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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부인 김건희 여사의 디올 백 수수 논란 등에 대해 전통적인 방식의 기자회견 대신 특정 방송사와 대담을 갖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실은 공식적으로는 “아직 정해진 것이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여러 매체를 통해 ‘대통령실 관계자’발로 비슷한 보도가 나오는 것을 보면 상당한 무게가 실린 것으로 보인다. 대담 방송사로는 KBS가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안이하고 자기중심적인 발상이다. 얻는 것은 없이 ‘꼼수’ 논란만 부르게 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이 먼저 회견 주제 전반에 대해 모두(冒頭) 발언을 하고, 이어 다양한 매체에 소속된 다수의 기자들과 자유롭게 질의응답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이 모습을 편집과 가공 없이 그대로 TV를 통해 생중계하는 것은 63년간에 걸쳐 공인되고 검증된 기자회견 방식이다.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961년 1월 25일 이런 방식으로 첫 기자회견을 했을 때나 지금이나 그 형식도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케네디 대통령이 처음 이 방식을 거론했을 때, 대다수 대통령 참모들과 정부 관료들, 언론인들은 거세게 반대했다고 한다. 녹화방송과는 달리 생방송에서는 실언이나 부주의한 발언이 나왔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케네디 대통령이 이 방식의 기자회견을 임기 내내 고수했다. 임기 중 평균으로 따지면 17일에 한 번꼴로 기자회견장을 찾았다. 국민과의 직접 소통에, 이보다 효과적인 방식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성별, 인종별, 사회계층별, 지역별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수백 명의 기자들이 어떤 사전 각본이나 조율 없이 대통령과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진솔한 메시지가 국민에게 전달될 수 있었고,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미국 국민들이 궁금해하고 기대하는 바를 왜곡이나 굴절 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비단 케네디 대통령 이후 미국에서만 굳어진 전통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신년이나 취임 1주년 같은 의미 있는 시점을 잡아 생중계로 기자회견을 하는 것이 1968년 이후 관행으로 자리를 잡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 정도가 예외였을 뿐이다. ‘사전 각본’ 논란도 문민정부 이후에는 사라져 가는 중이다. 이처럼 효율적이면서 오랜 전통으로까지 자리 잡은 방식을 마다하고 굳이 특정 방송사와의 대담 방식을 선택할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 신년 회견이나 취임 ○년 회견과 같은 주요 기자회견을 특정 방송사와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한 것은 매우 예외적이다. 이명박 문재인 대통령 때 이런 전례가 있지만 몇 차례 생방송 기자회견을 한 뒤에 이런 형식을 취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 근 2년 만의 2번째 회견을, 그것도 18개월 만에 하는 회견을 특정 방송만 골라 한다는 데 선뜻 수긍할 수 없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이달 18일 약 2시간 20분에 걸쳐 자신의 개혁 비전에 대해 설명하고 질의·응답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여기에는 기자 약 250명이 참여했고 24개의 질문이 나왔다. 그런데 일부 기자들이 발언권을 얻기 위해 엘리제궁의 언론 담당자들에게 메신저 등으로 질문을 미리 보냈다고 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언론 담당자들이 껄끄러운 질문을 피하기 위해 이 같은 일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훨씬 더 민감하고 논쟁적인 현직 대통령 배우자의 스캔들과 특검 문제가 회견의 핵심 주제다. 윤 대통령의 회견이 보수층·중도층·진보층을 가리지 않고 다수 국민에게 공감을 얻으려면 가능한 한 다양한 언론사가 참여해야 하고, 모두에게 투명한 절차를 통해 공정한 질문 기회가 제공돼야 한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특정 언론사와만 대담을 한다는 것은 시작도 하기 전에 ‘약속 대담’ ‘짬짜미 대담’ 논란을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대담 방송사로 거론되는 KBS는 보도 공정성과 편향성을 둘러싸고 야권의 집중 공격을 받는 상황이다. 윤 대통령이 회견을 한다고 해서 김 여사를 둘러싼 부정적인 여론이 수그러질지는 알 수 없다. 사과나 유감 표명을 할지, 어떤 수위로 할지, 어떤 후속 조치를 내놓을지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다를 것이다. 다만 껄끄러운 질문이나 장면을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국민은 많은 의구심을 갖게 될 것이고 부정적인 효과가 커지게 될 것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이야기하면서 “대통령의 직무 수행 과정이 투명하게 드러나야 하고, 국민들로부터 ‘날 선 비판과 다양한 지적’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어떤 회견 방식이 바람직한지는 이 말 안에 답이 있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보신주의에 빠진 관료주의 시스템에 대한 혁신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 단임제에선 정부가 5년마다 바뀌니 공무원이 적당히 시간만 끌며 움직이지 않는다. 차라리 내각제에선 정치세력 교체와 상관없이 차관 중심으로 관료주의가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취지의 발언도 나왔다고 한다.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윤 대통령 생각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다만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대통령실이나 내각에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되는 현실에서, 잘못된 처방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사실관계는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차관 중심 관료주의’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내각제 국가는 일본이다. 표면상 각 부처(일본식으로는 성청·省廳)의 장관은 여당 의원이 맡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인사권을 장악하고 각 부처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장관이 아니라 내부 관료 출신의 사무차관인 경우가 많았다. 사무차관을 정점으로 한 관료집단의 힘이 워낙 세다 보니 일본은 ‘의원내각제가 아니라 관료내각제 국가’라는 개탄이 나왔을 정도다. 이런 시스템의 장점이 주목을 받은 시기도 한때 있었다. 변덕스러운 정치 외풍을 차단함으로써 행정의 일관성을 높였고 공무원의 전문성을 키우는 데도 기여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부처 이기주의와 칸막이 행정 같은 부작용이 순기능을 압도하면서, 관료집단은 가장 시급한 개혁 대상 중의 하나로 꼽히게 됐다. 이에 따라 나온 대표적인 조치가 2014년 내각인사국 설치다. 각 부처별로 관료집단이 틀어쥐고 있던 고위공무원 인사권을 총리와 내각의 수중으로 가져간 것. 이를 통해 개혁으로 첫발은 뗐다고 하지만 ‘망국론’까지 나오는 관료주의의 근본적인 병폐를 수술하기까지는 갈 길이 먼 상황이다. 일본의 예를 보더라도 내각제라고 해서 관료주의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단임제 여부도 마찬가지다. 임기 말이라면 모르겠지만 임기가 3년도 넘게 남은 정권에서 단임제, 중임제 따져가면서 일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공무원이 어디 있겠는가. 원인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관료사회의 보신주의와 무사안일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의 양상을 보면 문재인 정부 초기와 특히 비슷한 측면이 많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과 함께 거의 전 부처에 적폐청산TF를 꾸려 대대적인 사정 몰이를 했다. 그 과정에서 실무자급 공무원들까지 조사 대상이 되고 심한 경우 징계나 수사 의뢰 대상이 됐다. 그러다 보니 ‘다음 정권에서 책잡힐 일은 하지 말자’는 보신주의가 급속히 확산됐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일이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비슷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해 공무원 피살’ ‘통계 조작’ ‘태양광 비리’ ‘월성원전 폐쇄 결정’ 등에 대한 전방위 수사와 감사가 진행 중이다. 이런 일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는데, 어떤 공무원이 몸을 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명백한 비리나 부정에 대해 눈을 감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4대강 감사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4번, 5번까지 이뤄지는 식의 감사는 공직사회를 움츠러들게 할 뿐 어떤 공감도 얻어내기 어렵다. 정책 판단의 영역까지 사법의 잣대로 재단하려 한다는 논란의 소지를 남기는 것도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을 더 고질화시킬 뿐이다. 특히 현 정부와 전 정부를 가리지 않고 ‘직권남용죄’를 적용해서 공직자들을 수사하거나 기소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숙고해 볼 여지가 많다. 일본에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직권남용죄가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공무원이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뇌물이나 횡령과는 달리 추상적인 범죄여서, 주관이 개입할 소지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 검찰은 2017∼2021년 5년간 고소·고발이나 검경의 인지를 통해 4891건의 직권남용 범죄를 접수했는데, 기소는 고작 5건에 그쳤을 정도다. 그나마도 한국처럼 공무원 상하관계에 직권남용죄를 적용해 기소하는 사례는 아예 찾아볼 수 없다. 앞서 보도에 따르면 윤 대통령 발언과 관련한 후속 조치의 하나로 부처 간 칸막이를 허물어 성공한 해외 사례를 찾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내친김에 해외에서 주요 공직자를 개인 비리가 아닌, 정책 결정과 관련해서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하는 사례가 얼마나 있는지도 조사해 보기를 바란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하자마자 ‘역풍’을 만났다. 한 위원장이 인선한 임명직 8명의 비대위원 중 2명의 과거 발언이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는 것. 순풍보다는 역풍이 많은 게 세상사라곤 하나, ‘배’가 항구 밖을 나서기도 전에 거센 역풍을 만난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우선 민경우 비대위원은 지난해 10월 한 토크콘서트에서 “지금 가장 최대의 비극은 노인네들이 너무 오래 산다는 것이다. 빨리빨리 돌아가셔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과거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했던 “60,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아요”보다 훨씬 고약하다. 한 위원장은 비대위 출범식에서 “우리 당은 어르신을 공경하는 정당”이라고 했는데, 이 발언이 통째로 무색해지게 됐다. 박은식 비대위원이 과거 자신의 SNS에 올렸다는 “전쟁에서 지면 ‘집단 ㄱㄱ’이 매일같이 벌어지는데 페미니즘이 뭔 의미가 있냐”는 주장도 어이가 없다. 페미니즘에 대한 찬반을 떠나, 집권 여당의 비대위원을 맡기에는 인식이나 표현의 수준이 너무 천박하다. 민 위원은 파문이 확산될 조짐에 임명장을 받은 지 하루 만에 사표를 냈지만, 이대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다. 한 위원장의 사람 고르는 안목과 검증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도 있다. ‘한동훈 비대위호’의 뱃머리가 향한 방향이, 불필요한 역풍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동훈 비대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보수여당 비대위의 가장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는 ‘2012년 박근혜 비대위’를 철저하게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이 30% 선마저 무너진 위기 상황에서 총선을 100일가량 앞두고 출범한 박근혜 비대위의 결정적인 성공 요인은 크게 두 가지다. 