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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麻布·삼실로 찬 천) 뒷면에 물감을 밀어 넣는 ‘배압법(背押法)’을 사용한 연작 ‘접합’으로 잘 알려진 추상미술가 하종현 작가의 초기작들을 살펴보는 전시가 열렸다.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14일 개막한 ‘하종현 5975’전은 하종현이 1959년 홍익대를 졸업한 직후부터 ‘접합’을 시작한 1975년까지 만든 작품을 살펴본다. 이들 작품을 들여다보는 렌즈는 당대 한국 사회의 변화와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다. 총 4개 시기로 나눠진 전시는 시간 순서대로 펼쳐진다. 1부 ‘전후의 황폐한 현실과 앵포르멜’(1959∼1965)에선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 뒤 나타난 추상회화의 한 경향인 앵포르멜을 보고 그린 작품들을 모았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거나 그림 표면을 불에 그을리고 어두운 색조를 활용해 불안한 시대상을 담고자 했다. 1959년 ‘자화상’ 같은 인물화도 있다.1960년대 후반 작품을 조명하는 2부 ‘도시화와 기하학적 추상’에서는 연작 ‘도시계획백서’가 등장한다. 이 시리즈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년)으로 인한 급격한 산업화에서 영감을 얻어 강렬한 색채와 반복적인 패턴을 넣은 기하학적 추상화다. 또 단청 문양이나 돗자리 직조 기법을 인용한 연작 ‘탄생’도 이때 작품이다. 하 작가는 1969년 비평가 이일 등 작가 및 이론가 12명과 함께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결성한다. 실험 미술의 영향을 받아 철조망, 신문, 스프링 등 일상적 재료를 작품에 활용하는데, 이때 작품이 3부에 전시된다. 이번 전시는 특히 도면으로만 남아 있던 거울 설치 작업 ‘작품’(1970년)을 재현해 첫 전시 이후 처음으로 다시 선보인다. 거울 여러 개와 두개골, 골반 엑스레이 필름을 재료로 활용한 작품이다. 마지막 4부는 연작 ‘접합’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는 ‘접합―배압법’(1974∼1975)이다. 이 무렵 작가는 마포 뒷면에 물감을 듬뿍 바르고 나무 주걱으로 물감을 밀어내는 ‘배압법’을 고안했다. 이런 배압법을 이용한 여러 시도들을 4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하종현의 작품 속에 담긴 시대적 메시지와 물성에 관한 이야기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트선재센터는 이번 전시와 연계해 지난해 10월 신정훈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와 정연심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레슬리 마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근현대 아시아 미술 큐레이터 등이 참여한 심포지엄도 개최했다. 세 연구자가 심포지엄에서 발제한 ‘근대화의 회화, 면밀하고 고집스럽게 물질주의적인’(신정훈), ‘하종현의 6년(1969∼1975): 매체의 물질성에 대한 실험과 방법론’(정연심), ‘표식 만들기의 정치학: 1960∼1970년대 하종현 회화’(레슬리 마)는 전시 도록에 수록돼 다음 달 출간 예정이다. 4월 20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마포(麻布·삼실로 찬 천) 뒷면에 물감을 밀어 넣는 ‘배압법(背押法)’을 사용한 연작 ‘접합’으로 잘 알려진 추상미술가 하종현 작가의 초기작들을 살펴보는 전시가 열렸다.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14일 개막한 ‘하종현 5975’전은 하종현이 1959년 홍익대를 졸업한 직후부터 ‘접합’을 시작한 1975년까지 만든 작품을 살펴본다. 이들 작품을 들여다보는 렌즈는 당대 한국 사회의 변화와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다.총 4개 시기로 나눠진 전시는 시간 순서대로 펼쳐진다. 1부 ‘전후의 황폐한 현실과 앵포르멜’(1959-1965)에선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 뒤 나타난 추상회화의 한 경향인 앵포르멜을 보고 그린 작품들을 모았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거나 그림 표면을 불에 그을리고 어두운 색조를 활용해 불안한 시대상을 담고자 했다. 1959년 ‘자화상’ 같은 인물화도 있다. 1960년대 후반 작품을 조명하는 2부 ‘도시화와 기하학적 추상’에서는 연작 ‘도시계획백서’가 등장한다. 이 시리즈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으로 인한 급격한 산업화에서 영감을 얻어 강렬한 색채와 반복적인 패턴을 넣은 기하학적 추상화다. 또 단청 문양이나 돗자리 직조 기법을 인용한 연작 ‘탄생’도 이때 작품이다.하 작가는 1969년 비평가 이일 등 작가 및 이론가 12명과 함께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결성한다. 실험 미술의 영향을 받아 철조망, 신문, 스프링 등 일상적 재료를 작품에 활용하는데, 이때 작품이 3부에 전시된다. 이번 전시는 특히 도면으로만 남아 있던 거울 설치 작업 ‘작품’(1970년)을 재현해 첫 전시 이후 처음으로 다시 선보인다. 거울 여러 개와 두개골, 골반 엑스레이 필름을 재료로 활용한 작품이다.마지막 4부는 연작 ‘접합’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는 ‘접합-배압법’(1974-1975)이다. 이 무렵 작가는 마포 뒷면에 물감을 듬뿍 바르고 나무 주걱으로 물감을 밀어내는 ‘배압법’을 고안했다. 이런 배압법을 이용한 여러 시도들을 4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하종현의 작품 속에 담긴 시대적 메시지와 물성에 관한 이야기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아트선재센터는 이번 전시와 연계해 지난해 10월 신정훈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와 정연심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레슬리 마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근현대 아시아 미술 큐레이터 등이 참여한 심포지엄도 개최했다. 세 연구자가 심포지엄에서 발제한 ‘근대화의 회화, 면밀하고 고집스럽게 물질주의적인’(신정훈), ‘하종현의 6년(1969~1975): 매체의 물질성에 대한 실험과 방법론’(정연심), ‘표식 만들기의 정치학: 1960~1970년대 하종현 회화’(레슬리 마)는 전시 도록에 수록돼 다음 달 출간 예정이다. 4월 20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오늘은 오랜만에 미술 시장 소식을 전합니다.지난주 금요일인 2월 7일, 아트바젤 홍콩 디렉터인 앤젤 쓰양-러가 한국 언론을 상대로 기자간담회를 열었습니다.그간 아트바젤 홍콩은 디렉터가 조용히 방문해 몇 개 매체와 개별 인터뷰를 진행한 적은 있었지만 기자 간담회는 이번이 처음입니다.이렇게 이례적이고 적극적인 행보에 미디어의 관심과 궁금증도 커졌습니다. 디렉터와 인터뷰로 아트바젤 홍콩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아시아 예술 커뮤니티를 중심에기자간담회가 끝나고 만난 쓰양-러는 2022년부터 디렉터로 선임되었는데, 이 때 아트바젤 홍콩이 10년 차를 넘어섰고 이에 따라 아트페어가 맡은 역할도 달라졌다고 강조했습니다.“2012년 아트바젤 홍콩이 처음 개최됐을 땐 홍콩에 미술 기관이나 로컬 작가가 별로 없어 협업할 여지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첫 10년은 홍콩의 아트 커뮤니티가 성장하도록 도우면서 서구의 예술을 가져와 보여주는 데 초점이 있었죠.”아트바젤 홍콩 창립 멤버인 쓰양-러의 말처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트바젤 홍콩은 ‘서구 시장’을 보러 간다는 의미가 컸습니다. 가고시안, 화이트큐브, 하우저 앤드 워스 등 글로벌 갤러리가 가져오는 유럽과 미국의 유명 작가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요.홍콩에서 활동하는 작가나 큐레이터도 있지만 아트페어나 갤러리, 경매에 이들이 설 자리는 많지 않았고 이 때문에 장터의 역할만 할 뿐 현지 예술 커뮤니티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이런 가운데 아트바젤 홍콩의 두 번째 10년(second decade)은 홍콩은 물론 아시아의 예술 커뮤니티가 중심이 될 것이라고 쓰양-러 디렉터는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이제는 서구에 아시아 예술을 가르치는(educate) 것이 더 중요한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아시아 아티스트에게 더 스포트라이트를 주고 강조하고 있죠.이제 홍콩에는 글로벌 갤러리나 경매사의 헤드쿼터뿐 아니라 M+ 같은 미술 기관도 있고 로컬 큐레이터나 예술가들도 성장하면서 제법 예술 생태계를 갖추게 되어 그것이 가능해졌습니다.지역 예술계가 튼튼해야만 아트페어도 꾸준히 지속될 수 있습니다. 로컬 아티스트, 큐레이터가 성장하도록 돕는 것은 주최 도시인 홍콩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죠.더 나아가서는 홍콩을 넘어 아시아 다른 예술 기관과도 적극적으로 협업하고 싶습니다.“쓰양-러의 설명은 제가 아트바젤 홍콩의 변화에 대해 흥미롭게 보고 있던 부분과도 일치합니다.