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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둥이 아빠’들로서 좌충우돌 속에서도 가장 진실한 모습을 담아내려고 고군분투 중이죠. 예능 ‘아빠는 꽃중년’은 결혼을 한 분들, 하지 않은 분들 모두에게 위로가 될 겁니다.”(배우 안재욱) 18일 오후 9시 반에 첫 방송 되는 채널A 신규 예능 프로그램 ‘아빠는 꽃중년’ 제작발표회가 방송 전날인 17일 온라인으로 열렸다. 1990년대 연예계 ‘대표 오빠’였던 신성우, 안재욱, 김원준이 각각 두 자녀와 함께 출연한다. 평균 나이 53.7세로, 이제 꽃중년이 된 아빠들이 평균 4.8세인 아이들을 키우며 겪는 육아의 행복과 어려움을 진솔하게 보여줄 예정이다. 진행은 ‘선배 아빠’이자 각각 세 살배기 늦둥이를 키우고 있는 배우 김용건과 방송인 김구라가 맡는다. 여러 방송사로부터 육아 예능 출연 제안을 수차례 받을 때마다 매번 거절했다는 이들이 ‘아빠는 꽃중년’ 출연을 최종 선택한 이유는 뭘까. 이날 제작발표회에서 세 아빠는 “육아를 통해 커가는 꽃중년 아빠들의 성장 일기라는 점에 끌렸다”고 입을 모았다. 신성우는 “나를 냉정하게 되돌아보며 고칠 점을 찾을 수 있겠다고 봤다”면서 “편찮으신 어머니께서 화면으로나마 아이들을 지켜보길 바라는 마음도 컸다”고 했다. 김구라는 “단순 육아 예능이었다면 나이 많은 아빠들의 ‘짠함’만 비쳐 거절했을 것”이라며 “나 역시 이 프로그램을 통해 배우는 점이 많다. 고군분투하는 세 아빠를 보며 ‘내가 여전히 부족한 사람이구나’ 반성한다”고 고백했다. 김구라는 김원준을 ‘육아 고수’로 꼽았다. 실제로 김원준은 방송에서 18개월 된 둘째 예진이의 기저귀를 자주 갈아주는 등 육아로 동분서주하면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 ‘평정심’을 보여준다. 꽃미남 로커 출신 신성우는 ‘독박 육아’를 하던 중 첫째 태오에게 꾸지람하는 자신의 모습을 모니터링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는 “예전에는 첫째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다 잊어버리고 다시 복습 중”이라며 “첫째와 차를 타면 록 음악을 함께 들으면서 마음을 나눈다”고 말했다. 이들 세 아빠의 아내는 모두 워킹맘이다. 육아 보조가 아닌 주역으로서의 모습도 보여준다. 검사 아내를 둔 김원준은 “(저는) 육아가 적성에 잘 맞다. 하지만 ‘워킹 대디’이기도 해서 힘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뮤지컬 배우 최현주와 결혼한 안재욱은 “내가 아이를 본다는 사실을 주위 사람들도 아직 못 믿는다. 집에서는 어떤 생활을 하는지 방송을 통해 확인받겠다”며 웃었다. 늦깎이 아빠들이란 공통점 때문에 깊은 연대감도 생긴다고 했다. 안재욱은 “다른 친구들과 달리 50대가 넘어 어린아이들을 키우는지라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3박 4일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구라는 “곧 군대에 가는 동현이를 키워 본 경험자이자 ‘아직은 아빠보다 뽀로로를 좋아하는’ 늦둥이 딸을 가진 아빠로서 관심사가 잘 맞다”고 했다. 2021년 75세의 나이에 늦둥이 아들은 본 배우 김용건은 스케줄상 제작발표회에 참여하진 못했지만 “적은 나이도 아닌데 현역으로 뛰어서 감사하다”는 소감을 전했다. 김용건은 ‘인생 선배’이자 같은 처지의 아빠로서 꽃중년 아빠들에게 세심한 공감과 조언을 건넬 예정이다. 프로그램 연출은 채널A 예능 프로그램 ‘하트시그널’ 등으로 호흡을 맞춘 박철환, 한지인 PD가 맡았다. 박 PD는 “중년에 ‘인생 2회차’를 시작한 그 열정이 어디서 시작됐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계기가 됐다”며 “인생 마지막까지 행복한 삶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다섯 사람을 보며 시청자들도 ‘꽃 같은 인생’에 대해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빠는 꽃중년’은 매주 목요일 오후 9시 반에 방송된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12일 서울 중구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연극 ‘스카팽’의 막이 오르고 첫 대사가 들렸지만 극장은 깜깜해질 기미가 없이 훤했다. 관객들은 거실에서 TV를 보는 듯 옆 사람과 웃으며 속삭였다. 몰입에 자칫 방해될 정도로 너무 큰 손뼉과 환호도 터졌다. 공연 중간 밖으로 나가 스트레칭을 하고 오는 사람까지. 하지만 이를 제지하는 이도, 불만을 토로하는 이도 없었다. 이번 시즌 ‘스카팽’은 ‘열린 객석’으로 운영되며 이를 사전에 공지했기 때문. 이에 따라 극 중간에 입장, 퇴장도, 일정 소음 발생 등도 허용됐다. 관객으로서는 보다 ‘과감한 관람 모드’가 가능해진 것. 아홉 살 자녀와 극장을 찾은 김모 씨(43)는 “평소 공연을 볼 때 아이가 일부 장면에서 화들짝 놀라거나 모르는 내용을 질문할 때면 주변 관객들 눈치부터 살피곤 했다. 오늘은 부담을 내려놓고 공연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직장인 최모 씨(26)는 “평소 ‘남들 웃을 때만 웃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는데 편안한 분위기에서 실컷 웃으며 몰입했다”고 말했다. 공연계에서 최근 사진 촬영, 음식물 섭취 등 소위 ‘관크’(관객 크리티컬의 줄임말·타인의 관람을 방해하는 행위) 논란을 사며 금기시되던 것들에 도전하는 작품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이달 15∼23일 서울 용산구 아쉬랩하이에서 공연되는 배우 성수연, 양대은 주연의 연극 ‘타임스퀘어’는 관객 몰입을 떨어뜨리는 행위 50여 가지를 폭넓게 허용한다. 반려동물 동반부터 스마트폰 사용, 간단한 간식 및 주류 섭취까지 가능하다. 심지어 ‘관크’로 규정돼 금하던 행동들을 관객 참여와 소통을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공연도 있다. 지난달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열린 다원 예술 ‘메이크 홈, 스위트 홈’은 공연 중 각자 스마트폰을 통한 투표를 진행해 투표 결과에 따라 극 전개가 실시간으로 바뀌도록 했다. 객석 의자는 전부 없앴다. 관객은 마치 전시회를 보듯 극장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퍼포머들을 발치에서 구경하고 사진과 영상으로 남겼다. 이러한 공연들은 젊은 연출가들을 중심으로 엄숙한 극장 문화에 변화를 주려는 움직임의 결과다. ‘메이크 홈, 스위트 홈’의 변재하 연출가는 “관객을 통제하는 기존 공연계 관람 분위기에 거부감을 느꼈다. 안전 등 이유로 꼭 제한해야 할 행동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자율성에 맡기고 싶었다”고 했다. 자유로운 관람 분위기를 통해 극장이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려는 의도도 크다. 김정연 국립극단 PD는 “집중력이 비교적 흐트러지기 쉬운 어린이, 노인 관객이나 외부 환경에 민감한 공황장애, 자폐스펙트럼 등을 지닌 관객 등에게 경직된 관람 문화는 높은 장벽”이라며 “누구나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공연의 기존 문법을 깨는 파격적 시도가 창작자, 출연진에게 방해가 되진 않을까. ‘스카팽’의 임도완 연출가는 “지난 시즌과 달리 공연 시작부터 관객이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 배우들도 더욱 열정적으로 연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해외 연극에선 배우가 금기시된 행동을 직접 하며 자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4∼7일 서울 강동구 강동아트센터에서 공연한 미국인 연출가 제프 소벨이 주연까지 맡은 연극 ‘푸드’는 웨이터 복장의 배우가 대형 식탁에 둘러앉은 관객에게 말을 걸고 와인을 따르며 주문을 받거나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치워 화제가 됐다. 