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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자신의 인생을 자서전으로 남기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좋은 글을 쓰려면 우선 글감이 되는 인생의 자료를 잘 모아두어야 합니다. 글쓰기 고수들의 신박한 인생 기록 비법을 내·손·자(내 손으로 자서전 쓰기) 클럽이 소개합니다.미국의 스콧 니어링(1883∼1983)과 헬렌 니어링(1904∼1995) 부부는 함께 쓴 책 ‘조화로운 삶(1954)’을 통해 번잡한 도시 생활을 떠나 한적한 시골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전세계인에게 설파했다.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3년 뉴욕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버몬트 주 외딴 오두막집에서 시골살이를 시작한 부부는 6·25전쟁이 벌어지던 1952년 역시 사람이 드문 메인주 바닷가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거기서 각자의 생을 마감했다.부부가 말한 조화로운 삶이란 대략 이렇다. 하루의 3분의 1은 스스로 먹을 채소를 가꾸며 땔감을 장만하고, 3분의 1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3분의 1은 친구들과 교류하는 것이다. 그들보다 한 세기 먼저 메사추세츠 주 월든 호숫가 오두막집에 은거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의 뒤를 이은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은 2차 대전 이후 반전운동에 열광한 미국 젊은이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그들은 각자의 삶을 여러 권의 책으로 남긴 글쓰기 고수들이었다. 함께 쓴 책이 7권, 스콧이 쓴 책이 51권, 헬렌이 쓴 책이 4권이니 모두 합하면 62권이다. 그중 두 권은 각자가 쓴 자신의 전기, 즉 자서전이다. 스콧의 것은 1972년에, 헬렌의 것은 20년 뒤인 1992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스콧에게 자서전을 쓰라고 설득한 것은 헬렌이었고, 헬렌의 자서전은 스콧의 이야기가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부부가 상대의 인생을 함께 기록한 것이나 다름없다.경제학자로서 사회개혁가이고 자유주의자였던 스콧은 아동 노동문제를 제기하고 여성의 사회참여를 지지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 흥분했으나 이어진 전쟁의 광기에 비판적인 된 그는 미국의 1차 세계대전 참전을 반대하는 반전운동에 앞장서다 스파이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다. 배심원단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이 일로 그는 대학에서 쫓겨나고 아내와 아들과도 헤어져 살게 된다.그런 까닭에 ‘스콧 니어링 자서전’은 진보주의적 관점에서의 시대 고발이자 자기 항변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필자를 포함해 그와 다른 이념과 신념을 가진 독자들은 마음 편하게 읽기 쉽지 않다. 하지만 스콧은 서문에서 ‘자서전 쓰기’에 관한 중요한 한 문단을 남겼다. 한 인생의 기록은 그 시대의 기록이어야 한다는, 좌우 이념과 동서 고금의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일반론을 설파한 것이다.“일반적으로 자서전은 살아오면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자신을 중심으로 그려내는 보고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자기 이야기에만 국한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서전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에서, 그리고 전체의 일부로서 느끼고, 사고하고, 행동한다. 나는 이 세가지 차원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쓸 이야기는 이 셋을 동시에 포괄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자서전은 한 개인의 기록이라기보다는 그 개인이 살아온 시대의 기록이 되어야 한다(스콧 니어링 자서전, 실천문학사, 2000년, 39-40쪽).”모든 개인은 특정한 한 시대를 살아간다. 예를 들어 만 60세를 기준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거나 앞두고 있는 한국의 ‘베이비 부머’ 세대는 ‘산업화 시대’, 이어진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다. ‘한강의 기적’이 상징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을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으로 만드는데 초석을 닦은 ‘산업화 세대’, ‘넥타이 부대’가 상징하는 것처럼 20세기 신생국가 가운데 가장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구축한 ‘민주화 세대’도 대한민국의 역사를 움직였던 그 시대의 기록을 각자의 자서전으로 남겨 후대에 전해주면 어떨까.정치적인 스콧의 자서전과는 달리 헬렌의 자서전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1997년, 보리)’은 훨씬 비정치적이고 개인적이며 묘사적이다. 스콧은 자서전에서 전처 넬리와 아들 존과 로버트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헬렌은 그의 자서전에서 남편의 전 식구들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긴다. 스콧은 버몬트와 메인에서의 ‘조화로운 삶’에 대해서도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스콧의 디테일한 개인사를 기록으로 남긴 것은 헬렌의 몫이었다. 헬렌의 자서전은 후반부로 갈수록 서술보다는 인용이 많아지는데 대부분은 스콧이 헬렌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글이다.“여기는 겨우 일주일만 있었고(숙박료는 7달러), 먹는 것은 날마다 잘 먹었소. 아침은 오렌지와 대추야자 몇 개, 점심은 양상추 1인분 또는 1인분 반, 사워크림과 꿀 약간, 저녁은 강연 뒤의 토마토주스. 이 밖에 하루 중 때때로 당근, 자몽, 사과 같은 과일로 만든 주스를 보통 작은 컵으로 얼마간 들었다오(‘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보리, 2022년 고침판. 143쪽).”1940년대 스콧이 미국 디트로이트에 강연을 하러가 보내온 편지를 인용하면서 헬렌은 “이 모두가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라’는 그 사람의 철학에 따른 것”이라고 썼다. 스콧은 이념이 다른 맏아들 존과 잘 지내지 않았다. 미국의 자본주의와 세계대전 참전에 비판적이었던 스콧과 달리 존은 그것의 홍보에 앞장섰다. 아직 부자지간이 파탄나기 전인 1949년 12월 스콧은 존에게 편지로 이렇게 타일렀다.“어느 날 너는 깨어 일어나 네가 무엇을 해왔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네가 그것을 깨달아 남은 네 인생을 무언가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돌리고, 천박하고 거짓되고 파괴적인 사회 환경에서 어린 것들(두 딸)을 구하는 데 쓰기를 간절히 바란다(위의 책, 179쪽).”왜 존의 편지는 소개하지 않는지, 스콧의 편지는 어떻게 남아있는지에 대해 헬렌은 이렇게 말한다. “스콧은 손으로 썼는데 나는 그 가운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편지들은 종종 타자해 사본을 보관해 놓았다. 스콧은 몇십년 동안 자기에게 배달되는 모든 우편물은 없애 버리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인터넷이 보편화되기 전까지 손편지는 인간이 서로 소통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편지를 쓰는 순간만큼은 누구나 그 일에 몰입하게 된다. 멀리 떨어진 누군가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편지글 만큼이나 공이 들어간 개인사의 기록은 없을 것이다. 향후 자서전 쓰기를 고려한다면 내가 쓴 손편지는 복사해 보관해 놓는 것이 좋다.최근에는 대부분 e메일로 편지를 주고받기 때문에 보관하기가 더 편해졌다. ‘보낸 편지함’의 글들을 주기적으로 정리하고 개인 역사의 기록이 될만한 것들은 컴퓨터의 별도 폴더에 복사해 저장해 놓는 것이 좋다. 누군가에게 내가 받은 메일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나의 역사를 기록하고 싶을 때, 술술 몇 장을 추가해 나갈 수 있는 완벽한 사료가 되는 것이다.※ 을 방문하여 당신의 특별한 오늘을 사진과 글로 동아일보 1면 톱에 기록해보세요. 훗날 멋진 인생기록이 됩니다.myhistory@donga.com으로 본인이나 지인의 자서전과 인생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검토하여 소개해 드립니다.신석호 부국장 kyle@donga.com}
최근 자신의 인생을 자서전으로 남기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좋은 글을 쓰려면 우선 글감이 되는 인생의 자료를 잘 모아두어야 합니다. 글쓰기 고수들의 신박한 인생 기록 비법을 내·손·자(내 손으로 자서전 쓰기) 클럽이 소개합니다.한국을 대표하는 정신과 의사이자 뇌과학자, 40대 후반에 시작한 책쓰기로 90세 가까운 지금까지 122권을 책을 낸 사람. 이시형 사단법인 세로토닌문화 원장은 9월 8일 오후 약속한 시간보다 먼저 자택 근처 호텔 커피숍에 나와 앉아 있었다. 다가서면서 보니 이 원장은 서류판에 꽃힌 흰색 A4용지에 만년필로 뭔가를 빠르게 쓰고 있었다. 몰입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해 인사를 하기가 어색할 정도였다.“선생님 뭘 그리 열심히 쓰고 계셨어요?”인사를 마친 뒤 바로 물었다. 2011년 청소년 정신건강 프로그램인 ‘세로토닌 드럼 클럽’을 시작한 그는 얼마 뒤 세로토닌문화원 교육위원회 관계자들과 이주호 교육부장관을 만나기로 했다며 무슨 말을 할지 생각나는 대로 적고 있다고 말했다.“지금까지 대한민국은 남들을 따라가기만 했어요. 따라가기는 쉬워요. 이제는 앞서가야 할 때예요. 그런데 문제는 지금까지 우리 교육은 따라가는 인재는 잘 키웠는데 앞서가는 인재를 키우지 못했다는 거에요. 위험도 무릅쓰고 실패도 하고 엉뚱한 가설도 세우고 그런 인재를 키워야 하는데 시스템이 잘 안 되어있어요.”그는 관련된 내용을 책으로 쓰고 있다고 했다.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의사 시절인 1982년 ‘배짱으로 삽시다’를 낸 뒤로 지난해 ‘신인류가 몰려온다’까지 122권의 책을 낸 그는 대한민국의 글쓰기 고수다. 올해에도 세 권의 책을 동시에 쓰고 있다니 조만간 125권째 저서가 나올 수 있는 셈이다.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 파악한 이 원장의 글쓰기 요술 방망이는 바로 눈앞에 있었다. 몽블랑 만년필 한 자루, 고급 노트 한 권, 서류판에 꽂은 A4용지들, 그리고 모든 것을 넣고 다니는 서류 가방이다. 이 원장은 언제 어디든 ‘문방사우’라할만한 이들을 데리고 다닌다고 했다. 혼자 있건 사람을 만나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적는다. 그는 2021년 펴낸 ‘어른답게 삽시다’ 226페이지 ‘자전기(自傳記)를 쓰자’ 코너에 이렇게 주장했다.“일단 문방구나 서점에 가서 필기도구부터 사라. 좀 비싼 걸로 사라. 펜으로, 제 손으로 쓰는 게 좋다. 만년필은 몽블랑, 파버카스텔을 권한다. 제법 비싸다. 그러나 당신의 화려한 노년을 위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 공책은 몰스킨을 사라. 역시 비싸다. 다시 말하지만 그래야 할 가치가 있다. 비싼 돈을 들여 사놓았으니 그냥 놀리기가 아까워서라로 쓰게 되어있기 때문이다.”대화 중 취재한 놀라운 사실은 그가 글을 쓸 때 PC든 노트북이든 전자기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국 예일대 유학시절 타이핑을 배웠고 한국에 PC가 처음 들어왔을 때 KT의 첫 시험 사용 대상자이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부터 글은 직접 손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나는 컴맹입니다. 타이프는 잘 치지만 글은 내 손으로 써야 내 혼이 담길 것 같았어요. 글이란 나를 떠나 독자와 대화하는 것인데 혼이 발산되려면 내 손으로 써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컴퓨터를 사용하면 내용이 말라버릴 것 같아요. 그래서 글은 만년필로만 씁니다.”