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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에 나온 황지우의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는 ‘5월 그 하루 무덥던 날’이라는 시가 있다. ‘… /“광주일고는 져야 해! 그게 포에틱 자스티스야.”/“POETIC JUSTICE요?”/“그래.”/李선배는 나의 몰지각과 무식이 재밌다는 듯이 씩 웃는다./그의 물기 젖은, 싼뿌라찌 가짜 이빨에 햇빛이 반짝거렸다./나는 3루에서 홈으로 生還하지 못한, 배번 18번 선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5·18’에 대한 시적(詩的) 정의(正義)는 이뤄졌을까. 40주년의 5월, 5·18은 ‘헬기 사격은 있었느냐’ ‘암매장은 있었느냐’ ‘발포 명령은 있었느냐’는 사실의 차원에서 맴돌고 있다. 여전히 나(我)와 적(敵)을 나누는 현실 정치의 담론에 의탁하고 있다. ‘5·18’ 하면 ‘전두환’이 대구(對句)처럼 언급되는 상황은 여러 모로 비정상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5·18은 이제 사실의 영역을 넘어 인문학적 질문과 응답이 대상이 되었으며, 하나의 이념과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하고 개별적인 ‘진실’의 영역에 진입하고 있다’며 엮어낸 이 책은 비록 2010년 이후 발표된 글들을 다시 모은 것이지만 일독의 가치가 있다. 책은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이자 어떤 의미화-제도화에 대해서도 저항하는 무한텍스트로서의 5·18’을 조명하기 위해 정치학 철학 역사학 인류학 국문학 문학평론 등이 교차하며 더 큰 의미와 이해를 만들어내도록 했다. 특히 40년 전 5월 21일 계엄군이 퇴각하기까지 사흘간의 시공간을 ‘위대한 인간끼리 형성한 절대공동체’로 규정한 최정운 서울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의 글 ‘저항의 논리’는 울림이 크다. 필자는 “광주 시민들이 항쟁에 목숨을 걸고 참가한 것은 일차적으로 어떤 명분을 의식하고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의식의 수준에서 무엇보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였다.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으로서의 투쟁, 이념이 결여된 순수한 항쟁이었기에 5·18은 우리의 위대한 역사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명심해야 할 것은 그 뜨거운 투쟁이 그토록 소중한 기억이었던 이유는 그 핵심이 사랑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큰 교통사고를 당해 정상 생활이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을 이겨내고 재활에 성공해 27년째 한의사로 일하는 이태훈 씨가 비염과 중풍, 치매의 연관관계를 파악해 이를 막아내는 방법을 소개한 책 ‘통뇌법 혁명: 중풍·비염 꼭 걸려야 하나요?’(동아일보사·사진)를 펴냈다. 몸이 가장 좋게 기능하려면 몸의 구조가 가장 좋아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친 그는 코의 구조와 다른 장기의 연관성을 알아냈다. 코의 숨길과 목뼈 속의 물길(뇌척수관)을 열어줘서 중추신경계와 자율신경계를 정상화시키자 비염 축농증 같은 콧병, 중풍 치매 같은 머리 병은 물론이고 중이염 이명 같은 귓병, 안구건조증 등의 눈병, 편도선염 같은 목병이 한꺼번에 해결됐다는 것. 저자는 이를 ‘통뇌법(通腦法)’이라 부른다. 사례 중심으로 쉽게 써내려갔다. 1만5000원.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영국 맨체스터대 물리학 교수 안드레 가임은 2000년 터무니없어 보이는 연구에 주어지는 이그노벨상을 받았다. 수상 연구는 반자성(反磁性)을 띠는 용액에 든 개구리를 자석으로 공중 부양하는 실험이었다. 그는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듣던 다른 연구실의 박사과정 학생 콘스탄틴 노보셀로프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두께가 머리카락 두께의 10만분의 1이면서 강철보다 200배 튼튼한 물질 그래핀을 개발해 2010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서른세 살 무렵 미술학원에 등록해 10년 어린 학생들과 배우던 이 사람은 드로잉 대회에 나갔지만 “초급반에서 열 살 아이들과 함께 배우라”는 말을 들었다. 그 전까지 학생, 미술상(商), 교사, 서점 점원, 목사, 순회 전도사를 유망하게 시작했다 실패했다. 그림도 인물화를 그렸다가 풍경화로, 사실주의에 몰두하다 순수 표현주의로 빠졌다. 그러나 37세에 숨지기까지 4년간 길이 남을 걸작들을 남겼다. 빈센트 반 고흐다. 이 책에는 밖에서 보면 뒤처진 사람들이 대거 등장한다. 모두가 ‘일찍 선택해 반복적으로 훈련하고 그 일에만 집중하며 결코 흔들리지 말라’는 조기(早期) 전문화와 ‘1만 시간의 법칙’을 장려하는 현실에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조기교육과 1만 시간의 법칙’은 익숙한 패턴의 문제와 해법이 반복되고, 특정한 기교를 정확히 갈고닦는 것이 목표이며, 반복 경험만으로도 개선이 이뤄지는 ‘친절한 환경’에서만 유리하다고 지적한다. 반면 세상은 대부분 코트에서 라켓으로 공을 주고받는 선수들을 볼 수 있긴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규칙을 모르는 ‘화성테니스’같이 기존 경험의 테두리 너머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사악한 환경’이다. 그럼 이 지독한 환경의 지배자는 누구일까. 놀랍게도 조기교육과 전문화에 한참 늦은 것 같은 이 ‘뒤처진’ 사람들이라고 저자는 통계와 실례를 들어 설명한다. 이들의 핵심 특징은 폭(레인지·range, 이 책의 원제다)이 넓다는 것이다. 경험과 관심의 폭, 훈련의 폭, 적용하고 종합하는 폭이 넓다. 사전 지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분야 사이를 신나게 오갈 수 있는 마음과 사고의 폭이 넓다. 안토니오 비발디가 협주곡 수백 편을 써준 17∼18세기 천재 음악가 집단 ‘필리에 델 코로(합창의 딸들)’는 고아들이었고 병자가 많았다. 