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룡

구자룡 기자

동아일보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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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구자룡 기자입니다.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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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4~2024-12-04
남북한 관계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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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3%
정치일반3%
기타60%
  • 한국을 구한 맥아더의 집념, 인천상륙작전[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대부도와 선재도를 지나 도착하는 영흥도는 시화방조제로 직선 도로가 뚫렸어도 인천항에서 자동차로 1시간 20분 가량 걸리는 곳. 여기에 세워진 ‘해군 영흥도 전적비’ 아래에는 임병래 중위 등 해군 8명과 대한청년단방위대원 6명 전사자 명단이 화강암에 새겨져 있다. 눈길을 끈 것은 이들의 사망 날짜. 1950년 9월 14일과 15일, 인천상륙작전 전날과 당일이다. 맥아더가 이끄는 미 10군단 주도의 유엔군 인천상륙작전이 순조롭게 이뤄진데는 한국 해군과 민간인 청년 대원들이 희생을 무릎쓰고 인천 앞바다 길을 열어 놓은 것도 큰 기여를 했음을 보여준다. ● 상륙전 인천 앞바다 정지 작업과 양동 작전 영흥도는 인천항으로 가는 유일한 해로인 비어수로(飛魚水路)의 입구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 상륙작전을 앞두고 해군은 8월 18일과 20일 덕적도와 영흥도를 차례로 탈환했다. 적 40명을 사살하고 100여명을 포로로 잡는 과정에 아군도 4명이 전사했다. 이중 박동진 중사의 이름을 딴 유도탄 고속정도 진수됐다. 미군 유진 클라크 대위가 이끄는 ‘클라크 첩보대’는 9월 1일부터 영흥도를 거점으로 청년단을 조직하고 켈로(KLO) 부대와 함께 월미도, 인천 및 서울 시내까지 대원을 파견해 북한군의 해안포대 수량 및 배치, 북한군 병력 상황 등을 파악하는 ‘x-ray 작전’을 수행했다. 그런데 상륙작전 직전인 14일 북한군 1개 대대 규모 병력이 영흥도를 기습했다. 소수만 지키고 있다가 대부대의 공격을 받아 피해가 컸다.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대원은 다른 대원들이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해 퇴각하지 않고 남아 적과 맞섰다. 둘만 남은 뒤 포로로 잡힐 경우 상륙작전 비밀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남겨 두었던 총알로 자결했다. 클라크 첩보대와 KLO 부대는 상륙작전 전날 비어수로를 비추는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는 ‘트루디 잭슨 작전’을 무난히 수행해 15일 0시 30분 등대를 점화했다. 상륙작전을 시작하라는 ‘봉화’를 올렸다.맥아더는 상륙 사흘전인 12일 미영(美英) 혼성 부대가 군산에서 소규모 상륙작전을 벌이도록 했다. 하루 전날에는 삼척에서 함포 사격을 실시했다. 상륙 당일에는 포항 북쪽 낙동강 방어선의 북한군 뒤편 장사동에서 ‘명작전’으로 불리는 학도병 주도의 상륙 양동작전을 벌였다. ● 상륙작전보다 더 어려웠던 내부 설득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8월 23일 도쿄에서 열린 전략회의가 열렸다. 맥아더는 콜린즈 육군참모총장 등 다른 참석자들은 “토의가 아니라 계획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려고 했다”고 회고했다(맥아더, 189쪽)해군은 조수와 지형이 상륙에 위험하다, 썰물 때는 과거 수백년간 황해에서 밀려와 쌓인 진흙이 부두에서 2마일까지 뻗쳐 있다. 비어수로는 조수가 6노트 속력으로 드나든다. 기뢰를 부설하기 좋고, 취약 지점에 배가 침몰하면 다른 배가 통과하기 힘들다. 수륙양용부대가 월미도를 2시간 이내에 무력화해야 한다. 오후 밀물 이후에는 밤을 보낼 교두보를 확보해 다음날까지 견뎌야 한다. 반대하는 이유가 끝이 없었다. 육군은 현재 전투지역에서 너무 멀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제1 해병 여단을 빼면 방어선이 위태로워진다. 서울을 탈환해도 미 8군과 연계되기 어려워 상륙부대가 고립될 수 있다. 차라리 군산으로 상륙하자. 맥아더는 “인천으로 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령관을 임명하라”고 버텼다. 맥아더의 비서 로우니는 “맥아더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벌어졌던 세계 역사상의 주요 전쟁에 대해 6시간 동안 열변을 토하며 인천상륙 작전의 필요와 성공 가능성을 설득해 동의를 받아냈다”고 했다. 그는 회의 후 참모들에게 “인천상륙작전은 세계 역사를 통틀어도 22번째 위대한 전투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로우니, 58쪽)맥아더는 “북한도 인천상륙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오히려 기습을 해야 한다. 군산은 상륙해도 방어선 좌측에 병력을 조금 보태는 의미밖에 없다. 인천을 거쳐 서울을 점령해야 적의 보급로를 끊는다”고 주장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아니면 희생을 내는 전투를 무한정 계속해야 한다. 여러분은 장병들을 도살장 소처럼 피비린내나는 방위선에 두기 원하는가? 이 순간에도 운명의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 앞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상륙작전은 반드시 성공하고, 10만의 생명을 구할 것이다.”(맥아더, 195쪽)● 인천, 상륙에 불리한 요소 다 갖춰 ‘성공 확률 5000분의 1’ 인천 앞바다 조수 간만의 차는 9m로 캐나다 펀디만의 20m를 제외하면 가장 크다. 간조시 개펄이 최대 4km여서 때를 못맞추면 개펄 수렁에 빠진다. 바닷가 모래사장은 없고 오히려 높은 방파제로 둘러져 있다. 해안 상륙이라지만 모래사장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는 ‘공성전’ 같아서 인천은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이었다. 상륙작전을 위해 ‘적색해안’으로 이름붙인 인천항에 상륙하는 해병대가 일본에서 제작해 가지고 온 알루미늄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는 모습이 상징적인 장면이 됐다. 인천항으로 접근하는 해로는 비어수로 한 곳이어서 해안포나 기뢰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북한군 전차와 병력 2만 명 가량이 주둔해 있던 서울에서 인천은 30km 가량에 불과해 5,6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었다. 밀물은 12시간 간격이 있어 후속 부대가 오기전까지 첫 상륙 부대는 홀로 버터야 한다. 미 극동해군사령관 찰스 터너 조이 제독은 “해군 작전상 모든 지리적 핸디캡을 갖추고 있어 성공 확률은 5천분의 1”이라며 인천 상륙에 반대했다. ● 상륙작전의 맹장 맥아더, 작전명 ‘크로마이트’인천상륙작전 작전명 ‘크로마이트’는 보안을 위해 군사 작전을 전혀 연상시키지 않는 크롬 광석에서 따왔다. 상륙작전으로 ‘100-A’(낙동강 반격 후 군산 상륙), ‘100-B’(인천), ‘100-C’(군산), ‘100-D’(인천 상륙 후 주문진 추가 상륙) 등이 검토되었으나 맥아더의 집념과 판단으로 ‘100-B’로 결정됐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인천에서 상륙이 가능한 날짜는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 세 날을 전후한 2,3일. 낙동강 방어선 전황이 급박해 가급적 빨리 결행해야 했던 것도 9월 15일로 낙점한 이유 중 하나다. 7월 21일 미 육군 7사단과 제1 해병사단이 상륙부대로 선발돼 10군단이 구성됐다. 한국군은 해병 1연대와 육군 17연대가 각각 미 해병 1사단과 7사단에 배속돼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인천상륙작전 참가 부대 함정(척)상륙부대미군22610군단(제1 해병사단과 7사단)국군15제1 해병 연대, 국군 제 17연대연합함대20영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참가 합계261약 4만명 (해공군 포함시 7만5000명)맥아더는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고 돌아간 뒤 7월 4일 사령부에 인천상륙을 위한 ‘블루하츠(BLUE HEARTS)’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7월 22일 상륙 예정으로 검토됐다. 그런데 북한군 남진 속도가 너무 빨라 7월 8일 중단을 지시했다.(이상호, 180쪽)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많은 섬들을 공략하면서 ‘아일랜드 호핑(island hopping·섬 건너뛰기)’ 방식으로 상륙 작전에 성공한 것이 50여회에 이르는 ‘상륙작전의 귀재’였다. 방어가 강한 섬은 건너 뛰고 방어가 약한 섬을 공략해 일본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것이다. 맥아더는 1945년 9월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기 위해 인천항으로 들어 올 때도 대부대를 인천에 상륙시킨 경험이 있다. 1950년 봄에는 주일 미군에 대해 일본 열도에서 대대급까지 상륙훈련을 시킨 적도 있다. 이런 다양한 상륙작전 지휘 경험이 6·25 전쟁의 전세를 일거에 뒤집는 역사적인 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치밀한 육상과 항공 정찰을 통한 북한군의 동향 파악도 있었다. 9월 15일 ‘그날 하루’00:30 팔미도 등대 점화 02:00 유엔군 함포사격06:33 미 제1 해병사단 5연대 3대대 150명 월미도 상륙06:55 월미산 정상 탈환08:00 월미도 장악17:30 미 해병 1사단 5연대와 1연대, 인천항 적색해안과 녹색해안 상륙 20:00 인천 탈환 ● “월미산 높이가 2~3m 낮아졌다” 맹폭 후 전격적인 상륙 해발 108m 월미도는 인천항을 둘로 나누며 내려다보고 있어 상륙작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압해야 했다. 월미도에는 북한 제226 육전대 소속 1개 대대 500명 가량이 월미산 정상 송신소 인근에 주둔해 있었다. 팔미도 등대가 켜진 뒤 새벽 2시 미군은 월미도에 일제히 함포 사격을 가했다. 맥아더는 마운트 맥킨리호 함상에서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15일 오전 6시 33분 함포 사격이 멈춘 뒤 미 제1 해병사단 5연대 3대대 대원 150명이 월미도 북쪽 ‘녹색해안’에 상륙했다. 상륙 순간부터는 피아가 섞여 포격 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휴대 장비와 무기만으로 전투를 벌여야 했다. 같이 상륙한 M-26 전차 9대의 지원하에 월미산 정상을 점령한 것은 상륙 20여분 만인 6시 55분이었다. 이어 오전 8시 월미도를 완전 장악했다.같은 날 오후 5시 반 밀물 시간에 미 해병대가 현재 대한제분 앞 방파제 부근 ‘적색 해안’과 남쪽의 ‘청색 해안’에 상륙했다. 미군은 인천 시내를 남북으로 진격하면서 참호를 파고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을 고립시켰다. 이날 오후 8시 인천을 탈환했고 이튿날 오전 일찍 대부분의 북한군은 투항하거나 인천에서 철수했다.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은 단 하루 만에 성공을 거두었다. 아군 인명 피해는 전사 21명, 실종 1명, 부상 174명으로 예상의 20% 수준이었다고 한다. 15일 해병 제1사단이 상륙한 다음날부터 미 7사단이 뭍으로 올라왔다. 앞서 인천상륙을 위해 모두 261척의 군함이 일본 요코하마 사세보 고베 그리고 부산 등에서 출발했다. 부산에서 출발한 한국 해병 17연대 장교는 출발할 때까지도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고 했다.● 인천 탈환에는 하루, 서울 탈환에는 13일 북한군은 인천을 하루 만에 내주었으나 서울 방어에는 총력을 기울였다. 인천으로 상륙한 미 7사단이 경인 남쪽 공격에 투입됐다. 인천에서 허를 찔린 사실은 낙동강의 북한군에도 전해져 18일부터 본격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38선까지 후퇴하라”는 명령도 내려졌다. 9월 26일 상륙부대 미 10군단과 낙동강에서 올라온 미 8군이 ‘초전 죽미령 전투’가 있었던 경기도 오산에서 랑데뷰했다. 서울 방어에 인민군은 2만 여명이 투입됐는데 연희 104고지 전투가 고비였다. 하루 밤에도 2,3차례 뺏고 뺏기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연희 104고지’는 서울 시내에서는 드물게 6·25 전적비가 세워진 곳이다. 9월 28일 서울 수복은 기습 남침으로 뺏긴지 3개월 여 만이었다. 29일 오전 10시 맥아더 사령관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해 정오 중앙청 앞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서울을 돌려드린다”는 연설을 했다. ● 북한, 몰랐나 알고도 당했나 북한군에는 8월 26일 상륙작전 대비 지시가 내려왔다. ‘인천 방어지구 사령부’가 마련돼 9월 15일까지 방어 준비를 마치라는 것이었다. 월미도와 인천 항구에 포대도 설치됐다. 하지만 막강한 화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에 집중하고 있는데다 보급선도 길어져 다른 지역 상륙작전에 대비할 여력이 없었다는 분석이 많다. 중국은 개전 초기부터 후방 상륙작전을 경계하도록 북한에 조언하면서 인천과 원산을 지목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비서 레이잉푸(雷英夫)는 8월 초 일본에 파견돼 상륙작전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미군 부대가 상륙작전 훈련을 받고 있으며 일본 항구마다 미국과 세계 각 지에서 온 선박들로 붐빈다는 것을 확인했다. 레이잉푸가 맥아더가 인천을 선택할 확률이 높다고 보고한 것이 8월 23일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김일성에게도 전달했으나 인천항 폭파 등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핼버스탬, 462쪽)북한의 ‘조국해방 전쟁사’에서 김일성은 인천을 점령했을 때부터 상륙작전을 예상하고 7월에는 방어를 강화하라고 했으나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김일성이 책임을 밑에 떠넘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이상호, 187〜9쪽)● 인천상륙작전은 얼마나 공개된 작전인가 도쿄에서 맥아더 사령부를 취재하는 기자들 사이에서 인천상륙작전은 (언제 실행되는 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언제가 할 것으로 예상한) ‘누구나 아는 작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히긴스, 188쪽)프란체스카 여사는 상륙작전 보안이 허술했다고 지적했다. “미 8군에 들어갔던 우리 경관 한 명이 미군 병사와 대화했는데 글쎄 이 병사 말이 ‘전쟁에 대해선 걱정 말아라. 2주일 내에 우리가 상륙작전을 벌여 공수부대로 적의 배후를 치게 된다’고 하더라는 것이다.”(프란체스카 일기, 9월 6일자)애치슨 국무장관은 “인천상륙작전이 일본에서는 ‘상식 작전(Operation Common Knowledge)’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사전에 정보가 누출됐는데 다행히 북한에는 전해지지 않았다”고 했다.(애치슨, 580쪽). “비밀이 유지된 것은 새로운 병력배치를 목격하고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던 일선 종군기자들과 고국에 있는 편집자들이 군의 전략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덕분이었다.” 맥아더는 도쿄의 기자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알고 있었지만 보도하지 않고 도와줬다고 했다. 공격 개시 1주일전 마스터 플랜의 세부가 완성되어 있었는데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려면 사전에 비밀이 누설될 가능성도 있었다는 것이다. 기자들은 상륙작전에서 사용된 알루미늄 사다리 제작 의뢰만 보고도 인천을 예상할 수 있었지만 보안을 지켰다고 한다.(맥아더, 195쪽)맥아더와 대선 출마“맥아더는 대통령이 되려고 5000 대 1의 기적이 필요하단 말입니다.”영화 ‘인천상륙작전’에는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할 지를 두고 북한 군부와 도쿄의 맥아더사령부에서 각각 논란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공통점은 맥아더가 인천 상륙을 고집하는 목적이 대선 출마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화속 북한군 인천지구사령관은 “미제는 성공 확률 5000분의 1로 생각하지만, 확률이 적은 인천으로 왜 오나. 바로 맥아더 그 늙은이가 영웅으로 남고 싶어서다. 맥아더는 대통령이 되려고 5000 대 1의 기적이 필요한 것이다.”도쿄의 맥아더사령부에 모인 미 고위 인사들도 인천상륙 작전을 반대하면서 맥아더의 대선 출마를 거론한다. “맥아더는 사다리와 등대가 있으니 상륙작전 걱정이 없다고 한다. 인천을 노르망디 삼아서 대권에 도전하려는 거요!” ‘사다리’는 인천항구가 절벽이 높아 사다리가 필요했는데 일본에서 제작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면 된다고 한 것을 비꼰 것이다. 맥아더는 1944년 공화당 대선 예비경선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 민주당 출신 루즈벨트 대통령을 싫어한 공화당 일부에서 출마를 권유했다. 그는 네브래스카주 공화당 의원 아서 밀러와 주고 받은 편지가 밀러에 의해 공개되면서 경선에서 중도 하차했다. 편지에는 아서가 “미국에서 자행되는 독재가 사람들의 권리를 파괴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맥아더는 “미국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의원님의 현실 인식이 진정한 애국자들을 일깨우는 귀감이 될 것입니다”라고 화답했다. 현직 육군대장이 군 최고통수권자를 향해 ‘독재’라고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친 것이다. 앞서 맥아더는 필리핀 근무 시절 자신의 참모를 지냈던 아이젠하워 육군참모총장이 1946년 5월 도쿄를 방문했을 때 아이젠하워에게 차기 대선 출마를 권유했다. 아이젠하워도 맥아더에게 출마를 권유하자 “나이가 많다”고 고사했다. 그러면서도 1947년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제안이 오면 수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핼버스탬, 186쪽)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대공세’ 작전 실패에도 대선 출마가 거론된다. 1950년 11월 ‘그리스마스 때까지 귀국!’이라는 구호가 맥아더라는 개인 광고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고안됐다는 것이다. 미 대선(1952년 11월)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웨인트라웁, 37쪽)1950년 10월 트루먼과의 웨이크섬 회담 중에도 트루먼이 대선 출마 의향을 물었다. 맥아더가 정치적 야심이 있는지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저는 추호도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각하에 대항할 장군이 있다면, 그 이름은 아이젠하워지 맥아더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웃으면서 개인적으로는 아이젠하워를 좋아한다고 대답하면서도 “아이젠하워는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랜트(남북전쟁 시의 북부군 총사령관)도 완전무결한 대통령의 견본이 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맥아더, 215쪽). 트루먼이 아이젠하워에 대해 낮게 평가했지만 2년 후 차기 선거에서 아이젠하워가 공화당 후보로 당선돼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이후 20년 민주당 집권을 끝냈다. 참고 문헌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1, 2권, 일신서적, 1993.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딘 애치슨, 『Present at the Creation』, Norton & Company Inc., 1969. 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에드워드 L. 로우니 지음, 정수영 옮김, 『운명의 1도』, 후아이엠, 2014.스탠리 웨인트라웁 지음, 송승종 옮김,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작전』, 북코리아, 2015.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이승만 구술,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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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은 왜 낯선 땅에서 피를 뿌렸나”[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경기 파주군 적성면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의 벽면 부조물에는 무사히 귀환한 남편를 꼭 안고 안도하는 아내의 표정과 뒤에서 아빠의 바지를 잡고 기뻐하는 딸의 모습이 있다. 하지만 이 병사처럼 집으로 돌아와 다시 가족을 만나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6·25 전쟁 기간 영국군은 전사 1078명, 실종자도 179명이었다.옆 부조물에는 이곳 전투에 참가한 제29여단 글로스터 대대원들 12명이 활짝 웃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도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을 것이다. 6·25 전쟁 3년간 전투병을 보낸 16개 참전국 장병 3만7886명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로 길게는 한 달 가량 배를 타고 와 낯설은 곳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인적도 드문 파주의 감악산 자락에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고 세워놓은 추모와 감사의 비석만으로는 그들의 희생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미국과 공동 책임” 의식한 영국 영국은 1950년 1월 가장 먼저 신중국을 승인하고 중공과의 대립을 원하지 않았다. 자국이 총독 통치를 하고 있던 홍콩 때문이었다. 영국은 중공의 대만 점령 주장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맥아더의 만주 폭격 등 중국과 전면전을 일으킬 수 있는 이른바 ‘확전’에 영국은 가장 반대했다. 그렇지만 일단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책임을 다했다.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전투 병력을 미국에 이어 가장 먼저 한반도에 투입했다. 육군 파병 규모도 미국 다음으로 많았고 해군도 항모 1척을 포함 17척을 파견해 미국 다음으로 많았다. 희생자도 미국 다음으로 많았다. 영국은 18개월이던 군복무 기간을 2년으로 늘려 연인원 5만6000여명을 보냈다. 영국은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과 영연방군을 편성해 설마리 전투, 가평 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영국은 1951년 7월 ‘영연방 1사단’을 창설했는데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6개국이 참가한 것으로 ‘다국적 사단’은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다.(UN군지원사, 176쪽). 미국은 1950년 7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유럽부흥계획에 따라 28억5000만 달러를 지원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영국은 한국 전쟁에 지상군을 파병해 미국의 영국에 대한 지원이 축소되지 않기를 원했다.(김계동, 100쪽)● 참전 동기와 계기는 달라도 명분과 목적은 하나 ‘평화유지’ 6·25 전쟁에 전투와 의료 지원을 위해 파병한 각 국가의 목적과 경위는 다양했다. 하지만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는 불법 침략 세력의 격퇴라는 목적은 같았다. 각 국은 낯설고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나라에 전투병을 보내기 위해 부대를 새로 만들고 병력을 모집했다. 의무 복무 기간을 늘려 병력을 충원했다. 많은 국가에서는 참가하겠다는 자원병이 넘쳐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했다. 6·25 전쟁 한국과 북한 지원 국가 지원 항목한국북한전투지원미국 영국 등 16개국중국 소련 2개국의료지원 6개국인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이탈리아 서독 6개국체코 동독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물자지원일본 쿠바 베트남 이스라엘 등 38개국몽골 1개국총계60개국8개국● 16개국 파병, 4개국은 육해공 모두 보내유엔 안보리는 6·25 전쟁 발발 이틀만인 6월 27일 군사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7월 7일에는 유엔군사령부도 창설됐다. 파병 결의안이 통과되고 유엔군 사령부 창설 1주일이 지났지만 미국 외에 지상군을 파병하겠다는 국가가 없었다. 트뤼그브 리 유엔사무총장은 7월 14일 52개 회원국에 파병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미국은 6월 27일 해군과 공군이 평양까지 공습을 시작됐다. 일본에 주둔해 있던 육군 제24사단의 스미스 특임대대가 7월 1일 부산에 도착해 5일 오산 죽미령에서 첫 전투를 벌였다. 미국 다음으로 육군이 도착한 것은 영국으로 8월 28일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다부동 전투가 한창이던 때다. 당시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었던 자유중국(대만)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3만3000명의 지상군 파병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쟁 3년간 16개국이 전투 병력을 파견했다. 육해공군을 모두 파견한 국가는 미국 호주 캐나다 태국 4개국이다. 6·25 당시 독립국가 93개국 중 60개국이 전투, 의료, 물자지원 등으로 참여했다. “인류 역사상 단일 연합군으로 한 나라의 자유와 민주를 지키기 위해 참전한 규모로는 최대였다.”(국가보훈처 유투브 ‘역사다방’·2021년 11월)부산의 유엔공원묘지는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다. 매년 11월 11일 11시에 1분 동안 부산 향한 묵념 행사 ‘turn toward Busan’이 진행된다. 6·25 전쟁 전투병 파병 16개국 (참전 병력 숫자 순)국가참전병력(명)사망(명)한국 도착1미국1,789,10033,6867월 1일2영국56,0001,0788월 28일3캐나다26,79151612월 18일4튀르키예21,21296610월 17일5호주17,1643409월 27일6필리핀7,4201129월 19일7태국6,32612911월 7일8네덜란드5,32212011월 23일9콜롬비아5,1002136월 15일(1951년)10그리스4,99219212월 9일11뉴질랜드3,7942312월 31일12에티오피아3,5181125월 6일(1951년)13벨기에3,498991월 31일(1951년)14프랑스3,42126211월 29일15남아공8263611월 12일16룩셈부르크10021월 31일(1951년)※참전병력은 육해공 해병대를 포함한 연인원 기준. 미국 영국은 사망 외 실종자 3,737명과 179명 추가. ※도착은 육군 기준, 육군 없는 남아공은 공군자료 : ‘통계로 본 6·25 전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프랑스, 전후 복구와 혼란 속 대대 규모 파견 프랑스는 2차 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점령당해 괴뢰 정부의 통치를 받는 등 전쟁의 폐허상태에서 겨우 회복되고 있는 때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과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군예산은 상당한 압박을 받았다. 유엔의 5개 상임이사국 중 한 나라였지만 걸맞는 책임을 떠안을 여유가 없었다.(베르고, 38쪽) 프랑스는 2차 대전이나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싸운 경험이 있는 예비역들로 대대 단위 부대를 만들어 보내기로 했다. 프랑스 대대는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1950년 8월 창설됐다.프랑스의 참전 부대를 이끌고 온 랄프 몽클라르 중령은 ‘1차 대전의 영웅’ 칭호까지 받은 3성 장군이었다. 2차 대전 때는 ‘망명 자유 프랑스군’을 이끈 레지스탕스 지휘관이었다. 몽클라르는 가명이었다. 몽클라르는 대대를 지휘하기 위해 계급을 낮춰 중령급이 맡는 대대장을 자원했다. ● 참전 계기로 나토 가입한 튀르키예와 그리스 6·25 전쟁이 발생하자 튀르키예에서는 ‘형제의 나라에 전쟁이 났으니 돕자’는 분위기가 일었다. 1만5천여명이 자원했는데 고등학생들도 참가시켜 달라고 시위를 벌였다.(국가보훈처 유투브 ‘역사다방’·2021년 11월). 튀르키예는 나토에 가입하기를 원했는데 전쟁은 전공을 세워 나토 가입의 명분을 내세울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튀르키예는 전쟁 중인 1951년 9월 20일 나토 창설 멤버 12개 국가 외에 처음으로 그리스와 함께 가입됐다.그리스 참전 부대 이름은 ‘스파르타 대대’. 그리스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소련과 그 위성국의 지원을 받는 국내 공산당 세력과 6년간 내전을 치르고 있어 공산군의 침입을 받은 한국에 동질감을 느꼈다. 참전비 좌우의 기둥과 동판에 새겨진 월계수잎이 고대 문명국가 그리스가 우리와 생사를 함께 하며 싸웠음을 보여준다.● 영연방 국가들 :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호주는 유엔 결의안 직후인 6월 30일 마침 일본 극동군사령부에 파견 중인 2척의 함정과 1개 보병대대가 있어 파견을 유엔에 통보했다. 호주 국내에서도 자원병을 모집했는데 정규군의 98%가 지원 의사를 밝혀 심사를 거쳐 선발했다. (‘6·25 전쟁 참전사’, 136쪽) 1951년 10월 경기도 연천의 ‘마량산 전투’에서는 ‘능선 방향 공격’ 전술을 구사했다. 능선 을 달리며 공격하는 것은 적에게 노출이 쉬워 위험하지만 신속한 기동이 가능하다. 산악 기동에 장점이 있다는 중공군도 혼비백산했다고 한다.(국가보훈처 유투브 ‘역사다방’·2021년 11월). 호주는 가평 전투에 영연방군 일원으로 참여했는데 자국 현충일인 4월 25일(1차 대전 당시인 1915년 뉴질랜드와의 연합군이 튀르키예 해안에 상륙했던 날)의 하루 전날을 ‘가평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1129일의 전쟁’, 342쪽)뉴질랜드 육군은 7월 27일부터 부대 명칭을 ‘한국부대(K-Force)’로 명명하고 파병부대원을 모집했다. 모집 9일 만에 다수의 원주민 마오리족을 포함, 전국에서 5천982명이 지원했다. 캐나다는 6·25 전쟁이 터졌을 때 한국과 서로 대표부도 설치되지 않은 관계였지만 의회가 만장일치로 파병을 결의했다. 생 로랑 총리는 “참전은 특정 국가를 상대로 한 싸움이 아니라 유엔의 평화 회복을 위한 것”이라고 명분을 밝혔다.(‘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6·25전쟁 참전사’, 26쪽) ● 아시아의 우방국 태국과 필리핀 태국은 2차 대전 시 추축국인 독일 일본과 같은 진영에서 싸워 6·25 전쟁을 통해 국제사회의 신뢰를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빨리 파병했고 가장 오래 머물러 1972년 철수했다. 파병 당시와 철수할 때의 부대장이 부자간이어서 화제가 됐다.필리핀은 6·25 전쟁 4년 전 독립한 뒤 공산 반란군과 교전 상태에 있어 국내 정세도 매우 불안했다. 그럼에도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나자 공산군 토벌 작전에 투입된 10개 대대 중 한 개 대대를 빼내 한국에 보냈다.(‘UN군 지원사’, 295쪽) ● 자국 상비군도 부족한 유럽 국가도 파병 네덜란드는 보유중인 지상군이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는데다 1951년 5월 귀국할 예정이어서 정부는 파병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국내 참전지원자와 언론이 ‘한국참전 지원병 임시위원회’까지 결성해 정부에 참전을 강도높게 요구했다.(UN군 지원사, 217쪽). 국민 여론에 따라 지상군 파병이 이뤄졌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1949년 영세중립국을 포기하고 나토에 가입했다. 변변한 상비군도 없는 상황에서 두 나라는 통합 대대를 편성했다. 벨기에가 엄격한 기준과 적성검사를 통해 선발한 장병 중에는 전 상원의원이자 당시 국방장관도 포함됐다. 벨기에 6·25 전쟁 박물관이 있는 제3공수 대대에는 ‘임진강’ ‘학당리’ ‘잣골’ 등 벨기에 부대가 전투를 벌였던 지명을 딴 건물들이 있다고 한다.(황인희, 96쪽). 룩셈부르크는 연인원 100명을 파견했는데 당시 룩셈부르크 인구는 20만 명가량이었다. ● 왕실 근위대를 보낸 에티오피아와 공군 정예 보낸 남아공 에티오피아는 2차 대전 때 이탈리아에 무장해제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황실근위대 정도만이 남아있었다. 하일레 세라시에 황제는 황실근위대에서 1천200명을 선발해 수도 인근 한국의 지형과 유사한 곳에서 훈련을 시켜 파병했다. 에티오피아는 ‘전사한 영웅들의 시신은 반드시 수습한다’는 전통이 있어 적진에 남겨두지 않는다. 붙잡힌 동료도 반드시 구해내 포로가 한 명도 없다고 한다.(황인희, 25쪽) 강원도 춘천 이디오피아길 1번지에 있는 참전기념비는 1968년 하이레 세라시에 1세 황제가 친히 제막하였다. 한국에 새로 부임하는 에티오피아 대사들은 이곳부터 찾는다고 한다.아프리카 최남단의 남아공은 206명의 전투비행대대를 파견하되 먼 거리 수송 문제로 항공기나 장비는 없이 병력만 보냈다. 대대 병력은 40일간의 항해 끝에 요코하마에 도착해 무스탕(F-51기) 전투기와 장비를 인수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참전한 콜롬비아는 1948년 4월 공산분자들에 의한 최악의 폭력사건으로 참변을 겪었다. 공산 반정부 게릴라 활동으로 내부 사정도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유엔의 결정에 따라 파병을 결정했다.● 의료지원 6개국 전쟁 기간 중 의료지원을 한 5개국과 독일도 포함돼 6·25 전쟁 의료지원국은 6개국이 됐다. 독일은 1953년 5월 6·25 참전 유엔군을 지원하기 위한 야전병원 설립 의사를 유엔본부에 전달했고, 이듬해 80여명 규모의 의료지원단을 파견했으나, 정전협정 체결(1953년 7월 27일) 이후 의료지원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6·25 전쟁 의료지원국에 포함되지 않았다. 국방부는 2018년 6월 독일이 1954년 5월부터 부산에 적십자병원을 설립해 의료지원 활동을 펼친 것을 인정했다. 의료 지원 6개국 국가의료 지원 형태참전 연인원스웨덴적십자 병원(SRCH)1,124인도제60 야전병원627덴마크병원선(Jutlandia)630노르웨이이동외과병원(NORMASH)623이탈리아제68적십자병원128독일부산에 적십자병원 설립80자료 : ‘통계로 본 6·25 전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4 참고 문헌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황인희 지음,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양문, 2022. 에드완 베르고 지음, 김병일 이해방 공역, 『6·25 전란의 프랑스 대대』, 동아일보사, 1983.『UN軍支援史』, 국방군사연구소, 1998.『6·25전쟁 참전사』, 국가보훈처, 2015.『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6·25전쟁 참전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4.『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6·25전쟁 참전사』, 국가보훈처, 2016.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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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미령에서 다부동까지 ‘피(血)로 버틴 지연작전’[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경기 오산시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전투가 벌어진 1950년 7월 5일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15분까지를 표시한 시계 조형물이다. 당시 세계 최강국 미국과 한반도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북한 괴뢰 집단’간 첫 전투치고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더욱이 미군은 북한군에 겨우 반나절 가량 버틴 패배였다. 9월 초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를 거듭한 ‘지연작전’의 시작이었다. ● 한나절 전투에 병력 3분의 1 손실된 대패 맥아더는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고 돌아간 뒤 바로 지상군 투입을 결정했다. 한국군의 방위 능력은 이미 소멸해 북한군이 부산까지 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맥아더, 169쪽). 맥아더가 처음 투입한 부대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24사단.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규슈 구마모토에 있던 21연대 1대대(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첫 미 지상군으로 긴급 투입됐다. 7월 1일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시민환영대회를 받은 후 2일 대전을 거쳐 오산 북쪽 5km 지점의 죽미령에 도착한 것은 5일 오전 3시였다. 도로는 후퇴하는 국군과 피난민들로 가득 차 인파를 역류하면서 올라갔다. 오전 8시 후방에 배치된 52포병 대대가 북한군 선두의 T-34 탱크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전위부대는 대전차포와 무반동총을 발사했다. 탱크 4대가 파괴되었지만 다른 29대는 방어선을 돌파해 줄지어 내려왔다. 스미스 대대는 후방의 사단 본대와 통신망도 구축하지 못한 채 전투를 벌였다. 기상 상태가 안 좋아 공중 지원도 받지 못했다. 결국 전투 시작 6시간 여 만에 퇴각, 철수했다. 병력이 분산돼 포위 공격을 받았다. 모든 공용화기는 챙길 틈도 없었다. 부대원이 천안에 집결했을 때 전사 부상 실종 등 인원 손실이 150여 명으로 450여명 스미스 부대원의 3분의 1에 달했다. 죽미령 전투 전사자 중에는 나이 어린 10대 소년 형제도 있었다. 랜섬과 버질 월포드는 각각 14살과 16살에 군에 입대해 죽미령 전투 때는 16살과 18살이었다. 아버지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해 어린 나이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미군은 이들 형제를 되돌려 보내려 하던 중 죽미령 전투에 참전했다가 형제 모두 목숨을 잃었다.● 서로를 모르며 벌였던 초전(初戰) 정일권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대전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를 처음 보고 실망했다. 북한 T-34 탱크를 제압할 대전차 무기가 없는데다 실전 경험자도 부대원의 6분의 1에 불과했다. T-34 탱크는 미군이 발사한 대전차 포탄을 ‘고무공을 튕겨내듯’ 했다.(정일권, 1986, 54쪽). 미 24사단은 3개 연대 중 한 개 연대는 일본에 남겨두고 왔다. 부대원들은 여름용 군복을 준비하라고 했다. 초전에 북한군을 격파한 뒤 서울에서 개선 행진을 하려면 여름용 군복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북한군을 얕보고 준비가 안이했다.(핼버스탬, 208쪽) 부대스미스 특임부대 (1대대와 52포병대대)북한군 4사단피해전사 120명사망 42명포로 및 실종 36명부상 150여명부상 85명중화기 : 완전 유기전차 4대 파손● 미 육군 사례로 연구되는 죽미령 전투 죽미령 전투는 미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 전사 교육에서 연구 사례라고 한다. 상대에 대한 정보없이 얕잡아보고 전투에 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하는 전투로 꼽힌다.(남도현, 106쪽). 미군은 자신들이 참전한 것을 알면 겁먹고 전투를 포기할 것이라는 자만도 있었다. 