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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의 대규모 은퇴를 앞둔 2000년대 일본에서는 ‘정년연구 붐’이라 할 정도로 퇴직과 정년을 화두로 한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꼽을 수 있는 베스트셀러만 해도 여럿이다. 제목만 소개하자면 ‘마음의 정년을 극복하라-직장인 40세, 부업(副業)을 권함(2015년)’ ‘(있을)장소가 없는 남자, (쓸)시간이 없는 여자(2015)’ ‘정년여성(2015)’ ‘정년후(後), 50세부터 삶의 방식, 끝내는 방식(2017)’ 등 정년을 위한 마음의 준비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 ‘정년 고래(2001)’ ‘외로운 배(孤舟·2013)’ ‘끝난 사람(2015)’ 등 정년을 맞은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도 있다. 이런 책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지적하는 게 있다. 정년이라 하면 처음에는 자산관리 등 노후의 ‘돈’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지만, 실제 정년 후를 겪은 사람일수록 삶의 활력과 즐거움, 보람을 찾아 헤매는 수요가 많더라는 것이다. 그만큼 노후에 닥치는 고독과 무료함, 우울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얘기다. 각자 준비 태세에 따라 60세 이후 주어지는 8만 시간(90세까지 생존하는 것을 가정할 경우 실제 활동 시간)은 공포의 시간이 될 수도, 풍요로운 결실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솔직해질 수 없는 정년퇴직자의 속내 회사와 직장인 관련 책을 많이 쓴 구스노키 아라타(楠木新)는 일본 최고의 생명보험회사 경영관련 부서에서 일하며 50대부터 집필을 시작했다. 60세 정년 후에는 책 쓰고 강연 다니는 ‘비즈니스평론가’로 전업했다. 수많은 퇴직자와 예비 퇴직자를 만났지만 정년 퇴직자의 경우 속내를 제대로 털어놓는 사람이 없어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다”느니 “백수가 과로사한다”며 별로 바쁠 것 없어 보이는 일상에 대해 큰소리로 떠벌이는 사람은 많아도 정년 퇴직자가 겪는 당혹감과 미묘한 심리 변화, 행동의 변화를 진솔하게 고백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어쩌다 적나라한 속내를 털어놓는 사람은 한바탕 나락에 빠져 허우적대다 벗어난 경우였다. “지금은 극복했지만 전에는 이랬다”는 식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어렵게 발굴했다는 사례 한 토막을 예로 들자면 “출근을 하지 않게 되니 밤낮이 바뀌고 요일 감각이 사라졌다. 무기력해지고 TV 앞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나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집안에 내가 머물 장소가 없다”거나 “할 일이 없는데 자꾸만 초조해진다”는 사람, “싫은 상사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더라”는 사람도 있었다.진솔한 육성 채록(採錄)이 힘들기 때문인지 소설의 픽션 스토리가 더욱 생생하게 퇴직자의 마음을 보여준다. 이런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됐을 뿐 아니라 소위 ‘정년소설’이라는 장르까지 형성되는 분위기다.○ “높이 올라갔을수록 추락의 고통은 크다.” 개인적으로는 일본 지방신문에 연재됐다는 소설 ‘끝난 사람’이 충격적이었다(한국에도 번역본이 나와 있다). 소설의 형식을 빌어 정년 퇴직자의 구체적인 속내가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소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건 완전 생전 장례식이구만.” 주인공이 만63세로 정년퇴직하는 날이다. 업무가 끝나는 시각은 재깍재깍 다가온다. 퇴근 시각에 맞춰 방을 나와 건물 입구에 나서면 사원들이 죽 늘어서 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며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여직원들이 내미는 꽃다발과 선물가방. 건물 앞에는 회사에서 그날 하루만 내주는 고급 세단차가 대기해 있다. 몸을 구부려 차에 타면 직원들이 차를 둘러싼다. 장례식에서 조문객들이 영구차를 둘러싸고 마지막 작별을 하듯. 세단이 미끄러지듯 출발하자 그는 고개를 돌려 회사 쪽을 물끄러미 본다. 이미 아무도 없다. 집에서도 가족들이 마련한 파티를 마친 뒤 잠자리에 드는 그는 내일 당장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난 ‘끝난 사람’이 된 거야…”. ○“자신의 과거 영광과 싸우지 말라.” 어디부터 잘못됐을까. 승승장구하던 회사 내 행로가 삐끗한 이래 이해할 수 없이 찾아오는 모멸의 순간들과 맞서며 그는 날마다 어디부터 잘못됐을까를 곱씹는다. 회사 생활은 49세를 기점으로 급전직하했다. 명문대 출신으로 일본 최고의 은행에서 임원 승진 유력 후보로 꼽혔다. 그런데 승진 최종 경쟁에서 고배를 마셨고, 사원 30명의 자회사로 파견 발령을 받았다. 그간 밤낮없이 뛰며 쌓아온 실적과 인맥이 모두 무용지물이 됐다. 처음에는 본사 복귀를 꿈꾸며 성과를 내보려 애쓰지만 아무도 그의 성과를 원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게 된 그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2년간의 고문직 제안을 거절하고 자회사의 대표이사 전무로 정년을 맞았다. “흩날리는 벚꽃도, 남아있는 벚꽃도, 어차피 지는 벚꽃”이라면서. 하지만 불완전 연소로 끝난 회사 생활에 대한 미련은 정년 이후로도 꼬리를 물었다. 소설은 “난 저런 사람들과 다르다”거나 “난 죽지 않았다”며 좌충우돌하는 주인공의 행보를 그려낸다. 자신의 과거 영광과 싸우며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갈등에 겉돌던 그는 오랜만에 들렀던 고향에서 희망을 찾아낸다. ○“인생 후반전으로 갈수록 모두 비슷해진다” 66세인 그가 귀향을 준비한다. 이기적이기만 했던 자신을 무조건 따뜻하게 맞아주는 시골의 노모와 “평범한 아이들”이라며 멀리했던, 하지만 자신을 스스럼없이 받아주는 고향 친구들 품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어릴 적 친구들과 지역사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늙은 노모를 모시며 지낼 생각에 설레는 그는, ‘끝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베이비붐 세대인 작가 우치다테 마키코(內館牧子)는 환갑을 넘기면서 정년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고 했다. 부쩍 늘어난 동창회에 나가보면 “뛰어난 수재도, 엄청난 미인도, 환갑과 정년을 지낸 뒤 만나면 다 비슷비슷해져있더라”는 것. 젊은 때 화려하게 활동한 사람이건, 불우한 회사 생활을 한 사람이건 정년 후에는 ‘그냥 보통사람’이 됐다. 인생 막바지에 가면 착지점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늘 세상과 연결돼 있으라” 한국인의 수명은 1960년 51.23세(UN 통계)에서 2018년 82.7세(보건복지부 기대수명)로 불과 50년 사이 30여 년이나 늘었다. 어찌 보면 지금은 급격한 변화 속에서 몸은 오래 살게 됐지만 그 내용은 채우지 못하는 과도기라 할 수 있다. 100세 카페의 기사에 대한 독자 반응에서 실버세대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나와 처지가 다른 남에 대해서는 모진 태도를 취하고 세대 간의 갈등 구도를 가져다놓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하지만 나의 부모,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행복해야 나도 그런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게 아닐까. 오늘도 누군가가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조직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세상 속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의 마음을 잠시나마 헤아려보고 자신에게도 언젠가 닥쳐올 그 상황을 상상해보고 준비하는 자세를 갖는다면 이 또한 성장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2016년 6월 전북 군산시 개정면에 터를 잡은 수페리체 아파트를 분양받은 A 씨. 당시 2018년 6월 완공 예정으로 모두 492가구가 분양받았다. 하지만 내 집 마련의 꿈에 이르는 길은 험난했다. 시행사 측은 자금 부족을 이유로 공사 기한을 3차례나 연기하더니 입주 예정일을 훌쩍 넘긴 지난해 1월 결국 사업을 포기했다. A 씨 등 계약자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이미 계약금과 중도금을 모두 납입한 상태였는데 그 돈은 어떻게 되는 건지 불안하기만 했다. 이처럼 아파트 분양 계약을 했는데 사업자의 부도나 사업 포기 등으로 분양이 어려워진다면 계약자에게 막대한 피해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을 만나도 보험이 있다면 안심이 되듯 아파트 분양 계약에서 발생한 사고에는 주택분양보증이 존재감을 발휘한다. A 씨 등은 내 집 마련은 못 했지만 주택도시보증공사(HUG)를 통해 그동안 낸 계약금과 중도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주택분양보증은 아파트 준공을 책임지거나 분양계약자가 납부한 계약금과 중도금을 환급해주는 보증 업무다. 한국에는 1993년 도입됐으며 공공기관인 HUG가 업무를 전담한다. 30채 이상 공동주택을 선(先)분양하는 경우 주택사업자들은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예기치 못한 보증사고가 발생하면 분양계약자는 자신이 납입한 대금을 돌려받는 ‘환급 이행’이나 HUG가 사고 사업장의 준공과 입주까지를 책임져주는 ‘분양 이행’ 중 한쪽을 선택할 수 있다. 군산 수페리체 아파트 계약자들은 계약금과 중도금을 돌려받는 환급 이행을 택했다. A 씨는 “HUG 덕분에 원활하게 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HUG 측에 따르면 공사는 설립 이래 27년간 608만 채에 대해 1034조 원 규모의 주택분양을 보증했다. 이 중 보증 사고가 난 사업장 33만 채에 대해 공사 비용과 분양대금 환급 등으로 4조2684억 원을 지출했다. 이는 HUG가 벌어들인 분양보증료 수입 5조7193억 원의 75%에 해당한다. 분양 보증은 건설회사가 연쇄 도산하는 경제위기 때에 힘을 더욱 발휘한다. 가령 1997∼2000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2008∼2010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사용된 보증이행 금액은 각각 3036억 원과 2조3639억 원으로 지금까지 사용한 금액의 63%에 이른다. HUG 관계자는 “주택분양 보증이 경기 침체기에 주택시장을 안정화하고, 국민 재산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분양 관련 사고는 한 사업장에서 발생하면 다른 사업장으로 위기가 도미노처럼 확산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나아가 가구에서 차지하는 부동산 자산 비중이 72%(2020년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제때 제대로 된 분양보증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다. HUG는 2020년 말 현재 6조7546억 원의 자금을 확보해 만일의 위기에 대비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장기화하는 코로나19 상황이 서민 경제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고 판단해 주요 보증료율을 내리고 개인채무자 지연배상금을 40∼60% 감면해 주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39만 가구가 1645억 원의 보증료를 할인받고 개인채무자 1241명이 14억 원의 지연배상금 감면 혜택을 받았다. 