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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B 자본주의’는 러시아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모든 반대는 오래전에 박멸됐다. 그 결과가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푸틴의 자멸적 결정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이너서클을 해부한 ‘푸틴의 사람들’(열린책들·사진)의 저자 캐서린 밸턴 씨는 최근 본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지난달 국내에 출간된 이 책은 16년간 파이낸셜타임스(FT), 로이터통신 등에서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낸 그가 2020년 낸 ‘Putin’s People’을 번역한 것이다. 밸턴 씨는 원서를 출간할 당시 “푸틴은 모든 정적을 확고하게 제거하고 자기 손에 권력을 집중시킴으로써 자신을 상자에 가둔 셈이 됐으며,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보니 사실상 빠져나갈 길이 없어졌다”고 했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예견된 일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푸틴의 사람들’에 따르면 KGB 출신 푸틴의 측근들이 빼돌린 막대한 불법 자금이 20여 년 전부터 러시아의 언론과 사법부, 의회를 장악했다. 저자는 KGB 출신 푸틴의 측근들이 서방의 장비를 부풀린 가격에 사들인 뒤 차액을 여론 조작 등 공작 자금으로 쓰는 구조를 ‘KGB 자본주의’라고 일컬었다. 이들이 돈을 뿌리며 지역 선거 결과는 물론이고 여론도 크렘린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법부와 의회도 이들 손아귀에 있다. 밸턴 씨는 “이들은 정적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도록 법관에게 명령하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법관 역시 징역에 처할 거라고 위협하는 ‘전화 재판(Telephone Justice)’ 시스템을 수립했다”고 했다. 러시아 의회는 지난해 3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침공’이라고 하는 이에게 최장 징역 15년형에 처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했을 때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행정부에서 합리적 결정을 내리는 구성원들은 이미 주변부로 밀려난 상태니까요. 지금 러시아는 대통령이 받는 객관적인 피드백 메커니즘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한때 ‘푸틴의 은행가’로 불렸으나 푸틴의 눈 밖에 나 추방된 러시아 재벌 세르게이 푸가체프는 밸턴 씨에게 자조하듯 털어놓았다. “푸틴 주위 사람들은 ‘양심’이란 단어를 잊어버렸어요. 그들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돼버렸어요.” 밸턴 씨는 “반대 목소리가 완전히 제거된 지금 오히려 고립된 건 푸틴”이라고 봤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많은 점령지를 잃는 등 전황이 더욱 나빠질 경우 안보 기관 내 일부 세력이 푸틴을 제거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1998년 모라토리엄 위기로 보리스 옐친 당시 대통령(1931∼2007)의 지지율이 바닥에 떨어지자 KGB와 주지사들이 대통령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옐친은 이듬해 물러났다. “러시아 엘리트 구성원들이 전쟁의 종식을 바라고 있습니다. 막대한 군사적 손실을 입는다면 푸틴을 탄핵할 수도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이들은 서로 반목할 겁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24년 전 고종이 대한제국을 방문한 독일 하인리히 친왕(親王)에게 선물한 갑옷과 투구, 갑주함(갑옷과 투구 보관함)이 현대 장인의 손길로 다시 태어났다. 문화재청 한국문화재재단은 20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서울 중구 덕수궁 덕홍전에서 특별전 ‘1899, 하인리히 왕자에게 보낸 선물’을 연다. 한독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전시에는 정수화 국가무형문화재 칠장 보유자 등 무형문화재 10명이 1년간 심혈을 기울여 재현한 고종의 선물 3점이 전시된다. 고종은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한 지 2년 뒤인 1899년 6월, 13일간 대한제국을 방문한 첫 국빈 하인리히 친왕을 영접하기 위해 황제의 행사를 관장하던 장례원(掌禮院)에 선물용 갑옷과 투구, 갑주함을 제작하도록 명했다. 당시 선물한 실제 유물은 독일 로텐바움 세계문화예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번 갑옷과 투구 재현에 참여한 이유나 경기도무형문화재 입사장(入絲匠) 이수자는 “124년 전 장인들이 내게 무언의 답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전시 출품작 3점은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에 기증된다.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러시아 문서보관소에서 우리말로 쓴 ‘해조신문(海朝新聞)’을 발견한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어요. 이 귀한 자료를 한 장이라도 놓칠까 봐 수천 장에 이르는 신문 자료를 전부 복사해 연구실로 가져왔죠.”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65)는 199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문서보관소 아시아·아프리카별관에서 1908년 창간된 러시아 최초의 한글 신문 ‘해조신문’을 처음 만난 순간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가 찾은 1908년 3월 21일자 해조신문에는 “연해주 동포들아…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기약하자”고 쓴 안중근 의사(1879∼1910)의 기고문이 실려 있었다. 반공 이데올로기 탓에 그때까지 국내 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블라디보스토크가 당대 독립운동의 주 무대였다는 증거였다. 박 교수는 해조신문 등 러시아 한인 신문 수천 장을 분석해 1995년 3월 ‘러시아한인민족운동사’(탐구당)를 펴냈다. 학계에서 이 책은 러시아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사를 조명한 최초의 책으로 평가받는다. 정년 퇴임(8월)을 두 달 앞둔 박 교수가 최근 학자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본 자서전 ‘100년을 이어온 역사가의 길’(선인)을 펴냈다.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16일 만난 그는 “돌아보니 그동안 집필한 책 50여 권 중 ‘러시아한인민족운동사’가 가장 뜻깊다. 이 책을 쓸 땐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연구실에 침대를 들여놓고 온종일 자료에 파묻혀 살았다”며 웃었다. “처음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 1986년의 시대 정신은 민주화였어요. 