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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4일 밤, 연해주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이 기습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등 한인 거주 지역을 습격해 가옥 등을 불태우거나 파괴하고 다수의 한인을 살상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군이 2, 3일에 걸쳐 광란의 살상극을 부른 ‘4월 참변’이다. 노인동맹단의 주요 간부들이 이때 체포당하거나 중국 등지로 피신하는 바람에 조직은 거의 와해된다.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사를 연구해 온 박환 수원대 교수는 “일본 기록에는 일본군이 한인 60명을 체포했다고 하는데, ‘소련한족사’(김승화 저)에 따르면 당시 300명이 넘는 한인들이 체포됐고, 일본군은 그들을 학교에 가둔 채 건물을 불태워 죽였다”고 밝혔다. 4월 참변은 한 달 전인 3월 러시아 적군(볼셰비키 혁명군)이 일본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를 공격한 데 대한 보복적 성격이 강했다. 한인들이 대상에 포함된 것은 일본에 적대적인 러시아 적군에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만세운동 이후 러시아 군대로부터 신형 무기를 구입해 무장한 뒤 국내로 진출하려는 항일 움직임도 보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 과정에서 무자비했다. 신한촌의 기록은 일본군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체포한 조선인들을 집단으로 묶어서 조선인 신문의 편집국에 끌어놓고는 사방에서 불을 질렀다.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무서운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거기서 죽었는지 밝혀지지 못했다.”(이정은, ‘3·1운동을 전후한 연해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우수리스크에서도 일본군은 70여 명의 한인 독립운동가를 체포했다. 이때 최재형을 비롯해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이 일본군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 혁명 정부기관이 불태워지고, 많은 러시아인들이 학살당했다. 우수리스크 교외엔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4월 참변 추모비가 서 있다. 당시 희생된 240명의 러시아인과 한인들을 추도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매년 4월 5일 러시아 지방정부가 추모비와 ‘영원의 불꽃 추모광장’에서 추모제를 지낸다. 2006년에는 한국과 러시아가 공동 추모제를 지내기도 했다.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1919년 3월 26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마을 신한촌에 자리한 한약방 덕창국(德昌局). 시베리아의 매서운 추위가 꺾이지 않은 야밤, 두툼한 옷차림에 수염이 희끗한 노년의 신사들이 모였다. 열흘 전인 17일 신한촌에서 펼쳐졌던 3·1운동의 열기가 채 가시기 전이었다. 이곳은 연해주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 의원 김치보(당시 60세·1859∼1941)의 가게였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이 정착하던 초기부터 활동해온 원로 독립운동가였다. 이날 덕창국에 모인 이들은 독립만세운동에서 뒷방 신세로 머물러선 안 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청년 자제들이 모두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리고 있는데 늙은이라고 이 일을 할 수 없으랴.”(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독립운동 최전선에 나선 청년들을 지원할 목적으로 46세 이상의 남녀로 구성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노인동맹단)의 시작이었다. 당시는 평균 수명이 짧아 마흔 중반부터 ‘노인’으로 대접받던 시절이다. 3·1운동 이후 연해주 상황은 노인들이 나설 만큼 긴박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등 연해주 한인들은 열성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만세운동에 가담하지 않은 이들은 돈을 기부했다. 일제가 “가난한 이들도 만세운동 모금에 기부하지 않는 자가 없어 거의 전 조선인들이 이에 호응하는 상황”이라고 본국에 보고할 정도였다.(‘지나잡건·支那雜件’, 조선군참모부 첩보 제19호, 1919년 3월 18일) 러시아 사람들도 “한인들은 손에 쇳조각 하나 들지 않은 채 결사적으로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총과 대포의 힘이 있는데도 국권을 다른 나라에 양보했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며 한국인들을 높이 평가했다. 이날 노인동맹단 단장으로 추대된 김치보는 총무(김순약), 의장(이일), 서기(서상구) 등 집행부와 의원 10여 명을 선임했다. 또 전단위원(傳團委員)을 뽑아 담당 지역을 맡기고, 각자 단원을 모집하게 했다. 입회금 7루블에 총단원 7000명을 목표로 삼았다. 노인동맹단은 모집을 시작한 지 열흘 정도 지난 4월 5일 3000원(당시 국내 쌀 한 가마 값은 3∼5원)에 달하는 거금을 모으는 저력을 과시했다.(조선헌병대 사령관, ‘독립운동에 관한 건·국외 제32호’) 또 그해 6월 말에는 회원 5000여 명도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김소진, ‘1910년대의 독립선언서 연구’) 이들은 이듬해인 1920년 3월 말까지 젊은이들 못잖게 왕성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신한촌의 노인 독립운동가들 노인동맹단의 자취를 보기 위해 최근 블라디보스토크 라게르산 기슭에 자리 잡은 신한촌을 찾았다. 당시 신한촌의 집들은 대부분 러시아풍 목조 주택이었고 집마다 2, 3개의 한국식 온돌방이 갖춰져 있었다.(춘원 이광수의 기록) 신한촌의 중심지인 하바롭스카야 7번지 일대에 위치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덕창국 역시 비슷한 구조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이곳은 러시아인들이 거주하는 아파트촌으로 바뀌어 옛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다. 신한촌 중심가에 권업회, 한민학교 등과 지척에 있던 덕창국에는 한국독립운동사의 핵심 인물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당시 60세·1859∼1925)은 우수리스크(당시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머물다 이곳으로 옮겨와 노인동맹단을 지도했다. 산포수 의병장 출신으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홍범도(당시 51세·1868∼1943), 안중근 의사의 숙부 안태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의 아버지 이승교(일명 ‘이발’) 등도 이곳을 드나들며 노인동맹단으로 활동했다. 때때로 노인동맹단은 청년들을 지원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행동에 적극 나섰다. 1919년 5월 5일 노인동맹단은 정치윤(당시 74세), 이승교(68세), 윤여옥(58세), 안태순(47세) 등 7명을 국내로 파견했다. 5월 들어 고국의 3·1만세운동이 침체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국내의 독립 열기를 고취하겠다는 목적이었다.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아들(이동휘)을 대신한 이승교는 당시 자신의 심정을 이같이 밝혔다. “나는 지금 칠십이 가까운 노인으로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 조선에 나가 다시 한 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는 선포문을 대중 속에 알리겠다.” 7인은 일본 국왕과 조선총독에게 보내는 서한과 노인동맹단 취지서 수백 장을 품속에 지닌 채 서울로 잠입했다. 이들은 5월 31일 오전 11시경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군중 연설을 한 뒤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다. 이때 이승교는 “의(義)로써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며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 노인동맹단의 활약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강우규(당시 64세·1855∼1920)를 다시 서울로 파견했다. 중국 길림성 요하현 노인동맹단 지부장이었던 강우규는 같은 해 7월 8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으로 향하는 일본 배를 탔다. 하얀 팔자수염을 흩날리며 증기선에 오른 노인의 사타구니엔 폭탄이 숨겨져 있었다. 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하려는 계획이었다. 9월 2일 강우규는 남대문역(서울역)에서 해군 제복 차림의 사이토가 쌍두마차에 오르는 순간 폭탄을 던졌다. 그 자리에서 3명이 즉사하고, 34명이 부상을 입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10주년이 되던 해에 일어난 이 사건은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발생한 최초의 의열 투쟁이었다. 비록 총독 제거에 실패했지만 이날 거사는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노인동맹단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우수리스크의 비극 노인동맹단은 상해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0년 3월 임시정부는 연통제(聯通制)에 의한 아령총판부(俄領總辦部)를 연해주에 설치하면서 노인동맹단장 김치보를 아령총판부의 부총판에 임명했다. 아령총판부는 연해주에서 군자금 조달과 정보 보고, 연락망 관리 등을 총괄하는 행정조직이었다.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장관)에 선임됐던 최재형(당시 59세·1860∼1920)이 최고 책임자(총판)를 맡았다. 최재형은 당시 연해주 최고의 부호였다. 하지만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한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한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앞장서고, 30여 개의 한인학교를 세워 동포들을 가르쳤다. 자신의 월급을 장래가 유망한 학생들의 유학 자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평생 모은 재산을 송두리째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다. 러시아제 신형 무기를 독립군들에게 조달하고 동의회, 권업회 등을 직접 조직하며 독립운동의 최전선을 지켰다. 그 결과 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이 “(한인마을)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동포들의 존경을 받았다. 최재형의 마지막 발자취를 따라 우수리스크를 찾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00여 km 떨어진 우수리스크는 한민족과 많은 인연을 맺었던 곳이다. 과거 발해의 5경 15부 중 솔빈부(率賓府)가 자리했던 곳이기도 하다. 한인들은 이곳에서 농토를 개척해 부를 축적하고 한인마을을 형성했다. 우수리스크 시내 볼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는 최재형이 마지막까지 살았던 집이 100년 전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최재형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건물에 들어서니 파손된 유리창문이 눈에 띄었다. ‘최재형 가옥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그대로 두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일본군에게 체포돼 끌려 나가던 최재형의 긴박했던 마지막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1920년 4월 연해주에 주둔 중이던 일본 군대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의 한인들을 살육하는 ‘4월 참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눈엣가시 같던 최재형을 붙잡아 처형했다. 일본군이 내다 버리듯 처리한 그의 시신은 이후 발견되지 않았다. 1917년 숨진 헤이그 특사 이상설의 유허비도 최재형 고택 인근에 위치한 쑤이펀(綏芬·라즈돌나야) 강변에 세워져 있었다. 최재형과 함께 연해주 독립운동의 거두였던 이상설의 유골은 우수리스크에서 유일하게 동해로 흘러가는 하천인 쑤이펀에 뿌려졌다. 조국의 바다와 이어지는 쑤이펀 강변에서 의롭지만, 외롭게 숨져간 두 독립운동가의 넋을 기렸다.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러시아 극동 연해주의 최대 항만도시이자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 도시’로 불리는 블라디보스토크.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로 2시간 정도 걸리는 이곳은 100년 전까지만 해도 해삼위(海蔘崴)라 불리며 두만강을 건너간 많은 한국인이 새로운 삶을 개척하던 곳이다. 가장 왕성하고도 치열했던 해외 독립운동 기지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의 통역관이자 12년간 재러 한인 독립투사들을 탄압했던 기토 가쓰미(실제는 비밀경찰)는 “연해주 거주 조선인은 약 17만 명으로 대개 농업에 종사하는데, 그중에 확실히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자는 약 1만 명”이라며 일본인에게 매우 위험한 곳이라고 말했을 정도다.(동아일보 1921년 12월 7일) 최근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중심가(오케얀스카야)에 위치한 옛 일본 총영사관 건물(현재는 러시아 지방법원)을 찾았다. 2층 규모의 석조건물 입구에는 일본의 상징인 국화 문양 돌조각이 선명했고 지하에는 여전히 감방시설이 있었다. 현지 안내를 맡은 박환 수원대 교수는 “이 지하 감방에서 숱한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이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불과 1km가량 떨어진 곳에 한국인의 집단거주지인 신한촌(新韓村)이 자리했다. 하바롭스크 거리로 명명된 이곳은 아무르만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산비탈 지대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이 처음 마을을 이룬 곳은 시내 중심가인 포그라니치나야(카레이스키·고려인) 거리의 개척리(開拓里)였다. 그런데 1911년 봄 러시아 당국은 장티푸스 근절을 핑계로 한인들을 신한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후 러시아 기병대 병영지로 사용됐던 개척리 일대는 현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비싼 상업지역이 됐다. 도심 한복판에서 변두리 언덕배기로 몰려난 한인들의 삶은 비참했다. 1914년 신한촌을 방문했던 춘원 이광수는 “해삼위 시가를 다 지나고 공동묘지도 지나서 바윗등에 굴 붙듯이 산등성이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나타났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한인들은 굴하지 않고 달동네 신한촌을 1만여 명이 거주하는 독립운동의 성지로 바꿨다. 한민회, 권업회, 대한광복군 정부, 한민학교, 대한교육청년연합회 등 주요 독립운동 단체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에 자극받은 신한촌 민회가 항일신문인 ‘한인신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러시아 3·1운동의 본거지 신한촌 1919년 러시아의 3·1만세운동도 이곳에서 점화됐다. 그해 3월 8일 고국에서 육로를 통해 넘어온 동포들에 의해 독립선언 소식이 전해졌다. 김하구(한인신보 주필 역임)는 당일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개최된 기독청년회에서 국내의 시위 소식을 알린 후 한국 독립을 선언했다. 고국 소식에 감동을 받은 참석자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어 연해주에서도 시위운동이 펼쳐질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삼일여학교 학생들은 태극기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3월 15일로 예정됐던 독립선언식과 가두시위는 일제의 압력을 받은 러시아 당국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해치는 일체의 행위를 엄금하겠다는 명령이 내려짐에 따라 수포로 돌아간다. 만세운동을 추진하던 신한촌 민회와 ‘대한국민의회’에 대해서도 폐쇄령이 내려졌다.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2월 25일 전로국내조선인대회에서 출범한 단체로, 해외에서 설립된 최초의 임시정부로 평가받고 있다.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와 러시아 정부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았다. 대한국민의회 회장 문창범은 3월 17일 오전 9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12km 떨어진 우수리스크(당시 니코리스크)의 동흥학교(코리사코프 거리) 앞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기습 발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지 않은 우수리스크에서 러시아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시베리아에 있던 미군은 이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본국에 보고했다. “조국으로부터 기쁜 소식을 들은 2000명가량의 한국인은 모여 만세를 부르며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무장한 30명 이상의 일본군이 출동해 단상에서 연설하던 류영낙을 체포했다. 그러나 군중이 저지해 류 씨를 되찾았다.” 한국인들의 거센 저항에 당황한 일제 헌병대는 결국 러시아에 강력한 단속을 요구했고, 러시아 당국은 군인들을 동원해 공포 50발을 발사하며 군중을 해산시켰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던 조선인 사범학교 학생 4명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우수리스크의 시위는 이후 본격적인 러시아 지역 만세운동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체포를 피한 문창범은 같은 날 오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 다시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이를 지지하는 한인 상점과 학교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오후 3시 한인 청년들이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을 찾아가 “일본 정부에 전달하라”며 대한국민의회 명의로 한글과 러시아어로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건넸다. 또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11개국 영사관과 러시아 관공서에도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오후 4시 신한촌에서는 축제가 펼쳐졌다.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건 가운데 대한국민의회 주최로 독립선언식이 거행됐다. 