북한은 미군과의 첫 전투에 대해 ‘조선인민군 불패의 위력을 온 세상에 시위하였으며 이른바 세계 최강을 자랑해 온 미제 침략군의 거만한 콧대를 꺾었다’고 자평했다. (이상호, 171〜3쪽) 죽미령 전투는 패배했지만 북한군이 예상했던 시기보다 훨씬 빨리 미국이 지상군을 투입해 주력 부대의 남진 속도를 늦춰 미군 후속 부대를 전개하는 시간을 확보하게 했다. 맥아더는 북한군이 한반도 전역을 수중에 넣기 전에 전진 속도를 늦추기 위해 소규모라도 신속하게 지상군 부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적 사령관이 조심하게 될 것이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으로 봤다.(맥아더, 173쪽) 낙동간 전선에서 포로가 된 한 북한군 장교는 “미군의 참전 가능성에 대해 들은 바 없었는데 오산에 미군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몹시 놀랐다. 우리로서는 충격이었다”고 진술했다.(‘1129일간의 전쟁’, 541쪽). 비록 기습 남침을 받아 밀리면서도 북한군의 남진 속도를 줄이는 ‘지연작전’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 연대장 사망, 사단장 피랍, 대전전투 패배 죽미령 패배 후 미 24사단은 천안에서 34연대장을 로버트 마틴으로 교체 투입했는데 그는 2.36인치 로켓포를 들고 직접 T-34 탱크로 달려갔다가 탱크 총격에 사망했다. 미 24사단이 19일 대전까지 밀려왔을 때는 북한군 3,4사단과 105전차사단이 3개 방면에서 공격해 왔다. 윌리엄 딘 사단장은 직접 3.5인치 대전차포를 들고 전차사냥에 나섰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이틀 만에 대전을 북한군에 내줬다. 딘은 철수 과정에서 야간에 부상병에게 물을 떠다주려다 산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그는 부대와 헤어진 뒤 실종됐다가 포로로 잡혔다. 그는 휴전 후 포로 교환으로 돌아왔다. 24사단은 7월 21일 후퇴하면서 옥천 전투에서도 패배해 첫 전투 이후 보름여 만에 1만6000명 병력 중 약 7000명을 잃었다.● ‘버티느냐 죽느냐(stand or die)’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7월 26일 낙동강 방어선으로 8월 1일까지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7월 29일 상주 미 제25사단 사령부에서는 ‘버티느냐 죽느냐’의 전선사수 명령으로 유명한 훈시를 했다. “우리 뒤에는 후퇴할 곳이 남아있지 않다. 덩케르크의 참패가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 미군은 8월 1일 마산〜왜관〜낙동리〜청송〜영덕을 잇는 약 240km의 최초 낙동강 방어선을 설정했다가 11일 마산〜왜관〜포항을 잇는 180km로 축소했다. 부대간 거리를 좁혀 적의 우회 돌파를 막고 방어선을 단축해 예비 병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히긴스는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큰 반원형으로 군을 배치할 수 있었던 것은 워커 장군의 공로”라고 평가했다.(히긴스, 160쪽)낙동강 방어선은 왜관을 분기점으로 마산에서 왜관까지 서부 120km의 방어선(X선)은 미군 4개 사단, 왜관부터 포항까지 80km(Y선)는 국군 5개 사단이 담당했다. 북한은 8월 초중순까지는 대구와 마산을 집중 공격하다, 중하순에는 모든 전선을 공략했다.한 곳이라도 뚫리면 대구를 점령하겠다는 의도였다. 낙동강은 둑이 가파르고 강폭이 400〜800m로 공격보다 방어자에게 유리한 천혜의 방어선이었다.(백선엽 2권, 249쪽) 8월 16일 미 8군은 B-29 98대가 융단폭격으로 폭탄 960t을 쏟아부었다. 폭격을 지휘한 스트레이트마이어 극동공군사령관은 “지금까지 가장 강력한 폭격 작전이었다. 왜관 서북쪽 가로 3.5마일, 세로 7.5마일 지역에 투하했다. 육안 폭격이 가능해 10시 50분 시작해 13시 종료했다”고 기록했다.(스트레이트마이어, 8월 16일자 일기)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과 미군이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던 8월 29일 홍콩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27여단이 들어왔다. 16개 전투병 참전국 중 미국에 이어 영국이 참여하면서 ‘다국적 유엔군’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구멍많은 낙동강 방어선 융단포격 이틀 후인 18일 대구 북방 가산산성을 점령했던 북한군이 박격포를 발사해 7발이 대구역에 떨어져 역무원 1명이 사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도쿄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가 거절당했다. “대통령이 나를 불러 도쿄의 맥아더사령부로 떠나라고 했다. 거의 명령조였다. ‘적이 대구방어선을 뚫고 오면 제일 먼저 당신을 쏘고 내가 싸움터로 나가야 돼요. 당신만은 여기를 떠나주시오.” (프란체스카 7월 29일 일기) 프라체스카 여사의 ‘난중일기’에는 낙동강 방어선의 급박한 상황이 이어졌다. ‘낙동강 전선 17개 지점에서 적군이 아군 저지선을 돌파했다는 나쁜 소식이 파우치로 전해졌다. 적이 왜관에 침입했다고도 한다’(9월 2일 일기). ‘북괴군 유격대가 대구까지 침투했다. 그들은 자유지역(방어선 내의 지역) 어느 곳에나 퍼지고만 것이다’(9월 5일 일기)● 시산혈하(屍山血河) 다부동 전투 미군과 국군이 접하는 왜관의 다부동은 백선엽의 제1사단이 맡았다. 1사단의 3개 연대는 북한군 3개 사단을 맞아 숫적으로는 연대와 사단의 싸움이었다. 소대장이 보충되는 신병을 밤에 전선에서 처음 보고 손전등으로 얼굴을 비추며 “내가 소대장이다”고 소개한 뒤 전투를 벌였다. 전사하면 이름이라도 확인하려고 신병 이름을 화랑 담배값 쪽지에 적었다. 하지만 전선에 올라간 뒤 내려오지 않은 신병의 이름은 확인이 쉽지 않았다. 이름을 적었던 소대장 또한 전사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부동 전투의 무명용사들은 그런 병사들이었다.(백선엽 2권, 258쪽) 북한군 3개 사단은 대구 점령 목표를 세우고 관문인 다부동 돌파를 시도했다. 328고지와 839고지 유학산도 점령했다. 미국은 미 25사단 27연대를 1사단에 배속했다. 미군을 한국군에 배속시키는 것은 매우 이례적으로 다부동 상황이 그만큼 심상치 않았다. 양측간에 피바다의 일진일퇴 공방전이 벌어졌다. 낙동강에는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전사자의 시체가 떠내려갔다. 다부동 전적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고지의 주인이 15번 바뀐 328고지 전투와 수암산 전투, 가산산성 전투, 유학산 전투 등이 당시의 처절한 전투 상황을 보여준다. ‘동양의 베르됭 전투’로 불리는 다부동 전투에서 아군은 1만 여명, 북한군은 3만 여명이 전사했다. 특히 유학산 전투에서만 아군 2300명이 전사하고 적군 5690명이 사살돼 다부동 최대의 격전지였다. 그야말로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만들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낙동강 전투에서 북한군 최전선에 나섰던 병력의 상당수는 북한군이 남한에서 징발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북한은 그들을 총알받이로 앞에 세웠다. 안타까웠지만 국군은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눌 수 밖에 없었다.(백선엽 2권, 236쪽) 다부동 전투가 한창인 8월 21일 한 미 8군 장교가 한국군이 전선에서 물러나면 미군도 철수하겠다고 했다. 백선엽 장군은 11연대 1대대가 방어하는 천평동 계곡으로 달려갔다. 그는 고지를 버리고 물러서는 부대에 “앞장설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며 병사들을 독전했다. 적은 후퇴했던 병력이 다시 쏟아져 올라오자 증원 병력이 왔다고 착각했다고 한다. 천평동 계곡을 두고 남북 양쪽에서 미군의 철갑탄과 북한군의 포탄이 교차하며 날아다녔다. 5시간 가량 지속된 이 장면을 두고 외신 종군기자들이 ‘볼링 앨리(Bowling Alley)’라고 불러 치열한 다부동 전투의 대명사가 됐다.(백선엽 2권, 290쪽)낙동강 방어선에서 미군 담당 X선의 남단인 마산에서의 전투는 다부동 전투나 영천전투 등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부산까지의 거리가 50km에 불과한 이곳이 뚫렸다면 인천상륙작전이 진행되지 못하는 등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 수 있다. 미 25사단은 38선을 넘은 뒤 호남을 거쳐 낙동강 전선으로 밀고 온 방호산 사단장의 북한 6사단을 맞아 국군 해병대와 함께 2개월 가량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마산을 지켜냈다. 마산전투는 ‘60일간 하루도 쉬지 않고 싸웠고, 아군은 1천명, 적군은 4천명이 죽은 대혈전이었다’.(배대균, 10쪽).● 낙동강 최후 결전 영천 전투와 ‘링크업 작전’ 낙동강 공방전의 최후의 결전은 인천상륙 이틀전인 13일까지 열흘간 치러진 영천전투였다. 국군 2군단이 두 번 뺏기고 두 번 빼앗는 끝에 지켜냈다. 영천 전투 승리로 유엔군이 한 때 고려했던 한반도 전면철수 계획은 백지화됐다. 영천에서 패배해 낙동강 방어선에 구멍이 뚫리면 인천상륙작전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국군은 끝내 영천을 탈환해 버텨주면서 상륙작전도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영천 탈환 전이 계속되고 있는 7일 하양의 2군단 사령부를 찾아 격려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낙동강 방어선의 국군과 미 8군의 총반격 작전 과제는 상륙한 부대가 고립되지 않도록 밑에서 치고 올라가 협공하는 것이다. 일명 ‘링크 업(link up)’ 작전으로 상륙부대와 지원부대의 랑데뷰 작전이었다. 개전 이래 방어에 주력하던 아군이 본격적으로 공세로 전환하는 것이기도 했다.● 초전에 패했던 오산에서의 미군 ‘랑데뷰’ 9월 16일 총반격에 나선 미 제1기병사단이 20일 왜관을 탈환해 낙동강 방어선을 막고 있던 북한군 포위망에 구멍이 뚫렸다. 북한군은 급속도로 붕괴되어 도주했다. 아군은 북한군이 재편성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하루 40km 이상을 전진하며 몰아쳤다. 9월 26일 오산에서 인천상륙작전 부대와 랑데뷰하고 30일에는 원주까지 밀고 올라갔다. 백선엽 장군은 당시 일패도지(一敗塗地)하던 북한군의 모습은 한심했다고 한다. 주둔했던 진지와 부대 지휘소에는 중화기와 탄약, 보급품이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사기가 꺽일까 두려워 알려주지 않아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후퇴하거나, 상륙작전으로 후방이 차단된 것을 알고 혼이 나간 모습 등 다양했다. 북한군 기관총 사수들은 발목에 쇠사슬이 묶여 있어 도망가지 못하고 최후의 저항을 하도록 했지만 오히려 순순히 항복을 했다.(백선엽 1권, 314쪽). 낙동강까지 내려왔던 북한군 7만 여명 중 38선 이북으로 철수한 병력은 2만5천∼3만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사망, 포로 혹은 산속으로 피신해 무장 공비가 되었다.(‘1129일 전쟁’, 122쪽).가뭄의 단비같은 두 승리, 동락리와 화령장북한군 병력 수가 많고 장비면에서 우세한 데다 기습 공격을 당해 국군이 미처 대비하지 못하는 사이 북한군은 빠른 속도로 남진했다. 북한군 6사단은 별다른 저항없이 호남을 쓸고 내려갔다. 서울〜대전∼대구의 중심축에서도 북한의 주력 부대가 기세를 올렸다. 다만 동부전선에서는 국군이 북한군을 저지하는 쾌거가 있었다.춘천전투에서 선전했던 6사단 7연대는 충북 음성군 무극리와 동락리에서 벌인 동락리 전투(7월 5~8일)에서 북한군 15사단을 격파했다. 동락초등학교 김재옥(당시 19세) 교사는 국군이 후방으로 떠났다고 거짓으로 알려주어 북한군 15사단 48연대 병력은 경계를 풀고 교정에서 휴식을 취했다. 학교를 빠져나온 김재옥은 인근 부용산으로 올라가 4시간 가량 국군 7연대 병력을 찾아 헤맨 끝에 적 정보를 제공했다. 7연대는 기습공격으로 적 1개 연대를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2000여명을 사살하고 132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122mm 야포 6문 등 다수의 장비를 노획했다.(김철수, 119쪽). 김재옥 교사의 활약상은 영화 ‘전쟁과 여교사’로 만들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7연대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영광을 주었다. 동락리에서 괴멸당한 북한군 15사단의 48연대 잔여 병력과 49연대는 경북 상주의 화령장 전투(7월 17∼21일)에서도 국군 2군단 소속 17연대에 3개 대대 병력이 섬멸당했다. 국군은 지역 주민과 피난민들로부터 적 부대의 진행 방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뒤 미리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타격했다.(온창일, 50쪽). 동락리 전투의 7연대에 이어 화령장 전투의 17연대도 전 장병이 1계급 특진했다. 17연대는 개전 시 옹진반도에서 북한군에 밀려 서둘러 철수했던 패배를 되갚았다.(‘1129일간의 전쟁’, 234쪽). 17연대는 미 7사단에 배속돼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한다. 참고 문헌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남도현 지음,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미디더, 2010. 배대균 번역, 『마산방어전투』, 청미디어, 2020.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2권. 2020.온창일 등 지음,『6·25 전쟁 60대 전투』, 황금알, 2010.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이승만 구술,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이중근 편저, 『6·25 전쟁 1129일』, 우정문고, 2014.정일권 지음, 『전쟁과 휴전- 6·25 비록 정일권 회고록』, 동아일보사, 1986.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1, 2권, 일신서적, 1993.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윌리엄 T. 와이블러드 엮음, 문관현 등 옮김, 『조지 E.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의 한국전쟁 일기』, 플래닛미디어, 2011. 1129일간의 전쟁 6·25』,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구자룡 기자·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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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군 왜 서울에서 3일 허송했나[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북괴군의 ‘서울 3일’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남한 각지에서 공산당 지하조직이 일제히 폭동을 일으키는 ‘붉은 반란’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는 주장이 있다. 북괴군이 서울을 점령한 여세로 밀어붙였다면 미 지상군 참전도, 인천상륙작전도 없었을 것이다.” (정일권, 29쪽)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한 뒤 3일 만인 28일 서울 한강 이북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7월 1일 한강을 넘을 때까지 3일간 서울에서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고 머물렀다. ‘북한군 서울 3일’ 체류가 왜 발생했는지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분명한 것은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남침 승인과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전격전’을 주장한 것과는 다른 행보였고 전쟁의 양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 ‘서울 3일’이 미 지상군 파병 앞당겼다 북한군이 한강 이북에 머무르는 3일간 국군은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한강 이남에 수도사단, 2사단, 7사단 등 3개 사단을 배치해 시간을 벌었다. ‘북한군 서울 3일’ 기간 중인 6월 29일 맥아더 사령관이 도쿄에서 전용기 바탄호를 타고 수원 비행장에 내린 뒤 이승만과 만난 뒤 곧바로 한강 방어선까지 왔다. 북한군이 한강 북쪽에서 남쪽으로 120mm 박격포탄을 퍼붓는 가운데 맥아더는 영등포의 한 방어선 개인호에서 일등중사에게 묻는다. “자네는 언제까지 그 호 속에 있을 셈인가?”“철수 명령이 없었다. 명령이 내려지든가, 죽는 순간까지 참호를 지킨다.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다. 무기와 탄약을 달라”맥아더는 도쿄로 돌아가 트루먼에게 미 지상군 2개 사단 파병을 요청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7월 1일 일본 주둔 미 24사단을 긴급 투입했다. ‘북한 서울 3일’이 미 지상군의 신속한 파병에 도움이 됐다며 전사(戰史)에 전해지는 에피소드다.1951년 5월 15일 자 미군 정보지에는 “(북한이 신속히 남하하지 않아) 낙동강 방어선을 뚫지 못한 데는 서울 점령 뒤 한강 도하를 지체한 것 때문”이라는 김일성의 탄식이 있다. 38선에서 서울까지는 약 45km. 국군의 산발적인 저 항속에 북한군은 하루 15km씩 진군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에 머문 3일이면 7월 1일 수원, 7월 4일에는 조치원까지도 진격할 수 있었다. ‘북한군 서울 3일’은 남쪽으로의 진격이 며칠 늦어진 이상의 6·25 전쟁 전체의 양상을 바꾸는데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그래서 왜 3일을 한강 이북에서 머물렀는지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한강 다리 끊어져서 넘지 못했나’ 북한군은 6월 27일 4시 창동 방어선, 28일 1시에는 미아리 방어선을 넘었다. 국군은 미리 설치해 둔 폭약을 터뜨려 28일 새벽 2시 반 한강 인도교와 경인 철교를 끊고 광진교는 4시에 폭파했다. 한강철교는 일부만 파손됐다. 북한군이 서울 중심을 점령하기 전 한강 다리가 끊어져 신속히 도하를 못 했다는 시각이 있다.당시 한강은 수심 3m, 강폭 700〜1500m가량이었다. 북한군은 한강을 도하할 장비를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한강에는 마포나루 등 6개 나루터에 크고 작은 배들이 있었다. 1개 소대 병력도 탈 수 있는 ‘늘배’라는 목재 운반선도 있었다. 길이가 12m가량이다. 한강에는 4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광진교 한강 인도교 경인 철교는 파괴됐으나 한강철교는 일부 철로 레일과 침목만 손상됐다. 레일과 침목 교체는 수 시간이면 가능했다. 낮 공습을 피해 북한군은 야간 보수 작업을 거쳐 이틀 만에 철로를 보수해 3일 새벽 전차도 건너게 했다. 한강 이남에서 국군이 방어선을 펴고 있었지만 3일간 넘지 못할 만큼 강력한 저항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강 이북의 주력 부대가 철수 명령을 받지 못하고 다리가 부서져 중장비, 차량, 곡사포와 박격포, 기관총 등을 대부분 버리고 한강을 넘어와 버렸기 때문이다.김일성이 서울에 들어온 뒤 한강 다리 장악에 소홀한 것도 초기 작전의 실책으로 지적된다. 27일 서울로 진입한 105 전차여단은 한강 다리보다는 중앙청, 서대문형무소, 방송국, 신문사 등을 최우선으로 접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백선엽 장군은 김일성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기세대로 한강을 넘어 남진을 계속했다면 아주 불리했을 것인데 천행으로 김일성이 주춤거리고 말았다고 회고했다. (백선엽 1권, 294쪽) ● ‘서울만 점령하면 전쟁 끝으로 오판?’‘북한군 서울 3일’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학계에서는 북한군의 ‘서울 제한점령론’도 제기됐다. 북한 인민군의 남침 목표가 서울을 점령하는 것에 제한됐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서울을 점령한 뒤 뭔가를 기다리며 지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94년 러시아 옐친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한 1949년 1월 〜 1953년 7월 소련 외교문서 중 김일성과 스탈린 간에 오간 서한에는 서울 제한점령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박헌영은 마오쩌둥(毛澤東)과 스탈린을 만났을 때 “북한이 남침했을 때 20만 명이 봉기하고 남한 내 빨치산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6·25 발발 당시 한국군이 보유한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일부는 빨치산 토벌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1948년 10월 여순 사건 이후 빨치산 숫자는 2500여명까지 크게 줄었다가 그 후 다시 늘어나기도 했으나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1950년 초에는 지리산의 빨치산이 대부분 토벌됐다. (KBS 역사스페셜 1999년 6월 22일). 북한군이 서울에서 머무르며 빨치산의 호응을 기다릴 상황이 아니었다.7월 1일 스탈린은 북한 주재 대사 스티코프에게 보낸 전문에서 “조선사령부가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전혀 통보하지 않고 있다. 스탈린은 남한을 빨리 ‘해방’시킬수록 미국이 참전 가능성이 작아진다고 생각했다. ● 무산된 ‘수도권 포위 섬멸 작전’ ‘북한군 서울 3일’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북한의 남침 구상을 볼 필요가 있다. 남침 개시 직전인 6월 22일 작성된 것으로 개전 후 북한군에게서 노획한 문서 ‘북한군 정보계획’에 따르면 남침은 3단계로 진행된다. 1단계 방어선 돌파 및 주력 섬멸2단계 전과 확대 및 예비대 섬멸3단계 소탕작전 및 남해안 도달핵심은 1단계로 서울을 점령한 주력군과 춘천 원주 등을 점령하고 국군의 후방으로 온 북한군이 수원 이북에서 한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다. 그 후 남해안까지 3개 방향으로 진격한다.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북한군 1군단 등 주력 부대가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고, 중부 전선의 북한 2사단과 7사단은 원주와 홍천을 점령한 뒤 남쪽 후방에서 한강 이남 지역을 봉쇄 포위해야 한다. 계획대로 진행돼 수도권에서 국군 주력을 섬멸하면 1개월 이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북한은 생각했다. 미국이 개입할 시간을 주지 않는 속전속결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작전이 차질을 빚은 것은 작전상 주공(主攻)이 아닌 조공(助攻)을 맡은 중부 전선에서 발단이 됐다. ● 국군 6사단의 서전(瑞戰), 춘천 홍천 전투북한은 서부전선에서 1군단 등 주력이 서울을 공략하는 동안 중부 전선인 춘천〜홍천에서는 조공 부대를 우회 남진시켜 수도권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세웠다. 수도권 포위 섬멸 작전이다. 춘천 홍천 지구는 국군 제6사단(청성부대)이 맡고 있었는데 북한 정예 2군단을 맞아 선전하면서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남도현, 47쪽)6사단이 춘천에서 사흘, 홍천에서 이틀을 버텨 30일까지 북한군을 저지한 뒤 전략적 후퇴를 하면서 북한군은 ‘수도권 섬멸 작전’에 투입되는 타이밍을 놓치게 됐다.중부 전선으로 내려온 북한군은 2군단 예하 2사단과 12사단이었다. 6사단은 7연대가 옥산포, 19연대가 홍천 말고개에서 육탄돌격까지 감행하며 적의 자주포를 막아냈다. 사단의 제16포병대대는 춘천과 홍천을 오가며 맹활약했다.● 휴가도 줄이고 평소에도 철저한 훈련 6월 24일 0시 전군 비상경계령이 해제돼 25일 전방 부대의 외출 외박 휴가 장병이 많았다. 하지만 6사단은 전쟁 직전 귀순한 북한군 자주포 부대 병사가 ‘곧 북한군이 내려올 것’이라고 증언해 외출 외박을 제한하고 경계를 강화했다. 16포병 대대는 적의 예상 주요 접근로에 화력을 집중하는 연습을 반복했는데 실제 상황에서 그대로 적용해 부족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큰 효과를 봤다. 북한군의 주공은 홍천의 12사단, 조공은 춘천의 2사단이었다. 먼저 제동이 걸린 것은 춘천이었다. 춘천의 국군 7연대는 1개월 전 고등학생과 주민들의 도움까지 받아 진지를 구축했다. 북한군 2사단은 개전 직후 지금은 수몰된 춘천의 첫 관문 모진교를 계획대로 돌파했다. 문제는 옥산포. 북한군이 집중 타격을 받은 옥산포는 논밭 평지로 이곳을 내려다보는 우두산 8부 능선에 참호를 파두었다. 심일 소위는 5명의 결사대와 함께 대전차포와 화염병, 수류탄으로 SU-76 자주포 2대를 파괴해 창군 이래 처음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북한군은 26일 16포병 대대가 평소 주 침공로로 예상하고 사격훈련을 해왔던 북한강 하천 부지로 내려와 포병대대의 포격 효율을 높였다. 포병대대의 집요하고 정교한 포격으로 북한군이 머리를 들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고 북한군 포로가 진술했다고 한다. 북한군 2사단은 이곳에서 50%가량의 전력 손실을 봤다. 7연대는 이틀간 옥산포를 지키다 소양교로 옮겨 춘천의 관문인 소양교에서 다시 격전을 벌였다. 소양교에는 지금도 총탄 자국이 남아있다.춘천 전투에서 타격을 입자 홍천까지 내려갔던 주공 12사단의 2개 연대와 603모터싸이클 연대를 춘천으로 ‘회군’시켰다. 그러자 김종오 6사단장은 춘천의 7연대를 후퇴시키고 19연대와 16포병 대대도 홍천으로 이동시켰다. ● ‘11명의 육탄 돌격대’일부 부대를 춘천으로 보낸 12사단 역시 계획대로 홍천을 점령하지 못했다. 양구를 거쳐 홍천으로 향하던 북한군이 말고개에서 덜미를 잡힌 것이다. 이곳을 지키던 19연대의 11명 육탄돌격대는 굽은 지형을 이용해 숨어있다가 허리에 휴대한 대전차포를 발사하거나 SU-76 자주포에 뛰어올라 수류탄을 던지고 내려오기도 했다. 돌격대원 대부분이 희생됐다. 전투 현장에는 ‘11용사 육탄부대 전적비’가 세워졌다. 고갯길에서 길이 막혀 고립된 북한 12사단 병력은 춘천에서 내려온 16포병 대대가 집중 타격했다. 말고개 전투의 선전은 춘천에서 철수하던 7연대의 철수로를 확보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25일 새벽 동해안으로 북한 766부대가 상륙해 후방이 차단됐던 국군 8사단이 태백산맥을 넘어 제천으로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게 했다. 6사단과 8사단이 전력을 보존한 것은 이후 전황에도 영향을 미쳤다.(남도현, 66쪽). 후퇴하면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지연 작전’에 가담하고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도 맡은 역할을 수행했다. 춘천 홍천 전투에서 1개 연대급 손실을 입은 북한군은 2군단장, 2사단장을 전격 교체했다. 전쟁 초기 조치로서는 이례적으로 북한군 지도부도 큰 실책이라고 판단한 것을 보여준다. 6사단은 서부전선에서 서울이 점령되고 동부전선의 8사단도 후퇴하면서 6월 30일 충주로 이동했다. 북한군의 중부전선 주력을 5일간 저지한 뒤였다. ● 북한군 3일 늦은 한강 도하 남진 춘천 홍천 전투에서 5일을 묶인 북한군 2사단과 뒤에 전투에 가세한 7사단이 양평에서 한강을 넘은 것이 7월 1일이었다. 이날 서울을 점령한 뒤 3일을 지체하고 있던 북한군 주력 3,4사단도 한강을 건넜다. 마치 중부 전선의 2군단이 오기를 기다려 함께 내려가는 모양새다. 북한군 2사단이 수원에 도착한 것은 7월 5일로 국군은 남쪽으로 후퇴해 전력을 보강한 뒤였다. 미군 제24사단은 7월 1일 투입돼 5일 오산까지 내려온 북한군과 죽미령에서 첫 교전을 하게 됐다. 춘천에서 시간을 지체한 북한군이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후퇴하는 국군을 차단하지 못했고 미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었다.(박태균, 192쪽)<표> 국군 6사단과 북한군 2군단의 전력 및 인명 피해 국군북한군참가 부대6사단 2연대, 7연대, 19연대, 제16포병대대2군단 2사단, 5사단, 12사단, 제603모터싸이클 연대병력 수약 1만 명약 3만5천명주요 장비57mm 대전차포122mm 곡사포, 76mm 야포, 45mm 대전차포전사상자405명(사망 52명)6천792명, 포로 122명무기 장비 손실박격포 16문, 57mm 대전자포 1문SU-76 자주포 18문, BA-64 장갑차 2대, 45mm 대전차포 2문, 박격포 8문● ‘지연 작전’을 빛낸 한국군의 투혼 북한이 T-34 전차를 앞세워 부산까지 전격적으로 공격해 왔다면 미국의 참전을 곤란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로 진격해 서울에서 3일 가량을 남진하지 않고 머물렀다. 북한은 부산으로 남진이 늦었을 뿐만 아니라 기뢰 부설, 공중 또는 해상 공격 등으로 부산항에 대한 미군의 접근을 저지하거나 지연시키지 않았다. 부산항을 점령하거나 고립시키지 않아 미군의 교두보가 되게 한 것은 공산측의 결정적인 실수로 지적된다.(손튼, 250쪽)북한의 기습 남침 이후 국군은 물론 미군이 투입된 뒤에도 8월말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때까지 일방적으로 후퇴하면서 ‘지연 작전’을 폈다. 미 여성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는 ‘지연 작전’을 이렇게 풀이했다. “천안 조치원 금강 대전 영동 등에서 우리가 당한 패배를 지칭하는 용어이자, 한국에서 끔찍한 날들을 실제 목격한 사람 모두의 탄원이다.” 맥아더 장군은 공산주의자들이 개전 초기 몇 주 동안 머뭇거린 것이 그들의 가장 큰 실수라고 보았다. 미군이 북한을 과소평가한 것 만큼, 북한은 미군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이다.(히긴스, 98쪽)초기 전투는 일방적인 후퇴였고 미군이 투입된 후에도 당분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이 투입되기 전 중부 전선에서 6사단의 분투는 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3년간 치러진 많은 전투들 중에서 춘천과 홍천 전투를 다시 돌아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국군 6사단과 김종오 사단장의 영욕6·25 전쟁이 3년 가량 이어지면서 전쟁에 참가한 부대와 지휘관들은 숱한 전투 속에 승패가 엇갈리고 영욕이 교차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개전 초기 춘천 홍천의 중부전선을 담당한 국군 6사단이다. 미군은 군우리 전투의 참패와 지평리 전투에서 설욕한 육군 제2사단이다. 그야말로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경험을 했다.6사단은 개전 초기 춘천과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2사단과 7사단을 맞아 사흘 이상 저지함으로써 서울 함락 이후 북한군 남진의 발목을 잡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6사단이 홍천에서 철수해서 후퇴한 것도 다른 전선이 밀리면서 불가피한 후퇴 작전이었다. 그런데다 후퇴해 가면서도 7월 5일∼8일 동락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둬 6사단 7연대의 연대장부터 사병까지 장병 전체가 1계급 특진하는 영광을 누렸다. 같은 시기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에서는 미국 24사단의 스미스 특임부대가 준비되지 않은 오만함으로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받고 있던 때여서 더욱 대비가 됐다.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북진한 뒤 10월 26일 평안북도 초산에서 미군과 국군을 통틀어 처음 압록강에 도달한 것도 6사단의 한 특공수색대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압록강에서 수통에 물을 받는 병사가 6사단 7연대 소속이다. 백선엽 장군은 이같은 6사단의 활약에는 다른 국군 사단이 갖추지 못한 장점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6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강원도의 영월 일대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광산개발 붐이 일어 광석을 실어 나르는 중소형 트럭이 전국 어느 지역에 비해 많았다는 얘기다. 6사단은 전쟁 발발 뒤 그 광물회사의 트럭을 징용할 수 있어 기동력이 아주 탁월했다는 것이다. (백선엽 2권, 219쪽)그런데 ‘압록강 수통’은 ‘북진 과속’의 큰 대가를 치렀다. 중공군이 들어와 기다리고 있다가 포위 공격을 해 연대장이 권총도 잃어버릴 정도로 혼비백산해서 후퇴해야 했다. 당시 미군과 국군 모두 압록강 진격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중공군 대부대를 맞은 것이지만 김종오 사단장으로서는 큰 작전상 실책으로 남게 됐다. 6사단 사단장이 김종오에서 장도영으로 바뀐 1951년 4월 22〜24일 사창리 전투에서 부대의 50% 가량을 잃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게 됐다. 강원도 화천군 화악산과 사창리 일대에서 중공군 4개 사단과 벌인 방어 전투다. 중과부적의 상황이긴 했으나 방어선을 줄여 버티면서 아군의 화력 지원을 받는 전투를 벌이지 않고 사실상 전투를 포기한 데다 무질서한 도주로 피해가 컸다. 하지만 6사단은 5월에는 사단 단위로는 6·25 전쟁 최대의 성과로도 불리는 용문산 전투에서 승리한다. 장도영 사단장으로서도 개인적인 설욕의 기회가 됐다. 김종오 장군은 1952년 10월에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9사단장으로서 큰 성과를 올려 초산 전투에서 패배를 되갚았다. 참고 문헌남도현 지음,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미디어, 2010. 리처드 손튼 지음, 권영근 권율 옮김,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한국국방연구원, 2020.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박태균 지음, 『한국전쟁』, 책과 함께, 2005.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1〜2권. 2020.정일권 지음, 『전쟁과 휴전- 6·25 비록 정일권 회고록』, 동아일보사, 1986.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2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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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전쟁이 대만 살렸다[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1950년 4월 16일 밤, 중국 제4집단군 린뱌오(林彪) 휘하 40군과 43군은 4백 척 소형 선박과 동력선을 타고 대륙에서 15마일 거리의 하이난섬(海南島)으로 향했다. 해상 및 공중 화력지원을 받는 상륙작전이 아닌 게릴라 침투처럼 접근했다.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군대의 저항에 중공군 1만 명가량이 희생됐지만 5월 1일 하이난섬 전역을 점령했다.’(손튼, 151쪽). 중공군이 이용한 선박은 노획한 자동차 엔진을 떼어내 목선에 설치한 ‘돛이 달린 기선’으로 포 2문을 장착해 ‘토포정(土砲艇)’이라 불렀다. 크기가 작아 은폐하기가 좋고 제작 비용이 싼 것도 장점이다. 하이난섬 전투를 현장 지휘한 한센추는 6·25 전쟁 발발 후에는 펑더화이(彭德懷) 휘하 3명의 부사령관 중 한 명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1949년 10월 1일 톈안먼(天安門) 성루에서 신중국의 성립을 선포한 순간에도 서남부와 일부 섬 등에는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 70여만명이 대만으로 철수하지 않고 저항하고 있었다. 특히 하이난섬과 덩부섬(登步島)은 눈엣가시였다. 대륙을 장악한 마오로서는 혁명 완수를 위해서 대만섬을 평정하는 것은 절대적인 과제였다. 하이난섬 점령은 대만섬 평정의 분수령이었다. 신중국 성립 이후에도 공산군이 차지하지 못했던 저우산(周山)군도의 덩부섬 등을 하이난섬 이후 비교적 손쉽게 점령하는 등 국민당군이 점거 중이던 다른 군소 도서를 차례로 접수했다.● 대만 점령 목전에 두었던 중국 중공군이 하이난섬을 점령한 것은 6·25 전쟁 불과 2개월여 전이다. 장제스가 대륙에서 밀려나고 주변 섬들마저 하나씩 뺏겨 대만섬으로 조여오는 형국이었다. 대만섬도 중공의 점령 위기에 몰렸다. 이처럼 국면이 전환된 데는 국민당 군대의 부패 등 내전 패배가 요인이지만 미국의 아시아 정책 변화도 한 요인이다. 미국은 애치슨이 1950년 1월 12일 ‘극동 방어선’ 연설에서 대만을 제외했다. 2월 중소 동맹조약으로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살아났지만 그렇다고 국민당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장제스는 미국의 군사 지원 없이는 오래 버틸 수 없어 대만섬으로 가는 길목의 진먼도(金門島)와 마주(馬祖)열도 등을 제외한 곳에서 군사력을 철수했다. 그야말로 중국의 대만 점령은 턱밑까지 갔다. 장제스는 진먼도 등에 ‘물망재거(勿忘在莒)’라는 제나라의 고사를 돌에 새겨 대륙 수복 의지를 다졌다. 이게 6·25 전쟁 발발 불과 한 달을 앞둔 상황이다. 스트롱 대만 주재 대리대사는 5월 17일 “대만의 운명은 이미 결정됐다”며 “6월 15일에서 7월 말 사이 공산당이 대만을 공격하기 시작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6월 15일 이전까지 대만에서 철수할 미국 공공기관의 명단도 확정할 것”이라고 했다. 앞서 마오는 대만 침공을 전담할 지휘관으로 리위(粟裕) 대장을 임명했다. 리위는 1950년 1월 ‘대만 해방과 군사력 건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대만 정복의 마스터 플랜이다. 마오는 2월 이 보고서 등을 토대로 대만 침공을 위한 공수부대도 창설했다. 중국은 대만 주변의 병력도 4만 명에서 15만 6000명으로 증강해 침공 준비를 마쳤다.(김계동 23쪽)● 미국, 대만 장제스 4번 버리다 1948년 하반기 이후 국공 내전에서 장제스 국민당군의 패배가 뚜렷해지자 미국과 영국은 대륙을 실질적으로 장악해가는 공산당과의 관계 재설정에 들어갔다. 1949년 10월 신중국이 선포되기 이전에 이미 장제스 국민당 정부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의사를 여러차례 밝혔다. 1950년 1월 트루먼의 기자회견과 12일 애치슨의 강연에서 대만을 포기하고 공산당 정부와의 관계 정상화를 밝힌 것이 대표적이다. <표> 미국의 ‘대만 포기’ 일지1949년3월도쿄 연설, “대만과 한반도는 미국의 방위선 밖” 8월미 정부, “국민당은 부패 무능한 반동 정당” 백서 발표 12월NSC-48/2,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은 군사행동을 할 정도 아니다”1950년1월 5일트루먼, “군대를 사용해 분쟁에 개입할 의도 전혀 없다” 12일애치슨, “한반도와 대만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대만 제외” 3월애치슨, “대만의 조기 공산화는 불가피하다” 5월대만 주재 미국 영사, 3개월 이내 공산군 침략 예상하고 모든 미국인 대만 떠나야 한다는 권고를 본국 정부에 보고 ● 애치슨 강연은 ‘대만 포기’ 시그널 “대만을 놓고 벌이는 중국 공산당과의 전쟁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애치슨 강연 중 ‘극동방위선’에 관한 언급은 한국보다는 ‘대만 포기’ 의사를 마오쩌둥에게 알리는 것이 목표였다. 모스크바에서 소련과 밀담을 나누고 있는 마오에게 ‘대만도 포기할 테니 소련과 멀어지고 미국과 관계를 맺자’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미국에 협조하면 중국의 대만 정복을 용인할 수도 있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손튼, 80쪽). 키신저도 애치슨 연설에 담긴 강조점은 중국에게 유고의 티토가 택했던 옵션을 노골적으로 제안한 것이라고 했다.(키신저, 157쪽) “국민당 장제스 정부가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군사력에 직면해 무너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장제스는 중국 역사상 어떤 통치자보다 더 큰 군사력을 가졌었다.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도 받았다. 그런데 4년 후 무슨 일이 생겼나. 그의 군대가 녹아 없어졌다. 그에 대한 지지도 녹아내렸다. 그는 남은 군대와 함께 해안에서 떨어진 작은 섬에서 난민이 되었다.”(애치슨 연설문 일부)대만 정복 전투를 총지휘하던 리위는 “미국은 대만이 중국의 일부분임을 인정했다. 인민해방군이 대만을 공격해 점령하는 것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고 애치슨 선언을 이해했다. (선즈화, 262쪽). 애치슨 라인 선언 때문에 전쟁이 터진다면 대만이 상황에 더 맞았다. 중국이 대만 점령을 준비하고 공언한 데다 무력행사에 미국까지 불개입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은 대만을 향하던 총부리를 급히 한반도로 가져와야 했다. 