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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전 서울 동작구청 1층 로비에 ‘아이좋아 아이신나 가족사진 공모전’ 수상작이 전시돼 있다. 동작구청은 지난달 결혼과 출산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확산하기 위해 가족사진 공모전을 열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025년은 사다리 타듯 거리 크리스마스 장식을 위해 모인 사다리들 보니 바야흐로 연말이군요. 새해엔 우리 모두의 기운도 사다리 오르듯 상승하길요.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3일 서울 송파구 서울백제어린이박물관에서 관람객이 영국 스톤헨지를 만드는 신석기 인류를 표현한 미니어처를 관람하고 있다. ‘선사 시대로의 소소한 탐험’ 전시회 특별전은 내년 2월 2일까지 열린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924년 12월 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한 장의 사진.앞줄에 숫자가 표시된 5명의 인물은 강도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상해 임시정부에서 왔다”고 주장하며 부자들을 협박해 돈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뒷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용산경찰서 소속 경찰들로 추정됩니다. 범인과 경찰이 함께 한 사진을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어색합니다. 오늘날에는 피의자의 얼굴은 모자이크로 가리고, 경찰은 잘 등장하지도 않으니까요.기사를 살펴보겠습니다. ◇ 지난 5일부터 7일까지 삼일간 오명 피체(三日間五名被捉)지난달 11일, 고 양군 룡강면 창전리(高陽郡龍江面倉前里) 재산가 이덕규(李德圭)의 집에 침입했던 강도 사건을 비롯하여 창전리 전당포에 세 차례나 침입, 흉기를 들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왔다”고 위협하며 금품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한 이래, 용산경찰서는 주야로 각 방면에서 수색을 계속하였다.피해지를 중심으로 틈 없이 수색한 끝에, 용산 관내 본적을 두고 수년 전부터 집을 떠나 행방불명이 된 강절도 전과범 김개룡(金開龍)(31)이 주요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경찰은 그의 소재를 추적하던 중 지난 5일 광주군(廣州郡) 방면에 숨어 있는 흔적을 발견하였다. 이에 전(田), 민(閔), 화산(花山) 세 형사가 광주군으로 추격했으나, 김개룡이 이미 서울로 잠입한 뒤임을 확인하고 다시 추적을 이어갔다.그 과정에서 공범인 김참석(金昌錫)(27)을 6일 오후 7시, 종로 오정목 45번지의 음식점에서 전 형사가 체포하였다. 이어 엄중히 취조한 결과, 또 다른 공범인 박황윤(朴黃潤)(29)을 종로 오정목에서 체포하였다. 이후 형사들을 추가로 파견하여 7일 오전 6시, 부내 광희정(光熙町) 1정목의 술집에서 강도단의 단장 김개룡을 포함한 공범 김창성(金昌成), 김점동(金点童) 등 세 명을 검거하였다. 이 과정에서 활동사진과 같은 격투가 벌어졌으나 결국 전원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전후 범행 13건용산, 북미창정(北米倉町), 뚝섬(纛島) 등을 포함하여 이들의 범행은 총 13건으로 판명되었다.◇ 전과 4~5범 흉악 강도단검거된 5명을 엄중히 취조한 결과, 이들은 모두 강절도 전과범으로 춘천형무소(春川刑務所)에서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임이 밝혀졌다. 또한 창전리(倉前里) 사건을 비롯하여 북미창정 전당포와 뚝섬 등지에서 총 13건의 범죄를 저질렀음을 자백하였다.검거된 강도단원의 신상은 아래와 같다.김은복(金銀福)(29): 전과 4범, 고양군 숭인면 안감리(高陽郡崇仁面安甘里).박황윤(朴黃潤)(29): 전과 3범, 시흥군 신북면 동동리(始興郡新北面東洞里).김개룡(金開龍)(31): 전과 5범, 고양군 룡강면 율도(高陽郡龍江面栗島).김점동(金点童)(23): 전과 4범, 주소 미상.임창성(林昌成)(38): 전과 4범, 경성부 광희정(京城府光熙町).● 범죄자 공개 방식의 변화 100년 전에는 경찰과 피의자를 함께 사진에 담아 시민들에게 공개하는 것이 흔했습니다. 경찰로서는 “우리가 일을 잘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홍보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다릅니다. 2024년 상황을 보자면, 피의자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하고, 경찰은 카메라에 잘 등장하지 않습니다. 특히 경찰 수뇌부가 피의자와 함께 있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이처럼 시대에 따라 범죄자 공개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현재는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규제가 강화되었고, 경찰의 노출도 줄어든 상황입니다.