사학자로서 민주화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늘 고민했습니다. 좌우 이념 대립을 뛰어넘어 독립운동사의 저변과 외연을 넓히고 싶었어요.” 박 교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1860∼1920)의 생애를 복원하기도 했다. 함경북도에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조선 말기 러시아로 건너간 그는 1990년대까지는 자세한 행적이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사업으로 성공한 그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됐으나, 이를 사양하고 무장 투쟁을 벌이다가 192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돼 탈주 시도 중 총격으로 순국했다. 박 교수는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한 이듬해인 1991년 1월 곧바로 러시아를 찾아가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생존해 있던 최재형의 후손을 찾아 나섰다”고 했다. 1년간 수소문 끝에 러시아에서 최재형의 세 딸을 만났고, 최재형이 안중근 의사뿐 아니라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했으며 한인 신문 대동공보를 재발행했다는 사실 등을 밝혀냈다. 최재형의 큰딸은 “어릴 적 안중근 의사가 집에서 사격 연습을 했다”는 생생한 기억도 전했다. 박 교수는 2012년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역사공간), 2018년 ‘페치카 최재형’(선인)을 펴냈다. 박 교수는 “40년 가까이 연구하며 확보한 독립운동사 관련 사료를 선보이는 박물관을 열어 후학과 시민들의 것으로 남기고 싶다”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조선시대 사신을 태우고 일본을 오가던 조선통신사선을 재현한 선박이 대한해협을 건너 8월 5, 6일 일본 쓰시마(對馬)섬에서 열리는 ‘이즈하라(厳原)항 축제’에 참여한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부산문화재단과 쓰시마시, 이즈하라항 축제진흥회와 ‘쓰시마 이즈하라항 축제에 조선통신사선 뱃길 탐방과 참여를 위한 업무협약’을 17일 체결했다. 1964년 시작된 이즈하라항 축제에서는 1980년부터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해왔다. 이 축제에 조선통신사선이 참가하는 건 처음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018년 통신사선을 재현해 건조했지만 일본으로 가는 항해가 지체되다 이번에 성사됐다. 조선통신사선은 1607~1811년 12차례 일본을 오갔다. 이번에 재현한 통신사선은 길이 34.5m, 너비 9.3m, 높이 5m에 이르며 돛대와 함께 530마력 엔진 2개가 장착돼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1811년 이후 212년 만에 조선통신사선이 대한해협을 건너는 셈”이라며 “조선통신사선을 활용해 한일 문화교류를 더 활성화하겠다”고 밝혔다.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
그날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 함께 있던 친구들의 기억마저 서로 엇갈린다. 인민군들이 대한민국 국군 일등병 정대수의 손을 뒤로 묶고 고개 너머로 끌고 간 일, 이후 마을 사람들이 산속에 숨어 있던 어린 인민군을 잡아 산 채로 땅속에 묻었던 일,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최용호가 마을 사람들의 쇠스랑에 찔려 죽은 일…. 마을 사람들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었던 수십 년 전 그날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마을에 “내가 바로 최용호”라고 주장하는 한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죽은 사람이 살아왔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표제작은 6·25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을에 나타나 자신이 최용호라고 주장하는 남자는 온 동네를 뒤지며 그가 묻힌 자리를 파헤치고, 그와 연을 맺었던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옛일을 캐묻는다. 마치 무당이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듯 옛 기억을 불러낸 그로 인해 오래전 망각했던 기억들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가 진정 최용호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마을 사람들은 그날 자신들의 손에 죽었던 ‘빨갱이’ 최용호가 여전히 그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올해로 등단 60년이 되는 소설가 전상국(83)이 2011년 ‘남이섬’(민음사) 이후 12년 만에 펴낸 소설집이다. 책에 담긴 아홉 편의 중·단편소설 중 표제작을 포함한 4편의 이야기에 전쟁의 상처를 오늘날까지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등장한다. 단편 ‘저녁노을’은 6·25전쟁 때 팔 하나를 잃은 신재호란 남자가 노인이 돼 동창들 앞에 나타나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그의 명함을 받아 든 ‘나’는 어린 시절 팔 하나가 없단 이유로 그를 괴롭혔던 기억을 떠올린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현재진행형인 한국전쟁의 악령, 오늘날까지도 불신과 증오의 천형을 사는 사람들의 절규, 그 울분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라고 했다. 이어 “모두를 내려놓아야 할 나이에 잔불 살리듯 공을 들인 아홉 편의 중·단편소설을 모아 생애 마지막 소설집을 묶는다”고 썼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흑산도 홍어회가 우리 겨레의 걸작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이렇게까지 ‘프장데’(고기를 삭혀 더욱 고기 맛을 낸다는 의미의 프랑스어)해서 생선회를 먹는다는 것은 세계에 따로 예가 없을 것이다.”(‘미식가의 수첩’ 중) 4·19혁명 등 격변기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애쓴 언론인 홍승면 씨(1927∼1983)는 미식가들 사이에선 ‘원조 맛 칼럼니스트’로 통한다.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논설주간을 지냈던 그가 1976년부터 1983년 4월까지 여성지 ‘주부생활’에 연재했던 음식 칼럼을 상·하권으로 엮어 그의 사후인 1983년 11월 펴낸 ‘백미백상’(학원사)은 오늘날까지 미식 칼럼의 모범으로 꼽힌다. 오랜 시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던 ‘백미백상’이 최근 ‘미식가의 수첩’(대부등·사진)이라는 새 이름으로 재출간됐다. 책에는 한국 음식에 대한 예찬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식재료와 음식의 기원, 의미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고찰이 담겼다. 