이호재

이호재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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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틈틈이 소설을 쓰며 스토리텔링에 천착한다. 숨소리까지 살아 숨쉬는 생생한 내러티브 기사가 넷플릭스 영상보다 가치 있는 컨텐츠라 믿는다.

hoho@donga.com

취재분야

2024-10-24~2024-11-23
문화 일반40%
음악30%
인사일반17%
문학/출판13%
  • [어린이 책]세상에 꼭 필요한 그림자, 그늘은 여름 최고의 친구

    노란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더운 여름, 한 아이가 집을 나선다. 아이가 걸어가는 길을 지켜주는 건 다름 아닌 그늘. 아이는 신호등 기둥이 만든 그늘에서 파란불이 켜지기를 기다린다. 커다란 다리가 만든 그늘로 힘차게 걸어간다. 울창한 나뭇잎이 해를 가려준 덕에 아이는 시원하게 산책할 수 있다. 그늘은 친한 친구처럼 아이를 반겨준다. 산책을 마친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함께하는 것도 그늘이다. 햇빛이 진 자리에 그늘이 가득 내려앉는다. 그늘이 가득 들어차서 세상은 온통 깜깜하다. 별들은 옷처럼 그늘을 입는다. 사실 그늘이라고 하면 어둡고 슬픈 면을 먼저 떠올릴 때가 많다. 하지만 빛과 그늘은 둘로 쪼갤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빛이 있으니 그늘이 있고, 그늘이 있으니 빛이 있다. 그늘이 알맞게 드리운 세상이 아름답다는 교훈을 은은하게 전한다. 수채화 물감을 드리운 듯 화사한 여름 풍경을 그려낸 그림도 매력적이다. 무더위가 이르게 찾아온 요즘, 시원한 그늘에 누워 아이와 함께 읽으면 어떨까.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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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옷 입는 ‘이상’… 옛 권위 되찾을까[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겉모습에 이끌리는 걸 비난할 수 없다. 책이라고 다를까. 서점을 거닐다 보면 먼저 표지에 눈길이 간다. 표지가 마음에 들면 책을 펼쳐 든다. 읽다 보면 애정이 생기고 사고 싶어진다. 책에 빠져든 뒤엔 상관없지만, 첫 만남에 이끌림을 만드는 건 표지의 힘이다. 그래서 요즘 출판사들은 표지 디자이너에게 많게는 수백만 원씩 쓴다. 표지에 쓸 그림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입한다. 그런데 한결같은 표지로 독자의 사랑을 받은 책이 있다. 시인 이상(1910∼1937)의 초상을 내세운 이상문학상 작품집이다. 오뚝 바로 선 콧날, 두툼한 입술과 쌍꺼풀 없는 눈. 이상의 얼굴은 1977년 제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표지부터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상의 초상이 표지 왼쪽 위에 있는 현재와 달리 47년 전엔 오른쪽 아래에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 표지가 달라질 가능성이 생겼다. 11일 문학사상이 이상문학상 주관사를 다산북스에 넘겼기 때문이다. 다산북스는 상금, 심사위원, 표지 등을 전면 재검토한다는 방침이다. 내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출간되기까지 확실하진 않지만, 표지가 바뀔 가능성도 있다. ‘일러두기: 2024년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현 표지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물론 과거에도 작품집 표지가 잠시 바뀐 적이 있다. 1977년부터 2011년까지 이어진 표지는 2012년에 달라졌다. 2012년 표지에서 이상의 초상은 오른쪽 위에 작게 들어갔다. 반면 수상자인 소설가 김영하의 얼굴이 표지 절반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크게 들어갔다. 2013년 김애란, 2014년 편혜영, 2015년 김숨, 2016년 김경욱까지 총 5년 동안 표지는 조금씩 바뀌었다. 하지만 2017년 원래 표지로 돌아왔다. 독자들로부터 “과거 표지가 더 낫다”는 항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임지현 문학사상 대표는 이상문학상 매각 이유로 “지속적인 경영난”을 들었다. 또 문학계에선 2020년 수상자 저작권 논란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가 나온다. 당시 우수상 통보를 받은 작가 3명이 출판사의 ‘수상작 저작권 3년 양도’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어 수상을 거부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됐기 때문이다. 문학사상이 논란이 된 계약 조건을 수정했지만, 권위에 타격을 입으면서 작품집 판매량이 줄었다. “작품 선정 방식을 바꿔야 한다”, “독자를 위한 상이 돼 달라”…. 이상문학상 주관사가 바뀌었다는 뉴스에 달린 댓글들이다. 대부분 대학생 때부터 수십 년 작품집을 읽어 왔다는 이들이었다. 이들이 처음 작품집에 눈길을 돌린 건 이상의 얼굴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작품집을 꾸준히 사게 된 건 작품의 문학성, 수상자 선정 방식 등 내실 때문이다. “새 옷을 입더라도 작가들에게는 존경 어린 지지를, 독자들에게는 유수의 걸작을 건네는 문학상의 본질은 변함없을 것”이라는 김선식 다산북스 대표의 선언이 말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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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걸리버 여행기속 절망… 현시대에 희망 메시지”

    “‘걸리버 여행기’는 지금 우리가 인간에게 절망하는 것보다 영국 소설가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가 훨씬 더 깊이 절망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설가 김연수(54)는 19일 서울 종로구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1726년 처음 출간된 고전 ‘걸리버 여행기’를 새로 번역하며 당시 인간의 이기심을 지독히 지겨워했던 스위프트의 감정을 절절히 느꼈다는 것이다. 그는 “오래전에 마땅히 멸망했을 인간 사회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고전이 보여준다”며 “이 사실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이 싹튼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단순히 스위프트의 원전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2024년 한국의 시점에서 다시 썼다”고 했다. 26∼30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에선 김 소설가가 번역한 ‘걸리버 유람기’(대한출판문화협회)가 공개된다. 올해 주제는 걸리버 여행기 4부의 배경이자 이상적인 공간인 ‘후이늠’이다. 해외에서 18개국 122개 출판사, 국내에선 350개 출판사가 참여한다. 도서 전시, 강연, 사인회 등 450여 개 프로그램이 열린다. 도서전 얼굴 격인 주빈국은 사우디아라비아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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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의 디즈니? 때늦은 도전?… 네이버웹툰, 美상장 성패는