이은경 연극평론가는 “기존 규범을 전복하려는 젊은 창작자들과 수동적 관람 방식에서 벗어나 공연의 일부가 되려는 젊은 관객의 수요가 맞아떨어졌다”며 “당분간 자유로운 관극 문화는 더욱 활성화될 것”이라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나이 50쯤 되면 인생이 자칫 지루해지기 마련이에요. 그때 ‘짜잔’ 하고 갑자기 나타난 아이가 제 느슨해진 삶에 다시 불을 붙였죠. ‘아빠는 꽃중년’은 단지 아이의 성장 일기가 아닌, 늦깎이 아빠들의 성장 일기입니다.” 18일 첫 방영을 앞둔 채널A 예능 프로그램 ‘아빠는 꽃중년’에서 일곱 살, 두 살 아들과 함께 출연하는 가수 신성우(57)는 이렇게 출연 소감을 밝혔다. 이 프로그램에는 배우 안재욱(53), 가수 김원준(51)도 자신의 자녀들과 함께 나온다. 이들 ‘늦깎이 아빠’들의 평균 연령은 53.7세. 이들은 평균 4.8세인 자녀들을 키우며 겪는 육아의 기쁨과 어려움을 진솔하게 공개한다. 13일 서울 마포구 동아디지털미디어센터(DDMC)에서 만난 세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 유쾌한 수다를 풀어냈다. 1990년대 연예계를 사로잡았던 ‘오빠’들은 이제 ‘반백 살 아빠’가 된 일상을 공개한다. ‘테리우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꽃미남 로커로 활약했던 신성우는 이제 첫째 태오에게 아기자기한 동요를 불러준다. 안재욱은 두 아이에게 삼시 세끼 밥을 지어 먹이느라 초췌해졌고 식탁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김원준 또한 두 자매 육아로 체력 방전이다. 이들은 스타이기 전에 ‘아빠’다. 안재욱은 “화려한 무대에 서는 사람일지언정 아빠로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여느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김원준은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러운 모습)도 아니고 그냥 ‘안꾸’ 방송이에요. 부스스한 머리로 아이 목욕을 시키던 중 갑자기 둘째 예진이가 제게 기습 뽀뽀를 하는 거예요. 평소 안 그러는 앤데… 당황한 기색과 마냥 행복해하는 제 얼굴이 그대로 카메라에 찍혔죠.” 언제까지나 스타의 환상이 깨지지 않기를 원하는 팬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망가질 결심’을 한 이유는 무얼까. 세 아빠는 “아이와의 소중한 추억을 가장 예쁘게 남기고 싶었다”고 입을 모았다. 김원준은 “10년, 20년이 흘러 아이들과 함께 돌이켜볼 수 있는 기록이 돼줄 것 같았다”며 “특히 총각 때부터 가까이 지내던 형들이 출연한다기에 그저 자석처럼 끌렸다”고 했다. 신성우는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 위주로 담긴 기존 육아 예능과 달리 부모, 자식 간 발전해나가는 관계에 대한 비망록이라 좋았다”고 덧붙였다. ‘선비 아빠(신성우), 투덜이 아빠(안재욱), 엄마 같은 아빠(김원준).’ 세 사람이 말한 각자의 아빠 캐릭터다. 슬하에 둔 아이들의 성격이 각기 다르듯, 나이는 비슷해도 육아 스타일은 천지 차이다. 안재욱에겐 여덟 살 큰딸과 5년 터울인 아들이, 김원준에겐 일곱 살, 세 살 난 딸 둘이 있다. 김원준은 “성우 형이 자유로운 영혼인 줄 알았더니 아이를 키울 땐 예의범절을 중시하기에 놀랐다. 재욱이 형은 까칠하면서도 다정한 아빠”라며 웃었다. “부모로서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그간 고민의 연속이었죠. 이번 촬영을 통해 서로의 모습을 보며 정답은 없음을 깨달았어요. 시청자들도 방송을 보며 ‘표현하는 방식은 달라도 아이와 닿는 마음만은 같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안재욱) 이들은 ‘육퇴(육아 퇴근)’ 후 모여 속풀이도 나눈다. 진행자 김용건, 김구라가 ‘선배 아빠’로서 조언도 건넨다. 안재욱은 “김구라 씨도 3년 전 늦둥이를 얻어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고 했다. 신성우는 “김용건 선생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자 인생 선생님이다. 세심한 조언은 브라운관을 넘어 울림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아빠는 꽃중년’은 매주 목요일 오후 9시 30분에 방송된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잘 먹어야 힘을 쓴다’는 말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체력, 골밀도가 실력과 직결되는 스포츠계에서 여성 선수들은 ‘잘 먹지’ 못하고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의 연구에 따르면 여자 대학 운동선수의 35%가 거식증의 위험에 처해 있다. 남자 선수의 비율(10%)을 3배 이상 뛰어넘는다. 이상적인 여성 체형과 효과적 경기 체중에 대한 이중 압박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내용의 책은 달리기 선수 출신인 저자가 27년간 스포츠계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썼다. 전미 선수권대회와 세계육상연맹 다이아몬드리그 대회에서 각각 두 차례 우승을 거머쥔 여성 챔피언이다. “스포츠계는 여성의 생리적 경험을 평가절하하거나 잘못된 우선순위를 강조해 평생에 걸친 해를 끼친다”는 주장을 구체적 일화와 근거로 탄탄히 펼쳐낸다. 여성 선수로서 자기 신체와 끊임없이 불화했던 과거를 가감 없이 담아냈다. 저자는 사춘기 신체 변화가 시작되자 가슴이 커져 기록이 나빠지지 않도록 체중을 엄격히 통제했다. 하지만 중학교 댄스파티용 드레스를 고르러 가서는 “내 가슴이 남자처럼 납작하다고 놀리는 친구들”로 인해 자신의 몸을 부정하는 혼란을 겪는다. 구조의 불합리성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인용해 독자를 설득한다. 책은 “2016년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미국 여학생은 14세에 또래 남학생의 두 배에 달하는 비율로 스포츠를 그만두지만 이들을 위한 여성생리학 교육, 연구 및 지원은 거의 없다”고 비판한다. 이어 “오늘날 여성은 미국 운동선수의 40%를 차지하지만 그들에게 돌아가는 후원금은 전체 금액의 1% 미만”이라고 지적한다. 단지 여성 선수만을 위한 조언서가 아니다. “남성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에서 성장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라는 저자의 설명처럼, ‘주류 집단이 가진 것을 얻는 방식’으로 세상의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 발버둥 치는 모든 이들을 격려한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평생 했던 그 어떤 작품보다 고통스러웠어요.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걱정하느라 배고픔마저 잊고 하루가 다르게 야위었을 정도로요.” 최근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 ‘펜트하우스’ 등으로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은 배우 하도권 씨(47·사진)는 ‘그레이트 코멧’의 주인공 피에르 역으로 8년 만에 뮤지컬 무대에 복귀한 뒤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했다. 1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2016년 뮤지컬 ‘왕의 나라’ 이후 오랜만에 관객과 만나는 복귀작이기에 가장 좋은 연기를 보여드리고 싶다는 부담이 컸다”고 했다. ‘그레이트 코멧’은 1812년 나폴레옹이 침공하기 직전, 삶에 대한 회의감 속에 방황하는 러시아 귀족 피에르가 여인 나타샤에게 연민을 느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를 재창작한 뮤지컬로 2017년 제71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무대디자인상 등 2개 부문을 수상했다. 피에르 역은 하 씨와 케이윌, 김주택이, 나타샤 역은 이지수, 유연정, 박수빈이 돌아가며 연기한다. 총 27곡의 넘버는 일렉트로닉, 록, 힙합 등 장르를 넘나들며 관객 귀를 즐겁게 한다. 