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채은

전채은 기자

동아일보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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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전채은 기자입니다.

chan2@donga.com

취재분야

2024-10-31~2024-11-30
문학/출판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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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일반7%
역사3%
  • “亞여성이 왜 백인 性중독 해소 대상?” 에릭남 타임지에 비판글 기고

    “(인종적 동기가 없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순진하고 그 자체로 인종차별적입니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벌어진 총격으로 아시아계 여성 6명을 포함해 모두 8명이 희생된 사건에 대해 한국계 미국인 가수 에릭 남(33)이 미 시사주간지 타임지에 인종주의적 미국 사회를 비판하는 기고문을 게재했다. 19일(현지 시간) 에릭 남은 ‘만약 당신이 애틀랜타에서 벌어진 아시아계 대상 폭력에 놀랐다면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던 겁니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인종주의라는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는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비판했다. 애틀랜타에서 태어나고 자란 에릭 남은 “검찰과 경찰이 이번 사건을 증오범죄로 규정할지를 여전히 토론하는 동안 나를 포함한 수백만 명의 아시아·태평양계 사람들(AAPI·Asian Americans and Pacific Islanders)은 버려진 기분을 느낀다”고 썼다. 그러면서 “AAPI의 경험은 불안과 정체성 위기로 가득 차 있다. 미국 문화는 백인 우월주의와 조직적 인종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 속에서 아시아인은 ‘영구적인 외국인’이거나 ‘모범적인 소수민족 신화의 주인공’이었다”고 지적했다. 현지 경찰이 사건을 총격범 로버트 에런 롱의 성 중독 문제로 접근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AAPI는 배제되고 억압받았으며 성적 대상이 됐다”며 “왜 우리 공동체의 여성들을 당신들의 성 중독 해소 대상이자 희생자로 표현하나.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나”고 썼다. 에릭 남은 “이제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 지금 침묵하는 것은 곧 공모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해 절실히 필요한 변화를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야만 한다”고 덧붙였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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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편혜영표 서스펜스를 읽다

    치매를 앓는 아버지에게 수면제를 먹이는 딸, 옥수수 밭 한가운데의 집으로 찾아와 계약을 강요하는 보안업체 직원들. 이들이 지키려는 건 약속대로 상대방의 재산과 목숨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 독자들은 편혜영의 신작에서 이 석연찮은 관계를 바라보며 불편함에 빠져들게 된다. 이 책은 저자의 여섯 번째 단편소설집이다. 각 작품에서 인물들은 모두 현재 머물던 공간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새로운 공간은 소도시나 시골이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장소에서 이들은 고립과 위협에 시달린다. 몰아치지 않으면서도 긴장감을 쌓아가고 어느새 독자를 서늘한 진실의 공간으로 안내하는 ‘편혜영표 서스펜스’가 펼쳐진다. 단편 ‘호텔 창문’에선 죄 없는 죄의식을 그렸다. 주인공 ‘운오’는 물에 빠진 자신을 살리다가 목숨을 잃은 사촌형으로부터 19년째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사촌형의 기일을 맞아 찾아간 큰아버지 집에서 운오는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자책의 유혹에 이끌리는 인물들의 대화에서 작가의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반면 단편 ‘리코더’에선 어떤 감정을 떨쳐낼 수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빚더미에 앉은 ‘무영’이 고등학교 동창 ‘수오’의 집에 얹혀살게 된 지 얼마 안 돼 수오가 증발하듯 사라진다. 이 두 사람은 고교 시절 수련장 붕괴 사고에서 가까스로 구조된 생존자들. 수오의 실종을 뒤쫓는 과정에서 무영은 수오가 사고 후 지금까지 자신과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혀 살았음을 알게 된다.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흔히 볼 수 없던 물기 어린 시선을 이 작품에선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홀리데이 홈’ ‘플리즈 콜 미’ ‘후견’ 등 이어지는 단편들에서 작가는 한층 더 깊고 치밀해진 시선을 보여준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언제나 처음에 쓰려던 이야기와 조금 다른 자리이거나 전혀 다른 지점에서 멈춘다. 이제는 도약한 자리가 아니라 착지한 자리가 소설이 된다는 걸 알 것 같다”고 썼다. 작가조차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의 결말이 독자들에게 긴 여운을 남길 것이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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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 쓰시네’가 소설 쓰게 했다”

    “진보, 보수와 같은 프레임이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게 합니다.” 신작 장편소설 ‘장자의 비밀정원’ 출간을 앞둔 김호운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71·사진)은 17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김 이사장이 이 책을 쓴 계기는 본의 아니게 휘말린 정치 세태 때문이었다. 김 이사장은 지난해 7월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의 발언을 비판한 이후 일각의 공격을 받게 됐다. 추 전 장관이 국회에서 아들의 군 휴가 미복귀 의혹 질의를 받자 “소설 쓰시네”라고 받아친 게 발단이었다. 한국소설가협회는 “한 나라의 법무부 장관이 소설을 ‘거짓말 나부랭이’ 정도로 취급하는 나라에서 문학을 융성시키기 어렵다. 소설 쓰는 것을 거짓말하는 행위에 빗대어 소설가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준 정치인들은 각성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 이사장은 “당시 성명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단지 소설가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발표됐다. 하지만 이후 협회는 일부 여권 인사와 지지자들로부터 심한 조롱과 모함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에 따르면 일부 여권 지지자들은 그의 출신지(경북 의성)를 근거 삼아 보수정당 지지자로 몰아가고, 흐릿하게 찍힌 보수 집회 사진을 두고 김 이사장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리기도 했다. 그는 “당시 목도한 한국의 정치 세태가 이번 소설을 쓰게 된 계기”라고 밝혔다. ‘장자의 비밀정원’은 중국 춘추시대 등 과거의 이곳저곳을 비행하는 나비를 화자로 내세워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장자의 철학을 재조명하는 작품이다. 김 이사장은 “모든 사람이 본성을 이해하고 지혜롭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썼다”고 말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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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교는 못 가도 책은 읽어야죠”

