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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김을 양식으로 생산하는 나라는 한중일 3개국이다. 이른바 ‘김 삼국지’에서 단연 선두는 바로 한국산 김이다. 세계 수출량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산 김은 일본산보다 맛있고 중국산보다 깨끗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김 수출액은 최근 6년간 연평균 약 25%씩 늘어났다. 지난해에는 수출액 3억500만 달러(약 3500억 원)를 기록했을 정도로 오름세가 가파르다. 올해 들어서도 수출액은 2억7531만 달러(약 3153억 원)로 전년 동기에 비해 약 24% 증가했다. 이런 성과는 한국산 김의 뛰어난 맛과 향 그리고 일찌감치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 소포장과 다양한 가공제품을 선보인 덕분이다. 김을 처음 접하는 해외 소비자에게 부담을 덜 주고 ‘1인 가구’의 생활방식에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철저한 맞춤형 공략이 성공 비결 미역과 다시마 등 대부분의 해조류는 재료 그대로를 말리거나 소금에 절인 상태로 판매한다. 이와 달리 김은 마른김 외에도 들기름에 구워 소금을 뿌린 조미김, 볶아서 반찬용으로 먹는 김자반, 튀각·부각 형태의 김스낵 등 다양한 가공품이 인기를 얻고 있다. 이미 국내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기름을 발라 굽고 소금을 뿌려 자르는’ 과정을 거쳐 눅눅해지지 않도록 적은 양을 개별 포장해 판매하는 일명 ‘도시락김’이 일반적이다. 1·2인 가구가 늘면서 이런 소포장 형태 김 제품의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조금씩 사서 그대로 먹을 수 있는 특성 때문에 외국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올해 미국 전문식품협회가 차세대 슈퍼푸드로 항산화 성분이 풍부해 노화 방지에 효과적인 해조류를 꼽으면서 해외 김 소비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시장의 경우 현지인의 입맛에 맞춰 양념한 칩이나 큐브 형태의 스낵제품이 인기를 얻고 있다. 한류 열풍을 타고 신흥 수출국도 늘어나는 추세다. 이라크와 헝가리, 스웨덴은 올해 수출량이 전년 대비 500% 이상 크게 늘었다. 이슬람 시장에는 전 생산 과정에 할랄 인증을 받은 김이 진출했다. 할랄은 아랍어로 ‘허용된’이라는 뜻으로 이슬람 율법에 따라 도살 또는 가공됐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해외 수출이 많아지면서 물류비용이 늘자 이를 줄이는 방법도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국립수산과학원 해조류바이오연구센터와 한국식품연구원은 기존 플라스틱 용기를 이용한 조미김 포장을 주머니 형태의 포장으로 바꿔 부피를 절반 이상 줄이는 기술을 지난해 개발했다. 김 업계에서는 쌀 소비가 줄어드는 추세에 맞춰 기존의 밥반찬용 조미김 외에 더욱 다양한 형태의 가공·포장법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국내에서는 소비량이 정체되고 있는 만큼 양보다 질에 초점을 맞춘 기술 개발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옥영수 수산업관측센터장은 “브랜드를 개발하거나 일본처럼 김 등급제를 도입하면 소비자의 선택권을 강화하고 신뢰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김 이용한 화장품과 의약품 개발도 기대 현재는 식용 김의 생산성을 높이는 연구가 중심이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김의 성분과 효능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지면서 화장품과 의약품 개발도 기대되는 상황이다. 다른 해조류에 비해 생산비용이 낮고 산업 규모도 큰 만큼 가까운 미래에 김의 유용한 성분을 응용한 산업이 활기를 띨 것으로 전망된다. 김 등 해조류에 많이 들어 있는 수용성 식이섬유인 알긴산은 체내 중금속을 몸 밖으로 배출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세먼지와 중금속으로부터 건강을 지키려는 소비자의 욕구가 높아지는 만큼 해조류에 대한 관심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또 김에는 칼슘 등 무기질이 풍부해 골다공증 예방과 콜레스테롤 감소, 면역력 강화에도 효과가 있다. 특히 김에 다량 함유된 요오드는 태아와 어린이 성장에 필수적이다. 이 밖에 김에는 피부를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하는 성분인 ‘포피라(porphyra) 334’가 함유돼 있다. 해조류에 포함된 포피라 334 성분은 염증 질환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돼 최근 이를 이용한 자외선 차단제가 상용화돼 시판되고 있다. 2013년에는 인천대 해양 RIS사업단이 국내 최초로 서해 장봉도 김에서 ‘바이오매스 201F’라는 자외선 차단 성분을 추출해 화장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해조류들이 바다에서 강한 자외선을 받지만 조직에 손상을 입지 않는다는 점에서 착안한 연구 덕분이다. 물론 김을 이용한 의약품이나 화장품 원료 개발 연구는 아직 다른 해조류에 비교하면 초기 단계다. 하지만 다시마나 미역 등 다른 해조류에 비해 김은 두께가 얇기 때문에 유용한 성분을 추출하기가 훨씬 편하다. 오병준 목포수산식품지원센터장은 “얇은 풀과 굵은 나무를 비교해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며 “김은 식품은 물론이고 다른 용도로도 상품화에 매우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김산업연합회는 내년에 열릴 2017 완도국제해조류박람회에서 식품뿐 아니라 헬스케어 등 다목적 신(新)성장동력의 하나로 김을 집중 조명할 계획이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이런 역사적인 문서가 70년간 우리말로 옮겨지지 않고 묻혀 있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어요.” 프리랜서 번역가 서라미 씨(34·여)와 송연지 씨(28·여), 번역업체 직장인 김병찬 씨(51), 통역장교 출신 강신우 씨(29) 등 4인은 최근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의 전쟁범죄를 심판한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전범재판) 속기록 번역을 시작한 것이다. 한 번도 한국어로 공식 번역된 적이 없는 이 속기록 일부를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번역해 출간한다. 서 씨가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지난해 봄 남편과 일본으로 여행을 갔던 서 씨는 서점에서 ‘도쿄전범재판과 통역’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1946년부터 2년 반 동안 열린 이 재판에 당시 우리나라는 독립국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피해 국가로 참여하지도 못했다. 전쟁을 지시한 히로히토 일왕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천황이 곧 국가’라 생각하는 일본으로서는 “일본은 죄가 없다”는 인식을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서 씨가 발견한 책 역시 당시 총리로 전쟁을 진두지휘해 A급 전범으로 처벌받은 도조 히데키를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재판 자체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서 씨는 속기록의 한국어 번역본을 읽어 보려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것은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일본어와 영어판 원본뿐이었다. 서 씨는 “일본의 역사왜곡 뿌리가 된 중요한 기록을 아무도 우리말로 옮기지 않았다는 게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중국의 경우 올해 5월 재판 기록 중 자국과 관련된 부분을 번역해 출간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재판에 대한 관심 자체가 거의 없었다. 역사 전공자가 아니었던 서 씨의 고민은 1년 넘게 이어졌다. 그는 “군사 외교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재판이었던 만큼 평범한 번역가인 제가 나설 자격이 있는지 두려웠다”고 회상했다. 올해 5월 일본은 재판 70주년을 맞아 도쿄전범재판을 재검증하기 위해 총리 직속기구까지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서 씨는 결국 8월 말 전 직장 동료 송 씨와 선배 김 씨, 그리고 시동생 강 씨에게 차례로 연락했다. 이들은 주저하지 않고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48만 쪽에 이르는 속기록 전체를 번역하지는 못하더라도 도조 히데키의 증언을 발췌해 ‘A급 전범의 증언’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하기로 한 것이다. 네 명의 번역가는 각자의 전공 분야를 살려 본격적인 번역 작업에 들어갔다. 근현대 한일관계사를 전공한 송 씨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살리는 데 집중했다. 