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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 옆 전봇대에 주인 잃은 동전 지갑이 걸려 있습니다. 신호등이 여러 번 바뀌는데도 주인은 오질 않네요.―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1924년 1월 20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을 소개합니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석이 크게 서 있고 그 뒤로 누각이 보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입니다. 서울 종로에 있는 탑골 공원입니다. ▶ 100년 전 서울에 눈이 내리자 사진기자가 탑골 공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 온 모양입니다. 관련된 기사는 별도로 없습니다. 가볍게 찍은 스케치 사진인가 봅니다. 설명은 아주 간결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설경- 어제 탑골공원에서▶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진기자들은 눈이 내리면 주변 풍경 좋은 곳을 찾아가 사진을 찍습니다. 어차피 그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펑펑 내리는 눈을 보았을 텐데 굳이 사진을 찍어 지면에 게재합니다. 혹시 못 본 독자들을 위한 배려일까요? 아니면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시간을 기록하고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요? 사진기자들이 눈 스케치를 가는 장소는 다양합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대체로 회사 근처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아주 잠깐 내리다 말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강원도에 폭설이 내린다는 예보가 있으면 미리 자작나무 숲이나 대관령을 찾아가 기다립니다. 봄을 앞두고 눈이 내린다면 동백꽃이 피어 있는 곳을 찾아보기도 합니다.▶저도 얼마 전 눈이 내린 다음 날 서울 남산에 다녀왔습니다. 정작 눈이 내리는 시간에는 사진이 별로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큰 눈이 서울에 내리더라도 풍경 사진은 눈이 완전히 그친 후에 제대로 찍을 수 있습니다. 남산 순환로와 서울 타워를 오르내리며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왜 남산을 택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서울의 상징 같은 곳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우거진 나무 숲 사이로 길이 나 있어 설경을 즐기는 시민들도 같이 사진에 담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풍경은 쓸쓸해 보이고 리얼리티도 떨어지기 때문에 인적이 있을 만한 곳을 선택합니다. 경복궁이나 덕수궁도 설경 스케치에 잘 어울리는데 그런 곳들 역시 고풍스런 건물들이 많기도 하고 관람객도 사진에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롭고 고즈넉한 눈풍경에 어울리는 곳이 고궁이나 공원이라면, 폭설로 서울 시민들에게 불편이 초래된다면 강변북로 출근길이나 강남대로 퇴근길이 사진의 소재가 됩니다. 엉금엉금 눈을 뚫고 출퇴근해야 하는 하루가 그날의 뉴스 포인트이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사진의 촬영 장소는 유행이 있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신문과 방송 카메라가 자주 비추는 곳이 예전에는 그다지 자주 다뤄지지 않던 장소일 수도 있고, 반대로 예전에는 자주 등장했던 장소가 지금은 뜸한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사진기자를 처음 시작했던 1990년대 말. 추운 날씨에 출근하는 시민들의 표정을 스케치하기 위해서 사진기자들이 모였던 곳은 서울 지하철 1호선 대방역에서 여의도로 넘어가는 다리였습니다. 그 촬영 포인트가 지금은 서울 광화문 사거리로 바뀌었습니다. 특별히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의교를 걸어서 출근하는 시민이 급격히 줄어 ‘그림이 안되는’ 풍경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사진기자들이 새로운 로케이션을 찾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100년 전 탑골 공원 설경 사진은 여러분이 보시기에 너무나 평범한 사진일 겁니다.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당시에는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우선 시간적인 촉박함이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문 편집을 총괄하는 부장이, 너무 답답하고 속 터지는 뉴스만 가득한 사회면에, 가슴이 시원한 사진이라도 한 장 넣자고 갑자기 결정했던 것은 아닐까요? 갑자기 취재 지시를 받은 사진기자가 마감시간에 임박해 촬영했던 것은 아닐까요? 두 번째 이유로 상상할 만한 점은, 지금이야 탑골 공원이 노인들의 휴식처 또는 노인 문제의 상징처럼 인식되지만 100년 전 신문을 만들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특별한 장소였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탑골 공원은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절이, 조선왕조 때에는 세조가 건립한 원각사가 있던 곳을 1897년에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공원으로 조성한 곳입니다. 많은 문화공연행사와 집회 장소로 활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서울의 중심, 근대화의 가능성 그런 느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사진이 찍히기 5년 남짓 전인 1919년 3월 1일. 이곳 탑골 공원에서 한 남성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5천명의 시민들과 학생들이 독립을 외쳤었다고 합니다. 3.1만세운동의 발상지인 것입니다. 단순한 설경이 아니라 시대와 역사의 정체성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 서울에 갑자기 눈이 내린 17일 오후에 100년 전 저 사진 속 탑골 공원에 가봤습니다. 귀부 위의 비석과 누각이 그대로 보입니다. 신기했습니다. 다만 비석 주변에 누각이 하나 더 생겨 사진으로는 같은 모양은 아니었습니다. ▶문득, 한국 전쟁의 포화를 잘 견뎌내 준 문화재와 그 옆 아름드리나무들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다행히 탑골 공원은 하늘에서 쏟아졌던 전쟁의 포탄에서 벗어났었나 봅니다.탑골 공원이라는 이름이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원래 파고다 공원을 1990년대에 탑골 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상식과는 좀 다른 자료입니다.오늘은 100년 전 서울의 상징 중 한 곳이었던 탑골 공원의 설경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댓글에서 확인하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7일 오후 서울 지역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 가운데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서 무료 급식을 받으려는 노인들이 줄을 서고 있다. 이날 경기 포천시와 강원 철원군, 화천군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 기상청은 강원 영동 지역에 18일 오후부터 19일까지 최고 15cm 이상 눈이 내릴 것으로 예보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5일 서울 영등포구 당산공원 공영주차장의 전기차 충전소 앞에서 영등포구 관계자가 이곳에 비치된 소화기를 들어 보였다. 영등포구는 전기차 충전시설 26곳에 소화기 48대를 배치해 신속하게 차량 화재에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용의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오늘은 1924년 1월 7일 자에 실린 사진을 골랐습니다. ▶ 사람 키의 3배쯤 되는 긴 사다리 네 개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그 아래에서 유니폼을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지지대를 잡은 채 공중에 매달린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서커스 동작처럼 고난도의 몸동작이 시선을 끕니다. 서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어떤 모습을 촬영한 사진일까요? 사진과 조금 떨어진 지면에 관련 기사가 있었습니다. 옮겨봅니다. 京城消防出初式- 작일 아침 대한문 앞에서년년히 행하는 경성상비소방대(京城常備消防隊) 룡산소방대(龍山消防隊)의 출초식(出初式)은 어제 6일 오전 9시경에 시내 대한문 앞에서 거행하였다. 이미 만들어 놓은 조그마한 집에 불을 질렀는데 마침 불어오는 서북풍에 형세를 맞춰 염염히 타오르는 형세는 과연 큰 화재나 난 듯이 굉장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소방대원들이 “뽐뿌”를 들이대고 진화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참 굉장하였다. 대한문 넓은 마당에는 구경꾼이 산 같이 모여 매우 복잡을 이루었고, 기타 경기도 경찰부를 위시하여 시내 각 경찰서장과 관계 인사가 다수히 내참하였으며 9시 반에 출초식을 마친 후 경기도 마야경찰부장(馬野警察部長)과 경기도 좌등내무부장(佐藤內務部長)의 훈시가 있었더라. 동아일보 1924년 1월 7일자▶ 기사를 보니 새해를 맞아 소방대원들이 훈련을 하는 모습입니다. 덕수궁 대한문 앞은 그 때나 지금이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행사들이 진행된 핫플레이스였군요. 출초식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행사인데 처음 나선다는 뜻인가 봅니다. 동아일보 내부의 기사화상 검색망에 들어가 ‘출초식’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니 1920~30년대에 관련 기사가 꽤 많이 있었습니다. 1940년이 마지막으로 검색되는 거로 봐선 그때까지만 쓰였던 용어 같습니다. 지금도 소방 관계자분들께서 이 용어를 쓰는지 궁금합니다. ▶가상의 주택을 만들고 거기에 불을 붙인 후 소방대원들이 평소 갈고 닦은 소방 실력을 고위 공직자들과 시민들 앞에서 시연하는 행사입니다. 사진 속 사다리는 지금의 사다리에 비하면 그리 높은 편은 아닙니다만 당시 대부분의 건물이 1층짜리였다는 걸 고려한다면 불을 끄는 데는 그나마 적절한 높이였을 겁니다. 받침대가 있는 사다리에 올라가 화재 현장을 향해 호스를 대는 소방수와 그 아래에서 물을 공급하는 펌프(뽐뿌)를 운용하는 소방수가 팀을 이루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920년대에는 목조 건물과 초가집 등이 화재사고의 대부분이고 시민들의 삶과 직접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겨울철마다 서울 시내 화재 사고 현장에 대한 보도가 꽤 많습니다. 목조 건물이다보니 한 채가 타면 그 옆으로 불이 삽시간에 번져서 피해가 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소방대원들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가 컸을 겁니다. 