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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우경임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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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4-10-25~2024-11-24
칼럼100%
  • [횡설수설/우경임]건강보험 ‘얌체족’

    2월 미국 한인 인터넷 커뮤니티인 ‘미시USA’에 한국에서 건강보험으로 병원 진료를 받는 꼼수를 공유하는 글이 올라왔다. 미국 이주 이후 건강보험료를 낸 적 없는, 각각 시민권과 영주권을 가진 부부의 실제 경험담이었다. 유학생이나 관광비자로 해외로 건너간 다음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취득하고도 신고하지 않으면 해외 거주 내국인 신분으로 남는 것을 악용했다. 글을 쓴 이는 “우리나라 너무 좋다. 친절하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알아봐 주고 복지가 너무 좋은 것 같다”는 감상을 덧붙였다가 공분을 샀다. ▷‘한국 건강보험이 좋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이를 공짜로 누리려는 ‘얌체족’이 늘고 있다. 신원 확인이 허술하던 시기에는 주로 지인의 건강보험을 도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에는 건강보험료는 찔끔 내고 왕창 혜택을 받는 외국인, 재외국민, 해외 거주자들이 문제다. 2015년 혈우병을 앓는 자녀를 둔 재중동포가 한국에 건너와 건강보험에 가입했다. 희귀난치성질환이라 진료비가 4억 원대에 이르렀는데 건강보험 재정에서 대부분 부담했다. 이 동포가 한국에 들어와 납부한 건강보험료는 260만 원이었다. 외국인 건보 가입자로 인한 적자 규모는 지난해 2000억 원을 넘어섰다. ▷이 때문에 지난해 12월부터 외국인, 재외국민은 한국에서 6개월 이상 체류해야 건보 적용을 받도록 건강보험법이 강화됐다. 그래도 장기 해외 거주자들의 꼼수는 막기 어렵다. 해외여행객 유학생 주재원 등은 해외 체류 기간 동안 건강보험료 납부가 중단된다. 그 대신 매달 1일 건보료 부과 자격을 심사하는데 이날 하루만 한국에 있지 않으면 건보료를 내지 않고도 건보 적용을 받을 수 있다. 매달 2일 이후 입국해 건보료를 내지 않고 진료만 받고 출국한 해외 거주자가 최근 3년간 23만 명. 건보 재정 420억 원이 새어나갔다. ▷민간보험 위주인 미국은 보험료가 워낙 비싸고 의료비 부담이 커서, 공공의료체계가 잘 갖춰진 영국은 효율성이 떨어져서 병원 가기가 쉽지 않다. 1977년 도입된 우리나라 건강보험은 전 국민이 가입한 사회보험인데 의료비는 싸고 의료기관 서비스의 질은 높다. 중동·아시아 개발도상국이 ‘한국형 건강보험’을 벤치마킹할 정도다. 2017년 건강보험 청구 및 심사시스템을 바레인에 173억 원을 받고 수출하기도 했다. 건강보험 이식을 원하는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은 최근 보건차관에 한국인 공무원을 임명했다. 아무리 잘 설계된 제도라도 이를 갈고 닦아 쓰는 것은 사람이다. 무임승차하는 ‘얌체족’이 많아지면 균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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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에 있는 스웨덴 기업이 베네수엘라 때문에 문 닫았다 [광화문에서/우경임]

    올해 초 스웨덴 기업인 A사는 한국지사 폐쇄를 결정했다. A사는 초고압변압기 절연유, 타이어 원료유 등을 생산하는 기업이다. 이런 제품들은 화학적 성상(性狀)이 맞는 원유가 따로 있어서 창업 이래 90년 동안 베네수엘라 원유를 써 왔다. 이 회사가 어려워진 건 베네수엘라 원유에서 문제가 생긴 5년 전부터다. 원유에 바닷물이 섞였다거나, 정제 과정에서 결함을 일으켰는데 해가 지날수록 개선되기는커녕 악화될 뿐이었다. 20년 동안 베네수엘라국영석유기업(PDVSA)이 ‘포퓰리즘 정권’의 돼지저금통 노릇을 하며 망가진 결과였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익히 아는 줄거리다. 베네수엘라의 국내 사정으로 어려움을 겪던 A사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 건 미국의 독자 제재로 인해서다. 지난해 부정선거 의혹 속에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재선한 이후 미국이 그의 ‘돈줄’인 베네수엘라국영석유기업을 독자 제재 리스트에 올린 것이다. A사가 직접 제재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국영석유기업이 지분을 갖고 있는 데다 원유 거래를 한다는 이유로 금융회사들이 기피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라도 세컨더리보이콧(제3자 제재)을 당하지 않을까 우려해서다. ‘스치기만 해도 문 닫아야 한다’는 미국 독자 제재의 실상이다. 씨티은행, 도이체방크 등은 달러로 지불된 A사 상품대금을 꽁꽁 묶어버렸다. 자금이 돌지 않으니 회사가 버틸 재간이 없었다. A사는 베네수엘라국영석유기업이 일찍 지분을 정리하길 바랐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용히 임기만 채우고 나가면 되는데 누가 책임 있는 결정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결국 올해 초 A사 본사 대표가 바뀌었다. 수익성이 떨어지고 규모가 작은 지사 3곳과 공장 1곳부터 정리했다. 그중 한 곳이 한국이다. 2010년부터 A사에서 근무한 관계자는 “미국 독자 제재 대상에 오를 가능성만으로도 신용이 하락하고 국제금융거래망에서 퇴출될 위기에 처했다”며 “이란이나 북한과 거래를 하려는 한국 기업이 있다면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그런데 나라 이름이 여럿 등장하는 이 이야기의 플롯은 복잡하지만 어쩐지 낯설지 않다.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베네수엘라국영석유기업. 2003년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은 이 기업의 직원 절반을 해고했다. 2년 전 마두로 대통령 시절에는 직원 70여 명이 부패 혐의로 체포됐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원유 품질이 좋다면 이상한 일이다. 베네수엘라는 아주 극단적인 사례지만 정권에 따라 부침을 겪는 공기업은 우리도 늘 목격했던 바다. 세컨더리보이콧의 직격탄을 맞은 A사를 보며, 북한산 석탄 반입 의혹의 여진으로 기업과 은행들이 떨고 있는 사정이 떠오른다. 최근에는 개성공단 자산 점검을 위한 기업인 방북도 승인됐는데 해당 기업에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를 일이다. A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나라가 얼마나 국제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라면 국제 정세를 외면한 ‘평화’ 또는 국제 흐름과 동떨어진 ‘경제’가 오히려 우리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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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세계 육상 문화유산