이 조치는 올 6월 말까지 연장된다. HUG 관계자는 “정부의 주택공급 확대 정책에 따라 주택시장과 서민 경제 보호를 위한 HUG의 공적 역할도 확대되고 있다”며 “앞으로도 주택업계와 협력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일본에서 고령자 기준을 75세로 올린다거나 정년퇴직 연한을 70세로 상향하려 한다는 뉴스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 약간 걱정스럴 때가 있다. ‘정년을 없앤다’, 혹은 ‘정년을 연장한다’고 하면 나이 먹어서도 예전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막연하게 떠올리는 분들이 있어 보여서다. 일본에서는 2013년 4월부터 ‘고령자 고용안정법’이 시행돼 퇴직하는 직원이 원할 경우 기업이 65세까지 고용을 보장하도록 의무화했다. 한국 정부가 유사한 제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하니 실제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준비없이 맞은 정년, ‘재고용’ 계약서에 사인했지만 2005년부터 고령자가 인구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돌입한 일본은 “고령사회의 고민을 기업에 떠넘긴다”는 비판 속에서도 고령자 고용안정법 시행에 들어갔다. 다만 고용연장 방식은 기업 측에 맡겼는데 △정년 연장 △계속고용(재고용) 제도 도입 △정년 폐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기업이 계속고용제도를 택했다. 일단 정년퇴직을 한 직원을 촉탁 또는 계약직으로 재고용하는데, 매년 계약을 갱신하는 방식이 많다. 월급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고, 사회보험이 보장되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다. 많은 기업이 이들에게 합당한 일거리를 찾아주지 못해 고심에 빠졌다. 이렇다보니 정년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경우는 드물고(회사, 개인별 차이는 있다), 직책 없이 보조적인 업무가 주어지는 게 대부분이다. 주 3~4일 근무 조건이거나 일정한 사무실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노느니 일하는 게 낫다”며 재고용 계약서에 사인을 한 퇴직 당사자들도 별로 행복하지 않다. “그간 쌓아온 경험과 역량을 전혀 살릴 수 없다”거나 “이런 일 하려고 이 나이에 회사에 나오라는 거냐”는 불만이 터져나온다. 일부 회사의 경우 “(정년) 전과 하는 일이 똑같은데 급여가 절반 이상 깎였다”고 분개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래서 5년간 일하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뭐야, 남은 날이 그렇게 짧아?” 선택지를 하나 더 갖게 된 예비퇴직자들은 어떨까. 2017년 발간된 ‘정년후(後)’ 란 책에 정년을 코앞에 둔 직장인 5명이 ‘한 잔’하며 나눈 대화가 소개됐다. A씨가 “일을 그만두면 갑자기 확 늙는다고 한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회사에 다니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자 B씨는 “쉬고 싶은데 집사람 눈치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집에 있겠다고 하면 내쫓을 것같은 분위기”라며 회사에 남겠다고 했다. C는 “다른 계획이 없어서” 일하겠다고 했다. D도 “밖에 나가 새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익숙한 일을 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했다. 한참 얘기들이 무르익다가 A가 말했다. “잠깐…. 우리 아버지는 60대 후반에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65세 정년 뒤 몇 년밖에 없다는 얘기가 되는데….” “뭐야, 남은 날이 그렇게 짧아?” 모두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연공 임금체계와 정년의 상관관계 정년(停年). 직장에서 물러나도록 정해져 있는 나이를 말한다. 한국도 일본도 법정 정년은 60세다. 정년은 당연한 제도처럼 보이지만 기묘한 제도이기도 하다. 자영업자나 농민 어민에게는 정년이 따로 없다. 선진국의 경우 일반적인 은퇴연령은 제시되지만 의무적인 정년 개념은 없다. 미국은 ‘고용에서의 연령차별금지법’을 시행해 나이로 인한 해고를 불법화했다. 2001년 ‘정년파괴’라는 책을 낸 일본의 노동경제학자 세이케 아쓰시(淸家篤)는 정년의 존재이유를 기업내 연공적인 임금체계에서 찾았다. 기업은 사원이 젊을 때는 공헌도보다 적은 임금을 주고 연조가 올라갈수록 급여를 늘려 부족분을 보상해주는데, 이를 일정 선에서 멈추기 위해 정년을 설정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1998년 고령화대책으로 정년을 60세까지로 연장할 때 도입한 ‘임금피크제’도 이런 논리에 따랐다. 다른 한편으로 정년은 노동자 입장에서는 고용을 보장해주는 보호막 기능을 한다. 정년제도가 있는 회사는 사원을 마음대로 자르기 어려워진다. ○“60~75세가 가장 빛나는 나이” 통계청이 지난해 말 발표한 2019년 생명표를 보면 2019년 출생아의 기대수명은 83.3년이다. 집계가 시작된 1970년 62.3세에서 20년 이상 늘었다. 이제는 각자 대략 90세까지는 산다고 생각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다. 다만 유의해야 할 점은 건강수명이 따로 있다는 점이다. 건강수명은 질병치레 없이 건강하고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는 기간을 말한다.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27일 발표한 ‘제5차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에 따르면 한국인의 건강수명은 2018년 기준 70.4세다. 노후를 연구하는 일본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60~75세가 가장 빛나는 시기”라는 말이 많이 들려온다. 75세를 넘어서면 시름시름 아프기도 하고 사회 활동에서도 의욕과 능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물론 개인차는 있다). 의료 및 복지학계에서 75세부터를 ‘후기고령자’로 분류해 돌봄이 필요하거나 의료비 부담이 늘어나는 시기로 상정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놀랍게도 102세에도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이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저서 ‘100년을 살아보니’에서 똑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100년을 살아보니 내 인생의 황금기는 60~75세 기간이었다”는 것. 이 무렵이 학문에서도 인간으로서도 가장 많이 성장하고 깊어지고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김형석 교수의 학문의 경우 60세부터 새로 시작한 게 아니라 그 전부터 쌓아온 것들을 심화하고 꽃피운 시기가 60세 이후라는 뜻이 될 것이다.○한국의 직장인, “승진보다 정년이 중요” 결국 인생 후반기에 뭔가 새로운 시도하고 터를 잡는 시기는 60세 정년 뒤의 15년, 그 중에서도 건강수명 기간 내에 이뤄져야 한다. 회사에 5년 더 남아 ‘좀비 회사원’의 삶을 산다면 그 기간을 갉아먹는 게 된다. 많은 인생 2막 경험자를 만나본 일본의 전문가들은 회사원이 우동가게를 차리건, 교사가 작가로 변신하건, 공무원이 농부가 되건 새로운 일이 궤도에 오르는 데 통상 3년은 걸린다고 전한다. 조금이라도 건강과 기운이 있을 때 최종 30년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어영부영하다가 70세를 넘겨버릴 수 있다. 한국의 법정 정년은 2016년부터(300인 이하 사업장은 2017년부터) 60세 이상이 됐다. 그 전에는 회사마다, 직급마다 정년 체계가 달랐는데 대략 55~58세가 많았다. 하지만 60세 정년을 제대로 채우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게 ‘불편한’ 현실이다. 누구보다 직장인들이 이런 현실을 잘 안다. 2일 인크루트가 20~50대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직장인 절반 이상이 정년(52%)이 승진(19.4%)보다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승진’은 ‘창업준비(25.0%)’보다도 후순위였다. 화려한 승진보다 ‘가늘고 긴’ 직장 수명을 택할 정도로 직장인들이 체감하는 고용시장이 살벌하고 그들이 느끼는 미래는 불안하다는 말이 된다.○40~50대에 ‘마음의 정년’, 실질적 준비도 시작해야 여기서 다시 확인할 것은, 직장에서 정년까지 채울 가능성이 없다면 더더군다나 40~50대부터는 인생 2막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직장이라는 조직에서 떨어져나가는 외로움과 충격은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닥쳐온다. 그것을 제대로 예측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노후 충격을 피하고 두 번 세 번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일본의 인사 전문가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쓴 책 중 “입사 20년이면 마음의 정년을 하라”고 권하는 책이 있다. 정년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40~50대에 회사와의 관계를 객관화하고 조직보다 자신의 인생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의 독립을 하는 게 좋다는 것. 이런 쿨한 관계는 사실 회사측도 원하는 것이다. 60세부터 주어지는 인생의 자유시간은 약 8만 시간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20세부터 40년간 일한 총 노동시간보다 많다. 미리미리 이 시간을 잘 준비해 임한다면 행복하고 보람있는 노후가 조금은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까.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 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어느 나라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세대가 있다. 대개 머릿수가 많고 활동적이며 운도 좋은 베이비붐 세대가 그 주인공이다. 일본에서는 1947~1949년 사이 탄생한 약 800만 명이 그런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이른바 단카이((團塊·덩어리) 세대다. 경제 각료이자 작가였던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의 1976년 소설 ‘단카이의 세대’에서 나온 이름이다. 이들은 성장과 전성기를 지나 퇴직하기까지 전후 일본사회를 들었다 놨다 하며 영향을 끼쳤다.● 입시지옥에서 버블경제까지, 현대일본을 주도한 세대2004년 일본 연수 중 모 신문사가 주최한 심포지움에 간 적이 있다. 사회복지 관련 주제였는데, 수백 명의 청중 대부분이 늙수그레한 중년과 노인이라는 점에 놀랐다. 강연 뒤 질의응답시간에도 주로 노인들이 손을 들었다. 사회자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 젊은이가 발언했으면 한다”며 가물에 콩나듯 끼어있는 청년들의 질문을 유도했다. 명실공히 노인을 공경하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기자로서는 그런 분위기가 무척이나 생경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온갖 세미나와 문화행사를 찾아다니던 그들이 바로 단카이세대 혹은 그 윗세대였다.이들은 성장기에는 입시지옥의 주인공이 됐고 일부는 급진 사상에 빠져 좌파 시위를 주도했다. 그 유명한 전공투, 적군파 세대와 겹친다. 1960~70년대 산업현장에 뛰어들어 일본의 고도성장을 이끌었고 한두 시간의 통근시간을 감수하면서도 도심 외곽에 집과 주거단지를 지어 ‘마이홈’ ‘마이카’ 붐을 일으켰다. 1990년대 초 버블이 깨질 때까지 일본에 부동산 광풍이 몰아친 것도 이들의 수요 급증 탓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대접 받을 생각 없고 자존감 강한 노인 집단당시 30대 후반이던 내게 단카이세대는 가장 바람직하고 죽이 잘 맞는 아저씨 아줌마들이었다. 