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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효리(45·사진)가 14일 모교인 국민대를 찾아 “여러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여러분 자신”이라며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격려했다. 이 씨는 이날 서울 성북구 국민대 콘서트홀에서 열린 2023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에 참석해 후배들에게 이 같은 내용의 축사를 했다. 그는 1998년 국민대 공연예술학부 연극영화전공으로 입학한 직후 그룹 핑클로 데뷔했다. 이 씨는 “사랑하는 부모님, 심지어 훌륭한 성인들이 남긴 말도 안 듣는 우리가 조금 유명하다고 와서 떠드는 것을 들을 이유가 있느냐”며 말문을 뗐다. 이어 “나보다 뭔가 나아 보이는 누군가가 멋진 말로 깨달음을 주길, 그래서 내 삶이 조금은 더 수월해지길 바라는 마음 자체를 버리라”며 “인생은 ‘독고다이’(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일본말)”라고 강조했다. 이어 “지금은 너무 작아 못 들을 수 있지만 믿음을 갖고 나아간다면 (자신의 목소리가) 점점 커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누구에게 기대거나 위안받으려 하지 말고, 이래라저래라 위하는 척하는 말들에 흔들리지도 말고, 웬만하면 아무도 믿지 말라”고 당부했다. 축사를 마친 이 씨는 학사모를 벗고 자신의 히트곡 ‘치티치티 뱅뱅’을 불렀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빛 한 줌 들지 않는 동굴, ‘사는 게 죄가 된’ 여인 세 명이 숨어 속삭인다. “사람들한테 죽는 것보다 산짐승한테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작은 인기척에도 꺼지길 반복하는 위태로운 촛불처럼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다른 어둠 속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 차가운 돌바닥 위에 종이를 깔고 붓을 맞잡는다. 7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플러스씨어터에서 초연된 창작뮤지컬 ‘여기, 피화당’의 줄거리다.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정절(貞節)을 잃었다는 이유로 이혼과 자결을 강요받는 3명의 주인공 가은비, 매화, 계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웅 소설인 ‘박씨전’을 함께 써내려가는 판타지를 그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3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선정 작품으로 뮤지컬 ‘라흐 헤스트’ 등을 쓴 김한솔 작가가 극작을 맡았다. 이야기의 핵심인 연대와 희망의 정서는 짜임새 높은 캐릭터들이 풀어내 진정성을 높였다. 세 여인의 ‘벗’이 되는 선비 후량은 귀향 여성들을 옹호한 실존 인물 최명길의 아들로 등장한다. 가은비에게 “죽어가는 백성보다 대의명분을 중요시한 사대부를 비웃는 소설”을 써달라고 부탁하며 힘을 합친다. 국내 뮤지컬에서 공식처럼 사용되는 소모적인 러브 라인이 등장하지 않아 메시지가 한 줄기로 깔끔하게 모인 것도 강점이다. 극중극으로 등장하는 ‘박씨전’은 중소극장용 공연임을 잊게 할 만큼의 입체감을 제공했다. 이달 8일 공연에서 가은비 역을 맡은 최수진은 박씨 역을 연기할 땐 기존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에서 구성지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전환하며 매끄러운 극중극을 완성했다. 의성어, 의태어를 활용한 판소리 재담 형식의 대목은 관객 몰입도를 끌어올렸다. 동굴을 형상화한 무대 세트는 무대 영상과 조명에 따라 깊은 숲속이 됐다가, 박씨가 몸을 숨긴 피화당이 되기도 하며 다채로움을 더했다. 공연은 이야기의 배경으로부터 약 400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여전한 억압과 차별을 위로한다. “힘 있는 자들의 목소리만 남겨지는 이 세상에 그 어떤 목소리도 잊히지 않도록” 연대하는 다섯 인물의 이야기를 ‘여기, 피화당’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끝이 보이지 않는 투쟁의 삶도 언젠간 반짝이길 힘껏 소망하게 될 것이다. 4월 14일까지, 4만4000∼6만6000원.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20년 전, 될성부른 떡잎으로 만난 두 발레리나는 인생의 절반을 서로 의지하며 무성한 나무가 됐다. 같은 배역을 번갈아 퐁당퐁당 연기하던 20대 시절, 연습이 유난히 혹독했던 날엔 밤하늘에 대고 한탄하며 맥주잔을 부딪쳤다. 각자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된 뒤엔 “너희 딸 타고난 춤꾼이야” 하며 수다를 떨다가도 발가락이 문드러지도록 춤추며 변치 않는 기량을 뽐냈다. 유니버설발레단(UBC)의 두 수석무용수 강미선(41)과 손유희(40)의 이야기다. UBC의 두 ‘간판 스타’가 16∼18일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코리아 이모션 정(情)’에서 마지막으로 호흡을 맞춘다. 손 씨는 이번 무대를 끝으로 현역 무용수에서 은퇴하고 후학 양성의 길을 걷는다. ‘코리아 이모션’은 클래식 발레에 한국무용을 접목한 창작발레로 정과 한(恨) 등 한국적 감정을 표현한 9편의 짧은 춤으로 구성됐다. 지난해 강 씨에게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를 한국 무용수 사상 5번째로 안겨준 작품이다. 7일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일곱 살에 발레를 시작한 베테랑 무용수들이지만 ‘코리아 이모션’은 “조금도 안주할 수 없는” 무대다. 발레는 동작이 무용수의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것과 달리 한국무용은 주로 안쪽을 향한다. 손 씨는 “등은 굽고 골반은 여는 식의 꼬인 동작을 하니 몸이 아프기 일쑤”라며 “여성 4인무인 ‘달빛 유희’는 큰 동작 없이 잔잔하게 8분을 추는데도 모두 숨을 헉헉 몰아쉰다. 뻗어내는 동작 없이 호흡을 끌어올리기만 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역경은 끌림을 줬다. 강 씨는 “그리움 등 정서를 서사 없이 표현해야 해 까다롭지만 어떻게 표현력을 극대화할지 고민하는 재미가 크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입단한 두 사람은 서로 보고 배우며 ‘엄마 발레리나’까지 함께 성장했다. 손 씨는 “2004년 입단 전부터 미선 언니가 엄청나다는 소문을 듣고 오래도록 지켜봤다. 나처럼 춤만 추면 싱글벙글 웃는 여섯 살배기 딸이 난생처음 본 발레리나도 미선 언니”라며 “‘코리아 이모션’은 몸 상태와 심경에 따라 매일 달리 표현돼 고민인데 언니는 그마저 컨트롤한다”고 했다. 강 씨는 “나와 달리 유희는 억지로 힘을 쓰지 않고도 발끝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강렬하다. 특히 ‘미리내길’을 출 땐 보는 사람을 울컥하게 만든다”고 추켜세웠다. ‘미리내길’은 이 공연의 백미이자 두 사람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다. 푸른 달빛 아래, 지평권이 작곡한 동명 노래에 맞춰 죽은 남편을 향한 아내의 마음을 그리는 남녀 2인무다. 인생의 질곡을 거치고서야 새겨지는 한의 정서는 두 사람의 연륜으로 물감처럼 풀려나온다. 