● 경찰은 초상권이 있을까? 100년 전 강도 피의자들을 전리품처럼 소개하며 포즈를 취하는 경찰 사진을 보면서 공직자의 초상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즘 경찰들이라면 절대 저런 방식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있습니다.2016년, 한 경찰대 학생이 저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피의자를 호송할 때 경찰의 얼굴이 언론에 그대로 노출되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요?”그 학생은 경찰의 얼굴이 노출되면 나중에 흉악범들에게 보복을 당할 위험이 있고, 사생활이 침해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당시 저는 전화를 통해 이렇게 답했습니다. “경찰까지 모자이크 처리하면 시민들이 불안감을 느끼지 않겠어요?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이 두려움을 보이면 안 되죠.” 그렇게 답을 드리긴 했지만 사실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경찰로서 얼굴이 공개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그 업무를 사전에 조정하거나 배제하는 것도 방법일 것입니다. ● 초상권에 대한 내 생각저는 당시 경찰의 초상권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정리해 보았습니다.1. 경찰은 공적 인물이다.경찰은 국민의 세금으로 일하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공적인 활동은 투명하게 드러나야 한다.2. 공권력은 두려움을 보여선 안 된다.범죄자들의 보복 우려를 이유로 경찰을 가리는 것은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줄 수 있다.3. 문제가 있다면 사전 조치가 가능하다.호송 업무가 부담스럽다면, 사전에 요청해 배제되는 것이 맞다.경찰의 활동 모습은 단순히 범죄자를 호송하는 장면을 넘어,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는 중요한 역할도 합니다.100년 전 강도 사건 사진은 당시와 지금의 경찰 활동 방식을 비교해보게 합니다. 이 사진은 단순한 흑백 기록을 넘어 초상권 문제, 공권력의 역할, 언론의 윤리 등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범죄자와 경찰 모두가 카메라 앞에 서 있는 모습,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을 보시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댓글로 의견을 나눠주세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옛 관공서 옥상에 확성기가 건재하군요. 열매를 물고 날아가는 까치에게 경보를 날릴 듯합니다. “에엥∼.”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2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2024년 6·25전사자 발굴유해 합동봉안식에서 국군 장병들이 영현 봉송을 하고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날 추모식에 참석해 “포성이 멈춘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수많은 참전용사들이 전국 이름 모를 산야에 잠들어 계신다”며 “정부는 마지막 한 분까지 가족의 품으로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루돌프 대신 산타 할아버지 모십니다. 검고 큰 체구 탓에 겁내는 분들이 많았는데 산타 장식 옷을 입은 후 인기가 늘었다네요. ―경기 군포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쇠락한 권력에 대한 기록가구와 도자기 등이 길거리에 무질서하게 쌓여 있습니다. 주변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값비싸 보이는 세간살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50명 가까운 인파입니다. 경매처럼 앞에 있는 장삿꾼이 물건을 파는 모습입니다. 어느 쇠락한 권세가의 집 물건이라네요. 숙종의 장인 민유중(려양부원군)의 후손들이 살던 집, 죽동궁이 쇠락의 끝을 맞이했습니다. 가문의 상속자인 민정식이 집안 재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결국 상해로 몸을 피한 뒤, 집은 몇 달째 버려진 상태였습니다.결국 이틀 전부터 죽동궁의 창고에 쌓여 있던 세간들이 하나둘 큰 길가로 끌려 나와 경매로 처분되기 시작했습니다. 