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시작은 코스타리카 해변에서 발견된 바다거북이었다. 미국의 한 대학원생이 2015년 바다거북 코에서 플라스틱 빨대를 끄집어내는 영상을 공개했다. 바다에 버려진 빨대를 거북이가 삼켰던 것. 시각적인 충격이 어마어마해 플라스틱 빨대 퇴출 운동이 일었고 종이 빨대나 텀블러가 본격 확산되기 시작했다. 올해 11월부터 국내에서 이런 움직임이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식당과 카페 매장에서 플라스틱 빨대와 종이컵 사용이 금지되고, 편의점과 빵집에서는 돈 주고도 비닐봉투에 제품을 담아 갈 수 없게 된다. 올해 4월 일회용 플라스틱 컵 사용 금지에 이어 규제 수위가 높아졌다. 환경을 위한다는 목적이지만 식당 카페 등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에게 당장 불똥이 떨어졌다. 아르바이트생 구하기도 힘든데 일회용품 사용이 금지되면 ‘설거지옥’이 닥칠 것이라는 우려다. 12월부터 시행되는 일회용품 보증금제도 걱정이다. 테이크아웃 음료 등을 일회용 컵 등에 줄 때 고객에게 보증금을 받는 것으로 고객이 컵을 반납하면 보증금을 돌려주고 나중에 이를 수거업체에 넘겨줘야 한다. 반납된 용품 보관 장소 확보도 걱정이고, 보관 기간 용품에 당류나 우유 등이 남으면 벌레가 꼬일 수 있어 걱정이며, 보증금(300원 선)이 가격 인상 효과를 내지 않을지도 걱정이다. 정부의 일회용품 가이드라인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상황별 다른 잣대인 경우가 적지 않다. 매장 내 일회용품 사용은 금지하면서 배달음식 용기로 일회용품은 써도 된다. 대형마트 시식대나 축구장 치킨업체 등의 일회용품 사용도 허용된다. 편의점 조리 음식을 일회용품에 담아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먹는 건 안 되지만, 편의점 앞 공원에서는 괜찮다. 분식집에서 순대 튀김을 집어먹는 이쑤시개는 안 되지만 이쑤시개가 아닌 모양으로 변형해 쓰는 건 괜찮다. 이쯤에서 플라스틱 빨대로 상징되는 일회용품이 악인지에 대한 근본 질문을 하게 되는데, 실은 매년 바다에 버려지는 플라스틱 폐기물 900만 t 중 플라스틱 빨대 비중은 0.03%에 그친다. 이 플라스틱 쓰레기의 4분의 1은 중국에서 나오는 등 오히려 개발도상국 폐기물이 해양 오염에 더 해악을 끼친다. 종이 빨대도 목재를 원료로 쓰는 종이를 가공하는 것이어서 탄소배출량은 플라스틱 빨대보다 많고, 면화를 키워 만드는 에코백도 최소 131번 써야 비닐봉투보다 친환경적이 된다는 사실에 ‘에코백 부자’들은 숙연해진다. 더욱이 플라스틱이라고 무조건 유해한 것도 아니다. 인류 최초의 플라스틱은 코끼리 상아로 만들던 당구공을 대체하려 개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끼리 한 마리에서 나오는 당구공은 8알. 코끼리 멸종을 우려해 1869년 미국 엔지니어가 플라스틱을 발명해냈다. 기술의 진보로 자연을 보호할 수 있듯 생분해 플라스틱 등 친환경 기술로 절충점을 찾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종이 빨대를 쓰고 에코백을 드는 게 지구를 해한다는 마음의 부담은 덜지언정 실제 환경을 보호하는 행동인지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사소해 보이는 규제라도 한 번 도입되면 돌이키기 힘들다. 정부는 최근 규제혁신전략회의를 열고 경제 주체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꼭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금지하는 네거티브(negative) 규제로 가기로 했다. 복잡한 규제는 좋은 품질의 규제라 볼 수 없다. 환경 보호의 취지는 좋지만 규제 실효성을 달성하기보다 오히려 형평성 논란이 일고 경제 주체에 부담과 혼란을 주는 규제라면 재검토해야 한다.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대형마트 A사는 새벽에 만든 빵을 표방한 ‘새벽빵’을 판다. 고객이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마트 내 빵집에서 바로 구워 배달해주는 방식이다. 여전히 따뜻하고 바삭하다. 이런 빵을 새벽에 받아 아침에 먹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사실상 힘들다. 대형마트는 자정부터 오전 10시까지 영업이 금지돼 있다. 따라서 새벽빵을 정확하게 정의하면 새벽에 반죽해 대형마트 영업이 가능해지는 오전 10시부터 배송하는 빵이다. 극히 일부 지역에 국한해 새벽빵이 새벽배송 되지만 이는 경기 외곽 물류센터에서 만들어져 배달된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쿠팡과 마켓컬리 등 온라인 플랫폼이 ‘빵지순례’ 하는 소비자를 겨냥해 유명 베이커리 제품을 경쟁적으로 새벽배송하고 나선 것과 대조적이다. 온라인 플랫폼이 새벽배송으로 사세를 불려갈 때 대형마트는 영업시간 외에는 배송이 제한돼 새벽배송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못했다. 이는 대형마트 규제의 영향이 크다. 대형마트는 2012년부터 유통산업발전법을 통해 영업시간 제한과 주 2회 의무 휴업 규제를 받게 됐다. 이는 전통시장 등 골목상권을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10년간의 규제로 골목상권이 살아났다고 말하기는 여전히 힘들다. 사람들은 대형마트가 문을 닫으면 동네 식자재 마트나 편의점에 갈지언정 전통시장엔 여전히 안 갔다. 바가지를 씌우거나 현금 거래만 하려고 들며 위생 상태도 의문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이 같은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선거철만 되면 전통시장을 찾으며 ‘보호와 지원’을 우선시했다. 이는 전통시장을 개선하고 혁신할 기회를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때 한 카드사가 수십억 원을 들여 전통시장을 리모델링해서 핫플레이스로 만들었지만, 이젠 곳곳에 임대 현수막이 나붙어 있는 등 활기를 잃었다. 지원이 끊기면서 상권도 바로 죽었다. 이미 소상공인과 대형마트는 경쟁 구도가 아니다. 실제로 인천의 한 대형마트가 폐점하자 인근 3km 이내 식당 등 소상공인 매출이 오히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마트와 상인의 ‘동반 성장’을 내건 규제가 전체 상권을 ‘동반 위축’시킨 것. 업태는 다르지만 서울 여의도에 ‘더현대서울’이 들어선다고 했을 때 바로 옆 IFC몰은 망할 것이란 우려가 나왔지만, 1년 뒤 IFC몰 매출은 이전보다 50% 늘었다. 유동인구가 몰리면서 상권이 커진 결과다. 대형마트 규제는 결과적으로 골목상권을 살리지도 못했고 대형마트 산업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과거 백화점 셔틀버스 운행 중지 등의 규제가 있었다. 인근 상인과 버스회사 등을 의식한 규제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가용으로 백화점에 갔고 셔틀버스 기사 3000여 명만 졸지에 실업자가 되며 엉뚱한 곳에 불똥이 튀었다. 10년간 펼쳐온 대형마트 규제도 다르지 않다. 운영은 대기업이 해도 중소기업이 물건을 납품하고 농부나 어부가 농축수산물을 파는 주요한 판로이기 때문이다. 요새는 골목 여행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나름의 매력이 있는 골목상권이 적지 않다. 10년 전 대형마트 사업을 제약하는 손쉬운 규제를 가하기보다 왜 골목상권이 침체됐는지 원인을 진단하고 자체적인 경쟁력을 키우기에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대형마트가 제공하지 못하는 가치를 찾아내 잘하는 걸 더 잘하게 만들어야 했다. 규제만능주의에 사로잡혀 탁상에서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며 잘하는 걸 못하게 하기보다는 못하는 사람도 잘할 수 있게 근본적인 경쟁력을 키워주는 방안이 이제라도 나와야 한다. 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서울 강북구 삼양동 소나무협동마을은 요새 재개발 열기가 뜨겁다. 폭염이 극심했던 2018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옥탑방 한 달 살기’를 했던 곳이다. 당시 그는 “강북은 강남과 달라야 한다. 삼양동 고층 개발을 반대한다”며 주거 환경을 개선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골목을 포장해주고 나무 계단을 놓아줬으며 꽃과 나무도 심어줬다. 하지만 최근 3년여간 주민들은 삶이 나아졌다는 느낌은커녕 길 건너 고층 아파트들을 보며 더 큰 박탈감을 느껴야 했다. 결국 주민들은 재개발추진위원회를 꾸려 최근 한국토지주택공사(LH)로부터 공공재개발 설명회를 듣는 것으로 재개발 추진을 본격화했다. 