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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시작되면서 ‘과거’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중요한 자산이자 권력의 도구로 이용되어 왔다. … 역사가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이 거창한 머리말에 떨지 말자. 이 책은 에드워드 카(1892∼1982)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아니다. 꽤나 긴 제목이 엔간히 말해준다. 그래, 방바닥에 드러누워 배 두드리며 봐도 아무 문제 없다. 그렇다고 한때 유행했던 ‘오락물’에 가까운 흥미 위주 역사서냐면 고건 또 아니다. 물론 저자는 지난해 전작 ‘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에 이어 “재미난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라 겸양한다. 하지만 군산대 사학과 교수인 그의 글엔 ‘뭔가’ 있다. 편안한 웃음 뒤춤에 잘 벼린 칼이 숨겨져 있다고나 할까. 자, 일단 이 근거 없는 음모론을 이어가련다. ‘역사를…’은 역사 속 유명인 7명을 다룬다. 골리앗과 싸운 다윗, 로마 황제 네로,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 등 대체로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런데 ‘실제’ 그들은 세상에 흔히 알려진 것과 다르다고 쓰윽 포석을 깐다. 오호라. 감춰진 얘기를 까발리는 일만큼 신나는 게 어디 있겠나. 이를테면, 네로는 정말 폭군이었을까. 저자에 따르면 이런 오명은 억울한 면이 많다. 그가 핏줄도 정적이면 잔인하게 죽인 건 맞다. 한데 ‘왕좌의 게임’에서 그건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오히려 네로는 평민이 사랑했던 황제였다. 사후에도 대중에 영합해 그의 후예를 자처한 정치인이 나올 정도였다. 문제는 네로가 ‘가진 자’에게 적이었단 점이다. 귀족은 세금 부담과 (자신들에게 유리한) 전통의 붕괴를 두려워했다. 당연히 그들이 주도한 역사서가 네로에게 우호적일 리 없었다. 게다가 영화로도 유명한 19세기 소설 ‘쿠오바디스’가 최악의 폭군으로 묘사한 게 결정적으로 머리에 박혀버렸다. 저자가 ‘선택한’ 여타 인물도 마찬가지다. 현재 찬사를 받든 비난을 받든 다 뒤집어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다. 그게 남성이건 주류이건 강대국이건, ‘힘’을 지닌 세력에 따라 역사는 일그러진다. 하나 더. 이 굴곡은 남 일이기만 할까. 책 행간엔 너무나 많은 거울이 숨어 있다. 어떤 문장은 21세기 대한민국에 너무 맞춤이라 눈이 동그래진다. 다시 말하지만, ‘역사를…’은 재미가 우선이다. 크기도 앙증맞고 띠지 같은 꾸밈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겨울밤 구들방에서 들려주신 할머니의 옛얘기엔 곱씹을 통찰과 교훈이 배어있다. 그런 뜻에서 엉뚱하지만, 저자가 전작에서 쓴 한 글귀를 인용한다. “재미난 이야기의 기준은 무엇일까? …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는 ‘영양가’가 있어야 한다. … 우리의 인식 구조에 자리 잡고 있는 허위의식을 밝혀주는 이야기가 재밌을 때가 많다.” 국내 ‘역사’ 요리사가 차린 서양식 별미를 흐뭇하게 즐겨보시길.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아이라고 감정이 단순하진 않다. 어른만큼 말로 구분해서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용기 슬픔 분노 행복 질투 외로움 부끄러움 흥분 두려움…. 알고 보면 다 자연스러운 감정인 것을. 하루에도 여러 번씩 바뀌는 감정. 그게 바로 나 자신이다. 이 그림책은 형식 자체가 주는 메시지도 크다. 표지부터 마지막 직전까지 뻥 뚫려 있다. 그 속엔 작고 어린 ‘내’가 있다. 어떤 감정이 밀려와도 “내가 느끼는 감정이 곧 나 자신”이란 뜻.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이가 타인도 귀하게 여길 수 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이 유고집은 천국에서 온 편지일까. 저자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4년. 수많은 독자가 사랑했던 그의 글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건 분명 슬프다. 그런데 미공개 산문 7편을 포함한 에세이집이 다시 찾아오다니. 팬들에겐 축복이자 선물일 터. 의사이자 과학자였던 저자를 새로이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홀로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북미 대륙을 횡단한 20대부터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종이 책’에 대한 사랑을 접지 못한 말년까지. 그의 글은 여전히 종이 책이 전하는 질감만큼 온기가 넘친다. 하지만 100% 만족스럽느냐고 묻는다면 다소 망설여진다. 다 따로 썼던 걸 ‘짜깁기’했단 점을 감안해도, 너무 천차만별이다. 특히 발표하지 않았던 작품은, 이유나 사정이 있었을 텐데 싶기도 하다. 저자는 “뼛속까지 독자였다”고 자신할 만큼 책의 물성(物性)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 종합선물세트는 누군가에겐 ‘소소(so so)한’ 러키 박스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어쩌랴. 물어도 준치요 썩어도 생치다. “82년 전 나를 이 세상에 데려다 주었듯이, 조만간 나를 이 세상에서 데려갈 테니” 같은 문장들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책을 집어들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올리버 색스는 올리버 색스니까. 모든 게 그 자리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구는 돌아가고 삶은 이어진다. RIP.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2017년 ‘5·18문학상’ 동화 부문 신인상을 수상한 저자의 첫 작품집. 표제작을 포함해 다섯 편의 동화를 실었다. 저자는 특수학급 교사로서 겪은 경험을 잘 녹여냈는데,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아이의 시선에서 산뜻하게 풀었다. 책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모두 장애를 지녔지만, 조금 불편할 뿐 결코 남과 다르지 않다. 밝고 적극적이며 매력적이다. 삐뚤어진 잣대를 갖다대는 건 어른과 그에 영향을 받은 다른 아이들이 아닐는지. 함께 실린 개구쟁이 같은 그림이 글맛을 더욱 살려준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제왕이 돌아왔다. ‘아키라’ ‘공각기동대’와 함께 1980, 90년대 일본 3대 SF만화로 꼽히던 ‘총몽’이 무삭제 버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90년대 초반 팬들은 ‘사이버펑크(cyberpunk) 장르의 걸작’이라 불리던 이 만화를 불법 해적판으로 접하기도 했다. 