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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라이트 감독의 ‘오만과 편견’(2005년)은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이 손에 책을 들고 들판을 거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영화적 상상력이 필요한 지점에서 감독은 ‘읽는 여자’이자 ‘걷는 여자’였던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원작소설을 쓴 제인 오스틴의 오랜 팬이자 영화평론가인 저자는 “그녀의 지성뿐 아니라 걷기와 저항이라는 측면에서도 탁월한 선택”이라고 평한다. 책은 오스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공연 등 14개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당대에도 탁월한 풍자와 은근한 유머로 사랑받은 그의 작품들은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로운 급진성을 획득했다. 로저 미첼 감독은 영화 ‘설득’(1995년)에서 원작에 없는 설정을 가미해 관객들에게 재미를 선사했다. 오스틴은 원작소설에서 ‘여자는 배에 탈 수 없다’는 당시의 편견을 거부했다. 미첼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선원의 아내인 주인공 앤 엘리엇을 ‘기다리는 아내’에서 ‘항해하는 아내’로 둔갑시켰다. 오텀 드 와일드 감독의 ‘엠마’(2020년)에서도 주인공 엠마의 캐릭터가 각색됐다. 원작에서 뚜쟁이 엠마는 주변 사람들 중 같은 계층끼리 만나도록 연결해주기 바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2020년의 엠마는 하층 계급에도 차별 없이 다가선다. 원작의 변주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썼다. ‘나는 흔히 쓰는 ‘원작에 충실하다’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으며 대사와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영화들이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금성 라디오 A-501’. 1959년 11월 15일 금성사가 국내 최초로 생산한 라디오의 모델명이다. 대부분의 전자기기를 수입에 의존하던 시절 국산 라디오의 의미는 단순한 상품에 그치지 않았다. 라디오가 일반에 보급되자 이와 연관된 시장과 문화가 만들어졌다. A-501을 소장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대한역박)은 “금성 라디오의 탄생은 1960, 70년대 ‘기술만이 국력’이라는 구호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대한역박이 근현대 시기 소장품 4점을 집중 연구한 성과를 보고서로 최근 발간했다. 박물관은 약 15만 점의 소장품 가운데 대중에게 큰 영향을 끼친 상설전시실 전시유물 4점을 선정했다. 금성 라디오-501과 장면 정부 보고 자료인 ‘경제발전을 위한 대정부 건의’, 6·25 전쟁고아 감사편지,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금강산 안내지도다. 62년 전 등장한 최초의 국산 라디오는 ‘라디오 드라마’ 시대를 열었다. 금성 라디오의 출시 당시 가격은 2만 환으로 수입 라디오의 60% 수준에 불과했다. 라디오가 급속도로 대중에게 보급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에 힘입어 1964년 10월부터 방송된 라디오 드라마 ‘우리아빠 최고’는 높은 인기를 끌어 400회까지 제작됐다. 성공한 라디오 드라마는 영화로 제작됐을 때 흥행에 성공할 확률도 높았다. 영화 제작자들은 실패를 줄이기 위해 ‘청실홍실’을 비롯한 라디오 드라마를 원작으로 다수의 영화를 만들었다. 국산 라디오 보급이 국내 영화산업 발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보고서는 라디오 조립을 국가산업 관점에서 받아들인 국내 분위기도 짚었다. 당시 미국 독일 등 선진국에선 라디오 조립이 취미생활로 여겨졌지만 생산기반 시설이 절대 부족했던 한국에선 국가산업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1960년 12월 발간된 ‘경제발전을 위한 대정부 건의’는 장면 정부가 추진하려 한 경제정책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문건이다. 박물관은 당시 종합경제회의를 심층 분석해 장면 정부가 경제발전을 위해 수행한 활동을 조명했다. 박물관 관계자는 “유물이나 과거의 문건만이 좋은 연구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라며 “흔한 종이쪼가리처럼 보이는 소장품도 훌륭한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만든 ‘금강산 관광 안내 리플릿’은 일제강점기 때 금강산 관광산업의 실체를 조명할 수 있는 문건이다. 1897년 6월 12일자 독립신문에는 금강산 관광객 모집광고가 실렸다. 금강산 단체관광은 일제가 식민통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조직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에서 본격화됐다. 그러다 1930년대 후반 들어 일정별 관광 코스가 정해지고 인근 여관을 소개할 정도로 체계화됐다. 박물관은 보고서에서 “금강산은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 순수한 조선 민족심의 상징인 동시에 관광이라는 외피를 입은 식민성이 현현한 장소였다”고 분석했다. 6·25 전쟁고아 편지는 보호자를 잃은 고아와 보육단체들이 후원자들의 원조를 지속적으로 받아내기 위해 어떤 피드백을 보냈는지를 알 수 있다. 김시덕 대한역박 조사연구과장은 “생활용품 연구는 사료가 아닌 실물 중심으로 접근하기에 당시 생활사와 사회문화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그윽한 눈매의 성숙한 청년 이미지인 티모테 샬라메(26)와 청량한 미소의 소년을 연상케 하는 톰 홀랜드(25). 두 사람 중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주인공 ‘윌리 웡카’에 누가 더 어울릴까. 제작사 워너브러더스가 지난달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속편 ‘웡카’ 제작계획을 발표한 이후 웡카 역에 어떤 배우가 캐스팅될지에 영화 팬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로알드 달의 동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세계 최고 초콜릿 공장의 설립자 웡카가 자신의 공장을 이어받을 어린이를 찾기 위해 초콜릿에 숨겨둔 ‘황금 티켓’으로 세계 각국에서 어린이 5명을 초청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영화로도 1971년과 2005년 두 차례 제작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들 영화 역시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던 공장의 환상적인 내부와 공장 곳곳의 신비로운 캐릭터들을 영상으로 잘 표현해 동심을 사로잡았다. 속편 웡카의 제작은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를 만든 데이비드 헤이먼이 맡았다. 메가폰은 영화 ‘패딩턴’ 시리즈의 감독 폴 킹이 잡는다. 패딩턴 시리즈에서 킹 감독과 호흡을 맞춘 각본가 사이먼 파너비가 이번에도 대본을 집필한다. 속편에서는 초콜릿 공장을 열기 전 젊은 웡카가 겪은 모험담이 다뤄질 예정이다.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 등에 따르면 제작진은 소니픽처스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에 출연한 홀랜드와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주인공 샬라메를 웡카 역의 배우로 유력하게 검토 중이다. 영화 ‘라라랜드’ ‘노트북’ 등에 출연한 라이언 고슬링과 ‘월플라워’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의 에즈라 밀러가 주연배우로 한때 거론됐지만, 제작진은 좀 더 어린 20대 중후반의 배우를 캐스팅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팬들 사이에선 제작사가 1971년 개봉한 진 와일더 버전의 웡카를 찾는다면 홀랜드를, 2005년 개봉한 조니 뎁 버전을 준비한다면 샬라메를 캐스팅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오가고 있다. 와일더는 영화에서 곱슬한 금발에 붉은색 중절모를 쓰고 웡카 역을 연기했다. 뎁은 짙은 갈색 단발머리에 검은색 중절모를 썼다. 제작진은 “앞으로 4개월 이내에 촬영을 시작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개봉 예상일은 2023년 3월 17일.