새해 벽두에 시내 한가운데 가상의 화재 현장을 만들고 불을 끄는 훈련을 했던 이유일 겁니다. ▶요즘 이뤄지는 소방훈련을 잠깐 떠올려 봅니다. 사다리도 금속 재질에다 높이도 아주 높아졌습니다. ‘뽐뿌’의 성능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해졌구요.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가상의 화재 현장 모습입니다. 2008년 남대문이 방화범에 의해 불탄 후 고궁 등 문화재에서 가상의 화재가 발생한 상황을 가정해 훈련을 하기도 하고, 일본 지진이 발생한 후에는 지진대피 훈련을 합니다. 게다가 롯데타워 등 초고층 빌딩이 곳곳에 들어서면서 시민들의 걱정이 생기자 요즘에는 고층 건물 화재 대피 훈련 등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소방훈련도 시대에 맞게 연출되어 왔습니다. 그걸 찍은 사진도 시대별로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구요. 당연한 얘기지만 사진을 찍는 입장에서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사진의 구도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지금도 사진기자들이 선호하는 구도입니다. 사선(射線)구도인데요, 일렬로 서 있는 사다리들이 겹쳐 보이도록 측면에서 촬영했습니다. 만약 나란히 서 있는 사다리들을 정면에서 보면서 사진을 촬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다리의 형태는 더 잘 보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사진을 크게 써야지만 제대로 보이게 될겁니다. 측면에서 사진을 찍으면 좁은 지면에 많은 피사체와 내용을 포함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인터넷으로 신문을 보는 것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2000년대 이전까지 신문 사진에서 정말 선호되고 거의 정답처럼 인식되었던 구도가 사선 구도였습니다. 인터넷은 지면의 제약이 없다 보니 ‘평평한’ 사진도 새로운 시각을 독자에게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많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새해를 맞아 한 해의 화재 사고를 대비하던 100년 전 우리 사회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댓글에서 확인하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스타벅스코리아가 9일 오전 서울 종로타워에 있는 스타벅스 종로R점에서 청년 취업 활성화를 위한 커뮤니티 스토어 8호점을 열었다. 스타벅스 손정현 대표이사(가운데)가 참석해 청년 취업 활성화 활동을 위한 업무 협약식과 기금 전달식을 가졌다. 스타벅스는 커뮤니티 스토어 8호점에서 판매되는 상품 한 개당 300원씩 적립해 연간 1억 원의 청년 취업 활성화 기금을 조성할 계획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산책로에 누가 신용카드를 떨어뜨렸나 봅니다. 습득한 사람이 잘 찾아가라고 전등 아래에 예쁘게 꽂아 놨네요. ―서울 종로구 청계천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까치 한 마리가 문 위에 앉아 행인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요.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소비·유통 환경이 급변하면서 비대면·디지털 기술 도입을 서두르는 소상공인이 늘어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장관 이영)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사장 박성효)은 2020년부터 소상공인 사업장에 스마트기술 도입을 지원하고 점포 경영과 서비스를 혁신해 경쟁력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스마트상점 기술보급사업은 소상공인에게 서빙로봇, 조리로봇, 테이블오더, 키오스크, 사이니지, 경영관리 프로그램 등 스마트기술 도입 비용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디지털 전환의 필요성은 절감하지만 많게는 1000만 원이 넘는 투자비용에 부담을 느끼는 소상공인에게는 반가운 지원제도다. 경영·서비스 혁신을 위해 핵심 스마트기술 1개 이상 도입을 지원(최대 500만 원)하는 △일반형과 협동로봇 1개 이상을 지원(최대 1500만 원)하는 △미래형, 기술패키지를 지원(최대 1250만 원)하는 △상생형, 오프라인 경험요소와 스마트 기기 도입을 지원(최대 2000만 원)하는 △경험형으로 나누어 지원한다. 중기부와 소진공은 스마트기술 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스마트기술 피칭대회’를 개최해 사업장에 접목 가능한 기술을 발굴하고, 소상공인 점포 맞춤형 일대일 기술선택 전문 컨설팅을 추진하여 스마트 기술에 대한 문턱을 낮췄다. 또 간이과세자, 1인 사업장, 장애인 등 영세한 취약계층의 자부담률을 기존 30%에서 20%로 완화하고, 사업 전용 제휴카드를 도입해 기존 일시 납부를 12개월 무이자 할부로 결제할 수 있도록 하여 소상공인의 비용 부담을 경감했다. 민간기업과 소상공인 간 상생으로 스마트상점을 구축한 것도 눈에 띄는 성과다. 지난 3일과 4일 고양시 킨텍스에서 개최된 ‘2023년 대한민국 소상공인대회’에서는 우수 소상공인 포상, 박람회, 기능경진대회 등의 행사와 함께 정책홍보관, 판매관, 체험존 등의 부스를 운영했다.‘스마트상점 모델숍’으로 운영한 체험관에서는 치킨로봇, 바리스타로봇 등 12종의 스마트 기술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스마트상점 솔루션 기업인 넥스트페이먼츠의 돈가스 로봇은 자동화된 요리 전 과정을 보여줬고 완성된 돈가스를 시식할 수 있어 행사 기간 동안 관람객의 큰 사랑을 받았다.스마트상점 기술 기업인 웹플래너의 푸드3D프린터는 약 1000가지 디자인이 내장된 초콜릿 제작 기술력을 선보여 부모와 함께 방문한 어린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다양한 헤어스타일링을 체험해볼 수 있는 이색적인 거울도 볼 수 있었다. 두피 상태를 정밀 분석해 맞춤형 시술을 제안하고 미용 실습을 할 수 있는 기능도 더해져 1인 미용실을 운영하는 소상공인의 관심을 받았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부쩍 쌀쌀해진 날씨. 돌담 사이에 꿋꿋이 홀로 핀 노란 꽃이 유독 쓸쓸해 보입니다. ―서울 종로구 송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매주 토요일에 인터넷에 올리기로 스스로 했던 약속을 오늘은 좀 늦게 지키게 됐습니다. 전국의 사진기자들이 모이는 사진기자체육대회에 아침부터 참석하느라 글을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해서라는 핑계를 대봅니다. 매년 가을 이맘때면 열리는 사진기자체육대회는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는데 올해는 조금 달라진 풍경이 눈에 확연하게 띄었습니다. 체육대회라고 하면 운동경기가 좀 들어가야 맛인데 종목이 많이 줄었습니다. 특히, 20년 전에는 이 행사의 메인 종목이었던 축구 토너먼트가 없어지니 운동장 가운데가 비어 있었습니다. 운동장 사이드에 있는 배구장과 족구장에서만 경기가 치러졌습니다. 축구 종목을 소화할 신문사의 사진부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사진기자들의 평균 연령이 높아지면서(신규 인원의 유입이 최근 십 여 년간 현저하게 줄고 있습니다)나타나게 된 변화입니다. 나이 든 사진기자만이 남는 것이 아니냐 하는 자조 섞인 탄식이 몇 년째 있었는데 올해에는 작년과는 다른 또 다른 현상도 한 가지 보였습니다. 2022년과 2023년에 사진기자를 시작한, 서울지역 사진기자들이 약 30명 가까이 있었습니다. 부스를 돌아다니며 동료 사진기자 선배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이색적인 풍경이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전후부터 신문사들이 증면을 하고 칼라지면을 만들면서 사진기자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었는데 그 때 신문사에 입사했던 사진기자들이 작년과 올해 그리고 내년에 대규모로 정년퇴직하면서 나타난 현상일 겁니다. 아무튼 젊은 사진기자들이 체계적 선발 과정을 거쳐 현장으로 들어온 최근 상황은 고무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다만, 사진기자의 충원이 서울의 신문사와 인터넷 매체에 집중되고 지역의 경우 다운 사이징이 심해지고 있는 것도 같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신문사 사진부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망원렌즈가 없던 시절 스포츠 경기를 어떻게 찍었느냐는 질문에 옛날 선배 중에 한분이 야구 경기를 예로 들며, 심판 옆에 붙어서 도루를 하는 사진을 찍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지금이야 취재진들이 망원렌즈를 갖고 선수들과 최소 10미터 멀리는 100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찍는지도 모르게 찍지만 예전에는 완전히 붙어서 찍었던 것입니다.서설이 길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100년 전 사진은 높이뛰기 장면입니다.여기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앵글의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높이 뛰기 하는 선수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1923년 10월 29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그런데 묘한 느낌이 듭니다. 바로 현장감이죠. 눈앞에서 보고 있다는 느낌이 전달됩니다. 아마 지금 고해상도 카메라로 저 앵글의 사진을 찍는다면 바를 넘는 선수의 긴장되고 애쓰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을 겁니다. 사진을 보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사진이 어떤 조건에서 촬영된 사진인지 이해합니다. 바로 옆에서 작은 렌즈로 찍은 사진인지 멀리서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인지를 말입니다. 짧은 렌즈로 찍은 사진은 현장감을 주고 친밀감을 줍니다.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은 친밀하지는 않지만 객관적인 시선이거나 훔쳐보기라는 느낌을 줍니다. ▶현장감을 주기 위해 모든 카메라 기자들은 피사체 옆에서 사진을 찍고 싶어할겁니다. 하지만, 매체가 많아진 요즘 그렇게 하다가는 아마 뉴스 인물들이 카메라에 얼굴을 다칠 수도 있고 스포츠 선수들은 경기에 집중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진기자들은 현장에서 서 있을 수 있는 위치가 지정되고, 피사체에 대한 근접 촬영은 불허되거나 아니면 극소수의 인원에게만 허용됩니다. 가령 스포츠 경기의 경우, ‘오피셜 포토그래퍼’가 근접 찰영을 하게 됩니다. ▶정치 현장, 특히 대통령의 행사 취재에서도 ‘오피셜’은 근접 촬영의 ‘특권(?)’을 갖습니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 추모식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신문에 실린 사진들의 출처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대통령실 제공이었습니다.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이라면 홍길동 기자 또는 대통령실사진기자단이라고 표시되어 있었을 겁니다. 일종의 제공사진이 신문들 1면에 실린 것입니다. 가까이서 찍은 사진은 액션이 강해서 사진이 강렬한 느낌을 줍니다. 대통령 전속이 가까이서 찍는 사진과 출입기자들이 멀리서 망원렌즈로 촬영하는 사진의 느낌은 다를 때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전속에 비해 사진기자들은 피사체인 대통령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거나, 피사체가 좋아하는 앵글보다는 뉴스에 적합하고 독자들의 시선을 끌만한 순간을 포착하려고 합니다. 