강 씨는 “사방을 둘러보는 동작이 있는데, 밖이 아니라 거울로 나를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춘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에도 춤을 놓지 않던 때가 떠오른다”고 했다. 이어 손 씨는 이렇게 말했다. “‘미리내길’만 추면 이성을 잃을 듯 빠져들어요. 살면서 가장 외로웠던 순간, 차가운 병상에 실려 수술실에 출산하러 들어가던 때가 생각나기도 하고요. 나 홀로 세상과 맞서야 했던 시간들이 없었다면 이만큼 표현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각각 고별 무대, 트로피를 쥐여준 무대라는 중압감이 있지만 두 사람은 “긴장되기보단 설렌다”고 입을 모았다. 손 씨는 “최대한 덤덤한 마음으로 오르려 노력 중”이라며 “앞으로의 인생에도 발레가 함께할 것이기에 ‘완전 끝’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했다. 강 씨는 차분한 미소로 이처럼 말했다. “올해 첫 작품으로 다름 아닌 ‘코리아 이모션’ 무대에 올라 행복해요. 작년에 못 보신 분들, 이미 보신 분들도 와주실 거란 기대도 있고요. 저번과 또 다른 매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불안, 조울증 등 정신질환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바뀌면서 이를 소재로 한 공연들이 잇달아 제작되고 있다. 다음 달 28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초연되는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은 불안장애를 앓고 있는 소년 에반 핸슨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2017년 제71회 토니상 최우수 작품상 등 6개 부문을 석권한 작품으로 아시아에서 공연되는 건 처음이다. 다음 달 5일 서울 강남구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선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이 개막한다. 16년째 조울증(양극성 장애)을 앓고 있는 엄마 다이애나와 그 가족의 위태롭고 따뜻한 삶을 그린다. 창작 초연작도 활발히 공연된다. 이달 23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초연되는 연극 ‘이상한 나라의, 사라’는 엄마의 조현병 확진 이후 세상의 수군거림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17세 딸 사라의 이야기를 그렸다. ‘2023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됐다. 서울 중구 CKL스테이지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는 만성 불안, 불안정한 관계 등을 증상으로 하는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 키키가 등장한다. 작품들에는 편견을 바로잡고 현실을 담아내려는 노력이 담겼다. ‘이상한 나라의, 사라’는 극 사이사이 해설자가 등장해 병에 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한다. 원인진 작가는 “관객의 몰입을 깨고 주체적 해석을 요구하기 위함”이라며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 연구원 등과 의견을 나눠 작품에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키키…’의 홍지원 PD는 “기존 공연에서 정신질환은 폭력이나 자살 등 자극적으로 다뤄진 경우가 많았다”며 “비극 또는 낙관에 치우치지 않고 완치를 향해 나아가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공연이 줄줄이 열리는 배경에는 정신질환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 변화가 있다. ‘넥스트 투 노멀’의 한진희 엠피앤컴퍼니 홍보팀장은 “8년 전 3번째 시즌만 해도 낯설어하던 관객들이 최근 관련 드라마, 영화가 늘며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지혜원 경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정신질환을 다룬 과거 공연들이 시대물, 위인 캐릭터 위주였던 것과 달리 누구든 공감할 동시대적 서사가 많아졌다”며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병’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된 관객에게 울림을 준다”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미국 팝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35·사진)가 그래미 어워즈 최고상인 ‘올해의 앨범’을 역대 최초 4회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로써 스위프트는 그동안 이 상을 세 차례 수상한 가수 프랭크 시내트라, 그룹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폴 사이먼, 히트곡 ‘이즌트 쉬 러블리’를 남긴 스티비 원더 등을 뛰어넘었다. 그래미 어워즈는 대중음악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최고 권위 시상식이다. 스위프트는 4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크립토닷컴 아레나에서 열린 제66회 그래미 어워즈에서 앨범 ‘미드나이츠’로 ‘올해의 앨범’ 영예를 안았다. 스위프트는 이날 ‘베스트 팝 보컬 앨범’도 수상했다. 그는 시상대에 올라 감정에 벅찬 목소리로 “지금이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며 “이 상은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이 일을 정말 사랑한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2006년 데뷔한 스위프트가 그래미 어워즈에서 지금까지 수상한 횟수는 총 14번에 달한다. 그중 2009년, 2015년, 2020년에 ‘올해의 앨범’을 받았다. 스위프트는 신보 소식도 전했다. 그는 수상 소감을 전한 뒤 “지난 2년간 숨겨온 비밀을 말하겠다”며 새 앨범 ‘더 토처드 포이츠 디파트먼트’가 4월 19일에 발매된다고 발표했다. 올해 그래미 어워즈의 주요 부문에선 여성 가수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올해의 레코드’와 ‘베스트 팝 솔로 퍼포먼스’는 마일리 사이러스(32)가 받았다. ‘플라워스’를 부른 미국의 여성 팝스타다. ‘올해의 노래’, ‘비주얼 미디어 베스트 송’은 빌리 아일리시(23)에게 돌아갔다. 할리우드 영화 ‘바비’의 주제곡 ‘왓 워즈 아이 메이드 포’를 작곡하고 노래했다. 아일리시가 그동안 그래미 어워즈에서 수상한 건 이번이 9번째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주말과 이어지는 이번 설 연휴에 가족, 친구들과 함께 공연을 보며 추억을 남기는 건 어떨까. 국립무용단은 7∼11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명절 기획공연 ‘축제’를 펼친다. 액운을 떨치고 행복을 기원하는 전통춤 일곱 가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그중 진쇠춤은 꽹과리를 활용한 흥겨운 가락과 춤사위로 복을 기리는 춤이다. 주로 남자 무용수들이 추지만 이번 공연에선 남녀 혼성 군무로 재구성해 축제의 의미를 다진다. 이 외에도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지전춤 등을 선보인다. 세대를 넘어 추억을 되새기기 좋은 공연들도 있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은하철도의 밤’은 1970, 80년대 애니메이션과 영화 등으로 인기를 모았던 동명 원작 소설을 각색한 창작 뮤지컬이다. 