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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머리’에서 휴가를 보내다.”한국말로 들으면 그리 근사하지 않은 문장. 허나 태국어로 바뀌는 순간 마법이 펼쳐진다. 돌머리는 태국 말로 ‘후아힌(Hua hin).’ “태국 왕실 휴양지”로 유명한, 북부 말레이반도 인구 8만여 명의 도시를 일컫는다. 하긴, 휴가기만 하다면야 어디인들 어떠랴.자그마한 어촌이던 후아힌은 1921년 철도청장이던 한 왕자가 기차역 호텔을 세우며 확 달라졌다. 특히 이후 라마7세가 여름별장을 지으며 본격적인 왕실 휴양지로 명성을 얻었다. 별장명도 멋들어진다. ‘끌라이깡원(Klai Kang Won).’ “근심으로부터의 해방”이란다. 후아힌은 방콕에서 남으로 약 200km 거리. 차로 2~3시간 달리노라면, 왕도 놓고 왔다는 걱정거리가 스멀스멀 사라진다. 태국은 1년 내내 무덥지만, 겨울엔 건조한데다 기온도 다소 낮아 쾌적하다. 골프 같은 야외활동이 주목적이라면 후아힌은 탁월한 선택이다.실제로 후아힌은 겨울철 전지훈련 명소다. 올해 초 프로축구팀 FC서울과 부산아이파크가 여기서 구슬땀을 흘렸다. 최근 골프 아시안투어 퀄리파잉(Q) 시리즈 최종전도 열렸다. 태국관광청 초청을 받아 한국인들이 관심 많은 골프장들을 중심으로 후아힌을 둘러봤다.●반얀 골프 클럽한국에 가장 많이 알려진 후아힌 골프장은 ‘블랙마운틴.’ 미국 월간지 골프다이제스트가 2012년 뽑은 ‘비(非)미국 골프장 100선’에 오른 명문이다. 한데 명성만큼 인기도 많아 평일도 부킹이 쉽질 않다. 행여 예약이 안 되도 너무 아쉬워 말자. 후아인엔 블랙마운틴 버금가는 골프장이 여럿이다. 현지에선 반얀(Banyan) 골프 클럽이 더 낫다는 이들도 상당하다. 파인애플농장 자리였다는 반얀은, 이름처럼 근사한 반얀트리(벵갈보리수)들을 위시한 ‘자연미’가 끝내준다. 클럽하우스로 들어서 싱그러움으로 눈이 부신 전경만 봐도, 왜 이곳이 태국 10대 골프장에 항상 이름을 올리는지 수긍이 간다. 세련된 식당 역시 맛깔 나는 음식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해 만족도가 높다.반얀은 한국 골퍼라면 필드가 친숙할 수도 있다. 페어웨이 잔디가 ‘러쉬 조이시아(Lush Zoysia)’로 한국 금잔디와 같은 종이다. 공을 야무지게 받혀줘 치다 실수할 확률이 낮은 편. 그렇다고 스코어를 안심해도 좋단 얘긴 아니다. 어딜 가도 점수 나쁠 이유가 우린 101가지쯤 있지 않나.시그니처 홀은 파3 15번 홀. 클럽 측은 “티박스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오션 뷰를 놓치지 마라”고 소개했다. 허나 어쩌랴. 아일랜드 그린에 공을 올릴 수나 있을지 끙끙대느라, 저 너머 풍광이 어떤지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개인적으론 파5 12번 홀도 인상 깊었다. 태국에서 흔치 않은 오르막 코스로, 헉헉대며 그린까지 공을 올리니 나름 성취감이 밀려왔다. (쓰리 퍼팅으로 행복은 금방 시들었다.)태국 골프코스 디자이너 리파폰 나마트라가 설계했다는 반얀은, 어딜 가도 숲과 바다가 어우러져 “이 맛에 외국 나오지”란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코스 역시 어느 한 홀도 싱겁지 않고 아기자기하다. 2008년 10월 오픈한 뒤 명품시계 롤렉스가 선정한 ‘세계 골프코스 톱 1000’에도 이름을 올렸다.● 스프링필드 로열 컨트리클럽1993년 세워진 스프링필드(Springfield)는 곳곳에서 친숙한 얼굴 사진을 마주한다. ‘골든 베어(golden bear)’ 잭 니클라우스(84)다. 기존 18홀을 그가 디자인했는데, “챔피언십 코스의 높은 기준에 부합하면서도, 어떤 수준의 골퍼도 즐길 수 있는 편안함”(골프아시안 닷컴)이 장점이라 알려졌다. 2005년 추가로 만든 9홀은 미 유명 골프코스 디자이너 리 슈미트가 설계했다.미 월간지 골프매거진에 따르면 니클라우스 코스는 일반적으로 드로우를 구사하는 골퍼에게 유리하다. 페이드로 친 공은 ‘무시무시한’ 벙커와 워터해저드를 만날 각오를 해야 한다. 스프링필드도 확실히 오른쪽에 난관이 많이 도사렸다. 물론 ‘스트레이트’로 치면, 거리는 대체로 길지 않아 확실한 보상을 안겨준단다. 누군 똑바로 치고 싶지 않아 갈팡질팡했을까.스프링필드는 첫 홀에 서면 쭉 뻗은 심플한 전망에 안도감이 든다. 실제로 태국 골프장들은 웬만하면 ‘오비(OB·out of bounds)’가 없어 부담이 덜하다. 하지만 그린이 빠른데다, 은근한 언듈레이션(굴곡· undulation)에 애를 먹는다. 시그니처 홀은 파5 18번 홀. 드라이버 거리가 좀 나는 이들은 세컨샷부터 벌써 그린이 확 눈에 들어와 반갑다고. 하지만 주의하시길. 보기보다 거리가 먼 데다 심지어 아일랜드 그린이다. 자칫 기대는 찰나에 탄식으로 바뀐다.코스도 좋지만 부대시설도 잘 갖춰져, 블랙마운틴이나 반얀보다 ‘가성비’가 좋다는 후기들이 많다. 골프&리조트 총괄매니저도 “호젓한 분위기 속에서 골프 등을 즐기려 장기 투숙하는 한국인들이 꽤 많다”고 했다. 다양한 프로모션을 이용하면 당연히 가격도 착해진다. ● 레이크뷰 골프 클럽레이크뷰(Lakeview)는 후아힌에서도 가장 근사한 경치를 지닌 골프장으로 평가받는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깽끄라찬(kaeng krachan) 국립공원’ 옆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36홀로 구성된 골프코스는 어딜 가도 아름다운데, 9홀마다 컨셉이 조금씩 다른 게 독특하다.클럽 측에 따르면 기존 18홀은 전반 ‘마운틴 A’와 후반 ‘레이크 B’로 나뉜다. A는 산세가 심한 건 아니고, 무성한 나무와 굴곡 있는 페어웨이가 특징. B 코스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이나 이름처럼 ‘퐁당’의 아픔이 만만찮다. 파3지만 거리가 긴 3번 홀과 14번 홀이 어렵다. 2006년 문을 연 신규 코스는 ‘데저트(사막) 스타일’과 ‘스코티시 스타일’로 구분 짓는다. 진짜 사막 같은 건 아니지만, 곳곳에 도사린 벙커만 오가다보면 모래 위에서 치는 거나 진배없을 터. 스코티시는 “딱 보면 스코틀랜드가 떠오른다”는데 경험이 없어 뭔지 모르겠다.1월 말 방문했을 때 코스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시안 투어 퀄리파잉(Q)스쿨 대회 직후였다는데, 그렇다면 이용객을 받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후아힌 도심에서 상당히 멀어서 오고가는데 시간이 꽤 걸리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팜 힐 골프 클럽1992년 문을 연 팜 힐(Palm Hill)은 후아힌에서 가장 처음 생긴 국제기준 골프코스라고 한다. 수백 그루가 우거진 야자수만 봐도 흐뭇한데, 향수 원료로 유명한 푸루메리아 나무와 보랏빛 꽃망울이 어여쁜 부겐빌리아까지 어우러져 아름다운 이국 풍경이 펼쳐진다.미 유명 골프코스 디자이너 맥스 웨슬러가 설계한 팜 힐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물 흐르듯 이어지는 코스가 특징이다. 싱가포르 골프지 아시안골프는 “전반부는 정원 속을 거니는 기분을, 후반부는 태국 만(灣)을 가슴에 품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했다. 9홀만 치는 바람에 바다는 품어보질 못했다.10번부터 14번 홀은 팜 힐의 자랑거리. 아름다우면서도 정교한 샷을 요구해 골퍼들의 만족도가 크다고 한다. 시그니처 홀은 11번인데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파3에서 버디를 노려보라”는 안내가 나와있다. 전체적으로 그린은 후아힌에서도 특히 빠른 편에 속했다.방문한 날만 그런 건지 모르겠으나, 유독 서양 방문객들이 많은 것도 눈에 띄었다. 미 캘리포니아 고급 컨트리클럽에 온 기분마저 들었다. 활력 넘치는 분위기가 감돌아 외향적인 골퍼들이 좋아할 듯하다.●그 밖의 즐길 거리휴양지 성격이 강한 후아힌은 관광 명소가 많진 않다. 하긴 주변이 온통 근사한 바다와 숲인데 뭐가 더 필요할까. 그래도 후아힌 기차역은 들러봄직하다. 후아힌 소개 사진이나 영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랜드마크다.영국 BBC가 지난해 ‘세계에서 주목할만한 기차역 톱 5’ 로도 꼽았던 이곳은 1911년 세워진 태국 최고(最古)의 기차역이다. 크기는 간이역 정도로 소담하지만, 태국 전통 건축방식과 서구 빅토리아 양식이 혼합돼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연배가 있다면 무심코 ‘기차와 소나무’가 흥얼거려 질지도.후아힌 야시장은 데차누칫 거리에 있는 노점 행렬이 가장 유명하다. 100m 쯤 되는 거리를 좌우로 가득 메운 길을 어깨가 맞닿으며 걷다보면, 태국의 진짜 냄새가 물씬하다. 바닷가답게 해산물 식당과 군것질 노점이 많아 침샘을 꼬집는다. 상품들은 싸지만 조악한 편이나, 150바트(약 5500원)에 양질의 티셔츠를 건지는 묘미도 숨어있다. 노점상이 그득한데도 억지스레 호객하지 않는 차분함도 맘에 들었다.태국에 왔으면 마시지도 거를 순 없다. 가게마다 다르겠지만, 깔끔한 시설을 갖춘 샵도 500바트(팁 100바트 정도 추가)면 1시간가량 정성 가득 주물러준다. 요즘 동남아에서 마사지는 필수코스지만, 베트남과 태국은 지향점이 다소 다른 성싶다. 베트남이 따뜻한 차를 한입 머금은 듯 노곤해진다면, 태국은 막힌 속 뻥 뚫리는 청량음료를 들이킨 기분이랄까. 라운딩 직후 방문이라면 태국 손을 살포시 들어주고 싶다.후아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지난해 타계한 불세출의 재즈싱어 토니 베넷이 마음을 남긴 땅. 그가 지금 고향을 목도하면 얼마나 마음 시릴까. 미국인이 가장 살고픈 도시였던 ‘골든 시티’가 “좀비로 파멸된 불모지(zombie-apocalypse wasteland)”(디 애틀랜틱)가 되다니. 샌프란시스코(SF)의 추락은 마약 탓이다. 미국은 팬데믹 시기 중국발(發) 마약 ‘펜타닐’의 공습을 온몸으로 맞았다. 특히 SF가 초토화됐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마약 남용 사망자는 전국 평균 10만 명당 30명 안팎. 한데 SF는 60명을 훌쩍 넘겼다. 지난해는 마약으로 806명이 숨지며 역대 최악으로 치달았다. 왜 유독 샌프란시스코일까. “주민발의 47호(Prop. 47)가 SF를 마약의 성지로 만들었다”(월스트리트저널)는 게 중론이다. 2014년 제정된 이 법엔 마약 소지·투약을 경범죄로 처벌한단 대목이 있다. 나름 사정은 있었다. 아무리 단속해도 마약 범죄가 느는데, 차라리 계도가 나을 거란 기대였다. 하지만 SF는 면죄부라도 얻은 양 이를 타락의 기폭제로 삼았다. 아이러니한 건, 세기말 유럽의 한 나라도 엇비슷한 일을 겪었건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거기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기조 아래 2001년 마약 소지·투약을 경범죄로 낮췄다. 중독자 건강 회복에 주력하는 ‘해악 감소(Harm Reduction)’ 정책을 펼친 대목도 닮았다. 바로 포르투갈이다. 이 나라도 1990년대 수도 리스본이 “헤로인의 본산”이라 불릴 만치 마약 문제가 엄청났다. 하지만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포르투갈은 인구 10만 명당 마약 남용 사망자 0.6명. 유럽 29개국 가운데 22위로 청정해졌다. 이리도 엇갈린 이유가 뭘까. CNN에 따르면 SF 시의회가 ‘리스본 해법’을 배우러 연수도 다녀왔건만. 뉴욕타임스(NYT)는 “같은 법이라도 ‘집행 태도(enforcement attitude)’가 사뭇 달랐다”고 짚었다. 포르투갈은 마약이 중범죄가 아니어도 단속의 고삐를 풀지 않았다. 하루라도 구금하고 벌금을 물렸으며, 관찰 대상으로 추적했다. 잡아둘 땐 끈질기게 금단치료를 권했다. 당시 정책에 관여한 주앙 골랑 박사는 “거부하면 ‘강제 설득’도 서슴지 않았다”고 했다. 반면 샌프란시스코는 여타 ‘경범죄’처럼 다뤘다. 백주대낮 길에서 마약을 해도, 경찰은 금방 풀려날 테니 훈계만 했다. 검찰의 마약 관련 기소도 확 줄었다. 뭣보다 중독자에게 금단치료를 권하지 않았다. 지역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병원 보건소 50곳에서 중독자인 척 실험했더니, 깨끗한 (투약용) 바늘은 주면서 마약을 멈추란 제안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인구 다수가 가톨릭인 포르투갈은 “마약은 나쁘다”는 공감 아래 중독치료 시스템에 전념했다. 하나 샌프란시스코는 ‘신체 자치권(body autonomy)’ 보장을 이유로 마약마저 개인 선택으로 봤다. 포르투갈은 갱생이 목표였지만, SF는 범죄 억제가 먼저였던 셈이다. 그 결과는, 다들 아는 대로다. 샌프란시스코는 이대로 주저앉는 걸까. 다행히 최근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이 활발해지고 있다. 지역방송 ABC7에 따르면 Prop. 47 개정 운동이 시작됐고, 고향을 살리려 비어가던 도심에 재입주하는 회사들도 생겨났다. 제발 아름다운 도시를 가슴에 묻는(I left San Francisco in my heart) 일은 없길. 그래야 베넷도 특유의 “높은 구릉(High on a hill)” 어딘가에서 환하게 미소 짓지 않겠나. 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