이명박 대통령과의 과감한 차별화와 중도 확장 전략이다. 박근혜 비대위는 지나치게 ‘시장지상주의적’인 정강·정책을 ‘공정성’과 ‘복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정하고 보수의 ‘터부’로 통하던 빨간색을 당색(黨色)으로 채택하는 등 중도 확장에 총력을 쏟아부었다. 당명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그 결과로 패색이 짙던 19대 총선의 판세를 뒤집고 과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한 위원장은 윤석열 대통령과 오랜 상하관계로 맺어진 ‘인연의 빚’이 있고, 윤 대통령에게는 아직 3년 5개월이나 임기가 남아 있다. 경쟁관계였던 이명박-박근혜의 차별화를 뛰어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그렇기에 한 위원장은 경제·민생 살리기를 통한 중도 확장에 더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한 위원장은 중도 확장을 위한 경제·민생 살리기보다는 지지층 다지기를 위한 ‘운동권 특권 세력 청산’에만 ‘올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12월 26일 비대위원장 수락 연설에서는 ‘숙주’와 같은 자극적인 용어를 써가면서까지 386 운동권에 대한 거친 전의(戰意)를 드러내 보였다. 민 비대위원에 대한 인선도 그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한 위원장은 29일 민 위원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기득권과 싸우다 누구보다 견고한 기득권이 돼 버린 운동권 특권정치 청산에 앞장서 주실 분”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한동훈 비대위의 임명직 비대위원 8명 중 경륜과 중량감이 있는 경제·민생 전문가로 꼽을 만한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시급한 경제·민생 현안 해결을 제쳐 두고 ‘운동권 특권정치 청산’을 비대위의 최우선 과제로 앞세우는 데 대해 지지층은 박수를 보낼지 모른다. 그러나 불경기와 고물가 고통에 시달리는 서민층이나 총선 캐스팅보트를 쥔 중도층의 공감을 끌어내기는 어렵다. ‘386 운동권 정치’는 지난 대선에서 이미 한 차례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여전히 그들의 특권정치가 국가의 미래와 민생을 위협하는 문제라면 한 위원장이 앞장서 싸우지 않더라도 현명한 국민이 올해 총선에서 또 한 번 심판할 것이다. 한 위원장은 소설 ‘모비딕’을 자신의 최고 애독서로 꼽는다. 소설은 괴물고래 ‘모비딕’에게 한 다리를 잃은 에이허브 선장의 광기 어린 복수에 관한 이야기다. 개인적인 복수에 모든 것을 건 에이허브 선장은 결국 모비딕의 눈에 작살을 꽂아 넣는다. 그러나 그 대가는 자신뿐 아니라 ‘피쿼드’호의 선원 전원(소설 속 화자만 제외)의 죽음이다. 한 위원장은 자신이 모비딕을 향한 에이허브 선장의 싸움처럼 공허하고 무모하면서 값비싼 대가를 필요로 하는 싸움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아직 뱃머리를 돌릴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첫 시정연설에서 우리 사회의 가장 시급한 개혁 과제로 연금, 노동, 교육을 꼽았다. “지금 추진되지 않으면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게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1년 7개월이 지나도록 3대 개혁의 진전은 없는 상태다. 제자리걸음 아니면 뒷걸음질이다. 연금개혁과 관련해서는 맹탕이나 다름 없는 ‘정부 개혁안’을 국회에 던져 놓았다. 교육개혁은 ‘만 5세 초등학교 입학안’을 준비 없이 내밀었다가 역풍을 맞은 뒤 오리무중이 됐다. 그래도 한 가닥 희미한 불씨라도 살아있는 것을 굳이 꼽자면 노동개혁 정도다. 지금까지 공전을 거듭해온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노사정 대표자들이 17일 윤 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작은’ 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온 기회인 만큼 어떻게 해서든 살려 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올해 3월 추진하려다 무산된 ‘근로시간 개편안’의 틀에 매달리는 것은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크다. ‘주 69시간 근무’라는 주홍 글씨가 한 번 새겨진 이상, 그것을 지워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아예 판을 바꿔서 윤 대통령의 공약집에도 관련 내용이 있었고 인수위에서도 검토한 적이 있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collar exemption·고연봉 관리·전문직 근로시간 규제 적용 제외)’부터 테이블에 올려 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세계적으로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을 선도하는 미국은 한국과 달리 연장근로에 대한 제한이 전혀 없다. 법정 근로시간인 주 40시간을 넘어서는 연장근로에 대해 기본시급의 1.5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급하는 것이 전부다. 그뿐 아니라 총연봉이 10만7432달러를 넘는 고연봉 임원·관리직·전문직·전산직에 대해서는 연장근로 수당을 지급할 의무도 없다. 이것이 이른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다. ‘몰아서 일하기’가 가능한 이런 제도적 바탕 위에서 애플이 나올 수 있었고, 테슬라가 나올 수 있었다.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은 장시간 근로를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다. 고연봉 관리·전문직의 경우 근로시간이 아니라 일의 성과가 중요하다는 취지에서다. 일본이 2019년 일명 ‘고도(高度) 프로페셔널 제도’라는 이름의 일본식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를 도입한 것도 2차산업 중심의 시간급제를 탈피해 노동생산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다. 일본의 경우, 노사 합의를 전제로 고도의 전문지식을 갖추고 연수(年收) 1075만 엔이 넘는 노동자에 대해서는 노동시간과 관련된 규제를 하나도 적용하지 않는다. 금융상품개발자, 컨설턴트, 연구개발자, 공인회계사, 변호사 등이 대상이다. 출퇴근이나 휴가에 대해서는 노동자가 자유롭게 의사결정권을 행사한다.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연간 104일의 휴일도 보장받는다. 한국에서도 윤 정부 이전부터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 도입 논의가 있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19년 10월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김병관 의원은 ‘근로소득 상위 3% 이내’ 고소득 근로자에 대해 주 52시간 근로제 적용을 제외하는 법안을 대표 발의하기까지 했다. 한국에서 ‘근로소득 상위 3%’면 2021년 기준으로 연봉 1억2200만 원 수준이다. 첨단 분야 연구개발이나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 억대 고액 연봉을 받는 핵심 인재라면 회사에 대해서도 충분한 협상력이 있다. 이들의 근로시간까지 국가가 나서서 미주알고주알 간섭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올해 한국의 대중 무역수지는 31년 만의 첫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중국 경제가 한국을 추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구조적인 현상이다. 이대로 가면 잠재성장률이 0%대, 심지어 마이너스로 추락할 것이라는 경고도 안팎에서 나온다. 한국 경제가 이처럼 급속히 가라앉는 배경에는 2019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 34위로 꼽히는 낮은 노동 유연성이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장시간 근로에 따른 부작용을 개선하려면 주 52시간 근로제의 큰 틀은 필요하다. 하지만 주요 경쟁국들에 비해 지나치게 경직적이라는 문제점을 시급히 개선하지 않으면, 반도체 바이오 배터리 미래자동차 인공지능(AI) 금융 등 핵심 분야의 경쟁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진 핵심 인재들만이라도 획일적인 52시간 규제의 족쇄에서 풀어줄 필요가 있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더불어민주당 전·현직 국회의원들의 출판기념회에서 막말이나 비속어 발언이 줄을 잇고 있다. 출판기념회장의 분위기 그리고 막말·비속어(이하 막말)가 반복되는 패턴을 보면 어느 개인의 생각이라기보다는 특정 그룹의 집단정서, 실언이라기보다는 의도된 발언으로 볼 여지가 많다.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9일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이런 건방진 놈이 어디 있나. 어린 놈이 선배를 능멸했다”며 한동훈 법무장관을 겨냥한 거친 표현을 쏟아냈다. 6일 뒤에는 최강욱 전 의원이 바통을 받았다. 광주에서 열린 민주당 민형배 의원 출판기념회 도중 윤석열 정부 국정 운영을 비판하면서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도 보면 그렇게 암컷들이 나와서 설치고 이러는 거는 잘 없다”고 말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민 의원과 같은 당 김용민 의원은 제지를 하는 대신 키득키득 웃으며 ‘무언의 동조’를 했다. 지난달 30일 열린 추미애 전 민주당 대표 출판기념회에서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 함세웅 신부가 추 전 대표를 추켜세우는 과정에서 보기 민망한 손짓까지 해가며 “방울 달린 남자들이 여성 하나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당시 이해찬 민주당 전 대표를 비롯해 황운하 김용민 의원 등 민주당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한 현장에서는 요란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만 당사자들은 대체로 뭐가 문제냐는 반응이다. 특히 최 전 의원의 경우는 당 지도부가 대신 나서 사과까지 했는데도 정작 본인은 지난달 28일 한 유튜브 채널에 나와 “내가 그렇게 빌런(악당)인가”라고 되물으면서 자신의 발언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최 전 의원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의견도 나왔다. 남영희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은 비록 하루 만에 사과하기는 했지만 “(김건희 여사가) 학력 위조를 사과하면서 내조만 하겠다고 하고선 얼마나 많은 행보를 하고 있느냐”며 “더한 말도 하고 싶은데 저도 징계받을까 봐 말을 못 하겠다”고 최 전 의원을 징계한 당 지도부에까지 불만을 드러냈다. 공인에 대한 감시와 견제, 비판은 야당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김건희 여사는 공직에 직접 선출되거나 임명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대통령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열외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비판과 막말은 다르다. 막말은 오히려 비판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 뿐이다. 정치는 곧 말이고, 말이 곧 정치라고 한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깊이 천착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최 전 의원의 암컷 발언에 등장한 ‘동물농장’의 저자 오웰이다. 그는 ‘정치와 영어’라는 에세이에서 언어의 몰락을 초래하는 궁극적 원인 중 하나로 정치를 꼽았으며, 사고가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역시 사고를 타락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오웰의 소설 ‘1984’에는 선전과 보도를 담당하는 진리부가 ‘자유는 노예다’ ‘전쟁은 평화다’ ‘무지는 장점이다’와 같은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는 내용이 나온다. 독일의 작가인 악셀 하케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했다. “기존의 단어에 완전히 새로운 반대 의미를 부여하여 고유의 뜻까지 잃게 된다. … 이 과정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면 빅브러더에 대항하는 이들은 더 이상 아무 언어도 갖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오웰의 통찰과 하케의 해석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정치가 무언가 나쁜 것으로부터 오염되는 것을 막으려면 말의 오염을 절대 방치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말을 지키는 것이 정치의 추락을 막는 길이다. 