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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찾는 게 남편감이라면 내가 도와줄게. 나랑 수업하자. 넌 분명 금방 터득할 거야.”19세기 영국 런던 사교계. 브리저튼 가문의 셋째 아들 콜린 브리저튼(루크 뉴턴)은 오랜 친구인 페더링턴 가문의 셋째 딸 페넬로페 페더링턴(니콜라 코클란)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짝을 찾아 사교계에 데뷔했으나 남자에게 인기 없는 페넬로페에게 이른바 ‘연애 수업’을 해주겠다는 것이다.페넬로페는 콜린에게 교양 있게 부채질하고 눈웃음을 짓는 방법을 배운다. 촌스러운 옷 대신 화려한 드레스를 맞춰 입은 덕에 조금씩 남자의 관심을 얻는다. 하지만 페넬로페는 사실 어릴 적부터 친절하던 콜린을 짝사랑하고 있다. 과연 두 사람의 사랑은 이뤄질 수 있을까.● “끔찍하게 피둥피둥” 사라지다16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브리저튼 시즌 3’은 원작 소설인 ‘브리저튼 : 마지막 춤은 콜린과 함께’(신영미디어)에 없던 ‘연애 수업’을 새로운 장치로 활용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콜린이 페넬로페의 연애를 돕는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 미묘한 감정이 생겨나는 점을 섬세하게 다룬 것. 드라마는 공개 직후 넷플릭스 글로벌 톱 10 영어무문 1위에 올랐다.브리저튼 시리즈는 19세기를 배경으로 영국 런던 브리저튼 가문 8남매 이야기를 담은 시대극이다. 원작과 드라마의 가장 큰 차이점은 페넬로페의 다이어트다. 원작에서 페넬로페가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건 외모 때문이다. 다이어트에 열중하지만 다른 여성에 비해 밀리는 외모를 원작은 이렇게 표현한다.“(페넬로페는) 다른 레이디들보다 몸무게가 10kg은 족히 더 나갔으며, 긴장만 하면 얼굴이 얼룩덜룩해졌기에, 런던 사교계 무도회만큼 그녀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도 없었으므로, 한마디로 말해 얼굴이 얼룩덜룩하지 않을 때가 없다는 뜻이었다. …(중략)… 살이 10kg도 넘게 빠졌으므로, 이젠 자기 눈으로 봐도 ‘끔찍하게 피둥피둥하다’에서 ‘보기 좋게 토실토실하다’로 한 단계 올라섰다 볼 수 있었다.”반면 드라마에서 페넬로페는 통통한 몸매를 지녔지만 다이어트에 열중하지 않는다. 대신 사교계에 걸맞은 대화 방법을 배우고 화장이나 의상에 변화를 꾀한다. 드라마의 총괄 제작자인 제스 브라우넬은 미국 버라이어티지와의 인터뷰에서 “우린 페넬로페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페넬로페의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외모보다 자신감의 수준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노처녀’ 페넬로페의 나이가 바뀐 것도 주목할 점이다. 원작에서 28세인 페넬로페의 나이는 드라마에서 19세로 설정됐다. 17세에 사교계에 데뷔했지만 11년 동안 시집가지 못했던 원작의 설정보다 설득력 있다. 특히 원작이 묘사하듯 당시 결혼에 목메는 사교계에서 서른 살 가까이 결혼하지 못하는 것은 치명적이었다.“4월이 눈앞으로 다가옴과 동시에 이곳 런던은 새 사교계 시즌 준비로 분주하다. 야망에 불타오르는 사교계의 어머니들은 온 런던에 널려 있는 드레스 가게에서 자신들의 사랑스러운 데뷔탕트들을 유부녀와 노처녀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특별한 드레스를 찾고 있다.” ● 가십 난무한 사교계에 피어난 ‘우정’페넬로페가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을 모은 소식지를 만드는 ‘레이디 휘슬다운’이라는 사실이 드라마에서 콜린에게 들통나는 점도 원작과 다른 점이다. 원작에선 레이디 휘슬다운의 정체는 비밀 속에 숨겨져 있다. 반면 드라마에선 콜린이 페넬로페의 정체를 밝혀내기 직전으로 묘사돼 극적인 긴장감을 불러온다. 펜 하나로 귀족과 왕실까지 쥐락펴락하는 ‘레이디 휘슬다운’의 정체가 사실 수줍음 많은 소녀라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남성 위주 사회에서 결혼에만 목메야 했던 당시 영국 여성들의 욕망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하는 것이다. 원작은 결혼과 가십에 목메는 당시 사회 분위기를 이렇게 풍자한다.“한 장짜리 소식지는 금세 장안의 화제가 됐다. 런던 사교계는 어딜 가나 레이디 휘슬다운의 얘기로 뜨거웠다. …(중략)… 가십이란 마약을 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극심하게 중독이 된 상태, 울며 겨자 먹기로 5페니를 내고 신문을 사 볼 수밖에.”사교계에서 서로를 질투하고 비난하는 여성들이 서로 화합하는 과정을 ‘우정’ 서사로 보여주려고 한 점도 드라마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레이디 휘슬다운을 동경하던 엘로이즈 브리저튼(클라우디아 제시)이 자신을 소식지에서 비꼰 페넬로페(레이디 휘슬다운)와 틀어졌다 다시 화해하는 장면은 원작엔 없지만, 드라마에 추가된 부분이다. 드라마 제작자인 미국 프로듀서 숀다 라임스는 넷플릭스와의 인터뷰에서 “(사교계)에서 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 남성보다 서로에게 훨씬 더 큰 힘이 되는 완전한 여성들의 우정을 보여줄 수 있도록 했다”고 했다.● 원작도, 드라마도 ‘착한 남자’에 끌리다원작이건 드라마건 방황하는 페넬로페를 구원한 건 다름 아닌 콜린이다. 이성과의 대화를 전혀 하지 못하던 페넬로페가 콜린에게 끌리는 건 그가 친절하기 때문이다. ‘착한 남자’에게 끌리는 페넬로페의 마음을 원작은 이렇게 표현한다.“콜린 브리저튼은 착한 남자였다. 착한 남자. 그 얼마나 하찮고 우스운 단어인가. 그런데 진부하기까지 한 그 단어가 그에게는 완벽하게 어울렸다. …(중략)… 착한 남자에게 사랑을, 비록 일방적인 사랑이라 할지라도 느낀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쁜 남자를 사랑하는 것보다야 백배 천배 분별력 있는 처사가 아닌가.”사치와 타락, 아름다움과 화려함으로 점철된 시기인 리젠시 시대(1811∼1820년)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를 펼쳐낸 드라마의 매력은 시즌 3에서도 여전하다. 상류층 사교계의 전성기였던 리젠시 시대를 배경으로 전통 시대극을 벗어난 매력이 돋보인다. 시즌이 거듭할수록 서사의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지만 드라마의 인기가 여전한 비결은 화려한 배경에 운명적 사랑을 가미한 로맨스물의 성공 법칙을 그대로 따른 덕이다.원작을 쓴 건 미국 작가 줄리아 퀸이다. 퀸은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예일대 의대에 진학했으나 의대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살고 있다. 드라마 인기 덕에 원작 소설이 2021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소설 부문 1위를 차지해 4주간 자리를 지켰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의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자로 독일 작가 예니 에르펜베크(57·사진)가 선정됐다. 2005년 인터내셔널 부문이 신설된 이후 독일 작가로서 최초 수상이다. 부커재단은 21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연 시상식에서 예니 에르펜베크의 ‘카이로스(Kairos)’를 2024년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으로 발표했다. 에르펜베크는 2018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에 오른 데 이어 이번에는 수상에 성공했다. ‘카이로스’를 번역한 독일 출신 번역가 미하엘 호프만(67)도 함께 수상자가 됐다. 둘은 상금 5만 파운드(약 8600만 원)를 나눠 갖는다. ‘카이로스’는 1980년대 동베를린을 배경으로 19세 여성과 50대 유부남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 인터내셔널 부문 심사위원장 엘리너 와크텔은 “‘카이로스’는 사랑과 열정으로 시작해 권력, 예술, 문화를 다룬다. 파괴적인 소용돌이로 빠져드는 연인의 모습은 그 시기 동독의 역사와 연결된다”고 평했다. 에르펜베크는 1967년 동독의 동베를린 태생이다. 오페라 감독, 극작가, 소설가를 넘나들며 전방위적으로 작품 활동을 펼쳐왔다. 국내에는 그의 장편소설 ‘모든 저녁이 저물 때’(2012년·한길사) 등이 번역 출간돼 있다. 에르펜베크의 수상으로 소설 ‘철도원 삼대(마터 2-10)’로 최종 후보에 올랐던 소설가 황석영(81)은 고배를 마셨다. 그는 이날 부커상 시상식에 참석해 “(한국 독자들이) 속상해하실 것 같다. 응원해 주셔서 감사하다. 더 열심히 쓰겠다”고 말했다. 