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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오면 2년 늙고, 돌아가면 2년 젊어진다.” 외국인들이 가장 헷갈려하는 한국 문화가 나이 셈법이다. ‘만 나이’만 쓰는 그들에게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 되고 새해 첫날 한 살씩 먹는 한국식 나이는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대사관 홈페이지는 ‘코리안 에이지=올해 연도+1―출생 연도’라는 공식도 안내한다. 새 정부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만 나이로 통일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사용되는 나이 셈법은 한국식 ‘세는 나이’ ‘만 나이’ ‘연 나이’ 세 가지다. 일상에선 ‘세는 나이’를 쓰지만 민사와 행정 분야에선 ‘만 나이’를, 병역법과 청소년보호법은 행정 편의를 위해 현재 연도에서 출생 연도를 빼는 ‘연 나이’를 적용한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민법과 행정기본법에 ‘만 나이’ 표기 규정을 마련한 후 ‘연 나이’를 쓰는 개별법을 정비하기로 했다. ▷세 가지 나이 셈법이 혼용되면서 혼란도 작지 않다. 정부가 ‘12∼17세 방역패스 적용’을 발표하면 만 10, 11세 자녀를 둔 부모들은 “우리 애도 해당되느냐”는 문의 전화를 돌리기 바쁘다. 1월 출생아 수는 12월생보다 1.3배 많은데, 자녀의 세는 나이를 줄이려고 출생신고를 미루기 때문이다. 모 기업 노사는 단체협약상 ‘56세부터 임금피크제 적용’의 나이 셈법을 놓고 법정다툼을 벌인 끝에 ‘만 55세’라는 대법원 판결을 받아낸 일도 있다. 새 정부는 ‘만 나이’로 표준화하면 이런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동아시아 전통인 세는 나이의 유래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다. 태아 존중 사상의 발로라거나, 고대 아시아에 숫자 ‘0’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낙태는 오랫동안 죄가 아니었고, ‘0’ 개념의 인식도 중국이 유럽보다 빨랐다. 달력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유럽은 양력, 동아시아는 음력 문화권이었다. 양력과 달리 자연의 주기에 맞추는 음력은 변동이 심해 매년 새 달력을 반포했는데, 매년 달력이 바뀌다 보니 생일보다는 새해 첫날이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일본은 1950년부터, 중국에선 문화혁명을 기점으로, 북한은 1980년대 이후 만 나이만 쓰고 있다. 세는 나이를 지금껏 쓰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10명 중 6∼8명은 만 나이 통일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도 있다. 하지만 1896년 양력이 도입된 후로도 지금껏 음력설을 지낸다. 일제가 양력 명절을 강요한 탓에 음력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고 한다. 법적 나이가 만 나이로 통일되더라도 세는 나이로 형 동생 정하는 일상의 시간관념까지 바뀔지는 두고 봐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6월 1일 지방선거일에는 교육 권력 교체도 결정한다. 투표용지 7장에는 17개 시도교육감을 뽑는 용지가 들어 있다. 교육감 직선제가 전면 도입된 2010년 전교조 출신 당선자는 2명이었는데 2014년엔 8명, 2018년엔 10명으로 늘어났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처럼 ‘친전교조’ 인사까지 합치면 2014년 13명, 2018년 14명이다. 교육감 선거 두 번 만에 유치원과 초중고교의 교육 권력이 좌파로 넘어간 셈이다. 좌파 교육감 시대 8년을 돌아보면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다. 국어 수학 영어 전 과목에서 기초학력 미달자가 속출했다. ‘시험은 비교육적 줄 세우기’라는 도그마에 빠져 시험을 하나둘 없앤 탓이다. 초등 1학년의 받아쓰기와 일기 쓰기를 금지한 교육감도 있다. 교사들은 편해졌지만 자녀의 학력을 가늠할 길 없는 부모들은 역대급 사교육비를 쏟아부어 계층 간 학력 차만 커졌다. 좌파 교육감들은 혁신학교 살리기와 자사고·특목고 죽이기에 매달렸다. 하지만 혁신학교는 학력 저하를 우려하는 학부모들이 외면하고 있고, 서울시교육청 싱크탱크도 ‘체험은 했지만 배움은 없는’ 교육이 될 수 있다며 예산 삭감과 확대 정책 폐기를 주문한 상태다. 자사고 폐지에 관한 10건의 소송은 좌파 교육감들의 완패로 끝났다. 학생들 학력엔 손놓은 교육감들이 전교조 민원은 철저히 챙기고 있다. 전교조는 교육감 선거 개입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해직 교사 등 9명을 탈퇴시키지 않아 박근혜 정부에서 법외노조 처분을 받고 상당한 혜택을 잃었다. 교육감협의회는 “정부의 전향적 조치”를 촉구했고 현 정부의 ‘기울어진’ 대법원은 법도, 헌법재판소 결정도 무시하고 법외노조 족쇄를 풀어줬다. 전교조는 해직 기간 경력과 호봉을 인정해달라는 소송에서 2012년 패소했는데 교육감협의회는 특별 결의문을 내고 특별법 제정을 요구했다. 국회에는 여당 의원들이 발의한 특별법이 계류 중이다. 원안대로 통과되면 전교조 출신 교육감 9명을 포함해 총 1764명이 약 8억 원씩 받게 된다. 전교조 지지를 업고 당선된 교육감들의 ‘보은 인사’도 빼놓을 수 없다. 조희연 교육감은 전교조 해직 교사 5명을 불법 특채한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있다. 부산시교육청도 ‘해직자 특채’를 통해 전교조 해직자들을 합격시켜 감사원 감사를 받고 있다. 교장 자격이 없는 평교사 대상의 ‘내부형 교장공모제’는 대표적 보은 인사 수단이다. 전교조 조합원은 전체 교원의 10% 남짓밖에 안 되는데 교장공모제로 임용된 교장의 65%가 전교조 출신이다. 도성훈 인천시교육감의 정책보좌관을 지낸 이는 교장공모제 시험 문제를 빼돌려 전교조 출신에게 준 게 드러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 교육부는 전교조임을 내세워 임용되는 사례를 막기 위해 임용 과정에서 특정 단체를 언급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근절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을 투표로 심판하기는 어렵다. 유권자들은 인물이나 교육 공약엔 관심 없고 보수냐 진보냐만 따진다. 정당이 개입할 수 없는 교육감 선거에서는 보수 단일 후보가 아니면 선거 노하우를 꿰고 있는 전교조가 조직적으로 미는 후보를 당해낼 수가 없다. 보수 후보가 낫다는 보장도 없다. 자사고 100개를 만들자거나 국정교과서 도입을 들고나올 수 있다. 좌우 극단으로 기울지 않는 반듯한 인재는 교육감 되기 힘든 구조다. 이런 선거에 4년마다 2000억 원을 쓰고 있다. 교육 망치는 괴물 같은 교육감 선거를 폐지하고 그 돈은 아이들을 위해 써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범국가 독일과 일본에 법적 책임을 묻는 문제가 불거졌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향후 전쟁 행위부터 따지자며 ‘정치적 처리’를 주장했지만 중국 호주 폴란드 등은 형사처벌을 요구했다. 결국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범죄를 다루는 임시 국제전범재판소가 일본 도쿄와 독일 뉘른베르크에 설치돼 전범들을 단죄했다. ▷당시엔 전범을 다룰 근거법이 없어 사후 입법에 해당하는 도쿄헌장과 뉘른베르크헌장의 규정에 근거해 판결이 이뤄졌다. 대륙법계를 따르는 독일과 일본은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나는 소급처벌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을 주도한 나라는 불문법의 전통을 가진 영미계였다. 이런 ‘승자의 재판’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2002년 로마규정에 따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설립된 상설 조직이 국제형사재판소(ICC)다. 전쟁범죄 등을 저지른 개인을 기소하고 재판하는 곳인데, 최근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ICC 법정에 세우려는 움직임이 거세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이 수도 키이우 외곽 도시 부차 등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증거가 드러나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4일 푸틴을 ‘전범’으로 규정하며 재판에 회부하자고 주장했다. 미국은 40여 개 국가와 증거 수집을 하고 있다. ICC도 지난달 2일 우크라이나 내 민간인 사상자가 1400명을 넘어서자 123개 회원국 중 39개국의 요청에 따라 전쟁범죄 증거 수집에 들어갔다. ▷하지만 푸틴을 헤이그 법정에 세우기는 매우 어렵다. ICC는 자체 경찰력이 없어 체포영장이 발부돼도 해당 국가의 도움 없이는 집행할 수 없다. ICC는 회원국에 한해 재판권을 갖는데 러시아는 2016년 탈퇴했다. 비회원국은 유엔 안보리가 수사를 요구하면 되지만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만이다. ICC도 힘의 논리에 좌우된다. 지금까지 ICC가 기소한 45명은 대개 아프리카 인사들이었다. ICC는 미국의 아프간 전쟁범죄 수사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미국은 ICC 회원국이 아닐뿐더러 미군의 ICC 소추 면책을 보장하는 미군보호법까지 두고 있다. 푸틴을 단죄하자는 서구 사회 움직임에 ‘도덕적 자위행위’라는 자조가 나오는 이유다. ▷ICC가 ‘살아 있는 권력’을 기소한 사례는 수단 대통령 오마르 알바시르와 리비아 최고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 둘뿐이다. 그래서 푸틴이 실각할 때까지 길게 보자는 얘기가 나온다. ‘다르푸르 학살’의 주범 알바시르는 2009년 전범으로 기소되고도 10년간 권좌를 지켰지만 2019년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는 그를 ICC에 넘기기로 했다. 전쟁범죄엔 시효가 없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학교공사 뒷돈 비리’ 김 교육감 징역 7년, ‘선거 빚 갚기 위해 뇌물수수’ 이 교육감 징역 6년, ‘장학사 시험문제 유출’ 김 교육감 징역 3년….교육감은 유치원과 초중고교 교육을 책임지는 수장이지만 이렇게 비교육적인 죄명으로 언론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2007년 교육감 직선제 도입 후 수사나 재판을 받은 교육감은 20명. 