아무도 해석하지 않고 피사체의 마음에만 들면 되는 사진은 보도사진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최고 지도자의 주변에 사진가를 최소화해서 배치합니다. 사진은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고 표정은 적절하게 포착됩니다만 사진의 소스가 하나인 현장에서 나오는 사진은 뭔가 부족해보입니다. 세련되지 않고 시대에 맞지 않은 느낌 같은 거 말입니다. 변화가 없기 때문이고 틀에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식 사진을 생각해보시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결혼의식에 관련된 당사자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감동을 주지 않습니다. 가족끼리는 공유하지만 남들은 관심주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만 나올 수 있게 통제하는 것으로는 좋은 사진이 나오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사진기자와 피사체의 거리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이번 주 선택한 사진은 1923년 10월 26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멋진 단독 주택 앞에 누군가 구두 한 켤레를 들고 있는 사진입니다. 카메라로부터 떨어진 거리가 같은데 포커스가 둘 다 정확하게 맞아있다는 점에서 실제 찍은 사진이 아닌 합성 사진 또는 그래픽 이미지로 판단됩니다. 내용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폭락 또 폭락되는 독일 마르크의 시세독일 돈은 연일 자꾸 떨어져서 25일에 포착된 백림전보에는 영국 돈 한 파운드에 (일본 돈 약 십원) 대하여 독일 돈 사천억 마크의 시세를 보였다고 한다. 속담에 호왈백만이라더니 독일 마크야 말로 백만쯤은 당초에 돈값에도 가지 못하는 참혹한 형편이다. 이 사진은 전쟁 전의 물가와 전쟁 후 ‘마크’ 시세가 폭락된 후의 물가를 비교한 그림이니 즉 지금 구쓰 한켜레 사는 돈을 가지면 전쟁 전에 이런 양옥 한 채를 살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도 이제는 벌써 옛 이야기가 되었다. 지금은 구두 한 켤레 값을 가지면 전쟁 전 에는 그러한 양옥을 두서너채나 사고도 남았을 것이다.▶ 1920년대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가 폭락한 것을 표현한 사진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19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은 복구 비용 마련을 위해 돈을 무한대로 인쇄해 뿌리는 통화 공급 정책을 폈습니다. 이로 인해 독일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경험했는데 특이 1923년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가장 심각한 사례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 사진은 경제 역사책에 나오는 100년 전 상황을 한국 신문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는지를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영국 1파운드와 독일 4천억 마르크화가 교환될 정도로 독일 마르크의 가치가 폭락했고, 그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사진이 이용된 것입니다. 전쟁 전 물가가 정상일 때 집 한 채를 살 수 있던 돈이 전쟁 후 구두 한 켤레 밖에 살 수 없게 되었다는 설명을 사진이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화려한 그래픽 이미지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꽤나 특별한 ‘시각물’이 아니었을까요?▶신문사에서 일하는 사진기자와 편집자, 그래픽 디자이너 등은 독자들에게 뉴스와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고민합니다. 뉴스 중에서 제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분야가 금융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름값이 오르고, 아파트 전세거래 금액이 내리고, 증시가 폭등하고, 기준 금리가 동결되는 등 돈과 관련된 뉴스는 매일 신문의 주요 지면에 자리 잡습니다. 우리의 삶은 좌지우지 하는 뉴스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사회, 문화, 국제뉴스 등의 분야는 표현의 방식이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만 경제 중에서 돈과 관련된 뉴스는 사진으로 잘 표현되지 않습니다. 매일 비슷한 모양의 주유소 가격표 사진과, 부동산 중개업소 호가판, 외환 딜링룸 표정 등이 반복되어 지면에 실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식상한 사진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인류 전체를 통틀어 금융을 매일매일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사진가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미국의 증권거래소 사진도 자세히 보면, 매번 비슷한 딜러의 분주한 모습이 실립니다. 현장이 없고, 그나마 기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몇 군데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 신문에서 경제 뉴스가 주목을 받고, 지면을 크게 할애 받기 시작한 것은 IMF 이후입니다. 종합 일간지의 경우 그 때부터 아예 경제 섹션을 발행해오고 있습니다. 처음 경제 섹션이 만들어진 직후, 신문사에서는 지면에 실을 사진이 없어 아주 곤혹이었습니다. 경제 관료들의 회의 모습과 발표 모습이라도 실었지만 중년의 남성 공무원 사진은 금방 식상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주식 거래를 하기 위해 명동의 객장을 찾은 투자자들의 모습을 찍기도 했지만, 초상권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찍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지금의 금융 현장은, 몇몇 은행과 증권거래소 등에서 지수판과 그래프를 크게 화면에 띄우는 형식으로 만들어 놓아 사진기자들이 ‘뉴스를 시각화’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가 동향이나 신제품을 출시하는 업체의 홍보 담당자들이 아이디어를 짜내어 사진 연출을 하고 있어 지면이 단조롭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른바 유통사진이 저널리즘이냐는 질문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 신문에 실리는 모델과 제품이 함께 등장하는 사진이 보도사진의 교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유형의 사진이고 다른 나라에서는 지면에 등장하지 않는 형식이기도 합니다. 텍스트만 있는 지면을 독자에게 보일 수는 없고, 경제라는 현상이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제한적이라 불가피하게 발전된 사진 형태인 것이죠. ▶오늘은 100년 전 누군가 아이디어를 내,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표현한 사진을 보면서 지금의 금융과 경제 관련 사진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이번 주 제가 고른 사진은 1923년 10월 21일자 신문에 실린 사진입니다. 젊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를 하고 있고 그 옆에서 피아노 반주자가 혼신의 힘으로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100년 전 서울에서 바이올린 연주회가 열렸던 모양입니다. 사진 설명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공연장을 찾은 청중을 감동시킨 바이올린 연주를 ‘묘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폭포처럼 펼쳐지는 바이올린 선율에 관중들이 극도로 감동해 청중과 연주가가 몰아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식으로 현장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 이 사진을 보면서 드는 의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저 상황은 실제 공연 모습까 아니면 연습 시간에 양해를 구해 찍은 사진일까 하는 점입니다. 돈을 내고 들어온 신사숙녀들이 무대 아래에서 공연에 집중하고 있는 시간에 사진기자가 무대 위에 올라가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게 가능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저 사진은 망원렌즈로 촬영한 게 아니니 사진가가 피사체 바로 옆에서 촬영해야 했을텐데 그러면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카메라에는 ‘사일런스’ 기능이 있어서 소리가 아주 작게 나도록 설정할 수 있지만 그래도 셔터막이 열렸다 내리는 소리는 침묵 속에서는 크게 들립니다. 백 년 전 카메라는 지금보다 더 묵직한 셔터 소리가 났으니 아마 실제 공연 중에 촬영했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구경거리가 되었을 겁니다.지금도 예술의전당이나 연극무대의 공연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리허설 장면을 촬영하거나 방음시설이 된 조정실 유리창 너머로 찍습니다. ▶최근에 출시되고 있는 전문가용 미러리스 카메라에는 드디어 완벽한 ‘사일런스’ 기능이 있습니다. 바로 옆에서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미러리스 카메라는 셔터막이 없이 전자신호로만 사진을 찍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기술 발전입니다. 지금의 미러리스 카메라와 망원렌즈가 있다면 사진 속 저 장면은 멀리서 자연스럽게 포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소음의 미러리스 카메라는 사진기자들의 일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사진기자들은 과거에는 접근할 수 없던 현장으로 갈 수 있게 되었고 과거에는 촬영할 수 없던 순간을 촬영할 수도 있게 되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소리에 민감한 선수들이 벌이는 바둑 대회나 골프 티샷 순간을 마음껏 촬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소음의 미러리스 카메라가 대중화되면 혹시 ‘몰래 카메라’가 일상화되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분들도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몰래 카메라는 전문가용 미러리스 카메라 출시와 상관없이 시작되어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진기자들이 갖고 다니는 카메라는 크기가 커서 눈에 확실하게 띄기 때문에 몰래 카메라로 사용하기에는 한계가 많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바이올리니스트 공연 사진을 보면서, 이제 셔터 소리 때문에 못 가는 현장은 사라지고 있는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정구대회를 앞두고 경기장을 정리하는 모습입니다. 