살짝 진보적이면서 정의감이 강한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세가 강했는데, 가령 한국인을 만나면 “우선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사과한다”며 고개를 숙이는 식이다. 묘하게 반골적이고, ‘(진보적인) 아사히신문 구독자가 가장 많은 집단’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요즘도 일본 국내 여론조사 결과를 연령대별로 보면 60대를 넘어갈수록 평화헌법 개정이나 보수집권세력에 반대하는 비중이 높다.이들은 심포지움 진행자가 홀대를 하건 말건, 누가 부르건 부르지 않건, 필요한 곳은 알아서 찾아다녔다. 머리가 희끗한 아저씨들이 잠바에 가방 하나씩 둘러매고는 청년들처럼 돌아다녔다. 공공도서관이나 서점도 이들의 차지다. 전철에서는 자리에 앉지 않는 게 당연하고 웬만한 거리는 건강을 위해서도 걸어 다닌다. 젊은이에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없다.● 일본 전체를 뒤흔든 단카이 세대의 퇴장이들이 일본의 법정 정년 연령인 60세가 되는 2007~2009년을 앞두고 온 사회가 다시 한번 들썩였다. 각계에서 정점에 오른 숙련된 인력 수백 만 명이 불과 3년 만에 떼 지어 사라진다며 불안해했다. 솔직히 ‘뭘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떠나’ 싶을 정도였다. 회사들은 몇 년 전부터 인수인계팀을 가동하는 한편, 이들이 퇴직한 뒤 가정과 지역사회에 소프트랜딩하는 것을 돕기 위해 사내교육 프로그램을 대거 도입했다.사회 전체적으로도 생산가능인력이 대거 피부양인력으로 변하는 부담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2006년 일본 정부는 아예 정년 뒤에도 이들을 회사에 붙잡아두기 위한 법 개정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결국 고령자 고용안정법이 개정돼 2013년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직원이 원할 경우 65세까지 고용이 의무화됐다. 다만 고용연장 방식은 기업에 맡겨 △정년 연장 △계속고용제도 도입 △정년 폐지 등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기업이 계속고용제도를 도입했다. 요즘 한국 정부가 유사한 제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일본의 정년제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일본노년학회, “고령자 정의를 75세로 올리자”2017년 일본노년학회는 고령자의 정의를 75세 이상으로 바꾸고 65~74세는 준고령자로 분류해 생산적 역할을 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노인들이 더 오래 일하고 세금을 내라는 뜻이어서 사회적 논쟁이 일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들은 가장 부유한 은퇴세대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한 몸에 받았다. 국민연금과 후생(직역)연금, 기업(회사)연금까지, 탄탄한 3중 연금 구조로 현역 월급쟁이 시절 못지않은 수입이 약속돼 있었다. 일본의 금융자산의 70%를 60대 이상 노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다만 이런 준비가 미흡했거나 불운이 닥친 노인들을 중심으로 점차 ‘하류노인’ ‘장수의 재앙’ ‘노후파산’ 등이 유행어가 됐다. ● 배우려는 자세, 내게 부족함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어느덧 ‘세상에서 가장 늙은 나라’가 된 일본의 사회상은 한국의 미래를 예측하거나 비교할 때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개인적으로는 단카이 세대의 특징을 나이 들수록 배우려 하는 자세에서 찾고 싶다. 앞서 심포지움의 예도 있었지만 문화센터와 대학들도 연배의 수강생들로 붐빈다. 2018년 아쿠다가와상 수상자는 63세 주부였다. 남편을 일찍 여읜 뒤 55세에 문화센터에서 글쓰기 강좌를 들은 것을 계기로 일본 최고의 문학상을 거머쥐었다. 퇴직 뒤 평생의 연구주제를 정하고 자료를 발굴하고 필생의 과업으로 책을 써내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무언가를 배우려는 자세는 자신에게 부족함이 있다는 걸 안다는 전제에서 생겨난다. 이들도 나이 들면서 조금은 고집불통이 되고 매너가 부족해지고 인색해지기도 하지만 자신을 낮춰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특히 인지증(치매)을 피하기 위한 노력에 필사적이다. 서점에서는 치매 예방을 위한 두뇌훈련용 연습장, 치매예방을 위한 음식과 운동법, 신문 칼럼이나 불경 등을 베껴쓰는 노트, 빈칸에 색칠을 하는 그림책 등이 불티나게 팔린다. ● 단카이 세대 닮은 386세대, ‘오랜 기회 독점’ 비난 새겨들어야일본에서 쏟아져 나오는 단카이 세대 관련 기사들을 보며 우리 386(1990년대에 30대, 1980년대 학번, 1960년대 생) 세대와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무엇보다 시대정신과 주장을 몸소 구현하는 대목이 닮았다. 운동권이 많았지만 대부분은 큰 불이익 없이 사회에 진출했고 각자 자리에서 두각을 나타내 출세의 사다리에 올라탔다. 너무 오래 기회를 독점하는 것 아니냐는 원성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아마도) 괜찮았다.아사히신문의 현대용어사전인 ‘지에조(知惠藏)’에서는 단카이 세대에 대해 ‘전교생이 전람회장에 들어갔는데 앞에서 너무 오래 감상하는 바람에 뒷줄에 선 후배들이 폐장 시간에 쫓기게 한 세대’라는 표현으로 단카이 세대의 오랜 기회독점을 비판했다. 마침 4월 치러질 서울시장 선거 주요후보는 10년 전과 같은 얼굴들로, 대부분 386세대다. 이들이 가진 경륜과 지식, 사회적 인지도는 그런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뭔가 아쉬움도 남는다. 어찌됐건 386의 맏형격인 1960년생이 지난해 법적 정년을 맞았다. 앞으로 이어질 386세대의 퇴장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아쉬워할지는 미지수다. 이들이 과거 노인들과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해보면서, 올해 72~74세를 맞이한 일본 단카이세대의 모습을 살펴봤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차 한잔 타임“우리가 아는 ‘노인’이 아니다.”이런 제하에 새로 법적 ‘노인’에 편입된 베이비붐 세대에서 희망을 보자는 지난주 ‘100세 카페’ 글에 많은 독자가 댓글로 의견을 주셨습니다.‘요즘 65세는 10살은 아래로 봐야 한다’거나 ‘멋진 노인이 늘고 있다’며 공감을 표하는 독자 여러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부모님께 감사한다’는 분도 계셨지요. 반면 노인들의 매너 없음과 불통 등을 흉을 보는 분도 간혹 계셨습니다. ‘활기찬 노인이란 도시부의 얘기일 뿐, 지방에는 기운없는 노인들이 많아 우울해진다’고 토로하는 독자도 계셨고, 현재의 베이비붐 세대는 부모세대와 자식세대의 부양 부담에 치이는 마지막 ‘낀 세대’라며 애환을 토로하는 의견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정년을 늘려야 한다거나 노인들에게 더 많이 일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았는데, 앞으로 곰곰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나이듦과 은퇴, 생명의 쇠퇴에 대해 뾰족한 답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같은 시대, 같은 사회를 살아간다 해도 저마다 삶이 다르니 일률적으로 ‘노인은 이렇다’거나 ‘이 길로 가야만 한다’고 단언하기도 어렵습니다. 흘러가는 세월을 막을 도리도 없는 노릇이죠. 하지만 어떤 시대건 우리 사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게 만들려는 노력은 필요합니다.가령 노인이 되어도 사회와 소통하고 자신의 역할을 갖고 조그만 수입이라도 얻을 수 있는 세상, 어르신들이 편안한 표정으로 웃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그 아이들도, 그 아이의 아이들도 살기 좋은 세상에 가까워질 확률이 커집니다. 주어진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되, 좀더 낫게 바꾸려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100세 카페는 이어집니다.}
은퇴야 어느 시대나 있게 마련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거친 뒤 등장한 베이비붐 세대의 존재감은 좀 각별하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베이비붐 세대가 2006~2007년을 기점으로 만 60세를 맞으면서 대거 은퇴 대열에 합류했다. 앨런 그린스펀이 2007년 낸 자서전에서 “세계가 은퇴 중”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다. 전후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이 두터운 인구 층이 무리지어 일선에서 퇴장하다보니 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세상도 들썩이지 않을 수 없다. 워낙 숫자가 많으니 세대갈등 양상도 나타나곤 했다. 가령 참견이나 가르침을 주려 하는 기성세대에 대해 한국에서는 “꼰대”, 영미권에서는 “오케이, 부머”라고 꼬집는 젊은 세대의 조롱이 회자(膾炙)되기도 했다.●“세계는 은퇴 중” 베이비붐 세대의 퇴장미국에서 베이비부머는 1946년부터 1964년까지 근 20년간 태어난 세대를 칭한다. 일본은 1947년~1949년생인 ‘단카이(團塊·덩어리) 세대’ 800여 만 명이 전후 일본 사회의 총아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경우는 6.25전쟁의 여파로 한참 늦어진 1955년생부터 1963년생까지 탄생한 700여 만 명을 베이비붐 세대로 분류한다. 일각에서는 1974년생까지를 합쳐 1700만 인구라 하기도 한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가 미국 일본보다 8~9세는 젊은 셈이다. 인구표를 펴놓으면 우리는 ‘정해진’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지난해 한국 베이비붐 세대의 맏형 격인 1955년생이 만 65세로 법적 ‘노인’이 됐다. 앞으로 8년간 매년 80~90여 만 명이 이 대오에 합류하게 된다. 우리 주변에는 저출산과 고령화, 인구 감소가 맞물려 조만간 우리 사회가 겪어보지 못한 재앙에 빠져들 것이라는 경고가 가득하다. 지난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몰고 온 팬데믹도 세상의 변화를 더욱 재촉하고 있다. 늘어나는 노인은 정말 사회의 골칫거리일까.●“10년 내 세계의 중심은 노인과 여성으로 이동한다”앞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의 베이비부머는 미국이나 일본보다 젊다. 앞서나간 나라들을 참고하기 좋은 여건이다. 그런데 이런 나라들을 살펴보면 상당한 변화가 감지된다. 가령 요즘 마케팅과 산업, 미디어 등에서는 청년 세대를 떠받들고 탐구하느라 애쓰는 분위기지만, 팬데믹 이후를 예측하는 글로벌 석학들은 이 같은 논의가 잘못된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지적을 쏟아내고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 와튼스쿨 마우로 F. 기옌 교수는 저서 ‘2030 축의 전환: 새로운 부와 힘을 탄생시킬 8가지 거대한 물결’(2020)에서 세계의 부와 힘의 중심은 향후 10년 내에 △대서양에서 아시아 아프리카로 △밀레니얼 세대에서 실버 세대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요즘 기업들이 떠받드는 밀레니얼 세대보다 실버 세대의 경제력이 몇 배 크고 소비도 확대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60대 이상이 전 세계 자산의 최소한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에는 80% 이상을 가졌다는 것이다. 