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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올려도 사람들이 안 봐요. 길거리 다니면 가끔 절 알아보긴 하시는데 구독자, 조회수는 더 떨어지고 있어요. 이제 저 어떡하죠?개그맨 최우선(35)이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다’며 짠내 나는 읍소 영상을 올렸습니다. 아무리 봐도 누군지 잘 모르시겠다고요? 맞습니다. 척 보면 알 법한 유명 개그맨은 아닙니다. 하지만 최우선은 데뷔한 지 7년이나 된, 꽤 오래 활동해온 개그맨입니다.‘윤형빈 소극장’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로 희극인 생활을 시작한 그는 2017년 tvN ‘코미디빅리그’의 한 코너 ‘잠입수사’로 데뷔했습니다. 지난해 ‘코미디빅리그’를 그만두고 여러 유튜브 웹예능에서 활약했지만 아싸 티는 벗지 못했는데요. 최근엔 SNL 코리아 시즌4에도 출연하는 등 천천히 ‘인싸’들의 세계로 넘어오는 중입니다.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아싸 개그맨 최우선을 만났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랫동안 꿈 꿨던 개그맨의 길을 7년째 걷고 있지만 최우선의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고 합니다. 기대 만큼 호응을 받진 못해도 끝까지 ‘웃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7년차 개그맨, 슬럼프에 빠졌다고요?“거리에 나가면 알아봐주시는 사람들이 늘었는데 (유튜브 콘텐츠는) 뭘 올려도 조회수가 잘 나오지 않아서 걱정이 큽니다. 2021년 2월 채널을 개설했는데 1년 만에 구독자 수 10만 명이 넘었거든요. 100만 뷰가 넘는 콘텐츠도 꽤 있었고요. 근데 최근 1년 간 구독자 수가 2만 명도 안 들었어요. 상승세가 확 꺾여서 고민이에요.”―읍소 영상을 올리셨는데요.“유튜브가 잘 안 되고 있다는 건 사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요. 이걸 제 고민이라고 오픈한 적은 없어요. 다른 유튜버들과 달리 구독자와 소통하거나 그런 타입은 아니었거든요. 혼자 꽁해 있는 것보다 오픈주방처럼 구독자들의 조언, 직언을 듣고 싶은 마음에서 올렸습니다.”―인기를 끌지 못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아싸 대학생’이라는 부캐 하나만 계속 연기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해요. 조회수가 오르지 않는다는 건, 보는 사람만 보고 있다는 것이잖아요. 요즘 가장 큰 고민입니다. 저 역시 정답은 잘 모르지만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동안은 부캐를 활용한 콩트만 했다면 이젠 부캐를 활용한 여러 기획 콘텐츠에 도전해보려고요.”―아싸 대학생 부캐는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실제 인물을 보고 영감 받은 캐릭터는 아니에요. ‘코미디빅리그’에서 연기했던 한 코너의 캐릭터였어요. 녹화는 했는데 방송엔 못 나왔거든요. 최근 개그맨들 사이에서 부캐가 한창 인기였을 때 저도 부캐를 해봐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코미디빅리그’에서 연기했지만 방송에 나오지 못한 ‘아싸 대학생’을 떠올렸죠. 제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재밌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실제의 저라는 사람과 결이 가장 비슷하기도 했고요.”―원래 ‘아싸’ 같은 성격인가요?“그냥 평범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조용한 편이었고요. 학교에서 떠들고 웃기고 그런 타입은 전혀 아니었어요. 대부분 조용히 있는 편이었는데 친해지고 나면 재밌어지는 친구였어요. 새학기가 시작되면 1학기 때는 데면데면하다가 2학기 되면 웃겨지는 친구 있잖아요. 그게 저였어요. 다시 반 바뀌면 조용해졌고요.(웃음)”최우선이 본격적으로 ‘부캐’ 콘텐츠를 만들어 올리기 시작한 것은 2022년 2월. ‘코미디빅리그’에 함께 출연하며 동고동락했던 개그맨 김해준이 부캐로 큰 인기를 끌면서부터였습니다. 최우선과 김해준은 무명 시절 한 집에 동고동락할 정도로 친한 사이입니다.―절친 김해준 씨가 일약 스타가 됐는데요. “형이 너무 잘 돼서 놀랐어요. 제 주변 사람 중에 이렇게 유명해진 사람은 해준 형이 처음이었거든요. 스타들은 제게서 되게 멀리 있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바로 제 옆에서 같이 코미디 하던 형이 잘 되는 걸 보게 되니 많은 자극이 됐어요. 그것 때문에 ‘아싸 최우선’ 유튜브를 시작한 것도 있어요. 머리로만 새로운 도전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해준이 형 덕분에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계기가 됐죠.”―‘아싸 최우선’은 소수에게 컬트적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떡상’은 되지 않았지만 몇몇 팬들이 좋아해주시는거 보면 소수에게 어필하고 있진 않나 생각합니다.(웃음) 너무 소수여서 민망하긴 한데요. 그래도 저를 좋아해주시는 팬들이 있으니까 정말 괜찮을 때도 있습니다.”―‘아싸 대학생’은 어딘가 모르게 부족한, 모자란 느낌의 캐릭터인데요. “제가 하고 싶어하는 ‘페이소스’식 개그랑 잘 맞는 캐릭터예요. 저의 단점이나 결함, 슬프거나 짜증나는 일을 개그로 승화시키는 거죠. 나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더라도 타인에게 웃음이 될 수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마음이 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윤형빈 소극장’ 시절부터 크게 의지했던 박휘순 선배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가장 닮고 싶은 개그맨으로 박휘순 씨를 꼽으셨더라고요.“박휘순 선배는 개그맨 지망생 때 ‘윤형빈 소극장’에서 처음 알게 된 사이예요. 잘 모르는 사이였는데 되게 잘해주시는 거예요. 밥도 사주시고 술도 사주시면서. 모든 후배들에게 다 잘해주는 서글서글한 성격인줄 알았는데, 저한테만 잘해주셨던 거였어요. 이유를 여쭤보니 ‘널 보면 내 지망생 시절이 생각난다’고 하시더라고요.”―두 분이 약간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박휘순 선배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항상 웃어야 해. 안 웃으면 집에 우환이 있는 사람 같고,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 떠날 것처럼 보이니까. 우리의 무표정은 무표정이 아니다. 항상 웃어라.’ 어쩌면 개그맨으로서 제게 팁을 주신 거죠. 사실 개그맨들이 대부분 외향적이고 표정도 밝잖아요. 저처럼 우울하고 축 처지는 분위기의 개그맨은 항상 웃어야 호감처럼 보일 수 있다고 진심으로 조언해주신 거였어요.”최우선은 ‘고학력 개그맨’으로도 유명합니다. 중앙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한때 세무사가 되려고 고시원에서 지낸 적도 있습니다. 처음 개그맨이 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왜 반대하신 건가요? “대학 졸업했으니 멀쩡한 회사 취직해서 평범하게 살지 왜 그런 험한 길을 가려고 하느냐고요. 처음엔 엄청 반대하시다가 동생이 취업하면서부터 (부모님) 마음이 누그러지시더라고요.(웃음) 아들 둘 다 밥벌이 못 하고 살면 어떡하냐 걱정하신 거죠. 동생에게 고마워요. 덕분에 부모님 걱정을 덜었으니까요.”―부모님께 들은 칭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요?“원래 주변 사람들한테 자식 자랑 잘 안 하시는데, 저 개그맨 되고 나서 SNS 프로필 사진도 바꾸시더라고요. ‘코미디빅리그’에 출연한 영상 캡처한 사진으로요.(웃음) 동생은 취직해서 나가 사는데 저는 반백수처럼 부모님이랑 함께 살거든요. 집안일도 잘 하고 부모님이랑 대화도 자주 하니까 내심 저를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유튜브에 올리는 영상마다 낮은 조회수에 화제성도 떨어지니, 얼굴이 알려진 개그맨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데요. 그만두거나 숨기보다는 정면돌파를 택했습니다. 100만 뷰, 수십만 구독자를 바라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1년 내 작은 성과라도 만들어서 채널삭제하지 않는 것’이 그의 목표입니다.―목표가 너무 소박한 거 아닌가요?“옛날부터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재밌어하는 걸 좋아했어요. 팬은 많지 않고 유명세는 없지만, 그래도 제가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 역할이 계속 주어지잖아요. 그것만으로 만족해요. 타인과 비교만 하지 않으면, 제 상황은 정말 만족스러워요. 잘 나가는 동료들과 비교를 아예 안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크게 신경 쓰는 편도 아니거든요.”―개그맨이 본인의 천직이라고 생각하나요?“데뷔 전까진 후회할 때도 많았어요. 개그맨 되겠다고 학원도 다니고 공연도 열심히 했는데 잘 풀리지 않았으니까요. 서른 살이 되던 해 ‘코미디빅리그’에 데뷔하고 여러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작지만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어요. 느리지만 천천히 제 길을 가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개그맨만 힘든 건 아니잖아요.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나요? 그래도 하나뿐인 인생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불안하고 힘들 때도 있지만 재밌고 즐거울 때가 더 많습니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아이돌은 무대에서 춤 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이지 적어도 팬들과 ‘유사연애’하는 직업은 아닙니다.”‘유사연애’는 가상의 인물에게 연애 감정을 갖고 상상으로 연애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아이돌 업계에서 유독 많이 언급되는 말이죠. 아이돌 그룹 틴탑의 전 멤버 방민수 씨는 K팝 아이돌 팬덤이 ‘유사연애’를 강요하는 문화 때문에 병들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그는 19살에 아이돌 그룹 틴탑의 리더 ‘캡’으로 데뷔해 14년간 아이돌 멤버로 활동하다가 올 5월 그룹에서 탈퇴했습니다. 아이돌 탈퇴 후 화가로 활동하는 그는 틈틈이 예초(刈草·풀 베는 일)도 하는 등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연예기획사의 유사연애 비즈니스, 사생팬과 유사연애로 대표되는 팬덤의 실체 등에 대해 가감 없는 비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복수자들〉이 그를 만나 ‘아이돌 14년의 삶’에 대해 물었습니다. 아이돌과 팬의 유사연애를 조장하는 연예 기획사의 상술, 아이돌에겐 공포 그 자체라는 사생팬 문화, 아이돌 내 비인기 멤버의 설움 등을 다뤘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방민수는 2010년 데뷔한 이후부터 14년간 줄곧 ‘아이돌 부적응자’였습니다. 19살에 데뷔한 그는 성인이 된 후에도 아이돌이라는 이유로 자유롭게 자기 표현을 못하는 억압적 분위기가 싫었습니다. 신체에 타투를 한다고 욕을 먹고 팬을 보고 웃지 않는다고 비난을 당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공공의 적대감이 커질수록 그는 점점 엇나가게 됩니다. SNS 라이브 방송에서 자신에게 악플을 다는 팬들에게 욕설을 하고 흡연을 했습니다. 틴탑 내에서 ‘밉상’으로 통하던 그는 결국 팀을 탈퇴하게 됩니다.아이돌 활동 시절 그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팬들과의 ‘유사연애’가 당연시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이돌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 팬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위해 연예 기획사에서는 유사연애를 유도하는 서비스나 행사를 기획합니다. 팬이 스타에게 느끼는 연애 감정을 이용하는 건 연예 산업의 고전적인 비즈니스라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아이돌 업계에선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팬들은 아이돌과 연애하는 것 같은 환상을 구입하기 위해 기꺼이 거액을 지불합니다. 스킨십이 허용되는 아이돌 팬 사인회, 실시간 영상을 통한 아이돌의 사생활 공개, 아이돌 멤버와의 가상 온라인 채팅 등이 대표적입니다.―아이돌 산업은 ‘팬덤 비즈니스’로 유지됩니다. 팬덤 덕분에 아이돌 산업이 운영되고 아이돌 멤버들도 돈을 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팬덤 덕분에 아이돌이 돈을 버는 게 맞지만 아이돌은 극성 팬덤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극성 팬덤을 조장하고 이를 방조하는 회사의 태도가 제일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음반에 멤버별 포토카드를 넣어서 판매하는 게 대표적인데요. 팬 한 명에게 CD 여러 장을 팔려고 하는 수법이에요. 일부 극성 팬들은 원하는 멤버의 포토카드를 갖기 위해 음반 구입에만 수십, 수백만 원을 쓰게 됩니다. 돈을 많이 쓴 일부 팬들은 ‘나는 이만큼 소비를 했으니까 (아이돌 멤버에게 유사연애를 강요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BTS 같이 유명한 아이돌한테는 별로 해가 되진 않아요. 전체 팬덤이 많으니 극성 팬들의 영향력이 약할 수밖에 없거든요. 문제는 인기가 정점에 있는 아이돌이 아니라 하락세에 접어든 아이돌입니다.”―아이돌의 인기가 떨어질 때 ‘유사연애’ 폐해가 심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팬이 1만 명 있을 때랑 100명 남았을 때를 가정해보세요. 100명의 극성 팬들은 전체 팬덤이 1만 명이었을 때나 100명만 남았을 때나 쓰는 돈의 액수는 같거든요. 1만 명 있을 때는 소수였기에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다면 자신들이 다수가 된 후에는 목소리를 점점 키우는 거죠. 인기가 떨어진 아이돌에게 ‘너희 나 없으면 안 되잖아. 나 너희한테 이렇게 돈 많이 썼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너희들은 나 없으면 뭐가 되겠냐’고 권리를 주장하는 거예요.”유사연애로 시작한 팬덤이 어느 순간 선을 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사생팬(연예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극성팬을 이르는 말)의 스토킹 범죄가 대표적입니다. 사생팬에게 스토킹을 당해도 가벼운 대응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돌이 많습니다. 범행 강도가 웬만큼 심하지 않고서야 팬들을 고소·고발한다는 것이 아이돌에겐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사생팬에게 스토킹을 당한 적이 있으신가요? “데뷔 초반부터 사생팬들이 있었어요. 집 앞에서 새벽 3~4시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새벽이라 얼굴도 안 보이는데 불쑥 찾아와선 편지랑 선물을 건네는 거죠. 소름 끼치게 놀랐어요. 저는 처음부터 사생팬들을 보면 제발 오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욕도 하고 그랬어요. 당하는 입장에서 스토킹은 정말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에요. 휴대전화번호는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지 모르는 번호로 전화, 문자 오는 건 일상이고요.”―집 주소, 휴대전화번호는 개인정보잖아요. 어떻게 알고 접근하는 걸까요? “아이돌 개인정보를 거래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아이돌이 해외 공연 간다고 공항에 가잖아요. 스케줄을 공개하지 않으면 비행시간을 알 수가 없거든요. 근데 저희가 해외 나갈 때마다 소수의 팬들은 항상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팬들에게 아이돌 비행 정보를 돈 받고 파는 공항 관계자들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연예 기획사에는 직원이 많잖아요. 매니저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직군의 직원들. 그 사람들도 팬들한테 돈 받고 집 주소나 휴대전화번호를 넘긴다고 하더라고요. 비공개 스케줄을 통째로 판매하는 분도 있고요. 아이돌 개인정보를 사고파는 것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범죄나 다름 없죠.”14년간 아이돌로 살면서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졌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 틴탑에서 ‘비인기멤’이었다고 합니다. 미인기 멤버를 칭하는 ‘비인기멤’은 아이돌 그룹 내에서 인기가 없는 멤버를 의미합니다. 여러 명의 다양한 멤버로 구성된 아이돌 그룹에선 멤버별로 팬덤의 차등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비인기멤이 된 아이돌은 대인기피증이 생길 정도로 상처를 받는다고 합니다. 방민수는 활동 당시 주로 선글라스를 착용했는데, 아이돌 활동에 적응하지 못한 그가 카메라 렌즈나 타인의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틴탑 활동 시절 비인기멤이셨나요? “다른 멤버들에 비해 인기가 없었어요. 다른 멤버들이 저보다 훨씬 잘 하기도 했지만 저는 처음부터 유사연애 못 하겠다면서 행동도 ‘아이돌 답지 않게’ 한 거죠. 팬이 없는 것까진 괜찮은데 다른 멤버를 좋아하는 팬들이 저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게 힘들었어요. ‘너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멤버가 잘 나가지 못한다’ ‘너 때문에 틴탑이 뜨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면서요. 팬 사인회 같은 데서는 대놓고 싫은 티를 내요.”―비인기 멤버면 어떤 게 가장 힘든가요? “팬 사인회 같이 팬들이 참여하는 행사죠. 팬 사인회에서는 원하는 멤버들을 골라서 사인을 받을 수 있거든요. 팬 사인회 때 대부분의 팬들이 저는 보통 건너뛰고 싶어했어요. 팬들 표정에서도 저를 싫어하는 게 다 보이잖아요. 그러다보니 팬 사인회 같이 팬 만나는 행사는 아예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한테 속없이 웃어주고 싶지도 않았고요. 같이 활동하던 시기 친하게 지냈던 걸그룹 멤버가 한 명 있었어요. 그 친구도 그룹에서 비인기멤이었거든요. 군부대 행사를 갔는데 사인회를 했대요. 사인 받고 싶은 멤버한테 줄 서라고 했는데 그 친구한테는 1명도 안 선 거예요. 뒤에서 군 간부들이 군인들한테 ‘야, 저기 가서도 사인 받아, 인마’ 그랬는데 그게 더 상처였다고 했어요. 그 이야기 하면서 엄청 울더라고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상황인데도 (팬들 앞이기 때문에) 웃고 있어야 해서 너무 괴로웠다고요.”―자격지심을 느껴서 틴탑을 탈퇴했다고 개인 방송에서 고백하셨는데요. “비인기멤으로 계속 살다보면 설움의 연장선으로 자격지심이 따라와요. 사람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아를 찾아간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래도 저는 주변 멤버들과 저를 비교할 수밖에 없었어요. 틴탑에서 저는 항상 꼴찌였어요. 자격지심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정신적으로도 많이 취약해졌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돌은 ‘보여지는 나’와 ‘진짜 나’의 괴리를 느낄 거예요. 우울증이나 조울증에 걸리는 아이돌도 많고요. 저 같은 경우는 스스로 싫어하는 행동을 억지로 해야 했잖아요.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컸어요. 집에 혼자 있을 때 빼고는 전부 불행했어요. 내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싫어하는 행동을 ‘아이돌이기 때문에’ 억지로 해야 된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 컸어요. 스스로를 잘 모르는 어린 나이에, 아이돌이 돈을 벌기 위해서 어떤 일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데뷔한 제 잘못이 컸죠. 참고 또 참다가 결국 그만두게 된 거예요.”아이돌을 그만둔 그는 화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미술을 배웠던 그는 그림 그릴 때가 가장 즐겁다고 합니다. 2019년 첫 전시회를 연 그는 아이돌 활동 중에도 그림을 그려왔으며 개인 SNS를 통해 그림 판매도 하고 있습니다. 아이돌을 그만둔 후에는 일용직으로 예초 작업을 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예초 작업을 통해 그가 한 달에 벌어들이는 금액은 100만 원 남짓입니다. ―아이돌을 그만둔 지금은 행복하신가요? “돈은 훨씬 못 벌지만 행복합니다. 아이돌 때 공연 10여 분 하고 내려왔을 때 벌 수 있는 돈이 몇백만 원이었다면 예초는 2~3시간에 30만 원 벌거든요. 근데 저는 그 돈이 훨씬 가치 있고 괜찮다고 느껴질 수 정도로 아이돌 활동이 힘들었어요. 그런 상황이 왔기에 포기할 수 있었던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포기하지 못했을 거예요.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행복해요. 저는 아이돌 문화와 생활을 견디지 못해서 나왔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었던 건 14년 동안 열심히 일해 온 덕분이기도 하잖아요. 과거의 불행했던 일로 후회하지 말고 지금 행복에 집중하자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윤석열 대통령과 BTS가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황당무계해 보이는 주장을 한 이는 가설과 검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과학자입니다. 그는 서울대 물리학과 학사, 카이스트 신소재공학과 석사, 영국 케임브리지대 공학박사 과정을 밟은 맹성렬 우석대 전기전자공학과 교수(59)입니다. 세계 인명사전 ‘마르퀴스 후스 후’에 2년 연속 등재된 공학자, 2006년 특허청이 수여하는 특허 부문 최고상 ‘세종대왕상’ 수상자, ‘나노물질 합성과 실리콘계 및 비실리콘계 나노 트랜지스터’ 등에 대한 연구로 38편의 SCI(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급 논문을 발표한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입에서 ‘대통령과 BTS는 외계인일 것’이라는 말은 왜 나왔을까요? 맹 교수는 천재 공학자임과 동시에 36년간 UFO를 연구해온 국내 최고 권위의 UFO 연구자이기 때문입니다. 맹 교수는 세계 최대 UFO 단체 뮤폰의 한국 대표이자, 한국UFO연구협회 회장입니다. 세계적인 팝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 미국 전 대통령 조지 부시도 외계인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었죠. UFO 연구자들 사이에서 비범한 사람들은 외계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왔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맹 교수도 윤석열 대통령과 BTS 멤버들이 외계인일 수 있다고 주장한 겁니다. UFO는 실재한다는 증거들은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정부가 100년 간 UFO에 대한 정황을 숨겼고, 외계인의 유해를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이 의회 청문회에서 제기됐습니다. “UFO의 존재는 안보 위협 요인이기 때문에 미국이 모든 증거들을 은폐해왔다”는 맹 교수의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낮에는 전기전자공학을, 밤에는 UFO를 파헤치는 맹 교수를 지난달 13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사옥에서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BTS와 윤석열 대통령이 외계인인 이유를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근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미국 정부가 미확인비행현상(UAP)의 연구 결과에 대해 은폐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보셨나요? 미국은 1940년대 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 적극적으로 UFO를 연구하다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연구를 중단시켜버렸어요. 최근 들어 다시 연구를 하고 있지만 그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외계인이 미국과 중국, 러시아보다 뛰어난 군사력을 갖추고 지구를 기웃거리고 있다는 게 밝혀지면 이는 세계 안보에 엄청난 위협이기 때문이겠죠. 우리나라 역시 UFO 연구에 소극적인 편인데 최근 들어 조금씩 희망이 보이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 공약 중 하나로 항공우주청 신설을 내세웠고, 당선 후에도 2023년 말 항공우주청이 출범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UAP에 대한 증거들이 밝혀지고 있는 만큼, 항공우주청 안에 UFO 관련 연구 팀을 만들어야 합니다. ―UFO의 실재와 함께 많이 대두되는 주장은 유명인들의 ‘외계인설’입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조지 부시, 루퍼트 머독 등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렙틸리언’(인간형 파충류 괴물)설에 휩싸였었는데요. 교수님도 이를 믿으시나요? ‘주변에 외계인이 있다면 누가 외계인인 것 같으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유명인들은 외계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계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세요. 지구를 점령하고 싶다면 외계인을 어느 자리에 둘까요?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심어 놓겠죠. 그래서 한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이 가장 외계인일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BTS도 마찬가지고요. ―유명인의 렙틸리언 설을 두고 ‘음모론’이라고 보는 시각도 많은데요, 외계인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나요?외계인에게 납치된 경험이 있는 ‘피랍자’들의 진술이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요, 진술 증거는 힘이 약합니다. 보통 역행 최면 기술을 써서 피랍자들의 납치 경험을 듣는데, 최면 상태의 진술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어요. 그 내용이 얼마든 왜곡될 수 있다는 거죠. 진술보다 더 신빙성이 있는 증거는 북미에서 발생해 온 가축 도살 사례입니다. 1960~1970년대 미국 뉴멕시코주를 중심으로 남미, 캐나다 등지에서 소들이 예리한 칼에 사지, 귀, 생식기 등이 잘린 채 발견됐고, 더 놀라운 건 사체에 피가 한 방울도 없이 다 빠져나간 상태였다는 겁니다. 2009년에도 미국 콜로라도주 한 목장에서도 4마리의 소가 이 같은 상태로 발견됐습니다. 눈, 귀, 혀, 생식기 등이 사라졌고, 피와 상처도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야생동물에 물린 흔적도 없었고, 절단 도구도 밝혀내지 못했어요. 이런 정황들 때문에 가축 도살의 범인이 외계인일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외계인에게 납치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외계인 피랍 경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 납치된 순간엔 공포스러웠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즐거워진다고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공포를 잠재우기 위한 방어기재가 작동해 즐거움을 가짜로 느낀다는 주장도 있고, 외계인이 텔레파시를 통해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사실 뚜렷한 방법은 없습니다. 그냥 즐겨야죠. 별수 있나요. UFO와 외계인 이야기를 할 때 맹 교수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납니다. UFO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서울대 물리학과 3학년 재학 시절 ‘과학과 종교’라는 수업을 들은 후부터였습니다. 이후 UFO를 주제로 레포트를 썼고, 서울대 최초로 UFO 탐구 동아리를 만들었지만 가입자가 없어서 외부 인원을 영입해 한국UFO연구협회를 열었습니다. 28살이었던 1995년에는 UFO에 대해 탐구한 자료를 모아 600쪽에 달하는 책 ‘UFO 신드롬’을 발간해 과학 부문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유사 과학 아니냐”는 동료 학자들의 무시도 받았지만, 그는 주변에서 뭐라 하던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걸 좇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습니다. 그 고집으로 36년을 공학자이자 외계인 연구자로 살았습니다. ―외계인 연구는 언제부터 하시게 된 건가요? 대학 시절 수업을 들었다가 UFO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 후 제 전공과는 별개로 UFO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 성격이에요. 원래 의대도 갈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물리학과에 진학했어요. 돈 벌기 힘들 때 ‘의대에 가고 물리학, UFO 연구는 취미로 할 걸’이라 후회가 찾아오기도 하는데, 잠깐 그러고 말아요. 의대를 갔다면 제 젊은 시절이 굉장히 힘들었을 것 같거든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대신 물질적인 부분에서의 손해는 감내해야죠. ―‘검증되지 않았다고 해서 무조건 과학이 아니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검증돼야 과학 아닌가요? UFO를 ‘유사과학’(주창자와 연구자가 과학이라 주장하지만, 과학의 요건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과 맞지 않는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많습니다. 입증 방법론이 비과학적이라면 과학이 아닙니다. 하지만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검증해낸다면 그건 과학이죠. UFO 목격담이나 외계인 피랍에 대한 주장을 과학적 방법으로 입증하고 규명해낸다면 UFO와 외계인의 실재도 과학적인 것이 되는 거예요. 일반인들이 올리는 UFO 사진을 갖고 ‘UFO는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비과학적인 것이죠. ―UFO가 존재한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무엇이 있나요? 가장 결정적인 UFO 증거로 언급되는 건 항공모함 니미츠호 조종사들이 UFO를 목격했고, 그 물체가 실제 레이더에도 감지됐던 사례입니다. 2004년 니미츠호 항공모함 훈련 도중 2대의 조종기에 탑승해있던 4명의 조종사들이 일제히 UFO를 목격했다고 증언했고, 그 모습이 조종기의 레이더와 잠수함의 소나(음파에 의해 수중목표의 방위 및 거리를 알아내는 장비)에도 잡혔습니다. UFO 추정 물체가 우주에서 대기로 진입하는 모습, 대기를 비정상적으로 빠른 속도로 진입하는 모습, 진입 후 해수면 위에서 머물러 있는 모습이 레이더에 잡혔죠. 당시 레이더로 이 물체를 감지한 조종사들이 해당 위치로 가서 이 물체와 추격전을 벌였다는 증언도 나왔습니다. 추격전을 벌이던 물체가 바다 밑으로 사라졌는데, 바닷속에서의 움직임은 소나로도 감지됐습니다. 구체적인 증거들을 미국 정부가 갖고 있지만 민간에 공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해당 자료가 민간 과학자들에게 넘어가서 모든 퍼즐이 맞춰지면 지구상의 기술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쉬쉬하는 것이죠. ―UFO와 외계인이 있다고 주장했던 존 맥 하버드대 의대 교수는 미국 주류학계에서 외면받기도 했는데, 교수님도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가요?학자들 앞에서 UFO 얘기를 하면 저를 이상하게 보곤 했어요. “먹고 살기 힘들구나”라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죠. 저를 공학자이기 전에 UFO를 파헤치는 사람으로만 바라보고, 속된 말로 ‘또라이’로 치부하는 시선도 있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그런 시선이 불편했지만 요즘엔 UFO 이야기를 방송에 나와 사람들에게 공유할 수 있어서 즐거워요. 이제는 자신 있게 ‘UFO는 과학이다’라고 말하고 다닙니다. 미국 주류 과학자들 중 UFO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진지하게 접근하려는 이들이 많아졌어요. 전문 잡지에 UFO와 외계인을 다루는 추세도 이어지고 있고요. UFO가 비주류에서 주류로 편입되는 것 같아 행복합니다. 김재희기자 jetti@donga.com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
