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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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철희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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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2~2024-11-21
칼럼100%
  • [오늘과 내일/이철희]한반도, 우크라戰 탄약고

    얼마 전 외신들은 우크라이나군이 북한산 122mm 다연장로켓(방사포) 포탄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1980, 90년대 생산된 이 포탄에는 한글로 ‘방-122’라고 찍혀 있었다. 전장의 우크라이나 병사들은 ‘우호적 국가’가 한 선박에서 압수해 넘겨준 것이라고만 했고, 우크라이나 국방부 측은 러시아로부터 포획한 것이라고 에둘러 말했다. 잦은 오발·불발로 악명 높지만 병사들은 그나마 쏠 포탄이 있어서 다행으로 여긴다고 한다. 북한산 포탄 발견은 북-러 간 무기거래 의혹을 더욱 짙게 하는 새로운 정황이지만 결정적 증거로 삼기엔 부족하다. 지금 우크라이나군에는 옛 소련 시절 장비부터 최신 정밀유도무기까지 온갖 잡동사니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병사들은 이런 다종다양한 탄약과 장비를 두고 ‘동물원(zoo)’ 같다고 할 정도다. 러시아의 침공 직후 서방 진영은 각국이 보유한 무기들을 우크라이나에 보냈다. 그런데 포탄이 제각각이다 보니 이탈리아 박격포에 핀란드 포탄을 사용하려면 꼬리날개를 일일이 갈아내야 하는 일도 있었다. 나아가 미국과 영국은 소련식 무기로 무장한 우크라이나군이 사용할 탄약을 찾기 위해 옛 동구권과 유고연방, 아시아·아프리카까지 샅샅이 뒤졌다. 그렇게 긁어모은 것들 가운데 30, 40년 된 북한 포탄이 끼어 있다고 해도 신기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황이 흑해 연안으로 번지고 있지만 육상 전선에는 큰 변화가 없다. 석 달째로 접어든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성과는 미미하다. 새로 편성된 우크라이나 기계화 부대는 지뢰밭과 대전차 함정, 콘크리트 장애물로 이뤄진 러시아군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있다. 1차 대전을 떠올리게 하는 참호전·포격전 양상은 이 전쟁의 장기화를 예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포탄 공급은 여전히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형편이다. 냉전 종식 이후 방위산업을 대대적으로 축소한 각국이 갑자기 생산을 늘리기는 어렵다. 미국도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생산을 늘리고 있지만 곳곳에서 병목 현상이 발목을 잡는다. 일례로 각종 무기에 사용되는 흑색화약 공장은 미국 내 한 곳만 남아 있었는데, 그조차 2년 전 폭발 사고로 문을 닫은 상태였다. 미국이 국제적으로 금지된 집속탄까지 지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포탄 고갈 사태에 주목받는 곳이 한국과 불가리아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이 이미 한국, 불가리아와 포탄 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일본과도 협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우리 정부는 살상무기 지원을 부인하지만 미국의 빈 탄약고를 채우거나 폴란드를 통해 우회 공급하는 등 우크라이나 탄약 지원은 공공연한 비밀이 됐다. 불가리아에선 소련식 포탄 생산을 위해 35년 전 폐쇄됐던 공장이 다시 문을 여는 등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사정은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러시아가 지난달 말 북한 열병식에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을 참석시킨 데 이어 이달 초 고위급 인사가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 VIP용 공군기를 평양에 보낸 것도 다급함의 방증일 것이다. 김정은은 쇼이구 장관을 직접 무기전시장으로 안내하는가 하면 최근엔 사흘 연속 군수공장을 시찰하며 저격소총 발사 시범까지 보였다. 김정은이 거론한 ‘국방경제사업’도 무기거래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으로 읽힌다. 70년 넘게 냉전적 군사대결이 지속된 한반도가 새삼 신냉전 전장의 탄약고로 주목받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물론 정당성이나 합법성 차원에서 남과 북은 전혀 다르다. 유엔 제재로 모든 무기거래가 금지된 북한의 행위는 명백한 불법이다. 하지만 보편가치도 국제법도 비웃는 광포한 전쟁의 시대다. 누가 먼저 들키는지 보자던 숨바꼭질도 이제 끝나가는 듯하다. 이후 닥칠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할지 면밀히 고민할 때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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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조건 없는 대화’에 고장난 계산기 내민 북한

    요즘 북한 김여정의 등판이 부쩍 잦아졌다.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 전후로 미군 정찰기 활동을 트집 잡아 세 차례나 나서더니 한미 핵협의그룹(NCG) 첫 회의를 앞두고도 미국의 확장억제 강화를 비난하는 장황한 담화를 냈다. 난데없이 ‘남조선’ 대신 “대한민국”이라 칭하며 주목도까지 확 높였다. 남북관계를 이제 ‘같은 민족’으로서가 아닌 ‘국가 대 국가’의 적대관계로 보겠다는 색다른 선전선동의 잔재주 부리기일 것이다. 17일 담화에선 은근슬쩍 대화 가능성을 흘리며 미국의 반응을 떠보기도 했다. 김여정은 미국의 ‘전제조건 없는 대화’ 제안을 두고 “황당한 망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과거 북-미 협상에 올랐던 거래조건들을 새삼 상기시켰다. 미국이 ‘완전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요구할 테지만 한미 연합훈련 축소와 전략자산 전개 중단, 제재 완화, 나아가 주한미군 철수 같은 ‘가역적 공약’과 바꿀 수 없다며 “우리는 밑지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화에 대한 미련을 드러내며 미국을 향해 새로운 계산법을 요구한 셈이다. 북한은 앞서 5월 말 일본을 향해서도 비슷한 신호를 보낸 적이 있다. 일본 측에 전례 없이 군사정찰위성 발사 일정을 통보하더니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조건 없는 만남’ 제안에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외무성 부상 명의의 사뭇 정중한 담화를 냈다. 그즈음 북한은 일본인 납북자의 상징인 요코타 메구미가 북한에서 낳은 딸이 일본의 외할아버지 묘에 자기 이름으로 꽃을 바치고 싶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북한이 미사일 도발을 계속하면서도 교묘한 신호를 보내는 것은 일단 상대의 속내를 떠보면서 한미일 대북 공조에 균열을 내기 위한 상투적 수법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초조감과 조바심이 묻어 있는 게 사실이다. 북한으로선 1년 반 뒤 미국 대선 때까지 기다리며 도발 일변도의 대외전략을 밀어붙이기엔 한계에 봉착한 듯한 분위기도 감지된다. 우선 북한이 크게 기념하는 7·27 정전협정일(전승절) 70주년을 앞두고 야심 차게 추진하던 정찰위성 발사의 실패는 뼈아플 수밖에 없다. 잇달아 미사일을 쏘아 올렸지만 그 대외적 충격 효과나 대내적 결집 효과는 갈수록 떨어지고 비용도 감당하기에 만만치 않다. 대신 미군 전략자산의 잦은 출몰로 북한군의 긴장도와 피로감은 한층 높아지는 상황이다. 주변 정세도 녹록하지 않다. 그간 신냉전 기류 속에 버팀목이 됐던 중국과 러시아는 제 앞가림에 급급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수렁에 빠져 제 코가 석 자이고, 중국은 최근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며 고위급 대화를 재개했다. 무엇보다 과거 미중 관계의 타협점을 대북 제재 동참에서 찾았던 중국인만큼 경계심을 늦출 수 없게 됐다. 미국이 동북아 깊숙이 작전영역을 확대하는 터에 중국도 마냥 북한을 감싸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정세 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움직이며 생존을 연장해온 김정은 정권이다. 도발과 협박을 일삼다가도 일순간 유화 국면으로 돌아서는 태세 전환에 능수능란하다. 더욱이 어떤 계기든 잽싸게 잡아채 ‘지도자 동지의 주동적 조치’라고 선전하기까지 한다. 3대에 걸친 세습 독재를 유지해온 비결일 것이다. 그제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주한미군의 월북 사건이 일어났다. 과거에도 ‘인질 외교’로 단단히 챙겼던 북한이다. 어떻게든 이 사건을 계기로 도발과 유화 사이를 어지럽게 오가며 한미 간 동요를 일으키려 할 것이다. 북한의 뻔한 수작이지만 한국이 빠진 대화라고 해서 못마땅하게 여길 이유는 없다. 그 노림수를 제대로 읽으면서 긴밀하게 공조하면 된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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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국정원 인사파동, ‘제1고객’의 책임은 없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 직후 중앙정보국(CIA) 국장으로 33년 외교관 경력의 윌리엄 번스 전 국무부 부장관을 임명했을 때 미국 언론은 70년 전 외교관 출신 첫 민간인이자 역대 최장수 CIA 국장을 지낸 앨런 덜레스에 비유했다. 덜레스는 그의 형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과 함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쥐락펴락한 인물이다. CIA의 규모와 역할을 크게 확장시키며 미소 냉전체제의 뼈대를 구축했다. 덜레스 시대는 제3세계 쿠데타 조종과 암살 음모 같은 CIA 역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비밀공작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바이든의 번스 기용은 신냉전 기류에 휩싸인 국제질서 격변기에 외교와 정보를 효율적으로 결합해 세계에 ‘미국의 복귀’를 알리겠다는 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번스는 일찍이 이란 핵합의를 위한 오랜 비밀접촉을 이끌어 ‘비밀외교무기(secret diplomacy weapon)’라는 찬사를 들었던 인물이다. 당파로 갈라진 상원도 번스 인준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 번스도 굵직한 이슈의 현장마다 그 흔적을 남겼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석 달 전 모스크바를 방문해 바이든의 경고 메시지를 전했고, 이후 동맹과의 정보 공유를 통한 반(反)러시아 전선 구축과 러시아발 가짜 정보를 선제적으로 무력화하는 성공적인 정보전을 폈다. 최근 미중 간 소통의 물꼬를 트기 위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에 앞서 비밀리에 베이징을 다녀간 이도 번스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김규현 전 외교부 차관을 새 정부 첫 국가정보원장으로 발탁한 것도 번스의 사례와 비슷해 보인다. 윤 대통령은 김 원장에 대해 “30여 년간 외교안보 분야에서 핵심적 역할을 해온, 국제적 안목을 가진 전문가”라고 강조했다. 김 원장 이전에도 외교관 출신 정보 수장이 있었다.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과 이병기 국정원장. 특히 노신영은 외무부 장관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와 안기부 역사상 최초의 문민 수장이었고 이후 국무총리를 지내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 반열에까지 올랐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아래서 그 한계는 분명했지만 권력자의 신임을 얻어낸 가히 독보적 인물이었다. 김 원장 기용에 대해서도 확실한 일처리, 원만한 대인관계, 철저한 자기관리 등 호의적 반응 일색이었고 부정적인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 국정원 고위직에 대한 전면 물갈이가 단행되고 전직 국정원장 두 명에 대한 고발까지 이뤄졌지만 ‘정권이 바뀌니 또 그러나’라는 곱지 않은 시각 속에서도 김 원장을 직접 겨냥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랬던 김규현 체제에 최근 파열음이 요란하다. 윤 대통령이 재가까지 마친 국정원 1급 인사를 닷새 만에 번복한 것은 유례없는 사태다. 김 원장 측근이 인사를 전횡했다는 논란에 휩싸이면서 그의 리더십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더욱이 대통령의 신뢰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거취를 놓고 입방아에 오르는 처지에 놓였다. 이르면 오늘 발표될 장차관 인사에 김 원장 교체는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김 원장에 대한 재신임은 아닌 듯하다. “리더십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조직 안정이 우선이다” “향후 인사 가능성은 어느 조직에나 열려 있지 않느냐”는 얘기가 대통령실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마당이다. 사실 이번 인사 파동을 놓고선 정권교체기 물갈이를 둘러싼 내부 반발을 넘어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한 새 권력 내부의 파워게임 양상이라는 관측이 많다. 국정원장이 최측근에 휘둘렸다면 그 자체로 큰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외부 입김에 핵심 안보기구 수장의 입지가 흔들린다면 그건 임명권자이자 ‘제1 고객’인 대통령의 책임일 것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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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中 겁박에 맞선 호주의 ‘조용한 완승’

