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최근 두 달 간격으로 열린 두 고위 법조인의 인사청문회를 두고 ‘재테크를 잘하려면 인사청문회를 잘 봐야 한다’는 반응이 적잖이 나온다. 대법관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으로서 자질을 검증해야 하는 자리에서 그들의 남다른 재테크 수완이 돋보였다는 웃지 못할 관전평이다. 대학생 딸에게 비상장 주식으로 60배 넘는 수익을 안겨준 뒤 서울 용산구 재개발 지역의 주택까지 갖게 해준 이숙연 대법관 후보자 부부나, 기묘한 증여와 절세를 통해 딸에게 성남의 노른자 땅을 선사한 오동운 공수처장 사례를 보며 ‘부모 찬스’는 자녀가 어릴 때 일찌감치 누리게 해줘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반응들 속에는 부러움과 함께 사회 지도층에 대한 냉소와 체념이 배어 있다. 어차피 각자도생하는 세상, 법의 빈틈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엘리트 법조인들의 재테크 노하우나 배워보자는 것이니 말이다.지도층 향한 냉소와 체념 팽배 요즘 이렇게 인사청문회가 희화화되는 바람에 우리가 놓치곤 하는 게 하나 있다. 고위공직자는 대부분 공문서의 맨 아래 줄에 이름이 나오는 공적 결정의 책임자라는 점이다. 더는 법적으로 다퉈볼 수 없는 3심 확정 판결문의 끝에는 주심 대법관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해 관계자들이 첨예하게 맞붙는 사안을 두고 정부가 정책적 처분을 내릴 때도 통지문을 끝맺는 건 장관의 이름이다. 그래서 고위공직자는 사건 당사자를 납득시킬 수 있는 권위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 사회적 논란이 큰 공적인 사건을 다룰 땐 더욱 폭넓은 신뢰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이 후보자와 오 처장은 그만한 신뢰를 받을 만한 공직자일까. 이 후보자는 170억 원, 오 처장은 33억 원의 재산을 신고했는데 부유함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들의 재산 증식 과정이 국민들의 상식에 부합하는지가 중요하다. 이 후보자의 딸과 아들은 8세, 6세일 때 아버지 돈으로 비상장 주식을 300만 원씩 샀다가 지난해 13배 높은 4000만 원에 팔았다. 딸은 19세이던 2017년에도 대부분 아버지 돈인 1200만 원으로 또 다른 비상장 주식을 사서 5년 만에 63배의 차익을 실현하고 거기에 증여받은 수억 원을 보태 재개발 지역 갭 투자를 했다. 세법 전문 변호사였던 오 처장은 2020년 부인 소유의 재개발 예정지 땅을 20세 딸에게 증여하면서 희한한 거래를 했다. 당시 시세대로 6억 원에 그 땅을 바로 증여하면 될 것을 딸에게 3억5000만 원을 먼저 증여하고, 그 돈으로 시세보다 싼 4억2000만 원에 어머니의 땅을 사도록 했다. 증여세를 줄이기 위한 편법 증여였다.공직자 불신 커지면 국민이 손해 두 사람은 인사청문회에서 “국민 눈높이에 부합하지 못해 송구하다”고 했지만 이어서 나온 발언은 국민 눈높이를 제대로 알고 한 사과인지 의심케 했다. “요즘은 아이 백일 때 금반지 대신 주식을 사주지 않느냐”는 이 후보자의 말은 기껏해야 삼성전자 주식 몇 주 사주는 게 전부인 국민들에겐 황당한 얘기였다. “딸에게 아파트 하나는 마련해줘야 한다는 소박한 생각이었다”는 오 처장의 해명 역시 그가 생각하는 소박함의 기준이 국민들 생각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줬다. 사회의 룰을 다루는 고위공직자가 지나치게 사익을 추구하고 이를 상식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저울로 정당화한다면 자칫 그들이 주도한 수사와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 그런 사법체계에서는 사회 전반의 준법의식이 얕아지고 정직한 경쟁도 설 자리가 줄어든다. 심판을 믿을 수 없는 경기장에선 선수들이 판정에 신경 쓰느라 실력 발휘를 못 하듯 공직자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면 그로 인한 손해는 국민의 몫이 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한때 400만 명이 넘었던 부산의 인구는 현재 329만 명이다. 서울에 이어 ‘2대 도시’ 타이틀을 유지하곤 있지만 얼마 전 인천도 300만 명을 돌파했다. 최근엔 반갑지 않은 소식이 하나 더 늘었다. 부산이 전국 7개 특별·광역시 중 처음으로 ‘소멸위험’ 단계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소멸위험 지역이란 개념은 일본의 사회학자가 만든 것으로 우리 통계청도 2016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부정적 뉘앙스 탓에 소멸이란 단어가 적절하냐는 논란도 있지만 인구 감소의 심각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지역의 소멸위험을 판단하는 핵심 지표는 출산 적령기(20∼39세) 여성이 얼마나 살고 있느냐이다. 이 인구를 노인(65세 이상) 인구수로 나눈 값이 소멸위험지수다. 2030 여성 인구가 노인 인구의 절반이 안 되면, 즉 0.5 이하이면 소멸위험에 진입한 것으로 분류된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부산의 소멸위험지수는 0.49다. 서울(0.81) 경기(0.781) 인천(0.735)에 비해 크게 낮다. ▷부산 같은 대도시라도 일자리나 아이 키울 환경 등 청년들이 뿌리내릴 여건이 취약해지면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이번 보고서가 던지는 경고다. 보고서에는 또 하나 눈에 띄는 게 있는데 부산 해운대구마저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해운대에는 대형 쇼핑몰과 문화시설, 초고층 빌딩이 많아 젊은층이 선호할 것 같지만 임차료와 주거비가 비싸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일자리 부족도 문제지만 지역 내 양극화가 심하면 청년들이 발붙이기 힘들다. ▷이런 대도시는 부산만이 아니다. 서울을 제외한 전국 광역시 45개 구·군 중 소멸위험 지역은 거의 절반에 달한다. 대구 대전 울산 등 여러 광역시 일부 지역에서도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지방을 떠난 청년들은 대부분 수도권으로 몰려들고, 그 결과 수도권에선 한정된 일자리와 주거공간을 두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지방의 쇠락을 막지 못하면 저출산 해결도 어려워진다. 지방에선 청년들 자체가 적어서, 수도권에선 전국에서 모여든 청년들이 먹고살기 바빠서 결혼·출산이 쉽지 않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초저출산 및 초고령사회’ 보고서를 보면 출산율을 올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정책이 수도권 집중 완화다. 우리의 도시 인구 집중도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수준(우리의 22%)으로 낮추는 게 저출산 관련 정부 지출이나 육아휴직 사용률을 OECD 평균으로 끌어올리는 것보다 각각 8배, 4배 높은 효과를 내는 것으로 분석됐다. 부산 같은 대도시가 활력을 찾지 못하면 다른 저출산 대책에 아무리 많이 투자해 봐야 소용이 없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최근 기소된 트로트 가수 김호중 씨가 음주운전 혐의를 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사고 후 편의점에서 샀던 캔맥주 4캔이 큰 역할을 했다. 김 씨는 지난달 9일 밤 서울 강남에서 택시를 들이받고 경기도의 한 호텔로 도주한 뒤 그 앞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샀다. 보통의 음주 뺑소니범들은 알 만한 곳으로 도주해 몇 시간이면 잡히는데 김 씨는 추적이 어려운 외딴 호텔에 숨어 있다 17시간 뒤에야 경찰서에 나타났다. 이렇게 시간을 지연시켜 놓고, 맥주까지 사 마셨으니 경찰이 아무리 정교하게 추정한다고 한들 김 씨의 운전 당시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3% 이상이었다는 걸 입증하긴 어렵다. ▷음주 사고 후 일부러 술을 더 마셔 사고 당시 알코올 농도를 특정할 수 없게 만드는 ‘술타기’는 음주운전자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다. 음주운전을 하다가 앞에서 경찰이 단속 중이면 황급히 편의점으로 가 소주를 들이켜거나, 집에서 술을 마시며 경찰이 오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수사기관이 제때 음주 측정을 못 한 경우 사후에 혈중 알코올 농도를 역산하는 ‘위드 마크 공식’이 있긴 하지만 사고 후 2차 음주는 이마저 무력화시킨다. ▷대법원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런 꼼수를 단죄하지 못하는 무력감을 토로한 적이 있다. 2020년 음주 상태로 승용차를 들이받은 화물차 운전사가 경찰에 잡히기 전 소주 1병을 더 마시는 바람에 혈중 알코올 농도가 0.169%에 달했음에도 무죄 판결을 한 사건에서다. 대법원은 “음주운전자가 처벌을 회피하게 되는 결과를 용인하는 것은 정의 관념에 맞지 않지만 이를 처벌할 입법적 조치가 없는 현재로선 불가피한 결론”이라고 했다. ▷김 씨는 일단 도주 후 술타기 전략으로 음주운전 혐의를 피하는 데는 성공했다. 검찰은 형량이 더 무거운 혐의로 그를 재판에 넘겼다. 음주 영향으로 사고를 내 사람을 다치게 한 위험운전치상 혐의다. 혈중 알코올 농도는 없어도 되지만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였다는 걸 입증하는 게 관건이다. 판결이 어떻게 나오든 김 씨가 그토록 피하려 했던 음주운전자 꼬리표보다 ‘역대급 사법 방해자’라는 오명이 연예인에겐 더 치명적일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김 씨 사건이 남긴 ‘순기능’이 하나 있다면 음주운전 처벌에 있어 입법의 공백을 여실히 확인시켜준 점이다.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는 행태를 막지 못하면 형량을 아무리 높여도 소용이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검찰이 음주운전 처벌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술을 더 마시면 음주측정 거부죄와 동일하게 처벌하는 ‘김호중 방지법’을 추진하고 있고, 국회에서도 유사한 법안이 속속 발의되고 있다. 진작 나왔어야 할 법인데 이제라도 촘촘히 만들어 음주운전자들이 꼼수 부릴 틈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9일 정은혜 씨(34)와 만나 악수를 하는데 손가락 마디마디에 굳은살이 느껴졌다. 지난 8년간 5000명이 넘는 사람의 얼굴을 그린 손이었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은혜 씨는 화가이자 배우다. 2022년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배우 한지민의 쌍둥이 언니(영희)를 연기했다. 캐리커처 작가인 그는 이후에도 국내외에서 전시를 열며 왕성히 활동해 왔다. 최근에는 발달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줄이는 데 기여한 공로로 포니정재단이 젊은 혁신가에게 주는 ‘포니정 영리더상’을 수상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 프로바둑기사 신진서 9단 등이 받은 상이다.》● “얼굴 그리는 게 좋아요. 사람들은 다 다르니까”경기도 양평에 있는 은혜 씨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그는 뜨개질을 하며 휴식 중이었다. 