만년필로 글을 쓰는 단계는 이렇다. 우선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서류판에 꽂은 A4용지에 휘갈겨 적는다. 우선 중요한 아이디어 위주로 적는다. 다음엔 이렇게 적어놓은 아이디어를 문장으로 만들어 고급 노트의 펼친 면 중 오른쪽 페이지에 적는다. 왼쪽은 일부러 비워놓는다. 오른쪽에 적어놓은 문장에 대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왼쪽에 적기 위해서다. 이렇게 노트의 오른쪽과 왼쪽이 채워지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새로운 노트에 완전한 문장으로 옮겨 적는다.“이렇게 네 번, 다섯 번 옮겨 적기 작업을 거친 뒤에 비서에게 줍니다. 내가 글씨를 날려서 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잘 못 읽는데, 비서는 귀신같이 알아보고 정리해서 출판사에 줍니다. 최근 모든 책을 이렇게 냈습니다. 올해 준비하고 있는 세 권도 마찬가지구요.”본인의 표현대로라면 이 원장은 ‘인풋(In-put)’도 잘 하고 ‘아웃풋(Out-put)’도 잘 하는 사람이다. 남의 생각도 머릿속에 잘 넣어두고 자신의 생각도 말과 글로 잘 풀어놓는다. 그는 대다수 한국인들은 ‘인풋’은 잘 하는데 ‘아웃풋’은 어려워한다고 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를 배운 뇌과학자로서 한국인들이 왜 말하기와 글쓰기, 즉 ‘아웃풋’을 어려워하는지 이렇게 설명했다.“뇌과학이 밝힌 것에 따르면 ‘인풋’은 뇌의 양 옆 측두엽이, ‘아웃풋’은 앞쪽의 전두엽이 관장합니다. 측두엽은 무언가를 잘 기억해서 쌓아놓아요. 이걸 전두엽이 잘 풀어서 ‘아웃풋’을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우린 창고에 쌓아 놓기만 하고 풀어 쓰지를 못해요. 측두엽에 쌓인 생각과 지식 등을 버무려서 ‘아웃풋’을 생산하는 작업 뇌(working memory)가 잘 발달하지 않은 거지요. 작업뇌를 자꾸 써야 전두엽이 발달하거든요.”그 역시 어린 시절엔 글을 쓴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땐 일기도 안 썼다. 그런 그가 1982년 첫 저서 ‘배짱있게 삽시다’로 일약 글쓰기 고수의 반열에 오르게 된 건 40대 후반에 찾아온 허리 디스크가 결정적이었다. 테니스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허리에 무리가 오자 누워 책을 읽고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떠오르는 생각들 중 당대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책으로 풀어낸 것.“한국 사람들이 ‘아웃풋’이 잘 안 되는 것은 자신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성에게 마음은 가은데 ‘커피 한 잔 하자’고 못하는 것이지요. 거절당해도 믿져야 본전인데 말입니다. 말 한 마디에 죽겠느냐, 뭐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책에 풀어놓았어요.”책은 그를 정신과 의사로도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책을 읽고 일테면 ‘한국의 쑥맥’들이 다 와서 저한테 와서 치료를 해 달라는 겁니다. 마음은 있는데 말도 행동도 잘 안되는 그들의 증상을 ‘대인공포증’이라고 이름지었어요. 환자가 하도 많아서 병원 마당에 경찰이 와서 표를 나눠줄 정도였어요. 그래서 여러 명을 한 방에 모아놓고 집단치료를 시작했지요. 세계 정신과 치료사상 처음이었어요.”말도 글도 청산유수인 그의 일생 자체가 스토리였다. 이미 낸 책 123권 중에 반드시 자서전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과거 한 잡지사에서 내 이야기를 취재해서 기사로 쓰다 보니 거의 자전기가 되어 버렸어요. 가져왔는데 보니 뻥이 너무 많았어요. 내가 이야기할 때부터, 그리고 글로 적은 사람들이 초를 친거죠. ‘아하. 자전기는 함부로 쓰는 게 아니구나’ 생각하고 ‘없던 일로 하자. 내가 자전기를 쓸 만큼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것 같다’고 했어요. 다행히 흔쾌히 받아주었어요.”그런 그가 일생 첫 자전기를 낸다. 지난해 122권째 책인 ‘이시형의 신인류가 몰려온다’를 냈던 출판사 ‘특별한 서재’에서 원고를 받아 제작하고 있다. “나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내기로 했어요. 네 다섯 살 쯤 할머니에게 혼나고 감나무 아래에 묶인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이후 전 일생을 이야기로 풀어서 출판사에 줬는데, 출판사가 그러면 너무 밋밋하니까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나의 해결책이 무었인지 풋노트를 달자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일기도 쓰기 싫어했던 시골 소년이 한국을 대표하는 정신과 의사가 되고 120여 권의 책쓰기 고수가 되어가는 과정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을 방문하여 당신의 특별한 오늘을 사진과 글로 동아일보 1면 톱에 기록해보세요. 훗날 멋진 인생기록이 됩니다.myhistory@donga.com으로 본인이나 지인의 자서전과 인생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검토하여 소개해 드립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자신의 인생을 자서전으로 남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당신도 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글감이 되는 인생의 기록을 잘 모아두는 게 절반입니다. 자서전 쓰기 고수들의 신박한 인생 기록 비법을 내·손·자(내 손으로 자서전 쓰기) 클럽이 소개합니다.나이 90이 가깝지만 책과 유튜브를 통해 ‘죽을 때까지 즐겁게 유쾌하게 살고 싶다’고 외치는 노인이 있다. 정신과 의사로서 한 평생 한국인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화두를 제시하고 처방해 온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주인공이다.최근 40여 년 동안 23권의 책을 썼는데 2013년 나온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갤리온)’는 4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로 10년 만인 올해 개정판이 나왔다. 최근에는 유튜브 ‘이근후STUDIO’ 등을 통해 구독자들을 찾아가고 있다. 7일 오후 종로구에 있는 가족아카데미아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스스로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했지만 얼굴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무슨 일일까?“내 책이 영국의 권위있는 펭귄출판사를 통해서 15개 나라 언어로 번역된답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살고 싶다’가 나온 뒤 2019년에 낸 ‘어차피 살 거라면, 백 살 까지 유쾌하게 나이드는 법(메이븐)’이라는 책인데, 올해 4월에 최종 계약서에 사인했고 지금 독일어판은 표지까지 나온 상태입니다.”고령화가 심화되고 있는 한국, ‘어떻게 잘 늙어갈까’에 대한 한국 정신과 의사의 방법론이 영국과 독일, 네델란드, 홍콩과 인도네시아 등 세계 15개 나라 등의 언어로 읽혀진다는 건 뜻밖의 ‘뉴스’였다. 이 교수가 즐거울만 했다. 그는 “내가 늙어서 이런 즐거운 일이 생긴 건 운인데, 그 운이 어디서 왔는지 아느냐”며 오래 전 맺은 한 환자와의 인연을 떠올렸다.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인 2019년에 미국 보스톤 교민들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갔어요. 한 부부가 뉴욕에서 지방도로로 일곱 시간 차를 몰아서 왔다며 강연을 듣고 나한테 식사까지 대접하는 거에요. 그래 ‘나와 인연이 있느냐’고 했더니 오래 전에 부인의 언니가 한국에서 나한테 치료를 받았다는 겁니다. 아마 치료가 잘 되었던가 봅니다.”부부와 함께 온 딸이 미국에서 출판 에이전시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인연으로 이 교수의 책이 번역대상으로 검토되었고 최근 결실을 이룬 것이다. 인연이 인연을 낳고 그 인연이 전세계에 독자들에게 이 교수와의 인연을 만들어 가게 된 것이다.경북대 의대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공부한 이 교수는 서구식 교육을 받은 정신과 의사지만 인간 정신에 내재된 신성, 모든 일에 원인이 있다는 ‘연기론’을 믿는다고 했다. 최근 흉흉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유머를 연구하고 있다는 그는 ‘유머’라며 이야기를 이었다.“내가 그런 좋은 인연을 맺고 말년에 행복한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 찾아냈어요. 군의관 시절에 한 시골 동네에서 ‘신기’가 있어 불행하다는 여성을 상담해 준 적이 있어요. 자기가 말만 뱉으면 현실이 된다는 거예요. 그 여성이 상담을 끝낸 뒤 나가면서 ‘내가 한마디만 해 주겠다’고 해서 가슴이 철렁했는데, ‘말년에 잘 되려면 이름을 이근후에서 이근우로 바꾸라’는 거에요. 그땐 웃고 말았죠. 근데 나중에 후배가 나한테 이메일을 지어주면서 이름을 ‘Kun Hu’가 아니라 ‘Kun Woo’로 지어왔어요. 그게 지금의 복이 된 거 같아요. 하하.”이 교수는 타고난 ‘스토리텔러’다. 말을 재미있게 하고 그 말을 풀면 그대로 책이 되는 그런 부류. 그의 책이 이야기 듣는 것처럼 술술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책이 자신의 일과 취미, 가족 등 일상을 소재로 경험과 지식을 풀어내고 있어서 “그 많은 인생의 장면들을 기록하는 비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나에 대한 기록이 없어요. 내가 환자들 상담하면서 엄청난 기록을 만들었지만 정작 내 인생에 대한 기록은 없어요. 네팔에 봉사활동을 갔을 때 당시 처음 나온 노트북을 들고 가서 며칠 기록한 게 있는데 지금은 어디 저장해 놨는지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 책에는 몇 년 봄 가을 정도라고 쓰지 몇월 며칠 이런 팩트가 몇 개 밖에는 없어요. 적어놓지 않아서 나도 모르니까. 만약 내가 잘 기록했다면 정확하게 쓸 수 있었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럴 수가 없어요.”젊어서부터 등산이 취미였던 그는 히말라야 산맥이 있는 네팔을 찾아 등산도 하고 봉사활동도 했는데, 그곳에서 만난 외국인들은 틈만 나면 앉아서 자신의 등반 경험을 기록하는 것을 봤다고 했다. 그래서 등반안내서도 외국인들이 쓴 것이 한국 것보다 훨씬 자세하고 정확하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자서전을 쓰려면 정확성과 객관성을 갖춘 팩트가 있어야 하는데, 자신이 쓴 책은 그것이 없는 그저 ‘신변잡기’일 뿐이라고 겸손해 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그래서 쉽게 술술 읽히는 책이 독자의 마음을 사고 있는 것을.그런 이 교수에게 인생 기록 비법이 있다면 바로 사진촬영이다. 등산 못지않게 사진찍기를 좋아했던 그는 망원렌즈까지 갖춘 제대로 된 사진기를 메고 등산을 다녔다. 그의 사무실 책장 가장 좋은 곳에는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에 오르는 데 성공한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 경을 1982년 4월 네팔에서 만나 찍은 사진이 장식하고 있었다. 이 교수는 6.25전쟁 당시인 경북고 2학년 재학 때 힐러리 경의 등반 성공 사실을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통해 듣고 “여러분도 에드먼드 힐러리처럼 웅지를 가지라”는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힐러리 경과 함께 찍은 한 장의 사진은 당시의 기억을 지속하도록 해줬고 ‘죽을 때까지 즐겁게’의 한 챕터로 기록되도록 도왔다. 나중에 이 교수는 이 사진을 속초에 있는 국립산악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리고 이 사연을 다시 ‘백살까지 유쾌하게’에 기록했다.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사직 찍기는 전문 사진가의 손에서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취미가 되었다. 페이스북이 지고 인스타그램이 뜨는 것이 상징하듯 요즘 SNS는 글 위주에서 사진 위주로 바뀌고 있을 정도다. 평생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당장 기록하기 힘들더라도 한 장의 사진으로라도 남기면 좋다. 