서울의 경우 해직교사 부당채용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조희연 교육감까지 직선제 교육감 4명이 모두 법정에 서는 기록을 세웠다.관선제와 간선제를 청산하고 도입된 교육감 직선제는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구현하는 최적의 제도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도입한 지 15년이 지난 지금은 ‘직선제가 학교 현장을 정치판으로 만들고 비리 교육감을 양산한다’며 제도를 바꾸자는 목소리가 높다. 인천시교육감 권한대행을 지낸 후 지난 교육감 선거에 출마했다 중도 사퇴한 박융수 서울대 사무국장(57)도 직선제 반대론자다. 그는 6·1 지방선거일에 함께 치러지는 17개 시도 교육감 선거를 앞두고 복마전 같았던 선거 경험담을 기록한 ‘교육감 선거: 교육이 망가지는 이유’를 출간했다.》뒷돈 유혹하는 과도한 선거비용 ―정년을 8년 남겨두고 출마를 위해 사직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다. “인천은 직선제 교육감 3명 중 2명이 구속되고 한 명은 측근이 비리 혐의로 수감된 곳이다. 교육 공약으로만 승부하는 선거로 혼탁한 선거 문화를 바꿔보겠다는 의욕이 있었다. 3년 3개월간 인천시교육청에서 일하며 무상급식 실시율을 높이고 열악한 재정 상태도 해소해 학부모 단체 여러 곳에서 출마 권유를 받았던 터라 자신도 있었다.” ―교육감 선거에는 개인 돈이 많이 든다. 선거비용 한도액은 시도지사와 같지만 정치적 중립을 위해 정당의 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의 돈 받지 않는 ‘3무(無) 선거’를 내세웠다. 정말 안 받았나. “한 푼도 안 받았다. 3무 선거란 수입 측면에선 출판기념회, 후원금과 기부금, 펀딩 없는 선거이고 지출에서는 선거 유세용 트럭, 스피커, 율동운동원 없는 선거를 말한다. 이 세 가지만 안 써도 비용의 절반을 줄일 수 있다. 인천은 법정 선거비용 한도가 14억 원이다. 이 중 7억 원만 쓰기로 하고 명예퇴직 수당 1억6000만 원, 개인 돈 3억4000만 원에 집 담보로 2억 원을 대출받아 마련했다.” ―선거관리위원회 자료를 보면 2018년 선거 때 시도지사 후보들은 선거비용으로 1인당 평균 7억6000만 원을 썼는데 교육감 후보는 11억1000만 원으로 훨씬 많이 썼다. 서울시 교육감 후보들은 18억∼28억 원을 썼더라.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하나. “출판기념회다. 현직 교육감들은 대개 출판기념회를 통해 1만 권 이상을 판매한다고 한다. 1만 명이 평균 5만 원씩만 내도 5억 원이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교육감이 출판기념회를 하면 교직원들은 모른 체할 수가 없다. 인천시교육감은 3만 명이 넘는 교직원들의 인사권자다. 선거를 치러보니 도와준 사람들이 너무 고맙더라. 5만 원 낸 사람보다 100만 원 낸 사람이 예뻐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 유혹을 뿌리치려고 3무 선거를 선언한 거다.” ―출판기념회 후원금으로 선거비용을 충당할 수 있나. “아니다. 인천의 경우 선관위에서 보전 받지 못하는 금액과 비공식적으로 쓰는 돈까지 합치면 3억∼7억 원이다. 교육감 연봉이 1억4000만 원, 임기 4년이면 5억6000만 원이다. 그래서 선거비용 회수를 위해 당선 후에도 부지런히 출판기념회를 연다. 모 교육감은 5권짜리 세트를 13만 원에 내놓고 출판기념회를 해 욕을 먹었다. 초선 교육감은 대개 재산 신고액이 줄어들지만 재선 이상이 되면 재산이 늘어난다. 교육감 선거에 나가는 사람은 3선을 내다보고 한다. 선거 빚 때문에 부정한 뒷돈의 유혹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박 국장이 인천시교육감 권한대행을 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민선 2기 이청연 전 교육감도 선거 빚을 갚기 위해 학교 공사 시공권을 주는 대가로 건설업체 대표 등으로부터 4억2000만 원의 뇌물을 받아 대법원에서 6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전임자인 나근형 전 교육감은 부하 직원들에게 뇌물을 받고 근무 성적을 조작해 1년 6개월 형이 확정됐다.“깜깜이 선거에 단일화 뒷거래도” ―왜 선거 중간에 포기했나. “교육계에선 꽤 알아준다고 생각했는데 일반인들은 아무도 나를 모르더라.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공약을 설명하려고 하면 ‘그래서 진보냐, 보수냐’라고만 물었다. 이름 석 자 알리는 데만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인천 출신이 아니라는 걸 트집 잡아 양쪽 진영 모두 흑색선전까지 해댔다. 두 달 만에 몸무게가 10kg 줄었다. 결국 2억 원 넘게 쓰고 60여 일 만에 그만뒀다.” ―그래서 ‘깜깜이 선거’라고들 한다. 진영별로 후보 단일화에 목숨을 걸게 된다. “유권자가 선택하는 구조가 아니다. 진영과 조직이 만들어 낸 제한된 후보 중에서 뽑을 수밖에 없는 비민주적 선거다. 정치 중립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선거 공보물에 ‘보수후보 추대’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 등을 훈장처럼 내세운다. 진영과 조직이 지원하지 않는 개인 후보자는 필패할 수밖에 없다.” ―단일화 뒷거래도 문제다. 서울의 경우 곽노현 전 교육감은 후보 단일화 대가로 당선 후 2억 원을 건네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교육감직에서 물러났다. 조희연 교육감이 부당하게 특채한 혐의를 받고 있는 해직 교사 5명 중 한 명은 선거에서 조 교육감과 단일화한 후 선거운동을 도왔던 사람이다. “인천도 마찬가지다. 단일화에서 떨어졌던 평교사 출신 인사가 5급 상당 장학관으로 특채되더니 연이어 3급 상당 장학관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교육감 측근 중에는 교장 자리에 자기편을 앉히기 위해 교장 공모제 면접시험 예시답안을 빼돌렸다가 기소된 사람도 있다. 교육감 당선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전리품 나눠주듯 자리 만들어주고 승진시켜 준 것이 기소와 판결로 확인된 것이다. 교육감 직선제의 슬픈 자화상이다.” ―직선제 도입 후 교육 현장이 분열되고 교육의 편향성 시비도 끊이지 않는다. “선거가 진영 대결이 되다 보니 극단적인 사람이 아니면 당선되기 어렵다. 중도 성향의 후보는 설 자리가 없다. 교육감의 정치 성향에 따라 교육 정책이 수시로 바뀌면서 교육의 안정성도 흔들리고 있다. 교육엔 관심 없고 선거비용 회수와 다음 선거 준비에만 바쁜 교육감들이 많다.”“비교육적 직선제 바꿔야” ―주요국 가운데 모든 교육감을 주민 선거로 뽑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은 지역 의회의 검증을 거쳐 단체장이 임명하는 방식이다. 미국도 50개 주 가운데 10여 개 주만 직선제를 시행하고 있다. 우리도 시도지사 임명제로 하거나 시도지사 선거에서 교육감 후보자를 러닝메이트로 지정하자는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고 난 뒤로는 교육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교육감 선거가 단독으로 치러질 때는 투표율이 10∼20%대였다. 그런데 2010년부터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얹혀 치르게 돼 투표율이 올라갔는데 이게 독이 됐다고 본다. 저조한 참여율의 문제가 묻히게 된 것이다. 유권자들은 관심도 없는데 직선제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유능한 교육 전문가를 찾아 임명하는 방법도 있다. 어떤 대안이 됐든 지금의 직선제는 바꿔야 한다.” ―전국 17개 교육청이 교육감 선거를 위해 편성한 예산 총액이 2000억 원이다. “선거를 안 한다면 2000억 원을 아이들 교육에 쓸 수 있다는 뜻이다. 10개 학교에 다목적 강당 짓는 데 511억 원이 들었다. 실내 강당이 있어야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도 체육활동을 할 수 있다. 2000억 원이면 40개 학교에 강당을 지어줄 수 있는 돈이다. 왜 찍고 나서 누굴 찍었는지 기억도 못 하는 기억상실증 선거, 교육 현장을 정치판으로 만드는 비교육적 선거에 2000억 원을 낭비하나.” 박융수 국장은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29년간 교육부 공무원으로 일했다. 인천시 부교육감 시절인 2017년 2월 이청연 당시 교육감이 뇌물수수로 유죄 판결을 받고 법정 구속되자 교육감 권한대행을 맡았다. 이듬해 사직하고 인천시교육감 선거에 출마했다. 미 오하이오대 교육학 박사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단 한 명의 확진도 용납 않는 중국의 ‘제로 코로나’ 방역은 기술과 인해전술의 합작품이다. 전 국민의 활동 반경은 QR코드가 결정하고, 거리의 카메라들이 마스크 착용 여부를 감시한다. 확진자 한 명이 나오면 역학조사관 100명이 출동하는데 반경 800m 안에 있던 사람은 무조건 밀접 접촉자다. 성인 인구 250명당 한 명꼴인 450만 방역요원은 공안 및 통신사와 개인정보를 공유하며 담당 구역 출입자들의 방역수칙 준수 여부를 감시한다. ▷확진자가 많이 나오면 해당 지역 공무원은 해임될 수 있다. 재택 격리자를 감시하기 위해 가정 내 전력 사용량을 점검하거나 가가호호 센서를 달아 출입문이 열리는지 확인하는 등 방역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건물, 마을, 넓게는 도시 전체를 봉쇄하기도 하는데 바이러스의 전파력에 비례해 봉쇄 규모도 커지고 있다. 2020년 1월엔 인구 1100만 도시 우한이, 지난해 12월엔 1300만의 시안이, 어제부터는 인구 2500만의 중국 경제 수도 상하이가 전격 봉쇄됐다. ▷상하이는 26일 확진자 수가 처음으로 2000명을 넘어서자 봉쇄 결정을 내렸다. 황푸강 동쪽 지역은 28일부터, 서쪽은 다음 달 1일부터 4일간이다. 상하이 시민들은 집 밖 출입을 할 수 없고 모두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한다. 대중교통 운행이 중단되고 공장 가동도 멈추거나 원격으로 운영된다. 시내 주요 쇼핑몰과 상하이 디즈니랜드 같은 다중이용시설은 이전부터 임시 폐쇄된 상태다. ▷제로 코로나 덕분에 중국은 인구 100만 명당 사망자 3.3명으로 선방한 편이다. 미국은 2600명이다. 2020년엔 주요국 가운데 유일하게 플러스 성장에 성공했다. 하지만 전파력이 강한 오미크론과 중국산 ‘물백신’ 탓에 뒤늦게 감염이 확산되자 중국 경제는 물론이고 글로벌 공급망까지 흔들리고 있다. 선전 봉쇄로 애플 부품 공급사 폭스콘 공장, 창춘 봉쇄로 도요타자동차 등 5개 자동차 생산 공장, 상하이 봉쇄로 테슬라 공장이 조업을 중단했다. 공장과 물류 시설마다 기숙사를 운영하며 직원들의 외출을 금지하고 있지만 오미크론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경제적 피해가 막심하고 민심도 사나워지자 방역이 완화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지만 상하이 봉쇄로 제로 코로나 고수 방침이 확인됐다. 