부커상은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2016년 소설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한국 작가 최초로 부커상을 받은 바 있다. 황 작가의 수상은 불발됐지만 2022년 정보라 ‘저주토끼’, 지난해 천명관 ‘고래’에 이어 한국 작가 작품이 3년 연속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점은 주목받고 있다. 황 작가가 장편소설 ‘해 질 무렵’(영문판 ‘앳 더스크’)이 2019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롱리스트)에 오른 데 이어 두 번째로 후보가 된 점도 높게 평가받는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응원해주셔서 감사하다. 더 열심히 쓰겠다.” 황석영 작가(81)는 본인의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영문판 마터 2-10)’의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의 수상이 불발되자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그는 21일(현지 시간)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시상식에 참석해 “(한국 독자들이) 속상해하실 것 같다”며 이렇게 담담히 말했다. 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2016년 소설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한국 작가 최초로 부커상을 받은 바 있다. 황 작가는 앞서 여러 차례 향후 집필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17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최종 후보자 낭독회에선 “세계 여러 작가도 제 나이 때에 절필 선언을 했다. 저는 조금 더 쓰려고해서 3권을 더 쓰면 될 것 같다”고 했다. 황 작가의 수상은 불발됐지만 2022년 정보라 ‘저주토끼’, 지난해 천명관 ‘고래’에 이어 한국 작가 작품이 3년 연속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점은 주목받고 있다. 황 작가가 장편소설 ‘해질 무렵’(영문판 앳 더스크)로 2019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롱리스트)에 이어 2번째로 후보가 된 점도 높게 평가받는다. 올해 수상작은 독일 작가 예니 에르펜베크(57)의 장편소설 ‘카이로스’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독일 작가가 수상한 건 처음. ‘카이로스’를 번역한 독일 출신 번역가 마이클 호프만(67)도 함께 수상자가 됐다. 둘은 상금 5만 파운드(약 8600만 원)를 나눠 갖는다. ‘카이로스’는 1980년대 동베를린을 배경으로 19세 여성과 50대 유부남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 인터내셔널 부문 심사위원장 엘리너 와크텔은 “‘카이로스’는 사랑과 열정으로 시작해 권력, 예술, 문화를 다룬다. 파괴적인 소용돌이로 빠져드는 연인의 모습은 그 시기 동독의 역사와 연결된다”고 평했다. 에르펜베크는 1967년 동독의 동베를린 태생이다. 오페라 감독, 극작가, 소설가를 넘나들며 전방위적으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에르펜베크는 2018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에 오른 바 있다. 국내에는 그의 장편소설 ‘모든 저녁이 저물 때’(2012년·한길사) 등이 번역 출간돼 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시청 앞 광장이 붉게 물들어 있다. 광장 곳곳엔 새빨간 구두와 하얀 운동화가 버려져 있다. 광장 분수대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의 색도 시뻘건 색이다. 열 갈래로 퍼져 나오는 각 물줄기 끝엔 사람의 눈이 그려져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총에 맞아 쓰러진 광주 시민들의 눈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책은 5·18민주화운동 생존자의 그림 에세이다. 1956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저자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로 전학 왔다. 도시에서 학교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친구들은 시골에서 왔다며 대놓고 무시했다. 교사들은 엄격했다. 그를 위로해 준 건 광주 양림동의 한 도넛 가게였다. 저자는 “엄청 맛있어서 혓바닥이 튀어나올 정도”라며 천진난만하게 유년 시절을 회고한다. 그는 1978년 조직된 광주·전남 최초의 여성 민주화운동 단체 송백회의 창립 멤버가 된다. 하지만 곧 5·18이 터진다. 공격받은 시민들의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신간에서 그는 5·18을 은유적으로 그려낸다. 당시 여성 시민군이 대항하던 모습을 빨간 리본으로 얼굴을 가린 여성들이 손을 잡은 그림으로 형상화했다. 수많은 시민이 희생된 비극 이후를 훨훨 날아가는 노란색 나비 떼가 가득한 묘지 그림으로 그렸다. 저자는 5·18 이후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때부터 생긴 불면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 잠깐 자면 꿈을 꾸는데, 어떤 눈이 항상 나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어.” 평생 그는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뛰어다녔다. 하지만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로 인해 급성 뇌졸중이 찾아왔고 오른손이 마비됐다. 그는 왼손으로 자신의 삶을 담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모아 2022년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 ‘양림동 소녀’는 지난해 서울국제노인영화제 단편경쟁부문 대상을 받았고 신간까지 내게 됐다. 5·18은 그동안 여러 예술로 표현되곤 했다. 하지만 생존자가 직접 쓴 에세이와 그림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특히 저자가 왼손으로 그린 그림들엔 어설프지만 솔직한 기억이 담겨 눈길을 끈다. 예술이 삶을 구원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아이돌을 열렬히 사랑하는 팬, 비난받는 아이돌, 아이돌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tvN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를 시청하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하며 책장을 뒤져 보다 깨달았다. 2021년 국내에 출간된 장편소설 ‘최애, 타오르다’와 데칼코마니처럼 비슷한 이야기라는 것을 말이다. ‘최애, 타오르다’는 1999년생 일본 여성 작가 우사미 린의 작품이다. 2021년 일본 문학계 최고 권위의 양대 문학상 중 하나인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일본에서만 50만 부가 팔릴 정도로 대중성도 인정받았다. ‘최애, 타오르다’에서 일본 아이돌 마사키는 루머에 휘말린다. 팬을 때렸다는 것이다. 마사키는 사건의 전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실망한 팬들은 돌아서기 시작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비판이 쏟아진다. 아이돌의 팬인 여고생 아카리는 혼란스러워한다. 다른 팬들처럼 비난할지, 아니면 끝까지 사랑하는 이를 지지할지 고민한다. ‘선재 업고 튀어’에서도 아이돌 류선재(변우석)는 팬들의 비난을 받는다. 4인조 그룹 ‘이클립스’의 멤버 중 한 명으로 인기를 끌자 다른 멤버들의 팬들은 선재의 성공을 질투한다. 악플 탓에 선재는 우울증약과 수면제를 달고 산다. 선재가 세상을 떠나자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라는 추정이 나온다. 팬이 아이돌을 좋아하는 이유도 닮았다. ‘선재 업고 튀어’에서 여주인공 임솔(김혜윤)은 하반신 마비로 삶에 대한 의지를 잃은 상태다. 라디오에 출연한 선재가 솔에게 전화를 걸어 “고마워요, 살아있어 줘서”라며 응원해준 뒤 살아갈 힘을 얻었다. ‘최애, 타오르다’에서 학업 성적이 좋지 않고 취업 준비에도 관심이 없는 아카리의 인생을 위로하는 것도 오직 ‘최애’(최고로 애정하는 아이돌)인 마사키뿐이다. 아카리는 마사키에게 집착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고백한다. “최애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나를 불러 일깨운다. 