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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의 임태호 씨는 스무 살 때 일제 징용에 니가타현 사도(佐渡)섬의 광산으로 끌려갔다. 매일 새벽 함바(노동자 숙소)로부터 험한 산길을 1시간 30분 걸어야 나오는 광산이었다. 직할 병원이 있었지만 온갖 부상에도 병원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 결국 섬에서 도망쳐 사도광산 생존자로는 유일하게 구술 기록을 남겼다. 그에겐 죽음의 노역장이던 이곳이 28일 일본 문화심의회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됐다. ▷1601년 발굴된 사도광산은 1989년까지 운영된 일본 최고(最古) 광산으로 에도 시대엔 도쿠가와 막부의 금고 역할을 했다. 니가타현은 이 시절의 금광임을 강조하지만 태평양전쟁 무렵엔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광산이었고 대부분 유적도 이와 관계된 시설물들이다. 얼마 전엔 최소 1141명의 조선인이 이곳에서 노역했다는 일본 정부 문서가 공개됐다. 하지만 세계문화유산 추천서 요약본에는 조선인 강제노역 사실이 빠져 있어 군함도(端島·하시마)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와 같이 역사 왜곡이 반복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조선인 광부들은 형식적으론 청부업자를 통하거나 직접 고용됐지만 실제로는 강제노역이었다. 사도광업소 기록에는 1943년 6월 기준 조선인 광부 1005명이 들어와 이 중 148명(14.7%)이 ‘도주’한 것으로 나온다. ‘퇴사’가 아닌 ‘도주’로 집계했다는 건 강제노역임을 자인하는 증거다. 조선인 1인당 평균 월급은 80엔 안팎이었으나 각종 물품비와 보험료를 공제하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얼마 안 됐고 그나마 강제저축을 했다. 인플레이션 억제와 전비 충당, 그리고 도주를 막기 위해서였다.(정부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보고서)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로 판정한 218만여 명 중 사도광산 피해자는 148명으로 추정된다. 이 중 73명이 진폐증과 폐질환 같은 후유증을 앓았다. 사망자는 9명(사망률 6%)으로 일본 전 지역 조선인 노무자 사망률(0.9%)보다 높다. 1945년 광복의 날 사도광산엔 조선인 244명이 남아 있었다. 사도광산은 긴급회의를 열었는데 안건은 이들의 귀국이 아니라 ‘패전으로 인한 가동률 저하 방지 방안’이었다. ▷일본은 1932년 강제노동을 금지한 국제노동기구(ILO) 노동협약 29호를 비준했다. 국내에선 올 2월에야 비준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으니 일본이 89년 빨랐다. 그런데 군함도도 사도광산도 전쟁을 위해 스스로 비준한 국제협약을 위반하더니 이제는 그 사실마저 외면하려 한다. 근대화에선 앞서간 나라가 언제까지 후진적 역사 인식에 발목 잡혀 있을 건가. 강제노역의 역사를 뺀 사도광산은 세계유산의 자격이 없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동아일보가 각계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아 선정한 ‘올해의 책’은 브라이언 헤어의 공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입니다. 진화인류학자가 쓴 이 책은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 아니라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riendliest)고 주장합니다. 경쟁과 이기심이 아닌 협력과 연대의 관점에서 진화론을 재해석한 메시지는 어느 한 사람이 위험해지면 모두가 무사할 수 없는 감염병 시대여서 울림이 큽니다. 진화론은 오랫동안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이론으로 오독됐지만 찰스 다윈도 “자상한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공동체가 가장 많은 후손을 남겼다”고 썼습니다(‘인간의 유래와 성선택’). 인간은 내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만 관심 있는 이기적인 동물이어서가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감성지수(EQ) 높은 존재여서 번성했다는 것이죠. 다른 동식물 사례는 생략하고 인류만 비교해 보겠습니다. 개인의 역량으로 치면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이 호모사피엔스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힘도 세고 뇌도 15%나 더 큽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이 10∼15명의 무리만 짓는 동안 호모사피엔스는 그 이상의 규모로 연대할 줄 알았습니다. 네덜란드 사상가 륏허르 브레흐만의 표현을 빌리면 네안데르탈인은 초고속 컴퓨터이고 인간은 구식 PC지만 와이파이를 이용할 줄 아는 종입니다. 인간이 협력적 의사소통으로 살아남은 진화의 흔적은 신체에 남아 있습니다. 인간은 얼굴 붉힐 줄 아는 유일종입니다. 타인의 생각에 반응한다는 뜻이죠. 흰 눈자위를 지닌 유일한 영장류이기도 합니다. 눈빛만 보고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다정한 만큼 우리를 위협하는 ‘그들’에겐 잔인해질 수 있습니다. ‘다정한…’은 엄마 곰이 아기 곰과 함께 있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예로 설명합니다. 누구라도 아기 곰을 해치려 들면 엄마 곰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남극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자행된 대량 학살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는 종교적 유혈 분쟁이, 증오의 언어를 주고받는 사생결단식 정치 문화가 다정함의 딜레마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잔인한 표변을 비인간화로 정당화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털북숭이 짐승이거나 뿔 달린 악마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에겐 잔혹해지는 다정함의 한계도 ‘인간화’로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인 수천 명이 목숨 걸고 유대인을 구해주었습니다. 대단한 영웅심도, 종교적 신념 때문도 아닙니다. 전쟁 전 유대인 이웃이나 직장 동료와 친하게 지낸 경험이 있었을 뿐입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조지 오웰은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잡고 도망치는 적을 보고 이렇게 썼습니다. ‘파시스트가 아니라 분명 나와 같이 생긴 인간… 그에게 총 쏘고 싶지 않았다.’ 새해에도 코로나 사태는 당분간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체 줄넘기를 해야 합니다. 누구 하나라도 넘어지거나 뛰지 않으면 모두가 넘어지는 게임입니다. 다행히 우리에겐 지구상에 존재했던 99.9%의 종이 멸종하는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장의 무기가 있습니다. 다정함입니다. 참호전이 한창이던 1차대전 때도 영국군과 독일군은 참호 밖을 나와 함께 캐럴을 부르고 담뱃불을 교환하는 성탄절의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차별과 혐오의 참호에서 빠져나와 서로 눈 맞춤하며 고통을 나누고 희망을 만들어가는 다정한 새해가 됐으면 합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세계 최장수 국가는 일본이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인의 기대수명은 84.2세로 한국(82.7세)보다 1.5세 더 오래 산다(2018년 기준). 일본인의 생선 사랑과 저지방 식단이 비결로 꼽힌다. 