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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은 미국 휴스턴박물관의 캐럴라인 와이스 로 전시관 1층에 있는 한국실이 새로 단장해 재개관했다고 20일 밝혔다. 2007년부터 한국실을 운영해 온 휴스턴박물관은 소장품 7만여 점을 보유한 미국 남부 최대 규모의 박물관이다. 새로 문을 연 178.5㎡ 규모의 한국실은 조선시대 의례와 신앙, 생활을 보여주는 도자와 목가구, 불상 등 유물 33건 35점으로 채워졌다. 특히 고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이 기증한 청화백자 ‘구름과 용 무늬 항아리’(사진)가 전시된다. 항아리는 왕실을 상징하는 용 무늬로 가득해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 외에도 조선 왕실에서 자손이 태어났을 때 탯줄과 태반을 보관하던 태항아리, 무늬 없이 순백자로 만들어진 제기 등도 전시된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기존 한국실은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개괄적인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에 그쳤다면 처음으로 조선시대 삶과 문화를 깊이 있게 보여주는 ‘주제 전시’를 선보이게 됐다”고 설명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자네 늘 나더러 이르되 둘이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먼저 가시는가.’ 1998년 경북 안동시 고성 이씨 분묘에서는 머리카락과 마(麻)를 엮은 미투리(삼이나 모시 등을 가늘게 꼬아 만든 신발)와 더불어 이 같은 내용의 한글 편지가 발견됐다. 양반 신분의 이응태(1556∼1586)가 서른한 살에 병사하자, 아내가 남편을 그리워하는 편지를 써서 관에 넣은 것이다. 남편이 쾌유해 신고 다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정성스레 만든 미투리에는 애절한 부부의 사랑이 묻어난다. 국립대구박물관은 개관 30주년 기념 특별전 ‘한국의 신발, 발과 신’을 연다. 14일 시작되는 전시는 9월 22일까지 열린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리나라 신발의 역사와 이에 담긴 문화를 다룬다. 총 7부로 구성된 전시에선 짚신과 나막신, 왕실 신발을 비롯해 관련 풍속화 등 316건 531점을 선보인다. 전시에선 신분제 사회에서 권력을 보여주는 다양한 신발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왕실의례 때 구장복(九章服)과 적의(翟衣)를 각각 갖춰 입은 뒤 신은 비단 신발 ‘석(舃)’이 눈길을 끈다. 고려시대 신하들이 신은 발목 높은 가죽신 ‘화(靴)’도 전시됐다. 보물로 지정된 ‘안동 태사묘 삼공신 유물’ 중 하나로 보존 처리 이후 일반에 처음 공개됐다. 조선시대 혼례 때 활옷을 입은 신부가 신던 꽃신에서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완성한 화룡점정(畵龍點睛)을 감상할 수 있다. 망자를 추모하기 위해 무덤에 묻은 신발들도 선보인다.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서 출토된 고구려 금동신발을 비롯해 백제 무령왕비 금동신발, 경주 식리총 출토 금동신발 등 삼국시대 금동신발들을 한데 모았다. 고영민 대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삼국의 금동신발을 통해 금속공예 기술과 더불어 당시 사람들의 내세관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고봉 16좌를 등정한 엄홍길 산악인의 등산화와 한국 불교계를 이끈 고승인 성철 스님(1912∼1993)의 고무신 등 각계 유명 인사들의 신발도 선보인다.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황해봉 화혜장(전통 신발을 만드는 장인)이 만든 가죽 신 ‘혜(鞋)’가 벽면을 가득 채웠다. ‘기후를 극복한 신발’ 코너에서는 비오는 날 신은 삼국시대 나막신과 눈길에 신는 설피 등을 선보인다. 고영민 연구사는 “이번 전시를 통해 신발이 단순히 발을 보호하는 기능을 넘어 다양한 사회문화적 의미를 가진 물품이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과거를 곱씹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과거에 다른 행동을 했더라면 조금 다른 현재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라는 공상과 함께 말이다. 영화 ‘어벤져스’부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는 콘텐츠에 대중이 늘 반응하는 이유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을 대할 때만큼은 좀처럼 사실과 다른 가정을 하는 행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는 말은 교과서처럼 여겨진다. 신간은 ‘가상 역사’를 통해 색다른 시도를 한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부터 소련의 공산주의 붕괴까지 굵직한 역사의 ‘평행 우주’ 버전을 들려준다. ‘미국이 독립하지 못했다면 노예제 폐지가 가능했을까?’ ‘소련에 고르바초프라는 지도자가 없었어도 공산주의가 그토록 빨리 붕괴됐을까?’와 같은 흥미로운 가정을 던진다. 일종의 픽션(fiction)이지만 책이 가볍지는 않다. 이 책은 21세기 최고의 경제사학자로 불리는 니얼 퍼거슨을 비롯한 석학 9명이 1997년 낸 것으로, 이번에 한국어 버전이 처음 출간됐다. 역사에서 다른 과거를 가정하는 행위는 결코 무용하지 않다. 당시 인물들의 발언과 에피소드, 사회상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역사를 보면서 결과론적 해석과 이로 인한 편견을 지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역사가 필연은 결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또 만일 미국이 식민지 ‘영국령 아메리카’로 남았다면 미국이 1833년 노예제를 폐지한 영국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이에 따라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전쟁을 겪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분석한다. 수많은 책과 영화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이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가정을 다루면서도 미국의 참전을 통한 연합국의 승리를 낙관했다. 그러나 저자들은 미국과 영국의 관계, 실제 역사 속 미국의 참전 계기 등을 종합할 때 이런 믿음은 후대의 ‘희망’에 가깝다고 말한다. 히틀러가 주변 조언을 토대로 1941년 겨울 이전 모스크바를 점령해 소련을 무너뜨렸다면 나치의 계획이 실현됐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책에선 독일이 동부전선에 대해 남긴 수많은 자료를 인용한다. 이 외에도 ‘존 F 케네디가 살았더라면?’ ‘만약 스탈린이 냉전을 피할 수 있었다면?’ 등 흥미로운 지점에서 역사를 비틀어 본다. 신간에 따르면 역사는 고정된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우연과 행운, 실수와 성급함이 복잡하게 작용한 결과에 가깝다. 사소한 변수만으로 지금과 전혀 다른 역사가 펼쳐졌을 수 있다는 상상은 우리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각 장의 저자들이 단단한 근거와 논리적인 맥락을 곁들여 상상력을 발휘하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역사로 이어지기까지 여러 변수를 동시에 고려하기에 가정이 무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가령 책은 모든 역사적 사실을 상수로 놓고 한 가지 변수만 제시하는 방식을 지양한다. 스탈린의 소련이 냉전의 승리자가 됐을 가능성을 논할 때, ‘소련 정보부가 서구에 침투하지 않았을 경우’ ‘스탈린이 서구의 세력권 개념을 받아들였을 경우’ 등으로 상황을 나눠 추론한다. 30년 전 책이지만 오늘날 역사적 사실을 돌아볼 때 주는 교훈도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 등 굵직한 한국의 역사적 사건에 ‘만약에’ 가정법을 적용해 봐도 좋을 것이다. 