죽동궁은 결국 젓가락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가문의 영광이 몰락한 모습을 보며 회한과 비통함을 느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1924년 12월 5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무슨 사연인지 기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창피막심한 죽동궁(竹洞宮)의 말로(末路)돈 때가 묻은 가가지 세간 한길가에서 싸구려 신세로◇ 한창 세도가 당당하던 숙종대왕의 장인 려양부원군 민유중 공의 가통도 분명치 못한 상속자 민정식 대에 이르러 난마같은 집안은 나날이 쇠하여 들어가다가 수십만의 재산을 가지고도 맘대로 하지를 못하고◇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다가 필경에는 몸을 피하야 상해(上海)로 달아나서 그나마 죽동궁(竹東宮)이라던 대문조차 영구하다 더 버리게 된 지가 이래 몇 달이 되었던 바 재작일부터 그 집안 창고에 깊이 쌓여 있던 역대 손손히 내려오던 구하기 드문 가장 집물이며 주인이 친히 쓰던 탁자와 상이며 안주인이 입던 명주 비단 옷가지를 산산히 끄어내여 죽동궁 앞 넒은 마당에서 『십원이오 십원 십원 십원 오십전이오 자』소리를 치며 경매를 하게 되엿는데 부러진 상다리 깨어진 솥두껑, 동 녹 쓴 침상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회구의 감에 느끼게 하였으며 이끼 돋은 기와장에 『동민회』(同民會) 라고 쓴 흰 간판이 갈린 죽동궁은 옛날 듣고 지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비창한 느낌을 주었는데 이로써 말썽 많던 죽동궁은 젓가락하나 남지 않고 망해 버린다더라.● 화무십일홍…세간살이의 입장에서 본 권력의 쇠락 사진이 실린 다음 날인 1924년 12월 6일자 동아일보는 가구와 접시 등 물건들의 입장에서 권력의 쇠락을 바라보는 글을 게재했습니다. 기사라고 하긴 어색한 형식이지만 100년 전 신문이 권력의 무상함을 특이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입니다.〈죽동궁 민정식 씨의 몰락과 세간의 하소연 -몰락한 죽동궁의 주인〉“열흘 붉은 꽃 없고 십 년 세도 없다”는 속담이 죽동궁 민정식 씨의 집에 딱 들어맞는다. 그는 아내 이봉완 씨에게 휘둘리고 처가와 삼촌들, 그리고 채권자들에 시달리다 결국 죽동궁을 떠나 상하이로 몸을 피했다. 현재 그는 낯선 땅에서 눈물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죽동궁처럼 웅장했던 집은 이미 민영휘 씨의 소유로 넘어갔고, 남은 재산 역시 팔려나가고 있다. 집 안의 세간살이들마저 일본인 변호사에게 맡겨져 길거리 고물상에서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세간들의 하소연민정식 씨 집안에서 대대로 사용되던 세간들은 이제 주인을 잃고 낯선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 물건들은 자신들이 겪는 처지를 이렇게 한탄한다.◇배가 고픈 두 주전자 이야기과거 민정식 집안의 식량을 책임졌던 두 주전자는 이렇게 말했다.“우리는 이 집 대청 구석에서 수백 명의 식구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그 덕분에 한때 배고픔을 몰랐지만, 요즘은 우리 안이 텅 비어 배가 고픕니다. 결국 경매장으로 끌려가서 깨지고 망가져 이제 쓸모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꽃 같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접시“나는 선대감의 특별 주문으로 영국에서 건너온 최고급 접시였습니다. 산해진미를 담으며 연회와 식탁을 빛내던 날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깨지고 금이 가 병신이 되었습니다. 조선까지 와서 이렇게 비참해질 줄은 몰랐습니다.”◇비단옷이 담겼던 장농의 한탄“내 몸엔 대방마님이 시집올 때 가져온 비단옷들이 차곡차곡 쌓였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옷들은 하나둘 팔려 나갔고, 끝내 쥐들이 내 몸을 갉아먹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지금은 경매장 구석에서 나뒹굴며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습니다.”◇옛 영광을 잃은 침대“내 몸 위에는 한때 주인 부부가 편안히 잠들었고, 마마님들도 자주 쉬어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도금이 벗겨지고 똥칠까지 당해 비참한 모습이 되었습니다.”이처럼 민정식 씨의 몰락과 함께 세간살이들도 주인을 잃고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고 있다. 한때 영광을 누리던 물건들이 몰락한 집안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후일담신문사 사진기자를 하면서 패배자를 카메라로 찍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찍는다고 그 사진을 승리자보다 크게 쓰거나 많이 쓰지는 않습니다. 가령 박빙의 승부 끝에 선거에서 당선된 후보자의 얼굴은 크게 쓰지만 패배하고 눈물을 훔치는 모습은 그다지 크게 쓰지 않습니다. 