하지만 이들 개개인은 성악은 물론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며 새로운 음악을 빨리 흡수해 바로크 음악과 고전 음악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20세기 대표적인 재즈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나 ‘Take 5’ 같은 명곡을 지은 재즈 피아니스트 데이브 브루벡은 악보를 읽지도 못했다. 그러나 독학이라는 더 다양한 맥락에서 행한 훈련의 폭은 그들의 창의성에 날개를 달아줬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2000년간 지탱하던 천체의 운행 방식을 깨뜨리기 위해 빛 냄새 향 등 동떨어진 분야에서 유추(類推)했다. 찰스 다윈은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고 폭넓은 분야 학자들의 지식을 게걸스럽게 그러모았다. ‘어떤 도구도 만능이 아니다. 모든 문을 여는 마스터키 같은 것은 없다’는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말을 인용한 것을 보면 저자는 1만 시간의 법칙이 무용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학원은 전형적인 1만 시간 법칙의 신봉자다. 물리학자 다이슨의 말처럼 ‘눈앞에 집중하는 개구리’다. 그렇다면 학교는 ‘멀리 보는 새’가 되면 어떨까. 도전 과제들을 다양화하며 ‘한 발을 자기 세계 바깥에 딛고’ 서게 해줄 마음의 습관을 길러주는 곳 말이다. 세상은 깊은 동시에 넓으니까.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영국 맨체스터대 물리학 교수 안드레 가임은 2000년 터무니없어 보이는 연구에 주어지는 이그노벨상을 받았다. 수상 연구는 반자성(反磁性)을 띠는 용액에 든 개구리를 자석으로 공중 부양하는 실험이었다. 그는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듣던 다른 연구실의 박사과정 학생 콘스탄틴 노보셀로프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두께가 머리카락 두께의 10만 분의 1이면서 강철보다 200배 튼튼한 물질 그래핀을 개발해 2010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서른세 살 무렵 미술학원에 등록해 10년 어린 학생들과 배우던 그는 드로잉 대회에 나갔지만 “초급반에서 열 살 아이들과 함께 배우라”는 말을 들었다. 그전까지 학생, 미술상(商), 교사, 서점 점원, 목사, 순회 전도사를 유망하게 시작했다 실패했다. 그림도 인물화를 그렸다가 풍경화로, 사실주의에 몰두하다 순수 표현주의로 빠졌다. 그러나 37세에 숨지기까지 4년간 길이 남을 걸작들을 남겼다. 빈센트 반 고흐다. 이 책에는 밖에서 보면 뒤처진 사람들이 대거 등장한다. 모두가 ‘일찍 선택해 반복적으로 훈련하고 그 일에만 집중하며 결코 흔들리지 말라’는 조기(早期) 전문화와 ‘1만 시간의 법칙’을 장려하는 현실에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조기교육과 1만 시간의 법칙’은 익숙한 패턴의 문제와 해법이 반복되고, 특정한 기교를 정확히 갈고닦는 것이 목표이며, 반복 경험만으로도 개선이 이뤄지는 ‘친절한 환경’에서만 유리하다고 지적한다. 반면 세상은 대부분 코트에서 라켓으로 공을 주고받는 선수들을 볼 수 있긴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규칙을 모르는 ‘화성테니스’ 같이 기존 경험의 테두리 너머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사악한 환경’이다. 그럼 이 지독한 환경의 지배자는 누구일까. 놀랍게도 조기교육과 전문화에 한참 늦은 것 같은 이 ‘뒤처진’ 사람들이라고 저자는 통계와 실례를 들어 설명한다. 이들의 핵심 특징은 폭(레인지·range, 이 책의 원제다)이 넓다는 것이다. 경험과 관심의 폭, 훈련의 폭, 적용하고 종합하는 폭이 넓다. 사전 지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분야 사이를 신나게 오갈 수 있는 마음과 사고의 폭이 넓다. 안토니오 비발디가 이들을 위해 협주곡 수백 편을 쓴 17~18세기 천재 음악가 집단 ‘피글리에 델 코로(합창의 딸들)’는 고아였고 병자가 많았다. 하지만 이들 개개인은 성악은 물론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며 새로운 음악을 빨리 흡수해 바로크 음악과 고전 음악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20세기 대표적인 재즈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나 ‘Take 5’ 같은 명곡을 지은 재즈 피아니스트 데이브 브루벡은 악보를 읽지도 못했다. 그러나 독학이라는 더 다양한 맥락에서 행한 훈련의 폭은 그들의 창의성에 날개를 달아줬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2000년간 지탱하던 천체의 운행방식을 깨트리기 위해 빛 냄새 향 등 동떨어진 분야에서 유추(類推)했다. 찰스 다윈은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고 폭넓은 분야 학자들의 지식을 게걸스럽게 그러모았다. ‘어떤 도구도 만능이 아니다. 모든 문을 여는 마스터키 같은 것은 없다’는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말을 인용한 것을 보면 저자는 1만 시간의 법칙이 무용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학원은 전형적인 1만 시간 법칙의 신봉자다. 물리학자 다이슨의 말처럼 ‘눈앞에 집중하는 개구리’다. 그렇다면 학교는 ‘멀리 보는 새’가 되면 어떨까. 도전 과제들을 다양화하며 ‘한 발을 자기 세계 바깥에 딛고’ 서게 해줄 마음의 습관을 길러주는 곳 말이다. 세상은 깊은 동시에 넓으니까.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그야말로 ‘나눠야 산다’. 양적으로, 질적으로 무거운 책을 나누는 책들이 나오고 있다. ‘99그램 에디션’(이하 99그램)과 발췌본이다. 독자가 책을 더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과 책을 읽지 않아도 책을 읽은 것처럼 만드는 세태를 강화한다는 약점을 다 갖고 있다. 99그램은 두꺼운 책을 분철해 각 권의 무게가 100g을 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출판사나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이 아니라 오픈마켓인 G마켓에서 기획했다. 인터넷 쇼핑몰 소비자라는 틈새시장을 노리고 책을 상품의 바다에 빠뜨린 셈이다. 