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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이 있다면 일본엔 9600만 명이 쓰는 라인(LINE)이 있다. 메시지만 주고받는 게 아니라 뉴스를 보고 온라인 쇼핑을 하고 만화와 음악을 즐기고 공공요금까지 납부해 일본 신문들이 “라인 앱은 사회 인프라”라고 칭할 정도다. 라인은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가 기획하고 신중호 대표가 개발을 총괄한 한국산 서비스로 2011년 6월 출발했다. 동일본 대지진 때 현지에 머물면서 통신망 붕괴를 경험한 이해진 창업자가 재난 상황에서도 연락 가능한 모바일 메신저로 일본 시장을 공략하자고 한 것이다. ▷일본 정보기술(IT) 기업 소프트뱅크와 ‘반반 경영’을 시작한 건 2019년부터다. 네이버의 라인과 소프트뱅크가 운영하는 일본 최대 포털 야후저팬이 결합해 ‘라인야후’가 자리 잡았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 온라인 비즈니스를 망라한 거대 플랫폼을 만들겠다며 협업을 먼저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네이버가 13년간 공들여 키워 온 거대 메신저 기업의 경영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사태의 발단은 지난해 11월 라인의 고객 정보를 관리하는 네이버 가상서버가 해킹당해 개인정보 51만여 건이 유출되면서다. 그러자 일본 총무성은 올 들어 두 차례 행정지도를 통해 네이버와 맺은 지분 관계를 재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민간 IT 기업의 해킹 사고를 문제 삼아 정부가 지분 변경을 요구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앞서 페이스북이 해킹돼 5억 건 이상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는데도 일본 정부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된다. ▷이어 라인야후의 이데자와 다케시 사장은 8일 “소프트뱅크가 과반이 되도록 네이버에 자본 변경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총무성의 행정지도에 따라 네이버에 지분 매각을 공식 요구했다는 것이다. “한국 네이버와 연결된 네트워크를 차단하고, 업무 위탁을 제로로 하겠다”며 기술 협력도 사실상 모두 끊겠다고 했다. 또 ‘라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중호 대표를 사내이사에서 배제하고 이사회 멤버 전원을 일본인으로 채운다고 한다. 라인야후에서 네이버를 배제하려는 일본의 전방위 작업이 본격화된 셈이다. ▷이는 일본 국민 80%가 쓰는 메신저 플랫폼을 한국 기업 손에 두지 않겠다는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페이스북, 유튜브 같은 미국 공룡 플랫폼은 손댈 수 없으니 라인만이라도 일본의 통제 아래 두겠다는 것이다. 라인야후에 대한 지배력 상실은 단순히 일본 1위 메신저를 빼앗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1억 명 넘는 동남아 라인 이용자를 발판으로 ‘아시아 최고 IT 기업’이 될 기회마저 일본 기업에 넘어가게 된다. ‘네이버 라인’이 ‘일본 라인’이 되는 것을 한국 정부가 뒷짐 지고 지켜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국내 원자력발전소를 흔히 ‘화장실 없는 아파트’에 비유하는 이들이 있다. 원전을 가동하면 필연적으로 사용후 핵연료가 배출되는데 지금껏 이를 영구 처분하는 시설, 즉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장(방폐장)’ 없이 임시로 보관해 왔기 때문이다. 경북 경주에 2015년부터 운영 중인 방폐장이 있지만 원전에서 쓴 작업복, 부품 같은 방사능 세기가 약한 중·저준위 폐기물만 처분할 수 있다. 고준위 방폐장 건설은 1980년대부터 아홉 차례에 걸쳐 부지 선정이 시도됐지만 주민 반발과 여야 갈등으로 번번이 무산됐다. 격렬한 반대 시위를 불러온 2003년 ‘부안 사태’로 사회적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후 박근혜·문재인 정부에서 두 번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도출된 게 특별법 제정이다. 고준위 방폐장 설립 근거와 부지 선정 절차, 유치 지역 지원 등을 담은 견고한 법제도를 만들어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고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자는 취지였다.6년 뒤 사용후 핵연료 처리 한계 하지만 특별법은 지난 20대 국회에 이어 또다시 자동 폐기될 처지에 놓여 있다. 그동안 줄다리기하던 특별법 세부 내용을 두고 여야가 잠정 합의했지만, 야당의 ‘채 상병 특검법’ 단독 처리 등으로 극심한 대치가 계속되고 있어서다. 이번 21대 국회 임기가 끝나는 29일까지 3년 전 발의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특별법’이 통과될지 미지수다. 국회가 특별법 처리에 손놓고 있는 사이 고농도 방사능과 높은 열을 내뿜는 사용후 핵연료는 원전 부지 내 임시저장시설에 쌓여 가고 있다. 1978년 첫 원전을 가동한 이래 46년간 누적된 핵폐기물은 1만8000여 t에 달한다. 그런데 이들 저장시설마저 한빛원전을 시작으로 2030년부터 순차적으로 포화 상태가 된다.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원전 가동이 중단돼 전력 공급에 심각한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뜻이다. 대만에서는 궈성원전 1호기가 저장시설 포화로 2021년 조기 폐쇄된 바 있다. 에너지 해외 의존도가 90%가 넘는 우리로선 일부 원전이라도 멈추면 발전량 부족, 전기요금 인상 같은 심각한 후폭풍이 우려된다.‘고준위 특별법’ 21대 국회서 처리해야 첫발도 떼지 못한 한국과 달리 선진국들은 고준위 방폐장 건설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반세기 넘게 쌓인 핵폐기물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원전 발전 의존도가 40%에 달하는 핀란드는 내년에 세계 최초로 고준위 방폐장을 완공한다. 스웨덴과 프랑스는 부지를 정하고 건설 준비 단계에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방사성폐기물에 민감한 일본마저 부지 선정 작업에 돌입했다. 세계 10대 원전 운영국 가운데 부지 선정 절차를 시작하지 못한 나라는 한국과 인도 두 곳뿐이라고 한다. 한국이 30조 원대 원전 수출을 위해 공들이는 체코도 4개의 후보지를 정한 데 이어 유럽연합(EU)의 친환경 정책에 맞춰 건설 일정을 앞당기고 있다. 앞서 EU는 원전을 친환경 투자 기준(녹색분류체계)에 포함시키면서 고준위 방폐장 건설을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다. 방폐장 건설 계획을 세우지 못하면 재도약을 선언한 K원전의 유럽 수출길이 막힐 수 있다는 얘기다. 원전이 경제적이면서 탄소 배출이 없는 청정 에너지원이긴 하지만 사용후 핵연료가 자연 상태로 돌아가기까지 수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방폐장 건설을 외면하는 건 현 세대가 값싼 전기의 혜택은 다 누리면서 부담은 미래세대에 전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고준위 방폐장을 짓는 데 30년 넘는 긴 시간이 걸린다. 당장 특별법이 통과된다 해도 늦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탈원전 대 친원전 프레임에 갇혀 폐기물을 후대에 떠넘기는 ‘폭탄 돌리기’를 이젠 멈춰야 한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사우디아라비아가 사막 위에 짓는 미래형 신도시 ‘네옴시티’에서 가장 주목받는 건 주거지구 ‘더 라인’이다. 조감도를 보면 홍해 연안에서 사막을 향해 좁다란 담벼락 두 개가 끝없이 이어진 것 같지만, 실상은 서울 롯데월드타워만 한 높이 500m의 빌딩 두 채가 200m 간격을 두고 170km 길이로 서 있다. 이 거대한 유리빌딩에 사람들이 산다. 두 빌딩 사이엔 숲이 우거지고 강이 흐르고, 건물 안엔 사무실 학교 병원 등 필요한 게 다 있다. 170km면 서울에서 대전쯤 거리인데, 지하 고속철도로 20분이면 닿는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3년 전 이 길쭉한 선형 도시의 계획을 발표했을 때 웬만한 공상과학(SF) 영화도 울고 갈 정도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실현 불가능한 허상이라는 비판에도 더 라인 프로젝트는 2022년 11월 첫 삽을 뜨며 현실화를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사우디의 미래를 이끌 대역사에 국내 건설사도 참여했다. 삼성물산과 현대건설 컨소시엄은 더 라인의 핵심 기반시설인 지하 철도 터널 공사를 맡고 있다.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인구가 700만 명인데, 현대 과학기술을 집약해 900만 명이 거주하는 최첨단 선형 도시를 만들겠다는 게 빈 살만의 야심 찬 구상이다. 1단계로 2030년까지 150만 명을 거주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최근 1단계 목표 인구가 30만 명으로 대폭 축소될 것이라는 외신 보도들이 잇따르고 있다. 