나아가 10년 내에 남성보다 더 부유해진 여성이 늘고 이들의 기호와 선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기업가나 정치인은 설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고령사회를 위한 기술과 디자인을 연구하는 미국 MIT 에이지랩 창립자 조지프 F 코글린도 저서 ‘노인을 위한 시장은 없다(2019)’에서 “기업들이 전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거머쥔 노년층을 무시하고 있다”며 “그런 기업에는 미래가 없다”고 단언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소비자 집단 실버 세대 ‘젊음’과 ‘나이 듦’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사라지면서 세대 간의 역학 관계가 바뀔 것이라는 전망은 차고 넘친다. 노인을 보는 시선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국제 저널리스트가 석학 8명과 한 인터뷰를 엮은 책 ‘초예측’(2020)에서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미래 사회에서 관건은 ‘쓸모없는(無用) 계급이 되느냐 아니냐’이지 나이가 아니라고 갈파했다. 같은 책에 소개된 ‘라이프 시프트(100세 시대)’의 저자 린다 그래튼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100세 시대에는 60, 65세 은퇴란 있을 수 없다”며 일하는 방식의 설계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누구나 취업 뒤에도 새로 공부할 기회가 주어져 생애를 통해 배우고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는 먹었지만 건강하고, 능력 있고, 부유한 베이비부머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 사회의 틀도 이에 맞춰 변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로봇과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 시장도 노년층이 가장 큰 소비자가 될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아는 ‘노인’이 아니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도 윗세대보다 학력이 높고 연금이나 자산 등 경제적 여유가 있으며 건강하고 활력이 넘친다. 이들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정보화에 대한 이해가 깊으며 삶의 질과 행복에 관심이 많다. 얼마 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빈곤율(49.6%)을 기록한 기존 노인 세대와는 다르다. 스스로 노인이라 생각지 않는 이들은 ‘신중년’ ‘신연장자’ 등 다른 용어로 불려야 마땅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들이 펼치는 인생 2막 풍경에 따라 한국 사회의 미래가 달라진다. 나이 듦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현실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이런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할 때 암담한 미래가 찾아오게 된다. 가령 저출산으로 생산 인구가 줄어드는 마당에, 이들이 가급적 오래 부양 ‘받는’ 쪽이 아니라 부양 ‘하는’ 쪽에 서야 사회 전체의 부담이 줄어든다. 풀죽고 움츠린, ‘죽지 못해’ 사는 노년이 우리 청년들의 미래일 수는 없지 않은가.서영아 기자 sya@donga.com※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 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이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한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려 한다. 필자가 일본에서 취재한 세월이 긴 탓에 일본 사례가 상대적으로 많이 등장할 수 있다.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초고령 사회를 겪어내고 있는 나라라는 점에서 가급적 많은 참고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구치소발(發) 코로나19 집단 감염 소식에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다.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에서 200명 넘는 확진자가 나온 데 이어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도 확진자가 나와 어제 전수검사에 들어갔다. 두 구치소는 각기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이 수감돼 있어 더욱 주목을 받았다. ▷구치소는 수사나 재판이 진행 중인 미결수들이 주로 입감된 곳이다. 그렇다 보니 이들과 수시로 접촉해야 하는 법조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법원행정처는 전국 법원에 3주간 휴정을 권고하고 긴급을 요하는 사건 외에는 재판기일을 미루거나 바꾸도록 했다. 대검찰청도 구속 수사나 소환 등 대면조사를 자제하라고 지시했다. ▷바이러스는 만인에게 평등하다지만 이번에는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코로나 확산 이후 소득과 생활이 달라지지 않은 사람들과 치명적 타격을 입는 사람들의 격차가 벌어지는 ‘코로나 디바이드’가 생겨났다. 바이러스로 인해 그동안 숨어 있던 계급의 민낯이 드러났다며 이를 인도의 계급제도인 카스트에 빗댄 ‘코로나 카스트’라는 말도 등장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코로나 카스트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감염 위험이 낮고 급여도 줄지 않은 원격 노동자층, 감염 위험은 있지만 실직 위험이 없는 의사 군인 경찰관 등 필수 노동자층, 실직자와 무급휴직자 등 임금이 없어진 계층 등으로 나뉜다.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 교도소, 노숙인 시설, 이민자 수용시설 등에서 집단생활을 해야 하는 ‘잊혀진’ 계층이 있다. ▷하루 1000명대를 오르내리는 확산세에 오늘부터 수도권, 내일부터는 전국에서 5명 이상 사적 모임이 금지된다. 거리 두기 3단계에 적용되는 ‘10인 이상 집합금지’보다 더 강력한 조치다. 교도소나 구치소에는 독방도 있지만 6, 7명이 한 방에서 생활하는 혼거실이 적지 않다. 교정당국이 24시간 마스크 착용을 강조하지만 식사할 때나 세수할 때도 마스크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형을 사는 수인이라 해도 감염으로부터 안전할 권리는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또한 백신 접종 때까지는 조심하며 견뎌내야 할 현실인 걸까. ▷교정당국은 지난봄부터 발열측정 카메라를 구비하고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 등 위생수칙을 강조해왔다. 신입이 들어오면 감염 예방을 위해 14일간 격리했고 수형자들의 면회도 제한했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인 듯하다. 교정시설뿐 아니라 집단생활을 하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군대도 감염이 확산되면 면회와 외출 등 외부와의 접촉부터 규제받는다. 백신은 멀고 방역은 강화되면서 당연하던 일상이 당연해지지 않게 된 이 겨울, 사람을 ‘바이러스 덩어리’인 것처럼 여기고 기피해야 하는 일상은 감옥 안이건 밖이건 다를 바 없는 것 같기도 하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나도 혹시?’ 일상 속으로 파고든 코로나19는 언제 누가 감염되어도 놀랍지 않은 상황. 혹한에도 임시선별진료소마다 중무장을 하고 늘어선 행렬에서 나와 내 가족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들이 전해져 온다. 14일부터 설치된 임시선별검사소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검사방법은 세 가지다. 기존 ‘비인두도말(콧속분비물) 유전자증폭(PCR) 검사법’과 타액 PCR, 신속항원검사가 그것들인데, 언급된 순서대로 검사 정확도가 낮아진다. ▷신속항원검사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들어올 때 면역반응으로 생기는 항체를 검사하는 방식이다. PCR 검사가 4, 5시간 기다려야 하는 데 비해 약 15분이면 결과를 알 수 있다. 그 대신 정확도가 낮아 여기서 양성이 나오면 다시 PCR 검사를 받아야 한다. 현재 국내 사용 허가를 받은 신속항원검사 진단키트는 한 가지인데 임신 진단키트처럼 생겼다. 면봉을 콧속 깊숙이 밀어 넣어 검체를 채취한 뒤 시약이 담긴 추출용액에 넣고 5회 이상 저은 뒤 진단키트에 세 방울 떨어뜨리면 몇 분 안에 결과창에 음성인지 양성인지 뜨게 된다. ▷더 많은 사람이 더 손쉽게 진단검사를 받게 하려는 취지에서 신속항원검사를 둘러싼 논쟁도 커지고 있다. 지난달 말 서정진 셀트리온 대표가 전 국민 자가진단 검사를 제안했지만 방역당국은 부정적이었다. 최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국민 누구나 신속 진단키트로 1차 자가 검사를 하고 결과에 따라 추가 정밀 검사를 받게 하는 방안을 논의하자고 제안했지만 당국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자가 검사 도입은 안 하는 걸까, 못하는 걸까. 두 가지 모두인 듯하다. 우선 현재 국내에서 사용되는 검사 키트는 의료진만 사용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았다. 콧속 깊은 곳에 면봉을 찔러 넣어야 하기 때문에 일반인이 하기도 어렵고 정확도도 떨어진다. 검체 채취를 의료행위로 보는 의료법도 장애물이다. 국내 몇몇 제약사가 신속 진단검사를 위한 키트를 개발해 유럽 미국 등지에 수출하고 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마침 미국식품의약국(FDA)이 15일 호주 제약사가 개발한 자가 진단키트에 사용 승인을 내줬다는 소식이다. 일반인이 코에 면봉을 넣어 검체를 채취한 뒤 스마트폰에 부착한 진단키트로 15분 만에 감염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전에도 가정용 진단키트는 몇 가지가 사용돼 왔지만 처방전이 필요하거나 검체를 병원으로 보내 감염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백신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다. 자가진단이 가능한 길이 열리고, 한계점을 인정하는 범위에서 적절한 활용방안을 찾는다면 감염 확산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검찰이 8일 라임자산운용(라임)의 핵심 인물인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으로부터 ‘술 접대’를 받은 검사 3명 중 1명만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위반혐의로 기소했다. 모두 536만 원 상당의 향응이 제공됐다고 한다. ▷기소와 불기소를 가른 기준은 향응 수수금액이다. 검찰은 불기소 처분된 검사 2명이 오후 11시 이전에 귀가했으므로 이후 추가된 밴드 팁 등 55만 원을 제외하고 1인당 96만2000원 상당의 접대를 받았다고 계산했다. 처벌 기준금액 100만 원을 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적의 계산법’ ‘검사들을 위한 안전한 술 접대 받기 가이드’ 등의 조롱이 줄을 잇는다. ▷온라인에서는 ‘검사님들을 위한 99만 원짜리 불기소 세트’ 포스터가 만들어져 화제가 됐다. 흔히 알려진 김영란법의 ‘식사접대 3만 원 한도’는 뭐냐는 질문도 꼬리를 물었다. 김영란법에 따르면 1인당 접대 금액이 1회 100만 원 이상이면 형사 처벌 대상이고 접대 한도 3만 원은 소속 기관의 징계 기준이다. 두 검사도 검찰 징계를 받게 된다. ▷n분의 1 계산법은 전체 비용을 인원수대로 나누는 것이고 더치페이는 각자 주문, 각자 계산하는 방식이다. 검찰 계산은 이를 시간대별로 배합한, ‘신박한’ 것이기는 하다. 검찰로서는 두 검사를 기소할 경우 법정에서 당사자들의 항변이 이어질 것임을 의식했을 것이다. 어찌됐건 업자들이 호화 룸살롱에서 술을 살 때는 상대에게 공범의식을 심어주고 보험을 들려는 것임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쥐꼬리만 한 권력이라도 가진 애주가라면 이참에 술은 자비로 마셔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각자 진영논리에 갇혀버린 걸까. 이날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에 대한 반응은 양 갈래로 나뉘었다. 