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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 노인의 세포를 떼어내 40대로 되돌리는 것은 지금도 가능하다. 이를 ‘세포의 시간역전’이라고 한다. 인류는 시험관 안에서 세포를 다시 젊게 하는 ‘리프로그래밍’ 기술을 확보해 둔 상태다. 수명 연장 연구는 이 기술을 세포 단위에서 생체 단위로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세기 중에 영생불사가 가능해질 수 있다는 성급한 전망도 나온다. ▷아마존 최고경영자에서 올해 7월 물러난 세계 최고 부자 제프 베이조스가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수명 연장 연구를 목표로 올해 설립된 알토스랩스에 그가 투자한 사실이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 알토스랩스는 지난해 10월 러시아 출신의 정보기술(IT) 투자계의 거물인 유리 밀너가 과학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가진 세미나에서 태동했다. 베이조스와 밀너 등은 최소 2억7000만 달러(약 3105억 원)를 알토스랩스에 투자했다. ‘영원한 삶’에 대한 거부들의 공동 연구인 셈이다. ▷이론적으로 세포의 시간을 역전시킬 수 있으면 생체의 시간도 거꾸로 돌릴 수 있다. 세포에 단백질을 주입해 일반세포를 줄기세포로 되돌리는 리프로그래밍 기술은 동물실험에서 장기와 생체 기능을 젊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암 같은 비정상적인 세포가 발현하는 문제가 있다. 이 난관을 뚫기 위해 알토스랩스는 100만 달러 이상의 고액 연봉을 제시하며 유능한 유전학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인간의 노화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생체 시계’의 개발자인 스티브 호바스 교수와, 리프로그래밍 기술 발견으로 2012년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 야마나카 신야 교수 등이다. ▷한국에서는 미국 하버드대 의대 데이비드 싱클레어 교수가 쓴 ‘노화의 종말’이 지난해 번역 출간되면서 수명 연장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는 노화를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보는 새로운 관점을 확산시켰다. 그는 자신이 찾아낸 물질을 복용해 신체 나이를 젊게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효능이 완전히 검증되진 않았지만 그 노화 방지 물질을 미국에서 구매해 복용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것은 부자들만의 욕망은 아닌 것이다. ▷영원한 젊음을 간직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부단하게 이어져 왔다. 옛소련에서는 젊은 사람의 피를 나이 든 사람의 혈관을 돌게 한 뒤 되돌려 주는 방식으로 젊음을 찾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리고 젊은 피를 활용한 회춘 연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원하는 것은 다 이룬 것처럼 보이는 베이조스와 밀너의 올해 나이는 57세와 60세다. 나이 든 부자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건강한 젊음’이 아닐까 싶다.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카카오택시(카카오T)가 콜 비용을 정액 1000원에서 수요에 따라 최대 5000원까지 내도록 한 ‘스마트 호출 탄력 요금’ 제도를 2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바쁜 시간대에 택시를 빨리 부르려면 기본요금(서울 3800원)보다 더 많은 콜 비용을 내라는 것이다. 단거리 이용 소비자는 기본요금의 2배가 넘는 8800원을 내야 할 수도 있다. ▷2015년 택시 시장에 진출한 카카오는 초기엔 무료로 소비자와 택시 기사의 환심을 샀다. 그러다 택시 기사의 90% 이상, 국민의 절반 이상이 가입하며 독점적 지위에 오르자 ‘유료화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2018년에 콜을 유료화했고, 지난해에는 블루 서비스를 도입해 승차 거부 없는 배차를 구실로 최대 3000원을 더 받고 있다. 스마트 호출과 블루 서비스는 고급차량도 아닌 일반택시를, 쉽게 잡게 해준다는 명분으로 돈을 더 받는 사업이다. ▷카카오T는 택시 기사로부터도 월 9만9000원을 받는 ‘프로 멤버십’을 3월 도입했다. 회원으로 가입한 택시 기사에게 손님 행선지를 다른 기사들보다 먼저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고 돈을 받는다. 몇 년 전 자동 프로그램까지 만들어 손님을 먼저 잡으려는 택시 기사들이 있었는데, 카카오T가 이를 직접 사업화한 셈이다. ▷택시가 필요한 사람은 손을 들어 택시를 잡거나 앱을 켜서 택시를 부른다. 그런데 이 두 방식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길에서는 택시를 탄 후에 행선지를 알리면 되지만, 앱을 이용할 때는 목적지를 먼저 입력해야 한다. 만약 길에서 택시 기사가 행선지를 먼저 묻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냥 가버리면 승차 거부가 된다. 승차 거부는 세 번만 위반하면 택시 운전 자격까지 취소당하는 범법 행위다. ▷카카오T가 손님 행선지를 미리 알려주니 가까운 거리에는 택시가 잘 오지 않는다. 그런 환경을 만들어 놓고는 카카오T는 스마트 호출로 돈을 버는 셈이다. 장거리 손님 행선지를 특정 기사들에게 먼저 알려주는 것은 손님 골라 태우기를 조장하는 행위인데, 이걸로도 돈을 번다. 원칙에 맞춰 손님의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가까운 택시를 무조건 배차하면 손님이나 기사 모두 웃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은 택시를 이용하겠다는 의사만 표시하는 것이다. 앱으로 택시를 잡는다고 승차 거부의 빌미를 제공할 행선지까지 밝힐 이유는 없다. 규제 당국은 카카오T가 독점적인 지위를 이용해 요금을 올렸는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더 나아가 카카오T가 승차 거부를 조장하며 사업을 영위하는 것은 아닌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밝혀내서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7월 말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올해 2분기에 역대 최대 규모의 영업이익을 달성했다고 실적을 발표했다. 하지만 웃을 수가 없다. 철강은 대표적인 탄소배출 산업인데 유럽연합(EU)이 수입품의 탄소배출 정도를 따져 부담금을 지우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탄소국경세) 도입을 지난달 밝혔기 때문이다.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도 2025년 탄소국경세를 도입할 계획이다. 여기에 우리 정부는 2050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국내 기업에 적용할 탄소세 도입을 추진 중이다. 탄소국경세와 탄소세는 수출과 제조업 중심의 한국엔 중대한 도전이다. 20년 전부터 탈탄소 경제를 준비한 EU의 수준에 맞추려면 시간이 많지도 않다.》EU, 5개 분야에 우선 적용 EU는 2023년 1월 1일부터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기 등 5개 분야에 탄소국경세를 적용할 계획이다. 수입품의 탄소 함유량을 조사해 EU의 탄소배출권거래제(ETS)와 연계된 탄소 가격을 별도로 부과한다. 3년간은 수입품의 탄소배출량 보고만 받고, 2026년부터 실제로 부과한다. 탄소배출량을 실물 가격에 반영함에 따라 EU에 비해 상대적으로 탄소배출량이 많은 개발도상국 수출품은 그만큼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된다. EU는 탄소국경세를 발표하면서 전 지구적 탄소배출 감축을 명분으로 세웠지만 개도국에 대한 탄소 감축 기술 지원에 관한 내용을 담지 않았다. 사실상 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을 택함에 따라 중국과 러시아 등 탄소배출이 많은 국가를 중심으로 ‘탄소를 앞세운 신무역장벽’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철강사 年 4000억 부담할 수도 탄소국경세는 국내 철강 산업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탄소국경세가 적용될 5개 품목 중 지난해 철·철강은 221만 t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알루미늄(5만2600t), 비료(9214t), 시멘트(80t) 등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EY한영회계법인은 2023년 EU가 t당 30.6달러의 탄소국경세를 부과한다면 우리 철강업계는 연간 약 1600억 원을 부담해야 한다고 추산했다. 탄소배출권의 가격 상승으로 2030년에는 t당 75달러가 부과될 경우 부담액은 4000억 원으로 늘어난다. 2030년 기준 철·철강 수출액의 12.6%나 될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 철강업계의 영업이익률이 10%대인 것을 감안하면 적자 수출이 예상되는 수준이다. EU는 탄소국경세 제도를 발표하면서 2035년 EU에서 내연기관 차량 판매도 금지했다. 현대차는 2040년에 유럽 미국 중국 등 주요 시장에서 전기차 판매를 전면화할 계획이었는데, 이를 앞당겨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됐다. EU는 탄소국경세를 전 수입품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문진영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글로벌전략팀장은 “EU의 탄소국경세는 개도국의 반발과 그에 따른 보복관세 등 장애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탄소중립이라는 명분 때문에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며 “아직도 탄소배출량이 늘고 있는 우리가 이에 대한 대처를 소홀히 했다가는 생존의 위협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우리 정부는 탄소세 도입 추진 수출품에 적용되는 탄소국경세와 별개로 국내에서는 탄소배출에 비례해 세금을 매기는 탄소세 도입이 추진 중이다. 정부는 탄소중립 전환 지원을 위한 ‘기후대응기금’ 마련을 위한 세제와 부담금, 배출권 거래제 등 탄소 가격 부과 체계의 전면 검토에 착수한 상태다. 탄소세는 해외 사례를 참고해 석유·석탄 등 화석연료 사용량이 많은 기업과 업종을 중심으로 부과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산업 경쟁력 훼손이다. 전 세계에서 탄소세를 시행하는 나라는 25개국이지만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이 발달한 유럽 국가가 대부분이다. 한국은행은 최근 t당 50달러의 탄소국경세를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도입한다면 우리 수출이 8조 원(1.1%) 줄고 국내총생산(GDP)은 0.28% 줄 것이라고 추정했다. 여기에 탄소세 부담까지 더해지면 주력 수출 업종인 철강과 석유화학 관련 업종의 수출 타격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국회에 2건의 탄소세 관련 법안도 계류 중이다. 국회에 발의된 법안에 따르면 온실가스 t당 4만∼8만 원을 2025년까지 단계적으로 부과토록 돼 있다. 최대 36조3000억 원의 부담이 기업에 부과되는데 2019년 법인세수의 절반이 넘는 비현실적인 규모다.탄소저감기술 혁신이 활로 전문가들은 탄소배출 감축 기술 확립을 위해 적극적인 인센티브 정책을 펴야 한다고 제안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해 11월 ‘2050 탄소중립 범부처 전략회의’에서 실질적인 탄소중립을 위해서는 탄소배출 감축 기술이 전제돼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EU는 탄소배출 감축 기술의 사업화와 상용화를 위해 혁신펀드를 설립하고, 2030년까지 13조6000억 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호주는 저탄소배출 기술 개발에 2030년까지 15조5000억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이호근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는 “탄소세나 탄소배출권 거래제는 임시방편의 성격이 강하다”며 “제철 과정에서 탄소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수소환원제철공법 같은 탄소 감축 기술 개발에 나서는 기업들에 과감한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탄소배출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탄소세, 조세 부담 커 호주는 2년 만에 폐지 프랑스는 세율 인상 유예탄소세 제도는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등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25개국에서 시행 중이다. 