롤러를 가지고 사람들이 일일이 바닥을 다지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1923년 10월 14일에 열린 ‘제 3회 전 조선 정구대회’ 소식입니다. 오전 8시부터 휘문운동장에서 열렸는데 조선체육회 주최, 동아일보사 후원행사였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정구대회가 100년이 넘었다는게 신기합니다. 동아일보 정구대회는 지금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매년 봄에 개최하고 있습니다. 경기장은 평소에도 드문드문 활용되는데다 관리 담당자가 있어서 경기에 임박해 준비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경기 전에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신문에 쓸 만큼 특별한 ‘뉴스’도 아닌 장면입니다. 이제는 사라진 스포츠 관련 사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100년 전 스포츠 사진을 보며 지금은 사라진 스포츠사진은 뭐가 있을까, 새롭게 생겨난 사진은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얼마 전 아시안게임이 끝났죠? 생각보다 관심이 높고 인기가 있어서 놀랐습니다. 유쾌하면서도 감동적인 많은 경기와 시상식 장면 중에서 저는 탁구 신유빈 선수가 금메달을 확정지은 후 손에 든 태극기를 바로 잡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카메라에 건곤감리가 바로 잡히도록 신경쓰는 모습 말입니다. 그리고 기쁜 감정을 카메라를 향해 드러내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카메라를 향해 손 하트도 적극적으로 만들고, 동료와의 적극적인 포옹도 주도합니다. 이미 카메라를 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세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기 중간중간에 멋진 사진이 나오는 것도 젊은 세대답게 자기를 표현할 준비가 항상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포토제닉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카메라 세대’가 한국을 대표하는 시대입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가 생각납니다. 그 당시 한국 선수들은 안정환의 반지 세리머니와 단체로 손을 잡고 경기장을 달리며 슬라이딩을 하는 ‘아이콘’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한국 기자들 전체를 당황하게 했던 외국 선수의 세리머니가 있었습니다. 영국의 베컴 선수가 골을 넣은 후 골대 뒤쪽 카메라기자들이 모여 있는 지역으로 달려오는 ‘무릎 세리머니’를 했습니다. 한국 사진기들은 눈앞으로 다가온 스타의 모습에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망원렌즈를 끼고 ‘킬러’들의 포효를 포착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멱살잡이할 때 사용하는 작은 렌즈(와이드 렌즈)에나 잡힐 만한 장면이었습니다. 베컴은 카메라 기자들 앞에 와서 포즈를 취했지만 우리는 그 장면을 찍지 못했습니다. 우리 옆에 있던 영국 통신사인 게티이미지 기자의 손에 짧은 렌즈가 끼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사진기자를 향해 뛰어 온 스포츠 스타, 그리고 그와의 거리가 가까울 것을 미리 예상한 사진기자의 합작으로 한국 기자들은 ‘물을 먹은’ 사건이었습니다.▶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일 세리머니에 대해 제가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면 국대들의 감정 표현이 불과 20여 년 만에 엄청나게 변했다는 점 때문입니다. 옛날 스포츠 선수들도 골을 성공시키거나 메달을 따면 격정적인 포효를 했습니다. 그러나 감정을 드러내는 대상이 팀의 감독이나 현장에 응원하러 온 가족 친구들을 향한 경우가 많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시상대에 올라가서도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태극기를 향해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장면과 메달을 들고 손을 흔드는 정도였습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원하는 사진기자들과 독자들에게는 부족한 사진일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을 때 메달리스트들에게 사진기자들이 연출상황을 부탁합니다.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경기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에게 사진기자들이 많이 연출시켰던 포즈가 ‘금메달을 입에 물어 보시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금메달 이맛이네”라는 제목을 염두에 둔 사진이 목표였을 겁니다. 그런데 10여 년 전부터 현장에서 금메달 맛보는 세리머니를 부탁하면, 식상해 하는 젊은 선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탑 클래스의 선수들은 그런 연출을 오히려 부담스러워 합니다. 대신 젊은 세대 선수들은 카메라 앞으로 찾아와 윙크를 하고 하트를 만들고, 때로는 렌즈에 사인을 하는 등 ‘그림을 만들어 주곤’ 경기장을 떠났습니다. 자연스러운 개성 표현이 가능한 세대에게 사진기자들의 연출 요구는 필요 없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깨무는 사진이 거의 사라진 것을 저는 이런 변화의 흐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못 본 경기 중에 금메달 깨무는 세리머니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현장을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운동에 집중하느라 특별한 세미머니를 준비하지 않은 선수들도 얼마든지 훌륭한 분들이시니까요. ▶ 자원이 없던 시절이라 신문 지면도 아주 적었습니다. 경기는 많고 지면은 적고 그러다보니 단체사진이나 전체 경기장 모습을 지면에 실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당연히 지금의 눈으로 보면 사진이 임팩트도 없고 시선도 잘 못 끕니다. 집단적인 사진에만 익숙했는데 이제는 미니멀한 선수 개개인의 모습을 촬영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지금은 뉴스를 전달하는 입장에서 보면 자원이 많은 시대입니다. 지면도 많아졌고 인터넷을 통해서는 무한대의 사진을 찍어 전달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앨범에 ‘모듬 별’ ‘개인 별’ 사진이 있는 시대입니다. 제가 어릴 때와는 다르네요. ▶승리하면 기쁨을 만끽하며 개성을 충분히 드러내고, 패배해도 웃는 우리 젊은 선수들. 사진기자들의 고민이 시작되어야 하는 걸까요? 어쩌면 행복한 고민일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은 백 년 전 신문에 실린 스포츠대회 사진을 보며 스포츠 사진의 변화를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가을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1923년 10월 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남녀 한쌍이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사진설명을 보니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름입니다. 9월 26일 [백년사진 No. 35]에 포스팅했던 “우리는 언제부터 하늘을 날았을까… 첫 비행가 안창남이 죽었다는 소문”의 주인공 말입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안창남씨가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와 누이를 만나는 상봉 장면이군요. 일본에서 일어난 대규모 지진과 일본인들의 린치로 많은 조선인들이 사망하던 시절, 당시 우리 민족 최초의 비행사로 유명했던 안창남씨가 죽었다는 잘못된 뉴스가 퍼지기도 했었습니다. 그랬던 안창남씨가 배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온 후 부산역을 거쳐 서울역에 도착, 누이와 상봉을 하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입니다. ▶이날과 전날 동아일보 지면에는 안창남씨 귀국 관련 소식이 아주 많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우선 전날 부산에 도착한 기사의 원문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安昌男氏 昨朝釜山發 고생은 햇스나 원긔는 왕셩해 일시사거설을 전하든 비행가안창남(安昌男)씨는 삼일 아츰 부산에 입항하는 창경환(昌慶丸)으로 상륙하야 오전 구시에 부산을 떠나는 특별 급행렬차로 경성에 향하얏는대 씨는 디진중에 여러가지로 고생을 만히 하얏스나 원긔는 매우 왕성하야보이더라(부산뎐화)/1923년 10월 4일자 동아일보 3면 ▶사진이 실린 10월 5일에는 안창남씨의 증언이 실려 있습니다. 좀 길지만 누군가에는 필요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 원문을 그대로 전합니다. 굳이 읽으시지 않으시고 스킵하셔도 좋습니다. 日本人으로變裝하고일본 여자의 도음을 바다 군마현으로 피하기까지 ◇安昌男氏經驗談◇ 구사일생의 위경을 버서나서 꿈속가치 고향에도라온 안창남씨는 깃붐이 넘치는 얼골로 이번 고생한 경력담을 다음과 가치하며 다시 한번 감개가 무량한 듯 하더라 四人이 坐而待死 디진중에 병실에서 나는 몸에 병이 잇서서 디진이 나기전 약삼주일전부터 경교구(京橋區)에 잇는 지뎐병원(池田病院)이라하는 곳에 입원을 하얏슴니다. 디진이 이러나든 일일에는 나와 나의 친구 한사람과 이웃방에 잇는 환자 한사람과 간호부 한사람 도합 네사람이 내방에 모혀서 뎜심밥을 먹으랴하는대 돌연히 집이 흔들니기를 시작 하더니 차차 디진이 커저서 방바닥이 들석~하고 방네귀가 어긋나기를 시작하기로 창밧글 내다본즉 압헤잇는건축청부(建築請負)영업하는 삼칭벽돌집이 와글~하며 뎐차길로 문허집듸다 이광경을 본 우리 네사람은 밧그로 나아가도 살길은 업슬것을 짐작하고 방한가운대에 네사람이 머리를 맛대이고 죽더라도 가치죽기로 하얏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얼마아니하야 디진은 긋치엇슴으로 우리병원에서는 아모 연고도 업시 의사와 환자가 모다 거리로 뛰어나아갓슴니다 船便으로芝浦에 바다에서 하루밤 거리로 나아가본즉 벌서 뎐차길에는 사람으로진을첫고 압뒤집이 모다 문허젓는대『도라가는 디진은 뎡녕 또잇슬것이오 이만큼 큰 디진이 잇섯스니 의례히 불이날것이라』는공론이 분々하야사람들은 모다 엇지할줄을몰나 할때 벌서 여기저기서 불이일어나니순식간에우리가서잇는곳까지왓습니다 이때에 나는 부근 내속에 뷔인배가 잇는 것을 보고 두말할 것 업시 그리로 뛰어들엇갓슴니다 이때에 나와가치 뛰어나온 환자와 간호부 몃명이 나의탄배로 뛰여들엇슴니다 물에서위험을피하랴하얏스나화세는점々맹렬하야 도뎌히 조그만한내속에서는 아니될줄을 알은 우리는 배를 떼워가지고 다라나기를 시작하얏스나 얼마 아니가서 곳 불보다도 무서운 해일(海溢)을 맛낫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내가좁음으로별일은업섯스며그길로바로품천(品川)으로 도망을하야 그날밤은지포(芝浦)해안에서 불안중에 지냇슴니다 虎口에서虎口에 품천에서격근위경 그이튼날|이일정오쯤하야 우리는모다 배가곱흠으로 무엇을 조금먹으랴고 품천에 배를대이고 상륙하얏스나 위험은 갈사록 더 심하야젓슴니다 오후 두어시가 되닛가 소방대의 종소리가사방에서요란하게들니더니남녀로소할것업시 사람이란사람은 모다바다가로밀녀나옴을보고우리는웬일인가또불이낫나하얏스나나종에알고본즉엇더한일이생겻다하야 그와가치 소동을한것입니다우리는할수업시다시배를탓더니청년단인지누구인지알수업는사람들이와서 조사를 너무 심하게함으로나 는 이제는 그만이다!