최근 홍콩의 아트페어뿐 아니라 갤러리나 미술 기관에서도 그 중심축이 ‘아시아’로 옮겨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이는 2019년 대규모 반송환법 시위, 국가보안법 제정, 그리고 팬데믹으로 인한 국경봉쇄까지 일련의 이벤트를 계기로 홍콩에 더욱 강해진 중국 중앙 정부의 영향력도 배경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뿐만 아니라 글로벌 경제가 자국 중심주의로 흘러가고 있는 만큼 ‘미술 장터’인 아트페어가 생존하려면 ‘로컬 마켓’에 집중할 필요도 있겠지요.아트바젤이 한국에서 하려는 건?이제 남은 궁금증은 ‘아트바젤이 한국에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였습니다. 쓰양-러 디렉터는 “한국에는 이미 키아프와 프리즈가 있기 때문에 아트페어를 계획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의 고객과 직접 접촉하고 어떤 협업을 할 수 있을지 알아보고 싶다”고 했습니다.기자 간담회에서도 친근하게 한국말로 인사를 하고, ‘어릴 때부터 한국 사람이냐는 말을 들었다’며 한국에 대한 관심을 적극 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요.인터뷰 도중에는 한국의 젊은 컬렉터와 만나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하고, “서울 말고 대구, 부산, 제주도 가보고 싶다”며 “그곳에도 예술 현장이 있지 않느냐”며 한국 미술계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그래서 아트바젤이 아트페어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물었습니다.쓰양-러 디렉터는 싱가포르에서 열었던 동남아시아 현대미술가 그룹전 ‘SEA Focus’, 일본에서 연 현대미술 투어 프로그램 ‘아트 위크 도쿄’를 예시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에 가장 적합한 프로그램이 무엇일지는 아직 모르겠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적극 제안해달라”고 밝혔습니다.올해 아트바젤 홍콩은 홍콩컨벤션센터(HKCEC)에서 3월 26~27일 프리뷰를 거쳐 28일부터 30일까지, 42개국 240개 갤러리가 참여해 개최됩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글로벌 아트페어 ‘아트바젤 홍콩’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중국 홍콩에서 열리는 아트바젤 홍콩은 수년 전만 해도 가고시안, 하우저 앤드 워스, 화이트큐브 등 서구 대형 화랑의 작품을 아시아 컬렉터에게 소개하는 장이었다. 하지만 2019년 반송환법 시위, 2020년 팬데믹 등을 거치며 홍콩에서 중국 정부의 영향력이 강해진 뒤로는 아트페어도 서구보다는 아시아 시장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7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아트바젤 홍콩 디렉터 에인젤 쓰양러(사진)는 “이제 아트바젤 홍콩은 서구에 아시아 예술을 교육(educate)하고,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 예술계를 후원하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이러한 움직임은 최근 아트바젤의 공격적인 ‘홍콩 마케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아트바젤은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아트바젤 파리’에 팝업 카페를 열었다. 홍콩의 밀크티와 에그타르트를 맛볼 수 있는 ‘차찬텡(茶餐廳·서민 식당)’을 콘셉트로 한 이 카페에는 홍콩 현대 미술가 트레버 영의 작품을 전시했다. 유럽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이 몰리는 장소에 홍콩 문화 예술을 알리는 장을 마련한 셈. 쓰양러 디렉터는 “차찬텡 팝업은 팬데믹 시기에 기획했는데, 마침 아트바젤을 통해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고 싶다는 홍콩관광청의 제안으로 실현된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그간 아트바젤 홍콩을 찾은 미술 관계자들은 홍콩이 “작품을 사고파는 시장만 있고 미술 생태계는 없다”는 지적을 해왔다. 홍콩은 글로벌 갤러리나 경매사는 많지만 공공 미술관이나 전시 공간은 부족해, 유명 화랑이나 작가만 경제적 이득을 보고 현지 작가나 큐레이터는 들러리 역할만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쓰양러 디렉터는 “2012년 아트바젤 홍콩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서구 예술을 가져와 소개하는 역할에 그쳤지만 10년을 넘어선 지금은 역할이 달라졌다”며 “그동안 홍콩에도 M+ 같은 공립 미술관과 비영리 전시 공간 등 예술 생태계가 갖춰졌다”고 설명했다. 올해 아트바젤 홍콩은 주제 기획전 ‘카비넷’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이나 아시아 디아스포라 작가를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홍콩 독립 예술기관인 ‘파라 사이트’와 협력해 영상 작품을 상영하는 ‘필름’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쓰양러 디렉터는 한국 미술계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기획한 동남아시아 현대미술가 그룹전 ‘SEA Focus’나 일본에서 연 현대미술 투어 프로그램 ‘아트 위크 도쿄’ 등처럼 한국 고객들과 더 가깝게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2025 아트바젤 홍콩은 다음 달 26, 27일 프리뷰를 거쳐 28∼30일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42개국 240개 갤러리가 참여해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글로벌 아트페어 ‘아트바젤 홍콩’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중국 홍콩에서 열리는 아트바젤 홍콩은 수년 전만 해도 가고시안, 하우저 앤드 워스, 화이트큐브 등 서구 대형 화랑의 작품을 아시아 컬렉터에게 소개하는 장이었다. 하지만 2019년 반송환법 시위, 2020년 팬데믹 등을 거치며 홍콩에서 중국 정부의 영향력이 강해진 뒤로는 아트페어도 서구보다는 아시아 시장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7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아트바젤 홍콩 디렉터 앤젤 쓰양-러는 “이제 아트바젤 홍콩은 서구에 아시아 예술을 교육(educate)하고,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 예술계를 후원하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이러한 움직임은 최근 아트바젤의 공격적인 ‘홍콩 마케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아트바젤은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아트바젤 파리’에 팝업 카페를 열었다. 홍콩의 밀크티와 에그타르트를 맛볼 수 있는 ‘차찬텡(茶餐廳·서민 식당)’을 콘셉트로 한 이 카페에는 홍콩 현대 미술가 트레버 영의 작품을 전시했다. 유럽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이 몰리는 장소에 홍콩 문화 예술을 알리는 장을 마련한 셈. 쓰양-러 디렉터는 “차찬텡 팝업은 팬데믹 시기 기획했는데, 마침 아트바젤을 통해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고 싶다는 홍콩관광청의 제안으로 실현된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그간 아트바젤 홍콩을 찾은 미술 관계자들은 홍콩이 “작품을 사고파는 시장만 있고 미술 생태계는 없다”는 지적을 해왔다. 홍콩은 글로벌 갤러리나 경매사는 많지만 공공 미술관이나 전시 공간은 부족해, 유명 화랑이나 작가만 경제적인 이득을 보고 현지 작가나 큐레이터는 들러리 역할만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쓰양-러 디렉터는 “2012년 아트바젤 홍콩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서구 예술을 가져와 소개하는 역할에 그쳤지만, 10년을 넘어선 지금은 역할이 달라졌다”며 “그동안 홍콩에도 M+ 같은 공립 미술관과 비영리 전시 공간 등 예술 생태계도 갖춰졌다”고 설명했다. 올해 아트바젤 홍콩은 주제 기획전 ‘카비넷’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이나 아시아 디아스포라 작가를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홍콩 독립 예술기관인 ‘파라 사이트’와 협력해 영상 작품을 상영하는 ‘필름’ 프로그램도 마련했다.쓰양-러 디렉터는 한국 미술계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싱가폴에서 기획한 동남아시아 현대미술가 그룹전 ‘SEA Focus’나 일본에서 연 현대미술 투어프로그램 ‘아트 위크 도쿄’ 등처럼 한국 고객들과 더 가깝게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서울뿐 아니라 대구, 부산, 제주까지 방문해 한국의 예술 생태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며 “한국에 맞는 프로그램은 여전히 고민 중이고 관심 있는 기관이 있다면 적극 제안해 주면 좋겠다”고도 했다.2025 아트바젤 홍콩은 다음 달 26~27일 프리뷰를 거쳐 28~30일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42개국 240개 갤러리가 참여해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7일 찾은 서울 서초구 신시컴퍼니의 뮤지컬 ‘원스’ 연습실. 