검찰은 술 접대 사실 외에도 김봉현이 10월 자필 입장문을 통해 주장한 ‘검사 술 접대 의혹 은폐’ ‘여권 정치인 표적 수사’ ‘야권 정치인 수사 무마’ 의혹은 모두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추미애 법무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해 수사지휘권을 발동한 근거를 모두 부정한 것이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검사 불기소만 조롱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추 장관의 성급함만을 강조한다. ▷윤 총장은 10월 국감에서 “검사 접대가 사실이라면 사과하겠다”고 발언한 바 있다. 깔끔하게 사과하고 당사자들을 징계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정파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 문제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비약해서 해석하려는 시도 또한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법치주의와 정의’는 누구나 지켜야 할 가치이고 어느 한편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마스크와 고글로 무장한 스튜어디스가 내민 쟁반을 승객이 받아드는 사진. 쟁반 위 별것 아닌 기내식이 왈칵 향수를 부른다. 지난달 24일 인천공항을 출발한 아시아나항공 ‘A380 한반도 일주비행’ 승객들이 기내식 서비스를 즐기는 장면이다. 이들은 동해 바다가 보이는 강릉,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을 지나 두어 시간 만에 출발지로 돌아왔다. ‘비행기라도 타고 싶다’는 소비자들이 몰려 만석에 가까운 탑승률을 보였다. ▷코로나19 탓에 ‘집콕’이 대세라는 뉴노멀을 맞이한 여행객들은 호소할 곳도 마땅치 않은 금단 증세를 느끼고, 항공업계는 생존이 위협받는 위기에 빠졌다.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도착지 없는 비행 상품’이다. 비행기로 유람하듯 상공을 선회하고 회항해 ‘상공 여행’, ‘무착륙 여행’이라고도 불린다. 이미 대만과 호주, 일본에서 열풍을 불렀고 국내에서도 평균 80%에 이르는 탑승률을 기록했다. ▷정부가 그제 이 상품을 국제선에도 1년간 한시 허용하기로 했다. 관련 업계를 지원한다는 취지다. 대개 일본, 중국, 대만행 항로로 20만∼30만 원(일반석) 정도 운임이 될 것이라 한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일본 후지산이나 중국의 만리장성, 혹은 대만을 상공에서 구경하고 돌아오는 식이다. 철저한 검역·방역 관리를 전제로 입국 후 격리조치와 진단검사를 면제해주되 일반 여행자와 똑같은 면세 혜택도 준다. ▷아예 해외여행 상품 판매를 시작하는 여행사도 등장했다. 국내 3, 4위권 참좋은여행은 다음 주부터 동남아 유럽 미주 전 노선 상품을 판다. 상품명은 ‘희망을 예약하세요’. 코로나 이후 새로 개발한 방역 우수국가 여행과 기존 패키지여행에서 인원을 줄이고 안전요소를 강화한 상품들이 대상이다. 대만·태국 등 방역 우수국가들은 내년 3월, 유럽·미주는 내년 7월 15일 이후 출발하는 조건이다. ▷화이자, 모더나의 백신 개발 소식이 힘을 줬고 방역 우수국가끼리 자가 격리 의무를 면제해주는 ‘트래블버블’ 협약 체결에 대한 기대감도 있다. 재미있는 건 기사에 딸린 댓글들인데, 부정적 반응이 거의 없다. “건투를 빈다”거나 “아무리 지독한 바이러스도 결국 극복 가능하다”며 “모든 인류에게 파이팅”을 외치는 사람도 있다. 결국 모두가 똑같은 마음인 거다. ▷오늘 유럽 자유여행 패키지를 예약하는 우리에게 내년 여름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찌 알랴. 그래도 인간은 희망을 먹고사는 동물이다. ‘방콕’에 ‘확찐자’가 되어가는 무력감을 떨쳐내고 내일을 기약해 보는 것, 그게 희망이다. ‘사람이 여행을 하는 것은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하기 위해서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일본 출신 방송인 사유리(후지타 사유리·41) 씨의 출산 소식이 화제다. 무엇보다 결혼 없이 정자 기증을 받아 아들을 낳았다는 점이 관심을 끌었다. 아기를 가슴에 안은 그는 “너무 행복해 꿈일까 봐 두렵다”고 말한다. ▷사유리는 한국에 유학 중이던 2007년부터 많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한국인들에게 친숙해졌다. ‘언젠가는’ 아기를 갖기를 간절히 원해 방송 중에 “난자를 여러 개 얼려놓았다”고 고백했을 정도. 하지만 지난해 병원에서 시험관 시술조차 쉽지 않다는 진단을 받고는 더 늦기 전에 엄마가 되기로 했다. 아이를 낳기 위해 급히 배우자를 찾기보다는 혼자 엄마가 되는 ‘자발적 비혼모(Single Mother by Choice)’의 길을 택했다. 자발적 비혼모는 결혼은 하지 않고 애인 또는 정자은행을 통해 아이만 낳아 기르는 경우를 지칭한다. 미혼모에 비해 여성 본인의 선택과 의지가 강조된다. ▷한국인들의 반응은 ‘멋지다’거나 ‘용기 있다’는 축하와 격려가 많았다. 아빠 없이 자라날 아이의 처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충분히 헤쳐 나갈 것이란 응원이 압도적이다. 정치권에서도 축하인사가 답지했다. ▷국내에도 ‘결혼은 싫지만 아이는 갖고 싶은’ 사람은 적지 않지만 실행에 옮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사유리가 굳이 활동무대인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출산한 이유는 한국에서는 이 모든 과정이 불법이기 때문이다. 우리 생명윤리법은 여성이 임신하기 위해 정자를 기증받으려면 법적 남편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시험관 시술 등 난임 지원도 받을 수 없다. 결혼이란 절차를 거쳐 제도 안으로 진입해야만 임신 출산에 대해 합법적 지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진보정당인 정의당은 ‘비혼 출산 합법화’를 꺼내들었다. 경제학자 우석훈에 따르면 제도권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 대비 그렇지 않은 자녀의 비율인 혼외출산율은 한국이 1.9%로 세계 최저권인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40%라고 한다. 혼외출산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전체 출산율도 높다. ‘정상적’이란 고정관념에 갇혀버린 결혼과 출산에 대한 강박이 아기들이 태어나고 성장할 기회를 막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3일 새벽 서울 관악구에서 베이비박스 앞에 버려져 밤새 방치됐던 갓난아기가 숨이 끊어진 채 발견됐다는 가슴 아픈 뉴스가 있었다. 중고물품 거래사이트에 갓난아기를 올린 미혼모 뉴스도 기억에 새롭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2년째 0명대(지난해 0.92명)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현실은 여전하다. 어떤 처지와 조건이건 어려움 없이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미국 역대 대통령 부인들의 직업은 영부인이었다. 잘나가는 변호사였던 힐러리 클린턴 여사도, 미셸 오바마 여사도 백악관 입성과 함께 본업을 내려놨다. 하지만 이런 전통은 내년 1월 20일 취임하는 조 바이든 당선인의 부인 질 여사(69)에서 끝나게 된다. 평생 고교와 대학에서 가르쳐온 그는 영부인이 된 뒤에도 강의를 계속하겠다고 일찌감치 선언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백악관에서 출퇴근하는 ‘투잡(two job)’ 영부인이다.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에서 이제는 선출직 국가원수의 부인, 즉 퍼스트레이디를 일컫는 말이 된 영부인은 사실 직업이라 하기에는 좀 특별하다. 보수는 없지만 대통령을 보좌하고 여러 행사에 참석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사실상 사생활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남편이 대통령에 선출되면 아내는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고 내조에 적극 나서는 게 당연시됐다.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영부인은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라는 데 별 이견이 없다. 그는 불행을 기회로 만드는 ‘행복의 연금술사’라고 불렸는데, 적극적인 내조로 장애인이 된 남편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는가 하면, 4번이나 연임에 성공시켰다. 1945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재임 중 사망할 때까지 남편의 손과 발, 눈이 되어 그림자처럼 도우며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남편 사망 후에도 유엔 등을 무대로 ‘인권의 대모’라 불리며 영부인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했다. ▷미 언론들은 질 여사를 바이든 당선인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바이든의 최종 병기’라 표현한다. 질 여사는 카멀라 해리스를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선택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등 이번 선거 기간을 통해 ‘내조형’인 동시에 ‘참모형’ 아내의 면모를 두루 보여줬다. 이런 그가 “나만의 정체성과 직업을 갖길 원한다”고 했다. 26세 나이에 두 아들이 딸린 35세 바이든과 결혼해 세 아이를 키우며 석박사 학위 3개를 따낸 감투정신이라면 무엇이건 못하랴. 질 여사는 바이든이 부통령으로 일한 2009∼2017년 ‘에어포스투’ 안에서 시험지 채점을 한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미국의 한 연구자는 “과거 영부인들의 경우 일과 가정의 양립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질 여사는) 21세기에 맞는 영부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바이든 당선인은 평소 질을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왔고 지난해 4월 첫 유세에서 자신을 ‘질의 남편’이라고 소개했을 정도로 그녀를 밀어준다. 비록 78세, 69세 고령인 당선인 부부지만 사고방식은 그 누구보다 젊은 커플이 아닐까 싶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과 지난해 여름 수출규제 등을 거치며 증폭된 갈등 탓일까. 근래의 한일 관계에는 흔히 ‘해방 이래 최악’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지난해 12월 도미타 코지(冨田浩司) 주한 일본대사는 부임 일성으로 “양국 간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양국 관계는 줄곧 어두운 터널 속에 머물러 왔다. 이런 가운데 9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 취임을 계기로 양국 간에도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감지된다. 한일 외교의 최전선에 선 도미타 대사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현직 외교관이기에 갖는 발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긴 안목’과 ‘인내’를 강조하며 낙관적 미래를 내다봤다. 인터뷰는 지난달 30일 서울 성북구 일본대사관저에서 이뤄졌다. 부임 후 중앙일간지와 가진 첫 인터뷰다.》 “한일 관계, 긴 안목으로 보면…”“한일 관계가 나쁘다, 어렵다고들 하지만 긴 안목에서 보자면 1965년 국교 정상화로부터 ‘불과’ 50여 년 사이에 여기까지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낙관주의를 가질 만하죠. 반면 한일 간에는 역사적 경위가 있어 무언가를 진전시키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전후 국교 정상화에만 20년, 그로부터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선언(1998년)까지 30여 년이 걸렸습니다. 인내심이 필요한 거죠. 