역사적 결과보다 더 입체적이고 다양한 사실을 풍부히 느낄 수 있는 책이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17일부터 62년간 유지되던 ‘문화재’ 용어가 ‘국가유산’으로 바뀐다. 이날부터 국가유산기본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때문. 변화의 핵심 키워드는 ‘보존’→‘활용’이다.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등 기존의 문화재 보존에 치우쳤던 각종 규제가 완화되고, 관광 자원화 등 국가 유산의 활용에 탄력을 기한다는 것이 정부 방침이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선 당장 법이 시행되지만 문화유산 활용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이 미흡하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국가유산기본법에 따라 문화재는 국가유산으로, 주무 관청인 문화재청은 국가유산청으로 각각 명패를 바꾼다. 문화재가 재화 개념에 가까워 사람이나 자연물을 포괄하기 어려운 데다 유네스코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유산(heritage)이란 용어를 폭넓게 사용하고 있어서다. 이에 따라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민속문화재, 기념물 등으로 나눠 정부가 관리해온 분류체계도 문화유산, 자연유산, 무형유산으로 좀 더 단순하게 바뀐다.● 보존지역 500m→200m 등 규제 완화 이번 변화의 핵심은 보존을 최우선으로 했던 기존 문화재 정책 목표가 문화유산의 가치를 향유하고 활용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데 있다. 일각에서 ‘지역 개발의 걸림돌’ 혹은 ‘재산권 침해’로 여겨진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규제 완화가 대표적이다. 기존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지정 문화재로부터 반경 500m 이내 지역에서의 건설 공사는 인허가 전 행정기관의 사전 검토를 받아야 한다. 2021년 일부 건설사가 경기 김포시 장릉 500m 이내에 고층 아파트를 지어 문화재청이 공사 중지 명령을 내리는 등 논란이 된 게 대표적이다. 이에 국가유산청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에서 주거·공업·상업 지역에 대해선 최대 200m 이내로 현상변경 제한 범위를 완화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부산 동삼동 패총 등 일부 사적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고, 향후 완화 범위를 더 늘릴 방침이다. 또 제작된 지 50년이 넘은 ‘일반 동산문화재’의 국외 반출을 제한하는 규정도 풀기로 했다. 1946년 이후 만들어진 미술 작품은 제한 없이 해외로 나갈 수 있도록 시행령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과 맞물려 국내 미술품에 대한 해외 수요를 촉진하기 위한 취지다.● 전국 문화유산 ‘스마트폰 해설’도 국가유산의 가치를 알리고 공유하기 위한 사업도 추진된다. 딱딱한 문화관광 안내판 등에서 벗어나 스마트폰만으로 전국 문화유산의 해설을 체계적으로 들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겠다는 것.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같은 문화유산을 여러 번 봐도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며 “박물관 도슨트처럼 전국 문화유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해설 체계가 갖춰지면 관광의 패러다임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유산기본법에 산업 육성을 명시해 추진하는 것도 주목된다. 국가유산을 매개로 하는 콘텐츠나 상품의 개발, 제작, 유통 과정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관련 산업을 키우겠다는 것. 지방 관광 진흥과 맞물려 문화유산을 활용한 산업이 활성화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문화유산 활용에 대한 청사진이 여전히 미흡해 자칫 용어나 조직 변경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비지정 문화재인 일부 고궁 전각을 숙박시설로 활용하려다가 여론의 반발로 무산된 ‘궁스테이’ 정책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치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뺑소니 혐의로 조사받고 있는 트로트 가수 김호중 씨(33)가 매니저에게 ‘사고를 냈다. 경찰에 대신 출석해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소속사 측은 매니저에게 대신 출석을 요구한 것은 소속사 대표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 씨는 경찰이 수차례 출석을 요구하기 위해 연락했지만 17시간 만에야 모습을 드러냈고, 차량 블랙박스의 메모리카드도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씨가 사고 전 유흥주점에 갔던 점도 파악됐다. 경찰은 이 사건을 강제수사로 전환해 김 씨의 행적과 ‘운전자 바꿔치기’의 경위를 재구성하고 있다.● 매니저에게 ‘대신 출석해달라’ 이후 “블랙박스 없다” 주장 15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경찰이 김 씨 사건에서 주목하는 건 그의 매니저가 거짓 자수했을 당시 상황이다. 김 씨는 9일 오후 11시 40분경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왕복 2차로에서 비틀거리며 운전하다가 중앙선을 넘어 멈춰 있던 택시를 들이받고 곧장 현장을 벗어났다. 약 2시간 후 경찰서에 나타나 자수한 건 김 씨의 매니저였다. 경찰은 김 씨 매니저의 휴대전화를 입수했고, 김 씨가 ‘사고를 냈다’라며 ‘대신 경찰에 출석해달라’고 직접 요청한 녹취파일도 확보해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김 씨의 매니저는 김 씨의 것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차에 타고 내리는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포착됐을 가능성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김 씨가 처벌을 피할 목적으로 매니저에게 대리 출석을 요청하고 옷을 바꿔 입는 데도 관여했다면 범인도피 교사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김 씨 소속사 대표는 16일 입장문을 내고 “운전자 바꿔치기는 내가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찰에서도 같은 취지로 진술했다고 한다. 김 씨 소속사 관계자는 “지금 (운전자 바꿔치기를) 김 씨가 시킨 게 아닌데 마치 김 씨가 한 것처럼 몰리고 있다”라며 “(운전자 바꿔치기 결정은) 아티스트(김 씨) 보호 차원에서 나온 판단이었지만 미숙한 오판이었고 과잉보호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수사 상황을 다각도로 검토 중이고 모든 부분을 꼼꼼하게 살펴 보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매니저를 조사한 후 김 씨에게 전화와 문자메시지 등으로 여러 차례 직접 조사받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 씨는 사고 발생 약 17시간 만인 10일 오후 4시 반경에야 경찰서에 찾아갔다. 경찰이 차량 블랙박스의 메모리카드를 요구하자 김 씨는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고 전 주점 방문… “모든 수단 동원해 조사” 김 씨 측은 사건이 알려진 뒤 “음주운전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10일 경찰이 음주 측정기로 김 씨의 혈중알코올농도를 측정했을 때도 면허정지(0.03% 이상)에 해당하는 수치가 나오진 않았다. 하지만 통상 음주 이후 8∼12시간이 지나면 날숨을 통한 음주 측정으로는 사고 당시 음주 여부를 정확히 밝혀낼 수 없다. 경찰은 김 씨가 매니저에게 ‘대신 출석해달라’고 전화했던 점, 사고 직전 강남구의 한 유흥주점에 방문한 점 등을 고려해 추가 수사 중이다. 이런 경우 측정 대상의 키와 몸무게, 적발 당시 혈중알코올농도 등을 근거로 사고 당시 혈중알코올농도를 산출할 수도 있다. 