올가을 당 대회에서 3연임을 노리는 시진핑 국가주석이 환자 폭증과 의료 붕괴를 감수할 리 없다. ‘무질서한 민주주의’보다 ‘질서 있고 안전한 사회주의’의 체제 우월성을 주장하고 디지털 독재를 정당화하는 데 팬데믹 국면을 십분 활용해온 터다. 방역이 정치에 휘둘리는 만큼 중국 리스크도 커지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대선 후보 시절 MBC ‘100분 토론’에 나와 “공영방송이라도 제 역할을 했더라면 대통령이 탄핵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공영방송을 정권의 방송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MBC 생방송 프로임에도 “MBC도 심하게 무너졌다”고 정색을 했다. ‘정권교체 10년 주기론’을 깨고 5년 만에 정권을 내주게 된 문 대통령은 지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여당 후보의 패인은 부동산 정책 실패와 조국 사태 두 가지로 요약된다. 민주화 이후 대선에서 진보진영에 7전 6승을 안겨준 서울이 부동산 때문에 돌아섰다. 진보 성향이 강했던 2030세대는 조국 사태까지 터지자 반대쪽으로 대거 옮겨갔다. 이재명 후보가 “부동산 고통에 민감하지 못했다”며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조국 사태에 “아주 낮은 자세로 사과드린다”고 했지만 너무 늦었다. 문 대통령 말대로 공영방송이 제 역할을 했더라면, 진즉 다른 언론처럼 정부 실정에 제동 걸었더라면 뒤집힐 수도 있었을 박빙의 승부였다. 하지만 치솟는 집값으로 민심이 흉흉할 때 MBC는 ‘집값 폭등의 주범은 박근혜 정부의 정책’이라는 보도를 내보냈고, KBS는 ‘국민과의 대화’를 기획했다. ‘각본 없는’ 방송에서 ‘국민 패널’ 누구도 부동산 세금이나 전월세 부담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 대신 “대통령님의 영도력” “뵙게 되어 너무너무 영광” “집값 폭등은 투기세력 탓”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웃었지만 시청자들은 부글부글 끓었다. 문 대통령으로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출마 계기가 된 조국 보도 실패가 더 뼈아플 것이다. KBS 공영노조가 연일 자사의 ‘조국 비호 보도’를 규탄하는 동안 KBS는 조국 사건으로 기소된 의원을 초대해 다른 언론의 조국 보도를 ‘분풀이 저널리즘’이라고 비난하게 했다. MBC는 유독 조국 지지 집회에만 허가 없이 드론까지 띄워가며 집회 규모를 부풀렸다. 당시 박성제 보도국장은 후에 사장이 돼 “검찰개혁(조국) 집회와 약간 맛이 간 사람들이 주장하는 (광화문) 집회를 1 대 1로 보도하는 게 제대로 된 공영방송인가”라고 되물었다. 박 사장의 전임자인 최승호 PD는 대선 후 페이스북에 ‘보수언론은 정부를 비판해도 그러려니 하며 신경 쓰지 않고, 진보언론도 정부의 문제를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니 상황은 브레이크 없이 굴러갔다’며 “문 대통령은 기조를 너무 늦게 바꾸거나 바꾸지 않아 자신이 임명한 검찰총장을 야당 대선후보로 만들었다”고 썼다. MBC는 선거 막판에 강성 친여 유튜브 직원이 몰래 녹음한 김건희 여사와의 전화 통화 내용을 방송해 ‘비호감’에서 ‘걸크러시’로 김 여사의 이미지 세탁까지 도왔다. 지금쯤 ‘심각하게 무너진 MBC’ 탓에 속 끓이는 여당 인사들이 많을 것이다. 윤 당선인은 “정권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공영방송을 세금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라면서도 ‘공영방송 거버넌스 구조 개선’이라는 모호한 공약만 내놨다. 역대 대선 후보들이 비슷한 약속을 하고도 당선 후엔 인사 권한을 포기하지 않았고, 정권에 충성하는 방송은 정권에 독이 됐다. 공영방송 장악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면 한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희소 자원인 주파수 써가며 제구실 못 하는 어용방송에 국민도 정권도 또 당할 것이다. 하필 문 대통령의 생일날 간판 음악 프로 엔딩곡으로 ‘Song to the Moon’을 내보내는 공영방송은 너무 아니지 않은가.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5월에 유럽 가려는데 긴팔 챙겨야 하나요.” “신혼여행 모리셔스로 가려고요. PCR 검사 결과서 안 내도 된대요.” 해외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었다. 정부가 해외 나들이의 걸림돌이었던 입국자 자가 격리를 면제한다고 발표하면서 2년 넘게 억눌려온 여행 욕구가 ‘보복적 해외여행’으로 분출하고 있다. ▷인터파크투어는 해외 입국자 자가 격리 면제가 발표된 11일부터 3일간 해외항공권 예약 건수가 전년 동 기간보다 873% 폭증했다고 밝혔다. 하와이 괌 사이판 같은 가까운 휴양지와 현지에서 격리를 면제해주는 스페인 스위스 등이 인기다. 국내 여행을 하려다 해외 여행지로 갈아타는 신혼부부, 목요일인 5월 5일 어린이날 전후로 짧은 여행을 계획하는 직장인, 항공권 가격이 오르기 전 여름휴가용 예매를 서두르는 발 빠른 여행객들의 문의 전화가 폭주하고 있다고 한다. ▷자가 격리 면제 대상은 접종 완료자다. 2차 접종 후 180일이 지나지 않았거나 3차 접종자, 2차 접종 후 코로나에 걸려 완치된 사람이 이에 해당한다. 접종 의무가 없는 12세 미만 소아·청소년과 의학적 사유로 백신을 맞지 못한 사람은 지금처럼 입국 후 7일간 격리해야 한다. 만 6세 미만 어린이는 동반 입국자가 접종한 경우 격리 면제다. 다음 달 1일부터는 해외 입국자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 ▷코로나 이전과는 여행 방식도 달라졌다. 백신 접종 영문 증명서, 유전자증폭(PCR) 검사 음성 확인서, 건강신고서 등 목적지에 따라 챙겨야 할 서류가 많다. 감염의 우려 탓에 현지에선 현금 대신 카드만 받는다. 여행객들은 패키지나 단체여행보다는 소규모 여행, 유명 관광지에서의 문화 체험보다는 외진 곳에서의 야외 활동을 선호한다. 지금까지 자가 격리 7일을 감수하고 다녀온 사람들은 현지에서 확진될 경우 든든한 의료시설이 있는지 따져보라고 조언한다. ▷코로나 이전엔 한 해 2871만 명이 해외여행을 떠났는데 지난해는 122만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해외 여행길이 막힌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여행지 상공을 한 바퀴 돌고 면세품을 사서 돌아오는 ‘무착륙 해외여행’, 편의점에서 파는 기내식 도시락 사먹기, 구글어스의 ‘스트리트 뷰’를 활용한 ‘랜선 여행’으로 욕구를 달래 왔다. 비자카드의 최근 조사에서는 10명 중 3명이 “1년 안에 해외여행을 떠나겠다”고 답했다. 다음 달이면 세계보건기구가 전 세계에 발령했던 코로나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종료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컴퓨터 모니터로만 동경해온 풍경을 파란 하늘 아래에서 안전하게 확인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대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역병도 막지 못한 선거 열기다. 코로나 이후 첫 선거였던 2020년 총선 투표율은 66.2%로 28년 만에 최고치였다. 지난해 4·7재·보궐선거는 평일임에도 서울과 부산의 투표율이 광역단체장 재·보선으로는 처음으로 50%를 넘었다. 코로나가 최악으로 치닫는 시기에 치러진 이번 20대 대선도 77.1%로 2000년 이후 실시된 대선 중 역대 2위를 기록했다. 1위인 2017년 대선(77.2%)과는 0.1%포인트 차다. 총 투표자 수는 역대 최대인 3400만 명. 만 18세도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직접선거로 치러진 대선은 1952년 2대부터 올해 대선까지 모두 14회. 이 중 투표율이 가장 높았던 대선은 6·25전쟁 이후 실시된 1956년 선거다. 정전협정에 따라 한국에 편입된 경기 연천군과 강원 철원군 등 수복지구 주민을 포함해 총 유권자의 94.4%가 참여했다. 2위는 유신 이후 첫 직선제로 치러진 1987년 대선으로 89.2%였다. ▷이후 대선 투표율은 하향세를 그리며 2007년에는 63%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당시엔 이명박-정동영 후보의 본선 대결보다 이명박-박근혜 후보 간 당내 경선이 관심사였다. 민주화 이후 지난번 대선까지 7번의 대선에서 득표율 1위는 박근혜 전 대통령(51.55%)으로 유일하게 절반을 넘겼다. 2위는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48.91%)이었다. 1, 2위 간 표차가 가장 적었던 승부는 1997년 김대중-이회창 후보 대결로 39만557표 차였다. ▷역대 대선 투표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광주다. 민주화 이후 실시된 대선 가운데 2007년을 제외한 모든 선거에서 전국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다. 당시엔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유력했던 때문인지 광주 지역 투표율은 6위였고 경북이 68.5%로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번 대선에서도 광주 지역은 81.5%로 1위를 차지했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의 참여 열기가 뜨거웠던 배경엔 세대와 이념에 따른 심각한 분열상이 있다. 투표율이 반등한 시기도 진영 간 대결이 본격화했던 2012년 대선이다. 2020년 총선은 ‘친조국’과 ‘반조국’으로 갈라져 치렀다. ‘이러다간 나라 망한다’는 절박감이 투표율을 끌어올렸다는 해석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집권기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자 2020년 대선 투표율이 66.8%로 최고 기록을 세운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1875년 프랑스는 단 1표 차로 왕정에서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1표의 힘을 믿는 유권자들의 통합과 진보를 염원하는 간절함이 역대급 투표율에 담겨 있을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지만 러시아 내에선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지지율이 70%로 오히려 6%포인트 올랐다. 