민주당이 당 차원에서 “막말과 설화(舌禍), 부적절한 언행을 엄격히 검증해 내년 총선 공천심사에 반영하겠다”는 방침을 내놨지만, 국민과 유권자가 경계심을 풀어선 안 된다. 최 전 의원에 대한 솜방망이 징계를 보면 민주당이 얼마나 진심인지를 알기 어렵다. 더구나 심리학 분야에는 막말은 특정한 정치 성향을 공유하는 그룹 안에서 발언의 공감대를 넓히고 메시지를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적지 않다고 한다. ‘개딸’과 같은 강성 지지층의 환심을 사려는 정치인들에게는 막말에 대한 끊임없는 유혹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인지심리학자인 아주대 김경일 교수에 따르면 막말에 대한 대처법은 ‘바바리맨’에 대한 대처법과 비슷하다고 한다. 흔히 무시나 무반응이 효과적일 것 같지만, 반대로 막말이나 바바리맨의 행위를 더 기승부리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단호한 비판과 제재, 표를 통한 심판만이 정치가 막말에 오염돼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 더불어민주당이 23일 공개될 ‘새로운 민주당 캠페인―더민주 갤럭시 프로젝트’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한 ‘티저’용으로 준비했다가 논란이 된 현수막 문안이다. 17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도 보고됐고, 각 시도 당 위원회 등에도 관련 공문이 내려갔다고 한다. 민주당 설명에 따르면 이 캠페인은 ‘개인성과 다양성에 가치를 두는 2030세대’를 주로 겨냥한 것으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 ‘나에게 쓸모 있는 민주당’으로 변화하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 즉 내년 총선을 앞두고 2030 청년세대의 호감을 사기 위해 마련한 전략적 캠페인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민주당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이 현수막은 당내에서조차 청년세대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파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민주당 내 ‘청년당원 의견그룹’이 17일 “근래 민주당의 메시지 가운데 최악, 저질”이라는 격한 논평을 냈을 정도다. 같은 날 당직자와 보좌진들이 모인 당 홍보국 단체대화방에도 “문구가 너무 시대착오적”이라는 등의 비판이 줄을 이었다. 파문이 커지자 민주당은 19일 뒤늦게 홍보 문구를 교체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문안은 업체가 준비한 시안”이라며 “당이 개입한 사안은 아니다”라는 해명을 내놨다. 최고위원회의에 보고되고 시도 당 위원회에 공문까지 내려갔는데, 해명치곤 구차스럽다. 민주당이 청년과 관련된 발언으로 논란에 휩싸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에는 민주당 후보였던 박영선 전 의원이 낮은 20대 지지율에 대한 설명으로 “20대 같은 경우는 아직까지 과거의 역사에 대해 30, 40대나 50대보다는 경험한 경험 수치가 좀 낮지 않냐”고 말한 것이 논란이 됐다. 이에 앞서 20대 남성의 문재인 정권에 대한 ‘지지 이탈’ 현상이 두드러지던 2019년에는 설훈 의원과 홍익표 의원의 ‘민주화 교육 부족’, ‘반공 교육’ 발언이 문제가 됐다. 그래도 이전까지는 개인 차원에서 나온 실언의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이번 현수막 게시는 개인이 아닌 당 차원에서 진행된 일이라는 점에서 좀 더 심각하다. 청년당원들 모임인 ‘파동’이 “지금까지 우리 정치사에서 어느 정당이 당의 이름을 내걸고 한 세대를 조롱한 적이 있던가”라고 개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이번 현수막은 내용 면에서도 종전 발언들에 비해 문제의 정도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우선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라는 문구 속에 상정된 청년들의 초상(肖像)은 정치가 만들어 나가는 국가와 공동체의 운명이나 미래에는 무관심하면서, 자신의 삶만 나아지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모습이다.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라는 문구 속에 비치는 청년들의 초상도,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좋은 결과나 요행을 바라는 일그러진 모습이다.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 지금의 2030은 과거 어느 세대보다 공정의 가치를 중시하는 세대다. 불이익도 참지 않지만, 나만의 특혜도 바라지 않는다. 청년들이 원하는 것은 나만의 요행이 아닌 누구에게나 부여되는 공정한 기회다. 성향이 다르다고 해서 이런 청년들을 모독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물론 민주당이 일부러 청년세대를 비하하기 위해 이런 현수막을 내걸려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정치나 경제를 모르는 사람도 잘 살고, 돈 많이 벌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정당이 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적절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알고, 고민하고, 참여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포기하거나 양도할 수 없는 주권자의 소중한 권리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청년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정책과, 당장은 입에 달지만 결국 ‘나랏빚’으로 쌓여 언젠가 자신의 부담으로 돌아올 싸구려 ‘포퓰리즘’ 정책을 구별해 내려면 경제를 몰라서는 안 된다. ‘정치나 경제를 몰라도 괜찮다’는 건 당당한 주인이기를 포기하고 포퓰리즘의 제물이 되라는 이야기다. 기회만 있으면 ‘참여’를 말하는 정당이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다. 앞서 ‘파동’의 논평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민주당이 진정으로 청년세대의 신뢰를 얻고자 한다면, 어설픈 ‘현수막 마케팅’이 아니라 제대로 된 ‘민생 정책’을 선보이기 바란다.” ‘2030은 모르겠고 표는 얻고 싶다’는 식의 민주당 기성세대가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말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성장률 3%론’을 들고 나왔다. 2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다. 현재로선, 내년 2% 초반 성장도 낙관하기 어렵지만 정책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위기 극복 방안을 총동원해서 3% 성장을 달성하자는 주장이다. 부분적으로 일리 있는 내용도 있다. 연구개발(R&D)이 저성장을 막고 생산성을 높이는 핵심적인 방안이라는 데는 공감이 간다. 전세대출 이자 부담 완화나 월세 공제 대상 확대 등의 제안도 논의해 볼 가치가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얄팍한 내용이 많다. 재원 마련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부터 보이지 않는다. 이 대표는 자신이 제안한 ‘청년 대중교통 3만 원 패스’의 재원 조달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예산소요액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답변을 실무자에게 넘겼고, 실무자는 “특별한 예산 소요를 동반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식으로 답했다. 청년들에게 3만 원짜리 카드를 하나씩 나눠주는데도 들어가는 돈이 없다니, 어디 감춰 놓은 ‘화수분’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1년 한시 ‘임시 소비세액공제’를 도입하자는 제안도 마찬가지다. 예산이 얼마나 필요한지,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다. 재원은 그렇다 치고 주장 자체가 뜬금없다. 그동안 이 대표와 민주당은 정부·여당이 감세정책으로 막대한 세수 결손을 초래했다며 비판의 날을 세워 왔다. 감세가 문제라면서 감세하자는 게 앞뒤가 맞는 말인가. 더구나 지금은 재정이 과거 어느 때보다 불안정한 상황이다. 당장 올해에만 59조 원의 ‘세수(稅收) 펑크’가 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내년 예산만 하더라도 총수입이 총지출보다 45조 원 부족한 적자 살림이다. 경기 악화로 추가 세수 펑크가 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런 현실을 이 대표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지적이 나올 때마다 이 대표가 정해진 메뉴처럼 내놓는 답변이 ‘한국은 선진국에 비해 국가채무 비율이 낮기 때문에 정부가 빚을 더 내도 된다’는 것이다. 이번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 대표는 “다른 선진국들의 국가채무 비율이 110∼120% 수준인 데 비해 한국은 꾸준히 50% 아래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이 낮은 것은 외환위기의 집단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 외환보유액이 바닥나고 민간 부문이 과도한 부채에 짓눌려 나라가 와르르 무너지는 와중에서도 경제가 회복 불능으로 완전히 침몰하는 걸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재정이 건전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나라가 망하는 것을 피하려면 재정만큼은 건전해야 한다는 것이 그때 우리의 DNA에 각인된 ‘집단기억’이다. 그런데 이런 기억들이 흐릿해지면서 2013년 32.6%이던 국가채무비율이 지난해 49.4%까지 급등하는 등 무서운 속도로 높아지는 중이다. 이걸 두고 “국가채무비율이 꾸준히 50% 아래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치지도자로서 정직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이 대표가 또 하나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이 있다. 물가다. 지금은 코로나19 팬데믹 때 풀린 과잉유동성과 유럽, 중동에서 진행되는 두 개의 전쟁으로 인플레이션 가능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다. 정부 재정을 풀어 3% 성장을 달성한다 해도 물가 상승으로 인해 그 이상의 비용을 치를 가능성이 높다. 한국 경제의 체력을 객관적으로 보려면 한 나라의 경제가 물가 상승을 동반하지 않으면서 성장할 수 있는 최대치를 나타내는 ‘잠재성장률’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올해 1.9%로 2% 선이 처음 무너지고, 내년에는 1.7%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한다. 2030년 이후 전망은 0%대다. 규제혁파와 노동개혁을 통해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를 풀고 생산성을 개선해서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물가 상승 없는 성장률 회복’은 앞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런데도 ‘3% 성장론’을 내건 이 대표의 민주당은 ‘노란봉투법’을 9일 본회의에서 강행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파업으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노란봉투법’이 이대로 시행되면 가뜩이나 노(勞) 측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더 기울어져 노동개혁은 완전히 물 건너가고, 한국 경제는 ‘저성장’과 ‘고물가’ 사이를 영원히 오가는 시계추가 될 운명이다. 허울 좋은 ‘3% 성장’은 제쳐 두고 ‘노란봉투법 폭주’부터 멈춰 세우는 게 이 대표가 한국 경제를 위해 할 일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올해 하반기 경제가 상반기보다 2배 정도 성장할 것으로 본다. IMF가 전망한 내년 성장률은 GDP 1조 달러가 넘는 국가 중 최고 성장률이다.”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지난주 국회 국정감사에서 한 말이다. 줄곧 강조해 온 상저하고(上低下高)론에 ‘금년은 어렵지만 내년에 나아질 것’이라는 ‘금저래고(今低來高)’론이 보태졌다. 추 부총리는 앞서 15일에는 “물가도 회복 국면에 진입했고 고금리도 대체로 천장을 확인하고 있는 수준으로 보인다”며 물가와 금리에 대해서도 낙관적인 전망을 피력했다. 요약하면 한국 경제가 길고 긴 겨울에서 벗어나 따뜻한 봄날을 맞고 있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사뭇 다르다. 추 부총리가 ‘고금리 천장’론을 꺼낸 지 1주일도 안 돼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6년간 유지돼 온 ‘5% 천장’을 뚫었다. 현재 한국은 미국보다 기준금리가 2%포인트나 낮은데도 가계부채와 경기 부담 때문에 안간힘을 다해 ‘동결’로 버티고 있다. 그러나 미국 금리가 추가로 상승 행진을 시작하면 둑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앞서 추 부총리가 내년 한국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 근거로 제시한 IMF 전망도 의지할 것이 못 된다. IMF가 ‘2023년 경제전망’을 처음으로 내놓은 지난해 1월 당시 제시한 한국경제의 성장률 전망치는 2.9%였다. 