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배

안영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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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3~2025-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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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발포로 3명 숨져… 분노한 군중 “왜 죽였나” 주재소 부숴

    “만세 부른 백성들아/내 말 새로 들어보라/독립 만세 불러놓고/기정(사실을 속임)은 무슨 일인고/…같이 돈심(마음이 도타움) 못할진대 시작하지나 말았으면/불쌍한 백성들도 원혼이나 아니 되고/활달한 백성들은 고생이나 덜 것을/그중에 우리 시여(독립운동가 김승태의 자) 흥을 내어 즐기더니/가막(감옥) 고생 무궁하다.” 3·1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일경(日警)에 체포된 이들이 고문과 협박을 견디기 어려워하자 독립만세를 외치다 희생된 사람들이 원혼(冤魂)이 되지 않도록 끝까지 대의를 지켜 달라고 촉구하는 내용의 ‘내방가사’다. 이 기록은 경남 김해시 장유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감옥살이를 하던 김승태의 어머니 조순남(1860∼1938)이 지은 것이다. ‘김승태만세운동가’로도 불리는 이 내방가사에는 감옥에서도 일경에 굴하지 않는 아들을 대견해하면서도 몸을 상할까 애태우는 노모(당시 60세)의 절절한 심정이 담겨 있다.○ 장유 유학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조순남의 내방가사에 기록된 장유 지역 만세운동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김해의 폭동’(1919년 4월 18일자)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할 정도로 시위 규모가 컸다. 당시 김해 일대에서는 세 지역(김해읍, 하계면 진영리, 장유면 유하리)에서 각각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그중 가장 격렬했고 피해가 컸던 곳이 장유 지역이다. 장유 만세운동은 경성의 고종 인산 행사에 참여한 유학자 김종훤이 독립선언서를 옷 보따리에 숨겨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시작된다.(삼일동지회, ‘부산 경남 삼일운동사’) 탑골공원의 만세운동에도 참여했던 김종훤은 고향인 장유면 유하리에서 김승태 이강석 김용주 조용우 조항래 최현호 등을 만나 경성의 상황을 전한 뒤 거사 준비에 착수한다. 이들은 4월 12일 장유면 무계리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한다. 거사 당일 정오경 각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무계리 장터 근처 대청천 언덕에 모여 주도자들의 선창에 맞춰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장터에 모인 군중 3000여 명은 북을 둥둥 치고 나팔을 불면서 일본군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당황한 일본 헌병이 무차별로 총을 쏘며 해산시키려 하자 이에 격분한 손명조 김선오 김용이 등이 주재소로 뛰어들었다. 세 사람은 결국 헌병의 총을 뺏으려다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한다. 성난 주민들과 가족들은 이들의 시신을 업은 채 “왜 죽였느냐”고 외치며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주재소를 부쉈다. 이후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김해분견소에서 파견된 일제 군경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잔인한 시위 진압에 나선다. 이때 일본 헌병의 총탄에 사망한 김선오의 차남 김예천은 자신의 가슴을 헤집으며 “나도 쏘라”고 대항하다 처참하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장유 만세운동은 김승태를 비롯한 주도자 10여 명이 헌병대로 끌려가고 나서 수그러들었다. 조순남의 내방가사에는 당시 끌려가는 아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우리 승태 왕자왕손 후예로서(가야국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해김씨)/충성을 위로 하여/왈소(크게 웃고)하고 기창(앞장서 부르짖음) 서니”라는 말로 독립만세운동을 지역사회 지도층이 당연히 앞장설 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김종훤 김승태 최현호 등 장유 만세운동 주도자 대부분은 지역 명문가 자손들로 일제의 탄압을 각오하고 있었다. 특히 김승태는 스스로 잡혀온 이들의 대표를 자임했기에 더욱 모진 고초를 겪었다.(이홍숙, ‘장유의 만세운동과 조순남’)○ 진영 청년들의 ‘의병 창의’ 장유 만세운동 12일 전인 3월 31일, 장유 무계리 장터에서 북서쪽으로 15km가량 떨어진 진영 장터에서도 만세운동이 진행됐다. 진영의 만세운동은 지역민들이 자발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인 경우여서 주목받고 있다. 당시 하계면 서기로 재직하던 20대 청년 김우현은 신문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펼쳐지는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거사를 결심한다. 김우현은 같은 마을의 또래인 김정태 김성도 김용환 등과 준비에 돌입했다. 이들은 거사 전날인 30일 밤부터 하계면 여래리 뒷산 죽림에서 대형 태극기와 소형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만세’라고 쓴 전단까지 제작했다. 외부의 지원이 없었기에 독립선언서를 구하지 못해 전단은 자체적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진영 장날이던 3월 31일 오후 1시, 인파가 모인 장터 한복판에 20대 청년들이 기습적으로 등장해 태극기를 나눠 주고 ‘독립만세’라고 쓴 전단을 뿌린 뒤 독립만세를 외쳤다. 장터에 모인 군중이 호응해 독립만세를 연호했지만 재빨리 출동한 일제 군경에 주도자들이 모두 검거됐다. 김해헌병분견소장이 적은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시위대 규모는 200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일본 헌병은 참가자를 200명으로 축소 보고했다. 진영에서의 저항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특히 4월 5일 진영 장날에 2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펼쳐진 만세운동은 10대 청년들이 주도해 눈길을 끈다. 당시 하계면 한문서당에 다니던 안기호 김종만 등 10대 학생들은 서당 학생 30여 명과 함께 하계고개 밑에서 ‘독립군대장 안기호’라고 쓴 큰 깃발과 태극기를 흔들며 진영시장으로 시위행진을 했다. 이는 의병 창의의 방식을 따른 것으로, 3·1만세운동이 항일 의병정신을 이어받았음을 대외적으로 알리려는 의도였다.○ 김해의 여성 만세운동 진영의 만세시위와 같은 시기에 또 다른 독립만세운동이 김해군에서 진행됐다. 일본으로 쌀을 보내는 중요한 수탈 거점 항구였던 김해는 일제의 집중 감시 지역이어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이런 역경을 뚫고 만세운동의 불꽃을 지핀 이들은 여학생과 부녀자들이었다. 김해 최초의 만세의거 주도자는 당시 서울 정신여학교(현 정신여고)를 다니던 구명순이었다. 당시 20세의 꽃다운 나이였던 그는 학교 휴교령으로 고향인 김해로 돌아온 뒤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부녀자들을 상대로 만세운동에 나설 것을 독려한다. 이때 같은 마을 출신이자 세브란스의전 학생이던 배동석도 뜻을 같이했다. 3월 30일 밤 10시 배동석은 임학찬 배덕수 송세희 등과 함께 김해읍 중앙 거리에서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기습 시위에 놀란 일제 헌병대는 강경 진압에 나섰다. 가까스로 일제 헌병의 손길에서 벗어난 주도자들은 다시 4월 2일 김해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거사일 오후 4시 주도자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의용대까지 조직한 이들은 시위 주도자들을 똘똘 감싸 일제 군경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당황한 일제 군경은 일본 재향군인을 비롯하여 상인, 불량배까지 총동원해 진압에 나섰다. 이날 시위로 배동석 등 시위 주도자 6명이 검거되고, 일제는 형세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시장을 강제로 폐쇄했다.(1919년 4월 7일 경상남도장관 보고) 하지만 만세운동의 열기는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4월 16일 읍내에서 약 6km 떨어진 이동리에서 부녀자 50여 명이 동네 산에 올라 만세운동을 벌였다. 세 번째였던 이날 시위에서는 일제 보병 80연대 소속 군인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포해 4명이 중상을 입는 등 희생자가 발생했다. 김해읍 만세운동은 여학생으로 시작해서 부녀자들이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에도 굴하지 않는 조선 여성들의 투지 넘치는 기상과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보여준 역사로 평가된다. 김해, 진영, 장유의 3·1운동 발생지를 함께 찾아본 김해3·1독립운동기념사업회 김광호 회장은 “김해시는 지방 3·1독립운동의 다양한 만세운동 양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게 특징이다”라고 말했다. 이달 13일 김해시에선 3·1운동 관련 유족과 인사들이 함께하는 행사가 개최됐다. 장유만세운동으로 3명의 열사가 숨진 헌병주재소 터에 ‘장유기미독립의거 표지석’을 세우는 제막식이었다. 비문에는 당시 징역형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이 꼼꼼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행사에 참여한 허성곤 김해시장은 “표지석은 3·1운동의 주역이 김해의 평범한 민초들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며 “그 정신을 이어받은 김해의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내방가사 ‘김승태만세운동가’ ▼ 어머니 눈으로 본 그날의 현장, 만세운동 전모 취재하듯 생생히기록문화재로서 가치 높아 어머니의 눈으로 장유지역 3·1만세운동의 전모를 기록한 ‘내방가사’가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자식소회가’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이 내방가사는 장유지역 만세운동 주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승태를 중심으로 3·1운동 상황을 묘사했다고 해서 ‘김승태만세운동가’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내방가사는 조선시대에 주로 양반가 부녀자들이 순한글로 지은 작품으로 규방가사 혹은 규중가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재 34쪽 분량으로 전해지는 내방가사 역시 당시 사용되던 한글 말체로 작성돼 책자로 제작됐다. 내방가사는 문학적 가치 못지않게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순남의 내방가사를 연구한 이홍숙 박사는 “경남 명문 함안 조씨 출신의 부녀자가 마치 취재기자처럼 현장에서 장유지역 만세운동의 전모를 다큐멘터리처럼 치밀하게 기술했다는 점에서 기록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이어 “현존하는 내방가사 중 3·1운동 현장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내방가사의 저자인 조순남은 일제 감시를 피하기 위해 책을 종질녀에게 맡겼다. 장유 만세운동의 상황들을 후손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조치였다. 조순남의 증손자인 김융일 씨(77)는 “할아버지(김승태)가 감옥에서 풀려 나온 뒤에도 일제는 끊임없이 우리 집안을 감시했다”며 “증조할머니(조순남)께서는 책 제목도 ‘자식소회가’로 위장해 후세에 전해질 수 있도록 했다”고 소개했다. 내방가사 원본은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 김승태 지사의 유족이 자료의 중요성을 고려해 2005년 3·1운동 기념식장에서 김해시에 기증했지만 김해시에서는 현재 찾을 수 없다. 시 관계자는 “시청 자료실과 시 문화원 수장고 등을 모두 뒤졌으나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만 유족들이 시에 기증하기 전 자료를 사진으로 촬영해둬 내용은 파악할 수 있다.김해=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19-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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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촌이내 형제중 8명이 독립유공자… 조천 김해김씨 ‘항일투쟁 명문가’

    “할아버지의 8촌 이내 형제 중 모두 8분이 현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인정받지 못한 어른이 남아 있어 안타깝습니다.” 항일독립운동 가문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유공자 수가 많은 조천 김해김씨 후손인 김용욱 씨(73)는 “조천 김씨들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다른 역할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2018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된 김시범(1890∼1948) 선생의 손자다. 실제로 이들의 항일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와 맥을 같이한다. 먼저 김명식(1890∼1943)은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유학 중 재일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간사부장으로 활동했고,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도쿄 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 김시은(1887∼1957)과 김시범은 조천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3·1만세운동 10년 후인 1929년 11월 제주에서 광주로 유학을 간 김시성(1910∼1943)과 김시황(1909∼1956)은 광주 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3·1운동 이래 가장 큰 규모로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 김시곤(1901∼1983)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으로 생존권을 위협받던 해녀 보호에 앞장섰다. 그의 노력으로 1932년 국내 최대 규모의 여성운동인 제주 해녀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김시용(1906∼1945)은 소비조합운동 등을 펴며 항일운동을 펼쳤고, 김시추(1901∼1945)는 일제의 황민화 식민지 교육에 맞서 야학을 통해 소년·소녀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김씨 가문 중에는 당시 항일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언론사였던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은 이들도 있다. 김명식은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논설반(論說班) 기자(현 논설위원)로 맹활약했다. 그는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에 축시 ‘비는 노래’와 ‘새 봄’ 2편을 발표했고, 1940년 4월 1일부터 동아일보에 ‘제1차 대전 후 세계사’라는 제목으로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예언하기도 했다. 그의 조카뻘이자 조천 만세운동을 제안했던 김장환(1902∼?)은 3·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 1923년 3월부터 동아일보 기자로 활약했다.제주=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1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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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같이죽자, 만만세”… 미밋동산서 조천장터까지 나흘연속 시위

    지난달 21일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 이례적인 행사가 진행됐다. ‘제주 3대 항일운동(법정사 항일운동·조천 만세운동·해녀 항일운동)’ 유족과 관련 단체들이 총집결한 것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전국적으로 진행 중인 ‘독립의 횃불’ 릴레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조천리 앞바다에서 ‘해녀 항일운동’(1932년)을 상징하는 제주 해녀들이 뭍으로 전달한 횃불은 제주의 관문으로 통하는 연북정에서 점화행사를 가진 뒤 독립운동 유가족 및 단체들에 의해 최종 목적지인 미밋동산에 전달됐다. 조천리 일주도로 인근에 위치한 미밋동산은 1919년 3월 21일 제주에서는 처음으로 만세운동이 펼쳐진 곳이다. 제주 올레길 18코스의 종점이자 19코스의 시작점인 미밋동산에 ‘만세동산’이란 별칭이 붙여진 이유다. 이곳 정상에는 3·1독립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탑에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들을 묘사한 조각상도 새겨져 있다. 또 제주도 160인의 순국선열 위패를 모신 창렬사와 애국선열 추모탑, 제주항일기념관 등도 자리 잡고 있다. 제주도 항일운동의 성지(聖地)인 이곳에서 제주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날에 치러진 횃불 릴레이 행사는 성대히 끝났다. 횃불은 다시 육지(전남 목포)로 되돌아갔고 전북 익산, 충남 천안 등을 거쳐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인 4월 11일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다. ○ 미밋동산의 14인 결사 천혜의 포구를 갖춘 조천리는 조선 후기 때부터 애월 화북포와 함께 제주의 관문 역할을 해왔다. 일제강점기에도 뱃길로 목포와 연결되는 해상 교통 요지였다. 3·1운동 당시 경성(서울)에서 제작한 독립선언서도 이 루트를 통해 제주도에 전달됐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당시 16세 나이로 만세운동에 뛰어든 휘문고보생 김장환이었다. 조천리 출신인 김장환은 3·1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일본 경찰의 시위자 색출 작업이 강화되자 3월 16일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벌일 생각으로 귀향한다. 김장환은 항일운동가 김시학의 아들이다. 김시학은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송진우(3·1운동 당시 중앙학교장·동아일보 사장 역임), 신익희(일본 조선유학생학우회 회장 역임) 등과 교분을 나누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활발하게 항일운동을 펼쳤던 인물이다(‘한국독립운동사’).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김장환은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숙부인 김시범과 당숙인 김시은을 찾아가 독립선언서를 보여주고 3·1운동과 관련한 정보들을 전달한 뒤 만세운동을 펼칠 것을 제안했다. 지역을 이끄는 유림(儒林)이자 제주 특산물인 망건, 탕건 등을 육지로 판매하며 경제력까지 갖춘 지역 유지였던 김시범과 김시은은 그 자리에서 함께하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들도 이미 인편 등을 통해 육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만세운동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선뜻 뜻을 모은 것이다. 이들의 척사(斥邪) 의식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시(時)’자 돌림 중 맏형격인 김시우는 척사론을 펼친 면암 최익현의 문인인 김희정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아 척사론을 신봉했고, 그의 영향으로 김씨 집안 대부분이 척사론을 따랐다. 이들은 한일강제병탄 이후 일제를 척사의 대상으로 삼고, 항일 활동에 적극 나섰다. 제주 토박이인 제주학연구센터 박찬식 센터장은 “김씨 일가는 일제가 조선의 황국화 정책 일환으로 펼친 신정(新正·양력 1월 1일)을 거부하고 음력 설을 고집한 것으로 지역 사회에서 유명했다”고 전했다. 3월 17일 김장환 등 3인은 미밋동산에서 거사 발의를 한 뒤 동지 규합에 나섰고, 이틀 뒤인 19일 김용찬 고재륜 김형배 황진식 김경희 김필원 김희수 이문천 박두규 김연배 백응선 등 11명을 끌어 모아 ‘14인의 동지’를 만들었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거사일은 3월 21일로 정했다. 이날은 제주 유림계에서 명망이 높던 김시우의 기일(忌日)이었다. 유림 세력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명분이 있어 일경의 감시를 피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선택된 날이었다. 거사 준비는 치밀하게 진행됐다. 김형배가 대형 태극기 4본의 제작을 담당했고, 김시범 백응선 등은 소형 태극기 300여 장의 제작을 맡았다. 또 신촌 함덕 등 인근 주민들과 서당 생도들도 거사에 합류하도록 설득했다. ○ 4차례 연속 시위 마침내 거사일이 밝자 150여 명이 비장한 심정으로 미밋동산에 모였다. 14인의 동지 중 한 사람인 김필원은 더 많은 사람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창호지에 혈서로 쓴 ‘대한독립만세’를 들고 제주경찰서 조천주재소(현재 연북정 자리) 서쪽에서 동쪽에 위치한 미밋동산까지 행진했다. 혈서와 독립만세 함성에 고무된 사람들이 속속 합류하면서 그가 미밋동산에 도착했을 때에는 군중이 500여 명에 달했다. 오후 3시경 대형 태극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큰 소리로 낭독했다. 이어 김장환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은 일제히 만세 함성을 지른 뒤 행진을 시작했다. 미밋동산에서 시작해 조천 비석거리를 지나 제주성내(제주 시내)까지 가는 게 목표였지만 미밋동산에서 2km 정도 떨어진 신촌리에서 행진은 끝나고 만다. 일경이 막은 데다 급파된 일본 무장대에 14인의 동지 가운데 9명이 잡히는 등 모두 13명이 체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세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이튿날인 22일 조천장터에서 2차 시위가 진행됐다. 김필원 백응선 박두규 등의 주도로 200여 명이 모여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행진을 펼쳤다. 이날 시위로 박두규와 김필원이 체포됐고, 시위대는 강제 해산됐다. 사흘째인 23일 다시 시위(3차)가 전개됐다. 백응선 이문천 김연배 등이 조천장터에서 100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행진을 시작했다. 시위대가 장터 인근에 위치한 함덕리에 도착했을 때 지역 청년들과 주민들이 합세했고, 시위대 규모는 8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날 시위에서는 백응선 등 8명이 체포됐다. 이 가운데에는 “대한독립만세, 같이 죽자 만만세”라는 구호를 열창하던 여성도 포함돼 있었다. 잇따른 일경의 탄압에도 만세운동의 열기는 식지 않고 이어졌다. 나흘째인 24일은 마침 조천지역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14인의 동지 가운데 일경의 손을 피했던 김연배가 중심이 돼 무려 1500여 명에 달하는 군중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4차)를 펼쳤다. 이날 시위에는 장을 보러 나왔던 부녀자들이 상당수 합세했다. 이날 김연배 등 4명이 체포되면서 조천 만세운동은 일단락된다. 14인의 동지 전원이 검거돼 동력을 잃었기 때문이다(조선총독부경무국과 조선군사령관이 작성한 ‘3·1운동 1차 보고’). 조천 만세운동으로 검거된 이들 중 23명은 1919년 4월 26일 제주지청에서 형을 선고받았다. 14인의 동지는 이에 불복해 항고했지만 5월 29일에 있은 2심에서도 모두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러야 했다. ○ 선상 등불 시위로 확대 조천리에서 지펴진 만세운동의 열기는 제주 남쪽 지역까지 퍼져나갔다. 서귀포에서는 4월 1일 오후 8시경 어선 수십 척이 등불과 태극기를 선두(船頭) 돛대에 높이 달고 북을 울리면서 만세를 불렀다. 서귀포 삼매봉에서는 불을 피워 만세를 부르다 주모자 10여 명이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다(이병헌, ‘3·1운동비사’).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은 “구전으로 전해지는 서귀포 선상 시위는 조천만세운동이 지역적으로 확산된 결과로 보이며, 이 시위가 훗날의 제주 해녀 항일운동으로 계승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옥고를 치른 14인의 동지는 항일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1921년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했다. 동미회 조직원들은 감옥에서 새끼를 꼬아 번 돈을 모아 공동 관리하면서 제주에서 펼쳐진 항일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20년 3월 일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사망한 백응선의 묘소에 기념비를 몰래 세우는 등 끈끈한 동지애도 발휘했다. 이들의 항일운동 이후 제주에서는 민족교육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고,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각종 사회단체가 조직돼 1920, 30년대 제주 항일운동을 이끌어갔다.제주=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1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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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안영배]100년 전 오늘 아우내 장터