한인들은 큰길로 나아가 연설하고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이 러시아 관헌에게 제재를 요구하자 청년과 학생들이 집회 장소를 신한촌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로 옮겼다. 청년과 학생들은 오후 6시 해가 저물어 얼굴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둑해지자 자동차대(自動車隊)를 조직했다. 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자동차 3대와 마차 2대에 나눠 타고는 시내를 누비면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시위를 이어갔다.(독립신문 1920년 4월 8일) 오후 7시 반 러시아 관헌들은 시위를 막고 학생들을 체포한 뒤 신한촌에 내걸린 태극기를 모두 내리게 했다. 하지만 시위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다음 날인 3월 18일 한인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단행하고 신한촌에 집결하여 시위를 재개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에서 전개된 3·1운동은 이후 한인들이 살고 있는 연해주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한인 초기 정착지인 연추와 포시예트를 비롯해 니콜라옙스크, 스파스크, 라즈돌노예, 하바롭스크, 이르쿠츠크 등에서 수백 명의 한인이 모여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을 벌였다.(박환, ‘대한국민의회와 연해주지역 3·1운동의 전개’)○ 남북을 아우르는 항일운동기념탑 이듬해인 1920년 3월 1일 신한촌의 한민학교에서 성대한 잔치가 펼쳐졌다. 대한국민의회와 신한촌 민회가 주최하는 ‘3·1독립선언기념축하식’이었다. 연해주 각 지역에서 2만여 명의 한인이 모였고, 블라디보스토크 유력 인사들도 초대됐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각국 영사,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정부 대표 및 블라디보스토크시 위수사령관 등 러시아 관헌, 각 신문사 대표 등도 참가했다. 이날 축하식에서 독립을 위한 항일 무력 투쟁을 호소하는 다음과 같은 연설도 진행됐다. “대한의 독립은 피를 흘려야 할지니, 동포여 무력을 예비하라. 저 포악한 적과 최후의 전(戰)을 할 결심을 가지라.”(독립신문 1920년 3월 6일) 1년 전과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 것이다. 이는 그해 1월 일본군이 지원하던 블라디보스토크 백위파 정권(소비에트 정권의 반대세력)이 한인 독립운동에 우호적인 적군파(혁명파) 정권에 무너졌기에 가능했다. 일제는 행사를 막기 위해 무장군인을 출동시켰지만 러시아 혁명군이 그들을 막아섰다. 한인들은 신한촌 입구 길 양편에 붉은색 나무기둥을 세우고 윗부분을 솔가지로 장식한 ‘독립문’을 세웠다. 문 상단에는 ‘삼월일일 조선독립기념’이라는 문구도 새겨 넣었다. 현재 이 독립문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고, 독립문이 있던 자리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있는 소공원으로 바뀌었다. 김하구가 3·1만세운동을 촉구하고 3·1운동 1주년 행사를 치렀던 한민학교 자리에도 러시아인들이 사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상해임시정부 초대 총리 이동휘의 거주지에는 상점이 자리 잡고 있다. 다만 ‘신한촌 항일운동기념탑’과 ‘서울스카야(서울거리) 2A’라는 주소판 정도가 100년 전 신한촌의 뜨거웠던 추억을 알려줄 뿐이다. 기념탑은 세 개의 길고도 큰 비석이 중앙에 세워져 있고, 그 주위로 8개의 작은 돌비석이 에워싼 형태였다. 박 교수는 “세 개의 큰 비석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 거주 고려인을 의미하며, 8개의 작은 비석은 조선 8도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하나가 된 조국을 염원하는 기념탑이었다. ▼ 이준 열사-안중근 의사 거쳐 간 블라디보스토크역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종착지, 연해주-만주 항일투사들 이용한인 강제이주 눈물 어려… 홍범도 장군도 카자흐 끌려가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중심의 중앙혁명광장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역은 한국인들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1893년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구간이 개통되면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이 역은 세계 최장의 시베리아횡단열차(9334km)의 종착지로 유명하다. 또 연해주와 만주를 무대로 독립전쟁을 펼치던 항일투사들이 수시로 이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인연의 시작은 1907년. 헤이그 특사들이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 역사를 찾았다. ‘을사늑약(1905년)의 부당함과 일제의 침략상을 세계에 알리라’는 고종 황제의 밀명과 밀지를 가슴에 품은 이상설과 이준은 그해 5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열차를 탔다. 보름 만인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과 합류한 특사들은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해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도 이 역을 이용했다. 안중근은 그해 2월 7일(음력) 러시아령 한인 초기 정착지인 연추 하리(下里)에서 동지 12명과 함께 왼손 무명지를 자르고,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고 혈서(血書)를 쓴 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한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의 정착지인 개척리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이때 개척리 한인사회 지도자 최재형은 안중근에게 브라우닝 권총을 구해주는 등 거사를 지원했다. 마침내 10월 21일 오전 8시 50분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안중근은 동지 우덕순과 함께 권총을 가슴에 품고 거사를 실행했다. 이 밖에도 많은 무명의 독립투사가 블라디보스토크역을 이용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사의 마지막 장면도 이 역에서 펼쳐졌다. 1937년 스탈린이 실시한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영문도 모른 채 기차를 탄 한인들은 중앙아시아 등 러시아 각지로 흩어졌다. 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도 이때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갔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중앙혁명광장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상징이라면, 블라디보스토크역은 한인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꼽힌다”고 말했다.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1919년 4월 2일 전남 순천군(현 순천시) 낙안면 신기리 뒷산.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8명의 사내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우리는 같은 해 같은 월 같은 날에 죽자”고 약속한 뒤 ‘도란사(桃蘭社)’라는 결사체를 조직한다. ‘도란’은 중국 한나라 때 유비·관우·장비 3명이 했던 도원결의와 진나라 때 문사들의 모임인 난정(蘭亭)의 고사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으로, ‘뜻있는 유생들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에 목숨을 바치는 결의’를 의미한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 안호영(대한제국 시절 내관), 이병채(훈장) 등이 주축이 된 도란사 회원들은 이튿날인 4월 3일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서 이름을 딴 ‘이팔사(二八社)’라는 행동대도 결성한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위친계(爲親契·상부상조를 위한 친목모임)로 가장한 이팔사 대원은 33인 민족대표를 상징하는 33명으로 구성됐다.(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재판기록, 1919년 5월 2일) 이들은 효율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위해 이팔사 조직을 크게 3개 대대로 나누고, 산하에 소규모 조직인 ‘조’를 두는 등 군대식 체계도 갖췄다. 1대대가 일제 군경에 잡히면 2대대가 일정한 시차를 두고 시위를 벌이고, 뒤를 이어 3대대가 또 다른 만세운동을 펼치는 게릴라식 전술 체제였다.(낙안기미독립운동유적보존회, ‘낙안기미독립운동사’) 순천 만세운동은 이처럼 군대식 편성을 바탕으로 조직적인 시위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의 만세운동과 구별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일제와의 전투 경험이다. 문인향(文人鄕)이라고 불릴 만큼 유림적인 전통이 강했던 순천군 낙안지역에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부터 의병활동 등 항일무력투쟁에 가담한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시위를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이끌어갔다. 또 다른 요인은 실패 경험이다. 순천은 경성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3월 초부터 시위계획을 세웠지만 번번이 일제 경찰의 감시망에 걸렸다. 3월 2일 순천 천도교도들이 주도하던 시위계획이 무산됐고, 3월 16일 기독교도들이 순천읍 난봉산에 모여 만세를 부르려던 계획도 헌병 분견대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순천에서 6차례의 시위, 1500명의 참여, 8명 피살, 3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모두 도란사와 이팔사 등에 의한 조직적인 만세운동이 이끌어낸 결과였다. ○ 이팔사 대원들의 전술 순천의 본격적인 만세운동은 이팔사 대원 전평규(당시 45세)가 이끈 1대대로부터 시작된다. 4월 9일 벌교면 장좌리 아래장터(현재는 보성군)에 모인 이팔사 대원들은 장이 서자마자 기습시위를 펼쳤다. 전평규가 안용갑, 안응섭 등과 함께 ‘대한독립기’라고 쓴 종이를 흔들며 장꾼들을 향해 “모두들 우리와 같이 조선독립을 절규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려는가”라면서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군중이 호응하자 장터는 순식간에 시위장으로 바뀌었다. 이에 일제 헌병대가 무력진압에 나섰다. 이날 이팔사 대원 전평규, 안덕환 등 14명이 체포됐고, 부상자 여럿이 발생했다. 1대대의 시위 나흘 뒤인 4월 13일(낙안 장날) 2대대의 만세운동이 뒤를 이었다. 2대대는 낙안읍내(현 낙안읍성 민속마을) 인근의 하송리 사람들이 중심이 됐다. 2대대를 이끈 이팔사 대원 김종주는 1912년 임병찬이 주도한 대한독립의군부의 호남유사(湖南有司·의병대장)를 맡는 등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뛰어든 지사였다. 이날 오후 2시 김종주와 유흥주는 태극기와 ‘대한독립기’라고 쓴 2개의 대형 깃발을 준비한 뒤 낙안읍성 서문 밖에서부터 시위대를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성내로 진입했다. 서문을 경비하다 제지하려던 일본군 2명은 장꾼까지 가세한 시위대의 맹렬한 기세에 물러섰다. 이때 순찰 중이던 일제 헌병과 보병 6명이 총검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 맨 앞에 있던 김종주가 “찔러 죽이려면 죽여보아라”고 소리치며 가슴을 열어젖혔다. 일제 군경이 주춤대자 시위대 일부가 군인들에게 달려들어 총검을 빼앗으려 했다. 김종주도 일제 헌병의 권총을 뺏을 목적으로 격렬한 몸싸움을 했다. 이 과정에서 김종주는 일제의 칼날에 양손을 다치며 쓰러졌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아버지(김종주)를 목격한 아들(선재)과 시위대 일부도 일제 군경에 달려들었다가 군도(軍刀)에 상처를 입는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4월 13일 오후 2시 10분, 낙안면민 약 150명은 구한국기를 앞세우고 낙안읍내 시장에 들어왔는데 헌병과 보병들이 제지했음에도 극력 저항하므로 총검을 사용해 해산시켰는데, 시위자 중 4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수모자(首謀者) 5명을 체포하고 해산시켰다.”(‘3·1운동 일차보고’) 낙안 3·1운동애국지사유족회 배현진 회장(65)은 낙안읍내 시위가 펼쳐졌던 낙안읍성민속마을에서 “객사(복원 전에는 낙안초등학교) 바로 앞쪽 ‘난전 음식점’ 일대가 당시 낙안장이 열린 곳이고 이곳에서 만세운동이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현재 이곳에는 새로 단장된 ‘낙안 3·1독립운동기념탑’과 만세 시위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당시를 기리고 있었다. 배 회장은 “해마다 이곳에서 삼일절 기념식과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개최했는데(올해는 순천시내에서 개최) 그날만 되면 기온이 뚝 떨어졌다”며 “당시 낙안 독립운동가들의 처절하고 치열한 마음을 전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 혈서로 그린 태극기 낙안읍성의 2대대 시위에 이어 다음 날인 4월 14일 3대대가 주도하는 3차 시위가 진행됐다. 장소는 1차 시위가 펼쳐진 벌교 장터였다. 1대대의 1차 시위를 경험한 데다 전날의 낙안읍성 시위로 독립만세의 열기는 달아올라 있었다. 안용갑이 이끈 3차 시위에는 1차 시위 때 검거를 피한 이팔사 대원들과 자발적으로 동참한 신기리 사람들이 주도했다. 이팔사 대원 안규삼은 왼손 무명지를 베어 흐르는 피로 태극기를 그리면서 거사의 각오를 다졌다.(안상규, 안응섭 등 판결문) 오후 3시 ‘대한독립기’와 피로 그린 태극기를 앞세우며 만세 시위가 시작됐다. ‘순천군 동초면 신기리 입(立)’이란 글씨가 덧씌워진 ‘혈서(血書) 태극기’가 대나무로 만든 장대에 게양돼 펄럭이며 나타나자 벌교시장은 감격과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시위 군중과 진압에 나선 일제 헌병대 간에 몸싸움도 펼쳐졌다. 태극기를 든 안규삼이 일제 헌병들에게 체포되자 안규진이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다시 주워들어 만세를 불렀다. 안규진이 다시 붙잡히자 안운수(안은수)가 주워 들었고, 안운수가 체포되자 안상규가 뒤를 이어 태극기를 들었다. 이런 식으로 시위대는 일제 군경의 진압에 굴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전진을 계속했다. 이날 시위는 일제의 강제진압도 효과가 없을 정도로 활발하게 전개됐다. 시위대는 일제의 무력 진압을 뚫고 벌교에 위치한 헌병분견대 앞까지 진출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구금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날 밤 9시까지 이어진 봉화 시위 때에도 일제 헌병과의 무력 충돌이 펼쳐졌다. 며칠 후 산상 시위 때에는 일제 헌병대가 산 정상을 향해 대포까지 쏘았다. 이는 당시 시위가 이미 전쟁의 양상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배 회장은 벌교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신기리에서 “낙안읍성과 벌교장터의 중간 지점에 자리 잡은 이곳은 죽산 안씨 등이 거주하면서 유림 전통이 강했고, 최익현 의병진에 가담하는 등 항일정신이 투철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은 신기리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 거의 사라진 데다 3·1운동을 기념하는 표지석도 없어 주민들조차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한편 이팔사 대원들의 3차례 대규모 시위에 영향을 준 사건이 순천읍내에서 있었다. 1919년 4월 7일 순천읍 장날에 유생 박항래(당시 58세)가 순천시내의 남문 문루인 연자루에 올라 “현재 경향 각지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으므로 순천에도 그와 같이 만세를 외치자”고 연설한 후 단독으로 만세를 외치다 일경에 체포된 일이다. 그는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그해 11월 3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현지 향토사학자들은 “그의 외로운 함성이 이후 낙안과 벌교 등에서 펼쳐진 대규모 시위에 영향을 줬다”고 해석했다.▼ ‘독립의군부’에 가담했던 인사들 호남의 만세운동 주도 ▼최익현의 제자 임병찬 격문 발표, 호남 의병-유생들 적극적 호응3·1운동 뿌리는 의병운동인 셈순천지역의 만세운동을 이끈 이팔사 등 결사체 대원들은 대다수가 유생이자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특히 김종주 이병채 안주환 안규휴 등 대원들은 면암 최익현을 필두로 한 전남의병 활동에 앞장섰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후에는 군대식 비밀결사체인 ‘대한독립의군부’(1912년 결성·이하 독립의군부)의 항일투쟁에 가담했다. 이들은 독립의군부의 군대식 편제를 응용해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이끌었다. 호남지역에서 결성된 독립의군부는 전북 옥구(현 군산) 출신의 유학자 임병찬(낙안군수 지냄·사진)이 1912년 고종의 비밀문서를 받고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동지를 모으면서 시작됐다. 임병찬은 1906년 스승 최익현의 지휘를 받아 의병 활동을 벌이다 붙잡힌 뒤 일본 쓰시마(對馬島)에서 귀양살이까지 했던 의병장이다. 임병찬이 격문을 발표하자 호남지역 의병과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1913년 2월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겸 사령장관에 임명된 뒤 전국 규모의 조직을 짰다. 독립의군부는 중앙원수부(中央元帥府)에 병마도총장(兵馬都總長)과 참모총약장(參謀總約長)을 두어 지휘부를 구성하고 서울·강화·개성·수원·광주에 5영(營)을 설치했다. 각 도·부·군 단위마다 지역별 대표도 선정했다. 독립의군부는 결성 당시 유생과 대한제국 전직 관료들로 이뤄져 왕정복고를 목표로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연대하는 비밀결사체로 성격이 바뀌었다. 독립의군부 인사들은 국내에서 대한교민광선회를 결성하고, 국외지역인 서간도에서는 광제회를 결성해 동지 규합과 군자금 모금을 주도했다. 국권반환요구서 제출 및 전 국민 투서 운동 등과 같은 다양한 항일투쟁도 준비했다. 하지만 1914년 5월 23일 군자금 모금 과정에서 조직이 발각돼 임병찬을 비롯한 많은 대원들이 붙잡혔다. 임병찬은 체포된 뒤 1916년 거문도 유배지에서 병을 얻어 순국했다. 이로 인해 항일의병을 일으켜 거사를 계획하던 유림과 의병세력은 큰 타격을 입고 지하로 잠적했다. 그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의군부에 가담했던 호남지역 인사 상당수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3·1운동을 의병운동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순천=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조선의 현 상황이 유유히 천렵이나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미 남원, 담양의 각 보통학교 생도 등은 솔선하여 조선 독립을 부르짖고 있는데, 곡성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평온한 것은 너희들에게 애국심이 없기 때문이다. 썩어빠진 곡성 청년들은 이러한 용기가 없을 것이다.”