미국에서 초등학생 수가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주(州)가 이달부터 ‘필기체(cursive) 수업’을 실시하며 미 초등학생의 절반 이상이 다시 필기체를 배우게 됐다. 로이터통신은 28일 “지난해 10월 개빈 뉴섬 주지사가 서명한 필기체 의무교육법이 1월부터 발효돼 캘리포니아주 초등학생 1∼6학년 약 260만 명이 필기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은 2010년대에 들어서며 각 주의 교육 공통 핵심기준(Common Core State Standards)에서 필기체 의무교육 조항이 빠지며 필기체를 가르치는 학교가 크게 줄어들었다. 2016년 14개 주까지 감소했다가 2019년부터 다시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주는 필기체 의무교육을 채택한 21번째 주가 됐다. 필기체 수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교육담당자들은 필기체가 학생들의 인지기능은 물론 손가락과 팔 근육 발달에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미 헌법처럼 필기체로 쓰인 고문서나 나이 많은 어르신의 편지 등도 읽을 수 있다. 로스앤젤레스 교육청의 레슬리 조로야 독해담당관은 “필기체를 쓰면 뇌의 또 다른 신경망을 쓸 수 있다”며 “어린이 뇌 발달을 통해 초등학습에 큰 도움을 준다”고 설명했다. 배우는 학생들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지역 매체들은 “상당수가 필기체 수업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의무교육 대상인 1∼6학년 학생들은 컴퓨터에 익숙해 필기체는커녕 글쓰기 자체도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 많다. 오렌지카운티의 한 초등학교 교사인 패멀라 켈러 씨는 “필기체를 왜 배워야 하느냐며 울상 짓는 학생들이 많아 ‘이걸 하면 똑똑해질 수 있어’라고 달래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챗GPT 등 생성형 인공지능(AI) 기술이 발달할수록 필기체 수업의 가치는 더욱 중요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AI를 악용한 표절이나 부정행위가 늘어나면, 이를 막는 대안으로 ‘필기체 시험’을 활용할 수 있단 이유다. 다만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샤론 쿼크실바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은 “새 시대에 맞는 교육 커리큘럼을 개발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미국에서 가장 초등학생 숫자가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주(州)가 이달부터 ‘필기체(cursive) 수업’을 실시하며 미 초등학생의 절반 이상이 다시 필기체를 배우게 됐다.로이터통신은 28일 “지난해 10월 게빈 뉴섬 주지사가 서명한 필기체 의무교육법이 1월부터 발효돼 캘리포니아주 초등학생 1∼6학년 약 260만 명이 필기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전했다.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은 2010년대에 들어서며 각 주의 교육 공통 핵심기준(Common Core State Standards)에서 필기체 의무교육 조항이 빠지며 필기체를 가르치는 학교가 크게 줄어들었다. 2106년 14개 주까지 감소했다가 2019년부터 다시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캘피포니아주는 필기체 의무교육을 채택한 21번째 주가 됐다.필기체 수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교육담당자들은 필기체가 학생들의 인지기능은 물론 손가락과 팔 근육 발달에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미 헌법처럼 필기체로 쓰인 고문서나 나이 많은 어르신의 편지 등도 읽을 수 있다. 로스앤젤러스 교육청의 레슬리 조로야 독해담당관은 “필기체를 쓰면 뇌의 또 다른 신경망을 쓸 수 있다”며 “어린이 뇌 발달을 통해 초등학습에 큰 도움을 준다”고 설명했다.배우는 학생들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지역 매체들은 “상당수가 필기체 수업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의무교육 대상인 1∼6학년 학생들은 컴퓨터에 익숙해 필기체는커녕 글쓰기 자체도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 많다. 오렌지카운티의 한 초등학교 교사인 파멜라 켈러 씨는 “필기체를 왜 배워야 하느냐며 울상 짓는 학생들이 많아 ‘이걸 하면 똑똑해질 수 있어’라 달래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챗GPT 등 생성형 인공지능(AI) 기술이 발달할수록 필기체 수업의 가치는 더욱 중요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AI를 악용한 표절이나 부정행위가 늘어나면, 이를 막는 대안으로 ‘필기체 시험’을 활용할 수 있단 이유다. 다만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샤론 쿼크-실바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은 “새 시대에 맞는 교육 커리큘럼을 개발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아이들은 단 하나의 뇌만 갖고 있어요. 그들의 삶 역시 하나뿐이죠.” 얼핏 봐선 뻔하기 짝이 없는 말. 하나 10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 있는 주 의사당에선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민주당 케빈 매카시 주 하원의원이 문화·체육위원회에서 한 법안에 찬성하며 내놓은 발언이었다. ‘AB734’란 이름으로 제출된 해당 법안의 골자는 간명하다. “12세 이하 아동의 미식축구 시합 및 연습에서 ‘백태클’을 금지한다”는 거다.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몸싸움으로 ‘땅따먹기’하는 스포츠에서 태클을 뺀다고? 이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반박이 거세지만, 찬성 측도 확고하다. 미 청소년스포츠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에서 한 해 체육활동에 참여하는 미성년자는 대략 4000만 명. 이 가운데 약 1000만 명이 미식축구를 즐긴다. 그런데 이 인기 운동에서 해마다 2만 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한다. 심지어 이건 머리 쪽을 다친 경우만 헤아린 숫자다. 게다가 지난해 미 보스턴대가 뇌질환으로 30세 이전 세상을 떠난 운동선수 152명을 추적 조사한 논문이 논쟁에 기름을 끼얹었다. 연구 결과, 41.4%가 만성 외상성 뇌병증(CTE)이 원인을 초래했단 대목이 특히 그랬다.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 선수들에게 CTE는 일상이나 다름없는 ‘달고 사는’ 병이다. 더구나 미국 사회는 어떤 경우라도 ‘아동 보호’는 가장 우선시해야 할 안건으로 여긴다. 태클 없는 미식축구를 상상하기 어렵지만, 다른 종목에선 생경한 풍경이 아니다. 뉴욕포스트는 “미 축구협회는 10세 이하 어린이 축구 시합에서 ‘헤딩’을 금지했고, 아이스하키에선 13세 이하가 뛰는 경기에 ‘보디 체크(body check)’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웃 나라 캐나다가 2019년 12세 이하 미식축구 백태클을 금지한 것도 이들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실제로 이후 머리 부상이 40% 가까이 줄었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플래그 풋볼(flag football·몸 접촉 없이 허리에 매단 깃발을 터치하는 변형 미식축구)’를 대안으로 삼자는 의견도 나온다. 그럼 법안에 반대하는 입장은 뭘까. 첫 번째는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란 주장이다. 미 아마추어미식축구협회의 스티브 앨릭 회장은 “아이들과 부모는 자신들이 즐길 스포츠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며 “그들이 원하는 건 ‘열정’이 넘치는 경기”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두 번째는 더 신념에 차 있다. “유서 깊은 고유 문화인 미식축구의 ‘정신’을 훼손하는 건 반(反)미국적(un-American)이기 때문”(뉴욕 지역지 브롱크스타임스)이란다. 앞서 여러 주들이 법 제정에 실패했던 전례도 불안 요소다. 뉴욕과 일리노이, 뉴저지, 메릴랜드, 매사추세츠주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전했지만 쓴맛만 봤다. 현지에선 아동 미식축구 논쟁이 ‘총기 소유 제한’과 붕어빵이란 왈가왈부가 나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10일 “미국에서 미식축구 선호도는 ‘정치적 성향’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짚었다. 캘리포니아 포함 백태클 금지를 추진했던 6개 주는 모두 민주당 우세 지역이다. WP는 “지난해 조사에서 공화당 지지자들은 75%가 자녀에게 미식축구를 추천하겠다고 했지만, 민주당 지지자들은 44%만 긍정적으로 답했다”며 “미식축구를 둘러싼 ‘미국적 가치’ 논쟁은 이런 정치색과 무관치 않다”고 분석했다. 아동 미식축구 백태클 금지 법안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캘리포니아 역시 주 상원 통과와 주지사 서명이 남아 누구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2013년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내게 아들이 있다면, 미식축구를 시킬지 ‘심사숙고해’ 결정할 것”이라 불을 지핀 뒤 미식축구 안전 논쟁은 지금까지 이어졌다. 역사는 되풀이될까, 또 다른 물꼬를 틀까. 10년 넘어 강산도 변하는지 자못 궁금하다. 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
산업통상자원부가 올해 선정한 ‘2023 산업부 R&D(연구개발) 우수 성과 10선’에는 우주항공과 로봇, 바이오 등 첨단 분야의 산업이 다양하게 포함됐다. 산업부는 이러한 성과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 정부의 국정과제를 이행하고 산업기술의 정체성 확립에도 기여할 방침이다. 선정된 우수 성과 10건은 아래와 같다.● 이차전지-전기차용 고용량 하이니켈 양극재포스코가 니켈 함량이 90% 이상인 전기차용 초고용량 니켈 양극재를 출시했다. 이를 통해 폐전지로부터 회수된 재활용 액상 원재료를 적용해 양극소재 원가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폐배터리에서 재활용된 액체 원료를 활용하면 지속 가능성 목표에 부합할 뿐 아니라, 순환 경제를 육성해 원가 경쟁력을 강화한다. 지금까지 매출액도 6865억 원을 달성했다. 연구개발 기관은 포스코퓨처엠을 비롯해 포항산업과학연구원, 성일하이텍, 이엔드디, DGIST, 전남대.● 반도체-HBM 반도체 공정기술 및 소재호진플라텍은 불순물을 제거해 신뢰성과 정밀도를 높이는 12인치 웨이퍼 기반 최적화 공정을 통해 반도체 제조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거뒀다. 이 획기적인 발전은 업계 표준을 충족함과 동시에, 연장된 도금 용액 수명을 늘려 폐수 발생을 줄임으로써 환경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 도금 용액과 공정 장비를 모두 국산화해 기술 경쟁력을 확보했으며, 반도체의 지속 가능한 혁신에 큰 진전을 이뤄냈다. 호진플라텍과 라온인터네셔널, 성균관대,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이 연구개발 기관이다.● 기계-K9 자주포용 1000마력급 엔진 부품 국산화STX엔진이 K9 자주포용 1000마력 엔진 부품을 국산화해 대한민국 국방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000마력급 엔진의 기본 성능 및 핵심 부품에 대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확보했으며, K9 개발 엔진 성능 평가를 통해 독일 MTU 엔진과 비교해 동등 이상의 엔진 성능임을 입증하기도 했다. 올해 7월 1호기와 2호기의 성공적인 출고에 이어, 이집트와 355대(1348억 원) 수출 계약을 맺으며 시장 확대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연구개발 기관은 STX엔진과 한국자동차연구원, 한양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우주항공-초음속 경공격기의 레이저 유도 폭탄 지상표적 정밀 조준 통합 시스템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초음속 경공격기의 레이저 유도 폭탄 지상 표적 정밀 조준 통합 시스템을 선보였다. 이 기술은 항공전자 시스템과 타기팅 포드를 초음속 경공격기에 탑재해 통합 연산 및 제어를 위한 4가지 핵심 소프트웨어를 통해 임무 효율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공대지 타격 임무의 안정성과 정밀도를 높여 현재 공군에서 운용 중인 FA-50 항공기에 적용하면 차별화된 전술 작전도 가능하다. 2021년부터 2023년까지 5조8000억 원(74기)의 매출을 기록해 방위기술 시장에서 한국의 영향력을 자랑했다. 한국항공우주산업과 지아이시스템이 연구개발 기관이다.● 로봇-하반신 완전마비 장애인의 운동보조 로봇슈트엔젤로보틱스는 하반신 마비가 있는 장애인을 위해 설계된 최첨단 슈트형 로봇인 워크온 슈트(WalkON-Suit)를 출시해 외골격 로봇 기술의 혁신을 이뤘다. 2020년 사이배슬론 국제대회 금메달 등 여러 국제대회 수상을 통해 기술력을 입증한 워크온 슈트는 현재 세브란스병원과 분당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 국립교통재활병원 등에 제품을 제공하고 있다. 해마다 꾸준히 매출이 성장하며 재활 기술 분야의 선두 주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 연구개발 기관은 엔젤로보틱스와 에스톡스, 근로복지공단, 서울대병원.● 바이오-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배양육 생산 기술서울대가 소와 돼지, 닭 등 가축별 근육 줄기세포의 분화 기법을 개발해 지속 가능하고 윤리적인 육류 생산 공정으로 제조된 친환경적 배양육 기술을 선보였다. 서울대는 기술적 성과를 넘어 한국 세포 농업학회 창립을 통해 산학 관련 상호 교류 네트워크를 구축해 산업화에 중추적 역할을 했으며 배양육 산업 발전을 위한 의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 서울대와 대상주식회사, 롯데정밀화학, 세종대 산학협력단, 스페이스에프, 한국화학연구원 안전성평가연구소가 연구개발 기관이다.● 바이오-열대지방 중증 뎅기열 바이오마커와 현장 진단용 기기젠바디는 중증 뎅기열(Severe Dengue) 현장 진단장치 개발을 통해 열대 보건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바이오마커 2종(Scd163, Ferritin)에 대한 항원 항체와 나노 입자를 활용하는 진단 카트리지는 말레이시아에서 임상 승인을 받아 한국산 진단키트 상용화의 길을 열었다. 