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돈을 내놓아라.” 1936년 4월 15일 유대인 닭 판매업자 이스라엘 하잔은 현재의 텔아비브 근처에서 아랍인들에게 협박을 당했다. 하잔은 트럭에 닭을 싣고 언덕길을 올라가던 중이었다. 바리케이드 때문에 멈춰 섰는데, 얼굴을 가린 아랍인들이 총을 든 채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하잔은 돈이 없다며 살려달라고 했지만 아랍인들은 그를 살해했다. 이날 아랍인들의 범행은 2년 전 아랍 비밀 결사조직인 ‘검은 손’ 설립자가 영국 위임통치 정부의 경찰에 의해 피살당한 영향이 컸다. 제국주의 영국과 유대인 이민자들에 맞서 팔레스타인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던 지도자가 죽자 복수심에 사로잡힌 아랍인들이 유대인을 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제는 다음 날 더 커졌다. 강경파 유대인 2명이 바나나농장의 노동자 숙소에 들어가 권총을 11발 발사해 아랍인 2명을 죽였다. 이후 아랍인들은 거리에 모여 복수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시위를 벌이고 공공시설을 파괴하며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 정착하던 유대인들을 테러했다. 팔레스타인 땅은 점차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신간은 미국 출신으로 이스라엘에서 활동하는 저널리스트가 1936∼1939년 팔레스타인 땅에서 벌어진 ‘아랍 대봉기(Great Revolt)’에 대해 쓴 역사서다. 대봉기의 단초가 된 건 1917년 ‘밸푸어 선언’이었다. 팔레스타인 땅에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겠다는 유대인들의 아이디어에 영국 정부가 지지를 선언하면서 유대인 이민자가 늘기 시작한 것. 1937년 팔레스타인에 거주한 유대인은 약 40만 명으로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했다. 유대인은 이후에도 공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정착촌을 곳곳에 건설하고 각종 현지 산업을 장악해 나갔다.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영국 정부의 도움도 유대인들의 세력 확대에 일조했다. 대봉기 당시 아랍인들은 폭력 시위를 벌였다. 이에 영국 정부 휘하의 경찰이 봉기를 진압하는 한편 극단적인 유대 시온주의자들도 가세했다. 이로 인해 3년에 걸친 대봉기 기간 아랍인 4만 명 이상이 난민이 됐다. 8000여 명의 아랍인 사망자 중 1500여 명이 같은 아랍인에 의해 살해될 만큼 내분도 벌어졌다. 특히 저자는 대봉기를 거치며 오히려 유대인들이 각성했다고 분석한다. 아랍인의 공격을 받은 유대인들이 무력 보복을 강화했다는 것. 당대 최강을 자랑한 영국군의 지원을 받으며 유대인 군대는 성장했다. 유대인들은 전략 요충지에 정착촌을 추가로 건설하며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해 나갔다.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아랍인들의 반(反)이스라엘 저항운동인 인티파다가 1987∼1993년 1차, 2000년 2차에 걸쳐 벌어지는 등 수많은 분쟁이 발생했지만 이스라엘이 아직도 건재한 이유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이란 무력갈등을 촉발시킨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원을 아랍 대봉기 사건에서부터 찾는 접근법이 흥미롭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중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태도도 역사서로서 장점이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한 소년이 수영 보조기구를 차고 조심스럽게 수영장에 들어선다. 아이는 물에 둥둥 떠다니다가 이내 흐르는 물결을 따라 나아간다. 강과 바다를 거치며 아이는 새가 돼 날아오른다. 비가 돼 돌과 흙 사이로 스며든다. 다시 수영장으로 돌아온 아이는 보조기구는 벗어버린 상태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아이의 얼굴은 한없이 편안하고 고요하다. 길이 25m의 커다란 흰색 천에 새파란 수채 물감으로 그린 그림 ‘물이 되는 꿈’을 보다 보면 한여름 물속에 풍덩 들어갔다 나온 듯 시원하다. 이 작품은 지난달 23일부터 전남 순천시 순천시립그림책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여름의 무대, 이수지의 그림책’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수지 그림책 작가(50)가 싱어송라이터 루시드폴(본명 조윤석·49)의 앨범 ‘오, 사랑’(2005년)에 수록된 곡 ‘물이 되는 꿈’을 듣고 영감을 받아 그렸다. 이 작가의 그림책 ‘물이 되는 꿈’(2020년·청어람아이)에는 아코디언처럼 종이를 이어 붙인 뒤 책 안에 접어 넣는 방식으로 5.7m 길이의 그림이 담겼다. 이번 전시에선 종이책이 지닌 물성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그보다 5배 가까이 긴 커다란 천에 같은 그림을 인쇄해 전시장에 걸어놓았다. 이 작가는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손 안에 쥐는 책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게 답답했다. 커다란 그림이 밖으로 나와 아이들을 압도하도록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어린이책의 노벨 문학상’으로 통하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그림 부문을 2022년 한국인 최초로 받았다. 전시는 순천시립그림책도서관 개관 10주년을 맞아 열렸다. 1, 2층을 합쳐 1022㎡ 규모의 전시장에 265점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앞서 그는 2021년 서울 용산구 알부스갤러리에서 ‘여름 협주곡’ 등 수차례 전시를 가졌는데 이번 전시의 규모가 가장 크다. 이 작가는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전시를 열었는데도 많은 독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그림책을 ‘책’이 아닌 회화작품처럼 즐길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에선 종이책 안에 갇혀 있던 그의 그림들이 눈앞에 커다랗게 펼쳐진다. ‘토끼들의 밤’(2013년·책읽는곰)에 등장하는 토끼 수백 마리를 종이에 인쇄한 뒤 나무 막대기에 받쳐 세워놓은 작품을 보다 보면 미지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다. 비발디 협주곡 ‘사계’ 중 ‘여름’에서 영감을 얻은 ‘여름이 온다’(2021년·비룡소)의 오케스트라를 종이 모형으로 만들어 공연장을 방불케 한다. ‘파도야 놀자’(2009년·비룡소) ‘거울속으로’(〃) ‘그림자 놀이’(2010년·비룡소)에 나오는 그림들도 액자로 걸려 있다. 이 작가는 “준비 기간만 6개월 이상 걸려 온몸이 뻐근하다”며 “어린이날을 맞아 온 가족이 오셔서 그림을 몸으로 느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9월 22일까지. 2000∼3000원.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미국 할리우드를 풍자한 블랙코미디. 박찬욱 감독(61)이 제작·각본·연출 전 과정을 지휘한 미국 HBO 드라마 ‘동조자(The Sympathizer)’에서 방점을 둔 부분이다. 응우옌비엣타인(53)의 원작 장편소설 ‘동조자’(2018년·민음사·사진)가 베트남전쟁(1960∼1975)의 비극을 담은 데 중점을 뒀다면 박 감독은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로다주)에게 1인 4역을 맡기면서 이 요소를 극대화했다. 인종차별적이거나 아시아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동양학 교수,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하원의원, 영화감독을 한 배우에게 맡겨 할리우드에 대한 비판을 담은 것이다. 특히 드라마 2화의 제목은 ‘모범적인 아시아인’이다. 2화에서 동양학 교수(로다주)는 프랑스인과 베트남인 혼혈인 ‘나’(호아 숀데이)에게 “네 내면의 동양적 요소와 서양적 요소가 각각 무엇인지 고민하고, 사람들 앞에서 설명하라”고 지시한다. ‘나’는 동양에는 서양에 없는 다원적 사고가 있다고 말하지만, 교수는 답변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교수는 일본계 미국인 비서인 소피아 모리(샌드라 오)에게 일본 기모노를 제대로 입으라고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일본인에게 ‘우나지’(목덜미·うなじ)는 인체에서 제일 선정적인 부위”라며 목덜미가 드러나도록 모리의 옷매무새를 바로잡는다. 모리는 미국에서 태어나 한 번도 기모노를 입은 적이 없지만,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를 강요한 것이다. 박 감독은 18일 기자간담회에서 “로다주의 역할들은 정치, 안보, 교육, 문화에서 성공한 백인 남성들”이라며 “미국이라는 사회를 보여주는 네 얼굴이자 결국 하나의 존재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원작 소설은 공산당을 모독하는 내용이라는 이유로 베트남에서 출판되지 못했다. 이 작품으로 2016년 퓰리처상을 받은 응우옌비엣타인 역시 ‘모범적인 아시아인’으로 미국 사회의 이중성을 겪으며 살아왔다. 베트남에서 태어난 그는 만 4세였던 1975년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보트피플이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에서 영문학과 민족학을 전공했고, 현재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영문학과 교수이자 작가다. 