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다른 사람의 명의를 도용해가면서 2년 여간 수면제 1만4000여정을 불법으로 처방받은 20대 여성 두 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 노원경찰서는 2013년 7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다른 지인 24명의 인적사항을 도용해 자신이 자주 다니던 병원에서 1036회에 걸쳐 ‘할시온’ 등 불면증 치료제 1만338정을 처방받은 칵테일바 종업원 이모 씨(25·여)를 구속했다고 9일 밝혔다. 친구 전모 씨(25·여)도 11명의 인적사항을 도용해 369회 처방전을 발급받아 3649정을 처방받은 사실이 드러나 불구속 입건했다. 이들이 타인 명의로 약을 타가려는 것을 알면서도 처방전을 발급해준 의사 네 명도 함께 불구속 입건됐다. 단기 불면증 치료제로 사용되는 할시온은 항정신성의약품 성분이 포함돼있어 의사의 처방이 없으면 살 수 없다. 하루에 한 정씩 최대 2~3주 만 처방하는 것이 원칙이다. 오랜 기간 많은 양을 복용하면 의존성과 금단증상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불면증을 호소하던 이 씨와 전 씨는 “처음에는 한 알로 충분했는데 점점 많은 양이 필요했다”며 수면제를 상습투약하게 됐다. 주로 야간에 근무하는 이 씨는 수면제를 처방받기 위해 처방전을 위조했다가 처벌받은 적도 있었다. 의사인 유모 씨(60)는 이들이 자신의 병원을 33명의 명의를 도용해 찾으면서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의약품을 처방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 씨는 요양급여비를 받기 위해 이를 묵인하고 이 씨와 전 씨에게 286회에 걸쳐 수면제 2800여정을 불법으로 처방해줬다. 안모 씨(52) 등 다른 의사 세 명도 수십 회에 걸쳐 이들에게 불법처방전을 내줬다. 이 씨와 전 씨는 다른 병원의 의사들에게서도 수면제를 처방받았지만 의사 대부분은 이들이 명의를 도용했다는 사실을 몰라 입건되지 않았다. 경찰은 이 씨와 전 씨가 이렇게 처방받은 의약품을 불법판매 등 다른 용도로 사용했는지도 추가 수사 중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는 병원이 허위처방전으로 부정 수급한 요양급여비를 모두 환수하도록 조치했다고 밝혔다.홍정수기자 hong@donga.com}
인터넷 중고물품 사기로 3000만 원 가량을 가로챈 두 명의 10대 청소년들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의 전과는 합쳐서 20범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에 허위 판매글을 올린 뒤 잠적해 피해자 136명에게서 2820만 원을 가로챈 고등학생 김모 군(17)을 구속하고 공범인 김모 군(18)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8일 밝혔다. 고교 선후배 관계인 이들은 올해 3월 4일부터 지난달 19일까지 인터넷에 책이나 게임기, 태블릿PC 등을 판다는 글을 올리며 범행을 저질렀다. 구매자들이 통화를 원하거나 만나서 직접 거래를 하자고 요구하면 ‘출장 중’이라는 핑계를 대며 문자로만 대화했다. 구매자들이 돈을 입금하면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구매대금은 친구들에게서 빌린 은행계좌 6개로 나눠서 입금 받았다. 이렇게 챙긴 돈은 생활비나 유흥비, 명품신발을 사는 비용 등으로 탕진했다. 이들의 범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후배 김 군은 특수절도 5범, 선배 김 군은 사기 등으로 전과 15범의 전력이 있다. 다니던 고교에서 퇴학당한 선배 김 군은 다른 사기 범죄로 구속돼 경남 창원교도소에 이미 수감돼있다. 경찰은 후배 김 군이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는 점을 감안해 불구속 상태로 수사하려 했으나 김 군이 입건된 뒤에도 사기행각을 멈추지 않아 결국 구속했다고 밝혔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태 이후 손 소독제 등 생활화학제품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자 환경부가 다급하게 ‘살균’ ‘항균’ 성분이 포함된 모든 제품의 유해성을 확인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기업은 성분 분석 자료를 환경부에 제출할 의무가 없어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는 대책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환경부는 3일 “살균, 항균 성분이 포함된 이른바 살생물제(바이오사이드·Biocide)는 허가 가능한 물질만으로 제품을 제조해야 하는 ‘살생물제품허가제’를 도입하고 기존 살생물제에 대해선 내년까지 전수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환경부는 조만간 살생물제 허용물질 기준을 만들고 이 외 성분은 퇴출시킬 방침이다. 이는 유럽연합(EU)에서 1998년부터 시행 중인 ‘살생물제 관리 지침’과 같은 내용이다. 환경부는 현재 생활화학제품 중 위해우려제품 15종에 대해서만 유해성 검사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앞으로 살생물제로 검사 대상을 확대하겠다는 방침이지만, 문제는 살생물제 기준도 아직 명확하지 않고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규정도 없다는 점. 환경부는 현재 법령이 없고 관계 부처와 협의도 안 된 상황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기업이 자발적으로 함유 성분 서류를 제출해줄 것”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을 내놨다. 게다가 위해우려제품과 달리 살생물제는 종류가 많아 시험분석 기관 의뢰도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결국 기업 자체 조사 결과가 담긴 서류만 가지고 위해성을 평가해야 하는 만큼 실효성 논란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또 환경부는 손 소독제 등을 관리 대상에 포함시키겠다고 밝혔지만 해당 제품은 화장품법에 따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관리한다. 주무부처에서 허가 기준을 통과한 제품에 대해 환경부가 어디까지 규제할 수 있느냐도 논란거리다. 또 제품 포장지에 적힌 ‘살균’ ‘항균’ 표기만 보고 점검대상 목록을 만들겠다는 방침도 문제로 지적된다. 환경부는 실제 공산품과 생활화학제품에 어떤 화학물질이 쓰이는지 알 수 없어 포장과 광고 표기를 통해 목록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한편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가피모)과 환경보건시민센터는 5일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레킷벤키저(옥시레킷벤키저 본사)의 연례 주주총회에 항의단을 파견한다고 3일 밝혔다. 항의단은 8일에는 덴마크를 방문해 가습기 살균제의 원료를 공급한 케톡스(현재 폐업)에 대한 책임 문제도 제기한다. 가피모와 환경보건시민센터는 3일 옥시레킷벤키저 의뢰로 살균제 흡입독성 동물실험을 한 서울대, 호서대 연구팀을 각 대학 연구윤리위원회에 제소하고 연구 교수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임현석 기자 lhs@donga.com·홍정수 기자}