기획 의도는 ‘여성 핸드백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지하철에서 읽도록 하자’였다고 한다. 인문학 책의 분량에 주눅 든 독자를 겨냥했는데 에세이나 여행, 자녀교육 같은 분야로도 번졌다. G마켓과 옥션뿐 아니라 예스24 같은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되는데 2018년부터 16개 출판사에서 20종이 나왔다. 보통 서너 권으로 나누지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같이 6권짜리를 10권으로 나눈 것도 있다. 가장 최근 것은 올 3월 나온 3권짜리 ‘팩트풀니스’(김영사·사진)다. 김윤경 김영사 편집주간은 “처음 99그램을 제안받았을 때 거부감은 없었다”며 “물성(物性)에 집중해 표지 디자인을 바꾼 리커버가 소장 가치에 중점을 뒀다면 99그램은 어디서건 편하게 꺼내 읽을 수 있는 독자의 편의성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신간보다는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를 대상으로 한정판(1000∼3000부)을 찍고 제작비가 단권 기준 1.5∼2배 더 들어 중소출판사에는 그림의 떡이라는 지적도 있다. 발췌본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등 동서양 고전의 중요 대목을 그대로 따온 책으로 원전을 요약해 다시 쓴 축약본과는 다르다. 최근 출간된 ‘토인비의 전쟁과 운명’(까치)처럼 서구에서는 발췌본이 드물지 않지만 국내에서는 출판사 ‘지식을 만드는 지식’(지만지)이 주도하고 있다. 지만지는 2018년부터 원전 분량의 10% 이내를 전문성 있는 필자가 발췌해 ‘원서 발췌’라는 시리즈로 내놓고 있다. 그만큼 읽으려고 들면 숨부터 막히는 어려운 책들이 대상이다. 현재 20종을 내놨다. 최정엽 지만지 주간은 “고전 읽기는 ‘원전의 문장을 그대로 읽는다’는 의미도 있다”며 “발췌는 원전의 훼손이라는 생각도 있지만, 읽을 시간이 모자라는 독자들이 발췌본을 읽은 뒤 ‘완역본을 읽고 싶다’는 마음을 갖는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출판사 관계자는 “발췌본만 읽고서 그 책을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아이 같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아이처럼 순수하다. 아이같이 철이 없다. 어른은 때때로 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그런데 ‘사랑에 빠졌을 때 혀 짧은 소리로 간질간질 이야기’하는 것은 순수한 것일까, 철이 없는 것일까. 스마트폰 ‘신상’이 갖고 싶을 때 ‘한정판이라고 부르면서 꼭 필요한 거라고 우기’는 것은 어느 쪽일까. 작가는 구분할 필요 없다고 얘기하는 듯하다. 어느 쪽이든 다 소중하니까. 중요한 것은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기억들을 아이 때 많이 만드는 일이다. 어른이 돼서 불쑥 튀어나올 그 아이를 결정할 테니까. 하지만 그게 어떤 아이라도 잘 들어줘야 한다. 어른이 이 책을 봐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아이한테 읽어주다 눈물이 찔끔 나올지도 모르겠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서울을 고향이라 부를 수 있을까. 1960, 70년대 이촌향도(離村向都)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상경한 부모를 둔 서울 아이들에게 고향이란 대개 아빠, 혹은 엄마의 고향이었다. 1980년대 이후 서울 출생자들에게는 좀 다른 것 같다. 1982년생 싱어송라이터 검정치마는 ‘내 고향 서울엔’이라는 노래를 불렀고 동갑인 지리학자 황진태 박사(사진)는 같은 이름의 책(돌베개)을 냈다.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점점 남하(南下)하는 저자의 동선에 따라 종로, 신촌과 홍대, 영등포와 구로 그리고 강남에 얽힌 ‘자잘한’ 기억을 영화 노래 같은 대중문화에 버무린 글들을 모았다. 7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황 박사는 “아파트 숲이 고향일 수 있겠느냐는 곳이 서울인데 (30년간 살아온 오래된 아파트를 책과 영화로 기록한) 둔촌동 주공아파트처럼 기억들이 쌓여서 (고향이라는) 지층이 되고 있다”고 했다. 기억을 이야기하는 게 ‘라떼(나 때는 말이야)’나 싸구려 낭만으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저자는 낭만을 전략적으로 밀어붙였다. “틈새공간으로서 자잘한 기억을 말하고 나열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 아래 세대나 위 세대도 자신의 장소에 얽힌 기억들을 얘기하는 여지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었다.” 장소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의 공유가 세대 간 소통과 연대의 마중물일 수 있다는 얘기다. “밤에 을지로 ‘만선호프’가 있는 골목을 가득 메운 젊은이들을 보며 영화 ‘월드 워 Z’의 몰려드는 좀비들이 떠올랐다. 그 공간의 활력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들이 근대화 과정의 제조업 생산도시였던 그곳의 ‘역사’를 기억할까요.” 지금이 ‘미친 세상’일 수 있는 젊은이들이 그냥 피해자로, 종속된 것으로, 막막하게 고립되지 말고 다른 이와의 연대를 고민할 수 있는 완충지대로서 이 책이 읽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을지로 가봤어?” 하면 세대에 따라 그곳에 대한 서로만의 기억을 갖고 있다. 다르다고 하더라도 작은 기억의 공론장이 만들어진다면 변화를 모색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글들이 마냥 사적인 옛날이야기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서울의 지역과 지역 사이에 만들어진 정치경제적, 계층적 갈등과 애증이 문장 사이사이 배어 있다. 그래도 그의 바람은 재미있게 읽히는 것이다. “낭만이니까요, 그냥 재미있게 하하하. 서울을 얘기하는 장을 하나 만들었으니 앞으로 다양한 의제들을 이야기하지 않을까요. 다양한 버전의 ‘내 고향 서울’이 나올 것 같은데요. 정치적인 에세이일 수도 있고요.”