지금 개발 속도라면 2030년까지 전체 170km 중 2.4km 정도만 공사를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우디의 재정 상황도 회의론에 힘을 보태고 있다. 더 라인을 비롯해 네옴시티 전체 공사비는 당초 5000억 달러에서 1조5000억 달러까지 불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초기 사업비를 대야 하는 사우디 국부펀드는 축구, 골프, 게임, 전기차 등에 돈을 펑펑 쓰면서 보유 현금이 1년 새 500억 달러에서 150억 달러로 쪼그라들었다. 국제유가가 예상보다 낮게 유지된 탓에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의 순이익도 지난해 25%나 줄어 오일머니를 투입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이러다 보니 사우디 정부는 해외 투자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 사무실을 연 데 이어 전 세계 은행 관계자들을 현장으로 초청해 투자 설명회를 연다고 한다. 최근 ‘세계 최대 토목공사가 24시간 진행되고 있다’는 문구를 달아 더 라인 공사 현장을 촬영한 영상까지 공개했다. 빈 살만이 ‘탈(脫)석유’를 위해 추진하는 네옴시티에는 더 라인 외에도 바다 위에 조성되는 산업단지 ‘옥사곤’, 2029년 겨울아시안게임이 열릴 관광레저단지 ‘트로제나’ 등이 들어선다. 완전체 도시를 표방한 네옴이 사막의 기적이 될지, 신기루가 될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올 들어 잡코인 가운데 가장 화제가 된 게 ‘월드코인’이다. 은색 구슬처럼 생긴 홍채 인식 기구에 자신의 홍채를 등록하기만 하면 코인 수십 개를 무상으로 받을 수 있어 세계 곳곳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 문을 연 월드코인 행사장들도 공짜 코인을 받겠다며 대기표를 받아든 이들로 북적였다. 그런데 행사장마다 눈에 띈 건 20, 30대보다 지인들과 삼삼오오 온 장노년층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줄 선 노인들도 많아 코인이 뭔지 제대로 알고 온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요즘 우후죽순 열리는 잡코인 투자 설명회도 젊은 세대보다 장노년층이 훨씬 많이 목격된다. 이쯤 되면 젊을 땐 공격적인 투자를, 나이 들면 수비적 투자를 한다는 말이 옛말이 된 듯하다. 하지만 잡코인 중에 정체를 알 수 없거나 시세 조종의 표적이 되는 게 상당수다. 월드코인도 “민간 기업이 개인의 생체정보를 마구잡이로 수집한다”, “실체 없는 폰지 사기다”라는 논란 속에 일부 국가가 사업을 중단시키면서 보름 만에 가격이 반 토막 났다. ▷비트코인 가격이 1억 원을 오르내리며 불장을 이어가자 덩달아 기승을 부리는 것이 가상자산 사기 범죄다. 지난해 경찰에 검거된 코인 범죄자는 1000명에 육박하며 1년 새 3배 넘게 급증했다. 카카오톡 등으로 특정 코인의 매매를 부추기는 ‘코인 리딩방’은 흔한 일이 됐고, 코인을 발행하겠다며 연예인, 운동선수 등을 앞세워 투자를 받은 뒤 잠적하는 ‘스캠 코인’이 성행하고 있다. 거래소에 상장된 종목과 이름만 같은 가짜 코인을 싸게 준다고 속여 돈을 가로채는 사기도 잦다. ▷그런데 코인 사기에 연루되는 장노년층이 늘고 있어 걱정스럽다. 최근 9개월 동안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가상자산 사기 피해 3건 중 1건이 50대 이상의 신고였다. 올 들어선 60대 이상에서 피해 신고가 60% 가까이 급증했다. 장노년층 ‘코인 개미’ 가운데 노후자금이나 퇴직금 같은 목돈을 투자하는 큰손이 많다 보니 사기범들의 주요 타깃이 되는 것이다. 국내 가상자산 투자자 606만 명 중 1000만 원 이상의 코인을 보유한 사람이 20, 30대를 통틀어 10%도 안 되지만 50대와 60대 이상에선 각각 13%나 된다. ▷여기에다 장노년층이 블록체인, 대체불가토큰(NFT) 등 신기술에 익숙지 않다 보니 사기에 쉽게 현혹되는 편이다. 경기 불황을 틈타 매달 연금처럼 배당금을 준다고 꼬드기는 코인 사기에 노인들이 넘어가기 십상이다. 소득 없는 고령층이 한번 금융사기를 당하면 회복이 불가능하다. 사회적으로도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코인 범죄를 뿌리 뽑고 노인들에게 피 같은 노후자금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는 것도 시급한 민생 과제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행동주의 펀드의 장단점이 있는데도 한국에서 유독 ‘기업 사냥꾼’이라는 나쁜 이미지가 굳어진 건 외국계 펀드의 ‘먹튀’가 잇따르면서다. 지배구조 개선을 명분 삼아 기업을 압박한 뒤 주가가 오르면 막대한 시세 차익을 챙겨 떠난 사례가 반복된 것이다. 소버린이 SK그룹을 공격해 1조 원 가까운 차익을 올렸고, 칼 아이칸은 KT&G를 상대로 1500억 원을 벌었다.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제동을 걸더니 한국 정부를 상대로 1조 원짜리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했다. ▷요즘 개미투자자들에게는 단 1%의 지분으로 K팝 지형을 뒤흔든 토종 행동주의 펀드가 유명하다. 이창환 대표가 이끄는 얼라인파트너스는 SM엔터테인먼트와 라이크기획 간의 계약을 문제 삼아 경영권 분쟁을 촉발시키더니 ‘이수만 없는 SM’의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이보다 앞서 한진그룹과 경영권 분쟁을 벌인 KCGI, 일명 강성부펀드는 한진 오너 일가의 갑질 논란에 대한 사회적 공분을 등에 업고 이름을 날렸다. 한때 개미들 사이에선 ‘강따’(강성부 따라잡기) 투자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행동주의 펀드들의 표적이 되는 한국 기업이 갈수록 늘고 있다고 한다. 한국경제인협회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을 받은 한국 기업은 77곳으로, 4년 만에 10배 가까이 급증했다. 조사 대상 23개국 가운데 미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규모다. 한국 기업들이 팬데믹을 거치며 역대급 실적을 올렸는데도 주가는 저평가된 곳이 많다 보니 국내외 펀드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올 들어 정부가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겠다며 ‘기업 밸류업’ 대책을 내놓자 이에 편승한 행동주의 펀드의 공습이 더 거세지고 있다. 3월 주주총회에서 배당·자사주 매입 확대, 경영진 교체, 감사위원 선출 등을 요구한 펀드가 한둘이 아니다. 전략도 더 치밀해졌다. 늑대가 무리 지어 먹잇감을 사냥하듯 소수 지분을 가진 펀드들이 뭉쳐 한 기업을 공격하는 ‘울프 팩’ 전술이다. 삼성물산 주총에선 영국계 시티오브런던 등 5개 펀드가 연합해 회사가 계획한 것보다 8000억 원이나 많은 주주 환원을 요구하다가 표 대결에서 졌다. ▷해외에서는 행동주의 펀드가 기업의 사회·환경적 책임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긍정적 평가도 받지만, 단기 주가 부양에만 매달려 경영권을 위협하고 기업의 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펀드가 적지 않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차등의결권, 포이즌필 같은 투기적 펀드에 맞설 경영권 방어 장치는 여전히 국내에 도입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통 크게 주주 환원을 확대하라고 하는 건 총 없이 전쟁터에 나가라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국민연금을 애초 받을 나이보다 1∼5년 앞당겨 일찍 타가는 걸 조기노령연금이라고 한다.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직한 사람들의 노후 소득을 보장해주기 위해 1999년 도입됐다. 국민연금 가입 기간이 10년 넘고 소득이 일정 수준 이하면 신청할 수 있지만, 미리 당겨 받는 만큼 일종의 페널티가 있다. 1년 일찍 받을 때마다 연금액이 연 6%씩 깎여 3년 먼저 받으면 18%가, 5년 미리 받으면 30%가 감액된다. ▷원래 받을 나이가 됐다고 연금액이 다시 올라가지도 않는다. 5년 일찍 받으면 당초 받을 연금의 70%를 죽을 때까지 받는다는 얘기다. 조기노령연금을 ‘손해연금’으로 부르는 이유다. 그런데 이렇게 손해를 보면서도 조기에 연금을 타가는 사람이 지난해 11월 현재 85만 명에 육박했다. 10년 새 갑절 이상으로 불어난 규모다. 이 속도라면 조기연금 수급자는 올해 96만 명을 거쳐 내년이면 100만 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조기 수령자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건 은퇴는 점점 빨라지는데 노후 준비는 턱없이 모자란 탓이 크다. 지난해 한국의 55∼64세가 가장 오래 일한 직장을 그만둔 나이는 평균 49.4세에 그쳤다. 법정 정년은 60세이지만 현실 정년은 49세라는 뜻이다. 이런데도 은퇴하지 않은 가구 중 노후 준비가 잘된 가구는 8%가 안 되고, 이미 은퇴한 가구도 열에 여섯은 생활비가 부족한 형편이다. 은퇴 후 먹고살기가 빠듯해 국민연금이라도 당겨 받아야 할 처지라는 얘기다. ▷여기에다 국민연금을 받는 나이마저 늦춰지면서 은퇴 후 ‘소득 크레바스’(소득 절벽)가 길어지고 있다. 