포기하고 놓아버린 무언가, 평소에는 생활을 위해 내버려둔 무언가, 눌려 찌부러진 무언가를 최애가 끄집어낸다.” 아이돌은 사랑과 비난을 함께 받으며 살아간다. 관심 탓에 근거 없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돌에게 가장 뼈아픈 건 팬의 비난이다.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던 팬들이 돌아설 때 배신감을 느낀다. ‘선재 업고 튀어’의 선재와 ‘최애, 타오르다’의 마사키가 절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돌을 구하는 것도 팬이다. ‘선재 업고 튀어’에서 2023년을 살아가던 솔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이돌 선재를 살리기 위해 15년 전으로 돌아간다. 물론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공상과학(SF) 영화 같은 일이다. 반면 ‘최애, 타오르다’가 제안하는 방식은 조금 더 현실적이다. ‘최애, 타오르다’에서 마사키는 결국 은퇴한다. 아카리는 마사키가 영원한 아이돌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 불리며 노벨 문학상, 부커상 등을 받은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사진)가 13일(현지 시간) 별세했다. 향년 93세. 14일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먼로는 전날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있는 한 요양원에서 숨을 거뒀다. 고인은 웨스턴온타리오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1951년 결혼하면서 학업을 중단했고, 남편과 함께 서점을 운영하고 집안일을 하며 틈틈이 세탁실에 앉아 소설을 썼다. 1968년 첫 단편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 이후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2001년), ‘런 어웨이’(2004년) 등 소설집으로 이름을 알렸다. 소설 ‘곰이 산을 넘어오다’ 등은 영화로 제작됐다. 그는 2013년 캐나다 작가로는 처음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노벨상 선정위는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명맥을 잇는 경지’라고 평가했다. 고인은 영국 부커상(인터내셔널 부문), 캐나다 총독문학상 등도 받았다. 먼로는 2012년 단편소설집 ‘디어 라이프’를 끝으로 절필을 선언했고, 말년에는 치매를 앓기도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한국 부모들은 아이가 사회적으로 성공해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행복에 대한 기준이 다양한 핀란드 부모와 사고방식이 다릅니다.” 15일 국내에 양육서 ‘행복한 아이의 비밀’(토일렛프레스)을 펴낸 핀란드 작가 피르요 수호넨 씨(51)는 1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나 이렇게 말했다. 한국 부모들이 획일적인 성공 기준에 갇혀 있는 탓에 아이가 그 기준에 맞는 성공을 할 확률이 낮고, 이 때문에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부모들의 아이에 대한 높은 기대치, 한국 사회의 높은 성과주의가 출산율 하락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봤다. “한국에선 부모가 서울대를 나오면 아이도 서울대를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모와 아이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 한국에 만연한 성과 지상주의를 없애지 않으면 출산율은 오르지 않을 겁니다.” 그는 글로벌 의류 브랜드 이바나헬싱키의 설립자이자 12세짜리 딸을 키우는 워킹맘이다. 이바나헬싱키 한국 지사를 설립하기 위해 한국을 수차례 오가던 중인 2018년 한국 사업가에게 “당신을 비롯해 핀란드 부모들은 아이의 행복만 중시하고, 성공엔 관심이 없는 게 신기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한국과 핀란드 부모들의 생각이 다른지를 고민하다 소아정신과 전문의, 특수교육학과 교수 등 핀란드 교육·심리 전문가 12명을 인터뷰해 핀란드식 교육법을 담은 신간을 썼다. 신간에서 핀란드 전문가들은 “완벽한 부모가 되려 하지 말라”고 입을 모은다. 다른 부모와 비교해서 못난 부모라고 죄책감에 시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수호넨 씨는 “한국처럼 서로를 비교하는 사회에서 부모들에게 죄책감은 피할 수 없는 감정”이라며 “아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핀란드 전문가들은 구체적인 칭찬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얼마나 자주, 구체적으로 아이를 칭찬했는지, 칭찬보다는 고칠 것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라는 것이다. 수호넨 씨는 “만약 그림을 잘 그렸다면 색감, 구도 등 어떤 점이 훌륭했는지 구체적으로 칭찬을 해야 한다”고 했다. 신간은 아이를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고 함께 놀며 시간을 보내라고 조언한다. 물론 이런 교육법이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기본을 잘 지키는 육아법이 중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발간한 ‘세계행복보고서’에서 핀란드가 ‘행복한 나라’ 1위로 7년 연속(2018∼2024년) 꼽힌 것에 ‘핀란드 교육’의 영향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올해 52위였다.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당신부터 먼저 인생을 즐기세요. 아이를 위해 희생하지 마세요. 그래야 아이도 행복해집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한국 부모들은 아이가 사회적으로 성공해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행복에 대한 기준이 다양한 핀란드 부모와 사고방식이 다릅니다.”15일 국내에 양육서 ‘행복한 아이의 비밀’(토일렛프레스)을 펴낸 핀란드 작가 피르요 수호넨(51)은 1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나 이렇게 말했다. 한국 부모들이 획일적인 성공 기준에 갇혀 있는 탓에 아이를 낳으면 성공할 확률이 낮고, 이 때문에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가임 여성이 평생 낳을 평균 출생아 수)이 0.72명까지 추락했다고 전하자 그는 “놀랍다. 믿을 수 없이 낮은 수치”라고 했다. 그는 한국 부모들의 아이에 대한 높은 기대치, 한국 사회의 높은 성과주의가 출산율 하락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봤다. “한국에선 부모가 서울대를 나오면 아이도 서울대를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모와 아이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 한국에 만연한 성과 지상주의를 없애지 않으면 출산율은 오르지 않을 겁니다.” 그는 글로벌 의류 브랜드 이바나헬싱키의 설립자이자 12살짜리 딸을 키우는 워킹맘이다. 이바나헬싱키 한국 지사를 설립하기 위해 한국을 수차례 오가던 중인 2018년 한국 사업가에게 “당신을 비롯해 핀란드 부모들은 아이의 행복만 중시하고, 성공엔 관심이 없는 게 신기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한국과 핀란드 부모들의 생각이 다른지를 고민하다 소아정신과 전문의, 특수교육학과 교수 등 핀란드 교육·심리 전문가 12명을 인터뷰해 핀란드식 교육법을 담은 신간을 썼다. 신간에서 핀란드 전문가들은 “완벽한 부모가 되려 하지 말라”고 입을 모은다. 다른 부모와 비교해서 못난 부모라고 죄책감에 시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수호넨 씨는 “한국처럼 서로를 비교하는 사회에서 부모들에게 죄책감은 피할 수 없는 감정”이라며 “아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핀란드 전문가들은 구체적인 칭찬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얼마나 자주, 구체적으로 아이를 칭찬했는지, 칭찬보다는 고칠 것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라는 것이다. 수호넨 씨는 “한국 부모들은 아이 기를 살려주기 위해 ‘잘생겼다’, ‘똑똑하다’ 등 무조건 칭찬을 많이 한다”며 “만약 그림을 잘 그렸다면 색감, 구도 등 어떤 점이 훌륭했는지 구체적으로 칭찬을 해야 한다”고 했다. 