    “배송 차량이 일주일에 서너 번씩 집 앞을 지나다니는 걸 보고 우리 동네에 이용자가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서울 강남구에서 초등학교 2학년 자녀를 키우는 A 씨(35·여)는 스마트폰에 설치한 ‘우리집은 도서관’(우도)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어린이 책을 빌리고 있다. 이 앱은 이용자들이 집에 소장한 도서를 서로 빌려 볼 수 있는 도서 공유 서비스. A 씨는 “학년별 필독서는 물론이고 공공 도서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영어 원서 동화책까지 등록돼 있어 다양한 책을 아이에게 읽힐 수 있다”고 말했다. 유·초등 자녀를 둔 부모들을 중심으로 ‘비대면 도서 공유 서비스’ 이용자가 최근 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등교 수업이 준 데다 공공 도서관 이용이 제한되면서 아이에게 책을 읽힐 새로운 수단이 필요한 데 따른 것. 2019년 12월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약 37만8000권의 도서가 우도 앱에 등록됐다. 이 중 약 17만8000권(47%)이 올 들어 새로 등록된 책이다. 이용자들은 신간은 물론이고 희귀한 책들을 집에서 받아볼 수 있다는 것과 도서관에 비치된 책에 비해 상대적으로 책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는 걸 장점으로 꼽는다. 각 가정에서 아이들의 다양한 취향이 반영된 책들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한 이용자는 “유아용 도서 중에는 CD가 포함된 게 많은데 도서관에는 분실 우려로 이를 빼놓는 경우가 많다”며 “공유 서비스에서 책을 빌리면 부속품을 함께 이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고 했다. 우도 앱에 등록된 도서는 2주 동안 빌려 볼 수 있다. 이용자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책을 100권 이상 앱에 등록해야 다른 사람에게 대여료를 받고 책을 빌려줄 수 있다. 대여료는 이용자가 정하는데 통상 500∼2000원 수준이다. 이 중 70%는 대여자가, 30%는 앱 운영 업체가 각각 가져간다. 책 대여자는 대출자와 직접 만나 책을 전달하거나 앱 업체에 배송을 맡길 수 있다. 서울 서초 강남구 등 일부 지역은 업체가 직접, 나머지 지역은 배달업체가 배송한다. 대출을 신청하면 통상 3, 4일 내로 현관 문고리에 걸린 책가방에 책을 넣어준다. 앱 운영 업체인 스파이더랩에 따르면 이용량의 70%가 서울 서초 강남 송파 등 강남 3구와 강동구, 경기 성남시 분당구 등 교육열이 높은 지역에 집중돼 있다. 대출 도서의 85%는 5∼13세 대상 어린이 도서다. 이에 따라 학년별 추천 도서와 필독서를 제안하는 서비스도 운영 중이다. 원용준 스파이더랩 대표는 “지금은 서울과 수도권 일부 지역에 이용자가 집중돼 있지만 향후 직배송 서비스를 확대해 지방 서비스에도 주력할 생각”이라며 “올해 전국 등록 도서 100만 권을 달성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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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학조사로 개인정보 순식간에 전파…완치 뒤에도 ‘성북구 13번 확진자’…”

    “지난해 5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 클럽 집단감염 발생 당시 방역당국이 수집한 개인정보가 이후에 어떻게 처리됐는지 묻는 사람이 있나요?” 한국인 최초이자 유일한 유엔 시민적·정치적권리위원회 위원인 서창록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60)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되짚으며 이같이 말했다. 자신이 코로나19 확진자이기도 했던 서 교수는 방역의 중요성과 의료현장의 긴박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감했다. 하지만 그는 “방역과 인권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코로나19 확진자이자 완치자로 경험한 내용을 엮어 에세이 ‘나는 감염되었다’(문학동네)를 9일 출간했다. 책에는 인권 전문가의 시선으로 읽어낸 한국 사회의 면면이 촘촘히 기록됐다. 그는 11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 완치 수개월 뒤에도 서울 성북구청 웹사이트에 남아있는 ‘성북구 13번 확진자’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구청에 직접 전화를 걸어 삭제 요청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성북구 13번 확진자’는 그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순간 그의 신분이 된 타이틀. 방역당국은 그의 동선을 파악하기 위한 구두 조사와 신용카드 결제기록 외에도 얼굴사진을 요구했다. 매장 내 폐쇄회로(CC)TV 녹화 화면과 서 교수의 얼굴을 대조하기 위해서였다. 역학조사를 위한 목적이었지만 ‘거짓말 할 가능성을 의심 받아도 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경험은 서 교수에게 낯설었다. 그는 “성별과 나이, 직업, 동선이 순식간에 언론에 전파됐다. 동선을 제외한 정보들이 방역과 무슨 상관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서 교수가 국립중앙의료원에 입원할 때도 낯선 경험은 이어졌다. 당시 자가 격리 이탈자뿐 아니라 방역수칙을 충실히 이행하는 일반 자가 격리자에게도 이른바 ‘안심밴드’를 채워야한다는 주장이 나왔었다. 서 교수는 책에서 “(자가 격리자는) 범죄에 연루된 것도 아니고 확진을 받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범죄자 취급을 할 수 있는가”라며 “긴급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한국에선 너무 적었다”고 썼다. 책에는 사회에 대한 비판만큼이나 자기반성의 메시지도 담겼다. 서 교수는 지난해 3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체제학회’에 참석한 이후 코로나19에 감염됐다. 그는 당시 만난 동유럽 국가 출신 이민자와 중국인 교수를 향해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었다고 고백했다. 제목 ‘나는 감염되었다’에는 서 교수 스스로도 코로나 확진자와 접촉자에 대한 혐오 시선에 젖어있었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어찌 보면 자신의 치부를 솔직히 드러낸 이유를 묻자 그는 담담히 답했다. “저도 대중과 비슷한 편견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코로나19 감염은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 됐으니까요.”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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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은 정원에서 누리는 충만한 치유의 에너지

    노란 햇살을 맞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식물들을 가만히 바라볼 때, 흙냄새를 맡으며 녹음이 우거진 길을 거닐 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누구나 해본 적이 있을 테다. 복잡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한숨 돌리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30년간 정원을 가꿔 온 미국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수 스튜어트 스미스는 식물이 인간의 정신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과학적으로도 증명 가능하다고 말한다. 마당이 있는 집보다 공동주택에 사는 이들이 더 많은 한국에서조차 홈 가드닝 열풍이 부는 이유가 집에 갇힌 사람들의 무료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전쟁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저자의 외할아버지는 트라우마로 고통받다 식물을 가꾸며 일상을 회복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저자의 어머니 역시 인생의 위기 때마다 땅을 파고 잡초를 뽑으며 상실의 고통에 대처했다. 저자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된 후 식물이 사람을 치유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식물을 두고 전 세계에서 이뤄진 각종 연구 결과를 그러모아 이 책에 담았다. 식물은 특히 도시생활자에게 중요하다. 도시는 경제의 엔진이고 문화의 중심지이지만 도시 생활에는 대가가 따른다. 시끄럽고, 붐비고, 오염된 환경에서 도시인들은 내면에 좌절, 피로감, 불안, 적대감을 쌓아 간다. 땅은 부동산으로서의 가치와 그에 대한 수요 때문에 대도시에 남아 있는 소규모 녹지는 늘 위협을 받는 처지다. 저자는 가로수의 존재만으로도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 시카고대 환경과신경과학연구소가 2000년대 초반 캐나다 토론토의 한 주거지에서 벌인 연구에 따르면 블록마다 나무 열 그루만 더 있어도 소득이 1만 달러(약 1100만 원) 늘어나는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감소한다. 미국 일리노이대는 나무와 정원을 갖춘 건물 근처에서는 범죄율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녹지가 부족한 곳에 정원을 꾸미거나 나무를 심으면 범죄율을 7%까지 낮출 수 있다. 원예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연구자들은 최초의 원예가 5만3000년 전 동남아시아 보르네오섬의 열대 숲에서 시작됐다고 본다. 이곳 정글의 토양과 강우 패턴을 분석한 결과 거주민들은 낙뢰 맞은 땅을 보고 불의 힘을 이용해 땅을 비옥하게 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사람들은 물길을 만들고 잡초를 뽑고 모종을 이식하며 자연을 인간의 손길로 가꿨다. 경작은 거친 땅을 ‘인간화’하는 작업이다. 영어 단어 ‘culture(문화)’의 어원은 ‘cultivate(경작, 재배)’에서 왔다. 인간이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재배하기 위해 식물을 심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연구자들의 의견은 다르다. 고고학자 앤드루 셰라트는 “사치 작물을 기르는 원예에서 필수 작물을 기르는 농업으로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원예가 처음부터 문화의 표현이었다는 의미다. 2005년 미국 럿거스대의 연구에 따르면 선물로 꽃을 받은 집단과 다른 물건을 받은 집단을 비교했을 때 꽃을 받은 이들은 모두 ‘뒤센 미소’(진짜 기쁨과 행복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웃음)를 지었다고 한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요즘, 소중한 사람에게 싱그러운 식물을 선물하는 건 어떨까.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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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리즈 제작 늘고 인기 콘텐츠는 ‘스핀오프’… 동화책 ‘집콕 특수’ 날개달고 다양한 기획 붐

