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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보인 북한 선수단의 행동은 201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 대회 남북 단일팀의 추억을 갖고 있는 이들에겐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단일팀 유니폼을 입고 함께 땀을 흘렸던 그들이 5년 만에 딴사람이 됐다. 한 팀으로 뛰었던 북 여자농구 선수들은 우리 선수들을 차갑게 외면했다. 사격에서 우리 선수에게 져 은메달에 머문 북 선수들은 시상대에서 함께 사진조차 찍길 꺼렸다. 북 선수단 관계자는 뜬금없이 기자들에게 정식 국호로 불러 달라고 몽니를 부렸다. 그러면서 북 주민들에게 틀어준 중계 영상에선 우리를 ‘괴뢰’라고 불렀다. 북한의 태세 전환은 의도적이니 우리끼리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 5년 전 북-미 협상 국면에서 열린 직전 대회의 ‘북한’ 이미지를 지우려는 ‘낯설게 하기’ 선동이며, 국제적 관심이 쏠리는 아시안게임에서 남과 북이 갈라섰다는 걸 강조하고 한반도 긴장 상황을 세계에 주지시키려는 선전 술책이다. 우리에게 ‘북측’이 아닌 정식 국호를 써달라고 요구하는 건 이젠 같은 민족이 아니라 ‘남남’으로 생각하라는 협박성 설정이다. 그들에게 피를 나눈 민족 개념은 김정은 정권이 지배하는 그들의 ‘조국’보다 낮은 하위 개념이며, 선전선동을 위해선 언제든지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전술적 도구일 뿐이다. 같은 민족끼리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데, 돌이켜보면 그들은 그랬다. 북한의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됐던 2017년 뉴욕 특파원에 부임한 뒤 만난 북한 외교관들은 우리 기자들의 간단한 질문에도 입을 열지 않던 얼음장 같은 이들이었다. 2018년 북-미 협상 국면에선 지령이라도 받은 듯이 달라졌다. 먼저 말을 걸고 귀임 날짜나 가족 관계와 같은 사적인 질문도 던졌다. 김성 유엔 주재 북한대사는 우리 단체가 주최한 행사에 참석해 와인잔을 기울였다. 북-미 협상이 결렬되자 그들의 표정은 다시 굳어졌다. 1년 만에 말도 섞기 싫은 원수처럼 대하다가 살가운 혈육을 만난 것처럼 돌변할 수 있는 게 그들이다. 북한의 변덕스러운 행동 뒤엔 변하지 않는 진심도 있다.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소속 김인철 서기관은 유엔총회장에서 “개는 짖어도 마차는 간다(The dog barks, but the caravan moves on)”며 “위협에 단호히 대응하고 해야 할 일을 계속하겠다”고 발언했다. 핵과 ICBM 개발을 멈추지 않겠다는 위협이었다. ‘개는 짖어도∼’ 표현은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와 관련한 북-미 협상장에서 북측 대표 강성주가 미 대표인 로버트 갈루치에게 썼던 말인데 핵실험과 ICBM 발사로 북-미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인 2017년에도 등장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로켓맨”으로 지칭하며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고 경고하자, 유엔총회 연설을 위해 뉴욕에 온 리용호 북 외무상은 기자들 앞에 서서 “개들이 짖어도 행렬은 간다는 말이 있다. 개 짖는 소리로 우리를 놀라게 하려 생각했다면 그야말로 개꿈”이라며 응수했다. 북한이 30년 넘게 ‘개가 짖어도 마차는 간다’며 마이웨이를 고수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준 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오락가락한 한미의 대북 정책이었다. 내년 11월 미 대선에서 한미 동맹을 금전적 가치로 환산해 따지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복귀 가능성이 나오는 상황에서 북한이 러시아와 밀착하며 2017년 한반도 긴장 상태로 시곗바늘을 되돌리려는 건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가을이 오면 표범의 털이 아름답게 변해 ‘표변(豹變)’이라고 하는데, 필요하면 민족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북의 표변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코인 투자’ 논란으로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김남국 의원(무소속)에 대한 국회의원 제명 징계는 없었다.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윤리심사자문위원회가 ‘제명’을 권고했지만, 지난달 말 윤리특위 무기명 표결에서 제명안이 부결됐다. 여야가 석 달 넘게 정치 공방을 벌이고도 시비를 명쾌하게 가리지 못해 국회가 국민만 피곤하게 만들었다. 국민의 눈높이에선 의원이 상임위원회나 본회의 도중 코인 거래를 수시로 한다는 건 용납하기 어려운 근무 태만이다. 거액의 코인을 보유하고도 가상자산 관련 법안을 발의하면 이해 상충을 의심하게 된다. 국회 윤리심사자문위에 따르면 가상자산 보유 및 거래 내역을 신고한 여야 의원 11명 중 8명이 가상자산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투자 액수로 1000만 원 이상, 거래 횟수로 100회가 넘어 이해충돌 소지가 있는 것으로 자문위가 판단한 의원들만 최소 5명이다. 김 의원 한 명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선에서 어물쩍 끝날 일이 아니다. 공직자윤리법의 허점(loop-hole)과 의원 자기규제 문제(self-regulatory problem)를 보완하는 후속 조치가 없다면 ‘제2의 김남국 사태’가 어느 당에서나 재연될 수 있다. 의원과 고위 공직자 비리를 막으려면 사전 규제와 사후 처벌이 필요하다. 사후 처벌이 엄하면 사전 규제는 상대적으로 느슨해도 감시할 수 있다. 하지만 선례를 볼 때 국회에 엄정한 사후 처벌을 기대하긴 어렵다. 결국 사전 감시를 지금보다 훨씬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현재 이해 상충을 감시하기 위해 국회의원이나 1급 이상 고위 공직자의 재산을 등록하고 공개하는 제도가 30년째 운영 중이지만 1년에 한 번 재산 현황과 변동 내역을 사후 공개하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는 상임위에서 수백 차례 코인을 거래하는 근무 태만이나 거래 시점에서 이해 상충이 있었는지를 제때 감시하기 어렵다. 우리와 달리 미국 의원들은 주식이나 코인을 거래하면 45일 이내에 홈페이지 등에 그 사실을 공개해야 한다. 의원들이 떳떳하다면 미국처럼 주식이나 코인을 거래할 때마다 투명하게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행정편의적 재산 공개 방식도 이제는 수요자 눈높이에 맞게 고쳐야 한다. 지식의 단계는 데이터(data), 정보(information), 지식(knowledge)의 순으로 고도화된다. 가공 전의 날것 수치인 재산 데이터에 약간의 설명을 붙여 접근성이 떨어지는 관보나 공보에 PDF 문서로 올려놓는 식은 “마지못해 공개한다”는 인상을 준다. 또 행정부 공무원은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국회의원은 국회공직자윤리위원회, 법관은 대법원공직자윤리위원회 등으로 기관별로 공개해 찾아보기 불편하다. 국민이 정말로 원하는 건 한곳에서 편안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알기 쉽고 유의미하게 가공된 2차 데이터다. 이런 게 국민 눈높이에 맞는 ‘디지털 플랫폼 정부’ 서비스다. 더 나아가 주식이나 코인과 같은 직접투자 외에도 의원들의 펀드 등 간접투자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때가 됐다. 미국에서는 인도와 무역협상 개시를 촉구하는 등 친인도 행보를 보인 스티브 데인스 상원의원(공화·몬태나)이 인도 주식에 투자하는 펀드에 10만 달러 이상을 투자한 게 알려지면서 의원들의 업종이나 국가에 특화된 펀드 투자도 감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국내에서도 방문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후보자가 2억 원 규모의 2차전지 벤처펀드를 보유한 것을 두고 야권에서 이해 상충 우려를 제기하기도 했다. 최근 금융감독원의 발표로 논란이 된 김상희 민주당 의원의 라임펀드 환매도 의원이 펀드 거래를 할 때마다 공개하게 했다면 4년이 지난 지금 뒤늦게 특혜 시비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올해 1월 금융계 신년 인사회에 참석해 “거시금융정책 책임자 4명이 ‘F4’를 이뤄 원팀 정신으로 위기 극복에 앞장서겠다”고 했다. ‘금융(Finance)’ 정책을 담당하는 자신과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등 4명을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등장한 꽃미남 4총사 ‘F(Flower) 4’에 빗댄 조어인 듯한데, 그들이 활동하고 있는 한국 금융시장의 현실은 드라마처럼 풋풋하거나 화사하지 않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다른 나라들은 긴축 과정을 거치며 가계부채 규모를 줄이거나 유지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집값 폭등을 통제하지 못한 한국은 역주행을 했다. 작년 4분기(10∼12월)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5%로 주요 43개국 중 세 번째로 높다. 민심은 지난 대선에서 경제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빚을 지게 만든 부동산 실정의 책임을 물었다. 그런데도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증가세가 꺾였던 가계부채가 올 2분기(4∼6월) 증가세로 전환했다. 올 들어 7개월간 은행권에서 주택담보대출(전세자금대출 포함)이 약 22조 원 불어났다. 과거보다 금리가 높은 상황에서 늘어난 대출이어서 경제에 미칠 독성은 더 심각하다. 검사 출신 금감원장을 빼면 모두 금융 베테랑들인 F4답지 않은 실책이다. 정부 기관의 대출 보증은 원래 신용이 낮은 중소기업이 돈을 빌리기 쉽게 지원하는 정책금융 성격이 강했다. 요즘은 주택 시장을 떠받치는 지지대로 변질되고 있다. 부동산 대출 보증은 공적보증 잔액(869조 원)의 약 80%를 차지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주택담보대출 외에 전세보증금을 빌려주는 전세자금대출이 늘어나더니 전세금을 못 돌려주는 주인을 위한 역전세대출까지 만들어졌다. 