연금 수급 나이가 과거엔 법정 정년과 똑같은 60세였다가 2013년부터 5년마다 한 살씩 늦춰지도록 변경됐다. 마침 지난해도 연금 수급 연령이 62세에서 63세로 한 살 늦춰졌는데, 원래 연금을 탈 순번이던 1961년생이 1년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조기연금을 대거 신청했다고 한다. 수급 연령이 늦춰지는 5년마다 조기노령연금 신청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배경이다. ▷앞으로 1965년생, 1969년생 등 ‘낀 세대’가 1년 더 길어질 소득 공백기를 견디지 못하고 조기에 연금을 타갈 여지가 적지 않다. 문제는 지난해 조기노령연금 평균 수령액이 월 66만 원 정도에 그친다는 점이다. 은퇴 후 부부에게 필요한 최소 생활비(월 231만 원)의 30%도 안 되는 수준이다. 안 그래도 생애평균소득 대비 국민연금으로 받는 돈이 40%에 불과한데, 미리 타간다고 페널티까지 받으니 노후 버팀목이 되기에 한참이나 부족한 것이다. 쥐꼬리 수준의 공적연금 안에서도 빈익빈 부익부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씁쓸하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옛날 야구장이나 콘서트장 앞에서 웃돈을 주고 암암리에 사고팔던 암표를 요즘 디지털 세대는 ‘플미’(프리미엄) 티켓이라고 부르고, 시간 안 되고 손 느린 사람들은 ‘댈티’(대리 티케팅)를 시킨다. 온라인 공간에서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해 재빨리 티켓을 선점한 뒤 비싸게 되파는 식의 암표가 확산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컴맹이어도 몇만 원에 프로그램을 구매해 쓸 수 있다 보니 티켓 예매뿐만 아니라 대학교 수강 신청, 캠핑장 예약 등에도 매크로가 활용된다고 한다. ▷매크로는 자주 사용하는 여러 개의 명령어를 하나로 묶어 자동 반복 작업을 시키는 프로그램이다. 통상 티켓을 예매하려면 사이트 로그인→부정사용 방지 문자 입력→좌석 선택→결제 등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매크로를 동원하면 클릭 한 번으로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다. 몇 년 전부터는 보안 절차를 무너뜨리는 자체 매크로를 개발하는 건 물론이고 예매 총책부터 티켓 운반책, 자금 모집책 등을 두고 표를 싹쓸이하는 조직화된 암표상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렇다 보니 ‘피케팅’(피가 튈 만큼 치열한 티케팅)이 벌어지는 공연이나 스포츠 경기의 암표는 부르는 게 값이다. 지난달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서울시향 얍 판 츠베덴 음악감독의 협연 연주회는 예매 창이 열린 지 1분 만에 매진되더니, 당일 중고거래 사이트에 15만 원짜리 R석 티켓이 100만 원 넘는 암표로 등장했다. 롤드컵(리그오브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은 400만 원, 가수 임영웅 콘서트는 500만 원까지 암표 가격이 치솟았다. 부모님을 위해 효도 한번 해보려던 자녀들이 엄두도 못 낼 금액이다. ▷늦었지만 이달 22일부터 ‘매크로 암표상’이 처벌 대상이 된다. 개정된 공연법에 따라 매크로를 동원해 사재기한 공연 티켓을 팔다 적발되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 벌금이 부과되는 것이다.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도 최근 국회 문턱을 넘어 이르면 8월부터 스포츠 경기 암표를 팔다 적발돼도 같은 처분을 받는다. 하지만 법의 그물이 성글어 벌써부터 실효성이 크지 않을 거라는 얘기가 나온다. ▷매크로가 사용됐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운 데다 암표 몇 장만 팔아도 벌금을 충당할 수 있을 정도로 처벌 수위가 낮은 탓이다. 최근 공연 현장에서 ‘본인 확인’을 강화하자 암표상들이 제3의 아이디로 예매한 뒤 구매자 아이디로 곧장 바꾸는 ‘아옮’(아이디 옮기기)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속속 만드는 실정이다. 일본, 대만처럼 아예 제도적으로 티켓을 웃돈 주고 판매하는 것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K컬처의 위상은 세계적 수준으로 높아지는데 암표를 뿌리 뽑을 법과 제도는 언제나처럼 뒤늦게 따라오고 있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일본 정부는 지난해부터 한국의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국가공무원 종합직 시험의 응시 연령을 만 19세로 한 살 낮췄다. 또 공무원도 근무시간을 조정해 평일 하루를 쉴 수 있도록 주 4일 근무제를 확대하기로 했다. ‘일본을 움직이는 꽃’으로 선망받던 공무원의 인기가 수직낙하하자 내놓은 대책이다. 박봉에다 잦은 야근, 상명하복이 당연시되는 공직 사회를 일본 청년들이 기피하면서 공무원 지원자는 10년 새 반 토막 났다고 한다.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때 100 대 1에 육박했던 9급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은 올해 22 대 1로 32년 만에 가장 낮았다. 출세의 지름길로 통하던 5급 공채(옛 행시) 지원자도 1만여 명에 그쳐 2000년 이후 가장 적었다. 몇 년 전 미국의 한 일간지가 한국의 공시 열풍을 소개하며 “한국에서 공무원이 되는 건 하버드대 입학보다 어렵다”고 했는데 격세지감이다. ▷게다가 어렵게 관문을 통과해 놓고 공직을 내려놓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민간 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해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의 취업 심사를 받는 퇴직 공무원은 해마다 늘어 지난해 1000명에 육박했다. 과거엔 장차관이나 고위 공무원이 임기를 마치고 민간으로 자리를 옮겼다면, 요즘에는 국·과장급 베테랑 공무원에 이어 20, 30대 공무원까지 가세하고 있다. 로스쿨이나 의학전문대학원 진학, 구체적인 취업계획 없는 단순 퇴직 등을 모두 포함하면 지난해 퇴직한 5년 차 미만 공무원은 1만3000명을 웃돈다. ▷엘리트 공무원들이 선호하는 경제·외교부처에서 직원 이탈이 가속화하는 것도 최근 몇 년 새 뚜렷해진 현상이다. 급여나 워라밸 등 근무 조건은 열악한데 인사 적체는 해결될 기미가 없고, 지시는 정권이 내리는데 책임은 공무원이 지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젊은 엘리트 관료들의 사기가 꺾인 결과다. 리더가 될 만한 인재들이 줄줄이 떠나면서 정권의 지시만 충실히 따르는 ‘영혼 없는 관료’만 남게 될까 봐 걱정이라는 얘기들이 관가 안팎에서 나오는 이유다. ▷앞으로 이탈 행렬은 계속될 듯하다. 한국행정연구원의 실태조사에서 중앙 및 지방 공무원 10명 중 4명꼴로 기회가 되면 이직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9급 공무원 초봉이 올해 처음 3000만 원을 넘기고, 공무원 임금이 민간의 83%인 상황에서 이직 이유로는 ‘낮은 보수’가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규제를 만들어내는 ‘철밥통’ 공직 사회보다 도전과 창의력이 강조되는 민간 영역에 인재가 몰려든다는 측면에서 탈(脫)공무원 움직임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자부심과 꿈을 잃은 젊은 공무원의 엑소더스는 정부 위기의 신호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월급 빼고 안 오른 게 없어 ‘…플레이션’을 붙인 신조어가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더니 이번엔 프루트플레이션(과일+인플레이션) 차례다. 전체 물가를 끌어올릴 정도로 과일값 상승세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요즘 마트에서 사과 한 개에 5000원쯤 하는 장면은 새삼스럽지 않고 백화점에선 사과 한 알을 포장해 2만 원 가격표를 붙인 상품까지 등장했다. 서민들이 과일을 들었다 놨다 망설이는 게 아니라 그냥 외면하는 처지가 됐다. 체감만 그런 게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과일값은 1년 전보다 38% 넘게 급등해 32년 만에 최대 폭으로 뛰었다. 2월 물가 상승률(3.1%)의 12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사과, 귤은 70% 넘게 치솟아 가격이 널뛰기하는 코인이냐는 말이 절로 나온다. 국책연구원인 농촌경제연구원은 이달에도 딸기, 토마토, 대파, 호박 등 과일·채소값이 적게는 10%대에서 많게는 50% 이상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과일값이 이처럼 폭등하는 건 지난해 이상 기후로 흉작이 든 탓이다. 봄엔 이상 저온, 여름엔 폭염과 폭우, 가을에는 병충해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주요 과일의 생산량이 20∼30%씩 급감했다. 게다가 가격 상승세를 주도하는 사과, 배는 까다로운 검역으로 수입이 안 된다. 정부는 병해충 유입 등을 우려해 세계무역기구(WTO)의 동식물 위생·검역조치(SPS)에 따라 사과, 배, 복숭아 등 8개 작물의 수입을 제한하고 있다. 