요즘엔 올해 2월 국내 개봉한 미국 할리우드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 원작으로 유명하다. 작품은 지금 봐도 신선하다. 선택받은 자들만 사는 공중도시와 무법천지인 지상사회. 인간의 뇌를 가졌으나 온몸이 기계인 사이보그. 기억을 상실했지만 극강의 무술을 지닌 여주인공. 쉼 없이 활극이 펼쳐지면서도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잃지 않는 서사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왜 미국 할리우드가 21세기에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었는지 수긍이 간다. 물론 90년대 작품인지라 ‘촌스러운’ 면도 있다. 그림체는 컴퓨터그래픽을 동반한 요즘 작품만큼 깔끔하지 않다. 흐름이 매끄럽지 않고 엉성한 대목도 눈에 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반갑다. 공장에서 찍어내지 않고, 장인이 공들인 ‘핸드메이드’의 매력이 물씬하다. 이번에 출간한 버전은 원래 9권이었던 작품을 지난해 일본에서 새롭게 5권으로 엮은 완전판. 1, 2권이 먼저 나왔고 여름까지 나머지를 순서대로 선보인다. 출판사는 “완전 판 다음엔 또 다른 시리즈인 ‘총몽 외전’과 ‘총몽 라스트 오더’ 그리고 지금도 현지에서 연재하는 ‘총몽 화성전기’도 출간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지금 한국사회는 세대와 계층, 이념 간의 갈등과 분열로 인해 나라를 견인하고 미래로 끌어가야 할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고 일어나게 하는 원천인 부활 신앙이 어느 때보다 사회 전 영역에 필요합니다.” 오정현 사랑의교회 담임목사는 부활절을 앞두고 가진 17일 인터뷰에서 “적지 않는 사람들이 상처입고 고통 받는 현실”을 줄곧 걱정했다. 오 목사는 “갈등 에너지를 민족과 사회를 위한 건강한 에너지로 바꾸려면, 한국교회가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올해 부활절을 맞아 사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모든 인생은 살다가 결국은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희망과 소망과 회복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부활 신앙 위에 있는 기독교 안에서는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한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향한 부활절의 메시지가 아닐까요.” ― 한국사회에 만연한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우리는 현재 갈등해소 비용이 너무 많아요.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1인당 GDP의 27%를 사회적 갈등 관리 비용으로 쓴다고 합니다. 물론 갈등은 지금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교회가 지금 폭발하는 사회적 갈등 해결의 선두에 서야 하는 이유는 ‘통일 시대’를 앞뒀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갈등은 통일 이후의 갈등에 비하면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교회가 해결의 물꼬를 트지 못하면 통일시대의 갈등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요.” ― 통일 시대, 사랑의교회가 지닌 비전은… “피 흘림 없이 복음적 평화통일입니다. 통일은 더 이상 탁상공론이 아닙니다. 실체입니다. 2003년 서울 사랑의교회로 부임해 제가 맡은 역할 중 하나가 ‘복음적 평화통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애국·애족하는 교회였습니다.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강력한 보호하심으로 지켜졌다고 믿습니다. 통일 시대를 여는 저와 사랑의교회의 꿈은 평양과 신의주, 개성에서 모두가 민족을 위한 푸른 꿈을 안고 세계를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 지금 한국사회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사회 문제는 뭐라고 보십니까. “저출산 문제라고 봅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앞장서야 할 긴급한 사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단순히 아이를 많이 낳는 게 아니라, 다음 세대를 향한 올바른 교육을 위해 물꼬를 열어줘야 합니다. 모세혈관처럼 뻗어 있는 한국교회가 아이들을 안심하고 키울 수 있는 장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의교회는 이를 위해 구체적 실천 방안을 세우고 있습니다. 미세먼지도 심각합니다. 이 문제에 교회가 앞장서야 하는 이유는 빈부의 문제를 심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는 여러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폐해를 고스란히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을 도울 책무가 있는 교회는 마땅히 미세먼지를 해결하는 일의 중심에 서야 할 것입니다.” ― 목회 사역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십니까. “목회자의 힘의 원천은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 은혜가 없으면 목회를 힘 있게 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성도들의 사랑과 신뢰입니다. 교인들의 절대적인 신뢰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습니다. 2003년 사랑의교회에 부임해 16년 사역한 뒤, 올해 3월 재신임 성격의 투표에서 성도들이 96.42%의 신뢰를 보여줬습니다. 제 사역의 힘은 오롯이 성도들의 사랑과 절대적인 신뢰에서 비롯합니다.” ― 사랑의교회는 한국교회와 함께 사회와 민족을 위해 어떤 일을 할지 기대됩니다. “사랑의교회의 시대적 소명은 우리 교회만 잘하는 게 아니라 한국교회와 함께 민족을 섬기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지난해 ‘생명비상 사명비상 은사비상’이란 목표를 가졌는데, 이제는 ‘생명나눔 사명나눔 은사나눔’으로 국가와 지역사회를 섬길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교회는 하나이며, 서로의 연약함을 채우고 도와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사랑의교회와 한국교회는 주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랑의교회(서울 서초구)는 부활절을 맞아 생명의 공동체가 돼 ‘생명의 빛을 온 세상에 전달하는 도구로써 쓰임 받기’를 위해 기도한다. 