물론 낙관주의는 낙천주의와 달라서, 눈앞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요구합니다.” ―한국에서는 스가 총리 취임을 계기로 양국 관계 개선의 기대가 있었다. “새 정권 출범을 계기로 관계 개선의 기운이 생겨나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스가 총리는 스스로 외교에서 아베 신조 노선을 계승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중요한 나라라는 점, 그리고 이 지역 안정을 위해 일한·일미한 연대가 중요하다는 기본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한국 측이 정권 출범 직후 전화회담을 요청한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외교의 과제는 이런 긍정적 기운을 관계 개선을 향한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바꿔 나가는 일이다.” ―올 연말경으로 예상되는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한일 정상이 만난다면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일본 측이 스가 총리 방한 조건으로 징용 피해자 배상 소송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선조치를 요구하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일한중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일정이 나온 게 아니니 일반론만 말할 수 있다. 우선 스가 총리와 문재인 대통령이 개인적 관계를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정상들이 만났을 때 국민이 기대할 만한 성과를 낼 필요도 있다. 그에 어울리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외교적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 며칠 전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방한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여러 가능성에 대해 다각도로 모색 중이다.”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는 실타래가 너무 꼬였다는 지적이 많다. “이런 상황을 풀기 위해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낙관주의는 문제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자세다. 무엇보다 이 문제가 잘못될 경우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위기감, 그런 사태를 피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양국 정부가 공유한다고 생각한다.”한일 정상, 개인적 관계 만들어야 ―또 하나의 현안으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처리수 문제가 있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폐로 과정에서 언젠가는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인 것으로 안다. 다만 폐수 처리의 모든 과정은 국제적 기준을 준수하며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의 승인과 협력하에 이뤄지게 된다.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도 긴밀히 연락하고 투명성을 가지고 임한다는 각오다.” ―코로나19 문제와 관련해 그간 한일 간 협력이 몇 가지 성과로 나타났다. 제3국에서의 자국민 대피 과정에서의 협력, 일본계 기업인 도레이 구미 공장의 마스크 소재 생산 협력 등이 그런 예다. 좀 더 서로 도울 여지는 없을까. “방역은 국가마다 사정이 다르다는 점에서 국제협력에 제약이 있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내다본다면 여러 가능성이 생긴다. 가령 스가 총리는 포스트 코로나를 겨냥해 디지털 이노베이션에 투자하겠다고 하는데, 문 대통령이 내건 한국판 뉴딜 정책과 공통점이 많다.” ―3월 이래 멈췄던 한일 간 인적 교류가 최근 기업인부터 풀렸다. 코로나 확산 여하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우문이긴 하지만 일반인 왕래는 언제쯤 풀릴 것으로 예상하나. “비즈니스 트랙 외의 폭넓은 구조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올림픽과 방역을 어떻게 양립시킬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아베 전 정권은 관광입국을 내걸고 민간 경제활동의 상당 부분을 관광업에 투여했다. 지금 국내 관광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외국인 관광도 하루빨리 정상화하길 염원하고 있다.” ―반일 혐한 등 민족주의 감성이 기승을 부리는 반면 젊은이들은 음식이나 문화 등 독자적 감성으로 상대국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이들은 공감을 비교적 순수하게 표현하니까. 사실 서로에 대한 친근감은 다른 세대들도 가졌다고 본다. 한국 드라마가 일본에서 인기 있는 이유도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연애 감정, 가족의 소중함…. 느끼는 것이 비슷하다. 저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시종 흥미진진하게 봤고 최종회에서는 울었다. 교류를 통해 이런 공감대를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처칠-대처 전기 저술 위기 리더십 연구 그는 현역 외교관으로서 윈스턴 처칠과 마거릿 대처에 대한 저서를 낸 작가이기도 하다. 이 중 대처 전기는 지난해 일본의 권위 있는 출판상인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상을 받았다. 미디어에 보도되지 않은 사실들을 일일이 찾아내 공들인 저술이다. ―왜 처칠과 대처인가. “정치 지도자의 역할은 크게 자원 배분과 국가 위기에 대한 대처, 이 두 가지라고 본다. 처칠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 역사에 남을 궤적을 남겼다. 대처는 대처리즘으로 불리는 변혁을 통해 정치적 ‘자원 배분’을 새로이 해 영국병을 치유하고 영국 경제를 부활시켰다. 인간적인 그릇은 처칠이 더 크고 매력적이지만 영국 사회에 미친 업적은 대처가 더 컸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처칠이나 대처의 시대만 해도 리더의 역할이 크고 대중에게 리더십이 받아들여졌다. 요즘은 자국제일주의가 우선시되면서 포퓰리즘과 독재가 뒤섞인 리더십이 세계를 풍미한다. “리더는 국가를 이끌지만 국민에게 이끌려가기도 한다. 한 시대는 지도자와 국민의 상호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리더를 고르는 것은 국민이므로 국민의 현명한 판단이 중요해진다.” 그는 “현직 외교관으로서 현실 정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의 저서를 펼쳐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와 있다. “민주주의하에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리더는 국민에 영합하게 된다. 세상이 복잡 다양해지면서 정당들은 모두 중도로 수렴돼 차별성이 없어졌다. 불만이 쌓인 국민에게 리더들은 극단적인 주장으로 대중의 공감을 얻고 정치의 권좌를 차지하는 수법을 쓰게 된다….” 한일축제한마당… “계속의 힘” 그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 이래 20번째 주한 일본대사다. 2004∼2006년 주한 일본대사관 참사관과 정무공사로 근무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는 가족이 함께 서울에서 지냈지만 이번에는 혼자다. 자녀들은 이미 장성했고 부인은 지난해 태어난 첫 손자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다고 한다. ―한국에서 내정 단계부터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1925∼1970)의 사위로 소개되면서 경계의 대상처럼 인식돼 버렸다. ‘금각사’의 작가로 한때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던 미시마는 점차 극우 사상에 경도돼 자위대의 궐기를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남겨진 딸은 11세에 불과했다. “장인은 아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제 직업이나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밝혀둔다.” 10일에는 제16회 한일축제한마당이 온라인으로 개최된다. 주한 일본대사관은 코로나로 인해 거리 두기 단계가 높아지는 가운데서도 5월부터 축제 준비를 위한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수차례 회의를 거듭했다. 도미타 대사는 그때마다 “계속(繼續)은 힘(力)이 된다”는 일본의 격언을 강조하며 어떤 형식으로건 축제를 지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계속은 힘…’은 당장 화려하고 눈에 띄지 않더라도 해오던 것을 꾸준히 이어가는 정신을 말한다. “축제한마당은 제가 서울서 근무하던 2005년 ‘한일 우정의 해’ 기념사업으로 시작돼 15년간 이어온 행사다. 코로나 때문에 고민이 많았지만 계속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온라인이라 한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참가 못 하던 분들이 찾아줄지도 모른다. 되도록 많은 분이 관심 갖고 즐겨 주시길 기대한다.” 소소한 일이라도 꾸준히 계속해 나가다 보면 무언가를 이룰 힘을 얻는다. 향후 한일 관계 여러 장면에서 이런 정신은 꾸준히 지켜져야 할 것이다. 도미타 코지 주한 일본대사―1957년 후쿠오카 출신. 도쿄대 법학부 졸업. 1981년 외무성 입성, 주영 공사, 주미대사관 차석공사, 북미국장, 주이스라엘 대사를 거쳐 현직―저서: ‘마거릿 대처-정치를 바꾼 철의 여인’(2018년), ‘위기의 지도자 처칠’(2011년)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5년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일본 사회에 충격을 던진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을 소재로 했다. 도쿄 도심, 부모가 모두 가출한 뒤 세상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어린 4남매의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12세 장남이 가출한 엄마를 기다리며 가족을 꾸리는 과정의 막막함이 그려져 있다. 실화에서는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들이닥쳐 아이들은 복지시설로 보내졌고 엄마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엄마(30)가 외출한 집에서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먹으려다 화재로 중상을 입은 인천의 ‘라면 형제’ 중 여덟 살 동생이 그제 하늘로 떠났다. 지난달 14일 화재가 난 뒤 37일간이나 병마와 싸웠고 한때 의식을 찾는 등 상태가 호전되기도 했다는데,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열 살과 여덟 살. 불이 나자 아이들은 다급하게 119를 눌렀지만 “살려주세요”만 외친 채 전화를 끊었다. 2분 뒤 이웃이 신고해 화재 위치 등을 알렸다고 한다. ▷형제는 오랫동안 돌봄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었던 듯하다. 다만 어른들이 부실하면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든다. 형제는 늘 함께 다니며 서로를 챙겼다. 야심한 시각에 편의점에서 먹을거리를 고르는 폐쇄회로(CC)TV 영상에서 아이들의 힘든 생활을 눈치챌 수 있다. 한창 개구쟁이 노릇을 할 아이들이 비쩍 마른 몸으로 컵라면이니 도시락을 챙기곤 했다. 서로가 유일한 친구였다는데, 이제 형 혼자 남겨졌다. 어른들이 너무 많은 빚을 졌다. ▷코로나19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감염된다는 점에서 공평하지만 돌봄 사각지대의 사람들에게 유난히 가혹하다. 