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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대표가 전 국민 25만 원 지원 방안과 각종 특검법을 들고 와 대통령에게 ‘우리가 총선에서 이겼으니 받아라’ 해서 받을 수도 없지만 받는다고 협치도 아니다. 우리나라 정치에는 2개의 민의(民意)가 존재한다. 대통령을 선출한 민의와 국회를 선출한 민의다. 두 민의가 시간차를 갖고 존재하면서 같을 때는 서로를 강화하고 다를 때는 서로를 견제한다. 협치는 시간적으로 가까운 민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2022년 대선 직후 기존의 여소야대 국회가 대통령이 하자는 대로 했던가. 마찬가지로 4·10총선으로 새로 구성된 여소야대 국회가 하자는 대로 대통령이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파리 특파원을 할 때 독일 통일의 주역 중 한 명으로 당시 재무장관을 하고 있는 볼프강 쇼이블레와 인터뷰를 약속한 적이 있다. 약속한 날 며칠 전에 인터뷰가 어렵다는 연락이 왔다. 장관이 연정 협상에 들어가게 돼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일은 가령 총선에서 기민당(CDU)이 다수당이 됐으나 과반에 못 미쳐 사민당(SPD)과 연정 협상을 한다면 임기 내 추진할 주요 정책 전반에 대한 합의를 본 뒤 연정을 발표한다. 합의를 보지 못하면 당을 바꾸어 합의가 되는 당이 나올 때까지 협상을 거듭한다. 그 기간이 길게는 몇 달씩 걸리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독일 같은 의원내각제 국가는 아니다. 그러나 사안별로 그때그때마다 타협을 보려면 정치적 피로도가 커질 뿐 아니라 어느 사안에서 실패할 경우 다음 사안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협치가 파탄 날 수 있다. 그래서 협치를 한다면 사안별 합의가 아니라 여야가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2027년까지 3년간 추진하고자 하는 주요 정책을 다 내놓고 무엇을 어떻게 주고받을지 패키지로 묶어 협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협치가 예측 가능하고 지속 가능해진다. 물론 협상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을 하자’고는 할 수 있어도 ‘어떻게 할지’는 결정하기 어려운 정책이 많다. 그래서 큰 틀만 합의하고 여야 인사에게 장관 자리를 나눠줘 구체적인 방법은 그 틀 내에서 장관에게 맡기는 것도 병행할 수 있는 길이다. 국방이나 경제장관은 여당이 맡고 외교나 보건복지장관은 야당이 맡는 식이다. 협치에서는 여야의 정치적 책임이 불분명해지기 쉬운데 이렇게 하면 책임을 분명히 나눌 수 있다. 다만 총리 자리를 야당에 내주는 건 불가하다. 그럴 경우 대통령은 독자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선 장관 임명에 제동이 걸린다. 장관 임명에는 총리의 제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책도 뜻대로 펼 수 없다. 국가의 중요한 결정은 거의 모두 총리가 주재하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총리와 충돌해 총리를 해임하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여소야대 국회가 새 총리의 임명을 동의해 주지 않으면 총리 궐위 상태가 이어져 국정이 마비될 우려가 있다. 우리나라도 남미형 국가로 퇴행하고 있다. 대통령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늘 탄핵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종필이 이끄는 비중 있는 제3당이 있어서 사실상의 연정으로 탄핵당할 가능성에서 벗어났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소추를 당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까지 당했다. 지금 더불어민주당은 공공연하게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거론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과거에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우리나라 탄핵 제도의 큰 문제는 부통령이 없기 때문에 탄핵까지 가지 않더라도 탄핵소추만으로 권력 공백이 발생한다는 데 있다. 채 상병 사건으로 대통령이 탄핵당할 일은 없으리라고 보지만 국회에서 탄핵소추의 엄격성이 무너지고 헌법재판소도 제동을 걸지 않아 야당이 탄핵소추의 문턱까지 밀어붙이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윤 대통령은 각료 자리의 절반이라도 내줄 각오로 협치를 시도하는 게 좋다. 다만 바로 그 협치를 위해서라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법률안 거부권이다. 협치란 장식어를 다 빼면 대통령이 야당이 추진하는 법안 중 합의된 일부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대가로 정부의 법안 중 합의된 일부에 대한 국회 통과를 보장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면 야당이 굳이 대통령과 협치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범야권 의석이 200석에는 못 미친다는 총선 결과가 중요하다. 국민의힘 당선인 중 일부가 흐리멍덩해서 이런 사실을 망각할 때 나라는 다시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해병대 채모 상병 사망 사고와 관련한 수사 개입 의혹은 어려운 문제다. 수사선상에 있는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주호주 대사 발령이 일파만파를 몰고 온 이유는 어려운 문제를 어렵다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한 점 하나는 이 문제가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지 않도록 주의 깊게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의혹의 핵심은 물론 윤석열 대통령이 수사 개입을 했느냐다. 해병대 수사단장이었던 박정훈 대령 측은 윤 대통령이 “이런 일로 사단장까지 처벌하면 대한민국에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겠냐”며 질책한 것이 수사보고서 내용을 바꾼 이유라는 취지의 자료를 언론에 공개했다. 윤 대통령의 수사 개입을 추정할 만한 것은 현재로선 이것뿐이다. 개연성은 있어 보이지만 대통령실과 대립하는 박 대령 측이 만든 자료라는 점이 문제다. 병사가 죽었다고 사단장까지 처벌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쉽지 않다. 사단장까지 처벌하면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겠냐는 문제의식은 군을 잘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잘 모르는 것일 수 있다. 작전 단위가 대대라면 현장 사정을 가장 잘 아는 것은 통상 대대장이다. 사단장 등 윗선에서야 늘 성과를 내려고 다그치겠지만 대대장은 현장에서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해야 하니까 병사와 다른 장교인 것이다. 그러나 사단장이 현장까지 내려와 직접 지시를 한다면 사정이 다르다. 윤 대통령이 군 경험이 있었다면 자신 있게 그런 말을 하기보다는 사고 당시의 상황을 더 알아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수사 개입이 되는지는 불명확하다는 게 이 사건의 특징이다. 문재인 대통령 때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개정된 군사법원법이 2022년 7월부터 시행돼 군인이 사망한 사건은 민간 수사기관으로 이첩하도록 됐다. 채 상병 사건도 민간 수사기관인 경찰에 이첩됐다. 물론 경찰로 이첩하기 전에 군 검찰 지휘로 초동수사가 이뤄졌다. 그러나 경찰이 일반 변사 사건에서처럼 수사권을 갖고 진행하는 초동수사와는 다르다. 군의 수사 결과에 얽매이지 말고 경찰 등 민간 수사기관이 독립적으로 수사하라는 것이 군사법원법 개정의 취지다. 군 수사가 본래 축소나 은폐가 많다고 여겨져 이런 개정이 이뤄졌으나 민간 수사기관으로 이첩하게 된 것을 계기로 군 지휘부에 늘 축소나 은폐 압력을 받아왔던 군 검찰이 진상을 밝히려고 시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군의 수사 결과 보고서는 경찰이 참고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자료가 되고 말았다. 군 검찰로서는 다소 무책임하게 보고서를 낼 수 있는 여지도 주어졌다. 채 상병 사고에 대한 지휘관의 과실 책임은 경찰이 수사하지만 수사 개입 의혹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서 수사하고 있다. 공수처는 처장과 차장이 모두 임기가 끝난 지 수개월이 지났지만 후임자들이 임명되지 않고 있다. 상당 기간 동안 공백의 책임 중 절반은 당연직 공수처장 추천위원인 법무부 장관을 뒤늦게 지명한 정부에 있었고 절반은 야당 추천위원을 늦게 지명한 민주당에 있었다. 채 상병 특검은 공수처의 채 상병 수사 결과를 본 뒤 경찰이 지휘관 과실을 어느 선까지 인정하는지 참조해서 결정하는 것이 순서다. 민주당이 추진하는 특검은 이 순서를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이다. 민주당은 공수처의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특검으로 바로 가겠다는 속셈일 수 있다. 그러나 억지로 공수처를 만든 것이 민주당 아닌가. 그런데도 공수처 수사를 건너뛴다는 건 이율배반이다. 그래서 특검은 정략적이고, 이 시점에서 국민의힘 안철수 조경태 김재섭 당선인의 채 상병 특검 수용 발언은 경솔하다고 하겠다. 민주당이 특검법을 통과시킨다면 대통령은 자신과 관련된 것이므로 거부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여기서 통하기 어렵다. 수사 미비 등 특검의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검의 전제조건이 충족되면 그때 가서 특검을 수용하면 될 일이다. 지금 당장의 특검은 총선 민심에 부응하는 것도 아니고 협치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정해진 순서를 지키지 않는 반칙, 즉 법치의 훼손일 뿐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요새 미국 월가 최고의 비관론자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다. 미국 주가가 한때 최고치를 경신하는 등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가 만발한 가운데 그는 주주들에게 보낸 연례서한에서 미국 연준(Fed)의 기준금리가 8% 이상으로 오를 수도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지난해 9월에도 기준금리가 7%까지 오를 가능성을 경고했다. 올 들어 연준의 금리 인하를 기대하며 주식시장에 부는 훈풍에도 불구하고 금리가 오를 수 있다는 수준을 오히려 더 높였다. ▷JP모건은 단순히 미국 은행 중 하나가 아니다. 