    이른바 ‘늑대전사 외교’와 함께 중국식 겁박 외교의 대명사가 된 ‘경제적 강압’을 국제사회가 맞서 싸워야 할 핵심 이슈로 공론화한 나라는 호주였다. 2020년 호주가 중국의 코로나19 기원과 책임 규명을 공개적으로 요구하자 중국은 대놓고 호주의 국내 정치에 간섭하고 언론 논조까지 문제 삼으며 호주산 보리와 와인, 석탄, 목재, 바닷가재의 수입을 막는 대대적인 보복 조치를 취했다. 대중국 수출 비중이 37%에 달한 호주로선 전례 없는 위기였다. 호주는 굴복하지 않았다. 동맹과 우방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 중국의 강압에 맞선 대항전선 구축을 촉구했다. 호주 외교장관은 외부 인사를 만날 때마다 안주머니에서 중국 측이 던진 모욕적 요구, 이른바 ‘14개 불만 사항’ 메모지를 꺼내 보이며 분노와 결의를 표시하곤 했다. 그런 호주의 배짱은 통했다. 호주가 감당해야 했던 고통은 일시적이었다. 잠시 위축됐던 호주의 대외 수출은 다시 치솟았고 작년엔 사상 최대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이미 올해 초 호주산 석탄을 사들이기 시작한 중국은 최근 목재 수입을 재개하고 보리에 매긴 80% 관세도 재검토에 들어갔다. 중국이 부과한 무역장벽이 거의 다 철회된 것이다. 사실상 완벽한 호주의 승리였다.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상어의 공격으로 뜯긴 보드에 의지해 살아 돌아온 서퍼처럼 호주는 놀랄 만큼 강건한 모습으로 부상했다”고 극찬했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3월 말 ‘거부하고 뿌리치고 억제하라’는 제목으로 낸 보고서도 중국의 강압이 목표 달성은커녕 역효과만 냈다며 호주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보고서는 중국의 표적이 됐던 8개국 사례를 분석한 결과 중국의 강압은 미미한 성공에 그친 전반적 패착이었다고 진단했다. 호주 리투아니아에선 전술적·전략적으로 모두 실패했고, 한국 일본 캐나다에선 엇갈린 전술적 성패 속에 전략적 실패를 맛봐야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은 여전히 군사적 수단보다 리스크가 적은 경제적 강압을 앞세운다. 경제적 약소국과 비대칭 우위 분야를 표적으로 삼아오던 중국은 최근 미국의 최대 메모리칩 제조업체 마이크론에 대해 ‘안보 위협’을 이유로 제재를 가했다. 미국은 “명백한 경제적 강압”이라고, 중국은 “미국이 협박 외교의 원조”라고 맞선다. 그 와중에 한국은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메우는 문제(backfilling)로 미중 반도체 전쟁의 한복판으로 끌려들어 갔다. 이런 미묘한 시기에 중국은 미국과 한층 밀착하는 우리 정부를 향해 거친 언사를 서슴지 않고 있다. 석연찮은 이유로 한국인 축구선수가 4주 가까이 구금돼 있고, 난데없이 한국 포털사이트 접속이 차단되는가 하면 연예인 방송 출연이 취소되는 등 조짐이 심상치 않다. 벌써부터 제2의 사드 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정부 핵심 인사들은 중국의 오만한 기세가 꺾이기 전까지는 ‘당당한 외교’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이 중국에 저자세를 보일 이유는 없다. 동맹과 국제연대의 힘, 더욱이 중국에도 절실한 우리 반도체 기업이 있는 만큼 중국도 한국을 다시 표적으로 삼기는 쉽지 않다. 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정교한 대응책, 나아가 예방적 관리외교일 것이다. 호주가 중국에 맞서 이길 수 있었던 데는 그 배짱 못지않게 자원부국이란 행운이 작용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호주의 철광석은 중국도 건드리지 못하는 든든한 지렛대가 됐고, 중국 수출이 막힌 품목들은 쉽게 대체시장을 찾을 수 있었다. 지난해 정권교체의 효과도 한몫했다. 새 정부는 “용(龍)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며 조심스럽게 중국에 퇴로를 열어주는 실용외교를 폈다. 요즘 호주는 그 승리를 드러내놓고 자랑하지도, 국제무대에서 중국에 날을 세우지도 않는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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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美 대중 정책라인 줄교체… 바이든의 해빙 신호?

    1979년 미중 수교 이래 역대 미국 대선은 ‘중국 때리기’의 경쟁장이었다. ‘베이징의 도살자’라고 비난한 빌 클린턴,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한 조지 W 부시 등 역대 대통령은 선거전에서 한껏 중국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였다. 하지만 당선 뒤엔 그 톤을 누그러뜨리며 중국과의 교류에 집중하곤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이후부턴 ‘선거 때 비판, 재임 중 협력’ 공식마저 깨졌다. 매사 발언에 신중한 조 바이든 대통령도 대선 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민주주의의 뼈가 없는 깡패”라고 했고, 취임 이래 트럼프 시절의 대중국 견제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그랬던 바이든 행정부가 역대 최악이라는 미중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다. ▷어제 워싱턴에선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과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 간 회담이 열렸다. 양국이 격화된 경제전쟁에 상호 우려를 표시하는 수준이었다지만 일단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데 의미를 두는 분위기다. 최근엔 미국의 대중국 외교라인이 잇따라 교체됐다. ‘차이나 하우스’로 불리는 중국정책 총괄팀 책임자인 릭 워터스 국무부 부차관보가 다음 달 물러나고, 앞서 중국 외교를 이끌던 웬디 셔먼 국무부 부장관이 은퇴를 선언했다. 로라 로젠버거 백악관 중국·대만 담당 선임국장도 대만 주재 미국대사관 격인 미국대만협회(AIT) 회장으로 옮겼다. 중국도 5개월간 비어 있던 주미 대사 자리에 온건파 셰펑 외교부 부부장을 보냈다. ▷이런 움직임이 바이든 대통령의 예고대로 ‘해빙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 미국은 그간 중국 견제 노선을 강화하며 대결과 경쟁, 협력을 함께 강조했다. 그러면서 양국이 치열하게 경쟁하되 대결은 피해야 하며 충돌 방지를 위한 가드레일을 세우자고 했다. 사실 그런 기조 아래 지난해 말 미중 정상은 인도네시아 발리 회담에서 고위급 대화의 재개를 약속했다. 하지만 올해 초 중국 정찰풍선의 미국 영공 침입과 차이잉원 대만 총통의 미국 방문으로 양국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모든 것이 끊겼다. 결국 6개월 가까이 늦춰진 미중 대화가 이달 초 양국 외교안보 사령탑 간의 오스트리아 빈 회동을 계기로 서서히 재개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향후 미중 관계를 낙관하긴 이르다. 미국은 최근 ‘디커플링(공급망 단절) 아닌 디리스킹(위험 제거)’이라는 유럽연합(EU) 측 접근법을 수용했다. 다만 그런 정책 전환도 어차피 불가한 공급망 분리 대신 첨단기술 접근 차단 같은 핵심과제로 좁혀 정교한 실행전략을 가동하겠다는 의도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더욱이 이제 미국은 본격적인 대선전에 들어간다. 공화-민주 양당이 드물게 초당적 합의를 이룬 대중 강경노선에서 벗어나는 어떤 유화 제스처도 국내정치의 제물이 될 수 있다. 이래저래 엇갈리는 신호와 전망 속에서 미중 간 갈등관리 외교가 어떻게 전개될지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요즘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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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한미 핵협의그룹에 숨겨진 ‘아시아 核 쿼드’