    거대한 미국 시장을 노리고 뛰어든 시기적절한 선택일까. 웹툰 호황기가 지난 뒤 때늦은 악수일까. 네이버웹툰이 17일(현지 시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수정 증권신고서(S-1/A)를 제출하면서 네이버웹툰의 나스닥 상장 성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SEC가 수정 증권신고서를 허가하면 네이버웹툰은 이르면 6월 상장될 수 있다는 전망도 있지만, SEC의 허들을 넘는 과정에 발목을 잡을 악재도 적지 않다. 우선 호재는 네이버웹툰의 다양한 지식재산권(IP)의 가치가 높아진 것. 최근 웹툰이 드라마, 영화의 원천 IP로 활발히 활용되면서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부가가치가 주목받는 상황이다. 실제로 ‘스위트홈’ ‘사냥개들’ ‘마스크걸’ ‘이두나!’ ‘더 에이트 쇼’ 등 해외에서 성공을 거둔 넷플릭스 드라마가 네이버웹툰이 원작이다. 김준구 네이버웹툰 대표는 증권신고서에서 “우리의 목표는 향후 10년간 가장 큰 히트작이 될 IP를 발굴하고 개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보는 게 ‘일상화’되면서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도 유리한 점이다. 현재 네이버웹툰은 현재 150개국 이상에서 서비스되고 있다. 월간활성이용자(MAU·서비스를 한 달 동안 이용한 사용자 수)는 약 1억7000만 명, 웹툰 작가 약 2400만 명이다. 또 일본과 함께 만화 시장의 양대 축으로 불리는 미국은 콘텐츠 유료 소비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낮다. 한창완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텍 교수는 “네이버웹툰이 만화로 시작해 디즈니플러스라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운영하는 ‘디즈니’처럼 될 수 있다”고 했다. 반면 상장 전망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코로나19 시기 웹툰 산업이 가파르게 성장했으나 현재는 한풀 꺾였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3 만화·웹툰 이용자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웹툰 이용자의 주 1회 이상 이용 비율은 2022년 69%에서 2023년 62.8%로 떨어졌다. 네이버웹툰의 북미법인은 지난해 1분기(1∼3월) 순이익에서 약 252억 원 손해를 봤다. 이융희 문화연구자(전 세종사이버대 만화웹툰창작과 겸임교수)는 “사람들이 ‘집콕’ 하며 웹툰 등 콘텐츠를 소비하던 코로나19 시기를 지나 상장 ‘골든 타임’을 놓쳤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했다. 경쟁자의 추격도 만만치 않아 수익성 약화의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아마존은 지난해 5월 웹툰 서비스인 ‘아마존 플립툰’을 내놨다. 애플의 전자책 플랫폼 애플북스 역시 지난해 4월 ‘세로 읽는 만화’ 페이지를 신설했다. 네이버웹툰은 국내 1위 포털인 네이버를 등에 업고 빠르게 성장했지만, 해외 시장에선 몸집이 거대한 글로벌 기업과 경쟁해야 한다. 네이버웹툰은 증권신고서에서 “네이버의 자회사로 사업 운영의 특정 기능을 네이버에 의존해왔다”고 스스로 밝혔다. 또 네이버웹툰은 증권신고서에서 “애플 또는 구글이 네이버웹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식으로 플랫폼을 수정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스마트폰 운영체제(OS)를 만드는 애플과 구글이 수수료를 높이면서 견제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구글과 애플의 ‘인앱결제’(앱스토어 내부 결제) 수수료 인상 정책 때문에 네이버웹툰은 국내에서 쿠키(네이버웹툰 내 가상화폐) 1개 가격을 2022년 100원에서 120원으로 올렸다. 이 때문에 소비자들이 반발해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이준호 하나증권 연구원은 “상장에 성공하더라도 향후 가치가 높아질 것인지는 신중히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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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뮤지컬 토니상 품었다, ‘위대한 개츠비’ 의상賞

    미국 연극·뮤지컬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며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토니상 시상식에서 한국계 디자이너 두 명이 각각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16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열린 제77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의 한국계 무대의상 디자이너 린다 조가 의상디자인 부문을 수상했다. 린다 조는 시상식 직후 현지 매체 브로드웨이월드와의 인터뷰에서 “‘위대한 개츠비’엔 정말 특별한 게 많다. 프로듀서는 한국인(제작사 오디컴퍼니 대표 신춘수)이고 여주인공은 아시안”이라며 “이 뮤지컬 의상을 위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했다. 그들 모두에게 감사한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또 다른 한국계 디자이너 하나 김 씨(본명 김수연·39)는 동료와 함께 뮤지컬 ‘아웃사이더’로 조명 디자인 부문을 공동 수상했다. 김 씨는 시상식 직후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낯선 땅의 연극계에 입성한 뒤 재정적 문제 등에 시달려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한국에서 대기업에 취직해 안정적인 월급을 받는 친구들 소식을 들을 때마다 불안한 삶에 대해 고민했지만 이젠 다른 한국계 친구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린다 조는 생후 9개월 때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이민 갔다. 의사가 꿈이었으나 길을 틀어 캐나다 맥길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예일대 연극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브로드웨이 데뷔작인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로 2014년 토니상 의상디자인 부문을 거머쥐었고 10년 만에 같은 부문을 수상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여주인공 데이지 역을 맡은 배우 이바 노블러자다의 화려한 드레스 10벌을 포함해 총 350여 벌의 의상을 디자인했다. 특히 ‘위대한 개츠비’는 국내 공연 제작사 오디컴퍼니 대표 신춘수 씨가 단독 리드 프로듀서로 참여한 작품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국인이 단독 프로듀서로 나선 뮤지컬이 토니상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신 대표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린다 조는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 1920년대 의상을 세련되고 멋지게 재현했다”며 “한국인이 브로드웨이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나아갔다는 의미가 상당하다”고 했다. 하나 김 씨는 아버지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장이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태어났다. 3세 때 한국에 들어와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서울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했다. 영화미술을 공부하고 싶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무대디자인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약 10년 동안 미국 공연계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아웃사이더’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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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중앙도서관 접속 일시 마비… 디도스 공격 받아 3시간 30분간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의 인터넷 홈페이지가 13일 저녁 약 3시간 30분 동안 접속 마비를 일으킨 것으로 나타났다. 외부에서 동시다발로 접속해 서버에 과부하를 일으키는 분산서비스거부(DDoS·디도스) 공격을 받은 데 따른 것이다. 14일 국립중앙도서관에 따르면 디도스 공격으로 홈페이지가 13일 오후 6시 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 마비됐다. 국립중앙도서관이 디도스 공격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디도스 공격이 이뤄지는 동안 외부 이용자는 도서 검색이나 예약 시스템 이용이 불가능했다. 도서관 관계자는 “홈페이지가 공격받았을 뿐 내부 서버는 안전하고 직원 업무에도 차질이 없었다”며 “도서관 이용자의 개인정보나 전자책(e북) 파일도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디도스 공격의 주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문화체육관광부와 도서관은 공격이 해외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 도서관 홈페이지로 접속을 차단 중이다. 문체부 사이버안전센터와 도서관은 공격 주체를 파악하기 위해 접속 마비 상황을 분석하고 있다. 문체부 관계자는 “아직 북한의 개입 가능성을 속단하긴 이르지만 가능성이 있다면 국가정보원과 협력할 것”이라며 “정확한 분석까지는 1주일가량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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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환상 속 최애’는 현생의 문턱을 넘어올 수 있을까