특히 교회당은 성도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공유하고 열린 공간으로 조성했다. 아울러 사랑의교회는 민족과 나라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 역할을 감당하면서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고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선한 공동체의 사명’을 견지하려 한다.부활의 실천, 세상을 섬기는 공간 영국의 세계적인 복음주의 설교가였던 존 스토트 목사(1921∼2011)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세상에 대한 전도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주셨다”고 말했다. 사랑의교회 역시 부활절을 맞아 교회당을 누구나 찾아와서 인생의 짐을 내려놓는 쉼과 치유의 터로 만들고자 한다. 특히 문화 예술의 여유를 관조해 세상을 위한 나눔과 섬김을 공유한다. 이를 위해 3대 실천방안도 마련했다. 첫째, 누구나 거부감 없이 소통하는 개방형 문화공간이다. 종교적 색채를 자제하고 주민들이 편하게 드나드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실제로 지역사회 공공기관이나 단체가 임대해 아트갤러리나 북카페 등을 운영하기도 한다. 둘째, 공공재로서의 역할 수행이다. 사랑의교회 교회당은 장애인이 건물에서 이동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만들었다. 이동장벽을 완전히 제거해 최우수(Barrier Free) 등급을 취득했다. 또한 대지면적 기준으로 54%를 완전 개방하고, 교회 경내를 24시간 이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연을 생각하는 친환경 건축을 꼽을 수 있다. 태양열과 자동절전 조명시설, 유휴 냉난방 에너지 활용 시스템을 갖췄다. 사랑의교회는 건축계획단계부터 예배에 국한하지 않고 대중문화공연을 열 수 있는 ‘공공성’에 중점을 뒀다. 본당은 기둥을 제거해 음향과 조명이 방해를 받지 않는다. 수용인원 6500여 석에 44개의 채광창을 갖춰 대규모 오페라 공연도 가능하다. 실제로 2013년부터 ‘서울시립교향악단 우리동네 음악회(2014년)’ ‘영화 더크리스마스 상영(2017년)’ ‘호두까기발레 공연(2018년)’ 등 다양한 이벤트를 선보였다.꾸준한 나눔과 섬김 사랑의교회는 나눔과 섬김의 책임을 잊지 않는다. 2014년 설립한 국제구호개발 NGO ‘사랑광주리’(이사장 오정현 목사)는 북한 어린이에게 영양식품을 꾸준히 지원해왔다. 지금까지 7개 시설에 모두 78t(116만 명 분량)을 지원했다. 또한 △북한 돼지농장과의 경제협력 △종묘장 등 환경개선사업 △평양 소재 대학 교육지원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사랑광주리는 또 2015년부터 일대일 상담과 봉사활동, 음식 나누기 등을 통해 대학생과 취업·창업을 준비하는 청년 지원에도 힘쓰고 있다. 사랑의교회 ‘사랑의복지재단’과 ‘이웃사랑선교부’도 눈길을 끈다. 1996년 설립한 재단은 지금까지 300억 원가량을 어린이와 장애인, 취약계층에 지원했다. 이웃사랑선교부는 해마다 ‘사랑의 김장 김치 나누기’를 비롯해 지역 홀몸노인과 입양가정 돌봄에 힘쓰고 있다. 최근 국가적 화두인 저출산 극복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2014년 서초구에 기부채납 방식으로 교회 공간 325m²에 대형 어린이집을 건립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있는 그대로의 미국의 과거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옹골찬 유혹이다. 솔직히 이 책은 제목이나 두께가 되게 부담스럽다. 500년 조선사도 헷갈리는데, 다른 나라 4세기가 가당키나 한가. 근데 교과서처럼 외웠던 ‘아메리칸드림’ 이면을 들춰 주겠단다. 어떤 이에겐 자유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성조기가 실은 카스트 버금가는 계급사회의 깃발이란 주장이다. 그리고 그 최하층에서 허덕이는 백인 빈민들이 있다. 바로 책의 원제인 ‘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백인 쓰레기)’다. 이 정도면 저자가 미국 주적이 아닐까 싶지만, 아이젠버그는 루이지애나주립대 석좌교수다. 2016년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가 선정한 ‘가장 중요한 사상가 50인’에도 뽑혔다. 그가 자국의 치부라고도 할 만한 속살을 이토록 가차 없이 헤집는 이유는 뭘까. “마뜩잖을지 모르지만, 백인 쓰레기는 우리나라 서사에서 중심이 되는 가닥이다. (때로는 보이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존재야말로 미국 사회가 우리가 의식하고 싶지 않은 이웃들에게 부여한, 자꾸 바뀌는 꼬리표에 집착한다는 증거다. ‘그들은 우리가 아니야’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싫든 좋든, 그들은 우리이며 항상 우리 역사의 본질적인 일부였다.” 그 신념을 바탕으로 수집한 근거는 놀랍도록 매섭다. 일단 건국신화부터 뒤집었다. 신대륙으로 건너온 조상들은 개척영웅이 아니었다. 영국의 가진 자들은 이익 창출과 거지 퇴출(이것도 상당히 순화한 표현이다)을 위해, 못 가진 이들은 강제노역이나 추방에 떠밀려 아메리카로 왔다. 대서양을 건너왔건만 ‘기회의 땅’은 귀족에게나 허락됐다. 빈자들은 ‘영주관할인(leet-men)’이라 불리며 대지주에게 예속된 처지였다. 저자는 이런 계급 구도가 남북전쟁을 거치고 20세기를 넘기면서도 여전하다고 본다. 아니 오히려 더 굳어졌다.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등 건국의 아버지들이 친(親)계급주의 성향을 지녔던 건 넘어가자.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20세기 전후 여러 학자는 우생학을 끌어와 ‘가난은 타고난 기질’ 탓으로 몰고 갔다. 심지어 21세기에도 일부 정치인은 실직을 개인의 나태와 동일시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한다. 2009년 기준 미국 상위 1%는 소득의 5.2%만 국세와 지방세로 내는 반면에 하위 20%는 10.9%나 내는 기형적 구조는 다 뿌리가 있던 셈이다. ‘알려지지…’는 매우 논쟁적이다. 한쪽만 본다며 쉽게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많을 법하다. 게다가 강 건너 구경인지라 팍팍 와 닿지 않는 면도 있다. 생소한 지명과 인물이 숱해 가끔 ‘멍 때림’도 유발한다. 하지만 지난 미 대선에서 왜 그가 당선됐는지 어떤 정치서적보다 명쾌히 보여준다. 몇 세대 동안 하수구 취급을 받은 이들에게 ‘주류’는 어느 당, 어떤 공약이었건 위선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한반도에 이게 과연 남 일일까. 이미 세찬 바람이 낯짝을 때리건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어쩌면 이 책 구입비는 ‘1만6800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읽는데 분명 돈이 더 들어간다. 