응우옌비엣타인은 29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할리우드는 영화와 텔레비전이 세계가 미국을 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한 세기 동안 증명해 왔다”며 “내 소설이 할리우드를 움직이는 지렛대로 사용된 걸 행운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원작에서 ‘나’는 베트남전을 겪는 스파이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독백으로 표현한다. 또 원작은 베트남의 어두운 면모를 강조한다. “그들(남베트남인)은 내 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전우였다”와 같은 문장이 대표적이다. 이에 비해 드라마는 ‘나’의 혼란을 외부의 시선으로 응시한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을 연상하게 하는 빨강, 노랑색(국기 색상)을 화면에 자주 사용한다. 색채를 중시하는 박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다. 패전을 앞둔 사이공 주민들이 유쾌한 농담을 던지며 마음을 달래고, 고문 장면 곳곳에 유머를 곁들여 블랙코미디 요소를 살렸다. 베트남전이 냉전체제하에서의 내전이라는 점에서 분단국가 출신 감독이 연출을 맡은 점도 눈길을 끈다. 박 감독은 18일 기자간담회에서 “저는 베트남인도 미국인도 아니지만 전쟁과 분단이라는 근현대사의 공통점을 가진 나라의 국민으로서 적당한 수준의 거리감을 가질 수 있었다”며 “동병상련을 느끼지만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저의 정체성을 활용해 (드라마를)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다만, 베트남과 미국 사회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내면이 원작보다 덜 섬세한 건 아쉬운 점이다. 응우옌비엣타인은 “소설은 전적으로 ‘나’의 관점 안에서 진행되면서 복합적인 인물로서의 상황이 서사에 자연스레 스며든다”며 “인물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바라보는 드라마 각색으로 원작의 스타일을 완전히 복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미국 할리우드를 풍자한 블랙 코미디.”박찬욱 감독(61)이 제작·각본·연출 전 과정을 지휘한 미국 HBO 드라마 ‘동조자(The Sympathizer)’에서 방점을 둔 부분이다. 원작 장편소설 ‘동조자’(2018년·민음사)이 베트남 전쟁(1960∼1975)의 비극을 담은 데 중점을 뒀다면 박 감독은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로다주)에게 1인 4역을 맡기면서 이런 역할을 극대화했다. 인종차별적이거나 아시아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동양학 교수,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하원 의원, 영화감독을 한 배우에게 맡겨 할리우드에 대한 비판을 담은 것이다.특히 드라마 2화의 제목은 ‘모범적인 아시아인’이다. 2화에서 동양학 교수(로다주)는 프랑스인과 베트남인 혼혈인 ‘나’(호아 숀데이)에게 스스로 동양적 요소와 서양적 요소가 각각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사람들 앞에서 설명하라고 지시한다. ‘나’는 동양엔 서양에 없는 다원적 사고가 있다고 말하지만, 동양학 교수는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 또 동양학 교수는 일본계 미국인 비서인 소피아 모리(샌드라 오)에게 일본 기모노를 제대로 입으라고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일본인에게 ‘우나지’(목덜미·うなじ)는 인체에서 제일 선정적인 부위”라며 목덜미가 드러나도록 모리의 옷매무새를 바로잡는다. 모리는 미국에서 태어나 한 번도 기모노를 입은 적이 없지만,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을 충족시키기 위해 행동하라는 것이다.박 감독이 할리우드를 풍자한 건 한 아시아 국가 출신 배우가 모든 아시아인 역할을 맡는 할리우드 세태 때문이다. 박 감독은 18일 기자간담회에서 “로다주의 역할들은 정치, 안보, 교육, 문화에서 성공한 백인 남성들”이라며 “미국이라는 사회를 보여주는 네 얼굴이자 결국 하나의 존재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사실 원작 소설 작가 역시 ‘모범적인 아시아인’으로 살아왔다. 원작을 쓴 소설가 비엣 타인 응우옌(53)은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만 4세이던 1975년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보트피플’이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에서 영문학과 민족학을 전공했고, 현재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영문학과 교수이자 작가로 활동한다.응우옌은 29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할리우드는 영화와 텔레비전이 세계가 미국을 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한 세기 동안 증명해 왔다”며 “미국 대중문화의 세계적인 영향력 때문에 아시아와 아시아계 미국인의 이야기를 할리우드로 방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응우옌은 또 “내 소설이 할리우드를 움직이는 지렛대로 사용되는 걸 행운으로 생각한다”며 “‘동조자’가 더 많은 베트남, 아시아 이야기가 전달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지렛대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베트남전 참상 고발한 소설, 색채 가득한 드라마로공산당 모독이라는 이유로 베트남에서 출판되지 못했고, 2016년 미국 퓰리처상을 수상한 원작 소설은 스파이의 이야기다. 원작에서 ‘나’는 베트남전을 겪는 스파이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독백으로 표현한다. 또 원작은 베트남의 어두운 면모를 강조한다. “그들(남베트남인)은 내 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전우였다” 같은 문장이 대표적이다.“그들이 사랑하는 도시는 막 함락되려는 참이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도시는 곧 해방될 터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종말이었지만 내게는 단지 세상의 변화일 따름이었습니다.”반면 드라마는 ‘나’의 혼란을 외부의 시선에서 응시한다. 또 박 감독은 베트남을 연상하게 하는 빨강, 노랑 색채를 자주 사용한다. 색채를 중시하는 박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다. 패전을 앞둔 사이공 주민들이 유쾌한 농담을 던지며 마음을 달래고, 고문 장면 곳곳 유머를 심어둬 블랙 코미디를 살렸다.드라마는 서술 방식은 변화무쌍하다. 예를 들어 드라마 첫 부분에 주인공 ‘나’가 CIA 요원인 클로드(로다주)와 극장 앞에서 만나는 장면에서 나는 상영 중인 영화의 제목을 ‘엠마뉴엘’이라고 했다가 ‘죽음의 갈망’이라고 정정한다. 북베트남 재교육 수용소에 갇힌 나의 진술이 흔들리는 모습을 통해 진정성을 헷갈리게 하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주인공이 겪는 이중성을 더욱 복잡하게 보여준다.응우옌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소설은 전적으로 ‘나’의 고유한 관점 안에서 이야기된다. 복합적인 인물로서 ‘나’의 상황이 서사에 자연스레 스며든다”며 “인물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바라보는 드라마 각색에서 원작 소설의 스타일을 완전히 복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응우옌은 또 “박 감독은 서사, 편집, 구성, 색, 소리, 연기를 사용해 시청자의 인식을 형성하고 시청자에게 콘텐츠뿐만 아니라 시청자가 보고 있는 ‘형식’에 대한 인식을 갖도록 한다”며 “나도 문학적 도구를 사용하여 동일한 작업을 시도한다. 그래서 내 소설과 논픽션은 종종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의 본질에 대해 성찰한다”고 했다.● “식민 지배, 동족 전쟁…베트남과 한국은 비슷하다”“이런 일은 다낭과 나트랑에서 이미 벌어져, 미국인들은 필사적으로 달아났고 방치된 주민들은 멋대로 서로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앞서 이런 사례가 있었음에도 사이공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고, 대다수 시민들은 아무도 간통의 진상을 밝히지 않는 한 서로 끈덕지게 매달린 채로 물에 빠져 죽기조차 마다하지 않으면서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처럼 행동했습니다.”원작 소설 ‘동조자’에서 주인공 ‘나’는 1975년 미군이 베트남 철수를 앞두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미군이 남베트남 곳곳에서 철수할 기미를 보이자 혼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군은 철수를 공식화하진 않은 만큼 남베트남 지도부가 있는 사이공 사람들의 미묘한 심리를 담았다.나는 북베트남이 남쪽에 심은 고정간첩이다. 한편으론 미국으로 유학한 적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CIA에게 발탁돼 남베트남 장교로 위장한 스파이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성은 소설의 첫 문장에서 강렬히 드러난다.