마오는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김일성의 계획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시기상 중국이 대만 문제를 해결한 이후 돕고자 했다. 북한의 남침은 남한에도 ‘기습’이었지만 마오에게도 대만 침공을 목적에 둔 상황에서 ‘기습’적으로 이뤄졌다. 마오는 6·25 전쟁 발생을 외신 뉴스를 보고 알았다. 북한이 38선 부근으로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던 6월 12일 마오는 리위 장군과 군에 보낸 전문에서 “대만을 신속히 점령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한반도와 대만 해협에서 경쟁적으로 전운이 높아지고 있었다. 북한에 선수를 뺏겨 대만 침공의 타이밍을 놓친 중국은 6·25 정전 7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대만에 대한 무력 공격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 한국 전쟁이 바꾼 대만 운명 6·25 직전까지 중국은 대만 주변 섬을 대부분 점령했고 대만섬 공격 날짜까지도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대만에 대한 정책은 180도 선회한다. 필리핀 해역의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이동해 중공이 대만에 군사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항모 이동은 장제스가 본토를 침공하는 것을 막는 것도 포함됐다. 트루먼은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7일 “1월 5일 선언했던 중국 내전에 대한 미국의 불개입정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미국의 대만 정책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중국도 대만을 공격할 여유가 없어졌다. 6·25가 대만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키신저는 마오쩌둥이 혁명의 완성으로 대만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대만 문제가 해결된 뒤 북한을 돕겠다고 한 것이 오히려 김일성에게는 남침을 서두르게 했다고 했다. 키신저는 북한에 ‘(남침의) 인센티브’를 준 것이라고 했다. 미국이 두 차례나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군사적 정복을 그냥 두고 볼 리 없을 거라고 김일성은 확신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기 전에 남한에 대한 행동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키신저, 161쪽). 미국은 6·25 전쟁이 터지자 대만해협으로 미 7함대 파견을 결정했다.● 대만 학자의 ‘빈약한’ 반론 대만학자 장수야(張淑雅)는 ‘한국전쟁이 대만을 구했다’는 견해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대만을 구했다는 인식은 미국 학자들 사이에서는 토론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고 했다. 중국 본토 학자들도 한국전쟁이 장제스가 회생할 기회를 주었다고 본다고 소개했다.(장수야, 24쪽). 한국전쟁으로 ‘장제스의 운수가 대통하게 되었다’고 보는 미국 학자도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 미 7함대 파견만으로 중공군의 침략을 막을 수 없었고, 중공은 6·25 전쟁 전에 대만에 대한 공격 준비를 늦추었기 때문에 한국 전쟁 때문에 대만이 침공 위기를 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대만 국민당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중국 대륙에 접수되지 않도록 한층 노력한 것이 대만의 생존에 주효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명의(미국)와 환자(대만)의 비유를 들었다. 명의가 훌륭한 약을 주어도 병을 극복하는 것은 환자 스스로 나으려는 의지와 노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중공의 대만 점령이 목전에까지 와있던 상황에서 한국전쟁 때문에 중공이 말머리를 돌린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대만의 생존에서 내부적인 노력이 중요하지만 6·25 전쟁 이후 동북아에서 본격화한 냉전 질서가 각 진영 안보의 울타리가 된 것이 대만의 안보에도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대만을 보호하는 미국의 안보 울타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이었다. 국공 내전의 패장인 장제스의 집권 여부도 따지지 않았다. ● 소련의 늑장 지원, 해공군 지원 거부 중국의 대만 침공 결행이 늦어진 데는 소련이 큰 변수였다. 중국은 1949년 10월 진먼다오(金門島)와 덩부다오(登步島)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대만섬이 본토에서 149km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데다 대만은 400대 이상의 항공기, 70척 이상의 함정을 보유해 중공에는 거의 없었던 해·공군력이 만만치 않았다. 중국은 소련에 해공군 지원을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거절되거나 약속을 하고도 인도를 지연하거나 해서 예상대로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1949년 7월 5일 마오는 스탈린에 보낸 전보에서 “대만 공격은 공군부대가 조직된 후에나 가능하다”며 공군 지원을 호소했다. 마오의 요구는 매우 구체적이었다. 6개월에서 1년 안에, 모스크바에서 1천명의 비행사와 300명의 공항 근무 요원들을 훈련시켜 줄 것, 100~200대의 전투기와 40~70대의 폭격기를 중국에 판매할 것 등이었다. 마오는 해군함대 창설도 요청하면서 1950년 하반기 대만을 공격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스탈린은 소련이 대만상륙작전을 지원하면 미국과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다며 즉각 거절했다.(선즈화, 260쪽) 1949년 12월 마오가 모스크바에 갈 때는 공군력 지원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대만 공격이나 연해 도서 해방을 위한 군사행동에 필요한 비행기와 군함 및 주요 설비와 기재는 전혀 중국에 도착하지 않았다.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전투기 119대를 받은 것은 6·25 전쟁 이후인 1950년 10월이 처음이었다. 스탈린이 중국에 대한 해공군력 지원을 거절하거나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중국이 대만을 수복하지 못하고 중국이 유엔에도 가입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마오가 미국의 위협 속에서 자신에게 계속 의존하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미중 군사 충돌도 이런 목적에서 잘 수행됐다. 중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1971년보다 훨씬 일찍 유엔에 가입할 수 있었을 것이고, 대만 문제도 일찍 해결될 수 있었다.(쑤이, 344쪽). 스탈린이 6·25 전쟁에서 미중 대결을 유도함으로써 신생 중국과 마오를 견제하려 했다는 ‘스탈린 음모론’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대목이다. 이승만과 장제스의 반공(反共) 동맹장제스(蔣介石)는 국공 내전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 홍군에 밀려 대만으로 물러난 뒤에도 본토 수복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장제스는 자신의 구상 실현을 위해 한국과 군사동맹 체결을 희망했다. 한국의 군사기지를 이용해 만주 및 화북 지역의 공업지역을 폭격하고 중국 서해안 봉쇄에도 활용하려고 했다. 6·25 발발 3일 후 장제스는 군대 파견을 미국에 제의했다. 한국지원병사령관도 내정하고 3개 사단 3만 3000명과 1개 기갑여단, 20대의 수송기를 투입하겠다는 의사를 미국에 타진했다. 당시 대만은 육해공 68만 명(육군 48만 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맥아더와 미 합동참모본부는 중국군의 개입을 불러오고 대만 방어도 약화시킬 수 있다며 반대했다.(이상호, 169〜170쪽)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장제스가 병력을 한국에 파견하겠다는 제의를 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호의적이었으나 자신은 반대했다고 했다. 한국보다는 대만을 방위하는데 병력이 더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애치슨, 537쪽). 애치슨이 반대한 데는 다른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장제스가 원하는 것(중국 공산주의자를 끌어들이는 확전)과 미국이 원하는 것(중국을 개입시키지 않는 제한 전쟁)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애치슨은 장제스의 군대가 중국 본토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낱낱이 알고 있어 장제스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핼버스탬, 141쪽). 기본적으로 국민당 정권이 부패하고, 장제스의 군대는 무능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애치슨에게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확전을 불러온 빌미를 장제스에게 줄 리가 없었다. ● 이승만과 맥아더의 대만 군대 참전 환영 전환이승만 대통령도 주한 대만 대사가 2만〜2만5천명의 자국군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전해왔으나 정중히 거절했다. 반공국가인데 왜 거절하느냐는 프란체스카의 질문에 “중공군을 내 손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잖아”라고 했다. 중국 참전의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프란체스카 1950년 7월 11일의 일기) 이승만은 막상 중공군이 개입해 전세가 불리해진 상황에서는 대만 군대도 받아들이는 데 찬성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병력이 충분치 못하다는 애로사항을 털어놓자 ‘맥아더 장군에게 장제스 총통이 지원해 줄 5만 또는 그 이상의 군대를 보내주도록 요청하는 서한을 무초 대사를 통해 보냈다.(프란체스카의 일기, 1951년 1월 5일). 맥아더도 1951년 11월 28일 합참에 장제스 군대 파병을 요청했다. 그 후 맥아더는 장제스 군대의 대륙 공격 및 한국전쟁 개입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이견과 갈등을 빚어 전격 해임되는 주요 이유가 됐다.맥아더는 해임 후 의회 청문회에서도 대만군 활용에 대한 소신을 유지했다. 대만을 위협하던 중국군 제3, 제4 야전군이 한반도로 전환됐기 때문에 대만군을 한국전쟁에 이용하거나 중국 본토에 대한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한다면 한반도에서 중국의 압력을 충분히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이상호, 332쪽)● 이승만과 장제스의 셔틀 방문 외교 1949년 8월 6〜8일 장제스가 김해를 방문했다. ‘대한민국 제1호 정상외교’로 불리는 이장(李蔣) 회담이 7일 열렸다. 장제스가 부인의 이름을 딴 전용기 ‘미령호’ 타고 도착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진해 비행장에서 영접했다. 진해 해군기지사령부 영빈관에 투숙했다. 둘은 회담 후 “국제공산주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투쟁해야 할 것을 확인한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1949년 8월 8일, 9일 보도).전쟁이 끝난 뒤 1953년 11월 27∼29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만을 답방해 ‘반공통일전선 결성‘을 발표했고 이는 1954년 아시아민족반공연맹 발족으로 이어졌다.<참고 문헌>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데이비드 쑤기(徐澤榮) 지음, 한국전략 문제연구소 옮김. 『中國의 6·25 戰爭 參戰』, 한국전략문제연구소, 2011.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딘 애치슨, 『Present at the Creation』, Norton & Company Inc., 1969.리처드 손튼 지음, 권영근 권율 옮김,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한국국방연구원, 2020.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등 옮김. 『최후의 천조(天朝)』, 도서출판 선인, 2017.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이승만 구술,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장수야(張淑雅) 지음, 정형아 옮김, 『한국전쟁은 타이완을 구했는가?』, 경인문화사, 2022.헨리 키신저 지음, 권기대 옮김,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 민음사, 2012.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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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탈린은 한반도 전쟁에서 무엇을 노렸을까[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6·25 전쟁 발발 사흘째 북한군이 서울까지 밀려 들어오고 있던 1950년 6월 27일 정오(현지시간) 뉴욕 롱아일랜드 ‘스톡홀름 호텔’의 한 식당. 트뤼그베 리 유엔사무총장은 유엔 주재 미국 대표 그로스와 소련 대표 말리크의 중간에 앉아 점심을 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트뤼그베 리 총장은 말리크에게 오후 안보리에서 한국전쟁 관련 회의를 한다고 알리면서 “귀국의 이익을 위해 참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로스 대표는 탁자 밑에서 발로 트뤼그베 리를 툭툭쳤다. 말리크에게 굳이 회의 참석을 권유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유엔회원국들에게 한국전 참전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킬 예정인데 소련 대표가 참석하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리크는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 전 가지 않겠습니다”고 거절했다.(선즈화, 360쪽) 말리크는 이틀 전 ‘북한의 남침은 평화 파괴’라며 ‘38선 이북으로 철수’를 요구한 안보리 결의안 표결에도 불참했다. 7월 7일 유엔 설립 이후 처음으로 유엔군사령부를 창설하는 안보리 결의안을 낼 때도 방관했다. 소련은 북한의 남침에 대응한 유엔의 초기 3차례 결의안에 모두 불참했다. 그해 1월 안보리를 탈퇴하면서 내세운 명분처럼 자유중국(대만)이 유엔 회원국으로 남아있는 것에 대한 항의이자 유엔의 합법성에 흠집을 내고자 한 것이다. 미국은 소련이 유엔안보리 회의에 참석해 몽니를 부리기보다 오히려 길을 터주자 유엔을 한국전쟁에 대한 집단안전보장이 작동되는 무대로 활용했다. 스탈린은 왜 유엔이 미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사실상 수수방관하고 있었을까. ※현지시간 기준. 안보리 회원국은 11개국 6월 25일 안보리 첫 회의는 6·25 발발 24시간 만에 개최. 7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사령관에 작전지휘관 이양일자내용표결비고6월 25일‘북한의 남침은 평화의 파괴’ ‘북한군의 침략중지 및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 요구’찬성 9, 반대 0, 기권 1(유고슬라비아), 소련 불참안보리 1차 결의안〃 27일유엔 회원국의 군사원조 제공 결의찬성 7, 반대 1(유고), 기권 2(인도 이집트), 소련 불참안보리 2차 결의안. 통과 후 소련 정부, ‘무효’ 주장7월 7일유엔군사령부 창설소련 불참안보리 3차 결의안10월 7일유엔군 한반도 전체 점령 허가8월 1일 소련 안보리 복귀유엔총회 결의안● 스탈린이 체코 대통령에 보낸 한 통의 편지 스탈린이 6·25 전쟁 초기 유엔 안보리에서 미국을 저지하지 않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흥미로운 문건이 뒤에 공개됐다. 러시아 학자 라도프스키는 크렘린궁 문서보관서에서 찾아냈다며 스탈린이 1950년 8월 27일 체코의 클레멘트 가트왈드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을 2005년 공개했다. 소련이 왜 안보리에 불참하는지 조목조목 설명한다. “네 가지 목적이다. 첫째, 소련과 신중국의 일치단결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둘째, 미국이 대만 국민당 정부를 중국 대표로 인정하는 정책이 터무니없고 어리석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안보리에 소련 중국 두 강대국이 참석하지 않아 안보리 결정은 불법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넷째, 미국의 손발을 자유롭게 해줘 안보리 다수결을 이용해 어리석은 짓을 하도록 했다. 미국의 참모습을 세계 여론에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목적을 이미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 ‘안보리 불참은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 라도프스키는 소련의 안보리 불참은 ‘방치’가 아니라 의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무장 개입을 예견했지만 저지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이 전쟁에 빠져 힘이 약화되면 유럽에서 지위도 훼손시킬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온 학자 판초프에 따르면 스탈린 사후 집권한 흐루쇼프도 스탈린이 미국을 중국과의 충돌에 끌여들였다고 인정했다. 흐루쇼프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우리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한에 미국을 끌어들인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라고 말했다.(판초프, 536쪽) 소련의 안보리 불참이 스탈린의 신중한 고려와 세밀한 계산을 거친 책략이었으며 목적은 미국을 전쟁의 늪에 빠뜨리고 중국도 출병시켜 미국과 충돌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스탈린 음모설’이다. 음모설에 따르면 6·25 전쟁 발발 후 소련의 안보리 불참은 약 5개월을 거슬러 그해 1월 소련이 안보리를 탈퇴할 때와도 관련이 있다. ● 소련의 1월 안보리 탈퇴, 왜 그때1월 6일 소련의 비신스키 외상은 모스크바에 와 있던 마오쩌둥에게 ‘유엔 안보리에 대만 대표가 계속 남아있는 것은 비합법으로 대만을 탈퇴시켜야 한다’는 성명을 제출하라고 요청했다. 소련과 중공의 ‘대만 탈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련은 13일 기다렸다는 듯이 안보리 탈퇴를 선언했다. 당시 미국 주도의 유엔에서 소련과 중공의 요구는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었다. 그런데도 소련이 이런 행동에 나선 것은 다른 계산이 있었다는 것이 ‘스탈린 음모론’의 분석이다. 명분은 ‘대만을 몰아내고 중공을 유엔에 가입시키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다른 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내는 명분 만큼 중공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날짜 1949년 12월 16일스탈린과 마오쩌둥 첫 만남 21일스탈린 70회 생일 30일미국 NSC-48/2 채택 1950년 1월 5일트루먼 연설, ‘대만 포기’ 12일 애치슨 연설, ‘극동방어선 대만 한국 제외’ 13일소련의 안보리 탈퇴 17일 김일성의 주중 북한대사 송별연, ‘남침 상의 스탈린 면담 요청’ 19일김일성, 국공내전 가담 조선군 2만3천명 귀국 요청, 마오쩌둥 승인 30일 스탈린, 김일성 모스크바 방문 수락, ‘남침 승인 첫 사인’ 의미1950년 2월 4일김일성, 3개 사단 증강 지원 및 차관 1년 앞당겨 제공 요청. 북한은 금 은으로 대금 지불 14일중소 동맹 체결● 스탈린과 마오의 ‘조약 개정’ 기싸움 스탈린은 일본이 항복하기 하루 전날인 1945년 8월 14일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와 중소 조약을 체결했다. 창춘(長春) 철도, 다롄(大連), 뤼순(旅順)항 등에 관한 소련의 이권을 인정하는 것이 골자다. 소련은 이 조약으로 러일 전쟁 패배로 중국 동북지방에서 잃었던 이권 대부분을 회복했다. 마오쩌둥이 1949년 12월 16일 처음 스탈린과의 6시간 가량 회담에서 주요 관심은 조약 개정이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조약은 얄타협정에 근거한 체결한 것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마오는 참여하지 않은 얄타체제, 미국 영국과의 공조체제를 들어 마오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다. 스탈린과 마오의 조약 협상 신경전 바탕에는 국익에 대한 첨예한 갈등도 있지만 스탈린의 마오에 대한 견제 심리, 즉 마오가 ‘아시아의 티토’라는 의구심도 바탕에 깔려있었다. 스탈린이 보는 마오는 자기가 이룬 업적과 중국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하고 지나치게 독립적이었다. 혁명의 승리는 곧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내전에서 마오가 이끄는 공산당이 승리한 것은 스탈린에게는 반갑지 않았다. 소련의 지원없이 혁명을 달성했으니 소련의 위상이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45년 국민당 정부와 맺은 ‘침략적인 성격’의 많은 이권이 담긴 중소조약이 유지되기 어려울 가능성도 많았다.(손튼, 28쪽). 스탈린은 마오와의 공산주의의 이념적 동지라는 등의 명분 때문에 일본과 전쟁을 벌여 얻어 낸 이권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해 전 변절한 티토를 생각해서라도 중국이 국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생각은 거의 없었다.(키신저, 152쪽). 마오가 내전을 일단락짓고 신중국을 선포한 뒤 모스크바로 가서 가진 스탈린과의 첫 회동도 몇 차례 무산된 끝에 이뤄졌다. ● 서풍(西風)이 도와준 마오의 조약 협상 중소가 조약 협상에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뜻하지 않게 서방 국가들이 마오쩌둥에게 돌파구를 마련해줬다. 먼저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이다.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장기간 만나고 있는 것을 본 미국은 중소가 밀착하는 시그널로 보고 이를 막기 위해 부심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이 1월 5일과 12일 연설에서 잇따라 대만을 포기하면서까지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스탈린에 경각심을 주었다. 스탈린은 미중 관계 정상화는 미소 대결에서 최악으로 보았다. 처음 마오를 만났을 때 냉랭했던 태로를 바꿔 조약 개정이 아닌 조약을 아예 새로 체결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기세가 오른 마오를 견제하기 위해 김일성이 들고 온 전쟁을 통해 중국과 서구의 대립을 유도하려고 했다. 마오도 스탈린과의 협상에서 서방국과의 관계 정상화 카드를 활용했다. 마오는 영국이 곧 신중국을 승인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했다. 마오쩌둥이 처음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중소조약 개정을 얄타체제를 들어가며 거부했던 스탈린은 태도를 바꿨다. 소련은 1945년 조약이 ‘시대착오적’이라며 개정 아닌 폐기를 들고 나왔다. 불과 한 달도 안되는 기간 동안 상황이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안보리 탈퇴도 불참도 중국 고립이 목표’ 스탈린의 더 큰 음모 ‘음모론’은 소련이 안보리를 탈퇴한 것도 유대를 강조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중국의 유엔 가입을 막았다고 보았다. 당시 유엔에 중국을 가입시키자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안보리 11개국 중 7개국이 찬성하면 되는데 인도 노르웨이 소련 유고 및 영국이 중국 정부를 인정했다. 프랑스와 이집트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소련대표 말리크가 항의 퇴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를 유엔에 대한 협박으로 받아들여져 마오의 중공을 유엔에 가입시키려는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소련은 8월 1일에야 안보리에 복귀했다. 그 전까지 미국이 북한의 남침에 자유롭게 유엔을 동원하도록 했고, 중국에는 유엔 가입 기회를 갖지 못하게 했다. 더욱이 중공이 소련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을 지속시켰다.(손튼, 103쪽). 이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유도해 중국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려는 스탈린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손튼 교수 등은 분석했다. 선즈화 교수는 소련으로서는 말리크가 6·25 전쟁 안보리 결의안에 참가하면 진퇴양난이 됐을 것이라고 봤다.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북한과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배반을 의미한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북한의 배후에 모스크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두 달 가량이 지난 8월 1일 소련은 복구했다. 유엔 회원국들의 안보리 결의안 집행에 소련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한국전쟁에 대한 핵심적인 결의안이 모두 통과된 후여서 설득력은 떨어져 보인다. 대소련 봉쇄 마스터 플랜, NSC-68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NSC)의 정책 보고서인 NSC-68은 1949년 8월 소련의 원자탄 실험 성공과 10월 중국 공산화 그리고 1950년 2월 중소 동맹체결이라는 거대한 지각 변동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의 대공산권 대응 전략이다. 특히 갓 출범한 중국보다는 소련이 대담해지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재무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1948년 11월 유럽에서의 소련 봉쇄정책을 담은 NSC-20을 채택했으나 이를 아시아로 확대한 것이다. 그후 20여년간 대 공산권 정책의 기조가 됐다. 트루먼은 1950년 4월 이 정책을 보고받았으나 9월 정식 승인했다. 6·25 전쟁이 이 정책에 힘을 실었다. 1975년 2월 기밀문서에서 해제될 만큼 비밀에 부쳐졌다. 트루먼 대통령과 에치슨 국무장관은 중소가 가까워지는 것을 막는 이른바 ‘쐐기 전략’을 추진했다. 1949년 1월 나온 NSC-34는 미국의 주요 정책 목표로 ‘중국이 소련의 속국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1949년 12월 NSC-48/2나 애치슨의 1950년 1월 ‘극동 방어선에서 대만 제외’ 등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런 기조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 변화가 잇따라 나오면서 중소 양국을 같이 견제하는 정책을 마련할 필요가 생겨서 나온 것이 NSC-68이었다. NSC-68은 형세 진단에서 지구상 도처에서 세력균형이 소련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봤다. 가장 취약한 곳은 아시아. 국가안보를 궁극적으로 보장해주는 수단은 군사력이란 논리에 따라 미국의 재무장을 정당화했다. 4,5년 동안 매년 400억 달러에서 500억 달러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과 비교해 소련이 국가예산 중 높은 비율을 군의 하드웨어에 투자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여기에는 과장도 있었다. 소련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소련의 경제력을 지나치게 부풀리기도 했다. 소련이 1950년 중반 10개에서 20개, 1954년 중반 200개의 핵무기를 보유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공산화된 중국은 이곳을 발판으로 공산세력이 아시아 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갈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 이런 진단 하에 미국의 방어선에서 대만은 장제스의 집권 여부와 관계없이 우호적인 국가로 유지해야 했다. 한반도는 중국 소련 미국 같은 강대국 이익이 교차하는 지구상 유일의 지역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위치다. 미국이 추구할 궁극적인 목표로 소련을 군사적으로 패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에 두었다.(손튼, 171쪽)리처드 손튼 지음, 권영근 권율 옮김,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한국국방연구원, 2020.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등 옮김. 『최후의 천조(天朝)』, 도서출판 선인, 2017.알렉산더 판초프 지음, 심규호 옮김, 『마오쩌둥 평전』, 민음사, 2017.헨리 키신저 지음, 권기대 옮김,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 민음사, 2012.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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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어선에선 한반도 뺐던 미국, 어느 때보다 빠르게 참전했다[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미국의 태평양 지역 방어선은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을 거쳐 오키나와로 연장되는 선에서 필리핀으로 연결된다. 이들 지역을 제외한 태평양의 여타 지역은 외세의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보장해줄 수 없을 것이다. 공격이 있으면 초기 대응은 공격받은 국민들의 몫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이 1950년 1월 12일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 강연에서 했던 이 한 구절이 한반도에 ‘북한의 남침’을 불러온 초대장처럼 인식됐다. 6·25 전쟁은 애치슨 강연이 나온 뒤 5개월여 지난 뒤 터졌다. ‘애치슨 라인’이 빌미를 제공한 것은 맞지만 과도하게 낙인을 찍어 애치슨은 억울한 측면이 없지 않다.● ‘방어선 제외가 방어 제외는 아니었다’ 애치슨의 극동방어선은 2차 대전 패전국 일본을 무장해제하고 군정을 실시하고 있던 일본 방어를 강조하면서 나왔다. 애치슨 라인이 논란을 일으킨 건 ‘라인’ 언급 이후 ‘태평양 다른 지역의 안보는 아무도 군사 공격으로부터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구절이다. 하지만 연설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공격받은 국가가 저항한) 다음에는 유엔헌장에 따라 문명화된 세계 전체의 약속에 의존해야 한다’고 했다. 유엔이 개입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애치슨은 “유엔은 지금까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독립을 지키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조직으로 ‘약한 갈대’가 아니다”고 했다. 6·25 전쟁 발발 후 유엔의 신속한 움직임은 애치슨의 말처럼 유엔이 ‘약한 갈대’가 아님을 증명했다.● “한국에서 미국의 책임은 더 직접적” 애치슨의 연설 주제는 ‘아시아의 위기 : 미국 정책의 한 시험대’였다. 국무장관으로서 미국이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밝히는 것으로 많은 공을 들여 작성한 연설이었다. 애치슨은 아시아를 태평양의 남과 북으로 나누고 북쪽에 미국의 책임과 기회가 더 크다고 강조했다. 극동군사령부가 군정을 실시하고 있던 일본은 ‘미국이 직접 책임을 지며 직접적인 행동의 기회를 지닌다’고 했다. 그러면서 ‘강도는 낮지만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한국은 미국이 군사점령을 끝내고 세계가 인정하는 주권 국가를 세웠기 때문에 ‘책임은 더 직접적이고 기회는 더 분명하다’고 했다. 애치슨 연설에서 ‘책임’을 강조한 뒷부분만 알려졌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감사 전문’을 보냈다. 한국이 ‘애치슨 라인’에 포함된 필리핀보다 더 중요시됐다는 한국 언론 보도도 있었다.(도진순, 195쪽) 그만큼 애치슨 연설에서 한국은 방어선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어도 방어 의지는 작지 않았다. 애치슨은 연설에서 대만 국민당과 장제스(蔣介石)에 대해 ‘중공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으나 국민의 지지 철회로 군대가 녹아내렸고, 섬의 난민이 되었다’고 한 것과 대조된다. 1월 5일 트루먼 대통령과 1주일 뒤 애치슨 연설은 대만이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팽(烹)’된 것을 확인한 것이다. 대만에 대한 ‘침공의 초대장’으로 해석해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침공의 초대장을 6·25 전쟁을 통해 한국이 받은 꼴이 됐다.● 스탈린과 김일성이 본 ‘애치슨 라인’ 소련은 애치슨 라인을 어떻게 보았을까. 스탈린은 ‘조선반도 같은 작은 전쟁에 개입할 리는 없을 것’이라는 북한의 말을 확인하는 것으로 해석했을 수 있다.(선즈화, 334쪽). 소련은 북한의 남침을 국가 간 침략이라기보다 중공에서 막 끝난 국공내전처럼 ‘끝나지 않은 내전’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미국은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이 승리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한국전쟁에서도 판세가 결정되면 이를 뒤집으면서까지 희생을 치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애치슨 연설을 이해했을 수 있다.(핼버스탬, 84쪽) 김일성은 좀 달랐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찾아가 남침에서 속전속결 승리를 장담하며 지원을 요청할 때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이유로 남한이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된 것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은 방어선에서 제외돼 김일성의 남침을 불러왔다고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 애치슨 연설은 마오쩌둥 겨냥 트루먼(1월 5일)과 애치슨(1월 12일)이 잇따라 연설을 한 때는 마오가 신중공을 선포한 뒤 처음 모스크바에 찾아와 스탈린과 회담을 하던 때였다. 미국이 국공 내전에서 지지하던 국민당과 장제스를 버리고 마오의 공산 정권과 관계를 정상화해 중소 간에 틈을 벌리기 위한 ‘쐐기 전략’을 펴던 때였다. 애치슨의 연설은 사실은 모스크바의 마오를 겨냥한 것이었다. 소련이 제정 시절에 연해주 땅을 뺏어간 것처럼 사회주의 국가가 된 후에도 여전히 영토를 탐내고 있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폭로하면서 양국을 갈라놓으려고 한 것이다. 몰로토프 외상은 연설이 나온 며칠 후 마오에게 “애치슨 연설의 목적은 소련과 중공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것이다. 대만을 점령하기 위한 중상모략의 연막전술을 퍼뜨리는 것”이라고 했다. 소련이 발끈해 마오에게 같이 외무장관 명의의 반박 성명을 내자고 요구했다. 마오는 난처했다. 소련은 ‘애치슨 연설’이 중상모략이라고 하지만 당시 중소 관계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마오쩌둥과 스탈린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마오는 결국 수위를 낮춰 신화사 통신 사장 명의로 격을 낮춰서 애치슨 연설을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키신저, 158쪽) ● 중소동맹 체결이 가져온 미국의 아시아 정책 변화 애치슨이 중소 간 간격 벌리기, 이른바 쐐기 작전을 폈지만 연설 한 달여 만인 1950년 2월 14일 중소가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애치슨은 “중소 조약은 제국주의 출현을 알리는 위험한 징조 중 하나”라며 중공 지도부가 중공을 소련에 팔아먹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렇게 되자 대만을 버리면서 중소를 갈라치게 하려던 미국의 대만 정책도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했다.(선즈화, 269쪽) 중소동맹은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미 정부는 1949년 12월 채택한 NSC-48/2는 ‘선택적 봉쇄’로 소련을 봉쇄하면서 중소 간에 사이를 벌리기 위해서 중공에게 대만이라는 먹잇감까지 던진 것이었다. 이제 소련 봉쇄를 위해 중공 봉쇄도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전환했다.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었던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새롭게 평가됐다. 1950년 5월 20일 맥아더는 참모장 회의에서 “중공의 대만 점령은 소련의 점령과 같다. 이 경우 미국의 태평양 주변 방어선은 무너진다. 대만은 대소 전략의 이상적 위치에 있는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이라고 말했다.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서 대만의 중요성은 처음에는 중공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소련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 중소 동맹 체결은 ‘애치슨 연설’의 역효과 흥미로운 점은 애치슨이 중소 거리 벌리기를 위해 했던 강연이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은 마오가 조약 개정으로 요구했던 사항을 모두 수용하면서 동맹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렇게 마음을 바꾼 데는 애치슨 연설도 한 요인이었다. 미국은 대만을 버리면서까지 중공과 관계 정상화 사인을 보내자 스탈린은 12월 16일 첫 회담에서는 완고했던 중소조약 재협상 불가 입장을 바꿨다. 기존 조약을 폐기하고 새 동맹조약을 맺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당초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마오는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내세우며 스탈린을 압박했는데 미국이 마오의 전략에 맞장구를 쳐준 격이 됐다. 스탈린이 ‘미중 관계 정상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중공과 조약을 맺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북한의 남침’이라는 변수가 등장했다. 김일성의 ‘남침’ 승인 지원 요청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이었던 스탈린은 미중을 적대관계로 몰아넣는 쐐기로 이용하기로 했다. 그것도 중공이 대만을 정복하기 전에 해야 했다. ● ‘애치슨 라인’은 1년 전 ‘맥아더 방어선’ 1948년 3월 맥아더 사령관은 미국은 미드웨이 제도, 알류샨 열도,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 오키나와 등을 포함하는 U자형 방어 체계를 제시했다. 도서방위선 설정은 일본과 필리핀 등 미국 안보에 직결되는 지역에 대한 안전 보장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전략적 측면에서 한국은 일본의 종속적인 위치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 나타난다. 