하엿스나 요행히 위경을 면하고 그밤은 역시 바다에서 새인후 그이튼날|삼일에는 다른환자들과 함께 품천에잇는 품해병원(品海病院)에입 원하게 되얏습니다 그러나나는엇지할수업시그자리에서안등창남(安藤昌男)이라고 일본일홈으로 행세를하게 되얏슴니다 商人으로變裝하고 일본녀자의구제로 그병원에도 삼사일잇스닛가 잇지 못할 형편이 잇서서 이제는 어대로 갈지를 모르게되얏슴니다 그러나 죽는데에도 살약이 잇다는셈으로 나의 목슴을 구원해준사람은 어느 졂은 일본 녀자올시다 그는 나와 가튼병원에 입원하얏다가 이곳까지 가치온 죽뎐(竹田)이라는 일본청년의 안해인대 내가 조선사람 인것도알고 사라날 도리가 업는 것을 동정하야 자|안등씨!별수업스니나와 가치 갑시다 저이(자긔남편)는 일본사람이닛가 상관업시 나와 가치 부부처럼 차리고갑시다 하는 소리를들은 나는 고맙다할 것도업시『그럽시다!』하고 일본상인처럼 변장을한후 가방을 가치들고 뎡거장까지 무사히 거러가서 품천에서 차를타고 군마현전교시(群馬縣前橋市)에잇는 죽뎐의 형님집으로 갓습니다 그날인은륙일줄로생각함니다 通信도不自由하야 죽엇다는소문까지 전교시에가서는 거의 삼주간동안이나잇스면서도 그주인에게까지 자긔가조선사람인것을 알니지안코 지냇슴니다 이러한사정이잇기때문에 아모데도 통신할자유가업서서 필경 동경에서는 내가죽엇다는소문을 내게된것이외다생각하면이번일은살엇서도 살은듯십지도안코 죽엇다는소문도 무리는아니외다 그리하야 나는지난이십사일에야 처음으로 동경으로 도라가게되얏는대 급한마음에는 그날로라도귀국하고십헛스나 사정이 허락지아니하야 이제야도라오게 된것이오 그동안에 이만사람을위하야 만히근념해주신 여러분에게는 무엇이라구 감사한말슴을엿줄길이업슴니다 ▶이 사진을 보고 제가 주목한 점은 “표정이 왜 저럴까? 너무 밋밋한데…”였습니다. 아마 지금의 사진기자가 현장에서 저 정도 표정의 사진을 찍은 후 신문 지면에 게재한다면 뉴스룸 내부에서는 큰 논쟁이 붙을 것입니다. 죽었다던 가족이 살아 돌아왔는데 기쁨도 슬픔도 전혀 표현되지 않는 사진을 어떻게 지면에 게재하냐고 말입니다. 물론 사진설명에는 “기쁨에 지쳐 말 조차 없이 서로 바라보기만 한다”고 써 있지만 말입니다. 뉴스룸의 구성원들 중 누구도 이 사진이 상봉 장면, 그것도 뉴스로 이미 유명한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백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들의 대부분에서 저는 당시 사람들의 표정을 읽어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 옛날 사진에 나오는 얼굴에서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걸까요?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찍지 않았기도 했거니와 인쇄상태도 좋지 않아서 이기도 할겁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일까 생각해봅니다. 피사체들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즉 100년 전 사람들과 지금의 우리들은 평소 얼굴 표정에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속내를 드러내는 것을 어색해 하던 시절, 사진기자들이 누군가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웃음이 사진으로 표현된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집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시절 결혼사진이나 가족사진의 표정과 지금의 사진을 한번 비교해보시면 알 수 있으실 겁니다. ▶ 아마 지금의 사람들이 안창남씨와 누이의 상봉 장면을 촬영해야 할 상황이었다면 혹시 ‘카메라를 보면서 웃어봐주세요!’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을까요? 신문사 사진기자로 25년 동안 일하면서 갖고 있는 의문 중 하나가 바로 “왜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 특히 좋은 일이 있는 사람의 사진을 찍을 때 웃어보라는 주문을 할까?”입니다. 여러분도 아이나 부모님의 사진을 찍을 때 “김치~~”라고 외쳐보셨을 겁니다. 사진기자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신문에 들어가는 인터뷰 사진이나 제품 소개 사진 등에서는 어김없이 ‘미소’가 들어갑니다. ▶영어권에서는 김치 대신에 치즈를 외칩니다. “Cheese~~”는 김치와 마찬가지로 입꼬리가 올라가고 치아가 드러나서 웃는 모습으로 보이게 됩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김치”라고 외치는 건 미국의 “Cheese“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나름 토착화 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건 언어학자들이 해명할 문제이지만 치즈나 김치 모두 마지막 자음이 치아를 드러내는 음가(音價)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그렇다면 왜 인류는 사진을 찍을 때 “Cheese~~”를 외치는지에 대해 기원을 찾을 수 있을까요? 치즈는 언제부터 카메라와 함께 하기 시작했을까요?▶뉴욕대학교의 커뮤니케이션 교수인 Christina Kotchemidova가 쓴 논문, ‘Why We Say “Cheese” : Producing the Smile in Snapshot Photography’ 에 따르면, 치아를 드러내놓고 웃으며 사진 찍는 문화는 카메라가 발명된 초기에는 없었습니다. 19세기에는 유럽스타일의 정숙하고 근엄한 얼굴 표정이 다수였습니다. 독일의 경우는 아직까지도 그러한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고 교수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크게 웃으면서 찍는 사진은 20세기 미국식 자본주의의 문화라는 겁니다.▶그렇다면 왜 20세기에 넘어오면서 웃는 사진이 대중화되었을까요?논문은 기술의 발전이 가장 큰 이유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초창기 카메라는 지금처럼 순간을 정지시키는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모델은 카메라 앞에서 30초 이상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만 흔들리지 않고 뚜렷한 사진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인데 이 시간동안 미소를 유지한다는 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색할 것입니다.두번째 이유는 대중매체의 발달입니다. 우월한 외모의 배우와 가수 그리고 정치인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보여지면서 시청자와 독자들은 점점 그들을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솔직한 모습보다는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고 자연스레 웃는 모습이 ‘대세’(cultural leadership) 되었다는 것이죠.별로 동의하진 않지만 세번째 이유로 언급되는 것은 치아교정술의 발달입니다.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치아를 가지런하게 배치하는 수술이 대중화되면서 자신있게 치아를 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웃는 사진이 먼저인지 치아교정술이 먼저인지를 따지기 보다는 두 가지를 연관시킨 교수의 상상력에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유명인의 무표정한 ‘상봉 사진’을 통해 사진 속 표정이 시대별로 다를 수 있다는 얘기를 한번 해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카메라 앞에서 무표정하게 있는 것이 우리의 얼굴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완연한 가을입니다. 즐거운 휴일되시길 바랍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추석 연휴 잘 보내고 계시는지요? 신문사도 신문발행을 멈추고 28일부터 연휴에 들어갔습니다. 대략 추석 2주 전부터 사진기자들은 관련 사진을 촬영해 지면과 온라인에 게재했습니다. 미리 성묘하는 모습, 차례상을 준비하기 위해 재래시장을 찾은 시민들의 모습, 연휴를 맞아 해외로 떠나는 여행객 모습, 서울역에서 귀성길에 올라 부모님을 만나는 모습 등을 스케치합니다.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서 추석은 어떤 사진으로으로 표현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고 신문을 뒤져 보았습니다. 100년 전 사진기자들은 추석을 앞두고 어떤 사진을 찍었을까요? 음력 날짜를 변환해보니 1923년 9월 25일이 추석이었습니다. 그 날 근처 신문을 살펴보았는데 눈에 띄는 추석 풍경 사진이 없었습니다. 약간 당황스러웠습니다. 옛날에는 추석이 없었었나? 그러고 보니 100년 전은 식민시대었습니다. 민족의 전통 풍습이자 일종의 축제인 추석 풍경을 신문에 싣는 것이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문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추석 당일인 1923년 9월 25일자 신문에 작은 사진이 하나 실렸습니다. 억새인지 수크령인지 모를 가을 식물 뒤로 둥그렇게 떠 있는 보름달 사진입니다. 사진 밑에는 추석을 뜻하는 한자어인 ‘중추가절’이라는 단어만 덩그러니 붙어 있습니다.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 어떤 내용인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다행히 사진 근처에 간단한 기사가 하나 있습니다. 금일이 추석-경성은 매우 적막금 이십오일은 음력 팔월 십오일 곧 추석이라 풍성풍성한 세상 같으면 경성 시내에서도 매우 경황이 좋겠지만은 금년 추석에는 집에 떡하는 광경도 드뭇드뭇하여 일반의 실생활이 얼마나 적막한 것을 알겠더라. ▶ ‘풍성한 시절이었으면 시내가 북적거리고 활기가 돌았겠지만 올해는 집에서 떡을 하는 광경도 보기 드문 것으로 봐서 일반 사람들의 실제 생활이 적막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예년에는 분명 추석 명절에 시내가 활기가 찼는데 이 해는 평소와 다르게 적막한 분위기이라는 겁니다. 이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없습니다. 답답한 마음입니다. 아무리 작은 지면이라고 하지만 기자들이 당시 상황을 왜 이렇게 간략하게만 기록해 놓은 것일까요? ▶ 추석 다음날인 1923년 9월 26일자 신문에 실린 글을 하나 더 소개하고자 합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금번 지진재해로 인하여 발생된 골계적 사실이 한두건에 그치지 아니하나 그 중에도 포복요절할 일은 동경 소석천구 금물상 모씨가 자경단원으로 활동하는 중에 부근의 주민들이 그 사람을 조선인과 유사하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금물상 모씨는 당당한 일본인을 조선인에게 비유한 것은 오명이라고 하여, 마침내 자살하였다 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 하면 이른바 조선인이 그와 같이 추악무비한가. 이 따위 일본인은 정말 정신병자가 아니면 일종의 괴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작일은 중추절임을 불구하고 시가 전체가 꽤 적막한 감이 불무하였다. 직접으로는 서도수재의 타격도 있을 것이며 간접적으로는 일본 지진재해의 영향도 불무할 것이다. 앞으로 오는 경제계가 여하할지는 천기는 치워 오고 먹을 것 없고 입을 것 없는 무수한 생령들의 호원성이 이막을 타래하는 듯한 감이 불무하다./ 동아일보 1923년 9월 26일자 횡설수설(橫說竪說) 여기서 불무(不無)하다는 표현은 ‘없지 아니하다’, 즉 아주 많다는 뜻입니다. 추석이지만 도시 전체가 적막한 느낌이 아주 많다는 것이죠.1923년 한반도에는 큰 수해가 발생했고, 일본 대지진으로 많은 인명 피해가 생겼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어수선한 시기였습니다. 