그런데 일본을 제치고 한국이 최장수 국가가 된다는 전망이 나왔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2020∼2025년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4.1세로 일본(84세)을 근소한 차이로 앞지를 전망이다. 2065∼2070년이면 기대수명은 90.9세(남자 89.5세, 여자 92.8세)로 늘어나 일본(89.3세)과의 격차는 더 벌어진다. 2위와 3위는 노르웨이(90.2세)와 핀란드(89.4세)다. 통곡물과 채소, 오메가3 지방산 함량이 높은 생선 위주의 ‘노르딕 식단’으로 주목받는 북유럽 국가들이다. ▷한국이 세계 1위의 장수 국가가 된다는 전망은 영국 과학계에서 먼저 나왔다. 영국 임피리얼칼리지 런던 연구진은 2017년 의학저널 랜싯에 게재한 논문에서 2030년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여성 90.82세, 남성 84.07세로 최장수 국가가 된다고 예측했다. 연구진은 건강보험제도와 의료기술의 발달, 높은 수준의 교육과 어린이 영양을 비결로 꼽았다. BBC를 비롯한 외신이 주목한 건 김치로 대표되는 발효음식 문화와 조금만 아파도 병원으로 달려가는 건강염려증이다. ▷실제로 한국인 가운데 ‘나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3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낮다. 한국인보다 평균수명이 짧은 미국(87.9%)이나 독일(65.5%)의 절반도 안 된다. 건강염려증을 감당해주는 건 가성비 뛰어난 의료 인프라다. 한국인의 1인당 연간 병원 방문 횟수(16.6회)는 OECD(평균 7.1회)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예방접종률, 건강검진율 등 의료 접근성을 나타내는 지표와 위암 유방암 대장암 같은 중증질환 생존율 모두 OECD 평균보다 높다. 반면 1인당 연간 진료비(3192달러)는 OECD 평균(3992달러)보다 싸다. ▷세계 1위 장수 국가 기록에 기여한 또 다른 요인은 저출산이다. 영아 사망이 드물다 보니 기대수명이 길어지는 것이다. 지금 같은 저출산 기조가 이어지면 생산연령인구 100명이 부양해야 하는 인구가 2020년 38.7명에서 2070년이면 116.8명으로 급증한다. 유엔은 한국 인구가 2024년경 정점에 이른 뒤 2100년이면 2900만 명까지 줄어든다고 전망했다. 1966년 인구 규모다. 전후 폐허를 딛고 최장수 국가로 발돋움한 나라가 후손을 보지 못해 전후 수준으로 쪼그라든다니 서글프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대학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어둡다. 24년 전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는 “30년 후 대학 캠퍼스는 역사적 유물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토머스 프레이는 “2030년 대학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대의 변화에 대비하라는 뜻에서 던진 충격 발언이었는데 국내에선 실제로 25년 내 대학의 절반이 소멸된다는 예측이 나왔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5일 주최한 ‘미래전망 전문가 포럼’에서 저출산으로 학령인구가 줄면서 2042∼2046년 국내 대학 수가 190개가 될 것이라는 보고서가 발표됐다. 현재 대학이 385개이니 25년 후엔 절반만 남게 되는 셈이다.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대학 생존율이 75% 이상인 곳은 서울(81.5%)과 세종(75%)뿐이다. 경남(21.7%) 울산(20%) 전남(19%)은 5개 중 4개가 사라질 전망이다. ▷지난해 입시부터 학생수가 입학 정원을 밑돌면서 지방대들은 소멸의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지방 수재들이 가던 국립대 수학과를 수학 8등급 학생이 가고, 지원자 전원이 합격하는 학과들도 속출했다. 속이 타는 대학들은 ‘원서만 내면 100% 합격’이라고 모집 공고를 내거나 ‘1년 학비 면제+토익 수강비 지원’ 같은 유인책을 제시한다. 성적과 무관하게 들어온 학생들에게 고교 수학 과학을 가르치려고 사교육업체와 계약을 맺는 대학도 있다. ▷대학의 소멸은 지역 경제의 위기다. 대학생 1명의 월 경제유발 효과가 100만 원이라고 한다. 2018년 서남대 폐교 전후 6년간 전북 남원시의 연간 소득 감소액은 260억∼344억 원으로 추산된다. 2017년 남원시 총예산의 4.5∼6%다. 2010년부터 8년 연속 부실 대학 지정으로 학생수가 꾸준히 줄지 않았다면 폐교의 충격은 더했을 것이다(국토지리학회지 논문). 가야대와 단국대 캠퍼스가 2003년과 2007년 빠져나간 후 경북 고령군과 서울 용산구의 서비스업 고용은 약 6% 줄었다(KDI 보고서). 대학이 지역 문화의 구심점임을 감안하면 폐교로 지역 사회가 입는 손실은 더욱 커진다. ▷학생수 급감이 아니라도 지금의 교육 방식으로는 생존이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미래학자 프레이는 “앞으로는 평생 10개 직업을 바꿔가며 일하게 될 것”이라며 평생교육 수요에 대비하라고 제안했다. 코로나로 미국을 포함해 대부분 나라에서 유학생이 줄어든 데 비해 한국은 한류 덕에 올해 외국인 유학생 수가 12만 명으로 2019년보다 19.8% 늘었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시야를 넓혀 새로운 교육 수요를 찾아내는 것이 대학 소멸을 막는 방법이 될 것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전임 시장 시절 시민단체 지원 사업을 감사하고 지원 예산을 삭감하자 전국 1090개 단체가 ‘퇴행적인 오세훈 서울시정 정상화를 위한 시민행동’을 결성했다. 서울시의 ‘예산 차별 편성’이 ‘재량권 남용’이라며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한다는 것이다. 시민단체 출신인 박원순 시장 집권기에 시민단체들은 황금기를 누렸다. 지난해 말 기준 서울의 시민단체는 2295개로 9년 전보다 80% 증가했다. 이 중 절반가량인 1250개 단체가 올해 민간보조와 민간위탁 명목으로 서울시에서 1694억 원을 지원받았다. 2012년 지원액의 5배가 넘는다. 10년간 총 1조318억 원이다. 마을, 청년, 도시재생, 주민자치 등 분야도 다양하다. 서울시의회에선 “서울시 예산을 받으려면 시민단체를 만들라는 얘기가 있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이 막대한 예산의 집행 실태가 서울시의 분야별 감사와 평가로 드러나고 있는데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시민단체 출신이 임기제 공무원으로 채용돼 단체 지원 업무를 맡는다. 이해충돌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둘째는 서울시가 단체에 직접 예산을 주지 않고 ‘지원센터’라는 중간조직을 거치도록 한다는 점이다. 사무실 임차료나 인건비 모두 시민이 낸 세금에서 나가는 센터 역시 시민단체가 운영하는데, 유통 단계가 늘어나는 만큼 최종 수혜자인 시민에게 돌아가는 몫은 적어지지만 시민단체 일자리는 많아진다. 시민단체인 ‘마을’이 대표적인 사례다. ‘마을’은 박 시장이 취임한 지 6개월 후인 2012년 4월 박 시장 선거 캠프 출신이 설립해 그해 8월부터 10년간 마을공동체와 청년 지원 명목으로 600억 원이 넘는 사업을 독점 위탁받았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시의원은 “조직이 만들어지고 몇 개월 만에 수탁받은 예는 거의 없다”며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그런데 해당 사업을 관리 감독하는 공무원으로 채용된 이들이 ‘마을’ 출신이다. 마을공동체 예산은 종합지원센터와 24개 마을자치센터라는 2단계 중간단계를 거쳐 지원된다. 그중 9개도 ‘마을’이나 관련 단체 출신이 운영한다. 누가 그 예산 집행을 공정하다고 보겠나. 오 시장의 정치적 감사로 몰아붙일 일만은 아니다. 민주당 소속 시의원들도 “시민단체가 권력화되기 시작하고, 서울시 집행부로 들어오고, 또 수탁을 받아 일하고, 공무원들은 그 사람들 눈치 보기 급급하다”고 비판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4월 ‘민간단체의 관변화 방지’를 위해 시민단체의 ‘자부담 확대’를 건의하는 보고서도 냈다. 서울시정을 감시해야 할 시민단체가 ‘민관 협치’라며 시와 한 몸이 돼 도시재생, 주민자치, 사회적 경제 실험에 몰두하는 동안 서울시민의 행복지수와 도시 경쟁력은 뒷걸음질쳤다. 더 충격적인 건 시민단체의 평판 추락이다. 한국행정연구원 조사에서 시민단체 신뢰도는 2013년 50.5%에서 지난해 46.7%로 하락했다. 시민단체의 주요 감시 대상인 정부(49.4%)나 대기업(50.4%)보다도 낮아졌다. 청렴도 역시 정부와 대기업에 뒤진다. 