지난해 중소 규모 은행인 퍼스트리퍼블릭이 파산해 월가에 위기의 폭풍이 불어닥칠 순간에 그 은행을 인수함으로써 폭풍을 잠재운 것이 JP모건이다. JP모건은 미국 연준이 생기기 전에 사실상의 중앙은행 역할을 한 민간은행이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베어스턴스와 워싱턴뮤추얼을 인수한 것도 JP모건이다. 그래서 JP모건 CEO는 월가의 황제라고 불리고 그의 금리 전망이 남다르다는 건 관심을 끈다. ▷다이먼 CEO는 정부 개입 확대에 따른 막대한 재정 지출과 녹색 경제에 수반되는 기업의 비용 증가, 글로벌 공급망 조정 등이 인플레이션과 이를 억제하기 위한 금리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라고 꼽으면서 우크라이나와 중동 전쟁은 인상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다고 봤다. 그가 꼽은 요인이 딱히 특별한 건 없다. 경제전문가들이 대부분 거론하는 것이다. 단지 그만이 이런 요인이 쉽게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 냉정함을 잃지 않고 주목하고 있을 뿐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수석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는 지난해 ‘민주적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책에서 2008년 금융위기는 대공황에 버금가는 위기였고, 대공황 이후 뉴딜정책이 부상했듯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유사한 흐름이 부상하고 있다고 봤다. 과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영어에서 가장 무서운 문장은 ‘저는 정부에서 파견됐고 당신을 도와주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잊혀졌다. 정부 개입은 확대됐고 코로나는 그 확대를 부채질했다. 정부 개입 확대는 케인스주의에서 보듯 인플레이션으로 귀결된다. ▷다이먼 CEO 발언의 핵심은 섣부른 낙관에 대한 경계다. 금리가 오랫동안 낮았기 때문에 투자자와 기업이 고금리 환경에 대비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저금리 시대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적 사고’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미국조차 중하위층의 일자리 창출과 사회보장을 위해 재정지출을 늘리고, 기업은 기업대로 탄소 배출량 감축을 위해 돈을 써야 하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인플레이션이 끝날 것으로 보느냐고 묻는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황상무 전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이 ‘회칼 테러 보복’ 운운했다는 MBC의 앞뒤 다 자른 보도는 전해들은 발언의 맥락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그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고 싶은 얘기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황 전 수석을 흉내낸다면서 한 5·18 농담이다. 이 대표는 전북 군산 유세에서 “너 칼침 놓는 것 봤지. 너네 옛날에 회칼로”라며 쑥쑥 찌르는 동작을 반복한 뒤 “농담이야”라고 말했다. 또 “광주에서 온 사람들 잘 들어. 너네 옛날에 대검으로, M16 총 쏘고 죽이는 것 봤지. 너 몽둥이로 뒤통수 때려서 대가리 깨진 것 봤지. 조심해”라며 내리찍는 동작을 한 뒤 이번에도 “농담이야”라고 덧붙였다. 군 복무할 때 경북에서도 외진 지방 출신의 소대원이 한 명 있었다. 노래를 시켜보면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노래를 했다. 뽕짝도 아니었다. 부른다기보다는 웅얼거렸다. 알고 보니 공사판에서 배운 ‘노가다’ 노래였다. 그런 것 말고 뽕짝이라도 하나 불러보라고 해도 부를 줄 아는 뽕짝이 없었다. 그가 보통 소대원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노래를 부르듯이 이 대표는 보통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유머 취향을 보여준 것이다. 이 대표가 농담이랍시고 한 것은 소년공들이 공장에서 일하다 쉬면서 주고받았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 대표는 다른 소년공과는 달리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들어간 사람이다. 다만 그는 대학이 제공하는 일반교양 교육에도, 광주의 진상을 알아보는 데도 관심이 없었고 곧장 사법시험에 매달렸다. 그래서 일찍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긴 했지만 정신세계는 소년공 수준에서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다. 교양이 거창한 게 아니다. 농담으로라도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을 구분하는 능력 같은 것이다. 이 대표의 5·18 농담은 그런 능력이 떨어짐을 보여준다. 고대 로마에 잔인한 성정으로는 네로조차도 따라갈 수 없는 칼리굴라라는 황제가 있었다. 성적으로도 문란했던 그는 잠자리에서 애인의 목에 키스하면서 “이 아름다운 목도 내가 원하면 잘리고 말걸”이라고 속삭였다고 한다. 그의 잔인한 성정을 과장하기 위해 꾸며낸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농담이라도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이 있다고 여겼기에 그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슬픔을 자아내는 얘기는 세상 어디서나 비슷하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공감한다. 반면 웃음은 국지적이다. 그래서 외국인의 유머는 즉각 알아듣고 반응하기 힘들다. 유머는 정신세계를 공유하는 집단에서만 웃음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 대표의 ‘칼로 찌르고 몽둥이로 치는’ 5·18 농담은 철없는 소년들의 정신세계에서는 재미있는 것일 수 있다. ‘2찍’ 같은 말도 소년들이 좋아할 만한 중독성이 있다. 그러나 다 커서도 그러는 것은 도덕성 진화가 덜된 ‘가여운(poor)’ 정신세계를 보여줄 뿐이다. 너무 앞서가서 알아듣기 힘든 농담을 4차원적이라고 한다면 조폭들이나 재미있다고 낄낄거릴 농담은 2차원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대표는 충남 당진 유세에서는 “왜 중국을 집적거려요. 그냥 셰셰(謝謝·고맙다는 뜻의 중국말), 대만에도 셰셰… 이러면 되지”라며 두 손을 마주 잡고 고마움에 겨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대표가 중국 왕서방처럼 두 손을 잡고 이쪽에도 저쪽에도 헤헤거리는 모습이 조국 씨가 묘사한 적이 있는 ‘앞발을 싹싹 비비는 파리’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면도 있어 웃기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점 때문에 웃는 건 그의 의도와는 반대된다. 그는 “대만해협이 어떻게 되든, 중국과 대만(의) 국내문제가 어떻게 되든 우리와 뭔 상관이 있어요. 그냥 우리는 우리 잘 살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전쟁이 일어나면 중국이 주한미군의 대만 이동을 저지하기 위해 한국으로 미사일을 쏠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협박까지 하는 마당에 우리와 뭔 상관 있냐고 말하는 것은 ‘셰셰’ 하며 왕서방 흉내 낸다고 재밌어지는 게 아니다. 유머는 현실의 구체적이고 예리한 파악에서 출발해 비틀고 꼬집음으로써 현실을 넘어서는 힘이다. 복잡다단한 외교·안보적 사안을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비꼬는 것은 억지로 웃기는 개그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다. 이 대표에게 처칠이나 레이건 수준의 유머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의 웃기지 않는 유머를 걱정하는 건 꼭 필요한 현실 인식의 부족 때문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부지런한 독서는 마오쩌둥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장정에 나서 옌안에서 철수할 때 다른 건 다 버려도 책만은 버리지 않았다. 공산 정권을 수립하고 나서는 수만 권의 책을 모아 개인 장서실을 만들었다. ‘마오의 독서생활’이라는 책이 나와 있을 정도다. 그는 온갖 종류의 책을 읽었지만 특히 ‘루쉰 전집’과 홍루몽을 좋아했다. 스탈린도 마오 못지않은 열렬한 독서광이었던 모양이다. 다만 마오와는 달리 사후 흐루쇼프에 의한 격하 운동으로 그의 장서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럼에도 그가 짧은 평을 적은 400여 점의 텍스트가 남아 있다. 스탈린은 레닌을 갈릴레오와 다윈의 반열에 오른 사람으로 여겨 그의 책들을 열심히 읽었지만 또한 적수라고 말할 수 있는 카우츠키나 트로츠키의 글도 꼼꼼히 읽었다. 물론 카우츠키의 글에는 스볼로치(상놈), 르제츠(거짓말쟁이) 같은 욕설을 많이 달고, 트로츠키의 글에는 타크(맞아), 멧코(정확해)라는 메모를 달면서도 자신과의 결정적인 차이에 대해서는 틀렸다는 표시를 했다. 소련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스탈린에 대한 우상화와 악마화를 피하면서 진짜 스탈린을 알기 위한 연구도 깊어졌다. 조지아 출신인 스탈린은 젊은 시절 혁명가로 돌아서기 전까지는 성적이 좋은 신학도였다. 그가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이 된 것은 단순히 광기 때문이 아니다. 정교회 신도에서 무신론자로 돌아선 것도, 잔인한 독재자가 된 것도 나름의 논리를 집요하게 추구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스탈린은 레닌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반환하지 않은 책 중에 헤로도토스의 ‘역사’도 들어 있는 등 역사 전반에 관심이 많았다. 러시아 역사가 로베르트 비페르의 책을 많이 읽었고 그 책의 계급투쟁적 서술을 모범으로 삼아 소련 역사 교과서들이 쓰이도록 지도했다. 스탈린은 고전 문학의 계몽적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안타깝게도 스탈린이 소장한 문학작품은 그가 사망한 뒤 흩어졌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주재 소련 대사였던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스탈린에 대해 “그는 특히 좋아한 셰익스피어, 하이네, 발자크, 위고, 모파상 말고도 다른 많은 서유럽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고 전했다. 스탈린은 고리키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톨스토이에게는 스탈린상을 수여했다. 톨스토이가 각본을 쓰고 예이젠시테인이 감독한 영화 ‘이반 뇌제’에 대해서는 그의 역사와 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작품이 되도록 직접 지도하기도 했다. 