일례로 그는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 등에 실린 해삼에 관한 기록을 전하며 “그 당시는 아직 우리나라에 고추가 들어오지 않고 있어 지금처럼 초고추장에 해삼을 찍어 먹지는 못했다”고 설명한다. “승검초는 …당귀의 싹으로 꿀을 끼워 먹으면 매우 맛있다”며 제철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방법도 일러준다. ‘백미백상’은 2003년에도 2권의 책으로 재출간된 바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쪽빛으로 짙게 물들인 감지(紺紙) 위에 화려한 금빛으로 그려진 석가모니와 보살들…. 부처가 되는 길을 전한 14세기 고려 사경(寫經) ‘묘법연화경’ 가운데 한 권이 올 3월 일본에서 국내로 돌아왔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15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최근 환수된 ‘묘법연화경 권제6’을 공개했다. 이 유물은 불교 경전 중 하나인 묘법연화경을 금은니(金銀泥·금가루나 은가루를 아교풀에 개어 만든 안료)로 필사해 절첩본(折帖本·병풍처럼 접는 식으로 만든 책)으로 만들어졌다. 모두 접었을 땐 가로 9.5cm, 세로 27.6cm 크기로 접힌 면을 모두 펼치면 가로 길이가 1070cm에 이른다. 총 108면에 걸쳐 표지와 변상도(變相圖·불교 경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 경문으로 구성돼 있다. 공양 실천의 중요성 등을 적은 경문은 각 행에 17자를 담아 한 면당 6행씩 102개 면에 걸쳐 빼곡히 채워져 있다. 총 7권으로 이뤄진 ‘묘법연화경’ 가운데 6번째 권에 해당한다. 특히 총 4개 면에 걸쳐 금니로 화려하게 그린 변상도는 걸작이란 평가가 나온다. 배영일 대한불교조계종 마곡사 성보박물관장은 “완성도 높은 구성뿐 아니라 표현력이 정교하고 치밀한 것으로 보아 당대 최고 실력을 지닌 사경승이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13세기 고려 왕실은 사경을 전문 제작하는 사경원(寫經院)을 운영했고, 14세기에 이르면서 귀족들도 이곳 출신의 승려 장인을 통해 사경을 제작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유물에는 제작 시기와 배경, 제작자 등을 기록한 발원문이 적혀 있지 않다. 다만, 표지의 연꽃 문양 등 그림 양상이 현존하는 14세기 묘법연화경과 유사해 그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변상도에는 ‘묘법연화경 권제6’이 전하는 총 6가지의 불교 설화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림 오른쪽 부분에는 묘법연화경을 설법하는 석가모니불과 제자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림 왼쪽 위에는 사람들이 성을 내며 돌을 던져도 꿋꿋이 부처의 말씀을 전하는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 왼쪽 아래엔 활활 타오르는 화염 속에 자신의 몸을 바쳐 공양하는 약왕보살(藥王菩薩)이 나온다. 이 유물은 일본인 소장자가 지난해 6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매도 의사를 밝히며 세상에 드러났다. 재단에 따르면 국내외 현존하는 고려 사경은 150여 점으로, 이 가운데 60여 점이 해외에 있다. 7권 전권을 모두 갖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감지은니 묘법연화경’과 ‘상지은니 묘법연화경’이 국보로 지정돼 있다. 단권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감지금니 묘법연화경 권6’이 보물로 지정돼 ‘묘법연화경 권제6’ 역시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평가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구)이 상설전시관에 고대 그리스·로마실을 새로 마련했다. 박물관은 15일부터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화와 문화를 조명한 상설전 ‘그리스가 로마에게, 로마가 그리스에게’를 연다. 베누스(비너스) 조각상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의 소장품 126건을 선보인다. 전시 1부 ‘신화의 세계’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세계관을 소개한다. 고대 로마는 그리스 신화가 구축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받아들였다. 2세기경 로마에서 만든 ‘청동 유피테르(제우스) 전신상’과 ‘곤봉을 든 헤르쿨레스(헤라클레스)와 아들 텔레푸스 대리석 전신상’은 로마 신화가 그리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며 더 다채로워졌음을 보여준다. 2부 ‘인간의 세상’에서는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독자적으로 예술을 발전시킨 로마의 조각상에 주목했다. 그리스의 두상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로마는 여기에 생생한 묘사를 더했다. 곱슬곱슬한 머리 모양과 처진 눈꺼풀을 조각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초상’이 대표적이다. 3부 ‘그림자의 제국’은 무덤을 장식한 망자의 조각들을 통해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기억되길 바랐던 고대 그리스·로마인의 사후관을 소개했다. 전시는 2027년 5월 30일까지.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구)이 상설전시관에 고대 그리스·로마실을 새로 마련했다. 박물관은 15일부터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화와 문화를 조명한 상설전 ‘그리스가 로마에게, 로마가 그리스에게’를 연다. 베누스(비너스) 조각상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의 소장품 126건을 선보인다. 전시 1부 ‘신화의 세계’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세계관을 소개한다. 고대 로마는 그리스 신화가 구축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받아들였다. 2세기경 로마에서 만든 ‘청동 유피테르(제우스) 전신상’과 ‘곤봉을 든 헤르쿨레스(헤라클레스)와 아들 텔레푸스 대리석 전신상’은 로마 신화가 그리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며 더 다채로워졌음을 보여준다.2부 ‘인간의 세상’에서는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독자적으로 예술을 발전시킨 로마의 조각상에 주목했다. 그리스의 두상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로마는 여기에 생생한 묘사를 더했다. 곱슬곱슬한 머리 모양과 처진 눈꺼풀을 조각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초상’이 대표적이다. 3부 ‘그림자의 제국’은 무덤을 장식한 망자의 조각들을 통해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기억되길 바랐던 고대 그리스·로마인의 사후관을 소개했다. 전시는 2027년 5월 30일까지.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015년 프랑스 파리 한국문화원에서 민혜성 명창(51·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부가 이수자)의 판소리 공연이 열리던 때였다. 카메룬 출신 프랑스인으로 프랑스 대학에서 회계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로르 마포 씨(39)는 삼성전자 파리지사에 재직 중이었다. 