행정은 실패하면 시민들이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런데 시민단체가 행정에 개입해 실패하면 그 책임은 어떻게 묻나. 1090개 단체는 집단행동을 예고하면서 “오세훈 시장의 서울시 사유화를 멈추겠다”고 했지만 상당수 시민들은 ‘시민단체의 서울시 사유화’를 의심하고 있다. 행정의 감시자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비정부기구’라는 이름대로 정부지원금 의존증부터 버려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젊은 청년이 새벽길을 나선다. 인력사무소에서 100원짜리 믹스 커피를 마시고 현장에 도착하면 작업을 시작한다. 목재를 운반하고, 못질하고, 톱질하고, 새참으로 컵라면 먹고, 오후 4시쯤 일과를 마친 뒤 저녁은 따뜻한 순댓국밥으로 마무리한다. 건설 현장 청년 일꾼들의 일상을 담은 ‘노가더’ 콘텐츠가 감동을 주는 유튜브 장르로 뜨고 있다. ▷노가더는 막일꾼을 뜻하는 ‘노가다’에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er’를 붙여 만든 신조어. 유튜브에서 ‘노가더’를 검색하면 ‘일당 13만 원 노가더의 하루’ ‘20대 노가더의 리얼 노가다’ ‘숙노(숙식 노가다)의 개솔직 후기’ 등이 줄줄이 뜬다. 고된 노동 현장을 담은 영상들엔 수십만 조회수 표시와 함께 “새벽부터 열심히 사는 모습 보고 힘을 얻습니다” “요행을 바라는 직업보다 훨씬 의미 있어 보여요” 등의 응원 글이 올라온다. “학위나 자격증을 따면 편하게 살 텐데”라는 댓글엔 이런 답이 달린다. “교과서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장르의 콘텐츠는 ‘노가다 종류와 일당’ ‘노가다 현장, 여긴 피해 가라’ ‘헝가리 숙식 노가다 가는 법’처럼 정보 전달형이 많다. 이 일을 막 시작하려는 ‘노린이’를 위해 “깔창은 필수템, 허리보호대 하면 덜 아픔” “마스크는 N95로 사고, 입술이 마르니까 립밤을 꼭 챙겨라” 등 깨알 같은 정보도 소개한다. 인력사무소의 갑질을 폭로하거나 건설 현장에 여성용 화장실이 없다는 고발성 콘텐츠로 업무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도 한다. ▷청년(15∼34세) 취업자 가운데 단순노무직은 2017년 7.3%에서 올해 9.5%로 증가했다. 인원으로는 59만9000명으로 4년 전보다 12만5000명 늘었다. 안정적인 일자리가 수년째 줄어든 데다 코로나로 알바마저 구하기 어려워진 탓이다. 창업자금 마련을 위해 작업복을 입는 청년들도 있다. MZ세대 10명 중 3명은 입사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퇴사한다고 한다(잡코리아). 개중에는 자신의 의지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사무직을 포기하고 폭염과 찬 바람 속 노동하는 삶을 택한 사람들도 있다. ▷19세 목수 이아진 씨도 대학에 입학하는 대신 목조주택 시공팀에 들어가 일하고 있다. 그는 “내 손으로 집을 짓는다는 희열이 있다”며 “생활에서 제일 필요한 게 집인데 노가다라는 단어로 건축이 낮아지는 게 싫다”고 했다. 청년들은 내 일에만 집중할 수 있고, 평생 일할 수 있으며, 노력한 만큼 기술이 늘어나는 재미를 노가더의 장점으로 꼽는다. 청년 일꾼들이 올겨울엔 덜 춥고 더 안전하게 ‘몸을 써서 성과를 만들어내는 일의 보람’을 느꼈으면 좋겠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은 1일 유엔 기후총회 기조연설에서 “자연은 오래도록 우리를 기다려주었다. 이제 우리가 자연을 위해 행동하고 사랑해야 할 때”라며 “매우 도전적인” 온실가스 감축 계획을 천명했다. 세계 1·3·4위 배출국인 중국 인도 러시아가 못 줄이겠다며 꽁무니를 빼는데 우리가 앞장서겠다고 했으니 박수를 보내야 할까. 기후위기 대응은 시대적 당위지만 지구에 큰불이 났다고 모두가 똑같이 불구덩이에 뛰어들 수는 없다. 장비도 든든하고 기술도 있다면 뛰어드는 게 용감한 행동이다. 장비도 기술도 없으면 얼른 119에 신고하고 대피를 돕는 게 용기 있는 행동이다. 무턱대고 뛰어들다간 불도 못 끄고 다치기만 한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문 대통령의 탄소중립 계획(2030년까지 2018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 40% 감축)은 만용이다. 정부가 감당할 수 있다고 제시한 최대치(32%)보다도 목표가 높다. 2030년이면 9년밖에 안 남았는데 동원한다는 기술은 전문가들도 “50년이 걸릴지, 100년이 걸릴지 모르겠다”고 한다. 정부가 소요 비용을 공개 않는 사이 여기저기서 천문학적인 추산치들이 나온다. 2050년까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포함한 핵심 수출산업 6개 분야에서만 199조 원이 들고, 수입 수소를 액화·운송·저장하는 데만 66조 원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다고 지구를 살리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 탄소 배출량은 세계 배출량의 1.5%밖에 안 된다. 욕조에 물 한 컵 붓는 정도의 기여를 하겠다고 포스코 같은 기업 몇 개가 문을 닫는 피해를 감수하는 게 만용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만용의 반대가 비겁이다. 불이 났는데 못 본 체하는 경우다. 현 정부의 연금 정책은 비겁하다. 연금은 고갈이라는 화재 예방을 위해 주기적으로 더 내고 덜 받는 재설계를 해야 한다. 인기 없는 정책이지만 김영삼(공무원연금) 김대중(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 노무현(국민연금) 이명박(공무원연금) 박근혜(공무원연금) 정부에선 빠짐없이 개혁을 관철시켰다. 현 정부만 유일하게 국회 180석을 갖고도 연금개혁엔 손도 대지 않아 2030세대는 내면서도 못 받을까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공무원·사학·군인연금 적자도 4년 후엔 지금의 2배(11조 원)로 불어난다. 비겁하거나 만용 부리는 대통령 탓에 고생한 걸 얘기하자면 끝이 없다. “부동산만큼은 자신 있다”는 호기의 끝은 다들 아는 대로다. 정부 구조조정은커녕 공무원 수를 역대급으로 늘려놓아 국민 부담이 커지고 민간 부문의 활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문재인 케어’ 생색내기로 건보재정은 거덜 나고 중소병원들은 고사 위기에 처했다. 저성과자 해고와 성과연봉제 도입 등 이전 정부가 어렵게 해낸 노동개혁은 백지화하고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같은 만용을 부린 결과가 일자리 감소와 비정규직 청년 급증이다. 문 대통령 재임 기간에 나랏빚이 400조 원 늘어 내년엔 1000조 원을 넘기게 됐다. 그런데도 차기 대권 주자들은 오늘만 살 것처럼 “1인당 지원금 50만 원씩” “자영업자 50조 원 지원”을 외친다. 표 떨어지는 증세나 연금개혁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 징후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대통령, 해서는 안 될 일 안 하고 해야 할 일은 꼭 해내는 용기 있는 대통령을 갖기가 이렇게 어려운가. 지지율 떨어질까 의무는 외면하면서 위임받은 권한으로 지지층만 바라보며 만용이나 부리는 대통령 뒤치다꺼리는 그만하고 싶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현재 코로나19 환자에게는 항체 치료제를 쓴다. 코로나를 앓은 사람의 혈액에서 감염을 막는 항체를 선별해 만든 약물이다. 고위험군의 입원과 사망 확률을 70% 줄여주지만 비싸고 병원에서 정맥으로 주사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런데 집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알약 형태의 ‘항바이러스’ 치료제가 잇따라 개발됐다. ▷미국 제약사인 머크사의 항바이러스제 ‘몰누피라비르’가 4일 세계 최초로 영국에서 사용 승인을 받았다. 세계 2위의 백신 제조사인 머크사는 백신 개발 실패의 수모를 먹는 치료제 개발로 만회하게 됐다. 5일엔 미 화이자가 개발한 ‘팍스로비드’의 약효가 머크사를 능가한다는 임상시험 결과가 나왔다. 화이자는 이달 중 미 식품의약국(FDA)에 긴급 사용 승인 신청을 할 계획이다. 화학성분을 합성해 만드는 항바이러스제는 효능과 안전성 평가에 시간이 걸리지만 대량 생산이 쉽고 약효도 오래 지속돼 ‘게임 체인저’로 통한다. ▷머크사의 치료제는 바이러스의 유전 암호에 오류를 유도해 복제를 막는다. 화이자는 바이러스 복제에 이용되는 효소의 활동을 방해함으로써 복제를 막는데, 치료제의 약효를 더해주는 HIV 치료제와 섞어 먹는 방식이다. 두 치료제 모두 60세 이상 고령자와 기저질환자용으로 개발됐다. 