침몰 직전의 러시아를 세계 초강대국으로 일으켜 세운 강한 리더로서 굳건한 지지를 받아온 데다 정부의 보도 통제로 명분 없는 참혹한 전쟁의 실상을 러시아인들이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의 보도지침에 따르면 이번 전쟁은 우크라이나를 나치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특수 작전’이고, 민간인의 희생은 우크라이나가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이용하는 탓이다. 러시아 정부는 ‘특수 작전’ 대신 ‘전쟁’이라고 보도한 민영 방송의 송출을 금지하고, 서구 언론과 소셜미디어의 접속도 차단했다. 보도지침을 따르지 않는 기자는 ‘가짜뉴스’를 보도한 것으로 간주해 최대 15년의 징역형에 처하는 형법 규정도 5일 발효됐다. 지난 29년간 기자 6명이 살해당하면서도 권력을 비판해 온 ‘노바야 가제타’마저 정간을 피하기 위해 전쟁 보도를 중단하기로 했다.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드미트리 무라토프가 편집장으로 있는 신문이다. ▷눈과 귀가 가려진 채 국영방송의 선전보도에 노출된 러시아인들이 전황을 제대로 알 리 없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러시아에 사는 가족들과 전화 통화를 하다가 놀란다. 수화기 너머 도심에 포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가족들은 “너를 해방시켜 줄 것” “시민들은 건드리지도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한다. 러시아 내에서 반전 시위로 1만3000명 넘게 체포된 사실도 모른다. 포로로 잡힌 러시아 병사들마저 “해방군으로 환영받을 줄 알았다” “민간인을 공격할 줄은 몰랐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러시아 정부에 차단당한 서구 언론은 “정확하고 독립된 정보에 접근할 권리는 러시아인들도 누려야 할 인권”이라며 특수한 앱과 가상사설망(VPN) 등으로 러시아 정부의 검열을 피해 가고 있다. 2010년대 ‘아랍의 봄’ 당시에도 유용하게 활용됐던 우회로들이다. 영국 BBC는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기 선전전에서 활약했던 단파 라디오를 통해 러시아 일부 지역에 하루 4시간씩 전황을 알리고 있다.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인 푸틴은 영어와 독일어 신문까지 탐독하는 ‘뉴스광’으로 누구보다 정보의 중요성을 잘 안다. 취임 후 국영 언론사를 늘리고 민영 언론사에도 완력으로 ‘애국주의적 가치관’을 강요해 온 이유다. 하지만 국영방송의 시청률은 떨어지고 있고, 검열의 방화벽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진상을 완벽히 막아주기도 어렵다. 진실로는 자국민조차 설득할 자신이 없는 정부가 전쟁에서 승리를 기대할 수 있을까.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2000년 집권하자 러시아의 지배계층이 교체된다는 전망이 무성했다. 전임자인 보리스 옐친의 ‘돈줄’ 올리가르히(신흥재벌)는 가고 이들의 사설 경호로 근근이 살아가던 실로비키(제복 입은 남자들)가 뜬다는 예측이었다. 푸틴 스스로가 연방보안국(FSB·KGB의 후신) 출신인 실로비키다. 실제로 푸틴은 임기 초반 ‘적폐 세력’ 올리가르히 숙청으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멤버만 바뀌었을 뿐 올리가르히는 지금도 건재하다. ▷올리가르히는 1991년 소련 해체 후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탄생했다. 노점상 창문닦이 기계공으로 일하던 20, 30대 중 극소수가 발 빠르게 국유재산을 헐값에 사들이면서 금융 석유 언론 항공업계를 좌우하는 갑부가 됐다. 세계 주요 도시에 저택을 두고 비싼 미술품과 초호화 요트를 수집하는 이들 신귀족은 빈부격차가 심한 러시아에선 “고아원 앞에서 재미 삼아 돈뭉치 태우는 집단”으로 미움 받는다. ▷푸틴의 숙청에도 소수의 올리가르히는 살아남았는데 대표적 인물이 로만 아브라모비치다. 그는 무명의 푸틴을 총리로 발탁할 정도로 권력이 있었지만 푸틴이 대통령이 된 후로는 영국 첼시의 구단주가 돼 정치와 거리를 뒀다. 이번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비난 여론에 못 이겨 첼시 매각을 공언한 인물이다. 그처럼 경제 권력에 만족해 숙청을 피한 1세대와 실로비키 출신 2세대 올리가르히 110명이 푸틴의 충성스러운 돈줄 역할을 하며 러시아 부의 35%를 거머쥐고 있다. ▷올리가르히는 정치적 숙청에 대비해 자산을 해외로 빼돌려 놓는다. 대표적인 선호 지역이 러시아와 관계가 냉랭해 범죄자 인도 요청이 먹히지 않는 영국 런던으로 ‘런던그라드’로도 불린다. 그런데 이런 자산 관리 방식이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압박하는 수단이 됐다. 미국 영국 독일을 비롯한 서구 주요 국가들이 올리가르히를 푸틴의 전쟁 자금줄로 보고 이들의 자산을 동결하거나 압류하고 나섰다. 이미 러시아 상위 20대 부자들의 총자산 중 3분의 1인 800억 달러(약 97조 원)가 증발했다고 한다. ▷푸틴이 얼마나 타격을 입을지는 미지수다. 올리가르히의 자산이 대부분 지인의 명의로 돼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영국의 경우 이들의 자금 동결로 영국 경제도 피해를 입는다는 우려가 나온다. 올리가르히의 잦은 송사로 재미 본 로펌들이 벌써 방어막을 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최대의 올리가르히는 푸틴이다. 자산 규모가 세계 최고 부자 일론 머스크(260조 원)에 버금가는 240조 원으로 추정된다. 그의 자산도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연인 아리에바(21)와 푸르신(24). 둘은 러시아가 침공해온 24일 공습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키예프 수도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조국을 잃을 위기에 처한 두 사람은 식이 끝난 뒤 국토방위군에 자원입대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위해 함께 싸우다 죽을 것이다.” ▷당초 1∼4일이면 함락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러시아가 고전하는 이유는 시민들이 겁먹고 도망가기는커녕 결사적으로 항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맨몸으로 러시아 탱크 부대를 막아서고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을 소셜미디어로 공유하며 전의를 다지고 있다. 중년 여성이 중무장한 러시아 군인들에게 “내 나라에서 뭐 하는 짓이냐”고 호통치고, 80세 남성이 속옷과 칫솔을 챙겨들고 “내 손주들을 위해” 자원병 대열에 합류했다. 테니스 스타도 “온몸으로 내 나라 지키겠다”며 라켓을 집어던지고 총을 들었다. ▷우크라이나의 주요 징병소에선 20∼50대 남녀 수천 명이 소총 지급을 기다리고 있다. 군복도 군화도 없다. 운동복이나 평상복 차림에 테니스화, 하이킹화를 신은 이들은 노란색 완장으로 자원병임을 표시하고는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을 외치며 전장으로 달려 나간다. 온라인 쇼핑몰 사업자, 엔지니어, 나이트클럽 댄서 등 직업도 다양하다. 회사원인 올레나 소코란 씨는 “폭격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난 건강한 성인 여성이고 이건 내 의무”라고 했다. 58세의 키예프대 역사학과 교수는 “아내와 딸들이 걱정하면서도 말리진 않았다”고 한다. ▷러시아는 정규군이 90만 명, 우크라이나는 19만 명이다. 무기나 장비도 러시아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옛 소련에 속했던 발트3국은 개혁을 단행한 후 유럽연합에 가입했고, 러시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은 2000∼2008년 유가의 고공행진으로 돈벼락을 맞았다. 비슷한 행운에 올라타지 못했던 우크라이나는 사회 인프라는 물론 실제 군사력도 2005년 이후로는 서류상 숫자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 됐다. ▷그래도 우크라이나가 좀 더 버텨준다면 희망이 없지 않다. 러시아는 매일 200억 달러(약 24조 원)를 이 전쟁에 쏟아붓고 있다. 무기도 바닥을 드러내는 중이다.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많은 이들이 우크라이나 국기를 흔들며 “전쟁 중단” “우크라이나 만세”를 외치고 있다. 러시아에서도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만 명이 반전 시위에 나섰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며 러시아군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인을 간절한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이번 올림픽 기간에 중국에서 메달 3개를 휩쓴 스키 선수 아일린 구(19) 못지않게 주목받은 인물이 있다. ‘샤오화메이’라 불리는 여성인데, 오래전 납치돼 8남매를 낳고 쇠사슬에 묶인 채 살아온 사실이 블로거의 폭로로 알려지면서 대륙이 들끓었다. 누리꾼들은 중국 ‘스포츠 굴기’의 상징이 된 아일린 구와 인권 유린의 샤오화메이 가운데 누가 중국의 실상과 가까운지 자문하고 있다. 샤오화메이 관련 온라인 게시물이 속속 삭제되자 ‘칭송받거나 침묵을 강요당하는 두 여성은 국민을 도구로 보는 비뚤어진 국가주의를 보여준다’는 자성도 나온다.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건 태극 전사들이 승전보를 전해오는 가운데 2020년 9월 서해에서 북한군에 가장을 잃은 유족이 한국을 찾은 유엔 관계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훈련받은 아일린 구와 달리 우리 메달리스트들은 국내 훈련 인프라로 키워냈으니 그들의 성취는 나라의 성취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민의 황망한 죽음을 막지도, 1년 반이 지나도록 사후 수습도 못하는 국가 시스템은 우리의 또 다른 실상이다. 북에 피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의 처지는 중국 여성 샤오화메이보다 나을 것도 없다. 산아제한이 엄격한 나라에서 아이 여덟을 낳고 노예 생활을 하도록 방치됐듯, 우리 정부도 그가 실종돼 사망하기까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중국 공안 당국은 샤오화메이가 범죄의 피해자가 아니라 정신질환자라는 수사 결과를 내놨다가 은폐 의혹이 제기되자 인신매매의 피해자임을 인정했다. 우리 정부도 ‘자진 월북’ ‘도박 빚이 월북 동기’라는 중간 수사 결과를 공개하며 피해자를 욕보이고 책임을 피하려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피해자의 고교생 아들에게 “진실을 밝혀낼 수 있도록 내가 직접 챙기겠다”는 편지까지 쓰고도 청와대를 상대로 낸 정보공개 소송에서 유족이 승소하자 항소로 진상 공개를 막고 있다. 