    아프리카 초원에서 살아가는 사자 ‘와니니’와 그의 친구 하이에나, 버펄로, 하마들의 이야기. 생경한 풍경에서 펼쳐지는 야생동물들의 이야기가 어린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난달 출간된 이현 작가의 동화 ‘푸른 사자 와니니’ 시리즈(창비) 3권은 출간 1주 만에 예스24 어린이문학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더니 출간 3주가 지난 현재까지 3만 부가 제작됐다. 1권과 2권은 각각 20만, 10만 부가 판매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지난해부터 동화책 시장에 순풍이 부는 가운데 여기에 힘입은 출판계가 다양한 콘셉트의 동화책 기획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2017∼2019년 아동 분야 신간은 4200권 내외를 유지했지만 지난해 4617권으로 증가했다. 특히 어린이 문학과 교양서가 각각 150권, 270권 늘어 증가 폭이 컸다. 시리즈물 제작에 나서는 출판사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 특징 중 하나다. ‘푸른 사자 와니니’의 경우 2019년 1월 1권을 출간할 때만 해도 단행본으로 제작됐다. 독자들의 지속적인 요청으로 같은 해 8월 2권이 출간됐고, 3권 제작 단계부터는 아예 총 10권짜리 시리즈로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유병록 창비 어린이출판부장은 “동화책 시장이 성장세에 들어섰다고 판단해 비용이 많이 드는 시리즈 제작에도 자신감을 얻게 됐다. 흥미로운 영상 콘텐츠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은 이야기가 이어지는 문학 작품들에 큰 매력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출간 10년이 지난 단행본이 뒤늦게 시리즈로 제작된 사례도 있다. 비룡소는 2010년 펴낸 동화책 ‘만복이네 떡집’의 2, 3권인 ‘장군이네 떡집’ ‘소원 떡집’을 지난해 4월 출간했다. ‘만복이네 떡집’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심술을 부리던 주인공 ‘만복이’가 신비한 떡집을 발견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김리리 작가의 작품이다. 출간 이후 현재까지 30만 부가 넘게 판매됐다. 2권은 1권 말미에 잠깐 나오는 ‘장군이네 떡집’을 전면에 내세웠다. 박지은 비룡소 편집주간은 “2, 3권이 각각 10만 부 이상 판매되면서 10년 전 작품인 1권도 10만 부가 더 팔렸다. 동화책 시장이 침체기일 때는 시리즈물을 쉽게 시도하지 못했는데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고 말했다. 인기 콘텐츠를 스핀오프한 동화책도 제작됐다. 지난해부터 3권째 출간되고 있는 ‘흔한 남매 안 흔한 일기’ 시리즈는 구독자 214만 명을 자랑하는 인기 유튜브 채널 ‘흔한 남매’의 스핀오프 동화책이다. ‘흔한 남매’ 영상에는 코미디언 장다운, 한으뜸이 출연해 남매를 콘셉트로 다양한 상황극을 펼친다. 인기가 높아지자 아이세움은 이 콘텐츠의 스핀오프 만화책과 동화책을 제작했다. 이현정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담당자는 “어떤 콘텐츠가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같은 설정을 가지고 매체와 형식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가공하려는 움직임이 돋보이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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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양한 북방민족 역사 연구가 ‘中 역사굴기’ 막는 대안”