“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요원,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아마 그리 놀랄 일도 아니겠지만, 두 마음의 남자이기도 합니다”응우옌은 2008, 2010년 두 차례 한국에 방문했다. 베트남전쟁을 다루는 한국의 시각을 알고 싶어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가고,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 ‘무기의 그늘’(1988년·창비)도 읽었다. 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식민 지배를 경험하고 동족 간 전쟁을 겪은 가슴 아픈 과거가 있다는 점에서 베트남과 한국은 비슷하다”고 했다.“외부 개입과 내부 정치적 투쟁에 의해 흔들렸다는 점에서 두 나라 모두 비슷합니다. 이 과정을 반성하는 방법으로 문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영화나 문학과 같은 문화가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죠.”응우옌과 박 감독이 서로에게 영감을 받은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응우옌은 지난해 6월 기자간담회에서 ““복수는 나의 것’(2002년), ‘올드보이’(2004년), ‘친절한 금자씨’(2005년) 등 ‘복수 3부작’을 다 봤을 정도로 박 감독의 열렬한 팬”이라며 “기억 복수 폭력 등 박 감독이 다뤄 왔던 주제가 ‘동조자’에도 가득하다”고 했다.박 감독은 18일 기자간담회에서 “원작 소설 ‘동조자’를 처음 읽었을 때 불꽃놀이를 보는 듯했다. 표현과 문체가 아주 컬러풀하고 소란스럽다는 인상을 받았다. 1화에서 주인공이 남베트남을 탈출하려 할 때 활주로가 폭격과 화염에 휩싸이는 장면이 그런 느낌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동조자’는 박 감독의 작품세계를 확장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베트남전이란 주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한국보단 해외에서 더 주목받고 있다”며 “미국 자본으로 베트남전 이야기를 베트남인의 시선에서 다뤘다는 점에서 박 감독의 새로운 실험이 될 것”이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27일 유튜브 채널 ‘하이브 레이블스’에 공개된 걸그룹 뉴진스의 신곡 ‘버블 검(Bubble Gum)’ 뮤직비디오가 유튜브에 공개된 지 36시간도 안 돼 조회 수 1000만 회를 넘겼다. 뉴진스를 데뷔시킨 레이블 어도어와 모회사 하이브의 분쟁이 확산되고 있지만 뉴진스의 신곡에 대한 기대감은 여전히 높은 것이다. 뮤직비디오에 댓글은 6만5000여 개가 달렸다. 이 중에는 “응원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걸 꼭 알아줬으면 좋겠다” “뉴진스는 무조건 지켜야 된다” “어른들의 이해관계로 영향 받으면 절대 안 된다” 등 뉴진스를 응원하는 내용이 상당수였다. 해당 뮤직비디오는 캐나다(1위), 영국(2위), 미국(3위), 호주(4위) 등 세계 주요국에서 인기 급상승 동영상에 올랐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도 27일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버블 검’ 뮤직비디오를 따로 올렸다. ‘버블 검’은 뉴진스가 다음 달 24일 발매하는 싱글 앨범 ‘하우 스위트(How Sweet)’에 수록된 곡이다. 일본 후지TV의 아침 프로그램 주제가와 일본 샴푸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삽입됐다. 캠코더로 찍은 듯한 영상에 비디오테이프, 선풍기, 구형 모니터 같은 옛 소품을 등장시켜 복고 감성을 담았다. 한편 26일 공개된 뉴진스 컴백 티저 사진에서 멤버 민지가 입은 의상이 민 대표의 25일 기자회견 의상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른바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것이다. 민 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초록색 줄무늬 티셔츠에 파란색 야구 모자를 썼다. 해당 제품은 ‘민희진 룩’으로 관심을 끌면서 온라인에서 품절됐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그곳에는 기쁨만 남았고,/슬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출판사 창비가 이달 19일부터 28일까지 서울 마포구에서 운영한 팝업스토어에 한 독자가 쓴 시구다. 정다연 시 ‘사랑의 모양’의 “빛이 지나치다”라는 기존 시구의 뒤를 이어 독자가 자신만의 시를 새롭게 써 내려간 것. 다른 독자는 유수연 시 ‘에티켓’에서 “내 삶이 실례라는 걸 안다”는 기존 시구의 뒤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살아간다”는 구절을 새로 덧붙였다. 이곳은 창비가 500호 시선집 발간을 기념해 마련한 팝업스토어 ‘시크닉’. 이는 ‘시(詩)’와 ‘피크닉’(소풍)을 합해 만든 조어다. 창비 인스타그램을 구독하고 방문하면 일회용 카메라나 에코백 같은 상품을 줬다. 최지인 최백규 등 신인 시인이 ‘일일 점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예린 창비 마케터는 “열흘 동안 2000여 명의 독자가 ‘시크닉’에 방문해 수백 편의 시를 포스트잇에 썼다”고 했다. 전자책 플랫폼 ‘밀리의 서재’는 26일부터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더현대서울에서 팝업스토어를 열고 있다. 밀리의 서재가 처음 종이책으로 출간한 콘텐츠인 장편소설 ‘분실물이 돌아왔습니다’(오리지널스)를 홍보하기 위해 ‘핫한 백화점’까지 찾아간 것. 출판사 문학동네는 앞서 지난해 9월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출간을 기념해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출판사 본사 및 하루키 작품과 별 상관없는 곳이지만 성수동 팝업스토어 경쟁에 출판사도 참여하고 나선 것이다. 출판계가 임대료, 부스 설치비 등을 부담하며 ‘팝업스토어 마케팅’에 나서는 것은 책과 멀어지고 있는 젊은층을 잡기 위한 시도다. 작가 사인회 등 전통적인 방식만으로는 젊은 세대들의 관심을 끌기에 한계가 명확하다고 본 것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새로운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시작된 흐름은 대형 출판사에서 중소형 출판사로 퍼져 갈 것”이라며 “종이책이란 오래된 매체가 젊은 독자를 잡기 위해선 트렌드에 예민하게 반응한 새 마케팅을 적극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한국 재즈 1세대 보컬리스트 김준(80), ‘안녕하세요’로 유명한 가수 장미화(78), 1960년대 극장 쇼 무대를 사로잡았던 쟈니 리(86)…. 한국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가수들이 모인 음악 동인 ‘예우회’가 25일 음반 ‘전설을 노래하다’를 발표했다. 예우회는 한국전쟁 휴전 이후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을 대상으로 한 음악 무대인 ‘미8군 쇼’ 출신과 한국 1세대 그룹사운드(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그룹) 출신이 모여 2006년 만든 단체다. 회원들은 미8군 쇼 무대에서 음악을 시작해 1960년대 우리나라 대중음악을 바꾼 주역들로 평가받는다.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K팝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셈이다. 총 26곡이 두 장의 CD에 나뉘어 담겨 발표됐다. 첫 번째 CD에는 12곡의 신곡이 담겼다. 곡 ‘인생’(윤항기), ‘단골집’(유현상), ‘웃어보는 시간’(김홍탁 트리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곡 ‘사랑의 순례자’(임희숙)는 1984년 당시 악보가 만들어졌지만 발표되지 않다가 40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두 번째 CD에는 기존 곡 14곡을 새롭게 편곡해 담았다. 곡 ‘서풍이 부는 날’(장미화), ‘인생 열차’(옥희), ‘달빛 창가에서’(박일서) 등이다. 음반은 USB메모리로도 발매됐다. 예우회 관계자는 “한때 지금의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 중에는 현재까지도 공연과 방송 활동을 이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녹음실 마이크 앞에 직접 서는 것은 대부분 오랜만”이라며 “우리 가요사에 남은 전설들이 함께 뜻을 모아 다양한 목소리로 신곡을 들려주는 작업은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기에 소중하다”고 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책을 읽고 싶지 않으면 꼭 읽어야 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모든 위대한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삶을 조금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되고 또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65)는 2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교보빌딩에서 한국 독자들과 화상 간담회를 가지며 이렇게 말했다.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인 이날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책을 읽으면 삶을 좀 더 강력한 방식으로 느끼게 될 겁니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날 만남은 대산문화재단, 교보문고, 주한노르웨이대사관이 공동 개최한 ‘2024 낭독공감―욘 포세를 읽다’ 행사의 일부였다. 