안전한 데이터 전송 알고리즘과 결합된 통합 진단 시스템의 설계는 환자 데이터를 더욱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적 도약은 국내는 물론 세계 보건 문제 해결에도 크게 기여했다. 연구개발 기관은 젠바디와 Tropical Infectious Diseases Research and Education Centre, 가천대.● 자원회수-폐리튬 이차전지의 회수 자원 고부가가치화성일하이텍은 중대형 폐리튬 이차전지에서 유가금속을 회수하는 데 중점을 두고 폐자원의 선순환을 촉진하는 획기적인 기술을 선보였다. 이 기술은 자원 활용을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폐기물 처리 비용 절감과 대체 자원 확보를 통해 관련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재활용 공정 및 소재화 기술의 확대는 회수 소재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배터리 원료의 국산화를 통해 국가 경쟁력을 강화한다. 성일하이텍과 고등기술연구원,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한국해양대가 연구개발 기관이다.● 전력-송전급 초전도 XPLE 케이블 시스템 실계통 기술LS전선은 초고압 전송용 XPLE 케이블 기술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수준을 달성했다. 글로벌 고압 케이블 시장에 자립형 기술 생태계를 구축함으로써 눈부신 수출 성과를 거두고 있다. 2100억 원 규모의 제주-내륙 HVDC 제3연계선 케이블 공급 계약과 영국 풍력발전 단지에 HVDC 케이블을 공급하는 약 6400억 원 규모의 대규모 계약을 체결했다. 기술 독립부터 성공적 국제 계약에 이르기까지 HVDC 케이블 기술 분야에서 글로벌 핵심 플레이어로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 연구개발 기관은 LS전선과 디와이엠솔루션, LG화학, 호서대, 대진대, 전자부품연구원, 한국전기연구원, 한국전력공사.● 풍력-8MW급 대용량 해상풍력발전 시스템 개발두산에너빌리티가 8MW급 대용량 해상풍력발전 시스템 개발을 통해 깨끗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 분야에서 큰 진전을 이뤘다. 시스템의 견고성과 내구성을 확보하기 위해 구조 설계 분석이 수행됐으며, 가혹한 해양 환경을 견딜 수 있는 안정적 해상풍력발전의 바탕을 마련했다. 8MW급 풍력 터빈 국제 형식(IEC-RE) 인증을 획득했으며, 서남해풍 맞춤형 모델을 개발해 이용률 300% 이상을 달성했다. 두산에너빌리티와 한국재료연구원, 휴먼컴퍼지트, 세일종합기술공사가 연구개발 기관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산업기술의 허브로서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보탬이 될 올해의 연구개발(R&D) 우수 사례 10건이 선정됐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2023년 혁신의 해를 맞이해 R&D로 창출한 우수 사례 10건을 선정해 발표했다. 이번 선정엔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KEIT)과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KETEP),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등 산업부의 3대 전문기관이 참여했다. KEIT 등 3개 기관은 후보에 오른 우수 성과 6288건을 모은 뒤 엄격하고 공정한 평가를 통해 대표 성과 50건을 선별했다. 이후 전문가위원회를 통해 우수 성과 16건(KEIT 12건, KETEP 3건, KIAT 1건)을 최종적으로 선별했으며, 이를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거쳐 최종 10건의 기술을 선정했다. 선정 기술은 다양한 산업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반도체: HBM 반도체 공정기술 및 소재(호진플라텍) △기계: K9 자주포용 1000마력급 엔진 부품 국산화(STX엔진) △우주항공: 초음속 경공격기의 레이저 유도 폭탄 지상표적 정밀 조준 통합 시스템(KAI) △로봇: 하반신 완전마비 장애인의 운동보조 로봇슈트(엔젤로보틱스) △자원회수: 폐리튬 이차전지의 회수 자원 고부가가치화(성일하이텍) △바이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배양육 생산 기술(서울대) △바이오: 열대지방 중증 뎅기열 바이오마커와 현장 진단용 기기(젠바디) △이차전지: 전기차용 고용량 하이니켈 양극재(포스코퓨처엠) △전력: 송전급 초전도 XPLE 케이블 시스템 실계통 기술(LS전선) △풍력: 8MW급 대용량 해상풍력발전 시스템 개발(두산에너빌리티) 등이다. 산업 기술 전반을 아우르는 대표 성과 선정은 올해 처음으로 도입됐다. 산업부 관계자는 “선정된 10가지 기술을 살펴보면 한국의 국가적 역량이 다양한 산업 기술 전반에 걸쳐 한층 더 발전했음을 가늠할 수 있다”며 “단순히 세계적 흐름에 보조를 맞추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산업 기술 분야의 선두주자로 떠오르고 있음을 자신한다”고 설명했다. 선정 기술은 첨단 기술 분야이다 보니 일반 대중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도 적지 않다. 이에 기술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담은 사례집과 영상을 제작해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널리 전파할 예정이다. 특히 영상엔 기술마다 지닌 차별성과 창의성, 연구 성과와 함께 담당자 인터뷰나 성공 요인 등도 담아 국민적 관심을 높일 예정이다. 또한 외국어 해설 영상도 함께 제작해 해외에도 한국의 성과를 널리 알려 나간다. 참여 기업의 최고기술책임자(CTO)나 최고경영자(CEO) 등 2만여 명에 이르는 연구자들은 이달 6∼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대한민국 2023 산업기술 R&D 대전’에서 소통과 혁신을 위한 자리를 갖기도 했다. 10건의 선정 기술을 전시하며 상호 기술의 협력을 촉진함과 동시에 성공 요인을 공유해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산업부는 “이번에 선정된 10가지 기술은 향후 대한민국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한다”며 “우리 기술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바탕으로 혁신적 기술 발전을 위해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북에서 남으로 오다.’짧은 글귀지만, 한반도에서 이 문장이 갖는 함의는 적지 않다. 요즘 많이 줄었다지만, 흔히 탈북민이라 부르는 ‘북한이탈주민’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지금까지 한국에 온 탈북민은 약 3만4000명(지난해 기준). 저마다 국경을 건넌 이유는 다르겠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찾아 그들은 목숨을 걸었다.그 중엔 미성년자도 5100명 정도가 포함돼있다. 특히 0~9세일 때 탈출한 어린이는 약 1300명. 아마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왔을 공산이 크지만, 세월은 그들을 자연스레 북쪽 기억보단 남쪽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만든다. 남한에서 나고 자란 여느 동년배와 다름없이.9살에 탈북한 김여명 씨(28)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은 당연히 북한 억양을 쓰지만, 그는 이제 “친구들 경상도 사투리를 따라 하는 게 훨씬 쉬울” 정도다. 탈북 직전 다니던 게 소학교였는지 인민학교였는지도 가물가물할 정도. 하지만 북을 떠난 지 20년이 흐른 지금도, 그는 자의 반 타의 반 ‘남한 사람’인 동시에 ‘북한 사람’이다.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네 청년이면서도 이방인의 정서를 가슴 깊이 간직한 여명 씨를 만나봤다.-본인 소개를 부탁드려요.“안녕하세요, 김여명이라고 합니다. 1995년생이니까 올해 스물여덟입니다. 아홉 살에 할머니 부모님 동생과 북한에서 탈출해서, 같은 해 남한으로 왔습니다. 한양대 기계공학과 졸업하고, 지금은 스타트업 ‘포 레거시’에서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대표라니까 되게 거창한데, 2명이 시작해서 최근 4명으로 늘어난 올해 창업한 회사예요. 아직 수익은 제로입니다, 하하.”-스타트업 창업한 20대 청년. 왠지 근사한데요.“좋게 봐주셔서 감사하지만, 아직 갈 길이 먼 초짜일 뿐이죠. 저희야 확신을 가지고 도전하지만, 미래가 어떨지도 모르고요. 실제로 제가 스타트업이 이번이 3번째인데, 그 전에 성공했으면 여기 있질 않겠죠?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부침을 겪은 터라, 현실은 정말 만만치 않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어요.”-그 얘긴 차차 듣기로 하고, 어린 시절부터 되돌아볼까요. 아홉 살 탈북 이전 기억이 남아있나요.“그럼요. 저희 가족이 남포에 살았는데, 항구 도시다 보니까 친구들이랑 낚시 다니던 기억이 많이 나요. 폐공장 같은 데서 벽돌이나 철근 같은 걸 주워 오기도 했고. 뭣보다 그땐 항상 배가 고팠어요. 하루에 1끼밖에 못 먹으니까. 배급받아온 쌀을 죽보다 희멀겋게 끓여서 가족이 나눠 먹곤 했어요. 그러니 남는 시간엔 애들이랑 산으로 바다로 먹을 걸 찾아다녔죠.”-벽돌은 왜 주우러 다녔어요.“학교에서 시켰어요. 남한에서 준비물이라 하면 필기도구나 그런 거지만, 북한에선 언제나 그런 자재를 가져오라고 했어요. 어디다 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온종일 ‘구루마’ 끌고 다니다 어두워지곤 했어요.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수업에 못 들어가고 벌칙으로 노동 작업을 해야 했어요. 등교해서 온종일 물만 길어 나르다 집에 간 적도 있어요.”-초등학교 1학년인데 그런 걸 시키나요.“남한에서야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땐 억울하다는 생각조차 못 했어요. 다들 하는 거니까…. 그 나이에 그런 체제가 좋은지 나쁜지도 몰랐고요. 누구 생가 같은 데 억지로 가는 게 싫긴 했는데, 그냥 답답하다는 느낌 정도였어요. 아버지 어머니한테 탈북할 거란 말을 들었을 때도, 그게 얼마나 큰일인지 몰랐어요. 그냥 중국으로 간다기에 그런가 보다 했죠.”-두만강을 맨몸으로 건널 때 무섭지 않았나요.“그걸 판단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어요. 겨울이라 물이 허리 정도 찼는데, 가족이 다 같이 가니까 별로 겁나지도 않았고. 아마 부모님께선 자식 목숨까지 걸린 일이라 힘드셨겠지만, 전 부사(사과 품종) 먹을 생각에…. 아, 그 전에 할머니 친척이 중국에서 부사를 한번 사다 준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중국 간다니까 그게 떠올라서 ‘부사 또 먹을 수 있냐’고 물어봤어요. 실컷 먹을 수 있다기에 그 생각밖에 없었어요, 하하.”-부모님은 나중에라도 왜 탈북했다고 하시던가요.“말수가 적으신 편이라 자세히 설명하진 않으셨는데…. 저랑 제 동생 미래에 대한 걱정이 결정적인 이유라고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공부를 잘하셔서 의대에 가고 싶었는데, 출신성분이 낮아 결국 포기했대요. 자식들도 하루 한 끼 희멀건 죽밖에 못 먹는 삶을 대물림하는 게 싫었답니다. 운 좋게 탈북 브로커랑 이어져서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신 거죠.”-중국에서 부사는 실컷 먹었나요.“많이 먹었어요, 하하. 근데 그보다 콜라를 처음 마셨는데, 진짜 세상에 그런 게 있을 줄은…. 중국에서 한동안 숨어 지내다 몽골로 건너가는데, 품에 꼭 안고 다녔어요. 이거면 된다고. 아, 스크램블도 기억나네요. 달걀을 한 번에 서너 개씩 먹어본 게 처음이었거든요. 부모님은 내내 불안하셨겠지만, 전 신세계가 펼쳐진 듯 신났어요.”-왜 몽골로 간 거예요.“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땐 그게 남한으로 가는 루트였어요. 몽골에 가서 난민 신분으로 대한민국대사관의 도움을 얻는 거죠. 근데 탈북보다 몽골 가는 게 더 위험하대요. 중국 택시를 타고 국경선에 가서 철조망을 건너야 하는데, 어리숙한 운전기사가 잘 못 내려주면 러시아로 넘어가거든요. 그럼 현장에서 총살되거나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운 없는 경우가 많아요. 저흰 다행히 몽골로 가서 남한까지 오게 된 거죠.”-남한에 와도 바로 정착하는 건 아닌 거죠.“네, 대성공사에서 조사받고 안성에 있는 하나원에서 반년 이상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기간이 좀 헷갈리긴 하는데, 하나원에 있으면서 근처 초등학교도 잠깐 다녔으니까 꽤 오래 있었어요. 하나원에도 여러 교육·놀이 프로그램이 있지만, 계속 같은 곳만 있으니깐 답답하던 차라 학교에 간다니까 잘 됐다고 생각했어요.”-초등학교에 가니까 어땠나요.“진짜 어색했죠. 일단 말투가 다르니까…. 제가 말만 꺼내면 애들이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 그나마 담임선생님이 반장한테 잘 챙겨주라고 부탁하셔서, 그 친구가 굉장히 잘 해줬어요. 근데 뭐 수업을 해도 애들이랑 대화해도 알아듣는 게 없으니까. 무슨 만화 게임 얘기를 하는데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래서 쉴 때는 운동장 구석에서 혼자 앉아 있곤 했어요. 숨통이 탁 트여서 너무 좋았던 게 떠올라요.”-문화적 충격이 컸겠네요.“네, 특히 북한이랑 남한이 그렇게 사이가 나쁜 줄 몰랐거든요. 그때 ‘빨갱이’니 ‘무장공비’니 하는 말도 처음 들었고…. 하나원 나온 뒤론 서울 영등포에 있는 임대아파트로 이사 와서 정착했는데요. 친구들이랑 좀만 친해지나 싶으면, 다음날 와서는 ‘엄마가 너랑 놀지 말래’라고 했어요. 저란 존재가 교육 차원에서 뭔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무장공비란 말도 걔들이 어디서 듣고 어떻게 알았겠어요.”-반 친구가 면전에서 무장공비라 했단 말입니까.“네…. 그 친구하고는 시비가 잦아져서 결국 크게 싸웠어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학교 뒷산에서 단둘이 치고받았죠. 