서울대 성악과 출신인 그는 “클래식을 전공해서인지 음악을 들으면 선율과 박자를 예측하게 된다. 그런데 ‘그레이트 코멧’의 넘버들은 그 예측이 전부 빗나갈 만큼 신선하고 세련되다”고 했다. 출연자들은 넘버를 가창하는 동시에 악기 연주까지 소화한다. 하 씨는 총 8곡의 넘버에서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그에게 악기 연습은 그야말로 울분의 연속이었다. “하루 8시간씩 악기를 붙들고 있었어요. 특히 아코디언은 생소했기 때문에 오후 10시 공연 연습이 끝나면 레슨 선생님과 새벽 3∼4시까지 연습했죠. 대학 입시 때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하 씨는 2004년 뮤지컬 ‘미녀와 야수’로 연기 생활을 시작해 뮤지컬 ‘엘리자벳’ ‘레미제라블’ 등을 거친 베테랑 배우다. 그는 “20년간 맡은 배역 중 피에르는 나와 가장 많이 닮아 있다. 무대에서 자주 울컥하지만 남은 넘버를 소화하기 위해 감정을 다잡는다”며 “피에르가 느끼는 결핍,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과 사랑을 좇으려는 마음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레이트 코멧’은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6월 16일까지 공연된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죽음 뒤의 세상은 증명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 인간의 신체 움직임을 통해 사후 세계의 모습을 조명한 신작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국립무용단이 이달 25∼27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올리는 ‘사자의 서’가 바로 그 작품이다. 작품은 죽음 후 망자가 겪는 49일간의 여정을 ‘의식의 바다’ ‘상념의 바다’ ‘고요의 바다’ 등 3장에 걸쳐 풀어낸다. 지난해 4월 취임한 김종덕 예술감독이 불교 경전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 영감을 받아 처음 무대에 올리는 작품. 주역인 망자 역을 맡은 무용수 조용진 씨(39)와 최호종 씨(30)를 8일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삶과 죽음을 표현하는 것은 베테랑 무용수에게도 쉽지 않은 일. 30대로 ‘한창’ 때인 무용수들이 한바탕 죽음의 춤사위를 추고 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최 씨는 “삶에 대한 미련을 하염없이 표현하고 나면 후련함을 느낀다”며 “춤이 싫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기준에 못 미치는 나를 매일 후회하며 살기 때문인 듯하다”고 했다. 햇수로 28년째 춤을 추고 있는 조 씨는 이렇게 답했다. “제 춤에 대해 다시금 반성하게 됐어요. 내가 더 나은 무용수가 됐는지 연말마다 반추하곤 하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 삶과 죽음을 오가며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졌죠. 이처럼 극장을 찾은 관객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되돌아볼 수 있길 바랍니다.” 조 씨는 1장에서 죽음을 맞은 망자를, 이어 최 씨가 삶을 돌아보는 망자를 연기한다. 두 망자의 온도 차는 극명하다. 최 씨는 “불같이 살수록 죽음의 그림자가 더 짙어진다고 봤다”며 “생전 가장 열정적이던 순간을 2장에서 파노라마처럼 표현해 삶과 죽음을 대비시키려 한다”고 했다. 반대로 조 씨는 부정과 분노, 타협이 응축돼 끝내 차분해진 상태를 표현한다. 그는 “비교적 느리고 힘 있는 동작으로 죽음 앞 모든 걸 내려놓은 마음을 담아낼 예정”이라고 했다. 무대 효과도 주목할 만하다. 전통 무용에 기반한 작품이지만 역동적 춤사위, 미니멀한 무대 등으로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새하얀 무대는 조각조각 나뉘고 회전하며 이승과 저승이 중첩된 공간을 연출한다. 그 위에서 빠르고 역동적으로 이뤄지는 남성 군무 ‘일상’은 두 사람이 꼽은 가장 현대적인 장면이다. 조 씨는 “한국무용은 몸을 감아내는 동작이 많아 힘을 표출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전쟁 같은 일상을 역동감 있게 표현한 군무에선 엄청난 힘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예술감독이 “마치 도화지 같다”고 평한 두 사람은 창작 과정에 참여해 자신만의 색깔도 더했다. 최 씨는 “어렸을 땐 느리게 가던 시간이 나이가 들면서 순식간에 지나간다고 느낀다”며 “망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과정에서 그 변화의 흐름을 춤의 강약 및 완급 조절로 표현하려 한다”고 했다. 조 씨는 “1장과 2장이 동일 인물의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호종 씨와 나의 동작 일부가 겹치게끔 했다”고 했다. 조 씨와 최 씨는 국립무용단에 각각 2011년, 2017년 입단했다. 최 씨는 늦깎이로 무용을 시작한 고교 3학년 시절을 회상하며 “(용진)선배가 출연한 무용단 공연을 보고 무용수라는 꿈을 꾸게 됐다”고 했다. 멋쩍은 듯 손사래를 치던 조 씨는 “호종 씨의 집요함을 존경한다. 동작 하나를 백 번, 천 번 반복해 완성해낸다”며 후배를 치켜세웠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광클’해서 어렵게 예매했는데 공연이 갑자기 연기되니 허탈하네요.” 최근 국립극단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댓글창엔 관객들의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국립극단의 연극 ‘천 개의 파랑’이 개막 하루 전에 공연이 돌연 연기됐기 때문. 이 공연은 국립극단 창단 74년 역사상 처음으로 로봇 배우가 무대에 오르게 돼 큰 화제였다. 예매 경쟁도 치열해 예매 시작 하루 만에 전 회차, 전석이 매진됐었다. 극단이 공연 연기 결정을 내린 것은 무대에 서는 로봇 배우 ‘콜리’가 막바지 리허설 도중에 전원이 꺼져버렸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회로 설계상의 문제가 발견됐고, 재점검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이에 당초 4일이었던 개막일이 16일로 연기된 것. 회로 재점검을 마친 ‘콜리’는 10일부터 이어지는 리허설에 다시 나설 예정이다. 공연이 재조정된 일정대로 진행될지는 아직 불투명한 상황이다. 최근 인공지능(AI) 열풍은 공연계에도 ‘로봇 공연’이란 새바람을 불러왔다. 지난해 6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한국생산기술연구원과 손잡고 국내 첫 로봇 지휘자 ‘에버6’를 선보인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공연은 티켓 1200여 장이 매진되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번 ‘천개의 파랑’ 역시 젊은 관객층을 중심으로 티켓 쟁탈전이 뜨거웠다. 새로운 형식의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큰 것이다. 하지만 ‘천 개의 파랑’ 공연 과정을 들여다보면 상대적으로 준비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느낌도 든다. 앞서 국립국악관현악은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에버6를 지휘자 역할에 맞게 1년 가까이 연구 및 개조해 무대에 세웠다. 하지만 국립극단은 지난해 12월 로봇 개발 업체와 계약을 맺은 뒤 지난달 중순에야 로봇 제작을 완료했다. 티켓은 지난달 초순부터 판매되기 시작했으니 로봇도 완성하지 않고 ‘로봇 공연’을 하겠다고 나선 셈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로봇 등이 접목된 ‘기술 융합 공연’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에 제작이나 공연 시스템을 보다 세밀히 마련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동욱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수석연구원은 “공연 중 로봇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처할 상황별 가이드라인이 미비하다. 