경영서적 등 단행본 번역 경험이 풍부한 서 씨는 복잡한 법적 용어와 어려운 옛날식 표현을 부드럽게 다듬었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국제정치를 전공한 강 씨는 “도조가 변호인들의 도움으로 작성해 낭독한 ‘증언록’은 법리적으로만 보면 꽤나 객관적인 텍스트”라며 “해석에 따라 일본의 책임이 상당히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었다”고 말했다. 역사에 조예가 깊은 김 씨는 “도조는 별명이 ‘면도날’일 정도로 철두철미한 군인으로만 알려져 있다”며 “실제 증언대에서 벌어진 책임공방에서는 비장함을 잃은 모습이 드러나 흥미롭다”고 말했다. 이들이 크라우드펀딩이라는 방식을 선택한 것은 더 많은 사람에게 도쿄전범재판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펀딩 시작 20여 일 만에 169명으로부터 400만 원이 넘는 후원을 받았다. 강 씨는 “저희가 번역하는 부분은 일부에 불과하다”며 “남은 부분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시간을 들여서라도 완성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홍정수기자 hong@donga.com}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배후에 청와대와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알려진 최순실 씨가 있다는 의혹은 올해 초부터 무수히 제기됐다. 그러나 최 씨와의 연결고리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았고 청와대도 부인했다. 하지만 ‘더블루케이’라는 회사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최 씨는 100% 지분을 갖고 있는 독일 더블루케이뿐 아니라 한국에 있는 같은 이름의 회사도 직접 설립하고, 대표도 선임해 사실상 경영했다는 증언이 19일 나왔다. 한국 더블루케이는 K스포츠재단과 설립일, 사업 목적, 조직도, 로고까지 유사한 데다 K스포츠재단 직원들이 수시로 오간 것으로 확인돼 긴밀한 업무 관계에 있었다는 정황까지 있다. 한국 더블루케이의 대표를 지낸 최모 변호사는 이날 동아일보에 “다른 법조인의 소개를 받아 나를 찾아온 최 씨가 ‘독일에 법인을 만들겠다.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 전 대표는 “나는 큰 도움이 안 되니 독일에서 일하는 한국 변호사를 소개해 주겠다”며 고사했다고 말했다. 이후 최 씨는 최 전 대표를 다시 찾아와 “한국에도 (독일에 세운) 그런 회사를 만들었다. 변호사께서 (법률 문제를)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최 전 대표는 최 씨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 법인의 법률이사직을 맡았다. 이후 최 전 대표는 조모 초대 대표의 뒤를 이어 더블루케이 한국법인 대표까지 맡았다. 다만 최 전 대표는 “자신을 ‘최서원’이라고 한 최 씨가 유명한 ‘최순실’과 동일인이라는 것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최 전 대표는 더블루케이가 별 성과를 내지 못하자 대표직을 물러났다. 한편 K스포츠재단은 전면에 드러난 이사진은 실권이 없었고, 제3의 인물이 끊임없이 사업 방향을 지시한 것으로 본보 취재 결과 확인됐다. 복수의 이사들은 19일 “재단의 중요 내용은 전 사무총장 A 씨와 B 이사 등 재단 설립을 맡았던 소수만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핵심으로 지목된 B 이사는 2007년 골프협회장을 지내면서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 지지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일부 이사들은 재단 재산의 ‘수상한 운영’도 지적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출연한 재산 288억 원 가운데 상당액이 운영재산으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보통 비영리법인의 재산은 사업비나 운영경비로 함부로 써버리지 않도록 설립 당시부터 일정 금액을 종잣돈 개념으로 보관하는데 K스포츠재단은 사업비를 지나치게 많이 책정했다는 지적이다. 복수의 이사들은 사업비 사용을 둘러싼 내분으로 A 전 사무총장과 C 전 감사가 재단을 떠났다고 증언했다.김준일 jikim@donga.com·김단비·홍정수 기자}
국민들은 2006년을 시작으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실험 관련 소식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북한 핵실험을 으레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10, 20대를 중심으로 한 누리꾼은 북핵에 대한 냉정한 평가보다는 정치적 비판, 김정은에 대한 조롱과 희화화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만약에 벌어질지도 모를 위기 상황에는 무관심했다. 이 때문에 북핵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 시민들의 인식도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9일 동아일보 취재팀은 5차 핵실험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과 인식을 살펴보기 위해 5차 핵실험이 있었던 9일과 10일 주요 포털사이트에 노출된 기사에 달린 댓글 4만여 개를 수집해 분석했다. 이번 분석은 기사가 다룬 내용을 중심으로 ‘단순 정보 전달’ ‘국내 상황 변화’ ‘실험 이후 북한의 반응’ ‘대통령의 관련 언급’ 등 6개로 분류한 뒤 각 기사의 댓글을 분석하는 오피니언 마이닝(Opinion Mining) 기법으로 진행됐다. 그나마 5차 핵실험이 다른 실험보다 짧은 기간을 두고 이뤄지면서 위협과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늘기는 했지만 핵 위기 자체에는 여전히 무감각한 모습이었다. ○ 두려움은 느끼지만 대비 목소리는 없어 누리꾼은 북한의 핵실험 소식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정부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것으로 분석됐다. 내용의 중심 단어인 ‘핵’과 관련이 깊으면서 동시에 이에 대한 감정이나 의견을 표현한 키워드는 모두 27개였다. 이 중 두려움과 관련된 키워드는 8개(전쟁, 죽다 등)였다. 이들이 전체 키워드 중에서 차지한 비중은 4분의 1에 가까웠다(25.2%). 1위는 정부 등에 대한 비판(41.2%)이었다. 특히 ‘규탄하다’라는 단일 단어의 비중이 26.3%나 됐다. ‘정부가 매번 규탄이라는 입장만 내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 북핵이 이 지경이 됐다’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많았다. 반면 ‘차분함(안보 등)’을 드러낸 표현의 비중은 거의 없었다(1.1%). 5차 핵실험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한 감정이 담겼다고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갤럽이 5차 핵실험 직후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6%가 ‘북핵이 위협적’이라고 답했다. 4차 핵실험 당시 같은 내용의 조사에서 나온 응답 비율은 61%였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북한으로부터 상시적인 위협에 놓여 있다 보니 익숙해진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북핵 위기에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등을 차분히 논의하는 댓글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난달 있었던 경주 지진과 관련된 주요 감정 언어 조사(9월 19일∼10월 19일)에서 ‘피해(1위·4만9342회)’와 ‘안전(2위·2만8492회)’ 등 개인의 안전을 이야기하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박인휘 이화여대 교수(국제학부)는 “5차 핵실험으로 위기의식은 고조되지만 내 생명이 위협을 받거나 내 재산이 큰 피해를 볼 것이라는 생각까지 연결이 안 되는 것”이라며 “또 다른 차원의 핵 불감증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핵’을 정치 이슈로만 보는 사람들 누리꾼이 5차 핵실험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두려운 감정 못지않게 정치적 시각이 배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 이슈와 관련한 표현들이 등장한 비중은 22.5%로, 두려움 못지않게 높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주로 박근혜 대통령의 ‘김정은 정신상태 통제 불능’ 발언이나 ‘사드 반대’ 같은 내용이 등장했다. 또 댓글 분석에 포함된 기사 중 가장 많은 댓글이 달린 것도 박 대통령의 ‘통제 불능’ 발언과 관련한 것(약 7900개)이었다. 핵실험 자체보다 국내 주요 정치계 인사들의 발언에 더욱 관심을 둔 것이다. 전문가들은 북핵을 정치적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정작 필요한 대비를 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정 실장은 “핵 위협 가능성과 관계없이 지진과 화재처럼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매뉴얼이 갖춰져야 하는 등의 대비가 필요하다”며 “그런데 정부는 제대로 훈련도 하질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영수 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는 “핵이 언급되는 일이 너무 잦기 때문에 핵의 위협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며 “불감증이 민감증으로 바뀌어서도 안 되지만 안보라는 기본적인 차원에서 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권기범 kaki@donga.com·홍정수 기자}
