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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복잡해 보이는 대통령 선거의 방정식도 들여다보면 의외로 단순한 데가 있다. 내 나름대로 정리해본 ‘대선 공식’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번 대선의 강자는 거의 이전 대선 2위다’. 민주화 이후를 들여다보면 1992년 대선의 김영삼, 97년의 김대중, 2002년의 이회창은 모두 이전 대선에서 2위였다. 2012년의 박근혜는 이전 대선의 2위나 마찬가지다. 이명박 대통령이 승리한 2007년 대선 레이스는 박근혜 후보가 2위를 한 한나라당 경선에서 사실상 끝났다. 유일한 예외가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대통령 정도다. 당시에도 ‘노무현이 이긴 선거가 아니라 이회창이 진 선거’라는 말이 돌았다.이전 대선 2위가 강자 대선에 나가 준우승을 한다는 건 그만큼 엄청난 정치적 자산이다. 문재인은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51.6%)과 호각의 득표율(48.0%)을 얻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번 대선의 강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드물다. 답은 간단하다. 자기 실력으로 치른 선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문재인의 친구’라고 소개하기도 했던 생전의 노무현 대통령은 그를 향해 “저 사람은 정치할 사람이 아예 아니야. 전혀 (정치와) 안 맞아”라고 평가하곤 했다. 그런 문재인을 ‘폐족(廢族·벼슬을 할 수 없게 된 일족)’이던 친노가 노무현의 비운(悲運)으로 기사회생하자 ‘고용 사장’으로 내세워 치른 게 지난 대선이었다. 하지만 요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달라졌다고 한다. 벌써부터 ‘이번 총선의 진정한 승자는 문재인’이란 얘기가 나온다. 김종인이란 칼을 빌려 이해찬류의 ‘올드 친노’를 쳐내고 친문(친문재인) 세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친노 브레인인 ‘3철(이호철, 전해철, 양정철)에 휘둘린다’는 얘기도 쏙 들어갔다. 무엇보다 좋게 말하면 권력의지, 나쁘게 말하면 대권욕이 강하게 느껴진다. 김종인 더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받은 1460만 표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일갈했지만 아무나 그런 성취를 경험할 수는 없다. 대선 당시 운집한 군중의 엄청난 연호가 ‘정치할 수 없는 사람’ 문재인을 변하게 한 기폭제라고 나는 본다. 문 전 대표는 지난달 30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때문에 야당 단일화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며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묻고 싶다”고 압박했다. 지난 대선 직전 자신과 ‘이념적 차이를 느꼈다’는 안철수의 자택을 찾아가 문전박대를 당했을 때와는 180도 처지가 바뀌었다. 본보 창간 여론조사에 따르면 문재인의 대선주자 지지율(16.8%)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18.9%)과 함께 2강 구도를 구축했다.‘고용 사장’ 이미지 벗어야 총선이 끝나면 문재인은 당에 돌아올 것이고 대선 체제를 착착 구축해 나갈 것이다. 그럼에도 ‘친노의 고용 사장’이라는 태생적 이미지를 걷어내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 지난 대선 때도 ‘문재인은 괜찮은데 친노가 무섭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려면 무엇보다 노무현을 넘어서야 한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불편한 얘기라면 입도 뻥긋 못 하게 하는, 친노의 종교적이라고 느껴지리만치 무서운 ‘노무현 도그마’를 깨야 한다. 대선 가도에서 적당한 시점이 되면 문재인이 먼저 노 전 대통령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많은 국민도 그를 고용 사장이 아닌 ‘오너’로 보고 안정감을 느낄 것이다.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김종인은 헌정사상 전무후무한 5번째 비례대표 의원이 될까? 정치는 생물이라 확언할 순 없지만, 난 될 것으로 본다.” 4일자 본 칼럼은 이렇게 시작한다. 김종인은 1월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에 취임할 때부터 “내 (한국) 나이가 77세”라며 비례대표 의원 자리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자신을 2번으로 ‘셀프 공천’하기 5일 전인 16일에도 “나는 비례대표를 4번 해봤다”며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킹과 킹메이커 차원 달라 내가 김종인이 비례대표 의원을 할 것이라고 쓴 이유는 그와 인터뷰하면서 설혹 더민주당의 친노·운동권 체질을 못 바꿔도, 총선 후 ‘킹 메이커’가 되지 못해도 금배지를 달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보다 건강하며 ‘감(感)’과 기억력이 좋다. ‘김종인 등장의 최대 수혜자가 반기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72)이 대선에 출마하면 불거질 수 있는 고령 이슈를 네 살 많은 김 대표가 불식시켰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김종인에게선 아직도 정치에 대한 미련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는 ‘언제라도 내가 떠나면 그만’이란 말을 입에 달곤 했지만, 그런 인생철학을 가진 사람이 박정희 정권부터 좌우의 강을 세 번이나 넘나들며 5번이나 비례대표를 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가 20대 총선판의 유일한 스타로 뜨면서 ‘오버’한 것이다. 언론 인터뷰나 사석에서 ‘킹메이커가 아니라 킹’이라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야 킹메이커라도 해볼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국민이 킹과 킹메이커를 보는 눈은 차원이 다르다. 적어도 킹이 되려면 살아온 이력이 스토리가 돼야 한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참여와 뇌물죄 유죄 판결 이력으론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한편 김무성을 보면 이런 우스개가 떠오른다. ‘A: 내 몸에 털끝이라도 손대기만 해봐!→B: (한 방 때린다)→A: 한 번만 더 손대기만 해봐!→B: (마구 때린다)→A: 다시 또 손대기만 해봐!→B: ㅎㅎ….’ ‘상향식 공천에 정치생명을 걸겠다’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상향식 공천 원칙에 위배되는 △단수·우선 추천 △컷오프(공천 배제) △여론조사 100% 적용 등을 발표할 때마다 발끈했지만 다 양보했다. 그 대가로 김무성계와 부산 의원들을 살렸고 비례대표 몇 자리도 챙겼다. 양보는 자신을 버릴 때 울림이 있다. 그가 19대 공천에 탈락하고도 당에 남아 백의종군하겠다고 발표했을 때는 그런 울림이 있었다. 제 몫을 챙기려는 양보는 정치적으로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다.‘비박 학살’ 대표 걸었어야 김무성은 적어도 ‘3·15 비박(비박근혜) 학살’ 때는 대표직을 걸었어야 했다. 당 대표란 사람이 산하기구 장(長)인 이 위원장으로부터 “바보 같은 소리”라는 극언을 듣고도 자리를 지켰다. 김무성의 정치적 스승 김영삼(YS)은 1990년 ‘3당 합당’의 이면합의인 내각제 합의문서가 공개되자 당무를 거부하고 마산에 내려가 칩거했다. 결국 자신에게 불리한 정치상황을 반전시켰다. 김 대표가 총선 후 킹메이커가 아니라 킹을 꿈꾼다면 돌아볼 대목이다.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구절이 있다. 이를 패러디해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이 유행했다. 한 번 더 비틀어 보면 ‘살아남았다고 강한 자는 아니다’.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서울 청계광장에 인접한 동아일보사 위치 때문에 지겹도록 듣는 노래다. 제목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반정부 집회나 시위의 단골 레퍼토리다. 2008년 촛불시위 때 초저녁에 이 노래가 나오면 한밤에 광화문 일대는 무법천지가 되기 일쑤였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가사에 고무된 일부 시위대는 폭도로 돌변해 갖은 불법행위와 폭력을 자행했다.헌법 1조가 폭력 전주곡(?) 대한민국 국기(國基)와 국체(國體)의 기본원리를 담은 헌법 1조가 폭력의 전주곡으로 전락하다니….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면 안 된다는 건 세 살배기도 안다. 1조에서 규정하듯, 대한민국은 주권을 가진 국민이 선거를 통해 뽑은 권력의 지배를 받는 공화국(共和國)이기 때문이다. “나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 운동가요에서나 듣던 헌법 1조를 집권당 원내대표 사퇴의 변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유승민 의원은 공무원연금법 개정안과 연계해 야당이 요구한 국회법 개정안을 처리해 박근혜 대통령의 ‘진노’를 사는 바람에 지난해 7월 원내대표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사퇴와 헌법 1조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당시 유 원내대표는 ‘국회법 개정안에 청와대도 동의했다’는 식으로 의원총회에서 설명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원내대표로서 야당과 합의안을 내는 데 집착하다가 삼권분립 침해 우려가 있는 ‘독사과’를 덥석 베어 문 것이다. 그래놓고 밀려나면서 ‘박근혜=독재자’를 연상케 하는 헌법 1조를 읊조린 것은 치기(稚氣)요, ‘자기 정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원내대표가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증세 없는 복지’를 주장해온 박 대통령을 정면 비판한 것도 코미디다.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먼저 당-청 간 이견을 해소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다. 당론을 밝히는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공개한 것은 스스로 먹는 우물에 침을 뱉은 격이다. 이런 행위는 명백한 당헌 위반이다. 새누리당 당헌·당규는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적극 뒷받침’하며 △당 이념에 위반된 행위를 하거나 △당헌·당규를 위반한 자를 징계하도록 돼 있다. 