삼양동의 사례는 ‘책상머리 주거 대책’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울은 (아파트가 많아서) 천박한 도시”(여당 전 대표), “모든 국민이 강남에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전 대통령정책실장), “아파트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장관 출신 여당 의원) 등 현 정부에서 잇따랐던 부동산 구설수도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 짐작한다. 정부가 뒤늦게라도 공급의 중요성을 깨달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문제는 ‘어떻게’다. 지난해 2·4대책을 통해 도심 저층 주거지 등을 공공 주도로 재개발하겠다고 발표한 ‘도심 공공주택 복합사업(도심복합사업)’이 그렇다. 정부는 최근 대책 1주년을 맞이해 당초 목표의 절반을 넘긴 물량을 지을 후보지를 확보했다고 자평했지만 시장은 시큰둥하다. 사업이 가시화됐다고 할 만한 ‘본(本)지구’ 지정 지역의 물량은 당초 목표치의 5%에 그쳐 착공까지는 ‘산 넘어 산’이다. 이는 공공 주도로 재개발하면 용적률을 올려주고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해준다지만 공공성을 강화해야 하는 특성상 아무래도 사업성이 낮은 곳이 적지 않은 영향이 크다. 주택 공급이야 절실하지만 조합은 주판알을 튕긴다. 적정 이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시장경제의 속성이다. 민간재건축의 경우에도 개발이익의 최대 절반까지 부담금으로 내야 하는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가 현 정부에서 부활해 사업 추진 걸림돌로 꼽힌다. 현 정부 들어 지난해까지 집값이 크게 오른 것은 시장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고 시장을 존중하지 않은 영향이 크다. 30년 가까이 부동산 현장에 몸담은 한 민간 연구소 원장은 역대 최장 국토교통부 장관의 재임 시 모습을 거의 못 봤다고 한다. 집값이 잡히지 않자 청와대가 전문가 회의를 열었지만 회의는 ‘답정너’ 형식이어서 나중엔 전문가들이 참여를 꺼렸다는 후문이다. 과거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주재로 부동산 회의가 열린 적이 있는데 입맛에 맞는 선수만 채웠으니 듣기 좋은 말을 했을 공산이 크다. 진단을 잘못하면 정책도 잘못 나온다. 최근의 아파트값은 간만에 상승세가 꺾였다. 현 정부가 대대적으로 타깃으로 삼았던 서울 강남구 아파트값까지 지표상으로는 떨어졌지만 이를 부동산 정책 성과로 보긴 힘들다. 집값이 그동안 너무 올랐던 데다 대출·세제 규제가 워낙 강해 이제라도 숨 고르기에 들어가는 게 당연하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대선 이후의 정책에 주목한다. 양대 대선 후보도 큰 틀에서 재개발·재건축 활성화를 내걸어 정비사업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겠지만 시장 향방을 가늠하기는 힘들다. 부동산 정책에 정치논리를 들이대는 이상 시장에 역행하는 방안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실패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삼양동 재개발은 현재진행형이다.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요새 벤처 창업자들 사이에서 ‘기우제(祈雨祭) 지낸다’는 말이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비전펀드’에서 투자받기를 바란다는 은어다. 비전펀드는 각국의 될성부른 기업에 최소 1000억 원씩 투하하며 집중 육성한다. 투자받은 기업은 막대한 자금력에 힘입어 1급 개발자 등 최고급 인력을 빨아들이며 해당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업으로 성장한다. 기우제엔 ‘투자금의 단비’를 맞기를 기원하는 창업자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최근 이런 창업자들을 좌절시킨 일이 있었다. 창업자들은 외부 투자를 받으면 당장은 사업자금이 확보돼 좋지만 자신의 지분이 낮아진다. 때로는 경영권이 불안해져 처음부터 투자 유치를 주저하는 경우까지 있다. 한국은 ‘1주당 1개’의 의결권만 인정하는 ‘주주 평등의 원칙’을 고수하는 데에 따른 것. 벤처업계에선 1주당 2개 이상의 복수의결권을 주는 차등의결권 도입이 오랜 숙원이었다. 딱 2년 전인 2020년 1월 여당이 이를 간파하고 벤처기업에 차등의결권을 주기로 약속했다. 4·15총선을 두 달 앞둔 시점에 나온 더불어민주당의 제2호 공약이었다. 이해찬 당시 민주당 대표는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가 벤처업계에 도약의 날개를 달아주겠다”고 했고, 이인영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는 “민주당은 벤처 정당”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관련 법안 처리가 이후 지지부진하다 지난해 쿠팡이 차등의결권이 허용되는 미국 증시에 상장한 뒤부터 급물살을 탔다. 문제는 이달 초 이 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정식 안건으로조차 못 올랐다는 것. 법사위 여당 간사인 박주민 민주당 의원 등 강경파들이 “차등의결권이 재벌 세습에 악용될 우려가 있다”고 반발한 데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법안을 뜯어보면 여당 강경파들의 반대 논리가 무색해진다. 관련 법안에선 대기업에 대한 차등의결권은 원천 봉쇄됐다. 벤처기업이 기업집단(자산 총액 5조 원 이상)에 속하는 순간 차등의결권 효력이 없어진다. 창업자 지분을 상속·처분하면 보통주로 바꿔 세습 우려도 차단했다. 강경파들은 차등의결권 대신 무(無)의결권 주식을 도입하라지만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대안이다. 벤처 투자자들은 돈만 태우는 게 아니라 의결권을 갖고 기업을 함께 육성해 수익을 얻길 원하기 때문에 그간 무의결권 주식은 전무했다. 대기업 성장이 정체기에 접어든 가운데 벤처기업들이 한국 경제에 던지는 함의가 크다. 지난해 벤처 투자액이 10조 원을 돌파하는 등 사상 최대치를 나타내며 벤처기업들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대기업보다 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 지난해 벤처기업 전체 고용 인원(81만7000여 명)이 4대그룹 고용 인원(69만8000명)보다 훨씬 많다. 한국만 유별나게 차등의결권을 도입하자는 것도 아니다. 중국조차 ‘중국판 나스닥’인 커촹반(科創板)을 만들며 차등의결권을 허용하는 등 유니콘 기업이 많은 1∼4위국 모두 차등의결권을 인정한다. 글로벌 스타트업들도 이제 유니콘(기업 가치 1조 원)을 넘어 데카콘(기업 가치 10조 원)으로 향해 가고 있다. 시대가 이렇게 바뀌고 있는데 여당 강경파들은 “50년 넘게 주주 평등의 원칙을 지켜 왔다”는 낡은 사고로 재벌 타령을 하고 있다. 이는 벤처 투자 의욕을 꺾고 성장의 발목을 잡을 뿐이다. 적절한 보상으로 시장에 활력을 줘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선거철 감언이설이라도 내뱉지 말아야 한다. 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최근 유연한 실용주의를 강조하고 나섰다. 종합부동산세를 일부 완화하고 공시가격 제도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히는가 하면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를 유예해야 한다며 청와대와 맞섰다. 심지어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해제까지 거론했다. 현 정부의 신념과도 같은 부동산 대원칙에 반하는 발언을 연일 쏟아내는 걸 보면 노선이 달라졌는지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 후보를 최근 한 시간 반 넘게 인터뷰한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질 수 있다. 바로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를 유예해야 한다는 부분이다. 시장 친화적인 제스처로 보이지만, 그는 다주택자를 ‘타인의 주거 자유를 제한하면서 돈을 버는 투기꾼’으로 규정했다. 다주택자들이 전월세 가격을 올려 세입자가 이사 가도록 내몰아 주거 안정을 해친다는 것이다. 다만 당장은 거래가 얼어붙었으니 매물이 나오게 한시적으로 양도세를 낮춰줘야 한다는 취지였다. 과연 다주택자가 그러한가. 다주택자는 민간에서 전월세(임대주택)를 공급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과거 정부는 ‘전월세 시장 안정을 위해 다주택자의 주택 구입이 절실하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한 적도 있었다. 