넘지 말아야할 선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에 크게 사진이 실린다면 그 패배자에 대한 신문의 평가가 아주 박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1924년 12월 5일 동아일보 2면에 실린 두 장의 사진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사진입니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지탄받은 인물의 말로를 보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진기자로 최근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 계엄’의 후폭풍에 대해 느낀 점 몇 가지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날 새벽 지방 출장을 위해 집에서 쉬고 있던 중 우연히 YTN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의 기자회견과 막바지에 들린 ‘계엄’이라는 단어를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심정으로 TV와 유튜브의 채널을 옮겨가며 현장을 계속 지켜보았습니다. 계엄은 선언되었지만 기자들과 시민들의 카메라는 계속 돌아갔고 시민들에게 실시간으로 현장 화면이 중계되었습니다. ‘중과부적’이라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탄식은 사진기자인 저에게는 이미지 전쟁에서 실패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변화된 세상에 대한 이해와 준비없이 막연히 통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1980년대 운동권이었던 지금의 586들의 ‘국회 담넘기’ 이미지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SNS를 통해 퍼지면서 저항과 연대가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 시작했지만, 국민의 세금으로 첨단 장비를 지급받은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는 이미지는 보수층 사이에서도 지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1980년 전두환 세력의 계엄을 경험했던 우리 사회는 인터넷이라는 기술 발전을 계기로 세상에 소식을 알릴 수 있는 채널을 다양하게 준비해 왔습니다. 게다가 카메라에 익숙하고 카메라에 찍혀 역사에 남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는 젊은 군인들에게도 현장의 실시간 중계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습니다. 5일 저녁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학생총회 취재를 다녀왔습니다. 대통령의 후배인 대학생들은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은 엄청나게 절차와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총회가 열리는 학생회관 앞 계단광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바일 신분증으로 일일이 확인을 해야 했고, 타학교 학생이나 일반 시민들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100% 서울대 학생들의 모임이고 그들의 결의라는 명분을 갖추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덕분에 5시에 행사 시작할 것으로 예상하고 취재를 나섰던 저는 행사가 시작되는 8시 30분까지 신분 확인하는 절차를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본 행사가 시작되었을 때도 과거와 다른 집회 모습이었습니다. 일사분란한 8자 구호는 없었습니다. 손을 들어 동시에 하늘로 향하는, 사진기자에게는 필수적인 ‘결정적 순간’도 별로 없었습니다. 권위주의 시대의 데모 모습과는 현저하게 달랐습니다. 짧은 시간에 거리를 장악하고 시민들에게 세를 보여줘야만했던 시대와 달리 지금은 조근조근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는 학생들의 연설이 이어졌습니다. 사진기자로서는 상당히 지루한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신문에 쓸 한 장의 사진을 찍는데 총 4시간이 걸렸습니다. 