“‘여자 치고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출연자들은 여성경찰, 여성군인, 여성소방관이 아니라 직업군을 대표해서 나온 겁니다.”올 상반기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 을 연출한 이은경PD는 제작발표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선 경찰, 소방관, 군인, 스턴트맨, 운동선수, 경호원 등 6개 직업군의 여성들이 각자 직업의 명예를 걸고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입니다. 진흙을 뒤집어쓰고 땀범벅 되고 부상을 입어도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편견을 먹고 사는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지독한 승부를 벌이는 모습에 대리 쾌감을 느꼈다는 시청자의 응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속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강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센 놈이랑 붙자, 그게 멋있지” “나보다 센 놈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서 왔다”고 선전포고한 용감한 소방관입니다. 짧은 시간에 혼자 장작 30개를 패서 팀을 승리로 이끌고, 불 끄는 경기에선 전문성을 발휘해 활활 타오르는 불을 신속하게 제압했습니다. 경북 상주소방서 소속 정민선 소방사(30)가 그 주인공입니다. 최근 이 만난 그는 지난해 제1호 여성 소방차량 운전요원으로 임명된 소방관이기도 합니다. 소방차 운전은 오랫동안 금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분야입니다. 정민선 소방사 인터뷰는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기개 넘치는 선전포고가 매력적이었습니다. “ 1화 나오는 날, 소방학교 훈련 중이었어요. 텔레비전 큰 화면으로 보고 싶었는데 훈련 중이라 그럴 수 없었어요. 너무 궁금해서 휴식시간에 근처 카페로 가서 휴대전화로 봤는데 첫 화에서 제가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웃음) ‘내가 저런 말을 했었나’ 하면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말만 그런 게 아니라 경기에서 ‘센 놈’ 역할을 톡톡히 하셨습니다. 특히 장작 패기의 달인이 되셨어요. 다른 팀은 나눠서 했는데 정 소방사님 혼자 장작 30개를 팼어요. “그때 소방팀 리더였던 김현아 언니가 부상을 입으면서 저희팀 분위기가 안 좋았어요. 누구 하나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이 툭 흐를 정도로 암울했어요. 팀별 아레나전을 하러 현장에 도착했는데 운동장에 장작이 수북이 쌓여 있는 거예요. 진행자가 ‘의리 게임입니다. 순서를 정하십시오’라고 했을 때 떠오른 생각이 ‘최대한 혼자 해봐야 겠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순서를 정하는 게 저한테는 의미가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책임지고 다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다른 팀원들도 있는데 왜 혼자 장작 30개를 다 패야 한다고 생각했나요? “암울해진 팀 분위기를 다시 띄우고 싶었어요. 저도 언니들도 다시 힘을 내려면 상황을 반전시켜야 하잖아요. 소방관들이 매일 겪는 화재, 재난 현장이랑 똑같아요. 팀원이 부상을 입고 뒤처지고 있으면 자발적으로 나서서 도와주는 것이 팀워크라고 생각해요. 아마 장작이 2배 더 많았어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체력보다 정신력으로 해내는 거니까요.”부상 입은 동료를 대신해 한계에 도전하고, 긴박한 상황에서도 타인을 해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려는 모습을 보여준 소방팀. 자기를 희생하고 타인을 구하는 ‘소방관’이라는 직업적 특성이 잘 드러났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을 통해 소방관이라는 직업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졌습니다. “저희 4명이 소방관을 대표해서 출연했을 뿐입니다. 현장에 있는 모든 소방관의 평소 모습이에요. 아주 오래 전부터 대한민국 소방관들이 땀으로, 피로 일궈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출연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근무 중에 소방청에서 연락이 왔어요.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보겠냐고요. 처음엔 방송 출연 엄두가 나지 않아 거절했어요. 근데 일주일 뒤에 또 연락이 와서 죄송한 마음에 제작진 미팅을 하게 됐어요. 대화를 한참 나눈 후에 프로그램 취지에 대해 여쭤봤죠. PD, 작가님들이 정말 오랫동안 의 기획의도를 설명해주셨어요.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귀담아 들었어요. 제작진 말씀이 끝나자마자 ‘출연하겠다’고 말씀드렸죠.” 연출을 맡은 이은경PD는 프로그램 기획 의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적 있습니다.‘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포츠 만화의 세 가지 키워드는 우정, 노력, 승리다. 이 키워드들은 가슴을 뛰게 한다. 자기 분야에 진심이고, 조금 모자라도 뛰어들고, 무언가를 욕망하고, 그것을 쟁취하는 데에 거리낌 없는 이야기 속에서 늘 가슴이 웅장해졌다. 그런데 여성이 주인공인 스포츠 만화가 많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정, 노력, 승리가 담긴 진한 여성 서사물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우정과 노력, 승리. 소방팀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세 가지 키워드는 유독 빛이 났습니다. 소방팀은 반칙보다 정공법으로 경기에 임하며, 피 튀는 싸움보단 땀 흘리는 경쟁을 택했습니다. 생사를 함께 한 소방팀뿐 아니라 결승전에 오르기까지 ‘원팀’으로 협력했던 운동팀과도 끈끈한 우정을 과시했습니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출연자들과 우정을 나누고 계시다고요. “소방팀 언니들과는 단체카톡방에서 하루 종일 떠들고요. 사이렌에 대한 좋은 기사, 댓글 나오면 꼭 공유해요. 결승전에서 맞붙은 운동팀과는 촬영 끝나고 회식도 했어요. 운동팀 김성연 선수와는 여행도 다녀오기로 했고요.”―소방팀 리더 김현아 소방장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현아 언니의 말이 소방팀의 방향이었어요. 현아 언니는 힘도 세고 성격도 불같아요. 누구보다 의리 있고 리더로서 희생 정신도 강해요. 언니는 자기가 독재자처럼 굴었다고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해왔어요. ‘행복한 독재’ ‘멋있는 독재’였다고요. 그래서 결승전 때 소방팀 리더인 현아 언니가 ‘우리답게 공격하고 멋지게 전사하자’고 이야기했잖아요. 저희 모두 질 거라 예감했지만 마지막이니까 우리다운 것을 하자는 언니 말에 다들 설득됐던 것 같아요. 너무 허망하게 운동팀에 패배하긴 했지만요.(웃음)”―‘사이렌’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소방관이란 존재를 더욱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화재, 재난 현장은 남녀 소방관을 가리지 않아요. 똑같은 압력의 호스를 들고 똑같은 무게의 장비를 차고 요구조자(구조가 필요한 사람)를 구해야 해요. 저희가 성별을 떠나 해야 하는 일을 할 뿐이에요. 현아 언니 인터뷰를 봤는데 이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우리는 항상 증명하고 입증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여자 소방관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시선 끝에 무시, 짜증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선입견을 갖고 보시는 거예요.”―그럴 땐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저는 그런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긴 해요. 머리가 짧고 덩치가 크니까 제가 여잔지 남잔지 모르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인생 모토 중 하나가 ‘진짜는 모두가 알아본다’는 거예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성장하고 배우려는 거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그냥 웃고 말아요. 날마다 출동해야 하는 사고, 재난 현장이 있는데, 그런 편견들에 속상해할 시간이 없는 거죠.” ―재난이나 사고가 발생하면 보통 사람들은 대피하지만 소방관은 안전한 데 있다가도 위험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일단 출동벨이 울리고 나서부터는 위험하지 않은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어요. 뉴스에는 큰 사고, 큰 사건만 나오잖아요. 소방관 고립, 사망 이런 큰 뉴스만 나오죠. 근데 현장에서는 작은 사건, 사고도 정말 많이 일어나요. 예를 들면 저희가 타는 소방차는 되게 높거든요. 착용 장비가 굉장히 무겁기 때문에 차에서 내리다가 넘어지기도 해요. 공기호흡기 착용하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에 옆에 장애물을 보지 못하고 넘어지는 바람에 방화복이 찢어질 때도 있어요. 화재 현장에서는 불덩이들이 제 머리 위에서 굴러다니고요. 개방된 창문 틈으로 화염이 용암처럼 분출되는 경우도 많고요.”―화재 현장에서 방화복을 입어도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나요? “저희가 입는 방화복은 만능이 아닙니다. 순간의 열기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요. 방화복의 소재가 밖에서 오는 열기, 수분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지만 제 몸에서 나오는 열을 밖으로 나가는 걸 막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화복 안에 있는 열기를 고스란히 다 견뎌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열기를 식히기 위해 소방관들이 교대로 현장에 진입하는 거예요.”―화재 현장에서 가장 두려운 순간이 있다면요? “화재 현장은 농연(濃煙·짙은 연기) 때문에 시야 확보가 안 되거든요. ‘중성대’라고 해서 시야 확보가 되는 공간으로 진입, 대피해야 해요. 여기에 놓인 물이 가득 찬 수건을 잡고 이동하는데 그 수건이 소방관들에겐 목숨 줄 같은 거거든요. 이걸 놓치면 정말 무서워요. 소방관도 사람이지 않습니까? 소방관들이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건 두려움과 무서움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인 것 같아요. 원래부터 소방관인 사람은 없는 것처럼, 익숙해지기 위해 훈련을 많이 받아야 해요.”―모든 소방관들은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하더라고요. 트라우마가 심했던 사고가 있었나요? “몇 년 전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어요. 산사태, 낙석 방지 구조물에 들이받았는데 차량 정면, 오른쪽 유리가 다 깨져서 파편이 얼굴로 튀었어요. 잠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뒷목 부분이 되게 뜨거운 거예요. 머리에서 피가 콸콸 나오고 있더라고요. 그때의 뜨거운 느낌이 아직도 완전 선명해요. 찢어진 부위에 아홉 바늘 정도 꿰매고 후유증으로 이석증도 생겼어요. 정말 큰 사고였어요.”―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실 것 같아요. “사고 났을 때 응급실에서 급한 조치를 받고 붕대를 감고 집에 돌아오니 오후 11시 정도 됐더라고요. 타지에서 근무를 하고 있으니까 고향에 계신 엄마한테 전화를 드렸죠. 사고 났다고 말씀드리니 엄마가 덤덤하게 ‘내일 갈게’ 하시고는 바로 오셨어요. 생각보다 엄마 목소리가 차분해서 괜찮으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며칠 전에 엄마가 보고 싶어서 저녁 늦게 전화를 했는데 엄마가 엄청 긴장하는 목소리로 받으시는 거예요. 늦은 시간 딸에게 전화가 오니까 저번 사고 때처럼 또 다친 게 아닐까 염려하신 거죠. 그때 마음이 정말 아팠어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민선 소방사는 소방관이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방송 출연으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그가 스스로에게 붙인 별칭은 ‘동네를 지키는 평범한 소방관’입니다. ―‘동네를 지키는 평범한 소방관’이 되고 싶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구조가 간절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특이하게도, 제가 직접 119 신고하는 일이 많았어요. 제 눈앞에서 누가 다치거나 교통사고가 난다거나, 산불이 난다거나…. 한 번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날씨가 어떤가 보고 있는데 공사장에서 불이 나는 거예요. 다른 누가 먼저 신고를 할 법도 한데, 어쩐 일인지 제가 최초 신고자였어요. 아무도 손대지 않았고,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날것의 현장에 소방관들이 사람들을 구하고 조치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걸 보면서 막연하게 ‘타인을 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근데 정말 신기한 게 뭔지 아세요? 제가 소방관이 된 후부터는 사건, 사고를 목격한 적이 없어요. 이젠 제가 현장에 가장 먼저 출동하는 사람이 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웃음)”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드랙퀸은 전부 트랜스젠더’라는 혐오의 시선도, 여성들의 ‘탈코르셋’ 움직임에 역행한다는 편견도 옛말입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이태원 지하의 클럽에서 비밀스럽게 향유되던 ‘드랙’은 젠더의 구분을 넘어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예술 장르로 자리 잡았습니다.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 인기 댄스 크루 프라우드먼은 드랙 아티스트 ‘캼’과 협동 무대를 선보이며 드랙에 대한 편견을 깼다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인기 유튜버 랄랄의 ‘드랙퀸 분장실 기싸움’ 콘텐츠로 드랙 아티스트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드랙이 양지로 올라오는데 기여한 아티스트 중 하나는 현시점 드랙신(Scene)의 슈퍼스타, 나나영롱킴(본명 김영롱·36)입니다. 브라운아이드걸스와 마마무의 뮤직비디오, 박효신 콘서트 티저영상에 출연하는 등 K팝 아티스트와 협업하며 ‘드랙은 성소수자들만의 문화’라는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화장품 브랜드 ‘헤라’ 캠페인 모델로도 활약했습니다. 캠페인 광고 끝 무렵 금색 가발을 벗어던지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유튜브 영상에는 ‘백화점 브랜드 광고에서 드랙을 볼 날이 오다니, 감격을 넘어 존경스럽다’는 댓글이 달렸습니다.커밍아웃을 한 동성애자이자 드랙퀸. 소수자 중 소수자인 그는 손쉽게 혐오와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편견의 끝에는 도리어 자신의 삶에 대한 끝없는 긍정이 있었습니다. 헤라 캠페인 광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살잖아요. 자기가 주인공이라면 화려해도 되지 않을까. 새드보다는 해피엔딩.’ 해피엔딩을 향해 매순간 나아가는 나나영롱킴을 지난달 10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사옥에서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국민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던 그가 드랙에 빠져 자퇴한 사연부터, ‘드랙퀸은 잠재적 트랜스젠더’라는 편견에 대한 일침까지 동아일보 유튜브 ()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드랙이 좋아서 대학교를 그만 두셨다고요. 배우가 되고 싶어서 국민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제가 LGBTQ+(성소수자)에 속한 사람이다 보니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서정적인 로맨스 연기를 못하겠더라고요. 남녀의 획일적인 성역할과 사랑 연기를 풀어낼 수가 없었어요. ‘연기는 내 길이 아니구나’ 싶었죠. 자퇴를 하고 5, 6년 동안은 연극이나 뮤지컬을 하나도 안 봤어요. 무대를 보면 제가 연기를 다시 하고 싶어질 것 같았어요. 드랙퀸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밥벌이를 하면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젠 동기들 연극도 보러가도 아무렇지 않아요. ―‘드랙’의 어원은 무엇인가요?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여성들이 연극과 오페라 무대에 올라갈 수 없어서 여성의 역할을 남성이 했어요. 남성이 여성 분장을 했을 때 드레스가 무대 바닥에 질질 끌리는 모습에서 ‘드래그’(Drag)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요. 어원에 대한 가설은 워낙 많아서 뭐가 정확한 건진 저도 몰라요. 각자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받아들이면 돼요. 예전엔 드랙이 무엇인지 이해시키려고 했거든요. 살다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아무리 설명해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받아들이더라고요. ―드랙은 여성성을 강조하는 ‘여장남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무당벌레, 겨털(?)을 연상케 하는 특이한 분장도 많이 하셨더라고요. 빨간색 바탕에 흰색 점박이 수트를 입은 드랙 분장을 보고 무당벌레라고 하는 분도 있고 일본 설치미술가 구사마 야요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어떻게 봐도 좋아요. 해석은 자유죠. 드랙 아티스트가 반드시 여장만 하는 게 아니에요. 무당벌레 같은 곤충이나, TV, 거품 등 사물이 되기도 해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제3의 캐릭터를 만드는 친구들도 있어요.―드랙퀸은 여성이 되고 싶어 하는 남성들, 즉 잠재적 트랜스젠더라는 일부 시각도 있습니다. 사실인가요?아닙니다. 드랙을 단순히 진한 화장, 화려한 드레스를 입는 ‘여장’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성애자인 여성 드랙퀸도 있고, 남성성을 강조하는 ‘드랙킹’도 있어요. 드랙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걸 마구마구 표현하는 예술 장르예요. 요즘엔 ‘드랙퀸’ 대신 ‘드랙 아티스트’ ‘드랙 퍼포머’라는 용어가 더 많이 쓰여요. ‘드랙퀸=여장’이라는 틀이 깨졌으면 좋겠어요.―드랙이 대중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매니악한 장르예요. ‘풀타임 드랙’으로 생계유지를 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는지도 궁금해요. 프리랜서다 보니 수입이 고정적이진 않아요. 지난해 10월까지는 투잡을 뛰었어요. 낮에는 욕실용품 브랜드 ‘러쉬’를 다녔고, 저녁에는 촬영이나 드랙 공연을 했죠. 러쉬는 LGBTQ+를 응원하는 브랜드 중 하나죠. 입사 면접에서 “우리 브랜드는 LGBTQ+를 지지하는데 성소수자에 대한 불쾌감이나 혐오감이 있느냐”고 직접적으로 질문해요. 그래서 러쉬는 LGBTQ+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사람들로 구성이 돼 있죠. 그 덕에 러쉬에서 7년 동안 재밌게 일했어요.―최근 들어 드랙이 급격히 대중화돼가고 있는 분위기예요. 킹키부츠, 헤드윅, 프리실라 등 드랙 아티스트를 소재로 한 뮤지컬이 인기이고, 최근엔 드랙 아티스트와 K팝 가수들과의 협업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고요.해외에선 드랙 문화가 자리 잡은 지 오래 됐는데, 한국에서는 드랙이 TV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콘텐츠 소재가 된지 5, 6년 밖에 안 됐어요. 드랙이 마니아층만 즐기는 음지의 문화였다면, 요즘엔 한층 더 밖으로 나온 건 확실하죠. 남녀 커플이 데이트 코스로 드랙쇼를 보러 오기도 하고, 얼마 전엔 제 공연에 단골 고객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오기도 했어요. ‘드랙 아티스트’라는 화려한 외피를 벗은, 사람 ‘김영롱’은 불특정 다수의 혐오 섞인 손가락질로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한창이던 2020년 집단감염이 발발한 곳이 성소수자들이 즐겨 찾는 이태원 클럽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확산되면서 커밍아웃한 게이인 나나영롱킴에게도 하루에 100개 이상의 혐오 메시지가 왔습니다. 당시 그는 강박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렸습니다. “성격이 어두웠으면 자살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혐오의 강도는 심각했습니다. 퀴어 퍼레이드에서는 그에게 설사약을 탄 생수병을 건넨 행인도 있었습니다. ―숱한 악플에 시달려 오셨다고요. 입에 담기에도 어려운 인신공격적인 악플이 너무나 많았어요. 변호사가 악플을 추리니 101개더라고요. 한 사람이 여러 악플을 단 경우도 있어서 사람 수로 따지면 69명이었고, 그들에 대한 고소를 진행했죠. LGBTQ+ 친구들이 악플에 시달리면서 “전부 고소할거야. 가만 안 둘 거야”라고 말은 하지만 실천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다 착하고 여리다보니 그 과정을 견딜 자신이 없었던 거죠. 그들을 대신해서라도 매운맛을 제대로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다인원을 고소한거고, 아직 진행 중에 있습니다. ―2021년 대부업체 광고모델이 되신 뒤 인지도가 높아졌어요. 세상의 편견에 “어쩌라구!”라고 반격하는 앙칼진 멘트가 통쾌했는데요. 일각에선 비난도 있었다고요. ‘대부업체 광고를 왜 하느냐. 제 정신이냐’는 욕을 엄청 먹었어요. ‘트랜지션(성전환)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당신(나나영롱킴)을 보고 성전환 수술을 하기 위해 돈을 빌렸다가 못 갚고 자살하면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는 극단적인 비판까지 들었어요. 저를 트랜스젠더로 보셨던 거죠. 주변에 트랜지션을 준비하는 친구들한테 “광고를 보고 돈 빌려서 수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라고 물어보니 “언니는 트랜스젠더도 아니고 드랙퀸인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느냐”고 의아해하더라고요. ―퀴어 퍼레이드에서 행인으로부터 설사약을 탄 생수통을 받으신 적도 있다고요. 맞아요. 퀴어 퍼레이드를 응원하는 척 하면서 물병을 건넸는데 알고 보니 설사약이 타져 있었던 거죠. 혐오의 감정에 빠진 사람들은 죄책감이 없어요. 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는 목적 하나에만 빠져있어서 자신이 하는 행위가 얼마나 심각하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지 생각하지 못하죠. 단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만이 아니에요.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혐오의 공통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어떤 아티스트가 되고 싶나요?얼마 전 제 드랙쇼에 대만 남녀 관광객들이 오셨어요. K팝, K드라마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해 한국의 LGBTQ+ 문화에도 흥미를 갖게 되셨대요. 제 공연을 보기 위해 휴가를 내 한국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정말 감동을 받았어요. 원래 ‘나나’라는 이름으로만 활동하다가 ‘영롱킴’을 붙이게 된 이유도 해외에 한국의 드랙을 더 알리고 싶기 때문이에요. 아직은 생소한 한국의 드랙이, 제 한국 이름 ‘영롱킴’을 타고 더 날개를 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크리에이터? 네가 무슨 창조주냐?” 2015년 ‘크리에이터’가 적힌 명함을 건네자 친구들이 던진 말입니다. 2009년 무한도전 ‘코리안 돌+아이’에 참가해 얼굴을 알리고 2014년 유튜브를 시작해 인기를 끈 1세대 크리에이터 ‘채채’, 채희선 씨(31)의 이야깁니다. 지금은 초등학생 장래 희망 1순위 직업이 됐지만 9년 전만 해도 크리에이터는 생소한 직업이었습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겠다는 채 씨에게 친구들은 “창조주냐”며 웃었고, 부모님은 “탤런트와 다른 거냐”고 물었습니다. 지난달 16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만난 채 씨는 “유튜브를 시작한 2014년에는 페이스북의 시대가 영원할 줄 알았다”고 회상했습니다. 꿈틀거리는 끼를 발산할 통로를 찾던 중 유튜브를 알게 됐습니다. 지상파 개그맨 공채 시험 최종 단계에서 고배를 마셨던 그는 2014년 구독자 47만 명 채널 ‘쉐어하우스’의 연기자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구독자 79만 명을 보유한 코미디 채널 ‘쿠쿠크루’의 객원멤버로 활동을 넓히면서 인지도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데이트할 때 몰래 방귀 뀌는 방법’, ‘도를 아십니까 만났을 때 대처법’ 등 콩트 콘텐츠 조회수는 수백만 회에 달합니다. 이후 본인의 유튜브 채널 ‘채채’에서 ‘가슴 작으면 좋은 점’ ‘마르면 나쁜 점’ 등 고정관념을 뒤집는 ‘채고점’ 콘텐츠, 121만 구독자를 보유한 ‘딕헌터’(본명 신동훈)와 커플로 분한 ‘신채커플’ 콘텐츠를 선보이며 50만여 명의 구독자를 모았습니다. 아이돌 그룹에게 ‘마의 7년’이 있듯 크리에이터에게도 전성기가 영원하진 않습니다. 2015년부터 5년 넘게 인기를 누렸지만 2021년 자율신경실조증, 기립성 빈맥을 앓아 유튜브 제작을 쉬어야 했습니다. 53만 명이었던 구독자는 43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섣불리 주저앉지는 않습니다. 지난해부터 결혼 후 일상을 담는 유튜브 채널 ‘채새댁’을 개설했고,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순간을 극복한 과정을 적은 에세이 ‘오히려 좋아’도 발간했습니다. 사람들을 웃길 때의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는 그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한물간 유튜버가 살아남는 방법’()을 <복수자들>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3일 오후 4시 공개되는 2부에서는 ‘결혼전도사’가 된 그가 말하는 ‘배우자 고르는 방법’도 공개됩니다. ―무한도전의 코리안 돌+아이 특집에서 최종 선발된 24명의 돌아이 중 한 분이셨어요. 당시 고등학생이셨는데, 프로그램 출연 계기가 궁금해요. 어렸을 때 꿈이 코미디언, 리포터, 연극배우, 쇼호스트, 레크리에이션 강사였어요. 1순위인 코미디언이 안 됐을 경우 이후 직업들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정도로 저를 표현하고 사람들을 웃기는 직업을 갖고 싶었어요. 대학에서 예체능을 전공하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무한도전 코리안 돌+아이 콘테스트는 부모님께 저를 증명할 방법이었어요. ‘우리 애한테 말도 안 되는 똘끼가 있구나’를 보여드리면 제가 예체능 전공을 하는 걸 지원해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돌+아이 콘테스트에 나가기 위해 ‘이 사람은 돌아이가 맞습니다’라고 적힌 서류를 만들어서 교감선생님을 비롯해 100명의 선생님, 친구들 사인을 받아 제출했어요. ―유튜브는 어떻게 처음 시작하게 됐나요? 코미디언이 꿈이었기 때문에 지상파 공채 개그맨 시험을 봤어요. SBS는 최종까지 가서 떨어졌어요. 계속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고 있던 중에 코미디 유튜브 채널 ‘쉐어하우스’에서 연기자 아르바이트를 해보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당시 2014년은 대부분 페이스북만 하던 시대였어요. 