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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을 주도하면 리더가 되고, 혁신을 받아들이면 생존자가 되지만, 혁신을 거부하면 죽음을 맞는다. 많은 자리에서 저는 혁신이야말로 위기를 돌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오늘은 혁신을 ‘리스크 테이킹’이란 단어로 바꾸겠다.” ‘미스터 반도체’라 불리며 삼성전자를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 기업으로 도약시킨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은 지난해 가을학기 연세대 강의에서 이처럼 말했다. 7주 강의를 관통하는 주제는 혁신이었는데, 그는 첫 강의에서 ‘리스크 테이킹’을 혁신만큼이나 중요하게 강조했다. 학생들에게 “리스크 테이킹을 하지 않는 화석은 되지 말라”고도 조언했다. 삼성전자가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이 된 것은 그의 말처럼 리스크 테이킹이란 모험을 감행했고 경쟁사를 압도하는 좋은 결과를 얻었던 영향이 크다. 사례 하나를 소개한다.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한 삼성전자는 이듬해 세계 3번째로 64Kb(킬로비트) D램 개발에 성공했다. 당시 세계 시장을 주름잡던 일본 기업들은 견제에 나섰다. ‘후발주자 시장 진입→선행주자의 단가 인하→자금 압박으로 후발주자 퇴출→선행주자의 가격 원위치’ 형태의 치킨게임을 벌인 것이다. 1980년대 중반 D램 가격은 연일 하락했다. 1985년 64Kb D램의 생산원가는 1.7달러인데, 판매 가격은 1.3달러까지 떨어졌다. 팔수록 손해였기에 미국 인텔은 1985년 D램 사업을 포기했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는 대규모 해고를 진행했다. 삼성전자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했다. 오히려 차세대 제품인 256Kb D램의 공급량을 늘렸고, 그다음 세대(1Mb D램)의 선행기술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역공법을 취했다. 이 전략은 1987년 들어 반도체 사이클이 다시 호황으로 접어들고 1Mb D램이 주력이 됐을 때 삼성전자를 기사회생시킨,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됐다. 만약 반도체 사이클이 몇 년 늦게 호황기로 바뀌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삼성전자란 이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위험을 감수한 결과는 달콤하기도 하지만 때론 치명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리스크 테이킹을 해도 위험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 적어도 반도체 산업에선 그렇다. 지난해 3분기부터 다시 반도체 침체기가 시작돼 D램 범용제품(PC용 8Gb 2133MHz)의 평균 고정거래가격은 올 8월 1.3달러까지 내려갔다. 자금력이 약한 일부 반도체 기업은 쓰러질 법하다. 하지만 이번 반도체 불황기 때 쓰러진 반도체 기업은 적어도 메이저 업체 중에는 없다. 각국 정부가 반도체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보며 전력으로 후방지원을 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와 국회도 올해 3월 소위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을 국회 통과시키며 반도체 산업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미국, 일본, 대만 등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다. 본보가 한국과 대만에 각각 5000억 원씩 첨단 반도체 설비 투자를 했다고 가정하고 세금을 계산했더니 한국에선 대만보다 한 해 850억 원을 더 내야 했다. 게다가 K칩스법엔 올해 한시적으로 지원하는 조항이 많다. 내년이면 대만보다 기업 여건이 더 안 좋아지는 것이다. 10월 D램 범용제품 평균가격이 전달 대비 15% 이상 오르면서 반도체 불황의 끝이 보이고 있다. 불황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단행한 의사결정의 성적표도 곧 나올 것이다. 기업이 홀로 분투해 얻은 성적표와 정부와 기업이 2인 3각으로 달려 이룩한 성적표의 점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중견기업 A사는 각종 소비재에 사용되는 첨단소재를 만들고 있다. 설립한 지 50년 이상 됐고, 꾸준히 흑자를 내는 알짜 기업이다. 하지만 10년 남짓 실적이 계속 나빠지고 있다. 올해도 흑자 규모가 작년보다 줄어 연초 비상경영을 선포했다. 최근 간부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 실적 하락 원인을 분석했다. 답은 ‘저출산’과 ‘중국 경제 위축’으로 모아졌다. 두 가지 이유로 최종 소비재 판매가 줄어드니, 그 원재료인 A사의 첨단소재도 덜 팔리는 것이다. A사 임원은 “저출산은 단번에 해결하기 힘들지만 중국의 리오프닝(경제 활동 재개) 본격화는 시간문제다. 조만간 회사 실적은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기자는 A사 임원이 바라는 것처럼 상황이 흘러가지 않으리라고 본다. 중국이 과거의 중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제 성장은 분명 한국에 축복이었다. 1978년 덩샤오핑이 실권을 잡은 후 중국은 개혁개방을 추진했고 해외 자본을 받아들였다. 1990년대 이후 10% 내외 경제성장률을 보였고, 그런 초고속 성장은 201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그 덕분에 한국 기업들은 중국에 중간재 수출을 꾸준히 늘렸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입·수출(무역의존도) 비율은 80∼110%에 이른다. 지난해 수입을 제외한 수출만 놓고 봐도 GDP 대비 44% 수준이니 폭발하는 대중 수출이 얼마나 한국의 성장률을 끌어올렸을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성장은 한국 경제에 큰 그림자도 드리웠다. 1차 충격은 한중 국교를 수교했고, 한국 정부가 해외투자 승인 절차를 대폭 완화한 1992년 무렵에 왔다. 한국 기업들이 저임금의 중국으로 공장을 잇달아 옮겼다. 어느새 노동집약적인 섬유, 신발, 가죽 공장이 한국에서 사라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계기가 된 2차 충격은 현 한국 경제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중국 역시 해외 의존도가 높았기에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세계 경제 변화에 취약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은 자원 및 노동력 투입에 의존하는 경제에서 첨단산업 등 혁신주도형 경제로 전환을 시도했다.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중국은 이를 ‘신창타이(新常態·New Normal)’라 부른다. 신창타이를 통해 부품소재 경쟁력을 강화했고, 첨단 제조업에 대한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렸으며 중간재를 국산화했다. 지난해 중국은 자연과학 연구 영향력에서 미국을 추월해 세계 1위로 올라섰다. 그런 과학기술 역량이 점차 산업계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독일과 일본은 오랜 기간을 들여 기술을 습득했지만, 중국은 인수합병을 통해 단기간에 기술을 쌓았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리오프닝이 본격화되더라도 과거와 같은 대중 수출 활황은 쉽지 않다. 그럼 A사는 앞으로 쓰러질 일만 남은 것일까. 그건 아니다. 대만 전자제품 회사인 에이서의 설립자 스탠 스가 ①생산 전 서비스 ②생산 ③생산 후 서비스로 나눠 그 부가가치를 따져봤더니, ②가 가장 낮고 ①과 ③이 높았다. 이 현상은 갈수록 강해졌다. ①∼③을 선으로 연결하면 웃는 모양의 곡선이 그려진다. 소위 ‘스마일 커브’다. A사는 이제 생산에 주력할 게 아니라 생산 전 서비스인 R&D, 디자인, 서비스 등에 힘을 쏟아야 한다. 혹은 생산 후 서비스에 해당하는 유통, 물류, 마케팅 등에 집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세계의 공장’ 중국에 기댈 게 아니라 이별해야 살아남는 시대가 됐다.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는 ‘오스미 기초과학창성재단’이란 공익재단이 있다. 홈페이지에 밝힌 연구비 지원 기준은 3가지. 선견지명과 독창성이 있는 기초과학, 국가 지원을 받기 힘든 기초과학, 정년 등으로 인해 계속 연구하기 힘든 기초과학이다. 즉, 돈 안 되는 괴짜 연구를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그 재단을 2018년에 설립한 오스미 요시노리 도쿄공업대 명예교수를 지난해 1월 인터뷰하며 이유를 물었다. “재미있는 연구를 하지만 연구비가 부족한 사람을 돕는다. 도전하는 이를 지원하자는 취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정부는 성과를 낼 수 있는 유망 분야를 선택해 지원한다. 하지만 과학은 1000만 엔을 투입했다고 반드시 1000만 엔의 성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며 정부 지원책에 대한 불만도 드러냈다. 오스미 교수는 효모 세포를 이용한 ‘오토퍼지(Autophagy·자가 포식)’ 연구로 201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단독 수상한 일본 생물학의 권위자다. 도쿄특파원 시절 자연과학 분야 노벨상을 받은 일본인 3명을 인터뷰했는데, 그들의 주장이 묘하게 일맥상통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과가 나올 것 같으니 연구비를 지원하자’는 식으로 과학을 육성할 수 없다. 