두 주연 배우가 원작 영화의 삽입곡인 ‘Falling Slowly’를 부르기 시작했다. 기타를 든 남배우와 피아노 앞에 앉은 여배우가 전부였지만 화려한 배경이나 조명 없이도 배우들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아일랜드 더블린 거리에서 소형 디지털 캠코더로 찍은 초저예산 영화의 감성이 그대로 묻어났다. 19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막을 올리는 ‘원스’는 영화가 원작인 뮤지컬. 최근 연극 ‘타인의 삶’과 ‘바닷마을 다이어리’, ‘셰익스피어 인 러브’, ‘렛 미 인’ 등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들이 연달아 무대에 오르고 있다. 원작 영화의 익숙한 감성을 되살리면서도 무대에서 차별적인 요소를 가미해 관객 사로잡기에 나섰다.● 스크린 속을 걷는 듯한 생동감 원스 연습실에서 만난 코너 핸래티 협력 연출은 “뮤지컬 원스는 구슬픈 노래를 가만히 듣기만 하는 공연이 아니다”라며 “노래를 녹음하다 싸우는 장면, 체코인들의 파티 장면 등 다이내믹한 연출이 많다”고 강조했다. 담당 극작가인 엔다 월시도 처음엔 특별한 서사 없이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지는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기 어려워 고민했지만 음악 자체에서 가능성을 봤다고 한다. 이런 고민 끝에 뮤지컬은 원작 음악은 살리되, 무대의 생동감을 극대화한 방향으로 제작됐다. 우선 오케스트라 없이 출연진이 직접 악기를 연주한다. 한 배우가 피아노와 만돌린, 벤조, 멜로디카 등 9개 악기를 연주하는 경우도 있다. 총 16개의 악기가 활용되는, 배우 입장에서는 고난도의 공연이다.공연 전 20분 동안 ‘프리쇼(pre-show)’가 펼쳐지는 것도 눈길을 끈다. 관객들은 아일랜드의 바(bar)처럼 꾸며진 무대에 올라가 음료를 살 수 있다. 배우들은 기타, 아코디언, 만돌린 같은 악기를 즉흥 연주한다. 배우에게 말을 걸거나 즉흥 연기를 감상할 수도 있다. 영화 ‘원스’ 스크린 속으로 관객이 실제로 들어가는 기분을 선사하는 연출이다.이러한 연출 방식은 해리포터 소설이 마무리된 뒤 연극으로 만들어진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를 연출한 존 티퍼니의 개성이 잘 묻어난다. 그의 또 다른 연출작이자 영화가 원작인 연극 ‘렛 미 인’도 7월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국내 관객을 만난다. 티퍼니는 “사뮈엘 베케트가 쓴 것 같은 뱀파이어 이야기”라고 영화 ‘렛 미 인’을 설명했다. 최승희 신시컴퍼니 홍보실장은 “한겨울 눈밭의 스산한 기운, 핏빛 사랑과 뱀파이어를 눈앞에서 보는 듯한 충격 등을 라이브 무대의 특징을 살려 표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검증된 예술 영화들을 무대로 7월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막을 올릴 예정인 ‘셰익스피어 인 러브’처럼 할리우드 영화를 원작으로 화려한 의상과 캐스팅을 선보이는 작품도 있다. 제작사 쇼노트 관계자는 “영화가 이미 관객을 만난 적이 있기 때문에 제목만 들어도 알 만한 작품은 쉽게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독립 예술 영화가 원작인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 일도 잦아졌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선보인 연극 ‘타인의 삶’은 동명 영화가 원작.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동독에서 사상범으로 의심받는 예술가들을 감시하던 비밀경찰이 점차 그들의 삶에 동화되는 과정을 담아 2007년 미국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연극은 오히려 무대를 단순하게 만들고, 인물의 감정을 극대화한 연출로 흥행에 성공했다. 칸국제영화제 등에서 상을 받은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도 한국에서 연극으로 제작해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3월 23일까지 관객을 만나고 있다. 이러한 예술 영화 원작 작품은 문화에 관심도가 높은 관객에게 소구력이 있다. 독창적인 스토리와 감성적인 분위기, 서정적인 화면 등도 무대 연출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평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2023년 6월 국내 출간돼 4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도둑맞은 집중력’ 저자가 이번엔 ‘마법의 약’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작은 바늘이 달린 파란색 펜을 배에 찌르고 약물을 투입한 지 이틀 뒤. 저자는 늘 먹던 치킨 마요네즈 샌드위치를 겨우 몇 입 베어 물고는 배가 불렀다. 결국 음식을 남길 정도로 식욕이 떨어진 걸 느낀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체중을 9.5kg이나 감량했다! 이 약의 이름은 ‘오젬픽’.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다이어트약으로 유명해진 비만 치료제다. 이 책은 저자가 요즘 서구를 강타하는 신종 비만 치료제를 직접 경험하고 취재한 내용을 생생하게 담았다. 오젬픽, 위고비, 마운자로 등은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GLP-1 호르몬’ 유사체다. 췌장에서 분비되는 GLP-1은 혈당을 조절하고 식욕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비만 치료제를 투약한 사람들은 체중을 평균 5∼24% 줄이는 효과를 본다고 한다. 저자 역시 투약 며칠 만에 “식욕이라는 창에 덧문이 내려져 손톱만 한 빛밖에 통과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체중이 줄어드는 기적을 경험한 것이다. 살에 파묻혔던 목선과 광대가 드러나며 자존감도 높아졌다. 처음엔 0.25mg으로 시작했던 투약량이 점차 늘어나 1mg에 이르자 메스꺼움과 멈추지 않는 트림, 변비 등 부작용도 심해졌다. 하지만 부작용들은 음식 섭취량이 줄면서 일어난 신체 변화로 시간이 지나면서 완화됐다. 그럼에도 불편한 감정은 남았다. “우리는 어쩌다 식욕을 낮추는 약까지 필요하게 될 정도로 뚱뚱해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약을 개발한 생명과학자와 식품 산업 관계자, 몸을 연구하는 세계적 석학 등 100명이 넘는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며 신종 비만 치료제의 유행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파헤친다. 먼저 살펴본 건 ‘인간은 왜 이렇게 뚱뚱해졌느냐’였다. 원래 인류 역사를 통틀어 비만인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다 1970년대 후반부터 비만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현재 미국 성인의 약 70%, 유럽 인구의 절반이 과체중 문제를 겪고 있다. 인류는 왜 20세기 들어 갑자기 자제력을 잃고 마구잡이로 음식을 탐하게 된 걸까. 저자는 각종 화학물질로 만들어진 가공식품에서 해답을 찾는다. 50여 가지 화학물질로 딸기향을 만들어 내는 ‘딸기 없는’ 딸기맛 밀크셰이크처럼, 가공식품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양의 화학물질을 부품처럼 조립해 생산된다. 긴 유통 기간 동안 상하지 않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6000가지 이상의 식품 첨가물이 사용된다고 한다. 뭣보다 이렇게 만들어진 음식은 인간의 포만감을 손상시키도록 설계돼 있다. 그러니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위에 구멍이 난 것처럼 더 먹고 싶어진다. 결국 현대사회의 식문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포만감을 망가뜨리는 음식을 먹은 다음에 또다시 포만감을 되찾는 화학물질을 주입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저자는 비만을 개인의 식단이나 의지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질병으로 보고 원인이 되는 식문화와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물론 신종 비만 치료제가 비만으로 건강을 위협받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하다. 다만 거식증이나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전지전능한 마법의 약은 세상에 없다. 뭐든 과하면 해가 되기 마련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우리 집 입구에 걸려있던 이 그림은 상반신 누드의 젊은 남자를, 그 몸에서 초자연적인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이 남자는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진정한 너 자신이 되라’고 부추기는 듯 했다.거짓으로 꾸며낸 페르소나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숨기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다. …그림 속 남자의 눈을 충분히 오랫동안 바라본다면,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다.”