책을 통해 혁명에 접근했다는 점에서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은 다 같다. 다만 스탈린은 러시아어 외에는 읽을 수 없었고 해외 경험이 없다. 이것이 독일어를 잘했던 레닌이나 트로츠키와의 차이다. 마오쩌둥이나 스탈린을 보면 책을 열심히 읽는다는 것과 좋은 지도자가 되는 것은 큰 상관이 없어 보인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신념은 책을 통해 얻어지기보다는 인성과 도덕적 경험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인 듯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창작과 비평’의 백낙청 씨가 근래에는 주된 발언 무대를 잡지에서 유튜브로 옮긴 듯하다. 지난 대선 직전 문재인 격하의 신호탄을 쏜 뒤 이재명을 추켜세우고 대선 직후에 다시 나와 이재명의 대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를 중심으로 뭉칠 것을 호소했는데 총선 국면에서도 같은 주장을 이어가고 있다. 백 씨는 분단모순론을 주장했었다. 분단이 한국 사회의 제반 문제를 초래하는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계급모순과는 달리 분단모순은 족보도 없는 개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체제 대결을 벌일 때만 해도 양 체제를 넘어서려는 지향으로서의 호소력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체제 경쟁에 져 붕괴하면서 분단모순론은 길을 잃었다. 그러자 그는 냉전 후 유행하던 탈(脫)근대론을 끌여들여 근대 적응과 근대 극복의 ‘이중과제론’을 들고나왔다. 한반도의 남북 사회는 근대화를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하지만 그 최종 목적지는 근대가 아니라 근대를 극복한 체제라는 것이다. 근대 체제에서는 분단을 극복할 수 없고 근대를 넘어선 체제에서만 분단을 극복할 수 있다는 함의는 있지만 근대를 넘어선 체제가 어떤 모습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한반도 남쪽이 근대화를 위해 여전히 실천할 과제가 많은 사회라고 하더라도 한반도 북쪽의 3대 독재 세습체제와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 그는 이 차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남한이 근대 적응과 근대 극복의 이중 과제를 실천할 때 북한은 어떻게 조응할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틀은 웅장하지만 절반이 비어 있는 기만적인 이론이다. 과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체제 대결은 오늘날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 북한의 김정은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보면 ‘자유롭고 민주적인 체제’와 독재 체제의 대결이었을 뿐이다. 냉전 종식은 역사의 종말이 아니었다. 단지 독재를 감싸고 있던 공산주의라는 포장지가 찢어져 실체가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백 씨의 이중과제론은 지금도 계속되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체제’와 독재 체제의 대립을 흐리는, 김지하의 표현을 빌리면 ‘쑥부쟁이(훼방꾼)’의 논리다. 백 씨는 이재명 민주당의 공천을 대거 민주당원이 된 촛불시민(개딸)들이 민주당 내의 반(反)촛불 세력을 걷어낸 혁신적 공천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어떤 정치인을 이재명에게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하위권으로 분류해 감점을 준 뒤 경선을 붙여 친이재명 정치인을 공천한 결과를 혁신이라고 하는 것은 공평무사함 따위는 필요 없고 오로지 촛불혁명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특정인을 중심으로 한 유일지도 체제만이 중요하다는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는 보수 언론만이 아니라 진보 언론조차도 ‘친명(親明) 횡재, 비명(非明) 횡사’라고 비판하자 자유 언론를 통째로 반동으로 매도했다. 그가 추구하는 체제의 일부 모습을 의도치 않게 내비친 것인지 모른다. 백 씨는 근대를 극복한 체제가 어떤 모습인지 말하지 않는 것처럼 촛불혁명이 박근혜 탄핵 후에도 왜 계속돼야 하며 무엇이 달성됐을 때 끝나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가 궁극적으로 목표로 하는 체제가 남로당의 계보에서 혁신계가 추구해온 체제인지, 아니면 베네수엘라 차베스-마두로 체제의 한반도판인지, 또 다른 체제인지 알 수 없다. 근래에 올수록 개벽사상이니 뭐니 하며 거대한 종교적 담론까지 펼치는 것을 보면 그 자신도 모르는 어떤 체제를 상정하고 한반도를 태울 불장난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백 씨가 민주당 후견 원로그룹인 원탁회의에서 활동한 지는 오래됐지만 지난 대선과 이번 총선에서처럼 전면에 나선 적은 없다. 이재명을 만나 때가 무르익었다고 본 듯하다. 그는 윤석열의 집권을 변칙적 사건이라고 보고 그것이 변칙이니만큼 임기가 끝나기 전에라도 쫓아낼 수 있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그가 2016년 박근혜 탄핵이라는 변칙적 사건을 몰고 온 촛불시위를 촛불혁명으로 받든다면 변칙으로 집권한 문재인의 퇴진을 외친 2020년 개천절 집회도 잊어선 안 된다. 변변한 시위 경험도, 조직도 없는 사람들이 입만 열면 촛불을 외치는 문재인이 헌법과 상식을 유린하는 사태를 더 이상 지켜만 볼 수 없어 역대 최대 규모로 모였다. 근대 사회에서 시민들의 저항은 한 방향으로만 분출하지 않는다. 그 다양함을 제도한 것이 근대 정치라는 기초부터 백 씨는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대선 출마 자격을 박탈한 콜로라도주(州) 대법원의 판결이 연방대법원에서 뒤집혔다. 논리는 간단하다. 주는 연방대통령의 출마 자격을 박탈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미 수정헌법 제14조 3항은 “폭동이나 반란에 가담한 자는 공직에 취임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연방대법원은 트럼프가 여기에 해당하는지는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함의는 트럼프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해도 연방 공직 후보자인 트럼프의 출마 자격을 박탈할 권리는 연방의회에만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사법적 책임을 묻는 절차와 정치적 책임을 묻는 절차를 구별해 사법적 책임은 법원에서 다루지만 정치적 책임은 의회에서 다룬다. 정치적 책임을 묻는 절차의 대표적인 것이 탄핵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탄핵 소추는 국회, 탄핵 심판은 헌법재판소가 하지만 미국은 탄핵 소추는 하원, 탄핵 심판은 상원이 한다. 연방 공직 후보자의 출마 자격 박탈도 사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라고 보기 어려워 연방의회에 권한이 있다고 본 것이다. 현재 연방의회에서 상원은 민주당이 다수이지만 하원은 공화당이 다수다. 공화당 후보가 될 것이 확실한 트럼프의 출마 자격 박탈이 하원을 통과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트럼프가 출마 자격을 박탈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반란 가담 혐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탄핵이 돼도 탄핵 사유에 해당하는 범죄에 대한 재판은 별도로 이뤄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해 8월 미국 법무부 특별검사는 그를 반란 혐의로 기소했다. 이에 트럼프는 대통령 재직 시 공무 중 행위는 퇴임 후에도 처벌할 수 없다며 법원에 면책을 요구했다. 연방지방법원과 항소법원은 기각했고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연방대법원은 말도 안 되는 면책 요구에 대해 구두변론까지 연 뒤 6월에나 판단할 예정이다. 대선은 11월에 열린다. 연방대법원이 하급심처럼 면책 요구를 기각한다고 한들 본안인 반란 혐의 재판 결과는 대선 전에 나오기 힘들다. 앞서 연방대법원은 트럼프 재판을 신속 심리로 진행해달라는 특검의 요구를 거부했다. 사법 절차가 정치 일정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연방대법원은 사법 절차를 늦추는 방식으로 국민의 정치적 선택에 우선권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다른 혐의도 아니고 반란 혐의로 기소된 사람에게 대선 출마 자격을 줘도 되는가 의문이 든다. 그러나 기소됐다는 이유만으로 유죄로 몰아가지 않는 확고한 재판중심주의의 나라가 미국이다. 트럼프는 재선에 성공한다면 대통령의 사면권을 이용해 ‘셀프 사면’을 할 가능성이 크다. 정치와 사법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연방대법원의 결정이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의대 정원을 얼마나 늘리는 게 적절한지 잘 모르겠다. 다만 윤석열 정부의 ‘2000명 증원’에는 공감이 가지 않는다. 매년 2000명을 5년간 늘려 뽑고 그다음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본다는 식의 계획이 지속성을 중시하는 교육 계획으로서 성립할 수 있는지부터 의문이다. 나중에 1000명을 줄여 뽑는다면 그게 쉽게 되겠는가. 대학에서 증원을 신청한 규모가 2000명을 훨씬 넘어서는 3400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학의 위상과 재정 수입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총장의 요구가 의대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총장들의 요구와 의대 학장들의 요구가 다르다는 얘기가 들린다. 윤석열 대통령은 얼마 전 2000명 증원 계획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김대중 때 사법시험 합격자 인원을 500명에서 1000명으로 늘린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나 당시 사시 합격자는 한꺼번에 1000명으로 늘린 게 아니라 100명씩 5년에 걸쳐 1000명으로 늘렸다. 합격자가 김대중 때만 늘어난 것도 아니다. 전두환 때 100명에서 300명으로 늘었고 다시 김영삼 때 300명에서 500명으로 늘었다.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도 단계적인 계획이었다면 좀 더 공감이 갔을 것이다. 윤 대통령의 김대중 때 언급이 무엇보다 뜬금없었던 것은 노무현 때 로스쿨이 도입되면서 변호사 시험 합격자가 1700명으로 늘어난 사실은 제쳐두고 더 먼 시절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법조인 출신이 변호사 1700명 시대에 1000명 시대를 얘기하는 감각에 대해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변호사 증원이 아무런 문제가 없이 사회 곳곳에 법치를 확산시켰다는 듯 말하는 것도 사실과 맞지 않다. 