다른 나라가 이들 작물을 우리나라에 수출하려면 8단계로 이뤄진 수입위험분석 검역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아직 이걸 통과한 곳이 없다. 1992년 이후 미국 독일 뉴질랜드 등 11개국이 한국에 사과 수입 허용을 요청했지만, 진전 속도가 가장 빠른 일본도 8단계 중 5단계 관문에 멈춰 있다. 사과, 배의 생육 주기가 1년 단위인 점을 감안하면 올가을 햇과일이 나오기 전까지 가격 초강세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과, 배 가격이 뛰면 대체 과일로 수요가 옮겨가 과일값이 연쇄적으로 오르고 채소값 상승세까지 자극할 소지가 다분하다. 이는 곧장 외식·식료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치솟는 과일값을 잡지 않고는 물가 상승률 2%대 회귀가 힘들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가 이번에도 꺼내든 카드는 ‘세금으로 할인 지원’이다. 설 연휴를 앞두고 690억 원을 들여 농축수산물 할인 지원에 나선 데 이어 다음 달까지 또 600억 원을 투입해 사과, 배 등을 할인해 주고 수입 과일의 관세를 낮추기로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일회성 재정 지원이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반짝 세일이 365일 세일이 되면 시장 가격을 왜곡하고 물가 잡기에도 힘이 달릴 뿐이다. 금(金)사과, 금배 현상이 어쩌다 올해 발생한 일이라고 넘어간다면 오산이다. 농가 고령화로 문 닫는 과수원이 늘고 있는 데다 기후 변화까지 겹쳐 과일 재배 면적은 빠르게 줄고 있다. 사과 재배 면적이 매년 1% 감소해 2033년이면 서울 여의도의 10배에 달하는 재배지가 사라진다고 농촌경제연구원은 예측했다. 지구 온난화 여파로 2070년대엔 강원 일부 지역에서만 사과 재배가 가능하다는 관측도 있다. 이제 국내 작황에만 사과, 배의 수급과 가격을 의존하기보다 일정 부분 시장 개방을 검토할 때가 됐다. 그래야 소비자 선택권이 넓어지고 탄력적인 물가 대응도 할 수 있다. 정부는 수입 가능성을 거듭 일축하고 있지만, 금값 과일이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로 자리 잡은 만큼 중장기 수입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국내 생산 기반이 무너지지 않도록 과일 농가의 자생력을 키워주는 대책도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농산물 유통구조를 개선하고 기후 변화에 맞춰 품종을 개량하는 방안도 시급하다. 국민들이 사과, 배 하나 사먹는 걸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부동산 고수와 현금 부자들이 모여 있는 경매 시장은 부동산 경기 선행지표로 통한다. 경매를 찾는 발걸음이 뜸해지면 부동산이 하락기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며, 반대로 경매 시장이 꿈틀대면 침체기가 끝났다는 신호로 본다. 요즘 경매 시장은 매물은 쌓이는데 입찰에 참여하는 사람이 줄면서 역대급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올 1월 전국 법원에 들어온 신규 경매 신청은 1만 건을 넘어서며 월별 통계로 10년 6개월 만에 가장 많았다. ▷고금리와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가계와 기업, 자영업자들이 빚을 제때 갚지 못하면서 경매로 넘어가는 부동산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기업 10곳 중 4곳이 번 돈으로 이자도 못 내는 형편이고, 한계에 부닥친 소상공인·자영업자의 줄폐업이 이어지다 보니 아파트형 공장이나 상가도 줄줄이 경매에 나오고 있다. 지난달엔 서울 명동 중심거리의 꼬마빌딩이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경매에 나왔지만 새 주인을 찾지 못하고 유찰됐다고 한다. ▷무엇보다 경매로 날리는 ‘영끌족’의 부동산이 수두룩하다. 지난해 경매가 진행된 서울 아파트는 7년 새 가장 많았고, 최근 교통이나 학군 좋은 대단지 아파트도 대거 경매로 쏟아지고 있다. 통상 3개월 이상 이자가 연체되면 은행 등 금융회사가 경매를 신청할 수 있는데, 부동산 급등기에 무리하게 대출받아 집을 산 영끌족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를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소득 기반이 취약한데도 과도하게 빚을 낸 20, 30대 영끌족의 충격이 더 크다. 지난해 가계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가처분소득은 1%대로 늘어난 반면 물가 영향을 뺀 이자 비용은 27% 넘게 치솟았다니 예견된 결과라 할 만하다. ▷여기에다 전세 사기와 역전세난의 여파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들이 법원에 강제 매각을 신청하는 강제경매 또한 늘고 있다. 1월 수도권에서 강제경매를 신청한 아파트·오피스텔·빌라는 역대 가장 많았다. 이 중 전세를 끼고 갭투자한 2030세대가 집주인인 매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경매로 넘어간 서울 빌라 10채 가운데 1채 정도만이 낙찰되는 수준이어서 보증금을 날릴 위기에 처한 세입자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다. ▷아파트부터 상가, 빌라까지 경매 물건이 쌓이지만 수차례 유찰에도 주인을 찾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최근 2년간 시중은행이 경매를 신청한 4건 중 1건은 아직 낙찰자를 찾지 못했고, 그나마 매각에 성공한 4건 중 1건도 은행이 돌려받아야 할 금액보다 낙찰가가 낮았다고 한다. 부동산 시장 침체와 고금리 폭탄의 파장이 영끌족의 눈물을 거쳐 금융권 부실로 옮겨가고 있어 우려스럽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팀 쿡 최고경영자(CEO)가 2014년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게 있다”고 했지만, 애플이 자율주행 전기차를 개발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애플의 전 이사회 임원이 한 인터뷰에서 “스티브 잡스의 생전 꿈이 혁신 자동차 ‘아이카’를 만드는 것이었다”며 애플 애호가들을 흥분시켰고, 이름난 자동차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들이 줄줄이 애플로 자리를 옮겼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CEO가 “애플이 우리가 해고한 사람을 모두 고용한다”고 할 정도였다. ▷10년간 애플이 개발해온 ‘애플카’는 전 세계 언론과 기업, 투자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애플이 공동 개발과 위탁 생산을 위해 BMW, 현대차·기아, 닛산 등을 물밑 접촉했다는 소식이 알려질 때마다 관련 기업 주가가 치솟았다. 월가의 투자은행들은 ‘애플의 차세대 캐시카우는 스마트폰 아닌 자동차’, ‘애플카 출시 4년 내 자동차 강자가 될 것’ 등의 전망을 쏟아냈다. 입 다물고 있던 쿡 CEO도 “그동안 많은 내부 연구가 빛을 보진 못했지만 자율주행은 다를 것”이라며 힘을 보탰다. ▷그런데 애플이 공들였던 애플카 개발을 접고 2000여 명이 몸담았던 전기차 조직을 해산할 것이라고 27일 외신들이 보도했다. 애플카 출시가 2025년에서 2026년으로 연기된 데 이어 2028년까지 미뤄진다더니 결국 포기 수순에 들어간 것이다. 혁신의 상징 애플도 자율주행 기술의 벽을 넘지 못한 탓이 크다. ‘바퀴 달린 스마트폰’을 만들겠다는 야심한 계획은 운전자가 운전대를 잡아야 자율주행이 가능한 수준으로 수정돼 테슬라 짝퉁이 될 것이냐는 혹평이 쏟아졌다고 한다. ▷냉각기에 접어든 전기차 시장 상황도 영향을 끼쳤다. 3년간 연평균 65%씩 고속 성장하던 전기차 판매량은 올해 9% 증가에 그친다고 한다. 얼리어답터들은 이미 구매를 끝냈고, 일반 소비자는 비싼 가격과 불편한 충전 때문에 전기차 구매를 꺼리고 있어서다. 게다가 미국, 유럽 등 주요국들이 전기차 전환 속도 조절에 나서고 있다. 이러다 보니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전기차 대신 전기차로 가는 징검다리로 여겨졌던 하이브리드차 생산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중국 전기차의 공세 또한 무섭다. 테슬라를 제치고 세계 전기차 1위에 오른 중국 비야디를 두고 미국자동차연합은 “중국 초저가 전기차가 핫케이크처럼 팔릴 것”이라며 위기감을 드러냈다. 요즘 중국 차는 싸구려라는 꼬리표를 떼고 품질까지 인정받고 있어 더 위협적이다. 중국 가전업체 샤오미는 최근 첫 전기차를 공개하며 “포르셰와 테슬라가 라이벌”이라고 선언했다. 머스크 CEO가 “무역장벽이 없다면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 경쟁사를 다 무너뜨릴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도 허투루 넘길 얘기가 아니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10년 전만 해도 미국 수도 워싱턴에 사무소를 낸 국내 기업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중견기업들까지 가세해 40여 개 기업이 워싱턴사무소를 운영한다고 한다.