사진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며 그 정보들은 나중에라도 나의 기억을 다시 소환해 낸다. 한 장의 사진에 짧더라도 설명을 남겨놓으면 금상첨화인 것이다. 인생의 기록으로서의 사진은 잘 찍는 것만큼 저장하는 것도 중요하다. 당장 필요하지 않다고 제대로 저장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분실하거나 필요할 때 쉽게 찾을 수 없다. 이 교수는 과거 네팔 봉사활동에 가면 보통 필름 100통을 찍어왔다고 했다. 그렇게 찍어온 사진을 인화해 파일에 넣어 지금도 보관하고 있었다. 그를 방문했을 때 사무실 서재에는 그렇게 만든 파일들이 나란히 이름을 보이고 있었다.디지털 사진도 보관이 중요하기는 마찬가지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을 주기적으로 PC나 노트북, 외장하드에 다운받아 저장해야 한다. 당장 필요하지는 않기 때문에 시기별로 아니면 이벤트별로 폴더를 만들어 저장해놓아야 나중에 찾기가 쉽다. 예를 들어 2023년 폴더에 1월, 2월 등으로 나눠 넣거나 ‘가족 추석 행사-2023년 9월’ 등으로 저장해 놓으면 좋다. ※ 을 방문하여 당신의 특별한 오늘을 사진과 글로 동아일보 1면 톱에 기록해보세요. 훗날 멋진 인생기록이 됩니다. myhistory@donga.com으로 본인이나 지인의 자서전과 인생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검토하여 소개해 드립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서애학회는 13일 오후 2시 반 서울 종로구 프레스센터에서 ‘서애 류성룡과 충무공 이순신의 위대한 만남’이라는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한다.제1부 학술회의에서는 ‘위대한 만남 그리고 대한민국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 ‘음양이론으로 본 임진왜란의 전개과정-류성룡과 이순신의 위대한 만남을 중심으로(백권호 서울종합과학대학원대학 석좌교수)’, ‘류성룡과 이순신의 위대한 만남(박정규, 전 해군대 교수)’ 등 세 편의 논문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진행된다.제2부 사단법인 서애학회 창립총회에서는 민간단체인 서애학회를 사단법인으로 새롭게 발족시키고 초대회장인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의 후임으로 서재진 전 통일연구원장을 회장으로 선임한다. 서 신임 회장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에서 북한사회와 남북관계를 주로 연구했다. ‘또 하나의 북한사회’, ‘주체사상의 이반’ 등 20권의 책을 저술했다. 원장 퇴임 후 리더십 코칭 분야에 투신해 아들러 심리학에 기반한 코칭 프로그램인 ‘아들러 리더십 코칭’이라는 저서를 출간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시니어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 편집실이 평생 현역 시대를 살아가야 할 4050세대를 위한 ‘제2직업’ 지침서 ‘Lifetime Job(평생 일자리)’을 펴냈다. 무크지 형식의 콘텐츠 큐레이션 매거진 ‘dice@11pm’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정부의 중장년 일자리 정책부터 다양한 전직 사례, 노후에 추천되는 직종 정보, 창업을 위한 고려사항 등을 담았다. 정부기관과 지자체, 교육기관, 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일자리 서비스 정보도 담겼다. 트렌드와 가이드, 체험과 전문가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녹여냈다. 책 속 QR코드를 스캔하면 지면에 담지 못한 더 자세한 정보에 닿을 수 있다.브라보 마이 라이프 김종훈 편집인은 “‘dice@11pm’은 주사위의 여섯 면과 같은 여섯 개 파트에 밤 11시 일과를 마치고 펼쳐보기 쉬운 내용을 담을 것”이라며 “노후 준비를 위한 금융, 거주 등의 정보를 담은 시리즈 계속 펴낼 것”이라고 말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김홍중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 대외협력부 상무가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PR의 윤리를 고민한 ‘포스트-진실 시대의 PR(커뮤니케이션북스)’을 출간했다. 본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얻은 고민을 발전시킨 것으로 홍보 실용서가 아니라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초래한 현대 사회 담론 공간의 구조와 문제점, 대안을 다룬 정치커뮤니케이션 서적에 가깝다.기자 출신인 저자는 진실(truth)이 가치를 잃어가는 ‘포스트-진실’ 시대, 디지털 미디어와 매스 미디어가 혼재하는 하이브리드 미디어 환경 속에서 민주주의의 근간인 공론장이 위협받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모바일 시대를 맞아 다양한 SNS는 ‘관심 경제’를 확산시키고 기존 매스 미디어의 ‘게이트 키핑’ 능력은 줄어들고 있다. 조직이 아닌 개인, 공중도 ‘진실의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은 진실보다는 의도적인 선전과 상업적 PR의 활동반경을 키우고 있다는 것.저자는 문제의식을 포퓰리즘과 담론을 통한 헤게모니, 4차 산업혁명이 낳은 감시자본주의 등 정치경제적 검토로 심화시켜 나간다. 결국 PR의 긍정적 이상적 측면을 강조한 ‘조화론적 PR이론’보다 갈등과 경쟁이라는 현실을 반영한 ‘경합적 PR모델’이 옳다는 결론에 이른다.마지막에 “디지털 플랫폼의 설계방식이 인간의 인지적·심리적 취약점을 악용한 설득과 포스트-진실적 커뮤니케이션을 조장한다면, 플랫폼 설계 자체를 변경하려는 사회적 노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 대목은 최근 가짜뉴스와 저질 연성기사 양산의 환경으로 지목되고 있는 한국 포털 개혁 논의에도 시사점을 준다.신석호기자 kyle@donga.com}
챗GPT 열풍이 거세다. 그 강도와 심도에 있어서 개인도, 기업도, 사회도 열외일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부터 알아 나가야 할까.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독자라면 ‘초거대 AI가 불러올 비즈니스 변화’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독자들의 처지와 출발점에 따라 관심에 우선순위가 있겠지만 개인과 기업, 사회가 알아야 할 내용들을 기본적인 개념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6년째 언론사의 디지털전환을 담당하고 있는 필자에게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에서 AI 트랜스포메이션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선언이 눈에 쏙 들어왔다. “경영진과 AI를 통한 디테일을 추진하는 부서가 해당 사업을 왜 하는지를 먼저 명확히 하고 추진해야 한다”고 저자들은 주문한다. 목적을 정의한 뒤 일하는 문화를 혁신하고 사업을 효율화하여 궁극적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혁신하는데 AI기술을 활용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생성형 AI와 챗GPT에 관한 책과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저자들은 개인과 기업, 사회의 관심사 중심으로 장을 나누고 각 장마다 구체적인 질문과 답변을 하는 형식으로 자칫 어려울 수 있는 개념들을 쉽게 설명해 나간다. 마치 챗GPT가 보통 언어로 던져진 질문에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것과 비슷한 설정이다.질문을 던지는 최재홍 강릉원주대 교수는 아마존 창업에서 성장까지를 구석구석 분석한 현장 전문가다. 대답을 하는 김지현 SK경영경제연구소 부사장은 AI, 메타버스, 블록체인 등 기술 기반의 디지털 트렌스포메이션을 연구하고 있는 ICT전문가다. 김 부사장은 “인공지능의 미래는 우리가 어떻게 이 기술을 이해하고 적용하며 그 한계와 잠재력을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인간과 인공지능이 상호 협력의 토대 위에 보완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이를 지속가능한 발전에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경남대(총장 박재규)는 26일 서울 삼청동 극동문제연구소에서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일본 총리에게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후쿠다 전 총리는 2007~2008년 제91대 총리를 지냈으며 현재 ‘일본-인도네시아협회’, ‘아시아보아포럼(BFA) 고문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위대한 인물의 일생을 담은 전기를 읽으면 접하게 되는 좋은 것들이 있다. 한 사람이 태어나 위대함에 이르는 과정과 요인, 탁월한 생각 업적 인품 등 위대함의 내용, 그가 지내며 겪었던 시대의 모습 등이 그것이다.이 책의 주인공은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로 기억되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그는 ‘광전자 이론’으로 생전인 1921년 한 차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2020년(140세)까지 살았다면 ‘상대성 이론’의 입증 등을 통해 다섯 개나 더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책은 말한다.자연과학도라면 뜨고 진 자연과학 이론의 역사를 개괄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지만 인문학도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개입한 이야기는 국제정치학적 측면에서도 가치가 있다.독일이 일으킨 1차 세계대전 당시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초’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중력이 빛을 휘게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 과학자들이 이론을 검증하는 실험을 하려 하자 아인슈타인이 독일인이라는 점이 문제가 됐다. 그때 영국 천문학자 아서 스탠리 에딩턴은 이렇게 말했다고 책은 전한다. “진리에는 국경이 없다. 어느 나라 과학자의 이론이든 옳은 이론을 증명하는 것은 과학자들의 책임이다.”아인슈타인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많은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독일이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미국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편지에 서명했고 이는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종전을 이끌었지만 엄청난 민간인 희생을 본 아인슈타인은 “내 생애에 가장 큰 실수”라며 후회했다고 책은 전한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중국 전국시대를 끝내고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뒤를 다퉜던 유방과 항우. 항우는 유방을 상대로 거의 모든 전투에서 이긴다. 하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패해 결국 전쟁에서 지고 죽음을 맞이한다.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개국했지만 ‘토사구팽’의 신세가 되는 한신, 소련의 개혁개방을 주도하다 본의가 아니게 소련 제국의 붕괴를 이끈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마찬가지로 비운의 역사적 인물이다.●저자의 문제의식은?고대 중국과 한반도 삼국시대, 로마제국과 조선왕조와 막부시대 일본, 대혁명 시절 프랑스와 남북전쟁 당시의 미국 등 동서고금 13개 역사적 사건에 등장하는 비운의 패배자들에겐 어떤 점이 부족했을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떤 것이 있었을까.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에 경제학과 게임이론을 적용하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출판사 서평 한 문단많은 독자들이 이미 아는 것처럼 항우가 진 가장 큰 원인은 그가 세운 왕들이 경쟁자인 유방을 위해서 싸웠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해석은 이렇다.“저자는 항우의 비극에 대해 ‘비협조적 게임’ 이론을 적용하여 설명한다. 