파란색 실로 목도리를 짜고 있었다. “우빈 오빠 주려고요.” 은혜 씨는 함께 드라마 촬영을 했던 김우빈 배우와 가끔 카톡을 주고받는 사이라고 했다. 뜨개질은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은혜 씨에게 외로움을 달래준 오랜 친구다. 요즘도 틈틈이 뜨개질을 해 지인들에게 선물한다.은혜 씨가 사람들을 만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건 20대 중반이던 2016년부터다. 주말에 북한강변에서 열리던 야외 벼룩장터 ‘문호리 리버마켓’에 노점을 두고 손님들을 맞았다. 그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 손님을 계속 앉아 있게 하진 못하고 사진을 찍어서 보고 그렸다. 여름에는 뙤약볕을, 겨울에는 칼바람을 맞으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종일 그렸다. 손등은 부르트고 손가락엔 굳은살이 박였다. 그렇게 5000여 명의 얼굴을 그려 왔지만 은혜 씨는 요즘도 손님을 만나는 게 설렌다고 한다. “저는 얼굴을 그리는 게 좋아요. 사람들은 다 다르잖아요.”노점에 찾아온 손님과 은혜 씨의 대화는 보통 이렇게 시작한다.“여기서 그림 그려주시나 봐요?”“네. 니 얼굴.”“저 예쁘게 그려주세요.”“아유 뭘… 지금도 예쁘면서.”‘니 얼굴’은 은혜 씨와 가족들이 운영하는 노점 이름이다. 반말처럼 들리는 이 세 글자가 손님들을 순식간에 무장 해제시킨다.● 사람들 시선 피해 자기만의 동굴로은혜 씨가 캐리커처 작가로 변신한 지금을 그의 부모는 10여 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외모 때문에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던 은혜 씨는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오랫동안 고통받았다. 상처가 깊어져 자신을 무심코 보는 시선마저 공격적이라고 느껴 과민 반응하는 ‘시선 강박’도 생겼다. 어머니 장차현실 씨는 자신만의 동굴에 고립되어 가는 은혜 씨를 지켜만 봐야 했다.“당시 딸의 휴대전화 통화료 고지서가 왔는데 기본요금 외에 추가요금이 0원이었어요. 뭔가 잘못된 줄 알고 통신사에 전화했더니 사용량이 ‘0’이라는 거예요. 단 한 통도 전화가 올 데도, 전화를 걸 데도 없었던 거죠. 스물두 살 아가씨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어서 눈물이 났어요.”사춘기의 은혜 씨는 방에 틀어박혀 낙서를 하거나 뜨개질로 시간을 보냈다. 외출하고 온 날에는 상상 속의 친구들을 한 명씩 불러내 소리를 지르며 밖에서 겪은 불쾌함에 대해 화풀이를 했다. 은혜 씨는 그때의 마음을 이런 시로 남겼다.‘난 외롭다. 두렵다/나 같은 장애로 왜 태어났을까/괜히 낳아 보네. 괜히 나왔다/나는 외톨이야. 놀 친구가 없다/내 인생이 너무나 힘들다/내가 죽으면 참 좋았을 걸 안다/그래도 쉬고 싶다/울 때는 울어야 한다/기쁠 때는 기뻐야 한다’(나는 왜 그랬을까 中)● 그림을 그리며 세상과 눈을 맞추다“2013년 2월 27일. 제가 처음 그림 그린 날.”은혜 씨는 11년 전 그날을 날짜까지 기억했다. 현실 씨가 딸의 소질을 알아본 날이기도 했다. 미대 출신 만화가인 현실 씨는 당시 생계를 위해 화실을 열었고, 집에만 있던 은혜 씨도 화실로 나오게 해 청소를 시켰다. 하루는 학생들 틈에서 그림을 따라 그리는 은혜 씨를 보고 잡지 속 여자 향수 모델을 그려보게 했다.“은혜 씨가 그린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얘한테 이렇게 좋은 게 있었다니…. 장애인 딸로만 봤지, 뭔가를 하려는 욕구가 있고, 잘하는 게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했어요. 저조차도 은혜 씨에게 내재된 힘을 보지 못했던 거죠.”(현실 씨는 딸을 ‘은혜 씨’라고 부른다. 관공서 등에서 성인인 은혜 씨를 자립 능력이 없는 아이처럼 대하는 걸 보고 자신부터 호칭을 바꿨다고 한다.)그날 이후 현실 씨는 화실 구석에 딸을 위한 책상을 마련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늘 목말라했던 은혜 씨에게 “네가 해결하지 못한 사람을 그려보라”고 했다. 은혜 씨는 가족이나 연예인들의 얼굴을 하나씩 그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연필을 들면 저녁까지 놓지 않았다. 그림에 몰입하면서 가상 친구들을 소환해 대화처럼 들리는 혼잣말을 하는 일도 줄어들었다.“제가 종일 외출했다가 저녁에 화실로 돌아온 날이었어요. 은혜 씨가 불도 안 켜고 창가로 들어오는 붉은 노을빛에 의지해 둥근 어깨를 구부리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뭔가가 북받쳐 오르더군요.”(현실)은혜 씨는 그림을 시작한 지 3년쯤 된 2016년 가족들과 집 근처에서 열리던 문호리 리버마켓에 구경을 갔다. 사람이 많으면 움츠러들곤 했던 은혜 씨가 “여기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 했다. 타인의 눈빛이 늘 두려웠던 그였지만 그림을 그려 달라며 마주 앉는 손님들의 눈은 자신 있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난히 무더웠던 그해 8월 은혜 씨는 ‘니 얼굴’ 노점을 차렸다. 코로나19 기간을 빼고 5년 가까이 거의 매주 노점을 열었다. 아침잠이 많은 은혜 씨는 주말 아침만큼은 맨 먼저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덥거나 추워서 나가기 싫었던 적 없어요?”(기자)“전혀요. 그림을 그려야 하니까. 그림을 그리면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주니까.”(은혜)● 틀리게 그려도 세상에 하나뿐인 그림보통 캐리커처는 인물의 장점을 부각하거나 귀엽게 그리는 경우가 많지만 은혜 씨의 그림에는 그런 고려가 담겨 있지 않다. 연예인이건 정치인이건 일반인이건 특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은혜 씨는 “저는 보이는 대로 그려요. 그냥 그게 다예요”라고 했다.“한번은 군수님이 오셨어요. 좀 멋지게 그려 드리면 좋겠는데 은혜 씨가 그분 이빨이 다 쏟아지게 그려놨더라고요.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나 이리저리 재는 게 없는 것 같아요.”(현실)은혜 씨의 그림은 구도나 명암 같은 미술 공식과도 거리가 멀다. 현실 씨가 가끔 훈수를 둬도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참다못한 현실 씨가 스케치를 쓱쓱 지우고 고치기라도 하면 은혜 씨는 씩씩거리며 엄마를 째려본다.“엄마가 조언을 하거나 고쳐주면 싫어요?”(기자)“갱년기라 그런가 보다 해요. (웃음) 늙어서 그래, 늙어서.”(은혜)현실 씨도 이제는 딸의 방식을 존중하기로 했다. “저처럼 정통 미술을 배운 사람은 틀리지 않는 그림을 그려요. 은혜 씨는 자기 멋대로, ‘틀리면 어때’ 하는 마음으로 그리거든요. 근데 결과물을 보면 완성도가 저보다 높아요. 제가 전문가라면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린다면, 은혜 씨는 자신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거죠.”● 그림을 통해 갖게 된 ‘마주 볼 용기’‘열다섯 살인 나는 성형수술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고 싶다/마음도 감정도 달라지면 좋겠다. 성격도 날씬해지면 좋겠다.’(되돌아졌으면 좋겠다 中)은혜 씨가 어릴 적 쓴 시 중에는 외모로 인한 열등감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을 표현한 글이 많다. 늘 내 안의 끼를 표현하고 싶고,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거울을 보고 나면 세상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림은 그에게 성형수술 없이도 사람들과 마주 볼 용기를 줬다.“은혜 씨를 따뜻하게 보는 눈빛들이 은혜 씨를 살린 것 같아요. 다들 그렇게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잖아요. 제 눈에 딸은 달라진 게 별로 없는데 딸을 바라보는 세상이 달라진 거 같아요.”(현실)은혜 씨는 ‘우리들의 블루스’ 출연 이후 인지도가 높아졌지만 곧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포옹전’ ‘정은혜와 친구들’ ‘반려견 지로의 초상화’ 등 전시를 이어오며 요즘도 하루 10시간 정도 캔버스 앞에 앉는다. 강연 요청도 많다고 한다.“요즘 은혜 씨 알아보는 분들 많아요?(기자)“아유, 골치 아파요. 그놈의 인기.”(은혜)“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요?”(기자)“글쎄요. 이미 다 이뤄졌는데.”(은혜)은혜 씨는 4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내내 짤막하게 답했다. 질문을 받으면 찬찬히 생각하다 옆에 앉은 현실 씨가 끼어들려고 할 때쯤 예상치 못한 한마디를 툭 내놨다. 이 질문은 답을 듣기까지 특히 더 오래 걸렸다.“은혜 씨에게 그림이란 어떤 거예요?”(기자)“음…. 만약에 안 그린다고 생각하면 숨이 안 쉬어지는 거.”(은혜)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벌인 일본은 태평양의 섬들을 군사기지로 만들어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활용했다. 일본 해군이 막강할 땐 통하는 전략이었지만 1943년 이후 전세가 기울면서 이 섬들은 일본군의 무덤이 됐다. 미국은 전력이 약한 섬을 골라 띄엄띄엄 점령하고 나머지 섬들은 해상만 봉쇄하는 ‘개구리 뛰기’ 작전을 폈다. 그렇게 식량과 무기 보급을 차단하면 고립무원에 갇힌 일본군은 굶주림의 지옥으로 내몰렸다. ▷남태평양 마셜제도에 있는 산호초 섬 밀리환초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섬에는 일본군 3600여 명 외에 군사시설 건설 목적으로 전남 지역에서 강제 징용된 조선인 1000여 명이 있었다. 미군 함정이 이 섬을 포위하면서 보급선의 접근이 어려워지자 일본군은 섬 안의 군인들에게 각자도생하라고 지시했다. 해안가엔 미군이 있어 물고기를 잡긴 어려웠고, 벌레나 쥐를 잡아 겨우 연명했다. ▷조선인들 중에는 노역에 끌려 나갔다가 실종되는 이들이 늘어갔다. 일본군이 조선인을 살해해 인육을 먹는다는 공포가 확산됐다. 일본군이 고래고기라며 고깃덩어리를 던져준 날, 몇몇 조선인들은 사라진 동료를 찾아 나섰다가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했다. 허벅지 살이 도려진 채 뼈만 남은 조선인의 시체가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굶어 죽거나, 잡아먹히게 될 운명 앞에서 조선인들은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일본군 감시병을 제압한 뒤 미군에 투항하자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945년 3월 감시병 11명 중 7명을 제거하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살아 도주한 병사가 군 병력을 데리고 왔다. 조선인 55명이 학살됐고, 나머지는 야자나무 위 등으로 숨어 목숨을 건졌다. ▷밀리환초 조선인 학살 사건이 알려지기까지 30년 넘게 일제 강제동원을 연구해온 일본인 사학자가 큰 몫을 했다. 역사교사 출신인 다케우치 야스토 씨는 밀리환초 생존자 이인신 씨를 인터뷰한 동아일보 기사(1990년 11월 3일자)를 보고 이 사건 연구를 결심했다고 한다. 기사에는 “나무 열매를 먹으며 버티다 미군 함정으로 헤엄쳐 갔다. 함께 탈출을 기도했던 조선인 150여 명이 죽었다” 등의 상세한 증언이 담겨 있다. 다케우치 씨는 일본 정부가 한국에 제공한 징용사망자 명부를 수작업으로 분석해 밀리환초에서 사망한 조선인을 한 명 한 명 찾아냈다. 