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진화생물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리처드 도킨스 영국 옥스퍼드대 뉴칼리지 명예교수가 쓴 종교 비판서다. 2006년 ‘만들어진 신’을 통해 진화론 시각에서 종교의 모순을 조목조목 지적한 지 15년 만이다. 저자는 비판의 수위를 한층 높였다. 1부 ‘신이여, 안녕히’에선 성경에 드러난 오류와 모순, 신의 부도덕함을 들춰내며 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의 시각에서 아브라함을 시험에 들게 한 신은 마치 질투심 많은 아내가 남편을 시험하는 것과 비슷하다. 죄 없는 맏아들을 죽게 한 신은 잔인한 아동학대범과도 같다. 성경에는 방주를 타고 탈출한 노아의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각 대륙에선 해당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동물들의 뼈만 나왔다. 도킨스는 만일 신을 주인공으로 한 희곡을 쓴다면 신에게 다음과 같은 대사를 읊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내 아들을 인간으로 변신시켜 모든 인간을 대신해 고문당해 죽게 하면 어떨까? 미안하구나. 하지만 더 나은 방법을 모르겠구나. … 나는 너를 여자의 자궁에 넣을 것이다. 너는 아기로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고, 10대의 불안을 포함해 모든 것을 겪어야 할 거야.” 그는 책 후반부에서 동물행동학과 집단유전학 등 자신의 전공을 살려 주장한다. 놀랍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생물체는 신의 재주가 아니라 자연과 진화의 법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우리가 추울 때 소름이 돋는 게 여러 증거 중 하나다. 온몸이 털로 덮여 있던 인간의 먼 조상은 털을 일으켜 세우는 것만으로 체온을 높일 수 있었다. 이제 인간의 몸은 더 이상 털로 뒤덮여 있지 않은데도 여전히 찬 바람에 소름이 돋는 건 진화의 흔적이 남아서다. 만약 태초의 인간이 피부가 매끈한 아담이라면 이런 흔적은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 종교로 인한 대립이 극심한 때 “종교는 사람들을 언제든 살인무기로 만들 수 있는 정신 바이러스의 일종”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에 공감하는 무신론자라면 흥미를 끌 만한 책이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한국고전번역원(번역원)과 한국천문연구원(천문연)이 인공지능(AI)을 활용한 고전 번역 서비스를 선보였다. 고전 자동번역 서비스는 승정원일기 모델과 천문 고전 모델 두 가지로 나뉘어 공개됐다. 우리나라에서 한문으로 쓰인 국내 고전 번역에 AI 기술을 활용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 고전을 국문으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실물에 적힌 원문을 컴퓨터로 옮기고, 이 원문에 문장부호(표점)를 표기하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한다. 원문 고전에는 고리점(마침표) 등 문장부호가 전혀 표시돼 있지 않아 전문 번역가가 표점을 찍는 작업만 완료해도 연구하기에 훨씬 수월해진다. 표점이 찍힌 텍스트를 국문으로 번역하면 비로소 국문 번역본이 나온다. 국내 최초로 AI 번역 기술을 개발하는 데 승정원일기가 활용된 이유는 우리 고전 중에서 비교적 번역 속도가 빠른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의 지시 내용을 기록한 승정원일기는 전체 3243권 중 약 30%가 국문으로 번역된 상태다. 나머지 70%가량은 표점 작업만 마친 채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승정원일기 웹사이트에 공개돼 있다. AI 번역기는 전문 번역가가 옮긴 30%의 데이터를 토대로 개발됐다. 승정원일기 웹사이트에 공개된 고전 원문을 자동 번역기에 넣으면 아직 번역되지 않은 70%의 내용을 미리 가늠해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의 국문 번역본에 기반을 두고 개발한 기술이어서 조선왕조실록 등 원문이 공개된 다른 고전을 넣으면 번역 정확도가 다소 떨어진다. 번역원이 AI 자동 번역 개발에 활용한 ‘말 뭉치’는 120만여 건에 이른다. 여기에 인명, 지명, 관직명 등 고유명사는 하나의 의미 있는 단어로 인식하지 않도록 따로 모아 학습시켰다. AI의 번역 결과가 승정원일기 초벌 번역으로 활용될 정도로 정확도는 높진 않지만 대학생이나 일반인이 맥락을 파악하는 데는 활용 가치가 높을 거라고 번역원은 내다봤다. 정영미 번역원 역사문헌번역실장은 “승정원일기는 다른 고전에 비하면 비슷한 내용이 동일한 문체로 반복되는 경향이 있어 AI 학습에 적합했다”고 설명했다. 14일 공개된 번역 서비스는 25일까지 1만7700여 명이 이용했다. 천문 고전 AI는 승정원일기의 데이터에 천문고전서 40여 권에서 뽑아낸 약 6만 건의 말 뭉치를 더해 개발했다. 서윤경 천문연 선임연구원은 “고전에 드러난 별자리와 기상 관측 결과, 관측기기 등을 활용해 2차로 연구를 진행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엉성하더라도 초벌 번역으로 활용할 자동번역 서비스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천문 고전 AI는 기상 현상, 관측기기 이름 등 고유명사를 수천 건 학습하도록 해 고(古)천문학자들이 연구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백한기 번역원 고전정보센터장은 “표점을 찍는 등 번역 기초 작업이 활발히 이뤄져야 자동번역 개발에도 속도가 난다”며 “아직 번역되지 않은 70%의 승정원일기도 번역하는 대로 AI 학습 데이터로 활용해 완성도를 높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고전 자동번역 서비스는 번역원과 천문연 웹사이트, 또는 한국고전자동번역서비스 홈페이지에서 이용할 수 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넷플릭스가 다큐멘터리 자체 제작에 힘을 쏟으면서 다큐멘터리 애호가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의 틀을 넘어 다양한 주제를 새로운 형식이나 분량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강점. 특히 지난해 선보인 작품들이 작품성과 흥행성을 인정받아 국제다큐멘터리협회상(IDA)을 다수 수상하면서 ‘다큐 맛집’으로 각광받고 있다. ○ 장애, 동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 “캠프 첫날 지도교사가 키스하는 법을 가르쳤어요. 제 생애 가장 훌륭한 치료였죠.” 한 남성 장애인이 말한다. 난생처음 장애인도 성적 욕구를 지닌 한 인간으로 존중받았다고 느꼈다며, 이는 병원에서 받아 온 어떤 물리치료보다 삶에 더 도움이 됐다고 한다. 미국의 장애인 인권 발달사를 다룬 다큐 ‘크립 캠프―장애는 없다’의 한 장면이다. 다큐는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1971년, 한 마을에서 열린 장애인 캠프에서 시작된다. 장애인이 소수자가 아닌 환경에 놓인 참가자들은 비장애 친구들에게는 물론 가족에게도 보여준 적 없었던 편안한 표정으로 캠프를 즐긴다. 캠프 말미에 이들이 나누는 토론은 장애인의 마음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의 가슴을 때린다. “아무리 엄마에게 화가 나도 화를 낼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퍼. 엄마는 나를 씻기고 보살피는 사람이어서 자칫 화를 냈다간 도움을 못 받게 되거든.” 감정을 꾹꾹 누르며 살아야 하는 장애인들의 심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나의 문어 선생님’은 우연히 바닷속에서 마주치게 된 인간과 문어가 교감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의 인물들처럼 인간의 손과 문어의 빨판이 최초로 닿는 모습은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번식하며 희생하는 작은 암컷 문어는 조용한 경외심에 사로잡히게 한다. 영상 전반에 낮게 깔려 바다의 모습을 더욱 장엄하게 만드는 배경 음악이 일품이다.○ 기발한 아이디어, 톡톡 튀는 각본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의 감독 커스틴 존슨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수십 년을 살다 은퇴 후 노년을 보내고 있는 아버지 딕 존슨과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기로 한다. 주제는 다름 아닌 ‘딕 존슨의 죽음’. 딕은 미리 치르는 장례식을 통해 막역한 친구의 추도사와 조문객들의 표정을 엿본다. 