신간은 아이를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고 함께 놀며 시간을 보내라고 조언한다. 물론 이런 교육법이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기본을 잘 지키는 육아법이 중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발간한 ‘세계행복보고서’에서 핀란드가 ‘행복한 나라’ 1위로 7년 연속(2018~2024년) 꼽힌 것에 ‘핀란드 교육’ 영향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올해 52위였다. “한 아이의 엄마로서 저도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어요. 아이에게 너무 ‘오냐오냐’하고 있는지, 반대로 어떤 때는 지나치게 엄하게 대하고 있는 게 있는지 궁금했죠. 한국 독자도 아이를 잘 키우는 방식을 찾아가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당신부터 먼저 인생을 즐기세요. 아이를 위해 희생하지 마세요. 그래야 아이도 행복해집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 불리며 노벨문학상, 부커상 등을 받은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가 13일(현지 시간) 별세했다. 향년 91세. 14일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먼로는 전날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있는 한 요양원에서 숨을 거뒀다. 고인은 웨스턴온타리오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1951년 결혼하면서 학업을 중단했고, 남편과 함께 서점을 운영하고 집안일을 하며 틈틈이 세탁실에 앉아 소설을 썼다. 1968년 첫 단편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 이후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2001), ‘런 어웨이’(2004) 등 소설집으로 이름을 알렸다. 소설 ‘곰이 산을 넘어오다’ 등은 영화로 제작됐다. 그는 2013년 캐나다 작가로는 처음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노벨상 선정위는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명맥을 잇는 경지’라고 평가했다. 고인은 영국 부커상(인터내셔널 부문), 캐나다 총독문학상 등도 받았다. 먼로는 2012년 단편 소설집 ‘디어 라이프’를 끝으로 절필을 선언했고, 말년에는 치매를 앓기도 했다. 국내에는 먼로의 책 10여 종이 출간됐다. 여성의 평범한 삶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묘사했다는 점에서 소설가 박완서와 비교되기도 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어느새 빗물이 내 발목에 고이고. 참았던 눈물이 내 눈가에 고이고.” 2008년 비가 쏟아지는 고등학교. 남주인공 류선재(변우석)가 여주인공 임솔(김혜윤)에게 파란색 우산을 씌워주자 가수 윤하의 ‘우산’이 흘러나온다. 이 곡은 힙합그룹 에픽하이와 윤하가 2008년에 함께 불러 당시 각종 음악방송에서 1위를 휩쓸었다. 선재와 솔의 로맨스가 펼쳐지는 드라마에선 윤하가 2014년 리메이크해 부른 곡이 흘러나오지만, 2008년의 감성을 되살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다. 지난달 8일부터 방영 중인 tvN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는 2023년을 살아가던 솔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이돌 선재를 살리기 위해 15년 전으로 돌아가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2019년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된 김빵 작가의 원작 웹소설 ‘내일의 으뜸: 선재 업고 튀어’(사진)에선 솔이 6년 전인 2010년대로 돌아가지만, 드라마는 2000년대를 다룬다. 원작은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앞으로 닥칠 문제를 해결하는 ‘회귀물’이다. 과거로 돌아간 솔이 “뜬금없이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6년 전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꿈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며 놀라는 장면은 국내 웹소설에서 유행하는 회귀물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어떤 기대로, 간절한 바람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넌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걸”같이 솔이 선재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는 문장은 로맨스 소설을 보는 듯하다. 고등학생들이 자주 쓸 법한 일상적인 욕설이 거침없이 등장하는 건 웹소설의 특징이다. 이에 비해 드라마는 시대 배경에 더 집중했다. 솔은 스마트폰 대신 MP3 플레이어로 그룹 브라운아이즈의 ‘점점’(2002년), 가수 김형중의 ‘그랬나봐’(2003년)를 듣는다. 러브홀릭의 ‘러브홀릭’(2003년),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2009년)와 같이 당시 감성을 그득 담은 OST도 시청자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극에서 솔은 카페 ‘캔모아’에서 팥빙수를 먹으며 친구와 수다를 떤다. 선재의 ‘싸이월드’를 찾아가 일촌 신청을 한다. 당시 유행하던 컨버스 신발이나 시계 브랜드 지샥 손목시계도 감초로 등장한다. 2008년을 배경으로 한 만큼 중국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수영 선수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딴 박태환도 나온다. 이런 복고 감성을 살린 미장센 덕에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4.8%를 기록했다. 온라인에선 ‘선친자’(선재에 미친 자)라는 강력한 팬덤도 생겼다. 실제로 하이틴 로맨스를 좋아하는 10, 20대뿐아니라 30, 40대 시청자까지 불러 모으고 있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는 “선재와 솔이 함께 우산을 쓰는 장면은 2002년 귀여니가 발표한 동명의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늑대의 유혹’(2004년)을 생각나게 한다”며 “1980, 90년대가 배경인 ‘응답하라 시리즈’가 다루지 못한 2000년대를 노려 각색한 전략이 적중했다”고 분석했다. 드라마에서 솔이 과거 짝사랑한 김태성(송건희)이라는 캐릭터를 새로 만들어 삼각관계를 형성한 것도 원작과 다른 점이다. 원작에서 솔이 선재를 사랑하는 심리가 두드러진다면, 드라마에선 선재와 솔이 서로를 아끼고 지키려는 상호작용이 강조된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드라마에 지친 시청자들이 따뜻한 사랑 이야기에 끌리는 점도 인기 이유”라고 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어느새 빗물이 내 발목에 고이고, 참았던 눈물이 내 눈가에 고이고.”2008년 비가 쏟아지는 고등학교 교정. 남주인공 선재(변우석)가 여주인공 솔(김혜윤)에게 파란색 우산을 씌워주자 가수 윤하의 곡 ‘우산’이 흘러나온다. 이 곡은 에픽하이와 윤하가 2008년에 함께 부른 음악으로 당시 각종 음원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선재와 솔의 로맨스가 펼쳐지는 드라마에선 윤하가 2014년 홀로 부른 곡이 흘러나오지만 2000년대 감성을 살리기엔 부족함이 없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다. ● 2000년대 싸이월드 감성 노린 ‘선업튀’tvN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는 2023년을 살아가던 솔이 15년 전인 2008년으로 회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이돌 선재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2019년부터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된 김빵 작가의 원작 웹소설 ‘내일의 으뜸 : 선재 업고 튀어’에선 솔이 6년 전으로 회귀했다. 비교적 최근 이야기를 다룬 웹소설과 2000년대를 다룬 드라마는 배경이 다르다.