공공이 임대주택을 공급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들이 집을 사서 세를 줘야 임차 수요를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후보는 다주택자의 이 같은 순기능을 무시하고 (대통령 당선 시) 초반에는 탈출할 기회를 주되 그러지 않으면 부담을 확실히 지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주택자가 일정 기간이 지나도 주택을 내놓지 않으면 보유세와 양도세 모두 세율을 높여 벌주겠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는 새로운 방법이 아니다. 현 정부도 다주택자에게 양도세를 중과하겠다고 예고하고 1년 가까이 양도세 중과를 미뤄 줬지만 매물 유도 효과가 크지 않았다. 사람들은 제3자에게 매각하는 것보다는 가족에게 증여하는 방법을 택했다. 지방이나 수도권 외곽에 ‘멍청한 여러 채’를 보유했던 사람들은 핵심지 ‘똘똘한 한 채’로 정리해 서울 강남 집값은 더 올랐다. 비(非)핵심지역 비(非)아파트는 내놔도 1년 넘게 안 팔리는 게 현실이다. 민간 임대 공급이 위축되면 세입자가 거주할 집을 누가 공급하느냐는 문제에 다다르는데 이 후보는 이 지점에서 ‘기본주택’을 꺼내 든다. 땅은 국가가 갖되 건축물만 분양하는 것으로 기본주택을 최소 100만 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싱가포르 공공주택을 예시로 들었지만 토지가 국유화된 싱가포르와 그렇지 않은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이 후보는 토지를 국가가 수용해 수도권에 기본주택을 짓겠다는 생각이다. 재원도 문제지만 도심도 아닌 수도권 주택 수요가 얼마나 높을지, 임대주택이 시장에서 얼마나 통할지도 의문이다. 도심 공급을 늘리기 위해 재개발 재건축도 합리적으로 규제를 완화해 적정 이익을 보장해 주겠다고 하지만, 용도 변경 등으로 공공이 개입해서 발생할 민간의 이익을 환수하겠다는 방침은 확고하다. 국토보유세를 토지이익배당금제로 바꿔 보유세를 높이려는 기조도 토지공개념을 기반으로 했다. ‘경제 대통령’을 내세운 이 후보는 기본소득부터 기본주택, 기본금융에 이르기까지 ‘기본’을 자신의 브랜드로 굳히려 하지만, 시장을 진정성 있게 존중하는 기본을 얼마나 다졌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부동산은 자신 있다”는 이 후보의 모습이 “부동산은 자신 있다”던 임기 3년 차 문재인 대통령 발언과 정확히 겹쳐진다. 그는 아직 변하지 않았다. 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충북 청주시 내수읍 산속 마을. 널따란 잔디밭 주변에 2층짜리 아담한 단독주택 9채가 빙 둘러 서 있다. 청주 시내에 살던 건축가와 디자이너, 은행원, 자영업자 등 9가족이 의기투합해 만든 ‘소소다향’이라는 마을 공동체다. ‘더 적은 소유, 더 많은 향유’라는 의미를 담았다. 이들은 주말에 다 함께 잔디를 깎고 마을회관에 모여 차를 마신다. 때때로 공방, 북클럽, 밴드 등의 활동을 하고 바비큐도 구워 먹으며 대가족처럼 지낸다. 이런 고요한 마을이 최근 위기에 처했다. 지난달 말 종합부동산세 고지서가 날아오면서다. 올해 종부세가 8463만 원. 주택 9채 공시가격이 총 15억 원 남짓한 점을 감안하면 예상 밖이었다. 이전에도 종부세는 나왔다. 2019년 387만 원, 2020년 512만 원 등 가구당 50만 원 안팎으로 공동체 유지를 위해 필요한 비용으로 보고 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가구당 940만 원으로 연 5000만 원 정도 버는 이들이 내기엔 부담스러운 수준으로 뛰었다. 이는 소소다향이 2018년 마을 공동체를 ‘법인’으로 만든 데에서 비롯됐다. ‘더 적은 소유’를 내세운 만큼 부동산을 공동 소유하며 마을을 공동 운영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정부는 지난해 7·10부동산대책을 통해 법인에 부과하는 종부세율을 6%로 높였다. 법인을 투기세력으로 간주하고 최고세율인 6%를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납부 세액을 전년도 3배 이하로 제한하는 ‘세 부담 상한선’이 있지만 법인엔 이런 상한선이 적용되지 않는다. 소소다향 주택의 공시가격은 한 채당 1억7600만~1억9600만 원. 개인이 따로 소유했다면 종부세를 안 내도 됐지만 법인으로 공동 소유하면서 이 사달이 났다. 이들은 일단 종부세 납부 유예 신청은 하되 종부세 과세 불복 소송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는 이번에 ‘종부세 폭탄’ 지적이 나오자 “종부세 대부분을 법인과 다주택자가 낸다. 국민 98%는 무관하다”고 항변했다. 소소다향은 예외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이번에 이런 예외적인 폭탄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여럿이 농촌에 내려와 집 짓고 살면서 농사로 돈 버는 영농법인도, 임대주택으로 등록했다가 임대주택이 말소된 셰어하우스(공유주택)도 감당하기 힘든 종부세액을 고지받았다. 이런 법인을 꾸리는 이들은 상위 2%의 자산가도 아니고 투기세력과도 거리가 멀다. 정부는 법인과 다주택자를 일관되게 투기꾼으로 보고 이들의 주택에 높은 세금을 물리면 매물을 토해내 집값이 안정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시장은 다르게 반응했다. 정작 정책의 타깃이 된 이들은 주택 처분보다는 증여를 택해 매물은 생각만큼 안 나왔고 집값은 오히려 올랐다. 설령 종부세를 강화해도 매물이 나오게 유도한 뒤에 양도소득세를 강화했어야 했지만, 정부는 2017년 8·2대책에서 양도세를 먼저 강화해 주택 처분에 대한 부담을 높였고 2020년 7·10대책에서 종부세를 강화하는 등 정책 순서도 뒤죽박죽이었다. ‘더 적은 소유’를 내세워 마을을 이룬 서민들이 거액의 세금을 떠안게 되는 현실은 ‘부동산 보유에 대한 조세 부담의 형평성을 제고하고 부동산 가격 안정을 도모한다’고 명시한 종부세법 1조의 취지와 다르다. ‘2%의 국민’은 징벌적 세금을 내도 괜찮다며 국민을 갈라치기하는 단순한 인식은 종부세 부과 체계의 구멍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김유영 산업2부 차장 abc@donga.com}
최근 집값 상승이 주춤해지고 아파트 거래가 뜸해졌지만 젊은층 매수 비중은 여전히 높다. 주택 구매 주력 계층이 중장년층에서 청년층으로 이례적으로 넘어왔다. 젊을 때 전세 살면서 월급을 모아 자녀가 크면 집을 사는 ‘K-내 집 마련’ 공식이 깨졌다. 과거에는 적정한 준비만 되면 언제든 집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집이 당장 필요하지 않으면 무리해서 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주택 공급이 급감한 데다 겹겹의 규제로 집값이 급등하자 젊은이들이 “가만히 있다가 영영 집을 못 산다”는 불안감에 주택을 매수한 게 ‘패닉바잉’으로 불리게 됐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최근 주택을 매입한 젊은층을 심층 인터뷰하면서 이들의 생각을 날것으로 접할 수 있었다. 이번에 집 산 젊은이들은 내 집 마련 막차에 올라탔다며 안도했다. 집값이 워낙 높아진 데다 대출 규제가 강해지며 집 사는 길이 막혔다는 이유다. 이들은 자신이 산 아파트 가격이 계속 오르는 걸 보면서 집 사길 잘했다고 여겼고 주거 불안이 없어진 건 물론 삶에 여유가 생겼다고 했다. 월 100만∼200만 원 이자를 내기도 했지만 ‘금리가 더 올라도 집 없는 것보다 낫다. 감내하겠다’고 했다. 반면 패닉바잉 행렬에 합류 못 한 이들의 박탈감은 더 커졌다. 주택 마련은 어느새 결혼 선결 조건이 되어 소개팅에서 ‘서울 자가 보유’가 스펙으로 통하는 지경이 됐다. 2, 3년 전으로 돌아가면 사채를 쓰더라도 최대한 집을 많이 사두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임대아파트에 사는 한 30대는 “내년에 첫아이가 태어나는데 이곳에서 잘 키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들은 주택 보유 여부에 따라 인식차가 극명했고 향후 삶의 격차도 그 차이만큼이나 벌어질 수 있다고 여겼다. 흥미로운 점은 대다수가 ‘경기 아파트’도 ‘서울 빌라’도 아닌 ‘서울 아파트’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도 생활권을 벗어나는 곳은 안 사겠다는 등 ‘가상의 북방한계선’을 그려 놓는 경우도 있었다. 수도권 외곽에 보금자리를 꾸리고 가장이 콩나물 버스를 한 시간 이상 타고 출퇴근하며 희생하는 건 부모님 시대에 끝난 것이다. 수도권광역철도(GTX)를 깔아도 결국엔 지하철로 갈아타야 하는 신도시는 이들에게 무용했다. 신도시 분양 물량이 풀려도 청약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꽤 있었다. 정부가 3기 신도시와 사전 청약으로 공급을 늘리고 공급 시기도 앞당기겠다지만 젊은 실수요자 인식과 동떨어진 이유다. 결국 서울 도심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당연한 해법으로 귀결된다. 정부와 서울시는 자체적으로 공공 주도 개발을 추진하지만 지지부진하다. 그동안 옥죄어 왔던 재건축 재개발이 ‘질서 있는 정상화’를 향해 가야 한다. 주변 집값을 자극하지 않게 장기적 안목에서 큰 그림을 그려놓고 실제 사업이 진행되게끔 해줘야 한다. 부동산시장은 내년 대선을 최대 변수로 꼽는다. 대선 주자들의 부동산 공약에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젊은층이 패닉바잉 했던 마음과 패닉바잉 못 했던 마음을 읽는 사람이 유권자 마음을 살 수 있다. ‘열심히 일하면 나도 집 살 수 있다’는 당연한 믿음을 젊은이들에게 다시 심어주고 이를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김유영 산업2부 차장 abc@donga.com}