그러나 지난해 7, 10월과 올해 1, 4, 7월 내리 5번 연속 하향 조정을 한 끝에 반토막 수준인 1.4%까지 떨어뜨렸다. 내년 성장률 전망도 이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다. 더구나 지금처럼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 경쟁으로 글로벌 경제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는 단순한 거시지표보다 산업 구조적인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비슷한 제조업 강국인 독일이 최근 ‘유럽의 병자(sick man)’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휘청이고 있는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불과 1, 2년 전까지만 해도 ‘경제 슈퍼스타’ ‘유럽의 성장엔진’으로 칭송받던 독일이 ‘병자’로 추락한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꼽는다. 주어만 바꾸면 섬뜩할 정도로 한국에 들어맞는 이야기다. 우선 높은 제조업 비중이다. 최근 유일하게 잘나가는 미국 경제의 제조업 비중은 2021년 기준으로 10.7%가량이다. 독일은 그 두 배인 20.8%다. 한국은 이보다 더 높은 27.9%다. 자유무역이 확산되고 전 세계 교역량이 증가하는 상황에서라면, 제조업 제품의 비중이 높다는 것은 ‘플러스’다. 하지만 미중 간 패권 경쟁으로 보호무역 장벽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는 한국과 독일 모두 서비스업 등 내수 비중이 높은 나라들에 비해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제조업 중에서도 특정 산업에 대한 편중된 구조는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독일은 전체 수출의 10%가량을 자동차가 차지하는데, 자동차 산업이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의 전환’에 뒤처진 것이 경제 부진의 결정적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 한국은 더 심각할 수도 있다. 반도체에 대한 한국의 수출의존도는 20%에 육박한다. 최근 반도체 경기가 회복되는 조짐이 보인다고는 하지만 반도체 제조 시장을 대만과 함께 사실상 ‘싹쓸이’하던 호시절이 다시 올지는 의문이다. 반도체 설계·소재·장비 등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가진 미국과 일본이 직접 제조에 뛰어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중국 시장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 독일 경제가 고전하는 주된 요인 중 하나다. 이 또한 한국이 독일보다 나을 게 없다. 지난해 독일의 수출액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6.7%였다. 한국은 약 3배에 해당하는 22.8%였다. 중국 시장이 위축되거나 또는 경합 품목에서 중국에 따라잡힐 때 받는 충격이 독일보다 훨씬 크다. 굳이 독일의 위기에서 시사점을 찾을 것도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의 1인당 잠재성장률이 2030년 이후에는 0%대로 떨어져 38개 회원국 중 캐나다와 함께 공동 꼴찌를 할 것이라는 전망을 2021년 내놓은 바 있다. 한국 경제의 추락을 막을 유일한 해법은 노동 연금 교육 등 구조개혁을 서두르는 것인데도, 현 정부는 어느 것 하나 작은 ‘첫발’조차 떼지 못하고 있다. 한가로운 낙관론을 읊조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한국 경제는 지금 ‘아시아의 병자(病者)’로 전락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인사청문회가 끝난 신원식 국방부 장관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임명을 7일 강행했다. 이 중 신 장관은 현 정부 들어 여야 합의 없이 임명된 18번째 장관급 인사라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 야당이 과거 ‘막말과 편향적’ 역사관을 문제 삼으면서 인사청문 경과보고서 채택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관심사는 23년 인사청문회 역사상 처음으로 ‘36계 줄행랑’ 파문을 빚은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임명을 윤 대통령이 강행할지 여부다. 김 후보자는 스스로를 “성공한 기업인”으로 정의하고 있다. ‘자뻑’도 이런 자뻑이 없다. 2009년 온라인 뉴스 사이트 ‘위키트리’를 공동 창업했고, 2013년 청와대 대변인이 되면서 주식을 처분했지만, 2018년 회사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주식을 재인수했으며, 이후 탁월한 경영 수완을 발휘해 불과 4, 5년 만에 기업 가치를 79배로 키웠다는 것이다. 회사 성장 과정에서 선정적이고 성차별적인 저질 기사를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방식으로 ‘돈벌이’를 했다는 지적에 대해 자신은 경영자여서 직접 기사를 쓰거나 보지 않았으며 “이게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마치 남 이야기하듯 말했다. 공직자의 기본 자질에 해당하는 책임 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낯 두꺼운 자기변명이자 억지다. 문제의 기사가 한두 번에 그친 것이라면 해당 기자의 책임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의 기사가 반복적이고 상습적으로 나왔다면 회사 전체의 방향을 설정하고 끌고 나가는 경영자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안 된 것은 남 탓, 잘된 것은 내 덕’이라는 자세로 대한민국의 여성·청소년 정책을 책임지는 여성가족부 장관직을 어떻게 맡을 수 있겠는가. ‘주식 파킹’ 의혹은 더 심각하다. 김 후보자는 2013년 위키트리 주식을 시누이에게 매각했다가 나중에 되산 것에 대해 불법적인 파킹이 아니라 선의에서 이뤄진 정상 매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검사 출신이면서 여당인 국민의힘 소속인 김웅 의원조차도 “99.9% 주식 파킹이며 수사 대상”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설령 법률 영역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언론 검증과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나온 김 후보자의 잦은 말 바꾸기만으로도 신뢰가 땅바닥에 떨어진 상황이다. 그가 앞으로 무슨 해명을 내놓는다 해도 이미 눈덩이처럼 커진 의혹을 해소하기는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이런데도 윤 대통령이 김 후보자 지명을 강행한다면 정치적으로도 두고두고 큰 짐이 될 것이다. ‘윤석열 검찰’은 2019년 조국 전 법무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를 단골 미용사 명의로 차명 주식투자를 한 혐의 등으로 기소한 적이 있다. ‘차명 주식투자’가 ‘주식 파킹’의 다른 이름이다. 조 전 장관이 최근 “정 전 교수 차명주식 의혹을 수사하듯이 김행 후보자 및 그 배우자, 친인척을 수사하라”며 마치 좋은 기회라도 만난 듯 공세를 펴고 나선 것도 이런 배경에서일 것이다. 윤 대통령이 김 후보자 임명을 강행할 경우, ‘인사청문회 제도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든 대통령’이라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물론 전임자인 문재인 대통령도 장관급 인사 34명을 국회가 청문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은 가운데 독단으로 임명하긴 했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을 포함해 어느 대통령도 국회 인사청문회장에서 제 발로 뛰쳐나간 장관 후보자를 임명했다는 기록을 남긴 적은 없고, 그럴 일 자체가 없었다. 인사청문회 제도의 역사가 230년이 넘는 미국에서조차 전무했던 일이다. 미국에서라면 의회모욕죄로 형사처벌을 받았을 사안이다. 혹자는 정책을 위주로 인사청문회를 진행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의 인사청문회가 지나치게 개인의 도덕성이나 사생활 문제로 흐른다고 지적한다. 틀린 이야기다. 미국의 경우 장관 후보자로 지명이 되면 연방수사국(FBI)이 나서서 심한 경우 2개월 이상 사생활을 샅샅이 캔다. 이혼한 전처나 전 직장 동료를 만나 주량과 술버릇, 이성 문제, 심지어 양말 사이즈까지 조사해서 백악관과 의회에 보고한다. 정책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음주 등 사생활 문제로 낙마한 사례가 실제로 적지 않다. 김 후보자가 여성가족부를 이끌 정책 능력이나 비전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이미 제기된 의혹과 인사청문회에서 보인 행태만으로도 ‘부적격’ 판단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나마 서둘러 지명을 철회하는 것이 윤 대통령에게 지워진 인선과 검증 책임에서 빨리 벗어나는 길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제일 중요한 것이 이념입니다…우리 당은 이념보다는 실용이다 하는데 기본적으로 분명한 이런 철학과 방향성 없이 실용이 없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했던 말이다. 여소야대(與小野大)의 국회 환경과 야당의 후쿠시마 오염수 대응 등의 이슈도 거론됐지만 가장 큰 비중이 실린 내용은 경제였다.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 운영을 망하기 직전인 기업의 ‘화려한 껍데기’에 비유하면서, 건전한 재정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특히 나랏빚을 늘리는 국채 발행에 대해서는 극도의 거부감을 표시했다. 건전 재정을 윤석열 정부 경제 정책의 축으로 삼겠다는 것은 전혀 나무랄 일이 아니다. 문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영으로 한국의 국가채무는 5년간 400조가 늘었고, 지난해 마침내 1000조 원을 넘어섰다. 미래세대를 빚더미 위에서 허우적대지 않도록 하려면 윤 대통령이 강조해온 것처럼 ‘재정 다이어트’가 꼭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나 방향이 옳다고 하더라도 눈앞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직진’을 하다가는 큰 탈이 날 수 있다. 아무리 과체중 부작용이 심각한 비만 환자라고 해도, 일주일쯤 굶은 사람에게 당장 고강도 다이어트를 시작하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 한국의 나라살림이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들은 올해 400조 원의 세금(국세)이 걷힐 것이라는 기획재정부 전망을 믿고 여기에 맞춰 지출 계획을 짰다. 그런데 한 해가 4분의 3이나 지난 시점에 와서 기재부는 당초 예상했던 액수보다 59조 원 덜 걷힐 것 같다는 수정 전망을 내놨다. 역대 최대의 ‘세수(稅收) 펑크’다. 심각한 경제위기가 아닌 상황에서 이런 대규모 세수 펑크가 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진 2020년 정도다. 당장 이 여파가 전 경제 영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정상적인 해법은 ‘국채 발행’이다. 일단 정부가 빚을 내서 급한 고비를 넘기는 방법이다. 경제부총리는 물론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까지 경제관료 출신들이 겹겹이 포진한 현 정부가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국채 발행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건전 재정과 국채 발행’ 문제를 타협 불가능한 ‘이념’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 정책 선택의 폭을 좁히는 족쇄가 돼버린 모양새다. 국채 발행 대신 현 정부가 내놓은 해결책은 세 가지다. 첫째 작년에 다 못 쓴 예산을 쓰는 것이다. 상식적인 방법인데 문제는 액수다. 기껏해야 6조 원밖에 안 된다. 두 번째 이미 편성된 예산을 쓰지 않는 것인데, 지금 같은 불경기에는 지나치면 약보다 독이 된다. 마지막으로 외국환평형기금(외평기금)에 쌓여 있는 원화 중 20조 원을 정부 예산으로 끌어다 쓰는 방법이다. 외평기금 활용에 대해서는 일부 ‘묘수’라는 평가도 있다. 미시적으로만 보면 손해가 아니라 득이 되는 측면도 있다. 문제는 외평기금이 환율이 불안할 때 외환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쌓아 놓은 ‘방파제’라는 점이다. 1997년 당시 ‘세계의 경제 대통령’ 격이던 앨런 그린스펀 미 연준 의장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 정부가 대외적으로 공표한 장부에 250억 달러나 되는 외환보유액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상은 한국 정부가 외환보유액 중 상당액을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금고’에 넣어두지 않고 은행에 빌려주는 등 다른 목적에 쓰는 바람에, 장부상으로만 쓸 수 있는 돈이 돼 있었던 것이다. 이런 순간을 다시 맞지 않으려면 외평기금에는 ‘외환시장 안정’ 이외의 어떤 임무도 부여해선 안 된다. 