집 한 채를 놓고 세입자와 집주인이 정부 보증을 낀 ‘대출 돌려막기’를 하게 만든 셈이다. 정부는 부동산과 대출 규제를 조였다 풀었다 하면서 주택시장에 흥을 돋우는 ‘클럽 DJ’ 같은 역할을 했다. ‘부동산 시장 정상화’를 명분으로 1월 서울 강남 3구와 용산구를 제외한 부동산 투기 규제를 해제한 ‘1.3 대책’을 내놓고 9억 원 이하 주택에 대해 최대 5억 원까지 대출해주는 특례보금자리론을 풀었다. 검사 출신 금감원장은 은행 현장을 돌며 금리 인하까지 압박했다. 이렇게 풀린 대출이 서울 및 수도권 주택시장으로 흘러 들었다. 대출이 풀리고 집값이 다시 꿈틀거리면 소득으로 집값을 따라잡기 힘든 청년들이 동요할 수밖에 없다. 올해 상반기 전국 아파트 매매 건수의 31.3%가 30대 이하가 사들인 집이다. “특례보금자리론 등 정책금융이 가계대출 증가의 원인”이라는 비판에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그것도 안 하면 젊은 분들이 힘들어질 것”이라고 옹호했다. 거리에 나가 청년들에게 물어보라. 대출이 안 나와서 어려운 건지, 대출을 받지 않으면 사지 못할 정도로 무섭게 뛴 집값 때문에 더 걱정인지. 집값과 전세금이 2배 오르면 조혼인율(1000명당 혼인 건수)이 각각 0.33건, 0.19건 하락한다거나 집값이 10% 오르면 합계출산율이 0.2명 떨어진다는 분석도 있다. 무리하게 빚으로 떠받친 집값은 소비 위축과 금융시장 불안을 키우고 한국 경제의 미래마저 어둡게 한다. 중국 경제가 위기를 겪고 있는 것도 부동산 시장에 풀린 빚을 제때 통제하지 못한 후폭풍이다. 위기 땐 ‘원팀 정신’이 중요하지만 필요할 땐 목소리를 내야 집단사고(Groupthink)에 빠지지 않는다. 고삐가 풀리고 있는 가계빚 증가세를 잡지 못하면 금융 F4는 거품이 터질 때 가계부채를 방치한 ‘F(Failure·실패) 4’로 기억될 것이다. 전임자를 탓할 시기는 한참 지났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지난달 타계한 재즈의 거장 토니 베넷은 1963년 ‘아이 레프트 마이 하트 인 샌프란시스코(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로 올해의 레코드 상을 받았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베넷은 고독한 맨해튼보다 케이블카가 밤하늘의 별을 향하듯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서늘한 아침 안개가 가슴속에 스며드는 서부 해안의 샌프란시스코에 마음을 빼앗겼다. 말년에 알츠하이머로 투병했던 베넷은 그토록 사랑한 도시가 범죄와 마약의 온상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까. 미 실리콘밸리에서 살던 지인이 최근 한국을 다녀가면서 들려준 샌프란시스코 얘기는 듣고도 믿기 어려웠다. 해외 관광객이 늘고 있다지만, 도심 상점에선 좀도둑이 대낮에 보안요원이 보는 앞에서 물건을 훔쳐 당당하게 문을 나설 정도로 치안이 나빠졌다고 했다. 그는 “1000달러 미만 절도는 기소하지 않는 법이 생겨 좀도둑이 늘고 있다”며 “노숙자가 넘쳐나고 대놓고 마약을 거래하는 중독자들이 많아 가족과 함께 놀러 가기 겁난다”고 했다. 현지 언론의 지적도 다르지 않다. CNN은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약국 체인을 취재하는 30분간 3건의 절도를 목격했다고 보도했다. 매장은 상품을 진열한 선반에 자물쇠를 달고 음료수가 담긴 냉장고 문은 직원 도움 없이 열지 못하게 쇠사슬까지 묶어뒀다. 미국 대도시 중 필라델피아 다음으로 마약 관련 사망률도 높다. 공원에서 놀던 10개월 아이가 누군가 버린 펜타닐을 입에 넣었다가 생사를 오가는 비극이 벌어진다. 범죄와 경제는 상극이다. 미 서부의 금융 중심지인 샌프란시스코는 뉴욕, 일본 도쿄 다음으로 백만장자가 많다. 범죄가 무서워 상점과 백화점이 문을 닫고 부자와 중산층이 차례로 떠나면 도시엔 떠날 곳이 없는 가난한 이만 남는다. 부동산이 폭락하고 세수가 줄어 경찰 소방 등 도시 핵심 기능도 무너진다. 디트로이트와 뉴욕의 할렘 등 슬럼화된 도시들이 겪은 이 ‘파멸적 고리(doom loop)’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중산층과 젊은이들이 찾는 슈퍼인 홀푸드마켓은 샌프란시스코 거점 매장을 닫았다. 중심가인 유니언스퀘어의 고급 백화점 노드스트롬도 30여 년 만에 문을 닫는다. 미국의 도시학자인 제인 제이컵스는 “가게 주인들은 거리 안전의 직접적 이해당사자이자 감시자이며 관리인”이라고 말했다. 상점이 사라지면 거리는 더 위험해진다. 샌프란시스코는 민주당이 시장을 독식해온 ‘진보 도시’다. 히피 문화의 발상지이자 소수인종, 동성애 등을 포용하는 진보와 관용의 도시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범죄와 마약에 대한 지나친 관용, 주택 공급 부족 등의 실책이 이어지면서 빛을 잃어가고 있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등 진보적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았던 체사 부딘 샌프란시스코 검사장은 좀도둑과 마약 등에 온정적인 정책을 펴다가 지난해 주민소환 투표에서 쫓겨났다. 2018년 미 첫 흑인 여성 시장이 된 민주당 소속 런던 브리드 시장은 범죄 문제가 심각해지자 뒤늦게 경찰 예산을 증액했다. 시의 세수가 줄어 막대한 재정적자가 예상되는데도 시 의회는 노예제와 인종차별 피해 보상금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구당 500만 달러를 지급하는 ‘흑인 보상(Black reparation)’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최근 샌프란시스코 도심을 취재하다가 마약중독자의 공격을 받은 영국 언론사 텔레그래프 취재팀은 “샌프란시스코의 고난은 다른 지역이 이 같은 급진적인 진보 정책을 선택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경고”라고 전했다. ‘사회적 약자를 보듬어야 한다’는 진보 정치의 이상도 치안, 주거 등 시민이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생활 정치’에 실패하면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샌프란시스코엔 대지진, 닷컴버블, 글로벌 금융위기 등 위기마다 오뚝이처럼 일어섰던 80여만 명의 시민이 있다는 점이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계획과 관련해 “한국민들의 우려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밝혔다. 과학적 기술적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들은 일본 정부가 왜 원전 오염수를 태평양에 방류하려는지, 수산물은 안전한지 알지 못하니 걱정하는 게 당연하다. 한국인들이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건 국제기구 수장도 잘 알고 있다. 시민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풀어주는 건 전문성을 갖춘 과학자와 정부, 국제사회의 몫이다. 일본 정부는 방류 절차의 안정성을 설명할 의무가 있고, 원자력 전문가들이 포진한 IAEA는 일본 정부의 계획을 검증했다. 그로시 사무총장은 “국제기준, 과학적 기술적 측면에서 내부 이견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검증 결과를 자신했지만, 2박 3일 방한 기간 IAEA 검증 결과나 공신력을 공격하는 이들까지 설득할 순 없었다. 국민 건강은 작은 위험만 있어도 “100%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이럴 때 국제기준과 과학적 기술적 결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괴담’이 생겨난다. 괴담은 소문으로 끝나지 않을 때도 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건강에 대한 국민들의 합리적 의심을 악용해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공격하는 ‘킬러 괴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2018년 뉴욕타임스(NYT)는 1980년대 이후 구소련 당국 등이 유포한 수십 개의 허위 뉴스 사례를 분석하고 괴담에는 공통된 ‘각본(playbook)’이 있다는 점을 알아냈다. 괴담 공작의 첫 번째 단계는 건강, 성 정체성, 인종 등 사회적 갈등의 뇌관이 될 수 있는 민감한 이슈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런 다음 세상을 충격에 빠뜨릴 ‘거대한 거짓말(big bold lies)’을 꾸며낸다. 이 괴담을 ‘진실의 조각들’로 감싸 그럴듯하게 만들고 괴담을 대신 퍼뜨려줄 ‘유능한 바보(useful idiot)’를 찾아낸다. 구소련은 이런 식으로 ‘흑인과 동성애자를 싫어하는 미국 군부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바이러스를 만들어냈다’는 ‘AIDS 음모론’을 6년간 세계 80여 개국에 퍼뜨렸다. 이 보도를 기획한 애덤 엘릭 NYT 오피니언 동영상 책임 프로듀서를 5년 전 뉴욕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 광우병 사태가 ‘괴담 각본’에 포함된 ‘국민 건강’이라는 민감한 이슈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흥미로워했다. 2008년 광우병 시위, 2016년 사드 배치 논란의 출발점은 서로 달랐지만 ‘국민 건강이 위태롭다’는 극단적 시나리오의 종착역은 같았다. ‘광우병 소’ ‘전자파 참외’ 같은 먹거리 괴담은 공포를 실어 날랐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괴담은 결국 현실이라는 검증의 벽은 넘지 못했다. 미국산 쇠고기는 그때보다 더 많이 팔리고, 성주 참외는 올해 사상 최대 수출을 기대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괴담 논란’이 되풀이되는 건 국제기준, 과학적 기술적 결론을 믿고 따르는 ‘신뢰자본’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괴담을 걸러낼 공신력 있는 전문가집단, 독립위원회 등 사회적 여과장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야당 정치인과 민간단체들이 일본까지 날아가 오염수 방류의 위험성을 제기하더라도 과학적 기술적 근거와 국제적 기준에 따라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팻말과 구호만으로는 ‘국내 정치용 괴담’이라는 손가락질을 피하기 어렵다. 반복되는 ‘괴담 논란’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애꿎은 자영업자, 농민, 어민들의 피해로 이어진다. 