과학에선 실패의 경험도 쌓이면 지식이 된다. 결코 낭비가 아니다. 노벨상 수상 연구도 의외로 ‘우연한 발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둘째,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곧바로 성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주의 기원을 밝히는 등 인류의 기초 지식을 풍부하게 해준다. 한 국가가 가진 역량의 종합판이 기초과학이다. 실용화까지 100년이 걸릴 수 있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셋째, 일본이 노벨상 강국이 된 것은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폐허에서 일어서려면 과학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 덕분이다. 당시 시작한 연구가 지금의 노벨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2024년도 예산안을 보면서 일본 노벨상 수상자들과 진행했던 과거 인터뷰를 떠올렸다. 정부는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을 올해보다 16.6% 줄였다. 기초연구 예산의 경우 6.2% 삭감했다. 과학계 연구비 카르텔을 깨부수고 핵심 전략기술을 중점 육성하겠다는 정부 설명에 동의한다. 하지만 예산 절감이라는 이익보다 중장기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악영향이 더 크다고 본다. 오스미 교수는 1970년대부터 효모 연구를 파고들었다. 당시 다른 과학자들은 효모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수많은 과학자들이 오토퍼지 현상을 주목하고 있다. 암, 알츠하이머병 같은 노인성 질환을 해결해 줄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을 약 50년 연구했더니 이제 실용적인 성과를 기대할 만한 단계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와 인터뷰하며 “정부가 집중 투자하는 유망 과학 분야와 오스미 기초과학창성재단이 지원하는 새로운 과학 분야 중 어느 측이 노벨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높으냐”며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당시 신문에 소개하지 않았던 답을 그대로 옮긴다. “매우 어려운 문제다. 내 사례를 보면 오토퍼지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데 그리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새 연구를 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자금 지원이 필요하다. ‘효과가 있을 것 같으니 지원한다’고 하면 과학은 육성되지 않는다.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기초연구까지 지원하는 게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은 미세공정에서 판가름 난다. 삼성전자는 현재 3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공정으로 반도체를 양산해 내고 있다. 나노미터는 반도체 회로의 선폭을 뜻하는데, 선폭이 좁을수록 같은 크기의 웨이퍼에서 더 많은 칩을 생산할 수 있다. 초미세공정을 위해선 거기에 맞는 장비도 갖춰야 한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제조기업인 ASML은 1984년에 설립됐다. 당시 반도체 공정은 400∼800나노 수준이었다. 기업들은 더 미세하게 가공하기 위해 전자선, 극자외선(EUV) 등을 연구했다. ASML은 여러 기술 중 EUV가 가장 효율적이라고 보고, 1997년 EUV 장비 연구에 뛰어들었다. 이미 1980년대 중반 일본 통신기업 NTT의 연구원이었던 기노시타 히로오(木下博雄·현 효고현립대 명예교수)가 EUV 기술을 처음 실현해 낸 것을 감안하면 ASML은 후발주자였다.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각종 기술적 난제로 10년이 지나도록 성과를 내지 못했다. “EUV 장비는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 “개발을 포기해야 한다” 등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ASML은 2010년 결국 시제품을 만들어냈다. 180t 규모에 10만 개 이상의 부품이 들어간 EUV 노광(露光) 장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시제품은 고객사인 삼성전자로 보내졌다. 단점을 보완하고 개선하는 데 9년이 더 걸렸다. 삼성전자는 2019년에서야 EUV 기반 7나노 반도체 제품을 처음 양산했다. ASML이 첫 연구를 시작한 지 22년 만이었다. 현재 ASML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EUV 노광 장비를 만들고 있다. 초미세 반도체 가공을 위해선 EUV 노광 장비를 사용해야 하기에 전 세계에서 주문이 몰리고 있다. 한 해 40∼60개밖에 생산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항상 수요가 공급보다 많다. ASML은 장비를 만들어 파는 소위 ‘을’이지만, 실제로는 ‘슈퍼 갑’인 셈이다. ASML은 어떻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을까. ASML 홈페이지에 있는 EUV 개발 역사 자료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를 강조했다. 예를 들면 독일 광학기업 자이스. EUV 노광 장비 내부엔 EUV를 지그재그로 반사시키는 여러 특수 거울이 있다. 자이스는 ASML의 요구 수준에 맞춰 반사거울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우주를 관찰하는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에 사용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정밀도를 갖췄다. ASML과 자이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20년 이상 프로젝트를 같이 했고, 특허를 공동 출원하기도 했다.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의 갑을 관계 기업 문화에선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는 저서 ‘반도체 삼국지’에서 네덜란드의 산학연 클러스트를 주목했다. ASML도 연구중심대학으로부터 긴밀한 도움을 받았다. 기초 단계부터 산업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에서 산학연이 유기적으로 협업했다. 이는 한국의 절반도 안 되는 국토와 3분의 1 수준 인구를 가진 네덜란드가 제조업 강국이 된 비결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말 페터르 베닝크 ASML 회장(CEO)을 만나 한국 투자 확대를 당부했다.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감안한다면 한국도 초고성능 반도체 장비 제조 역량을 보유하는 게 더 낫다. 20년 이상 연구를 지원할 수 있는 기업 환경, 믿고 협업할 수 있는 파트너, 탄탄한 산학연 협력 등 ASML 사례가 보여준 것들을 갖출 수 있느냐에 달렸다.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퀴즈 하나.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12.3%를 기록했던 1987년, 수출 증가율이 30.3%였던 1995년, 제조업 성장률이 7.3%를 보였던 2011년 등 한국 경제가 잘나갔던 3개 연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답은 ‘엔화 강세’다. 1980년대 이후 한국 경제가 호황을 보일 때는 대체로 엔화 강세라는 훈풍이 있었다. 한국과 일본은 산업구조가 비슷해 국제 시장에서 경쟁하는 제품이 많은데, 엔화 강세는 일본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렸다. 한국 수출 기업으로선 성장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엔화 강세가 끝나면 험난한 고생길이 펼쳐졌다. 1996년 엔화 약세가 시작되면서 한국 기업들의 수출이 가파르게 줄었다. 그해 경상수지 적자는 사상 최고 수준인 230억 달러에 이르렀다. 경제가 빠르게 식었고, 기업들의 부채 부담은 커지면서 한보철강과 같은 대기업이 하나둘 쓰러졌다. 당시 엔화 약세는 결국 외환위기를 초래하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최근 엔화 약세가 다시 시작됐기 때문이다. 올해 초 100엔의 가치는 940∼1000원 정도였는데, 지난달 900원대 초반으로 급락하더니 이달 초 800원대까지 떨어지는 ‘슈퍼 엔저’ 현상을 보였다. 산업연구원은 원-엔 환율이 5% 하락하면 그해 한국의 수출액은 1.1∼3.0% 감소할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다만 현재 한국 기업의 비명 소리가 그리 크게 들리진 않는다. “과거보다 일본과 경합하는 정도가 줄었다”, “일본에서 수입하는 부품 가격은 오히려 싸졌다” 등 별 영향 없다는 반응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반도체 기업. 1980년대 반도체 왕국을 이뤘던 일본은 그 후 투자에 소홀했고 지금은 반도체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이 사라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D램을 수출할 때 일본 제품과 맞붙지 않으니 엔화 가치에 영향을 받을 이유가 없다. 과거 엔저의 직격탄을 맞았던 자동차 업종도 여유 있는 모습이다. 한일 자동차 기업들이 직접적으로 경합하는 미국 시장에서 현대차·기아는 올해 상반기 전년 대비 17% 증가하는 판매 실적을 올렸지만 같은 기간 도요타는 0.7% 감소했다. 