    국제육상연맹(IAAF)은 지난해 ‘세계 육상 문화유산(World Athletics Heritage)’을 만들어 올해부터 대상 선정을 시작했다.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육상의 놀라운 순간을 기념하자’는 뜻에서다. 육상의 역사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대회, 인물, 장소, 작품이 대상이다. 10일 서울국제마라톤 겸 동아마라톤 대회가 세계 육상 문화유산으로 선정됐다. 마라톤 대회로는 보스턴 마라톤과 아테네 마라톤에 이어 세 번째이다. ▷세계 육상 문화유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는 달리 대상국의 신청 없이 IAAF가 독자적으로 선정한다. 세계 5대 마라톤 대회 중에서는 뉴욕 베를린 시카고 런던을 빼고 보스턴 대회만이 선정됐는데 1897년 이래 122년의 긴 역사를 지닌 보스턴 마라톤을 제외하고는 모두 1970년 이후 시작돼 역사가 길지 않다. 1931년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동아마라톤은 보스턴 다음으로 역사가 긴 대회다. 아테네 마라톤은 시작은 1972년이지만 고대 그리스 병사의 마라톤 원조 코스 42.195km를 되살렸다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1931년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동아마라톤은 손기정 황영조 이봉주 등 한국 마라톤의 역사를 만든 선수들을 배출했다. 1932, 33년 동아마라톤에서 입상한 손기정 선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써 일제 핍박 아래서 신음하던 온 겨레에 희망을 쐈다. 1940년 일제는 동아마라톤을 강제로 중단시켰고, 14년 만인 1954년 6·25전쟁이 끝나고야 재개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외국인이 우승한 건 1977년, 본격적인 국제대회로 거듭난 것은 1993년부터다. ▷외환위기가 닥친 1998, 1999년에는 국제대회로 치를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국내 마스터스 참가자가 1만 명을 처음 돌파해 마라톤의 저변이 확대됐다. 금융위기가 휩쓸고 간 2009년에는 ‘39세 봉달이’ 이봉주 선수가 동아마라톤을 은퇴 무대로 선택해 40번째 풀코스를 완주했다. 1995년과 2007년 두 차례 동아마라톤을 제패했던 노장의 마지막 도전을 국민들은 뜨겁게 응원했고, 쓰러질 듯 말듯이 힘겹게 결승선을 통과한 이 선수는 “국민 여러분, 감사해유”라며 화답했다. “마지막인데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우리는 한껏 용기를 얻었고 정말 그 위기를 헤쳐 나왔다. 88년 역사의 동아마라톤, 대한민국과 함께 뛰고, 넘어지고, 일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육상 문화유산으로서의 진정한 가치라면, 바로 이런 우리의 역사 속 땀과 의지일 것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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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연애 파업

    ‘다양한 통로로 물질 교환이 일어났으며 권력 관계가 조성되었고 결국에는 어느 한편이나 쌍방의 착취로 관계가 종료되기까지 끊임없이 성실과 근면을 강요받았다.’ 유명 문예지의 ‘젊은 작가상’을 여러 번 받은 김금희의 지난해 베스트셀러 소설 ‘경애의 마음’ 속 남자 주인공 공상수는 이렇게 냉소적으로 연애를 정의한다. 비(非)출산과 비혼에 이어 비연애가 등장한 세태를 엿볼 수 있다.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뜻의 비연애는 비혼처럼 페미니즘 진영에서 기존 남녀관계에 대한 일종의 저항으로 시작됐으나 요즘은 남녀 가릴 것 없는 현상이 됐다. ▷미국 CNN 온라인판이 11일 “한국 청년들이 경제난과 청년실업, 성범죄에 대한 공포 때문에 연애를 기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20∼44세 한국의 미혼 남성 중 26%, 미혼 여성의 32%만이 연애를 한다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KIHASA) 조사를 인용했다. 가난한 청년들이 연애 파업 중이라는 것이다. 청년들은 데이트 1회당 평균 6만 원인 비용이 부담돼 연애를 하기 어렵다고 인터뷰했는데 엄살만은 아닌 것 같다. 동아일보가 핀테크 기업 ‘핀크’ 회원 중 1990년대생 월급 생활자의 평균 급여를 추출했더니 월 148만 원이었다. ▷가장 안전하고 사적인 공간인 이불 안도 위험했다. 최근 케이팝 스타들의 단톡방에서 벌어진 성범죄를 보며 여성들은 우리 사회에 불법 촬영이나 동영상 유포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깨달았다. 가장 친밀한 연인과의 사랑 행위가 몰래 촬영되는 것은 아닌지 여성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여성가족부의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통계를 보면, 불법 촬영 피해의 65%는 전 배우자나 연인 등 아는 사람이 저질렀다. 이렇다 보니 ‘비싸고 위험한 연애’를 직접 하는 대신에 대중문화로 연애를 소비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저출산이 고착되면서 TV에서 육아 관찰 프로그램이 한창 인기를 끌었듯이 연애 파업이 일반화되면서 남의 연애를 관찰하는 TV 프로그램이 늘어났다. ▷‘데이트 비용이 없어서’ ‘취업 준비로 바빠서’ 등 사랑하지 않을 이유 100가지를 열거하고 나서도 사랑에 빠지는 것이 인간이다. ‘경애의 마음’ 속 상수도 결국 사랑에 빠지고야 만다. 그런데 연애하는 청년의 비율이 실제로 낮다면, 자발적으로 ‘연애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연애할 수 없어서’라고 보는 것이 맞다. 비록 지금 가난한 연인일지라도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릴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연애 본능을 포기하지는 않을 터다. 청년들이 연애 파업을 하는 나라, 그건 ‘미래가 없다’는 선언은 아닌지.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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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더 슬픈 ‘新원정출산’

    2002년 5월 미국 LA타임스는 한국 신생아의 1%인 5000명이 미국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추산된다는 내용의 원정출산 실태를 보도했다. 이 기사에는 “한국에서 가장 불만스러운 것은 교육이고 병역 의무를 덜어주면 아이에게 큰 선물이 될 것”이라는 임신 8개월 김모 씨가 등장한다. 김 씨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다. ‘우아한 진주 장식 임신복을 입고 하이힐 샌들을 신고 BMW를 탄다’는 것. 2만 달러(당시 한화로는 약 2500만 원)나 드는 원정출산에 주로 부유한 사회지도층이 나서고 있음을 비꼰 것일 게다. ▷이듬해 경찰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서 산모 50여 명이 참고인 조사를 받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2005년 원정출산이 명백하면 병역을 기피할 수 없도록 법이 강화되면서 원정출산 붐은 다소 시들해졌다. 그런데 임신부들이 다시 출산을 위해 살던 곳을 떠나는 ‘신(新)원정출산’이 벌어지고 있다. 목적지는 외국이 아니라 대도시다. 지방에서 분만실을 갖춘 산부인과가 속속 문을 닫으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지난해 특별시·광역시를 제외한 시군구 신생아 18만5000명 중 1만9485명(10.5%)은 거주지 인근 특별시·광역시의 병원에서 태어났다. ▷전국 226개 시군구 중 분만실이 없는 지역이 63곳에 이른다. 한 시간 내 분만실 이용이 어려운 분만 취약지도 33곳이다(2017년 12월 기준). 농산어촌뿐 아니라 경북 김천, 전남 나주같이 공공기관 이전으로 인구가 늘어난 혁신도시조차 출산 인프라가 붕괴하고 있다. 경북 김천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유일한 산부인과인 김천제일병원이 올해 안에 분만실을 폐쇄한다는 소식이다. 정부가 전국 분만 취약지 병·의원 15곳을 지원하고 있지만 산부인과 감소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산부인과가 분만을 기피하는 것은 출산이 고위험·고비용 의료행위여서다. 산부인과·마취과 의사와 간호사 등이 24시간 대기해야 하니 인건비가 많이 든다. 고령 임신부가 늘어나면서 고위험 분만이 늘었는데 응급 상황 시 이송 체계도 미흡하다. 과거에는 워낙 아이가 많이 태어나니 수지타산이 맞았지만 지금은 분만실을 닫는 편이 낫다. 임신부가 부른 배를 안고 2, 3시간 거리 병원으로 산전검사를 받으러 가거나, 심지어 아이를 낳으러 가야 하다니…. 괜히 ‘합계출산율 0.98’ 쇼크가 온 것이 아니다. 출산장려금·아동수당 뿌리면서 생색낼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 누구나 혜택을 보는 분만실부터 지원해야 한다. ‘아이를 낳으라’고 하기가 민망한 일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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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우경임]자사고 폐지 갈등의 마침표, 유은혜 부총리가 찍어야 된다