대통령이 퇴임 후 관련 정보가 대통령 기록물로 지정되면 최장 30년간 열어볼 수 없게 된다. 중국인들은 샤오화메이 사건과 공안의 은폐 의혹 수사에 국제기구의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피살 공무원의 유족도 한국 정부가 1심 판결대로 정보를 공개하고 유엔과 남북이 공동 조사하도록 도와달라고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유족은 “어찌 죽었는지라도 알려달라고 할 때마다 국가기밀이나 남북관계를 이유로 입을 닫는다. 대체 국민 보호도 못하면서 남북평화가 다 뭔가”라고 했다.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을 두고도 인권 유린을 당하고 다른 나라에 도움을 청해야 하는 현실이 참담하다”고도 했다. 한류 스타들이 성과를 낼 때마다 그러했듯 문 대통령은 이번에도 메달을 딴 선수들에게 축전을 보냈다. 남녀 쇼트트랙 계주에서 준우승한 선수 9명에게는 모두 다른 맞춤형 축전을 썼다. 그런데 피살된 공무원 아들이 최근 “고등학생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다”며 대통령이 보낸 편지를 돌려보냈는데도 반응이 없다. 잘난 자식만 귀하게 여기는 못난 부모처럼 정부 체면 구기는 국민은 나 몰라라 하는 건가. 국가의 실패로 피해 입은 이를 챙기는 일은 축전 쓰기보다 어렵지만 꼭 해야 할 일이다. 이제라도 항소를 포기하고 “저희 엄마와 어린 동생이 삶을 비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아빠의 명예를 돌려 달라”던 피해자 아들에게 설명의 의무를 다하기 바란다. 아직 장례도 못 치르고 있는 유족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호신용 칼, 테이저건, 최루액 분사기. 여자 스노보드 1인자인 한국계 미국인 클로이 김(22)이 집 밖을 나서면서 챙기는 물건이다. 경기장을 갈 때, 강아지 산책 시킬 때, 집 근처 식료품점에 갈 때도 예외가 아니다. 평창에 이어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여자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사상 첫 2연패를 달성한 국가대표도 두려움 없이 거리를 걸을 수 없을 만큼 미국의 아시아계 증오범죄는 심각하다. ▷클로이 김은 미국에선 증오범죄 공론화에 앞장서는 인물로도 유명하다. 지난해 ESPN 인터뷰에서 인종차별을 일상으로 겪고 있다고 폭로한 것이 계기가 됐다. 2013년 애스펀 X게임에서 첫 메달을 딴 후 “백인 소녀의 메달을 훔쳤다”는 악플에 시달리기 시작해, 평창에서 우승한 후론 “멍청한 동양인” 같은 문자폭탄을 받았으며, 부모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면 병원에서 나쁜 소식을 전하는 전화가 걸려 올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그는 정신적 충격으로 평창 이후 22개월간 스노보드를 접어야 했다. ▷클로이 김이 슬럼프를 극복하고 베이징에서 다시 정상에 서자 미국 언론은 세계적인 스타도 피해가지 못하는 아시아계 혐오범죄의 심각성을 조명하기 시작했고 결국 백악관도 움직였다. 15일 백악관 정례 브리핑에서 젠 사키 대변인은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며 “조 바이든 대통령은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엄중히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클로이 김이 피해를 호소하고 바이든 정부 들어 아시아계 증오범죄가 339% 늘었다’는 기자들의 지적에 대한 답변이었다. ▷클로이 김의 ‘용기’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만큼 아시아계가 인종차별을 문제 삼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아시아계는 ‘모범적 소수자(model minority)’로서 신고나 보복으로 문제를 일으키려 하지 않는다. 이는 적은 숫자, 작은 체격과 함께 유독 아시아계가 증오범죄의 표적이 되는 요인으로 꼽힌다. 클로이 김도 한동안 “그냥 무시하라”는 부모의 말을 따랐지만 메달리스트가 되자 “부당함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됐다”고 했다. 백인 친구들은 “당하고도 침묵하는 너도 문제”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평범한 아시아계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4, 15일에는 뉴욕 맨해튼에서 증오범죄 규탄 집회가 잇달아 열렸다. 30대 한국계 여성이 노숙인에게 살해당하고, 한국 외교관이 길거리에서 ‘묻지 마 폭행’을 당한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예방책을 촉구하는 집회였다. 참가자들은 “두려움 없이 거리를 걷고 싶다”고 외쳤다. 부당함에 맞서는 용기가 그런 당연한 권리를 되찾아 줄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선거를 앞두고 20대가 이렇게 주목받은 적이 있었나. 대선 후보가 청년 보좌역의 쓴소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힙합 차림에 청년들과 댄스 배틀을 벌인다. 연간 100만 원의 청년 기본소득, 사병 월급 200만 원, 청년 전담 부처 신설과 학자금대출 50% 탕감 등 청년 민심을 겨냥한 맞춤 공약도 푸짐하다.20대의 표심이 주목받는 배경엔 정치 성향의 급변이 있다. 20대는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2007년 대선(이명박 대통령 당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진보 진영의 후보를 선택했다. 그런데 지난해 4·7 재·보궐선거에서는 국민의힘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에게 몰표를 줬다. 더 이상 정치 무관심층도 아니다. 대선을 거듭할수록 투표율은 증가 추세다. 30대와 함께 ‘스윙보터’로 분류되는 20대의 몸값은 더 올라가고 있다. ‘20대 현상’의 이해를 돕기 위해 90년대생 논객 임명묵 씨(28)를 만났다. 그는 요즘 20대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투쟁성’을 꼽았다.》‘개천의 용’ 꿈 무너져 집단투쟁 ―20대가 투쟁적이라고? “20대의 전장(戰場)은 온라인이다. 다양한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세력 싸움에 몰두하고 있다. 남초 커뮤니티와 여초 커뮤니티 사이의 갈등은 현실 세계에 영향을 줄 정도로 격해졌다. 대중문화 콘텐츠 소비도 투쟁적이다. 팬클럽들의 조직적인 음원 스밍 총공(스트리밍 총 공격), 경쟁 아이돌 그룹에 대한 공격 등이 투쟁적인 문화 소비 경향을 보여준다. 요즘 웹툰과 웹소설은 경쟁 승리 지배 복수를 다룬 내용이 많은데 주 소비층이 20대인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왜 투쟁적이 된 건가. “사회의 불평등이 심화하고 지위 세습 경향이 강해졌다. 내 자리에서 열심히 하면 더 나은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신화가 무너진 것이다. ‘수저계급론’과 부조리한 사회를 쓸어버리겠다는 ‘죽창론’이 나온 배경이다. 게다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24시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쟤는 부모 잘 만나 저렇게 사는데 나는 왜 이럴까’ 한숨 쉬고 ‘금수저’나 ‘인싸’들과 끝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비관하게 됐다. 계층 이동이 어려워진 사회에 대한 불만과 SNS로 인한 불행감이 상호작용하면서 집단적 투쟁성을 끌어올렸다고 본다. 좌절 질시 체념 분노가 빚어낸 심리적 스트레스를 젠더 간 싸움과 대중문화 소비로 표출하고 있다. 한류의 성공은 좌절된 자아들의 대리만족 활동에 힘입은 것이다.”정부의 中대응방식에 불만 커 ―비슷한 처지의 미국 밀레니얼 세대는 40%가 사회주의를 선호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의 20대 남성들은 보수 성향으로 바뀌고 있다. “미국 밀레니얼 세대가 좌경화되고 있다기보다는 전통적인 양당 체제 바깥에서 좌우 포퓰리즘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한국 20대 남자들도 보수 성향으로 바뀐 게 아니라 엘리트 기득권을 상징하는 현 집권세력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20대는 2008년 광우병 사태,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2011년 무상급식 논쟁을 겪으며 진보 성향이 됐다. 2017년 대선에서도 관성적으로 진보 진영을 따라갔는데, 취업난도 그대로이고 집권 세력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 데 대해 실망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도 보수보다는 깨끗하다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2019년 조국 사태로 그 방어선마저 사라졌다.” ―20대의 눈에 비친 보수는 어떤가. “참신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현 집권 세력에 대한 반감에만 의존한다. 86세대, 페미니즘, 중국에 대한 반감과 적개심만 이용해 지지를 얻는다면 집권을 하더라도 현 정부의 실패를 반복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20대 표심에 영향을 주는 주요 변수는 무엇이라고 보나. “20대 남자 기준으로 말하면 젠더 이슈와 중국 북한 문제다.” ―안보관은 보수 성향인 건가. “대체로 20대 남자들에게 북한은 한민족이 아니다. 좋은 점이 하나도 없는 독재국가 말썽쟁이, 우리한테 시비 걸고 우리의 젊음을 2년간 군대에 바치게 만드는 그런 존재다.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이 반감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중국은 왜 싫어하나. “기성세대는 홍콩 영화나 ‘삼국지’ 같은 중국의 소프트파워가 작동했던 시절을 살았다. 그런데 우리 세대는 중국을 처음 접한 통로가 인터넷의 ‘대륙의 기상’ 시리즈였다. 민둥산에 녹색 페인트칠을 해놓은 사진은 ‘대륙의 녹화사업’, 파란색 짝퉁 운동화를 신었다가 발에 퍼렇게 염료가 묻어나온 사진은 ‘대륙의 나이키’라는 제목으로 확산됐다. 그런 사진들을 보며 중국을 후진적인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을 압도하는 중국의 위상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미세먼지, 서해 불법 조업, 한국 고유문화 침범도 중국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그런 중국에 친화적이고 심하게 말하면 굴종적인 대응을 하는 현 정부가 불만스러운 것이다.”