‘가정의 달’인 5월의 첫날, 서울 성북구 ‘자오나학교’의 바자회에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모여들었다. 판매대에는 색색의 천연비누와 수세미, 수제 초콜릿이 진열돼 있었고, 뒷마당에선 봄날에 어울리는 다홍색 눈화장을 한 여학생이 어린이들에게 페이스페인팅을 해주고 있었다. 식당 앞에서는 볼이 발그레한 소녀가 “김밥 몇 줄 사세요?”라며 소리 높여 주문을 받고 있었다. 이 소녀들은 하나같이 밝은 표정이었지만 사실 마음 깊은 곳에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청소년 미혼모, 부모님이 돌아가신 소녀가장,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 등 학교를 다니기 어려운 형편인 청소녀(靑少女)들을 위한 자오나학교의 학생들이다. 천주교 ‘원죄없으신 마리아교육선교수녀회’가 2014년 만든 자오나학교에는 현재 16∼20세 여학생 7명과 미혼모 학생들의 아기 두 명이 머물고 있다. 또래 친구들과는 조금은 다른 환경에서 자라는 여학생들에게, 자오나학교는 ‘진짜 가족’이 되어주는 특별한 곳이다. 학교 밖 청소년들은 길어봤자 몇 개월밖에 머물 수 없는 쉼터를 옮겨 다니며 공부할 시기를 놓치기 일쑤다. 자오나학교는 이들이 돈과 숙식 걱정 없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중등·고등교육 과정을 각각 2년씩 무료로 제공한다. 규모가 작은 미등록 대안학교인 탓에 비용은 후원자 1600여 명의 도움으로 충당하고 있다. 학생들이 학교를 그만둔 시기가 제각각인 만큼 교직원들이 아이들에게 ‘일대일 맞춤교육’을 해주고 있다. 점차 안정감을 찾은 학생들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중학교 때 가출해 쉼터를 전전하고, 아이도 낳았던 김진아(가명·20·여) 씨는 처음 학교에 왔을 때만 해도 “여기도 몇 달 있다 나가라고 할 것 아니냐”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 양육법까지 세세하게 알려주는 사회복지사, 엄마 못지않게 아이를 잘 돌봐주는 ‘이모’(다른 학생)들, 학교의 전폭적인 지지에 점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지금은 자오나학교의 ‘큰언니’가 된 김 씨는 전산회계 자격증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뒤 자오나학교에 들어온 이비아 양(18·여·세례명)은 “혼자 살 때는 월세 내는 날, 공과금 내는 날이 너무 무서웠다”며 “지금은 월세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활짝 웃었다. 이 양은 경찰이 되고 싶다는 꿈을 당차게 밝히며 바자회에서 음식을 파는 틈틈이 두꺼운 한국사 책을 들여다봤다. 다른 학생들도 공부와 직업교육, 육아를 병행하며 각자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이날 바자회에서 ‘완판(판매완료·매진)’된 초콜릿은 얼마 전 쇼콜라티에 자격증을 딴 학생이 솜씨를 발휘해 만든 제품이다. 페이스페인팅을 선보인 미혼모 학생은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꿈꾸고 있다. 곧 있으면 어린 딸이 있는 미혼모 학생이 한 명 더 들어온다는 소식에 학생들은 “남자 아기밖에 없었는데 잘됐다”며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학생들의 다음 목표는 자신들의 재능을 활용한 온·오프라인 매장을 여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학교에 머물 순 없는 만큼, 졸업생들이 사회로 나아갈 디딤돌로 삼을 수 있도록 학교 주변에 공동주택을 마련하려는 계획도 세워놓았다. 교장 강안나 수녀는 “의지할 가족이 없는 여학생들이 이곳을 편안한 ‘친정’처럼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안녕, 경연!” “스텔라, 봉주르(Bonjour)! 꺅!” 2일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덕성여중. 머리색과 피부색이 다른 중학교 3학년생 29명이 기쁨에 겨워 포옹하며 ‘상봉’하느라 왁자지껄했다. 3학년 교실 복도에는 비명과 함께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가 마구 섞여 울려 퍼졌다. 처음 만나는 것인데도 학생들은 손가락으로 ‘브이(V)’를 그리고 함께 사진을 찍으며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과 프랑스의 수교 130주년을 맞아 지난해 4월 덕성여중과 자매결연한 프랑스 귀스타브 플로베르 중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이날 결연 1년여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중학교는 지난해부터 서울시교육청과 파리시교육청이 국제 자매결연한 6개 학교 가운데 유일한 중학교 결연학교다. 지구 반대편 친구들과의 만남을 위해 두 학교는 1년 전부터 꼼꼼하게 준비해왔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중학교는 유럽에서 최초로 한국어교실을 개설했다. 이날 방문한 학생 14명 모두 한국어교실 학생들이다. 교내에 ‘서예 아틀리에(문화예술공간)’를 만들 정도로 한국 전통 예술 수업도 다양하게 열고 있다. 덕성여중 학생들도 방과후학교에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를 공부해왔다. 지난해 11월 파리 테러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프랑스어로 애도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지난달부터는 양국의 학생들이 일대일로 짝을 지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수다를 떨며 친분을 나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학생들은 학교 수업을 참관하고 덕성여중 학생들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는 등 다양한 한국 체험활동을 한 뒤 9일 프랑스로 돌아간다. 덕성여중은 10월에 프랑스를 방문해 교류를 이어갈 예정이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정부에서 받은 연구지원금을 허위 세금계산서를 이용해 2억여 원을 빼돌린 전직 유명 사립대학교 부설 연구원장이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 중랑경찰서는 2007년부터 10년간 150억 원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HK(인문한국)지원사업을 수주해 매년 15억 원씩 집행하는 과정에서 2억1300만 원을 가로챈 혐의(사기 등)로 김모 전 연구원장(69) 등 7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2일 밝혔다. HK지원사업은 교육부 산하 한국연구재단이 대학 부설 연구소에 정부출연금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지원금은 연구목적 외에는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연구비 집행내역에 대한 감사체계가 허술한 점을 악용했다. 먼저 네 곳의 거래업체에서 납품받지 않을 물건을 구입한 것처럼 허위로 전자세금계산서를 발급받은 뒤 교내 산학협력단에 지급요청을 했다. 산학협력단이 업체에 물품대금을 입금하면 연구원은 거래업체들로부터 부가가치세 등 세금과 수수료를 공제한 금액을 현금으로 돌려받았다. 이런 방식으로 김 전 원장 등이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현금화한 금액은 2억1300만 원에 이른다. 김 전 원장은 이 돈을 직접 관리하며 일부 직원들에게 연말 격려금으로 한 사람당 50만~200만 원씩 주고 제자 2명에게는 어학연수비·항공료 등으로 6000만 원 상당을 지원했다. 김 전 원장이 퇴직한 뒤에는 회계 실무자였던 전 총무부장 최모 씨(59)와 총무과장 오모 씨(40)가 사기행각을 ‘대대로’ 물려받았다. 이들은 사적인 용도로도 수천만 원을 사용했다. 최 씨는 승용차 구입비로 1500만 원을 썼고 총무과장도 1100만 원을 자신의 개인계좌로 이체했다. 경찰이 압수해 공개한 회계장부에는 100만 원 상당의 김치냉장고와 전기매트 구입비 등도 포함돼 있었다. 경찰은 “연구기관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해 국민의 혈세로 조성된 거액의 정부출연금을 ‘눈먼 돈’으로 인식하고 있다”며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이 더욱 체계적인 정밀감사를 통해 경각심을 고취시킬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홍정수기자 hong@donga.com}