“가만 보자…. 여기가 하나, 둘, 세 번째니까 열쇠가 이건가? 아니네.” 민방공 대피소로 지정된 서울 성북구의 한 아파트단지 지하주차장. ‘주차장 자체가 대피소냐’는 기자의 질문에 관리소 직원은 “다 숨어있는 공간이 있다”며 공간배치도와 열쇠꾸러미를 들고 나섰다. 확인해 보니 ‘진짜’ 대피 공간은 ‘기계실’과 같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이름표를 달고 있던 문 안쪽에 있었다. 공간 자체는 튼튼해 보였지만 수십 개에 이르는 대피 공간이 모두 다른 자물쇠로 잠겨 있다는 게 문제였다. 유사시에 담당자가 단지를 모두 돌아다니며 일일이 열쇠를 대조해야만 열 수 있는 상황이다. 주민들의 인지도도 낮았다. 동행한 다른 직원조차 “이게 대피 공간인 줄 몰랐다”며 신기해할 정도였다. 그나마 이곳은 관리가 잘되고 있는 편이었다. 전쟁이나 핵 폭격이 있을 경우 국민들이 피해야 할 대피소가 너무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서울 동작구의 한 주민센터에 있는 대피 공간은 외부로 창이 노출된 반지하였다. 그나마도 창틀이 녹슬고 창도 외부 충격에 쉽게 깨질 수 있는 재질이었다. 서울 종로구의 국립서울과학관은 아예 폐쇄돼 있었다. 현재 국민안전처가 후방 지역에 지정해 놓은 공공용 대피시설은 지난달 1일 기준으로 전국에 2만974곳이다. 2013년 소방방재청 용역조사 결과 조사에 응한 1만4014곳 중 절반가량(6456곳)은 핵 공격이나 화생방은 물론이고 재래식 폭탄 공격도 막지 못하는 열악한 시설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보완 조치는 사실상 없었다. 국민안전처 관계자는 “어떻게 나온 숫자인지 모르겠다”면서도 “접경 지역이면 모를까 후방 지역의 2만여 곳을 일일이 판별했단 말이냐”며 전수조사 결과 자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민안전처는 올해 1월 “(시설별로) 관리책임자를 지정해 유지 관리의 내실화를 꾀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관계자는 “대부분이 민간시설이라 사실상 책임자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맞서기 위한 '2016 독도수호마라톤대회'가 15일 서울 한강시민공원 뚝섬지구에서 3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공적으로 열렸다. 올해 9회를 맞은 이번 대회는 한국정보기술연구원과 21세기경제사회연구원, 대한롤러스포츠연맹이 공동 주최했다. '좋은 나라·안전한 사이버세상 만들기'를 슬로건으로 삼은 이날 대회에는 국군사이버사령부 장병들과 차세대 보안리더(BoB) 교육생·수료생 200여명 등 사이버 안보 전문가들이 다수 참가했다. 서울 동자초교 학생 20여명도 단체로 참가해 독도 사랑의 의미를 되새겼다. 케냐 마라톤 선수 등 외국인들과 대한롤러스포츠연맹 소속 인라인하키 선수 등 이색 참가자들도 함께 달렸다. 후원기관인 한민족독도사관이 독도시화 전시를 비롯해 독도를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등 다양한 부대행사도 열렸다. 독도수호마라톤대회장이자 2012년 633km에 이르는 국토종주 달리기를 했을 정도로 '마라톤 마니아'인 유준상 한국정보기술연구원장도 이날 직접 5.4km 코스를 달렸다. 유 원장은 "독도는 대한민국 주권의 상징"이라며 "내년에 열 10회 대회는 참가자 1만 명을 목표로 크게 열어 독도에 대한 한국인들의 사랑을 전 세계에 보여줄 것"이라고 강조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여름 성수기를 앞둔 6월 4일. 부산 해운대구의 최고급 호텔 파크하얏트에 홍모 씨가 아내와 함께 들어섰다. 겉으로 봐서는 보통 투숙객과 다를 바 없었지만 홍 씨는 한국관광공사의 호텔업 등급평가단의 암행평가위원이었다. 이날 하룻밤에 홍 씨가 파크하얏트에서 이용한 서비스는 76만9000원어치. 숙박비만 60만 원이 넘는 고급 객실이었다. 하지만 홍 씨가 실제로 지불한 금액은 0원이었다. 홍 씨가 당일 결제한 금액을 추후 호텔이 전액 환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홍 씨가 기본급 이상 고급 객실에 머물며 배우자와 동행한 비용까지 지원받은 것은 ‘호텔업 평가지침’을 어긴 행동이었다. 지난해 1월 개정된 호텔업 등급 결정제가 공식 시행된 뒤 이뤄진 국내 고급 호텔 암행평가가 일부 평가위원의 ‘호화 숙박’으로 변질된 것으로 나타났다. 새누리당 이종배 의원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9월 말까지 22개 호텔을 대상으로 이뤄진 암행평가 세 건 중 한 건꼴로 평가지침을 어긴 정황이 드러났다. 4, 5성급 고급 호텔의 등급은 호텔 한 곳당 세 명의 평가위원이 각각 숙박하는 ‘암행평가’로 매겨진다. 암행평가위원은 한국관광공사가 관광업 분야 전문가를 추천과 공모를 통해 선정했다. 위원들은 호텔에서 숙박비를 포함한 평가비용 전액을 환급받고 한국관광공사로부터 50만 원 안팎의 심사비도 지급받는다. 문제는 이런 점을 악용한 일부 평가위원이 암행평가를 핑계로 필요 이상의 ‘갑질’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세부 평가지침에 따르면 호텔은 기본 객실에 묵는 1인의 비용만 지원하게 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 지난달까지 이뤄진 평가 44건 중 16건은 객실 숙박료만 40만 원을 넘었다. 평가를 명분으로 기준 이상의 호화로운 객실에 공짜로 투숙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한 예로 올해 7월 평가위원 민모 씨는 웨스틴조선호텔 부산에서 3명이 고급 객실인 ‘이그제큐티브 트윈룸’에 묵은 것으로 나타났다. 44건의 호텔 총 평가비용은 1925만 원에 이른다. 또한 전체 가운데 40건은 위원 본인 외에 가족 등 비전문가 동행자가 함께 숙박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동행 자체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상당수 평가위원이 숙박 당일 개인 카드로 결제한 금액 중 기본 객실비를 초과하는 비용이나 동행자가 쓴 비용까지 통째로 환급받은 점은 문제로 지적된다. 한국관광공사 측은 “혼자 투숙하는 것보다 가족을 동행하는 것이 평가위원의 신분 위장에 도움이 된다”며 “평가비용도 위원들로부터 e메일로 영수증을 받아 세부 명세를 확인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막상 의원실이 영수증 제출을 요구하자 공사는 “e메일 저장 기간이 만료됐다”고 밝혔다. 호텔 평가를 통해 국제적인 신뢰성을 높이고 관광객들의 만족도를 높이겠다는 당초의 취지를 달성하려면 평가 가이드라인을 명확하게 재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의원은 “한국관광공사의 묵인 아래 고급 호텔 평가의 객관성이 저하되고 있다”며 “등급평가가 1인당 수십만 원의 예산을 지원받는 공무인 만큼 평가비용의 세부 명세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손님들이 김영란법 때문에 밥상 앞에서 고민하지 않게 할 수 있는 서비스가 나왔는데, 어떠세요?”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 시행을 하루 앞둔 27일 저녁.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의 한 삼계탕 집에 30대 남성 2명이 나타나 애플리케이션(앱) 제휴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들이 꺼내 든 ‘이구구(299)’라는 이름의 앱은 1인당 3만 원(직무수행 등 목적으로 음식물에 쓸 수 있는 상한액) 이하로 식사할 수 있는 쿠폰을 발행해주는 서비스였다. 이들은 제휴를 맺으면 ‘김영란법 맞춤 식사 티켓’을 대신 팔아주겠다고 제안했다. 고민하던 식당 사장은 결국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김영란법 때문에 벌어질 번거로운 일도 적어지고 홍보 수단도 하나 더 생기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김영란법이 28일 시행되면서 공직자와 식당 관계자 등 법 영향권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위법을 피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안하고 나섰다. 부지불식간에 법을 위반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앱이 등장했고, 고급 식당들은 3만 원 이하 메뉴를 부랴부랴 개발했다. 직장인 함성식 씨(29)는 지난달 말 서울대 인터넷 커뮤니티에 ‘링 마이 빌(Ring My Bill)’이라는 앱을 공개했다. 여기에는 사람 수, 총액에 맞춰 각자 계산(더치페이) 액수를 구해주는 기능이 담겨 있다. 해당 커뮤니티에는 “김영란법 덕에 대박 날 수도 있겠다” 같은 댓글이 60여 개 달렸다. 구글 안드로이드 앱 마켓에는 이 밖에도 ‘N(엔)빵 정산’ 같은 더치페이 앱도 등장했다. 부정 청탁과 금품 수수 금지 조항을 스스로 점검하고 사용 명세를 등록할 수 있는 ‘영란이’ 앱도 나왔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들도 구내식당을 이용했다. 더불어민주당 한 초선 의원은 이날 국회 의원회관 구내식당에서 기자들과 점심을 먹었다. 구내식당 메뉴는 홀에서 먹을 때는 8500원이지만, 홀 한쪽 방에서 먹을 때는 1만5000원. 이 의원은 방에서 먹은 뒤 기자들과 더치페이를 했다. 일부 의원은 부담스럽다며 약속을 취소하거나 아예 약속을 잡지 않고 ‘혼밥’을 먹었다. 강원 횡성축산산업협동조합도 28일부터 횡성과 인천지역의 한우프라자에서 2만4000원짜리 신메뉴인 ‘영란세트’를 팔기 시작했다. 광주시청 인근 식당가에도 ‘김영란법 세트 팝니다’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내걸렸다. 법 시행 전날인 27일 밤에는 마지막 회포를 푸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이날 오후 11시 15분경 서울 종로구의 한 한정식집에서는 모임을 마친 50대 남성 12명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법 시행 시간인 밤 12시가 다가오자 일제히 자리를 뜬 것이다. 이들은 약 90만 원의 식사비를 4명이 나눠서 ‘쏘기로’ 했다. 이들 중 한 남성은 “아직 자정이 안 넘었으니 편하게 계산할 수 있었다”며 웃었다. ‘김영란법 전야(前夜)’를 보내는 이들은 비싼 한정식, 쇠고기 대신 치킨과 삼겹살 등 값싼 메뉴를 택했다. 자정 직전 치킨집에서 나온 40대 남성은 “괜히 술에 취해 자정이 넘은 줄 모르고 계산을 했다가 문제가 될까 봐 일부러 싼 곳을 골랐다. 배부르게 먹었는데 한 사람 앞에 2만 원도 나오질 않았으니 걱정이 없다”고 말했다.권기범 kaki@donga.com·홍정수·곽도영 기자}