시급 4500원을 받고 연기자 알바를 시작했죠. 이후 돌+아이 콘테스트에 함께 출연했던 딕헌터 님의 제안으로 유튜브 채널 ‘쿠쿠크루’ 객원멤버로 들어가게 됐어요. 2015년엔 제 채널 ‘채채’를 개설하면서 본격적으로 크리에이터 활동을 시작했죠. ―본격적으로 크리에이터 활동을 시작한 2015년만 해도 유튜브라는 플랫폼은 생소했어요.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다이아TV와 계약을 맺은 뒤에 지인들 모임에 나가서 ‘크리에이터’가 적힌 명함을 줬더니 다들 의아한 표정이었어요. 지금은 유명한 PD가 된 한 오빠는 “크리에이터? 너 직업이 창조주야?”라며 웃었어요. 그 정도로 생소한 직업이었던 거죠. 부모님도 처음엔 제 직업을 잘 이해하지 못하셨어요. 제가 크리에이터를 한다고 하니 “탤런트 비슷한 거냐”고 물으셨어요. 부모님이 친구들에게 제 직업을 설명하려고 해도 휴대폰에 유튜브가 안 깔려 있어서 소개 못 하신 적도 많았대요. ―인기를 끌었던 ‘채고점’ 콘텐츠에서는 ‘가슴 작으면 좋은 법’ ‘키 작으면 좋은 법’처럼 콤플렉스일 수도 있는 점을 유쾌하게 콘텐츠화했고, 치질수술 과정까지 자세하게 공개했어요. 본인을 내려놔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나요? 전 제가 웃길 때가 가장 예쁜 것 같아요. 스스로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가 망가지고 웃기는 순간이라 ‘현타’가 온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올리는 족족 100만 조회수는 거뜬하게 넘기는 인기 유튜버가 됐지만 그는 2021년 돌연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건강 악화 때문이었습니다. 온종일 어지럼증이 지속되는 기립성 빈맥증후군과 자율신경실조증을 함께 앓으면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대학원을 다니던 중이었지만 책의 문장 한 줄도 제대로 읽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몰입과 집요함의 힘으로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이겨낸 그는 지난해부터 새로운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에세이집도 냈습니다. 인기가 예전만 하지 않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크리에이터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웃음을 줄 때 가장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구독자가 53만 명까지 늘면서 가장 인기 있는 1세대 유튜버로 활발하게 활동하셨는데, 2021년부터 활동이 뜸해졌어요. 작년에는 영상이 10개밖에 안 올라왔더라고요.2021년부터 건강이 악화됐어요. 기립성 빈맥증후군, 자율신경실조증 두 가지가 한 번에 왔어요. 병명을 몰라서 병원도 많이 다녔고요. 그 병의 증상은 어지럽고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하루 종일 지속되는 거예요. 그 증상이 1년 반 동안 지속돼서 일상생활이 안 될 정도였어요. 그때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논문 한 줄을 읽고 쉰 뒤에 다시 한 줄을 읽어야 했어요. 라이브 커머스 쇼호스트 활동도 하고 있었는데 멘트를 외울 수가 없어서 진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두 가지 병이 동시에 찾아온 건가요?살다 보면 감당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감당을 할 수 없는 일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 내가 토익점수를 400점에서 750점으로 올리겠다거나, 구독자 수를 40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올리겠다는 건 제가 감당할 수 있고, 노력으로 극복이 가능한 문제예요. 당시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일이 닥쳤어요. 내 노력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하니 몸이 아프더라고요. 그때 받았던 스트레스가 병의 원인이 된 것 같아요. ―감당할 수 없는 일과 맞닥뜨린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내 능력 밖의 문제라면 그와 관련된 걱정과 생각을 바로 끊어내세요. 스트레스를 최대한 안 받으려고 하는 거죠. 저는 다른 일에 집중을 정말 많이 하려고 노력해요. 잡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루를 진이 빠지게 사는 거죠. 예를 들어 방송을 할 때 ‘오늘 하루 진짜 이 악물고 이 사람들 다 웃겨주겠다’는 마음으로 임해요. 대학원 공부를 할 때는 타이머를 재요. ‘오늘 하루 13시간 앉아있는다’ 라고 스스로와 약속을 하고요. 남들 눈에는 스스로를 혹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제게는 그게 집중의 방법입니다. 제가 어떤 일에 몰입하고 집중을 하면 제 뒤에 있는 그림자들이 안 보이더라고요. ―지난해 출간한 에세이 ‘오히려 좋아’에서 ‘나는 슬픔을 갈고 닦아 웃음을 만드는 감정연금술사’라고 묘사하셨어요. 힘든 순간을 이겨내는 긍정의 힘을 어떻게 기른 것인지 궁금해요.혼잣말을 많이 해요. 매일 어떤 생각들을 하는데 그 생각을 10번 이상 스스로한테 외쳐요. 예를 들어 오늘은 길을 걸어가면서 ‘도태되지 말자’를 열 번 반복해서 스스로에게 말했어요. 제가 블로그에도 쓴 말인데요, ‘결국 끝까지 남아 성공한 사람들은 오래 버틴 사람이다’라는 말을 요즘 계속 새기려 해요. 현실이 버거울 때마다 생각해요. ―작년부터 유튜브 채널 ‘채새댁’을 시작하셨고, 여전히 43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채채’에도 본격적으로 영상을 올리시고 있어요. 반응이 예전만 하진 못한데 크리에이터로서의 고민은 없으신가요? 트렌드를 만들 수 없다면 트렌드를 따라가기라도 해야 해요. 요즘 ‘렉카’ 콘텐츠가 인기잖아요. 그래서 2개월 전 ‘채채, 당신이 몰랐던 10가지 사실’이라는 렉카 컨셉의 영상을 올렸던 거예요. 트렌드를 따라가야 조금이라도 대중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겠죠. 근데 전 저만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욕구가 커요. 남들과 똑같은 걸 만들고 싶진 않아요. 남들이 안 했는데 진짜 웃긴 걸 만들고 싶어요. ‘진짜 미쳤다’, ‘진짜 또라이다’ 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분들 정말 많잖아요. 요즘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1순위가 유튜버일 정도예요. 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한 방에 훅 갈 수 있다’, 이 말을 꼭 기억해야 돼요. 새로운 캐릭터와 콘셉트의 유튜버들은 계속해서 생겨나고, 유튜브가 밀어주는 특정 알고리즘에서 벗어나면 뜻하지 않게 인기가 식을 수도 있어요. 결국 개인의 브랜드를 탄탄히 다져놔야 합니다. 그래야 유튜브의 트렌드에서 좀 뒤처지게 되더라도 개인 브랜드를 지지하는 팬들의 힘으로 계속 콘텐츠를 만들 수 있어요.―크리에이터는 인기와 수익이 불안정한 직업이잖아요. 2015년으로 돌아가더라도 크리에이터라는 직업을 택하실 건가요? 수익과 인기는 필연적으로 등락이 있어요. 월수입 격차가 크게는 10배까지 나요. 수익이 적은 달에는 의기소침해지고, 많이 번 달에는 ‘장난 아닌데?’ 싶을 때도 있죠.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제가 이 일에 갖는 애정이에요. 사람들마다 가장 잘하는 일들이 있잖아요. 고등학교 때부터 느꼈는데 저는 수학이나 과학을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거든요. 근데 말하는 것이나, 친구들 웃기는 건 전교 1등이었어요. 저는 이 일을 선택한 걸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전 제가 웃길 때보다 남들이 절 보고 웃을 때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그 행복을 추구해 나갈 겁니다. 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일일연속극, 주말드라마 안방극장의 ‘탤런트’로 50년, 운영할수록 손해가 더 큰 놀이공원 ‘사장님’으로 33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어느 새 나이는 칠순을 넘었습니다. 인생 후반부 여생은 40년 전 품었던 숙원을 이루며 살아보기로 다짐했습니다.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은 배우 임채무(75)의 이야기입니다.40년 전, 전국을 돌아다니며 드라마 촬영을 다녔던 10년 차 배우 임채무에겐 소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이 모여 사는 산간벽지에 의료봉사를 다니는 것.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도시로부터 한참 떨어진 시골의 의료 인프라는 열악합니다. 한평생 농사짓느라 몸을 쟁기처럼 써왔던 어르신들 대부분 무릎과 허리에 골병이 들었지만 제때 치료를 받기란 어려웠습니다. 시골엔 큰 병원이 없었던 탓에, 진료라도 받으려면 대도시로 나와야 하지만 교통편도 여의치 않은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을 지켜볼 시간도 없이 하루하루 살다가 이 나이가 됐다”는 임채무. 칠순이 넘은 나이, 자식이 자식을 낳아 손주를 둔 할아버지가 된 후에야 오랜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4월부터 자신의 이름을 내건 예능 ENA ‘임채무의 낭만닥터’를 진행하게 된 겁니다. ‘임채무의 낭만닥터’는 이동치료소 차를 타고 다니며 전국 각지를 찾아 의료봉사를 하는 프로그램으로, 조만간 시즌2 촬영을 앞두고 있습니다. 임채무는 이번 시즌에서도 출연료를 받지 않습니다. “늘그막에 봉사한답시고 시작했지만 결국 내가 얻는 게 더 많더라”는 그를 최근 경기 양주의 두리랜드에서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임채무의 낭만닥터’ 시즌2 촬영을 앞두고 계십니다. “(시즌1 촬영 때) 7개월 동안 20개 넘는 읍면리 시골을 다녔어요. 가서 보니까 어르신의 99.9%가 무릎, 허리는 기본으로 고장이 나 있는데 병원을 안 가시는 거예요. 왜 안 가시느냐 물으면, 마을 교통편이 아무리 좋아도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아니곤 버스가 오질 않는다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시골엔 병원이 없잖아요. 병원 가려면 대도시로 나와야 하고 겨우 예약을 하면 환자가 워낙 몰리니 진료도 미뤄지고…. 그러다 보면 버스가 끊겨서 집에 오기 힘들고. ‘에라 모르겠다, 귀찮다’ 하면서 병원을 안 가는 거죠.”―의료봉사 하겠다 마음 먹으신 게 40년 전이시라고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드라마 촬영을 하고 야간 업소나 지역 축제에서 행사 뛰던 시절이에요. (시골의 의료시설이)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어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나이 들면 시골로 의료봉사를 다니며 살아야겠다고요. 어르신들 치료도 해드리고 맛있는 음식도 먹여드리고 싶다. 진료 의자, 의료기구, 침대, 냉장고 같은 게 다 들어갈 수 있는 버스가 한 대 있으면 참 좋겠다. 구상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해보려고도 했어요. 故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님이 도와주려고 하셨어요.”―김우중 회장과는 어떤 인연이었나요. “당시 연예인들로 이뤄진 ‘무궁화 축구단’이 있었어요. 그때 김우중 회장이 우리 축구단을 지원해주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요. ‘대한민국 공무원들, 특히 경찰, 시청, 구청 공무원들이 운동할 시간이 없어서 운동을 못 한다고 하더라. 억지로라도 운동을 해야 몸도 정신도 건강해진다. 유명한 연예인들이 친선 축구대회 하자고 하면 운동하러 나올 것이니 공무원들 불러내서 같이 운동하라.’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신 분이었어요. 참 존경하고 좋아했죠. 사석에서 회장님을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의료봉사 이야기를 잠깐 꺼냈었어요. 당시만 해도 (제가) 인기가 좋았을 때니 팬클럽 회원들이랑 봉사활동 다니고 싶은데 의료 차량 한 대만 기부해줄 수 있냐고 여쭤봤죠.”―뭐라고 하시던가요. “너무나 흔쾌히 알겠다고 하시더니 바로 비서실장을 불러서 이것저것 지시를 하시더라고요. 계획도 다 세우고 이런저런 계산도 끝내고 기다리는데, 나중에 비서실에서 연락에 왔어요. 당시 금액으로 의료 차량 제작에만 2억 원이 넘게 들어가는 거예요. 법인 회사에서 개인에게 무상으로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요.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던 거였죠. 아쉽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배우 생활을 하며, 두리랜드를 운영하며 한동안 잊고 살았던 꿈을 다시 꺼내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었습니다. ‘9988 정형외과의원’ 이태훈 원장과 독특한 인연이 시작되면서부터입니다. 정형외과 전문의인 이태훈 원장은 ‘임채무의 낭만닥터’ 시즌1 때부터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태훈 원장과는 어떤 인연이었나요? “이태훈 원장이 운영하는 ‘9988 정형외과의원’을 보고 누가 나한테 제보를 했어요. 제 노래 ‘9988 내 인생’ 제목을 베껴서 병원 이름을 지은 게 아니냐는 거예요. ‘9988 내 인생’은 2018년에 제가 직접 만든 곡이에요. ‘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아서 자식 속 썩이지 말자’는 뜻을 담은 곡인데, 이태훈 원장이 허락도 없이 ‘9988’을 갖다 썼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매니저한테 ‘잘됐다. 저작권 엄청 뜯어내자’ 해놓고 잊어버렸어요.(웃음) 그러고 한참 있는데, 몸이 너무 아픈 거예요. 치료를 받아야 해서 어느 병원을 갈까 했는데, 매니저가 9988 병원에 가자고 했죠. 당시 상황이 위급해서 바로 수술하고 치료도 잘 받았어요. 그러고 이태훈 원장이랑 식사를 했는데 슬쩍 저작권 이야기를 꺼냈죠. 이태훈 원장은 ‘9988’은 자기가 2017년부터 썼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러더니 ‘선생님이랑 가족분들 평생 정형외과 진료는 제가 무료로 해드리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그건 됐고 나랑 의료봉사하러 다니자’고요.”―촬영이긴 하지만 7개월 동안 매주 봉사를 다니셨습니다. 힘들진 않으셨나요? “나이가 나이인지라, 매주 전국 각지를 다니다 보니 피곤하고 이제 그만했으면 하는 마음도 솔직히 있어요. 근데 이걸 하면서 새롭게 느낀 건, 남의 인생을 들여다본다는 게 참 즐거운 일이더라고요. 80세, 90세, 100세까지 건강하게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보면서 배우는 게 많아요. 술 담배 적게 하고 음식 잘 챙겨 먹는 것보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사는 게 가장 중요하더라고요. 경북 의성에 사는 87세 할아버지가 있는데, 그분은 아침 10시에 막걸리 반병, 오후 4시에 막걸리 반병을 매일같이 마셔요. 막걸리가 거의 주식이야. 근데도 나보다 기운이 훨씬 더 좋아요. 낙천적인 마음으로 즐겁게 사니까.”시골 노인들의 낙천적인 삶을 동경한다고 했지만, 사실 임채무는 누구보다 ‘낙천적인 몽상가’에 가깝습니다. 30년 넘게 경기 양주에서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원 ‘두리랜드’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이 아닌 개인이 놀이공원을 운영하는 건 임채무가 유일합니다. ‘두리랜드’를 만들어야겠다 결심한 건 1973년 경기 양주의 사극 촬영 현장. 단역을 전전하던 무명 배우 임채무는 자신의 촬영 순서를 기다리다 인근 계곡에서 놀던 가족을 발견합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곳엔 깨진 술병이 흩어져 있고 고성방가를 하는 어른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날 문득 이런 다짐을 하게 합니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자!” 10여 년이 지난 1989년 그때 그곳에 짓기 시작한 ‘두리랜드’는 1990년 5월 문을 열었습니다.―30년 가까이 두리랜드엔 담도 없고 입장료도 없었다고요.“원래부터 입장료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2000원씩 받았어요. 문 연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들을 데려온 부모가 문 앞에 서있는 거예요. 아이는 들어가겠다고 울고, 모자를 푹 눌러쓴 아버지의 주머니에선 동전 소리만 들렸죠. 입장료 때문에 난처한 것 같았어요. 다음 날 직원 불러서 입장료 없애자고 했죠.”1990년대는 그가 CF, 드라마, 야간 업소에 출연해서 돈을 벌었을 때입니다. 방송에 나가 번 돈이 놀이동산 매출의 두 배가 넘었습니다. 사비를 털고 사재를 팔아 직원들 월급을 줬습니다. 하지만 IMF를 겪으면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놀이동산을 찾아오지 않았고, 그를 불러주는 방송도 많이 줄었습니다. 경영 위기로 두리랜드는 2000년대 초 폐장했다 2009년 재개장했습니다. 이후에도 ‘입장료 0원’을 고수하던 두리랜드는 2020년부터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입장료를 받으시면서 욕을 많이 먹었다고요. “여태 안 받다가 다 늙어 돈독이 올랐냐고 욕하는 분도 있었어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해요. ‘돈 받지 말고 다음 달에 문 닫을까요?’라고요. 제가 예전에는 야간 업소도 다니고 CF, 드라마 촬영도 많았으니까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는데 지금은 불러주는 데가 없으니 돈을 못 벌잖아요. 근데 전기세나 세금, 인건비에 매달 이자만 7천만 원이 넘어요. 두리랜드가 망하면 안 되잖아요. 망하는 거 막기 위해 입장료를 받게 됐어요.”―두리랜드 운영하느라 생긴 빚이 160억 원이라고 들었어요. “IMF 외환위기 때는 정말 어려웠는데 그래도 입장료 안 받고 운영하겠다는 원칙을 고수했어요. 근데 90년대만 해도 인기 있었던 회전목마, 바이킹, 범퍼카 같은 아날로그 놀이기구는 아이들이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요즘엔 미세 먼지와 황사 때문에 엄마들이 바깥에서 아이들을 놀게 하는 걸 꺼리잖아요. 그래서 롯데월드처럼 실내 시설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2017년 말에 두리랜드를 닫고 2018년부터 신축 공사를 시작했죠.”VR 같은 새로운 놀이기구를 들여오고 실내 시설을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들지만, 연예인 임채무의 수입은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결국 여의도에 있는 아파트 두 채를 팔았고 자녀들 마이너스 통장까지 끌어 썼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두리랜드는 재개장했지만 정작 그와 부인이 잘 곳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두리랜드 안 화장실을 개조해 일 년 넘게 먹고 자고 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제일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라며 “두리랜드는 돈 벌려고 운영하는 게 아니다. 빌린 돈 갚으려고 이제 와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벌었던 돈도 다 쏟아부으시고 빚도 많으신데,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이제 이게 내 삶이에요.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대체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물으면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어요.(웃음) 어른들을 만나면 이 사람은 나한테 뭘 원할까, 뭘 바랄까를 고민하게 돼요. 근데 아이들은 달라요. 아무 계산 없이 웃고 울고 나한테 안겨서 인사도 해주고요. 그런 아이들 보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죠. 가끔 놀이공원에서 만나면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시켜요. ‘여기 만들어주신 분이야.’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정말 감사하고 또 보람을 느낍니다.”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기자 jetti@donga.com}
“충주시 얼굴마담이라고요? 저는 고트(GOAT)죠.” 2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 일일 기자 체험을 온 충북 충주시 홍보담당관실의 김선태 유튜브운영전문관(36·주무관)의 말입니다. 충주의 특산물, 차기 충주시장 후보(?)…. 김선태는 현시점 반박 불가한 대한민국 홍보계 ‘고트’(The Greatest Of All Time·특정 분야 역사상 최고의 인물)입니다. 2019년 조길형 충주시장의 권유로 혼자 시작한 ‘충주시’ 유튜브는 4년 만에 구독자 36만 명을 모았습니다. 3년 전 ‘관짝춤’을 패러디한 ‘생활 속 거리두기’ 홍보 영상 조회수는 852만 회(19일 기준)에 달합니다. ‘김선태 덕에 충주시장 이름을 외웠다’ ‘유튜브를 보고 처음 충주 여행을 다녀왔다’는 댓글이 줄을 잇습니다. 홍보계 ‘고트’에게 브레이크란 없습니다. 충주시의회 속기직원에게 “말한 거 빼달라는 의원님은 없었는지”를 묻고,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국무회의에 지각한 장관은 없었나요?”라며 ‘맑은 눈’으로 직구를 던집니다. 선 넘는 질문들이 불편하지 않은 건 충주를 사랑하는 그의 진심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충주를 잘 모르는 게 너무 속상했다”는 그는 샘 스미스의 ‘Unholy’ 무대의상을 입고 충주시 상수원보호구역 관련 규제를 완화하는 중부내륙특별법을 통과시켜 달라며 춤을 춥니다. “어제도 마 느그 서장이랑 다 했어”라며 서류를 던지고 반말을 내뱉는 진상 민원인으로 열연해 지방직 공무원의 고충을 유쾌하게 풀어냅니다. 조길형 충주시장을 ‘길형이 형’이라 부르고, ‘귀성길 레전드’ 짤을 패러디한 7초짜리 영상 조회수가 153만 회를 기록하는 ‘고트’가 되기까지는 고충도 많았습니다. 상사가 기획안 결재를 내주지 않거나, 올라간 영상을 지우라고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혼자 기획, 촬영, 편집을 모두 도맡아 하는 부담도 컸습니다. 그때 꺾였다면 지금의 충주시 ‘홍보맨’은 없었을 것입니다. 주말에 기획안을 올리고 결재가 나기 전에 촬영하는 ‘선 촬영 후 보고’를 택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했느냐”는 질문에 이런 답이 돌아옵니다. “성공하는 길과 망하는 길이 명확한데 망하는 길로 가라는 지시를 참을 수 없었다. 내 방식이 옳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선을 넘다 못해 지워버린 김선태 전문관을 이 만났습니다. “2년 뒤에는 유튜브를 그만 하겠다”는 그의 폭탄 발언을 인터뷰(https://www.youtube.com/watch?v=72RkSPg9p4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6일 오후 4시 공개되는 2부에서는 막내기자 일일 체험을 한 김선태 전문관이 ‘동아일보 유튜브 구독자 10만 명 달성 방법’ 회의에 참여한 현장도 공개됩니다.―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공무원이시죠?선출직 공무원을 제외하고는 제가 최고의 스타죠. 사실 선출직도 이제 가능할 것 같습니다. 충주시장 출마요? 우선 공천을 받아야 하겠죠? ―고졸이라는 소문은 사실인가요? 아주대 e-비즈니스학부를 다니다 2학년 때 중퇴했습니다. 전 문과라 미적분을 배운 적도 없는데 미적분을 영어로 가르치는 거예요. ‘이건 내 길이 아니다’ 싶어 공부를 놨어요. ―그때부터 사법고시를 준비하신 건가요?중퇴 후 6년 동안 사법고시를 준비했습니다. 대학 시절 법 관련 교양수업을 들었는데 재밌었어요. 제게 ‘리걸 마인드’가 있다고 판단했죠. 신림동에서 자취를 하면서 사시를 준비했는데요, 공부라는 게 오래 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신림동에 PC방이 많거든요. 형들이랑 게임하면서 PC방에 1500만 원 정도 썼습니다. 그러다 로스쿨이 생기면서 사법고시가 폐지됐어요. 사법고시와 저는 인연이 아니었나 봅니다. ―대학교를 자퇴하고 6년 동안 도전한 사법고시에 실패했을 때 많이 낙심하셨을 것 같아요. 후회를 별로 안 하는 편이에요. 사법고시를 그만뒀을 땐 더 이상 여한이 없었어요. 법조계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법고시에 실패하면 법원 공무원으로 많이 가는데 저는 아예 새로운 곳으로 가자는 마음이었어요. 법원에 취직을 했는데 거기서 판사들을 마주친다고 생각해보세요.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었는데”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될 것 같았어요. 스스로 비참해질 것 같아서 일반행정직 9급으로 시험을 봤죠. ―2018년 충주시청 홍보팀의 SNS 담당자가 된 후 이듬해 조길형 충주시장의 권유로 유튜브를 시작하셨어요. 유튜브 운영 도중에 때려 주고 싶은 상사가 있었다는 게 사실인가요?올라간 영상을 내리라거나, 이미 제작이 끝난 영상을 올리지 말라는 상사가 있었어요. 화요일 오후 6시에 무조건 영상을 올리는 건 구독자와의 약속이잖아요. 그 상사는 유튜브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거죠. 2019년 채널 개설 후 4년째 지자체 유튜브 중 구독자 수 1위를 지키고 있는데도 작년까지 투쟁을 해야 했어요. 이 정도 성과를 냈으면 믿고 맡겨야 하는데 계속 증명을 요구하더라고요. 자율을 얻는 과정에서 충돌이 있었지만 지금은 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상사의 말에 따르는 게 책임을 면하는 방법이기도 하잖아요. 왜 그렇게까지 투쟁해서 B급 유튜브 콘텐츠를 만드신 건가요?저도 처음부터 사명감에 가득 찬 반골은 아니었어요. 사실 직장은 돈을 버는 수단인 곳이죠. 그렇지만 제게 주어진 일을 망치고 싶지는 않은 거예요. 유튜브를 어떻게 하면 성공하고, 어떻게 하면 망할지 정확히 보이는데 자꾸 망하는 길로 가라고 하는 지시를 참을 수 없었어요. ‘내가 상사의 지시는 따르지 않지만 반드시 내 방식이 맞다는 걸 증명하겠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증명해냈고요. ―당시 본인이 생각한 ‘명확한 성공의 길’은 무엇이었나요? 지방자치단체 유튜브 콘텐츠 조회수가 너무 안 나오더라고요. 가장 심한 경우 조회수 2회인 것도 봤어요. 그 이유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죠. 시청자 타깃을 전국민으로 잡아서 누구나 재밌게 볼 수 있는 영상을 만들고자 했어요. 대부분의 지자체 유튜브는 본인 지역의 일, 주민들이 소꿉장난 하는 것만 올리니 사람들이 안 봤죠. 저는 그 반대로만 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본인 같은 후배가 있다면 어떠실 것 같으세요?요즘 스스로 자주 다짐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제가 팀장이 된다면 전 아무 소리도 안 할 거예요. 끝까지 해봤는데 성과가 안 나올 수도 있죠. 인사이동이 있을 수도 있고요. 그래도 그 후배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밀어줄 겁니다. 조직에서 별난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않는 이유는 상사 한 두 명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조직 전체의 분위기가 발목을 잡는 것일 수도 있어요. “저 팀원은 저렇게 두다간 큰일 난다”고 상사에게 겁을 주는 목소리들이 많겠죠. 그런 분위기에 동조되지 않는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조직에서는 협업을 잘하는 직원을 선호하기도 하잖아요. 저는 협업을 혐오합니다. 특히 유튜브 제작 같은 창의적인 업무는 혼자 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기획한 본인만이 그 콘텐츠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기획부터 연출, 편집까지 정확하게 본인의 의도대로 가야 하는 거거든요. 잡상인이 많으면 콘텐츠의 포인트를 살리기 어려워집니다. 힘들긴 하지만 기획자의 의도를 100% 살리기 위해서는 혼자 하는 게 가장 좋아요. ―조직에서 미움을 받는 캐릭터이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미워할 수밖에 없죠.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는 무조건 욕을 먹을 가능성이 따라온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주목도 받는 거죠. 제 유튜브 성공의 이면이라고도 생각해요. 남들과 다르게 했기에 욕을 먹고, 그래서 유튜브가 잘될 수 있었던 거죠. 내외부적으로 상처 안 받으려고 멘탈 관리를 하고 있어요. 웬만하면 악플도 안 읽으려고 하고요. 2019년 4월 ‘시장님이 시켰어요! 충주 공무원 브이로그’를 시작으로 4년째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는 김선태는 “2년 뒤 유튜브를 그만하겠다”는 폭탄 발언을 했습니다. 차기 충주시장 후보로 출마하려는 계획일까요? 그가 가장 재밌게 보고 있다는 유튜브 ‘침착맨’ 메인 PD 자리를 노리는 걸까요? 전부 아닙니다. 올해 서른여섯의 그는 점점 ‘에이징 커브’를 느끼고 있다고 털어놨습니다. “Z세대가 재밌어하는 것이 왜 재밌는지 잘 모르겠다”는 그는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유튜브는 언제까지 하실 생각인가요? 최대 2년 봅니다. 왜냐하면 ‘에이징 커브’(스포츠 스타들이 나이 듦에 따라 신체 능력이 떨어지고 이로 인해 성적이 하락하는 현상) 이슈가 있어요. 요즘 젊은 친구들의 감각을 못 따라가겠어요. 예를 들어 에버랜드 아마존 익스프레스 알바생 ‘소울리스좌’가 전 재밌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슬슬 젊은 친구들이 재밌어하는 것에 ‘이게 왜 재밌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본인을 정확하게 알아야 꼰대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년 뒤에는 정치권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많아요. 최근에는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실에서 정책보좌관 자리 제안도 받으셨잖아요. 중앙부처와 정당, 사기업 등 7~8곳에서 이직 제안을 받았어요. 월급이 지금보다 2배 더 높은 곳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안 가는 이유는 진정성 때문이예요. 절 스카웃하려는 기관은 제가 그 기관에서 유튜브 홍보를 하길 원하잖아요. 충주시를 알려오던 제가 다른 부처에 가서 그곳을 홍보한다면 과연 진정성이 느껴질까요? 저는 이제 충주시 유튜브와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고 생각해요. 제가 창시자이기도 하니까요. 하하하. ―사실 돈도 진정성만큼이나 중요하잖아요. 진정성은 돈에서 나올 수도 있는데, 월급 2배를 더 준다고 해도 충주시청에 남으신 걸 보면 혹시 금수저이신가요?금수저 썰도 있었습니다만, 평범한 집에서 자랐어요. 부모님 두 분 다 선생님이셨어요. 제가 충주를 굉장히 좋아해요. 제가 서울에서 생활을 오래 했는데 충주의 인지도가 낮은 것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내 고향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이야기를 못 하겠는 거예요. 설명이 길어지기도 하고 대부분 청주랑 헷갈려 했고요. 지금 제가 하는 일로 충주를 알리는 것에 보람이 큽니다. 꼭 보수가 높고 낮고를 떠나서 제가 충주에 기여하고 있다는 게 기뻐요.―대한민국 모든 조직 상사들에게 한 마디?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후학 양성에 신경 쓰셔야 해요. 너무 의견을 많이 내면 안 좋습니다. 지시가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본질이 흐려져요. 후배들에게 기회를 많이 열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김재희기자 jetti@donga.com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