북유럽 국가들은 탄소세와 배출권거래제를 함께 시행하는 곳이 많아 중복 규제를 피하기 위해 법인세나 소득세 등 다른 세금을 감면하는 조치를 병행하고 있다. 1990년 세계 최초로 탄소세를 도입한 핀란드는 1997년과 2011년 에너지 세제 개혁을 통해 개인의 소득세와 기업의 사회보장비 부담을 줄여줬다. 배출권거래제 대상 기업에는 배출권을 무료 할당하는 방식으로 탄소세 부담을 줄여줬다.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싱가포르가 탄소세를 도입했다. 일본은 2012년 10월 ‘지구 온난화 대책세’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탄소세를 도입했다. 세율은 이산화탄소 t당 3달러. 기존 석유석탄세에 더해 부과하면서 면세와 환급 조치를 병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세수는 재생에너지 도입, 에너지 수급구조 개선 등에 쓴다. 싱가포르는 2019년 연간 25kt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탄소세 제도를 도입했다. 2023년까지 이산화탄소 t당 4달러의 세금을 부과하고, 2030년에 가서는 7.5∼11.3달러를 부과할 예정이다. 탄소세 도입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호주는 2012년 7월 탄소세를 도입했지만 광산과 에너지, 유통 기업은 물론 소비자의 부담이 늘어나 2014년 7월 폐지했다. 2014년 탄소세를 도입한 프랑스는 탄소세율을 인상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가 2018년 11월 유류세 인상에 반대하는 ‘노란 조끼 시위’가 발생하자 인상 계획을 유예한 상태다. 탄소배출권거래제(ETS)정부가 탄소 전체 배출 허용 총량을 설정하고, 기업이 그 범위 내에서 배출권을 부여받는 방식. 남거나 모자라는 배출권은 시장에서 거래.탄소세정부가 정한 세율에 의해 탄소 배출량에 따른 세금을 지불하는 방식. 탄소 가격은 세율에 의해 일정하게 관리되는 특징이 있음.탄소국경세유럽연합(EU)이 처음 도입하는 제도로 탄소세와 탄소배출권과 달리 역외 국가 제품에 적용하는 일종의 관세. EU보다 탄소 배출이 많은 국가에서 생산된 제품에 비용을 부과해 무역장벽의 효과를 냄.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더불어민주당이 18일 열린 정책 의원총회에서 종합부동산세 개편안과 함께 양도소득세 개편안도 당론으로 확정했다. 1가구 1주택자에 대한 비과세 기준선을 현행 실거래가 9억 원에서 12억 원으로 올리는 반면, 양도차익이 5억 원을 넘기면 금액이 커질수록 장기보유특별공제 혜택을 축소하는 것이 핵심이다. 10년 실거주할 경우 최대 80%까지 받던 장기보유특별공제가 최대 50%로 낮춰지는 식이다. 이에 따라 집값이 12억 원이 넘으면서 시세차익이 5억 원 이상인 1주택자는 양도세 부담이 늘어날 수 있다. 개편안이 올해 국회를 통과해 바로 시행된다면 1주택자에게 주어지던 장기보유특별공제 혜택이 2009년 도입 이후 12년 만에 축소되는 것이다.》장기보유자, 기존보다 세금 늘어 비과세 혜택 기준선이 실거래가 기준으로 12억 원까지 높아진 것은 양도세 부담을 줄이는 효과를 낸다. 2년 이상 거주한 1주택자는 기존에는 실거래가 9억 원 이하일 때만 양도세 비과세 혜택을 받았지만 여당 개편안이 시행된다면 12억 원 이하까지 적용된다. 하지만 실거래 가격이 12억 원을 넘는 1주택자는 양도차익이 5억 원이 넘을 경우 장기보유특별공제 혜택이 줄기 때문에 세금을 더 낼 수 있다. 개편안 이전과 이후로 나눠 세금을 모의 계산해보니 장기 보유한 1주택자가 이전보다 세금을 더 많이 내는 문제가 실제로 나타났다. 실거주·보유기간이 3년 5개월인 서울 양천구 목동3단지 아파트의 경우 세금(사례1)은 1870만 원가량 준 반면 비슷한 규모의 목동2단지 아파트(사례2)는 보유기간이 9년을 넘기면서 양도차익이 10억 원을 넘기자 세금이 2600만 원가량 늘었다. 비과세 기준선이 올라 세금이 줄어드는 효과보다 장기보유특별공제 축소 효과가 더 큰 영향을 끼쳐서다. 반포미도1차 아파트(사례3, 4)는 취득가액과 양도차익이 비슷한데도 5년가량 보유한 1주택자의 세금은 줄었는데, 10년 이상 장기 보유한 1주택자의 세금은 오히려 늘어난다. 서초구 롯데캐슬 클래식 아파트(사례5)와 강남구 은마아파트(사례6)를 비교한 모의 계산에서도 은마아파트 보유자는 양도차액이 더 적고, 보유기간은 더 긴데도 롯데캐슬 1주택자와 달리 내야 하는 세금이 늘게 된다.수십년 거주, 은퇴자에 직격탄 여당의 개편안이 시행되면 오래전 집값이 지금보다 싸던 시절에 서울 강남이나 목동, 여의도 등에서 아파트를 분양받거나 구입해 20∼30년간 살다가 은퇴한 사람들이 직격탄을 맞게 된다. 보유기간이 길어 양도차익은 클 수밖에 없는데 공제혜택이 이전보다 줄어 세금을 더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은퇴자들 사이에서 “정부가 시키는 대로 집 한 채 사서 평생 살아 온 1주택자에게 세금 폭탄을 때리는 게 공정한가”라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이전보다 늘어날 양도세 부담 때문에 집을 내놓기를 꺼려 도심 인기 지역에 매물 잠김 현상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마땅한 소득이 없는 상태에서 이사를 하려면 취득세와 부동산 복비도 부담스럽기 마련인데, 양도세까지 이전보다 늘면 이주를 포기할 공산이 크다. 이번 정책으로 9억∼12억 원에 있던 집값이 12억 원으로 오르는 ‘키 맞추기’ 부작용도 우려된다. 실거래가 12억 원까지는 비과세 혜택이 있기에 그보다 조금 낮은 가격대의 주택으로 수요가 몰리면서 집값을 끌어올릴 수 있다. 장기보유특별공제 취지 어긋나 장기보유특별공제는 부동산을 오래 보유할수록 양도차익에서 일정 금액을 공제해 주는 제도다. 단기적 투기가 아닌 건전한 부동산 투자와 소유를 유도하겠다는 취지가 있다. 또 부동산을 오래 보유하면 물가상승에 의한 가격 상승분도 포함되기 때문에 이를 합리적인 수준으로 낮춰줘야 할 필요도 있다. 무엇보다 1가구 1주택을 장기 보유하는 경우 80%에 이르는 높은 공제율을 적용하는 것은 1가구 1주택이 국민 주거 안정에 필수적인 요건이기 때문이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기존의 장기보유특별공제를 적용하더라도 양도세가 높은 나라에 속한다”며 “1주택을 오래 보유한 사람의 양도세 부담이 커지면 그들은 비슷한 환경의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번 개편안은 아직 국회 심의 과정이 남아 있다. 국회에서 논의할 때는 1주택 장기 보유자에 대한 보다 합리적인 개선안이 나와야 할 것이다. 장기보유특별공제 도입한지 12년만에 축소 양도세 감면 혜택은 현 정부 들어 계속 줄어들고 있다. 다주택자의 장기보유특별공제 혜택을 없애는 것을 시작으로 1주택자가 장기보유특별공제를 받는 조건도 점점 까다롭게 만들고 있다. 정부는 2017년 8·2대책을 통해 다주택자가 조정대상지역 안에 있는 주택을 양도하면 양도세를 중과함과 동시에 장기보유특별공제 혜택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이때 1주택자가 양도세 비과세 혜택(양도가 9억 원 이하)을 받으려면 조정대상지역에서는 2년 이상 거주해야 하는 조건이 생겼다. 물론 조정대상지역 주택이 아니거나 8월 2일 이전에 취득했다면 2년 이상 거주할 필요는 없었다. 이듬해 9·13대책에서는 1주택자가 장기보유특별공제 적용을 받으려면 규제지역 여부와 상관없이 무조건 2년 이상 거주해야 하는 것으로 조건이 강화됐다. 2017년 8월 2일 이전 취득 주택이더라도 9·13대책에 따라 2020년 1월 1일 이후 양도할 경우에는 2년 이상 거주해야 최대 80%의 공제를 받을 수 있다. 2019년에 나온 12·16대책에서는 1주택자가 장기보유특별공제를 최대(80%)로 받으려면 사실상 그 집에 10년 이상 살아야 한다는 취지의 조건이 붙었다. 공제율을 보유기간(연 4% 공제)과 거주기간(연 4% 공제)으로 구분해 적용키로 한 것이다. 즉 실거주하며 보유해야 연 8% 공제를 받고 2년 이상 실거주 후 보유만 하면 보유기간에는 연 4% 공제만 된다. 만약 거주기간이 2년 미만이면 일반 장기보유특별공제(연 2%)가 적용돼 최대 30%(15년 이상 보유)까지밖에 공제를 받지 못한다. 올해 1월 1일 이후 양도분부터 적용되고 있다. 지금까지 장기보유특별공제 혜택 축소는 그래도 10년 이상 실거주하려는 1주택에게는 별다른 영향이 없어 최대 80%의 공제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여당의 개편안은 이 혜택마저 없앴다. 아무리 오래 실거주를 했더라도 양도차익이 5억 원 이상이면 공제율이 10∼30%포인트 더 낮아져 세금이 늘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 80% 공제 혜택이 축소되는 건 2009년 이후 처음이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누구나집’ 프로젝트를 띄우고 있다. 집값의 10% 정도로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한다. 10년 정도 세를 살다가 분양전환 때 최초 분양가로 집을 살 수 있는 선택권을 주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임대법인이 가져가던 시세차익을 임차인이 갖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입주민들이 협동조합을 구성해서 10%의 사업비를 낸다. 나머지는 시행·시공사가 출자하는 10%, 대출 80%로 채워진다. 10년 전 가격으로 분양받을 수 있다면 누구나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2018년 영종미단시티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민간사업자가 조합원을 모집한 적이 있다. 8년 임대를 산 뒤에 최초 분양가로 분양받을 수 있는데도 당시 조합원을 제때 모으지 못했다. 당시 영종도는 미분양이 많은 상황이었는데도 ‘8년 후에도 최초가 분양’을 고려하다 보니 30평형대 분양가가 주변보다 3000만∼4000만 원 더 비쌌다. 또 조합원들이 내는 돈이 분양가의 10%뿐이어서 전체 사업비 조달을 위한 금융사 및 건설사와의 협의도 지지부진했다. 사업을 살린 건 집값 급등이었다. 집값 상승 기대감에 사업성이 개선돼 올해 초에야 겨우 착공할 수 있었다. 내 집 마련 방안이 많아지는 것은 기본적으로 국민에게 좋은 일이다. 여당이 임대주택만 고집하지 않고 주택 소유 욕구를 인정한 점도 평가한다. 그러나 조목조목 따져보면 곳곳에 허점이 도사리고 있다. 우선 10년 뒤 분양할 아파트 가격을 지금 얼마로 책정하는 것이 적정하냐는 문제다. 지금 시세에 맞춘다면 사업성은 급격히 떨어진다. 지금도 집값이 고점에 접근했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10년 뒤의 분양가를 책정하는 것 자체가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난제가 될 공산이 크다. 둘째, 사업비의 80%를 대출로 충당하는 구조가 존속 가능하냐의 문제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전문가들의 평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비슷하게 사업을 추진하는 민간 리츠 사업자들은 ‘대출 비중은 사업비의 40% 이하’를 철칙처럼 지킨다. 이자 비용이 커지면 자본금을 까먹는 상황도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여당은 국가 보증으로 자본 조달 비용을 낮춘다는데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하물며 금리 상승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셋째, 사업시행자가 가질 수 있는 이점의 불확실성이다. 시세차익 대신 세입자들을 상대로 한 구내식당 운영, 차량공유 서비스, 돌봄 서비스, 헬스케어 사업 등으로 수익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한다지만 가늠이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집값이 상승할 것이라는 예측이 틀렸을 때의 위험성이다. 세입자는 10년 동안 월세를 내며 사업비의 이자를 충당하는 셈인데, 집값이 정체하거나 내리게 되면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은 또 멀어지게 된다. 여당이 이런 정책을 내놓은 것은 부동산정책 실패를 조금이라도 만회하려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사정이야 어떻든 국민을 설득하려면 최소한의 경제이론과 상식에는 맞아야 한다. 하지만 1일 여당이 개최한 ‘누구나집 5.0 및 누구나주택보증 시스템 도입방안 세미나’에선 “시행사가 이익을 볼 생각을 하지 않고 사회적 기여를 할 생각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비상식적인 답변까지 나왔다. 여당은 이 정책을 ‘부동산판 이익공유제’라며 자랑까지 하고 있다. 국민은 내 집 마련을 못 해 초조하다. 이념을 앞세운 허술한 정책으로는 그런 국민의 마음을 달래줄 수 없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내년도 최저임금을 심의, 결정해야 하는 최저임금위원회 활동이 민노총의 18일 2차 전원회의 불참으로 초반부터 파행하고 있다. 