문제는 당내에서 징계할 일을 대통령이 ‘너무 큰 칼’을 빼들면서 일이 커진 것이다. 박 대통령은 6월 국무회의에서 ‘여당의 원내사령탑이…’라며 유 의원을 콕 집어 지목한 뒤 ‘배신의 정치’로 규정했다. 유 의원은 ‘대통령과 맞선 개념 원내대표’로 뜨면서 한동안 대선주자 여론조사 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나도 좀 키워주지” 대선주자 리스트에서 사라졌던 그의 이름을 이제 다시 볼 것 같다. 어떻게든 유승민은 잘라내려는 ‘박심(朴心)’을 업은 친박(친박근혜)계는 칼을 휘두르려 하지만, 총선 역풍을 우려하는 반대에 부딪혀 그가 현역 의원으로는 유일하게 공천이 보류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국민들이 새누리당 공천의 면면보다 ‘박근혜와 유승민’의 드라마가 어떤 결말을 맺을지에 더 촉각을 세우면서 그는 이제 ‘태양의 후예’ 송중기 못지않은 스타로 떴다. 오죽하면 정두언 의원이 “나도 좀 그렇게 키워주지”라고 꼬집었을까. 미당(未堂) 서정주의 시 ‘자화상’을 패러디하면 ‘유승민을 키운 건 팔할(80%)이 박근혜다.’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친반평화통일당, 친반국민대통합, 친반통일당, 친반연대…. 여의도 정치가 윤상현의 “김무성 죽여” 막말 파문과 김종인의 ‘물갈이’로 시끄러운 요즘에도 당은 조용히 만들어졌거나 만들어지고 있다. 당명은 모두 ‘친반(親潘)’으로 시작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겠다는 정당들이다. 반 총장과 무슨 교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반 총장 측은 이들과 연결짓는 시각엔 펄쩍 뛴다.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반기문 추대 움직임은 ‘반기문 대망론’에 미리 숟가락을 얹겠다는 행태다.대선 출마로 기운 듯 그렇다면 여기서 가장 궁금한 질문. 반기문은 대선에 나올까? 늘 그렇듯이 ‘정치는 생물’이지만, 나는 나오는 쪽에 건다. 흔히 반 총장은 권력의지가 부족하다고 한다. 그러나 권력의지가 부족한 사람이 유엔 총장 자리에 오른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가 외교통상부 장관까지는 관료였을지 몰라도, 선거운동을 하고 총장을 지낸 지난 10년은 정치인이었다. 반 총장은 1992년 부친상을 당했다. 당시 그는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판문점에 나가 회담할 때가 많았다. 부친상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판문점 회담 참석에 이어 서울 평가회의까지 마친 뒤 밤에 고향(충북 음성) 빈소에 내려갔다가 다음 날 또 판문점에 나타났다고 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외교부 선배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당시의 또 다른 일화. 어느 날 반기문 부위원장은 공로명 위원장에게 ‘민자당 대표에게 회담 상황을 브리핑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건의했다. 민자당 대표는 그해 대선에서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 두 사람은 김 대표를 찾아갔고, YS의 눈에 든 반기문은 문민정부에서 외무부 차관보와 대통령의전·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승승장구한다. 반 총장의 부지런함이야 정평이 나 있지만, 그 못지않은 정무감각이 오늘의 반 총장을 있게 했다. 뉴욕에서 전해지는 기류 변화도 감지된다. 전기(前期) 때만 해도 반 총장은 대망론에 대해 철저히 선을 그었다. 측근들은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연임 임기를 마치는 2016년 말부터 대선이 끝날 때까지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세계에서 가장 바쁜 직업’이라지만, 드물게 시간이 났을 때 가까운 사람들과 한잔하며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찮다. 뉴욕에서 그와 접촉했던 한 인사는 “반 총장은 지금도 누구보다 건강하고 부지런하다. 무엇보다 공적인 일에 헌신하려는 열망이 강하다”고 말했다. 친박(친박근혜)계에선 ‘반기문 대통령, 친박 실세총리’ 카드를 말하기도 한다. 김무성 대표를 대통령감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깔려 있지만,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반기문은 남에게 일을 맡기기보다 자신이 다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선 ‘노무현 대통령이 총장을 시켜줬다’며 연고권을 주장한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부터 관료를 지낸 그가 여당보다는 후보군이 가시화한 야당의 대선후보가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5월 방한 행보 주목 반 총장을 아끼는 외교부 선후배들은 “한국 대선은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인데, 실패하면 위인전에도 등장하는 영예에 먹칠을 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맞는 얘기다. 한국 정치에서, 특히 대선에서 그를 꽃가마 태워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연 그가 전 인생을 건 싸움에 나설지, 5월 방한 행보를 들여다보면 좀 더 분명해질 것 같다.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김종인은 헌정사상 전무후무한 5번째 비례대표 의원이 될까? 정치는 생물이라 확언할 순 없지만, 난 될 것으로 본다. 일단 더불어민주당 공천의 전권을 장악한 본인이 뜻이 있다. 더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할 때 “내 나이가 77세”라며 손사래를 쳤던 그의 말은 “단적으로 하겠다, 안 하겠다는 말을 드릴 수 없다”→“왜 자꾸 미리 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로 바뀌었다.5번째 비례대표 의원 될 듯 그의 눈은 이미 대선에 가 있다. 총선을 잘 치러 당내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킹 메이커’로 정권을 교체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다. 정권을 잡는다면 실세 총리로 경제민주화를 구현하려는 꿈을 꿀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금배지는 중요하다. 대선 주자로 뛸 수 없는 ‘불임 좌장’이 배지도 없이 당내에서 목소리를 내기가 얼마나 힘든 줄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모를 리 없다. 일단 지역에서 배지를 단 의원들은 선민(選民) 의식에 빠진다. 비례대표는 한 수 아래로 본다. 배지마저 없다면 투명인간 취급 당하기 일쑤다. ‘킹 메이커’까진 못 되더라도 김종인은 아직 정치에 대한 미련이 있다. 인터뷰를 위해 그와 만났을 때 “그 연세에 또 정치를 하려는 이유가 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조부인 가인(街人)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고 회고했다. 5·16군사정변 이후 정치활동이 허용된 1963년 가인이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할 때 “노령에 무슨 당을 만들려고 하십니까”라고 물었다고 했다. 가인의 당시 한국 나이 77세. 김종인은 같은 나이에 창당을 했던 조부에게 자신을 투사(投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 정권에서 4번 비례대표를 지내고 박근혜 대선후보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거쳐 더민주당 대표까지 된 그 이력에서 두 가지는 분명히 확인된다. 첫째는 능력. 지난 대선 때 박 후보가 ‘경제민주화’ 기치를 들도록 한 것은 혜안이었다. ‘금수저’와 ‘헬조선’으로 대표되는 양극화 심화를 내다보고 박 후보의 보수 기득권 이미지를 중화시켰다. 이번 총선의 화두를 경제로 삼고, 중도층을 불안케 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중단시킨 뒤 야권통합이란 국면전환 카드를 던져 국민의당을 자중지란에 빠뜨린 것도 고수의 솜씨다. 둘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갈 곳을 안 가린다는 점이다. 이미 좌우의 강을 3번이나 넘나든 그에게 이념은 의미 없다. 좌우명도 특이하게 ‘자연의 주어진 여건대로 산다’이다. 이런 좌우명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참여와도 관계있을 것 같지만, 그의 말은 명료하다. “내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데는 확신이 있으면 참여한다. 확신이 없으면 안 하고.” 그가 지조의 상징인 가인의 손자라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가인은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의 무료 변론을 도맡았으며 민족의 미래를 개탄하며 소석(小石)이던 아호를 ‘거리의 사람’이란 뜻의 가인으로 바꿨다. 총선 후 토사구팽? ‘자연의 주어진 여건대로 사는’ 김종인이 제1야당을 좌지우지하면서 20대 총선의 스타로 떠오른 것은 눈여겨볼 정치현상이다. 국민들은 그가 비례대표 배지를 달든, 말든 더민주당의 고질병인 이념과잉 운동권 체질을 혁파해주길 고대한다. 실용주의자 김종인이 총선 후에도 살아남아 정치 발전에 기여할지, 다시 돌아올 문재인 전 대표의 친노 세력에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할지 하늘의 조부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로마 제국이 ‘팍스 로마나’를 구가하던 시절에도 오리엔트 강국 파르티아는 골칫거리였다. 감히 로마에 도전해서가 아니었다. 파르티아와 인접한 아르메니아를 탐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는 ‘로마 제국의 우산’ 아래 놓인 나라. 아르메니아가 침탈당할 때마다 로마 군단은 원정을 떠났다. 동쪽 변방의 작은 나라 아르메니아가 소중해서가 아니다. 아르메니아가 무너지면 인접국에도 파장을 미쳐 오리엔트의 질서가 무너지고, 결국 제국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봤기 때문이다.제국의 안전이 최우선 수천 년이 지나도 제국의 생리는 바뀌지 않는다. 미국이 한국을 ‘제국의 우산’ 아래 넣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많은 미국인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South Korea’가 소중해서가 아니다. 