괴담으로 이득을 보려는 세력에게 ‘한국은 흔들면 흔들리는 만만한 나라’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원전 오염수 방류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만큼 허약한 신뢰자본을 되살리는 일도 중요해졌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맷 필립스 전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는 2014년 미국 경제 계간지 ‘밀컨인스티튜트리뷰’에 ‘전세 따라잡기(Keeping up with Jeonse)’라는 제목으로 한국 특유의 전세 제도와 문제점을 소개했다. 그는 “서울로 이사할 계획을 세우지 마라. 아파트를 빌리려면 평균적으로 30만 달러에 상당하는 돈(전세보증금)을 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도 가계부채가 많지만, 한국인들은 그들과 달리 집을 사기 위해 돈을 빌리지 않는다. 집을 빌리기 위해 돈을 빌린다”고 꼬집었다. 지금 들어도 따끔한 충고다. 전세는 원래 은행 문턱이 높던 때 집주인이 부족한 자금을 세입자 보증금으로 충당하는 사적금융 형태로 출발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은행들이 가계대출을 확대하고, 정부가 주거 안정을 명분으로 전세자금 대출을 풀면서 세입자가 돈을 빌려 다시 집주인에게 빌려주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비정상적인 전세시장이 형성됐다. 정부가 푼 전세대출은 전세금을 밀어 올렸다. 전셋값이 올라 투자 비용이 줄면 ‘갭(매매가와 전세가의 차이) 투자’ 유인이 커진다. 집값이 다시 상승하고 전세금과 전세대출이 늘어나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문재인 정부가 2020년 계약갱신요구권, 전월세상한제 등이 담긴 ‘임대차 3법’을 도입한 뒤 전세금이 단기 급등하며 2022년 7월 정점을 찍기 전까지 이런 일이 되풀이됐다. 이렇게 불어난 전세보증금이 지난해 말 기준 1000조 원을 넘어선 걸로 추정된다. 문제는 돈을 빌리는 사람(세입자)과 이 돈을 가져다가 투자하는 사람(집주인)이 서로 달라 도덕적 해이와 정보 불균형에 따른 전세 사고를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외환위기, 2002년 신용카드 사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마다 집값과 전세금이 떨어지면 다음 세입자를 받아 기존 세입자의 보증금을 다 돌려주지 못하는 ‘역전세’나 집값이 전세금보다 더 떨어지는 ‘깡통전세’, 전세 사기 등이 반복됐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최근 역전세 문제를 연일 거론하는 건 오래된 한국 전세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방치하다가 뒤늦게 비상벨을 울리는 격이다. 정부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집주인들이 대출을 더 받아 보증금을 돌려줄 수 있게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이는 집주인들이 책임져야 할 전세금 상환을 정부가 대출로 지원해 주는 셈이다. 정부가 전세대출을 풀어 전세금을 밀어 올리고 갭투자에 일조하더니, 이제는 갭투자를 한 집주인의 위험까지 줄여줘 ‘무위험 갭투자’를 만들어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미 집을 팔거나 다른 자산으로 모자란 보증금을 채워 돌려준 집주인과도 형평성에서 어긋난다. 자칫 보증금 상환 대출이 또 다른 갭투자의 종잣돈으로 쓰이거나 다음에 들어올 세입자의 보증금 상환 가능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세입자 피해를 막기 위해 보증금 상환 대출 한도를 늘려주더라도 먼저 집주인의 보증금 상환 능력을 엄격히 심사하고 지원 대상과 지원 기간을 제한해야 한다. 부동산 호황기에 전세금을 올려 받아 자본 수익과 소득 수익을 올리다가 집값이 떨어질 때 그 손실을 세입자와 사회에 전가하는 갭투자 집주인들에겐 응분의 대가도 요구해야 “전세 끼고 집 사도 문제없다”는 도덕적 해이를 막는다. 근본적으로 돈을 빌려 집을 빌리는 형태의 비정상적 전세시장을 정상화해야 한다. 전세대출에도 대출 한도 규제를 적용하고 전세금 비율이 높은 주택은 전세대출을 제한해 전세대출을 이용한 ‘무위험 갭투자’를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다. 전세대책을 주거 지원에서 부채 관리 관점으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외신에 ‘역전세(Yeok-Jeonse)’라는 한국어가 자주 등장할 날도 머지않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한국에 코인 투자 논란으로 탈당까지 한 김남국 의원이 있다면, 미국엔 코인 스캔들로 추락한 매디슨 코손 전 공화당 하원의원(노스캐롤라이나)이 있다. 김 의원은 1982년생, 코손 의원은 1995년생으로 둘 다 젊다. 거액의 코인을 보유한 ‘코인 고래’였고 실체가 불분명한 잡코인에 손을 댔다가 의회의 윤리 심판대에 오른 점도 닮았다. 미 하원 윤리위원회가 내놓은 81쪽짜리 보고서에 따르면 코손 의원은 2021년 12월 21일 15만 달러를 투자해 미국 최대 자동차 경주대회인 나스카(NASCAR) 우승자 브랜던 브라운 이름을 딴 밈코인(농담이나 유행어 등에서 착안해 만들어진 코인)인 ‘LGB(Let’s go, Brandon)’ 1800억 개를 매입했다. 당시 ‘Let’s go, Brandon’이라는 표현이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을 공격하는 ‘밈’으로 유행했다. 코손 의원은 자신이 투자한 코인을 동영상 등을 통해 홍보까지 했다. 코손 의원이 투자하고 9일 뒤 LGB코인 측은 “2022년 나스카 시즌에 브랜던 브라운을 후원한다”고 발표했고, 코인 가격은 치솟았다. 코손 의원은 다음 날 보유 중인 코인 일부를 매각해 현금을 회수했다. 나스카 측은 일주일도 안 돼 LGB코인의 후원 계획을 거부했다. 코인 가치는 급락해 결국 휴지 조각이 됐다. 윤리위는 이 과정에서 코손 의원이 금전적 이득을 얻어 이해충돌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보고서는 “코손 의원의 암호화폐 매입 조건이 일반인보다 더 관대했고 이는 부적절한 선물”이라며 선물의 가치에 해당하는 1만4000달러를 기부하게 했다. 1990년대생 최초로 하원에 입성한 코손 의원은 코인 스캔들과 의원답지 못한 언행을 일삼다가 지난해 중간선거를 앞두고 당내 경선에서도 떨어졌다. 미국에서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무렵 의원들이 행정부 고위 관료들과 회의에 참석한 뒤 내부정보를 이용해 주식 투자를 했다는 의혹이 CBS 탐사보도로 드러났다. 이 결과 의원들의 주식 거래 내역을 45일 이내에 온라인에 공개하는 내용이 포함된 ‘스톡법(STOCK Act·Stop Trading on Congressional Knowledge Act)’이 2012년 통과됐다. 2018년엔 코인도 추가됐다. 코손 의원도 LGB코인 거래를 늦게 공개하는 바람에 1000달러를 물어야 했다. 김남국 의원이 미 의원이었다면 2021년 1월 LG디스플레이 주식 9억8000만 원어치를 매각하고 45일 이내에 공개했어야 한다. 그 돈으로 코인을 매입해도 마찬가지다. 그랬다면 그가 그해 7월 가상자산 과세를 미뤄주는 소득세법 개정안을 공동 발의할 때 곧장 이해충돌 논란이 일었을 것이다. 나중에 ‘입법 로비’ 의혹이 제기된 ‘P2E(Play to Earn·돈 버는 게임)’ 코인을 여러 차례 매입했을 때도 내부거래와 이해충돌 감시망에 포착됐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최근 ‘김남국 방지법’(국회법 개정안,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의원들이 보유한 가상화폐를 주식처럼 국회 윤리심사자문위원회에 등록하게 하자는 거다. 하지만 국회법 개정안의 핵심인 ‘사적이해관계 등록’ 조항(32조2)이 국회를 통과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주식 등을 등록하고 공개하는 구체적 절차를 담은 국회 규칙이 아직 마련되지 않아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그래 놓고 이번에 김남국 방지법이라며 코인을 하나 얹었다. 그러니 ‘소나기만 피하고 보자’는 식의 면피 대책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여야 의원들이 자정 의지가 있다면 하루빨리 국회 규칙을 제정하고, 의원들이 주식이나 코인을 백지신탁하지 않는다면 미국처럼 거래 내역을 온라인에 그때그때 공개하게 하는 한국판 ‘스톡법’을 시행해야 한다. 지금도 많이 늦었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대기업 임원 A 씨는 올해 하반기(7∼12월)로 예정된 유럽 국가의 프로젝트 입찰 소식을 듣고 당황했다. ‘탄소중립(온실가스 배출이 사실상 제로가 되는 상태)을 선언한 기업만 입찰할 수 있다’는 특별한 조건이 달렸기 때문이다. 또 다른 유럽계 회사는 납품 조건으로 ‘RE100’(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글로벌 캠페인) 참가를 요구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이 ‘시장의 룰’을 바꾸면서 탄소 배출이 많은 기업이 수출과 입찰 경쟁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연합(EU)은 올해 10월 탄소 배출량이 많은 기업들에 부담을 지우는 ‘탄소국경조정제(CBAM)’를 시범 운영한다. 2026년 이 제도가 본격 시행되면 한국 주력 수출품인 철강이 직격탄을 맞는다. 유럽이 측정하려는 탄소 배출량에는 생산 과정에서 쓰인 열과 전력에서 발생한 ‘간접 배출량’까지 포함된다. 한국의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의 경우 약 70∼75%가 간접 배출이다. 탄소무역 장벽이 확대되면 한국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와 같은 반도체 기업도 안심할 수 없다. 삼성전자가 경기 용인에 20년간 300조 원을 투자해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를 짓기로 했지만, 24시간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전력 인프라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충남 당진 화력발전소 총발전량(6GW)을 끌어와도 부족한 판인데 EU의 간접 배출 기준과 RE100 목표를 달성하려면 해상풍력,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로 남부 지역에서 생산한 전기를 멀리서 끌어와야 한다. 문제는 전기를 실어 나를 고압송전선로다. 한국전력은 8일 해상을 통해 호남 지역 등의 잉여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는 초고압직류송전(HVDC) 기간망을 구축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하지만 전기요금을 묶어두는 바람에 지난해 32조 원의 적자를 내고 올해도 약 9조 원의 적자가 예상되는 한전이 ‘전기 고속도로’에 투자할 여력은 별로 없다. 