    병천순대로 유명한 충남 천안시 병천(竝川)시장은 아우내 장터라고도 불린다. ‘아우내’는 여러 개천이 하나로 모인다는 의미다. 그 ‘아우내 장터’는 한국인들에게 있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100년 전인 1919년 4월 1일, 그곳에서는 천안 청주 조치원 진천 등에서 모여든 주민들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뜨겁게 외쳤다. 비폭력 운동에 대해 일제는 총검으로 진압했고 현장에서만 19명이 즉사했다. ▷그때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의 중심에 유관순 열사(1902∼1920)가 있었다. 그의 양친은 만세운동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집은 불태워졌다. 하지만 온갖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의 준비과정부터 투옥생활 중 잔혹한 고문으로 짧은 생을 마치기까지 10대 소녀가 보여준 기개와 애국심, 저항 정신은 눈부셨다. 그 일가의 항거 의지가 얼마나 두려웠으면, 만세운동 이후에도 일제는 집중 사찰을 계속했다. 1919년 7월 9일 충남도 장관 구와바라 하치시가 조선총독부에 올린 동향보고에는 “유관순 일가는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으로 처분돼 일가가 거의 전멸하는 비참한 지경에 빠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 활약상은 뒤늦게야 알려졌다. 일제강점기 내내 쉬쉬하며 묻혀있었기 때문이다. 유 열사와 그 가족의 항일 소식과 희생을 처음 알린 것도 해외의 동포신문이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한 ‘신한민보’는 1919년 9월 2일자에 ‘한 이화여학생의 체포―소녀의 양친은 원수에게 피살’이란 제목으로 첫 소식을 전했다. 국내에서는 1947년 11월 27일 병천리에서 열리는 기념비 제막식에 맞춰 동아일보가 ‘천고에 빛날 순국혼 유관순 소녀의 위훈’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 재조명이 시작됐다.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1년 뒤인 1920년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는 2001년부터 충남도와 유 열사의 모교인 이화여고와 함께 유관순상을 제정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손톱이 빠져나가고 귀와 코가 잘리고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 잃은 고통만은 견딜 수 없다.” 지난해 3월 뉴욕타임스가 ‘한국 독립을 위해 싸운 10대 순교자’라는 기사에서 인용한 유 열사의 발언이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유일한 슬픔”이라고 가슴 절절한 유언을 남겼던 젊은 독립투사. 그의 항거를 기억하고, 그의 이상(理想)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와 가치를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후손의 당연한 책무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1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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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학생들 日교사 턱 앞에 두 손 들이대고 “대한독립 만세”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께서 붕어한 이후) 2개월간 우리는 여러 준비를 하였다. 학우의 주소를 조사하며, 재정을 구취(鳩聚)하며, 일인(日人)의 눈을 피해 비밀히 동지를 단속하였다. 혹 (불을) 때는 아궁이 앞에 널짝을 놓고 그 밑에 들어가 가만히 한마디 두 마디씩 연락을 하여 주기로 하였다가, 3월 1일 오전을 당하여 어린아이 큰사람 할 것 없이 ○○○○ 하나씩 둘씩 끌고 가서 오늘 할 일을 일러주었다. 그래도 천연스럽게 하오 1시가 될 때까지는 참고 공부하기로 하였다. ‘불의(不義)코 백년 살지 말고 의(義)코 하루 살아라’를 변소 벽에 기록하고 한 사람씩 가보게 한다. 하오 1시경에 독립선언서 1장이 들어왔기로 몰래 들여다보고 있을 때 탑골(탑동)공원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울리다.”(상하이판 독립신문 1919년 10월 16일, ‘여학생 일기’) 이 글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수록된 ‘여학생 일기’의 한 부분이다. ‘심원(心園)여사’란 필명으로 작성된 일기는 3·1운동을 기획하고 현장을 경험한 여학생의 육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상경 KAIST 교수에 따르면 일기의 주인공은 당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성여고보·현 경기여중고교) 학생이던 김원경이다. 그는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6차례에 걸쳐 독립신문에 일기를 연재했다. ○ 총독부가 관리하는 여학교 경성여고보는 1908년 한국 최초로 설립된 관립 여학교인 한성고등여학교의 후신으로, 1910년대 당시 조선총독부가 직할하던 유일한 여자고등보통학교였다. 전국의 수재와 문벌 있는 가정의 자녀들이 찾는 명문 학교였다. 총독부는 경성여고보를 여성 황국신민화 교육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다. 주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설립해 운영하던 이화, 배화, 정신 등 당시 경성의 사립 여학교들과는 달리 총독부가 주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여고보 교사 대부분은 일본인들로 채워졌고 한국인 여학생들은 철저한 감시와 통제 아래 식민지 교육을 받았다. 총독부는 2세 양육을 맡는 여성들에게 신민화 교육을 하면 자연스럽게 전체 한국인의 신민화가 정착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박용옥,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 민족운동 진영은 이런 일제의 의도를 간파하고 경성여고보를 일제의 여성 신민화 교육의 실패 사례로 만들기로 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박희도(당시 YMCA 간사)가 주도적으로 나섰다. 그는 1917년부터 경성여고보생들의 비밀조직 결성을 지도했는데 3·1만세운동 당시 300여 명의 전교생 가운데 42명이나 이 조직에 가담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 저항의식을 기른 여학생들은 일본인 교사들과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일본을 ‘내지·內地’라고 표현하는 것은) 행랑것(한국)이 큰댁(일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는 일본인 교사에게 여학생들은 “우리가 일본 사람의 행랑것들이에요?”라고 반박하기 일쑤였다. “일본 돈으로 조선이 산업화되었으니 고맙다고 절을 해야 한다”는 역사교사에게는 여학생들이 극도로 분노해 “피피피”라고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여학생 일기’) 경성여고보 출신 최정숙이 ‘소녀 결사대’라고 밝힌 경성여고보 비밀조직은 민족운동가들과 연락하며 3·1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본과생 최은희 김숙자 이양전과 사범과생 최정숙 강평국 고수선 등이 중심이 됐다. 특히 당시 25세의 ‘만학 처녀’로 학생들에게 “언니”로 불렸던 김숙자는 큰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화학당과 영변의 숭덕학교에서 교편생활까지 경험한 김숙자는 일본 대학으로 유학하기 위해 경기여고보 3학년에 편입해 있었다. 그는 기숙사 복습실에서 한국 지도를 펼쳐놓고 ‘어린 동지’들에게 조국의 참모습을 일깨워줬고 취침시간에는 살며시 일어나 만세운동에 쓸 300여 장의 태극기를 제작했다.(김숙자 회고, 중앙일보 1976년 3월 1일) 그런데 3월 1일 새벽에 독립선언서 한 뭉치가 학교 담장을 넘어 운동장에 뿌려지는 일이 발생했다. 학교는 초비상이 걸렸다. 긴급 교직원회의가 열리고 학생들은 귀가를 봉쇄당한 채 학교에서 제공하는 빵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기숙생들은 바깥출입이 금지됐다. 오후 1시에 탑골공원에 모이기로 한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학생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기숙생들 사이에서 “(교사들이 회의하는 틈을 타) 대문을 빠개자” 하는 고함이 터졌다. 검정 치마 밑으로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맨 여학생들은 손도끼와 식칼, 돌멩이를 닥치는 대로 집어 들고 기숙사 후문을 부쉈다. 깨진 대문 조각들을 짓밟으며 학생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갔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길이었기에 속옷에 주소 성명 학교 고향 부모 이름까지 써 붙인 학생(최정숙 회고)도 있었다. 오후 2시 경성여고보에서 남쪽으로 500여 m 떨어진 탑골공원에서는 이미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선언식을 마치고 북상하는 군중에 합류해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거쳐 경성여고보 정문을 지나갔다. 교사들과 사환들은 학교 정문 앞에 나와 넋을 읽고 이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여학생들은 일인 교사들 턱 앞에 두 손을 바짝 들이대고 높은 소리로 “독립만세”를 통쾌하게 외쳤다.(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 이날 시위로 경성여고보 전교생의 10%가량인 32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이 가운데 10여 명이 구금됐다. 하지만 경성여고보생들은 굴하지 않고 3월 5일 학생들이 주도하는 남대문역(서울역) 2차 시위에 다시 참가했다. 경성여고보 기숙생 전원(70여 명)은 이날 새벽 사감의 눈을 피해 기숙사를 빠져나가 시위에 참여했다. 이때 경성여고보생들은 ‘일편단심’을 의미하는 빨간 머리띠를 수천 개 만들어 경성고보 남학생들을 통해 각 학교에 전달해 사용하도록 했다. 두 차례에 걸친 경성여고보생 시위는 당시 장안에 큰 파문과 충격을 던졌다. 특히 일제 당국은 3월 1일 1차 시위에 관립인 경성여고보 전교생이 만세운동에 참가한 사실에 경악했다. 여성 신민화 교육이 실패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여학생들 3·1운동에 놀란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경성지역에 임시휴교령을 내린다. 추가로 있을 학생운동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학생들은 귀향한 뒤 각 지방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열렬한 독립운동가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경성여고보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숙자는 휴교령에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내려간 뒤 1919년 8월 여성 비밀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애국부인회’ 평북조직책으로 활약하다 1921년 5월 일경에 붙잡힌다. 그의 활약상은 수원대 박환 교수가 최근 찾아낸 ‘매일신보’ 1921년 6월 24일자 기사 ‘여자 정치범 검거, 독립운동의 거괴(巨魁) 김숙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김숙자는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됐다. ‘수원의 유관순’으로 불렸던 이선경은 수원 최초의 자생적 학생 결사조직인 ‘혈복단’(이후 ‘구국민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1920년 8월 일경에 체포된 이선경은 8개월 후 석방됐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풀려난 지 9일 만인 1921년 4월 21일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했다. 그는 “만일 석방된다면 다시 이 운동을 벌일 생각인가”라는 일경의 질문에 “그렇다. 석방돼도 다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며 신념을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부르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신문기자로 활약하던 최은희는 1927년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운동 조직인 ‘근우회’에 참여해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제주 출신의 여자 3인방 최정숙 강평국 고수선 역시 군자금 모집 등 항일운동, 문맹퇴치 교육 등에 헌신했다. 최정숙과 고수선은 훗날 독립유공자로 선정됐지만 강평국은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했다. 박환 교수는 “김숙자 강평국 등 과거 여성들은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컸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더 찾아내고 기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기개 높은 민족의식 서로 공감했나… 부부인연 맺은 민족운동가들 많아 ▼3·1운동 후 낙향 교단에 선 김숙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장도빈과 결혼 ‘여학생 일기’ 주인공 김원경은 상하이 임정 참여 최창식과 혼인3·1운동은 여학생들과 남성 민족운동가들을 부부로 맺어주기도 했다. 남녀 구별이 엄격했던 당시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기개 높은 민족의식을 드러낸 여학생들이 독립 투쟁에 뛰어들었던 남성 운동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섰기 때문이다. ‘재원 집합소’로 이름을 날리던 경성여고보 학생 김숙자(1892∼1979), 김원경(1898∼1981) 등이 대표적이다. 김숙자 지사는 3·1운동 후 평안북도 영변으로 귀향해 교사 생활을 하던 중 1920년 7월 언론인이자 국사학자인 장도빈(건국훈장 독립장)과 결혼했다. 김 지사의 아들인 장치혁 전 고합 회장(87)은 “당시 노총각인 아버지(33세)와 노처녀인 어머니(28세)가 결혼의 인연을 맺은 것은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공통분모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지사는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의 재원이었다. 그의 부친 김준찬은 광복군 사건으로 투옥 생활을 한 독립운동가였고(동아일보 1925년 11월 12일), 그의 남동생 김응원은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인 ‘연통제’의 책임자로 활약하며 조선총독부 대관(大官)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됐다(동아일보 1922년 3월 3일). ‘여학생 일기’의 주인공인 김원경은 1919년 4월 ‘조선독립애국부인회’ 및 ‘혈성단’ 대표로 중국 상하이에 파견을 갔다가 독립운동가 최창식(건국훈장 독립장)을 만나 결혼했다. 오성학교 교사 출신인 최창식은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인 뒤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상하이판 독립신문 등을 발행하는 인쇄소를 운영하다가 김원경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숙명여학교 출신 박자혜 지사(1895∼1943)도 3·1운동을 인연으로 결혼까지 했다.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 간호사로 일하던 박 지사는 당시 일본 군경에 무자비하게 진압당한 학생들을 치료하면서 일본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간호사들로 구성된 ‘간우회’를 조직해 일제에 항거하다가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던 박 지사는 중국으로 망명해 단재 신채호(건국훈장 대통령장)를 만나 결혼까지 한다. 박 지사와 단재는 1920년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소개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19-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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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여학생들…속옷에 고향 부모 이름까지 써 붙여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께서 붕어한 이후) 2개월간 우리는 여러 준비를 하였다. 학우의 주소를 조사하며, 재정을 구취(鳩聚)하며, 일인(日人)의 눈을 피해 비밀히 동지를 단속하였다. 혹 (불을) 때는 아궁이 앞에 널짝을 놓고 그 밑에 들어가 가만히 한마디 두 마디씩 연락을 하여 주기로 하였다가, 3월 1일 오전을 당하여 어린아이 큰사람 할 것 없이 ○○○○ 하나씩 둘씩 끌고 가서 오늘 할 일을 일러주었다. 그래도 천연스럽게 하오 1시가 될 때까지는 참고 공부하기로 하였다. ‘불의(不義)코 백년 살지 말고 의(義)코 하루 살아라’를 변소 벽에 기록하고 한 사람씩 가보게 한다. 하오 1시경에 독립선언서 1장이 들어왔기로 몰래 들여다보고 있을 때 탑골(탑동)공원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울리다.”(상하이판 독립신문 1919년 10월 16일, ‘여학생 일기’) 이 글은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수록된 ‘여학생 일기’의 한 부분이다. ‘심원(心園)여사’란 필명으로 작성된 일기는 3·1운동을 기획하고 현장을 경험한 여학생의 육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상경 KAIST 교수에 따르면 일기의 주인공은 당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이하 경성여고보·현 경기여중고교) 학생이던 김원경이다. 그는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6차례에 걸쳐 독립신문에 일기를 연재했다. ●총독부가 관리하는 여학교 경성여고보는 1908년 한국 최초로 설립된 관립 여학교인 한성고등여학교의 후신으로, 1910년대 당시 조선총독부가 직할하던 유일한 여자고등보통학교였다. 전국의 수재와 문벌 있는 가정의 자녀들이 찾는 명문 학교였다. 총독부는 경성여고보를 여성 황국신민화 교육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다. 주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설립해 운영하던 이화, 배화, 정신 등 당시 경성의 사립 여학교들과는 달리 총독부가 주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여고보 교사 대부분은 일본인들로 채워졌고 한국인 여학생들은 철저한 감시와 통제 아래 식민지 교육을 받았다. 총독부는 2세 양육을 맡는 여성들에게 신민화 교육을 하면 자연스럽게 전체 한국인의 신민화가 정착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박용옥,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 민족운동 진영은 이런 일제의 의도를 간파하고 경성여고보를 일제의 여성 신민화 교육의 실패 사례로 만들기로 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박희도(당시 YMCA 간사)가 주도적으로 나섰다. 그는 1917년부터 경성여고보생들의 비밀조직 결성을 지도했는데 3·1만세운동 당시 300여 명의 전교생 가운데 42명이나 이 조직에 가담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 저항의식을 기른 여학생들은 일본인 교사들과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일본을 ‘내지(內地)’라고 표현하는 것은) 행랑것(한국)이 큰댁(일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는 일본인 교사에게 여학생들은 “우리는 일본 사람의 행랑것들이에요”라고 반박하기 일쑤였다. “일본 돈으로 조선이 산업화되었으니 고맙다고 절을 해야 한다”는 역사교사에게는 여학생들이 극도로 분노해 “피피피”라고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여학생 일기’) 경성여고보 출신 최정숙이 ‘소녀 결사대’라고 밝힌 경성여고보 비밀조직은 민족운동가들과 연락하며 3·1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본과생 최은희 김숙자 이양전과 사범과생 최정숙 강평국 고수선 등이 중심이 됐다. 특히 당시 25세의 ‘만학 처녀’로 학생들에게 “언니”로 불렸던 김숙자는 큰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화학당과 영변의 숭덕학교에서 교편생활까지 경험한 김숙자는 일본 대학으로 유학하기 위해 경기여고보 3학년에 편입해 있었다. 그는 기숙사 복습실에서 한국지도를 펼쳐놓고 ‘어린 동지’들에게 조국의 참모습을 일깨워줬고 취침시간에는 살며시 일어나 만세운동에 쓸 300여 장의 태극기를 제작했다.(김숙자 회고, 중앙일보 1976년 3월 1일) 그런데 3월 1일 새벽에 독립선언서 한 뭉치가 학교 담장을 넘어 운동장에 뿌려지는 일이 발생했다. 학교는 초비상이 걸렸다. 긴급 교직원회의가 열리고 학생들은 귀가를 봉쇄당한 채 학교에서 제공하는 빵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기숙생들은 바깥출입이 금지됐다. 오후 1시에 탑골공원에 모이기로 한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학생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기숙생들 사이에서 “(교사들이 회의하는 틈을 타) 대문을 빠개자” 하는 고함이 터졌다. 검정 치마 밑으로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맨 여학생들은 손도끼와 식칼, 돌멩이를 닥치는 대로 집어 들고 기숙사 후문을 부쉈다. 깨진 대문 조각들을 짓밟으며 학생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갔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길이었기에 속옷에 주소 성명 학교 고향 부모 이름까지 써 붙인 학생(최정숙 회고)도 있었다. 오후 2시 경성여고보에서 남쪽으로 500여 m 떨어진 탑골공원에서는 이미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선언식을 마치고 북상하는 군중들에 합류해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거쳐 경성여고보 정문을 지나갔다. 교사들과 사환들은 학교 정문 앞에 나와 넋을 읽고 이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여학생들은 일인 교사들 턱 앞에 두 손을 바짝 들이대고 높은 소리로 “독립만세”를 통쾌하게 외쳤다.(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 이날 시위로 경성여고보 전교생의 10%가량인 32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이 가운데 10여 명이 구금됐다. 하지만 경성여고보생들은 굴하지 않고 3월 5일 학생들이 주도하는 남대문역(서울역) 2차 시위에 다시 참가했다. 경성여고보 기숙생 전원(70여 명)은 이날 새벽 사감의 눈을 피해 기숙사를 빠져나가 시위에 참여했다. 이때 경성여고보생들은 ‘일편단심’을 의미하는 빨간 머리띠를 수천 개 만들어 경성고보 남학생들을 통해 각 학교에 전달해 사용하도록 했다. 두 차례에 걸친 경성여고보생 시위는 당시 장안에 큰 파문과 충격을 던졌다. 특히 일제 당국은 3월 1일 1차 시위에 관립인 경성여고보 전교생이 만세운동에 참가한 사실에 경악했다. 여성 신민화 교육이 실패했을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독립운동가로 변신한 여학생들 3·1운동에 놀란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경성지역에 임시휴교령을 내린다. 추가로 있을 학생운동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학생들이 귀향한 뒤 각 지방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열렬한 독립운동가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경성여고보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숙자는 휴교령에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내려간 뒤 1919년 8월 여성 비밀독립운동조직인 ‘대한애국부인회’ 평북조직책으로 활약하다 1921년 5월 일경에 붙잡힌다. 그의 활약상은 수원대 박환 교수가 최근 찾아낸 ‘매일신보’ 1921년 6월 24일자 기사 ‘여자 정치범 검거, 독립운동의 거괴(巨魁) 김숙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김숙자는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됐다. ‘수원의 유관순’으로 불렸던 이선경은 수원 최초의 자생적 학생 결사조직인 ‘혈복단’(이후 ‘구국민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1920년 8월 일경에 체포된 이선경은 8개월 후 석방됐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풀려난 지 9일 만인 1921년 4월 21일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했다. 그는 “만일 석방된다면 다시 이 운동을 벌일 생각인가”라는 일경의 질문에 “그렇다. 석방돼도 다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며 신념을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부르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신문기자로 활약하던 최은희는 1927년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운동 조직인 ‘근우회’에 참여해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제주 출신의 여자 3인방 최정숙 강평국 고수선 역시 군자금 모집 등 항일운동, 문맹퇴치 교육 등에 헌신했다. 최정숙과 고수선은 훗날 독립유공자로 선정됐지만 강평국은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했다. 박환 교수는 “김숙자 강평국 등 과거 여성들은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컸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더 찾아내고 기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3·1운동은 여학생들과 남성 민족운동가들을 부부로 맺어주기도 했다. 남녀 구별이 엄격했던 당시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기개 높은 민족의식을 드러낸 여학생들이 독립 투쟁에 뛰어들었던 남성 운동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섰기 때문이다. ‘재원 집합소’로 이름을 날리던 경성여고보 학생 김숙자(1892~1979), 김원경(1898~1981) 등이 대표적이다. 김숙자 지사는 3·1운동 후 평안북도 영변으로 귀향해 교사 생활을 하던 중 1920년 7월 언론인이자 국사학자인 장도빈(건국훈장 독립장)과 결혼했다. 김 지사의 아들인 장치혁 전 고합 회장(87)은 “당시 노총각인 아버지(33세)와 노처녀인 어머니(28세)가 결혼의 인연을 맺은 것은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공통분모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지사는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의 재원이었다. 그의 부친 김준찬은 광복군 사건으로 투옥 생활을 한 독립운동가였고(동아일보 1925년 11월 12일), 그의 남동생 김응원은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인 ‘연통제’의 책임자로 활약하며 조선총독부 대관(大官)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됐다(동아일보 1922년 3월 3일). ‘여학생 일기’의 주인공인 김원경은 1919년 4월 ‘조선독립애국부인회’ 및 ‘혈성단’ 대표로 중국 상하이에 파견을 갔다가 독립운동가 최창식(건국훈장 독립장)을 만나 결혼했다. 오성학교 교사 출신인 최창식은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인 뒤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상하이판 독립신문 등을 발행하는 인쇄소를 운영하다가 김원경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숙명여학교 출신 박자혜(1895~1943) 지사도 3·1운동을 인연으로 결혼까지 했다.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 간호사로 일하던 박 지사는 당시 일본 군경에 무자비하게 진압당한 학생들을 치료하면서 일본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간호사들로 구성된 ‘간우회’를 조직해 일제에 항거하다가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던 박 지사는 중국으로 망명해 단재 신채호를 만나 결혼까지 한다. 박 지사와 단재는 1920년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소개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19-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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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쏴봐 쏴봐”… 학생들, 日警 총부리 앞서 가슴 풀어헤치고 항거