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패션 디자이너 장문정 씨가 2020년 이탈리아 ‘A’ 디자인 어워드 (A‘ Design Award & Competition 2020)’의 패션·의류·의복 디자인 부분 금상(golden)을 받았다. A‘ 디자인 어워드는 이탈리아 코모의 디자인 및 디자인 컨설팅 업체 OMC 디자인 스튜디오(OMC Design Studios SRL)가 온라인으로 주최하는 디자인 시상식이다. 건축 가구 패션 등 100개 분야에서 시상한다. 뉴욕에서 ’MOON CHANG‘이라는 브랜드를 런칭한 장 씨의 수상작은 ’혼성의 미(Hybrid Beauty) 여성 의류 콜렉션(사진)‘이다. 생사를 넘나든 사고(事故)의 경험과 외상후증후군(PTSD)을 승화시켜 ’미학과 감각 사이의 긴장감과 이중성‘을 보여주는 컨셉트다. 장 씨는 세계적 디자인학교인 뉴욕 프랫(Pratt)인스티튜트와 FIT에서 각각 학·석사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 다음달 일본 도쿄, 싱가포르 도버스트리트, 중국 상하이 레인크로포드백화점 등에서 두 번째 브랜드 ’VENUS IN BLACK (비너스 인 블랙)‘을 띄울 예정이다.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5권짜리 ‘국수(國手)’에 이어 10권짜리 ‘금강’(김홍정 지음)이다. 국내 작가의 장편소설 내기도 쉽지 않은 문학출판계에서 총 3292쪽의 대하소설이라니…. “호흡이 짧고 유행을 따라가는 소설은 지양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올 1월 역사소설 ‘금강’을 펴낸 도서출판 솔의 임우기 대표(64·주편집자·사진)는 문학편집 35년 경력의 문학평론가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도 그의 손을 거쳤고 구수한 사투리가 넘쳐 나는 이문구 전집도 펴냈다. 임 대표는 “중앙에 종속된 지역이 아니라 서로 독립적이고 평등한 유역(流域·강물이 흐르는 언저리)이 네트워크를 이루며 문학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유역문학론’의 주창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충청도 금강(錦江) 유역을 중심으로 중종반정부터 임진왜란, 후금(後金) 건국에 따른 파장, 허균의 죽음까지 조선의 16∼17세기를 민중사적 시각으로 조망한 이 책이 와 닿지 않을 리 없다. 대부분 역사소설이 남성 중심인 것과 달리 작가의 고향인 충남 공주를 기반으로 한 상단(商團) 행수 등 여성 5명이 100년 넘는 유장한 이야기를 끌고 간다. “김홍정 작가와 15년간 작업한 셈입니다. 김 작가는 세계관이 건강하고 부지런하며 성실합니다. 특히 반항과 도전, 저항을 담은 문장의 고유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원래 금강은 3권짜리 장편소설로 처음 나왔다. 김 작가의 ‘천재성’과 내용의 확장 가능성을 본 임 대표가 더 늘리자고 제안해 2017년 6권으로 출간됐다. 그리고 다시 2년여의 ‘엄청난 고생’ 끝에 10권으로 완성했다. 지역의 방언을 살리고 향토사를 계승해야 한다는 유역문학론에 ‘금강’은 딱 들어맞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는 금강 유역의 역사와 전통이 풍부하게 배어 있다. 예를 들면 객주의 국밥을 비롯해 젓갈, 생선탕, 잔치 음식 등 당대 금강 주변에서 먹었던 음식 이야기가 집요하리만치 생생하고 감칠맛 나게 재현된다. 술 먹는 장면은 임 대표가 줄이기까지 했을 정도다. 또한 이 유역 민초는 당연히 충청도 사투리를 쓴다. “현재 한국 소설이 감각적이고 사소설적인 문장을 쓰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모든 소설이 그렇게 몰아갈 이유는 없지 않나요. ‘영어 번역을 전제로 해서 글을 쓴다’는 소설가가 있던데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국 문학이 지향해야 할 바로서의 세계문학은 허구라고 생각하는 그는 금강 같은 소설을 통해 한국어의 고유한 언어 체계와 정서, 사상을 지켜내야 한다고 믿고 있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브렉시트의 혼란을 거치며 유럽 정치의 주도국 자리마저 흔들려 보이는 작금의 영국이다. 유럽 대륙에서 동떨어진 잉글랜드라는 섬나라에서 서양은 물론 세계를 이끈 제국이 되는 역사의 시초가 바로 정복왕 윌리엄이다. 프랑스 유명 중세학자 및 언어학자이던 저자(1915∼1995)는 프랑스 공국이던 노르망디의 공작 윌리엄이 도버해협 건너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후 영국이 바이킹 세계와 절연하고 대륙의 본류에 합류하게 되는 과정을 공시적, 통시적으로 흥미롭게 정리했다. 정복왕 윌리엄을 드라마 ‘왕좌의 게임’ 속 인물들과 비교하며 책을 읽는 것도 재미있다. 웨스테로스 7왕국을 정복하고 타르가르옌 왕조를 세운 아에곤이 윌리엄을 모델로 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또 다른 아에곤인 ‘존 스노우’는 서자(庶子)로 불렸다는 점에서 정복왕이 되기 전의 윌리엄과 흡사하다. 윌리엄 역시 서자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스파이소설을 문학의 경지에 올려놓은 존 르카레는 ‘개인이 사상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관념’을 작품에서 보여주려 한다. 냉전 시기 암투와 음모가 횡행하는 스파이 세계를 다루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얘기다. 그의 2017년 작 ‘스파이의 유산’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저자의 걸작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1963년)의 후속편이자 뒷이야기다. 당시 동독 비밀경찰(슈타지)에 영국 정보부가 심어둔 고위 정보원 보호를 위한 ‘윈드폴 작전’에 이용됐다가 숨진 요원과 여성의 자녀들이 복수를 꾀한다. 소설은 작가의 페르소나 같은 조지 스마일리 대신 그의 부하였던 피터 길럼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피터는 진실을 얘기하면 서커스(정보부의 옛 별칭)를 배신하게 되고 거짓으로 버티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게 된다. 윈드폴 작전의 대의명분은 냉전 이후 ‘세상이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일 뿐. 고뇌하는 피터는 ‘자유의 이름으로 우리가 인간적인 감정을 얼마나 깎아 내면 스스로 인간이라거나 자유롭다는 생각을 더 이상 안 하게 되는 겁니까’ 하고 마음속으로 절규한다. 