단 며칠 주어지는 리허설만으로는 현장을 파악하기엔 역부족”이라고 말했다. 엄현희 연극평론가는 “작품을 본격 제작하기 전에 해외 공연계처럼 ‘기술 랩(lab)’을 진행하는 등 수년간 단계별로 개발해야 같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가끔씩 세상이 정한 규격에 미달인 내가 미울 때가 있다.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은 그런 관객들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그 누구도 자기 존재를 의심하며 살면 안 된다”고 따뜻하게 다그친다. 우리는 못 된 존재가 아니라, 단지 복잡하고 다채로운 존재일 뿐이란 이유에서다.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이 아시아 초연됐다. ‘디어…’는 2017년 제71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한 작품이다. 불안장애를 앓고 있는 외톨이 소년 에반 핸슨이 어두운 삶에서 벗어나고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거짓말을 저지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에반 역은 배우 김성규, 박강현, 임규형이, 홀로 에반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아들의 ‘정상화’를 바라는 엄마 하이디 역은 김선영, 신영숙이 번갈아 가며 연기한다. 총 15곡의 넘버는 주인공의 감정선과 맥락을 섬세하게 반영한 덕에 이야기 서사를 빈틈없이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 ‘라라랜드’ ‘위대한 쇼맨’ 등을 작사·작곡한 벤지 파섹과 저스틴 폴이 곡 작업에 참여했다. 특유의 세련되고 서정적인 팝 스타일을 살려 간판 넘버 ‘You will be found’ 등 누구나 즐기기 좋은 음악을 들려준다. 별도 앙상블이 없지만 4명의 등장인물이 부르는 ‘Good for you’는 탄탄한 화음 덕에 1200여 석 규모의 대극장을 화려하게 메웠다. 2021년 개봉한 동명 영화와 비교해 서사 공감도가 높다. 관객 저마다 판관이 되어 주인공을 비난하기 쉬운 줄거리지만, 상황의 불가피함과 에반의 극단적 심경을 암시하는 대사를 곳곳에 배치해 자연스레 유예를 이끌어냈다. 에반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장면은 보다 주체적, 점층적으로 구성해 성장의 국면을 강조했다. 지난달 31일 공연에 출연한 임규형은 갈 곳 잃은 시선과 가쁜 호흡, 허공을 헤매는 손짓 등을 통해 ‘배달원과 대면 결제조차 힘겨운’ 심리 상태를 관객에게 매끄럽게 전달했다. 50cm 정사각형 발광다이오드(LED) 패널 935장으로 구성된 무대 세트 역시 볼거리다. 물리적 세트 대신 패널을 활용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속 세상과 에반의 침실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이는 공간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물론이고 ‘디어 에반 핸슨’이 오늘날 우리 주변의 이야기임을 강조했다. 식상한 러브 라인도, 신파성 슬픔도 남발하지 않는다. 그 자리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명료한 대사들이 채운다. 엄마 하이디가 에반을 다독이며 “언젠간 이 모든 일들이 아주 작게 느껴질 거야”라고 말하는 대목은 길고 따뜻한 여운을 남겼다. 6월 23일까지, 7만∼16만 원. 7월부터는 부산 드림씨어터에서 계속된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시대를 풍미한 실존 예술가들의 삶을 조명하는 창작뮤지컬 3편이 잇달아 무대에 오른다. 서울 종로구 링크아트센터드림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브론테’는 19세기 영국에서 소설가로 활동했던 세 자매의 삶을 재창작했다. 소설 ‘제인 에어’를 쓴 첫째 샬럿, ‘폭풍의 언덕’을 남긴 둘째 에밀리, ‘아그네스 그레이’ 등을 쓴 막내 앤이 그 주인공이다. 여성은 글을 쓸 수 없던 시대, 불우했던 삶 한복판에서도 꿈을 잃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6월 2일까지, 4만∼7만 원. 서울 종로구 예스24아트원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디아길레프’는 혁신을 좇은 20세기 러시아 발레단 ‘발레 뤼스’의 단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디아길레프가 천재 발레리노 니진스키, 수석 디자이너 브누아, 전위적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와 함께 ‘봄의 제전’을 준비하던 과정을 재창작했다. 6월 9일까지, 5만∼7만 원. 이달 23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뮤지컬 ‘버지니아 울프’는 에세이 ‘자기만의 방’ 등을 남긴 20세기 동명 영국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 속 세상에 작가 자신이 들어가며 벌어지는 일을 2인극으로 풀어낸다. 재즈와 클래식 간 크로스오버 넘버들로 구성됐다. 7월 14일까지, 4만4000∼6만6000원.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하임숙 채널A 전략기획본부장(사진)이 4일 제31대 한국여성기자협회 회장에 선임됐다. 임기는 2년. 하 신임 회장은 1995년 기자 생활을 시작해 동아일보 편집국 산업1부장, 산업2부장, 채널A 보도본부 부본부장 등을 지냈다. 이날 협회는 부회장에 박영진 YTN 국제부 기자와 신보영 문화일보 경제부장, 감사에 윤수희 KBS 시청자센터장과 하현옥 중앙일보 논설위원, 기획이사에 정호선 SBS 생활경제부장, 총무이사에 강유현 동아일보 산업1부 차장을 각각 선임했다. 재무이사는 이한나 매일경제신문 부동산부장, 출판이사는 송혜진 조선일보 산업부 차장, 디지털이사는 권혜진 연합뉴스 산업부 차장, 국제협력이사는 박은경 경향신문 정치부 외교안보팀장, 균형발전이사는 최진주 한국일보 국제부 차장이 맡는다.일반이사는 안선희 한겨레 뉴스룸국 신문부국장, 노희영 서울경제신문 생활산업부장, 강미선 머니투데이 편집국 에디터, 조인경 아시아경제 산업부문 콘텐츠매니저, 곽인숙 CBS 정치부장, 백민경 서울신문 사회부장, 이진경 세계일보 산업부 차장, 박신영 파이낸셜뉴스 금융부 차장, 문수정 국민일보 산업2부 차장, 조수영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차장이 선임됐다. 1961년 설립된 한국여성기자협회에는 현재 33개 언론사, 1700여 명의 여기자가 회원으로 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지독한 현실을 마주하느니 환상 속에 남길 택한 이들의 결말은 비슷하다. 어리숙한 프랑스 영사관 직원 르네 갈리마르가 “동양인은 결코 완전한 남성이 될 수 없는 세상”에서 황제로 군림하는 동안, 파멸의 격랑은 그에게 빠르게 닥쳐오고 있었다.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연극 ‘엠. 버터플라이’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7년 만에 관객과 만나고 있다. 이번 시즌은 2017년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된 개작 버전의 첫 국내 공연이다. 작품은 1964년 중국 베이징, 하급 외교관 르네가 오페라 ‘나비부인’을 연기하는 경극 배우 송릴링(쑹리링)의 신비롭고 순종적인 매력에 빠져들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20세기 중국에서 여장을 한 채 스파이로 활동했던 경극 배우 스페이푸가 프랑스 외교관 베르나르 브루시코를 속이고 국가 기밀을 유출한 실화를 재창작했다. 작품의 배경은 60년 전이지만, 극중 동양과 여성을 지배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은 오늘날과도 평행을 이룬다. 