    강물이 유유히 흘러 서해에 닿는 광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북 군산 금강 하구언에 위치한 구암동산(해발고도 34m). 3·1운동역사공원이 조성된 이곳에는 지난해 6월 개관한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이 있다. 호남 최초 3·1만세운동을 벌인 영명학교(군산제일고 전신)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당시의 서양식 3층 건물로 외관을 꾸몄다. 영명학교는 1903년 서양인 선교사가 구암동산 자락(당시 전북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에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이다. 군산 최초의 사립학교이자 호남지역 명문학교로 이름을 떨친 이 학교에서 서해 쪽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옛 군산항과 뜬다리(물 수위에 따라 상하로 움직이는 다리) 부두가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군산항에는 늘 포개진 쌀가마들이 산처럼 쌓여 장관을 이뤘다. 일본 오사카 등지로 반출되던 쌀이었다. 당시 군산항은 전국 제1의 미곡항(米穀港)이자, 일제의 쌀 수탈기지였다. 영명학교의 한국인 교사와 학생들은 이를 지켜보며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키웠다.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 하순 학교에는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군산경찰서의 일본 순사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가 군산에 나타났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반일감정의 온상’으로 지목해온 영명학교를 주시했기 때문이다(‘군산제일100년사’). 이 정보는 정확했다. 그해 2월 26일 졸업생이자 세브란스의전에 다니던 김병수가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이모부 박연세를 만나 경성의 상황을 전달했다. 기독교와 천도교를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 중이며, 자신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당시 세브란스병원 제약실 근무)으로부터 군산지역 연락책임자로 임명됐다는 내용이었다. “경성에서는 (고종) 국장일을 기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지요?”(박연세에 대한 광주지방법원 군산분청 신문 조서) 김병수는 박연세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다짐받듯 이렇게 물은 뒤 경성에서 숨겨온 독립선언서 90여 장을 건넸다. 박연세는 “경성에서 일이 그렇게 벌어진다면 이곳에서도 동시에 운동을 개시하겠다”고 화답한 뒤 교사들(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김인묵 이동욱 김윤실 등)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였다. 삼남(영남, 호남, 충청) 지방 최초의 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일경의 허를 찌른 3·5만세운동 박연세 등은 3월 6일 군산 서래 장날을 거사일로 잡고 준비에 나섰다. 영명학교 남학생들과 영명학교 바로 옆에 위치한 멜본딘여학교의 학생들, 같은 선교재단인 구암예수병원의 직원들도 동참을 약속했다. 영명학교 학생들은 밤을 도와 학교 지하실과 기숙사 2층 다락방에서 독립선언서 7000여 장을 등사했고, 멜본딘여학교 학생들은 교내에서 일본인 선생들의 눈을 피해가며 태극기를 만들었다. 학교 병원 등에 밀정을 심어뒀던 일경(日警)은 거사 이틀 전인 4일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5일 오전 영명학교를 급습했다. 10여 명의 일본 순사들은 증거물들을 찾아냈고, 거사를 주모한 교사들을 연행하려 했다. 이때 영명학교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위협을 느낀 일본 순사들은 총을 뽑아 공포탄을 쏘며 물러서라고 위협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쏴 봐, 쏴 봐”하며 가슴을 풀어헤치는 등 대항했다. 일경은 결국 박연세, 이두열 두 교사만 연행해 가는 데 그쳤다(1919년 윌리엄 불 선교사의 비밀 보고서). 거사의 주역들이 체포되자 만세운동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이에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교사 김윤실이 교사들과 학생들을 긴급 소집했다. 모임 참가자들은 이대로 주저앉아선 안 된다는 데 뜻을 모으고 당일(5일) 오후 일경의 허를 찔러 거사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학생들, 병원 직원, 구암리 주민 등 140여 명으로 시작한 시위대는 군산부 내 본정(本町) 큰 거리에 이를 때쯤 500여 명 수준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군산경찰서까지 진출한 뒤 체포 교사 석방과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예상치 못한 시위와 시위대 규모에 크게 당황한 일경은 인근 익산 헌병대까지 동원한 뒤 무차별 총격과 함께 시위대 탄압에 나섰다. 이날 체포된 한국인은 90여 명에 달했다.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한 군산의 3·5만세운동은 이것으로 일단락되는 듯했다(‘군산제일100년사’).○ 청년 노동자들이 일어서다 하지만 한번 켜진 만세운동의 불씨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일한병합기념비(日韓倂合記念碑)에 쇠똥을 바르고 길바닥에 독립만세를 대문짝만하게 쓰는 등 일제에 대한 반감을 감추지 않는 이들이 속출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군산 거주 일본인들이 대응하기 시작했다. 재향군인회 소속 일본인 200여 명은 매일 밤 3교대로 순찰을 돌고, 화재진화용 쇠갈고리로 무장한 소방대원들은 일본인 주택과 상점에 대한 경비를 섰다. 대농장주들은 치안 유지 경비에 보태라고 거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일경도 검문검색을 강화하며 공포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산 주민들은 꺾이지 않았다. 당시 잡화상을 하던 청년 권재길은 3월 8일 “우리 일반 청년 및 노동자들은 궐기하고 있는데 학생들은 어찌하여 궐기하지 않는가”라는 문서를 작성한 뒤 군산지역 학교에 뿌렸다. ‘구암리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의 이 글을 받아본 군산공립보통학교(군산초등학교 전신) 학생들이 이에 호응했다(‘권재길 등 판결문’). 18, 19세의 보통학교 상급생들은 3월 14일 독립운동 격문을 첨부한 퇴학계를 작성해 학생들에게 배포했고, 70여 명이 퇴학원을 내고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보통학교 상급생들은 같은 또래의 노동자들과 연대해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정미소 종업원 이남률, 김수남 등 청년 노동자들도 이에 가세하기로 했다. 청년 및 학생들은 군산항 부두로 나가 다른 노동자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또 군산부 노동조합 사무실과 강호정(江湖町·현 죽성로) 거리 등에서 독립선언서와 격문 등을 나눠주며 만세운동의 정당성을 알렸다. 하지만 두 번째 독립만세운동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이 학부모를 동원해 자퇴한 학생들을 회유해 없던 일로 처리한 것이다. 이남률과 김수남은 만세운동을 방해한 공립학교의 조치에 크게 분개했다. 3월 23일 오후 8시경 두 사람은 “조선 독립을 위해서는 식민지 교육의 온상인 보통학교를 불태워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화염병을 던져 군산공립보통학교 시설 일부를 불태워 버렸다. 군산지역에선 이 사건을 제2의 군산 만세운동으로 여긴다(‘군산제일100년사’).○ 인근 호남·충남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 학교가 불탄 지 일주일이 지난 3월 30일 밤, 군산에선 세 번째 만세운동이 펼쳐진다. 이번에는 한밤중 횃불 시위였다. 수천 명의 군중이 횃불과 등불을 들고 군산경찰서와 재판소 앞에 모여들었다. 군중은 “만세운동은 빼앗긴 국권을 도로 찾으려는 것인데, 이것이 무슨 죄가 된다고 구속하고 형을 선고하는 것이냐”며 구금자 석방을 요구했다. 다음 날 광주지방법원 군산분청에서 열릴 영명학교 만세운동 참여자 30여 명의 재판을 염두엔 둔 시위였다(국가기록원, ‘독립운동 판결문 자료집’). 사태 확산을 두려워한 일경은 무자비한 탄압을 벌인다. 헌병대 군인과 경찰이 총을 쐈고 칼을 휘둘렀다. 여기에 일본인 재향군인회와 민간인들도 가세해 목총과 칼로 비무장이었던 한국인들을 무차별로 살상했다. 군산시내가 피로 물들었다. 이튿날 개최된 재판의 파행은 예고된 일이었다. 영명학교 만세운동 주도자들이 재판정으로 들어오는 순간 재판정을 가득 메웠던 방청객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고, 재판정을 순식간에 만세운동 장소로 바꿨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재판은 졸속으로 진행됐고, 만세운동 참가자 전원(3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19년 3월 한 달간 세 차례에 걸쳐 군산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은 당초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굴곡을 겪었다. 하지만 이후 호남과 인근 충남 지역의 만세운동을 촉발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對日 쌀 수출로 붐비던 군산… 일본인에겐 황금의 땅, 조선인에겐 눈물의 땅 ▼ 征韓派 고장 야마구치현 이주민들 고리대금업 하며 농지 마구 수탈채만식 소설 ‘탁류’서 피폐상 드러나일본식 주택과 일제강점기의 근대 문화 유적들로 유명한 전북 군산은 1899년 외국인들에게 개항됐다. 군산은 일본인들에게 ‘황금의 땅’이었다. 땅이 비옥한 데다 땅값도 일본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군산 일대 토지를 대규모로 사들인 뒤 쌀농사를 지어 막대한 부를 쌓았다. “호남평야의 황금물결이여/구치(조선 쌀)는 100척이고 1000척이 실려 오사카, 도쿄까지도/어머나, 군산은 멋진 항구”라며 군산을 찬미하는 노래(군산 속요)까지 불렀다. 군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현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정치적 고향이자 정한파(征韓派)의 근거지인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이 대다수였다. 이들은 한국 진출에 적극적이었고, 토지 확보를 위해 탈법과 불법을 서슴지 않았다. 토지를 담보로 한 고리대금업을 통해 수많은 한국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군산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인은 갈수록 늘어났다. 3·1만세운동이 전개된 1919년에는 군산 거주자(1만3604명)의 절반 이상(6806명)이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들은 군산을 ‘쌀의 군산’이라 부르며 제2의 고향이라 여기고 영원히 정착하길 바랐다. 만세운동 탄압에 일본 민간인들이 적극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인 대농장이 많아질수록 한국 농민들은 몰락했다. 청년들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매갈잇간(도정공장)의 매갈이공으로, 부녀자들은 쌀을 고르는 정미소 미선공으로 내몰렸다. 쌀을 배에 실어 나르는 인부나 인력거꾼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들은 언덕 비탈진 곳에 위치한 허름한 집에 살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듯 살아갔다. 군산 출신 소설가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당시 군산 거주 한인들의 피폐한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군산 주민들은 만세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정미소 노동자 파업(1924년), 옥구농민 소작 쟁의(1927년) 등의 반일 투쟁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군산=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19-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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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 당시 중국·대만에 큰 영향 미쳐

    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이 당시 재일(在日) 중국 및 대만 유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중국의 5·4운동과 대만의 자치운동까지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오노 야스테루(小野容照) 규슈대(九州大) 교수는 이런 내용을 담은 논문 ‘동아시아사 속의 2.8독립선언’을 9일 일본 도쿄 재일한국YMCA에서 개최될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 국제 심포지엄’에서 공개한다. 논문에 따르면 대만 유학생들은 당초 대만인과 일본인이 법률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두 나라의 ‘동화주의(同化主義)’를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2·8독립선언과 3·1운동을 통해 드러난 일제의 행태를 보면서 동화주의가 법률적 동화만이 아닌 문화적 동화까지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한 뒤 대만자치 운동을 펼치게 된다. 다만 대만 유학생들은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하는 한국 유학생들과는 달리 일본의 식민지 지배 자체는 부정하지는 않았다.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중국인들이었고, 2·8독립운동 3개월 후에 전개된 중국의 5·4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오노 교수는 “중국의 5·4운동은 파리평화회의에서 일본이 쥐고 있던 산둥반도 이권을 회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주 요인이지만, 2·8독립운동 및 3·1만세운동이 중국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돼 중국인의 내셔널리즘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중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박은식이 저술한 ‘한국통사’를 탐독했다는 사실도 공개될 예정이다. 1915년 중국 상하이에서 순한문으로 발간된 ‘한국통사’는 조선이 식민지화되기까지의 역사를 민족주의 사관에 의해 그린 책으로, 나라가 망해도 민족의 혼이 살아 있으면 망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역사서이다. 일본 내무성에 따르면 2·8독립선언 운동이 발생하기 2년 전인 1917년 7월에 조선인 유학생들은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통사 200부를 주문해 도쿄 유학생들에게 배포했는데, 이 과정에 중국인 유학생 요천남(姚薦楠)도 참여했다. 또 일본에서 결성된 한·중·대만 3국 유학생들의 비밀결사조직인 신아동맹당(1915년 창설)의 단장을 맡았던 황제민(黃介民)은 자기 침실에 ‘한국통사’를 숨겨놓고 읽기도 했다. 서정민 메이지학원대학(明治學院大學) 교수는 이날 발표할 논문 ‘한일기독교 역사를 통해 보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서 일본 기독교인들의 양분된 반응을 자세히 소개했다. 서 교수에 따르면 일본 기독교인들은 3·1운동을 한국 기독교인들의 편협한 애국심과 미성숙한 유대주의적 신앙심에 의해 야기된 소요사태로 진단하는 측(와다세 츠네요시 등)과 조선총독부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 정책으로 야기된 불만이라는 측(요시노 사쿠조 등)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양측 모두 한국인들의 독립 요구에는 침묵한 채 일제의 한국통치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한편 9일 국제 학술 심포지엄에 이어 15일에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만세운동이 전개된 일본 오사카 재일한국기독교회관에서 ‘2·8선언 및 3·1운동과 한국 식민지 통치체제의 전환, 한국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 등에 대한 학술대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도쿄=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

    • 201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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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독립선언,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금번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를 기회 삼아 조선 독립의 필요와 우리의 요구가 간절하다는 의사를 표시할 계획으로 결의문과 선언서를 썼다. … 이는 조선 민족뿐 아니라 동양평화와 세계평화, 정의 인도를 위하여 극히 긴절(緊切)한 일로 생각한다.”(동아일보 1922년 1월 18일자 3면 머리기사) 1922년 1월 12일 일본 도쿄지방재판소 형사 제2호 법정.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재일 한인 유학생들은 법정에서도 당당했다. 1919년 2·8독립선언에 이어 1921년 11월 5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차 독립선언을 거행한 이들이었다. 동아일보는 당시 방청석이 한인 유학생과 신문기자가 어깨를 부비고 들어서서 긴장한 기운이 넘쳤다고 보도했다. 중형을 구형한 검사도 논고에서 “우선 망국청년으로 그에 대한 번민을 가진다는 것은 동정하는 바이며…”라고 해 일순 설득당하는 듯했다. 2차 독립선언서를 만들고 배포한 주역인 이동제 김송은 전민철 이정윤 등은 금고 9개월을 선고받았다. 1919년 도쿄에서 조국 독립을 외쳤던 2·8독립선언. 8일 100주년을 맞는 이 선언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재일 한인 유학생들은 1921년 11월 ‘2차 독립선언’과 3·1운동 기념집회 등을 통해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나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동아일보는 이를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김인덕 청암대 교수는 “도쿄 유학생을 비롯한 재일 조선인들은 광복을 맞을 때까지 거의 해마다 3·1독립선언 기념 시위와 집회를 벌였다”고 말했다.▼ 청년들이 싹틔운 일본내 항일투쟁, 광복의 날까지 이어가 ▼在日유학생들 끈질긴 투쟁 1919년 2·8독립선언에 비해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1921년 2차 독립선언은 오늘날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동아일보가 1922년 1월 3차례에 걸쳐 전한 공판 소식에서 그 전모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작년 11월 5일에 동경신전구서소천정(東京神田區西小川町)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학우회 석상에서 제2회 조선독립선언을 결의하고 인쇄물을 배포한 일로 동경감옥의 쓸쓸한 철창에서 과세(過歲)를 하게 되었던….”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2차 독립선언의 주역들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일문과 영문으로 번역해 각 대사관과 공사관, 신문사에 배포했다. 그뿐 아니라 유학생 독립운동 동지 방원성을 중국 상하이로 보내, 임시정부와 연계해 독립선언을 워싱턴 회의에 제출하려 했다. 조선청년독립단 공동대표 자격으로 임정에 도착한 방원성은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촉구하고 1923년 이 회의에서 교육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김인덕 청암대 교수는 “이들의 선언서는 ‘조선의 독립이 곧 극동, 세계평화의 원동력’임을 확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일 한인들의 독립 투쟁은 학우회를 중심으로 지속됐다. 김 교수에 따르면 재일 유학생들은 1920년 2·8독립선언 1주년 기념축하문을 작성해 임정과 국내로 보내려 시도했다. 3·1운동 1주년을 맞은 그해 3월 1일에는 다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였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군중 70여 명은 도쿄 히비야(日比谷·일비곡)공원에 모여 ‘대한국 만세’를 높이 외쳤다. 집회는 1921년에도 이어졌다. 본보는 “조선유학생 약 100명은 일비곡 공원에 집합하여 독립선언의 연설을 하였음으로 경관대는…76명의 학생을 검거하였는데 계속 검거 중이라더라”(1921년 3월 3일자)고 전했다. 1924년 2월 28일 ‘3·1운동 기념식’이라는 연설회에는 학우회와 조선노동동맹회, 북성회 등의 주최로 120명이 참가했다. 1926년 학우회 주최 기념식에는 250명이 참석했고 도쿄 시내와 공원에서 시위를 벌였다. 1927년 이후에는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가 3·1 기념 시위와 투쟁을 이어갔다. 김 교수는 “일본 정부는 특히 조선인 유학생을 ‘민족해방운동의 저수지’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은 “2·8독립운동은 3·1운동의 기폭제로 조명돼 왔지만 사상적 배경이나 운동의 성숙도 면에서 볼 때 청년들은 새로운 시대의 싹을 틔운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동아일보도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유학생들의 국내 활동을 전폭 지원했다. 학우회가 1920년 7월 연 전국 순회강연회를 후원하기도 했다. 이 강연회에는 2·8독립선언으로 옥고를 치른 김도연 윤창석 이종근 등 유학생 18명이 연사로 참가했다. 동아일보는 2·8선언의 ‘설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주간 장덕수를 부산에 보냈고, 강연단 활동을 일일이 취재해 보도했다. 연사들이 전국 약 10곳을 거친 뒤 서울 단성사에서 18일 연 강연회에는 3000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이날 강연회는 시작 1시간 반이 지나 김도연이 ‘조선 산업의 장래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연설하던 중 일본 경찰이 돌연 중지와 해산을 명령했다. 보안법 제2조 “불온의 언사를 용(用)하여 치안을 문란함이 파다”했다는 이유였다. 이를 빌미로 19일 이후 강연은 모두 중지되고 강연단은 강제 해산됐다. 동아일보는 7월 22일 1면 사설로 “무차별이니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니 선정덕정(善政德政)이니 하는 사(蛇·뱀)의 설(舌·혀)을 농(弄)하야 조선인을 기만치 말라”고 조선총독부를 맹렬히 비판했다. 이 날짜 신문은 총독부에 의해 발매금지처분을 당했다. 한편 8일 일본 도쿄 시내 재일본한국 YMCA 건물에서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다. 재일본한국 YMCA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하는 이 행사에서는 회관 건물 10층 협소한 곳에 자리했던 2·8독립선언기념관을 2층으로 확장 이전하는 기념식과 함께 선언의 의미를 짚어보는 한일 전문가들의 학술대회도 열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안영배 논설위원}

    • 201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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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안영배]100년 전 2·8독립선언 현장

    1919년 3월 13일 미국 뉴욕타임스는 ‘한국인들 독립을 선언하다’라는 제목으로 3·1만세운동을 서방에 알리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는 한국인들이 독립선언을 통해 “우리는 천한 민족이 아니다. 우리는 독립국가로서 43세기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그런데 3·1독립선언서는 ‘43세기의 역사’가 아니라 ‘반만년 역사’라는 표현을 썼다. ‘4300년의 장구한 역사’라는 표현이 담긴 것은 2·8독립선언서였다. ▷100년 전 오늘 일본 도쿄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들은 도쿄기독교청년회 회관(재일본한국YMCA회관 전신)에 모여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영문과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 정부와 의회, 주일 각국 대사관, 언론사에 보냈다. 그래서 외신들이 3·1운동 소식을 보도하면서 2·8독립선언서의 문구를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도쿄 시내 지요다(千代田)구의 재일본한국YMCA회관 앞에는 그때의 일을 기념하는 ‘조선독립선언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회관 내에는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을 비롯해 한국문화관, 숙박 시설 등이 갖춰져 있다. ▷사실 현재의 회관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그 건물은 아니다. 원 건물은 직선거리로 700m쯤 떨어진 곳에 있던 74평 규모의 서양식 2층 목조건물이었다. 1906년에 지은 회관은 유학생들의 애국 집회와 토론장 역할을 하다가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 때 불타버렸다. 그 후 1926년 현 위치로 옮긴 새 회관은 일제강점기 내내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 “우리 회관”이라고 불리며 사랑을 받았고, 1980년에 현재의 건물로 신축된 것이다. 이 건물은 실제 1926년 재단법인 서울기독교청년회 유지재단 명의로 토지가 등기된 일본 내 드문 한국계 자산이다. ▷이 회관을 방문하는 이들은 적국(敵國) 수도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을 한 유학생들의 용기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건물을 관리하고 있는 YMCA는 자금난과 노후화된 시설 등으로 운영에 어려움이 크다고 한다. 독립운동 사적지로 지정하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민족적 힘을 결집시킨 2·8독립선언의 정신을 기릴 지혜를 모아볼 때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1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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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안영배]설날과 독립운동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일제강점기인 1924년 아동문화 운동가 윤극영(1903∼1988)이 작사 작곡한 동요 ‘설날’은 지금도 한국인 누구나 흥얼거리는 명절 노래다. ‘까치설날’은 섣달 그믐날이고 우리의 설날은 음력 정월 초하루라는 이 노랫말은 전통적이고 서정적인 감성을 자아내는 이상의 의미가 있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매년 신정(양력 1월 1일)이 되면 학생들을 학교에 모이게 한 뒤 일본 노래인 ‘식가(式歌)’를 부르게 하면서 한 해를 시작했다. 일본이 신정 쇠기를 강압한 데는 배경이 있다. 19세기 후반 일본은 메이지 유신 체제에서 그들 전통의 음력 5대 명절을 폐지하고 일왕 생일인 천장절, 1월 1일 원단(신정), 2월 11일 기원절이라는 양력 삼대절(三大節)을 도입함으로써 일왕 중심의 근대화를 주창했다. 일왕 숭배를 위해 기념력까지 바꾼 일제는 이를 식민지 조선에도 도입해 황국신민화를 꾀했다. ▷일제가 구습으로 격하시켰지만 한국인들은 설 명절을 버리지 않았다. 독립운동 하는 심정으로 지키는 이들도 많았다. 100년 전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설날(양력 2월 1일)에도 한국인들은 차례상 차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조차 “세배를 다니는 어른과 아이들로 전차마다 가득하다”(1919년 2월 2일자)고 보도했다. 윤극영이 일제의 일방적인 신정 강요에 반발해 지은 ‘설날’을 흥얼거리며 민중은 설을 소중한 전통으로 여기는 마음을 다졌다. 일본 순사가 어린이들이 노래를 못 부르게 틀어막아도 소용없었다. ▷입춘(立春) 절기 즈음에 맞이하는 설날은 정서적으로나 생체리듬적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명절감을 느끼게 한다. 물론 양력 1월 1일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새해 첫날로서 그 의미가 크다. 8·15광복 후 남북한 정부가 각기 음·양력설을 하나로 통일하려 무던히 애썼지만 실패했다. 이제는 양력 1일 1일과 설날을 이중과세의 잣대로 보기보다는 신구(新舊), 음양의 조화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단, 어느 날 차리든 차례상은 허식은 버리고 정성만 담으면서.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 2019-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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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義 關頭서 떨쳐 울지 않을쏘냐”… 서간도, 게릴라식 만세 펼쳐