모발이나 소변에서 검출되는 음주 대사체 검사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최대 72시간 안에 측정해야 한다. 경찰은 “음주운전 여부 등을 확인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최대한 근거를 수집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14일 김 씨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는 등 강제수사에 나섰다. 김 씨와 매니저의 통화 녹취파일 외에도 물증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통상 시일이 경과한 뺑소니 사고를 수사할 땐 피의자의 차량 내비게이션 기록이나 들렀던 장소의 CCTV, 신용카드 사용 명세, 목격자 조사 등으로 운전 당시 혈중알코올농도를 추정할 수 있다. 김 씨 소속사 관계자는 “김 씨가 (사고 당일) 지인들과 주점에 갔던 건 맞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라며 “매니저에게 경찰서에 가달라고 한 건 사고 처리를 부탁한 것일 뿐이었다”고 해명했다. 김 씨는 사고 이후인 11일과 12일에도 예정된 공연을 했고, 추후 공연 일정도 바꾸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김 씨는 2020년 한 트로트 경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성악 창법으로 노래해 ‘트바로티’(트로트와 파바로티의 합성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인기를 얻었다. 김 씨는 2021년 인터넷 불법 사이트를 이용해 도박을 한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화려한 사슴뿔 모양의 관 사이사이 달린 푸른 곡옥(曲玉)들이 자태를 뽐낸다. 1921년 처음 발굴된 신라 금관총 금관의 모습이다. 이는 유라시아 초원의 황금 문화와 동아시아의 옥을 제작하는 기술이 결합된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불을 이용해 금속을 제련하는 뜨거움과 돌을 갈아 만드는 차가움의 조화가 절묘하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54·사진)는 최근 펴낸 ‘황금, 불멸의 아름다움’(서해문집)에서 이렇게 유라시아 초원 지대에서 번성한 황금 문화가 중국 북방을 거쳐 한반도까지 건너온 과정들을 살핀다. 특히 신라의 황금 문화가 발달했던 3∼6세기에는 초원을 중심으로 유라시아 일대 훈족들이 대이동을 했고, 각 지역으로 황금 문화가 전파됐다. 강 교수는 “황금 문화가 유라시아에서 신라로 전파됐다거나, 아니면 신라에서 자생적으로 자라났다거나 하는 단순한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려 했다”며 “‘실크로드’를 매개로 초원과 동아시아 간 형성된 다양한 지역적 네트워크를 조명했다”고 말했다. 신라 금관 양식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초원 황금 문화의 변용에 주목해 풀어낸 연구가 드물다는 것에 착안했다. 신라의 금관은 이 같은 초원의 황금이 신라의 상황에 맞게 변형된 예다. 이동성이 강한 초원에서는 휴대할 수 있는 황금 장식품 등이 발달했지만, 신라에서는 권력자들이 머리를 장식해 권력을 드러내야 했다. 특히 금관을 쓰는 집단에서는 사물을 활용해 두개골을 변형시키는 고대 풍습인 편두(褊頭)가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특히 제사 등을 담당하는 지배 계급에서 금관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강 교수는 “황금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권력자들의 독점이라는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2016년 7월 국립 카자흐스탄 박물관 수장고에서 카자흐스탄 국보인 황금 유물들을 본 것을 계기로 이번 책을 집필했다. 강 교수는 “황금은 약 6000년 전 인간 역사로 들어온 이래 아름다움과 재화, 권력에서 최상의 가치를 한 번도 내어준 적이 없다”며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황금에 얽힌 고고학적 의미를 대중에게 잘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신간은 기원전 9세기∼기원전 3세기 스키타이-사카 문화에서 발달한 동물 모양 황금 장식, 기원후 3∼5세기 훈족들의 유색 보석을 황금 사이에 박는 상감 기법 등 시기별로 발달한 황금 문화를 세분해 알려준다. 또 고대뿐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는 황금 유물의 발굴과 전시품의 운명을 다뤄 읽는 재미를 더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뺑소니 혐의로 조사받고 있는 트로트 가수 김호중 씨(33)가 매니저에게 ‘음주운전을 했다. 경찰에 대신 출석해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씨는 경찰이 수 차례 출석을 요구하기 위해 연락했지만 17시간 만에야 모습을 드러냈고, 차량 블랙박스의 메모리카드도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이 사건을 강제수사로 전환해 김 씨의 행적을 재구성하기로 했다.● 매니저에게 ‘대신 출석해달라’ 이후 “블랙박스 없다” 주장15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경찰이 김 씨 사건에서 주목하는 건 그의 매니저가 거짓 자수했을 당시 상황이다. 김 씨는 9일 오후 11시 40분경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왕복 2차로에서 비틀거리며 운전하다가 중앙선을 넘어 멈춰 있던 택시를 들이받고 곧장 현장을 벗어났다. 2시간 후 경찰서에 나타나 자수한 건 김 씨의 매니저였다.경찰은 김 씨 매니저의 휴대전화를 입수했고, 김 씨가 ‘사고를 냈다’라며 ‘대신 경찰에 출석해달라’고 직접 요청한 녹취파일도 확보해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김 씨의 매니저는 김 씨의 것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차에 타고 내리는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포착됐을 가능성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김 씨가 처벌을 피할 목적으로 매니저에게 대리 출석을 요청하고 옷을 바꿔 입는 데도 관여했다면 범인도피 교사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경찰은 매니저를 조사한 후 김 씨에게 전화와 문자메시지 등으로 여러 차례 직접 조사받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 씨는 사고 발생 약 17시간 만인 10일 오후 4시 반경에야 경찰서에 찾아갔다. 경찰이 차량 블랙박스의 메모리카드를 요구하자 김 씨는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김 씨 측은 사건이 알려진 뒤 “음주운전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10일 경찰이 음주 측정기로 김 씨의 혈중알코올농도를 측정했을 때도 면허정지(0.03% 이상)에 해당하는 수치가 나오진 않았다. 하지만 통상 음주 이후 8~12시간이 지나면 날숨을 통한 음주 측정으로는 사고 당시 음주 여부를 정확히 밝혀낼 수 없다.● 사고 전 주점 방문… “모든 수단 동원해 조사”경찰은 김 씨가 매니저에게 ‘대신 출석해달라’고 전화했던 점, 사고 직전 강남구의 한 유흥주점에 방문한 점 등을 고려해 추가 수사 중이다. 이런 경우 측정 대상의 키와 몸무게, 적발 당시 혈중알코올농도 등을 근거로 사고 당시 혈중알코올농도를 산출할 수도 있다. 모발이나 소변에서 검출되는 음주 대사체 검사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최대 72시간 안에 측정해야 한다. 경찰은 “음주운전 여부 등을 확인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최대한 근거를 수집하는 중”이라고 밝혔다.경찰은 14일 김 씨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는 등 강제수사에 나섰다. 김 씨와 매니저의 통화 녹취파일 외에도 물증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통상 시일이 경과한 뺑소니 사고를 수사할 땐 피의자의 차량 내비게이션 기록이나 들렀던 장소의 CCTV, 신용카드 사용 명세, 목격자 조사 등으로 운전 당시 혈중알코올농도를 추정할 수 있다.