독설과 위로가 섞인 동기부여, 자기계발 강의로 유명한 스타강사 김미경 아트스피치앤커뮤니케이션 대표(58)에게도 20년 넘는 무명(無名) 시절이 있었습니다. 광고회사 직원, 피아노학원 원장을 거쳐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기업 강사’ 일을 시작한 그는 한참 동안 이름 없는 강사로 살았는데요. 모든 걸 다 이뤘을 것 같았던 ‘40대 김미경’이 실은 누구보다 가난하고 불안하고 힘들었다고 합니다. 유독 고단한 40대를 보낸 그가 ‘성공 강박’ ‘완성 강박’에 갇힌 40대를 위로하는 책을 냈습니다. 올 2월 출간한 신작 ‘김미경의 마흔수업’입니다. 출간 2개월 만에 누적 판매 부수 15만 부를 기록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김미경이 많은 세대 중에서도 40대를 위한 책을 쓴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또 그의 40대는 어땠는지도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김미경을 만났습니다. 40대를 위한 김미경의 조언(https://youtu.be/gI5Sfc9LQRg)과 2030세대를 위한 김미경의 고민상담(https://youtu.be/Bv6cLfuUytA)을 동아일보 유튜브 채널 ‘기웃기웃’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40대는 어떠셨나요?“40대의 전 무명 강사였고 집 한 채 없이 가난했고 세 아이 돌보며 강의 다니느라 늘 시간에 허덕이던 사람이었어요. 쉬는 날 없이 바쁘게 살았지만 손에 쥔 건 없었어요. ‘아트 스피치’ ‘언니의 독설’ 같이 유명세를 가져다 준 저서는 모두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나왔어요. 강의를 시작한 건 29살이었으니까 18년간 말 그대로 이름 없는 강사였어요.”공자는 40세를 불혹(不惑)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일에 현혹되어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어,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가게 됐다는 의미입니다. 예로부터 40대는 20, 30대 노력했던 것을 보상 받고 완성하는 시기로 알려졌습니다.―성과 없는 무명의 40대를 어떻게 버티신 건가요? “누가 뭐라 그래도 난 알잖아요. 노력하고 있다는 걸. 남들이 알아줄 때까지의 시간과 내가 나를 알아주는 시간이 다른 것뿐이죠. 심지어 남들이 늦게 알아봐줄수록 좋아요. 실력이 아주 많이 쌓이거든요. 10년 노력한 것보다 18년 노력하니 실력이 훨씬 많이 쌓였던 거예요. 무명 시절을 노력하며 보냈기에 40대 후반에 이르러서 인지도가 생기고 유명해진 거죠. 누구에게나 무명의 시대는 있어야 해요. 겸허한 태도로 실력을 쌓을 기간이 필요하니까요.”―정신적으로 힘들진 않으셨나요?“왜 안 힘들었겠어요.(웃음) 40대가 되면 이상하게 마음이 고3처럼 되는 거 아세요? 다 커버린 것 같고 다 산 것만 같아요. 고 1,2 때 치열하게 공부하다 고3이 되어 수능을 치고 나면 인생이 다 끝나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거죠. 고3처럼 40대가 되면 20, 30대 노력한 인생의 성과가 나야 하는 느낌인 거예요.많은 사람들이 40대가 되면 연봉도 높고 집도 대출 없이 한 채는 가져야 하고 커리어 부문에서도 정점을 찍어야 할 것 같잖아요. 그래서 50대 이후의 삶은 아무 것도 없는 것마냥 느껴질 거예요. 그래서 40대한테 50대는 어떨 것 같냐고 물어보면 ‘거기 사람 사는 데예요?’ 이런 시선으로 봐요.(웃음) 40대가 지나면 어떤 희망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근데 그게 절대 아니거든요. 절 보세요. 50대부터 유명해졌어요. 재산의 대부분을 50대에 벌었는걸요.”5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직업적 성공을 거둔 그가 ‘동기부여 강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건 29살 때였습니다. 그는 원래 음악도였습니다. 연세대 작곡과를 졸업했고 광고 회사에서 CM송 제작하는 일을 했으며 피아노학원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그 시절, 음악을 전공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우리 엄마 덕분이에요. 읍내에서 작은 양장점을 손수 운영하셨는데 그 덕에 제가 시골에서 대학에 갈 수 있었어요. 우리 엄만 되게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자기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밀어줬어요. 같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더 노력하는 자식을 좋아했죠. 그래서 제가 음대에 가겠다고 했을 때 엄마가 그러셨어요. ‘내가 죽어라고 벌어서 학비 대줄게’라고. 대학 입학했을 때 엄마는 너무너무 기뻐하셨죠.”―음대 졸업 후 어떤 일을 하셨나요?“대학 졸업 후 광고 회사에 들어가서 CM송 작곡하는 일을 맡았어요. 근데 일년 반도 못 다녔어요. 조직생활이 안 맞더라고요. 모두가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잖아요. 모두가 정해진 돈을 받는 것도 싫었고요. 왜 7시에 퇴근해야 하나? 난 12시까지 일하고 3배 벌고 싶은데 같은 생각을 했어요. 결국 회사 그만두고 집에 피아노 한 대 갖다 놓고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근데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거예요. 아예 학원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죠.”―처음 사업을 시작하신 거네요.“학원을 차리려면 돈이 필요할 거 아니에요. 처음엔 자본금이 없어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어요. 대출금이 많으니 잠이 안 오더라고요.(웃음) 대출은 많이 받았는데 원생들은 많이 없었으니까요. 어찌나 걱정을 했던지 새벽 4시 반이면 절로 눈이 떠지더라고요. 어차피 잠이 안 오니 학원에라도 가자는 마음으로 한동안 새벽 출근했어요.우리 엄마 따라한 거였어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새벽 기도를 다녔던 엄마가 그러셨거든요. ‘살다가 힘든 일 있으면 걱정하지 말고 일찍 일어나서 염원을 해’ 종교가 없는 저는 기도는 안 하고 아이들을 많이 오게 할 방법을 궁리하러 아침 일찍 학원에 나갔어요.” ―새벽 4시 반부터 피아노학원에 가서 뭘 하셨나요?“처음엔 새벽에 학원 나가서 어떤 행동을 하기보다는 걱정하는 데에만 시간을 쓰는 거예요. 걱정만 하면 해결은 하나도 안 되잖아요. 대신 염원하는 마음으로 엄마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아이들 사진을 하나하나 두고 ‘내가 당신의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이들이 얼마나 피아노를 예쁘게 잘 치는지’에 대한 내 생각을 편지로 써서 엄마들한테 보냈거든요. 편지에 감동한 엄마들이 소문을 내기 시작했고 1년 반 만에 학생이 200명으로 늘었죠.”업계에는 소문이 쫙 났습니다. 28살 여성이 어떻게 학원 경영을 이렇게 잘하느냐는 거였죠. 어느 날 그는 피아노 학원 원장들 세미나에 강사로 초청을 받게 됩니다. ―‘강사 김미경’의 첫 데뷔였네요.“성공 사례를 발표해달라고 했는데 처음엔 당연히 안 한다고 했어요. 제가 강의를 해 본 사람이 아니잖아요. 근데 ‘있는 이야기를 편하게 해주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강의계획서를 만들었어요. 내가 왜 새벽 4시 반을 택했는지, 4시 반에 일어나서 5시간 동안 뭘 했는지, 편지를 쓰면서 뭘 느꼈는지, 학원에 안 오는 학생들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써내려갔죠. 당연히 반응은 폭발적이었어요.(웃음) 새로운 꿈이 생기더라고요. 강의로 먹고 사는 직업을 갖고 싶다고요.”인터넷이 없던 시절, 새로운 꿈이 생긴 그는 ‘가르치는 걸로 먹고 사는 직업’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서점으로 향했습니다. 어떤 책에서 그는 ‘기업 강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은 동기부여 강사의 모태가 된 직업입니다.―피아노 학원을 열심히, 또 잘 운영하셨기 때문에 강사가 될 수 있었던 거네요.“살면서 느낀 건데요, 일단 임계점을 넘겨야 해요. 뚜껑이 열릴 때까지 부글부글 끓어서 부풀어야 해요. 일단 뚜껑이 열린 후엔 3가지가 넘는 다른 기회로 연결돼요. 만약 제가 글을 쓴다고 생각해봐요. 글 분야에서 어느 정도까지 무르익으면 뚜껑이 열리겠죠? 그럼 예측하지 못했던 다른 분야의 운들과 연결이 되는 거죠. 근데 뚜껑이 열리지 않고 덮여 있잖아요? 그럼 아무 기회도, 가능성도 생기지 않아요.”40대 후반 여러 베스트셀러를 쓰고 본인의 이름을 딴 토크쇼를 진행했을 정도로 스타강사로 성공했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습니다. 강의료가 주 수입원이었던 그에게 팬데믹 기간은 혹독했습니다. 오프라인 강의가 줄줄이 취소되면서 한 달 강의료가 0원인 적도 있었습니다. ―소위 말해 잘나가다 고꾸라진 거잖아요. 충격이 크셨을 것 같아요.“몇 개월간 통장에 0원이 찍히더라고요. 너무 놀라고 걱정되고 힘들었어요. 그때도 피아노 학원 차렸을 때랑 같았어요. 돈 버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싶었죠. 돈을 버는 건 생각보다 쉬워요. 돈이 움직이는 방향을 살펴보면 돼요. 사람보다 돈의 속도가 훨씬 빠르거든요. 팬데믹 3년 동안 빅테크 기업 주가가 확 올랐잖아요. 전 세계 돈이 그리로 모인 거죠. AI, 블록체인, NFT…. 모두 팬데믹 때 급격하게 성장했어요. 돈이 가리키는 방향이 디지털 분야인 거예요. 그러던 중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디지털 전환)’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박혔고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어요.”팬데믹을 겪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카카오톡 외엔 사용할 수 있는 SNS가 없었다고 합니다. 블로그에 글 하나 올리는 것도 한참 걸릴 정도로 그의 디지털 리터러시는 최하 수준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접한 후 코딩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실행력이 엄청나십니다. 젊은 사람들도 코딩은 배우기 어렵잖아요.“공부가 실행력 있을 게 뭐 있어요. 그냥 하면 돼요.(웃음) 관련 책을 사고 영상을 보는 거죠. 배운 지식을 제 일에 적용하기로 했어요. 오프라인에서 했던 모든 강의를 온라인으로 옮기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온라인 교육 플랫폼 회사를 창업했습니다.”팬데믹 기간 그가 고군분투한 내용은 2020년 7월 출간된 ‘김미경의 리부트:코로나로 멈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법’이라는 책에 담겨 있습니다. ‘김미경의 리부트’는 영문판으로도 번역돼 미국 아마존 전자책 ‘전염병 분야’ ‘비즈니스 계획 및 전망 분야’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국내에서는 출간되자마자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1위를 휩쓸었습니다. 환갑을 앞둔 그는 5년 전부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영어 공부입니다. 어려서부터 자유롭게 해외를 돌아다니며 살고 싶었던 그에게 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미국 현지에서 ‘영어 강의’를 하는 것입니다.―55세부터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하셨다니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당연하죠. 매일 새벽 네시 반에 일어나서 몇 시간씩 영어공부를 했어요. 그게 5년이 훌쩍 넘었죠. 언어 공부는 어릴 때 하라고 하지만 55살에 시작해도 가능하긴 하더라고요.(웃음) 3년 전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강의한 적이 있는데 당시 유튜브 영상 조회수가 850만 회를 넘겼어요. 덩달아 자신감도 붙었죠.”―‘총, 균, 쇠’의 저자인 세계적 석학 제레미 다이아몬드, 펜실베이니아 와튼 스쿨의 최연소 종신 교수 애덤 그랜트, 미국 출신 세계적 투자자 짐 로저스 등 해외 명사들과 대담 인터뷰도 하셨더라고요. “미국 현지 직강의 꿈을 위해 천천히 밟는 단계인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통역 없이 영어로 진행한다는 목표를 세웠죠. 처음엔 너무 부담스럽고 힘들어서 취소하고 싶은 유혹이 몰려왔어요. 인터뷰 전날엔 불안해서 잠도 못 자고 교수님 쓴 책을 몇 달에 걸쳐 원서로 다 읽었죠. 교수님 영상 스크립트도 뽑아서 외우다시피 했어요. 질문할 내용도 미리 다 외웠죠. 인터뷰 일주일 전부터는 영어 선생님과 매일 역할을 바꿔가며 실전처럼 연습했어요. 부담이 큰 만큼 정말 노력했습니다.”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취소하고 싶은 유혹들이 불쑥불쑥 올라올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나는 지금 성장근육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근육에 상처가 날 정도로 운동해야 근육이 단단해진다”며 스스로를 단련했습니다. 세계적 석학들과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자신감을 쌓은 그는 올해 말 미국에서 첫 번째 강의를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영어로만 하는 강의입니다. 50대 후반인 그가 환갑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셈입니다. 환갑은 보통 은퇴하고 쉬는 나이입니다. 휴식 아닌 도전을 택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죠. 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여러 나라 돌아다니면서, 여러 나라의 언어를 구사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막내가 작년에 고3이었어요. 아이들 다 스무살 넘었고 독립했으니 이젠 그렇게 살 수 있게 됐잖아요. 제 강의가 해외에서도 통하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걸 위해 지금도 새벽 네시 반이면 기상합니다.(웃음)”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시들지 않는 꽃을 빚는 여자가 있습니다. 세라믹 아티스트인 도화 김소영(36)은 2011년부터 12년째 도자기로 빚은 카네이션 브로치를 만들고 있습니다. 배고픔을 숙명처럼 지고 가는 예술가에게 도자기 카네이션은 생계수단이었고, 포기할 뻔한 순간 한 걸음을 더 떼게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절박했기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매년 다른 디자인을 개발했고, ‘도자기=그릇’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머리와 드레스에 도자기 카네이션을 잔뜩 붙이고 거리를 활보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영감은 배고픔에서 나오나봅니다. 도자기 카네이션은 돈이 아쉬웠을 때 나온 아이디어였습니다. 졸업 후 일하던 쇼핑몰이 폐업 조짐을 보여 퇴사하면서 수개월 간 실직상태에 놓였던 그는 유년시절 로망이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수중의 돈은 100만 원 남짓. 산티아고를 가는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방법을 고민하다 떠올린 것이 도자기 카네이션이었습니다. 하룻밤 사이 60개의 도자기 카네이션을 만들었고, 300만 원을 마련해 산티아고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산티아고가 주는 자유와 평온의 감각에 눈 뜬 그는 지금까지 8번 산티아고를 갔고, 서울과 부산을 8번 왕복한 거리인 5479km를 걸었습니다. 개인전을 열고, 틈만 나면 산티아고로 훌쩍 그에게는 ‘금수저’라는 의혹(?)도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그는 도예를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30대 초반까지도 모아둔 돈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서울의 작업실을 빌릴 여력이 안돼 4년 간 귀촌을 하기도 했습니다. “도예를 계속 할지 고민 된다”는 후배가 찾아오면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거지같이 밥 못 먹어도 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그만 두라”고 말입니다. 그가 10년 간 스스로에게 해 온 말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꿈’의 또 다른 말은 ‘절박함’입니다. 재고 따진다면 그만큼 절박한 게 아니라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정말 하고 싶은 걸 이루기 위해선, 안되는 이유 대신 어떻게든 되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도예도, 산티아고도 놓지 않았습니다. 간절함이 길을 만든다는 그를 지난달 18일 서울 도봉구 작업실에서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흙수저 아티스트’로 살아남은 방법(https://www.youtube.com/watch?v=vfHPEB_QCh0)과, 산티아고에서 5479km를 걸은 이유(https://youtu.be/qFSrZbmYEGg)를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12년 간 인기를 끌고 있는 ‘도자기 카네이션’을 판매하시고 얼마 전 개인전도 여셨어요. 그런데 세라믹 아티스트가 원래 꿈이 아니었다고요? 미대에 진학해서 도예를 처음 접했는데 너무 어려웠어요. 원래 섬유 전공을 희망했는데 경쟁에서 밀려서 도예 전공을 하게 됐어요. 제 마음대로 모양이 안 나오면 도자실을 폭발시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었어요.도자실 앞에서 엉엉 울기도 했죠. 그런데 제 성향이 현실에 만족을 못해도 그 생각을 바꾸려고 해요. 도예가 싫었지만 어쨌든 해야 하잖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학교에선 최고가 돼 보자고 마음을 잡았어요. ―‘도자기 카네이션’을 12년 째 만들고 계세요. 도자기 카네이션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졸업 후에는 ‘도자기로 먹고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카페 알바도 하고 쇼핑몰에서도 일했는데 쇼핑몰 사세가 기울어서 퇴사를 했어요. 이후 4개월 동안 실직 상태였는데 그때 산티아고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2006년 쯤 파올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라는 책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처음 접한 뒤에 꼭 가 보고 싶었거든요. 산티아고를 갈 돈을 벌 방법을 궁리하다가 도자기 카네이션을 떠올렸어요. 그 때 수중에 100만 원 밖에 없었거든요. 밤을 새서 하루만에 60개를 만들고, 트위터를 통해서 판매를 해서 300만 원 남짓을 모았어요. 그 돈을 다 털어서 무작정 산티아고로 떠났죠. ―여행경비 마련을 위해 졸업 후 눈을 돌렸던 도예가 업이 된 거네요.맞아요. 산티아고를 가기 위해 도자기 카네이션을 개발했고. 그걸 판매도 해 보면서 ‘도자기로도 돈을 벌 수 있구나’라는 용기가 생겼어요. 이 길을 계속 가보자는 결론이 났죠. 산티아고를 다녀와서 2012년부터 도자기 카네이션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6개월 동안 4000개를 만들고 버리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맘에 드는 디자인을 완성시켰어요. 첫 해였던 2011년 판매량보다 10배 더 많은 600개를 판매했어요. ―도예는 돈 벌기 힘든 예술이라는 시선이 있잖아요. 경제적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도자기 카네이션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내신 건지 궁금해요. 30대 초반까지 모아놓은 돈이 하나도 없었어요. 버는 족족 작업실 임대료와 재료비로 다 나갔거든요. 월에 기본 500만 원은 들었어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죠. 버는 돈은 많아도 그만큼 나가니까 모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일하는데 돈은 안벌리니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막상 작업을 시작하면 너무 재밌으니까 그만두질 못한 거죠.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그만둘 뻔한 순간은 없었나요?2018년 무렵에 돈이 한 푼도 없었어요. 원래 일하던 작업실이 철거를 하면서 새로운 작업실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서울에서 작업실을 구할 여력이 안돼서 귀촌을 택했어요. 작업실을 알아보던 중 수도원에서 빈 공간을 무료로 빌려주신다고 해서 강원도 홍천, 정선에서 4년 간 살았어요. 그곳에서 사람도 안 만나고 도자기만 만들면서 악착같이 2년 동안 1억 원을 모았어요. ―예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 중에서는 소위 ‘금수저’도 많잖아요. 경제적 압박 없이 작품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박탈감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재력이 있었다면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죠. 돈으로 쉽게 해결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직접 하려다보니 너무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인정이 빠른 편이에요.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건 제 이상일 뿐이잖아요. 돈이 없는 상태에서 제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는 건 저에게 주어진 현실이고, 그 현실에서 제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가요. 그 길에서 얻는 것도 있어요. 배고픈 상황에서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은 과정이 피가 되고 살이 됐어요.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헤쳐나갈 자신이 있어요. 돌아왔던 시간들이 부끄럽지 않고요. ―지금은 안정적인 수익이 있으신가요? 12년 동안 도자기 카네이션을 판매하고, 도예와 마케팅 강의도 하면서 안정적으로 돈을 벌었어요. 이제 어느 정도 안정권에 접어들긴 했는데, 안정을 포기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하는 시점이에요. ―어떤 시도인가요?도자기 카네이션이나 액세서리같은 작은 작업들만 하는 게 답답하게 느껴지더라고요. 파인아트 작가로 더 큰 규모의 작업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어요. 제 세계관을 담은 작품들이요. 어렸을 때부터 우주와 별을 좋아했거든요. 제 작품에 우주와 별을 담고 싶어요. 그래서 문화센터, 방과 후 교실 다 그만 뒀고, 도자기 카네이션 비중도 줄여나가려고 해요. 제 신념은 ‘하나를 포기해야 하나를 얻을 수 있다’는 거에요. 이 문이 닫혀야 반대쪽 문이 열리죠. 1년 정도 거지같이 살면서 제 미래에 투자하려고요. 전 그래서 10년을 봐요. 10년 뒤에는 ‘지금의 선택을 내리길 잘 했다’고 생각할 거 같아요. “성공한 예술가의 95%는 ‘금수저’라는 속설이 있다. 나머지 5%가 나다.” 소영 씨의 말입니다. 예쁜 옷, 비싼 가방을 못 사서 아쉬운 적은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더 넓은 작업실에서 재료비 걱정 없이 원하는 작업을 하는 것. 그 꿈에 다가가는데 돈이 걸림돌이 될 때 그는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럴 때마다 숨통을 틔워준 건 산티아고였습니다. 현실이 팍팍하게 느껴질 때 산티아고에서 만나는 낯선 이의 미소와 따뜻한 인사가 ‘산소호흡기’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 순례길은 예수의 열두제자 중 한 명인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길입니다. ―산티아고를 8번이나 가셨다면서요. 그곳의 가장 큰 매력이 뭔가요? 그 곳의 모든 사람들이 웃으며 서로 인사를 해요. ‘부엔 까미노’라는 인사말인데 ‘좋은 길 되세요’라는 뜻이에요. 서로 웃으며 부엔 까미노를 나누면 힘들었던 순간들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그 후론 현실이 힘들 때마다 산티아고를 찾았어요. 지금까지 총 8번, 다 합쳐 5479km를 걸었네요. ―8번이나 간 이유가 뭔가요? 산티아고는 저에게 산소호흡기같은 존재예요. 사람이 살아가려면 숨을 돌릴 시점이 필요하잖아요. 도자기는 저를 너무 힘들게 한 적이 많아요. 그 힘듦을 씻어내고 에너지를 다시 채워주는 존재가 산티아고였어요. 제가 다시 달릴 힘을 주는 존재이자 제 고향같은 곳이라 매년 찾아요. 제 심장을 둘로 나눈다면 하나는 도자기, 다른 하나는 산티아고예요.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나요?산티아고를 처음 갔을 때 제대로 운동을 안 하고 가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어요.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저를 보고 한 스페인 커플이 짐을 들어주겠다고 다가왔어요. 커플이었는데, 여자분도 힘들어서 짐을 남자가 들고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여자분이 10kg이 넘는 제 백팩을 들어줬어요. 제 가방을 매고 걸어가는 여자분 뒷모습은 12년이 지나도 안 잊혀요.―세라믹 아티스트로서의 꿈은 뭔가요?저는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요. 세계에 제 ‘우주별 도자기’를 알리는 게 꿈이에요. 도자기가 단순히 액세서리나 식기뿐만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 온전히 사랑받는 날을 꿈꿉니다. 내년에 미국 뉴욕에서 전시를 여는 게 목표에요. 일단 9월 뉴욕행 티켓을 끊었어요. 전시 공간을 물색하려고요. 맨땅에 헤딩이죠. 믿을 건 제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어요. 10년 뒤의 제 모습을 기대해주세요. 김재희기자 jetti@donga.com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