르네는 송릴링을 ‘순수한 얼굴로 자신을 최고라고 말해주는 신비로운 여인’이라 칭찬하고, 그의 친구 마크는 경극에 대해 “고양이들이 짝짓기하는 소리”라고 농담한다. 이는 유머를 빙자한 차별과 타자화, 오마주의 탈을 쓴 문화전유가 더욱 교묘해진 오늘날 일부 콘텐츠를 떠올리게 했다. 은유와 직설을 오가는 정교한 설정 및 대사로 울림의 깊이를 더했다. 르네가 매료되는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미국 해군 중위와 일본 게이샤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오페라로, “동양을 동등하게 바라봐야 한다”면서도 송릴링의 순종적인 모습에 이끌리는 르네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르네 역은 배우 배수빈, 이동하, 이재균이 번갈아가며 연기한다. 송릴링 역은 김바다, 정재환, 최정우가 맡아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낸다. 다음 달 12일까지, 4만5000∼7만 원.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2005년 국내 초연된 스테디셀러 뮤지컬 ‘헤드윅’의 14번째 시즌이 지난달 22일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개막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받거나 사랑받지 못해 상처투성이가 된 트랜스젠더 로커 ‘헤드윅’을 더 진하게 만나보기 위한 관전 포인트들을 짚어봤다. 올해 공연은 대형 ‘샤막’(반투명 스크린)을 처음 도입해 더욱 풍성해진 볼거리를 자랑한다. 작품의 대표 넘버 ‘The Origin of Love’에선 헤드윅의 미묘한 표정 연기가 중계되는 발광다이오드(LED) 패널 위에 오일파스텔로 그린 듯 동화적인 그림을 샤막으로 오버랩시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다층적 감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손지은 연출가는 “지난 시즌에선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헤드윅에게 집중했다면, 이번 시즌에선 그 과거가 헤드윅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강조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공연은 헤드윅의 이야기를 따라 록음악의 매력이 고스란히 묻어난 넘버들로 구성된다. 1988년 동독 베를린, 헤드윅은 음악을 들으며 불우한 유년 시절을 버티다가 성전환을 조건으로 결혼을 제의하는 미군을 만나 미국 캔자스로 간다. 그러나 결국 버림받고 변두리 술집을 전전하며 노래한 끝에 뉴욕에서 콘서트를 열게 된다. 이준 음악감독은 “세 도시 모두 펑크록과 글램록이 성행 및 발전했던 장소들로, 넘버와도 연관된다”며 “‘Angry Inch’, ‘Exquisite Corpse’ 등이 대표적인 펑크록 넘버”라고 설명했다. 무대 소품과 대사에 깨알같이 숨어 있는 음악적 요소를 발견하는 것도 관전 포인트다. 어린 헤드윅이 부엌에서 라디오를 듣는 장면의 경우 주인공이 동경한 데이비드 보위 등 록스타들의 사진이 오븐 안쪽에 도배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영국 록밴드 레드 제플린을 비롯한 뮤지션들이 대사에서 재치 있게 활용되기도 한다. “얜 마치 레드 제플린의 비행선(zeppelin)이 터져버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어”라는 헤드윅의 말은 ‘알고 들을 때’ 더욱 유머러스하다. 끈적이는 목소리, 뇌쇄적 눈빛이 강렬한 주인공 헤드윅 역은 이번 시즌 조정석, 유연석, 전동석이 돌아가며 맡는다. 2006년 처음 헤드윅 무대에 선 조정석이 다시 출연하는 건 2016년 이후 8년 만이다. 3인 3색 캐스트의 매력은 어떻게 다를까. 이 감독은 “조정석은 감정의 움직임이 큰 ‘Wig in a Box’를, 유연석은 통통 튀는 ‘Sugar Daddy’를, 전동석은 서사적 표현이 특징인 ‘The Origin of Love’를 자신만의 색깔로 특히 잘 소화해낸다”고 했다. 넘버 11곡 사이사이, 헤드윅은 공식 넘버 이외 ‘히든 트랙’들을 노래하며 관객 귀를 즐겁게 한다. 곡은 배우별로 다르다. 조정석의 경우 헤드윅의 어린 시절 우상이던 미국 록스타 루 리드의 ‘워크 온 더 와일드 사이드(walk on the wild side)’, 마치 자신의 인생을 고백하는 듯한 가사가 담긴 렌카의 ‘더 쇼(The show)’ 등을 노래한다. 손 연출가는 “치밀한 캐릭터 분석을 요하는 작품인 만큼 배우 자신조차 모르던 본인의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다. 6월 23일까지, 8만∼15만 원.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채널A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당일 오픈스튜디오와 광화문광장, 청계광장을 잇는 ‘나의 선택 2024’ 선거 방송을 선보인다. 방 안에서 수동적으로 지켜보던 기존 선거 방송의 틀을 깨고 유권자와 함께하는 ‘축제의 장’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광화문 찾은 시민들 생방송 제작 직관 채널A 선거 방송은 대한민국의 심장 광화문 한가운데 자리 잡은 동아미디어센터 1층 오픈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오픈스튜디오는 시민 누구나 뉴스 제작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는 ‘핫플레이스’. 총선 당일 광화문을 찾은 시민들은 선거 생방송 현장을 직관할 수 있다. 맞은편 광화문광장에서는 초고화질 대형 전광판으로 중계되는 몰입형 선거 방송을 시청할 수 있다. 세종대로 사거리의 일민미술관 전광판을 통해 실시간 투표율, 득표율은 물론이고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3차원(3D) 이미지로 구현된 후보자들을 만나볼 수 있다. 청계광장에서도 채널A의 긴박감 넘치는 생방송이 이어진다. 전국 254개 지역구를 카토그램(특정한 주제와 통계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지도)으로 구현한 가로 7m, 세로 13m 크기의 ‘A-MAP’ 앞에서 김윤수 앵커가 실시간 판세를 전한다. ‘주말 뉴스A’를 진행하는 김 앵커가 모자이크처럼 정당별 색깔로 채워진 카토그램을 직접 바꾸며 선거 상황을 전달할 예정이다. 눈앞에서 채워지는 지도를 통해 전국 판세는 물론이고 한강벨트를 비롯한 관심 지역 판세도 확인할 수 있다.● ‘1당 바로미터’로 족집게 선거 예측 선거 방송의 열기는 투표가 종료되는 오후 6시부터 더욱 달아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채널A는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결과를 정확히 예측한 데 이어 이번 총선에서도 족집게 예측조사를 진행한다. 앞서 채널A는 2022년 대선에서 서울대·연세대 공동 연구팀과 개발한 당선인 예측 시스템 ‘알파A’를 활용해 초접전을 달렸던 두 후보의 득표율 차(0.73%포인트)를 근접하게 맞혔다. 이번에는 서울 용산, 동작을 등 원내 1당을 차지하려면 반드시 차지해야 할 ‘1당 바로미터’ 지역을 중심으로 당선 결과를 내다본다. 해당 지역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양당이 직접 꼽았다. 선거를 앞두고 쏟아지는 천차만별의 여론조사 결과에 혼란을 느끼는 유권자들을 위해 채널A는 여론조사 팩트체크 시스템 ‘Poll-A’를 운영 중이다.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ViBA Lab과 협업해 만든 시스템이다. 각 여론조사 기관의 편향성을 최소화해 실제 민심에 가장 가까운 여론을 전달하며, 조사 방식에 따른 지지율 변화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정치 고수’가 읽어주는 판세 선거판을 정확히 읽어내는 ‘정치 고수’들이 출연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5선 중진의원 출신 김형오 전 국회의장과 여야를 가리지 않는 촌철살인 코멘트로 유명한 유인태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이 팽팽한 분석 배틀을 펼친다. 