그는 1942∼1945년 학살과 기아, 강제노동으로 희생된 218명의 명단을 최근 광주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했다. ▷당시 미군에 구조된 조선인들 사진을 보면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채 온몸이 까맣게 타 있고 뼈만 앙상한 모습이다. 밀리환초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의 민낯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국가는 섬에 고립된 아군을 버렸고, 버림받은 군인들이 타국에서 끌려온 노동자들을 학살하도록 방치한 나라가 ‘제국주의’ 일본이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미국 연방하원에 진출한 한국계 의원 4명 중 하나인 앤디 김의 아버지는 고아원 출신에 소아마비로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 서울역 등지에서 한때 동냥을 했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국비 장학생 기회를 잡아 1970년대 미국에 갈 수 있었다. 다행히 매사추세츠공대(MIT)와 하버드대를 나와 유전공학 박사로 자수성가했다. 김 의원의 어머니는 공립병원 간호사로 일했다. 그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워싱턴 국회의사당을 구경시키며 “네게 모든 것을 선사한 나라(미국)를 사랑하고 가슴에 새기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42세의 김 의원은 오바마 행정부 때 국무부를 거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으로 재직했다. 그가 2018년 백인 밀집지인 뉴저지 3선거구에서 연방하원 의원에 당선됐을 때 ‘아메리칸 드림의 기적’이란 평가가 나왔다. 이제 3선인 그는 최근 민주당의 뉴저지주 연방 상원의원 후보로 선출됐다. 뉴저지는 민주당이 지난 50년간 내리 상원의원을 배출한 텃밭이다.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11월 선거에서도 김 의원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첫 한국계 미 연방 상원의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민주당 상원의원 50명 하나하나가 다 대통령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야심작인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추진 초기에 조 맨친 상원의원의 반대에 부딪히자 답답함을 이렇게 토로했다. 상원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거의 반반이어서 여당에서 한 명이라도 이탈하면 정부가 정책 추진에 애를 먹는다. 그만큼 한 표의 영향력이 막대하다. 주별로 2명인 상원의원 100명은 권위와 희소성이 있어 주지사들과 함께 대권주자로 여겨진다. ▷소수인종인 데다 조직력과 자금력이 약한 김 의원은 당내 상원의원 경선에서 승산이 낮았다. 뉴저지주는 당 지도부의 입김이 강하고, 많은 정치인이 뇌물 수수로 물러날 정도로 금권선거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곳이다. 현직 상원의원도 지난해 뇌물 혐의로 기소됐다. 그 틈에 경선에 나선 김 의원은 당내 기득권 개혁을 승부수로 던졌다. 통상 도전자는 출마 전 지도부에 지지를 구하는데 이를 건너뛰고 출마 선언을 해 주도권을 잡았다. 지도부가 자신들이 미는 후보를 투표용지 맨 위로 올리고 다른 후보는 구석에 배치해온 관행에도 제동을 걸었다. ▷이민 1세대인 부모가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끌어내야 했던 강인함을 김 의원 역시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복한 교육을 받고 미 주류사회로 진입하긴 했지만 당국자들이 한반도 안보나 무역정책을 결정할 때 한국의 목소리를 별로 고려하지 않는 걸 보며 정치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가 상원의원이 된다면 한국은 든든한 대변자를 얻게 되고, 미국에도 ‘기회의 땅’이란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요즘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보유세를 물리자는 얘기가 나온다. 반려동물 증가로 개 물림 사고나 동물 유기 등이 늘고 있는데 여기에 예산을 할애하기 어려울 정도로 곳간 사정이 급하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무자녀세 도입을 검토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지자체들이 저출산 지원책을 내놓긴 했지만 실탄은 없다 보니 이런 고육책까지 거론되는 듯하다. 친환경 차량 세제 혜택을 줄이고 전기차 주행세를 도입하자는 목소리 역시 커지고 있다. 지자체들이 줄어드는 세수를 어떻게든 만회해보려는 몸부림이다. ▷지난해 중앙정부의 역대급 세수 결손으로 지자체 곳간은 직격탄을 맞았다. 소요 예산보다 56조 원이나 덜 걷히다 보니 지방으로 가는 교부세·교부금이 23조 원가량 줄었다. 부동산 경기침체와 공시지가 하락으로 지자체 수입원인 취득세와 재산세 수입도 줄어들었다. 기업들 실적마저 부진해 이들이 내는 법인지방소득세도 감소했다. 쪼그라든 재정으로 살림을 꾸리자니 예산이 줄줄이 깎여나간다. 인천에선 도로에 금이 가고 아스팔트가 깨져도 보수공사를 못 하고 있고, 학생들 무상급식이 중단될 위기에 놓인 지자체도 있다. ▷지방경제 활성화를 위한 예산이 깎이는 게 특히 문제다. 기업 투자유치 보조금, 전문인력 인건비 지원, 대학생 인턴 지원, 골목상권 부활 사업 등이 축소되고 있다. 일자리가 생기고 돈이 돌아야 세수가 발생하는데 경제 활력을 키우는 사업이 위축되면 오히려 악순환에 빠져 재정 가뭄이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지방채를 발행해 돈을 끌어오려는 지자체도 많지만 잘 팔리지도 않을뿐더러 5%에 달하는 고금리가 큰 부담이다.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재정자립도가 가장 낮은 강원도는 안 쓰는 도로를 민간에 팔기로 했다. 행정 목적으로는 용도가 마땅치 않지만 민간의 수요가 있을 만한 도로를 골라내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강원도는 도내 미활용 도로를 매각하면 향후 10년간 1200억 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지자체가 이런 식으로 공공자산을 내다 팔면 당장은 보탬이 되겠지만 장기적으론 세수 기반을 잃게 될 수 있다. ▷감세 기조로 인해 중앙정부부터 세수 확보에 애를 먹는 마당에 지자체 교부세가 늘어나길 기대하기는 당분간 어려운 상황이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지방정부들 사정이 녹록지 않지만 광역단위로 재산세를 걷은 뒤 고르게 배분해 지자체 간 격차를 줄이는 대안을 고려해볼 만하다. 서울은 시가 각 자치구 재산세의 50%를 걷어 25개 구에 나누는 재산세 공동과세를 시행 중인데 이를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광역지자체가 쇠락한다면 단기 처방에 그칠 수 있어 지방 세수의 파이를 키워야 하는 숙제는 여전히 남는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이원석 검찰총장은 제주지검장이던 2022년 4월 주요 일간지에 6차례 연달아 기고를 한 적이 있다. 현직 검사장이 신문 오피니언면에 직접, 그것도 여러 매체에 등장한 건 이례적이었다. 그의 칼럼은 당시 여당이 한창 밀어붙이던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검수완박)’ 입법에 반대하는 글이었는데 두 가지가 눈에 띄었다. 우선 검경을 수직적 관계로 보던 기존 인식을 벗어던졌다. 자신이 수사하거나 지휘했던 사건들을 생생히 소개하며 두 기관이 힘을 합치고 서로 검증해야만 범인을 단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는 검찰 과오에 대한 반성이었다. 정치적 사건에 공정성이 부족했다는 지적, 살아있는 권력에 굴종했다는 지적을 뼈아프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검찰이 일을 못한다고 무력화시킬 게 아니라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더 엄히 꾸짖어 달라고 했다.검사장 때 ‘검수완박 반대’ 6건 기고 연쇄 언론 기고 한 달쯤 뒤 이 총장은 대검 차장에 올랐고, 몇 달 후 윤석열 정부의 첫 검찰총장이 됐다. 이젠 어느덧 2년 임기 중 4개월을 남겨두고 있다. 그가 칼럼에 썼던 대로 살아있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어떤 사건이든 공정하게 실체를 규명하는 데 수사권을 쓰겠다는 다짐을 얼마나 실현했는지 물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사건은 검찰 수장의 내공을 시험대에 올린 사건이다. 수사 대상이 현직 대통령의 부인이고, 정치적 논란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원칙대로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없지만 검찰 수사는 김 여사에 대한 검찰 고발이 이뤄진 지 5개월이 지나도록 잠잠했다. 이 총장의 신속·집중 수사 지시는 총선이 야당의 압승으로 끝난 뒤에야 나와 ‘특검 대비용’이란 비판을 자초했다. 그 후 10일 만에 이 총장의 뜻과 다르게 단행된 인사로 수사팀 지휘부가 물갈이되면서 제대로 수사가 될지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총장 패싱’ 인사가 있었다고 해도 검찰의 최종 책임자가 이 총장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김 여사 수사를 견제하는 용산과 이를 ‘김 여사 특검’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야권의 이중 압박을 풀어내는 게 그의 과제다. 그러자면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으로부터 검찰의 중립을 지켜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명품백’ 엄정 수사로 그때 다짐 지켜야 윤 대통령과 이 총장은 한때 검찰 수사권 수호를 위해 한배에 탔었다. 윤 대통령이 총장에 취임할 때 그를 검사장으로 승진시키며 대검 기획조정부장으로 발탁했다. ‘검수완박’을 저지하기 위한 검찰 대응을 총괄하는 핵심 참모였다. 이 총장이 검찰 대표로 언론에 기고했던 이유 중 하나도 이런 이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 총장은 인사권으로 검찰을 흔드는 대통령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야권이 벼르고 있는 ‘검수완박 시즌2’에 맞서고자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검찰 수사권의 존재 이유를 입증해야만 한다. 그는 최근 검찰 내부망에 글을 올려 “형사사법 체계가 정쟁의 트로피로 전락해선 안 된다”고 정치권을 비판했는데,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검찰의 엄정한 수사야말로 형사사법 체계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이 총장이 2년 전 기고했던 자신의 칼럼들에서 답을 찾았으면 한다. 