평생을 성치 못한 발가락으로 살았지만, 딸이 만든 ‘천국 스튜디오’ 영상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온전한 다섯 발가락을 얻어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 함께 맨발로 춤춘다. 익살스러운 장면이 끊임없이 튀어나오지만 이 작품이 아무런 준비 없이 엄마를 떠나보내야 했던 딸의 반성문이라는 점을 알아차리게 되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다. 커스틴 감독이 제안하는 이 독특한 아이디어는 부모의 죽음과 남은 삶을 동시에 생각하게 만든다. 시리즈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프로풋볼 리그 진출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대학 미식축구 시리즈 ‘라스트 찬스 대학’은 2016년 첫선을 보인 후 지난해까지 5개 시즌이 제작됐다. 이들 작품에 외계인과의 교신에 일생을 바친 남자를 다룬 ‘존의 컨택트’를 더한 5개 작품은 미국 HBO, 내셔널지오그래픽 등과 겨루는 국제다큐멘터리협회상(IDA)에서 최근 작품상, 감독상을 비롯해 8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다큐멘터리는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구사할 수 있는 유연한 장르”라며 “시의성 있는 작품을 발 빠르게 제작하는 것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의 특징”이라고 말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외계 생명체가 있다면 이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게 좋을까. 아니면 지구인의 존재는 최대한 감추고 외계에서 감지되는 인공적인 신호를 먼저 포착하는 데 몰두하는 게 좋을까. 인공적 신호의 발신 및 감지를 통해 외계 지적 생명체를 탐색하는 과학적 작업을 ‘세티(SETI·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라고 한다.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우리 존재를 외계 생명체에 먼저 알렸다가 지구인이 멸종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일부 우주과학자들은 외계 지적 생명체에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이 기울었다. 논의는 “이 중대한 결정을 우주과학자들의 손에만 맡겨둘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천문학자로, 세티코리아 대표인 저자는 지구인이라면 책임 의식을 갖고 우주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빅뱅이론부터 우주과학계 최신 뉴스까지 아우른다. 우주는 더 이상 일부 연구자의 영역이 아니며 모든 지구인이 우주과학계의 각종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티를 우주과학계에서 적극적으로 우주에 인공 신호를 보내는 ‘메티(METI·Messaging to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로 발전시킨 이유는 TV, 라디오, 휴대전화에서 발생한 전파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유 있는 결정이었다고 해도 이 같은 중대한 사안에 사회적 토론이 없었다는 점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세티 프로젝트는 1984년 본격적으로 닻을 올렸지만 2015년에야 미국 과학진흥협회 등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를 시작했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와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각각 블루오리진, 스페이스X를 통해 우주산업에 뛰어들었다. 달에서 물로 된 얼음층이 발견되며 자급 가능한 달 기지를 상상해볼 수 있게 됐다. 미국과 중국, 아랍에미리트(UAE)는 인간의 화성 이주를 꿈꾸며 화성 탐사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제 우리도 우주과학계의 일원으로서 밤하늘을 바라봐야 할 때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국내 강연 시장이 커지면서 방송사들이 교양 강연 프로그램을 잇달아 편성하고, 수준 높은 강연에 대한 대중들의 수요도 늘고 있다. 그러나 실력과 대중성을 겸비한 강연자를 구하는 게 쉽지 않다는 이야기가 많다. 국내 학계에서 자신의 연구 내용을 대중들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연구자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반면 해외에선 리처드 도킨스나 마이클 샌델, 유발 하라리 등의 석학들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내놓는 파워라이터이자 대중 강연자로도 명성이 높다. 지난해 11월 신간 ‘사피엔스: 그래픽 히스토리’를 출간한 하라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를 조망하는 국내 학회나 포럼들에 1순위로 초청되고 있다. 학계는 이런 차이가 지식시장 규모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출판·강연시장 규모가 큰 미국에선 학자들이 대중서와 강연으로 얻을 수 있는 보상이 그만큼 크다는 것.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미국 출판시장 규모는 약 40조5000억 원으로, 우리나라(약 4조 원)의 10배가 넘는다. 일부 해외 석학의 국내 강연료는 수억 원대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A 교수는 “미국 석학들은 자신의 저서로 세계 각국에서 판매수익을 거두고 여기에 강연료까지 받는다”고 했다. 교수 양성 트랙의 차이도 영향이 크다. 미국 대학들은 교수 임용 시 연구전담과 강의전담으로 구분해 채용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강의전담 교수는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보다는 강의의 질을 높이는 데 주력한다. 반면 국내 대학들은 이렇게 이원화된 교수 양성 트랙이 없는 데다 교수 평가에서 논문 성과를 과도하게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학계에 따르면 국내 대규모 대학 중 상당수는 △SCI 혹은 SSCI급 저널에 발표한 논문 등재 건수 70% △수강생들로부터 받은 수업평가 20% △서적 발간 등 사회 공헌도 10% 정도의 비중으로 교수 평가를 한다. 아직 정년(테뉴어)을 보장받지 못한 소장학자들은 대중 학술서 발간이나 강연보다 논문 발표에 온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B 교수는 “일부 교수들은 논문 등재 건수에만 급급해 학문적 성과를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운 해외저널에까지 논문을 내고 있다”며 “이런 세태가 한국의 지식시장 발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학자의 역량을 키우는 동시에 대중들의 지식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교수 양성 트랙이나 평가 시스템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학자의 대중서 발간과 강연은 일종의 사회공헌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심리학을 전공한 C 교수는 “교수마다 특성에 맞춰 연구와 강의 중 더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게 학문 발전에도 유리하다”고 말했다. 학계에선 일정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일군 시니어 교수들이 대중 강연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유도하고 지원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박완서 작가의 글은 어릴 때 같이 놀려고 까치발을 들고 보던 친구네 마당 같아요.” 6개월째 박완서 작품 필사 모임 ‘박완서가 그리울 때’에 참여하고 있는 이도화 씨(48·여)에게 작가의 글은 친근하고도 낮은 글이다. 화려한 문장들로 몰아치는 글을 쓰는 작가들은 때로 문학의 벽을 높인다. 하지만 박완서의 글은 까치발만 들어도 훤히 내다보일 정도로 가깝고 낮은 곳에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노인,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하는 힘이 박완서 작품의 미덕이다. 22일로 박완서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아침마다 그의 글을 읽고 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박완서가 그리울 때’는 2019년 1월 류경희 씨(52·여) 주도로 시작됐다. 