외국 기업들이 허술한 소비자 피해 구제 제도를 악용해 국내 소비자들을 ‘호갱’(호구 고객이라는 뜻의 은어)으로 취급한다는 비난이 커지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 발생 5년여 동안 책임을 회피하던 옥시레킷벤키저는 뒤늦게 대국민 사과에 나설 예정이지만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어쩔 수 없이 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경유차 배출가스 저감장치 조작 사건을 일으킨 독일 폴크스바겐은 최근 미국에서 현금 보상 계획을 내놓았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시정조치(리콜) 계획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개인정보 2400만여 건을 보험사에 팔아 수백억 원의 이득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는 영국 홈플러스(지난해 국내 사모펀드가 인수) 역시 소비자 배상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기업들이 소비자 피해에 ‘안하무인’으로 대응하는 것은 국내 소비자 구제 제도가 선진국에 비해 매우 허술하기 때문이다. 특히 외국 기업들은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데다 국내 기업과 달리 정부의 입김이나 여론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소비자 피해 관련 분쟁이 벌어지면 대형 법무법인을 앞세워 “법대로 하자”며 소송에 나서고 있다.○ 증권 피해에서만 인정한 소비자 집단소송제 전문가들은 제한적인 소비자 집단소송제를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는다. 소비자 집단소송제는 다수의 소비자가 동일한 피해를 당한 경우 일부가 제기한 소송의 효력을 소송에 참가하지 않은 다른 피해자들도 누릴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미국은 1966년 소비자가 개별적으로 소송을 진행해야 하는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취지로 이 제도를 도입했다. 일본, 프랑스도 최근 유사한 제도를 도입해 운영 중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에서만 소비자 집단소송을 인정하고 있다. 다른 피해를 겪은 소비자는 반드시 소송에 원고로 참여해야만 배상을 받을 수 있다. 이렇다 보니 피해를 입고도 소송을 포기하는 피해자가 대부분이다. 소송에 가도 피해 입증이 쉽지 않아 기업을 상대로 개인이 승소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민사 소송에서는 피해자가 자신이 입은 피해를 입증해야 한다. 전문지식이 없는 소비자가 자신의 피해와 기업의 잘못을 입증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기업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손해배상을 하도록 규정한 제조물 책임법이 있지만 그 적용 대상이 제조물 결함에만 한정돼 있어 실효성이 낮다는 지적이 많다. 선진국에서는 소비자의 피해 입증을 지원하는 제도적 장치가 잘 마련돼 있다. 피해자가 요구하면 기업은 원칙적으로 관련 문서를 모두 제출하도록 하는 미국의 ‘문서제출명령제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원칙적으로 기업이 문서를 제출하지 않는다. 그 대신 피해자의 요청을 법원이 인정한 경우에만 기업으로부터 피해 입증에 필요한 문서를 받을 수 있다. 홈플러스 개인정보 매매 사건 피해자의 손해배상 소송을 대리하는 좌혜선 변호사(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사무국장)는 “여러 차례 요청에도 불구하고 회사 측이 ‘자료가 폐기됐다’고 버텨 증거 확보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적은 배상액에 ‘이겨도 손해’ 피해 배상액이 지나치게 적은 것도 소비자 피해 구제의 걸림돌이다.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기업의 행위가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인 경우 실제 손해액의 몇 배에 달하는 배상을 하도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기업의 갑질과 관련된 하도급 거래와 기간제 근로자 파견, 그리고 금융기관 대량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후 신용 및 개인정보 이용 등 관련 피해에 한해 제한적으로 도입된 상태다. 국내 법원이 정신적 피해와 같은 무형의 피해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 보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겨도 손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폴크스바겐 사건의 손해배상 소송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바른’의 하종선 변호사는 “배상액이 적다 보니 ‘지더라도 일단 재판을 해 보자’는 게 외국 기업들의 속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소비자 집단소송제를 도입하자는 논의는 1993년 시작됐다. 하지만 2004년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이 제정됐을 뿐 일반적인 소비자 피해에 대해 이 제도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기업을 옥죄는 법안이라는 반발에 부딪혀 번번이 무산됐다. 전문가들은 “법이 안 바뀌면 기업들은 소비자를 계속 무시할 것”이라고 법 개정의 필요성을 지적한다. 서희석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한국소비자법학회장)는 “소비자의 생명, 신체와 관련된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소비자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인정해야 한다”며 “기업들에 ‘잘못을 저지르면 큰일 난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과 같은 부도덕한 행위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김호경 기자 whalefisher@donga.com·홍정수 기자·김지환 채널A 기자}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던 4월의 마지막 날인 지난달 30일 인천의 바닷가는 푸른빛 도화지와 형형색색의 텐트로 넘실댔다. 제2회 생명의 바다 그림대회의 수도권 대회장인 인천 중구 월미도 문화의 거리와 동구 만석부두 공영주차장, 서구 정서진 아라뱃길 여객터미널,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등에는 1만여 명의 참가자와 학부모, 교사들이 찾았다. 