    “이 콘서트가 네 삶을 바꿀 거야.” 독일 베를린에 사는 29세 한국계 미국 여성 ‘나’는 어느 날 친구의 제안을 받고 케이팝 아이돌 그룹 ‘팩 오브 보이즈’의 콘서트에 간다. 커다란 공연장엔 다섯 명의 소년이 춤추고 있다. 나의 시선이 멈춘 곳은 멤버 ‘문’. 금빛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에 분홍색 셔츠를 걸친 문의 모습에 나는 홀려 버린다. 공연장엔 여자 팬 수천 명이 꽉 들어차 있지만, 나는 다른 팬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건 나뿐일 것이다.” 인생은 송두리째 바뀐다. 문이 스무 살 생일을 맞아 팬들에게 직접 쓴 편지를 몇 시간에 걸쳐 필사한다. 문이 라이브 방송을 시작하면 밤낮 구분하지 않고 참가한다. 문이 갑작스레 은퇴를 선언하자 방황한다. “문은 너의 존재조차 모른다”는 남자친구의 지적을 받고 화나 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는다. 나는 문을 만날 수 있을까. 1989년 미국에서 태어나 현재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계 여성 작가의 데뷔작이다. 미국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올해 주목받은 책 100권’에 선정하며 화제가 됐다. 아이돌에 푹 빠진 화자의 모습은 방탄소년단(BTS) 팬클럽 아미, 아이돌을 살리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tvN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를 생각나게 한다. 서울에 온 나에겐 기이한 일들이 펼쳐진다. 문이 자주 가던 식당에 갔다가 문의 팬을 자처하는 한 남자를 만나 ‘원나이트 스탠드’(처음 만난 남녀가 성관계를 갖는 것) 직전까지 간다. 문이 아이돌이 되기 전 활동했던 발레단의 공연을 보러 갔다 한 여자와 만나 토론을 벌인다. 서울을 정처 없이 떠돌며 상념에 빠진다. 사실 나는 문을 만나고 싶지 않다. 현실 속 문을 만나면 자신만의 환상이 깨질까 두려운 것이다. 어쩌면 나는 매일 뻔한 글을 쓰는 통조림 회사 카피라이터의 일이 지겨워 문에게 집착하는 것일지 모른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친구의 위선이 무서워 한국으로 떠난 것일 수도 있다. 나의 욕망은 소설 중간중간 등장하는 ‘팬픽’(아이돌을 소재로 한 가상 소설)으로 드러난다. 팬픽 속에서 나는 연습생 문을 우연히 만나고, 낯선 여행지에서 문과 대화한다. 수많은 팬 중 하나가 아니라 일대일로 관계를 맺는 상상에 빠지는 것이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서울을 여행하는 나의 모습과 팬픽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탓에 독자로선 이 소설 자체가 팬픽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해외 언론이 이 소설을 환상 문학의 대가인 체코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 작품에 빗대 “카프카식 열병”이라 평가한 이유다. 소설 막바지 나는 문을 만나지만 ‘어떤 사건’을 겪으며 깨닫는다. 나는 다른 팬과 다르지 않고,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 문을 수단으로 삼았다는 진실을 말이다. 스타를 사랑하는 일은 상상 속에서 무한히 자유롭지만, 관계를 맺는 건 현실의 일이란 걸 작가는 이렇게 보여준다. 관념적인 서술 방식 때문에 읽기가 쉽진 않지만, 사랑의 본질과 아이돌 팬덤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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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 책]오염된 강물을 떠나 붕어빵이 된 붕어의 꿈

    붕어 한 마리가 강물을 헤엄친다. 강 곳곳엔 쓰레기가 버려져 있다. 커다란 배수구로 폐수가 흘러나온다. 붕어는 물 밖으로 나와 두 발로 우뚝 선다. 작정한 듯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도착한 곳은 작은 붕어빵 노점상. 붕어는 확 붕어빵 조리 도구 속으로 뛰어든다. 빵틀 안에서 붕어는 생각한다. 깊은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곳을 오기까지 수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붕어빵 틀에서 발이 달린 붕어빵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붕어빵을 먹는다.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온다. 햇살에 반짝이는 강물과 생명이 역동하는 풍경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 본연의 모습이다. 사람들을 만나 생명의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붕어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붕어빵을 소재로 생태주의를 표현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푸른 강 물고기 되어/인간 세상 나아가면”이라는 노랫말은 작가가 아이누족의 전설을 듣고 지었다. 깨끗한 자연을 표현한 화려한 색감 덕에 그림을 감상하는 맛이 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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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콧수염 기른 69세 김구’ 사진 첫 공개

    굳게 다문 입술 위로 콧수염이 간결하게 나 있다. 수염은 입술을 덮지 않을 정도로 짧다. 69세라는 나이를 보여주듯 수염 곳곳이 하얗게 바랬다. 하지만 짧게 자른 머리, 동그란 뿔테 안경, 인자한 표정은 우리가 아는 백범 김구(1876∼1949)의 모습 그대로다. 이 사진은 1945년 9월 촬영됐다. 흑백인 원본 사진을 컬러로 복원했다. 백범이 1945년 11월 귀국한 사실에 비춰 보면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몸담았던 시절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촬영된 백범 사진은 많지만, 콧수염을 기른 모습이 공개되는 건 처음이다. 백범의 미공개 사진을 비롯해 조선과 일제강점기 사진 390여 장이 담긴 사진집 ‘당신이 보지 못한 희귀사진’(전 3권·서해문집)이 26일 출간된다. 임정에서 활동한 김구, 조소앙, 신익희, 김원봉의 단체사진, 1930년대 서울 시가지 사진 등이 눈에 띈다. 책을 펴낸 대만 사진 수집가 쉬쭝마오(徐宗懋)는 13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콧수염을 한 김구의 모습은 아마 이번에 처음 볼 것”이라며 “중국 국민당에서 보관해 온 임시정부의 사진들을 개인적으로 수집했다. 서울 시가지 모습은 대부분 서양과 일본 사진작가들이 찍은 것”이라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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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에 소설 키워드 주니… 얼개 잡고, 배경 그림 1시간만에 뚝딱