한국이 흔들리면 동북아 질서가 흔들려 마침내 미국의 안전을 위협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미국의 보수논객 로버트 캐플런은 전 세계 주둔 미군을 탐사해 지은 역저 ‘제국의 최전선(Imperial Grunts)’에서 “제국주의는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서보다는 자국이 완전무결하게 안전해야 한다는 필요에 따라 추진된다”고 설파했다. 가공할 북핵과 미사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않던 중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한국 배치는 사활을 걸고 막으려는 것도 같은 이유다. 남북한은 자국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없지만, 미국의 사드가 코앞까지 다가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강력한 대북 제재를 수용하는 대신, 미국이 사드 배치에 유연함을 보인 23일 미중 외교장관 회담은 한국의 처지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우리의 안전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아르메니아가 로마파와 파르티아파로 갈려 정쟁을 일삼았던 사실(史實)마저 친미파와 친중파로 나뉘어 치고받는 우리의 현실과 겹쳐 씁쓸하다. 대한민국 제1야당 대표라는 사람이 일개 국장급 주한 중국대사로부터 “한중 관계가 사드 배치 문제 때문에 순식간에 파괴될 수 있다”는 협박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리는 것이 우리의 격(格)이다. 중국 관영 환추시보는 16일 사설에서 ‘한국에 사드가 배치되면 국가적 독립성을 잃게 돼 대국의 게임에서 바둑돌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 관변학자들이 한국을 ‘미국의 바둑돌’이라고 폄훼해온 만큼 관영매체의 ‘바둑돌’ 운운에는 한국을 바라보는 중국 당국의 시각이 담겨 있다. 자기비하에 빠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도 그들의 시각에서 냉정하게 우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미-중-일-러라는 강대국 사이에 끼여 영속해 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지정학적인 운명이고, 이런 운명이 단시일에 한국이 세계 최빈국에서 10위권 국가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된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국제정치적 좌표를 직시하고 힘을 모아야 할 위중한 시기다.망국일에도 훈장 수여 한일 강제병합 조약이 체결된 1910년 8월 마지막 황제 순종은 나라를 팔아먹은 고관과 그 일족에게 집중적으로 훈장 수여를 했다. 을사오적인 이완용과 박제순을 비롯한 고관들과 이완용의 처, 황족과 상궁 등이 줄줄이 훈장을 받았다. 병합이 발표돼 대한제국 최후의 날이 된 8월 29일까지도 훈장 수여는 멈추지 않았다(‘제국의 황혼-대한제국 최후의 1년’). 안보 위기를 도외시한 채 총선을 앞두고 정쟁에만 매몰돼 있는 정치권이 훗날 어떤 평가를 받을지 두고 볼 일이다.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리더는 누구나 위기를 맞는다. 위기의 리더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 조직 내부의 분출하는 요구를 들어주면 문제가 한꺼번에 풀릴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자칫 그 길로 갔다간 두고두고 발목을 잡힐뿐더러 조직까지 나락으로 떨어뜨린다.위기에 창궐하는 포퓰리즘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봤다. 오래전부터 즐겨 부르던 ‘아침이슬’ 노랫소리도 들렸다. 캄캄한 산중턱에 홀로 앉아…” 지금 봐도 손이 오그라드는 감성 연애편지 같은 내용은 집권 초 촛불시위에 몰린 이명박 대통령이 특별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광우병 쇠고기라는, 돌아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선동에서 촉발된 시위에 영합한 결과는 어땠나. 531만 표라는 사상 최대 표차 대선 승리는 한방에 날아갔고, 집권 내내 좌파의 선동에 끌려다녀야 했다. 임기 말 레임덕에 내곡동 사저 문제로 코너에 몰린 MB는 2012년 8월 전격 독도 방문과 ‘일왕 사죄’ 카드를 빼들었다. ‘일왕도 진심으로 사과할 게 아니면 한국을 방문할 필요 없다’는 직정(直情) 발언은 국내에선 잠시 박수를 받았을지 몰라도 이후 한일관계를 수렁으로 빠뜨렸다. 상대가 있는 외교에서의 포퓰리즘은 그만큼 파문이 크고 오래 간다. 진보좌파 정권의 외교 포퓰리즘은 한술 더 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반미면 어때’라며 미국 콤플렉스를 자극했지만, 그 대가는 참으로 컸다. 임기 내내 북한을 옹호하며 대북 퍼주기를 해줬지만, 오늘날 김정은 정권의 가공할 핵·미사일 능력의 발판이 된 1차 핵실험은 그의 임기 중(2006년 10월)에 터졌다. 김영삼∼박근혜 5개 정부 동안 대북지원 총액인 3조2826억 원 가운데 57%인 1조8833억 원이 노무현 정부 때 북으로 넘어갔다. 동북아에 한미일-북중러의 신냉전 구도가 펼쳐지고 있다. 미증유(未曾有) 안보위기에 아니나 다를까, 포퓰리즘이 피어오르고 있다. 제1야당의 대표를 지낸 사람도 개성공단 가동 중단 조치에 ‘진짜 전쟁이라도 하자는 거냐’며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를 팔아 ‘공포 마케팅’을 하고 있다. 우파 진영에선 전례 없던 핵무장 주장까지 번지고 있다. 집권당의 원유철 원내대표까지 “비가 올 때마다 옆집에서 우산을 빌려 쓸 수는 없다”며 핵무장을 말하는 지경이다. 핵무장은 우리의 안보 보루인 한미동맹의 폐기 및 미국의 핵우산 철회, 주변국의 제재는 물론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에 맞닥뜨릴 비현실적인 카드다. 당장은 속 시원할지 몰라도 한국을 절벽으로 내몰 위험천만한 포퓰리즘이다. 남쪽에도 핵이 필요하다면 1991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 직전에 전량 철수한 미국의 전술핵을 재배치하는 방향으로 미국을 설득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중장기적으로는 일본처럼 미국의 신뢰를 쌓아 핵 재처리를 용인 받고 핵능력을 축적해 나가야 한다.핵무장 카드는 위험천만 위기에 분출하는 포퓰리즘의 속삭임에 지도자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조직과 국가의 명운이 갈린다. 십자군 전쟁 때 은자(隱者) 피에르라는 프랑스 수도사가 있었다. ‘이교도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되찾자’는 그의 열광적인 선동에 이끌려 동방으로 떠난 ‘민중 십자군’이 10만 명가량이나 됐다고 한다. 종교적 열정만 있고 리더십은 부족했던 지도자에 조직이나 규율도 없었던 민중 십자군. 결국은 굶거나 병들어 죽고, 더러는 튀르크와의 전투에서 전사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역시 고수(高手)다. 정부가 개성공단 가동 중단 카드를 내민 10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든 생각이다. 공단 가동 중단이라는 초강수는 ‘박근혜 정부의 유일한 남자’로 불리는 그밖에 던질 수 없다. 4차 북핵 실험 한 달 만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로켓 발사 성공이라는 핵폭탄급 연타를 맞으면서 국민들이 나눈 정서는 여느 때 같은 무관심이 아니었다. 무력감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무관심보다 위험한 무력감 한국과 국제사회가 ‘강력한 대북 제재’를 외칠 때마다 북한은 더 가공할 핵·미사일 능력으로 우리를 무력하게 했다. 게다가 4차는 ‘유사 수폭’ 실험이었고, ICBM에 얹을 수 있는 탄두 중량은 2배(200kg가량)로 늘었다. 얼마 안 돼 김정은이 수폭을 얹은 ICBM을 실전 배치할 수도 있는데 아무것도 못하다니, 결국 수폭을 가진 북을 이고 살아야 하나…. 무관심보다 훨씬 위험한 무력감이었다. 한미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협의에 들어간다고 했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강한 태클로 ‘제대로 되겠어’ 하는 의구심마저 들던 터였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남북관계 최후의 카드’인 공단 가동 중단을 불사하면서 중-러는 물론 국제사회에 모든 걸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무엇보다 내부적으로 ‘우리도 주도적으로 뭔가 할 수 있다’는 의식을 불어넣어 무력감을 덜어낸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 대통령은 자타가 공인하는 정치게임의 고수다. 아홉 살에 청와대에 들어가 스물둘에 퍼스트레이디 역할까지 맡아 ‘조기교육’을 받은 과목이 정치요, 권력이다. 이후 집권할 때까지 부모와 자신의 죽음까지 가까이 하며 수많은 실전을 치렀다. 한 측근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처럼 두려운 상대는 없다”고 평했다. “2006년 지방선거 당시 커터 칼로 피습됐을 때도 침착하게 자신의 손으로 철저히 지혈했다. 병원에 도착해서 의사가 ‘이렇게 피를 조금 흘린 게 놀랍다’고 했을 정도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이고, 나 죽네’ 하고 난리를 치다가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 정치게임의 고수인 그가 통치(統治)에 그렇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이걸 문제 삼을 때는 아니다. 위기에 적전분열(敵前分裂)하는 국가나 체제는 예외 없이 추락했다. 박 대통령은 최후의 카드를 던지며 루비콘 강을 건넜고, 어떻게든 북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도록 실효성 있는 제재를 이끌어내는 게 국가적 당면과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 1월에 루비콘 강을 건넜다. 로마 원로원이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자 1개 군단을 이끌고 도강했다. 그가 강을 건너며 남긴 유명한 말.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나가자 우리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무장한 채 군대를 이끌고 본국 로마와 속주의 경계인 이 강을 건너면 명백한 반란이었지만, 이탈자는 단 1명뿐이었다.함께 건너도록 설득해야 앞으로 남북관계는 경색할 것이고, 북한의 추가 도발 여부에 따라 전운이 감돌 수도 있다. 불안해진 국민 사이에서 ‘북한이 수폭을 가지면 어떠냐, 전쟁보단 낫지 않으냐’는 목소리가 커질 수도 있다. 그럴수록 박 대통령은 직접 선두에 서서 설득하고 호소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국민이 대열을 흩뜨리지 않고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널 수 있느냐에 우리의 명운이 달려 있다.