    또 하나의 교육정책이 길을 잃고 산으로 간다. 대통령 공약인 ‘자율형사립고의 일반고 전환’ 얘기다. 최근 전북 전주 상산고를 다녀왔다. 구호에 가까운 성긴 정책이 정치적인 동기로 추동됐을 때 어떤 참사가 일어나는지 그곳에서 봤다. 올해 전체 자사고의 절반이 넘는 24곳의 존폐가 결정된다. 자사고 ‘운명의 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가운데 단 한 곳, 상산고를 평가하는 전북도교육청이 기준 점수를 교육부 표준안보다 10점 높이고 교육감 재량인 지표를 늘려 논란이다. 전북도교육감은 재지정 평가를 주택임대차 계약에 비유하며 아예 폐지를 공언하고 있다. 집주인인 교육감이 5년 기한이 끝나 재계약 의사가 없으니 세입자가 학교를 비워야 한다는 논리다. 교육 수요자는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어떻게 이런 교육감의 폭주가 가능한가.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이 ‘자사고 폐지’라는 거북한 짐을 핑퐁하다 벌어진 일이다. 당초 시도교육청은 초중등교육법 개정을 통해 교육부가 전국 자사고를 한꺼번에 문 닫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적법한 절차로 세워진 자사고를 일방적으로 폐지하려니 법안 통과를 장담할 수 없고, 행정소송 등 뒷감당이 어려웠다. 공은 다시 교육청에 넘어왔다. 2017년 7월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대통령 공약을 다듬어 ‘자사고 단계적 폐지’를 내놓은 배경이다. 각 교육청이 재지정 평가를 엄격히 하고, 일반고와 동시 선발로 학생선발권을 제한하겠다는 내용이다. 당시 국정기획자문위에서 교육정책을 손질한 사람이 바로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다. 이제는 그 정책을 실현해야 하는 자리에 있다. 교육감이 자사고 지정을 취소하려면 교육부 장관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동의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된다. 결국 자사고 폐지를 둘러싼 갈등의 마침표는 유 부총리가 찍어야 한다. 평가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자사고가 우후죽순 늘며 생겨난 입시 과열 같은 부작용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정권이 바뀌든 말든 일관된 원칙에 따라 평가하고 부실한 곳은 걸러내면 된다. 문제는 옥석을 가리는 대신 아예 수월성·다양성 교육을 봉쇄하겠다는 발상이다. 상산고 학생과 학부모들은 “자사고가 없어지면 우리 교육이 좋아지냐”고 물었다. 이런 성찰 없이 ‘특권학교’ ‘귀족학교’라며 자사고를 공교육 붕괴의 원흉으로 몰아봐야 우리 교육의 근본적인 해법만 찾기 어려워질 뿐이다. 2017년 8월 대입 관련 토론회에 국회 교육문화체육위원회 여당 간사였던 유 부총리가 참석했다. 그는 “일반고에서 준비하기 어렵다. 학생부종합전형을 확대하지 말라”는 학부모들에게 둘러싸여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어머니, 두 아이 다 일반고 나왔어요. 잘 알아요.” 이 한마디에 학부모들이 “부탁한다”며 물러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일반고를 보낸 학부모로서 그는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공교육의 질이 전국 고교의 1.7%를 차지하는 자사고가 아닌 나머지 학교의 경쟁력에 달렸다는 사실을. 자사고가 없어져도 공교육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때는 무엇을 탓할 텐가. 유 부총리가 자사고의 운명을 결정하기 전에 한 번만 숙고했으면 좋겠다. 정말 자사고 때문인가.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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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대만 총통 후보 부인의 가출

    “돌아와줘, 여보.” 아내가 가출했다. 그것도 억만장자의 24세 연하 아내다. 대만 국민당 총통 후보 경선에 출마한 궈타이밍(郭臺銘·69) 폭스콘 회장이 최근 “경선 참여를 선언한 뒤 아내가 이제 가족의 사생활은 없어질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며 집을 나가버렸다”고 밝혔다. 성공한 사업가로 거침없는 화법까지 닮아 ‘대만의 트럼프’라 불리는 그는 “나랏일을 하는 데 여자가 나서는 법이 아니다”라고 대권 출마 의지를 재확인했다. 이미 여성 총통을 배출한 대만인데 두고두고 여성 표를 날릴지도 모르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 여사도 당초 대선 출마에 반대했다.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서 “대선 출마 결심을 털어놓자 아내가 ‘지금도 잘 살고 있는데 왜 (대선 출마를) 하려고 하느냐’고 했다”고 말했다. 우려대로 대선 과정에서 멜라니아 여사는 모델 활동 당시 반누드 사진이 다시 공개되는 등 곤욕을 치러야 했다. 남편 못지않게 활발히 사회활동을 했던 미셸 오바마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2006년 버락 오바마 당시 상원의원이 대선 출마를 결심한 뒤 처남 부부에게 아내를 설득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를 들은 미셸 여사의 첫 반응. “버락이 주말마다 집에 올 수 있고 일요일은 휴식을 취할 수 있냐”였다(피터 슬레빈의 ‘미셸 오바마’). 정치인의 아내로, 워킹맘으로 매일 전투를 치르던 미셸 여사는 두 딸과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바뀔 것을 두려워했다. ▷정치를 ‘대업’으로 보고 가족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던 과거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도 가장이 가족을 위해 정치 욕심을 접었다는 소식이 종종 들린다. 네거티브 폭로가 난무하는 선거를 치르다 보면 가족의 평온한 일상은 곧잘 산산조각이 난다. 지난 총선에 입성한 한 의원의 지인은 “그 부인으로부터 왜 말리지 않았냐는 원망을 오래 들었다”고 했다. ▷가족의 신상까지 탈탈 털리는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고위공직자는 말할 것도 없다. 현 정부 출범 초기 장관 후보자로 거론됐던 한 인사는 “청문회 가는 장관은 싫다. 청와대 수석이면 모를까” 하며 손사래를 쳤다. 대통령수석비서관은 차관급이다. 서로 고사하는 바람에 28번째 후보자에게 돌아간 현 정부 장관 자리도 있었다. 최근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장관 인사검증을 제안하면 대개 ‘나는 장관 말고 차관 하겠다’고 한다”며 ‘구인난’을 호소했다. 이대로라면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가 가장 넘기 힘든 허들은 ‘가족’이 될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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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설위원 현장칼럼/우경임]아이돌 지망생 무대 빼앗듯, 공부하겠단 아이들 학교 뺏겠다니