    《어느 날 한적한 바닷가에 있는 연구소에서 독특한 사건이 벌어진다. 최첨단 인공지능(AI) ‘루미’가 사라진 것이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혈기 넘치는 젊은 남성 탐정 김신이 연구소에 등장한다. 김신은 루미를 창조한 박지연 박사와 함께 루미를 찾기 시작한다. 처음에 두 사람은 루미를 도난당했다고 생각한다. 혹은 기술적 결함으로 루미가 사라져 버렸다고 추론한다. 하지만 사건을 파헤쳐 갈수록 둘은 깨닫는다. 루미가 미지의 세상을 탐험하고 싶어 스스로 연구소를 떠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두 사람은 루미를 찾을 수 있을까.》소설 ‘루미의 실종’은 시중 서점에서 판매되는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흥미롭다. 하지만 이 소설의 얼개를 잡은 건 인간 소설가가 아니다. 창작 AI 플랫폼 ‘루이스’를 활용해 기자가 1시간 만에 만든 것이다. 루이스는 인간이 ‘GPT-4 터보’ 등 최신 AI를 사용해 이야기를 만들도록 돕는 창작 플랫폼이다. 수천 개의 태그 중 몇 가지를 인간이 선택하면 AI가 이를 조합해 그럴듯한 서사나 캐릭터를 만들어 준다. 보통 사용자가 AI를 직접 사용하려면 각종 입력값을 직접 설정해야 한다. 하지만 루이스는 태그를 활용해 편의성을 높였다. 국내 AI 개발업체 키토크AI가 올 4월부터 이달 23일까지 교보문고 후원을 통해 AI 스토리 공모전을 열면서 무료로 루이스를 쓸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 기자가 직접 써 본 루이스는 꽤 편리했다. 예를 들어 기자가 대략적인 줄거리인 ‘로그라인’을 먼저 설정했다. AI가 추천하는 수백 개의 태그 중에 고심하며 ‘어두운 면을 조명하는’ ‘인공지능’ 등 6개의 태그를 클릭했다. 이후 주인공 캐릭터의 성격을 골랐다. ‘정의감에 불타는’처럼 탐정에 어울릴 법한 태그에 치명적인 남자를 뜻하는 ‘옴파탈(homme fatal)’을 골라 맛깔나게 했다. 이야기에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플롯엔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골랐다. 마지막에 세계관으로 ‘바다를 배경으로 한’을 넣었다. 약 1분 후 AI는 간단하게 소설을 요약해 출력했다. “어두운 밤, 고립된 연구실에서 인간의 감정을 모사하도록 설계된 인공지능이 갑작스럽게 사라지자, 그 불가사의한 사건을 파헤치는 젊은 탐정이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에서 심오한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달빛만이 스며들어 오는 고립된 연구소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라는 문장처럼 묘사력도 상당했다. AI는 소설에 맞는 캐릭터와 각 장면에 맞는 그림도 만들어냈다. 기자가 주인공의 나이를 31세, 성별을 남성, 직업으로 사설탐정을 고르자 정장을 차려입고 콧날이 날카로운 젊은 미남의 그림을 내놓았다. 소설의 표지는 물론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해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만들 때 참고 자료로 활용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오류도 종종 발생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을 ‘남성’으로 설정한 뒤 그림을 만들어 달라고 했으나 자꾸 여성의 그림을 내놨다. ‘다시 생성하기’ 버튼을 3차례 클릭한 뒤에야 제대로 된 남성 캐릭터가 나왔다. 여성 캐릭터는 캐릭터 설명에선 단발머리였으나 장면에선 긴 머리를 묶은 상태였다. 소설의 결말이 모호한 점도 한계점이었다. AI가 창작을 위한 보조 도구는 될 수 있으나 깊은 이해가 필요한 문학성은 보여 주지 못했다. 주술을 쓸 수 있는 소녀가 미래 세계에서 모험을 떠나거나 북한 평양을 배경으로 독재자를 암살하려는 이야기 등 다른 AI 공모전 응모작 중에도 흥미로운 작품이 많았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AI가 창작자를 대체하지는 못해도 창작을 돕는 비서 역할까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 기술 발전 속도에 따라 창작의 방식이 바뀌는 대변혁기가 올 것”이라고 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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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로 1시간 만에 소설 ‘뚝딱’…장면에 맞는 그림도 제작한다

    어느 날 한적한 바닷가에 있는 연구소에서 독특한 사건이 벌어진다. 최첨단 인공지능(AI) ‘루미’가 사라진 것이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혈기 넘치는 젊은 남성 탐정 김신이 연구소에 등장한다. 김신은 루미를 창조한 박지연 박사와 함께 루미를 찾기 시작한다. 처음에 두 사람은 루미가 도난당했다고 생각한다. 혹은 기술적 결함으로 루미가 사라져버렸다고 추론한다. 하지만 사건을 파헤쳐 갈수록 둘은 깨닫는다. 루미가 미지의 세상을 탐험하고 싶어 스스로 연구소를 떠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두 사람은 루미를 찾을 수 있을까. 소설 ‘루미의 실종’은 시중 서점에서 판매되는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흥미롭다. 하지만 이 소설의 얼개를 잡은 건 인간 소설가가 아니다. 창작 AI 플랫폼 ‘루이스’를 활용해 기자가 1시간 만에 만든 것이다. 루이스는 인간이 ‘GPT-4 터보’ 등 최신 AI를 사용해 이야기를 만들도록 돕는 창작 플랫폼이다. 수천 개의 태그 중 몇 가지를 인간이 선택하면 AI가 이를 조합해 그럴듯한 서사나 캐릭터를 만들어준다. 보통 사용자가 AI를 직접 사용하려면 각종 입력값을 직접 설정해야 한다. 하지만 루이스는 태그를 활용해 편의성을 높였다. 교보문고가 올 4월부터 이달 23일까지 국내 AI 개발업체 키토크AI와 AI 스토리 공모전을 열면서 무료로 루이스를 쓸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 기자가 직접 써본 루이스는 꽤 편리했다. 예를 들어 기자가 대략적인 줄거리인 ‘로그라인’을 먼저 설정했다. AI가 추천하는 수백 개의 태그 중에 고심하며 ‘어두운 면을 조명하는’ ‘인공지능’ 등 6개의 태그를 클릭했다. 이후 주인공 캐릭터의 성격을 골랐다. ‘정의감에 불타는’처럼 탐정에 어울릴법한 태그에 치명적인 남자를 뜻하는 ‘옴므파탈’을 골라 맛깔나게 했다. 이야기에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플롯엔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골랐다. 마지막으로 세계관으로 ‘바다를 배경으로 한’을 넣었다. 약 1분 후 AI는 간단하게 소설을 요약해 출력했다. “어두운 밤, 고립된 연구실에서 인간의 감정을 모사하도록 설계된 인공지능이 갑작스럽게 사라지자, 그 불가사의한 사건을 파헤치는 젊은 탐정이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에서 심오한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달빛만이 스며들어 오는 고립된 연구소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라는 문장처럼 묘사력도 상당했다. AI는 소설에 맞는 캐릭터와 각 장면에 맞는 그림도 만들어냈다. 기자가 주인공의 나이를 31세, 성별을 남성, 직업으로 사설탐정을 고르자 정장을 차려입고 콧날이 날카로운 젊은 미남의 그림을 내놓았다. 소설의 표지는 물론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해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만들 때 참고 자료로 활용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오류도 종종 발생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을 ‘남성’으로 설정한 뒤 그림을 만들어달라고 했으나 자꾸 여성의 그림을 내놨다. ‘다시 생성하기’ 버튼을 3차례 클릭한 뒤에야 제대로 된 남성 캐릭터가 나왔다. 여성 캐릭터는 캐릭터 설명에선 단발머리였으나 장면에선 긴 머리를 묶은 상태였다. 소설의 결말이 모호한 점도 한계점이었다. AI가 창작을 위한 보조도구는 될 수 있으나 깊은 이해가 필요한 문학성은 보여주지 못했다. 주술을 쓸 수 있는 소녀가 미래 세계에서 모험을 떠나거나 북한 평양을 배경으로 독재자를 암살하려는 이야기 등 다른 AI 공모전 응모작 중에도 흥미로운 작품이 많았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AI가 창작자를 대체하지는 못해도 창작을 돕는 비서의 역할까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 기술 발전 속도에 따라 창작의 방식이 바뀌는 대변혁기가 올 것”이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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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화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피스메이커, 폐부를 찌르다