김 씨 소속사 관계자는 “김 씨가 (사고 당일) 지인들과 주점에 갔던 건 맞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라며 “매니저에게 경찰서에 가달라고 한 건 사고 처리를 부탁한 것일 뿐이었다”고 해명했다. 김 씨는 사고 이후인 11일과 12일에도 예정된 공연을 했고, 추후 공연 일정도 바꾸지 않겠다는 입장이다.김 씨는 2019년 한 트로트 경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성악 창법으로 노래해 ‘트바로티’(트로트와 파바로티의 합성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인기를 얻었다. 김 씨는 2021년 인터넷 불법 사이트를 이용해 불법 도박을 한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경기 포천시 백운산의 사찰 흥룡사(興龍寺) 터에서 출토된 뒤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 중인 불상 2기의 손 부분이 사라진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박물관은 “(이관 이후) 손이 사라진 것은 맞다”며 경위 파악에 나섰다. 14일 대한불교조계종 흥룡사 주지 도암 스님은 “1924년 흥룡사 터에서 출토돼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철불 2기의 손이 사라졌다”며 박물관 측에 해명을 요구했다. 불상들은 통일신라 말기 승려인 도선 국사가 흥룡사 전신인 내원사를 창건할 때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석가모니불과 지장보살상이다. 출토 후 1925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이관됐고, 1945년 12월 국립중앙박물관이 생긴 뒤에도 줄곧 국가 소유로 관리해 왔다. 출토 당시 사진을 보면 불상의 손이 존재한다. 또 당시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흥룡사 발견 철불과 운송’ 문건에도 ‘석가모니불의 손은 오른손 손가락 4개가 파손됐다’, ‘지장보살상은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파손됐다’고 돼 있다. 그러나 흥룡사 측이 지난달 촬영한 철불 사진은 모두 손목 아랫부분이 사라진 채다. 흥룡사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도암 스님은 “관리 소홀로 분실된 것은 아닌지 박물관 측에 해명을 요구하는 공문을 이달 초 보냈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다”며 “불상들은 흥룡사의 역사를 말해주는 중요 문화재인데 심히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손 부위가 온전히 남아 있는 1930년 경복궁 근정전 전시 사진 이후로는 관련 기록이 없어 경위 파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일제강점기나 6·25전쟁 중 철불 손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경위 파악은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윤봉길 초상화(사진)와 의친왕(義親王) 유묵(遺墨·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 등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문화재청은 13∼31일 서울 중구 덕수궁 돈덕전에서 독립운동가 유물 21점을 공개하는 특별전 ‘국봉(國奉), 나라를 받들어 열렬한 마음이 차오르다’를 연다고 밝혔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천장절)과 전승을 기념하는 행사장에서 폭탄을 투척한 뒤 순국한 윤봉길 의사(1908∼1932)의 초상화를 선보인다. 천도교 지도자이자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손병희(1861∼1922)의 초상화와 광복 노래 필사본도 볼 수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유묵도 선보인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1877∼1955)이 현판에 남긴 ‘가운수성(可雲修省·마음을 가다듬고 성찰하다)’도 그중 하나. 그는 1919년 항일 독립투사들과 접촉해 상하이 임시정부로 탈출을 모의하다 발각돼 강제 송환됐다. 조선 말기 외교관 김가진(1846∼1922)이 작성한 ‘종오소호(從吾所好·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나가겠다)’ 유묵도 전시됐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627번째 세종대왕 탄신(5월 15일)을 기념해 14, 15일 이틀간 경복궁과 세종문화회관 등에서 ‘세종과의 하루’ 행사가 열린다. 13일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이번 행사는 14일 오후 2시 경복궁 수정전 앞에서 열리는 궁중음악 대취타(大吹打)로 막을 올린다. 국립국악원은 세종 때 창작된 궁중음악 중 전승이 끊어진 ‘치화평(致和平)’과 ‘취풍형(醉豐亨)’을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복원한 후 연주할 예정이다. 치화평과 취풍형은 15세기 정간보 악보로만 존재했는데, 이번에 심층신경망 기반의 AI 모델을 적용해 대금, 해금, 아쟁 등의 선율을 새롭게 만든 것이다. 15일에는 세종문화회관 서클홀에서 ‘세종이 꿈꾸는 세상, 책으로 말하다’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가 열린다. 오전에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과 음악, 교육 철학에 대한 발표가, 오후에는 세종대왕이 만든 금속활자 ‘갑인자(甲寅字)’ 등에 대한 발표가 이어진다. 15일 국립한글박물관은 ‘오늘, 세종대왕과 함께해요’ 행사를, 국립국어원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2024년 외국인 받아쓰기 대회’를 연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은 “세종께서 꿈꾸던 ‘생생지락(生生之樂·생업에 종사하며 삶을 즐기다)’의 기쁨을 시민들이 깊이 되새겼으면 한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부(父) 김성배, 모(母) 임오조의 장녀 종희(일명 공주님).” 1979년 아버지 김성배 씨가 결혼을 앞둔 큰딸의 결혼을 기념해 원고지에 적은 글이다. 성인이 된 딸을 ‘공주님’으로 부르는 아버지의 사랑이 묻어난다. 김 씨는 양가 상견례와 결혼식은 물론이고 신혼여행과 신랑 측 함이 들어오는 날 일정까지 정성스레 적었다. 김 씨는 딸이 출산한 1984년 사위에게 손녀의 이름을 직접 지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가정의달을 맞아 기획전시실2에서 이 같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기획전 ‘아버지’를 지난달 30일부터 선보이고 있다. 총 3부 외 인터뷰 공간, 수집 자료 공간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된 전시에선 아버지 144명의 마음이 담긴 소장품과 자료 등 150여 점을 볼 수 있다. 특히 2부 ‘요즘 아빠&호랑이 아버지’에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자식들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전남 강진에서 유배 중이던 정약용은 1810년 부인 홍씨가 보낸 노을빛 치마를 잘라 만든 서첩 ‘하피첩’에 자식들에게 전할 글을 적었다. “몸과 마음을 닦으며 근검하게 살아라”, “학문과 처세술을 익혀 훗날을 대비하라” 등과 같은 교훈이 주로 적혀 있다. 박물관 변정숙 학예연구사는 “조선시대 아버지는 마냥 엄했을 것 같지만 자식에 대한 애틋함만큼은 요즘 아버지 못지않았다”고 말했다. 2010년 보물로 지정된 하피첩은 보존 관리를 위해 이달 13일까지만 공개된다. 1934년 김교철(1880∼?)이라는 인물이 아들 정옥의 돌을 기념해 만든 ‘천인천자문(千人千字文)’도 볼 수 있다. 천 명의 지혜가 아이에게 전해져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천 명의 지인들에게 한 글자씩 부탁해 만든 천자문이다. ‘100인의 기억’이라는 이름의 자료 공간에서는 시민 100명이 아버지의 추억을 떠올리며 박물관에 기증한 물건들을 볼 수 있다. 딸 정다솜 씨(33)는 아버지의 암 치료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떠난 여행에서 아버지가 사준 부채를 기증했다. 