간판 시사 보도 프로그램 앵커들도 전진 배치한다. ‘뉴스A’ 진행자이자 채널A 정치부장으로 현장까지 꿰고 있는 동정민 앵커가 내공 있는 선거방송을 이끈다. 이와 함께 ‘김진의 돌직구쇼’로 아침을 여는 김진 앵커, 매일 저녁 파트너 ‘뉴스 TOP10’의 김종석 앵커도 가세한다. 손영일 채널A 선거방송기획TF팀장은 “방 안에서 지켜보는 기존 선거 방송의 틀을 깨려고 한다”며 “대한민국의 중심 광화문 한가운데에서 유권자들과 함께 즐기는 선거 방송을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제전’은 제사의 의식 또는 성대한 잔치를 뜻한다. 길운을 염원하는 제전에선 가장 귀한 제물을 바치고, 넘보기 힘든 산해진미를 내어놓는 법이다. 다음 달 26∼2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되는 서울시발레단 ‘봄의 제전’은 한국 발레의 새 지평을 열고자 현대무용가 안성수(62), 유회웅(41), 이루다(38)가 힘을 모은 귀한 한상차림이다. 지난달 출범한 서울시발레단이 선보이는 첫 번째 공연으로 8월 창단 공연에 앞서 공연된다. 서울시발레단은 국립발레단, 광주시립발레단에 이어 48년 만에 창단된 국내 세 번째 공공발레단이다. 그중 컨템퍼러리(현대) 발레단은 서울시발레단이 유일하다. 3인 3색 트리플빌을 안무한 세 사람을 27일 서울시발레단 연습실에서 만났다. 첫 신호탄을 알리는 만큼 세 작품 모두 뛰어난 기량과 고강도 체력을 요구한다. 안 씨의 ‘로즈’는 2009년 초연된 ‘장미―봄의 제전’을 더욱 빠르고 역동적으로 재구성한 30여 분 길이의 공연이다. 힙합 댄스가 가미된 기존 버전에서 발레 동작을 강화해 움직임은 자연스레 화려해졌다. 안 씨는 “2009년 초연 때부터 15년간 작품의 음악인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선율에 익숙해지면서 이전엔 놓쳤던 음표와 쉼표가 들렸다. 이를 움직임으로 채우다 보니 작품 강도가 높아졌다”면서 “연습이 끝나면 다들 몸을 부여잡으며 힘들어하지만, 운 좋게 이를 해낼 수 있는 멋진 무용수들을 만났다”며 웃었다. 서울시발레단은 기존 공공발레단과 달리 단장, 고정 단원 없이 시즌 및 작품별로 선발된 무용수와 안무가로 구성된다. 올해 시즌 무용수는 국립발레단, 미국 뉴욕 페리댄스 컨템퍼러리 무용단 등 출신의 무용수 5명으로 이뤄졌다. 김희현, 김소혜, 원진호는 ‘로즈’에, 남윤승, 박효선은 ‘노 모어’에 출연한다. ‘볼레로24’는 프로젝트 무용수 9명이 무대에 선다. 이루다의 ‘볼레로24’ 역시 모리스 라벨의 관현악곡 ‘볼레로’를 더욱 압축적이고 강렬하게 펼쳐낸다. 1년 24절기, 하루 24시간으로 반복되는 시간의 흐름에 관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에서 ‘볼레로’의 희극적인 선율은 이 씨를 상징하는 ‘어둠’을 거쳐 재탄생된다. 이 씨는 “낮과 밤, 음과 양 등 우주의 흐름 속 생명체의 탄생과 소멸을 몸으로 표현하려 한다”며 “어릴 때부터 백조보단 흑조를 좋아했다. 검정 색은 내 작품에 정체성을 부여한 길잡이”라고 설명했다. 컨템퍼러리 발레는 클래식발레와 비교해 비정형적인 움직임이 매력으로 꼽힌다. 그런데 유회웅의 ‘노 모어’는 그 매력을 한판 더 뒤집었다. 유 씨는 “현대무용이지만 신체적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토슈즈를 신고 무대에 선다. 탁탁 두드리는 소리를 만들고 분출하는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작품은 오늘날 피로와 무기력에 매몰된 사람들의 심장에 힘찬 박동을 안겨주고자 기획됐다. 무용수들은 도심을 형상화한 무대세트를 배경으로 떨림과 긴장감을 빠른 드럼 비트에 맞춰 움직임으로 표현한다. 현대예술엔 정해진 답이 없어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다. 그러나 정답이 없기에 관객은 ‘찾아나가는’ 재미가 크다. 이 씨는 “클래식발레의 길고 예쁜 동작들이 어떻게 해체적으로 변형됐는지 비교해 보는 방법이 있다”며 “미디어아트에 담긴, 춤의 의미를 느껴볼 수 있는 시각적 힌트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고 권했다. 안 씨는 “무용수들의 아이디어로 재미난 동작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알라딘의 요술램프’ 지니의 제스처, 가수 엄정화의 춤 등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4만∼6만 원.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2020년 12월, 한 재심법정에서 내려진 선고로 한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1988년 벌어진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에서 범행을 자백해 20년간 구금됐던 윤성여 씨가 무죄를 선고받은 것. 재판부는 과거의 잘못된 판결을 사과하며 “피고인의 자백 진술은 불법체포·감금 상태에서 가혹행위로 얻어졌다. 각종 증거에 객관적 합리성도 없다”고 밝혔다.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려 옥살이를 하는 이들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다. 책은 이처럼 누구든지 무고한 피해자로 만들 수 있는 오늘날 사법제도에 대해 비판한다. 저자는 무죄 입증 변호사 단체인 ‘캘리포니아 무죄 프로젝트’의 설립자로서 30년간 힘썼다. 무고한 사람들이 어떻게 감옥에 갇히게 되는지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변호 인력의 부족과 부적절한 수사로 인해 사형을 선고받은 매릴린 멀레로 사건, 범행 현장으로부터 56km나 떨어져 있었지만 목격자의 부정확한 진술 탓에 억울하게 복역한 라파엘 매드리걸 사건 등이 총 10개의 장에 걸쳐 등장한다. 영화 ‘추락의 해부’의 모티브가 된 어맨다 녹스 사건도 눈길을 끈다. 오판을 낳게 하는 불가항력적 실수와 구조적 요인들도 지적한다. 잘못 조합될 가능성이 상존하는 인간의 기억력이 대표적이다. 책은 “기억해내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경찰이 잘못된 정보를 한두 개 흘리면 기억을 정확히 소환하기 어렵다”며 “경찰관은 심문에서 진실을 찾으려 하는 대신, 이미 만들어놓은 시나리오에 피의자가 동의하는 것에 집중한다”고 말한다. 무고한 피해자를 낳는 불합리한 사법제도를 개혁해야 함을 강력히 주장한다. 책에 따르면 미국은 매년 1800억 달러를 교도소에 사람을 가두는 비용으로 투입하고 있다. 저자는 “거짓 자백을 만들 우려가 있는 절차들은 전부 뿌리 뽑고, 용의자 식별 절차 중 의도적 오염이나 실수가 개입하지 않도록 이중 잠금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국내 뮤지컬 시장이 다시 활기를 되찾고 있는 가운데 공연계가 ‘지방 관객 모시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 예술경영지원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뮤지컬 티켓 판매액은 약 4591억 원으로 관련 집계가 시작된 2019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서울 공연 대비 짧은 기간 진행되는 지방 투어 공연에선 과거 시간 및 비용 효율 등의 이유로 뮤지컬 음악 반주가 MR(반주 음원)로 대체되곤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서울 공연과 마찬가지로 지방 공연에서도 20인조 이상의 오케스트라 라이브 연주를 선보이며 관객들의 만족도를 높이고 있다. 21∼24일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과 다음 달 2∼7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드라큘라’는 모든 회차 공연에서 오케스트라가 직접 연주에 나선다. ‘드라큘라’ 제작사인 오디컴퍼니 공연제작팀 관계자는 “최근 일회성이 아닌 기간적 여유를 가지고 공연하는 경우가 늘면서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가 가능한 구조가 됐다”고 설명했다. 학생 등 밤 시간 공연 관람이 어려운 관객층을 겨냥해 낮 시간대 공연을 신설하기도 한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지난해 말부터 올해 2월까지 이어진 대구 공연 기간 금요일 마티네 공연을 추가했다. 