이 글은 오스트리아의 화가 리하르트 게르스틀의 ‘세미 누드 자화상’을 본 감상입니다. 이 감상을 남긴 사람은 소장가인 루돌프 레오폴드의 아들인 디트하르트 레오폴드.루돌프 레오폴드는 게르스틀의 자화상 두 점을 집에 나란히 걸어 두었고, 아들 디트하르트는 어린 시절 보았지만 여전히 생생한 그 때의 느낌을 글로 적습니다.이후 오스트리아 빈 레오폴드 미술관 소장품이 된 이 작품은 지금 한국 관객을 만나고 있습니다.디트하르트가 어린 시절 이 작품의 강렬함에 시선을 빼앗긴 것처럼, 저 역시 이 푸른 자화상을 처음 보고 게르스틀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꼈습니다.신비로운 빛을 뿜어내지만, 깊은 바닷물 속에 잠긴 듯 약간은 어두움이 감도는 푸른 색.그 가운데 타월로 하반신을 간신히 가린 채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는 누드의 남자.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것은 자신감이 넘친다는 이야기지만, 어딘가 불안하고 예민한 분위기가 풍겨져 나와 눈을 떼기 어려운 그림입니다.확신과 불안 사이를 오고 가는 파란만장한 롤러코스터. 이 인물이 살았던 삶도 그랬습니다.뛰어난 재능을 가진 청년게르스틀은 어릴 때부터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무려 15세에 아카데미에 입학하며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그러나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스타일이 맞지 않음을 깨달은 그는 3년 만에 아카데미를 떠납니다.그 후 자신만의 작업실을 마련하고 ‘독학’을 시작하는데요. 이 때 그림을 그린 것은 물론 언어, 철학, 문학, 음악을 공부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습니다.당시 빈 사회를 뒤흔들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책은 물론 철학자 오토 바이닝거의 저서 ‘성격과 성’, 헨릭 입센과 프랑크 베데킨트의 극작품 등 당대 사회적 금기를 깬 연구와 문학 작품을 탐독했죠.빈 분리파가 조형적인 탐미주의에 빠져들어 새로운 표현을 고민했다면, 게르스틀은 새로운 세상을 보는 ‘눈’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이 때문에 클림트를 비롯한 빈 분리파의 작품은 ‘너무 장식적이다’라고 비판하고, 극도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이렇게 자신만의 신념을 지키고 타협하지 않으려는 ‘확신’은 그에게 무기가 되었지만,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불안’을 느끼게 하는 감옥도 되었습니다. 클림트를 거부한 신인 작가게르스틀이 추구했던 가치관은 그가 그린 인물화에서 드러납니다. 클림트의 초상화가 중산층 주문자의 취향에 맞춰 거슬리지 않는 세련된 조형미를 자랑했다면, 게르스틀은 자신의 앞에 있는 인물의 기질을 포착해서 예민하게 표현합니다.게르스틀이 그린 ‘페이 자매’는 그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던 카롤리네, 파울리네 페이 자매가 무도회 시즌이 끝난 직후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만약 클림트라면 자매가 입었던 옷의 장식적인 요소와 질감을 강조하고 여기에 현실에는 없을 디자인적인 패턴을 더해 그림을 완성했을 것입니다.그런데 게르스틀은 자세한 표현을 과감히 생략하고 거의 모노톤의 색채에 흰색 덩어리 속에 두 자매가 엉켜 있는 모습으로 그립니다.당시 자매의 나이는 19세, 22세. 이 무렵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무엇이든 함께하고 가깝게 지내지만 때로는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복잡한 자매의 심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자매를 둘러싼 시커먼 배경은 정체성의 갈등을 암시하는 듯 하죠.이렇게 게르스틀은 ‘선배 화가들과는 다른 길을 가겠다’며 확고한 자기만의 세계를 추구했지만, 이러한 태도가 그에게 독이 되기도 했습니다.게르스틀의 그림을 흥미롭게 본 갤러리스트가 그에게 전시를 제안하지만 ‘내 작품을 클림트와 함께 걸기 싫다’며 클림트를 참여 작가에서 빼달라고 요구해 전시 기회를 놓친 적도 있으니까요.25세 나이로 마감한 삶“누구도 게르스틀을 공격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을 맞서 싸워 지켜내야 한다고 느꼈다.”디트하르트 레오폴드가 게르스틀에 대해 한 말입니다.이렇게 세상과 싸울 준비가 된 게르스틀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가깝게 지낸 선배 화가가 국왕을 옹호하는 전시에 참여한다고 하자, 이에 대해 강하게 문제 제기하며 인연을 끊습니다.또 유명해지기 전 작곡가 쇤베르크를 만나 서로의 예술에 공감하며 친하게 지내지만, 그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결국 이 사건으로 크게 상처를 받은 게르스틀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25세로 짧은 삶을 마감하죠.그 후 빈 예술계에서 ‘기인’ 게르스틀의 이름은 빠르게 잊혀졌고, 재발굴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50년대. 열정적인 소장가와 미술사가들이 게르스틀의 작품을 재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1970년대 후반에는 독일 베를린 화가들이 게르스틀의 강렬한 주관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고, 빌럼 드 쿠닝, 게오르그 바젤리츠도 그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습니다.지금은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와 함께 빈 표현주의의 문을 연 작가로 평가 받습니다.비록 작가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지만 뒤늦게라도 평가를 받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여러 가지 가치가 혼재하며 폭발했던 1900년대 도시 빈에서 게르스틀이 찾고 싶었던 자신의 자리는 50년이 지나야만 마련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게르스틀을 가르쳤던 한 화가는 “게르스틀은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그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내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적기도 했는데요.이렇게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다 가라앉고 만 한 사람의 인생, 이제는 푸른 배경의 강렬한 초상화가 살아 남아 그 가치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과거의 인기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몰락한 배우 노마 데스몬드의 이야기를 담은 1950년 할리우드 영화 ‘선셋대로’. 오리지널 포스터는 주연의 얼굴을 사진으로 강조하지만, 폴란드 작가 발데마르 시비에지가 그린 포스터는 짙푸른 아이섀도와 문어 다리 같은 머리칼로 데스몬드의 광기를 묘사한다. 경기 양평군 ‘이함캠퍼스’에서 6월 22일까지 열리는 ‘침묵, 그 고요한 외침_폴란드포스터’ 전시는 함축적이고 독창적인 폴란드 포스터 200점을 선보인다. 예지 플리삭이 디자인한 ‘로마의 휴일’ 포스터는 유럽을 순방 중인 호기심 많은 공주(오드리 헵번)의 탈출을 공주가 입은 새빨간 치마와 개선문 위에서 두리번거리며 공주를 찾는 수행원들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주최 측은 “폴란드 포스터는 ‘폴란드 포스터파’로 불릴 정도로 참신한 표현으로 주목 받으며 1950∼1960년대 세계 그래픽 디자인의 전환점이 됐다”고 설명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국 뉴욕에서 ‘애나 델비’라는 가짜 이름으로 독일 상속녀 행세를 하며 거액을 투자받았다가 결국 옥살이까지 했던 사기꾼 애나 소로킨(35). 실제 인물인 그를 모티프로 한 영국 웨스트엔드 초연작 ‘애나 엑스’가 국내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 연극은 소로킨에서 영감을 얻은 주인공 ‘애나’와 가상의 스타트업 대표 ‘아리엘’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한다. 아리엘은 유명인이나 화려한 외모를 가진 이들만 가입하는 프라이빗 데이트 매칭 앱을 만들어 거액의 투자를 받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업을 “실현 가능하단 증거도 없는 허상”이라며 “그냥 인간 본성의 천박함뿐인 아이디어에 투자한 것”이라고 자조한다. 그러면서도 더 높은 곳을 향한 욕망은 가득하다. 그런 아리엘의 눈에 상류층 상속녀 애나는 완벽한 파트너. 애나는 자신을 사랑하는 아리엘을 보며 조금씩 가면을 벗으려는 듯 고민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만든 허상은 끝내 파국에 이른다.‘애나 엑스’에서 먼저 눈에 띄는 건 스마트폰 화면처럼 꾸민 무대다. 두 사람이 소셜미디어 등으로 주고받는 메시지가 영상으로 떠 연극 무대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다만 메시지를 영어 원문 그대로 사용한 건 상당수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낄 대목이다. 