    “언니, 얼른 일어나요. 이 쇼 다 끝났어요.”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작은 방. 쇼 참가자 ‘5층’(문정희)은 바깥 다른 참가자들의 부름을 받고 눈을 뜬다. 문을 열고 공용 공간으로 나가자 모두가 웃고 있다. 참가자들은 회전목마를 타고, 파란 수영장에서 헤엄치고 있다. 전광판엔 ‘해피 엔드’라는 문구가 흐르고 있다. 5층은 감격에 차 눈물을 흘린다. 천천히 열리는 출구를 향해 걸어가다가 다른 이들에게 묻는다. “‘2층’(이주영) 님은?” 그 순간 허공에서 2층의 몸이 날아온다. 얼굴은 피범벅이다. 5층이 뒤를 바라보니 참가자들이 서로를 폭행하고 고문하고 있다. 쇼든 현실이든 세계가 평화로울 리 없다. 순진한 중재자인 ‘피스메이커’ 5층의 상상은 산산조각 난다. 지난달 17일 공개된 뒤 넷플릭스 한국 TV 시리즈 부문 1위에 오른 드라마 ‘더 에이트 쇼’에는 원작 웹툰 ‘머니 게임’과 그 속편인 ‘파이 게임’에는 없는 새 캐릭터 5층이 추가됐다. 드라마는 8명의 인물이 8층으로 나뉜 공간에 갇혀 시간이 쌓이면 돈을 버는 쇼에 참가하는 이야기다. 7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파이 게임’과 달리 극 중 인물은 8명으로 늘었다. 5층은 모두가 갈등 없이 잘 지내기를 바라며 참가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화를 중재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평소 누구든 잘 챙기는 5층의 심성은 쇼를 오히려 파국으로 몰고 간다. 능력 없는 중재는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잔인한 현실에 대한 은유로 느껴진다. 배우 문정희는 지난달 30일 기자간담회에서 “(모두가) 착해 보이지만 언제나 발 뺄 준비를 하고 있지 않나. 겉으론 친절한데 결정적 순간에는 (회피하려고) 움직이지 않냐”고 했다. 원작에서 참가자들은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심리 싸움에 열중한다. 반면 드라마는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경쟁을 벌인다. 드라마에서 공용 공간은 새파란 물이 가득한 수영장, 평화롭게 돌아가는 회전목마, 화려한 의상으로 가득한 옷가게로 채워져 있다. 가질 수 없으나 갖고 싶은 욕망을 증폭시키려는 연출적 의도다. 한재림 감독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쇼 안에서) 돈을 열심히 벌어서 수영장에 놀러 가고 싶지만 이곳의 수영장은 다 가짜다. 끝없이 욕망만 하고 이루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원작이 계급 구조에 천착했다면 드라마는 창작자로서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대한 고민을 담은 것도 다른 점이다. 참가자들이 경쟁하는 쇼를 지켜보며 즐거워하는 주최자는 결국 시청자인 셈이다. 드라마 제목에 ‘게임’ 대신 ‘쇼’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도 같은 이유다. 직업이 광대로 영국 영화감독 찰리 채플린(1889∼1977)을 떠올리게 하는 참가자 ‘1층’(배성우)이 죽는 장면을 통해 ‘영화의 죽음’을 표현했다. 한 감독은 “지금은 도파민의 시대이고 재미있는 것이 중요한 시대”라며 “유튜브와 쇼트폼 콘텐츠에 익숙해져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힘들 때가 있다. ‘시네마’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담았다”고 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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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착하지만 비겁한 ‘5층’은 우리의 모습…‘더 에이트 쇼’ 원작 웹툰과 어떻게 달라졌나[선넘는 콘텐츠]