‘디에이치라클라스, 래미안라클래시.’ 최근 입주가 시작된 서울 강남권 아파트 명칭이다. 서초구 디에이치라클라스(The H La Class)는 건설사 브랜드(디 에이치)에 프랑스어 관사인 ‘La’를 썼고 지위나 계급이라는 영어 ‘Class’를 붙였다. 굳이 외국어를 써야 할까 싶지만 그래도 써야 한다면 관사가 프랑스어이므로 명사도 프랑스어 ‘Classe’여야 한다. 강남구 래미안라클래시(Raemian La Classy)는 건설사 브랜드에 ‘세련된’이라는 영어 ‘Classy’를 붙였는데 ‘프랑스어 관사’에 ‘영어 형용사’를 써버렸다. 프랑스어와 영어를 뒤섞은 데다 관사 뒤에 명사 아닌 형용사를 붙였다. 배타적이고 높은 지위에 있는 걸 표현하려는 것 같은데 어법을 보면 어쩐지 민망해진다. 요새 국적 불명의 알쏭달쏭 외국어로 만든 아파트 이름이 난무하고 있다. 블레스티지, 첼리투스, 원펜타스, 리버젠, 루센티아 등 영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와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까지 갖다 붙이며 외국인조차 의아해하는 이름이 봇물을 이룬다. 1990년대 전만 해도 지역이나 건설사 이름을 쓴 아파트가 많았다. 부르기도 기억하기도 쉬웠다. 그러다 분양가 자율화로 건설사들이 아파트를 매력적인 상품으로 소구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자 2000년대부터 롯데캐슬, e편한세상, 래미안, 자이 등 브랜드가 본격 등장했다. 이후 2015년 무렵 여러 건설사가 함께 재건축 재개발하는 경우가 많아지며 아파트명은 ‘고덕래미안힐스테이트’ ‘마포래미안푸르지오’처럼 여러 브랜드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여기에 단지 별칭까지 유행이 됐다. 최대 재건축 단지로 불리는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의 새 이름은 당초 에비뉴포레(Avenue Foret)였다. 숲길을 굳이 영어로 표현했다. 하지만 옆 동네인 송파구 올림픽공원이 가깝다는 걸 강조하자는 의견에 영어인 파크(공원)를 더해 ‘둔촌올림픽파크에비뉴포레’라는 12자의 아파트명이 탄생했다. 이처럼 리버(강), 메트로(역), 에듀(학교), 마리나(바다) 등 아파트 가치를 높여준다는 마법의 영어 단어까지 애용되며 아파트 이름은 장대해졌다. 신규 택지나 신도시라면 ‘이천증포3지구대원칸타빌2차더테라스’, ‘검단신도시2차노블랜드에듀포레힐’처럼 20자에 육박하는 이름이 가능해지는 이유다. 어느 아파트 브랜드 광고에서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고 했던가. 지역별로 집값 격차가 커졌고 같은 지역도 아파트 단지별로 철저히 계급화되는 현실에서 더 나은 곳에 살고 싶은 욕망을 나무랄 수 없다. 하지만 외국인조차 어리둥절해지는 기상천외한 아파트 작명법은 애처롭다. 구축에 살던 주민들이 앞장서 아파트에 새 브랜드 붙이는 게 유행했던 때 HDC현대산업개발은 압구정 현대 주민들에게 현대 아이파크로 바꿔 달라고 먼저 제안했다가 퇴짜 맞았다는 건 흥미롭다. 외국어가 모국어보다 우월할 것이라는 착각, 그 우월함을 내세워 외국어에 익숙지 않은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배제하는 모습이 나는 불편하다. 한글날을 맞이해 개나리 무지개 장미아파트 같은 한국어 아파트 이름을 새삼 떠올려 본다.김유영 산업2부 차장 abc@donga.com}
서울 주택 공급난이 극심해지면서 정부가 잇달아 공급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집값 상승세가 여전하다. 거래량이 줄긴 했지만 계약이 체결됐다 하면 최고 가격 기록이 나오고 있다. 금리를 올려도 대출을 조여도, 심지어 수도권에 신도시급 택지를 개발(3차 공공택지)하겠다고 해도 통하지 않고 있다. 이는 사람들에게 공급에 대한 확신을 여전히 심어주지 못한 이유가 크다. 정확히는 ‘서울 아파트’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공급대책에 이런 수요가 반영되지 못했다. 서울 내 대규모 택지를 통한 공급이 현 정부에서는 노원구 태릉골프장 등이 발표된 지난해 8·4공급대책이 사실상 마지막일 듯하다. 당시도 집값 급등세가 심해 정부가 서울 택지를 ‘영끌’했다는 말이 나왔다. 대책 발표 전 국토교통부 공무원들이 서울 유휴부지나 국공유지까지 샅샅이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보존가치가 낮은 그린벨트를 해제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서울 우면산 일대 등 강남권 그린벨트가 유력 후보지로 떠올랐다.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은 “그린벨트는 미래 세대를 위해 남겨놔야 할 보물과 같은 곳”이라며 반대했지만, 이 일대는 과거 택지로 지정됐다가 해제된 이력이 있어 유효한 카드였다. 하지만 예기치 않게 박 시장이 사망했고 서울시가 “시장님의 유지(遺旨)”라고 맞서자 문재인 대통령을 서울시에 힘을 실어주는 걸로 상황을 정리했다. 이 카드는 이후 주택당국에서 금기어가 됐고 이번에도 검토되지 못했다. 그린벨트는 1971년 영국 사례를 벤치마킹해 만들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 그린벨트의 원조 격인 영국에서는 최근 주택 공급난이 심해지자 보존 가치가 떨어진 그린벨트, 이른바 브라운벨트(brown-belt)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됐다는 점이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7년 만들어진 도시계획제도가 시대에 안 맞고 효율적이지도 않다”며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곳에 가서 살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현재 주택시장에 신규 진입해야 할 젊은이들이 집값 폭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상황에서 ‘미래 세대를 위한 보물’이라는 그린벨트 중에선 비닐하우스나 창고 등이 무질서하게 들어선 곳이 적지 않다. 과거에도 보존 가치가 낮아진 그린벨트가 일부 해제되며 보금자리주택이나 뉴스테이(민간기업형 임대주택) 사업지로 쓰이기도 했다. 그린벨트는 고도의 경제성장기에 도시 주변이 무분별하게 확장되는 도시 팽창(urban sprawl)을 막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수도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경제권역이 됐고 직주근접 주거 수요도 커지면서 각국 주요 도시는 메가시티로 도시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서울에 집 지을 땅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공공이 주도한다는 도심복합개발도, 민간 재건축·재개발 사업도 여전히 부진하다. 대선주자들이 저마다 ‘기본주택’ ‘원가주택’ ‘학교 위 주택’ 등을 외치고 있지만 실현 가능성이 낮거나 막대한 예산이 들어 미래 세대에 부담이 된다. 민간 규제 완화가 정공법이겠지만, 보존가치가 낮아진 지역을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도 시작할 때가 됐다. 따지고 보면 태릉골프장도, 이번에 공공택지로 지정된 일부 지역도 그린벨트였다. 어디는 풀고 어디는 못 푼다는 것도 형평성에 안 맞다. 자연은 보존되어야 마땅하고 녹지는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지만 이미 보존가치가 낮아진 지역은 조금 다르다. 올해로 쉰 살이 된 그린벨트를 잘 쓰기 위한 방안을 고민해 봐야 할 이유다.김유영 산업2부 차장 abc@donga.com}