임상시험에 따르면 화이자는 증상 발현 3일 이내에 먹으면 입원과 사망 확률이 89%, 5일 안에 먹으면 85%까지 감소했다. 머크사의 알약은 증상 발현 5일 안에 먹으면 입원·사망 확률이 50% 줄었다. 화이자는 젊고 기저질환이 없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도 진행 중이다. ▷약의 안전성과 관련해 머크사는 치료제 복용자의 12%가 가벼운 부작용을, 화이자는 20%가 가벼운 부작용, 1.7%가 심각한 부작용을 겪었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는 머크사 치료제 사용을 승인하며 임신부, 수유 중인 여성, 치료 후 4일까지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은 먹지 말라고 권고했다. 한국 정부는 머크사 치료제 20만 명분을 구매 계약했고 화이자와 7만 명분의 선구매 약관을 체결한 상태다. ▷2009년 온 국민을 떨게 했던 신종플루는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면서 단순 독감이 됐다. 코로나도 먹는 치료제까지 나왔으니 일상 회복의 시기가 더욱 당겨질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치료제는 백신의 대체재가 아니다. “내년 1월 미국에서 코로나가 끝날 수 있다”는 스콧 고틀리브 전 미 FDA 국장의 5일 발언도 100인 이상 기업의 백신 접종 의무화를 전제로 나온 것이다. 당분간은 백신을 주기적으로 맞아야 한다. 치료제는 중증으로 악화할 위험을 줄여줄 뿐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초중고교에서 최대 분쟁거리 중 하나가 휴대전화 사용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는 2016년부터 관련 진정이 약 45건 접수됐는데 ‘전면 금지는 인권 침해’라는 것이 일관된 판단이다. 최근엔 대구 A고교에 대해 비슷한 결정이 나왔다. ▷A고 교칙에 따르면 학교에선 휴대전화 전원을 꺼놔야 한다. 수업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사용하다 들키면 휴대전화를 압수당하고 벌점을 먹는다. 세 번 걸리면 5일간 아침 청소를 해야 한다. 학교 측은 교사의 수업권과 학생의 학습권 보장을 위한 조치로 헌법에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조항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관련 교칙이 통신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기본권 제한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모색하라고 권고했다. ▷교내 휴대전화 규제 완화에 힘을 실어준 건 진보 교육감들이다.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가 2018년 교내 휴대전화 자유화를 주장하며 교육부에 관련 규정 개정을 제안했다. 초중등 교사들 97%가 “다른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고 생활지도 체계가 붕괴된다”며 반대했지만(한국교총 설문조사), 교육부는 2020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해 학교규칙에 담을 수 있는 내용 중 ‘두발 복장 등 용모’와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의 사용’을 삭제했다. 시도교육청이 휴대전화 사용을 전면 허용하는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면 학교 차원에서 시행령에 근거도 없는 규제 교칙을 만들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해외에선 10대들의 스마트폰 이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청소년기 저널’ 최신호에 따르면 스마트폰이 보급된 후 37개국 중 36개국에서 외로움을 호소하는 15세 학생이 50∼100% 늘었다. 특히 여학생들이 정신건강에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영국에선 휴대전화 사용이 학생들의 정서와 학업 성적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자 모든 학교에서 사용을 금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프랑스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따라 2018년 15세 이하의 교내 휴대전화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국내 10대들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90%가 넘는다. 코로나19로 스마트폰 이용 시간이 길어지면서 지난해 10대 청소년 중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은 35.8%로 전년보다 5.6%포인트 증가했다. 서구 전문가들은 학교에서만큼은 사용을 전면 중단하고, 소셜미디어는 가급적 늦은 나이에 시작하도록 지도하라고 한다. 스티브 잡스는 자녀의 아이폰 사용을, 페이스북 임원들은 자녀들의 소셜미디어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다. 스마트폰의 폐해에 관한 연구들이 속속 발표되는 만큼 10대의 건강한 기기 사용을 돕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얀센은 한 번만 맞으면 된다더니….” “화이자 2차까지 맞았는데 부스터샷 예약하라는 문자 받았어요.” 코로나19 백신 접종 완료율이 70%를 돌파하자 이번엔 추가접종(부스터샷) 준비로 분주하다. 이달 12일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시작된 부스터샷이 다음 달부터는 얀센 접종자와 50대 이상, 18∼49세 기저질환자로 확대된다. ▷부스터샷을 하는 이유는 백신의 약발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접종 후 3∼6개월이 지나면 중증화 예방 효과는 여전해도 감염을 막는 효과는 줄어든다. 미국에선 델타변이가 우세종이 된 후 백신 감염 예방 효과가 91%에서 66%로 급락했다. 올 2월 말부터 백신을 맞은 요양시설에서는 돌파감염이 속출하고 있다. 경남 창원의 한 병원에서는 돌파감염으로 추정되는 100여 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얀센의 돌파감염률(0.267%)이 가장 높고 모더나(0.005%)가 가장 낮다. 얀센 접종자 전원을 대상으로 부스터샷을 하는 이유도 ‘물백신’이라 불릴 정도로 돌파감염률이 높아서다. ▷부스터샷은 대개 1, 2차 접종 때와 같은 백신을 쓰지만 교차접종도 효과와 안전성 면에서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접종 후 이상 반응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경우 1차보다는 강도가 강하고 2차보다는 약했다. 18∼25세 남성은 화이자나 모더나 같은 mRNA 백신 접종 후 심근염, 18∼49세 여성은 얀센 접종 후 혈전증을 앓는 사례가 있지만 극히 드물다. 방역 당국은 mRNA를 기본으로 하되 백신 종류가 2종을 넘지 않도록 할 계획이다. 얀센 접종자는 mRNA 백신과 얀센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에 따르면 얀센 접종자는 부스터샷으로 모더나를 맞을 때 항체 수준이 76배, 화이자는 35배 높아졌고, 같은 얀센으로 맞으면 4배 증가하는 데 그쳤다. ▷부스터샷을 하는 나라는 40개국이 넘는다. 올해 7월 가장 먼저 시작한 이스라엘은 12세 이상이 접종 대상인데 부스터샷을 맞지 않으면 공공장소 출입을 제한한다. 지난달부터 65세 이상 고령층을 대상으로 시행 중인 미국은 접종 대상을 40세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일본은 접종 완료 후 8개월이 지난 전원에게 부스터샷을 하기로 했다. ▷부스터샷의 효과는 화이자의 경우 감염 예방 효과는 11배, 중증화 예방 효과는 19.5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감염을 완벽히 막지는 못한다. 일찌감치 부스터샷을 개시한 영국과 독일에선 요즘도 하루 3만∼4만 명 안팎의 확진자가 쏟아지고 있다. 백신을 두 번 세 번 맞아도 거리 두기와 마스크 쓰기 없이는 일상 회복이 어렵다는 뜻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세상을 떠난 역대 대통령은 7명인데 장례 형식은 네 가지였다. 