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 공동대표는 과거 ‘더치페이’를 했다. 정보기술(IT) 업계 관계자 중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얘기다. 안철수연구소 사장 시절 직원과 식사를 해도 더치페이를 했다는 게 연구소에서 근무했던 이의 회고다. 당시 수천억 재산가였던 안 대표가 몇 푼 아끼려고 더치페이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정신세계가 독특했다고 볼 수 있다.IT업계 평가 안 좋아 놀랍게도 IT 업계 출신이나 종사자 가운데 안 대표를 좋게 얘기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안 대표라면 IT 신화의 주인공 아닌가. 2000년에는 연구소 전 직원에게 자신의 주식을 나눠 줘 ‘감동 경영’ ‘개념 오너’의 상징처럼 부각된 인물이다. 왜 그런 평가가 나오는지 이해하려면 당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1999년 10월 연구소는 안철수에게 5만 주의 신주(新株)를 추가로 인수할 수 있는 신주인수권부회사채(BW)를 발행했다. 안철수는 총주식 13만 주 중 5만 주(39%)를 갖고 있던 대주주. 통상 회사채는 기업자금을 융통하려고 발행한다. 하지만 그때 BW 발행은 2001년 코스닥 상장을 앞두고 오너의 경영권 방어가 명분이었다. 바로 이 BW 발행이 그가 수천억 자산을 일군 열쇠였다. 5만 주의 신주 인수권은 이후 무상증자와 액면분할을 거치면서 1년 뒤 안 사장이 인수할 때는 146만여 주로 늘었다. 연구소의 총주식도 500만 주가 넘었으며 안 사장은 과반의 지분을 확보했다. 1998년 체르노빌 바이러스 사태에 김대중 정부 때의 벤처 거품까지 끼어 연구소 주식가치는 천정부지로 솟았다. 싼값에 신주를 인수할 수 있었던 안철수는 BW 발행으로만 수백억 원대의 평가차익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안 사장이 직원들에게 주식을 나눠 준 때는 BW 발행으로 엄청난 차익을 올린 2000년 10월이었다. 그것도 연구소 총주식의 1.5% 정도(8만 주)였으니 BW 발행으로 늘어난 지분의 10분의 1가량을 나눠준 셈. 업계 관계자는 “자신의 주식을 나누지 않는 오너도 많은데 좋은 일을 한 건 분명하다”면서 “다만 안 대표가 청춘콘서트나 방송 등에 출연해 주식을 아낌없이 나눠 줬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걸 들으면 ‘그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고 말했다. 15년도 더 된 얘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자명하다. 국민의당 출범으로 안 대표는 제3당 대선주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오늘을 있게 한 ‘안철수 신화’의 뿌리에 대해선 앞으로도 규명이 필요해 보인다. 물론 안 대표는 지난 대선 때 자신이 가진 안랩(2012년 안철수연구소에서 명칭 변경) 주식의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통 큰 기부’를 약속했다. 그의 재산도 기부와 안랩 주가 하락 등으로 787억 원(2015년 국회의원 재산신고 기준)으로 줄었다.‘安신화’ 뿌리 규명 필요 정치는 세력화다. 안 대표처럼 ‘큰 꿈’을 꾸는 이는 더 유념할 대목이다. 비단 IT 업계뿐이 아니다. 안 대표와 한지붕 아래 들어갔다가 욕하면서 나온 이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와 결별했다가 다시 합류한 윤여준 전 공동창당준비위원장은 안 대표가 2014년 7·30 재·보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에서 물러났을 때 “임기를 채웠다면 정치 밑천이 드러났을 것”이라고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안 대표가 자신을 떠난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다시 손을 내미는 건 좋은 변화다. 사람은 컴퓨터 백신처럼 쉽사리 새 버전으로 교체할 수 없기에.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 여야 원내대표가 합의한 이른바 ‘원샷법(기업활력제고특별법)’ 처리를 무산시킨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겸 선거대책위원장(사진)을 ‘논설위원이 만난 사람’에서 인터뷰했다. 김 위원장은 “여야가 합의한 기업활력제고특별법 등을 처리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얼굴마담이나 되려고 더민주당에 올 결심을 했겠느냐. 당을 변모시키려고 왔다”고 말했다.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해서는 “지난 대선에서 받은 1460만 표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김종인(76)은 ‘문제적 인간’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2번의 비례대표(11, 12대), 노태우 정권에서 보건사회부 장관과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에 세 번째 비례대표(14대), 노무현 정권 때 네 번째 비례대표(17대)를 지냈다. 좌우를 넘나들며 4번이나 비례대표를 지낸 전무후무한 기록을 갖고 있다. 지난 대선 때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과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으로 ‘경제 민주화’ 브랜드를 앞세워 정권 창출에 기여했다. 이제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 겸 선대위원장으로 또 한번 좌우의 강을 넘었다.그러면서도 모셨던 주군(主君)에게 할 말은 꼭 하는 성격이다. 아니, 주군 개념 자체가 없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문재인 대표가 물러나고 선대위원장이던 그가 비대위원장까지 겸하는 지난달 27일 더민주당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어 31일 전화로 추가 인터뷰를 했다. 김 위원장은 문 전 대표를 향해 “지난 대선 때 받은 1460만 표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쓴소리를 날렸다. 그의 국회 진두지휘 첫 작품은 여야 합의 파기였다.선거구 획정 빼고 뭘 논의하나 ―‘당을 수권정당으로 변모시켜야 한다’고 했는데, 여야가 합의한 기업활력제고법(원샷법)과 북한인권법의 29일 국회처리를 왜 뒤집었나. “원샷법 등을 처리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선거구 획정이 더 급하기 때문에 같이 하자는 것이다. 원래 12월 31일까지 선거구 획정을 했어야 하지 않나.” ―그래도 여야가 29일 처리하기로 날짜를 박아 합의한 사항이다. 합의를 파기하고 새로운 걸 연계하는 것은 투쟁이나 하는 정당, 운동권 논리에 빠진 정당의 모습이 아닌가. “그게 투쟁이나 운동권과 무슨 관계가 있나. 여야 합의에 보면 ‘나머지 쟁점 법안을 계속 논의한다’고 돼 있다. 가장 시급한 선거구 획정을 빼놓고 여야가 계속 논의해서 뭐 하겠는가.” 그에게 “비례대표도 4번이나 하고, 장관과 수석비서관, 은행 이사장(국민은행·1989년) 등 하실 만큼 하셨는데, 그 연세에 또 정치를 하려는 이유가 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더니 대뜸 조부(가인·街人 김병로 선생) 얘기부터 꺼냈다. 가인은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들의 무료 변론을 도맡았으며 1948년부터 초대 대법원장에 9년 4개월간 재임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에 맞서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냈다. “내가 정치를 실질적으로 체험한 건 24세(세는 나이) 때다. 5·16군사정변 이후 정치활동이 허용된 1963년 조부께서 정치 정 자(字)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하셨다. 딱 지금 내 나이 때다. 창당 과정에서 할아버지 심부름을 다 했다. 창당 후에도 대통령후보 단일화, 야당 단일화 추진 과정도 봤지만 결국 야당 단일화도, 후보 단일화도 못 했다. 그때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나라 발전이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독일에선 무슨 공부를 했나(김종인은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를 나와 독일 뮌스터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 가서부터 당시 우리나라 경제발전 단계에서 뭐가 필요할지 스스로 생각하고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래서 재정과 세제, 예산과 사회보장 문제 등을 공부하고 왔다. 돌아와선 서강대에서 재정학 강의를 했는데, 1974년 부가가치세 도입이 논의됐을 때 남덕우 재무장관이 도와 달라고 해서 정부 정책을 조언하게 됐다. 내가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국가와 관련된 분야를 주로 공부했고, 그걸 실현하려면 정치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김종인 하면 ‘경제 민주화’인데, 경제 민주화가 도대체 뭔가. ‘경제 민주화가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만큼이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간단히 말하면 소수의 경제 권력이 나라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경제 민주화를 구현하는 정당이 선택받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양극화가 더 벌어지지 않게 중재를 하고 좁혀 나가는 게 정치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런데 이런 걸 하려면 모두 입법 사항이다. 제대로 이해하고 관심을 가진 국회의원이 많아야 입법이 제대로 추진된다. 기본적으로 시장은 자연적으로 떨어진 게 아니라 만들어 줘야 된다. 그래서 내가 1987년 헌법 경제 조항인 119조 2항에 경제 민주화의 못을 박아 넣은 것이다.” ―그 얘기 좀 들려 달라. 119조 2항은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 “당시 헌법특위가 만들어졌는데 내가 경제조항 담당 분과위원장이 돼 이 조항을 만들었다. 전두환 대통령께 보고하러 갔더니, ‘빼라’고 했다. 