애치슨의 극동방어선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의 구상을 정치적으로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이상호, 146쪽).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맥아더 자신도 후일 회고록에서 “애치슨의 극동 문제에 대한 오판은 잘못된 정보에 기인한 것”이라고 공격한 것이다. 자신이 구상했던 방위선과 유사한 것을 애치슨이 다른 아시아 정책을 설명하면서 강조한 것인데 전쟁을 유발한 한 요인으로 지목하고 나선 것이다. 맥아더로서는 자기모순적인 것이다. 애치슨과 맥아더가 불편했던 관계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애치슨은 1950년 10월 트루먼과 맥아더 간의 웨이크섬 회담 이후 맥아더가 경례를 하지 않는 등 결례를 범했다며 해임을 건의했고 1951년 4월 해임 때도 가장 적극적이었다.● 이승만의 ‘방어선 붙들기’ 노력 “불행한 과거사 싸움 대신 일본이 우리와 같이 위기를 깨닫고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의 생명과 자유를 위해 기꺼이 협조할 수 있다면, 양국 사이의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도진순, 199쪽) 북한 핵 능력이 높아지면서 한일 안보협력이 높아지는 2023년 한일 관계에 그대로 적용될 것 같은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1950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이 도쿄에 맥아더를 만나러 갔을 때 한 말이다. 이승만은 6·25 전쟁 후 한반도가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된 것이 북한 남침의 빌미를 줬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6·25 전쟁 전 극동방어선의 주요 거점에 있는 일본과 한국을 연결시키고자 분투했다. 1950년 ‘애치슨 라인’부터 6·25 전쟁까지·1월 5일 트루먼 연설 “대만 포기” 12일 애치슨 강연 ‘애치슨 라인’ 선포 17일 김일성, 이주연 환송연에서 러시아측에 ‘남침 상의 스탈린 만나고 싶다’ 30일스탈린,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 허용. 남침 승인 첫 신호 ·2월 14일 중소동맹 조약 체결·3월 30일~4월 25일 김일성 박헌영, 모스크바 방문·5월 13~16일, 김일성 박헌영 베이징 마오 회담. 29일,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 중장, 전쟁 및 북한군 운용계획 완성 ·6월 16일 스탈린의 전쟁계획 승인. “6월 25일 옹진반도를 시작으로…” 25일 북한 남침 애치슨 연설문 요지국민지지철회로 ‘난민’된 장제스 대만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정부가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군사력에 직면해 무너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장제스는 중국 역사상 어떤 통치자보다 더 큰 군사력을 가졌었다.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도 받았다. 그런데 4년 후 무슨 일이 생겼나. 그의 군대가 녹아 없어졌다. 그에 대한 지지도 녹아내렸다. 그는 남은 군대와 함께 해안에서 떨어진 작은 섬에서 난민이 되었다. 이는 중국인의 거의 지칠 줄 모르는 인내심이 끝났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부를 전복시키려 애쓰지 않았다. 전복할 것도 없었다. 단순히 무시했을 뿐이다. 그들은 정부에 대한 지지를 완전히 철회했고 그러자 군 조직 전체가 붕괴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흐름을 타고 승리와 권세를 차지하기 위해 기민하고 교활했다. 소련 공산체제의 제국주의, 중국 영토 침탈 소련 공산주의는 러시아 제국주의의 추진력에 새로운 방법과 기술, 개념을 추가해 중국 북부지방을 분리 합병했다. 외몽고에서는 이미 완료됐고 만주에서도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 내몽고와 신장에서는 소련 요원들로부터 기쁜 보고가 들어오고 있다. 우리는 중국 국민들이 가질 정당한 분노와 증오를 러시아인에게서 우리에게로 돌리려고 해서는 안된다. 중국 국토의 완전성을 침해하는 자는 누구든 중국의 적이며 우리의 이익에도 반한다. 극동 방어선, 일본에서 필리핀까지 일본의 패배와 군축은 일본의 안보를 위해 필요한 군사적 방어를 떠맡을 임무를 미국에게 부여했다. 방어선은 알류산열도를 따라 일본과 류큐제도 그리고 필리핀 제도까지 이어진다. 태평양 다른 지역 안보는 아무도 군사 공격으로부터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공격이 발생하면 처음에는 공격을 받은 국가가 저항해야 한다. 그 다음에 유엔 헌장에 따라 문명화된 세계 전체의 약속에 의존해야 한다. 유엔은 지금까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독립을 지키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것으로 약한 갈대라고 입증되지 않았다. 미, 한국에 직접적인 책임 우리는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고 직접 행동할 기회도 있다. 정도는 덜하지만 한국에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우리는 직접적인 책임을 졌고 행동을 취했다. 한국에서 우리는 군사적 점령을 끝내고 유엔과 협력하여 거의 모든 세계가 인정하는 독립된 주권 국가를 세우는 위대한 조치를 취했다. 그곳에서 우리의 책임은 더 직접적이고 기회는 더 분명하다. 참고문헌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1, 2권, 일신서적, 1993.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헨리 키신저 지음, 권기대 옮김, 『헨리 키신저의 중공 이야기』, 민음사, 2012.도진순, ‘1950년 1월 애치슨의 프레스클럽 연설과 하나의 전쟁 논리’, 『한국사연구』, vol. 119, 185∼231쪽, 2002.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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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불참전’ 오판한 러시아, 북한 남침을 승인했다[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한국과 미국이 ‘정보 실패’로 북한군의 동향과 남침 정보를 소홀히 하고 대비태세도 느슨해져 있을 때 북한과 소련은 강한 남침 의지와 치밀한 준비로 결전의 날을 기다렸다. ▶[1회] ‘미국 불개입’ 오판(誤判)이 부른 6·25 전쟁 (上) 보기● 김일성의 남침 의지와 집요한 스탈린 설득 “1950년 새해 국토의 완정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새로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힘차게 전진합시다. 새로운 승리를 향하여 전진하는 조선인민에게 영광이 있으라!” 김일성의 1950년 신년사에 남침 도발에 대한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이성춘, 75∼87쪽). 마오쩌둥이 중국 대륙에서 공산혁명을 이루는 것을 보고 적화통일에 대한 투지를 불태웠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11일 정치국 고위간부와 소련의 군사고문단 회의에서 “미국의 개입은 없을 것이다. 북한은 개전 후 3주 이내에 승리한다, 미국이 개입을 결정해도 참가에만 50일이 걸린다. 인민군이 내려가면 20만 명의 지하 공산단원이 봉기한다”고 말했다.(김계동, 14∼15쪽). 김일성의 자신감은 1년여 노력 끝에 스탈린으로부터 모스크바에 남침을 상의하기 위해 와도 좋다는 ‘남침 반(半)승인’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그해 1월 17일 이주연 주중대사 송별연이 끝나갈 때 스티코프 주북한 소련대사에게 “이승만이 북침하면 공격하라는데 공격하지 않으니 인민의 해방과 통일 사업이 지연되고 있다. 스탈린과 만나 나의 행동을 허락받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1월 30일 스탈린은 “언제든지 김일성을 만나 회담하겠다. 그를 도울 준비를 하겠다”고 회신했다. (선즈화, 321쪽)1년 전만 해도 스탈린은 김일성의 잇단 호소와 요청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국과의 군사 대결을 우려하는 등 여러 조건을 달았다.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북한 남침을 반대하는 결의문도 채택했다. 날짜내용3월 3일〜4월 7일김일성 박헌영, 스탈린 면담 시 3가지 이유로 남침 승인 거절. ‘인민군 압도적으로 우월하지 못하다, 남한에 미군이 있다. 38선에 관한 미소협정 유효하다’8월 2일북한내 소련 군사시설 모두 철거 지시9월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에 북한의 옹진반도 점령계획 반대 입장 전달9월 24일소련 공산당 정치국, 북한 남침 반대 결의 채택. “북한 주도의 전쟁이 공격의 빌미가 된다, 남한 사람이 북한 지지한다는 보장이 없다”스탈린은 ‘남침 승인’ 첫 사인을 보낸 뒤 2월 북한군 3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장비와 탄약을 지원하기 위해 1951년에 계획한 차관 1억3000만 루블을 앞당겨 지원했다. 북한은 금과 은 등 광물로 지불하기로 했다. 2월 말에는 군사고문단장을 바실리예프 중장으로 교체하고 북한군 각급 조직에 군사고문을 파견해 남침 계획 지도를 시작했다.광물수량(t)금액(만 루블)황금95,366백은40488몰리브덴 정광15,0007,9501억3805김일성과 박헌영이 1950년 3월 30일〜4월 25일 모스크바를 방문해 가진 면담에서 김일성은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4가지 이유를 들며 남침 지원 약속을 받았다. ⓵기습 공격으로 3일 내 승리 ⓶20만 남조선 공산당원 봉기 ⓷남한 유격대(빨치산)의 지원 ⓸ 미국 참전 준비 부족.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고, 중국 지도부가 승인하는 경우 해방전쟁은 시작될 수 있다”고 했다. 김일성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뒤 소련 무기와 장비들이 청진항에 쏟아져 들어와 38선에 배치된 부대에 보급됐다.● 중국으로부터는 병력 귀환 북한은 중국으로부터는 병력을 보강했다. 북한은 국공내전 중 인민해방군에 편입된 한인 병사들의 귀환을 요구했다. 중국은 내전이 끝난 뒤 병력 감축 필요도 있었던 터여서 흔쾌히 동의하고 속속 돌려보냈다. 전쟁 전까지 돌아온 한인 병사 6만3천여명은 북한 병력의 3분에 1에 달하는 데다 국공내전으로 실전 경험도 풍부해 남침의 주력이 됐다. 중공군 소속 및 인원북한군 편성1949년 7월166사단 10,320명6사단9월164사단 10,821명5사단1950년 1월중국 각 지역 14,000명12사단4월 156사단 23,000명7사단 ● 스탈린 김일성 지원과 마오쩌둥 견제 ‘음모론’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기로 마음을 바꾼 1950년 1월은 마오쩌둥이 공산혁명 이후 처음으로 모스크바에 장기간 머물고 있을 때였다. 스탈린은 ‘남침을 상의하기 위해’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오라고 한 것에 대해 마오쩌둥에게는 비밀로 했다.5월 13~16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나 스탈린의 남침 지원 의사를 전달했을 때에야 알고 마오는 자신과 상의 없이 결정된 것에 놀랐다. 그는 스탈린에게 직접 확인한 뒤 “중국이 먼저 타이완 함락한 뒤 통일에 도움 주겠다”고 했다. 마오는 6·25 남침을 외신 보도를 보고 알았다고 한다. 마오쩌둥에게는 알리지 않고 ‘기습적’으로 이뤄졌다.이런 상황을 두고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하다 태도를 바꾼 것은 김일성의 요청이나 설득이 아닌 중국 또는 마오쩌둥에 대한 전략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소련의 주요 적국인 미국과 중국이 외교관계가 정상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판단해 이를 필사적으로 저지하기 위한 대안이 한반도 전쟁이었다는 것이다.(손튼, 56쪽). 따라서 김일성의 남침을 지원하는 것은 한반도 통일 지원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미국과 중국이 적대관계가 되는 것이 스탈린의 목표라는 것이다.반론도 있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에 동의한 것은 미국이 무력간섭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으로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중미 관계가 철저하게 파괴된 것은 스탈린이 조선 전쟁을 결정한 목적이 아니고 조선전쟁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선즈화, 67쪽) ● 전쟁 결정 핵심 변수는 ‘미국의 군사적 불개입’ 오판 ‘병자국가대사, 불가불찰(兵者國家大事, 不可不察)’. 손자병법 첫 구절은 ‘전쟁은 국가의 대사이기 때문에 신중히 살펴야 한다’고 했다. 한국과 미국의 허술한 대비와 북한과 소련의 치밀한 준비가 균형점을 잃어 오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사’를 결행하면서 공산 측이 더 중요하게 살핀 것은 무엇일까. 바로 ‘미군의 불참전’에 대한 믿음 또는 과소평가였다.마오쩌둥은 1950년 5월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미국은 이처럼 조그만 국가를 위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군이 참전하면 돕겠다고 하면서도 ‘불참’할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해 4월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김일성을 만나 “미국이 한반도 전쟁에 참전하는 경우 소련은 미국과 싸울 의사가 전혀 없다. 미군이 개입하면 마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김일성이 베이징과 모스크바의 남침 유세(遊說)에서 “성공할 테니 도와달라”고 하면서 그 근거로 “미군이 개입 하지 않을 것이다. 개입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낼 것”이라고 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말이나 애치슨이 연설에서 ‘한반도를 극동 방어선에서 제외’한 것만을 보고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니라고 한다. 미 국가안보회의(NSC)의 1급비밀이라며 거이 버지스 등 영국인 이중 스파이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가 더 작용했다고 한다.(남시욱, 314) 그 정보가 정확하든 아니든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국의 불개입’에 대한 믿음이 북중소 3국 간에 공유되지 않았다면 북한의 남침은 어렵거나 더 여건이 갖춰질 때까지 미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한 것도 초기에는 ‘북진 통일’에 대한 열망과 아쉬움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안보 확약, 즉 동맹조약이 없으면 또 침략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지금은 2만3천여명의 주한미군이 상주하고 있다. 하지만 상대는 더 이상 야크기와 T-34를 몰고 오던 북한이 아니다. 미 대륙까지 도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다양한 중단거리 투발 수단까지 확보했다. 지금의 ‘핵 확장억제’는 그래서 6·25 당시의 ‘미국의 참전 확약’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정전 70년에 ‘왜 전쟁을 알고 막지 못했을까’라는 물음에 주는 시사점이다.국가내용미국한국 전략적 가치 저평가(애치슨 라인)철수 조건 미충족 상태에서 미군 철수한국군 지원 소극적, ‘무장경찰대’ 수준 유지 북한 남침 및 적화 위험 경고 무시 소홀 한국북진통일론으로 미국 경계 초래좌우 대립으로 사회적 혼란미군 철수 주장 여론 공비 소탕 등으로 전력 전후방 분산군 비상사태 해제 소련 중국소련의 원자탄 실험 성공중국 국공 내전 마무리와 공산화 중소 동맹조약 체결스탈린, 마오쩌둥 견제 위해 남침 지원 의도마오쩌둥, 내전 중 북한 도움 부채 의식북한중국 공산화 같은 적화통일 야욕‘남로당 20만’과 빨치산 호응 오산김일성, 스탈린과 마오쩌둥 집요한 지원 호소 소련 중국 북한, 개전 시 미국 불개입 오판 한강교 폭파의 파장과 논란1950년 28일 밤 1시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자 2시 반쯤 한강인도교와 철교 3곳이 폭파됐다. 한강 이북의 국군 주력부대가 철수하지 못하고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다리가 끊긴 것이다. 군부대는 무기와 장비, 트럭 등을 대부분 두고 내려와 전력이 크게 약화됐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시민들 중에는 북한군에 학살되거나 납북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기 폭파’에 대한 책임이 제기되자 이승만 정부는 한강교 폭파 2개월 후인 8월 28일 폭파 현장 책임자 최모 공병감(대령)을 전격 구속했다. 이어 최 공병감은 단심제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을 선고받고 9월 16일 전격 집행됐다. 죄목은 적전비행(敵前非行). 최 헌병감에게 폭파를 명령한 것으로 최 공병감이 진술한 채병덕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그해 7월 전사해 법정에서 증언을 하지 못했다. 최 헌병감의 유족은 1961년 재심을 청구해 1964년 무죄를 선고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법원은 “절대적 구속력이 있는 상관의 작전명령에 복종한 것일 뿐”이라고 무죄 판결 이유를 밝혔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한국전쟁사’에는 채 참모총장이 6월 28일 새벽 1시 45분 “적의 전차가 시내로 침입했다”는 요지의 보고를 받고 즉시 최 공병감에게 전화를 걸어 폭파를 명령했다고 기술했다. “한강교를 폭파하라. 나는 이제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간다. 곧 실시하라.” 채 총장이 전화를 걸었다는 시간에 그를 수행해 한강다리를 차로 건너고 있었다는 당시 육군본부 강영훈 인사국장(전 국무총리)은 다른 증언을 했다. 2008년 5월 펴낸 회고록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에서 그와 같은 전화 통화가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강 전 총리는 “최 공병감을 변호하는 사람들이 변론 기술상 강조한 것으로 추측되나, 세상된 기록된 문서의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게 했다”고 했다.(강영훈, 154쪽). 강 전 총리는 그와는 별도로 “정부가 100만 명 서울 시민에게 말 한마디 못 하고 떠난 상황에서 공병감에게만 책임을 추궁하고 총살형은 너무 가혹한 형벌”이라고 적었다. 한강교 폭파로 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역사학자 굴든은 “군대와 피란민들이 다리를 건너는 도중 폭파돼 많은 사람이 죽었다. 미 군사고문단(KMAG)은 군인과 민간인 500∼800명이 폭사 또는 익사했을 것으로 추정했다”고 적었다.(굴든, 116). 하지만 폭파 작업에 직접 참가했던 한 장교는 “다리가 폭파된 후 다리 밑에 시체가 둥둥 떠 있거나 하는 광경은 없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월간조선 뉴스룸 2013년 7월). 전쟁에서 파괴되는 시설 중에 대표적인 것이 다리다. 6·25 전쟁 중 파괴된 다리 중에는 압록강대교, 대동강철교, 한강인도교와 철교, 왜관 철교 등 적지 않다. 한강교는 ‘조기 폭파’로 후퇴 작전에 차질을 빚고 서울 시민의 피해를 키웠다는 평가가 많았다. 다만 소련제 T-34 탱크 200여대를 앞세워 밀고 내려온 북한군의 진격 속도를 잠시라도 늦추는데 한강 다리 폭파가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3일간 머무는데 ‘한강교 조기 폭파’도 한 요인으로 거론된다.참고 문헌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리처드 손튼 지음, 권영근 권율 옮김,『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한국국방연구원, 2020.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 『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이성춘, ‘북한 신년사 분석을 통한 김정은 시대 지속과 변화’, 『융합보안논문지』, 제14권 61 호, 75∼87쪽. 2014.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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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군은 북한에 남침할 용기를 줬다” 맥아더의 비판[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공격개시 = 전화음어 ‘폭풍’ / 무전 ‘224’ 발포개시 = 전화음어 ‘폭풍’ / 조명탄 ‘적색’ / 무전 ‘333’6·25 전쟁 개전 후 입수한 북한 ‘전투명령 1호’에서 드러난 작전명은 ‘폭풍’이었다. 북한군은 암호처럼 전격적으로 옹진반도~개성~동두천~포천~춘천~주문진을 잇는 38선에서 새벽 4시 일제히 포격을 개시했다. 비슷한 시각 강릉 남쪽 정동진과 동해 남쪽 임원진에서는 북한군 육전대와 유격대가 ’순조롭게 상륙’해 동부 전선 8사단의 퇴로를 막았다. (소련 스티코프의 6월 26일자 전문). 하루 전날 평양방송이 “내일 오전 중 중대 방송이 있다”고 남침을 예고한 것처럼 25일 오전 11시 “북침을 해왔다”고 허위 선전을 했다. 북한은 6월 조만식 선생과 이주하 김삼룡을 교환하자고 평화공세를 폈는데 이는 전쟁 개시 직전 연말술이었다.휴전까지 1129일 동안 민족과 국토에 길고 크고 깊은 상처를 남긴 6·25 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동아일보가 1950년 6월 26일 1면 머릿기사로 ‘북괴군 돌연 남침을 기도’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는 25일 당일에는 전쟁 발발을 알리는 호외를 수차례 뿌렸고, 27일자까지 발행한 뒤 잠시 휴간했다. ● 비상해제 휴가 외출 외박으로 최전방 구멍 숭숭 분단 이후 산발적으로 무장 충돌이 계속되어 왔지만 그해 상반기에는 유난히 전군 비상 경계령이 잦았다. 4월 11일, 5월 8일에 이어 6월 11일 세 번째 내려졌던 비상 경계령은 24일 0시 해제됐다. 장기간 경계령 발령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 누적과 농번기까지 겹쳤다. 춘궁기를 맞아 군부대 알곡이 거의 떨어진 것도 한 요인이었다. 중부전선 6사단은 3월에 비상식량이 하루치였다고 한다. (남도현, 85쪽). 6월 10일 군인사로 전후방 전체 8개 육군 사단 중 5개 사단장이 바뀌었는데 전방 4개 사단장은 모두 교체됐다. 비상 경계령 해제로 전방부대 휴가 외출 외박 병력이 전체의 30%에 달했다. 북한군 주력 1군단이 내려온 의정부와 포천을 담당하는 국군 7사단은 더 높아 비율이 40%였다. 북한군 1군단의 3사단과 4사단, 105전차여단과 국군 7사단만을 보면 병력 차이는 7 대 1, 화력까지 계산하면 18대 1 정도로 열세였다. 전방 4개 사단 중 7사단이 가장 먼저 무너졌다.당시 유재흥 7사단장은 부임 후 철원 쪽에 적의 신예 전차 부대가 집결 중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나 부대에는 대전차 지뢰도 없었다. 육군본부에 호소했으나 미 고문관들은 “한국 지형은 전차가 활동할 수 없으니 겁낼 것 없다. 2.36인치 로켓포가 어떤 무기냐”고 일축했다. 북한이 소련제 T-34 전차를 몰고 내려왔을 때 2.36인치 로켓포는 무용지물이었다. (유재흥, 113쪽). 의정부시 자일동의 옛 축석령 고개길에 있는 ‘포병용사 김풍익 전투기념비’는 몸을 던져 북한 전차를 막아야 했던 절박한 상황을 보여준다. 축석령 고갯길은 지금은 43번 국도에서 벗어나야 갈 수 있는 승용차 2대가 비켜가기에도 좁은 길이다. 7사단이 붕괴된 후 긴급 투입된 포병학교 교도2대대(김풍익 대대)의 김풍익 소령과 장세풍 대위 등은 곡사포를 직접 조준해 발사하기 위해 북한군 전차 50m까지 접근했다. 이어 전차 캐터필러를 파괴해 주저앉힌 뒤 두 번째 포격을 하려다 적 후속 전차의 포격으로 사망했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은 뒤 3일만에 서울이 점령됐으나 김풍익 소령처럼 몸을 던지는 투혼으로 조금이나마 진격속도를 늦췄다. 1950년 6월 24일 밤 용산 육군참모학교 구내 장교구락부 개관 축하 파티가 열렸다. 50여명의 고위 장성이 참석했고 밤 10시경 끝났다. 10여명의 육군본부 및 미 군사고문단 장교는 명동 카바레로 2차를 가서 이튿날 새벽 2시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김인철, 110쪽).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24일 동두천과 포천, 개성 지구에 정보장교들을 급파해 25일 오전 8시까지 보고토록 했다. 그만큼 북한 동향이 심상치 않았다는 것을 느끼던 때였다. 하지만 정작 채 총장은 용산 장교구락부 개관 축하 파티에 참석해 이튿날 새벽 2시에 귀가했다. (백선엽 2권, 175쪽) ● 미국, 한국의 전략적 가치 저평가미국 전쟁부는 1947년 4월 미국 국가안보의 중요성에서 한국이 원조 대상 16개국 중 13위라며 국무부에 주한미군 철수를 건의했다. 미 합참도 그해 9월 국무부에 “한국에 군대나 기지를 유지할 전략적 이해관계가 전혀 없다”고 통보했다.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은 1948년 3월 미국은 미드웨이 제도, 알류산 열도,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 오키나와 등을 포함하는 U자형 방어 체계를 제시하면서 한국은 방어선 밖에 두었다. 일본 방어에 필요한 종속적인 위치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호, 146쪽).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8 문서는 1948년 4월 베를린 사태 등 유럽의 상황 악화로 주한미군의 철수가 필요하다며 그해 12월 31일로 제시했다. (김철수, 51쪽). 미국은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하자 그해 6월부터 공수작전을 시작하는 등 유럽의 냉전도 점차 긴박해졌다. 2차 대전이 끝나고 5년가량이 지나 병력과 군비를 대폭 축소한 미국으로서는 전략적 가치가 높지 않은 한국에 병력을 주둔하며 강한 방어 의지를 가지기도 어려웠다. 미 육군 병력(명)미 극동군사령부 병력(명)1945년830만1947년30만1950년60만1950년 10만 8천● 주한 미군 철수 주한 미군 철수는 소련이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를 완료한 뒤 압박하고 나서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그런데다 미국과 한국 국내에서는 철수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1948년 8월 시작된 미군 철수 작전명은 ‘크래버플 플랜(crabapple plan)’. 당초 시한은 그해 12월이었다. 그런데 그해 하반기 남북한에 각각 정부가 들어서 분단이 고착화한 데다 여순 사건, 북한의 잦아진 38선 도발 등으로 연기돼 이듬해 6월 30일 완료됐다. 한국에는 500명 규모의 군사고문단(KMAG)만 남았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이 공산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은 미군 철수를 승인한 맥아더에게 책임이 있다고 미 정부는 책임 일부를 돌렸다. 맥아더는 전쟁이 끝난 후에 반박했다. “내가 동의한 것은 한국군 10개 사단을 현대식으로 완전히 무장하여 대체한다는 조건하에서 워싱턴 당국의 검토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나의 동의 조건은 이뤄지지 않고 철수만 이뤄졌다. 그 책임은 국무성이 져야 할 것이다”(‘정보’ 6호, 125쪽) ● “북한군에 남침 기회와 용기를 북돋은 한국군 수준”미국은 한국군 규모를 10만 명으로 제한(개전 시 규모 10만3800명)하고 공군 창설에 반대했다. 1950년 1월 26일 한미상호방위원조 협정은 6만5천명 유지에 필요한 지원뿐이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도 영향을 미쳤다. 미군 철수 이후 북진을 견제한다며 방어무기만 제공했다. 소련제 T-34 탱크와 항공기 등으로 중무장한 북한에 맞서 전차, 155mm 곡사포 등을 요청했으나 산악이 많은 한국의 지형, 도로와 교량 조건상 탱크는 필요 없다고 KMAG는 판단했다.맥아더는 “한국군은 전선에 배치된 군 병력이 아니라 경찰대원이다. 무기는 경화기뿐이고 공군이나 해군은 아예 없으며 전차, 대포 또는 기타 전투부대에 필수적인 무기는 없었다. 한국의 북한 공격을 방지하는 조치라지만 북한군에 남침할 기회와 용기를 돋워준 것이다.”(맥아더, 165쪽) 국군북한군육군병력8개 사단94,974명10개 사단 175,200명무기와 장비전차(탱크) 0대장갑차 27대57mm 대전차포 140문 T-34 전차 242대장갑차 59대대전차포 552문모터싸이클 500대해군병력6,956(해병대 포함)10,297(육전대 포함)무기와 장비함정 36척소형경비정 3척, 어뢰정 3척공군병력1,897명2,800명무기와 장비항공기 22대전투기 84대 등 226대총병력103,827명188,297명● ‘정보 실패’가 문을 열어 준 북한군 남침 그날의 도발을 막지 못한 것은 적색 조명탄이 올라갈 때까지 잇단 적색 경고등을 무시한 데도 책임이 크다.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봄 중앙정보국(CIA)은 북괴가 산발적인 습격을 바꿔 언제 전면 공격을 할지 모른다고 했다. 다만 언제인지 단서를 제공해주는 정보는 없었다. 더욱이 한국만이 아닌 세계 도처에서 소련측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가 반복해서 들어왔다”고 회고했다. (트루먼, 308쪽)북한군 10개 사단 18만여 명이 공격 개시 3일 전 전방 배치를 마쳤다. 대규모 적병력의 이동이 이뤄져 동향에 대한 첩보와 정보가 쏟아졌다. 이 상황에서 워싱턴이나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경각심이 부족하거나 흘려듣고 과소평가하고 무시했다. 미 국무부 고문 덜레스가 전쟁 발발 1주일 전인 6월 19일 방한해 전방 7사단을 방문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북한의 공격을 받더라도 충분한 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맥아더는 “덜레스가 전술적으로 아무런 경험이 없으며 정확한 정보도 없어 한국군이 38선 북쪽 부대에 비해 얼마나 열세인지 알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맥아더는 북한이 한국 측에 공격 준비 사실을 속이기 위해 38선 부근에는 한국군과 거의 같은 정도의 경무장한 병력을 배치하는 기만술도 폈다고 했다. (맥아더, 165쪽). 맥아더가 이렇게 덜레스를 비판했지만 6·25 전쟁이 터질 때 극동군사령관으로서 아시아 전체를 관할하는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정보 실패’가 더 치명적이다.●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부 G-2의 ‘정보 실패’ 맥아더는 2차 대전 당시 CIA(1947년 창설)의 전신인 전략정보국(OSS)이나 CIA를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전투지역에 CIA가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맥아더는 OSS를 좌지우지했던 소위 ‘동부 주류파’(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등 미국 동부 명문대 출신 정재계 핵심 인맥)를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OSS나 CIA의 정보를 소홀히 하고 G-2로 불리는 자체 정보팀을 가동했다. (핼버스탬, 84쪽)G-2에 1950년 5월 하순 북한군이 탱크 여단을 만들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중(重) 경(輕) 탱크 180대와 장병 1만명으로 구성되고 대전차포, 야포, 오토바이 등도 포함됐다. G-2 책임자 윌로비는 5월 25일 자 ‘일일정보요약’에서 이런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 실정에서 경제적 군사적 실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북한군은 모터사이클 1개 연대와 500대의 모터사이클이 있다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 앞서 5월 초 38선에서 2마일(3.2km) 이내 주민을 모두 이동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포착됐으나 무시됐다. G-2는 농민들이 지뢰를 피해 자발적으로 피해 가는 것으로 보았다. 개전 수개월 내 황해도 사리원에서 38선까지 모든 철도를 폐쇄하고 군사용으로만 사용케 했다. 통신 및 간호를 위한 여성 징집, 10대 소년과 일본군 경험이 있는 자들의 황급한 징발 등 정보도 들어왔다. G-2는 ‘전쟁형 편성’으로 2차대전 전 독일이 한 것과 비슷하다고 평가했으면서도 전쟁이 임박한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 (굴든, 44~46쪽)OSS 시절 이미 38선 너머로 보낸 요원들이 ‘정예부대를 38선으로 이동시키고 전방의 교량과 철로 보수 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첩보를 보내왔다. 그런데 G-2는 정보원의 신뢰성은 ‘F-6’(A∼F 6단계) 등급, 정보의 신뢰성은 6등급(1∼6등급)으로 최하위 평가를 내리며 깔아뭉갰다.● 이승만의 항의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직전까지 “한반도는 냉전이 아니라, 실제 총격전을 벌이는 전쟁상태다”고 남침 임박을 경고했다. 이승만은 “미국은 불리한 상황이 오면 즉시 철수할 수 있도록 한 발은 한반도에, 다른 발은 밖에 내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미군은 전쟁 중 불리할 때마다 철수 준비를 했다.이승만은 남침 소식을 보고 받고 26일 새벽 3시 자고 있던 도쿄의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습디까?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라도 항의했다.프란체스카, 1950년 6월 26일 자)참고 문헌해리 S. 트루먼 지음, 손세일 옮김, 『시련과 희망의 세월-트루먼 회고록』 하, 1968.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2권, 일신서적, 1993. 이승만 구술,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유재흥 지음, 『격동의 세월』, 을유문화사, 1994.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2권. 2020.김인철 지음, 『38선에서 휴전선까지』, 보문당, 1992.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남도현 지금,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미디더, 2010.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조셉 굴든 지음, 김병조 발췌 번역, 『한국전쟁 비화』, 청문각, 2002.『정보』 6호, 공보실발행, 1956.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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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정전 70년, 현재를 찾는 과거로의 여정[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는 ‘형제의 상’이 있다. 전선에서 총부리를 겨누던 상대가 알고 보니 헤어진 형제인 것을 형상화했다. 동생이 형의 품에 안겨 온몸이 축 늘어진 채 올려다보고 있다. 그 생생함과 절절함이 절로 느껴진다. 실제로 북한군은 전쟁 중 많은 청년들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징발했다. 전투에서 부자, 형제가 총을 쏘다 친혈육인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6·25 전쟁 ‘동족상잔’과 비교될 바는 아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오랜 기간 피와 역사, 문화를 공유했던 땅과 사람에 대한 침략인 점에서 6·25를 닮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전후 처리가 ‘전쟁 중 분할된 상태로 정전 체제가 유지되는’ 한반도 모델로 갈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한반도 모델’은 따라와서는 안 될 매우 안 좋은 사례다. 오히려 국토와 민족이 갈라진 상태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반면교사를 삼아야 할 일이다.우크라이나 전쟁은 일요일 새벽 느닷없이 발생한 6·25 전쟁 같은 무도한 일이 21세기에도 여전히 벌어질 수 있음을 새삼 일깨웠다. 더욱이 북한은 소련제 T-34 탱크와 앵앵거리는 야크기를 몰고 왔다가 미군의 막강한 공군과 화력 앞에 굴복했던 당시와 다르다. 핵무기,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사거리 1만2000km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다양한 투발 수단을 개발해 남한을 ‘핵 볼모’로 삼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점차 높아지는 한반도의 안보 불안과 지정학적 단층지대의 숙명의 뿌리에는 분단과 6·25 전쟁이 있다. 미국에서 6·25 전쟁은 오랜 기간 ‘잊혀진 전쟁’이었다. 한국에서는 6·25가 몇 년에 발생한 전쟁인지 모르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렇게 잊혀져도 되는 전쟁인가?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의 대변인이자 인천상륙작전 기획에 참여했던 에드워드 로우니는 ‘운명의 1도’ 서문에서 “한국전쟁은 한국에서 벌어졌지만 한국인이 모르는 일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북핵 위협 속 6·25 전쟁 정전 70년을 맞아 몇 가지는 기억하고 되새겨보자는 취지에서 긴 여정을 시작한다. 착오와 실패 미국 -극동방어선에서 한반도 제외해 공산 세력 침략 자극-전쟁 초기 북한군 과소평가-중공군 개입 전후 중공군 과소평가-중공군 불참 오산으로 압록강 돌진 소련-미국 불참 오판 -미중 적대화 음모중국-미국 불참 오판 -압록강 도하 후 능력 과신해 38선 넘어 남진 -소련의 지원 받지 못하고 향후 중소 분쟁에 영향 -참전으로 미국 대만 지원으로 전환-유엔 가입 늦어지고 국제사회에서 고립 남한-김일성의 남침 경각심 부족-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이 미국 오도 -좌우익 대립과 혼란으로 안보 체제 취약-미군 철수 요구 여론이 안보 약화 초래 북한 -미국 불참 오판-남침 후 남한 20만 명 봉기 호응 오산 -전쟁으로 고립, 피폐, 침체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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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격전의 현장부터 역사 고증까지, 6·25 발자취를 따라갑니다[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이사장 남시욱)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시작한다.전쟁 당시 최고 정책 결정자와 장군들의 회고록, 구소련 문서 공개 이후 드러난 공산권 자료 등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한다.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관련 전적비 추모비 동상 등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을 재구성한다. 북한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중국 단둥(丹東)의 ‘항미원조기념관’, 미군의 폭격으로 북한쪽 절반만 파괴된 채 보존되어 있는 압록강단교(斷橋)도 찾아간다.이번 기획은 현충일인 6일부터 주 2회 동아닷컴에서 연재된다. ‘미국 불개입 오판이 부른 6·25 전쟁’을 시작으로, ‘애치슨 라인이 전쟁 불렀나’ ‘한국전쟁이 대만 살렸다’ ‘휴전 반대한 이승만 하야 계획 세운 미국’ 등 전쟁 시작부터 정전협정 체결까지를 20여 개 주제로 나눠 새롭게 정리한다. 또 ‘한강 다리 폭파 논란’ ‘맥아더 고별 연설’ ‘장진호의 동쪽’ ‘중공군의 땅굴 만리장성’ ‘카투사’ 등 핵심 키워드 약 20개에 대한 분석도 추가된다. 북핵 위협 고조 속에 안보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 하지만 이번 기획은 과거의 적대와 증오를 다시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을 삼자는 여정이다. ※참고로 지금은 ‘하나의 중국’이지만 6·25 전쟁 당시는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과 자유중국(대만)이 있었다. 기사 속 전쟁 당시 중국의 표기는 중공, 자유중국은 대만으로 표기한다.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 소장 bonhong@donga.com}