여차하면 기업이 반도체 공장도 짓고 전력을 끌어오기 위한 고압송전선로까지 깔아야 할 판이다. 미국 등 경쟁국가는 세금을 깎아주고 보조금을 주면서 기업을 유치하는데 한국에선 공장도 짓고 전기도 직접 끌어와야 한다면 투자할 기업이 거의 없다. ‘탈탄소’는 정부의 일방적 의지나 몇몇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 문재인 정부는 무리하게 ‘탈원전’을 추진하면서 재생에너지 비중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전기요금을 묶어두고 인구와 공장이 밀집한 수도권과 해상풍력, 태양광 시설이 밀집한 남부 지역 간 전력 불균형을 방치하는 바람에 국가적 비효율을 키웠다. 수도권의 경우 전력 소비량이 발전량의 약 1.4배지만 그 밖의 지역은 발전량이 더 많다. 수요가 공급보다 많다면 가격이 올라가야 하지만 수도권이나 지방이나 전기요금은 동일하니 전력 소비량이 큰 인터넷데이터센터(IDC)가 수도권에 몰리는 게 현실이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원자력 발전 등 효율적인 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하고 저렴한 산업용 전기를 공급해 수출 기업들을 키웠기 때문이다. ‘탄소중립 경제’ 시대의 과제는 청정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해 탄소 배출이 줄어도 성장할 수 있는 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전기요금을 찔끔 올리거나 한전 자구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청정에너지 등 미래산업과 떼어내 접근하기도 어렵다. 미국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만들어 에너지 안보와 청정에너지 산업 육성을 위한 10년간의 밑그림을 제시한 것처럼 미래산업과 일자리의 관점에서 ‘탄소중립 경제’의 큰 그림을 그리는 ‘한국형 IRA’를 고민해 볼 때가 됐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9일 우에다 가즈오(植田和男) 일본은행 총재가 취임하면서 무제한 돈 풀기로 일본 경제를 장기 침체에서 구해내겠다는 ‘아베노믹스’의 주역들이 사실상 모두 퇴장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의 경제 비전인 아베노믹스 10년의 공과에 대한 평가도 본격화하고 있다. 끝물 분위기인 ‘아베노믹스’는 10년 전엔 초유의 금융 실험이자 정치적 모험이었다. 2012년 12월 일본 중의원 총선에서 자민당은 ‘물가 목표 달성을 위해 대담한 금융완화를 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승리했다. 경기 침체에 지친 민심을 등에 업은 아베 총리는 “윤전기를 쌩쌩 돌려 돈을 찍어내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일본은행을 압박해 2013년 1월 ‘디플레이션 탈출과 지속적 경제 성장 실현을 위한 정책협력’이라는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의 정치적 타협이었고, 아베노믹스의 서막이었다. 공동성명의 당사자였던 시라카와 마사아키(白川方明) 전 일본은행 총재는 올해 1월 일본 경제전문지 ‘동양경제’ 기고문에서 “10년 전 일본 사회는 ‘2% 물가목표’나 ‘과감한 금융완화 요구’가 휩쓸었다”며 “1980년대 후반 거품경제나 1990년대 초반 금융위기 전야 때처럼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는 시대 분위기가 지배했다”고 전했다. 돈을 풀어 물가를 끌어올리고 경기를 살린다는 아베노믹스 처방에 매료된 정치와 여론은 세계화나 정보기술(IT) 발달, 임금 하락, 인구구조 변화 등 금융 외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나 저출산 고령화 같은 근본 대책을 요구하는 주장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집단 사고와 정치적 타협은 후유증을 남긴다. 10년간 돈 풀기에도 일본 경제가 2% 이상 성장한 건 2번뿐이다. 물가도 최근 세계적 인플레와 다른 나라 금리 상승으로 엔화 가치가 하락하기 전까지는 기대만큼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래 세대에 전가될 청구서는 두툼해졌다. 일반 정부부채 비율은 2012년 말 226%에서 2021년 말 262%로 뛰었다. 경제의 기초체력은 여전히 부실하다. 일본의 잠재 성장률은 0.7%에 그쳤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일본 경제의 당면 과제는 잠재성장률 저하를 막고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것”이라며 “일본은 이를 배우기 위해 20년 이상 꽤 오랜 시간을 썼다. 민주주의의 비용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 큰 비용”이라고 아쉬워했다. 경기 침체 위험에 직면한 한국 경제 앞에도 내년 4월 총선이라는 정치적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여야가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의 문턱을 낮추는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기준 완화에 합심하면서도 ‘돈 풀기’를 막는 보루인 재정준칙 법제화를 30개월째 미루고 있다는 건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다.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등 미래 세대가 쓸 돈을 가불해 표를 얻으려는 정치권의 ‘표퓰리즘’ 요구도 더 거세질 것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여론의 기적이 필요하다”며 재정준칙 법제화를 뭉개고 있는 여야의 ‘포퓰리즘 협치’를 막아달라고 하소연했지만, 그 역시 내년 총선 출마가 점쳐진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 필요한 근본 대책은 고통을 수반해 인기가 없는 데다 효과를 실감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려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는 금융완화가 선택된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미래를 생각하면 사회가 장기적으로 금융완화에 의존하는 것을 방지하는 메커니즘 구축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만의 고민은 아니다. 미래 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는 선거철 ‘민주주의 비용’을 최소화하려면 정말로 ‘여론의 기적’이 필요하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지난 주말 오후 서울시청 광장 근처 횡단보도 앞에서 외국인 단체 관광객을 우연히 만났다. 이날 주변 도로에서는 각종 시위로 차량들이 거북운행을 했다. 경찰이 교통을 통제했고, 횡단보도 빨간불도 한참 만에 바뀌었다. 한 외국인 관광객은 답답한 듯 가이드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가이드는 “토요일(Every Saturday)마다 시위가 있다”며 “Every Saturday”를 한 번 더 강조했다. 주말마다 시위가 되풀이되는 서울. 외국인이 느끼는 첫인상이다. 언제부터인가 토요일 서울 도심은 평범한 시민의 것이 아니다. 남대문부터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세종대로 주변은 ‘퇴진’ ‘구속’ 등과 같은 정치 구호가 적힌 현수막, 각종 단체의 깃발이 나부낀다. 그 단체가 그 단체들이다. 시민들은 인도를 이들에게 내주고 길가로 밀려난다. 특정인에 대한 비방과 음모론으로 가득찬 현수막을 지날 때는 아이들 눈을 가려야 한다. 시위는 자신들의 주장을 널리 알리는 일인데 시민들이 눈을 가려야 할 정도면 무슨 소용인가. 시위가 시작되면 ‘소음 경쟁’이 벌어진다. 집회 주최 측은 대형 공연장에서 봄 직한 전광판과 무대를 설치하고 크레인으로 대형 스피커를 공중으로 끌어올려 귀청이 찢어지도록 철 지난 운동권 노래나 군가를 틀어댄다. 광화문과 남대문 양쪽에서 서로 다른 단체가 시위를 하면 중간에 낀 시민들은 귀를 막고 걸어야 할 정도로 시끄럽다. 시위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널리 전하기 위한 것인데 시민들이 귀를 막고 걷는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시민들이 눈과 귀를 막게 하는 ‘민폐시위’ 문화를 바꾸려면 주최 측부터 시민 친화적 시위를 더 고민해야 한다. 2020년 6월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BLM’(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시위를 취재하면서 시민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 울림을 갖는지 실감했다. 휴대용 확성기를 든 한 시민이 구호를 외치면 다른 시민들이 그의 마이크가 돼 한목소리로 따라 외쳤다. 함께 걷고 구호를 외치며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대형 스피커가 없어도 거리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뉴욕에선 공공기관 비리를 비판하는 시위에 ‘부패’를 상징하는 쥐 모양의 대형 풍선 모형이 등장한다. 소음 대신 상징물을 통한 시각적 자극으로 주위를 환기하는 시위 방식이다. 당국은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되 소수가 거리를 독점하고 시민을 밀어내지 않도록 관리할 책임이 있다. 평균 소음을 측정해 단속하는 방식으로 소음시위를 근절하기 어렵다면 유럽처럼 실시간 소음측정기를 설치하고 소음이 기준치를 넘는 시간에 비례해 벌금을 내게 해 주최 측에 책임을 철저히 물어야 한다. 정치권도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럽다”는 말로 넘어가거나 민폐시위에 어물쩍 편승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가 역할을 다했다면 애초 각종 단체들이 거리로 나올 일도 없었다. 국회의원 수를 늘리거나 세비를 올리는 데 정신을 쏟을 게 아니라 의사당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특정 세력이 거리와 광장을 장악하고 제 목소리만 높이면 사회 구성원 간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자본은 약해진다. 