올해 처음 대회가 열린 송도 솔찬공원은 1m 높이의 펜스를 따라 드넓은 바다가 1.5km가량 펼쳐져 최상의 조건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부모들은 펜스를 따라 설치된 나무 덱 위에 텐트를 치거나 돗자리를 깔고 자녀들을 격려했다. 이날 경기 시흥시 경기자동차과학고 학생들은 단체로 솔찬공원을 찾았다. 미술교사가 꿈인 양현모 군(17·디자인과 2학년)은 눈동자에 비친 바다의 아름다운 모습을 창의적으로 그려냈다. 다문화가정 학생들도 눈길을 끌었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압두라 커들(10·초등 3학년), 압두라 흐먼(8·초등 1학년) 형제는 인천 문남초등학교(교장 박봉회)를 대표해 대회에 참가했다. 형 커들 군은 자신이 좋아하는 바다거북과 부서진 배, 상어 등 바닷속 생물을 생동감 넘치게 채색했다. 동생 흐먼 군은 깊은 바다를 헤엄치는 큰 고래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세월호 참사 1주년을 맞아 ‘안전한 바다’를 그린 작품이 많았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생명의 바다라는 주제로 건강한 해양 생태계를 표현한 그림이 눈에 띄었다. 박세진 양(11·인천 문학초5)은 “학교에서 기름 유출로 인한 바다 오염의 심각성을 배웠다”며 시민들이 기름종이로 방제작업을 하는 모습을 도화지에 채웠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참가한 학생도 많았다. 지난해 충남도지사상을 수상한 김지니아 양(12·서울 인헌초 6학년)은 “지난해 대회에서 수상한 뒤 자신감을 갖고 더 열심히 미술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김지민 양(8·인천 학산초 2학년)과 지원 군(11·인천 학산초 5학년) 남매는 지난해에 이어 나란히 출전했다. 김 양은 “지난해에는 나만 상을 탔는데 올해는 오빠도 꼭 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회장에는 학생뿐 아니라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 어린 동생 등 총출동한 가족이 많았다. 단순한 사생대회를 넘어 가족들의 봄나들이 장소로 자리매김한 모습이었다. 초중고교를 함께 다닌 죽마고우인 이정일 씨(39)와 김영삼 씨(39)는 각각 딸 이영채 양(10·인천 인주초4)과 아들 김기백 군(7·인천 인주초1)을 데리고 행사에 참석했다. 이 씨는 ”아이들도 같은 학교를 다니고 그림대회도 함께 참가하며 대를 이어 우정을 이어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이날 김홍섭 인천 중구청장과 이흥수 동구청장은 각각 월미도와 만석부두를 찾아 학생들을 격려했다. 또 응급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인하대병원 공공의료사업지원단이 현장에 나왔고 김수민 씨 등 인천대 홍보대사 10여 명이 대회 진행을 도왔다. 또 인천 동구청과 중부·서부·연수경찰서, 중부·서부·남동소방서 직원들도 안전한 대회를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차준호 기자 run-juno@donga.com·홍정수 기자·유원모 기자}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의 최대 가해 기업인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를 상대로 피해자와 소비자들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 자사 제품 탓에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는데도 진정성 있는 사과를 내놓지 않고 꼼수를 부리자 소비자들이 불매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가피모)’과 환경보건시민센터, 소비자단체협의회 등 37개 시민단체는 2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살인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들은 이번 불매운동은 현재까지 공식 집계된 사망자 146명 중 가장 많은 103명(70.5%)을 죽음에 이르게 한 옥시에 집중하기로 했다. 강찬호 가피모 대표는 “이번 소비자 불매운동은 기업을 믿었다가 가족의 소중한 목숨을 잃지 않도록 하는 소중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은경 소비자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은 “옥시는 한국에서 소비자를 ‘호갱’(호구 고객이라는 뜻의 은어)으로 생각한다”며 “기업들이 법적 사회적 책임을 다할 때까지 옥시 제품 구매를 중단하고 보유하고 있는 제품도 폐기하자”고 호소했다. 소비자들은 생활용품에 관심이 많은 주부들을 중심으로 불매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정은주 씨(57·여)는 “욕실 청소에 평생 ‘옥시크린’ 표백제를 써 왔는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옥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며 “검사 결과를 조작하고 소비자를 우롱하는 모습을 보고 불매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옥시가 만든 제품 목록과 이를 대신할 다른 회사 제품 목록이 퍼지고 있다. 옥시가 영국계 기업이라는 점도 국내 소비자들의 분노를 부추기고 있다. 한 누리꾼은 “바글바글 끓다가 금세 시들어 버리는 ‘냄비 근성’ 때문에 한국 소비자가 무시당한 것인지 화가 난다”고 말했다. 네 살배기 아들을 둔 이현경 씨(33·여)도 “엄마들 사이에서는 ‘한국이 물이냐’는 말도 나온다”며 “이런 기업을 움직이려면 소비자들이 물건을 사지 않는 방법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통업계도 소비자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에서 슈퍼를 운영하는 박모 씨(64)는 “불매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면 매상에 타격이 있을 것”이라며 “옥시 제품 수요가 줄어들면 할인 행사나 끼워 팔기로 재고를 처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부 할인 마트에서는 벌써 옥시 제품을 할인 판매하고 있다. 한편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이철희 형사2부장)은 26일 신현우 전 옥시 대표이사(68)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 조사한다. 신 전 대표는 옥시가 2001년부터 유해성 의혹이 제기된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인산염 성분이 원료가 된 문제의 ‘옥시싹싹 뉴 가습기당번’을 제조·출시할 당시 대표이사를 지냈다. 검찰은 신 전 대표를 제품 개발을 지시한 핵심 인물로 보고 제품을 만들고 판매하게 된 경위와 인체 유해성을 사전에 알았는지 등을 따져볼 예정이다. 검찰은 또 가습기 살균제 최초 개발과 제조에 관여했던 핵심 관계자인 최모 전 옥시연구소 선임연구원과 김모 전 옥시연구소장도 함께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과실 유무를 조사한다. 검찰은 혐의가 구체화되는 대로 관련자들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방안도 고려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신 전 대표 등에게 업무상 과실 치사 및 치상 혐의 적용을 심도 깊게 검토 중이다. 수사팀 관계자는 “인체에 유해함을 알고도 제품을 판매했다면 살인의 고의가 성립되는데 사람을 죽이기 위해 판매했다는 정황 등이 파악되지 않았다”며 살인죄 혐의를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수사팀은 옥시 관계자 조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롯데마트와 홈플러스 등 다른 가해 업체 조사도 차례로 진행한다.홍정수 hong@donga.com·신나리·김호경 기자}