    • 202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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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결단한 미래로 가는 문, 日 진정성 있는 호응으로 열어야”

    《한일 관계, 미래의 문 열리나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 일본, 과거와 역사의 굴레를 벗고 미래로 가자’는 한국 정부의 선제적 결단에 일본은 얼마나 진정성 있는 조치로 호응할 것인가.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외교안보 좌담회를 열어 한일 정상회담의 의미를 점검했다.》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16일 정상회담으로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이라는 말까지 나왔던 한일 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이사장 남시욱)은 한일 정상회담의 의미와 한반도 안보를 주제로 21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전문가 좌담회를 가졌다. 신봉길 한국외교협회장(전 주인도대사),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참석했다. 사회는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이 맡았다. ● ‘과거 딛고 미래로’ 구자룡 소장=한일 정상회담 후 윤 대통령은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협력의 새 시대를 여는 첫걸음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기시다 총리는 “한일 관계의 매우 큰 발자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은 ‘굴욕외교’라며 반발하고 식민지배에 대한 명확한 사과가 없는 일본에 비판적인 여론도 적지 않다. 이번 정상회담이 2012년 징용 판결로 더욱 꼬이기 시작한 한일 관계의 변곡점이 되기까지는 진통이 예상된다. 신봉길 협회장=문재인 정부가 신남방 정책이나 아세안, 인도 등에 공을 기울인 것은 잘했고 성과도 있었다. 아쉬운 점은 한일 관계를 잘못 다룬 것이다. 이제 한일 관계가 정상화의 길로 들어서려 하지만 동북아 협력 차원에서는 ‘절반의 성공’이다. 2019년 중국 청두(成都)를 끝으로 안 열리고 있는 한중일 정상회담 국면을 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진창수 센터장=윤 대통령은 선제적 결단을 통해 과거를 넘어서는 미래 지향적 한일 관계에 방점을 두고 있다. 양국이 회담을 계기로 ‘대화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자’는 인식을 같이했다. 인도태평양, 경제 안보, 북한 핵문제 공동 대응을 위해 한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한 것이 큰 성과다. 박철희 교수=일본은 문재인 정권 때 한국은 못 믿겠다. 도저히 상대 못 하겠다는 분위기였는데,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이번 ‘제3자 변제안’ 발표 이후 일본에서는 한일 관계가 이제 풀려 나가겠다는 안도감이 생겨난 반면, ‘한국에서 저렇게까지 결단했는데 일본도 뭘 해야겠다’고 부담감을 느끼는 분위기도 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이후에도 노무현 정권 중반부터 지금까지 한일 관계는 사실상 ‘흔들리는 20년’이었다. 양국 관계는 갈등이 기본이고 협력은 가끔 있었다. 이번 정상회담은 협력의 틀을 다시 짜는 출발점이었다. 구=회담 후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이 올라간 반면,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떨어졌다. 진=산케이신문이 회담 후 ‘완승했다’는 사설을 실었는데 곧바로 신문사 내부에서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고 한다. 한일 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고 보는 것이다.● ‘제3자 변제안’이라는 고육책과 결단 구=한일 정상회담의 물꼬를 튼 것이 제3자 변제안이지만 제일 논란이 되고 있다. 진=제3자 변제안은 이낙연 총리 방일 때부터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고육책이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대법원 판결 사이에서 칼날같이 좁은 공간에서 선택을 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이 방법밖에 없을 것으로 본다. 박=제3자 변제안은 전후 한일 관계의 근간인 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의 틀을 깨지 않으면서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지도 않으려는 것이다. 청구권 협정의 여덟 개 항목에는 징용 문제도 들어 있었다. 청구권 협정을 통해 징용이 해결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1975년 박정희 정권과 2007년 노무현 정권 당시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대규모 보상을 했다. 그런데 2018년 대법원 판결이 위자료 형식의 개별 피해 청구권을 인정해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야 할 법정 채권이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 권리를 실효적으로 구제해 주는 방법으로 생각해 낸 것이 제3자 변제였다. 일본에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이 있지만 제3자 변제는 면책적 채무 인수가 아니다. 책임을 면제해 주고 대신 갚아주는 게 아니다. ‘일본 기업도 책임이 있지만 제3자인 재단이 우선 변제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상권이 생긴다. 구상권 행사는 갚아준 사람 마음이다. 그 부분이 정치의 영역이다. 윤 대통령이 “구상권 행사를 상정하고 있지 않다”고 한 것이 정치적 결단이다. 제3자 변제안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최선책보다 현실성 있는 차선책을 택한 것이다. 한국 정부가 먼저 피해자를 구제해 주고 일본의 호응 조치를 기대한다. 호응 조치가 없으면 한국 정부가 아닌 일본에 화살을 돌려야 한다. 신=국제법과 국내법이 충돌하면 국제법이 우선한다는 것은 국제사회의 일반 원칙이다. 다만 지금은 1965년 기본조약에 대한 해석의 문제인 것 같다. 국제법 원칙을 위반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본조약의 해석에 대해 지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 일본도 적극적인 호응 있어야 구=윤 대통령의 통 큰 결단에 비해 일본의 호응은 미흡했다는 지적이 한일 양국 모두에서 나온다. 박=한일 관계에 대해 4가지 선택이 있는데 인식의 차이가 있다. △일본을 적대와 대립의 대상으로 볼 것인지 협력 파트너로 인식할 것인지 △반일을 정치적으로 활용해 갈등을 확대할 것인지, 갈등을 축소지향적으로 관리해 나갈 것인지 △피해자 구제 등 문제를 방치할지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하려고 노력할 것인지 △사법부 판결을 최후 결정이라며 그냥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국정 책임자로서 정치 외교의 영역을 열어 놓을 것인지 등이다. 물론 윤 정부는 모두 후자를 선택하고 있다. 진=한국 국력이 커졌는데 여전히 과거사 문제에 매달려 있을 것인가, 여전히 피해자 의식만으로 한일 관계를 생각할 것인가. 윤 대통령은 이런 인식에서 벗어남으로써 한일 관계의 대전환을 가져오고자 했다. 이제 일본이 화답해야 한다. 기시다 총리가 사죄와 반성을 명확하게 하면서 통 크게 나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 오히려 아베 신조 총리였다면 보다 전향적인 대답을 했을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아베는 오너 비슷한 우파의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본인 책임으로 결단을 했을 수 있는데 우유부단한 기시다는 못했다. ● 한일 관계의 아킬레스건 ‘사죄’ 구=기시다 총리가 식민 지배에 대해 명확한 사죄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 대통령실 관계자는 일본이 과거 50차례 이상,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20차례 넘게 사과했다고 했다. 박=기시다 총리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얘기했으면 가장 좋았지만 다음 달 지방선거와 보궐선거를 앞두고 주저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진=일본 언론들도 기시다 총리가 빨리 털고 가는 것이 나았다는 지적을 한다. 그러지 못해 오히려 부담으로 남았다는 것이다. 신=회담 후 기자들이 김대중-오부치 선언 때 오부치의 사과 문구를 읽어 달라고 했는데 안 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할 때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낸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아베가 2차 대전에서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해 반성과 사죄를 표시하는 것을 추진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모두 여론과 선거를 의식하는 국내 정치적 요인 때문일 것이다. 박=이제 한일 언론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는 오부치의 사과 문구가 나오는지만 볼 것이다. 기시다 총리에게 조언한다면 꼭 그 말이 아니어도 된다. 식민 지배에 얼마만큼 미안하게 생각하고 한국 사람들에게 끼친 피해와 고통에 얼마나 공감하는지 표현하는 것이 핵심이다.● ‘특별법’으로 국회도 나서야 구=윤 대통령은 회담에 앞서 서둘러 제3자 변제안을 내면서 미흡했다는 지적을 받는 피해자들과의 소통 등 국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신=결국 진정성을 가지고 피해자들을 계속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직접 피해자들을 만나는 것도 방법이다. 박=더 많은 대화로 설득하고 이해시키면서 최대한 진정성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피해자들 입장도 다양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리 구제를 원하는 분들한테는 권리 구제를 할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한다. 진=법적 문제 해결을 위해 특별법 논의도 시작해야 한다. 모든 피해자들을 대법원 판결 방식으로 보상하기에는 국력이 너무 소모된다. 국회가 ‘제2의 문희상안’을 마련하든지 해서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박=특별법 논의에 세 가지 기준은 있어야 한다. 피해자를 객관적으로 증빙하는 객관성, 과거 보상받은 사람과의 형평성, 그리고 사회적 공정성이다. 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은 분들에 대한 보훈과 징용 피해자의 보상이 사회적 정의에 부합해야 한다. 보훈과 보상은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보훈도 제대로 못 해주고 있는 나라다. ● 한일, 이제는 한중일 협력으로 구=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한일 정상회담에 앞서 “일부 국가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소그룹을 만드는 것에 반대한다”고 논평했다. 한일이 중국을 견제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신=국제정치학자들은 동북아 지역 협력이 어려운 3가지 특징을 꼽는다.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점, 미국의 영향력이 일본 한국 등을 끌어당겨 동북아에서 빠져나가는 원심력이 작용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중국이라는 존재가 이웃 국가와 균형을 맞추기에는 너무 크다는 점이다. 동북아 지역이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가장 긴장이 높은 곳이 됐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커지는 데 한일 간 분열 지속은 곤란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일, 한미일 안보협력은 동북아 긴장 완화에도 중요하다. 박=한국은 미국 일본과의 관계 강화와 정상화로 대중국 외교의 부담도 줄었다. 미일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에 접근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더욱이 한중일 교류의 장이 마련되면 자연스럽게 한중 관계를 풀어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 신=한일 정상회담 이후 4월에는 워싱턴에서 한미 정상회담, 5월에는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 한미일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한국으로서는 한미일 관계 구축과 강화에 이은 수순은 한중일 관계 복원이다. 그 계기는 한국에 협력사무국이 설치되어 있는 3국 정상회담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상 중국에서는 총리가 참석하는데 순서상 한국이 개최하는 차기 정상회담에는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참여해 3국 관계 회복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도 검토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 ‘안보 보험’, 한미일 안보협력 구=한일 정상회담 전후로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포함한 미사일 실험을 하더니 800m 상공에서 폭발하는 핵폭탄 모의실험까지 했다. 한일, 한미일 안보협력이 왜 중요한지를 확인해 주는 것 같다. 진=미국과 일본 간 군사적 일체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일 협력 강화는 안보 보험을 확대하는 의미가 있다. 안보 보험을 더 확대하기 위해서는 공동 훈련을 통해서 역할 분담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한미일 협력 속에서 한국과 일본이 어떤 역할을 함으로써 유사 사태 때 억제 능력을 더욱 높일 수 있다. 지금까지는 한미일 협력이라는 말을 터부시했다. 한미일 군사협력이 신냉전을 가져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미일 협력은 유사 상태 시 우리의 억제력을 높여주는 ‘안보 보험’을 확대하는 것이다. 구=한미일 안보협력에 대해 중국은 ‘동아시아판 나토’를 결성하려는 것이냐고 경계를 한다. 박=안보협력과 군사동맹은 다르다. 안보는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것이다. 북한의 실질적인 위협이 있으니까 ‘방어적 협력관계’를 맺는 것이다. 안보협력은 위협에 대한 대응 메커니즘을 좀 더 촘촘하게 짜자는 것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커지고 중국의 국력이 커지면서 팽창적 공세적으로 힘을 사용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혼자 힘으로, 국제정치학 용어로 ‘자조(自助·self help)’만으로 대응할 수는 없다. 동맹국, 우호국과 팀을 짜야 한다. 신=한일 관계 개선의 방향은 옳지만 중국을 봉쇄 고립시키거나 압력과 압박을 가하는 식으로 전개돼서는 안 된다. 중국이라는 강대국이 압박을 당하면 불만을 대외적 팽창 등으로 표출할 수 있다. 중국이 포위하려 한다고 포위될 나라도 아니다. 호주 코앞 솔로몬 제도에 해군기지 사용권을 확보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 화해를 주도하는가 하면 시 주석이 푸틴 대통령을 만나 반미 공동 전선을 펴고 있다. 국내에서는 반중 감정이 고조되면서 중국 ‘배싱(bashing·때리기)’이 심하다. 중국 외교관 만나는 것도 신경을 쓴다고 한다.정리=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정리=윤융근 기자 yunyk@donga.com}

    • 202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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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전 70년, 北의 핵위협에 南은 ‘핵옵션’으로 고민”

    《독자 핵무장, 전술핵 재배치, 나토식 핵 공유 아니면 미국 확장억제 강화? 북한의 핵 선제공격 위협에 대응할 ‘핵옵션’ 논란이 연초부터 뜨겁다. 동아일보 화정평화재단은 신년 좌담회를 열어 휴전 70년을 맞은 올해 한반도 안보 상황을 점검했다.》북한은 사실상 단거리 미사일인 초대형방사포 발사 도발로 한 해를 시작했다. 북한 김정은은 전술핵무기를 대량 생산하고, 남한에 대한 핵 선제공격 위협도 서슴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고 미중 갈등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이사장 남시욱)은 9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신년 안보 좌담회를 가졌다. 대담에는 고재남 유라시아정책연구원장(전 국립외교원 교수),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참여했다. 사회는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이 맡았다.● 대남 선제 사용까지 공언한 북핵 위협 구자룡 소장=북한은 남한을 향해 전술핵을 선제 공격용으로 사용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급박하고 실제적인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에 윤석열 대통령은 ‘일전 불사의 결기’로 응징해야 한다고 했다.(11일에는 ‘북 도발이 심해지면’이라는 조건을 걸었지만 전술핵 재배치나 자체 핵무장 옵션도 언급했다.) 전성훈 전 원장=북한의 전술핵은 대남용이다. 지난해 9월 8일 법으로도 정했다. 올해 정전협정 체결 70년을 맞은 한반도는 전례없는 안보 위협에 놓여 있다. 고재남 원장=북한이 지난해 핵보유국을 선언하고 선제 핵사용을 구체화하는 여러 조치를 취했다.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에는 전술핵 선제 사용 위협으로 응수했다. 올해 남북 간 강 대 강 대치 국면이 계속될 것이다. 박철희 교수=중국과 러시아가 미국과 맞서는 상황을 이용해 북한은 비핵화 의지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을 거라고 국제사회가 믿게 만들고 싶어 한다. 전=북한이 지난해 발사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은 섣불리 한반도에 들어오지 말라고 미국에 보내는 강력한 신호다. 북한은 2021년 전후부터는 한반도에서 사용할 핵 및 투발 수단 개발에 매진했다. 설마 북한이 남한에 사용할까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지난해 집대성해서 보여줬다. 고〓지난해 발사한 90여 차례 미사일 중 39차례는 신형 미사일이라고 한다. 이들 미사일 개발 및 발사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 이후 더욱 집중적으로 개발한 것인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중·러가 유엔 안보리 제재를 무력화하는 기회를 활용하는 전략에서 나온 것인지 볼 필요가 있다. 전〓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은 지난 30년간 지속되어 왔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중·러와 미국 간 강대국 경쟁 환경 등이 촉진 요인이 됐다. 도발을 해도 중·러가 막아준다고 김정은은 생각하는 것이다. 구〓올해는 휴전협정 70주년, 북한 정권 수립 75주년이다. 어떤 도발이 있을지. 전〓7차 핵실험 가능성도 있지만 김정은의 속내에는 미국과 대화 물꼬를 트는 것도 있다고 본다. 김정은은 미국과 핵을 바탕으로 대등하게 관계를 설정하는 지도자로 남고자 할 수도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계속 북한에 대화하자고 얘기해 왔기 때문에 북한이 뭔가 대화 메시지를 던지면 물게 되어 있다. 그러면 핵군축 협상이 시작된다. 박〓북한이 지난해에는 한반도에 집중했다면 올해는 미국이 좀 더 관심을 갖도록 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관심은 우크라이나 전쟁, 그 다음은 중국과의 전략적인 경쟁이다. 북한이 모두가 놀랄 만한 도발을 하지 않는 한 우선순위를 많이 높일 것 같지 않다. 고〓지난해 10월 미국이 발표한 국가안보전략에도 북한은 한두 줄밖에 안 나와 있어 쉽게 핵군축 협상에 나설 것 같지 않다.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가 답습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박〓‘전략적 인내’에서 나아가 ‘전략적 무관심’인 것 같다. 구〓북한은 2017년 후반 6차 핵실험 후 이듬해 새해 벽두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를 선언하고 이어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 나섰다. 박〓북한이 대화에 나온다면 핵군축에 응하라는 것인데 핵군축 협상으로 비핵화를 포기하는 순간 남북은 핵 불균형 상태에 들어간다. 전〓미국은 비핵화를 목표로 대외적으로는 핵군축 협상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북한이 만나자면 만날 수도 있다. 구〓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이 됐고 투발 수단도 다양해져 북핵 대응을 위한 이른바 ‘핵옵션’ 논의가 분분하다. 윤 대통령은 연초 언론 인터뷰에서 확장 억지 이상의 미국 핵전력 한미 공동 기획 연습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전〓기존 확장억제만으로는 북핵 위협으로 불안한 국민을 안심시키지 못한다고 지적한 것은 맞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언급한 것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전술핵을 탑재한 미군기로 외곽 경호 비행을 하는 정도다. 미국과 핵공유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서 전술핵탄두가 배치된 5개국 외의 국가들이 하는 훈련이다. ‘스노캣(SNOWCAT·Support of Nuclear Operations With Conventional Air Tactics)’이다. 구〓스노캣은 한미 확장억제 개념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나? 전〓미국의 B50이나 B2 전략폭격기와 한국 전투기가 공동 훈련하는 것이 그것이다. 핵 없는 우리나라 전투기가 할 수 있는 것은 핵을 탑재한 전폭기를 외곽에서 경호하는 것이다. 박〓윤 대통령 발언은 실제로 북한이 핵을 쏜다고 했을 때 구체적으로 양국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 아닌가 싶다. 북한이 핵을 실제로 사용했을 때 어떻게 공동 작전을 실행할 것인지 기획하고 훈련을 해보자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고〓김정은이 대놓고 남한을 대상으로 전술핵을 개발, 사용하겠다고 하니 이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구〓어떻든 스노캣은 북핵에 대응해 핵무장도 필요하다는 국내 여론이 70%까지 올라온 것에 비하면 한참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다. 박〓이제 핵무장도 최후의 수단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핵 잠재력을 가져야 한다. 전술핵 재배치는 핵잠수함, 폭격기, ICBM 등 투발 수단이 너무 다양화되어 있어 굳이 한반도에 전술핵을 가져다 놓지 않아도 될 것 같다. ●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 소모전 가능성도 구〓우크라이나 전쟁은 올해도 종전의 실마리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가 지난해 30만 명에 이어 50만 명을 추가 징집하겠다고 밝혔다. 고〓우크라이나 전쟁은 푸틴의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미국의 책임도 있다. 쿠바 미사일 사태는 물밑 협상을 통해 핵이 동반된 제3차 세계대전 위기를 피한 성공적인 위기관리로 꼽힌다. 반면에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러 간에 가장 실패한 외교 사례가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위기는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더욱 고조됐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동부 돈바스 문제 등을 협상으로 풀기 위해 푸틴과 가까운 재벌을 러시아에 보내기도 했다. 구〓전쟁이 발생하기 전에 좀 더 세심한 위기관리가 있어야 했다는 건가. 고〓젤렌스키 이전 포로셴코 정부에서 나토 가입을 명문화하고 러시아어 사용을 제한하는 등 반러 조치가 나왔다. 2021년 7월에는 흑해에서 나토 주도의 군사훈련이 있었다. 푸틴 대통령이 레드라인으로 여기는 조치들이 초래할 위험 요인을 미국은 간과했다. 미국은 이번 기회에 푸틴이 전쟁 수렁에 빠져 러시아가 약화되고 유럽에서는 대러 나토 동맹을 강화시키려는 전략적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구〓지난해 하반기 미국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협상을 중재하는 듯한 움직임도 있었는데. 고〓푸틴은 이미 점령한 지역을 우크라이나가 포기하면 협상할 의사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젤렌스키가 개전 300일을 기념해 미국에 가서 바이든과 회담하고 의회에서 연설한 뒤 패트리엇 미사일 등 대규모 군사지원을 받아왔다. 비슷한 시기 푸틴은 핵전투태세 강화를 지시하고 러시아 국방장관은 장기전을 준비하는 정규군 150만 명으로의 증원 계획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전쟁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장기전으로 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박〓우크라이나 전쟁은 소모적인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참상을 겪지만 미국 등 서방은 빨리 종결할 인센티브가 별로 없다. 러시아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서유럽을 단결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구〓우크라이나 전쟁이 ‘한반도식 정전 모델’로 갈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전〓6·25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은 종전을 원하지 않았으나 강대국들의 요구로 이뤄졌다. 우리가 정전협정 모델 케이스라고 하지만 전쟁은 끝났어도 분단이라는 숙제를 남겼다. ‘안 좋은 모델’이다. 고〓크림반도까지 회복한 정전협정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크림반도가 문제 되면 푸틴이 핵 사용을 고려할 수도 있다. 전〓푸틴이 정말 핵을 쓰기는 어려울 수 있다. 독일 때문이다. 러시아가 핵을 쓰는 순간 독일의 핵무장 명분이 생긴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가 터지자 독일이 이게 기회다 싶게 굉장히 무섭게 움직였다. ●미중 갈등 휴지기? 또 터질 화산 구〓3기 연임으로 장기집권 기반을 굳힌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국내 경제 문제 처리를 위해 주변국 관리에 나서고 미중 갈등도 좀 완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박〓중국은 올해 경제 둔화, 코로나 확산, 사회 불평등에 대한 불만 표출 등 내부적인 문제가 많다. 미국과 확전을 피하고 속도 조절을 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공화당 민주당 인사 가릴 것 없이 중국을 견제해 경쟁에서 질 수 없고 적어도 중국의 추격, 발전 속도를 둔화시켜야 한다는 점에 합의가 되어 있다. 전〓미국은 2년 후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대중 강경 자세는 더 강해져 중국 국민과 공산당(CCP)을 분리한 뒤 CCP의 무릎을 꿇리겠다고 나설 것이다. 그게 공화당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자세였다. 지금 미중 갈등은 약간 숨고르는 휴지기라고 볼 수 있지만 밑에서 끓고 있다. 언제 또 화산이 터질지 모른다. 구〓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대만과 중국 사이에 긴장이 높아질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박〓최근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서 야당인 국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너무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지 말자는 정서가 표출된 것이다. 대만해협은 한국의 에너지 및 해양 안보에도 매우 중요하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주 깨알같이 살펴봐야 한다. 전〓대만에서 유사 사태가 발생하면 무엇보다 북한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힘이 분산되는 호조건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구〓중국이 주변국과의 갈등 관리에서 우선적인 국가 중 하나가 한국이다. 윤 대통령이 한국형 인도태평양 전략도 발표했다. 박〓중국은 미국이 동맹국과 민주주의 네트워크를 다시 짜고 있는 가운데 한국을 제일 약한 고리로 볼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한국형 인태 전략은 중국과 협력은 하지만 중국의 ‘위성 궤도(orbit) 국가’는 안 되겠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고〓중국과의 관계에서 정권교체에 흔들리지 않는 내부 원칙을 세워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칩4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참가, 나토 정상회의 참여 등은 우리 갈 길을 가면서 중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 구〓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높아지면서 일본과의 안보 협력 필요성은 높아지는데 일본의 군사대국화에 대해서는 우려의 시각도 많다. 박〓일본이 보통국가화의 흐름으로 강하게 드라이브를 거는 것은 북한과 중국에 대한 대항인데 우리에게는 자꾸 위협으로 비친다. 일본을 과거사 중심으로 보면서 적대국처럼 여기는 것은 우리의 착시 현상이다. 고〓징용 보상 문제는 국가가 힘이 없을 때 생겨 국가 잘못이었다고 국민들을 설득한 뒤 배상을 하고, 한일 관계는 미래 지향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일본이 국내총생산(GDP) 2%로 방위비를 늘려 군사력을 키우는 것에 대해 우리가 할 말이 없다. 북한 미사일이 영공을 지나가는데 가만히 보고 있을 나라가 어디 있나. 다만 한미일 군사협력 틀에서 이뤄지더라도 일본이 어떤 수준을 넘어갈 때는 우리가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일례로 대한민국 헌법상 북한은 한국 영토이기 때문에 일본이 적기지에 반격한다는 명분으로 북한에서 작전을 한다고 해도 우리와 협의하고 반드시 동의를 받아야 한다.정리=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정리=윤융근 기자 yunyk@donga.com}

    • 2023-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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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권, 北정권엔 ‘불편한 진실’, 주민엔 생존문제…국제사회 나서야”[화정안보인터뷰]