    중국 헤이룽장성 동북부에 있는 면적 12만 km²의 삼강평원에서는 두만강, 연해주 일대에서 발굴된 집자리, 토기와 비슷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두만강 유역에서 발흥한 옥저 계통의 문화가 삼강평원까지 북상한 흔적이다. 농사를 지어 생활했던 옥저인은 북쪽에서 찾은 기름진 땅에서 300여 년간 살며 거대한 성터를 일궜다. 이곳에서는 250여 기의 성터가 발견됐고, 이 중 가장 큰 성터는 풍납토성의 규모를 능가한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51)가 지난달 발간한 책 ‘옥저와 읍루’에는 옥저와 읍루에 대해 새롭게 발굴한 고고학적 결실이 담겼다. 옥저는 기원전 4세기∼서기 246년, 읍루는 기원전 4세기∼서기 559년경 존재했던 북방민족이다. 강 교수는 10년간 러시아와 중국, 한국을 다니며 알려진 사실이 많지 않은 북방민족인 옥저와 읍루를 연구했다. 그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양한 북방민족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중국의 역사 팽창주의를 막는 대안이 된다”고 말했다. 강 교수의 연구로 새롭게 알려진 사실은 크게 두 가지다. 그동안 삼강평원에서 발견된 성터를 옥저인이 지은 것이라고 보는 연구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강 교수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삼강평원의 각종 유물들은 옥저인의 문화와 똑같았다. 잡곡농사에 유리한 지역을 따라 이동했던 옥저인의 습성을 고려하면 이동경로 역시 설명 가능했다. 강 교수는 “이 책 출간과 비슷한 시기에 삼강평원을 연구하는 중국학자들도 이 성터의 주인을 옥저인으로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중국 헤이룽강 하류에서 쑹화강 유역에 걸쳐 있는 읍루 지역에서 기원전 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강철화된 철도끼가 발견됐다는 점도 강 교수가 꼽는 학문적 성과다. 이는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국내 연구자가 거의 없는 분야인 북방민족을 연구하는 강 교수는 “북방민족 역사가 한국의 역사가 맞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북방민족의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네 것과 내 것을 나누는 것은 한국사 왜곡의 지름길”이라며 “역사의 다변적인 흐름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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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생 딱 한번 나오는 인생 이야기 찾아다녀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김이나의 ‘김이나의 작사법’…. 문학동네의 15년 차 에세이 편집자 이연실 씨(37)가 내민 명함 앞면엔 서점 매대에서 한 번쯤은 본 책들의 제목이 빼곡했다. 뒤집어보니 원고지 양식의 빨간색 칸에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며 보호할 수 있기를’이라는 일본 만화책 ‘중쇄를 찍자!’의 대사가 쓰여 있었다. 이 씨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나누며 자꾸만 되새기고 싶은 문구라 이런 명함을 만들었다”며 멋쩍게 웃었다. 최근 ‘에세이 만드는 법’(유유출판사)을 출간한 이 씨를 5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굵직한 에세이들을 엮어내 출판계에선 ‘미다스의 손’으로 유명하지만, 본인이 직접 책을 쓴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씨는 15년간 ‘맨땅에 헤딩’하며 얻은 모든 지혜를 이 책에 담았다. “그 사람이 쓸 수 있는 단 하나의 에세이를 찾아내는 것, 그게 에세이 편집자의 역할이에요.” 한 사람이 쓸 수 있는 에세이는 무궁무진하다. 일기도 에세이다. 하지만 이 씨가 찾아 헤매는 건 그 사람이 인생에 단 한 번밖에 쓰지 못하는 이야기다. 희귀질환으로 키가 110cm까지만 자란 이지영 씨의 취직 분투기(‘불편하지만 불가능은 아니다’), 데뷔 10년을 맞는 인기 작사가의 첫 에세이(‘김이나의 작사법’)가 그런 글이다. 본인의 이번 책 역시 마찬가지다. “제가 15년 차 편집자로서 내놓는 에세이 편집법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요. 열정을 갖고 출판사에 들어온 신입 편집자들이 금세 지치는 걸 많이 봤어요. 그 후배들한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진솔하게 썼습니다.” 책에는 저자 섭외부터 보도자료 배포에 이르는 모든 출간 과정에서 편집자가 해야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적나라하게 담겼다. 이슬아 작가 에세이의 제목을 지으며 어떤 고뇌를 했는지, 김이나 작사가 책에 두를 띠지의 문구를 두고 작가와 어떤 실랑이를 벌였는지 등 인기 에세이의 탄생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묘미다. 이 씨가 엮은 책들 중에도 초판본을 소진하지 못한 에세이가 많다. 그는 이런 책들을 경기 파주시에 있는 문학동네 사무실 한곳에 모아두고 ‘1쇄의 전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가끔씩 책을 만들다 지치는 순간이 오면 이 씨는 고개를 들어 ‘1쇄의 전당’에 꽂힌 채 먼지가 쌓여 가는 좋은 책들을 올려다본다고 한다. “저 책들을 출판사가 잊고 독자가 잊고 심지어 작가마저 잊더라도 저만은 잊어선 안 된다는 마음이 매 순간 최선을 다하게 하는 원동력이랍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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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00만 인종학살… 죽음의 땅에 갇힌 비극의 얼굴들 [책의 향기]

    1927년 소련 공산당 최상부를 장악한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은 단일하고 강력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명분하에 민간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독일에서 벌인 대량 학살은 스탈린에게서 힌트를 얻은 결과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400여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전쟁이 아닌 히틀러와 스탈린의 ‘정책’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시체가 쌓인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들에 이르는 땅을 ‘블러드랜드(bloodland)’라고 일컫는다. 미국 예일대에서 유럽사와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티머시 스나이더 교수가 독일, 폴란드 등 국가의 기록보관소 16곳의 자료를 토대로 쓴 연구서 ‘피에 젖은 땅’이 번역 출간됐다. ‘제2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 등 굵직한 전쟁사를 펴낸 앤터니 비버는 이 책이 “당시 스탈린과 히틀러의 이데올로기적 아집의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참된 유럽사를 그리기 위해서는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공간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게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관점이다. 저자가 보기에 스탈린은 1933년 우크라이나의 배고픈 농민들에게서 식량을 강제 징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8년 뒤 히틀러 역시 소련 전쟁포로들의 식량 배급을 끊으면 어떻게 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총살과 가스실 이전에 ‘굶겨 죽이기’가 있었던 것. 1933∼1945년 블러드랜드에서 숨진 1400여만 명의 민간인 중 절반은 굶어 죽었다. 책의 미덕 중 하나는 통계와 숫자만을 가지고 살상의 역사를 기록하는 대신 죽어간 희생자들의 표정을 조명했다는 점이다. 극도의 배고픔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었다. 가장 어려서, 혹은 가장 착해서 가족과 이웃의 먹잇감이 돼야 했던 이들의 얼굴을 저자는 놓치지 않았다. ‘생존자 카페’에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2세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아야 했던 트라우마에 대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은 “두 책의 주제가 이어지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전해질 울림도 더욱 클 것이라고 판단해 비슷한 시기에 펴냈다”고 말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엘리자베스 로즈너의 부모는 집단수용소나 학살지에서 살아남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배고픔의 기억이 뼈에 새겨져 닭을 먹을 때면 뼈다귀의 골수까지 빨아 먹는 어머니, 평생 ‘생존자’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로즈너는 결코 집단학살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저자는 트라우마와 부모 세대의 기억을 정확히 기록하기 위해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그들의 자녀를 만나러 떠났다. ‘피에 젖은 땅’에서도 알 수 있듯 20세기 유럽 인종 학살의 양태는 단일하지 않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로즈너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언제나 나는 무엇이 우리를 분리하는가보다 우리가 무엇을 공유하는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 책은 감히 내가 평화를 위해 바치는 제물이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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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 박사논문 작년 단 2편… 의병들이 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는 해였던 2019년, 국내 독립운동사를 다룬 박사학위 논문 6편이 심사를 통과했다. 다시 말하면 국내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려는 신진 연구자가 6명 배출됐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100주년 반짝 특수’ 성격이 있었다. 2019년을 전후해서는 관련 연구자가 거의 배출되지 않았다. 이 분야 학문 후속 세대의 명맥이 거의 끊겨 가는 양상이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중견 학자들은 “신진 연구 인력의 양성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뚝 끊긴 신진 연구자 이계형 국민대 사학과 교수가 최근 국내 독립운동사 박사학위 논문 추이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16년 0편, 2017년 2편, 2018년 1편 등 미미하다. 지난해 발표된 근대사 박사학위 논문은 총 14편이었는데, 이 중 국내 독립운동사를 다룬 것은 2편뿐이다. 1980년대에는 매년 10여 명씩 쏟아졌던 독립운동사 신진 연구자가 일 년에 한두 명 수준으로 줄어든 이유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먼저 독립운동사 연구가 누적되면서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학문적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인식이 생겨 인기가 떨어졌다. 대학들이 역사를 비롯한 인문 분야를 축소하면서 교수 채용이 줄어든 것도 영향을 미쳤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2010년대 들어서는 교수의 퇴직과 함께 사학과를 폐과하는 대학이 속속 생길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고 설명했다. 한 서울 사립대 사학과 교수는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신진 연구자가 너무 없다 보니 이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따기만 해도 장학금을 줘야 한다는 자조적인 목소리까지 나온다”고 침체된 분위기를 전했다. 기존 연구자들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아직 연구되지 않은 내용이 많은데, 이대로 학문 후속 세대가 끊길까 봐 우려하고 있다. 이 교수는 “3·1운동도 이미 연구가 많이 이뤄져서 더 발굴할 내용이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예컨대 전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곳과 일어나지 않은 곳은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지도자의 유무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의 연구는 여전히 미진하다. 지금까지 연구된 바에 따르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곳은 전국 약 3000개 면 중 3분의 2 정도다. 이 교수는 “똑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때인 장날을 통해 3·1운동이 전파됐는데, 왜 어떤 곳에선 사람들이 참여했고 어떤 곳에선 참여하지 않았는지 추가 연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발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외 독립운동사 연구도 속도가 안 나긴 마찬가지다. 이 분야는 중국과 일본, 미국 등에 걸쳐 방대한 해외 자료를 찾고 연구해야 하는 영역이라 문제가 심각하다. 해외를 무대로 한 독립운동사 박사학위 논문은 최근 5년간 2편(2018년, 2019년 각 1편)에 그쳤다. 장세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교수는 “기성 연구자들의 연구는 틈틈이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신예 학자들의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독립운동사에서 생활사로 그렇다면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젊은 학자들이 몰리고 있는 분야는 어디일까. 운동사에서 생활사로 관심이 옮겨 갔다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박성순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영웅 중심적 서술은 과거 독립운동사의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을 때 필요했던 관점이다. 독립운동사의 기본적인 뼈대가 선 지금은 실제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대중적 기반에 대한 물음이 중요해졌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한다는 점에서 이 같은 근대사 학계의 흐름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많다. 다만 연구가 끊기는 분야가 생기지 않도록 신진 연구 인력을 충분히 양성하려는 노력은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나온다. 이 교수는 “신진 연구자들이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현실적 토양이 마련돼야 젊은 연구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전채은 chan2@donga.com·이호재 기자}