서울대의 경우 사시 합격자 수가 500명으로 늘었을 때는 법대만이 아니라 인문·사회대에서까지 사시 보는 학생이 늘더니 1000명으로 늘었을 때는 문과 전체가 사시판이 됐다. 결국 사시 낭인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해 로스쿨로 전환하지 않으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사태가 빚어졌다. 로스쿨 정원 2000명도 막연히 정한 과다한 것임이 드러나고 있다. 로스쿨 정원은 1500명으로, 변호사 시험 합격자는 1200명으로 줄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변호사 숫자가 늘어 수임료가 상대적으로 떨어진 측면이 있겠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배고픈 변호사들이 과거에는 사건이 되지 않던 것까지 사건으로 만들면서 오히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 측면도 있다. 우리나라는 소송 건수가 일본보다 3배가 많고 인구 비례로는 8배가 많다. 그렇지 않아도 ‘툭하면 소송’이었는데 이런 상황을 개선할 대책 없이 변호사 숫자만 늘려 ‘툭하면 소송’을 더 부채질했다. 의사는 건강보험 체제에 속해 있어 의사가 늘어난다고 이미 싼 병원비가 더 싸지는 것이 아니다. 의사 증원의 가장 주요한 목적은 부족한 지역의와 필수의의 확보다. 그러나 의사를 몇 명까지 늘려야 피부과와 성형외과가 포화상태가 되고 배고픈 의사들이 생겨 지역의와 필수의에 머무를까. 의사를 많이 늘리면 늘릴수록 피부과도 성형외과도 포화상태가 될 가능성은 높아지겠지만 이 문제에서 다다익선(多多益善)식 사고는 너무 단순 무식하다. 게다가 배고픈 의사들만 지역의와 필수의에 머무는 건 바람직한가. 10년 후가 아니라 지금 당장 지역의와 필수의가 필요하지 않은가. 증원도 증원이지만 지역의와 필수의에 대한 의료수가를 조정하는 것이 우선 돼야 한다. 감기만 걸려도 병원 가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선진국에서는 예약이 어렵거나 비용이 비싸서 감기 정도로는 병원에 안 간다. 우리도 감기 정도로는 함부로 병원을 찾기 어렵게 개인 부담을 높이는 대신 지역의료와 필수의료에 대한 보상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또 의대 정원이 한꺼번에 2000명씩 늘어 이과의 우수한 재원을 더 빨아들이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가. 지금 공대는 이미 서울대까지 황폐화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도 양쪽을 다 보지 않고 한쪽만 보는 게 어리석게 여겨질 지경이다. 지방 근무라서 연봉 4억 원 자리를 마다하는 배부른 의사들을 보면 혀가 절로 차진다. 지역의와 필수의가 모자란 것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배가 불러서인지도 모른다. 2000년 무렵 이후로 변호사 수가 2배 혹은 4배로 늘 때 의사 수는 하나도 늘지 않았다. 대폭 늘려야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단 매년 2000명씩 5년간 늘려놓고 보자’는 건 수긍하기 힘들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국제 관계의 대전환을 이룬 것은 우드로 윌슨이다. 윌슨 이전만 해도 약소국은 강대국의 이익을 위해 희생돼도 상관없는 장기판의 졸이었다. 이런 상황이 비난을 받기는커녕 칭송을 받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05년 러일전쟁을 끝내는 포츠머스 조약을 중재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 조약의 제1조가 조선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루스벨트를 탓해봐야 소용없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였다. 당시의 평화란 다른 모든 걸 제쳐두고 강대국끼리 전쟁을 안 하는 상태를 의미했다.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승전한 후 국제 관계를 재편하면서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대신에 민족자결(national self-determination)과 집단안보(collective security)를 이념으로 삼았다. 세력균형은 강대국의 약소국 나눠 먹기에 불과하고 기껏해야 일시적인 평화만 보장할 뿐이었다. 윌슨은 약소국의 자결을 보장하고 그 위에서 강대국들이 영구적인 평화를 모색하는 집단안보를 추구했다. 그것은 무기의 현대화로 대량살상이 가능해진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약소국들은 이상주의자 윌슨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집단안보의 모색은 약소국들에 독립의 길을 열어줬다. 우리나라도 뒤늦은 수혜자다. 그러나 영구적인 평화는 너무 원대한 꿈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후 처리 실패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고,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나자마자 냉전(冷戰)으로 이어졌다. 냉전의 실질적 내용은 한국전쟁에서 우크라이나전쟁까지 이어지는 약소국에서의 열전(熱戰)이었다. 그나마 열전이 냉전의 껍질을 깨고 나와 대전(大戰)으로 비화하지 않은 건 핵무기 같은 대량살상 무기에 의한 공멸의 위기감 속에서 최소한의 집단안보가 유지됐기 때문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승전국인 미국 영국 소련 중국 등 ‘4개 경찰국(Four Policemen)’에 의한 집단안보를 구상했다. 이것이 프랑스를 포함해 유엔 상임이사국으로 이어졌다. 유엔 상임이사회는 거부권의 족쇄에 잡혀 기능하지 못했다. 거부권의 족쇄를 풀려면 상임이사국들이 가치를 공유해야 하나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는 대화가 어려웠다. 다만 상임이사국에만 핵 보유를 인정한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가 집단안보에 실효적인 최소한의 구속복(拘束服·straitjacket)으로 남아 있다. 재선에 도전한 도널드 트럼프가 북핵을 사실상 인정하고 대북 지원의 대가로 핵 동결-축소-폐기를 유도하려 한다. 핵 보유국이 자발적으로 비보유국이 된 적이 없어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더 심각한 것은 트럼프가 북핵 용인을 핵 억지력 제공 비용과 결부시키는 상황이다. 물론 한국과 일본은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더 이상 미국의 피와 돈만으로는 평화를 지킬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의 핵 억지력 실행에 대한 의구심이 항존(恒存)하는 상황에서 억지력의 대가가 지나치면 차라리 자체 억지력을 갖는 것이 낫다. 북한과 같은 불량국가가 아니라 NPT를 모범적으로 준수해온 한일이 핵무기를 보유한다면 집단안보의 최소한의 구속복이 완전히 풀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트럼프의 불장난을 막으려면 핵무기를 가질 수 있음에도 갖지 않은 나라들이 언제라도 핵무기를 개발할 준비가 돼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한일만이 아니라 트럼프가 탈퇴로 협박하고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NPT는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 러시아 중국에 핵 보유의 특권을 부여한 체제인데도 러시아와 중국은 북한의 핵 개발을 제지하기는커녕 방치하고 이제는 노골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특권을 부여받은 나라로서 무책임하기 짝이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이익에도 반한다. 다만 두 나라가 한 어리석은 짓을 깨우쳐주기 위해 러시아와 중국에 가까운 곳에 핵무기를 재배치해야 할 때 미국이 안이한 판단으로 하지 않았고 결국 북핵의 현실화로 이어졌다. 핵 강대국들이 집단안보를 위한 최소한의 의무라도 이행하도록 하려면 핵 비보유국들이 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 자체 핵무장 능력도 갖추지 않고 핵무기 재배치도 거부하는 한가한 자세로는 국가의 안위도, 세계의 안위도 지키지 못한다. NPT를 모범적으로 준수해온 나라들이 NPT를 넘어설 각오까지 해야 NPT가 가까스로 지켜질 수 있는 시대가 됐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일본의 검찰 신뢰도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다. 일본 검사는 기소한 사건이 무죄가 날까 전전긍긍이다. 무죄가 나면 옷 벗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죄를 다루는 특수부 검사일수록 사건마다 목숨을 거는(一生懸命) 자세로 임한다. 그래서 기소가 소극적이라는 비판도 없지는 않지만 억울한 피의자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우리나라 검사는 기소해서 무죄가 나도 ‘아니면 말고’다. 특수부일수록 더하다. 1987년 민주화를 전후해 검찰의 특수부가 거악(巨惡)과 싸우던 멋진 시절이 있었다. 당시 재벌 수사는 뇌물이나 불법 정치자금을 찾지 못하면 제대로 된 수사로 봐주지 않았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박영수 대검 중수부장 때부터 재벌 개혁을 내걸고 배임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서양에선 배임을 형사 범죄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그런 식으로 기업을 털면 안 걸릴 기업이 없다. 중수부가 졸렬해졌고 그때부터 폐지론이 제기돼 한참 후이긴 하지만 폐지되기에 이른다. 윤석열 한동훈 두 사람은 박영수 밑에서 수사를 배웠고 이복현 또한 그들 밑에서 배웠다. 중수부 폐지 이후의 특수 수사는 ‘외과수술식 수사’가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으나 검찰주의자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윤석열과 좌(左)동훈 우(右)복현 체제에서는 저인망식으로 혐의가 걸릴 때까지 수사하고, 걸 수 있는 혐의는 모조리 기소하는 방식이 주(主)가 됐다. 윤석열 검찰총장 밑에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사건 기소를 강행한 것은 기업 회계를 잘 안다는 이복현 부장검사였다. 그 덕분에 금감원장이 됐으나 1심 선고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19개 혐의는 모두 무죄가 됐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밑에서 사법농단 수사팀장을 맡은 건 한동훈 3차장검사였다. 법치에 능통해 사법농단 수사를 맡고 법무부 장관이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구속까지 시킨 양승태 대법원장의 47개 혐의는 모두 무죄가 됐다. 두 수사를 총괄한 사람은 대통령이 됐다. 좌천감인 수사를 한 검사들이 바로 그 수사로 승승장구한 셈이다. 