그래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사회의료보험제도를 만들었는데, 미국의사협회와 제약회사 등이 제소해서 위헌 판결을 받는 바람에 실시가 중단됐다’는 예를 들었다. ‘경제가 발전하면 경제를 다루는 사람들의 영향력이 커지기 때문에 이런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정부는 그런 걸 방지할 능력을 갖지 않으면 나라 운영이 어렵다’고 설득해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경제 민주화에 꽂힌 건가, 독일 유학 영향인가. “독일 유학 영향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사를 보면 그런 정도는 터득할 수 있어야 한다.”전두환 설득해 ‘경제민주화’ 넣어 ―이제 더민주당을 지휘하게 됐다. 일각에선 더민주당의 친노(친노무현) 패권주의 때문에 얼굴 마담 역할만 할 것이란 우려가 있다. “내가 얼굴 마담이나 되려고 더민주당에 올 결심을 했겠나. 더민주당이 수권정당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지금 모습으로는 안 된다. 맨날 투쟁이나 하고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언행이나 하고…. 지금 시대가 옛날처럼 민주화만 외치면 다 되는 때가 아니다. 당을 변모시켜야 한다. 당에 친노 패권주의가 있다고 치자. 내가 당권을 이어받았는데, 그들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나?” ―더민주당의 탈당 사태가 중단된 건 탈당한 사람들 때문에 ‘하위 20% 컷오프’ 룰에 적용될 사람들이 다 채워졌기 때문이란 관측도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할 거다. 룰은 적용돼야 한다. 룰은 엄격히 잘해 놓았던데….”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 민주화를 내세웠다. 김 위원장이 당선에 기여한 부분이 있는데 어떻게 결별하게 됐나. “내가 박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린 건 탐욕이 너무 심해서였다. 박 대통령은 탐욕이 있을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둘째, 대통령들은 주변이 너무 복잡하고 그 사람들이 사고 쳐서 실패했는데, 박 대통령은 주변이 간단하다. 셋째가 중요한데, 박 대통령은 누구에게 신세 진 적이 없다. 그래서 이분은 제대로만 설계하면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결별이랄 게 뭐 있나. 선거에 당선됐으니 그냥 끝난 거지.” ―박 대통령의 3가지 장점에 대해선 지금도 생각에 변화가 없나. “당선된 이후에는 역시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참모그룹의 생각이 다르면 결국 (대통령도) 바뀔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런 게 오늘날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본다.”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에게도 조언자 역할을 했는데, 안 의원은 어떻게 평가하나. “처음에 그 사람은 정치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정치하고 싶으면 국회부터 가라’고 했더니, ‘국회의원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근데 국회의원이 돼서 요즘 하는 걸 보니 구정치인이 다 됐다. 정직성이 좀 결여돼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당을 만든다고 하다가 민주당과 합당했고, 일단 정당에 들어가면 서로 경쟁을 해서 결국은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인데 여의치 않으니까 나가 버린 거 아닌가?”하위 20% 컷오프 엄격 적용 ―문 전 대표는 어떤가. “정직하고 진정성이 있다. 다만 정치 경력이 일천하다. 실질적으로 초선 의원이니까. 사실 대선 6개월 남겨 놓고 공식 선언한 사람 아닌가. 6개월 선거운동 해서 1460만 표 얻었다는 건 대단한 성공이고 정치적 자산이다. 당 대표까지 됐는데, ‘내가 1460만 표 받았는데 다음엔 좀 더 노력하면 승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세상이 변하고, 국민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문 전 대표에게 ‘변화하는 데 대한 적응을 못 하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니 각오하라’고 했다. 흔히 밖에서 ‘김종인이란 사람이 가서 문 대표 꼭두각시가 될 거다’ 하는 얘기 나오면 난 웃음밖에 나질 않는다.” ―불편한 질문을 좀 해야겠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사실 5·18 나고 인명 피해가 많이 나고 할 때 ‘이 사람들 큰일날 짓을 하는 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국보위 재무분과위원장 보좌관이란 육군 중령이 찾아와 ‘부가가치세를 폐지하려는데 도와 달라’고 했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 때 부가세 도입 작업을 해서 1977년부터 시행됐다. 부가세가 부마항쟁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자 없애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때는 시행 4년째여서 정착 단계에 들어갔는데, 그걸 없애면 세제에 엄청난 혼란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못 없애게 하려고 국보위에 들어갔다.” ―좌우명이 ‘자연의 주어진 여건대로 산다’라는데, 맞나. 이렇게 현실에 적응하려는 좌우명이 국보위 참여와 관련 있나. “좌우명 맞다. 국보위 참여와는 관계없다. 나는 내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데는 확신이 있으면 참여한다. 확신 없으면 안 하고.” ―불편한 질문을 하나 더 하겠다. ‘동화은행 뇌물수수 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노영민 신기남 의원을 징계하는 것이 형평에 맞느냐’는 얘기도 나온다(김종인은 1992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경제수석비서관 재직 시 안영모 동화은행장에게서 2억1000만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 추징금 2억1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동화은행 사건은 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난 사건이라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 사건을 말하면 나는 당시에 14대 비례대표 후보였다. 그 돈이라는 게 사실은 후보들에게 지원한 돈이다. 당시 청와대에서 내가 유일하게 김영삼 씨가 대통령 후보 되는 것에 반대했다. 그분이 대통령 되면 일정한 보복을 받을 거란 걸 각오하고 있었고, 그렇게 됐다.”대표집필 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낀 고종은 양인(洋人)들을 경호원으로 채용한다. 미국인 다이 소장과 닌스테드 대령,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 등이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당일(1895년 10월 8일) 야간당직이던 다이 장군은 조선인 경비대를 지휘해 경복궁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군경·낭인 등과 맞닥뜨리자 제대로 교전도 못하고 도망쳤다.美 육군소장 도망쳐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이 시기를 연구해 몇 권의 저서를 낸 이종각 동양대 교수는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에서 그날 함께 야간당직을 섰던 사바틴의 증언을 인용하고 있다. “첫 번째 일제사격에서 왕실 군인들은 모두 총을 한 발도 쏘지 않고 그냥 버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복을 벗어던지고, 탄환을 버리고 달아났다.” 서양 경호원에게 의지하려 했던 고종은 10년 뒤엔 겁박과 회유로 을사늑약을 체결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초대 한국통감으로 오라고 청하기까지 했다. 고종은 늑약을 체결하고 귀국하는 이토에게 “경의 머리와 수염을 보니 반백인데, 흰 것은 일본 황제를 보필하다 생긴 것이겠지만, 나머지 검은 것이 희게 될 때까지 짐을 위해 일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고종은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됐을 때도 ‘이토는 우리나라의 자비로운 아버지(慈父)와 같다. 위해를 가한 흉한(兇漢)이 한국인이라고 하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라고 말했다고 ‘통감부 문서’는 기록한다. 일본 측 문서이니 사실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100여 년 전 굴욕과 통한의 역사를 다시 들추는 건 불편하다. 하지만 한국 외교가 처한 작금의 상황이 당시를 떠올리게 했다. 세계를 놀라게 한 6일 4차 핵실험 후 한 달도 안 돼 장거리 미사일까지 쏘려는 김정은 정권, 그럼에도 미국의 대북 제재 요구를 거절한 중국, 그런 중국에 매달렸던 박근혜 정권, 한국과는 위안부 문제 등으로 각을 세우는 사이 중국과 경제협의체를 구성한 일본, 한국 정부가 어렵게 입을 뗀 ‘5자회담’을 거부한 러시아까지…. 한국 외교에 ‘퍼펙트 스톰’이 몰려오는 느낌이다. 고종의 경호원이었던 미국 군인들도 명성황후를 지켜주지 못했다. 북핵보다는 이란 핵문제 해결에 올인(다걸기)했던 미국은 이제 11월 대선에 제 코가 석 자다. 한미동맹이라고는 개념조차 없는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아니 공화당 후보라도 된다면…. “그럴 리 없다” 손사래를 치는 외교부 관계자들이 최악의 시나리오에는 대비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국보다 훨씬 험악한 외교 지형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은 단합된 국론 아래 신속 단호한 행동으로 주변국이 두려워하고, 강대국도 어쩌지 못한다. 북이 핵실험을 하자 ‘이 지경이 되도록 정부가 뭐했느냐’고 비판하다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도입을 검토하겠다니 ‘사드가 한중관계보다 중요하냐’고 어깃장을 놓는 분열상이 북의 핵과 미사일보다 훨씬 위험하다. 국론분열 북핵보다 위험해 역대 최고 외교장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공로명 전 장관의 얘기. “한국 외교가 위기라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설 땅을 지키면 된다. 중국 최고지도자들과 교유했던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회고록에서 중국은 결코 ‘북한 카드’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썼다. 북한이 무너지면 미국이 코앞까지 다가온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중국에 조금이라도 지렛대를 가지려면 국방비도 늘리고, 사드 배치도 진작 했어야 한다. 