비협조적 게임이란 영화 ‘뷰티플 마인드’의 실제 주인공 존 내시 교수가 주장한 이론으로, 모든 의사결정은 개인들이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성립된다는 것이다. 분명 항우가 임명해 왕이 된 자들인데, 항우를 돕지 않고 유방의 편에 서서 싸운 것은 이미 왕이라는 자리로 포상을 받은 터라 더 이상 항우에게서는 받을 것이 없는 반면,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새로 논공행상을 한다면 더 큰 포상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항우는 부하가 충성하는 것은 내가 승진시켜준 데 대해 감사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또 승진시켜줄 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이 책의 무엇이 특별한가?역사 속 패자들에게 돋보기를 들이댄 경제학 서적이라는 점이 특별하다. 항우와 유방의 일생을 통한 경쟁은 ‘초한지’로 전수되어 왔다. 이를 근거로 많은 해설서와 리더십 책이 나왔지만 대부분 승자인 유방을 조명해왔다. 항우로 시작해 한신, 로마의 원로원, 당태종 이세민, 나당 연합군에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 가마쿠라 막부 등 명멸한 일본 사무라이들…, 한 때 세상을 호령하다 졸지에 몰락한 패자들에게서 교훈을 찾으려 했다는 역발상이 돋보인다.이들의 패인을 경제학 특히 게임이론으로 설명하는 시도가 신선하다. 경제학자가 역사를 공부하면 이렇게 된다는 생각이 번쩍 든다. 독자들은 저자가 꼽은 13가지 사건의 역사적 사실을 개괄적으로 접하면서 동시에 게임이론이라는 경제학의 다양한 이론과 개념들도 소개받을 수 있다. 역사에 해박한 독자들은 게임이론의 신박한 해석을, 역사 입문자들에게는 동서고금의 역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을 제공하는 책이다. 떴다 진 인물들의 일생 속에서 삶을 전략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조직과 국가를 이끄는 리더들이 읽어야 할 처세서로도 손색이 없다.●저자는 누구?저자인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에릭 매스킨 교수와 게임이론의 대가로 불리는 드루 푸덴버그 교수의 지도를 받았고 이후 게임이론과 법경제학을 전공해 왔다. 저서 ‘인생을 바꾸는 게임의 법칙’ ‘대한민국이 묻고 노벨 경제학자가 답하다’ ‘경제학 비타민’ ‘인생경제학’ 등이 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사단법인 북한인권정보센터(NKDB·이사장 신영호)는 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20층에서 창립 20주년 기념 행사를 열었다. 북한에서 자행되는 인권 실태에 대한 기록분석, 보관을 목적으로 2003년 설립된 이 단체는 현재까지 2만여 명의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조사와 증언을 분석해 8만 5391건의 인권침해 기록과 5만 5065의 인물정보를 보관하고 있다. 북한인권 침해 정보 관련 세계 최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세계 각국과 단체들의 북한 인권 운동에 밑거름을 제공해 왔다.NKDB 임순희 본부장은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앞으로의 20년은 북한인권의 탈정치화와 북한인권에 대한 보편적인 국민인식의 제고를 위해 북한인권박물관 운영, 북한인권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작업에 그간 쌓은 역량을 쏟을 예정이다. 북한인권 피해 당사자와 그 가족의 이익과 요구를 우선하며 북한이탈주민 스스로 당사자로서 인권 활동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돕겠다”라고 밝혔다.‘함께 기록한 20년, 나아갈 내일’이라는 슬로건을 걸은 이번 기념행사에 데이비드 알톤 영국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살몬 UN 북한인권특별보고관, 워싱턴 D.C. 북한인권위원회(HRNK) 그렉 스칼라튜 사무총장 등이 축하 영상 메시지를 전달했다. 오준 전 유엔 대사, 안호영 전 주미 대사 등이 참석해 축하 인사를 전했다.신영호 이사장은 국군포로와 납북자 실태를 알린 공로로 귀환 국군포로 유영복과 귀환 납북자 이재근에게 대표로 감사장을 전달했다. 김상헌 NKDB 명예 이사장(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 김선화 마천종합사회복지관 관장, 김웅기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 김일동 한울회계법인 회계사, 박종훈 전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장, 이재춘 전 러시아 대사, 이재화 전 명화실업 회장, 이현일 전 GM대우 마케팅 본부장 등에게도 공로패를 전달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이인배 국립통일교육원장이 한반도 통일과정에 4차 산업혁명 기술을 활용하기 위한 시론적 고민을 담은 ‘한반도 운명과 두 개의 특이점, 열린책들’을 출간했다. 두 개의 특이점 중 하나는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으로서 민족 통일이라는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운명이고 다른 하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끌고 있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말한다.이 원장은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자유민주주의 통일이라는 원칙에 입각해 통일 이후 북한의 도로와 철도 건설, 주택 개선사업, 통일화폐 발행 등의 과제에 현재 개발되고 있는 자율주행차, 3D 프린팅 건축기술, 암호화폐 기술 등을 활용하는 고민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관련 이슈들에 대해 현재의 열악하고 퇴행적인 북한의 상황을 소개하고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통일 독일의 경험 등이 함께 소개된다.신석호기자 kyle@donga.com}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가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의 일생과 리더십을 담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가장 사나이 다운 대통령의 빛나는 리더십, 박영사’를 출간했다.강 교수는 “루즈벨트는 ‘사나이 다움(virtu, 혹은 manliness)’을 추구하고 또 몸소 실천한 역사에 아주 보기 드문 지도자였다. 한 세대 후에 영국에서 윈스턴 처칠(Winston S. Churchill)이 등장할 때까지 그와 같이 사나이다운 민주주의적 정치 지도자는 거의 없었다”고 저술 이유를 밝혔다.처칠 수상이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보어전쟁의 참전 영웅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한다면, 루즈벨트 대통령은 1898년 쿠바를 둘러싼 스페인과의 전쟁에 의용 기병대장으로 참가하면서 일약 전쟁 영웅이 된다.1900년 부통령이 되었다가 다음해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피격 사망에 따라 집권한 뒤 국내정치적으로는 소수 기득권이 아닌 국가와 국민의 공익을 대변하며 공화당의 진보진영을 이끈다. 한국인들에게는 ‘카스라-테프트 조약’을 승인해 제국주의 일본의 한반도 병합을 용인한 장본인이지만 러일전쟁을 종식하는 ‘포츠머드 평화회담’을 이끈 공로로 미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미국의 영향권을 확고히 한 ‘먼로독트린’을 강화하고 미국의 대외정책을 고립주의에서 현실주의적 국제주의로 전환해 20세기를 ‘미국의 세기’로 만드는 초석을 놓은 그는 러시모어 바위산(Mount Rushmore)에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토마스 제퍼슨과 함께 얼굴이 새겨진 20세기 유일한 대통령이다.강 교수는 2014년 퇴임 이후 링컨과 처칠, 워싱턴, 해리 투르먼, 헨리 키신저, 오토 폰 비스마르크, 나폴레옹 보나파트르 등 세계사의 역사적 인물의 리더십을 탐구해 저서로 펴내왔다.신석호기자 kyle@donga.com}
한국온라인신문협회(온신협)는 2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대표자 회의를 열고 박학용 디지털타임스 대표(전 문화일보 편집국장)를 회장으로, 김정욱 매경닷컴 대표를 부회장으로 선임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8일 평양에서 열린 조선인민군 창건 75주년, 이른바 건군절 기념 열병식을 보는 한국과 국제사회의 관심은 온통 새로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네 발과 주석단에 오른 김정은의 딸 김주애에 모아졌습니다. 김주애가 김정은의 후계자인지를 둘러싼 섣부르고 소모적인 논쟁은 차치하고라도 북한이 3대 세습을 넘어 4대 세습을 위한 정지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신호인 것만은 분명합니다.중요 기념일의 5, 10년 단위로 꺾어지는 해(정주년)마다 열리는 제대로된 열병식 주석단에 북한 김씨 독재자가 자식을 데리고 등장하는 장면 자체가 흔하지 않습니다. 생전 김정일이 김정은을 데리고 등장했던 2010년 10월 10일, 65주년 당창건기념일의 열병식 장면이 생생합니다. 마침 김일성의 지시로 주체사상을 만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87세 일기로 서울에서 사망했던 날이었습니다. 처음 무대에 올린 아들을 바라보는 걱정스런 김정일의 눈빛과 잔뜩 긴장한 26세 김정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 합니다. 아래는 황 전 비서의 사망 소식과 함께 다음날 동아일보 1면에 실렸던 사진입니다.23년 뒤인 8일 김정은은 딸 김주애를 데리고 주석단에 올랐습니다. 김주애는 부인 이설주보다 더 대접받는 모양새였습니다. 당연하지요. 이설주는 이씨이고 김주애는 김씨 이기 때문입니다. 10대 김주애가 후계가 될지 아닐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그가 김일성의 증손녀, 이른바 ‘백두혈통’의 4대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그를 주석단에 올려놓고 그날 열병식장에 벌어진 일은 모두 북한의 4대 세습 분위기 띄우기에 집중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올해 4월 김일성의 생일인 이른바 ‘태양절’을 전후해 인공위성을 띄우겠다고 공언한 북한은 이를 핑계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ICBM의 정상각도 발사를 단행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과 일본, 미국에 핵으로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전하게 4대 세습을 할 수 있다. 고로 김씨 독재 정권은 영원할 것이다. 그러니 엉뚱한 생각들 마라. 지금처럼 충성해라!.’ 이게 8일 열병식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입니다.그런데요, 그런 뻔한 스토리에 흥미로운 소품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김일성과 항일무장투쟁활동을 같이한 이른바 ‘빨치산’들의 영정이 4대 세습 분위기 띄우기에 무더기로 동원되었다는 겁니다. 북한군이 죽은 선배들의 얼굴 사진을 들고 행진을 했다는 것인데, 제 눈에는 죽은 선배들을 영정사진의 형식으로 등장시켜 3대세습 후계자 김정은과 4대 김주애에게 사열을 시킨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오늘 가라사대의 제목입니다.구체적으로 조선중앙통신은 세 문단에 걸쳐서 빨치산 출신 ‘북한 개국 공신’ 8명과 이후 군 간부 등 모두 18명의 이름을 언급했는데, 오늘 소개할 8명은 첫 문단에 소개된 빨치산 출신 ‘북한 개국 공신’ 8명입니다. 통신이 공개한 순서대로 김책 안길 최용건 오중흡 김일 김주현 오백룡 강건이 바로 그들입니다.북한을 20년 넘게 공부하고 지켜보고 있지만 대충 이름만 들었던 그들의 프로파일을 확인하기 위해 책들을 뒤졌습니다. 그러다보니 북한 조선인민군의 창설 역사가 꿰어졌습니다. 8일 북한이 기념한 건군절은 김일성이 1948년 2월 8일 당시까지 비밀리에 키워온 정규군을 ‘조선인민군’으로 명명하여 공식적으로 군창설식을 가졌다는 이벤트입니다. 8일 소개된 8명 가운데 당시까지 살아남았던 5명은 요직을 맡게 됩니다. 최용건은 사령관을, 강건은 총참모장이 됩니다. 이후 5명은 죽을 때까지 김일성과 김정은의 ‘은전’을 받아 요직을 독차지했고 대대손손 북한의 핵심성분 지위를 누립니다. 