속도보다는 올바름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가 변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맥락이나 설명 없이 3일 밤 TV에서 들었던, 계엄군의 ‘처단’이라는 단어는 참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왜’가 빠진 공권력의 공격 앞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절차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40년 전과 같은 ‘상명하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사회로 우리 사회가 성숙했고 그만큼 복잡하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은 100년 전 어느 세도가의 몰락을 명확하게 기록해 놓은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100년이 지난 오늘과 내일 신문은 어떤 사진으로 권력을 기록하게 될지 그리고 그 기록들이 나중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두려우면서도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느껴지시나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장미의 가시 같은 경고일까요?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 불을 밝힐 전선에 감전주의 안내판이 붙어 있네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여의도 한강 둔치에서 거닐고 있는 왜가리 한 마리. 카메라 세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 톱모델의 ‘포스’를 뿜어내네요. ―서울 여의도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날아다니던 씨앗이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하필 나팔 속, 너무 시끄럽진 않을까요. ―서울 홍익대 앞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일 서울 종로구 JW메리어트 동대문스퀘어 서울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녹색소비자연대전국협의회, 화학물질 저감 우수제품 발표’ 행사에서 모델들이 제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날 공개된 제품은 성분 공개와 원료 안전성 평가 등을 통해 안전성이 인정된 생활화학제품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기습 한파와 함께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시작되자 스키장이 하나둘씩 문을 열기 시작했다. 겨울 시즌 개장 첫 주말인 1일 강원 평창군 모나 용평 스키장은 이른 아침부터 스릴을 즐기기 위해 슬로프에 오르는 스키어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슬로프를 타고 올라간 스키어들이 본격적으로 코스를 타고 내려오기 시작하자 새하얗게 펼쳐진 스키장 코스는 금세 형형색색 스키복 색깔로 뒤덮였다.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추위와 스릴을 기다렸다는 듯이 스키장 곳곳에 스키어들의 환호성이 울려퍼지기도 했다.지난 29일 초·중급자용 핑크 슬로프를 개장한 모나 용평은 연말까지 모든 슬로프를 개장할 예정이다. 강원 도내 대부분 스키장은 오는 6일까지 문을 열고 본격적인 스키 시즌에 돌입한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대형 열차 충돌 사건 발생에 바빠진 신문사남쪽과 북쪽으로 각각 향하던 열차가 정면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었습니다. 신문사에서는 이 사건을 1924년 11월 28일자 조간 신문과 석간 신문을 통해 사고 내용을 우선 상세히 보도하는 한편 사진기자를 현장으로 급하게 파견합니다. 1924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사진 3장과 함께 출장을 간 사진기자의 취재 후일담에 실렸습니다. 기사 제목은 “본사 특파 사진반 고심 촬영 – 급행열차 정면 충돌 화보”입니다. ●사고 발생 경위 1924년 11월 27일 목요일 새벽, 중국 룡진강 철교 위에서 대형 열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날 새벽 1시경 남북으로 운행 중이던 두 열차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화물열차와 급행열차 모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고는 안동현(현 중국 단둥)을 출발한 제72호 화물열차가 신막역을 지나 한포역으로 진입하던 중 발생했습니다. 당시 부산을 떠나 봉천(현재 중국 선양)으로 향하던 제5호 급행열차와 룡진강 철교를 못 미쳐 정면으로 부딪힌 것입니다. 이 사고로 두 열차의 기관차는 물론 화물열차 전부 화차 두 량이 크게 파손되었고, 급행열차의 수하물차와 유리창이 부서지는 피해가 발생했습니다.당시 제72호 화물열차는 통상적으로 먼저 한포역에 도착해 급행열차를 기다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약 5~6분 늦게 도착해 급행열차와 거의 동시에 역에 도착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급행열차는 신호를 받지 못하고 룡진강 철교 위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한편, 제72호 화물열차가 역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으나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전철기를 깨뜨리고 대기 중이던 급행열차와 정면 충돌하게 되었습니다.