보수성향 시민단체인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자금 지원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나 청와대 직원이 집회 개최를 지시했다는 의혹은 부인했다.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은 22일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경련이 1억2000만 원의 지원금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인정했다. 추 사무총장은 “우리는 (전경련이 지원한) 선교복지재단을 통해 돈을 받아 노인들에게 무료 급식을 하고 있다”며 “전경련은 (재단에 준) 지원금의 일부가 어버이연합 운영비로 사용된 줄 몰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추 사무총장은 청와대 정무수석실 허모 행정관이 어버이연합 측에 집회 개최를 지시했다는 의혹에 대해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지시를 받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정부 보조금을 가로챈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탈북자단체 대표 등이 개인적인 목적으로 언론에 이 같은 의혹을 제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긴 처용의 노래….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들을 숱하게 담고 있는 역사서 ‘삼국유사’의 가장 오래된 현존 판본이 1999년 도난당했다가 17년 만에 돌아왔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도난당한 ‘삼국유사 권 제2 기이편’을 15년간 몰래 숨겨온 문화재 매매업자 김모 씨(63)를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21일 밝혔다. 이 삼국유사는 대전의 한 국립대 교수가 집에 소장하고 있었지만 1999년 1월 도난당했다. 이 삼국유사는 보물로 지정된 ‘성암고서본’과 같은 목판본이지만 인쇄상태는 더 깨끗해 현존하는 판본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목판은 여러 번 찍을수록 닳기 때문에 일찍 찍은 판본이 인쇄상태가 좋다. 당시 경찰은 전국에 장물품표 1만 부를 배포하며 1년 9개월간 수사했지만 결국 행방을 찾지 못했다. 약 1년 뒤인 2000년 1월 삼국유사는 장물업자 김 씨의 손에 들어갔다. 김 씨는 표지가 없던 판본에 가짜 표지를 만들어 붙이고 과거에 소장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적은 마지막 쪽을 떼어버렸다. 김 씨는 15년 동안 네 번 이사를 다니며 삼국유사를 비롯한 고서(古書)들을 거실, 안방, 파우더룸의 천장에 만든 ‘비밀 수납공간’에 숨겨놓았다. 지난해 11월 5일 김 씨는 삼국유사 도난의 공소시효(특수강도 15년)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고미술품 경매업체에 삼국유사를 경매에 출품해 달라고 의뢰했다. 1억2000여만 원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김 씨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문화재보호법에서 은닉죄는 은닉한 순간이 아니라 은닉상태가 끝나는 순간, 즉 지난해 11월 5일부터 공소시효를 계산한다는 사실이다. 경매업체는 올해 1월 20일 삼국유사를 3억5000만 원에 경매 출품해 화제를 모았다. 원소장자인 교수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하지만 교수의 딸의 신고로 해당 경매품이 문화재청에 도난문화재로 등록됐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김 씨는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경찰 조사에서 김 씨는 처음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주장하다가 나중에는 2006년 사망한 대전의 한 골동품상에게서 다른 고서들과 함께 9800만 원을 주고 매입했다고 번복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긴 처용의 노래….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들을 숱하게 담고 있는 역사서 ‘삼국유사’의 가장 오래된 현존 판본이 1999년 도난당했다가 17년 만에 돌아왔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도난당한 ‘삼국유사 권제2 기이편’을 15년간 몰래 숨겨온 문화재 매매업자 김모 씨(63)를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21일 밝혔다. 이 삼국유사는 대전의 한 국립대 교수가 집에 소장하고 있었지만 1999년 1월 도난당했다. 이 삼국유사는 보물로 지정된 ‘성암고서본’과 같은 목판본이지만 인쇄상태는 더 깨끗해 현존하는 판본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목판은 여러 번 찍을수록 닳기 때문에 일찍 찍은 판본이 인쇄상태가 좋다. 당시 경찰은 전국에 장물품표 1만 부를 배포하며 1년 9개월간 수사했지만 결국 행방을 찾지 못했다. 약 1년 뒤인 2000년 1월 삼국유사는 장물업자 김 씨의 손에 들어갔다. 김 씨는 표지가 없던 판본에 가짜 표지를 만들어 붙이고 과거에 소장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적은 마지막 쪽을 떼어버렸다. 김 씨는 15년 동안 네 번 이사를 다니며 삼국유사를 비롯한 고서(古書)들을 거실, 안방, 파우더룸의 천장에 만든 ‘비밀 수납공간’에 숨겨놓았다. 종이와 에어캡, 오동나무 상자로 포장도 꼼꼼히 했다. 지난해 11월 5일 김 씨는 삼국유사 도난의 공소시효(특수강도 15년)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고미술품 경매업체에 삼국유사를 경매에 출품해달라고 의뢰했다. 1억2000여만 원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김 씨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문화재보호법에서 은닉죄는 은닉한 순간이 아니라 은닉상태가 끝나는 순간, 즉 지난해 11월 5일부터 공소시효를 계산한다는 사실이다. 경매업체는 올해 1월 20일 삼국유사를 3억5000만 원에 이르는 경매가에 출품해 화제를 모았다. 원소장자인 교수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하지만 교수의 딸의 신고로 해당 경매품이 문화재청에 도난문화재로 등록됐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김 씨는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경찰조사에서 김 씨는 처음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주장하다가 나중에는 2006년 사망한 대전의 한 골동품상에게서 다른 고서들과 함께 9800만 원을 주고 매입했다고 번복했다. 경찰은 “도난·도굴된 문화재는 이번처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장에서 유통되는 경우가 많다”며 문화재 절도의 공소시효를 늘리거나 폐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16일 서울 강동구 올림픽대로의 구리암사대교 진입로. 