영국 싱크탱크 레가툼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적 자본 수준은 조사대상 167개국 중 107위다. ‘사회적 자본 후진국’은 같은 자본과 노동력을 투입해도 선진국에 비해 경제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뉴욕 맨해튼대로는 시민 축제나 순직 경관 및 소방관 장례식 등 공동체를 위한 행사를 위해 차단된다. 특정 세력과 이익집단이 시민을 밀어내고 도심을 점거하는 일이 반복되진 않는다. 우리도 이젠 시민에게 ‘도심의 봄’을 돌려줄 때가 됐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금융회사 본부장급 간부 A 씨는 기획재정부(재정경제부) 출신 퇴직 관료들(김낙회 변양호 이석준 임종룡 최상목)이 2년 전 내놓은 책 ‘경제정책 어젠다 2022’를 찾아 읽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금융회사나 KT 등 소유분산 기업의 지배구조 문제를 언급한 뒤 주위에서 일독을 권했다. 저자 중 최상목 전 기재부 제1차관은 윤석열 정부에서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됐다. 이석준 전 기재부 제2차관은 NH농협금융지주 회장에 취임했다.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은 얼마 전 우리금융 회장에 내정됐으니 무시하기 어려운 책이다. 내용 중엔 한국 경제의 ‘3대 과제’ 중 하나로 ‘공정한 경쟁 환경 조성―기업 지배구조 혁신을 위한 제도 개편 방안’까지 들어 있다. A 씨가 이 책을 집어 든 건 ‘관치 경제’에서 터득한 민간의 ‘생존 본능’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사석에서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 연임 개입 논란과 관련해 “우린 비토(거부권)는 해도 추천은 하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퇴짜만 놓아도 임원 인사, 신규 채용과 투자 등이 ‘올스톱’되고 불확실성이 커지는 게 기업 경영이다. ‘윤심’이니 ‘명심’이니 따지는 후진적 정당 지배구조로 지탄을 받고 있는 정치인들이 기업 지배구조엔 ‘그들만의 리그’니 ‘이권 카르텔’이니 입바른 말을 하면 앞에서 굽신거려도 뒤돌아서 비웃는 게 저잣거리 민심이다. 퇴직 관료나 정치인이 기업이나 금융사 CEO로 가더라도 실력과 리더십이 있다면 출신을 따지는 건 촌스럽다. 하지만 중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관에서 민으로만 흐르는 일방통행식 인사라면 불공정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와도 거리가 있다. 벤처기업인 출신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빼면 대부분의 장관이 정치인, 관료, 학자로 구성된 ‘정·관·학’ 출신이다. 한국의 엄격한 공직 기준을 통과할 정도로 자기관리가 잘돼 있는 기업인이 별로 없다손 쳐도 전문성과 도덕성을 겸비한 민간 인재를 발탁할 시스템이나 의지가 있다면 못 할 일도 아니다. 미국은 민간기업이나 금융회사 CEO로 경험을 쌓고 재무장관이나 상무장관이 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으로 일한 스티브 므누신은 골드만삭스, 상무장관으로 일한 윌버 로스는 로스차일드은행 출신 기업인이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일한 행크 폴슨, 민주당인 빌 클린턴 대통령이 지명한 로버트 루빈까지 골드만삭스 출신 재무장관만 3명이다. 오히려 너무 쏠려서 탈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도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최초 여성 의장을 지낸 재닛 옐런을 재무장관에 발탁했다.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은 로스쿨을 졸업하고 로드아일랜드 최초 벤처캐피털 회사의 공동 창업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윤 대통령은 1년 전 대선 다음 날인 3월 10일 국회 대국민 인사에서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중심의 경제로 전환하겠다”고 했지만, 요즘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나”라며 의심하는 이들이 꽤 있다. 정부가 해답을 갖고 있지 않은 기업 지배구조나 금리 등 시장 가격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입김을 세게 불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 정부 눈치를 살피고 모든 일이 관을 통해야만 해결되는 ‘만사관통’ 사회에선 관은 상전이고 민간은 늘 뒷전이다. 윤 대통령이 약속한 민간이 끌고 정부가 미는 ‘민간 중심 경제’도 오지 않는다. 기업인이 정부보다 시장을 먼저 바라보고, 실력으로 민관 전문가가 물 흐르듯 교류할 수 있어야 ‘관치’니 ‘낙하산 인사’니 하는 말이 사라진다. 정부 우위의 ‘기울어진 운동장’도 비로소 평평해질 것이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13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은행의 돈 잔치’로 국민들이 위화감이 생기지 않도록 금융위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은행이 번 돈을 성과급이나 배당으로만 쓰지 말고 소비자들의 금리 부담을 완화하고 금융시장 불안을 대비해 손실 흡수 능력을 확충하는 데 쓰라는 주문이다. 은행들이 “손쉬운 이자 장사로 막대한 돈을 번다”는 인식은 틀리지 않는다. 국내 은행의 이자수익 비중은 90%에 육박한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국내 은행은 지난해 18조9000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전년보다 2조 원 많다. 지난해 금리 급등기에 이자로 짭짤한 재미를 본 셈이다. 하지만 은행의 이자 장사를 위한 ‘게임의 규칙’을 정한 건 금융당국이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은행은 과점적 형태로, 여수신 차익 등 영업익을 얻는 것에 대해 특권적 지위를 주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인허가와 규제를 거머쥔 당국은 은행들엔 ‘저승사자’나 다름없다. 2021년 금융당국이 과열된 부동산 시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은행 대출을 제한하자, 고금리를 약속하고 예금을 잔뜩 끌어모았던 신생 인터넷은행 토스뱅크는 이자 장사를 하지 못해 위기를 겪었다. 은행 이자이익이 급증한 건 한국은행이 지난해부터 올해 1월까지 기준금리를 8번 올렸기 때문이다. 기준금리가 연 1.0%에서 연 3.5%로 단기 급등하는 과정에서 예금금리보다 대출금리가 더 빨리 올라 은행들은 손쉽게 돈방석에 앉았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예대금리 차이는 지난해 1월 2.24%포인트에서 12월엔 2.55%포인트로 벌어졌다. 은행의 이자 장사가 걱정이라면 예금금리와 대출금리의 시차를 초래하는 금리 산정 체계의 구조적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금융당국은 지난해 10월 가산금리 산정 체계를 정비한다며 부랴부랴 대책을 내놨다. 대통령실은 은행 이자수익 확대에 대한 대책으로 지난해 7월 당국이 내놓은 예대금리 차 비교공시 제도도 소개했다. 그러면서 은행권 신규 예대금리 차가 2022년 1월 1.80%포인트에서 지난해 12월 1.34%포인트로 줄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비교공시 제도의 효과인지는 분명치 않다. 오히려 비교공시 제도가 경쟁자의 진입이 제한된 시장에선 합법적인 금리 담합 장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형마트의 최저가격 보상제가 치열한 가격 경쟁으로 이어질 것 같지만 실상은 서로 가격 경쟁을 피하게 하는 경쟁 억제 장치로 작용하는 역설과 비슷하다. 군기 잡기는 그때뿐이다. 은행의 돈 잔치가 마뜩잖으면 금리 인상기에 큰돈을 벌지 못하도록 시장 환경을 구조적으로 바꾸는 게 근본 해법이다. 은행이 예금금리를 더 높게 주고, 대출금리를 더 낮게 받으면 이자수익은 자연스럽게 준다. 시장 진입장벽을 낮춰 기존 은행의 특권적 지위를 낮추고 과점적 시장을 경쟁 체제로 바꾸면 은행들이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예금이자는 높아지고, 대출이자는 낮아질 것이다. 하지만 은행 진입장벽은 아직도 높다. 오히려 당국은 지난해 하반기에 ‘레고랜드 사태’로 회사채 시장이 경색되자 은행들에 수신금리 경쟁 자제를 요청하는 역주행을 했다. 예금이자는 뚝 떨어졌고, 예금자의 불만은 고조됐다. 은행들은 덕분에 이자 장사를 할 기회를 또 얻었다. 정부에 정책이 있다면 시장엔 대책이 있다. 얼핏 시장 실패처럼 보이는 일도 따지고 보면 정부 실패가 원인일 때가 많다. 정부가 스스로에 관대하고 시장에 엄격하면 개혁에 대한 공감과 지지는 떨어진다. 시장에선 “은행 다음 차례는 또 다른 규제산업인 통신사”라는 말이 나온다. 언제까지 시장 탓만 할 건가.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세계 곳곳에서 ‘집값 호러쇼(house-price horror show)’가 벌어지고 있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가파르게 올리자 미국 뉴욕부터 대한민국 서울까지 집값이 추락하고 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집값 호러쇼에 따른 고통 강도가 최근 집값 상승 폭, 소득 대비 가계부채, 금리 인상 반영 속도 등 3가지에 달려 있다고 진단했다. 이 기준만 놓고 보면 한국은 혹독한 ‘집값 호러쇼’가 연출될 가능성이 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해 10월 서울의 가구소득 대비 주택가격비율(PIR)이 “현재 18인데, 금융위기 직전(8배)보다 높다”고 우려했다. 그만큼 소득보다 집값이 가파르게 올랐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는 106%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빠르게 집값이 오르는 동안 ‘빚으로 만든 집’이 수두룩하다. 미국은 주택담보대출이 30년 만기 고정금리가 대부분이지만 우리는 변동금리 비중이 77.9%다. 기준금리가 오르면 대출 금리도 동반 상승해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 집주인들은 불어난 이자 부담에 밤잠을 설쳐야 한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고도 가계부채 관리에 다시 실패해 집값 호러쇼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그런데도 그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전 정부 인사들은 자기 보호를 위한 ‘세력화’에 급급하고, 물가를 잡으려고 금리를 올리는 판에 야당은 또 돈을 풀어야 한다며 무책임한 정치 공세를 펼치고 있다. 