토론수업 프리랜서 강사로 활동하던 류 씨에게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작가를 향한 그리움이 계기가 됐다. “‘원로 작가가 아닌 당대의 가장 젊은 작가를 잃었다’는 신형철 평론가의 글이 너무나 와닿았어요.” 그 후로 3년 동안 매일 아침마다 필사한 문장과 감상평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회원들과 주고받고 있다. 회원들은 무직자부터 정육점 사장, 회사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면서도 평범한 독자들이다. 류 씨는 2005년 출간된 단편소설 ‘촛불 밝힌 식탁’의 의미가 요즘 새롭게 읽힌다고 했다. 노년을 아들 부부와 함께 보내고 싶은 노부부가 아들 집 근처로 이사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노부부와 아들, 며느리 누구 하나 선하거나 악하지 않지만, 서로 계속 부딪친다. 결국 가족들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고, 거절당한 노부부의 스산한 마음이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류 씨는 “박완서 작품의 주제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이어서 세월이 지나도 녹슬지 않는다”고 했다. 이 씨는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 실린 ‘나는 다만 바퀴 없는 이들의 편이다’를 추천했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 인조보다, 왕의 행렬 맨 뒤에서 바퀴 없이 걸어야 했던 백성들의 모습에 더 마음 아프겠다는 박완서의 선언이 담겼다. 이 씨는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가장 먼저 돌아봐야 할 사람들을 돌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20, 30대 독자들에게조차 젊은 작가의 글보다 더 편안하게 읽힌다는 점도 다른 작가들이 범접하기 힘든 박완서 문학의 매력이다. 김경은 씨(39)는 “젊은 작가들의 잔뜩 꾸며진 글을 읽다 보면 편안하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박완서의 문장은 쓰인 게 아니라 터져 나왔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편안하고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후배 작가들도 박완서 글의 생명력은 여전하다고 말한다. 생전 박완서 작가와 친분이 두터웠던 정이현 작가는 “최근 선생의 작품을 다시 훑어봤는데 2021년에 읽어도 그가 던진 질문들이 유효하다는 생각에 다시금 놀랐다”며 “자전 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20대 여성들에게 추천한다. 한국에도 일찍이 여성의 ‘증언 문학’이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축복”이라고 말했다. “물려주신 부엌에서 많은 시간 보냈다”맏딸 호원숙 작가 산문집 발간‘노란 집’서 보낸 모녀간 추억 담아호원숙 작가(사진)가 어머니 박완서 작가 타계 10주기를 맞아 모녀간의 추억을 되새긴 산문집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세미콜론)을 22일 출간한다. 박완서의 맏딸인 호원숙 작가는 이번 산문집에서 어머니가 물려주신 ‘노란 집’의 부엌을 중심으로 박완서와 얽힌 추억을 도란도란 풀어 놓는다. 박완서의 소설집 제목이기도 한 ‘노란 집’은 작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경기 구리시 소재 집이다. 호원숙 작가는 책 서두에 “어머니가 물려주신 집의 부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썼다. 어머니가 떠난 집에서 미나리를 다듬고 만두를 빚으면서 어머니를 떠올렸다고 했다. 책에 실린 산문에는 오직 딸이기에 가능한 ‘박완서 문학’에 대한 감상이 실려 있다. 출판사 현대문학은 10주기를 맞아 박완서의 자전적 연애 소설이자 마지막 장편인 ‘그 남자네 집’ 개정판을 22일 출간한다. 일흔을 훌쩍 넘긴 작가가 수십 년 동안 가슴에 소중히 품어온 첫사랑의 기억을 풀어놓은 작품이다. 개정판엔 호원숙 작가의 헌사와 이해인 수녀, 구효서 작가 등이 2011년 쓴 추모사 등이 담겨 있다. 웅진지식하우스는 자전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후속작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개정판을 22일 펴낸다. 박완서의 유년 시절과 성년의 기억을 망라한 두 작품은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문학동네는 박완서의 수필을 모아 10주기 기념 산문집 세트를 11일 출간했다. 1977년 첫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부터 1998년 나온 ‘어른 노릇 사람 노릇’에 수록된 글까지 총 465편의 산문을 골랐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한 남성이 기존 수상 작품을 도용해 5개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피해를 주장하는 작가는 “베껴진 작품이 줄줄이 상을 받는다는 건 문학상에 표절과 도용을 검토하는 최소한의 장치마저 없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작가 김민정 씨는 16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2018년 백마문화상 소설 부문 상을 받은 제 단편소설 ‘뿌리’를 그대로 베낀 A 씨가 5개 문학 공모전에서 수상했다”는 글을 올렸다. A 씨는 2020 포천 38문학상 대학부 최우수상,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가작, 제2회 글로리시니어 신춘문예, 소설전문 계간지 ‘소설 미학’ 2021년 신년호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김 씨에 따르면 A 씨는 4개 문학상에는 뿌리라는 제목 그대로 출품했고, 글로리시니어 신춘문예에는 제목을 ‘꿈’으로 바꿔 제출했다. 포천 38문학상과 경북일보 문학대전에 출품할 땐 소설 속 병원 이름을 ‘포천병원’으로 바꿨다. 실제로 소설 미학 등에는 김 씨의 원작과 똑같은 작품이 A 씨의 이름으로 실려 있다. 김 씨는 자신의 SNS에 “제 작품 ‘뿌리’는 온라인에 본문이 게시돼 있어 구글링만 해 봐도 전문이 나온다”며 “문학상 규모와 상관없이 당선작에는 표절, 도용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고봉준 문학평론가는 “문학상 주최 측에서도 당선작을 선정할 때 심사위원이 알고 있는 작품을 베낀 경우가 아니라면 표절과 도용을 적발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표절을 검토할 수 있는 빅데이터나 풀을 만드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서울대 졸업장, 탄탄한 일자리, 고액 연봉…. 한때 남들이 우러러보는 스펙을 좇았지만, 어릴 적 품었던 자기만의 꿈에 도전해 ‘영꿈(Young+꿈) 통장’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청년들이 있다. 배우 프로필을 100번 넘게 돌려 99번 거절당하고, 6번 도전한 스페인 축구단 입단에서 5번 실패했지만 결국 이뤄낸 짜릿한 성취로 꿈에게 진 빚을 갚는 사람들을 만났다.》 “서울대 나와서 왜 연기를 해요?” 2018년 3월에 있었던 한 독립영화 오디션장. 막 연기를 마친 김재은 씨(28)를 지켜보던 한 영화 관계자는 심드렁하게 툭 내뱉었다. 연기에 대한 평가도 없이, 그게 어떤 상처가 되는지도 모르는 한마디. 재은 씨는 한참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진심을 몰라주는 것만큼 서러운 일이 없거든요. 그저 제 연기를 보여주고 싶은 건데, 누군가는 다른 조건들에만 관심을 갖죠. 연기에 도전할 때마다 자주 그런 상처를 받아요. 어떤 이들은 가진 자의 배부른 소리라고도 하지만, 꿈은 누가 대신 꿔주는 게 아니잖아요.” 남들이 뭐라 하든 자기만의 ‘영꿈(Young+꿈) 통장’을 가진 청년들은 곧잘 이런 벽에 부딪힌다. “왜 그 좋은 걸 마다해?” 조건을 박차고 나와 꿈에 투자하는 이들은 때론 괴짜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영꿈 통장은 눈앞의 ‘수익률’을 생각하며 만드는 게 아니다. 통장을 개설하는 것 자체, 그 도전하는 과정이 청년들이 꾸는 꿈이다.○ 진심을 채워가는 꿈의 통장 재은 씨가 연기자의 길에 들어선 건 스물세 살이 되던 2016년. 유치원 때부터 맘속에서만 품고 있던 ‘워너비(wannabe)’의 세상에 도전하기로 했다. 물론 주위에서 반대가 엄청났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르바이트와 인턴 생활을 하며 모았던 돈을 몽땅 연기학원에 쏟아부었다. 