주인공 조반니가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친구 캄파넬라와 함께 은하수를 여행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21년 전 발표된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쿨 오브 락 월드투어’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오르고 있다. 록밴드에서 퇴출당한 주인공 듀이가 명문 초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다룬다. 영화에 사용된 음악 3곡에 뮤지컬 음악의 거장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별도로 작곡한 14곡까지 들어볼 수 있다. 연휴를 틈타 그간 놓쳤던 스테디셀러 작품을 보는 것도 좋다. 전 세계 23개국에서 누적 관객 1500만 명 이상을 모은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15세기 파리,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사랑하는 세 남자의 사랑을 노래한다. 노트르담 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 역은 배우 정성화, 양준모, 윤형렬이 번갈아가며 연기한다.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에서는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의 4번째 시즌이 열리고 있다. 동시대 프랑스 작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이 2014년 출간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교통사고로 뇌사 판정을 받은 한 청년의 장기가 기증되기까지의 24시간을 1인극으로 풀어냈다. 배우 손상규, 김신록, 김지현, 윤나무 등이 출연한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있는 힘껏 사는 것’과 ‘최선을 다해 죽는 것’ 사이의 위계는 없다. 이 같은 내용을 다룬 책은 캐나다에서 45년간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다 의료 조력 사망을 시행한 한 의사가 썼다. 의료 조력 사망은 의료진과 약물의 도움을 통해 이르는 사망을 뜻한다. 10여 개 국가 내 30여 개 자치구에서 허용되고 있다. 저자는 “의료 조력 사망은 누군가의 삶을 앗아가기 이전에 삶을 돌려주는 행위”라며 삶을 열심히 살아냈으나 통증과 외로움 끝에 죽음을 의지적으로 결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책은 죽음을 자기 결정의 영역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통증이 일상을 잡아먹고 혼자선 움직일 수 없게 된 환자 애슐리는 자신을 위해 커리어를 포기하는 엄마를 본다. 애슐리는 삶의 통제권을 되찾고, 엄마에게 인생을 돌려주고자 죽음을 결심한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의료 조력 사망을 선택하지 않는다더라도 그 선택지가 있다는 것은 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도구, 상황을 장악할 수 있다는 안심, 심지어는 희망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각자가 겪는 고통의 정도를 존중해야 한다는 대목은 ‘너만 힘든 거 아니다’란 암묵적 윽박에 지친 현대인에게 위로를 주기도 한다. 겉보기엔 훤칠하고 재치 있지만 근육위축증을 앓았던 인물 소어는 ‘기저귀를 차기 전’ 죽기를 원했다. 저자는 “삶을 직접 제어하길 원하는 환자의 소망은 의사의 의무와 부딪힐 때가 있다. 그러나 심리적 고통은 매우 개인적인 감각이고 그 정도는 본인만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을 부지하는 것이 미덕인 한국 사회에 생각할 거리를 준다. 유교 문화가 뿌리 깊은 사회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건 여전히 부도덕하고 논의조차 금기시된 일이다. “좋은 죽음은 환자가 세상과 맺어온 관계가 느껴질 경우다. 즉, 생전 외롭지 않고 각종 지원 체계가 충분했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을 곱씹어볼 때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강원도부터 부산까지, 최근 무대를 달군 ‘핫한’ 작품들이 연달아 지방공연에 나선다. 배우 신구와 박근형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달부터 4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순회공연을 펼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사뮈엘 베케트가 쓴 부조리극으로 주인공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라는 인물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야기다. 현재 전석 매진이 이어지고 있는 서울 공연이 18일 끝나면 울산, 강릉, 대전 등 총 8개 지역에서 공연을 선보인다. 400여 년간 한 여인만을 사랑한 드라큘라의 사랑을 다룬 뮤지컬 ‘드라큘라’는 3월과 4월에 각각 대전과 부산을 찾는다. 2014년 국내 초연된 이후 약 40만 명의 누적 관객을 모은 ‘드라큘라’가 지방 공연을 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드라큘라 역은 김준수, 전동석, 신성록이 돌아가며 연기한다. 다음 달 20∼24일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을 거쳐 부산문화회관에서 4월 2∼7일 공연된다. 37년간 53개국에서 1억3000만 명 이상이 관람한 스테디셀러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다음 달 21일부터 4월 7일까지 대구 계명아트센터에서 공연을 펼친다.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1862년 발표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One Day More’ ‘Bring Him Home’ 등 친숙한 곡들이 귀를 즐겁게 한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공허한 마음이 두려워 불 꺼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오래도록 밤을 헤맨 적 있는가. 행여 미움 받을까 작은 실수에도 전전긍긍한 적은? 비슷한 마음을 앓는 사람들이 많다.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는 크고 작은 ‘키키’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CKL스테이지에서 초연된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는 성격장애를 앓는 주인공 키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현대인에게 흔한 만성 불안, 불안정한 대인 관계 등을 증상으로 하는 경계성 인격장애를 소재로 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3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된 작품으로 뮤지컬 ‘실비아, 살다’를 만든 공연제작소 작작이 제작했다. 작품은 키키가 성격장애를 치료하려 애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경쾌하게 풀어낸다.