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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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진영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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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8~2024-12-18
칼럼97%
인사일반3%
  • [이진영 칼럼]열불 나는 국회 쌈박질, 에어컨이라도 끄고 하라

    국회의원들이 지켜야 하는 법에는 ‘일하는 국회법’도 있다. 세비는 따박따박 받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으니 상임위원회별로 월간 최소한의 회의 개최 횟수를 법으로 정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요즘 국회 회의장을 분주히 오가며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는 의원들을 보면 일하는 국회가 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5월 30일 개원한 22대 국회의 입법 활동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기록 갱신이 목표인 것 같다. K칩스법이나 예금자보호법처럼 이견이 적고 시급한 민생 법안은 제쳐 두고 정부가 ‘불법파업조장법’(노란봉투법), ‘현금살포법’(25만 원 지원법)이라며 반대하는 법안만 골라서 통과시키고 있다. 특검법도 ‘김건희 특검법’ ‘윤석열 김건희 특검법’ ‘권익위 김건희 윤석열 특검법’을 포함해 9건이 발의된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횟수는 19회로 역대 대통령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45회)에 이어 2위 기록이다. 입법 취지가 좋더라도 무력화될 게 뻔한 법을 통과시키는 것은 더불어민주당 출신인 김진표 전 국회의장의 말을 빌리면 “국회의 입법권을 훼손하는 행위”다. 개원 두 달여 만에 탄핵을 7건이나 추진한 것도 기네스북 감이다. “이재명 대표님과 가족, 동지들을 괴롭힌 무도한 정치 검사들” 4명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발의됐고, 공영방송 경영진 인사를 담당하는 방송통신위원장은 임명되는 족족 탄핵 압박에 사퇴하거나 직무 정지를 당하고 있다. 야당은 “윤 정부의 방통위원장 인재 풀이 고갈될 때까지” 탄핵하겠다고 한다. 가장 최근에 임명된 이진숙 위원장은 취임 하루 만에 탄핵당했다. 어차피 탄핵할 위원장 인사청문회는 왜 역대급으로 사흘씩이나 한 건가. 이번 국회에선 인사청문회 말고도 현안 청문회가 8번이나 열렸다. 예정된 것까지 합치면 16번으로 역대 최다 기록을 세울 것으로 전망된다. 국회가 부지런히 정부 정책 집행 과정을 챙기고 감시하겠다니 박수 칠 일일까. 아니다. 악명 높은 정청래, 최민희 위원장이 진행하는 ‘동물 상임위’뿐만 아니라 다른 상임위도 여야 편 갈라 싸우다 끝나는 ‘맹탕 청문회’ 수준이다. 의대 증원 청문회에서 여당 의원은 어려운 전문 용어를 써가며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의대 증원임을 강조했고, 야당 의원은 “의대 증원 2000명이 역술인 이천공 때문이냐”고 따져 물었다. 자기 지역구에 의대 신설을 해달라고 장관을 달달 볶는 의원도 있었다. 한국 국회는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면 입법 품질이 떨어지고 효율도 낮은 편이다. 다른 나라는 법안 발의 건수에 큰 변화가 없는데 한국은 20년간 10배 늘어 연간 2만 건 넘는 법안이 발의된다. 하지만 같은 기간 가결률은 40%에서 10% 안팎으로 하락 추세다. 고비용인데 저효율이다. 왜 그럴까.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은 최근 방송에서 “왜 이렇게 한국 정치가 자꾸 나빠지는 거냐”는 질문을 받고 국회의원 연봉을 거론하며 “정치인이 아주 뛰어난 전문직 인사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직업이 돼 버렸다”고 했다. 대신 “선거 기득권 지키기는 잘하고 논리적 변설엔 약한” 사람들이 국회에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연봉을 올린다면, 그래서 뛰어난 인재가 몰려들면 나아질까. 국회의원 올해 연봉은 1억5690만 원으로 국민 소득 수준에 비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민생 법안 처리는 미뤄도 세비는 때마다 올려 받은 덕분이다. 의원실 운영비에 보좌진 연봉 등을 합하면 의원 1인당 연간 예산이 8억1400만 원이다. 의원실 규모도 45평으로 책상 하나 겨우 들어가는 영국 의원실(1.8평)의 25배나 된다. 의원들이 누리는 특혜가 180가지라고 한다. 다른 공공기관은 에너지 절감을 위해 여름에도 실내 온도를 28도로 맞춰야 하지만 ‘공공기관 냉난방 카스트’의 최상위에 위치한 국회는 회의장에 들어가면 긴팔 입고도 으슬으슬 추울 정도다. 지금 받는 연봉과 특혜도 줄여야 한다는 게 여론인데 어떻게 늘리겠나. 21대가 22대가 되고 새 사람이 들어와도 나빠지기만 한다면 이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필요하다.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문제 자체가 돼 가고 있는 국회 개혁 없이는 될 일도 안 되겠다. ‘일하는 국회’도 정착되지 않은 시점이지만 생산적으로 경쟁하는 국회, ‘일 잘하는 국회’를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당장은 쌈박질할 땐 에어컨이라도 끄고 했으면 한다. 폭염 재난 문자를 하루에 34번씩 받는 상황이라 정장 갖춰 입고 열 올리며 막말 주고받는 동안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의원들을 보고 있으면 열불 난다는 원성이 자자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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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한달새 6배 급증한 코로나 환자

    요즘 감기에 걸렸다 싶으면 가능성은 크게 세 가지다. 두통 콧물 재채기로 2∼3일 힘들다 괜찮아질 경우 여름 감기, 감기 증세에 더해 쉽게 피곤해지고 온몸이 아프면 실내외 온도 차로 인한 냉방병이다. 감기인 것 같은데 열 나고 독감처럼 많이 아프면 코로나를 의심해야 한다. 요즘 감기인 줄 알고 병원을 찾는 환자 4명 중 1명은 코로나 환자라고 한다. ▷정부는 코로나 전수조사 대신 전국 220개 병원의 코로나 발생 추이를 표본 조사하고 있는데 이달 첫째 주 코로나 입원 환자 수가 861명으로 집계됐다. 올 2월 초 875명으로 정점을 찍고 줄어들다 6월 말부터 증가 추세로 돌아서더니 한 달 새 환자가 6배로 급증한 것이다. 바이러스는 고온다습한 여름철에는 전파력이 떨어지지만 냉방기 사용과 밀폐된 실내 생활이 전파를 부추기고 있다. 현재 유행하는 바이러스는 오미크론 변이인 KP.3로 전파력과 중증도가 증가했다는 보고는 없다. 코로나 유행은 이달 말∼다음 달 초 정점에 이를 전망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1년 연기한 끝에 ‘무관중’으로 개최됐던 도쿄 올림픽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파리 올림픽도 코로나 비상이 걸렸다. 코로나 검사를 하면 5명 중 1명은 확진 판정을 받는다. 남자 100m에서 0.005초 차이로 우승한 미국 육상 선수 노아 라일스(27)는 200m에서 동메달을 결정짓고 쓰러졌는데 이틀 전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공개됐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감염 사실을 알릴 의무는 없다. 라일스는 동메달 시상식 때는 마스크를 쓰고 참석했지만 400m 계주와 1600m 계주는 컨디션 난조로 포기했다. ▷현재 코로나 치명률은 독감과 비슷한 수준으로 낮아져 확진돼도 격리 의무는 없다. 다만 증상이 사라진 뒤 하루 지나 일상에 복귀하는 것이 좋다. 먹는 치료제는 기저질환자와 60세 이상만 유료로 처방받을 수 있고, 코로나 검사비는 치료제 처방 대상자가 아니면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코로나 확산세로 자가진단키트 가격도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정부는 10월 신규 백신 접종을 개시한다. 65세 이상은 무료다. ▷감기인 줄 알았는데 드물게는 심각한 병인 경우가 있다. 10세 이하 어린이의 경우 감기 증세가 심각하고 열이 잘 안 떨어지면 뇌수막염 가능성을 의심해야 한다. 성인이라면 일본에서 역대 최대 규모로 유행하고 있는 ‘연쇄상구균 독성 쇼크 증후군(STSS)’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대개는 가벼운 감기 앓듯 쉽게 회복되는데 고령자, 당뇨 환자, 최근 수술을 받아 상처가 있는 경우 매우 드물지만 폐렴 같은 중증으로 진행될 수 있고, 이 경우 치명률이 30%가 넘는다. 모든 감염병이 그렇듯 손 씻기와 마스크 쓰기만 잘해도 발병률은 크게 낮아진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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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오늘 딴 메달도 이젠 과거, 내일부터는 다시 달려야”

    승리의 환호와 패배의 탄식이 교차하는 올림픽에서는 오래도록 기억될 명언이 쏟아지게 마련이다. 2016년 리우 올림픽 때는 펜싱의 박상영(29)이 남긴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가 최고 유행어였다. 에페 결승전에서 4점 차로 뒤져 다들 포기하는 순간 그는 이 말을 되뇌며 역전의 드라마를 썼다. 2021년 도쿄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 결승에선 슛오프까지 가는 접전 상황에서 ‘3관왕’ 안산(23)이 했다는 속엣말이 화제였다. “쫄지 말고 대충 쏴!” 파리 올림픽에서도 새로운 어록이 만들어지고 있다. ▷신예들은 패기로 승부한다. 여자 총잡이 금메달리스트 삼인방이 대표적이다. 오예진(19)의 좌우명은 “내 갈 길은 내가 정한다”, 양지인(21)은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다. 반효진(17)은 “나도 부족하지만 남도 별것 아냐”라는 생각으로 쐈다. 남자 펜싱 사브르 3연패에 기여한 도경동(25)은 결승전 후반 1점 차로 쫓기는 상황에서 교체 투입돼 28초 만에 5연속 득점하고 내려와 포효했다. “질 자신이 없었다.” ▷양궁 남자 개인 결승전은 역대급 명승부였다. 마지막 슛오프에서 원샷으로 승부를 결정지은 김우진(32)은 통산 5번째 금메달을 따내며 한국 최다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그는 잠깐 웃더니 “오늘 딴 메달도 이젠 과거다. 오늘까지만 즐기고 내일부터는 새 목표를 향해 달리겠다”고 했다. 후배들에게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메달 땄다고 (그 기분에) 젖어 있지 마라. 해가 뜨면 마른다.” 김우진에게 패한 미국 브래디 엘리슨(36)은 “간발의 차로 졌다고 속상하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챔피언처럼 쐈다. 중요한 건 그거다.” ▷한국 패장들의 소회도 인상적이다. 남자 유도 100kg 이상급 결승전에서 한국에 첫 은메달을 안긴 김민종(24)은 금메달을 놓친 후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삐약이’ 탁구 선수 신유빈(20)은 “패배의 경험이 저를 더욱 성장시켜줄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서늘한 총잡이 김예지(32)는 사격 주 종목 예선에서 탈락하고도 쿨했다. “한 발 놓쳤다고 세상 무너지지 않는다.” ▷이번 올림픽은 테니스 노장들의 고별 무대였다. 노바크 조코비치(37)는 16세 어린 카를로스 알카라스(21)를 꺾고 커리어 골든 그랜드슬램을 완성한 후 “내가 꿈꾸었던 그 모든 것을 넘어섰다”며 오열했다. 8강전에서 탈락한 앤디 머리(37)는 재치 있는 은퇴사를 남겼다. “어차피 테니스 좋아하지도 않았어.” 룩셈부르크 탁구 노장 니샤롄(61)은 ‘언제 은퇴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 젊다”고 답한다. 신예든 노장이든 승자든 패자든 선수들이 공유하는 명언이 있다.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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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혁명적 올림픽 개회식