2017년엔 아예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1평짜리 연습실도 빌렸다. 전력투구를 위한 투자였다. 차근차근 정열을 쏟아부으면 지금은 마이너스인 영꿈 통장이 플러스로 바뀌리라.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제 영꿈 통장은 해질 대로 해진 노트 한 권이에요. 표를 만들고 날짜와 함께 그날 연습할 배역을 적어뒀죠. 연습 때마다 까만 동그라미를 하나씩 칠했어요. 이 노트 한 권을 채우는 데 거의 1년이 걸렸네요. 제 꿈을 향한 노력이 고스란히 담겼어요.” 노력은 결국 길을 터줬다. 2018년 가을, 재은 씨는 한 독립영화에서 3분 동안 중국어 독백 장면을 찍었다. 어려운 중국어 대사를 오디션에서 깔끔하게 소화해냈다. 현장에서도 “감정 표현이 좋았다”는 칭찬을 받았다. 늦깎이 연기자 재은 씨의 영꿈 통장에 가능성이 비치던 순간이었다. 아직도 재은 씨의 영꿈 통장은 현재진행형이다. 소규모 영화와 연극 수십 편에 출연하며 커리어를 쌓고 있다. 이젠 학교만 물어본 뒤 기회를 주지 않던 시절은 벗어난 셈이다. “당장 10만 원, 100만 원이 제 인생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면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는 회사에 들어갔겠죠. 물론 그것도 성취감이 있지만 제가 꿈꾸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죠. 영꿈 통장에 근사한 연봉을 채우진 못했지만 제 ‘진심’을 입금했어요.” ○ 연봉은 제로라도 마음만은 부자 축구선수 구성은 씨(28). 웬만큼 축구에 해박한 이들에게도 낯선 이름이다. 일단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면 다들 깜짝 놀란다. 그런데 소속팀 이름을 대면 다들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 한다. ‘우니온 엘리파(C. D. Union Elipa).’ 레알 마드리드 같은 1부 리그가 아닌 6부 리그 축구팀이다. 사실 성은 씨는 ‘축구 선수를 경험해본 적 없었던’ 축구선수다. 평범한 대학생이던 그는 아마추어임에도 남다른 실력으로 국내 K3리그(당시 4부 리그)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 그저 “제대로 도전해보고 싶다”는 각오뿐이었다. 입단까진 성공했지만 수준 차라는 벽만 여실히 절감했다. 그는 군대에 갔다. 하지만 그는 휴면계좌로 잠들어 있던 영꿈 통장을 한시도 잊지 못했다. 어린 시절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감동은 언제나 그를 들썩거리게 했다. 차범근축구교실에서 배운 게 다지만 무모한 꿈이라도 상관없었다. 전역한 뒤 그 무모함을 갈아 넣을 마이너스통장을 발견했다. 2018년 당시 스페인 7부 리그에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꿈 FC’를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택배기사, 기간제 교사 등 다양한 이들이 모였다. 연봉은 없다. 성은 씨도 무작정 스페인으로 건너가 1년 동안 선수로 뛰었다. 2019년엔 본격적으로 영꿈 통장을 만들었다. 제대로 스페인 지역 리그 선수가 되겠다는 게 목표였다. 5전 6기 끝에 소속 팀을 찾았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국내에 와 있는 동안 방출됐다. 통장엔 잔액도 없이 마이너스만 늘어갔지만 성은 씨는 개의치 않았다. 지난해 8월 다시 스페인으로 건너가 입단 테스트에 도전했다. 그렇게 찾은 소속 팀이 현재의 우니온 엘리파다. 지금도 성은 씨는 버는 돈이 거의 없다. 스페인은 3부 리그 이상은 올라가야 주급이라도 나온다. 그나마 유튜브에서 자신의 일상을 소개한 것이 호응을 얻어 그 수익으로 생활비를 충당한다. 하지만 그의 꿈을 응원하는 수백 개의 댓글은 그에겐 통장 이자만큼이나 소중하다. “더 잘해서 더 높은 리그에 도전해보고 싶죠. 현실적으로 4, 5부 리그만 올라가도 정말 기쁠 것 같아요. 이렇게 도전하는 자체로도 ‘뭐든 인생에 얻는 게 있을 거야’란 자신감이 있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불어난 팬들은 엄청난 수익이고요.”○ 꿈을 잃으면 어떤 일도 즐겁지 않아 여섯 살 때부터 이어가던 피아니스트라는 ‘영꿈 통장’. 하지만 김수진 씨(34)는 고교 2학년 때 그 통장을 해지했다. 지극히 뻔하고 현실적인 이유였다.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다. 모아뒀던 악보를 다 버리고 2005년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피아노는 취미가 됐다. 하지만 꿈을 잃은 청년에게 길고 긴 방황이 찾아왔다. 대학을 졸업해도 흔들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2011년 첫 직장에 들어간 뒤 2년 동안 이직만 여러 차례. 채워지지 않는 뭔가로 가슴이 뻥 뚫려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문화단체 사무국에서 일하다 예술인들을 마주하며 깨달았다. ‘내 꿈은 피아노구나.’ “음대를 가려고 정말 죽을 듯이 노력했어요. 레슨비를 벌려고 하루 6시간씩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을 한 푼도 안 썼어요. 거의 10년 만에 다시 피아노를 치니 손가락이 다 굳어 정말 애먹었죠. 하지만 일하고 밥 먹고 자는 시간 말곤 오로지 연습만 했어요.” 수진 씨는 2012년 기적처럼 음대에 합격했다. 합격한 뒤엔 더 미친 듯이 정열을 쏟아부었다. 오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연습만 하는 일이 평범한 일상이 됐다. 해지했던 영꿈 통장은 다시 살아나 부풀어 올랐다. 석사 과정을 마친 수진 씨는 현재 예술경영박사 과정까지 밟고 있다. “피아노를 다시 할 수 있어 행복해요. 그것뿐이에요. 안 했으면 평생 후회했겠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진다’는 생각으로 간절하게 원하고 노력했어요. 꿈꾸던 삶을 살 수 있어 만족스러워요. 정식 연주자가 되지 못해도 좋아요. 제 영꿈 통장은 ‘무엇이 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사는가’예요.”○ 습생이에서 스타 인플루언서로 소셜미디어에서 수많은 팔로어를 거느린 허영주 씨(29)는 10년 전엔 ‘습생이’이라 불렸다. 습생이란 연예기획사 아이돌 연습생을 낮춰 부르는 말이다. 오랜 노력 끝에 데뷔도 했다. 스무 살때 ‘더 씨야’란 걸그룹 멤버였다. 데뷔만 하면 스타가 될 줄 알았던 꿈은 금방 깨졌다.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습생이 때만큼 연습하고 연습했지만 무대에 설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몇 년간 습생이로 부은 ‘영꿈 통장’이 드디어 황금 알을 낳을 줄 알았건만. 이자는커녕 원금 회수조차 어려운 통장이 돼버렸다. “매일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남 탓만 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어요. 누군가가 키워주지 않아서 이런 거라고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 게 잘못이란 걸 깨달았죠.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죠. ‘댐에 물을 채우는 시간을 갖자.’ 성공 말고 성장에 투자해보자. 그게 목표이자 꿈이어야 한다고요.” 영주 씨는 남이 관리해주길 바랐던 통장을 다시 자기 품으로 찾아왔다. 자기만의 장점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소속사와 계약이 끝난 뒤 동생 정주 씨와 함께 ‘듀자매’란 그룹을 결성했다. 아직 대중가수로서 뭔가를 이루진 못했지만 지금 그들은 ‘틱톡’ 팔로어가 550만 명이 넘는다. 국내에서 틱톡 팔로어 순위 20위 안팎일 정도의 ‘인플루언서’가 됐다. 이젠 수입도 꽤 커졌다. “당연히 수입이 생긴 것도 고맙죠. 하지만 ‘나 스스로 우뚝 섰다’라는 자부심이 더 소중해요. 고난의 시간을 겪으며 쌓은 노력이 이제 행복이란 이름으로 영꿈 통장에 쌓이는 거죠.” “1년간 책 100권보다 매일 2장씩 읽기 목표로… 소소한 도전이 자신을 키워”위기 때 ‘진로적응성’ 높이는 법 ‘3포 세대’ ‘N포 세대’도 옛말이 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가 터진 뒤엔 그냥 다 포기해야 한다. 이 시대 청년들은 불안을 일상으로 품고 지낸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게 꿈이다. 영꿈 통장을 마련해 엎치락뒤치락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두려움과 역경에도 청년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도전과 실패를 통해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을 높이 샀다. 