이승만 윤보선 대통령은 가족장을 지냈고 최규하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장,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이 국장, 김영삼 대통령은 국가장을 치렀다. 26일 서거한 노태우 대통령 장례도 어제 국무회의에서 국가장으로 의결했다. ▷유족이 가족장을 원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현직 대통령은 국장, 전직은 국민장이 관례였다. 국장은 9일장에 영결식이 공휴일로 지정되고 전액 국고로 지원한다. 반면 국민장은 7일장이고 영결식은 공휴일이 아니며 비용도 일부만 지원해 국장보다는 예우의 수준이 낮다.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은 관례에 따라 국민장으로 치렀는데, 3개월 후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는 같은 전직임에도 고인의 공로에 비추어 최고 예우가 필요하다는 유족의 요구를 수용해 전직 대통령으로는 유일하게 국장을 지냈다. ▷이후 국장과 국민장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2014년 법을 바꿔 국장과 국민장을 ‘국가장’으로 통일했다. 국가장은 최대 5일장이며 공휴일 지정은 없고 조문객의 식사비 노제 삼우제 비용 등을 제외한 전액을 국고에서 지원한다. 2015년 서거한 김영삼 대통령 장례가 국가장으로 엄수된 첫 사례다. 의회주의자였던 고인은 국회의사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장례비용은 15억8864만2240원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내란죄로 실형을 선고받아 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박탈된 상태이고 국립묘지 안장도 불가능하지만 국가장 결격 사유는 없다. 정부는 5·18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검소한 장례식을 당부하고 떠난 고인을 법이 허용하는 최대치인 5일간의 국가장으로 예우하기로 정했다. 여당 내에선 ‘전두환 국가장 배제법’을 발의하면서도 고인에 대해서는 ‘큰 과오와 작은 공’을 함께 인정하는 분위기다. 유족은 장지로 고인이 대통령 재임 시 조성한 통일동산이 있는 경기 파주를 원하고 있다. ▷미국에선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을 ‘고인과 국가의 마지막 대화’라고 한다. 역대 대통령들이 드물게 한자리에 모여 화합의 메시지를 전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 전현직 대통령들은 다양한 이유로 모이기 어렵고, 서로 마주쳐도 서먹한 인사를 주고받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재임 시절 김영삼 대통령의 영결식에 불참해 ‘대를 이은 불화 탓’이란 뒷말을 낳았다. 문재인 대통령도 노태우 대통령을 5일장으로 예우하면서도 조문 가지는 않았다. 미국처럼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이 고인과 국가의 마지막 대화가 되기에는 아직 아물지 않은 현대사의 상처들이 많은 것 같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미국 대학에 다니는 한국인 유학생들은 장학금 받기가 어렵다. 집 주소가 ‘캐슬’ ‘빌라’ 아니면 ‘팰리스’여서 거부의 자제들로 오해받기 때문이다. 엉터리 영어인 콩글리시라도 써야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의 허영심을 꼬집은 우스갯소리다. ▷콩글리시를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이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 씨다. 그는 저서 ‘가짜 영어사전’(2000년)에서 콩글리시를 “반쪽짜리 영어, 쭉정이 영어”라고 했다. 콩글리시엔 일본식 영어(Japlish)인 ‘네고’ ‘아파트’ ‘스킨십’ ‘오토바이’와 한국에서 만든 ‘핸드폰’ ‘오피스텔’ ‘아이쇼핑’ ‘애프터서비스’가 섞여 있다. 우리끼린 통하지만 외국인은 모른다. ‘노마크 찬스’는 ‘빵점짜리 기회’, ‘샐러리맨’은 ‘셀러리 파는 사람’, ‘백댄서’는 ‘곱사춤’이라 이해한단다. ▷그렇다고 콩글리시를 피해가기는 쉽지 않다. ‘SNS’ ‘핸들’ ‘팬티’ ‘러닝머신’처럼 이미 입에 붙어버린 단어들이 너무 많다.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는 최근 한국의 콩글리시 문화를 조명한 기사에서 한국 정부가 한글날을 맞아 바른 우리말 사용을 촉구하면서도 정부 역시 ‘위드 코로나’ ‘언택트’ 같은 콩글리시를 많이 쓴다고 지적했다. ▷국내 전자회사가 ‘디지털 익사이팅’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가 콩글리시라고 비난받은 적이 있다. 문법적으로 ‘디지털리 익사이팅’이나 ‘디지털 익사이트먼트’라 해야 옳다는 것이다. 문법 파괴에 엄격한 우리와 달리 영어권에선 창의적 표현이라며 관대한 편이다. 애플이 ‘Think Differently’가 아니라 ‘Think Different’라고 했을 때 세상에 없는 걸 생각해내는 애플 정신을 구현한 슬로건이라는 호평이 나왔다. 앞서 소개한 더타임스도 콩글리시 같은 혁신이 언어의 성장과 발전의 필수 요소라는 전문가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소개했다. ▷언어는 유기적 존재다. 한때 웃음거리였던 콩글리시가 한류 덕에 영어권에서도 ‘쿨’한 표현으로 각광받는다.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PC방’ ‘스킨십’ 같은 콩글리시와 함께 ‘콩글리시’도 등재됐다. 21년 전 안정효 씨가 싸움 거는 줄로 오해받는다며 ‘파이팅’이란 말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요즘은 외국인들이 웃으며 ‘파이팅’을 외친다. 엉터리 언어의 남용도 경계해야 하지만 유연할 필요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는 언어가 ‘브로큰 잉글리시(엉터리 영어)’라는 말이 있다. 현대 영어엔 앵글로색슨어에서 내려온 표현은 20%도 안 남아 있다. 영어의 풍부한 어휘는 중국의 칭글리시, 싱가포르의 싱글리시, 뉴질랜드의 키위 영어, 그리고 콩글리시까지 포용한 덕분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석사논문 제목이 공교롭게도 ‘지방정치 부정부패의 극복 방안에 관한 연구’다. 성남시장 출마 전인 2005년 가천대에서 썼는데 “인용 표시를 다 하지 않아 표절이 맞다”고 자인했지만 ‘지방 영주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단체장은 부패 가능성이 높다’는 문제의식은 대장동 사태를 내다보기라도 한 듯 16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이 지사의 지적대로 기초자치단체는 특히 비리에 취약하다. 성남시장의 경우 한 해 3조4000억 원의 예산 집행과 3200명의 공무원 인사, 각종 인허가 권한을 독점한다. 권한은 막강한데 보는 눈은 적으니 탈이 날 가능성이 높다. 감사원이 2015∼2019년 자치단체 인허가 업무를 감사해 징계나 시정을 요구한 대상도 92%가 기초 시군이었다. 이 지사는 개발 사업과 관련된 부패 실태를 상세히 기술했는데 “당선 또는 재선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지방정치가와 부당한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 사이에서 부패가 발생한다”고 했다. 민관 합동 개발로 이익금 일부를 환수해 시장은 ‘성남시장 시절 최대 치적’이라는 정치적 스펙을 챙기고, 업자들은 부당한 떼돈을 벌어간 대장동 사업이 딱 들어맞는 사례다. 선거 공신의 인사 우대를 부패 행위로 규정한 점도 인상적이다. 그 자신도 성남시장 선거를 도운 유동규를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 시의회에서 공사 설립 조례안을 통과시킨 뒤 2014년 선대위원장을 맡은 최윤길은 성남시체육회 부회장 자리에 앉혔다. 선거를 도운 폭력 전과자들이 시와 산하기관에 들어갔다는 보도도 나왔다. 백현동 개발 의혹의 핵심 인물로는 2006년 선대본부장 이름이 거론된다. 멀리해야 할 사람들을 ‘가까운 사람’으로 쓴 인사 부패가 인허가 비리와 합쳐져 역대급 게이트가 된 것이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빤한 동네에선 직분에 맞는 거리 두기가 어렵다. 그만큼 단체장의 전횡에 쓴소리하기가 쉽지 않다. 단체장은 임기 4년에 3연임이 가능하다. 한번 눈 밖에 나면 10년 넘게 고생하니 내부고발은 언감생심이다. 외부 통제도 헐겁다. 