(신태윤, 정내성 판결문) 1919년 3월 24일 전남 곡성군 곡성보통학교 훈도(교사) 신태윤(1884∼1961)은 학교 숙직실 뒤쪽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끓여 먹던 졸업생과 재학생들에게 이같이 꾸짖었다. 실제로 당시 상황은 그만큼 긴박했다. 보름 전인 3월 10일 광주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시위가 이웃한 담양, 나주, 장성 등지로 들불처럼 확산됐고, 밤을 이용한 산상 봉화 시위도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스승의 말에 자극받은 정내성, 김중호, 양성만, 박수창, 김경석, 김기섭, 김태수 등 청년들은 “곡성 생도들도 그 정도의 일은 할 수 있다”며 만세 운동에 앞장서기로 한다. 이튿날인 25일 신태윤의 애제자인 정내성이 ‘우리 곡성의 제군이여! 가슴에 있는 의지를 잃지 말자. 우리도 대한 사람이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분기하라! 우리들도 제군과 함께 궐기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격문 20여 장을 작성한다. 그는 이어 26일 자신의 집에서 만세운동을 위한 비밀 모임을 연다. 이 자리에 참석한 신태윤은 “독립운동 계획은 비밀리에 철저히 세워야 한다. 다음 장날에 거사하는 것이 좋겠다”고 거사 계획을 밝힌다. 이에 신태윤의 제자들은 태극기를 제작하는 준비 작업에 나섰다. 신태윤은 3·1운동을 독려하는 동시에 역사의식도 강조했다. 그는 담양보통학교 졸업생 김중호에게 조선 개국 이래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한 ‘조선역사’를 건넨 뒤 “그대들이 조선을 독립시키고자 한다면 먼저 조선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우선 이것을 서당에 가져다 두면 내가 가서 가르쳐 주겠다”고 말한다. 신태윤은 이전부터 수업이 끝난 뒤 별도로 마련된 서당에서 원하는 학생과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길러주는 역사교육을 진행해왔다. 학교에서는 조선 역사를 가르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3월 29일 곡성 장날 신태윤은 태극기를 들고 거사를 시작했다. 정내성 등 곡성보통학교 졸업생과 재학생 수십 명이 태극기를 들고 스승의 뒤를 따랐다. 학생 시위대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며 시장을 돌자 장에 모인 주민들이 따라붙었다. 시위 규모가 커지자 놀란 일제 경찰은 무력 진압에 나섰고 신태윤과 정내성, 박수창, 김경석, 김중호 등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곡성의 만세운동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 때문에 몇 차례의 산발적 시위로 끝나고 만다. 하지만 곡성 사람들은 항일의병 활동의 중심지로서 많은 희생을 치렀던 과거를 딛고 일어나 만세운동을 펼침으로써 절의지향(節義之鄕·충절의 고향)의 명성을 이어갔다. ○ 조상 사당으로 위장한 단군전 이달 2일 곡성 3·1운동이 벌어졌던 현장을 찾았다. 3·1운동을 주도한 곡성보통학교(현 천주교곡성성당 자리)와 시위 장소인 옛 장터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곡성군 곡성읍 봉황대에 조성된 몇 개의 기념물이 그날의 역사를 간직할 뿐이었다. 3·1공원으로도 불리는 봉황대에는 곡성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곡성3·1운동기념탑’과 신태윤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백당기념관,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단군전 등 건축물이 삼각형 구도로 자리 잡고 있다. 봉황대를 안내한 김학근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84)은 “백당(신태윤의 호)은 3·1만세운동 당시 곡성 사람들의 독립 정신에 불을 지피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3·1운동 기념탑과 함께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조성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단군전에 대해서 “백당은 1910년 나라를 잃게 되자 국운과 민족정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단군전을 조성하는 등 한평생 단군 숭모운동을 벌여왔다”고 덧붙였다. 1950년대에 신태윤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김 위원은 “백당은 광복 후에도 ‘우리의 국조(國祖) 단군을 모시고 애국, 애족, 애향 운동을 해야 한다’면서 늘 주체 의식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민족정기와 바른 역사를 주창한 신태윤이 단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경성 한성사범학교에 재학(1906∼1908년)하던 때다. 그는 당시 주시경, 어윤적, 이능화 등 애국지사들의 민족계몽 교육에 큰 감명을 받고, 단군을 받드는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과 인연을 맺는다. 이현익의 ‘대종교인과 독립운동연원’에는 “백당 신태윤 선생은 홍암 대종사(나철)의 유훈을 받고 국내 비밀사원으로 활동했다”고 기록돼 있다. 대종교 비밀결사대원이었던 신태윤은 곡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1914년 학교 인근인 삼인동에 초가로 단군묘(檀君廟)를 세운다. 선조의 사당을 짓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단군의 위패인 ‘단조홍성제(檀祖弘聖帝)’를 모셨다. 당시는 일제가 반일 및 불온한 사상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단군 신앙을 철저히 탄압하던 시대였다. 현재의 봉황대 단군전은 신태윤이 3·1운동으로 징역살이를 하다가 출옥한 뒤 삼인동의 단군사당을 옮겨와 1931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봉황대 단군전은 남한지역의 단군사당으로는 유일하게 등록문화재(제228호·2005년)로 지정돼 있다. 김 위원은 “현재도 백당 선생의 뜻을 받들어 곡성지역 유림들 중심으로 매년 어천절(3월 15일)과 개천절(10월 3일)에 춘추봉제(春秋奉祭)를 올리고 있다”면서 “국내에서 단군과 역사 정신을 기치로 삼아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는 백당이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 ‘황새가 빼앗은 학의 둥지’ 신태윤의 독립운동은 곡성과 이웃한 담양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가 3월 29일 곡성 만세운동으로 체포돼 광주로 이송될 때였다. 곡성군 옥과면 주민들뿐만 아니라 담양군 창평면 사람들이 도로에 나와 울부짖으며 애통해할 정도로 신태윤은 곡성과 담양군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출소한 뒤 1928년 담양의 지곡학교에서 근무하며 지곡리 만수동에 단군전을 세우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담양이 고향인 신태윤은 어린 시절 담양군 창평면 창흥의숙(창흥학교·창평공립보통학교·현재는 창평초등학교)을 다니며 신학문을 접했다. 또 신학문과 민족 계몽교육에 일찌감치 눈을 뜬 담양은 곡성보다 먼저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었다. 담양에서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청년과 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담양보통학교 학생 임기정은 김길호(4학년생) 김홍섭(3학년생) 등과 함께 학생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3월 17일 조선인을 학으로, 일본인을 황새에 빗댄 격문을 썼다. ‘황새가 날아와 학의 둥지를 빼앗아 1700여만의 학들이 비탄에 잠겼으나 하늘은 이를 그대로 방임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황새를 쫓아낼 기회가 있을 것이다.’(정기환 외 판결문) 임기정은 격문 끝에 붉은 물감으로 ‘금일 시장에서 호만세(呼萬歲·만세를 외치자)’라는 글귀를 넣었다. 거사일인 담양읍 장날(3월 18일)이 밝았다. 그런데 이날 오전 5시경 담양시장 십자로 다리 밑에 숨겨둔 태극기 150장이 발각됐다. 만세운동 주도자들은 담양 헌병분견대에 체포돼 시위 자체가 물거품이 돼버릴 상황에까지 처했다. 하지만 담양 청년과 학생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김길호, 김홍섭 등은 그대로 시장으로 뛰쳐나가 만세를 외쳤다.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이 그 뒤를 따랐고, 시내를 행진했다. 담양의 만세운동 열기는 이듬해인 1920년에도 이어졌다. 그해 1월 창평면에서 한익수(16세) 조보근(15세) 등이 10여 명을 모아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특히 신태윤이 공부했던 창평보통학교(이전 창흥의숙)의 후배인 한익수는 15명으로 구성된 창평소년회 회장을 맡아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20년 1월 23일 이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가’를 합창하며 창평장터와 창평리 신작로를 행진했다. 이들은 조선 독립만세를 외쳐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민심을 동요케 하여 독립의 기세를 올려야만 외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을 수 있다고 판단해 열렬히 독립만세를 외쳤다.(한익수 등 판결문) 주민들은 이들의 뒤를 따랐다. 1919년의 3·1만세운동 1년 후, 시위를 주도한 어린 소년들의 기개는 일경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드높았다.곡성·담양=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단군은 우리 민족의 종조(宗祖)이시오, 우리 근역(槿域)에 건국하신 제일인(第一人)이시오, 가장 신성하신 대위인(大偉人)이시라.…(중략)…숭엄하신 단군존(檀君尊)○을 구하야 독자와 공히 배(拜)하려고 자(玆)에 본사는 현상(懸賞)하야 감히 존(尊)○○을 모집하오니 강호형제(江湖兄弟)는 응모하시오.’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사는 그해 4월 11일자에 ‘단군영정 현상모집(檀君影幀 懸賞募集)’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내용의 사고를 실었다. 또 이 사고를 5월 말까지 한 달여 기간에 10여 차례에 걸쳐 게재하며 국민적인 동참을 호소했다. ‘한국의 단군 사묘’의 저자 윤한주 박사는 “3·1운동 이후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단군 영정을 모집하거나 단군 기원(紀元)을 사용하는 등 국조(國祖·나라의 조상)로 단군을 모시자는 인식이 온 국민에게 확산됐다”고 말했다. 일제의 눈을 피해 단군 사묘(祀廟·영정이나 위패 등을 모신 전각)에서 독립정신을 일깨우는 모임도 전국 곳곳에서 진행됐다. 윤한주 박사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는 46곳의 단군 사묘가 설립돼 있다. 1910년 한일강제병탄 이후 설립돼 남아 있는 단군전으로는 충남 서산의 와우리 단군전(1913년)에 이어 곡성 단군전이 두 번째다. 당시에 단군 사묘 설립은 사대주의를 배격하고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하나로 해석됐다. 실제로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은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자 노력하면서 단군을 정신적 기치(旗幟)로 삼는 일이 많았다. 이런 이유에서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단군이 임금이 되어 나라를 세운 날인 개천절(10월 3일)을 ‘건국기원절’로 정해 기념식을 치르기도 했다(동아일보 1924년 11월 9일자). 반면 일제는 단군을 구심점으로 삼아 한민족이 결속되는 일을 두려워했다.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단군은 황당한 전설이라고 왜곡하기 시작했고, 단군 유적지를 파괴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일제는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한국인의 정신까지 식민지화하려 애썼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민족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을 가로질러 흐르는 한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주동산. 경기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에 위치한 이곳을 이달 7일 찾았다. 차량 내비게이션의 도움 없이는 찾기 힘든 정주동산 입구에는 높이 3.5m의 탑 3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3·1운동을 이끈 33인 민족대표 가운데 3명의 추모비다. ‘겨레의 스승 남강 이승훈 선생’, ‘순국선열 순교자 일재 김병조 선생’, ‘애국선열 춘헌 이명룡 선생’이 그 주인공들. 정주동산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 실향민들이 조성한 사설 공원묘지다. 기자를 안내한 최근 정주동산 이사장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북한과 마주한 이곳에 묘지공원을 조성한 뒤 정주가 고향인 민족대표 세 분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우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제에 치열하게 맞섰던 정주 3·1운동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매년 3월 1일 정주 출신들은 이곳에서 기념행사를 연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정주지역 출신들의 항일과 독립 정신은 남달랐다. 1900년대 초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대항해 의병활동과 국채보상운동 등을 활발히 전개했고,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직후인 1911년 발생한 ‘105인 사건’(데라우치 총독 암살 사건)에서도 선천 다음으로 많은 34명의 기소자(전체 123명)를 냈다. 정주의 만세운동은 그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만세운동의 점화 정주의 만세운동은 3·1운동 첫날에 시작되지 못했다. 바로 이웃한 평북 의주와 선천 등지에서는 3월 1일 만세운동이 펼쳐졌지만 정주는 일제 군경의 사전 단속에 막혔기 때문이다.(‘조선소요사건일람표’, 1919년 4월 30일 작성) 하지만 늦게 점화된 정주의 만세운동은 다른 지역들보다 훨씬 치열했다. 3, 4월에 모두 14차례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많은 희생자를 냈다. 공식적인 정주의 첫 만세운동은 3월 5일 정주읍에서 일어났다. 이날 오후 1시 30분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연합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읍내를 돌다가 해산했다. 아쉽게도 이날 시위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한국민족운동사료·3·1운동편’) 만세운동이 점화된 뒤 이를 확산시키려는 민족운동 세력과 진압하려는 일제 관헌들 간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3월 6일 오산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사용할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보관하다 일본 군경에 발각돼 구속됐고, 곽산면의 미곡상(米穀商) 김성근이 ‘불온문서’(독립선언서) 70장을 곽산면 시장 점포들에 배포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대규모 만세운동이 꽃을 피운 곳은 곽산면 곽산읍이다. 3월 6일 오후 2시 강훈채(사립 영창학교 교사) 등이 이끄는 254명의 영창학교 학생과 100여 명의 주민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기를 앞세우며 곽산 읍내로 진출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등이 가세했고, 시위대 규모는 삽시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천도교 곽산교구장인 김경함이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한 뒤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읍내를 누비고 다녔다. 이에 자극받은 공립보통학교 학생들도 만세운동에 가세했다. 이들은 일제 관사나 학교 담장, 처마 등에 태극기를 꽂았다. 이날 시위는 오후 4시까지 계속됐다. 시간이 갈수록 시위대 규모가 커지고 열기가 뜨거워지자 일제는 진압을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남녀 14명이 체포됐다. 경찰보조원이 당시 50세가 넘은 박지협을 때려 숨지게 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후 정주지역의 만세운동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물밑 작업은 계속되고 있었다. 정주에서 동학 대접주를 지냈던 천도교인 김진팔과 정주 교구장 최석일, 곽산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곽산 교구장 김경함 등은 3월 31일 정주 장날을 이용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교구직원 대신 일반 신자였던 김석보, 김공선, 방열경 등 세 사람에게 연락과 군중 동원 책임을 맡기며 거사 준비를 진행했다.○ ‘굴목대장’ 김석보 김석보는 이 과정에서 ‘굴목대장(掘目大將)’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당시 40대로 기골이 장대했던 김석보가 서면과 해산면 교인들에게 거사 계획을 알려준 뒤 읍내로 돌아오던 중 일제 헌병의 검문에 걸렸다. 조선인 헌병보조원이 김석보의 솜바지 속에서 독립선언서 1장을 발견하고 그를 체포하려 했다. 김석보는 “같은 동포끼리 왜 이러느냐”며 풀어줄 것을 사정했지만 통하지 않자 주먹으로 얼굴을 휘갈긴 뒤 눈알을 뽑았다. 그는 이어 “너는 일본의 사냥개가 아니냐. 나는 사람의 눈알을 뽑은 것이 아니고 개의 눈알을 뽑은 것이다”라고 호통을 쳤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눈알을 뽑은 대장부라는 뜻에서 그를 ‘굴목대장’으로 불렀다.(김석보의 증언, ‘정주군지’) 거사일인 3월 31일 정주읍 장날이 되자 인근 지역 주민들이 정주읍성 동·서·남문 등을 이용해 몰려들었다. 한곳에 모인 시위대는 오후 1시 30분부터 읍내 진출을 시도했다. 이들의 만세 함성은 양고(洋鼓), 나팔소리 등과 어울려 천지를 진동시켰다. 읍내의 주민 100여 명도 이에 호응했다. 이때 모여든 군중 수는 무려 2만5000명이 넘었다. 하지만 일제는 3500여 명으로 축소해 기록했다. 당시는 일제가 보병 77연대 소속 군인들을 앞세워 평안도 곳곳에서 민간인들을 상대로 잔인한 살육을 감행했다는 흉흉한 소식이 전해진 뒤였다. 이에 시위대는 ‘대한국독립단’ 기를 앞세우고 도끼와 낫 등을 들고서 만세를 외치며 정주읍내로 진입했다. 목숨을 내건 셈이었다. 시위는 격렬하게 진행됐다. 일본인 거리이던 정주 우편국 앞에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독립만세 함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일제 헌병의 저지에 맞서 군중은 투석으로 저항했다. 충돌은 군청에서도 발생했다. 헌병대는 일본인 민간 소방대의 지원을 받으며 실탄 사격까지 감행하며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일제 헌병은 선두에서 태극기를 높이 흔들고 만세를 외치던 최석일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태극기를 쥐고 있던 그의 오른팔이 잘려 나갔다. 최석일은 떨어진 태극기를 왼손으로 주워 들고 다시 만세를 불렀다. 헌병은 왼팔마저 칼로 내리쳤다. 