한국어를 배우러 드나들었던 한국문화원에서 ‘춘향가’가 울려 퍼진 순간 “내 안의 억눌려 있던 소리를 모두 뱉어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민 명창을 찾아가 대뜸 “당신에게 배우고 싶다”고 했다. 민 명창은 “원한다면 10년이든 20년이든 가르쳐 줄 테니 한국으로 오라”고 답했다. 마포 씨는 2년 뒤인 2017년 직장을 그만두고, 반대하는 부모님을 뒤로한 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마포 씨는 “그날의 판소리 공연이 내 인생을 바꿔버렸다”고 했다. 올해로 7년째 민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있는 마포 씨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9일 만났다. 그는 능숙한 우리말로 “7년 전에 내가 불렀던 ‘흥부가’와 요즘 내가 부르는 ‘흥부가’는 완전히 다른 소리”라며 “갈고닦을수록 나의 소리를 찾아가는 판소리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소리의 끝이 어디인지 한계에 부닥쳐보고 싶다”고 했다.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개최된 한-프랑스 대통령 만찬 등 여러 무대에 오른 그가 꼽은 최고의 무대는 어머니가 사는 고국 카메룬의 한국대사관에서 2019년 열린 공연이다. 당시 그는 ‘사랑가’를 프랑스어로 불렀다. 그는 “판소리를 처음 들어보는 카메룬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어머니가 그제야 내 꿈을 인정해주며 ‘갈 데까지 가보라’고 했다”며 웃었다. 마포 씨는 2020년부터 한-아프리카재단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이사장 최정화)이 13일 서울 서대문구 주한 프랑스대사관저에서 ‘몰입과 히든 탤런트, 나누는 즐거움’을 주제로 개최한 ‘2023 문화소통포럼’에서 판소리 공연을 했다. 태권도 2단인 필리프 르포르 주한 프랑스대사가 태권도 시범을 선보이고, 미하엘 라이펜슈툴 주한 독일대사가 쇼팽의 녹턴을 피아노로 연주한 이날 무대에서 마포 씨는 흥부가 중 ‘가난타령’ 대목을 불렀다. 202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원에 판소리 전공으로 입학한 마포 씨의 꿈은 “언젠가 스승인 민 명창처럼 한국 아이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 살 땐 어딘가에 억눌려 내 소리를 내지 못했는데 한국에서 판소리를 배우며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며 “이제는 내가 느끼고 배웠던 판소리의 힘을 관객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 경기 연천군 은대리의 작은 연못에는 천연기념물 물거미가 산다. 국내에서 물거미 서식이 확인된 곳은 은대리뿐이다. 한데 2015년 가뭄으로 이 물거미 서식지가 말라붙는 일이 벌어졌다. 가뭄이 더욱 잦아진다면 물거미의 생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2. 충무공 이순신의 전공을 기념하는 국보 ‘경남 통영 세병관’의 기둥 양 옆에 끼워진 나무는 흰개미 떼가 갉아먹었다. 2021년 3월 국립문화재연구원이 세병관의 피해 실태를 파악한 결과 흰개미 떼가 목재의 겉과 속을 파먹어 목재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기후변화가 심각해지면서 문화재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기온, 해수 온도 상승으로 문화재에 피해를 주는 생물의 활동이 늘고 가뭄 등 기상이변으로 인한 피해도 커지고 있다. 문화재청은 기후변화를 위협 요인으로 인식하고 대응에 나섰다. 올해 7월 ‘기후변화 대응 종합계획 수립 TF’를 조직해 향후 5년간 피해를 예측하고, 피해 상황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계획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제주연안 연산호 군락, 해인사 전나무…사라지는 천연기념물기후변화로 인해 천연기념물 등 자연유산의 피해가 심각하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 따르면 2014년까지만 해도 세계 자연유산의 첫 번째 위협 요인으로 꼽힌 건 ‘침입 외래종 유입’이었다. 그러나 2017년 조사부터는 기후변화가 1순위 위협 요인이 됐다. 국내에선 ‘제주 바다의 꽃’으로 불리는 천연기념물 ‘제주연안 연산호 군락’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2021년 제주도 세계유산본부가 발표한 ‘제주연안 연산호 군락 내 유해 해양생물 제거 및 서식환경 개선사업’ 보고서에 따르면 난대성 해양생물 지표종인 담홍말미잘과 보키반타이끼벌레 등 유해 해양생물이 연산호 군락을 서서히 뒤덮어 고사 위기에 놓였다. 전문가들은 해수 온도 상승을 원인으로 꼽는다. 국립해양조사원에 따르면 인근 가파도의 8월 평균 수온은 2018년 24.9도에서 지난해 28.1도로 4년 만에 3.2도나 올랐다. 이원호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 학예연구관은 “해수 온도가 올라가면서 연산호 군락을 갉아먹는 난대성 해양생물이 제주 연안 생태계의 우세종이 됐다”고 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老巨樹) 179그루는 평년값을 크게 벗어난 극한기온 현상이나 자연재해에 취약하다. 기후변화로 잦아진 태풍도 노거수를 위협하고 있다. 수령이 250년이 넘은 경북 합천 ‘해인사 전나무’는 2019년 태풍 링링으로 완전히 부러졌다. 이 나무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 학자 최치원이 해인사를 지나다 꽂은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전설이 깃든 나무의 후계목이다. 문화재청은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해인사 전나무 등 천연기념물 노거수 2그루가 태풍 피해로 부러져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됐다”고 밝혔다.● 해인사 장경판전, 통도사 대웅전 흰개미로 몸살 목조건축 문화재는 기후변화에 특히 취약하다. 목재를 갉아먹는 흰개미 탓이다. 국보인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과 양산 통도사 대웅전, 통영 세병관은 모두 흰개미 떼의 피해를 입었다. 13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지난해 흰개미 피해로 방제를 실시한 국가지정 목조문화재는 조사 대상 78건 중 17건으로 피해율이 21.8%나 됐다. 올해 3월 문화재방재학회지에 등재된 ‘우리나라 기온 변화에 따른 흰개미 활성 변화 연구’ 논문에 따르면 지난 100년(1920∼2019년) 동안 한반도 기후변화로 흰개미가 활동하는 기간과 범위가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흰개미 분포 범위는 한 해 중 가장 추운 달의 평균 기온에 따라 결정되는데, 최근 30년(1990∼2019년)의 1월 연평균 기온은 첫 30년(1920∼1949년)보다 2.1도가 올랐다. 같은 기간 흰개미의 연평균 활동 일수는 212일에서 228일로 16일 늘었다. 흰개미 활동량이 늘면서 개체 하나가 연간 먹어치우는 목재의 양도 같은 기간 6.958mg에서 8.107mg으로 12.7% 증가했다. 김시현 국립문화재연구원 안전방재연구실 학예연구사는 “우리나라 기후가 점차 온난화되면서 흰개미 번식으로 인한 피해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흰개미 미리 탐지하는 시스템 개발 관련 기관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문화재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나섰다. 