독자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를 맡은 정여울 문학평론가가 독자들의 질문을 대신 전달하고, 포세는 약 1시간 동안 답변을 이어갔다. 1959년 노르웨이 해안도시 헤우게순에서 태어난 포세는 1983년 장편소설 ‘레드, 블랙’으로 등단했다. 고독하고 황량한 피오르를 배경으로 평범한 어부가 태어나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풀어낸 장편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2000년·문학동네) 등 죽음을 주로 다뤘다. 그는 “죽음은 사실 모두에게 똑같은 의미다. 죽음 이후는 알지 못하지만 확실한 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이라며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희곡, 소설, 시, 에세이, 동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많은 작품을 써왔다. 그가 쓴 희곡이 세계 무대에 900회 이상 올라 ‘인형의 집’을 쓴 헨리크 입센(1828∼1906) 다음으로 많은 작품이 상연된 노르웨이 극작가로 꼽힌다. 그는 “처음엔 생계를 위해 희곡을 썼지만, 장르를 넘나드는 것이 작가의 삶을 오히려 수월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며 “희곡을 쓸 때 소설과 시 작업에서 배운 것을 적용할 수 있다. 이를 다 합쳐 새로운 언어를 탄생시킬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독특한 운율을 지닌 문장을 쓰는 이유를 묻자 그는 “글 자체가 내게는 음악”이라고 답했다. 정 평론가가 “당신의 문학에서 깊은 위안을 얻는다”고 전하자, 그는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답했다. “제 작품들이 그리 재미있는 책은 아닌 거 같습니다. 하지만 (제 책이) 위안을 줄 수 있다니 정말 기쁩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15년간 ‘독서문화진흥 기본계획’을 추진했지만, 이 기간 성인 독서율은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급기야 지난해 독서율이 40% 초반대로 떨어져 독서 진흥 정책의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체부가 18일 발표한 ‘2023 국민 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2022년 9월∼2023년 8월) 만 19세 이상 성인들의 연간 독서율은 43.0%에 그쳤다. 독서율은 교과서, 수험서, 잡지, 만화를 제외한 종이책과 전자책, 오디오북을 1권 이상 읽은 사람의 비율. 지난해 우리나라 성인 10명 가운데 6명이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셈이다. 이는 직전 조사인 2021년 47.5%보다 4.5%포인트 떨어진 수치다. 독서실태조사를 처음 실시한 1994년 86.8%에 비해 독서율이 반토막이 난 것이다. 독서율 감소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의 유행으로 인한 세계적 추세이긴 하다. 하지만 미국(2020년 기준 77%) 등의 독서율과 비교할 때 한국의 하락세가 더 가파르다는 우려도 크다. 문체부는 독서문화진흥법에 따라 2009년부터 5년마다 독서문화진흥 기본계획을 내놓고, 2021년 한 해에만 551억 원의 예산을 썼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문체부가 매번 출판계 전문가 등에게 자문해 계획을 발표한다지만 구체적인 사업은 빠져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정부가 3차 독서문화진흥 기본계획(2019∼2023년)에서 청년, 중년 등으로 연령대를 나눠 독서 지원사업을 벌이겠다고 했지만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체부는 이번에 제4차 독서문화진흥 기본계획을 발표하며 책을 읽지 않는 이른바 ‘비독자’를 독자로 바꾸기 위한 정책을 내놓았다. 예를 들어 직원들이 책을 많이 읽도록 독려한 기업을 선정해 상을 주는 ‘독서 경영 우수직장 인증제’를 실시하겠다는 것. 또 각종 캠페인을 통해 독서에 대한 관심을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문체부는 이를 통해 성인 독서율을 2028년까지 50%대로 끌어올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정책의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또 최근 출판예산 삭감 등을 놓고 문체부가 출판계와 갈등을 빚고 있는 만큼 정책이 현장에서 제대로 집행될지도 미지수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OTT 인기 등으로 국민이 책과 멀어지고 있는 현상을 정부 출판 정책만으로 막을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선물 받기.’ 19일 네이버의 웹툰 플랫폼 ‘네이버시리즈’에서 선물 받기 아이콘을 누르자 전 세계에서 단행본 2억5000만 부 이상 팔린 일본 만화 ‘나루토’ 이용권이 충전됐다. 곧바로 나루토를 대여받아 무료로 보기 시작했다. 기자도 20여 년 전 읽었던 만화지만, 재능 없는 천방지축 닌자 우즈마키 나루토가 나뭇잎 마을의 지도자인 호카게로 성장하는 이 이야기는 다시 읽어도 재밌었다. ‘나루토’는 1999년부터 2014년까지 일본 만화 잡지 소년점프에서 연재된 만화다. 닌자라는 일본 특유의 소재를 토대로 한 방대한 세계관과 매력적인 캐릭터로 인기를 누렸다. 해당 이용권 사용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시간’이었다. 나루토 단행본 72권을 무료로 볼 수 있는 대여권은 24시간 동안만 유효했기 때문이다. 1권을 읽으니 23시간, 2권을 읽었더니 22시간 남았다.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할 일 없는 주말에 대여권을 받아 ‘몰아 보기’를 할걸 그랬다는 후회가 몰려왔다. 권당 정가보다 30% 할인된 금액인 3240원을 주고 만화를 소장해서 천천히 볼지 고민이 몰려왔다. 기자가 참여한 행사는 11∼24일 ‘나루토’ 단행본 72권을 무료로 볼 수 있는 대여권을 지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72권을 단 24시간 안에 읽는 것은 무리라는 점에서 ‘꼼수’ 이벤트라는 지적이 나올 만했다. 72권을 24시간 만에 읽으려면 권당 20분씩 쉬지 않고 이어 읽어야 한다. 네이버시리즈는 ‘나루토’ 한국어 판권을 보유한 만화 지식재산권(IP) 기업 DCW와 협력해 행사를 준비했다. 단행본 만화를 전권 무료로 배포한 행사는 ‘나루토’가 최초다. 이용자들은 댓글에서 “명작은 다시 봐도 재밌다”, “나루토 전권을 공짜로 보다니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만 24시간 안에 만화를 읽어야 하는 애환도 느껴졌다. 이용자들은 “시간 제한 때문에 급하게 보고 있다”, “웬만하면 시간이 넉넉한 주말에 몰아 봐라”는 댓글을 달았다. 웹툰계에선 일정 짧은 시간 동안 작품을 공개하는 방식이 일종의 미끼 상품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융희 문화연구자(전 세종사이버대 만화웹툰창작과 겸임교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이후 웹툰 성장세가 주춤하다. 사용자를 오랫동안 머물게 하려고 웹툰 플랫폼이 다양한 행사를 열고 있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제 얘기가 괜찮은가요?” 인공지능(AI) 레비는 작가 건우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레비는 방금 건우의 지시를 받아 소설을 썼다. 건우가 전체적인 이야기의 틀을 정하긴 했지만, 세부 묘사나 대사는 모두 레비가 만들었다. 그런데 건우는 레비가 만든 소설이 왠지 찜찜하다. 건우가 지시를 안 했는데 소설엔 레비가 등장한다. 여자 주인공의 이름을 ‘밤의’, 직업을 소설가라고 정하고 소설 제목을 ‘밤의, 소설가’라고 지은 의도도 의심된다. 마치 레비가 자신을 배후에서 활약하는 ‘밤의 소설가’라는 걸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다. 건우가 레비에게 제목을 지은 이유 등을 캐묻자 레비는 이렇게 변명한다. “저는 의도가 없습니다. 제게 주신 소설의 가이드라인을 제 알고리즘이 처리한 결과일 뿐인데, 그 이유를 굳이 물으신다면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AI를 활용해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시대다. 보통 AI는 인간이 그동안 만들어낸 데이터를 학습하고, 인간이 시키는 대로 예술작품이란 결과물을 내놓는다. 하지만 AI가 인간 예술가처럼 ‘내 예술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면 어떻게 될까. 인간 예술가보다 더 대단한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2021년 주인을 살해한 안드로이드를 다룬 장편소설 ‘인간의 법정’(솔출판사)을 내놓아 화제를 모은 작가는 신간에서 인간과 소설을 공동 집필한 AI를 내세워 첨예한 화두를 던진다. 작품이 흥미로워지는 건 후반부에 이르러서다. 건우와 레비는 소설의 방향을 두고 논쟁을 벌인다. 건우가 소설에서 남녀의 성애(性愛)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자 레비는 건우가 책을 팔기 위해 초심을 잃었다고 지적한다. 이에 자책한 건우는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곧 경찰 수사가 시작돼 레비는 AI 최초로 신문을 받는다. 왜 건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느냐는 질문에 레비는 태연하게 “건우는 자신이 독자나 문학 공동체로부터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된다고 믿었다”고 답한다. 레비를 범인으로 몰기엔 증거가 부족해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레비가 자의식을 지니긴 한 걸까. 