수천 년간 외교를 해온 중국을 상대하려면….” 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어릴 적 ‘이등박문 같은 ×’이라는 욕이 있었다. 이등박문을 그냥 ‘안중근 의사가 쏘아 죽인 나쁜 일본인’ 정도로 알았다. 나중에야 그가 고종과 대신들을 겁박하고 회유해 을사늑약을 체결한 뒤 초대 한국 통감에 오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임을 알게 됐다. 뒷날 이토가 메이지(明治) 내각에서 초대 총리 등 무려 4번이나 총리를 지냈으며 국민적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1841년 10월 일본 조슈 번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하야시 리스케는 아버지가 이토 가문의 양자로 가면서 이토 리스케가 된다. 1868년 메이지 정부 출범 후 효고 현 지사가 되면서 히로부미(博文)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이토는 일본인에겐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고 근대화를 이끈 영웅 중 한 명이다. 작가 도요타 조는 이토 전기에서 “일본의 근대가 이 사내에 의해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내 없이 근대는 전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했다(이종각의 ‘이토 히로부미’에서 재인용). ▷더구나 이토는 일본인에게는 안중근이란 ‘자객’의 총탄에 순국한 열사다. 놀라운 일은 이토 장례식 때 그의 죽음을 부러워하는 원로들이 많았다는 사실. “방 안 다다미 위에서가 아니라 만주 벌판에서 자객의 손에 쓰러진 것이 영광스러운 죽음이다.”(오쿠마 시게노부) 그의 초상은 가장 많이 쓰는 1000엔권(1963∼1984년 통용)에 들어 있었으며 국회의사당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동상이 있다. 조선총독부가 이토의 공훈을 기려 1932년 건립한 절이 박문사(博文寺)다. ▷서울시는 호텔신라의 한옥 호텔 건립 계획에 4번째로 제동을 걸면서 이 자리에 있던 박문사 터를 문화재 보호 대상으로 거론했다. 1939년 바로 그 박문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차남 준생이 이토의 아들 분키치에게 굴욕적인 사과를 하는 쇼가 벌어진 일을 서울시 관계자들은 아는지 모르겠다. 총독부 연출쇼에서 안준생은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립니다”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당시 한국에서 발행하는 신문 중 동아일보는 유일하게 이 화해 쇼를 보도하지 않았고, 이듬해 강제 폐간을 당하는 사유 중 하나가 된다.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권력자는 고독하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은 더 고독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임기 말로 가면 갈수록…. 전직 대통령을 청와대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측근의 얘기. “임기 초에는 VIP(대통령) 저녁 식사 일정을 조정하는 게 큰일이었다. 저녁을 두 번 드시게 할 수도 없고…. 임기 4년 차가 되면서 그런 고민은 확 줄었다. 점차 VIP가 ‘누구누구 불러라’고 직접 하명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데 청와대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어딘가 뚱했다. ‘임기 초에는 안 불러 주고, 이제 와서 불러?’ 이런 표정들이었다.”“외로울 틈이 없다” 다른 전직 대통령 측근의 회고. “임기 후반 총선을 앞두고 ‘각하, 그래도 임기 끝나면 사저에 올 만한 사람 10명은 만드셔야 합니다’라고 조언했다. 그랬더니 VIP가 ‘걱정 마라, 10명 이상은 충분히 온다. 내가 그동안 공천 준 ×들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하더라. 정작 임기 끝나고는 단 한 명도 자발적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어느덧 임기 4년 차를 맞은 박근혜 대통령. 여성이자 가족도 없어, 아니 왕래를 끊어 구중심처(九重深處)의 고독은 깊어만 간다. 그래도 역대 대통령은 대체로 할아버지들이었다. 주말이면 청와대를 찾은 손주들의 재롱도 보고, 가족들과 시중 돌아가는 얘기도 나눴다. 어떤 대통령은 비밀리에 청와대로 밴드를 불러 기자들과 여흥을 즐기면서 스트레스를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주말은 물론이고 연휴에도 별다른 일정 없이 관저에서 보낸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외롭지 않으냐”는 질문을 할 때마다 답은 한결같다. “외로울 틈이 없다.” 관저에서도 보고서를 읽고, 인터넷 서핑도 하며, 생각날 때마다 수석비서관과 장관 등에게 전화를 하는 박 대통령으로선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고독에 단련됐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은 10·26 이후 청와대 문을 나선 1979년 11월부터 정치에 입문한 1997년 12월까지 칩거하면서 절대고독의 시간을 보냈다. 당시 결혼을 권유하는 한 인사에게 박 대통령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적이 많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아기를 낳을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부모를 모두 총격으로 보낸 그의 트라우마가 읽히는 대목이다. 박 대통령은 지금도 독대를 피하는 편이다. 본인은 ‘만나면 서로 시간 낭비하니 전화가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게 주변 얘기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대면접촉 기피가 업무 효율보다는 고독에 인이 박여 굳어진 성격에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나는 본다. 편치 않은 상대와 식사하는 걸 꺼려 가끔 TV를 보면서 혼자 저녁을 먹을 때도 있다고 한다. TV 보면서 저녁식사 그럴수록 수족처럼 편한 2인방(정호성 제1부속비서관과 이재만 총무비서관)에 대한 의존도는 낮아지기 어렵다. 3인방 가운데 정윤회 문건 파동 이후 안봉근 국정홍보비서관은 지근거리에서 멀어졌지만, 정 비서관은 지금도 박 대통령의 바로 옆방을 차지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고독을 걱정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남 얘기를 잘 듣지 않는다는 그가 더욱 고독해지는 임기 말에 접어들면서 자칫 치우친 결정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최근 박 대통령이 경제살리기 법안 입법을 촉구하면서 직접 장외(場外)로 나가 서명을 벌였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이 정책 결정 과정에서 균형감을 잃지 않았는지, 수시로 전문의 상담을 받는 미국의 예를 참고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당신은 이 가운데 몇 가지에 해당되는가? ①연립주택에 살고 있다 ②가계부채가 있다 ③받은 세뱃돈이 10만 원을 넘겨본 적 없다 ④부모님이 정기 건강검진을 받지 않는다 ⑤부모님이 취미생활이 없다 ⑥부모님이 음식을 남기지 말라고 잔소리한다 ⑦냉동실에 비닐 안에 든 뭔가가 많다 ⑧중고나라 거래를 해본 적 있다 ⑨집에 비데가 없다 ⑩옷장 안에 유행이 지난 후 쟁여 두는 옷이 많다….씁쓸한 흙수저 빙고게임 지난해 ‘금수저’ 논란이 불거지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흙수저 빙고게임’의 물음들이다. 원래는 가로 5개, 세로 5개씩 모두 25개의 질문에 자신이 해당되는 문항을 표시하고 빙고게임을 한다. 다소 과장된 질문에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곤 없다는 흙수저들의 자조가 담겨 있다. 하지만 인터넷에 흔히 떠도는 치기 어린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엔 어딘가 씁쓸하다. 그 자조 아래는 청춘의 좌절과 분노 같은 것이 깔려 있다. 비단 흙수저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기업 임원인 지인은 자식 둘을 모두 명문대에 합격시켜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그런데 큰아들이 지난해 취업에 실패했다. 인문·사회계열 졸업자였다. 지인은 “뭐 이런 나라가 있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인문·사회계열 취업난은 명문대라고 비켜가지 않는 시대다. 오죽하면 ‘인구론’(인문계의 90%가 논다)에 이어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13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5∼29세 청년층의 실업률은 9.2%. 관련 통계기준을 바꾼 1999년 이후 가장 높다. 취업 준비를 하거나 아예 취업 의사가 없으면 경제활동인구에서 제외돼 실업률 계산에서 빠지는 것까지 감안하면 체감 청년실업률은 20∼30%나 된다. 이젠 취업하려면 스펙 ‘3종 세트’(학벌, 학점, 토익점수)가 아니라 ‘9종 세트’(3종+어학연수, 자격증, 공모전 입상, 인턴, 봉사활동, 성형수술)를 갖춰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런 스펙들이 실제 취업에 도움이 되느냐와는 별개로 이런 말이 나오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과거에는 많은 공직 후보자가 부동산 투기, 병역 기피, 편법 증여, 위장 전입 등 ‘4대 종목’에 걸려 청문회 문턱에서 낙마했다. 최근에는 부모의 영향력을 배경으로 한 ‘금수저 취업’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그럴 때마다 취직하지 못한 ‘3포 세대’와 그런 자식에게 해줄 거라곤 별로 없는 부모들의 좌절과 분노가 부글부글 끓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이젠 뭔가 바뀔 때가 됐다’는, 기득권에 대한 불만 수위가 차고 넘치기 직전이다.현역의원 특권 심판해야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역대 최악이라는 19대 의원들은 현역 기득권을 지키려 선거구 획정조차 하지 않고 있다. 당원 명부조차 볼 수 없는 신인 예비후보들은 자신이 뛸 운동장이 어딘지도, 누구에게 전화해야 할지도 모르는 ‘깜깜이’ 선거에 맞닥뜨렸다. 새누리당의 ‘험지 출마론’이라는 것도 결국 현역 의원 지역구는 놔둔 채 예비후보들을 야당 의원 지역구에 떨어뜨리는 것과 다름없다. 안철수 의원의 ‘국민의당’이 뜨는 것도 중도개혁을 표방하면서 새누리당은 ‘기득권 우파’, 더불어민주당은 ‘기득권 좌파’ 이미지를 씌우는 데 일단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선거는 이제 90일도 안 남았다. 