한효주, 성훈, 김우빈, BTS 진, 진서연, 최은주…. ‘몸짱’으로 유명한 수많은 연예인들의 몸을 만든 체육관 관장이 있습니다. 운동만 잘 가르치는 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신들린 애드리브와 부릅뜬 큰 눈의 ‘호랑이 관장님’ 캐릭터로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인물, ‘바디스페이스’ 양치승 관장(48)을 이 만났습니다. 지금은 ‘연예인 트레이너’로 유명한 그도 과거엔 배우 지망생이었습니다. 심은하, 한효주 같은 톱스타들이 다녔던 연기학원을 다니며 코믹 액션 배우를 꿈꿨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과 허리 디스크 부상 등으로 꿈을 접게 됩니다. 주차 아르바이트, 은행 청원경찰 등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다가 포장마차를 차려 운영하던 중 좋은 기회를 만나 20여 년 전 처음 체육관(헬스장)을 차리게 됩니다. 그는 타고난 사업가였습니다. 망해가는 헬스장을 인수해 흑자를 낸 뒤 되파는 방식으로 큰 돈을 모았습니다. 성실히 모은 돈으로 2008년엔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그만의 고유 브랜드 ‘바디스페이스’를 차렸습니다. 그는 15년 째 같은 자리에서 ‘양치승 관장’으로 통합니다. 어린 시절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사업에서 큰 성공도 거두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도 당하고…. 인생에서 온갖 희로애락을 겪은 그는 “인생은 영화 같다. 내 인생엔 코믹, 액션, 멜로, 공포, 스릴러가 다 담겨 있다”며 지금은 웃어넘길 수 있다고 합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채널 <복수자들>에서 억대 사기로 폐인이 됐던 양치승이 운동으로 멘탈을 극복한 비결(g)과 무일푼 알바생에서 논현동 헬스클럽 관장이 될 수 있었던 성공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원래 배우를 꿈 꾸셨는데, 꿈은 왜 접으신 건가요? “당시 고등학교 졸업하고 코믹 액션 장르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심은하, 한효주 같은 사람들이 다녔던, 엄청 유명한 연기 학원에도 다녔어요. 근데 군대에서 허리 디스크를 다쳐서 제대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해야 했어요. 수술비가 없어서 디스크 수술은 못 받고 밤새도록 혼자 재활운동을 해서 겨우 퇴원했죠. 돈도 없고 몸도 성하지 않다보니 자연스럽게 배우 꿈은 접었어요. 일단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주차장 아르바이트, 은행 청원경찰 같은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전전했어요.”―그러다가 체육관을 시작하셨는데 계기가 궁금해요.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살면 평생 이렇게 살게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포장마차를 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포장마차 운영하면서 알게 된 보디빌딩 국가대표 선수들과 인연이 되어 1990년대 후반 첫 체육관을 차리게 됐어요. 그 당시 저는 가진 게 없고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다 보니 열심히 일하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간절했기에 정말 열심히 살았죠. 하루 종일 헬스장에 머물면서 회원들 이름 다 외우고 한 명씩 운동도 가르쳐드렸어요.”그렇게 시작한 헬스장 사업은 점점 규모가 커졌습니다. 타고난 사업가였던 그는 영업 이익이 낮은 헬스장을 저렴한 가격에 인수해 회원 수를 불린 뒤 다시 파는 식으로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한 달 수익이 10~20만 원에 불과했던 헬스장을 월 수익 5~600만 원으로 만들어 권리금을 높여 팔았던 겁니다. ―망해가는 헬스장들을 인수하신 이유가 뭔가요? “일부러 망한 헬스장들만 찾아다녔어요. 처음부터 헬스장을 키워서 되팔겠다는 마음보다는 기존 헬스장도 살려내지 못하면 나에게 헬스장을 운영할 능력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회원수는 많은데 영업이익이 0원에 가까운 헬스장부터 회원수가 아주 적은 헬스장까지 다양한 케이스를 접하면서 노하우가 쌓였어요.”―헬스장을 살리는 비법은 뭔가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어요. 진심이에요. 만약 헬스장이 오전 6시에 오픈하잖아요? 그럼 저는 6시부터 헬스장에 나가서 회원들을 맞이해요. 회원수가 500명 넘어도 얼굴과 이름을 한 명 한 명 다 외우고 인사해요. 문 닫을 때까지 하루 종일 헬스장에 머물면서 직접 운동 가르쳐주고 대화도 나눴어요. 그렇게 하다보니 동네에 입소문이 쫙 나는거죠. 하루도 빼놓지 않고 성실하면서 진심을 다하니까 알아주시더라고요.”노원 인근에서 시작한 헬스장은 노량진을 거쳐 지금은 강남구 논현동 ‘바디스페이스’가 됐습니다. 일반인에게만 핫한 헬스장이 아닙니다. ‘나 혼자 산다’에 함께 나왔던 배우 성훈뿐 아니라 한효주, 김우빈, BTS 진, 진서연 등 많은 스타들이 그에게 운동을 배웠습니다. ―‘연예인 PT 쌤’으로도 유명하세요. 연예인 고객 유치 비법이 있으신가요? “‘바디스페이스’가 있는 논현동에는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배우 지망생들이 많이 살았어요. 저희 헬스장은 월 3만 원으로 회비가 다른 곳에 비해 저렴한 편인데 그조차도 부담스러워서 운동을 그만두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그런 친구들한테 그냥 편하게 돈 안 내도되니 와서 운동하라고 했어요. 여기서 오랫동안 헬스장을 운영하다보니 그때 회원이었던 친구들이 다 잘 된 거예요. 인연은 그런 식으로 생기더라고요.”체육관을 운영하면서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가족처럼 믿었던 동생에게 크게 사기를 당해 다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힘든 때도 있었습니다. ―크게 사기를 당하신 건가요? “헬스장 회원이었는데 막냇동생 삼고 싶을 정도로 좋아했던 친구였어요. 헬스장 일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일을 맡겼는데 처음엔 관리를 너무 잘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친구를 믿고 여러 지점 운영을 맡겼죠.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의심 가는 행동을 했어요. 근데 제가 이 친구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 ‘동생을 믿지 못하는 내가 나쁜 놈이구나’하며 오히려 저를 자책했어요. 5년 정도 지난 후에 보니까 그 친구가 여러 지점의 장부를 빼돌렸더라고요. 수억대의 손해를 봤어요. 근데 돈보다 사람을 잃었다는 게 큰 충격이었어요.”―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았으니 배신감으로 후폭풍이 심하셨을 것 같아요. “사기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일주일 정도가 제일 심했어요. 아침에 눈을 딱 뜨잖아요. ‘어제까지 있었던 일들이 꿈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일어나자마자 그 친구에게 예전처럼 전화까지 걸었던 적도 있어요. 충격이 너무 커서 사기 당했단 사실을 잊어버린거죠. 한동안 제정신으로 살기 힘들었어요. 가족 같은 사람한테 제겐 인생이나 다름없는 체육관을 맡긴 거였어요. 그러다보니 술을 엄청 찾았어요. 체육관에 운동하러 온 회원들이랑 운동은 안 하고 술만 들입다 마셨죠.”배신감과 분노를 잊기 위해 틈만 나면 술을 찾았습니다. 4년 넘게 매일같이 과음하는 생활을 지속하던 중 몸이 이상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체지방률은 40%에 육박했고 체중은 100kg가 넘은 겁니다.―피 검사 했을 때 엄청 충격을 받으셨다고요? “피가 맑아야 하잖아요. 찐득찐득해서 혈액 순환이 안 될 정도였어요. 이래서는 건강까지 버리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회원들과 술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순간 괴로움은 잊을 수 있잖아요. 너무 괴로웠던 거예요. 몸이 망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술 마시는 걸) 멈추질 못했어요.”―다시 운동을 시작하신 계기는요? “아직도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해요. 2016년 1월 2일이에요. 연말연초 술을 엄청 마시고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는데 정말 짐승이 따로 없더라고요. 4년 동안 하루도 안 빼놓고 술 마시고 운동도 거의 안 했으니까요.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봐도 이건 정말 아니더라고요. 그날부터 운동을 다시 시작했어요. 하루 4~6시간, 길게는 8시간 정도. 시간 나는 대로 미친 듯이 했어요.”시간 날 때마다 운동에 매진했던 그는 8개월 만에 ‘완벽한 바디 핏(body fit)’을 회복했습니다. 되찾은 건 건강한 신체뿐이 아니었습니다.―몸이 건강해지니 마음도 괜찮아지던가요? “몸도 몸이지만 멘탈이 정말 좋아졌죠. 몸을 만들고 나서 지난 4년을 술로 허비한 게 너무 아까웠어요. 진작 운동했으면 더 빨리 힘든 걸 잊고 더 행복해지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 뿐만 아니라 운동하면서 정신이 건강해진 케이스가 많아요. 저희 헬스장에 우울증 환자들이 되게 많았는데 운동하면서 되게 건강해지더라고요. 운동 경력을 활용해서 다른 사업을 시작한 친구들도 많고요. 운동을 하면 삶이 180도 바뀝니다. 진짜예요.”몸과 마음이 회복되자 그에겐 새로운 기회도 찾아왔습니다. 헬스장 회원이었던 배우 성훈과 함께 MBC ‘나 혼자 산다’ 출연 제의를 받은 겁니다. 먹는 걸 좋아하는 성훈을 엄하게 혼내는 ‘호랑이 관장’으로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20대 초반의 꿈을 이제 이루신 거네요. 배우는 아니지만 방송에 출연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니까요. “44살이 된 후에야 꿈을 이뤘다고 볼 수 있네요.(웃음) 돌이켜 생각해보면 스무살 때 배우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고 싶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마음가짐이었기 때문에 (당시) 잘 안 풀린 게 아닐까 해요. 그때 제가 잘 됐다면 지금 같은 겸손한 마음을 갖지 못할 거예요. 지금의 저는 늦게라도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게 정말 감사하고 행복하거든요. 주변 사람에게도 더 잘 하고 베풀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고요.”―방송하시면서 가장 뿌듯했던 때가 언제인가요? “채널A ‘오은영의 금쪽상담소’에 출연한 적이 있어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분이셨어요. 어릴 땐 집에 들어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출연 제의를 받고 처음엔 고민했어요. 방송에 나가 내 부모를 욕하는 것 같잖아요. 근데 제가 나온 영상에 한 댓글을 봤어요.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던 30대 여성이 집에 암막 커튼을 달고 갇혀 살았는데, 제 영상을 보고 용기를 얻어서 세상으로 다시 나오기로 결심했다는 내용이었어요. 그걸 봤을 때 정말 방송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사람들에게 즐거움뿐 아니라 마음까지 어루만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방송 출연 기회가 주어지면 책임감을 갖고 정말 잘 해야 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이러다 체육관 접고 방송인으로 전업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방송인과 체육관 관장, 하나만 선택하라면 저는 무조건 체육관 관장입니다. 방송에 나오는 게 재밌긴 하지만 체육관만큼은 아니에요. 저는 지금도 하루 종일 체육관에 머물면서 운동하러 오시는 회원님들과 수다 떨고 운동 가르쳐드리는 게 좋습니다. 이곳에 있을 때 가장 편하고 행복하거든요.”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5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사옥에 발을 들인 한 서양 남자. 100년 전통 한국 언론사에서 보기 힘든 파란 눈의 금발 사나이에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꽂힙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바프’(바디프로필)를 찍는다는 그는 올블랙 풀정장 사이로 숨겨지지 않는 근육질 몸매를 뽐냅니다. 조각 같은 외모에 더해 그와 한 발짝 더 멀어지게 되는 이유는 그의 국적입니다. 그는 국민들이 스스로를 ‘노잼’이라 부르는 나라, 바로 독일에서 온 모델 겸 방송인 마르쿠스 플로리안 크라프(30)입니다. 유튜브 ‘코리안브로스’,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등 방송으로 이름을 알렸고, 최근 넷플릭스 ‘피지컬: 100’에 출연해 독일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양국에서 인기를 끄는 중입니다. 다소 부담스러운 외모, 국적(?)과 달리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그는 반전의 입담을 뽐냅니다. “준비돼있습니다. 드루와, 드루와~!” 2013년 영화 ‘신세계’ 속 정청의 명대사가 한국 살이 6년 된 독일인 입에서 술술 나옵니다. “라면 먹으러 갈래?” 대신 “소세지 먹으러 갈래?”를 제안하는 그, 전통시장 상인에게 “사장님, 존함이 어떻게 되세요?”라 묻는 그는 스스로를 ‘반국인’이라 부릅니다. 독일에서 국제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2015년 숭실대로 교환학생을 왔다가 한국의 정에 흠뻑 취했습니다. 복날이면 삼계탕을 끓여다주고, 김치와 콩나물을 싸주는 한국인들에게서 고향의 정취를 느꼈다고 합니다.세계 1위 컨설팅 기업 딜로이트에 사표를 던지고 2017년 한국에 왔지만 인종차별을 당하기도 했고, 방송 섭외 제안이 뜸할 때는 “매일 매일이 불안함 그 잡채”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꾸준한 노력으로 오늘도 버팁니다. 한국 유튜브 콘텐츠를 라디오처럼 들으며 따라했고, 책 속 맘에 드는 글귀와 신조어들을 메모하며 한국어를 익혔습니다. “한국인은 밥심이지” “저는 ‘자만추’에요” 같은 구어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독일인에게 대중들은 친근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바디프로필을 찍으며 혹독하게 체력과 몸매를 유지한 독기 덕에 ‘피지컬: 100’에도 출연하며 유명세를 타고 있습니다. 버티면 언젠가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그의 목표는 “한국에서 제일 웃긴 독일인 되기”입니다. 독일인은 ‘노잼’이라는 이미지를 바꿀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그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사우나 딸린 3층집과, 딜로이트 사원증을 내팽개치고 한국에 온 이야기()와, 한국의 회식문화와 MZ세대에 대한 생각()을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 컨설팅기업 딜로이트를 다니셨다고요. 어떻게 한국에 정착하시게 된 건가요?2015년 숭실대 교환학생으로 처음 한국에 왔다가 한국인들과 친해져서 몰려다니고 같이 김치도 때려 먹었어요. 한국은 저와 잘 맞는다는 걸 느꼈죠. 이후 독일에서 학점 4.5점 만점에 4.5점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딜로이트라는 컨설팅기업에 입사했어요. 돈을 많이 받는 만큼 야근도 오지게 했어요.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고려대에서 운영하는 장학생 프로그램에 합격을 한거에요. 붙자마자 바로 딜로이트 때려 치고 나와서 2017년 한국에 왔어요. 그 후론 쭉 한국에 살고 있죠. ―고려대 대학원에 합격하셨는데 논산에서 1년 동안 지내셨다고요?한국 정부에서 한국어를 배우라고 외국인들을 어학당으로 보내줘요. 저는 논산에 있는 건양대 한국어교육센터로 가게 됐어요. 학교 앞에 치킨집이 있었는데 거기 양념치킨이 너무 맛있었어요. ‘겉바속촉’이었거든요. 독일인들은 맥주만 때려 먹지, 안주가 없어요. ―논산 생활은 어떠셨어요? 문화충격은 없었나요? 논산은 시골이라 저 같은 외국 양반이 많이 없어요. 나이 드신 분들 눈에 제가 신기했나봐요. 길거리에서 한 아저씨가 “어디에서 왔냐”고 하셔서 “독일에서 왔다”고 하니, 손 경례까지 하시면서 “하이~히틀러!”라고 했어요. 버스 기사님이 저를 보고 문을 닫아버린 적도 있어요. 속상하긴 했지만 그런 사람들은 1%도 안돼요. 삼계탕 끓여서 주시고 김치랑 콩나물을 챙겨주신 할머님도 있어요. 독일에서는 못 느꼈던 한국인의 ‘정’이 좋아서 계속 있는 거예요. ―한국에서 방송인으로 활동하시기 시작한 계기는 뭔가요?학교에서 알게 된 분이 모델을 해 보라고 제안하셔서 기업 광고, 의류 모델 등을 했어요. 외국인들이 출연하는 유튜브 ‘코리안브로스’에서 제가 출연한 영상 하나가 ‘떡상’을 하면서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했고요. ―어떤 영상이었나요?한국인들은 썸남, 썸녀에게 “라면 먹으러 갈래?”라고 한다기에 “왜 하필 라면이야? ‘소세지 먹으러 갈래?’라고 하면 안돼?”라고 한 말이 엄청나게 화제가 됐어요. 사람들이 저한테 ‘소세지남’이라는 별명을 붙여 줬어요. 최근에는 유튜버 조나단과 함께 촬영한 ‘남산의 외국인들’에서 시장 상인분께 “아이고 김사장~ 이거 참, 반갑구만! 반가워요!”라는 ‘응답하라 1988’ 대사를 친 게 화제가 됐어요. ‘K드라마로 한국어 공부한 외국인’이라는 유튜브 쇼츠 조회수가 400만 회가 넘었더라고요. ―“왜 내 여자다 말을 못해”라는 ‘파리의 연인’ 대사나, “홍시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의 ‘대장금’ 대사를 읊으시더라고요. 한국어는 드라마로 독학하신건가요?‘우왁굳’이라는 게임 스트리머를 좋아해서 그 사람 영상을 보면서 따라했어요. 하도 혼자 중얼거려서 옆집 사람은 제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또 좋아하는 소재의 책을 사서 소리 내서 읽었어요. TV나 유튜브를 보면서 재밌는 멘트가 있으면 노트를 해놓고 실생활에서 써 보고요. 독일 사람들은 드럽게 재미없어요. 그래서 한국 유머를 열심히 배웠어요. ―‘바디 프로필’을 1주일에 한 번씩 찍으신다고요? 스무 살 때까지 비만이었어요. 엄청 더운 여름날 호흡이 안돼서 집에 혼자 있는데 5분 동안 쓰러졌어요. 그 일이 있고 나서 1년 동안 울면서 40kg을 뺐어요. 아무것도 안 먹으면서 달리기만 했어요. 요즘도 하루에 3시간씩 운동해요. 스케줄 상 시간을 내기 힘들면 새벽에 일어나서 공복 유산소 운동을 해요. 바디프로필도 1주일에 한 번씩 찍으면서 계속 관리를 해요. 살을 빼고 싶은 분들께 일단 작은 것부터 습관으로 만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하루 밤 사이에 되는 건 없어요. 간식부터 곤약젤리나, 단백질이 함유된 과자로 바꿔보세요. 완벽하게 식단을 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는 기계 아니잖아요? 스스로를 반국인이라 부를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지만 문화의 장벽에 가로막힌 적도 많습니다. 나이나 직급을 이유로 그를 하대하는 사람도 있었고, ‘회식문화’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술 마신 다음날 컨디션이 ‘쓰레기’가 된다는 그는 ‘뒤풀이’ 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기 위해 배가 아프다거나 운전을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딜로이트를 다니다가 한국 사람들과 일 하고 있어요. 일할 때 양국의 문화적 차이가 있나요? 한국은 직장 동료를 패밀리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일이 끝나면 회식 하고 술도 먹잖아요. 독일 사람들은 맥주는 드럽게 좋아하지만 회식은 안 해요. 회사와 집이 완전히 나눠져 있거든요. 회식할 때 술을 서로 따라주는 문화도 독일엔 없어요. 자기 술은 자기가 알아서 마셔요. 근데 코로나 19 이후로 회식 많이 없어지지 않았나요? 만약 기자님들 아직도 회식을 한다면 부장님이랑 제가 한 번 얘기해봐야겠네요? ―‘꼰대문화’로 상처도 받으셨다고요.제가 고정으로 들어간 프로그램이었는데 상사가 반말하고 막대해서 회의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요. 나이가 어리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러면 안 되잖아요. 결국 프로그램은 폐지됐어요. 독일은 나이, 직급과 상관없이 맞다고 생각하면 그 말을 자유롭게 해요. ―요즘 MZ세대들의 회사 문화도 화제잖아요. 이어폰 끼고 일하는 ‘맑눈광’, 독일 딜로이트라면 어떻게 바라볼까요?독일에서 제일 중요한 건 ‘effektivitat’, 효율이에요. 이어폰을 끼고 일해야 능률이 오르면 좋은 거 아닌가요? 한국에서 직원들이 이어폰 끼고 일하는 걸 안 좋게 생각하나요? 마음 좀 여세요. 부장님이 좋아하는 노래 틀어서 이어폰 껴 드리세요. 직접 경험해보시라고. ―프리랜서의 삶은 불안하잖아요. 딜로이트를 그만둔 걸 후회할 때는 없나요? 매일매일이 불안함 그 잡채에요. 화끈한 일거리가 들어오면 진짜 행복하지만, 일이 안 들어올 땐 너무 불안해요. 하지만 딜로이트라고 모든 게 좋은 건 아니었어요. 야근도 잦았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있는 게 적성과도 안 맞았어요. 모든 일에 장단점이 있는 거죠. 완벽한 건 없어요. 지금의 삶은 불안하긴 하지만 자유가 있어요. 오늘 열심히 했으면 다음날 여유롭게 지내죠. ―롤모델이 있나요?다나카상과 촬영을 같이 했는데 대본에 없는 멘트도 애드립으로 바로바로 나와서 정말 천재라고 느꼈어요. 그 분이 다나카 컨셉을 4년 동안 밀어왔다고 하더라고요. 다나카상을 보면서 꾸준한 노력이 답이라는 걸 느껴요. 다나카가 대단하긴 하지만 남과 나를 비교하진 않아요. 나와의 싸움인 거에요. 과거의 나,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돼요. ―플로리안은 어떤 방송인이 되고 싶으세요?그리고 저는 방송을 하면서 사람들한테 웃음을 주는 게 좋아요. 독일 사람들은 재미없다는 편견이 있잖아요. 독일 사람들이 재밌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한국에서 가장 웃긴 독일인이 되는 게 목표에요. 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천만 영화 ‘범죄도시2’, 세계적 인기를 끈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 시즌2와 ‘스위트홈’에 이어 전도연 주연의 영화 ‘길복순’까지…. 근래 가장 ‘핫’했던 작품들엔 시선을 확 잡아끈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덥수룩한 수염, 묵직한 눈빛을 가진 장신의 거구(巨軀)지만 웃으면 볼부터 귀까지 발그레해지는 순박한 매력의 배우 박광재(43)입니다. 채널A ‘천하제일장사’, KBS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예능인으로도 활약하는 그가 10여 년 전엔 프로농구 선수였다고 합니다.농구 명문 경복고, 연세대를 졸업한 그는 3점 슛도 잘 쏘는 ‘센터’로 주목 받았습니다. 2003년 드래프트 1라운드 8순위로 LG에 입단하며 프로의 세계에 입문했습니다. 하지만 녹록치 않았습니다. 당대 최고 농구선수였던 현주엽(LG), 서장훈(전자랜드)을 만나게 되면서 코트보단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대학 때까지만 해도 유망주였지만 프로 입단 후부터 주전에서 밀리면서 차츰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2012년 무렵 연습 도중 발목에 큰 부상을 입고 결국 은퇴를 결심하게 됩니다. 은퇴 후 반년 동안 칩거하던 그에게 어느 날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무대 위에 서는 배우가 된 겁니다. 2013년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에서 자코포 역으로 데뷔한 그는 지금까지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차곡차곡 ‘배우 경력’을 쌓고 있습니다. “아직 배우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과정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그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프로 입단 후 좌절을 겪었지만 극복해낸 농구 선수 박광재의 이야기()와 우연한 기회로 연예계 데뷔 후 훌륭한 배우가 되기 위한 과정을 보내고 있는 이야기()를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지금은 경기장에서 운동선수들이 춤 추는 일이 많습니다. 운동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 자신의 끼를 발산하는 것이 장려되는 분위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박광재가 활동했을 때만 해도 다른 분야로 주목 받는 운동선수는 환영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유독 끼가 많았던 그는 코트에선 이단아 취급을 받았습니다.―프로 농구 선수 시절 ‘딴따라’라는 말을 들으셨다고요? “요즘은 운동선수들이 경기하다 말고 춤 추는 게 화제가 되기도 하고 좋게 봐주시는데 예전엔 안 그랬어요. 제가 프로농구 올스타전에서 춤 췄을 때, 팬들은 되게 좋아해주셨는데 감독님들은 별로 안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쟤는 농구에 관심 없는 딴따라구나’ 이렇게들 생각하셨다고 해요.”―이적 시장에서 ‘인기 없는 선수’였던 건가요? “은퇴 후 술자리에서 허재 감독님을 만났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우리나라에서 스크린플레이(농구에서 공 가진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같은 팀 선수가 상대의 진로에 방해하는 기술)는 최고여서 데리고 오고 싶었는데 다들 반대했다’는 거예요. 그때 감독님들 사이에서 저는 ‘농구 관심 없고 노는 거 좋아하고 연예계로 가고 싶은 애’로 통했다는 거죠. 그 말을 들었을 때 무척 속상하긴 했어요. 근데 뭐…. 농구를 정말 잘했으면 어떻게든 데려갔겠죠?(웃음)” ‘딴따라 선수’라는 오해도 있었지만 대진운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농구계 최고 스타였던 현주엽, 서장훈과 같은 시기, 같은 팀에서 활동했는데, 주전 경쟁에서 밀려 코트보단 벤치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그는 “형들은 대한민국에서 정말 너무 잘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경쟁으로 이기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프로 입단 1년차, 주전 선발에서 현주엽에게 번번이 밀렸던 그에게 회사는 ‘군대부터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회사 방침에 반발하다 군대에서도 운동을 계속 할 수 있는 ‘상무’(국군체육부대)가 아닌 공익근무요원으로 군생활을 하게 됩니다. ―상무가 아니라 일반 군생활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1년차 때는 주로 벤치에 있긴 했지만 저 스스로는 점점 기량이 올라간다고 생각했어요. 2년차 때 더 열심히 해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싶었죠. 근데 회사에선 헤드업 선수(현주엽)가 있으니까 (어차피 주전으로 많이 못 뛸 테니) 군대부터 갔다 오라고 한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 입장에선 저를 배려해주신 거였어요. 근데 저는 어린 마음에 ‘형이랑 경쟁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했어요. 회사랑 싸우다가 결국 상무도 못 갔죠.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 중 하나예요.”제대 후 오리온, 전자랜드로 소속팀을 옮긴 그는 10여 년간 활동했지만, 선수로서 큰 기회를 받지 못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결국 2011~2012 시즌을 마치고 농구 유니폼을 벗습니다. 연습 중에 입은 발목 부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습니다. ―은퇴를 해야 했을 정도로 부상이 심했나요? “다친 직후엔 걷지도 못했어요. 발목이 꺾이면서 빨래가 짜이듯이 근육이 말리면서 정강이뼈도 부러진 거예요. 허벅지까지 통 깁스를 했죠. 수술 받고도 입원 생활을 한참 했어요. 큰 부상이었어요. 아직까지 발목에 철심이 박혀 있을 정도니까요.” ―농구에 20년 넘게 투자했는데 그만둘 때 좌절이 컸을 것 같아요. “괴로워할 여유도 없었어요. 꾸준히 주전으로 뛰다가 그런 일을 겪었으면 심하게 아쉬웠을 텐데 나중엔 벤치 생활을 오래 했거든요. 선수로 많이 못 뛸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 타이밍에 다치게 된거였어요.”은퇴했을 때 그의 나이는 30대 초반, 누군가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어린 나이에 시작한 운동이었기에 끝도 빨리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습니다. 20년 넘게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농구에 투자했고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입니다. ―심정이 복잡하셨을 텐데 재활치료는 어떻게 하셨나요. “선수는 못하더라도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어야 하잖아요. 그땐 걷지도 못했으니까 솔직히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어요. 오직 재활에만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선수를 그만해야겠다고 결심한 후부터는 어떤 일을 하면서 살면 좋을지 고민도 많이 했어요.”―상황이 좋지 않으면 비관이나 자기연민에 빠지는 사람도 많잖아요. “농구를 하면서 배웠던 것 중 하나가 힘든 상황을 버틸 수 있는 인내심이에요. 선수생활을 하다보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과 압박을 많이 받아요. 버티고 참아낸 경험 덕분에 (부상 후 재활치료할 때) ‘이 정도는 견딜 수 있겠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운동선수는 은퇴하면 주로 감독이나 코치 등 지도자의 길을 걷습니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됩니다. 지인 추천으로 영화에서 작은 역할을 맡은 것을 계기로 2013년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에 출연합니다. 배우로 살게 된 겁니다.―농구선수에서 배우라니…. 너무 급격한 변화가 아닌가요. “농구선수 출신 배우는 제가 처음이긴 하죠. 선수할 때부터 춤도 잘 췄고.(웃음) 끼가 있었어선지 선수 시절부터 엔터테인먼트 쪽에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많았어요. 그 중 한 지인이 제가 은퇴하고 쉬고 있을 때 ‘영화 한 번 해보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감독님이 저 같은 이미지의 캐릭터를 딱 원한다면서요.”―그게 어떤 영화였나요? “연습을 엄청 했는데 영화가 준비 과정에 엎어졌어요. 그 영화를 찍으면서 뮤지컬 배우 김승대 씨를 알게 됐는데 그 친구가 뮤지컬 해볼 생각 없냐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뮤지컬은 자신 없었어요. 연기는 물론이고 노래도 잘해야 하잖아요. 제가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서 거절했는데 한 번만 만나보라고 하더라고요. 미팅인줄 알고 나갔는데 알고 보니 오디션 자리였어요.”―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오디션을 보신 거네요. “문 열고 들어가자마자 음악 감독님이 박장대소를 하셨어요. 왜 웃으신건지 궁금해서 나중에 여쭤봤거든요. 캐릭터에 너무 딱 맞는 사람이 와서 너무 놀랐다고 하시더라고요. 연기력이나 노래 실력보다는 이미지가 맞아서 캐스팅이 됐던 거죠.”‘몬테크리스토’ 이후 그는 매체 연기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2m가 넘는 장신에 독보적인 비주얼을 가진 그는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그의 필모그래피는 화려해졌지만 비슷비슷한 배역이 주를 이룹니다. 건달, 깡패, 괴물…. 독보적 이미지가 ‘배우 박광재’에겐 기회인 동시에 한계로 작용한 겁니다.―연기자는 이미지만으로 살아남긴 어렵잖아요. 배우로서 힘든 때도 있으셨나요? “드라마 촬영 때였어요. 감독님이 대본보다는 애드리브를 좋아하는 분이었는데 대사가 끝나도 오케이 사인을 안 주시더라고요. 저로서는 (씬이) 끝났는데 계속 하라니 당황해서 땀이 엄청 났어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겨울 장면을 찍었거든요. 옷에 땀이 엄청 젖다보니 저 때문에 재촬영을 하게 됐어요. 그때 정말 많이 위축됐어요. ‘옷 얇게 입고 왔냐’는 스태프들이 건네는 말들도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렸고요. 최대한 사람들 안 마주치려고 하고 밥도 차 안에서 혼자 먹었어요.”―드라마는 중간에 하차할 수도 없잖아요. 어떻게 버티셨나요? “사전에 대본 공부를 많이 했어요. 감독님이 애드리브를 좋아하시니까 (대본에 없는) 말이나 행동을 미리 준비해갔죠. 12부작 드라마였는데 8부작 촬영할 때쯤 감독님이 ‘진작 그렇게 하지’라고 하셨어요. 칭찬은 받았지만 기분이 좋기보다는 계속 힘들었어요.(웃음) 그래도 그만두고 싶진 않았어요. 뭘 좀 제대로 해보고 나서 안 되면 그만둬야지, 지금 멈추는 건 스스로 용납이 안 될 것 같더라고요.”―비슷한 역할 제안만 자꾸 들어오니, 연기자로서 고민이 되실 것 같아요. “양날의 검이죠. 제가 독보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에 많은 감독님이 찾아주시지만 할 수 있는 배역은 한정적인 거죠. 하지만 감사한 기회로 생각하고 있어요. 비슷한 역할만 들어오는 이유 중엔 제가 연기력이 부족한 탓도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선생님한테 연기를 배우면서 꾸준히 스펙트럼을 넓히려고 노력 중입니다.”‘괴물 캐릭터’에 갇히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은 천천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그가 작품에서 맡은 배역을 보면 점점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스펙트럼도 넓어졌습니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에서는 청부살인업체 소속 킬러 광만이를 연기했고 8월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될 시리즈 ‘무빙’에서는 북한군 역을 맡았습니다. ―배우로서 꿈은 무엇인가요? “솔직히 말해 저는 주연은 못 할 것 같아요. 