    중국 지린(吉林)성 퉁화(通化)시 류허(柳河)현에 들어서면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수양버들이 거리 양쪽에 줄지어 서 있다. ‘버들강’이라는 현(縣) 이름을 상징하는 이곳 버드나무엔 우리나라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한(恨)이 배어 있다. 이 지역 조선족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까지 침탈한 일본 군경은 독립지사들의 목을 베고, 그 머리를 류허현 삼원포(三源浦)의 강변 버드나무에 매달았다. 일제의 잔악한 행위는 류허현의 조선족 학교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12년에 설립돼 올해로 개교 107주년을 맞는 류허현 삼원포의 조선족실험소학교(현 조선족완전중학교)의 약사(略史)는 이렇게 전한다. ‘(조선족실험소학교의 전신인) 은양학교는 1920년 11월 5일 일제의 ‘경신 대토벌’ 때 배일(排日)교육을 했다는 죄명으로 강제 폐교되었고 교장 방기전은 일제의 군도에 의해 몸이 네 동강 나 순국하였다. 은양학교 선생으로 있던 안동식 장로의 두 아들도 일제의 군도에 잘려 몸이 세 동강 나 순국하였으며, 나이 많은 안동식은 자기 손으로 판 무덤에 산 채로 매장됐다. 일송 김동삼의 동생이자 삼광학교 교장 김동만은 두 손을 꽁꽁 묶인 채 일제의 군마에 의해 10여 리 끌려간 뒤 군도에 잘려 순국하였다.’ 일제로부터 3·1운동과 항일투쟁의 온상지로 지목된 은양학교는 폐교됐다가 1922년 동명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이후 동명학교의 맥을 이어받은 조선족완전중학교에서는 아쉽게도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학교 관계자는 “갈수록 조선족 학생 수가 줄어들어 다른 학교와 통합됐고, 학교 위치도 원래 터에서 바뀌었다”고 전했다. ○ 서간도 은양학교, 북간도 명동학교 압록강 건너편의 서간도 삼원포 추가가(鄒家街)에 처음 둥지를 튼 은양학교는 그 시절 본국에서 유학생이 몰려올 정도로 유명한 민족학교였다. 두만강 대안(對岸) 북간도 룽징(龍井)의 명문 명동학교와 비교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에서도 은양학교와 명동학교 학생들은 이심전심으로 행동을 같이했다. 명동학교 학생들이 룽징에서 3·13만세운동(본보 제23화 참조)을 주도하던 때에 맞추어 은양학교 학생들은 삼원포에서 하루 앞선 3월 12일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만세운동은 삼원포 외곽에서 독립선언 경축대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됐다. 이 모임에는 은양학교 교사와 학생, 삼원포 교회 교도, 서간도 한인들의 독립운동조직인 부민단 간부 등 수백 명이 참석했다. 이때 서간도 한인사회 부녀자들이 조직한 부인회의 박혜숙 회장이 “최후 1인까지 최후 순간까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자”는 혈서를 보내와 대회장을 숙연케 했다. 삼원포 서문 밖에서 축하회를 마친 군중은 운동 지휘부의 인솔에 따라 저마다 태극기를 들고 “나의 강산을 돌려 달라” “일제는 어서 물러나라”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강을 건너 삼원포 시내로 향했다. 일제는 이를 방관하지 않았다. 중국 관헌들을 앞세워 온갖 방해공작을 펼쳤고, 시위 군중을 막기 위해 중국 군경까지 동원했다. 중국 군경은 삼원포 시내로 대규모 군중이 몰려오자 “한인 폭동이 일어났다”며 총을 쐈다. 중국 군경의 사격으로 시위대 중 9명이 쓰러졌다.(‘중국동북지역 한국독립운동사’, ‘서간도 독립군의 개척자, 이상룡의 독립정신’) 이런 참사에도 서간도의 만세 시위는 중단되지 않았다. 3월 17일 다시 삼원포 내 각 민족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1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시위대는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격해 시위운동을 전개하자는 결의까지 했다. 서간도의 민족운동 지도자 이시영이 이들을 만류했다. “다음의 독립전쟁에 총력을 바치기 위해서 지금의 일시적 기분을 자제하자.”(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 이시영은 총칼로 무장한 일제가 버티고 있는 고국으로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희생만 따를 뿐이니 3·1만세운동의 정성과 열기를 축적해 독립전쟁에 총력을 기울이자고 설득했다. 부민단의 중책을 맡고 있던 이시영의 발언은 서간도 민족운동 지도자들의 방침이기도 했다. 서간도 지도자들 사이에는 혈전(血戰)을 치러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일찌감치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 한민족 자치국의 탄생 서간도 한국인들의 이런 정서는 이 지역 개척사와 무관하지 않다. 서간도 이주민들은 국외에 독립전쟁 기지를 구축하려는 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온 국내 명망가들과 그 가족이 주류를 이뤘다. 이들은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은양학교가 자리한 삼원포 추가가 일대를 독립전쟁 전략기지로 지목했다. ‘삼원포는 사면이 산악으로 둘러싸고 있어 자연 성벽을 쌓아 놓은 듯하고, 물이 흐르는 곳이어서 토지도 비옥했기 때문이다.’(동아일보 1920년 8월 21일). 이주자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경성에서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성을 떨치던 이회영 6형제(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가문과 경북 안동의 기개 높은 ‘혁신 유림’인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가문, 선산의 명망가 허위 가문 등이 이곳에 모였다. 삼원포 추가가에 정착한 이들은 1911년 자립 경제와 민족 교육을 목표로 경학사(耕學社) 및 부설기관인 신흥강습소(신흥학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특히 ‘신민흥국(新民興國·백성을 새롭게 하고 나라를 융성하게 일으킴)’의 이념을 따른 신흥강습소는 나중에 무장 독립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무관학교로 바뀐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광복절 축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으로 언급했던 안동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은 칠언(七言) 한시로 ‘추가가의 결사’를 회고했다. ‘추가가에서 결사하니 충심은 굳고/밭 갈고 배우는 일 취지 모두 완전했다/모든 정신 신흥학교에 쏟아부어/양성한 군사 비호(飛虎)보다 날랜 오륙백.’(‘만주기사·滿洲紀事’) 500∼600명의 군사력까지 확보한 경학사는 이후 부민단-한족회-서로군정서 등으로 그 계보를 이어간다. 이 단체는 가문 단위의 끈끈한 단결력과 농업 생산을 통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 지속된 독립운동기지로 활약한다. 일제가 이곳을 ‘서간도 불령선인(不逞鮮人·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핵심 소굴’로 지목해 가혹하게 탄압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한편 서간도의 민족지도자들이 본국에서의 3·1운동 소식을 들은 때는 부민단(1915년 혹은 1916년 결성)을 이끌 때였다. 당시 부민단을 지도한 이상룡은 3·1운동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종국에는 실패할 것이 불 보듯 뻔하나 대의(大義)의 관두(關頭·가장 중요한 지경)에서 어찌 감히 떨쳐 울지 않을쏘냐.”(‘만주기사·滿洲紀事’) 비폭력을 앞세운 평화적 만세운동이 결실을 맺기 어렵겠지만 전 세계에 한국인의 독립 열망과 의지를 밝히겠다는 대의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부민단 지도부는 중국 관헌들을 자극할 수 있는 대규모 대중 집회 대신 서간도 한인사회 곳곳에서 독립운동 열기를 고취하는 소규모 게릴라식 만세운동을 조직했다. 이후 류허현과 퉁화현을 비롯해 환런 판스 지안 싱칭 등 서간도 각 지방에서 부민단 지회 분회 등을 통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부민단은 또 3·1운동을 계기로 잘 훈련된 군대를 동원해 조직적인 국토 수복 작전을 수행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부민단은 1919년 4월 한족회로 발전적 해체를 했다. 군자금과 무기를 확보한 한족회는 산하에 ‘서로군정서’라는 무장단체를 조직했다. 신흥학교 출신 무관들이 서로군정서를 주도했다. 1920년 6월 일본 정규군을 처음으로 대파한 봉오동전투에서도 서로군정서 독립군들은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한족회의 고무적인 활동을 대서특필했다. ‘사면이 청산록수(靑山綠水)로 두른 봉천성 삼원보(삼원포)에서 2000호의 조선 민족이 모여 한족회가 다스리고 있으며 소중학의 교육까지 담당해 완연히 한민족의 자치국을 일구었다.’(1920년 8월 21일) 서간도는 3·1운동이라는 자양분을 토대로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로 우뚝 섰다. 상하이의 임시정부에 버금가는 ‘소국가(小國家)’ 체제도 구축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시초가 된 삼원포 대고산 자락 아래의 경학사와 옥수수 창고를 빌려 개교했다는 추가가의 신흥강습소는 흔적조차 없다. 이곳을 찾았을 때 텅 빈 자리만 남아 있었지만 기자에겐 낯선 타국이나 타향으로 보이지 않았다. ▼ 동북 3성 식문화 바뀌고, 폐교위기 신흥무관학교에 자금 몰려 ▼안동출신 독립운동가 이상룡-김동삼, 수차례 실패 딛고 만주벌판서 벼농사 성공“경북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상룡, 김동삼 등이 ‘수전(水田·논) 농사’에 성공하면서 서간도 지역은 무장 독립운동의 중심 기지가 됐다.” 강윤정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만주 독립운동에서 서간도 한국인들의 농업혁명에 주목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당초 서간도에서 중국 농민들은 조, 콩, 감자, 옥수수 등 한전(旱田·밭) 작물만 생산했다. 척박하고 거친 땅에서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 논농사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고삐나 잡고 글만 읽던’ 서간도의 안동 출신 양반들이 수없는 실패를 거듭한 끝에 논농사에 성공했다. 이상룡은 1914년 당시의 감회를 이렇게 기록했다. ‘만주 사람들 논농사 지을 줄 몰라/거친 벌판 빌려 올벼 늦벼 파종했다/가을 되매 흰 쌀밥에 물고기 반찬/그제사 얼굴 볼그레 생기 돌아오다.’(‘만주기사·滿洲紀事’) 논농사 성공의 파급 효과는 컸다. 우선 중국 동북 3성(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의 식문화가 바뀌었다. 옥수수, 감자 등을 주식으로 삼던 만주인들이 영양가 높고 맛있는 수갱자(水粳子·조선 쌀)에 매료됐다. 이후 농업의 주도권은 땅을 가진 중국인이 아니라 기술을 가진 한국인들 손으로 넘어왔다. 한국인들의 정치적 지위는 크게 향상됐다. 중국인들은 경원시하던 한국인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중국 지방 당국은 만주로 넘어오는 한국인을 적극 유치하고 한인촌 지도부에 자치 행정을 위임하며 신뢰를 보냈다. 독립전쟁기지 운영도 활성화됐다. 그동안 명맥만 유지하던 무관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에 자금 지원이 가능해지자 인재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경학사 창설 당시 이회영 일가와 이상룡 일가가 고국에서 가져온 재산으로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1, 2년 만에 문을 닫을 형편까지 몰렸다. 하지만 논농사로 부를 축적한 한국인들이 자치기관인 부민단에 자금을 댔고, 그 덕분에 신흥무관학교는 성장할 수 있었다. 강 부장은 “신흥무관학교는 특정 개인의 재산 출연으로 설립됐지만 이후의 성장과 발전에는 서간도 한국인들이 낸 자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신흥무관학교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된 대한민국 최초의 정식 사관학교로 인정받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서간도=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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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란강의 첫봄 알리듯… 수만 한인들 함성, 만주벌판 메아리 쳐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에 속한 룽징(龍井·이하 용정). 이곳을 방문하는 많은 한국인에게는 타국으로 비치지 않는다. 벼논으로 뒤덮인 넉넉한 들판, 떡갈나무와 소나무가 군데군데 군락을 이룬 야트막한 야산과 구릉, 시내를 가로질러 유유히 흘러가는 강줄기 등은 정겨운 우리 농촌의 풍경과 다를 게 하나 없다. 소마저 한국의 들판에서 볼 수 있는 누렁 황소다. 산과 들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용정 주민 중 대다수는 우리와 같은 핏줄인 조선족이다. 거리의 간판에는 한글이 쓰여 있고, 그 밑에 중국식 한자(간자체)가 작게 표기돼 있다. 낯설지 않은 환경에서 우리말로 된 간판을 읽다 보면 마치 한국의 조그만 소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다. 일제강점기 한인(韓人)들은 피땀 흘려 옥토로 바꿔 놓은 용정을 남의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용정까지는 120리(약 47km) 길, 걸어서도 한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이웃 지역이었다. 한인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간도(만주)로 이동할 때 “건너간다”거나 “들어간다”라고 표현했다. 타국으로 이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 마을을 드나드는 정도로 여겼다. 본국(本國)의 고향에서 3·1독립만세 운동이 전개됐을 때 용정이 적극적으로 동참한 것은 이처럼 지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이다. 올해 기자는 용정의 독립만세운동 현장을 찾기 전,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비암산 정상에 올랐다. 국민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一松亭)이 우뚝 서 있는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서는 평야 지대에 조성된 용정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선구자’에 등장하는 한 줄기 해란강이 천년 넘게 흐르는 모습도 보이고, 저녁 종소리로 비암산을 아련하게 울리던 용주사 터도 가까이 있다. 다만 기자가 정작 만나고 싶은 ‘해란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항일 독립투사)’의 모습은 지난 100년간 ‘거친 꿈’처럼 깊이 잠들어 있다. ○ 북간도의 기백 약 100년 전인 1919년 2월 중순, 독립만세운동의 열기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용정과 옌지(延吉·이하 연길) 등 만주 벌판까지 달구어 나갔다. 두만강 대안(對岸) 북간도의 민족지도자들은 그해 2월 8일 일제 심장부 도쿄(東京)에서 본국의 젊은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거행했다는 감격적인 소식을 들은 데 이어, 본국 수부(首府)인 경성에서도 만세운동이 곧 시작된다는 비밀통신도 접했다. 용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일제강점 10년 만에 맞이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간 북간도의 한인들은 친일파 중국인 장쭤린(張作霖)이 이끄는 군벌 세력과 실제적으로 만주를 지배하는 일제로부터 이중 압박을 받아오면서 움츠러들어 있었다. 자연히 항일 독립운동도 크게 위축돼 있던 터다. 그런 상황에서 본국과 일본에서 발화된 만세운동은 간도에서 독립투쟁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훌륭한 ‘불씨’였다. 이에 따라 ‘가만히 있기를 처녀같이’ 처신하던 간북(墾北·북간도) 인사들이 ‘달리는 토끼’처럼 날쌔게 움직이기 시작했다.(계봉우의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 독립신문 1920년 1월 10일자) 1919년 2월 18일과 20일, 연길현 국자가(局子街) 하장리(下場里) 박동원의 자택에서 연길, 용정 등 북간도 지역을 대표하는 33명의 지도자가 모였다. 이 비밀 회합에서 간도 지역의 모든 한인단체와 지역이 연대해 독립만세운동을 펼칠 것을 결의했다. 만세운동 집결지로는 용정이 지목됐다. 용정은 한민족의 북간도 개척사에서 가장 오랜 도시이자 한인들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일제도 본방인(本邦人·조선인과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곳에 총영사관을 설치한 뒤 만주 침략의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일제는 총영사관 내에 막강한 경찰 조직과 수감 시설까지 갖추고 밀정들을 부리면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그렇기에 북간도 지도부는 의도적으로 이 지역에서 독립선언을 함으로써 일제 통치를 정면으로 거부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자 했다. ○ 해란강의 봄 축제 용정의 독립만세운동은 본국 및 러시아 연해주와 연대해 펼치는 것으로 계획됐다. 이를 위해 김약연, 정재면, 강봉우 등을 본국과 연해주에 파견해 놓고 있었다. 달이 바뀌어 3월의 첫날, 경성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됐으나 북간도 지도부는 알지 못했다. 파견된 동지들의 소식도 없었다. 그 며칠 후인 7일, 본국의 독립만세운동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갔던 강봉우가 드디어 돌아왔다. 용정의 영신학교 교감인 강봉우는 간도의 주요 동지들에게 격문을 보내 연길 국자가로 모이라고 했다. 그는 회의에 참석한 동지들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본국 만세운동과 향후 계획을 상세히 보고했다. 북간도의 지도자들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했다. 즉시 ‘독립운동기성회’라는 조직을 결성, 3월 13일 용정에서 단독으로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확정했다(일본 외무성, ‘본방인재류금지관계잡건(本邦人在留禁止關係雜件) 기밀 제19호’). 용정 북쪽의 서전벌(서전대야)에서 ‘조선독립축하회’라는 이름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용정의 한인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독립선언서와 대회 개최 통지서 등의 문건들은 은진중학교 지하실에서 등사된 후 북간도 전역으로 릴레이식으로 전달됐다. 각급 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회 경비와 안전을 책임지는 ‘충렬대’ ‘자위단’ 등이 조직되고, 군중을 대상으로 항일운동을 선전하는 ‘강연단’까지 가동됐다. 용정에 거주하는 의병 출신 한학자 김정규는 일기장(양력 3월 11일자)에서 당시 상황을 기술했다. “지사(志士)와 인인(仁人)들이 비밀리에 회의를 갖고 오는 12일(양력 3월 13일) 갑자일에 사람마다 태극기를 들고 곧장 일본영사관이 있는 용정시로 가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날 일본과 경성·평양·원산·부산·대구, 그리고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도 같은 소리로 이 거사를 하기로 하였다. 이는 우리 이천만 동포가 기사회생하는 날이니 어찌 맹렬히 일어나 각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환호작약하면서 동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황천이 우리 한인을 불쌍히 여겨 태운(泰運·커다란 운수)을 열어주는구나’라고 했다.” 1919년 3월 13일, 바로 그 태운의 날이 왔다. 그런데 아침에 개었던 날씨가 갑자기 급변했다. 황진과 굵은 모래바람까지 휘몰아쳤다. 회오리바람이 어찌나 세차게 불던지 하늘의 구름 떼가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서전벌에는 수많은 한인들이 조금의 동요도 없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오히려 밝은 화색이 감돌고 있었다. 용정에서 30리 거리의 명동학교 학생들은 인근의 농민들과 함께 1000여 명의 대오를 이뤄 서전벌에 도착했다. 두만강변의 자동에 위치한 정동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북을 울리면서 하룻밤을 꼬박 걸어 당일 아침에 도착했고, 용정 시내의 은진중학교를 비롯한 동흥학교, 대성학교 학생들도 속속 대회장으로 모여들었다. 훈춘(琿春)과 안투(安圖) 등 먼거리 지역의 사람들은 거사 전날 이미 도착해 용정 사람들과 함께 행사 준비를 했다. 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각지의 모든 한인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서전벌로 모여든 것이다. 인산인해를 이룬 이날의 군중 수가 얼마인지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계봉우가 쓴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에서는 3만 명 이상이라고 추산한 반면, 일제 보고서는 6000명으로 축소돼 있다. 중국 당국의 기록에는 2만여 명으로 집계돼 있다. 분명한 것은 북간도의 궁벽진 산촌에 사는 아낙과 초동목아(樵童牧兒)까지 한마음으로 나선 거족적 운동이라는 사실이다. 정오가 되자 시내 교회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신호로 ‘조선독립축하회’가 시작됐다. ‘대한독립’과 ‘정의인도’라고 쓰인 두 개의 오장기(五丈旗)가 나부끼는 곳을 중심으로 서전벌의 군중이 둥글게 모여들었다. 대회 부회장 배형식의 개회 선언과 함께 대회장 김영학이 ‘간도거류 조선민족 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 포고문’을 낭독하였다. 독립을 ‘선언’하는 게 아니라 ‘선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행사는 당연히 조선독립을 기념하는 축제 분위기였다. “포고문 낭독이 끝나자마자 군중은 ‘기뻐서 흐느끼고(喜而泣) 흐느끼면서 뛰며(泣而蹈)’ 태극기를 흔들었다. 용정 시내 800여 호의 한인 가옥마다 내걸린 태극기들도 모래를 날리는 광풍 속에서 힘차게 펄럭였다.”(‘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 군중은 천지가 진동하듯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눈 녹은 해란강의 첫봄을 알리는 우레처럼 만세운동 함성은 용정의 비암산까지 메아리쳤다. 독립축하회를 마친 군중은 ‘대한독립’이라 크게 쓴 깃발을 앞세우고 거리 시위에 들어갔다. 명동학교와 정동학교의 교원과 학생 320여 명으로 조직된 충렬대(총대장 김학수)가 앞장서고 북과 나팔을 멘 악대가 시위대를 이끌었다. 시위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총영사관이 있는 쪽으로 행진했다.○ 중국 군벌과 일제의 결탁 일제는 마냥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다. 일본 외무성과 군부에서는 간도의 조선인 거사 정보를 일찌감치 입수해 중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이를 빌미로 군대까지 투입하려는 일제 동향을 파악한 동북군벌 장쭤린은 한인의 독립운동에 대해 강경한 조치로 탄압할 것과 일본영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 연길 도윤(道尹·행정책임자) 장스취안(張世銓)은 상급 기관의 지령과 일본 영사관 측의 압력에 굴복해 조선인의 독립운동에 대해 동정하고 지지하던 태도마저 바꾸었다. 장스취안은 장쭤린의 휘하인 멍푸더(孟富德)를 용정촌 군경 총지휘관에 임명해 조선인들의 거사를 제지하라고 지시했다. 거사 당일인 3월 13일, 중국 군경은 모든 시가지와 골목골목을 엄중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이때 서전벌 행사를 마치고 커다란 파도같이 밀려드는 시위대를 맞아 어쩔 줄 모르던 멍푸더는 휘하 군사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시위대 중에는 용정 동산학교와 연길 도립중학교에 다니는 한족(漢族) 학생들도 다수 끼어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총성이 한동안 울렸다. 순식간에 무수한 시위 군중이 쓰러졌다. 중국 군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13명의 시위대원이 희생되고 3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체포된 사람만도 300명이 넘었다. 부상자들은 즉시 제창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다. 치명상을 입은 6명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던 중 숨졌다. 결국 이날 시위운동으로 공덕흡을 비롯한 19명이 순국하였다. 이와 관련, 일본영사관에서 파견한 순경(사복 경찰)들도 중국 군경 틈에 숨어 있다가 총질에 가담했다는 증언도 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허춘림은 “(일본) 순경들은 멍푸더 부하의 헛총질에 시위대가 혼란해진 틈을 타 권총으로 시위자들을 쏴죽이고 부상을 입혔다”고 말했다.(김동화, ‘연변역사연구’) 3·13 시위운동 희생자들의 유해는 3월 17일 5000여 한인의 애도 속에 용정 동남쪽 교외의 양지바른 언덕에 안장되었다. 기자는 용정에서 시인 윤동주의 고향인 명동촌으로 가는 길 왼쪽 산자락에 자리한 ‘3·13 반일의사릉’을 찾았다. 기념비를 중앙에 두고 앞줄에 9기, 뒷줄에 4기 등 현재 13기의 능이 조성돼 있었다. 이 능은 일제강점기에도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용정으로 향하는 동포들이 반드시 참배하던 순국묘역으로 기려졌다. 기자는 능 앞에서 참배하면서, 이들이야말로 해란강변을 누비던 진정한 선구자이자 독립투사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들의 희생은 만주 벌판 한인들의 울분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그해 5월 말까지 훈춘을 비롯해 북간도 전역에서는 50여 회에 이르는 크고 작은 만세운동이 전개됐고 무려 7만5500여 명이 시위에 가담했다(‘독립운동사 사료’ 제6집). 그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반일독립운동은 이후 중국인들에게도 큰 공감을 불러일으켜 중국의 반제반일투쟁인 5·4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중국 측 보고서(조문기, ‘중국 東北의 조선족과 3·1운동’)도 있다. 또한 3·13만세운동을 기점으로 북간도의 평화적 시위는 무장투쟁으로 확대 전환하게 된다. 1920년 1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은행권 15만 원을 쟁취한 이른바 ‘15만 원 탈취 사건’은 용정 3·13만세운동에 참여한 ‘철혈광복단’ 학생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봉오동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전투(1920년 10월) 같은 무력 항일투쟁도 용정 만세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결과였다.용정=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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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9년 만에… 잊혀져온 독립유공자 16인, 세상 밖으로 나오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도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가 16명을 새로 찾아냈습니다. 경기 용인시 수지 지역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태형 90대를 선고받았지만 증빙 기록이 없어 잊혀져 온 애국지사들입니다.” 이달 초, ‘머내여지도’라는 지역 소모임 단체가 동아일보에 이런 내용의 제보를 해왔다. 3·1운동 관련 공공기관도 아니고 전문 연구 단체도 아닌 마을 공동체 모임이 무려 16명의 숨은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했다는 거다. 모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도 포상 대상이 되는 유공자들이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까지는 3개월 이상의 형, 혹은 태형 90대(1대를 하루 수형으로 계산) 이상의 선고를 받은 독립운동가들만 포상 대상으로 선정했다. 그러다 올 4월 기준을 완화해 옥고 기간이나 태형 수에 관계없이 활동 내용을 심사해 포상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기자는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있는 머내여지도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오유경 대표는 “머내여지도는 2016년 9월 머내(용인시 수지구 동천동과 고기동의 옛 지명) 지역의 역사와 지리를 탐구하기 위해 10명의 주민이 모여 만든 모임”이라고 소개했다. 이름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서 따왔다. 머내 지역의 여지도, 즉 머내여지도라는 ‘아마추어 향토사 연구 모임’이 어떻게 ‘독립유공자 발굴’까지 하게 됐을까. ○ “마을 역사가 우리를 초대해” 머내여지도 회원들은 처음에는 난개발이 심한 이 지역에서 원주민과 이주민이 땅의 역사를 함께 기억하고 수도권의 베드타운이 아닌 역동적인 삶의 공간으로 마을을 가꿔 보려 노력하기 위해 활동을 시작했다. 작년에는 경기문화재단이 주관하는 ‘보이는 마을’ 사업에 선정돼 1000만 원을 지원받게 됐다. 모임이 만들어진 이후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마을 연구를 해오던 회원들은 ‘거금’을 마련하자 본격적으로 마을의 역사와 지리를 파고들었다. 소수만 남아 있는 원주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난개발 이전의 마을 옛길을 발견했다. 이어 머내 지역에서 3·1만세운동이 전개됐다는 뜻밖의 사실도 알게 됐다. 더욱이 만세운동 당시 일본 군경에 의해 2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적잖은 주민이 옥고를 치렀다는 증언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마을이 교과서에서나 배웠던 3·1운동의 현장이라는 게 마냥 놀라웠어요. 마을 역사를 기록한 ‘수지읍지(誌)’에는 1919년 3월 29일 발생한 머내 지역의 독립만세운동과 함께 이 지역 출신 16명이 태형 90대라는 중형을 선고받았다고 언급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일일이 이름까지 기재된 분들이 국가로부터 아무런 훈·포장도 받지 못한 거예요. 시간이 흐를수록 용인 지역 독립운동사에서조차 잊혀져 가는 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늦게나마 우리 주민이 나서서 그 후손들과 관계자의 증언을 들어 기록으로 남기고, 나아가 정당한 대우를 받게 해드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섰어요.” 머내여지도 회원이자 3·29 머내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을 맡고 있는 김경애 씨의 말이다. 그는 8년 전 자녀 교육을 위해 이곳으로 이사 온 평범한 주부다. 머내 지역과 특별한 연고도 없던 그가 지금은 아이들로부터 “엄마가 이제 안 해도 되잖아”라는 말까지 듣는 열정적인 마을 활동가로 변신했다. 그는 마을 역사가 던져주는 무언의 메시지에 강하게 이끌렸다고 한다. 마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아이들이 가슴에 안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자녀 교육이라는 깨달음도 있었다. 그러나 비전문가 모임이 머내 3·1운동사를 추적하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 지역에 대한 독립운동사는 일제의 재판 기록(이덕균 1심 판결문·1919년 4월 29일)에 간략히 언급돼 있을 뿐이다. 공식 기록에 근거한 머내 만세운동은 당시 용인군 수지면 고기2리 샛말(현재 광교산 중턱)의 구장(이장 격) 이덕균과 고기1리 손기마을 주민 안종각의 주도로 시작됐다. 안종각이 만세운동을 제안하면서 태극기를 준비하자, 구장이자 마을 훈장이던 이덕균이 적극 호응해 시위가 본격화됐다. 1919년 3월 29일 오전 9시경, 이덕균은 집집마다 1명씩 대표로 나온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가두 행진을 벌였다. 고기리 주민 100여 명으로 시작된 시위 행렬은 동막리, 동천리, 풍덕천리를 지나면서 6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다시 수지면사무소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시위대가 1000여 명이 됐다. 시위대는 기세를 몰아 군청과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는 읍삼면사무소(이후 구성면사무소)로 나아갔다. 그러나 오후 2시경 일본 헌병대 총부리 앞에서 시위 행렬은 멈추고 말았다. 여기서 만세운동 주동자인 안종각과 최우돌이 일제의 총격에 의해 현장에서 절명하고 참가자들이 무더기로 붙잡혔다. 일제는 이후 구장 이덕균을 체포해 1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공식 기록은 이게 전부다. ○ 독립운동가 후손 찾기 고기리의 궁벽진 산골 동네에서 시작한 머내 만세운동은 그렇게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99년의 세월이 흐른 후, 머내여지도 회원들이 머내 만세운동의 뼈대에 살과 피를 더하는 스토리 작업을 하면서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그들은 일제 판결문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태형을 선고받은 독립운동가 16명의 후손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회원들은 각고의 노력 끝에 이달까지 4명의 후손을 찾아내 인터뷰까지 마쳤다. 김경애 씨는 독립운동가 홍재택(1870∼1951)의 손자 홍봉득 씨(86·서울 거주)를 만나 기록으로는 접할 수 없는 증언을 들은 게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고 말했다. 홍 씨에 따르면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집안 출신의 홍재택은 ‘궁술대회’라는 친목 모임 등을 개최해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한 힘을 길렀다. 이윽고 인근 지방에서 일어난 3·1 항쟁 소식을 접하고는 바로 만세운동을 결심했다. 이웃인 안종각과 함께 구장 이덕균을 설득하는 한편 동리마다 만세운동에서의 역할을 부여하고, 일경과의 물리적 싸움을 대비하는 준비까지 갖추었다. 말하자면 머내 만세운동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벌인 ‘거사’였다는 것이다. 거사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인 홍재택은 만세운동 후 일경의 검거를 피해 집으로 몸을 피했다가 이튿날 새벽 체포됐다. “할아버지는 일제의 고문에 이어 태형 90대를 맞고서는 엉덩이 살이 터져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지경이 됐습니다. 동네 주민들이 이불에 싸서 족운(가마)에 태워 겨우 집에 모셔올 수 있었어요. 만세운동 후 할아버지는 일제의 특별감시 대상이 됐어요. 1945년 광복이 되기 3개월 전인가, 할아버지는 75세이셨는데 일경이 찾아와서는 낮에 술을 드셨다고 트집을 잡으면서 욕을 하고 말채찍으로 정수리를 후려쳤어요. 나는 그걸 보고 너무 놀랐지만 할아버지는 미동도 않고 태연하셨습니다. 그날 밤 할머니한테서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때 그 왜경이 조선인이었는데 동족 간에 그런 꼴을 보는 할아버지 심정이 오죽하셨을까….”(홍봉득 씨 녹취록) 증언하는 홍 씨의 눈은 붉게 물들었고, 그 말을 듣는 머내여지도 회원들은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홍 씨는 조부의 나라 사랑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자식과 손자들의 생일을 모두 3·1절(3월 1일)과 광복절(8월 15일)에 맞춰 호적에 올렸다고 말했다. 고기리 구장을 지낸 이덕균의 손자 이석순 씨(74)의 증언도 가슴을 아프게 했다. 현지에서 지금도 거주하고 있는 이 씨는 기자와도 만났다. “할아버지는 만세운동을 스스로 입에 올린 적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애국심과 사명감으로 독립운동을 했지만, 일제 치하에서 ‘범죄자’로 낙인찍히고 탄압받은 게 드러내놓고 자랑할 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저는 훗날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가 만세운동 때 쓰고 가셨던 남바위(일종의 방한모)에 총알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후 독립운동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서 당시 만세운동을 함께한 분들의 후손들에게 연락도 해봤어요. 그런데 만나자고 해도 만나주는 사람이 없었고, 선대가 3·1운동을 한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대체로 사는 형편이 좋지가 않아요.” 당시 한 집에 한 명꼴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고기리 사람들은 농부가 대다수였다고 한다. 회원 김효경 씨는 독립운동가 후손 인터뷰 작업에 참여하면서 “나도 농사짓는 사람으로서 농부인 그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만세운동이 일어난 3월 29일 무렵은 겨우내 곡기에 굶주린 농군들이 퇴비를 져 나르는 등 한 해 농사 준비에 한창 몸과 마음이 바쁠 때다. 더욱이 이미 한 달 가까이 진행된 이웃 지역의 만세운동을 보며 시위에 가담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농사를 밀쳐놓고 목숨을 건 행진에 나섰다. 만세운동 후 집집마다 모진 태형을 받고 몸을 가누지 못하던 가장들은 그해 씨앗을 제때 뿌리지 못해 한 해 농사까지 망쳐버려 ‘가난한 입’들을 그저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 기적같이 등장한 ‘범죄인 명부’ 머내여지도 회원들은 독립운동가 후손 찾기와 인터뷰 외에도 바쁘게 움직였다. 3월 24일에는 당시 머내 지역인 동천동과 고기동의 주민 300여 명이 참여한 ‘3·29 머내 만세운동 기념 걷기대회’(연출 감독 정필주 회원)를 열어 독립만세 행렬을 재현했다. 머내여지도 회원들이 당시 판결문과 후손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세 행렬 길을 찾아냈던 것. 이 행사 즈음에 반가운 소식이 찾아왔다. 경기동부보훈지청(지청장 박용주)에서 머내여지도 팀에 연락을 해왔다. 3·29 머내 만세운동 걷기 행사에 관심을 보인 양진건 보훈팀장은 “정부가 해야 할 일에 민간단체가 직접 나서서 고마울 따름”이라면서 미포상 독립운동가 16명을 발굴하는 데 함께 노력하기로 약속했다. 공공기관의 지원 없이 활동하던 머내여지도 회원들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용기를 얻었다. 그간 머내여지도 회원들은 태형 선고를 받은 16명의 공식 기록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회원들은 일제강점기 때 16명의 관할 구역이 수지면사무소였던 만큼 수지면사무소를 승계한 수지구청에 형사기록이 보관돼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 보훈지청과 수지구(구청장 정해동)가 머내여지도 회원들의 노력을 전해 듣고 적극 협력에 나서면서 일이 일사천리로 풀려 나갔다. 11월 14일 수지구청 문서고에서 ‘범죄인 명부’가 확인했다. 놀랍게도 일제강점기 때 작성된 1000쪽가량의 수기(手記) 범죄인명부에 머내 만세운동에 참여한 16명이 ‘보안법 위반’이란 죄명으로 고스란히 기재돼 있었다. 용인헌병분대가 ‘태 90’이라는 즉결 처분을 내렸으며, ‘범죄자’의 직업, 연령, 주소도 적혀 있었다. 현재 머내 만세운동으로 국가의 포상을 받은 이는 이덕균, 안종각 단 2명뿐이다. 이번 ‘범죄인 명부’ 발견으로 16명의 미포상 독립운동가와 3·29 만세운동 당시 현장에서 순국한 또 다른 인물인 최우돌도 포상을 받을 길이 열렸다. 머내여지도 회원으로 경기동부보훈지청 보훈혁신자문단 위원장인 김창희 씨의 말. “이번에 홍재택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16명에 대한 공적 기록이 발견돼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을 길이 열렸습니다. 소중한 기록이 지역공동체인 민간단체, 국가 기관, 지자체의 공동 노력으로 세상에 드러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기자는 머내여지도 회원들과 인터뷰를 마치고 함께 만세운동 길을 걸어보았다. 만세운동 발상지인 고기초등학교(수지구 고기동)를 방문했다. 그러나 만세운동과 연결되는 곳이라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머내여지도 회원들은 이곳을 비롯해 중요한 지점에 머내 만세운동 표석을 세우는 등 또 다른 과제 해결에 골몰하고 있었다. 이달 12일 드디어 경기동부보훈지청, 용인시 수지구와 기흥구, 머내여지도,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원장 한시준) 등 단체가 공동으로 ‘용인 3·29 만세운동 독립유공자 포상’을 국가에 공식 신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용인에서 한 민간단체의 열정이 3·1운동의 역사를 제대로 복원하는 결실을 맺은 것이다. 표석 세우기나 유공자 지정 및 포상도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용인=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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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리로 뛰쳐나온 유생들… 日 통치기관 면장-면서기도 동참