최석일은 양팔을 다 잃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제 헌병은 그의 목을 향해 칼날을 드밀었고, 최석일은 현장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바로 뒤에 서서 행진하던 김사걸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 김사걸은 최석일이 떨어뜨린 태극기를 주워 들고 다시 앞장서 나아갔다. 헌병 보조원이 쇠갈고리를 들고 달려들어 그의 배를 찌른 뒤 끌고 다녔고, 일제 헌병은 그를 향해 총탄을 발사했다. 김사걸도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무차별 진압에 정주읍 시가는 붉은 피로 물들었고, 이 과정에서 28명이 사망하고 99명이 부상을 입었다. 모씨 일가족(모신녀·모원봉·모원빈) 세 명도 현장에서 숨졌다. 당시 정주 사람들은 시산혈해(屍山血海·시신이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루다) 광경을 보고, 조선시대 ‘홍경래의 난’ 이후 가장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고 말했다.(‘정주군지’) 비슷한 시각 동주면 삼리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천도교인 박일경 등의 주도로 600여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시위대는 면 서기와 직원 2명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고, 면사무소에 비치된 각종 문서와 기구를 불태워버렸다. 이후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는 총격을 앞세워 시위를 탄압했다. 이때 동원된 일제 소방대원들은 들개를 때려잡을 때 사용하는 쇠갈고리를 휘둘러 수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했고, 일제 엽총사냥꾼들은 정주읍을 향해 오는 시위대를 향해 짐승을 사냥하듯 사격을 했다. 거리가 피바다를 이룰 정도로 시위대의 피해는 막심했다. 일제의 발포로 모두 12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독립신문, ‘정주군 독립운동실기’ 1921년 3월 26일자) 격렬한 만세운동 이후 일제는 학교, 교회 등을 불태우며 보복을 단행했다. 일제 헌병들은 4월 2일 새벽 천도교 정주교구 24칸 건물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그날 밤에는 용동 오산학교와 기숙사, 용동교회 등에도 불을 놓았다. 4월 10일 오전 6시경에는 읍내 기독교 정주교회당을, 25일에는 곽산교회당을 불태워버렸다. 일제는 방화 사건들이 모두 3·1운동을 반대하는 조선인이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는 거짓 보고와 함께 사건 자체를 덮어버렸다.▼ 항일로 이름난 오산학교 일제가 불태워… “재건하라” 전국서 성금 ▼이승훈, 안창호 만난뒤 학교 설립… 정주 만세운동과 운명 함께해일제는 정주 3·1만세운동의 배후로 오산학교를 지목하고 학교를 불태워버렸다. 실제로 오산학교는 정주의 만세운동과 운명을 함께했다. 1919년 3월 2일 오산학교 교사 박기준과 심재덕이 학생 및 기독교인 80여 명을 모아놓고 만세운동 참여를 독려했고, 만세운동 기간에 학생들은 독립선언서 제작과 배포 등에 앞장섰다. 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3월 31일에는 정주읍 시위와는 별도로 갈산면에 위치한 오산학교 교직원과 용동교회 신도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고읍역까지 진출하며 만세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뜨거웠던 오산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만세운동은 학교의 설립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오산학교는 1907년 12월 민족대표 33인 중 핵심 인물인 이승훈이 도산 안창호를 만난 뒤 본격적으로 교육사업에 뛰어들면서 세운 곳이다. 민족교육을 목표로 설립된 학교였기에 일본어가 국어(國語)로 인정받던 일제강점기에도 학생들은 한국어와 한국사를 배웠다. 그 결과 학생 대부분이 일본어를 잘 할 줄 몰랐다.(두고 온 모교, 정주 오산학교·‘북한(1975년 6월호)’) 학교를 이끌어간 인물들도 쟁쟁하다. 조만식 류영모 홍명희 김성환 주기용 등 당대의 명망가들이 교장을 맡았고, 여준 서진순 이광수 염상섭 김억 이상정 진연근 이윤재 등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학생들을 지도했다. ‘전국적으로 항일학교로 이름난 오산학교가 일제에 의해 전소되자 학교 재건을 위한 성금이 모아졌다’는 동아일보의 기사(1920년 9월 1일자)도 있다. 동아일보는 ‘오산교의 서광’이란 제목으로 “정주 오산학교에서 만세 소요 때에 교실이 불에 타고 교사들도 체포를 당한 사람이 많이 있어 일시 동안은 상학을 중지하였다가 유지인사 김기종 씨가 일만 원을 기부하고 동교 졸업생 편에서 일만 원과 학부형 편에서 일만 원을 기부하여 동교는 일칭 더 충실하게 되어는 가는 중이며, 이 소식에 여러 인사들이 기부에 동참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1923년 각지의 성금으로 다시 세워진 오산학교는 남북 분단 후 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오산고등학교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1919년) 3월 초순 이 지역 사람들이 독립을 외치고 난 후 56명이 헌병대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곳으로 갔다. 그들이 헌병대 안으로 들어서자 대문이 굳게 닫혔다. 헌병들이 담 위로 올라가더니 들어왔던 사람들 모두를 쏘아 죽였다. 그러고는 내려와서 죽은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총검으로 다시 찔러 죽였다. 53명이 그곳에서 학살당했고, 나머지 세 사람은 나중에 그 주검의 더미에서 기어 나와 탈출하였다. 그들이 계속 살아 있는지 여부는 알려진 바 없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한 여성 기독교인이 며칠에 걸쳐 여행한 끝에 그의 외국인 친구에게 위의 사실을 전해 주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재한 선교사 보고 문건) 미국인 선교사 모펫 등이 본국에 보고한 이 문건은 현장에 있던 여러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문제의 사건은 1919년 3월 10일 대동강이 발원(發源)하는 산간 지역인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발생했다. 만세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에 일제가 저지른 집단학살 만행 중 대표적인 게 ‘제암리 사건’이다. 1919년 4월 15일 일제는 경기 수원군 제암리 예배당에 23명을 가둬놓은 뒤 건물에 불을 지르고,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 사격을 가해 몰살시켰다. 이 사건은 스코필드 등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외부세계에 알려졌다. 그런데 이보다 한 달여 앞선 시점에 일제는 맹산에서 비슷한 집단 학살사건을 자행한 셈이다. ‘북한판 제암리 사건’이라 불릴 맹산 학살의 피해 규모는 제암리보다 컸다. 사망자도 제암리의 배가 넘는 54명이나 된다. 선교사의 보고보다 1명이 더 많은데, 51명은 현장에서 죽고, 3명은 부상을 입고 도망하던 중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38식 보병총과 권총 등으로 무장한 일제 군인과 헌병들은 모두 66발의 실탄을 쏴댔다.(‘조선소요사건의 사상수 건보고’, 1919년 9월 29일) 맹산 사건은 일제가 3·1운동 초기부터 만세운동 참여자들에게 조준사격을 가했음을 보여준다. 또 3·1운동 당시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인명 피해가 컸던 사건이다. 하지만 남북이 분단되면서 그동안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 천도교 맹산 교구 맹산의 만세운동은 천도교인들이 주도했다. 천도교 맹산교구의 원로 지도자 방기창은 경성의 천도교 중앙총부를 왕래하다가 천도교가 주축이 돼 만세운동을 벌일 것이라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방기창은 맹산 지역 천도교인으로는 유일하게 천도교 교주 손병희가 직접 챙기는 ‘봉황각 수련’에 참여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던 인물이다. 경성의 천도교 지도부는 3월 1일 낮 12시에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하고 이 사실을 각 교구에 통보한다. 당시 경성에 있던 방기창은 소식을 접하자마자 맹산으로 귀향한 뒤 맹산교구 내 각 전교실에 이를 알린다. 천도교가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미리 인쇄된 독립선언서(최종 완성본은 아닌 것으로 추정)도 그해 2월 24일 맹산 교구에 전달됐다.(박연수 증언, ‘맹산교구의 만세운동·신인간 1989년 3월호’) 맹산의 만세운동은 공식적으로는 3월 6일에 발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천도교 중앙총부의 지령에 따라 3월 1일 낮 12시에 시작됐다. 당시 보통학교 2학년생 김득홍(1906년생)은 “(3월 1일에) 55명의 천도교도가 박창도를 앞세우고 만세를 불렀다”면서 “학교 수업 중에 시장 쪽에서 만세 소리가 들려오더니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갔다”고 증언했다. 또 “이튿날인 2일 낮 12시에도 천도교 청년들로 구성된 55명이 또다시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헌병과 경찰의 제지로 해산했다”고 덧붙였다.(김득홍 증언, 신인간 1989년 3월호) 이렇게 시작된 맹산의 만세운동은 장날인 3월 6일 규모를 대대적으로 키운다. 맹산교구장 문병로, 방기창, 정덕화, 김치송, 박창도, 이관국, 방진항 등 천도교 간부들이 5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맹산면 소재지에서 독립선언서를 공식 배포하고 만세를 외쳤다. 이에 수백 명의 군중이 합세했다. 이날 시위는 출동한 일제 헌병들에 의해 강제 중단된다. 하지만 만세운동의 열기는 꺾이지 않았다. 밤이 되자 시위대는 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맹산군수와 맹산 헌병분견소가 해산을 종용했지만 시위는 이튿날에도 계속됐고, 인근 지역으로 들불처럼 확산됐다. 3월 9일에는 지방 촌락의 교인들도 맹산읍내에 모여 만세를 외쳤다. 기독교인들이 가세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더 커지고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의도된 학살 진압에 한계를 느낀 맹산 헌병분견소장은 인근 덕천 수비대에 지원을 요청한다. 맹산 덕천 등 평남 지역을 관할하는 일본군 보병 제77연대는 이노우에(井上) 중위와 10명의 병력을 긴급히 파견한다. 이들은 3월 9일, 맹산 바로 북쪽에 위치한 영원군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천도교인들을 총으로 쏘아 이미 15명의 사망자와 38명의 부상자를 낼 정도로 성품이 포악했다. 3월 10일 오전 9시 20분, 이들이 맹산에 들이닥쳤다. 맹산 헌병분견소는 천도교인 100여 명이 이날 오후 3시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벌인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사전에 진압하기 위해 주동자 검거에 나섰다. 오후 2시 천도교인 100여 명을 맹산공립보통학교 앞에 집합시킨 뒤 해산을 명하고 주동자 4명을 헌병분견소로 잡아가려 했다. 교인들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결국 5명이 분견소로 끌려가고 만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김덕홍은 이같이 증언했다. “(맹산 헌병분견소에 구인된) 박창도가 증파된 완전무장 군인들의 철수를 요구하자 맹산 헌병분견소장 사다케(佐竹)가 욕설을 퍼부었고, 이에 박창도가 의자로 헌병을 내려쳤다.”(‘맹산교구의 만세운동·신인간 1989년 3월호’) ‘맹산군지’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시위 주동자로 지목된 박창도를 헌병분견소로 구인해 시위 중지를 강요하며 고문하려 하니, 박창도는 분연히 ‘시위운동은 우리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는 자주독립 의사이므로 당연한 주장이요, 누구도 제압할 권리가 없다’고 항변을 토하며 옆에 있던 의자를 들어 심문하는 헌병에게 던졌다.” 이 과정에서 카이젤 수염이 난 잘생긴 외모에 힘이 장사였던 박창도는 죽임을 당한다. “옆에 있던 사토(佐藤) 상등병이 권총으로 박창도를 쏘았다. 복부에 총탄을 맞은 박창도는 고통을 참으며 사토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억센 힘에 의해 목이 졸린 사토도, 총에 맞은 박창도도 같이 죽었다.”(김덕홍 증언) 이 사실에 격분한 시위대는 헌병분견소로 진입을 시도한다. 이때 이노우에 중위가 군인과 헌병을 건물 밖으로 나오게 한 뒤 건물 안에 들어간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하도록 명령한다.○ 조작된 기록 일제는 이날 상황에 대해 폭도(시위대)가 시위 주모자를 탈취하기 위해 먼저 돌을 던지고 건물 안까지 들어가 헌병을 구타했다는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조선총독부, 평남기밀 제118호) 조선총독부 기관지 역할을 하던 매일신보도 거들었다. “군중이 (헌병분견소) 사무실에 돌입하여 폭행하였으므로 헌병 및 보조원은 방어코자 하여 대격투가 시작되었는데, 마침내 헌병 상등병 좌등연 씨는 다수의 군중과 용감히 격투하다가 죽고, 박 보조원 감독은 중상을 당하였고, 사무실 안은 수라장이 되었다. 다른 헌병과 보조원 등은 마침 응원하러 온 보병과 뒤뜰에서 협력해 발포해 격퇴했다.”(매일신보 1919년 3월 13일자) 박창도에 대한 사격 사실은 쏙 뺀 채 시위대가 헌병분견소에 들이닥쳐 먼저 폭행을 행사해 방어 차원에서 군경이 시위대에 총격하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 선교사 모펫의 보고는 정반대다. 그는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았으며 폭력을 행사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시위대에 군인들은 총을 쏘았다”고 밝혔다. 북한지역 3·1운동을 연구해온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은 “일제의 기록은 자신들의 인명 살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으로 작성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당시 순국한 이들은 일제 군경에 의해 산골짜기에 버려졌다. 이후 만세운동의 진원지였던 천도교 맹산교구는 1년 넘게 헌병대와 경찰에 강점당했다. 일제는 배일(排日)의식이 강한 천도교인들에게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협박하기도 했다. ‘한국독립운동사략’은 맹산군의 만세시위를 ‘천도교인의 참사’로 소개하고 있다. ▼ 일제 총칼에… 민간인 사망자 553명중 평안도 231명 최다 ▼ 평남 124명-평북 107명 순국 “평안도 반일 종교단체 세력 강해일제가 종교인 학살해 와해 노려”일제 총독부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표방한 3·1운동에 대해 첫날부터 총을 발포하는 폭압적 방식으로 대응했다. 1919년 3월 1일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경성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직후 성명을 발표한다. “(3월) 3일에 거행될 (고종) 국장을 앞두고 애도의 지정(至情) 대신에 황당무계한 유언비어로 민중을 선동하고 무엄한 일을 감행하는 무리가 있다면 추호의 가차도 없이 엄중 처단한다.”(조선총독부관보, 1919년 3월 1일)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은 “조선총독부의 ‘엄중 처단’ 방침이 사실상 일본 군경의 발포 명령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폭압적 만행은 대부분 평안도 지역에서 벌어졌다. 평안남도 선천에서는 3월 1일 질서 있게 행진하던 시위대를 향해 일경이 총탄을 발사해 강신혁이 현장에서 죽고 주민 12명이 부상당했다. 같은 날 평양에서는 총에 맞아 다친 5명이 병원에서 모두 숨지는 일도 있었다. 2일에도 평남 강서군에서 일본 헌병들은 독립만세 소리가 나자마자 발포를 시작해 한 남자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이들은 도망가는 어린 소년의 등에 총탄을 퍼붓기도 했다.(재한 선교사 보고자료, 1919년 3월 6일) 일제는 시간이 흐르며 만세운동이 확대될수록 광분했고 피해 규모는 커져만 갔다. 3월 4일 평남 강서군 사천시장에서는 사망자 9명(한국 측 기록 50명), 9일 영원군에서는 수십 명의 사상자를 각각 냈고, 10일 맹산에서 최대 규모의 집단 학살극을 벌였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소요사건 총계일람표’(1919년 6월 30일)에 따르면 3·1운동 당시 전체 민간인 사망자 553명 가운데 평안남도가 124명으로 가장 많았다. 또 평안북도가 107명으로 뒤를 이었다. 일제가 축소 왜곡한 통계에서도 전체 사망자의 40%가 평안도 지역에서 발생한 셈이다. 이정은 원장은 이에 대해 “평안도 지역은 기독교와 천도교 등 반일의식이 강한 종교단체가 중심이 돼 3·1운동을 조직적으로 이끌었다”며 “일제는 종교인들을 응징함으로써 만세운동의 와해를 노렸다”고 해석했다. 실제로 천도교세가 강했던 평남의 경우 천도교 조직이 와해되면서 3월 11일 이후 만세운동이 급감했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1919년 3월 중순, 33인 민족대표들의 뒤를 이어 비선(2선) 조직원으로 활동하던 기독교 전도사 이규갑(1888∼1970)은 일제 경찰을 피해 조카의 집에 은신 중이었다. 당시 일경과 헌병은 3·1운동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33인 민족대표들과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시위를 이끈 학생대표단을 체포한 뒤, 나머지 시위 주동자들을 잡기 위해 밤늦게까지 검문검색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연락이 닿은 동지 8명이 그의 은신처를 찾았다. 3·1운동의 조직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면 당장에 독립을 쟁취할 수 없더라도 이를 바탕으로 장차 독립투쟁을 위한 전열을 정비하는 구심점이 될 것이다.”(이규갑 증언, ‘한성임시정부 수립의 전말’·신동아 1969년 4월호) 당시 독립운동을 이끌어갈 중심 조직도 절실했다. 3·1운동 이후 시위는 계속되고 있었다. 시내 각지에는 ‘동포여 일어나라’ 등의 독립투쟁을 독려하는 격문이 뿌려졌다. 동아연초주식회사 직공(3월 9일)과 전차 차장·운전수(3월 8∼10일) 등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고, 상인들도 철시 운동 등을 벌였다. 덩달아 일경은 무자비하게 진압에 나섰고 피해 규모는 커져만 갔다. 희생자 수가 늘어나면서 독립 운동의 열기는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운동 지도부로선 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국 13도를 대표하다 모임 결과 이규갑이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일을 맡기로 했다. 민족대표 33인의 밀사로 중국 상하이(上海)에 파견된 현순이 이규갑에게 보낸 편지도 영향을 미쳤다. 현순은 국내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임시정부 구성 절차를 밟도록 요청했다.(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3·1운동’) 하지만 항일 감정만을 앞세워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규갑은 국민 전체 의견을 대신할 지역 대표나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들을 한자리에 모아 대표성을 인정받기로 했다. 홍진(홍면희·1877∼1946·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등이 그의 뜻에 공감했다. 3월 17일 오전 경성부(서울) 내수동 64번지 현직 검사 한성오가 사는 자택.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검사직을 박차고 나와 변호사로 활동하던 홍진이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고른 비밀 독립운동본부였다. 