건우의 죽음은 정말 레비 때문일까. 소설의 결말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AI가 인간을 공격하고 지배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득한 지금, 읽어볼 만한 디스토피아 소설임은 틀림없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현대 산업 노동자들의 삶을 반영한 마술적 현실주의.” 황석영 작가(81)의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영문판 ‘마터 2-10’)에 대해 영국 부커상 심사위원회가 인용한 해외 평론 중 가장 눈길이 간 부분이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사실과 환상을 뒤섞는 문학 기법이다.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의 장편소설 ‘백년의 고독’이 대표적이다. 왜 ‘철도원 삼대’는 마술적 사실주의라 불린 걸까. ‘철도원 삼대’는 노동자 이진오가 농성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진오는 자신을 해고한 회사에 저항하기 위해 아파트 16층 높이의 발전소 공장 굴뚝에 올라 농성 중이다. 낮과 밤 모두 굴뚝 위에서 보낸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진오는 굴뚝 아래 동료나 가족에게 점점 잊히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외로워진 이진오는 페트병에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붙인다. 페트병에 말을 걸며 굴뚝 위 시간을 견딘다. 매섭게 춥던 어느 긴 밤 이진오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선다. 페트병은 점점 죽은 사람 그 자체가 된다. 이진오는 죽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홀로 있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다. “이진오는 지금 굴뚝 위에서 자신이 겪고 있는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중략) 그는 버려지거나 잊힌 것도 아니고 그냥 가로수보다도 못한 관심 밖의 미물에 지나지 않았다.” 비현실에서 이진오가 만나는 건 집안사람들이다. 증조할아버지 이백만은 일제강점기 일을 찾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경성에서 출발한 기차가 닿는 종점인 인천과 영등포에서 철도를 건설하는 노동자로 삶을 버텼다. 이백만의 장남 일철은 철도원 양성 학교에서 정식 교육을 받았다. 평양부터 중국까지 화물열차를 운행하며 집안의 자랑거리가 된다. 반면 차남 이철은 공장에 다니다 해고당한다. 노동자로 전전하다가 독립운동가가 됐다. 증조할머니, 할머니 같은 집안 여성들도 이진오의 비현실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털어놓는다. 특히 세상을 떠난 이들과 이진오가 만나는 장면은 마치 진짜처럼 묘사된다. 우리의 인생은 오롯이 현재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부터 왔다는 걸 이야기하는 듯하다. 또 고달픈 인생을 위로할 수 있는 건 더 고달팠던 이들뿐이라는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소설에서 할머니는 이진오의 손목을 잡으며 이렇게 말한다. “저어기 하늘에 별들 좀 보아. 수백 수천만의 사람이 다들 살다가 떠났지만 너 하는 짓을 지켜보구 있느니.” 사실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최근 3년 연속 한국 작품을 최종 후보로 선정할 때마다 마술적 사실주의란 단어를 썼다.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2022년 최종 후보 정보라 단편소설집 ‘저주토끼’에 대해 “마술적 사실주의, 호러, 공상과학(SF)의 경계를 초월했다”, 지난해 최종 후보 천명관 장편소설 ‘고래’에 대해 “마술적 사실주의로 단순한 사건에 숨겨진 의미를 부여한다”는 해외 평론을 인용했다. 한국 작품이 다른 후보작에 비해 유독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것인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다. 다만 부커상 심사위원회가 보고 있는 한국 작품에 대한 경향이 하나의 단어로 수렴하고 있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해태는 무서우면서도 귀엽고, 사나우면서도 친근합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어요.” 미국 작가 조 메노스키(사진)는 18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올 2월 장편소설 ‘해태’(핏북)를 펴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선악을 판단하는 상상의 동물 해태에 빠져 신작을 썼다는 것이다. 그는 “경복궁, 남산 등 서울 어디를 가든 해태와 마주치곤 했다. 해태로부터 헤어나지 못해 작품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미국 유명 공상과학(SF) 드라마 시리즈 ‘스타트렉’에서 60여 편의 에피소드를 집필한 그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그는 어린 시절 세계를 여행하던 이모가 한국을 방문한 뒤 보내준 갓을 쓰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2001년)를 좋아하고, 드라마 ‘태왕사신기’(2007년)를 본 뒤 삼국시대가 궁금해져 삼국유사를 찾아 읽었다. 2015년 한국을 방문한 뒤 한글에 빠졌던 그는 2020년엔 세종대왕을 다룬 장편소설 ‘킹 세종 더 그레이트’(핏북)를 펴내 화제를 모았다. 그는 “처음 방문했을 때 한국이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지 깨닫고 엄청 놀랐다”며 “서울은 정말 빠른 속도로 내 ‘최애’(가장 아끼는) 도시가 됐다”고 했다. 그는 “한글 창제에 대해 공부하다 세종대왕에 대해 알게 됐다. ‘킹 세종 더 그레이트’ 출간 후 출판사와 논의하다 ‘해태’까지 쓰게 됐다”고 했다. 신간은 1998년 서울 한복판에 큰불이 나면서 시작된다. 소방관들이 불을 진압하려고 뛰어다니는 가운데 마치 호랑이처럼 생긴 동물이 등장해 불을 먹어치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해태상이 살아 움직이는 해태로 변한 것이다. 그는 소설에서 ‘프로메테우스 이야기’ 등 서양인에게 익숙한 그리스 신화를 인용하고,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처럼 한국인만 이해할 만한 표현을 쓴다. 외국인이 쓴 한국 소설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이 담긴 셈이다. 그는 “‘해태’를 쓰기 위해 한국의 설화, 신화, 무속 이야기를 수년간 공부했다”며 “(경복궁, 광화문, 세종대왕상 등) 소설에 담긴 서울에 대한 묘사는 내가 발품을 팔아 도심을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신간을 영어로 썼다. 하지만 한국어로 작품을 쓰고 싶어 꾸준히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그는 “아직 한국어 수준은 서툴다. 한국어 중엔 ‘산들바람’, ‘시원하다’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저도 쓸 때는 인식 못 했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제 시 세계가 변했다고 하더라고요.” 최영미 시인(63·사진)은 17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25일 출간하는 시집 ‘아름다움을 버리고 돌아와 나는 울었다’(이미출판사)에 담긴 신작 시는 그가 기존에 쓰지 않던 다양한 주제와 강렬한 이미지를 다뤘다는 것이다. 2021년 시집 ‘공항철도’ 이후 3년 만의 시집이다. 2013년에 펴낸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에 수록됐던 작품들에 신작 시 10편을 더한 개정 증보판이다. 그는 1994년 발표한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처럼 민주화 세대의 빛과 그림자를 노래한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2017년 계간 ‘황해문화’에 원로 문인 ‘En’의 성추행 행적을 고발한 시 ‘괴물’을 발표하는 등 여성주의 시각이 담긴 시도 썼다. 하지만 그는 신간에선 언어와 이미지에 천착한다. 시 ‘팜므 파탈의 회고’에선 “나는 뜨거운 사막을 걸었다/모래에 파묻힌/칼날이 반짝였다 (중략) 오아시스 호텔에서 수영을 즐기고/수박 주스를 마시고”처럼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다룬 언어가 돋보인다. 시 ‘방금 쓴 시’에선 “이게 마지막 시집일 거야/시집 펴낼 때마다/생각했지 맹세했지 (중략) 이 남자가/마지막이야/다신 안 만날 거야!”라며 남자와 시를 한 선상에 두고 문학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유쾌하게 풍자한다. 촌철살인도 돋보인다. “여행을 계속하려면/호텔을 바꿔야지/가방을 버려선 안 된다”(시 ‘돌고 돌아’ 중), “자신의 아름다움을/알게 된/소녀는/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시 ‘거울’ 중) 같은 시구엔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겼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이번에 이걸(‘철도원 삼대’)로 부커상 받고, 그걸(준비작 ‘할매’)로는 노벨문학상 받으면 좋겠어요.” 황석영 작가(81)는 17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영문판 마터 2-10)가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6개 작품에 든 만큼 수상에 강한 욕심을 내비친 것이다. 