양은주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영꿈 통장을 만들어가는 청년들의 모습이 난관 극복의 효과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라며 “위기에 굴하지 않고 도전했던 경험이 나중에 찾아올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주는 레이더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다. 진로 상담 분야에 ‘진로적응성’이란 용어가 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어떤 도전이건 위기를 겪기 마련이다. 하지만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상황을 곱씹어가는 것 자체로 인간은 자신을 조금씩 깨달아간다. 이런 과정에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관심과 통제력, 확신을 갖는 능력이 진로적응성이다. 청년의 영꿈 통장은 이런 진로적응성을 담는 그릇이어야 한다. 이런 진로적응성은 ‘작은 도전’을 해결해보는 경험을 통해 키워 나갈 수 있다. 처음부터 너무 큰 도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목적보다는 가능성의 폭을 열어놓는 것만으로도 영꿈 통장은 커질 수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소소한 도전’을 추천했다. 예를 들어 독서라는 목표를 세웠을 때 “1년 동안 책 100권을 읽어야지” 같은 거창한 목표는 오히려 실패할 확률이 높다. “매일 책 두 페이지씩 읽겠다”는 가벼운 도전을 통해 성취감을 매일 맛보는 게 중요하다. 그 결과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무기력을 극복하고 꿈도 발견할 수 있다. 심리학이나 정신건강 분야에서는 사건 사고 등으로 생긴 트라우마를 극복한 뒤 개인적인 역량과 삶에 대한 만족도가 이전보다 크게 향상되는 현상을 ‘외상 후 성장’이라고 부른다. 도전과 실패의 경험은 상처로 남지만 이를 극복해 아물고 딱지가 떨어지면 더 단단하고 건강한 새살이 돋아난다. 조용래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는 “사회적 여건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걸 인정하고 적응하면서 내면의 긍정적 변화를 겪게 되기도 한다”며 “도전을 계속하고 성취를 이루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을 믿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 특별취재팀 ::▽팀장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강승현 신희철 이소연 김태성 이청아(이상 사회부) 전채은(문화부) 신지환(경제부) 기자}
‘고적운 누비이불’. 영국 구름감상협회 회원이 해질녘 영국 런던의 구름을 카메라에 담은 뒤 붙인 이름이다. 황혼에 깃든 양떼구름을 보고 구름 모양의 수가 놓인 누비이불을 덮은 모습을 상상한 것. 협회 회원들이 구름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처럼 몽상적이고 사랑스럽다. 구름감상협회를 세운 저자는 세계 각국 회원들이 보내온 수많은 구름 사진 중 365장을 추려 짤막한 글과 함께 책으로 엮었다. 어려서부터 구름을 좋아한 그는 영국 레딩대에서 방문연구원으로 기상학을 연구했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이 일반인들에게 아름다운 하늘로 받아들여지는 게 불만스러웠던 그는 2005년 협회를 만들었다. “우리는 구름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구름이 없다면 우리 삶도 한없이 초라해지리라고 믿는다”는 선언문을 보고 5만3000명이 이 협회에 가입했다. 이들에게 구름 없는 파란하늘은 전혀 유쾌하지 않다. 책에는 아름답고 웅장한 구름의 면면과 더불어 학계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구름 유형도 담겨 있다. 협회 회원이 발견한 ‘거친물결 구름’은 세계기상기구가 발행하는 ‘국제구름도감’ 2017년판에 정식으로 수록됐다. 코로나 우려에 갇혀 지내는 나날이 답답하다면 이들 ‘구름주의자’들처럼 고개를 들어 흘러가는 구름을 감상해보는 건 어떨까.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우리가 일본 (정부)에다가 소송하는 건 사죄가 필요해서다. 돈 문제가 아니다.” 일본 정부의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배상 책임을 처음 인정한 8일 판결의 원고 12명 중 5명의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인 이옥선 할머니(94)는 법원 판결에 대해 “개운하지 않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일본 정부는)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솔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이옥선 할머니가 머물고 있는 나눔의집은 “일본 정부는 지금이라도 이 끔찍한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93)는 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참 좋습니다. 너무 고마운 일입니다”라며 흐느꼈다. 숨을 한참 동안 고른 뒤 이 할머니는 “그래도 아직 일본이 사과하지 않았다. 확실한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오전 선고 직후 판결 소식을 접한 이 할머니는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다. 13일은 서울중앙지법에 간다. 하루 전에 올라가서 선고 결과를 기다릴 것이다. 먼저 간 언니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이 할머니가 다른 피해 할머니 20명과 함께 같은 취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1심 선고는 13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다. 이 할머니는 또 “법원이 결정을 내린 것은 상징적인 것”이라며 “돈(배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야 한다. 살아있을 때 꼭 받아야 하는데…”라며 한숨을 쉬었다. 정의기억연대는 “대한민국의 헌법 질서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국제인권법의 인권 존중 원칙을 앞장서 확인한 선구적이고, 기념비적인 판결”이라고 밝혔다. 위안부피해자가족대책협의회는 “대한민국 법원에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위안부 사건은 나치 전범과 함께 20세기 최악의 인권침해 사건임에도 양국의 무책임 속에서 오랜 기간 피해 회복에 소극적이었다”며 “이번 판결은 이러한 상황에 경종을 울림과 동시에 피해자들의 실효성 있는 권리 구제를 위한 발판이 됐다”는 성명을 냈다. 장영훈 jang@donga.com·전채은 기자}
노년층이나 기저질환자가 많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망자가 속출하는 요양병원들에서 새해에도 계속해서 집단 감염이 이어지고 있다. 광주시는 “광산구 삼거동에 있는 한 요양병원에서 2일부터 이틀 동안 입원 환자 53명과 직원 9명 등 모두 62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3일 밝혔다. 해당 병원은 방역당국이 요양병원 관계자에 대한 전수 검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집단 감염이 드러났다. 확진자 가운데 60명은 본관 2층에 입원해 있는 환자 51명과 직원 9명이며, 나머지 2명은 본관 1층에 입원한 환자들이다. 방역당국 관계자는 “해당 요양병원은 입원 환자가 293명이며, 종사자는 152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광주시에 따르면 광주지역 요양병원은 지난해 12월 21일부터 면회 금지 등의 행정명령이 내려진 상태다. 신입 환자는 코로나19 검사를 진행해 음성일 경우에만 입원이 가능했다. 방역당국 관계자는 “이를 감안할 때 해당 요양병원의 집단 감염은 외부에서 직원을 통해 유입됐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역학조사 결과 확진된 직원들은 함께 승합차를 타고 출퇴근했으며, 일부는 최근 오한 등 코로나19 의심 증상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시 관계자는 “방역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사실이 확인될 경우 고발이나 과태료 부과 등의 강력한 제재를 가할 방침”이라고 했다. 인천에 있는 한 요양병원에서도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 인천시는 “계양구에 있는 한 요양병원에서 2일 요양보호사와 간호조무사 등 직원 7명이 확진된 뒤 진행한 전수검사에서 41명이 추가로 양성 판정을 받았다”고 3일 밝혔다. 방역당국에 따르면 해당 요양병원의 누적 확진자 48명은 입원 환자가 28명이고, 직원 17명, 기타 3명이다. 방역당국 관계자는 “해당 병원을 코호트(동일집단) 격리하고 확진자들은 전담 병원이나 생활치료센터로 이송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15일 첫 확진자가 나온 뒤 대형 집단 감염으로 퍼졌던 서울 구로구의 한 요양병원도 3일 6명이 추가 확진되며 관련 확진자가 206명으로 늘어났다. 서울시 측은 “입원 환자 4명과 직원 1명, 가족 1명이 양성 판정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1일 첫 확진자가 나왔던 경기 고양시 덕양구의 한 요양병원은 접촉자 조사 과정에서 9명이 추가로 양성 판정을 받았다. 시 관계자는 “현재까지 확인된 관련 확진자 10명은 직원이 6명이고, 입원 환자가 3명, 가족이 1명”이라고 전했다. 종교시설 집단 감염도 이어지고 있다. 2일 첫 확진자가 발생했던 경기 용인시 수지구의 한 교회에서는 접촉자 조사 과정에서 27명의 추가 확진자가 나왔다. 지난해 12월 31일 첫 확진자가 발생한 충북 충주의 한 교회에서도 24명이 추가 확진됐다.광주=이형주 peneye09@donga.com / 인천=차준호 / 전채은 기자}