통상 수요일 낮에 이뤄지는 마티네 공연을 금요일에도 실시해 주말과 이어 붙여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한 것.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지난해 10, 11월 열린 부산 공연에서 4번의 마티네 공연을 추가했다. 노민지 클립서비스 홍보팀장은 “‘레미제라블’의 경우 먼 지역으로 공연을 보러 가기 어려운 학생들의 호응이 높았다. 마티네 공연을 중심으로 부산·경남 소재 40여 개 학교의 단체 관람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공연 여건상 전국 투어 공연이 불가능할 경우 지방 관객의 발길을 서울까지 모으기 위한 이색 프로모션들도 제공한다. 서울 구로구 디큐브 링크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EMK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는 360도 회전하는 대규모 무대장치 등으로 인해 서울 외 지역에서 공연을 열지 않는다. 그 대신 고속버스 승차권, 항공권 등을 제시하는 타 지역 관객에게 20% 할인 혜택을 줬다. 김지원 EMK 부대표는 “프로모션용으로 준비한 물량이 거의 다 소진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며 “투어 공연이 어려울 경우 다양한 혜택을 마련함으로써 지방 관객들의 공연 관람 수요를 충족시키고자 한다”고 말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는 말을 기치로 사랑 한 줌 없는 삶을 견뎠다. 불우했던 이팔청춘에 청부 살인을 시작해 40여 년간 감정을 거세한 채 살아온 60대 여성 킬러 ‘조각’. 그의 메마른 삶에 타인과 생명을 향한 사랑이 움트려 한다면 그건 축복일까, 더 큰 불운일까. 15일부터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초연 중인 창작 뮤지컬 ‘파과’는 2013년 발표된 구병모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제목 ‘파과’는 부서진 과일 또는 여자 나이 16세를 뜻한다. 작품은 파과(破瓜)일 적부터 파과(破果)로서 살아야 했던 조각, 그리고 어린 시절 조각의 손에 아버지를 잃은 후 20년간 복수심과 동경심을 원동력 삼아 살아온 ‘투우’가 그리는 이야기다. 투우 역을 맡은 배우 신성록은 증오와 동경, 연민이 뒤엉켜 비틀린 투우의 내면을 비릿한 웃음과 느릿한 말투 등으로 매끄럽게 표현한다. 조각 역의 구원영은 세월이 흐르며 곪아버린 마음과 그 속에서도 돋아나려는 새살로 인한 미묘한 감정을 건조하면서도 처연한 연기로 그려낸다. 조각 역은 차지연과 구원영이, 투우 역은 신성록과 김재욱, 노윤이 번갈아 가며 연기한다. 소설과 비교해 뮤지컬에선 누아르 장르의 매력을 더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 스카프를 이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등 주연 배우들이 무대에서 몸소 선보이는 격정적 액션 장면은 긴박감을 더한다. 통상 뮤지컬에서 액션을 가미한 연기 및 군무가 극 전개와 다소 괴리되는 인상을 주는 것과 달리 ‘파과’ 속 액션은 극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누아르 영화를 연상케 하는 무대세트와 흑백 영상도 작품의 매력을 더한다. 차갑고 대칭적인 형태의 철제 난간과 계단은 날카롭고 무거운 분위기를 형성했다. 총 3개 층으로 이뤄진 수직적 무대는 언제 어디서든 감시와 위협을 당할 수 있는 조각의 불안한 삶을 시각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성근 전개와 심리묘사는 다소 아쉽다. 조각이 어릴 적 친척 손에 거둬지며 겪었던 성장통, 투우가 살해범에게 온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배경 등이 뮤지컬에선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 ‘지극히 인간적인’ 이들의 양가적 마음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됐다. 조각이 과거 자신을 거둬주고 청부 살인 방법을 전수한 스승에게 느꼈던 애틋함과 현재 부상당한 자신을 치료해주는 ‘강 박사’로 향한 연정이 어수선하게 병렬되며 흐름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다만 등장인물의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내레이션과 20여 곡의 서정적 넘버가 캐릭터에 대한 몰입도를 보완했다. 5월 26일까지, 6만∼12만 원.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오늘 훌륭한 가수분들과 (학전의) 마지막 무대에 서게 돼 영광이고,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학전의 정신은 제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배우 황정민) 대학로 소극장 문화를 이끌어 온 학전이 15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1991년 3월 15일 개관한 지 꼭 33년 만이다. 폐관 전날인 14일, 서울 종로구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열린 ‘학전 어게인 콘서트’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 황정민은 “학전은 제게 배우로서 포석이자 지금의 저를 만든 마음의 고향”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학전 뮤지컬 ‘지하철 1호선’ 등으로 연기 인생을 시작한 그는 이날 학전 대표 김민기의 히트곡 ‘작은 연못’을 노래했다. ‘학전 어게인 콘서트’는 오랜 경영난과 김민기 대표의 투병이 겹치면서 지난해 폐관 소식이 알려지자 학전과 인연이 있는 배우, 가수들이 뜻을 모아 기획했다. ‘학전 독수리 오형제’로 불리던 배우 설경구, 장현성부터 가수 동물원, 시인과 촌장, 윤종신, 세계적인 재즈 가수 나윤선까지 모두 출연료 없이 노개런티로 동참했다. 지난달 28일부터 이어진 총 20회 릴레이 공연은 티켓 예매 시작 10분 만에 전석 매진됐다. 티켓 수익금은 제작비를 제하고 모두 학전에 기부된다. ‘김민기 트리뷰트’를 부제로 열린 이날 공연에선 그룹 노찾사, 가수 박학기, 권진원, 정동하, 알리 등이 ‘상록수’를 비롯한 김민기의 히트곡들을 불렀다. 1956년 문을 열어 대학로의 산증인이 된 학림다방의 이충열 대표도 게스트로 참석했다. 2시간 동안 이어진 콘서트는 모든 출연진이 입 모아 “나 이제 가노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아침이슬’)를 노래하며 끝을 맺었다. 이번 릴레이 콘서트의 총감독을 맡은 가수 박학기는 “김민기 이름 석 자 아래 선후배들이 같은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했다. 이날 공연장을 찾은 관객 서정임 씨(서울 광진구·50)는 “20대에 ‘지하철 1호선’만 두세 번 봤고 지금도 김민기의 노래를 즐겨 듣는다”며 “아쉬운 마음에 딸에게 부탁해 티켓을 구했다”고 했다. 학전은 그동안 고(故) 김광석, 들국화, 조승우 등 수많은 스타 가수와 배우들을 배출해 냈다. 국내 창작뮤지컬 역사에도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다. 1994년 초연한 ‘지하철 1호선’은 한국 뮤지컬 최초로 라이브 연주를 선보인 작품이었다. 공연 횟수 4000여 회, 누적 관객 70만 명을 기록하는 등 소극장 뮤지컬의 역사를 썼다. 또 학전이 제작한 뮤지컬 ‘의형제’는 제35회 동아연극상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극장은 다음 달부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임차한다. 학전의 뜻에 따라 명칭은 변경되며 올 7, 8월경 어린이·청소년 전문극장으로 재개관하게 된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호흡을 맞춘다’는 것. 심장박동을 나누고 함께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말이다. 차디찬 로봇이 달리는 말의 등에 올라타 호흡을 맞추고 질주의 두근거림을 나눈다면, 그 순간만큼은 로봇에게도 온기가 도는 것은 아닐까. 