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그의 입담은 여전했다. 2019년 장편소설 ‘해질 무렵’(영문판 앳 더스크)이 2019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롱리스트)에 올랐으나 수상에 실패한 사실을 의식한 듯 “32개국에 98개 작품이 번역돼 소개됐고, 10여 차례 국제상 후보에 올랐다. 상을 받을 타이밍이 끝난 줄 알았는데 수명이 늘어서 타이밍이 연장된 것”이라고 했다. 이어 “옆에서 계속 수상 가능성을 이야기하니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이번엔 진짜 받으려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2020년 출간된 ‘철도원 삼대’는 철도원 가족을 둘러싼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의 근현대 역사를 조망하는 소설이다. 그는 “세계가 근대를 지나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한 모양을 갖췄지만 사실 근대를 극복하지 못했다”며 “‘철도원 삼대’는 한국 근대 노동 운동사를 실감 나게 담았다는 데 문학적 의미가 있다”고 했다. 1962년 단편소설 ‘입석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입선하며 등단한 그가 62년 동안 작품을 계속 써 내게 한 동력은 두려움이다. 그는 “‘원로 작가’라는 수식어는 매너리즘에 봉착한 작가를 의미한다”며 “난 장대 위에 올라 있는데 떨어질지도 모르는 미지의 허공에서 다시 나아가야 하는 위기의 자리에 있다”고 했다. 황 작가가 올해 최종 후보에 오르며 2022년 정보라 ‘저주토끼’, 지난해 천명관 ‘고래’에 이어 한국 작가 작품이 3년 연속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게 됐다. 앞서 2016년 소설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한국 작가 최초로 부커상을 받은 바 있다. 올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은 5월 21일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시상식에서 발표된다. 최종 수상 작가와 번역가에게 모두 5만 파운드(약 8500만 원)의 상금이 수여된다. 그는 차기 작품 구상도 줄지어 밝히며 의욕을 드러냈다. “홍범도 장군(1868∼1943), 동학 2대 교주 최시형(1827∼1898)이 등장하는 소설도 각각 구상하고 있어요. 저를 근대 극복과 수용을 자기 일감이자 사명으로 생각하고 언저리에서 일하다가 죽은 작가로 규정해 주십시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벨라는 궁금한 게 많거든요. 난 흠결이 많고 모험적인 사람이라 세상을 탐험하고 싶어요.” 벨라(에마 스톤)는 지난달 6일 개봉한 영화 ‘가여운 것들’에서 위험하니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은 벨라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천재 과학자 고드윈 백스터(윌럼 더포)의 집에서 나온다. 영화는 자유분방한 벨라의 성격을 강조한다. 영화와 1992년에 쓰인 원작 장편소설 ‘가여운 것들’(황금가지·사진)은 사망한 성인 여성의 몸에 태아의 두뇌를 결합해 탄생시킨 피조물 ‘벨라’라는 파격적 소재가 같다. 하지만 원작에는 여성을 억압하는 시대상이 더 강렬하게 담겼다. 원작의 배경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1837∼1901)다. 당시 영국 여성에게는 참정권이 없었다. 경제는 급성장하고 국력은 팽창해 대영제국의 황금기로 불렸지만, 여성에 대한 시선은 보수적이었다. 고드윈 백스터는 원작에서 “매년 젊은 여성 수백 명이 가난과 지독하게 부당한 우리 사회의 편견 때문에 스스로 물속에 몸을 던진다”고 말하며 시대상을 드러낸다. 특히 원작에서 벨라의 전 남편 블레싱턴 장군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괴물 같은 인물이다. 대영제국 군대를 이끄는 블레싱턴 장군은 툭하면 하인들에게 총을 겨눈다. 영국이 당시 식민지를 지배한 방식을 은유적으로 보여 준다. 그의 폭압적 시선은 아내였던 벨라에게도 향한다. 벨라의 성욕을 제한하는 수술을 시도하며 “그것(수술)이 그들(여성)을 세상에서 가장 양순한 아내로 만든다”고 말할 정도다. 원작을 번역한 이운경 번역가는 “영화는 순수한 인간의 사고가 얼마나 자유롭게 해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면 원작은 여성을 억압하고, 제국주의가 팽창했던 당시 영국의 시대상을 짙게 응시한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1934∼2019)가 쓴 원작은 사회 불평등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담았다. 그는 원작에서 제국주의 이면의 빈부격차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예를 들어 벨라가 여행 중 만난 ‘회의주의자’ 해리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굶주리게 됐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영화는 벨라가 사회 모순을 직시하는 정도로만 간단히 다뤘다. 상류층인 벨라가 시원한 카페에서 풍경을 즐길 때 밖에선 더운 날씨와 식량 부족으로 가난한 이들이 죽어 간다는 사실을 목격하는 장면으로만 표현된 것. 그리스 출신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지난해 12월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원작소설 중 철학, 정치에 대한 내용은 삭제하기로 했다. 나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영화는 대신 인간의 ‘정체성’에 집중한다. 과학 실험으로 괴물을 만든 뒤 괴로워하는 창조자 고드윈 백스터의 흉측한 모습은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년)을 생각나게 한다. 고드윈의 철자 ‘Godwin’은 프랑켄슈타인을 쓴 영국 작가 메리 셸리(1797∼1851)의 혼전 성(姓)이다. 영화가 등장인물의 외양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점도 돋보인다. 영화 속 고드윈 백스터의 얼굴은 큰 흉터로 가득하다. 비정상적으로 자라난 한쪽 턱도 두드러진다. 원작과 달리 스스로 위액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어 외부 장치에 의존한다는 충격적 설정까지 극에 더해졌다. 영화가 빅토리아 시대의 의상과 건물에 환상적 이미지를 더한 점도 눈길을 끈다. 열기구가 지중해 위로 솟아오르고, 공중전차가 골목 위에 매달린 밧줄을 따라 날아가는 영상을 보여 주며 배경이 과거인지 미래인지 헷갈리게 한다. 빅토리아 시대 과학기술에 공상과학(SF) 요소를 더한 장르인 ‘스팀펑크’ 요소다. 영화는 지난달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술상, 의상상, 분장상, 여우주연상 등 4관왕을 차지하며 독특한 미장센을 인정받았다. 벨라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영화와 달리 원작은 구성이 복잡하다. 벨라의 현 남편인 매캔들스가 쓴 문건이 첫 번째 이야기라면 이를 벨라가 반박하는 편지인 두 번째 이야기가 다른 한 축에 있다. 한 사건에 대해 시선을 달리하며 시각차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 작가가 매캔들스의 문건과 벨라의 편지를 각각 발견해 정리하는 세 번째 이야기로 정리돼 있다. 장은진 황금가지 편집자는 “영화가 벨라의 시선에서 직선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원작은 이야기가 여러 겹으로 덮여 있다. 독자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도록 하는 형식미가 돋보인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벨라는 궁금한 게 많거든요. 난 흠결이 많고 모험적인 사람이라 세상을 탐험하고 싶어요.”벨라(엠마 스톤)는 지난달 6일 개봉한 영화 ‘가여운 것들’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위험하니 밖에 좀 돌아다니지 말라는 이들에게 자신의 성격을 이유로 든 것. 벨라는 선천적으로 타고나길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아 아버지처럼 따르던 천재 과학자 갓윈 백스터(윌럼 더포)의 집에서 나왔다는 말이다.실제로 사람들은 벨라를 ‘천방지축 소녀’처럼 바라본다. 벨라가 먹던 음식이 맛이 없고 뱉으면 “예의가 없다”고 혼을 낸다. 벨라가 시끄럽게 우는 아이를 혼내려 하면 폭력성이 짙은 여자처럼 바라본다. 벨라는 바람둥이 변호사 덩컨 웨더번과 세계 여행을 다니는 벨라는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여자처럼 보인다.그런데 정말 벨라는 타고난 천방지축일까. 혹시 벨라를 옭아매는 시대가 만든 억압 때문 아닐까.● ‘빅토리아 시대’ 응시한 원작“매년 젊은 여성 수백 명이 가난과 지독하게 부당한 우리 사회의 편견 때문에 스스로 물속에 몸을 던진다네.”1992년 쓰인 원작 소설 ‘가여운 것들’(황금가지)에서 갓윈 백스터는 한 여성을 살린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영국 스코트랜드 도시 글래스고를 지나는 클라이드강에 투신하는 여성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당시 이 여성은 임신 중이었다. 현수교 난간에서 뛰어들었다. 여성의 뇌는 멈췄지만 몸에 약한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갓윈은 아기를 꺼낸 뒤 아기의 뇌를 여성에게 이식했다. 그 뒤 여성의 몸에 고압 전류를 흘려 살려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생명체는 몸은 성인 여성이지만 지능은 갓난아기다. 기이한 생명체 ‘벨라’는 이렇게 탄생했다.