김주현과 오중흡 역시 항일빨치산 출신으로 1937년 6월 이른바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지만 해방 전인 1938년과 1939년 전사했습니다. 안길은 북한 정권 수립 직전인 1947년 12월 사망합니다. 김일성을 둘러싼 8명의 관계는 훨씬 더 이전에 시작됩니다. 말씀드린대로 8명은 100% 김일성과 항일유격대 활동을 같이 한 빨치산 출신입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저서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에서 북한 건설과정에 참여한 빨치산을 100여 명으로 계산했는데 8명은 초기인 1932~35년 사이에 참가했던 인물입니다. 해방 이후까지 살아남은 6명은 일본을 막기 위해 동아시아에 진주한 소련군의 지원과 비호를 받아 ‘제대로 된’ 군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최용건 김책 안길 강건 등 4명은 아래 과정을 통해 김일성과 함께 소련군 대위 출신이지요.“소련군들은 빨치산 출신 중 교육 정도가 비교적 높거나 만주시절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을 선별하여 소련의 하바로프스크 보병학교에서 6개월 동안 장교 속성교육을 시키고 정규군의 초보전술을 가르쳤다. 소련군은 유격대 경력, 장교교육에서 성적 등을 고려해 88여단 내에서 이들에게 계급과 직책을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김광수, “조선인민군의 창설과 발전, 1945~1990”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엮음, ‘북한군사문제의 재조명’ 한울아카데미, 2006, 82쪽.)최용건 김책은 해방 이후인 1945년 7월 김일성이 ‘조선에서의 당 건설과 해방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결성한 ‘조선공작단’을 주도했습니다. 이들은 해방 직후 북한에 들어오려 했지만 소련군의 반대로 해방 이후 가명을 사용해 개인 자격으로 북한에 들어옵니다. 소련군 정찰대에 파견되었던 오백룡 만이 유일하게 소련군과 함께 북한 지역에 진주했습니다. 1946년 7월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을 만난 김일성은 정규군을 만들라는 지령을 받고 돌아와 ‘보안간부학교’라는 이름의 군관학교를 설립합니다. 당연히 빨치산 측근들을 요직에 중용하죠.“김일성은 간부 구성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사령관에는 88여단의 부참모장이었던 최용건이 임명되고 참모장으로는 같은 여단 제1대대의 정치위원을 지낸 안길이 임명되었다. 계몽과 정치교육을 담당하는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직책인 문화사령관에는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인 김일이 임명되었다.”(김광수, “조선인민군의 창설과 발전, 1945~1990”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엮음, ‘북한군사문제의 재조명’ 한울아카데미, 2006, 72~73쪽.)최용건은 북한 건국 후 권력투쟁 과정에서 김일성을 1인 독재자로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2인자로 군림하면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부주석 등을 지내고 1976년 사망합니다. 김일도 내각 부수상, 정무원 총리, 국가부주석 등 권력서열 3위를 지키다 1984년 사망했습니다. 오백룡은 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 정위원 등을 거쳐 1984년 사망했습니다.6.25전쟁 중에 죽은 이는 둘입니다. 김책은 초대 내각부수상 겸 산업상을 맡았는데 6.25전쟁 중인 1951년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강건도 초대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1950년 6.25전쟁을 일으켰다가 그해 9월 전사합니다.설마 이들이 숨을 거두면서 영정의 형태로 김씨 4대 세습에 활용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요. 못했을 겁니다. 다만 김씨 일가가 영원히 권력을 지켜 자자손손 대를 이어 호가호위를 하기는 바랬을 겁니다. ‘김책공대’로 북한 역사에 영원이 이름을 새긴 김책의 아들은 노동당 간부담당 비서를 오래 지낸 김국태 였습니다. 한번 김씨 일가의 ‘로열패밀리’가 되면 대대손손 잘 먹고 사는 나라, 로열패밀리의 2대, 3대가 물려받은 기득권을 유지하기위해 김씨 2대, 3대 후계자에게 대를 이어 충성을 바쳐 무너지지 않는 나라, 그게 오늘의 북한입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나는 한국어를 구사할 순 없어도 인권을 ‘구사할 수’ 있었다.”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재임 8년의 대부분을 미국의 북한인권특별대사로 일한 로버트 킹은 2022년 10월 한국어로 출간된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2009년 5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자신에게 북한인권특사직 수락을 제의한 것은 자신이 한국 전문가라서가 아니라 인권에 대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이었습니다.그는 젊은 시절 미 터프츠대 플레처법률외교대학원에서 냉전 초기 중부 유럽의 다민족 공산주의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쓴 후 7년 동안 독일 뮌헨에 있는 자유유럽방송 본부에서 근무했습니다. 이후 미 의회에 자리를 잡았고 거의 25년 동안 톰 렌토스 하원외교위원장의 비서실장이자 하원 외교위원회 실무국장으로 일하며 인권문제를 두루 다루게 됩니다. 그는 “북한의 인권유린에 경악함과 동시에 이 문제에 완전히 사로잡혔다”며 오바마 행정부 2기, 존 케리 국무장관 시절까지 자리를 지킨 이유를 설명했습니다.“나는 한국어도 구사할 수 있다. 거기다 인권도 구사할 수 있다.”14년 전 킹 특사의 수락 일성을 그의 후임인 줄리 터너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과장에게 대입한다면 이럴 겁니다. 한국계인 터너 과장은 글로벌 이슈를 다루는 미 국무부에서도 인권에 특화된 부서, 민주주의·인권·노동국에서 16년을 근무하면서 주로 북한인권 문제를 다뤘다고 합니다. 2017년 12월 국무부가 SNS에 공개한 ‘인권의 영웅들’이란 동영상에서 탈북 여성 지현아 씨와 직접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윤석열 정부가 임명한 이신화 북한인권대사는 그의 지명을 반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2022년 10월초 대사로 처음 방미해 국무부에 면담을 갔을 때 동석한 담당과장이었지요. 당시 좋은 인상을 받아 12월초 다른 회의로 짧게 다시 갔을 때 식사라도 하며 그의 북한인권에 대한 경함과 이해에 대해 들어보고 의견을 교환하고 싶었는데 못 만났어요. 지명이 빨리 승인되어 조만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의 가까운 협력을 크게 기대합니다.”2005년 8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초대 북한인권특사로 지명했던 제이 레프코위츠 변호사는 한국어를 못했을뿐더러 인권, 특히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전문성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3대 터너 특사는 2대인 킹 특사가 가졌던 인권 전문성에 모국어로서 한국어 능력도 가졌다고 하니 앞으로 북한 인권문제를 다뤄나갈 역사적인 사명을 수행하는데 엄청난 강점(strength)을 가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하지만 8년 가까운 임기동안의 일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낸 킹의 경험담을 읽으며 비교해보니 터너 특사에겐 상대적인 약점(weakness)이 적지 않습니다. 우선 그가 전임자에 비해 ‘정치적 무게감’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70대의 원숙한 의회 간부 출신 킹 특사는 지명 때부터 그 무게감으로만 한미 관계자들의 기대를 샀습니다. 실제 그는 한국과 북한을 수차례 오가며 북한인권문제를 조율했고, 미국 내에서 의회와 행정부의 교량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2011년 북미 2.29합의 전후 대북 식량 지원 협상, 유엔인권이사회에서의 대북 인권 압박, 로버트 박·아이잘론 곰즈·전용수·케네스 배 등 북한 내 억류자 송환,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활동, 북한 내 정보유입 활동 등 북한인권운동사에 남을 이벤트들이 킹의 손을 거쳐갔습니다. 각각의 이슈들을 깨알같이 정리한 회고록을 보면 그는 재임기간 미국 국무부의 대사급 직책을 앞세워 한국과 미국 내 두터운 인맥을 동원하고 활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북한도 그를 여러 차례 초대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하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킹 특사의 개인적 무게감이 작용한 덕분이죠. 하지만 터너 특사는 어떤 기준으로도 전임자 만큼의 비중을 느낄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저도 2013년부터 3년 동안 워싱턴 특파원을 역임하면서 킹 특사를 공석 사석에서 여러 차례 만났지만 터너 특사의 이름은 이번에 처음 들었습니다. 한미 공공외교에 함께 몸담았던 동료들의 증언도 마찬가지더군요. 한마디로 터너 특사는 국무부에 입부해 ‘블랙’으로 북한인권업무를 수행해 온 실무 공무원이었던 것으로 평가됩니다.16년 동안을 국무부에서 근무했다는 것으로 보아 의회 경험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북특사라는 자리가 요구하는 경력의 큰 공백일 수 있습니다. 미국의 북한인권 업무를 비롯한 대북정책의 키는 근본적으로 의회가 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이 모두 북한 핵문제와 인권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가운데 키를 쥐고 있는 몇몇 의원들에 대한 직접 소통과 관계 활용이 특사직을 잘 수행하는데 핵심적인 역량일 수 있습니다. 킹 특사도 국무부 대사 직책이 의회와의 관계 유지에 중요하다는 맥락에서 의회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이러한 지위(북한인권특사)는 북한 문제에 대한 의회 고위관계자들의 관심을 다루는 데에도 중요하다. 의회는 전통적으로 북한인권 뿐만 아니라 인권 전반에 대한 미국의 행동을 촉구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 의회에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국가별 인권보고서, 인신매내 보고서, 국제종교자유 보고서)는 인권 문제에 대해 매년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의회 위원회는 이러한 보고서와 관련된 청문회를 열고 다양한 인권 사안을 정기적으로 논의한다. 북한인권특사를 초청해 청문회를 자주 연다는 것은 그만큼 국무부 내에서 특사의 지위가 갖는 중요성을 보여준다.”무엇보다 북한이 전략핵과 전술핵 미사일 공격 능력을 완성하고 법제화했다고 주장하는 상황에 좋건 나쁘건 미국과 북한 사이에 활발하게 진행되는 인권 이슈가 거의 없다는 것도 터너 특사에겐 위기(threat)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늘 새로운 상황과 도전에 대한 새로운 인물의 응전으로 발전해 왔다고 믿습니다. 터너 특사는 전임자보다 젊습니다. 전임자와 달리 냉전을 경험하지 못했을 터이구요.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젊은이들이 참신한 발상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온 것이 인류 역사 아니던가요. 터너 특사가 전임자와의 차이를 극복하고 북한 인권 문제에 새로운 획을 긋는 중대한 역할을 해 주어 과거의 기준에 따른 위기 요인을 미래를 만들어가는 기회(opportunity)로 삼아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응원하겠습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 조금 지난 2022년 7월. 갓 취임한 사정기관 고위 당국자가 사석에서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에 넘겨주도록 한 문재인 정부 시절 국회 입법은 국가안보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취지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하라고 했으니 따라야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국회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북한에서 직접 내려 보내는) 직파간첩은 없습니다. 