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부터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기치를 높이 든 조 바이든 행정부까지 미국의 굳건한 보호무역 장벽을 경험한 기업들이 사무소를 두고 워싱턴의 정·관계 채널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 정부가 2022년 인플레이션감축법(IRA)부터 이른바 ‘칩스법’(반도체지원법)까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위한 공격적 입법을 추진하면서 이런 움직임이 가속화됐다. 한국 기업을 차별하는 IRA가 미 의회를 통과한 뒤에야 부랴부랴 대응에 나섰던 한국 정부에 의존하기보다, 자체 네트워크를 쌓아 각자도생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한국과 인연이 각별한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를 북미총괄 부사장으로, LG그룹이 15년간 백악관에 몸담았던 조 헤이긴 전 부비서실장을 워싱턴 공동사무소장으로 임명한 게 이즈음이다. ▷최근엔 현지의 ‘친한파’ 인사 대신 ‘미국통’으로 꼽히는 국내 외교안보 출신 인사를 영입해 글로벌 현안에 대응하려는 기업이 늘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해 외교부 북미과장을 거친 김일범 전 대통령실 의전비서관을 부사장으로 영입해 미국 대관 업무를 맡겼다. 아산정책연구원 워싱턴소장을 지낸 우정엽 전 외교부 외교전략기획관도 현대차 전무로 합류한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안보 교사’로 불린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은 HD현대의 조선 지주사(HD한국조선해양) 사외이사 선임설이 돌고 있다. ▷각 기업의 ‘워싱턴 라인’들은 11월 치러지는 미국 대선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물밑 로비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4대 그룹의 대미 로비자금은 벌써 사상 최대 규모로 늘었다. 워싱턴 현지 사무소들은 현재 ‘워룸’(전시 상황실)처럼 운영되며 미국의 경제·통상 정책 동향을 수집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쪽이든, 바이든 대통령 쪽이든 접촉을 최대한 늘려 선거 결과에 따른 정책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대선이 8개월 남짓 남아 변수가 많지만, 지금 분위기로는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이 최대 리스크다. 당선되면 취임 첫날 바이든 정부의 IRA를 폐기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미국에서 관련 공장을 가동 중인 국내 기업들은 타격이 불가피하다. 중국에 대한 징벌적 관세나 수출 통제의 여파도 쓰나미처럼 몰려올 것이다. 이미 각국은 트럼프의 귀환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캐나다처럼 아예 정부 차원의 태스크포스를 만든 나라도 있다. 우리만 기업에 대비를 맡겨두고 사실상 손 놓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반세기가 흐른 1995년, 일본 곳곳에서 ‘침략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도쿄에서 서북쪽으로 100km쯤 떨어진 군마(群馬)현에서도 조선인 6000여 명이 강제징용으로 끌려왔고, 이 중 상당수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숨진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지역 시민단체와 기업,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추도비 건립에 나섰다. 재일동포들도 총련, 민단 가릴 것 없이 힘을 보탰다. ▷그렇게 2004년 세워진 것이 다카사키시 ‘군마의 숲’ 공원에 있는 ‘군마현 조선인·한국인 강제연행 희생자 추도비’다. 비석 앞면엔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라는 글이 일본어와 한글, 영어 순으로 크게 쓰여 있다. 뒷면에는 한국인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입힌 역사를 반성해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긴 글이 일본어와 한글로 적혔다. 일본의 반성을 담은 추도비가 지자체 소유 공원에 들어선 건 군마현이 유일한데, 당시 현은 정치적 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설립을 허가했다. ▷그런데 20년간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있던 이 추도비가 29일부터 철거에 들어간다. 군마현은 2주 동안 공원 전체를 폐쇄하고 추도비를 철거한다고 한다. “강제동원 역사를 부정하는 만행”이라며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철거를 지지하는 우익단체의 충돌을 고려한 조치다. 시민단체가 추도비 앞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다는 것을 트집 잡아 극우 세력들이 철거를 주장한 건 아베 신조 정권이 출범한 2012년 무렵이다. 이때부터 일본 각지의 한국인 위령비, 추모비가 우익 세력의 표적이 됐다. ▷이어 2014년에는 도쿄에 있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철거를 주장해 온 혐한 단체가 군마현 추도비 철거 청원을 냈고, 자민당 의원이 다수였던 현의회가 이를 받아들였다. 군마현은 일본의 첫 부자 총리인 후쿠다 다케오·후쿠다 야스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오부치 게이조 등 자민당 출신 총리를 4명이나 배출한 보수 텃밭이다. 추도비를 지키는 시민 모임이 소송으로 맞대응하며 법정 싸움에 들어갔지만 보수 색채가 짙은 일본고등재판소에 이어 최고재판소까지 군마현의 손을 들어줬다. ▷일본 전역에 150개가 넘는 조선인 추모비가 있는데, 지방정부가 직접 철거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집권 내내 역사수정주의적 관점으로 과거사를 미화하려고 했던 아베 정권의 ‘침략의 역사 지우기’가 군마현에서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한일 정상의 수차례 만남으로 파행을 거듭하던 양국 관계가 정상화 궤도에 복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해의 기억을 지워 가는 일본의 변화 없는 태도가 계속되고 있어 씁쓸하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2022년 대선을 보름 남짓 앞두고 지난 정부가 청년들의 목돈 만들기를 돕겠다며 내놓은 게 ‘청년희망적금’이다. 만 19∼34세가 매달 50만 원 한도 안에서 2년간 저금하면 연 10%에 가까운 금리를 받을 수 있는 상품이다. 은행 기본금리에 정부가 주는 장려금과 비과세 혜택이 더해져서다. 급여가 3600만 원 이하인 사람만 가입할 수 있어 “무직, 실직 청년은 어쩌란 말이냐”, “금수저 알바생은 되고 고연봉 흙수저는 안 되냐”는 불만이 쏟아졌지만 290만 명이 가입하며 히트를 쳤다. ▷한도를 꽉 채워 꼬박꼬박 저축한 청년이라면 만기가 되는 다음 달 1298만 원이 찍힌 통장을 받아들고 꽤나 뿌듯해할 것이다. 스무 번째 저금 날이던 지난해 9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1000만 원을 모았다는 인증샷이 쏟아졌다. 이들과 달리 파격적 금리 혜택을 포기하고 중간에 적금을 해지한 청년도 86만 명이 넘는다. 가입자 10명 중 3명꼴이다. 직장에 들어가면 희망적금과 비슷했던 ‘재형저축’부터 가입해 종잣돈을 모았던 부모 세대라면 혀를 찰지 모른다. ▷물론 중도 해지 청년 중엔 “티끌 모아 티끌”이 싫다며 코인이나 주식 ‘한 방’을 찾아 떠난 이들도 있다. 하지만 “저축은커녕 생활비도 빠듯하다”며 마지못해 적금을 깬 청년이 대다수다. 번듯한 일자리를 얻지 못해 소득은 불안한데 전월세 가격부터 지하철 요금까지 안 오르는 게 없으니 허리띠 졸라매고 적금부터 깨는 것이다. 희망적금의 업그레이드 버전 ‘청년도약계좌’가 외면받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도약계좌는 5년간 매달 70만 원까지 저축해 5000만 원 정도를 모으는 것인데, 가입자가 정부 예상치의 20%도 안 된다. ▷SNS에 ‘거지방’을 만들어 돈 쓰지 않는 것을 서로 독려하고, 생활비를 한 푼도 안 쓰는 ‘무지출 챌린지’에 도전하는 청년들에게 저축은 사치일 뿐이다. 취업난 속에 고물가와 고금리의 충격을 온몸으로 맞다 보니 빚 수렁에 빠진 청년도 한둘이 아니다. 2030세대가 금융권에서 대출받았다가 갚지 못한 돈은 반년 새 40% 넘게 늘었다. 빚 돌려막기를 하며 금융회사 3곳 이상에서 돈을 빌린 20, 30대는 142만 명이나 된다. ▷총선을 앞두고 이번에도 정부와 정치권이 2030세대를 겨냥한 청년 대책들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하지만 교통비와 아침밥을 지원하고 전월세 대출을 늘려주고 빚을 탕감해주는 땜질식 처방으로는 벼랑 끝에 몰린 청년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미래 세대에게 필요한 건 푼돈 얹어주는 적금 통장이 아니라 꼬박꼬박 월급 주는 질 좋은 일자리다. 그래야 자립해서 스스로 돈도 모으고 빚도 갚아 나갈 수 있다. 