    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이하 북한인권대사)로 발탁돼 7월 28일 박진 외교부 장관으로부터 윤석열 대통령 명의의 임명장을 받았다. 2016년 시행된 북한인권법에 따라 문재인 정부 초기인 2016년 9월 이정훈 초대 대사가 취임했으나 1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뒤 후임 인선이 이뤄지지 않아 5년간 공석이었다. 북한인권대사는 각 분야에 전문성과 인지도를 갖춘 인사에게 대사 직명을 부여해 외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대외직명 대사’로 비상근 무보수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국제공조를 강화하겠다”며 북한인권법의 충실한 집행과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공동 제안국 참여 등을 공약했다. 이 교수를 북한인권대사에 임명한 것은 공약을 실천하는 것이자 유명무실화된 법 제정 취지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이 교수는 국제연합(UN) 등 국제기구 관련 업무를 수년간 수행한 다자외교안보 전문 국제정치학자로 ‘인간안보(human security)’ 등 보편적 시각에서 북한 인권을 접근해야 한다는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남북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민감한 이슈인 북한인권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긴 데는 이 같은 활동 경험 등이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교수는 임명장을 받은 직후 외교부 출입기자단과의 간담회와 대학 연구실에서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인권대사직 임명의 의미와 앞으로의 계획 등을 밝혔다. Q. 남북한 화해와 협력, 교류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 시절 한국 정부는 유엔의 대북인권결의안에도 참여하지 않는 등 북한 인권 문제는 방치되어 있었다. A. 북한인권대사 임명은 윤석열 정부가 인류 보편적 가치인 인권 측면에서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국제사회와 함께 노력해 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믿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헌법에 나와 있는 것처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민주공화국이다. 민주주의는 인권 발전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해왔다. 인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을 증진하는 것은 정권의 성격이나 정치적 목적 등 어떤 이유에서도 타협할 수 없는 목표다. 우리 모두는 남북한이 전쟁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북한 주민의 인권 유린까지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은 글로벌 중추국가이자 4반세기 만에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이뤄 많은 국가의 모델이 되는 대한민국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다. 그건 민주국가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책무를 저버리는 일이다. 오준 전 유엔 대사님의 말처럼 우리에게 북한 주민은 아무나가 아니다. 박진 장관님이 “북한 인권은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한 것도 같은 의미다.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북한 정권에게 매우 민감한 이슈지만 북한 주민에게는 절실한 생존 문제다. 5년간 자리를 비워놓아 임명 시기가 이미 상당히 늦었지만 뜻 깊은 일이고 대사직에 무게감과 책임감을 느낀다. Q. 북한인권대사로서의 활동 방향으로 ‘두 가지 트랙’을 제시한 것이 눈길을 끈다.A. 북한인권의 활동 방향은 크게 보면 ‘책임 규명’(accountbility)과 ‘국제적 관여’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책임 규명은 북한인권상황을 기록해 공식 문서로 보존하는 것이다. 가해자나 책임자에 대한 책임 추궁이나 처벌이 당장은 불가능해도 추후에 사용 가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2013년 유엔인권이사회 결의로 설치되고 2014년 발표된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정권에 의한 인권침해와 책임규명 문제가 분명히 적시되어 있다. 그 결과로 2015년 6월 서울에 설치된 것이 유엔서울인권사무소다. 둘째, 국제적 관여인데, 이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와의 ‘적극적인 참여’(assertive involvement)이다. 한국 정부는 인류보편적 가치로서의 인권수호에 대한 일관적 입장을 가지고 ‘아무나가 아니고 남의 일이 아닌’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국제적 공론화에 있어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2019년부터 3년간 유엔 대북인권결의안에 한국 정부가 침묵했다. 박진 장관이 공동 발의에 참여하겠다고 밝힌 것을 환영 지지한다. 한 가지 덧붙이면 유엔서울인권사무소는 유엔 관할의 주요 인권 국제기구로 일본, 태국 등과의 경쟁 끝에 어렵게 유치했는데 그에 비하면 그동안 정부차원에서 협력노력이 미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2020년 이래 사무소 대표도 공석이라 조속한 임명이 필요하다. 향후 장·차관이 사무소 대표와 회동하고 협력방안을 모색하는 등 한국 정부가 보다 높은 관심을 가지고 이 기구를 활용하고 활발한 교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인권대사로서 곧 사무소를 찾아 관계자를 만나 의견을 교환할 계획이다. Q. ‘국제적 관여’에 있어 인도적 지원 등을 포함한 북한과의 ‘건설적 관여’(constructive engagement)를 강조했다. 북한에게 인권은 압박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인권의 잣대를 대면서 지원을 강조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A. ‘건설적 관여’란 국제적 관여 활동 속에 ‘대북 인도적 지원’을 포함하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책임규명 만을 강조하면 북한과 관계가 경색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책임규명이라는 굳건한 원칙 하에 제재와 지원을 적절하게 섞어서 인권개선을 위한 최적점을 찾아내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 주민들의 실질적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도 인권증진의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Q. 북한인권대사로서 중점을 두고 추진할 구체적인 활동들을 소개해 달라. A. 첫 번째는 통일부 주도로 추진되는 북한인권재단의 출범이다. 2016년 북한인권법에 설치 규정을 두고 있으나 아직까지 방치되어 있다. 북한인권대사 주무부서는 외교부이지만 여러 부처와 협력하고 여야 의원들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해 재단 설립이 추진됐으면 한다. 특히 지난 5년간 외교부, 통일부, 국정원, 법무부, 국방부 등 북한인권과 관련한 각 부처의 기능들이 축소되거나 와해되었는데 이러한 기능들을 부활시켜 부처간 시너지 효과를 높일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미국과의 공조다.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북한 인권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공유했다. 미국의 경우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집권 당시인 2009년 임명되었던 로버트 킹 국무부 북한인권특사가 물러난 2017년 이후 아직까지 공석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이후 특사를 임명하겠다는 공약을 지키지 않고 있다. 설사 임명하더라도 특사 인준안이 상원 본회의를 통과해야 한다. 미국도 조속히 특사를 임명하여 같이 공조방안을 논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세 번째는 유엔과의 긴밀한 협조다. 한국과 미국에서 북한인권대사나 특사자리가 공석이었던 기간에도 유엔은 ‘유엔북한인권 특별보고관(special rapporteur)’을 꾸준히 유지했다. 신임 보고관 엘리자베스 샐먼 대사가 1일 임기를 시작해 8월 중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한국과 유엔의 대북인권대표의 임기가 비슷하게 시작한 가운데, 미국의 특사도 하루 속히 임명되어 3자 협력이 이뤄지면 좋겠다. (로버트 킹 전 특사는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이 교수의 북한인권대사 임명에 대해 “한국 정부가 더 적극적인 인권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는 신호라고 본다”고 환영을 나타냈다.)Q. 한국, 미국, 유엔 이외에도 북한 인권과 관련해 추진할 국제사회와의 협력은 어떤 것들이 있나. A. 유럽연합(EU)의 북한 인권 활동은 매우 적극적이고 일관돼 한국이 해야 할 일을 EU가 했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한국 대중들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세안도 ‘아세안 정부간 인권위원회(Asean Intergovernmental Commission on Human Rights)’가 있다. UN의 보고관은 아르헨티나에 이어 남미의 페루 출신이 맡았다. 앞으로 남미에도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싶다. 국제사회는 ‘생각이 같은 국가들(like-minded)’ 못지않게 ‘생각이 같지 않은 나라들(unlike-minded)’과 협력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압력과 지원’의 두 가지 트랙으로 북한 인권증진을 추진하는데 보다 광범한 지지를 얻고 설득력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Q. 북한인권대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북한 인권’이라고 하면 그 범위가 북한 주민들의 생활환경이나 정치범 수용소의 인권 침해 등 북한 내부에 국한되나. A. 북한인권법의 북한인권기록센터 활동 범위가 참조가 될 것 같다. 자료와 정보를 수집 연구 보존 발간하는 범위가 예시되어 있다. 북한 주민의 인권 실태뿐만 아니라 국군포로, 납북자, 이산가족과 관련한 사항이다. 통일부 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항도 있다. 북한인권대사의 책무로 탈북자와 북한 내 인권 뿐 아니라 국군포로, 납북자, 억류자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해결책을 모색해야한다고 생각한다. Q. 2019년 11월 강제 송환된 어민 2명에 대한 인권 침해 논란이 뜨겁다. 귀순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 북송해 처형당하게 한 것은 반인도적 처사였다는 비판이 높다. A. 한 장의 사진이 1000마디 얘기를 대변한다. 국제 강제송환 금지 원칙인 ‘농 르프르망(non-refoulement)’과 북한인권법 이행의 시각에서 봐야 한다. 탈북민의 망명이나 귀순 의사는 정부가 자의적으로 정권의 성향에 따라 판단하면 안되고 사법부가 담당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든다. 정권에 따라서 자의적 판단을 못하도록 이번 기회에 명문 규정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분명히 귀순 의사를 밝혔으면 일단은 우리 국민이다. 설사 우리 국민으로 간주하지 않거나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대한민국에 엄연한 사법제도가 있는데 여기서 조사하고 처벌하는 것이 먼저 고려되었어야한다. 물론 북한에서 중범죄를 저지른 탈북민에 대한 법적 조치와 관련해서는 한국 국내법의 미비한 점들을 정비할 필요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금 조사 과정에서 변호사 선임, 무죄 추정의 원칙 등 적법한 절차가 보장됐는지 책임규명이 필요하다. 2014년 COI 보고서는 북한에서 다수의 사람이 처형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의적 사형이나 고문, 학대,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재판 등으로 비판받는 북한으로 송환하면 심각한 인권 침해가 자행될 것이 뻔하다. 사형제 폐지를 적극 지지했던 지난 정권에서 북한으로 적법한 절차 없이 북한 주민을 강제 송환한 것은 국제법도 위반한 것이다. 강제송환금지 원칙은 국제인권법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원칙이다. 유엔고문방지협약에 가입비준한 당사국인 한국이 그 협약에 명기된 ‘어떠한 당사국도 고문 받을 위험이 있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는 다른 나라로 개인을 추방, 송환 또는 인도하여서는 아니 된다’라는 강제송환금지 원칙을 어긴 것이다. 백범석 경희대 교수에 따르면, 여기서 개인은 비범죄인, 난민과 같은 조건이 붙지 않고, ‘사람이기만 하면’ 예외 없이 적용받을 수 있어야 한다.Q. 북한인권대사를 지명한 시기가 서해에서 북한에 피살된 해수부 공무원과 어민 강제 북송 논란이 높을 때라며 일각에서 신북풍몰이라고도 주장한다. A. 윤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부터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북한인권대사를 취임 후 바로 임명, 국제사회와 협력해 북한인권의 실질적 증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공약했다. 북송 논란 등으로 인해 지금 임명한 것이 아니고, 공약을 지킨 것이다. Q. 북한인권대사는 국내외 북한 주민 및 탈북자 인권 관련 단체들과도 활발한 교류가 예상된다. A. 국내적으로는 통일부에 등록된 탈북자 관련 단체가 34개로 알고 있다. 서울시에도 여러 단체가 등록되어 있다. 임명장을 받고 처음 한 일이 이들 단체의 관계자들을 만나 여러 의견을 경청한 것이고, 앞으로도 이들 단체들, 그리고 국내 및 국외에 있는 북한인권이나 여성, 아동, 장애인 이슈 등을 다루는 국제기구 및 시민단체들과의 교류협력을 확대해나가겠다. Q. 국제정치 전문가이지만 국제법이나 인권법이 전공은 아니다. 북한인권대사로 임명된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나. A. 유엔에서 일할 때 난민문제를 다뤘다. 난민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국제정세가 더 불안해 진다는 것이 지론이다. 1995년 한국에서 탈북자를 환경난민으로 규정하고 국제적 보호를 해야 한다는 논문을 쓴 이래 탈북자 문제나 북한인권 문제를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j from fear)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라는 ‘인간 안보(human security)’의 측면에서 봐야한다는 주장을 1990년대 말 이래 꾸준히 펼쳐왔다.(이 교수는 북한 및 국제협력 관련 저서와 연구논문을 다수 집필하고, 유엔 르완다 독립조사위 사무총장 특별자문관, 유엔 사무총장 평화구축기금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고, 현재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겸 한국유엔체제학회 회장이다)구자룡 기자·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2-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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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낀 국가’의 숙명과 처세의 교훈 일깨운 우크라이나 전쟁[화정안보인터뷰]

    우크라이나 전쟁은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지정학적 단층지대에 위치한 중소 국가의 운명이 어떤 것인지, 그래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일깨우는 교훈이 된다는 점에서 한반도에 강한 시사점을 준다. 미국의 한 전략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제2의 6·25 전쟁’이라고 했다. 한러대화(KRD·조정위원장 이규형 전 주러대사)는 최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외교타운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러관계’를 주제로 세미나를 가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배경과 원인, 전쟁의 성격을 분석하고 미중 갈등 상황에서 한국에 주는 시사점을 집중 분석했다. ●‘여타 국가들’과의 다층적 외교로 활로 찾아야 신범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3중 전쟁’의 성격이 있다고 진단했다. 첫째는 러시아와 서방, 특히 러시아 대 미국 간 전쟁이다. 탈냉전 이후 유럽 안보질서 개편 과정에서 러시아 안보에 대한 고려가 배재돼 불만을 가지게 된 것이 원인(遠因)으로 지목됐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진에 대한 러시아의 반발이 우크라이나 침공의 바탕에 있다고 했다. 러시아에게는 나토의 동진은 직접적인 안보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흔들 수 있는 위협으로 인식됐다. 2003년 이후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키르키스스탄에서 나타난 각종 색깔의 민주화 혁명이 러시아의 체제 변화 요구를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이러한 도전에 러시아가 공세적 방어로 전환해 나타난 것이 2008년 조지아 남오세티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과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이었다. 둘째는 나토에 가입하려는 우크라이나와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 간 전쟁이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자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만이 안보를 보장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2019년 2월 포로센코 대통령은 헌법 개정을 통해 나입 가입을 천명했다. 그런데 이런 나토 가입 가속화는 오히려 올해 2월 러시아 침공의 근인(近因)이 됐다고 신 교수는 분석했다. 세 번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강화된 민족주의의 충돌이라는 측면이다.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민족주의에 근거한 배타적 정책이 가시화하면서 동부 돈바스 지역 등에서 러시아어 사용 주민에 대한 압박정책을 강화한 것을 신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촉발적 요인으로 보았다. 러시아가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준비없이 전쟁을 일으킨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내부의 나치화 움직임을 전쟁 명분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신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나타난 서방과 중-러 진영간의 대립 구도를 ‘신냉전’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과거 냉전과는 성격이 다른 점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념에 따라 두 개의 진영으로 확연히 갈라졌던 냉전 시대와 달리 이번에는 적지 않은 ‘여타 국가들(the Rest)’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가 국제법을 위반한 명백한 침범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제재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나토 회원국 터키, 인도 태평양에서 대중 견제전선의 핵심 국가인 인도, 중동에서는 미국의 군사 동맹국인 이스라엘이 포함됐다. 동남아와 아프리카 국가 일부와 유럽에서는 세르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이 있다. 자국 이익에 따라 진영화해 G20 국가 중 대러 제재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가 절반인 10개국이다. 우크라이나와 한국은 ‘지정학적 활성 단층대’에 있는 ‘중간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강대국 논리에 따라 얄타회담에서 한반도가 분단되었듯 우크라이나도 자국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래가 결정될 수 있는 상황이다. 신 교수는 “지질 구조상의 단층대가 활성화하면 지진이 발생해 많을 피해를 줄 수 있듯이 지정학적 단층대가 활성화되는 상황에 처한 중간국의 갑작스러운 외교 안보 노선의 변경은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는 것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교훈”이라고 분석했다. 신 교수는 “중간국은 외교적 자율성 확보가 외교의 성패를 가르기 때문에 강대국 한 진영에 치우치지 않고 중간국 연대나 소다자 협력같은 다층적 국제정치 구도에서 균형을 모색하는 창의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타 국가들’의 중요성이 커지는 이유다. 이들 국가와의 연대를 통해 미국 유럽 대 중국 러시아의 대립 구도 속에서 생존과 번영을 모색하고 외교의 자율성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같은 외교 전략이나 노선을 정하는데 있어 국내 정치적인 합의 기반을 마련해 국내적 분열의 요소를 억제 관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 아태 지역에도 영향 엄구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기축 통화인 달러의 횡포 때문에 루블화의 가치가 하락했다는 피해의식을 가진 러시아가 원자재를 레버리지로 벌이고 있는 경제 전쟁의 성격도 있다”고 진단했다. 따라서 앞으로 국제경제에서는 경제 안보가 전통 안보 못지않게 중요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제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서처럼 얼마나 싸게 공급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신뢰를 얻고 공급을 받을 수 있느냐의 경제안보 질서가 중요해 질 것이라는 것이다. 공급망에서 가격보다 신뢰가 핵심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엄 교수는 러시아가 동부 돈바스 지역을 점령한 뒤 영토 분할을 선언한 채 협상이 결렬되면 우크라이나 사태는 장기화할 가능성이 있다며 그럴 경우 미국의 대중 견제 인도-태평양 전략의 추동력은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 먹구름이 짙어지고 쉽게 걷히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전봉근 국립외교원 교수는 고대 그리스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주요 경쟁 도시인 아테네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동맹 관계였던 멜로스의 보호를 포기했다며 강대국 사이에 놓인 ‘낀 국가’의 비극과 운명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도 역사적으로 명분과 전통을 중시한 나머지 침략과 항복의 굴욕의 역사가 이어져왔다. 19세기 이후 해양세력과 대륙세력간의 지정학적 경쟁에 끼여 전쟁, 점령, 분단의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국에 주는 교훈은 ‘낀 국가’는 지정학적 역사적 정체성, 국가역량, 지정학적 환경에 맞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점이다. 강대국의 명분없는 침략전쟁은 소국의 명분있는 국민적 저항에 번번이 무산된 것이 전쟁사를 통해 보여주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자강(自强)에 힘쓰고, 국론 합의에 기반을 둔 일관성 있는 외교정책이 긴요하다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영토 보존은 모든 중소국, 끼인 국가들에게 공통된 가치이자 이익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북핵에도 악영향 엄 교수는 “러시아가 유럽에서 서구와의 대결에서 직면한 전략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균형수단으로 동북아에서 북한과의 전략적 제휴를 강화하면 북핵 해결에서 한러간 협력의 공간은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장덕준 국민대 교수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핵과 미사일 무장을 강화하고 있는 북한에 안 좋은 시그널을 주었다며 대북 핵정책에 대한 변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도 강조한 한미 동맹 강화에 기초한 대북 확장억제에 ‘전술핵 무기 반입’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한반도 전술핵 반입이 북한에 대한 비핵화 요구와 모순된다는 반론이 강하지만 북한은 이미 핵 보유국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고, 북핵 강화에 따른 독자 핵무장 요구를 무마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했다. 장세호 국가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금까지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한반도에서의 전면 전쟁도 놀랄 일이 아니게 됐다고 우려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일본은 재무장과 보통국가화를 위한 기회로 삼기 위해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고,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에 따른 고립에서 탈피하고 대북 압박을 분산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고 했다. 전 교수는 과거 우크라이나가 ‘부다페스트 각서’ 등을 통해 핵을 포기한 것이 옳았냐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지만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당시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의 최대 과제는 국제사회의 인정이었는데 최대의 장애는 핵 보유였다. 당시 국제사회의 인정 속에 강대국으로부터의 안전 약속과 경제적 지원을 받는 대신 핵을 포기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정체성과 국가적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핵 개발에는 성공했으나 경제와 국가발전 전략은 실패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고립과 제재를 당하고 있는 북한에게 과거 우크라이나의 선택, 즉 비핵화의 길이 없다고만 할 수 없다. 북한은 비핵화에 앞서 먼저 핵동결을 요구할 수도 있다. 전 교수는 이런 맥락에서 우크라이나 사태 때문에 북한 비핵화를 위한 노력을 멈출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러시아 한국에 ‘빌런(불량 국가)’이 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국립외교원 이태림 교수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전략적 역할과 가치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며 동북아에서 러시아가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역할이 크지 않다고 해도 ‘빌런(villian·불량 국가)’이 되려고 하면 오히려 큰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한국은 일본처럼 공공연한 대러 비난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권고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적인 무기 지원이나 공급은 물론 폴란드 등을 통한 무기 지원에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직간접적인 무기 지원은 러시아가 한국을 압박하는 카드로 역이용될 수 있다고 했다. 러시아는 미국 등 서방과의 대립 국면에서 중국과의 협력이 강조되고 있지만 동북아에서는 중국과 일본 견제를 위해 ‘한국 카드’를 두고 싶어한다며 러시아가 끝내 한국 카드를 버리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 사태로 강해진 중-러 협력, 내구성은? 신범식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중-러 협력이 강화되고 있다며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참가해 단독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협력에 한계가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중국의 일대일로와 러시아의 유라시아경제연합이 중앙유라시아를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이익을 조율,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러시아가 구상하는 다극 질서에 대해 중국이 얼마나 동의할 지는 미지수라고 봤다. 엄구호 교수는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에 두 개의 전선을 갖게 되어 대중 압박이 약해질 수 있어 중국이 우크라이나 사태의 가장 큰 수혜국이라고 분석했다. 러시아의 대중 의존도도 커졌고 그동안 실체가 불분명했던 브릭스(BRICS·러시아 중국 인도 남아공 브라질 5개국 협의체)도 러시아를 지지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냈다. 엄 교수는 전쟁 장기화에 따라 서구나 우크라이나의 피해가 커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러 밀착이 강화되는 것도 미국 국익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미국 주도의 대러 협상이 필요하며 이 협상 결과가 러시아의 국제사회 복귀 시점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봤다. ●미-러 ‘적대적 공존’으로서의 우크라이나 전쟁 홍완석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밑바탕에는 유라시아 패권 장악을 놓고 미러가 벌이는 권력투쟁이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구소련 해체 이후 미국 주도의 나토 동진에 대한 반발을 이어왔는데 2008년 조지아 침공, 2014년 크림반도 합병에 이어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2015년 시리아 내전에 대한 군사적 개입도 냉전시대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복구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했다. 홍 교수는 미국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의 갈등의 증폭을 통해 양측이 모두 원하는 것을 얻어가는 ‘적대적 공존’의 전쟁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때 약화됐던 나토의 결집력을 복구하고 유럽연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자 했는데 러시아를 외부 공통의 적으로 한 안보 위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됐다고 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유럽이 미국에 의존적인 안보 구조를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다. 전쟁 장기화로 피해가 커지고 있지만 미국이 구상하는 이같은 지정학적 목표들은 대부분 달성됐다는 것이 홍 교수의 분석이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도 나토의 동진과 팽창 차단에만 그치지 않고 냉전 종식 이후 구축된 국제질서에 대한 재편을 노리고 미국과 유럽, 유럽내 각 국의 분열도 노렸다고 했다. 홍 교수는 이같은 지정학적 요인 외에 ‘제국 증후군’에 사로잡혀 있는 러시아인들에게 탈냉전 이후 손상된 대국적 자부심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있다고 했다. 오랜 기간 중국에 가려져 있던 러시아의 존재감을 국제사회에 다시 과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국민들이 불법 침략전쟁에도 불구하고 푸틴에 대해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것과도 무관치 않은 대목이다. 홍 교수는 이밖에도 푸틴의 장기 집권에 따른 국민들의 피로감을 해소하고 시선을 외부로 돌리려는 목적도 있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주는 기회 요소는 없나 고상두 연세대 교수는 21세기의 지정학적 리스크는 중국의 부활과 러시아의 부활이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는 (제국의 부활은커녕) 쇠약의 길로 가게 되었고, 이는 한반도에는 안보 리스크가 줄어드는 상황이라고 했다. ‘낀 국가’ 운명과 비극이 있지만 강대국이 싸울 때 제3의 국가가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제유가가 100달러를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중국과 인도는 수출이 제한된 러시아 석유를 ‘우호 가격’이라며 35달러에 구매하고 있다며 미국의 제재를 적용해 할증된 가격에라도 러시아 석유를 구매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 교수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 상황을 돌파하는 방법으로 한-러간 행위의 주체를 국가나 정부기관이 아닌 기업과 시민사회 등으로 바꿔 활용해서 경색을 풀어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서방 기업이 철수해 수입 대체 산업 육성 필요성이 큰 러시아에 카자흐스탄을 통한 우회 진출 등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것. 독일이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를 40%까지 높였다가 대러 제재 국면에서 타격이 큰데 대중 무역 의존도가 25%인 한국에는 미국 유럽으로의 시장 다변화 필요성이 더 커졌다고 강조했다. 고 교수는 한미 동맹이 중요하지만 경제 뿐 아니라 대미 편중 안보에서 ‘안보 다변화’도 필요하다고 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에서 미국이 한 발 더 나아가 패권정책을 포기할 경우 한국 안보에 소홀하거나 포기할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에 한미일 안보 파트너 관계를 강화하고 나토와도 안보협력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러시아 제재 참여하면서도 한-러 협력도 지속되어야 정민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부연구위원은 미국 등 서방의 대러 제재가 포괄적이고 장기화하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고립이 심화될 전망이라며 한국이 대러 제재에 동참하면서도 교류 협력이 가능한 분야를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협력 분야와 방향에서 한국이 강점을 가지고 있고 러시아의 수요가 큰 디지털 분야가 중장기적으로 유망하고 IT 분야에서 한국의 하드웨어와 러시아의 소프트웨어의 상호보완성이 특히 크다고 강조했다. 러시아가 IT 분야 중소기업 육성을 강조하고 있어 첨단 산업 중소기업의 역할을 강화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했다. 박종호 한러비즈니스협의회(KRBC) 대표는 서방의 대러 제재 강화로 러시아 내에서 “서방과의 경제 관계는 끝났다”는 분위기마저 있다며 한국에는 협력 가능성이 더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30년 이상 사업을 해온 김윤식 신동에너콤 회장은 “노태우 정부 이후 북방정책은 한국의 국시(國是)였다”며 큰 기조를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도 한국 대러 제재 참여로 비우호국으로는 지정했으나 무비자 협정에 따라 비자발급에 어떤 제한도 없다고 했다. 한국 항공사가 우크라이나에 4000만 달러 지원 물품을 수송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1억 달러의 추징금 명목의 보복을 했지만 미국과의 동맹국인 한국이 제재에 동참한 것에 대해 일정 정도 암묵적인 양해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다만 제재가 장기화하면 러시아가 북한에 핵추진 잠수함 관련 기술을 넘겨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핵잠 기술은 제재 대상이 아니지만 핵잠수함에 탄두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기 때문에 위협적일 수 있다. 박 대표는 대러 제재에 한국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나진 하산에 대한 한국의 독자 제재는 지난 정부에서 해결했어야 한다며 “있지도 않은 미국의 눈치 보기”는 없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의 이란 제재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이란의 원유 수입을 지속한 것이 좋은 사례라고 했다. 엄 교수는 “시장, 에너지, 물류 등의 성장 인프라를 제공하는 러시아와의 협력이 필요한 한국으로서는 북방정책의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아시아를 통한 러시아와의 간접적 경제 협력도 모색해 볼 만하다”고 조언했다. 구자룡 기자·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2-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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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尹정부, 글로벌 한미동맹 의지 커… 中눈치보는 외교 성공 못해”

    《한미 정상회담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순방에 대한 불만으로 북한은 장단거리 탄도미사일 세 발을 발사했다. 중-러 전투기는 한국의 방공식별구역(KADIZ)을 무단 침범하며 반발했다.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이사장 남시욱)은 25일 바이든 대통령 순방과 한미 정상회담 이후 달라진 안보 환경을 분석하는 좌담회를 가졌다.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진행된 좌담에는 안호영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전 주미대사), 박철희 서울대 교수(국제학연구소 소장), 우정엽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 참석했다. 진행은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이 맡았다.》○ 도발하는 북한, 원칙적 대응이 답 ―윤석열 정부는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참여로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했다. 핵과 미사일 무력을 강화하는 북한에는 핵을 포함한 공동 대응을 발표했다. 북한과 중-러는 예상한 것처럼 즉각 불만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안: 태영호 의원 얘기를 들어 보면 1990년대 남북 대화가 활성화됐을 때 북한 외교부 내에서는 냉전이 끝났으니 살길은 남북 간 관계 진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1993년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모두 중단했다. 그 후 북한은 제네바 회담, 6자 회담 등 무슨 회담을 하든 뒤에서는 핵과 미사일 개발에 매진했다. 박: 북한과 중-러의 도발은 한미일 협력과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 질서가 강화되는 것에 대한 반발이다. 형세는 힘을 사용해 국제 질서를 변경하려는 세력과 룰과 가치에 기반해 국제 질서를 지키는 세력의 상호관계가 복잡해지고 있다. 한국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후자를 선택했음을 대외적으로 밝혔다. 우: 북한이 한미 정상회담에 어떤 반응을 했다고 우리의 원칙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 북한을 끌어내기 위해 원하는 것을 줘야 된다고 정책이 바뀌면 처음 이루려고 했던 장기적인 목표를 이룰 수가 없다. ○ ‘글로벌 동맹’, 위상 높아져 외연 확장 당연 ―윤석열 정부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한미 동맹의 핵심 키워드로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을 선언했다. 박: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에는 4가지 포인트가 있다. 하나는 문재인 정부에서 뒤틀리고 약화됐던 동맹의 정상화다. 두 번째는 동맹 강화다. 가시적인 조치로 한미 고위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와 연합훈련 재개, 전략자산 필요 시 적시 전개 등이 제시됐다. 세 번째는 동맹 확대, 즉 군사 안보뿐 아니고 경제 안보, 기술 안보 등으로의 외연 확장이다. 마지막은 동맹의 심화다. 아태 지역이나 글로벌 문제도 미국과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안: ‘글로벌’이 새로운 것이고 중요하다. 한미 동맹의 역할이 북한 위협에 대응하는 것 이상으로 확대되면 부담을 키워 동맹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국력이 커질수록 동맹의 외연은 확장될 수밖에 없다. 우: ‘포괄적 전략동맹’은 2009년 이명박-오바마 대통령 때 처음 나왔지만 이번에 주목받는 것은 양국 정상 모두 실행 의지를 강력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한미 동맹을 한반도 내 역할로 국한시켜 한국의 위치를 과소평가했다. 안: 호주 수도 캔버라의 전쟁박물관 입구에는 ‘평화를 희망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구절이 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있는 호주는 안보 위협을 직접 당하지 않으면서도 1, 2차 세계대전, 이라크전쟁에 참여해 책임을 다했다.○ 한미 ‘행동하는 동맹’이 동맹의 정상화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북 위협 대응 확장억제에 ‘핵’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갔다. 우: ‘핵 능력과 재래식 능력을 포함한 모든 가용한 자원을 동원해서’라는 표현은 과거에도 있었다. 이번에 주목할 만한 것은 전략자산을 적시에 전개해 북한이 도발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양국 정상이 의견 일치를 봤다는 것이다. 전략자산이 매번 한국에 오지 않아도 북한에 전달하는 메시지의 강도가 상당하다. 안: 지난 5년간은 사실 정상적인 동맹이 아니었다. 문 정부에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대선 때 트럼프의 말을 듣고 대통령이 되면 동맹국들이 어려움에 처하겠구나 생각했는데 현실이 됐다. 핵 확장 억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신뢰다. 정상 간이나 워킹 레벨의 신뢰도 중요하지만 양국 국민 간 신뢰도 중요하고 확장억제의 가장 큰 담보가 된다. ―김성한 대통령실 안보실장은 ‘행동하는 한미 동맹’을 강조했다. 연합방위 약속과 실행 의지를 보여주지만 북한의 반발도 커지지 않겠나. 우: 북한은 작년 1월 당 대회 때 국방력 강화를 김정은이 언급한 뒤 줄곧 미사일을 발사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9년에도 미사일을 연이어 쐈다. 새 정부의 어떤 원칙적인 대북 정책에 자극을 받아서 북한이 도발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박: 북한의 전략이 한국 정부의 변화에 따라 영향을 받으면 오히려 좋겠다. 북한은 일관되게 핵무장 국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안: ‘행동하는 한미 동맹’이라고 했는데 지난 몇 년 동안은 행동을 안 했다. 작년 5월 한미 공동성명을 보고 문재인 정부가 이런 합의를 할 수 있나 깜짝 놀랐는데 문제는 후속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다.○ 尹-바이든, 변화된 北에 현실적 대응―바이든은 김정은이 진정성 있게 나오면 만나겠다고 했다. 바이든의 대북한 태도 등을 두고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주한 미국대사는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를 닮았다고 했다. 우: 바이든의 대북 정책을 ‘전략적 인내’라고 부르는 의도는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다. 한미가 뭔가를 제공해야 북한이 반응을 할 거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바이든의 접근을 전략적 인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부정적인 의미로만 볼 것은 아니다. 2016년 이후 대북 제재가 촘촘해져 북한의 비핵화가 선행되고 제재가 해제되지 않으면 지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박: ‘전략적 인내’는 사실은 ‘비전략적인 무시’라는 의미였다. 윤 대통령은 대화에 대한 기본 입장은 바뀌지 않지만 정상회담을 (비핵화 해결의) 입구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비핵화를 위한 실질적인 의지와 구체적인 행동 없이 말만 계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 미중 사이 전략적 모호성 ‘지속 불가능’ ―한국은 안보는 쿼드(Quad·미국 인도 호주 일본 4개국 협의체), 경제는 IPEF라는 두 날개의 대중 포위 견제전선에 동참하는 모양새다. 중국에서는 ‘미국의 앞잡이가 되지 말라’ ‘중국 배제는 발전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안: 중국의 반발 때문에 IPEF에 가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한국이 미중 관계에서 지난 5년간 전략적 모호성을 취했지만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먼저 미국이 한국에 배신감을 얘기한다. 트럼프 시절 데이비드 스틸웰 동아태 차관보는 “미중 사이의 선택이라면 한국은 이미 1970년대에 했다”고 했다. 미 의원들 중에는 저울질하는 한국을 보고 이러려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냐고 한다. 중국도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한국을 약한 고리로 여긴다. 조금 건드리면 한미 관계를 와해시킬 수 있다는 잘못된 희망을 준다. 김대중 대통령은 ‘일맹삼호(一盟三好)라고 했다. 한국에 하나(미국)의 동맹과 주변의 3개 우호 국가(중국 러시아 일본) 모두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중국이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훈수를 해서는 안 된다. 박: 윤 대통령의 외교 안보 캐치프레이즈가 ‘튼튼한 안보, 당당한 외교’다. 중국의 강압에 굴복하는 외교는 성공할 수 없다. 국내에서 ‘중국이나 북한이 이렇게 나올 것이다’ 하고 미리 조심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본말로 ‘손타쿠(忖度)’라고 한다. 국익에 맞고 주권적인 판단이라면 상대방이 안 받더라도 설득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우: 정부의 IPEF 가입 결정은 우리 이익에 맞느냐가 일차적으로 중요하지 중국을 고려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문재인 정부 때는 부차적인 요소를 먼저 고려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의사 결정이 있었다. 박: 우리가 ‘룰 테이커’가 될 거냐 ‘룰 메이커’가 될 거냐의 문제다. 시작 단계에 한국을 빨리 들어오라고 하는 것은 역량과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역할을 하라고 문을 열어줬는데 옆 나라가 겁나서 못 들어가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대만해협 안정, 원칙적인 입장일 뿐―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공동 성명에서 대만을 언급하면서 ‘아태 지역 안보 핵심’이라고 했다. 자유, 인권,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 등은 중국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 공동성명 어디에도 중국을 직접 언급한 적이 없다. ‘대만해협의 안정’이란 표현은 작년 4월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했던 미국의 한 싱크탱크 연설에 거의 똑같은 문장이 있다. 지역 내 인권 문제나 대만해협의 안정이 중요하다는 것은 힘에 의한 일방적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는 원칙적인 입장이다. 그런 표현을 정상회담 선언문에 못 담을 이유가 없다. 박: 나는 거꾸로 중국에 묻고 싶다. 그럼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냐. 우리가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대만을 한국이 군사적으로 도와주겠다는 것도 아니다. 대만해협과 남중국해는 한국에 중요한 항로다. 원유의 90%가 여기로 오고 수출의 30∼40%가 지나간다. ―바이든은 일본에서 “대만이 공격을 받으면 미국이 군사 개입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을 어느 정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나. 안: 바이든의 말실수를 ‘개프(gaffe)’라고 하는데 이번 말실수는 가장 논리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 국방부는 (하나의 중국)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해명했다. 미국 언론은 바이든과 국방부가 각각 배드 캅(나쁜 경찰), 굿 캅(좋은 경찰) 역할을 분담한 것이라고 했다. 외교를 오래 해 온 바이든 대통령이 말실수를 가장해 내심을 던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한국 대미 수출은 6위, 투자는 13위―바이든 순방을 즈음해 현대자동차와 삼성이 미국에 거액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은 안보를 제공하고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것인지,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바이든이 선물을 챙겨 간 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 우: 기업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으니까 투자하는 것이다. 미국에 대한 대규모 투자라고 부각됐지만 사실 미국과의 교역 규모에 비해 투자는 크지 않다. 미국에 대한 투자국 중 한국은 일본 유럽 등에 이어 13위다. 박: 글로벌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하는 것은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공급망)에서 미국이 효용성이 높은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요즘 강조되는 경제안보와도 관련이 있다. 한국 기업 투자는 상당 부분 첨단 기술 분야로 미국에서는 보안이 유지되고 현지 연구개발과 시너지가 높은 반면 중국에 가면 첨단 기술을 뺏기거나, 기술이 유출되거나 따라잡힐 우려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일 관계 개선, 더 미룰 수 없는 과제” ―한미 정상회담과 미일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에 공통적으로 한미일 협력의 중요성이 포함됐다. 박: 박진 외교부 장관과 같이 미국에 정책협의단으로 갔을 때 주요 정책 결정자들은 줄곧 한미일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북한 위협, 중국의 공세적인 외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등 불안한 상황에서 가치를 같이하는 한미일이 한편에 서서 힘으로 현상을 변경하려는 국가들에 대응해야 한다는 논리다. 한국의 안보에 제일 도움이 되는 게 한미일 협력이다. 북한이 오판해서 유사 상황이 발생했을 때 한미일이 협력하지 않고서는 한국의 안보를 지킬 수가 없다. ―한미일 안보 협력이 강화되는 것을 중국은 ‘아시아판 나토’라고 비판한다. 박: 중국은 북한이 핵이나 미사일 개발을 하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런 것은 가만히 두고 한국이 방어 기제를 강화하는 것에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한일 관계 개선의 장애 요인으로 일본의 우경화가 언급되기도 하는데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을 오래 봐왔기 때문이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이번에 가서 만났을 때 “한일 관계 개선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과제”라고 했다. 일본 내에서 상당히 정치적인 저항이 있을 수 있지만 더 이상 미룰 과제가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줬다.정리=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정리=윤융근 기자 yunyk@donga.com}