    충남 당진 대호지면 사성리의 ‘남병사 댁’은 기미년(1919년) 3월 3일 고종 장례일을 앞두고 갓 쓴 사람들의 출입이 부쩍 잦았다. ‘남병사 댁’은 고종 때 장위영 경무사(병마절도사급)를 배출한 의령 남씨 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경성을 왕래하는 충청 유생(儒生)들은 이 집에서 쉬어가곤 했다. 잠시 식객으로 머문 유생들은 서산과 당진의 경계인 대호만의 대호지 포구로 나가 화륜선을 이용해 3시간 남짓 걸리는 인천 제물포로 상륙했다. 거기서 다시 기차(경인선)로 갈아타면 한나절 만에 경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귀향할 때도 육로보다 가깝고 편리한 해상 교통로를 택했다. 자연스럽게 ‘남병사 댁’은 경성 소식을 누구보다도 빨리 접해 주위에 퍼뜨리는 정보 창구가 됐다. 대호지면의 최고 부자이기도 했던 ‘남병사 댁’ 주인 남계창과 조카 남주원은 평소 집을 외부인에게 개방했다. 2400여 평의 드넓은 대지에 100칸은 족히 넘는 대저택은 시국을 걱정하는 애국지사들과 문장으로 명성을 떨치는 묵객들로 늘 북적거렸다.(김상기, ‘민족교육의 산실 도호의숙’) “청산리 대첩의 주역인 김좌진 장군과 33인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도 ‘남병사 댁’을 거쳐 서울을 왕래했다. 홍성 출신인 두 분은 남병사 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남기은 당진문화원 향토사학회 회장의 말이다. 남씨 문중은 이웃 지역 홍성에서 항일의병운동을 지휘한 거유(巨儒) 김복한(1860∼1924)과 교유하고 있었다. 특히 김좌진은 김복한을 스승으로 모신 인연으로 ‘남병사 댁’과 친분을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도호의숙의 유생들 경성에서 진행되는 3·1만세운동 움직임도 ‘남병사 댁’ 정보망을 통해 이미 대호지면 유생들 사이에 은밀하게 퍼져 나갔다. 집주인인 남계창과 남주원은 2월 27일(혹은 28일)경 일찌감치 경성에 올라가 만세운동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뒤이어 경성에 도착한 대호지면 유생들(남상직 남상락 남상돈 이대하 이춘응 등)도 탑동공원의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김남석, ‘대호지 3·1운동의 전개와 특성’) 상경한 유생들은 모두 의령 남씨의 문중 서당인 도호의숙(桃湖義塾) 동문이었다. 대호지면 도이리에 자리한 도호의숙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유학자들을 스승으로 초빙하고, 남씨 문중 후손뿐 아니라 다른 성씨 인사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는 등 ‘열린 교육’을 펼쳤다. 도호의숙은 한학 교육만이 아니라 민족의식 고취 교육에도 앞장섰다. 도호의숙의 이 같은 교육 방침은 의령 남씨 집안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집안 선조 중 남유는 1598년 정유재란 당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했다. 그 아들 충장공 남이흥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의 군사들과 싸우다 안주성에서 순절했다. 부자 2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의 직계 후손인 대호지면 남씨들은 그 명예를 자랑스럽게 지켜왔다. 남씨 집안 인사들은 대한제국 시절 황성신문 등 언론에서 민족의 위난을 극복한 영웅담으로 조상인 남이흥의 충의정신이 소개되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한편으로 일제강점기 노량전적지에 세운 남유의 유허비가 고의적으로 멸실된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는 가슴 깊이 분노를 새기고 있던 터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학문을 닦던 도호의숙 학생들이 경성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서는 직접 시위에 참가한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한다. 문제는 경성에서 구한 국기(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고향으로 무사히 빼돌리는 것. 이때 일행 중 한 명인 남상락이 꾀를 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성백화점에서 신상품으로 내놓은 석유 램프를 이용하기로 했다. 긴 목을 가진, 당시로서는 최신형 석유 램프를 구입해 그 속에다 국기와 선언서를 돌돌 말아 넣은 뒤 백화점 포장지로 포장해 놓으니 감쪽같았다. 기차와 배에서 삼엄하게 검문 검속을 하는 일경을 피해 국기와 선언서는 대호지면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와 관련해 남상락의 아들 남선우 씨(2004년 작고)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1984년 8월 15일자)에서 “부친 등 7명이 고종 황제의 인산일에 상경해 한용운 선생으로부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또 부친은 모친이 명주천에 직접 수를 놓아 만든 태극기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남상락이 독립선언서를 숨겨와 ‘남상락 람프’로 이름 붙여진 램프와 명주천으로 만든 태극기는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뒤 보관돼 있다.○ 면장과 면서기도 나서다 고향으로 돌아온 도호의숙 유생들은 본격적으로 ‘독립 만세운동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거사 과정에서 생사를 함께하기로 하는 의형제까지 맺었다. 흥미롭게도 대호지면의 만세운동 추진위에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 말단기구인 면사무소 면장과 면서기(면사무소 직원)들도 포함돼 있었다. 그 시절 면사무소는 식민 통치를 원망하는 시위대의 공격 대상이 되는 곳이 많았다. 그러나 대호지면은 사정이 달랐다. 면장과 면사무소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면장 이인정은 경북 자인군(현재 경산시 일대) 군수를 지낸 뒤 대호지면 사성리의 전주 이씨 동족마을로 낙향했다가 61세 고령의 나이에 면장직을 맡고 있었다. 민재봉 김동운 강태완 송재만 등 면사무소 직원들도 이 지역 출신이어서 지역민들과 강한 유대감을 형성했다.(박상건, ‘당진지역 항일독립운동사’) 대호지면의 거사 계획은 면장-면서기-소사-구장(이장)으로 연계되는 관공서 조직을 이용할 수 있다 보니, 순풍에 돛 단 듯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게다가 일제가 대호지면의 치안을 이웃 정미면 천의주재소(서산경찰서 관할)에 맡기고 있던 것도 만세운동 측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일제는 대호지면은 정치·경제적으로 전혀 이익이 없는 지역으로 판단해 면사무소 이외에 별도의 통치 기관을 설치하지 않았다.(박걸순, ‘당진 대호지·천의장터 3·1운동의 성격과 특징’) 송재만 등 면사무소 직원과 대호지면의 젊은 청년들 위주로 구성된 선봉 행동대는 3월 하순에 들어서면서부터 발 빠르게 움직였다. 거사 날짜는 4월 4일, 장소는 대호지면 면사무소에서 동남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정미면 천의장터로 정해졌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호지면은 워낙 궁벽진 곳이라 장이 서지 않는 반면, 정미면의 천의시장에서는 이날 5일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만세운동 인원도 손쉽게 동원할 수 있었다. 면장 명의로 ‘도로 보수 가로수 정리의 건’이라는 공문을 돌려 면내 각 호(戶)에서 1명씩 면사무소로 모이도록 했다. 4월 4일 오전 8시경, 대호지면 면사무소에는 부역을 하기 위해 400∼500명의 군중이 집결했다. 그런데 면사무소 광장 한가운데는 흰 광목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가 30척(약 9m)짜리 죽간(竹竿)에 달려 펄럭거리고 있었다. 일제 강점 10년 만에 낯선 태극기가 대호지면 주민들에게 선을 보인 것이다. 영문을 모르고 나온 일부 사람은 그제야 범상치 않은 모임임을 알아차렸다. 면장 이인정이 앞에 나서서 연설했다. “여러분들을 집합시킨 것은 도로 수선 때문이 아니라 조선독립 운동을 하기 위한 것이니 각자는 이에 찬동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나아가자.” 이어 ‘남병사 댁’의 남주원이 등단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도호의숙의 훈장 한운석이 스스로 지어놓은 애국가도 제창됐다. 다음은 천의시장으로 행진할 차례. 태극기를 맨 앞에 세우고 이인정 면장이 말을 타고 행진을 하자 군중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뒤를 따랐다. 남주원은 군중이 용기를 내도록 술을 내어 대접까지 했다.(‘민족교육의 산실 도호의숙’)○ 만세운동과 빚잔치 대호지면 시위대는 현재 ‘4·4 만세로’로 명명된 도로를 따라 만세를 외치며 천의시장으로 이동했다. 기자는 26일 당진으로 내려가 당시를 떠올리며 이 길을 걸어보았다. 3형제(남상돈 남상락 남상찬) 모두 도호의숙 유생이자 만세운동에 참여한 의령 남씨 집안의 남기행 씨(남상돈의 손자)와 남기환 씨(남상락의 손자)가 동행했다. 남기행 씨는 길을 걸으며 역사 자료에는 기록되지 않은, 100년 전 할아버지가 주도한 만세운동 후일담을 기자에게 들려주었다. “할아버지는 만세운동으로 8개월 감옥살이를 한 후, 이듬해인 1921년 34세의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대기 위해 엄청난 빚까지 지고 있었다. 그 빚을 갚느라 부모님은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인 1950년대까지도 우리 집에서 지은 쌀농사는 가을 추수기만 되면 낱알을 털지 않은 볏단째 채권자에게 넘어갔다. 어린 마음에도 무척 속상했다.” 만세운동의 여파가 40여 년간 독립운동가 집안에 무거운 짐을 지우며 남아 있었던 셈이다. 남기행 씨의 말 때문일까, 추수가 끝난 농촌의 들판이 황량하게만 보였다. 그런데 천의시장으로 가는 만세로를 걷다 보니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는 집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대호지 포구와 도호의숙, 대호지면사무소 일대 주택과 가게에도 태극기가 걸려 있거나 태극기 문양을 새겨 놓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3·1운동 당시 제작한 ‘명주천 태극기’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남선우 씨 아들 남기환 씨는 “이 지역에서는 태극기를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고, 평시에도 당연히 걸어두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윽고 정미면 천의시장에 도착했다. 99년 전인 4월 4일 오전 11시경 대호지면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도착한 바로 그 시장이다. 당시 우시장까지 들어설 정도로 번성했던 장터에서는 장꾼까지 합세해 군중이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천의시장과 정미면사무소, 경찰관 주재소 등지를 돌면서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대호지면에서 시위 군중이 천의장터로 행진해 오고 있다는 소식은 일경의 귀에도 들어갔다. 천의 주재소 소속의 일본인 우에하라(上原) 순사와 한국인 순사보가 출동해 해산을 명령했으나 군중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만세 시위는 오후 4시경까지 계속됐고 막 평화롭게 해산하려던 중이었다. 이때 천의 주재소로부터 응원 요청을 받은 당진경찰서 소속 니노미야(二宮)와 다카시마(高島) 순사가 현장에 출동해 시위대와 맞닥뜨렸다. 순사들은 군중이 지니고 있던 태극기를 빼앗으려 했다. 군중이 이에 반항하며 투석으로 맞섰다. 위급함을 느낀 순사가 권총을 발사해 시위대 4명이 중상을 입는 등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평화롭게 해산하려던 시위 상황이 급변했다. 격앙한 시위대는 거세게 투석전을 벌이며 주재소로 도주하는 순사들을 쫓았다. 시위대는 주재소를 파괴하고, 순사와 순사보를 붙잡아 발포한 연유를 따지며 구타했다. 순사들의 권총과 환도를 빼앗기도 했다. 이날 사건에 대해 조선군사령관이 일본 도쿄의 육군대신에게 보낸 전문은 이렇다. ‘서산군 천의에 내습(來襲)한 폭민(暴民)은 주재소를 파괴하고 순사 1인이 중상, 순사보 2인이 행방불명, 일본인 1인이 경상을 받다.’ 일제는 곧 수비대를 파견해 21명의 시위 주도자를 체포했다. 그러나 격앙된 민심이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천의 주재소를 폐쇄하고 이 지역에서 거류하던 일본인 14명을 서산으로 철수시켜야 했다. 시위대의 희생도 컸다. 천의장터에서 해산해 대호지면으로 돌아온 군중들은 이후 출동한 일경에게 체포됐다. 일시 피신했던 주모자들도 속속 체포됐다. 198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그중 130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시위 현장과 옥중에서 순국한 사람도 6명이나 됐다. 소단위 지역에서 벌어진 한 차례 시위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처벌받은 것은 국내 3·1운동사에서 찾아보기 드물 정도다. 기자는 천의장터를 둘러본 후 그 희생자를 추모하는 창의사를 찾았다. 이곳에서 만난 남기찬 씨(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 수석부회장)는 의령 남씨와 도호의숙 인물들이 만세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대호지와 천의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의 위패를 봉안한 창의사에는 의령 남씨 남이흥의 후손들만 모두 60명에 이른다. 또 도호의숙 유생들만 따로 추려 보면 21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도호의숙 유생들의 만세운동은 충청 유림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조선조 이래 국내 최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유림계(儒林界)는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명단에서 빠져 있던 데다 만세운동에서도 이렇다 할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도호의숙 유생들의 만세운동은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기자는 취재를 마치며 도호의숙의 스승이자 유학자인 한운석이 지은 애국가를 조용히 읊조려 보았다. ‘간교한 일본은 강폭(强暴)하게 주장하여/마침내 우리나라를 억지로 빼앗아/우리들은 이처럼 통탄과 만나게 되어/살아도 죽은 것 같고 죽어서도 묻힐 곳이 없다/이 원수를 갚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동심일체가 돼 불구대천의 원수를 갚고 무궁한 국가를 건설하자는 선열들의 애절함과 원통함이 절절히 느껴지는 가사였다.당진=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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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재소 불사르고, 일본인 내쫓고… 원곡-양성면 ‘해방구’됐다