그 덕에 드라마에서 솔은 MP3에 브라운 아이즈 ‘점점’(2002년), 김형중의 ‘그랬나봐’(2003년)를 담아 듣는다. 곳곳에서 러브홀릭 ‘러브홀릭’(2003년), 소녀시대 ‘소원을 말해봐’(2009년)가 흘러나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또 드라마에서 솔은 카페 ‘캔모아’에서 팥빙수를 먹으며 친구와 수다를 떤다. 선재의 ‘싸이월드’를 찾아가 일촌 신청을 한다. 컨버스 신발과 지샥 손목시계도 등장. 2008년을 배경으로 한만큼 중국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수영 선수 최초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박태환이 등장하는 점도 시청자에게 추억을 불러일으킨다.드라마의 최고 시청률은 4.8%다. 온라인 경쟁력 분석기관인 굿데이터코퍼레이션 펀덱스가 발표한 5월 1주차 TV-OTT 드라마 화제성 1위에 올랐다. 온라인에서 ‘선친자’(선재에 미친 자)란 강력한 팬덤을 형성한 것도 복고 감성을 살렸기 때문이다. 하이틴 로맨스를 좋아하는 10, 20대뿐 30, 40대까지 불러 모으고 있다.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쿠팡플레이 드라마 ‘소년시대’가 1980년대를 배경으로 중장년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면 ‘선재 업고 튀어’는 2000년대를 배경으로 30, 40대 시청자를 사로잡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는 “선재와 솔이 함께 우산을 쓰는 장면은 2002년 귀여니가 발표한 동명의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늑대의 유혹’(2004년)을 생각나게 한다”며 “1980, 90년대가 배경인 ‘응답하라 시리즈’가 다루지 못한 2000년대를 노려 각색한 전략이 적중했다”고 했다.● ‘늑대의 유혹’처럼 그 시절 감성 녹여“뜬금없이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6년 전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꿈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건 그냥, 너무나 평범한 일상이었다. 내가 앞으로 벌어질 6년간의 일들을 알고 있다는 것만 빼면.”원작에서 솔은 6년 전으로 회귀한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처럼 원작은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앞으로 닥칠 문제를 해결하는 ‘회귀물’이다. 요즘 국내 웹소설에서 보통명사로 취급받는 장르다. 더욱이 미래를 알고 있는 만큼 솔은 선재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곳곳에서 진심으로 드러낸다. 솔이 두려워하는 장면은 섬세한 문체로 표현한다.“어떤 기대로, 간절한 바람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꿈이라도 좋으니 선재를 만난다면 알려 주고 싶었다. 이 세상엔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단지 그 사람들은 나처럼 목소리가 크지 못했을 뿐이라는 걸. 넌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걸.”솔은 선재에게 닥칠 위험을 경고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불면증이 있어 수면제를 찾겠지만 버티기 힘들더라도 그날만은 제발 아무 약도 먹지 말아라”는 편지를 써서 전달하려 했지만, 문장이 삭제돼 있다. 미래를 경고하지 못한 설정인 셈이다.웹소설 특유의 감성이 담긴 점도 눈여겨볼 점이다. “선재가 강아지 상이라면 백인혁은 고양이 상이었는데, 이러나저러나 둘 다 숨이 막힐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있자니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억눌리는 느낌이 들었다”는 솔의 독백을 읽고 있으면 2002년 귀여니가 발표한 소설 ‘늑대의 유혹’이 생각난다. 고등학생들이 자주 쓸법한 일상적인 욕설을 거침없이 쓰는 점도 순문학 소설과 다른 점이다.● ‘팬덤 문화’를 보편적 사랑 이야기로 확장해드라마에서 선재가 소속된 그룹명은 ‘이클립스’지만, 원작에선 ‘감자전’이다. 원작에선 선재가 그룹에 중간에 합류해 그룹의 이미지를 망친다고 비난을 받지만, 드라마에선 원래부터 그룹 멤버였다. 원작에선 선재가 아이돌 데뷔를 하지 못해 고생하는 장면이 들어갔지만, 드라마에선 선재가 수영선수였다가 부상으로 그만두고 아이돌이 됐다는 설정으로 바뀌었다. 원작에서 현재 시점 솔의 직업은 방송사 조연출이지만, 드라마에선 취업준비생으로 바뀌어 취업이 힘든 한국 청년들의 퍽퍽한 현실을 강조했다. 드라마에서 솔이 장애인인 점도 원작과는 다른 점이다. 원작은 솔이 공부를 못하고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모습만 나오지만 드라마에선 솔의 좌절을 극대화하기 위해 새롭게 설정을 추가한 것이다. 드라마에서 솔이 과거 짝사랑했던 김태성(송건희)이라는 캐릭터가 새롭게 생기며 삼각관계가 형성된 점도 다른 점이다. 원작에서 솔이 선재를 사랑하는 심리가 두드러진다면, 드라마에선 선재와 솔이 서로를 아끼고 지키려는 상호 작용이 돋보인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아이돌 팬덤 문화만 담은 게 아니라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로 각색한 덕에 대중성을 확보했다”고 했다.드라마의 해외 반응도 뜨거운 편이다. 드라마는 세계 영화 비평 사이트 IMDb 평점 9.2를 기록했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는 “한국 대중문화에 익숙한 동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2000년대 감성을 건드린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점도 눈여겨볼 점”이라고 했다.드라마 ‘무빙’을 본 뒤 스마트폰을 켜고 원작 웹툰을 정주행한 적이 있나요?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듣고 ‘가상 캐스팅’을 해본 적이 있나요? ‘선넘는 콘텐츠’는 소설, 웹소설, 만화, 웹툰 등의 원작과 이를 영상화한 작품을 깊이 있게 리뷰합니다. 원작 텍스트가 이미지로 거듭나면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재밌는 감상 포인트는 무엇인지 등을 다각도로 분석합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많이도 먹네.” 2018년 서울에서 고향 대전으로 내려온 서른 살 ‘솔’은 엄마에게 이런 구박을 받으며 산다. 솔은 외주 프로덕션에서 6년 동안 PD로 일했다. 자신이 기획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잘리고서 엄마 집으로 향했다. 자기 일에서 성공하지 못한 스스로가 길가의 쓸모없는 돌멩이처럼 느껴졌다. 솔은 15년 전 자주 찾던 비디오 대여점 ‘돈키호테 비디오’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자신을 ‘산초’라고 부르며 아끼던 비디오 가게 주인 ‘돈 아저씨’가 행방불명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솔은 결심한다. 유튜브 채널을 열고 돈 아저씨를 찾는 여정을 촬영하기로. 과연 솔은 돈 아저씨를 찾을 수 있을까. 좌절로 가득한 삶을 찬란하게 바꿀 수 있을까. 지난달 25일 장편소설 ‘나의 돈키호테’(나무옆의자)를 펴낸 김호연 작가(50)는 6일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신간은 스페인 소설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1547∼1616)의 장편소설 ‘돈키호테’를 패러디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17세기 스페인 라만차에 사는 돈키호테가 산초를 데리고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를 좌절한 한국 청년 솔(산초)이 꿈으로 상징되는 돈 아저씨(돈키호테)를 찾는 소설로 변주했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모험과 우정을 그린 돈키호테를 나만의 방식대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2019년 스페인 마드리드에 3개월간 머물며 자료 조사까지 마쳤죠.” 그는 “돈키호테를 좋아하는 건 무명 생활을 지속하며 좌충우돌한 내 삶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2001년부터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일했지만 빛을 보진 못했다. 잠시 출판사에서 일하다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10만 원짜리 작업실을 구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2013년 ‘망원동 브라더스’(나무옆의자)로 세계문학상을 수상하고도 8년간 무명 생활을 버텼다. “다른 작가들은 선생님, 공무원, 카페 사장 등 본업이 따로 있더군요. 