    4·26 한미 정상회담 결과 나온 핵협의그룹(NCG·Nuclear Consultative Group)을 두고 ‘사실상 핵 공유’라느니 ‘속 빈 강정’이라느니 그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어떤 제도나 기구든 시작은 낯설고 어설프기 마련이다. 첫발을 떼자마자 주저앉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몸집을 불리고 힘도 키우기 마련이다. 일단 자리를 잡으면 쉽게 소멸하지도 않는다. 냉전과 함께 탄생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탈냉전 이후에도 확장을 거듭하는 것은 그 제도화의 힘이다. NCG도 앞으로 무엇이 담기고 어떻게 변화할지 주목해야 한다. NCG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 연원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작년 2월 바이든 행정부 출범 직후 나온 시카고국제문제연구소(CCGA)의 보고서 ‘핵 확산 방지와 미국 동맹 안전보장’이 그 시작으로 보인다. 여기엔 척 헤이글 전 미국 국방장관과 케빈 러드 전 호주 총리, 맬컴 리프킨드 전 영국 외교장관이 공동의장을 맡고 여러 나라 안보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이 보고서는 호주 일본 한국을 미국의 핵 기획 과정에 참여시키고 이들과 미국 핵전력 정책을 논의할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며 나토의 핵기획그룹(NPG·Nuclear Planning Group)과 같은 ‘아시아 핵기획그룹(ANPG)’의 창설을 제안한다. 미국 일본 호주 인도의 4개국 안보협의체 쿼드(Quad)와는 별도로 핵 억제에 특화된 ‘아시아판 핵 쿼드’의 설립을 주문한 것이다. 그 제안의 동인은 미국의 정권 교체였다. 전임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 경시와 자국 우선주의에서 벗어나 동맹국들의 의구심을 씻어내지 않으면 여러 나라의 독자 핵무장 등 세계적 핵 확산을 막을 수 없다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나아가 작년 2월엔 한국인의 71%가 자체 핵개발에 찬성한다는 CCGA의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미국 방위공약에 대한 한국의 불신이 이슈로 떠올랐다. 또 올해 초 윤석열 대통령의 ‘핵 보유 가능’ 발언은 세계 안보전문가 그룹을 화들짝 놀라게 했다. 워싱턴 전문가들은 윤 대통령의 발언이 단순 말실수인지, 국내 여론 관리용인지, 미국을 향한 압박용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도 커져가는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반감을 관리해야 한다는 데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중 눈에 띄는 정책구상이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의 ‘신뢰의 위기: 아시아에서 확장억제 강화의 필요성’ 보고서였다. 클링너도 한미일 3국과 호주가 참여하는 나토식 다자 NPG 설립을 제안한다. 다만 “한국은 NPG란 이름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이든 불만족스럽게 여길 것”이라며 한미 전력의 통합성과 한국의 다급한 요청, 국가적 자부심을 감안해 일단 양자 NPG를 만든 뒤 4자 그룹으로 묶는 2단계 방안을 제시했다. 이런 배경 아래 태어난 한미 협의체 NCG는 미국의 전략적 큰 그림에선 한미일 3자, 이어 아시아판 4자 NPG로 가는 첫 징검다리일 것이다. 실제로 NCG가 핵 확장억제의 실효성을 갖추려면 위협 인식을 공유하는 한미일 3각 협력은 필수적이다. 나아가 북핵 위협이 더욱 커지고 미중 대결이 한층 격화되면 호주의 합류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한국이 불가피하게 중국과의 갈등을 최전선에서 감당해야 하는 지정학적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는 데 있다. 중국은 쿼드 같은 안보협력체를 두고 ‘배타적 패거리 짓기’라며 강력 반발해 왔다. 한국은 북핵에 맞선 한반도 안보에 초점을 맞추고 싶지만 미국은 대만해협은 물론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을 봉쇄하려 한다. NCG가 미국엔 아시아판 핵 동맹의 시험대지만, 한국엔 미중 간 선택의 시험대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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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태국 왕실과 군부 동시에 심판한 ‘정치적 지진’

    2016년 10월 방콕 근처 골프장에서 일본인 20명이 태국군 차량 3대에 실려 군 시설로 연행된 적이 있다. 푸미폰 아둔야뎃(라마 9세) 국왕의 국상 애도 기간에 먹고 마시며 떠드는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들은 다행히 ‘엄중 주의’를 받고 풀려났다. 태국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하게 왕실모독죄를 처벌하는 나라다. 왕과 왕비, 왕세자를 비방하거나 위협한 사람은 최장 15년의 징역형에 처해진다. 그럼에도 와치랄롱꼰(라마 10세) 현 국왕의 각종 기행과 사생활 논란이 끊이지 않자 그토록 금기시되던 군주제 개혁도 정치적 도마에 올랐다. ▷14일 치러진 태국 총선에서 왕실 개혁과 군부 타도를 내세운 진보정당 전진당(MFP)이 하원 500석 중 152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됐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막내딸이 이끄는 프아타이당도 141석으로 선전했지만 2001년부터 유지하던 제1당 자리를 빼앗겼다. 군부 축출을 내건 양대 야당이 60% 가까운 하원 의석을 차지한 것이다. 반면 육군참모총장 출신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창당한 룸타이상찻당(UTN)은 36석에 그치는 등 군부 계열의 정당은 모두 80석에 못 미쳤다. 무능한 군부에 대한 철저한 심판, 신뢰 잃은 왕실에 대한 깊은 회의, 나아가 탁신 가문의 포퓰리즘에 대한 실망까지 태국 민심의 현주소를 보여준 결과였다. ▷외신이 ‘정치적 지진을 일으켰다’고 평가한 전진당은 43세의 피타 림짜른랏이 이끄는 신예 정당이다. 피타는 기업 출신의 엘리트 정치인. 대학 졸업 후 부친이 경영하던 쌀겨기름회사를 잠시 운영했고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석사를 땄다. 동남아 모빌리티 플랫폼 ‘그랩 타이’의 임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태국 선거사에서 처음으로 왕실모독죄 폐지를 공론화한 그는 징병제 폐지와 동성결혼 합법화 같은 급진적 정책까지 내세우며 2030세대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뛰어난 토론과 연설 솜씨로 청년층에서 록스타급 인기를 누리고 있고, 총리 후보 지지도 조사에서도 진작에 1위를 예고했다. ▷피타는 어제 트위터에 “여러분이 동의하든 아니든, 제게 투표했든 아니든 저는 여러분의 총리가 되어 봉사할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그가 총리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의 2017년 헌법 개정으로 총리 선출에는 하원 500명 외에 군부가 임명한 거수기 상원 250명도 참여한다. 상하원 합동 투표에서 과반인 376석 이상을 얻어야 하지만 전진당과 프아타이당 두 야당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군부 주도 연립정부에 참여했던 품짜이타이당 등 중도 정당을 끌어와야 한다. 당장 군주제 개혁에 대한 다른 정당들의 경계심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전진당의 최대 숙제가 됐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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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 터지는 ‘숄칭’ vs 속 시원한 ‘유닝’[오늘과 내일/이철희]