    지금까지 이런 올림픽 개회식은 없었다. ‘물 위의 개회식’이라는 형식부터 파격이다. 단두대에 머리가 잘린 마리 앙투아네트가 노래하고, 여장 남자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하며, 남성 여성 성소수자 3명의 결혼식이 연출됐다. “개회식의 새 지평을 열었다.” “역대 최악의 무례한 개회식이다.” 올림픽 개회식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갈라진 적도 드물다. 1900년, 1924년에 이어 100년 만에 다시 열린 프랑스 파리 여름올림픽이 시작부터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 개회식은 센강을 중심으로 파리 전체를 무대 삼아 펼쳐졌다. 206개국에서 참가한 선수들이 에펠탑 근처 광장까지 6km 구간을 85척의 배를 타고 입장하는 동안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파리의 명소 곳곳에서 2000명의 예술인들이 발레, 캉캉, 뮤지컬, 패션쇼 등을 선보였다. TV 시청자들은 선수단 입장 사이사이 화려한 쇼와 영상을 한눈에 즐길 수 있었지만 현장에 있던 관중은 개회식의 일부만을 지켜봤을 뿐이다. TV 속 이미지가 더 진짜 같다는 점에서 ‘보드리야르적인’ 개회식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내용도 ‘개최국의 역사와 문화 홍보’라는 통념을 깨는 것이었다. 헤비메탈 밴드와 합창단이 협연한 프랑스 혁명의 노래 공연이 대표적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가두었던 파리 최초의 형무소에서 펼쳐졌는데 머리가 잘린 왕비 분장을 하고 나와 합창하고, 형무소 창문 밖으로 붉은 색종이 피가 분출되는 장면은 19금 영화처럼 기괴하고 전위적이었다. 여장 남자들의 ‘최후의 만찬’ 패러디는 가톨릭계로부터 “역겹고 경박한 조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행사 막바지 성화 주자 중에는 프랑스 축구 영웅 지네딘 지단과 함께 스페인 테니스 스타 라파엘 나달, 미국의 테니스 선수 세리나 윌리엄스와 육상의 칼 루이스, 루마니아 체조 전설 나디아 코마네치가 포함됐다. 개최국 스타만이 성화 주자로 등장하는 고정관념을 깬 시도에 대해서는 ‘포용적’이라는 호평이 나왔다. 개회식 마지막 희귀병을 앓고 있는 캐나다 가수 셀린 디옹이 ‘사랑의 찬가’를 열창하는 장면은 논쟁적 행사에서 드물게 보편적 감동을 주는 순간이었다. ▷파격의 개회식을 놓고 프랑스 내부 평가도 “환상적이다” “자기 비하적이다” 등으로 엇갈린다. 한 프랑스 작가는 “자부심의 역사를 기념하는 순간 혁명의 끼가 발동했다. 저급한 취향과 고급스러움, 노골적 유머와 진보적 깨어있음이 뒤섞여 논쟁을 유발하는 혼란의 도가니는 프랑스 정신의 완벽한 구현”이라고 평가했다. 이쯤 되면 오륜기가 거꾸로 걸리고, 한국을 북한으로 소개한 실수도 프랑스적으로 보인다. 파리의 레전드급 개회식에 다음 개최 도시인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고민이 깊어질 듯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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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영 칼럼]의사 키워낼 지방대 병원이 망해 간다

    충청권 최대 규모인 충남대병원이 도산 위기를 맞아 정부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2020년 개원한 세종 분원의 누적 손실이 막대하고 전공의 이탈 후 매달 100억 원씩 적자를 보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직원 월급과 약품 대금 지급도 어려운 지경이라고 한다. 의대 증원 발표 후 전국 대학병원들의 줄도산 우려가 있었지만 정부가 지원하는 지역 거점병원부터 도산 위기에 내몰릴 줄은 몰랐다. 충남대병원과 세종 분원이 잘못되면 하루 5500명 규모인 환자들이 큰 불편을 겪게 된다. 충남대 의대생들의 실습 교육 파행은 장기적으로 더 심각한 문제다. 충남대 의대 정원은 110명에서 올해 입시에선 158명, 내년부터는 200명으로 늘어난다. 수련시설도, 교수진도 대대적으로 늘려야 하건만 증원된 학생들이 들어오기도 전에 수련병원은 문 닫을 처지이고 교수들은 수도권 대학과 개원가로 빠져나가고 있다. 다른 지방 국립대 의대들도 사정이 비슷하다. 정부 지원을 못 받는 사립대들은 훨씬 열악하다. 대학병원 지원금은 기대하기 어렵고 15년째 동결된 등록금 수입마저 급감하고 있어 의대 교육에 투자할 돈이 없다. 의대생들은 본과생들까지 서울 지역 의대로, 비의대생들은 의대 가려고 휴학하고 N수 대열에 합류한 탓이다. 이대로 가면 수련병원 없이 개교했다가 평가인증에서 탈락해 2018년 폐교된 서남대 의대 사태가 재연될 수 있다. 지방의 필수 의료를 책임질 지역 의사를 양성한다던 의도와는 달리 지방 의대 증원 발표 후 서울과 지방 의대의 간극은 더욱 벌어지고 있다. 상황이 급박한데도 정부는 6월 내놓겠다던 의대 지원 대책을 9월로 미룬 채 돈 안 드는 엉뚱한 대책들만 쏟아내고 있다. 교수 자원 부족에 대비해 개원의 경력 4년이면 연구 교육 실적 없이도 교수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밟지 않은 개원의에게도 인턴 레지던트 끝나고 전임의 과정 2년을 마쳐야 자격이 주어지는 교수 자리 지원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다. 수업 거부 중인 학생들의 집단 유급을 막기 위해 F학점도 유급시키지 말라는 권고안을 내놓았다. 한국은 대부분의 선진국과 달리 의대 졸업 후 면허만 따면 별도 수련 없이도 어떤 진료과목이든 독립적 진료가 가능하다. 그만큼 대학 교육이 중요한데 오히려 학사 기준을 완화하겠다 하니 학생들도, 잠재적 환자들도 반발하는 것이다. 그나마 자격 미달 의사 배출을 막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의대 평가인증 제도다. 정부는 여기에 손을 대겠다고 한다. 20세기 초 미국이 평가 결과를 토대로 131개 의대 중 50개를 폐교시킨 후 의대 평가인증 의무화는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았다. 제대로 못 배운 의사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니라 있어서는 안 될 흉기나 다름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도 1980, 90년대 정부가 지역마다 공항 지어주듯 의대 20여 개를 무더기로 신설하자 의학계가 2004년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을 설립해 자율적으로 평가인증을 시작했고, 2016년 아시아 최초로 국제 의대 평가인증기관으로 인정받았으며, 2017년부터는 인증을 못 받은 의대 졸업생들은 면허시험을 볼 수 없도록 법도 개정됐다. 정부가 인증기관 지정 권한을 이용해 국제 기준에도 맞는 의대 평가인증 기준 변경을 압박하는 이유는 증원된 대학들이 평가인증을 통과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입학 정원이 10% 이상 늘어난 30개 의대는 올 12월 증원에 따른 교육계획서를 재정계획과 함께 제출해 평가받아야 한다. 대학들이 자체 검증한 결과 30개 의대 모두 인증평가에서 탈락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처음부터 개별 의대 교육 여건에 맞춰 증원 인원을 조정했으면 될 일이다. 배정 기준도, 회의록도 없이 ‘깜깜이 배정’을 해놓고 인증평가 통과가 어려워지자 기준을 낮추려 한다면 지난 정부 시절 집값이 잡히지 않아 부동산 통계를 조작한 혐의로 재판받고 있는 공무원들과 뭐가 다른가. 의대 증원으로 교육 파행을 겪고 있는 지방 의대를 보면 조민 씨가 생각난다. 부산대 의전원 4년 과정을 두 번 유급 끝에 6년 만에 졸업하고 면허시험도 통과했지만 입학 당시 제출한 서류가 허위로 판명 나 면허가 취소됐다. 면허 취소 전 조 씨가 인턴 과정을 시작하자 당시 야당이던 국민의힘 의원들은 “우리 가족이 아플 때 조민을 마주치지 않을까 너무너무 두렵다”며 무자격자 진료 배제를 주장했다. 의대 입시에 정당하게 합격하고도 조 씨가 다닐 때보다 헐거워진 평가인증을 받은 의대에서, 낙제해도 봐주는 학사 관리를 받은 의사를 만나면 어떨 것 같은가.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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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감사한 의대생-전공의-전임의”… 복귀자 신상 공개 논란