저는 전업 작가로 살다 보니 생계 유지가 어려웠고 지칠 때가 많았죠.” 기회가 온 건 2021년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나무옆의자)이 성공하면서다.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2022년 ‘불편한 편의점 2’(나무옆의자)를 펴냈다. 1, 2권 합쳐 150만 부가 팔리면서 ‘힐링 소설’ 열풍을 불러왔다. 그는 “힘들던 나를 위로하고 싶어 쓴 소설이 독자까지 다독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신간에서도 독자를 위로하는 그의 문장은 빛을 발한다. 그는 “돈키호테의 이룰 수 없는 꿈은 숭고하다”며 꿈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돈 아저씨를 찾는 이 여정은 채널 돈키호테 비디오의 성장 서사와 닿아 있으며 한편으로는 나 자신의 모험이기도 했다”는 솔의 독백은 용기를 전한다. 솔처럼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혹여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더라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꿈은 이뤄졌을 때 끝나는 게 아니라 꾸는 동안 의미가 있으니까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곧 죽을 거예요.” 한 여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의 얼굴은 희고 갸름했다. 뺨에 따뜻한 핏기가 돌아 발그레했다. 곧 죽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내가 죽으면 묻어달라. 그런 다음 100년 동안 무덤 옆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여자의 눈이 감겼다. 긴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조용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자는 죽어 있었다. ‘나’는 구덩이를 파고 여자를 묻었다. 부드러운 흙을 뿌려 여자 위를 덮었다. 동쪽에서 해가 떴다 서쪽으로 졌다. 그렇게 셀 수 없이 해는 뜨고 졌다. 어느새 묘비에서 푸른 식물 줄기가 비스듬히 뻗어 나왔다. 줄기는 점점 길어졌다. 끝에서 새하얀 백합이 피어났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벌써 100년이 다 됐구나.” 단편소설 ‘열흘 밤의 꿈’의 내용이다.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1867∼1916)의 작품 13편을 ‘기담(奇談)’이라는 주제로 모았다. 기담의 뜻인 ‘이상야릇하고 재밌는 이야기’에 걸맞은 기묘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특히 현실인지 꿈인지 불명확한 환상적 이야기나 귀신이나 요괴가 등장하는 작품이 많이 포함돼 으스스하다. 신간에서 나쓰메는 “여자인지 무언지 모를 것이 서 있는데/희고 얇은 옷감 사이로 비치는/눈썹이 덧없이 검고 곱도다”(시 ‘귀신이 곡하는 절에서의 하룻밤’ 중), “오랜 세월 흐트러진 검은 머리. 물귀신도 뒤엉켜 흐느적거린다”(시 ‘물 밑의 느낌’ 중)라며 일본 귀신을 섬뜩하게 묘사한다. 영국에서 2년간 유학한 만큼 영국 런던탑에서 귀신을 만나는 단편소설 ‘런던탑’, 영국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를 분석한 평론 ‘맥베스의 유령에 관하여’같이 영문학 색채가 묻은 작품도 담겼다. 나쓰메는 장편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년) 등 인간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탐미주의적 색채를 드러낸 작품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작품집을 엮은 일본 문학평론가 히가시 마사오는 나쓰메가 활동하던 20세기 초 일본 문단엔 기담 열풍이 불었다고 신간에 썼다. 나쓰메 역시 시대 흐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팬들에겐 나쓰메의 다양한 작품 세계를 즐기는 기회가 생겼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문학 담당 기자로 젊은 작가들을 만나다 보면 ‘꿈의 가격’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좋은 학벌, 명석한 두뇌를 지닌 작가들이 생계 유지엔 상대적으로 소홀하기 때문이다. 한 30대 소설가는 “아직 부엌이 없는 반지하 방에 살고 있다”고 했다. 다른 30대 소설가는 “내가 정한 최소 생활비인 월 200만 원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닥치는 대로 한다”고 했다. 작가들이 작품을 위해 들이는 노력을 생각하면 최저임금은 ‘사치’처럼도 느껴진다.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향년 77세로 별세한 미국 작가 폴 오스터의 자전적 장편소설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장편소설 ‘뉴욕 3부작’(열린책들), ‘달의 궁전’(열린책들)으로 인기를 얻으며 노벨 문학상 후보로 자주 언급됐다. 하지만 그의 청년 시절은 가난하고 비루하기 그지없었다. 책의 원제 ‘Hand to Mouth’(근근이 먹고 살기)처럼 말이다. 소설가로 제대로 인정받기 전 그의 삶은 궁핍했다. 작품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번역을 해야 했다. 탐정소설을 써서 떼돈을 벌어보려고도 했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그는 카드놀이를 만들어 팔아볼 시도까지 했다. 그는 “기적 같은 역전을 꿈꿨다. 복권에 당첨돼 수백만 달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따위의 일확천금을 꿈꾸며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고 털어놓는다. “신들의 호의를 얻지 못하면,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비바람을 막아줄 방 한 칸 없이 떠돌다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가 좌절한 건 노력에 비해 결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1982년 첫 장편소설 ‘스퀴즈 플레이’(열린책들)를 내놨지만 반응은 적었다. 걸핏하면 좌절감에 빠졌다. 인생의 낙오자라는 생각에서 늘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벌컥벌컥 술잔을 비우듯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었다. 매일 출근하는 직장에 다니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낭만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가령 나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선언하고, 훌륭한 인생에 대한 일반 통념에 휩쓸리지 않고 혼자 힘으로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은 욕구 같은 것.” 그는 책에서 어떤 교훈을 남기지 않는다. ‘라떼는 말이야’처럼 고생스러운 시간을 견뎌야 훌륭한 작가가 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두려움을 드러내는 대신 재치있는 농담과 빈정조의 어투 속에 그 두려움을 파묻어 버렸다”며 비겁함을 고백하기도 한다. 다만 책을 읽다 보면 ‘공짜 꿈’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화려하게 성공한 작가의 뒷모습엔 고난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난해 11월 국내에 장편소설 ‘4 3 2 1’(열린책들)이 출간될 당시 출판사를 통해 그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하지만 “몸이 많이 안 좋아 인터뷰가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6개월 뒤에 세상을 떠났지만, 만약 그와 인터뷰할 수 있다면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이 지불한 ‘꿈의 가격’은 얼마인가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지난해 국내 주요 문학 출판사의 영업이익은 크게 희비가 엇갈렸다. 문학동네와 창비가 영입이익이 크게 준 반면 민음사의 영업이익은 반대로 증가한 것. 