민노총은 공익위원들이 지난 2년간 낮은 수준의 최저임금 인상을 주도했는데 대부분이 유임되자 이에 대한 불만으로 회의에 불참했다. 아직 노사 양측의 공식적인 인상률 요구안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불거진 분란이라 올해 노사 갈등이 더 심하게 표출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올해는 특히 문재인 대통령 임기 내 마지막 최저임금 결정이어서 근로자위원 측의 요구가 거셀 것으로 전망된다. 문 대통령은 ‘2020년 시급 1만 원’ 공약의 무산을 사과했었다. 매년 8월 5일까지 고용노동부 장관은 다음 해 최저임금을 고시해야 한다.“1만원 이상” vs “삭감-동결” 사용자위원 측은 내달 초에 모여서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에 대해 의견을 모을 예정이다. 2018년과 2019년 대폭 인상된 최저임금 여파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은 최저임금의 삭감을 요청할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대기업도 이미 많이 오른 최저임금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서도 과하다며 최소한 동결을 주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중위임금 대비 최저임금 수준은 60%대가 최고 수준인데, 이미 한국은 그 수준에 도달했고, 주요 7개국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근로자위원 측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1만 원 이상으로 큰 폭의 인상을 주장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올해와 내년은 코로나19로 위축되던 경제가 회복할 가능성이 높고, 인플레이션으로 물가도 높아질 것으로 예상돼 최저임금에 이런 요인들이 충분히 반영돼야 한다는 논리다. 한국노총 측은 “소득 불균형과 양극화 해소를 위한 현실적인 심의가 이뤄져야 하고, 문재인 정부가 국민에게 한 약속도 지켜져야 한다”는 입장이다.급격한 인상, 영세자영업 타격 문 정부 초기 2년간 29.1%에 이르는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여파는 컸다. 영세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중소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가중시켜 근로자 일자리가 위협을 받았다. 2018년의 가파른 인상으로 약 35만 개 일자리가 줄어들었다는 분석(중앙대 강창희 교수)이 나오기도 했다. 영세 사업자와 그 고용인이 최저임금을 두고 다투는 모양이 되면서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 ‘을’들의 전쟁을 부추겼다는 비판도 컸다. 이후 2년간의 최저임금 인상률은 다시 급격히 낮춰졌다. 급격히 높아진 최저임금의 영향으로 영세 사업자에게 인건비는 지속적으로 부담이 되고 있다. 최저임금 미만율(최저임금 미만으로 급여를 받는 근로자 비율)은 2019년 16.5%로 역대 최고를 기록한 이후 2020년에도 15.6%로 역대 2번째로 많았다. 2020년 최저임금 인상률은 2.87%에 불과했지만 한번 높아진 최저임금의 영향이 계속돼 최저임금조차 지급하지 못하는 사업자가 많은 것이다. 소상공인연합회가 최저임금을 적용할 때 최소한 업종별 지역별로 차등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배경이다. 업종별 차등 적용은 현행 최저임금법에서도 가능하다. 하지만 지역별이나 규모별, 나아가 나이별로 차등 적용하려면 법 개정이 필요하다.“중요한 국가정책, 정부 결정을” 최저임금위원회는 사용자위원 9명, 근로자위원 9명, 공익위원 9명 등 27명으로 구성해 원칙적으로 합의에 의해 최저임금을 결정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1988년 시행 이후 32번의 결정 중 합의가 이뤄진 경우는 7번뿐이다. 표결 25번 중에서도 노사 양측이 모두 참석한 경우는 8번에 불과할 정도로 갈등이 심했다. 최저임금 결정 과정에서 반복되는 사회적 갈등을 줄이고, 최저임금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용부는 2019년 2월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안을 내놨다. 최저임금위원회를 구간설정위원회와 결정위원회로 이원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전문가가 객관적인 경제·사회 지표로 최저임금의 상·하한선을 정하면 노·사·공익으로 구성된 결정위원회가 인상률을 확정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안을 담은 최저임금법 개정안은 20대 국회에서 노사 반발 속에 자동 폐기된 상황이다. 21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도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여럿 계류 중이다. 이 중에는 정부(고용부)가 책임지고 결정하도록 하는 방안, 국회에서 법률로 결정해야 한다는 방안 등 다양한 방식이 올라 있다. 문제는 아직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은 고용과 물가 등 경제지표에 영향을 주고, 수많은 근로자와 사용자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국가 정책’이다. 게다가 인위적으로 시장에 개입해 가격을 확정하는 재분배 정책이기도 하다. 급격한 인상이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실업자에게 미치는 악영향 등 범사회적인 영향도 고려돼야 한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저임금법이 제정된 지 30여 년이 지나면서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리면 노동시장에서 소외될 비정규직과 고령인력이 늘어나는 등 노동시장의 구조가 많이 변했다”며 “노사의 의견을 충분히 듣되 정부가 결정하고, 그 근거를 국민에게 소상하게 설명하며 책임지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내년 대선에서는 최저임금 결정 방식 개선이 주요 어젠다가 돼야 할 것이다. 미국은 의회, 프랑스는 정부가 최저임금 결정 각 나라의 최저임금 결정 방식은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다르다. 미국은 의회를 통과하는 법률로 최저임금을 결정한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2025년까지 연방 최저임금을 시간당 15달러로 인상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한 것은 법적 절차에 걸리는 시간을 염두에 두고 내놓은 발표다. 연방 최저임금과 달리 주별 최저임금을 허용하고 있어 지역별 최저임금이 적용되는 셈이다. 연방 최저임금은 시간당 7.25달러로 2009년 7월 이후 12년째 동결이지만 캘리포니아(14달러), 워싱턴(13.69달러), 매사추세츠(13.5달러) 등 20개 주는 개별적인 최저임금을 적용하고 있다. 프랑스는 노동장관이 ‘단체협상 국가위원회’ 의견을 들어 최저임금을 결정한다. 단체협상 국가위원회에는 기업 규모별 고용주 대표 6명과 5대 주요 노조별 노동자 대표 10명이 참여한다. 먼저 전문가 그룹이 매년 국가위원회에 인상률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고, 정부는 국가 재정 및 경제 전반에 대한 보고서를 위원회에 제출한다. 이후 노동부가 위원회를 소집해 노사 대표 의견을 청취한 뒤 결정한다. 독일은 노사 2자로 구성된 최저임금위원회에서 결정한다. 노사 양측 대표 위원 각 3명과 중립적 위원장 1명, 표결권 없이 자문만 담당하는 학계 인사 2명 등 총 9명으로 구성된다. 연방 통계청의 월별 임금 지표에 기반해 결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출석 위원 과반수 찬성으로 확정된다. 갱신 주기는 2년이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국회가 수익률 제고 방안에 초점이 맞춰진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 논의를 본격화한다.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소위는 28일 퇴직연금 제도 개선을 위한 전문가 간담회를 열고, 입법에 속도를 낸다는 계획이다. 확정기여(DC)형에는 ‘디폴트 옵션(사전 지정 운용) 제도’를, 확정급여(DB)형에는 ‘투자 일임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핵심이다. 디폴트 옵션은 가입자의 운용 지시가 없으면 미리 지정된 상품에 자동으로 투자하는 방식이고, 투자 일임은 사용자(기업)에게 퇴직연금 위탁 운용을 허용하는 것이다. 간접적이나마 퇴직연금의 수령액이 달라질 수도 있는 새 제도 도입 논의가 막 시작되고 있다. 》퇴직연금 수익률은 연 1%대 2005년 12월 퇴직급여보장법 시행으로 시작된 퇴직연금은 2020년 말 기준으로 적립금이 255조5000억 원으로 늘었다. 매년 15% 전후로 적립금이 늘면서 그 규모가 126조 원에서 2배로 커진 것이다. 전 국민이 가입한 국민연금 855조 원의 30%에 달하는 규모다. 규모는 커지는데 수익률이 낮아 문제다. 수익률이 낮으면 노후 안전장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퇴직연금의 최근 5년간 연 환산 수익률은 1.8%대로 국민연금(5.3%)보다 낮다. 적립금의 대부분(86.1%)인 219조9000억 원이 원리금 보장 상품에 가입돼 있고, 실적배당 상품에는 10.7%(27조4000억원)만 투입돼 있는 상황과 무관치 않다. 그나마 DC형 가입자는 여러 투자 상품을 선택해 수익률을 높일 수 있지만, 금융지식 부족과 무관심 등으로 적립금 67조2000억 원의 83.3%인 56조 원을 원리금 보장 상품에 넣고 있다. 이율이 가장 낮은 예금에 넣어두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4월 현재 DC형 적립금의 절반가량(50.4%)이 금리가 0.72%에 불과한 은행 예금에 들어있다. 근로자가 퇴직연금 사업자(은행, 증권사, 보험회사 등)에게 “저축은행에 넣어 달라”와 같은 명확한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저축성 상품 중에서도 금리가 낮은 은행 예금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금융투자업계는 보고 있다. 기업이 운용을 책임지는 DB형도 손실에 대한 부담 때문에 적립금의 대부분(95.5%)을 원리금 보장 상품으로 운용하고 있다. 2019년 현재 위탁운용 비중을 40.5%까지 늘린 국민연금의 수익률은 11.3%로 2.3%가량인 퇴직연금의 약 5배에 달한다.‘예금 상품’ 옵션 도입 논란 디폴트 옵션은 DC형에 새로 가입했거나 기존 투자 상품이 만료된 가입자가 투자 상품을 선택하지 않는 특수한 경우에 적용된다. 4주 이내에 새 상품을 선택하지 않으면 사전에 가입자나 사용자(기업)가 정한 상품에 투자됨을 통지하고, 그럼에도 2주 내에 운용 지시가 없으면 해당 상품에 투자된다. 관건은 디폴트 상품(사전 지정 상품)에 원리금이 보장되는 저축성 상품을 넣느냐는 것이다. 안호영 의원이나 김병욱 의원 등 더불어민주당 안에는 실적배당 상품만 있고,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의 발의안에는 저축성 상품도 있다. 수익률 제고 취지에 맞추려면 디폴트 상품에 저축성 상품은 넣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미국이나 호주 등이 그런 방식으로 연 7%의 수익률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 근거로 제시된다.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를 회원으로 두고 있는 금융투자협회 측은 “가입자가 상품 선택 때 예금을 선택할 기회가 있는데, 운용 지시가 없을 때 다시 넣는 것은 수익률 제고를 위한 제도 개선 취지를 무색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도 가입자의 운용 지시가 없을 때는 저축성 상품에 자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반면 생명보험협회와 은행연합회 등은 퇴직연금이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임금 성격이 강해 원리금에 대한 보장이 확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명보험협회 측은 “퇴직 시기에 주식 시장의 변동성이 크게 되면 예금에 넣어둔 것만 못한 효과를 볼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계층 간 불평등 문제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윤석명 한국연금학회장은 “디폴트 옵션이 도입되면 금융지식이 부족하고 직장을 자주 옮겨 다녀야 하는 근로자는 상대적으로 이전보다 높은 위험에 노출되는 점 등 소득 계층 간의 불평등 문제도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디폴트 상품 수수료 낮춰야 여야 모두 디폴트 옵션 도입 자체에는 이견이 적어 앞으로 연금시장에는 디폴트 상품이 새로 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자산운용사들이 미국에서 인기 있는 타깃데이트펀드(TDF) 형태로 엄선한 새 상품을 내놓을 수 있다. TDF는 만기에 가까워질수록 안전자산 비중을 높여 수익성과 안정성을 같이 추구하는 상품이다. 