대신 임팩트 있는 조연을 해보고 싶어요. 장르는 코미디나 로맨틱 코미디 그리고 격정 멜로도! 영화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님을 정말 좋아해요. 감독님이 불러주신다면 노 개런티로 출연할 의향도 있습니다.(웃음)”―배우로 잘 안 풀린다고 느끼실 때 농구선수를 그만둔 걸 후회하진 않으시나요? “얼마 전 고등학교 농구부 모임이 있었어요. 대학 때까지 선수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은 친구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어떤 형은 사업이 잘 되어서 대표가 되고 또 저는 배우를 하고 있잖아요. 농구로 시작했다고 해서 농구로 성공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죠. 그럼에도 지금의 일을 할 때는 최선을 다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아직 배우로 성공한 건 아니지만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버틸 수 있는 힘은 선수 시절 누구보다 열심히 운동했던 경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저라는 사람의 원동력은 그때 만들어진 거예요.“인터뷰 말미 그는 영화 ‘길복순’에 함께 출연한 배우 설경구가 건넨 조언을 소개했습니다. 배우 인생의 좌우명처럼 생각하게 됐다는 말인데요. 그가 배우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을 당시, 농구 해설 제의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농구선수’라는 이미지가 굳어질까 우려가 컸던 당시의 그는 그 제의를 거절하려 했다고 합니다. “설경구 선배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의 차별점이 농구선수를 하다가 배우가 됐다는 건데 그걸 굳이 숨길 이유가 있냐. 배우뿐 아니라 농구 해설도 같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장점이냐’고 하시더라고요. 그 후부턴 오디션 가서도 이렇게 자기 소개해요. ‘안녕하세요. 농구선수 하다가 지금은 배우를 하고 있는 박광재입니다.’라고요.”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배우 박재민(40)에게는 열 개의 직업을 가졌다는 의미의 ‘십잡스’,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는 뜻의 ‘인간 나이키’ ‘프로챌린저’라는 별명이 붙습니다. 헤르미온느처럼 시간을 자유자재로 쓴다는 뜻에서 ‘재르미온느’라고도 불립니다. 정말 그에게만 하루에 48시간이 주어지는 걸까요? 그는 비보이, 배우, MC 등 방송인으로 활약하면서 스노보드 선수, 스노보드 해설위원, 스노보드 국제심판, 3X3농구 국내심판, 번역가라는 다수의 ‘부캐’를 만들어왔습니다. 현재 정화예술대 실용댄스전공 전임교수이자 ‘육아대디’입니다. 학사, 석사를 마친 서울대에서 글로벌스포츠매니지먼트학 박사과정도 밟는 중입니다. 얼마 전 생방송에서 코피가 났지만 의연하게 진행을 이어가는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끼를 다방면에서 뿜어내는 ‘재능 금수저’일까요? 놀랍게도 그는 “어렸을 때 되고 싶은 게 없었다”고 말합니다. 무엇 하나 특출난 게 없는 ‘그림자’같은 존재, 집중력이 떨어지는 ‘산만한 아이’. 박재민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었습니다. ‘되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것’은 많았습니다. 하루는 비보잉 연습실, 다음날은 농구코트에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도서관, 또 다른 날은 스키장이었습니다.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현장에 뛰어들어 직접 몸으로 부딪쳐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여러 곳에 기웃거렸지만 전부 애매했습니다. 그럼에도 중간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딱 한 가지입니다. “재밌으니까.” 나에게 재밌는 건 세상이 뭐라 하든 꾸준히 밀고나갔습니다. “하나만 진득하게 해”라는 세상의 비아냥에 꺾이지 않았던 ‘지구력’이 자신의 가장 큰 재능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2회 만에 하차한 드라마 ‘공주의 남자’(2011년) 속 조연은 11년 뒤 728만 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 ‘한산’ 속 신스틸러를 연기했고, 초등학생도 출전한 스노보드 대회에서 170명 중 170등을 한 꼴찌는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해설위원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방송과 라디오 고정출연, 대학 강의, 대학원 박사과정, 그리고 ‘딸 바보’ 아빠로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그를 지난달 24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만났습니다. 지구력을 바탕으로 실패를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만들어온 박재민의 삶()과, 입학과 입사라는 목표를 이루고 꿈을 잃은 2말3초들이 삶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방법()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서울대 출신의 방송인이자 운동선수, 스포츠 해설위원, 번역가까지. ‘다재다능’의 대명사와도 같은 박재민은 어렸을 때 잘 하는 것이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수업시간에 ‘꿈’을 쓰라고 하면 다른 친구들처럼 의사, 판사, 대통령을 끄적였지만 정작 그는 속으로 ‘되고 싶은 게 없는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춤출 때 가장 행복했고, 운동하며 땀 흘리는 순간 살아있다고 느꼈던 박재민은 남들이 뭐라고 하든 좋아하는 것을 계속 했습니다. ―지난해 9월 이순재 선생님이 예술감독을 맡으신 연극 ‘위선자 따르뛰프’ 주연으로 연극 무대에 서셨어요. 근황이 궁금해요. 요즘도 십잡스로 바쁘게 살고 계신가요?평일에는 아침 생방송이 있어서 오전 5시에 일어나요. 7시부터 9시까지 방송을 하고, 끝나면 집에 와서 딸 등원을 시켜요. 화, 목은 정화예술대 교수로 저녁까지 강의를 하고, 수요일은 서울대 박사과정 학생으로 학교에서 수업을 들어요. 여러 일을 하지만 요즘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육아에요. 저는 ‘십잡스’로 30대를 정말 치열하게 살았고, 다양한 경험들을 했어요. 30대는 욕심이 많았던 시기라면, 40대에 접어든 지금은 모든 선택의 기준이 아이가 됐어요. 더 이상 ‘나’라는 기준은 제 삶에서 중요하지 않아요. 나를 내려놓게 됐어요. 오롯이 아이를 위해 하루 24시간을 다 쓰는 삶이 보람차고 의미 있고 행복하다고 느껴요. ―육아까지 열정적으로 하시네요. 뭐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사기캐’ 다워요. 어렸을 때부터 많은 재능을 타고 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출발선이 다르지 않았을까?’ 혹은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다양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초, 중, 고등학교를 통틀어서 저는 단 한 번도 특출난 재능으로 튀는 학생이 아니었어요. 특별하게 잘하는 것도 없고 성적도 중위권인 ‘그림자’같은 존재였어요. ―재민님처럼 끼 많은 사람이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니, 잘 상상이 안 가는데요. 학창시절 어떤 학생이었나요? 되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건 많았어요. 관심사가 정말 다양했어요. ADHD로 보일 정도로요. 대신 관심만 갖는 게 아니라 현장으로 뛰어드는 성격이었어요. 고등학생 때 비보잉에 관심이 생기자마자 프로팀을 무작정 찾아가서 연습실에서 살았어요. 스노보드가 너무 좋아서 선수 등록을 하고 시합을 나갔고요. 재능을 타고났다기보다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 주변을 항상 기웃거리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산만하다는 얘길 많이 들었죠. 스키장, 비보잉 연습실, 체육관, 도서관을 드나들었으니까요. ―애매한 재능은 취미로 삼기 마련인데, 재민님은 어떻게 업으로 꾸준히 키우셨나요? 재밌으니까요. 재미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진짜 좋아한다면 잘 못해도 계속 하잖아요. 게임에서 레벨이 가장 낮은 분들도 너무 재밌어서 밤을 새워 하잖아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 재밌어 하는 것은 실력과 무관하게 추진력과 동기부여를 얻게 되는 것 같아요.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혼내시진 않았나요? 부모님이 굉장히 엄하셨는데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엄하셨을지언정 삶의 성과에 대해서는 엄하지 않으셨어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어떤 가치관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굉장히 많이 혼내셨어요. 예의 없는 행동을 한다? 가차 없습니다. 그런데 성적에 대해 단 한 번도 혼내신 적이 없어요. ‘학원가라’ ‘과외 받아라’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없고요. 제 관심사가 다양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을 하면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애매한 재능을 쫓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10대를 쏟아 부었던 비보이는 어깨 탈골로 계속하기 어려워졌고, 학창시절 코치가 프로선수를 제안했을 정도로 농구 소질도 뛰어났지만 작은 키, 부모님의 만류로 농구선수의 꿈도 접었습니다. 방송인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2012년 ‘짝 스타 애정촌’ 출연 이후 한 오보로 소속사와 계약해지를 당하고 출연하던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는 아픔도 찾아왔습니다. 고통의 순간, 그가 늘 떠올렸던 한 문장이 있습니다. ‘실패를 결과로 만들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멈추면 실패는 결과가 되지만 앞으로 나아가면 실패는 과정이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애매한 재능들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실패의 쓴맛도 보셨어요. 프로농구 선수를 꿈꿨지만 작은 키와 부모님의 반대로 좌절됐고, 어깨 탈골로 비보잉도 지속하기 어려워졌어요. 뜻대로 안됐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어요. ‘실패가 결과가 되게 하지 말자’. 부모님이 운동선수는 힘든 길이라며 말리셨지만 그게 ‘농구 포기’라는 결과가 되면 안 되죠. ‘농구선수가 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뭘까?’를 생각했어요. 농구를 놓지 않았기에 결국 대학에서 농구선수를 했어요. 어떻게든 대안을 찾아내서 결과물을 기어이 손에 넣고 마는 성격이에요. 제 뜻대로 안되는 것에 타협이 안 돼요.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죠. 남들은 승부욕이라고 하는데 전 지구력이라고 생각해요. 승부욕의 출처는 상대방이지만 지구력의 출처는 ‘나’에요. 남을 이기는 게 아니라, 내가 목표한 바를 이루는 것이 제겐 가장 중요해요.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그 실패를 과정으로 만드는 지구력은 어떻게 키우신 건가요? 저는 다 잘해본 적이 없어요. 비보이도 소속팀은 유명했지만 제 실력은 별로였고, 농구도 동네에서나 잘했고, 스노보드도 잘 하는 선수가 아니었고 공부도 중상위권이었거든요.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압박을 평생 받잖아요. 결과물이 중요한 사회에서 저는 좋은 성적을 내는 차분한 기질이 없었거든요. 뭔가 열심히 하고 싶고 욕구는 넘치는데 내 존재 의미를 찾을 수가 없는 거에요. 어디를 가도 주목받지 못하는 중간자이고, 산만하다는 얘길 들었죠. 그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보이고 싶었어요. 애매한 것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다보니 못해도 끈질기게 밀어붙이는 성향이 강해진 거죠. ‘2등들이 다 나가떨어져도 나는 끝까지 버텨보지 뭐’, 이렇게 생각했어요. 버티는 놈이 승자에요.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실패를 실패로 두지 않고 반드시 과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일 수도 있잖아요.압박이라기보다 제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요. ‘짝 스타 애정촌’ 출연 이후 한 오보로 인해 크게 상처받고, 넘어졌고, 멈췄어요. 이제와 돌이켜 보면 ‘별거 아니었구나, 극복 가능한 거였구나’라는 생각을 하죠. 다 내려놓을 수도 있었지만 당시 다이빙에 도전하면서 한계를 넘으려 했고, 절에 들어가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했어요. 그때 깨달은 것은 ‘멈추면 실패가 결과가 되지만 꾸준히 계속 가면 과정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거에요.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를 하더라도 내가 계속해서 나아간다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요. ―스트레스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아침에 명상을 해요. 샤워를 하면서 ‘나는 잘하고 있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행복하다’ 이 세 문장을 계속 되뇌어요. 말만 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떠올려야 돼요. 웃고 있는 내 모습, 건강한 내 모습, 아이랑 행복한 내 모습. 이걸 머리에 한 번만 떠올리면 하루의 방향이 달라져요.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설정해놓으면 어떻게든 경로를 재탐지해서 목적지로 가잖아요. 아침에 ‘피곤하고 짜증나’로 시작하면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목적지는 ‘짜증’인거에요. 실력은 애매하지만 나의 마음이 동하는 것을 꾸준히 쫓아온 박재민. 그는 대입과 취업의 문턱을 넘고 목표를 상실한 2말3초(20대 후반~30대 초반)에게 나에게 재밌는 ‘딴 짓’을 찾으라고 제안합니다. 당장 해야 하는 일을 제쳐둘 정도의 ‘딴 짓’이라면, 그게 바로 나의 적성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당장의 직업이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직업 하나라는 것으로 다 표현하기엔 우리의 삶이 너무 아름답잖아요.” ―한국의 청년들은 대부분 명문대 입학, 대기업 취업을 향해 달려가잖아요. 이후 삶의 목표가 사라졌다는 2말3초들이 정말 많아요. 새로운 적성을 찾는 방법은 뭘까요? 딴 짓을 많이 하세요. 딴 짓은 재밌어서 하는 거에요.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더 하고 싶고, 관심이 가는 일이 있다면 그게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거에요. 그 딴 짓을 희소성 있게 만들어야 돼요. 저는 스노보드라는 딴 짓이 좋아서 스노보드 심판 자격증을 땄고, 희소성을 살려서 해설위원을 했어요. 배우 중에 스노보드 심판 자격증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제가 일궈 놓은 것과 제 딴 짓을 연결시켜서 희소성을 개발하면 업이 될 수도 있어요. ―보통 꿈이나 목표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직업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온 재민님에게 꿈이란 무엇인가요? 세상이 잘못된 정보를 주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꿈이에요. 꿈이라는 게 이룰 수 있는 걸까요? 꿈은 내가 가고자 하는 이상향, 이루고자 하는 헛된 상상이에요. 그런데 강연을 가서 학생들에게 “넌 꿈이 뭐야?”라고 물으면 “의사요, 과학자요, 대통령이요”라고 답해요. ‘꿈=직업’이 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다보니 직업을 가진 이후의 삶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요. 꿈을 재설정하는 게 2말 3초분들에게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그 삶을 살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 생각해야 해요. ―한 가지 직업만 더 갖는다면 뭘 고르시겠어요? 전 더 이상 갖고 싶은 직업은 없어요. 꿈이 있다면 좋은 아빠가 되는 것, 그리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에요. 가족을 떠올렸을 때 아이들이 따뜻하다, 돌아가고 싶다, 행복하다고 느꼈으면 좋겠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사라지고 난다면 인류 역사에 어떤 의미가 남겠어요? 별거 아닌 것에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가 없어요. 그럼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뭔가? 우리 가족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 하는 거죠. 제게 직업은 가족을 지키기 위한 공격수단이자 방어수단이에요. ―삶의 목표를 잃어 힘든 이들에게 한 마디 해 주신다면?“무슨 일 하는 사람이야?”라는 말, 정말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직업 하나로 표현하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아름다운 것 같아요. 현대사회에서 직업이라는 게 너무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내 삶의 전부 다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 삶은 그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다채로워요. 항상 내 본질이 무엇인지, 내가 누군지를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아이유는 나이를 기록하는 가수입니다. 얄궂었던 20대 초반에 낸 ‘스물셋’, ‘이제 조금 나를 알 것’ 같았던 스물 다섯의 ‘팔레트’, 28살을 기록한 ‘에잇’…. 치열하게 달려온 20대를 정리하는 의미의 곡 ‘라일락’은 아이유에게 더욱 특별했을 것입니다. 이 곡은 발매 직후 음원차트 1위를 석권했고, 미국 빌보드가 정한 ‘2021년 최고의 K-POP 노래’ 3위, 영국 음악 평론지 NME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K-POP 노래’ 1위에 선정됐습니다. 라일락의 탑라인(멜로디)을 만든 이는 화성학 공부도 한 적 없는 의사 출신 작곡가 닥터 조(조민형·37)입니다. 그는 의대생 시절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달려가 밤을 새워 곡을 만들었습니다. 조 씨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데모곡(샘플 음원)을 본 방시혁 하이브 의장(당시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대표)은 그에게 “신인에게서 보기 드문 신선함이 있다”며 그의 가능성을 눈 여겨 봤습니다. BTS를 키운 제작자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조 씨는 “병원 취업해서 남들처럼 평범한 인생 살아라”는 부모님 걱정을 듣던 골칫거리에서, 누적 스트리밍 1억 회를 넘은 글로벌 히트곡 라일락의 작곡가가 됐습니다. 라일락을 하루아침에 꽃피운 건 아닙니다. 원더걸스 유빈의 솔로앨범부터 트와이스, 구구단, 에이프릴, 마마무, 에이핑크, 있지, 엔믹스까지 그와 작업한 가수들의 화려한 라인업 뒤에는 좌절의 순간들이 녹아 있습니다. ‘듣보(듣지도 보지도 못한) 작곡가가 우리 애들(가수) 앞길 막는다’ ‘부모님을 해코지하겠다’ 등 악플 세례에 고소를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99곡의 미발매곡을 지나 어렵사리 세상에 나온 100번째 곡이 혹평을 받기도, 포기하려던 순간 동경하던 가수의 타이틀 곡을 만들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 삶을 살아온 그는 “과정에는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는 초연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지난달 16일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의사이자 작곡가, 현재는 싱어송라이터 ‘루이드’의 프로듀서로도 활동하고 있는 조 씨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사사건건 극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그가 숱한 상처를 딛고 라일락을 꽃피우게 되기까지의 과정 (https://youtu.be/jb2PjrtmKcA)과, 아이돌 히트송 작곡 비결(https://youtu.be/ix4ZdK8N0Zs)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닥터 조는 중학교 시절 작곡가를 꿈꾸는 친구를 보며 음악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모범생이었던 그는 의료봉사를 다니는 의사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에 진학합니다. 하지만 유년시절의 꿈이 그의 내면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학업은 뒷전이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청력소실이 올 정도로 작곡에만 몰두했습니다. 의사와 작곡가를 고민하던 중, 방시혁 당시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대표의 한 마디가 그를 흔들었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선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고려대 의대에 진학한 모범생이셨어요. 음악을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중학교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지만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한 건 의대 진학 후 예과 때부터예요. 작곡이 너무 재밌어서 지금이라도 시작을 안 하면 죽기 전에 후회할 것 같았어요. 낙원상가에서 피아노, 스피커 등 작곡 장비를 12만 원 들여 사서 들쳐 메고 집에 왔어요. 값싼 장비들로 수업이 끝나면 집에서 밤을 새우며 데모곡을 만들었어요. 음악을 너무 많이 들어서 고음 음역대가 잘 들리지 않는 청력소실이 왔을 정도예요. 음악을 제대로 공부해본 적은 없어요. 지금도 화성학을 전혀 모르고 코드(화음)도 못 읽어요. 감으로 하는 거죠. ―의사와 작곡가를 고민하다가 방시혁 하이브 의장 때문에 의사를 그만 두셨다고요? 당시 방시혁 의장님이 JYP를 나와 빅히트엔터테인먼트를 차렸을 때였어요. 방 의장님이 작곡가 지망생들을 위한 온라인 카페 ‘퓨처 프로듀서’를 만드셨어요. 학창시절 우상에게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은 기회잖아요. 카페에 10개 씩 데모곡을 올렸는데 방 의장님이 그걸 보시고 ‘신인답지 않은 가능성이 보인다’는 댓글을 달아 주셨어요. 그게 인연이 돼서 실제로 뵀는데, 의사와 작곡가를 고민하는 저에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긴 힘들다. 두 가지 중 더 간절히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 때 결단이 섰어요. ―의사가 아닌 작곡가의 길을 걷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대는 없었나요?부모님은 음악으로 돈을 번다는 생각을 못 하셨어요. 저에게 “왜 그렇게 음악에 목을 매냐. 빨리 의사로 취직해서 돈 벌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라”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제가 남의 말을 듣긴 하지만 참고만 하고, 결국 제가 하고 싶은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에요. (웃음) ―발굴은 방시혁 의장님한테 됐지만 계약은 JYP와 하셨더라고요.제가 중학생 때부터 JYP 음악을 정말 좋아했어요. 지오디, 박지윤, 별, 비의 음악을 들으며 자랐죠. 군의관 시절 퇴근 후 밤새 작곡한 데모곡을 무작정 JYP 이메일로 보내기도 하고, 신인개발팀 내선번호로 전화도 걸었어요. 어느 날 “2AM이라는 그룹이 곧 데뷔하는데 이 곡으로 연습을 시켜 보겠다”고 답이 왔죠. 제 곡이 앨범에 실리진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박진영 PD님도 알게 됐고, JYP와 퍼블리싱 계약도 맺게 됐어요. JYP와 계약을 맺은 뒤 그의 커리어는 탄탄대로였습니다. 2AM, 갓세븐, 미스에이의 멤버 페이, 트와이스 등 JYP를 대표하는 인기 아이돌 그룹과 작업하며 작곡가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무렵이었습니다. 인기 걸그룹의 타이틀곡 작사와 작곡, 동경하던 JYP 소속 가수의 타이틀곡 프로듀싱까지. 작곡가라면 누구나 꿈꿨을 기회가 한 순간에 위기로 돌변한 순간들이 잇따랐습니다. 조 씨는 그 때 “끝까지 (잘 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 나태함이 아닙니다. 과정에는 최선을 다하되, 자신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결과에는 집착하지 않는 초연함을 기른 것입니다. ―방시혁, 박진영 등 당대 최고 프로듀서에게 인정받으면서 탄탄대로를 걸으셨어요. 작곡가로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에요? 걸그룹 구구단의 타이틀곡 ‘나 같은 애’의 작사, 작곡을 맡았을 때였어요. 그 때 “왜 저런 듣보(듣지도 보지도 못한) 작곡가를 붙여서 가수 앞길을 막느냐”부터 시작해서 “부모님을 해코지하겠다”는 내용까지 음원 사이트 댓글창을 도배했어요.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악플러들을 고소할까 고민도 했는데, 선배 작곡가분들이 “고소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더 피폐해 질 거다”라며 말리셨어요. 걸그룹 타이틀곡을 맡았다는 게 작곡가로서는 중요한 발돋움이기 때문에 그 시간을 부정적으로 낭비하지 말고, 좋은 기회로 여기자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원더걸스 출신 유빈의 첫 솔로앨범 타이틀곡 ‘숙녀’의 작사, 작곡, 편곡까지 맡으셨는데 그 때도 심리적으로 힘드셨다고요. 중학교 때부터 JYP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작곡가로서의 첫 목표가 JYP에서 타이틀곡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유빈의 ‘숙녀’는 그 목표를 이룬 곡이에요. 제가 작사, 작곡, 편곡까지 맡았거든요.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행복했어요. 그런데 예상치 못한 ‘왜색논란’이 일각에서 제기됐어요. 숙녀는 시티팝 장르의 곡이라 시티팝이 태동한 일본의 1970~1980년대 버블 시대의 분위기가 묻어 있어요. 다만 일본의 당시 분위기를 재연한 것이지, 찬양한 것은 아니거든요. 왜색논란으로 노력들이 묻히는 것 같아 씁쓸했죠. ―작곡가님의 대표곡 ‘라일락’은 어떻게 만들게 되셨나요? 2019년 말에 전세사기를 당했어요. 신축빌라에 2년 전세로 들어갔는데 계약 직후 집주인이 바뀌어있고, 저와 계약한 집주인의 연락도 두절된 거에요. 결국 보증금을 돌려받긴 했지만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고, 수입 없이 대출금 이자를 갚으면서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졌어요. 돈을 벌기 위해 한방병원을 나가야 했죠. 물 마실 시간도 없이 하루에 환자를 100명 넘게 진료했어요. 그 시기에 ‘라일락’을 작곡했어요.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모든 걸 쏟아 부었어요. 병원 퇴근 시간에 맞춰서 저녁식사를 주문해놓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빨리 밥을 먹은 뒤에 새벽 4시까지 곡을 만들었어요. 오전 9시가 되면 병원으로 출근하고요. 그렇게 만든 곡이 타이틀곡이 되고, 음원차트 1위에 오른 과정이 전부 비현실적이었어요. ―‘나 같은 애’의 악플, ‘숙녀’의 왜색논란, 전세사기까지…. 삶의 고비들이 많았는데 그 순간을 이겨내고 ‘라일락’을 만드신 거네요. 멘탈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저는 멘탈이 강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끝까지 믿지 않아요. ‘이 곡은 대박이 날 거야’라고 기대하면 잘 안 되더라고요. 반대로 ‘나는 안 된다’ ‘이게 성공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거꾸로 생각하니 결과가 잘 안 나와도 실망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대신 과정에는 후회가 남지 않게 최선을 다해요. 결과에는 초연한 마음을 가지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많이 걸어요. ―기대 안하려 해도 기대하게 되고, 결과가 안 좋으면 낙담하게 되잖아요. 결과에 초연한 마음은 어떻게 갖게 되신 건가요? 제 삶이 사사건건 극적이었어요. 의대 시절 혈압이 200 가까이 올라서 죽을 뻔한 적도 있고, 전세사기도 당했고요. 작곡가가 되고 나서도 힘들게 발매한 타이틀곡이 욕을 먹거나, 최선을 다한 곡이 미발매되는 과정을 지나면서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안 풀릴 때는 안 풀리는구나’를 배웠어요. 단단해졌다고 생각하는데도 흔들리는 순간, 당연히 오죠. 타고난 성향이 계획적이고 생각이 많아서 불안한 순간이 오면 잠도 못자고 ‘생각의 버튼’을 끌 수가 없어요. 그런 나 자신을 탓하지 않아야 해요. 끝없이 생각하고 걱정하는 나 자신을 탓하는 순간 더 힘들어져요. 내 편은 결국 나밖에 없어더라고요. ―작곡가 지망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끝이 없는 노력은 없습니다. 언젠가 끝이 있으니 기회가 되고 에너지가 있을 때 후회가 없을 정도로 노력하세요. 언제까지나 힘들지는 않을 거에요. 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반려동물 인구가 1500만 명을 넘어선 시대. 어떤 이들에게 동물은 가족과 다름없는 존재가 됐습니다. 말 못하는 동물의 행동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유튜브에는 ‘개가 짖는 이유’ ‘고양이가 좋아하는 영상’ 같은 영상이 많이 올라옵니다. TV엔 ‘개통령’이라 불리는 훈련사가 나와 동물의 행동을 분석하고 교정해주는 콘텐츠가 범람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도 ‘1세대 개통령’이 있었습니다. 