한국차의 상품성과 브랜드 가치가 올라갔고, 전기차 분야에서 한국이 월등히 앞섰기에 나올 수 있는 결과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엔저 영향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기업인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엔저가 초래할 불확실성이 만만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환 위험 대비 능력이 떨어지는 수출 중소기업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일본에 수출해 엔화로 대금을 받는 중소기업이라면 이익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철강, 화학, 전자, 부품 등 일본과의 경쟁이 심한 분야는 엔저가 장기화될수록 가격경쟁력에 밀리게 된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지난달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매우 높아 끈기 있게 금융 완화를 지속하겠다”고 말한 것을 볼 때 엔저 현상이 단기간에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예상치 못한 충격이 2, 3년 후에 올 가능성도 있다. 전례를 보면 일본 기업들은 엔저 때 수출 물량을 늘려 시장점유율을 키우기보다 이익을 늘리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쌓인 현금으로 연구개발(R&D)과 제품 혁신에 투자했다. 엔저를 활용해 체질을 강화하는 것이다. 2, 3년 후 그 성과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때야말로 한국 기업에 진정한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산업계를 오래 취재하다 보니 각 기업의 조직문화를 직간접적으로 느낄 기회가 많았다. 2005년 11월 중동 5개국을 순방한 이해찬 당시 총리를 동행 취재하면서 현대의 조직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총리 일행이 쿠웨이트에서 정유공장 해상터미널 공사를 하는 현대건설에 들렀을 때였다. 현대건설 임직원 수백 명이 공사 현장 약 50m 앞에서부터 2열로 도열해 박수 치며 환호했다. ‘여기가 북한인가’ 생각될 정도로 낯설었다. 현황을 설명하는 현대건설 관계자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고 목소리는 감격에 차 있었다. ‘너무나 뜨겁고 낯선 중동이지만 죽을힘을 다해 철저하게 시공해 한국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뉘앙스가 아직도 기억난다. 차분하게 현지 사업을 설명하는 다른 건설사들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현대는 열정, 끈기, 도전의 DNA를 가졌다. 최근 현대차의 질주를 보면서 과거에 느낀 현대의 DNA가 떠올랐다. 현대차그룹의 글로벌 판매 순위는 2000년 10위에서 2010년 처음으로 ‘톱5’에 들었고, 2020년 4위, 지난해에 3위에 안착했다. 올해 1분기(1∼3월)엔 사상 최초로 분기 영업이익 국내 1위에 올라섰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46년 자동차 정비공장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을 시작점으로 본다면 80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이룬 성과다. 2004년 미국 자동차 전문지 ‘오토모티브’는 현대차가 단기간에 이뤄낸 품질 향상 성과를 극찬하며 ‘Man bites dog(사람이 개를 물다)’라고 표현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일을 해냈다는 것이다. 오토모티브는 약 20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을 뭐라 표현할지 궁금하다. 품질 좋은 차량을 만들겠다는 열정, 끈기 있게 디자인과 고성능을 밀어붙이지 않았으면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올해 산업계 전체는 잔뜩 위축된 모습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전국 2307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3분기 기업경기전망지수(BSI)를 조사했더니 91로 집계됐다. 100보다 낮다는 것은 2분기보다 경기를 더 안 좋다고 본다는 것이다. 정부의 ‘상저하고’ 경기 전망도 예상처럼 되지 않을 거라는 우려도 나온다. 기획재정부는 올해 성장률 전망을 기존 1.6%에서 1.4%로 낮췄다. 뚜렷한 외부의 경제적 충격이 없는데 1%대 성장을 보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기업은 경기가 좋지 않을 땐 인력 채용을 줄이고 비용 절감, 세일즈 및 마케팅 예산 삭감 등으로 대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공격적인 투자와 인재 확보에 나선 기업들이 위기 후 성장의 기회를 잡았다. 삼성전자는 1분기 반도체 부문에서 사상 최악의 실적을 냈지만, 1분기 중 반도체 시설에만 9조8000억 원을 투입했다. 연구개발(R&D)에도 1분기 전체 영업이익의 10배가 넘는 6조5800억 원을 투자했다. 반도체 산업 특성상 호황과 불황 주기가 번갈아 나타난다. 불황에서 진행된 투자는 다시 호황이 왔을 때 초격차 경쟁력을 확보하는 발판이 될 것이다. 위기 때 경영자가 ‘비전’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비전을 제시한다고 모든 기업이 비전을 다 이룰 수는 없다. 하지만 비전이 없다면 그 비전을 이룰 기회조차 갖질 못한다. 정 명예회장이 ‘독자적인 한국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갖지 않았으면 현대차는 여전히 자동차 정비공장에 머물렀을 것이다.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서울에서 핀란드 알토대 MBA 과정을 이수하던 2007년 8월이었다. 핀란드 헬싱키 현지에서 2주간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휴대전화 기업 ‘노키아’를 찾았다. 안내하던 여직원의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럴 만한 게 노키아는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4%, 핀란드 전체 수출의 약 25%를 차지했다. 시가총액은 헬싱키 증시의 70%였다. 핀란드 경제는 노키아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기자가 방문한 2007년이 노키아의 최대 전성기였다. 같은 해 6월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휴대전화 시장의 판도는 바뀌기 시작했다. 노키아는 새 흐름을 가벼이 봤다. 아이폰보다 더 많은 기능을 갖췄고, 자동차가 그 위를 지나가도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내구성을 가진 자사 휴대전화에 도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 이후 노키아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수직 낙하했다. 결국 2014년 4월 핵심인 휴대전화 사업 부문을 마이크로소프트(MS)에 매각했다. 노키아의 추락에 핀란드 경제도 휘청했다. 핀란드의 휴대전화 수출은 2007년 3070만 대(69억 달러)에서 2012년 400만 대(9억 달러)로 줄었다. 핀란드 전체 수출은 2008년에 전년 대비 0.2% 줄어들었고, 이듬해에는 31.3% 급감했다. 무역수지는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년 연속 적자였다. 그런데 세상사 참 묘하다. ‘노키아가 죽으니 핀란드가 살아났다’는 평가도 나왔다. 핀란드는 과거부터 연구개발(R&D) 투자 비율이 높고, 교육 경쟁력도 세계 1, 2위를 다툴 정도였지만 기업 실적은 신통치 않아 ‘핀란드 패러독스’라는 말까지 생겼다. 창업을 주저하는 문화, 고율의 법인세 등이 문제로 꼽혔다. 하지만 노키아의 몰락이 위기감을 불러왔고, 그 위기감이 핀란드 패러독스를 해결했다. 노키아는 2008년 이후 1만 명 이상의 공학 인재들을 구조조정했는데, 그들은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으로 흘러갔다. 점차 위험을 감수하고 창업에 도전하는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학들은 산학협력을 통해 학생들의 창업 활동을 격려했다. 정부는 벤처캐피털을 조성해 신생 기업에 자금을 공급했다. 헬싱키기술대학 학생 3명이 창업한 로비오는 2009년 앵그리버드 모바일 게임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2010년 설립된 슈퍼셀은 전략 게임 ‘클래시 오브 클랜’의 성공으로 설립 4년 만에 약 2조 원의 매출을 올렸다. ‘노키아의 몰락이 핀란드의 이익이 되다’(월스트리트저널, 2011년 8월), ‘대기업이 쓰러질 때 기업가정신이 살아난다’(하버드비즈니스리뷰, 2013년 3월) 등 평가가 나왔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 부진을 보면서 10년도 더 지난 핀란드의 추억이 떠올랐다. 반도체가 부진하니 한국 수출은 8개월 연속 적자다. 무역수지도 15개월째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 치명타라 할 수 있다. 올해 성장률은 1%대로 예상되는데, 외환위기와 같은 경제 충격 없이 1%대 성장률을 보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소수 대기업이나 특정 산업에 의존한 경제 생태계는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다만 핀란드 사례가 보여주듯 위기 상황이 오히려 한국의 고질병을 고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반도체와 중국에 대한 과도한 수출 의존도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한다. 