경북 경주시 동천동에 사는 이주은 씨(46·여)는 21일 규모 3.5의 여진이 발생하자 깜짝 놀라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 씨는 “또 언제 큰 지진이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숨쉬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경주시 내남면 덕천리 신진국 씨(72)도 “혼자 사는 노인들은 밤이면 무서워 잠도 못 잔다”며 “우째야 하노…”라고 탄식했다. 잇단 지진으로 심리적 불안함을 호소하는 경주 시민들이 늘고 있다.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만 들려도 움찔한다”거나 “약 없이는 잠자리에 들지 못할 정도로 불안하다”는 것이다. 경주시보건소에 따르면 12일 리히터 규모 5.8의 강진이 일어난 후 23일까지 7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지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며 방문 상담을 받았다. 전화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상담하는 사례도 많다. 이처럼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상담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시 건강증진센터, 도 건강증진센터, 보건복지부 지원 의료기관 등 3곳에서 현장을 찾아 환자를 보살피고 있는데 전체 인원은 10여 명에 불과하다. 마땅한 치료 매뉴얼도 없다. 심리치료를 원하는 주민들에게 몇 마디 물어보고 혈압과 당뇨를 체크해 돌려보내는 식이다. 경주시보건소를 찾은 한 시민은 “도움이 될 줄 알고 찾았는데 시간만 낭비한 것 같다”며 돌아섰다. 전문가들은 지진 심리치료는 다른 트라우마 치료와는 접근법이 달라야 한다고 조언한다. 크고 작은 여진이 계속될 가능성이 큰 만큼 치료센터를 상시적으로 운영해야 하고, 초등학생부터 노인층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는 치료를 해야 하며, 단순 심리치료뿐 아니라 지진 대피 매뉴얼 등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교육도 함께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노인이나 어린이 등 트라우마 취약계층에 특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며 “심각한 불면증이나 불안감을 방치하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발전할 수 있으니 조기 진료가 중요하다”고 말했다.정지영 jjy2011@donga.com·홍정수 기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부검을 마친 시신 2구를 유족들에게 뒤바꿔 돌려준 것으로 드러났다. 22일 국과수 서울과학수사연구소 등에 따르면 서울 구로경찰서와 경기 광명경찰서가 각각 국과수에 부검을 의뢰한 하모 씨(62)와 홍모 씨(48)의 시신이 부검 후 뒤바뀐 채 유가족들에게 전달됐다. 이는 22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장례식장에서 이뤄진 홍 씨의 발인 과정에 확인됐다. 앞서 홍 씨는 19일 경기 광명시의 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다가 숨졌다. 국과수는 광명경찰서 의뢰로 21일 오전 10시 30분경 홍 씨의 시신을 부검한 뒤 유가족에게 시신을 인계했다. 유가족이 이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하기 위해 염을 하던 중 시신을 살펴보니 홍 씨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신이었다. 국과수에서 같은 날 비슷한 시각에 부검이 진행된 하 씨의 시신이었다. 유가족은 항의하며 국과수에 시신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홍 씨의 시신을 받은 하 씨의 유가족들은 이미 시신을 화장한 뒤였다. 하 씨의 유가족은 원래 시신을 돌려받았지만 홍 씨의 유가족은 화장된 유골만 받았다. 국과수는 시신을 차량에 옮기는 과정에서 용역업체 직원이 시신의 표식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일어난 실수였다고 해명했다. 최영식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은 뒤늦게 유가족들을 찾아 사과하고 장례 절차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씨름의 성지, 장충의 모래판이 5년 만에 열렸다. 1983년 첫 천하장사씨름대회를 통해 한국 민속씨름의 전성기를 열었던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2016년 추석장사씨름대회가 열렸다. 장충체육관에서 장사씨름대회가 열린 건 2011년 설 이후 처음이다. 13일 예선을 시작으로 14일 개회식과 태백장사에 이어 18일 여자부까지 부문별 장사 결정전이 추석 연휴에 차례로 펼쳐지고 있다. 모처럼 장충에서 열리는 대회이다 보니 열기는 뜨겁다. 화려한 조명과 선수 소개는 마치 이종격투기 대회를 방불케 했다. 건장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효와 관중의 함성은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식었던 모래판을 다시 달궜다. 민속씨름은 1980년대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신드롬으로 불릴 정도였다. 씨름 중계방송의 시청률이 워낙 높아 방송사의 9시 메인뉴스가 미뤄질 정도였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후 프로씨름단이 차례로 무너졌고 국민 관심도 빠르게 식어갔다. 하늘 아래 무서울 것이 없어 보였던 씨름장사들 역시 제각기 생업의 길을 찾아 나섰다. 씨름협회는 이런 상황에서도 밥그릇 싸움만 벌이다 올해 초 대한체육회로부터 관리단체로 지정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조금씩 씨름 중흥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다. 올해 3월 말 씨름계와 정부의 노력에 힘입어 한국 씨름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신청이 이뤄졌다. 대한씨름협회는 국민생활체육전국씨름연합회와 합친 ‘통합씨름협회’로 새롭게 출발한 뒤 조직 재구성과 함께 추석장사씨름대회의 성공적 개최에 전념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으로 민속씨름을 다룬 영화도 제작된다. 물론 이 정도 노력으로 씨름이 과거의 전성기를 되찾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보기 드물게 여러 호재가 겹친 지금이 씨름 재도약의 적기라고 입을 모으는 사람이 많다. 힘든 생활에 지친 서민들에게 ‘통쾌한 뒤집기’ 한판을 선사했던 민속씨름이 다시 도약을 꿈꿀 수 있을까.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씨름이 확 바뀝니다.’ 통합씨름협회가 이번 추석장사씨름대회에 내건 슬로건이다. 협회는 이번 대회의 홍보에만 예년의 10배 이상인 3억 원가량을 쏟아부었다. 장사 결정전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사진과 주특기, 승률 등 다양한 정보가 진행 무대 뒤 대형 화면에 나왔다. 선수들은 화면이 가운데로 갈라지면서 모래판으로 향했다. 마치 대형 콘서트장을 연상케 하는 무대 연출이었다. 관객의 흥미를 끌기 위한 다양한 시도도 이뤄졌다. 보통 국악인이나 트로트 가수가 축하무대에 섰지만 이번 대회에는 걸그룹 스텔라와 멜로디데이, 공연예술가 팝핀현준과 국악인 박애리 부부 등이 공연을 펼쳤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한 사진 콘테스트 등 다양한 사전 이벤트도 열렸다. 이렇게 17일까지 나흘간 열린 체급별 남자 대회에서는 다양한 기록이 만들어졌다. 백두장사 꽃가마에는 ‘만년 2위’ 손명호(의성군청)가 올랐다. 2008년 실업팀에 입단한 뒤 여섯 번의 결승전 진출 만에 처음이다. 그는 장사에 오른 후 2009년 돌아가신 아버지를 언급하며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 앞서 16일에는 이주용(수원시청)이 생애 여덟 번째 한라장사에 등극했다. 그는 금강장사 8회, 통합장사 1회를 포함해 통산 17차례 장사에 오르며 현역 선수 최다 우승 기록을 세웠다. 15일에는 이승호(수원시청)가 김기선(영월군청)을 3-0으로 꺾고 통산 다섯 번째 금강장사에 올랐다. 태백장사 타이틀은 ‘새신랑’ 문준석(수원시청)이 차지했다. 18일에는 매화, 국화, 무궁화장사 등 3체급으로 구성된 여자 대회가 이어진다. 