냉동탑차 운전자 윤모 씨(36)가 먼저 진입하려 하자 직진하던 흰색 외제 승용차가 속도를 높여 추월했다. 양보운전을 하지 않은 것에 화가 난 윤 씨는 항의 표시로 상향등을 네 번 켰다. 이에 격분한 외제차 운전자 한모 씨(49)가 급제동한 뒤 내려 윤 씨에게 다가가며 “내려”라고 외쳤다. 그러자 윤 씨는 “외제차를 타고 다니니 돈 많겠네”라며 “때리지도 못하면서 왜 내리라고 하냐”고 빈정댔다. 갑자기 한 씨는 자신의 차량으로 사라졌다. 다음 순간 윤 씨는 눈을 의심했다. 한 씨가 칼처럼 보이는 물건을 손에 쥐고 달려들고 있었다. 급히 차에 올라 운전석 문을 닫았지만 한 씨는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죽여버리겠다”며 협박했다. 공포를 느낀 윤 씨는 서둘러 차를 몰고 도망치며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한 씨가 들고 온 것은 나무로 만든 24cm 길이의 단검(사진)이었다. 군 복무 시절 특공무술을 배운 한 씨는 단검술을 연마하다가 특공무술도장 운영을 준비하느라 목단검을 소지하고 다녔다. 서울 노원경찰서는 한 씨를 특수협박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20일 밝혔다. 경찰은 “한 씨가 목검을 검정 테이프로 둘둘 감아서 언뜻 보면 흉기로 인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지난달 9일 오후 11시경 서울 중구 명동의 한 신발 가게에 이란인 남성 G 씨(35)가 들어왔다. 신발 깔창을 산 그는 지갑에서 1만 원짜리 지폐를 5장 꺼내 들더니 직원 최모 씨(27·여)에게 매장의 금전출납기를 가리키며 영어와 이란어를 섞어 말하기 시작했다. 일련번호 ‘KK’가 들어가는 5만 원권으로 바꿔 달라는 뜻이었다. G 씨의 손짓 발짓에 정신을 뺏긴 최 씨는 금전출납기에서 5만 원짜리 지폐 뭉치를 꺼내 들고 G 씨와 함께 ‘KK’ 지폐를 찾기 시작했다. 이윽고 돈을 바꾼 G 씨가 고맙다며 매장을 유유히 빠져나간 뒤, 최 씨는 정산을 하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50만 원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서울 동대문경찰서는 3월부터 지난달 초까지 약 한 달간 이런 방식으로 현금 1100만 원을 훔친 이란인 형제를 구속했다고 18일 밝혔다. 경찰 조사 결과 3월 초 관광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형 G 씨는 그의 동생(30), 다른 공범 C 씨와 36회에 걸쳐 전국의 편의점 등 매장에 들어가 특정 지폐를 수집하는 척하면서 직원들이 지폐를 살펴보는 동안 ‘밑장 빼기’ 수법으로 지폐 일부를 훔쳤다. 이렇게 훔친 돈을 유흥, 쇼핑, 숙식 등에 쓰던 G 씨 형제는 결국 출국 전날인 5일 오전 1시 경찰에 긴급 체포됐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2년 전 70대 할머니의 목숨을 구한 간호학과 대학생이 이번에는 출근길에 심장이 멈춘 채 쓰러진 40대 남성을 또 한번 살렸다. 삼육대 간호학과 4학년생인 홍예지 씨(23·여)는 18일 오전 6시 30분 지하철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전모 씨(49)를 응급 심폐소생술로 구했다. 전 씨는 이날 서울 도봉구 쌍문역에 접근하던 오이도행 열차 객실에서 갑자기 가슴 부분을 붙잡으며 쓰러졌다. 홍 씨는 이 상황을 보고 한 남성승객과 함께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전 씨가 입에 거품을 물었지만 홍 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공호흡까지 실시했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승객들은 대부분 우왕좌왕했고, 일부 승객들은 “복잡한 출근시간대니 일단 환자를 옮기자”고 말했다. 하지만 홍 씨는 “골든타임이라 심폐소생술을 멈추면 위험하다”며 6시 45분경 119 구급대가 도착할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지속했다. 열차가 역에 도착하자 쌍문역 직원은 자동심장충격기를 가져와 응급조치를 실시하며 홍 씨를 도왔다. 근처 병원으로 후송된 전 씨는 건강을 회복해 퇴원했다. 홍 씨는 삼육대 측에 “머리보다는 몸이 먼저 움직였다”며 “간호학도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응급처치강사 자격증을 딴 홍 씨는 대학에 재학하며 대한적십자사에서 강사로도 활동 중이다. 그는 2년 전인 2014년에도 서울 동대문구의 한 영화관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피를 흘리던 70대 할머니를 응급처치로 살린 바 있다. 서울메트로는 홍 씨와 심폐소생술을 도운 남성 승객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포상하겠다고 밝혔다.홍정수기자 hong@donga.com}
4·13총선 참패라는 성적표를 받아 든 박근혜 대통령의 처지가 2006년 지방선거 참패 직후의 노무현 전 대통령과 비슷하다는 얘기가 정치권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이 어려운 정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당시 노 전 대통령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2006년 5·31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은 전국 16개 광역자치단체 단체장 중 전북을 제외하고는 모두 졌다. 수도권에서는 기초단체 66곳을 모두 졌고 광역의원도 비례대표를 빼면 단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울산의 기초단체장도 모두 졌다. 사상 유례가 없는 여당 참패였다. 이번 총선을 2006년 지방선거와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박 대통령도 당시 못지않은 심판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열린우리당 내부에서는 “국민이 우리를 정부 여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탄핵”, “이번 패배는 대통령의 독선과 아집 때문”이라는 등 노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겸허하게 민심을 수용한다’는 말 대신 “한두 번 선거에 패배했다고 해서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한두 번 선거로 나라가 잘되고 못되는, 어느 당이 흥하고 망하는 것이 민주주의는 아니다”라는 ‘유체이탈’식 화법을 구사했다. 청와대도 “당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는데도 패했다”며 당에 책임을 돌렸다. 또, 노 전 대통령은 “(선거 참패를) 민심의 흐름으로 받아들이되 그동안의 정책은 계속한다”며 당시 지방선거 패인의 하나로 꼽힌 부동산 정책 등의 기조를 바꾸지 않았다. 여당 참패에 국정 운영 전반에 대한 민심의 ‘심판’이 반영됐다는 일반적인 평가를 거부하며 ‘마이웨이’를 고수한 것이다. 당청 관계는 극도로 악화됐고,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민심을 무시하는 독선을 드러냈다”는 비판이 나왔다. 8개월 뒤 탈당 러시가 벌어졌다. 당시 여당은 자중지란 속에 이듬해 대선에서도 패배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사진)이 15일 당 전국위원회 의장직에서 사퇴했다. 그는 이날 오전 원유철 원내대표에게 전화로 사퇴 의사를 밝힌 뒤 오후에 공식 사퇴서를 제출했다. 이 의원은 4·13총선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아 유승민 의원(탈당 후 무소속으로 당선) 등 비박(비박근혜)계 현역 의원들을 노골적으로 찍어내며 계파 간 갈등을 촉발시켰다. 