정 씨는 “여행지의 무더운 날씨에 힘들어하는 내게 아버지가 사준 부채”라며 “매년 여름이 되면 아버지와 함께한 여행을 떠올리며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들 이건욱 씨(53)는 유학을 떠나던 1995년 아버지가 선물한 만년필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씨는 “30년간 늘 이것으로 메모하고 글을 써왔다”며 “(만년필로 쓴 글을 보면) 색은 바랬는데 무언가 고풍스러워 보인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구두, 월급봉투 등 고단한 밥벌이에 나서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릴 소장품도 다양하게 선보인다. 항암 치료로 듬성듬성해진 머리카락을 감추고자 딸 결혼식에 썼던 모자처럼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소장품도 많다. 1996년 100만 부가 팔려 신드롬을 일으킨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 2004년 나온 동요 ‘아빠 힘내세요’ 등 아버지에 관한 도서와 음악도 즐길 수 있다. 또 부스에 마련된 다이얼 전화 2대를 통해 각각 들을 수 있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남긴 육성도 잔잔한 감동을 준다. 전시는 7월 15일까지. 무료.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이 차는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작동합니다.” 2016년 미국 수소 전기 트럭 기업 니콜라의 창업자 트레버 밀턴이 시제품을 공개하면서 한 말이다. 니콜라는 수소로 움직이는 자율주행 트럭 영상을 선보였지만, 알고 보니 이 차는 전지와 모터조차 없는 ‘가짜’였다. 트럭을 언덕 위에서 굴려놓고 땅이 평평하게 보이도록 카메라를 조작해 만든 영상에 투자자들은 속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이 조악한 속임수에 속는다고?”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하지만 사기 행각이 실제로 발각되기 전까지 니콜라의 시가총액은 약 36조 원에 달해 굴지의 자동차 생산업체인 포드를 넘어섰다. 신간은 많은 사람들이 교묘한 속임수와 사기에 속아 넘어가는 이유를 샅샅이 파헤친 심리학 책이다. 인지심리학자인 저자들은 인지적 습관이 속임수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설명한다. 가짜 뉴스, 이메일 피싱 사기부터 미국 월스트리트의 폰지 사기까지 다양한 속임수 사례들이 등장한다. 저자들은 성공적인 속임수는 예측, 집중, 전념, 효율 등 인간의 4가지 인지 습관을 활용해 벌어진다고 말한다. 특히 예측이 우리의 경험과 맞아떨어지면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위험성이 크다. 조지 W 부시가 군 복무 당시 신체검사를 건너뛰는 등의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을 보도해 2004년 9월 미국 CBS 뉴스 앵커 댄 래더가 사임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CBS 취재진은 당시 공군수비대에 복무 중이던 빌 버킷의 제보를 토대로 이를 보도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부시가 젊은 시절 한때 약물과 알코올에 중독됐다는 사실이 보도에 영향을 끼친 것. 제보 내용과 기자들의 예측이 일치했기에 다른 취재만큼 제대로 제보를 검증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정밀성, 일관성, 친숙함, 효능 등 사기꾼들이 거짓을 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법 네 가지도 소개한다. 똑똑한 사기꾼들은 장기간에 걸쳐 신뢰를 유지하려면 정밀하고 구체적인 세부사항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피 한 방울로 모든 질병을 검사할 수 있는 기기를 개발했다고 세상을 속인 테라노스의 엘리자베스 홈스 최고경영자(CEO)는 정밀하게 위조된 자료들을 투자자들에게 제시했다. 미군에 기기를 납품했다는 사실을 설명할 때는 미군이 어느 곳에 자신의 기기를 배치했는지, 어떤 회사가 기기의 정확성을 검증했는지 등 디테일한 정보를 계속 주입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짓말과 속임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들은 “덜 받아들이고, 더 확인하라”는 원칙을 제시한다. 예컨대 누군가로부터 일생일대의 매력적인 제안을 받았다면 반드시 세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멋진 기회가 하필 나에게 찾아올 확률은?’ ‘내가 원하는 일과 상대가 원하는 일이 반드시 같을 확률은?’ ‘내가 속기 쉬운 상황과 장소에 처해 있진 않은가?’ 평범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정보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사기꾼들은 모든 정보에 집중한다. 저자들은 속지 않으려면 사기꾼처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운 이때, 거짓 정보의 홍수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심리적 기제를 마련해 놓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죽을 고비도 겪었습니다. 그러나 광산 덕분에 자녀 셋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광산은 제게 살아가는 힘을 줬습니다.” 컴컴한 탄광 속에서 꼬박 37년. 일찍이 가정을 꾸려 23세이던 1986년부터 지하 1000m 깊이의 막장에서 석탄을 캐내다가 지난해 퇴직한 이재대 씨(61)는 이렇게 말했다. 15년 전 발파 작업 도중 탄가루가 쏟아지면서 막장에 갇힐 뻔하기도 했지만, 탄광 덕분에 그간 가장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고. 체감 온도 40도의 끔찍한 더위도, 날아다니는 석탄 가루도 이젠 추억이 됐다. 그가 일했던 강원 태백시 장성광업소는 다음 달 문을 닫는다. “오랜 시간 몸담은 직장이 없어진다고 하니 마음이 먹먹합니다.” 1960년대 초반까지 석탄은 석유를 능가하는 핵심 에너지원이었다. 1960년대 경제 개발에 이어 1970년대 오일 쇼크 때도 국가 경제에서 석탄이 차지하는 역할은 지대했다. 그러나 값싼 수입 석탄에 비해 국내 탄광의 채산성이 떨어지면서 탄광 수가 지속적으로 줄었다. 정부의 석탄 증산 정책으로 1988년 347개에 달했던 국내 탄광 수는 한 자릿수로 줄었다. 1986년 6만8861명에 달했던 탄광 근로자 수도 현재 1000여 명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문경·보령·태백 석탄박물관과 함께 우리나라 산업화를 이끈 석탄의 역사와 의미를 조명하는 ‘석탄시대’ 특별전을 지난달 26일부터 열고 있다. 이번 전시는 석탄에 삶을 의존했던 탄광마을 사람들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1일 대한석탄공사에 따르면 국내에 남은 탄광은 3개다. 이 가운데 국내 최대 탄광으로 1936년 문을 연 태백 장성광업소가 6월 30일 문을 닫는다. 내년 6월 강원 삼척시 도계광업소마저 폐광되면 국내에서 공영 탄광은 사라지게 된다. 국내 유일의 민영 탄광인 삼척 경동 상덕광업소는 아직 폐광 여부가 정해지지 않았다. 이번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에서는 1960년대 석탄 산업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증산보국(增産報國·석탄 생산량을 늘려 나라에 보답한다)’ 편액과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동명광업소 노동자에게 수여한 훈장증 등 130여 점이 전시된다. 3교대로 밤낮없이 일하던 광부들의 작업 상황과 안전교육 교재, 작업복 등 광부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전시품도 볼 수 있다. 전시는 총 5부로 구성됐다. 프롤로그에선 석탄의 형성부터 산업혁명까지의 역사를 소개한다. 태백에서 채탄된 약 1m 크기의 무연탄과 수억 년 전 경북 문경과 충남 보령에서 자생한 식물 화석을 선보인다. 2부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던 탄광 여성 노동자나 광부의 도시락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다. 에필로그에선 폐광 이후 남겨진 석탄 산업유산을 문화산업지역으로 활용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광부 화가’로 불린 황재형 작가의 그림도 눈길을 끈다. 