국민은 지켜볼 것이다. 어느 당이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기득권 구조를 타파하는 데 기여할 후보를 내놓는지를, 먼저 자신들의 기득권부터 내려놓는지를. 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바야흐로 선거철. 이틀에 한 번꼴로 전화가 걸려온다. “안녕하십니까. 4월 실시되는 20대 총선과 관련해….” 기계음이라면 고민할 필요 없다. 가차 없이 끊는다. 사람 목소리면 인내가 필요하다. 전화 면접원이 여론조사 개요를 설명한 뒤 “3분(또는 5분) 정도 시간을 내달라”고 요청하면 “지금 회의 중”이라든가 하면서 가급적 예의를 갖추게 된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는 지난해 12월 28∼30일 19세 이상 남녀 1634명을 표본으로 정당 지지율 정례 조사를 실시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자동응답시스템(ARS)의 응답률은 전화면접조사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무선 ARS(35%) 응답률이 3.8%로 가장 낮았고 유선 ARS(35%) 5.5%, 유선 전화면접(15%) 26.1%, 무선 전화면접(15%) 34% 순이었다. 리서치앤리서치 배종찬 본부장은 “응답률이 지나치게 낮으면 모집단의 특성을 올바로 측정하지 못해 대표성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29일 새누리당 대구 동을 이재만 예비후보 측에서 생산한 A4용지 1장짜리 ‘여론조사 행동요령 지침서’가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20, 30대가 ARS 응답률이 낮은 점을 겨냥해 ‘여론조사 응답버튼을 누를 때 나이를 물어보면 20, 30대를 꼭 선택하시라’는 지침을 이 문건은 담고 있다. 응답률이 높은 40대 이상이 20, 30대인 양 답변하면 전체 여론조사 반영률이 높아진다는 점을 노린 것. ARS 조사의 경우 연령대 식별이 어렵기 때문이다. ▷11일 주간동아에 따르면 20대 총선 선거운동원들 사이에서 ‘여론조사 때 지지자 500명을 모으면 경선 통과 가능성이 50%를 넘고, 1000명을 모으면 본선 진출이 확정적’이라는 얘기까지 나돈다. 비정상 여론조사 경선 방식이 비정상 선거운동을 낳고 있다. 여야는 지난해 12월 31일 휴대전화 가입자의 거주지와 연령을 파악할 수 있는 안심번호제 도입을 뼈대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럼에도 ARS 조사 방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여론조작의 유혹은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다.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지금부터 20년이 더 된 1995년 6월, 나는 처음 접한 열대기후를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문을 열면 훅 하고 열기를 끼얹는 습식 사우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는 그런 날씨였다. 그 속에서 회담 대표들이 언제 나올까, ‘뻗치기’를 했다. 미국과 북한 사이에 열린 이른바 ‘준(準)고위급 회담’. 당시 외무부(현 외교부) 출입기자였던 나는 취재차 출장을 갔다. 회담 쟁점은 북한에 제공할 원자로의 노형(爐型) 결정 문제. 그 전해 전쟁 위기까지 치닫게 했던 북한 핵문제는 10월 미국과 북한의 제네바 기본 합의로 해소되는 듯했다. 북한이 핵 활동을 중지하고 사찰을 받는 대신 경수로(輕水爐)를 제공받는다는 것이 합의의 요지. 문제는 북한이 한국표준형 경수로를 거부하면서 불거졌다. 일주일을 예상하고 떠났던 출장은 무려 한 달이나 끌었다. 북한은 결국 한국형 경수로를 받았고,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는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는 것이 큰 보람으로 느껴졌다.‘기대 섞인 착각’ 북핵 능력 키워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나도, 정부도, 회담 상대였던 미국도, 국제사회도 모두 착각했다. 북한은 1987년 영변에 핵발전소를 가동했을 때부터 ‘수소탄 시험’이라는 4차 핵실험을 감행한 오늘날까지 단 한 번도, 아니 꿈에라도 핵무기를 포기한 적이 없다. 충분한 보상을 해주면 핵을 포기할 것이란 우리의 ‘기대 섞인 착각’이 오히려 핵능력을 키워줬다. 그때만 해도 북의 핵능력은 핵무기 한두 개를 생산할 수 있는 양의 플루토늄을 보유했다는 ‘의혹’ 수준이었다. 이제는 북한 주장대로 수폭, 아니면 원폭과 수폭의 중간단계인 증폭핵분열탄 같은 가공할 핵무기를 보유하는 단계가 됐다. 이번 4차 실험에서 북한은 지난 세 차례 실험과 달리 핵무기 운반수단인 장거리미사일 발사 실험을 생략했다. 북한은 1차(2006년 10월) 2차(2009년 5월) 3차(2013년 2월) 실험을 하기 1∼3개월 전에 모두 장거리미사일을 쐈다. 그러나 북한이 장거리미사일을 쏘지 않았을지언정 운반수단 실험을 포기한 건 아니다. 더 치명적 운반수단인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의 수중사출 실험을 했다. 그것도 지난해에만 5, 11, 12월 세 차례나 했다. 세 번째는 4차 핵실험을 실시하기 불과 16일 전이었다. 핵탄두를 장착한 SLBM은 ‘궁극의 핵무기’로 불린다. 잠수함에서 쏘기에 사전탐지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적의 공격으로 지상 핵무기가 파괴돼도 ‘2격(Second Strike)’을 가할 수 있기에 상대가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최상의 억제력을 갖고 있다.‘궁극의 핵무기’가 北 최종목표 이른바 ‘수소탄 시험’을 앞두고 연달아 SLBM 사출 실험을 한 북한의 의도는 자명하다. SLBM에 수소탄을 장착한 궁극의 핵무기를 갖겠다는 뜻이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발표하면서 ‘소형화한 수소탄’을 유난히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이른바 5대 핵 강국은 모두 수폭과 SLBM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SLBM으로 1만 km 이상 날아가는 대륙간탄도탄을 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나라는 미, 중, 러 3국 정도다. 결국 북한 핵개발의 전략적 최종 목표는 SLBM에 소형화한 수폭을 장착해 1만 km 이상 날리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하는 것이다. 북한에 과연 그런 날이 올까? 20여 년간 우리는 이 질문을 하면서 매번 ‘그런 날’을 맞고 있다.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차기 대통령은 누가 될 것인가? 정치부 기자를 오래한 때문인지, 대선 때마다 많이 받은 질문이다. 새날은 밝았고, 4월 총선만 끝나면 관심사는 내년 대선으로 모아질 것이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지는 솔직히 나도 정말 궁금하다. 그렇다고 ‘나도 궁금하다’고 대답할 수는 없기에 나름대로 답변을 정리해놓고 있다. “한국 대통령이 되려면 적어도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단 이 두 가지는 정치부 기자 경험을 통해 스스로 정리한 것이므로 주관적일 수도 있음을 미리 밝힌다. 자기희생의 스토리 있어야 첫째는 스토리다. 그 스토리는 자기희생의 이야기일수록 좋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공헌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감정 해소라는 대의를 위해 패배가 예상되는 부산에 출마해 ‘바보 노무현’의 스토리를 만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자기희생인 면은 약하지만, 일개 월급쟁이로 출발해 대기업 회장이 된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스토리의 보고(寶庫)다. 한국 근대화를 이룩한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자 스물둘의 나이에 총격으로 어머니를, 5년 만에 다시 총격으로 아버지를 잃은 ‘비운의 공주’다. 둘째는 시대정신에 맞는 비전이다. 스토리가 인생의 전력(前歷)이라면, 비전은 대통령이 이끌어주기를 기대하는 한국사회의 방향이다. 김영삼 대통령에게는 오랜 군사독재를 끝내고 문민시대를 열어달라는 시대적 소명이,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수십 년 응어리져 더께 앉은 호남의 한을 풀어달라는 역사적 기대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는 정치권이란 ‘그들만의 리그’에서 독점하던 기득권을 깨고 시민권력의 시대가 열릴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참여정부 5년의 이념 과잉과 편 가르기, 포퓰리즘에 질린 국민은 실용(實用)을 기치로 세운 이명박 정권을 택했다. 하지만 지나친 실용은 종종 무원칙으로 이어졌고, 결국 국민은 ‘원칙이 바로 서는 사회’를 브랜드로 내세웠던 박근혜 대통령을 택했다. 자, 이제 첫째인 스토리를 현재 거론되는 대선 예비후보들에게 적용해보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을 모시고 한국 민주화에 기여한 자기희생의 스토리가 있다. 다만 리더가 아닌 참모 이미지가 강한 편이어서 파괴력은 크지 않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의 ‘동업자’였다는 것이 강점이자 한계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51.6%)과 호각의 득표율(48.0%)을 올린 점은 자산이다.시대정신에 맞는 비전 보여야 안철수 의원은 안랩을 창업해 ‘컴퓨터 의사’로 변신한 뒤 청춘콘서트로 청년들의 마음에 다가갔다. 다만 중대한 순간에 회군해 ‘철수정치’ 이미지가 따라붙는 것이 부담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운동을 통해 서울시장에 재선까지 했으나 ‘해놓은 게 뭐 있느냐’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스토리가 가장 소구력 있는 사람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다. 충북 음성의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유엔 사무총장까지 올랐으니…. 하지만 이것이 과연 자기희생의 행로냐에 대해선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제 비전을 볼 차례지만, 아직은 섣부르다. 대선구도가 짜이지도 않았고, 구체적인 비전이 나오지도 않았다. 살아온 전력이야 어쩔 수 없지만, 시대정신에 맞는 비전을 제시하는 건 대선후보 진영의 총체적 역량의 산물이다. ‘큰 꿈’을 꾸는 이들이여. 이제 내년 대선의 시대정신이 뭔가, 고민할 때가 왔다.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사석에서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를 처음 만나본 사람은 놀란다. 