    의사들 군기는 군대 못지않다. 사소한 실수가 인명 피해로 이어지는 직업적 특성 때문이다. 짧게는 예과와 본과 6년, 길게는 전공의 기간까지 10년 이상 관계가 이어지는 좁고 폐쇄적인 사회인 탓도 크다. 의사들의 기강 잡기는 환자의 안전에 도움이 되는 순기능도 있지만 내부적으로 집단의 결정에 동조와 복종을 강요하는 부작용도 작지 않다. 의대 증원을 둘러싼 의정 간 대치 국면에서 의료계의 집단행동 불참자 신상 공개와 조리돌림도 의사 군기 문화의 폐해를 보여준다. ▷최근 텔레그램에는 ‘감사한 의사-의대생 선생님 감사합니다’라는 제목의 채팅방이 개설돼 ‘감사한 의대생’ ‘감사한 전공의’ ‘감사한 전임의’ 명단이 올라오고 있다. 의대생은 학교와 학년, 전공의와 전임의는 소속 병원과 진료과, 출신 학교 학번 같은 개인정보가 이름과 함께 공개된다. 채팅방 개설자는 ‘이 시국에도 의업에 전념하고 계신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려 한다’고 했지만 복귀자들을 조롱하며 추가 이탈을 막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경찰은 병원과 수업 복귀를 방해하는 불법 행위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동료들의 복귀를 방해하는 행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3월엔 집단 사직에 불참한 전공의들 명단이 ‘참의사… 안내해 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의사와 의대생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참의사’ 명단 유출 사건을 수사해온 경찰은 최근 개원의 2명을 포함한 의사 5명을 업무방해와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지난달에는 수업에 참여한 학생에게 공개 사과와 수업 거부를 강요한 혐의로 모 대학 의대생 6명이 입건됐고, 다른 3개 의대도 집단행동을 강요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폐쇄적인 집단에서 동료 사이의 평판은 결정적이다. 의대는 거의 모든 과목이 전공 필수로 6년 내내 함께 수업을 듣는다. 팀별 과제나 실습이 많아 ‘왕따’ 당하면 학교생활이 매우 어려워진다. 이번 동맹 휴학 중엔 ‘불참자는 시험용 족보를 공유하지 않겠다’며 휴학을 강요하는 대학도 있었다. 의사 면허를 딴 후에도 동료 선후배 관계는 이어지기 때문에 배신자로 찍히는 건 면허 정지보다 무서운 일로 통한다. 2020년 의사 파업 때 불참자도 블랙리스트로 ‘박제’돼 공공연히 배제되는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의대생과 전공의들은 정부가 의대 증원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서 ‘의사를 악마화’한다고 반발한다. 그러면서 내부적으로는 집단행동을 강요하며 이탈자들을 ‘악마화’하고 있다. 환자 곁을 지키고 수업을 받겠다는 동료들의 소신을 조롱하고 사이버 폭력을 휘두르면서 어떻게 집단행동의 대의명분을 이해받으려 하나.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엘리트들의 건강하지 못한 집단주의 문화가 유감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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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사망자 비중 특히 높은 고령 운전자 사고

    교통사고 사망자는 해마다 줄고 있지만 다른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많은 수준이다.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5.6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4.7명)을 훌쩍 웃돈다. 38개국 중 28위로 많다(2021년 기준). 한국은 보행자와 고령의 사망자 비중이 특히 높은데 고령 운전자가 내는 교통사고가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사망에 이르는 교통사고에서 고령자는 핵심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셈이다.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연평균 4.6% 증가하는 동안 운전면허 소지자는 10.2% 늘었다. 내년이면 고령자 중 운전면허 가진 사람이 절반가량이 된다. 고령 운전자가 느는 만큼 이들이 내는 교통사고도 증가 추세다. 문제는 고령 운전자가 교통사고를 낼 경우 치사율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인구 대비 교통사고를 가장 많이 내는 연령대는 20세 이하지만 사망자를 가장 많이 내는 연령대는 65세 이상이다. 지난해 고령 운전자로 인한 사망자 비중은 전체의 29.2%였다. ▷정부는 구체적인 사고 원인별 통계는 따로 집계하지 않는다. 한국보다 고령 인구 비중이 높은 일본의 경우 75세 이상 운전자가 낸 사망사고 중 33%가 브레이크와 가속 페달을 착각하거나 핸들 조작 미숙으로 발생했다. 전방 부주의나 안전 미확인(각 21%)보다 비중이 컸다. 최근 3일간 서울광장 앞, 국립중앙의료원, 서울 강남 어린이집 근처에서 고령 운전자가 낸 사고도 ‘돌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운전에 가장 중요한 시력은 60대가 되면 30대의 80% 수준이 되고, 돌발상황 반응 시간은 1.4초로 2배로 늘어난다. ▷한국이 고령 운전자로 인한 치사율이 높은 원인으로는 허술한 면허 관리가 꼽힌다. 면허 갱신 주기가 65∼74세는 5년, 75세 이상은 3년으로 다른 선진국보다 길고, 면허를 갱신할 때 적성검사와 인지능력 검사만 하고 도로 주행 시험은 하지 않아 실제 운전 능력을 평가하기엔 한계가 있다. 평가 결과 면허 유지나 취소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는 것도 고령자들이 면허 관리 강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요인이다. ▷같은 고령자여도 신체와 인지 능력은 천차만별이다. 나이에 따라 일률적으로 제한하기보다 운전 능력에 따라 낮시간이나 일정 지역 내에서만 운전하게 하거나 페달 오작동 방지 장치 설치를 의무화하는 등 안전과 이동권을 조화시키는 규제가 합리적이다. 고령자가 많이 사는 시골 지역에 가로등 같은 안전 인프라를 강화하고 대체 교통수단도 늘려야 한다. 고령자 보행 속도에 맞춰 신호 시간을 조정하는 등 OECD 1.9배나 되는 고령 사망자 비중도 낮출 필요가 있다. 고령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함께 줄이는 것이 고령화 시대 주요 교통정책 과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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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고교생 제자에 심히 부적절한 편지 보낸 교총 회장

    박정현 인천 부원여중 교사(44)는 얼마 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 77년 역사상 최연소 회장으로 선출됐다. 주로 교수들이 맡아온 회장 자리에 평교사 출신이 오른 것은 박 회장이 세 번째다. 그런데 20일 임기 시작 일주일도 되지 않아 교총 회원들의 사퇴 요구를 받고 있다. 11년 전 인천국제고 근무 시절 제자에게 보낸 ‘부적절한 편지’가 공개됐는데 그 수위가 높다. ▷처음엔 ‘부적절한 쪽지’가 논란이었다. 회장 선거 기간 중 인천국제고 박 회장 반이었다는 누리꾼 등이 박 회장이 제자에게 ‘사랑한다’ ‘차에서 네 향기가’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한다’고 적은 쪽지를 건넸다고 폭로했다. 박 회장은 22일 사과문을 내고 “한 제자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입시에서 좋은 성과를 낼 것 같아 쪽지를 보내 격려했는데 과했던 것 같다”고 해명했다. 이 일로 ‘품위유지 위반’에 따른 ‘견책’ 조치를 받았으며 견책 처분은 3년 만에 말소됐고 올 2월 사면도 받았다는 것이다. 교총도 “성비위는 아닌 것으로 확인했고 회원들도 문제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3일 후 박 회장이 당시 제자에게 보낸 편지 사본 12장이 교육전문매체를 통해 추가로 공개됐다. 몇 구절만 옮기면 이렇다. “당장이라도 안아주고 싶었어” “차에 떨어지는 빗소리, 당신의 향기” “얼굴 한번 마주치기 어렵지만 자기를 떠올리는 일만으로도 행복해요” “어젠 기숙사에서 자며 자기 생각 참 많이 했어요”. 교총 회원들은 “회장이 사퇴하지 않으면 내가 탈퇴하겠다”고 하고, 학부모 단체는 “신임 회장 당선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야당에선 “권력에 의한 성범죄”라며 진상조사와 자진 사퇴를 요구한 상태다. ▷현재로선 편지를 받은 학생이 성적 수치심을 느꼈는지 확인되지 않아 성범죄라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우월적 지위에 있는 교사가 사제 간 신뢰 관계를 악용해 미성년자에게 부적절한 언행을 한 것은 지탄받을 일이다. 교사의 제자 성희롱이 드물지 않은데 당하는 학생들은 “내가 공부를 잘해서 예뻐하고 격려하신다”거나 “내가 형편이 어려워 각별히 챙겨주시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미숙한 제자가 먼저 접근해도 바로잡아 줘야 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교권 침해 사례가 늘면서 교총의 교권 보호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초중고교생이 여교사에게 “남자 잘 꼬시죠” 같은 막말을 하는 일이 벌어질 때면 교총은 “교사가 어린 학생에게 도 넘은 성희롱을 당하는 현실”을 개탄해 왔다. 그런데 어린 학생에게 도 넘은 편지를 보낸 교사를 교원 대표로 뽑았다. 박 회장이 “교권 보호”를 호소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가 여제자에게 보낸 연서의 낯 뜨거운 구절을 떠올릴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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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15년간 등록금 동결… 대학 경쟁력 퇴보 언제까지

    자녀가 대학에 가면 부모는 ‘에듀푸어’에서 졸업한다. 다달이 수십만 원, 많게는 100만 원 넘게 통장에서 빠져나가며 가계 살림을 옥죄던 사교육비가 굳기 때문이다. 대학 등록금을 내야 하지만 학원비에 비하면 큰 부담이 아니다. 지난해 국공립대 연간 등록금(394만 원)은 초등학생 사교육비(554만 원)보다 적고, 사립대(733만 원)는 고교생 사교육비(888만 원)보다 못 한 수준이다. 모든 물가가 오르는 동안 대학 등록금은 ‘반값 등록금’ 규제에 묶여 15년간 동결된 탓이다. ▷등록금 고지서에 찍히는 명목 등록금은 2011년 이후 큰 변화가 없지만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실질 등록금은 855만2000원에서 685만9000원으로 14년 새 20%나 줄었다. 최근 10년 사이 미국 대학 등록금은 1만7200달러→3만2000달러, 영국은 4980달러→1만2300달러, 일본은 8040달러→8740달러로 올랐는데 한국만 역주행한 셈이다. 법에는 ‘직전 3개년 평균 물가상승률의 1.5배 내’에서 올릴 수 있게 돼 있지만 이 경우 정부의 지원을 못 받기 때문에 사실상 사문화된 규정이다. 대학이 법정 기준만큼 등록금을 올리지 못해 발생한 결손액이 28조 원에 이른다. ▷정부 재정이 들어가는 국립대와 달리 재정의 63%를 등록금 수입에 의존하던 사립대는 학생 수 급감까지 덮쳐 재정 파탄 위기에 내몰린 상태다. 생존하려니 투자를 줄일 수밖에 없다. 50만 개가 넘던 강좌 수를 43만 개로 줄였고 연구비, 실험실습비, 도서구입비, 시설투자비도 내리 삭감했다. 연구 역량과 교육의 질이 좋아질 리 있겠나. 중고교보다 못한 시설에 놀란 학생들이 “등록금 올려도 좋으니 빔프로젝터 바꾸고 화장실 좀 고쳐 달라”고 요구하는 학교도 있다. ▷한국만큼 대학에 돈을 안 쓰는 나라는 드물다. 초중고교생 1인당 공교육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상위권, 대학생 공교육비는 최하위권이다. 대학생 교육비가 초등학생보다 적은 나라는 그리스, 콜롬비아, 한국뿐이다. 정부가 투자도 않으면서 등록금도 못 올리게 하니 대학 졸업장이 제 구실을 못 한다. 한국은 OECD 회원국에 비해 대졸자 비율은 높지만 대졸자 취업률이 크게 떨어지고 고졸 대비 대졸자의 상대적 임금 수준도 낮다. 헐값에 졸업장만 내어 주는 교육이 무슨 의미가 있나. ▷전국 135개 대학 총장들이 최근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하계 세미나에서 대학 등록금 규제를 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대학 경쟁력을 위해 고민해야 하는 자리에서 10년 넘게 같은 요구를 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정부 지원 포기하고 등록금 올리느냐, 지원금 받고 등록금 포기하느냐는 구시대적 고민을 호기롭게 교육 규제 철폐를 내세운 정부에서도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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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영 칼럼]비윤리적 의사 파업, 정부는 책임 없나