    올해 초 유럽에선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의 사진 옆에 그의 이름을 동사형으로 만든 신조어 ‘숄칭(scholzing)’을 사전 스타일로 풀이한 온라인 패러디 게시물이 유행했다. 숄칭의 뜻은 이랬다. ‘좋은 의도를 표명하면서도 그것을 미루거나 막기 위해 상상 가능한 어떤 이유든 이용하거나 찾아내거나 지어내는 것.’ 우크라이나에 독일제 전차 레오파르트2를 지원하는 문제를 놓고 몇 주 동안이나 시간을 질질 끄는 숄츠에 대한 신랄한 조롱이었다. 당시 유럽 곳곳에선 ‘표범(레오파르트 전차)을 풀어줘라(Free the Leopards)’는 피켓 시위가 벌어졌고 트위터에선 표범 무늬 옷을 입은 사진을 올리는 릴레이 캠페인까지 벌어졌다. 여기엔 핀란드 총리도 동참했다. 실제로 숄츠는 막판까지 미적거렸다. 지원할 전차가 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다가 미국이 에이브럼스 전차를 지원하겠다는 발표가 나온 뒤에야 레오파르트2 지원을 최종 승인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넘게 이어지는 동안 숄츠는 끊임없이 망설였다. 러시아의 침공이 임박했던 작년 1월엔 여러 나라가 우크라이나에 각종 무기를 보내는 상황에서 헬멧 5000개를 보내 “다음엔 뭘 보낼 건가. 베개냐?”고 조롱당했다. 그런 독일에 대한 주변국 여론은 따가웠다. 일부에선 “전시에 적을 이롭게 하는 배신 행위”라는 비난까지 나왔다. 하지만 숄츠는 개의치 않는 듯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관련 질문을 받자 “숄칭은 ‘독일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받아넘겼다. 그렇다고 독일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분쟁 지역에 살상 무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뒤집고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필두로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군사 지원을 했다. 다만 그처럼 꾸물거린 것은 앞장서는 모습은 보이지 않겠다는, 대놓고 러시아와 척지는 일은 피하겠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독일은 러시아와 적대관계로 맞설 가능성에도 면밀히 대비했다. 그간 러시아에 의존하던 천연가스를 대체하기 위한 에너지 인프라 건설에 집중하면서 1000억 유로의 특별방위기금을 조성해 군사력 증강에도 나섰다. 그렇게 내년까지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의 2%로 끌어올리면 독일은 미국 중국에 이은 세계 3위의 군사비 지출 국가가 된다. 끊임없이 살피고 따져보는 대외 행보는 숄츠의 독일만이 아니다. 신냉전 대결이 격화하면서 많은 나라가 미국과 중·러 사이에 걸터앉아 ‘다(多)동맹 전략’ ‘360도 외교’를 펴고 있다. 미국과의 확고한 밀착을 추구하던 일본도 요즘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은 최근 미중 대결의 과열 양상을 우려한 듯 ‘중국과의 건설적이고 안정적 관계’를 새삼 강조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며칠 전 외신 인터뷰에서 ‘중국의 패권 야망을 막기 위해 군사적으로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에 머뭇거리면서 즉답을 피했다고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기시다는 대신 “중국과의 적극적 외교를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고 답했고, 인터뷰 자료를 흘끗흘끗 보며 중일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 국빈방문을 앞두고 한 외신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과 대만 문제에 관한 ‘원론적 발언’으로 러시아와 중국의 반발을 샀다. 대통령의 가치관과 신념이 반영된 상식적 답변이라는데, 그간의 정책 기조를 뛰어넘는 소신 발언이 낳을 역풍까지 염두에 뒀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속 시원한 원칙 천명과 직진 외교가 당장 동맹의 박수를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뒷감당까지 동맹이 떠맡아 주진 않는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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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만우절에 느닷없이 젤렌스키 때린 김여정

    지난주 토요일 저녁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동생 김여정의 담화를 전하는 뉴스 속보가 떴다. ‘만우절이라선가?’라는 생각이 스칠 만큼 담화는 뜬금없었다. 김여정은 난데없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핵 망상’ 운운하며 맹비난했다. “젤렌스끼가 미국의 핵무기 반입이요, 자체 핵개발이요 하면서 떠들어대고….” 김여정이 ‘핵 망상’의 근거로 제시한 것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홈페이지에 오른 국민 청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벨라루스에 전술핵을 배치하겠다고 하자 그에 맞서 우크라이나도 미국 핵무기를 도입하거나 자체 핵무장을 하자는 내용이다. 대통령의 공식 답변이 나오려면 2만5000명이 청원에 동참해야 하는데, 고작 600명 남짓 참여한 상태였다. 그런 온라인 청원을 용케도 찾아내 러시아에 고자질이라도 하듯 주말에 담화까지 낸 선전선동 일꾼 김여정의 노력은 고약하고 잔망스럽다. 한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듯한 만우절 객쩍은 소리로만 듣고 넘기기엔 기묘한 구석이 적지 않다. 그동안 우리 사회 내부에서 전술핵 재배치 여론이 일어도, 윤석열 대통령이 ‘자체 핵보유도 가능하다’고 밝혀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북한이다. 뭐라도 한마디 한다면 그게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임을 알아서였을까. 그렇게 켕겨서 못 했던 말을 김여정은 먼 나라 우크라이나를 향해 쏟아냈다. “미국을 하내비(할아비)처럼 섬기며 상전의 허약한 약속을 맹신하는 앞잡이들은 자멸적인 핵 망상에서 하루빨리 깨어나야 제 목숨을 지킬 수 있다.” 북한은 그 담화가 누구보다 푸틴의 귀에 들어가길 바랐을 것이다. 김여정은 1월 말 금요일 밤에도 우크라이나에 주력전차를 지원하겠다는 미국의 발표를 비난하면서 “우리는 로씨야 군대와 인민과 한 전호(참호)에 서 있을 것”이라는 담화를 낸 바 있다. 푸틴의 환심을 사기 위한 구애의 메시지였다. 이번 담화가 나오기 이틀 전 미국 정부는 러시아가 북한에 식량을 내주는 대신 무기를 지원받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며 그 거래를 주선한 슬로바키아인 무기상을 독자제재 명단에 올렸다. 작년 말에도 미국은 북한이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에 무기를 팔았다며 그 정황을 보여주는 위성사진을 제시한 바 있다. 당시 북한은 “황당무계한 조작”이라며 발끈했지만, 이번 미국의 조치에 대해선 부인조차 하지 않았다. 1년을 넘긴 우크라이나 전쟁은 끝도 없이 병력과 장비, 탄약을 쏟아붓는 소모전이 됐고 당장 러시아군은 포탄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 그런데도 푸틴은 최근 모스크바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주석에게서 어떤 군사적 지원 약속도 얻어내지 못했다. ‘무제한 협력관계’라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중국의 선택은 신중했다. 실망한 러시아로선 꿩 대신 닭이라도 찾아야 할 참이다. 북한엔 더없는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미국과의 거래를 통해 핵을 상품화해 보려던 시도가 좌절된 이래 북한은 본격적인 핵·미사일 도발에 나섰다. 때마침 펼쳐진 신냉전 국면을 한껏 활용하며 한미일-북중러 대결 구도를 굳히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더욱이 러시아와의 군사 협력은 식량난과 에너지난을 일거에 해결할 한 줄기 희망이다. 그렇다고 푸틴이 대놓고 북한 무기를 조달할 처지는 아니다. 당장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부르는 자충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북-러의 거래는 시간문제일 것이다.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장에 의용군을 투입할 것이라는 미확인 외신 보도도 그래서 심상찮다. 이러다 우크라이나에서 남북 간 간접 대결이 벌어지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북-러 밀착이 어디까지 갈지 면밀히 주시하고 대비해야 한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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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한미, 비밀을 나누는 동맹인가