해외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인데 그건 해외 정보기관들과의 협조가 되어야 파악이 됩니다. 경찰은 그거 절대 못 잡습니다.”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스파이 작전도 글로벌화 되었기 때문에 ‘북에서 바로 들어오는 간첩을 앉아서 잡는’ 시대는 갔고 그렇기 때문에 간첩 조직을 잡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정보기관과의 ‘정보 교환’이 필수적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같은 해외 정보기관들은 정보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을 수 있고 비밀유지가 되는 상대방과만 거래를 합니다. 그 일을 해 온 것이 한국에서는 국정원입니다. 국정원이 나서도 힘이 부칩니다. 북한은 대남 간첩 요원을 80년 키운다고 합니다. 평생 그 일만 시킨다는 것이죠. 우린 30년을 키워도 대적이 안 될 판인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잘리고 또 잘리고….”당시에는 그 말이 긴급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최근 속속 드러나는 시민단체와 정치권, 노동계 등의 간첩 연루 혐의 소식을 보면 윤 정부 국정원은 출범 초기부터 대공수사권이 왜 국정원에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 증명해 보이기로 마음 먹은 것 같습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가을 김규현 국정원장의 비서실장 산하에 방첩조직을 만들어 간첩 수사에 매진했다고 합니다.최근 언론에 드러나는 내용들을 보면 국정원의 ‘증명’이 일부 성공하고 있는 듯합니다. 대한민국의 제도권 노동운동 조직인 민노총 간부들이 해외 북한 공작원에 포섭되었다는 혐의가 사실이라면 충격적입니다. 베트남 캄보디아 등에 거점을 마련한 북한 공작 조직이 남한 인사들을 불러내 접선했다고 합니다. 돈이 오갔고 비밀 교신 수법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내에 반국가단체를 조직하고 요인들을 포섭하려 했답니다.과거 냉전시절의 뻔한 스토리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만,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북한의 대남 공작 조직 활동 구조의 변천을 네 단계로 구분합니다. 먼저 분단 후 남한에 자생하는 간첩 조직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은 1975년 불가리아를 방문해 “남조선의 마르크스당인 통혁당은 약 3000명 가량”이라고 실토했음이 미국 우드로윌슨센터가 입수한 북한 외교문서를 통해 2013년 공개됐습니다.두 번째는 북한 간첩이 남한에 내려와 요인을 만나고 포섭하는 방식입니다. 1990년대 유명한 간첩 김동식이 주요 대학 총학생회장들을 만나 포섭하려 했던 사건이 대표적입니다(1996년 기자생활을 서초동 법원에서 시작하면서 법정에 선 김동식을 직접 보았습니다). 유 원장은 “북한은 김대중 정부와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을 한 뒤 직파간첩 투입 방식에 부담을 느끼고 해외에서 간첩을 들여보내는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2010년대 들어서는 해외에 거점을 둔 북한 간첩조직이 남한 인사들을 해외로 불러 포섭하고 지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글로벌 화’ 했다는 겁니다.이번 사건에서 국정원은 상대국인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은 물론 국제 정보당국과의 긴밀한 공조 수사를 벌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국정원이나 검찰 등 공안당국이 암시하는 간첩조직의 규모도 상상 이상인 듯합니다. 한 사정당국 인사는 “하마터면 나라 넘어갈 뻔 했다”고 암시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들도 동아일보에 “혐의자는 수십, 수백 명 더 늘어날 수도 있다”거나 “어떤 분야에서 어떤 인사들이 튀어나올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습니다.말만 들어도 섬뜩합니다. 1990년대 이후 남북한의 국력차이가 커지면서 남한 내부에 간첩조직을 키워 전복시키겠다는 북한의 대남전략이 사실상 끝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핵 미사일 능력을 키워오면서 방식을 전환하며 대남 간첩 활동을 계속하는 북한을 보면서 한반도는 아직 분단과 냉전 상태의 지속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당국자들의 허풍이 아니라면, 이대로 가다가 정말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북한을 위해 일해 온 스파이들이 드러날지 모르는 일입니다. 마치 1974년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를 사임으로 이끈 총리실 직원 생 귄터 기욤처럼 말입니다.1927년 동독에서 태어나 1956년 아내와 서독으로 건너 온 그는 동독과의 비밀 교신이 꼬리를 잡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동독 첩보조직 슈타지 소속 인민군 장교였음을 실토했다고 합니다. 그레고어 쇨겐이 쓴 ‘빌리 브란트(김현성 옮김, 빗살무늬, 2003)’에 따르면 조사를 맡았던 ‘기밀조사위원회’ 위원장 테오도르 에쉔부르크는 그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영리하고 조직력이 있으며 명민하고 항상 준비되어 있어 어떤 일도 피하지 않는다. 여기서 (총리실에서) 그는 동료들과 부하직원들과 잘 지냈다. 호기심이 가득하고,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공무를 맡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므로.”한마디로 기욤이 우리 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똑똑하고 부지런한‘ 공직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는 유동열 박사의 구분에 따르자면 세 번째 유형입니다. 밖에서 들어왔지만 오랫 동안 자리를 잡은 뒤 활동을 한 케이스지요. 최영태 전남대 교수는 ‘빌리브란트와 김대중: 아웃사이더에서 휴머니스트로(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0)’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정치적 이유를 내걸며 서독으로 탈출한 사람들 중에도 서독에서 장기간 다른 일에 종사하다가 나중에 대공당국의 관심이 없어질 즈음 애초에 의도했던 임무를 수행하는, 소위 장기전을 펴는 간첩들이 있었다. 기욤의 경우도 이에 해당되었다. 동독 첩보원 혹은 간첩들 중에는 동독 정치범의 석방기회를 활용하여 서쪽으로 옮겨온 사람도 있었다. 서독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들 동독 첩보원 혹은 간첩들을 단속하기가 쉽지 않았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11일 “더 (북핵) 문제가 심각해져서 대한민국에 전술핵을 배치한다든지, 우리 자신이 자체 핵을 보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외교부와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만약 그렇게 되면 오랜 시간 안 걸려서 우리 과학기술로,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더 빠른 시일 내에 우리도 (핵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북핵 문제가 더 심각해지면’이라는 단서를 붙였고 “그러나 늘 현실적으로 가능한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미 공조를 통한 미국의 핵우산 강화가 최선책이라는 점을 밝힌 전제에서 한 발언이었지만 파장은 컸다.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에 대한 대통령 취임 이후 첫 발언이었다. 최근 북한의 전술핵 도발 위협과 관련해 ‘압도적인 힘에 의한 평화’ 등 대북 강경발언을 쏟아 내고 있는 맥락에서 이해되었기에 파장은 더 커지고 있다. 미국 안보당국들은 일제히 “바이든 대통령의 한반도 비핵화 목표는 불변”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북한이 미국을 겨냥한 전략핵과 한국 일본을 타깃으로 하는 전술핵 개발을 완료하고 법제화까지 했다고 공언하는 마당에 한국도 상응하는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보수 진영의 숙원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실현을 위한 액션플랜을 준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자체 핵무장이라는 정책선택의 키는 ‘비대칭 동맹국’인 미국이 쥐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 강대국이 핵보유 권리를 독점하고 대신 비핵국가의 평화적 핵이용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핵비확산체제(NPT)를 구축해왔다. 비핵국가인 한국과 일본이 자체 핵무장을 하기 위해서는 NPT체제를 위반한 것에 대한 혹독한 제재를 감수하던지, 아니면 미국이 주도적으로 한국과 일본에 NPT 체제의 예외를 인정하는 정책결정을 내려야 한다. 미국과 나토의 핵공유 방식이 도입되는 방식과 1990년대 초까지 미국이 한반도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했던 방식을 부활하는 방안 역시 전적으로 미국의 정책결정 사항이다. 따라서 우리는 ‘북핵 문제의 악화’라는 원인과 ‘한국의 핵무장’이라는 결과 사이에 게재해 있는 중요한 ‘블랙박스’인 미국의 대외정책 결정과정이 무엇인지 미리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 미국 외교사의 흐름 속에 고립주의와 개입주의를 오가며 대외정책의 큰 틀을 바꾼 정책결정 전환이 사례들은 적지 않다. 특히 나치 독일의 침략에 맞닥트린 영국이 고립주의 속에 잠자고 있던 미국을 깨워 참전시키는 과정은 참고할 대목이 많다. 나치와의 전쟁 시작 직후인 1940년 5월 영국 전시 내각 수상에 오른 윈스턴 처칠은 아돌프 히틀러의 파상공세에 시달렸다. 독일 잠수함 ‘U-보트’와 전투기 폭격에 따른 영국 전함 피해는 날로 커져갔고 결국 미국에서 해군력을 지원받는 것이 가장 절실한 과제로 떠올랐다. 지금 한국에 자체 핵무장이 점차 긴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처럼. 처칠은 취임 다음달인 6월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세 차례나 간곡한 어조로 편지를 썼다. “구축함이 증강되는 것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이기에 이렇게 요청을 드립니다. 우리는 어떤 투쟁이라도 할 것이지만, (구축함 증강을) 받지 못한다면 자원의 범위를 넘어서게 될 것입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200척의 구축함이 있었고 대략 50척은 빌려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 다시 고립주의로 회귀한 미국의 의회는 행정부가 전쟁 중인 국가에 전투함을 빌려주는 행위를 겹겹이 규제하고 있었다. 1917년 방첩법은 그것을 불법행위로 보았다. 미국인들의 고립주의 정서에 편승한 의회는 구축함의 대여는 물론 판매도 승인하지 않을 기세였다. 대통령이 군 최고사령관 자격으로 의회의 승인 없이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3선을 노리는 루즈벨트는 의회를 우회할 자신이 없었다. 처칠이 해군성 장관이던 1939년 9월부터 서신교환을 시작해온 루즈벨트였지만 그해 연말 3선에 도전하는 루즈벨트에게 우호국 영국의 요청보다 중요한 건 국내정치였다. 그런 루즈벨트를 도와준 것은 영국을 걱정하는 민간 오피니언 리더 그룹이었다. 1940년 7월 11일 뉴욕의 센추리 클럽에 모인 타임지 발행인 헨리 루스, 윌리엄 스탠들리 전 해군 제독 등 30여 명은 영국이 가진 서반구의 해군기지를 제공받는 대가로 미국이 50여 척의 구축함을 빌려주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에 고무된 처칠은 7월 31일 곧바로 루즈벨트에 대한 편지 공세를 이어나갔다.“최근 10일 동안 우리는 11척의 구축함을 잃거나 손상당했습니다. 구축함은 공중폭격에 취약합니다. 하지만 적의 해상침투를 막기 위해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의 손상을 오래 버텨낼 수 없습니다. 