    올해 자율형사립고 24곳이 재지정 평가를 받는다. 5년마다 실시되는 주기적인 평가인데 유독 ‘자사고 죽이기’라는 반발이 거세다. ‘외고·자사고의 일반고 전환’ 공약을 내건 이 정부가 사실상 자사고 취소를 위한 평가를 하고 있다는 것. 반면 자사고가 고교 서열화를 부추기고 입시 경쟁을 과열시킨다는 비판도 상존한다. 이 갈등의 한복판에 전북 전주 상산고가 있다. ‘상산고는 정말 없어져야 하나’ 답을 찾고 싶어 12일 학교를 찾았다.□1 학생 “왜 우리는 학교를 선택할 수 없나” 봄기운을 품은 상산고 교정을 삼삼오오 거니는 학생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학생들은 상산고 진학을 목표로 중학교 내내 준비를 했다고 한다. 김정윤 군(3학년)과 조채은 양(2학년)은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원했다. 이대훈 군(3학년)과 강지호 군(2학년)은 수학에 특화된 교육을 기대하고 왔다. 학원에 가지 않고도 밤낮으로 선생님과 토론하고 친구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어 만족스럽다. 강 군은 “상산고가 아니더라도 더 나은 교육환경을 갖춘 학교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했다. 상산고 학생회는 학생 투표를 통해 대통령에게 손편지를 쓰기로 했다. 학생회장인 김 군은 “선생님과 부모님은 공부에만 집중하라고 하셨지만…. 자사고 평가가 법에 어긋나고 불합리해서 꼭 알려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고 했다. 손편지에 쓰고 싶은 말을 물었다. “첫 줄에 ‘상산고에서 행복한 재학생 조채은입니다’라고 쓸래요.”(조 양) “결과가 정의롭다 해도 절차가 공정하지 않다면 민주적이지 않습니다.”(김 군) ‘공부할 기회를 빼앗지 말라’고 하는 공부가 재능인 남다른 아이들도 있다. 노래가 재능이고, 요리가 재능이듯이. 아이들은 단 하나의 다른 학교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2 학부모 “자사고가 일반고를 붕괴시켰나” 상산고 재학생 1100여 명의 학부모들은 2월부터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활동 중이다. 전국 각지에서 서명운동을 벌였고 지난달 15일에는 전북도교육청 앞에서 934명이 모여 궐기대회도 열었다.(※이날 김승환 전북도교육감은 연가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 ‘자사고가 고교 서열화를 조장해 일반고를 황폐화시킨다’는 주장에 대해 학부모들은 “자사고가 죽으면 일반고가 살아나느냐”고 물었다. “큰아이는 일반고, 작은아이는 상산고를 다녔어요. 공개수업을 가 보니 수업의 질 차이가 커요. 학교에서 안 가르치니 사교육을 더 시키고요. 아이들 줄 세우는 건 일반고가 더할걸요. 대학 갈 만한 아이들에게 학교의 지원이 집중되니까요.”(이미연 씨·전북 군산) “아이가 ‘서울 있었으면 매일 학원 다니고 전교 ○등 경쟁만 했겠지’라고 해요. 여기선 서로 격려하고, 자극을 준다고요. 학생과 학부모가 만족하는 학교를 시행령 하나 뚝딱 만들어서 ‘우리를 따르라’고 하니….”(조윤경 씨·서울) “아이가 중1부터 상산고 간다고 해서 3년간 고민하고, 준비해서 진학했어요. 정권이 바뀐다고 학생들 꿈도 바뀌어야 하나요. 이건 학생인권으로서 존중받아야 해요.”(김혜수 씨·전북 정읍) “각 시도교육청 일반고 지원정책을 일일이 조사해 봤어요. 전북도교육청이 그동안 일반고를 위해 뭘 했는지 찾을 수가 없더군요. 자사고가 없어지면 다 해결되나요? 하향평준화되는 것 아닌가요?”(강계숙 씨·전북 군산)□3 교사 “어떤 학교가 좋은 학교인가” 교장실을 들어서니 탁자 위에 놓인 ‘교육법전’이란 책부터 눈에 띄었다. 박삼옥 교장은 “2013년 부임 이후 첫 임기 4년은 교육자로서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2년 전부터 소송과 평가에 대응하느라…”고 말끝을 흐렸다. “아이들 터전을 지켜주고 싶다”고 했다. 올해 전북도교육청이 평가하는 자사고는 단 한 곳, 상산고뿐이다. 지난해 12월 자사고 재지정 평가계획을 받았다. 기준점수를 다른 시도보다 10점 높은 80점으로 올렸다. 그동안 의무선발이 아니었던 사회통합전형 관련 배점은 크게 높인 대신 학교 구성원의 만족도 관련 배점은 낮췄다. 박 교장은 “아무리 성적 좋은 학생도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고 예고 없이 커트라인까지 높인 셈”이라고 말했다. 자사고에 들이대는 이 같은 엄격한 잣대는 진보교육 브랜드인 혁신학교 재지정 평가 탈락률(1.2%)과도 비교된다. “우리 교사들 보통 오전 7시 반 출근, 오후 6시 퇴근합니다. 야간 특강도 합니다. 수능이 목표가 아니라 고급영어, 고급수학 배워 세계와 겨루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에요. 열심히 가르치면 특권학교, 학원 안 가고 기숙사 생활하면 귀족학교라니요.” 교육 수요자의 관점에서는 교사나 수업의 질이 중요하다. 이와는 거리가 먼 평가기준으로 좋은 학교를 선별할 수 있을까. □4 설립자 “국가의 약속이란 무엇인가” 홍성대 상산학원 이사장을 만난 11일은 마침 자사고 동시선발·중복지원 헌법재판소 결정이 있던 날이었다. 자사고-일반고 중복지원 금지는 위헌, 후기 동시선발은 합헌 결정이 난 순간, 그는 펜을 내려놓고 긴 한숨을 쉬었다. ‘흙수저’였던 홍 이사장의 쓰라린 고학의 산물이 ‘수학의 정석’이다. 1981년 이 수익금으로 고향인 전북에 학교를 세웠다. 2002년 김대중 정부가 평준화 틀 안에서 획일성을 보완하고자 자립형사립고를 도입할 당시 자사고로 전환됐다. 사학들은 매년 학생 납입금 총액의 25%를 학교법인이 반드시 부담하도록 한 조항 때문에 이를 외면했지만 창의적인 인재를 기르고 싶어 호응했다고 한다. “학생선발권과 교과과정의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고 재산과 열정을 쏟았는데, 이처럼 신뢰를 저버린다면 누가 정부를 믿고 교육을 하겠어요.” 작은 소나무를 사다 직접 기르고, 비단잉어 치어를 사다 키웠다. 집처럼 편히 지내라고 950명을 수용하는 기숙사는 방마다 샤워실을 만들었다. 이런 쾌적한 환경이 적폐가 된 이유 중 하나다. “사학을 하며 남는 건 명예와 보람뿐인데 물거품이 됐어요. 세금 안 쓰고 미래를 위한 교육을 하겠다는데 국가는 하지 말라 하고, 나는 하겠다고 하고… 이상한 세상 산다 싶어요.” 한 학부모의 전언이다. “홍 이사장이 ‘내 고향 살리고 싶어 정치권 손짓도 뿌리치고 교육에 전념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정치를 할걸’ 그랬다고.” □5 지역사회 “지역의 자랑을 왜 없애나” “멀쩡한 학교를 왜 없애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여기 사람들 교육감이 무슨 욕심이냐고 한다.” 상산고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운전사가 전한 지역 여론이다. 상산고의 경제적인 파급효과가 연간 200억 원이란 분석이 있을 정도로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학교 앞 호남마트를 24년째 운영하는 이인자 씨는 “학생 만나러 온 학부모들이 한옥마을 구경하고, 졸업생들은 대학 친구들을 데려와 전주를 소개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인근 아파트 전·월세 시세도 다른 곳보다 다소 높게 형성돼 있다. 김 교육감은 이런 여론에 대해 아예 귀를 닫고 있다. 학부모와 동문들이 공개질의서를 보내고, 면담도 줄곧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이다. 국회의원 도지사까지 나서 ‘다른 시도와 형평성을 맞춰 달라’고 했지만 김 교육감은 강행 의사를 피력하고 있다. 유재희 상산고 동창회장은 “아무리 신념이더라도 반대 의견이 있으면 대화하고 설득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상산고 없어지면 전주 인재들이 갈 곳이 없어진다”고 우려했다. 필자가 상산고 교정에서, 전주에서 만난 이들의 말은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상산고가, 자사고가 없어지면 우리 교육이 정말 좋아지는 겁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자 김 교육감과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대변인실과 비서실은 “김 교육감이 관련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는다. 자사고에 대한 원칙은 이미 밝혔다”고 했다. 그가 1월 신년회견서 밝힌 원칙은 “자사고 폐지는 대통령 공약이고, 전북도교육청은 그 방향으로 갈 것”이다. 6월 자사고 24곳의 평가결과가 나오고, 7월 존폐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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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대한민국 행복보고서