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연인에게 집착하며, 자해를 서슴지 않던 키키는 상담사 에단을 만나며 자신의 병을 다루는 방법을 배워 나간다. 키키 역은 배우 이수정과 이휘종이 번갈아 가며 연기한다. 엄마에서 직장 상사로, 스테이플러로 쉴 새 없이 변하는 1인 다역 연기를 좇는 재미가 있다. 매 공연마다 키키를 포함한 6명의 배우가 등장해 총 30여 개의 배역을 맡는다. 배우 남경주, 김수정 등이 출연한다. 배역 간 관계를 명확하게 연출해 많은 캐릭터가 혼란스럽기보단 극을 익살맞게 푸는 장치가 됐다. 귀에 꽂히는 킬러 넘버는 부족하지만 키키의 상황과 심리에 꼭 맞게 작곡된 넘버들이 마음을 울린다. 키키의 내면이 혼돈에 휩싸여 폭주할 땐 하드록이, 자신의 성격장애를 인정조차 않는 부모와 말싸움을 벌일 땐 속사포 랩이 주인공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키키가 연인과의 불화 뒤 자해하는 대신 고통을 잊고자 차가운 얼음을 양손에 움켜쥔 채 부르는 넘버 ‘유일한 탈출구’는 객석에도 용기를 안겨준다. 장애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흔히 취하는 핑크빛 미래를 손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키키의 역경은 끝날 듯 끝나지 않는다. 극이 다소 늘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희망차다.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어도 더는 스스로를 역겨워하지 않고 노력하는 키키를 보며 관객은 “터벅터벅 느린 걸음으로 나아갈” 힘을 두 손에 쥐게 될 것이다. 25일까지. 전석 6만6000원.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공연계 MZ세대 직원들이 통통 튀는 기획으로 젊은 관객과 제작진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세종문화회관은 공연계에서 처음으로 라이프스타일 연계형 구독 서비스를 이달 선보였다. 올해 열리는 공연 28종을 최대 40% 할인가에 구매 가능한 것은 물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 전자책 플랫폼도 각 1개월씩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로, 준비한 800개 계정이 모두 팔렸다. 이는 지난해 초 신설된 DX팀의 아이디어로, 팀원 10명 중 9명이 MZ세대다. 김여항 세종문화회관 DX팀장(38)은 “공연 외에도 즐길 콘텐츠가 많은 젊은 관객을 겨냥해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고자 했다”며 “굿즈로 팬심을 다지는 요즘 취향을 고려해 유명 스티커 업체와 만든 ‘힙한’ 스티커도 제공했다”고 말했다. MZ세대 주도의 이색 공연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난달 6∼17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에선 전시 관람과 바(bar), 독서, 콘서트 등을 결합한 ‘클럽 아크 위드 안테나’ 공연이 열렸다. 이 공연에선 싱어송라이터들의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 관객들에게 그날 공연과 어울리는 술을 한 잔씩 제공했다. 이와 함께 관객들이 공연장 외 백스테이지와 분장실을 자유롭게 다니면서 전시된 음반과 사진을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김주연 LG아트센터 프로젝트 매니저(39)는 “취향이 뚜렷한 젊은 관객들이 열광할 요소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통상 LG아트센터 기획공연의 관객 연령대는 30∼40대가 60% 이상이지만, ‘클럽 아크 위드 안테나’는 30대 이하 관객이 60%를 차지했다. 1985∼1998년생으로 구성된 LG아트센터 기획팀이 공연을 기획했다. 젊은 제작진을 겨냥한 공연 서비스도 나왔다. 서울문화재단은 지난해 12월 MZ세대 직원들의 주도로 공연물품 공유 플랫폼 ‘리스테이지 서울’을 내놓았다. 시대별, 작품별 의상과 다양한 소품을 물품가액의 최대 5% 비용에 빌릴 수 있는 서비스다. 온라인으로 물품을 둘러보고 예약, 결제할 수 있다. 1986∼1999년생 직원 5명 등으로 구성된 무대기자재공유센터 팀이 공유 플랫폼의 기획과 운영을 맡았다. 임지은 무대기자재공유센터 매니저(43)는 “공연 후 소품 폐기로 인한 환경오염을 막으려는 젊은 제작진과 관객들의 의견을 반영했다”고 말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작품 속 진동을 관객과 나누기 위해 배우, 창작진 모두가 과분한 일을 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작품의 의미를 읽어내려 애써주신 심사위원들과 공연을 보러 와주신 관객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29일 열린 ‘KT와 함께하는 제60회 동아연극상’ 시상식에서 연극 ‘비비비(B BE BEE)’로 작품상을 받은 배우 겸 연출가 성수연이 이렇게 말했다. 우란문화재단의 ‘비비비’와 국립정동극장, 극단 돌파구가 공동기획한 ‘키리에’는 각각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타자적 존재와 마주하는 과정에 주목한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정성숙 국립정동극장 대표는 “60년간 연극계에 꿈과 희망을 준 동아일보사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고 밝혔다. 팬데믹 기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방지 차원에서 최소 인원만 참석한 채 진행됐던 동아연극상은 올해 4년 만에 따뜻한 발걸음으로 북적였다. 이경미 동아연극상 심사위원장은 “어려운 창작환경에서도 극장을 지키며 일상에 지친 관객들에게 큰 힘이 돼준 모든 연극인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연출상은 ‘싸움의 기술, 졸’의 김풍년 연출가에게 돌아갔다. 연기상은 각각 ‘싸움의 기술, 졸’과 ‘키리에’에 출연한 이미숙, 유은숙 배우가 수상했다. 이미숙은 “20년 넘게 수많은 인물들을 연기하며 적어도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아야겠다는 신념으로 연기를 해왔다”며 “그 인물들과 함께 받는 상이라 더 행복하고 즐겁다”고 소감을 밝혔다. 실험극 ‘혁명의 춤’으로 특별상을 수상한 김우옥 연출가는 “60년 전 한국 연극계의 현실을 직접 목격했기에 당시 동아연극상 창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잘 안다”며 연극상의 의미를 다졌다. 이어 “40여 년 전 초연 때는 작품을 본 관객과 평론가들이 당혹해했지만, 지난해 공연에선 젊은 관객들이 환호하며 작품을 인정해줬다. 세상이 바뀌었음을 직감했다”며 “바뀌어 가는 시대에 맞는 새 연극을 만들기 위해 우리 다함께 고민하자”고 말했다. 희곡상은 ‘그게 다예요’를 쓴 강동훈 작가, 무대예술상은 ‘엑스트라 연대기’의 김혜림 디자이너, 새개념연극상은 다페르튜토 스튜디오가 받았다. 신인연기상은 배우 백성철과 권은혜, 신인연출상은 ‘고쳐서 나가는 곳’을 쓰고 연출한 박주영 연출가에게 돌아갔다. 이날 시상식에는 김광보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 정성숙 국립정동극장 대표, 심사위원인 이경미 평론가, 김명화 작가 겸 연출가, 김옥란 평론가, 전정옥 평론가, 전인철 연출가가 참석했다. 김정호 배우 겸 심사위원이 사회를 봤다. 그밖에 천광암 동아일보 논설주간을 포함한 200여 명이 자리를 빛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해외 명작 소설을 재창작한 공연 2편이 이달부터 연달아 펼쳐진다. 