이번 대회에서 다양한 변화를 보였지만 아직 과거의 ‘재미있는 씨름’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기술 씨름의 달인으로 불렸던 이승삼 심판부장은 “국민들은 작은 선수가 큰 선수를 이기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며 “체급 상한선을 조정해 힘이 아닌 기술로 하는 씨름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씨름은 전 국민을 TV 앞으로 불러 모았다. 경제 한파(寒波)가 불어닥친 1990년대 후반부터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씨름은 아직도 명절마다 중계방송 시청률 5% 안팎을 유지하며 ‘국민 스포츠’로서의 명맥을 잇고 있다. 화려했던 영광을 기억하는 장사들은 “씨름은 그 자체로 민족의 혼을 담고 있는 역사”라며 씨름의 부활을 염원했다.○ 잇단 선수 이탈과 경제위기로 ‘흔들’ 우리 씨름의 역사는 고구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5세기경 만들어진 고구려 고분 각저총의 벽화에는 고구려인과 매부리코의 외국인이 씨름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왕이 용사를 거느리고 씨름 놀이를 구경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 말살 정책도 이겨내고 명맥을 유지했다. 광복 후에는 고우주, 김성률 등 민속씨름의 원조 격인 장사들이 전국을 휩쓸었다. 현대와 같은 형태의 민속씨름이 본격적인 인기를 끈 것은 1980년대부터다. 전두환 정권은 1982년 프로야구에 이어 이듬해 프로축구와 프로씨름을 출범시켰다. 마침 컬러 TV가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를 두고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정권의 우민화(愚民化) 정책이라는 비판이 일었지만 국민들은 씨름장과 TV 앞으로 몰려들었다. 초창기 프로씨름 중계방송은 평균 시청률이 30%를 넘나들었다. 특히 1988년 이만기와 이준희가 맞붙은 제6회 천하장사대회 결승전은 68%라는 기록적인 시청률을 올렸다. 저녁 경기가 길어질 때마다 아나운서는 “9시 뉴스는 중계방송이 끝난 다음에 보내 드리겠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을 하곤 했다. 기업들도 앞다퉈 씨름팀을 창설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프로팀이 줄줄이 해체되면서 씨름은 위기를 맞았다. 강한 개성과 화려한 기술을 가진 선수들이 밀려나거나 다른 종목으로 옮기면서 별 재미 없는 체급별 경기로 전락했다. 결정타는 2004년 말 간신히 유지되던 프로씨름팀 3개 중 LG투자증권씨름단이 해체를 선언한 것이었다. 간판 선수였던 최홍만은 해체 발표 직후 이종격투기 진출을 선언하며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프로씨름이 고사 위기에 처하자 김영현 등 선수 25명은 이듬해 장충체육관 앞에서 상복을 입고 “한국씨름연맹 집행부 퇴진”을 외치며 ‘씨름 장례식’ 퍼포먼스까지 벌였다. 하지만 신창건설마저 무너지면서 프로씨름 대회를 주관해온 한국씨름연맹은 사실상 해체됐다. 대한씨름협회 역시 밥그릇 싸움에 바빠 종목 진흥을 등한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유일한 프로팀인 현대코끼리씨름단마저 해체를 눈앞에 두고 있다. 조선 산업의 위기 속에 팀을 운영하던 현대삼호중공업은 결국 올해 말 기존 팀을 해단하고 새로 창단될 전남 영암군청에 선수들을 전원 인계하기로 결정했다.○ 화려한 모래판 뒤로하고 과거 모래판을 주름잡던 장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씨름이 쇠락한 뒤에도 씨름판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다. 36세 최고령 천하장사 기록을 가진 ‘모래판의 귀공자’ 황규연은 친정인 현대코끼리씨름단의 감독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후배들을 양성해 왔다. ‘슈퍼두꺼비’로 불렸던 김정필은 지난해까지 대구씨름협회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은퇴했다.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삶이나 ‘인생 2막’을 여는 데 성공한 일부를 빼면 대부분 생업을 고민하며 ‘투잡’을 뛰어야 한다. 특히 슈퍼스타급 인기를 끌었던 ‘3이(李)’인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의 은퇴 후 모습은 제각각이다. 천하장사 10차례라는 전무후무한 타이틀을 갖고 있는 이만기는 인제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대 국회의원 총선에도 출마하는 등 정계 진출을 여러 번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작은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과 탁월한 기술, 수려한 외모로 씨름판의 관객들을 열광시켰던 그는 강단에 서는 것 외에 TV 예능 프로그램 단골 섭외 대상이기도 하다. ‘인간 기중기’로 이름을 떨친 이봉걸은 부상으로 은퇴한 뒤 치킨점, 의류판매업 등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번번이 실패해 다단계 판매업까지 했다. 2009년엔 에너라이프 씨름단 감독으로 복귀했지만 9개월 만에 팀이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현재는 대전씨름협회장을 맡고 있다. 이준희는 ‘모래판의 신사’로 불렸지만 2012년 노인들을 상대로 한 건강식품 사기범죄에 연루돼 그를 잊지 못하는 팬들에게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그는 현재 염화칼슘 납품 사업을 하며 통합씨름협회 경기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3李 트로이카’는 14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추석장사씨름대회 개막식에 앞서 팬 사인회를 열며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엇갈린 ‘외도’의 결말 씨름 쇠퇴와 함께 아예 다른 길을 선택한 선수도 많다. ‘원조 골리앗’ 김영현은 2007년 종합격투기의 일종인 K1으로 전향했으나 네 차례 경기에서 2승 2패의 평범한 성적을 남기고 은퇴한 뒤 씨름이나 격투기계와 연락을 끊고 있다. 엔터테이너 기질이 강했던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은 24일 종합격투기 경기에 출전하며 8년 만에 국내 격투기 무대에 복귀할 예정이다. 역대 최다승, 총상금 1위 등 화려한 기록을 보유한 ‘모래판의 황태자’ 이태현 용인대 교수 역시 2006년 종합격투기에 진출했다. 그는 “씨름판에서 더 이상 느낄 수 없던 함성과 화려한 조명이 너무나 그리웠다”고 말했지만 정작 성적은 좋지 않았다. 결국 2년 만에 씨름으로 복귀했다. 선수 시절에도 틈틈이 공부하며 석·박사 학위를 딴 그는 2011년 공식 은퇴 후 꾸준히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완전히 전직한 장사들도 있다. ‘씨름판의 악동’ 강호동이 대표적이지만 그 외에 성공적인 사례는 많지 않다. 17세에 최연소 천하장사에 오른 ‘소년장사’ 백승일은 은퇴 후 K1 등 각종 스포츠계의 선수 제의를 뿌리치고 2006년 데뷔한 10년 차 트로트 가수이지만 아직 무명에 가깝다. 벌이가 시원치 않아 경기 고양시에서 음식점 ‘천하장사 백승일 돈카츠’도 운영하고 있다. 올해 4월 새 앨범 ‘전통시장’을 발표한 그는 “전국 순회 홍보 때문에 바쁘다”면서도 “기회가 된다면 씨름 후배들을 양성하고 싶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람바다’ 박광덕은 강호동의 뒤를 이어 개그맨으로 데뷔했지만 얼마 버티지 못했다. 식당, 라이브카페 등을 전전하던 그는 현재 인천 부평구, 서울 강서구 등 전국에 ‘박광덕의 천하장사 족발’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다. 학구적인 길을 걷는 이들도 있다. 연간 3차례 열리던 천하장사대회가 한 차례로 줄어든 직후인 1995, 96년 연속 우승한 ‘들소’ 김경수는 은퇴 후 공부를 시작해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대학교수로 재직했다. 이후엔 마케팅 등 기업체에 몸담았고 2012년에는 대학원에서 3년간 철학을 공부했다. “회사를 다녀 보니 드라마 ‘미생’에 그렇게 공감이 갈 수가 없었다”던 그는 하고 싶은 것이 많다며 올해 하반기에는 공공분야의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털보장사’로 사랑받은 이승삼은 2008년 씨름선수의 부상과 회복에 관한 논문으로 모교인 경남대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현역 시절 끝내 천하장사에 오르지 못한 이승삼은 경남대, 마산씨름단, 창원시청 감독으로 후배들을 키우다 2014년 정경진(창원시청)을 결국 천하장사로 만들고 감독직에서 은퇴했다.홍정수 hong@donga.com·차길호 기자}