●사고 보도와 사진기자의 취재 과정당시 사진기자는 급하게 준비해서 현장을 찾아갑니다. 사고가 발생한 27일 오후, 편집자로부터 “내일 신문에 게재할 수 있도록 꼭 촬영하라”는 부탁을 받고 카메라를 들고 출발한 그는 오후 5시 5분 신막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하지만 기차는 예상보다 세 시간 늦은 밤 8시 50분에야 한포역에 도착했습니다.그는 밤중에 역장을 설득해 사고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심야에 비까지 내리는 악조건 속에서도 역에서 약 한 마장(약 4km) 떨어진 룡진강 철교까지 걸어가 사고 현장을 촬영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기관차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으나 이미 파손된 기관차는 각각 평양과 용산으로 옮겨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급히 평양으로 이동해 기관차를 촬영하고 새벽 4시 반 개성역에서 사진을 확보한 뒤 아침 9시 40분 경성으로 돌아와 신문에 보도할 사진을 완성했습니다. 사고 발생 이틀 뒤인 11월 29일자 동아일보에는 사고 현장을 담은 사진과 사진기자의 취재기가 실렸습니다.●변화한 사진 보도 환경이 사건은 과거와 현재의 사진 보도 환경을 비교할 때 여러 변화를 시사합니다. 우선 전송 기술의 발전이 있습니다. 당시 촬영한 사진이 독자들에게 전달되기까지는 24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사진기자는 필름을 들고 서울 본사로 돌아와 현상과 인화 과정을 거친 후 신문 제작팀에 전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늘날에는 무선 통신망을 통해 사진을 즉시 전송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SK텔레콤의 CDMA 기술이 도입된 이후, 신문사 사진기자들은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을 즉시 본사로 보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사진기자가 아닌 시민들이 열차에 타고 있었다면 휴대폰으로 촬영해 언론사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취재 환경도 과거와 현재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1924년 당시 사진기자는 역장을 설득해 현장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보안과 안전상의 이유로 기자들이 공식 요청을 해도 거절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특히 공무원들이 불리한 상황일 경우, 기자증의 권위로 취재 협조를 받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이는 2000년대 초반 이후 크게 달라진 모습으로, 이제는 기자가 스스로 방법을 찾아 현장에 접근해야 합니다. 공무원들은 오히려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에서만 언론을 활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곤 합니다.●후일담사진기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사고 현장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의 고단함은 글에 고스란히 묻어났습니다. 당시 그는 취재를 마치고 “성공은 했으나 후유증이 남는다”고 말하며 글을 마치고 있습니다. 기사는 ‘후유’라고 마무리 되었지만 어떤 후유증이 있을까 100년 후의 사진기자인 제 경험에서 유추해 보았습니다. 필름으로 사진을 찍던 1997년 6월 중국 단둥역에 출장을 간 적이 있습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대북 식량 지원이 시작되는 날이었는데 원래 출장 계획이 있던 선배가 중국 당국으로부터 비자 발급이 지연되면서 저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입사 7개월, 정식 기자가 된지 3개월 만에 해외 출장을 가는 파격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되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전날 밤(그 시간 저는 집에 안 가고 회사 근처에서 선배들과 시끌벅적하게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에 의사결정이 되어 제가 출장을 가게 되었고 비행기 티케팅은 회사 여행사와 항공사 홍보팀을 통해 ‘급행’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중국 선양 공항에 내려 택시를 4시간 동안 타고 단둥역에 도착하니 이미 밤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새벽에 움직일 것으로 예상되는 북한행 열차 시간을 알아내기 위해 단둥역의 중국인 근무자들을 깨웠습니다. 