    • 202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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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성선설’을 믿으면 순진한 거라고?

    소년 6명이 무인도에 고립됐다. 구출되지 못한 채 15개월이 흘렀다.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소년들의 비극적 결말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소외됐을 것이고, 다친 소년은 버려졌을 것이며, 아마도 서로를 해쳤을 것이다. 윌리엄 골딩은 소설 ‘파리대왕’(1954년)에서 어리고 순수한 소년들마저 그 본성은 추악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소설과 달랐다. 1965년 6월 태평양을 표류하다 통가제도의 바위섬에 갇혔던 소년 6명은 15개월간 고립됐을 때 나름의 규칙을 만들고 역할을 나눴다. ‘파리대왕’ 속 소년들은 불을 차지하기 위해 난투극을 벌이지만, 현실의 소년들은 힘을 합쳐 어렵게 피운 불을 1년 이상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네덜란드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리처드 도킨스와 유발 하라리가 각각 ‘이기적 유전자’ ‘사피엔스’에서 주장한 성악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성악설을 뒷받침한 실험들이 왜곡됐음을 지적하고, 서로를 믿지 못할 때 모두가 권력의 통제 대상으로 전락함을 주장한다. 이 책에 따르면 1961년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은 이미 답이 정해진 실험이었다. 밀그램은 피험자가 타인에게 전기충격을 어느 수준까지 줄 수 있는지를 측정해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험 10년 뒤 밀그램의 저서에 따르면 당시 전기충격이 실제로 이뤄지고 있다고 믿은 피험자는 56%에 불과했다. 연구진이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은 피험자에게 폭행을 가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저자는 ‘방관자 효과’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캐서린 수전 제노비스 살인사건도 일정 부분 왜곡돼 있다고 지적한다. 1964년 3월 미국 뉴욕에서 괴한의 칼에 찔려 죽어간 제노비스를 발견한 사람들이 37명이 아니라 3, 4명의 이웃이었다면 즉각 경찰에 신고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사람들이 원래 친절하게 태어났다고 믿는 건 감상적이거나 지나치게 순진한 게 아니다. 오히려 평화와 용서를 믿는 건 용감하고 현실적”이라고 강조한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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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적십자 활동한 그들, 항일무장투쟁도 벌였다

    1920년 3월. 러시아어가 유창했던 조선인 청년 박영빈의 요청으로 체코군 군의관 베리코프가 연해주(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총 60정을 샀다. 한 달 뒤엔 박영빈이 직접 총 300정을 사들였다. 박영빈 뒤에는 당시 러시아 지역 대한적십자회 대표였던 박처후(1883∼?)가 있었다. 미국 한인소년병학교장이기도 했던 박처후는 항일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무기 구매와 간호사 양성에 적극 나섰다. 일제강점기 대한적십자회에서 활동한 박처후와 채계복(1900∼?·여)이 다음 달 1일 열리는 3·1절 102주년 기념식에서 정부 독립유공자 훈장(애족장) 수여자로 선정됐다. 대한적십자회 활동을 주요 공적으로 정부 훈장이 수여되는 건 이들이 처음이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된 몽양 여운형이나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안정근(안중근 의사의 동생)은 일제강점기 대한적십자회 총재를 지낸 적이 있지만, 이 활동을 주요 공적으로 인정받은 건 아니었다. 1919년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총장이던 안창호 등이 세운 대한적십자회는 그동안 구호사업 등 인도주의 활동으로만 일반에 각인됐었다. 그러나 최근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의 연구 결과 대한적십자회는 1920년 2월 독립전쟁에 대비한 ‘간호원 양성소’를 설치하는 등 항일 투쟁에 적극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국제적십자사연맹에 가입해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교섭한 것도 이들 노력이었다.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적십자회가 무장 투쟁에도 적극 나섰던 것이다. 1883년 평북 순천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박처후는 24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1905년 6월 제국신문에 “자유와 권리란 학식이 있는 자만이 아는 것이며, 학식이 있으려면 교육과 외국 유람이 중요하다”는 글을 남겼다. 이어 1908년 6월 공립신보에 ‘미주 유학생 박처후’라는 필명으로 “완전한 독립국, 완전한 자유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 1909년 9월에는 신한민보에 “동포들은 탄식만 할 게 아니라 무기를 구입하고 전 국민이 군사훈련을 받아 나라를 다시 찾고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항일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1920년 1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연해주에서 양성한 간호사가 미국적십자사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리기도 했다. 대한적십자회에선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대거 활약했다. 이 중 채계복은 러시아 지역에서 대한적십자회를 조직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함남 문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채성하의 맏딸인 그는 아버지의 독립운동 기록에도 수차례 등장한다. 대한적십자회 간호사였던 그는 1919년 12월 중국 간도에서 12명의 간호사가 미국적십자사로부터 간호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이른바 ‘간도 15만 원 사건’ 기록에도 그의 이름이 나온다. 이 사건은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철혈광복단이 일제의 조선은행 자금을 탈취한 것이다. 채계복은 당시 거사에서 핵심 인물이던 독립운동가 최봉설의 총상을 치료해줬다. 이후에도 채계복으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은 최봉설은 훗날 그의 이름 중간 글자를 따 ‘최계립’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박환 교수는 “대한민국 육군의 정통성이 신흥무관학교에 있다고 보듯, 국군간호사관학교의 정신적 모태는 대한적십자에 있다”고 말했다.전채은 chan2@donga.com·김태언 기자}