서로 다른 존재가 맞추는 호흡을 담은 연극 ‘천 개의 파랑’이 다음 달 4∼28일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천선란 작가의 동명 공상과학(SF) 소설이 원작으로 국립극단이 제작했다. 더는 달리기 힘든 경주마 ‘투데이’, 투데이를 살아있게 하고자 스스로 폐기를 택한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 그런 콜리를 살리려는 소녀 ‘연재’가 연대하는 과정을 그렸다. 티켓 예매 시작 하루 만에 전 회차 전석 매진된 화제작이다. 이번 공연에서 ‘호흡을 맞춘’ 장한새 연출가(35)와 천선란 작가(31)를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만났다. 2016년부터 SF 연극을 꾸준히 다뤄온 장 연출가는 연재와 콜리가 첫눈에 서로의 특별함을 알아봤듯 책 ‘천 개의 파랑’을 읽자마자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SF지만 스페이스 오페라(우주 활극)가 아니라서 더욱 좋았다. 기술에 관한 이야기는 다분히 일상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먼 미래에나 벌어질 상상으로만 치부한다면 이미 도래한 기계사회에서 기술이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활용되고 사유되고 있는지 놓치기 쉽다”고 했다. 천 작가의 작품이 연극, 영화 등 3차원(3D)으로 재탄생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지난해 공연으로 제작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당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좋다고 외쳤다”며 “2년 전 한 축제에서 ‘천 개의 파랑’ 낭독을 듣던 중 울어버렸다. 한 장면의 감각과 분위기를 언어로 온전히 담아내는 데 평소 한계를 느끼는데 연극에선 이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 같다”고 고백했다. 콜리와 투데이가 대화하지 않고 고삐를 당기는 것만으로도 호흡을 맞추듯 연극은 관객과의 약속만으로 상상력을 펼쳐내는 무대예술이다. 천 작가는 “영화화 제안도 받았지만 말과 로봇이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런데 연극은 약속으로 이뤄지는 장르이니 가능하겠단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극 중 투데이는 빛으로 형상화돼 콜리의 심장을 표현한다. 국립극단 74년 사상 처음으로 로봇 배우가 무대에 올라 콜리 역을 맡는다. 특별 제작된 145cm 크기 로봇은 조명장치 제어 기술로 신호를 받아 동작과 대사를 실시간으로 소화한다. 배우 김예은이 로봇을 조종하는 동시에 콜리 시각에서의 서술자 역할을 수행한다. 무대는 사실적 재현 대신 ‘콜리의 메모리박스’로서 표현된다. 장 연출가는 “콜리가 각 인물과 공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에 중점을 뒀다”며 “경마장은 말발굽 소리와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역동성, 투데이의 존재를 통해 감각화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들이 각자 소설로 연극으로, 있지도 않은 미래를 자꾸만 이야기하는 이유는 뭘까. 두 사람에게 SF적 상상력이란 ‘현실과 맞서 싸울 힘의 원천’이다. 장 연출가는 “죽음을 통해 삶을 반추하듯 세상의 끝을 이야기함으로써 새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싶다”고 했다. 천 작가는 “인류가 사라지고 몇백 년이 흘러 텅 빈 도시를 상상하면 소란스럽던 마음이 차분해진다”며 이같이 답했다. “그 순간 차별과 갈등에 맞서 싸울 힘이 생겨요. 결국 모두 침묵 속에 가라앉을 거라면 지금 더 크게 목소리 내도 되겠다 싶어요. 그게 제가 SF를 사랑하는 이유죠.”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오늘 집을 나서는데 마음이 너무 무겁더라고요. ‘진짜 마지막’ 같아서…. 학전은 제게 운명이었고, 그 이름은 사라져도 제겐 학전의 DNA가 영원히 새겨져 있을 겁니다.”(배우 설경구) 뿌린 씨가 싹을 틔우길 기다리는 이른 봄, 11일 서울 종로구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열린 ‘학전, 어게인 콘서트’에 선 배우 설경구가 아쉬움이 가득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다. 1994년 학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 출연한 그는 꼬박 30년이 흘러 국내 손꼽는 ‘명배우’ 타이틀을 달고 같은 무대에 섰다. 설경구는 “대학 졸업 후 포스터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학전 김민기 대표의 눈에 띄어 엉겁결에 무대에 섰다. 그땐 모든 게 참 어설펐다”고 미소 지었다. 15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학전의 마지막 공연은 ‘릴레이 콘서트’다. 오랜 경영난과 김민기 대표의 투병이 겹치면서 지난해 폐관 소식이 알려지자 학전과 인연이 있는 배우, 가수들이 ‘학전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겠다’며 발 벗고 나선 것. 출연료는 한 푼도 없다. 티켓 수익금은 제작비를 제하고 전액 학전에 기부된다. 윤종신, 장필순 등 싱어송라이터와 동물원, 시인과 촌장 등 굵직한 포크 가수, 그리고 데이브레이크 등 ‘요즘’ 밴드까지 릴레이에 동참했다. 지난달 28일부터 이어진 총 20회 공연은 티켓 예매 시작 10분 만에 전석 매진됐다. 폐관을 나흘 앞둔 11일 공연은 나윤선, 오지혜 등 학전 출신 배우 70명이 직접 기획과 연출을 맡은 것은 물론이고 직접 출연자로 나섰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 ‘고추장 떡볶이’ 등 학전 대표작의 넘버를 부르는 갈라 콘서트와 토크쇼로 구성됐다. 과거 설경구, 황정민, 조승우, 김윤석과 함께 ‘학전 독수리 5형제’로 불린 배우 장현성은 손수 기타를 치며 설경구, 방은진, 최덕문과 ‘축복합니다’를 노래했다. 장현성은 “가장 ‘학전답게’ 이별하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관객과 학전의 앞날을 축복하고자 이 노래를 골랐다”며 “누구보다 열심히, 순수한 마음으로 공연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방은진은 “백스테이지에서 나갈 준비를 하는데 왈칵 눈물이 나더라”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2시간 반 동안 이어진 콘서트는 출연진 전원이 무대와 객석 통로에 빼곡히 서서 ‘지하철 1호선’ 1막 마지막 넘버 ‘코랄’을 합창하며 끝이 났다. 김민기를 위해 배우들이 준비한 감사패는 직접 전달되지 못했다. 가수 박학기 등에 따르면 김민기 대표는 “건강상 극장을 직접 찾진 못하지만 마음은 항상 극장에 와 있다”고 전했다. 그는 매일 릴레이 콘서트 녹화 영상을 챙겨 보고, 출연진에게 전화해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공연 막바지 그동안 학전을 거쳐 간 배우, 연주자, 스태프 등 771명의 이름을 호명하는 엔드크레디트가 오를 때 객석 곳곳에서 터져 나온 울음은 김민기의 히트곡 ‘봉우리’가 흘러나와 위로했다. 1991년 개관한 학전은 대학로 소극장 문화를 이끈 상징적 공간이다. 지금까지 기획·제작한 작품 수는 총 359개에 달한다. 고(故) 김광석, 들국화, 안치환 등이 학전에서 콘서트를 열었고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2008년까지 약 4000회 공연되며 관객 70여만 명을 모았다. 다음 달부터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극장을 임차해 어린이·청소년 전문극장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다만 학전의 뜻에 따라 명칭은 변경하며 7∼8월 재개관한다. 한편 학전은 14일 열리는 콘서트를 끝으로 33년의 릴레이를 완주한다. 마지막 공연에선 배우 황정민 등이 출연할 예정이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