존경할 정치인 없어 ‘오락가락’ ―이번 대선에서 2030을 ‘스윙 보터’라고 한다. “정치적 성향이 고착되는 과정에는 성취의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노년층의 시대적 과제는 산업화였고 중년층은 민주화였다. 박정희와 김대중 같은 상징적인 정치 세력들에 자기 힘을 보태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고 자부하면서 그 정치 진영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의 20대를 동원할 만한 정치적 비전은 없고, 이를 상징하는 정치인도 없으니 정치 성향이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 몰라 방황한다는 뜻인가. “그렇다. 앞선 세대는 선망하는 모델 국가도 있었다. 일본이나 미국처럼 되겠다는 목표를 정해놓고 그 나라를 추격하는 것이 발전의 동력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따라할 만한 나라가 없다. 일본도 선망하지 않는다. 20대들 사이에서 반일 감정이 옅어진 이유도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서일 것이다. 한류의 위상을 보라. 웬만한 건 우리가 더 잘하는 것 같다. 해외여행을 많이 하고 유튜브에서 각 나라를 소개하는 콘텐츠들을 보면서 선진국에 대한 환상도 사라졌다. ‘가서 보니 별것 없더라’는 식이다. 우리의 문제는 다른 선진국도 동시에 가지고 있거나, 선진국의 정책이 좋아 보여도 우리와는 맥락이 전혀 달라 적용할 수 없겠다는 생각들을 하는 것 같다.”에너지를 분출할 출구가 없다 ―대선 후보들이 앞다퉈 청년 공약을 내놓고 있다. 20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한때 ‘가붕개론’이 유행한 적이 있다. 너도나도 개천의 용이 되려고 애쓰며 힘들게 살지 말고 그냥 예쁜 개천을 만들어 가재 붕어 개구리로 만족하고 살자는 주장이었는데 호응이 없었다. 한국인은 정적이고 주어진 자리에 만족하며 편하게 사는 것보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역동성을 좋아하지 않나. 젊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성취감, 노력하면 미래를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을 원한다. 이 끓어넘치는 에너지를 분출할 출구가 필요하다. 그게 막히니까 청년층에서 부정적인 에너지가 쌓이고 있다. 지금 20대는 그들이 가진 증오와 불만을 자극해 대리만족의 대상이 돼줄 수 있는 포퓰리스트 정치인과 궁합이 가장 잘 맞을지도 모른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 나아질까.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한데 대선 후보들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 같다. 이번은 과도기적인 선거이고, 다음번 대선에서는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인물이 나왔으면 한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마치 우리 세대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며 자조하듯 미국 철학자 에릭 호퍼의 아포리즘 모음집 ‘인간의 조건’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했다. “필요한 것은 모두 바로바로 채워야 하고, 세계의 문제는 즉석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세대가 후대까지 남을 만한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런 세대는 가장 현대적인 기술을 갖추고 있어도 본질적으로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고 만다. 자연을 경외하면서 주술사가 하라는 대로 복종할 것이다.” 임명묵 씨는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대학원(석사과정)에서 서아시아 지역학을 공부하고 있다. 덩샤오핑 시대에서 시진핑 시대로의 전환을 다룬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2018년), 90년대생의 시각에서 한국 사회를 진단한 ‘K를 생각한다’(2021년)를 썼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요즘은 뭐든 코로나 핑계를 대는 게 습관이 됐지만 실은 코로나 탓이 아닌 경우가 많다. 2020년 고용절벽은 코로나보다는 국내 경제의 고용창출 역량이 떨어진 탓이라는 게 한국은행의 진단이다. 출산율 저하도 코로나 때문만이 아니다. 현 정부 출범 후론 출산율이 한 번도 반등하지 못하고 내리막길만 걸었다. 학력 붕괴도 학력 경시 정책으로 코로나 이전부터 시작된 만성적 교육 문제다. 국민 5명 중 1명이 ‘우울 위험군’이라는 정부 발표에 ‘코로나 블루’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미국 학자의 논문 ‘정치가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다’를 읽고 나서다. 논문의 결론은 분열적인 정치가 만성 스트레스 요인이라는 것. 도널드 트럼프 집권 전후로 이뤄진 세 번의 설문조사 결과 미국인의 40%는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으로 정치를 지목했고, 25%는 정치 때문에 이사 가고 싶어 하며, 5%는 정치 때문에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신적 고통은 트럼프 집권기에 심해졌고, 2020년 선거 후에도 트럼프의 불복 선언 탓인지 악화됐다고 한다. 이 조사에서는 응답자들에게 32개 문항을 제시한 후 5점 척도(1점 ‘전혀 아니다’, 5점 ‘매우 그렇다’)로 답하게 했는데 주요 문항은 다음과 같다. 정치 때문에 피곤하다, 나와 정치 성향이 다른 언론 보도를 보면 미치겠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길 바란 적이 있다, 선거 결과에 지나치게 신경 쓴다, 정치적 견해차로 친구나 가족 모임에서 문제가 생긴 적이 있다, 나중에 후회할 글을 인터넷에 올린 적이 있다…. 다 내 얘기 같지 않은가. 촛불로 하나 된 민심을 갈라놓은 2019년 조국 사태를 떠올려 보자. 다들 ‘친(親)조국’ ‘반(反)조국’으로 찢어져 열병을 앓았다. 부모 앞에서도 언성을 높였고, 단군 이래 최대의 ‘페친 물갈이’가 이뤄졌다. 온라인은 실명으론 내뱉을 수 없는 막말과 저주로 도배가 됐다. ‘조국 때문에 우울증, 탈모, 분노조절 장애를 앓고 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집단소송까지 제기됐다. 조국 사태는 윤미향 사태로, 다시 추미애와 윤석열 사태로 이어지면서 집단적 코르티솔(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를 급격히 올려놓았다. 선거는 정치적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이벤트다. 요즘 양대 대선 후보 지지자들은 “○○가 되면 나라 망한다” “△△가 되면 이민 가겠다”며 사생결단을 낼 태세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도 무병(無病)지대에 있지 않다. 유튜브와 소셜미디어까지 가세해 증폭시키는 정치적 소음은 눈 감고 귀를 막아도 피하기 어렵다. 선거가 끝나면 패배한 쪽에선 집단 화병을, 승리한 쪽에선 며칠 좋다가도 다시 분열된 나라 걱정에 답답증을 호소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 양극화는 민주화 이후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해 여당 지지층의 연평균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은 75%인 반면 국민의힘 지지층의 대통령 지지율은 5%에 불과했다(한국행정연구원). 정치 스트레스가 만성화하기 좋은 체질인 셈이다. 외로움은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 해롭다는데 우린 정치 스트레스로 매일 줄담배를 피우듯 명을 재촉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고 끊을 수도 없다. ‘식견 있는 시민(informed citizen)’은 건강한 민주주의의 기초다. 정치를 멀리하면 민주주의가 병들고, 관심을 가지면 내 마음이 병드는 딜레마 상황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삼류 정치로 얻은 집단적 화를 가라앉힐 처방을 내놓아야 한다. 백약이 듣지 않는 망국의 불치병이 되기 전에.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세계 최대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의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2019년 재선 직후 수도 이전 계획을 발표할 때만 해도 그 실현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자바섬의 인구 1000만 수도 자카르타를 대신하는 새 수도 예정지로 선택된 곳은 보르네오섬 동칼리만탄의 정글지역. 현지인들조차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오지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의회가 최근 수도 이전 법안을 통과시켰다.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섬은 인도네시아 전체 면적의 7%에 불과하지만 인구(2억7500만 명)의 60%가 모여 산다. 대기오염은 물론이고 시내의 차량 평균 시속이 10km일 정도로 교통 체증도 심각하다. 장관들은 국무회의에 늦지 않으려고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한다. 자카르타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가라앉는 도시다. 도시의 40%는 해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데 지금도 매년 지반이 25cm씩 내려앉고 있다. ▷새로운 수도가 들어설 곳은 자카르타에서 약 1200km 떨어진 열대 우림으로 오랑우탄과 긴코원숭이의 주요 서식지다. 새 수도 이름은 ‘열도’라는 뜻의 ‘누산타라’. 위도도 대통령이 80개의 후보명 가운데 선택했다. 올해 착공해 전기차와 드론 택시가 다니는 친환경 도시로 건설한 후 2024년 공공기관 이전을 시작으로 2045년 천도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이전 비용은 약 38조 원. 