일본의 스모는 우리나라 씨름과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현재의 인기는 격세지감이다. 일본에서 스모는 프로야구와 비슷한 인기를 누린다. 우리나라에서는 스모를 단순히 거대하게 살을 찌운 선수들이 몸을 밀치며 힘자랑을 하는 스포츠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국기(國技)이자 민족의 정신이 담긴 문화로 높이 평가받는다. 스모의 인기가 퇴조하기 시작하자 일본에서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대사관에 따르면 스모에 몽골과 중국, 아르헨티나 등 외국인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영입된 것은 1960년대 이후부터다. 1990년대에는 이들이 랭킹에서 상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2003년 이후로는 63연승 기록을 세운 몽골 출신 하쿠호 등 외국인 선수들이 요코즈나(橫綱·스모 천하장사)를 독식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이다. 스모는 2011년 도박과 승부 조작 논란 등의 추문에 휘말리며 위기를 겪었지만 크게 흔들리지는 않는 모습이다. 스모 입장권 가격은 대체로 1만 엔(약 11만 원) 내외로 낮지 않다. 하지만 도쿄의 국기원은 1만 석 규모의 관중석이 매진될 때도 많다. 관중은 티켓 종류에 따라 스모 선수와 같이 사진을 찍을 수도 있고 경기장 안에서 음식을 주문해 먹을 수도 있다. 아사히신문은 최근 스모 경기장에 기모노를 차려입은 젊은 여성 팬들이 몰리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화려한 기술로만 비교하면 스모는 씨름을 이기기 어렵다. 하지만 일본스모협회는 무거운 이미지를 친근하게 개선하기 위해 어린이와 프로 선수가 대결하는 ‘스모 도전 이벤트’ 등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하며 관중을 사로잡고 있다. 일본 고유의 제사의식에 기반을 둔 스포츠인 만큼 경기 면면에서 전통색이 듬뿍 묻어나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다. 국내에서는 침체기를 극복한 스모에서 배울 점은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허건식 2016청주세계무예마스터십조직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은 “일본은 프로 스모의 경우 많은 후원을 통해 선수들의 사기를 높였고 아마추어 스모는 100여 개국에 협회를 두고 세계화를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이태현 용인대 교수는 “결국은 마케팅의 문제”라며 “기술력에만 연연하지 말고 경기 자체를 포장하는 노력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영화 제작자인 이앤엠필름 김동현 대표는 요즘 새 영화 ‘한라장사―요요’의 제작 준비에 한창이다. 2006년 개봉한 ‘천하장사 마돈나’ 이후 씨름을 소재로 한 두 번째 상업영화다. 하지만 천하장사 마돈나가 씨름을 통해 성소수자의 고민을 다뤘기 때문에 민속씨름을 전면에 내세운 건 한라장사―요요가 처음인 셈이다.○ 씨름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 김 대표가 한라장사―요요의 시나리오를 처음 구상한 건 2006년 경남 마산시(현 창원시)의 한 장례식장에 차려진 지인의 빈소에서다. 김 대표의 지인은 한때 명문 팀이었던 대구 청구씨름단 소속 선수였지만 자금난으로 팀이 해체된 뒤 경제난에 시달리다가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선수를 그만둔 사람들이 그나마 국밥집이라도 차릴 수 있으면 잘나가는 거죠. 약장수, 막노동에 연예인 매니저, 어깨(건달)까지 하고 다닙니다. 성질은 순한데 덩치는 크니까요.” 김 대표의 시나리오는 한동안 방향을 잡지 못하고 표류하다가 2012년 씨름진흥법이 제정되면서 급물살을 타고 마무리됐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올 11월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갈 예정이다. 모티프가 됐던 현실과는 달리 ‘해피 엔딩’으로 영화를 구상했다는 김 대표는 “영화가 흥행하면 중국 베이징(北京)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시사회를 열어 세계적으로 씨름을 알리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영화계뿐 아니라 문화계와 씨름계, 국회 등에서도 민속씨름을 소생시키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지정되고 택견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동안 씨름만 답보 상태에 수십 년간 머물러 있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국회와 정부는 늦게나마 법·제도 정비에 나섰다. 2012년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이 발의한 씨름진흥법이 제정돼 ‘씨름의 날’(음력 5월 5일 단오)이 만들어졌고 정부가 씨름을 지원할 근거가 마련됐다. 그 덕분에 문체부의 지원 예산은 2012년 25억 원에서 지난해 38억 원, 올해 41억 원으로 늘어났다. 씨름의 국제화를 위한 걸음도 시작됐다. 한국은 2013년부터 3년간 준비한 끝에 3월 씨름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 신청하는 데 성공했다. 2018년 예정된 심사까지는 약 2년이 남아 있다. 등재 신청 실무를 추진한 공성배 용인대 교수는 “비록 경제적인 도움은 되지 않더라도 등재에 성공하면 국제사회에 씨름을 알리기 위한 토대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구식’ 이미지 깨고 내부 혁신 필요 씨름계 안팎에서는 무엇보다 신임 회장을 갓 뽑은 통합씨름협회가 이번엔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많다. 앞서 대한씨름협회는 회장 선거를 둘러싸고 ‘분신 소동’까지 일어나는 등 각종 분쟁과 재정 악화의 여파로 올 1월 대한체육회로부터 관리단체로 지정됐다. 3월 국민생활체육전국씨름연합회와 통합하면서 관리단체 지정에서 해제되긴 했지만 협회의 내홍은 계속됐다. 2016 청주무예마스터십대회에서는 씨름 종목이 빠지는 수모까지 겪었다. 이 때문에 8월 새로 선출된 박팔용 회장 체제가 민속씨름의 재도약을 이뤄주길 바라는 씨름인들이 많다. 한때 협회 개혁을 추진했던 ‘원조 골리앗’ 이봉걸은 “박 회장은 씨름인 출신인 만큼 다른 무엇보다 씨름을 우선시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물론 씨름계의 이런 노력들이 왕년의 전성기를 다시 불러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현장에서는 씨름진흥법이 시행된 지 5년째지만 “전혀 효과를 체감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씨름에는 미래가 없다”는 인식을 깨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목소리가 크다. 외부 전문가를 적극 영입하고 자본력 확충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식’ 이미지를 탈피해야 국민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지적도 많았다. 황규연 현대코끼리씨름단 감독은 “기업들은 현대적이고 스마트한 이미지를 추구하는데 언제까지나 ‘전통’만 강조할 수는 없다”며 “실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선수들을 발굴하고 자기홍보(PR) 교육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태현 용인대 교수는 “씨름은 살을 맞대는 스포츠인 데다 상대를 가격하지 않아 신사적”이라며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아이들의 인성교육에도 효과적이다”라고 말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대체 믿을 만한 지진 국민행동요령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거지?” 12일 관측 이래 최대 강진이 한반도를 강타하는 동안 놀란 국민은 우왕좌왕하며 먹통인 스마트폰만 붙잡고 서로에게 의지해야 했다. 부산에 거주하는 직장인 김지윤 씨(34)는 “지진 발생 시 행동 요령을 읽어 본 적도, 지진 대비 훈련을 받아 본 적도 없다”며 “이렇게 ‘실전’에 갑자기 던져지니 당황스럽고 무서웠다”고 말했다. 올 들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규모 3.0 이상의 지진은 현재(13일 오후 3시 기준)까지 총 31회. 이번 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 14회에 이른다. 한반도가 더는 지진 안전지대가 아닌데도 지진 재난에 대응하는 국민의 준비는 ‘0’에 가까운 수준이다. 일반적으로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매뉴얼’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전문가들은 “매뉴얼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매뉴얼만 있고 행동이 없는 게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실제 훈련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안전처는 지진 발생 시 국민행동요령을 홈페이지()와 국민재난안전포털() 등에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국민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알더라도 평소에 자발적으로 접속해서 읽어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민안전처가 주관해 5월 16일부터 20일까지 시행한 올해 안전한국훈련에는 울산과 같은 동해안 지역을 비롯해 일부에서만 지진해일 대비 훈련을 했을 뿐 전국적인 지진 대피 훈련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나마 매뉴얼을 볼 수 있는 국민안전처 홈페이지는 12일 지진 이후 먹통이 되면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방재 전문가들은 재난이 벌어지기 전에 매뉴얼을 숙지할 수 있도록 전 국민이 참여하는 대피 훈련을 철저하게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기환 전 소방방재청장은 “손에 쥐여 주고 입에 떠먹여 줘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재난 대비 훈련”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재난 대비는 무조건 몸에 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실제 큰 지진이 발생해 경각심이 높은 지금이 골든타임”이라고 강조했다. 