취조와 비밀보고서 내용, 잦은 회상으로 구성돼 자칫 지루할 것 같지만 거장의 솜씨는 86세에도 빛을 발한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계획한 모든 인터뷰를 했다. 읽으려던 모든 책과 과학논문과 박사논문을 읽었다. 사일로 한 채를 거뜬히 채울 만한 자료를 모았는데 이제 이걸 가지고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국 논픽션의 거장 존 맥피의 책 ‘네 번째 원고’에 나오는 저자의 하소연이다. 60년 넘게 잡지 ‘타임’과 ‘뉴요커’에 글을 써왔고, 지질학 동식물 인물 환경 역사 등을 주제로 30여 권 책을 써서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도 글을 쓸 때는 ‘타불라 라사(백지 상태)’가 된다. 89세가 된 올 1월 뉴요커에 쓴 기사 제목도 ‘타불라 라사’다. 뉴요커에 실린, 글쓰기 과정을 담은 에세이 8편을 모은 이 책은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 ‘이 같은 대가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는 위안을 건넨다. 그렇다고 “글쓰기의 지름길”을 알려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글감을 찾은 뒤 글의 구조를 짜고, 도입부에 머리를 싸매고, 결론을 써서 초고와 퇴고를 마치는 지난한 과정을 찬찬히 짚어준다. 글감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아이디어는 내가 찾는 그곳에 있다”고 격려한다. 글의 구조를 짤 때는 “구조에 글감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다 보면 독자들이 구조를 뻔히 눈치 채게 된다”고 힌트를 준다. 초고에 애먹는 친딸에게 “첫 번째 원고에는 뭐든 괜찮으니 그냥 내뱉고 토해내고 지껄이렴” 응원하지만 정작 자신은 도입부를 쓰지 못해 끙끙댄다. 디테일에 충실하면서도 정갈한 문장에 인정미와 유머를 가미한 그의 글은 모든 형태의 작가를 따뜻하게 감싼다. “… 내가 쓰는 단어 하나하나가 모조리 자신이 없고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 갇혔다는 느낌이 든다면 … 내 글이 실패작이 될 게 빤히 보이고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다면, 당신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제목 네 번째 원고는 저자 자신도 글을 완성시키는 데 적어도 4번은 쓰고 고쳐야 한다는 뜻이다. “단 한 줄도 북북 그어서 지우지 않는 완벽한 작가의 눈부신 초상이란 환상의 나라에서 온 속달우편일 뿐이다.” 네 번째 원고가 글을 쓰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면 ‘어느 노언론인의 작문노트’는 문장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 아사히신문 1면 덴세이진고(天聲人語) 칼럼을 1975년부터 13년간 집필한 저자(2017년 작고)는 살아있다면 90세다. 저자는 좋은 문장에는 ‘이것만은 어떻게든 전달하고 싶다’는 글쓴이의 마음이 담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글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는 일은 작가에게는 목숨을 걸고 서로 칼로 찌르는 일과 다름이 없다”(가와바타 야스나리)는 혼신의 마음이다. 문장은 어깨에 힘을 빼고 쓰라고 권한다. 동시대를 살며 글을 써온 저자들이어서인지 두 책에는 호응하는 충고가 적지 않다. “글쓰기는 선별(選別)”(…원고)이고 “‘빼다’는 동사와 함께하는 노동”(…작문노트)이다. “‘틀에 박힌 표현’과의 격투를 벌인다는 뜻”(…작문노트)은 “빌려온 생동감 위에는 절대 순조롭게 착륙할 수 없다”(…원고)는 것이다. 두 저자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가장 적절한 한 단어(le mot juste)’를 찾는 일이 글쓰기라고 ‘합의’한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책의 향기는 개성 강한 저자를 인터뷰한 ‘이 사람이 쓰는 법’, 놓치고 지나친 책의 리뷰 ‘이 사람이 읽는 법’, 편집자가 자신이 만든 책을 소개하는 ‘이 사람이 만드는 법’을 번갈아 게재합니다. 새로운 각도에서 자기만의 시선으로 신선하게 조명한 책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훅 하고 짧은 숨을 들이마시게 되는 첫인상은 진짜 웃음 많이 짓는 사람 특유의 눈가 주름에 슬슬 바뀐다. ‘응급의학과 곽경훈입니다’(원더박스)의 저자 곽경훈 씨(42·사진)를 15일 만났다. 울산병원 응급의학과 의사인 곽 씨가 대구의 한 대학병원 응급의학과에서 보낸 레지던트 4년간의 얘기를 담았다. 응급 처치 후 추가 치료가 필요한 환자는 각 과 레지던트들이 “우리 과 담당 아니다”라며 받기를 꺼리고, 전문분야 경력이 일천한 교수들은 호언장담하다 환자를 위기에 빠뜨린다. ―당시 교수들이 좋아하지 않겠다. “심히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는 얘기가 들린다. 내가 97학번인데 선배들은 ‘이런 얘기까지 적으면 문제 아이가’라는 반응이고, 레지던트들은 낄낄대며 ‘맞잖아’ 한단다.” ‘동물의 왕국’ 짐승 무리 관찰하듯 인간의 말과 행동의 이유를 분석하는 ‘시니컬한’ 학문, 인류학에 매료됐었다는 그의 말대로 대학병원 응급실을 둘러싼 군상들의 이야기가 민족지(民族誌)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응급 치료 후 각 과에서 입원 환자 받기를 미룬다. “사람이 신체 손상을 10점 입으면 죽는다고 볼 때 5점짜리 손상 2개나 10점짜리 1개면 산다. 임상과가 명확하니까 치료를 잘 받는다. 하지만 1점짜리 손상 10개면 목숨이 흔들린다. 걸쳐 있는 임상과 모두 ‘우리 환자 아니다’라고 한다.” ―‘낭만닥터 김사부’ 같은 실력인가. “전혀. 평균이나 평균 약간 아래 수준이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복싱도 하고 사진 찍기도 좋아하고 수업 빠지고 영화 보고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사고는 유연하다. 간호사가 ‘이런 상태 아닐까요’라고 살짝 하는 말도 진단에 참고한다. 그럼 도움이 된다.” ―교수들을 들이받기도 한다. “큰 조직에 있으면 부조리한 일이 생기는데 적당히 반항해도 괜찮다. 