불순물을 골라내는 여성 광부를 그린 ‘선탄부’, 헤드랜턴을 쓴 채 어두운 갱도에서 밥을 먹는 광부들을 묘사한 ‘식사’ 등을 선보인다. 압축된 공기를 동력으로 암벽에 구멍을 뚫는 2.3m 높이의 착암기 실물과 광부들의 작업 영상도 볼만하다. 이 밖에 연탄 비누를 직접 만들어 보는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한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은 “우리에게 남겨진 석탄 산업의 유산과 뜨거웠던 석탄 시대의 기억을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9월 22일까지. 무료.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어린이날을 맞아 서울 시내 박물관과 공연단체들이 각양각색의 행사와 공연을 선보인다. 아이 손 잡고, 즐겁고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곳들이 가득하다. 관람이 끝나고 아쉬운 분들을 위해 주변 볼거리도 함께 소개한다. ● 어린이박물관 즐기고, 서커스도 보고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달 4∼6일 산하 어린이박물관의 입장 인원을 하루 1300명에서 1800명으로 늘린다. 어린이박물관에서는 예부터 장수의 상징으로 여겨진 해, 산, 물, 거북 등을 다룬 ‘십장생, 열 가지 이야기’ 특별전을 관람할 수 있다. 관람일 2주 전부터 온라인 예약이 가능하며, 예약이 찼더라도 당일 노쇼 인원만큼 현장 관람이 가능하다. 국립중앙박물관 관람을 마쳤다면 도보로 6, 7분 거리의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열리는 ‘어린이, 한글과 놀자’ 행사를 찾을 만하다. 어린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야외마당에서 서커스 음악극, 비눗방울 퍼포먼스, 코미디 마술, 한글 퀴즈 맞히기, 책갈피 만들기 등이 진행된다. 한글박물관 행사를 찾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인근 용산가족공원 산책을 추천한다. 야외 조각상과 연못을 구경한 뒤 너른 풀밭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서울 도심권에서는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과 인근 고궁 나들이를 고려할 만하다. 어린이날 민속박물관에서는 아이들이 분리수거를 실천하며 맑은 물을 되찾는 과정을 그린 국악 뮤지컬 ‘동동마을을 구해주세요!’를 선보인다. 민속박물관과 이어져 있는 경복궁뿐 아니라 창덕궁에서는 1∼5일 ‘어린이 궁중문화축전’이 열린다. 경복궁에선 조선시대 군인인 갑사(甲士)의 선발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창경궁 통명전에서는 도장을 활용해 왕실 잔치 의궤도를 그리는 ‘화원 체험’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서울 강남권에서는 3일 개관하는 송파구 서울어린이백제박물관을 찾을 만하다. 1991년 문을 연 몽촌역사관을 전면 개편한 곳으로, 인터랙티브 영상 등을 활용해 전시장을 새로 꾸몄다. 이곳에서는 ‘열려라 백제 왕성’ 등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백제 역사를 설명한 전시를 볼 수 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친 뒤에는 백제 초기 왕성 터로 박물관과 맞닿아 있는 몽촌토성을 둘러볼 수 있다. 몽촌토성에서 차로 약 15분 거리에는 대표적인 신석기 유적지인 암사동 선사유적지가 있다.● 동화책이 현실로…청와대도 ‘눈높이 개방’ 어린이날을 맞아 다채로운 기획 공연들도 열린다.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는 뮤지컬 배우들이 디즈니 만화영화 속 OST를 영어로 들려주는 ‘2024 디즈니 인 콘서트’가 열린다. ‘인어공주’, ‘라이온 킹’부터 ‘겨울왕국’, ‘위시’ 등 최근 개봉작까지 아우른다. 대형 스크린을 통해 디즈니 만화 영화도 감상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뮤지컬 배우 김환희, 이아름솔, 최민우, 이종석이 화음을 맞춘다. 4만4000∼11만 원. 인기 동화를 재창작한 뮤지컬도 눈길을 끈다. 서울 마포구 마포문화센터 아트홀맥에서는 뮤지컬 ‘이상한 과자가게 전천당’이 무대에 오른다. 일본의 판타지 동화 작가 히로시마 레이코가 쓴 동명의 스테디셀러가 원작. 오래된 과자가게 전천당이 기묘한 힘을 가진 과자로 하루 한 명의 고민을 해결해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5만∼7만 원. 서울 광진구 상상나라 극장에서는 영국의 유명 그림책을 무대화한 뮤지컬 ‘고릴라’가 펼쳐진다. 아동문학계 노벨상으로 통하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받은 앤서니 브라운이 원작을 썼다. 공연은 일하느라 바쁜 아빠로부터 주인공 한나가 고릴라 인형을 선물로 받으면서 시작된다. 한나의 꿈에 고릴라 인형이 나타나 함께 동물원에 놀러가는 여정을 환상적으로 풀어냈다. 전석 4만 원. 어린이들의 오감을 자극할 체험형 공연도 열린다. 서울 성북구 하땅세극장에선 가족극 ‘오버코트’가 공연된다. 매일 출근 전쟁을 치르는 아빠와 놀고 싶은 딸 제인의 이야기를 미디어 아트와 라이브 음악으로 풀어냈다. 공연이 끝난 뒤 어린이 관객을 대상으로 제인 역의 배우와 털실을 가지고 노는 행사가 이어진다. 전석 3만 원. 청와대 개방 2주년을 맞아 열리는 아동 그림 전시는 전쟁 속에서도 피어나는 동심을 다룬다. 서울 종로구 청와대 춘추관 2층에서 1일부터 6월 3일까지 ‘희망을 그리는 아이들: 우크라이나 아동 그림전’이 열린다. 전쟁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이 자신의 일상과 희망을 그린 그림 15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우리나라 최초 사립 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이 1년 7개월 간의 보수 공사를 마치고 다시 문을 열었다. 재개관을 기념한 전시에서는 미술관 설립자인 간송 전형필(1906∼1602)의 일기를 비롯해 미공개 상태였던 서화들이 공개된다. 간송미술관은 다음 달 1일부터 6월 16일까지 ‘보화각 1938: 간송미술관 재개관전’을 연다고 28일 밝혔다.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은 1938년 설립된 모더니즘 양식의 건물로, 2019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뒤 국고보조사업을 통해 2022년 9월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이번 전시에선 간송이 1936년부터 2년간 서화 및 골동 구입 내역을 직접 기록한 ‘일기대장’ 등 미공개 작품 40여 점을 선보인다. 작품들은 복원 공사 과정에서 유물을 조사하던 중 발견됐다. 2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은 “일기대장은 건물 설계비와 건축비는 물론이고 정원 인력의 인건비 등 간송이 지출한 모든 것이 적혀 있을 정도로 자세하다”며 “간송 컬렉션의 형성 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1세대 근대 건축가 박길룡(1898∼1943)이 1938∼1940년 설계한 보화각 및 북단장 도면도 최초 공개됐다. 특히 각 도면에 설계된 건물을 3차원(3D) 모델링 영상으로 구현한 키오스크도 설치했다. 보화각의 현대적인 건물 외관과 반원형 돌출 구조의 비대칭, 벽돌과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건축 구조 등을 영상으로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이외에도 일본 화백 사쿠마 데쓰엔이 고종의 어명을 받아 제작한 ‘이백간폭도(李白看瀑圖)’, 1930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작으로 당선된 근대화가 노수현(1899∼1978)의 ‘추협고촌(秋峽孤村)’ 등이 전시된다. 1888년 미국 워싱턴에서 서화로 교유한 대한제국 주미 공사관원 강진희(1851∼1919)와 청국 공사관원 팽광예(1844∼?)의 작품 8점이 실린 ‘미사묵연 화초청운잡화합벽첩(美槎墨緣 華初菁雲襍畵合璧帖)’도 처음으로 전면 공개된다. 