프랑스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1944)의 소설을 재창작한 뮤지컬 ‘비아 에어 메일’이 3월 6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티오엠 1관에서 초연된다. ‘어린 왕자’ 등을 쓴 생텍쥐페리에게 1929년 프랑스 페미나상을 안겨준 ‘야간비행’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공연은 1920년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항공 우편이 본격화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항공 우편기 조종사 파비앙과 그의 아내이자 작곡가 로즈의 꿈과 모험을 다룬다. 파비앙 역은 배우 송원근 성태준 변희상이, 로즈 역은 나하나 강혜인 임예진이 돌아가며 연기한다. 5월 26일까지. 5만∼7만 원. 이달 21일부터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는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가 공연되고 있다. 2017년 3번째 시즌 이후 6년 만이다. 1976년 출간된 아르헨티나 작가 마누엘 푸이그(1932∼1990)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감옥에 수감된 반정부주의자 발렌틴과 자신을 여자라고 믿는 몰리나가 이념과 사상의 차이를 넘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몰리나 역은 전박찬 이율 정일우가, 발렌틴 역은 박정복 최석진 차선우가 번갈아가며 맡는다. 연극 ‘오펀스’ ‘옥탑방 고양이’ 등을 만든 레드앤블루가 제작했다. 3월 31일까지. 전석 6만6000원.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아동만화가 박윤선 씨(44·사진)가 프랑스 대표 만화 축제인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서 아동 부문 최고상을 수상했다. 28일 앙굴렘국제만화축제 홈페이지에 따르면 박 작가의 ‘어머나, 이럴수가 방소저!’가 제51회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서 아동 부문 야수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한국 작가가 이 축제에서 수상한 것은 2017년 앙꼬 작가의 ‘나쁜 친구’ 이후 7년 만이다. 작품은 남성만이 무술을 배우고 통치자가 될 수 있는 시대에 한 소녀가 남자아이들과 동일하게 성장하기로 결심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상을 받아 정말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미국의 유명 작가이자 유튜브 크리에이터인 마크 맨슨(40)이 대한민국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국가’로 평가했다. 또 그는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자본주의와 유교문화가 가진 최악의 요소가 맞물린 결과”라고 진단했다. 2017년 발간돼 세계 65개국에서 누적 20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신경 끄기의 기술’을 쓴 작가인 맨슨은 이달 22일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하다’라는 제목의 영상을 유튜브에 게시했다. 영상 서두에서 그는 “한국은 짧은 시간에 과학기술, 교육, 문화예술 등 분야를 선도하는 나라로 발전했다”며 “그러나 동시에 높은 불안과 우울, 자살률을 나타내고 있다. 그 이유를 파헤치고자 한국에 왔다”고 밝혔다. 영상은 오늘날 한국의 정신건강 문제를 근현대사와 심리학 등 여러 각도로 비춰 본다. 유튜브 구독자 144만 명을 보유한 이 채널의 영상은 28일 기준 약 54만 회 시청됐다. 영상에 따르면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급속 성장에 대한 압박과 그로 인한 사회구조적 병폐와 관련된다. 맨슨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황폐화된 한국은 최대한 빨리 경제적 기틀을 다져야 했고, 정부는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잔혹한 교육체계를 택했다”며 “사회에 만연한 압박은 한국인의 정신건강을 악화시켰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공동체성이 갖는 장점은 사라지고 단점만 남은 유교 문화가 더해졌다고 분석했다. 그는 개인의 실패가 곧 집안 전체의 실망 및 수치와 직결되는 분위기, 상사가 집에 간 뒤에야 퇴근할 수 있는 직장 문화 등이 젊은층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누군가에게 동아연극상은 어둑한 새벽녘과 황혼녘의 한 줄기 빛이었다. 동아연극상에서만큼은 ‘대기만성’이었던 역대 최고령 수상자 김우옥 연출가(90·제60회 특별상)와 ‘청출어람’ 역대 최연소 수상 타이틀을 지키고 있는 배우 송승환 씨(67·제5회 특별상)가 그 주인공. 23일 서울 종로구 서울연극센터에서 만난 두 사람은 “동아연극상은 연극 인생의 마중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지만 이들의 눈빛은 수십 번의 겨울을 견뎌낸 거송처럼 카랑카랑하고 푸르렀다. 올해 60주년을 맞은 동아연극상에서는 역대 최고령 수상자가 배출됐다. 지난해 서울 용산구 더줌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연극 ‘혁명의 춤’을 연출한 김 씨다. ‘혁명의 춤’은 2000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초대 원장 퇴임 이후 22년 만에 연극 ‘겹괴기담’으로 복귀했던 그가 지난해 선보인 실험극이다. 그는 “한평생 여러 상을 받았지만 동아연극상은 처음이다. 오래 기다렸다”며 “40여 년 전 초연 땐 대중과 평론가에게 외면받던 작품이 상까지 받으니 시대가 바뀌었음을 절감했다. 동아연극상이 내 소원을 이뤄줬다”며 웃었다. 역대 최연소 수상자가 나온 날은 5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공중파 어린이 연속극에 출연 중이던 초등학교 6학년 송 씨가 극단 광장의 연극 ‘학마을 사람들’의 복남 역으로 특별상을 받았다. “부상으로 받은 시티즌 시계를 차고 의기양양하게 중학교를 간 기억이 나요. 재미로 시작한 연기였지만 상을 받자 ‘연극을 해야겠다’는 꿈이 명료해졌죠. 극장은 제게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놀이터였어요.” 이후 그는 공연제작사 PMC프러덕션을 차려 오늘날 누적 관객 수 1514만 명을 돌파한 스테디셀러 논버벌 공연 ‘난타’를 제작하고,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까지 맡는 등 배우 겸 제작자로 성장 가도를 밟았다. K콘텐츠 열풍의 원조 격인 ‘난타’는 사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 완성됐다. 1997년 초연 이후 2년이 흘러 영국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을 준비하던 송 씨는 ‘어떻게 하면 전 세계 관객의 눈높이에 맞출 수 있을까’ 하고 머리를 싸매다 김 씨에게 SOS를 쳤다. 그는 “실험극 불모지를 개척한 선배의 말이니 믿을 수 있었다. 물을 두드려보자는 권유를 따랐고 에든버러에서 엄청난 환호를 샀다”고 했다. 연기와 물, 빛을 활용한 한국 연극사상 최초의 구조주의 연극 ‘내·물·빛’(1980년)을 연출한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조언이었다. 새로움을 좇은 연극인들은 필연적으로 가난했다. 김 씨는 “1980년대 초반, 실험극 세 편을 연달아 올리고 나니 수중엔 200만 원 적자만 남았다”며 “더는 지원금조차 받기 힘들어져 잠시 실험극을 접고 아동청소년극 제작으로 전향했다. 