물론 최악의 ‘세수 펑크’ 상황에서 빚을 내서 지출을 35조 원이나 늘리자는 식의 더불어민주당의 추경 주장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현 정부가 국채 발행을 꺼리는 데는 야당의 주장에 말려들지 않으려는 전략도 깔려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외평기금 동원이라는 ‘위험한 불장난’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될 순 없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이념에 현실과 통계를 억지로 꿰맞추려 하다가 임기 전반부를 완전히 허송하고 통계 조작 논란에까지 휩싸였다. 건전 재정과 국채 발행 여부가 정책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이념이 되면, 현 정부도 실패한 ‘소주성’의 전철을 밟지 말란 법이 없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뉴스타파가 작년 대통령 선거를 3일 앞두고 보도했던 ‘김만배 음성파일’이 거센 후폭풍에 휩싸였다. 대통령실과 여당, 검찰은 음성파일이 대선에 영향을 주기 위해 사전에 기획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만배 씨가 대화 상대방인 신학림 당시 뉴스타파 전문위원에게 책 3권 값으로 건넨 1억6500만 원이 ‘거짓 인터뷰’의 대가라는 것이다. 당시 뉴스타파의 보도는 2011년 당시 대검 중수 2과장이던 윤석열 대통령이 부산저축은행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박영수 전 특별검사의 부탁을 받고 조우형이라는 인물의 혐의를 무마해줬다는 내용이다. 조 씨는 대장동 초기 사업비 1100억 원을 부산저축은행에서 끌어오고, 그 대가로 10억 원의 뒷돈을 챙긴 인물이다. 중수부 수사에서는 처벌을 피했지만 4년 뒤 이 건으로 수원지검에서 기소돼 실형을 선고 받았다. 파문이 커지자 뉴스타파는 ‘기획 인터뷰’ 의혹을 강력히 부인하면서 72분짜리 녹음파일 원문을 7일 공개했다. 하지만 혹 떼려다 혹을 하나 더 붙인 격이 됐다. 기획 인터뷰 논란과는 별개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짜깁기해 ‘악마의 편집’을 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뉴스타파가 보도한 편집은 윤석열 중수 2과장이 조 씨에게 직접 커피까지 타줘가며 형식적인 조사를 한 뒤 수사를 무마해줬다고 들리게 돼 있다. 그러나 원본을 보면 ‘주어’가 윤석열 2과장이 아니라 직원들과 박모 검사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뉴스타파 측은 “커피를 누가 타줬는지는 핵심이 아니며, 담당 검사가 과장의 허락 없이 사건을 덮을 수 있겠느냐”는 식의, 황당한 사후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뉴스타파 측은 보도 경위를 설명하면서 “관련 의혹들은 이미 여러 매체에서 다뤄졌던 내용으로 새로운 것이 없으며, 김만배 스스로의 육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김 씨의 발언을 최대한 충실하게 소개했어야 한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짜 맞춰 앞뒤 잘라내고, 주어를 바꾸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조작일 뿐이다. ‘담당 검사가 봐줬는데 실상은 중수 2과장의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는 제작진의 추론과 ‘중수 2과장이 직접 부탁을 받고 사건을 없애 버렸다’는 당사자의 직접 진술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파일 원문을 들어보지도 않고 뉴스타파가 공개한 편집본을 인용해 의혹을 전파하거나 확대 재생산한 매체들의 태도도 저널리즘의 기본이나 보도윤리에서 크게 벗어났다. 특히 MBC는 문제가 많다. 당시 MBC 보도에는 국민의힘 측에서 “녹음파일에 끊긴 흔적이 있다”고 밝혔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대선 이틀 전이라는 민감한 시점에, 짜깁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을 네 꼭지나 할애해서 보도한 것을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철저한 경위 조사와 진솔한 반성, 실효성 있는 재발 방지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 응분의 책임도 져야 할 것이다. 다만,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가 이번 건을 “사형에 처해야 할 만큼의 국가반역죄”로 규정하고, 당이 나서서 뉴스타파, MBC, JTBC 등의 전현직 취재기자들을 다짜고짜 고발부터 한 것이 적절한 대응인지는 의문이다. 우선은 해당 언론사들의 자체 조사와 상응 조치를 지켜보고, 사법적인 대응에 나서도 늦지 않다. 여권의 대응이 도를 넘게 되면 입맛에 맞지 않는 언론을 길들이려 한다는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김 대표는 원내대표 시절이던 2021년 더불어민주당이 강행하려던 ‘언론중재법’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 반대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가장 기본적인 가치”라고 강조했었다. 일부 잘못된 보도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가짜 뉴스는 명확한 진실만이 바로잡을 수 있다. 윤 대통령은 2021년 12월 대선후보 관훈토론 등에서 부산저축은행 관련 의혹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자세히 해명해 왔다. 하지만 어렴풋한 기억, 전언, 당시 관행 등에 근거한 설명이 적지 않았다. 10억 원의 뒷돈을 챙긴 조우형이 중수부에 불려 가고도 입건조차 되지 않은 것은, 설령 김만배 음성파일이 조작된 것이라 하더라도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쉽게 수긍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진실 규명 절차가 뒤따르지 않으면 앞으로도 의혹과 논란이 꼬리를 물 가능성이 크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인공지능(AI) 바둑 ‘알파고’가 선보인 것은 2016년 초다. AI 반도체로 유명한 엔비디아의 당시 시가 총액은 약 160억 달러. 전 세계 반도체 기업 가운데 13위였다. 그로부터 7년여가 지난 지금 엔비디아의 시총은 75배인 1조2000억 달러에 육박한다. 전 세계 반도체 기업 중 1위. 인구 2억7753만 명의 인도네시아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금액이다. 바야흐로 AI 붐이다. 포털, 자동차, 유통, 반도체, 바이오, 미디어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대다수 글로벌 기업들이 사활을 건 AI 투자를 감행하고 있다. AI 인재 확보 경쟁에 불이 붙으면서 미국에서는 ‘연봉 12억 원’ 공개 채용공고까지 나붙었다. 어디든 ‘AI’라는 수식어만 붙으면 사람이 몰리고 돈이 붙는다. 하지만 AI가 처음부터 이렇게 화려한 봄날을 누렸던 것은 아니다. 약 반세기에 가까운, 길고도 추운 ‘겨울(AI winter)’이 있었다. 인간의 뇌를 모방한 ‘신경망 AI’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7년이다. 신경망 AI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당시 주류 학자들의 반응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그런 데다 눈앞의 성과도 보이지 않자 초기 AI 연구 지원의 ‘큰손’이었던 영국과 미국 정부는 이후 수십 년간 자금줄을 끊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돈도 안 되고 가망도 없는’ AI 전문가들을 데려다가 “마음껏 연구하라”고 지원해준 나라가 캐나다다. 그곳으로 향하는 행렬 속에는 제프리 힌턴 교수(토론토대)도 포함돼 있었다. 힌턴 교수는 토론토대에 뿌리를 내린 지 19년 만인 2006년 ‘심층신경망(딥러닝)’을 개발해 ‘AI 혁명’에 결정적 돌파구를 열었다. 연구자들의 순수한 호기심을 조건 없이 지원한 캐나다 정부 덕분에 오늘날 토론토, 몬트리올, 에드먼턴 등은 세계적인 ‘AI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토론토는 2016∼2021년 미국을 포함한 북미 지역에서 ‘테크 일자리’가 가장 많이 늘어난 도시가 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작년 9월 ‘AI 강국’에 대해 ‘한 수’ 배우기 위해 달려갔던 곳도 토론토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인물이 힌턴 교수다. 힌턴 교수는 당시 만남에서 ‘AI 암흑기’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캐나다 정부의 노력을 거론하며 AI 발전의 결정적 키워드 중 하나로 “정부 지원”을 꼽았다. 힌턴 교수가 인터뷰 등을 통해 꾸준히 밝혀 온 내용을 보면 그가 강조하는 것은 지원 중에서도 학자의 호기심이 바탕이 된 기초연구에 대한 지원이다. 구체적인 성과를 닦달하는 ‘목표 중심형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은 결과적으로 성과를 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하지만 정부가 22일 발표한 내년 R&D 예산안을 보면 힌턴 교수의 조언과는 거꾸로 가는 듯하다. 우선 총액에서 내년 주요 R&D 예산은 올해보다 3조4000억 원이 깎였다. 혈세 낭비는 막아야 한다지만 ‘선거용 토건 사업’은 마구 끼워 넣으면서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R&D 예산부터 손봐야 했나. 특히 구체 내역을 보면 기초연구 분야에서 6.2%를 깎았고, 정부 출연연 예산에서 10.8%를 삭감했다. ‘R&D 카르텔 타파’가 명분이다. 대신 바이오, AI, 이차전지 등 국가전략기술, 즉 ‘목표 중심형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고 한다. 힌턴 교수의 경우도 그렇지만 하이테크 분야에서 ‘의도나 목표’와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많다. 어디서 ‘잭팟’이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챗GPT를 발표해 AI 붐에 불을 댕긴 오픈AI의 출발은 “인공지능으로 세상을 구한다”는 순수한 꿈들이 모여 만들어진 비영리단체다. 엔비디아만 해도 처음부터 작정하고 AI용 반도체를 만들었던 것이 아니다. 엔비디아는 컴퓨터 게임에 쓰이는 그래픽처리장치(GPU) 제조에 특화된 반도체 기업이다. 엔비디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처음에는 암호화폐 채굴꾼들이, 다음에는 AI 혁명이 엔비디아 GPU의 쓰임새를 ‘발명’했다. AI를 앞세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진정한 경쟁력은 과학과 과학, 기술과 기술, 산업과 산업, 기업과 기업 간의 다양한 조합과 융합에서 나온다. 그 공통의 토대가 되는 기초과학을 죽이는 것은 모래 위에 성 쌓기다. 한국은 아직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오랜 염원을 이루려면 다른 예산을 확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기초과학만큼은 긴 안목에서 집중 지원해야 한다. ‘노벨상 0’ 국가의 자충수는 한시라도 빨리 바로잡는 게 좋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고 채수근 해병 순직 사고 조사 결과를 놓고 국방부와 해병대 수사단장을 맡았던 박정훈 대령 간에 진실 공방이 뜨겁다. 박 대령은 국방부가 해병대 1사단장의 형사책임을 축소하기 위해 외압을 넣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국방부는 박 대령이 부당한 외압이 아니라 상부의 정당한 지시를 어긴 항명 사건이라고 맞서고 있다. 절차적 논란까지 덧붙여지면서 형사책임에 대한 최종 결론이 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채수근 해병과 유족의 원통함을 달래주기 위해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형사책임을 철저하게 규명해 응분의 조치를 해야 한다. 하지만 형사책임 규명이 전부는 아니다.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려면 제도나 관행 등에 문제가 없었는지도 철저히 따져 봐야 한다. 이제는 군의 대민(對民) 지원이 과연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어디까지가 적정한 수준인지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볼 때가 됐다. 한국군이 2020년부터 3년간 대민 지원에 투입한 병력은 평균 83만여 명(연인원 기준)에 이른다. 그 범위도 태풍·호우·폭설 같은 자연재해 대응과 피해 복구 작업, 코로나19 대응, 가축전염병 대응, 농촌 일손 돕기 등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이 중 대규모 재난은 기후변화 등으로 예측이 점점 어려워지고 그 규모나 범위도 커지는 현실을 고려할 때 군의 역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국제적인 흐름에도 맞다. 미군도 인도적 지원과 재난구조(HA/DR)를 중요한 임무의 하나로 삼고 있다. 대형 지진 등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에서는 자위대가 지자체·경찰·소방보다 더 큰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자위대의 경우 동일본대지진 당시 독자적으로 또는 지자체·경찰·소방과 연계해서 1만9286명을 구출했다. 전체 생존 구출자의 약 70%에 해당하는 수치다. 재해 발생에 앞서 지자체·경찰·소방은 물론 해당 지역 주민까지 포함해 ‘실전’과 같은 대규모 훈련을 거듭해 온 결과였다. 한국 해병대의 ‘주먹구구식’ 대응은 이와 극명하게 차이 난다. 