    의사의 신뢰도는 높다. 지난해 말 ‘가장 신뢰하는 직업’ 여론조사에서는 1위가 과학자, 2위가 의사였다. 신뢰도 꼴찌인 정치인은 물론이고 판사, 공무원, 성직자보다 순위가 높다. 그런데 파업하는 순간 제 밥그릇 위해 환자 신뢰 저버린 파렴치한으로 전락한다. 파업의 목적이 밥그릇 챙기기가 아니라 잘못된 의료 정책 바로잡기라 해도 곧이듣지 않는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 만큼 더 높은 윤리 의식을 기대하는 것이다. 한국은 파업하는 의사를 형법 의료법 공정거래법으로 처벌하지만 대부분 나라에선 의사들의 단체행동권을 인정한다. 지난 100년간 70개국에서 300건 넘는 의사 파업이 있었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전공의들이 지난해 3월부터 10차례 41일간 급여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했다. 세계의사회는 세계 곳곳에서 의사 파업이 빈발하자 2012년 의사들의 단체행동을 허용하는 성명을 내고, 파업의 명분이 의사들의 열악한 근로 여건 개선이든 왜곡된 정책 철회든 환자 안전과 무관하지 않으므로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의사 파업이 일반 노동자 파업과 같을 수는 없다. 세계의사회는 의사들이 피고용인으로서 단체행동을 할 순 있지만 전문가로서 윤리적 의무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세계의사회가 제시한 단체행동 수칙의 핵심은 파업에 앞서 집회, 홍보, 협상, 중재의 노력을 최대한 기울일 것, 파업 기간 내내 필수 응급 의료를 지속할 것 두 가지다. 이 기준에 따르면 지금의 의사 파업은 불법 여부를 떠나 윤리적이라 보기 어렵다. 평소 의료 개혁에 무심했고, 의대 증원 협의엔 소극적이었으며, 정부가 ‘의대 증원 2000명’을 발표하자 그제서야 움직였으나 정부와 대화는커녕 의사들 내부 이견 조율에도 실패해 대안을 못 내고 갈팡질팡했다. “그동안 휴진 빼고 모든 노력을 다했다”는 의사들 주장에 동의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파업해도 중증·희귀병·응급 환자 진료는 열어둬야 하는데 말기 암 환자 항암치료를 안 해주고 열이 끓는 아이 안고 가도 받아주지 않더란다. 미래의 국민 건강을 위한 파업이라지만 오늘의 환자 희생이 수단이 돼선 안 되는 것이 의료 윤리다. 그렇다고 의사 파업이 의사들 욕하고 끝낼 일은 아니다. 의사 파업이 비윤리적이라고 반대하는 학자들도 그 책임은 정부가 함께 져야 한다고 본다. 국민 건강권 보호를 위한 정부 역할이 커지면서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요구하는 전통적 의사-환자 관계가 의사-정부-환자의 삼각관계로 확장됐으니 환자에 대한 책임을 의사에게만 요구하는 건 부당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모든 의료기관이 건강보험 환자를 진료하도록 법으로 강제하고 정부가 가격 결정권을 쥐고 있어 정부 권한이 막강하다. 그만큼 망가진 의료 체계에 대한 정부 책임도 크다. 소아과 오픈런이나 응급실 뺑뺑이는 정부가 환자를 볼수록 손해 보는 구조를 방치한 결과다. 의사들은 미용 의료, 환자들은 빅5 병원으로 쏠리면서 필수 의료, 지방 의료 다 죽는다는 소리가 커지자 근본적 수술 대신 의대 증원이라는 대증 요법으로 막아보려다 이 사달이 났다. 의사들 입장에선 의사 수 늘어나 밥그릇 작아지는 것도 싫겠지만 의료비 급증과 의료 질 하락이 불 보듯 뻔하니 반발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의정 간 협의도 기본적인 근거 자료도 없이 대폭 증원을 강행했다. 정부는 의사들이 환자를 볼모로 잡고 있다고 하지만 의사들은 정부가 환자를 볼모로 증원을 밀어붙였다고 본다. 단국대 의대 정유석 교수는 ‘일반 노동자들이 파업하면 오너는 손해 보고, 경쟁 기업은 득 보고, 소비자들은 별 영향 없이 끝나는데 의사들이 파업하면 오너인 정부는 손해 보는 일 없고 피해는 국민에게 전가된다’고 했다. 2000년 의약분업 파업도 환자들이 병원과 약국 두 곳을 모두 도느라 돈 쓰고 불편을 겪는 것으로 끝났다. 당시 의사들 달래려 의대 정원을 줄였는데 그 피해를 지금의 의대 증원 분란으로 겪고 있다. 생업에 바쁘고 전문 의료 정책이 어려운 국민을 대신해 의정 갈등을 중재하며 국민의 이익을 지켜내야 할 책임은 국회에 있다. 이번 국회엔 의사 출신 의원이 8명이나 되는데도 골치 아픈 의정 간 다툼에 끼어들려 하지 않는다. 당장 내년에 의사 3000명 배출이 안 되고, 3000명이 배우던 의대 교실에 유급생까지 7000명이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나. 의사든 정부든 국회든 미래 환자가 입을 피해를 외면하는 건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인 일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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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385만 원짜리 디올 가방 원가는 8만 원”

    명품은 비싸도 원가는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 브랜드 값이다. 자동차 중에서 마진율이 높은 테슬라 전기차가 20% 내외인데 3대 명품 에루샤(에르메스 루이뷔통 샤넬)의 마진율은 60∼70%다. 최근에는 프랑스 브랜드인 디올의 385만 원짜리 가방 원가가 8만 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인건비를 후려친 결과다. ▷이탈리아 밀라노 법원은 하청업체의 노동 착취를 방치·조장한 혐의를 받고 있는 디올 이탈리아 지사의 가방 제조업체에 1년간 사법 행정관의 감독을 받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34쪽짜리 법원 결정문에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하청업체 4곳이 최저 위생 기준에도 못 미치는 공장에서 이민자들을 먹이고 재우며 가방을 만든 것으로 나온다. 전기 사용량으로 추정해보니 공장은 24시간 휴일도 없이 풀가동됐고, 작업 속도를 높이기 위해 기계의 안전장치는 제거된 상태였다. 업체는 가방 한 개에 53유로(약 8만 원)를 받고 디올에 넘겼는데 이 가방의 매장가는 2600유로(약 385만 원)다. ▷이민자를 동원해 노동 법규를 어겨가며 작업하는 방식은 이탈리아 명품업계에선 드문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는 세계 명품 생산의 50∼55%를 커버하는데 ‘메이드 인 이탈리아’의 상당 부분을 밀라노, 피렌체, 프라토 등에 몰려 사는 중국계 이민자들이 만든다. 값싼 중국 노동력을 이용하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탈리아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높다. 올 4월에는 아르마니 가방 하청업체가 불법 체류 중국인들을 시간당 2∼3유로에 쓰다가 적발됐다. 개당 출고가는 14만 원, 판매가는 267만 원이다. ▷향수도 제조 원가율이 5∼15%로 낮다. 패션 전문회사들이 향수 제작을 병행하는 이유다. 고급 향수일수록 비싼 원료를 쓰지만 워낙 극소량만 들어가기 때문에 고가든 아니든 원가는 거기서 거기다. 최근에는 재스민 원산지인 이집트에서 명품 브랜드용 재스민 수확에 어린이를 동원하는 실태가 영국 BBC 보도로 드러났다. 재스민은 꽃잎이 햇볕에 상하기 전인 새벽에 따야 하는데 이 시간대 아동 노동은 불법이다. 방송에서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어린 자녀 넷과 재스민꽃 1.5kg을 따 1.5달러를 손에 쥔 어머니 사례가 나온다. ▷원가의 세 배 네 배 가격을 주고 명품을 사는 건 그만큼 무형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가죽 가방’이 아니라 ‘디올 가방’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업체는 비쌀수록 잘 팔리는 심리를 악용해 실적 개선이 필요할 때마다 질이 아닌 가격을 올려버린다. 가뜩이나 높은 마진율을 더 높여보려 ‘장인의 한 땀 한 땀’ 대신 약자의 노동력 착취에 의지하는 민낯까지 드러났다. 분별력 있는 소비가 기업의 탐욕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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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대 증원, 단체기합식 R&D 예산 삭감… 이공계 생태계엔 치명타”