요즘 분위기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근데 재밌는 건, 걔가 지금도 자주 보는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예요. 한번 시원하게 뒹굴고, 서로 뭔가 통하게 된 거죠. 그 이후론 그 얘길 꺼내지도 않지만, 뭐 친구 사이가 원래 다 그런 거잖아요.”-그래도 마음에 상처가 됐겠네요.“그렇긴 한데, 전 그걸 제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남한에 와서 너무 좋았거든요. 일단 삼시세끼 먹을 수 있는 거 자체만으로 행복했어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 싶었죠. 말투부터 바꿨어요. 북한말 안 쓰려고 노력하고, 반에서도 뭐든 나서서 했어요. 수업도 열심히 듣고, 청소 포함 모든 일에 무조건 손들었어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저를 대하는 게 조금씩 달라지더라고요. 이듬해 3학년엔 반장도 하게 됐죠.”-대단하네요. 한편 안쓰럽기도 하고요. 아직 어린데,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니.“전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북한에선 그보다 훨씬 노동 강도가 셌잖아요. 그런데도 벽돌 모자란다고 혼났죠. 근데 여기선 조금만 부지런해도 칭찬받고 애들도 달리 보는데, 보상이 확실하니 더 열심히 했죠. 게다가 선생님들이 정말 잘해주셨어요. 주말에도 저 데리고 가서 맛있는 거 사주시고, 공부도 가르쳐주시고. 6학년 때까지 모든 선생님이 다 그러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들도 쉬고 싶으셨을 텐데, 개인 시간까지 할애해서 챙겨주신 거잖아요. 너무 감사할 일이죠.”-집안 형편은 어땠나요. 남한에 와서 나아졌나요.“밥 굶지 않으니 북한 때보다야 훨씬 낫죠. 근데 풍족하지도 않죠. 3학년 때인지 4학년 때인지 헷갈리는데,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어머님께서 삼겹살을 구워주셨거든요. 전 그때까지 집에서도 고기를 구워 먹는다는 건 상상도 못 해봤어요. 아버지는 남한에 오셔서 대학 박사학위를 따셨어요. 한 10년 걸렸는데, 그러니 그때까지 지원금 조금이랑 어머니가 일하시는 게 경제적 수입의 전부였죠. 친구들은 학교 끝나면 당연한 듯 가는 학원을 저희 집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어요.”-그럼 학원을 다닌 적이 없나요.“원래 그럴 상황이었는데…. 초등학교 때 선생님들도 그랬지만 남한에 와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같은 동네에 제 처지를 알고 공부를 가르쳐주신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그분 소개로 목동에 있는 학원 원장님을 알게 돼서 무료로 학원을 다녔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비용이 적지 않을 텐데 너무 감사한 일이죠.”-그 덕에 대학도 잘 갔나 보네요.“큰 도움이 됐죠. 근데 내신은 그리 좋진 않았어요. 수학 과학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는데 다른 과목은…. 고등학교 때 과학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그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아요. 양천고등학교 나왔는데, 학교 최초로 청소년과학축전도 참가했거든요. 온실 자동화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꽤 반응이 좋았어요. 북한 있을 때부터 뭔가 만드는 걸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무조건 기계공학과가 목표였어요. 돌이켜보면, 그게 다 주변에서 도와준 분들이 많았던 덕분이죠.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분야를 한 우물만 팠던 것도 주효했던 것 같아요.”-부모님이 좋아하셨겠네요. 자식 위해 탈북하셨잖아요.“네, 그러셨을 텐데 아버지는 내색을 많이 하시는 편은 아니에요. 어머니는 그래도 기쁜 티를 좀 내셨는데. 지금도 자식들이 뭘 하겠다고 하면 묵묵히 믿고 지켜봐 주시는 편이에요. 그래서 항상 고맙고, 제가 더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겨요. 빨리 돈 벌어서 집안에 도움이 되고 싶었고요. 기계공학과 목표로 공부할 때부터 항상 창업을 염두에 뒀던 이유 중 하나가, 빨리 성공해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돕고 싶었어요. 고생한 가족도, 절 도와준 남한 분들도 제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길 바라시는 거라고 믿거든요.”※다음 주 토요일(12월 31일)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전통문화를 재해석한 ‘K굿즈’가 MZ세대의 뜨거운 호응을 얻으며 또 다른 한류 열풍을 불러오고 있다. 전통문화상품 보급에 앞장서 온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은 올해 사상 처음으로 문화상품 매출 100억 원을 돌파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재단 측은 “팬데믹 여파를 겪으며 2020년 39억 원까지 떨어졌던 매출이 적극적인 상품 개발 등을 통해 지난해 83억 원으로 반등했고, 올해 11월 27일 드디어 매출 100억 원 돌파를 이뤄냈다”고 밝혔다. 이번 성과는 현재 경복궁과 창덕궁, 인천국제공항 등 전국에 9개 상품관을 운영하며 거둔 것이기에 더욱 의미가 크다. 특히 지난해 8월 신설된 9번째 오프라인 매장인 국회박물관 문화상품점은 올해 7500만 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며 힘을 보탰다. 여기에 올해 4월부터 문을 연 온라인 쇼핑몰 ‘KCHF 스토어’가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끈 것도 효과를 거뒀다. 재단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 일본, 프랑스, 호주 등에서 KCHF 스토어를 통해 1700만 원 이상의 매출을 이뤄냈다. 김광희 문화상품실장은 “7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카페 ‘파리 다방’에서 팝업 전시를 열었는데, 이후 KCHF 스토어 프랑스 방문자 수가 전월 대비 128% 상승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뭣보다 올해 재단이 선보인 다양한 전통문화상품은 실용적이고 참신하다는 평을 받으며 1년 내내 화제를 모았다. 특히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의 그림을 현대적으로 유쾌하게 재해석한 ‘모두의 풍속도’ 문화상품은 MZ세대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모두의 풍속도 그립톡’은 출시 2주 만에 완판됐으며, 나머지 상품도 판매율 90% 이상을 달성했다. 자폐인 아티스트가 참여한 일러스트 상품 ‘시선을 담다’ 시리즈도 5만 개 이상 팔렸다. 또한 국가무형문화재 유기장 보유자와 협업한 ‘유기수저세트’(매출 3000만 원)와 무형문화재 선자장 작품을 담은 ‘연화윤선 손가방’(매출 1600만 원)도 히트 상품으로 등극했다. 매출 100억 원 돌파를 기념해 감사 이벤트도 진행된다. 13일까지 KH몰에서 상품을 구입하면 소정의 기념품을 증정한다. 자세한 내용은 KH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최영창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은 “판로 확대와 상품 개발 등에 애쓴 덕분에 재단 전통문화상품을 올해 국내외에 더욱 많이 알리게 됐다”며 “앞으로도 한국의 문화유산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더욱 뜻깊은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힘쓰겠다”고 감사를 전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만화를 통해 세상을 보려 합니다. 1965년 비틀스 싱글 곡 ‘데이트리퍼(Day tripper)’는 “당일치기 여행자”를 일컫습니다. 만화를 본다는 건 잠깐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니까요. 브라질 그래픽노블 ‘데이트리퍼’도 영감을 줬습니다. 이 만화엔 삶을 담는 소설가를 평생 꿈꾸지만, 실상은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 담당 기자가 나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우리네 인생과 무척 닮지 않았나요.“내가 사람에 대해 딱 한 가지 확신하는 게 있거든?”“확신? …그게 뭔데?”“사람은 절대 예측할 수 없다는 거.”(96화에서)대의(大義)를 위해 목숨을 버렸다. 자신만 던진 게 아니다. 부모형제나 다름없던 동료도 전부 잃었다. 그게 옳은 일이라, 바른 길이라 믿었으니까. 허나 강산이 바뀐 뒤 환생(還生)을 통해 목도한 세상은 쓰디썼다. 희생은 독이 됐고, 명예는 짓밟혔다. 허울 좋은 정의 아래 감춰진 냉혹한 현실을 마주한 두 번째 삶. 다시 강호에 나서 세상을 짊어지게 된 순간. 그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네이버 웹툰이자 웹소설 ‘화산귀환’은 엄청난 콘텐츠다. 아직 연재 중인데도, 이미 ‘리빙 레전드’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2019년 4월 시작한 웹소설은 올해 11월 누적 매출액 500억 원을 넘어섰다. 2021년 3월부터 선보인 웹툰 역시 만만찮다. 올해 네이버에서 남성 독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작품 1위에 올랐다. 흥행력이 작품성을 보장하진 않지만, 그만큼 대중을 사로잡은 매력은 부정하기 어렵다.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는 면에서도 화산귀환은 특별하다. 웹툰 원작 드라마 같은 ‘원 소스 멀티 유즈’가 당연한 시대. 허나 만화와 소설이 서로를 이끌어주며 동반성장하는 밴드왜건 효과를 증명한 사례는 흔치 않다. 뭣보다 ‘아재 장르’로 치부되며 다소 하향세였던 무협을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신상품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웹툰 시장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이후 비슷한 설정의 무협만화가 얼마나 즐비해졌는가.이토록 치열한 웹툰·웹소설의 경쟁 속에서 화산귀환은 어떻게 대박을 칠 수 있었을까. 뻔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요즘 세대의 취향을 잘 짚어낸 게 첫 번째다. ‘환생’이나 ‘고인물’ 설정은 이젠 낯익다 못해 밥상 위 김치 같지만, 여전히 지겹기는커녕 맹위를 떨친다. 게임에 익숙한 MZ의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에 담긴 세태적 욕망의 반영이랄까.그런 갈증은 무협과도 훌륭한 궁합을 선보인다. ‘내공’이란 매력적 키워드를 가진 동양적 초인은 마블이 이끌던 슈퍼히어로가 주춤한 빈자리를 훌륭히 채워낸다. 게다가 ‘물리적 폭력의 행사’가 정의의 기준이 되는 것도 요즘 입맛에 들어맞는다. 화산파의 희생이 배신과 무정으로 돌아온 강호에서 억울함을 풀만한 수단으로 ‘힘’만한 게 있나. 마침 종남파는 졸렬하고 무당파는 치사했으며, (이후 등장할) 소림파는 위선적인데다 사파·마교는 사악하다. 실컷 두들겨 패도 속 시원할 뿐 거리낄 게 없다.여기에 화산귀환은 이야기를 쌓아가는 ‘빌드업’이 탄탄하다. 매화검존 청명의 재림을 모든 걸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삼지 않는다. 캐릭터의 구성부터 좋다. 독수리5형제만큼 근사한 화산 후지기수 5인방(나중에 “땡중”까지 껴서 6, 7명으로 늘지만)의 성장기를 뼈대로 작은 배역까지 살려가는 발걸음이 근사하다. 특히 종남 이송백 같은 안배는 자칫 한쪽으로 쏠릴 극의 물줄기를 균형 있게 잡아준다. 웹툰보다 훨씬 앞서가는 웹소설에선 다소 장황해지기도 했지만, 적절한 에피소드를 쫄깃하게 매조지하는 작가의 능력은 일품이다.정통 무협지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적당한 차별화를 가한 점도 높이 살만하다. 원래 강호는 웬만한 손해를 보더라도 대의를 지키는 걸 미덕으로 삼는다. 허나 화산귀환은 기존 스타일에 억지로 얽매이지 않는다. 오히려 경직성을 떨치고 형식보다 내용에 치중한다. 명분만 내세우며 헛기침만 해대느니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구하는’ 게 본질이라 갈파한다. 특히 주인공 청명 캐릭터는 신의 한 수다. 개그캐와 진지캐를 넘나들며 복잡다단한 면모를 잘 구현해, 자칫 어정쩡하고 산만해졌을 상황을 깔끔하게 끌고 간다.우연성에 기대지 않고 ‘의지와 노력’으로 난국을 타개하는 스토리 진행도 상찬받아 마땅하다. 현재 웹툰에서 진행하는 ‘혼원단’ 에피소드만 봐도 그렇다. 그저 기연으로 우당탕 뭔가를 얻지 않는다. 오랜 준비를 통해 실력을 갖추고 정확하게 판세를 분석해 장벽을 헤쳐 나간다. 아무리 천재여도 2만 번 슛을 던져봐야 하는 법이니까. 게다가 명확한 리더를 두되, 서로의 등을 믿고 맡기는 하나의 ‘팀’으로 성장하는 과정도 야무지다. 다만 이젠 너무나 방대해진 웹소설의 ‘사이즈’를 웹툰이 어떻게 소화할지는 두고두고 관건이 될 터. 웹툰은 이제야 초입에 들어섰는데 3년이나 지나버렸다. 이 기나긴 여정은 앞으로도 별 탈 없이 이어질까. 미래를 벌써부터 걱정할 건 아니지만, 세월이 때론 왕좌를 좀 먹는 경우를 심심찮게 보아왔다. 그만큼 화산귀환에 거는 기대는 너무나 커져 버렸다. 이미 ‘승자’에 올라선 중압감을 잘 이겨낼는지. 기대와 우려가 이래저래 교차한다.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국내 만화는 일본 등과 달리 ‘장기연재’가 지극히 드물다. 특히 웹툰의 거센 파고에 치인 종이 만화의 쇠락이 이를 더 부채질했다. 그런데 웹툰 시대가 정착하자 오히려 10년 이상의 연재도 빈번해졌다. 내년 봄이면 연재 3년을 맞는 웹툰 ‘화산귀환.’ 누군가의 청춘을 함께 하는 인생 만화로 자리 잡을지. 기름을 만땅으로 채운 자동차는 고속도로에 올라섰다. 