분명 빵빵하게 저녁도 먹었건만. 반갑잖은 군침이 밀려온다. 독서가 마음이 아니라 몸의 양식도 될 줄이야. 담뱃갑 따라 “체중이 불어날 수 있습니다”란 경고 문구라도 표지에 실어야 할 판이다. 하지만 다이어트와 잠시 이별하고 나면 신나는 모험이 황홀경으로 펼쳐진다. 근사한 사진 때문이라면 더 나은 요리책이 훨씬 많다. 우리의 입을 달래주는 갖은 디저트들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배우는 건 기대보다 더 즐겁다. 실은 디저트는 이름만 달랐을 뿐, 고대부터 존재했다. 옛사람이라고 ‘단짠단짠’을 싫어했겠나. 하지만 영국 옥스퍼드백과사전의 음식 분야 필자인 저자에 따르면 본격적으로 디저트가 각광받은 건 중세 무렵이다. 역시 주인공은 ‘설탕’. 인도에서 사탕수수로 정제하는 기술을 개발한 뒤 돌고 돌아 유럽으로 흘러왔다. 당시엔 설탕이 병도 치료하는 비싼 약재이자 최고급 향신료로 대접받았다. 당연히 상류층, 그들만의 잔치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 아닌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린 이들은 맛이나 모양을 따질 리 없다. 여유가 되니 폼도 잡는다. 디저트가 화려하게 꽃핀 17, 18세기가 왕정·귀족문화의 절정기였던 건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당시 디저트는 눈으로 즐기는 ‘과시용’이 많았다. 성이나 영토를 미니어처처럼 만들어 내놓기도 했다. 설탕 등으로 만든 외벽을 부수면 안에서 새들이 날아오르는 디저트도 유행이었다고 한다. 재밌는 건, 과거엔 디저트가 꼭 식사 마지막에 먹는 요리는 아니었다. 유럽도 우리네 ‘한상차림’처럼 고기 생선과 함께 올라왔다. 지금과 같은 코스요리는 ‘러시아식’인데, 실용을 중시하던 이 풍조가 유럽으로 전해져 정착했다. 마찬가지로 대다수 디저트는 어느 한 나라가 ‘자기 것’이라고 부르기 애매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리저리 뒤섞이며 완성된 형태니까. 앞서 얘기했지만 ‘디저트의 모험’은 굉장히 즐거운 탐방이다. 세계 곳곳을 돌며 뿌리 내린 디저트를 따라, 미식여행을 다녀온 듯한 만족감이 크다. 특히 디저트의 양대 산맥이라 할 ‘크림’(아이스크림 포함)과 ‘케이크’는 따로 1장씩 할애해 설명했는데, 더욱 허기가 지니 주의하시길.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디저트가 19, 20세기 대중에게 퍼져 나가는 대목은 격변의 역사만큼 흥미진진하다. 다만 하나 아쉬운 건, 이 모험이 너무 한쪽 동네만 들여다본단 점이다. 디저트라 부르진 않았을지언정, 다채로운 후식을 보유한 아시아를 너무 홀대한다. 중국과 일본은 1페이지뿐이고, 한국은 아예 없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도. 겨우 80일 동안 몇 나라 들러놓고 ‘세계일주’라 불러서야 되겠나. ‘리얼 어드벤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저자는 얼른 다시 짐을 싸시길. 아님 다른 누군가라도.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파란 하늘∼ 빨간 지구∼.’ 왠지 동요 한 구절을 연상시키는 제목에 현혹되지 마시라. ‘파란하늘…’은 버겁도록 묵직한 책이다. 왜 아니겠는가. 빙하가 녹아서 북극곰이 물에 빠지는 영상. 기상이변으로 몰아닥치는 자연재해. 아니, 뿌옇다 못해 마스크를 써도 목이 텁텁한 대기. 최소 한 번쯤 봤거나 경험한 지구의 경고는 어깨를 짓누른 지 오래다. 전 국립기상과학원장인 대기과학자가 썼으니 품질이야 믿고 봐도 될 터. 아니나 다를까.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입천장이 메마른다. 미리 말하지만, 저자는 결코 과장해서 겁을 주진 않는다. 오히려 이 심각한 내용을 담담한 필치로 정리한다. 하지만 다들 안다. 원래 차분한 팩트가 제일 무섭다. 요즘 한반도에서 가장 큰 관심사인 ‘미세먼지’를 살펴보자. 어느 순간 미세먼지는 호환마마, 심지어 핵미사일보다 겁나는 존재가 됐다. 그런데 실은 “서울의 오염먼지 농도는 2000년대 초반이 지금보다 50퍼센트 이상 높았다”. 저자도 지적하지만, 미세먼지란 용어 자체를 본격적으로 쓴 것도 2014년 이후다. 게다가 미세먼지는 생태계에서 긍정적 효과도 지녔기에, 예전부터 썼던 스모그나 연무로 부르는 게 옳다고 한다. 이 혼란은 무분별한 용어 사용에 멈추질 않는다. 우린 쉽게 중국을 탓하지만 아직 명확한 결론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심지어 봄에 몰려올 ‘공포의 황사’는 실제로는 “코털이나 기관지 점막에서 걸러져 배출되므로 노약자가 아닌 건강한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토양은 대부분 산성화돼 있어 알칼리 성분인 황사는 토양을 중화시키는 ‘고마운’ 역할도 한다. ‘파란하늘…’은 참 반가운 책이다. 원래 오해나 무지만큼 무서운 게 없다. 특히 지구온난화나 오염먼지와 같은 이슈는 대단히 중요하나 대다수가 ‘잘 모른다’. 숱한 관련 서적이 있지만 다소 장황하거나 와 닿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저자는 조곤조곤 맥을 짚어 준다. 깨진 빙하가 빨리 녹는 이유를 “덩어리 얼음을 따뜻한 곳에 둬도 천천히 녹지만, 얼음을 깨뜨려 물그릇에 넣으면 빠르게 녹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하는 친절함도 맘에 든다. 특히 이 책을 손에 쥐었다면 마지막 ‘나오는 말’은 곱씹어 읽길 권한다. 30년 넘게 현직에 종사했던 과학자로서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빼곡하다. 과학을 과학으로 대접하지 않고, 정책의 도구로 쓰는 한국의 현실은 울림이 크다. 과학자조차 공무원이나 영업사원으로 만드는 사회에서 어떤 개선이나 진보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저자를 비롯한 과학자들에게도 어쭙잖은 부탁 말씀을 드린다. 계속해서 이렇게 현안을 다루는 과학서가 나와야 한다. 최근 청와대에서 발표한 인공강우 실험은 “요행을 기대하는 현대판 기우제”란 질타처럼. 대중이 그만큼 알아주지 않더라도, 한숨과 좌절이 반복되더라도 말이다. 모두가 하늘과 지구를 돌아볼 수 있도록.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에리코는 정말 구제불능이다. 주위에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도 있었을 게다. 20대 초반 여성이 기껏 한다는 일이 에로만화 편집자. 힘든 일만 있으면 엄마에게 쌍심지. 급기야 자살 미수까지. 겨우 살아났지만 재취업은 물 건너가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연명하다가 또 목숨을 끊으려 하고…. 가족과 친구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아마 이렇게 ‘동전의 한쪽 면’만 보면 그리 정이 가질 않는다. 하지만 동전을 뒤집어보자. 술과 노름에 빠진 아버지. 학창시절 지속된 집단따돌림. 겨우 취직한 직장은 월급이 고작 12만 엔(약 122만 원). 숱한 야근과 가욋일에도 추가 수당도 없다. 지병이던 우울증은 점점 깊어지고…. 