    1919년 2월 하순 경기도 안성 원곡면의 농부 이덕순(당시 41세)은 장남 결혼식에 쓸 혼숫감을 마련하기 위해 경성에 왔다가 고종황제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을 듣는다. “1월 21일 훙거한 나라님이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 독이 든 식혜를 마시고 비명횡사했다고?” 이덕순은 일제 흉계에 의한 것이라는 말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불의에 굽히지 않는 성격인 그는 사흘간 경성에 머물면서 세상 물정을 살핀다. 그사이 독립운동 관계자와 접촉하면서 지방에서도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결단을 내린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평범한 사내는 그렇게 독립만세운동에 눈을 뜨게 된다.(이정은,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 돌과 몽둥이를 들다 이덕순은 서당이나 학교를 다니지 못해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게다가 독립만세운동은 혼자 감당할 일도 아니었다. 그는 경성에서 3·1독립만세 운동이 ‘예정대로’ 전개되는 것을 보고 세 차례에 걸쳐 18명의 원곡면 주민들을 경성으로 데리고 갔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百聞不如一見)’고 했다. 원곡면 사람들은 경성에서 만세운동을 보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해 3월 말, 이덕순은 장남 혼인 잔치와 동리 회갑연 등에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만세운동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갔다. 동리별로 만세운동 책임자까지 정해졌다. 칠곡리의 이유석(33·서당)·홍창섭(27·농업), 내가천리의 이덕순(농업)·최은식(22·농업·보통학교 졸업), 외가천리의 이근수(31∼32·대서업)·이희용(47·농업 겸 주막업), 죽백리의 이양섭(25·농업) 등이 바로 그들. 원곡면의 대지주도 아니고 명망가도 아닌, 크게 내세울 것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운동 지휘부는 매우 체계적이며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지휘부는 동리별로 이민(里民)들을 규합해 원곡면사무소로 몰려가 산발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곤 했다. 일경이 배치되지 않은 원곡면에서는 면사무소가 유일한 일제 통치기관이어서 만세운동을 비교적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이는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위한 예비적 성격이 짙었다. 드디어 4월 1일, 3·1항쟁이 시작된 지 꼭 한 달이자 음력으로는 3월 1일이다. 이 ‘의미 깊은’ 날에 원곡면의 만세운동 지휘부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오늘 밤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니 저녁 식사 후 다 모이라.” 해는 아직 짧아 어둠이 일찍 깔렸다. 4월 초하루 밤은 달도 뜨지 않아 ‘기습 작전’에도 유리했다. 이윽고 밤 8시, 원곡면 6개 리에서 1000여 명이 외가천리에 있는 면사무소로 삽시간에 집결했다. 당시 원곡면 주민은 4700여 명. 어린이를 빼면 주민 4명 중 1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셈이다. 사람들이 밝혀 든 등불과 횃불이 면사무소를 빙 둘러싸고 밤하늘을 벌겋게 수놓았다. 면사무소는 일거에 시위대에 제압당했다. 시위 주도자 중 한 명인 이유석이 말했다. “면장을 끌어내 국기를 쥐여 선두에 세우고 일동이 만세를 부르면서 양성(면) 주재소로 가자.”(이정은,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 시위대가 면장을 앞세우고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인 성은고개(현 만세고개)에 이르자, 이덕순 등 각 동리 책임자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불같은 연설을 토했다.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본의 정책을 시행하는 관청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같이 원곡면·양성면 내의 순사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파괴하자. 또한 내지인(일본인)을 양성면 내에 거주케 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 내지인을 양성으로부터 구축(驅逐)하자. 제군은 돌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여 성히 활동하라.”(독립운동사자료집 5, ‘3·1운동 재판 기록’) 원곡면 시위 주도자들은 처음부터 순사 주재소가 있는 양성면에 가서 실력 행사를 할 계획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맨손 시위대를 총과 칼, 쇠갈고리 등으로 진압하는 일제의 행태를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힘을 행사해 일제의 통치기관을 무력화하고자 했다. 이제 만세운동은 민족대표, 천도교·기독교 등 종교계, 학생 및 지식층의 손을 떠나 일반 대중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자생력까지 갖춘 것이다.○ 통신망을 차단하라 원곡면 시위대가 나무 몽둥이를 마련하고, 바지에는 작은 돌을 잔뜩 싸 담은 채 양성면으로 들어선 게 밤 10시경. 그 시각 양성면에서도 만세운동이 별도로 일어나고 있었다. 사방에서 올려진 봉화를 신호로 각 동리에서 떼를 지어 시위에 나선 군중은 양성면 동항리의 순사 주재소와 면사무소, 양성보통학교(현 양성초등학교)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막 해산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저 멀리 성은고개 쪽에서 휘황찬란한 횃불과 함께 원곡면 시위대가 우렁차게 만세를 부르며 다가오지 않는가. 귀가하려던 동리 사람들은 다시 발걸음을 돌려 합류했다. 시위대는 2000명으로 불어났다. 원곡·양성 연합 시위대는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 순사부장 다카노 효조(高野兵藏)는 막 한숨을 돌리려던 참에 또다시 주민들이 몰려와 만세를 부르자 위압적으로 해산을 명령했다. 순사부장이 시위 주동자의 이름을 적으려 할 때, 이덕순이 순사부장의 장죽을 뺏어 한 대 후려쳤다. 벌벌 떠는 순사부장을 붙잡아 조선 두루마기를 입힌 뒤 태극기를 손에 쥐게 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게 했다. 시위대에 붙들려 양성까지 온 원곡면장 남길우는 재판정에서 그때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군중은 주재소로 감과 동시에 독립만세를 부르고, 많은 사람들이 투석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순사보(2명)가 도망쳐 나가자 불을 놓았다. … 그들은 그 다음으로 사무실에 방화했다. 군중은 각자 곤봉을 들었고 또한 바지에 작은 돌을 싸 가지고 그곳에 이르러 거의 전부가 투석한 듯하다.”(독립운동사자료집 5, ‘3·1운동 재판 기록’) 주재소를 불사른 군중은 이어 “전선을 끊으러 간다”며 양성우편소로 몰려갔다. 안성읍 방면으로 연결되는 전신·전화 겸용 통신망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도끼에 찍혀 넘어진 전신주 사이로 전선들이 토막 난 채 버려졌다. 시위대는 우편소 사무실에 들어가 사무용품과 일장기를 걷어내 불에 태워버렸다. 면사무소도 무사하지 못했다. 원곡면과 양성면 내의 일본인들도 모두 쫓겨났다. 대금업자, 잡화상 점주 등 일본인 상인들은 집 안의 물건과 가재도구가 불살라지는 것을 보며 피신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한 가지 원칙은 분명하게 지켰다. 사람은 살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일본인이건 일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조선인이건 사람의 생명을 해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안성3·1운동연구소, ‘안성 3·1독립운동’) 자정을 지나 4월 2일 새벽 2시경. 원곡·양성면은 일제 통치기구도, 일본인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해방구가 돼 있었다.(윤우, ‘안성4·1독립항쟁’) 그런데 누군가가 외쳤다. “다리를 끊으러 가자, 다리!” 외부와의 통신망을 끊은 데 이어 안성읍의 일본 수비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다리를 차단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안성읍에서 양성면으로 들어오려면 안성천의 지류인 한천에 놓인 한 길 반 높이의 다리를 이용해야 했다. 실제로 시위대가 다리를 끊어버리자 일본수비대가 진입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이덕순 등 시위 주도자들은 통신망, 도로를 차단하는 것뿐만 아니라 철로까지 차단하려는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우리는 무기가 없고, 적은 무기를 갖고 있으니까 철도 침목 핀을 뽑아버리면 군대를 막을 수 있다. 하려면 철저히 하자. 하다 말면 개죽음당한다.”(최은식의 형수 노부귀 증언, ‘안성 3·1독립운동’) 그러나 4월 2일 아침 원곡면에서 서남쪽으로 7km 떨어진 평택의 경부선 철도를 차단하려는 계획은 무산됐다. 중무장한 일본 수비대가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원곡면 시위대는 급히 피신해야 했다.○ 피가 진동한 보복 기자는 당시 4월 1일 밤과 2일 아침에 걸쳐 ‘이틀의 해방’을 맞았던 안성3·1항쟁지를 찾았다. 안성은 일제가 황해도 수안, 평북 의주와 함께 ‘3대 폭동지’로 지목할 정도로 격렬한 항일기지였다. 일제가 민족대표 33인을 내란죄로 엮기 위해 폭동 근거로 든 곳 중 하나가 바로 안성이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이어주는 만세고개에 들어서자 3·1만세운동을 기리는 ‘안성 3·1운동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만세고개는 원곡면 시위대가 양성으로 진격할 때 연설과 결의, 무장 준비를 했던 역사적 장소다. 기념관 입구에는 ‘만세고개’라고 명명한 기념 석비와 함께 ‘이곳을 지나가는 겨레여/잠시 길을 멈추고/이 만세소리를 들으소서’(조병화, ‘이 만세소리’)라는 시가 새겨져 있었다. “일제 통치기관을 내쫓는 행위가 무모한 게 아니었냐고요? 3·1운동이 발발한 후 한 달간 일제는 폭압적으로 진압하면서 이미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낸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군경의 발포 명령까지 떨어져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안성 사람들은 목숨을 내놓고 정당한 실력 행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잠시 동안이지만 일제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는 승리를 거둔 거예요. 양성·원곡면의 항쟁은 우리 겨레의 꺾이지 않는 정의감과 애국심을 보여준 의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히 ‘안성4·1항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당시 ‘실력행사가 무리하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태수 안성3·1운동기념관장은 이렇게 의미를 강조했다. 3·1운동 당시 원곡면 만세운동에 참여한 김봉현(7년 구형)의 손자이기도 한 김 관장은 “3·1운동의 ‘3대 실력 행사’ 지역 중 재판에 기소된 인원으로 보면 안성이 127명으로 수안(71명), 의주(2명)보다 월등히 많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성공한 실력 행사 지역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11월 13일, 기자가 안성3·1운동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마침 독립운동 유공자와 유족들로 구성된 광복회(회장 박유철)가 모임을 열고 있었다. 행사장에서 만난 이경우 광복회 안성지회장과 함께 양성면을 거쳐 안성읍(안성 시내)으로 이동했다. 안성 독립운동가 후손인 이 지회장은 “원곡·양성 등 서부 지역뿐만 아니라 중부 지역의 안성읍, 그리고 동부 지역의 일죽면, 죽산면, 이죽면, 삼죽면 등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다”며 남아 있는 유적을 안내했다. 그중 안성경찰서가 있던 안성읍내에서도 3월 하순 이후 만세운동은 끊이지 않았다. 원곡·양성면의 대규모 시위 하루 전인 3월 31일에는 변매화 등 안성기생조합 기생들이 시위를 벌이는 것을 시작으로 3000명의 군중이 밤늦게까지 읍내 안성군청과 경찰서, 안성면사무소를 돌아다니며 등불 행진을 했다. 그 이튿날인 4월 1일에도 500명 규모의 만세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때 일본 헌병의 발포로 안성읍 시위대 2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일경은 안성읍내의 시위를 막느라 원곡·양성 쪽으로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일제는 4월 3일부터 군대, 그것도 보병부대(조선주차군 제20사단 보병 제40여단)를 세 차례에 걸쳐 투입하고 나서야 겨우 안성의 만세운동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이후 일제의 보복은 가혹했다. 일경은 시위 주동자들의 집을 모두 불태워 없앴다. 야간 수색까지 벌여가며 피신한 시위 참여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검거가 부진하자 기만책까지 썼다. 일경은 원곡면장을 내세워 ‘농사철임을 감안해 경찰서장의 연설을 듣고 나면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을 사면해 농사를 짓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6세 이상 60세까지 남자들은 4월 19일 원곡보통학교 뒷산에 모이도록 설득했다. 시위 참여자들의 가족과 친지들은 이를 믿었다. 그러나 당일 지정 장소에 모이자 군인들이 이들을 포위했다. 이어 일경과 헌병들이 참나무를 베어 만든 몽둥이로 무조건 때리고, 저항하거나 도망치는 사람에게는 총까지 쏘았다. 일부는 상투를 묶인 채 30여 리 길의 안성경찰서까지 질질 끌려갔다. 시위 주동자들도 대부분 체포됐다. 경찰서에서 몽둥이로 무차별 구타를 당해 숨진 사람들도 속출했다. 원곡·양성면의 희생자는 현장에서 순국한 3명, 부상해 순국한 7명, 경찰서에서 순국한 5명,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한 9명 등 24명에 이르렀고 127명이 옥고를 치렀다. 그뿐만 아니라 시위 중 불에 탄 일제 재산에 대한 배상금으로 무려 1만1000원(당시 쌀 한 가마 3원)을 시위자들에게 부담시켰다. “가장은 서대문감옥에 갇히고 아녀자가 산에서 나무를 해다 20리 장에 파는 등으로 10여 년에 걸쳐 배상금을 내는 기막힌 일까지 벌어졌다.”(윤우, ‘안성4·1독립항쟁’) 기자는 취재 일정을 마치고 안성의 광복회 사무실을 찾았다. 그런데 안성시 보훈회관 건물의 국가 유공자 단체를 소개하는 안내판에 광복회이름이 끝자락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 눈에 걸렸다. 보훈회관을 지원하는 시 관계자는 “각 단체 간 상호 협의에 따라 사무실이 배치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워지도록 희생하고 밑거름이 된 항일독립운동가들에게 맞는 예우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광복회가 시위에 나섰을 때 일본인들도 어쩔 줄 몰라 했다”고 했던 한 광복회 간부의 말이 생각났다. 항일투쟁의 역사적 정당성을 갖고 있는 광복회의 무게감과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안성=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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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시나 가르침 없이…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자발적 만세운동