온화하고 단정한 신사의 느낌이다. 가끔 지각하는 걸 빼곤 매너도 수준급이라고들 한다. 지난달 6일 열린 국정화 반대 집회에선 피아노까지 연주했다. ‘어라, 막말의 달인이 피아노를….’ 하지만 이종걸은 예원학교 피아노과 출신이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로,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답게 요즘 정치인치곤 드물게 르네상스적 감수성을 갖췄다. ▷그런 그가 마이크 앞에만 서면, SNS 자판에 손만 올리면 돌변한다. 아무래도 이종걸 막말의 ‘끝판왕’은 ‘박근혜 그년’ 사건이다. 오죽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인상도 좋으시고 말씀도 잘하시는데 왜 저보고 ‘그년’ ‘저년’ 하셨어요?”라고 대놓고 무안을 주었을까. 그 자리에선 바로 사과했던 이종걸이 22일 또 박 대통령을 비난하며 “국민이 병신이냐, 바보냐”고 막말했다. 그런데 이번 ‘국민 병신’ 발언은 단순한 막말 같지가 않다. ▷되도 않는 ‘민중총궐기’란 이름의 19일 3차 집회 때 ‘병신년 박근혜’란 구호가 등장했다. 지금 SNS에선 박 대통령과 새해를 조합한 ‘박근혜 병신년 지지율’ ‘박근혜 병신년 연하장’ 따위의 악성 조어들이 돌고 있다. ‘병신(病身)’은 ‘바보’라는 말과는 또 다르다. 장애인을 극도로 비하한 단어여서 정치인에겐 금기어나 마찬가지. 이종걸이 사실상 금기어를 입에 올린 걸 어떻게 봐야 할까. 벌써부터 새해의 60간지(干支) 이름인 ‘병신(丙申)년’이 각종 악성 저질 패러디에 쓰일 거란 우려가 나온다. ▷천간(天干)의 병(丙)은 씨앗이 줄기를 뻗는 모습이고, 붉은색을 띤다. 지지(地支)의 신(申)은 원숭이다. 즉 병신년은 ‘붉은 원숭이가 뻗어나간다’는 좋은 뜻을 담고 있다. 예로부터 원숭이는 지혜와 사교성의 상징이 아닌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해(936년)도, 팔만대장경 제작이 시작된 해도 병신년(1236년)이다. 추락이냐, 비상(飛上)이냐의 갈림길에 선 대한민국. 국운을 널리 뻗어도 시원찮을 새해를 ‘병신년∼’이나 읊조리며 지저분하게 맞을 수는 없다. 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살벌하고 그악한 데다 허접스럽기까지 하다. 대통령 선거 기사 보도 주무 부장인 나조차도 ‘쓸 만한 구석’을 찾기 힘든 18대 대선 레이스. 종착점까지 5일밖에 안 남았으니 ‘그래도 뭔가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되돌아본다.동토에 핀 꽃, 지역감정 완화 안철수 전 후보가 주장한 ‘새 정치’가 대선에 순기능을 했을까? 그는 출마선언문에서 “정치개혁은 선거 과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대선 막판에 쏟아지는 포퓰리즘 공약과 흑색선전, 뜬금없는 국정원 여직원 감금과 댓글 진실게임까지…. 박근혜 문재인 두 후보 측 모두 ‘안철수의 새 정치를 존중한다’라고 했지만, 그가 주장한 ‘선거 과정의 쇄신’ 따윈 없었다. 더구나 안 전 후보마저 대선 이후까지도 ‘새 정치의 아이콘’으로 남을지 알 수 없다. ‘대선 끝나면 출국하겠다’라는데 다시 귀국할 때도 여전히 ‘신상(품)’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을지…. 하지만 동토(凍土)에도 꽃은 피는 법. 이번 대선에는 많은 이가 간과했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있기는 있다. 지역감정 완화다. 동아일보와 리서치앤리서치(R&R)가 1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호남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지지율이 11.8%를 기록했다. 이대로 가면 민주화 이후 처음 보수후보가 호남에서 두 자릿수 득표를 할 가능성이 크다. 같은 조사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TK(대구·경북) 지역에서 21.2%를 기록했다. 이 지역에서 17대 대선 때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6%대를 기록했다. 문 후보는 PK(부산·경남)에선 고향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30%가 넘는 괄목할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정치에서 민주화 운동의 양대 산맥인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흡사 ‘코트 체인지’(이훈평 전 의원)를 하듯, 상대 진영 후보를 지지하는 모양새도 시너지를 내고 있다. 이제 동서화합은 큰 고비를 넘게 됐다고 말하면 지나친 예단(豫斷)일까. 문제는 남남(南南)화합이다. 박, 문 후보 모두 ‘국민화합’과 ‘사회통합’, ‘100% 대한민국’ 등을 부르짖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50% 대한민국’도 요원하다. 두 후보 진영은 경쟁심이 아니라 적개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어느 쪽이든, 이긴 쪽은 진 쪽에 흔쾌히 손을 내밀 자세가 돼 있지 않다. 진 쪽은 이긴 쪽이 손을 내밀더라도 마음으로 맞잡을 준비가 안 돼 있다. 직간접으로 선거에 간여한 사람들뿐 아니라 단순 지지자들의 반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래선 선거전의 종전(終戰) 축제일이 돼야 할 12월 19일이 또 다른 ‘5년 전쟁’의 개전 선포일이 될 수밖에 없다.당선과 동시에 레임덕 시작 한국 대통령이 유난히 빨리 레임덕에 빠져드는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순간 그는 새로운 5년 전쟁의 전장에서 비켜나게 된다. 대통령 당선자의 관심은 당연히 국정에 쏠리겠지만, 전쟁을 치른 두 진영에선 ‘차기 전쟁의 리더’가 누가 될지에 눈을 돌린다. 특히 패배한 쪽에선 발호하는 승장(勝將)들을 보면서 5년 후를 절치부심하게 된다. 어쩌면 대통령 당선일이 바로 레임덕이 시작되는 날일 수도 있다. 선거 기사 주무 부장으로 대선을 치르는 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만, 이런 악순환은 이제 그만 봤으면 한다. 그 고리를 끊을 사람이 있기는 하다. 바로 18대 대통령 당선자다. △친박이든, 친노든 함께 선거를 치른 아군에 상대 진영보다 엄한 잣대를 들이대고 △패배 진영과 그 지지자들을 더 힘껏 껴안으며 △말뿐이 아닌 진심의 ‘대탕평인사’를 하면서 △임기 초부터 개헌이든, 결선투표제든 5년 전쟁의 고리를 끊을 제도적 보완을 서두른다면 아직도 희망은 있다. 5년마다 되풀이돼 온 한국 정치 비극의 막을 내릴 희망이. 늘 그렇듯, 동토에도 꽃은 피는 법이니까.박제균 정치부장 phark@donga.com}
2004년 4월 17대 총선을 앞둔 청와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한 수석비서관에게 총선에 나가라고 종용했다. 사실상 압력이었다. 그러자 이 수석비서관이 반발하듯 따졌다. “왜 저 사람은 놔두고 저한테만 그러십니까?” 그러자 되돌아온 노 대통령의 대답. “저 사람은 정치할 사람이 아예 아니야. 전혀 안 맞아.” ‘저 사람’은 당시 민정수석이었다. “운명이다”란 유언을 남긴 노 전 대통령이 ‘정치가 아예 안 맞는 사람’으로 치부했던 그가 제1야당의 대선후보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박빙의 승부를 벌이는 아이러니. 그게 바로 ‘문재인의 운명’이다.“저 사람 정치에 전혀 안 맞아” 문 후보가 ‘전혀 안 맞는’ 정치에 뛰어들게 된 건 친노세력의 영향이 컸다. 권력을 향유하다가 ‘폐족’의 나락으로 떨어져 더더욱 상실감이 컸던 친노 주주들…. 이들이 노 전 대통령의 비운으로 기사회생하자 이번 대선을 겨냥해 ‘얼굴’로 내세운 CEO(최고경영자)가 바로 그다. 문 후보가 ‘친노를 내치라’는 당 내외의 무수한 설득과 압력에도 그러질 못하는 근본적 이유는 바로 정치 입문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리라. ‘고용 CEO’가 주주를 내치는 건 예사로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물며 ‘정치가 안 맞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담백한 성품의 문 후보 아닌가. 이처럼 문 후보는 대선 가도의 출발점부터 사실상 새누리당의 오너인 박근혜 후보와 판이하다. 거칠게 말하면 오너는 자기 책임 아래 기업을, 심지어 대선을 말아먹든 말든 상관없다. 하지만 고용 CEO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문재인은 대선전 초반부터 친노 주주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고, ‘아바타’란 모욕적인 표현까지 들어가며 유명을 달리한 친노의 오너 노무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뿔싸, 이를 어쩌나. 더 예쁜 ‘새얼굴’ 안철수가 무대 위에 등장했다. 더구나 그는 친노의 대선 기획상품 격인 문 후보와 달랐다. 기성정치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의 수요가 창출한 ‘신상(품)’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신상을 득템 하고야 말겠다’는 쇼핑 중독자의 심리처럼 안철수 전 무소속 후보가 뭘 해도 그를 향한 ‘선망’의 열기는 빠지질 않았다. 이러니 할 수 없지 않은가. 대선 승리를 위해서 이번엔 안철수에 목을 매야 하는 게 문재인의 또 다른 ‘운명’이었나 보다. 결국 친노와 노무현, 안철수의 그림자에까지 가려 ‘문재인이 안 보인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부산 출신 정치권 인사의 얘기. “문재인이 고향인 PK(부산·경남)에서 왜 안 뜨는 줄 아는가. 부산 사람들은 누구에게 기대거나 끌려가는 듯한 2인자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노무현처럼 안 될 줄 알면서도 부닥치고 보는 사나이에게 끌린다.”지금이라도 ‘대선 독립선언’ 하라 문 후보는 4일 자신과 “이념적 차이를 느꼈다”고 말한 안 전 후보의 자택에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 문제는 이런 문 후보의 행보가 전혀 삼고초려(三顧草廬)의 미덕으로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에 박근혜 후보와 근소 차로 접근한 분이 대선 막판까지 누군가에게 매달리는 모양이 유권자인 국민들 보기에 좀 그렇다. 이제 문 후보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때가 됐다. 자신을 ‘문재인의 친구’라고 불렀던 노무현처럼. 문 후보가 지금이라도 이런 ‘대선 독립선언’을 한다면 국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는 더이상 안철수 전 후보에게 손을 내밀지 않겠습니다. 안 전 후보의 새정치에 100% 공감합니다. 오늘이라도 안 전 후보가 저를 도와준다면 너무나 고맙겠습니다. 하지만 대선 승리를 위한 단일화나 연대 같은 정치공학은 이제 버리겠습니다. 선거일까지 홀로 국민만 보고 뛰겠습니다.” 대선은 ‘아직도’ 13일이나 남았다.박제균 정치부장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