그 앞에 무엇이 기다릴지는 “절대 예측할 수 없겠지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18일 상편()에서 이어집니다.‘공간 디렉터’ 이혜인 씨(37)는 ‘공간(空間)’을 품에 안고 줄곧 달려온 청년이다. 홍대 건축학과를 나온 그는 스리랑카에서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 건축 코디네이터로 일했으며, 아이웨어 ‘젠틀몬스터’ 공간팀에 초기 멤버로 합류해 명성을 쌓았다. 현재 ‘이혜인 디자인 스튜디오’를 이끌고 있는 이 대표는 그간 젠틀몬스터 하우스도산과 로우클래식 플래그십스토어, 콤포트서울 등 선보인 작품마다 세간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청년실업이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서, 이 디렉터가 자신이 하고픈 일에 매진할 수 있었던 건 당연히 축복이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 역시 끊임없는 노력과 치열한 고민이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재능이 있다고 누구나 운이 따르는 건 아니지만, 이 청년 건축가는 뭣보다 함께 일한 이들과의 “소통과 협력”이 자신을 성장시켜온 가장 큰 무기였다고 여겼다. 그가 공간이란 화두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들어봤다.-코이카에서의 첫 직장생활은 즐거웠나요.“웬걸요.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어요. 일이 의미가 없다거나 재미있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런데 뭐든 그렇지만,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덜컥 뛰어들 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맡은 프로젝트들이 엄청나게 규모가 컸거든요. 스리랑카 국제회의장 건설사업 같은 것도 참여했으니까요. 사실 그런 일에 투입되기엔 경력이 너무 없었어요. 물론 전 서포트하는 입장이긴 했지만, 현장에서 부딪혀가며 하나하나 배우는 상황이라 정말 하루하루가 정신없었어요. 덕분에 일을 빨리 배울 수 있게 됐고, 이젠 큰 프로젝트에도 겁먹지 않게 되긴 했지만…. 진짜 매일매일 24시간 일 생각만 해야 했던 시기였어요.”-그래도 보람 있었겠어요.“그렇죠. 세상에 도움이 되는, 말 그대로 ‘건설적인’ 일이었으니까요. 만약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면, 20대 중반에 그런 큰 프로젝트들을 경험할 수 없었겠죠. 유엔하고 협업해서 학교를 지어주는 프로젝트를 한 적도 있었는데, 스리랑카 공군 비행기를 타고 통제구역에 들어가 현장을 살펴보기도 했어요. 사회초년생으로선 돈 주고도 경험할 수 없는 엄청난 기회들이 많았죠.”-4년 동안 일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뭔가요.“다양한 경험을 많이 쌓았으니, 이제부터는 ‘내 일을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코이카에선 아무래도 정해진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게 업무잖아요. 좀더 자유롭게 제가 꿈꾸는 건물을 지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든 거죠. 물론 갑자기 한국에 오면 당장 일감이 있을지 없을지도 몰랐죠. 하지만 역시 도전해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잖아요. 그때 엄마도 ‘사람은 올라갈 때가 있으면 당연히 내려갈 때도 있다. 그걸 겁내지 마라’고 응원해주셨어요. 그게 큰 힘이 됐어요.”-그때 젠틀몬스터에 취직한 건가요.“아뇨. 처음엔 학교 친구랑 동업해서 작은 사무실을 하나 차렸어요. 근데 국내에서 경력이 짧다 보니 아무래도 잘 안 됐죠. 그래서 미래에 대한 고민이 들던 차에, 제가 했던 몇 가지 프로젝트들을 보고 젠틀몬스터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때는 젠틀몬스터가 선글라스로 국내외에서 엄청난 화제를 모으던 시기인데, 쇼룸 등을 만드는 ‘공간팀’은 이제 막 꾸려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어요. 저도 계속 업계 동향을 살펴보면서 젠틀몬스터가 굉장히 재밌는 프로젝트를 많이 한다는 걸 알고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던 터라 제안이 너무 반가웠죠. 지금은 공간팀만 100명이 넘지만 그때는 제가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 영입이었을 거예요.”-젠틀몬스터가 크게 성장한 비결이 뭘까요.“제가 운영진도 아니었고 지금은 떠난 직장이라 함부로 평가하긴 그렇지만, 제가 면접 볼 당시의 얘기를 해드릴게요. 보통 회사 면접이라고 하면 정장 입고 정자세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을 떠올리잖아요. 근데 젠틀몬스터는 딱 갔더니 사장이랑 임원들이 모이셔서 제 포트폴리오를 펼쳐놓고 저랑 토론을 하는 거예요. 그것도 다 같이 바닥에 그냥 퍼질러 앉아서. 서로 의견을 공유하면서 1시간 정도 쉬지 않고 대화를 했어요. 그때 느꼈어요. 이런 수평적인 구조로 서로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는 회사라면 분명 성장 가능성이 높겠구나.”-7년 동안 있었다고 들었어요.“네, 시간이 어떻게 그리 빨리 갔는지 모르겠어요. 당시의 성과를 칭찬해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다른 건 몰라도 정말 온몸을 던져서 최선을 다해 일했다는 거 하나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7년 동안 회사 일이 제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거의 100%, 모든 것이었어요. 아무래도 이런 분야는 최신 트렌드를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더 집중력과 순발력을 필요로 하는 게 많거든요. 머리 속에 온통 일 생각 뿐이었던 시절이었어요.”-잘 나가던 직장을 관둔 이유가 뭡니까.“금방 말씀드린 게, 반대로 생각하면 퇴사한 이유가 되기도 했어요. 점점 제 자신이 고갈되는 기분을 느꼈어요. 채워지는 건 없이 계속 쥐어짜서 모든 걸 쏟아 붓기만 하는 느낌이었죠. 다른 대부분 직장인들도 저와 마찬가지겠죠. 근데 너무 일에 얽매이고 매몰되는 제 자신이 점점 걱정됐어요. 프로젝트가 조금만 잘 진행되지 않아도 너무 불안하고, 조금이라도 어그러지면 스트레스 받고 폭음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건강도 점점 나빠지고…. 이러다 제가 진짜 하고 싶은 건 시도도 못 해보고 끝날 수도 있을까봐 덜컥 겁이 났어요.”-진짜 하고 싶은 건 뭐였을까요.“전 스리랑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잖아요. 그곳의 바다와 숲 자체도 사랑했지만, 그런 자연과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건축도 너무나 사랑했거든요. 특히 ‘트로피컬 모더니즘’의 대가라 불리는 세계적인 스리랑카 건축가 제프리 바와를 존경했어요. 저도 그런 자연을 닮은 편안한 건축을 하고 싶은데, 회사에서는 정해진 방향이라는 게 있으니까. 퇴직 1, 2년 전부터 사장님 포함 여러 분들께 조심스레 상의를 드렸습니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어느 정도 마무리한 뒤에 잘 정리하고 퇴사했습니다.”-그게 지금의 ‘이혜인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린 계기군요.“네, 벌써 2년 반이나 됐네요. 다행히 그동안 인맥도 꽤 쌓았고 제가 했던 프로젝트들이 이쪽 분야에서 꽤 인정을 받은 덕분에, 처음 한국에 와서 창업했을 때처럼 막막하거나 어려운 상황은 아니에요. 오히려 너무 좋은 제안을 많이 해주셔서 모두 다 함께 못 하는 게 죄송할 경우가 많죠.”-더 바빠진 건 아닌가요. 원래 자기 사업이 제일 힘들다던데. “맞아요. 근데 최대한 욕심을 안 내려고 해요. 처음 차릴 때는 정말 비상업적인 프로젝트만 하려고 했는데, 먹고 살아야 되니 그러진 못 하고 있어요, 하하. 다만 어떤 일을 하기로 결정할 때는 ‘내가 이 일을 하게 되면 서로가 행복할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해요. 당장 근사하고 멋진 프로젝트로 보이더라도,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걸 덜컥 맡았다가는 저도 맡겨주신 분도 서로 고통스러울 뿐이니까요.”-그건 일해보지 않고서는 알기 힘들지 않나요.“그래서 계약 전에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눠요. 저에게 프로젝트를 제안한 분이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어떤 스타일인지를 알려고 시간을 많이 들여요. 전혀 프로젝트랑 상관없이 함께 전시 같은 걸 보러가자고 제안하기도 해요. 그리고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는지도 알려드리려고 노력하고요. 그렇게 소통하고 서로를 알아야 양쪽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일하는 방식이 독특하네요.“제 방식을 누군가에게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하지만 어떤 식으로건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제가 그 일을 굳이 맡을 이유가 있을까 싶어요. 저에겐 건축은 사람과 소통하는 매개체이자 방식이에요.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물은 나올 수가 없는 거죠. 좀 뜬금없는 얘기긴 한데, 제가 지금 ‘버드’라는 개를 키우고 있거든요. 이 친구를 만나는 과정에서도 깨달은 게 많아요.”-어떤 건지 들려주시겠어요.“실은…, 저한테는 평생 마음에 죄책감으로 남은 일이 하나 있었어요. 대학교 때 강아지를 키우다가 파양을 했거든요. 스리랑카 살 때도 개를 키워서 전 제가 반려동물과 생활하는데 어떤 문제도 없을 거라고 과신해서 덜컥 비글 한 마리를 입양했어요. 근데 어릴 때는 다 부모님이 키워주신 거였더라고요. 혼자 자취하는 대학생으로선 도저히 감당이 안 됐어요. 저도 힘들고 강아지도 힘든 상황이었는데, 비글을 기르는 친한 언니가 보다 못해서 결국 데려갔어요. 대책 없이 일을 저지르는 게 얼마나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크게 깨달았죠.”-많이 속상했나보군요.“지금도 그 언니한테 가서 자주 들여다보긴 하는데, 다행히 잘 지내긴 하지만 저로선 너무 미안하죠. 끝까지 책임져주지 못해 부끄럽기도 하고요. 그 뒤로 제대로 준비를 마친 뒤에 다시 강아지를 들이겠단 생각으로 십수 년 동안 유기견 봉사활동도 다니고 공부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올해 유기견인 버드를 만나게 됐죠. 저도 거의 집이랑 제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니까 버드를 외롭게 놔두지 않을 여건이 만들어졌고요. 입양 당시에 보호기관에 과거 파양 경험도 다 솔직하게 말씀드렸는데, 더 진정성 있게 봐주신 것 같아요.”-버드와의 일화에 자신만의 세계관이 담긴 것 같아요.“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지만, 제가 추구하는 스타일이랑 닮아있긴 하네요. 일에서도 솔직하게 대화하고, 진심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하긴 합니다. 오래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충 넘어가지 않으려고 하기도 하고요. 결국은 모든 게 사람이 하는 일이잖아요. 함께 일하는 사람, 프로젝트를 제안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본질이 아닌가 싶어요. 어떤 일이든 다 그렇겠지만요.”-심오한 깨달음이 느껴지네요.“아이고, 제가 뭐라고요. 그런 게 느껴지셨다면 아마 부모님 가르침이 배어나온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이만큼이라도 잘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가족의 사랑 덕분이거든요. 아빠 엄마가 언제나 자식을 믿어주고 지켜봐주시는 것만큼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큰 힘이 되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잘 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항상 바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부모님한테 좋은 딸이고 싶기 때문이에요.” -좋은 딸이 앞으로 꿈꾸는 목표는 뭔가요.“건강한 삶이요. 결국은 사람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한 게 최고라는 걸 갈수록 많이 느껴요. 일이건 뭐건 건강해야 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삶의 균형을 잘 잡으면서 차근차근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내는 게 중요하단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전 제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오래오래 하고 싶어요. 그건 누구에게나 꿈이고 숙제이기도 할 텐데, 저 역시 그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중인거죠. 건축 역시 결국은 그걸 위한 게 아닐까 싶어요.”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자연은 신이 만든 건축이며, 인간의 건축은 그것을 배워야 한다.”(스페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1852~1926)흔히들 인간 생활의 3가지 기본요소를 ‘의식주(衣食住)’라 한다. 등수를 매기는 게 무의미하지만, 주는 의식과는 살짝 결이 다르다. 먹고 입는 행위가 비교적 간명한 것과 달리, 어딘가에 머무르고 생활한다는 건 상당히 복합적인 의미를 담아낸다. 일단 ‘집’을 떠올려 봐도, 어떤 형태로 거주하는가는 삶의 질은 물론 방향까지 가늠한다. 