디폴트 상품은 퇴직연금을 적극적으로 운용하려는 DC형 가입자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은 2600여 펀드에서 직접 선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디폴트 옵션이 도입된 이후 디폴트 상품 가입자가 급증했다. 다만,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는 꼴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수수료를 낮추고, 이해충돌을 감시할 수 있는 별도 장치를 갖추는 논의도 필요해 보인다. 미국, 퇴직연금으로 100만 달러 자산 형성 노리기도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스웨덴 이탈리아 뉴질랜드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디폴트 옵션 제도를 이미 도입해 운용하고 있다. 미국은 1981년 DC형 퇴직연금(401k) 제도 시행 때 디폴트 옵션을 도입했다. 2006년 연금보호법 제정 때 디폴트 옵션 투자 손실에 대한 사용자(기업)의 면책 조항이 포함되면서 더 활성화됐다. 미국 가입자는 정부가 지정한 ‘적격 디폴트 상품(QDIA)’을 투자 대상으로 설정하는데, 그중에서 타깃데이트펀드(TDF) 선택 비율이 가장 높다. 연 7%대의 수익률과 주식 활황 덕분에 미국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퇴직연금 내 주식과 펀드 등을 통한 100만 달러 노후자산 형성(401k Millionaire)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호주는 1992년 사용자가 근로자 급여의 9.5%를 의무 적립하는 강제 퇴직연금 제도인 ‘슈퍼 애뉴에이션 제도’를 도입했다. 이때 ‘마이 슈퍼’라는 이름으로 디폴트 옵션을 도입했다. 양국 모두에서 디폴트 옵션 행사 때 선택하는 디폴트 상품(적격 연금 상품)은 전문가에 의해 잘 설계된 대표 상품이라는 인식이 높아 DC형 가입자가 투자 상품 선택 때도 이들 상품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있다. 일본은 대부분의 국가들과 달리 디폴트 상품에 저축성 상품을 포함시켜 가입자가 원금보장형 상품을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있다.퇴직연금제도 유형1)확정급여(DB·Defined Benefit)형: 기업이 재원을 금융회사에 적립·운용하고 퇴직 시 근로자는 정해진 금액(퇴직 직전 3개월 평균 급여×근속연수)을 받는 방식.2)확정기여(DC·Defined Contribution)형: 기업이 매년 임금의 12분의 1 이상을 적립해주고, 근로자가 이를 운용해 최종 수령하는 방식.3)개인형 퇴직연금(IRP): 퇴직한 근로자가 수령한 퇴직금을 운용·관리하거나, 재직 중인 근로자가 DB나 DC 방식 외에 자기 부담으로 추가 적립·운용해 연금 혹은 일시금으로 수령.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3월 하순 온라인 블로그에 페이스북 해킹 피해가 하나 공유됐다. 페이스북에서 상품 광고를 하는 A사 계정이었다. A사는 광고비 결제를 위해 신용카드 번호를 등록해 놓고 있었다. 해커는 다른 기업 광고를 실은 뒤 A사 카드로 결제하는 방법으로 돈을 가로챘다. 관리자 한 명의 비밀번호가 해커에게 뚫리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세계 최대 소셜미디어인 페이스북 이용자 5억 명의 개인정보가 온라인 게시판에 노출됐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3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세계 106개국 이용자가 망라됐다. 한국인도 12만여 명이 포함됐다. 유출된 정보에는 아이디와 실명, 거주지, 생일, 이력, 이메일 주소 등이 포함된다. ▷페이스북의 개인정보 유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8년 3월에는 영국 정치 컨설팅업체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가 부적절하게 수집한 페이스북 이용자 데이터 8000만 명분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문제가 됐다. 페이스북은 벌금 50억 달러(약 5조6000억 원)를 물었다. 당시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는 “우리는 당신의 데이터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당신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자격이 없다”고 다짐했다. 그럼에도 이듬해 2건의 정보유출 사고가 더 발생했다. ▷이번에 노출된 정보에는 페이스북 비밀번호까지 포함된 것은 아니다. 페이스북 측은 “2019년 8월 보안 패치 적용 전에 유출된 자료”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보안 전문가들은 노출된 정보를 바탕으로 다른 사회공학적 해킹이 가미되면 이용자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본다. 사회공학적 해킹이란 온라인 및 오프라인의 정보를 바탕으로 공격 대상의 성향이나 동향, 관심사 등 심리상태를 파악해 악성 파일이 담긴 메일 등으로 공격하는 방식을 말한다. 악성 파일은 비밀번호도 캐낸다. ▷페이스북은 개인정보 활용 문제를 두고 최근 애플과 갈등을 빚고 있다. 애플은 아이폰 이용자가 명확히 동의해야만 자신의 활동내역이 페이스북 같은 앱에 제공되도록 했다. 페이스북은 이용자 활동내역이 있어야 맞춤형 광고 사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개인정보 보호가 허술하면 동의자 수는 줄 수밖에 없다. ▷지갑에 대해 ‘중요한 물건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만드는 도구’라는 냉소적인 정의가 있다. 페이스북은 ‘세계인의 개인정보 지갑’ 같은 곳이다. 저커버그의 말처럼 데이터 보호에 실패하면 관련 사업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런데 이번 사태가 발생한 뒤로 페이스북코리아나 저커버그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사과는커녕 안내조차 찾아볼 수 없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이던 지난해 11월. 당시 밥 스완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홈페이지를 통해 바이든 당선인에게 공개서한을 띄웠다. 전 세계 반도체 생산능력의 80%를 아시아가 차지하고 있는데 미국은 12%에 불과하다는 점, 외국 정부의 보조금이 미국 반도체산업에 큰 불이익이 되고 있다는 점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스완 당시 CEO는 미국 반도체산업에 대한 정부의 투자와 지원을 요청했다. 이 서한은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 정책을 읽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미국 백악관이 삼성전자와 제너럴모터스(GM) 등 반도체 생태계의 주요 공급자와 수요자들을 불러 모으기로 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1일 보도했다. 12일(현지 시간) 경제 참모뿐만 아니라 안보보좌관도 백악관의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회의를 할 예정이다. 미국이 반도체를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국가안보 문제로 끌어올려 대대적인 지원을 쏟아붓겠다는 구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의회는 올해 1월 국방수권법(NDAA)을 통과시켜 반도체 연구개발 및 투자에 연방정부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에 인텔은 지난달 24일 200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에 파운드리 공장 2곳을 짓는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달 31일 바이든 대통령이 밝힌 2조 달러 초대형 인프라 투자계획에도 국가반도체기술센터(NTSC) 설립 등 반도체 투자비 500억 달러가 포함돼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백악관 반도체 테이블에 왜 삼성전자를 초청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우선 최근 반도체 부족으로 자동차 가전 스마트폰 산업에 생산 차질이 생긴 것이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고 있는데 2월에 닥친 한파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은 바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견제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논의하기 위한 목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바이든 정부와 인텔의 ‘2인 3각’식 움직임은 그동안 아시아에 넘겨줬던 반도체 생산을 미국으로 가져오겠다는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생산 분야에서는 현재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대만 TSMC의 뒤를 멀리서 쫓는 처지다. TSMC는 앞으로 3년간 연구개발에 1000억 달러를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1일 내놨다. TSMC는 달아나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뛰어들면 급성장하는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백악관의 초대장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계절이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으로 그 어느 때보다 이해충돌방지법 제정의 필요성이 부각됐지만 여야 국회의원들은 3월 국회에서 처리하지 않았다. 이해충돌방지법은 공직자가 함부로 사익을 좇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들을 담고 있다. 여야가 31일 심사를 재개하기로 했지만 시민사회는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국회 처리가 무산된 데다 4·7 재·보선 이후 정국이 대선 체제로 전환되면 이해충돌방지법 이슈가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일주일 전 슬그머니 심사 중단 정치권에서 이해충돌방지법에 드러내놓고 반대하는 목소리는 없다. 서울·부산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서 열세로 나오는 더불어민주당이 도입을 더 서두르고 있을 뿐이다. 야당인 국민의힘은 도입에 찬성하면서도 제정법인 만큼 좀 더 신중하자는 입장이다. 겉으로는 야당이 지체시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법안에 미온적일 수밖에 없다는 게 한국투명성기구 등 시민단체의 판단이다. 이번 법안은 지난해 6월에 제출됐지만 그동안 심사를 하지 않다가 3월 초 LH 사태가 발생하자 부랴부랴 공청회가 열렸고, 법안 심사가 시작됐다. 법안심사 소위는 24일 오전에 이어 오후에도 열릴 예정이었지만 결국 슬그머니 중단됐다.법 있었다면 LH사태 막았을 것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해충돌방지법이 있었으면 LH 사태를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이 많다. 법에 따르면 신도시 개발 업무 관련 공직자들은 관련 부동산 거래를 사전에 신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직무상 비밀을 이용해 재산상의 이득을 취했다면 7년 이하의 징역이나 7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는 강력한 처벌도 효과를 발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법은 반부패권익위법이나 청탁금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과 달리 사전 예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공직자가 사적 이익을 추구했는지를 증명할 필요 없이, 관련 신고의 미비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다. 이해충돌방지 조항은 원래 청탁금지법에 들어 있었다. 그래서 2013년 발의 당시 명칭은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 이해충돌방지 법안’이었다. 