이 화첩에 실린 강진희의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는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 풍경을 그린 산수화로 유명하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방짜유기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22일 서울 경복궁에서 만난 이지호 유기장 이수자(38)는 “놋쇠로 만든 유기는 단순해 보이지만 아무리 때려도 제 마음처럼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방짜유기장은 불에 달군 놋을 망치로 때려 기물을 제작하는 장인으로 국가무형문화유산에 지정돼 있다. 이 씨는 유기장 명예보유자인 할아버지와 보유자인 아버지에 이어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이수자는 보유자로부터 도제식 교육을 받으며 무형문화유산을 계승하는 이로, 전승교육사를 거쳐 보유자가 되기까지 수십 년이 걸린다. 이 씨는 한국문화재재단 주관으로 27일 개막하는 ‘궁중문화축전’에 참여한다. 올해로 10주년을 맞는 이 행사는 경복궁 등 서울 5대 궁궐과 종묘에서 야간 관람과 공연, 전시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씨는 처음에는 가업을 이을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어렸을 적 기름이나 쇠 냄새에 절어 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고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는 것.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그는 2012년 은행에 입사해 4년간 대출 담당자로 일했다. 하지만 그의 핏속에 흐르는 장인의 기질을 끝내 외면할 수 없었다. 유기에 애착을 갖고 밤을 새워 제품을 만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내가 주체가 돼 작품을 만들어 내는 유기장 일이 문득 멋있어 보였다”고 말했다. 이후 은행을 관두고 아버지의 공방으로 출근해 기술을 배우는 동시에 금속공예 대학원을 다니며 이론을 익혔다. 굽은 젓가락을 망치로 수없이 두드려 펴는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이제는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과거 방짜유기는 요강이나 대야로 많이 사용됐지만 생활방식이 바뀌면서 요강 등의 수요가 급감했다. 이 씨가 최근 유기를 활용한 식기나 인테리어 소품을 많이 만드는 이유다. 궁중문화축전에서 전통 문화상품을 파는 ‘K-헤리티지 마켓’에도 현대적 디자인을 접목한 유기 식기와 수저, 테이블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 씨는 “미슐랭 선정 식당과 협업해 유기 식기 납품을 추진하는 등 ‘전통의 현대화’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청장 이수자인 안유진 씨(26)도 이 씨처럼 전통공예 기술을 어떻게 이어 나갈지를 치열하게 고민 중이다. 안 씨는 “단청의 최대 매력은 화려한 색상”이라며 “목조건물의 병충해를 막아주는 등 기능적으로도 우수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이던 2008년 숭례문 화재를 보고 단청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됐다. 아버지의 금은방 앞에 있어 자주 보던 숭례문이 불타는 모습을 본 게 계기가 된 것.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뒤 자신의 꿈을 찾아 2019년 한국전통문화대에 진학해 단청을 전공했다. 디자인을 공부할 땐 컴퓨터로 간단하게 긋던 선을 장척(긴 자)으로 긋는 게 번거로울 때도 있었다. 단청의 나선형 무늬인 ‘고팽이’를 수천 번 그리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이 길로 들어선 걸 후회한 적은 없단다. 그는 인스타그램에 단청 작업 과정을 쇼츠(짧은 동영상)로 제작해 올리고, 초등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등 젊은 세대에게 단청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청색이나 금색을 많이 사용하는 중국 단청과 달리 오방색(노랑, 파랑, 빨강, 검정, 하양 등 전통색상)을 사용하는 한국 단청은 알록달록한 색의 조화가 돋보인다. 그는 “일상용품에 한국 단청의 아름다움을 적절하게 적용하는 방식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조선 후기 화가 단원 김홍도(1745∼?)가 그린 6폭 병풍 ‘김홍도 필 서원아집도 병풍’과 조선 후기 범종인 ‘남원 대복사 동종’이 보물로 지정된다. 25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1778년작 ‘서원아집도 병풍’은 중국 북송대 영종의 부마였던 왕선이 자신의 정원인 서원(西園)에서 문인들과 문예활동을 벌이는 장면을 그린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옛이야기 속 인물을 그린 그림)다. 6폭 병풍에 수묵담채로 표현된 이 작품은 중국 화풍을 차용했지만, 사슴과 학 등 복을 기원하는 길상적 의미의 동물들을 그려 넣어 조선화된 그림으로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화재청은 “병풍 상단에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의 감상평이 적혀 있어 김홍도의 예술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남원 대복사 동종은 승려 장인 정우 등이 1635년(조선 인조 13년) 제작한 범종이다. 종의 어깨 부분을 장식하는 입상연판문대(立狀蓮瓣文帶) 등은 고려시대 동종 양식을 계승하면서 종뉴(종을 매다는 고리)는 쌍룡의 외래 양식으로 제작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종이부채 오른쪽 밑에 흰 찔레꽃이 그려져 있다. 왼쪽 한편에는 나비 세 마리가 날고 있다. 단원 김홍도(1745∼?)가 중국 고대 사상가 장자의 나비 꿈 고사를 떠올리며 부채에 그린 그림이다. 부채에는 “장자 꿈속의 나비가 어찌하여 부채 위에 떠올랐느냐”는 시구가 적혀 있어 장자가 물아일체의 경지를 표현한 고사성어 ‘호접지몽(胡蝶之夢)’을 떠올릴 수 있다. 옛사람들의 꽃과 나비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표현법을 엿볼 수 있는 전시가 열렸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봄을 맞아 15일부터 상설전시관 서화실에서 ‘옛 그림 속 꽃과 나비’ 전시를 열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꽃과 나비 그림 15건 42점을 선보이고 있다. 조선 사람들은 장수를 상징하는 나비 그림을 자주 그리고 감상했다. 문인들은 꽃을 키우는 것이 마음을 닦고 덕을 기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집 안에 꽃밭을 만들었다. 조선 화가들은 꽃과 나비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모방했다. 그리기 교재인 화보(畵譜)를 통해 화면 구도와 꽃의 자태, 나비의 동작 등을 익혔다. ‘남나비’라고 불릴 정도로 조선시대 나비 그림을 잘 그린 것으로 정평이 난 화가 남계우(1811∼1888)는 나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능했다. 붉은 바탕에 금가루가 뿌려진 종이 위에 그린 그의 ‘군접도(群蝶圖)’를 보면 나비의 날개 무늬까지 섬세하게 표현돼 있다. 꽃 그림으로 이름이 높았던 화가 신명연(1809∼1886)의 그림도 전시돼 있다. 그는 식물 백과사전을 보면서 꽃에 대한 지식을 쌓고, 꽃을 자세히 관찰해 그림을 그렸다. 그가 비단에 채색한 꽃과 나비 그림은 분홍빛으로 물든 월계화와 노란색 호랑나비, 하얀 배추흰나비의 조화가 아름답다. 전시는 7월 28일까지. 무료.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어머니는 어떻게 결혼도 하고 출산도 할 수 있었을까?” 신간 ‘들리지 않는 어머니에게 물어보러 가다’의 저자는 이른바 ‘코다’(CODA·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 및 비청각장애인)다. 일본 미야기현 출신으로 2015년부터 작가로 활동하며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신간은 1950년대 가족 중 유일한 농인(聾人)으로 태어난 어머니의 삶을 취재해 쓴 에세이다. 신간을 집필하게 된 것은 할머니로부터 어머니가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사랑의 도피’를 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다. 당시 어머니의 가족들은 같은 농인인 아버지와의 결혼을 반대했었고, 가출을 계기로 겨우 결혼을 인정받았다. 