청년을 ‘희망고문’하는 공약들을 가려내는 건 이제 우리의 몫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김 수출의 역사는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말이 좋아 수출이지, 조선을 무단 통치한 일본이 완도 어민들에게 김 양식과 가공법을 가르친 뒤 생산한 김 대부분을 수탈해 갔다. 광복 이후에도 김은 외화벌이 1등 공신이어서 “완도에서는 개도 500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았다. 김 최대 주산지가 지금은 고흥이다. 1978년 일본이 자국 어민을 보호하겠다며 한국산 김 수입을 막은 이후 완도의 김 양식장이 미역, 다시마, 톳으로 바뀌면서다. ▷한 세기가 훨씬 지나 김 수출은 1조 원 시대를 열었다. 김을 대규모로 생산해 상품화하는 나라는 한중일 3개국뿐인데, 우리가 세계 시장의 70%를 휩쓸며 압도적 1위를 자랑한다. 여의도의 218배 규모에 달하는 양식장에서는 중국, 일본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김이 생산되는데 맛과 향 등 품질도 한국산이 우월하다. 특히 김 두께를 조절하는 가공 기술이 탁월해 얇은 김밥용 김은 우리만 생산할 수 있다. ▷해외에서 인기가 좋은 건 밥에 싸먹는 김보다 간식용 김이다. 김부각, 김스낵, 김칩, 김스틱처럼 형태를 다양화하고 겨자, 김치, 치킨, 아보카도 등 각양각색의 맛을 입혀 나라별 입맛을 공략했다.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 유럽, 중동, 남미 등 120개국으로 수출 시장을 넓힐 수 있었던 힘이다. 얼마 전만 해도 서양에서 김을 먹으면 ‘검은 종이(black paper)’를 먹는다며 조롱받았지만 지금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건강과 다이어트에 좋고, 맛도 좋다’며 김 사진을 올릴 정도다. ▷그래도 서구권에서는 여전히 김을 ‘바다의 잡초(seaweed)’로 인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미국에선 전체 가구의 5% 정도만 김을 먹는다고 한다. 이를 바꿔 말하면 우리가 개척할 시장이 그만큼 넓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부와 기업들은 바닷가에 버려진 해조류와 달리 김은 양식장에서 정성껏 키운 ‘바다의 채소(seavegetable)’라는 점을 꾸준히 홍보하고 있다. 김 산업과 수출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김 산업 진흥구역’도 처음 지정했다. ▷일본에선 양식 어민이 가공, 판매까지 도맡아 하는 사례가 많다. 이와 달리 한국은 양식, 마른김 생산, 수출 등으로 분업화가 잘돼 있지만 진흥구역을 만들어 한층 더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1차로 선정된 곳은 친환경 김으로 유명한 전남 신안·해남군, 충남 김 생산의 95%를 차지하는 서천군이다. 최근 서천에서는 전국 최초로 ‘마른김 거래소’가 문을 열었다. 거래소를 통해 입찰 방식으로 수출 계약을 진행해 김값을 제대로 받겠다는 취지다. 첫날부터 8개국 바이어들이 몰렸다고 한다. 이런 노력들이 더해져 김이 ‘바다의 반도체’라는 이름값을 하길 기대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안타깝게도, 혹시나 했던 수익률 반전은 없었다. 새해 들어 만기가 돌아온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에서 대규모 원금 손실이 현실화하고 있다. 2주 동안 5대 은행에서 발생한 손실액은 2300억 원에 육박한다. 평균 수익률 ―52.7%로 투자금 절반 이상을 날렸다는 얘기다. 올 상반기에만 10조2000억 원어치의 홍콩H지수 ELS 만기가 닥치는데, 지금 추세라면 원금 손실액은 6조 원을 넘어설 것으로 우려된다. 사정없이 터지는 손실 폭탄에 투자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ELS는 통상 3년인 만기 때까지 기초자산으로 삼는 주가지수나 특정 종목 주가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으면 약정한 수익을 보장하는 일종의 파생상품이다. 2003년 처음 선을 보인 뒤 은행 예금 금리보다 2∼3배 높은 수익률을 내걸면서 저금리 시대 ‘국민 재테크’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기초자산 가격이 일정 수준 아래로 내려가면 100% 손실도 각오해야 한다. 손실 확률이 비교적 낮지만 한번 깨지면 크게 깨지는 초고위험 상품인데도, 한국에선 ‘중위험 중수익’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지금 문제가 되는 홍콩H지수 ELS도 약정 수익률을 받으려면 지수가 3년 전 가입 때보다 65% 이상은 돼야 한다. 65% 밑으로 떨어지면 하락 폭만큼 원금 손실이 발생한다. 2021년 상반기 10,000∼12,000대를 오르내리던 홍콩H지수는 현재 반 토막도 안 되는 5,000 문턱까지 주저앉았다. 중국 부동산 경기 침체와 소비 부진 여파로 올 들어 하락세는 더 가파르다. ELS 손실률이 60%를 넘어서는 건 시간 문제다. 눈덩이 손실이 본격화되자 투자자들은 집단행동에 나섰다. ELS 가입자 모임은 19일 금융감독원 앞에서 집회를 열고 “원금 손실 가능성에 대해 설명 듣지 못했다”며 “불완전판매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은행 직원들이 “중국이 망하지 않는 한 손실 날 일이 없다” “금리가 훨씬 높고 안전하다”며 가입을 권했다는 게 투자자들의 주장이다.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으로 불완전판매 요소를 점검하는 이중삼중 장치가 생겼지만 65세 이상 고령층의 ELS 투자액이 전체 개인 투자액의 30%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금융사들이 이를 요식적으로 지켰을 가능성이 높다. ELS 가입에 필요한 투자성향서 작성이나 서명을 은행 직원이 대신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금감원이 앞서 벌인 사전 점검에선 일부 은행이 직원 인사 평가에서 ELS 판매 실적을 높은 비중으로 반영해 사실상 판매를 부추겼다는 정황이 확인됐다. ELS 판매 한도를 임의로 늘린 사실도 드러났다. ELS발 대형 손실 위기는 처음이 아니다. 2008년, 2015년, 2020년 등 수차례 원금 손실 공포를 안겼는데도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건 모럴해저드에 빠진 금융회사 못지않게 금융당국의 책임도 작지 않다. 문제가 불거지고 나서야 대응에 나서는 감독당국의 뒷북 행태는 그대로다. 2019년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손실 사태 이후 금융당국은 개별 종목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ELS 판매를 금지하면서도 H지수를 포함한 지수형 ELS 판매는 허용했다. 은행들이 홍콩H지수 ELS를 판매하도록 판을 깔아준 셈이다. 이번 기회에 은행의 고위험 투자 상품 판매가 적합한지 따져 봐야 한다. 감독당국이 ELS 판매 은행과 증권사에 대한 현장 검사에 착수한 만큼 철저하게 진상을 밝혀 금융사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일반적 투자 실패와 불완전판매로 인한 피해를 명확히 가려내는 작업도 필요하다. ELS 같은 고위험 상품에 여러 차례 투자해 수익을 챙겨놓고 손실이 날 때에만 판매사에 책임을 돌리는 이들까지 무작정 보호하는 건 곤란하다. 이번 사태 수습에서도 투자자 보호는 엄격하되, 총선을 앞두고 금융 포퓰리즘에 휘둘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비트코인 가치가 산출된 최초의 기록은 2010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한 개발자가 비트코인 1만 개를 내고 피자 두 판을 사 먹으면서다. 당시 피자값이 30달러 정도였으니 비트코인 1개당 0.003달러꼴이었다.강산이 한 번 바뀌었을 뿐인데 비트코인은 현재 4만2000달러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사상 최고가였던 재작년 11월의 6만9000달러 수준에서 30% 넘게 빠졌지만, 개발자는 한 판에 2800억 원짜리 피자를 먹은 셈이다. 비트코인이 세상을 바꿀 신기술이라는 블록체인에 기반했는데도 ‘제2의 튤립 버블’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던 이유다.》한때 ‘투기 광풍’의 중심에 섰던 비트코인이 세계 최대 금융시장인 미국에서 공식 투자 자산으로 인정받아 제도권에 진입했다. 비트코인 현물에 투자하는 상장지수펀드(ETF)가 미국 금융당국의 승인을 받아 11일(현지 시간)부터 뉴욕 증시에서 거래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비트코인 ETF의 상장도, 투자도 여전히 막혀 있다. 세계 각국이 투자자를 보호하면서도 코인 산업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만큼 한국도 제도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비트코인 ‘주류 금융’ 진입 이미 뉴욕 증시에는 2021년 10월부터 비트코인 선물(先物) 기반의 ETF가 거래되고 있다. 선물 ETF는 비트코인을 담지 않고 미래 특정 시점에 미리 약정된 가격으로 비트코인을 사고팔 수 있는 선물 계약을 따르는 구조다. 이 때문에 실제 비트코인 가격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컸다. 