물증까지 나와 있는 명품백 사건조차 제대로 파헤치지 못하는 검찰이라면 그가 6번이나 칼럼을 쓰면서까지 그토록 지키려 했던 검찰이 과연 맞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임기가 4개월밖에 안 남았고, 곧 있을 후속 인사에서 수사팀마저 교체될 수도 있지만 이 총장은 흔들림 없이 수사 지휘에 매진해야 한다. ‘총장 패싱’ 인사 다음 날 이 총장은 기자들에게 “인사는 인사고, 수사는 수사”라고 말했는데 적어도 수사만큼은 책임지고 완수하는 게 그가 2년 전 칼럼에서 했던 다짐을 지키는 길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부장검사도 사기를 당한다. 얼마 전 퇴임한 검찰 간부는 10여 년 전 서울의 한 검찰청 부장검사일 때 지인에게 속아 690만 원을 떼였다. 사기꾼들을 숱하게 감옥에 보냈던 그마저 사기를 피하지 못했다. 작정하고 덤벼드는 사기범 앞에선 학력이나 사회 경험도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심하고 경계해도 한순간에 당할 수 있는 게 사기 범죄다. ▷전세사기 대책을 총괄하는 국토교통부 박상우 장관이 최근 기자들과 차담회를 했다. 보증금 8400만 원을 날린 대구의 30대 여성이 극단적 선택을 해 8번째 ‘전세사기 사망자’가 나온 지 10여 일쯤 되던 날이었다. 박 장관은 피해자 지원 관련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 전에는 전세를 얻는 젊은 분들이 덜렁덜렁 계약을 했던 부분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이제는 꼼꼼하게 따지는 인식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이날 간담회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국토부가 원래 피해자 주거지원대책을 발표하려다 돌연 취소하고 차담회로 대체한 것이어서 장관이 실효성 있는 방안을 내놓을지 기대하던 참이었다. 박 장관은 이날 50분간 많은 얘기를 했지만 ‘덜렁덜렁 계약했다’는 한마디가 피해자들 가슴에 비수로 박혔다.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는 인식이 엿보이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논란이 일자 국토부는 “이전 전세계약 과정에 허점이 상당했다는 취지”라고 해명했지만 피해자들 마음을 돌리진 못했다. ▷요즘 전세사기는 세입자가 대비한다고 피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집주인과 부동산 중개업자가 처음부터 짜고 치밀한 각본에 따라 세입자를 속이는 경우가 많다. 계약을 하고 보니 가짜 주인이거나, 동일 매물 다중 계약, 계약 직후 임대인 변경 등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다. 이러니 누구보다 악착같이 미래를 준비해 온 젊은이들도 속절없이 당했다. 한 간호사는 휴일 없이 맞교대 근무를 하며 7년간 모은 결혼자금 수천만 원을 잃었고, 조종사를 꿈꾸며 월급을 모아 온 30대 청년은 훈련비로 쓸 5800만 원을 전세보증금으로 날린 뒤 빚을 갚기 위해 비행기 대신 원양어선을 타고 있다고 한다. ▷전세사기는 개인의 부주의가 아닌 제도의 실패가 낳은 지능 범죄다. 주무 장관이라면 누구보다 철저히 이런 관점에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박 장관은 그날 간담회 모두발언에서 “피해자들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고 했지만 이후 질의응답에서 나온 ‘덜렁덜렁’ 발언은 경솔했다. 올 1월 부산지법의 한 부장판사가 전세사기 사건 주범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한 뒤 방청석의 피해자들에게 건넸던 말이 떠오른다. “절대로 여러분을 자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뭔가 부족해서 피해를 당한 게 아니란 점을 반드시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여기 제 이름 보이시죠? 병원 와서 그동안 많이 참으신 거 알아요. 저한테는 눈치 보거나 참지 말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랑 얘기하다 신경질 나거나 피곤하면 손만 들어주시고요.” 사회복지사 고주미 씨는 서울대병원 완화의료·임상윤리센터에서 일하며 말기 암 환자들과 만날 때면 이런 인사를 건넨다.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호스피스 등록 환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이를 편지로 정리해 가족들에게 전하는 게 주미 씨의 일이다. ‘내 마음의 인터뷰’라는 프로그램을 2013년부터 시작해 11년간 257명의 말기 환자를 만났다. “저는 ‘환자분’이란 호칭 대신 ‘○○님’이라고 이름을 불러요. 환자라는 정체성 말고, 당신이 어떤 사람이고, 지금 마음이 어떤지를 물어요. 의사, 간호사들은 그분들에게 더 이상 해줄 얘기가 별로 없고, 가족들도 많이 지쳤거나 속내를 털어놓기 힘든 경우가 많거든요.” 주미 씨가 편지를 함께 써 보자고 하면 환자들 반응이 제각각이다. “저 이제 죽어요?” “이거 유서 쓰는 건가요?” “편지라곤 각서밖에 안 써봐서…” 등등. 하지만 편지를 쓰고 나면 “누구도 나한테 이런 걸 물어오지 않았다” “정리하느라 손이 얼마나 아팠어”라며 고마워하는 이들이 많다.》● 임종을 앞두고서야 깨닫는 것들주미 씨는 후두암 말기여서 말을 할 수 없는 40대 아버지를 만난 날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목과 상체 곳곳에 호스가 달려 있던 그는 주미 씨를 보고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그의 아들은 병실 밖을 서성였다. 평소 엄했던 아버지를 어려워한다고 했다.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물음에 아버지는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쓸 수는 있다는 뜻인 듯했다. 주미 씨가 수첩을 내밀자 그는 겨우 알아볼 만하게 몇 글자를 적었다. ‘칭찬 그때그때 못 한 거 미안하다.’“그분한테 다음 질문으로 ‘지금 두려운 게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수첩에 크게 ×자를 그리더니 밑줄을 두 줄이나 긋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편지 제목에 ‘나는 두렵지 않다’라고 써서 보여드렸는데 그 제목에 줄을 쓱 긋고 다시 쓰셨어요.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라고.” 아버지는 주미 씨와 만난 지 나흘 만에 숨을 거뒀다.말기 상태인데 수용을 거부하는 환자가 있다기에 만나러 갔다가 전 직장 동료를 마주한 적도 있다. 고속 승진을 거듭했던 그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50대인 그에겐 사춘기 아들 둘이 있었다. 주미 씨가 “애들에게 전할 성공 법칙 3개만 알려 달라”고 했더니 그는 5개를 줄줄이 읊었다. ‘남한테 뭐 물어볼 때 무턱대고 묻지 말고 너만의 대답을 갖고 물어볼 것. 가족끼리 스킨십을 자주 할 것! 그리고 여행 많이 가라. 특히 엄마 모시고 자주 가라.’주미 씨가 며칠 뒤 그를 다시 찾았을 땐 병세가 악화돼 의료진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주미 씨, 미안. 오늘은 못 하겠어.” 그는 그날 숨을 거뒀다.죽음에 임박해서야 깨닫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고 주미 씨는 말했다. “여행 많이 해둘걸” “내가 나를 좀 위할걸” “바쁘게 사는 게 좋은 건 줄 알았는데…”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40대 초반의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쓴 편지는 “한 편의 시 같았다”고 주미 씨는 말했다. 그는 국어교사였다. ‘아빠는 우리 아들이 변해가는 계절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여유와 낭만이 있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아빠가 조금만 힘내서 집 지붕에서 뚜두둑 뚜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도 같이 듣고 싶네. 사랑한다는 말이 아까울 정도의 아들, 사랑한다.(7일 후 임종)’● 얼굴 보고는 속 얘기 못 터놓는 가족들한 달째 의식불명인 60대 남편에게 매일같이 말을 거는 부인이 있었다. 환자가 의식이 없을 땐 보호자와 편지를 쓰기도 한다. 그 역시 남편을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날 위해서라도 기운 내라고 했더니 당신이 그랬잖아. 악착같이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그 말이 섭섭하더라. 왜 내 생각은 안 하는 거야.(눈물) 그런데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어. 지금 생각하니 미안하지만 여전히 섭섭해. 그래도 여보, 당신이 하늘나라에서 날 기다려줄 것 같아서 좋아. 날 꼭 기다려.’부인은 이 편지를 남편의 귓가에 읽어줬다. 그 후 4일 뒤 남편은 사망했다. 마치 부인이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늘로 떠난 듯했다.대장암 말기인 한 70대 남성은 주미 씨에게 스스럼없이 마음을 열었다. “부인에게 편지 좀 쓸까요” 한 마디에 담담하게 독백을 했다.‘여기 온지 보름 만에 내가 하반신을 못 써. 하늘이 나를 부르나 본데 내일이라도 부르면 가지 뭐(눈물). 당신은 나 없이 많은 시간을… 힘들어서 어떻게 해. 겨울이면 춥고, 여름이면 더울 텐데. 그래도 당신을 사랑해주는 손주들이 있으니 걔내들 공책이라도 하나 사주는 재미로 사시구려. 우리 지금은 떨어질지언정… 만납시다, 다시.’부부라고 다 사이가 좋은 건 아니다. 임종 때까지 갈등을 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말기 암 80대 남편에게 받은 상처가 컸던 부인은 애증의 마음을 편지로 옮겼다.‘내가 병날 정도로 나한테 모질게 한 거, 한 번만이라도 왜 그랬는지, 안 미안한지 궁금하지만 이렇게 누워 있는데 무슨 말을 할까 싶기도 해. 다음 생에는 남 괴롭히지 말고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잘 살았으면 좋겠어.’꼼짝 못 하고 누워 주미 씨가 읽어주는 편지를 듣던 남편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부인에게 전해 달라며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너무 미안했다. 날 용서해라.”주미 씨는 말했다. “가족들끼리 얼굴 보고 못 하는 얘기가 많잖아요. 편지가 대화의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편지를 쓰다 보면 ‘끝까지 나를 부탁한다’고 속마음을 표현하거나 ‘수목장으로 해 달라’는 현실적인 내용까지 전하게 돼요.”● 얼마 안 남은 삶을 즐겁게 산다는 건하루는 주미 씨가 유방암 말기인 50대 여성을 만나러 병실에 들어설 때였다. 주치의와 전공의 3, 4명이 환자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 괜찮아요. 선생님들 정말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몇몇 전공의들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주미 씨는 환자의 대학생 외동딸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가 의연해서인지 애써 두려움을 억누르는 듯 보였다. 주미 씨는 딸과 먼저 편지를 썼다.‘엄마 늙을 때까지 내가 옆에 있을 줄 알고 여유 부린 건데, 이제 해줄 수 있는 나이인데…. 엄마가 울면 같이 울 텐데 엄마가 안 우니까 나도 못 울고 있어.