그런 뜻에서 ‘공간(空間)’을 창조한다는 건 단순히 건물을 세우거나 꾸미는 행위가 아니다. 사람을 포함한 생물이 생명을 영위할 장소를 만드는 일이다. 빽빽하게 밀집된 집단주택이건 허허벌판에 펼친 간이텐트건, 공간을 머무는 방식은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때문에 하나의 공간은 만드는 이와 살아갈 이의 세계관을 담아낸다.건축가 겸 인테리어디자이너인 이혜인 씨(37)가 스스로를 “공간 디렉터”라 불러주길 바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국내 건축·인테리어 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청년 작가 중 하나인 그에게, 인간을 둘러싼 공간은 단지 머묾을 제공하는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매개체가 될 때, 공간은 비로소 본연의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2년 전 ‘이혜인 디자인 스튜디오’를 창업한 그의 공간 철학을 들어봤다.-하시는 일이 뭔지 설명 부탁드릴게요.“항상 이게 참 어려운 거 같아요. 요즘 그런 고민을 많이 하는데, 하나로 단정 짓기가 어렵더라고요. 스스로는 일종의 ‘해결사’라 여기고 있어요. 건축을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전 뭔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함께 참여한 사람들을 조율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건축가나 디자이너보단 ‘공간 디렉터’가 제 일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하는 단어가 아닐까 싶네요.”-공간 디렉터란 직함이 생소합니다.“예전엔 건축가나 인테리어 디자이너 등을 구분 짓는 경향이 강했는데, 해외에선 이런 개념들이 모호해진 지 오래됐거든요.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란 게 바깥 건축과 내부 인테리어 모두 중요하잖아요. 바라보는 시선이 바깥에서 안을 향하느냐, 안쪽에서 밖을 향하느냐는 차이일 뿐이죠. 요즘은 국내에서도 이런 걸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흐름으로 많이 바뀌고 있어요.”-단순히 설계나 디자인만 하는 게 아니라고 이해하면 될까요.“그렇죠. 제가 올해로 14년째 이쪽 일을 하고 있는데, 하나의 도면을 내놓는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니거든요. 결국 하나의 공간이 완성돼야 마무리라고 할 수 있죠. 그 과정에서 참여한 모든 이들이 최대한 만족할 수 있게 하는 게 디렉터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이죠.”-야구나 축구 감독이랑 비슷하네요.“너무 좋은 비유라 맘에 드는데, 좀 거창해서 부끄럽네요. 공통점이 있긴 해요. 예를 들어, 하나의 생활공간을 떠올려보세요. 그곳에 어떤 가구나 식기, 꽃 등이 놓이는가도 정말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플로리스트나 세라미스트가 될 순 없으니 가장 어울리는 전문가를 찾아서 기용해야죠. 또 결국 그 공간을 이용할 사람과도 소통이 잘 돼야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협업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린 거예요.”-흥미롭네요. 어릴 때부터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았나요.“부모님 영향을 많이 받은 거 같아요. 아버지가 스리랑카에서 자수 관련 공장을 운영하셨는데, 1997년 초등학생 때 가족이 모두 건너가 그쪽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한국과는 다른 이국적인 건축문화를 접하게 됐죠. 어머니가 집안 꾸미기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도, 그땐 몰랐지만 자연스레 영향을 받았겠죠.”-스리랑카는 왠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나라예요.“네, 같은 아시아라 낯익지만, 그리 알려진 게 많진 않죠. 홍차 정도나 유명할까요?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면 다들 ‘아하’ 하시며 무릎을 딱 치세요. 인도 아래쪽 섬나라인데 바로 옆에 몰디브가 있어요.”-하하, 진짜로 확 와 닿습니다.“네, 천혜의 환경을 가진 나라다 보니, 감사하게도 어릴 때부터 자연의 아름다움을 실컷 누릴 수 있었어요. 실은 저희가 갔을 때 아직 내전이 끝나지 않았던 상황이라, 부모님은 여러모로 힘드셨을 거예요. 자식들 안전 문제도 염려됐을 거 같고. 근데 저야 어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바다에서 실컷 뛰놀곤 했죠. 아무래도 학교도 한국보단 자유로운 분위기여서 친구들하고도 즐겁게 지냈고요.”-그런 경험이 본인의 진로에도 영향을 끼쳤나요.“그때는 몰랐어요. 제가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왔는데, 학교에 다니다 보니까 제가 한국에서 쭉 나고 자란 친구들이랑 살짝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1학년 때 디자인 과제를 해갔는데, 전 집에 문이 없는 게 문제가 된단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스리랑카는 다 뻥뻥 뚫려있으니까요. 저한텐 앞바다가 정원이고 놀이터였어요. 햇볕이 안방까지 쏟아지고 벌레가 그냥 날아다니는 것도 당연한 거였고요. 고층 아파트에서만 산 친구들과는 집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이 차이가 났어요. 그렇다고 제가 더 낫다는 건 절대 아니고, 서로가 달랐던 거죠.”-고등학교 때도 건축과가 목표였나요.“아뇨. 아까 말씀드렸듯, 어릴 땐 제가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몰랐어요. 실은 어머니가 공예 쪽으로 일하셔서, 자연스럽게 조소과를 꿈꿨어요. 근데 당신께서 고생하셔서 그랬는지, 예술 쪽은 취미로 하라고 하셨어요. 저도 뭐 꼭 해야겠단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라서…. 그러다 고등학교 때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어요.”-특별한 계기가 뭐였나요.“기억하시겠지만, 2003년 인도네시아 몰디브 등에 엄청난 쓰나미가 있었잖아요. 제가 살던 콜롬보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스리랑카도 동부지역이 큰 타격을 입었어요. 그때 한국에서 구호단체들이 많이 왔는데, 그분들을 돕고 통역할 사람들이 필요했어요. 여러 나라 사람들이 참여하는지라 영어도 가능한 사람이어야 했죠.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고등학생들도 나서게 된 거죠. 그때 저도 참여하게 됐는데, 피해 현장에서 느낀 게 많았죠. 그런데 현장에는 외국의 유명한 건축가들도 많이 와 계시더라고요.”-건축가들이 왜 온 건가요.“난민 쉼터나 구호센터 같은 걸 짓기 위해서예요. 저도 그때 처음 알았는데,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일종의 재능기부를 하기 위해 오는 거죠. 안도 다다오나 반 시게루 같은 거물들도 직접 현장에 와서 봉사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그들은 구호센터 하나를 지어도 뭐가 다르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건축가가 이런 일도 한다는 걸 알게 됐고, 그렇게 완성된 건축물이 너무 멋져 보였어요.”-정말 인상적인 계기네요. 소중한 경험이고요.“맞아요. 그리고 그때 배운 게 있어요. 건축은 크고 거창한 건물만 짓는 게 목표가 아니라 그 상황에 맞는 공간을 만드는 데 있다는 걸요. 쓰나미로 집을 잃은 사람에게 화려한 집을 지어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피해자들이 지금 당장 맘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하는 거잖아요. 그저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와 그늘만 제공하더라도, 그 사람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 심정을 공감해주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건축 또한 그래야 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을 가지게 됐죠.”-외국 대학으로 진학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부모님이 적극적으로 권유하셨어요. 부모님이 다른 건 크게 간섭하지 않으셨는데, 어디든 상관없으니 대학은 한국으로 꼭 가라고 하셨어요. 너희는 외국에서 자랐지만 한국인이니까 한국을 더 배워야 한다고요. 오빠도 한국으로 와서 군대도 다녀왔고요. 저도 자연스럽게 그걸 당연하게 여겼어요. 지금도 제가 회사를 관두건 창업을 하건 언제나 응원해주시지 뭐라 그러시진 않아요. 그런 점들이 항상 감사하죠.”-자식의 의견을 존중해주시는 거군요.“맞습니다. 그 덕분에 저도 제가 하고 싶은 일에 맘껏 도전해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어릴 때부터 딱 한 가지만 엄격하게 가르치시고, 나머진 편하게 해주셨어요. 예의범절. 공부 못 해도 좋고, 딴 건 맘대로 하되 항상 사람에게 예의를 지키라고 하셨어요. 특히 어른들에게. 제가 어르신에게 인사 잘하는 사람이 된 것도 그런 영향 때문이에요. 건축 쪽 일을 하면 다방면으로 나이 지긋한 분들과 일을 많이 하는데, 절 좋게 봐주시는 게 부모님 가르침 덕분인 것 같아요.”-한국에서 대학 생활은 어땠습니까.“너무 즐거웠어요. 특히 교수님들이 ‘건축쟁이들은 자기들끼리만 노는 경향이 있다. 여러 분야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해라’고 강조하셨는데, 전 그 말씀을 정말 잘 지켰습니다, 하하. 친구들이 ‘혜인이는 홍대 앞에서 100m 걸어가며 아는 사람한테 100원씩만 받아도 술값 나오겠다’고 했을 정도예요. 단지 학생뿐만 아니라 주변 상가 어른들하고도 잘 지냈어요.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건축도 결국 협업이거든요. 다양한 사람과의 소통이 무척 중요해요. 이렇게 말하니 놀기만 한 거 같은데…, 놀기도 잘 놀고 공부도 실컷 했어요. 졸업하고 부모님한테 ‘나 4년 동안 열심히 배웠으니까 당분간 취직 안 하고 놀 거야’라고 선언했을 정도니까요.”-부모님이 뭐라 안 그러시던가요.“네, 다행히요. 살짝 걱정하신 거 같긴 한데, 일단 내버려 두셨어요. 친구들은 하나둘 회사에 취직하는데 저만 그러고 있는 게 좋아 보이진 않으셨겠지만, 전 그때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스스로 열심히 했으니 잠시 백수 생활을 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었어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확신 같은 것도 필요했고요. 그때 전 잘 되느냐 못 되느냐 같은 기준으로 저를 보기보단, 진짜 하고 싶은 잘 찾아서 최선을 다하고 그 순간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첫 직장을 스리랑카에서 시작했어요.“네, 첨부터 그럴 맘으로 간 건 아니었고요. 부모님하고 시간 보내며 쉬고 싶어서 간 거였는데 우연히 기회가 주어졌어요. 부모님 지인 가운데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 소장님이 계셨는데, 마침 건축 코디네이터를 뽑고 있다면서 해볼 생각이 없냐고 제안하셨어요. 현지를 잘 아는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네가 딱이라고 하셨어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코이카는 어릴 때부터 봉사활동 같은 걸 하면서 익숙하기도 했고요. 그땐 제가 그걸 잘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좋은 일이고 새로운 경험이니까 일단 도전해보자는 마음이었죠.”(다음 주 토요일 하편에서 이어집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청소년 등 MZ세대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스타 가수 이영지 씨와 댄스 크루 원밀리언 등이 저작권을 기증한 음원과 안무로 참여하는 ‘F!RE 댄스 챌린지’ 이벤트가 열리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와 한국저작권위원회(위원장 최병구)는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들에게 용기와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창작자들이 국가에 기증한 음원 및 안무에 대한 챌린지 이벤트를 24일까지 진행한다”고 14일 밝혔다. 이번 행사에 사용되는 음원은 이 씨가 작사·작곡·노래를 맡은 ‘F!RE’란 곡이다. YG엔터테인먼트 소속인 Q(강규용) 김민기 김승남 씨도 공동으로 작사 및 작곡, 편곡에 참여했다. 인기 음악그룹 하모나이즈는 가창에 힘을 보탰다. 창작자들이 기증한 음원은 지난달 11일 위원회 ‘공유마당’ 및 음원 재생 서비스 등을 통해 처음 공개됐다. 원밀리언이 해당 음원에 맞춰 창작한 안무 역시 같은 날 공개됐다. 해당 음원 및 안무 기증 프로젝트는 내년 1월 열리는 ‘2024 강원 청소년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응원하는 뜻도 함께 담았다. 가수 이영지 씨는 “저작권 나눔에 공감해 이번 기증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올해 명예기증자로 선정돼 기쁘다”며 “청소년들이 꿈과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음원에 담았다. 많은 청소년에게 이러한 마음이 잘 전달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원밀리언 안무가 백구영 씨도 “좋은 취지로 저작권 기증 프로젝트에 참여해 뿌듯하고 가슴이 벅차다”며 “청소년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기증 안무를 잘 활용했으면 한다”고 소회를 전했다. 