지난해 10월 학대를 당하다 숨진 생후 16개월 입양아의 양부모를 아동학대 혐의로 세 차례 조사했던 서울 양천경찰서의 홈페이지가 부실 대응을 비판하는 글들이 몰리며 한때 접속이 마비됐다. 양천서 홈페이지에 있는 게시판에는 2일 밤부터 3일까지 누리꾼들의 항의성 글 수백 건이 올라왔다. 대다수가 “기회가 있었는데 왜 정인이를 살리지 못했느냐”는 내용이었다. 해당 홈페이지는 접속자가 크게 늘며 한때 시스템 오류가 발생했으며, 3일 오후 10시경에도 접속이 원활하지 않았다. 정인이는 숨진 아이의 입양 전 이름이다.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현재 재판에 넘겨진 정인이의 양부모는 지난해 5월과 6월, 9월 경찰 조사를 받았다. 아이를 살펴봤던 병원과 어린이집 등이 학대를 의심해 신고했으나, 경찰은 내사 종결하거나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내린 뒤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온라인에선 양부모의 공판을 담당하는 서울남부지법에 진정서를 보내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는 3일 공식 블로그에 ‘정인이 진정서 양식 파일’을 올려두기도 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정인이에 대한 추모의 물결도 일고 있다. 인스타그램에선 해시태그 ‘#정인아 미안해’ 등을 단 게시물이 3일 기준 2만5000여 개가 올라왔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고사실에서 예정보다 일찍 울린 시험 종료 종으로 인해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유은혜 교육부 장관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을 경찰에 고소했다. 서울 강서경찰서에 따르면 3일 강서구 덕원여고에서 수능을 치른 수험생 9명과 학부모 16명은 “학교 측 실수로 수험생들이 공정하게 시험을 치를 권리를 침해받았다”며 유 장관과 조 교육감을 24일 직무유기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당시 시험장에서 방송 업무를 담당한 교사 1명과 고사장 감독관 5명 등도 함께 고소했다. 수능 당일 덕원여고에서는 탐구영역 시험이 진행된 4교시 첫 번째 선택과목 시험의 종료 종이 2, 3분가량 일찍 울렸다. 감독관들은 종이 울린 뒤 수험생들의 시험지를 걷었다가 뒤늦게 종이 일찍 쳤다는 것을 알아채고 시험지를 다시 나눠주고 약 2분간 시험 시간을 더 줬다. 서울시 양천교육지원청은 “방송 담당 교사가 타종 시간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마우스 휠을 실수로 잘못 건드려 벌어진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힌 바 있다. 수험생들은 종료 종을 일찍 쳤다는 안내 방송 이후에도 감독관들의 대응이 교실마다 달라 시험지를 다시 돌려받은 시각이 수험생마다 길게는 2분 이상 차이가 났다는 입장이다. 또 고소에 나선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교사 개인의 실수에서 벌어진 일로 치부하기보다는 수능 관리 시스템의 오류, 관리감독 책임 방기 문제일 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할머니 두 분이 평생 모은 재산 수억 원을 서울대에 기부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18일 서울대에 따르면 송혜민 할머니(78)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과 남편을 기리며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에 4억4000만 원을 기부했다. 송 할머니의 외아들 도원석 씨는 1991년 화학생물공학부를 졸업했으며 남편도 상과대학 동문이다. 아들 도 씨는 서울대 졸업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으나 경영학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2004년 돌연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2015년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자 송 할머니는 생전 남편의 뜻에 따라 유산을 서울대에 기부하기로 했다. 송 할머니는 “화학공학에 대한 아들의 열정을 기리며 평소 아들이 사랑했던 서울대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돼 뜻깊은 일이 될 거 같다”며 “남편이 남긴 재산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아들의 이름으로 부자(父子)의 모교에 기부할 수 있어 마음이 후련하다”고 말했다.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는 ‘도원석 장학기금’을 조성해 학부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예정이다. 올해 초 87세를 일기로 별세한 홍정희 할머니는 신탁 기부를 통해 7억 원을 서울대에 기부했다. 홍 할머니는 재일 교포 사업가와 결혼해 일본에서 거주하다 남편이 사망한 후 2019년 한국에 돌아왔다. 홍 할머니는 경기 고양시의 한 요양원에 머물면서 요양원 측에 사망 후 재산을 서울대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가정 형편 탓에 배움이 짧았던 것이 홍 할머니에겐 평생의 한이었다고 한다. 요양원 원장은 홍 할머니가 ‘유언대용신탁’ 제도를 활용해 서울대에 기부할 수 있도록 도왔다. 유언대용신탁은 위탁자가 살아 있는 동안 금융회사가 자산을 운용하다 위탁자 사후 계약대로 재산을 상속·배분하는 제도다. 홍 할머니는 이 계약을 맺으며 “젊은 학생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공부를 포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장학기금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홍 할머니가 올해 2월 사망하자 신탁 계약에 따라 유산 7억 원은 서울대발전기금에 기부됐다. 서울대는 할머니의 이름을 딴 ‘홍정희 장학기금’을 조성해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요즘은 사회적 거리 두기 3단계라 생각하고 생활해요.” 직장인 김모 씨(29)는 14일경부터 출근 때 도시락을 쌌다. 평소 동료와 구내식당이나 주변 음식점에서 점심을 해결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크게 는 뒤론 ‘혼밥’을 하고 있다. 사무실에서도 김 씨는 동료들과 거의 말을 섞지 않는다. 필요한 대화도 마스크 쓰고 거리를 둔 채 나눈다. 김 씨는 “별스러운 게 아니다. 동료들도 서로를 위해 비슷한 방식으로 일한다”고 전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매일 1000명 안팎을 넘나들자, 정부는 사회적 거리 두기 3단계 시행을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 시민들은 이미 ‘자발적으로’ 3단계에 버금가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사무실에 나와도 재택과 다름없이 근무하는 직장인이 늘었고, 영업이 가능해도 가게 문을 닫는 자영업자도 적지 않다. 서울 강남의 직장에 다니는 이모 씨(25)는 1, 2주 전부터 점심때면 팀원들과 도시락을 주문한다. 물론 음식이 오면 따로 먹는다. 이 씨는 “요즘엔 배달을 많이 시켜서인지 대기 시간이 엄청 길어졌다. 기다리기 힘들어 집에서 싸오거나 출근길에 사오는 이들이 늘었다”고 했다. 기업도 순환·재택근무를 늘려 가는 추세다. 지금까진 대기업 위주였지만, 최근 중소업체도 안전을 위해 참여하는 모양새다. 13일 한국은행의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재택근무 확산, 쟁점과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기업의 절반 이상이 재택근무를 시행한다. 특히 중견기업(64.6%)과 중소기업(44.1%)의 참여율이 증가했다. 큰 손해를 감수하고 영업을 중단하거나 포장·배달만 주문받는 자영업자들도 있다. 부산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김모 씨(42)는 오후 9시까지 영업할 수 있지만 당분간 휴업을 결정했다. 김 씨는 “나름대로 꼼꼼히 방역수칙을 지키지만 어떤 경로로 감염될는지 알 수 없지 않냐”며 “내 가족과 고객을 위해서도 잠깐 쉬는 게 옳다고 봤다”고 했다. 강원 강릉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탁모 씨(43)는 방문 고객은 받지 않고 포장만 해주고 있다. 물론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처지도 여전히 많다. 서울 용산에서 식당을 하는 B 씨(48)는 “마음이야 휴업하고 싶지만 임차료가 나가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하소연했다. 직장인 정모 씨(37)는 “중소업체들은 대체인력을 찾기 힘들어 재택근무가 어렵다”며 한숨을 쉬었다.강승현 byhuman@donga.com·전채은 기자}