형제도 학교가 비대면 수업을 시행하면서 급식 대신 직접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엄마는 수년 전부터 형제를 학대·방임한 혐의로 8월 검찰에 송치됐고 가정법원은 이 가족에게 상담을 받으라는 보호처분을 내렸지만 이 또한 코로나 사태로 방치돼 버렸다. ▷아이들에게 부모 혹은 가족은 자신에게 주어진 전 세계와 같다. 그곳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아이들이 ‘내게도 돌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이웃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유다. 형제가 끔찍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 누워 있는 사이, 쾌유를 비는 성금이 2억 원가량 모였다. 아이들로선 그저 ‘천문학적 숫자’일 뿐인 2억 원보다 당장 편의점에서 쓸 수 있는 2만 원이 좋았을 것이고, 2만 원보다는 따뜻한 어른의 보살핌이 자연스러웠을 터다. 이번 동생의 사망 소식에 맘카페 엄마들 사이에서 “가슴 아프다” “안타깝다”만큼이나 “미안하다”는 댓글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1980년대 대학생, 특히 운동권 학생들은 군대 가기를 꺼렸다. 군사독재정권의 ‘군바리’가 되기 싫기도 했지만 군=강제징집=최전방으로 통하던 무서운 시절이었다. ‘녹화사업’이라 하여 학원 프락치 활동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당시 ‘동 뜬다’는 은어가 돌았는데 순번을 정해 가두시위의 주동자로 나서는 것을 뜻했다. ‘동’은 시위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당시에는 폭력행위특별법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으면 군대에 갈 자격이 박탈됐다. 병역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1986년 1200여 명이 구속된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 때는 병역면제 요건에 미달하는 집행유예 3개월이 무더기로 선고됐다. 그런데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한시적으로 3개월 집유도 병역을 면제해줬다. 뛸 듯이 기뻐하던 주변 친구들이 많았다. ▷우원식 윤미향 우상호 등 여당 의원 20명이 민주화운동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 교육 취업 의료 금융 등의 혜택을 주는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을 추진하고 있다. 지원 대상은 2000년 설립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인정받은 사람 중 사망자, 행방불명자, 상이자(장해등급 판정을 받은 자)와 그 가족이다. 우 의원은 총 829명이라며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을 예로 들었지만 국회예산정책처의 법률안 비용추계서는 수혜 대상이 가족을 합해 2021년 3753명에서 2025년 3792명으로 늘어날 거라고 추산한다. ▷이 법안이 알려지자 민주당의 ‘셀프 특권’ 법안이란 비판이 쏟아진다. 특히 가뜩이나 ‘공정’을 중시하는 청년세대에게 입시와 취업에서의 특혜는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민주화 유공자들에 대해선 이미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뤄져 왔다. 여권 고위층에도 억대의 보상금을 받은 이들이 적지 않다. 반면 신청자격이 충분하지만 보상 신청을 사양한 이들도 있다. 그중 한 명인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은 “지식인으로서 민주화운동을 한 거면 충분하다. 국민 세금으로 보상을 받는다면 내 명예는 어떻게 되는가”라고 말한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유명을 달리한 분들과 그 가족이 겪는 고통에 대해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과유불급이 된다면 민주화운동의 순수한 뜻을 욕보이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민주화는 거리에서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독재 타도를 외쳤던 수백만 시민이 함께 만든 것이다. 그들이 예우나 보상을 바라는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싸웠고 자긍심과 보람, 인간적인 성장을 얻었다면 그게 보상 아닌가. 생각 짧은, 혹은 흑심 있는 국회의원들이 민주화 인사들을 욕먹이고 있는 건 아닌지 안타깝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1980년대 대학 신입생은 고교 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지식의 세례를 받았다. 읽어야 할 도서 목록 가운데는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1979년)도 들어 있었다. 한국 ‘여성운동의 교과서’로 불리는 이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저서다. 이 교수가 4일 향년 96세로 영면에 들었다. ▷선생은 한국 여성학의 선구자였다. 강단에서는 불평등한 여성의 현실을 이론화했고 여성민우회, 여성단체연합,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정의기억연대의 전신) 등 단체 활동을 통해 현실을 바꿔 나갔다. 호주제 폐지, 부모 성 같이 쓰기, 동일노동 동일임금, 비례대표제 도입 등 그가 강단과 단체를 오가며 맺은 열매는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말년은 더욱 멋졌다. 1990년 정년을 맞은 그는 7년 뒤 부모의 고향인 경남 진해로 내려갔다. “어느 순간 내가 한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나 자신이 중요한 자리를 맡거나 선두에 나서기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는 이유에서다. 진해에서 ‘기적의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지역사회 풀뿌리운동에 헌신했다. 2008년 그는 한 인터뷰에서 “교수 대신 지역활동을 했더라면 세상이 조금 더 변화했을 것”이라며 자신의 진로 선택에 뒤늦은 ‘후회’를 고백하기도 했다. ▷올 5월 윤미향 당시 국회의원 당선자의 횡령·배임 의혹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자 일부 정대협 원로들이 초대 대표였던 이 선생과 윤정옥 이화여대 명예교수(95)의 명의를 넣은 12인 원로 성명을 발표했다. 윤미향을 두둔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윤 교수는 “그런 말 못 들었다”며 발끈했고, 이 선생도 제자를 통해 유감을 전했다. 무엇보다 출범 당시 정대협은 모금운동을 벌이거나 정치권에 참여하는 요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선생을 비롯한 여성운동 1세대에는 유복한 집안 출신이 많다.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도 못 가던 1950, 60년대에 미국 유학까지 간 것은 엄청난 혜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자신이 가진 지식과 능력을 불행한 여성들을 일깨우는 데 바치려 노력했던 듯하다. ▷선생의 타계 소식에 여야 막론하고 애도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요즘처럼 진영으로 갈라진 세상에서 드문 일이다. 사리사욕을 멀리하고 헌신한 진정성은 당파 관계없이 통하는가 보다. 평생 여권 신장을 위해 싸워온 이 선생은 10여 년 전 자신을 찾아온 후배들에게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랑의 능력을 키우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사랑’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질임을 이제야 깨닫게 됐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추석(秋夕)은 ‘가을 저녁’, 즉 가을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이다. 오곡이 무르익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 좋은 날을 가족과 함께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산업화 이후 도시로 떠난 자식들은 아무리 길이 막혀도 고향을 찾아 ‘민족 대이동’을 해왔다. 1996년 강원도에서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일대에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강원도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이번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한 일은 있었을지언정, 고향을 향하는 발길은 그 어떤 것도 막지 못했다. ▷코로나19가 우리 민족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언택트 추석’을 강요하고 있다. “추석 때 오지 말그라. 나중에 더 반갑게 만나제이. 사랑한다.” 경북 의성군은 최근 홀로 사는 노인 1873명의 영상을 촬영했다. 머리 위로 ‘손하트’를 그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영상이 객지로 떠난 자식들의 휴대전화로 보내졌다. 자식들보다 더 손꼽아 기다렸을 어르신들이지만 명절을 포기하는 아쉬움보다 학교도 못 가는 손주들 걱정이 앞선다. ▷우리 조상들은 명절과 예법을 중시했지만 융통성이 있었다. 각종 문헌에는 나라에 역병이 창궐하거나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제사나 차례를 생략했다는 사례가 많이 나온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의 류의목이 지은 ‘하와일록’(1798년)에는 “마마(천연두)가 극성을 부려 마을에서 의논해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는 대목이 있다. 유교의 경전 ‘중용’에는 시중(時中)이란 표현이 있는데, ‘지금 처한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추구한다’는 뜻이라 한다. 코로나 시대에는 감염 방지를 최우선으로 하면서 예를 갖추는 것이 유교적 예법이 될 것이다. ▷안동의 유림 명문가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의 후손들은 26년 전부터 모든 제사는 광복절 하루에 몰아 지내고, 추석 차례는 10월 말 산소를 찾는 걸로 대신한다. 자손 이창수 씨는 “조상을 기리는 마음만 있다면 그 형태는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추석 연휴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가을겨울 코로나19 유행의 양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한다. 예절도 의례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의 건강을 위해서도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고, 친지들과 거리를 두며, 최대한 ‘집콕’ 하는 것이 올 추석 최선의 예법이다. 자식들을 만나지 못해 서운할 어르신들께 손자들이 재롱떠는 동영상을 보내드리고, 영 서운하다면 온라인 제례를 시도하는 등 현명한 선택지도 찾아보면 적지 않을 것이다. 팬데믹(pandemic) 시대의 신예기(新禮記)는 ‘거리 두기’로 완성된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2일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를 선언하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재임한 지난 7년 8개월간, 매일 오전 정례 기자회견을 주재하던 그에게서는 볼 수 없던 표정이다. 늘 피로에 찌들고 뭔가 포기한 듯한 굳은 얼굴이었고, 뻔한 답변을 영혼 없이 되풀이하는 듯 보이곤 했다. 그도 최장수 아베 총리와 함께하면서 최장수 관방장관 기록을 세웠다. ▷관방(官房)장관은 흔히 ‘총리의 마누라’라 불린다. 