    《의대 증원 확정으로 상위권 대학의 이공계는 폭풍 전야다. 올해 입시에서 의대 입학정원은 1540명 증원돼 4695명이 됐다. 서울대 이공계 정원(1775명)만큼 늘어나 상위 4%인 이과 1등급은 원하면 모두 의대에 갈 수 있을 만큼 문호가 넓어졌다. 일찌감치 의대 진학을 위해 휴학한 학생들에 이어 2학기엔 본격적인 ‘이공계 엑소더스’가 펼쳐질 것으로 전망된다. 재수 삼수해 대학 간 학생들이 삼수 사수를 준비 중이고, 대기업 신입사원 중에도 “지금 들어가도 남는 장사”라며 N수 대열에 합류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이미 연구개발(R&D) 예산 일괄 삭감으로 쑥대밭이 된 이공계는 학생 이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비상이 걸렸다. 이달 1일 취임한 김영오 서울대 공대 신임 학장은 “R&D 예산 삭감과 의대 증원이 연이어 터지면서 과학기술 인재 양성 생태계의 근간이 위협받고 있다”며 “신임 학장으로서 공학교육혁신과 더불어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이 1순위 과제”라고 했다.》―의대 증원이 있기 전에도 이공계 이탈 문제가 심각했다. 서울대 공대는 어느 정도인가. “서울공대 입학정원은 812명으로 서울대 전체 입학 정원(3300명)의 4분의 1이다. 2000년 이후 서울공대 자퇴 및 제적생 통계를 보면 2000년대 초반 100명이 넘다가 노무현 정부 때 과학기술부총리와 과학기술수석실이 신설되고 이공계 장학금 같은 진작책이 시행되면서 30∼40명 선까지 떨어졌다. 2019년부터 다시 상승해 지난해 100명을 넘겼는데 내년에는 역대 최고 기록을 세울까 매우 우려된다.” ―입시학원 자료를 보면 2000학년도만 해도 자연계열 합격선 상위 20개 학과 중 7개 학과가 서울대 공대 학과였다. 그런데 2024학년도엔 20개 학과 모두가 의대나 치대다. 올해 입시에선 1등급은 모두 의대 가고 2등급부터 공대를 채울 거라는 얘기가 나온다. “커트라인이란 입학 최저 점수여서 공대 입학생 전체 성적을 대변할 수 없다. 공대에는 수학 잘하고 만들기 좋아하는 재능 있는 젊은이가 여전히 많이 온다. 커트라인 변화보다 훨씬 신경 쓰이는 문제는 서울공대 입학을 의대 진학을 위한 재수의 안전판 정도로 여기는 학생들이다. 공학도를 열망하는 젊은이들이 의대 N수생 때문에 떨어지는 병폐만은 없어져야 한다.” ―학생들이 빠져나가면 빈자리는 어떻게 되나. “공학을 하고 싶어하는 학생들로 빈자리를 채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금의 편입학 제도로는 어렵다. 공대는 전공마다 특정 산업과 관련돼 있어 모든 학과가 관련 산업에서 활동할 최소 인원을 배출해야 한다. 서울대 공대 입학정원 812명 중 이탈자 100명이면 10%가 넘는다. 임계값(tipping point)에 가까워지면 작은 변화가 큰 영향을 가져오기 때문에 치명적이다.” ―의대 증원의 여파가 어느 정도 갈 것 같나. “최소 2∼3년간 상위권 공대는 이탈 학생 문제로 매우 힘들 것이 확실하다.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 이후 국가적으로 엄청난 진통을 겪고 있어 말을 아꼈는데 의대 정원이 확정됐으니 의료계라는 ‘나무’만 보지 말고 이공계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한 ‘숲’을 보는 정책을 세우길 건의한다.” ―대통령이 지난해 6월 과학계 카르텔 척결을 위해 “R&D 예산을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하면서 올해 R&D 예산이 33년 만에 처음으로 줄어들어 전년 대비 14.7% 삭감됐다. 총액은 26조5000억 원으로 정부 총지출의 3.9%다. 계약직 신진 연구자들이 줄줄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연구의 대가 끊겼다는 탄식이 나온다. “R&D 예산 체계에 수술해야 할 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일괄 삭감이다.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만 벌을 줘야 하는데 단체 기합 식으로 반찬 개수랑 식사량을 전부 줄인 모양새가 됐다.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문제의식에 비해 이를 집행하는 예산 관련 정부 기관들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질적 경직성도 일괄 삭감을 초래한 주요 요소일 것이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건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던 학생과 신진 연구자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고 방황하는 빌미를 주었다는 것이다.” ―서울공대의 연구비는 어느 정도 줄었나. “평균 25% 삭감된 것으로 파악된다. 연구실마다 연구생 인건비를 최대한 살리려고 연구 기자재 구입, 국제 학회 발표 같은 연구활동비 순으로 대폭 줄였다. 연구와 교류가 중단된 것이다. 다른 나라는 뛰어가는데 우리는 멈춰 서 있다.” ―내년에는 R&D 예산을 대폭 늘린다고 한다. 1년 예산이 깎인 것이 그렇게 치명적인가. “1∼2년의 기술격차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공학과 산업에 매우 ‘광범위한’ 치명타를 가할 것이다. 얼마 전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이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2023년 한국 산업기술 수준이 세계 최고인 미국의 88% 수준이고 이를 시간으로 환산하면 0.9년이다. 미국은 아무것도 안하는 동안 우리가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열심히 연구하면 1년도 안 돼 따라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공학과 산업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만 스스로 속도를 줄이고 있다. 2023년 한국 디스플레이 분야가 유일하게 세계 최고이나 고작 6개월 차이로 앞서고 있다. 조만간 디스플레이마저 1위 자리를 뺏기고 다른 분야의 기술 격차도 더 뒤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서울공대 연구 주제의 상당 부분이 탄소중립이나 미래 에너지 이슈와 관련돼 있다. 2050년 탄소중립 달성도 많이 지체될 것이다.” ―R&D 예산 삭감의 여파가 얼마나 오래갈까. “과학기술수석실이 생겼고 내년엔 관련 예산이 역대 최대가 된다니 기대가 크다. 유행을 타지 않는 기초 연구 분야가 홀대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연구자 이탈, 사기 저하, 연구 연속성 단절 등으로 연구 생태계 내부 상처는 회복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과학기술 인력 수요가 연평균 5.3% 늘어나는 동안 이공계 학사학위 이상 소지자 증가율은 3.6%에 그쳤다.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한데 관련 분야 인재 가뭄이 심각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대학 입시와 수도권 대학 이공계 증원에 관한 매우 견고한 규제를 일부라도 풀어주길 건의한다. 입학 사정 단계에서 공대를 의대 진학을 위한 정거장으로 여기는 아이들을 걸러낼 수 있어야 하는데 현행 전형 자료나 구술고사 방식으로는 어렵다. 특목고나 서울 강남 학생들을 더 많이 뽑으려고 입시 자율권을 달라는 게 아니다. 어려서부터 공학을 열망했던, 지금도 공학을 즐기는, 공학이 왜 좋은지 가르쳐주면 그걸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학생들을 선발하겠다는 뜻이다. 이공계 최우수 학생들의 병역 특례와 공학도의 생애소득, 고용안정, 보상체계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했으면 한다.” ―어느 대학 총장이 ‘정부의 R&D 예산 삭감은 정책 실패’라고 했다. 기술패권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해 정책 실패의 아쉬움이 크다. “과학기술 정책이 정쟁화하는 것도 문제다. 에너지 분야를 예로 들면 원전, 신재생 에너지, 영일만 유전까지 정쟁화 이슈가 많아지고 그 폭도 넓어지는 것 같다.” ―영일만 유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제 연구 분야 중 하나가 불확실성하에서의 의사결정이다. 저출산은 미래가 뻔히 보이는 확실성이 큰 이슈이지만 기후변화나 영일만 유전 개발은 불확실성이 크다. 이런 정책 추진은 어둠 속에서 운전하는 것과 같다. 대낮에 기어가는 건 미련한 짓이지만 어두울 때 마구 달리다간 사고 난다. 더듬더듬 조금씩 나가면서 이쪽이 아니다 싶으면 저쪽으로 방향을 바꿔 가며 가역적인 정책을 써야 한다. 희망 고문하며 비가역적인 정책으로 가다 석유 안 나오면 어떻게 하나. 이번 일로 석유 탐사 산업이 좌초될까 걱정된다.” ―40년 전 학장께서 대학 다닐 때와 비교하면 요즘 학생들은 어떤가. “예전에 고교생들에게 서울공대 설명회를 하다 놀란 적이 있다. 학생들이 의대 가면 여러 고민할 필요가 없어 좋다고 하더라. 예과 본과 인턴 레지던트 그대로 쭉 따라 올라가다 마지막에 개업할 거냐, 종합병원에 남을 거냐만 정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대 들어오면 교수도 되고 노벨상도 타고 장관이나 CEO도 될 수 있다’고 했는데 핀트를 완전 잘못 맞췄다.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불확실성이었다! 안정된 미래에 집착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기성세대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자동차, 반도체, 컴퓨터가 그러했듯 청년들이 사회 전체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새로운 기술 개발에 매력을 느끼는 기회를 많이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김영오 서울대 공대 학장(58)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 서울대와 미국 워싱턴대에서 토목공학으로 학사 박사 학위를 받은 후 NASA 박사후 연구원을 거친 수자원공학 및 기후변화 분야 전문가. 아시아오세아니아지구과학회(AOGS) 수문과학 섹션 회장으로, 서울대 학생처장과 과실연(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상임대표를 지냈다. ‘수월, 융합, 창의를 지향하는 학문공동체’를 비전으로 제시하며 32대 서울대 공대 학장에 선출됐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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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비혼 선언하면 축의금 달라”

    결혼 축의금 지출이 많은 5월, 결혼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청첩장을 받고 고민이 많아진다. 받을 일 없는데 꼭 내야 하나. 얼굴 안 볼 사이도 아니니 5만 원만 내고 가지 말까. 요즘은 당당하게 ‘비혼식’을 열고 축의금을 회수하거나, 비혼 친구가 여행이나 이사 갈 때 결혼한 친구들이 목돈을 모아 축의금 빚을 갚기도 한다. 몇몇 기업은 “비혼이지만 축의금은 받고 싶어” 하는 직원들에게 지원금을 주는데 일명 ‘비혼 축의금’을 둘러싼 찬반 논란이 뜨겁다. ▷비혼 축의금은 사내 복지와 공정을 중시하는 MZ세대 직원들을 붙들어두기 위해 기업들이 하나둘 도입하기 시작한 제도다. 직원이 결혼하면 유급휴가와 축하금을 주듯 비혼 직원에게도 비슷한 혜택을 주는 것이다. LG유플러스가 비혼 선언 시 결혼 축의금과 같은 기본급 100%와 유급휴가 5일을 주고, 롯데백화점은 40세 이상 직원이 비혼을 선언하면 지원금과 유급휴가 5일을 준다. 최근에는 공공기관으로는 처음으로 IBK기업은행 노조가 이 제도 도입 요구를 준비 중이다. ▷비혼 축의금을 요구하는 쪽에서는 일을 잘해 포상금과 휴가를 주는 것은 괜찮지만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적인 혜택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사내 복리후생 제도가 기혼자를 우대하고 있는데, 직원들 대부분이 결혼하고 정년 때까지 다니던 시절엔 문제가 없었지만 요즘은 미혼도 많고 회사도 자주 옮겨 다니므로 시대 변화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료 직원이 신혼여행이나 출산휴가를 간 동안 빈자리를 메우느라 고생한 비혼 직원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하는 차원에서도 지원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반대쪽에선 경조금이란 결혼하고 아이 낳고 부모님 돌아가시면 힘들고 비용도 드니 주는 것인데 결혼도 출산도 안 하면서 비혼을 선언했다는 이유만으로 축의금을 요구하는 건 경우가 아니라고 따진다. 그런 논리라면 ‘무자녀 학자금 지원’도 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기업으로선 인구 늘려주는 가족이 있어야 존재하므로 결혼하고 아이 낳는 직원을 우대하는 게 당연한데, 민간기업도 아니고 IBK기업은행 같은 공공기관이 비혼 축의금을 주면 저출산을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논리다. ▷예전에 어느 기업에서는 임직원 자녀가 대학에 가면 축하금을 주는 문제로 특혜 논란이 제기된 적이 있다. 결국 자녀가 대학을 안 가도 비슷한 지원금을 주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대학진학률이 높아진 후로는 대학 축하금 놓고 누군 받네 못 받네 하는 일은 사라졌다. 비혼 축의금 논란도 소수였던 비혼 인구가 늘면서 벌어진 일이다. 결혼이든 동거든 젊은 청년들이 축하받으며 짝을 짓고 아이도 낳는 문화가 대세가 돼 비혼 축의금 가지고 입씨름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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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영 칼럼]대통령이 일할수록 나라가 나빠져서야