레지던트 때 좀 불합리한 거 있으면 교수님한테 대들어도 죽지 않는다. ‘하얀 거탑’ 속 꼬붕 짓 하는 의사들처럼 비굴하게 살 거면 나와서 돈 많이 벌고 살면 된다. DNA 규명한 왓슨처럼 똑똑한 것도 아니고, 또 그만큼 똑똑하면 윗사람 엿 먹여도 교수 된다. 쫄지 말고 살자는 얘기다.” ―응급실의 영웅처럼 비치는 대목이 있다. “가슴 따뜻한 휴머니스트도, 정의로운 슈퍼맨도 아니다. 돈을 많이 받으니 그 값을 하는 사람이다. 이 일을 존경하는 만큼 명예를 지키려고 한다. 환자가 ‘갑질’ 하면 까칠하게 꺼지라고 한다. 나쁜 평판이 가끔씩 있어야 명예를 지킬 수 있다.” ―글이 드라마 보듯 술술 읽힌다. “작가를 꿈꿨기에 글쓰기는 진정한 자아실현이다. 그렇다고 나이 들어 의사 잡지에 수필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세미프로는 돼야 한다. 글 쓰는 의사들이 많은데 다들 착하고 감성적으로 쓴다. 후발주자로서 그런 캐릭터로는 성공 못 한다. 남궁인 씨는 잘생기고 좋은 학교 나왔지만 나는 못생기고 지잡대 출신이다. 그렇게 멋지고 온화한 역할 하면 망한다. 하하.”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선출은 많은 학자에게 숙제를 안겨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공화당과 민주당, 보수와 진보, 백인과 유색인, 부유와 빈곤 같은 분석틀로는 답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담론을 다듬었고, 저자는 집단 정체성이라는 더 작은 단위의 현실에 천착했다. 그 결과물이 정치적 부족주의다. 과거에는 다양한 집단의 의사결정도 거시적 분석틀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들의 차이를 진보는 포용이라는 실천으로, 보수는 보편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이 심한 ‘오늘날 분노의 시대’에는 선택과 행동의 스펙트럼이 일치하는 이들끼리 똘똘 뭉치며 ‘우리 대 저들’의 관점으로 다른 사람을 틀렸다고 규정한다. 부족에서 동일시(同一視)는 알파요 오메가며, 배제는 본능이다. 지난 미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지지하던 도시·연안지역 백인 엘리트는 농촌·중서부·노동자 계급 백인의 ‘반(反)기득권 정체성’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면서 이들의 트럼프 지지에는 분노했다.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하지 않다는 확신이 진보주의자의 분노와 충돌하면, 엘리트 진보주의자와 그들이 도우려 하는 대상인 노동자 계급 사이에 분열이 생긴다.” 4·15총선의 의미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다만 이를 보수니 진보니, 산업화세력이니 민주화세력이니 하는 ‘한물간’ 개념으로 해석하려 든다면 곧 울분에 찬 부족 간의 거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빠질 것이라고 이 책은 경고한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흔히 실패한 유화정책, 비굴과 배신 외교의 상징으로 통하는 뮌헨회담 못지않게 숱한 논란을 낳은 정상회담이 1945년 2월 크림반도에서 열린 얄타회담이다. 미국과 영국이 동유럽을 소련에 팔아먹고 극동의 운명마저 소련 손아귀에 던져줬으며, 결국 냉전 시기 많은 문제의 기원이 된 실패한 회담이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얄타에서 이미 한반도 분할이 결정됐고 38선이란 분단선까지 그어졌다는 주장도 나왔다. 저자는 말 많고 탈 많은 얄타회담을 각종 공식, 비공식 자료와 기밀문서, 참석자들의 일기, 회고록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복원했다. 옛 소련에서 나고 자라 캐나다를 거쳐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로 있는 그야말로 적임자일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윈스턴 처칠, 이오시프 스탈린 등 ‘3거두’의 밀고 당기는 대화를 녹취라도 풀어내듯 긴장감 있게 재구성했다. 학자로서 냉정한 역사적 평가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얄타회담을 둘러싼 수많은 논쟁은 냉전시대의 ‘신화’에서 얻은 부정확한 정보 탓이었다고 지적한다. 얄타회담은 실패한 정치적 거래가 아니었으며 당시로선 불가피한 선택과 결정이었다는 것. 스탈린은 세 정상 가운데 가장 유리한 입장에 있었지만 상대를 잘못 판단하고 착오를 저질렀으며, 루스벨트와 처칠의 선택도 그것을 대체할 만한 실제적인 대안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약소국은 강대국 간 거래로 하루아침에 운명이 바뀌는 신세일 수밖에 없다. 한국 얘기는 루스벨트와 스탈린 둘만의 30분 회동에서 잠깐 거론됐는데 다음이 전부였다. 1943년 11월 테헤란회담에서 한국에 대해 40년 신탁통치를 제안했던 루스벨트는 이번엔 20∼30년을 얘기했다. “기간은 짧을수록 더 좋겠죠”라고 말한 스탈린은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킬 필요가 있는지 물었다. 루스벨트는 그럴 필요 없다고 답했다. 그는 신탁통치 관리국가로 미국 소련 중국을 제안하며 “영국을 포함시킬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영국은 반발할 겁니다”라고 했다. 스탈린은 “영국은 모욕감을 느끼겠죠. 아마도 처칠 총리는 우리를 죽이려 할 거요”라고 농담했다. 루스벨트는 타협안으로 처음엔 세 국가가 맡되 영국이 반발하면 포함시켜 주자고 했다. 스탈린도 동의했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모든 이야기를 삼켜 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북핵(北核)은 지구적 이슈였다. 또한 코로나19 이후 세계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차원에서 화정평화재단이 2017년 7월부터 올 1월까지 북핵을 주제로 국내외 정상급 외교안보 전문가 30명을 초빙해 매달 개최한 강좌의 기록인 이 책은 정독의 가치가 있다. 북한이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로 위기를 고조시키고 이듬해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를 명분으로 남북 화해 모드 조성에 적극 나선 뒤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지만 이후 ‘하노이 노딜’로 핵 폐기 의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는 상황과 그 이후를 조목조목 분석하고 전망했다. 