총리를 도와 주요 정책의 기획·조정, 정보 수집 등을 총괄한다. 정부 대변인과 총리비서실장도 겸하지만 무대 뒤 스태프 역할이다. 실제 그는 매일 TV에 등장했지만 개성도 존재감도 없었다. 그러다 지난해 4월 1일 새 연호 ‘레이와’를 발표하면서 ‘레이와 아저씨’라는 별명이 붙었고 ‘정치인 스가’로 조명받는 기회가 늘었다. ▷일본 정가에서 보기 드문 ‘흙수저’ 출신. 아키타의 농가에서 태어나 고교 졸업 뒤 상경해 고학으로 호세이대 야간 법학부를 졸업했다. 요코하마 시의원 등을 거쳐 48세 때인 1996년에야 초선 배지를 달았다. 지역 기반의 세습 정치인들이 선대로부터 ‘지반(지연) 간반(간판) 가반(가방·자금)’의 ‘3반’을 물려받아 20대부터 정치에 입문하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늦깎이인 셈이다. ▷아베 총리와 정치 노선을 같이했지만 아베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등 ‘뼛속까지 우파’는 아니라는 평도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들어 “리더가 좋은 사람이면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설파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이룬 배경에는 언제나 뒤에서 지켜준 이복동생 히데나가가 있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아베 정권의 독주가 가능했던 데는 관료집단을 장악한 스가의 공이 크다. 그는 2014년 부처 간 칸막이 행정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내각인사국을 설치해 고위관료 인사권을 손에 쥐었다. 이후 관가에서 스가는 ‘저승사자’로 통했다. 관료들은 스가에게 ‘찍히지’ 않기 위해 윗분의 의중을 알아서 챙기는 ‘손타쿠’를 했고, 이는 정권 후반에 터져 나온 각종 스캔들의 화근이 되기도 했다. ▷그는 14일 선출되면 아베의 남은 임기인 2021년 9월까지만 총리직을 맡게 된다. 자민당으로서는 지난 8년여간 아베와 일심동체였던 그가 ‘위기관리 내각’ 적임자일 것이다. 혹자는 파벌도 배경도 없는 그가 전국시대에 군주를 보호하기 위해 내세워진 가게무샤(影武者·그림자 무사)로 끝날 수 있다고 본다. 아베 상왕(上王)설, ‘아베스(아베+스가) 정권’ 등이 다 같은 맥락이다. 과연 그는 ‘스가 시대’를 열 수 있을까.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노인에겐 서러운 일이 많다. “난 가만히 있는데 세상이 자꾸 바뀐다”는 탄식도 그중 하나다. 어느 날 갑자기 열차표 예매 방법이 인터넷 중심으로 바뀌고 햄버거 가게나 푸드코트에서 음식을 주문하기도 어려워졌다. 2G폰이면 충분했는데 어느 틈에 대세는 스마트폰. 덩달아 바꾸고 보니 소소한 사용법 하나하나가 거대한 장벽이 된다. 코로나 위기 재난지원금도 은행에 줄서서 신청하는 사람 대부분이 고령자들이었다. ▷노인들이 느끼는 디지털 소외는 정보기술 세계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데서 온다. 기계도 프로그램도 익숙해질 만하면 체제부터 사용법까지 휙휙 바뀐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보니 뒤처지는 사람들까지 배려할 여력은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대학교수도, 회사 간부도 은퇴가 두려운 이유 중 하나로 컴퓨터 관련 잡무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진다는 점을 들 정도다. ▷좀 더 심각한 노인 소외도 있다. 가령 초고령사회 일본에서는 노인, 특히 치매환자 소유로 은행에 잠겨버린 돈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금융자산이 2030년이면 215조 엔(약 240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데, 가뜩이나 소비가 위축되고 돈이 순환되지 않아 고민인 일본의 또 하나 골칫거리다. 치매 환자는 2030년이면 830만 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돼 이 무렵 전체 금융자산의 50%가 75세 이상의 소유일 것이라 한다. 일본 사회가 미리미리 이들의 돈을 신탁 관리할 ‘성년 후견인 제도’ 등 보완책 마련에 바쁜 이유다. ▷2025년이면 초고령사회를 맞는 우리나라도 어르신들을 위한 맞춤형 금융서비스를 마련한다고 한다. 금융위원회가 그제 발표한 ‘고령친화 금융환경 조성방안’에 이런 내용이 담겼다. 예컨대 노인이 고액을 결제하면 보호자 휴대전화에 결제내용이 자동 통보되는 신용카드, 기능을 단순화한 고령자 전용 스마트폰 앱이 나온다. ‘노인금융피해방지법’(가칭)을 만들어 노인 대상 금융사기는 물론 보호자나 지인이 노인의 재산을 빼앗는 것을 막고, 치매 노인의 후견인 역할을 지원하는 일명 ‘치매 신탁’도 활성화한다. ▷이 소식에 달린 댓글 반응이 각양각색이라 놀랐다. “내 돈 내가 쓴다는데 웬 참견이냐”거나 “감시 사회를 만드느냐”며 발끈하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치매어르신의 씀씀이 탓에 고생해본 경험을 들어 환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상대적 약자인 노인들이 살기 편한 사회는 모든 세대가 살기 편한 사회일 수 있다. 다만 부쩍 늘어나는 세금에 데어서일까. 정부가 노인들의 주머니사정도 통제하고 싶은 건가 하는 의구심이 슬쩍 드는 것도 사실이다. 동네 곳곳에 CCTV를 설치하면 안전은 얻지만 자유를 잃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2799일(만 7년 244일). 아베 신조가 어제 역대 일본 최장수 총리로 등극하며 기록한 연속 재임일수다. 메이지유신 중추 세력들이 1885년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총리로 추대한 이래, 일본 정치의 수장직을 가장 길게 수행한 것. ▷장기집권이 훌륭한 리더십을 뜻하는 건 아니다. 아베 총리는 평화헌법 개정과 러시아로부터의 북방영토 반환, 북한 납치피해자 문제, 도쿄 올림픽을 통한 경제 부흥 등을 추진했지만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기집권이 가능했던 비결로는 흔히 ‘야당복(福)’이 거론됐다. 아베 정권의 폭주와 우경화 등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왜 정권이 바뀌지 않느냐’는 질문에 단골로 나오는 답은 “대안이 없다”였다. 자민당 내 총리 교체를 두고도 ‘포스트 아베는 아베’라는 말이 유행했다. 배경에는 일본 국민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야당 집권 3년간의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 ▷1955년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보수연합’이란 명목으로 합당해 ‘자민당 체제’가 출범한 이래, 야당인 민주당이 제대로 정권을 잡은 것은 2009년부터 3년간이었다.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의 세 총리가 탄생했는데 그 기간 일본인들이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 이어졌다. 미국 중국과 외교 마찰을 빚는가 하면 엔화 가치 급등으로 기업 실적은 곤두박질쳤다. 설상가상으로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다. 사망·실종자 2만여 명에, 원전 폭발이 겹친 끔찍한 재난의 수습 과정에서 민주당 정권은 아마추어 정부의 민낯을 보여줬다. ▷일본의 역대 총리는 메이지 유신의 중심 세력이던 조슈(長州·지금의 야마구치현)와 사쓰마(薩摩·현 가고시마현) 출신들이 가장 많다. 이토 히로부미와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등이 모두 조슈 출신이다. 과거 자민당 내엔 몇 개의 파벌이 있어 매파와 비둘기파 역할을 하며 총리 교체를 통해 정권 교체 효과를 대신했는데 아베에겐 당내에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었다. ▷지금도 아베 내각 지지율은 바닥 수준이지만 야당 지지율은 더 낮다. 23일 마이니치신문 조사에서 자민당 지지율은 29%, 제1 야당인 입헌민주당은 9%, 제2 야당인 국민민주당은 2%에 그쳤다. 여기에는 해온 방식, 알던 사이를 선호하는 일본인들의 보수적인 ‘의리 문화’도 한몫하는 듯하다. 아베 총리에게 피로감을 느끼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이나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같은 이들이 거론되지만 아베 스스로 권력을 내어주는 게 먼저다. 아베 총리는 어제도 병원에 갔다. 더 이상 ‘포스트 아베는 아베’가 아닐 것 같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이번엔 ‘우다 쿠다 슈다’식 선거가 되면 안 된다.” 민주당 전당대회 셋째 날인 19일 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이런 표현을 썼다. 자신이 도널드 트럼프 후보에게 총득표 수에서 280여만 표 앞서고도 대통령직을 내준 4년 전 선거를 빗대, 올 11월 대선에서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에게 확실하게 표를 몰아줘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다. 이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등도 총출동해 트럼프 공격에 화력을 집중했다. ▷‘우다 쿠다 슈다!’ 마녀의 주문 같기도 한 이 말은 여성 뉴요커 4명의 이야기로 선풍을 불렀던 옛 미드 ‘섹스 앤드 더 시티’에서 주인공들이 입버릇처럼 외친 말이다. “그렇게 할걸(would have+PP·과거분사),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could have),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should have)”를 뭉뚱그려, 과거를 후회하는 말이다. 가령 “I should have gone”은 “갔어야 했는데 가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불상사가 벌어진 뒤, 돌이켜보며 탄식하는 후회막급한 마음이 전해져 온다. 나아가 “후회하면 뭐 하나”, “세상사, 아무도 모른다”는 푸념으로도 쓰인다. 단어의 리듬감이 재미있는 데다 인생살이나 러브스토리에서 흔한 상황이다 보니 이를 제목으로 한 노래도 여럿 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는 공화당 유력인사들도 줄줄이 참석해 “트럼프를 다시 뽑느니 바이든에게 표를 주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을 정상적이지 못한 국가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클린턴 전 장관은 이날 미국인들에게 “여러분의 삶과 생명이 걸려 있는 투표처럼 한 표를 행사해 달라”고 당부했다. 다만 투표권은 국민의 것이다. 4년 전 미국민이 트럼프 대통령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기존 정치인 등 엘리트들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대변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바이든을 지지하는 엘리트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들릴지 궁금하다. ▷개인이건 조직이건 잘못된 길로 들어선 패착의 순간들이 있다. 국가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요한 투표들도 그럴 수 있다. 훗날 “내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거나 “그때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라며 후회해 보지만 한번 지나간 일은 고칠 수 없다. 앞으로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경계할 따름이다. 선택지는 두 가지. 계속 잘못된 길로 직진하며 올바른 길을 찾아보거나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거나.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인간이기에. ‘과거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을지라도, 분명 그 운율은 반복된다’(마크 트웨인).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