논문에 따르면 지방의회는 ‘단체장의 시녀’이고 언론이나 시민단체의 감시도 ‘부실’하다. “임명 권력은 선출 권력에 복종하는 게 민주주의 대원칙”이라는 단체장이 경찰이나 검찰이라고 무서울까. 이 지사는 탄핵 대상인 대통령이나 국회의원과 달리 단체장은 징역형에 해당하는 죄만 아니면 징계할 수 없는 제도를 지방정치 부패의 요인으로 거듭 지적했다. 논문이 통과된 후인 2007년 주민소환제가 도입돼 단체장도 임기 전에 쫓아낼 수 있게 됐지만 주민투표까지 간 사례는 10건 정도다. 그것도 대부분 화장장 같은 혐오 시설 건립을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손해 보는 일이 아니면 시장이 무슨 나쁜 일을 하건 다들 무관심한 것이다. 지방의회가 부활한 때가 1991년, 단체장 직선제 시행이 1995년이다. 이 지사의 논문은 직선제 도입 10년 후 나왔다. 그는 “지방자치를 폐지해야 한다는 극언조차 나오는데 근저에 지방부패가 있다”고 했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형사 처벌로 임기를 못 채운 단체장이 20년간 100명이 넘는다. 개발이 활발한 경기 용인시의 민선 시장 6명은 죄다 뇌물수수나 인사 비리로 구속됐다. 논문에 “권력의 필연성만큼 통제의 필연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30년간 자치 분권과 지방 이양만 말할 뿐 지방권력의 감시와 견제에 눈감은 대가를 크고 작은 대장동 사태들로 치르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필리핀의 민주주의는 가문 간의 싸움이며 국민은 구경꾼일 뿐이라는 얘기가 있다. 아키노 로하스 마르코스 등 소수의 정치 가문이 선출직 자리를 꿰차고 정치와 경제를 주무른다는 뜻이다. 필리핀의 변방 민다나오섬 출신인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76)이 2016년 당선되자 필리핀의 후진적 족벌정치에 경종을 울렸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런데 두테르테 일가가 필리핀의 새로운 정치 가문으로 주목받고 있다. ▷내년 대선에서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던 두테르테 대통령이 돌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차기 대선에서 대권에 재도전해 대통령 단임제 규정을 우회할 것으로 예상됐는데 여론이 나빠지자 부통령 도전을 포기한 것. 그 대신 후임 대통령으로는 장녀인 사라 두테르테 다바오 시장(43)이 거론된다. 필리핀 정가에선 두테르테가 딸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다시 그 자리를 노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두테르테 부녀는 다바오 시장과 부시장 자리도 주거니 받거니 했었다. 아버지가 다바오 시장이던 2007년 딸은 부시장이었고, 2010년 아버지가 시장 3연임 제한 규정에 걸리자 딸이 시장, 아버지는 부시장 자리로 바꿔 앉았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면서 딸은 시장 자리로 복귀하고 부시장 자리는 두테르테의 장남이 차지했다. 2019년 장남이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로는 차남이 부시장 자리에 앉았다. ▷사라는 변호사 출신에 터프한 정치 스타일이 아버지를 닮았다. 대형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경관 얼굴에 주먹을 날린 일화로 유명하다. 이혼한 아버지가 대통령이 된 뒤로는 영부인 역할을 하면서 중앙 정치 무대에서 얼굴을 알렸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마약과의 전쟁에 미온적이고, 미중 전쟁에서 방관자론을 제안하며 아버지의 친중 노선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대선 후보 1위 주자인데 최근엔 지지율이 28%에서 20%로 급락했다. 복싱 영웅 매니 파키아오 상원의원이 12%로 바짝 추격 중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앞세워 당선됐지만 그의 장남과 사위, 그러니까 사라의 남편은 마약 밀반입 연루 혐의를 받았다. 서민 대통령을 표방하며 대기업과 날을 세우면서도 친한 기업은 챙긴다는 뒷말이 나왔다. 최근엔 정부와 가까운 기업에서 방역 물품을 고가에 구매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된 상태다. 엘리트 가문정치 청산을 공언하고도 이제는 딸까지 동원해 정권 연장의 꼼수를 부리고 있다. 한때 ‘피플 파워’로 아시아 민주화를 선도했던 나라에서 벌어지는 족벌정치 소동은 민주주의를 시작하기보다 지켜내기가 얼마나 어려운 과정인지 보여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대장동 특혜 의혹을 처음 보도한 곳은 비정규직 기자 5명이 꾸려가는 한 인터넷신문이다. 이 매체의 경기도청 출입기자는 제보를 받고 보완 취재를 거쳐 화천대유와 자회사들이 수천억 원의 개발 수익을 챙겼고 배후에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있다는 소문이 돈다고 8월 31일 보도했다. 정교한 기사는 아니었지만 이를 계기로 대장동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화천대유는 보도가 나간 바로 다음 날 이 기자를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2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과 인터넷 게시금지 및 삭제 가처분신청도 냈다. 흔히 이런 형태의 소송을 후속 보도를 막기 위한 전략적 봉쇄 소송이라고 부른다. 기자로선 민형사 소송 뒷감당을 하느라 추가 보도를 할 여력을 잃게 된다. 더불어민주당이 염원하는 언론법 체제에선 대장동 같은 거물급 비리 의혹은 더욱 캐기 어렵다. 우선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적용돼 기자가 패소할 경우 물어야 하는 배상액은 몇 배로 뛴다. 1억 원으로 1200억 원을 벌어들이는 능력자들은 져도 그만이지만 회사에서 받는 급여로만 생활하는 기자라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고위공직자는 징벌적 손배 청구를 못 하도록 금지 규정을 두어도 이번처럼 화천대유가 대신 ‘이재명 후보는 관련이 없다’는 소송을 내면 된다. 대장동 의혹을 처음 보도한 매체는 네이버 뉴스 메뉴에 없다. 화천대유가 기사열람 차단 청구권을 행사하면 가뜩이나 널리 읽히기 힘든 지역 인터넷신문의 보도는 아예 묻혀버릴 수 있다. 지방 토호들의 비리는 현지 사정에 밝은 지역 언론이 먼저 포착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당의 언론법은 이렇게 부패한 토호들에게 주류 언론의 추적 보도를 막는 든든한 방패가 되는 것이다. 대장동 의혹은 ‘단군 이래 최대 모범적 공익사업’에 참여한 민간업체가 어떻게 지분 투자로 3억5000만 원을 내고 배당금 4040억 원과 분양사업 이익 3000억 원의 돈벼락을 맞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업 설계와 인허가 서류를 공개하면 풀릴 의문이다. 민간 건설업체가 참여한 아파트의 공사 원가를 공개하고, 수술실 폐쇄회로(CC)TV도 경기도의료원에 가장 먼저 설치한 투명행정의 달인이 왜 온 국민이 궁금해하는 공공사업 자료는 감추는가. 검찰 공수처 국가수사본부가 늑장 수사로 이름값도 못 하는 동안 게이트가 닫히지 않도록 뛰어다니는 이는 계좌 추적권도, 압수수색 권한도 없는 기자들이다. ‘대장동 사람들’엔 기자들도 포함돼 있다는 사실에 참담함을 공유한 채 대장동 일대 등기부등본을 떼고, 관련 인물들을 찾아다니고, 각종 심사 보고서를 뒤져가며 사건의 전모를 드러내줄 퍼즐 조각들을 찾고 있다. ‘고위험 고수익’이라던 대장동 개발이 실은 ‘땅 짚고 헤엄치기’였고, 국민의힘 인사도 연루돼 있으며, 대장동 사건은 부동산 게이트이자 권순일 전 대법관과 박영수 전 특검까지 만수산 드렁칡으로 얽힌 법조 게이트라는 사실이 이렇게 해서 밝혀졌다. 이쯤에서 묻고 싶다. 왜 여당은 ‘대장동이 게이트가 되도록 감시견 노릇도 않고 뭐 했느냐’며 언론을 질타하는 대신 ‘함부로 짖다간 다친다’는 식의 입법으로 입막음을 하려 드나. 의혹과 추측이 난무하는 공론장은 진상을 밝히려는 언론 탓인가, 감추려는 권력자들 때문인가. 국제사회까지 나서서 여당의 언론법에 반대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가짜 뉴스 없는 세상을 진심으로 바란다면 공적 관심사에 책임 있는 자들이 자료를 충분히 공개하고 설명할 의무를 다하도록 강제하는 방법부터 고민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겉으론 세 보여도 일찍 죽는 건 남자들이다. 