이와 달리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이번에 승인한 현물 ETF는 비트코인을 직접 담고 있어 실질적으로 비트코인을 사는 것과 같다. 그동안 비트코인에 투자하려면 가상자산 거래소에 계좌를 만들고 별도의 코인 지갑에 보관해야 했지만, 이제는 증권거래소에서 비트코인이 포함된 ETF를 주식처럼 쉽게 사고팔 수 있게 된 것이다. 비트코인 현물 ETF는 캐나다, 독일, 호주 등이 먼저 선보였지만 글로벌 금융 중심지인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만큼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동안 가상자산에 회의적이던 투자자와 초고위험을 우려했던 기관투자가의 자금이 들어오면서 비트코인이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 피델리티 등이 내놓은 11개 비트코인 현물 ETF가 뉴욕 증시에 입성하자마자 이틀간 거래액은 77억 달러(약 10조2000억 원)에 달했다. 헤지펀드, 연기금 등 기관의 비트코인 투자가 일반화되면 올해에만 최대 1000억 달러, 중장기적으로 전 세계 ETF 자금의 3%가량인 3000억 달러가 유입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현물 ETF 상장 이후 비트코인 가격은 올해 상승분을 모두 반납하며 하락하고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상승세로 돌아설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들이 쏟아지는 이유다. 여기에다 4월 비트코인 발행량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반감기가 예정된 것도 상승론에 힘을 보태고 있다. 비트코인이 개당 1억 원을 넘어 2억 원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비트코인은 ‘사토시 나카모토’로 알려진 개발자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러온 중앙집권적 금융 체계에 맞서겠다며 2009년 내놓은 가상자산 원조이자 상징이다. 그런데 15년 만에 ‘탈중앙화’ 의미는 퇴색되고 제도권 금융이 코인을 흡수하는 역설적 상황이 된 셈이다. ● 실체 논쟁에도 세계 각국 제도권 포용 하지만 가격 널뛰기가 심해 투기적 성격이 강한 비트코인을 제도권 시장에 편입하는 것이 맞느냐는 논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SEC는 그동안 투자자 보호 장치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비트코인 현물 ETF의 상장을 거부해 오다가 미 연방법원이 재심사하라고 판결하면서 승인으로 돌아섰다. 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은 성명에서 “이제 환경이 변했다”면서도 “SEC의 결정은 ETF에 국한된 것이지 비트코인을 승인하거나 보증하는 건 아니다. 투자자들은 가상자산 연계 상품들이 지닌 수많은 위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2위 자산운용사 뱅가드를 비롯해 메릴린치, 씨티그룹 등이 비트코인 상품 출시에 거리를 두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반면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는 “현물 ETF 등장은 비트코인의 합법성, 안정성을 보여준다”며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金)’으로서 훌륭한 가치저장 수단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범죄, 자금 세탁, 조세 회피에 쓰이니 가상자산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제이미 다이먼 회장의 발언과 상반되게 JP모건은 이번 비트코인 ETF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 같은 논쟁에도 가상자산의 제도권 편입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세계 각국도 이에 발맞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 세계 최초로 가상자산에 대한 포괄적인 규제를 담은 가상자산시장법(MiCA)을 통과시켰다. 일본은 최근 은행의 스테이블코인(법정화폐에 연동하도록 설계된 코인) 발행, 가상자산을 통한 스타트업 자금 조달 등을 허용했다. 비트코인 채굴 금지령까지 내렸던 중국도 대체불가토큰(NFT) 거래가 가능한 국영 거래소를 출범시키고, 홍콩을 전면 개방해 글로벌 가상자산 허브로 구축할 계획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1일 기자간담회에서 “비트코인이 확실히 하나의 투자재로 자리 잡은 것 같다”며 “투자자산으로서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고 안정성이 있는지 시험해볼 시기가 됐다”고 말했다. ● 정부, 뒤늦게 “현물 ETF 거래 안 된다” 비트코인 현물 ETF에 대한 현지 반응은 뜨겁지만 한국 투자자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국내 증권사를 통해 해외에 상장된 비트코인 선물 ETF는 사고팔 수 있지만, 현물 ETF는 투자가 불가능하다는 방침을 금융당국이 내렸기 때문이다. 현행 자본시장법상 비트코인 같은 가상자산은 ETF가 담을 수 있는 기초자산에 포함되지 않아 위법 소지가 있다는 게 금융위원회의 판단이다. 정부는 2017년 1차 코인 광풍이 불었을 때 금융회사의 가상자산 보유나 매입, 담보 취득, 지분 투자 등을 전면 금지했는데, 여전히 이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내재 가치를 판단하기 쉽지 않은 가상자산의 태생적 한계나 2030세대가 불나방처럼 코인 투자에 뛰어들어 사회 문제가 됐던 점을 감안하면 금융당국의 신중한 입장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번 비트코인 ETF 대응 과정에서 보여준 혼선에 대해서는 비판이 많다. 미국의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은 지난해 중반부터 국내 금융투자 업계의 큰 관심사였는데 금융위는 이달 11일 오후가 돼서야 이와 관련된 유권해석을 내놨다. 또 2년 전부터 캐나다, 호주, 독일 등에서 비트코인 현물 ETF가 상장됐을 때는 손놓고 있다가 미국에서 출시되자 부랴부랴 거래를 막았다. 2년간 해외 비트코인 현물 ETF 상품을 중개해 오던 증권사들은 돌연 거래를 중단했고, 미국발 ETF 거래를 준비하던 증권사도 급하게 전산을 막아야 했다. 오락가락 ‘뒷북 규제’라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이 같은 혼선을 두고 자산시장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금융 정책의 난맥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가 적지 않다. 코인 광풍 때에는 못 미치지만 지난해 6월 말 기준 가상코인 시가총액은 28조 원을 넘어서고, 코인 투자자는 600만 명을 웃돈다. 이런데도 가상자산 불공정거래 처벌과 투자자 보호에 초점을 맞춘 초보적 단계의 ‘가산자산 이용자 보호법’은 올 7월에야 본격 시행된다. 가상자산 발행과 유통 규제, 사업자 진입 규제, 산업 육성 등을 포괄하는 2단계 가상자산법은 언제 도입될지 기약이 없다. 지금처럼 가상자산의 법적 지위가 애매모호하면 오히려 돈세탁이나 시세조종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 금융 산업의 새로운 흐름에 도태되지 않으면서 투자자 보호와 금융 건전성을 함께 고려한 인프라 마련에 속도를 내야 한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비행기가 활주하는 순간 어떤 이는 설렘과 기대에 부풀지만 어떤 사람은 초조함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비행기가 이착륙하거나 난기류를 지날 때 단순한 불안감을 넘어 신체 이상을 초래하는 극심한 불안을 느끼는 게 ‘비행 공포증’이다.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리거나 현기증, 질식감 같은 이상을 느끼고 심하면 기절하거나 심장 발작을 일으키기도 한다. 성인 10명 중 1명이 겪는 흔한 질병이라는데 국내엔 집계된 수치가 없다. 미국에선 2500만 명이 비행 공포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해외 출장이 잦은 사람이 아니라면 1년에 비행기 탈 일이 몇 번 되지 않아 과소평가되지만 비행 공포증은 일상은 물론이고 직업을 위협할 만큼 문제가 되는 병이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한 시간 남짓 비행하는 제주도 여행도 망설이게 되고, 심하면 아예 비행기 탑승을 거부한다. 네덜란드 축구의 전설적 공격수 데니스 베르흐캄프는 비행 공포증 때문에 자동차, 배, 기차로 방문 경기를 다녔다. 비행기를 못 타 연봉 협상에서 손해를 보기도 했다. 북한의 김정일이 모스크바를 오갈 때 왕복 24일에 걸쳐 기차를 탄 것도 이 병 때문이라고 한다. ▷비행기 사고는 극히 드물어 걸어 다니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자동차의 65분의 1, 상업용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2억 명당 1명꼴이다. 하지만 비행 공포증을 앓는 사람들은 이를 몰라서가 아니라 사고가 나더라도 내가 대처할 수 없다는 통제의 상실에 더 큰 불안을 느낀다. 