이날 이규갑과 홍진을 비롯해 한남수, 이동욱, 이교헌, 윤이병, 윤용주, 이용규, 김규, 최전구, 김사국, 이민태, 민강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독립운동을 이어갈 새로운 지도부인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위원회’의 시작이었다. 준비위원회의 진행을 맡은 이규갑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전국 13도 민족대표가 모이는 국민대회 개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당시 일제는 한반도를 13개 도로 나누어 도장관(道長官·도지사급)을 임명해 통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각 도를 대표하는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정부를 세워야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이규갑의 아이디어였다. “임시정부를 당장 조직해서 일제의 침략 잔당을 깨끗이 숙청, 극복하여 수권기관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목표 달성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홍진 발언,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민족운동’) 이날 준비위원회는 ‘한성임시정부’라는 호칭을 결정했다. 또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대회를 열고, 국민대회를 거친 뒤 임시정부 수립을 공포하기로 했다. 승려 신분인 이동욱이 국민대회 취지서와 임시정부 선포문 및 약법(約法·일종의 헌법) 등의 초안을 만들기로 했다. 국민대회에 참석할 13도 대표로는 모두 25명(조만식 이춘규 강훈 김유 최전구 이래수 유식 김명선 기식 김탁 박한영 이종욱 유근 주익 김현준 박장호 송지헌 강지성 홍성욱 정택교 이용준 이동욱 장정 장근 박탁)이 선정됐다. 3·1운동을 이끈 독립지사와 학생, 농민, 노동자, 언론인, 종교인, 교육인, 기업인 등 각계 대표가 망라됐다. 임시정부 설립 실무를 맡은 홍진과 이규갑, 김규(유림 지도자), 민강(동화약방 설립자) 등은 연락책임위원이 돼 전국 주요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13도 대표자들을 찾아가 설득하기로 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보름 후인 4월 2일 인천의 만국공원(현재 자유공원) 광장으로 대표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곳이 대표자회의 장소로 정해진 데는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이 가진 상징성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 모든 나라가 모이는 ‘만국의 장’에서 당당히 독립 의지를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공원 주변이 중국인과 서양인들이 거주하는 조계지(租界地)로서 치외 법권 지역이라는 점도 고려됐다. 모임은 은밀히 진행됐다. 대화는 일절 삼가고 흰 헝겊이나 창호지를 둘러 싸맨 손가락을 서로 내밀어 확인했다. 3·1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잇따르면서 몇몇 대표자가 지명 수배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규갑도 인천역에서 일경의 불심 검문을 받았다. 다행히 변호사인 홍진이 “이 사람은 약장사 하는 사람으로 우리와 일행”이라고 둘러대는 바람에 간신히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오후 3시경 약속장소에 20명가량이 모여들었다. 경성에서 활동하던 기독교계, 불교계, 천도교계, 유림계 대표들은 대부분 참석했다. 지방대표로는 경기 강화도와 수원시 등 인근 지역의 인사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일경의 감시에 먼 거리에 있던 지역대표들은 참석하지 못했다. 공원 인근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긴 이날 참석자들은 경성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기로 했다.○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확보하라 4월 17일 비밀독립운동본부인 한성오의 집. 이동욱이 기초한 약법과 국민대회 취지서 및 선포문 등이 공개됐다. 취지서에는 13도 대표자 25명의 서명도 실렸다. 임시정부 기구와 각원(閣員) 명단도 완성됐다. 현석칠이 목각으로 국민대회 취지서와 선포문 등을 6000장 인쇄했다. 취지서에는 독립운동의 정통성이 33인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과 13도 민족대표자들이 모인 국민대회에 있다는 내용도 담았다. “우리 민족은 손병희 등 33인을 대표로 하여 정의와 인도에 기본한 조선독립을 선언했다. 지금 그 선언의 권위를 존중하며 독립의 기초를 견고케 하며, 인도(人道) 필연의 요구에 보답하기 위하여, 전 민족 일치의 동작으로 대소 단결과 각 지방 대표를 종합하여 본 회를 조직하고 이를 세계에 선포하노라.” 또 △일본 정부의 조선통치권 및 군대 철거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자 선정 △일본관청에서 재직하는 조선인 관공리(官公吏) 퇴직 △일반인의 각종 납세 거부 등을 결의했다. 약법은 제1조 국체(國體)는 민주제를 채용함, 제2조 정체(政體·정치체제)는 대의제를 채택한다고 밝힘으로써 대의민주제를 천명했다. 한성임시정부의 초대 각원 명단은 화려했다.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 총재 이동휘, 외무부총장 박용만, 내무부총장 이동녕, 군무부총장 노백린, 재무부총장 이시영, 법무부총장 신규식, 학무부총장 김규식, 교통부총장 문창범, 참모부총장 유동열, 노동국총장 안창호 등 13명이 임명됐다. 이규갑은 회고에서 “한성정부는 해외망명 정부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기에 우리가 임명한 각원들도 전부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애국지사들로 충당했다”고 설명했다. 4월 23일 한성정부가 마침내 선포됐다. 김유인 이춘균 등 학생조직이 자동차에 ‘국민대회, 공화 만세’ 등의 문구가 쓰인 깃발을 달고서 국민대회 취지서, 임시정부 선포문, 임시정부령 등이 담긴 전단을 뿌렸다. 종로구 서린동 봉춘관에서 열릴 예정이던 13도 대표자회의는 대표들의 불참으로 무산됐지만 학생들은 종로 보신각과 탑골공원 등 경성 사대문 안 곳곳에서 임시정부의 탄생을 선포하며 길거리를 누볐다. 이날 시위로 일경에 검거된 사람만 270명에 달했다. 한성정부의 설립은 곧장 대중에게 알려졌다. 이날 지하신문인 ‘국민신보’ 제11호는 “조선 13도 대표자가 모여 우리 이천만의 뜻을 모아, 세계에 부끄러움이 없을 만한 세밀하게 가(假)정부를 조직해 열국에 공포했다”고 보도했다. 한성정부의 성립 사실은 윤치호 등 기독교 세력과 국내 민족운동계에 알려지고 경성발 연합통신(UP) 소식으로 해외 한인사회에까지 퍼져나갔다.(이현주,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이규갑은 후일담에서 국내 13도 대표자들이 선포한 한성정부는 해외의 독립지사들에게 정통성 있는 정부로 인식돼 향수와 동경의 대상이 됐다고 자랑했다.▼ “혼선 우려” 상하이-한성 등 3곳 통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 3·1운동 후 국내외에는 6개의 임시정부가 난립했다. 이 중 러시아령(露嶺)의 대한국민의회, 중국 상하이의 상하이임시정부, 국내의 한성정부 등 3곳만이 정부 기능이 가능한 조직이었다. 1919년 4월 한성임시정부 설립을 추진하던 홍진과 이규갑은 상하이에서도 정부 수립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두 사람은 실체 파악을 위해 4월 20∼21일경 한성임시정부 행사를 실무진에게 맡긴 후 직접 상하이로 찾아갔다. 국민대회 취지서와 한성정부 조각 명단 등을 담뱃갑과 성냥갑 속에 숨긴 채였다. 이규갑은 위험을 무릅쓴 당시 방문 이유에 대해 “만약 상하이에 이미 임시정부가 섰다면 결국 두 개의 정부가 생긴 셈이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양자 간에 서로 불화라도 생긴다면 우리 독립운동 전선에 크게 혼선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우려대로 상하이임시정부는 이미 4월 11일 출범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들이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에는 한성임시정부와 상하이임시정부의 통합이 급선무가 됐다. 이규갑과 친분이 있던 도산 안창호가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규갑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도산에게) 한성정부보다 상하이정부가 단 며칠이라도 먼저 생겼으니 우리가 상하이정부에 합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양보하였다. 도산은 아무리 상하이정부가 활동력 있는 쟁쟁한 독립투사들이 만든 것이라 하더라도 이는 나라를 떠난 유랑자들에 의하여 된 정부이고 한성정부야말로 국내에서 13도 대표들이 모여 국민의 총의에 입각하여 만든 정부이니 상하이정부를 해체하고 한성정부의 법통에 순응해야 한다고 극력 사양하였다.”(‘한성임시정부 수립의 전말’·신동아 1969년 4월호) 1919년 9월 초, 두 정부의 통합을 위한 임시 헌법개정안과 임시정부개조안이 상하이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확정됐다. 이 자리에서 안창호는 “우리 정부의 유일무이함을 내외에 표시하는 것이 긴요한 일인데, 이렇게 하려면 상하이정부를 희생하고 한성의 정부를 승인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성정부와 상하이임시정부의 통합은 러시아령 임시정부와의 통합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1919년 9월 11일 3개 임시정부가 통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출범했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재단법인 ‘임진정유 동북아평화재단’(이사장 김병연, 전 외교부 대사)은 지난해 발간한 ‘정유재란사’와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책 2권을 서울·경기·인천지역 919개 고교 역사교사에게 무료 배부 중이라고 23일 밝혔다. 배포될 책은 모두 1838권이다. ‘정유재란사’는 ‘정유재란의 배경과 전쟁의 실상’(1부)과 ‘전쟁의 참상과 조선민중의 수난’(2부)으로 구성돼 있다. 기타지마 만지(北島万次·전 일본 교리쓰여대 교수) 등 국내외 학자 15명이 저술한 논문 17편이 수록돼 있다.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은 동아일보 안영배, 박영철 기자가 2018년 동아일보에 6개월 동안 연재한 정유재란 현장 탐사 기획물을 묶은 것이다. 임진정유 동북아평화재단은 지난해 12월 호남지역 역사학자들에게 배포를 시작한 이후 올해 5월에도 전남·광주지역 210개 고교에 나눠준 바 있다. 사업을 주관하고 있는 김병연 임진정유 동북아평화재단 이사장은 “미래의 주인공들이 올바른 역사의식과 우리 스스로 지킨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성장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책자를 무료 배부하고 있다”고 사업 취지를 밝혔다.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
1919년 3월 중순 이후 만세운동이 갈수록 격렬해지자 일본인들이 한국인이 사용하는 우물과 식품 등에 독약을 집어넣었다는 얘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이는 곧 사실로 드러난다. 박은식은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평안북도 의주군과 용천군 등지에서 일본인의 사주로 우물에 독약을 넣은 일을 자백한 아이를 소개하고 있다. 저서에 따르면 용천군 용천읍 양시(楊市)에서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모든 우물의 물 위에 기름이 떠오르는 것이 발견된다. 이에 우물의 물을 모두 퍼내고 보니까 보자기에 싸인 약 한 덩어리가 나왔다. 마침 수상한 행동을 하는 아이를 붙잡아 신문한 결과 “왜인(倭人)이 한 번 넣는데 10원을 준다고 하기에 이런 일을 했다”는 자백을 받아낸다. 이 약을 검사한 일본인 의사는 ‘독약은 아니며 이질을 일으키는 약’이라는 소견을 냈지만 목격자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모두 죽었다고 증언했다. 생선, 소금 등 각종 식료품에서도 독약은 발견됐다. 평양 상인이 소금 한 되 속에서 4작(勺·1작은 10분의 1홉)의 백색 결정체로 된 약을 발견해 분석했더니 석질(石質)을 녹이는 약이었다. 이를 닭 네 마리에게 먹였더니 모두 즉사할 정도로 맹독이었다. 이와 관련한 또 다른 증언도 있다. 한일문화연구소 김문길 소장은 “일본인들이 3·1운동 후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죽이기 위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사실은 일본 학자 마쓰오 쇼이치(松尾章一)의 논문에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 김 소장은 또 “일본인들은 1923년 일본 간토대지진 때도 자신들이 한국에서 저지른 만행을 일본의 조선인이 한 것처럼 유언비어를 날조해 조선인들을 학살했다”고 덧붙였다. 일제의 이런 만행은 항일(抗日) 기독교 세력이 크게 자리 잡아 물리적 충돌이 심했던 북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일제는 “독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예수교인을 증오하기 위해 한 일”이라면서 한국인들의 소행으로 몰며 이간질을 시도했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0분경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내 서부야소교(의주서교회) 인근 공터. 의주서교회와 의주지역 유지들이 후원해 설립한 양실학교의 교사와 학생, 학부형 등 의주군민 700∼8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어서 모임은 교회 대부흥회처럼 보였지만, 이는 한반도 최북단에서 맨 처음으로 진행된 독립선언식이었다. 행사를 주관한 유여대 목사는 당초 경성에서 작성한 3·1독립선언서를 받아 경성과 동시에 독립선언식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문서 도착이 늦어지자 더 이상 지체할 순 없다는 판단에 따라 행사를 결행하기로 했다. 이날 사전 배포된 독립선언서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은밀하게 수집한 도쿄의 2·8독립선언서였다.(안석응 외 6인 판결문, 유여대 신문조서) ○ 2·8독립선언서의 등장 모임 장소는 순식간에 독립선언식 무대로 꾸며졌다. 운천교회 장로 허상련이 준비한 대형 팔괘국기(八卦國旗·태극기) 두 장이 임시로 만든 단상에 세워졌고, 종이로 만든 소형 태극기 100여 장이 참석자들에게 나누어졌다. 유 목사의 지시를 받은 안석응 등은 미리 등사해둔 200∼300여 장의 2·8독립선언서를 의주군내 평안북도 도청과 경무부, 기타 관청, 지역주민들에게 배포했다. 도쿄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사용했던 2·8독립선언서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식선언서로 선보이는 순간이었다. 행사는 ‘찬미가-기도-식사(式辭)-독립선언서 낭독-독립창가 합창-만세-의주성 행진’의 순으로 진행됐다. 기도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특별한 손님’이 맡았다. 압록강을 경계로 의주군과 마주하는 중국 안동현(현 단둥)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김병농 목사였다. 그는 같은 해 2월 중국 상하이를 거점으로 국내외 연계 독립선언운동을 도모하던 동제사(同濟社) 요원 선우혁을 만나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약속했다. 압록강 철교 건너 안동역(단둥역) 부근에 있던 그의 집은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외 연락과 통신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김병농 목사가 독립의 염원을 담아 기도하는 동안 기적처럼 3·1독립선언서가 식장에 도착했다. 이에 유여대 목사는 2·8독립선언서 대신 민족대표 33인 중 14번째로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는 독립선언서를 소리 높이 낭독했다. 황대벽과 김이순이 독립선언서의 의미를 소개하는 연설을 하자 이에 호응한 “조선독립만세” 함성이 압록강변까지 퍼져갔다. 33인 민족대표 중 한 명인 김병조 목사는 1920년 상하이에서 출판한 ‘한국독립운동사’에 당시 상황을 이같이 소개했다. “공중에 펄럭이는 팔괘국기는 선명한 색채가 찬란하고 벽력과 방불한 만세 부르짖음 소리는 뜨거운 피가 비등하매 통군정(統軍亭·의주군 의주읍에 있는 조선시대 누정) 숙운(宿雲)에 놀란 학(鶴)이 화답하여 울고, 압록강의 오열(嗚咽)하는 파도에 물고기와 자라가 고개를 내밀고 듣더라.” 마침내 행사의 마지막인 의주성 일대를 도는 시위행진이 시작됐다. 학생들을 선두로 한 시위대는 태극기와 함께 ‘독립 창가’를 부르며 주민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독립선언을 함은 3월 1일 오늘이라/반도의 강산 너와 내가 함께 독립만세를 환영하자/충의를 다하여 흘리는 피는 우리 반도의 독립의 준비라/4000년을 다스려 온 우리 강산을 누가 강탈하고/누가 우리의 정신을 바꿀 수 있으랴/만국평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는 천제(天帝)의 명령이요/자유와 평등은 현시(現時)의 주의(主義)인데/누가 우리의 권리를 방해할소냐.’ 놀란 일제 헌병들이 달려와 시위대에 해산을 요구했지만 규모는 오히려 늘어나 2000여 명으로 커졌다. 행사 직후 유여대 목사와 안석응, 김창건, 김두칠, 장창식, 강용상, 정명채 등 주동자 7명은 일제 헌병에 구속됐지만 시위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경성의 3·1운동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전개된 의주 독립만세운동은 33인 민족대표가 현장에서 민중을 직접 지도하며 만세운동을 벌인 유일한 사례다. 유여대 목사는 처음부터 경성이 아닌 의주 지역 일대에서 독립선언식을 이끌겠다고 다짐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김승태, ‘의주에서의 3·1운동과 유여대 목사’) 일제는 국경도시인 의주에서 독립선언서가 뿌려진 사실에 경악했다. 독립선언서의 해외 유출을 극도로 경계하던 일제는 선만(鮮滿·조선과 만주) 국경선 경계를 더욱 강화했다. 그러나 만세운동이 벌어진 3월 1일 이미 경성에서 작성된 3·1독립선언서는 압록강 철교를 건너 중국으로 가는 기차에 실려 있었다. 그 도착지는 김병농 목사의 집이었다. 김 목사가 의주 3·1운동에 참석하는 동안 독립선언서는 그의 아들(김태규·후에 의열단원으로 활동)을 통해 상하이의 현순 목사에게 전달된다. ○ 농민과 천도교인까지 가세 의주 만세운동은 이후 일제가 황해도 수안군, 경기도 안성군과 함께 ‘대표적 폭동 사건’으로 지목할 정도로 치열하고 끈질기게 전개됐다. 의주 만세운동은 3월 1일부터 6일까지 계속됐다. 2일에는 읍내 시위와는 별개로 남대문(남문) 밖 광장에서 최동오, 최안국 등 천도교인들이 지역농민 등 30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일제 헌병대는 무장을 풀지 못한 채 철야로 경계했지만 3일에도 1200여 명이 읍내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같은 날 의주 공립농업학교와 보통학교에서도 훈도(교사)와 학생들이 교정에서 모여 독립선포식을 거행했다. 이들은 “당신들(일본인 교직원)이 조속히 물러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등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수업 거부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4일과 6일에는 의주 만세운동의 진원지였던 양실학교 학생들이 단독으로 시위를 벌였다. 5일에도 의주군 수진면 수구진과 의주읍 서쪽 소관관(所串錧)에서 시위가 펼쳐졌다.(이용철, ‘평안북도 의주지역의 3·1운동’) 계속되는 시위에 일본 군경은 더욱 강압적인 자세로 나왔다. 시가지에 네다섯 명이 모이는 일도 허락하지 않았고, 통군정의 높은 곳에 기관총을 설치하며 시가지 경계를 강화했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식을 줄 몰랐다. 상인들은 철시로, 직공들은 파업으로, 학생들은 휴학으로, 농민들은 양곡과 땔감의 반출 매매 중단으로 일제를 괴롭혔다. 