출판계 불황 속에서 공격적 투자보다 보수적 대응이 엇갈린 성적표를 만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한출판문화협회의 보고서 ‘2023년 출판시장 통계’와 지난해 각사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문학동네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32억1600만 원에 그쳐 전년(57억6500만 원)보다 44.2% 감소했다. 창비도 지난해 영업이익이 17억1000만 원으로 전년(27억6200만 원)에 비해 38.1% 줄었다. 문학동네는 지난해 공격적인 시장 공략에 나섰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9월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출간하며 서울 성수동에 팝업스토어까지 여는 등 마케팅에 적극 나선 것. 이번 선인세 금액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하루키의 전작인 ‘기사단장 죽이기’(2017년)의 선인세가 20억∼30억 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번에도 비슷한 수준을 지급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업계에 따르면 기대했던 것만큼의 판매량은 거두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창비는 지난해 손꼽을 만한 새로운 베스트셀러를 내지 못했고 기존 스테디셀러 등에 의지하면서 영업이익이 쪼그라들었다. 반면 민음사의 영업이익은 지난해 15억6800만 원으로 전년(11억3500만 원)에 비해 38.1% 늘었다. 업계에 따르면 민음사는 불황이 심해진 출판계 사정에 맞게 선인세에 보수적으로 투자하며 내실 높이기에 집중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전반적으로 출판계 상황은 좋지 않았다. 글로벌 인플레이션에 맞춰 인쇄용지 가격이 급등하고, 인건비도 상승했기 때문이다. 제지업체 무림페이퍼의 1t당 인쇄용지 가격은 2021년 95만 원에서 2023년 125만6000원으로 증가했다. 종이책 판매 비중이 여전히 높은 대형 서점의 적자도 커졌다. 교보문고는 지난해 360억4700만 원의 영입이익 적자를 기록해 전년의 적자(138억8800만 원)보다 적자 폭이 커졌다. 발 빠르게 디지털 전환에 집중한 출판 업체들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뒀다. 국대 최대 독서플랫폼인 밀리의서재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104억600만 원으로 전년(41억6900만 원)보다 149.6% 증가했다. 관련 전자책 업체들도 영업이익을 늘렸다. 웹툰·웹소설 출판사 8곳은 지난해 25억3100만 원의 영업이익을 거둬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이들 기업은 2022년 29억7200만 원의 적자를 기록했지만 상황 반전에 성공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출판계에서는 전자책으로의 전환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특히 인공지능(AI) 등 시대 변화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필요성도 커졌다. 또한 선인세가 높은 기존 작가의 ‘명성’에 기대기보다는 신인들을 적극 발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진다. 다산북스가 지난해 국내엔 처음 소개한 아일랜드 소설가 클레어 키건의 장편소설 ‘맡겨진 소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처럼 선인세는 낮아도 가능성이 높은 작가를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출판 편집자가 시대를 포착하는 기획 출간을 하거나 국내에서 인지도가 낮은 작가를 키워 베스트셀러를 만들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한 때”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인공지능(AI)이 너무 빨리 (내 화풍을) 따라오는 게 약간 화가 나기도 한다.” ‘공포의 외인구단’(1983년), ‘아마게돈’(1988년) 등으로 한국 만화계를 이끈 이현세 화백(68)은 9일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린 ‘이현세의 길: K-웹툰 전설의 시작 특별전’ 개막행사를 앞두고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만화기획사 재담미디어를 통해 그가 45년 동안 창작한 만화책 4174권을 컴퓨터에 학습시켜 자신의 그림체를 구사할 수 있도록 한 프로젝트가 한편으론 두렵다는 것이다. 그는 “AI가 이현세 화풍을 학습해서 만화를 그려내는 프로젝트는 올해 말이면 결과가 나온다. 하지만 좀 더 걸렸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이 작가는 만화계에 AI가 도입되는 상황에 대해 “AI로 인해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은 수천 명의 보조작가를 갖게 되는 셈”이라며 “대신 AI의 역할과 사람의 역할은 선명하게 나뉜다. ‘어떤 이야기를 할까’, ‘어떤 질감과 입체감을 넣을까’ 하는 사고는 작가의 몫”이라고 했다. 이 작가는 또 “제일 걱정되는 것은 상업주의 작품이 많아지면서 독자들이 질리고, 콘텐츠가 죽어가는 것”이라며 “작가주의 작품에서 상업작가도 영감을 받을 수 있다. 앞으로 한국 웹툰의 미래는 큰 플랫폼이나 정부가 작가주의 성향 작가에게 투자를 얼마나 하느냐에 달렸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한국계 미국인 작가의 논픽션 책이 미국 최대 권위를 가진 퓰리처상을 받았다. 앞서 한국계 인사가 언론 부문에서 수상한 적은 있지만 도서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퓰리처상 선정위원회는 6일(현지 시간) ‘주인 노예 남편 아내(Master Slave Husband Wife)’를 쓴 한국계 미국인 우일연 작가를 전기(傳記) 부문 공동수상자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우 작가는 미국 국적의 한인 2세로, 그의 부친은 환기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등을 설계한 재미 건축가 우규승 씨다. 우 작가는 예일대에서 인문학 학사 학위를, 컬럼비아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이 책은 1848년 미국 남부 조지아주의 흑인 노예 부부인 윌리엄 크래프트와 엘런 크래프트가 노예 농장에서 탈출하기 위해 아내는 병든 부자 백인으로, 남편은 그의 노예로 위장해 미국 북부로 떠나는 실화를 담고 있다. 작품 속 부부는 약 1609km(약 1000마일)를 증기선, 마차, 기차를 갈아타면서 노예 상인과 군 장교, 노예 사낭꾼 등의 눈을 피해 자유를 찾아 이동한다. 끝내 탈출에 성공해 영국으로 건너가 노예제 폐지 등에 앞장선다. 작가는 본인의 홈페이지를 통해 “작품에는 그들(부부)의 사랑 이야기뿐 아니라 부모와 자식 등 다른 많은 종류의 사랑이 녹아 있다”고 설명했다. 1917년에 창설된 퓰리처상은 뉴스와 보도사진 등 언론 부문과 도서, 드라마·음악 등 예술 부문에서 수상자를 선정한다. 한국계 사진 기자가 언론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한 적은 있지만 도서, 드라마·음악 부문에서 한국계가 수상한 것은 처음이다. 퓰리처상 선정위원회는 우 작가의 작품에 대해 “자유를 향한 기념비적인 시도로 압축된 세 개의 장대한 여정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생명, 자유, 정의라는 미국 핵심 원칙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퓰리처상 선정위원회는 이날 미 연방대법관의 도덕성 문제를 파헤친 미 탐사보도 전문매체 프로퍼블리카의 조슈아 캐플런 등 기자 5명을 공공보도 부문 수상자로 발표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저출산 문제는 한 번에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여럿이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나누는 숙론(熟論)을 거쳐야 하죠.”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70)는 7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인문학서 ‘숙론’(김영사)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최 교수는 2021년 “애 낳으면 바보!”라고 발언한 유튜브 동영상이 조회수 360만 회를 기록하는 등 젊은층의 주목을 받았다. 