한국전통문화대 문화재예방보존연구소는 2021년부터 ‘사물인터넷 기반 흰개미 원격감시 통합 모니터링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이 시스템은 기존 흰개미 탐지 체계의 한계를 보완하는 기술로 꼽힌다. 문화재청에서는 2007년부터 인간보다 100만 배 뛰어난 후각을 지닌 흰개미 탐지견을 동원해 목조문화재에 침입한 흰개미를 탐지하고 방제해왔다. 그러나 탐지견을 통한 점검에는 한계가 있어 선제적 대응보다는 이미 흰개미 피해를 입은 목조문화재를 방제하기 위한 후속 조치에 가까웠다. 정용재 한국전통문화대 문화재예방보존연구소장이 개발 중인 새 시스템은 사전 예측을 할 수 있게 한 것이 핵심이다. 목조문화재에서 약 2m 떨어진 땅속 얕은 곳에 원격 통신이 가능한 ‘흰개미 탐지 디바이스’를 설치한다. 흰개미 떼를 유인하기 위해 기기 내부에는 이산화탄소를 분사한다. 30cm 길이의 기기 아래쪽 끝에는 4cm 길이 셀룰로오스 성분의 종이가 숨어 있다. 셀룰로오스는 나무 성분 중 흰개미가 가장 좋아하는 물질이다. 흰개미 떼가 좋아하는 환경으로 유인한 뒤 흰개미들이 기기 하단의 종이를 긁어먹으면 자동 경보 센서가 작동해 ‘목조문화재 흰개미 모니터링 시스템’에 전달된다. 정 소장은 “2025년 시범 운영을 목표로 현재 충남 부여군 한국전통문화대 내 산지 3곳에 탐지 기기를 설치해 시험하고 있다”고 했다.● 지역공동체, ‘자연유산 지킴이’로 나서기술보다는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일도 적지 않다. 문화재청과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는 올해 3월 ‘제주연안 연산호 군락’을 위협하는 유해 해양생물을 지역 주민과 함께 제거하기로 했다. 제주연안 연산호 군락이 서식하는 문섬과 범섬, 섶섬에 입도하는 낚시 어선 35척의 선주와 스쿠버 업체 120곳을 운영하는 전문 다이버를 ‘자연유산 지킴이’로 임명한 것. 전문 다이버들은 연산호 군락을 고사시키는 유해생물을 제거하고, 선주들은 선박 내 40L 쓰레기종량제 봉투를 두고 수시로 섬 주변 쓰레기를 치운다. 주민들은 “제주연안 연산호 군락이 고사하면 우리도 살길이 없어진다”며 적극 나서고 있다. 노거수 역시 인근 주민의 보살핌이 필수적이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3월부터 천연기념물 노거수 179그루를 가까이서 돌보는 지역 주민을 선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노거수 지킴이로 선정된 지역민 82명은 산불이나 수해 등 자연재해 때 수시로 노거수를 살피며 문화재청에 위기 상황을 알리고 있다. 이 같은 노력 덕분일까. 2017년부터 봄에도 싹을 틔우지 못하며 말라죽을 뻔했던 천연기념물 ‘강릉 오죽헌 율곡매’가 올 3월 14일 분홍색 매화꽃을 활짝 피웠다. 이원호 연구관은 “율곡매는 기온 상승과 일조량 증가 등으로 고사 위기에 놓였지만, 지역민과 지자체가 나무 주변에 차양막을 설치해 일조량을 조절하며 노력한 결과 다시 꽃을 피우게 됐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기후변화에 취약한 천연기념물을 지역 공동체와 함께 지켜나가는 ‘자연유산 지킴이’ 제도를 확장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소연 문화부 기자 always99@donga.com}
미국 추상미술의 거장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작품에는 비밀스러운 기교가 숨어 있다. 보존 전문가들이 로스코 사후에 작품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미술가들이 보통 사용하는 재료 이상의 특별한 재료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로스코는 유화 물감의 특성을 조정해 자신이 원하는 흐르기와 마르는 시간, 색상을 확보했다는 것. 로스코가 생전 이 사실을 알렸다면 그의 명성은 더 높아졌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째서 로스코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물감을 만들고도 이를 알리지 않았을까. 겸손해서였을까.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에서 게임이론을 가르치는 두 저자에 따르면 그 이유는 정반대다. 예술가들은 때로 자신의 기교를 숨김으로써 자신의 재능을 과시한다는 해석이다. 기교를 감추는 것은 ‘자신이 보내는 신호를 일부 사람이 못 봐도 괜찮다’는 의미다. 다수가 알아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소수의 평론가와 예술가들이 진가를 알아챌 때 거장의 면모는 더 인정받는다. 이 같은 전략은 고액 기부자 소사이어티에 속한 부자들이 익명으로 기부하는 이유와 같다. 평범한 사람들까지 기부 사실을 알 필요는 없다. 같은 소사이어티에 속한 고액 기부자들만 알아주면 된다. 저자에 따르면 신호를 숨기는 전략은 조직 내 입지가 확고한 이들이 자신의 지위나 권위를 교묘하게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다. 책은 두 저자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과와 하버드대 경제학과에서 선보인 강연에서 출발했다. 독과점과 정치, 경매, 범죄뿐 아니라 사랑에 빠진 연인이 ‘밀당’을 하는 이유까지 일상의 모든 행동을 게임이론으로 분석한 이들의 강연은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책은 이들의 강연대로 일상 행동 패턴부터 조직의 결정 등 인간 행동의 이유를 게임이론으로 풀어냈다. 게임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때론 살아남기 위해 이타적 존재가 된다. ‘독재자 게임’이 대표적이다. 이 이론은 익명의 실험 참가자에게 돈을 주고 다른 참가자와 나눠 가지는지를 확인한 행동경제학 실험에서 나왔다. A에게 20만 원을 주고 익명의 다른 참가자 B에게 자신이 원하는 몫만큼 나눠주도록 하는 실험이다. 이때 B는 A와 협상할 권한이 없다. A가 전액을 다 가져가도 B는 할 말이 없다. 그런데도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참가자의 70%가 주어진 돈의 25%가량을 B와 나눈 것. 서로의 신원이 알려진 경우에는 더 많은 돈을 나눈 경향도 나타났다. 이 실험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이 때로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의 기대에 보답하려 한다는 경향성을 밝혀냈다. 게임이론을 실제 제도나 행정에 접목하면 많은 이들로부터 이타적인 행동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한 호텔에서 투숙객들에게 수건 재사용을 권하며 ‘환경보호에 도움을 준다’는 안내메시지를 전했을 땐 참여가 저조했다. 하지만 ‘투숙객의 75%가 수건을 2회 이상 사용해 환경보호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문구를 바꾸자 수건 재사용이 급증했다.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동기를 이용하면 선의에 기댔을 때보다 더 높은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셈이다. 책은 외교나 군사 전략을 짤 때에만 게임이론이 적용되는 게 아니며, 일상이 곧 게임임을 흥미롭게 전한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이론에 따르면 ‘썸 타는’ 상대가 적극적인 신호를 보내지 않는 이유는 셋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조급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연애 경험이 많거나 천천히 시간을 갖고 장기적인 관계로 발전하길 원하거나 신호를 보낼 다른 파트너가 많거나. 