(미소) 뭐든 엄마랑 같이 했었는데 어떻게 될까 그런 게 막막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 엄마의 영원한 베이비, ○○가.’(5일 후 임종)주미 씨가 만난 이들 중에는 20, 30대가 적지 않다. 젊어도 성찰이 깊고 자기표현을 잘하는 환자가 많다고 한다. 혈액암 말기 20대 여성이 쌍둥이 동생에게 쓴 편지다.‘쌍둥이 내 동생 보고 싶어요. 나랑 똑같이 생겼어요. 내가 더 예뻐요.(미소) 아프기 전에는 많이 싸웠죠. 아프고 나서는 얼마나 잘해주던지.(울음) ○○아, 내 통장 비밀번호는 통장서랍 안에 다 있다. 그리고 이 말 하면 너 울 거 같은데, 나는 네가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미소) ○○이∼ 귀여워!’자궁암으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그보다 한 달 넘게 살아 있는 60대 여성도 있었다. 가족들은 감사해했지만 정작 그는 고통스러워했다. 극도의 통증 때문에 휠체어에 아슬아슬 걸터앉은 채로 주미 씨를 맞았다. “지루하고 우울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오늘밤은 어떻게 지내려나, 내일은 또 어떠려나 생각뿐. 삶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즐겁게 산다는 건 뭘까. 그런 것에 대한 모델링이 없어서 더 힘들다.’주미 씨는 며칠 뒤 그를 다시 찾아 이 편지를 읽어줬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뭔가에 북받친 듯 흐느끼기 시작했다. “편지 내용이 불편해서 우는 건가 싶어 당황했는데 환자분이 제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짧은 시간에 나보다 나를 더 잘 표현해줘 고맙다. 나도 모르는 대답이 내 안에 있었다’라고요. 저는 그분 말을 그대로 옮겼을 뿐인데 경청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 같아요.”● 장지 가는 버스에서 발견한 엄마 편지말기 환자들은 생명이 언제 멎을지 모르는 불확실성을 특히 힘들어한다. 편지 쓰기는 이들이 불안을 내려놓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도록 돕는 작업이다. 주미 씨는 “환자들은 종일 누워 지내며 대소변도 못 가리는 경우가 많아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기 쉬운데 편지를 주고받으며 여전히 사랑받고 중요한 사람이란 걸 실감하게 된다”고 했다. 그렇게 자존감이 회복돼야 남은 삶을 주체적으로 계획할 수 있다.“호스피스 치료는 통증 관리 못지않게 정서적 지지가 중요해요. 요즘 겨울이면 버스 정류장에 ‘엉따(엉덩이가 따뜻해지는)’ 의자가 있는데 버스가 올 때까지 편하게 기다리면 좋잖아요. 호스피스 역시 환자가 생의 종점까지 중심을 잡도록 해주는 거죠. 다만 말기 환자 중 호스피스 혜택을 받는 분이 20%대이고, 인력도 부족해서 서울대병원마저 호스피스가 필요한 분들 중 실제 의뢰되는 비율이 3분의 1 정도인 걸로 내부에선 보고 있어요. 특히 시스템은 없고 개인의 노력에만 의존하는 게 문제입니다.”폐암으로 세상을 뜬 70대 여성의 딸이 주미 씨에게 반가운 연락을 해온 적이 있다. 그 환자는 주미 씨와 함께 쓴 편지를 딸에게 직접 건네려 했지만 미처 전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런데 딸이 장의버스를 타고 장지로 가던 길에 어머니 가방을 열었다가 고이 접어둔 분홍색 편지를 발견한 것이다. “따님이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들고 가족들에게 그 편지를 읽어줬대요. 엄마를 보내드리는 데 편지가 뜻밖의 도움이 됐다고 해요.”주미 씨는 이 일의 보람을 설명하며 한 30대 환자의 편지를 인용했다. “‘병원엔 화장실 말고는 거울이 없다. 나 자신을 바라볼 기회가 없다. 제3자의 시선으로 나에 대해 얘기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대목이 있어요. 환자가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게 제 일인 것 같아요.”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시민들과 설전을 자주 벌이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22년 재선 도전 유세를 위해 알자스 지역을 찾았을 때 일이다. “당신 때문에 살면서 처음으로 마린 르펜(당시 극우정당 대선 후보)에게 투표하려 한다.”(행인) “이유가 뭔가.”(마크롱) “당신만큼 형편없는 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 오만하고 거짓말쟁이다.”(행인) “많은 토론거리를 줘서 감사하다. 하지만 당신이 계속 당신 생각만 하면 우린 토론을 할 수 없다.”(마크롱) ▷마크롱 대통령이 시민들과 만나는 현장에선 계란이나 토마토가 심심치 않게 날아든다. 극우 청년에게 뺨을 맞는 봉변도 있었다. 이 청년은 마크롱과 악수를 하다 다른 손으로 그의 뺨을 후려쳤다. 대통령이 폭행을 당한 중대 사건이지만 마크롱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폭행 위협이 있더라도 계속 소통할 것”이라며 다시 시민들을 만났다. 이후 영부인과 산책 중 시위대를 만났을 땐 “고함치지 말고 냉정히 말해 달라”며 토론을 청하기도 했다. ▷마크롱의 소통 행보를 ‘쇼’라고 폄하하는 시각도 있다. 개혁 과제를 밀어붙이면서 반대 여론을 끌어안는 것처럼 보이려는 제스처라는 것이다. 마크롱이 추진해 온 정책들을 보면 그런 쇼라도 해야 할 만한 사안이 적지 않다. 집권 초기부터 고용과 해고를 수월하게 만들고, 친환경 에너지 정책의 일환으로 유류세 인상을 시도해 노조와 화물기사들의 저항을 불렀다. 정년을 연장하고 연금 수령 시점을 늦춘 연금개혁 역시 국민 70% 반대를 무릅쓰고 관철시켰다. 여론을 수습하지 못하면 정권이 흔들릴 만한 이슈들이다. ▷과거 정부가 미뤄 온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니 지지율이 높을 리 없다. 연금개혁 직후 26%까지 곤두박질쳤다가 요즘은 30%대에 머물고 있다. 위축될 법도 한데 마크롱은 더 거침없는 대화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연금개혁에 반대하며 프라이팬을 두드리는 시위대 틈에 파고들어가 “프라이팬으로는 프랑스를 전진시킬 수 없다”고 설득하고 ‘연금 반대 시민’ 500명을 초대해 200분간 스탠딩 토론을 벌였다. 최근에는 농업박람회에 방문했다가 농업용 경유 면세 폐지에 항의하는 농민들이 야유를 퍼붓자 농민 수십 명과 즉석 토론을 했다. ▷‘트랙터 시위(농업개혁 반대)’ ‘노란조끼 시위(노동개혁 반대)’ ‘프라이팬 시위(연금개혁 반대)’ 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지만 대통령이 시위대와도 기꺼이 마주 앉는 게 프랑스의 민주주의다. 대통령이 불편해할 목소리는 경호원들 선에서 ‘입틀막’ 되는 한국과 다른 대목이다. 9일 대통령 기자회견이 열리긴 했지만 추가 질문 기회가 없어 토론을 못 하는 구조에선 소통을 기대하기 어렵다. 마크롱이 프랑스에서 20년 만에 나온 재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는 대화를 통한 정면 돌파 전략이 한몫을 했다. 성공한 정치인이 되려면 까다롭고 날 선 질문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독일에는 의대에 가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성적. 우리 수능시험과 비슷한 아비투어(Abitur) 점수 순으로 선발한다. 이렇게 뽑는 비율이 전체 정원의 20%다. 가장 비중이 큰 60%는 대학 자율에 맡긴다. 나머지 20%를 뽑는 방식이 독특하다. ‘대기기간 전형’이란 게 있다. 지원자 중 최장 7년 이내에서 오래 기다린 순으로 입학시킨다. 여기서 관건은 의료·보건 관련 경력이다. 응급구조대원이나 중환자실 간호사, 요양병원 간호조무사, 조산사 등 현장 경험이 풍부할수록 가산점이 높아 주로 의료 경력자들이 지원한다. 독일 의대생 5명 중 1명은 이 전형으로 들어온 구급대원 간호사 출신들이다. 독일에서도 의대 입시는 치열하다. 한정된 기회를 어떻게 배분할지를 두고 독일이 고심한 결론이 바로 이 전형이다. 의사가 되는 경로는 다양해야 하고, 성적 우수자가 아니어도 환자를 돌보려는 사명감과 열정이 강하다면 입학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늦깎이 입학생들이 의대 공부를 못 따라갈 것이란 우려도 나왔지만 기우였다. 의사 국가고시에서 다수가 탈락하는데 대기전형 출신들의 합격률은 다른 경로 입학생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의대 공부를 감당할 수 있다면 의료 현장에서 자신의 적성을 검증하고 환자에 대한 이해심을 기른 학생들이 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는 게 독일인들의 인식이다. 2년 전 독일에서 의대 증원이 추진될 때였다. 코로나 사태로 의료인력 부족을 실감한 뒤 1만여 명인 입학 정원을 50% 늘리기로 했다. 독일은 인구당 의사 수가 우리보다 2배 이상 많다. 거기서 더 늘린다니 의사들이 반발할 법도 한데 대부분 찬성했다. 의사 업무가 과중해 의료 서비스의 질이 떨어진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독일 의사들은 추가 공급될 의사들을 경쟁자가 아닌, 환자를 나눠 맡을 동료로 보는 것이다. 의사는 독일에서도 고소득 직종이다. 근로자 평균 임금 대비 의사 소득이 5.6배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3위다. 1위(6.8배)인 한국과 차이가 크지 않다. 독일 의사들이 의대 증원에 있어 한국 의사들과 생각이 다른 것은 의대생 시절 경험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동기들, 특히 환자 곁에서 궂은일을 하며 의료의 굳은살이 박인 동료들과 함께 배우고 수련하는 것 자체가 살아 있는 소양교육이다. 전국의 ‘전교 1등’들이 모여 엘리트로서 집단 자의식을 쌓아가는 한국 의대생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국민들은 ‘전교 1등’ 의사를 원하지, 실력이 모자란 의사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의대 증원이 추진될 때면 일부 의사들은 이런 반대 논리를 편다. 성적으로 줄 세우는 의대 입시가 수십 년 지속돼 온 걸 고려하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좁은 의대 구멍을 통과해 힘들게 공부하고, 온갖 비인간적 처우를 감내하며 수련했는데 이제 와 문턱을 낮추겠다니 선뜻 동의하긴 어려울 것이다. 정부의 이번 의대 증원 정책의 한계 중 하나는 성적 위주의 천편일률적 입시를 그대로 두는 것이다. 3000명인 정원을 1500명 늘린다고 의사라는 직업을 대하는 의대생들의 태도가 달라지진 않는다. 증원이 현실화되면 의대 합격선이 2.9점 낮아질 거라고 학원가에서 전망하는데 선배들보다 2.9점 낮은 ‘차상위’ 수재들이 늘어난 정원을 채울 뿐이다. 필수의료를 강화하려면 수가체계 개선이 급선무지만 의대생들이 사회적 책임을 내면화하도록 입시제도도 바꿔야 한다. 의료 일선에서 수년간 환자들과 부대껴 본 경험을 성적 못지않게 높이 평가하는 쪽으로 의대 관문이 넓어진다면 좋은 시작이 될 것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사기 범죄의 악랄함은 상대의 가장 아픈 약점을 공략한다는 데 있다. 투자 사기를 당해 은퇴 자금을 날린 노인들의 사연에는 그들이 헤쳐 가려 했던 힘겨운 현실이 녹아 있다. “안 그래도 먹고살기 바쁜 자식들에게 손 벌리기 싫어서” “병원비 생활비 부담은 계속 커지는데 연금처럼 매달 배당금을 준다기에” “혼자 살아 외로웠는데 살갑게 대해 주는 게 고마워서”…. 사기범들은 노인들의 이런 마음을 피해자의 금고를 여는 열쇠로 이용했다. ▷고령자 상대 범죄 중 최근 급증하는 분야가 사이버 금융사기다. ‘주식리딩방(주식 종목 추천 채팅방)’으로 초대해 투자를 유도하거나, 비대면 방식으로 가상화폐나 다단계 투자를 하게 한 뒤 돈을 들고 잠적하는 경우가 많다. 