자카르타는 경제와 금융 중심지로 남게 된다. ▷정치적으로도 인도네시아의 수도 이전은 국부(國父)인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부터 품어온 숙원이었다. 네덜란드와 일본의 식민통치 시절 수도였던 자카르타를 벗어나고 싶었고, 국가 경제활동의 절반이 자바섬으로 집중된 후로는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새로운 명분이 추가됐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이전 비용이 발목을 잡았다. 자카르타 기득권층의 반발도 거셌다. 역대 대통령 9명 중 한 명을 빼고는 모두 자바인이다. 결국 가라앉는 도시를 더는 고집할 수 없게 되자 자바인이며 자카르타 주지사 출신인 위도도 대통령이 나서게 된 것이다. ▷20세기 이후 독립국 가운데 약 20개국이 수도를 이전했는데 인도네시아가 눈여겨보는 나라는 브라질 말레이시아 그리고 한국의 세종시다. 브라질은 해안가에 집중된 경제력을 분산하기 위해 1960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내륙 지역인 브라질리아로, 말레이시아는 쿠알라룸푸르의 교통난 해소를 위해 1993년 푸트라자야를 새 행정수도로 지정했다. 인도네시아의 천도는 정부 기능을 분산시킨 말레이시아와 한국보다는 신수도를 건설한 브라질 모델에 가깝다. 그만큼 인도네시아의 천도가 완성돼 성공 여부를 평가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어린 시절 새집으로 이사하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전에 살던 주인이 보일러에 기름을 가득 채워놓고 떠난 것이다. 덕분에 기분 좋게 출발해서인지 그 집에 사는 동안 좋은 일들이 많았다. 도시가스 난방이 드물던 시절엔 다들 그렇게 살았다. 보일러 가득 채워놓는 후한 인심은 드물었지만 남의 집 문간방살이를 하는 사람도 새로 들어오는 이가 냉골에서 고생하지 않도록 연탄불을 넣어두고 가는 걸 도리로 알았다. 새삼 옛날 일이 떠오른 건 넉 달 후 퇴임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이사 에티켓’이 민망해서다. 방을 뺄 때가 되면 살면서 고장 낸 것은 없는지, 집을 험하게 써서 새로 이사 오는 사람이 불편해하지는 않을지 돌아봐야 하건만 문 대통령은 오히려 들고 갈 것은 없는지 끝까지 챙기는 모양새다. 취임식에서 “빈손으로 취임하고 빈손으로 퇴임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해놓고 잊어버렸나 보다. 문 정부만큼 곳간을 털어먹은 정부도 드물다. 온 국민이 열심히 운동하고 술 담배를 줄여가며 20조 원 넘게 쌓아둔 건강보험 적립금이 ‘문재인 케어’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노사가 10조 원 넘게 불려놓은 고용보험기금도 문 정부 4년 만에 마이너스가 됐다. 빚 무서운 줄 모르고 쓰다가 국가부채를 400조 원 넘게 늘려놓고도 또 빚을 내 사상 최대 규모인 607조 원 예산을 편성하더니 새해 시작부터 추경 얘기를 꺼낸다. 전구와 샤워기 꼭지까지 빼가는 것도 모자라 새로 들어올 사람 앞으로 외상 달아놓고 가는 격이다. 인사권도 그렇다. 임기 말에도 부지런히 알박기 인사를 하고 있다. 상대국에 대한 결례를 무릅쓰고 외교부 공관장 인사를 앞당겼다. 정권 말 인사를 자제하는 관례를 무시하다 보니 35개 공기업 중 32개는 사장이 다음 정부에서 임기를 절반 이상 보내게 됐다. 무리를 해서라도 잡아야 하는 인재들일까. 주경제협력개발기구(OECD)대표부 대사로 임명된 전 청와대 수석은 요소수 대란으로 경질설이 돌았던 인물이고, 대한석탄공사 사장과 감사 자리를 꿰찬 이들은 석탄의 ‘ㅅ’도 모르는 친여 인사들이다. 좋은 건 바리바리 싸가고 나쁜 건 죄다 버리고 간다. 전기요금과 도시가스요금을 두 자릿수로 인상하면서 시기는 4월 이후로 미뤘다. 서민 물가를 안정적으로 관리한 공은 챙기고, 서민물가 폭등이라는 과는 차기 정부로 떠넘긴 것이다. 올해 주택보유세 산정에 지난해 공시가격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데, 올해 보유세는 동결되겠지만 내년엔 그만큼 더 오르게 된다. 이 역시 정책 실패의 책임 떠넘기기다. 자동이체가 드물던 시절 우유 값, 신문 값 떼먹고 이사 가던 염치없는 전출자와 뭐가 다른가. 덕분에 차기 정부는 차디찬 냉골에서 새 살림을 시작해야 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통 크게 쓰겠다고 벼르고 있지만 나랏빚은 1000조 원 넘게 쌓여 있고, 텅 빈 곳간을 채울 기업들은 임기 말까지 계속된 반(反)기업 입법으로 손발이 묶여 있다. 공상과학 수준의 탄소중립계획을 포함해 무리한 정책들이 들이밀 청구서에 연금개혁 노동개혁 폭탄까지 떠안다 보면 후임 대통령도 현 정부처럼 “저희가 물려받은 좋지 못했던 여건” 탓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안 하던 퇴임식까지 하고 갈 모양이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전세 들어왔다고 생각하겠다’고 했다. 퇴임식이야 어떻든 집주인에겐 다시는 들이고 싶지 않은 세입자로 기억될 것 같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세계랭킹 1위 노바크 조코비치(35)의 호주오픈 참가 여부가 올해만큼 주목을 끌었던 적은 없다. 남자 테니스 역사상 첫 메이저 21회 우승에 도전하기 때문이 아니다. 백신 회의주의자인 그가 엄격하기로 소문난 섬나라 호주의 방역패스를 통과할 수 있을지가 경기 결과에 앞서는 관심사였다. 결국 그는 입국을 거부당해 추방될 위기에 놓였다. ▷조코비치가 5일 호주 입국을 시도한 건 대회가 열리는 멜버른의 빅토리아 주정부가 접종 면제 허가를 내줬기 때문이다. 호주 방역규정에 따르면 최근 6개월 이내에 코로나에 걸렸다 나은 사람은 백신을 맞지 않아도 입국이 가능하다. 하지만 멜버른 국제공항에서는 서류 미비를 이유로 그의 비자를 취소했다. 비자 취소 무효 소송을 제기한 그는 인근 호텔에 억류된 채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조코비치의 모국인 세르비아 대통령은 베오그라드 주재 호주 대사를 초치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철회하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호주 총리는 “누구도 법 위에 있을 순 없다”고 선을 그었다. 17일 개막하는 올해 호주오픈은 메이저 대회로는 처음으로 선수 팬 자원봉사자 전원의 백신 접종을 의무화했다. 호주는 12세 이상 90%가 접종을 완료하고도 하루 평균 3만 명의 확진자가 나오는 상황이다. 조코비치에게 우승 트로피를 9개나 안겨준 나라지만 모든 특혜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테니스 연습시설이 있는 호텔로 옮겨 달라는 요구도 거절했고, 대회 일정을 감안해 신속히 판결해 달라는 요청도 “꼬리가 몸통을 흔들면 안 된다”며 일축했다. ▷특혜 시비를 빼면 이번 논란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와 공공이익의 충돌이다. 조코비치는 기(氣)치료에 빠져 있는 대체의학 신봉자다. “피라미드에서 영적 치유를 경험했다”는 그의 독특한 건강비법을 스타의 기벽쯤으로 여기던 팬들도 코로나 이후 그가 백신에 반대 목소리를 내자 “믿음의 자유가 타인의 건강을 해칠 권리는 없다”며 돌아섰다. 팬데믹 종식의 방해꾼으로 보는 것이다. ▷국내에선 학원과 독서실 등 교육시설의 방역패스 시행에 대해 법원이 최근 효력정지 결정을 내렸다. 방역당국은 백신의 의학적 효과를 간과한 결정이라며 항고했는데 법적으로도 의문이 남는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 다수가 감염의 위험을 감수하는 게 옳은가. 개인의 기본권이 병에 걸리지 않을 권리보다 중요한가. 경제적 피해가 막심한 거리두기가 아니라면 방역패스 말고는 답이 없는 상황이다. 당분간은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한 과학적인 방역패스를 예외 없이 적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 대상이 조코비치라 할지라도.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방송가엔 3대 해결사가 있다. ‘요식업계 대부’ 백종원, ‘개통령’ 강형욱, 그리고 ‘육아의 신’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57)다. 오 박사는 채널A 육아예능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아이들의 이상 행동을 감쪽같이 바로잡는 ‘금쪽 처방’으로 떼쟁이 아이를 둔 부모들에겐 ‘영접’ 희망 1순위 인물이다.요즘엔 성인용 프로그램 ‘금쪽 상담소’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유명 인사들이 털어놓는 고민을 들어주며 국민 멘토로 부상하고 있다. 진지한 연애를 못 하는 남자, 사춘기 딸과 티격태격하는 싱글맘, 서로 사랑하지만 대화가 겉도는 난임 부부 등 출연자들은 수심 가득한 얼굴로 나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돌아간다. 좀 더 단단한 마음으로 새해를 살아낼 순 없을까. 이런 고민을 안고 오은영 아카데미 강남센터 사무실을 찾은 3일, 마침 대학생 30%가 ‘코로나 블루’를 경험했다는 통계자료가 공개됐다.》소통에 서툰 부모, 아이 탓만 해 ―코로나로 다들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비대면의 장기화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겐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나 봅니다. “사람은 서로 마주치면서 힘을 얻어요. 복작대는 강남역에서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칠 때도 정신적 에너지를 교환합니다. 이런 접촉이 줄어드니 힘든 거죠. 특히 아이들은 사람뿐만 아니라 환경과도 상호작용 해야 대뇌가 발달해요.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모래에서 뛸 때와 아스팔트에서 뛸 때가 다르다는 걸 체험하며 커야 하는데 그런 기회가 많이 줄어 걱정입니다.”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2020년 우울증 같은 기분장애로 병원을 찾은 20대 환자가 전년 대비 21%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우울증은 나이가 들수록 환자가 증가하는 노년의 병이었는데 이젠 청춘의 질병이 돼버린 걸까요. “억울한 마음이 큰 것 같습니다. 젊은 사람은 코로나에 감염돼도 가볍게 앓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왜 고령층 보호를 위해 우리까지 희생해야 하느냐는 억울함이죠. 자영업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성실함과 책임감에서 정부가 시키는 대로 방역수칙을 지켰는데 왜 우리만 피해를 보느냐는 억울함입니다. 코로나 이전부터도 억울함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정서가 된 것 같습니다. 