삼성 합병 무죄는 단지 그 사건의 무죄로 끝나는 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유의 핵심인 뇌물죄의 토대를 무너뜨린다. 삼성이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합병을 부당한 방식으로 추진하면서 박 대통령을 위해 최순실의 딸 정유라와 조카 장시호를 금전적으로 지원했다는 것이 뇌물죄 혐의의 대강이다. 뇌물죄를 인정한 대법원의 논리는 명시적 청탁은 없었더라도 현안이 있는 기업과 권력자 사이에 금전이 오간 이상 묵시적 청탁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무리한 논리이지만 설혹 그 논리를 인정한다고 해도 삼성 합병 무죄로 기업의 가장 중요한 현안 자체가 흐지부지됐다. 윤석열-한동훈 조(組)의 수사가 최소한의 절도마저 잃고 남용 가까이 치달은 것이 사법 농단 수사다. 이탄희 판사가 법원행정처가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와해를 시도하고 판사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주장으로 불을 붙이고 검찰이 받아쓰기하듯 기소했으나 법원의 무죄 판결에서 보듯 사소한 시빗거리였을 뿐이다. 윤석열-한동훈 조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 개입 등 재판 관여까지 새로 엮어서 양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 몰이에 들어갔었다. 그들은 박영수와 함께 삼성 현대차 SK 등 힘 있는 재벌 총수란 총수는 다 잡아봤고 대통령까지 잡아봤다. 못 잡아본 사람이 하나 있다면 대법원장이었다. 법원은 늘 검찰에게는 갑이었다. 대법원장마저 잡아서 모든 권력이 검찰 아래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고서는 그 수사를 이해할 수 없다. 검찰이 권력에서 독립해 수사하게 됐으나 검찰 내부의 수사 기강이 무너지면 그것은 검찰공화국으로 통하는 길이 될 수도 있음이 분명해졌다. 검사가 대통령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검사가 뒤늦게 무죄가 된 사건으로 대통령도 되고 법무부 장관도 되고 금감원장도 되고 법무부 장관을 토대로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도 되는 세상이 올 줄은 몰랐다. 우리가 아직 못 해봤지만 꼭 해봐야 할 수사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검찰의 수사 농단 수사다. 손준성과 김웅의 고발 사주 시도는 빙산의 자그만 일각일 뿐이다. 저인망으로 샅샅이 뒤지면 농단이 국정에만 있고 사법에만 있었겠나. 수사 농단은 그보다 더했는지 덜했는지도 한 번쯤 확인해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김건희 여사를 함정 취재한 사람은 최재영 목사가 아니라 그냥 최 씨라고 부르겠다. 개신교에서 목사라고 부르려면 최소한 어느 교단(총회) 어느 노회 소속인지가 나와야 한다. 그는 2014년 통일뉴스라는 인터넷 매체에 방북기를 연재하면서 이력에 안양대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을 나왔다고 썼다. 안양대 신학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 총회 신학교다. 그렇다면 대신 총회 아래 어느 노회에 속한 목사가 돼야 하는데 그러지는 않은 것 같다. 그는 자신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해외총회 남가주노회 소속 목사라고 밝혔다. 대한예수교장로회는 통합과 합동이 양대 산맥이다. 통합과 합동은 각각 총회의 이름이다. 총회 안에 총회가 있을 수 없으므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해외총회는 어색하다. 현재 합동 총회에는 미국에 동부노회 서부노회 등 2개 노회밖에 없다. 그가 밝힌 소속은 우리가 흔히 아는 합동과는 관련이 없다. 그가 201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영광의빛교회(The Light of Glory Church)의 2대 담임목사로 취임했다는 기사가 당시 현지 한인 매체에 일제히 나왔다. 그것 말고는 그 교회에 관한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교회에 관한 영상이나 사진조차도 인터넷에 남아 있는 게 없다. 현재 구글 지도로 교회를 찾아보면 폐업이라고 돼 있다. 이상한 교회다. 그의 나이가 올해 61세인 걸로 봐서 또래들처럼 학교를 갔다면 안양대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을 다닌 것은 1980년대일 것이다. 이후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교육철학을 공부했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그러고는 1995년 미국으로 떠났다고 하니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본격적인 목회를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미국에 간 지 3년 만에 1998년 ‘NK VISION 2020’이라는 통일운동 단체를 만들었다. NK는 뉴코리아(New Korea)의 약자다. 사우스코리아도 노스코리아도 아닌 뉴코리아를 내세우고 있지만 친북적인 단체다. 이 단체가 얼마나 큰지 모르겠으나 그 산하에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동북아종교위원회, 남북동반성장위원회, 오작교포럼 등 이름도 어마어마한 기구가 4개나 있다. 그는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장 자격으로 2014년 북한을 방문했다. 북한의 봉수교회와 함께 대표적 대외 선전용 교회인 칠골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북한이 가정교회라고 주장하는 곳도 방문했다. 그 뒤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고 지역 교인 10여 명이 집에서 예배를 보는 가정교회가 무려 530곳이나 된다고 선전하고 다닌다. 전형적인 친북 인사의 길을 가고 있다. 최 씨가 김 여사 문제로 여권의 분열이 심화되는 것을 틈타 그제 기자회견을 통해 최고권력자에 대한 몰래카메라 취재의 당위성을 내세웠다. 그러나 최 씨가 한 것은 단순한 몰카 취재가 아니라 함정 취재다. 몰카 취재는 평소와 다름없이 전개되는 상황 속에 취재하는 사람이 카메라를 숨기고 끼어들 뿐이다. 함정 취재는 취재하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미끼를 던지면서 상황을 조성한다. 최 씨의 경우는 김 여사에게 300만 원짜리 디올 백이라는 미끼를 들고 가서 상황을 만들었다. 전문적인 스파이처럼 손목 몰카 시계까지 차고서 그렇게 했다. 길바닥에 돈뭉치를 일부러 놓아두고 길 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몰카로 찍는다고 해보자. 길에서 주운 돈뭉치라고 슬쩍 하는 것은 단순히 비양심적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실물 습득죄라는 범죄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런 반응으로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을 일부러 유혹의 함정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목사라면 더구나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마귀가 예수를 상대로 빵과 능력과 권력을 차례로 미끼로 던지며 한 시험이 바로 그런 짓이다. 물론 우리가 냉철해지려고 해도 몰카 속에 비친 모습은 마음속에 남기 마련이다. 누군가 돈뭉치를 주워 경찰서에 갖다 주지 않고 슬쩍 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를 전과 같이 여기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도 그런 유혹에 빠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렇다. 그래서 함정 취재는 하면 안 되고 용납하는 것으로 비치게 해서도 안 된다. 김 여사가 디올 백을 즉각 돌려주지 않고 받은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균형감의 회복을 위해 노력할 때다. 김 여사가 못마땅하지만 나라가 친북 인사의 공작에 놀아나서야 되겠는가.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어제는 언론 보도에서까지 부적절하게 쓰인 ‘지점’이란 표현을 보게 됐다. 존 플럼 미 국방부 우주정책 담당 차관보가 북한의 정찰위성과 관련해 ‘그들의 전쟁 능력을 가능하게 하는 지점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는 구절이다. ‘그들의 전쟁 능력을 가능하게 하는 지점이 있는지 여부’란 부분이 영어로는 ‘if there are things that enable their ability to do a war fight’로 돼 있다. 왜 ‘things’를 굳이 지점으로 번역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10일 경남도당 신년인사회를 마친 뒤 기자들이 현직 검사들의 총선 출마가 잇따르는 사태에 대해 묻자 “우려 지점은 우리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우려할 점’이라고 하면 될 것을 우려 지점이라고 해 어색했다. ▷지난해 말 방한한 피아니스트에 관한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다가 한 방송사 라디오 PD가 올린 영상을 보게 됐다. 지점이란 표현을 수차례 사용하는데 어느 것 하나 적절하지 않았다. ‘자유롭고 독창적인 그의 커리어가 가능했던 지점은 그가 전형적인 콩쿠르 출신의 피아니스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의 지점은 이유라고 써야 한다. ‘30개의 곡(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의미)을 그냥 갖다 붙여놓은 것 같은 연주가 되면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 그런 지점들을 상쇄시키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했다’의 지점은 그냥 점으로 쓰면 된다. ▷한 위원장은 51세다. 앞의 라디오 PD는 인터넷을 찾아보니 50세로 나와 있다. 지점(地點)은 글자 그대로는 땅의 한 점이다. 흔히 사고가 난 지점과 같은 말을 쓴다. 출발 지점, 도착 지점이라는 말도 쓴다. 사실 이런 말만 해도 ‘지’를 빼고 출발점, 도착점이라고 쓰면 된다. 그러나 거꾸로 언제부터인가 구체적인 장소가 아니라 포인트(point)할 만한 추상적인 것에 대해서까지 지점이란 표현을 마구 갖다붙이는 버릇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더니 이제는 젠체하는 50대들까지도 무반성적으로 그런 말을 쓰고 있다. ▷이제 상당수가 60대가 된 ‘86세대’들은 부분이란 표현을 유행처럼 사용했다. 지금도 그들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 같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독일 헤겔 철학에서 전체와 부분의 동일성에 기초해 만들어진 표현이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쓰이다가 1980년대 운동권을 통해 확산된 것이다. ‘그런 부분’은 ‘그런 점’ 혹은 ‘그런 측면’으로 해도 부족할 게 없고 오히려 더 적절하다. 