폐소 공포증이나 고소 공포증, 공황 장애 같은 불안 장애와 얽혀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연초부터 일본 하네다공항의 비행기 충돌 사고에 이어 미국에서도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한 사고가 나면서 비행기 타기가 두렵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5일 미국에서 비행 중이던 보잉737 맥스9 항공기 동체에 큰 구멍이 뚫린 사고가 벌어졌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미국 정부는 해당 기종의 운항을 전면 중단시켰다. 맥스 기종은 보잉의 대표적 중·장거리 여객기지만 앞선 맥스8 기종은 두 차례 추락으로 탑승자 전원이 숨지는 비극을 겪었다. 이쯤 되면 비행 공포증이 아닌 ‘보잉 공포증’이 올 판이다. ▷다른 불안 장애와 마찬가지로 비행 공포증도 피하지 않고 약물, 노출 치료 같은 전문 치료를 받는 게 필요하다. 미국, 유럽 항공사들은 오래전부터 공포증을 완화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승객들이 이륙 때 눈을 감고 음악에 맞춰 명상을 하거나 공항에서 개, 토끼 같은 동물을 직접 쓰다듬으며 긴장을 낮추는 식이다. 비행 정보를 입력하면 그동안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고 가능성을 예측해주는 앱도 개발됐다. 국내엔 아직 이런 움직임이 없어 아쉬울 뿐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주택시장에서 실수요, 투자, 투기만큼 구분이 모호한 게 없다. 무주택자나 1주택자가 전세를 안고 집을 사면 갭투자로 눈총 받다가도, 나중에라도 들어가 살면 실수요자라는 당당한 호칭을 얻게 된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에 나섰던 지난 정부는 실거주 의무를 강화하는 대책들을 쏟아냈다. 2017년 8월 1가구 1주택자의 양도소득세 면제 요건에 ‘2년 실거주’를 부활시켰고, 2020년 6월 재건축 조합원의 ‘2년 실거주’를 도입했다. 이어 2021년 2월엔 분양가상한제 아파트의 실거주 의무를 시행했다. 수도권에서 분양가상한제 아파트를 분양받은 청약 당첨자는 최초 입주일부터 최소 2년 이상 거주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로또 분양’을 노린 투기 수요를 막겠다는 취지였다. 목돈이 부족한 서민들이 전세를 놓아 분양 대금을 치르고, 몇 년 뒤 돈을 모아 입주하는 내 집 마련의 사다리를 차버렸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당시 정부는 집값을 잡는 게 먼저였다. 팬데믹 이후 집값 하락으로 시장 상황이 달라지자 현 정부는 올 1월 청약 당첨자의 실거주 의무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건설사들은 정부 대책을 앞세운 홍보로 그동안 쌓였던 미분양을 털어냈다.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으로 불리는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의 ‘줍줍’(무순위 청약)엔 4만여 명이 몰렸다. 그만큼 실거주 의무 폐지 등 분양 규제 완화에 수요자들이 목말라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실거주 의무 폐지를 담은 주택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폐기될 위기다. 여야 이견으로 정기국회 마지막 법안심사소위에서도 법안은 논의되지 않았다. 정부 발표를 철석같이 믿고 분양받은 사람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실거주 의무를 적용받는 수도권 아파트는 지난달 현재 72개 단지, 4만7500여 채다. 이 중 자녀 교육이나 직장 등의 문제로 당장 입주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멘붕’에 빠졌다. 새 집 전세보증금으로 잔금을 치르려던 이들은 자금 조달에 비상이 걸렸다. 이렇다 보니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선 법망을 피할 방법이 공유되고 있다. 실거주 의무를 지키지 않으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의무 기간 내에 이사 나가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분양가 수준으로 집을 되팔아야 한다. 청약자들 사이에선 입주를 못 해 계약금을 날릴 바에는 세를 주고 벌금을 물겠다는 얘기가 나온다. 분양권을 판 뒤 본인이 세입자로 2년간 살면서 거주 의무를 채우겠다는 이면계약도 거론된다. 이 같은 혼란을 자초한 정부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야당의 협조가 없으면 법 개정이 힘든 걸 알면서도 섣부른 발표로 혼선을 가중시켰다. 야당은 실거주 의무가 사라지면 갭투자가 성행할 수 있다며 법 개정에 반대하고 있다. 그 대신 조건부로 예외를 허용하는 방안을 시행령에 담고, 애매한 사유에 대해선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를 꾸려 판단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예외 규정을 열거하는 방식으로는 제도가 누더기가 돼 시장 혼란을 더 부추길 소지가 적지 않다. 실거주 의무 여부를 가리겠다고 위원회까지 두는 건 행정력 낭비가 아닐 수 없다. 통상 새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전월세 물량이 쏟아지기 마련이지만 실거주 의무 적용 단지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전혀 없다. 가뜩이나 내년 서울 입주 아파트가 올해의 3분의 1로 급감하는 상황에서 실거주 의무에 따른 전월세 공급 경색까지 겹치면 전세시장 불안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29주째 오름세다. 국회는 2020년 재건축 조합원의 실거주 의무로 세입자가 밀려나고 전셋값이 급등하자 1년 만에 백지화한 바 있다. 부작용이 되풀이되기 전에 이번 실거주 의무도 서둘러 손봐야 한다. 양도세 면제 요건처럼 입주 시점부터가 아니라 보유 기간 중 거주 의무를 채우도록 하는 보완책이라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요즘 MZ세대에게 운동화는 그냥 신발이 아니다.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대중문화 아이템이자 투자 방법 중 하나다. 한정판 스니커즈를 산 뒤 웃돈을 붙여 되파는 리셀은 ‘슈테크’(슈즈+재테크)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나이키가 3년 전 명품 브랜드 디올과 협업해 내놓은 운동화는 전 세계 8000명에게만 판매됐는데, 리셀 가격이 판매가의 10배인 3000만 원까지 뛰기도 했다. ▷슈테크보다 앞서 등장한 ‘샤테크’(샤넬+재테크)는 코로나가 한창일 때 백화점 앞에서 밤을 새우는 ‘샤넬 노숙자’와 대신 줄을 서주는 ‘오픈런 아르바이트’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른바 ‘에루샤’(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로 불리는 럭셔리 브랜드들이 구매 이력이 있는 고객에게만 제품을 판매하다 보니 명품에 갓 입문한 2030세대는 리셀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정품 구입보다 중고 거래가 낫다는 거였다. 국내 리셀 시장은 지난해 1조 원대로 커졌고 2025년이면 2조8000억 원대로 성장할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자 샤넬, 에르메스를 비롯해 나이키, 아디다스, 뉴발란스 등 운동화 브랜드들이 지난해부터 줄줄이 ‘리셀과의 전쟁’에 나섰다. 재판매 목적으로 상품을 구매하면 판매 제한이나 계약 취소, 회원 자격 박탈 같은 불이익을 주는 조항을 약관에 명시하고 사실상 리셀을 금지한 것이다. 회사 가격 정책을 훼손하는 개인 간 거래를 막고 브랜드 가치를 지키겠다는 의도였지만 소비자들 사이에선 “내 돈 주고 산 물건 내 맘대로 처분도 못 하느냐”는 항의가 쏟아졌다. ▷그동안 한국 소비자를 ‘호갱’(호구+고객)으로 보는 명품 브랜드들의 배짱 장사가 끊이지 않았기에 고객 불만은 더 폭발했다. 명품업체들이 해마다 서너 차례씩 가격을 높이는 건 이제 놀랍지 않은 뉴스다. 애프터서비스를 받을 때도 아침 일찍부터 번호표를 뽑고 줄서야 하고, 수선된 제품을 받기까지 수개월을 기다리는 건 부지기수다. 제품 불량으로 고객이 교환을 요구할 때도 그 사이 가격 인상분을 받는다고 하니 소비자 기만이 도를 넘었다. ▷한국이 1인당 명품 소비 1위 국가에 올랐지만 이에 걸맞은 대접을 못 받고 있는 셈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작년에만 168억 달러(약 21조 원)에 달하는 명품을 구입했고, 1인당 구매액(325달러)은 미국 일본 유럽은 물론이고 명품 사랑으로 유명한 중국을 앞질렀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리셀은 구매자 권리”라며 샤넬, 에르메스, 나이키를 대상으로 리셀을 금지한 약관을 고치도록 했다. 하지만 기꺼이 호갱이 되려는 소비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명품·수입 브랜드의 ‘갑질’은 계속될 것 같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