    “언니, 얼른 일어나요. 이 쇼 다 끝났어요.”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작은 방. 쇼 참가자 ‘5층’(문정희)은 바깥 다른 참가자들의 부름을 받고 눈을 뜬다. 문을 열고 공용 공간으로 나가자 모두가 웃고 있다. 참가자들은 회전목마를 타고, 파란 수영장에서 헤엄치고 있다. 전광판엔 ‘해피 엔드’라는 문구가 흐르고 있다. 이제 서로를 의심하고 경쟁하는 이 지긋지긋하고 잔인한 쇼가 끝날 걸까.5층은 감격에 차 눈물을 흘린다. 해 맑게 웃으며 너무 믿기지 않는다며 핫도그를 먹고 맥주를 마시며 하하 호호 웃는다. 천천히 열리는 출구를 향해 걸어가다가 다른 이들에게 묻는다. “‘2층’(이주영)님은?”그 순간 허공에서 2층의 몸이 날아온다. 얼굴은 피범벅이다. 5층이 뒤를 바라보니 참가자들이 서로를 폭행하고 고문하고 있다. 쇼든 현실이든 세계가 평화로울 리 없다. 순진한 중재자인 ‘피스메이커’ 5층의 상상은 산산조각 난다.● 우리 모두 “언제든 발 뺀다”지난달 17일 공개된 뒤 넷플릭스 한국 TV 시리즈 부문 1위에 오른 드라마 ‘더 에이트 쇼’에는 원작 웹툰 ‘머니 게임’과 그 속편인 ‘파이 게임’에는 없는 새 캐릭터 5층이 추가됐다. 드라마는 8명의 인물이 8층으로 나뉜 공간에 갇혀 시간이 쌓이면 돈을 버는 쇼에 참가하는 이야기다. 7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파이 게임’과 달리 극중 인물은 8명으로 늘었다.5층은 모두가 갈등 없이 잘 지내기를 바라며 참가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화를 중재하는 인물이다. 쇼를 평화롭게 진행하려 하는 5층 역을 만들어내 선함과 비겁함 사이의 인간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하지만 평소에 누구든 잘 챙기고 5층의 심성은 쇼를 오히려 파국으로 몰고 간다. 마음이 약해진 5층이 포박된 ‘6층’(박해준)을 풀어주자 결국 6층이 다른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 능력 없는 중재자의 행동은 결국 잘못된 결과를 불러온다는 현실의 잔인함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진다. 한재림 감독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고구마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황당한 착각에 빠지는 인물”이라고 했다.특히 5층의 역할은 나쁜 인간이 되고 싶진 않은 평범한 이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배우 문정희는 지난달 30일 기자들과 만나 “(모두가) 착해 보이지만 언제나 발 뺄 준비를 하고 있지 않나. 겉으로 친절한데 결정적 순간에는 움직이지 않냐”고 했다.●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한 공용공간새파란 물이 가득한 수영장, 먹음직스럽게 생긴 핫도그, 평화롭게 돌아가는 회전목마, 명품으로 가득한 옷가게, 두툼한 치즈와 페퍼로니가 올려진 피자, 형형색색 소프트 아이스크림….드라마에서 참가자들은 ‘더 에이트 쇼’의 공용공간을 마주하고 깜짝 놀란다. 모두가 진짜처럼 생긴 가짜지만 이 알록달록한 색채는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마치 이곳을 행복의 공간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이는 칙칙한 시멘트 건물 내부로 구성한 원작과 다른 점이다. 원작은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참가자들이 심리 싸움에 열중하지만 드라마는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참가자들의 욕망을 증폭시키는 것. 이는 가질 수 없으나 가지고 싶은 욕망을 증폭시키려는 연출적 의도다.한 감독은 22일 기자들과 만나 “돈을 열심히 벌어서 수영장에 놀러 가고 싶지만 이곳의 수영장은 다 가짜다. 인물들이 끝없이 욕망만 하고 이루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고 했다.원작이 계급 구조에 대해 천착했다면 드라마는 창작자로서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는 것도 특징이다. 특히 7층(박정민)의 직업은 영화감독. 지적인 인물로 상황 판단이 빠르며 다른 참가자들을 이끈다. 제목에 ‘게임’ 대신 ‘쇼’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도 비슷한 이유다. 1층(배성우)의 모습에선 영국 코미디언이자 영화감독 찰리 채플린(1889~1977)이 엿보이고, 드라마에선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1936년)의 음악이 흐른다.한 감독은 “창작자로서의 제 고민을 담은 것 같다”며 “지금은 도파민의 시대이고 재미있는 것이 중요한 시대”라고 했다. 한 감독은 또 “유튜브와 숏폼에 익숙해져서 극장에서 힘들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시네마’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담았다”고 했다.● 참가자 8명 성별, 4 대 4로다른 인물들도 조금씩 설정이 바뀌었다. 예를 들어 드라마에서 괴팍하고 폭력적인 6층은 적당히 머리를 굴리며 다른 참가자들을 수탈하는 앞잡이 역할을 한다. 이는 체격은 건장하나 정신연령이 낮은 캐릭터로 묘사된 ‘파이 게임’과 다른 점이다.다른 참가자들 사이에서 편을 오가며 쇼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박쥐형 인간인 ‘4층’(이열음)은 원작에선 남성이었으나 드라마에선 여성으로 바뀌었다. 그 덕에 남녀 성비가 5 대 2였던 ‘파이 게임’과 달리 드라마 참가자 8명의 성별은 4 대 4로 동등해져 현실과 유사해졌다.웹툰 원작 드라마와 영화가 쏟아지고 있지만 두 개의 웹툰을 한 작품으로 각색한 점은 흔치 않은 방식이라는 점도 주목할만한 점이다. 원래 한 감독이 ‘머니게임’ 연출을 제안받고 작품을 기획 중인데 ‘오징어 게임’이 나왔다. ‘누군가가 죽어야 내가 돈을 번다’라는 구조가 유사했기에 고민했다. ‘파이 게임’을 합쳐서 아무도 안 죽는 게임, 시간을 벌어서 시간으로 상금을 버는 이야기로 바꾸며 벌어진 일이다.결말도 다르다. ‘파이 게임’은 주인공이 쇼를 나서는 장면에서 거의 마무리되지만 ‘더 에이트 쇼’엔 1층의 장례식장 장면까지 추가됐다. 원작은 파멸로 끝이 나는데 드라마는 1층의 죽음 외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원작에 있는 몇몇 지나치게 잔혹한 설정을 그대로 담지 않고 비교적 드라마에 담길 수 있는 수준으로 각색했다.원작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지만 드라마에선 배진수라는 점이 밝혀진다. 배진수는 원작 작가의 이름이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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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진스 ‘하우 스위트’… 지난달 108만장 팔려, 음반 4연속 밀리언셀러

    걸그룹 뉴진스가 지난달 24일 발매한 앨범 ‘하우 스위트(How Sweet)’가 밀리언셀러가 됐다. 소속사 어도어는 ‘하우 스위트’가 써클차트에서 지난달에만 총 108만5355장이 팔렸다고 9일 밝혔다. 써클차트는 한국음악콘텐츠협회가 운영하는 음악 차트다. 이에 따라 뉴진스가 2022년 데뷔 후 발표한 음반 4장이 모두 밀리언셀러가 됐다. 앞서 데뷔 앨범 ‘뉴 진스(New Jeans)’는 159만 장, ‘오엠지(OMG)’는 166만 장, ‘겟 업(Get Up)’은 214만 장이 각각 팔렸다. 신규 앨범 ‘하우 스위트’에 포함된 동명의 타이틀곡은 글로벌 음원 플랫폼 스포티파이의 ‘위클리 톱 송 글로벌’에 2주 연속 진입했다. 이 곡은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글로벌’(미국 제외) 7위, ‘버블링 언더 핫 100’ 12위 등 상위권에 올라 있다. 다른 수록곡 ‘버블 검(Bubble Gum)’은 멜론, 지니, 벅스 등 국내 주요 음원 사이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다. 뉴진스는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디토(Ditto)’, ‘오엠지’, ‘이티에이(ETA)’ 3곡은 올 상반기(1∼6월) 빌보드 저팬 종합 차트 ‘핫100’에 포함됐다. 뉴진스는 21일 일본에서 앨범 ‘슈퍼내추럴(Supernatural)’을 별도로 내놓을 계획이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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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혹한 시절 속에서 작가를 버티게 한 것[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모진 시간을 거친 김지하 시인(1941∼2022)을 버티게 한 건 장모 박경리 작가(1926∼2008)일지도 모른다.” 2022년 5월 9일 강원 원주시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김 시인의 빈소. 전날 별세한 김 시인의 마지막 길에 모여든 옛 친구들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렇게 입을 모았다. 이들은 기자에게 “박 작가가 사위의 옥살이를 뒷바라지했다”고 말했다. 박 작가가 김 시인이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수감되자 면회를 다니며 사위를 챙겼다는 것. 6·25전쟁 때 부역자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남편에 이어 사위의 옥살이까지 몸소 도와야 했다. 사위가 수감됐을 때 박 작가의 기분은 어땠을까. 지난해 6월 개정판이 출간된 대하소설 ‘토지’를 읽다 박 작가가 마음을 털어놓은 글을 찾았다. 1994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박 작가가 기고한 글 ‘토지를 쓰던 세월’이 ‘토지’ 개정판 서문을 대신해 실렸다. “그때 (사위의 옥살이) 일에 대해 말한 적도 글로 쓴 적도 별반 없었던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됐다. ‘토지’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 수도 있겠으나 자신에 관한 일은 거의 말하지 않는 성미 탓도 있었을 것이다.” 박 작가는 1994년 8월 ‘토지’를 완간한 뒤에야 20년 전 사건에 대해 털어놓았다. 말을 아낀 이유에 대해 박 작가는 “구질구질한 신세타령 같기도 했고 되살리기가 아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박 작가가 입을 닫고 산 건 남편에 이어 사위까지 옥살이한 시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무서운 세월이었기 때문에 딸아이와 나는 침묵을 했던 것인데 그 무서운 세월을 질러서 여기까지 왔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맞서 홀로 딸을 키운 박 작가는 사위가 감옥에 가자 집안살림을 책임져야 했다. 작품을 쓰며 손주를 등에 업고 다니며 엄혹한 시절을 버티려 발악했다. 박 작가는 “처지를 하소연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독한 행위”라며 “묻는 사람은 부담스럽고 난처한 일”이라고 했다. “언어는 결코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다. 듣는 사람은 진실을 평가할 수 없고 말하는 사람은 진실을 전달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박 작가는 수난을 버티게 한 건 “우리를 따스하게 감싸주신 분들” 덕이라고 고백한다. 1974년 박 작가가 동아일보에 소설 ‘단층’을 연재했을 때 그를 챙긴 건 당시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였던 김병익 문학과지성사 고문이다. “김 선생은 벌판만 같은 내 집에 들러 우리 생활을 목격하곤 했다. 따뜻하고 안쓰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그분의 눈빛을 우리는 잊지 못했다. 신문사에 돌아가서는 박 선생을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을까 했다는 말도 들려왔다.” 올 8월 완간 30주년을 맞는 ‘토지’가 25년 동안 연재된 건 오롯이 작품의 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며 작품을 쓰는 건 작가고, 작가를 버티게 하는 데엔 결국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통의 이유를 묻지 않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 말이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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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순 추리소설 ‘컨설턴트’… 英 대거상 최종후보에 올라