해병대는 해상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포병을 수변 수색 작업에 투입했고, 주요 임무가 수색 작업이라는 사실을 현장 지휘관에게 뒤늦게 전달해 구명조끼나 로프 같은 기본 안전장비도 갖추지 못했다. 이래서는 군이 재난 대응에 오히려 ‘짐’이 될 뿐이다. 한국군이 재해 대응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려면 허점투성이인 관련 법규와 매뉴얼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체계적이고 반복적인 재난 대응 훈련 경험을 쌓아야 한다. 훈련되지 않은 병력을 현장에 투입해 2차 재난을 자초하는 일이 절대로 있어선 안 된다. 군 본연의 임무와 무관한 ‘노력 동원’식의 대민 지원은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과 지적이 적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4대강 사업 비용 절감을 위해 청강부대를 창설해 운영하다가 군을 정권의 사병(私兵)쯤으로 여긴다는 지적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평창 올림픽 쇼트트랙 빙상장을 교체하는 작업에 군 장병을 동원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연례행사인 농촌 일손 돕기에 대해서도 ‘열정페이’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당초 농촌 일손 돕기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에 파병 장병의 가족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제한적으로 시작됐다. 농가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시절이었기에 대부분 ‘농민의 자식’인 군인들이 모심기와 추수를 거드는 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농가 인구의 비중이 4%대에 불과하고 특히 농촌은 저출산 현상이 더 심각하다. 요즘 젊은 군인들에게 농사일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낯설고 고된 일일 뿐이다. 해병대 수사단이 밝힌 채수근 해병 사망 관련 수사기록에 따르면 현장 지휘관들이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무리한 수색 작업을 한 것은 병사들의 안전보다 해병대의 홍보에만 연연한 1사단장의 행태에 압박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20년 국감에서는 장병들을 대민 지원에 보내 놓고 장성급을 포함한 간부들은 근처에서 골프를 친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기도 했다. 대민 지원이 ‘공짜 노동력’을 활용한 장교들의 실적 쌓기로 변질돼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대목들이다. 청년들 사이에서 “소중한 청춘을 군 간부들의 출세를 위해 잡일하는 데 낭비했다”는 말이 나오는 일이 없도록 대민 지원 전반을 원점에서 다시 봐야 한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머크와 보쉬. 둘 다 한국 투자에 적극적인 독일 기업들이다. 글로벌 연 매출액이 각각 31조 원, 124조 원이 넘고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대기업들이다. 이 밖에도 공통점이 있다. 머크는 355년, 보쉬는 137년의 역사를 이어온 가족기업이라는 점이다. 머크는 13대째다. 두 회사 모두 창업자의 후손 일가가 지분관리회사나 공익재단 등을 통해 지배구조의 정점에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머크나 보쉬 같은 기업들이 나올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속세 부담 때문이다. 명목상 최고세율만 보면 한국이나 독일이나 50%로 똑같다. 하지만 실질적인 내용 면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한국은 경영권 승계에 대해 ‘획일적인 20% 할증률’을 적용해 60%의 상속세를 때린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한국만의 제도다. 이에 비해 독일은 아들딸 등 직계비속에게 상속을 할 때는 최고세율이 30%로 낮아진다. 그나마 실제 내는 세금은 5%도 안 된다. 가업 승계 시에는 몇 가지 조건을 붙여 85%를 공제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도 가업 승계 시 세금을 깎아주는 제도가 있다. 하지만 대상이 제한적이고 요건도 까다롭다. 그렇다 보니 이 제도를 이용한 기업이 2021년을 기준으로 110개 사에 그쳤다. 독일의 2만8482건(2017년 기준)과 비교하면 0.4%에 불과하다. 독일에서는 이런 제도를 이용할 수 없는 경우에도 지분관리회사나 공익재단 등을 활용해 투기자본의 위협에 노출되지 않고 경영권을 승계할 수 있다. 한국과 독일은 상속세를 매기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한국은 재산을 물려주는 사람을 기준으로 상속액을 정한 뒤 물려받는 사람이 배분받아야 할 비율에 따라 나누는, 일명 ‘유산세’ 방식이다. 이에 비해 독일은 재산을 물려받는 상속인 입장에서 받은 몫만큼 세금을 내는, ‘유산취득세’ 방식이다. 상속인이 여러 명일 때는 유산취득세가 부담이 작다. 상속세 제도가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4개 회원국 중 ‘유산세’를 채택한 나라는 한국 미국 영국 덴마크 등 4개국뿐이다. 이 중 덴마크는 아들딸 등 직계비속에 대한 상속세율이 15%에 불과하다. 미국과 영국도 상속세율이 한국보다 낮은 40%다. 더구나 미국은 상속세와 증여세를 합해 1170만 달러(약 150억 원·연방정부 기준)까지는 세금이 면제된다. 영국의 경우 집권 보수당이 상속세 폐지안을 내년 하원 선거의 대표 공약으로 내놓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유독 한국만이 삼중사중의 징벌적 상속세 부과 장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유산세를 유산취득세로 바꾼다는 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상속세를 완전히 폐지하거나 부담이 덜한 다른 세목(稅目)으로 대체해 나가는 글로벌 추세에 비춰 보면 ‘겨우 시늉을 내는 수준’의 공약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27일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2년차 세제 개편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부의 편중을 막으려면 상속세는 필요하다. 하지만 과도한 상속세는 ‘기업가 정신’을 죽이고 경영권을 위협하는 등 기업의 뿌리를 통째로 흔든다.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들은 포이즌 필, 차등의결주식, 초다수의결제 등 한국에 없는 다양한 경영권 방어 장치를 허용하고 있다. 설령 상속세 납부 등으로 인해 지분이 크게 떨어져도 한국에 비해서는 경영권 위협을 덜 느낀다. 피도 눈물도 없는 투기자본의 발톱 앞에 알몸인 채로 내던져지는 것은 한국 기업뿐이다. 윤 대통령은 이달 4일 열린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회의에서 “기업인들의 투자 결정을 저해하는 ‘킬러 규제’를 팍팍 걷어 내라”고 주문했다. 즉시 TF가 꾸려졌고 지시 열흘 만에 산업단지 입지 규제와 화학물질 관련 규제 등 15개 개선 과제가 선정, 발표됐다. 모두 필요한 내용이다. 하지만 계획대로 다 실현이 된다고 해서 기업 투자가 팍팍 늘어날 것 같지는 않다. 과도한 상속세 등으로 기업 경영의 뿌리가 흔들리는 현실에 비춰 보면 ‘곁가지 쳐내기’ 수준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가 기업계에 200년, 300년 가는 ‘기업 거목’들을 키워내려면 상속세 제도를 서둘러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업 승계 공제 확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약탈적’ 상속세율 자체를 손봐야 한다. 이 정도는 해야 후일 윤석열 정부가 킬러 규제를 팍팍 걷어 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천광암 칼럼 논설주간 iam@donga.com}
대선 국면에서 ‘대장동 특강’으로 존재감을 보여줬던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또 한번 ‘일타강사’로 나섰다. 서울∼양평고속도로 노선 변경 특혜 의혹은 더불어민주당의 근거 없는 거짓 선동이라는 취지의 유튜브 영상을 통해서다. 12일 처음 올라온 이 영상은 16일 현재 조회수 56만을 넘겼다.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한 ‘원안’이나 ‘민주당 수정안’보다는 ‘국토부 대안’이 편익이나 기술 면에서 우월하고 지역 주민들의 기대에도 부응하는 안이라는 게 이 강의의 요지다. 주장의 구체적인 뼈대는 크게 세 줄기다. 첫째, 노선 변경 의견을 처음 제시한 것은 전문 엔지니어링 업체이며, 이 업체에 관련 용역을 발주하는 절차는 문재인 정부 시절에 이뤄졌다. 또한 이 업체가 대안을 국토부에 처음 보고한 것은 자신이 국토부 장관에 취임한 지 불과 3일 뒤의 일이라고 원 장관은 설명한다. 국토부 대안은 실질적으로 이전 정부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취지다. 둘째, 전문가들의 검토에 따르면 도로 설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교통량 흡수 측면에서 예타 원안보다 국토부 대안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환경이나 문화재 보호, 마을 보존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도 ‘국토부 대안’이 월등하다고 원 장관은 설명한다. 끝으로 국토부 대안의 종점에 김건희 여사 일가의 땅이 있다고 해서 특혜라고 할 수는 없다고 원 장관은 강조한다. 서울∼양평고속도로 종점은 진출입로가 없는 분기점이어서 땅값을 끌어올리는 호재가 아닌 데다, 일가 땅도 이미 ‘1980년부터 갖고 있던 땅’이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조회수나 댓글 반응을 보면 일단 원 장관이 일타강사로서의 ‘이름값’을 높이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지지층 일각에서는 ‘제2의 한동훈’이라는 반응도 나온다. 하지만 원 장관의 특강이 특혜 의혹 해소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의문이다. 거의 모든 쟁점에 대해 국토부·여당과 민주당 간에 반론과 재반론이 오가며 공방은 확산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김 여사 일가가 ‘1980년부터 갖고 있던 땅’이라는 대목에 대해서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일가 소유의 땅이 2005년 이후 매매를 통해 취득됐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강력한 반론에 부딪힌 상태다. 여야 공방은 그렇다 치자. 무엇보다 유튜브 특강에서처럼 일도양단식으로 설명이 가능한 내용이라면 그동안 원 장관이 보여준 ‘오락가락 행보’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원 장관은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국민적인 의혹을 사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강상면 종점안’에 대해 전면 재검토를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달 3일 기자간담회에서는 ‘늘공’ ‘어공’ 비유까지 해가면서 실무진의 ‘정무 감각 부재’를 질타했다. 그러다가 6일 뜬금없는 전면 백지화 카드를 던졌다. 여야 공방의 비용을 고스란히 국민에게 떠넘긴 ‘고속도로 사업 전면 백지화’는 어떤 논리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원 장관은 “민주당이 정치 공세를 계속할 것이기 때문에 이 정부 임기 안에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민주당이 의혹 제기를 하는 정책, 사업마다 건건이 백지화로 대응할 셈인가. 민주당이 김 여사를 최고의 ‘정치공세 소재’로 삼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앞으로 제2, 제3의 ‘종점 의혹’이 나올 것이다. 우상호 의원은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던 지난해 8월 “우리들 입장에선 김건희 여사가 계속 사고를 치는 게 더 재미있다”는 ‘속내’를 내비친 적이 있다. 대통령 주변의 비위를 감찰할 ‘특별감찰관’ 임명과 관련해서 “야당 입장에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라는 발언을 부연하면서 나온 말이다. 여당이 김 여사를 둘러싼 의혹과 정치 공세의 늪에서 헤어나는 길은 우 의원의 말속에 실마리가 있다. 윤 정부 출범 이후 1년 이상 비어 있는 특별감찰관 자리를 서둘러 채워야 한다. 대통령 주변의 비위를 상시적으로 감찰하는 특별감찰관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어지간한 의혹은 국민에게 먹혀들지 않는 ‘백신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부수적인 효과를 떠나 대통령 주변에서 비위가 자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본질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일타강사가 와도 ‘건드릴수록 커진다’는 의혹의 속성을 바꿔 놓을 수는 없다. ‘고속도로 종점 의혹’이 해소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지금이라도 특별감찰관 임명을 서두르는 게 좋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일본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오염수 해양 방류를 둘러싼 여야의 장외 공방이 점입가경이다. 