실질적인 증강이 없다면 전쟁의 전체 판세는 작은 요인에 의해 결정 날 겁니다. 이것이 솔직한 우리의 현재 상황입니다. 대통령 각하, 존경하는 마음으로 나는 길고 긴 세계 역사 속에 이것은 지금 바로 해야 할 일임을 말씀드립니다.” 영국을 걱정하는 미국인들의 노력도 계속됐다. 미국의 전쟁영웅인 존 퍼싱 대장의 라디오 연설 이후 타임지와 뉴욕타임즈 등 유력지들이 ‘영국은 구축함을 원한다’는 배너 광고를 실었다. 변호사인 딘 애치슨 등은 ‘대통령이 의회의 조치 없이 영국에 구축함을 양도할 수 있다’는 글을 실었다. 이에 힘을 얻은 루즈벨트는 미국이 영국에 50척의 구축함을 지원하는 대신 영국이 미국에 뉴펀들랜드와 버뮤다, 바하마 자마이카 등 8곳의 기지를 99년간 임대하는 방안을 의회의 승인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루즈벨트는 “루이지애나를 (프랑스에서) 사들인 이래 우리 국방력 증강에 가장 중요한 조치”라고 홍보했다. 대중은 압도적으로 찬성했고 의회도 대통령을 비판하지 못했다. 루즈벨트는 이를 선거운동에 활용했고 11월 대선에서 승리해 역사상 첫 3연임에 성공했다. 그는 다음해 취임하자마자 의회를 설득해 연합국에 대한 물자지원을 할 권한을 대통령이 가지는 것을 골자로 하는 무기대여법(Lend-Lease Act)를 통과시켰다. 처칠은 미국의 도움으로 나치와의 전쟁을 이어났고 1941년 12월 일본에 진주만을 기습당한 미국이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함께 나치 독일을 물리칠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고립주의로 회귀했던 미국이 다시 개입주의로 방향을 바꾸는 기지-구축함 맞교환 사례는 미국 외교정책결정의 몇 가지 핵심적인 측면을 보여주었다. 외교정책결정의 ‘거래주의’적 측면, 민주주의 국가의 정책결정에서 여론과 여론주도자의 중요성, 외교정책에 미치는 국내정치적 영향 등이 그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건국의 이념으로 삼은 미국에선 우호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도 국가이익에 우선한 ‘거래’의 양태를 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영국의 구축함 지원을 가로막는 국민의 고립주의와 의회를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영제국의 해양기지라는 대가를 근거로 내세워 넘어섰다. 우호국이라도 무조건 지원하기보다 상응하는 안보상의 이익을 대가로 지원을 교환한다는 ‘상호주의’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정부간의 거래가 성사되기 전에 민간 엘리트들이 여론을 움직였다. 이른바 ‘센추리 그룹’이라고 역사가 기록하는 미국인들은 의회에 가로막힌 루즈벨트 행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 내부 여론에 호소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 정책의 ‘힘의 중심부’는 바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국민의 여론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루즈벨트가 민간 여론 주도층의 지지와 여론의 호응을 확인하고서야 영국 지원에 나선 것은 코앞으로 다가온 선거에 미칠 영향이 주요 고려 요소였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외교정책의 결정과정에 결정자의 국내정치적 고려가 강하게 게재된 사례다. 83년 전 영국과 미국의 전시 무기대여 협상을 현재의 한국의 핵무장 논의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한국의 핵무장 논의에 결정적인 요소가 ‘미국의 정책결정’이라고 본다면 몇 가지 시사점을 추릴 수 있다. 미국에 한반도와 일본 비핵화는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원칙으로 보인다. 한국과 일본이 핵무장을 하면 대만 등도 도미노로 핵무장을 하게 돼 사실상 NPT체제가 붕괴되어 버린다. 하지만 역사의 어떤 국면에서 만일의 하나 미국이 한국 비핵화를 허용할 수 있다면 영국이 구축함 지원을 대가로 해군기지를 내놓은 것처럼 한국도 미국이 바라는 무언가를 내놓아야 할 수도 있다. 이미 대중 봉쇄에 나선 미국은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역내 동맹국들과의 양자 다자간 협상에서 다양한 정치 경제적 기여와 희생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그 무엇이든 중국의 거센 반발을 불러올 것으로 보이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핵을 보유해야 한다는 결기가 우리 국민들에게 공유되어 있는가? 미국 오피니언 리더 그룹이 한국의 핵무장을 지지한다면 정책결정 변화에 긍정적인 요인이 될 것이 분명하다. 현재 일부 외교 전문가들 사이에서 한국과 일본의 독자적인 핵무장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지만, ‘센추리 그룹’이 처칠과 루즈벨트를 지원했던 것과 같은 결정적인 지원 세력은 아직 없다. 윤석열 정부는 미국에 대한 철두철미한 공공외교 강화를 통해 그런 지원그룹을 조직하고 육성하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을 포괄하여 한국 핵무장 허용 결정은 현직 대통령의 재선이나 수권 정당의 정권연장에 도움이 될 때만이 의회와 백악관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안보 당국자들은 지금 한국의 핵무장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게 2024년 재선을 노리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게 미래다. 그런 역사적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앞서 말한 공공외교보다 중요한 것은 한미관계의 힘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미 대통령에 대한 직접 외교다. 또 그 핵심은 정상 대 정상간의 진정한 소통이 이다. 미국 내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대통령의 결단이 이뤄질 수 있도록 사전에 소통의 문화를 조성하고 그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처칠은 2차대전 중 루즈벨트 대통령과 수차례 정상회담을 가진 것 외에 위에 소개한 것을 포함해 1300여 통의 비밀 편지를 썼다. 한국이 핵무장을 해야 할 상황이 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올 수도 있고 그럴 땐 잘 할 수 있다는 호소는 한국의 지지층과 여론이 아니라 우선 미국 여론과 그의 지지층을 향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전략적이고 은밀하고 치밀한 방식으로.※참고문헌루즈벨트 대통령의 대영국 구축함 지원 정책결정 과정에 대해서는 Jean Edward Smith, FDF(New York: Random House, 2007); 권용립, 미국 외교의 역사(서울: 삼인, 2010) 참고. 처칠 수상의 루즈벹트 대통령 설득의 리더십은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의 ‘윈스턴 S. 처칠-전쟁과 평화의 위대한 리더십(서울: 박영사, 2019)’ 참고.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대한민국의 윤석열 대통령께.안녕하십니까. 나치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외다. 요즘 북한의 3대 세습 독재자 김정은을 향해 ‘할말은 하는’ 당신을 보면 90년 전의 내가 떠오릅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난 그의 침략성을 간파했소. 그리고 장차 독일과의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지요. 1차 세계대전 이후 맹목적인 평화주의에 빠진 영국인들은 그런 나를 ‘전쟁광’ 이라고 욕했소.나의 전임자 네빌 체임벌린이 1938년 히틀러를 만나 훗날 잘못된 유화정책의 대명사가 된 유명한 ‘뮌헨협정’을 체결했을 때에도 난 강력히 반대했소. 하지만 영국인들은 평화를 지킬 수 있게 됐다며 환호성을 질렀지.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9월 김정은과 백두산에 올랐을 때 많은 한국인들이 박수를 쳤던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약소국 체코슬로바키아를 나치 독일에 바친 치욕적인 협정은 다음해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이후 휴지조각이 되었소. 2018년의 이른바 평양선언과 9·19군사합의도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일는지요.각설하고, 지금 한반도에 1939년처럼 진짜 전쟁이 난 것은 아니지만 철저한 군사적 대비를 강조하는 당신의 상황 인식은 올바른 것이외다. 김정은은 미국을 겨냥한 전략 핵미사일에 더해 대한민국과 일본을 공격할 전술 핵미사일 체제를 완성했다며 선제적 사용 가능성마저 공언하고 있는 판 아니오? 아직도 북한의 핵무장이 미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적인 것이며, 협상을 통해 북한 비핵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들이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나는 누구보다 먼저 공산주의자들의 본질과 속성을 먼저 간파한 사람이요. 비록 이오지프 스탈린이 2차대전에서 나와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손잡고 독일과 일본 등을 물리치는 데 협조했지만 난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상 그와의 평화는 오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소. 1949년 3월 25일 미국 뉴욕에서 ‘타임-라이프 지’ 설립자인 헨리 루스와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지.“공산주의자들과 논쟁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들을 전향시키거나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소련 정부에 당신이 우월한 무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그 무력을 완전히 실질적으로 무자비하게 사용할 것이며 어떤 도덕적인 고려에 의해서도 억제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의 가장 큰 기회이고 평화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최근 당신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더군요. 지난해 12월 29일 대전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지요. “우리가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압도적으로 우월한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 전쟁을 생각하지 않는, 전쟁을 대비하지 않는 군이란 있을 수 없다. 도발에는 반드시 혹독한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현실주의 평화관’을 정확하게 피력한 겁니다.그런데 말이오, 전체주의 독재국가에 맞서 평화를 지키는 말처럼 쉬운 건 아니란 걸 당신도잘 알고 있을 거라 믿소. 무엇보다도 정부와 군대, 국민을 마음속으로부터 하나로 단결시키는 최고지도자의 리더십이 중요합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간지’를 갖추었다 한들 국가 구성원을 하나로 묶어 전쟁에서의 승리에 동원하는 영웅적 리더십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그래서 난 중요한 고비마다 공개 연설을 통해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데 공을 들였소.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정치권, 특히 당신을 비판하는 야당은 가장 중요한 설득 대상이요. 1940년 5월 13일 수상으로서의 첫 연설에서 나는 이렇게 호소했소.“나는 의회에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나는 피와 노고, 눈물, 그리고 땀 외에 달리 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가장 심각한 종류의 시련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어떤 비용을 치루더라도 승리하는 것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승리 없이 우리의 생존은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연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소.