국민권익위가 법무부 감사원 등 8개 기관의 의견을 수렴하고, 시민단체들과 토론해서 만든 안인데 국회에서 이해충돌 부분이 통째로 빠졌다. 국회의원이나 중앙부처 공무원의 업무는 그 범위가 넓기 때문에 업무가 사실상 마비될 수 있다는 주장 등에 밀렸다. 그나마 청탁금지법이라도 통과된 것은 세월호 참사의 영향이 컸다. 사고 원인 중 하나로 감독 부실이 거론됐고, 해양수산부의 사무를 위탁받는 관련 협회에 퇴직공직자들이 취업한 것이 문제가 됐다. 이에 퇴직공직자의 취업 제한 제도를 강화하는 공직자윤리법 개정과 청탁금지법 제정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거셌던 것이다. 이해충돌방지는 부패방지와 한몸이어서 2001년 부패방지법 제정 때 도입됐어야 했다. 신봉기 한국부패방지법학회장(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은 “이해충돌방지는 2000년 초부터 논의가 있었지만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해 법안에 반영되지 못했다”며 “사실상 20년째 이해충돌방지 논의가 맴돌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내달 처리 못 하면 로드맵 제시를 여야가 법안 심사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으니 4월에는 처리될 가능성도 있다. 24일까지 3차례 진행된 법안심사 소위에서는 ‘직무상 비밀 이용 금지’ 조항에서 ‘비밀’을 ‘미공개 정보’로 확대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직무상’도 없애서 LH 사태에서처럼 동료로부터 취득한 정보를 포함시키자는 의견도 나왔다. 이해충돌방지법은 LH 사태 이전에 제출돼 보완해야 할 사안이 있을 수 있다. 더 신중하게 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제대로 더 논의할 수 있다. 다만 여야는 마감 시한을 정한 일정표라도 제시해서 국민들의 불신을 잠재워야 한다. 국회의원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이해충돌방지법의 처리가 더딘 것에 대해 시민단체가 보는 눈은 곱지 않다. 이상학 한국투명성기구 대표는 “공직자는 공무원 행동강령과 감사원 감사 등으로 견제라도 받지만 국회의원과 지방의회 의원들은 권력에 비해 감시가 약하다”며 “국회의원과 지방의회 의원이 핵심인 만큼 논의 도중 대상에서 빠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해충돌방지법은 조문이 많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너무나 상식적인 주문들이다. 美는 반세기 앞서 도입… 위반땐 최대 5년刑 이해충돌방지법은 선진국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도입돼 있다. 미국은 1962년 제정한 ‘뇌물, 부당이득 및 이해충돌방지법’을 통해 공직자 자신 및 가족 등의 재정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특정 사안을 회피하지 않고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향후 고용될 수 있는 단체도 이해관계 대상에 포함된다. 이를 위반하면 고의성이 있을 경우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고의성이 없는 단순 참여라 할지라도 1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금융회사 조사관 등이 조사 대상 은행 등으로부터 대부금이나 사례금을 받으면 1년 이하 징역이나 벌금에 처한다. 또 2009년 별도의 행정명령으로 공직자로 임용되기 전의 사용자 또는 고객과 직접적 실질적으로 관련된 특정 업무를 공직 임용 후 2년간 수행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프랑스는 ‘공무원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1983년 7월 13일의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이해충돌을 방지하고 있다. 객관적인 직무수행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이고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보여도’ 이해충돌 상황이 성립한다는 규정까지 두고 있다. 캐나다는 2006년 ‘공직자의 투명성과 이해충돌방지법’을 제정했다. 공직자의 가족이 공직자와 유관한 기관과 고용계약을 맺는 것은 금지되고, 친인척에 대한 계약 발주도 제한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이해충돌방지 가이드라인에서는 공무와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사적 이해관계를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신고하는 절차를 만들 것을 권고하고 있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새집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주택청약제도는 이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 집값이 급격히 오르고 주택자금 대출은 여의치 않으니 사람들은 더 청약에 매달리는 상황이다. 청약통장 가입자는 올해 1월 말 2730만 명을 넘었다. ‘인생 최대의 쇼핑’인 생애 최초 주택 마련에는 7년 안팎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도 걸린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청약통장을 만들고, 땀 흘려 오랫동안 일하며 자금을 마련한다. 하지만 막상 청약을 하려고 보면 청약 조건은 이전과 달라져 있기 일쑤다.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니 불편하고 불안하다. 유주택자가 되려면 움직이는 과녁 정도는 맞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10명 중 1명은 부적격자로 탈락 청약은 조건이 복잡해져 지뢰밭 수준이다. 가령 지난달 19일 시행된 주택법 시행령을 모른 채 청약했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다. 2월 19일 이후 입주자모집공고를 낸 분양가 상한제 아파트를 분양받으면 반드시 입주를 해야 하고 2∼5년을 의무적으로 살아야 한다. 새 아파트를 전세로 내놓고 그 전세금으로 잔금을 치르지 못한다는 의미다. 새 아파트의 잔금이 부족할 때 일정 기간 전세를 주고 그사이 돈을 모아 입주하는 기회를 막은 것이다. 자금 부족으로 계약을 하지 못하면 청약통장은 무효가 되고 당첨일로부터 10년간 투기과열지구 등의 주택에 청약할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된다. ‘남은 무주택자’에게는 더 혹독한 자금 조달 조건이 부과된 셈이다. 청약제도는 국토교통부의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으로 주로 실현된다. 이 규칙은 1978년 5월 처음 나와 지난달까지 시행 횟수 기준으로 148번 고쳐져 시행됐다. 1년에 3.4회꼴이다. 1순위 자격은 툭하면 변경됐고, 바뀔 때마다 금지 규정이 신설되거나 사라졌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 5월 이후로는 4년이 채 안 되는 동안 20번 새로 시행됐다. 청약제도의 잦은 변경은 청약 혼선과 함께 부적격자 양산이라는 문제를 낳는다. 내 집 마련의 꿈이 어그러지고, 투기과열지구 등에서 1년간 청약이 제한되는 불이익도 받는다. 2017∼2019년 매년 청약 당첨자의 11%가량, 즉 10명 중 1명꼴로 부적격자 판정을 받았다. 경쟁이 치열한 곳은 20%를 넘기도 한다. 지난해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세대 갈등까지 부른 청약제도 청약제도는 세대 갈등까지 야기한다. 지난해 서울 아파트 매매에서 30대 이하가 차지한 비중은 37.3%로 10명 중 4명꼴이다. 청약 시장에서 밀린 청년층이 대거 주택 매입에 나선 결과다. 정부는 2017년 투기지역과 투기과열지구에서 분양하는 전용면적 85m² 이하 물량은 가점제로만 당첨자를 가리도록 했다. 가점에서 불리한 청년층이 소외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후 신혼부부 특별공급의 소득기준을 완화하고, 민간분양에도 생애최초 특별공급 등을 도입하며 달랬다. 이렇게 조건을 바꾸자 청약 대상이 줄게 된 장년층의 불만이 커졌다. 서울시가 작년 8·4대책에서 지분적립형 주택의 100% 추첨제를 발표했을 때도 20년 이상 청약통장에 돈을 넣으며 기다린 50대 이상 무주택자들은 반발했다. 한정된 물량을 일반공급(가점제)과 특별공급으로 가르니 제도가 바뀔 때마다 어느 쪽에서건 불만이 나온다.로또 분양 막을 채권입찰제 필요 청약제도를 둘러싼 잡음은 과도한 차익이 근본 원인이다. 당첨되면 많게는 10억 원의 이득이 생기니 청약자들은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민간택지 분양가 상한제가 도입된 지난해 7월 말을 기점으로 수도권 분양 아파트 1순위 경쟁률에서 세 자리 경쟁률이 속출했다. 당장 집이 필요 없더라도 일단 해보자는 심리가 팽배하다. 실수요자 내 집 마련은 멀어지고 언젠가는 당첨될 거라는 희망고문만 늘어난다. 과도한 시세 차익을 줄이려면 분양가 상한제를 없애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채권입찰제가 현실적 해법이다. 당첨자가 독차지하던 시세 차익을 공공채권으로 흡수하면 시세 차익을 노린 투기적 수요를 막을 수 있고 공공채권을 주택 건립 재원으로 활용하면 주택 공급에도 도움이 된다. 예전에는 분양가상한제 등으로 분양가를 통제하면 채권입찰제는 바늘과 실처럼 같이 갔다. 1990년대 초반 1기 신도시 분양 때 그랬고 참여정부가 판교신도시를 분양할 때도 그랬다. 로또 분양을 그대로 두고 대출 규제를 옥죄면 부모의 도움을 받는 금수저만 웃는 불공정 논란도 계속된다. 한국 가계 자산의 80%가량이 집이다. 새집 배분 방식을 담은 청약제도는 사실상 자산을 배분하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더 공정하고 알기 쉬운 청약제도가 필요한 이유다. 1인 가구가 전체 30%… 가점제 손봐야청약제도는 2007년 청약가점제도가 도입되면서 더 복잡해진 측면이 있다. 가점은 부양가족 수(35점)와 무주택 기간(32점), 청약통장 가입 기간(17점)을 합쳐 84점이 만점이다. 항목은 3개로 많지 않지만 해외 체류 등을 감안한 무주택 기간, 양어머니의 부양가족 포함 여부 등 개인 사정을 따져가며 정확한 계산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 신혼부부, 생애최초, 다자녀 등 특별공급에 소득 기준 같은 별도 조건이 붙으면서 청약제도는 더 복잡해졌다. 투기과열지구 등 규제지역별로 조건을 달리 적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점제는 결혼을 해서 자녀를 둘 이상 두고 부모를 봉양하는 가정에 유리하도록 만들어졌다. 하지만 1인 가구가 615만 가구로 30%에 달하고 30, 40대에도 미혼인 인구가 383만 명에 이를 정도로 시대가 바뀌었다. 김덕례 주택산업연구원 주택정책연구실장은 “달라진 환경에 맞춰 가점제 배점 항목이나 점수 비중을 바꾸지 않고, 특별공급 물량을 늘리면서 제도가 복잡해진 측면이 있다”며 “생애 주기에 맞춘 청약 등 큰 틀에서 단순하고 오래가는 청약제도를 만들어야 할 때”라고 했다. ::채권입찰제::아파트 분양 이후의 경제적 이득을 노리고 투기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청약 때 매입할 채권액수를 적어내고 많은 순서로 당첨자를 결정하는 제도. 매입한 채권을 은행에 할인해서 팔게 되면 수분양자는 그 할인액만큼 비용을 더 지불하게 되는 셈이 된다.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입시학원이 밀집해 있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은 전세 수요가 많다. 임대차 2법이 도입되기 전인 작년 7월까지만 해도, 은마아파트 전용면적 84m²를 기준으로 했을 때 전세가격은 5억 원가량이었다. 지금은 2개의 전세가격이 존재한다. 이미 세 들어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5%(2500만 원)만 올려주면 된다. 하지만 새로 전셋집을 찾아들어가는 사람이라면 10억 원을 내야 한다. 이처럼 전세가격이 급등하면서 전세를 월세로 전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전세를 월세로 전환할 때 적용하는 비율은 현재 2.5%로 주택임대차보호법 시행령에 정해져 있다. 한국은행이 정하는 기준금리(현재 0.5%)에 2%포인트를 더하는 방식으로 나온 것이다. 1억 원의 전세를 월세로 돌린다면 1억 원의 2.5%인 250만 원을 연간 내면 된다. 즉, 월세로는 20만8333원이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기존 세입자가 살던 전셋집에서 전세금 일부를 월세로 돌릴 때 해당하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이 전세로 살던 집에 월세로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시장에서 평균적으로 형성되는 전월세전환율은 법정 전환율과는 차이를 보인다. 한국부동산원 통계에 따르면 시장 전월세전환율은 작년 11월 기준 전국 평균이 5.7%로 나타났다. 1억 원의 전세금이 모자라면 월세 47만5000원이 필요하다. 2억 원이면 95만 원이나 된다. 