일제 경찰은 고시문을 발표하며 상점을 열도록 유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조선인 관리들도 동맹퇴직을 결의하고 사직서를 제출한 뒤 상하이로 탈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상황이 악화되자 일제는 무자비한 대응을 시작했다. 특히 군인들은 노약자와 어린이들을 살해하거나 부녀자들을 겁탈했다. 재물을 약탈하고, 교회당과 민가를 불태웠다.(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 10여 일간의 주민 자치 의주읍 시위는 3월 6일을 고비로 한풀 꺾이지만 주변지역의 만세운동은 4월 초까지 격렬하게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유혈 충돌로 인한 참극도 발생했다. 3월 30일 의주군 고령삭면 영산시장에서 펼쳐진 시위가 대표적이다.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등 3000∼4000여 명이 대규모 연합 시위를 벌이다 일제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흥분한 시위대는 투석전으로 맞서며 일제 헌병의 총 2정을 빼앗고, 헌병 건물 일부를 파괴했다. 이에 군인 11명이 출동해 시위대 5∼7명을 총격해 사망하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사망자 친족들이 시신을 메고 헌병주재소를 찾아 통곡하며 “독립이 성취되기 전에는 절대로 장례를 치르고 땅에 묻을 수 없다”고 하자 헌병들이 이들을 마구 때리며 쫓아내기도 했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 이때 옥상면에서는 독립을 구호로만 외치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일이 발생해 눈길을 끈다. 옥상면민 약 3000명은 4월 2일 옥상면사무소로 몰려가 “우리는 이미 독립을 선언하였으니, 금일 이후 면사무소는 마땅히 폐지하고 우리가 새로 조직할 자치민단에 면사무소 청사와 비품 재산 등 일체를 넘겨라”고 요구했다. 이후 면사무소를 접수해 비품과 공부(公簿) 7책, 현금 193원45전을 압수하고 10여 일간 자치업무를 집행했다. 이 일로 주동자 일부는 일제에 붙잡혀 징역형을 살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의주군에서 4월 초까지 만세운동 중 총격에 사망한 사람은 최소 20∼22명에 달한다. ‘독립운동지혈사’의 독립운동일람표에선 의주군의 경우 31명의 사망자, 350명의 부상자, 1385명의 투옥자가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주군의 독립만세운동이 그만큼 치열했음을 증명하고 있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유출된 방사성물질을 없애기 위해 사용된 ‘고준위 방사능 오염수’ 약 100t이 후쿠시마 앞바다에 여과 없이 버려졌다. 그 후 이 오염수는 어떻게 됐을까. 지난달 일본 쓰쿠바대와 가나자와대, 해양연구개발기구의 합동 연구팀은 충격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2011년 방출됐던 방사성물질 세슘이 북태평양을 돌아 1년 만인 2012년 일본 근해로 돌아왔다는 것. ▷후쿠시마에는 여전히 방사성 오염수 100만 t 이상이 남아 있다. 최근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는 “일본 정부가 방사성 오염수 100만 t 이상을 태평양에 방류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며 “한국을 비롯한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범죄 행위이며 환경 재앙”이라고 비판했다. ▷후쿠시마 앞바다에는 구로시오 해류가 흐른다. 일본 동해안을 따라 북상한 이 해류는 적도 위의 북태평양 지역 연안을 시계 방향으로 돌아 회귀한다. 한국의 동해와 남해도 이 해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약 서울 63빌딩 용적에 맞먹는 방사성 오염수가 후쿠시마 앞바다로 흘러나오면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해양 생물 및 생태계가 방사성물질 오염에 노출될 가능성이 우려된다. △그린피스는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방사성 오염수에서 스트론튬90과 아이오딘129 같은 고위험 방사성물질 제거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지난해 9월 인정했다”고 밝혔다. 도쿄전력이 8년간 매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제염(除染)에 실패한 오염수 100만 t은 육지에서 마냥 보관할 순 없다. 해양환경오염 방지 및 통제를 목적으로 제정된 유엔해양법협약도 별 소용이 없다. 일본 정부가 대체 수단이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인해 오염수 방출을 강행한다고 하면 제재하기가 어렵다. △올 3월 그린피스는 ‘원전 사고 피난 지역이었던 나미에와 이타테 지역은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방사능으로 오염돼 있다’는 보고서를 펴냈다. 그러나 아베 신조 정부는 후쿠시마는 안전하다고 거듭 주장한다. 한술 더 떠 내년 7월 도쿄 올림픽을 ‘후쿠시마 안전 홍보 이벤트’로 만들 심산인 것 같다. 원전 사고지에서 불과 67km 떨어진 후쿠시마 아즈마 구장에서 야구 개막전과 소프트볼 경기를 치르고, 올림픽 선수촌에는 후쿠시마산 식재료를 공급할 계획이다. 오염수 방류도 국제사회의 지탄을 면치 못할 일이지만, 후쿠시마 농산물의 실제 안전 여부와 별개로 세계 각국에서 온 올림픽 출전 선수들을 이용해 ‘안전한 일본’을 홍보하려는 아베 정권의 행태는 손님에 대한 기본 예의가 아니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1920년 7월 22일 오전 8시 40분경 서울 정동의 경성지방법원 특별법정. 불과 며칠 전 3·1운동 민족대표 48인에 대한 공판이 열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법정에서 불빛에 번득이는 금테 안경을 두른 일본인 검사가 심리를 시작했다.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치안을 방해하고 피고 이영철, 홍석정 등은 번갈아가며 (수안 헌병분대) 분대원에 대해 다수(多數)한 위력을 빌려 ‘우리들은 이미 조선독립의 선언을 하였으니 속히 이 분대를 내놓고 나가라. 만일 듣지 않으면 계속하여 다방(多方)으로부터 몰려오는 천도교도가 더욱 증가하여 어떻게든지 이 요구를 하리라’ 협박하고….”(동아일보 1920년 7월 23일자 3면) 이날 재판에선 북한의 황해도 수안군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잡힌 7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공소심리가 진행됐다. 당시 재판을 참관한 동아일보 기자는 “세상의 주목을 끌지 아니한 까닭인지 방청석에는 겨우 20여 명의 방청자가 있는데, 그중에 수삼인의 상투 있는 사람이 있음을 보건대 아마 이번 공판이 열린다는 말을 듣고 멀고먼 시골에서 일부러 방청을 하러 온 사람인 듯하다”고 재판정 상황을 소개했다. 이어 “70여 명의 피고 중에는 머리가 희득희득하게 세인 사람도 있고, 스스로의 의복을 차입할 수가 없는 까닭인지 보기도 흉한 푸른 감옥 옷을 입은 것은 새삼스럽게 감회를 끈다”고 보도했다. 1920년 당시 일제는 3·1운동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극구 막으려 했다. 신문과 잡지 등 언론에 대해서는 검열 방식으로 보도를 통제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재판정에서 진행된 일본인 검사의 공소와 심리를 낱낱이 보도하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수안 지역의 만세운동 전모를 세상에 공개했다. 동아일보에 의해 알려지게 된 수안군의 만세운동은 평안북도 의주군, 경기도 안성군과 함께 ‘3대 실력 항쟁지’로 꼽힌다. 3대 실력 항쟁지는 평화로운 시위 수준을 넘어서 유혈충돌이 벌어진 대표적인 곳들이다. 일제가 3·1운동 민족대표들에 대한 신문조서에서 3·1운동의 폭력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폭동’의 대표적인 지역들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다. ○ 자유와 공화의 시대 수안군 만세운동은 천도교인들의 주도로 진행됐다. 경성의 천도교 총부 지시에 따라 수안의 천도교구는 1919년 3월 3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고종의 장례일인 이날은 일제가 제2차 만세운동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경성 행사’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때였다. 수안군 지역의 천도교 지도자들은 거사 전날인 3월 2일 수안읍내 천도교구실에 집결해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논의했다. 이미 경성에서 도착한 독립선언서는 수안군 각 지역에 비밀리에 배포한 뒤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거사 계획이 누설됐다. 이날 오후 3시경 “독립선언서가 경성에서 수안에 전달됐다”는 황해도 경무부장의 전보를 받은 수안 헌병분대가 천도교구에 기습적으로 들이닥쳤다. 수안 천도교구장 안봉하 등은 독립선언서가 없다고 잡아떼며 저항했지만, 교구 소사실 돗자리 밑에 숨겨두었던 독립선언서가 발각됐다. 안봉하 김영만 등 11명의 천도교 교직자들이 현장에서 붙잡혔다. 다행히 일제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한청일(전교사)과 홍석정(전 천도교구장)은 이날 밤 각 지역의 중견 인물들을 다시 모은 뒤 3월 3일로 예정됐던 거사를 차질 없이 치르기로 다짐했다. 이에 따라 3월 3일 오전 6시경 140여 명의 교인들이 천도교구실에 모였다. 시간이 촉박해 참석자가 1500명가량의 수안군 천도교인 중 10%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한밤중에 수십 리 길을 걸어 모일 정도로 비장한 결의를 다진 정예 교인들이었다.(‘수안교구의 만세운동’, 신인간 1989년 3월호) 이들은 모이자마자 곧장 시위에 돌입했다. 한청일과 홍석정은 시위대 중앙에서 2개의 큰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행진했고, 이영철(천도교구실 소사)은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대를 이끌었다. 이영철은 수안금융조합사무소 앞에 도착한 뒤 “조선은 독립하였다. 자유와 공화 정치는 세계의 대세다. 속히 헌병분대를 명도(明渡)하라”고 외쳤다. 시위대는 헌병분대 앞뜰까지 진출한 뒤 다시 “대한제국은 오늘로 독립하였고 우리는 자유민이 됐다”고 외쳤다.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5권)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대 규모는 커져갔다. 고함 소리와 만세 소리로 천지가 진동했고, 사람들은 당장 독립이 된 것 같은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영철 등 지휘부는 헌병분대 사무실로 몰려가 일본인 헌병분대장에게 분대를 인도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일본 헌병과 보조원들은 벌벌 떨며 허둥대다 경성 본부에서 연락이 오는 대로 물러가겠다는 약속을 했다. 일종의 ‘항복 선언’이었다. 시위대는 승리의 환성을 올리며 천도교 교구로 돌아갔다. 수안읍내는 헌병대까지 접수했다는 소식이 퍼져나가 온통 독립만세 함성으로 뒤덮였다.(‘수안군지’)○ 9명이 현장에서 즉사 오전 11시, 수안교구실에는 100여 명의 천도교인들이 모여든 가운데 시위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시위대는 헌병분대로 몰려가 재차 “분대를 명도하라”고 촉구했다. 이때 이동욱과 오관옥 등 일부 천도교인들이 헌병들을 쫓아내기 위해 사무실로 뛰어들었다. 그때까지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당황하던 헌병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사격을 시작했다. 헌병의 무차별 총격에 다수의 교인들이 쓰러지고 시위 대열은 무너졌다. 오후 1시경, 흩어졌던 시위대는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모였다. 150여 명의 천도교인들이 헌병분대로 몰려갔다. 한청일이 선두에 서서 헌병의 만행을 규탄하고, 붙잡은 이들을 석방해줄 것을 요구했다. 오관옥은 “나는 총알을 맞지 않는다”면서 가슴을 풀어헤친 채 헌병분대 사무실로 다가갔다. 시위대 역시 헌병분대가 설치한 장애물을 제거한 뒤, 독립만세 함성과 함께 “죽이라”고 절규하며 사무실로 뛰어들었다. 또다시 일본 헌병분대의 총격이 시작됐다. 한청일과 오관옥 이외에 4명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일본 헌병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폭행을 가하며 칼로 찍는 등 살육을 자행했다. 일본에서 발간된 ‘현대사자료’는 당시 수안에서 벌어진 학살 행위를 이렇게 기록했다. “헌병들의 발포에 5명이 즉사하고 또 다른 몇 명이 쓰러졌다. 한 노인이 총격을 항의하자 역시 사살했다. 그 노인의 아내가 달려와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하자 헌병은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다 사살해 버렸다. 그 다음 날 아침 노부부의 딸이 달려왔는데 이번엔 전신을 칼로 난자했다.” 황해도 장관 보고서(1919년 8월 18일자)는 이날 현장에서 즉사한 이가 9명, 중상자는 18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시위대는 분노하기 시작했다. 읍내의 관청과 일본인 주거지를 불태워버린다는 풍설까지 나돌았다. 이에 일본인들이 살상될 것을 우려한 수안 헌병분대는 민간인야경단을 만들고, 일본인 남자에게는 헌병복을 입혀 경계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등 비상조치를 취했다. 한편으로는 상급 부대에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3월 4일 평양 주둔 보병부대 20여 명이 수안에 파견됐다.(‘한국민족운동사료, 3·1운동편’) 증파된 일본 헌병들의 진압과 감시 활동으로 수많은 이들이 붙잡혔다. 하지만 수안군 만세운동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시위를 주도했던 천도교인들은 수안군 내 면소재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이어갔다. 3월 7일 수구면 석달리의 천도교 전교사 이승필 등은 40여 명의 교인을 이끌고 장날에 만세를 부르고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또 수안군의 시위 소식은 이웃한 곡산, 신계, 서흥, 재령 등 황해도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한 장소에서 벌어진 시위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구금자만 71명에 달했던 수안 만세운동은 지방에서 취급할 사안이 아니라는 일제의 판단에 따라 경성지방법원으로 송치됐다. 이후 1년 가까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최석구는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최고 2년 6개월에서 최저 금고 6개월의 형을 받았다. 이들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그 외에 대장장이, 짚신장수, 마부 등 소규모 자영업자와 일용직 노동자, 영세상인 등이 운동에 참여했다. 수안의 만세운동은 3·1운동이 계층과 계급에 구애받지 않은 거족적 민족운동이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주요 사례였다.(조규태, ‘황해도 수안지역 천도교인의 3·1운동’)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수안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홍석정 한청일 이영철 등 천도교 지도부는 “우리는 이미 조선 독립을 선언하였고, 현재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시대이니 헌병분대의 관할권을 즉시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으니 일본 제국주의 무단통치의 상징인 헌병대 권력을 넘겨받겠다는 뜻이었다. 천도교인들은 만세운동을 진행할 때에도 ‘조선이 독립됐다’는 말을 주민들에게 자주 했다. 수안 만세운동을 연구한 조규태 한성대 교수는 “수안 천도교인들은 교리강습소를 통해 문명개화론, 계몽주의 등 근대적인 지식을 수용하였고, 그 결과 공화와 자유사상에 입각해 조선 독립을 주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당시 한반도 서북지역의 천도교인들은 동학의 평등 이념과 ‘개벽’이라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현실화하려는 욕구가 매우 컸다. 이는 일제에 대한 저항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서북지방 출신이 집권층으로부터 받아온 차별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수안의 만세운동은 고종의 장례일인 3월 3일에 거행됐다. 이날은 대한제국의 황제를 떠나보내는 기일로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자제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구축한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현재의 남한지역에서는 충남 예산군에서 5명이 음주 후 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부른 것 외에 만세운동은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반면 북한지역은 달랐다. 황해도만 해도 수안을 비롯해 옹진 황주 봉산 등지에서 만세시위가 펼쳐졌고 평안남·북도와 함경남도에서도 만세운동이 있었다. 이들 지역은 대체로 천도교 세력이 강한 곳이었다. 이는 천도교가 3·1운동 주도 이후 일제에서 나라가 독립한다면 왕조 국가로 복귀하는 대신 근대적인 국가 설립을 추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천도교가 펴낸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제2호(1919년 3월 2일자)는 “근일(近日) 중에 가정부(假政府·임시정부)를 조직하고 가대통령(임시대통령) 선거를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3·1운동 이틀 뒤에 민주, 자유, 공화 등의 사상에 입각한 새로운 형태의 정부 출현을 선언한 셈이다. 이후 이런 움직임은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출범한 임시정부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이 임시헌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을 명시하고, 평등주의와 자유주의를 천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이럴 때가 아닙니다. 빨리 고향으로 내려가 나랏일을 하시오.” 1919년 2월 말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는 고종 황제 국상에 참여하기 위해 경성에 도착한 박지선, 김현곤, 송수연 등 전북 정읍군(현 정읍시) 태인면 출신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하 송진우는 3·1만세운동 거사계획을 넌지시 알리며 정읍지역에서도 궐기할 것을 당부했다. 세 사람은 인촌 김성수 등 경성에 거주하는 호남 출신 인사들을 만나며 거사의 중요성을 깨달은 뒤 즉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등을 구해 태인으로 돌아갔다.(박지선의 생전 회고 ‘송진우 선생과 15인회’, 신동아 1965년 3월호) 이들은 고향에 도착한 즉시 항일독립만세운동을 목적으로 비밀결사조직 ‘15인회’를 조직했다. 회장 김현곤, 총무 박지선 등 전원 태인면 청년들로 구성된 이 조직은 태인 3·1만세운동을 주도해나갔다. 현재 태인면 주산(主山)인 성황산 자락에는 ‘태인3·1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뒤편으로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15인회 주역들을 포함한 항일투사 25명의 위패봉안소가 자리 잡고 있다. 5일 이곳을 참배한 정읍역사문화연구소 김재영 이사장은 “올해를 ‘정읍 방문의 해’로 삼은 정읍시에선 3·1운동 100주년 열기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3월 1일엔 1000여 명의 정읍시민이 위패봉안소에 모여 만세운동 기념 행사를 가졌고, 정읍시립박물관에서는 ‘정읍의 함성, 대한독립 만세’를 주제로 기획전(6월 22일∼8월 21일)이 진행 중이다. 