이벤트 참여는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F!RE댄스(사진)를 선택한 뒤 음원에 맞춰 춤을 추는 영상을 촬영하고 해시태그와 함께 게재하면 된다. 10일부터 24일까지 2주 동안 인스타그램 릴스를 통해 진행되며, 추첨을 통해 다양한 선물을 증정할 예정이다. 문체부와 위원회는 앞으로도 국민이 직접 참여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저작권 나눔 문화 및 저작권 기증과 관련한 인식 확산을 위해 노력할 예정이다. 위원회 관계자는 “저작권 기증은 창작에 씨앗이 되는 나눔의 가치”라며 “이번 챌린지 이벤트를 통해 국민들이 기증 저작물을 활용해 보고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만화를 통해 세상을 보려 합니다. 1965년 비틀스 싱글 곡 ‘데이트리퍼(Day tripper)’는 “당일치기 여행자”를 일컫습니다. 만화를 본다는 건 잠깐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니까요. 브라질 그래픽노블 ‘데이트리퍼’도 영감을 줬습니다. 이 만화엔 삶을 담는 소설가를 평생 꿈꾸지만, 실상은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 담당 기자가 나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우리네 인생과 무척 닮지 않았나요.“아빠, 나 ‘심슨’ 봐도 돼?”왜 그럴까. 아들이 리모컨을 들 때마다 움찔한다. 아이가 ‘더 심슨(The Simpsons·한국명 심슨 가족)’을 본 게 벌써 여러 해. 심지어 직접 추천까지 해줬다. 근데 “그래, 봐”란 답이 곧장 튀어나오질 않는다. 분명 끝내주는 만화이자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시리즈인데. 심슨은 왜 언젠가부터 ‘계륵(鷄肋)’이 돼 목구멍에 걸리는 걸까.지난달 미국에선 드디어 ‘더 심슨’의 시즌35가 시작됐다. 서른다섯 번째라니. 1989년 12월 17일이니 공식 데뷔일이니 30년 넘은 장기근속. “20세기 최고의 TV 시리즈”(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방영된 TV시트콤·애니메이션.”(영국 기네스) 숫자를 맞추려고 그랬는지, 지금까지 받은 에미상도 딱 35개. 그간 쌓은 업적만 놓고 보자면, 비슷한 수준이라 견줄만한 작품도 떠오르질 않는다.발음이 ‘얼간이(simpleton)’가 떠오른단 이유로 낙점된 이름인 심슨은, 이미 만화란 장르로 국한할 수 없는 문화적 아이콘이다. 지금도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캐릭터 상품의 위력만 얘기하는 게 아니다. 요즘은 좀 잦아들었다지만, 심슨이 다루면 다 얘깃거리다. 2021년 심슨이 영화 ‘기생충’을 패러디하거나 지난해 블랙핑크의 노래만 삽입해도 화제를 모은다. 역사상 이런 파급력을 지닌 애니메이션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게다.한데 이 대단한 만화가 지속되는 게 왜 조금씩 불편하게 느껴지는 걸까. 여전히 반갑고 기쁘면서도, 올해는 또 어찌 대접해야 하나 머리를 싸맨다. TV연예 연말대상에서 유재석을 마주하는 기분이 이럴까. 여전히 평타만 쳐도 대상 받아 마땅한데, 막상 발표하면 “올해도?” 싶은. 변하지 않길 바랐던 심슨은 진짜로 변치 않고 지금껏 와줬건만. 이젠 ‘오픈 런’할 자세가 안 된 스스로를 꾸짖어본다.물론 그 세월 동안 심슨이라고 부침이 없었겠나. 대중성에서나 작품성에서나 최고의 평가를 받았던 90년대가 지난 뒤, 21세기 심슨은 수많은 비판을 견뎌왔다. 특히 ‘영원한 악동’ 바트를 두고 벌어진 미국 교육계의 공방은 꽤나 치열했다. 아이가 심슨을 보는 게 찜찜해진 이유도 비슷하다. 어린이에게 ‘교육적이지 않다’는 건 심슨을 좋아하건 싫어하건 양측 모두 공감할 터. 허나 그보다는, 우리에게 온 지 10년이 지나며 심슨은 왠지 ‘참신함’이 떨어졌다.심슨이 노력하지 않았단 뜻은 아니다. 살짝 정체기를 겪었던 시즌 20대 이후, 최근 시즌들의 환골탈태는 왜 심슨이 심슨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만든다. 그저 날카로운 해학만 살아난 게 아니다. 특히 해마다 선보이는 대표 에피소드인 핼러윈 특집 ‘공포의 나무집(Treehouse of Horror)’들을 보면, 최신 장르와 형식을 넘나드는 과감한 실험성은 범접하기 힘든 탁월함까지 선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제언한다. 이제 심슨은 마지막 피날레를 마련할 때가 됐다. 개인적으로 시즌40을 종착역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한 시대가 저무는 걸 세월 탓만 하기엔 서글프긴 하지만, 기사회생의 빛을 발산하는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대장정을 마무리할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여전히 상품성 높은 심슨에게 하차를 권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제 그의 유머가 현실보다 재밌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화제를 모았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예견이 대표적 사례다. 심슨이 던진 농담들이 실제로 더 리얼하게 벌어지며, 스프링필드는 “미국의 흔한 중산층 시골마을”(미 뉴욕타임스)이 아니라 ‘박물관에 박제된 멸종생물’이 돼버렸다. 뭣보다 호머 심슨은 더 이상 평범한 중산층 백인 가장을 대표하지 못한다. 그렇게 살며 단란한 2층집을 유지할 여력이 이젠 우리에겐 없다. 세상은 더 비루하고 더 웃겨져 버렸다.팬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시즌33부터 심슨에서 사라진 게 있다. 이 만화의 대표적인 클리셰인 ‘호머가 바트 목을 조르는’ 장면이다. 줄기차게 아동학대 지적이 일었던 이 장면은, 결국 심슨에도 등장한 대사처럼 “시대가 바뀌었기에” 이젠 나오질 않는다. 이거 하나 빠졌다고 심슨의 위용이 꺾일 리야 만무하지만, 그만큼 세상은 변하고 또 변했다. 30년 넘게 재즈 한 길만 파던 리사가 두 번째 좋아하는 음악장르로 ‘K-팝’을 꼽을 만큼. 그 시대의 흐름에 굳이 심슨까지 발맞춰 갈 필요가 있겠나. 제왕은 제왕으로 남아야 한다.아이는 또 물어볼 게다. “아빠, 나 심슨 봐도 돼?” 이미 보기 시작한 거 말리긴 늦었다. 하지만 언젠가 조금 더 크면 들려주고 싶다. 우리 시대는 그랬다고. 거칠고 불편하지만 그땐 그게 최고였고 최선이었다고. 심슨은 심슨의 시대를 살았다. 우리와 함께. 이제 다음 시대의 왕좌는 비워줄 때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상편()에서 이어집니다.경북 김천에 사는 고선민 씨는 스물다섯 살 청년이다. 고교 때부터 알바를 했던 그는 사정 상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수많은 곳에서 일해 왔다. 편의점과 마트, PC방, 호프집, 카페, 옷가게, 고깃집, 소규모 호텔, 온라인 패션쇼핑몰 등등. 하루 서너 시간씩 자고, 한 달에 한두 번 쉬며 쉼 없이 일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돈 벌기 위해.”고 씨가 그토록 돈을 벌고 싶은 이유는 뭘까.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그는 솔직했다. “이 세상은 돈이 있어야 행복하니까요.” 어릴 때부터 기초생활수급자였던 그는 스물세 살에 독립해 처음 자기 방을 가졌다고 한다. 몇 평 되지 않는 월세방에서 자신만의 목표를 세운 고 씨는 지난해 형과 함께 십년 넘게 모았던 돈을 투자해 편의점을 차렸다. “언젠가 부자가 되면 저처럼 없이 사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청년 사장의 꿈을 상편에 이어 들어봤다. -전역 뒤 바로 편의점을 차린 건가요.“아뇨. 1년 반 정도 뒤에요. 그 사이엔 계속 뭔가 혼자 시도해보는 시기였어요. 군대 가기 전처럼 밤낮 없이 투잡을 뛰기도 했고, 인터넷방송에 도전하기도 했어요. 잘 풀리진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한 계단씩 올라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서울에서 생활할 기회가 생겨 나름 큰 결심을 하고 상경했는데 결과가 좋진 않았어요.”-왜 서울에 갔던 건가요.“한 온라인 패션쇼핑몰에서 뽑는 피팅 모델에 합격한 게 계기였어요. 당시에는 키 181cm에 체중 66kg로 날씬했거든요. 모델 일도 흥미로웠지만, 그걸 기회로 김천을 벗어나려는 목적이 컸어요. 그때 호프집에서 일했는데, 사장님도 좋고 근무 여건도 불만 없었어요. 근데 뭔가 갈수록 ‘정체되는’ 느낌이더라고요. 처음 독립해 월세방에 살았는데, 갈수록 친구들 공동숙소처럼 돼버렸어요. 친구들이 좋긴 하지만, 늦게 퇴근해 같이 술 마시고 늦잠 자는 생활이 반복되니까. 서울로 가서 초심도 되찾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서울살이는 어땠나요.“음…,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어요. 변명 같지만,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게 꼬여버렸습니다. 일단 온라인쇼핑몰에서 몇 주 만에 관뒀어요. 팬데믹 때문에 매출 떨어졌다고 모델 숫자를 확 줄이더라고요. 초보인 제가 1순위였죠. 그 뒤 구한 옷 가게 알바도 1주일 만에 관뒀어요. 역시 장사 안된다며 그만 나오라더군요. 이후 80군데 이상 알바를 지원했는데, 답도 안 해주는 경우가 많았어요. 코로나로 인원 감축하는 곳은 늘어나는데, 그렇게 일자리 잃은 인력은 넘쳐나니까요. 그땐 돈 없어서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질 못했어요.”-그래서 고향에 돌아온 건가요.“처음엔 안 오려고 했죠. 이대로 포기하긴 억울하기도 했고. 어렵사리 호텔 청소를 시작했는데, 생활비도 빠듯했어요. 김천은 월세방이 20~30만 원인데, 서울은 싼 게 60~70만 원이니까 월세 내면 남는 게 없었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버티려 했는데, 형이 계속 내려오길 종용했어요. 사실 서울 갈 때도 엄청 말렸거든요. 연고도 없는 네가 뭘 할 수 있느냐며. 내려와서 자기랑 동업하자고 설득했어요. 두 달 만에 내려가는 게 왠지 실패자가 되는 기분이라 싫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어요.”-형제가 선택한 동업이 편의점이군요.“저희가 가진 돈이 많지 않다 보니, 처음엔 치킨 가게를 떠올렸어요. 초기비용이 비교적 적게 들더라고요. 근데 닭도 튀길 줄 모르는데 무작정 덤비긴 위험하잖아요. 그래도 제가 오래 경험한 편의점이 제일 낫겠다 싶었던 거죠. 몇 달 동안 나름 시장조사와 연구를 많이 했어요. 편의점 브랜드도 다양한데다, 어디서 하느냐 등 따질 게 많으니까요.”-제일 크게 고려한 점은 뭔가요.“저희 형제 ‘둘이서 할 수 있느냐’였어요. 알바까지 둘 여력이 없거든요. 초기 자본금이 8000만 원 들었는데, 70% 이상은 형이 저축한 거예요. 저도 안 쓰는 편이지만, 형은 고등학생으로 PC방 알바할 때부터 한 푼도 안 쓰고 모았대요. 하지만 둘이 모은 돈 다 넣고도 대출까지 받아야 했어요. 처음부터 잘 될 거란 보장이 없는데, 일단은 둘이서 어떻게든 버텨보자고 했죠. 그래서 24시간 열지 않는다는 조건이 중요했어요. 제가 오전 6시 오픈해서 오후 7시까지 일하고,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형이 퇴근해 7시부터 새벽 1시 문 닫을 때까지 있는 거죠. 지난해 8월 29일 드디어 창업했습니다.”-혼자 하루 13시간씩 일하기 힘들 텐데요.“만만치 않죠. 20대라지만 체력적으로 버거울 때도 있어요. 게다가 올해 6월까지 하루도 못 쉬었거든요. 지금은 하루씩 도와주시는 분에게 부탁해 한 달에 1번 정도 쉬어요. 그래도 제가 편의점 알바를 오래 해서, 상품 발주나 관리 등을 아니까 초기에 헤매는 일은 없었어요. 근데 일도 일이지만, 혼자서 가게를 지킨다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돈 아끼려고 유통기한 지나 처분해야 하는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건강도 나빠지더라고요.”-어디가 아픈 건가요.“하하, 병 생긴 건 아니고요. 체중이 너무 불었어요. 좁은 공간에서 오래 있는 데다 열량 높은 음식을 주로 먹어서인지 88kg까지 살이 쪘어요.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서, 지금은 80kg까지 감량했는데 더 빼려고요. 편의점 창고에 아령 같은 운동기구를 갖다 놓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도로 집에 갖다 뒀어요. 공과 사는 좀 구분해야겠더라고요. 여기도 엄연히 직장인데 일에 더 집중해야겠단 마음이었어요.”-간이침대 같은 게 없는 이유도 그래서인가요.“네, 늘어지고 싶지 않았어요. 쉴 때도 차라리 관심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하지, 허투루 시간 보내지 않으려고 해요. 예전에 알바할 때 돌이켜보면, 손님 없거나 급한 일 없으면 의미 없이 핸드폰으로 영상이나 보며 허송세월 많이 했거든요. 물론 그런 쉬는 짬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지금은 제가 사장이잖아요. 퇴근하고 집에서 쉬면 되니까, 일터에선 최선을 다하는 거죠.”-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이 있었나요.“참 그게…, 세상일이 맘대로 되질 않더라고요. 편의점 오픈하고 처음 몇 달 동안 장사가 너무 안돼서 망할 뻔했어요. 실제로 형이랑 폐업까지 고민했어요. 여기 김천역 인근이 옛날엔 번화가였어요. 근데 지금은 빈 상가가 여러 곳일 정도로 많이 쇠락했어요. 저희 편의점 있는 건물도 지금은 김천시 산하기관이랑 행복주택이 입주했는데, 당시엔 텅텅 비어서…. 잘 모르시겠지만, 편의점이 하루 매출 50만 원이라면 이것저것 떼면 5만 원도 안 남아요. 형제가 하루 19시간 일하는데, 버는 돈이 그마저도 안 될 때가 많았어요. 그러니 상품 폐기는 늘고 일을 하면 할수록 손해가 커지는 거예요. 정말 앞이 캄캄했어요.”-그때 ‘난 망해가는 편의점 사장이다’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거군요.“네, 맞아요. 원래도 브이로그 형식의 영상은 계속 올렸는데, 창업 뒤엔 편의점에 초점을 맞춘 ‘고선몬(@goseonmon)’이란 채널을 운영하고 있어요. 말씀드렸듯, 근무 때 짬 나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거든요. 