    ‘해외 직구 금지’ 논란을 보고 두 번 놀랐다. 경제통인 국무총리 주재로 14개 부처가 관련 회의를 20번 넘게 하고도 소비자 편익에 눈 감은 대책을 내놓은 데 놀랐고, 소비자들이 ‘직구 계엄령’이라며 반발하자 3일 만에 대책을 철회한 속도에 놀랐다. 처음부터 잘했어야 하지만 잘못했을 때 늦지 않게 멈추는 것도 실력이다. 만약 대통령이 국내 기업 보호와 소비자 안전을 위해 직구 금지 지시를 내렸다면 이렇게 빨리 철회할 수 있었을까. 대통령이 앞장서다 제때 제동이 안 걸려 국민 피해와 여당의 정치적 부담을 키운 사례가 적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대통령실이 전담조직까지 두고 뒤늦게 올인한 부산엑스포 유치전이 그랬고 대통령의 수능 직전 킬러 문항 적폐 몰이가 그랬다. 부산엑스포는 사우디 대세론에도 “역전 가능하다”며 기업까지 동원해 열을 올리다 국력만 낭비하고 끝났다. 킬러 문항 배제 지시는 입시 혼란과 N수생 증가로 사교육비를 늘리고 시험 망친 학생들에게 ‘킬러 문항 지시 탓’이라 할 빌미만 줬다. 그 어떤 정책 헛발질도 연구개발(R&D) 예산 삭감과 의대 증원만큼 두고두고 나라를 골병들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과학기술계의 ‘이권 카르텔’을 겨냥해 “나눠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한 때가 지난해 6월이다. 올해 R&D 예산은 33년 만에 뭉텅이로 잘려 나갔고, 카르텔에 끼지도 못하는 계약직 신진 연구자들만 줄줄이 일자리를 잃는 바람에 연구의 대가 끊겨버렸다. 지난 총선에서 충청권의 얼음장 민심을 확인한 후로는 다시 “성장의 토대인 R&D는 예비 타당성 조사를 폐지하라”는 지시다. 깜깜이 예산으로 카르텔들 나눠 먹기 하라는 뜻인가. 일을 저질러 놓고 수습도 못하기는 “2000명은 그냥 나온 숫자가 아니”라며 대통령이 밀어붙인 의대 증원도 마찬가지다. 최근 의대 증원을 허용한 법원 결정에 대해 ‘정부의 승리’라고 하지만 그건 전공의들이 복귀할 때나 할 수 있는 얘기다. 전공의가 안 돌아오면 전문의, 공보의, 군의관 배출에도 줄줄이 차질이 생긴다. 필수의료 지방의료부터 죽어 나가고 전공의가 없어 수련병원들 도산하면 병원과 거래하던 제약회사 장비업체 약국 식당들을 포함한 주변 생태계까지 망가질 것이다. 전공의 협박과 설득에 실패한 정부가 새로 내놓은 대책이 외국 의사 도입이다. 원래는 외국 의사가 국내에서 환자를 보려면 정부가 지정한 38개국 159개 의대 출신에 한해 해당 국가 의사 면허를 딴 뒤 우리나라 의사면허 예비시험과 국가고시를 통과해야 하는데 한시적으로 국적 대학 따지지 않고 의사 면허만 있으면 받아준다는 것이다. 한국말 하는 외국 의사도 드물겠지만 원가도 안 쳐주는 필수의료 하겠다고 들어올 의사가 몇이나 되겠나. 온다고 해도 문제다. 힘 있는 사람들은 정부가 최고 등급을 준 지역 대학병원도 못 미더워 서울 병원 명의를 찾으면서 서민들에겐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건너뛴 의사들에게 몸을 맡기라는 건가. 대통령이 주도한 정책들은 ‘미스터리’로 회자된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기에 부산엑스포 급발진을 하고 R&D 카르텔, 킬러 문항, 의대 증원 2000명을 밀어붙이는지 그때마다 비선을 점치는 뒷말들이 무성했다. 정책적 맥락과 근거도 모호한 즉흥적 지시라도 참모나 장관들이 ‘격노’를 무릅쓰고 반대하거나 ‘플랜B’를 준비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킬러 문항 논란엔 “대통령은 입시 전문가”, 의대 증원엔 “의사 파업 시 전세기 띄워 환자를 해외로 보낸다”며 지시 사항을 정당화하기 바쁘다. 대통령이 엉뚱한 곳에 활을 쏘면 그에 맞춰 과녁을 그려주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탈이 나고 지지율도 떨어지는 것이다. 이번에는 대통령실에 민생물가 TF를 꾸리고 저출생수석실을 만든다고 한다. 대통령이 나서겠다 하면 물가가 잡히겠거니, 출산율이 오르겠거니 기대해야 하는데 ‘이번엔 또 뭔 일을’ 하는 걱정부터 앞선다. 저출생 정책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기획원 모델로 대응”이라며 밀어붙이기를 예고한 상태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1978년 개혁개방의 기치를 들면서 “맨발로 미끄러운 돌을 살살 밟으면서 강을 건너자”고 했다. 당심이 민심인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개혁은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대통령은 직구 금지 소동에 사과하며 “정책의 사전 검토와 국민 의견수렴 강화, 정책 리스크 관리 시스템 재점검”을 지시했는데 대통령실부터 그리해야 한다. 대통령이 나설수록 나라가 나아지기는커녕 현상 유지도 못하고 더 나빠진다는 말이 나와서야 되겠나.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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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이번엔 저출생수석 신설… 연금수석, 반도체수석은 안 만드나

    대통령비서실 조직을 보면 정부의 핵심 어젠다를 알 수 있다. 노무현 정부는 국민과 쌍방향 소통을 하겠다며 국민참여수석실을, 이명박 정부는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비상경제상황실을 신설했다. 박근혜 정부는 미래전략수석실에서 창조경제를 주도했고,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수석실을 신설해 1호 공약인 일자리 정책을 챙겼다. 집권 3년 차에 접어든 윤석열 정부가 저출생 극복이 시급하다며 저출생수석실을 새로 두기로 했다. ▷윤 대통령은 최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부총리급 부처로 승격시켜 저출생대응기획부를 신설한다고 발표한 데 이어 13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대통령실에도 이를 전담할 컨트롤타워 신설을 지시했다. 부처 신설은 정부조직법 개정에 시간이 걸리는 만큼 이르면 다음 주에 저출생수석부터 임명해 관련 정책을 챙기겠다는 것이다. 차관급인 초대 저출생수석은 체감도 높은 정책을 내놓을 수 있도록 40대 다둥이 워킹맘 중에서 찾고 있다고 한다. ▷한국은 ‘저출산 함정’에 빠져 있는 ‘국가 비상사태’다. 합계출산율 1.3명 미만인 초저출산이 20년 넘도록 이어지고 있어 강력한 출산장려책을 시행하지 않으면 출산율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새로 조직부터 만드는 것이 능사인지는 의문이다. 저출산 전담 조직인 저출산위의 위원장은 2012년 보건복지부 장관에서 대통령으로 격상됐다. 대통령이 컨트롤타워를 맡아도 성과가 시원찮았는데 행정부와 대통령실에 옥상옥으로 컨트롤타워를 두면 더 나아질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은 출산율 하락세가 평균 13년간 지속되다 반등에 성공했다. 한국엔 없는 별난 조직이 있어서가 아니라 고용 돌봄 교육 주거 문제 해결 등 공식 같은 정책을 꾸준히 실행한 덕분이다. 출산율이 걱정이라면 왜 우리 저출생 대책은 실패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정책 방향이나 설계가 잘못됐는지, 예산이 부족한 건지, 조직의 문제인지, 조직이 문제라면 새로운 조직이 더 효율적이라고 기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정책의 중요도에 따라 조직을 만들기 시작하면 연금수석 물가수석 반도체수석은 왜 안 두느냐는 말이 나올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미래전략수석실은 ‘창조경제는 한반도 3대 미스터리’라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다음 정부에서 폐지됐다.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수석실은 ‘일자리 파괴 정부’라는 혹평과 함께 정권 교체 후 사라졌다. 저출생수석실도 잘못하다간 인구는 못 늘리고 세금 쓰는 자리만 늘리다 끝날 수 있다. 저출생수석실이 생기면 대통령실은 출범 초기 2실장 5수석 체제에서 3실장 8수석 체제로 확대된다. 정부 조직을 슬림화하겠다던 약속과 거꾸로 가고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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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겁나는 가정의 달

    가정의 달 5월은 명절 못지않게 스트레스가 많은 시기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같은 기념일을 챙기려니 계획 짜느라 스트레스, 돈 나가서 스트레스, 차 밀려서 스트레스 받는다. 물가가 다락같이 오른 올해 가정의 달은 아예 ‘가난의 달’로 불린다. 월별로 따지면 12월 다음으로 결혼을 많이 하는 시기여서 주말마다 돌아오는 결혼식까지 다니다 보면 5월은 ‘탈탈 털리는 달’이 되기 십상이다. ▷특히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모두 챙겨야 하는 40대들 부담이 크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올해 40대 가정의 달 추가 지출 규모는 평균 56만9000원. 어린이날 아이들과 유명 놀이공원에 다녀온 사람들은 어린이 종일 이용권 5만 원에 외식비와 간식비, 기름값까지 최소 20만 원을 썼다고 한다. 어버이날엔 카네이션 꽃바구니 6만∼8만 원, 트로트 가수 포토카드를 사은품으로 주는 홍삼 선물세트가 최소 10만 원대이니 양가 부모님 뵙고 오는 데 식사비를 제외해도 30만 원이 넘게 든다. ▷각종 기념일에 5만∼10만 원 하는 결혼식 축의금까지 ‘지출의 달’ 목돈 마련을 위한 서민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배달 같은 단기 알바를 뛰거나 휴일과 야간 근무로 특근 수당을 챙긴다. 중고사이트에 물건을 내다 팔아 현금화하고 5월 전후로 식비와 여가비를 최대한 졸라맨다. 정기 적금을 들고, 미리 들어둔 적금이 없으면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거나 예금 가입과 동시에 이자부터 주는 적금에 가입해 ‘텅장(텅 빈 통장)’을 채워 넣는다. ▷가정의 달 후유증이 커지자 기념일 무용론도 제기된다. “요즘 애들은 모두 금쪽이여서 365일 어린이날인데 꼭 어린이날이 있어야 하나” “명절과 생신 챙기는데 효도하는 날까지 따로 정해져 있어 부담된다”는 것이다. 어버이날 양가 부모님 찾아뵙는 순서, 선물이나 식대 지불 문제로 명절 못지않게 부부싸움을 한다는 집들도 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없애고 대신 ‘가족의 날’을 만들어 한 번만 지내자는 제안도 나온다. ▷외국에도 ‘마더스 데이’가 있지만 후유증 얘기는 없다. 수수한 꽃다발을 건네는 정도로 부담이 크지 않다고 한다. 가정의 달 특수를 노리는 장사꾼들은 ‘돈 가는 곳이 마음 가는 곳’이라 부추기지만 부모 자식 간 정이 봉투로 전달될 리 없다. 요즘 TV에서 유명 연예인들이 늦둥이 자녀를 키우는 프로그램이 화제인데 다들 여유 있게 사는 집이지만 아이들이 웃는 순간은 아버지와 김밥을 만들어 먹거나 동네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는 때다. 그런 소소한 일상을 부모님과 공유하는 것이 효도 아닐까. 제사상 차리기 힘들어 명절이 싫듯, 놀이공원 입장료와 인기 가수 포토카드 부담에 가정의 달이 ‘겁나는 달’이 돼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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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지난해 방한한 외국인 환자 198개국 60만 명… 日中美 순