회사원 서모 씨(34)는 지난해 서울 외곽에 아파트를 마련했다. 회사 동기들이 잇달아 집 사는 걸 보고 ‘더는 늦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절박감에 서둘렀다. 은행 대출은 물론 회사 대출까지 끌어다 산 아파트는 1년 사이 1억 원 넘게 올랐다. 아직도 오르는 집값을 보며 안도는 하지만 마냥 좋지만도 않다. 그의 집은 방 2개짜리 복도식 낡은 아파트. 회사까지 1시간 넘게 걸린다.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가 크면 학군 좋고 회사에서 가까운 동네의 30평대 대단지 신축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지만 그런 아파트들은 이제 로또에 당첨되어도 못 살 만큼 아득하게 올라버렸다. 그는 “지금 집에 평생 눌러앉을 수도 있단 생각을 하면 잠이 안 온다”고 했다. 젊은층의 패닉바잉 행렬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만 ‘영끌’해서 집을 사도 웃을 수만은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신이 종국에 살고 싶고 사고 싶은 아파트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올랐기 때문이다. 요새 중개업소에 나와 있는 매물들은 대체로 직전 실거래가보다 1억∼2억 원 높고 이런 매물조차 사겠다고 하면 집주인이 더 비싸게 팔려고 거둬들이는 경우가 다반사다. 오죽하면 집 보러 다닐 때 일회용 비밀번호(OTP) 생성기를 휴대하라는 말까지 나온다. 집주인 마음이 바뀌기 전에 바로 계약금을 쏘라는 것이다. 이렇게 무리해서라도 집 사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기에 ‘배짱 호가’로 나온 매물이 실제 계약되며 신고가가 잇따르고 있다. 이는 집값이 크게 올라 전체 수요가 줄기는 했지만 공급이 더 부족해지면서 시장이 철저하게 집주인 우위로 바뀐 영향이 크다. 실제 8월 첫째 주 서울 아파트 매매수급지수(한국부동산원)는 올해 3월 첫째 주 이후 최고치를 달리고 있다. 서울 도심에서 민간 재건축 재개발이 막혔고 공공 개발을 통한 공급도 더딘 상황에서 양도세제가 강화되면서 매물이 거의 실종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는 다주택자가 매물을 토해 내게 하려고 양도세를 중과해 ‘징벌적 양도세’ 체계로 만들어 놓은 것도 모자라 2023년부터는 다주택자가 1주택자가 되는 시점부터 양도세 장기보유특별공제를 해주기로 했다. 장기 보유에 따른 세제 혜택을 받으려면 빨리 집을 팔고 ‘1가구 1주택자’가 되라는 압박이다. 하지만 이들은 매매보다 증여를 택하며 매물은 시장에 나오지 않고 ‘똘똘한 한 채’로 정리하는 움직임이 강화되면서 결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지역 집값은 더 많이 오르게 됐다. 더 나은 동네, 더 좋은 집에서 더 잘살고 싶은 욕구는 시장주의를 지탱하는 힘이다. 다주택자를 죄악시하고 ‘1가구 1주택’을 강요하는 지금의 부동산정책은 ‘땡 없는’ 얼음 땡 놀이를 하라는 것과 같다. 다른 곳으로 움직이지 말고 현 자리에 눌러앉아 살라는 것이다. 살아보고 싶은 주택의 대출 길은 막혔고 이런 집을 전세 끼고 미리 사두는 일도 사실상 힘들어졌다. 주거 상향 이동 욕구(upward mobility)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성실한 시민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준다. 시장의 실패가 아닌 정책의 실패가 그래서 더 무섭다. 망가진 시장에서 누가 땡을 외쳐 줄 수 있을까.김유영 산업2부 차장 abc@donga.com}
경제 당국자들이 잇달아 ‘부동산 거품’을 경고하고 나섰다. 경제 사령탑인 경제부총리가 “집값이 고점에 가깝다. 수요자들이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고 포문을 열더니 금융위 부위원장은 “부동산시장에 검은 먹구름이 온다”며 “부동산 투자에 경각심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주택정책 수장인 국토교통부 장관 역시 “2∼3년 후 집값이 내려갈 수 있다”며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기)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들은 금리가 오르면 집값 오름세가 어느 정도 진정되길 내심 바라는 분위기다. 경제부처들이 이렇게까지 한목소리인 적이 있었나 싶지만, 돌이켜 보면 노무현 정부 때와 닮았다. 당시 ‘버블 세븐’으로 상징되는 집값 상승세가 서울을 넘어 수도권으로 번지며 민심이 악화되자 정부는 넘치는 유동성을 원망했다. 2006년 11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금융의 해이에서 부동산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국정홍보처는 바로 국정 브리핑에 “과잉 유동성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는 글을 실었고, 급기야는 김수현 당시 청와대 사회정책비서관이 한국은행 총재를 만나러 갔다. 시장에서는 정부가 ‘한은 독립성’을 무시하고 집값 잡으려 금리 인상을 압박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실제 한은은 그 전후(2005년 10월∼2008년 9월)로 8차례 기준금리를 올렸다. 하지만 금리를 올렸다고 집값이 떨어진 건 아니었다. 이 기간 수도권 아파트 값은 KB국민은행 통계를 기준으로 오히려 30% 상승했다. 보유세 강화, 양도세 중과, 토지거래허가 강화, 분양권 전매 제한, 재건축초과이익 환수 등 다방면에 걸친 수요억제책을 유지한 영향이 크다. 이번엔 당시의 수요억제책을 보다 강도 높게 가져다 쓴 데다 한은까지 가세해 미리 금리 인상을 예고했다는 게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하지만 부동산시장에서는 이번에도 금리가 올라도 집값 상승세 진화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론적으로는 하락할 수 있지만 여전히 집값 상승 요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당장 하반기 입주 물량이 전년 동기 대비 줄어들고 현 정부가 호언장담한 공급대책 역시 아직 손에 잡히지 않는다. 3기 신도시에 대규모 공급을 한다지만 입주까지는 10년 안팎 걸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내년 대선도 부동산시장엔 리스크 요인이다. 일부 대선 주자들은 현 정부 들어 실패한 수요억제책보다도 센 규제를 언급하고 있다. 결국 전방위적인 수요억제책을 풀고 서울 도심에 확실한 공급을 현실화하지 않는 상황에서 금리를 올리면 부자들은 감내하지만 한계가구만 고통받을 여지가 크다. 현 정부 초대 국토부 장관이 취임 초반 “살고 있는 집이 아니면 파시라”고 했지만, 그 말을 듣고 정말 집을 판 사람들은 지금 가슴을 치고 후회한다. 최근 집값이 다시 오르고 있다. 정부가 할 일은 국민에게 겁주며 ‘집 사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니라 실현 가능한 공급책을 무던하게 펼치는 것이다. 집값이 버블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판단하면 될 일이고 그 판단은 국민이 한다.김유영 산업2부 차장 abc@donga.com}
요새 결혼 앞둔 사람에게 물으면 안 되는 게 있다. 바로 신혼집에 관한 질문이다. 집값이 너무 올라 신혼집 마련까지 겪을 고충을 짐작하기에 자기 집인지, 전세인지는 물론 어느 지역인지 묻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오죽하면 ‘등기신분제’라는 자조까지 나올까. 자기 집 등기를 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이제는 넘지 못할 벽이 생겼다. 등기된 집이 있어도 그 집이 어디인지에 따라 사람들은 집으로 계급화되다시피 했다. 그래서인지 대통령은 올해 1월 “국민께 매우 송구한 마음”이라고 부동산 문제에 처음 사과했고 5월에도 “(재·보궐 선거 참패로) 죽비를 맞고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심판을 받았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부동산특위를 꾸리고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집값 오름세는 아직도 멈출 줄 모르고 있다. 이는 수요가 여전한데 공급은 늘지 않는 상황에서 갖가지 규제까지 더해지면서다. 현 정부 출범 이후 매년 개편한 양도소득세가 대표적이다. 주택 보유 지역과 기간, 주택 수에 따라 양도세가 달라져 세무사조차 계산하기 쉽지 않다. 거래에 따라오는 양도세는 거래세로 보고 보유세가 높으면 거래세를 낮춰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양도세가 소득세에 가깝다는 입장이어서 세율을 잇달아 올려 급기야 이달 1일부터는 양도세 최고세율이 75%에 이르게 됐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집주인들이 지방 아파트는 내놓을지언정 똘똘한 아파트는 증여세를 물고 자식에게 물려주는 한이 있더라도 시장에 던지지 않는다. 올 하반기 입주 물량이 줄어드는 등 공급이 원활치 않은 상황에서 매물 잠김까지 심해지며 시장은 ‘거래 빙하기’로 들어설 조짐이다. 연초 매물 유도를 위한 양도세 완화설이 잠깐 나왔었지만, 정부와 여당은 즉각 부인했다. ‘집으로 돈 버는 사람 없게 하겠다’는 철학 근간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집값 불로소득은 사회에 환원되어야 한다”는 최근의 총리 발언이 이를 드러낸다. 이달 1일 현 정부의 부동산정책 설계자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지 모르겠다. 양도세 외에도 종합부동산세의 세율 역시 최고 6%로 올라 취득세(최고 세율 12%·지난해 8월 시행)까지 감안하면 주택의 ‘매입-보유-처분’의 모든 단계에서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체계가 됐다. 여기에 전월세 신고제까지 이날부터 시행돼 임대차법까지 완결됐다. 겹겹의 규제에 자신감이 붙어서인지 경제부총리는 최근 “집값이 오를 데까지 올랐다”고 했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집값이 떨어졌다는 이유지만, 사람들은 집값이 한때 떨어져도 오를 때는 이전 하락폭을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로 급등할 수 있음을 이번에 경험했다. 더욱이 지금은 당시보다 금리가 낮고 수도권 공급 물량도 당시보다 적을뿐더러 규제 역시 월등히 많아졌다. 한 경제학자는 최근 해외 경제학자들과의 화상 토론에서 ‘극단적인 규제’가 단기간에 쏟아진 한국 부동산 시장이 어떻게 바뀔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부작용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무주택자들은 극심한 자산양극화에 허덕이며 절망한다. 대통령이 진정 정신이 번쩍 들었다면 시장 거스르는 부동산 철학부터 다시 살펴봤으면 한다.김유영 산업2부 차장 abc@donga.com}