기자가 묵은 정읍고택문화체험관에서도 태인 출신 기생 김옥진(소란)의 항일운동을 다룬 음악무용극이 밤늦게까지 공연돼 관객 80여 명으로부터 큰 갈채를 받았다. 마치 100년 전 태인 만세운동을 실제로 경험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너는 왜놈의 개냐?” 1919년 음력 2월 보름(양력 3월 16일)에 거행된 태인 3·1만세운동의 준비 과정은 치밀했다. 15인회 회원들은 지역 유지인 김달곤의 집을 거점 삼아 밤마다 촌락들을 돌아다니며 만세운동 참가자들을 모았다. 그 결과 20, 30대의 청년 50여 명이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송진우 선생과 15인회’) 15인회 회장이자 태인면사무소 서기인 김현곤은 몰래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가져와 회원 송한용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찍었다. 총무를 맡은 박지선은 각 지역 동지들에게 인쇄물을 전달하는 한편 일본 헌병들의 동태 파악에 힘썼다. 마침내 거사일이자 태인 장날인 3월 16일, 헌병 분경소의 정오 타종을 신호로 농민들과 장꾼들이 면사무소(현 태인면 피향정 자리) 앞 우(牛)시장에 모였다. 15인회는 세 개 조로 나뉘어 종이로 만든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주며 큰 소리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15인회의 사전연락을 받은 태인보통학교 생도와 졸업생 등 청년 200여 명도 면사무소 인근에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기 시작했다. 만세운동에 호응해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았다. 삽시간에 수천 명 수준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일제 관공서로 몰려가 만세를 불렀다. 기습 시위에 놀란 일본 주재소(현 태인파출소 자리) 헌병들은 주재소 안에서 공포(空砲)만 쏘아댔다. 이때 조선인 헌병 보조원들이 박지선 등 시위대를 폭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성난 군중이 “너는 조선 사람이 아니고 왜놈의 개냐?”고 비난하며 거세게 대항했다. 이 과정에서 김현곤, 송진상 등 15인회 청년 5명이 체포됐다.(‘태인지’) 일경의 진압에도 시위대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시위대는 태인읍을 둘러싸고 있는 성황산과 항가산 등에 올라 봉화를 올린 뒤 다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경이 쫓아오면 산을 옮겨 다니며 시위를 계속했다. 이날 태인읍의 산마루는 밤새 횃불이 꺼질 줄 몰랐다. 산마루의 횃불은 신호가 돼 민가에서도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일부는 “왜놈들아 물러가라”고 외치며 석유로 적신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주재소로 던지기도 했다. 격렬했던 태인의 만세운동은 이튿날인 17일 새벽 수백 명으로 증원된 일본 군경에 의해 15인회 전원이 체포되면서 일단락됐다. ○꺼질 줄 모르는 봉화 만세운동의 주역들이 모두 끌려갔지만 한번 지펴진 독립운동의 불씨는 살아남았다. 태인면에서는 이후 10여 일간 민중의 자발적인 ‘야간 산상 봉화’ 운동이 이어졌고, 이웃 지역으로도 번져갔다. 3월 21일 새벽 신태인 쪽 산에서 봉화가 오르자 사방에서 불을 놓아 이에 호응했다. 이날 오후 5시경 정읍군 읍내 뒷산에서도 봉화가 올랐다. 정읍군 읍내에서도 태인면과 별개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쉽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읍내에는 헌병 분대와 검사국 등 일제 통치기관이 자리 잡고 있는 데다 일본인 밀집 주거지가 있어 일경이나 밀정에게 포착되기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3월 16일 발생한 태인 만세운동과 시위 주도 인물들이 체포돼 헌병 분대로 개처럼 끌려오는 모습에 크게 자극받기 시작했다.(김재영, ‘한국민족운동사와 정읍’) 마침내 지역 유지인 이익겸, 박환규 등은 3월 23일 장날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천도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전도 형식을 빌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시위 참여를 권유했고, 부인들도 이에 적극 호응했다. 순조롭게 준비된 거사는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거사 전날인 22일 밤, 일본인 소학교 교사의 밀고로 주동자 두 사람이 체포된 탓이다. 일본 헌병대는 백로지(갱지)에 청색과 홍색 염료로 태극기를 제작하던 현장을 급습했다. 거사일인 23일 시장에 모인 군중 100여 명은 맨손으로 독립만세만 외쳤을 뿐 시가행진도 못한 채 해산했다. 그 와중에도 덕천면의 송기룡과 박재구, 읍내의 도상철과 박근수 등 애국지사들은 4월 2일 장날을 맞아 다시 만세운동을 전개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손바닥에 못을 박는 고문 1919년 3월에서 5월까지 정읍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시위는 31회에 걸쳐 1만8000명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치열했던 태인 만세운동에는 일제 헌병과 경찰에 검속된 군중만 80여 명이고, 이 가운데 정읍검사국에 송치된 사람도 25명에 달했다.(‘태인지’) 15인회의 주모자로 지목된 송수연과 김현곤은 각각 징역 2년형과 1년 6개월형을 언도받았다. 이들은 태인의 토착 종족(宗族)인 여산 송씨와 김해 김씨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일경에 체포돼 선고받은 독립운동가 25명 중 여산 송씨는 7명(송수연 송한용 송진상 송영근(가수 송대관의 조부) 송문상 송근상 송순용), 김해 김씨는 6명(김현곤 김부곤 김달곤 김진근 김진호 김승권)이었다. 이들은 선고받기 전까지 견디기 힘든 고문을 받았다. 일경은 특히 15인회 총무를 맡았던 박지선에게 조직 및 연락책을 실토하라며 악행을 가했다. 박지선의 두 손바닥에 일주일간 못을 박아두고, 심지어 성기에 못을 집어넣기도 했다. 박지선은 죽기를 각오하고 고문을 버티며 참가자 이름을 함구했지만 그 대가로 자손을 낳을 수 없는 불구자가 됐다. 송한용 역시 손가락을 불로 지지는 고문을 당했다. 형을 살지 않았지만 함께 체포된 애국지사 부인들도 고문을 피하지 못했다. 박지선의 아내는 뺨을 맞다 이가 다 빠졌고, 송한용의 아내는 골병이 들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광복 직후 사망했다.(‘송진우 선생과 15인회’) 태인의 애국지사들은 6개월 내지 1년 반의 옥고를 치른 뒤에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요시찰 대상자가 된 이들은 단 10리(4km)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신고 없이 이동하다 발각되면 곤장치레를 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김현곤, 박지선, 송한용 등은 옥고로 상한 몸을 이끌고 밤마다 정읍지역 동지들을 찾아다니며 독립군에 건넬 군자금을 모았고, 7000원(당시 쌀 한 가마니 값 3∼5원)의 거금을 상해임시정부 파견원(국창현)에게 전달했다. 훗날 박지선은 자신들이 보낸 자금이 이청천 장군에게 전달됐다는 얘기를 듣고 한없이 기뻐했다고 술회했다.▼ “백범선생, 정확히 이집에 오셨어… 회의하고 주무셨다고” ▼독립운동가 김부곤 지사의 사위‘상해임정이 정읍에 큰빚 졌다’… ‘백범발언-정읍방문’ 생생 증언 “백범 선생(김구)이 정확히 이 집(15인회 회원 김부곤의 자택)에 오셨어. 내가 1958년에 장가를 오니 장모(김부곤의 아내인 김용복·1996년 작고)께서 그러시는 거야. 저기 다다미방으로 만든 응접실에서 백범 선생이 여러 사람과 회의를 하고 또 이 집에서 주무셨다고….”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오리마을에 위치한 독립운동가 김부곤의 자택에서 사위인 곽규 씨(89)는 백범의 정읍 방문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진위를 놓고 논란이 됐던 백범의 정읍 방문과 “상해 임정이 정읍에 큰 빚을 졌다”는 백범의 발언이 사실로 확인된 셈이다. 한국 종교사를 연구해 온 안후상 박사도 “김제 출신의 고승 탄허 스님(1913∼1983)에 의하면 백범이 정읍을 방문하면서 그렇게 말했다”고 밝혀 백범의 정읍 방문이 실제 있었던 일임을 뒷받침했다. 임정이 정읍에 큰 빚을 졌다는 발언에는 근거가 있다. 3·1만세운동 후 출범한 상해임시정부는 부족한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외 각지로 연락원들을 파견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군자금을 지원받았는데 정읍 지역에서 특히 많은 군자금을 모아 보내줬다. 백범이 직접 찾은 김부곤 지사는 태인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이후 군자금을 모아 보내는 데 주력했다. 김 지사는 태인의 제일 부자 김재일 등 부호들로부터 자금을 거둬 임정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영원면의 부호 라홍균은 한 번에 거액인 1000원을 희사하기도 했다(‘송진우 선생과 15인회’). 정읍 지역의 종교단체들도 군자금 지원에 힘을 보탰다. 안후상 박사는 “정읍에 본부를 둔 민족종교인 보천교는 특히 많은 군자금을 보낸 것으로 확인된다”고 말했다. 3·1운동 민족대표 48인으로 활약한 임규(보천교 간부)는 보천교에서 5만 원을 받아 라용균(도쿄 2·8독립선언 참여, 상해 임시의정원 의원)을 통해 임정에 전달했다(‘전북인물지’). 보천교가 만주에서 무장 항일투쟁을 벌이던 김좌진 장군에게 5만여 원을 지원한 정황이 담긴 일제 정보기관(관동청 경무국·關東廳 警務局) 보고서가 최근 발견되기도 했다.정읍=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금일 오등(吾等)이 독립운동을 전개함은 조선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를 절대 지지하고 중앙에 호응하여 완전한 독립 주권국을 전취(戰取)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등은 정의를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며 대한독립을 한사코 전취할 것을 맹세하고 이에 서명 날인함.’(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 1919년 3월 13일 오후 1시, 경남 창녕군 영산면 읍내의 남산(남산봉) 자락에서 청년 23명이 결의한 ‘결사단원맹세서(決死團員盟誓書)’의 내용이다. 10대에서 20대 나이의 청년들은 맹세서에 지장을 찍으며 ‘이 운동에서 일보라도 퇴각하는 자는 다른 단원으로부터 생명을 빼앗길 것’이라고 결의했다. 이들의 비장한 결의는 이후 창녕 지역 곳곳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의 촉매제가 됐다. 그 결과 남산은 ‘영산호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운동의 성지가 됐다. 청년들이 독립운동을 맹세한 자리에는 ‘3·1운동독립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높이 4.6m의 기념비석 하단에는 2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3일 이곳을 찾은 ‘영산3·1독립결사대 유족회’의 권정동 회장은 “매년 3·1절 이곳에서 결사대 후손들이 모여 위령제를 올린다”고 말했다. ○ 육박전 벌인 23인의 결사대 영산의 독립만세 운동은 경성 보성학교 졸업생이자 천도교도인 구중회(당시 나이 21세)로부터 시작됐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보성학교 교장인 최린의 제자였던 구중회는 경성 3·1운동 준비단계 때부터 고향에 내려와 지역 만세운동을 도모했다. 이 소식을 접한 장진수(25), 김추은(24)은 흔쾌히 계획에 동참했다. 고향 친구이자 천도교도였던 세 사람은 수십 명을 규합했지만 정보 보안 등을 이유로 결사대원을 24명으로 한정했다. 24명 가운데 한 명인 하찬원은 처가가 있는 경남 함안 만세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맹세서에 이름을 넣지 못했다. 그렇게 남은 23명의 결사대는 치밀하게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밀양, 의령, 함안 등 이웃 지역과 연락망을 개설하고 다량의 목판본 태극기를 제작했다. 또 요약본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시위용 농악대도 조직했다. 거사일인 3월 13일, 결사대는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개춘회(開春會·봄맞이 하는 모임) 명목으로 약속 장소(현 3·1봉화대 자리)에 모였다. 구중회의 결의문 낭독을 시작으로 대원들은 품안에 숨겨뒀던 태극기를 꺼내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 “약소민족 해방만세”를 외쳤다.(영산3·1독립운동유족회, ‘봉화’) 결사대는 곧이어 읍내로 진출했다. 징, 장구, 북 등 군물(농악)을 앞세우고 남산 줄기를 따라 내려오는 대원들의 모습은 장엄했다. 대원들이 도산 안창호가 작곡한 독립군가인 “무쇠팔뚝 돌주먹 소년 남아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소년행진곡)를 부르자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이에 놀란 영산주재소의 일제 경찰들은 읍내로 진출하는 다리목인 만년교(萬年橋)에 저지선을 만들었다. 시위대가 나타나자 일경은 선두에 있던 결사대원 하은호를 개머리판으로 때려 쓰러뜨렸다. 이에 김추은이 “나한테 총을 쏴라”라고 외치며 일경에 달려들어 총을 빼앗고 육박전을 벌였다. 만년교 주위의 미나리꽝에서 결사대원과 일경 간에 난투극이 펼쳐졌고, 이 틈을 이용해 시위대 본진은 읍내로 나아갔다. 영산 시장터에 도착한 결사대는 독립선언서와 결사대 선서문을 낭독했고, 결사대가 나누어준 태극기를 손에 든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호응했다. 일경은 삽시간에 늘어난 시위 규모에 압도돼 구경만 해야 했다. 600∼700명에 달하는 시위대는 읍내를 누비며 행진하다 해가 저물어서야 해산했다. ○ 전원 체포된 결사대원들 시위 상황을 보고받은 창녕경찰서 소속 일경들은 창녕 장날(3월 14일)에 맞춰 시위를 준비하던 결사대를 급습했다. 장진수, 남경명 두 대원이 일경과의 격투 끝에 체포됐고, 나머지 대원들은 비밀 장소로 피신했다. 일경의 습격에 분노한 결사대원들은 곧장 2차 만세운동에 들어갔다. 13일 오후 8시 다시 남산에 모여 봉화를 지폈다. 시위대가 ‘덩기덕 쿵덕’ 장구를 치자, 영산사람들은 하나둘씩 죽음을 각오하고 모여들기 시작했다.(‘봉화-영산 3·1독립운동소사’) 결사대원들은 창녕경찰서를 습격해 구금된 동지들을 구출하거나 그것이 어려우면 다 함께 유치장에 들어가자고 결의했다. 독립만세 함성과 장구 소리를 앞세운 시위대는 영산 읍내에서 12km 떨어진 창녕경찰서로 향했다. 두 차례 시위에서 농악을 무기로 삼은 것은 영산만세운동만의 차별화된 특징이다. 2차 만세운동은 일경과의 혈투극으로 끝이 났고, 결사대를 이끌던 구중회는 부인과 함께 체포됐다. 이튿날인 3월 14일, 체포를 피한 결사대원들은 창녕장터에 다시 모였다. 장날이었지만 장꾼들은 보이지 않았다. 일경이 만세운동을 막기 위해 파시(破市) 조치를 취한 탓이었다. 대원들은 굴하지 않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했고, 일부는 “감금된 동지를 구출하자”며 창녕경찰서로 돌진해 육탄 항거를 벌였다. 이날의 항거로 결사대원 23명은 모두 체포됐다. 23인의 의거는 이후 펼쳐진 독립만세운동의 촉매제가 됐다.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창녕군 남지에서는 3월 18일 장날에 수백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일으켰다.(정호권 판결문) 결사대원들을 대거 배출한 영산보통학교(현 영산초등학교) 학생들도 들고 일어났다. 영산보통학교 학생들은 3월 26일 “우리들은 결사대의 뒤를 이어 이 운동에 목숨을 내어 놓는다”는 결의문을 작성한 뒤 영산 장날 시위를 주도했다. 보통학교 학생들은 그해 3월 말까지 영산의 우편국 전화선을 끊거나, 일경의 정보원 노릇을 한 일본인들을 몰아내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 운동을 펼쳐나갔다. ○ 혹독한 고문 일경에 체포된 결사대원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23명 모두 1919년 5월 8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재판을 받았다. 구중회, 김추은, 장진수 등 주도자급 3명은 징역 10개월, 면서기 하은호 등 10명은 징역 8개월, 나머지 10명은 징역 6개월을 언도받고 마산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형기를 마친 결사대원들 대부분은 고문과 옥고로 몸이 성치 않았다. 갓 신혼살림을 차렸던 임창수 지사(21)는 이듬해인 1920년 3월 불귀의 객이 됐다. 조삼준 지사(1976년 작고)는 80세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았다. 조 지사의 아들 조진규 씨(80)는 “아버지는 수감 생활 당시 왜경의 고문으로 인해 부러진 한쪽 다리가 곪았지만 치료를 받지 못했다. 상처 부위에 구더기가 들끓어 수감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셨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구중회의 동생인 구남회, 구판돈, 권재수 등 10대 결사대원들은 옥고가 직간접적인 원인이 돼 40세를 넘기지 못한 채 1930년대에 모두 사망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결사대원들의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결사대원 상당수는 출옥 후 중국, 일본, 연해주 등지로 건너가 활동했고 귀국해서는 청년운동, 소년운동, 농민운동, 노동야학운동 등을 통해 영산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결사대원을 이끈 구중회 지사는 출옥 후 “일본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며 일본 와세다대에서 유학한 뒤 고향에 돌아와 결사대원 하상준 등과 함께 ‘사월회’라는 모임을 조직해 청년 운동을 이끌었다. 또 15세 전후의 소년들을 대상으로 영산야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사업에 투신한다. 구 지사는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50년 6·25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됐다. 강직한 성품으로 일경에 맞섰던 김추은 지사는 1930년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뜰 때까지 사비를 들여 소년교육운동과 농민운동 등을 펼쳤다. 그가 결사대원인 장진수, 구남회 등과 함께 ‘영산소작인회’를 조직해 일본인 지주들에 맞서고, 소작인들의 권리 보호에 나선 일은 동아일보에 소개되기도 했다.(동아일보 1923년 4월 8일자) 김 지사의 사망 후 가족에게 남겨진 유산은 ‘빚잔치’였다. 김 지사의 손자 김상현 씨(73)는 “빌려간 돈을 갚으라면서 차압 딱지가 집으로 날아와 남은 식구가 빚을 갚느라 엄청 고생했다”고 말했다. 일제의 눈 밖에 난 집안이라 도움 구하기도 어려웠던 김 지사의 두 아들은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했다. 둘째 아들(김이권)은 어린나이에 일본 광산에서 유황 캐는 일로 돈을 벌어 빚을 갚는 데 보태기도 했다. 23인 결사대는 영산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권정동 유족회 회장(권재수 지사 손자)은 “영산 사람들은 23인 결사대원의 후손이라면 지금도 다시 한번 얼굴을 쳐다봐 준다”고 밝혔다.▼ “납북된 독립운동가 구중회, 北정권 정치적 이용에 협조 거부” ▼北행적 밝혀진뒤 1990년 건국훈장 “6·25전쟁 당시 북한으로 납북된 독립운동가와 국회의원 등 유명 인사들은 세 부류로 나뉘어 관리됐습니다. 먼저 북한에서 결혼을 해 자식을 낳고 살겠다는 부류로 임정 요인 엄항섭 선생,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오화영 선생 같은 분들이 이에 해당했습니다. 이분들은 사후 애국열사릉에 안장됐습니다. 