반도체가 무너지자 한국도 같이 무너질지 아니면 오히려 성장할지, 지금 그 갈림길에 서 있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4월 중순 “제보를 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일본에서 교민들을 상대로 벌이는 400억 원대 사기 행각을 고발하겠다고 했다. 며칠 후 다단계처럼 투자자를 끌어모아 주가를 인위적으로 띄운 SG증권발(發) 주가조작 사태가 터졌다. 왠지 제보에 관심이 갔다. 문제의 인물은 박모 씨(51)였다. 그는 2018년부터 일본 도쿄에서 카페, 의류, 분식 등 매장을 운영했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 청소를 했고 저녁까지 일했다. 수더분하게 생긴 얼굴이었고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런 성실함과 외모에 더 믿음이 갔다고 했다. 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하는 재일교포 L 대표는 지난해 박 씨의 의류 매장을 공사한 적이 있다. 박 씨는 “골프 의류 사업을 하고 있는데, 주문이 몰려 어쩔 줄 모르겠다”고 말했다. 전화 통화를 하며 “주문이 밀려 배송이 늦어졌다, 죄송하다”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박 씨는 한두 달 융통할 자본이 있으면 생산을 더 할 수 있다면서 L 대표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는지 물었다. 12% 수익 중 8%를 이자로 주겠다고 했다. L 대표는 우선 몇천만 원을 빌려줬다. 실제 8% 이자를 포함한 원리금을 받았다. 점차 투자 액수를 늘려 합계 28억 원을 건넸다. 거래하는 동안 별문제가 없었기에 계약서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박 씨는 2월 중순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그 후 피해자들이 대거 수면 위로 드러났다. 약 100억 원을 물린 교민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일본 경찰서에 사기 혐의로 고소장을 접수시켰다. 자체적으로 박 씨의 행적도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과거 경남 거제, 광주 등지에서도 사기 행각을 벌인 사실을 확인했다. 제보자는 2015년 7월 거제경찰서에 접수된 고소장과 올해 3월 인천 중부경찰서에 낸 민원 접수증 사진을 보여줬다. 모두 사기 혐의였다. 제보자는 “도쿄의 한국 교민 사회를 산산조각 내놓고 지금은 다른 곳에서 사기를 치고 있을 것이다. 하루빨리 잡아야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2015년 이후 국내 범죄 중 부동의 1위는 사기다. 2015년 25만7000여 건이었던 사기 발생 건수는 2021년 29만2042건으로 늘었다. 사기 수준을 부동산이나 보험 사기, 보이스피싱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된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기도 갈수록 지능화되고 있다. 최근 음성과 영상을 인공지능(AI)으로 위조해 돈을 가로채는 신종 사기까지 등장했다. 순진한 사람이 사기범에게 당한다는 생각도 고치는 게 좋다. SG 사태를 보면 의사, 변호사, 연예인 등이 주가조작단에 거액을 맡겼다. 정계, 재계, 언론계 인사 등의 이름도 거론되고 있다. 일부는 속아서 돈을 건넸을 것이고, 일부는 주가조작을 알면서도 눈을 감고 일확천금을 노렸을 것이다. 사기 피해자가 돈을 돌려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사기꾼이 잡혔을 때는 사기로 얻은 돈을 이미 탕진한 경우가 많다. 법률 지식으로 무장한 사기꾼은 미리 돈을 빼돌려 놓기도 한다. 피해를 없애려면 ‘예방’이 최선이다. 법무법인 법조가 펴낸 저서 ‘사기꾼의 얼굴을 공개합니다’에 따르면 100% 확신적으로 말하는 사람, “둘도 없는 기회” “지금 안 하면 놓친다” 등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 안 되는 일 없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 되는 일도 없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쉽게 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는 게 사기 피해를 막는 지름길이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1963년 경남 진해에서 태어난 소년은 10대 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버퍼드칼리지를 졸업한 후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2년 정도 인수합병(M&A) 관련 업무를 한 뒤 사표를 던지고 하버드대 MBA 과정을 밟았다. 그 후 36세가 되던 1999년 세계적인 사모펀드 운용사인 칼라일그룹에 입사했다. 그는 한국사무소 대표로 지내며 2000년 한미은행을 인수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4년 뒤 한미은행을 팔아 7000억 원대 차익을 거두면서 M&A 시장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2005년 3월 칼라일그룹을 떠나 아예 직접 사모펀드 운용사를 설립했다. 사명은 MBK파트너스. 자신의 영문 이름(마이클 병주 김)에서 따왔다. 이야기의 주인공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이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선정한 한국 자산가 순위에서 올해 처음 1위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자산 97억 달러로 2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80억 달러)보다 더 많았다. 3월 기준 MBK파트너스가 투자한 기업의 매출 합계는 441억 달러, 고용 인원은 37만 명이다. 87명의 투자전문인력이 만들어냈다고는 믿기 힘들다. 한국 최고의 부자지만 많은 사람이 김병주란 이름을 낯설어 할 것 같다. 그만큼 한국에서 사모펀드의 역사는 짧다. 1997년 외환위기 때 한국 굴지의 대기업이 줄줄이 쓰러지자 외국계 사모펀드들은 헐값에 사들였다. 제일은행, 외환카드, LG카드 등 금융기관들도 줄줄이 팔렸다. 당시 국내에는 토종 사모펀드가 없었다. 뒤늦게 정부가 법 제정에 나섰고, 2004년 12월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이 시행되면서 한국에서도 사모투자전문회사를 만들 수 있게 됐다. MBK파트너스가 2005년 설립됐으니 토종 사모펀드 1세대라고 볼 수 있다. 약 20년이 지났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1년 말 사모펀드 운용사는 394곳이다. 상대적으로 적은 자본으로도 창업할 수 있어 김 회장과 같은 해외 유학파뿐만 아니라 국내파도 속속 사모펀드 시장에 진입했다. 쉽게 돈을 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1조 원짜리 사모펀드를 만들려면 운용사는 최소 100억 원의 자기 자본을 넣어야 한다. 투자한 기업이 망하면 운용사도 함께 망하는 경우가 많다. 사모펀드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자금력 있는 대기업들이 주도하던 M&A 시장에 사모펀드들이 새로운 거인으로 등장했다.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사모펀드들은 기업 경영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오너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한국 기업 생태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먹튀’ 이미지가 강한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사모펀드의 본질이 싸게 기업을 인수해 성장시킨 뒤 높은 값에 되파는 것이어서 그 이미지를 피하기 힘들다. 은밀한 거래를 추구하기에 언론에 잘 드러나지 않는 특징도 있다. 김 회장은 2021, 2022년 포브스가 선정한 아시아의 대표 자선가로 뽑혔지만 이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계 최대 사모펀드 그룹인 블랙스톤의 창업자 스티븐 슈워츠먼. 그의 이름 앞에는 월스트리트의 황제뿐만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 교사, 미중을 잇는 제2의 헨리 키신저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영향력이 투자업뿐만 아니라 경제와 외교까지 걸쳐 있는 것이다. 김병주 회장도 자산 1위에 걸맞은 선한 영향력을 더 확산시켜 주길 기대한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최근 짐 정리를 하다가 일본 도쿄 특파원 시절에 냈던 전기료 영수증을 발견했다. 일본은 장기간 물가 하락을 겪었기 때문에 공산품, 음식, 집값 등 어지간한 것들은 한국보다 저렴하지만 전기료는 예외다. 도쿄 시내 아파트에서 5인 가족이 살면서 2021년 2월 낸 전기료는 8131엔(약 8만1000원)이었다. 올해 2월 한국에서 낸 전기료 5만7070원보다 훨씬 높았다. 한국과 일본의 전기료 구조는 비슷하다. 기본요금에 전력 사용량만큼 요금이 더해지고, 거기에 연료비 가격 등락에 따른 조정요금 등이 반영된다. 양국 모두 전력 사용량이 많을수록 곱해지는 단가가 높아지는 누진제를 채택하고 있다. 한일 모두 자원 빈국이어서 원유, 액화천연가스(LNG) 등 연료를 대부분 수입한다. 지난해 연료 수입 가격 급등, 자국 통화 가치 하락도 함께 경험했다. 그만큼 전기료 인상 요인이 많았지만 한국은 전기료를 억눌렀고, 일본은 꾸준히 올렸다. 한국에서 2월에 사용한 전력량 384kWh를 일본 도쿄전력의 가격 시스템에 기초해 계산했더니 1만1578엔이란 요금이 나왔다. 물가가 저렴한 일본이지만 전기료는 한국의 2배였다. 한국에선 질 좋은 전기를 값싸게 이용할 수 있어 좋긴 한데, 너무 싸다는 게 문제다. 현재 전기료는 원가의 약 70%밖에 되지 않는다. 