    1962년 2월,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미국인 손님 두 명을 맞았다. 독일계 학자 헨리 키신저 하버드대 교수와 월터 다울링 주독 미국대사였다. 당시는 소련 핵 위협과 베를린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던 시절. 미국의 유럽 방어공약에 대한 의구심이 높아지면서 서독도 핵무장 같은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자 존 F 케네디 행정부가 동맹에 대한 미국의 신뢰 회복을 위해 마련한 ‘특별 브리핑’ 자리였다. 하지만 아데나워로선 마뜩잖을 수밖에 없었다. 키신저가 미국의 방위공약 설명으로 서두를 꺼내자 아데나워는 대뜸 말을 끊었다. “워싱턴에서 이미 들은 얘기요. 거기서도 날 납득시키지 못했는데….” 자신은 관료가 아닌 학자이니 다 듣고 판단해 달라는 키신저에게 아데나워는 “미국 정부의 자문에 당신 시간을 얼마나 쓰느냐”고 물었다. ‘약 4분의 1 정도’라는 답변에 아데나워는 “그러면 진실의 4분의 3을 얘기해주는 셈 치자”고 응수했다. 그렇게 시작된 브리핑에서 키신저가 미소 간 핵전력 격차를 설명하자 아데나워의 태도는 바뀌기 시작했다. 키신저는 소련의 핵 선제공격(제1격)에 대응하는 미국의 반격(제2격) 능력은 더욱 크고 훨씬 효과적이며, 당연히 미국의 1격 능력도 소련을 압도한다고 했다. 브리핑에는 미국의 핵전력 구조와 핵사용 계획 같은 민감한 세부정보가 포함됐다. ‘특별한 동맹’ 영국과만 공유하던 1급 비밀이었다. 아데나워는 자리를 뜨려는 키신저를 두 번이나 붙잡으며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알게 돼 안도했다”고 거듭 감사를 표시했다. 다만 “이제 주요 과제는 사람으로 인한 허점이 없도록 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키신저는 ‘대서양 동맹에 대한 미국의 힘과 헌신을 얘기할 때 그건 그저 한가한 수사가 아니다’라고 재삼 강조했고, 아데나워는 “그럼 다행이다!”라며 손님을 보내줬다.(키신저의 책 ‘리더십’에서) 날로 고도화되는 북핵 위협 속에서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에 대한 한국의 의구심은 1960년대 초 서독의 기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파리나 본을 지키기 위해 워싱턴과 뉴욕의 위험을 감수하겠느냐는 것이 당시 유럽의 질문이었다. 프랑스는 미국 핵 의존이 아닌 독자 핵무장의 길을 갔고, 서독은 전범국가의 굴레 속에서 깊이 갈등했다. 한국도 어쩌면 그런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두 달 전 윤석열 대통령의 ‘자체 핵 보유 가능’ 발언도 그 의도가 뭐였든 같은 맥락에서 미국에 질문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 발언 이후 미국에선 화들짝 놀란 듯 한국의 비확산체제 이탈 가능성에 대한 경고와 설득, 회유조의 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실 그 반응은 대체로 곱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 시절 비밀 핵개발 전력을 소환하며 동맹의 파열음을 경고하거나 윤 대통령이 어휘 선택에 주의해야 한다며 말조심을 주문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논란 속에 워싱턴의 논의가 핵 정보 공유와 공동 계획 등 확장억제의 신뢰성 강화로 모아지는 것은 다행스럽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핵계획그룹(NPG) 같은 기구를 신설해 한국을 참여시키는 구상이 대표적이다. 비밀의 공유는 동맹의 끈끈함을 보여주는 시금석이다. 내달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에서 신뢰에 바탕한 구체적 성과물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다시 아데나워 얘기. 키신저는 수십 년 뒤 당시 브리핑에 배석했던 아데나워의 통역으로부터 뜻밖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그 다음 날 통역이 정리해온 브리핑 내용에서 핵 관련 부분은 파기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미국이 요청한 비밀유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3-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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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비운의 2인자’ 리커창 퇴장, ‘시진핑 예스맨’ 리창 등장

    2012년 중국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리커창이 권력서열 1위 시진핑에 이어 2인자에 오르고 이듬해 국무원 총리가 됐을 때 외신은 중국을 이끌 쌍두마차로서 ‘시진핑-리커창 투톱 체제’를 전망했다. 이전까지 총리는 서열 3위였는데, 리커창이 총리에 오르면서 2위가 됐다.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 후진타오의 후원 아래 승승장구하던 리커창이다. 하지만 혁명원로의 자제들인 태자당과 장쩌민의 상하이방이 연합해 시진핑을 밀어주면서 1인자 자리를 내줘야 했다. ▷비정한 권력투쟁에선 한번 밀리면 계속 밀릴 뿐이다. 리커창은 시진핑 체제에서 끊임없이 견제를 받는 ‘비운의 2인자’ ‘실권 없는 총리’로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리커창은 합리적 개혁가로서 과도기의 중국 경제를 조용히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일찍이 국내총생산(GDP) 같은 지표는 조작이 가능해 믿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그 발언이 알려지면서 그가 대신 살펴본다는 △철도 물동량 △전력 소비량 △은행 신규 대출 등 3가지 지표를 재구성한 ‘커창지수’는 외부에서 중국 경제를 예측하는 바로미터가 됐다. ▷리커창은 시진핑에게 반기를 드는 듯한 발언으로 갈등설을 낳기도 했다. 2020년 외신 기자회견에선 “중국인 6억 명의 월 수입이 1000위안(약 19만 원)에 불과하다”고 말해 절대빈곤 해결을 약속한 시진핑의 실패를 겨눈 것 아니냐는 논란을 불렀다. 이후 리커창이 진흙투성이 장화를 신고 수해 현장을 누비는 모습이 관영매체로부터 외면당했고, 작년 8월엔 덩샤오핑 동상 앞에서 개혁개방을 칭송한 장면마저 당국의 검열 대상이 됐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렇게 잊혀진 총리가 된 리커창이 5일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식 업무보고를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한다. 그의 흔적은 벌써 지워지고 있다. 리커창이 지난주 정부 부처를 돌며 따뜻한 환대와 작별 인사를 받는 영상이 일제히 삭제되고 있다고 한다. ‘리커창 지우기’는 작년 20차 당대회 폐막식 때 시진핑 옆자리에 있던 후진타오가 사실상 쫓겨나듯 퇴장하면서 이미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당시 후진타오는 직계 후배인 리커창의 어깨를 두드리고 나갔는데, 이후 발표된 새 지도부에서 공청단파는 전멸했다. ▷새 총리는 시진핑 측근 그룹 ‘시자쥔(習家軍)’의 리창 상무위원이 예약한 상태다. 리창은 20년 전 시진핑이 저장성 성장과 당서기를 지낼 때 비서실장으로 보좌한 이래 시진핑의 집사로 불리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상하이 당서기 시절엔 코로나19 봉쇄 사태로 문책론이 비등했지만 그는 오히려 2인자로 올라섰다. 일각에선 리창이 시진핑의 두터운 신뢰 아래 실권을 쥘 것이란 얘기도 있지만 그가 과연 ‘예스맨’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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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틴, 트럼프 복귀 기다리나 [오늘과 내일/이철희]

    흔히 전쟁은 시작하기는 쉬우나 끝내기는 어렵다고들 하지만, 대부분의 전쟁은 5개월 정도면 끝난다고 한다. ‘전쟁 종결’ 이론가인 하인 호먼스 미국 로체스터대 교수는 전쟁의 50%가 5개월 안팎을 끌다가 비교적 신속하게 끝났다고 분석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의 힘과 의지를 파악하는 진실의 순간이 오고, 그런 현실과 전망 아래 서로 양립 가능한 조건을 맞춰 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전쟁은 꽤 장기화되는데, 그건 다른 차원의 역학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호먼스 교수는 말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경우다. 1914년 개전 4개월 만에 독일 황제와 내각, 총참모부는 승산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프랑스를 빠르게 제압한 뒤 러시아로 진군한다는 단기결전의 슐리펜 계획은 일찌감치 실패로 확인됐다. 그런데도 독일은 전쟁을 계속하기로 했고 이후 참혹한 지구전이 4년이나 이어졌다. 그 이유는 뭘까. 실패를 인정하면 곧 국내 혁명을 불러 체제가 전복될 것이라는 권력 지도부의 공포심 때문이었다. 이런 딜레마는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맞는 러시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러시아가 며칠 안에, 적어도 몇 주 안에 끝낼 것이라던 전쟁은 앞으로도 최소 1, 2년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21일 국정연설에서 전쟁의 모든 책임을 서방으로 돌리며 서둘러 끝낼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전쟁이 이렇게 길어진 것은 러시아군, 아니 푸틴의 오판과 실책이 낳은 결과다. 전쟁 초기 러시아는 충분한 공습과 안정적 병참선도 없이 여러 전선에 걸쳐 지상군을 조급하게 진격시켰고 우크라이나의 항전에 막히면서 예봉이 꺾였다. 군사작전까지 일일이 챙기는 푸틴의 어처구니없는 개입이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푸틴은 뒤늦게 방어 체제로 전환하고 부분 동원령도 내렸지만 이미 전쟁은 끝도 없이 병력과 장비, 탄약을 쏟아붓는 소모적 장기전이 됐다. 어느덧 푸틴의 사활이 걸린 전쟁이 됐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의 퇴각, 특히 크림반도의 포기는 정권의 존립, 나아가 푸틴의 생명까지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 푸틴의 국내 권력 기반은 탄탄하다. 푸틴은 전쟁을 지속할 동원 능력도 충분하다고 자신한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언제나 끝날까. 일방의 결정적 승리가 없다면 전쟁은 서방이든 러시아든 어느 한쪽이 탈진할 때까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푸틴은 핵전쟁 협박으로 미국과 유럽의 직접 개입을 막으면서 서방의 분열을 노리고 있다.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변수 중 하나는 내년 말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는 상황이다. 벌써 트럼프는 “내가 대통령이면 24시간 안에 끝낼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미국에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이 과도하다는 여론도 늘고 있다. 푸틴의 전쟁은 전 세계의 진영 대결, 나아가 한반도의 긴장을 격화시키고 있다. 특히 러시아도, 서방도 무기와 탄약 창고가 비어가는 상황에서 한반도는 재래식 화력의 공급처로 주목받고 있다. 북한이 러시아 용병회사에 무기를 공급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한국도 우크라이나 지원 국가의 빈 무기고를 채우는 식의 간접 지원을 하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어느 편인지 분명히 하라는 ‘진영 테스트’ 압박은 한층 강해질 것이다. 이미 서방은 한국에 직접적 무기 지원을 요청하고, 러시아는 “한-러 관계 파탄”을 경고하고 있다. 응당 민주진영 연대에 적극 나서야겠지만 러시아에 진출한 우리 기업을 생각하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리스크를 관리하며 국제적 책임을 다하는 지혜를 찾아야 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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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지처럼 구겨진 정찰풍선, 눈으로 확인한 美中 신냉전 [횡설수설/이철희]