5월부터 방류 반대 서명운동을 벌여온 더불어민주당은 1일 서울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졌다. 국민의힘은 ‘릴레이 회 먹방’을 이어가는 중이다. 일부 여당 의원들은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을 찾아 수조 속 바닷물을 떠 마시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지 않으면서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일에는 여야 모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정치적 득실 계산이 앞선다. 그러다 보니 ‘과학’은 뒷전이고 억지 주장과 앞뒤 안 맞는 언행이 난무한다. 심지어 한 야당 중진의원은 앞에서는 오염수 반대 서명을 받고 뒤에서는 홋카이도 골프 여행을 가는 계획을 짜는 일까지 있었다. 민주당은 안전성 검증을 맡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해상 방류 이외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민주당의 주장이 진정성과 실현 가능성을 가지려면 민주당이 여당 시절이던 문재인 정부에서 답이 나왔어야 한다. 일본에서 해상 방류가 본격 거론된 것은 2020년 2월의 일이다. 일본 정부 산하 자문기구는 그때까지 검토되던 5가지 방안 중 해양 방출과 대기 방출 2가지 방안이 현실적이며, 둘 중에는 해양 방출이 낫다는 권고안을 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자문단 권고에 대한 IAEA의 검증을 거쳐 2021년 4월 각료회의에서 해양 방출 방침을 확정했다. 이런 과정을 문재인 정부는 지켜만 봤다. 2020년 10월 당시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2021년 4월 당시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국회에 나와 한 답변에 문재인 정부의 인식이 잘 반영돼 있다. 강 장관은 “(오염수 방류는) 원칙적으로 일본의 주권적 결정 사항”이라고 말했고, 정 장관은 “IAEA 기준에 맞는 적합한 절차에 따른다면 굳이 반대할 건 없다”고 했다. IAEA 보고서의 구체적인 내용에 부적절한 점이 있다면 문제를 삼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정치적 입지가 바뀌었다는 사정만으로 합당한 이유도 없이 IAEA라는 기관의 신뢰성 자체에 시비를 거는 것은 스스로의 신뢰도를 깎아 먹는 일이다. 국민의힘도 민주당의 주장을 모두 ‘괴담’으로 몰아가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힘 지지층의 53%와 무당층의 82%가 ‘후쿠시마 방류가 우리나라의 해양과 수산물을 오염시킬까 봐 걱정’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불안감이 커진 데는 국민의힘도 한몫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제주지사 시절이던 2020년 10월 “제주와 대한민국은 단 한 방울의 후쿠시마 오염수도 용납할 수 없다”며 “민형사 소송을 불사하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김기현 대표도 2020년 10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오염수가 1년 정도 걸려서 동해로 흘러 들어온다는 일본 가나자와대 등의 발표 내용을 인용한 적이 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제안한 국제해양법재판소 제소 방안에 대해 “발상 자체가 아이러니고 코미디”라고 비판했지만 제 발등 찍기다. “유엔해양법협약 제207조에 의하면 육상 오염원에 대한 해양 오염을 방지할 의무가 각국에 부과돼 있습니다. 따라서 이에 따른 국제 소송과 가처분신청도 해야 될 것이고….” 이 또한 다른 사람도 아닌 김 대표가 국회에서 했던 발언이다. 이 방안이 타당한지 여부를 떠나, 자기주장을 뒤집을 때는 최소한의 설명이라도 있어야 한다. 원전 오염수 처리의 안전성에 대한 검증은 해당 분야에 대한 고도의 전문성과 방대한 데이터의 실증분석이 필요하다. IAEA와 한국 후쿠시마시찰단의 최종보고서와 원자료가 전부 투명하게 공개된 다음 민간 전문가들이 최대한 참여해 신뢰성을 검증해야 안전성에 대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런 과정 없이 민주당이 무조건 반대를 외치며 장외로 뛰쳐나가는 것은 당리당략적 차원의 ‘불안 마케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도 안전성을 최종 확인하기 전에 오염수 방류를 기정사실화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여선 안 된다. 일어나선 안 될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여러 차례 되풀이했던 말은 “상정외(想定外)”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 정부 여당이 할 일은 ‘먹방’이 아니라 0.1%의 ‘상정외’ 가능성까지도 ‘상정’해서 일본에 안전대책을 요구하는 것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중국 인민해방군 병력 4만 명이 양쯔강을 넘어 티베트(시짱·西藏) 동부를 침공한 것은 1950년 10월의 일이다. ‘국공내전’을 치르면서 무수한 실전으로 단련된 인민해방군이 제대로 된 훈련 한번 받은 적이 없는 티베트군을 궤멸시키는 데는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유엔 등 국제사회도 ‘약소국’ 티베트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 여유가 없었다. 그해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1951년 외형적으로는 ‘협의’, 실질적으로는 ‘강압’으로 티베트를 병합한 중국은 독립이나 자치를 요구하는 봉기나 시위에 대해 가차 없는 폭력으로 대응했다. 폭격기나 탱크를 앞세운 무차별 살육도 주저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불교 탄압과 티베트어 말살 등 민족 정체성을 지워버리려는 ‘공작’이 진행됐다. 한족(漢族) 노동자와 군인 등을 대대적으로 이주시켜 티베트를 식민지화하는 작업도 줄기차게 진행 중이다.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의 발언 후폭풍이 거센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의원 7명이 ‘논란의’ 티베트 방문을 강행했다. 단장 격인 도종환 의원은 ‘제5회 시짱관광문화국제엑스포’의 부대 행사로 17일 열린 키노트포럼에 참석해 축사까지 했다. 도 의원은 티베트 방문에 비판적인 국내 여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부정 여론을 만들려는 것이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나머지 6명의 의원도 이번 방문을 전후해 시종일관 “정치와 무관한 관광·문화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평소 ‘소수자 인권의 옹호자’이자 ‘사회적 약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민주당 의원들의 언행치고는 무개념하다. 최근 국제적으로 유행하는 현상 중에 ‘그린 워싱(Greenwashing)’ ‘스포츠 워싱’이라는 것이 있다. 악덕 기업이 ‘눈속임’성 친환경 행보로 이미지를 분칠하거나, 인권 침해 논란에 휩싸인 국가가 사람들의 이목을 혹하게 만들 만큼 화려한 스포츠 행사로 ‘이미지 물타기’를 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개혁주의자인 후야오방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1980년 중국이 티베트에 저질러 놓은 참상을 눈으로 확인하고 부끄러움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티베트를 둘러싼 어두운 역사를 지금의 중국은 어떻게든 지우고 덧칠하려 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개발워싱’ ‘관광워싱’ ‘문화워싱’이다. 이를 통해 중국이 만들어 내려는 티베트상(像)은 2021년 10월 당시 왕이 외교부장이 했던 연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오늘날 티베트는 중국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티베트는 개방과 협력의 중요한 창구입니다. … 시짱관광문화엑스포 등이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이웃 국가들과의 일대일로 협력은 풍성한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 우리는 티베트의 발전과 진보에 대한 어떠한 공격이나 비방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수사와는 달리 티베트의 인권은 여전히 후진(後進)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5월 일본 히로시마에 모인 주요 7개국(G7) 정상들은 티베트와 신장 지역의 강제 노동에 대한 우려를 공동선언문에 담았다. 또 미 국무부는 5월 공개한 종교의 자유에 관한 보고서에서 티베트불교 등 종교단체에 대한 재정 감시 강화 등을 거론하며 중국을 ‘세계 최악의 인권 및 종교자유 침해국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티베트의 실질적 1인자이자 이번 박람회의 주최자 격인 왕쥔정(王君正) 시짱 당서기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당 부서기와 신장생산건설병단 서기를 지낸 왕쥔정은 심각한 인권 침해에 대한 책임자로 지목돼 2021년 3월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제재 대상 명단에 오른 전력이 있다. 정치·외교 무대에서는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장면, 한 장의 사진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도 의원은 심각한 인권 침해로 국제사회의 손가락질을 받는 인물이 주제 연설을 한 그 시각, 그 자리에서 ‘한국 의원 대표단 단장’ 타이틀을 걸고 축사를 한 자신의 행동이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갖게 될지를 스스로 숙고해 보기 바란다. 2009년 이후 지금까지 승려를 비롯한 티베트인 159명이 분신(焚身)을 했다. 이들이 스스로 몸을 불살라 가면서 전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7명의 민주당 의원들 귀에는 가서 닿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상·하원을 거쳐 넘어온 부채한도 유예 법안에 3일 서명했다. ‘미국 정부의 디폴트’를 불과 이틀 앞두고서다. 그런데 만약 이 법안이 의회에서 부결됐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세계적 신용평가회사인 S&P는 72년 역사에서 딱 한 차례,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조정한 적이 있다. 2011년 8월의 일이다. S&P는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최고등급인 AAA에서 AA+로 한 단계 낮췄다. 그 여파로 미국의 주요 주가지수가 하루 새 6% 이상 폭락하는 등 세계 증시 전체가 ‘검은 월요일’을 맞았다. 미국 정부의 디폴트는 신용등급이 하루아침에 ‘20단계 아래’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 세계 경제가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대혼돈에 휩싸이게 됐을 것이다. 이런 대재앙의 문을 열어젖히려 한 것도 정치였고, 문을 닫은 것도 정치였다. 전자는 ‘대결과 극단의 정치’였고, 후자는 ‘타협과 중도의 정치’였다. 정부의 부채한도를 의회가 정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미국과 덴마크 두 나라뿐이다. 그나마 덴마크에서는 사문화한 조항이고, 미국에서도 2011년을 제외하고는 심각하게 논의된 전례가 없다. 그럴 필요가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부채한도’는 이 금액 안에서 정부가 마음대로 돈을 쓰라는 뜻이 아니다. 이미 의회가 심사하고 승인한 예산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빚을 낼 일이 있으면 그 한도 안에서 하라는 제도다. 이런 제도가 없어도 행정부가 의회의 통제권을 벗어날 일은 없다. 그런데도 부채한도가 ‘갈등의 핵’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극단주의로 치닫는 미국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 있다. 오바마 정부 시절이던 2010년 미국에서는 강한 보수 성향을 띤 티파티(Tea Party) 바람이 거셌고, 이는 그해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하는 여소야대(與小野大)의 결과로 이어졌다. 티파티 세력이 2011년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공세를 위해 정치적 무기로 들고나온 것이 ‘부채한도’다. 올해 상황도 그때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번에 부채한도를 놓고 벼랑 끝 공세를 편 정치세력은 ‘티파티’의 후신으로 극단주의 성향이 더 짙어진 ‘프리덤 코커스’ 그룹이다. 이들은 케빈 매카시 의원(공화당)이 하원의장으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투표를 14차례나 부결시키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손에 넣었다. 의회 주요 위원회의 요직을 보장받은 것은 물론이고 의원 한 명만 동의(動議)해도 의장 사퇴를 표결에 부칠 수 있는 조항을 관철시켜 매카시 의장의 ‘목줄’을 틀어쥐었다. 