    • 2021-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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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가 녹음한 오디오북을 ‘밀리의 서재’에… 수익형 플랫폼 구축 등 시장 확대 나선 출판계

    “에디터 J님께. 일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소설가 김초엽이 e북 플랫폼 ‘밀리의 서재’에 공개한 ‘지구 끝의 온실’ 첫 문장을 클릭하자 2개의 녹음 메뉴가 떴다. 이 중 붉은색 버튼을 누르자 기자의 목소리가 녹음되고, ‘AI(인공지능)’ 버튼은 성우 목소리로 녹음이 시작됐다. 녹음을 마친 뒤 ‘발행’ 메뉴를 클릭하니 헤드셋 아이콘이 그려진 오디오북이 개인 계정에 생성됐다. 밀리의 서재가 지난달부터 시작한 ‘내가 만든 오디오북’ 서비스다.○ ‘스타 낭독자’ 만들기로 차별화 오디오북을 찾는 독자들이 늘면서 관련 콘텐츠 업체들이 자신만의 장점을 살린 차별화에 나서고 있다. 출판계는 국내 오디오북 시장 규모를 약 100억∼150억 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다음 달에 오디오북 시장 규모 추산치를 처음 집계해 발표할 예정이다. 밀리의 서재 녹음 프로그램은 현재까지 약 1만 건이 다운로드돼 약 400개의 개인 계정에 오디오북이 만들어졌다. 이 중 약 150개는 공개 신청이 된 상태. 운영사 검수를 통해 공개된 오디오북이 3분 이상 재생되면 낭독자 계정에 100원이 적립된다. 적립금이 5만 원을 넘으면 현금으로 받을 수 있다. 밀리의 서재는 이 서비스가 자사와 이용자들에게 새로운 수익 모델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마치 유튜브 플랫폼을 통해 유튜브와 유튜버가 광고 수익을 얻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함께 일반인 중 ‘스타 낭독자’를 만들겠다는 복안도 갖고 있다. 오디오북은 텍스트를 그대로 읽기도 하지만 낭독자에 따라 짧은 감상이나 작품 해설을 가미하기도 한다. 같은 책이라도 누가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 셈이다. 아직 서비스 초기 단계라 일반회원들이 제작할 수 있는 오디오북 종류가 한정적이라는 아쉬움은 있다. 전솜이 밀리의 서재 홍보매니저는 “전자책 시장이 그랬던 것처럼 오디오북 제작에 뛰어드는 출판사도 점점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완독형·낱권 구매 서비스도 강연 전문 출판사 인플루엔셜의 계열사인 ‘윌라’는 ‘완독형 오디오북’으로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첫 장부터 끝까지 모든 챕터를 완독하려는 독자들을 겨냥한 전략이다. 반면 밀리의 서재의 경우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려는 독자층을 타깃으로 해 주요 챕터만 발췌해 녹음하는 제작 방식이다. 윌라는 오디오북을 전문 성우가 낭독해 콘텐츠 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윌라 관계자는 “지난 한 해 가입자 수가 3.2배 늘어 150만 명을 넘어섰다”며 “오디오 콘텐츠 전문이란 장점을 살려 단행본은 물론이고 ‘오디오 매거진’ 등으로 경계를 확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네이버 오디오클립은 낱권으로 오디오북을 구매하거나 대여할 수 있도록 해 진입 문턱을 낮췄다. 오디오북을 부정기적으로 조금씩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반면 밀리의 서재와 윌라의 경우 한 달에 1만 원 안팎의 구독 비용을 내야 한다. 두 회사는 구독 시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책을 많이 이용하는 이들에게 적합한 방식이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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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포문학의 거장 러브크래프트… 그의 인종차별주의 깨고 싶었다”

    몸이 갈라지며 흰색 촉수를 뻗는 괴물, 낯선 고대의 의식, 기괴한 흑마술…. 미국 작가 맷 러프(56)의 소설 ‘러브크래프트 컨트리’에선 공포 문학의 거장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1890∼1937)의 작품을 읽어본 이들에게는 익숙한 모티브가 펼쳐진다. 제목만 봐선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을 그대로 답습했을 것 같지만,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자가 러브크래프트의 서사를 영리하게 비꼰 흔적이 보인다. 2016년 발표한 이 작품으로 저자는 이듬해 미국의 권위 있는 공상과학(SF) 문학상인 인데버상을 받았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이 최근 은행나무에서 출간됐다. 러프의 책이 한국에 소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저자는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러브크래프트의 도덕적 실패를 인정한다고 해서 그의 예술을 즐길 수 없는 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저자가 이 작품을 통해 비판한 건 인종차별이다. 러브크래프트는 ‘검둥이들의 탄생(On The Creation of Niggers)’이라는 제목의 시를 남길 정도로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가 심했다. 저자는 “1980년대 대학에 다닐 때 친하게 지낸 흑인 친구가 인종차별이 두려워 등산조차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여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러프는 책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한 ‘짐 크로(Jim crow) 법’의 시대를 통과한 1950년대 흑인들의 삶과 고통을 정교한 방식으로 조명한다. 흑인 주인공들은 눈앞의 괴물들과 싸우는 동시에 백인 남성 중심의 권력구조에도 저항한다. 저자는 “정확한 시대 묘사를 위해 1950년대 신문기사와 ‘선다운 타운스’ 등 미국 흑인을 다룬 역사책을 깊이 연구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저자는 소설에 등장하는 개별 인물들의 설정에도 인종차별 문제를 섬세하게 고증해 반영했다. 주인공 중 하나인 흑인 청년 애티커스는 6·25전쟁 참전용사로 등장한다. 저자는 “미국엔 흑인들이 전쟁에 나가 자신의 애국심을 증명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다”며 “국가로부터 차별받는 흑인들에게 더 강한 애국심이 강요되는 역설을 지적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특히 6·25전쟁을 마지막으로 흑인부대가 해체돼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미국 HBO가 이 책을 원작으로 제작한 동명 드라마는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 최우수 TV 드라마 부문 후보에 올랐다. 저자는 “작품이 새로운 독자들에게 소개되는 건 언제나 즐거운 경험”이라며 “한국에도 드디어 작품을 알리게 돼 기쁘다”고 전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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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년만에 ‘듄’ 재번역… 예전 글 보니 땅 파고 들어가고 싶었죠”