권력을 넘겨받은 여당과 실상을 아는 관료집단은 빚으로 지탱하고 있는 주택시장이 임기 내 무너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규제를 풀고 또 ‘부동산 거품기’를 돌리고 있다. 둔촌주공 재건축 아파트(올림픽파크포레온) 미분양 우려가 커지자, 정부는 중도금 대출 규제와 전매 제한 완화, 실거주 요건 폐지 등을 핵심으로 하는 ‘1·3 부동산 대책’을 급히 내놨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빚을 내서 집 사라는 게 아니다”라고 했지만 시장은 ‘당첨자들이 돈이 모자라면 은행 대출을 받아 중도금을 내고, 잔금은 세입자가 가져온 보증금으로 치르고, 그마저 부담이 되면 1년 있다가 집을 팔아도 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정부의 파격적 규제 완화에도 둔촌주공 당첨자의 약 30%가 계약을 포기한 건 분양가가 너무 비싸고 부동산 시장 침체의 골이 더 깊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실수요자가 적지 않다는 뜻이다. 규제 완화 기대감에 집주인들이 매물을 거두고, 대출을 받아 집을 살 수밖에 없는 실수요자들은 집값이 더 떨어지길 기다리며 매수를 미루면 거래는 끊긴다. 공인중개사 수입도 사라지고, 이삿짐센터나 인테리어 가게는 할 일이 없어진다. 가구나 가전제품도 팔리지 않는다. 소비는 더 가라앉는다. 이자 부담이 커진 대출자를 지원하는 ‘핀셋 대책’과 급격한 집값 하락을 막는 연착륙 대책이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지나치면 독이 된다. 규제를 성급하게 풀고 다주택자 투기 수요를 끌어들여 억지로 집값을 떠받치면 경착륙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나 경기 침체와 가계 부채의 늪을 더 깊게 만들 수도 있다. 금융위기 때는 집값 하락이 금융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질 뻔했다. 현재는 은행들의 건전성이 훨씬 나아졌다. 금융 안정이라는 나무만 보다가 경기 침체라는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는 피해야 한다. 집값이 급락하면 부실 건설사나 금융사가 쓰러지는 고통이 따르지만 옥석 가리기가 끝나면 대기 중인 실수요가 유입돼 거래가 살아나고 시장이 단기 회복될 여지도 생긴다. ‘나 때는 안 돼’라며 부실 투자자들에 대한 구조조정을 또 미루고 규제를 풀어 억지로 집값만 떠받치려고 들다간 ‘집값 호러쇼’의 공동 연출자라는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2010년 비정부기구(NGO) 취재를 하려고 일본을 방문했다가 생각지도 못한 ‘한국 칭찬’을 들었다. 고베(神戶)시의 한 비영리단체(NPO) 관계자는 “일하는 사람들이 자원봉사자나 은퇴자들이어서 속도를 내서 일하기 어렵다”며 “젊은 상근활동가가 많은 한국 단체들의 추진력이 부럽다”고 말했다. 곱씹어 볼수록 칭찬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소수 상근활동가가 주도하는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 성과를 빨리 낸다고 해서 더디더라도 시민의 힘으로 가는 일본보다 더 낫다고 할 순 없다. 시민의 지지와 후원이 없으면 결국 동력이 떨어지고 감시 대상인 정부나 기업에 손을 벌려야 한다. 10여 년이 흘러 일본인의 어색한 ‘한국 칭찬’이 떠오른 건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다. 한국의 간판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회원 수는 2010년 1만2000여 명에서 11년간 1000여 명이 늘었다. 거긴 그나마 낫다. 시민 참여가 저조한 곳은 정부 의존이 커진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지난 7년간 비영리 민간단체에 정부 보조금 31조4000억 원이 들어갔다. 목적과 달리 세금을 유용한 곳도 드러났다. NGO가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지나치면 독립성이 훼손된다. 1980년대 이후 국제사회에선 정부 지원을 받고 친정부 활동을 하는 무늬만 비정부기구를 ‘곤고(GONGO·Government Organized NGO)’라고 부르며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 국제 환경단체인 그린피스는 정부나 기업 후원을 받지 않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원칙을 갖고 있다. 국제 의료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국경 없는 의사회’는 각국 정부의 지원을 전체 재원의 20% 미만으로 제한한다. 멸종위기 동물 보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세계자연기금(WWF)의 재원 중 정부 보조금은 10% 미만이다. 한국에서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회비와 후원을 주된 재원으로 할 때 건강하게 생존할 수 있다’며 정부 지원금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참여연대도 ‘불필요한 논란의 소지를 아예 없애기 위해, 1998년 이후 정부로부터 그 어떠한 재정 지원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실의 보조금 관리 강화 방침에 대해서는 “국고보조금을 지렛대 삼은 시민사회 ‘좌우 갈라치기’”라며 반발했다. 나랏돈 무서운 걸 잘 알면서도 정치적 해석으로 앞뒤 안 맞는 성명을 내놓았다. NGO가 시민보다 정부에 의존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갈라치기 논란’은 되풀이된다. 시민 참여 확대 해법 역시 정부가 아닌 시민사회가 내놔야 한다. 시민단체들이 정치 외교 국방 경제 사회 문제부터 기업 지배구조까지 수많은 논평과 성명을 내놓지만, 시민들은 누가 어떤 논의 과정을 거쳐 이런 내용을 내놓는지 잘 모른다. 의사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으면 이해관계자나 정치적으로 편향된 인물이 개입해도 알 수 없다. 직업적 상근활동가들이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며 국회로 향하거나 감시 대상인 권력기관, 공공기관에 입성하면 시민들은 시민운동이 사유화, 권력화, 정치화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회원은 몇 명이며 재원을 어떻게 마련해 어디에 쓰는지도 제대로 알리지 않는 ‘깜깜이 단체’도 많다. 그러면 시민들이 참여하기 어렵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가 소개한 것처럼 무늬만 NGO를 가려내기 위해 금융시장의 민간 신용평가사처럼 단체들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하는 독립적인 ‘NGO평가기관’이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다. 단체는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시민의 지지는 아무나 가질 수 없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공식석상에서 말을 아끼던 역대 총재와 다르다. 통화정책 고려 요인으로 환율 안정, 부동산 시장 연착륙 등 정부가 신경 쓰는 거시경제 변수를 언급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주재한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 브리핑에서도 기자들의 질문이 그에게 쏟아진다.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 경제 관료들과도 말이 통한다. 한은 안팎에선 그런 그를 두고 “중앙은행 총재보다 ‘통화정책부 장관’ 같다”고 말한다. 김주현 금융위원장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요즘 은행가에서 ‘금리위원장’ ‘금리감독원장’으로 불린다. 시중금리 개입성 발언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24일 한은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렸을 때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금융권의 과도한 자금 확보 경쟁이 금융시장 안정에 교란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수신 경쟁 자제를 주문했다. 다음 날 이복현 금감원장은 “수신금리 과당 경쟁에 따른 자금 쏠림이 최소화되도록 관리해 달라”고 했다. 당국의 잇단 경고 이후 시중은행에서 5%대 정기예금은 약속이나 한 듯이 사라졌다. 금융거래의 기본인 기준금리는 1년에 8번 열리는 한은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결정된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리면 ‘단기금리-장기금리-예금, 대출금리’가 오르고 시중에 풀린 통화량이 줄어 과열된 경기가 진정되는 효과가 생긴다. 한데 금융당국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하면 한은이 금리를 올려도 시중금리가 내리고 통화정책 경로가 뒤틀린다. 금융당국은 대출금리 상승을 억제하고 은행권으로 돈이 쏠리는 시장 실패를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항변하나 금리 상승과 자금 쏠림 현상이 순전히 시장 탓은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가장 영향을 준 책’으로 꼽은 ‘선택의 자유’를 저술한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경고처럼 시장 실패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가격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인위적 제약(정부 실패)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11월까지 석 달간 5대 시중은행 정기예금에 100조 원 가까운 돈이 몰린 건 한은이 뒤늦게 금리를 급하게 끌어올린 책임이 크다. 한은은 올해 사상 처음으로 6연속 기준금리를 올렸다. 7월과 10월엔 두 차례 ‘빅스텝(0.5%포인트 인상)’을 밟았다. 기업 자금시장 경색은 당국 책임이 무겁다. 채권시장에선 공공채, 은행채, 우량 회사채 등의 순으로 소화된다. 