콩을 가공해 두부를 만드는데, 콩값이 두부값보다 비싼 셈이다. 이런 기형적 구조는 자원 낭비와 경제 왜곡으로 이어진다. 한 지인은 최근 주택을 수리하면서 기름보일러를 없애고 전기 패널을 깔았다. 그게 더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기업도 전기에 점점 더 의존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 발표에 따르면 1990∼2020년 기간 한국의 산업용 전력소비는 372% 늘었다. 같은 기간 독일(3%)과 프랑스(1%)는 소폭 증가했고, 일본(-19%)과 미국(-14%)은 오히려 줄었다. 1차 에너지원인 석유나 석탄으로 난방을 하면 에너지 전환 손실률이 10∼20%에 그친다. 전기는 석유나 석탄으로 만든 2차 에너지원이다. 전기로 난방을 하면 손실률이 60%로 커진다. 전기 패널이 늘어날수록, 기업이 전기에 의존할수록 국가 차원의 자원 낭비가 심해지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전기요금을 제때 올리지 않은 지난 정부의 무책임함을 비판하면서 지난해부터 올해 1월까지 전기요금을 단계적으로 인상해 왔다. 올바른 방향이라고 본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최근 2분기 전기료 인상 결정을 보류했다. 전기료 인상으로 인한 연쇄적인 물가 상승, 직격탄을 맞을 취약계층과 소상공인의 반발 등이 신경 쓰였을 것이다. 일본 사례를 보면 전기료 인상이 고스란히 가계 충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떠올려 보면 특파원 생활할 때 다섯 가족 모두 거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전기 패널이 거실에만 깔려 있기에 겨울엔 거실을 떠날 수 없었다. 여름에도 거실에만 에어컨을 켰고, 가족 모두 거실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절전 습관은 한국 귀국 후에도 유지돼 서울 아파트에서 낸 전기료는 전체 평균보다 항상 적었다. 일본인 역시 전기 사용을 줄여 고지서에 찍힌 요금을 계속 낮췄을 것이다. 일본 기업도 저에너지 주택인 ‘스마트 하우스’ 등을 개발하며 절전을 도왔다. 전기료 현실화를 통해 개인의 절전과 기업의 기술 혁신을 유도하는 게 시장원리에 맞다. 취약계층에 대한 핀셋 지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일본 오사카에 사는 이경재 씨(73)는 1982년 7월 7일이란 날짜를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재일교포들이 낸 자본금으로 설립된 신한은행이 그날 서울 명동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재일교포 주주 200여 명이 서울로 날아왔다. 개점 행사 때 눈물을 흘린 주주도 있었다고 한다. 이 씨는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약 150만 명의 조선인들이 한국으로 귀국했지만 그의 부친은 일본에 남았다. 가난과 차별을 각오한 것이다. 당시 일본에 남은 교포들은 쓰레기 수거, 청소, 고물상 등 허드렛일을 주로 했다. 일본 각 도시에서 분뇨 수거 작업을 맡기도 했다. 저학력에 일본어가 서툴렀기에 대체로 2세에게 빈곤이 대물림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공한 교포들도 하나둘 나왔다. 제과로 일어선 신격호 롯데 회장, ‘파친코 황제’ 한창우 마루한그룹 회장 등이 그 예다. 그들은 한국에도 투자했다. 하지만 자금 조달이 문제였다. 한국 기업들도 대출받기 힘든 시절이었으니, 재일교포 기업이 은행 문턱을 넘기는 더 힘들었다. 결국 재일교포들이 나서 한국에 은행을 직접 설립했다. 재일교포 341명이 자본금 250억 원을 모아 첫 순수 민간자본 은행이자 교포은행인 신한은행을 만든 것이다. ‘조상제한서(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로 불리는 5대 시중은행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때 신한은행은 서울에서 점포 3개로 시작했다. 영업 방식은 혁신적이었다. 고객 한 명이 은행 문을 열고 들어오면 모든 직원이 일어나 허리 숙여 인사했다. 당시 고객이 ‘을’인 시절이었기에 다른 은행 직원들은 고개 숙이는 데 인색했다. 또 대출에 따르는 검은 커미션(사례금)을 없앴다. 그러자 신한은행 점포 수가 빠르게 늘어났다. 2002년 굿모닝증권, 2003년 조흥은행, 2006년 LG카드 등을 잇달아 인수하면서 비(非)은행 포트폴리오까지 갖춘 신한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동안 변화도 많았다. 특히 창립 멤버들이 주식을 상속, 증여하면서 현재 재일교포 주주는 약 5000명으로 늘었다. 100%였던 지분은 15∼20%로 줄었다. 재일교포 주주의 존재감도 비례해 떨어졌다. 하지만 신한금융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각별하다. 시세차익을 노리고 주식을 사들이는 다른 투자자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23일 신한금융 주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이 씨는 “신한은 재일교포의 자랑이다. 주식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려는 재일교포 주주는 1명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상시 느슨한 연합체 주주로 있지만 위기 때는 주인의식을 내보인다. 2010년 소위 ‘신한 사태’로 불리는 경영권 다툼 때 결국 재일교포 주주들이 문제 인사 3명을 일본으로 불러 다들 물러나도록 교통정리 했다. 23일 주총에서도 최대주주 국민연금의 반대표에도 불구하고 재일교포 주주들이 뭉쳐 진옥동 회장 내정자의 사내이사 선임안을 통과시켰다. 정부의 부적절한 간섭에 대해선 방패 역할을 해왔다. 다만 앞으로도 무한 애정을 무기로 은행을 성장시킬 수 있을지 장담하기 힘들다. 지금은 시장 신뢰를 잃은 은행이 하루 만에 초고속으로 파산하는 시대다. 지분율에 비해 경영권에 미치는 과도한 영향력, 재일교포 주주를 대표하는 사외이사들의 금융 전문성 부족, 불투명한 사외이사 선임 과정 등 약점을 개선할 때 또 한번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일본인 모토에 다이치로(元榮太一郎·48) 씨는 학창 시절 교통사고를 일으킨 적이 있다. 태어나 처음 변호사와 상담을 했고, 상담 내내 고액의 이용료가 걱정됐다. 그는 게이오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사법시험에 합격해 2001년 변호사가 됐다. 그리고 2005년 법률 포털사이트 ‘벤고시(弁護士)닷컴’을 만들었다. 일본 언론 인터뷰에서 “학창 시절 경험을 떠올려 모든 사람이 법률을 좀 더 쉽게 이용하게끔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벤고시닷컴의 법률 Q&A 코너를 즐겨 이용했다. 질문을 남기면 변호사가 무료로 답을 해준다. 월 330엔(약 3200원)을 내고 프리미엄 회원이 되면 다른 사람의 사례 203만 건까지 모두 볼 수 있다. 실제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 단계에선 가장 성실하게 답을 내놓은 변호사에게 연락하는 경우가 많다. 변호사들에게 벤고시닷컴은 일종의 구세주와 같다. 일본 변호사 업계는 극심한 ‘레드오션’이다. 변호사 수는 2000년 1만7126명, 2010년 2만8789명, 지난해 4만3960명으로 매년 늘었다. 수임을 못 해 연봉이 300만 엔에 그치는 변호사도 적지 않다. 온라인 광고를 하려 해도 ‘○○ 분야 전문가’, ‘가장’, ‘완벽’, ‘불패’ 등 표현은 사용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벤고시닷컴은 고객 유치의 중요한 통로가 됐다. 월 2만 엔 회비를 내면 검색 때 상위에 표시되고 자신의 해결 사례까지 내보일 수 있다. 벤고시닷컴에 가입한 변호사는 현재 2만1031명이다. 일본 전체 변호사의 절반에 육박한다. 대형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와 기업에 고용된 변호사를 제외하고 대부분 이용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벤고시닷컴은 초창기 적자를 냈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설립 9년째부터 흑자로 돌아섰다. 2012년부터 뉴스 서비스를 시작했고, 2014년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2021년엔 매출액 53억1800만 엔, 영업이익 1억7200만 엔 실적을 올렸다. 종업원은 320명이다. 한국에서도 2014년 벤고시닷컴과 유사한 법률서비스 플랫폼 ‘로톡’이 탄생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서비스 시작 1년여 만에 변호사 단체로부터 고발을 당했다. 변호사 단체는 “저가 수임 경쟁을 부추겨 법률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고, 변호사들이 플랫폼과 자본에 종속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톡은 세 차례 고발을 당했지만 모두 ‘혐의 없음’으로 끝났다. 하지만 장기간 변호사 단체와 갈등을 겪다보니 경영 상황이 나빠졌다. 최근 직원 90여 명 중 절반을 줄이는 등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했다. 벤고시닷컴은 일본 변호사 단체와 갈등이 없었을까. 일본 최대 변호사 단체 ‘일본변호사연합회(일변련)’의 부회장을 지냈던 지인에게 물어봤다. “(일변련 부회장을 지낸 변호사인) 나도 벤고시닷컴 회원이다. 지금까지 특별한 문제 없었고, 일변련에서 변호사 가입을 제한하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사건 소개하고 소개료 받는 것은 위법인데 (벤고시닷컴은) 그런 활동이 없다.” 그는 벤고시닷컴이 보낸 최신 뉴스레터를 전송해주며 “변호사에게 중요한 판례 등 정보를 잘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일본 변호사는 “법 위반 사항이 없는데 왜 로톡이 고발당하느냐. 뭔가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겠느냐”고 되물었다. 