두 번째는 북한 여성과 결혼을 하되 자식을 두지 않겠다는 부류로,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구중회 선생 같은 분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혼자 살겠다는 분들로, 이분들은 무조건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며 단식 투쟁 등을 벌이곤 했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분들은 걸핏하면 김일성 면담 요구와 성토대회 등을 벌였는데, 납치된 소장파 그룹의 대표인 구중회 선생이 늘 선동에 나서곤 했습니다.” 6·25전쟁 당시 남한의 중요 인물 납치 계획부터 납북된 인사들을 관리해 온 북한 고위급 간부 출신 ‘김선생’(가명)이 1980년대 말 구중회 지사의 아들 구자호 씨(전 세종문화회관 이사장)에게 밝힌 얘기다. 납북된 아버지의 행방을 찾기 위해 노력하던 구 씨는 관계 기관의 협조로 김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김선생에 따르면, 김일성은 자신이 항일 독립운동가라고 선전했기 때문에 납북된 독립운동가들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중요 인사들을 조국평화통일위원으로 추대하는 등 예우도 갖추었다. 하지만 납북 인사들 대부분은 북한 정권의 정치적 이용에 협조하기를 거부했다. 구중회 지사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9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구 지사의 이북 행적이 밝혀진 뒤였다. “아버지가 22년이나 서훈을 늦게 받게 된 이유는 6·25전쟁 때 정부가 한강 다리를 끊어버려 피란을 갈 수 없게 만든 탓입니다. 아버지가 이북에 붙잡혀 간 것도 억울한데 독립유공자 선정 담당 부처는 강제 납북 증명서를 떼서 오라는 거예요. 그걸 증명할 길도 없고, 피해자인 유족이 해야 할 일입니까?” 구 씨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불쾌하다고 말했다. 창녕=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1909년 10월 26일 북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는 불과 5개월 만인 1910년 3월 26일 일제에 처형당했다. “나는 죽음도 고문도 두렵지 않다. 나는 조국 해방의 첫 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 만주 뤼순(旅順) 감옥에서 하얀 명주로 된 한복을 입고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인 안 의사는 자신의 희생이 조국 해방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일제가 안 의사를 급하게 처형한 것은 그의 의거가 일파만파 퍼져 나가 국제여론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안 의사의 의거는 20세기 초 제국주의 식민지배자들에게는 큰 공포와 두려움을 안겨줬고, 피압박 민족들에는 해방의 등불을 비추는 소식이었다. 최근 공개된 당시의 극동지역 러시아 신문들은 안 의사가 체포된 후 신문에서부터 사형 집행까지의 종적을 자세히 보도해 안 의사 의거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보여준다. ▷안 의사는 사형 직전 자신의 뼈를 중국 하얼빈 공원 옆에 묻었다가 국권을 되찾으면 고국으로 옮겨 달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안 의사가 순국한 지 109년이 됐는데도 우리는 그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안 의사가 묻혀 있는 곳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가기록원이 발굴해 공개한 러시아 연해주 지역 신문의 1910년 4월 21일자에는 안 의사가 사형 직후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 교도소의 예배당으로 옮겨졌다가, 지역의 기독교 묘지에 매장됐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간 안 의사 유해 매장지는 뤼순 교도소 내 수인(囚人)묘지로 추정돼 왔는데, 다롄 시내의 민간인 공동묘지에 묻혔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러시아 신문 기사는 ‘(일본) 아사히신문의 특파원에 따르면’으로 시작하는 인용 형태인데, 막상 당시 아사히신문에서는 그런 내용이 확인되지 않아 더 정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8·15 광복 이후 한국의 지도자들은 안 의사 유해 발굴에 적잖은 공을 들여 왔다. 백범 김구는 1948년 남북협상 때 김일성에게 안 의사의 유해 공동 봉환 문제를 제기했다. 남북한이 공동으로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한 적도 있다. 남북한은 2008년 한 달에 걸쳐 뤼순 교도소의 원보산 지역을 발굴했으나 지형이 너무 변해 성과가 없었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의 삼의사(윤봉길·이봉창·백정기) 묘원 옆에는 1946년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조성됐다. 하지만 73년째 묘는 텅 비어 있다. 우선은 안 의사의 유품을 안치해 기념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하루빨리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 고국 땅에 모셔 올 날을 고대해 본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2월 27일 전북 임실군 천도교 임실교구 전도실(운암면 지천리). 동학농민혁명 당시 북접(北接) 대접주로 맹활약한 최승우, 독립선언서 서명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박준승 양한묵 두 제자를 천도교 측 대표로 천거한 동학 원로 김영원, 공주 우금치전투에 참여한 임실교구장 한영태 등 동학군 출신 천도교 지도자들이 모임을 갖고 있었다. 참석자들은 경성(서울)의 천도교 중앙총부로부터 전국 규모의 3·1운동 계획 소식을 미리 듣고 ‘일제와의 새로운 전쟁’을 모의했다. 밤에 불을 밝히는 봉화책,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선언서책,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동원책 등 임무가 부여되고, 임실군 각 면을 책임지는 면책(面責)이 선정됐다(‘천도교임실교사’). 거사 일은 경성에서 보낸 독립선언서가 임실교구로 도착하는 시점으로 정해졌다. 참석자들은 운암면 국사봉, 청웅면 백련산, 덕치면 회문산, 삼계면 원통산, 성수면 성수산, 신덕면 치마산 등에서 봉화가 올려지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했다. 또 ‘3·1독립운동거사준비회’도 결성했다. 3월 2일 밤, 독립선언서가 천도교 전주대교구를 거쳐 운암면 임실교구에 전달됐다. 계획대로 임실군 각 면의 시장, 학교, 경찰서, 면사무소 등에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독립만세운동을 촉구하는 격문이 붙여졌다. 하지만 본격적인 시위 계획은 좌절되고 만다. 일제 경찰이 동학혁명의 주무대이자 천도교 핵심 지도자들을 배출한 임실군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온 데다 핵심 인물인 한영태, 강계대 등을 일찌감치 체포해버렸기 때문이다. 전주로 압송된 한영태는 시위 가담자들을 자백하지 않아 3일간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한영태는 실수로라도 관련자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 혀를 깨물었고, 3월 9일 옷을 찢어 만든 줄로 목을 매 자결했다. 김영원 역시 옥중에서 모진 고초를 겪다가 그해 8월 26일 운명했다. 이런 소식은 이후 임실읍, 청웅면, 둔남면 등 임실군 곳곳에서 만세운동을 지피는 불쏘시개가 된다. 임실군에서는 3월 10일부터 4월 7일까지 약 한 달간 17차례에 걸쳐 만세운동이 이어졌고, 79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임실지역 3·1운동 100주년 기념도록 迎春’).○ 보통학교 생도들의 만세운동 임실지역의 본격적인 만세운동은 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해 불붙여진다. 한영태의 순국 하루 뒤인 3월 10일, 임실읍에서 남동쪽으로 9km가량 떨어진 둔남면 오수리 오수공립보통학교(현 오수초등학교) 학생들이 첫 깃발을 들었다. 이날 오전 10시 학생들은 첫 수업 후 쉬는 시간을 신호로 운동장에 모여 오수 역전(역참)으로 몰려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1919년 3월 15일 전라북도장관 보고). 학생들의 기습시위에 놀란 일본인 교장과 주재소 순사들은 학생들을 설득하고 학부모를 강압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일경은 또 10대의 어린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벌인 시위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배후를 캐기 위한 탐문수사를 벌였다. 하지만 생도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모르는 사람이 독립선언문을 주고 갔을 뿐”이라며 비밀을 사수했다. 이날 시위의 배후 주도자는 교사 이광수(1896∼1948)였다. 오수리와 인접 지역인 남원군 덕과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석기 덕과면장의 조카인 이광수는 이후에도 임실지역 청년회와 농민회를 통해 시위를 이끌었다. 16일 방문한 오수초등학교 교정에는 그의 항일운동을 기념하는 ‘설산 이광수 선생 의거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의 약력과 사진이 교실 복도 게시판에 걸려 있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임실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임실읍 장날인 3월 12일 오전 10시경, 시장 한복판에서 2000여 명이 참가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지고,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이 곳곳에 뿌려졌다. 남원 등지에서 급히 차출된 일본 수비대와 헌병, 현지 경찰들이 무차별 총격으로 진압에 나서면서 시위대는 흩어졌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이날 밤 9시경 시위대 1000여 명이 읍내와 인근 산에 모여 동시다발적으로 만세를 부르는 게릴라식 운동을 펼쳤다. 횃불을 든 시위대는 산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이 들이닥치면 숨죽였다가 다시 읍내에서 만세를 부르고, 일경이 읍내로 내려오면 다시 산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며 밤을 새웠다(‘전북지역독립운동사’). 임실읍 만세운동이 시작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3·1동산에는 1978년 동아일보사가 지역 사회와 협력해 만든 ‘3·1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을 안내한 임실군청 김철배 학예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세웠던 신사(神社) 터에 이 기념비를 세운 것은 지역 사회의 반일 정서와도 관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 원동산의 만세 소리 임실지역 만세운동은 3월 23일의 오수면 시위로 이어졌다. 그 중심지가 구 오수장터가 있던 원동산(현재 오수면 오수리 원동산공원)이다. 매월 3일과 8일에 장이 서는 ‘오수 삼팔장’에서 지역 유지인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은 시위 계획을 모의했고, 야트막한 둔덕으로 이뤄진 원동산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사전에 거사 계획을 감지한 임실군수와 경찰서장이 만류와 협박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이기송은 독립만세운동의 정당성을 발표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이에 나머지 유지들이 시위를 이끌었고, 군중은 삽시간에 800여 명 규모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이기송이 끌려간 주재소를 향해 거리행진을 벌이며 만세를 외쳤고, 그중 80여 명은 “이기송을 석방하라”며 주재소로 들이닥쳤다. 그 기세에 놀란 일본인 순사는 이기송을 바로 풀어주었다. 시위대는 이기송을 둘러싼 채 장터로 나가 거리를 돌며 시위를 이어갔다. 저녁 무렵이 되자 시위대는 2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철시한 시장에서 일본인 점포를 부순 다음 면사무소로 달려갔다. 면장과 면서기 등에게는 “너희도 조선 사람이니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독려해 만세대열에 합류시켰다. 시위대는 다시 오수 주재소로 향했다. 이만의는 주재소를 접수하고 유치장에 갇혀 있던 독립운동 참가자들을 풀어주었다. 이때 주재소에 있던 순사보 고택기가 총으로 위협했지만 이만의가 덤벼들어 총을 빼앗은 뒤 그에게도 만세를 부르도록 했다. 일제 경찰들은 많은 군중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우리 백성들은 의기가 더욱 매서워져서 결사적으로 용진하므로 악한 적도 감히 칼을 뽑지 못하니, 이는 인자무적(仁者無敵)임을 가히 알게 된 바였다. 만세 소리는 산이 울고 골짜기가 이에 따르게 하여 백의의 빛깔은 어두운 밤을 낮과 같이 밝히는 듯했다.”(김병조, ‘독립운동사략’) 당시 오수는 일제에서 벗어난 ‘해방구’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비상연락을 받고 남원에서 출동한 일제 헌병과 임실경찰서 무장 병력이 나타나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했다. 삼계면 출신 허박이 그 자리에서 순국하는 등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시위로 50여 명이 체포됐다. 특히 둔덕면의 이기송 등 둔덕 이씨 일가만 무려 16명이 투옥됐다. 이기송은 이후 무죄를 주장하며 고등법원에서 이같이 항변했다. “일한합병 이후 조선인은 모두 독립의 뜻이 있었으므로 만세를 외쳤다고 하여 어찌 범죄라고 할 수 있는가. … 우리 2천만 동포를 감옥 가운데 고통하게 함은 우리 동포의 단결심을 하루하루 강고하게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내가 죽은 후에 내 자손이 있고 자손은 진보한다. 천만 년이라 해도 이 마음을 폐하지 못한다.”(‘이기송 외 7인 판결문’) 이기송은 또 “우리 민족은 일본에게 조선을 허락한 일이 없다”라며 상고했으나 일제 법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시위주도자들에게 1∼7년형의 옥고를 치르게 했다. 100년 전 ‘임실의 독립선언’ 장소였던 원동산에는 현재 당시를 기억할 만한 게 거의 없다. 이곳은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오수 의견비(義犬碑)와 개를 형상화한 동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주변에 누정과 관찰사 등의 선정비만 세워져 있다. 오수면의 3·1운동을 기리는 기념탑(오수면 오수리 산3)은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비탈진 곳에 ‘외롭게’ 서 있었다. ▼ 옥고 치른 지사 35명 ‘경착영춘계’ 만들어 비밀 독립운동 ▼ 일제 탄압에도 독립염원 접지 않아… 광복후 계원 21명 국가유공자 추서임실군에서 가장 치열한 시위가 전개된 오수 3·1만세운동에선 전주 이씨(일명 둔덕 이씨)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민족대표 33인이 받은 최고 3년형보다 무려 4년이 높은 7년형을 선고받은 이기송 선생(1888∼1939)을 비롯해 모두 16명의 둔덕 이씨가 재판에 회부돼 고초를 겪었다. 이들은 옥고 후에도 독립운동을 접지 않았다. 최근 이기송 선생의 후손 집에서 발견된 자료집 ‘영춘계안(迎春契案)’에 이런 사실이 수록돼 있다. 자료를 찾아낸 김철배 학예사는 “1921년 임실군 오수 지역에서 조직된 경착영춘계(耕鑿迎春契·밭을 갈면서 봄을 기다리는 계)는 오수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지사 35명이 출옥하면서 차례로 가입해 만든 비밀 독립운동단체”라고 설명했다. 8·15광복 후 계원 35명 가운데 21명이 순차적으로 국가유공자로 추서됐다. ‘영춘’이라는 이름에서도 독립의 염원을 읽을 수 있다. 봄을 의미하는 ‘춘(春)’이 실은 조국 독립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이며, 영춘은 조국 독립을 맞이하는 행위라는 설명이다. 영춘계원이었던 이성기 선생(1890∼?)이 1977년에 증언한 자료에 따르면, 영춘계는 보통계와 같은 모양을 갖췄지만 ‘춘(春)을 맞는다’는 뜻을 내포해 춘풍추국(春風秋菊)에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을 벌이는 비밀결사였다. 영춘계는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4∼5년 만에 해산되고 만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영춘계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은 임실 지역의 ‘아픈’ 독립운동 가족사와 연결돼 있다. 이기송 가문은 만세운동 이후 여러 친지와 이웃들까지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자 고향을 떠났고, 그 후손들은 이런 사실들을 모르고 살아왔다. 김철배 학예사는 “‘영춘계안’도 광주에서 사는 후손이 무언지 모르고 보관해 오다가 우연히 눈에 띈 것”이라고 밝혔다.임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세계유산위원회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한국의 서원에 대해 사실상 등재가 확실시되는 ‘등재 권고’ 통보를 해왔다. 최초의 사액서원인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해 모두 9곳의 서원이 선정 대상이 됐다. 2016년 세계유산 등재 신청 때 실패했다가 3년 뒤 날아든 희소식이다. 그런데 중국은 배가 아픈 모양이다. 중국 환추시보는 14일 인터넷판에서 “한국이 또다시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이번엔 정말로 중국과 큰 관계가 있다”며 불편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마치 중국 것을 빼앗긴 것 같다는 듯. ▷서원이 중국에서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에선 악록(岳麓)서원 등 4대 서원이 유명했고, 청나라 때는 7000여 곳에 달하는 서원이 번창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중국 서원은 단 한 곳도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지 못했다. 중국 서원은 관료 양성을 위한 ‘고시원’ 기능에 치우쳤고, 시대에 따라 성리학 양명학 고증학 등으로 학풍이 바뀌며 일관성을 유지해오지 못한 것이 약점으로 지적된다. 반면 한국의 서원은 조선 성리학의 예(禮)를 꾸준히 실천하고 존속한 점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실제로 조선 후기 서원이 토호 세력의 이권 수탈의 장이자, 특정 가문을 지키는 사적 용도로 쓰이는 등 병폐도 적지 않았지만 도덕군자를 함양한다는 본래의 기능은 유지돼 온 게 사실이다. ▷한국의 서원은 건축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탁월한 사례’라는 점도 부각됐다. 서원 건립에 앞장섰던 퇴계 이황은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경개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만큼 교육적 성과가 크다”고 말했다. 한국의 서원들은 대개 이 원칙 아래 건립됐으며, 건물 입지도 특징을 지닌다. 학문 탐구에 비중을 두는 강학 중심의 서원은 핵심적인 명당 혈처(穴處)에 교육을 하는 강당(講堂)을 배치한 반면, 제향(祭享)을 중시하는 서원은 사당(祠堂)을 핵심 길지에 배치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서원이 자리한 곳의 앞산과 뒷산이 열린 공간으로 확장돼 사람들과 교감한다는 자연관 등이 외국인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밝혔다. ▷세계유산 지정 경쟁에서 한국에 밀린 중국은 반전의 카드를 쥐고 있다. 바로 풍수학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계획이다. 서원 풍수를 연구해온 한양대 박정해 박사는 “10여 년 전부터 준비해 온 중국의 노력이 현실화할 경우 우리나라 서원을 비롯해 왕릉, 사찰 등 풍수 관련 문화재들이 중국의 아류로 분류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