애나라는 여주인공에 돈이 넘쳐나는 실리콘밸리의 ‘될 때까지 속여라(fake it till you make it)’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 아리엘을 결합한 점도 흥미롭다. 극 중에서 애나는 데이미언 허스트, 제프 쿤스 같은 현대 미술가들을 자주 언급한다. 이 작가들의 ‘실체 없는 아이디어’가 미술 시장에서 큰 거품을 만들어 내는 현상은 두 캐릭터의 실존을 반영하는 듯하다. 극에선 여러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모두 두 배우가 연기하는 2인극이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 역할이 수시로 바뀌어 두 배우는 애나와 아리엘일 땐 항상 같은 옷을 입는다. 스타트업 대표인 아리엘이야 스티브 잡스가 떠올라 그렇다 치지만, 거부 상속녀인 애나의 근사한 의상을 기대했다면 아쉬울 수 있다. 다만 설정상 사람들의 환상 속에선 화려하지만, 실체는 아무것도 없는 애나를 표현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애나 역은 최연우 한지은 김도연, 아리엘 역은 이상엽 이현우 원태민이 맡았다. ‘클로저’, ‘올드 위키드 송’을 연출했던 김지호 연출 작품.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U+ 스테이지. 3월 16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도트 무늬 작품으로 세계적 사랑을 받는 구사마 야요이(96).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올해 10월 회고전을 가질 예정인 일본계 미국 작가 루스 아사와(1926∼2013).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외벽에 신작 조각을 설치한 이불(61)과 프랑스 파리 미술관 ‘부르스 드 코메르스’ 돔 공간에 설치 작품을 선보인 김수자(68)까지. 최근 세계 현대 미술계에선 아시아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구순에 가까워서야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받은 김윤신 작가처럼, 그간 남성 중심의 미술 현장에서 주목받지 못하다 뒤늦게 조명받는 작가들도 있다. 이런 분위기에 맞물려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여러 아시아 국가의 여성 작가들에게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전을 계기로 여성 미술의 키워드를 살펴봤다.● ‘나의 몸’이 곧 미술 소재이번 전시는 1960년대 이후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 130여 점을 모았다. 대부분 한국에서 처음 소개된다. 제목처럼 이번 전시에 선보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공통 키워드는 ‘몸’이다. 작가들은 자신의 몸을 본떠 조각을 만들거나, 임신·출산 등의 경험을 토대로 작업했다. 또 직접 자기의 몸을 재료로 퍼포먼스에 나서기도 했다. 이를테면 조각이나 회화로 친숙한 구사마도 초기에는 자기 몸에 직접 점을 붙이고 행위예술을 펼쳤다. 영상 ‘자기소멸’에서 구사마는 자신의 몸은 물론이고 나무, 바위, 고양이 몸에 동그라미 모양 스티커를 붙이거나, 타인의 몸에 원형을 그린다. 모든 걸 점으로 뒤덮으며 나와 타인의 ‘경계 허물기’를 시도했다.‘지옥의 문’으로 유명한 일본 작가 다나카 아쓰코는 실험미술그룹 ‘구타이 미술협회’의 1956년 그룹전에서 전구 90개와 진공관 100여 개를 연결한 ‘전기 드레스’를 직접 입었다. 이 전기 드레스를 회화로 옮긴 게 바로 ‘지옥의 문’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최근 주목받는 차학경(1951∼1982)의 ‘눈먼 목소리’는 길거리에서 단어를 쓴 천을 이용해 구현한 행위예술이다. 이민자로서 겪는 언어·자아상실의 경험을 담았다.● 저항과 연대를 통한 공감필리핀의 선구적인 미술가로 평가받는 이멜다 카지페 엔다야도 주목할 작가다. 설치작 ‘돌봄을 이끄는 이들의 자매애를 복원하기’는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던 비밀결사조직 ‘카티푸난’에 속한 여성 조직원들의 연대를 표현했다. 이처럼 아시아 여성 작가들은 식민주의에 맞서는 등 체제에 저항하며 서로 공감하는 점도 또 하나의 키워드라 할 수 있다.인도네시아 작가 멜라 야르스마 역시 20세기 초 네덜란드 식민 지배에 있던 인도네시아의 역사가 짙게 밴 작품을 선보였다. 서구 옷과 원주민 옷을 절충한 어떤 형태를 표방해 만든 작품을 관객이 직접 입어보도록 하며 인도네시아의 아픈 기억을 만나도록 유도한다. 신체를 우주의 축소판으로 보고 그 속에 흐르는 기운을 드로잉으로 표현한 중국 작가 궈펑이의 ‘자유의 여신상’, 인도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므리날리니 무케르지의 ‘바산티(봄)’도 드로잉이나 섬유 같은 재료를 이용해 공감의 영역을 넓히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배명지 학예연구사는 “가부장제나 국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 ‘아시아’에서 그러한 체계를 몸으로 느끼고, 그 몸으로 저항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려고 했던 여성들의 작품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7일에는 한국과 중국, 일본, 대만, 필리핀 등 아시아 여성 미술 연구자와 문화 인류학자 등 8인이 참여한 심포지엄도 열린다. ‘아시아 여성 미술: 역사적 맥락’ ‘미술 너머: 해석과 담론’ ‘콜렉티비즘: 다공적, 집단적 신체’ 등의 연구가 발표된다. 전시는 다음 달 3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조선의 마지막 화원(畵員·궁중 화가)’으로 불리는 서화가 심전 안중식(1861∼1919)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 제품을 선보이는 ‘양양화관(洋洋畵館)’전이 7일부터 열린다. 심전의 4대손이자 디자인하우스 ‘혜(HYE)’의 대표인 정성혜 인하대 패션디자인전공 명예교수는 서울 종로구 예올에서 개최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액자 형태의 작품과 스카프 등 60여 점을 소개한다. 안중식이 제자에게 써 준 글씨인 ‘양양화관’은 19세기 말∼20세기 초 동양과 서양, 옛것과 새것,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던 혼란스러운 시대에 동서양이 함께한다는 뜻이 담겼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선 안중식 서화에서 도상을 가져온 제품들은 물론이고 조선시대 민화와 규방 예술, 장식 조형예술 등에서 영향을 받은 작업의 결과물도 관객들을 만난다. 16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012년 프랑스 리옹. 세 살 여자아이가 음식을 잘못 삼켜 기도가 막히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의료진은 뇌에 산소가 몇 분 동안 공급되지 못해 아이가 사실상 식물인간이 됐다며 연명 치료 중단을 권했다. 하지만 메일린은 뇌사 판정 약 40일 만에 깨어났다. 지금은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메일린의 기적’이 신앙의 힘으로 일어났다고 믿는 메일린의 아버지가 그 경험을 써 내려간 책이다. 메일린의 부모 에마뉘엘 트란과 나탈리 인실 트란은 아이가 식물인간이 된 막막한 상황에서도 기도를 이어가며 믿음을 잃지 않았다. 아버지 에마뉘엘은 가톨릭을 믿지 않았지만 사고 뒤 세례를 받고 시간이 날 때마다 기도했고, 꿈속에서 신의 음성을 듣는 경험도 했다고 말한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도 ‘살아있는 묵주 기도회’를 조직해 메일린을 위해 기도했다. 이 기도회는 19세기 리옹에서 교황청 전교회를 설립한 폴린 마리 자리코(1799∼1862)에게 전구(轉求·천주교 신자가 다른 이에게 자신의 기도를 하느님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는 것) 기도를 했다. “기도가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안식처였다”는 저자는 메일린이 회복하자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고 확신했다. 메일린의 회복이 ‘기적’으로 바티칸의 공식 승인을 받는 과정도 기록했다. 교황청은 수년에 걸쳐 ‘메일린의 기적’을 조사했다. 먼저 메일린의 의료 기록을 살펴보고 당시 뇌 손상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는지 다른 의사들에게도 자문했다. 또 메일린 가족들을 평의회로 초청해 이야기를 들으며 신빙성을 검증했다. 교황청은 현대의학에서 치료법이 없는 환자가 완치되고 재발이나 후유증이 없으며 신학적으로도 합당하다고 판단하면 교황의 승인을 거쳐 기적으로 선포한다. 메일린의 회복은 2020년 5월 26일 교황청이 공식 인정한 ‘기적’이 됐다. 메일린의 부모가 기도했던 폴린 마리 자리코는 2022년 가톨릭의 성인 이전 단계인 복자(福者)로 선포됐다. 메일린의 엄마 인실은 한국에서 입양된 여성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가톨릭 신자인 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이 기획하고 취재해 다큐멘터리로 만들었고, 지난해 성탄절 가톨릭평화방송에서 방영됐다. 