“요즘은 그냥 사회적 거리 두기 3단계가 시작됐다고 생각하고 생활해요.” 직장인 김모 씨(29)는 14일경부터 출근 때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평소 동료들과 구내식당이나 회사 주변 음식점에서 점심을 해결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크게 늘어난 뒤론 자기 자리나 휴게실에서 ‘혼밥’을 하고 있다. 사무실에서도 김 씨는 동료들과 거의 말을 섞지 않는다. 꼭 필요한 대화도 마스크를 꼭 착용하고 거리를 둔 채 나눈다. 김 씨는 “나만 별스러운 게 아니다. 최근엔 동료들도 대다수가 서로를 위해서 비슷한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매일 1000명 안팎을 넘나들자,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 시행을 놓고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 시민들은 이미 ‘자발적으로’ 3단계 수칙에 버금가는 일상을 보내기 시작한 이들이 적지 않다. 사무실에 나와도 재택과 다름없는 근무를 하는 직장인이 늘었고, 영업이 가능한데도 가게 문을 닫는 자영업자도 적지 않다. 서울 강남에 있는 직장에 다니는 이모 씨(25)는 1, 2주 전부터 점심때면 팀원들이 함께 도시락을 주문해서 먹는다고 했다. 물론 배달을 시킨 뒤엔 서로 각자 떨어져서 혼자 먹는다. 이 씨는 “요즘엔 워낙 배달을 많이 시키는 탓인지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졌다. 너무 오래 걸린다고 집에서 싸오거나 출근길에 사서 오는 동료들이 늘었다”고 말했다. 기업들도 순환·재택근무를 늘려가고 있는 추세다. 이전까지는 아무래도 대기업 위주였지만, 최근엔 중소업체들도 안전을 위해 참여하는 모양새다. 13일 한국은행의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재택근무 확산, 쟁점과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기업의 절반 이상이 재택근무를 시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견기업(64.6%)과 중소기업(44.1%)의 참여율이 증가했다. 중소벤처기업부 관계자는 “최근 코로나19 장기화로 재택근무 형태로 전환한 중소기업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큰 손해를 감수하고 영업을 중단하거나 포장·배달만 주문받는 자영업자들도 늘었다. 부산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김모 씨(42)는 현재 오후 9시까지 영업할 수 있지만 당분간 자발적으로 휴업하기로 했다. 김 씨는 “나름 꼼꼼히 방역수칙을 지키고 있지만 어떤 경로로 감염될는지 알 수 없는 거 아니겠느냐”며 “내 가족을 위해서도 고객을 위해서도 잠깐 쉬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경기 안성의 카페 업주 A 씨도 “주변 경치가 좋아 주말이면 여전히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지만 당분간 쉬기로 했다”고 전했다. 강릉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탁모 씨(43)는 방문 고객은 받지 않고 포장만 해주고 있다. 물론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처지도 여전히 많다. 서울 용산구에서 식당을 하는 B 씨(48)는 “마음이야 휴업을 하고 싶지만 임대료가 계속 나가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며 하소연했다. 직장인 정모 씨(37)는 “많이 늘었다지만 중소업체들은 아무래도 대체인력을 찾기 힘들어 재택근무를 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한숨쉬었다. 강승현 기자byhuman@donga.com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13일 오후 3시경 서울 강서구 보건소. 보건소 입구에서 시작된 줄은 건물을 한 바퀴 빙 둘러싼 뒤 100m가량 떨어진 지하철 9호선 등촌역 앞까지 이어졌다. 인근 골목들엔 주차 공간을 찾지 못한 시민들이 아무렇게나 세워둔 차량들이 가득했다. 막 검사를 마치고 나온 A 씨는 “대기 줄에서만 1시간 반 이상 기다린 뒤에야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서울 경기 등 수도권에서 확진자들이 갈수록 늘어나며 의심 증상자나 접촉자 등을 검사하는 선별진료소도 포화 상태에 이르고 있다. 강서구와 강남구 보건소는 12일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검사자만 1000명을 넘어섰다. 서울은 2개월 전만 해도 시 전체 검사 숫자가 하루 3000건 안팎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12일까지 2주 동안 서울의 평균 검사는 3배가 넘는 9521건으로 늘어났다. 심지어 8일부터는 5일 연속 1만 건을 넘어섰다. 12일 1017건으로 서울 자치구 가운데 가장 많았던 강서구 보건소는 13일도 혼잡함이 이어졌다. 특히 관련 확진자가 130명을 넘는 집단 감염이 발생한 성석교회 교인이 몰리며 검사 대상이 크게 늘었다. 이 교회는 전체 교인이 약 1000명으로 최근 예배에 480명가량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인 B 씨는 “교회에서 교인 모두에게 검사를 받으라고 공지했다”며 불안해했다.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눈이 내리고 날씨도 춥다 보니 대기 줄은 갈수록 간격이 좁아졌다. 보건소 직원들은 계속해서 돌아다니며 “간격을 벌려 달라”며 큰 소리로 외쳤다. 한 직원은 “오전 일찍부터 길게 늘어섰다. 최대한 부지런히 검사를 진행했지만 대기 인원이 갈수록 늘어 감당이 안 된다”고 답답해했다. 12일 서울에서 두 번째로 검사자가 많았던 강남구 보건소(1001건) 역시 13일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보건소를 찾은 시민들은 직원 안내를 빠르며 질서정연하되 빠르게 문진표를 작성하고 검체 채취를 받았다. 하지만 속도를 내도 새로 검사를 받으러 오는 이들이 많아 줄은 점점 더 길어졌다. 시민 C 씨는 “고등학생 딸이 검사를 받아야 해서 함께 왔다. 애가 다니는 학교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며 “대기자 중에도 확진자가 있을 텐데 행여 옮기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라고 했다. 의료진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검사 대상도 늘었지만, 서울시는 보건소 선별진료소 운영 시간을 평일 오후 9시, 주말 오후 6시까지 연장했다. 한 보건소 관계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근무시간 조절은 고사하고 중간에 쉴 틈도 없어 누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우려된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14일부터는 선별진료소 정체가 다소 누그러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중앙방역대책본부는 이날부터 내년 1월 3일까지를 ‘집중 검사 기간’으로 정하고 수도권 150곳에 임시 선별진료소를 설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시 관계자는 “유동인구가 많은 서울역과 용산역은 물론 주요 대학가나 집단감염 발생 지역에도 설치돼 검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전했다.이청아 clearlee@donga.com·박창규·전채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