나락으로 떨어진 심정이 이해가 간다. 실은 이해한단 말도 에리코에겐 조심스럽다. 어떻게든 “평범하게” 살아보려던 그에게 세상은 냉혹했다. 병력과 자살 시도는 자립할 기회를 박탈한다. 치료와 위안을 위해 찾은 클리닉센터는 환자를 돈벌이 대상으로 여긴다. 기초생활수급자를 대하는 공무원들은 왜 그리 야멸치고 냉랭한지. 갈수록 심장이 쪼그라드는 에리코는 인생이란 무거운 굴레를 벗어던지고만 싶다. 짐작했겠지만, 다행히 그는 ‘회복’하고 있다. 다시 한 발짝씩 내딛고 있다. 봉사단체에서 일하며 세상이란 문을 노크했다. 작지만 소중한 월급봉투를 쥐고 친구에게 점심을 먹자고 전화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서글프다. 에리코는 10여 년에 걸친 여정 끝에 어렵사리 일어섰지만,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상당수는 무너져 내리니까. 아마 그가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것도 그런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메시지가 아닐까. ‘이 지옥을…’은 참 먹먹한 책이다. 담담한 문장 속에 절망이 빼곡하다. 차이는 있겠지만, 갈수록 팍팍한 삶에 힘겨워하는 청춘들의 눈물이 배어 있다. 흥미로운 건, 후반부에 에리코의 말투가 달라진단 점이다. 마치 딴 사람처럼 주장과 의견을 쏟아낸다. 결이 좀 안 맞긴 한데, 얼마나 하고픈 말이 많았을까 싶다. 그래서 더욱, 더 많은 목소리가 울리는 세상이 돼야 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삶은 그래도 계속된다. 하지만 행복도 이어질까. 제인스빌. 미국 위스콘신주에 있는 작은 도시. 인구는 겨우 6만 명이 조금 넘는다. 하지만 시민들은 자긍심이 넘쳐난다. 어디나 그렇듯 크고 작은 문제야 있다. 그래도 안정적이다. 부유하진 않아도 기름기가 흐른다. 대다수는 안락한 노후를, 혹은 근사한 미래를 꿈꿨다. 그런데 폭풍우가 몰아쳤다. 조짐은 진작부터 보였다. 2008년 금융위기를 앞두고 미 자동차산업은 헛발질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하필 제인스빌 경제의 근간은 1923년 첫 자동차를 생산한 GM 공장이었다. 전성기엔 7000명, 당시에도 3000명 이상이 종사하는. 그 공장이 문을 닫았다. 처음엔 절망보다 낙관이 우세했다. 일시적 중단이려니 싶었다. 그게 아니라도 산 입에 거미줄 치랴 싶었다. 하지만 부동산은 폭락했고, 제조업 노동자가 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정부와 지역 사회가 나름의 애를 쓰긴 했다. 하지만 보조금이나 후원금은 갑자기 텅 빈 월급봉투를 메울 수 없었다. 폭풍이 지나갔다고 끝이 아니었다. 햇볕이 없는 먹구름 아래에서 젖은 옷은 갈수록 무거워졌다. 몇몇에게만 실낱같은 햇빛을 허락한 채. ‘제인스빌…’은 참 조심스러운 책이다. ‘힐빌리의 노래’(흐름출판) 저자 밴스는 “가공되지 않은 아름다운 이야기”라 극찬했는데, 뭔 말인지 알겠지만 차마 그렇게 부르질 못하겠다. 담담하게 박힌 글자 속에 이토록 애잔함이 가득한데 어찌 아름답다고 부를까. 책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는 뻔한 표현 말고는 달리 떠오르질 않는다. 물론 미 워싱턴포스트 기자인 저자는 상찬 받아 마땅하다. 2008년 GM 공장이 폐쇄된 뒤 2013년까지 제인스빌이 변해가는 과정을 대단한 필력으로 켜켜이 쌓아올렸다. 뭣보다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집중했는데, 이게 상상 이상이다. 사실 기반산업이 무너진 도시의 곤궁함은 꽤나 익숙한 테마다. 제인스빌은 몰라도 거제와 군산은 아니까. 하지만 책은 우리가 가진 정보가 얼마나 파편적이고 피상적인지 잘금잘금 씹어준다. 가슴을 울린 공명을 감히 드러내기도 겸연쩍게. 뭣보다 재난이 휩쓸고 간 뒤 이에 대처하는 자세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절망을 부르짖는 저편에선 희망을 노래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초점을 맞춘 사람들은 모두 ‘다시 씨앗을 심는’ 이들이었다. 취업교육을 받고, 살림이나 잠을 줄이고, 싸우고 또 싸웠다. 가진 자들도 외면하지 않았다. 기부하고 지원하고 곁을 지켰다. 각자의 방법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자신들의 도시를 지키려 애썼다. 하지만 본질은 바로 그 결과에 있었다. 모든 씨앗이 꽃을 피우는 게 아니었다. “주민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부는 형편이 피고, 일부는 비통해하고, 일부는 그럭저럭 살아간다. … 최근에 시행된 조사의 결과를 보면, 실업률은 4% 아래까지 떨어졌다. 21세기가 시작된 이래 가장 낮은 실업률이다. … 좋은 소식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직업을 가진 모든 주민들이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주민들의 실질 임금은 눈에 띄게 하락했다.” 비가 오지 않는 땅은 사막이 되기 쉽다. 하지만 폭우를 견딜 우산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진 않는다. 게다가 더 큰 아픔은, 비는 또다시 내린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삶은 그래도 계속 된다. 하지만 행복도 이어질까. 제인스빌. 미국 위스콘신 주에 있는 조그만 도시. 인구는 겨우 6만 명이 조금 넘는다. 하지만 시민들은 자긍심이 넘친다. 어디나 그렇듯 크고 작은 문제야 있다. 그래도 안정적이다. 부유하진 않아도 기름기가 흐른다. 대다수는 안락할 노후를, 혹은 근사한 미래를 꿈꿨다. 그런데 폭풍우가 몰아쳤다. 조짐은 진작부터 보였다. 2008년 금융위기를 앞두고 미 자동차산업은 헛발질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하필, 제인스빌 경제의 근간은 1923년 첫 자동차를 생산한 GM공장이었다. 전성기엔 7000명, 당시에도 3000명 이상이 종사하는. 그 공장이 문을 닫았다. 처음엔 절망보다 낙관이 우세했다. 일시적 중단이려니 싶었다. 그게 아니라도 산 입에 거미줄 치랴 싶었다. 하지만 부동산은 폭락했고, 제조업 노동자가 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나름 정부나 지역사회가 애를 쓰긴 했다. 하지만 보조금이나 후원금은 갑자기 텅 빈 월급봉투를 메울 수 없었다. 폭풍이 지나갔다고 끝이 아니었다. 햇볕이 없는 먹구름 아래에서 젖은 옷은 갈수록 무거워졌다. 몇몇에게만 실낱같은 햇빛을 허락한 채. ‘제인스빌…’는 참 조심스러운 책이다. ‘힐빌리의 노래’(흐름출판) 저자 밴스는 “가공되지 않은 아름다운 이야기”라 극찬했는데, 뭔 말 인지 알겠지만 차마 그렇게 부르질 못하겠다. 담담히 박힌 글자 속에 이토록 애잔함이 가득한데 어찌 아름답다고 부를까. 책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단 뻔한 표현 말고는 달리 떠오르질 않는다. 물론 미 워싱턴포스트 기자인 저자는 상찬 받아 마땅하다. 2008년 GM 공장이 폐쇄한 뒤 2013년까지 제인스빌이 변해가는 과정을 대단한 필력으로 켜켜이 쌓아올렸다. 뭣보다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에 집중했는데, 이게 상상 이상이다. 