    5월 첫 주는 중국 노동절 연휴와 일본 황금연휴가 겹치는 주간이다. 요즘 피부과나 성형외과는 연휴를 맞아 양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들썩이고 있다. 5∼10일간의 연휴 기간에 ‘송혜교 피부’나 ‘김수현 콧날’을 만든 뒤 신속 친절한 건강검진을 받고 한의원에 들러 1년 치 한약까지 지어 가려는 의료쇼핑족들이다. 코로나로 주춤했던 의료관광이 재개되면서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환자가 사상 처음으로 60만 명을 돌파했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198개국에서 60만6000명의 환자가 몰려들었는데 가까운 일본(31%)과 중국(18.5%) 비중이 절반이고 미국(12.7%)이 3위다. 피부과, 성형외과, 내과통합, 검진센터 순으로 환자가 많았다. 일본 중국 미국 캐나다 사람들은 피부과, 몽골 베트남 러시아 사람들은 내과통합 진료에 몰렸다. 지난해를 제외하고 역대 가장 많은 환자가 찾았던 해는 2019년으로 49만7000명이 동반자와 입국해 의료비로 3조 원 넘게 쓰고 갔다. 이로 인한 생산유발액은 5조5000억 원이다. ▷한국 의사를 찾는 이유는 의료 기술이 좋고 의료비가 저렴하기 때문. 맹장 수술의 경우 미국은 1800만 원, 한국에선 150만 원대다. 동네 병원에선 오래 기다리지 않고 진료 가능하다는 점도 강점이다. 규모가 되는 병원들은 의료통역사를 두고 검사나 수술 후 회복기를 거쳐 출국할 때까지 전 과정을 돌본다. 대가족을 동반해 오래 머물며 일반 외국인 환자의 6배를 쓰고 가는 중동 환자들을 위해 기도실을 갖추고 할랄 환자식을 제공하는 병원도 있다. ▷K의료가 성장세라지만 글로벌 의료 시장의 순위는 10위권 밖이다. 상위권에 진입하려면 의료 기술의 격차가 큰 중증치료 시장을 잡아야 하는데 이 시장의 최강자는 미국과 독일이다. 아시아권의 강자로는 일본, 한국, 싱가포르가 꼽힌다. 이보다 기술은 떨어지되 의료비가 싼 나라들도 무시할 수 없다. 말레이시아와 튀르키예는 매년 100만 명 넘는 외국인 환자를 유치한다. 말레이시아는 공용어인 영어와 할랄 인증을 받은 치료법이 경쟁력이다. 튀르키예의 가성비 좋은 모발 이식 수술은 한국에서도 유명하다. 의료비가 미국의 10∼20% 수준인 인도의 추격세도 무섭다. ▷한국이 중증치료 시장에서 뒤지는 이유는 의료 기술보다는 비자 제도 탓이 크다고 한다. 의료관광비자(단기 90일 이하)를 받기가 어려워 치료와 회복 기간이 긴 환자들을 말레이시아나 튀르키예에 뺏기고 있다. 사전 상담과 사후 관리를 하려면 비대면 진료도 필요하다. 내년이면 치료 목적으로 국경을 넘는 이들이 4400만 명에 이를 전망이다. 의료관광 강국이 되기 위해서도 미용의료 쏠림 해소와 비대면 진료 제도화 같은 의료 개혁이 필요하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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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영 칼럼]건보 재정 거덜 낸 文케어, 의료 위기 초래한 尹케어

    여기 온몸에 암세포가 퍼진 중환자가 있다. 통증을 완화하고 체력을 보강해 가며 수술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의욕 충만한 외과 의사가 나타나 덜컥 배부터 갈랐다. 막상 열어 보니 종양을 떼려면 장기나 혈관까지 건드려야 해 환자가 죽을 판이다. 출혈은 계속되고 바이탈은 떨어지고, 그대로 덮을 수도 어쩌지도 못하는 상황…. 서울의 한 의대 교수가 이런 요지의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의대 증원 사태를 무모한 외과 의사의 의료사고에 빗댄 것이 절묘하다. 환자의 보호자 입장에선 원점 재논의를 요구하며 “일단 덮자”는 의사도, 국립대 의대를 동원해 증원 축소안을 제시하며 “종양 몇 개라도 떼자”는 정부도 미덥지 않고 불안하기만 하다. 선진국 수준이라는 한국 의료는 속으론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상태다. 박정희 정부가 건강보험을 도입하고 노태우 정부가 완성할 때까지는 좋았으나 이후에 나온 정책들이 줄줄이 실패하면서 병을 키웠다. 김영삼 정부는 미니 의대를 무더기로 신설해 교육의 질과 효율을 떨어뜨렸고, 김대중 정부의 의약분업은 환자들에게 병원과 약국 두 곳을 모두 돌게 하며 건보 재정을 축냈으며, 건보 통합과 진료권 폐지는 전국의 환자들을 서울 대형병원에 불러모으면서 지역 의료를 약화시켰다. 의학전문대학원은 김대중 정부가 계획하고 노무현 정부가 실행했는데 늦은 나이에 의대 공부를 시작한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미용 의료로 쏠리면서 필수의료 위기만 키웠다. 문재인 정부의 ‘문케어’가 보장률은 찔끔 올리고 건보 재정을 거덜 낸 건 다들 아는 사실이다. 거듭된 정책 실패로 기신기신 연명해온 K의료에 2000명 사태는 치명적이다. 의료계에서는 올해 사망자 수가 36만 명대로 1만 명 늘어날 것이라는 추산이 나온다. 의료공백이 아니었다면 살 수 있었을 ‘초과 사망자’들이다. 앞으로가 더 큰 일이다. 필수의료 회생이 시급함에도 2000명 발표 후 수련병원에서 필수의료를 책임지던 전공의들부터 빠져나갔다. 이들 중 상당수는 비필수 분야로 바꾸거나, 의사 수가 늘기 전에 일찌감치 개원해 한몫 벌려고 할 것이다. 정부가 진료 유지 명령으로 필수의료 의사를 ‘의노예’ 부리듯 하는 모습을 본 의대생들이 필수의료를 하려 들까. 다음 달부터는 간호사 월급을 못 주는 수련병원들이 나온다고 한다. 못 버티고 도산하면 병원 직원들은 실업자가 된다. 정부 지원도 받기 어려운 사립대 병원 몇이 매물로 나왔다는 얘기가 들린다. 수련병원이 문 닫으면 그 많은 의대생들은 어디서 수련하나. 국립대병원 망하지 않게 하고 의대 교육 인프라 늘리는 데만 해도 어마어마한 재정이 들 것이다. 10년 후 증원된 의사들이 배출돼 의료비 지출을 늘리기도 전에 건보 누적 적립금은 바닥나게 돼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 혈세 낭비하는 포퓰리즘 정책”이라며 문케어를 폐기했다. 후임 대통령은 ‘윤케어’를 뭐라 평가하게 될까. 역대 정부의 의료정책 실패에 대해 이규식 건강복지정책연구원장은 제도에 대한 이해 부족을 근본 원인으로 꼽는다. 같은 사회보험인 연금은 공동으로 마련한 돈주머니에서 모두가 연금을 지급받지만 건강보험은 주머니는 같이 채워도 병원에 가는 횟수는 달라 의료 쇼핑 같은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 건보 도입 초기엔 재정 범위 안에서 의료 이용을 통제하는 일본 제도를 따라해 문제가 없었는데, 이후 ‘한국형’으로 운용하면서 수요 관리는커녕 선심성 정책들을 남발하거나, 장점은 한 가지인데 부작용은 열 가지인 설익은 정책들을 밀어붙이다 재정만 축내고 제도 왜곡을 자초했다는 분석이다. 정부는 의대 증원을 의료개혁이라고 강변한다. 진짜 개혁은 다른 선진국의 2.5배나 되는 의료 이용을 줄이고, 의사들이 비급여 과잉 진료를 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도록 의료 원가를 보상해주는 것이다. 4400만 유권자에게 병원 덜 가고 보험료와 세금 더 내라, 싫은 소리 하기보다는 14만 의사와의 싸움이 쉬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의대 증원 주도 의료개혁’이란 ‘소득 주도 성장’만큼이나 황당한 발상일 뿐이다.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가 곧 가동된다. 특위부터 꾸린 뒤 의대 증원을 논의했어야 하는데 일을 거꾸로 하다 보니 본업인 의료개혁이 아니라 당장 배 열고 누운 환자 출혈 막고 바이탈부터 잡아야 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정부는 증원 철회는 없다고 하고, 의사들은 그런 정부를 ‘돌팔이’라 욕하면서도 나서지 않는다. 최악의 의료사고다. 어쩌자고 배부터 갈랐는지 그 외과 의사도 후회하고 있을까.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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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개인 맞춤형’ 암 백신 경쟁

    암 정복의 신기원을 열어줄 약물로 주목받는 암 백신은 암에 걸릴 확률을 낮추는 예방용과 재발을 막는 치료용으로 나뉜다. 현재 널리 쓰이는 자궁경부암 백신이 예방용이고, 치료용 백신은 작동 원리가 백신과 같지만 엄밀히 말하면 치료제다. mRNA(메신저 리보핵산) 코로나 백신을 선보였던 세계적 바이오 기업들이 mRNA 기반의 암 백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식품의약국(FDA)이 최근 암 백신 허가 준비를 마쳤다고 발표하면서 상용화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선두주자는 미국 모더나다. 오래전부터 암 백신 개발에 주력해 오다 갑작스러운 코로나 사태로 mRNA 기술의 안전성을 확인한 후론 코로나 백신으로 벌어들인 돈을 미국 머크와 함께 암 백신 개발에 쏟아붓고 있다. 흑색종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2상에서는 항암제와 함께 썼더니 사망 위험이 62% 줄어들었다고 한다. 모더나는 임상 3상을 마치는 대로 2030년 암 백신을 출시할 계획이다. 미국 화이자와 독일 바이오엔테크는 임상 1상 결과 종양 성장이 멈추거나 작아지는 효과가 나타났다고 밝혔다. 2030년까지 암 환자 1만 명 치료가 목표다. ▷mRNA 암 백신은 환자의 종양에서 채취한 암세포 단백질의 유전정보가 담긴 mRNA를 환자 몸속에 넣어 면역반응을 유도한 뒤 암세포를 죽이게 하는 원리다. 일반 백신과 달리 암세포 단백질의 유전정보만 있으면 바로 백신 개발이 가능해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면 개인 맞춤형 백신을 6주 만에 생산할 수 있다. 종양의 위치를 몰라도 치료가 가능하고, 항암제와 달리 정상 세포까지 죽이거나 머리카락이 빠지는 등의 부작용이 거의 없어 ‘웃으며 치료받는 약물’로 불린다. ▷하지만 가장 속도가 빠른 모더나도 아직 임상 3상 단계이다. mRNA 암 백신을 맞은 환자가 적고, 장기간 추적 관찰한 환자는 더욱 적다. 백신은 건강한 사람이 맞지만 암 백신은 몸이 약해진 암 환자가 맞는 약물이어서 더욱 조심스럽다. 개인 맞춤형이므로 6년 후 출시돼도 가격이 비싸 엄두를 못 낼 수 있다. 췌장암 백신을 개발 중인 바이오엔테크는 1회 투여용 백신 개발 비용을 35만 달러(약 4억8000만 원)에서 10만 달러로 낮추는 데 10년이 걸렸다. ▷mRNA 암 백신 시장은 2033년 32조 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암뿐만 아니라 심혈관이나 자가면역 질환 등 모든 질병 치료제로 활용될 수 있어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이 시장을 주도하는 이들이 의과학자들이다. 모더나의 암 백신 개발 책임자도 종양학 전문의다. 환자 한 명 한 명의 생명을 살리는 데서 보람을 찾는 의사도 필요하지만 인류의 건강을 지키는 연구로 세계 바이오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의과학자들도 많아져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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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북한, 그래도 그리워하는 이유는…” [월요 초대석]