“남양유업 제품인지 확인해 보세요.” 스마트폰 앱에 제품 바코드를 스캔하면 남양 제품인지 아닌지 알려준다. ‘남양유없’이라는 앱으로, 하필이면 ‘없다’의 ‘없’을 썼다. 이를 만든 개발자는 제품을 알리기 위해 만들었다지만 영업 방해 혐의를 피하기 위한 설명이고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 남양은 2013년 대리점 갑질 사태로 불매운동이 거세지자 브랜드 숨기기로 일관했다. 아이스크림점인 ‘백미당’을 열며 남양 브랜드를 드러내지 않았고, 자회사 남양F&B는 아예 ‘건강한사람들’로 사명을 바꾸고 편의점 등에 납품하는 제품에서 남양 이름을 지웠다. 그런 의미에서 ‘남양유없’은 불매운동 목적이 크다. 이렇게 특정 기업에 8년간 끈질기게 불매운동이 이어진 건 드물다. 대리점 갑질 사태 직전인 2012년엔 600억여 원 흑자였지만 이듬해 바로 적자로 돌아섰고 지난해엔 700억여 원의 적자를 냈다. 전문가들은 대리점 갑질 사태로만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아니라고 단언한다. 남양은 위기 대응 과정에서 오히려 화를 키웠다. 대리점주들이 본사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일 땐 침묵하다가 본사 영업사원이 대리점주에게 막말로 통화한 내용이 공개되고 나서야 사과했다. 하지만 책임 있는 회장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회사 측은 피해 대리점주를 고소하기까지 했다. 진정성 있는 사과로 보기 어려웠다. 경쟁사를 비방하기도 했다. 맘카페에 ‘매일유업 제품에서 쇠맛이 난다. 목장이 원전에서 가까워 그렇다’는 글이 잇따랐다. 경찰이 범인을 잡고 보니 남양유업 광고대행사 직원이었다. 남양 측은 “실무자가 대행사와 협의하면서 벌어진 일”이라며 실무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발뺌하기에 급급했다. 이번에 불가리스가 코로나19 억제에 효과가 있다고 발표한 것도 비슷하다. 식품에 의학적 효과가 있다고 밝히는 것은 극도로 신중해야 한다는 게 식품업계 상식이지만, 내부에서 아무도 제동을 걸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사내 등기이사 4명 중 3명은 회장과 회장의 장남, 회장 어머니다. 장남은 회삿돈으로 고급 외제차를 빌려 자녀를 등교시켰다는 의혹이 나와 보직해임됐다. 경영학계에서 이런 남양 사례는 위기관리 대참사로 통한다. 남양은 한때 업계 1위를 달렸다. 40대 이상이라면 기억할 법한 ‘우량아 선발대회’를 1971년 처음 연 곳도 남양이고, 금유(金乳)로 불릴 만큼 귀하던 분유를 1967년 처음 국산화해서 널리 보급한 곳도 남양이다. 아기를 튼튼하게 키우라는 창업주 뜻에 시장은 남양 주식을 주당 100만 원이 넘는 황제주로 대접했다. 하지만 대리점 갑질 사태 이후 남양 주가는 30만 원대로 떨어졌고 시가총액 역시 3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위기가 발생하면 책임 있는 사람이 조속히 나서서 잘못을 구체적으로 인정하며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는 게 기본이다. 하지만 남양은 이를 지키지 못했고 위기 대응 과정에서 위기를 더 키우고 위기가 끝난 뒤엔 비슷한 위기를 반복했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기본을 저버리면 한순간에 존립을 위협받는다는 걸 그대로 보여줬다. 김유영 산업2부 차장 abc@donga.com}
회사원 최모 씨(36)는 자정이 다가오면 스마트폰을 꺼내 든다. 막 개장한 미국 증시에서 주식을 거래하기 위해서다. 최근엔 암호화폐로 투자 영역을 확장했다. 오전 서너 시에 잠들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는 “월급만 모아서 언제 집 사냐”며 “어차피 승진에는 큰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의 친구 서모 씨(35)는 5년 가까이 일정한 직업이 없다. 시간은 많으니 10분 간격으로 주식 앱을 들여다보며 투자한다. 돈이 떨어지면 아르바이트를 한다. 연애는 하지만 결혼 생각은 없다. 서 씨는 “결혼하려면 집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로선 버겁다”고 말한다. 직업이 있건 없건 전업 투자자처럼 주식 거래를 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과거엔 전업 투자자라면 모니터 여러 개를 두고 골방에서 복잡한 차트를 들여다보는 사람을 떠올렸지만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로 투자할 수 있고 투자 정보 장벽도 낮아졌다.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젊은이가 전업 투자자일 수도 있다. 이들에게는 집값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는 절망감이 배어 나온다. 젊은층이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기)로 집을 산다지만 영끌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영끌할 종잣돈이 없는 이들에게는 주식 투자가 유일한 탈출구인 셈이다. 비혼과 비출산을 택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점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일찍이 해외여행을 다니고 인테리어 잡지에 나올 법한 집을 보며 눈높이가 높아졌지만 앞으로의 소득이 빤한 상황. 하지만 다가올 생애주기에서 자신이 누리는 삶의 질을 더 끌어내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부의 상징이라는 조혼(早婚)과 다산(多産)의 대척점에 서서, 혼자라도 적게 벌고 적게 쓰면 된다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전업 투자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의 정서를 다르게 분출하는 것일지 모른다.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저금리에 돈이 많이 풀려서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통화량(M2·광의통화)은 역대 최대 수준이 됐지만 이 돈이 실물경제에 얼마나 흘러들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통화 승수(M2/본원통화)는 역대 최저다. 돈이 많이 풀려도 실물경제로 흘러들어 오지 못하고 주식이나 부동산 등 자산시장에 고여 있다. 좋은 산업도, 좋은 직업도 나오기 점점 힘든 구조가 되고 있다. 근로소득이 아니어도 돈을 벌 방법은 많다. 열심히 일해서 좋은 집을 사기도 어렵다. 한국경제연구원의 설문에서 소득 향상을 위해 중요한 수단으로 ‘주식과 부동산’을 꼽은 응답자가 32.9%로 ‘업무역량 강화와 승진’(14.9%)보다 많았다. 하지만 ‘노오력’이 조롱받고 월급이 평가절하되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회사원들이 월급 받는 걸 두고 ‘현금을 채굴한다’는 자조가 나온다. 어떤 이들에게는 회사가 종잣돈을 지급받는 ATM이 되어버렸다. 이는 개인에게는 일의 가치가 달라지고 기업에는 혁신 공식이 달라지고 국가에는 성장동력이 달라진다는 뜻일 수 있다. 산업구조가 날로 격변하지만 성장은 멈춰버린 ‘수축경제’ 시대에 전업 투자에 빠진 젊은이들의 희망과 절망, 냉소와 체념을 읽어내지 못하면 한국 경제에 미래는 없다.김유영 산업2부 차장 abc@donga.com}