원제는 ‘Hidden Games(숨겨진 게임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7세기 중엽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삼국을 통일했다’는 건 상식으로 통한다. 물론 고구려의 영역을 모두 통합하지 못했고, 외세의 힘을 빌렸다는 부정적 평가는 있지만 통일 자체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와 관련한 논쟁이 오래 이어져 왔다. 1980년대 들어 신라가 당나라군과 연합한 건 백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을 뿐 애초에 고구려는 신라의 정벌 및 통합 대상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달 31일 출간된 ‘신라는 정말 삼국을 통일했는가’(역사비평사·사진)는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해 관련 학계 논쟁을 정리했다. 각각의 주장을 펼치는 사학자 12명의 논문을 엮은 이 책에서 윤경진 경상대 사학과 교수(58)의 주장이 특히 주목을 받았다. 당대 삼국통일을 뜻하는 ‘일통삼한(一統三韓)’ 의식은 존재했을까. 기존에는 이 의식이 7세기 전후 신라에서 성립됐다고 보는 견해가 많았지만 윤 교수는 “신라 말기인 9세기 무렵 성립돼 고려의 태조 왕건이 완성시켰다”고 주장했다. 5일 전화로 만난 윤 교수는 “신라가 이른바 ‘삼국통일전쟁’을 벌였던 7세기 이전 사료에는 일통삼한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일통삼한 의식 7세기 성립설’의 중요 근거 중 하나가 충북 ‘청주 운천동 사적비’다. 1982년 공동우물터에서 발굴된 이 사적비에는 ‘合三韓(합삼한·삼한을 합쳤다)’이라는 문구와 686년을 뜻하는 당나라 연호 ‘수공 2년(壽拱二年)’이 새겨져 있다. 윤 교수는 이에 대해 “수공 2년이 등장하는 문장에는 ‘초가도 손질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나올 뿐 사적비가 이때 건립됐다고 볼 만한 단서는 없다”며 “686년은 비문이 아니라 사찰 건립 연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또 이 비문에 고려 초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사해(四海)’라는 말이 나오고, 나말여초 비문에서 전형적으로 나오는 아간(阿干)이란 직위의 명단이 있는 점 등을 바탕으로 윤 교수는 사적비 건립 시기를 9, 10세기경이라고 주장했다. 일통삼한 의식의 형성은 신라 내부 상황과 관련됐다고 윤 교수는 보고 있다. ‘신라 성주사비(聖住寺碑)’는 건립 시기가 문성왕 재위(839∼857) 때로 명확하고 ‘삼한(三韓)’이 언급된 사료 중 빠르다. 당시는 822년 왕위 계승 경쟁에서 밀려난 웅천주 도독(都督) 김헌창(?∼822)이 반란을 일으킨 뒤다. 윤 교수는 “옛 백제의 도읍이었던 웅천주에서 벌어진 반란은 백제의 복구를 뜻하는 위협으로, 신라가 내부 분열을 막을 이념적 근거로 삼국통일 관념을 만들어냈다”며 “실제 정치이념으로서 삼국통일을 완성한 건 태조 왕건의 고려”라고 했다. 기존 설에서는 당 태종이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뒤 신라에 주겠다고 한 ‘평양이남 백제토지(平壤已南 百濟土地)’를 ‘평양 이남의 고구려 영토와 백제 토지’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윤 교수는 평양 이남을 ‘고구려 영토’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오히려 통상적인 해석에 따라 “평양 이남이 곧 백제 토지”이고 백제 영토를 주겠다고 해석하는 게 합당하다는 견해다. 적어도 전쟁 이전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까지 모두 획득해 삼국을 통일하고자 전쟁을 벌인 것은 아니라는 게 ‘신라는 정말…’을 쓴 학자 대부분의 공통된 의견이다. 일통삼한 의식의 성립 시기는 전쟁 이후인 7세기 중후반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이번 책을 엮은 정요근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머릿말에서 “‘삼국통일’과 일통삼한 의식에 관한 주제는 한국 고대사 분야의 핵심적인 논쟁 주제”라며 “실증 논거를 바탕으로 한 논쟁이 더욱 발전되길 바란다”고 밝혔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처음엔 겁이 났습니다. 늘 주목받는 건 제가 만든 매듭이었지, 제가 아니었으니까요. 고민하다 결심했습니다. 뭔가를 해내려 하기보다 57년간 내가 매일같이 작업해 온 그대로 보여주자고요.”(김혜순 매듭장) 하나의 백자와 매듭이 만들어지기까지 작품에 깃든 장인의 손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국립무형유산원이 기획해 3, 4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무대에 오른 공연 ‘생각하는 손-흙과 실의 춤’은 김정옥 국가무형문화재 사기장 보유자(81)와 김혜순 매듭장 보유자(79)의 몸짓에 현대무용을 접목해 이를 드러냈다. 공연에서 김 사기장은 1막이 펼쳐지는 40분 내내 쉴 새 없이 발로 물레를 돌리며 찻잔을 빚었다. 무대에 오른 김 매듭장 역시 2막 내내 끈 틀 위에서 두 손을 엇갈리며 끈을 엮었다. 이들 뒤에 선 무용수들은 물레 위의 흙덩이처럼 몸을 돌리고, 끈 틀 위의 실처럼 얽히고설켰다. 보이지 않는 장인의 시간을 형상화한 것이다. 공연을 앞둔 김 사기장과 김 매듭장을 2일 각각 만났다. 이들은 “작품이 아닌 우리 자신이 주인공이 돼 무대에 오르는 것이 감격스럽다”고 했다. 특히 아들 김경식 사기장 전승교육사, 손자 김지훈 이수자와 함께 무대에 오른 김 사기장은 “3대가 함께 하는 공연이라 더 뜻깊다”고 했다. 김 사기장은 경북 문경의 도예가문 ‘영남요’의 7대 장인으로 1996년 보유자가 됐다. 아들과 손자가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이들은 전기 물레와 가스 가마 대신 전통 발 물레와 장작 가마를 고수한다. 공연은 전통을 고집하는 이들의 방식을 그대로 재현했다. 김 사기장이 발로 물레를 돌리며 찻잔을 빚는 동안 아들과 손자는 발로 흙을 밟고 손으로 달항아리를 빚는 식이다. “조선 왕실의 자기를 만들었던 사기장 후손들 가운데 오늘날까지 전통을 지킨 가문은 우리뿐입니다. 아들과 손자가 무대 뒤에서 나를 받쳐 주니 여한이 없습니다.”(김 사기장) 시누이이자 매듭장이었던 고 김희진 씨(1934∼2021)의 뒤를 이어 2017년 보유자가 된 김 매듭장은 “이번 공연을 통해 내가 배우고 얻는 것이 더 많다”고 했다. 그는 “이번 공연 덕에 50년 넘는 세월 동안 걸어온 나의 작업 역시 하나의 행위예술이었음을 깨닫게 됐다”며 웃었다. 이들이 무대를 통해 전하려는 건 ‘인고의 시간’이었다. 김 사기장은 “흙이 사기가 되려면 20가지가 넘는 작업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중엔 사람이 어쩔 수 없는 기다림의 시간이 있다”고 했다. 일례로 흙을 물에 풀어 구정물을 걸러내기까지 한 달이 걸린다. 김 사기장은 “욕심을 비운 무념의 몸짓을 통해 관객들에게 인고의 시간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김 매듭장은 “나는 작품을 만들 때 이 사물을 지닐 누군가를 상상한다”며 “늘 그랬듯 무대 위에서도 마음 의지할 곳 없는 누군가의 끈이 되어주고, 이들과 인연을 맺는 마음으로 임한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드넓은 우주, 서로 다른 초능력을 지닌 부족들이 ‘천 개의 세계’라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13세 세빈은 호랑이로 변신할 수 있는 초능력을 지닌 주황 부족에 속해 있다. 다른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이들은 무엇보다 부족의 명예를 중시한다. 