    임성순 작가(사진)의 장편 소설 ‘컨설턴트’가 영국 대거상(The CWA Dagger) 번역추리소설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대거상은 1955년 영국추리작가협회(CWA)가 제정한 상으로, 미국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에드거상과 함께 영미권 양대 추리문학상으로 꼽힌다. ‘컨설턴트’는 완벽한 살인을 하기 위한 ‘킬링 시나리오’를 대신 써주는 작가를 등장시켜 자살을 가장한 타살을 일삼는 사회나 구조를 비판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지난해 영국의 저명한 문학출판사인 블룸즈버리의 자회사인 레이븐북스에서 영어판이 출간됐다. ‘컨설턴트’는 올해의 대거상 번역추리소설 부문 최종 후보 6개 작품에 포함됐으며, 수상작은 다음 달 4일 발표된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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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간 30돌 ‘토지’, 전시회-개정판-교육서로 다시 찾아왔다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토지를 쓰던 세월展’. 5㎡(약 1.5평) 남짓한 ‘작가의 방’에 들어서자 방안을 가득 채운 200자 원고지 수백 장이 눈에 들어왔다. 작가 박경리(1926∼2008)가 대하소설 ‘토지’에 쓴 문장을 인쇄한 것이었다. 원고지 곳곳엔 “어떠한 역경을 겪더라도 생명은 아름다운 것이며 삶만큼 진실한 것은 없다”와 같이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이 가득했다. 광복을 맞이한 사람들을 그려낸 ‘토지’의 마지막 문장(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처럼 감동적인 문장도 눈에 들어왔다. 생전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도 없었다”고 말한 박 작가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대하소설 ‘토지’ 완간 30주년을 기념해 지난달 3일 개관한 이번 무료 전시엔 이달 3일까지 한 달간 약 7만 명이 다녀갔다. 전시는 올 12월 31일까지 열린다. 전시를 기획한 안지혜 다산북스 브랜드관리팀장은 “20, 30대 연인은 데이트 코스, 40대 부모는 아이들 현장학습 차원에서 방문하고 있다”며 “장년층 방문객 중엔 전시장을 둘러보다 눈물을 흘리는 분도 있었다”고 했다. ‘토지’는 박 작가가 1969년 6월부터 1994년 8월까지 쓴 소설이다. 1897년 조선 말기부터 시작해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1945년 광복까지 이어지는 48년의 역사를 담았다. 등장인물만 700여 명에 달하고, 200자 원고지 4만여 장에 이르는 대작이다. 그동안 팔린 ‘토지’의 판매량은 정확히 추정되지 않지만 360만 권 이상으로 알려졌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로 일부 번역됐고, 일본엔 올 9월 20권이 모두 번역 완간될 예정이다. 완간된 지 30년이 지난 ‘토지’의 인기가 식지 않는 건 요즘 독자들에게 맞게 접점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토지문화재단은 지난해 6월 출판사 다산책방을 통해 20권짜리 토지 개정판을 내놓았다. 젊은 독자들을 위해 인물 계보 및 어휘 소개 등을 넣은 개정판은 2만2000부가 팔렸다. 지난달부터 내년 2월까진 독자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박 선생 작품에 대한 감상평을 올리면 기념품을 주는 ‘독서 챌린지’도 운영한다. 박 작가의 외손자인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관장은 “‘독서 챌린지’는 모집을 시작하자마자 모집인원 100명을 달성했다”며 “박 작가의 작품이 긴 생명력을 지니고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다양한 행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토지’가 최근 학부모 사이에서 교육용 도서로 주목받는 것도 이유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 따르면 ‘토지’(전 20권·다산책방) 구매자의 22.2%가 40대 여성이다. 이는 40대 남성 11.8%에 비해 2배 가까이 높은 비중이다. 주로 대하 역사소설이 중년 남성에게 인기를 끄는 출판계 흐름과 다른 기류다. 최근 문해력 논란이 커지자 한국어의 다양성을 맛볼 수 있는 작품으로 인기를 끄는 것이다. 학부모 사이에서 “어휘력을 늘릴 수 있는 책”, “우리말 어휘와 문장의 보물 창고”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책 읽지 않는 시대, ‘토지’의 변하지 않는 인기는 무엇을 의미할까. 김종회 문학평론가(전 박경리 토지학회장)는 “‘토지’는 만화와 청소년판처럼 젊은 독자가 선호하는 출판물로 펴내고, 1979·1987·2004년 3차례 드라마로 만들어 대중성을 유지했다”며 “기피 대상이 된 대하소설이 어떻게 현대판 고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긍정적 사례”라고 분석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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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영 감독 ‘하녀’, 영화인 선정 韓 최고 영화