사실 기반산업이 무너진 도시의 곤궁함은 꽤나 익숙한 테마다. 제인스빌은 몰라도 거제와 군산은 아니까. 하지만 책은 우리가 가진 정보가 얼마나 파편적이고 피상적인지 잘금잘금 씹어준다. 가슴을 울린 공명을 감히 드러내기도 겸연쩍게. 뭣보다 재난이 휩쓸고 간 뒤 이에 대처하는 자세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절망을 부르짖는 저편에선 희망을 노래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초점을 맞춘 사람들은 모두 ‘다시 씨앗을 심는’ 이들이었다. 취업교육을 받고, 살림이나 잠을 줄이고, 싸우고 또 싸웠다. 가진 자들도 외면하지 않았다. 기부하고 지원하고 곁을 지켰다. 각자의 방법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자신들의 도시를 지키려 애썼다. 하지만 본질은 바로 그 결과에 있었다. 모든 씨앗이 꽃을 피우는 게 아니었다. “주민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부는 형편이 피고, 일부는 비통해하고, 일부는 그럭저럭 살아간다. …최근에 시행된 조사의 결과를 보면, 실업률은 4% 아래까지 떨어졌다. 21세기가 시작된 이래 가장 낮은 실업률이다. …좋은 소식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직업을 가진 모든 주민들이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주민들의 실질 임금은 눈에 띄게 하락했다.” 비가 오지 않는 땅은 사막이 되기 쉽다. 하지만 폭우를 견딜 우산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진 않는다. 게다가 더 큰 아픔은, 비는 또 다시 내린다. 정양환기자 ray@donga.com}
책을 읽다가 이리 겸연쩍기도 처음이다. 처음부터 문제 13개를 내놓더니 풀어보란다. 독자 수준을 뭐로 보나 싶게 ‘쉽다’. 휘리릭 풀고 답을 봤는데 아뿔싸. 반 이상 틀렸다. 당황한 마음을 저자는 더 후벼 판다. 보기가 3개이니 침팬지도 33%는 맞힐 거라고. 다만 위안도 건넨다. 한국 포함 14개국 1만2000여 명이 풀었는데 정답률이 13%라고. 심지어 노벨상 수상자와 의료계에선 점수가 더 낮았단다. 어떤 문제이기에 이럴까. 하나 고르자면 ‘지난 20년간 세계 인구에서 극빈층 비율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늘거나 비슷할 줄 알았더니 정답은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이다. 갈수록 삶이 팍팍하다던 우리네 푸념은 뭐였단 말인가. 저자는 또 지긋이 못 박는다. “사람들이 자기가 세상을 오해했음을 알았을 때, 당혹스러워하기보다는 아이 같은 궁금증과 영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팩트풀니스’를 읽는 과정은 상당히 버겁다. 어렵게 쓴 탓이 아니다. 오히려 똑 부러지게 명확하다. 문제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진실이라 믿었던 세계관에 자꾸 금이 간다. 세상은 이토록 발전했고 나아졌는데, 우리는 왜 여전히 1960년대에나 맞아떨어질 편견을 진실이라 붙잡고 살았을까. 저자 말마따나 유엔이나 세계은행 홈페이지 통계만 들어가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책이 권하는 건 단 하나다. 번역하자면 ‘사실충실성’이라 부를 제목처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게다. 그럼 세상이 이렇게 살 만하니 엔조이하면 되는 걸까. 아니다. 저자는 계층갈등이나 지구온난화 등 산적한 이슈를 가벼이 여기란 뜻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면 문제도 풀 수 있단 바람이다. 곪은 상처가 어딘지 알아야 약도 바를 수 있듯. 스웨덴 통계학 석학이던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다 2017년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 이들의 몫도 자명하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반성할 건 반성하자. 오해를 풀면 관계도 회복될지니. 세상이라는 저버릴 수 없는 친구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언젠가 한 출판사 대표에게 물어봤다. 국내에선 왜 평전이 인기가 없냐고. 사견을 전제로 그는 답했다. ‘위인전 효과’ 때문일지도. “이유가 여러 갈래겠죠. 근데 책이 다룰 정도면 ‘교훈적’이길 바라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평전의 핵심은 인물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건데. 게다가 삶이 바빠서 그런지, 큰 줄기만 알려고도 하고. 그래서 저희끼린 ‘교육용 위인전’에 익숙해서가 아닐까 짐작하곤 하죠.” 그게 맞는다면, ‘알렉산더…’는 그런 흐름을 가장 거슬러 올라가는 책이다. 평범한 우리네에겐 별반 교훈적이지 않다. 그리 두껍진 않지만 간략하지도 않다. 패션 문외한에겐 진입장벽도 있다. 일단 맥퀸이 누군지 모르면 어떻게 이 책을 집어 들겠나. 하지만 꿈틀거리는 에너지를 만끽하고 싶다면 ‘알렉산더…’는 탁월한 선택이다. 거칠고 퇴폐적이며 음습하고 파괴적이지만, 강력하고 끈질기다. 비록 2010년 스스로 세상을 등지며 짧은 생애는 멈춰버렸지만, 알렉산더 맥퀸이란 이름은 여전히 살아 숨쉬는 것처럼. 영국 노동자 집안 출신인 그는 순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언제나 돈에 쪼들렸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어린 시절 매형에게 성폭력에 시달린 상처는 평생을 지배했다. 게다가 보잘것없는 외모에 동성애자였으니. 뭐 하나 ‘주류’가 될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디자이너로 승승장구했을 때조차 비아냥거림이나 수군거림을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맥퀸은 자기가 뭘 잘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스케치 없이 원단에 바로 가위를 갖다대도 완벽한 옷태를 만들어냈다. 양복점 수습 등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실력을 쌓았기에 현장을 장악할 줄 알았다. 그리고 ‘패션을 위한 패션’에 갇히기보단 경계를 넘나들며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또 그걸 실현시킬 추진력을 내뿜었다. 물론 단점도 뚜렷했다. 그런 시절 그런 업계였다지만,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살았다. 괴팍했고, 치기 어렸다. 뭣보다 인성이 ‘×차반’이었다. 평전은 다소 애정을 갖고 점잖게 감싸는데, 천재고 뭐고 친구 삼긴 글렀다. 인간적 배신도 적지 않다. 그런데 묘하다. 그래서 더 이 인물이 끌린다면 이상하게 들릴까. 부제 ‘광기와 매혹’처럼 나방을 유혹하는 불꽃이 넘실거린다. 게다가 구질구질한 짠함도 귀를 간질인다. 역시, 인생은 ‘기브 앤드 테이크(give & take)’다. 