한국 이익단체의 기득권 지키기를 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Japan as No. 1 AGAIN.’ 지난해 9월 26일 자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이 같은 영문 광고가 실렸다. 이미지는 없었다. 일본을 다시 넘버원으로 만들자는 뜻의 영문이 가운데 큼지막하게 자리했고, 그 주변에 329개사 로고가 있었다. 가상자산 벤처기업도 여럿 포함됐다. 블록체인을 연결시킨 플랫폼을 만들어 기존 사회, 경제, 문화, 정치 체계를 바꾸겠다는 설명도 달려 있었다. 광고주는 블록체인 네트워크 서비스를 개발한 스타트업 ‘스테이크테크놀로지’다. 27세인 창업자 와타나베 소타(渡邊創太) 씨는 애초 일본에서 사업하려 했다. 하지만 규제와 세금이 너무 엄격해 2020년 싱가포르로 건너갔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싱가포르는 ‘가상자산에 리스크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리스크를 겁내는 게 국가에 더 손해다. 우리는 가상자산 시장을 진흥시킬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선 세금을 더 내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실제 일본은 가상자산 사업을 하기 쉽지 않은 국가다. 일본 정부는 2017년 자금결제법을 개정해 가상자산을 화폐에 준하는 지급수단으로 보고 규제하기 시작했다. 거래소는 의무적으로 금융청에 등록해야 하고, 고객 자산을 별도로 관리해야 했다. 세금도 무겁다. 가상자산 매매로 얻은 이익은 주식 매매와 달리 분리과세 대상이 되지 않는다. 기존 소득과 합산해 과세하기 때문에 최대 55% 세율로 세금이 매겨진다. 가상자산을 다른 가상자산으로 교환할 때마다 세금을 내야 한다. 반면 투자자라면 일본만 한 곳도 드물다. 지난해 11월 미국 FTX 파산 때 미국에선 투자자들이 자산을 인출할 수 없어 패닉에 빠졌지만, 일본에선 그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FTX 일본 법인은 금융청 규제로 투자자가 맡긴 자금을 은행 등에 의무적으로 맡긴 덕분이었다. 투자자 보호가 최우선인 일본에 최근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금융당국이 최소 6개월이 걸리는 가상자산 상장 심사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겠다고 지난해 10월 밝혔다. 또 한 거래소에 상장된 가상자산을 다른 거래소에서 거래되게끔 할 때 신규 상장 절차를 거쳐야 하는 기존 제도도 없애겠다고 했다. 일본이 이제 가상자산 산업 진흥에도 나서는 모습이다. 한국은 어떨까. 가상자산 관련법은 2020년에 개정된 특정금융정보거래법이 유일하다. 이 법은 주로 가상자산 사업자의 진입 규제에 대한 것으로 투자자 보호에는 미흡하다. 투자자 보호를 중심으로 하는 법안 19개는 모두 국회에 계류돼 있다. 지난해 FTX 사태, 테라-루나 폭락을 계기로 국회에서 법안 논의가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됐지만 아직도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없다. 지난해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과 금융당국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가상자산 투자자 보호와 산업 진흥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답은 예외 없이 “투자자 보호가 최우선”이었다. 한 금융 당국 인사는 “규제 당국에 왜 산업 진흥 이야기를 하느냐”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모든 부처의 ‘산업부화’,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 등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적어도 가상자산 업계에선 전혀 통하지 않고 있다. 그 사이 일본은 다시 세계 1위가 되겠다며 조용히 산업 진흥에 나서고 있다. 와타나베 씨가 일본으로 유턴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환경이면 한국에 지사를 세울 일은 분명 없을 것이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열정 하나로 자신만의 사업 모델을 만들어가는 스타트업 대표들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그들을 응원하게 된다. 애로사항도 꼭 물어본다. 좋은 인재를 구하기 힘들다는 점, 자금 부족, 그리고 정부 규제를 공통적으로 꼽았다. 불합리한 규제는 언론의 힘으로 없앨 수도 있다. 구체 사례를 물었지만 그들은 예외 없이 입을 닫았다. 공무원 눈 밖에 나면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핀테크 플랫폼 ‘토스’의 성장사를 다룬 서적 ‘유난한 도전’을 읽으면서 그들이 입 닫았던 규제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토스는 2014년 3월 개인 간 간편 송금 시범 서비스를 열었다. 은행 모바일 뱅킹은 첫 화면에서 송금까지 8, 9단계를 거쳐야 하지만 토스는 3단계로 줄였다. 가입자가 매주 8%씩 늘어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한 달 뒤 금융 서비스 망을 제공한 회사가 “더 이상 협력할 수 없다”고 했다. 개인 간 송금에 금융 서비스 망을 허용하지 말라는 금융당국의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은행 아니면 송금 서비스를 할 수 없다는 법 규정은 없다. 하지만 ‘해도 된다’는 법 조항도 없다. 금융당국은 이처럼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가장 쉽고 안전한 길, 규제를 선택한 것이다. 1년 뒤 문제는 해결됐다. 2015년 1월 청와대에서 열린 정부 업무보고에 토스를 만든 이승건 비바리퍼블리카 대표도 초대됐다. 대통령과 기획재정부 장관, 금융위원장, 국책은행장 등이 모인 자리였다. 이 대표는 3분간 발언 기회를 얻었다. “보안 사고에 대한 금융당국의 정책이 변해야 합니다. 과도한 제재로 인해 금융회사가 새로운 시도를 열심히 해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 대표의 발언이 끝나자 장내에는 2, 3초간 침묵이 흘렀다고 한다. 다행히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규제 일변도의 금융 정책을 바꾸겠다고 화답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금융위원회는 토스 서비스를 사실상 허용하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그 덕분에 2015년 2월 토스 서비스가 정식으로 출시될 수 있었다. 현재 토스는 국내 제1호 핀테크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스타트업)이 됐다. 모든 규제가 나쁜 것은 아니다. 시장의 실패를 막고 시장경제가 안고 있는 부(富)와 정보 격차를 줄여주는 좋은 규제도 많다. 하지만 법과 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신사업 영역에서 종종 규제는 기업인의 손과 발을 묶는다. 아무리 사업 모델이 좋아도 법에 명쾌하게 규정돼 있지 않으면 공무원은 “서비스 불가” 판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안전, 환경, 질서, 이해관계 충돌은 단골로 내세우는 명분이다. 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는 박하고, 규제를 없애 부작용이 일어났을 때 ‘책임’은 무거운 현 감사 시스템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아랍에미리트(UAE)와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잇달아 영업사원을 자처했다. “공무원을 상대할 때 ‘갑질이다’ 싶은 사안은 저에게 직접 전화해 달라”고도 했다. 당장 전화기를 들고 싶은 스타트업 대표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대통령이 수많은 전화를 받지 않고도 문제를 개선시키는 방법도 있다. 감사 방향을 바꾸면 된다. 일이 되게끔 하려다 그릇을 깬 공무원에게는 관대할 필요가 있다. 그 대신 애매하면 처리하지 않는 소극적인 공무원에게 감사의 칼날을 들이대야 한다. 그럼 저절로 갑질이 줄어들 수 있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힘을 넣는 사업 중 하나는 ‘서비스업 활성화’다. 서비스업을 발전시키면 내수를 키울 수 있고, 고용에도 효과적이다. 생산이 10억 원 늘어나는 과정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취업자는 제조업이 6.2명인 데 비해 서비스업은 12.5명(2021년 한국은행 발표)이다. 하지만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서비스업을 강조해야 할 정도로 매번 서비스 혁신의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8월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안경업, 이·미용업, 도매시장업, 리스업 등 11개 서비스업 분야의 진입규제에 대해 토론회를 열었다. 진입규제를 없애면 더 많은 참여자가 뛰어들어 산업이 커지고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라고 봤다. 예를 들어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안경사 면허가 없으면 안경점을 열 수 없고, 안경사는 안경점 1개만 차릴 수 있다. 토론회를 통해 자금력을 가진 개인이나 법인에도 진입을 허용하면 어떤 변화가 생길지 살펴보려 했다. 하지만 빨간 머리띠를 두른 수십 명의 안경사들이 나타나 토론회장을 점거했다. 그들은 “진입장벽을 낮추면 영세 사업자들이 다 죽는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나흘간 예정된 11개 업종의 토론회 중 절반이 취소되는 파행을 겪었다. 