세빈은 천 개의 세계를 지키는 우주군대에서 선장으로 복무하는 삼촌처럼, 부족의 명예를 드높이는 군인이 되고 싶다. 그토록 바랐던 우주군 합격통지서를 받아든 설렘도 잠시. 나쁜 소식도 함께 찾아온다. 삼촌이 반역죄로 기소됐다는 것. 우주를 파괴할 마법 물건을 훔치려고 군을 배신했다는 혐의였다. 주황 부족장은 즉시 세빈에게 “우주군에 입대해 삼촌을 지키라”고 명한다. 군 복무를 위해 부족을 떠나기 전, 세빈은 가족들 앞에서 맹세한다. “저는 모든 일에서 부족에 봉사할 것을 맹세합니다.” 한국계 작가로 미국의 공상과학(SF) 문학상 ‘로커스상’을 2017년 수상한 저자의 신작 장편소설이다. 난생처음 부족을 떠난 세빈이 우주군에 입대하며 자신이 알던 세상보다 더 크고 다채로운 우주를 경험하는 여정을 그렸다. 부족의 울타리에 머물던 세빈은 군대에서 새 친구들을 만난다. 천인(天人) 부족 유나와 이무기 부족 남규, 여우 부족 민…. 이들과 어울리며 그에게는 부족 말고도 지켜야 할 이들이 늘어난다. 이들이 탄 우주선에 적의 침입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렸을 때 세빈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부족의 맹세를 따를 것이냐, 부족보다 더 큰 우주를 지킬 것이냐. 과연 세빈은 무엇을 선택할까. 이 책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SF 소설 ‘퍼시 잭슨과 올림포스의 신’ 시리즈의 작가 릭 라이어던이 저자에게 “한국 신화와 스페이스 오페라를 결합한 이야기를 써 보라”고 권유하며 기획됐다. 소설에는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구미호와 우주를 떠도는 귀신, 영혼과 대화하는 무당 등 매우 한국적인 초능력이 등장한다. 우주 공용어는 한국어, 공식 의복은 한복이란 세계관도 흥미롭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닥종이는 ‘조선의 반도체’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수출품이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그 어떤 나라도 따라 할 수 없는 독자 기술력을 가진 산업이었어요.” 한반도 닥종이의 발전사를 조명한 ‘장인과 닥나무가 함께 만든 역사, 조선의 과학기술사’(푸른역사)를 최근 출간한 이정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교수(51·사진)가 말했다. 이 교수는 지난달 30일 인터뷰에서 “조선 백자처럼 아름답지도, 조선 후기 과학서만큼 사료가 방대하지도 않지만 닥종이야말로 조선의 과학기술사를 대표하는 발명품”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의 가장 혁신적 기술이 과학자 장영실(1390∼?)이나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이 아닌 이름 모를 지장(紙匠)들에 의해 발명됐다는 얘기다. 닥종이는 고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최고의 상품이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종이를 만드는 기술자를 촌장이나 부족장급인 5두품으로 인정했다. 신라산 닥종이는 당나라와 일본에 수출되며 인기를 끌었다. 송나라 재상 손목이 남긴 ‘계림지(鷄林志)’에는 “고려 닥종이는 윤택이 나고 흰빛이 좋아 ‘백추지(白硾紙·다듬이로 반드럽게 만든 흰 종이)’라 불린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교수는 여기서 ‘찧다’는 뜻의 한자 ‘추(硾)’에 주목했다. 그는 “이 한자는 우리 옥편에선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중국에선 쓰지 않는다. 고려의 지장들이 중국에 닥종이를 수출하면서 ‘石(석)’자와 늘어뜨린다는 뜻의 ‘垂(수)’자를 합성해 새 글자를 지은 것”이라고 했다. 나무껍질에서 얻은 섬유를 맷돌로 완전히 갈았던 중국과 일본의 지장과 달리, 한반도의 지장은 돌 위에 놓고 다듬이질하듯 빻았다. 이 교수는 “강한 섬유를 살려냈던 당대 지장들의 기지가 더 질기고 강한 종이를 발명해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만든 닥종이를 다시 다듬이질하는 도침(搗砧) 공정은 조선시대 지장들이 완성시킨 기술이다. 1425년 명나라 황제가 이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세종에게 ‘종이 만드는 방법을 적은 글’을 바치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이 교수는 “도침 공정을 거친 닥종이는 밀도가 높아져 현대의 플라스틱과 유사한 성분 구조를 갖게 된다. 이로 인해 조선의 닥종이는 방수 기능까지 갖추게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닥종이의 독특한 특성이 조선에 ‘휴지(休紙) 문화’를 만들어냈다”고도 했다. 15세기 중반 닥종이 수요가 폭발하면서 지장들은 사용된 종이를 물에 풀어 다시 새 종이로 만들기 시작했다. ‘승정원일기’ 등에는 실록 편찬 뒤 남은 초고를 ‘271권 4장 반’ 등 반 장까지 낱낱이 집계해 보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재활용하기 위해 종이를 보관하는 ‘휴지 행정’이 자리잡은 것이다. 지장들은 휴지로 옷과 가방, 물통을 만들기도 했다. 계암일록(溪巖日錄)에 따르면 17세기 유지의(襦紙衣·종이로 만든 겨울옷)는 비단저고리보다 비쌌다. 이 교수는 “닥종이를 변신시킨 지장들의 발명은 종이의 발명만큼이나 위대했다”고 강조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서울 광화문 월대(月臺) 발굴 과정에서 14∼1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재 시설이 확인됐다. 1866년 월대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광화문 앞 공간이 연희 등 목적으로 활용됐음을 짐작게 하는 흔적으로 분석된다. 30일 문화재청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월대의 어도(御道) 서쪽 하부에서 가로 76cm, 세로 56cm, 두께 25cm 크기 사각형 석재 1점이 최근 발견됐다. 석재 중앙에는 지름 6cm 크기 철제 고정 쇠가 박혀 있었다. 이 같은 석재는 경복궁 근정전이나 종묘 바닥에서도 확인된다. 양숙자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행사 때 차일(遮日·햇볕을 가리기 위해 치는 포장)을 바닥에 묶어두는 장치”라며 “19세기 월대가 지어지기 전에도 광화문 앞 공간에서 행사가 열렸음을 보여주는 유구”라고 했다. 세종실록에는 1450년 ‘광화문 밖에 채붕(綵棚·나무로 단을 만들고 오색 비단 장막을 늘어뜨린 무대)을 만들고 잡희(雜戲)를 베풀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석재 양옆으로는 약 85cm 너비 석렬(石列·돌로 열을 지어 만든 시설) 두 줄이 확인됐다. 기단 등을 놓기 위한 기초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유명 화장품과 잡화 브랜드가 즐비한 백화점 한복판에 ‘작은 박물관’이 차려졌다. 다음 달 4일까지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본점 지하 1층 코스모너지광장 출입구에선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의 문화재 상품 브랜드 ‘뮷:즈(MU:DS)’의 팝업스토어가 열린다. 132㎡ 남짓한 매장 진열대에는 국보 반가사유상과 조선백자를 본뜬 미니어처, 신라 토우(土偶·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의 상)로 장식된 유리컵 등 10개 품목 26종의 문화재 상품이 빼곡히 놓여 있다. 전통 문화재를 재해석한 박물관 상품을 백화점에서 선보이는 건 처음이다. 