기적에 대한 믿음과 별개로 삶에 대한 경외심이 느껴진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드라마 ‘수사반장’ ‘한지붕 세가족’,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 등의 각본을 쓴 윤대성 전 서울예대 교수(사진)가 27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1939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고인은 보성고와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4년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유치진이 세운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를 수료한 뒤 희곡 ‘출발’로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당선됐다. 방송사 전속 작가와 시나리오 작가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한 고인은 드라마 ‘수사반장’ ‘알뜰가족’ ‘한지붕 세가족’과 영화 ‘방황하는 별들’ ‘그들도 우리처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의 극본을 썼다. 사회성 짙은 연극 작품인 ‘미친 동물의 역사’와 ‘사의 찬미’ ‘남사당의 하늘’ 등도 고인의 대표작이다. 1980년부터 2004년까지 서울예대에서 극작을 가르쳤으며, 2011년 대한민국예술원 연극분과 회원이 됐다. 2015년 국내 희곡 작가로는 처음으로 ‘윤대성 극문학관’이 경남 밀양 연극촌에서 개관했다. 같은 해 창작 희곡 발굴 및 신진 작가 양성을 위한 ‘윤대성 희곡상’도 제정됐다. 저서로는 ‘윤대성 희곡집’, ‘극작의 실제’, 소설 ‘고백’ 등이 있다. 동아연극상과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상, 동랑 유치진 연극상, 국민포장 대통령 표창 등을 받았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나무 프레임에서 캔버스 천이 떨어져 나올 것처럼 흘러내린다. 이 천을 뒤에서 누군가가 잡아당겨 팽팽한 긴장감이 생겨난다. 그런데 천을 당기는 사람은 천에 가려져 있고, 뒤에서 비치는 환한 조명 덕분에 실루엣만 보인다. 그림자만 드러날 뿐 이 사람의 모습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에서 더 묘한 대목은 바로 나무 프레임이다. 현실에서라면 이 프레임을 받치는 이젤이 설치됐겠지만 그림 속에선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인물이 등장하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아 초상화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모습인지라 초현실주의 추상화 같기도 하다. 17일부터 서울 용산구 갤러리바톤에서 열리고 있는 데이비드 오케인(40)의 개인전 ‘자아의 교향곡’에서 선보인 작품 ‘땅거미’다. 아일랜드 출신인 오케인은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다. 한국에서 세 번째로 갖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캔버스 천을 둘러매고 씨름하는 성인 남성, 이 천을 갖고 노는 어린아이 모습을 담은 신작들을 공개했다. 때로는 기괴하고 때로는 유머러스한 이미지를 통해 작가는 관객을 상상의 내면 세계로 초대한다. 17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캔버스와 씨름하는 남성은 자기 모습을, 어린아이들은 조카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카메라를 설치한 다음 캔버스 뒤로 가서 내 모습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수백 장의 컷을 기록한다”며 “마지막에는 10여 장의 장면을 추려서 고민하는데, 가족과 가까운 사람의 의견을 듣고 나에게 가장 끌리는 최종본을 골라 그림으로 만든다”고 했다. 예술 작품, 특히 회화의 의미나 개념을 고민하고 모호한 경계를 탐구하는 것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주제다. 다만 과거에는 예술가들이 단순한 설치나 오브제로 표현했다면, 최근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작가들은 이를 뛰어난 기교를 갖춘 회화로 표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주름진 캔버스, 사실적인 인체 표현, 여기에 빛과 그림자를 넣어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오케인의 작품은 이런 경향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2월 1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나무 프레임에서 캔버스 천이 떨어져 나올 것처럼 흘러내린다. 이 천을 뒤에서 누군가가 잡아당겨 팽팽한 긴장감이 생겨난다. 그런데 천을 당기는 사람은 천에 가려져 있고, 뒤에서 비치는 환한 조명 덕분에 실루엣만 보인다. 사람의 그림자만 드러날 뿐 이 사람의 모습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이 그림에서 더 묘한 대목은 바로 나무 프레임이다. 현실에서라면 이 프레임을 받치는 이젤이 설치됐겠지만 그림 속에선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인물이 등장하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아 초상화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또 현실에서 불가능한 모습을 그려 초현실주의 추상화 같기도 한. 17일부터 서울 용산구 갤러리바톤에서 열리고 있는 데이비드 오케인(40)의 개인전 ‘자아의 교향곡’에 선보인 작품 ‘땅거미’다.아일랜드 출신인 오케인은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다. 한국에서 세 번째로 갖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캔버스 천을 둘러매고 씨름하는 성인 남성, 이 천을 갖고 노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신작들을 공개했다. 때로는 기괴하고 때로는 유머러스한 이미지를 통해 작가는 관객을 상상의 내면 세계로 초대한다.17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캔버스와 씨름하는 남성은 자기 모습을, 어린아이들은 조카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카메라를 설치한 다음 캔버스 뒤로 가서 내 모습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수백 장의 컷을 기록한다”며 “마지막에는 10여 장의 장면을 추려서 고민하는데, 가족과 가까운 사람의 의견을 듣고 나에게 가장 끌리는 최종본을 골라 그림으로 만든다”고 했다.예술 작품, 특히 회화의 의미나 개념을 고민하고 모호한 경계를 탐구하는 것은 현대 미술의 중요한 주제다. 다만 과거에는 예술가들이 단순한 설치나 오브제로 표현했다면, 최근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작가들은 이를 뛰어난 기교를 갖춘 회화로 표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주름진 캔버스, 사실적인 인체 표현, 여기에 빛과 그림자를 넣어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오케인의 작품은 이런 경향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2월 1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8년 전 구라파의 북쪽에서 거침없는 구라와 호구 짓을 남발하며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들었던 그가 이번에는 구라파 남쪽에 떴다.”(소설가 김호연)2016년 ‘베를린 일기’와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픽션과 섞어 ‘기차와 생맥주’를 썼던 소설가 최민석이 이번엔 스페인 마드리드로 향했다. 2022년 교환 작가 프로그램에 선발돼 두 달여 동안 마드리드에 머물게 된 작가는 매일 일기를 썼다. 타국에서의 경험은 제때 쓰지 않으면 나중엔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이유였다.책을 펼치면 마드리드에 도착한 날부터 마지막까지 매일 보고 겪은 시시콜콜한 일상이 사진과 함께 나타난다. 자전거 대여 상점 직원과 대화를 나누다 소설가라는 이야기까지 하게 되고, 그다음 “사진을 찍자”는 제안을 거절하다 ‘도난 방지를 위해 기록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머쓱해한다. 자전거에 호기롭게 ‘로시난테’라고 별명을 붙였다가 불편한 승차감에 ‘거북선’으로 바꾼다. 유머러스한 문장으로 사랑받는 작가의 마드리드 일기는 현실에서 언어 장벽으로 미처 던지지 못한 재치 있는 말들을 저장해 놓았다 글로 한꺼번에 풀어 놓은 느낌이다. 좌충우돌의 순간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방인의 눈으로 더 깊게 본 도시의 잔상들도 만날 수 있다. ‘시에스타’(낮잠)와 ‘피에스타’(축제)가 공존하는 뜨거운 도시의 풍경, 그 속에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는 레스토랑 직원, 서른 살의 나이 차에도 상관없이 친구가 된 독일인, 고향에 대한 향수를 함께 나누었던 교포 등 다른 듯 같은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이 드러난다.마드리드에서 스페인어 학원에 다니며 ‘이걸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 소설 집필을 못 해서 문학적 궤도에서 멀어질 뿐인데 왜 공부하려 하는가’라고 일기에서 스스로 묻던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돌이켜보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든 건 언제나 금전적 보상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순수한 즐거움을 바라며 삶에 무용한 것을 꾸준히 하다 보면, 삶은 언젠가 보상을 준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여기 피리를 부는 소년이 서 있습니다.