지난 정부에서 전기요금을 묶어두는 바람에 경영난을 겪고 있는 한국전력이 한전채를 대거 찍어내고 당국이 요구한 유동성 비율을 맞추기 위해 은행들이 은행채 발행에 나서는 바람에 기업에 돌아갈 자금이 바싹 말랐다. 10월 터진 강원도발 레고랜드 사태는 강풍이 불고 건조한 들판에 성냥불을 던진 격이었다. 한전 관계자들이 “전기요금을 올리지 않으면 한전채 발행이 늘어 민간기업이 자금난을 겪게 된다”고 경고했지만 정부도, 국회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금융당국이 뒤늦게 자금을 빨아들이는 은행채 발행 자제를 요청하자, 은행들은 자금 확보를 위해 예금 확보 경쟁에 들어갔다. 당연히 은행 조달 비용이 오르고 대출 금리까지 들썩였다. 당국은 결국 예금 금리까지 건드리게 됐다. 그러는 사이 금융 시스템의 중추인 은행의 건전성 지표(자본 비율)는 하락하고 있다. 중앙은행과 금융당국이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면 ‘통화정책부’니 ‘금리감독원’이니 하는 엉뚱한 얘긴 나오지 않는다. 프리드먼은 시장 실패를 막겠다는 명분을 내세운 정부 개입에 대해 “치료제가 질병보다 더 나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국이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으면 그것이 진짜 잘못이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으로 불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17일 한국에서 약 20시간 머물며 40조 원 규모의 ‘투자 보따리’를 꺼냈다. 37세 사우디 왕세자가 멀리까지 찾아온 건 그가 원하는 게 한국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사우디 비전 2030의 실현을 위해 한국과 협력을 강화해 나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왕세자가 언급한 ‘사우디 비전 2030’은 석유 생산이 꼭짓점을 찍고 급감하는 ‘피크오일(peak oil)’을 대비한 미래 프로젝트다. 670조 원을 투자해 사우디 북서부에 스마트시티를 건설하고 자본, 인재, 관광객을 끌어들이려는 ‘네옴시티’ 사업이 핵심 프로젝트다. 네옴은 ‘새로운 미래(Neo+Mustapbal·아랍어로 미래)’를 뜻한다. 사우디는 세계 최대 석유수출국이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석유가 사라지면 국가 경제가 일순간 붕괴하고 왕국의 존립 기반도 무너진다. 하루 16시간을 일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이끈 윈스턴 처칠 총리와 손자병법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젊은 사우디 왕세자가 이 ‘예정된 미래’를 모를 리 없다. 전례도 있다. 산유국 노르웨이는 경제 다각화로 석유 의존에서 벗어났다. 1966년 유전을 발견한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도 항만, 공항 등에 투자하고 시장을 개방해 ‘석유 없는 미래’를 대비했다. 이제는 두바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석유 비중이 1% 미만이다. 카타르는 21일 월드컵 개최에 성공하며 국가 이미지를 새로 만들고 있다. 사우디도 2030년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빈 살만 왕세자는 한국을 찾아 “수교 이래 한국 기업들이 사우디의 국가 인프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1970, 80년대 중동에서 땀을 흘린 ‘한강의 기적’ 세대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 것이다. 당시 중동에서 한국 건설 노동자들은 ‘코리안 아미(Korean Army)’로 불렸다. 집단체조로 하루를 시작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며 공기를 앞당기는 그들이 중동 사람들에겐 일사불란하고 신속한 군대처럼 보였다. 그들의 땀과 눈물이 오늘날 빈 살만을 한국으로 이끈 셈이다. 한국은 과거 덕분에 먹고살면서도 정작 후손들에게 물려줄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는 데는 소홀하다. 주력산업인 반도체가 미국 대만의 견제와 중국과 일본의 맹추격을 받고 있는데도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법안들은 ‘대기업 특혜’라는 낙인이 찍혀 석 달 넘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120조 원이 투자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물을 끌어오는 시설 인허가에 1년 6개월이 걸린다. 정부가 서비스업 산업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며 발의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11년째 ‘재추진’만 반복하고 있다. 올해 무역적자가 400억 달러를 넘고 1인당 GDP가 20년 만에 대만에 추월당할 판이다. 인구는 줄고 빠르게 늙고 있다. 내년엔 1%대 성장 전망도 나온다. 경제 전문가의 97%가 “한국 경제가 위기 상황”이라는데 국회는 정쟁으로 예산안 심사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다. 두바이 지도자였던 라시드 빈 사이드 알막툼은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낙타를 탔다. 나는 벤츠를 타지만 증손자는 다시 낙타를 탈 수 있다”며 석유 없는 미래를 대비했다. 덕분에 그들의 후손들은 아직 ‘벤츠’를 탄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교과서에도 실리는 ‘한강의 기적’ 과실을 먹고 자란 한국 정치 지도자들은 후손들에게 정쟁과 갈등만 물려줄 건가.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고물가시대에도 내리는 게 있다. 9월 소비자물가가 5.6% 올랐는데, 쌀값은 17.8% 떨어졌다. 지난해 풍년이 든 데다 올해도 25만 t의 쌀이 초과 생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낙엽처럼 떨어질 쌀값 걱정에 농민들의 시름이 깊다. 한국 쌀 시장은 만성적 공급과잉 상태다. 소비가 빠르게 줄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떠나는 위태로운 시장에서 쌀값을 지탱하는 건 정부다. 쌀이 과잉 생산되면 양곡관리법 기준(초과 생산량 3% 이상이거나 쌀값 평년 대비 5% 이상 하락)에 따라 세금으로 남아도는 쌀을 사들이는 ‘시장 격리’(정부 매입)를 한다. 정부는 기준을 충족한 11번 중 2006년을 빼고 10번 시장 격리를 했다. 올해도 식량 안보를 위한 공공비축미 45만 t에 더해 역대 최대 규모인 45만 t의 쌀을 시장 격리한다. 총 쌀 생산량의 약 4분의 1이 시장에 풀리지 않고 정부 양곡 창고로 직행하는 셈이다. 정부 발표 이후 10월 5일 기준 쌀 산지 가격이 9월 25일 대비 16.9% 올랐다. 초과 생산을 해결하지 못하니 세금으로 쌀값 하락 고통을 덜어주는 ‘진통제’만 놔준 셈이다. 정작 생산을 줄이거나 신규 시장을 발굴해 쌀 공급 과잉을 해결하는 구조개혁은 더디다. 1인당 쌀 소비량은 지난 10년간 평균 2.2% 줄었는데 쌀 생산량은 0.7% 감소하는 데 그쳤다. 안타깝게도 더불어민주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양곡관리법 개정안 논쟁은 이런 근본 해법과는 거리가 멀다. ‘시장 격리 진통제’를 의사(정부)가 재량으로 놓게 하느냐, 조건만 충족하면 자동으로 놓게 하느냐를 두고 여야가 각을 세우고 있다. 야당은 지난해 정부 대응이 늦어 쌀값 급락을 미리 막지 못했다며 이참에 정부 재량권을 없애고 법이 정한 기준에 부합하면 자동으로 쌀 초과 생산량을 시장 격리하게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여당은 그렇게 하면 쌀 공급 과잉 구조를 해결하지 못하고 2030년까지 연평균 1조 원의 시장 격리 비용이 들어간다며 반대하고 있다. 야당 주장처럼 시장 격리를 의무화하면 쌀값이 급락해도 농가 소득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정부가 끌어올린 쌀값 부담은 국민들의 몫이다. 소비자들은 쌀값 안정에 들어가는 세금도 내고 비싼 쌀값까지 감수하는 ‘이중 부담’을 져야 한다. 흉년이 들어 쌀값이 크게 뛰어도 다음 해 풍년이 들어 초과 생산이 발생하면 정부가 자동으로 쌀을 매입해야 하기 때문에 시장에서 쌀값이 떨어지지 않거나 더 오르는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야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포함된 쌀 생산 조정 방안(논에 벼가 아닌 다른 작물을 재배하면 지원)이 실행되면 시장 격리 비용이 줄 것이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정부가 쌀값을 지탱해 주는데 판로도 불확실하고 소득도 적은 다른 작물을 재배할 농민이 얼마나 될까. 농촌경제연구원은 시장 격리를 의무화하면 쌀 초과 생산량이 올해 25만 t에서 2030년 64만 t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시장 격리 의무화가 오히려 생산 조정을 방해해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농가의 절반이 쌀농사를 짓고 농업 소득의 32.9%는 쌀에서 나온다. 국가부채가 빠르게 늘고 있는 상황에서 재정으로 무한정 쌀값을 지탱할 순 없다. 언젠가 정부가 ‘산소호흡기’를 갑자기 떼면 쌀 농가가 받을 충격은 상상하기 어렵다. 농가의 미래와 소비자에게 모두 보탬이 되는 일은 논 재배 작물을 다각화하고 만성적 쌀 공급 과잉을 해결하는 구조개혁이다. ‘쌀값 진통제’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7일 ‘달러 마이너스 통장’인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에 대한 진실 한 조각을 꺼냈다. 이 총재는 미국이 나서려면 “전제조건인 글로벌 달러 유동성이 위축되는 상황이 와야 한다. 적절한 때가 오면 깊이 있게 논의하겠다”고 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나 코로나19 사태처럼 ‘달러 기근’이 닥치지 않는 한 미국의 ‘오케이’ 사인을 받기 어렵다는 얘기다. 동맹에 너무 야박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미국은 14년 전에도 그랬다. 2008년 9월 15일 세계 4위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무너지고 45일이 지나서야 브라질 멕시코 싱가포르와 함께 한국에 통화스와프 라인을 열어줬다. 통화스와프는 비가 올 때 쓰는 우산이다. 정부가 “외환위기 가능성이 매우매우 낮다”면서 한미 통화스와프에 공개적으로 매달리면 시장은 “한국이 우산을 찾는다”고 오해한다. 