저자는 늘 방글방글 웃기만 하는 어머니와 어울리지 않는 대범한 과거에 호기심을 갖게 된다. 저자가 캐낸 어머니 사에코의 유년기는 몹시 외로웠다. 청각장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부모가 그녀를 일반 학교에 보냈기 때문이다. 들리는 사람 속 홀로 들을 수 없어 늘 겉돌아야 했다. 가족들 모두 수어를 적극적으로 배우지 않았다. 사에코와 공통의 언어로 소통하지 않았던 이 가족의 역사는 20세기 중후반 일본 농인들이 경험한 소외의 시간과 같다. 사에코는 중학생이 되고 나서야 농학교에 입학해 친구들과 어울리며 생기를 찾는다. 그렇다고 가족들이 사에코를 무작정 외면한 것은 아니다. 사에코의 아버지 ‘긴조’는 딸의 손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며 딸에게 힘껏 말을 가르쳤다. 사에코의 엄마인 나에코는 딸의 귀가 낫도록 열심히 기도를 한다. 완벽하진 않지만 서툰 애정을 받는 어머니의 삶을 다각도로 취재해 복원해 내는 저자의 세심함이 돋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사에코 개인의 인생을 들여다보던 저자의 관심이 농인 사회 전반으로 확대됐다는 점이다. 저자는 1948년 일본에서 성립한 우생보호법의 불합리함을 꼼꼼히 파헤친다. 당시 패전 이후 양질의 인구 증가를 꾀하던 일본은 이 법을 이용해 유전성 질환, 한센병, 신체장애 등 56가지 질병과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강제 불임 수술을 시행한다. 1996년 모체보호법으로 개정되기 전까지 국가에 의해 강제 불임 수술을 받은 피해자는 1만6500여 명에 달한다. 관련 재판에 참석하고,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며 자신의 탄생이 커다란 운임을 깨닫는 저자의 모습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신간 ‘우리의 활보는 사치가 아니야’는 휠체어를 탄 여성 장애인에 초점을 맞춘다. 책은 뇌병변장애를 가진 여성이자 유튜버로 활동 중인 저자가 “더 많은 장애 여성이 몸을 던져 수많은 세계에 가닿을 때까지 달리겠다”며 기획한 메일링 서비스에서 출발했다. 10∼60대 여성 휠체어 장애인 6명과의 인터뷰가 담겼다. 소수자는 종종 ‘장애인’과 같은 한 단어로 묶여 호칭된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이들 모두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인간임을 깊이 느끼게 된다. 청소년과 비건, 장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10대 유지민 양, 노르딕 스키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20대 주성희 씨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특수교육학과 교수로서 한국과 미국의 특수교육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60대 김효선 씨까지…. 이들은 장애 여성으로서 산부인과 검진 의자에 올라가는 법, 가족으로부터 독립하는 법, 운동하는 재미 등 삶을 살아나가는 자신들만의 요긴한 꿀팁을 전한다.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우리 주변에 있는 멋진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 이후로 학부모와 교사의 관계가 거리감이 더 생긴 것 같아요.”신간 ‘다시 일어서는 교실’의 저자 송은주 씨(37)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2020년 밀레니얼 세대 교사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나는 87년생 초등교사입니다’가 화제가 된 이후 4년 만에 나온 신작 에세이다. 전작이 젊은 교사들이 안정성과 워라밸을 갖춘 교사들이 왜 교육 시스템에서 이탈하는지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14년 차 초등교사이자 초등학교 2학년생 아들을 둔 학부모로서 교육 현장 전반의 현실을 담아내려 했다. 그는 “(사건 이후) 학부모들은 학교에 문의하기 더 조심스러워하는 경향이 생겼고, 학교 역시 방문할 수 있는 행사를 줄이는 등 점차 폐쇄적으로 바뀌고 있다”며 “이 상황이 지속되면 서로가 답답한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송 씨는 책을 쓰기 위해 교사, 학부모, 교장, 교감, 교육부 관계자 등 110여 명을 인터뷰했다. 흔들리는 교권과 학부모와 교사 간 갈등 등 교육 현장의 해묵은 문제의 정답에 접근하기 위해서다. 책의 각 장도 △교사의 시선 △학부모의 시선 △학교의 시선 △공교육의 시선 등 이해 관계자의 입장을 고루 담았다. 그는 “학부모님들을 처음 인터뷰할 때 교사인 내 입장을 생각해서 자신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다 하기 어려워했다”며 “책의 70~80% 정도를 완성했을 때 다시 인터뷰를 요청해 보다 진심이 섞인 학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책에는 서이초 사건을 비롯해 잇따라 발생한 교사 사망 사건 이후 무력감을 느낀 교사들의 입장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송 씨와 인터뷰한 한 13년차 초등교사는 “올해만 잘 버티면 내년에는 또 새로운 아이들을 만날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며 “그런데 이상하게 최근 몇 년 전부터는 ‘내년에는 더하면 더했지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란 두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송 씨는 “교사와 학부모가 소통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문제가 생겼을 때 보호받지 못할 거란 생각에 점차 교사들이 노력하기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학부모들은 평범한 질문이나 문의조차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위축된 기분을 느낀다고 했다. 한 초등학교 4학년생 학부모는 “요즘 ‘맘카페’에 들어가서 보면 좀 무섭다”며 “학교나 선생님의 교육 방침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었을 뿐인데 ‘질문자의 의도가 궁금하다’는 댓글 등이 달린다”고 토로했다. 학부모 상담이 교사에게 과도한 부담을 준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소통 창구 중 하나였던 ‘상담 주간’도 점차 없어지고 있다. 송 씨는 “저도 막상 학부모가 되어보니 담임 선생님과 하는 상담 20분이 굉장히 짧다고 느꼈다”며 “학부모는 내 아이에게 집중해 주기를 바라고, 교사는 여러 아이를 만나야 한다는 입장의 차이가 큰 것 같다”고 말했다.그는 교육 현장의 문제가 교사와 학부모 간 대립관계 만으로 축소돼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송 씨는 “책을 쓰기 위해 인터뷰한 교사와 학부모 모두 아이들을 만나는 장소와 방법이 다를 뿐 아이들이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었다”며 “큰 목표는 같은데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서로 오해하고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한국 교육 정책의 가장 큰 단점으로는 ‘너무 급하다는 것’을 꼽았다. 예를 들어 애초 2025년 추진하기로 했던 늘봄학교는 정부가 일정을 앞당겨 올해 2학기부터 전면 도입될 예정이다. 늘봄학교는 맞벌이 부부 등을 위해 학교가 오전 7시~오후 8시 돌봄과 교육을 담당하는 제도다. 그는 “정책을 학생 중심으로 짜지 않고, 정치나 경제적 관점에서 만들어 급하게 집행하니 학생은 실험만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책에서 학부모들이 교사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토로한 사례를 미화 없이 쓰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가령 학교 폭력을 당하는 학생들을 외면하며 ‘그 정도면 심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거나, ‘아이들의 자유를 중시한다’며 수업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 등이다. 그는 “내가 교육계에서 교사이자 학부모로서 쓸 수 있는 책을 썼다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