한국 남녀의 기대수명 차이는 6년, 러시아는 12년이나 된다. 진화론적으로 수컷의 짝짓기 경쟁이 더 치열하고, 사회적으로는 남자가 위험한 일을 하거나 과로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으며, 생물학적으론 면역력이 본디 약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코로나19에도 남자가 더 취약하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팀이 세계 29개국의 지난해 기대수명을 조사한 결과 27개국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남자들의 수명 단축이 두드러졌다. 영국 남성은 1년 전보다 1.2년, 여성은 0.9년 줄었다. 미국은 남성이 2.2년, 여성은 1.7년으로 수명 단축 폭이 가장 컸다. 사회활동이 활발한 연령대에 코로나 감염이 집중된 탓이다. 영국 프랜시스 크릭 연구소가 46개국의 감염사례를 분석해 지난해 말 발표한 자료에서도 남성 사망자(12만 명)가 여성(9만1000명)보다 훨씬 많았다. 한국의 경우 26일 현재 남성 사망자가 1233명, 여성은 1217명으로 큰 차이는 없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이나 2003년 사스, 2015년 메르스 때도 남성들의 피해가 컸다. 메르스 당시 한국 남성 환자는 111명, 여성은 75명이었다. 남자들이 술 담배를 훨씬 많이 하고, 손을 자주 씻지 않으며, 건강관리에 무신경한 생활습관 탓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몸에 이상 신호가 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병원을 덜 찾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남자는 선천적으로도 면역력이 약하다. 남성 호르몬(테스토스테론)은 면역계 활동을 방해하고, 면역계를 망가뜨리는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도 돕는다. 반면 여성 호르몬(에스트로겐)은 면역력이 강하다. 후손에게 강한 면역력을 물려주기 위해서라는 가설이 제기됐는데 실제로 모유를 먹은 아기가 면역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색체도 남자가 불리하다. 여성은 X 염색체가 두 개여서 어느 한쪽에 문제가 생기면 대체가 가능하다. X 염색체엔 면역을 담당하는 유전자도 많다. 반면 남성(XY)은 X 염색체가 하나밖에 없고, 염색체 간 대체도 되지 않는다. ▷코로나 장기화로 경제적 타격을 받은 이들이 늘고 만성질환자의 진료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기대수명은 당분간 더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반면 코로나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그만큼 건강한 사람들이니 기대수명은 곧 반등할 것이라는 낙관론도 있다. 남녀 차이를 고려한 치료 기술이 발달하고 남성들의 후천적 건강관리 노력이 병행된다면 코로나 피해의 성별 격차도 줄어들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A사는 자녀가 셋인 직원에겐 ‘퇴사 경고’를 하고 넷이 되면 사표를 받기로 했다. 얼마 전엔 넷째를 낳은 4대 독자에게 시범 케이스로 사직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70년대 신문의 사회면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뉴스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는 살벌한 산아제한 표어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이후 ‘하나 낳아 젊게 살고 좁은 땅 넓게 살자’던 시절을 거쳐 이젠 ‘다둥이가 행복이다’라며 출산을 장려하는 시대다. ▷현행법상 다자녀 기준은 3명 이상이다. 정부는 다자녀 가구에 주택특별공급과 주택구입 및 전세자금 대출을 포함해 다양한 혜택을 준다. 자동차 취득세 면제, 도시가스 전기료 난방비 할인, 대학 장학금 지원에 학자금 대출, 국립수목원 관람료 면제, 기차표 할인 등이다. 1970년대 정부가 불임 시술을 받은 이에게 분양 우선권을 주는 청약제도를 도입해 서울 반포주공이 ‘고자촌’으로 불리던 시절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내년부터는 자녀가 2명만 돼도 다자녀 지원을 받는다. 출산율이 0.84명으로 1명도 안 되는 데다 전체 유자녀 가구에서 3자녀 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7.4%로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다자녀 지원 강화 방안에 따르면 기초·차상위 가구의 둘째도 대학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는다. ‘아이 돌봄 서비스’도 만 12세 이하 자녀가 2명 이상이면 지원 대상이 된다. 내년에 도입되는 통합공공임대주택의 다자녀 기준도 2자녀 이상으로 하향 조정되고, 고속열차 2자녀 할인 혜택은 당장 올 하반기부터 SRT로 확대된다. ▷정부 지원과 별개로 대부분 광역자치단체는 카드회사와 손잡고 이미 2자녀 가정에 깨알 같은 혜택을 주고 있다. 롯데월드 에버랜드 반값 자유이용권, 패밀리 레스토랑과 주유소 요금 할인, 전화영어회화 40% 할인, 헤어 커트비 1000원 할인, 종합보험 무료 가입 등 일일이 챙기기 어려울 정도다. 충남 서천군이 둘째를 낳으면 1000만 원을 주는 등 인구 소멸 위기를 겪는 기초자치단체에선 둘째부터 출산 장려금을 올려주는 곳이 많다. ▷대선 주자들도 다자녀 기준을 2명으로 낮추거나 기준 자체를 없앤 저출산 대책을 내놓고 있다. 둘째부터 대학 등록금을 전액 지원하고, 만 5세까지 모든 자녀를 무상 보육하며, 민간 기업의 육아휴직 기간을 3년으로 확대하는 등의 공약들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요즘 출산 장려 표어대로 ‘다정한 첫째, 똑똑한 둘째, 장난꾸러기 셋째, 애교쟁이 넷째’들이 많이 태어나 ‘대한민국의 미래를 품어’ 주길 기대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지금까지 부스터샷(백신 추가 접종)에 관한 논란은 도덕적 논쟁에 가까웠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완료율이 높은 선진국들이 델타 변이의 전파력에 놀라 부스터샷을 서두르자 “구명조끼를 여러 벌 챙기는 동안 백신 빈국은 익사하고 있다”며 이들의 백신 독식에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이번엔 부스터샷의 효과를 놓고 과학적 논쟁이 뜨겁다. ▷미국식품의약국(FDA)과 세계보건기구(WHO) 소속 과학자 등 18명은 최근 영국 의학전문지 랜싯 기고문에서 “일반인에게 부스터샷이 필요하다고 볼 만한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접종 완료 후 시간이 지나면 경증 감염을 예방하는 효과는 떨어지지만 중증 질환을 막는 효과는 75세 이상 고령층을 제외하면 지속된다는 것이다. 몸 안의 항체는 줄어도 면역 세포가 바이러스를 오래도록 기억해 중증 진행을 막는다. 연구자들은 혈전, 심근염, 길랭바레 증후군 같은 백신의 희귀 부작용은 2차 접종 후 더 자주 나타나는데 3차 접종을 서두르다간 부작용의 위험도 커질 것이라고 했다. 또 부스터샷이 강한 면역 반응을 야기하므로, 하더라도 접종 양을 줄여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 같은 신중론은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을 포함해 부스터샷을 밀어붙이는 미국 정부 전문가들과 충돌한다. 미국은 접종 완료 8개월이 지난 16세 이상에게 20일 부스터샷을 개시한다고 발표부터 한 뒤 17일 화이자를 대상으로 FDA 승인 절차를 밟는다. 이들에게 나침반 역할을 하는 건 올 7월 가장 먼저 부스터샷에 들어간 이스라엘이다. 접종 완료 후 5개월이 지난 이들을 대상으로 화이자 3차 접종을 하고 있는데 2차 접종만 했을 때보다 중증 예방 효과가 5, 6배 높았다. 하지만 랜싯 기고자들은 이스라엘의 단기 데이터로는 장기 효과를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은 부스터샷의 부작용에 대한 데이터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백신 접종에도 확산세가 가라앉지 않는 나라들은 부스터샷에 기대를 건다. 독일은 이달부터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3차 접종을 진행 중이다. 프랑스는 이달부터, 영국은 올겨울부터 노약자 대상 3차 접종을 계획하고 있다. 