시장 전월세전환율은 시기는 물론 지역에 따라 다르다. 작년 11월 기준 서울이 4.8%, 경기 5.9%, 인천 6% 수준이다. 수도권(5.2%)보다 지방(6.7%)이 높다. 서울의 한강 북쪽은 5%, 한강 남쪽은 4.6%다. ▷월세를 줄이고 전세금을 높일 때는 시장 전환율로 계산하는 게 세입자에게 유리한데, 이 방식을 적용하도록 국토교통부가 유권해석을 내렸다. 법정 전환율로 계산하면 훨씬 더 많은 환산 전세금이 나와서 세입자에게 불리하다. 다만 등록임대주택에 사는 세입자는 불리한 줄 뻔히 알면서도 법정 전환율을 써야 한다. 등록임대에 적용되는 민간임대특별법의 규정이 그렇게 돼있기 때문이다. ▷전월세살이가 복잡하게 꼬였다. 거슬러 가보면 작년 7월 31일 임대차 2법의 급격한 시행이 진원이다. 정부는 갱신계약을 한 세입자는 2년 더 거주하는 혜택을 입고 있다고 하는데, 현실에는 법과 원칙을 지키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입자를 힘들게 하는 각종 편법이 난무하는 중이다. 더 큰 문제는 2년 뒤다. 추가계약 기간 2년이 끝나면 전세금 인상을 막을 방법이 없다. 이 모든 것이 세입자를 보호한다며 만든 임대차 2법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말 많았던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중대재해처벌법에는 대기업의 경영책임자뿐만 아니라 1000m² 이상의 음식점 목욕탕 PC방 등 대형 다중이용업소 주인을 처벌하는 ‘중대시민재해’ 조항도 담겼다. 처벌 수위가 높은 법이 나왔으니 안전이 담보될 것인가. 2018년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협력업체의 비정규직 신분으로 설비점검에 나섰던 김용균 씨(당시 24세)가 끔찍하게 숨지는 비극이 있었다. 비슷한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이 개정돼 지난해 1월 시행됐다. 처벌이 강화된 개정 산안법은 ‘김용균 법’으로 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산업재해 중 업무상 사고 사망자는 860명(고용노동부 잠정 집계)으로 그 전해 855명보다 늘었다. 처벌만 강화한다고 해서 사고가 곧바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을 징역 1년 이상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했고, 원청 업체에도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했다. 반면 원안에 있던 5인 미만 사업주 처벌은 빠졌다. 50인 이상 기업은 내년부터, 50인 미만은 2024년부터 적용된다. 재계와 노동계는 중대재해법 제정 이후에도 여전히 고쳐야 할 점이 많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사망 최대 요인은 건설 현장 추락 추운 날씨가 잠시 주춤했던 14일 오후, 서울 시내의 한 고층 건물 리모델링 현장. 1층에 들어서니 회색 벽면에 빨간색과 초록색의 LED 불빛이 반짝였다. ‘추락 주의!’ 그 아래엔 안전 포스터까지 붙어 있었다. ‘아빠! 안전을 먼저 생각하세요.’ 웬만한 건설 현장에선 업무 시작과 끝이 안전 교육일 정도로 안전은 제1순위다. 그럼에도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의 절반은 건설 현장에서 나오는 게 현실이다. 2019년 업무상 사고 사망자 855명 중 428명(50.0%)이 건설업 종사자다. 제조업은 206명(24.1%)으로 그 뒤다. 건설 현장에서 가장 많은 사망 원인은 추락(떨어짐)이다. 2019년 건설업 산재 사망자 428명 중 무려 265명(62%)이 추락으로 사망했다. 추락 사고를 예방하려면 발판과 난간을 튼튼하게 만들어 주면 된다. 그래서 각광을 받는 것이 ‘일체형 작업발판(시스템 비계)’이다. 기존에 나무나 강관을 엮어서 사용하던 비계를 규격화해 안전성을 높인 것이다. m²당 240kg도 견딘다. 이날 방문한 리모델링 현장에서도 시스템 비계를 쓰고 있었다. 시스템 비계 위의 근로자 두 사람은 마치 복도에서 일하듯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시스템 비계도 사고에서 자유롭진 못하다. 현장의 비계 설치 전문가는 “물건을 옮긴다고 잠깐 난간을 풀어두거나 시간에 쫓겨 안전통로를 이용하지 않고 임의로 건물과 발판을 오가다가 사고가 난다”고 말했다. 산업안전에는 ‘정상 사고(Normal Accident)’라는 개념이 있다.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복잡한 기술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하는 피할 수 없는 사고를 말한다. 이런 유형의 사고는 예방하기가 매우 어렵다.법 아랑곳 않고 되풀이되는 산업재해 중대재해법이 통과되던 당일 충북 청주시 서원구의 한 폐기물 처리 사업장에서는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근로자 1명이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 끼임 사고는 제조업 근로자가 가장 많이 사망하는 유형의 사고다. 2019년 제조업 사고 사망자 206명 중 66명(32.0%)이 끼임 사고로 사망했다. 12일에는 부산 수영구 광안동의 한 주상복합 신축공사장 9층의 비계에서 창틀 주변 방수작업을 하던 인부 1명이 자재 반입을 위해 난간을 풀어 놓은 곳으로 떨어져 사망했고, 13일에는 경기 파주시 LG디스플레이 공장에서 유해화학물질이 새어 나와 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사망자가 없더라도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이면 중대재해법 적용 대상이다. 2016∼2018년 자료로 ‘중대재해 유형별 현황 분석 연구’를 한 조윤호 한국산업안전연구원 연구위원은 “사고를 예측하거나 완벽하게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사후처벌보다는 안전 관련 시스템 전체를 향상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자연인 처벌은 비합리적” 중대재해법은 안전 조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을 1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하한선이 있는 징역형은 고의가 있는 방화나 상해치사죄에 적용하는 것이어서 헌법상 과잉금지 원칙 위배의 가능성이 있다. 법이 이대로 시행된다면 건설업에서 발생하는 사고 사망자 규모를 감안할 때 수백 명의 기업인이 징역을 살 수도 있다. 경총은 회원사를 상대로 구체적인 보완 입법 방향에 대한 의견을 수렴 중이다. 노동계는 원안보다 처벌 수위가 낮아진 데다가 ‘안전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경영책임자 등에 포함돼 오히려 사업주가 법망을 빠져나갈 우려가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중대재해법의 모태인 영국의 법인과실치사법은 물론 어느 나라도 산업안전을 이유로 개인을 형사처벌을 하는 사례는 없다. 처벌은 산업재해 예방활동에 참여할 동기를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전예방의 한계가 분명하니 법적 다툼으로 해결하려는 요인만 생기는 것이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중대재해법은 자연인 처벌 조항으로 인해 법을 빠져나갈 방안에 더 골몰하게 만들고 있다”며 “법인에 징벌적 과징금을 매기는 것이 사고 예방에는 더 효율적”이라고 제안한다.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연구소장을 지낸 조기홍 대한산업보건협회 직업환경연구실장은 “한국에선 사업주의 한마디가 큰 영향력이 있다는 정서가 반영돼 사업주 처벌이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사후 처벌에 초점이 맞춰져 로펌만 살찌우는 법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라며 “사고 예방의 책임이 큰 정부의 역할을 더 키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방식은 효율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이런 식이라면 군대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군 통수권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5인미만 사업장 근로자도 보호해야” 중대재해처벌법 입법 막바지에 5인 미만 사업주는 처벌 대상에서 빠졌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소상공인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영세사업장의 근로자는 고용과 임금, 복지 등에서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중대재해 보호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차별의 가중은 불가피해졌다. 노동계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5인 미만 사업장은 전체 사업장의 80%를 차지한다”며 “노동조건에서 차별을 받는데 이제 죽음마저도 차별을 당할 처지에 내몰렸다”는 입장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을 처벌이 아닌 사전예방에 초점을 맞추면 해결의 실마리는 보인다. 중기부는 소상공인이 많은 5인 미만 사업주를 가혹한 처벌 대상에 선뜻 포함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재철 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장은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주와 경영책임자가 산재 예방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면서 5인 이하 사업주도 반드시 법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했다. 5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산업재해 전체 피해자는 2019년의 경우 3만2568명으로 전체 10만2305명의 31.83%를 차지했다. 5∼49명 사업체의 피해자 4만7554명(46.48%)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규모다. 5인 미만 사업장이 예외로 남으면 사업체를 4명 이하로만 잘게 쪼개는 편법이 활개를 칠 가능성도 높다. 비정규직으로 2년 이상 고용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토록 했더니 2년이 되기 전에 비정규직 자리마저 빼앗는 일이 발생하듯 안전의 사각지대만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학계에서도 누더기 입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권이 중대재해를 줄일 방안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입법 시한을 못 박으며 여론을 잠재우는 데만 신경을 썼다는 비판도 나온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산재 예방 인프라를 개선하거나 산재예방행정시스템을 혁신할 진정성은 보이지 않고 여론에 밀려 처벌 만능주의에 빠진 법을 만들었다”고 했다.모든 위험 살피는 ‘시스템 안전’ 필요 지금은 산업재해 예방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때이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위험을 제거한다고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 전 원장은 “단순 시설로 대량 생산을 하던 때에는 간단한 안전장치로도 재해 예방 효과가 컸지만 산업환경이 복잡해진 지금은 설계와 생산순서, 예산, 의사결정체계 등 상호간섭을 일으킬 수 있는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 안전’ 개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컨대 크레인 붕괴 사고를 예방하려면 안전교육은 물론이고 재하청의 재하청으로 인한 예산 부족, 공기 단축에 따른 시간 부족, 동료와의 불화 문제는 없는지를 종합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건설 현장에선 아직도 시공 순서를 현장에서 임의로 결정하면서 발생하는 사고도 많다. 다행히 중대재해처벌법은 정부의 책무에 대해선 유예 없이 공포 즉시 시행토록 하고 있다. 사업주 지원 및 종합 예방대책 수립·시행에 관한 것이다. 정부의 산업재해 예방 대책을 눈여겨 지켜볼 일이다. 논란 속에 탄생한 중대재해처벌법은 어찌 됐든 우리 사회에 영향을 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중대재해처벌법이 실제 사고를 줄일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법 제정은 종착지가 아니라 지혜를 모을 출발선이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침실의 소음 기준선은 35dB(데시벨)로 조용한 공원 소리 정도다. 