경찰청 통계에 잡힌 사이버 사기 피해자 중 60대 이상의 비중은 2019년과 비교해 4년 새 4배로 급증했다. 지난해 개인파산자 중에서도 60대 이상이 47.5%로 가장 많았고, 이들이 주식 코인 등 투자 실패로 파산한 비율은 최근 3년 새 4.5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삶의 경륜을 쌓아온 노인들이지만 디지털 세계에선 약자다. 요즘 금융투자는 온라인에서 많이 이뤄지는데 고령일수록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이해력과 금융지식이 부족하다. 젊은층보다 정보를 얻는 매체도 제한적이고, 치매 증상 등으로 판단이 흐려질 수도 있다. 여생은 길어지고 고물가 장기화로 어떻게든 자산소득을 올려야 하는 노인들로선 경제 활동의 중심을 온라인으로 옮기는 게 큰 도전이다. 여기에 퇴직금이나 상속 재산 등 쌓아둔 목돈은 많으니 사기꾼들에겐 손쉬운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피해 노인들 중에는 대기업이나 금융사 임원 출신도 있다고 한다. 투자 기법이 급속히 변화하고 있어 과거 경험만으론 따라잡기 어려운 데다, 유명 금융전문가나 연예인들이 투자했다는 허위 광고에 속아 넘어간 사례가 적지 않다. 최근에는 한 주식리딩방 업체 직원들이 시골 노인들을 찾아가 주식거래 앱을 깔아주며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손실 위험이 큰 관리종목 주식을 사들이게 한 사건도 있었다. 일부 피해자들은 낯선 사람이 휴대전화를 조작하는 게 꺼림칙했지만 평소 연락이 뜸한 자식들이 귀찮아할까 봐 물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노인들이 평생 일군 재산을 투자 사기로 잃지 않도록 지켜주는 건 고령화 시대에 중요한 복지다. 노후 파산이 많아지면 가족이 무너지는 건 물론이고, 국가의 복지 부담도 가중될 수 있다. 고령층이 주요 타깃이었던 보이스피싱이 꾸준한 예방 교육과 제도 정비로 피해가 줄고 있듯 디지털 약자에게 특화된 금융 교육이 필요하다. 요즘 시중은행들이 운영하는 ‘노인 금융학교’에 수강생이 몰려 관광버스까지 대절한다고 하는데 민간에만 맡겨둘 일이 아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요즘 골목책방은 ‘인스타 성지(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사진촬영 명소)’가 된 곳이 많지만 책방 주인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다. 손님들이 책은 안 사고 근사하게 진열된 책들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가는 경우가 많아서다. 책방의 감성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를 소비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또 책 판매는 줄어드는 반면 인테리어 소품용 모형 책은 잘 팔린다고 한다. 책은 안 읽어도 책이 풍기는 지성미는 갖추고 싶다는 게 요즘 세태다. ▷한 해 동안 책을 단 한 권이라도 읽은 성인 비율(종합독서율)은 지난해 기준 43%다. 정부의 독서실태조사가 처음 시작된 1994년 이후 최저치다. 30년 전 이 비율은 86%였다. 조사 대상자들이 책을 안 읽는 이유는 주로 두 가지다. 일하느라 시간이 없고, 유튜브 등 책 이외에 다른 매체를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0, 20대 사이에선 유튜브 같은 동영상을 시청하는 것도 독서의 일종이란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독서 인구는 줄지만 유튜브로 책을 소개하는 ‘북튜브’ 채널은 인기다. 가성비 높은 지식 소비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볼거리는 늘었는데 시간이 한정돼 있다면 한 권에 10시간 이상 걸리는 독서보다 10분∼1시간 이내로 핵심을 추려주는 영상에 사람들이 몰릴 법도 하다. 책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이슈와 정보를 정리해주는 지식 콘텐츠가 많아 유튜브로 세상을 배운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독서만큼 도움이 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유튜브를 볼 때와 독서를 할 때 우리 뇌는 다르게 반응한다. 영상은 완제품 형태로 눈을 거쳐 뇌리에 바로 맺힌다. 뇌가 일할 필요가 없다. 반면 책은 뇌를 바쁘게 만든다. 글은 설명과 묘사, 정보를 담은 원재료일 뿐이고 한 문장 한 문장이 머릿속 지식과 경험, 정서와 뒤섞이면서 활발한 시뮬레이션이 펼쳐진다. 책을 읽다 잠시 멈추게 되는 게 이런 작용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영상을 100명이 보면 거의 비슷하게 기억하지만 책 한 권을 100명이 읽으면 각기 다른 100개의 스토리가 생긴다. 스쳐 흘러가는 영상과 달리 책에서 읽은 건 깊이 각인되는 이유는 나만의 맥락이 담겨 저장되기 때문이다. ▷책 대신 유튜브 보는 습관이 들면 당장은 단순명료하게 가공된 지식을 얻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장기적으론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게 될 가능성이 높다. 자칫하면 궁금한 주제를 짧고 흥미롭게 만든 영상만 골라 보고, 그마저 메뚜기 뛰듯 띄엄띄엄 보거나 ‘세 줄 요약’에만 익숙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단순화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은데 영상 제작자가 주관적으로 편집한 지식에 길들여지면 흑백 논리에 잘 휘둘리고, 가짜 정보에 대한 분별력도 떨어지기 쉽다. 독서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 정도 노력을 들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준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집권 여당 참패라는 선거사상 초유의 결과를 낸 이번 4·10총선은 충청의 영향이 컸다. 2년 전 대선과 지방선거 때의 승리와 달리 국민의힘은 충남·충북에서 역대급 패배를 했다. 윤석열 대통령 부친은 충남 공주가 고향이다. 국민의힘은 총선 직전 충청권 판세를 박빙으로 분석했었지만 대전·천안·아산·청주 등 도시권 16석 중 단 1석도 건지지 못했고, 그나마 농촌과 중소도시에서 12석 중 절반인 6석을 얻는 데 그쳤다. 24일 충남 홍성군 충남도청에서 국민의힘 3선 의원 출신인 김태흠 충남도지사를 만났다. 그는 여당의 충청 참패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고향이라도…” 24만7077표로 승부가 갈린 지난 대선에서 충남과 충북은 각각 8만292표와 5만6068표 차로 윤 대통령이 승리한 지역이다. 지난 대선에서 윤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안겨줬던 대전 역시 더불어민주당으로 다시 돌아섰다. 김 지사에게 충청 민심 변화의 원인에 대해 먼저 물었다. “영남과 호남은 다 자기편들이 있습니다. 충청 지역 유권자들은 우리 민심이 곧 대한민국 민심이란 프라이드를 가진 분들입니다. 정치적 변곡점 때마다 정치적 명분을 쥔 쪽을 지지해 왔습니다. 이번 선거에선 정부·여당을 지지해줄 명분이 없다고 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충청 민심의 수도권화’를 강조했다. “충청권 도시들은 급속한 산업화·도시화로 외지 주민의 유입이 급증하면서 멜팅폿(Melting pot·여러 문화가 하나로 동화되는 것)이 이뤄졌고, 표심도 수도권을 따라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영호남처럼 특정 정당에 대한 충성도가 높지 않은 지역이다 보니 정권심판론이 먹혔다고 생각해요.” ‘대통령의 고향’을 언급하자 그는 “(대통령 고향이라고) 무조건 편들어 주는 곳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는 “충청이 윤 대통령의 고향이라고 하지만 이를 도민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키지 못했고, 내각이나 요직에 충청인 발탁이 미흡해 피부에 와닿지 않은 탓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미 명분에서 다 진 상태인데 충청으로 와서 표를 달라고 한들 도민들이 무조건 찍어줄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명분에서 졌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종섭 전 주호주 대사 문제만 해도 임명 자체로 말할 나위 없이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대통령실 이관섭 비서실장한테 전화해서 자진 사퇴시키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빨리 사퇴시켜야 한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사퇴까지) 8일이 걸렸습니다. 민심에 둔감했던 것이죠.” 그는 김건희 여사 문제의 처리 과정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표했다. “윤 대통령의 국정 방향은 맞게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국민들이 윤 대통령을 뽑을 때 기대했던 것들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실망한 것입니다. 국민들은 문재인 대통령 시절 검찰총장으로서 핍박을 받으면서 공정과 상식을 지키는 리더가 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또 남자답고 화통하고 스케일이 큰 리더일 것이란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 여사나 장모 문제에 대한 대응을 보면서 공정과 상식을 기대한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습니다.”● “힘 못 쓴 ‘국회 완전 이전’ 공약” 그가 진단한 충청의 민심은 ‘정권 심판론’이 크게 작용했던 총선 전체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원인은 없었을까. ―총선 직전 나온 ‘국회의 세종시 완전 이전’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국회는 이미 본회의장 등 일부 기능을 제외하고 11개 상임위원회와 대부분의 기능을 세종시로 이전하기로 결정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완전 이전이란 국민의힘의 공약은 파급력이 약할 수밖에요. 또 선거를 목전에 두고 발표했는데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종은 공무원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국민의힘은 지난 21대 총선에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세종에서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세종에서의 계속되는 국민의힘의 패배에 대해 김 지사는 ‘38.6세’라는 숫자를 제시했다. “세종시는 2002년 16대 대선 공약 이후 위헌 논란과 수정안 등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젊은 도시’입니다. 평균 연령이 2023년 말 기준 38.6세입니다.