최 교수는 신간에서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가임 여성이 평생 낳을 평균 출생아 수)이 0.72명까지 추락한 저출산 위기를 극복하려면 사회적 숙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저출산 문제는 대통령, 정부 부처, 현인 등 한 주체가 판단해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라며 “다양한 분야의 많은 연결고리가 얽힌 이 문제를 절묘하게 해결하기 위해선 반복적으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신간에서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는 과정이 숙론이라고 정의한다. 어떤 문제에 대해 함께 숙고하고 충분히 의논해 좋은 결론에 다가가자는 것이다. 그는 “숙론을 위해선 정부 토론회나 학계 심포지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발제-지정 토론-종합 토론’의 구조부터 탈피해야 한다”며 “널찍한 공간에 동심원으로 의자를 배치하고 서너 개의 원이 겹겹이 둘러싸는 구조를 만들어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가 토론의 중요성을 깨달은 건 유학 시절이라고 한다. 1983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생물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4년 서울대 생물학과 교수에 임용돼 토론 수업을 이끌며 숙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것.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별히 말하는 걸 좋아하지만 말할 기회가 없다”며 “숙론의 장을 만들고 충분히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 응어리가 풀리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학교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숙론을 벌이는 아버지일까.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다. “해외에서 오래 산 제 아들은 저와 대화하다 의견이 다르면 ‘아 유 스튜피드?(Are you stupid?)’라고 물어요. 하지만 진짜 저를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 이건 (대화 방식과 문화의) 차이일 뿐입니다. 가정에서부터 토론문화가 조금씩 바뀌면 사회도 변화하지 않을까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노란색 커다란 창 오른쪽 아래에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여성이 벽에 기대 있다. 여성의 얼굴엔 표정이 없다. 하지만 반쯤 얼굴을 기울인 여성이 그려진 그림을 바라보다 보면 왠지 모를 슬픔이 밀려온다. 그림 곁에 적힌 문구 ‘나는 울지 않기 위해 그린다’가 애절한 감정을 극대화한다.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김채원(78)이 언니인 소설가 김지원(1942∼2013)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그린 서화첩의 일부다. 유명 문인과 예술인들의 서화첩을 선보이는 ‘화첩으로 보는 나의 프로필’ 전시가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영인문학관(관장 강인숙)에서 열린다. 이해인 수녀, 소설가 조정래, 화가 김구림, 서예가 김병기, 시인 성춘복 등 60여 명의 작품이 전시된다. 회화, 서예를 비롯해 붓펜이나 만년필로 글과 함께 그림을 그려 넣은 서화첩 등 다양한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은 “서화첩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담는 캔버스”라며 “전통을 현대적으로 접목했다”고 설명했다.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김상옥의 생전 집필실을 재현한 ‘작가의 방’,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1934∼2022)이 생전 사용한 서재도 공개된다. 4000∼6000원.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반세기 동안 고도를 기다리던 사나이가 떠났다. 한국 연극계의 거목 임영웅 극단 산울림 대표가 4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고인의 아들 임수현 산울림 예술감독(서울여대 불문과 교수)은 5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평생 연극에 헌신하신 아버지가 1년 가까이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다”며 “1985년 개관한 산울림 소극장 40주년을 맞아 내년에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를 보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다.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란 갔던 휘문고 2학년 때 연극제를 열 정도로 당돌하고 끼 많은 소년이었다. 서라벌예대 연극영화학과 재학 시절인 1955년 연극 ‘사육신’으로 연출 데뷔했다. 졸업한 후 신문기자를 거쳐 동아방송과 KBS에서 PD로 일했다. 고인은 2016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동아방송에서 PD로 재직하며 연극 연출 작업을 동시에 했었다”며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회사와 선후배들이 후원자였던 것 같다”고 했다. 고인의 인생을 바꾼 건 부조리극의 대표적 작가 사뮈엘 베케트(1906∼1989)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다. 두 부랑자가 시종일관 얼토당토아니한 대화를 나누며 ‘고도’라는 정체불명의 인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작품이다. 고인은 1969년 초연한 이 작품의 성공을 계기로 1970년 극단 산울림을 창단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초연 배우인 김성옥 함현진 김무생 김인태와 윤여정 박정자 손숙 윤소정 사미자 김용림이 산울림 창단 멤버다. 이후 50여 년간 1500여 회 공연에 22만여 명이 고인의 공연을 봤다. 고인은 2012년 “나도, 극단 산울림도, 산울림 소극장도 ‘고도’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다. 고인은 1985년 아내인 오증자 서울여대 명예교수(89)와 사재를 털어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산울림 소극장을 열었다. 23㎡(약 7평) 크기의 무대에 객석 74석의 작은 공간이었다. 인건비도 안 나오는 소극장을 유지하기 위해 고인은 말년까지 극장 건물 3층에 살았다. 극장 건물 3층에서 자란 아들이 산울림 예술감독, 딸이 산울림 극장장으로 아버지의 꿈을 잇고 있다. 산울림은 ‘연극학교’로 불리며 수많은 연출가와 배우를 배출했다. 특히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연극을 평일 낮에 공연해 주부에게 인기를 끌었다. 박정자의 ‘위기의 여자’,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 손숙의 ‘담배 피우는 여자’가 대표작이다. 배우 손숙은 이날 “산울림은 남성 배우들이 차지하던 연극판에 주부를 불러들이고, 여성 배우 전성시대를 열었다”며 “고인은 열악한 시절 오직 뚝심만으로 연극계의 지평을 넓혔다”고 했다. 고인은 1985년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로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받았다. 또 그가 이끈 극단 산울림은 1986년 대상(‘위기의 여자’) 등 동아연극상을 총 23회 수상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었던 고인은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8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1995년) 동랑연극상(1995년) 보관문화훈장(2004년) 금관문화훈장(2016년)을 받았다. 한국 최초로 1989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국립극단 이사,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한국연극연출가협회 초대 회장 등 행정가로도 활동했다. 고인은 2019년 “연극은 인간을 그리는 예술”이라며 “반세기 외길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오증자 교수, 아들 수현 산울림 예술감독, 딸 수진 산울림 극장장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은 7일 오전 8시.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