의료기사법의 핵심 내용은 지금까지도 바뀌지 않았고, 전국 안경점들은 대체로 소규모 구멍가게처럼 운영되고 있다. 윤증현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서비스업 중에서 특히 영리병원에 관심이 높았다. 그는 “영리병원을 허용해야 의료 분야에 민간 투자가 흘러들어오고, 의료서비스 질도 높아진다”고 확신했다. 참고로, 한국 의료법에는 비영리법인만 병원을 운영할 수 있게끔 돼 있다. 비영리법인은 이익이 나더라도 투자자에게 배당할 수 없다. 투자자 입장에선 비영리재단에 투자할 유인이 없는 것이다. 투자가 부족하다 보니 종합병원이 생기기 힘들다. 삼성, 현대 등 대기업이 비영리재단을 만들어 종합병원을 운영하는 정도다. 종합병원이 부족하다 보니 예약하려면 2, 3개월씩 기다려야 한다. 경제부처 최고 수장이 강한 의지를 가지고 밀어붙였지만 결국 지금까지 영리병원은 설립되지 않았다. “사람 생명을 담보로 돈을 벌려고 하느냐”, “의료비가 올라가 부자만 좋은 서비스를 받는다”와 같은 부정적 국민감정에 무너졌다. 정말 부자만 좋은 서비스를 받는 의료 양극화가 일어나는지, 아니면 보통 사람의 종합병원 접근이 더 편해지는지 이성적인 논의의 장은 없었다. 윤석열 정부도 서비스 혁신에 시동을 걸고 있다. 정부는 29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이끄는 서비스산업 발전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켰다. 당정은 내년 경제정책 방향을 협의하면서 5대 개혁 과제 중 하나로 ‘서비스’를 꼽았다. 내년엔 수출과 고용이 휘청거리고, 성장률은 1%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되기에 서비스업 활성화에 더욱 눈길이 간다. 한국 서비스업 취업자는 주로 숙박·음식업에 몰려 있고, 정보통신업이나 전문·과학·기술서비스업 등 고부가가치 분야에는 많지 않다. 의료, 교육, 관광 등에서 돈 있는 사람이 국내에서 돈을 더 쓰고,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돈을 쓰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집단 이기주의, 부정적 국민감정, 총론에선 찬성하지만 각론에서 반대하는 부처 갈등 등을 극복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서비스업 혁신이 가져올 사회 변화상을 있는 그대로 국민들에게 보여줘 국민적 공감대를 넓히는 게 돼야 할 것이다. 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캐나다, 호주, 인도네시아 정상들을 만날 때 핵심 광물에 대한 공급망 협조를 구했다. 광산 자체를 매입해 개발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할 것 같다.”(윤석열 대통령) “핵심 광물은 첨단산업의 씨앗이다. 정부로서도 광물자원 부국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자원을 확보하고 있다.”(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10월 말 TV 생방송으로 진행된 1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해외 광물 확보에 대한 이 같은 대화가 오갔다. 그렇게 해서 핵심 광물을 척척 확보하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은 자원이 곧 무기인 시대다. 하지만 광산을 매입하거나 지분 투자를 하지 않는 한 안정적 광물 확보는 힘들다. 문제는 광산 매입과 투자에 큰 위험이 따른다는 것이다. 2009년 3월, 지도상에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아프리카 니제르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니제르 국영 광산 관리회사와 우라늄 공급 MOU를 맺으러 방문하는 한국광물자원공사(현 한국광해광업공단) 김신종 당시 사장을 동행 취재했다. 그때 광물 확보의 어려움을 실감했다. 우선 육체적으로 힘들다. 니제르를 방문하려면 출국 전에 황열 예방접종을 하고 말라리아 예방약을 먹어야 했다. 그랬더니 사흘 정도 근육통과 몽롱함에 시달렸다. 니제르에선 말라리아가 무서워 밤에 일절 돌아다니지 못했다. 니제르 중부 마다우엘라 광산을 취재할 땐 모래바람이 수시로 불었다. 옆 사람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더니 입 안에 모래가 버석버석 씹혔다. 김 사장은 몸살 증상이 있었고, 설사가 멈추지 않았지만 약을 먹으며 현장을 다녔다. 일이 되게끔 하기도 힘들다. 30년간 산업부에 몸담았던 김 사장이 2008년 광물자원공사 사장이 됐을 때 직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서두르면 감사원 감사에 걸린다”는 것이었다. 유망한 해외 광산을 감지해도 규정대로 진행하다 보면 1, 2년이 흘렀고, 그 사이 중국, 일본이 채 갔다고 했다. 김 사장은 “확보해야 할 광물이라면 곧바로 계약하라. 문제가 생기면 사장인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올해 들어 에너지 수입 가격이 치솟으면서 비상경제민생회의, 국정감사 등에서 자원개발 중요성이 강조됐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땅 밑의 자원을 확인하고 개발하는 데에는 막대한 시간과 자금이 필요하다. 탐사 단계만 2, 3년이 걸리고 개발과 생산 단계까지 가려면 통상 10년은 걸린다. 성공하면 큰 이익을 얻지만 실패하면 재정적 손실이 막대하다. 해외 자원개발 선진국도 10개 중 1, 2개 사업만 성공한다. 한국에선 정권이 바뀌거나, 자원 가격이 떨어지면 자원개발은 ‘돈 먹는 하마’로 지목된다. 김 사장도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후 자원개발 관련 배임 혐의로 기소됐다. 다만 1, 2, 3심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자비로 수억 원의 변호사 비용을 댔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본 후배 공무원들이 감히 “자원개발에 나서자”고 주장할 수 있을까. 윤석열 정부가 본격적으로 해외 자원개발을 하려면 장기 프로젝트로 밀어붙일 뚝심이 있어야 한다. 개인 비리가 있다면 당연히 처벌해야겠지만, 일이 되게끔 하려고 내린 의사 결정을 법의 잣대로 재단해선 곤란하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자원개발 업무를 민간에 맡기고 정부는 지금처럼 지원 역할에 그치는 게 낫다. 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신한은행 창립자인 고 이희건 신한은행 명예회장은 회고록 ‘여러분 덕택입니다’에서 은행 설립 당시 상황을 자세히 묘사했다. 1981년 말 이승윤 당시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장관과 만났을 때 일이다. “초대 은행장으로 어느 분을 선임하실지요?”(이 장관) “혹시 심중에 둔 적임자가 있는지요?”(이 명예회장) “김세창 증권거래소 전무님이 어떨지요?”(이 장관) 이 명예회장은 ‘그 순간 정부 차원에서 이미 김세창 전무로 낙점한 것으로 감지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재무부가 3명을 후보로 올렸더니 청와대가 김세창 씨를 골랐다고도 전했다. 실제 김세창 씨는 1982년 7월 7일 개점한 신한은행의 초대 은행장이 됐다. 회고록에는 2대 행장에 대한 일화도 나온다. 이 명예회장은 1985년 초 청와대를 방문해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차기 은행장으로 이용만 (중앙투자금융) 사장을 모시고 싶다”고 말했다. 전 대통령은 “그래요? 그렇게 하세요”라고 답했다. 이처럼 청와대의 의중을 확인하고서야 그해 2월에 2대 행장으로 재무부 출신 이용만 사장을 영입했다. 경북 경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이 명예회장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자전거 타이어 장사 등을 하며 돈을 모은 뒤 금융업에 진출했다. 그리고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는 340여 명의 재일교포들로부터 출자금을 모아 국내 최초 순수 민간자본 은행인 신한은행을 설립했다. 첫 시작은 겨우 점포 3개였다. 그는 은행장 인사에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것이다. 회고록에 ‘1980년대 초반엔 한국에서는 여전히 관치(官治) 분위기였기에 은행장은 대정부 과제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어야 했다’고 적었다. 정부 뜻에 맞춘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읽힌다. 요즘은 어떨까.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인사 여러 명에게 물었더니 “과거처럼 노골적으로 민간 금융사 인사에 개입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반대하는 인사가 안 되게끔 할 수는 있다”로 결론이 모아졌다. 최근 신한, 우리, NH농협, BNK금융지주 등 주요 민간 금융사들이 새 최고경영자(CEO) 선임에 나섰다. 각 금융사는 회장·행장추천위원회 같은 독립기구를 가동한다. 시스템상으로는 독립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 당국의 인사 개입성 발언이 나왔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10일 라임자산운용 사모펀드 환매 중단 사태와 관련해 중징계를 받은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에 대해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흘 뒤에는 이례적으로 은행지주 이사회 의장과 간담회를 하며 “전문성과 도덕성을 겸비한 유능한 경영진 선임”을 강조했다. 이 원장은 인사 개입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CEO 선임 등에 절대 구체적인 개입을 할 생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드물다. 