명절의 평화로운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신문에 실리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 횡설수설이라는 칼럼이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발생한 간토대지진의 여파로 ‘한 일본인은 자신이 조선인을 닮았다’는 말에 자살을 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일본인들이 조선 사람들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이 칼럼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100년 전 추석 풍경은 신문에서 찾을 수 없는걸까요? 사진이 제 기대만큼 신문에서 발견되지 않아 그 다음해인 1924년 추석 사진을 찾아보았습니다. 역시 특별한 풍경 사진은 없었습니다. 비슷한 보름달 사진 한 장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다음 해 신문을 추가로 살펴보았습니다. 1925년 은 10월 2일이 추석이었습니다. 다음 날인 10월 3일에 성묘 모습이 실렸습니다. 여러분께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 사진을 찾은 것 같습니다. 기사는 없이 사진설명 그것도 묘한 여운이 가득한 제목만 있는 사진입니다. 마치 할 말은 많은데 할 수 없다는 뉘앙스 입니다. ‘갔던 명절이 다시 왔지만…어제 추석날 공동 묘지에서’이라는 내용 쯤 됩니다. 성인 여성 2명과 왜소한 소녀 한명이 앉아 있습니다. 뒤쪽에서는 남성들이 벌초를 하고 있습니다. 사진 왼쪽에 나무로 만든 듯한 묘비에 고인의 이름이 한자로 써 있습니다. 수철리 묘지는 지금의 서울 금호동에 있던 공동묘지를 말합니다. 서울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던 시절, 4대문 밖은 도심 외곽에 해당되어 논밭으로 활용되거나 공동묘지도 곳곳에 조성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사진에 따르면, 추석 명절에 집에서 차례를 지낸 시민들이 조상들의 분묘를 찾아 잡초를 뽑고 경배를 드리는 일정을 보냈던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이야 각 집안마다 변화된 방식으로 추석을 보내시겠지만, 100년 전에는 이런 풍습이 꽤 많았을 겁니다. 사진에서 제가 조금 주목한 것은 묘지 비석 옆 제단에 제수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보통 명절 성묘를 갈 때면 집에서 준비했던 차례상과 별도로 술과 과일 송편 등을 싸가지고 간 후 간단한 차례를 한 번 더 지내는 게 풍습이었을텐데 말입니다. 척박하고 힘들었던 시를 보여주는 사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은 100년 전 추석 풍경 사진을 찾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점이 보이시나요? 100년 전 성묘 모습에서 지금의 우리 모습과 차이가 느껴지시나요?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평안한 연휴 마저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 다른 사진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죄수복을 입은 남성들이 화면 왼쪽의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1980년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육군 계엄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 출석한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과 유사하기도 하고, 한국 현대사의 아픈 기억인 이념 사범 사건 재판 모습을 기록한 사진과도 구도가 비슷합니다. 그러고 보니 1920년대 신문에서는 기자들이 법원 내부의 공판 과정을 사진으로 찍었던 사례가 꽤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자주 신문에 재판 모습이 보도되었습니다. 기사를 읽어보겠습니다. 인천을 중심으로 하여 대대적으로 군자금을 모집한 윤응념 일파에 대한 공판은 예정과 같이 경성지방법원 제 7호 법정에서 열리었다. 시간 전부터 군중은 사면으로 모여들어 방청석은 터지고 넘칠 듯이 되었으며 그 위에 입장하지 못하고 섭섭히 그만 돌아간 사람도 적지 아니하다. 시간이 되매 삼시(三矢) 판사와 대원(大原)검사와 기타 서기가 림석하여 심리를 개시하엿는데 먼저 피고 일동의 주소성명과 직업 연령에 대한 문답이 있은 후 사실 심리에 들어 갔더라. ▶ 당시 일본 검찰 입장에서는 권총 강도, 지금의 우리의 입장에서는 군자금 마련을 위해 부잣집을 턴, 독립운동가에 대한 기사입니다. 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인터넷에 ‘윤응념 인천사건’으로 검색하니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사건 자체가 아니고, 법정에서 이뤄지는 공판을 사진기자들이 촬영할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만약, 1923년 인천사건과 같은 상황이 다시 일어날 경우, 사진기자들이 공판 모습을 촬영할 수 있을까요? 현행법으로는 신문사와 방송사의 기자들이 판사의 허가 없이 법정 내부를 촬영하거나 녹음할 수 없습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신문사 사진기자들은 법정 내부 촬영을 몇 번씩은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진기자들 중에는 재판 장면을 한 번도 촬영해보지 못한 기자들이 대부분입니다. ▶ 사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기자들이 재판 장면을 찍지 못하게 된 계기가 ‘이철희 –장영자 사건’이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1982년 5월 4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이철희 장영자 부부를 구속했습니다. 육사 2기 출신으로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내고 국회의원까지 지낸 이철희와 그의 부인 장영자는 ‘단군 이래 최대의 금융 사기 사건’이라고 일컬어지는 어음사기를 벌였습니다. 게다가 당시 대통령의 처가가 연루된 정황까지 있어 사회 전체가 관심을 가진 큰 사건이었는데 이철희 장영자 부부의 공판을 취재하던 사진기자들이 법정에서 올라가지 말아야할 연단 등에 올라가고 소란스럽게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진과 영상기자들의 법정 출입이 제한되기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사진기자 선배들의 증언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 보니 두 사람이 구속되어 재판 받기 직전에 이미 법이 바뀌었습니다. ▶ 기자들이 법정 사진을 거의 촬영하지 못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1982년 2월 26일자 중앙일보를 보니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와 있습니다. “대법관 회의는 25일 형사피고인 등 사건 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법정 안에서의 녹화, 촬영, 중계방송을 못하도록 방청 촬영 등에 관한 규칙을 개정, 3월 10일부터 시행토록 했다. 이전의 규정에는 재판장의 허가를 받아 촬영 등이 가능토록 되어 있었으며 ▲심리 개시 전에만 가능하고▲법단위에서는 촬영을 금하며▲촬영 등으로 인한 소란을 금지해왔다. 대법원 당국자는 언론, 출판의 자유가 다소 제한된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인권보호와 법정 안의 질서유지 등을 위해 이같이 규칙을 개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1982년 2월 26일 중앙일보.▶ 1982년 2월 열린 대법관 회의에서 ‘앞으로는 판사의 동의 이외에 사건 당사자의 동의가 있어야만 재판을 촬영할 수 있다’는 규칙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인권보다는 사회적 관심 정도가 촬영 허가의 척도였지만 1982년을 기점으로 개인의 인권에 대한 강조가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2023년 9월 현재 법원조직법 제 59조는 “누구든지 법정 안에서는 재판장의 허가없이 녹화 촬영 중계방송 등의 행위를 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판장은 허가 과정에서 사건 당사자의 동의 여부를 검토해야 합니다. ▶ 그런데 1982년 이후에도 우리 사회는 몇 번의 중요 사건의 공판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1996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공판, 2013년 내란음모 혐의를 받았던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공판, 2015년 세월호 선장 등에 대한 공판,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공판, 2018년 이명박 전 대통령 공판 등 법원이 특별히 허가한 경우에 예외적으로 대표 취재단 (POOL)이 법정에 들어가 촬영했습니다. 당사자들이 다 동의를 했기 때문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법원이 판단하기에 국민의 알권리가 당사자의 동의보다 우선한다면 기자들을 법정 안으로 들어오게 해 촬영을 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관련 규정을 한번 찾아봤습니다.[법정 방청 및 촬영 등에 관한 규칙]제 3조(퇴정 명령 등) 재판장은 다음 각호에 해당하는 자에 대하여 이를 제지하거나 또느 퇴정을 명할 수 있다.재판장의 허가 없이 녹음, 녹화, 촬영, 중계 방송 등을 하는 자제 4조(촬영 등의 제한)①법원 조직법 제 59조의 규정에 의한 재판장의 허가를 받고자 하는 자는 촬영 등 행위의 목적, 종류, 대상, 시간 및 소속기관명 또는 성명을 명시한 신청서를 재판기일 전날까지 제출하여야 한다.② 재판장은 피고인(또는 법정에 출석하는 원, 피고)의 동의가 있는 때에 한하여 전항의 신청에 대한 허가를 할 수 있다. 다만, 피고인(또는 법정에 출석하는 원, 피고)의 동의 여부에 불구하고 촬영 등 행위를 허가함이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어떻게 보면 법원이 원칙이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회적 관심 또는 국민의 알권리의 정도를 법원이 자의적으로 판단할 여지가 있습니다. 법원에서 재판 받는 형사 피의자에 대한 촬영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미국 신문에서는 가끔 법정 내부 모습을 화백이 그림으로 그려 보도하기도 합니다. 다만, 2018년 미국 올림픽 체조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가 선수들을 성폭행한 사건 등 사회적 주목을 받는 사건의 경우, 미국에서도 판사가 생중계와 사진기자의 취재를 허용합니다. ▶ 한국이나 미국의 사법부가 대부분의 형사 사건에서 카메라맨의 법정 내부 촬영을 통제하는 이유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인권도 인권이려니와 사실관계를 따져서 판단을 해야 하는 법관들의 입장에서 취재진에 의해 법정이 소란스러워지면 판결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미디어가 싫어하는 것과 법원이 판단하는 죄가 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 선입관을 피하기 위한 장치로 취재진 출입금지를 만든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판사 사회 내부에서도 사법부가 법정 촬영과 방송 등을 통한 재판과정 공개를 전향적으로 검토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을 끈 적도 있습니다. 2008년 7월 말, 서울남부지방법원 윤성근 부장판사는 ‘법정 내의 촬영 또는 방송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법원 내부 게시망에 올렸습니다. 