    “다시 읽어 보니까 땅 파고 들어가고 싶던데요.” SF 거장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 ‘듄’ 전집(황금가지·사진)을 번역한 김승욱 씨(55)가 겸손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2001년 ‘듄’ 한국어 번역본이 처음 출간될 당시 번역을 맡았던 김 씨는 지난달 22일 같은 출판사에서 20년 만에 재출간된 신장판 전집을 재번역했다. 그런 김 씨를 15일 동아일보 인터뷰룸에서 만났다. ‘듄’은 허버트가 1965년부터 20년간 쓴 SF 대작이다. 우주시대를 맞은 인류의 모습을 다뤄 SF 장르가 발달하지 않았던 한국에서도 마니아층의 인기를 끌었다. 황금가지는 10월로 예정된 드니 빌뇌브 감독 영화 ‘듄’ 개봉을 앞두고 당초 18권 분량의 반양장으로 펴냈던 이 전집을 6권짜리 양장본으로 묶어 재출간했다. ‘듄’ 전집의 재출간 소식을 듣고 김 씨는 책 전체를 직접 검토하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계약된 인세 이외엔 별도 보수 없이 이뤄진 작업이어서 출판사에서는 “꼭 고쳐야 할 부분만 간단히 알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김 씨의 마음에는 초보 번역자 시절의 작업물이 짐으로 남아 있던 차였다. 4300쪽에 이르는 책을 다시 들여다보는 데에는 꼬박 6개월이 걸렸다. “기존의 독자들을 생각해 최대한 덜 고치려고 했지만 결국 20% 정도는 뜯어고치게 되더라고요.” 최초 번역본에는 20년 전 김 씨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2001년 김 씨는 주인공 이름의 원문인 ‘Paul Atreides’를 원칙대로 ‘폴 아트레이데스’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책에는 ‘폴 아트레이드’로 표기됐다. 초보 번역자의 생각보다는 “게임 ‘듄’의 번역을 따라야 독자의 혼란을 방지할 수 있다”는 일부 편집자들의 의견이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당시 바로잡지 못했던 걸 이젠 베테랑이 된 김 씨가 마침내 고쳤다. 김 씨는 “부끄러운 대목도 있었지만 ‘제법 분위기를 살렸네’ 싶은 부분도 있어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아직도 원작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SF 소설 마니아였던 김 씨는 출판사의 제안을 받기 전부터 ‘듄’ 시리즈의 명성을 알고 있었다. 손에 받아든 게 고작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기쁜 마음으로 덜컥 작업을 수락했다고 한다. 장장 3년에 걸친 번역 작업이 그렇게 시작됐다. 고된 작업이었지만 작품의 매력에 흠뻑 빠진 김 씨에게는 즐거운 경험이기도 했다. 김 씨는 “너무 일찍 태어나서 다른 행성을 못 가보는 게 한스러웠을 정도였다”며 웃었다. 1960년대에 쓰이기 시작한 작품임에도 환경과 여성 문제를 일부 다뤘다는 점이 김 씨가 꼽은 이 작품의 매력이다. 이번 신장판도 김 씨와 같은 마니아들이 발 빠르게 반응했다. 출간 1주일 만에 초판 3000세트가 전부 팔려 급히 증쇄에 들어갔다. 아직 ‘듄’ 시리즈를 읽어보지 못한 독자들에게 김 씨는 이렇게 전했다. “분량이 어마어마하지만 걱정 마세요. 1권을 읽어보시면 이어지는 시리즈는 술술 읽힐 테니까요.”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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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한국을 알기 위해 중국을 공부하다

    최근 흡입력 높은 칼럼과 에세이를 통해 특유의 ‘공부 철학’을 설파해온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국내에서 첫 학술서를 펴냈다. 이 책은 그가 2017년 영국에서 발간한 동명의 책(‘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영국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집필된 이 책은 한국어판에 새로운 내용이 보강돼 원서의 2배 이상으로 두꺼워졌다. 영국 출간 당시 중국 정치학자 샤오궁취안(蕭公權)의 ‘중국정치사상사’ 영역본(1979년)이 나온 이후 약 40년 동안 정체됐던 이 분야의 학문적 공백을 메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자는 서문에서 “한국을 잘 이해하고 싶어 중국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어떤 것에 대해 알고자 할 땐 대상뿐만 아니라 그것이 놓여 있는 맥락을 폭넓게 파악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이 때문에 책은 ‘정치사회’ ‘국가’ ‘귀족사회’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중국 정치사상의 거대한 서사를 망라한 후 이것이 조선 등 동아시아 각국에 미친 영향을 짚었다. 저자는 “독자가 현재의 중국에 대해 알고 싶어 책을 집어 들었다가 생각보다 넓게 펼쳐지는 세계에서 그만 길을 잃게 만드는 게 나의 바람”이라고 썼다. 이 책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 분야의 기존 연구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중국이 역사를 만들기보다는 역사가 중국을 만든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이에 따라 중국학계의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의 허구를 밝히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중국은 단일체이기보다 구성물이었으며, 중화민족의 이미지는 인공의 조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중국 정치사상서 상당수가 중국 학자들의 기존 관점에 입각한 점을 감안할 때, 이 책은 중국 정치사상사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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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당신을 울린 그놈…책 속에 가둬라”

    지난해 1월 프랑스에서는 1980년대 파리를 배경으로 13세 소녀 ‘V’와, 그를 상대로 수년에 걸쳐 그루밍 성폭력을 저지르는 50대 남성 작가 ‘G’의 이야기가 출판됐다. 프랑스 쥘리아르 출판사의 대표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저자 바네사 스프링고라(49)는 책에서 이 작품이 자전적 소설임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출간과 동시에 프랑스 문단과 독자들은 이 소설이 대문호 가브리엘 마츠네프(85)의 과거 성폭력을 폭로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저자의 첫 장편소설인 ‘동의(Le consentement)’는 예술가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미성년자에 대한 성착취에 눈감았던 프랑스 문단의 위선을 고발하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3개월 만에 18만 권이 판매됐다. ‘동의’는 국내에서도 은행나무 출판사를 통해 1일 출간됐다. 스프링고라 작가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집필을 결심한 계기와 문단계 성폭력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 가해 작가를 책 안에 가두기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갓 청소년기에 접어든 아들딸의 모습이었어요.” 30여 년간 가슴에 품고만 있었던 성폭력 피해 경험을 글로 옮기게 된 이유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아이와 성인의 경계에 접어든 자녀들은 저자가 처음 그루밍 성폭력에 노출됐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성인의 욕망을 지녔지만 한없이 취약한 10대의 특성을 가까이에서 보며 저자는 어린 자신 역시 얼마나 무방비한 존재였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피해의 기억을 되살려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당초 저자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허구의 인물을 앞세워 글을 쓰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저자는 “결국 1인칭으로 써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2017년 2년 만에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책을 쓰는 건 문단계 성폭력 피해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반격이기도 했다. 가해 작가는 성폭력 피해자들과 있었던 일들을 작품 소재로 자주 활용했고 이는 고스란히 2차 피해가 됐다. 저자는 서문에서 “너무도 오래전부터 우리 안에 갇혀 맴돌며, 살인과 복수가 우글대는 꿈을 꿔왔다”며 사냥꾼이 쳐놓은 올가미로 사냥꾼을 잡는 것처럼 그(가해 작가)를 책 안에 가두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선언했다.○ “권력형 성폭력 폭로 계속돼야” 한국에서 문단 성폭력 폭로는 2016년 나왔고, 2018년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이 이를 본격적으로 고발하는 신호탄이 됐다. 최 시인의 행동은 문단계 ‘미투(#MeToo·나도 당했다)’로 이어졌지만 프랑스에선 아직까지 추가 폭로가 나오지 않았다. 저자는 “출판사들이 판매 중이던 마츠네프의 책을 회수했고 2013년 그에게 문학상인 르노도상을 수여했던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사임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면서도 “문단은 여전히 비밀스러운 영향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어 또 다른 폭로로 번지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2017년에는 대만에서도 문단 내 성폭력을 다룬 소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 발표됐다. 저자 린이한은 “실제 이야기를 다룬 자전적 소설 아니냐”는 문단과 독자들의 추궁에 시달리다 출간 두 달 만에 26세의 나이로 목숨을 끊었다. 반면 가해자로 지목된 유명 문학 강사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스프링고라는 “때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들의 저항은 극복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런 유형의 학대를 증언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용기를 주는 일이다.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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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책 홍보, 예전처럼 안 합니다”