최근 지어진 신축 아파트에서 배경 소음을 측정하면 20dB(나뭇잎 부딪치는 소리)이 나온다고 한다. 창문과 벽면의 소음차단 기술이 진보한 덕분이다. 하지만 구축이든 신축이든 위층이나 아래층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신경을 건드리는 일은 더 잦아졌다. ▷한국환경공단 층간소음이웃사이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상담 건수가 월 6145건으로 2012년 센터 개소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집콕’을 하는 시간이 크게 늘어난 것이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다. 유명 연예인인 이휘재 씨 부부가 최근 층간소음 문제로 이웃에 사과를 한 사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코로나 스트레스가 높아지면서 소음 문제로 다툼이 생기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발판 소리가 시끄럽다”는 등의 이유로 이웃을 칼로 찌르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우리나라에서 층간소음을 둘러싼 갈등이 많은 데는 아파트 구조 탓도 있다. 아파트 대부분은 벽식 구조로 돼 있는데, 위층의 바닥을 아랫집의 벽면들이 지지하는 방식이다. 벽식은 위층 바닥의 진동을 아랫집 여러 벽면을 통해 잘 전달하는 특성이 있다. 보와 기둥으로 지지하는 기둥식은 주상복합 아파트 등에 적용되는데, 진동의 발생과 전달 면적이 작아 층간소음에선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1기 신도시를 지으면서 공사 기간이 짧고 비용도 적게 드는 벽식 구조가 일반화됐다. ▷오래된 아파트의 구조는 당장 바꿀 수 없으니 층간소음을 잘 이해하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층간소음의 73%는 이른바 ‘발망치’다. 아이들 뜀박질이나 성인의 걸음걸이 같은 중량충격소음이 주범이라는 얘기다. 이는 50Hz 이하의 저주파로 콘크리트 벽체를 타고 잘 전달된다. 음악이나 말소리는 고주파여서 상대적으로 멀리 못 간다. 발망치의 경우 매트를 너무 믿어서도 안 된다. 발바닥의 충격을 흡수하지 않고 바닥으로 그대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매트를 깔더라도 슬리퍼를 신는 게 좋다. ▷내년 7월이면 공동주택을 다 짓고 나서 현장에서 바닥충격음을 측정해 부족하면 지자체가 건설사에 보완을 권고하는 사후 확인 제도가 시행된다고 한다. 아파트 바닥을 두껍게 하고, 완충재를 넣으면서 경량충격소음(구슬 굴리는 소리 등)은 어느 정도 잡았다. 하지만 발망치는 여전히 기술적 난제로 남아 있다. 다양한 편의성을 갖춘 아파트가 갈등과 공포의 공간이 되지 않게 하는 데는 이웃 간의 배려가 아직까지는 최선책이라는 말이다.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공항은 있는데 비행기가 제대로 뜨고 내리지 못하고 있다. 12일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김포공항 국제선 부문이 무용지물이 돼 버렸다. 근근이 한두 편씩 뜨던 중국행 비행기가 이날은 한 편도 뜨고 내리지 못한 것이다. 같은 날 알려진 미국 정부의 유럽인 입국제한 조치는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경제 풍파를 앞서 맞고 있는 항공 산업 생태계에 더 혹독한 시련을 줄 것으로 보인다. 정장 차림의 비즈니스맨과 여행객들로 늘 북적이던 인천국제공항은 지금 완전 딴판이 됐다. 발권 카운터가 텅텅 비고, 보안검색을 위해 줄을 서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미주 출발 비행기가 있을 때나 잠깐 사람들이 비쳤다가 이내 고요의 바다에 잠긴다는 것이 공항 관계자의 전언이다. 상점은 물론이고 병원과 호텔, 세관과 경찰 기능까지 갖추고 7만 명이 근무하는 인천공항은 도시의 축소판이다. 작년에 인천공항의 하루 여객 평균은 20만 명이 넘었다. 최근에는 그 수가 1만 명대로까지 떨어졌다. 공항 운영을 위해 상주하는 것으로 알려진 근무자보다 손님이 훨씬 더 적어진,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항공 산업의 핵심인 항공사들의 어려움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국내 주요 항공사들의 직원들이 3명 중 1명꼴로 휴직을 하고 있을 정도다. 날지 못하는 비행기를 둘 곳이 없어 활주로 곳곳에 비행기를 세워두고 있다. 타격을 먼저 받은 항공사들을 위해 정부는 이미 지난달 중순에 3000억 원 규모의 긴급자금 지원책을 발표했다. 비행기를 빌린 비용과 인건비, 정비비 등은 계속 나가는데, 수입이 없으니 적절한 금융 지원 없이 이런 상태가 오래간다면 버텨낼 재간이 없는 상황이다. 항공사와 공항을 둘러싼 어려운 상황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국가들이 겪고 있는 상황의 축소판이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사람들의 교류가 줄면 경제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유심히 봐야 할 것은 바이러스 자체의 위험과 그로 인한 경제적 위험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코로나19 확진자 중 많은 이들의 동선에 인천국제공항이 있었지만 아직 인천국제공항 상주 직원 중에서는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다. 방역을 위한 노력이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는 않더라도 두려움 때문에 공항 경제의 불황은 계속되고 있다. 유동인구가 줄다보니 공항 내 전반적인 소비가 감소한 것이다. 이를 국가적인 차원으로 확대해 보면 방역에 성공하더라도 경제적 피해는 더 오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역 성공이 경제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경제적 피해는 언제쯤 수그러들까. 아마도 경제적 회복의 신호는 코로나19에 대한 치료제나 백신의 개발 소식이 들려야 할 때쯤인 것으로 예상된다. 두려움을 없애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그것들이기 때문이다. 항공사와 공항을 둘러싼 경제적 생태계는 결코 작지 않고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상징성도 작지 않다. 어려움에 처한 항공사들을 대·중소기업 가리지 않고 정부가 지원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방역은 중요하다. 그리고 경제 주체들이 전환점을 맞이하기 전까지 정부가 체력을 유지토록 돕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허진석 산업2부장 jameshur@donga.com}
북위 5도 이상에서 발생하는 태풍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발생하는 순간부터 기상 전문가들의 추적과 예측의 대상이 된다. 태풍이 어느 시기에 어디로 상륙하는지에 따라 피해 지역이 갈리기 때문이다. 센 바람을 몰고 온 13호 태풍 ‘링링’은 남한으로 상륙하지는 않았는데도 28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10일 집계됐다. 당초 상륙 확률이 높았던 수도권으로 상륙했다면 진행 방향의 오른쪽 반경에 있는 지역은 바람 피해뿐만 아니라 폭우 피해도 입었을 것이다. 태풍의 예상 진로에 큰 관심이 쏠리는 것은 불확실성 때문이다. 불확실성은 불안을 야기한다.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은 온통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에 관심이 쏠려 있는 듯하다. 언제 어디부터 적용되는지에 따라 해당 아파트를 분양하는 주체에는 부담금이 벼락처럼 떨어질 수 있고, 아파트를 분양받으려는 사람들도 그 시행 시기와 대상을 알아야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는 아파트 가격을 사실상 정부가 책정해 싸게 공급하도록 하는 정책이다. 아파트 가격이 낮아지면 디플레이션 때 나타나는 현상처럼 공급자들이 상품을 공급할 유인이 줄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파트 공급은 감소할 확률이 크다. 이는 정작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파트를 제때 공급받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달 14일 주택법 시행령에 담겨 입법예고된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는 아직 입법예고 기간이다. 이달 23일까지 의견을 접수하고 국무회의를 거쳐 의결·공포되면 바로 실시된다. 시행이 임박했지만 아직도 언제, 어디부터 적용될지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는 법제처 심사 등을 거쳐 10월 초에 국무회의 상정 후 실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심사 기간이 길어지고 국무회의 상정 자체도 더 늦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당장 10월 초에 작동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2일 국회에서 한 것이 알려지면서 미묘하지만 더 늦춰질 수 있다는 기대가 시장에서 생기는 듯하다.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 실시를 담은 주택법 시행령이 발효되더라도 구체적인 적용 대상과 적용 시기는 국토부가 여는 ‘주거정책심의위원회’에서 결정토록 돼 있다. 그런데 이 회의가 개최되는 요건 등이 규정된 바가 없어 언제 열릴지를 예측하기는 힘들다. 사실상 정책 당국의 의지에 모든 게 달려 있는 셈이다. 서울의 반포주공1단지 재건축 사업은 새 아파트를 짓기 위해 기존 입주민들이 아파트를 비우는 이사 시작 2개월을 남기고 서울행정법원으로부터 ‘관리처분 무효’ 판결을 받아 혼란에 빠져 있다. 현 조합과 이 조합에 반대하는 일부 조합원의 다툼이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정부 부동산 정책의 예측 불가능성 때문이라는 전문가 지적도 나온다. 2017년 정부가 6·13부동산대책과 8·2부동산대책을 연달아 내놓으며 초과이익환수제를 당장 2018년 1월부터 시행한다고 밝히자 조합이 이를 피하기 위해 서두른 것이 다툼의 원인이 됐다는 분석이다. 집값을 잡겠다는 것이 정책 당국이 원하는 바지만 불안이 가중된 시장은 기존 아파트의 신고가 속출로 반응하고 있다. 지어진 지 오래되지 않은 아파트를 중심으로 강남은 물론 강북에서도 신고가 거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청약경쟁률도 수백 대 1이 나오는 등 높아지고 있다.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가 실시되더라도 청약 가점이 모자라 기회를 잡기 힘든 소비자들이 공급 부족이 예상되는 아파트를 미리 사두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집은 국민들의 전 재산과 다름없다. 불안을 가중시키지 않는 예측 가능성이 더 강조돼야 하는 정책이 부동산 정책 아닐까. 허진석 산업2부장 jameshur@donga.com}