칠레 우루과이 태국은 중국 백신 접종자들 사이에서 감염이 확산되자 다른 백신을 이용해 부스터샷을 하는 중이다. ▷부스터샷이 시기상조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도 면역 체계가 약한 이들에게는 부스터샷을 권한다. 한국 예방접종전문위원회는 백신 접종 완료 후 6개월이 지난 뒤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한 부스터샷을 권고한 바 있다. 부스터샷이 일반인들에게 확실한 이득이 될지는 더 많은 데이터가 쌓여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67)는 포브스지가 선정하는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순위에서 10년째 1위를 하고 있지만 여성계 반응은 부정적이다.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임에도 별다른 여성 정책을 내놓은 것이 없다. 그가 집권하는 동안 독일의 양성평등 순위는 6위에서 11위로 뒷걸음질쳤다. 공개 석상에선 “(페미니스트) 배지를 달고 싶지 않다”는 말까지 했다. 그런데 최근 반전이 일어났다. ▷그는 8일 나이지리아의 페미니즘 작가 응고지 아디치에와 여성계 인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페미니즘이란 기본적으로 남녀가 동등한 참여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뜻에서 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다. 더 나아가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고 말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2017년 주요 20개국(G20) 여성경제정상회의에서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라고 묻자 부정적으로 답한 때와는 180도 달라진 것이다. ▷왜 묻지도 않았는데 ‘페미 선언’을 한 걸까. 혹자는 여당인 기독민주당 지지자들의 보수적 정서를 감안해 말을 아껴오다 26일 총선 후 퇴임을 앞두고 ‘본색’을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선거 판세가 좌파 사민당으로 기울자 진보 표심을 겨냥한 발언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가 일관된 태도를 보여 온 건 아니다. 2005년 총선에선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선거 전략에 맞춰 “내가 당선되면 양성평등의 자극제가 될 것”이라며 여성임을 내세웠다. 집권 후엔 “메르켈은 여자도 남자도 아닌 중성인”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모호함으로 일관했다. “유연하고 실용적” “노회한 정치꾼”이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왔다. ▷메르켈 총리는 ‘사이다’ 언행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다 조용하고 느리게 움직인다. ‘답답하다’는 뜻의 ‘메르켈스럽다’는 유행어도 있지만 1인자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대통령제와 달리 다양한 정치세력과의 연정이 필수인 의원내각제에선 ‘메르켈스러운’ 리더십이 통한다. ‘유럽의 병자’ 독일을 ‘유럽의 경제 발전소’로 일으켜 세우고 글로벌 금융 위기, 난민 위기, 코로나 위기를 극복한 건 그의 신중하고 유연한 말과 행동이다. ▷‘메르켈 다이아몬드’라 불리는 특유의 손동작이 있다. 엄지와 검지로 마름모 모양을 만들어 배 위에 두는 것인데 그는 “균형을 잡기 좋다”고 설명한다. 메르켈 총리는 16년간 집권하며 미국 대통령 4명, 영국 총리 5명, 이탈리아 총리 8명을 상대했다. 정체성 정치의 덫에 빠지지 않는 균형 감각이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에서 끝나지 않고 독일 최장수 총리, 독일 역사상 제 발로 퇴장하는 첫 총리로 남게 된 비결일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여자들의 사회적 위상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집에서는 맞고 사는 여자들이 폭증하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최근 발표한 ‘2021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2019년 가정폭력 건수는 하루 평균 138건으로 8년 전보다 7.3배로, 데이트폭력은 하루 27건으로 6년 전에 비해 36% 늘었다. 이는 경찰의 검거 건수를 집계한 수치로 가정폭력의 경찰 신고율이 3%가 안 되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 규모는 가늠하기조차 두렵다. 폭력적인 남편이나 애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무직자, 구청장, 일본검 소지자, 인명구조사 등 언론에 보도되는 가해자의 면면은 다양하다. 잘나가는 여자들을 향한 못난 남자들의 용심일까. 그보다는 더 이상 맞고는 못 살겠다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유독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에서 ‘미투’가 드문 이유는 다들 짐작하는 대로다. 남편이고 애인이며 애들 아빠가 아닌가. ‘보복이 두려워서’ ‘창피하고 자존심 상해서’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서’ 참기도 한다. 경찰도 미덥지 않다. 신고 전화를 하면 “제가 꼭 가야 되나요” 하고 되묻거나, 출동해서는 “형님, 술 깬 다음에 얘기하세요” “친정이나 찜질방에라도 가 계세요” 하며 발을 빼려 든다. 거리의 폭력과는 달리 ‘집안싸움’ ‘사랑다툼’인 것이다. 하지만 그 피해는 사회적이다. 미국의 가정폭력 실태를 다룬 베스트셀러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에 따르면 가정폭력으로 인한 의료비용이 매년 80억 달러(약 9조3000억 원)가 넘는다. 폭력의 후유증으로 인한 근로시간 상실 규모는 연간 800만 시간이다. 여성 노숙인의 절반 이상은 가정폭력으로 집을 나온 경우이고, 폭력적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발달장애의 위험이 훨씬 높으며, 대규모 총격사건의 시작은 가정폭력인 경우가 많다. 세계보건기구(WHO)와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을 공중보건의 문제로 간주한다. 이 공중보건의 문제가 코로나19로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재택이 미덕인 시대지만 유엔에 따르면 “집은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곳”이다. 세계 각국은 집 안에 갇혀 신고 전화도 못 하고 있을 멍든 여성들을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낸다. 봉쇄 상황에서도 문을 여는 약국과 슈퍼는 최적의 구조 장소다. 약을 사고 장을 보러 나온 피해 여성이 ‘마스크19’라고 암호를 말하면 직원이 알아듣고 대신 신고를 해준다. 슈퍼 안에는 간이 상담소가 있고, 구매 영수증 아래쪽엔 여성폭력 신고 전화번호가 자동으로 찍혀 나온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재난문자를 보내면서 그런 안내번호 한번 보내준 적이 없다. 참으로 무심한 행정이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2018년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제정되고, ‘전처 살인사건’과 데이트폭력 살인사건이 터지자 줄줄이 종합대책이 나왔지만 대부분 발표에 그쳤다. 올해 가정폭력 관련 예산은 넓게 잡아도 427억 원으로, 신설된 군 장병 이발비(421억 원) 수준이다. 대선 주자들은 ‘펫 공약’은 경쟁적으로 내놓지만 가정폭력 대책을 얘기하는 이는 드물다. 허술한 정부 통계를 대신해 시민단체 한국여성의전화가 매년 언론 보도를 토대로 ‘친밀한 관계 내 여성폭력’을 집계하는데 지난해 사망자가 115명이었다.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인 지인들의 ‘테러’로 매년 100명 넘게 숨지는데 예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행정의 과실치사 아닌가.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