요새 ‘지점’의 용례는 ‘부분’의 용례보다 훨씬 부적절해 보인다. 언어를 무반성적으로 쓰면 내가 말하지 않고 말이 말을 하게 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법무부 장관 재임 마지막 날 한 예비 고교생에게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선물했다. 그는 장관으로 임명되기 전 국회 인사청문회에 제출한 서면질의 답변서에서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으로 모비딕을 꼽았다. 모비딕을 최고로 꼽았다니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난 모비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다. 모비딕은 백과사전 같은 장황한 고래 설명 반, 고래 잡는 얘기 반이다. 그래서 모비딕을 읽을 때 고래 설명 부분은 건너뛰면서 읽지 않으면 잘 읽히지 않는다. 한 위원장이 그 책을 어느 나이에 읽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요새처럼 책 안 읽는 시대에 예비 교교생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모비딕 같은 책을 선물하는 게 선물받는 사람보다 선물하는 사람의 입장이 우선인 것 같은 느낌은 들었다. 한 위원장은 법무부 장관 시절인 올 3월 유럽 출장을 가면서 손에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번역서를 들고 공항에 나타났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을 내는 곽작가가 친한 후배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그리스 원문과 영어 번역서를 참조하면서 읽었다. 그의 말인즉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한국 번역서든 영어 번역서든 그냥 읽는다고 읽히는 책이 아니다. 일단 고대 그리스와 주변 도시들의 지도가 머릿속에 그려져야 하고 각 도시들의 관계, 그 시대의 특수한 관행들이 이해돼야 읽힌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위원장의 독후감이 궁금하지만 그것까지는 알 수가 없다. ‘정치인’ 한동훈이 요새 트레이드마크처럼 쓰고 있는 말이 ‘동료 시민’이다. 미국 정치인들이 연설에서 흔히 쓰는 ‘마이 펠로 시티즌스(my fellow citizens)’를 직역한 것이다. 우리 말에는 이런 표현이 없다. 서구의 중세 도시와 관련해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는 말이 있다. 농촌을 중심으로 주종(主從)관계가 지배하던 중세에 도시에서 처음 상인과 수공업자를 중심으로 동료 의식에 기초한 자유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것이 자본주의를 일으키고 인문주의를 낳고 종교개혁을 낳고 시민혁명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런 역사로부터 행정구역상의 시민이 아닌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이란 뜻의 시민이란 말이 생겼다. 이 시민은 런던 시민, 파리 시민이기도 하면서 영국 시민, 프랑스 시민이기도 하고 심지어 세계 시민이기도 하다. 우리는 왕조의 백성, 즉 신민(臣民)에서 바로 민주국가의 국민으로 건너왔다. 우리에게도 3·1운동, 4·19시위 같은 게 있지만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국민으로서 그런 일을 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한국민이나 서울 시민은 자연스럽지만 한국 시민은 그렇지 않다. 시대를 앞서가는 멋은 처음에는 거슬리지만 점차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동료 시민’이란 말은 여전히 들을 때마다 귀에 거슬리지만 계속 뇌리에 남는 것도 사실이다. 그 말이 새로운 시대 정신의 구호가 되려면 한 위원장이 중앙당 위주에서 벗어나 아래로부터의 정당 정치를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보수 정당에 부족한 것이 아래로부터 동료 의식에 의한 정치다. 그러나 아래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진보 정당에서 먼저 동료 시민적인 민주주의에 관심을 갖고 깨시민(깨어 있는 시민)을 외쳤지만 결국 개딸로 끝나가고 있다. 한 위원장이 아스팔트 보수와 유튜브 보수의 함정을 피하면서 보수 정당의 하부구조를 바꿔갈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한 위원장은 모비딕에서 선장 에이허브보다는 1등 항해사 스타벅에 더 호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에이허브는 무모했고 스타벅은 신중했다(커피브랜드 스타벅스의 스타벅이 여기서 유래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 내 배에 태우지 않겠다’는 스타벅의 말을 좋아하는 구절로 꼽았다. 한 위원장이 ‘조선 제일검’으로 불리긴 했지만 옛 명(名)검사들처럼 끝까지 신중했는지 의문을 갖고 있다. 사법농단 수사는 유례를 찾기 힘든 무모한 수사였다. 스타벅은 신중했지만 막판에는 에이허브가 몰고온 집단 광기에 휩쓸려 모비딕을 잡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검찰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에이허브였고 한 위원장은 스타벅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정치에서는 그래선 안 된다. 에이허브의 무모한 통치를 끝장내는 스타벅이 돼야 보수 정당이란 배는 국민이라는 고래에 의한 침몰을 면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한때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법관의 꽃’으로 불리었으나 지금은 고등법원 판사가 ‘법관의 꽃’ 비슷해진 모양이다. 법원 인사철마다 고법 판사의 대형 로펌행이 줄을 잇고 있다. 고법 판사 퇴직자는 2022년 13명, 2023년 15명이었고 올해도 벌써 서울고법에서만 10명 안팎의 판사가 사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종전에는 판사가 되면 지방법원 배석판사, 지방법원 단독판사, 고등법원 배석판사, 지방법원 부장판사 순으로 경력을 쌓았다. 지법 부장판사까지는 대부분 됐다. 고법 부장판사부터는 자리가 많지 않다.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하면 법원장이나 대법관을 바라볼 수도 있고 중도에 사직해도 전관(前官)으로서의 활용 가치가 높기 때문에 대형 로펌에서 모셔갔다. 과거에는 고법 부장판사의 로펌행이나 고법 부장판사가 못 된 지법 부장판사의 줄사표가 법원 인사철마다 주요 기사였다. ▷지금 고법 판사의 줄사표는 승진을 못 해서 그만두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과거 지법 부장판사의 줄사표와는 성격이 다르다. 지법과 고법 인사를 분리하는 이원화는 김명수 대법원에서 처음 시행된 것이 아니라 이미 2010년에 도입됐다. 이에 따라 2011년부터 지법 부장판사가 될 기수에서 매해 20여 명이 고법 판사로 선발됐다. 이때부터 6년간 고법 판사 선발이 고법 부장판사 조기 선발처럼 인식되는 특수한 시기가 있었다. 고법 판사 선발에 떨어진 판사들은 너무 이른 시기부터 근무 의욕을 잃게 됐다. 그런 이유도 있고 해서 2017년 김명수 대법원에서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주목할 것은 고법 부장판사가 더 이상 승진 자리가 아니게 된 다음에도 서울 수원 등 수도권 고법 판사 선발 경쟁률은 10 대 1을 넘고 지방 고법도 2 대 1 정도의 경쟁률은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법이 대등합의부로 운영되면서 고법 판사들의 업무량이 크게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과거와 같이 고법 부장판사의 권한을 누리고 법원장 보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건 없어졌지만 법원 내에서 실력을 검증받은 판사로 인정돼 중도에 사직해도 대형 로펌에서도 귀하게 모셔가는 자리가 됐기 때문이다. ▷고법 부장판사는 2015년부터 대형 로펌으로 직행할 수 없다. 고법 판사는 고법 부장판사와 위상이 크게 다르지 않은데도 취업 제한이 없다. 고법 판사를 고법 배석판사라고 하지 않는 것은 고법 부장판사와 대등하게 합의부를 구성하기 때문이고 고법 판사는 시간이 지나면 대개 고법 부장판사가 된다. 억지로 고법 판사 시킨 게 아니다. 그렇다면 고법 부장판사에게 적용되는 취업 제한을 고법 판사로까지 확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양의 국가는 도시국가로 출발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같은 말을 사용했지만 그리스 국민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이나 스파르타 시민이었을 뿐이다. 고대 로마는 도시국가 로마에서 시작해서 제국을 이뤘지만 사도 바울처럼 로마에 살지 않아도 로마시민권을 갖는 게 중요했다. 근대에 들어와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끼리 한 국가를 이루려 하면서 뒤늦게 민족국가(nation-state)가 등장했다. 서양인에게는 시민의 정체성이 먼저이고 국민의 정체성은 나중이다. ▷우리는 서양과 달리 일찍부터 민족끼리 왕조 국가를 이루고 살았다. 다만 우리는 왕의 신민(臣民·subject)에서 바로 국민(國民)으로 넘어왔다. 서양에서는 절대국가의 신민에서 민주국가의 국민으로 넘어오는 사이에 시민혁명이 존재한다. 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이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시민혁명이 없었다. 그래서 영미권에서 시티즌(citizen), 프랑스인이 부르주아(bourgois), 독일인이 뷔르거(Bürger)라고 말할 때의 시민 개념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에게 시민은 행정단위의 구성원일 뿐이다. 서울시민이나 부산시민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한국 시민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런 말을 써야 할 때가 있다면 국민이라고 쓴다. 미국 대통령은 연설할 때 ‘마이 펠로 시티즌스(my fellow citizens)’라고 부르며 시작한다.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을 모은 유명한 책 이름이 ‘마이 펠로 시티즌스’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통령은 연설할 때 ‘국민 여러분’이라고 부르며 시작한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26일 취임사에서 ‘동료 시민’이란 말을 여러 차례 썼다. ‘마이 펠로 시티즌스’의 직역이다. 어제도 기자들 앞에서 같은 말을 수차례 썼다. 그는 2022년 법무부 장관에 취임할 때만 해도 국민이라고 했다. 다만 그때도 ‘동료 공직자’란 말을 썼다. 얼마 전 법무부 장관에서 퇴임할 때 처음 ‘동료 시민’이란 말을 썼다. 이번 취임사에는 ‘국민의힘 동료’라는 표현도 나온다. 