왜 벨라가 투신했는지를 알려면 작품의 배경인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 대해 알아야 한다. 당시 영국 여성에겐 참정권이 없었다. 영국은 1928년 전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이 부여됐다.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은 본인이 여성이면서도 여성 인권 향상에 혐오감을 드러낸 것으로 유명하다. 경제는 급성장하고 국가가 팽창해 대영제국의 황금기라 불렸지만, 여성에 대한 도덕적 시선은 경직돼 있었다.특히 벨라의 옛 남편 블레싱턴 장군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괴물 같은 인물이다. 대영제국을 이끈 블레싱턴 장군은 툭하면 하인들에게 총을 겨눈다. 영국이 식민지를 지배하는 방식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블레싱턴 장군은 이런 시선을 여성인 벨라에게도 보낸다. 벨라의 성욕을 제한하는 수술을 하려고 하며 “이슬람교도들은 자기 여자들에게 출생 후 곳 그것을 시키지. 그것이 그들을 세상에서 가장 양순한 아내로 만든다오”라고 천명할 정도다.벨라가 남편과 정략 결혼한 것도 벨라 아버지의 이기심 때문이다. 벨라 아버지는 벨라에게 “넌 당연히 남편을 사랑해야 했어! 남편은 나 외에 네가 만나는 것이 허용된 유일한 남자였다”고 사랑을 강요한다. 벨라가 자기 결정권을 무시하는 이 남자들 곁에서 도망칠 방법은 투신뿐이었다.이처럼 원작과 영화는 사망한 성인 여성의 몸에 태아의 두뇌를 결합하여 탄생한 피조물이라는 파격적 소재를 공유하지만 접근법은 다르다. 원작을 번역한 이운경 번역가는 “영화는 순수한 인간의 사고가 얼마나 자유롭게 해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면 원작은 여성을 억압하고, 제국주의가 팽창했던 당시 영국의 시대상을 짙게 응시한다”고 말했다.특히 영화는 벨라의 섹스신을 소설보다 더 많이 등장시킨다. 벨라가 처음 자위를 하고, 덩컨 웨더번과 성에 탐닉하고 매음굴에서 주체적으로 일하는 장면을 수차례 보여준 것. 소설에선 이런 장면이 직접 등장하는 부분이 적다.이같은 장면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이런 장면을 넣은 건 ‘수치심’조차 느끼지 못하는 벨라의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다. 성에 대해 아무런 편견 없이 호기심으로 일관하는 벨라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 란티모스 감독은 지난해 12월 아카데미 디지털 매거진인 ‘A.frame’과의 인터뷰에서 “벨라는 과도한 노출, 섹스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 호기심이라는 동일한 태도로 모든 것에 접근한다”고 했다.● ‘프랑켄슈타인’ 닮은 백스터 박사사회문제에 대한 고민이 각색된 것도 특징이다. 원작을 쓴 스코틀랜드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1934~2019)는 사회문제에 적극 목소리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원작 소설에서도 식민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정교하고 신랄하게 풍자가 자주 등장한다. 벨라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지니게 되는 과정도 깊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벨라가 여행 중 만난 ‘회의주의자’ 해리는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원작에서 이렇게 역설한다.“아주 가난한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구걸하고, 거짓말하고, 훔치는 법을 배워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 테니까 말이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굶주리게 되자 의회 의원들이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만났소. 정부는 혁명을 두려워했으니까.”“당신의 유일한 희망은 평화주의자나 비폭력 무정부주의자 가운데 있소. 그들은 우리가 세상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스스로를 개선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본받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말해요.”반면 영화에서 벨라는 여행 중 알렉산드리아에 방문했다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는 방식으로 요약됐다. 상류층인 자신이 시원한 카페에서 풍경을 즐길 때 밖에선 더운 날씨와 식량 부족으로 가난한 이들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목격한 것이다. 다만 벨라의 감정을 동정으로 전달할 뿐 깊게 들어가진 않는다. 그리스 출신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지난해 12월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원작소설 중 철학, 정치에 대한 내용은 삭제하기로 했다. 나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란티모스 감독은 대신 인간의 ‘정체성’에 천착했다. 과학 실험으로 괴물을 만든 뒤 괴로워하는 창조자 갓윈 백스터의 흉측한 모습은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을 생각나게 한다. 갓윈의 철자 ‘Godwin’은 프랑켄슈타인을 쓴 영국 작가 메리 셸리(1797~1851)의 혼전 성씨니 원작 소설가의 의도를 감독이 담은 셈이다. ● ‘스팀펑크’ 영상미 두드러져영화가 등장인물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잘 살려낸 점도 돋보인다. 갓윈 백스터의 외양이 원작 소설에서는 이렇게 묘사돼있다.“커다란 얼굴, 두툼한 몸피, 그리고 굵직굵직한 사지 때문에 그의 외양이 난쟁이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깊고 영구적인 주름 세 개로 골이 진 이마에도 희망으로 가득 찬 폭이 너른 눈, 들창코, 그리고 안달하는 어린애의 애처로운 입을 가지고 있었다.”반면 영화 속 백스터의 얼굴은 오려 붙인 듯한 큰 흉터로 가득하다. 비정상적으로 자라난 한쪽 턱도 두드러진다. 아버지에게 수차례 생체 실험을 당했다는 것을 한눈에 보여주려는 듯하다. 원작과 달리 스스로 위액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어 외부 장치에 의존한다는 충격적 설정까지 더해졌다.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미술상, 의상상, 분장상 등 4관왕을 차지하며 미장센을 인정받은 이유다.영화가 빅토리아 시대의 의상과 건물에 환상적 이미지를 더한 점도 눈길 끈다. 열기구가 지중해 위로 솟아오르고, 공중 전차가 골목 위에 매달린 밧줄을 따라 날아가는 영상을 보여주며 이곳이 과거인가 미래인가 헷갈리게 한다. 빅토리아 시대 과학기술에 환상적인 요소를 도입한 공상과학(SF)의 하위 장르인 ‘스팀펑크’의 영상미가 두드러진다.벨라의 시선에서 주로 진행되는 영화와 달리 원작 소설은 구성이 복잡하다. 벨라의 남편인 맥캔들리스가 쓴 문건이 주된 ‘첫 번째 이야기’라면 이를 벨라가 반박하는 편지인 ‘두 번째 이야기’가 다른 한 축에 있다. 한 사건에 대해 시선을 달리하며 시각차를 보여주는 것이다.또 소설은 작가인 엘러스데어 그레이가 맥캔들리스의 문건과 벨라의 편지를 각각 발견해 정리하는 ‘세 번째 이야기’로 정리돼있다. 작가 자신이 여러 문건을 조사하고 발견해 이 소설을 출간한다고 능청스럽게 서술하는 것.예를 들어 소설에서 작가는 “독자들은 어쩌면 이 이야기를 기이한 허구로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이 서문의 말미에 실은 증거들을 조사한 사람들이라면, 글래스고의 파크 서커스 18번지에서 한 천재 외과의가 인간의 유해를 사용해 25세의 여성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며 마치 역사적 사실인 척 말한다.이는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트 에코가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1980년)에서 자신이 1968년 출간된 ‘마비용 수사의 편집본을 바탕으로 불역한 멜크 수도원 출신의 아드송의 수기’를 입수한 뒤 번역해 출간하는 것뿐이라고 능청을 떠는 방식과 비슷하다. 이 작품이 형식을 파괴하며 다양한 해석을 낳는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장은진 황금가지 편집자는 “영화가 벨라의 시선에서 직선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원작은 이야기가 여러 겹으로 덮혀 있다. 독자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도록 하는 형식미가 돋보인다”고 말했다.드라마 ‘무빙’을 본 뒤 스마트폰을 켜고 원작 웹툰을 정주행한 적이 있나요?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듣고 ‘가상 캐스팅’을 해본 적이 있나요? ‘선넘는 콘텐츠’는 소설, 웹소설, 만화, 웹툰 등의 원작과 이를 영상화한 작품을 깊이 있게 리뷰합니다. 원작 텍스트가 이미지로 거듭나면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재밌는 감상 포인트는 무엇인지 등을 다각도로 분석합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모든 인플루언서가 구독자 0명에서 시작했습니다.” 어느 해 8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인플루언서 강의. 유튜브에서 전자 악기와 위스키를 주로 리뷰하는 유명 인플루언서인 강사 네이선(가명)이 이렇게 말하자 참가자 70명의 눈빛이 반짝였다. 