    ‘지금 얼마나 행복합니까?’ 서울대 행복연구센터는 카카오 플랫폼 ‘마음 날씨’를 통해 지난 한 해 동안 한국인 104만 명에게 행복과 관련된 10개 문항을 물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인의 ‘안녕지수’(행복지수)를 산출했다. 결과는 10점 만점에 5.18점. ‘헬 조선’도 ‘해피 한국’도 아니었다. 그런데 행복과 불행의 편차가 컸다. 아프리카 수준(4점 이하)과 북유럽 수준(8점 이상)이 각각 응답자의 20%씩 차지했다. 행복도 양극화 현상을 보인 것이다. ▷가장 행복한 세대는 10대 남성이었다(6.2점). 가방이 반쯤 열린 채로 왼쪽으로 뛰었다, 오른쪽으로 뛰었다 등교하는 10대 아들을 이해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행복하다니 다행스럽다. 하지만 그 행복감이 좌절로 바뀌는 것도 순식간이다. 20대는 전 세대에 걸쳐 가장 행복감이 낮았다(5.06점). 누구나 다시 돌아가고 싶을 청춘인데, 취업 연애 결혼 어느 하나 쉽지 않은 ‘N포 세대’의 아픔이 느껴진다. 특히 20대 중에도 여성은 가장 불행하다고 여기는 세대였다(4.98점). 기존 성 역할이 무너지고 있고, 사회 각계에서 여성이 약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여성이 고달픈 사회인 것 같다. 여성이 남성보다 안녕지수가 높은 연령대는 가사와 자녀 양육의 부담에서 어느 정도 해방된 60대뿐이다. ▷객관적인 지표로만 보면 우리나라는 더 행복한 나라여야 마땅하다. 국민소득 교육여건 평균수명 등 객관적 삶의 질을 통계로 보여주는 인간개발지수(HDI) 순위에서 한국은 2017년 22위다. 그런데 주관적 행복도인 지구촌행복지수(HPI)에서는 68위다. 인간개발지수 1위 국가인 노르웨이는 지구촌행복지수가 88위다. 코스타리카 자메이카 같은 나라들은 정반대로 나타난다. 선진국일수록 주관적 행복지수가 낮은 것은 모두가 가난한 것보다, 나만 가난한 상대적 박탈감의 영향 때문이다. ▷경제학자인 리처드 이스털린이 세계 30여 개국을 비교해 보니 국가 전체 부의 총량이 증가해도 함께 행복 수준이 높아지지 않았다.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다음에는 행복은 사회적인 조건보다 개인적인 요인이 결정적인 변수가 된다는 얘기다. ‘안녕지수’ 연구를 진행한 최인철 서울대 교수는 ‘행복의 비법’을 이렇게 요약한다. 삶의 재미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의미가 있어야 한다, 서로 지지해 줄 수 있는 인간관계를 맺고 식사나 대화 같은 경험을 나눠야 한다 등…. 벼락 행운이 찾아온 하루를 기다리기보다 ‘좋은’ 하루를 꾸준히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행복 점수를 쌓는 길인 셈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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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우경임]누가 ‘포용국가’에서 청년을 소외시켰나

    당정이 싸늘한 여론을 무릅쓰고 교육부 차관보 신설을 강행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혁신적 포용국가’에서 성과를 내려면 사회부총리 기능 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경제에서 실점했으나 복지에선 득점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그만큼 확고하다. 최근 만난 사회복지계 원로는 “문재인 정부 들어 사회복지계의 모든 숙원이 풀렸다”고 했다. “세수가 넘치는 것도 이 정부의 복(福)”이라면서. ‘혁신’과 ‘포용’을 나란히 세워 알쏭달쏭하게 들리지만 ‘혁신적 포용국가’는 결국 선별적 복지를 보편적 복지로 전환하고, 개인이 실패를 감수하도록 사회안전망을 갖춰 혁신이 일어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역대 정부마다 ‘퍼주기’라는 인식과 예산 부족으로 진전이 없었던 기초연금과 장애인연금이 30만 원까지 인상됐고, 아동수당(10만 원)이 도입됐다. 건강보험 보장 범위가 착착 넓어지고 있고 실업급여는 평균임금의 60%까지, 육아휴직 급여는 50%까지 올랐다. 이대로라면 문재인 정부의 브랜드는 ‘포용국가’가 될 것이다. ‘소득주도성장’을 두고 “세계적으로 족보 있는 이야기”라는 문 대통령의 발언이 논란이 됐는데 굳이 족보를 따진다면 1929년 대공황 이후 경제냐, 분배냐 하는 오랜 실험의 흐름 속에 있는 ‘혁신적 포용국가’야말로 뼈대 있는 정책이다. 우리나라도 경제와 복지가 동반성장한 실증적인 사례다. 비록 권위주의 정부의 정치적 계산이 깔렸지만 1977년 건강보험(의료보험), 1988년 국민연금 도입으로 산업역군을 안정적으로 확보해 반세기 만에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이뤄냈다. 저성장이 ‘뉴노멀’이 된 시대, 저출산·고령화 위기에 맞서 이번에도 정부는 ‘포용국가’를 해법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려면 답이 뻔한 문제를 하나 풀어야 한다. 경제가 압축성장하는 과정에서 양극화가 심화됐듯이, 복지가 압축성장하는 과정에서 그 수혜가 독점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서다. 지난해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정규직 월평균 임금(300만9000원)은 비정규직(164만4000원)의 1.83배다. 그런데 생애 전반에 걸친 복지 격차는 이보다 크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비해 국민연금 가입률은 2.35배, 건강보험 가입률은 1.96배, 고용보험 가입률은 2배 높다. 아파도, 실직해도, 은퇴해도 비정규직은 기댈 곳이 없다. 복지를 확대하면 할수록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복지 격차’가 벌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질적, 양적으로 팽창한 복지가 골고루 분배되려면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가 시급하건만 ‘포용국가’ 어디서도 이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청년들은 복지 빈곤층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 아직 취직을 못 했거나(청년고용률 42.9%) 취직을 했더라도 비정규직을 전전해(20대 비정규직 비율 32.3%) 사회보험에 가입할 여력이 없고, 각종 혜택이 집중된 결혼과 출산을 멀리 미뤄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그들만의 철옹성을 쌓고 있는 공공부문·대기업 노조와의 정면대결을 피한 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같은 정책으로 청년들의 노동시장 진입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고 있다. 청년들은 ‘포용국가’에서조차 소외계층이 되고 있다. 이러니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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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개츠비 곡선