이 의원은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선거에서 진 것에 (책임을 지고) 14일 당 지도부가 모두 사퇴하지 않았느냐”며 “당이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미로 나 또한 사의를 밝힌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공천 과정에서 논란을 일으킨 부분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이 의원의 사퇴로 공석이 된 전국위 의장 직무는 당규에 따라 당내 최다선(8선)인 서청원 의원이 대행할 것으로 보인다. 전국위는 22일 당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의결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컷오프(공천 배제)에 반발해 무소속으로 당선된 안상수 의원은 한 라디오 방송에서 “(총선 참패는) 80∼90%가 이 의원의 잘못”이라며 “(이 의원이) 독단으로 왜곡되고 편파적인 공천을 했다”고 비판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4·13총선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조기 레임덕(권력 누수)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향후 정국을 풀어 나갈 해법은 보이지 않아서다. 여당은 혼란에 빠졌고 청와대 비서진과 내각은 침묵하고 있다. 사면초가(四面楚歌) 양상이다. 총선 이후 박 대통령은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여당의 참패로 상심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참모들도 정국 수습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박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고 있다. 전날에 이어 15일에도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 주재로 수석비서관회의를 열었지만 “동요하지 말고 업무에 매진하자”는 수준의 논의에서 그쳤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이날 총선 후 첫 외부 일정으로 에르나 솔베르그 노르웨이 총리와 정상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노동개혁이 꼭 이뤄져야 한다는 신념하에 적극 추진해 나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18일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총선에 대한 견해와 정국운영 방안을 언급하면서 4대 구조개혁을 변함없이 추진하고, 관련 법안을 통과시켜 줄 것을 국회에 당부할 것으로 전망된다. 관건은 박 대통령이 총선 참패에 대한 유감 표명과 더불어 ‘통치 스타일’의 변화를 가늠하게 하는 언급이 나올지 여부다. 주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선 야당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한 만큼 협력과 소통을 강조하며 야당에 손을 내밀지가 관심의 초점이다. 이동관 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은 “‘박근혜다움’으로 돌아가는 게 필요하다”며 “2004년 천막당사를 차려 당을 살린 것처럼 지금까지 해온 것에 연연하지 않고 다 내려놓음으로써 더 큰 것을 얻는 게 박 대통령의 진면목”이라고 조언했다. 당시 17대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은 대선자금 ‘차떼기 사건’과 탄핵 역풍으로 ‘100석도 얻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 대표를 맡은 박 대통령은 “당사를 팔아 국고에 귀속시키겠다”며 당사를 나와 서울 여의도에 천막을 쳤다. 자성하는 모습에 민심이 움직였고 한나라당은 121석을 얻으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여권 내에서는 당장 내놓을 수 있는 국정 수습 방안은 인적 쇄신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전직 청와대 참모는 “대통령이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메시지는 인적 쇄신”이라며 “그래야 국민이 ‘대통령이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고 반응하는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청와대 비서진 개편과 개각을 포함한 인적 쇄신은 늦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청와대와 정부 내에서 ‘내각 총사퇴’나 ‘청와대 비서진 전면 개편’은 공론화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청와대 내부에서는 2000년 4월 16대 총선 당시 여소야대 결과가 나온 뒤에도 인적 쇄신은 8월에야 이뤄졌던 전례를 언급하는 이들도 있다. 이는 현 상황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인식과 관련돼 있다. 정치권에서는 전날 “새로운 국회가 되기를 바란다”는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의 브리핑이 박 대통령의 뜻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메시지 관리에 유독 철저한 박 대통령의 재가 없이 나오기 어려운 내용”이라며 “청와대의 책임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메시지로 들린다”고 평가했다. 여권에서는 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등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오고 있지만 청와대 내부에서는 논의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청와대의 한 참모는 “청와대에서 먼저 인적 쇄신을 들고 나오면 총선 패배의 책임이 전적으로 청와대에 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며 “여당이 정비되는 상황을 보면서 청와대와 정부도 움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박 대통령이 여론을 지켜보다가 상황을 반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결심할 경우 전격적으로 일부 비서진 개편을 단행할 가능성도 있다. 정치권에서는 현 정부가 실제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대선 정국이 본격화하기 전까지 1년 안팎으로 보고 있다. 인적 쇄신 시기가 늦어지면 새 인물들이 일할 시간도 그만큼 줄어들어 청와대와 정부 업무의 효율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인적 쇄신의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청와대 비서진이 박 대통령에게 자유롭게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절실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병준 전 대통령정책실장은 “대통령의 스타일에 맞는 일을 잘 찾아주는 게 참모의 기능”이라며 “대통령이 고집을 부린다면 참모는 고집 속을 뚫고 들어가 대통령에게 지혜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장택동 will71@donga.com·홍정수 기자}