    • 2022-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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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정권교체기 ‘레드 라인’ 도발…‘힘 통한 평화’ 시험대에”

    북한이 올해 9차례 미사일 발사에 이어 16일에도 평양 순안공항 인근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추정되는 발사체를 쏘았으나 발사 직후 폭발했다. 2월 27일과 3월 2일 발사실험은 ICBM 성능 실험이라고 한미 당국이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취임일인 5월 10일을 전후해 7차 핵실험도 감행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이사장 남시욱)은 15일 정권 교체기를 맞아 긴박한 한반도의 안보 상황 등을 분석하는 전문가 좌담회를 가졌다. 좌담에는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 전재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이 참석했다. 진행은 구자룡 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이 맡았다. 북 ICBM, 핵 보유국 향한 대미 협상용 북한은 과거에도 남한의 정권 교체기에 핵과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다. 이번 ICBM 성능 시험 발사 등도 대선 일정에 맞춘 것인가. 윤: 화성 17호는 세계 최대 크기로 ‘괴물 ICBM’으로 불린다. 미국 본토를 겨냥한 것이자 북한의 미사일 개발이 거의 완성 단계에 왔음을 보여준다. 특히 남한 국민을 겨냥한 완전히 새로운 신형의 전술 핵무기가 거의 완성됐다는 것이 우려할 점이다. 북한이 역대 최대 크기의 ICBM 발사 실험을 하는 것은 명실공히 핵보유국이 되는 꿈을 이루려는 마지막 단계다. 북한은 핵을 보유한 후에도 제재를 받지 않는 파키스탄 인도 이스라엘 같은 나라가 되고 싶어 한다. 북한은 미국과 담판을 통해서 대남 전술핵 무기는 묵인해 달라고 협상하려고 할 것이다. 미국을 괴롭히는 ICBM은 발사를 유예하고 핵이나 ICBM을 제3국에 넘기지는 않겠다고 할 것이다. 미국과의 이런 협상을 위해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전: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실험은 보통 군사력 증강이라는 군사 기술적인 수요, 국내 정치적인 필요성, 그리고 대외 협상용 등의 목적이 있다. 이번 성능시험 발사는 군사 기술적으로도 굉장히 유용하고 지난해 8차 당대회 때 김정은이 얘기했던 ‘전략 국가를 위한 자력 증강’을 착실하게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과의 단기적 협상에서 입지를 강화하려는 시위라기보다 장기적으로 미중 경쟁 시대에 핵 국가로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다. 김정은의 시간표는 15년 이상으로 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불법 행동을 해도 중국이 감싸는 걸 보고 북한은 ‘내가 망하려고 하면 중국과 러시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강해진 것은 아닌가 싶다. 신: 북한의 행보는 지난해 8차 당대회 때 김정은이 결정한 바를 이행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자력갱생하고 군사안보적으로 핵능력을 강화하면서 미국과 정면 대결을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별다른 변수가 아니었다고 본다. 북한은 한국이 아닌 미국을 맞상대하겠다는 생각이다. 북한이 미사일 시험 발사를 계속하는 것은 자신들의 핵능력을 극대화하는 조치를 밟아가겠다는 의미다. 북한이 대선을 맞은 한국 국내 정치를 고려했다면 베이징(北京) 올림픽에서 한국 정부 고위층과 만나 화해 제스처를 보였을 수도 있는데 그런 옵션을 걷어찼다. 북한은 미중 전략 경쟁으로 유엔 안보리에서 새로운 제재가 나올 수 없다는 확신이 있어 핵능력 극대화를 별다른 부담없이 계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北 핵과 미사일, 南 정권 교체보다 자체 일정 따라북한은 한국의 정권 교체와 관계없이 자신들의 시간표나 장기적 목표에 따라서 핵과 미사일 개발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공통의 의견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와 관계없이 ICBM 발사나 핵실험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인가. 윤: 문재인 정부 초기 6차 핵실험과 화성 15형 ICBM 시험 발사를 했다. 그 후 한반도 전역을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30~40차례 실험 발사하고 실전에 배치했다. 북한이 대선 혹은 정권 교체기라고 해서 미사일을 발사한 것도 아니고 무슨 협상용도 아니다. 1차 핵실험은 진보 정권인 노무현 정부 때 했다. 김대중 정부 때는 참수리호가 격침당하고 연평해전이 벌어졌다. 북한은 군사 기술을 개발해 나가는 과정에서 진보 정부면 도발을 안 하고 보수 정부가 들어서면 화가 나서 도발을 하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전: 이번 대선에서 진보 후보가 이겼어도 대남 무시 전략으로 갔을 것이다. 북한은 하노이 이후 문재인 정부가 엄청 군비를 증강한 것을 보았다. 북한은 문재인 정부도 이중 기준을 내세우고 미국의 앞잡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진보 정부였어도 미사일 시험 발사 스케줄을 조정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고 본다. 7차 핵실험, 전술핵 개발용 가능성북한 영변 강선 평산 등에서 핵실험 재개 징후가 발견됐다. 폭파쇼를 벌였던 풍계리 핵실험장의 3, 4번 갱도는 조금만 수리라면 다시 쓸 수 있는 상태라고 한다. 5월 10일 윤 당선인 대통령 취임 전후 7차 핵실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전: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 위협, 선전 효과는 크겠지만 기술적인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북한은 핵개발에 필요한 실험은 이미 다 했다는 생각이다. 이제 핵무기를 실어 나를 미사일이 중요하다. 미 본토까지 타격할 수 있는 ICBM은 억지 측면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다만 북한은 2차 핵공격 능력을 갖춰야 하는데 아직은 그렇지 않다. 북한이 선제 타격을 받아도 2차 핵공격 능력을 가질 때까지는 실험을 계속할 것으로 보여진다. 북한이 2차 핵공격 능력을 가지면 미국도 북한을 선제공격할 수 있는 군사 옵션은 사라진다.신: 북한이 남북 관계 차원에서 도발을 해온 측면도 있지만 그들의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서 일관되게 핵개발을 했고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되는 때 역량 테스트를 하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은 2006년과 2009년 그리고 2013년, 그리고 2016년 등으로 근 3년 주기설이 적용됐다. 2016년과 2017년 실험 횟수가 늘어난 것은 핵개발의 완성 단계로 최종적으로 데이터를 축적하기 위해서였다. 핵실험은 6차례면 충분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파키스탄도 6차례 실험에 그쳤다. 7차 핵실험을 한다면 전술핵 시험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지난 2년 동안 북한이 개발한 중단거리 미사일은 한국을 겨냥한 전술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북한은 원자탄과 수소탄의 위력을 어느 정도 확보해 더 이상의 성능 테스트가 필요 없다. 이제 소형 전술핵으로 폭발시킬 수 있는지 검증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尹 시험대에 설 ‘힘을 통한 평화’ 윤석열 당선인은 ‘힘을 통한 평화’을 강조했다. 다음달에는 실병력 한미연합훈련이 재개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정권 교체기의 북한 리스크가 차기 정부 초기의 큰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신: 한반도 4월 위기설이 상당히 가시화되고 있다. 한미연합 군사훈련이 규모를 늘렸든 줄였든 시작되는데 북한으로서는 도발 명분이 된다. 4월 15일은 김일성 생일 110년이다. 북한이 내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도발 가능성이 있다. 북한의 도발이 윤 당선인 취임 이후에도 이어지면 새 정부의 안보 역량을 테스트 받는 기회가 될 것이다. 신속한 한미 공조, 북한 도발을 억제하도록 중국을 견인할 수 있는 지 등이 역량 평가의 기준이 될 것이다. 윤: 남북협력을 중시하는 지난 30년의 포용정책의 적실성에 대해 철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관성적으로 무조건 포용한다고 했지만 북한과 남북 관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남북협력을 위한 정상회담을 하다 한반도를 겨냥한 북한의 핵무장은 현실이 됐다. 개성공단 금강산이 무슨 변화를 가져왔나. 개혁도 개방도 없었다. 탈냉전 시대에 체제우위 인식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 포용정책이었다면 지금은 신냉전 시대다. 남북한 군사력 균형이 무너졌다. 재래식 군비는 북한 핵 앞에서 효용이 없다. 과거에는 주변국 북방 외교를 통해서 북한을 개혁 개방으로 이끌겠다는 북방 외교의 꿈이 있었다. 지금은 완전히 상황이 바뀌었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변화는커녕 뒷배를 봐주는 상황이 됐다. 문: 윤 당선인은 선제 타격 등 대북 강경 자세를 보였다. 선거 때와 달리 윤 당선인이 직접 정부를 운영하면서 조금 조정될 수 있나. 신: 윤 당선인의 대북 공약이나 자세를 강경이나 강공이라고 보는 것을 맞지 않다. 문재인 정부의 유화정책과 대비해 윤 당선인의 말을 강경하다고 잘못된 프레임이 씌여지고 있다. 대화의 문을 열어두되 북한이 도발하면 억제력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국가 외교안보 정책으로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전: 대북 군사력 강화를 통한 억지와 경제제재를 확고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윤 당선인의 공약은 잘 정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제재를 약화시키면서 협상을 하려고 하거나 군사훈련을 하지 않아 억지력을 약화하면서 협상을 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억지와 제재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대북 관여를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윤 당선인의 대북 정책에서 ‘대화가 열려 있다’고 되어 있는데 문재인 정부보다 더 효과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고 정말 ‘핵을 버릴까’(가능성은 낮지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대화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韓 쿼드 가입 = 대중 적대’ 잘못 윤 당선인의 한미 관계는 ‘한미 포괄적 전략동맹’이 키워드다. 쿼드(QUAD·미국, 일본, 호주, 인도 4개국 협의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미국의 MD체제 가입 등 한미 관계에서 문재인 정부와는 달라질 부분들이 많다. 윤: 한미 포괄적 전략동맹은 이명박 정부에서도 나온 것으로 그것을 현실화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쿼드는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지지를 표명했다. 쿼드가 대중 군사동맹으로 비쳐지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RCEP) 같이 중국이 주도하는 것은 다 가입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것에 가입하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된다. 문: 한국이 미국의 MD 체재에 가입하려는 액션이 나오면 사드 이상으로 중국이 반발할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윤: 지금 북한의 전술 핵무기를 실은 미사일 수백 발이 서울부터 제주도까지 다 겨냥하고 있는데 우리는 방어망이 거의 없다. 미국의 MD 체제에 들어가면 중국과 북한을 자극하고 동북아의 군비 경쟁을 일으킨다고 김대중 정부 이래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우리는 독자적으로 하겠다지만 우리가 가진 역량으로는 탄도미사일은 요격도 못한다. 미국에 의존하지 않으면 북한 미사일을 요격할 수가 없는 실정을 알아야 한다. 전: 한미간 ‘포괄적 전략 동맹’과 한중간 ‘상호 존중’은 잘 선택한 말이다. ‘포괄적 전략동맹’은 좋은데 내용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문제다. 우리의 대미 전략과 대중 전략 얘기를 하는데 그거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 미중 관계 전략이다. 미중 관계를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큰 원칙을 세울지에 대한 전략이 있어야 하위의 한미 및 한중 전략의 그림이 나온다. 포괄적 동맹은 이슈의 포괄일 수도 있고 지리적 범위의 포괄일 수도 있다. 그걸 이제 결정해야 되는 상황이다. 이명박 정부 때는 가치동맹 얘기까지 했다. 다만 지금은 가치동맹은 부담되는 측면이 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상황에서 미국의 가치에 무조건 동조하기에는 조심해야 한다. 차기 정부에 대한 미국의 기대 수준이 굉장히 높아 무조건 맞춰줄 수도 없다. ‘상호 존중’ 한중 관계, 공중증은 벗어나야윤 당선인의 대중 관계 키워드는 ‘상호 존중’이다. 다만 3불(不) 정책을 계승하지 않는 등 친중 저자세 외교는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신: 사드도 그렇고 과연 어떤게 한중 관계의 올바른 방향인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중국이 원하는 걸 우리가 다 수용하면서 어떻게든 중국으로부터 피해 받지 않는 것이 올바른가. 그보다는 중국이 우리에게 요구를 해도 전략적 이익을 보존하면서 상황에 따라서는 중국과 맞서거나 입장을 조화롭게 조정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재인 정부는 사드 3불이 정책이 아닌 입장 표명이라고 했지만 대통령의 방중에 앞서 나왔다. 우리 스스로 잘못된 방향의 한중 관계를 만들어 갔다. 전: 사드와 MD는 미국 편들기나 대중 견제라는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미중 관계 상위의 문제가 해결되면 이것은 굉장히 기능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대북 군사 체제를 강화하는 것으로 중국의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이 윤 정부가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또 미중 관계 속에서 헤매고 미국은 한국을 의심하고 중국은 한국을 약자로 보고 보복하는 상황이 반복될 수도 있다. 윤: 문 정부는 3불 약속은 합의도 약속도 아니라고 한다. 그냥 입장 표명이라고 한다. 이런 것을 두고 우리가 마치 큰일 나는 것처럼 하는 것도 이상하다. 근본적인 건데 국익이 과연 뭐냐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우크라이나를 보면 지정학적 리스크는 숙명이다. 우리 주변 세 나라는 전부 다 우리를 침략하거나 지배하거나 했던 경험들이 있다. 최근 100여 년 사이 세 나라로 인해서 세 번의 전쟁이 일어났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 그 다음 한국전쟁이다. 신흥 강국이 등장할 때 전쟁이 발생했다. 중국이 신흥 강국으로 등장하고 있는 동북아에서 다시 ‘권력 정치’(파워 폴리틱스)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이 지역에 안정적 균형이 있는 게 제일 좋다. 70년 전 미국이 만들어 놓은 균형을 어떻게 유지시키느냐가 우리의 이익이 되어야 한다. 일본이나 호주도 한국만큼 경제적으로 중국 의존도가 높은데 왜 쿼드에 가입하나. 우리가 너무 공증증(恐中症)이 있는 게 아닌지 봐야 한다. 전: 중국은 한국이 쿼드에 들어가면 반중이라고 규정해버린다. 그런 말에 얽히면 우리의 정책 레버리지가 너무 약화된다. 우리가 쿼드를 어떻게 보는지 시각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비난하는 최근 유엔 총회 결의에서 인도가 기권하는 것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인도는 쿼드 참가 국가지만 이해에 따라 (중국과도 같은 입장을 취하며) 러시아편을 들었다. 쿼드가 사실 굉장히 결속력이 약하고 안보적인 측면은 특히 그렇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 윤 당선인의 경우 쿼드는 기능별 협력을 먼저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국의 국가 이익과 한미 동맹을 고려하면서 정책을 선택해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다. 미국이냐 중국이냐의 선택은 현실에 맞지 않는 외교다. ‘미국 or 중국’이 아닌 ‘미국 and 중국’의 관점이 되어야 한다. 한일 관계 개선 모멘텀 살려야 박근혜 정부 때 위안부 문제에 대해 ‘비가역적 합의’까지 있었지만 문재인 정부들어 한일 관계는 수교 이래 최악이 됐다는 평가다. 윤석열 정부에서 전환점을 맞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일본의 사도 광산 유네스코문화유산 등재 추진 등 걸림돌도 없지 않다. 윤 : 한일 간에 관계 개선을 위한 모멘텀은 생긴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상황을 워낙 어렵게 만들어 놔 복원이 쉽지 많은 않다. 한일 관계를 지난 5년간 거의 방치했다. 국가간 합의를 형해화시킨 뒤 뒤에 가서 유효하다고 얘기했다. 신: 문재인 정부 때 나온 투 트랙 기조는 이어가는 것이 좋다. 투 트랙이라는 게 결국 역사 문제는 역사 문제로 풀고 미래지향적 협력을 하겠다는 것인데 작동이 안됐다. 전: 문재인 정부 초기 북핵과 남북관계를 다루면서 약간 일본 패싱이 있었다. 북한의 미래나 한반도를 다룰 때 한일 관계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는 후보들이 ‘일본 때리기(재팬 배싱)’가 없었던 것은 다행이다. 한미동맹이 강화되면 한일 관계도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 한미일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한미 관계가 좋아지면 한일 관계가 좋아지는 효과도 있을 수 있다. 한국의 지정학 리스크 일깨우는 우크라의 숙명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강대국 사이에 끼인 국가의 지정학적인 운명에 대한 분석이 많다. 한반도에도 시사점이 많다. 윤: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동병상린을 느낀다. 동아시아에도 강대국 정치 시대가 다시 도래한 느낌이다. 투기디데스가 말한 ‘강대국은 원하는 걸 하고 약소국은 인내해야 된다’라는 명제가 생각난다. 우리가 세계 10대 경제국가가 됐지만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서 어느 때보다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전 : 우크라이나 침공은 근대국가 체제의 근간인 기본적인 주권 존중이라는 원칙을 해치는 국제법 위반 행위다. 1990년 독일 통일 당시 미국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진을 약속했는데 지키지 않았다며 우크라이나 침공의 구실로 삼지만 그렇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탈냉전 이후 30년간 유럽의 안보 질서를 형성하는 과정이 없었던 결과 중 하나가 이번 침공으로 나타난 측면이 있다. 유럽에서 러시아와 동부 유럽을 아우르는 안보 질서를 구축하는데 실패했다. 제국주의와 팽창주의를 키워드로 한 푸틴니즘이 들어설 여지를 주었다. 미국으로서는 중국을 어떻게 참여시켜서 동아시아 안보 질서를 구축할지 중요한 시기이다. 지금의 동아시아는 유럽의 1990년대 중반 정도에 해당되는 시기인 것 같다. 지금 아시아에서 미중 간에 어떤 관계를 만들어 가느냐가 앞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운명이 결정될 수 있다. 신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국가 정책의 목적으로 전쟁을 불법화한 유엔 헌장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고 체결된 부전조약(겔로그 브리앙 조약)으로 전쟁을 불법화하는 시도가 나타났고 유엔 헌장에서 전쟁을 금지했다. 자위권만 합법적인 수단으로서 인정하고 있다. 北 핵 미사일만 강화시킨 ‘대북 유화 정책 5년북한이 ’레드 라인‘을 넘으려고 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5년 대북 유화 정책은 제자리 걸음, 아니면 헛발질을 했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윤 : 21세기는 완전히 새로운 국제질서의 패러다임이 진행되는데 1980년대 사고를 가지고 남북 관계를 다뤘다. 남북관계만 좋아지면 모든 게 잘 풀린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은 북한의 의도부터 잘못 파악해서 북한의 핵무장은 기정사실화되고 최신형 전술 핵무기로 무장한 북한을 마주하게 됐다. 전 : 문재인 정부는 대북 관여를 강조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보수 정부가 좌회전 깜빡이 키고 우회전한 것과 비슷한 결과를 가져온 것에 대해 관계자들도 당혹스러워한다. 차기 정부는 ‘문재인 정부 정책만 아니면 된다’는 접근으로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비핵화 문제는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하되 북한이 얘기하는 체제불안 해소 그리고 김정은 개인 안전 확보 등도 무시하면 안된다. 신 : 문 정부가 대북 유화정책을 폈지만 국방비는 크게 늘렸다. 이는 북한 문제에 유화적으로 임한 데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도 있었던 것 같다. 대북 유화 정책을 펴면서도 국방은 튼튼히 했다는 인식을 심어주려고 했다. 신 :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에는 잘못된 가정과 잘못된 접근이 있었다. 잘못된 가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가 선의를 먼저 보여주면 북한도 선의로 응할 것이라는 것. 두 번째는 북한이 비핵화 의지가 있다는 가정이다. 가정이 틀려서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 진전도 비핵화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북 미사일에 무감각해진 현실 안타까워” 북한의 ICBM 발사 실험과 핵실험을 할 수도 있다는 뉴스가 이어지면서 불안해하는 국민들이 많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윤 : 북한의 ICBM보다 몇 달전까지 쐈던 이스칸데르나 극초음속 미사일이 남한에 대한 위협이 더 크다. 그런데도 UN에 어필도 하지 않았다. 북한 미사일 발사 상황을 너무 많이 경험해 북한이 도발을 해도 주가도 그때만 잠시 출렁이다가 원상태로 돌아간다. 실제 위협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옅어져서 안보 전문가로서 좀 안타깝다는 생각을 한다. 전 : 민주주의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국민들의 의사를 계속적이고 실체적으로 정책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5년간 중국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은 늘고 김정은에 대한 신뢰도는 거의 바닥이었다. 일본과의 우호나 대미 안보동맹에 대한 바램이 늘어났다. 이런 부분이 정책에 반영되면 훨씬 더 두려움도 덜하고 신뢰가 갈 것 같다. 정치의 ‘책임성(accountability)’의 문제다. 정리=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정리=윤융근 기자 yunyk@donga.com}

    • 202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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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南정권교체기 ‘레드라인’ 도발… ‘힘 통한 평화’ 시험대에”

    《긴급 진단 북한이 5년 만에 끝내 다시 ‘레드라인’을 넘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성능 발사 시험에 이어 7차 핵실험 징후도 감지됐다.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권 교체기 ‘한반도 안보 위기’ 긴급 진단 전문가 좌담회를 가졌다.북한이 올해 9차례 미사일 발사에 이어 16일에도 평양 순안공항 인근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추정되는 발사체를 쏘았으나 발사 직후 폭발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취임일인 5월 10일을 전후해 7차 핵실험도 감행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이사장 남시욱)은 15일 정권 교체기를 맞아 긴박한 한반도의 안보 상황 등을 분석하는 전문가 좌담회를 가졌다. 좌담에는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 전재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이 참석했다. 진행은 구자룡 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이 맡았다.》○ 북 ICBM, 핵 보유국 향한 대미 협상용―북한은 과거 남한 정권 교체기나 미국의 주요 선거를 전후해 핵과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다. 이번 ICBM 성능 시험 발사 등도 대선 일정에 맞춘 것인가. 윤=북한이 세계 최대 크기로 ‘괴물 ICBM’으로 불리는 화성-17형 성능 실험을 한 것은 미국 본토를 겨냥한 미사일 개발이 거의 완성 단계에 왔음을 보여준다. 북한은 핵 보유 후에도 제재를 받지 않은 파키스탄 인도 이스라엘처럼 되고 싶어 한다. 이제 미국을 괴롭힐 ICBM 발사는 유예하고 핵이나 ICBM을 제3국에 넘기지는 않겠다며 대남 위협용 전술핵은 인정받으려고 할 것이다. 미국과 이런 협상을 위해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전=북한의 핵과 미사일 실험은 보통 군사력 증강을 위한 군사 기술적인 수요, 국내 정치적 필요성, 그리고 대외 협상용 등 목적이 있다. 이번 발사는 단기적 협상용 시위라기보다 장기적으로 미중 경쟁 시대에 핵 국가로 인정받고자 하는 과정의 진행으로 보인다. 신=북한의 행보는 지난해 8차 당 대회 때 김정은이 결정한 바를 이행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자력갱생하고 군사안보적으로 핵능력을 강화해 미국과 정면 대결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 한국은 별다른 변수가 아니었다고 본다. 북한이 한국을 고려했다면 베이징(北京) 올림픽에서 한국 정부 고위층과 만나 화해 제스처를 보였을 수도 있는데 그런 옵션을 걷어찼다. ○ 北 핵과 미사일, 南 정권 교체보다 자체 일정 따라―북한은 한국의 정권 교체와 큰 관계없이 자신들의 시간표나 장기적 목표에 따라서 핵과 미사일 개발을 이어가고 있다는 분석인데 이번 대선과 관계없이 ICBM 발사나 핵실험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인가. 윤=문재인 정부 초기 6차 핵실험과 화성-15형 ICBM 시험 발사를 했다. 그 후 한반도 전역을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30∼40차례 시험 발사했다. 북한이 남한의 대선 혹은 정권 교체기라고 해서 미사일을 발사한다고만 볼 수 없고 협상용도 아니다. 1차 핵실험은 진보 정권인 노무현 정부 때 했다. 전=대선에서 진보 후보가 이겼어도 대남 무시 전략으로 갔을 것이다. 북한은 하노이 회담 이후 문재인 정부가 군비를 엄청 증강한 것을 보았다. 문재인 정부도 이중 기준을 내세우는 미국의 앞잡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정권 교체가 안돼도 미사일 시험 발사 스케줄을 조정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고 본다. ○ 7차 핵실험, 전술핵 개발용 가능성―북한 영변 강선 평산 등에서 핵실험 재개 징후가 발견됐다. 폭파 쇼를 벌였던 풍계리 핵실험장의 3, 4번 갱도도 다시 쓸 수 있는 상태라고 한다. 7차 핵실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전=북한이 핵실험을 하면 위협, 선전 효과는 있지만 기술적인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핵개발에 필요한 실험은 다 했다는 생각이다. 다만 북한은 아직 2차 핵공격 능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선제 타격을 받은 뒤 2차 핵공격 능력을 가질 때까지 실험을 계속할 수 있다. 신=(선거나 정권 교체 시기 등) 남북 관계 차원에서 도발을 하기도 했지만 북한은 자체 군사적 필요성에 따라 일관되게 핵개발을 했고 필요한 시점에 테스트를 해왔다. 7차 핵실험을 한다면 전술핵 개발용일 가능성이 크다. 지난 2년 동안 북한이 개발한 중단거리 미사일은 한국을 겨냥한 전술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尹 시험대에 설 ‘힘을 통한 평화’ ―윤석열 당선인은 ‘힘을 통한 평화’를 강조했다. 정권 교체기의 북한 리스크가 차기 정부 초기의 큰 시험대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신=한반도 4월 위기설이 상당히 가시화되고 있다. 한미 연합 군사훈련이 규모를 늘렸든 줄였든 시작되는데 북한은 도발 명분으로 삼을 것이다. 4월 15일은 김일성 생일 110년이다. 북한의 도발이 윤 당선인 취임 이후에도 이어지면 시험대가 될 것이다. 신속한 한미 공조, 북한 도발을 억제하도록 중국을 견인할 수 있는지 등이 역량 평가의 기준이 될 것이다. 윤=남북협력을 중시하는 지난 30년의 포용정책이 적실성이 있는지 재검토가 필요하다. 한반도를 겨냥한 북한의 핵무장만 현실이 됐다. 과거에는 중국 러시아와의 북방 외교를 통해 북한을 개혁 개방으로 이끌겠다는 북방 외교의 꿈이 있었다. 지금은 두 나라가 북한의 뒷배가 됐다. ―윤 당선인은 선제 타격 등 대북 강경 자세를 보였다. 선거 때와 달리 윤 당선인 취임 후 정부를 운영하면서 조정될 수 있나. 신=윤 당선인의 대북 공약이나 자세를 강경이나 강공이라고 보는 것은 맞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의 유화정책과 대비해 강경하다고 잘못된 프레임이 씌워지고 있다. 대화의 문을 열어두되 북한이 도발하면 억제력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국가 외교안보 정책으로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전=억지와 제재를 유지하면서 대북 관여를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윤 당선인이 ‘대화가 열려 있다’고 했는데 문재인 정부보다 더 효과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고 정말 ‘핵을 버릴까’(가능성은 낮지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대화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 ‘韓 쿼드 가입=대중 적대’ 잘못 ―윤 당선인의 한미 관계는 ‘한미 포괄적 전략동맹’이 키워드다. 쿼드(Quad·미국 일본 호주 인도 4개국 협의체) 가입,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추가 배치,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제 가입 등 한미 관계에서 문재인 정부와는 달라질 부분들이 많다. 윤=쿼드가 대중(對中) 군사동맹처럼 비치는 것은 잘못이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처럼 중국 주도 체제에는 가입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것에 들어가면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미국의 MD 체제 가입 문제도 지금 북한의 전술 핵무기를 실은 미사일 수백 발이 서울부터 제주도까지 겨냥하고 있지만 우리는 방어망이 거의 없다. 미국의 MD 체제에 들어가면 중국과 북한을 자극하고 동북아의 군비 경쟁을 일으킨다고 김대중 정부 이래로 들어가지 않고 있다. 우리 독자적으로 방어하겠다지만 미국에 의존하지 않으면 북한 미사일을 요격할 수 없는 실정을 알아야 한다. 전=한미 간 ‘포괄적 전략동맹’은 내용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문제다. 포괄적 동맹은 이슈의 포괄일 수도 있고 지리적 범위의 포괄일 수도 있다. 그걸 이제 결정해야 된다. MB 때는 가치동맹 얘기까지 했다. 지금은 부담되는 측면이 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상황에서 미국의 가치에 무조건 동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 ‘상호 존중’ 한중 관계, 공중증은 벗어나야 ―윤 당선인의 대중 관계 키워드는 ‘상호 존중’이다. 다만 3불(不) 정책을 계승하지 않는 등 저자세 외교는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신=어떤 게 한중 관계의 올바른 방향인지 생각해야 한다. 중국이 원하는 걸 우리가 다 수용해 어떻게든 중국으로부터 피해 받지 않는 것이 올바른가. 그보다는 중국이 우리에게 요구를 해도 전략적 이익을 보존하면서 상황에 따라서는 중국과 맞서거나 입장을 조화롭게 조정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 정부는 3불(미 MD 체제 편입,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동맹 등 3가지 안 한다는 것)이 정책이 아닌 입장 표명이라고 했지만 대통령의 방중에 앞서 나왔다. 우리 스스로 잘못된 방향의 한중 관계를 만들어 갔다. 전=사드와 MD는 대중 견제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한중 한미 관계의 상위인 미중 관계에서 해결되면 이것은 굉장히 기능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윤=우크라이나 사태를 볼 때 지정학적 리스크는 숙명이다. 중국이 신흥 강국으로 등장한 동북아에서 다시 ‘권력 정치’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한국으로서는 이 지역에서 70년 전 미국이 구축한 균형을 어떻게 유지시키느냐가 중요하다. 일본이나 호주도 한국만큼 대중 경제 의존도가 높은데 왜 쿼드에 가입하나. 우리가 너무 공중증(恐中症)이 있는 게 아닌지 봐야 한다. 전=중국은 한국이 쿼드에 들어가면 반중(反中)이라고 규정해 버린다. 우리 스스로 쿼드를 어떻게 보는지 시각과 입장을 정립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비난하는 최근 유엔총회 결의에서 인도가 기권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인도는 쿼드 참가 국가지만 이해에 따라 (중국과도 같은 입장을 취하며) 러시아편을 들었다. 신=윤 당선인도 쿼드에서 기능별 협력을 먼저 하겠다는 입장이다. 한국의 국가 이익과 한미 동맹을 고려하면서 정책을 선택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 외교는 ‘미국 or 중국’이 아닌 ‘미국 and 중국’의 관점이 되어야 한다. ○ 한일 관계 개선 모멘텀 살려야 ―박근혜 정부 때 위안부 문제에 대해 ‘비가역적 합의’까지 있었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한일 관계는 수교 이래 최악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윤=정권 교체로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모멘텀은 생긴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상황을 워낙 어렵게 만들어 놔 복원이 쉽지만은 않다. 한일 관계를 지난 5년간 거의 방치했다. 국가 간 합의를 형해화시킨 뒤 뒤에 가서 유효하다고 얘기했다. 신=문재인 정부의 투트랙 기조는 역사 문제는 역사 문제로 풀고 미래지향적 협력을 하겠다는 것으로 방향은 잘 잡았으나 작동이 안 됐다. 전=문재인 정부 초기 북핵과 남북관계를 다루면서 약간 일본 패싱이 있었다. 북한의 미래나 한반도를 다룰 때 한일 관계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번 선거에서 여야 후보 모두 ‘일본 배싱(때리기)’이 나오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 한국의 지정학 리스크 일깨우는 우크라의 숙명―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강대국 사이에 끼인 한반도에도 시사점이 많다. 윤=우크라이나를 보면서 동병상련을 느낀다. 투키디데스가 말한 ‘강대국은 원하는 걸 하고 약소국은 인내해야 된다’라는 명제가 생각난다. 우리가 세계 10대 경제국가가 됐지만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서 어느 때보다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전=러시아는 1990년 독일 통일 당시 미국이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의 동진 중단을 약속했는데 지키지 않았다며 우크라이나 침공의 구실로 삼지만 그렇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국가 정책의 목적으로 전쟁을 불법화한 유엔 헌장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고 체결된 부전조약(켈로그-브리앙 조약)으로 전쟁을 불법화하는 시도가 나타났고 유엔 헌장에서 전쟁을 금지했다. 자위권만 합법적인 수단으로서 인정하고 있다.○ 北 핵 미사일만 강화시킨 ‘대북 유화 정책 5년’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으려고 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대북 유화정책 5년은 제자리걸음, 아니면 헛발질을 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윤=남북관계만 좋아지면 모든 게 잘 풀린다는 생각을 했다. 북한의 의도부터 잘못 파악해서 북한의 핵무장은 기정사실화되고 최신형 전술 핵무기로 무장한 북한을 마주하는 결과를 낳았다. 신=문 정부가 대북 유화정책을 폈지만 국방비는 크게 늘렸다. 북한에 유화적으로 임한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도 있었던 것 같다. 유화정책을 펴면서도 국방은 튼튼히 했다는 인식을 심어주려고 했다. 전=민주주의는 과정 못지않게 국민들 의사를 실체적으로 정책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5년간 국민들의 대중 불안감은 높아지고 김정은에 대한 신뢰도는 거의 바닥이었다. 일본과의 우호 증대나 대미 안보동맹 강화에 대한 바람이 늘어났지만 반영이 되지 않았다. 정치의 ‘책임성(accountability)’ 문제다.정리=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정리=윤융근 기자 yunyk@donga.com}

    • 2022-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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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잃은 문재인 정부 대북 유화정책 5년, 백서 만들어 귀감 삼아야 [화정안보인터뷰]<2>