    고 김기영 감독(1919∼1998)의 영화 ‘하녀’(1960년)가 한국 영화인들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한국 영화에 선정됐다. 한국영상자료원은 배우, 감독, 학자 등 영화인 240명이 지난해 6∼8월 투표를 거쳐 선정한 ‘한국 영화 100선’을 31일 발표했다. 직전에 이뤄진 2014년 조사에선 ‘하녀’와 ‘오발탄’(1961년), ‘바보들의 행진’(1975년)이 공동 1위를 차지했다. ‘하녀’는 2014년에 이어 올해 발표에서도 1위를 유지했다. 2위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년)이 차지했다. 2014년 조사에서 ‘살인의 추억’은 ‘바람불어 좋은 날’(1980년)과 더불어 공동 7위였다. 3위도 봉 감독이 연출한 ‘기생충’(2019년)이 뽑혔다. ‘기생충’은 한국 영화 최초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과 미국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받았다. 박찬욱 감독은 100위 안에 총 7편이 선정돼 가장 많은 작품을 올린 감독이었다. 박 감독이 연출한 ‘올드보이’(5위·2003년)와 ‘헤어질 결심’(공동 8위·2022년)은 10위 안에 들었다. 이 밖에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 ‘복수는 나의 것’(2002년), ‘친절한 금자씨’(2005년), ‘박쥐’(2009년), ‘아가씨’(2016년)가 100위 안에 선정됐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4위·1961년),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6위), 이창동 감독의 ‘시’(7위·2010년),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공동 8위·1998년),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0위·1996년)도 10위 안에 들었다. 영상자료원의 ‘한국 영화 100선’ 선정은 2006년과 2014년에 이어 올해가 세 번째다. 필름이 남아있는 한국 영화 중 가장 오래된 ‘청춘의 십자로’(1934년)부터 2022년까지 제작된 모든 한국 장편영화를 대상으로 선정이 이뤄졌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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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심판’서 갓 나온듯… 카프카의 그림은 부조리극을 닮았다

    도화지 위에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젊은 남성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짙은 일자 눈썹, 오뚝 선 콧날, 곱게 가르마 탄 머리카락 덕일까. 남성은 미남이다. 하지만 눈은 공허로 가득 찼다. 굳게 다문 입 때문에 표정이 없어 보인다. 색을 칠하지 않고 검은 연필만으로 선을 그려낸 탓에 허무함마저 감돈다. 왜 남성이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그림이 체코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가 1901∼1907년 사이에 그린 자화상이란 사실을 알면 여러 상상에 빠지게 된다. 인생 내내 불행에 갇혀 살았던 카프카에게 어둠은 늘 함께하던 굴레일까. 초현실주의로 인간의 고독을 탐구한 카프카에게 외로움은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자고 일어나니 벌레로 변해 있던 주인공이 등장한 중편소설 ‘변신’(1916년)처럼 카프카가 그린 자신의 얼굴은 괴이하기 그지없다. 3일 카프카 타계 100주기를 맞아 출간된 카프카의 그림집이다. 카프카가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생소하다. 오랜 소유권 분쟁 끝에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카프카의 그림이 2019년 공개됐고, 이후 시각예술가로서의 카프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다. 신간은 이러한 흐름에 맞춰 출간됐다. 이스라엘국립도서관 등 각지에 흩어져 있는 카프카의 그림 163점이 실렸다. 카프카는 주로 소묘를 그렸다. 간단한 선만으로 인체나 건물을 표현했다. 미사여구 없이 간결하고 정밀하며 무미건조한 카프카만의 문체와 닮았다. 또 카프카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 인체의 독특한 움직임을 세밀하게 그렸다. 장편소설 ‘심판’(1925년)처럼 진짜같이 정밀하게 구성된 거짓 세계를 그려낸 문학 세계처럼 말이다. 카프카를 제대로 된 화가로 인정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다만 그의 그림을 감상하면 문학 세계를 더 깊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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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투-허영 가득할 법한 19세기 英 사교계… 여자들 우정과 화합으로 이끄는 연출 눈길

    “네가 찾는 게 남편감이라면 내가 도와줄게. 나랑 수업하자. 넌 분명 금방 터득할 거야.” 19세기 영국 런던 사교계. 브리저튼 가문의 셋째 아들 콜린 브리저튼(루크 뉴턴)은 오랜 친구인 페더링턴 가문의 셋째 딸 퍼넬러피 페더링턴(니컬라 코클런)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짝을 찾아 사교계에 데뷔했으나 남자에게 인기 없는 퍼넬러피에게 이른바 ‘연애 수업’을 해주겠다는 것. 퍼넬러피는 콜린에게 교양 있게 부채질하고 눈웃음을 짓는 방법을 배운다. 촌스러운 옷 대신 화려한 드레스를 맞춰 입은 덕에 조금씩 남자의 관심을 얻는다. 하지만 퍼넬러피는 어릴 적부터 콜린을 짝사랑하고 있다. 과연 두 사람의 사랑은 이뤄질 수 있을까. 16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브리저튼 시즌 3’은 원작 소설인 ‘브리저튼: 마지막 춤은 콜린과 함께’(신영미디어·사진)에 없던 ‘연애 수업’을 새로운 장치로 활용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콜린이 퍼넬러피의 연애를 돕는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 미묘한 감정이 생겨나는 점을 섬세하게 다룬 것. 드라마는 공개 직후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영어 부문 1위에 올랐다. 브리저튼 시리즈는 19세기 영국 런던 브리저튼 가문 8남매 이야기를 담은 시대극이다. 원작과 드라마의 가장 큰 차이점은 퍼넬러피의 체중 변화다. 원작에서 퍼넬러피가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건 외모 때문으로 묘사된다. 원작에선 다이어트에 열중하지만 다른 여성에 비해 밀리는 외모를 “(다른 여성보다) 몸무게가 10kg은 족히 더 나갔다” “(다이어트 후) 자기 눈으로 봐도 ‘끔찍하게 피둥피둥하다’에서 ‘보기 좋게 토실토실하다’로 한 단계 올라섰다”고 표현한다. 반면 드라마에서 퍼넬러피는 통통한 몸매를 지녔지만 다이어트에 열중하지 않는다. 대신 사교계에 걸맞은 대화 방법을 배우고 화장이나 의상에 변화를 꾀한다. 드라마의 총괄 제작자 제스 브라우넬은 “퍼넬러피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외모보다 자신감의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노처녀’ 퍼넬러피의 나이가 바뀐 것도 주목할 점이다. 퍼넬러피의 나이는 원작에선 28세이지만, 드라마에선 19세로 설정됐다. 17세에 사교계에 데뷔했지만 11년 동안 시집가지 못했던 원작의 설정보다 설득력 있다. 퍼넬러피가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을 모은 소식지 ‘레이디 휘슬다운’의 제작자란 사실이 드러나는 시점도 차이가 있다. 원작에선 ‘레이디 휘슬다운’의 정체는 숨겨져 있다. 반면 드라마에선 콜린이 퍼넬러피의 정체를 밝혀내기 직전으로 묘사돼 극적인 긴장감을 불러온다. 펜 하나로 귀족과 왕실까지 쥐락펴락하는 ‘레이디 휘슬다운’의 정체가 사실 수줍음 많은 소녀란 사실은 결혼에만 목매야 했던 당시 영국 여성들의 욕망을 드러낸 장치다. 사교계에서 서로를 질투하고 비난하는 여성들이 화합하는 과정을 ‘우정’ 서사로 보여주려고 한 점도 드라마의 특징이다. 드라마 프로듀서 숀다 라임스는 넷플릭스와의 인터뷰에서 “남자보다 서로에게 훨씬 더 큰 힘이 되는 여성들의 완전한 우정을 보여주려 했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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