최근 전통 문화재를 바탕으로 한 디자인 상품이 인기를 끄는 등 ‘힙트래디션’ 열풍이 불고 있다. 힙트레디션이란 우리 전통에 MZ세대(밀레니얼+Z세대) 특유의 힙한 감성을 입혀 새로운 트렌드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문화재 기획 상품이 관광객의 기념품에 머무는 게 아니라 유리컵과 시계, 파우치, 우산, 휴대전화 케이스 등 일상생활 속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포함해 전국 국립박물관이 소장한 문화재를 모티브로 상품을 기획해 판매하는 국립박물관문화재단에 따르면 문화재 상품 매출액은 2020년 38억 원, 2021년 66억 원에서 지난해 117억 원으로 껑충 뛰었다. 지난해 매출은 2011년 재단이 출범한 후 최고액이다. 최근 재단이 선보인 자개소반 모양 무선충전기와 고려청자 문양 전자기기 케이스는 내놓자마자 품절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은 10년 넘게 민간 업체를 대상으로 문화재 상품 기획 아이디어를 공모해 왔는데, 올해 상반기(1∼6월) 154개 업체에서 798종의 상품을 출품했다. 김미경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상품기획팀장은 “지난 10여 년간 출품 규모 중 역대 최대”라며 “‘반가사유상 미니어처’ 등 문화재 기획 상품이 스테디셀러가 되다 보니 신진 디자이너들의 참여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힙트래디션 열풍에 대해 “문화에 관심이 많은 2030세대는 박물관에서 전시를 보는 것으로 멈추지 않는다”며 “예술 작품을 내 방으로 들여와 누리기를 적극적으로 원한다”고 말했다. 정병모 전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는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었던 문화재와 관련된 상품을 일상에서도 접할 수 있다는 것이 2030세대에게 의미 있게 작용한다”며 “문화재 소품은 고가의 미술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해 더 매력적으로 느낀다”고 분석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옛사람들이 나뭇조각을 좁고 길게 깎아 그 표면에 글을 기록한 것을 ‘목간(木簡)’이라고 한다. 충남 부여군 국립부여박물관에서 7월 30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백제 목간―나무에 쓴 백제 이야기’에서는 백제인의 일상이 담긴 목간 60여 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2018년 2월 부여군 쌍북리에서 출토된 유교 경전 ‘논어(論語)’의 구절을 새긴 목간 1점이 처음 공개된다. 길이 약 28cm, 너비 약 2cm 크기 두툼한 목간의 4개 면에는 논어 제1편 ‘학이(學而)’가 일부 새겨져 있다. 특히 논어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로 꼽히는 ‘자왈학이시습지 불역열(子曰學而時習之 不亦悅·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과 ‘유붕자원방래 불역락(有朋自遠方來 不亦樂·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을 볼 수 있다. 이 목간은 6세기 무렵 완성된 논어 주석서 ‘논어의소(論語議疏)’에서 주석을 제외한 논어 본문만 일부 기록한 것으로 파악된다. 김지호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 목간은 당대 백제에서 관리를 뽑을 때 사용한 임용시험 문제지였거나 시험을 대비한 문제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관리 임용시험 때 응시자들에게 논어 본문을 새긴 목간을 제시해 이에 대한 정확한 풀이를 답할 수 있는지를 평가했을 것이란 해석이다.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황순원의 단편소설 ‘독 짓는 늙은이’에 등장하는 노인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독은 모조리 깨버린다. 최고의 독을 만들려는 장인의 고집이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은 자신이 생성한 그림을 이 노인처럼 파괴할 수 있을까. 미국 럿거스대 예술과인공지능연구실에서 2019년 발표한 알고리즘 ‘AICAN’은 한꺼번에 수도 없이 많은 그림을 만들 수 있다. 15∼20세기 미술사에 등장했던 화가 1119명이 그린 8만1229점을 학습해 새로운 그림을 내놓는다. 이전 작품들과 유사하면서도 기존 스타일과는 가능한 한 다른 그림을 만들도록 설계됐다. 모방 속에서 자기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만드는 과정마저 인간 예술가와 다르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AICAN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자기 작품에 대한 송곳 같은 평가다. 이 알고리즘은 ‘독 짓는 늙은이’처럼 스스로 만든 작품을 파괴할 수도, “이게 내 최고작”이라고 선언할 수도 없다. 과학기술 철학자인 저자는 “하나의 그림이 완성됐다고 판단할 권리는 화가에게 있다”는 세계적 미술사학자 언스트 곰브리치(1909∼2001)의 말을 인용해 되묻는다. 예술의 완결성을 판단할 수 없는 AI가 과연 예술가인가, 그런 AI가 무작위로 만든 그림을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가. 저자는 “가치를 평가하고 표현하는 일이 예술과 문학의 원천에 있다면, AI는 아주 세련되고 훌륭한 도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고 분석한다. 비평이야말로 예술창작에 있어 인간의 마지막 보루로 남을지 모른다는 전망도 담았다. 저자는 교육, 학술 등 일상의 여러 면에서 코앞으로 다가온 AI 시대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AI와의 공생 방법을 찾는다. AI를 잘만 활용하면 인간은 최고의 조력자를 얻을 수 있다는 것. 독일 기업 ‘딥엘(DeepL)’이 내놓은 AI 번역 서비스에 두꺼운 과학책 문서 파일을 올리면 순식간에 책 한 권이 번역된다. AI가 번역에 걸리는 시간을 단숨에 줄여주는 것이다. 저자는 “AI 번역 서비스 덕분에 앞으로는 전 세계 동시 출간도 많이 시도될 것”이라며 “AI가 도움이 되는 측면은 ‘생성’ 자체보다 ‘생산성’에서 더 찾아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AI가 인간을 위협할지 모른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위기는 AI에서 오는 게 아니다. 위기의 본질은 혁신하지 못하는 타성과 고착에 있다”는 입장이다. 이 지적은 국내 전문가 집단과 교육자들을 겨냥한다. 기존에 전수돼온 지식을 정리하는 것은 AI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어서 머지않아 AI로 대체될지 모른다. 미래의 대학과 교실은 교과서에 정립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을 발굴하고 창작하는 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인 AI를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 다시 발견하게 됐다”고 했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고민할 자유’다. 주어진 알고리즘을 따르기만 하는 AI와 달리 인간은 스스로 반문하고 명령을 내리고 자기만의 해법을 찾아나간다. AI와 다른 인간의 본질을 고찰한 저자의 고민 속에서 AI 시대 인간이 길러야 할 역량이 무엇인지 답을 얻을 수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