소년의 눈동자는 정면을 응시하고, 오므린 입술은 그가 연주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피리를 따라 왼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소년의 손가락 하나가 올라와 있고, 수직으로 올라간 시선은 그 아래 금관 악기로 이어집니다. 이 흐름을 소년이 두르고 있는 흰 띠가 부드럽게 감아올리죠.이 그림에서 이렇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흐름을 만드는 요소는 더 있습니다.소년이 입고 있는 재킷의 나란히 달린 금장 단추, 모자의 장식이 만드는 V 모양, 바지의 옆단에 붙은 검은 천,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으로 살짝 내민 왼발이 있죠.이 왼발이 그림 모서리로 향하며 마치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생동감을 줍니다.공중에 떠 있는 사람이 작품은 인상파 화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에두아르 마네가 1866년 그린 ‘피리 부는 소년’.1914년부터 1947년까지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다가 1986년 오르세 미술관의 소장품이 된 마네의 대표작 중 하나죠.이 그림에서 생동감을 만드는 여러 가지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을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소년을 감싸고 있는 텅 빈 배경입니다.다른 19세기 그림들이 전시된 곳에서 이 그림을 보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습니다.다른 작품 대부분은 여러 인물이 등장하거나, 도시나 자연의 배경이 복잡하게 놓여 있는데 이 그림은 사람 1명만 강조해 그렸기 때문입니다.다른 작품들은 1명을 모델로 초상화를 그리더라도, 의뢰를 받아 그린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 또는 그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넣고 싶은 오브제들이 그림의 배경을 채웁니다.마네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구성은 흔히 드러납니다.그런데 이 작품에서 마네는 ‘배경을 채우고 싶은 욕심’을 과감하게 버리고 노란빛이 도는 회색으로 가득 채워버렸습니다.심지어 바닥과 벽의 경계마저 지워버려 소년이 어디에 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죠. 사진과 그래픽 기술 활용이 손쉬워진 지금에는 이렇게 인물만 잘라서 단색 배경에 놓은 다음 강조하는 디자인을 사용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그런데 이 작품은 마네가 무언가를 선전하기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살롱전에 출품해서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보여주기 위해 공들여 그린 것이라는 점이 다릅니다.마네는 여기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한 걸까. 이 그림을 그리기 3년 전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공개했고, 여기서 붓 터치가 거칠고 구도가 이상하다는 지금의 시각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 비판을 받습니다.이에 상심해서 스페인 마드리드로 떠나는데요. 여기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벨라스케스를 만나다“벨라스케스가 그린 작품 옆에 전시되니 티치아노가 그린 초상화도 경직되고 생기가 없어 보이는군.”마네가 마드리드에서 프라도 미술관을 보고 난 뒤 친구 화가 팡탱 라투르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마네는 이뿐 아니라 “벨라스케스를 본 것만으로도 여행한 보람이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화가들의 화가”라고 극찬하죠. 그러면서 ‘피리 부는 소년’처럼 배경을 삭제하고 그린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인물화에 감탄합니다.“(그림에서) 배경은 사라지고 강렬한 검은 옷의 사람의 주변엔 오로지 공기만이 둘러싸고 있었다.”사람의 주변에 공기밖에 없었다는 표현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이렇게 인물을 극도로 강조할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기법을 마네는 곧바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합니다.이뿐 아니라 벨라스케스가 초상의 대상으로 누구를 택했는가에 대해서도 그는 유심히 관찰하는데요. 마네는 벨라스케스가 그린 난쟁이 초상화 연작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고 쓰기도 했습니다.“난쟁이 초상화 연작들. 특히 정면을 바라보고 주먹을 양옆으로 내리고 있는 초상화 작품은 진짜 그림을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을 위해 만든 수작이야.”정리하면 마네는 배경을 삭제한 인물화, 또 난쟁이를 모델로 한 인물화에서 감명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이것이 마네의 눈에 왜 그렇게 신선하게 보였을까. 19세기 프랑스 미술은 원근법과 해부학을 토대로 한 이탈리아 하이 르네상스 회화를 추종하는 ‘신고전주의’가 주류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이와 달리 스페인 미술은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고야 같은 거장들이 등장해 ‘아카데미 미술’에서 다소 벗어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역사화나 종교화에 녹였고, 고야는 심지어 당시 스페인의 전쟁 같은 정치적 상황이나 인간의 내면까지 파고듭니다.따라서 배경을 삭제한 인물화는 ‘사람 그 자체’를, 게다가 난쟁이를 모델로 한 인물화는 ‘아웃사이더’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니 마네가 깜짝 놀란 것이었습니다.에밀 졸라의 옹호마네는 벨라스케스처럼 평범한 사람을 배경 없는 초상화로 그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 3세 근위대 군악대에 소속된 10대 소년을 모델로 세웠고, 마네는 이 소년을 “스페인의 귀족처럼 대접”했습니다.이 소년의 얼굴과 자신이 자주 함께 일했던 모델들의 얼굴을 합해 마네는 익명의 인물을 만들어냅니다.그 결과 국가를 통치하는 왕도, 돈이 많은 귀족도 아닌, 역사 속에서 영웅으로 대접받는 인물도 아닌, 그저 피리를 부는 이름 모를 소년이 커다랗게 강조된 초상화가 탄생합니다.마네는 이 작품을 1866년 살롱전에 보냈지만, 역시나 아카데미 회원들은 이 그림을 거절했습니다. 역사화나 영웅 초상화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아카데미에겐 도발 같은 주제였으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러나 마네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거절 소식을 듣고 화가 난 마네의 친구이자 문학가, 에밀 졸라는 마네의 사실적인 그림 스타일, 그리고 권위가 아니라 인물에 집중하는 모던한 그림의 내용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옹호하는 글을 신문 연재 기사로 내보냈죠.마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자금을 모아 그 해 열린 만국박람회에 부스를 차리고 자기 작품을 전시했습니다.독특한 스타일의 회화는 곧바로 미디어의 주목을 받습니다. 대부분 부정적인 것이었지만 역시 눈 밝은 사람들은 이 그림에 바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1872년 뒤랑 뤼엘이 이 그림을 사들였고, 마네의 친구인 장 바티스트 포르, 다시 뒤랑 뤼엘, 그리고 아이작 드 카몽도 공작이 이 그림을 소장했습니다. 그리고 카몽도 공작이 세상을 떠날 때 국가에 기증하며 이 작품은 루브르와 오르세에서 전 세계 관객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6일(현지 시간) 타계한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속 세상을 살아 보는 느낌이라는 연극 ‘슬립 노 모어’, 인간 본성과 정체성을 심오하게 탐구한 걸작이란 평을 받은 ‘지킬 앤 하이드’, 2023년 미국 토니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여성 1인극 ‘프리마 파시(Prima Facie)’. 해외에서 호평 받으며 인기를 모았던 연극들이 올해 한국에서 잇따라 초연된다. 8월 한국 관객을 만나는 ‘슬립 노 모어’는 관객이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여러 방을 옮겨 다니며 보는 몰입형 연극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기본 줄거리로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레베카’와 마녀재판을 연상케 하는 미스터리하고 충격적인 장면들로 구성돼 있다. 