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늘 어려운 지역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회 세종의사당과 대통령 세종집무실 건립이 지금까지 속도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 정책의 구체성을 따져보는 젊은 유권자들에게 여당의 약속이 곧이곧대로 전달되기 힘들었다는 얘기였다.● “민심의 쇠몽둥이 맞은 여권” 김 지사는 총선 직후 페이스북에 자신이 느낀 충격에 대해 “국민은 집권 여당을 향해 회초리가 아닌 쇠몽둥이를 들었다”고 표현했다. ‘여권의 위기’를 강조한 것이다. “회초리라고 하면 과반 150석 중에 130∼140석 정도 받았을 때 회초리를 들었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100석 갓 넘기는 의석을 받았다면 그건 쇠몽둥이 아니겠습니까.” ―뭐가 달랐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윤 대통령이 장모가 감옥에 갔을 때 가족으로서 유감 표명이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작은 문제들을 진솔하게 털고 가지 않아 더 큰 문제로 쌓인 면이 있다고 봅니다. 디올백 문제 때도 대통령이 ‘국민 눈높이에는 맞지 않았다’ ‘사과드린다’ 그렇게 인정하고 털고 갈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그런 게 잘 안 되다 보니 국민 마음속에 불만이 누적됐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불통을 지적하는 여론이 많습니다. “윤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오만과 불통에 대한 인식이 1이라면 국민의 생각은 9, 10인 것 같아 안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국민에게 비치는 문제점 중 대부분은 국정 운영 때문이라기보다는 장모 또는 김건희 여사 관련 리스크에서 온 게 사실입니다. 국민이 윤 대통령에게 가진 부정적 이미지는 실제보다 과장돼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국정 운영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첫째는 듣는 사람이 바뀌어야” 그렇지만 김 지사는 “지금도 여권이 우왕좌왕하고 있다”며 “이러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내놓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이 인적 쇄신에 나섰습니다. 앞으로 달라질까요. “대통령에게 직언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 많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에게 직언을 한다는 게 사실 쉽지 않습니다. 대통령을 설득하려면 상당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대통령이 생각하는 방향이 있으면 그 자리에선 동의한다고 해도 하루 이틀 지나 좀 더 의견을 정리하고 보완 방향을 판단해서 바꿀 건 바꾸자고 말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물론 첫째는 듣는 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지만 참모가 되면 대통령의 생각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대통령은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겠습니까. “윤 대통령이 화통하고 스케일이 큰 리더의 모습을 이제라도 제대로 보여줬으면 합니다. 시대마다 원하는 리더가 있습니다. 지금은 자기 소신이 있으면서 통 크게 포용하는 리더를 원하는 시대입니다.” ―내각의 인적 쇄신 작업은 잘되고 있다고 보십니까. “총선 후 인적 쇄신은 기초적인 부분입니다. 인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집권 여당으로서 3년 남은 기간에, 그리고 이런 정치 구도 아래에서 어떤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 것인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갈 것인가 방향 설정을 먼저 해야 합니다. 지금 사람 구하는 데 우왕좌왕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총리 인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번에 이재명 대표 회담 때 야당에 ‘총리로 좋은 분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부 장관직도 민주당이 추천해주면 그분 모시고 국정 같이 잘 해볼 테니 좋은 의견을 달라고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통 큰 윤 대통령의 리더십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3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반성’과 ‘미래’를 수차례 언급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한 부분들에 대한 처절한 반성, 그리고 앞으로 3년을 어떻게 가겠다고 하는 미래에 대한 비전의 부재”가 ‘위기의 여권’을 진단하는 그의 핵심 키워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집권 2년이 됐으니까 이번 선거는 심판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며 “이제라도 받아들일 것은 겸허히 받아들이고, 여당이 보여줄 수 있는 미래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정 동력 상실은 국가와 국민에게 큰 손실입니다. 앞으로 더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홍성=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신광영 논설위원 leon@donga.com}
올해 15세인 2009년생부터는 평생 담배를 살 수 없도록 한 초강력 금연법이 최근 영국 하원에서 1차 표결을 통과했다. 리시 수낵 총리가 추진한 법인데 여당인 보수당 의원들은 대거 반대하거나 기권하고 야당인 노동당이 압도적으로 찬성했다. 노동당은 “보건정책의 획기적인 진전”이라고 평가한 반면 보수당에선 “개인 자유를 침해하는, 보수당답지 않은 정책”이란 비판이 거세다. 리즈 트러스 전 총리는 작심 발언을 했다. “국가가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해선 안 된다. 경찰국가를 넘어 유모국가로 가자는 것인가.” ▷‘비흡연 세대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은 2009년생이 담배 구입 가능 연령(18세)이 되는 2027년부터 허용 연령을 한 살씩 올려 평생 못 사게 막자는 것이다. 흡연자를 처벌하는 건 아니고, 담배를 판 상인에게 벌금을 물리는 방식이다. 영국에서는 무상의료 시스템이 흡연으로 인한 질병을 치료하느라 과부하에 걸리면서 강력한 금연법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커져 왔다. 이런 목적으로 쓰이는 예산이 연간 28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 돈을 의사 채용과 병상 확충에 쓰면 다른 환자들이 의사를 기다리는 기간을 단축할 수 있어 금연법에 대한 서민들이 지지가 높다. ▷수낵 총리는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일주일에 하루는 금식할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단지 건강에 대한 소신 때문에 여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연법을 밀어붙이는 건 아니다. 사회복지 축소와 부자 감세 등 반서민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영국 역사상 최단기(44일)로 물러난 전임자(트러스 전 총리)의 실책이 그의 결단에 한몫을 했다. 게다가 야당인 노동당(45%)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이 보수당(26%)보다 크게 높다 보니 중도·서민층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도 있어 보인다. ▷이번 금연법이 발효되려면 하원의 최종 표결에 이어 상원까지 통과해야 한다. 작은 정부와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해온 보수당의 반대가 만만찮아 시행을 장담하긴 이르다. 흡연을 통제하면 담배 암시장이 난립하고, 전자담배 수요만 자극할 것이란 우려도 많다. 뉴질랜드 진보의 아이콘인 저신다 아던 전 총리(노동당)도 같은 내용의 금연법을 추진했지만 지난해 보수당으로 정권이 넘어간 뒤 법이 폐기될 위기에 놓였다. ▷“(시가 애호가였던) 윈스턴 처칠 전 총리를 배출한 보수당이 담배를 금지하려 한다니 미친 짓이다.” 보리스 존슨 전 총리는 수낵 총리를 저격하며 처칠을 소환했다. 처칠은 “나는 시가를 피우지 않는 사람을 믿을 수 없다. 시가는 생각의 동반자이자 실패의 위로자”란 말을 남길 정도로 골초였다. 하지만 그는 오랜 흡연으로 인해 폐질환과 고혈압에 시달리다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처칠의 경우는 금연법 도입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영국 윌리엄 왕세자의 부인 캐서린 왕세자빈(42)은 영국인들에게 왕실의 완벽함을 상징해온 인물이다. 캐서린은 6년 전 셋째인 루이 왕자를 낳은 날 출산 7시간 만에 빨간색 드레스에 하이힐 차림으로 병원을 나와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첫째 조지 왕자, 둘째 샬럿 공주가 태어난 날에도 캐서린은 말끔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등장해 로열 베이비를 건강하게 출산한 세손빈으로서 대중의 기대에 부응했다. ▷하지만 그가 22일 소셜미디어에 올린 영상메시지는 영국은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1월 복부 수술 후 검사에서 암이 발견돼 화학치료를 받고 있다.” 암의 종류나 단계를 밝히진 않았지만 암 진단 사실을 직접 공개한 것이다. 올 들어 공개 석상에서 자취를 감춘 캐서린을 둘러싸고 최근 가족사진 편집 논란이 확산되며 건강 위중설, 부부 불화설 등 온갖 루머가 돌던 와중에 나온 발표였다. ▷왕실 인사들의 건강 상태를 공개하는 건 오래전부터 왕실의 금기였다. 약한 군주로 비쳐 외세 침략의 빌미가 될 수 있고, 대내적으론 민심의 혼란을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의 신비주의가 그런 명분으로 유지됐다. ‘군주제는 대낮의 햇빛을 받으면 마법이 사라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1948년과 1950년 임신을 했을 때 왕실은 “여왕이 흥미로운 상태(interesting condition)에 있다”고만 했고, 여왕의 어머니가 1960년대 암을 앓았던 사실도 40년 뒤에야 전기 작가를 통해 알려졌다.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지난달 암 투병 사실을 공개했을 때 역사학자들이 “다른 군주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이라고 평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발표가 나온 데에는 국민들이 왕족의 일거수일투족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왕실의 치부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순식간에 확산되는 환경에서 암을 숨기는 게 불가능하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이후 군주제 지지 여론이 약화되면서 “불평도 하지 않고, 설명도 하지 않는다”는 왕실의 오랜 방침을 고수하기도 어려워졌다. 