청년들은 부모 세대가 요구한 대로 열심히 공부했는데 취업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억울한 세대입니다. 부모 세대는 ‘우리 땐 더 힘들었는데 요즘 젊은이들 고생이 고생이냐’며 억울해하죠.” ―집단적 억울함을 해소하는 건 결국 정치의 영역인데요. “전 소통의 문제라고 봅니다. 상대가 억울하다는 걸 인정해야 풀어갈 수 있는데, ‘너보다 내가 더 억울하다’는 생각에 소통이 이뤄지지 않죠. 우린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어요. 보이지 않는 마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요즘 젊은이들은 건방지다’ ‘노인네들은 꼰대스럽다’ 하면서 태도를 문제 삼죠. 수능을 망친 아이들은 신경질을 내거나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컴퓨터 게임을 합니다. 견디기 힘든 마음을 분노로 표현하거나, 불안감을 잊기 위해 게임에라도 몰두하는 거죠. 그런데 부모는 그런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너 엄마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뭘 잘했다고 밥도 안 먹고 게임이야’ 그래요.” ―그럴 때 모범 답안은 무엇인가요. “‘속상해도 밥은 먹어라. 네가 안 먹으면 엄마도 너무 속상하단다’ 해야죠. 그래도 ‘내버려둬’ 하면 ‘좀 생각해 보고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얘기해 보자’ 하는 거죠. 그런 언행을 하는 이유는 외면한 채 남 탓만 하면 대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뒤로 가게 돼요. 소통에 서툰 부모들을 위해 포털에 ‘오늘 육아 회화’라는 코너도 연재한 적이 있어요.” ―입학과 졸업의 계절입니다. 많은 청년들이 대학 입시와 취업 경쟁에서 좌절을 경험하는 때이죠. 입시에 실패한 아이들은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하나요. “한 수험생이 와서 ‘12년간 열심히 공부했는데 억울하다’고 해요. 그래서 얘기해 줬어요. 사람이 공부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피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보는, 인생을 열심히 살아 보는 경험을 하는 거다. 그 과정에서 배운 많은 것들로 넌 앞으로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럼 아이가 ‘그래도 당장 이 좌절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해요. 그 좌절감마저 잘 겪어내는 게 최선의 마침표라고 얘기해 주죠.” ―대학생들은 심리·정서 안정에 위협이 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취업 경쟁을 꼽습니다. “그런 청년들에겐 ‘네가 기대치를 조금 낮추면 갈 수 있는 일자리가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일단 일을 시작해 보라고 해요. 제가 의사 면허를 따고 인턴으로 했던 일 중에서 의사의 전문성이 필요한 일은 10%도 안 됐어요. 나머지 90%는 허드렛일이었죠. 정말 자신과 맞지 않거나 열정페이를 강요당하는 일이 아니라면 실제로 해보면서 배우는 것도 많고 경력이 쌓이는 거라고 생각해요.”아이에게 문제 해결할 시간 줘야 ―같은 시련도 잘 극복해 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외부의 자극을 막을 순 없지만 그 자극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어요. 외부 자극을 견디려면 내면의 힘이 필요합니다. 핵심 애착관계인 부모로부터 이해받고 공감받는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게 중요해요. 여기서부터 내면의 힘이 길러지죠. 내면의 힘은 자신의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인데 이는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배우는 겁니다. 아이가 크고 작은 어려움에 부닥치면 부모들은 직접 해결해 주기보다 아이 자신이 스스로 해결하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줘야 해요. 많은 부모들이 결과 중심적인 양육을 합니다. 이런 양육 방식으로 자란 아이는 중간 과정이 중요하고, 과정을 통해 결과가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하게 될 수도 있어요. ‘너는 열심히 했지만 잘 안될 때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이런 말을 많이 들으면서 자라야 해요. 그래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난 한 해 클리닉을 운영하면서 12개 TV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자 혹은 게스트로 나오고 3개 신문사에 칼럼을 기고하셨죠. 그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해내나요. “아기 때부터 잠이 적었어요. 요즘은 4, 5시간 자고 일합니다. 14년 전 크게 아픈 뒤로 제가 아주 잘난 사람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열심히 살면 행복이 찾아와요 ―암 수술을 받으셨죠. “그날이 토요일이었어요.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담낭에 악성 종양이 있는 것 같다고 했어요. 월요일 정밀검사에선 담낭암일 가능성이 93%라고 했습니다. 대장암까지 발견됐으니 이틀 뒤 수술에서 담낭암이 확인되면 오래 못 살 수도 있다고요. 수술 전날까지 예약된 환자들 진료를 봤어요. 환자들 중엔 지방에서 월차를 내고 온 사람, 절박한 마음으로 찾은 부모들이 있는 데다 제 고민이 당장 해결될 일도 아니었고요.” ―일상을 유지하는 게 시련을 견디는 힘이 된다는 말씀인가요. “인생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오늘 하루의 최선’을 다할 뿐인 거죠. 여기서 최선이란 내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일상을 살아내는 거예요. 내가 해낼 수 있는 선을 넘어 에너지를 끌어다 쓰면 건강도 나빠지고 오래 하지도 못해요. 만약 오늘 너무 힘들어서 하루 쉬었어요. 그럼 그게 오늘의 최선인 거예요. 아이가 잠들기 전 동화책을 읽어 주는 건 좋은 일이지만 내가 피곤하면 하루 건너뛰어도 됩니다. 인생은 꽤 긴 과정입니다.” ―박사님이 항상 웃으며 사는 비결은 뭡니까. “상처 없이 매끈한 인생이 있을까요. 꿰매어 가면서 너덜너덜한 채로 견뎌 내는 거죠.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순간의 감정이에요. 우울한 사람들은 행복의 순간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허리를 숙였다가 폈는데 하늘이 파래요. ‘와, 하늘 좀 봐’ 하며 행복해지죠. 아이 키우는 건 매우 힘든 일이지만 가끔씩 귀여운 짓을 하는 걸 보면 행복하잖아요. 한번은 강연을 끝내고 나오는데 어떤 엄마가 뒤따라 나오더니 작은 사탕 하나를 건네주었어요. 그날 그 사탕 하나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한 끝에 드물게 찾아오는 행복감, 이런 순간의 힘으로 사는 겁니다.” 오은영 박사는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연세대 의대 졸업 후 같은 학교에서 석사 학위, 고려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어린이와 성인의 심리 상담과 치료를 하는 ‘오은영 아카데미’ 원장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일본 사람들은 ‘해 넘기기 우동’을 먹는다. 삿포로의 한 우동 가게에도 12월 31일 늦은 밤 남루한 차림의 여인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1인분을 주문했다. 딱한 사정을 알아챈 주인은 몰래 1.5인분을 내어주고 세 모자는 맛있게 나눠먹는다. 구리 료헤이의 소설 ‘우동 한 그릇’의 줄거리인데 실제로 따뜻한 한 끼의 추억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다. 미국 뉴욕에 사는 A 씨도 그중 한 명이다. ▷A 씨는 가난한 고학생이었다. 겨울 밤 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A 씨는 서울 신촌시장 뒷골목에서 홍합을 파는 리어카를 보았다. 배가 고팠던 그는 “홍합탕을 한 그릇 먹을 수 있겠느냐. 돈은 내일 드리겠다”고 했고, 아주머니는 선뜻 한 그릇을 내주었다. 그 다음 날이라고 없던 돈이 생겼을까. A 씨는 이후 이민을 떠났다. 홍합탕 값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A 씨는 50년이 지난 최근 이 같은 사연을 담은 손 편지와 1000달러짜리 수표 두 장을 서대문경찰서 신촌지구대로 보내왔다. 1만 원짜리 홍합탕을 200그릇 넘게 먹을 수 있는 돈이다. ▷식당들이 코로나 폐업 위기에 몰린 올해도 ‘홍합탕 한 그릇’의 사연이 줄을 이었다. 특히 “애들 굶는 건 절대 못 보겠다”는 식당들이 많았다. 홍대 앞 치킨집은 “동생이 치킨을 좋아하는데 5000원밖에 없다”는 소년 가장에게 세트 메뉴를 공짜로 주었다. 망원동 분식집은 결식아동 카드를 가진 아이는 물론 동반 1인에게도 식사를 준다. 혼자 먹기 부끄러워할까봐서다. ‘뭐든 먹고 싶은 거 얘기해줘. 눈치 보면 혼난다’라고 문 앞에 써 붙인 식당도 있다. 이렇게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가게가 전국에 3000개 가까이 된다. ▷홍합탕 한 그릇은 일방적 나눔이 아니다. 식당 주인들은 “아이들을 먹이는 일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 몰랐다”고 한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싶다가도 “사장님 덕분에 밥 잘 먹고 성인이 됐다”는 편지를 받으면 마음을 다잡게 된다. 영업난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던 파스타집 사장은 “‘1년간 매일같이 신세졌는데 눈치 안 보고 잘 먹었다’는 감사 인사를 받고 수면제 없이 잘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소설 ‘우동 한 그릇’의 형제는 14년 후 의사와 은행원이 돼 노모와 함께 그 우동 집을 찾아 3인분을 시킨다. 그날 밤 한 그릇의 우동에 용기를 얻어 열심히 살았다면서. A 씨는 편지에서 “50년간 친절하셨던 아주머니 덕으로 살아왔다”며 가장 어려운 이들에게 따뜻한 한 끼를 제공해달라고 당부했다. 올 한 해 넉넉지 않은 이들 덕분에 ‘홍합탕 한 그릇’의 추억을 갖게 된 아이들도 나눔의 힘을 믿는 반듯한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