당뇨와 고혈압은 노인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만성질환이다. 다리가 불편한 시골 노인이라면 읍내 병원에 약을 타러 가는 것도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불편을 앞으로 강원도에 사는 노인들은 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중소벤처기업부가 규제자유특구를 최근 발표했는데, 강원도가 당뇨와 고혈압에 한해서 제한적인 원격진료 허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처음 진단은 병원에 가서 받고, 재진은 환자의 집에 간호사가 있을 때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환자들의 편익이 증대되는 방향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이번 규제자유특구 발표 때 원격의료가 기술적으로는 얼마나 비상식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지가 새삼 관심을 끌었다. 현재는 원격모니터링만 가능한 상황이다. 혈당이나 혈압을 환자가 집에서 기기를 이용해 측정하면 의사가 병원에서 그 측정값만 지켜볼 수 있다. 측정 상태를 보고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요즘 식습관이 어떤지, 약은 제대로 복용하고 있는지 등을 물으면 불법이 될 수 있다. 세계적인 통신망이 깔린 나라에서 데이터를 주고받으며 동시에 통화를 하는 데 아무런 애로가 없는데도 그 사용을 막아 놓은 것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증기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마차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리지 못하도록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증기자동차를 관리했다는 적기(Red Flag)법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규제는 사전적으로는 ‘규칙이나 규정에 의해 일정한 한도를 정하거나 한도를 넘지 못하게 막는 것’을 의미한다. 등장 속도를 빨리하는 신기술과 사회적 안정성을 전제로 하는 규칙(법)의 충돌은 더 잦아질 수밖에 없다. 최근 정부가 택시업계와 모빌리티업계 간의 문제를 정리한 ‘택시-모빌리티 상생 방안’에서도 기술과 규칙의 충돌이 있다. 모빌리티업계는 기존 법 제도 안에서 소비자들에게 승합차를 초단기로 렌트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개척한 측면이 있다. 휴대전화를 통해 실시간으로 위치 파악이 가능해지고, 역시 실시간으로 결제가 가능해졌기에 그런 사업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운송 서비스라는 정책당국의 해석에 따라 모빌리티업계는 사업을 다시 설계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신기술과 기존 규칙이 충돌할 때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선(善)이 될 것인가. 발표된 정책이 복잡해 보이고 이해관계자의 목소리가 클수록 더 차분하게 장기적 안목을 갖고 대해야 한다. 이때 요긴한 질문이 ‘누가 이득을 보는가’이다. 정책의 수혜 대상은 국민이기에 국민의 편익을 최우선시하는 결정이 나와야 한다. 좋은 규제는 건전한 경쟁을 낳고, 나쁜 규제는 독과점을 유발한다는 얘기도 공동체 구성원의 편익을 염두에 두고 나온 말이다. 강원도에서 원격의료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이 발표된 뒤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원격의료가 일반화된다면 대형 의료기관으로 환자가 몰리고, 원격의료에 필요한 기기들을 만드는 의료 대기업들의 배만 불릴 수 있다는 우려다. 택시-모빌리티 상생 방안이 발표되고 나서는 택시업계는 환영했고, 모빌리티업계는 신산업의 싹을 죽였다는 반응들이 나왔다. 두 사안 모두 국민의 편익 측면에서 고려하면 최선의 선택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선택한 방향으로 가는 길에 예상되는 이해 상충이나 안전, 재산권 침해 등은 정부가 나서서 보완해야 할 문제일 뿐이다. 기술은 시간과 공간의 축약을 의미한다.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고 그만큼 새 사업의 출현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신산업의 등장을 국민 편익과 공동체의 풍요로 이끌어야 하는 것은 정부의 막중한 임무다. 그게 ‘진보’다.허진석 산업2부장 jameshur@donga.com}
“46년을 일궈 온 회사가 올해 처음으로 2개 분기 연속 적자를 냈습니다.” 중소기업 사장 A 씨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좌절도 배어 있는 듯했다. 1998년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던 시기도 이겨내며 적자를 면해 왔는데, 지금은 더 힘들다고 했다. 그는 자사 최저임금 대상자에게 지급되는 총지급액을 계산한 종이를 한 장 보여줬다. 시급은 8350원이지만 여기에 유급 휴무일수와 상여금, 4대 보험, 퇴직금, 기타 수당을 포함한 기업의 시간당 부담금은 약 1만680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최저임금이 지난 2년간 29%나 오르고, 적용 시간도 길어지면서 경제 현장에선 피로감이 가중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A 씨는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신입 직원뿐만 아니라 기존 직원들의 월급도 조금씩 올려줘야 했다. 그 결과 2년 전 매년 50억 원 가까이 지급되던 임금 총액이 지금은 55억 원으로 5억 원이나 늘어났다. 2년 전 회사의 연간 이익은 5억∼10억 원 수준이었다. 2개 분기 연속 적자의 원인이 최저임금 인상 때문만은 아니지만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원가비 등 다른 비용 부담도 늘었고, 불경기로 매출이 시원찮아진 측면도 적자의 원인이다. A 씨는 “인건비 부담은 앞으로도 매년 져야 하는데 생산성은 그만큼 빨리 늘지 않아 평생 처음 ‘사업을 접어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A 씨의 물건을 매입하는 곳도 여유가 없는 중소기업이어서 납품 가격을 크게 올리기도 힘든 여건이다. A 씨 주변에는 사업 포기를 고민하는 사장이 많다. 그는 “요즘은 지인들이 모였을 때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하소연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사업을 접을 수 있을까’를 화제에 올린다”고 전했다. 누군가 사업을 접었다고 하면 박수를 치며 축하까지 해 주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A 씨는 “올해 적자가 나면 매년 내던 수억 원의 세금을 한 푼도 못 내게 될 것 같다. 만약 내가 사업을 접으면 우리 직원들 일자리는 어떻게 될지가 걱정이다”고 했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은 자영업자를 ‘고용 없는 사업자’로도 내몰고 있다. 경기 남양주시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B 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보조직원을 두고 있었지만 지금은 인건비 부담 탓에 ‘1인숍’으로만 운영 중이다. 올해 초 잠깐 직원을 뒀다가 마음의 상처만 입었다. 최저임금과 주휴수당을 맞춰주지 않아도 되니 기술만 가르쳐 달라고 했던 직원이 한 달만 일하고 관두더니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한 것이다. B 씨는 최저임금과 주휴수당을 다 물어주고 벌금까지 내야 했다. 그는 “적게 일하고 적게 버는 게 낫지 이제 다신 직원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기업의 한 최고경영자(CEO)는 지나간 일이니 해주는 말이라며 대규모 공장을 짓다가 자동화로 전환한 사례를 들려줬다. 그는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올리는 정책을 보면서 경영 리스크를 줄여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사람 대신 자동화 설비를 늘렸다”고 했다. 최저임금은 한번 오르면 내리기 힘든 데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매년 어떤 부담을 지게 될지 불확실한 반면 자동화 설비에 드는 비용은 예측이 가능해 경영에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는 논리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일자리’는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은 지나간 이슈가 아니다. 한번 결정된 최저임금이 1년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위원회가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을 위해 고심 중이다. 앞서 열거된 현상에서 보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익은 힘이 세다는 사실이 그 결정 과정에 ‘정상적으로’ 반영돼야 할 것이다.허진석 산업2부장 jameshur@donga.com}
일제강점기 사재를 털어 국보급 문화재들을 지켜낸 간송 전형필(1906∼1962)은 시장에서 잘 알려진 ‘큰손’이었다. 가치 있는 물건은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매입을 했기에 좋은 물건이 시장에 나오면 골동품상들은 간송에게 먼저 가져갔다. 골동품상 박형수가 1933년 친일파 송병준의 집에서 변소 가는 길에 머슴이 군불 때려고 쌓아둔 더미에서 발견한 초록색 비단보에 쌓였던 화첩이 간송에게 간 것도 그의 명성과 네트워크 덕분이었다. 한발만 늦었어도 땔감으로 사라질 뻔했던 화첩은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 모음집이었다.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보물 제1949호)’으로 지금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전시되고 있다. 큰손의 명성과 네트워크, 미래 가치를 보는 눈이 똑같이 작동하는 곳이 벤처기업 투자 시장이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가 투자에 성공하는 것도 큰손으로서의 덕이 적지 않다. 골동품 시장에서 ‘누가 소유했던 물건’이었냐가 골동품의 가치를 올리듯, 그의 투자 자체가 투자받은 기업의 가치까지 올리고 있다. 지금 국회에 계류 중인 공정거래법 전면 개편안에는 ‘벤처지주회사 설립 요건을 완화’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큰손인 대기업을 벤처투자 시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안이다. 자산총액 요건을 5000억 원에서 300억 원으로 크게 줄이려는 계획이니 대기업의 참여가 늘어날 것처럼 보이지만, 뜯어보면 이 조항은 작동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펀드 조성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시장의 투자 형태는 여러 기관이 돈을 모아 투자를 하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펀드 조성을 금지하고 대기업이 자기의 자본금만으로 투자를 하라고 하면 최소 7∼8년 동안 매년 수십억 원의 손실을 감내해야 한다. 손실이 나는 기업에 계속 돈을 쏟아 붓는 대표이사는 배임죄로 걸려들기 십상이다. 감옥 갈 위험을 감수하면서 실패 확률이 높아 이름이 ‘벤처(venture·모험)’인 기업에 돈을 대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벤처지주회사 제도가 2001년에 만들어졌지만 지금 단 1개의 벤처지주회사도 없는 배경이기도 하다. 벤처기업뿐만 아니라 여러 여당 의원과 중소벤처기업부 등이 원한 것은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이었다. 시장의 큰손인 대기업이 자신들의 사업전략과 연관된 벤처기업에 바로 투자를 하고, 대기업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벤처기업을 키우는 형태다.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할 가능성이 큰 방안이다. 그러나 금산분리의 벽을 넘지 못하고 벤처지주회사 요건 완화로만 갈음하려는 중이다. 금산분리의 취지가 산업자본이 일반 예금자의 돈으로 자기 사업을 키우는 것을 막자는 것인데, 벤처기업의 가치를 알아보는 기업이 몇몇 투자 주체의 돈을 모아 투자하는 것까지 막아야 할지는 사회적 합의를 거쳐 다시 논의해볼 만한 사안이다. 가치 있는 골동품처럼 양질의 벤처기업이나 스타트업은 미래에 든든한 일자리를 만들어낼 ‘국보급 자산’이기 때문이다. 시장에 큰손이 많이 들어오면 벤처기업은 비싼 값에 팔려 젊은 스타 창업가가 나올 확률도 높아진다. 창업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지금처럼 일일이 신경을 써가며 정책을 만드는 수고의 상당 부분이 필요 없을 수 있다. 이왕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글로벌 기업의 명성과 네트워크를 애써 버릴 이유는 없다. 산업의 발전과 기업들의 경쟁 상황을 감안할 때 적절한 때에 제도적 발판을 마련해주는 일이 어느 시대보다 중요해졌다. 우리의 글로벌 기업들은 해외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에만 투자를 하고, 청년 창업가들은 외국에서 먼저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한발만 늦어도 국보급 자산들이 땔감으로 사라질 수 있다. 허진석 산업2부장 jameshur@donga.com}
심재돈 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2부 부장검사(51·사진·사법연수원 24기·사시 34회)가 최근 서울 서초구에 사무실을 열고 개업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경기 김포 출신으로 인천 선인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심 변호사는 1995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서부지원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창원지검과 인천지검, 청주지검, 서울지검(특수부) 등을 거쳐 대검찰청 중수부 연구관, 수원지방검찰청 부부장 검사, 대전지방검찰청 공주지청장, 대검찰청 첨단범죄수사과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3부 부장검사 등으로 활약했다. 2013년부터 최근까지 김앤장법률사무소 재직 기간에는 주로 기업형사 사건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