    《1980년생인 그는 44년간 일곱 개 이름으로 불렸다. 북한 양강도 혜산에서 ‘김지혜’로 태어나 어머니의 재혼으로 ‘박민영’이 됐다가, 17세에 중국에 대한 호기심에 압록강으로 국경을 건넌 뒤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12년간 ‘채미란’ ‘장순향’ ‘채인희’ ‘박선자’로 이름을 네 번 바꿔가며 불법 체류자로 살았다. 2008년 한국 땅을 밟은 뒤로는 17년째 ‘이현서’다.2013년 탈북자로는 처음으로 TED 강연을 한 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고 유엔 북한 인권 청문회장에서 증언하는 등 북한 인권운동가로 세계를 누볐다. 한동안 강연 무대에서 사라졌던 그가 올해 초 개봉된 미국 다큐멘터리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로 돌아왔다. 실제 탈북 과정을 생생히 담은 이 영화 제작은 35개국에서 번역 출간된 밀리언셀러 회고록 ‘이현서, 나의 일곱 번째 이름’에서 시작됐다. 그는 영어 내레이션과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 뜻밖에 2021년부터 오너 펀드매니저로 일한다고 했다.》―올해 아카데미상 다큐 부문 예비후보로 선정됐는데 아쉽게도 최종 후보작은 되지 못했다. “다큐 영화 167편중 15편을 뽑는 예비후보로 선정된 것만 해도 큰 성과라 생각한다. 미국 600개 극장에서 상영됐고 올해 초엔 미 국무부 청사에서 상영회가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군사 퍼레이드 같은 북한의 선전용 영상만 보다 실제 북한 사람들의 처참한 실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현서 씨의 회고록이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 “2016년 미국에서 저자 사인회를 했는데 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 왔다. ‘현서 씨를 위해 뭔가 해주고 싶다’기에 이 회고록을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 북한 인권 실태를 널리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사람이 ‘비욘드 유토피아’ 제작자에게 이 책을 건넸고 판권 계약을 했다.” ―정작 영화에는 현서 씨 얘기보다 다른 탈북 가족의 얘기가 비중 있게 나온다. “북한에 사는 이모네 탈북 여정을 찍으려다 계획이 바뀌면서 전체 스토리가 달라졌다. 영화 ‘엑스맨’의 감독이 내 이야기를 3시간짜리 새로운 상업 영화로 찍고 싶다고 해서 만났다. 가족을 탈북시키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 호주 여행객 역엔 호주 배우 휴 잭맨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내 배역을 맡을 한국어 영어를 하는 20대 여배우를 못 찾고 있다. 현재 투자자들과 협상 중이라고 한다.” ―영화 속 북한 가족은 중국-베트남-라오스-태국-한국 루트로 탈북하느라 브로커만 50명 넘게 거쳤다. 그런데 현서 씨는 중국 상하이-인천국제공항 루트로 2시간 만에 탈출했다. 브로커 비용도 한 푼 쓰지 않았다. “탈출 루트를 정하려고 지도에서 베트남 라오스가 어딨는지 찾아보다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인천공항까지만 가면 되는 거잖아! 그래서 상하이에서 인천을 경유해 방콕으로 가는 왕복 항공권을 샀다. 중국에서 마지막 신분증 이름은 ‘박선자’인데 정신병을 앓고 있는 한국계 중국인 소녀의 것을 비싸게 산 진짜 신분증이었다. 소녀의 부모가 신분증을 팔아 딸 치료비로 쓰려 한 것이다. 진짜 신분증이 있으니 위험하게 가짜 여권을 만들 필요도 없고 태국 비자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그땐 중국인이 한국 비자 받는게 엄청 어려웠다.” ―상하이에서 방콕으로 바로 가지 않고 인천을 경유해 3200km를 우회하는 여행 경로는 누가 봐도 이상하다. “상하이 출입국 관리소에서는 서울에 사는 남자친구가 인천에서 방콕까지 같은 비행기를 예약해 함께 가려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10분 넘게 여권 신분증 운전면허증을 검토하더니 통과시키더라. 정작 인천공항에 도착해 내가 망명을 원하는 북한 사람임을 증명하는게 어려웠다. 불법 체류하려는 중국 조선족이라 여긴 것이다.” ―중국에서 바로 한국으로 오지 않고 12년간 살았다. “17세에 압록강을 건널 땐 한국에 온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몰래 중국 드라마를 본 뒤 중국이 궁금했다. 불법 체류자로 불안에 떨며 살다 ‘박선자’의 진짜 신분증을 산 뒤로는 한국 첨단기업의 중국법인에 통역 겸 비서로 취직해 생활도 안정이 됐다. 그런데 2004년엔가 TV에서 베이징 한국 대사관으로 어른과 아이들이 목숨 걸고 돌진하는 장면을 봤다. 앵커가 정치적 망명을 시도한 북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배고픔이나 나처럼 경솔한 호기심이 아닌 정치적 이유로 탈북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한국행이 목숨을 걸 만한 가치 있는 일임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상하이에서 사귄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싶었다.” 그는 2008년 한국에 먼저 온 뒤 어머니와 남동생을 설득해 탈북시켰다. 중국-라오스 루트였는데 많은 검문소와 이민국 사무소 등 곳곳에서 붙들려 브로커 쓰고 뇌물 쥐어주며 해결하느라 1년이 걸렸다. 세 가족이 서울서 재회한 건 2010년 8월이다. ―세 가족이 모두 자유를 찾았으니 해피엔딩이다. “행복해지기란 남한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북한에선 충성심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니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한국에선 개인 능력이 중요하니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북한에서 받은 교육은 여기선 쓸모가 없다. 특히 한국어가 영어보다 어렵다. 메뉴판의 글씨 ‘나초’ ‘팝콘’ ‘콜라’ 모두 아는 글자인데 뜻을 모르겠더라. ‘미팅이 있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를 나와 택시를 탔다’는 말을 못 알아들었다. 외래어를 일일이 외우느니 차라리 영어를 공부하자 싶어 한국외국어대에서 중국어 영어를 복수 전공했다. 자신이 선택한 대로 사는 자유란 두려운 존재일 수 있다.” ―남동생은 미국 컬럼비아대 학사 석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에서 결혼해 아이 낳고 잘 살고 있다. “나도 도왔지만 학자금 대출 받아가며 악바리처럼 공부했다. 젊은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힘들다. 어머니는 지금도 북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몹시 그리워한다. 왜 탈북자들은 자유와 가족을 모두 가질 수 없고 하나를 선택해야 하나.” ―북한을 지옥 같은 곳이라 하면서도 북한을 그리워하는 탈북민들을 보면 이해가 안 된다. “북한이 아니라 가족과 고향이 그리운 것이다. 탈북민들은 두 부류가 있다. 정치적 박해를 받고 굶주리며 살았던 사람들은 빠르게 적응한다. 반면 출신성분이 좋아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이들은 서울 생활이 벅차다. 국가가 다 정해주기 때문에 경쟁할 필요가 없는 단순하고 질서정연한 삶을 그리워할 수 있다. 이곳에선 이등 시민으로 사는 탈북민들이 적지 않다. 사람은 자유만으로 살 수 없다. 가족도 있어야 하고 자존감도 있어야 한다.” ―한국행을 결행하게 한 그 남자는 어떻게 됐나. “서울에 와서도 한동안 사귀면서 프러포즈를 기대했다. 강남 부잣집 아들이었는데 어느 날 내게 대학 진학을 권하며 ‘의사나 약사 시험에 합격하면 우리 부모님이 좋아할거야’라고 말했다. 바로 알아보니 의대는 학비도 비싸고 1등을 해도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결국 내가 ‘우리에겐 미래가 없다’고 끝냈다. 친구로 헤어졌다.” ―현서 씨는 강연료가 1만 달러, 줌으로 하면 5000달러를 받는다고 들었다. 강연은 왜 그만둔 건가. “매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게 힘들었다. 사람들은 내가 일곱 살 때 공개 처형을 목격하고, 가족과 목숨 걸고 탈출했던 얘기를 듣길 원한다. 지금 나는 잘 살고 있는데 불행했던 얘기만 되풀이하다 보니 과거에 갇혀 지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우울증이 왔다.” ―새로 시작한 일이 왜 펀드매니저인가. “자본주의의 끝판왕이 금융이니까. 숫자에 밝은 편이다. 강연료와 인세 수입을 펀드에 투자했는데 수익률이 좋아 직접 해보고 싶었다. 2021년 투자자산운용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작은 투자일임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돈이 모이면 재단을 설립할 계획이다. 젊은 탈북민을 돕는 프로그램은 많은데 고령자를 돕는 곳은 많지 않다.” ―일곱 개의 이름으로 살았다. 어느 이름으로 불릴 때 가장 행복했나. “박민영. 겨울철 눈 덮인 산과 석탄 타는 냄새, 오래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아늑한 품, 다정한 이모 삼촌들과 함께 살았던 시절이 그립다. 그땐 바깥세상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이현서’ 빼고는 모두 북한에서 내 정체를 알아낼까 봐 지어낸 가짜 이름들이다. 내가 묻힐 곳은 이곳 서울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심 없는 친절을 베풀어줬다. 이제 나도 남을 돕는 인생, 이 나라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 내 유일한 진짜 이름, ‘이현서’의 이름으로.”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4-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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