    미국 정부가 글로벌 금융위기 수습에 여념이 없던 2008년 말, 앨런 크루거 프린스턴대 교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듬해 초 출범할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맡을 티머시 가이트너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였다. “경제가 망해 가는데, 큰일 한번 해보지 않겠습니까?” 이에 응한 크루거 교수는 2009∼2010년 재무부 차관보, 2011∼2013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을 지낸다. 저명한 노동경제학자이자 오바마 행정부에서 경제브레인으로 활약했던 그가 18일 59세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2012년 1월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그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할수록 계층 간 이동이 어렵다는 ‘위대한 개츠비 곡선’ 개념을 처음 발표했다. 빈농 아들에서 매일 호화파티를 여는 벼락부자가 된,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 주인공 이름을 따온 것이다. ‘금수저-흙수저’처럼 얼핏 당연하게 느껴지는 명제를 실증적으로 입증했다. ▷각국의 개츠비 곡선을 비교한 한국개발연구원의 연구를 보면, 우리나라는 불평등 정도가 북유럽 국가에 필적해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계층 이동성이 약화된 것도 사실이고 국민들은 실제보다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계층 이동성 지표와 주관적인 평가를 비교했더니 계층 상승 정도를 실제보다 20%포인트 낮게 평가했다는 연구도 있다. 부모 세대의 자수성가는 옛말이 된, “돈도 실력, 부모를 원망해”라는 소리가 횡행하는 시대가 낳은 좌절감의 반영이다. ▷크루거 교수는 최저임금, 기본소득 등 논쟁적인 연구에 천착했다. 1994년 뉴저지주에서 시간당 최저임금을 18% 이상 올렸지만 패스트푸드점 일자리는 줄지 않았다는 연구를 내놓아 찬반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런 그를 로런스 카츠 하버드대 교수는 “데이터가 이끄는 대로 연구한 사람”이라고 했다. 기존 경제학과 다른 길을 걸었어도 학자로서의 엄밀함과 치열함을 갖췄다는 평가다. “경제 정책을 추상적인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방법으로 여겼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이렇게 애도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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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영국發 산성비 퇴치한 스웨덴

    미세먼지 돔에 갇힌 중국과 한국을 비롯해 뒤늦게 산업화를 이룬 아시아가 요즘 환경재앙을 겪고 있다. 사실 50∼60년 전만 해도 유럽이 ‘죽음의 땅’이었다. 스칸디나비아반도 숲과 호수에서 나무는 시들고 물고기는 떼죽음을 당했다. 스웨덴 과학자인 스반테 오덴은 전국 토질과 수질 데이터 분석에 나섰고, 1967년 영국과 독일 국경을 넘어온 이산화황(SO₂)이 비로 내리며 산성도가 상승했기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스웨덴 호수 9만 곳 중에 4만 곳이 물고기가 살기 힘들 정도였다. ▷1952년 스모그로 이미 1만2000명이나 사망한 재난을 겪은 영국인데도 자신들이 만든 오염물질이 스웨덴에 산성비를 내린다는 결과를 인정하길 거부했다. 스웨덴은 꾸준히 산성비 문제를 국제이슈로 만들었고 1971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스웨덴의 주장을 인정하는 보고서를 내놓기에 이른다. 하지만 여전히 영국과 독일은 부인했다. 이에 1972년 유엔인간환경회의에서 스웨덴은 산성비 조사보고서를 다시 발표하며 여론전에 나섰다. 국제적인 압력이 높아지자 1979년 11월 영국과 독일을 포함한 31개국이 ‘월경(越境)성 장거리 이동 대기오염에 관한 협약(CLRTAP)’에 서명한다. ▷당시 협약은 대기오염 물질 이동에 관한 공동연구를 하고, 상호 오염을 감시하는 수준의 느슨한 합의로 출발했으나 이산화황을 감축하는 헬싱키 의정서(1985년), 질소산화물을 감축하는 소피아 의정서(1988년) 등 8개 기후환경협약의 단초가 된다. 국경을 넘어온 오염물질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축적해 국제적인 연대를 바탕으로, 끈질기게 노력한 결실이었다. ▷한중일 간에도 한중 환경장관회의, 한중일 장거리 이동 대기오염 물질 공동연구 등 협력의 틀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미세먼지에 관한 한 중국은 항상 오불관언이다. 중국이 “과학적 근거가 있냐”며 발뺌하지 못하도록 과학적 데이터로 말해야 한다. 더불어 미세먼지로 고통받는 태국 등 다른 나라들과 긴밀한 국제협력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일관된 논리와 과학으로 10년, 20년 집요하게 싸우면서 국제사회와 힘을 합쳐 해결의 길을 찾아간 스웨덴의 교훈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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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난임 부부의 눈물

    자녀를 원하는 부부에게 1년 넘도록 자연적으로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난임으로 정의한다. 국내의 난임 진단자는 22만여 명에 이른다. 아이를 낳기 위한 고난의 여정에서 이들은 말 못할 슬픔을 겪는다. 2015년 난임 여성 대상 설문조사에서 26.7%가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우울감과 고립감을 경험한 이들은 86.7%에 이르렀다. ▷지난해 처음 합계출산율이 1명 아래로 떨어진 0.98을 기록했다. 사망자가 출생아보다 많아지면서 2021년부터 인구 자연 감소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평생 낳는 아이 수가 줄어든 데는 만혼과 난임 증가도 한몫한다. 난임 시술은 체외수정과 인공수정으로 나뉜다. 체외수정 임신율은 40% 안팎으로 인공수정(17∼18%)에 비해 높지만 한 가지 흠이 있다. 평균 시술비가 341만 원(2015년 기준)으로 인공수정보다 5배 이상 비싸다. ▷2006년부터 난임 치료를 지원해 온 정부가 올해 그 지원 대상을 확대하고 지원 횟수도 늘렸으나 여전히 문턱은 높다. 난임 시술비가 정작 자연임신 확률이 높은 만 44세 이하 여성에게만 지원된다. 횟수 제한도 문제다. 시험관 시술 7회, 인공수정 3회를 합해 10회인데 모든 시술이 맞는 경우는 극소수라 실질적으로 10회까지 지원받기 힘들다. “첫째 아이만이라도 집중적으로 지원해 달라”는 것이 난임 부부의 절박한 호소다. 또한 난자 채취를 할 때마다 5∼7일이 필요한데 난임 휴가는 연간 3일뿐, 난임 시술에 집중하려면 직장까지 관둬야 할 상황이다. ▷난임 시술로 태어난 신생아는 2017년 2만854명으로 전체의 5.8%를 차지한다. 우리나라는 출생아 수 30만 명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다. 난임 가정의 임신 확률을 높일 수 있다면 출산율 제고에도 도움이 된다. 올해 저출산 예산 23조4000억 원 가운데 난임 지원은 184억 원에 불과하다. 아이 낳을 준비가 안 된 사람과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 어느 쪽에 저출산 정책의 우선순위를 둘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나가는 아이만 봐도 눈물이 난다는 난임 부부의 아픔에 대해 사려 깊은 응답이 필요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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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생활지도교사 ‘구인난’

    “야, 학주(학생주임) 떴다.” 학생주임이 막강한 권력자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등굣길 학생주임 앞을 지나는 학생들 사이에선 쫄깃한 긴장감이 흘렀다. 남고생은 스포츠형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집어 밖으로 삐져나오면 안 됐다. 여고생은 귀밑머리 3cm, 앞가르마, 치마 길이… ‘걸면 걸리는’ 규칙들이라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남고에서는 “엎드려뻗쳐”라는 고함과 함께 ‘퍽퍽’ 엉덩이 맞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과 후나 주말 극장 앞에서도 학생주임의 매서운 눈은 번득였다. 학생들은 토끼들이 하늘의 매를 살피듯 학생주임이 떴는지를 살폈다. 때로는 거친 말을 퍼붓고 출석부로 머리를 쥐어박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학생들의 앞날을 걱정해주는 학생주임 교사도 많았다. 그래서 기성세대에겐 중고교 시절 더더욱 잊기 힘든 기억의 한 단편이다. 그랬던 학생주임이 요즘은 권위주의 색채를 벗어버린 생활지도교사로 통칭되는데 ‘구인난’이 심각하다고 한다. ▷지난해 5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7%가 가장 기피하는 보직으로 생활지도부장을 꼽았다. 경력교사들이 손사래를 치니 학교 내 약자인 기간제 교사나 신입 교사에게 생활지도를 맡기는 일이 빈번하다. 생활지도교사가 담당하는 업무인 학교폭력, 생활지도 등은 공문은 산더미처럼 쌓이고 학부모 민원은 폭주하는 일이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라도 한번 열리면 교사들은 거의 수업을 포기해야 될 정도다. 학폭위 결과가 상급학교 진학에 영향을 주다 보니 학부모들은 교사를 상대로 소송도 불사한다. 생활지도에 열심히 나섰다가 오히려 학생·학부모 교원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기도 한다. ▷2000년대 들어 학생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교사가 생활지도를 할 수단이 마땅치 않게 됐다. 교사의 역할이라면 학습지도와 생활지도인데, 이제 생활지도를 학교 내 다른 직군에 맡겨 달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학생주임을 피해 다니던 시절, 학생들은 늘 학교를 탈출하는 꿈을 꿨다. 이제는 교사가 학생과 직접 부딪치는 일을 피한다. 이런 학교에서 교사가 행복할 리 없다. 학생이 행복할 리도 없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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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동아마라톤 90회