    경기도 가평의 서당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훈장 이규봉(1873∼1961)은 모처럼 한양(경성)을 찾았다. 1919년 3월 3일 거행되는 고종의 인산(因山·왕족의 장례)을 참관하기 위해 미리 상경한 참이다. 인산일을 하루 앞둔 경성 거리는 이미 흰 베로 싸개 한 갓과 흰 신발을 신은 이들로 가득했다. 이규봉은 청계천 수표교 근처 지인의 집에 여장을 풀고 시내를 둘러보는 동안 국상(國喪) 분위기 외에 무언가 수상쩍은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종로통을 거닐던 그는 갑자기 몰려든 청년 시위대 수백 명과 맞닥뜨렸다. 시위대는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종로경찰서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자신처럼 지방에서 상경한 듯한 촌로들까지 시위에 합세해 만세를 부르는 모습도 보였다. 그도 얼떨결에 두 손을 번쩍 들었고 입에서는 자동적으로 만세 소리가 나왔다. 3월 1일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지 못한 이규봉은 백주 대낮에 태극기와 독립만세 소리가 진동하는 경성의 사세(事勢)가 불안스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가평에서 일본 순사들의 엄격한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마을 이장 일도 맡고 있던 그로서는 마치 독립이나 된 듯 흥분한 경성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는 경성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평 출신의 제자들을 수소문했다. 북촌 화개동(화동·현 종로구 정독도서관 인근) 언덕배기에 제자 정한교가 살고 있다고 했다. 이규봉은 밤길을 재촉해 제자 집을 찾았다. “선생님, 이 밤에 어인 일이십니까?”(신현정의 ‘가평독립운동사’·이하 대화의 출처는 동일) 정한교는 스승의 느닷없는 방문에 깜짝 놀랐다. 정한교는 가평 출신의 동지 신태련, 민영순과 함께 만세운동의 축배를 들고 있던 참이었다. 세 사람은 손병희가 이끄는 천도교 내 청년 일꾼들로 3·1독립선언서를 제작하고 배포하는 중책을 무사히 완수했음을 자축하고 있었던 것. 세 사람은 가평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이규봉으로부터 한학을 배운 제자들이었다. 스승과 제자들은 새로 차린 술상 앞에서 경성과 가평의 소식을 안주 삼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종로통에서는 아직도 횃불을 밝혀들고 간헐적으로 시위하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려왔다. 이규봉은 아끼는 제자들로부터 국내외 정세와 만세운동의 자초지종을 들으며 마음이 든든해짐을 느꼈다. “선생님, 이번에 선포한 독립만세운동은 산간벽촌까지 퍼져나가 조선 독립의 기틀을 이룩해야 합니다. 저희들은 경성에서 중책을 맡고 있어서 고향으로 갈 형편이 못되니 선생님께 가평을 부탁드립니다.” 가평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켜야 하며, 스승 이규봉이 이 일을 이끌어야 한다는 제자들의 간절한 부탁이었다. 이규봉은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목숨을 걸고 만세운동을 하는 제자들의 요구를 못들은 척하기도 난감하고, 쉰 살을 바라보는 유생(儒生)이 대사를 치른 후 감옥살이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담뱃대를 입에 문 채 한동안 말이 없던 이규봉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자네들의 뜻이 정 그렇다면 내 한번 일을 추진해 보겠네. 그러려면 문적(文籍)이 있어야 할 테니 선언서와 독립신문을 구해 주면 좋겠네.” 그러자 민영순이 기다렸다는 듯 신고 있던 양말 속에 감추어둔 선언서를 꺼내 놓았다. 이규봉은 독립선언서 2장과 독립신문 한 부를 챙긴 후 3월 3일 제자의 집을 나섰다. 그는 동대문 밖 숭인동에서 고종의 장례를 지켜본 후 이내 고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평의 3·1만세운동은 이렇게 스승과 제자의 우연찮은 만남으로 시작된다. ○ ‘13도창의군’의 길을 따라 경성 동대문에서 이규봉이 사는 가평군 북면 목동리까지는 육로로 약 200리(80km) 길. 기자는 10월 하순 이규봉이 걸은 길을 그대로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는 동쪽으로 길을 잡아 청량리-망우리고개(서울 중랑구 망우동)-천마산의 마치고개(경기 남양주시 화도읍)-청평면을 거쳐 가평에 도착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 길은 10여 년 전 의병연합부대인 13도창의군이 ‘서울진공작전’을 펼칠 때 밟았던 바로 그 길이기도 했다. 1907년 정미의병 당시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 3000여 명을 포함해 1만 병력의 의병연합부대 ‘13도창의대진소(13도창의군)’는 경성의 통감부 정치를 무너뜨리기 위해 경기도 양주에서 진공 작전을 개시했고, 그 선발대가 동대문 밖 30리(지금의 망우리고개 일대)까지 진출했던 것. 춘천, 가평 등지에서 활동하는 의병들의 집결지였던 망우리고개는 예로부터 경성으로 들어가는 동부 관문이었다. 300명 규모의 선발대는 이곳에서 본진이 도착하는 대로 일거에 쳐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본진의 합류가 더뎌지는 틈을 타 일본군이 기습 공격을 해왔다. 결국 화력이 막강한 일본군 앞에서 결사대가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창의군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해 귀향하는 바람에 서울진공작전은 중지되고 말았다.(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11’) 기자는 항일의병 사상 가장 아쉬운 역사의 현장이었던 망우리고개를 넘어가면서 13도창의군을 기념하는 ‘13도창의군탑’을 둘러보았다. 망우공원 입구에 높이 15m 크기로 세워진 기념탑은 멀리 13도창의군이 밟았던 길을 굽어보고 있는 듯했다. 탑을 소개하는 안내판에는 1991년 동아일보사가 의병들의 서울진공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했다고 쓰여 있었고, 행정 관할처인 중랑구청이 관리자로 명기돼 있었다. 그런데 탑 주위는 족구장과 축구장 등 각종 운동시설이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망우공원을 즐겨 찾는다는 시민 류만희 씨는 “원래 창의군탑 앞으로는 항일기념 행사를 위해 넓은 부지까지 마련돼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체육시설들이 야금야금 들어서더니 이제는 탑마저 가려져 주객이 전도됐다”고 말했다. 무관심과 부실한 관리 속에 방치된 창의군탑을 뒤로하고 기자는 13도창의군과 이규봉이 걸었던 길을 계속 따라갔다. 이규봉은 구리(당시 양주군)를 지나면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천마산 마치고개를 넘어 가평군에 들어섰다. 경성을 출발한 지 사흘 만에 고향 땅을 밟았지만, ‘위국대사(爲國大事)의 과제’를 책임진 그의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규봉이 경성을 다녀왔다는 소식이 온 마을에 퍼졌다. 가평군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북면 목동리 싸리재에서 서당을 운영하는 장남 이윤석(1894∼1953)과 제자 정흥교(이명 정흥룡·1900∼1965)가 달려와 안부 인사를 했다. 이규봉이 그간의 경과를 말하자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젊은 자신들에게 일을 맡겨달라고 말했다. 이규봉은 그제서야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풀려나갔다. 이윤석과 정흥교는 지역을 분담해 만세운동 소식을 비밀리에 전파했다. 경성의 3·1만세운동이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작으로 전개됐다는 소식은 가평 종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북면의 천도교 간부 박화윤은 “손병희 선생이 민족대표가 돼 독립선언을 주관했고 곧이어 일헌(日憲)에 체포됐다”는 말을 듣고서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사실 박화윤은 이미 경성의 천도교인으로부터 독립선언서 한 장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엄두가 나지 않던 차에 이규봉 측으로부터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서는 감격했던 것이다. 이후 박화윤의 주도로 북면 일대의 천도교도들이 일제히 운동에 참여하기로 했다. 기독교 측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평읍 대곡리에서 예수교를 믿는 장기남이 전폭적으로 나서서 예수교도들을 동원하기로 했다. 비단 종교인들뿐만 아니었다. 북면의 마을 여성들은 야밤을 이용해 청·적색의 물감과 풀, 창호지로 소형 태극기 1800여 장을 제작했다. 이규봉의 서당 제자들도 합류했다. 최종화는 등사기를 동원해 독립선언서를 인쇄했고, 인쇄한 독립선언서는 보안을 위해 일련번호와 함께 배부자의 이름까지 새겨져 각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또 다른 제자 김정호(가평우편소 우편배달부)는 우편배낭에 담은 태극기를 각 가정에 미리 배포하며 만세운동 참여를 일일이 독려했다.(‘가평독립운동사’) ○ 위대한 보통사람들 3월 15일 약속한 거사일이 왔다. 일헌(日憲)과 친일배(親日輩)들은 3월 6일 이규봉이 돌아온 후 열흘가량 주민들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밤낮으로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서가 없어 이날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이른 아침, 이규봉이 비장한 마음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길을 나섰다. 1차 집결지인 북면 면사무소에 수백 명이 모였다. 이규봉의 장남 이윤석이 대형 태극기를 받쳐 들고, 최종화 장기영 최인화 정흥교 이만석 등 시위 주도자 10여 명은 머리에 조선독립만세라는 휘장을 두른 채 선두에 섰다. 그 뒤로 독립만세를 따라 부르며 태극기를 손에 쥔 수백 명의 군중이 맹렬한 기세로 가평읍으로 향했다. 북면의 군중이 남쪽으로 10여 km 떨어진 가평읍 군청에 이를 때까지 누구도 감히 제지하지 못했다. 군청 앞에서는 김정호 최기홍 장귀남 김창현 권임상 이도봉 등 가평읍 주도자 6명이 군중을 이끌며 호응했다. 가평군청에서 합류한 시위대는 이윤석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이규봉의 만세삼창 등 독립선언을 공식 선포했다. 가평 공립학교(현 가평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한국인 교사들이 만세 소리를 듣고서는 학생들을 인솔해 동참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동참한 만세운동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일제 헌병과 면장 등이 나와 해산을 요구했으나 3200여 명에 달하는 군중의 위세를 꺾을 수 없었다.(‘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5일의 시위가 끝난 밤, 이윤석 등 10여 명의 북면 시위 주도자들은 헌병주재소에 붙들려갔다. 군중은 가만있지 않았다. 이튿날 시위대 200명이 북면에서 가평읍으로 넘어가는 당고개에서 일제 관헌과 부딪쳤다. 시위 주도자들이 간밤에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자 헌병대원들이 공포탄을 쏘며 총칼로 위협했다. 이에 군중은 함성을 지르며 각목과 투석으로 대항했다. 진압 헌병을 상대로 격렬한 격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총칼로 가해지는 위협 앞에 시위대는 기세를 꺾지 않을 수 없었다.(‘가평군지’) 3월 15, 16일 이틀 동안 시위로 붙잡힌 가평군민은 무려 70여 명. 이규봉 이윤석 부자를 비롯해 이규붕(이규봉의 동생), 최인화(이규봉의 사위) 등 일가족도 체포돼 헌병주재소에 갇혔다. 그런데 면의 ‘어른’으로 존경받던 이규봉은 헌병 보조원으로 활동하던 한국인 제자들이 몰래 주재소에서 빼돌려 피신시킨 덕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수감된 이들 중 28명은 징역 3년에서 6개월에 이르는 형을 선고받아 서대문 감옥에 수감됐고 나머지는 가평경찰서에서 반인륜적인 태형을 받고 풀려났다. 이규봉의 아들 이윤석은 서대문 감옥에서 옥살이한 후 독립운동가 남궁억과 함께 전개한 ‘무궁화 사건’(1933년 일제의 벚꽃에 대항해 무궁화를 심어 민족정신을 앙양하고자 한 운동)으로 또다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가평군민은 1991년 가평생활체육공원에 3·1운동과 항일 의병활동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군청 마당에서 3·1운동을 재연하는 만세행사도 3월 15일 열렸다. 가평군의 독립만세운동 현장 취재에 동행한 가평군청의 최근락 학예사는 “누구의 지시나 도움도 없이, 지역민들이 스스로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실천했다는 점이 가평군 3·1운동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기자 역시 가평군의 3·1운동이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저력을 보여준 사례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이 같은 역사적 의미에 비하면 현장 보존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가평 3·1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던 북면 이규봉과 이윤석의 서당(집)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3·1운동을 전개한 장소 역시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다. 흔한 표지석조차 세워져 있지 않아 3·1운동의 감흥을 느끼기 힘들었다. 기자가 수소문해 찾아낸 이규봉의 손녀 이원각 씨(이윤석의 막내딸·82·인천 거주)와 증손자 이광무 씨(80·남양주 거주)는 전화통화에서 “가평군에서 3·1운동 기념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을 먼 친척으로부터 전해 듣고 개인적으로 행사장에 가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광무 씨는 “내년 3·1절 행사에도 가평군으로부터 초청받지 못하더라도 참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고향의 얼을 드높인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의 후손을 챙기지 못하는 지방자치단체 행사라면 무언가 알맹이가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가평=안영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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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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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丁未의병서 만세운동까지… 항일투쟁 맥 이은 ‘결사대장 유봉진’

    1919년 3월 초 경성의 마포와 서해안 지역을 배편으로 이어주는 한강 양화진나루(현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성지 공원 일대)는 크고 작은 배와 전국 팔도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선창에서 정박 중이던 기선(汽船)이 이윽고 출항을 알리는 소리를 내자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때 한 청년이 승객들 사이로 재빨리 숨어들었다. 청년은 곧장 강화도행 기선에 올라탔다. 굳게 다문 입술, 눈매가 다소 날카로운 이 청년은 연희전문학교 2학년생 황도문(1897∼1950). 3월 1일 탑동공원(탑골공원) 만세운동과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 학생 연합 시위에 모두 참가한 그는 용케 일경(日警)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황도문은 배편으로 고향인 강화도에 도착할 때까지 무사하기를 빌었다. 그의 품속에는 조선총독부가 경성 외부로 전파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불운한’ 문서들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대표 33인 명의의 3·1독립선언서, 독립만세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지하신문인 ‘국민회보’ ‘조선독립신문’ 등 각종 유인물이었다. 뱃고동을 요란하게 울린 기선은 증기를 숨 가쁘게 내뿜으며 한강을 따라 하류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때서야 황도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3월 6일, 경기 강화군(이하 강화도) 길상면 선두리 고향에 도착한 황도문은 곧장 고개 너머 이웃 마을인 온수리에서 은 세공업을 하는 유봉진(1886∼1956)을 찾았다. 고향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의 정겨운 해후도 잠깐, 황도문은 유봉진에게 문서 더미를 꺼내 보였다. 강화도에서 첫선을 보인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을 받아본 유봉진의 손이 떨렸다. 그간 섬에서 소문으로만 들었던 경성의 열렬한 만세운동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유봉진은 강화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펼치자는 스물두 살의 열혈 청년 황도문을 대하면서 10여 년 전의 자신을 보는 듯했다. 그 역시 20대 청춘에 강화도에서 항일의병 활동을 한 독립투사였다. 황도문의 진지한 태도에 감동을 받은 유봉진은 독립 투쟁에서 만세 운동으로 다시 한 번 인생을 던지는 결심을 한다. ○ 군인에서 의병으로 은 세공업자 유봉진은 원래 대한제국 강화진위대 소속 군인이었다. 그의 아버지(유홍준) 또한 강화진위대의 장교를 지냈다. 1900년대 초 유봉진이 근무하던 시기 강화진위대는 1000여 병력을 보유한 대부대였다. 강화도가 수도 한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해로를 지키는 길목으로, ‘인후지지(咽喉之地)’의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군 지휘자는 후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1873∼1935). 참령(參領·대대장) 이동휘의 지휘 아래 강화진위대는 근대식 군사훈련과 양총(洋銃) 등 신식 무기로 무장한 정예부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 대한제국은 너무나 힘이 미약했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군대부터 감축시켰다. 힘없는 나라의 무장(武將) 이동휘와 휘하 부대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딱히 없었다. 이동휘는 군복을 벗은 후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만이 나라를 살릴 길이라고 판단했다. ‘일동일교(一洞一校·마을마다 학교를 하나씩 세움)’의 구국(救國)교육 운동을 펼치는 이동휘와 의형제를 맺은 유봉진도 적극 동참했다. 일동일교 운동을 전개한 지 불과 2년 만인 1907년 강화도엔 무려 72개의 사립학교가 설립됐다. 그런데 바로 그해, 스물한 살의 청년 유봉진은 뜻하지 않게 다시 총을 쥐게 된다. 이른바 ‘정미(丁未) 의병’이란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 사건이다. 1907년 7월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는 조치를 취했다. 8월 9일 ‘나라님의 명(命)’이란 말 한마디로 총을 뺏기고 군복을 벗는 치욕을 당한 진위대 군인들은 분연히 일어섰다. 이들은 무기고로 가서 총과 탄환을 챙겼다.(강화문화원, ‘강화사’) 진위대 부교(副校·하사관) 출신의 연기우와 지홍윤, 참교(參校) 출신의 유명규 등은 본격적으로 항일의병 부대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무기를 탈취한 민간인들도 합세했다. 진위대 출신 봉기군 50명을 포함해 300여 명으로 구성된 민(民)·군(軍) 연합 의병부대가 탄생했다. 의병부대는 친일집단 일진회의 간부인 강화군수(정경수) 처단, 주재소(파출소)의 일본인 순경 사살, 친일 공무원 축출 등 활동을 펼치며 강화도를 삽시간에 장악해 갔다.(‘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유봉진도 진위대 후배들의 활약을 그냥 지켜보지는 않았다. 그가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앞으로 보낸 자기소개 이력서엔 강화 의병 봉기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정미(1907년) 대한군대 해산 시에 군기탄약고를 파괴하고, 탄환을 수출(搜出)하여 분배하고, 갑곶에 출전하여 강화군대를 해산시키려는 일본 병정들이 육지에 도착했을 때 격파하고….” 실제로 1907년 8월 11일 강화도가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군사령부는 수원의 1개 소대 병력을 출동시켰다. 기관총 2문을 이끌고 물때에 맞추어 갑곶 돈대에 들어온 일본군과 의병들 간에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매복한 의병들은 일본군 6명 사망, 부상자 8명이라는 전과를 올렸다.(‘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13일) 정식 군사 훈련으로 무장한 의병부대의 활약은 대단했다. 일본군은 인천과 용산의 병력까지 동원해야 했다. 의병부대는 결국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강화 읍내에서 물러난 의병부대는 이후 인근 경기도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강화도 산악으로 숨어들어 장기전에 돌입한다. ○ 길상 결사대 유봉진은 갑곶 전투에 참여한 이후 일제 군경의 감시망을 피해 감리교회 권사 신분으로 조용하게 살아갔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삶일 뿐이었다. 그는 정미의병 당시 일본군의 보복으로 억울하게 숨진 강화 사람들의 희생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열한 살 연하인 황도문의 방문으로 그의 가슴속에 묻어놓은 항일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당시로서는 결코 젊지 않은 나이(33세)인 유봉진은 아내(조인애)에게 3·1만세운동에 목숨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묵묵히 듣던 그의 아내도 만세운동에 동참하겠다고 결연하게 말했다. 유봉진은 먼저 강화도 길상면의 감리교도들을 중심으로 ‘길상결사대’를 조직했다. 유봉진이 결사대장을 맡고, 황도문 황유부 염성오 장윤백 조종렬 조종환 등 교회 지도급 인사들이 동참했다. 유봉진은 강화 본도는 물론이고 부속 섬들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며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그는 속옷 상의에다 ‘유봉진 독립결사대’라고 쓴 글씨를 펼쳐 보이며 동지들을 규합했다. 3월 18일 강화읍 장날,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한 바로 그날이 왔다. 따스한 봄볕이 완연한 장터는 사람들로 붐볐다. 결사대원들은 강화 주민들과 장꾼들 속에 섞여 있었다. 오후 2시 웃장터와 아랫장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두 장터를 관통하는 돌다리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심전심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만세 소리와 함께 감격에 겨운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태극기를 보고 덩실덩실 춤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새 인파는 수천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장터를 순찰 중이던 일제 군경이 재빨리 달려와서는 시위를 주도하던 조기신 유희철 장상용 등 결사대원들을 체포해 끌고 갔다. 뜨거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어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저 멀리서 백마를 탄 사람이 마치 장군처럼 나타났다. ‘결사대 유봉진’이라는 글씨가 쓰인 태극기를 어깨에 두른 결사대장이었다. 유봉진은 종루(현재 강화읍 관청리 김상용순절비가 있는 곳)에 올라 종을 쳐 군중을 불러 모았다. 싸늘하게 가라앉았던 군중이 다시 함성으로 화답했다. 일경은 유봉진도 체포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용납하지 않았다. 유봉진과 시위 군중은 한국인 순사들에게도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촉했다. 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일경은 철수해버렸고 시위대는 군청으로 몰려갔다. 강화군수 이봉종에게도 조선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했다. “만약 응하지 않으면 군청으로 들어가 청을 파괴하겠다.” 결사대의 겁박에 질린 군수는 마지못해 만세를 불렀다. 다음 목표는 경찰서였다. 시위대는 경찰서를 완전히 포위한 다음 돌다리에서 잡혀간 결사대원들을 석방할 것과 시위 군중에게 칼을 빼어든 순사보 김덕찬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경찰은 시위대의 위세에 굴복해 체포한 결사대원들을 풀어주었다. 유봉진은 다시 시장에 모인 군중을 대상으로 연설했다. “파리강화회의에서는 조선인이 독립을 희망하는지 아닌지를 보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독립만세를 불러야 한다. 내일 정오에는 온수리에 모여서 만세를 부르며 점차 각 면을 돌면서 만세를 불러야 한다.”(‘예심종결결정서’) 군중은 내일을 기약하며 해산했다. 당시 일제 보고서와 시위 통계자료에는 군청 앞에 모인 군중은 5000∼6000명, 시장에 모인 전체 군중은 1만 명(혹은 2만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규모 면에서 강화도 만세운동은 3월 5일 서울 학생 시위, 3월 23일 경남 합천군 시위와 함께 한 집회에서 1만 명 이상을 동원한 대규모 운동 중 하나로 기록된다.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강화도 3월 18일의 시위에서는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유봉진이 군중의 폭력적 행동만큼은 적극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미의병 때의 경험에 비추어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와 군중이 희생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 마니산에 숨은 결사대장 기자는 10월 중순 의병운동과 3·1항쟁에 모두 참여한 유봉진의 행적을 찾아 강화도에 갔다. 의병 활동을 하다가 중국 만주 등으로 넘어가 해외 무장투쟁을 이어간 경우는 적지 않지만, 국내에 남아 두 운동에 모두 참여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동행한 강화3·1운동기념사업회 이은용 이사장(강화인문연구소 소장)은 “의병운동과 3·1만세운동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길상면 선두리의 선두교회 터가 바로 그곳.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들고 온 황도문이 다닌 예배당이자 3·1만세운동에서 길직교회와 함께 길상결사대의 주축을 이룬 교회다. 원 선두교회에서 300m쯤 떨어진 곳에 새로 지은 선두감리교회 마당에는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황도문과 교인들의 활약을 기록한 기념비도 있었다. 기념비는 이곳이 강화 3·1운동의 정신적 중심지라고 자부하는 듯 웅장한 모습이었다. 선두교회 바로 맞은편으로는 마니산 줄기 중 하나인 초피산(252.6m)이 보였다. 유봉진이 만세운동 후 일본 군경의 체포를 피해 숨어 있던 곳이다. 초피산은 크지 않은 산이지만 산세가 험해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런데 일경은 유봉진의 부모까지 잡아가 모진 핍박을 했다. 결국 유봉진은 자진 출두해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아내 역시 같은 혐의로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선두리에는 정미의병 운동의 자취도 남아 있다. 이은용 이사장은 선두교회와 바로 앞 초피산 사이를 길게 가르며 흐르는 길정천의 둑을 가리키며 ‘족실(足失)방죽’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의병장 이능권이 이끄는 의병부대(대동창의진)가 선두리 뒷산인 정족산 등지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전투에 패배한 일본군 30여 명의 다리를 잘라 방죽에 던진 곳으로 구전돼오고 있다는 것. 강화도의 3·1항쟁은 일본 군경의 강력한 탄압에도 만세 소리가 꺼지지 않았다. 1919년 3월과 4월에 걸쳐 만세 함성이 고을고을 메아리쳤고, 야간에는 횃불 시위도 전개됐다. 육지와 떨어진 섬에서 가열차게 전개된 강화도 만세운동의 저력은 무엇일까. “원래부터 강화도는 외세 침략에 맞서는 저항의식이 남달랐던 지역이다. 1866년 프랑스군의 강화도 점령(병인양요), 1871년 미국함대의 침략(신미양요), 1876년 강화도 연무당에서 맺은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등을 잇달아 겪으면서 강화인들은 국토 수호 의지를 강하게 다져왔다. 개항 이후 강화도만큼은 일본 자본과 상인들이 거의 침투하지 못했던 것도, 의병운동과 3·1운동이 한 축으로 연결돼 줄기차게 항일투쟁을 한 것도 이 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일 것이다.” 이은용 이사장의 말에서 강화도의 3·1운동 유적지는 ‘역사를 알아야 국혼(國魂)이 산다’는 말을 증명하는 현장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강화=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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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자들 대신… 개성 ‘여성 4인방’ 3·1운동 선봉에 섰다