구식 방재 훈련에서 벗어나 국민의 참여를 늘릴 수 있도록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가상현실(VR) 체험이나 TV 공익광고, 재난을 현실적으로 다룬 영화 등 많은 사람이 흥미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참여할 만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인의 경우 어린아이들에 비해 지진 대피 교육을 받은 비율이 더 낮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4월 재직자·구직자 92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진 대처 교육을 받아 본 응답자는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는 것(46.3%)으로 나타났다. 부산대 정진환 지진방재연구센터장은 ”스마트폰 시대에 맞춰 사고가 발생할 경우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모바일 매뉴얼을 평상시에 정부 차원에서 미리 보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재는 2002년 우리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태풍 루사 당시처럼 전력이 끊어지거나 통신 중계탑이 무너지면 정부 차원의 대응 방법이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다. 한편 전문가들은 전국 통합 매뉴얼의 내용 자체는 어느 정도 필요한 구성이 갖춰져 있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다만 매뉴얼 자체가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일본을 벤치마킹했고 10여 년 전에 만들어져 최근 상황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게 문제다. 서울시립대 권기혁 교수는 “현재 지나치게 혼란스러운 매뉴얼을 직관적이고도 구체적인 문구로 다듬고, 아파트나 동 주민센터 등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자살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심리부검센터가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121명의 유가족을 상담 조사한 결과 자살자의 절반가량(59명·49%)은 그전에 자살을 시도했거나 실제 자살한 가족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동아일보가 세계 자살 예방의 날(10일)을 맞아 자살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을 취재한 결과 혈연관계는 물론이고 연인, 직장 동료와 친구, 자살을 마주하는 경찰관과 소방관까지도 자살의 직간접적인 영향권 안에 들어 있었다. 미국의 정신건강 전문가 오드라 니퍼 씨는 1999년 ‘한 사람의 자살이 최대 28명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논문을 내기도 했다. 자살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작은 것으로 치부하기 쉽지만 그 주변인에게는 무시하지 못할 증폭 효과를 낳는다. 중앙심리부검센터가 지난해 성인 1467명을 조사한 결과 296명(20%)이 가까운 지인의 자살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경험자 세 명 중 두 명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했다. 본보가 인터뷰한 자살자들의 수많은 주변인 역시 “‘나도 따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고백했다. 이렇게 자살의 영향력이 심각한데도 정부의 자살예방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대책도 막연한 예방에 집중돼 있을 뿐 자살자 주변인에 대한 관리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우리나라가 13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것은 ‘정부의 무관심’ 때문이란 지적도 나온다. 신은정 중앙자살예방센터 부센터장은 “자살은 결코 개인적, 심리적 문제가 아니다”라며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 자살 유경험자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홍정수 hong@donga.com·권기범 기자}
가까운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안 순간의 충격, 그리고 그 뒤로도 쉬이 멈추지 않는 여진(餘震)을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는 힘들다. 자살 관련 상담을 받고 싶다면 가까운 기관의 문이 언제나 열려 있다. 보건복지부는 2005년부터 전국 공통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인 1577-0199를 휴일 없이 24시간 운영한다. 중앙자살예방센터도 홈페이지()에서 전국 21곳의 자살예방센터와 15개 광역정신건강증진센터의 위치와 연락처를 안내하고 있다. 소중한 가족이 떠나간 이유를 규명하고 싶다면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심리부검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홈페이지()나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를 통해 신청하면 자택이나 지역정신건강증진센터 등에서 면담이 가능하다. 민간단체의 상담도 활발하다. 사랑의전화(1566-2525)는 자살 유가족 및 자살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24시간 무료 전화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 서울시자살예방센터가 운영하는 ‘자작나무’는 대표적인 유가족 자조모임이다. 매달 한 차례 모임이 열리고 자살자와의 가족관계별로 소모임도 진행된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다 종합병원 응급실에 이송된 사람이라면 복지부의 ‘응급실 기반 자살시도자 사후관리사업’을 통해 외래진료과와 정신건강의학과, 지역사회의 복합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정유진 서울 강동성심병원 사회복지사는 “지역사회의 정신보건센터와 병원의 지원에 동의한다면 치료비 지원뿐 아니라 퇴원 직후에도 사후 관리를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정태섭(가명·31) 씨 가족의 비극은 할아버지로부터 시작했다. 5형제 가운데 장남이던 할아버지는 갑자기 들이닥친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농약을 들이켰다. 정 씨의 아버지가 열 살 남짓일 때였다. 극단적 선택은 이후 4명의 작은할아버지들에게 번졌다. 거짓말 같은 일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자살의 ‘심리적 전염’ 비극의 유산은 대(代)를 건너뛰었다. 정 씨의 친척 동생은 중학교 1학년 나이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6년 뒤인 2005년 정 씨의 누나마저 생일을 이틀 앞두고 대학 졸업식이 열리던 어느 겨울날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뒤 마음속에 분노를 쌓아온 아버지의 영향으로 집안 분위기는 늘 답답하고 폭력적이었다. 이런 와중에 정 씨가 의지해온 연년생 누나가 대학생활에 어려움을 겪다 유서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것이다. 한 집안에 7명이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삶을 마감했다. 자살은 대물림되고 전염된다. 한 사람이 자살했을 때 영향력이 더 이상 퍼져나가지 않도록 차단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임재호 교수는 “자살을 목격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죽음을 하나의 가이드라인이나 탈출구로 받아들인다”며 “삶의 짐이나 힘든 일이 생길 때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당장은 고통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가정불화나 우울증 같은 심신의 병이 나타날 가능성도 크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형이 연쇄적으로 자살했던 한 40대 남성은 “나이를 먹었는데도 삶이 힘들 때면 두 사람 생각이 나서 괴롭다”며 상담기관에 도움을 요청했다. 중앙심리부검센터 고선규 부센터장은 “자살이 한 번 일어나면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부터 주변 동료, 나아가 제3자까지 단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며 “거꾸로 말하면 한 사람의 죽음을 막으면 그만큼 사회적 비용과 갈등을 줄일 수 있다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직격탄을 맞는 것은 대부분 유가족이다. 