회고적이 아니라 동시대성을 갖췄기에 내용이 살아 숨쉰다. 반기문 한승주 윤영관 문정인 이종석을 아우르는 연사 구성은 압권이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2018년 3월, 영국 정치 컨설팅 및 데이터 분석 업체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CA)가 불법 유출된 페이스북 사용자 5000만 명의 개인정보를 2016년 미국 대선에 활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CA는 당시 미 공화당 테드 크루즈 후보의 당내 경선과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대선 선거운동에 이 자료를 활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저자인 브리태니 카이저는 그때 CA에서 사업개발 이사로 일했으며 2018년 크리스토퍼 와일리에 이어 두 번째 내부고발자로 언론에 사실을 폭로했다. 이 책은 저자가 CA에서 3년간 일하며 경험한 ‘어두운 선거공학’의 단면이자, 21세기의 석유로 불리는 빅데이터가 통제되지 않고 쓰일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엿볼 수 있는 창(窓)이기도 하다. CA는 페이스북 사용자의 신상뿐만 아니라 이들이 어떤 내용에 ‘좋아요’를 눌렀는지 클릭 성향까지 담긴 개인정보를 기반으로 유권자 그룹의 성격을 분석했다. 그리고 이들이 공감할 확률이 높은 정치 광고 등 다양한 메시지를 페이스북 스냅챗 판도라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뿌렸다. 약간 과장한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을 각각 타깃으로 하는 개인 맞춤형 메시지를 제작해 그 사람의 SNS에 집어넣은 셈이다. 이것이 완전히 새롭지만은 않다. 버락 오바마 대선 캠프에서도 2012년 재선 과정에서 페이스북 개인정보를 활용해 흡사한 전략을 구사했다. 차이가 있다면 개인정보를 수집한다는 동의를 사전에 얻었다는 것뿐이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1997년 PC통신 천리안에는 ‘애완동물’ 카테고리가 있었다. 그 밑에 여러 소모임이 있었는데 ‘파충류방’도 그중 하나였다. 1975년생 동갑내기인 한국양서파충류협회 이태원 회장과 문대승 박성준 이사는 여기서 알게 돼 절친한 친구가 됐다. 서로 다른 대학에서 한문학, 디자인, 법학을 전공하던 이들은 종종 주말이면 서울 동묘 인근 수족관 거리에서 만났다. 양서파충류라고 해봤자 물거북이와 이구아나가 전부였던 때, 이곳에서는 낯설고 신기한 거북이와 도마뱀을 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전국 어디서 누가 무엇을 키운다고 다 알려질 정도였어요. 애완용 뱀인 ‘볼 파이선’ 신종을 입수했다는 얘기를 듣고 기차를 타고 찾아간 적도 있습니다.”(이 회장) 2000년대 들어 인터넷으로 해외 파충류 애호가 사이트에서 찾은 진기하고 희귀한 거북이 등의 사진을 들고 수족관 거리에 가면 몇 주 지나지 않아 실물이 등장했다. 파충류 시장이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2004년 디자인 회사에서 캐릭터 디자인을 하다 애완동물 용품 업체에서 일하던 문 이사는 아예 파충류 가게를 차렸다. 당시 전국에 사업자등록을 하고 파충류를 수입해 파는 가게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두 친구가 부추겨서 서울 관악구 신대방역 근처에 차렸는데 금세 사랑방이 돼버렸어요. 동호인들이 찾아와서 거북이 도마뱀 뱀 이야기하고 같이 저녁 먹고 그랬지요.”(문 이사)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에서 사법시험 준비를 하던 박 이사도 시간만 나면 찾아왔다. 차문석 이사와 출판사 박영사의 안상준 대표도 당시 ‘동생’처럼 이 아지트에서 뒹굴었다. “고시촌 원룸 한쪽 벽에 사육장을 놓고 거북이 5마리를 키웠어요. 아침마다 야채를 썰어서 먹였죠. 저는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있었지요.”(박 이사) 파충류 가게는 6년 만에 자본금을 까먹고 문을 닫았지만 이들의 파충류 사랑은 더 맹렬해졌다. 거북이 도마뱀 뱀에 관한 책을 썼고 문 이사와 차 이사는 직업전문학교에서 파충류 사육법을 가르치게 됐고, 이 회장은 생명과학박물관의 수석실장이 됐다. 2017년 11월 협회를 창설한 이들은 최근 ‘양서파충류사육학’(박영사)이라는 책을 펴냈다. 양서류와 파충류 사육에 대한 사실상 최초의 교재다. 합치면 사육 경력 100년이 넘는 4명의 실전 경험과 공부한 것들을 집대성했다. 전국에 파충류 숍이 250곳이나 되고 10만 명이 넘는 파충류 애호가들에게 올바른 사육문화를 알려주자는 뜻에서였다. 부주의로 ‘탈출시켜’ 생태계를 교란시키지 않도록 하자는 뜻도 담았다. 이를 토대로 협회의 양서파충류자격증 시험도 치를 수 있도록 했다. “거북이는 실내에서 키우면 일찍 죽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비만 때문이에요. 받아먹는 모습이 예쁘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먹이를 주다 보니 당뇨 콜레스테롤이 오죠.”(박 이사) 개나 고양이같이 사람과 교감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 보면 징그럽고 혐오감마저 드는 파충류에 이들은 왜 빠지게 됐을까. “그냥 무작정 좋았어요. 양서파충류는 바쁜 일상에서 많은 시간과 관심을 들이지 않아도 되지요.”(이 회장) “이들의 색에 매료됐어요. 남들이 알아채지 못한 아름다움을 알아챘다고나 할까요.”(문 이사) “반려동물이 아닌 관상동물이지만 ‘어떻게 이렇게 생길 수 있지’ 하는 감탄을 느끼게 해주죠. 털이 없어 알레르기가 생기지 않는다는 건 덤이고요.”(박 이사)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인내와 배려의 시간이다. 마음을 살찌우기에 적절하다. 책과의 거리 좁히기에는 더할 나위 없다. 편집 경력 20년 안팎의 1인 출판사 대표 9명이 500쪽 넘는 ‘벽돌책’을 권한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사이언스북스) 스티븐 핑커 지음·김명남 옮김·1408쪽 인류는 문명화의 과정에서 평화를 얻기 위해, 인간의 권리를 얻기 위해, 인간의 폭력성 복수심 가학성 그리고 이데올로기로 인해 폭력의 역사를 거듭했다. 