    시간을 거슬러 99년 전인 1919년 10월 초, 추석을 며칠 앞둔 경성(서울) 서대문감옥의 여옥사 8호 감방은 벌써 한겨울로 접어들었다. 햇볕이 들지 않는 바닥은 빙판처럼 차가웠고 몸은 오슬오슬 떨렸다. 일여덟 명의 독립만세운동 ‘여전사’는 감방에서 추위를 이기려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개성(당시 경기도 소속)에서 3·1항쟁을 주도한 어윤희 권애라 신관빈 심명철, 수원에서 기생 만세운동을 일으킨 김향화, 천안 아우내장터(현 병천)의 만세운동으로 공주감옥에 수감됐다가 8월에 이감돼 온 유관순 등이 바로 그들. 8호 여감방생들은 가족과 한가위를 즐기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해 가을을 보내고 있었다. 그새 또 사람이 늘어났다. 경기 파주 지역 3·1항쟁을 이끈 구세군 사령 부인 임명애가 출산이 임박해 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출산 한 달 만인 11월에 신생아와 함께 감방으로 돌아왔다. 신생아도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은 남편(염규호)마저 투옥 중이어서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날씨는 점점 매섭게 추워져 기저귀가 마르지 않아 아이의 대소변을 해결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감방 시설은 극도로 열악했다. 냉난방은 고사하고 별도 화장실이 없어 수감자들은 나무로 만든 통에다 볼일을 해결했다. 급식은 더 형편없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콩밥 한 덩이와 배추 몇 조각이 둥둥 떠 있는 소금국, 무장아찌 두어 쪽이 전부. 끼니는 개인별 형량과 노역 강도에 따라 9등급으로 차등을 두어 배급됐으나 늘 양이 모자랐다. 그럼에도 8호 감방생들은 자신이 먹을 음식을 조금씩 덜어 영양 부족에 시달리는 산모와 신생아를 챙겨주곤 했다. 8호 감방생들의 신분은 다양했다. 여학생(유관순), 교사(권애라), 기생(김향화), 시각장애인(심명철), 출산부(임영애), 교회 ‘전도부인’(여성 전도사·어윤희, 신관빈) 등 제각각이었지만 모두들 3·1항쟁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으로 강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노래로 수감 생활의 고통을 달래기도 했다. 이화여전 출신으로 유관순의 선배인 권애라는 스물두 살 동갑내기인 기생 김향화에게 저녁마다 ‘개성 난봉가’나 ‘평양 수심가’ 등 노래를 배웠다. 김향화는 권애라로부터 서양 가곡을 배우면서 서로 의지했다. 노래 실력이 “기생 웃길 간다”(기생보다 잘한다는 뜻)는 칭찬까지 들은 권애라는 신분과 계급에 구애받지 않는 신여성이었다(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 그는 왼팔 겨드랑이 안쪽에 태극 문양 문신을 새겨 넣을 정도로 열혈 애국지사였다. 감방이라고 해서 독립운동의 열기가 멈춰진 것은 아니었다. 해가 바뀌어 1920년 3·1독립만세운동 1주년이 다가오자 8호 감방생들은 또다시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나이가 가장 많은 맏언니이자 감방장인 어윤희(1881∼1961, 당시 38세)를 중심으로 감방 동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벽을 두들겨 암호화한 신호를 주고받는 ‘통방’, 즉 타벽통보법을 통해 옆방의 동료들과 정보를 교환했다. 당시 여옥사는 2개 동에 모두 17개의 감방이 갖춰져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주로 구치감(미결감)으로 사용되던 여옥사 8호 감방 옆으로는 비밀결사체 대동단의 여성 대표를 맡아 독립운동을 한 이신애, 유관순의 스승인 이화학당 교사 박인덕, 정신여학교 학생 이아주 등이 수감돼 있었다. 1920년 3월 1일 오후 1시경, 여옥사는 물론이고 서대문감옥 전체가 순식간에 독립만세 현장으로 바뀌었다. 일반 잡범까지 포함해 3000명이 넘는 수감자들이 일제히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동시에 변기 뚜껑으로 철판을 두드리고 문짝을 발길질하는 행동으로 서대문감옥은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여옥사 8호 감방은 투철한 항일정신으로 무장한 여성 투사들로 인해 ‘옥중 투쟁본부’라는 별칭도 붙여졌다.(김삼웅,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 개성의 여장부 ‘어부인’ 9월 추석 연휴에 기자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여옥사 8호 감방을 찾았다. 청명한 가을 날씨임에도 복원된 여옥사의 모습은 을씨년스러웠다. 여옥사에는 당시 수감됐던 인물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남성 못지않게 치열했던 여성들의 독립운동사가 이곳에 압축돼 있는 듯했다. 8호 감방생 중 개성 지역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서대문감옥의 수감자들은 민족대표 48인을 비롯해 3·1항쟁이 발생한 지역에서 주동적 역할을 한 남성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단 한 군데, 개성만은 예외였다. 거사 준비와 진행이 모두 여성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뤄졌고 만세운동의 주역들이 여옥사 8호 감방에 함께 수감됐던 것.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60km 남짓한 개성은 교회 조직을 통해 일찌감치 경성의 3·1운동 계획을 접하고 있었다. 33인 민족대표 중 한 명인 오화영 목사가 보낸 독립선언서가 2월 말 이미 개성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개성에 연고를 둔 오화영마저 “개성에서는 너무나 일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선언서도 조금만 보내겠다”(‘이만규 신문조서’)고 한탄할 정도로 독립만세운동 열기는 식어 있었다. 독립선언서를 대중에게 배포하겠다고 나서는 남성들도 없었다. 심지어 ‘불온한’ 독립선언서 보관마저 저마다 떠넘기는 바람에 교회 예배당 지하 어두운 곳에 방치돼 있다시피 했다. 이때 ‘어부인’이라고도 불리던 어윤희가 나섰다. 그는 독립선언서 배포와 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듣고 흔쾌히 자청했다. 남편이 동학군으로 출전했다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바람에 열여섯 살 소녀 과부가 된 어윤희는 34세 때 개성 미리흠여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이후 교회 전도부인으로 활동해온 여장부였다. 그는 권애라 신관빈 심명철과 함께 교회의 부인들, 호수돈여학교와 미리흠여학교 학생들을 규합해 거리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만세운동도 못 하는 ‘부끄러운 도시’가 될 뻔했던 개성은 어윤희에 의해 겨우 체면을 차릴 수 있게 됐다.(박용옥,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여성운동’ 편) 거사는 경성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맞춘 3월 1일 오후 2시. 어윤희 등은 읍내 만월정(滿月町), 북본정(北本町), 동본정(東本町)의 각 거리에서 조선독립선언서를 당당하게 팔에 걸고 배포하면서 3·1항쟁의 시작을 알렸다.(‘경성지방법원판결문’, 1919년 4월 11일) 여성들의 주도로 시작된 3·1항쟁은 처음 예상과 달리 개성 장안을 애국적 열기로 들끓게 했다. 어윤희 등의 애국 행동을 지켜본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은 미리 자퇴서를 학교에 써내놓고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결사대까지 조직했다. 미리흠여학교 출신의 시각장애인 심명철은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 대열에 서서 열변을 토했다.(박용옥,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 15, 16세 이하의 소학교 생도들로 구성된 소년대 수백 명도 선죽교에서부터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수천 명 군중이 합세해 일인(日人) 집에 게양된 일장기를 찢어버리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일제 파출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는 등 과격한 시위도 감행했다.(이병헌, ‘3·1운동비사’) 이후 어윤희 등 4명은 주동자로 지목돼 일제 경찰에 연행됐다. 어윤희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끌려가 신문을 받으면서도 의기를 굽히지 않았다. “저 앙큼한 년을 봐라! 다 알고 있는데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저 년을 발가벗겨라” 하고 호통치는 검사에게 어윤희는 “내 몸에 누가 손을 대느냐? 발가벗은 내 몸뚱이를 보기가 그렇게 소원이거든 내 손으로 옷을 벗으리다” 하고는 옷을 훌훌 벗어버렸다. “자, 실컷 보시오. 당신 어머니도 나 같을 거고 당신 부인도 나와 같을 거요.” 어윤희의 서슬 퍼런 소리에 검사가 오히려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심명철은 “장애인이 무슨 독립만세운동을 하느냐”는 추궁에 “내 눈이 멀었다고 내 마음도 먼 줄 아느냐!”며 당당하게 맞섰다.(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 실패로 돌아간 여성 ‘황국신민화’ 일제는 개성과 수원을 포함해 전국 각지에서 여성들이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서고, 특히 어린 10대 여학생들까지 참여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개성―여학생이 시작’ ‘평양―여학생이 만세’ ‘고양―여학생을 꼬여’ ‘부산―여학생의 음모’ 등 기사로 여학생들의 만세운동에 비상한 관심을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것이 3·1항쟁에서 여학생들의 활약은 일제 식민지 교육정책의 실패를 드러낸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여성 정책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썼다. 1907년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을 용이하게 통치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부녀자들을 허물어뜨려야 한다는 지침을 내린 이후, 일제 총독부 관리들은 여성들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주력했다. 무조건 복종형 교육으로 길러진 여성들을 통해 그 자녀들은 저절로 일본의 충량한 황국신민이 될 수 있으며, 조선인의 민족정신도 자연스럽게 말살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일제는 이런 교육정책으로 의도하는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3·1항쟁에서 여학생들은 일제의 기대를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오히려 여성들은 일경의 강경 진압으로 남성들이 만세운동을 멈칫거릴 때마다 먼저 나서서 시위를 주도할 정도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서울의 공립 여고보 학생들이 거리의 군중 가운데서 용감하고도 눈에 잘 띄는 지도자들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Korean Independence Outbreak Beginning March 1st, 1919’, 서양인 선교사들이 작성한 3·1운동 발발 보고서) 일제는 여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세 시위에 나선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학생들을 검거하고 신문하면서 배후 조종자를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었다. 체포된 여학생들을 발가벗긴 채 기절하도록 때리고, 깨어나면 세워놓은 거울 앞에서 고양이처럼 기어가게 하기도 하고, 찬물 끼얹기와 인두 담금질을 번갈아 하기도 했으며, 음모(陰毛)를 뜯어내는 등의 비인간적인 악행을 가했다.(‘北京 데일리뉴스’ 1919년 4월의 보도 기사 발췌) 여학생들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목포 정명여학교 학생 김정애(당시 14세)는 당당하게 말했다. “일본 사람들은 어른만 애국심이 있고 아이들은 애국심이 없는 식충이들만 산다는 이야긴가요. 조선 사람은 삼척동자도 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요. 우리들은 벌써 14, 15세의 장성한 처녀들이에요.”(최은희, ‘한국근대여성사’) 한국 여성들의 독립만세운동은 외국 언론과 선교사들을 통해 해외에도 알려졌다.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에 저항한 민족운동가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당시 16세의 딸 인디라 간디(1917∼1984)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민족은 자신들의 이상을 위해 희생하고 순국했다”며 특히 여성들의 활약을 강조했다. “일본인이 한민족을 억압한 것은 역사상 보기 드문 쓰라린 암흑의 일막이다. 코리아에서는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여성과 소녀가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안다면 너도 틀림없이 깊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세계사 편력’) 실제로 여성들은 3·1항쟁에서 비폭력 저항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됐다. 여학생의 경우 경성 시내 소재 10개 여학교의 학생(1929명) 중 99.8%(1926명)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경성 시내 여학교 만세사건 보고공판 개황, 1919∼1929년). 또 1919년 한 해에 전개된 만세운동으로 검거된 여성은 471명에 이르렀다(조선총독부 법무국 자료). 당시 사회적 연약 계층으로 취급받던 여성들이 참여한 3·1독립만세운동은 이후 대한민국 임시 헌장에 ‘남녀노소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는 원칙을 명문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 최초의 남녀평등주의는 이렇게 탄생했다.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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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생검사날… 藝妓 김향화, 동료 30여명 이끌고 “대한독립만세”

    고향은 경성(서울), 1897년생, 본명은 순이(順伊), 10대 나이에 ‘향기로운 꽃’이란 이름으로 기적(妓籍)에 오른 수원 기생 김향화(金香花). 갸름한 얼굴에 주근깨가 운치를 더하고, 맵시 동동한 중등 키에, 성품은 순하고 귀염성이 있다. 검무·승무·정재무·가사·시조·경성잡가·서관소리·양금치기 등 기예에 막히는 것이 없는 데다 탁음이 섞인 듯한 애원성(哀怨聲)의 목청은 사람의 마음을 구슬프게 한다.(1918년 간행된 ‘조선미인보감’의 김향화 묘사) 3·1항쟁이 일어난 1919년, 스물두 살이던 김향화는 수원지역 요릿집에서 가장 즐겨 찾는 일등(1패) 예기(藝妓)였다. 당시 수원군 수원면 남수리의 수원예기조합(수원기생조합) 취체역(주식회사 이사)도 맡고 있었다. 수원 유지 및 지식층과의 교분으로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해 3월 독립만세운동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다. 25일자 ‘매일신보’ 3면에는 기생까지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생이 앞(장)서서 형세가 자못 불온’하다는 제하의 이 기사는 6일 전인 3월 19일 경남 진주에서 기생들이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6명이 체포됐으며, 그 후에도 진주는 여전히 불온한 기운이 가득하다는 내용을 담았다. 독립만세운동을 ‘불온한 소요사건’으로 몰아가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논조는 당시 읽는 이의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유일하게 한글로 발행된 신문지면의 행간을 통해서 세상사를 얼추 헤아려볼 순 있다. 진주 기생들이 펼친 운동의 실상은 이랬다. 진주읍 장날인 3월 18일 학생, 농민, 장꾼, 심지어 걸인들까지 나선 가운데 대규모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일제가 ‘기생독립단’이라고 표현한 진주 기생들이 시위에 동참해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악대를 선두로 한 기생독립단은 군중과 함께 남강 변두리를 둘러 논개의 자취가 남아 있는 촉석루를 향해 행진했다. 진주 기생들은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선배 의기(義妓) 논개의 애국충정을 본받고자 했다. “우리가 죽어도 나라가 독립이 되면 한이 없다”고 외치던 기생 6명은 일제에 검거됐다. 기생까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주는 독립에 대한 열망의 기운이 식을 줄 몰랐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 수원을 대표하던 기생인 김향화는 진주 기생들의 행동에 자부심과 함께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또한 기생이기 이전에 망국의 아픔을 함께하는 대한의 딸이었다. 독살 의혹이 난무한 고종의 성복(成服·상복을 입는 의례)날인 1월 27일, 그는 20여 명의 수원 기생과 함께 깃옷 소복 차림으로 나무 비녀를 머리에 꽂고, 짚신을 신은 채 경성으로 올라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통곡을 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수원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청년 학생들의 방화수류정 횃불시위(3월 1일)와 시장 상인 및 노동자들의 잇따른 만세운동이 모두 수원예기조합의 지척 거리에서 벌어졌다. 이를 모두 지켜봤던 그는 마침내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서도홍, 이금희, 손산홍 등 수원에서 활동하는 30여 명의 동료 기생이 그와 뜻을 같이했고, 즉시 독립만세를 외칠 때 쓸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준비에 나섰다. ○ 화성행궁에서 자행된 성병검사 거사 날은 3월 29일 토요일. 수원 기생들이 정기 위생검사를 받는 날이었다. 말이 정기검진이지 치부를 드러내고 성병 검사를 받는 치욕스러운 날이다. 일제는 의도적으로 조선시대의 전통적 관기(官妓) 신분이던 예기와 매음녀인 창기(娼妓)를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공창제를 강행했다. 예기든 창기든 가리지 않고 기생조합에 가입했다면 정기적으로 위생검사를 거쳐야만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전통적 기생, 즉 예기들은 비록 천하게 대우받긴 했지만 관(官)에 소속된 신분이었다. 서울과 평양 등 전국 각지의 예기들이 고종의 승하를 애달파하며 예를 갖췄던 것도 스스로가 궁인(宮人)이라는 정체감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예기들은 예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학문을 겸비한 신여성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강압적이고도 비인간적인 위생검사를 받게 되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생들이 위생검사를 받는 자혜의원도 정조 임금이 지은 화성행궁의 정전(正殿)인 봉수당(奉壽堂)에 자리 잡고 있었다. 봉수당은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1795년 윤 2월 13일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른 유서 깊은 곳이다. 봉수당 진찬연에는 궁중 관기를 비롯해 화성부 소속의 지방 관기 13명이 참여해 잔치를 빛냈다. 화성부 지방 관기는 바로 김향화가 이사로 있는 수원예기조합의 ‘탯줄’ 같은 곳이며, 나라님이 머물던 화성행궁은 수원 기생들의 친정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의미가 담긴 화성행궁에 일제는 의도적으로 식민지 행정기구와 병원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조선을 짓밟았다.(이동근, ‘1910년대 기생의 존재양상과 3·1운동’) 이를 잘 알고 있던 김향화는 이곳을 독립만세운동 장소로 결정했다. 오전 11시 30분, 그는 30여 명의 기생을 이끌고 자혜의원 뜰 앞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의원 측이 내쫓자 이들은 멈추지 않고 바로 경찰서 앞으로 나아갔다. 병원 바로 앞에는 총검을 든 순사들이 지키고 있는 수원경찰서(화성행궁 북군영 터)가 위치했다. 당시 수원의 일경들은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바로 전날까지 수원면 곳곳에서 20∼30명 단위로 만세운동이 펼쳐진 데다 인근 사강리에서는 시위를 진압하러 간 수원경찰서 사법계 주임 노구치 고조(野口廣三) 순사부장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다가 시위대의 돌에 맞아 죽는 일까지 생겼기 때문이다. 수원 기생들은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던 수원경찰서 앞에서 대범하게 만세운동을 벌였다. 결국 그들은 무자비하게 진압됐다. 30여 명 중 19명은 10대의 앳된 소녀였다. 이들은 만세운동 뒤에 죽음의 공포와 끔찍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했다. 기자가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화성행궁을 찾은 9월 9일. 일요일 오전인데도 방문객들로 넘쳐났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행궁을 보려는 이들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기까지 무려 30분 이상을 꼼짝없이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수원 기생들이 만세를 부른 자혜의원(봉수당)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봉수당은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 장면을 연출한 무대로 꾸며져 있었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 궁녀 등을 묘사한 밀랍인형이 당시 조선 왕실의 흥겨우면서도 진지한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서고 기생들이 만세운동을 했다는 흔적은 볼 수 없었다. 문화관광해설사는 정조와 화성행궁의 사연만 관람객들에게 설명해줄 뿐이었다. 기자가 만난 방문객 대부분은 이곳이 기생들의 만세운동 현장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서울에서 온 한 여성 방문객은 수원 기생들이 봉수당 앞에서 만세운동을 했다는 기자의 설명에 “그랬어요?”라며 놀라워했다. 그날 종일 기자의 머릿속엔 ‘스스로를 관기(官妓), 궁인(宮人)으로 자부한 수원 기생들의 독립만세운동 역시 역사에서 잊혀질 일은 결코 아니다. 화성행궁을 빛내줄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역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사상기생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당시 수원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노래하고 춤추는 게 전부인 줄 알았던 기생들이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것 자체가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곱디고운 기생들이 일경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하며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됐다. 기생들이 체포된 날 밤, 300명의 학생 상인 노동자 등이 수원면(현 수원시내) 거리로 나왔다. 시위대는 기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수원경찰서 병력과 소방대원 등이 총출동해 진압에 나섰다. 시위는 밤늦게까지 격렬하게 이어졌고, 관공서와 민가 6채가 파괴되고 16명이 구속되며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튿날인 30일에도 거리 곳곳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경기도 장관은 “(이 날은) 수원 장날로서 일반으로 살기를 띠고 위험의 경향이 있으므로 보병 제 79연대로부터 병원(兵員)을 파견할 터”(‘경기도장관 보고서’)라고 할 정도로 수원 상황을 엄중하게 보고 있었다. 실제로 수원의 만세운동은 인근 면리로 확대됐고, 3·1항쟁의 최고 격전지로 이미 변해가는 중이었다.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이전 진주 기생들의 운동 방식과 달랐다. 진주 기생들이 지역민들의 만세운동에 합류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수원 기생들은 스스로가 판단하고 독자적으로 시위를 주도했다.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 후 전국 각지의 기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일이 잇따랐다. 3월 31일 경기도 안성에서는 변매화 등의 기생들이 만세운동을 선도해 1000여 명의 군중이 호응했다. 4월 1일 황해도 해주에서는 기생들이 독립만세 결사대를 조직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낸 피로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이끌었다. 4월 2일 경남 통영에서도 기생 만세운동이 치열하게 진행됐다. 기생 이소선과 정막래 등은 소복 차림으로 통영 시장거리에서 3000여 군중 시위에 앞장섰다. 한편 수원 만세운동 주동자로 체포된 김향화는 2개월여에 걸쳐 진행된 감금과 고문 끝에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 분국에서 재판을 받고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매일신보’는 그의 재판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보도했다. 이후 김향화는 경성의 서대문 감옥에서 유관순 등 여성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감방 생활을 하다가, 만기를 1개월 앞두고 가출옥했다. 수원 기생들의 독립운동을 연구해온 이동근 학예사(수원시청)는 “그가 형기를 다 채우기 전에 가석방된 것은 고문 같은 가혹 행위로 인해 수감 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상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그의 행적은 어디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정부는 2009년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훈·포장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의 훈·포장을 찾아갈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 현재 수원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일제는 김향화처럼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기생들을 ‘사상기생’이라고 불렀다. 3·1운동의 기운이 잦아들던 1919년 9월, 경성의 치안 책임자로 부임한 지바 료(千葉了)는 한국인 기생들을 만나보곤 혀를 내둘렀다. “우리가 처음 부임하였을 때 경성(서울) 화류계는 술이나 마시고 춤이나 추고 놀아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800명의 기생은 화류계 여자라기보다는 독립투사였다. 기생들의 빨간 입술에서는 불꽃이 튀었고, 놀러 오는 조선 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사상을 불 지르고 있었다.”(‘朝鮮獨立運動秘話’) 실제로 당시 일본 경찰은 경성 시내 100여 곳의 요정을 ‘불온한 소굴’로 보았다. 지바 료는 “총독부가 아무리 좋은 정치를 하고, 군대와 경찰이 아무리 호령을 해도 사회의 이면에 불온한 소굴이 남아 있는 한 조선 사회의 치안 유지는 성공할 듯싶지 않다”고 한탄했다. 불온한 소굴의 주인공들인 기생들은 이미 각성한 신여성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셈이다.수원=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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