강형욱 씨처럼 텔레비전만 틀면 나오던 분이었죠. 근데 훈련사는 아닙니다. 수의사나 동물행동학자도 아닙니다. 23년째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치과의사 박창진 원장(53)입니다.포털 사이트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그간 거쳤던 수많은 직함이 쏟아집니다. ‘한국반려동물 봉사단 대표’ ‘동물행동연구 협회원’ ‘동물보조치료협회 대표’ ‘사람과 동물의 올바른 유대관계를 생각하는 모임인 한국 HAB협회 대표’…. 본업 치과의사보다 반려동물에 진심이었던 그는 “멋진 풍채의 독일산 세퍼트건 족보를 알 수 없는 동네 바둑이건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훈련만 거치면 모든 개는 ‘개 이상의 개’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지난달 27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병원에서 반려견 행동 교정 전문가 그리고 28년째 치과의사로 살고 있는 ‘복수자’ 박창진 원장을 만났습니다. ‘원조 개통령’이 알려주는 ‘개 이상의 개’로 키울 수 있는 강아지 훈련법()과 평생 치과 안 가도 되는 치아 관리법()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가 치과의사가 된 건 1995년, 반려견 행동 교정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2000년대 초였습니다. 수의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훈련사 일을 전문적으로 배우지도 않았지만 애견인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시절 그는 언제나 개와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치와와부터 세퍼트, 진돗개, 요즘말로 ‘시고르 자브종’이라 불리는 잡종견도요.―자연스럽게 개와 가까워지신 거군요. “어렸을 때부터 집에 항상 개가 있었어요. 지금도 키우고요. 아버지께서 동물을 되게 좋아하셨죠. 집에서 키우던 개가 죽기도 하고 다른집 개한테 물려보기도 했어요. 개와 관련된 다양한 경험을 두루 했어요.”―개를 키우는 걸 넘어서 ‘행동 교정’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2002년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개최됐어요. 국제 행사가 열리면서 개를 키우는 문화도 바뀌기 시작했죠. 보신탕 문화는 지하로 숨었고 마당에서 키우던 개를 실내로 들여오는 문화가 생겼어요. 반려견 문화가 유행처럼 번지다보니 갈등과 분열도 많았죠. (개를 키울)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를 집에 들였다, 도저히 못 키우겠다며 버리는 경우도 많았고요. 그때 유기견이 대폭 늘었습니다.”―신구(新舊) 문화가 섞였던 혼돈의 시기였네요 “한쪽에선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다른 쪽에선 ‘먹는 개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서로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상황이 안타까웠죠. 전 어려서부터 개를 키워봤잖아요. 집에서 개를 키우면 정말 좋거든요. 개나 고양이를 안고 있으면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병이 치유되는 효과도 있어요. 개와 사람들 모두 행복하고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텐데…. 그 무렵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사람과 동물이 더불어 행복해지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그는 ‘동물 보조 치료’를 시작하게 됩니다. ‘동물 보조 치료’는 개,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으면 사람의 마음이 진정되고 편안해지는 것을 이용해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입니다. ―개와 고양이가 의사 역할을 하는 거군요.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일반 골든 리트리버가 맹인 안내견이 되려면 오랫동안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요. 근데 전 트레이닝(training·훈련)보다 에듀케이션(education·교육)을 하자고 이야기했어요. 훈련과 교육은 접근부터 다르거든요.”―훈련과 교육,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훈련은 같은 행동을 반복을 통해 연습시키는 거예요. 교육은 개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행동을 결정하게 만드는 거죠. 특정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선 심리를 알아야 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동물심리’ ‘동물행동학’을 더욱 공부하게 됐습니다.”그는 개의 행동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 인간의 심리에 관한 연구서적을 탐독했다고 합니다. ‘스키너의 상자’로 유명한 미국의 심리학자 버러스 프레더릭 스키너(1904~1990)부터 비강압적 훈련방법을 고안해낸 동물행동학자 카렌 프라이어까지. 그는 “개와 인간은 똑같지 않지만 같은 포유류고 뇌에는 전두엽이 있다”며 “사람으로 치면 3~4살 정도의 지능이 있는 셈”이라고 말했습니다.―3~4살짜리 어린 아이를 다루듯 개를 대해야 하나요. “어린 아이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잖아요. 개도 마찬가지예요. 때리는 건 물론이고 눈을 부라리는 것도 안돼요. 폭력, 강압으로 개를 훈련하면 일시적으로 말을 들을 순 있어요. 근데 그건 개가 상황을 모면하려고 주인 눈치를 보는 거예요. 교문 앞에 몽둥이를 들고 서 있는 선생님과 선생님을 피해서 나쁜 짓을 하려는 학생 같이 되는 거죠.”―감시자와 피감시자의 관계가 되는 거군요. “맞아요. 그런 훈련을 지속하면 주인과 개 사이에 유대가 전혀 형성되지 않아요. 주인을 좋아하고 존경해서 말을 잘 듣게 해야 하잖아요. 게다가 말 못하는 동물이잖아요.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려고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 정도로 노력하지 않는 거예요.”그는 일부 훈련사들이 행하는 바디 블로킹(강아지 앞을 가로막는 훈련법)이나 목줄 잡아당기기 같은 ‘강제적 훈련법’은 최소화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개가 나쁜 행동을 했을 때는 ‘무반응’으로 대응하고 나쁜 행동을 멈추면 보상을 해주는 긍정적 강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겁니다.―개가 나쁜 행동을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기다려야죠.(웃음) 참교육엔 인내가 필요합니다. 자식 교육도 그렇잖아요. 강압적 훈련은 반드시 한계에 봉착합니다. 채찍질하는 감시자(주인)가 없으면 부정적 행동이 다시 나와 버려요. 개가 나쁜 행동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확실하고 일관성 있는 보상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제대로 된 교육을 위해선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나요. “하루에 5분도 좋고 10분도 좋아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키우는 동물을) 관찰해보세요. 쟤는 왜 저기 가서 짖을까, 마루를 빙글빙글 도는 이유는 뭘까. 동물 입장에서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 거죠. 참을성 있는 관찰이 교육의 출발입니다.” 그는 본업인 치과의사로 일할 때도 ‘관찰’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환자의 구강 내부가 아니라 환자의 행동이나 생활습관을 관찰하는 겁니다.―정신의학과도 아닌데 환자의 행동이나 생활습관을 관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걸 알아야 왜 충치가 생기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웃음) 우리가 보통 의료인을 영어로 표현하면 헬스 케어 프로페셔널(health care professional)이라고 해요. 헬스, 즉 건강을 케어하는 전문가라는 뜻이죠. 고장 난 치아만 치료하는 게 아니라 치과치료 없이도 건치를 유지할 수 있게 관리해주는 역할입니다. 지금의 의료 시스템에선 치료하는 의사만 돈을 벌 수 있어요.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사에게도 보상이 갈 수 있게 바뀔 필요가 있죠.”박창진 원장은 개의 심리를 분석하고 행동을 교정했던 것처럼 어린이들이라면 으레 갖는 ‘치과 공포증’ ‘병원 공포증’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관찰해왔다고 합니다. 어린 환자들은 병원, 특히 치과에 가는 걸 무서워합니다. 트라우마가 이어져서 어른이 된 후에도 치과만은 가기 싫다며 충치를 묵혀두는 사람도 종종 있습니다. 그는 “치과공포증은 다름 아닌 부모에게서 시작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말했습니다.―치과공포증이 부모에게서 시작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부모님이 아이들 교육시킬 때 이렇게들 말씀하시잖아요. ‘너 이렇게 이빨 안 닦으면 치과 선생님이 이빨 다 뽑아버린다!’ ‘젤리나 초콜릿 같은 거 자주 먹으면 나중에 치과가서 주사 맞는다!’ 이런 말들이요.(웃음) 치과의사라는 존재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가상의 공포를 심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치과 소리만 나오면 아이들은 온갖 상상을 펼치는 거죠. 거기서부터 공포가 시작돼요. 자녀들이 치과 치료를 잘 받기 원한다면 선입견을 심어주지 않으심 돼요. 다른 병원도 마찬가지고요.”―환부만 보는 것이 아니라 환자 자체를 들여다보시네요. “사람이 병에 걸리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성격과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요. 평소 어떤 약을 먹는지, 생활 습관은 어떤지. 이런 게 중요하단 말이에요. 병 이전에 인간을 먼저 알아야 제대로 된 치료를 하고 예방을 도울 수 있어요. 의사는 환자에게 어떤 느낌을 줘야 하냐면, ‘이 사람이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구나’ ‘이 사람은 내가 건강하도록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구나’ 같은 마음이 들게 해야 해요. 그래야 의사가 아니라 의사 ‘선생님’으로 불릴 수 있지 않겠어요.” ―치과가 아니라 정신의학과를 갔어도 잘 맞으셨을 것 같아요.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치과예요. 어렸을 때부터 뭔가 만들어서 형체가 나오는 걸 되게 좋아했어요. 정신의학과는 형체가 없는데 치과에는 형체가 있잖아요. 공작(工作) 같은 작업이 적성에 맞아요. 예전에 건축 인테리어 회사를 잠깐 운영하기도 했어요. 지금 운영 중인 병원도 직접 지은 거예요.”―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희열을 느끼는 편인가요. “건축이나 인테리어는 짧으면 한 달, 길면 6개월 정도면 눈앞에 뭐가 짠하고 나와요. 치아 교정은 훨씬 길어요. 수년 간 치료하고 관리해야 결과가 나오죠. 칫솔질로 건강해지는 건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려요. 사람을 붙들고 2, 3년을 가르쳐야 하거든요. 그래선지 단기간에 무언가 만들어지는 것도 해보고 싶었나 봐요.”치과의사로 살면서 건축, 인테리어 사업에 동물 행동 교정 치료까지…. 다방면에 활약하며 진정한 복수자로 살고 있는 그에게 인생관을 물었습니다. “인생은 도화지 위에 점을 찍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점을 찍다보면 언젠가 그 점들이 선으로 연결될 수 있고, 점에 물 한 방울이 떨어지면 색으로 번져서 전체 영역이 넓어질 수 있죠. 그러다 보면 흰 도화지가 검은색으로 바뀔 수 있어요. 빈 도화지에 점을 찍어나가는 게 여태껏 제가 살아온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기자 jetti@donga.com}
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서울 중구 비좁은 인쇄골목에 위치한 와인바 ‘십분의일’,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에서 시작해 4호점까지 낸 와인바 ‘심퍼티쿠시’…. 이곳들의 공통점은 회사를 다니던 평범한 직장인이 삼삼오오 의기투합해 차린 와인바라는 점입니다. MZ세대 사이에서 ‘N잡’ 열풍이 불면서 회사를 다니며 요식업 창업을 하는 이들이 많아진 탓입니다. ‘용산국제업무지구’가 들어섬에 따라 재개발될 예정인 서울 용산구의 한 골목. 이곳에 자리한 와인바 ‘드포레’ 역시 8년 차 직장인 이민우 씨(가명·35)가 친구들 두 명과 함께 차린 곳입니다.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와인바 사장으로 사는 그에게는 주말이 없습니다. 주중에는 회사를 다니고, 주말에는 ‘드포레’로 출근하기 때문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한창이던 2021년 말 와인바를 창업해 영업시간제한이라는 난관에도 불구하고 연매출 7억 원을 달성하며 순항 중입니다. 직장인들은 한 번쯤 “나도 와인바나 할까?”라는 생각, 해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회사와 와인바 병행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월화수목금금금’을 사는 근면함은 물론이고, 신메뉴 개발, 손님 관리, 점포 확장 계획, 직원들과의 소통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끝도 없습니다. 여행지에 노트북을 들고 가고, 퇴근 후에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일과 삶이 섞여 있지만, 이 씨는 2년 전으로 돌아가도 와인바를 창업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이기에 후회 없이, 하고픈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는 그를 ‘복수자들’이 지난달 24일 ‘드포레’에서 만났습니다. 그가 이토록 열심히 사는 이유(https://youtu.be/FwBOSw0WAPc)와, 연매출 7억 원을 달성한 팁(https://youtu.be/X8GOLKMh634)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와인바 창업을 결심한 계기가 궁금해요. 회사를 다니다보니 제가 올라갈 수 있는 위치의 한계가 보이더라고요. 챗GPT 등 AI가 사람의 역할을 대체해가면서 근로 수명도 짧아지고 있잖아요. 직업 하나만으로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것 같아요. 회사에서 더 이상 저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당황하기보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서 일할 수 있는 수명을 최대한 연장하고 싶었어요. “난 이제 뭐 해 먹고 살지?”라는 고민과 맞닥뜨렸을 때 스스로가 무기력하게 느껴지기 싫어요.―카페, 식당 등 다양한 선택지 중 왜 하필 와인바였나요? 첫 번째로 고려한 건 ‘단가’였어요. 소주를 파는 음식점은 좌석이 매일 가득 차도 일 매출이 높지 않아요. 술을 팔아야 돈이 남는데, 그중에서도 고가의 술을 파는 게 높은 매출에 유리해서 와인을 택했어요. 두 번째로는 와인바에는 주사를 부리는 취객이 다른 식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합니다. 접객이 상대적으로 수월할 것이라고 판단했어요. 마지막으로는 저만의 아지트를 갖고 싶었어요. 나중에 벤처를 창업하고 싶은데, 미리 인맥을 쌓고 친해지기에 와인바가 가장 좋을 것 같았습니다. ―회사와 병행하기 힘드시지 않나요? 1주일 스케줄이 궁금해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회사 근무를 하고, 금요일 퇴근 후부터 토요일, 일요일은 와인바에서 일합니다. 주중에 회사 퇴근 후 와인바로 출근하는 삶도 살아 봤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회사 생활에 충실할 수가 없어서 주중에는 회사 일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금요일에 와인바 정리하고 집에 가면 새벽 1시에요. 토요일 점심까지 쭉 자다가 오후 5시쯤 와인바로 다시 출근하죠.―회사 다니기도 힘들다는 직장인이 많아요. 이렇게 치열하게 사는 이유가 있나요? 저도 어렸을 땐 낙천적이고 걱정 없는 성격이었어요. ‘난 무조건 잘 될 거야’라는 막연한 확신도 있었고요. 그런데 21살 때부터 가세가 기울었어요. 내가 당연히 누리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면서 독하게 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제 통장 잔고는 늘 만 원이 안 됐거든요. 고등학교 졸업한 순간부터 집에서 일절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았고, 회사 인턴과 과외 4개를 병행하면서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어요. ―직장인과 와인바 사장,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한 본인만의 루틴이 있나요?잠들기 전에 내일 할 일을 스마트폰 캘린더에 전부 다 적어요. 정말 별것 아닌 것까지도요. 일정은 타인과 한 약속이잖아요. 절대 잊어버리지 않고, 남들에게 약속한 내용을 반드시 기한 내에 실행하기 위해서 전부 다 적습니다. 자영업자들이 ‘줄도산’하던 코로나19의 한복판에서 요식업을 창업하기 위해서는 위기를 기회로 바라보는 대담함이 필요했습니다. 코로나19로 문을 닫은 식당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실패 사례를 공부했고, 차별화를 위해 미슐랭 레스토랑들을 전부 돌며 특징을 파악했습니다. 당시 권리금은 바닥을 쳤던 상황. 재개발이 예정된 용산에 ‘권리금 0원’으로 공간을 임대했습니다. ―코로나19가 한창 확산세일 때 창업을 결심하셨어요.식당 영업시간제한이라는 위험 요인도 있었지만 1년 이내로 잠잠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 권리금이 거의 바닥을 쳤을 때예요. 특히 제 와인바가 있는 지역은 용산국제지구가 들어오면서 조만간 재개발될 예정이거든요. 그래서 권리금이 0원이었어요. 최소화된 예산으로 와인바를 차려서 이 시기를 잘 버티자는 생각이었죠. 또 제가 창업을 준비했던 때는 코로나19가 1년 지난 시점이라 실패 사례를 스터디했어요. 문 닫은 가게들의 공통점은 주거지구, 오피스 지구, 유흥지구 등 ‘단일상권’에 위치했다는 점이더라고요. 특징을 하나만 가진 상권은 위기 상황에 더 취약합니다. 그래서 저는 중복상권 위주로 장소를 물색했어요. 용산, 공덕, 양재, 선유도 등 주거지구와 오피스지구가 혼재해있는 지역들이 후보였고, 그중 가장 권리금이 싸면서도 주민들의 소득수준이 높은 용산을 택했습니다. ―‘미슐랭 레스토랑’ 등 잘되는 와인바를 돌아다니며 조사도 많이 하셨다고요. ‘핫플’들의 공통점이 있나요?이미 완벽한데도 계속 변화를 시도하고, 그 변화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새롭게 다가오는 곳들이 있어요. 그런 와인바들은 사장님이 매장에 상주하면서 하나하나 세심하게 신경을 써요. 메뉴를 2~3개월 단위로 바꾼다거나, 커틀러리(식기)를 바꾸는 식으로요. 사실 사장이 헤드셰프(주방장)가 아닌 이상 신메뉴를 계속 개발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하나의 메뉴를 개발하기까지 정말 많은 인력과 자원이 들어가거든요. ―코로나19를 통한 실패 사례 스터디, 미슐랭 레스토랑 연구 등 치밀하게 사전 조사를 하고 와인바를 차리셨네요. ‘드포레’만의 차별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손님들이 불편해하실 만한 부분들을 빠르게 파악하는 거요. 손님들이 말하기 전에 선제적으로 액션을 취하려고 해요. 예를 들어 물병에 물이 조금만 남아있다고 하면 조용히 새 물병을 놓아 드려요. 직원을 뽑을 때도 따뜻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들을 뽑으려고 해요.―오지게 착한데 일 못하는 직원, ‘싸가지’는 더럽게 없는데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는 직원 중 누구를 택하시겠어요?전 착하고 일 못 하는 직원이요. 일이라는 게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제일 많이 받잖아요. 싸가지 없는 직원 한 명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된다면 전체적인 일에 능률이 되게 떨어지게 될 것 같아요. 직원들이 일하기 싫은 공간이 되면 안 되죠. ―이곳을 ‘네트워킹 아지트’로 만들고 싶다고 하셨는데 손님들과 교류도 하시나요?단순히 고가의 와인을 시킨다거나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인맥을 형성하려고 하진 않아요. 몇 마디 대화를 나눠봤는데 저와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거나 성향이 잘 맞는 손님들과는 개인적으로도 연락을 하는 편이에요. 제가 먼저 연락처를 여쭤보기도 하고 손님이 먼저 명함을 주시는 경우도 꽤 많아요. 본인의 매장처럼 편하게 느끼시면서 이용하시는 분들도 생겼습니다.―올해 요식업 창업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에게 이것만은 꼭 지켜라, 팁을 주신다면?가장 중요한 건 내가 원하는 위치의 부동산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드포레’는 구석진 곳에 있다 보니 사람들이 찾기 힘들고, 그게 매출에 큰 영향을 주거든요. 똑같은 맛과 서비스라도 어디에 위치했느냐에 따라 존폐가 나뉘어요. 두 번째는 제 인생 가치관이기도 한데 ‘스몰 석세스’라는 단어를 실천하는 거예요. 큰 목표를 잡고 장기간 달려가기보다 작은 목표를 하나하나 이뤄나가는 거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큰 목표도 이루게 될 거라고 믿어요.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간판도 없는 허름한 노포에 ‘이 사람’만 다녀가면 줄이 늘어섭니다. 전국 곳곳에 숨어 있는 노포를 소개하는 유튜버인 세끼 먹는 김사원, ‘김사원세끼’(아래 김사원)입니다. 자꾸 생각 나는 중독적인 말투, 광고와 협찬은 일절 받지 않는 뚝심은 기본입니다. ‘미국인들의 장모님댁’ ‘횟집계의 홍성대, 횟집의 정석’처럼 ‘병맛’과 천재성을 절묘하게 오가는 묘사력에 힘입어 2020년 1월 유튜브를 시작한지 3년 만에 구독자가 40만 명을 넘었습니다. 1주일에 광고와 협찬 제의가 5건 넘게 들어옵니다. 빅뱅의 대성, 188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은 김사원세끼를 패러디한 유튜브 영상을 본인의 채널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셀럽들의 셀럽’이 된 김사원에게 본업은 따로 있습니다. 그는 사실 6년차 직장인입니다. 영상에서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평소와 다른 목소리를 연기하는 이유도 회사 내 ‘겸업금지조항’ 때문입니다. 사원 3년차에 찾아온 슬럼프를 털어내고자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퇴근 후 허름한 식당에서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는 소소한 일상을 영상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선 한 마디도 안 한다는 그는 유튜브 세계에서 숨겨왔던 자아를 표출합니다. “회식을 하면 산해진미도 흙맛이죠” “저희 회사는 40년 전통의 변함없는 월급 맛집(몇 년째 동결)”과 같이 부장님 앞에서는 털어놓지 못했던 진심을 속사포로 쏟아냅니다.10분 짜리 광고 한 건당 직장인 연봉과 맞먹는 돈을 벌수도 있지만 그는 “절대 퇴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튜브는 철저히 ‘취미’로 하겠다는 철칙 때문입니다. 유튜브가 본업이 되는 순간 노포에 가는 것도, 주말에 영상 편집을 하는 것도 “일처럼 느껴질 것”이라는 그는 낮에는 김 대리, 밤에는 김사원으로 살아가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남들은 “쉴 시간이 있냐”고 묻지만 그에게는 촬영과 편집이 ‘힐링’이자 쉬는 시간입니다. 유튜버라는 ‘부캐’를 어머니에게도 숨기고 은밀한 취미생활을 지속해 온 김사원을 ‘복수자들’이 지난달 9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만났습니다. 회사보다 유튜브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지만 회사를 그만 두지 않는 이유()와, 3년 만에 40만 구독자를 보유한 인기 유튜버가 되는 비법()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철저히 신상을 가리는 ‘신비주의 유튜버’로도 유명하세요. 구독자 40만 명을 보유한 4년차 유튜버가 됐는데 주변에서 알아차린 사람 없나요?제가 유튜브 하는 걸 어머니도 모릅니다. 용돈 올려달라고 하실까봐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농담이고요. 가장 가까운 사람에서 시작해 한두 명씩 알게 되면 거기서부터 비밀이 깨지기 때문에 철저히 숨기고 있어요. 제가 유튜브 하는 건 저와 노포를 가는 극소수의 절친들만 압니다. 손가락 안에 꼽아요. 회사에서 “너랑 말투 비슷한데 너 아냐?”라며 제 유튜브 영상 링크를 보낸 선배도 있었습니다. 등에서 땀 한 줄기가 흘렀습니다만, 아무렇지 않은 척 했죠. “저 유튜브 잘 안 봅니다”라고 잡아뗐습니다. ―유튜브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해요.원래 맛집 소개 유튜브를 즐겨 봤습니다. 그러던 중 ‘내가 이것보다는 잘 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그때 직장인 3년차라 회사생활에 슬럼프도 왔어요. 뭔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죠. 제가 실제로 친구들과 퇴근하고 한 잔 하는 걸 즐기거든요. 제 취미를 유튜브 영상에 담아보자는 게 시작이었습니다. 거창한 계기 같은 건 없었어요. ―2020년 1월 첫 영상을 올리고 불과 3년 만에 구독자 40만 명이 됐어요. 정말 빠른 속도인데 채널 ‘떡상’ 시점이 언제였나요? 저도 유튜브 시작한지 한 달 동안은 조회수가 100회 정도 나왔어요. 구독자는 44명이었습니다. 그때 목표가 1년 안에 구독자 1만 명을 모으는 거였어요. 그러다 2020년 2월에 올린 이모카세(이모와 오마카세를 합친 말) ‘나드리식품’ 영상이 떡상의 출발이었어요. 그 후부터 조회수가 1000회 씩 나오기 시작했고, 7개월 만에 구독자 10만 명이 넘었어요. 2020년 11월에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에서 저를 패러디한 영상을 올려주신 게 두 번째 떡상 포인트였어요. 패러디 영상 조회수가 138만 회가 나왔어요. 그 영상이 올라가고 한 달 만에 구독자 3만 명이 늘었습니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노포를 소개하는 5분 남짓의 영상을 왜 그렇게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셨다고 생각하세요? 인기요인을 분석해보신다면? ‘김사원’이라는 캐릭터에 많은 직장인들이 공감해주는 것 같아요. 김사원은 눈치 안보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뻔뻔한 캐릭터거든요. 그런 모습에 회사원들이 많이 위로를 받으시는 것 같습니다. ‘김사원세끼’가 대단한 채널은 아니잖아요. 제가 가는 식당들이 아무나 못가는 고급 식당도 아니고, 그냥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이에요. 그런 소박함을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요. ―인기의 척도인 광고, 협찬 제의도 엄청나게 많이 들어올 것 같은데 일절 안받으신다고요. ‘식당 광고는 안 받습니다’라고 채널에 명시를 해 놨는데도 일주일에 5건 정도 광고와 협찬 제안 이메일이 와요. 단 한 번도 받은 적 없습니다. 솔직히 흔들린 적 있긴 합니다만, 제가 식당 광고를 하지 않아서 구독자 수가 늘은 건데 이제 와서 광고를 받는 건 구독자를 기만하는 거잖아요. 무엇보다 전 김사원세끼 채널을 오래 하고 싶은 사람이지, 돈을 빨리 벌고 싶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유튜브로 돈 벌 생각을 했다면 1년차 때 광고만 하다가 이미 이 바닥 떴겠죠. 전 롱런하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취미를 꾸준히 하고 싶습니다.―광고, 협찬 받으시면 직장 연봉을 광고 하나로 벌 수 있는데…. 퇴사하고 싶은 생각 없으세요? 유튜브는 제게 철저히 취미입니다. 만약 유튜브가 본업이 된다면 생계유지 수단이 되는 거잖아요. 그럼 영상도 억지로 만들어야 하고, 드립들도 지금처럼 잘 나오지 않을 것 같아요. 내가 온전히 콘텐츠 만드는 과정을 즐겨야 그 재미가 구독자들에게도 전달되지 않을까요? 물론 상사한테 깨지고 일이 안 풀릴 때도 힘든 순간도 많죠. 근데 그럴 때 노포에서 한 잔 하는 게 가장 맛있습니다. 자다 일어나서 노포 가는 게 무슨 맛이 있겠습니까? ―두 가지를 병행하시는 게 힘들지는 않으세요?제가 유튜브 하는 걸 아는 사람들은 “안 바쁘냐”고 묻는데 제가 유튜브에 들이는 에너지는 거의 없습니다. 영상 대부분 5분짜리고, 일주일에 한 개 올립니다. 영상편집은 주말에 1시간도 안 걸려서 다 해요. 대본을 쓰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도 많은데 전부 애드립입니다. 저희 집에 옷방 들어가서 생각나는 대로 말해요. 퇴근 후에 헬스 가고, 영화 보고, 책 읽고 전부 다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즐기는 취미생활을 공유했는데 사람들이 좋아해주시니까 저한텐 오히려 힘이 되죠. ―회식할 땐 주로 어디 가세요? 노포 예약하시나요? 회식은 철저히 프랜차이즈죠. 이춘복참치, 창고43, 투뿔등심을 즐겨 갑니다. 제 돈 주고 가기 힘든 식당들 위주로 가야죠. 식당 예약해야 하는 사원분들, 회식 빨리 끝내고 싶을 땐 장어구이집 추천드립니다. 1인분에 2만9000원, 3만4000원이에요. 2인분 시키면 예산 끝납니다. 집에 가면 8시예요. ‘유튜브는 철저히 취미’라는 그의 말은 지나친 겸손함일까요? 3~4분 남짓의 영상을 1주일에 한 개 꼴로 올리는데도 유튜브 시작 3년 만에 구독자 40만 명을 넘겼습니다. 구독자수보다 더 중요하다는 조회수도 상당히 ‘살발’합니다. 영상 회당 평균 조회수는 42만 회에 달합니다. 본업 유튜버들보다도 더 성공한 그는 절대 ‘유튜브나 해볼까?’라는 마음으로 유튜브를 시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기존 채널의 한계를 보완할 본인만의 분명한 강점이 있어야 아류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회사 몰래 유명 유튜버 된 직장인’이라는 책도 내셨더라고요. 유튜버로 성공하는 꿀팁을 담으셨고, 책 구매자 대상으로 유튜브 컨설팅도 해 주신다고요. 혹시 초보 유튜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실수가 있나요?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영상을 굉장히 길게 만들어요. 찍은 걸 다 보여드리고 싶은 욕심이죠. 15분 넘어가는 영상들도 많은데 이거 다 안 봅니다. 영상 시청 지속 시간이 굉장히 중요한 지표거든요. 만약 지속시간이 전체의 50%가 안 된다면 채널 성장이 어렵죠. 두 번째는 콘텐츠의 일관성이 없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맛집 유튜버면 맛집만 소개해야 하는데 중간에 갑자기 기타를 치고 있고, 반려견이 나와요. 물론 저도 제 반려견 ‘흰둥이’ 출연시킨 적 있습니다만, 딱 8초 나왔습니다. ―유튜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게 제목과 섬네일이라고요. 영상을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섬네일과 제목이 보기 싫으면 그 영상은 날리는 거에요. 하나 예를 들어 드릴게요. ‘살다 살다 이렇게 맛있는 잠실 맛집은 처음 봅니다’와, ‘살다 살다 이렇게 맛있는 맛집은 처음 봅니다’ 중 어떤 게 좋은 섬네일과 제목일까요? 두 번째에요. 첫 번째 제목은 잠실 가는 사람만 누릅니다. 표본을 좁히면 안돼요. 누구나 누를 수 있는 제목과 섬네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맛집 소개 유튜버라 음식 맛이 콘텐츠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할 줄 알았는데 의외에요. 물론 맛없는 집은 안갑니다. 하지만 맛은 사람마다 기준이 너무 달라요. 제 기준에 맛있어서 소개를 해도 맛없는 사람은 맛없다고 해요. 그리고 제가 맛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잖아요. 이모님 친절하고, 가격 적당하고, 술 잘 들어가면 저한텐 그곳이 최고 맛집입니다. ―김사원 님처럼 유튜브를 부업으로 삼으려는 직장인들이 정말 많은데요, 유튜브를 시작하기 전에 꼭 기억해야 할 점이 있을까요?‘나도 유튜브나 해 볼까?’라는 마음으로 시작하면 대부분 고전합니다. 본인이 즐겨 보는 채널이 있잖아요. 그 채널을 보다가 ‘내가 이것보다는 잘 만들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유튜브를 시작하길 추천합니다. 기존 채널의 단점을 보완할 아이디어가 있어야 해요. 이미 시장을 장악한 채널보다 단 한 가지라도 장점이 있어야 아류가 되지 않을 수 있어요. ―유튜버로서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사실 없습니다. 왜냐면 이미 이룬 것 같아요. 제 원래 목표가 ‘1년 안에 구독자 1만 명’이었는데, 1년 동안 구독자가 20만 명이 됐어요. 이미 너무 큰 달성을 했어요. 그냥 제가 김사원이라는 캐릭터에 계속 애정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초심을 잃지 않고요. ―김사원에게 행복이란?‘행복의 역치’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음식을 먹어도 행복을 느끼는 수준은 사람마다 다 달라요. 매일 오마카세 먹는 사람이 삼각김밥 먹으면 안 행복하지만 매일 삼각김밥 먹다가 오마카세를 먹으면 정말 행복하겠죠. 저는 행복의 역치가 낮은 사람인 것 같아요. 소박한 것에서 행복을 자주 느껴요. 소소한 노포에서 친구들과 한 잔 하는 것도 제겐 행복이에요. 구독자분들도 제 채널을 통해 소박하고 소소한 행복을 많이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행복은 곳곳에 있죠. 일상에 있고요. 김재희기자 jetti@donga.com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