캐서린 왕세자빈 역시 암 치료를 받는 병원의 직원들이 자신의 의료기록에 접근한 사실이 알려지자 결국 카메라 앞에서 서게 됐다는 분석이 많다. ▷왕실 신비주의가 통하기 어려운 요즘 왕족들은 사치와 안락함을 누리는 대가로 대중의 동경과 비난을 한 몸에 받는 공적인 존재가 됐다. SNS 시대에 왕관의 무게를 견딘다는 건 사생활의 자유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도 포함한다. 다만 산악자전거를 타고 럭비를 즐길 정도로 건강했던 캐서린 왕세자빈의 부쩍 수척해진 얼굴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만들어진 이미지의 완벽한 왕실보다 국왕과 며느리가 줄줄이 암 치료를 받게 된 진솔한 모습의 왕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6일 오후 10시 미국 워싱턴 그랜드하이엇호텔에서 열린 만찬 무대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올라섰다. 바이든은 시계를 힐끔 보며 말문을 열었다. “내 취침 시간보다 6시간이나 지났네요(Six hours past my bedtime).” 좌중에서 폭소가 터졌다. 82세인 그의 재선 도전에 고령 논란이 커지자 ‘자학 개그’로 받아친 것이었다. 바이든은 이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78)을 겨냥했다. “민주당과 공화당 대선 후보가 정해졌는데 한 명은 너무 늙은 데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다. 다른 한 명이 바로 나다.” ▷이날 행사는 미국 중견 언론인들이 대통령 등 권력자들을 초청해 격의 없이 소통하는 ‘그리드아이언(Gridiron)’ 만찬이다. 1885년 시작된 이후 역대 대통령 대부분이 초청됐다. 세계 초강대국 지도자인 미국 대통령도 이때만큼은 ‘최고 폭소 책임자(CFO·Chief Fun Officer)’로서 면모를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 잘만 하면 야당과 국민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전세를 반전시킬 기회로 만들 수 있다. ▷“오늘밤, 사상 최초로 저의 출생 비디오를 공개합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1년 이 만찬에서 중대 발표를 했다. 당시 트럼프 등 보수 인사들이 오바마 출생지 의혹을 제기하며 오바마는 아프리카 케냐에서 태어나 선거법상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던 때였다. 오바마의 엄중한 표정에 만찬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곧 대형 화면에 영상이 재생됐다. 아프리카 평원에서 새끼 사자가 태어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의 한 장면이었다. 배꼽을 잡는 참석자들 사이에서 트럼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후 7년 뒤인 2018년 트럼프 역시 같은 무대에 섰다. 행사 며칠 전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당시 백악관 선임고문이 족벌정치 논란 끝에 기밀 접근권을 박탈당했는데 트럼프는 이를 빗대 인사말을 했다.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사위가 보안 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오래 걸렸네요.” 트럼프는 당시 참모들의 연이은 사퇴에 대해 “요즘 백악관을 떠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다음은 누굴까. 멜라니아(영부인)일까”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마이크만 들고 서서 말로 관객을 웃기는 스탠드업 코미디는 미국에서 웬만한 가수 콘서트 못지않은 인기 공연이다. 이런 문화가 정치에도 투영돼 유머감각은 정치인의 자질 중 하나로 평가된다. 미 대선에서도 “내가 낙선하면 피바다가 될 것(트럼프)” “트럼프는 히틀러 앵무새(바이든)” 같은 험한 말들이 오가지만 가끔 등장하는 자학 개그는 격해진 긴장을 풀어주는 순기능이 있다. 상대의 정곡을 찌르고 유권자의 공감을 얻는 데도 촌철살인이 담긴 유머는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 정치에도 다 같이 빵 터지는 순간들이 많아지면 막말과 혐오의 언어가 조금은 줄어들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유럽 발칸반도 소국인 몬테네그로 법원이 가상자산 테라·루나 폭락 사태 주범인 테라폼랩스 대표 권도형 씨를 미국으로 인도하라고 했다가 최근 항소심에서 이를 뒤집고 한국 송환을 결정했다. 국내 피해자만 20만 명이 넘어 다행스러운 소식 같지만 “차라리 미국으로 보내라”는 피해자가 적지 않다. 적은 돈이나마 보상받기 위해 어렵게 민사소송을 하느니 권 씨가 미국 감옥에 평생 갇혀 죗값이라도 치르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권 씨는 현지 법원에 한국에서 재판받게 해달라고 요구해 왔다. 그래야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고 본 것인데 틀린 계산이 아니다. 그를 자본시장법상 사기 거래로 처벌하려면 코인도 주식 같은 증권에 해당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코인의 증권성에 대한 판단을 정립하지 못한 상태다. 다행히 유죄 판결이 난다고 해도 처벌에 한계가 있다. 우리는 여러 혐의가 유죄여도 가장 무거운 혐의에 대한 형량의 2분의 1까지만 가중할 수 있다. 현재까지 경제사범의 최대 형량은 40년이다. 반면 개별 혐의별 형량을 모두 합산하는 미국에선 100년형도 가능하다. 게다가 미국은 루나·테라 코인을 이미 증권으로 간주해 이익환수 소송을 진행 중이다. ▷글로벌 무대의 범죄자들에게 미국 사법체계는 재앙 그 자체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를 운영한 손정우도 2020년 미국이 우리 법원에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해오자 미국행을 필사적으로 회피했다. 당시 손정우를 종신형까지 선고될 수 있는 미국으로 보내자는 여론이 들끓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불법 계좌를 만들어 범죄수익을 은폐했다며 고소했다. 그로 인한 추가 수사와 재판이 이어지며 그의 미국 인도는 불발됐다. 손정우는 성착취 관련 혐의로는 1년 6개월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권 씨가 한국으로 올 경우 그의 ‘법원 쇼핑’은 성공하는 셈이 된다. 그러니 그를 미국으로 보내 평생 감옥에 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다. 다만 피해자 중 일부라도 피해 보전을 받으려면 우리 사법체계로 그를 단죄해야 한다. 검찰은 지난해 서울 성동구 성수동 고급 주상복합을 포함해 권 씨의 국내 자산 2300억 원을 추징·보전해 놓은 상태다. 미국이 추산한 전 세계 테라 사기 피해액 52조 원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소액이나마 보상을 기대할 순 있다. ▷우리 손으로 테라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제2의 권도형’을 막을 법과 제도를 정비할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 루나·테라는 가치가 ‘0원’으로 완전히 증발하면서 피해가 명확해졌지만 일부 코인의 경우 사기성 투자 권유나 은밀한 시세 조종이 벌어지는데도 아직 피해가 구체화되지 않은 사례들이 있다. 권 씨를 수사하고 재판하면서 규제 공백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가상자산 관련 제도를 촘촘히 보완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우리나라 산부인과 진료실에선 의사와 예비 부모들 사이에서 선문답 같은 알쏭달쏭한 대화가 흔히 오간다. 초음파 검사를 하다가 뜬금없이 아기 옷은 무슨 색깔이 좋을지, 어떤 장난감을 준비할지 등을 묻는 식이다. 서구에선 임신 4, 5개월쯤 의사가 태아 성별을 알려주고 부모는 이를 기념하는 성별 공개 파티를 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임신 32주까진 의료진이 태아 성별을 알릴 수 없게 한 법조항 때문에 부모들이 눈치껏 성별을 알아채야 한다. ▷이 법이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정을 받았다. 37년 전 제정 당시 팽배했던 남아 선호 사상이 확연히 퇴조했고, 대부분의 낙태가 성별을 알지 못하는 임신 10주차 전에 이뤄진다는 게 주된 이유다. 다만 재판관 9명 중 3명은 성별 공개에 신중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남아 선호가 아니더라도 부모가 원하는 성별로 자녀를 한 명만 낳으려 할 경우 성별에 따라 낙태가 이뤄질 개연성이 있다.’ 여아 선호로 인한 낙태 가능성 역시 우려된다는 취지다. ▷재판관들은 여아 선호를 보여주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비중 있게 인용했다. 지난해 조사에서 응답자 중 59%는 ‘딸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답했는데 ‘아들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응답은 절반 수준인 34%에 그쳤다. 딸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답변은 모든 연령대에서 아들보다 더 높게 나왔다. ▷여아 선호 현상은 자녀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에 자식은 가계에 기여할 노동력이자 부모의 노후 대책 성격이 강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딸보단 아들이 유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녀 양육이 ‘고비용’ 그 자체인 요즘엔 그런 공식이 적용되기 어렵다.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직장을 포기하고 육아만 할 경우 기회비용이 일단 크다. 대학 졸업 후에도 안정적인 직장을 못 잡고 부모에게 얹혀사는 자녀가 많다. 자녀의 경제력은 부모 세대를 넘어서기 어렵고, 노후 돌봄은 자녀가 아닌 국가의 몫으로 옮겨가고 있다. ▷요즘 부모들이 자식에게 기대하는 가치는 정서적 친밀감이다. 키울 때 애교가 많고, 노후엔 부모를 살뜰히 챙기는 건 아들보단 딸인 경우가 많다. 딸은 정서적인 면에서 평생 보험이란 말도 있다. 또 맞벌이 부부들 중에는 “육아에 할애할 시간과 자원이 부족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부모 말에 잘 따르고 빨리 철드는 딸을 선호하게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인구 전문가들은 남아를 선호했던 나라 중에 한국처럼 급격하게 여아 선호로 바뀐 사례를 찾기 힘들다고 한다. 최근 여아 선호 현상은 저성장, 청년실업, 열악한 육아 환경 등 우리의 고질적 문제와 연결돼 있어 ‘한국적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해결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 문제들인 만큼 태아 성별 공개를 무작정 허용해선 안 된다는 헌재 재판관들의 소수의견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