이후 ‘방황하는 별들’을 비롯해 6년간 만든 ‘별 시리즈’ 5편이 연일 매진돼 돈을 좀 벌었다”고 했다. 송 씨는 1990년대 제작에 뛰어들었지만 수익이 나지 않던 즈음 부모님의 사업 실패가 겹치며 빚더미에 앉았다. 그는 “‘난타’를 성공시킨 원동력은 당시 인생의 목표였던 빚 갚기였다”고 했다. 이들이 거친 풍파에도 무대로 회귀하는 건 연극만이 주는 재미 때문이다. 김 씨는 “우리 삶 속에서 번쩍 빛이 드는 순간을 무대에 올렸을 때 관객은 웃기도,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면서 “그런 순간을 선물할 수 있어 행복하다”며 미소 지었다. 송 씨는 “편집으로 완성되는 드라마, 영화의 연기와 달리 연극은 무대에 올라간 순간부터 2시간 동안 오롯이 내가 책임져야 한다. 가장 어렵지만 동시에 가장 짜릿하다”고 했다. 끝 모르는 담금질은 지금도 두 사람의 생을 두레박처럼 퍼 올리고 있다. 송 씨는 5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되는 연극 ‘웃음의 대학’에서 검열관 역을, 10월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에 오르는 연극 ‘더 드레서’의 선생님 역을 연기한다. 그는 “6년 전 황반변성, 망막색소변성증으로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할 땐 연극 인생이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더 자세히 들리고, 깊이 느껴졌다”며 “걷고 들리고 말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연기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김 씨는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미국 뉴욕을 샅샅이 뒤지며 기록한 공연 후기들을 엮은 책 ‘김우옥, 뉴욕에서 바람나다’를 이달 말 출간한다. “아흔 살 먹고 미래를 얘기한다는 게 쑥스럽긴 하지만, 이왕 동아연극상도 받았으니 ‘별들 시리즈’ 마지막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어요.(웃음)” 한편 제60회 동아연극상 시상식은 29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열린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국내 최초, 최고(最古)의 연극상인 동아연극상은 실험극장, 연우무대 등 걸출한 극단과 고 백성희 여운계, 신구, 박정자, 박근형, 오현경, 최불암, 최민식 등 수많은 배우를 배출한 한국 연극사 그 자체다. 올해로 환갑을 맞은 동아연극상의 자취를 숫자를 통해 알아봤다.#1964년 동아연극상은 한국 연극의 저변 확대와 발전을 목표로 1964년 창설됐다. 본보에 게재된 제1회 동아연극상 참가 요강에 따르면 대상 수상작에는 상금 30만 원이, 연기상 수상자에게는 고급시계 1개씩이 주어졌다. 당시 자장면 한 그릇 가격이 15∼30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대상 수상작엔 자장면 최대 2만 그릇이 주어졌던 셈이다. 이 금액은 당시 한 해 내내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현재 상금은 1000만 원. 제1회 시상식은 서울 중구 드라마센터 극장에서 열렸으며, 극단 실험극장의 연극 ‘리어왕’이 대상작으로 선정됐다. #3번 동아연극상이 열린 60년간 가장 상을 많이 받은 배우는 누구일까. 연기상을 각각 3회씩 거머쥔 후 지금까지도 활발한 연기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신구(88)와 박정자(82), 이혜영(62)이 그 주인공이다. 신구는 연극 ‘나도 인간이 되련다’ 인민위원장 역 및 ‘포기와 베스’ 크라운 역(제3회), 박정자는 연극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온달모 역(제7회), 이혜영은 연극 ‘사의 찬미’ 윤심덕 역(제25회) 등으로 연기상을 수상했다. 신구는 과거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동아연극상을 받자 세상이 내게 배우라는 이름표를 달아준 기분이었고, 더 치열하게 연기를 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제28회·50회 제28회 동아연극상이 열린 1991년은 한국 연극사에서도 이정표가 된 해다. 당시 배우를 제외하면 연극판에서 여성 인력을 찾아보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 연출상 부문에서 여성 수상자가 처음으로 배출된 것. 배우 신구 김재건, 고 서희승 등이 출연한 연극 ‘사로잡힌 영혼’으로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받은 김아라 연출가(68)는 그해 35세의 나이로 국립극단 사상 첫 여성 연출가로 부임했다. 제50회 동아연극상에선 사상 첫 외국인 수상자가 나왔다. 연극 ‘가모메’로 연출상을 받은 일본인 다다 준노스케 씨가 그 주인공. 그는 수상 당시 “한국의 권위 있는 연극상인 동아연극상 수상 소식을 듣고 일본 연극계도 굉장히 놀라고 고마워했다”고 전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공연계가 ‘경험 콘텐츠’를 강화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증샷 명소로 거듭난 백화점 등과 경쟁에 나서고 있다. 세종문화회관은 공연 시작 전과 중간 휴식시간에 전용 라운지에서 차별화된 경험을 누릴 수 있는 ‘스위트석’ 서비스를 올해 도입한다. 이용객은 라운지에서 핑거푸드와 음료를 즐기고, 티켓부스에서 줄을 서지 않고도 티켓을 수령할 수 있다. 소정의 굿즈도 제공받는다. 7개 공연을 대상으로 운영되며 올 4월 개막하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경우 VIP 티켓가 15만 원에 2만 원을 더 내면 이용할 수 있다. 관객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부대 행사도 마련되고 있다. 국립극장은 지난해 12월 서울 중구 해오름극장 앞 문화광장에서 겨울 빛축제 ‘윈터 빌리지’를 운영했다. 8m 높이의 대형 트리와 전구로 꾸민 나무 60여 그루 등이 설치돼 인증샷 명소로 눈길을 끌었다. 작은 오두막 모양 부스에서는 공예 예술가 12인의 전시가 열렸다. 이곳에는 한 달간 2만4000여 명이 다녀갔다. 같은 달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는 연말 대표 공연인 ‘호두까기 인형’이 공연되기 전 오페라극장 로비에서 재즈밴드 연주가 펼쳐졌다. 예술의전당과 국립발레단이 공동 기획한 행사로 크리스마스와 어울리는 음악을 40분간 들려줬다. 뮤지컬계는 희소성을 앞세워 젊은층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다. 공연제작사 EMK는 뮤지컬 ‘레베카’와 ‘몬테크리스토’를 가장 많이 관람한 관객 1명씩을 마지막 공연에 초대하는 이벤트를 다음 달 진행한다. 초대 관객은 무대와 가장 가까운 OP석 1열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은 물론이고 배우들과의 파이팅콜, 단체사진 촬영에도 참여할 수 있다. 오디컴퍼니는 16∼21일 뮤지컬 ‘일 테노레’를 관람한 관객에게 주인공 윤이선 역을 연기한 배우 홍광호, 박은태, 서경수의 사진이 담긴 한정판 포토 티켓을 증정했다. 공연계가 이색적인 경험 콘텐츠에 공을 들이는 건 젊은층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백화점, 호텔 등 소비재를 팔던 곳들이 최근 경험까지 판매하면서 극장의 치열한 경쟁자가 됐다”며 “기존 공연장과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해야 젊은층과의 접점을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윈터 빌리지’를 기획한 최성민 국립극장 공연기획부 PD는 “추운 날씨에도 남녀노소가 참여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마련하되 SNS 사용 빈도가 높은 젊은층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루돌프 조형물을 활용한 포토존을 설치했다”고 말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가상의 중앙아시아 신생 자립국 치르치르스탄. 