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알록달록한 세상’을 몰랐던 이가 있습니다. 적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색각장애, ‘적록색약’을 안고 태어난 이모티콘 작가 ‘동동작가’, 최동석 씨(28) 이야기입니다. 적록색약은 최근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주인공 ‘전재준’이 앓는 색각장애로도 잘 알려졌습니다. 학창시절 선생님은 그에게 “왜 꽃을 파란색으로 칠하니?”라 물었습니다. “너 이거 무슨 색인지 맞춰봐”라는 친구들의 짓궂은 질문에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림 그리는 일은 절대 직업으로 삼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낙서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림과 일부러 멀리한 건 일찍이 자라난 자격지심의 발로였습니다. 마이스터고에서 전기를 공부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에 취업해 발전기를 다루는 일을 했습니다. 애써 외면해 온 ‘본심’과 마주하게 된 건 20대 초반 때였습니다. 회사 일에 적응하며 여유가 생기자 어렸을 적 취미였던 낙서가 다시 하고 싶어진 겁니다. 미술학원을 다니며 매해 띠 동물을 캐릭터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치부와도 같았던 색각장애와도 정면으로 부딪쳐보기로 했습니다. 색채를 다루는 전문가들이 응시하는 ‘컬러리스트 산업기사’ 자격증을 따기로 한 겁니다. 학원에선 늘 꼴찌였고, 수업을 따라오지 못하는 그를 보며 내쉬는 강사의 한숨이 비수로 꽂히기도 했습니다. 상처와 마주하길 자처한 그의 고집은 2017년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띠였던 닭을 캐릭터화한 ‘콩닭콩닭 코코닭’이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통과된 겁니다. 2018년 개띠 해에 만든 ‘찌바’는 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최 씨가 가장 좋아하는 견종인 시바견을 캐릭터화한 찌바 1탄은 한 달 누적 판매 수 2만 개를 넘었습니다. 그는 이모티콘으로 번 연봉이 한수원 연봉의 2배가 되던 2018년 한수원을 퇴사했습니다. 이모티콘 작가로 전업한 그는 찌바를 8탄까지 출시했고, 이모티콘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신의 직장’을 그만 두고 콤플렉스를 업으로 삼은 동동작가를 ‘복수자들’이 지난달 15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만났습니다. 적록색약을 극복한 그의 노력()과, ‘전업 이모티콘 작가’로 살아남는 방법()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성공한 이모티콘 작가가 됐지만 원래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림은 그에게 피하고 싶은 콤플렉스였습니다. 어렸을 땐 ‘졸라맨’ 수준의 단순한 그림만 끼적이던 소년이었습니다. 스무 살이 넘어서야 그 콤플렉스를 직시하기로 마음 먹게 됐습니다.―시바견을 모티브로 한 이모티콘 ‘찌바’로 큰 인기를 끌었어요. 이모티콘 작가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원래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했어요. 취업을 목표로 마이스터고에 진학해 전기를 공부했고, 졸업 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에서 발전기를 다루는 업무를 했어요. 반복적인 일을 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고, 교대 근무를 해서 하루를 통으로 쉴 수 있는 날이 생겨 그 시간을 활용해 그림을 배워보기로 했어요. 매해 띠 동물을 캐릭터로 그렸고, 2017년 닭띠 해에 그렸던 ‘콩닭콩닭 코코닭’이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통과됐어요. 하루에 150~200개 씩 팔렸는데 너무 신기한 거에요. 취미로만 하던 제 그림을 누군가가 돈 주고 샀다는 거잖아요. 개띠 해였던 2018년에는 시바견을 모델로 한 ‘찌바’를 그렸고, 1탄부터 3탄까지 쭉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통과됐어요. ―원래 그림에 소질이 있으셨어요? 전혀 아니에요. 오히려 제게 그림 그리는 건 콤플렉스였어요. 초등학교 때 신체검사에서 알게 됐는데 제게 색각장애인 ‘적록색약’이 있었어요. 신호등 색 정도는 구분할 수 있지만 노란색과 황토색처럼 가까운 색들을 붙여 놓으면 구분을 못 해요. 그림도 잘 못 그렸어요. 졸라맨 같은 단순한 그림을 끼적거리던 수준이었죠. 콤플렉스를 극복해보자는 마음으로 미술학원과 컬러리스트 산업기사 자격증 학원을 다니게 됐어요. ―컬러리스트 산업기사 자격증 시험은 여러 색들을 섞어서 주어진 색에 최대한 가깝게 만드는 시험이잖아요. 색각장애를 갖고 있는데 그 시험에 통과하는 게 가능했나요? 컬러리스트 산업기사 자격증은 색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직업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따는 자격증이라 아주 미세한 색의 차이도 구분할 줄 알아야 해요.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많아요. 학원에서 주어진 색을 만드는 실습을 하는데 전 매번 꼴찌였어요. 선생님이 한숨을 쉬며 제 옆을 지나가실 때도 많았고요. 보통 물감 한 세트 다 쓰기도 힘든데 저는 두 세트도 모자랐을 정도로 밤을 새 가며 연습했어요. 처음엔 30% 가까이 되던 오차율을 점점 줄여서 결국 시험에 합격했죠. 합격점수를 가까스로 넘겼지만요.(웃음)외면하고 싶은 치부, 모른 척 살아가도 되는 콤플렉스를 직시하기로 한 다짐 뒤에는 유년시절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악의 없이 던진 친구들의 장난, ‘미성숙’을 가장한 차별과 따돌림의 기억과 최 씨는 뒤늦게라도 부딪혀보길 택했습니다. ―적록색약으로 인해 유년시절 상처를 받은 기억도 있으시다고요. 친구들에게 입고 간 옷을 자랑하려고 “이 주황색 옷 예쁘지?”라고 했는데 친구들이 “그거 연두색인데?”라고 한 적이 있어요. 제가 색약이란 걸 알게 된 뒤부턴 애들이 놀다가 갑자기 “너 이거 무슨 색인지 맞춰봐”라고 질문을 던졌어요. 전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했고요. 그 때 기억이 아직도 상처로 남아있어요. 미술시간도 싫었어요. 선생님께서 “너는 왜 이 색을 썼니?”라고 물어보시는 경우가 있었어요. 저는 빨간색이라고 생각해서 꽃을 색칠했는데 파란색이었더라고요. ‘나는 남들과 다르구나’라는 생각에 많이 위축됐어요.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주인공 전재준도 적록색약을 갖고 있잖아요. 드라마를 보셨을 때 어떠셨어요?전재준은 학교폭력 가해자라 ‘꼬시다’고 생각했는데요(웃음), 전재준의 친딸인 ‘하예솔’도 적록색약을 앓는 건 많이 안타까웠어요. 특히 꽃을 하얗게, 배경은 파랗게 칠해놓은 장면에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많이 울었어요. 저도 똑같은 상황을 겪어 봤으니까요. 색을 구분 못한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기도 했고, 유년시절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된 적도 있어요. 중학교 때 뒤뜰로 불러서 때리는 아이들도 있었고요. 저도 더 글로리에서 학교 폭력을 당한 주인공 ‘문동은’처럼 ‘내가 얘네보다는 잘 돼야 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그게 동기부여가 돼서 더 치열하게 살아온 것 같아요. ―이모티콘에도 다양한 색이 활용되잖아요. 이모티콘 작가로 일하는데 있어 적록색약이 불편하시진 않나요?제가 비슷비슷한 색을 구분하지 못해요. 그래서 일부러 정확한 색을 사용하려고 해요. 콤플렉스를 역으로 이용한거죠. 예를 들어 찌바의 색을 정할 때도 애매한 황토색 말고 누가 봐도 정확한 황토색을 썼어요. 색을 잘 보는 친구의 도움을 받기도 했어요. 친구가 조금 더 정확한 색을 골라주면, 그 색을 저장했다가 꺼내 쓰는 방식으로 작업을 해요. 지금은 그 친구와 같이 일하고 있어요. 도움을 받을 사람이 있다면 꼭 그 도움을 받으세요. 시행착오를 겪는 것도 경험이지만 방황의 시간을 줄이는 것도 중요해요. 콤플렉스를 발판 삼아 치열한 매일을 살아온 그는 이모티콘 작가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찌바로 한 달에 수 천 만원을 벌기도 했습니다. 이모티콘 수익이 한수원 연봉의 2배가 되던 시점에는 원하는 일에 집중하고자 한수원을 퇴사했습니다. 하지만 ‘꽃길’만 펼쳐진 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퇴사를 했지만 퇴사 직후 10번 넘게 카카오톡 이모티콘 미승인을 받으며 1년 반 동안 ‘강제적 경력단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한수원이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공기업 중 한 곳이잖아요. 그만 둔다고 했을 때 주변 반대는 없었나요?어머니의 반대가 심해서 2년 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어요. 부모님 세대는 자식 잘 되는 게 본인의 자랑이잖아요. 어머니가 친구들에게 ‘우리 아들 한수원 다닌다’고 자랑도 많이 하셨고, ‘아들 하나 잘 키웠다’는 뿌듯함으로 살아가셨어요. 그런데 제가 덜컥 회사를 관둔다고 하니 ‘분명 후회할 날이 올 거다’라며 엄청 말리셨어요. 어머니 고집이 되게 세시거든요. 어머니를 닮아 저도 한 똥고집 하기 때문에 퇴사를 감행했어요. 지금은 화해하고 잘 지내요. 이모티콘으로 번 돈으로 부모님 차도 바꿔 드렸어요.―‘언젠가 후회한다’던 어머니 말씀처럼 한수원 퇴사를 후회하신 적 있으세요? 있어요. 찌바 3탄까지 승승장구하다가, 퇴사 직후 낸 찌바 4탄에서 첫 미승인의 쓴맛을 봤거든요. 그 후 1년 반 동안 10번의 미승인을 겪었어요. 그 때 대인기피증이 와서 한 달 동안 아무도 안 만났어요. 누군가를 만나면 ‘나 뭐 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 1년 반 동안 돈을 못 버니까 자존감도 많이 떨어졌고요. ―10번이나 미승인을 받은 찌바 4탄을 어떻게 통과시킬 수 있었나요? 처음엔 캐릭터의 매력만으로 승인을 받을 수 있지만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구체적인 콘셉트가 필요해요. 4탄은 ‘꼬꼬마 찌바’라고 해서 아기 찌바를 주제로 했는데 캐릭터 모션이나 멘트가 어른스러운 것들도 포함돼 있었어요. 소품이나 멘트를 더 어린 아이처럼 확고히 해서 통과됐어요. 이모티콘은 콘셉트가 정말 중요해요. 주식, 골프, 수영처럼 내가 관심이 있는 특정 분야를 정하고, 그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모티콘을 만드는 게 핵심입니다. ―요즘도 이모티콘 작가로 전업한 걸 후회하시나요?가끔요(웃음). 이모티콘 작가는 프리랜서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수익이 0이에요. 제가 발로 뛰어서 일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절대 나태해져서는 안 돼요. 그래서 전 이모티콘 전업을 꿈꾸는 분들에게 ‘반드시 부업으로 해라’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요즘 이모티콘 시장 경쟁이 굉장히 치열해요. 1주일에 2000~3000개 100~150개만 출시돼요. 프리랜서가 되면 수익이 불규칙적이라 마음의 여유도 사라지고요. 처음엔 내가 좋아서 시작했는데 돈 때문에 쫓겨서 이모티콘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일로 돈과 타인의 인정, 둘 다 얻을 수 있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장점이에요.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정체성이 더 확고해졌고, 일에 대한 보람도 한수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요.―적록색약이라는 선천적 장애를 극복하고 그림으로 돈을 버는 전업 이모티콘 작가가 되셨어요. 요즘 콤플렉스를 바라보는 작가님의 마음이 어떤지 궁금해요. 드라마 때문에 적록색약이 화제가 되면서 제가 적록색약이라는 걸 알고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 때 새삼 ‘아, 적록색약이 나에게도 엄청난 콤플렉스였지’를 느꼈어요. 한때 제 치부였다는 걸 잊어버렸을 정도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적록색약 때문에 제가 더 악착같이 살았고, 한계에 도전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오히려 적록색약에 감사해요.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배우 황석정(52)에게는 공식처럼 따라오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신 스틸러’ ‘개성파 배우’ ‘비범한 외모’…. 주목받아야 기회가 찾아오는 배우에겐 더없이 좋은 특징입니다. 데뷔작인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2008년)에서 강렬한 노숙자 연기로 시선을 잡았고 영화, 드라마, 연극을 오가며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그에겐 한때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평범한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합니다.독특한 캐릭터가 내뱉는 특이한 대사는 쉬웠지만 ‘하늘이 예쁘다’ ‘바다가 푸르다’ ‘사랑한다’ 같은 일상적인 표현은 어려웠습니다.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신 스틸러 역을 제안받고도 눈에 띄지 않는 조연을 자처한 적도 있습니다. 스타 아닌 배우로 살고 싶어 했던 선택이었습니다. 그렇게 배우로 10년째 살아가던 중,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로 전성기를 찍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족의 부양을 홀로 담당하게 되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애인과 이별했습니다. 밀려드는 고통으로 과호흡이 올 정도였습니다. 당시 그의 숨통을 틔워 줬던 건 다름 아닌 식물이었다고 합니다. 마당에 장미를 키우고 뒷산에 나무를 심으며 상처는 천천히 아물었습니다. 1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웃을 수 있게 됐습니다.지난달 27일 경기 양주시에 있는 ‘미스황팜’에서 농업인이 된 배우 황석정을 만났습니다. 스타 아닌 배우로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야기(https://youtu.be/BdQ_rRNHpJM)와 식물을 키우며 상처를 치유하고 사람들과 교감하게 된 이야기(https://youtu.be/sZl3L_81CUc)를 나눴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배우이자 농업인 황석정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처음부터 배우를 꿈꿨던 건 아니었습니다. 색소폰 연주자 아버지, 성악을 전공했던 어머니를 둔 덕분에 자연스럽게 음악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피리를 전공했던 그는 서울대 국악과에 입학해 한때 음악인의 길을 걷습니다.―처음부터 배우가 하고 싶으셨던 건 아니네요.“어릴 때는 연극을 볼 기회가 없었어요.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공부만 시키는 분위기였죠. ‘우리가 청춘을 이렇게 허비할 수 없다’며 각 반에 한 명씩 모여 무작정 연극을 연습했어요. 대본도 없는 얼기설기한 연극이었는데 새벽 여섯 시에 모여 한두 달 연습했죠. 축제 때 처음 무대에 섰어요. 흥분한 아이들이 박수치면서 환호하더라고요. 그 환호성이 잊혀지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절 보고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거든요.”―무대 위의 감각을 그때 처음 느끼신 거네요.“나라는 존재가 타인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는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대학생이 된 후엔 ‘서울대 총연극회’에 들어갔어요. 인간적인 고뇌, 갈등이 담긴 연극을 원했는데 제가 89학번이거든요. 그때 사회 분위기 때문에 아무래도 사회성이 강한 연극이 많았죠. 제가 원하는 연극이 아니었기에 총연극회는 얼마 못 하고 나왔어요.”―이후 들어간 극단이 ‘한양 레퍼토리’라고요.“창단 직전 공연을 봤는데 유오성, 권해효 선배가 나오는 거예요. ‘내가 바라던 예술 세계가 바로 저기에 있구나’ 생각했어요. 극단에서 설경구 선배님, 안내상 선배님, 이정은 언니를 만났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배우가 되겠단 꿈은 없었어요. 인간의 고뇌를 담은 예술 자체에 흥미가 있었죠.”―그런데 어떤 계기로 배우가 되신 건가요.“포스터 돌리고 극장 청소하는 허드렛일을 했어요. 근데 설경구 선배님이 술자리에서 ‘너는 꼭 연기를 해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연기하는 걸 본 적도 없으신 데도요. 그 말이 강하게 각인됐어요.”본격적으로 ‘배우 수업’을 받게 됩니다. 한 번은 독백 수업이었습니다. 준비한 연기를 선보이자 ‘한양 레퍼토리’를 창단한 최형인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는 왜 이렇게 한(恨)이 많니. 아무래도 배우를 해야 할 것 같다.” ―용기가 생겼을 것 같아요.“교수님이 제게 큰 배역도 주셨어요. 주인공이었죠.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어요. 리허설까지 했는데 공연 15일 전에 하차 통보를 받았어요. ‘미안하지만 우리 극단을 위해 네가 물러나야 되겠다’고요.”―하차 이유가 뭐였나요?“연기를 못 했으니까요.(웃음) 에너지는 충만했지만 준비된 건 하나도 없었죠. 연기에는 독백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몸짓도 있고 상대 배우와 같이 호흡도 해야 하고…. 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거예요. 잔뜩 신났다가 인생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아이 같았죠.”배우로서 처음 경험한 ‘거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좌절보단 배움을 택합니다. 대학을 졸업한 이십 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의 신입생으로 입학한 것입니다.―어리지 않은 나이에 연기 학교의 신입생이 됐는데요.“학교생활은 정말 즐거웠지만 연기 수업은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부족함을 많이 느꼈거든요. 신화(神話) 속 캐릭터나 개성 강한 역할은 곧잘 했는데 ‘평범한 역할’은 아예 못했어요. 사랑, 아름다움, 슬픔 같은 기본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는 도저히 못 하겠는 거예요.”―감정을 표현하는 연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요.“엄마가 굉장히 엄격하셨어요. 대학 졸업 때까지 엄마와 나눈 대화가 거의 없을 정도예요. 그러다 보니 표현이 서툴렀어요. ‘사랑해’ ‘하늘이 파랗다’ ‘꽃이 예쁘다’ 같은 말을 26살이 될 때까지 입 밖에 내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딱딱한 사람이 표현을 하려니 오죽했겠어요. ‘로미오와 줄리엣’에선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대사를 말하기도 전에 쓰러진 적도 있어요.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던 거예요.”배우로 살아남아야 했는데 그걸(평범한 역할 연기) 못하면 할 수 있는 역이 별로 없었어요. 계속 괴물만 연기하다가 끝나게 될까 두려웠거든요.―배우로 살아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어요. 저 사람은 왜 이런 말을 하지? 왜 그런 표정을 짓지? 그 과정에서 ‘교감(交感)의 즐거움’을 알게 됐어요. 내가 ‘예쁘다’고 표현을 해야 상대도 ‘예쁘다’는 걸 인지하고 즐거워하잖아요. 거기에서 행복이 오게 되더라고요.”―타인과 교감할 때 행복을 느끼신 건가요?“표현을 해야만 대상이 실재하고 그 공기, 그 정서로 가득 찬다는 걸 느꼈어요. 표현은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해주었고 교감은 나를 가치 있게 만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표현과 교감을 할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라는 걸 남들보다 늦게 깨달은 거죠.”연기를 배우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실제 무대에 서기까지 고초도 겪었습니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 ‘날 보러 와요’ 때 이야깁니다. 처음 그는 ‘남씨 부인’에 캐스팅됩니다. 남편이 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되는 바람에 경찰서에 끌려와 넋두리를 늘어놓는 역할로, 110분간 단 한 번 등장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신 스틸러’ 배역입니다.―‘남씨 부인’ 말고 ‘박기자’ 역을 달라고 요청하셨다고요.“‘박기자’는 극 중 여자 주인공이에요. 매력적인 여성 배우들이 맡았던 역이죠. 제가 하도 애원해서 연출님이 허락해주셨어요. 남씨 부인과 박기자, 1인 2역을 하게 됐죠. 근데 제작자, 배우 할 거 없이 원성이 빗발쳤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같이 생긴 여성 배우가 그런 중요한 역할을 한 적이 많지 않았거든요. 결국 무대에 서긴 했지만 상처를 많이 받았죠.”―황석정 씨 외모가 ‘박기자’스럽지 않았다는 건가요? “그런 셈이었죠. 학생 때는 교수님께도 ‘너 매체(영화, 드라마)엔 나가기 힘들 거야’ ‘그런 얼굴로 연기하기 어려울 거야’ 같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데뷔 후 10년 넘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죠. 시청자 게시판에 ‘저렇게 생긴 여자가 나와서 못 보겠다’ ‘토하겠다’는 글도 올라왔어요.”―그럴 때마다 어떻게 대처하셨나요? “무례한 말들과 함께 살아온 거죠.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전 이렇게 생각해요. 세상엔 여러 외모와 성격을 가진 여자들이 살아가잖아요. 여러 생김이 있고 여러 매력이 있는데 왜 배우만은 똑같은 테두리에 들어야 하나요? 다양한 나이, 생김새, 성격을 가진 여성의 삶을 더 많은 사람이 궁금해 할 거란 확신이 있어요.”―상처가 많았을 텐데 꿋꿋하게 버티신 거네요. “먼저 나 같은 사람이 (대중에게) 익숙해지면 그게 다리가 돼서 다른 여성 배우들도 더 편하게 나이, 생김새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살았어요. 개성적인 외모의 여성 배우들에게 디딤돌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참고 또 참았어요.”10년 차 배우가 된 2015년 무렵 그는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로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삶은 정반대였다고 합니다. 빛이 드리우지 않는 구덩이에 갇힌 기분이었습니다. ―큰 인기를 얻었던 시기였는데 왜 불행하셨나요?“당시의 저는 너무 피곤하고 너무 가난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가족들을 혼자 부양했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남자와 이별했어요. 사는 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았어요. 과호흡까지 오더라고요. 정말 죽을 것 같았던 어느 날 우연히 지나가다 장밋가시에 찔렸어요. 손에서 피가 확 나는데…. 분명 아파야 하는데 너무 시원하고 위로를 받는 것 같더라고요. 내 고통을 누군가는 알아주길 바랐는데 그게 장미였어요.”장미에게서 뜻하지 않는 위로를 받은 그는 마당에 장미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마당 한 가득 수백 그루의 장미를 키우면서 마음이 치유되는 걸 경험했던 그는 본격적으로 식물을 가꾸기로 합니다. 지인 소개로 경기 양주 야산에 버려진 땅을 구입했습니다. 촬영 끝나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심었습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았습니다.―산에 나무를 심을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지인이 산에 식물을 심고 사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그걸 보면서 ‘아 맞아. 나도 저런 거 좋아하지?’ 란 생각이 들었죠. 산 중턱 버려진 땅에 어린 묘목을 사다 심었어요. 3년 넘게 넝쿨 제거하고 벌레도 잡아주고 물도 주고 하다 보니 나무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렇게 8년을 살았어요.”―배우와 병행했는데 지친 적은 없었나요?“힘들지만 지치진 않았어요. 식물이 주는 즐거움은 고통을 상쇄해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매년 반복되니까 식물의 모습도 똑같을 것 같죠? 식물도 성숙해요. 매년 변하고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줘요. 너무 아름다워요. 원래 취미로 그림 그렸는데 (식물 키우면서) 그만뒀어요. 아무리 열심히 그려도 식물의 아름다움을 담아내지 못하는 거예요.”1년 전부터 그는 ‘농업인 황석정’으로 살고 있습니다. 8년 간 산행을 다녔던 경기 양주 인근에 부지 420평을 매입해 지금은 1만 3천 그루의 식물을 키우고 있습니다. 수국, 안개나무 등 심긴 품종도 다양합니다. 농장엔 ‘미스황팜’이라는 이름도 붙여주었습니다.―‘미스황팜’은 어떻게 시작됐나요?“1년 전에 오래된 비닐하우스를 구입했어요. 쥐도 많았고 (비닐이) 찢어진 데도 많았어요. 한 달 넘게 직접 치우고 수리했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태어나 이렇게 노동을 열심히 해본 건 처음이었어요.(웃음) 직접 비닐도 갈고 오래된 구조물도 철거하고 물 공급하는 호스도 설치했어요. 비용도 많이 들었지만 노동력이 정말 많이 들어갔어요.”―주로 어떤 품종을 키우시나요?“좋아하는 품종을 키워요. 전 꽃을 좋아해요. 향기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다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환경이에요. 농장이 경기 북부에 있잖아요. 추위에 강해야 해요. 추위에도 강하면서 향기 나는 식물을 주로 키우죠. 대표적으로 수국이에요. 활짝 피어있는 수국을 보고 사람들이 너무 행복해하고 위로를 받으시더라고요. 그걸 보고 수국이 더 좋아졌어요.”―‘농업인’으로 전업하신 건가요?“당연히 본업은 배우죠.(웃음) 다른 욕심이 있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식물 옆에서 살고 싶을 뿐이에요. 농장 옆에 조그마한 농막에서 살고 싶어요. 큰 집은 필요 없어요. 삼삼오오 둘러앉아 대본 읽을 수 있는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친구들 오면 마당에서 고기도 구워주고요. 농장에서 연극이나 연주회 같은 공연도 할 거예요. 작년에 지인들끼리 모여 작은 연주회를 열었는데 다들 너무 행복해하시더라고요.”식물을 키우게 된 건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함이었지만 지금은 식물을 키우면서 알게 된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다음 달 4일 개막하는 연극 ‘분장실’에 출연하게 되면서 연극 연습만으로도 바쁜 나날이지만 일주일 세 번은 농장에 들러 식물들을 보살피고 있습니다. 햇빛이 쨍하면 가림막을 치고 습기가 차면 환기를 시키고 병균이 자랄까 마른 잎을 떼어줍니다. ―농업인 황석정의 꿈은 무엇인가요.“전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해지더라고요. 위안을 주는 것들과 더불어 살고 싶어요. 우리 모두 너무 불안정하잖아요. 삶이란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평온하길 바라요. 저 역시 고요하고 평화롭고 싶어요.”―배우로서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은 있으신가요.“진짜 사랑하는 역, 진짜 사랑받는 역을 해보고 싶어요. 커플 연기를 해본 적은 있었는데 코믹한 관계이다 보니 충분히 사랑하는 건 못 해봤어요. 티격태격하는 부부 말고 진짜 사랑하는 안정적인 관계. 그게 어떤 느낌일지 무척 궁금합니다.”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기자 j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