이들은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매카시 의장이 타협에 응하지 않도록 공개적이고 지속적인 압박을 가해 왔다. 매카시 의장은 강경 우파의 반발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가 혼돈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합의안에 서명했다. 다행히 파국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공화당 의원은 매카시 의장 혼자가 아니었다. 하원에서만 149명의 공화당 중도파 의원들이 부채한도 유예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바이든 대통령이라고 해서 타협 외의 선택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 나온 ‘재무부가 1조 달러(약 1310조 원)짜리 동전을 주조하는 것과 같은 해법’도 궁여지책이긴 하나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타협에 대한 당내 강경파들의 반발도 거셌다. “우리는 전 세계의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는다. 왜 공화당이라는 경제 테러리스트와 협상하려 하는가”라고 외치는 민주당 의원도 있었다. 그럼에도 바이든 대통령은 타협을 선택했고 백악관 고위 참모들이 나서서 공화당 의원들을 설득하도록 했다. 매카시 의장과 타협안을 도출한 이후에도 공화당 의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로키 전략’으로 일관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매카시 의장과 잠정 합의안에 사인한 뒤 기자들과 만나 “아무도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타협안”이라며 “그것이 통치에 따르는 책임”이라고 말했다. 평범하고 상식적이지만 지당한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다. 최근 국회를 거쳐 윤석열 대통령의 책상에 쌓이는 법안들은 ‘거부권 행사 대상’ 아니면 ‘여야 짬짬이 포퓰리즘’ 법안들뿐이다. 여야 모두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식으로 상식과 중도를 잃어버린 탓이다. ‘제로 성장’ ‘인구소멸’ ‘연금 파탄’으로 치닫는 대한민국의 발걸음을 돌려세울 협치 법안이 윤 대통령의 책상 위에 오를 날이 과연 올지 걱정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가상화폐는 가치가 전혀 없는 쓰레기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사를 국내에서 꼽으라면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그중 한 명일 것이다. 그는 2018년 1월 30일 김어준 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상세하게 밝힌 적이 있다. 유 전 이사장은 가상화폐 투자는 한마디로 ‘도박’이자 ‘다단계 사기’라고 잘라 말한다. 절반 인터뷰, 절반 대담처럼 진행된 방송에서 김 씨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화는 “사기다”(유 전 이사장) “사기에 가깝다”(김 씨)로 마무리됐다. 실제로 최근의 코인시장의 상당 부분은 사기꾼, 다단계업자, 시세조종 기술자, 사채업자들이 활개 치는 ‘투전판’으로 변질돼 가는 중이다. 이른바 ‘러그 풀(Rug Pull)’이라는 사기극이 빈발한다. 러그 풀이란 겉으로만 그럴싸한 프로젝트를 하나 만들어서 투자자를 끌어모은 뒤 높은 가격에 팔아치우고 일제히 ‘잠수’를 타는 ‘먹튀 사기’다. 양탄자 위에 사람을 올라가게 한 뒤 확 잡아빼서 넘어뜨리는 것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러그 풀 작업의 최적 소재로 꼽히는 것 중의 하나가 ‘디파이(탈중앙화 금융)’다. 신생 잡(雜)코인은 대개 대형 거래소에서 사고팔 수가 없기 때문에 큰손들이 코인을 묻어 ‘사설 거래소’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할을 하는 사람을 흔히 ‘유동성 공급자(LP)’라고 한다. 더불어민주당 김남국 의원이 위믹스 코인 34억 원어치를 교환해서 LP 투자를 했다는 보도가 나온 클레이스타가 바로 디파이 서비스를 통해 거래되는 코인이다(업체 측은 러그 풀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투자자 입장에서 보자면 결과적으로 러그 풀을 당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김 의원이 이런 고위험-고난도 투자를 한 것이 사실이라면 ‘국회의원의 코인 투자 부업’이라기보다는 ‘코인 타짜의 국회의원 놀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상임위 회의시간에 스마트폰을 꺼내서 코인 거래를 했다는 자체가 이런 무의식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유 전 이사장의 견해를 원용하자면 수십억 원의 판돈을 걸고 평시와 주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하우스’를 찾았다는 자체가 ‘프로 도박꾼’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럼에도 민주당과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김 의원 감싸기가 끊이지 않는다. 민주당 박찬대 최고위원은 15일 페이스북에 ‘프로테고 막시마’라는 문구를 띄웠다. 해리포터에서 나오는 말로 악마들로부터 거대한 보호막을 치는 주문이다. 또 같은 당 유정주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사냥하지 말자. 상처 주지 말자. 우리끼리라도!’라는 문구를 올렸다. 이어 19일에는 “비트코인 자체가 사회악이 되는 것이 안타깝다”며 “비트코인은 청년들에게 불안과 앞날을 준비하고픈 열망의 단면 자체”라는 글을 게시했다. 또 민주당 양이원영 의원은 19일 라디오에 출연해서 “코인에 투자하는 국민이 600만 명이 넘고, 자산을 불리지 못해 실망에 빠진 청년들이 많다는데 코인 투자가 비도덕적이라고 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김 의원을 비트코인에 투자하는 청년이나 600만 명의 코인 투자자들 중 ‘한 명’으로 비치게 하려는 게 두 의원의 속셈인지 모르지만 속아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제 휴지조각이 될지도 모르는 고위험 코인에 수십억 원을 아무렇지 않게 지르고, 여러 가지 의혹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김 의원의 코인 투자를 거론하면서 청년들의 불안과 앞날을 운운하는 것은 후안무치한 ‘청년 팔이’다. 이들보다 더 강력한 ‘프로테고 막시마’ 주문을 건 인물은 앞서 가상화폐를 ‘사기에 가깝다’고 한 유튜버 김어준 씨다. 두 차례에 걸쳐 김 의원을 불러 해명 인터뷰 장을 열어준 김씨는 10일 방송에서 “김남국 의원 60억 가상화폐 사건은 검찰이, 혹은 보수매체가 정치적 이유로, 의도적으로 키우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게 가능한 토대가 진보는 도덕성 이걸 스스로 자기 굴레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며 진보의 도덕성을 탓한다. 그러면서 김 씨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돈 많이 버는 것과 진보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룰’만 지키면 되는 거예요.” 김 씨의 말을 듣고 든 두 가지 의문이다. 첫째, 도박판이든 다단계 사기판이든 그 세계의 ‘룰’만 지키기만 하면 문제가 없는 돈벌이라는 말인가. 두 번째 궁금증은 진보의 도덕성을 ‘떨이’로 처분해 버릴 자격을 누가 김 씨에게 줬는지 하는 점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영업사원의 세계에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토론에 이기면 상담(商談)이 깨진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담(商談)은 공통의 이익을 확인하고 다듬어 가는 과정이다. 반면 토론은 생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서로의 주장이 맞부딪치고 결과로써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비록 옳은 말이라도 자신을 이기려 들거나 아픈 곳을 찌르는 영업사원에게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국가 간의 비즈니스도 다르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한국과 중국 간의 관계가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 마치 ‘상담(商談)의 시대’에서 ‘토론의 시대’로 옮겨가는 듯한 양상이다. 공동의 이익보다는 대만 문제나 ‘장진호 전투’처럼 상호 입장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슈가 전면에 부상했다. 주고받는 말의 수위도 예사롭지 않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따지자면, 윤 대통령이 틀린 말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국익의 관점에서 필요한 말인지 필요하지 않은 말인지, 이득이 되는 말인지 손해가 되는 말인지에 대해서는 숙고해볼 여지가 많다. 우리에게 중국은 대체 가능한 시장인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2001년만 해도 중국(홍콩 포함)과의 무역이 한국의 전체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4.5% 정도였다. 미국 일본 두 나라와의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33.2%)에는 절반도 못 미쳤다. 하지만 2007년 그 비중이 22.8%로 미국과 일본을 합한 비중(22.7%)을 추월했다. 지금도 중국이 미국과 일본 두 나라를 합한 것보다 규모가 큰 무역상대국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중국을 대체하는 시장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다음으로 한중 간의 교역은 일대일 수평적인 관계인가. 2020년을 기준으로 중국과의 무역액을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으로 나눈 대(對)중국 무역의존도는 16.3%에 이른다. 이에 비해 중국의 대한(對韓) 무역의존도는 1.9%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 통상 갈등이 빚어졌을 때 한국은 중국보다 8배 이상의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안보 문제와 달리 무역마찰에는 동맹인 미국도 이렇다 할 우군이 되지 못한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 이후 롯데 등 한국 기업들이 받았던 보복 조치와 한국 문화콘텐츠에 대한 한한령의 전개 양상만 떠올려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아직 ‘노(NO)’를 할 만한 실력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대놓고 상대를 자극하는 것은 위태로운 행동이다. 모리타 아키오 소니 창업주 사례가 반면교사가 될 만하다. 모리타 창업주는 뛰어난 국제감각으로 ‘워크맨’ 등 숱한 마케팅 신화를 쓴 경영인이다. ‘일본 주식회사’의 ‘대표 영업사원’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지만 말년에 돌이키기 어려운 큰 실수를 했다. 1989년 극우 인사인 이시하라 신타로와 더불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을 쓴 일이다. 이 책은 당시 소니의 컬럼비아영화사 매입으로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키워가던 미국을 크게 자극했다. 모리타 창업주 자신도 이 책을 쓴 일을 후회한 나머지 영문 번역본에는 자신의 이름과 원고를 모두 빼도록 했다. 하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쑥대밭으로 만든 미국의 ‘보복’도 이 책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힘이 부족할 때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실력을 키우는 것이 지혜다. 과감한 개혁개방으로 ‘경제대국’의 토대를 닦은 덩샤오핑이 좋은 본보기다. 1990년대 초 소련 붕괴를 앞두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중국이 국제사회의 리더로 나서야 한다는 안팎의 요구에 덩샤오핑이 내놓은 답은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실력을 키운다는 뜻으로, 덩샤오핑이 부연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도광양회는 우리나라의 기본 상황과 국제적 역량을 대비하는 현실에서 출발해 큰 뜻을 품고 또 약점을 잘 감추면서, 일에 매진하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을 과시하는 것, 스스로 표적이 되는 것, 스스로 지른 불에 타 죽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미국이 국운을 걸고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추진하는 현실에서, ‘탈(脫)중국’은 동맹인 한국으로서 상당 부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선택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나서서 중국의 ‘타깃’이 될 이유는 없다. 중국도 미국을 상대로 할 말을 하기까지는 30년의 도광양회가 있었다. 아직은 토론보다 상담(商談)이 필요한 때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