    1960년 미국이 ‘키 홀(Key Hole·열쇠구멍)’이라는 코드네임을 가진 최초의 첩보위성을 운용하기 시작한 것은 정찰기 U-2가 소련군에 격추된 사건 직후였다. U-2기 격추는 미소 정상회담 취소까지 낳으며 냉전 완화 기류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었다. 데이터 전송이 불가능했던 당시로선 쏘아올린 지 한 달도 안 된 위성을 떨어뜨려 필름을 회수한 뒤 분석하는 고비용 방식이었지만 U-2 격추의 파장을 감안하면 가치 있는 투자였다. 그렇게 첩보위성의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미국의 정찰용 풍선은 항공기와 함께 소련과 동구권 감시에 톡톡한 역할을 했다. 그때도 대외적 목적은 ‘기상 연구’였다. ▷4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유명 관광지 머틀비치를 찾은 이들은 심상찮은 굉음 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영화 ‘탑 건’을 떠올릴 만한 광경을 목격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전투기 3대가 풍선 주변을 선회하더니 그중 한 대가 다가가 미사일을 발사했다. 폭음과 함께 찢어진 풍선은 그대로 바다로 추락했다. 중국 ‘정찰풍선’으로 의심되는 비행체가 일주일 동안 미 본토를 횡단한 뒤 최신예 스텔스전투기 F-22의 공대공미사일을 맞고 추락하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환호를 불렀다. 한 주민은 이렇게 전했다. “희고 동그란 공이 별안간 구겨진 크리넥스처럼 됐다.” ▷첩보 활동의 생명은 은밀함에 있다. 하늘에서의 정보 수집은 물론 온갖 위장수단을 동원한 스파이 작전도, 사이버 해킹에 의한 정보 탈취도 눈에 띄어선 안 되고, 들키더라도 발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육안으로도 보이는 ‘정찰풍선’이 대놓고 미 영공을 침범했다. 물론 중국은 “우발적 사고”라고 주장하지만 중국이 정찰풍선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벌써 몇 년 전부터라고 미 국방부는 새삼 공개했다. 나아가 그 풍선이 민감한 군사기지, 특히 핵미사일 격납고 상공을 지나간 것에 미국은 주목하고 있다. 결국 정찰의 결정적 증거는 수거한 풍선 잔해 분석을 통해 밝혀낼 장비의 수준과 거기 담긴 정보에 달렸다. ▷이번 사건으로 모처럼 해빙 무드에 접어들던 미중 관계는 또다시 냉각이 불가피해졌다. 당장 미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 취소를 불렀고 미국 정가엔 여야 간 ‘중국 때리기’ 경쟁을 한층 가열시켰다. 공화당은 격추 명령이 늦었다며 “경기 끝나고야 쿼터백을 태클하는 격”이라고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난했다. 그래서 미중 간 전략적 안정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중국이 왜 이런 대담한 도발을 했는지 의구심을 낳는다. 일각에선 중국 군부 또는 강경파의 사보타주 가능성도 나온다. 어쨌든 그 정체도 의도도 아직은 확실치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미중 신냉전 갈등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는 점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3-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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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말폭탄도 연애편지도 김정은에겐 먹혔다”

    회고록은 역사가 아니다. 역사로 만들기 위한 주관적 노력일 뿐이다. 특히나 정치인, 여전히 큰 야심을 품고 있는 인물의 회고록은 자기 자랑과 변명으로 덧칠돼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읽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한 사건, 그 뒷얘기, 나아가 사후 평가는 어디서도 기대하기 어려운 쏠쏠한 재미를 준다.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이 최근 낸 회고록 ‘한 치도 물러서지 말라(Never Give an Inch)’도 꽤나 흥미롭다. 폼페이오의 책 출간은 내년 대선의 공화당 경선에 나서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그의 회고록은 여느 정치인이 선거 전에 내놓는 책과 달리 몹시 사납고 공격적이다. 자신이야말로 위험을 무릅쓴 극한 전사이자 냉혈한 현실주의자로서 ‘아메리카 퍼스트’의 구현자임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래선지 철저히 당파적, 정쟁적이다. 민주당 인사는 물론 안보전문가, 언론인에게까지 거침없는 독설을 쏟아낸다. 함께 일했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 특히 공화당 경선의 잠재적 경쟁자들도 험악하게 깎아내린다. 반면 트럼프는 시종 변호한다. 자신은 트럼프의 총아(寵兒)로서 충직한 실행자였다고 자부한다. 트럼프가 부추긴 의사당 폭동 같은 불편한 얘기는 가급적 피한다. 과거 ‘트럼프 엉덩이만 쫓는 열추적 미사일’이라던 놀림을 상기시키는 이유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도 폼페이오는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한다. 우선 트럼프가 김정은을 향해 날린 “화염과 분노” “완전 파괴” 같은 말폭탄이 ‘역대 어느 행정부도 하지 못한 멋진 전략’이었다고 평가했다. 김정은을 몇 달간 조용하게 만들었고 이후 북한이 쏜 미사일은 단 한 발이었다고 썼다. 하지만 그 한 발이 미국 전역을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었고 그 직후 김정은이 ‘핵무장 완성’을 선언했다는 사실은 빼놓았다. 나아가 갑작스러운 대화 국면 전환도 외교의 창을 열어둔 결과라고 했다. 정상회담 약속만으로 인질 3명을 귀환시켰고, 싱가포르 회담을 통해선 6·25전쟁 전사자 유해 송환과 핵·장거리미사일 시험 중단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비록 대규모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대가로 줬지만 “홈런은 아닐지라도 가치 있는 거래였다”고 주장했다. 반면 하노이 회담 결렬에 대해선 “나쁜 양보도, 나쁜 타협도, 나쁜 거래도 하지 않은 옳은 일이었다”고 강조했다. 이후에도 트럼프와 김정은의 판문점 회동, 지속적인 ‘연애편지’ 교환을 통해 북한 도발을 막는 효과를 거뒀다며 이렇게 적었다. “트럼프 임기 말까지 북한은 핵실험도, 장거리미사일 발사도 하지 않았다. 미국을 안전하게 지킨 중요한 성과였다.” 극과 극을 널뛰듯 오간 트럼프식 대북 접근법은 전례 없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과연 성공적이었을까. 일시적 책략의 승리였을지는 모르나 북한에 시간만 벌어준 것은 아닌가. 트럼프가 떠난 뒤 곧바로 드러난 사실은 북한이 더욱 위험해지고 미국도 한층 불안해졌다는 것이다. 여지없이 북핵을 이고 살게 된 한국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다. 북한은 당장 폼페이오 회고록을 꼼꼼히 검토할 것이다. 폼페이오가 ‘그렇게 재미 좀 봤다’며 드러낸 미국식 셈법, 나아가 북한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과 비하에 김정은은 이를 갈고 있을지 모른다. 미완(未完)으로 끝난 협상의 민감한 내용까지 들춰낸 그의 기록은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실패의 자인(自認)이 아닐 수 없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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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중국은 미군 떠난 한반도를 티베트·신장 취급할 것”

    “최근 일부 대국마저 미국의 비열한 강박에 굴종하고 서푼짜리 친미 창녀의 구린내 나는 치맛바람에 맞장단을 쳐주는 치사한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다.” 2016년 4월 북한 조선중앙통신에 실린 기고문이다. 잇단 핵·미사일 도발에 따른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중국이 동참하자 노골적인 비난을 퍼부은 것이다. 중국도 가만있지 않았다. 공산당 기관지까지 나서 “북한이 중국에 점증하는 위협이 됐다”며 골칫덩이 북한을 정면 비판했다. ▷북-중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라지만 김정은 집권 이래 양국 간에는 긴장과 마찰이 이어졌다. 김정은이 2013년 대표적인 친중파인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한 데 이어 2017년 역시 친중파인 이복형 김정남까지 암살하면서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북한은 시진핑 주석이 주최하는 주요 외교 이벤트 때마다 마치 잔칫상에 재를 뿌리듯 도발을 자행해 화를 돋웠고, 김정은은 방북한 시진핑의 특사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최근 나온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의 회고록에는 당시의 험악한 북-중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 눈에 띈다. 2018년 3월 첫 방북 때 폼페이오는 “중국은 늘 ‘주한미군 철수는 김정은 위원장을 매우 기쁘게 할 것’이라고 얘기한다”고 김정은을 떠봤다. 그러자 김정은은 웃음을 터뜨리고 테이블까지 두드리며 “중국인들은 거짓말쟁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나아가 중국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면 주한미군이 필요하고, 중국은 한반도를 티베트와 신장처럼 취급하려고 미군 철수를 원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미군 주둔 용인론은 사실 아버지 김정일도 구사했던 협상 책략이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은 오래전 미국에 특사를 보내 ‘미군이 계속 남아 남북 간 전쟁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뜻밖의 얘기를 김대중 대통령에게 털어놨다. 역사적으로 주변 강국의 수많은 침략 사례까지 들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미군 주둔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왜 북한 매체는 미군 철수를 계속 주장하나. 김정일의 답은 이랬다. “우리 인민들의 감정을 달래기 위한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정은은 아버지보다 한발 더 나가 미국과의 거래에서 혈맹의 핵심 관심사를 무시하고 그 책임마저 떠넘길 기세였다. 하지만 막상 북-미 대화가 가동되자 김정은은 누구보다 중국과의 단절을 두려워했다. 회담이 이뤄질 때마다 김정은은 시진핑에게 달려가 훈수를 받았다. 폼페이오는 “중국은 북한에 대해 완전에 가까운 통제권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그 결과 북-미 대화는 좌초했지만, 북-중 관계는 복원됐다. 중국에 대차게 호기를 부리던 김정은. 이제 어느 때보다 중국에 매달리고 있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3-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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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함지뢰 vs 확성기, 강대강의 추억[오늘과 내일/이철희]