제로섬 게임처럼 뭔가 가지면 뭔가를 잃는다. 악마가 건넨 행운은 신이 주는 행복을 앗아가는지도. 다른 뜻에서도 ‘알렉산더…’는 참 반갑다. 2004년 재즈피아니스트 빌 에번스로 시작했던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는 2012년 26권 뒤론 만날 수 없었다. 지난해 기존에 소개했던 구스타프 말러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신(新)버전으로 내놓더니, 드디어 진정한 재출발을 알렸다. 마침 ‘알렉산더…’의 원서 부제는 ‘Blood Beneath the Skin’이다. 시리즈도 면면히 혈관을 타고 생명이 흘러가길 기대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참 대단한 양반이다. 미국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쉼 없이 굵직한 책을 펴낸다. ‘금융의 지배’ ‘로스차일드’ 등 무게도, 내용도 묵직하다 못해 버거울 정도. 솔직히 너무 두꺼워 주저할 때도 있지만, 결국 읽어 보면 감탄한다. ‘광장과 타워(The Square And The Tower)’도 실망스럽지 않다. 일단 제목이 근사하다. 책의 주제를 멋들어지게 담았다. 서양에서 중세나 근대에 조성한 스퀘어와 주변 타워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높다란 탑이 수직적 위계조직을 상징한다면, 널찍한 광장은 수평적인 관계인 ‘네트워크’를 뜻한다. 즉, 인류는 왕국이나 제국과 같은 계층 구조와 이를 거스르는 연결망 조직의 움직임을 통해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간 역사는 권력 중심으로 쓰이고 설명돼 왔기에 저자는 네트워크라는 관점에서 이를 들여다보려 한다. 사실 네트워크란 용어는 20세기 무렵부터 흔히 쓰여, 이전 역사에서 그다지 중요하단 인식이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 같은 조직부터 현재의 페이스북이나 구글까지 역사의 주요한 대목에선 네트워크가 강한 힘을 발휘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르네상스나 종교개혁, 4차 산업혁명 등의 거대한 물결도 네트워크가 작용했다고 본다. 다만 네트워크가 언제나 순기능만 가진 건 아니었다. 질병의 확산이나 종교적 갈등처럼 “의도하진 않았지만 가끔은 끔직한 재앙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네트워크는 역사에서 더욱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앞서 말했지만 ‘광장과 타워’는 매우 흥미롭다. 저자는 경제사학이 전공이지만 다양한 분야를 거침없이 넘나들면서도 논거의 핵심을 잃지 않는다. ‘통섭’을 이렇게 체화해 내는 학자는 정말 드물다. 다만 다소 장황한 대목도 없지 않다. 이 책의 1부 서론은 굳이 이렇게 길게 써야 했을까 싶다. 호불호를 떠나서 유발 하라리의 ‘정신없이 몰아치는’ 흡입력이 아쉽다고나 할까. 비싸고 맛있는 특급 요리라서 허겁지겁 먹지 말란 깊은 뜻이 있을 거라 혼자 납득해 본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 꿈꾸지 않을까. 조직을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그런데 조만간 이런 ‘선택’의 옵션조차 사라질지 모른다. 모두까진 아니라도 대다수가 프리랜서나 자영업자가 되는 세상. ‘긱 경제(gig economy)’의 시대가 오기 때문이다. 긱 경제란 전통적인 정규직과 달리 임시직이나 프리랜서가 주를 이루는 경제 구조를 일컫는다. 당연히 자기 사업이나 가게를 하는 이들도 포함되지만, 이 용어는 그보다는 새로운 근로 형태에 초점을 맞춘다. 이른바 ‘독립계약자’다. 독립계약자는 글로벌 차량공유업체 ‘우버’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우버에서 실제로 차를 운전하는 기사는 그들의 직원이 아니다. 개인사업자로서 우버와 계약을 맺은 신분이다. 때문에 본사의 지시를 따를 필요도 없고, 근무 시간이나 방식도 맘대로 정할 수 있다. 우버 이후 ‘청소계의 우버’ ‘배달계의 우버’ 등 숱한 분야에서 비슷한 형태의 스타트업이 쏟아졌다. 대다수가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출발한 이들이 꿈꾸는 장밋빛 미래는 자명하다. 더 이상 숨 막히는 직장에 얽매이지 마라. 자유롭게 일하고 원하는 대로 쉬라. 긱 경제는 혁명적 대안이 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스타트업 전문기자로 활동해 온 저자는 여기에 단연코 제동을 건다. 분명 대세는 거스를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경제구조를 낙관적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물론 컴퓨터 프로그래머 같은 전문가들에겐 독립계약은 꽤나 ‘짭짤한’ 노동방식이 될 수 있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도 더 많은 수익을 거두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호사를 누리는 건 ‘일부’일 뿐이다. 학력이나 경력이 떨어지는 이들은 거기서도 도태됐다. 요령을 터득한 이들조차 일감을 따내려 하루 종일 컴퓨터나 휴대전화란 ‘족쇄’에 발목 잡힌다. 심지어 복지 혜택도 없는 데다, 해고(이 관계에선 ‘퇴출’이라 부른다)까지 쉽다. 이름과 업종만 다를 뿐, 우리네 프랜차이즈 가게들의 한숨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렇다고 이런 기업들이 다 나쁘단 뜻은 아니다. 좀 더 나은 수익과 지원을 제공하려 노력하는 업체도 많다. 미국의 한 청소공유업체는 아예 직원을 정식으로 채용하고 스톡옵션도 줬다. 노동자가 일터를 옮길 때마다 따라 움직이는 사회보험 프로그램인 ‘이동형 복지’를 만드는 곳도 적지 않다.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건 정부와 기업, 시민들이 이런 구조의 변화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대응 방안을 서둘러야 한단 점이다. “긱 경제는 한때 그 창조자들이 상상했던 것과 달리 ‘노동의 미래’에 대한 주문형 개선책이 아니다. 그러나 노동의 미래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전망하고 그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수고를 기울여야 할지 고민한다면, 긱 경제가 현실의 생생한 사례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직장이 없는…’은 끝내준다. 뻔한 경제서적의 외피를 썼지만, 공들인 취재를 바탕으로 긱 경제의 속살을 제대로 파헤쳤다. 뭣보다 숫자나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현장에서 살아 숨쉬는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인간미가 물씬하다. 원서의 부제인 ‘직업의 종말과 노동의 미래’가 궁금하다면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차고 넘친다. 그나저나 정말 세상은 어디로 가는 걸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제목만 보면 뜨거운 연애가 떠오를 터. 