대사 없이 몸짓과 춤으로만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한 공간에서 차례대로 전개되지 않고 배우들이 각 공간에서 1시간 길이의 동일한 연기를 총 3번 반복한다. 가면을 쓴 관객들이 관심 있는 캐릭터를 따라다니며 관람하도록 구성돼, 보는 사람마다 같은 연극을 다른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연극은 2003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된 뒤 2011년부터 미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10년 이상 장기 공연됐다. 한국 공연은 뉴욕 공연을 토대로 한다. 뉴욕에선 6층 건물 전체를 무대로 사용했는데, 한국은 지난해 문을 닫은 서울 중구 대한극장 건물을 리모델링해 공연장을 만든다. 제작사 미쓰잭슨 관계자는 “옛 대한극장 내부를 공연장으로 바꾸는 공사가 진행 중”이라며 설명했다. 지난해 영국 에든버러에서 처음 선보인 뒤 “고전의 충격적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는 평을 받은 연극 ‘지킬 앤 하이드’도 3월 4일부터 서울 종로구 대학로 TOM 2관에서 초연된다. 스코틀랜드 극작가인 게리 맥네어가 원작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지킬의 친구인 ‘어터슨’의 시점으로 재해석한 1인극이다. 이준우가 연출하고, 배우 최정원 고훈정 백성광 강기둥이 출연한다. 최정원은 2019년 이후 6년 만의 연극 출연이다. 글림컴퍼니 제작. 8월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프리마 파시’는 여성 1인극이다. 성범죄 사건 변호를 전문으로 하는 유능한 변호사였던 테사가 성폭행 피해자가 되면서 겪는 2년의 세월을 그린다. 배우 한 명이 테사를 포함한 여러 인물을 연기하며 법정 드라마와 개인의 트라우마를 결합해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테사가 변호사에서 피해 당사자가 되면서 변화하는 법체계에 대한 시각, 법정 시스템의 모순과 피해자가 겪는 어려움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2019년 호주 시드니에서 초연됐으며 2022년 런던 웨스트엔드, 2023년 뉴욕에서 공연했다. 영국 올리비에상 ‘최우수 신작’ ‘최우수 여우주연상’ 등도 받았다. 영국 맨부커상을 받은 원작과 2013년 리안(李安)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잘 알려진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도 11월 국내 초연될 예정이다. 2023년 토니상 3관왕을 받은 작품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여기 피리를 부는 소년이 서 있습니다. 소년의 눈동자는 정면을 응시하고, 오므린 입술은 그가 연주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피리를 따라 왼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소년의 손가락 하나가 올라와 있고, 수직으로 올라간 시선은 그 아래 금관 악기로 이어집니다. 이 흐름을 소년이 두르고 있는 흰 띠가 부드럽게 감아올리죠. 이 그림에서 이렇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흐름을 만드는 요소는 더 있습니다. 소년이 입고 있는 재킷의 나란히 달린 금장 단추, 모자의 장식이 만드는 V 모양, 바지의 옆단에 붙은 검은 천,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으로 살짝 내민 왼발이 있죠. 이 왼발이 그림 모서리로 향하며 마치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생동감을 줍니다.공중에 떠 있는 사람 이 작품은 인상파 화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에두아르 마네가 1866년 그린 ‘피리 부는 소년’. 이 그림에서 생동감을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소년을 감싸고 있는 텅 빈 배경입니다. 이 작품에서 마네는 ‘배경을 채우고 싶은 욕심’을 과감하게 버리고 노란빛이 도는 회색으로 가득 채워버렸습니다. 심지어 바닥과 벽의 경계마저 지워버려 소년이 어디에 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죠. 사진과 그래픽 기술의 활용이 손쉬워진 지금에는 이렇게 인물만 잘라서 단색 배경에 놓은 다음 강조하는 디자인을 사용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마네가 무언가를 선전하기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살롱전에 출품해서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보여주기 위해 공들여 그린 것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마네는 여기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한 걸까요. 이 그림을 그리기 3년 전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공개했고, 여기서 붓 터치가 거칠고 구도가 이상하다는 지금의 시각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에 상심해서 스페인 마드리드로 떠나는데요. 여기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벨라스케스를 만나다“벨라스케스가 그린 작품 옆에 전시되니 티치아노가 그린 초상화도 경직되고 생기가 없어 보이는군.” 마네가 마드리드에서 프라도 미술관을 보고 난 뒤 친구 화가 판탱라투르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마네는 이뿐 아니라 “벨라스케스를 본 것만으로도 여행한 보람이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화가들의 화가”라고 극찬하죠. 그러면서 ‘피리 부는 소년’처럼 배경을 삭제하고 그린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인물화에 감탄합니다.“(그림에서) 배경은 사라지고 강렬한 검은 옷의 사람 주변엔 오로지 공기만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렇게 인물을 극도로 강조할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기법을 마네는 곧바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또 벨라스케스가 초상의 대상으로 누구를 택했는가에 대해서도 그는 유심히 관찰하는데요. 마네는 벨라스케스가 그린 소인(小人) 초상화 연작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고 쓰기도 했습니다.“특히 정면을 바라보고 주먹을 양옆으로 내리고 있는 초상화 작품은 진짜 그림을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을 위해 만든 수작이야.” 이때 스페인 미술은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고야 같은 거장들이 등장해 ‘아카데미 미술’에서 다소 벗어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역사화나 종교화에 녹였고, 고야는 심지어 당시 스페인의 전쟁 같은 정치적 상황이나 인간의 내면까지 파고듭니다. 따라서 배경을 삭제한 인물화는 ‘사람 그 자체’를, 게다가 소인을 모델로 한 인물화는 ‘아웃사이더’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니 마네가 깜짝 놀란 것이었습니다.에밀 졸라의 옹호 마네는 벨라스케스처럼 평범한 사람을 배경 없는 초상화로 그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 3세 근위대 군악대에 소속된 10대 소년을 모델로 세웁니다. 그 결과 국가를 통치하는 왕도, 돈이 많은 귀족도 아닌, 역사 속에서 영웅으로 대접받는 인물도 아닌, 그저 피리를 부는 이름 모를 소년이 커다랗게 강조된 초상화가 탄생합니다. 마네는 이 작품을 1866년 살롱전에 보냈지만, 역시나 아카데미 회원들은 이 그림을 거절했습니다. 역사화나 영웅 초상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아카데미엔 도발 같은 주제였으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네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거절 소식을 듣고 화가 난 마네의 친구이자 문학가 에밀 졸라는 마네의 사실적인 그림 스타일, 그리고 권위가 아니라 인물에 집중하는 모던한 그림의 내용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옹호하는 글을 신문 연재 기사로 내보냈죠. 마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자금을 모아 그해 열린 만국박람회에 부스를 차리고 자기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독특한 스타일의 회화는 곧바로 미디어의 주목을 받습니다. 대부분 부정적인 것이었지만 역시 눈 밝은 사람들은 이 그림에 바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1872년 뒤랑 뤼엘이 이 그림을 사들였고, 마네의 친구인 장 바티스트 포르, 다시 뒤랑 뤼엘, 그리고 아이작 드 카몽도 공작이 이 그림을 소장했습니다. 그리고 카몽도 공작이 세상을 떠날 때 국가에 기증하며 이 작품은 루브르와 오르세에서 세계 관객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됐습니다.※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을 하시면 e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