    2015년 8월 20일 오후 경기도 연천 28사단 지역. 북한군이 우리 군의 대북 확성기 쪽으로 고사포 1발과 평곡사포 3발을 쐈고, 그에 맞서 우리 군은 155mm 자주포 29발을 북쪽으로 발사했다. 우리 군엔 최고경계태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고, 북한군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48시간 내 군사행동 개시’까지 위협했다. 6·25전쟁 이래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일촉즉발의 위기는 그달 4일 북한 목함지뢰의 폭발로 우리 부사관 2명이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으면서 시작됐다. 우리 군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며 확성기 방송을 시작했다. 남북 합의로 중단된 지 11년 만이었다. 이에 북한은 42년 만에 섬이 아닌 내륙 영토에 포격을 가했고, 우리 군도 고강도 반격에 나선 것이다. 이후 남북은 전면전 일보 직전까지 갔다. 북한군은 전방 화기들의 총안구를 개방하고 미사일 발사를 준비하며 시차별 전력운용에 들어갔다. 잠수함 50척의 기지 이탈, 특수부대용 공기부양정의 이동도 포착됐다. 우리 측도 접경지역에 대피령을 내리는 한편 한미 연합부대를 전방으로 배치하고 무력시위 비행을 벌였다. 미군 전략폭격기 전개 검토 소식도 전해졌다. 이런 살벌한 대결의 한편에선 남북 고위급 접촉이 이뤄졌다. 먼저 대화를 제안한 쪽은 북한이었다. 서로 부릅뜨고 노려보는 눈싸움에서 먼저 눈을 깜빡거린 것이다. 사흘간의 피 말리는 협상 끝에 남북은 ‘지뢰 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당한 것에 대한 유감 표명’과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모든 확성기 방송의 중단’에 합의했고, 3주간의 위기는 막을 내렸다. 요즘 정부와 군 안팎에선 북한 도발에 강경한 대응이 최선이라며 그 사례로 당시를 소환하는 이들이 많다. 도발에 맞선 ‘비대칭무기’로서 확성기 방송의 효능을 확인했고, 나아가 압도적 대응을 보여줌으로써 북한이 먼저 꼬리를 내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에 대해선 논란이 없지 않지만 당시 정부가 모처럼 제대로 대처했다는 여론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지지도가 수직 상승하는 효과도 거뒀다. 사실 북한이 각종 미사일을 쏴 올려도 정부로선 강경한 언어를 동원해 규탄하는 것 외엔 뾰족한 방법이 없다. 하지만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에는 단호한 대응으로 북한의 기를 꺾어놓을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응징 보복” “일전 불사”를 주문하고, 정부가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 같은 심리전 재개를 검토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다만 결기 어린 의지만큼이나 단호하게 즉각 대응할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최근 북한 무인기 대응 과정에서 드러난 우리 군의 무능과 혼란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군에 대한 통수권자의 강한 질타까지 나온 터라 북한이 또다시 도발한다면 한반도 정세는 정면대결의 위기로 직행할 가능성도 높다. 북한의 벼랑 끝 긴장고조 책략에도 단단히 버티면서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과 태세부터 총체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진다. 두 달 전 북한이 울산 앞 80km 바다에 순항미사일 2발을 떨어뜨렸다고 주장했지만 우리 군은 “탐지 포착된 게 없다”며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이 대목부터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이 구글 지도 수준에도 못 미칠 정찰사진 촬영을 위해 서울로 무인기를 침투시킨 것은 아닐 터. 무인기에 폭탄을 달면 순항미사일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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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신냉전이 불러낸 ‘전범’ 군사대국

    지난 주말 독일 북부 빌헬름스하펜 항구에선 액화천연가스(LNG) 터미널 준공식이 열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독일 정부가 러시아에 의존하던 가스 수입의 55%를 대체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이 터미널을 통해 축구장 3개 크기의 특수선박(FSRU)에서 기화된 가스가 곧바로 육지에 공급된다. 몇 년은 걸릴 것이라던 예상과 달리 독일은 10개월 만에 건설을 마쳤다. 이런 터미널 4곳이 추가로 속속 들어선다. 신중한 언사로 유명한 올라프 숄츠 총리지만 이날만큼은 단호하고 분명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가스 공급을 막아 우리를 협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틀렸다. 올해 안에 터미널을 완공하겠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불가능하다며 결코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정반대였다. 우리는 대단한 속도로 해냈고, 그것이 바로 새로운 독일의 템포다.” 독일의 행보는 빨랐다. 에너지 안보에서 탈(脫)러시아로 선회하는 한편 군사력 증강에도 신속히 나섰다. 일본이 최근 반격능력의 확보와 국내총생산(GDP) 2%로의 방위비 증액을 공식 의결했지만, 독일은 이미 6월에 헌법까지 개정해 1000억 유로 규모의 특별방위기금을 조성했다. 독일은 2024년까지 방위비를 GDP 2%로 끌어올리게 됐고 미국, 중국에 이은 세계 3위의 군사비 지출 국가 자리를 일본보다 먼저 예약했다. 일본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래 전범국가로서 ‘강요된 평화’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랬던 두 나라가 러시아의 침략전쟁과 미중 전략경쟁 속에 빠르게 재무장하고 있다. 승전 5개국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체제로 상징되는 전후 국제질서가 막을 내리는 셈이다. 이 모든 게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저물면서 비롯됐다. 미국은 이제 한발 빠지면서 지역 국가에 부담을 넘기는 역외균형(Offshore Balancing) 전략을 가동하고 있다. 재군비 속도전은 두 나라의 국가 정체성마저 바꾸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는다. 오직 수비에만 전념한다는 전수(專守)방위 원칙도, 무기 이전을 엄격히 제한하는 평화주의 원칙도 깨졌다. 군사력은 그 자체로 스스로를 지키는 든든함을 주지만 한번쯤 휘둘러보고 싶은 근질거림도 낳는다. 77년간 잠들었던 괴물 본능을 깨울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이유다. 두 나라의 행보에 주변국의 경계심이 높아질 법한데도 워낙 거센 신냉전 기류 탓에 큰 우려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있다. 독일의 경우엔 전쟁범죄에 대한 독일의 끊임없는 사죄와 반성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같은 집단안보체제 내부의 통제, 즉 독일의 충동을 막을 주변국의 견제와 균형의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의 군사대국화에 주변국은 경계를 늦출 수 없다. 부끄러운 과거 숨기기에 급급한 일본의 태도도 문제인 데다 동아시아 안보체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양자적 바큇살(hub & spoke) 동맹 구조여서 일본의 힘자랑을 억제할 지역 내 견제 시스템이 없다. 그렇다고 먼 바다 너머 미국에 맡겨둘 수만은 없다. 그래서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북한 중국의 위협에 맞선 한미일, 한일 안보협력은 불가피하다. 한국은 일본과 협력하면서 동시에 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일본이 신뢰받는 나라가 되도록 진정 어린 과거사 반성을 끌어내는 한편으로 일본의 군사 활동이 한반도 위기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안전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지정학적으로 일본의 방파제 역할을 해온 한국의 권리이자 책임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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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시진핑의 승풍파랑