논문의 뼈대는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재판 과정의 공개를 전향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윤 부장판사는 논문에서 “미성년 성폭행 사건과 같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재판장의 적절한 지휘 하에 재판 과정에 대한 촬영이나 방송을 포함해 재판 공개가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적으로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높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 오늘은 100년 전 빈번하게 있었던 형사사건 재판 사진이 오늘날 거의 사라진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이번 주 신문에서는 눈에 띄는 인물 사진이 하나 있어 그 스토리를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비행기 조종사의 죽음에 관한 소문을 전하는 기사입니다. 1923년 9월 15일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사거를 전하는 안씨23세의 단촉한 일생조선의 과학상 위대한 공로자비행 기술은 일인도 감탄◇조선의 비행가 안창남씨가 이번 재변 중에 무참히 죽었다고 동경의 전보는 필경 우리에게 야속한 소식을 전하고 말았다! 아직도 우리의 가슴에는 그가 설마 참으로 불행아였으랴 하는 생각이 스러지지를 아니한다. 작년 12월 10일에 한강가 여의도 벌판에서 수십만 동포의 열렬한 환호 중에 고국 방문의 대비행을 하던 광경이 지금도 오히려 우리의 눈 앞에 현저히 보이는 듯 한데 이러한 소식은 정말 야속도 심하다! 동경의 재변 중에 의외의 불행을 당한 사람이리오 참혹히 죽은 약 10만 생령 중에 몇 천명의 동포가 섞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 우리는 만리 이역에서 의지가 없이 불행한 동포를 위하여 만강의 열루를 금치 못하는 바이며 안씨로 말하면 우리 민족의 과학상 위대한 공훈이 있을 뿐 아니라 아직도 장래에 어떠한 사업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줄지 모르는 터인데 의외에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됨은 실로 통탄할 바이다. ◇불행한 소식이 과연 참이라하면 그의 최후는 얼마나 참혹하였을고 사고무친한 남의 고장에서 평일에도 눈치와 시기 속에서 외로이 분투하던 그가 재화 중에 변사를 하였다하면 그의 유해는 지금에 과연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하여도 기가 막힐 뿐이다. 안씨의 경력은 작년 고국 방문 비행때에 본지에 소상히 소개된 바이라 이제 다시 기록할 것도 없지만은 이제 흉문을 접한 우리는 다시 한번 그의 짧은 일생을 생각지 아니할 수 없다. ◇안창남씨는 금년 23세의 꽃같은 청춘이다. 그는 신축년 정월 29년에 서울 평동 안의관 집에 태어나니 그 부친은 40에 첫 아들이라 사십동이 창남은 애지중지 중에 금지옥엽같이 자라나는 중 4살에 자친을 의의고 누이의 손에 길러나서 12살이 되었을 때 누이가 출가하고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 사십동이 귀한 창남은 그만 의지할 곳이 없는 고아가 되고 말았다.◇그러나 창남은 어려서부터 기상이 쾌활하여 조금도 국축함이 없이 전도를 개척한 결과 필경은 조선에서 처음되는 비행가가 된 것인데 그는 어려서 미동 보통학교를 다니었고 휘문학교를 중도에 퇴학 한 후 대판(일본 오사카)으로 가서 자동차학교를 마친 후 열아홉살에 다시 동경으로 가서 소율비행학교를 다니어 석달만에 3등 비행사가 된 후 그 학교의 교원으로 있다가 이번에 불행한 것인데, 그의 비행에 대한 천재는 세상이 공인하는 바이라 다시 말할 것도 없지만 금년 6월 초생 천엽현(일본 지바현)에서 거행한 민간비행대회에서도 모든 곤란을 무릅쓰고 2등의 명예를 얻었으며 성적으로는 일본인 간에도 그를 당할 자가 없이 되었고 더욱이 야간비행에는 특별한 천재를 가졌으므로 그의 묘기에는 동료간에도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이와 같은 실력을 인정한 일본 항공국에서는 지난 6월 31일에 아무 시험도 없이 1등 비행사 면장을 하부하였다. ◇안씨의 불행은 실로 민족적 대손실이라 하려니와 그는 평생에 말하기를 ‘나는 결코 비행기로는 죽지 않을 것이다’함을 보아 그가 얼마나 대담하고 침착하였던 것을 알 수가 있었으며 일찍이 기자와 같이 비행기를 타고 동경의 공중을 날아 다닐 때의 실제 경험을 보면 그는 공중이나 지상이나 조금도 다름없는 태도로 언제든지 평화한 낯빛으로 장난하듯이 손을 놀리어 기계를 조종함은 그가 얼마나 비행술에 자신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공중에 나는 재주가 있어서도 죽음에 들어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 안씨를 잃음은 우리의 중대한 손실이오 그 자신으로 생각하여도 원대한 희망을 품고 23세의 청춘으로 세상을 떠남은 철천의 한스러운 일이나 무정한 죽음을 어찌하리오. 다만 안씨의 일생이 비록 짧다하나 다소의 성공을 한것으로써 유명이 서로 쓰린 가슴을 위로할 뿐이다(한 기자)▶ 우리 역사에서 안창남이라는 이름은 최초의 비행기 조종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술을 배웠고, 1922년 12월 10일 ‘금강호’를 타고 조선인 최초로 경성 하늘을 비행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제 1차 세계대전 말미였던 1918년 미국 공군에 조종사로 임관한 이응호와 1919년 중국 남원비행학교를 졸업하고 비행사가 된 서왈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는 합니다. 하지만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비행술을 선보인 것은 안창남이 맞습니다. 안창남은 1917년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 파일럿 아서 스미스가 용산에서 선보인 비행 퍼포먼스를 계기로 진짜 비행사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고 합니다. 아카바네 비행제작소에 들어가 비행기 조립과 정비 기술을 익혔으며, 소율(일본 오구리)비행학교에 진학해 6개월간 비행기술수업을 이수, 1920년 11월에 비행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 해인 1921년 5월에 치러진 일본 최초의 비행자격 시험에 당당히 합격해 정식 비행사가 되었습니다. 17명 응시에 2명이 합격했고 안창남이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고국의 동포 사이에서 엄청남 인기를 얻게 된 안창남은 일본에서 자신이 소유한 비행기를 가지고 직접 고국을 방문하게 됩니다. ▶1921년 7월부터 동아일보는 안창남에 대한 기사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22년 10월 19일 기사를 통해 “동아일보 주최 안창남군 고국방문 대(大)비행”이라는 선전 기사를 냅니다. 안창남을 보고 싶다는 국민들의 마음을 읽고, 고국방문을 위한 일종의 캠페인을 연 것이었죠. 11월에는 동아일보사의 제안으로 ‘안창남군 고국방문후원회’가 조직되어 박영효 권동진 등 당시의 주요 인사 47명이 후원회원으로 참여했다고 합니다. ▶ 드디어 안창남은 1922년 12월 5일 서울에 도착하고, 예고했던 대로 12월 10일에 역사적인 비행이 펼쳐집니다. 당시 서울 인구 30만 명 중에서 5만 명이 여의도에 모여 그의 비행기술을 직접 관람하며 환호하게 됩니다. ‘금강호’라고 이름 붙인 영국제 뉴포트 단발쌍엽 1인승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간이 비행장을 이륙한 뒤 남산과 창덕궁 상공을 거쳐 다시 여의도에 착륙하는 코스였습니다. 그날의 감격에 대해 안창남은 [개벽]지 1923년 1월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성의 하늘, 경성의 하늘! 내가 어떻게 몹시 그리워했는지 모르는 경서의 하늘! 이 하늘에 내 몸을 날리울 때 내 몸은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었습니다…참으로 일본서 비행할 때… 보이지도 않는 이 경성을 바라보고 오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뛰노이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지웠는지 알지 못합니다.”▶안창남은 1930년 중국에서 사망한 것으로 지금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사는 어떻게 된 걸까요? 결과적으로는 잘못된 소문을 기사화한 것입니다. 오보입니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혼란에 빠져있던 상황에서 안창남이 죽었다는 소문이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 기사화된 것입니다. 지난 주 [백년사진 No. 34] “간토 대지진에서 살아 돌아온 일본 유학생” 이야기에서 함께 보았듯이, 수십만 명이 사망하고 일본의 사회 시스템이 초토화되다시피한 대형 지진 상황에서 기자들의 취재력도 한계가 많았습니다. 위 기사에는 기사 마지막에 ‘한 기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게 기자의 성씨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한 명의 기자가 썼다는 의미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이색적입니다. 당시 신문 기사에서 기자의 이름을 발견하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기사 내용을 보면, 이 기자가 일본에 가서 안창남 선생과 함께 비행기에 직접 올라 경험을 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1921년과 1922년 안창남에 대한 기사를 연속해서 작성하고 고국방문 프로젝트에서 중추 역할을 했던 기자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가 안창남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기사를 쓴 것이 아닐까 합니다. 기사에서 느낌표와 격정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 오늘은 100년 전 간토 대지진 당시 스타 비행사의 죽음과 관련한 기사와 사진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점이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올해는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關東)대지진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됩니다. 또한, 일본의 자경단원, 경찰, 군인 등이 조선인을 집단 학살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대지진이 일어나자, 일본인들 사이에는 ‘조선인들이 자연재해라는 혼란을 틈타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급속하게 퍼졌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사진은, 100년 전 일본에서 유학하던 도중,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가 일어나자 극적으로 일본을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온 두 명의 젊은 조선인 사진입니다. 9월 7일자 1면 사진입니다. 서울역 근처로 보이는 곳에서 단정한 교복 복장의 두 청년이 어색한 포즈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적사항에 대한 설명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9월 7일 구사일생으로 동경을 탈출한 2 학생 – 생지옥의 실황을 목도한 최신 소식.참화의 지옥을 벗어나 2일에 맹화 중의 동경을 떠나 도보와 무료 승차로 구사 일생의 곤경 중 6일 아침 6시 경성역에 도착하는 급행차로 무사히 귀국한 학생 2명이 있다. 