갑자기 쓴 게 아니라 숙고하면서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한 위원장은 ‘개딸 전체주의’에 대항해 싸우기 위한 용기와 헌신을 당부했다. 동료들끼리 형제애로 함께 꾸려 가는 게 민주주의다. 그렇기에 동료에게 헌신을 요구하고 용기를 요구할 수 있다. ‘동료 시민들이여, 국가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달라’는 케네디 모멘트와도 연결된다. 다만 언어는 사회의 것이다. ‘동료 시민’이 한 개인이 혼자 별나게 쓰는 말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말이 될지는 의문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이미 2013년에 지구 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2도 이상 올라가면 회복 불가능한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봤다. 실제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보는 선은 4도 상승이다. 그러나 온난화로 2도 이상 올라가면 북극이 녹아 이산화탄소보다 30배나 강력한 온난화 효과를 지닌 메탄가스가 동토층에서 분출되기 때문에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노력은 더 이상 의미 없어지고 지구 온도는 계속 올라가 4도까지도 이르리라는 얘기다. 1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를 홀로세라고 한다. 인류는 홀로세에서 산업화 이전보다 3도 이상 높은 온도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홀로세를 넘어 빙하기라고 불리는 플라이스토세를 거쳐 지구와 소행성의 충돌로 공룡이 멸종한 이후부터 시작되는 플리오세로나 가야 홀로세의 산업화 이전보다 3도 이상 높은 기온이 나타난다.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부터는 2도가 아니라 1.5도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산화탄소 축적으로 인한 온난화 효과는 바로 다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간격을 두고 단계적으로 나타난다. 지구 온도가 1.5도 높아졌다면 그때까지 누적된 이산화탄소의 양으로 2도까지 올라가는 것은 불가피하고 2도 이상이 되면 앞에서 언급한 메커니즘에 따라 4도까지 자동으로 오르기 때문에 1.5도 상승 전에 멈추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구 온도는 2021년과 2022년에 이미 1.1도 높아졌다. 2030∼2035년 사이에 1.5도 상승에 도달하리라는 것이 대체적인 예상이다. 불과 몇 년 남지 않았다. 1.1도 상승 때까지도 이상 기후가 속속 나타나는데 4도 상승 때의 상황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나의 과학 지식으로는 1.5도라는 기준이 얼마나 근거가 있는지 알 수 없다. 2도 상승까지 올라가면 4도까지 상승하는 메커니즘이 정말 그런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기준을 1.5도가 아니라 좀 더 높게 잡고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면 언젠가는 온난화를 되돌릴 수 없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건 설득력이 없지 않다. 게다가 온난화가 초래할 위기의 성격이 더 낫고 덜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생사의 문제라면 더 비관적인 전망에 맞춰 대책을 찾는 게 안전해 보인다. 온난화를 초래한 산업화는 탄소 기반 문명이다. 산업화로 인력(人力)이나 마력(馬力) 대신 증기력을 사용한 지 150년이 넘게 흘렀다. 그동안 인류는 탄소 기반 문명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익숙해져 버렸다. 석탄 석유는 연료로만 사용될 뿐 아니라 그로부터 뽑아낸 원료로 수많은 물건을 만든다. 우리나라는 플라스틱 빨대를 종이 빨대로 바꿔 쓰는 것 하나 못하고 결국 플라스틱 빨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생활 방식의 근본적 전환이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에 몇 년 뒤가 아니라 설혹 몇십 년 뒤라고 해도 많은 시간이 남은 건 아니다. 올해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는 결의문에서 화석 연료의 ‘단계적 퇴출(phase-out)’ 대신에 화석 연료로부터 ‘멀어지는 전환(transitioning away)’이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2030∼2035년 사이에 1.5도 상승에 도달하리라는 예상에서 보면 안이한 인식의 표현이다. 어쨌든 화석 연료로부터 멀어지는 전환은 원자력으로 향하는(transitioning toward) 전환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태양력 풍력 조력 같은 신재생 에너지는 효율성이 화석 연료에 비해 크게 떨어지고 효율성이 높아지길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기는 환경론자라면 원자력 사용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데 찬성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최초로 핵무기를 개발한 오펜하이머의 말처럼 핵은 파괴자이면서 구원자인지 모른다. 실은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전해 줬다는 불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불을 사용하면서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지만 불은 주의 깊게 관리하지 않으면 재앙을 몰고 오기도 했다. 막바지에 이른 탄소 기반 문명에서 구원해 줄 것은 일단 태양도 바람도 조류도 아니고 핵이다. 이 현대판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없었다면 온난화에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다만 원자력은 불을 다룰 때보다 훨씬 더 세심한 주의와 철저한 관리를 요구한다. 그 때문에 여러 가지 불안이 초래되지만 문명은 진화할 때마다 더 큰 불안을 감수하고 극복하며 나아갔다고 본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연동형 비례제는 초과의석이 가능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한다. 2020년 총선 결과에 대입해 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실제로는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과 열린민주당)과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실제로는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의 정당투표 득표율은 각각 38.8%와 33.8%다. 정의당(9.7%)과 국민의당(6.8%)까지 4개 정당만 최저 기준인 3%를 넘겼다. 지역구에서는 민주당 163석, 미통당 84석, 정의당 1석, 국민의당 0석을 얻었다. 연동형 비례제를 적용하려면 단순 비례제에서 얻을 수 있는 의석을 먼저 계산해야 한다. 민주당 129석, 미통당 108석, 정의당 36석, 국민의당 27석이 나온다. 이 결과에 가깝게 지역구 의석을 고려한 조정을 하는 게 연동형 비례제다. 민주당은 단순 비례제라면 얻을 수 있는 의석보다 34석을 더 얻었기 때문에 추가로 받을 의석은 없다. 미통당은 단순 비례제라면 얻을 수 있는 108석에 못 미치는 84석을 얻었기 때문에 모자란 24석을 받는다. 정의당과 국민의당도 같은 식으로 35석과 27석을 받는다. 그러면 의원 총수는 334명이 된다. 연동형 비례제의 마법은 초과의석에서 나온다. 본래 비례의석 47석에 민주당이 얻은 초과의석 수(34석)만큼이 더해져 81석이 다른 정당들로 배분되기 때문에 다른 정당들은 득표율만큼의 의석을 확보한다(단순화를 위해 무소속 5석을 빼고 계산했기 때문에 앞 문단의 계산으로는 81석에 5석을 더한 86석이 배분됐다). 2020년 총선은 실제로는 초과의석 없이 30석으로 준연동형을 실시했다. 결과는 민주당 183석, 미통당 103석, 정의당 6석, 국민의당 3석이다. 민주당은 연동형이라면 초과의석을 포함한 의원 총수(334석)의 과반에 못 미치는 163석에 그쳤을 것이지만 준연동형으로 의원 총수(300석)의 5분의 3이 넘는 183석을 얻었다. 미통당은 의석수로는 108석과 103석으로 비슷하지만 처지는 나빠졌다. 연동형 비례제를 기를 쓰고 막고 준연동형에서 먼저 위성정당을 만들었다가 압도적 제1당을 허용했다. 정의당과 국민의당은 연동형에서라면 36석과 27석을 얻었을 것이나 6석과 3석으로 쪼그라들었다. 연동형이 군소정당에 유리하지만, 준연동형에서 군소정당은 오히려 병립형 비례제에서만도 못한 결과를 얻었다. 병립형 비례제라면 지역구에서는 거대 양당을 찍고 정당투표에서는 소수당을 찍는 유권자가 나오지만 위성정당으로 인해 ‘분리 투표’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위성정당만 없으면 준연동형은 작동할 것인가.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 초과의석은 지역구로만 나오고 미달의석은 채워주는 제도에서 위성정당을 막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준연동형에서는 위성정당을 막을 방법이 없다. 법으로 금지해도 법을 우회한 위성정당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난 총선에서는 미통당이 앞장선 위성정당으로 민주당이 재미를 봤지만 언제든지 제1당이 바뀌어 낭패를 볼 수 있다. 연동형 비례제를 위해서는 초과의석이 필요하지만 국민은 국회 의석 증가에 거부감이 강하다. 그래서 ‘의원 대우와 권한 줄이기’부터 거론하지 않는 연동형 비례제 주장은 하나 마나 한 소리다. 현재 의원 총수를 유지한 상태에서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270명 정도를 의석 배분의 기준으로 삼고 지역구를 220석으로 줄여 비례대표의 여지를 80석 정도 둔다면 300석을 상한으로 한 연동형 비례제가 가능하다. 초과의석이 많이 나오지 않으면 오히려 의원 총수가 줄어 국민에겐 좋은 일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런 방식은 거론하지도 않는다. 당장 연동형 비례제를 실시할 수 없다면 병립형 비례제로 돌아가야 한다. 다만 병립형 비례제도 민주적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권역별 중대선거구제의 활용이다. 각 정당이 권역별로 여러 명의 비례대표 후보를 낸 뒤 후보들이 득표한 순으로 정당 득표율에 따라 할당된 수만큼 당선시키는 것이다. 