하지만 전쟁과 야만의 역사 안에서도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내면의 악마를 제압해왔다.(조연주 레제 대표)밀크맨(창비) 애나 번스 지음·홍한별 옮김·500쪽 타인과의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소비되며, 사회 안에서 굴러가는지를 경이로운 문체에 담아낸 소설. 말하고자 하는 바가 치밀하고 묘사 또한 신선해 곱씹어 읽을 만하다. 사회적, 물리적 거리 두기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많은 사람에게 권한다.(박래선 에이도스 출판사 대표)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전 2권·가톨릭출판사) 박승찬 지음·716쪽 코로나19 확산으로 한때 종교 문제가 화두였다. 기독교의 정체가 궁금한 이에게 추천한다. 서양의 문화 역사 철학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기독교를 중세철학 전문가가 예화와 사진 등을 곁들여 흥미롭게 풀어냈다. 십자군전쟁과 흑사병 등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박혜련 오르골 대표)빅 픽쳐(글루온) 션 캐럴 지음·최가영 옮김·648쪽 장대하고 명쾌하다. 입자부터 생명, 우주까지 아우르는 거창한 주제의 논픽션임에도 서술이 단 한 번 비틀거리지 않는다. 명쾌한 비유와 담백한 유머로 페이지가 팔랑팔랑 넘어간다. ‘사피엔스’급의 압도적인 책을 찾는다면 결코 지나칠 수 없다.(성기승 프시케의숲 대표) 신들의 봉우리(리리) 유메마쿠라 바쿠 지음·이기웅 옮김·824쪽 만화 ‘신들의 봉우리’의 원작 소설. 일본에서 720만 부 판매된 ‘음양사’ 시리즈의 유메마쿠라 바쿠가 구상부터 집필까지 20여 년 들여 완성했다. 극한의 리얼리즘 소설이자 산악문학의 정수. 어지러운 정국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길 바란다.(천경호 루아크 대표)마일스 데이비스(집사재) 마일즈 데이비스 지음·성기완 옮김·640쪽 ‘음성 지원’ 되는 듯한 구어체 문장이 매력적이다. 엄청난 음악적 성취를 이뤘지만 인간적으로는 좀 ‘재수 없는’ 남자가 거침없이 쏟아내는 이야기를 좇다 보면 푹 빠져든다. 레전드들이 총출동해 재즈의 역사를 훑은 기분이다. 마일스의 눈으로 본 야사에 가깝지만….(전은정 목수책방 대표)자기배려의 책읽기(북드라망) 강민혁 지음·800쪽 자기배려란 개인주의나 자기본위가 아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서양철학이 비로소 찾아낸 철학적 출구다. 자기를 넘어서는 ‘자기’ 되기! 철학과 책읽기를 자기배려의 연장 삼아 연구한 ‘은행원 철학자’의 진중한 사색과 유려한 문장이, 어려운 책들을 음미하도록 이끈다.(최지영 에디토리얼 대표)향모를 땋으며(에이도스) 로빈 월 키머러 지음·노승영 옮김·572쪽 페이지 넘어가는 게 아깝다. 생의 뿌리인 자연과 거기서 얻은 삶의 지혜를 사유한 책이라고 설명을 달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문장을 읽는 그 맛을 음미하며 읽다 보면 딛고 선 땅과 주변에 흐르는 공기를 바라보는 ‘나’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이현화 혜화1117 대표)사회주의 100년-20세기 서구 좌파 정당의 흥망성쇠(전 2권·황소걸음) 도널드 서순 지음·강주헌 외 옮김·1792쪽 ‘유럽문화사’ 저자 도널드 서순의 또 다른 대작. 제2인터내셔널이 탄생한 1889년부터 100년간 서유럽 좌파 정당의 흥망성쇠를 담았다. 발전하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서구 좌파의 노력과 한계를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냉정하지만 따뜻하게 바라본다.(도진호 지노출판 대표) 정리=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우리는 이상주의를 현실주의로 누그러뜨려야 한다.” 5년 전 ‘4차 산업혁명의 시대, 전문직의 미래’라는 저서에서 기술 혁신이 20세기 내내 굳건했던 전문직의 종말을 부를 것이라 예측했던 저자. 그가 이번 책에서는 기술 발전이 경제적 파이를 키워 인간 노동의 새로운 수요, 즉 새 일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생각은 이상주의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무도가(武道家)가 ‘도장(道場) 깨기’ 하듯 기술 발전과 노동 수요 발생의 연관성을 낙관한 경제학설을 하나씩 논파하면서. 미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2010년까지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네 배 넘게 늘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은행 창구 직원은 20% 증가했다. 계좌에 돈을 넣고 빼는 단순 업무에서 벗어나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자 고객이 늘었고, 기술 혁신이 경제를 끌어올려 소득이 늘어나자 은행을 찾는 수요가 증가했으며, 더 다양한 금융상품을 팔게 된 결과다. 책은 이런 과정을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해로운 힘과 인간을 보완하는 유익한 힘의 싸움에서 언제나 후자가 이겼다. 인간의 노동을 찾는 수요가 충분히 컸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래 기술이 인간을 보완하던 힘은 한계에 도달했다고 책은 말한다. 당초 ‘틀에 박힌 업무’만 대신하리라던 기술 발전은 인간만의 것으로 여겼던 공감 판단 창의성의 영역까지 넘어왔다. 그것도 인간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저자는 기술이 인간의 업무를 끊임없이 잠식해 절대적으로 일이 줄어드는 세상이 수십 년 내에 오리라 장담한다. 그 세상은 지독한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영향력까지 키운 ‘기술 대기업’, 찾기 힘든 삶의 의미로 구성된다. 저자는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조건적 기본소득과 삶의 의미를 만드는 ‘큰 정부’를 제시한다. 결론에 이르기까지 탄탄하고 무엇보다 현실적이던 논지가 정부에 대한 ‘무한 신뢰’로 귀결되는 것은 아쉽다. 저자는 정부가 살아야 하는 의미까지 제공하는 유토피아와 정부가 인간의 삶을 통제하는 디스토피아 사이에서 길을 잃은 것일까.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