일전엔 공공임대를 강조했지만 이번엔 공공개발을 들고나왔다. 정확히는 공공이 직접 시행하는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사업(공공 직접시행)으로, 올해 2·4공급대책에서 발표한 도심 공급 방안이다. 지지부진한 도심 재개발·재건축 사업에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같은 공공이 토지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개발하겠다는 것으로, 사업 속도를 높여 아파트 공급 시기를 앞당기겠다는 구상이다. 지난해 8·4공급대책에서 공공과 민간이 함께 추진하는 방안으로 내놓은 공공재건축 및 공공재개발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우선 ‘용적률은 공공의 것’이라는 정부 뜻에 따라 늘어난 용적률 일부를 공공에 내줘야 하는 점은 공통된다. 다만 공공재건축과 공공재개발이 늘어난 물량 절반을 주로 공공임대로 채우는 것과 달리 공공 직접시행은 늘어난 물량 상당수를 공공 분양한다. 공공임대 위주 공급을 펼쳤던 정부가 ‘내 집 갖고 싶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뒤늦게라도 읽고 분양 위주로 바꾼 건 바람직하다. 문제는 공공 직접시행으로 도심 아파트 물량이 얼마나 늘어날지다.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 변창흠 장관은 “민간 호응이 좋다”고 했지만, 정작 재건축 단지들은 “민간 재건축을 추진한다”는 현수막을 보란 듯이 내걸고 있다. 공공 직접시행을 추진하면 오히려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다. 자체 재건축이 힘들어서 공공재건축을 검토해 보겠다는 단지마저 조합원들이 공공 직접시행 개발에는 반기를 들었다. 사업이 조합원 의도와 다르게 추진되면 어떻게 하느냐 등의 우려다. 현금청산 규정도 논란거리다. 대책 발표일인 이달 4일 이후 집을 산 사람들은 해당 구역이 공공 직접시행 정비사업에 포함되면 나중에 아파트 입주권을 못 받고, 현금을 받고 주택을 처분해야 한다. 현금청산은 도심 외곽 신규 택지 지정에는 효과가 있지만, 땅 주인이 얽히고설킨 도심에 적용하는 건 좀 다른 문제다. 공공 직접시행 대상인지도 모른 채 집 산 사람은 집에서 쫓겨나가야 하고(사용권한 침해), 이미 해당 구역에 집을 가진 사람도 현금청산 우려로 집을 팔려 해도 팔지 못하는 상황(처분권한 침해)에 빠진다. 현장에서는 ‘현청’(현금청산)당할까 두렵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래서인지 2·4대책 발표 이후 다세대 다가구 밀집지에서는 매매 거래가 얼어붙었다. 감정가보다 낮은 금액을 현금으로 받고 집을 내줘야 하는 상황을 반길 사람은 없다. 오히려 공공 직접시행 가능성이 매우 낮은 신축 대단지와 강남 재건축 단지의 집값이 다시 오르고 있다. 내 집을 마련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다시 한번 절망하고 있다.수요에 맞춘 공급을 하려면 도심 외곽에서 변죽을 울릴 게 아니라 도심 아파트 공급이 필수다. 정부는 민간 재건축 규제 등은 그대로 놔둔 채 공공 직접시행이야말로 '확실한 혜택'을 주는 방안이라며 조합들이 여러 정비 방안 중 공공 직접시행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시장은 공공 직접시행을 혜택(benefit)이 아닌 리스크(risk)로 받아들인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황에서 저마다에게 각별한 땅문서 받아내기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사람들은 시장 원리에 따라 이익을 보장 받길 원하지 공공으로부터 이익을 배분받고 싶어 하진 않는다. ‘공공이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서울 아파트 공급 부족은 심화되고 부처의 명운을 건다 해도 서울 집값 안정은 힘들 수 있다.김유영 산업2부 차장 abc@donga.com}
미국 뉴욕 맨해튼 서쪽 허드슨강변 인근. 계단 2500개가 나선형으로 벌집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방문객들은 이 15층짜리 건물 계단을 탐험하듯 오르면서 강변을 바라보기도 하고 건물 내부도 감상할 수 있다. 수많은 계단들이 식물의 가느다란 물관처럼 뻗어 있다 해서 베슬(vessel)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주변에는 100층 넘는 초고층 빌딩을 포함한 빌딩 10개가 들어섰다. 사무실과 호텔, 쇼핑몰, 아파트까지 고루 있어서 ‘도시 속의 도시’로 꼽힌다. 맨해튼 스카이라인을 바꿔놓았다고 평가받는 허드슨 야드(Hudson Yards) 프로젝트다. 허드슨 야드는 미국 부동산 개발업체인 릴레이티드가 250억 달러(약 28조 원)를 투입해 개발한, 미국 역대 최대 개발 사업으로 꼽힌다. 당초 이곳은 낙후된 철로 부지가 있어서 골칫덩이였다. 1950년대부터 개발이 추진됐지만 번번이 좌초됐다. 그러다가 2010년 뉴욕시장이었던 마이클 블룸버그가 적극적으로 개발을 추진했다. 반세기 넘게 지지부진했던 사업을 현실화하기까지는 과감한 세제 혜택이 한몫했다. 민간개발업체에 세금 대신 세금보다 낮은 부담금을 부과한 것. 개발업체 입장에서는 어차피 세금을 내야 했는데, 기존에 내야 했던 세금보다 적은 금액을 내니 세제 감면 혜택을 받은 셈이다. 사업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사업성이 높아지니 개발업체도 기꺼이 사업에 참여했다. 뉴욕시가 추진하는 사업인 만큼 물론 뉴욕시 산하의 공공기관인 ‘허드슨야드기반시설개발공사’도 개발에 참여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업성이 우선이었던 만큼 개발업체에 별도의 부담을 지우지 않았다. 공사는 예산과 자금 조달, 비용 절감을 맡았다. 개발업체에서 받은 비용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해서 자금을 조달했고 이를 사업 재원으로 보탰다. 공원을 조성하고 도로를 닦았으며 채권 원금과 이자를 상환했다. 개발업체도 우리 돈으로 7조 원 안팎을 감면받을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건물이 엄밀히는 공중에 떠 있는 상태로 건설된 것이다. 뉴욕시는 철도역을 그대로 남겨둬야 해서 철도 차량기지를 계속 운영했다. 첨단 건설 공법을 바탕으로 기지 위에 덮개를 설치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땅값이 부담이고 주택을 새로 지을 곳이 마땅치 않은 서울에서 이런 구상이 아마도 누군가에게는 매혹적으로 들렸을 것 같다.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이 도심개발방식으로 허드슨 야드를 언급했다.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장 후보들 역시 주택 공급을 늘리겠다며 ‘철로 위 주택’, ‘도로 위 주택’ 등을 지어서 공급을 늘리겠다는 공약을 경쟁적으로 내걸고 있기도 하다. 노후된 지역을 개발하고 부족한 주택을 늘려보겠다는 구상은 좋지만 어디까지나 돈이 문제고 사업성이 문제다. 정부가 개발이익을 철저하게 환수하는 기존 철학을 바꿀 가능성이 당장은 크지 않아 보인다. 이들이 뉴욕시처럼 민간 참여를 실질적으로 유도하는 철학까지 같이할지는 의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철로든 도로든 그 위에 어떤 건물을 올린다 해도, 그 구상은 신기루에 그칠 수 있다. 김유영 산업2부 차장 abc@donga.com}
다음 달 발표될 주택 공급 대책에 관심이 높다. 대통령이 공급 대책을 주문한 건 늦었지만 다행이다. 주무 부처 장관이 공급론자인 점도 반갑다.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은 “서울에 집 지을 공간은 충분하다”며 도심 역세권과 저층 주거지 개발 방안 등을 거론했다. 단, 이런 공급에 전제를 달아 놓았다. 공공이 개입해서 개발하고 공공이 개발 이익을 환수 해야 한다는 것. 다음 달 대책에서도 이런 철학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이는 토지공개념을 바탕으로 토지에 대한 이윤을 환수해야 한다는 19세기 사상가 헨리 조지의 철학에 영향받은것으로 보인다. 변 장관은 학부 시절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을 읽고 주거 문제에 관심 갖게 됐다고 했다.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설계자로 알려진 김수현 세종대 교수와 함께 ‘조지스트’로 꼽힌다. 헨리 조지는 부의 상당 부분이 토지 소유자에게 지대(rent) 형태로 옮겨지므로 불로소득(unearned income)이 불평등의 원인이라 주장했다. 토지는 한정돼 있는데 노력 없이 토지를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소득을 거두는 게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 그는 토지에 세금을 매겨 불로소득을 차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사상은 노동운동이 위축됐던 유럽에서 큰 호응을 받았고 국내에선 유신 독재시절 대학생들 사이에서 읽혔다. 우연인지 헨리 조지의 그림자가 곳곳에서 드리운다. ‘어용지식인’을 자처한 친여(親與) 인사는 최근 헨리 조지를 언급하며 “부동산 세금이 너무 헐렁하다. 불로소득에 더 높은 비율로 과세하는 게 합당하다”고 말했다. 현재 보유세와 거래세 등이 대폭 올랐지만 집값 상승세가 세금이 낮아서 빚어진 것처럼 말했다. 그런가 하면 현 법무부 장관은 여당 대표 시절 “헨리 조지가 살아 있었다면 땅의 사용권은 인민에게 주되 소유권은 국가가 갖는 중국식이 타당하다고 했을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한 게 있다. 