다행히 압록강 철교를 지나 북한으로 들어가는 열차를 촬영할 수는 있었지만, 저를 비롯한 한국 기자들은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몰래 서울에 전송까지 마쳤지만 8시간 안에 단둥을 떠나라는 추방 조치를 받았습니다. 가는 데 12시간, 촬영 가능 시간과 촬영 포인트를 확인하느라 밤을 새고 공안의 조사 후 바로 추방되어 베이징으로 가는 열차를 타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 일정 동안 제 등과 어깨에는 총 5개의 가방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카메라 가방, 망원렌즈 가방, 노트북 가방, 스캐너 가방, 현상인화 키트 가방 등이었습니다. 출장에 필요한 옷가지와 세면도구들은 따로 가방으로 챙기지 않고 각각의 가방 여유 공간에 조금씩 나눠 넣었던 기억이 납니다. 방송 기자와 달리 신문사 사진기자들은 혼자서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보조도 없고 취재기자와 동행하는 경우보다 따로 움직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수면 시간과 끼니를 챙길 수 없는 조건도 있었네요. 물론 그 당시에는 그게 20대의 젊은 사진기자에게는 중요한 조건이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출장을 다녀오면 어깨와 등에 채찍을 맞은 듯한 흔적이 남았었습니다. 가방의 끈들이 몸을 짓누르기 때문에 피가 뭉쳤던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몸에 피로감이 남는 것만이 취재의 후유증은 아닙니다. 인간 관계에 대한 후회도 꽤 남습니다. 현장에 가기 위해 누군가를 윽박지르고 달래는 과정이, 취재가 끝나고 곱씹어 보면 무례하고 무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취재하는 저를 만나셨던 분들 중에 그런 기억이 있으시다면 이 글을 통해서나마 사과 드리고 용서를 구합니다. 100년 전 열차 사고 사진을 찍었던 사진기자가 말하는 ‘후유’라는 것도 그런 회한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무엇을 느끼셨나요? 오늘도 좋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깨진 유리창과 사냥용 엽총 사진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의 사연을 찾아가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이번 주에 고른 사진은 열차 폭발 사고 사진입니다. 유리창이 깨져 여기저기 파편이 흩어져 있는 혼란스런 모습입니다(왼쪽 사진). 커다란 총 옆에 보따리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오른쪽 사진). 1924년 11월 2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사람이 타고 다니는 열차 선반 위에 화약과 총을 싣고 다녔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놀랍습니다. 지금의 안전 의식이나 기준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기사 내용을 한번 보겠습니다. 아마 지금의 사진기자들이라면 와이드 렌즈를 사용해 사고의 원인인 엽총 화약과 사고의 결과인 깨진 유리창을 한 장의 사진으로 담아 보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열차 객실이라는 좁은 공간의 왼쪽과 오를쪽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렌즈가 없었기 때문에 두 장으로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객차 선반 위에 있던 화약이 폭발한 사고기사를 바탕으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1924년 11월의 어느 쌀쌀한 아침, 서울역을 출발 약 1마일을 전진한 경부선 8호 급행열차에서 폭발음이 울려 퍼졌습니다. 시각은 오전 10시 5분. 열차가 용산역을 향해 달리던 그 순간, 맑은 하늘을 가르는 굉음과 함께 객실이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기관차에서 두 번째로 달린 삼등 객차에서 난 사고였습니다. “갑자기 굉장한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폭발했습니다. 기차는 비상 기적을 울리며 즉시 멈췄죠.”기자가 인터뷰를 했다면 당시 현장을 목격한 한 승객의 증언은 아마 이랬을겁니다. 혹시 폭탄이 터진 것인가 하고 의심했으나 사고의 원인은 의외의 곳에 있었습니다. 경기도 사회주사로 재직 중이던 조원환(33) 씨의 수하물이었습니다. 그는 휴가를 맞아 호남 지역으로 사냥을 떠나기 위해 화약 500 돈과 뇌관 1,000개를 구입했고, 이를 가방에 넣어 객실 선반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열차의 진동이 화약을 자극했고, 결국 폭발로 이어진 것입니다.