하지만 우리로 치면 ‘귀농 이야기’다. 스웨덴 문학 강사였던 저자는 2010년 아버지 목장을 물려받았다. 아내, 세 아이와 함께 낙향한 이유는 간명하다. 안 그래도 도시가 지겨워졌는데, 재산까지 물려받았으니. 그런데 ‘양치기의 삶’은 생각만큼 근사하지 않다. 제목 그대로, 맘이 널뛰기를 한다. 짭짤한 귀농 노하우를 기대한다면 얼른 덮으시길. 3년의 일기를 정리한 이 책은 정보보단 금언집(金言集)에 가깝다. 대단한 명언도 없는데, 짤막하되 정갈한 문장에 삶의 지혜가 콕콕 박혀 있다. 양 도축이나 채식주의, 대규모 농업 등에 대한 현실적인 사변들이 가볍지 않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역시 인생이란 어디에 살든 모순덩어리인 것을.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 기억은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이다. … 전후 세대에게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또 물어서도 안 되지만, ‘기억 연구’라는 영매를 통해 과거의 비극과 만나고 죽은 자들과 소통하고 기억해야 하는 책임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읽은 뒤 좀 후회했다. 명쾌한 문장 덕에 배운 게 많지만, 머리도 가슴도 뻑뻑해졌다. ‘역사에 대한 기억’이 이다지도 복잡한 일일 줄이야. 자칫 양비론이나 양시론에 휘둘리고픈 유혹마저 느껴졌다. 일단 감 놔라 배 놔라 하기 쉬운 남의 일부터 짚어 보자. “베일 뒤에 숨은 가해자”였던 오스트리아. 알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나치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조했던 국가였다. 당시 ‘제3제국’ 전체 인구 가운데 오스트리아인은 8% 정도였지만 나치 친위대의 14%나 차지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들은 전후 스스로를 나치의 첫 번째 피해국이라 불러왔다. 히틀러의 서슬에 휘둘린 불가항력적 가담자일 뿐이라는 논리다. 2013년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1%가 ‘과거 청산은 지금으로도 충분하다’고, 46%는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희생자’라고 답했다고 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일본이 자행하는 ‘기억 조작’은 더하다. 우리를 비롯해 아시아를 사지로 몰아넣은 제국주의 주범이 가녀린 원폭의 피해자인 양 행세한다. 위안부 문제는 군이나 정부가 이를 지시했다는 증거나 문서는 어디에도 없다는 얄팍한 ‘실증주의’를 들이민다. 특히 “많은 일본인이 자신은 군부 지도자들에게 속은 순진한 보통 사람일 뿐이며, 오히려 희생자”라고 생각했다. 속에서 천불이 날 얘기지만, 저자는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도 냉정히 들여다볼 것을 주문한다. 사례로 든 ‘집합적 유죄’란 개념이 그렇다. 해나 아렌트는 단지 독일인이란 이유로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고 항변했다. 만약 전후 일본이 똑같은 논리로 일제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 더. 그렇다면 한국군이 베트남전쟁에서 벌인 행위에 대해서는 현재의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물론 사안마다 경중이 다르며 ‘침묵’과 ‘부정’과 ‘왜곡’은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하지만 이 기억 전쟁의 면죄부를 ‘내로남불’로 선택할 순 없는 노릇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해결의 실마리는 과거에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과 그 과거를 기억할 책임을 구분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결국 하나씩 풀어나갈 수밖에 없으리라. ‘기억 전쟁’은 몹시 날카롭고 매섭다. 역사를 자기 입맛대로 재단하려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 암세포는 우리 사회, 우리 인식 속에서도 살아서 꿈틀거린다. 어떤 수술이나 약물이 효과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넋 놓고 있다간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암을 앎으로써 다시 한번 출발점에 서야 한다. 지난한 싸움이라 할지라도.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이웃을 사랑하기란 어렵고, 적을 사랑하기란 더 어려우며, 후자는 실제로 가끔 부주의한 판단이다.” “자유는 자칫 퇴색하기 쉬운 개념이다. 자유 덕분에 오히려 엄격한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는 선택지가 가능해질 수도 있다.” 명언 노트라도 하나 사야 할까. ‘경험 수집가의 여행’은 최근 몇 년 사이 읽은 책 가운데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문장들이 가장 뻔질나게 튀어나온다. 일상생활에서 들었다면 느끼했을지도 모를 이런 글귀를 세련되고 유려하게 엮다니. 일단 저자의 펜에 경배를….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 임상심리학과 교수인 그는 원래 저널리스트로서도 방귀깨나 뀌는 인물이다. 실은 이 책도 뉴욕타임스와 뉴요커, 에스콰이어 등 여러 매체에 실었던 글 가운데 엄선했다고 한다. 1988년부터 2015년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세계를 돌며 겪은 기록들은 쫀득쫀득하면서도 싱싱한 날것의 냄새가 물씬하다. 뭣보다 ‘경험…’은 한가한 여행 후일담과는 결이 다르다. 저자는 여행이란 직접 체험이 담겼기에 관광보다 윗길이라고 했지만, 그보다는 르포라고 봐야 옳을 듯하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저자가 놓치지 않는 대목이 바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015년 국내에도 출간했던 ‘부모와 다른 아이들’(열린책들)에서 보여줬던 놀라운 취재와 따스한 인간애를 다시 한번 만끽할 수 있다. 묵직하기 이를 데 없었던 심층보고서 ‘부모와…’와 달리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고 가벼운 맘으로 접근할 수 있단 매력은 덤. 다만 한계도 살짝 엿보인다. 25년간 다양한 언론에 썼던 기사를 모으다 보니 아무래도 ‘도도히 흐르는 굵은 강줄기’는 흐릿하다. 게다가 1988년의 소련과 2015년의 호주는 변해버린 저자의 나이와 환경만큼이나 동떨어진 분위기인 것을. 물론 이런 아쉬움을 메워주는 지성과 문장력이 있긴 하다. 어쨌거나 이번 기회에 서재에 좋아하는 작가 이름을 또 하나 추가하시길. 그만한 ‘솔로몬의 지혜’가 없어 보인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