    1931년 3월 21일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맨 14명의 선수가 광화문과 영등포를 왕복하며 22.530km를 달렸다. ‘하프코스’로 시작된 첫 동아마라톤대회 우승자는 양정고보 재학생인 김은배. 이듬해 김 선수는 한국인 최초로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출전해 6위를 한다. 김 선수는 당시 동아일보에 ‘올림픽촌에서’를 기고했는데, ‘선중의 뱃멀미가 아직 낫지 못해 연습 중에 뇌빈혈을 일으켰다. 운동장이 삥삥 돌아가는 것 같다’라고 썼다. 가난하고 힘없는 식민지 청년의 ‘무한도전’은 온 겨레에 희망을 줬다. ▷국제대회 가운데 보스턴 마라톤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동아마라톤은 근현대사 굽이굽이마다 ‘다시 달리자’라는 용기를 불어넣었다. 제2, 3회 대회에서 입상한 손기정 선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썼다. 비록 일본 선수로 출전했어도 반드시 ‘손긔졍’ ‘KOREAN’이라고 사인했다. 손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을 당하는 등 언론 탄압이 심해지면서 동아마라톤은 13년간 중단됐다. 동아마라톤이 부활한 1954년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이 오뚝이처럼 일어서려던 때였다. ▷그 후 매년 열린 동아마라톤은 사회 발전과 더불어 계속 업그레이드됐다. 1982년부터 국제대회로 거듭났고, 1990년대에는 황영조 이봉주 선수를 배출해 ‘올림픽 영웅’의 산실이 됐다. 2000년대에는 뉴욕, 보스턴, 런던 마라톤과 겨루는 국제대회로 성장했고 지난해까지 한국 최고기록을 21번이나 갈아 치웠다. ▷마라톤은 인생을 닮았다. 그래서인지 사회와 경제가 팍팍해도 달리는 이들은 줄지 않는다. 동아마라톤 참가자가 1만 명을 처음 돌파한 해는 외환위기 여파가 한창이던 1999년이었다. 건강과 성취감이라는 마라톤의 매력이 알려지며 ‘2030 여풍’도 거세지고 있다. 다음 달 17일 제90회 동아마라톤에는 역대 최고인 3만8500명이 참여하는데 마스터스 참가자 중 여성이 25%다. 특히 20, 30대 여성 참여율이 지난해보다 각각 64%, 20% 늘었다. 기운 잃은 경제, 답답한 정치…. 미래를 걱정하는 한숨이 들리지만 지난 시절 그래 왔듯이, 우리는 다시 달릴 것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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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교권침해 보험

    제주 A초교에선 학부모 1명이 지난 한 해 동안 100여 건의 민원과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 있었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처리 결과에 불복해 교육청, 국민신문고 등 행정기관마다 민원을 제기했다. 학교를 대상으로 행정소송을 반복했고 교장, 교감, 담임·보건교사뿐 아니라 동문회장까지 직권남용, 아동학대 등으로 고소했다. 학교 업무는 마비될 지경이었고, 해당 교사는 줄줄이 병가를 가거나 전보를 신청했다. 다소 극단적인 사례지만 교사를 상대로 한 소송이 결코 드물지 않다. ▷학생 지도 중에 발생한 사고로 인해 소송을 당한 교사들은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는다. 교사보험이 인기를 끄는 이유다. 전국 시도교육청 17곳 중 11곳은 단체로 교사보험에 가입했고, 나머지 교육청도 예산 확보에 나섰다. 지난해 4월에는 기존 법률비용보험에 교권침해 피해 특약을 추가한 보험까지 출시됐다. 변호사 비용만 지원하는 기존 보험과 달리 교권침해로 판명되면 최대 300만 원까지 정신적 신체적 피해 보상을 해준다. 지난달까지 1579명이 가입했다. ‘그래도 교육자인데…’라며 학생·학부모와의 갈등을 쉬쉬하던 교사들도 폭행 폭언, 성희롱이 빈발하자 자구책 마련에 나선 것이다. ▷자괴감을 느끼고 교단을 떠나는 교사도 늘고 있다. 이달 명예퇴직을 하는 초중고교 교사가 6039명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교사들은 개학 직전 명퇴를 하는데 지난해 2월, 8월 명예퇴직 교사 수를 합친 것(6143명)만큼 많다. 서울 강남 B초교 교장은 “요즘 학부모는 교사에게 ‘자녀 맞춤형 서비스’를 기대한다. 학부모와 심한 갈등을 겪고 나면 신입 교사는 병가를, 나이 든 교사는 명퇴를 선택한다”고 말했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대비해 위험을 분산시킨 제도가 보험이다. 언제 소송에 휘말릴지 몰라 보험이 출시될 만큼 사제(師弟) 간 불신은 커졌다. 학생 지도는 위험해서 서로 기피하는 업무가 됐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노래를 부르며 자랐을 세대들은 씁쓸함을 감추기 어려운 소식이다. 기둥도 기울고, 서까래도 썩은 채 간신히 버티고 선 우리 교육의 단면일 터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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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존엄한 이별’

    2010년 1월 10일 세브란스병원에서 78세 김모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폐암 검사를 받다 회복 불능 뇌손상을 입고 식물인간 상태가 된 지 거의 2년 만이었고, 대법원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판결을 받은 뒤 201일 만이었다. 이를 계기로 촉발된 존엄사 논의는 지난해 2월 연명의료결정법(존엄사법)으로 결실을 맺었다. ▷우리나라는 소극적 의미의 존엄사만 허용한다.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인공호흡기 착용 등 연명치료를 하지 않는 것이다. 약물의 도움을 받는 적극적 의미의 안락사와는 다르다. 지난 1년 동안 연명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한 환자가 3만5839명,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자는 11만4147명이다. ‘죽을 권리’를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이 늘었으나 죽음이란 단어 자체를 금기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가족끼리 이를 대놓고 이야기하기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죽는 게 어둡고 외롭고 쓸쓸한 게 아니다. 이 세상 즐겁게 살다가 이제 당신들과 작별할 때가 왔다. 그동안 날 사랑해줘서 고맙다. 마지막으로 이 한마디 말을 남기고 싶다.’ 얼마 전 가까운 가족과 친구를 초대해 축제 같은 생전장례식을 연 암환자 김병국 씨(86)가 쓴 글이다. 모든 생명의 끝자락에는 소멸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죽음을 당당히 마주할 때 삶은 더 찬란해진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더없이 소중해지는 것은 덤이다. ▷네덜란드 ‘앰뷸런스 소원재단’은 죽음을 앞둔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죽음이 묻습니다. 만약 당신이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이들의 소원은 하나같이 소박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 고향에 가 보기, 손자와 놀러가기 등….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은 이들의 소망, 그건 특별하고 화려한 추억의 재현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가장 간절하고 그리운 순간은 우리가 무심하게 보내는 일상이었다. 명절을 보내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소회야 모두 다를 테지만, 새삼 기억해야겠다. 가족들과 함께 보낸 그 시간들이 훗날 우리가 가장 돌아가고 싶은 삶의 한 순간이 될 것임을.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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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홍역의 역습