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수사학이 지도자의 필수적 덕목이라는 것을 마르쿠스 톨리우스 키케로(로마 공화정 말기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에게 배웠소. 그는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폭풍이 불어오기 시작할 때 배를 조타하는 것과 같다’고 했지요. 그만큼 정치지도자에게는 철저한 지식이 요구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도 9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순간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소. 내 손으로 72권의 책을 썼다오.키케로는 진정한 지도자란 자신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항상 우선시해야 한다고 강조했소. 자신의 이익에는 국내정치적 인기도 포함될 것인데, 그야말로 그건 정말 덧없는 거외다. 나도 2차대전에서 승리한 직후인 1945년 7월 총선에서 영국 유권자들에게 비참하게 버림받았소. 사람들은 나에게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정치에서는 졌다’고 비아냥댔지. 하지만 난 낙담하지 않았소. 오히려 이후 기간을 ‘위장된 축복’이라 여기며 자서전을 쓰고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보냈소. 그 결과 1951년 다시 수상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소.나의 삶을 돌아보면 핵을 든 북한에 대적하려는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은 덕목은 더 많이 있소. 신념과 비전(Faith and Vision), 공직자로서의 의무감(the Sense of Duty), 분별력(Prudence), 전략적 안목(the Strategic Mind), 외교술(Diplomatic Skill), 용기(Courage) 그리고 장엄함(Magnanimity)까지. 그중에 분별력은 미국이라는 가장 중요한 동맹을 세심하게 관리해야 할 한국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덕목이요. 내가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것이요. 두 나라, 두 정상 사이에 아주 작은 오해도 없도록 세심하게 따져보고 치밀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난 당신의 전임자인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절대 미국과 헤어지지 말라’는 고별연설 내용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다오.▶‘오늘과 내일’ 칼럼 2017년 9월 18일자하고 싶은 말은 더 많지만 개인적인 조언 하나로 마칠까 하오. 적과 대적하는 상황에서는 늘 맑은 정신을 유지하라는 것이오. 안보를 책임져야 하는 고독한 자리에 있지만 더 자주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를 권하오. 나는 혼자 그림 그리기를 즐겼소. 전쟁 중에도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소. 평생 족히 500여 점 그린 듯하오. 그림을 그리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나와 대화를 했소. 앞으로 어떤 상황이 올지,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대한민국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당신의 건투를 빕니다. 그럼 이만.처칠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의 ‘윈스턴 S. 처칠-전쟁과 평화의 위대한 리더십(서울: 박영사, 2019)’를 인용 및 재구성 했습니다. 처칠의 생애에 대해서는 2018년부터 읽은 두 권의 원서를 참고했습니다. Martin Gilbert, Churchill: A Life (New York: Henry Holt and Company, 1991), Roy Jenkins, Churchill: A Biography (New York: A Plumbook, 2002).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북한의 3대 세습 지도자 김정은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7형’ 발사장에 열 살 짜리 둘째로 알려진 딸 김주애를 데리고 나와 공개하자 한국과 국제사회에 또 ‘북한 세습 지도자 알아맞히기’ 게임이 시작된 형국입니다. 김주애가 김정은의 뒤를 이을 ‘4대 세습 지도자’가 될 가능성을 두고 전문가들의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노무현 정부)은 11월 30일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이미 김주애로 후계자가 결정이 됐고 앞으로 아마 웬만한 데는 다 데리고 다니면서 훈련을 시킬 것 같다”고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는 2일자 한 신문 칼럼에서 김주애가 후계자로 등장한 것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두 가지 가설을 제기했습니다.“2010년 얻은 아들(정보가 맞는다면)이 지도자감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김정은의 아들을 얻은) 현송월과의 권력다툼 속, 이설주가 김위원장에게 김주애를 일찍 후계자로 공개하도록 압력을 넣은 것은 아닐까.”일단 김주애에 대한 김정은의 ‘의전’은 파격적입니다. 11월 18일 미사일 발사장에서 앳띤 모습의 김주애와 동행하는 사진과 동영상을 공개했습니다. 27일 미사일 발사 공로자들을 치하하는 행사에 또다시 김주애를 등장시켰는데 이번에는 어머니 이설주를 꼭 닮은 모습으로 연출된 채였습니다. 인민군 장성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고, 매체들은 “존귀한 분” “제일 사랑하는 자녀” 등 우상화 표현까지 사용했습니다.하지만 과거의 사례를 돌아볼 때, 열 살 난, 그리고 여성인 김주애를 후계자로 단정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김주애가 아들이 아닌 딸이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성년인 자녀를 후계자로 등장시킨 적이 없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김주애의 오빠와 동생으로 알려진 두 아들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다는 것은 큰 변수입니다. 애버라드 대사는 이 아들들이 ‘지도자감은 아닐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김정은의 등장 과정을 보면 최후의 순간까지 후계자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북한스럽습니다. 김주애의 등장은 오히려 그녀가 후계자가 아니라는 점을 반증한다고도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김정일 위원장의 세 아들 중 누가 3대 세습 후계자가 되는지를 놓고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 점치기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장남인 김정남이 가장 많이 등장했고, 그가 아버지의 눈에 나자 차남 김정철이 그 다음을 이었습니다. 3남 김정운(개명 하기 전의 이름)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왜? 아버지 김정일이 정철과 정운의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김정일은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려졌다가 일어난 뒤인 2008년 겨울에야 후계자 지명 작업에 나섰습니다. 몇 달 전인 그해 5월 26일자 동아일보에는 국방연구원 박사 22명이 집단 설문조사를 통해 후계구도를 점친 보고서가 1면과 3면에 대서특필 되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국방부 차관을 지난 백승주 전 국회의원이 미국 정부의 용역을 받아 비밀리에 작성한 것입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박사 22명의 집단 예측은 한마디로 거의 빚나갔습니다.▶관련기사: ▶관련기사: 박사 22명 중 45.5%인 10명은 ‘김정일이 자연사한 뒤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설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지금 그런가요? 아닙니다. 후계자가 누가 될지에 대해 36.4%(8명)가 김정철을 꼽았고 31.8%(7명)는 김정남, 22.7%(5명)는 장성택을 점쳤습니다. 그런가요? 김정철은 동생의 그늘에 가려 두문불출 살고 있고 김정남 장성택은 저세상에 가고 없습니다. 심지어 보고서는 당시 기준으로 5년 내에 승계가 이뤄지면 ‘장성택-김정남’ 조합이, 5년이 지나면 ‘김정철-정운’이 유리하다고까지 내다봤습니다. 김정일은 3년만에 죽었습니다.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우선 김정일 사후에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설 것이라는 전망은 사실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가깝습니다. 당시에는 모두가 그러기를 바랐으니까요. 김정운의 낙점을 예상하지 못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북한이 정보를 철저히 숨긴 상황에서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의 후계자 지명 이론을 적용해 ‘학문적인 추측(academic guessing)’ 한 결과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백 박사는 논문을 작성하면서 비교사회주의 정치학자 레슬리 홈스 박사의 ‘3Ps+X’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 독재국가에서 최고지도자가 권력을 잃을 경우(X), 권력기반(Power base)과 인격적 자질(Personal qualification), 정책능력(Policy making ability)을 가진 인물이 후계자로서 권력을 차지한다는 이론입니다. 그렇게 흐루시쵸프는 스탈린의 후계자가 되었고 덩샤오핑도 마오저뚱 사후 혼란한 정국 속에 등장했다는 거죠.이 이론을 적용하고 보면, 장성택이라는 든든한 후원 세력이 있고(권력기반) 김일성 주석의 장손, 김정일 위원장의 장자(인격적 자질)인 김정남이 김정철이나 김정은보다는 나아 보였던 것입니다. 정책 수행 능력이 불투명하기는 셋 다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만일 김정남이 아니라면 둘째 김정철이었던 것이구요. 하지만 정철과 정운 두 아들을 숨겨놓은 채 관찰했던 김정일은 모든 면에서 김일성과 자신을 닮은 정운을 마음속에 낙점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기류를 눈치 챈 외부인은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 정도였음이 훗날 드러났습니다.소련이나 중국과 달리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 중 유일하게 세습독재를 하고 있다는 점도 결정적인 차이인 것 같습니다. 독재자 사후 성이 다른 어떤 엘리트라도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소련과 중국에서는 ‘3Ps+X’라는 복잡한 고려사항이 필요했겠지만 세습독재 국가인 북한에서는 오로지 아버지의 마음에 든 아들만이 권좌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이런 이유로 북한 김씨 독재의 미래를 전망하느니 ‘차라리 동전을 던지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구나 21세기에 세습 독재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국민들의 궁핍과 인권의 유린을 전제로 한 세습은 그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최근 시진핑 주석의 3연임 이후 중국 국민들의 불만들이 높아지고 있는 것처럼, 북한 내에서 들려오는 불만의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그런 가운데 숨겨진 두 아들이 어떤 상태인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정보력을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