2차전지의 원재료인 리튬을 팔아 돈방석에 앉은 왕정국가다. “국가가 정하면 국민은 따르는 것”이라며 국민 문화 진흥을 위한 총사업비 3조 원 규모 사업의 전 세계 입찰 경쟁을 추진한다. 한국에선 국립현대극장(NCT)의 김민식(民食) 팀장이 ‘K신파’를 들고 입찰에 뛰어든다. 최종 후보로 한국의 신파극과 K팝, 브라질의 삼바 등이 경쟁을 펼친다. 그중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다름 아닌 대형 K팝 기업. 기업 담당자는 김 팀장에게 3년 치 사업비를 주는 대신 입찰 포기를 권유하며 이렇게 말한다.“우리도 오래가진 않을 거예요. 가사는 영어로, 가수는 외국인으로 바뀌고 있죠. 이번 건은 우리가 맡고, 돈 줄 테니 극장 이름은 ‘SM남산예술극장’ 같은 걸로 바꿔줘요.”》지난해 11∼12월 서울 종로구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초연된 연극 ‘신파의 세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제59회 동아연극상 희곡상 수상자인 정진새(44)가 극작과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극중극 형식으로 국가주의적 문화 정책부터 상업성에 빠져 K자만 붙이기 급급한 문화 산업까지 풍자한다. 극 중 외국인으로 구성된 ‘신파 트리오’가 K영화인 ‘명량’ ‘국제시장’ 등을 비틀어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하는데 ‘명량’의 이순신 장군 역엔 튀르키예 출신 배우 베튤이 캐스팅되는 등 황당한 설정으로 웃음을 유발시킨다. “인생은 가까이 보면 신파, 멀리서 보면 컨템포러리”, “이 나라에선 작품 열 개 만들면 아파트 한 채 빚이 생긴다” 등 대사가 나올 때마다 객석에선 쓴웃음이 터져 나왔다. 연극을 관람한 김은미 씨(40)는 “블랙리스트 사태 등을 겪은 공연계에선 최근 몇 년간 악쓰고 침울한 작품 위주로 공연됐다. 연극을 보고도 행복하기보단 찝찝한 기분을 느낄 때가 많았다”며 “최근 들어 적절한 유머를 가미한 작품이 연달아 무대에 올라 공연 보는 맛이 더욱 생겼다”고 말했다.● 젊은 창작진 손 거친 희극 줄줄이 무대에 최근 블랙코미디 등 유머 코드를 강화한 연극, 뮤지컬이 잇달아 무대에 오르고 있다. 2016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2018년 미투 사태 등 질곡을 정면으로 겪은 공연계가 수년간 엄숙하고 진지한 작품 위주로 공연해 온 것과 대비되는 분위기다. 최근에는 소극장 이외에 굵직한 공연 제작사까지 희극 제작에 발을 들이는 중이다. 뮤지컬 ‘헤드윅’ ‘멤피스’ 등을 만든 제작사 쇼노트와 낭만바리케이트는 올해 9월 뮤지컬 신작 ‘번 더 위치’를 공동으로 선보인다. 중세시대의 마녀와 오늘날 슈퍼스타가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마녀사냥 문제를 비춰 보는 블랙코미디다. 다음 달 1∼3일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연극 ‘명태 말고 영태’는 언어유희와 판소리 재담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재미를 더했다. 1990년생 김민주 연출가가 극작과 연출을 맡았다. 보관 방법과 서식 환경 등에 따라 이름이 가지각색으로 변하는 생선 명태를 통해 베이비붐 세대의 애환을 풀어내고 ‘세대가 만들어낸 시대가 아닌, 시대가 만들어낸 세대’를 꼬집는다. “영태는 노가리 때부터 머리가 좋아 금태로 소문났지만 집안이 궁태해 끌태 되어 끌려가는 진퇴양난의 모양새” 등의 대사는 웃음을 유발한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공연되던 희극이 인지도 높은 극장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한남’들이 등장해 한국의 남성성을 풍자적으로 꼬집는 연극 ‘케이맨즈 랩소디’는 기존 서울 종로구 선돌극장에서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로 자리를 옮겨 4월 6일부터 재연된다.● 미투 등 ‘트라우마’ 옅어지며 희극 기지개 그동안 희극이 잠잠했던 건 블랙리스트, 미투 등 이후 창작자들 사이에서 ‘웃기기 자제’ 경보가 울린 것과 관련된다. 한 극작가는 “10년 전과 비교해 웃음을 겨냥한 작품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체감한다. 미투 이후 웃음이 혐오에 기인했다는 자성이 이뤄졌고 굳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부담감이 커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몸을 사리던 희극이 왜 다시 기지개를 켜는 걸까. 엄현희 연극평론가는 “각 파동 직후엔 관련된 작품을 만드는 것도, 보는 것도 녹록지 않았지만 시간이 흘러 창작진과 관객 모두 사안을 침착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 여유를 바탕으로 풀어낸 방식이 풍자극”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팬데믹 기간엔 직격탄을 맞은 공연계가 비극적 작품을 쏟아내 피로감이 쌓였고, 그 반대급부로 희극이 주목받은 영향도 있다”고 분석했다. 과거에 비해 자유로워진 창작 및 제작 환경도 풍자극이 늘어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한 국공립 공연단체 관계자는 “정치 사회적으로 예민한 이슈를 다루는 공연이 공동기획 작품이거나 제작비 대부분을 공기관에서 지원하는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톤을 조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블랙리스트 사태 여파로 작품 수정 요구는 예술가에 대한 갑질이자 국가의 검열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특정 소재 대상화 아닌 회차·의외성 살려 웃기기 풍파를 지난 공연계에 남은 숙제는 문화계의 화두로 떠오른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논쟁’이다. 편집 기술이 있는 영상매체와 달리 불특정 관객에게 낙장불입의 농담을 던지는 공연계는 ‘포용’을 기치로 대처에 나섰다. 서울시극단 단장인 고선웅 연출가는 “20년 전 내가 쓴 극본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예전엔 관행처럼 사용하던 ‘예쁘장하다’ 등 표현을 이젠 쓰지 않는다”며 “PC가 화두가 되면서 배우, 스태프, 기획팀까지 머리를 맞대 최대한 다양한 인식을 끌어안으려 노력한다. 연극은 관객과 나누는 동시에 수많은 창작진이 책임을 나누는 공공재적 예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손정우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은 “과거 원색적인 소재와 대사로 다뤄지곤 했던 젠더, 장애, 종교, 인종 등은 더 이상 웃음거리가 될 수 없다. 미투 등을 거치며 연극계 역시 치열한 학습을 했다”고 말했다. 직장인 윤나라 씨(27)는 “연극에서 비윤리적인 농담이 나올 때마다 전혀 웃기지 않고 불편했다. 그런 대목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 4∼5년 전만 해도 코믹함이 담긴 연극을 보는 게 꺼려졌는데 이젠 그 지뢰가 줄고 선택지는 넓어진 느낌”이라고 했다. 