폭발로 인해 객실의 유리창 세 개가 산산조각 났고, 조씨를 포함한 승객 7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가장 큰 부상을 입은 것은 송포(마쓰우라) 가족으로, 3주간의 치료가 필요할 정도였습니다.조씨는 인력거에 간신히 몸을 의지해 시내 자택으로 돌아갔습니다. “지독한 화약 냄새가 객실을 가득 메웠습니다. 승객들은 혼비백산하여 열차에서 뛰쳐나왔죠.”당시 동아일보는 현장의 혼란상을 이렇게 전했습니다.이 사건은 용산경찰서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경찰서장을 비롯한 20여 명의 경찰관들이 자동차와 도보로 현장에 긴급 출동했습니다. 당시는 각종 풍설이 돌던 시기라 경찰은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다고 합니다.100년 전 이날의 사고는 다행히 인명 피해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일상적인 열차 운행이 순식간에 아찔한 재난 상황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 충격적인 사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안전해지는 교통수단1924년 열차 폭발 사건은 단순한 화약 사고였지만, 당시에는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건이 공론화되면서 열차 안전 관리가 강화되었을 것이고 대중의 불안은 점차 해소되었습니다. 한 시대를 뒤흔드는 사고도 결국에는 원인을 찾아 해결되고 사회는 점점 발전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요.요즘 전기자동차 배터리가 충전 도중 화재로 이어지는 사고들이 자주 보도되고 있습니다. 신기술에 대한 불안과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100년 전 열차 사고를 돌아보면, 새로운 기술이 도입될 때 겪는 시행착오와 그로 인한 사회적 충격은 피할 수 없는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화약을 객실에 들고 탔다는 것은 지금의 기준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만 당시에는 사고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위험성을 사회 전체가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언론이 보도하고 공론화시킴으로써 여론을 환기시키고 정책의 수립을 자극하게 되었습니다. 열차가 생각지도 못했던 사고를 계기로 더 안전한 교통수단으로 발전했듯, 오늘날 전기자동차 역시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며 더 안전하고 신뢰받는 기술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봅니다. 요즘 빈번하게 발생하는 전기자동차 배터리 사고가 100년 후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요? 오늘은 지금의 시각에서 볼 때 황당하다고 할, 열차내 화약 폭발 사건 현장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사진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셨나요?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감이 차를 탔네요. 홍시 익기 전에 잘못 먹으면 정말 떫은데, 저렇게 차 안에서 익히면 유혹에 빠질 일 없겠어요. ―서울 종로구 한 도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1일 서울 종로구 일대가 안개와 미세먼지 탓에 뿌옇게 보인다. 환경부에 따르면 이날 수도권과 충청 경북 지역의 초미세먼지 농도가 ‘나쁨’ 수준이었다. 절기상 소설(小雪)인 22일에는 경기 및 강원 지역 내륙 산지를 중심으로 아침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지며 쌀쌀한 날씨를 보일 것으로 예보됐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0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4 농식품부×코엑스 푸드위크(제19회 서울국제식품산업전)’에서 방송인 타일러 씨(오른쪽) 등 모델들이 다양한 비건푸드를 소개하고 있다. 국내외 프리미엄 식품과 대체식품을 선보이고 식품 산업의 미래를 조망하는 이번 전시회는 23일까지 이어진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9일 서울 중구 뚜레쥬르 제일제당센터점에서 어린이 모델들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한정 판매하는 ‘2024 윈터 홀리데이 시즌 케이크’를 선보이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내가 달려도 이거보단 빠르겠네 교통 정체에 견공이 답답했던 모양이네요. 아무리 그래도 차창 밖으로 머리 내미는 건 위험해요∼. ―서울 종로구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