유권자는 명단은 결정하지 못하고 순위만 결정할 뿐이지만 그래도 정당은 유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병립형 비례제의 민주성을 점차 강화하는 바탕 위에서 국민의 신뢰를 얻어 비례의석을 80석 정도로 확대한다면 비례제의 이상에 보다 근접한 연동형으로의 전환을 자연스럽게 모색할 기회가 올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로스 다우섯은 2일 ‘한국 소멸하나’라는 도발적 제목의 칼럼에서 “흑사병 창궐 이후 인구가 급감했던 14세기 중세 유럽 시기보다 더 빠르게 한국 인구가 감소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근거는 한국의 합계출산율인 0.7명을 적용하면 한 세대가 200명이라고 할 경우 다음 세대에는 70명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합계출산율은 15세 여성이 가임 기간이 끝나는 49세까지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숫자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올 10월 발표한 추계에 따르면 합계출산율이 0.7에서 반등하지 않고 유지될 경우 2040년 0∼14세 인구는 2020년의 절반가량으로 줄어든다. 0∼14세 인구가 200명이라고 한다면 20년 만에 100명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다우섯이 한 세대를 30년으로 봤다면 30년 만인 2050년에는 얼추 70명으로 줄어든다는 계산이 나온다. ▷흑사병은 1348년 이탈리아에 상륙해 4년 만에 유럽 총인구의 3분의 1을 사망케 했다. 파리 피렌체 런던 등 도시에서는 사망률이 50∼80%에 이르렀다. 전염병에 의한 단기간 급속한 인구 감소이긴 하지만 당시는 전염병 없이도 사망률이 높아 장기간 인구 회복이 쉽지 않았다는 점에서 낮은 출산율에 의한 장기간 감소와 비교하는 것이 꼭 어색한 것만은 아니다. 다만 한국의 총인구는 합계출산율 0.7이 유지되더라도 고령 인구로 인해 2040년에 2020년보다 5% 정도 감소한다는 사실은 기억해둬야 한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지난해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8년째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OECD 국가 중 합계출산율이 1을 밑도는 유일한 나라로서 꼴찌에서 두 번째인 나라와 압도적 차이로 꼴찌다. 합계출산율이 1을 밑도는 상황도 5년째 계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나라가 겪는 기록적인 저출산이 이제 전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음을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가 뉴욕타임스 칼럼일 뿐이다. ▷한국은 자원이 부족해 가공 무역을 통한 수출밖에는 먹고살 길이 없다. 그래서 우수한 인력을 키웠다. 인력을 키우는 데는 돈이 든다. 내부 경쟁은 점차 심해져 공교육으로는 따라잡지 못하고 사교육으로만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비혼(非婚) 출산에 호의적이지 않은 문화 때문에 기본적으로 출산율이 떨어지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이 더 떨어지는 것은 사교육비 때문이다. 다우섯도 그 점을 지적했다. 성공한 그 이유 때문에 실패한다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공식을 피해 가야 진짜 성공한 나라가 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는 지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를 뽑는 데서부터 길을 잘못 들어섰다. 선거를 앞두고 규칙을 바꿨다. 지금 더불어민주당이 하려는 것과 똑같은 짓을 했다. 규칙은 일반 유권자의 의사를 30% 반영해온 데서 당원들의 의사를 100% 반영하는 것으로 바꿨다. 당원 중심에서 유권자 중심의 포괄 정당으로 가는 추세에서 보면 정체도 아니고 오히려 퇴행이었다. 대통령실은 출산율 제고를 위한 의견 표명에 불과한 것을 트집 잡아 당 대표 출마 의지를 밝힌 나경원 전 의원을 공격해 주저앉혔다. 나 전 의원이 반윤(反尹)도 아니지만 친윤(親尹)도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대통령실은 김기현 의원이 윤심(尹心) 타령을 할 때는 잠자코 있다가 안철수 의원이 윤안(尹安)연대를 거론하자 윤심을 선거에 이용하고 있다고 득달같이 비난하고 나왔다. 윤 대통령은 당 대표로 상징되는 중앙당 체제를 허무는 것으로 정치 혁신의 시동을 걸었어야 한다. 그랬다면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낡은 것으로 보일 만큼 차별성을 갖게 됐을 것이다. 당장 당 대표 자리까지 없애지는 못해도 당 대표 선출에서 중립을 지켜서 당 대표를 통한 공천권 행사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 어느 대통령보다도 더 노골적으로, 더 집요하게 당 대표 선거에 개입했다. 국민의힘은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 참패로 내년 총선에 불똥이 떨어지자 인요한 씨를 중심으로 혁신위원회를 꾸렸다. 혁신위의 제안으로 이준석 전 대표와 홍준표 대구시장의 징계에 대한 사면이 이뤄졌다. 그들이 무슨 이유로 징계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당의 진정한 대표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만으로도 그들은 징계감이다. 물론 같은 당에 있으면서도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비판이 자기 당이 후보로 내세워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에 대한 존중을 바탕에 두고 한 것인지 아닌지는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정당인은 언론인이 논평하듯이 대통령을 비판할 수 없다. 한두 번은 몰라도 계속 그렇게 하려면 당을 나가야 한다. 정당의 생명은 기율(紀律)이다. 국민의힘의 기율은 이 전 대표의 응석을 받아주면서 무너졌다. 이 전 대표에 대한 사면은 통합이 아니라 혼란일 뿐이다. 그는 사면이 아니라 제명을 했어야 한다. 이 전 대표의 탈당으로 인한 당장의 손해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내년 총선도 지난 대선처럼 사생결단할 선거라고 여긴다. 그러나 더 비호감인 정당을 찍지 못해 비호감인 정당을 찍는 선거는 끝내야 한다. 이준석 신당이든 비명(비이재명) 신당이든 또 다른 신당이든 생겨서 총선에서만큼은 양당 투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내년 총선이 사생결단할 선거인지도 의문이다. 코로나 방역 때 치러진 지난 총선처럼 어느 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기는 어려운 판이다. 게다가 국회선진화법하에서는 과반 의석만으로는 입법권을 행사하기 어렵다. 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들 대통령이 거부권을 갖고 있는 마당에 걱정도 태산이다. 선거 때마다 선거를 사생결단으로 보는 사람들 때문에 정치 혁신이 지체되고 있다. 인요한 혁신위는 영남 중진 의원들의 험지 출마를 거론하고 있다. 희생적인 험지 출마가 선거에 도움을 주는 건 틀림없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래로부터의 공천’이라는 정당민주주의 원칙의 관철이다. 아래로부터의 공천은 현역에게 유리하고 신참에게 불리하다. 그러나 현역에게 유리하다는 이유로 언제까지나 미뤄둘 수는 없다. 무언가를 언젠가 시작해야 한다면 그 언젠가는 항상 지금이 최선이다. 전략 공천도 아래로부터의 공천에 합치해서 이뤄져야 한다. 억지스러운 혁신은 오래가지 못한다. 혁신도 순리를 따라야 한다. 윤 대통령은 정치권 밖에서 와서 바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그에게 정치적 소명이 있다면 늦은 나이에 ‘여의도 사투리’를 배우는 게 아니라 정치의 표준어를 되찾는 것이다. 여의도 사투리의 화법에 따라 김기현 대표를 뽑아놓았더니 잘됐던가. 정자정야(政者正也), 정치는 바른 것이다. 바르면 민심(民心)이 모인다. 오늘날의 여의도는 정치의 표준어를 잊어버린 지 오래다. 윤 대통령부터 잘하지도 못하는 정치의 잔기술을 부리려 하지 말고 크고 바른 표준이 되는 걸 행하려 노력하시라.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날벼락도 도시에서만 있을 수 있는 날벼락이다. 서울 노원구 월계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주민 김모 씨(78)가 다리가 불편한 아내를 부축하며 아파트 입구 계단을 오르던 중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주먹만 한 돌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돌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초등학교 저학년 남자아이가 10층 높이에서 던진 것이었다. ▷2015년 경기 용인시 수지구에서 ‘캣맘 벽돌 사망 사건’이 일어났다. 한 아파트 옥상에서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투척한 벽돌에 아래에서 고양이 집을 지어주던 55세 여성과 29세 남성이 맞아 여성은 사망하고 남성은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 벽돌을 던진 아이는 10세도 되지 않아 형사처벌은 물론이고 보호처분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2007년에는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아파트 옥상에서 중학생 둘이 장난삼아 벽돌을 투척했다가 같은 아파트에 사는 40대 남자가 사망했다. 중학생들은 14세 미만으로 형사처벌은 면했지만 보호처분을 받았다. 널리 보도된 사건이 이렇다는 것일 뿐이고 상해에 그친 사건이나 다행히 피해를 면한 사건까지 포함하면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과거 두 사건은 옥상에서 돌을 던졌다. 소방법에 따르면 아파트 옥상문은 화재 시 고층 가구 거주자들의 안전을 위해 개방하도록 돼 있다. 2015년 사건 이후 신축 아파트의 경우 평상시에는 잠가두고 화재 시에만 자동으로 여는 개폐 장치를 달도록 건축법으로 의무화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에는 이런 장치가 없는 곳도 허다하다. 경찰에서는 투척 사건만이 아니라 추락사나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 잠가두도록 권고하고 있지만 소방법과 충돌해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이번 사건은 복도식 아파트의 복도에서 돌을 던졌다. 복도식 아파트를 계단식 아파트로 다 바꾸기 전까지 대책이 난감하다. 계단식 아파트로 다 바꾼다 해도 창문을 열고 던지는 것까지 막을 방도는 없다. 그러나 아이들이 무심코 던지는 돌에 누군가 맞아 죽는 황망한 일만은 없어야 한다. 유족은 누굴 탓하기도 어려운 고통에 시달리고, 아이나 부모에게는 평생 마음의 죄책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도시의 속도가 초래하는 위험에 대해서는 어릴 때부터 도로 무단횡단을 삼가고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자동차에 주의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아파트 공화국’으로 불릴 정도로 아파트가 많은 나라임에도 도시의 높이가 초래하는 위험에 대해서는 그만큼 경각심을 갖고 있지 않다. 건물에서의 추락이나 투척의 위험에 대한 교육을 어릴 때부터 강화해야 한다. 날벼락을 피하려고 수시로 하늘을 쳐다보고 다녀야 하는 나라가 돼서는 곤란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