    ‘여항간(閭巷間)에 어린아이가 드물었고, 외방(外方)에선 온 집안이 몰사(沒死)한 경우도 부지기수였으니, 실로 혹심한 재앙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숙종 33년(1707년) 평안도에 홍역이 창궐해 1만 명 하고도, 수천 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국내서 백신 접종이 시작된 1965년 이전만 해도 홍역은 고열과 함께 열꽃이 피다 때론 생명까지 앗아가는 공포의 감염병이었다. ▷우리나라는 2014년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홍역퇴치국가로 인증받았다. 1983년부터 국가예방접종으로 MMR(홍역·유행성이하선염·풍진) 백신이 보급돼 발병이 줄어들었으나 돌연 2000∼2001년 5만여 명이 걸릴 정도로 창궐했다. 정부는 초중고교생 580만 명에게 긴급 예방접종을 했고 이후 예방접종률이 98%까지 올라 ‘한국형 바이러스’는 사라졌다. 그런데 최근 한 달 새 전국적으로 홍역환자가 30명(21일 기준)이나 발생했다. 보건당국은 해외여행을 통해 바이러스가 유입된 것으로 추정한다. 20대 중반∼30대가 주로 걸리는 것도 과거와 다른 양상이다. 1996년까지는 1회만 접종을 해서 항체보유율이 낮은 게 원인으로 보인다. ▷백신으로 예방 가능해 후진국형 질병으로 분류되는 홍역의 귀환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지난해 발병건수가 세계적으로 30%나 증가했다. 유럽질병통제예방센터(ECDC)에 따르면 2017년 11월∼2018년 10월 유럽 30개국의 홍역환자는 1만3144명이고 37명이 사망했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선진국들도 그야말로 홍역을 앓고 있다. WHO는 2000년대 백신에 대한 불신이 소셜미디어를 타고 확산돼 예방접종률이 떨어진 것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20년 전 의학저널 랜싯(The Lancet)에 MMR 백신이 자폐증과 관련 있다는 연구결과가 실리면서 ‘안티 백신’ 및 자연면역 운동이 촉발됐다. 연구자가 샘플을 선별하고 뒷돈을 받은 사실이 2010년 드러나 논문이 철회됐지만 여진이 상당하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인간이 승기를 잡은 것은 천연두 백신 개발 이후인 220년 남짓이다. 하지만 이미 정복한 걸로 여겼던 홍역이 잠깐의 소홀함을 틈타 역습에 나섰다. 더 강해진 바이러스에 대비할 때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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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선생님과 ‘쌤’

    초등 5학년인 아이는 국어 ‘언어 예절과 됨됨이’ 단원 수업에서 ‘샘(쌤)’ ‘헐’ 등을 예절에 어긋난 말로 배웠다. 그런데 ‘쌤’이 선생님을 대체할 호칭이 될지도 모르겠다. 8일 서울시교육청이 조직문화 혁신방안으로 직급이나 직위로 부르는 대신 ‘쌤’ ‘님’으로 호칭을 통일하겠다고 했다. 조희연 서울교육감은 ‘조희연 쌤’, 김철수 교장선생님은 ‘김철수 님’으로 부르는 식이다. 교권 추락을 우려한 교사들의 반발이 확산됐고 조 교육감은 “교직원들끼리만 적용하는 것”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선생님을 부르는 말인 ‘쌤’은 ‘선생님’에서 각각 한 글자씩(ㅅ, ㅐ, ㅁ) 따서 축약한 ‘샘’의 된소리쯤 된다. 2000년대 인터넷서 은어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생활 속에서 준말처럼 널리 쓰인다. ‘쌤예∼’ 하던 대구 사투리에서 비롯된 것이란 주장도 있으나 국립국어원은 ‘쌤’을 표준어로도, 방언으로도, 신조어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선생님을 낮춰 부르는 호칭으로 알려져서다. ▷서울교원단체총연합회는 “선생님은 제자가 스승에게 쓸 수 있는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존경의 말”이라며 “교사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교육당국이 무너뜨리고 있다”고 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는 “교권침해에 시달리는 교사들이 선생님이란 호칭에 마지막 자긍심을 느낀다”고 했다. 스승이란 말은 희귀해졌고, 다른 많은 직업 종사자들에게도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쓰니 본래 뜻이 희석됐다. 이제는 아예 ‘쌤’이라 부르라니 교사들이 교권 추락을 실감할 만도 하다. ▷학생이 ‘쌤∼’ 부르며 달려와 인사를 하고, 이를 친근함의 표현으로 보는 선생님도 있다. 다만 서로 돈독한 신뢰가 쌓였을 때라는 전제 아래서다. 더욱이 교사가 절대 권위를 갖고 군림하던 1970, 80년대처럼 사제 관계가 위계적인 시대도 아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부르게 해 달라’는 청원 글이 여럿 올라왔다. 그중 ‘교실에서 학생들이 선생님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기간제쌈(ssam)이라 합니다’라는 내용도 있었다. 교실은 이미 이렇게 바뀌었다. 현장과 괴리된 혁신으로 교실을 실험해선 안 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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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바르게 살다 가서 고맙다”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희생된 고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아들아, 바르게 살다 가 줘서 고맙다.” 납골(봉안)공원에 함께 있던 가족과 동료들은 오열했다. 단장(斷腸)의 고통에 빗대는 자식 잃은 슬픔을 삼키면서도 어머니는 누구를 원망하는 대신 아들의 삶에 감사했다. ▷어머니는 ‘남보다 잘 살아라’가 아닌 ‘바르게 살아라’라고 가르쳤다. 아들은 삶으로, 또 죽음으로 이를 실천했다. 임 교수에게 진료를 받았던 환자들은 임 교수가 평소 환자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던 ‘좋은 의사’였다고 했다. 예약 없이 불쑥 찾아온 환자를 진료시간이 지났는데도 거절하지 않았다가 참변을 당했다. 장례식장에는 그를 추모하는 환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고 동료 의사들은 “이렇게 환자가 많이 찾는 의사 장례식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생명이 위급한 순간에도 두 번이나 멈칫한 채 뒤를 돌아보며 “도망쳐” “신고해”를 외쳐 주변 사람들을 구했다. ▷유족들의 의연한 태도에도 숙연해진다. 임 교수의 죽음으로 정신질환자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정신적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이 사회적 낙인 없이 적절한 치료와 지원을 받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 유족의 뜻’이라고 밝혔다. 하마터면 정신질환자의 일탈로 귀결될 뻔한 사회적 논의의 방향이 발전적으로 바뀌었다. 조의금은 병원과 학회에 기부해 이들의 치료를 돕는 데 쓰겠다고 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사회적 의미로 확장시킨 것이다. ▷유족들은 6일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 ‘감사의 글’을 보내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 없는 치료와 사회적 지원을 재차 당부했다. 참척(慘慽)의 고통 속에서도 ‘감사’를 말할 수 있는 유족들로 인해 가슴이 먹먹해진다. 유족들은 고인에게 “생명이 위협받는 순간에도 주위를 살펴봐 줘서 고마워요. 그 덕분에 우리가 살았어요. 우리 함께 살아보자는 뜻 잊지 않을게요”라며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 함께 살아보자’가 고인의 유지(遺志)였다. 내 자식만 바라보는 부모에게, 각자도생(各自圖生)에 버둥대는 우리에게 고인과 유족이 남긴 울림이 메아리처럼 퍼져 나간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19-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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