    Q. 개츠비의 성대한 파티에 초대된 당신!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1. 파티에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옷은 뭐 입지? 2. 초대를 받아서 가긴 가야 하는데…. 귀찮다. 첫 질문에 2번을 클릭하고 12개 질문에 추가로 답하자 출판사 문학동네가 2012년 세계문학전집 94번째 작품으로 발간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표지 이미지가 떴다. 작품 속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이 기자의 성격과 가장 비슷한 고전문학 캐릭터라고 한다. 문학동네가 지난달 22일 자사(自社) 블로그에 게시한 ‘세계문학전집 MBTI 테스트’다. 이 테스트에는 9일까지 20만 명 넘게 참여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출판사의 톡톡 튀는 마케팅 아이디어가 눈길을 끌고 있다. 문학동네의 MBTI 테스트는 세계문학전집을 알리기 위해 기획된 이벤트다. 김혜연 문학동네 마케터는 “코로나 시국에 책이 많이 읽힌다고 하지만 독자들은 해외 문학을 가장 마지막으로 찾는다”며 “독자 자신과 비슷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책에 더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아 기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문학동네는 이벤트 참여자 중 10명을 추첨해 세계문학전집 중 표지를 새로 바꾼 ‘리커버 도서’를 증정했다. 독자들은 이벤트 결과와 상관없이 “꽤 정확하다” “내 실제 MBTI와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관련 링크를 공유하고 있다. 해당 이벤트가 시작된 날 문학동네의 ‘프랑켄슈타인’과 ‘오만과 편견’은 인터넷 서점의 실시간 검색도서 순위에 오르기도 했다. 유튜브를 통한 마케팅도 활발하다. 최근 출판사들이 유튜브에 뛰어들었지만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인 건 민음사가 운영하는 ‘말줄임표’다. 현재 민음사TV 구독자는 약 4만3800명. 문학동네(2만1200명)나 창비(1만2800명)와 비교하면 2배 이상 많다. ‘말줄임표’에는 한국문학팀 편집자 2명이 직접 출연해 ‘교과서 속 문학’ ‘편집자 가방 속 책’ ‘북 디자인’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출판사와 상관없이 책을 소개하고 있어 민음사가 아닌 다른 출판사가 내놓은 책이 더 많다. 자사 책 소개 영상을 주로 올리는 다른 채널과 구별되는 점이다. 이것이 오히려 구독자를 늘리는 데 도움을 줬다는 평가가 있다. 이 채널은 에피소드별 추천 책 목록이 만들어져 블로그 등에 공유될 정도로 공신력을 얻었다.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 나쓰메 소세키 전집 등 굵직한 책들을 펴낸 현암사는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발랄하고 독자 친화적인 게시물로 호응을 얻고 있다. SNS에서 인기를 끈 ‘밈’(meme·출처를 알 수 없이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콘텐츠)을 가져와 이벤트를 홍보하는가 하면 ‘남탕(남의 책 탐방기)’ ‘마작(마스크 쓰고 작은 서점 가기)’ 등의 콘텐츠를 연재하고 있다. 출판계 관계자는 “현암사 인스타그램의 분위기가 바뀌면서 최근 2∼3년 새 팔로어 수가 급격히 늘었다”며 “이는 출판사의 이미지 변화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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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이 사람이 쓰는 법]“살빼려다 거식-폭식… 거울속 내가 물었다 아름다움이란 뭘까”

    “같이 조여서 말라 죽자. #프로아나 #뼈말라.” ‘뼈의 모양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말랐다’는 뜻의 단어 옆에서 ‘프로아나’라는 낯선 표현을 발견했을 때 김안젤라 씨(36·사진)는 문득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의미를 알아보니 이 단어는 찬성을 뜻하는 ‘프로(pro)’와 ‘거식증(anorexia)’의 합성어로 마른 몸매를 위해 섭식을 강도 높게 제한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여중생 혹은 여고생이 쓴 것으로 보이는 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게시물을 보고 김 씨는 섭식장애의 일환인 폭식형 거식증을 앓았던 17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를 계기로 ‘살이 찌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창비)를 쓴 김 씨를 4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만났다. “제 경험이 섭식장애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길 바랐어요. 의학계에선 다이어트를 하는 것만으로도 섭식장애 1단계로 보는데, 한국 사회에선 다이어트가 너무 흔해서 이런 사실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거든요.” 김 씨는 무작정 블로그 계정을 열고 처음 섭식장애를 앓기 시작했던 19세 때의 기억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섭식장애의 문턱에 있는 사람들을 구해 내겠다는 사명감에 시작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벗어난 어두운 터널을 다시 걷는 작업은 고통스러웠다. 김 씨는 “특히 폭식할 때 끓어오르는 음식에 대한 극심한 욕망을 묘사할 때는 질병을 앓고 있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실제로 재발할 뻔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대학에서 의상디자인을 공부하며 음식과 살찌는 것에 대한 공포심을 학습했고 이것이 섭식장애로 이어졌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지금보다 더 엄격하고 왜곡됐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우리 사회가 외적인 아름다움만큼이나 건강에도 관심을 쏟는 분위기로 변했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아쉬운 점이 많다. 김 씨는 “실제 몸무게보다도 근육량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며 ‘눈바디’(체중계가 아닌 거울을 통해 몸을 확인하는 것)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며 “하지만 ‘건강함을 위한 근육’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위한 근육’을 추구한다면 체중계와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김 씨가 섭식장애를 극복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줬던 건 그의 ‘일’이었다. 패션 매거진 기자, 강의 콘텐츠 MD 등 다양한 일을 해 온 김 씨는 일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스스로의 정체성과 아름다움을 표현할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고 한다. 한때 양 허벅지 사이의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눈바디’로 살피며 강박적으로 살을 뺐던 김 씨는 이제 허벅지에 ‘기능하는 근육’을 기르기 위해 노력 중이다. 보기 좋게 올라붙은 허벅지 모양을 위한 근육이 아니라, 지난해 취미 붙인 스노보드에 실제로 쓰일 근육을 기르겠다는 것이다. 김 씨는 독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모두가 각자의 스노보드를 찾았으면 좋겠어요.”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 2021-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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