    3월 9일 20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새 정부 출범은 선거 후 2개월 여 뒤지만 국정의 축은 당선자와 차기 정부로 넘어가게 된다.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남성욱 교수와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 5년을 되돌아본다. Q. 2월 20일 베이징(北京) 동계올림픽이 끝났다. 지난해 문 대통령이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평창 어게인’을 하려고 한다는 관측이 많았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었듯이 결국은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A. ‘평창 어게인’이 아니라 ‘미사일 어게인’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간 하노이 노딜 이후에도 한국 주도로 북미 또는 남북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오판이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뒤 2018년은 북미간에 접촉이 없었고 김정은도 중국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기 전이었다. 모든 것이 다 낯설고 새로운 상황이어서 한국이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중계자 역할을 시도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와 하노이 그리고 판문점까지 세 차례 북미 접촉을 통해서 양측은 수많은 러브레터를 서로 교환하면서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다. 북미간 메인 게임의 핵심은 북한 비핵화를 둘러싼 ‘기브 엔 테이크’를 얼마나 정확하게 하느냐였다. 하노이에서 봤듯이 북한은 완전한 비핵화에 대해서 소극적인 입장을 보여 회담은 노딜로 끝났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 번 한국이 뛰어들어 양측의 손목을 붙잡고 어떤 회담을 전개하겠다는 구상 자체가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었다. 한국 대통령은 단임 5년이어서 3년 반~4년 차에 들어가면 정권이 동력을 잃으면서 레임덕에 빠진다. 이것은 대외 정책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임기 말에도 종전선언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모든 참모들이 외교력을 낭비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굉장히 공허한 것이었다. 임기 말에 ‘평창 어게인’을 하겠다는 시도는 너무나 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Q. 베이징 올림픽은 문재인 정부로서는 친중국 정책을 마무리하는 계기도 될 수 있었다. 그런데 편파 판정 시비 등으로 한중 양국 국민들의 감정이 오히려 악화된 측면도 없지 않았다. A. 문 대통령의 대외 정책 중에서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을 분야 중 하나가 대중 정책이다. 왜 미국에 가서는 할 말을 하면서 베이징에 가서는 혼밥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문 대통령의 가장 큰 오판과 오해는 중국에게 있어 한국의 가치는 한미동맹의 강도에 비례한다 는 것을 망각한 것이다. 한국이 미국과 가까워질 때 중국이 우리를 챙기고 돌아보고 배려한다는 외교 상식의 ABC를 잊었다. 때문에 한미 동맹이 이완되고 한미 간에 거리가 생겼다. 한국 대통령은 베이징에 가서 조선시대 조공 구도 형식으로 황제를 알현하는 시대의 한중 관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 남북관계를 개선한다든가 김정은 위원장을 활용한다는 구상 자체가 중국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중국은 세계 제2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지만 아직 1840년 아편전쟁 시절 서구 강대국에 의해서 공격을 받았던 트라우마,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스스로 자존감을 가지고 국제사회의 리더로서 뭔가 품격을 보여줘야 되는데 중국의 가장 큰 문제점은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G2 국가이긴 하지만 베이징 상하이(上海)를 비롯한 대도시를 벗어나면 내륙으로 갈수록 국민소득 5000 달러 미만인 지역들이 많다. 시진핑은 빈부 격차가 공산당의 토대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판단 하에서 ‘공동부유(共同富裕)’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반(反)시장 정책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IT, 유튜브를 비롯한 SNS 플랫폼의 중단, 연예인 활동 금지, 영어 공부 하지 마라 등 문화대혁명 시절로 회귀하는 듯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중국의 도약이 역설적으로 한계에 맞고 있는 상황을 한국이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일방적인 구애나 중국에 대한 존경, 예우 등은 부작용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결국 2030세대의 공정 합리성 키워드와 맞지 않아 차기 정부는 한중 관계를 바로잡는 숙제를 맞고 있다.Q. 문재인 정부가 2017년 5월 들어선 뒤 그 해 후반 북한은 6차 핵실험,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실험 등을 했다. 한반도에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가 조성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화염과 분노’라는 말도 했다. 그런데 이듬해 2월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한 것을 계기로 극적인 반전이 이뤄질 수도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A. 국제 정치를 볼 때 구조적인 문제냐, 전략 전술의 문제냐를 구분해야 한다. 지금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구조에 관한 문제다. 푸틴 입장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을 막아야 된다는 것이다. 2017년 트럼프는 선거 운동 과정에서 북한과의 여러 가지 갈등을 해결하겠다고 했다. 김정은 입장에서는 미국 지도자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군사적인 도발은 하나의 수단이다. 이건 전략 전술이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구조적인 문제인 것과는 다르다. 나는 2017년 하반기에도 일촉즉발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두 사람이 대화 국면이 일어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양측은 일종의 전술 전략적 측면에서 화염과 분노를 얘기했고 한쪽은 미사일 도발을 했던 것이다. 양측의 접점 꼭지를 평창에서 찾았고 문재인 정부는 그 틈새를 파고들어 (남북과 북미) 회담으로 이어졌다. 2018년 6월 싱가포르 회담에서 트럼프가 (북한 비핵화에 대한) 기대를 한 것은 오산이었다. 차관급 회담에서 해결되지 않는 아젠다는 대통령 회담에서도 해결되지 않는다. 성김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북한 최선희를 판문점에서 7번 만났지만 북한은 어느 것도 양보할 수 없었다. 결국은 양측 모두 정상에게 공을 던져 실무자들은 책임을 면피했다. 싱가포르는 트럼프로서는 상견례에 불과했지만 승리자는 김정은이었다. 김정은은 꿈에 그리던 시진핑과의 회담을 다섯 차례나 하면서 브로맨스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연극의 시간은 끝나고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다시 만났다. 이제는 양측이 패를 다 까야하는 상황이었다. 김정은은 “영변을 포기할 테니 대북 제재 11건 중 5건을 해제해 달라”고 요구했다. ‘영변과 5건의 제재 해제’. 북한은 미국의 정보를 쉽게 과소평가했다. 영변이 북한 핵 개발의 성지이긴 하지만 북한의 핵개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가 될까말까였다. 분강 강선 등 수많은 우라늄 농축 시설이 산재해 있는데 영변 해체만으로 제재를 풀어달라고 했다. 유엔 안보리가 결의한 제재 11건 중 5건만 해제해 달라는데 이걸 안 들어준 미국은 날강도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2016년 안보리 제재 2270호 이후 제재는 돈줄 제재다. 이 돈줄 제재는 하나를 풀면 실타래 줄이 끊어져 결국은 유야무야 된다. 김정은은 5개만 풀면 되겠다고 생각하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 아마도 김정은이 전용열차를 타고 평양을 떠나기 전 작전을 세울 때는 트럼프라는 사람이 덜렁거리고 비즈니스맨이라 우리 장군님이 코너로 몰고 가 그냥 쑥덕쑥덕해서 사인을 하면 될거다라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최용해 김영철 등이 그런 보고를 했을 것으로 추정을 한다. 미국 정치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트럼프의 행동을 제지할 여러 가지 그물망이 있다. 존 볼턴 등 스태프들이 나서 대통령이 와인 한 잔 먹고 사인을 하는 그런 외교 행태를 못하게 견제를 했다. 여진은 남아서 트럼프가 오사카 G20 정상회담에 왔다가 6월 30일 판문점에서 한번 만나고는 각자 갈 길을 갔다. 여기까지 진행될 때 문재인 정부의 중계 외교를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다만 문재인 정부가 (북미 남북 관계 진전이) 왜 안 됐을까 자성과 자숙을 해보고 대안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방향이 잘못됐다. 문 대통령은 판문점에서 김정은을 만나고 평양가서 9·19 군사합의하고 15만 명 북한 군중 앞에서 연설도 하고 부인을 동반해 백두산 정상에도 올라가니까 감격과 흥분이 있었다. 마치 통일 대통령이 되는 착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북한의 전면 비핵화를 전제로 제재 해제에 대한 대안을 내놓아야 하는데 평양에 가면 듣기 좋은 얘기를 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당시의 서훈 국정원장과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은 본인들이 지북파(知北派)라고 한다. 그렇지만 2019년 6월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은 턴을 하면서 바로 잡아야 됐어야 되는데 길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원하는 정책만 너무 많이 했다. 대북전단방지법, 일명 김여정 하명법, 그리고 9·19 군사 합의인데 이것은 비무장지대 무장 해제로 이어졌다. 이 두 가지 정책은 한국의 근본적인 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가 있다. 북한 체제의 변화는 정보의 유입인데 대북전단 방지법을 제정함으로써 인민들이 여전히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정보의 감옥에 갇히게 만들었다. Q. 북한은 올 1월에만 7차례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다. 또 핵실험과 ICBM 발사 유예 조치도 재검토하겠다고 해서 여차하면 레드라인을 넘겠다고까지 선언한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 5년간의 대북 유화 정책이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헛발질을 했다, 평화쇼만 했다는 비판을 듣는다. A.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을 키워드로 정리하면 ‘대북 유화 정책’ ‘친 김정은 정책’ ‘향북(向北·북한 바라기) 정책’ ‘올인 평양 정책’ 등이다.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에서 2년간 근무했던 서훈 전 국정원장은 자신은 친북이 아니라 지북이라고 한다. 북한을 알면서 안하면 그거는 더 문제가 있다. 북한을 알았으면 거기에 맞는 정책을 했으면 오늘날과 같은 결과는 안 나왔을 것이다. 결국 북한을 가짜로 아는 사이비 지북 정책이 됐다. 북한의 심기를 고려해 기분을 좋게하는 정책을 한다고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통일이나 남북 문제가 우리의 문제니까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주체적으로 나가야 한다는 민족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1월 7차례 발사한 미사일은 서울을 겨냥하는 동시에 워싱턴을 겨냥하고 있다. 미국 국제정치의 전선이 약해졌다는 틈새를 노리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UN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더 이상 미국의 전선이 대만, 우크라이나, 판문점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올해가 대북 제재를 해제할 호기로 보고 강공 모드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한국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다. 한미 동맹을 통해서 대응을 해야 한다. 우리 문제인데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야 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분단이 우리가 원해서 됐나. 한반도의 국제 정치에서 우리의 역할은 70~80%가 안된다. 동북아는 남북 관계도 있지만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중과 압력이 굉장히 높은 곳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 우크라이나의 운명에 대해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목소리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크다. 이게 강대국 사이에 낀 나라의 운명이다. 우크라이나는 기본적으로 동서의 대립이다. 한반도에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하면서 우리끼리 손잡으면 뭔가 내일 모레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가끔 걱정이 된다. Q. 문재인 정부 5년 동안을 보면 북한은 비핵화 의지가 없는데 맹목적으로 김정은이나 북한 정권의 선의에만 매달렸다는 비판들이 많다. 임기 마지막까지 문 대통령이 매달린 것이 종전선언이다. 그런데 2월 10일 세계 7대 통신사와 연합뉴스 공동 서면 인터뷰에서 문 대통령은 “임기 내 종전선언은 지나친 욕심일 수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직접 종전선언에 관한 마침표를 찍는 그런 발언이었던 것 같다. A. 그래도 현실을 깨닫고 임기 중에 마침표를 찍고 퇴임을 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혹시 퇴임 후에도 붙들고 밤마다 양산에서 뒤척일까봐 걱정을 했다. 종전선언 이 아이템은 정말 헛발질을 했다. 뭐가 헛발질이냐면 우리가 무슨 거래를 하려고 하면 거래 당사자들이 관심을 갖는 아이템을 가져와야 한다. 청와대는 매번 미국 워싱턴만 갔다 오면 미국이 종전선언 문안에 합의했다고 했다. 그런 미국이 왜 1년이 지나가도록 서울에 대사를 안 보내지 않았나. 한마디로 스토킹 당하기 싫어서 안 보내는 것이다. 새 정부 들어서면 보내겠다는 거다. 미국이 했던 10마디 중 한 마디를 가지고 전제조건 없이 미국이 종전선언에 합의했다, 문안이 곧 나온다고 했다. 주미 대사, 외교부 장관 등이 국회만 가면 거짓말하는 것이다. 중국은 종전선언은 하면 좋지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아해한다. 북한은 어떤가. 종전선언에 무슨 관심이 있겠나. 북한의 관심은 11건의 제재 중 한 건이라도 풀려고 한다. 북한은 이런 상황에서 종전선언을 해봐야 뭔 소용이 있냐고 했다. 현실주의 국제정치를 이해하는 것은 서울이 아니라 평양이다. 종전선언을 하면 북미 간 적대관계가 사라지고 양국이 외교 정상화를 하면 자동으로 제재가 풀린다고 하지만 북한 입장에서는 그냥 관망하는 것이다. 종전선언은 발을 땅을 디디지 않은 공허한 것이었다. 외교부 장차관, 통일부 장차관, 청와대 참모, 국회의장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프랑스 의회가 한국의 종전선언에 찬성을 한다고 언론에 푸시를 해서 보도하게 한다. 프랑스 상원이 그런 결의를 하는 것은 ‘기브 앤 테이크’가 있어서다. 국제 외교가 그런 거 없이 진행된다고 이해한다면 니콜슨 경의 ‘외교론’을 다시 읽어야한다. 외교에 공짜는 없다. 이 작은 나라가 경제 안보 외교 시대에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모든 장 차관이 파리 런던 도쿄에 가서 종전선언 협조나 요청하다 끝났다. 그러면 상대방은 한국은 뭐 줄 거냐고 한다. Q. 종전선언 지지 외교에 관리들이 분주했던 것은 대통령의 뜻이 그러니까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A. 프랑스 의회가 종전선언 결의를 하면 한국 외교부에 주한 프랑스 대사를 통해서 “이번에 어떤 입찰에 들어가는데 프랑스 업체 좀 선정해 주세요” 할 수도 있다. 이런 게 거기뿐이겠나. 미국에서 삼성과 LG가 반도체와 배터리 투자를 그렇게 많이 하면서 얻어낸 것이 뭔가. 바이든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회사 대표들 일어나 보세요”하고 립 서비스 한 것 밖에 없다. 비자 쿼터를 더 얻어 냈나. 한국 유학생들 지원책을 얻어냈나. 교민 우대책을 얻어 냈나. 김훈 소설에 나오는 말처럼 ‘조정을 떠도는 유령’에 얽매여 외교력을 낭비하는 것이다. 최근 바이든 대통령은 1941년 진주만 폭격 이후 일본인 13만 명을 격리한 것을 잘못된 것이었다고 했다. 일본이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통해) 얻어낸 것이다. 그러면서 관계를 대등하게 만드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은 안하고 쓸데없는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Q. 문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북한으로부터 ‘머저리’ ‘삶은 소대가리’ 등 온갖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 북한이 역대 한국 대통령을 비난했는데 대북 유화정책을 폈던 문 대통령이 빈도수에서 단연 1등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인내하고 기다리고 선의를 기대했던 것 같다. 문 대통령이 왜 이렇게 했는지. 김정은과 세 차례 정상회담을 하면서 생긴 친근감인지, 북한의 반발을 막기 위한 전략적 판단인지, 아니면 겁을 먹고 하는 굴종인지 어떤 심층적인 원인이 무엇인지.A. 하나는 문 대통령의 조상이 어디서 왔느냐는 것이다. (부모가) 6.25 때 배를 타고 온 뿌리에 대해서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함흥에서 우리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무얼했었지” 생각하면서 (북한) 사람들을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로 구분한 게 아니라 같은 뿌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스스로 지북주의자라고 하는 서훈 전 원장에게도 그래서 국정원장을 맡긴 것일 것이다. 그런데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는 간판을 내걸어 북한의 협조가 없으면 안되는데 북한은 그 약점을 파고든 것이다. 과거에 북에 협상하러 가면 북한 인사들이 남측 NGO 관계자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당신들 우리 때문에 밥 먹고 사는 거 아니냐. 당신들 우리가 안 오면 당신들은 어떻게 살아”. 그러면서 서울에서 선물을 더 가지고 오라고 한다. 북한에 약점을 잡혀 강 대 약 구조로 가면 계속 정도가 심해지다 함정에 빠져버리고 만다. Q. 북한의 속성을 청와대나 정부 당국자들이 전혀 모르지 않을 텐데 유화적으로 대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랄까 긍정적으로 이해할 만한 전략적인 요소는 없는지. A. 한반도 프로세스는 상대방의 선의를 기초로 한 정책이다. 평화를 제안해서 상대방이 응하면 경제협력을 해서 남북한이 윈-윈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사실은 진보든 보수든 대북 정책은 상대방이 있다. 상대방이 협력하고 선순환 구조로 가면 긍정적인 결과가 나온다. 그런데 선의를 기초로 평화를 제의했는데, 상대방이 응하지 않으면 그 정책은 실패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대북 유화정책을 편 문재인 정부가 역설적으로 제일 못한 게 이산가족 상봉이다. 박근혜 이명박 정부 때도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이 없었다. 왜 그럴까. 남북 관계도 어차피 ‘기부 앤 테이크’여서 주고받고 하는 건데 대등한 구조가 안 되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얻어내지 못한 것이다. 정책이 이제 선의만 갖고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북관계는 국제관계보다 더 어렵다. 남북 협상이 영어나 중국어로 하는 것도 아닌데 대화가 안 되고 소통이 안 되고 상식이 안 통한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선의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2018년 북한과 미국 간에 어떤 협상의 물꼬를 트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이후 북한의 요구를 지나치게 수용해 대북전단 방지법, 9·19 군사합의 등 우리 안보상의 취약성을 유발하면서도 우리가 원하는 이산가족 상봉 등을 얻어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학점은 C학점에 그칠 수밖에 없다.Q. 다른 언론 인터뷰에서 종전선언,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 9·19 군사합의 이 세 가지를 ‘최악의 3종 대북 정책 선물세트’라고 규정한 것을 보았다. 다음 달 9일 대통령 선거 이후 차기 정부가 들어서는데 3종 세트 등 대북 정책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A. 대북전단은 북한 주민이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것을 법으로 그것도 북한의 요구로 제정된 것은 헌법상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맞지 않는다. 북한 내부적으로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어떤 문틈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9·19 군사합의로 전방 40개 정도의 GP를 무인(無人)으로 바꾸고 비무장지대 근거리에서는 훈련을 하지 않게 됐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1년 전 38선에서의 군의 경계 태세와 뭔가 닮아가는 양상이다. 종전선언은 북한도 별로 관심이 없는 사항이다. Q. 북한이 다음 달 대선을 주시하면서 선거가 끝나면 어떤 도발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나. 특히 야당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면 좀 더 강한 도발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하는지. A. 네 명 후보 누가 다 당선되든지 도발은 강도가 높아질 것이다. 이재명 후보가 당선되면 친북 후보라고 생각해서 도발이 약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1월 7번 미사일을 발사한 메시지를 정확하게 읽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김정은은 워싱턴과 게임을 크게 벌리고 있다. 미국의 전선이 약해진 틈을 타 벌이는 것이다. (도발은) 남측 여야 진보 보수 후보를 떠나 제재를 해제하기 위해 워싱턴과 큰 게임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재명 후보가 당선되면 안 그럴 것 같다고 하는 말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재명 후보가 됐을 때 도발을 해야지 워싱턴에 가서 바이든 손을 붙잡고 압박을 하든지 바지가랑이를 잡든지 해서 미국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5월 15일 차기 대통령이 취임하면 지금 예정으로는 6월 1일 지방선거 이후 바이든 대통령이 방한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울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리는 호기를 김정은이 놓칠 수가 없다. 워싱턴은 한반도에서 1만km 이상 떨어져 있는데 바이든이 서울에 왔을 때 쏴야지 위험을 절감할 수 있게 만든다. 미국이 전략자산을 괌에서 전개하든지 하겠지만 김정은 입장에서는 올해는 그런 게임을 벌려야 될 시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야 제재를 해제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3월 9일 대선 이후 한미 간 어떤 정치 일정에 맞춰서 ICBM 발사 시험 등 북한의 도발 강도는 높아질 것이다. 김정은은 과거 유엔안보리에서는 중러가 자신들을 압박해 결의안을 내놓았지만 이제는 우크라이나와 대만 문제 때문에 그렇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Q.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두 개 자치공화국을 승인하고 평화유지군이라는 명분으로 푸틴은 진공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으로 규정했다. 우크라이나와 한반도의 관련성에 대한 분석들이 많다. 특히 1990년대 초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했기 때문에 주권을 위협당한다는 시각이 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면 우크라이나처럼 되니 포기하지 않겠다는 명분으로 삼지 않을까 싶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 중에서 가장 심각한 측면이 이런 것이 아닌지. A. 김정은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사태를 겪고 있는 것과는 무관하게 핵개발을 해왔다. 한반도 비핵화가 김일성의 유언이라는 거짓말에 속아서 일부 친북 학자들이 되뇌이는데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김정은은 미국의 전선이 약해지는 틈을 노릴 것이라는 점이다. 우크라이나는 하이브리드 전쟁이라고 본다. 심리전 경제전 군사전 등이 혼합되어 있다. 3월이 되면 벌판의 얼음이 녹아 탱크 등에 의한 군사 기동이 여의치 않게 된다. 그럼에도 푸틴 입장에서는 이 전쟁은 구조의 문제여서 얻는 것 없이 철수할 수는 없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등이 과거 친 러시아연방에서 분리 독립된 것이기 때문에 원위치시켜야 된다는 논리다. 여기에 중국이 서포터즈(지원국)가 되어 푸틴는 아주 신이 났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미국의 국력이 조금 다운사이즈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 것으로 국제정치의 판이 조금 흔들리는 것을 보여준다. 한반도에도 영향을 주는데 결국은 자강의 논리를 심어주는 것이다. 북한도 자강, 남한도 자강인데 우리는 한미동맹 속에서 자강을 해야 된다. 미국과 철저하게 동맹관계를 맺지 않으면 만약 대만 해협에서 긴장이 고조돼 주한미군이 빠져나가면 한반도의 역학 구조가 변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교훈은 북한 뿐 아니라 한국도 얻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인터뷰 후기남 교수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문재인 정부 5년의 대북 정책을 정리하는 백서를 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북 유화 정책을 펴면서 진행했던 대북 접근에서 문제점은 무엇인지, 후임 정부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점은 무엇인지 등을 면밀히 분석해 기록으로 남겨 둘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남 교수는 “북한은 남한 당국자와 대화나 협상을 할 때 ‘과거 남측 장관은 이런 얘기를 했는데 왜 다른 소리를 하느냐”고 책상을 손으로 치면서 다그치는 경우도 있다“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대북 정책은 북한에 빌미를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북 정책 백서 발행은 정부가 바뀔 때마다 기조가 달라지면서 빚어지는 시행착오를 줄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취지로 이해된다구자룡·윤융근 기자 bonhong@donga.com}

    • 202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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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대국 사이 약소국 전략실패는 큰 댓가” 보여주는 우크라이나 사태[화정안보인터뷰]

    우크라이나는 삼면초가(三面楚歌)의 위기다. 러시아가 2014년 병합한 남부 크림반도와 동부 접경 돈바스의 반군 장악지역 그리고 북부 벨라루스와의 접경지역에 12만 명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켜 놓고 세 방면에서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러시아와 비교해 병력과 장비, 무기 등에서 절대 열세인 우크라이나는 개전 시 30분 밖에 못 버틴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중간 패권 경쟁과 갈등을 ‘신냉전’이라고 하면 우크라이나 사태는 상대가 구소련에서 러시아로만 바뀐 것을 빼면 ‘냉전의 부활’에 가깝다. 미국 등 서방과 러시아 양측이 냉전 시대에 형성된 전선에서 맞붙고 있고 주장하는 논리도 냉전시대에 세력 다툼의 논리인 ‘영향권’이다. 구소련 붕괴 이후 30년 가량 유럽에 수면으로 내려앉았던 냉전의 기운이 되살아나고 있는 양상이다. 러시아는 구소련이 붕괴한 뒤 독립한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하는 경우 안보의 위협을 받는다며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해 무력 침공도 불사할 기세다. 미국 등 서방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대러시아주의 야망에 따라 소련 제국의 부활에 근본적 원인이 있다고 보고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 러시아는 동부 국경 돈바스 지역의 반군을 지원하고 있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갈등은 ‘대리 내전’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왜 갑자기 상황이 악화되었는지, 우크라이나에서 높아지는 긴장이 한반도에는 어떤 시사점을 주는지 허승철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에게 들었다. 허 교수는 주 우크라이나 대사(조지아 몰도바 겸임)를 지냈고 한러대화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미-러 양보 불가 지정학적 요충지 우크라이나-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러시아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의 회담은 예상했던 대로 사태 해결을 위한 별다른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다. 다만 러시아의 제안에 미국이 서면 답변을 하고 러시아가 이를 검토한 뒤 다시 대화를 이어가기로 하면서 잠시 시간은 벌었다. 하지만 마주 달리던 열차를 잠시 세워놓았을 뿐이다. 미국과 러시아, 유럽과 러시아 간에 회담이 잇따라 열리고는 있지만 양측의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멀고 가까운 다층적인 요인이 바탕에 깔려 있다. 멀리는 1991년 구소련 붕괴 후 우크라이나가 독립했지만 러시아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바탕에 깔려 있다. 러시아의 뿌리는 우크라이나 키예프공국에서 출발했다고 보고 있다. 러시아 문화와 역사의 발상지라고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독립하기 전까지 300년 넘게 한 국가였다는 의식이 남아있다.”-역사 문화적인 이유만으로 엄연한 독립국인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서부 반군을 지원하면서 국경을 넘으려고 하는 것은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 현상변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이다. 우크라이나 위기는 1990년대 말부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확장시킨 서방과 강대국 지위를 다시 찾으려는 러시아간의 충돌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독일 통일을 허용할 때 ‘공동의 집으로서의 유럽’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며 러시아가 포함된 유럽 질서 구축 구상을 밝혔다. 당시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은 ”NATO는 동쪽으로 1인치도 이동하지 않는다“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후 NATO의 동진은 계속됐다. 러시아는 속으로는 부글부글 했어도 구소련 붕괴 후 혼란과 경제 침체 등으로 강하게 반발하지 못했다. 냉전을 거치면서 국력이 쇠락해 반발할 여력도 부족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까지 NATO에 가입하면 지정학적 완충지대가 사라져 자국의 턱밑까지 밀고 들어오는 형국이라 자국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주장한다.”-러시아는 NATO의 동진이 러시아에 위협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나 이미 NATO에 가입한 동구권 국가들은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2차 대전 후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강압적인 세력권 편입 및 탄압도 있었다. 러시아에도 책임이 있지 않은가. “2014년 크림반도 합병, 2018년 벨라루스와 벌인 대규모 군사훈련이나 현재 우크라이나 동부 접경지역에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는 것 등은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북유럽의 노르웨이, 스웨덴 같은 국가들까지 NATO가입을 고려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러시아와 중국 두 전선 마주한 미국 -냉전 종식 후 구소련이 해체될 당시 미국 등 서방은 러시아 지원에 나서고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친서방 정책을 펴기도 했다.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구소련 붕괴 후 러시아가 미국 등 서방과의 관계에서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한 바 있다. 하나는 ‘성숙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해 윈-윈의 공생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같은 밀월 관계가 안되면 러시아가 주변 지역을 동원해 유럽과 미국을 견제하는 구도를 예상했다. 최악은 러시아가 유라시아에서 반미 동맹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러시아가 중국 이란과 동맹에 가깝게 결집해 최악의 시나리오로 가고 있다.”-교수님께서 최근 일민국제관계연구원의 ‘IIRI 보고서’에 발표한 글에서 서방이 당시 러시아와 관계가 틀어진데는 미국이 잘못 대응한 것이 큰 이유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구소련 붕괴 후 러시아를 유럽 질서에 포용하는 정책을 펼치지 못했다. 미국이 마셜 플랜에 버금가는 지원과 포용정책을 펴 러시아에서 시민사회와 중산층이 형성되었다면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미국은 패권도전국인 중국과의 경쟁 갈등이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와도 전선을 넓혀가고 있다. 미국이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는지. 그래서 대중 견제라는 보다 큰 목표를 위해 러시아와의 관계를 조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970년대 중국과 손을 잡고 러시아를 견제하는 구도를 세웠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도 중국 견제에 러시아와의 협력 필요성을 제시했다. “그렇다. 유럽에 포용된 러시아와 손을 잡고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 미국의 전략에 맞다. 실제로 그런 노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중국과 러시아가 밀착하여 미국에 대항하는 구도가 되어 미국으로서는 불리한 상황이다. 미중 패권 갈등, 미러 냉전적 갈등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 중-러간 전략적 협력은 당분간 더욱 공고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러가 손을 잡고 중국을 견제하는 상황은 당분간 어려울 듯하다.”우크라이나 사태 악화일로, 푸틴 때문?-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말한 ‘지정학적 중추’(geopolitical pivot) 국가인 우크라이나는 미러의 ‘외교 단층선’ ‘지정학적 단층선’에서 있어 이곳을 둘러싼 갈등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그런데 바이든 정부 출범 1년 가량을 맞으면서 위기가 더욱 높아지고 있는 이유가 있나. “트럼프 정부 때 미국과 탈레반 정부간의 평화협정이 맺어지고 철군 계획이 세워지기는 했지만 바이든 정부에서 아프가니스탄 미군 철수가 이뤄졌다. 푸틴은 미국이 힘이 약해졌다고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이런 약해진 미국에 대한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는 지 보겠다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이 돌아왔다’며 국제질서의 ‘원상회복’을 내걸고 흑해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재개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강화한 것도 러시아를 자극했다.”-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압박의 명분으로 삼고 있는데 최근 NATO 가입을 위한 특별한 행동이나 조치가 있었나. “그렇지 않다.우크라이나는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1994~2005)때 유럽연합(EU)와 NATO 가입을 국가적인 목표로 선언했다. NATO 가입은 지속적으로 이어져온 국가 정책이다. 최근 들어 가입을 신청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벌인 것은 아니다. NATO도 우크라이나가 가입을 신청한다고 해도 당장은 가입에 호의적인 분위기도 아니다. 러시아가 NATO 가입을 명분으로 압박하는 것이 명분이 약하다.” 이와 관련 토머스 프리드먼 미국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는 최근 칼럼에서 우크라이나 사태가 푸틴의 장기 집권 야망과도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2024년 선거에서 확실하게 승리하기 위해 전쟁 분위기를 조장한다는 것으로 ‘전시 대통령’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소연방 해체에 대해 2005년 ‘20세기 최악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선언했던 푸틴의 소연방에 대한 집착과 향수가 우크라이나 사태의 배경에 있다는 것이 프리드먼의 주장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 나서면 미국과 서유럽은 무기 추가 공급 지원 같은 군사적 대응 외에 경제적으로 강력한 제재와 대응을 경고했다. “러시아에 대한 제재로 △러시아의 국제은행간 통신협회(SWIFT) 결제 시스템 접근 차단 △러시아와 독일 잇는 ‘노드스트림 2’ 가스관 사업 진행 중단(개통식만 남겨놓은 단계) △친러 인사 자산 동결 등이 대표적인데 러시아에 대한 제재 중에서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은 서방의 러시아에 대한 중간재 수출의 금지도 있다. 러시아 공업의 30~50%까지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외부 압박, 내부 분열 우크라이나의 난맥상 -우크라이나 내부적으로도 국론 통일이 되지 않은 것도 위기를 헤쳐나가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크라이나에서 정권이 바뀌어 친서방과 친러 성향의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양극단을 오가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국제사회의 신뢰를 잃고 서방의 지원 의지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자국의 국익과 안보에 필요한지를 반영한 장기적·균형적인 외교정책을 펴야 하는 데 그러지 못했다. 우리도 정권 교체와 외교정책의 신뢰성, 지속성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블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코미디언 출신으로 부패정권에 맞서며 국민적 지지를 받아 집권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부 통합은 커녕 친러 친서방의 분열이 가열되고 있다. 거기에 국정 무능과 개인 부패 의혹까지 불거지고 있다. -러시아는 역사적 문화적 유대도 깊다는 우크라이나와 왜 이렇게 틀어졌나? “우크라이나는 2014년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국내 여론에서 친서방과 친러시아 지지율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야누코비치의 실정과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그리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반군과의 동부 돈바스 지역 내전이 8년 째 지속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멀어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위협 등의 강압적 수단 외에 다른 방법을 찾기 어렵다.”강대국 러브콜 착각하지 말아야, 한반도 시사점-교수님은 IIRI 보고서에서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이면서도 자국의 전략적 가치를 과대하게 평가하는 경우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다. “약소국이 대립하는 강대국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으면 외교적 지렛대가 생긴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이때 큰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 1,2차 대전 기간 중 폴란드가 독일, 소련과 모두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착각했다가 양국에 의해 무력 점령당했다. 말이 러브콜이지 강대국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압박으로 바뀔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과거 냉전 전선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듯한 느낌인데 우크라이나가 지정학적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적절한 외교를 펼쳤는지 실책은 없었는지. “우크라이나는 강대국 사이의 중소국 외교가 잘못되면 어떤 댓가나 기회비용을 치러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유럽연합(EU)이나 NATO 가입을 추진하는 친서방 정책을 펴면서 러시아로부터는 국제가격이 1000㎥당 250달러 안팎인 천연가스를 계속 50달러로 받기를 원했다. 러시아가 이를 수용할 리가 없다. 러시아는 두 차례나 가스 공급을 중단하고 가격도 올렸다. 경제(러시아)와 안보(미국과 서유럽)를 강대국에 의존한 상태에서 한쪽을 선택하는 경우 위협과 압박을 헤징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지 못해 댓가를 치렀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말이 있듯이 미중 갈등 속 한국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우크라이나는 구소련 붕괴 후 독립할 때는 구소련의 핵무기가 대량으로 배치되어 있어 ‘제3대 핵보유국’이기도 했다. 강대국의 안보 약속만 믿고 핵을 포기해서 영토 일부를 상실하고 안보가 불안해졌다는 지적이 없지 않다. “마땅한 동맹체제나 안보 수단을 확보하지 않고 선언과 구속력 없는 합의에 의해 주권과 안보를 맡긴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1994년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 의정서’를 맺었다.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후에는 중국도 가담해 유엔 차원의 조치는 아니지만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이 모두 참여했다) 등이 안보를 보장할 테니 핵무기를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2007년 우호조약을 맺기도 했다. 하지만 2014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합병하고 지금은 동부 국경을 압박하는 사태에 이르렀지만 의정서나 우호조약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비망록, 의정서, 협약 등에 기초한 주권과 영토 보장은 얼마든지 한 순간에 휴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히틀러의 팽창 직전 뮌헨 협정부터 독-소 불가침 협약 등이 아무런 효력이 없었던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는 미러의 힘겨루기와 협상에서 이해 당사자인 우크라이나의 참여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구한말 강대국의 흥정과 대결에 의해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고, 얄타회담에서 강대국 간의 거래로 폴란드와 한반도 운명이 결정된 것은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의 고난과 불행을 잘 보여준다. 국력과 국방력, 국론 통일에 바탕을 둔 주도적 자강 외교는 중견국이나 약소국 모두가 지향해야 할 과제이다.”구자룡 기자·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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