한국 경제는 글로벌 경제위기로 인한 불확실성 속에 놓여 있다. 금융권이 상대적으로 실적이 좋다고 해도 CEO의 잘못된 판단 하나로 경쟁에서 낙오될 수도 있다. ‘CEO가 낙하산이냐 아니냐’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정부와의 원활한 소통으로 더 성과를 낼 수 있다면 낙하산 인사도 명장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민간 금융사가 전문성과 능력을 최우선시해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느냐, 아니냐’다. 관치 인사는 한국 금융산업 경쟁력을 1980년대 수준으로 되돌릴 것이다. 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2년간 중단됐던 한일 언론인들의 교류가 재개됐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와 일본신문협회는 15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한일 관계 미래지향적 재정립을 위한 양국 언론의 역할’을 주제로 제52회 한일 언론간부 세미나를 열었다. 한일 중견 언론인 30여 명이 참석했다. 양국 언론인들은 △미중 관계와 동아시아 안보 △기후변화와 글로벌 경제위기 △한국 사회에서의 젠더 문제 △한일 양국의 역사 인식 등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했다.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경기도 뜨거워지고 물가도 안정시키는 해법은 경제학에 없다. 물가도 안정시키고 경기 후퇴도 막아야 한다고 하면 스탠스가 꼬인다. 당분간은 물가 안정에 방점을 둬야 한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28일 한 말이다. 동의한다.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면 모든 국민이 불행해진다. 한국은행 전망대로 올해 물가가 5.2% 뛴다고 하면, 연봉 5000만 원을 받는 회사원은 260만 원을 날리게 된다. 물가 상승 폭이 너무 커지면 체제에 순응하던 서민들이 폭도로 변하기도 한다. 2008년 전 세계적으로 곡물 가격이 폭등했을 때 아이티에선 유혈 폭동으로 최소 8명이 숨졌다. 집권 1년 차인 윤석열 정부는 물가 안정에 초점을 맞췄다. 내년도 예산안(639조 원)을 올해 본예산보다 5.2% 늘어나도록 짰다. 문재인 정부 5년간 총지출이 연평균 8.7%씩 증가한 것과 비교하면 건전재정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한국은행도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을 포함해 최근 5차례 연속 금리를 올리며 보조를 맞췄다. 빚 있는 가계, 투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기업에서 비명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물가를 잡아야 한다’는 목표를 우선시했고, 그런 공감대도 형성돼 있는 것 같다. 다만 변수가 생겼다. 올해 들어 고물가·고금리·고환율(원화 가치 급락) 등 ‘3고’가 한국 경제를 위협했는데, 최근 자금시장에 돈줄이 마르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중소 증권사, 건설사의 도산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경제위기가 금융과 실물 분야로 파급되기 직전이란 느낌이 든다. 새 위기는 어처구니없게도 악재가 우연히 겹치면서 생겨났다. 우선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지난달 말 테마파크 레고랜드 기반 조성 사업을 했던 강원도 산하 공기업에 대해 법원에 회생 신청을 한다고 발표했다. ‘지자체의 신용보장도 믿을 수 없다’는 불안감이 시장에 확산됐다. 대형 건설사인 롯데건설이 18일 2000억 원의 유상증자를 결정하자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으로 인해 자금이 부족해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증권가 사설정보지(지라시)는 사실관계 확인 없이 다른 건설사 이름까지 넣어 부도설을 퍼뜨렸다. 올해 약 30조 원의 적자가 예상되는 한국전력공사는 연일 최고 신용등급(AAA)인 한전채를 고금리로 대규모 발행하며 시중 자금을 흡수하고 있다. 레고랜드 사태, 롯데건설의 유상증자, 한전채 발행은 모두 별개의 이슈이고 발생 시점도 다르다. 하지만 지난주 후반 한꺼번에 주목을 받으면서 폭탄이 터졌다. 과거의 빚은 부동산과 관련해 위험성이 본격적으로 불거졌고, 미래의 빚이 될 자금은 한전 등 일부 신용을 인정받는 기업에만 몰렸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 일시적 유동성 위기에 빠진 기업들이 ‘흑자 도산’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신속하게 유동성을 공급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정부와 한은이 일요일인 23일 ‘비상 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어 50조 원 이상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발표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새 정부 경제팀은 이제 더 어려운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하게 됐다. 과감하면서도 선제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해야 하지만 너무 과해선 안 된다. 그럼 물가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부실기업을 솎아내면서도 일시적 자금 부족을 겪는 우량 기업에 자금이 흘러가도록 정교하게 핀셋 지원해야 한다. 경제팀의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정말 외환위기가 다시 오는 거야?” 최근 지인들로부터 이 질문을 자주 받는다. 미국 블룸버그통신이 지난달 말 경제 전문가를 인용해 “엔화가 달러당 150엔을 돌파하면 1997년 같은 아시아 외환위기가 올 수 있다”고 보도한 다음부터 특히 그렇다. 시간을 과거로 돌려보자. 1997년 12월 3일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과 구제금융 협상을 맺었다. 구제금융을 받는 대신 한국 경제가 IMF 관리체제에 편입되면서 경제주권을 잃게 됐다. 한보, 기아, 대우, 한라그룹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거나 팔려나갔다. 또 간신히 살아남은 곳은 강력한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한동안 매일 1만 명의 실업자가 새로 생겨났고 자살자가 속출했다. 국민들의 자존감에 큰 생채기를 냈던 외환위기는 ‘외화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면서 일어났다. 1997년 말 외환보유액은 204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3.7%에 불과했다. 대외자산도 없었다. 오히려 대외부채가 더 많았기에 대외순자산은 645억 달러 적자였다. 국내 금융기관은 해외에서 외화를 빌려 왔는데, 외국 금융기관들이 외화 차입금 만기를 연장하지 않고 회수에 들어갔다. 한국이 달러를 얻기 위해선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고환율, 고물가, 무역적자 등 현상은 1997년과 비슷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외환을 포함한 대외건전성이 크게 다르다. 9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은 4167억7000만 달러로 GDP의 20%가 넘는다. 대외순자산은 7441억 달러에 이른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달 28일 한국의 대외건전성에 대해 “무역적자 및 외환보유액 감소 등에도 불구하고 대외순자산과 연간 경상수지 흑자 전망 등을 고려할 때 양호하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상황을 종합할 때 현 시점에서 제2의 외환위기를 맞을 가능성은 낮다. 그렇기에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가 재연될 가능성에 대해 “매우매우 낮다는 게 외부의 시각”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정해선 안 된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2009년 경제사령탑에 구원투수로 등판했던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은 입버릇처럼 “해외가 기침을 하면 한국은 홍역을 앓는다”고 말했다. 그만큼 한국 경제는 외부로부터의 경제 충격에 취약하다. 그랬기에 윤 전 장관은 만기 1년 미만의 단기외채 증감에 극도로 민감했다. 언제든 한국 시장을 떠날 수 있는 단기외채는 외환위기의 트리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월 말 기준 단기외채 비율은 41.9%로 10년 만에 가장 높다. 2017년 이후 주식과 채권 시장에 매년 외국인 자금이 유입됐지만, 올해는 1∼8월 동안 5조6000억 원이 빠져나갔다. 외환위기 때와는 달리 경상수지는 최근 꾸준히 흑자를 유지했다. 상품수지 악화에 해외 배당이 겹친 올해 4월만 제외하고 2020년 5월 이후 올해 7월까지 꾸준히 흑자였다. 하지만 월간 기준 사상 최대 무역적자를 냈던 8월에 경상수지 역시 적자로 돌아섰을 가능성이 높다. 경제는 심리다. 1997년과 달리 외환보유액이 아무리 넉넉하고, 대외순자산이 많아도 한국 경제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는 순간 해외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수 있다. 위기대응 시나리오에 외환위기 가능성까지 포함시켜 경제 정책을 짜야 할 때다. 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