    “핵심은 신뢰를 높이는 것이다.” 중국 런민일보는 15, 16일 열린 중앙경제공작회의 결과를 이런 제목으로 18일자 1면에서 전했다. 매년 12월 열리는 경제공작회의는 최고위 정책결정자들과 지방정부 고위 관료, 국영기업 대표 등 수백 명이 이듬해 경제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회의. 올해 회의에선 지도부의 친(親)기업 발언들이 두드러졌다. 특히 시진핑 국가주석은 “나는 일관되게 민간기업을 지원하고 민간경제가 더 발전된 지방에서 일해 왔다”며 “민간기업과 기업인은 우리와 같은 편이다”라고 강조했다. ▷중국은 이번에도 ‘안정 속에 성장을 추진한다(穩中求進)’는 기존 방침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간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와 부동산 기업에 대한 규제의 명분이었던 ‘반(反)독점·부당경쟁’도, 시 주석이 강조하는 핵심 가치인 ‘모두가 잘사는 사회(공동부유·共同富裕)’도 언급하지 않았다. 분배보다는 성장을 중시하는 기조로 전환하면서 그간의 전방위적 ‘빅테크 때리기’도 끝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외신도 민간기업과 외국기업, 그중에서도 인터넷 플랫폼 기업에 관심을 표시한 것에 주목했다. ▷그제 이롄훙 저장성 당서기가 항저우에 있는 알리바바 본사를 찾은 것은 그런 정책 변화의 신호탄일 것이다. 2년 전 마윈 창립자가 “중국 은행은 전당포식 운영을 하고 있다”고 당국을 비판한 것을 계기로 알리바바가 반독점 조사를 받은 이래 고위급 관리의 첫 방문이다. 이 서기는 “알리바바가 최전선에서 경제성장을 이끌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글로벌 경쟁에서 두각을 보여 달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시 주석이 새삼 친기업 기조를 내건 것은 10월 당대회에서 종신 체제를 굳힌 만큼 이제 여유를 갖고 실용적 정책으로 성과를 내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겠지만, 그만큼 향후 경제전망이 어렵다는 방증일 수 있다. 6%대에 이르던 경제성장률은 올해 3% 초반대로 반 토막이 났다. 미중 전략경쟁 격화 속에 식량·에너지 안보와 반도체 등 핵심 공급망 확보는 당장 발등의 불이다. 더욱이 ‘제로 코로나’에 대한 반발로 ‘시진핑 퇴진’ 구호까지 나왔다. ▷시 주석은 “중국경제의 큰 배는 승풍파랑(乘風破浪)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 ‘승풍파랑’은 원대한 뜻을 이루기 위해 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치며 극복해 나간다는 뜻. 우선 경제성장에 집중하면서 사회적 안정도 이뤄 중국몽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한번 잃은 신뢰를 회복하는 일부터 쉽지 않을 것이다. 언제 다시 고삐를 죌지 모른다는 시장의 불안과 불신은 당장 중국이 헤쳐 가야 할, 그 어느 때보다 거칠고 험한 풍랑일 것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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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철희]그렇게 김씨 왕조가 된다

    “아이는 비밀 노출을 엄단하느라고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고 울타리 안에서만 자랐다. 합법적으로 갈 수 있는 곳은 봉화진료소뿐이었다. 천으로 차창을 전부 가린 ‘수인차’를 타고…. 제네바에 가서도 어울리지 못했다. 쉬는 시간 종이 치면 아이들은 다 밖으로 뛰어나가는데 그 애만 교실에 앉아 그림만 그렸다. 그리는 것은 평양 만화에서 본 ‘미국놈 대가리’였다.” 북한 김정일의 동거녀 성혜림의 언니로서 1996년 탈북한 성혜랑이 회고록 ‘등나무집’에서 묘사한 조카 김정남(2017년 피살)의 어린 시절이다. 성혜랑이 보모 겸 가정교사를 맡아 보살피던 김정남은 4m 넘는 담장 위에 고압선까지 쳐진 동평양 관저 안에 갇혀 살았다. 온갖 장난감과 놀이기구로 채워진 300평짜리 전용 오락실에다 “예예, 대장동지” 떠받드는 어른들 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아이로, 하지만 가장 외로운 아이로 자라야 했다. 김정남과 같은 ‘숨겨진 자식’ 처지였던 김정은의 삶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김정은에겐 친형과 여동생이 있었으니 그나마 나았을까. 경호원들과 어울려 대장 노릇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외부와의 단절, 주변의 떠받듦은 더 큰 인정 욕구를 키웠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승부 근성과 뭐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편집증적 성향도 거기서 비롯됐을 것이다. 김정은이 최근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 발사 현장과 자축 행사에 아홉 살짜리 둘째로 추정되는 딸과 함께 잇달아 나타났다. 북한 매체는 그 딸을 ‘사랑하는 자제분’ ‘존귀하신 자제분’이라 칭했고 “백두의 혈통만 따를 것”이라는 충성맹세도 쏟아냈다. 딸의 출현은 세계의 호기심을 불렀고 그 관심도는 ‘괴물 ICBM’의 공포심을 압도할 정도다. 일각에선 그 딸이 후계자로 낙점됐을 것이란 때 이른 관측이 나온다. 김정은의 여덟 살 생일 때 열린 축하파티에서 고위 간부들이 보천보전자악단 연주에 맞춰 ‘척척 척척척 우리 김대장 발걸음∼’이란 노래를 불렀는데, 그때 이미 후계자로 정해졌다는 일본인 요리사와 김정은 이모의 증언도 새삼 주목받는다. 하지만 김정은에겐 남아를 포함한 두 자녀가 더 있다고 한다. 머지않아 ‘젊으신 청년대장’ ‘친애하는 대장동지’가 깜짝 등장할 수도 있다. 북한이 3대에 걸친 폭압적 약탈정권이 된 지 오래지만, 이제는 4대 세습이 당연시되고 관심사는 후계자가 누구냐가 됐다. 김정은은 권좌에 오른 지 7개월 만에 아내 리설주를 공식석상에 대동하고 나왔다. 리설주 띄우기는 두 사람의 공인된 결합을 과시하고 그 자녀가 대를 이어 통치할 것임을 예고하는, 즉 세습군주제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첫 기획이었다. 여러 여성과의 사이에 여러 자녀를 둔 아버지의 숨겨진 아들 중 한 명으로 자란 김정은. 그에게 후계 체제의 확립은 미뤄둘 수 없는 숙제다. 창업 군주는 일찌감치 장남을 후계자로 정해 20년간 권력을 물려주기 위한 길을 닦았다. 반면 2대 군주는 후계 준비도 시작하지 못한 상태에서 뇌졸중을 맞아 서둘러 막내아들을 내세워야 했다. 이제 3대 군주는 그런 권력의 불안정과 궁정 암투를 막기 위해 왕가의 상속 시스템을 구축하려 한다. 마침 후대에 물려줄 유산 ‘절대병기’도 완성 단계에 있다. 김정은에게 핵무기와 후계자의 기괴한 조합은 21세기 세습군주정의 완성을 위한 불가결의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인민들이 겪는 굶주림과 빈곤, 그것이야말로 피할 수 없는 가장 위험한 유산임을 그는 정말 모를까.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2-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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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철희]트럼프의 대선 재도전 선언

    “이겨라. 이기고, 이기고, 더 이겨라. 더, 더. 무엇을 하건 승자가 돼라.” 부동산개발업자 아버지는 늘 아들에게 ‘킬러가 돼야 한다’면서 거칠게 밀어붙였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그의 인생 사전에 ‘패배’나 ‘실패’는 있을 수 없다. 대선 패배를 인정하는 ‘승복’은 더더욱 그렇다. 4년 임기 중 두 차례나 탄핵소추를 당한 대통령, 부정선거를 외치며 지지 세력을 의사당 난입 폭도로 내몰아 평화적 정권 이양의 전통을 깨뜨린 대통령이란 불명예스러운 기록도 그의 정치 행보엔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탄핵도, 패배도 그에겐 사기당하고 탈취당한 것일 뿐이다. ▷“미국의 귀환이 지금 바로 시작됐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15일 세 번째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11·8 중간선거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오면서 트럼프 측근들은 적어도 조지아 상원의원 결선투표가 끝날 때까지 출마 선언을 미루자고 했지만 그를 막지 못했다. 무엇보다 공화당 내부 경쟁자들의 부상을 막기 위해선 서둘러 나서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는 계산이 크게 작용했고, 자신을 향한 사법당국의 칼날을 피하려면 지지층의 정치적 보호막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트럼프의 발길을 재촉했다고 미국 언론은 분석한다. ▷트럼프에게 중간선거 결과는 위기의 신호다. 민주당에 상원 다수당을 넘겨준 데다 트럼프의 ‘대선 사기론’에 동조한 극우 후보들마저 줄줄이 고배를 들었다. 당장 공화당 내에선 트럼프 책임론이 일었고, 대선후보 선호도 조사에서도 ‘리틀 트럼프’로 불리던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에게 뒤처졌다. 그런데도 트럼프 측은 당내 경선에서 반(反)트럼프 경쟁자들이 표를 나눠 먹으면 무난히 본선 티켓을 따낼 수 있다고 기대한다. 정작 당내에선 트럼프가 경선에 패배하면 그에 불복해 열성 트럼프 지지층을 공화당 반대세력으로 만들 것이라는 걱정이 나온다. ‘트럼프 출마에 민주당이 신났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 중에도 백악관을 떠났다가 다시 도전한 몇몇 사례가 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22, 24대)는 1888년 재선 도전에 나서 전체 득표수에선 이겼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뒤져 낙선했다가 4년 뒤 재출마해 성공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26대)는 1908년 불출마하고 4년 뒤 나섰다가 낙선했다. 그는 공화당 경선 문턱을 넘지 못하자 신당을 창당해 출마하는 바람에 민주당에 어부지리를 줬다. 트럼프가 제2의 클리블랜드가 될지, 제2의 루스벨트가 될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미국 정치는 또 한 편의 흥미진진한 막장 드라마를 예고하고 있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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