이에 특정 소재를 대상화하기보단 공연 고유의 다양한 속성을 적극 활용해 희극의 가능성을 넓히고 있다. 3월 21∼23일 두산아트센터에서 초연되는 연극 ‘문병재 유머코드에 관한 사적인 보고서’는 공연만이 가진 현장성과 서사의 의외성을 웃음코드로 활용한다. 한때 자타가 공인하던 ‘웃음 사냥꾼’ 문병재가 세월이 흐르면서 ‘웃음 장례식’까지 치르는 여정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미투 사태가 벌어진 직후마다 주인공의 유머가 위축됐다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부활하며 웃음을 자극한다. 하우스 매니저 등을 무대 위로 갑작스럽게 소환해 황당한 질문을 던지는 것도 웃음 포인트다. 공연을 직접 기획한 문병재 연출가는 “유머의 기준과 취향이 천차만별이기에 특정 사물이나 상황을 대상화함으로써 관객을 웃기려 하진 않는다. 대본을 완벽히 외우지 않고 무대에 올라 대사를 뻔뻔히 까먹거나 관객에게 돌발적으로 말을 거는 등 예상치 못한 흐름을 활용해 웃음을 유발한다”고 했다. 공연만의 ‘회차’ 속성을 활용해 웃음의 윤리성을 다듬는 노력도 있다. 정진새 연출가는 “한번 제작이 끝나면 엎고 다시 만들기가 어려운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연극은 관객 피드백을 통해 유머를 수정하거나 중단할 수 있다는 장점이 크다”며 “유머 당사자성이 있는 관객이 오는 날엔 버선발로 뛰어나가 극 중 유머에 대한 의견을 구한다. ‘신파의 세기’의 경우 중앙아시아 국적의 관객 등에게 유머가 불쾌하진 않았는지 점검했다”고 말했다. 이지윤 문화부 기자 leemail@donga.com}
겨울방학을 맞아 어린이들을 위한 공연이 잇따라 무대에 오른다. 3월 15일 문을 닫는 학전의 대표 어린이 뮤지컬 ‘고추장 떡볶이’(사진)의 18번째 시즌 공연이 다음 달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열린다. ‘고추장 떡볶이’는 독일 라이너 하흐펠트의 ‘케첩 스파게티’를 학전의 김민기 대표가 한국 상황에 맞게 번안하고 연출한 작품이다. 2008년 대한민국연극대상 ‘아동청소년연극상’을 수상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동화책을 원작으로 한 어린이 뮤지컬도 나란히 오른다. 백희나 작가의 동명 인기 동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장수탕 선녀님’은 서울 성동구 서울숲 씨어터에서 관객과 만난다. 동네 낡은 목욕탕에 나타난 선녀 할머니와 여섯 살 덕지가 모험을 떠나는 내용이다. 인기 동화작가 ‘안녕달’의 동명 작품을 원작으로 한 ‘겨울이불’은 다음 달 18일까지 서울 강북구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퍼포먼스홀에서 공연된다. 할머니 집 이불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동화 속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다채롭게 그려냈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선 28일부터 3월 3일까지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아빠’를 선보인다. 시한부 판정을 받고 뇌로 암이 전이돼 자신을 19세로 착각하는 아빠 병삼과 힘든 현실 속에서도 동화작가를 꿈꾸는 딸 주영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삶의 어떤 파동은 운명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가 없다. 일제강점기, 모든 자유를 뺏기고도 조선 최초의 오페라 테너가 된 뮤지컬 ‘일 테노레’의 주인공 윤이선의 삶 자체도 그러하다. 지난해 12월 19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초연된 창작뮤지컬 ‘일 테노레’에서 윤이선 역을 맡은 배우 박은태(43) 역시 “내게 뮤지컬은 선택이 아닌 운명이었다”고 말했다. 17일 저녁 공연을 막 끝낸 그를 극장 인근 스튜디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공연은 1930년대 경성에서 오페라에 빠진 의대생 윤이선과 독립운동가 서진연, 이수한이 저마다의 꿈을 좇는 이야기를 다룬다. 한국 오페라의 역사적 인물로 꼽히는 테너 이인선(1906∼1960)의 삶을 재창작했다.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등을 만든 공연제작사 오디컴퍼니의 신작으로 윤이선 역은 박은태와 배우 홍광호, 서경수가 번갈아 가며 연기한다. 박은태와 윤이선의 간절했던 20대 시절은 묘한 평행이론을 달린다. 공부만 아는 모범생이 돌연 음악에 영혼을 뺏기며 인생을 베팅하는 점에서다. 한양대 경영학부에 다니던 박은태는 학업과 공연을 병행하느라 입학 9년 만에야 졸업장을 받았다. 그는 “노래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허당’인 것마저 닮아 감정이입이 잘된다”고 했다. 이어 “이선과 달리 나의 부모님은 다행히도 꿈을 지지해줬는데 세 아이의 아버지가 돼보니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깨달았다. 만약 아이가 노래하겠다고 하면 뜯어말릴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오페라를 향했던 윤이선의 마음은 시간이 흘러 사랑에 대한 간절함으로도 확장된다. 박은태는 인생에서 가장 간절했던 순간으로 걸그룹 ‘파파야’ 멤버 출신인 아내를 짝사랑했을 때와 2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폐암 판정을 받았을 때를 꼽았다. 그는 “그때의 간절함을 마음에 품고 첫 대사를 읊으면 공연이 끝날 때까지 작두 타듯 연기하게 된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몰입하는 작품은 처음”이라고 고백했다. 공연은 ‘꿈의 무게’ 등 19세기 오페라적 선율이 가미된 넘버들로 이뤄졌다. 이날 공연에서 박은태의 투명한 미성은 18인조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져 서정성을 극대화했다. 그렇지만 미성을 가진 그에게 테너라는 배역은 자기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 일이었다. “화통 삶아먹은 큰 성량의 목소리를 타고나지 못해 출연을 주저했어요. 그러다 이인선 씨가 ‘동양의 스키파’라고 불렸던 사실을 알게 되며 자신감을 얻었죠. 티토 스키파는 미성으로 유명했던 20세기 테너예요. 1막 마지막 아리아를 부를 때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지만 ‘내가 스키파다’라고 상상하며 마음을 겨우 진정시킵니다.” 이번 공연에선 그가 15년간 갈고닦은 성악적 기량을 들려준다. 베이스, 바리톤에 한정된 음역대가 콤플렉스였던 그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성악 훈련을 받으며 테너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그는 “팬데믹 이후 ‘내가 이토록 소중한 관객을 만날 자격이 있는가’를 거듭 고민했고 음악, 연기 공부에 매진했다”며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2년 전부턴 일상의 낙이던 퇴근길 맥주 한잔도 끊었다. 자연스럽게 친구는 줄었다”고 했다. 자정까지 이어진 인터뷰에도 그에게선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공부밖에 모르던 경영학도에서 대극장 주연 배우까지 오게 된 순수한 열정만이 느껴졌다. 어느덧 19년 차 배우가 된 그에게는 얼마만 한 꿈의 무게가 남았을까. “여전히 무대마다 죽을 만큼 떨리고, 컨디션 관리에 매몰돼 아빠로서 최선을 다하지 못할 땐 자괴감이 들어요. 그렇지만 뮤지컬은 수천억과도 맞바꿀 수 없어요. 80대가 돼서도 노래하는 것, 그게 제게 남은 꿈입니다.” 다음 달 25일까지, 8만∼16만 원.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