통화스와프는 양국이 은밀하게 추진할 비상대책이지 대통령의 순방 성과로 치장하거나 외환시장 구두 개입용으로 공공연히 입에 담을 일이 아니다. 통화스와프가 고비를 넘기기 위해 먹는 청심환이라면 경상수지 흑자는 외환위기를 예방하는 백신이다. 경제 관료들과 정치인들이 통화스와프 ‘기우제’를 지내기 전에 스스로 노력해 성과가 날 수 있는 과제라도 제대로 해놨다면 8월 경상적자가 30억 달러까진 나진 않았다. 적자의 상당 부분은 에너지 수입에서 나왔다. 돈을 잔뜩 풀어 물가가 오른 데다 대선, 총선 등 정치 일정까지 겹쳐 전기요금을 묶어두고 유류세 보조로 ‘진통제’만 놔주다 보니 달러를 주고 사와야 하는 연료 가격이 폭등하는데도 국내 수요가 줄지 않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에너지 수입이 늘어나 무역수지 적자가 커지면 원화 가치가 하락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한미 통화스와프를 얘기하기 전에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처럼 ‘진통제’와 함께 강력한 에너지 절감 등의 ‘수요관리’ 대책을 내놓고 국민을 설득하는 일부터 시동을 걸었어야 했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최근 영국의 돈 풀기용 감세가 국채 투매와 파운드화 폭락으로 이어진 것처럼 정부가 실기나 오판을 하면 시장의 공포감이 커진다. 벌써 미국의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으로 한미 기준금리가 역전됐다. 미국의 이자가 더 높으면 한국에 투자할 유인이 줄어든다. 자본 이탈 가능성도 커진다. 정부와 정치권은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려야 할 때 부채 부실 위험 때문에 올리지 못하는 ‘부채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재정 적자와 민간 부채를 세심하게 관리해야 한다. 정부와 한은이 “경상수지 적자가 일시적이고 연간 기준으로 흑자를 낼 것”이라 했지만 산유국의 감산 움직임에 유가가 다시 오름세를 보이고 있어 안심할 수 없다. 중국 등의 경기 침체로 수출도 심상치 않다. 서비스수지 역시 해상운임 하락과 해외여행 증가로 8월에 7억 달러 이상의 적자로 돌아섰다. 1997년 외환위기는 경상수지 적자로 달러 곳간이 비는데 갚아야 할 단기외채가 늘어나는 걸 방치한 정부의 실패였다. 환율을 안정시키려면 달러 곳간부터 지켜야 한다는 게 외환위기의 뼈저린 교훈이다. 위기 때를 대비해 한미 통화스와프를 물밑에서 치밀하게 준비하되 경상수지 관리의 끈도 다시 바짝 조여야 한다. 통화스와프 방패 뒤로 숨는 경제 관료들을 뛰게 하려면 대통령 집무실에 수출입 실적을 관리하는 ‘국제수지 현황판’이나 ‘에너지 절감 상황판’이라도 갖다 놓아야 할 판이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태풍 힌남노가 덮친 경북 포항시 인덕동 아파트의 침수된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빼러 들어간 주민 7명이 숨지는 비극이 일어났다. 사고 소식을 듣고 21년 전 안양 수해 취재 현장이 떠올랐다. 2001년 7월 집중호우로 삼성천이 범람해 경기 안양시 일부 지역이 물에 잠겼다. 둑을 넘은 물살은 닥치는 대로 쓸어갔다. 이리저리 떠내려가던 차들은 골목 끝에 차곡차곡 쌓여 탑이 됐다. 이날 안양시 안양2동 삼성아파트 주민 김모 씨(50)는 침수된 지하 주차장에 차를 빼러 들어갔다가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를 겪었다. 김 씨는 오전 3시경 “삼성천이 범람했으니 지하 주차장의 차를 빼라”는 관리실 방송을 듣고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물에 잠긴 뉴프린스 승용차 시동은 1분도 안 돼 꺼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차오르는 물을 피해 차 위로 올라갔다. 그는 주차장 천장 파이프를 붙들고 천장과 물 사이의 틈새에 얼굴만 내놓고 숨을 쉬며 5시간 동안 물과 사투를 벌인 끝에 구조됐다. 김 씨의 사연은 본보 2001년 7월 16일자 ‘지하 주차장서 5시간 사투’라는 기사로 소개됐다. 21년 시차가 있지만 안양과 포항 아파트 사고는 판박이처럼 닮았다. 사고 장소는 삼성천과 냉천을 낀 천변 아파트다. 하천이 범람하자 지하 주차장은 물바다가 됐다. 주민들이 관리실의 급한 안내방송을 듣고 주차장에 내려갔다가 변을 당한 것도 같다. 생존자들은 주차장 천장에 물이 차지 않은 ‘에어포켓’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대형 사고는 갑자기 터지지 않는다. 1931년 미국 보험사에서 근무하던 허버트 하인리히는 산업 재해 사례들을 분석하다가 대형 재해로 1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 이전에 같은 문제로 29명이 다치고, 300명이 다칠 뻔한 적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대형 사고의 사소한 징후들을 무시하면 큰 비용을 치른다는 게 널리 알려진 ‘하인리히 법칙’의 교훈이다. 안양 아파트에서 구조된 김 씨의 사례는 포항 아파트 참변을 경고하는 전조였던 셈이다. 21년 전 안양 사고 이후 침수 위험이 큰 하천변 아파트만이라도 지하 주차장에 차수벽 등을 설치하게 했으면 어땠을까. 물이 차오르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빼러 내려가선 안 된다거나 물이 무릎 위로 차면 서둘러 대피해야 한다는 내용의 아파트 안전관리 지침, 주민 행동 요령을 널리 알렸다면 가장 평온해야 할 자신의 집 주차장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웃의 안전보다 집값, 돈벌이와 같은 자신의 이익이 더 먼저 보이면 대형 사고의 전조를 알아채기 어렵다. 평당 억 소리가 난다는 고급 주택지인 서울 강남이 폭우가 오면 물에 잠기는 상습 침수구역으로 전락했지만 비가 그치고 물이 빠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수재 위험에 입을 다문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한 주민은 “아파트가 침수 피해를 입었는데도 주민들이 집값 떨어진다고 쉬쉬하는 분위기”라고 말한다. 국민 안전은 공짜가 아니다. 구성원들이 이웃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소한 사건사고를 허투루 넘기지 않는 안전 의식으로 무장하고, 정치와 행정이 목소리 큰 소수의 이익보다 침묵하는 다수의 안전부터 살필 때 가능한 일이다. 서울 중심가에선 일방적인 요구와 주장을 반복하는 이익집단의 확성기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지만 미국 뉴욕 시내에선 범인을 쫓는 경찰차, 불을 끄러 출동하는 소방차, 환자를 실어 나르는 구급차의 사이렌이 가장 요란하다. 포항 아파트 비극은 우리가 수십 년간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반성하게 한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내년엔 한국 최저임금(9620원)이 사상 처음 일본(961엔)을 추월한다. 지금처럼 환율이 100엔당 1000원을 밑돌면 한국 편의점에서 일하는 최저시급 청년이 일본에서 같은 조건으로 일하는 청년보다 더 벌게 된다. 일본 경제가 ‘거품 붕괴’ 이후 저성장 늪에 빠진 데다 달러 강세 속에서 원화 가치가 엔화보다 상대적으로 덜 하락하면서 생긴 일이다. 최저임금 역전은 경제적 요인 외에 ‘소득주도성장’을 내세운 지난 정부의 정치적 동기가 작용한 결과물이다. 2018∼2022년 5년간 한국의 최저임금 누적 인상률은 41.6%로 물가 상승률(9.7%)의 4배가 넘는다. 같은 기간 일본의 인상률은 12.1%에 그쳤다. 한국이 얼마나 가속페달을 깊게 밟았는지 알 수 있다. 최저임금 수준을 보여주는 ‘중위임금 대비 최저임금 비율’은 2010년 45.1%에서 올해 62%로 상승했다. 영국(60.2%), 독일(57.0%), 일본(46.5%), 미국(27.3%)보다도 높다. 하위직 공무원들은 이제 “급여가 최저임금 수준”이라고 비교한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최저임금을 단기에 큰 폭으로 올리면 받는 사람에겐 좋지만, 기업 경영자나 소상공인들은 불어난 인건비를 감내해야 한다. 이 비용이 가격에 전가되면 인플레와 최저임금 추가 인상 압력이 커진다. 인건비를 줄이려고 사람을 줄이거나 쓰지 않을 수도 있다. 직원을 두지 않는 ‘나 홀로 자영업자’는 이미 지난달 434만 명으로 14년 만에 가장 많다. 최저임금은 소비자 구매력을 높이고 불평등을 완화하는 정책 수단인데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저소득층엔 그림의 떡이다. 노동조합은 “생활임금을 보장해야 한다”며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을 주장하는데 시장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노동자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최저임금을 받지 못한 ‘최저임금 미만율’은 2010년 11.5%에서 올해 15.3%로 상승했다. 농어업, 5인 미만 사업장, 60세 이상 노인 일자리 등에서 최저임금 미만율이 평균의 2∼3배에 이른다. 이런 데도 한국의 최저임금은 모든 사업장 노동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미국 캐나다 일본은 지역에 따라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한다. 벨기에 스위스 멕시코 등은 업종별로 차등 적용한다. 룩셈부르크, 호주, 네덜란드에서는 일정 연령 이하나 수습생에게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허용한다. 싱가포르 홍콩 등은 외국인 도우미에게 내국인과 다른 최저임금을 준다. 최저임금 한일 역전시대엔 최저임금 인상에 집중된 사회적 에너지를 최저임금 수용성을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최저임금 피벗(pivot)’이 필요하다. 최저임금을 경제 여건에 맞춰 단계적으로 올리되 사문화된 최저임금법 4조의 취지를 살려 업종 등에 따라 우리 실정에 맞게 차등 적용해 수용성을 높이는 식의 ‘대타협’도 시도할 필요가 있다. 최저임금의 지속 가능성도 중요한 과제다. 저임금의 근본 원인은 낮은 생산성이다. 한국의 최저임금이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44.6% 상승하는 동안 1인당 노동생산성은 제조업은 13.3%, 서비스업은 3.1% 증가했다. 최저임금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를 더 늘리고 청년들이 이런 일자리로 직행할 수 있게 교육의 질과 기회를 대대적으로 혁신하는 일에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이런 준비 없이 최저임금 도입 34년 만에 맞이하는 한일 역전시대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