그들은원적 평남 강서군 수산면 운북리 1320현주소 동경 경교구 남은야정 27좌등방 명치대학생 한승인원적 원산부 두방리 49현주소 동경 경교구 남은야정 27 좌등방 동양대학생 이주성의 양군인데 그들은 지진이 일어날 당시에 가장 위험한 경교구에 있었으므로 당시의 참혹한 광경을 목도하였으며 화염 중에 몸을 피하여 가진 곤경을 겪곤 돌아왔는데 그들은 조선 사람으로서 처음 귀국한 사람이라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칠만한 소식이 많기로 그 대강을 보도하는 바이다.▶ 이 날 신문에서 한승인 이주성 두 대학생이 직접 목격한 간토대지진에 대한 설명과 함께,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단편적이지만 의미있는 증언을 싣고 있습니다. 기사 중에서 자경대와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위협 부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래의 내용입니다.“무수한 일본인이 자경대를 조직하고 만일을 예방하는 중 그 보호를 받아서 명치순궁에 숙박하고 3일 아침에 출발하여 철도 뚝을 따라 70리 밖 포화(浦和)에 도착하였다. 경찰서를 방문하고 그 보호를 받아서 조정까지 차표 없이 차를 타고 그로부터 명고옥(名古屋)까지 타고 그 다음 신호(新戶)에 나와 교섭한 결과 하관(下關)으로 급행하였다. 중간에 천구에서 조정까지는 창으로부터 승강하고 열차의 지붕까지 타고 있었다. 기차 기관차와 화차의 지붕까지 전부 타는 중이었다. 이 같이 불 속은 나오는데도 기차연로에서 자경대가 조선사람인 줄을 알면 끌어 내리게 되었으므로 매우 위험하였다 (이하 36행 삭제)일본인들이 자체적으로 구성한 자경대원들은 조선인 유학생이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숙소를 안내하는 역할도 하고, 한편으로는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조선인들을 열차 밖으로 강제로 끌어내리기도 했다는 이율배반적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기사 본문에서 (이하 36행 삭제)라는 표현이 기사 끝부분에서 나오는데 이 부분은 문맥상 자경대원들이 조선인에게 가했던 폭력 상황을 묘사했을 것으로 보입니만 당시 검열과정에서 삭제되어 있습니다. 당시 기자들이 정확한 기록을 남기지 못한데다 일본 정부 역시 린치와 학살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진상규명이 아직도 제대로 되지 않아, 한일 관계에는 앙금이 남아있고, 우리나라에서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해결방식을 둘러싸고 좌우가 여전히 대립하고 있습니다.▶개인적으로 사진을 비롯한 이미지가 정치적 매체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는데 꽤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본질이 그랬더라도 사진기자일을 하면서 그 말을 피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진은 불편부당해야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겁니다.그런데 100년 전 일본의 지진을 보면서 사진이라는 게 정치성을 갖는 매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우선, 당시 신문에서는 일본의 피해 상황을 아주 많이 다뤘다는 점입니다. 동아일보의 경우, 9월 3일자 횡설수설 칼럼을 통해 일본 도쿄가 지진으로 전멸했다는 보도를 하고, 9월 3일자 본사 기자 파견과 일본 가족 안부 확인 돕겠다는 사고를 3면에 실었습니다. 9월 7일에는 입수한 사진으로 지면을 가득 채우는 ‘화보 보도’를 하고, 조선인에 대한 감정이 있으니 도쿄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보도를 함께 합니다. 9월 8일에는 항공사진으로 폐허를 보여주고 거리에 즐비한 시체사진도 보도합니다. 강제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에 대한 감정이 없었다면, 아무리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자세하게 일본의 재난을 다뤘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둘째, 일본의 사진기자들은 간토 대지진 때 조선인들이 집단학살 당한 순간을 기록하지도, 입수하지도, 보관하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동아일보 사진기자가 현장으로 파견을 갔다는 기록은 없으니 아마 당시 지면에 실린 사진들은 일본 신문에서 찍은 사진을 입수해서 게재한 것일 겁니다. 그런데, 그 사진 중에는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장면은 없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신문사에서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는,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에 대한 린치와 학살 모습의 사진은 없습니다. 아마 조선인 사진기자가 현장을 갔었다면 하는 가정을 해봅니다.셋째, 저는 100년이 지난 생존자 사진을 발견해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일본인들이 저질렀을 학살에 대해 지금이라도 책임 있는 대책이 있길 바란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100년 전 간토 대지진 당시 구사일생으로 일본을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온 두 명이 유학생 사진에서 사진을 비롯한 기록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관점과 가치가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여러분은 저 사진에서 어떤 게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이별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여러분은 어떤 노래 가사나 시의 한 소절이 생각나시나요? 이별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어떤 장면이 떠오르시나요?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골라 소개하고 오늘을 생각해보는 [백년 사진] 코너입니다. 1923년 9월 2일자 신문에서 이별을 표현한 사진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의 이별 모습의 전형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서울역을 떠나는 열차 창밖으로 손을 내민 사람들을 향해 플랫폼에 서 있던 사람들이 모자를 벗어 인사하거나 손을 뻗는 모습입니다. ▶ 이 사진에서 저는 지금은 뜸해진, 남북이산가족상봉 행사 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산 형제자매들이 버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손을 뻗는 사진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뮤직 비디오에서 많이 나오는, 입영열차를 탄 남자친구를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는 여심을 표현하는 장면도 함께 떠올랐습니다. 우리에게 꽤나 익숙한 장면이어서 이 사진은 굳이 사진설명을 보지 않아도 ‘이별’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사연의 이별일까요? 기사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별루에 젖은, 작조의 경성역- 가는 사람 보내는 사람 손길을 맛잡고 잘가거라 잘있거라- 간단한 인사조차 鳴咽(명인)한 포와 동포 송별한 한 장면] 전후 두달 동안을 기차로 기선으로 고국산천을 편답하며 거츠러진 옛터에 눈물도 뿌리고 따뜻한 환영에 웃음도 치며 간 곳마다 속절없는 정을 드리여 오던 하와이학생단 일동은 마침내 예정과 같이 작일일 상오 10시 경성역을 떠나는 특별급행으로 하와이를 향하여 출발하고 말았다. 환영회의 위원 일동을 위시하여 각 단체의 대표자와 밋학생 일동의 친족이 되는 남녀 송별자가 무려 이백명에 이르러 서로서로 지친의 손을 잡고 차마 떨어지지를 못하여, 닥쳐오는 발차시간을 앞에 두고 맘을 태우며 하염없는 서운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기차가 떠날 림시하여는 가는 사람은 차창안에서 손을 내어 밀고 보내는 사람은 뿔랫폼에 손을 잡을 ‘잘 있소!’ ‘잘 가오!’ 소리도 울음에 막히고 목에 걸려서 말을 이루지 못하며 보내는 사람의 눈물! 가는 사람의 눈물! 모든 하소연을 대신하였었다. 하와이 학생 일동은 먼저 손을 들어 서투른 어조로 열정에 넘치는 소리를 질러 ‘이천만 동포 만세!’를 부르매 보내는 사람들 편에서는 즉시….▶ 별루, 작조. 지금은 쓰지 않는 표현이라 좀 어색합니다. 지금 말로 바꾸면 [이별 눈물에 젖은, 어제 아침 서울역]이라는 제목 쯤 되겠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사진은 포와(하와이) 동포들이 지난 두 달간의 전국 일주 행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입니다. 띄어쓰기와 표기법이 지금과 조금 다르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기사는 한편의 이별가처럼 감성적인 표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1923년 하와이 학생단의 모국 방문은 당시로서는 큰 뉴스였습니다. 일제의 폭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간 부모와 그 밑에서 자란 이민 1세대가 큰 세상을 먼저 배우고 한국으로 잠시 돌아와 두 달간 전국을 돌며 스포츠 문화 등을 전파하고자 했던 행사였습니다. 사진은 모국 방문단이 미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한 장의 흑백사진이지만, 당시 한국에 남아있게 될 사람과 미국으로 떠나는 사람들 모두의 안타까움과 아픔이 묻어납니다. 기사가 감성적 표현으로 점철된 이유도 현장에서 기자가 느낀 아쉬움 때문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다양한 이별을 직접 목격하고 사진을 통해 봐왔습니다. 남북 이산가족, 추석과 설날 귀경길, 입대하는 청년과 어머니, 해외 파병 가는 군인 가족. 그리고 대부분의 이별이 집단적인 이별이었었습니다. 하긴 개인 간의 사사로운 이별을 신문기자가 촬영할 이유도 없고 정당성도 없었으니까요. 한편으로 외국에서도 이런 집단적인 이별의 순간들이 있을까요? 우리처럼 많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 이별 이후의 시간이 서로 녹록치 않다는 걸 다들 알기에 이별은 더욱 눈물로 채워졌던 것 아닐까요? ▶지금 사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 민족이 겪은 가장 아픈 이별의 경험 중 하나가 구 소련 스탈린 시절 있었던, 연해주 지역에 정착해 살던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와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일입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강제로 실려 아무 연고도 없는 땅으로 내몰렸던 아픈 역사인거죠. 출발지였던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누군가 사진을 찍었다면 어떤 이별의 모습 보다 슬픈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지금도 연해주 지역에 가면, 고려인들이 쫓겨나기 전 일 궈놨던 논두렁과 밭두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 시골 농촌에서 볼 수 있었던 우물의 흔적도 있구요. 정치와 권력에 의해 누군가의 삶이 집단적으로 뿌리가 뽑히는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이별의 부산 정거장’ 노래를 틀어놓고 지나간 역사에서 우리는 어떤 이별과 상봉이 있었을까 그리고 왜 그런 집단적 이별이 반복되어 왔을까 마음속으로 따라가 볼까 합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게 또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