《 4·13총선은 여당뿐 아니라 박근혜 정부에 대한 심판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치 원로와 전문가들은 박 대통령 임기 3년 동안 △야당과의 소통 부족 △수직적 당청 관계와 공천 내분 △‘대표 브랜드 정책’ 부재를 3대 실책으로 꼽았다. 이런 문제점이 이번 총선 결과에 고스란히 반영됐다는 평가다. 하지만 여전히 청와대는 반성을 외면하고 있다.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14일 총선 관련 브리핑에서 상투적인 반성의 표현조차 없이 “새로운 국회가 되기를 바란다”며 국회를 탓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 박 대통령과 청와대가 이번 총선의 패인을 찾고 잘못된 부분을 고쳐야 남은 22개월의 임기 동안 국정을 원활히 운영할 수 있고, 향후 여권이 재기를 도모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야당과의 소통 부재 속 독선 이미지 강화 박 대통령은 경제와 안보의 ‘이중 위기’를 강조하면서 국회, 특히 야당이 경제활성화법안 처리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여야 지도부와 회동한 것은 7차례뿐이다. 야당 지도부와는 따로 만난 적이 없다.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은 “박 대통령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소신과 사회가 원하는 요구를 아우르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며 “야당이 문제가 있어도 대화로 풀려는 노력, 이를 국민이 볼 수 있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이번 총선에서 3당 체제가 구축된 만큼 소통을 통한 협력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어느 정당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2개 정당의 의견이 합치해야 국회에서 결정할 수 있게 됐다”며 “야당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청와대와 정부, 여당에 배치하는 인사 조치가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이진강 전 대한변호사협회장은 “그동안 여당과 청와대가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남 탓만 했다”며 “여야 간에 서로 대화와 타협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큰 현안이 풀리지 않을 때는 대통령이 나서서 여야를 아우르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수용한다는 점을 국민 앞에서 고해성사하고, 소통의 방식을 획기적이고 가시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수직적 당청 관계, 박 대통령에게 부메랑으로 지난해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사퇴는 ‘수직적 당청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박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라고 공격하자 이전까지 유 전 원내대표를 감싸던 새누리당 의원들이 줄줄이 돌아서면서 유 전 원내대표는 결국 물러났다. 이런 관계는 공천 과정에도 반영됐다. 주류인 친박(친박근혜)계는 “박 대통령의 국정철학에 적극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박(비박근혜)계 인사들을 줄줄이 컷오프(공천 배제)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유 전 원내대표로 대표되는 ‘배신의 정치’에 지나치게 집착한 여당의 공천 과정이 국민에게 엄청나게 실망을 줬다”고 지적했다. 결국 계파 가르기는 총선 패배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친박계 여권 지도부의 행태를 보면 국민은 안중에 없었고 이는 박 대통령에게 부담으로 돌아왔다”며 “‘잘한 것도 없는데 저렇게 오만할까’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최악의 참패가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 민심 사로잡는 대표 정책 부재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국정의 핵심 과제로 제시하고 재임 기간 이를 실현하는 데 주력해 왔다. 하지만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는 “경제가 어려운데 국민에게 희망이나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정부 여당과 정치권에 대한 질책이 반영된 것”이라고 총선 결과를 설명했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여권의 총선 실패 요인을 100으로 보면 오만이 30이고 무능이 70”이라며 “대통령 집권 4년 차에 실시된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회고적 투표를 하게 되는데 유권자들이 체감하는 성과가 없었다”고 분석했다. 김용철 부산대 교수는 “국민의 머리에 ‘박근혜 정부는 어떤 일을 했다’는 게 바로 떠오를 수 있도록 대표적인 정책에 성과를 내고 홍보해야 한다”고 주문했다.장택동 will71@donga.com·손영일·홍정수 기자}
여야 맞수 정치인들 간에 재대결이 펼쳐진 수도권에서는 야권 후보들이 압승을 거뒀다. 대표적인 ‘리턴매치’ 지역인 서울 서대문갑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당선자가 새누리당 이성헌 후보를 누르고 ‘5전 3승’을 거뒀다. 연세대 81학번 동기인 이 후보와 우 당선자는 16∼19대 총선에서 차례로 1승씩 나눠 가졌지만 우 당선자가 2회 연속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당내 대표적인 386 운동권 세대로 꼽히는 우 당선자는 당 대변인과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서대문을 지역구에서도 더민주당 김영호 당선자가 새누리당 정두언 후보의 4선행(行)을 막았다. 김 당선자는 18대 총선에서 정 후보에게 완패했지만 19대 총선에서는 625표 차의 박빙으로 고배를 마셨다. 3번의 도전 끝에 첫 승을 거둔 김 당선자는 서대문 지역에서만 4선을 지낸 더불어민주당 김상현 상임고문의 아들이기도 하다. 야야(野野) 대결이 펼쳐진 서울 관악갑에서는 국민의당 김성식 당선자가 더민주당 유기홍 후보를 근소한 차로 앞질렀다. 18대 국회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었지만 탈당 후 19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고배를 마신 김 당선자는 이번 총선에서 유 후보를 3.7%포인트 차(오후 11시 40분 현재)로 꺾고 국회에 재입성했다. 서울 영등포을에서는 현역 의원인 더민주당 신경민 당선자가 새누리당 권영세 후보의 설욕을 좌절시켰다. 경기 북부 최대의 접전지였던 경기 고양갑에서는 정의당 심상정 당선자가 여유 있게 승리했다. 정의당 대표인 심 당선자는 19대 총선 당시 전국에서 가장 적은 170표 차로 신승을 거뒀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새누리당 손범규 후보를 2만 표 이상 따돌렸다. 전현직 여성 의원 간에 세 번째 맞대결이 펼쳐진 경기 고양정에서도 더민주당 김현미 당선자가 4선 경력의 새누리당 김영선 후보를 꺾고 3선 중진 반열에 올랐다. 세 번째 맞대결이 펼쳐진 경기 시흥갑에서는 새누리당 함진규 당선자가 더민주당 백원우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