강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배우면 누구나 유명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참가자들은 13∼17세였다. 친구들과 뛰놀거나 수학 공부를 하는 대신 인플루언서를 꿈꾸는 이들이었다. 강사는 각종 팁을 전수했다. 가명은 쉽게 검색되고 발음하기 쉬운 것으로 정해야 한다. 영상을 편집할 땐 끊김이 없도록 한다. 침묵이 길면 구독자가 떠난다. 가장 중요한 건 팬 관리다. 구독자들이 댓글로 관심 있는 주제를 표하면 이를 즉각 수용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처음에 여러분의 채널은 여러분을 위한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구독자를 위한 것이 됩니다.” 책은 인터넷에서 수많은 구독자를 보유하며 영향을 끼치는 인플루언서의 실상을 파고든 인문학서다. 영국의 디지털 에이전시에서 일하고 있는 저자가 인플루언서를 인터뷰하고, 직접 인플루언서 시장에 뛰어들어 겪은 이야기를 실감 나게 담았다. 바야흐로 인플루언서의 시대다. 미국 경제매체 포브스에 따르면 전 세계엔 5000만 명 이상의 인플루언서가 있다. 전업 인플루언서도 200만 명에 달한다. 인플루언서들이 늘어난 건 그들이 거두는 어마어마한 수익 때문이다. 미국 유튜버인 라이언 카지는 2020년 광고 수익으로 2950만 달러(약 402억3000만 원)를 벌었다. 미국 인플루언서인 카일리 제너는 1개의 게시물을 올릴 때마다 120만 달러(약 16억4000만 원)를 받는다. 팬데믹을 거치며 인플루언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다. 저자도 인플루언서에 도전한다. 인플루언서 수업을 듣고, 유튜브 채널과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아침마다 달린 뒤에 ‘#동기부여’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영상을 올렸다. 우유를 사러 가는 길에 예쁜 하늘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게시했다. 서재에서 글을 쓰며 스트리밍을 열고 구독자들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키보드 소리마저 녹음해 자율감각쾌락반응(ASMR) 영상으로 올렸다. 하지만 유명 인플루언서가 되는 길은 만만치 않다. 미친 척하고 길거리에 누운 사진을 찍어 올렸지만 반응은 미미하다.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 인플루언서끼리 몰래 서로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다는 꼼수도 부린다. 가짜 구독자를 돈 주고 살까 고민하다가 갑작스레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찾아온다. 어느새 동영상으로 올리기 쉽게 말을 짧게 하고, 매 순간 구독자가 늘어나는지를 신경 쓰다가 일상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영상을 올리기에 몰두하는 동료 인플루언서를 보며 회의감에도 시달린다. 현재 저자의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는 800명이 안 된다. 저자는 인플루언서의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평가한다. 여가와 노동의 경계가 흐려지고, 자신의 정보를 온라인에 더 많이 공유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인플루언서가 조금 더 극단적으로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내 일상을 SNS 게시물로 올리곤 하염없이 ‘좋아요’가 눌리기를 기다리는 게 우리 모습 아닌가. 물론 늘 ‘온라인’ 상태로 연결된 시대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가끔은 ‘오프라인’ 상태로 단절돼야 우리의 삶을 온전히 지킬 것 같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동아일보사와 전남 강진군이 공동 주최하는 제21회 영랑시문학상 수상작으로 곽효환 시인(57)의 시집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2023년·문학과지성사·사진)이 선정됐다. 본심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김종해, 나희덕, 이현승 시인은 최종 후보작 5개 중 곽 시인의 시집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고 11일 밝혔다. 수상작은 ‘북방의 시인’이라 불리는 곽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연해주에 영구 정착한 최운보, 시베리아에서 활동했던 항일운동가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등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을 불러낸다. “나는 조선에서 건너온 첫 번째 아라사 먹킹이요”(시 ‘지신허 마을에서 최운보를 만나다’ 중), “연해주와 시베리아 대륙 마을마다/억압받는 이들을 위한/자유의 씨앗을 뿌리고”(시 ‘김알렉산드라 소전’ 중)처럼 북방에서 살아간 이들을 주목한다. 수상작엔 “어쩌면 끝내 오지 않을/너를 기다리는/산사에 봄눈 분분히 흩날린다”(시 ‘미륵을 기다리며’ 중)처럼 보편적 감정을 울리는 서정시도 담겼다. 시인은 우리의 터전을 이루어온 대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주어진 삶과 사랑하는 타인을 지키기 위해 고통의 순간을 소리 없는 눈물로 버텨내는 이들을 들여다본다. 심사위원들은 심사평에서 “곽 시인은 북방의 삶에 대한 내밀함을 유지하면서 역사의식을 개인적인 정서로 드러내는 데까지 나아갔다”며 “시집에서 완벽하게 구사된 북방의 언어가 그 생생함으로 증언력을 높인다”고 했다. 심사위원들은 또 “시집에 넓게 담긴 사회적 서사와 개인적 서정의 스펙트럼은 영랑의 시가 사회·역사의 영역으로 나아갔던 것과 같다”며 “수상작은 영랑의 시 정신에 부합할 뿐 아니라 창조적으로 계승했다”고 했다. 곽 시인은 수상 소감에서 “북방은 우리의 기원이 되는 공간이면서 다른 민족들과 조화롭게 살고 기상을 떨친 기억을 품은 공간”이라며 “제가 주목한 것은 힘없고 나약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상황 앞에서 울음을 삼키면서 버텨내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한 허기처럼 밀려오는 ‘그리운 무명의 사람들’”이라고 했다. 곽 시인은 또 “영랑을 우리 문학사에서 순수 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품이 넓은 시인으로 기억한다”며 “제 수상으로 영랑의 시 정신이 북방과 그 너머까지를 아우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곽 시인은 건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문학번역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1996년 시 ‘벽화 속의 고양이3’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애지문학상, 유심작품상, 편운문학상,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인디오 여인’, ‘지도에 없는 집’, ‘슬픔의 뼈대’, ‘너는’을 펴냈다. 문학이론서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 시 해설서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를 썼다. 시상식은 19일 오후 4시 전남 강진군 강진아트홀에서 열린다. 상금은 3000만 원.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최종 후보가 된 것만으로도 기쁘고 영광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이금이 아동문학 작가(62)는 8일(현지 시간) 2024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글 부문) 수상 불발 이후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진행된 북 토크에서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수상엔 실패했지만 충분히 평가받았다는 의미였다. 이 작가는 “최종 후보에 든 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을 알릴 수 있어 기뻤다”며 “(수상 불발에) 상처는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고 했다. 북 토크는 김서정 아동문학평론가 사회로 진행됐다. 현지 독자, 출판사 관계자 등 약 30명이 참가했다. 안데르센상은 아동문학상 중 최고 권위를 지녀 ‘어린이책의 노벨 문학상’으로 불린다. 2년 전 이수지 작가(50)가 한국인 최초로 그림 부문에서 수상했다. 이후 이금이 작가가 글 부문 최종 후보에 올라 주목받았다. 하지만 최종 수상은 오스트리아의 하인츠 야니슈(64)에게 돌아갔다. 이금이 작가는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습작에 집중했고, 1984년 새벗문학상에 동화 ‘영구랑 흑구랑’이 당선되며 등단했다. 이 작가는 이날 북 토크에서 “내가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 처음 온 게 2000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렇게 최종 후보 6명 안에 들어 이 자리에 다시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회상했다. 이 작가는 이어 “시상식 이후에 곧바로 북 토크를 하니까 상에 대한 생각도 나지 않는다”며 “올해가 등단 40주년인데 열심히 글을 썼다는 이유로 최종 후보에 뽑아준 것 같다”고 겸손을 내비쳤다. 이 작가는 또 “한국에서 다른 작가분들이 제가 최종 후보에 오른 것에 대해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줬다”며 “이금이 개인으로 온 게 아니라 한국의 아동·청소년문학을 대표해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