헨리 조지가 제안한 건 토지에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건물을 짓거나 조경을 하는 등 인간의 노력을 투입해 토지가치를 높이는 행위엔 세금을 매기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토지 가치를 높이는 노력을 저하시키면 안 된다는 것으로 지금으로 치면 부동산 개발엔 적극적이었던 셈이다. 드넓은 땅이 있던 19세기 미국과 주택 공급에 허덕이는 21세기 한국은 다르다. 더욱이 지금은 건설공법 발전으로 인위적인 노력을 들여 건물 지을 공간마저 ‘창조’할 수 있는 시대다. 시장은 민간 재건축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분양가상한제와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 등을 통해 시세차익 환수 장치를 두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많은 재건축 단지들이 낮은 사업성을 이유로 사업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공공재개발이든 공공재건축이든, 역세권 개발이든 빌라촌 개발이든 결국은 수많은 개인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게 관건이다. 인구 밀집도가 극도로 높은 특성상 서울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높지만, 개발에 대한 이익을 적정 규모로 인정해 주지 않고 이런 수요를 획기적으로 만족시켜 주지 못하면 역시나 그저 그런 대책 중 하나가 될 확률이 높다. 인간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동물이다. 김유영 산업2부 차장 abc@donga.com}
“아, ‘밸류’가 너무 높아, 높아.” 20년 넘게 벤처투자업계에 몸담아온 A 씨는 최근 벤처기업 설명회(IR)에 참석할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린다. ‘될성부른 기업’ 같아 투자할까 싶다가도 ‘밸류’(valuation), 즉 기업가치가 생각보다 높게 평가돼 투자가 망설여진다는 것.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리면서 벤처기업에 뭉칫돈이 몰렸고 그만큼 기업 몸값도 높아졌다. 투자자금 회수(exit)를 염두에 두고 투자해야 하지만 기업가치가 높아 지분을 비싸게 사야하고 이 경우 지분을 되팔아 회수할 때 수익이 줄어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확산에도 불구하고 벤처업계에서는 유례없이 돈이 많이 풀렸다. K유니콘을 육성하겠다며 의욕적으로 정부 예산이 집행된 영향이 크다. 이렇게 풀린 돈이 벤처기업의 성장 버팀목이 되고 있지만, 정작 벤처투자자들은 투자할 곳을 발굴 못해 애를 먹고 있다. 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1000억 원이 넘는 대형 벤처 펀드가 지난해 12월 22일로 50개를 넘어섰다. 2010년까지 단 1개였던 1000억 원 규모의 펀드는 2015년 15개였다가 2020년 들어 급증했다. 2017년 2조3800억 원에 그쳤던 벤처투자액은 2020년 5조 원 돌파가 확실시되고 있다. 이처럼 벤처기업 투자가 늘어난 건 고무적인 일이다. 기업이 투자액을 종잣돈 삼아 혁신을 시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자액에 비례해서 기업이 실제 성장하지는 않는다. 4000억 원 가까이 투자금액을 유치한 한 기업은 6년째 적자다. 물류망 투자비용이 막대해 손익분기점(BEP)을 넘기려면 갈 길이 멀다. 마찬가지로 2000억 원 넘게 투자받은 또 다른 스타트업은 경력직을 뽑을 때 전 직장의 1.5배로 연봉을 높여주겠다는 파격 대우를 제시하지만 여전히 적자다. 두 기업 모두 투자받은 금액으로 버티고 있다. 한 벤처투자자는 “투자한 기업 현황을 들여다봤더니 기업 대표부터 임원들이 모조리 법인 명의로 된 신형 외제차를 굴리고 있었다”고 토로하기까지 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K유니콘 프로젝트’를 벌인다며 2021년까지 유니콘 기업을 20개 육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유니콘 기업은 기업가치 10억 달러(약 1조1000억 원)가 넘는 비(非)상장기업을 가리킨다. 글로벌 기업정보업체인 CB인사이트에 유니콘으로 인정받은 국내 기업은 이제 10개 안팎이다. 정량 지표에 매달리다보니 기업 가치 산정이 자의적으로 이뤄질 때도 있다. 스타트업 육성이란 숙제를 떠안은 한 국책은행은 기업 지분 투자에 들어가며 일부러 기업 가치를 높게 산정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A 씨는 2년 차 투자 심사역이었던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벤처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졌던 걸 기억한다. 당시 투자한 기업 중에서 여전히 기업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기업은 극히 일부다. 사실 ‘관제 유니콘’은 탄생하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규제 완화 등에 힘써서 실질적으로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줘야 할 때다. 20년 뒤 A 씨가 자신이 투자했던 기업들을 살펴봤을 때에도 내실 있게 기업 경영을 이어가는 기업들이 남아 있었으면 한다. 김유영 산업2부 차장 abc@donga.com}
올 한 해는 전 국민이 ‘집값 우울증’에 빠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싼 아파트는 더 비싸졌고 서울에서 서민 아파트로 통했던 곳도 로또 당첨금에 육박할 만큼 올랐다. 더 나은 동네, 더 좋은 집에 이사 가려던 사람들은 대출 등 규제에 막혔고, 집 없는 사람들의 내 집 마련 기회는 더 멀어지게 됐다. 올 초만 해도 매수세는 뜸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시장이 표면적으로는 잠잠했지만 다주택자에 대한 각종 규제로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돈 좀 있는 사람들은 강남 아파트를 사들였다. ‘똘똘한 한 채’ 보유로 굳어지며 강남 집값은 조용히 오르고 있었다. 코로나19 확산이 주춤해진 늦봄이 되자 강북 부동산중개업소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강남 투기 수요를 잡겠다고 9억 원이 넘는 아파트에 대출 규제를 하자 강북 아파트 값이 뛰기 시작했다. 여기에 실수요자에게 대출 한도를 늘려주겠다면서 6억 원 이하 아파트 대출 요건이 완화되자 이른바 노도강(노원 도봉 강북구) 금관구(금천 관악 구로구) 아파트 값까지 급등했다. 통상 노도강 금관구가 오르면 시장 끝물로 여겨졌지만 올해는 예외였다. 전직 서울시장이 10년간 재임하는 동안 특정 시점까지 사업 진척이 없으면 정비구역에서 해제하는 등 재개발 재건축 사업을 틀어막아 공급이 달린다는 점을, 올여름 젊은 사람들은 영민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공급 부족으로 집값이 오른다는 걸 뒤늦게 인정해서인지 정부는 공급대책을 내놨지만 경기 위주였고 서울 물량은 턱없이 적었다. 사람들이 살고 싶은 집, 사고 싶은 집과도 거리가 있어 집값 상승세는 여전했다. 임대차법 시행으로 전세대란에 지친 사람들까지 아파트 매수에 가세해 집값 상승세는 더욱 가팔라졌다. 이번엔 정부가 수도권 대부분 지역을 규제지역으로 묶었다. 그랬더니 투자 수요가 지방으로 향했다. 가을로 접어드니 지방의 똘똘한 한 채에 돈이 몰려 부산 해운대구·수영구, 대구 수성구, 인천 연수구(송도국제도시), 대전 서구 등이 뛰었고, 최근엔 부산과 대구가 규제지역으로 지정되자 창원 울산까지 들썩이고 있다. 지방에서조차 15억 원이 넘는 아파트가 속속 나오니 서울 집값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것처럼 보일 지경이 됐다. 그렇다 보니 요샌 서울 강남과 재건축 아파트 위주로 서울 집값에 다시 불이 붙었다. 전국을 순회한 집값 상승세가 도돌이표로 서울로 돌아오면서 이제는 서울과 지방 가리지 않고 단지별로 최고 가격기록이 나오고 있다. 올 한 해를 돌이켜 보면 정부는 매번 투기 세력을 잡겠다며 규제 보따리를 쏟아냈고 규제가 나올 때마다 집값은 보란 듯이 더 튀어 올랐다. “규제 불쏘시개로 전국을 ‘불장’으로 만들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주택정책 주무 부처인 국토교통부 장관이 바뀐다지만 현 정부 부동산정책의 설계자로 불리는 전직 대통령비서실장의 그림자는 여전하다. 가격 통제 등 정부 개입, 개발이익과 시세차익의 공공 환수, 공공 주도 개발 등의 기조는 크게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념과 신념에 가까운 부동산 철학을 바꾸지 않으면, 이런 시장의 흐름 역시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유영 산업2부 차장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