그렇지만 고인의 연인 등 혈연보다 더 끈끈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 역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다. “가장 가까운 나조차도 힘들 때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크기 때문이다. A 씨(34)는 4년간 사귄 여자친구의 자살을 목격한 뒤 감정적 상처를 입고 자살을 시도했다. 어머니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고 형제는 자주 A 씨를 폭행했다. 의지할 가족이 없던 그는 여자친구를 만나 비로소 안정감과 애착을 느꼈다. 하지만 여자친구마저 자신을 떠나자 A 씨는 “누구도 내곁을 지켜주지 않는데 살아서 뭐 하냐”는 절망에 빠진 끝에 결국 지난해 자살을 기도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는 여전히 가까운 사람이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A 씨는 퇴원한 뒤에도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며 상담치료를 받고 있다. B 씨(51·여)는 2014년 대학생 딸이 자살한 지 일주일 만에 뒤따라 목숨을 끊었다. B 씨는 그 직전 상담기관에 전화해 “서로 의지하며 살던 딸이 죽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울다 끊었다. 당시 전화를 받았던 사회복지사는 B 씨가 일주일 동안 연락을 하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되걸었지만 전화를 받은 건 B 씨가 아닌 경찰이었다. 이웃의 신고로 B 씨의 집에 들어왔는데 이미 자살한 뒤여서 조사 중이라는 것이었다.○ 지인, 제3자도 트라우마 겪어 친구나 직장 동료, 먼 친척 등 주변의 지인들 역시 크고 작은 충격을 받는다. 직장 내 업무 스트레스 등의 이유로 자살을 한 경우에는 동료나 선후배들도 자신이 질책하거나 핀잔을 주는 등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40대 공무원 이모 씨는 2013년 관사 바로 아래층에 살던 친한 후배가 목을 매 자살한 모습을 본 뒤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출퇴근할 때마다 후배가 살던 빈집을 지나며 불안과 두려움, 자책감에 시달렸다. 평소 사교성이 좋고 자부심이 넘쳤지만 사고 이후 급격히 말수가 줄었고 불면에 시달렸다. 전과 달리 자녀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몇 달간 상담치료를 받은 뒤에야 이 씨는 불면증과 감정 기복 등을 해소할 수 있었다. 자살 경험을 학습하려는 경향이 강한 청소년들은 더욱 위험하다. 이혼가정에서 자란 C 양(19)은 친구 D 양을 따라 자살했다. 그들은 서로의 힘든 가정사를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였다. 우울증을 앓던 D 양의 오빠는 어느 날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 투신자살했다. 스스로를 심하게 자책하던 D 양까지 그로부터 4개월 만에 투신하자 C 양은 친구의 사진을 끌어안고 울며 식사도 거의 못했다. 평소 친했던 두 명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C 양은 결국 2014년 같은 방법으로 자살했다. 경찰·소방공무원과 같은 제3자들도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음에 자주 노출된다. 사고 현장을 직접 보고,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사고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듣다보면 심리적인 불안함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백모 씨(51)는 참혹한 사고 현장을 자주 목격하는 경찰 과학수사대에서만 20여 년 일하며 가슴 통증 등 공황장애를 겪다 경찰 트라우마센터를 찾았다. 백 씨는 “예전에는 혼자 출동해 시체를 봐도 괜찮았는데 몇 년 전부터는 퇴근해 집 문을 열면 안에 목을 맨 시체가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고 호소했다. 불면증 때문에 술에 의존하던 백 씨는 석 달간 치료를 받다가 지난해 결국 휴직했다. 10년 차 경찰인 E 경위(33·여)도 올해 초 트라우마센터에 상담을 요청했다. 자살신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한 순간 손쓸 틈도 없이 눈앞에서 사람이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본 뒤 충격을 받았다. 실종사건이 결국 자살로 밝혀졌을 때에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원망할 곳 없는 유가족이 “좀 더 일찍 찾았으면 애가 살았을 수도 있지 않느냐”며 오열하는 모습을 보며 책임감과 죄책감, 안타까움이 복합적으로 몰아친 것이다. 소방관 F 씨(35)는 2014년 투신자살한 50대 남성을 구조하려다가 실패한 뒤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동료들은 “이미 현장에 도착했을 때 사망해 있었다”며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위로했다. 하지만 심폐소생술을 하는 동안 공포심 때문에 남성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F 씨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에 짓눌렸다. 자살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어도 자살 시도자나 유가족을 자주 접하는 심리상담사들 역시 간접적인 트라우마가 있다. 열차 기관사들도 운행 중 철로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고를 겪은 경우 큰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불시에 현장에 출동해야 하거나 교대근무 일정이 빠듯한 이들이 적시에 충분한 상담치료를 받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경찰청은 2014년부터 전국 네 곳에 트라우마센터를 운영하고 있지만 상담사는 센터별로 1명에 그치고 있다. 국민안전처는 ‘찾아가는 심리상담실’을 지난해 19개 소방서에서 올해 30개서로 확대 운영하고 있지만 역시 장기적인 치료를 하기엔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조직문화나 이미지도 장애물로 작용한다. 상담을 받았다는 사실만 알려져도 인사나 조직 내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경찰청 조규형 복지지원계장은 “‘경찰은 강해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자신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겨도 잘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사실상 D―6개월.’ 2018년 2월 9일 개막하는 평창 겨울올림픽은 29일 현재 1년 5개월이 조금 넘는 529일 남았다. 하지만 개막 1년여 전 열리는 테스트 이벤트(사전 점검 리허설)까지는 6개월도 남지 않았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내년 1∼3월 빙상, 스키 등 겨울올림픽 전 종목 테스트 이벤트 결과로 평창의 준비 상태를 최종 점검한다. 본보 취재팀이 평창의 준비 상황을 점검한 결과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 등 주체들의 무사안일주의와 비협조, 정부의 무관심 속에 현장은 계속 엇박자를 내고 있었다. 29일 평창조직위와 강원도 등에 따르면 개·폐회식이 열리는 ‘올림픽플라자’와 12개 경기장의 공사 진척률은 평균 61%(19일 기준)다. 기존 스키 경기장을 보완해 짓는 용평 알파인 경기장은 최근에야 첫 삽을 떴다. 10월부터 진행되는 종목별 국제경기연맹의 경기장 인증을 통과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정부와 강원도, 평창조직위는 추가 예산 등을 놓고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강원도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은 겉으로는 “다 잘되고 있다”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이들을 관리 감독하는 중앙정부 파견 공무원들과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이렇다 보니 정부와 강원도, 평창조직위 고위 간부가 참여하는 조직위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집행위원회도 파행을 면치 못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최명길 의원실에 따르면 올해 6월 열린 27차 집행위원회 회의에 직접 참석한 위원은 재적 23명 중 9명에 그쳤다. 25차(8명), 26차 회의(9명)도 마찬가지였다. 평창조직위의 한 관계자는 “대회를 잘 치르려는 의지가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서울의 한 체육대 교수는 “2014년 아시아경기대회처럼 지방자치단체가 스포츠 이벤트를 유치한 뒤 정부와 갈등을 겪으면서 잘못된 길로 가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컨트롤 타워를 세워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평창도 ‘제2의 인천’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평창=권기범 kaki@donga.com·홍정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