근데 그 제목이 좀 자극적이었나 봐요. 보통 편당 조회수가 1만 회를 넘지 않는데, 그건 약 10만 회가 나왔어요. 관련 쇼츠는 조회수가 94만 회나 나왔고요. 덕분에 구독자도 5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는데, 잘 나가는 채널에 비하면 햇병아리지만 저한텐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죠.”-편의점 형편은 나아졌나요.“네, 다행히 조금은요. 오픈하고 6개월가량은 정말 힘들었는데, 올해 봄부터 찔끔찔끔 매출이 올라갔어요. 지금도 잘 된다고 말할 수준은 절대 아니지만, 편의점은 확실히 여름에 매출이 증가하거든요. 이제 숨이 좀 트이고 있는데, 벌써 가을이 됐네요. 그리고 곧 겨울이 올 거고…. 이번 겨울은 지난번 같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편의점이 계절 타는지 몰랐네요.“편의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게 뭔 줄 아세요. 담배예요. 근데 담배는 수익이 안 돼요. 그래도 조금은 벌겠지 싶으시겠지만, 정말 손님들이 찾아오는 구인 효과 말고는 거의 남는 게 없다고 보시면 돼요. 수익 측면에서 음료수가 가장 많이 팔려야 하는데, 더운 여름엔 지나가다 편의점에서 들러 음료를 찾지만 겨울엔 잘 안 마시거든요. 그래서 군고구마 같은 걸 하기도 하는데, 저희도 겨울을 어떻게 대비할지 고민 중입니다.”-이제 사장이 된 지 1년이 넘었습니다.“네, 어떻게 버텼나 싶어요. 계약기간이 5년인데, 앞으로 4년 동안 더 열심히 해야죠. 솔직히 계약 종료 뒤에 편의점을 계속할지 말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한 달에 월 1000만 원 버는 사람이 되는 게 목표예요. 그래야 제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거 같거든요.”-이루고 싶은 꿈이 뭔가요.“아직 20대다 보니 바뀌긴 하는데, 요즘 구체적인 게 하나 정해졌어요. 일단 저만의 ‘스튜디오’를 만들고 싶어요. 자신있는 요리도 선보이고, 거기서 영상 촬영해서 유튜브 등에도 올릴 수 있는. 온라인 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소통하고 영업도 하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해요. 장사하는 가게랑 뭐가 다르냐고 하시겠지만, 우리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가난한 사람도 돕고, 쇠락해가는 동네도 다시 살려 나가고 싶고. 관련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멀리 내다보고 차근차근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편의점 고객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을까요.“찾아주시는 것만도 고마운데 딱히…. 아, 항상 반갑게 인사드리려 애쓰는데(실제로 인터뷰 내내 고 씨는 손님이 오면 ”안녕하세요“라며 달려 나갔다.), 혹시 맘에 안 드시는 게 있으면 편하게 얘기해주세요. 음…, 좀 다른 얘기지만 하나만 조심스레 말씀드려도 되나요. 편의점에 가시면 가끔 직원들이 너무 무표정하거나 딱딱하다고 느끼실 때가 있을 거예요. 제가 세상의 모든 편의점을 대변할 순 없지만, 그런 분들은 대부분 사람한테 크게 ‘데인’ 적이 있는 거예요. 요즘은 손님들도 대체로 점잖고 좋으시지만, 가끔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일이 벌어지거든요. 혹시 그런 직원을 보시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 지금처럼, 아니 앞으로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편의점 파이팅!”[※고선민 씨에게 양해를 구할 게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편의점 운영 중 겪은 힘들었던 일들을 가감 없이 들려줬다. 그 중엔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가볍지 않은 사건도 있었다. 기사로 써도 좋단 허락을 받았지만, 고민 끝에 관련 내용들은 다루지 않기로 했다. 그런 사례들이 편의점 종사자들의 고충을 잘 보여줄 순 있겠지만, 행여 누군가는 앙심을 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 고 씨를 포함해 편의점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의 안전이 가장 소중하니까. 아울러 독자들에게도 이해를 부탁드립니다.]김천=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어머, 디올 맞은편에 ‘우영미’가 있네?” 20일 오후 대전 유성구에 있는 ‘대전신세계’ 백화점. 2층 패션럭셔리관을 둘러보던 한 40대 쇼핑객은 ‘우영미(WOOYOUNGMI)’ 매장 앞에서 문득 발길을 멈췄다. 구찌와 프라다, 몽클레어 등 세계적 해외 명품만 가득한 이곳에 엄청난 규모의 국내 브랜드 스토어가 있다는 게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실제로 한 패션 전문가는 “19일 우영미의 대전신세계 오픈은 관련업계에서도 그간의 관행을 뛰어넘는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영미, 해외 명품과 동급 대우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한국 패션계의 자존심 ‘우영미’가 최근 국내외에서 해외 유명 명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상을 떨쳐 커다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에선 해외 브랜드만 입점하던 백화점 명품관에 우영미 매장이 속속 들어서고 있으며, 해외에서도 지난달 하이엔드 브랜드의 상징인 프랑스 파리 생토노레 거리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여는 등 전례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우영미는 특히 올해 들어 국내 주요 도시에서 상징성을 지닌 백화점들에 잇따라 매장이 입점해 눈길을 끈다. 대전신세계에 앞서 지난달 17일 경기 화성시에 있는 롯데백화점 동탄점에도 국내 최대 규모(약 40평)의 ‘우영미’를 오픈했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경기 남부에 우영미를 유치하기 위해 여러 유통사가 경쟁을 펼쳤다”며 “롯데백화점이 2년 넘게 설득과 노력을 기울여 성사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최근엔 서울 서초구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남성명품관에도 신규 입점이 확정됐다. 우영미의 아이덴티티를 살린 럭셔리 부티크 매장을 내년 2월 15일 선보일 예정이다. 이로써 지난달 리뉴얼을 마친 강남구 플래그십 스토어 ‘맨메이드 도산’을 중심으로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 △신세계백화점 본점 △롯데백화점 잠실점 △부산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등에 화려한 라인업을 갖추게 됐다. 모든 매장은 롯데 에비뉴엘 같은 명품관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했다.● 20년 내내 파리 봉마르셰 TOP3 매출 국내 패션 브랜드인 ‘우영미’가 이처럼 주요 백화점에서 글로벌 해외 브랜드들만 누려 왔던 대접을 받는 까닭은 뭘까. 이유는 간명하다. 우영미의 가치가 그들과 맞먹거나 오히려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우영미는 해외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라인업 브랜드 ‘솔리드옴므’와 함께 럭셔리 명품으로 대접받은 걸 감안하면, 오히려 요즘 국내 반응은 한참 늦은 셈”이라고 말했다. 2002년 파리에서 론칭한 우영미는 20년 동안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걸어왔다. 2006년 LVMH그룹 소속인 파리 최고의 부촌 백화점 봉마르셰에 국내 브랜드 최초로 입점해 지금까지 거의 해마다 톱3 매출 브랜드에 이름을 올려 왔다. 2013년 마레에 이어 올해 생토노레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연 건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우영미 관계자는 “통상 2, 3년의 준비 기간과 건물 입주민 전체의 허가를 얻어야 입점이 가능한 거리”라며 “한국 브랜드 최초로 생토노레에 매장을 오픈한 만큼 책임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올해 2월 두바이와 9월 중국 상하이에서 단독 매장을 오픈한 데 이어, 12월 영국 런던의 상징과도 같은 해러즈백화점에도 입점이 예정돼 있다. 롯데백화점 동탄점장인 한지연 상무는 “우영미는 국내 브랜드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리는 대표적인 브랜드로 K패션의 랜드마크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5만4200여 개.’지난해 말 기준 국내 편의점 개수다. 숫자만 봐선 쉽게 감이 오질 않지만, ‘편의점 왕국’ 일본이 같은 시점 5만6000여 개. 심지어 일본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이나, 한국은 해마다 2000개 이상씩 늘고 있단다. 인구수나 땅 면적을 고려하면, 이미 우린 왕국을 뛰어넘어 제국이나 황국쯤 되는 셈이다.거리를 걷다 보면 편의점 서너 개는 금방 눈에 들어오는 세상. 그만큼 편의점은 우리네 삶에 깊이 녹아들었다. ‘딸랑’(문 열고) ‘삑삑’(바코드 찍고) ‘띠링’(결재한 뒤) 다시 ‘딸랑.’ 가끔은 “어서오세요” “수고하세요”조차 생략된 풍경. 우리의 편의를 위한 이 공간을 우린 주로 무심하게 들렀다 간다.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서로의 손만 잠깐 바라보며.허나 그곳에도 당연히, 사람들이 살아간다. 수많은 청년들이 ‘편돌이’ ‘편순이’라 낮잡아 불리며 묵묵히 일하고 있다. 경북 김천시에서 CU김천평화주택점을 운영하는 고선민 씨(25)도 그중 하나. 친형과 지금껏 모은 돈을 모두 투자해 지난해 드디어 ‘사장님’이 됐지만, 학창시절 때부터 편의점과 노래방 PC방 등에서 줄곧 알바 인생을 살아왔다. 그저 스쳐 지나갔지만, 실은 우리의 형제자매친구가 있는 곳. 편의점에서 고선민 씨를 만나봤다.-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릴까요.“안, 안녕하세요, 고선민입니다. 잠시만요, 너무 떨려서. 인터뷰는 처음이라…. 그래도 저희 편의점에서 만나니까 좀 낫긴 한데. 창고에서 뵙자고 해서 죄송해요. 저 혼자 있다 보니 자릴 비울 수 없어서. 휴, 다시 할게요. 저는 고선민이라고 합니다. 저란 사람은 목표가 뚜렷하고, 아니 목표를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입니다. 오로지 제가 가진 목표를 위해 사는…. 원래 활달한 성격인데, 요즘 좀 많이 진지해졌습니다.”-신선한 소개네요. 보통 나이 직업 같은 걸 얘기하는데.“아, 다시 할까요. 김천에서 나고 자란 스물다섯 살 남자입니다. 충북 영동에서 군 복무했을 때랑 서울 2개월 있었던 거 빼곤 줄곧 여기 살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계시고, 다섯 살 위인 형이 있고. 대학은 안 가서 고졸이고요. 2022년 8월 29일에 여기 오픈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인터뷰 요청 듣고 의심했다면서요.“네, 보이스피싱이나 사기꾼 아닐까…, 아, 면전에서 죄송합니다. 하여튼 절 취재한다는 게 이상하잖아요. 잘 나가는 사람도 아니고. 내세울 만한 일을 한 것도 없고요. 근데 사람은 누구나 특별하다는 말씀에 용기를 냈습니다. 저 같은 수많은 편의점주와 직원들에게 응원을 전하고도 싶었고요. 우리 부자 될 수 있다, 힘내자….”-활달했다고 했는데, 어릴 땐 어떤 아이였나요.“좀 부끄러운데요. 초중학교 땐 인기가 좀 있었어요. 지금 봐선 믿기 힘드시죠? 어릴 땐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다른 학교에서 여학생들이 찾아오고 그랬습니다. 그 바람에 물정 모르고 막연히 탤런트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주위에서 괜히 띄워주니까 학교에도 장래희망으로 ‘배우’라고 써내곤 했습니다. 근데 여건이 안 돼서.”-여건이 안 됐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부모님이 보시면 속상하실 수 있는데…, 실은 저희 형제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셨대요. 그 바람에 오랫동안 일을 못하셨어요. 지금은 다시 시작하셨지만, 계속 집안이 어려웠어요. 어머니도 스무 살에 결혼하셔서 딱히 경력도 없으신지라, 식당 주방 일 같은 걸 내내 하셨어요. 그러니 살림살이가 좋을 리 있겠어요. 저 중고교 때 한 달에 용돈 3만 원 받았어요. 대구나 김천에 있는 연기학원에 물어보니 학원비가 월 60~70만 원이라는데. 집에는 말도 못 꺼냈죠. 그래서 고2 때 몰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평일엔 학교 가니까 주말에 고깃집 서빙을 했습니다.”-그걸로 학원비 댄 건가요.“어데요. 주말 저녁 6시간씩 일하는데 턱도 없죠. 30만 원쯤 받았나…. 대구 있는 학원에 다녔다면 교통비로 다 나가죠. 그래서 고민 끝에, 김천의 한 극단에서 단원을 모집하단 소식을 듣고 찾아갔어요. 고생은 되더라도 기초부터 다질 수 있겠다 싶어서요. 다행히 받아주셔서 진짜 열심히 했습니다. 학교 마치면 곧장 극단에 가서 잡일 하고 연기 배우고. 입단 4개월 만인가 무대에도 섰어요. 대사 한 마디 없는 노비 1인가 2였지만, 하하. 근데 첫 공연이 끝난 뒤 그만뒀어요.”-왜 관둔 건가요.“작은 역할이었지만, 무대에 서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연기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걸. 나름 보람 있긴 했지만, 준비 과정도 너무 힘들었고요. 진짜 배우가 되려면 그 정도는 이겨내야 하는데, 그럴 마음의 자세도 갖추지 못했던 거죠. 그냥 어쭙잖게, 배우는 유명해지면 돈 많이 버는 직업이란 환상만 있었어요. 게다가 첫 공연 뒤 분장을 못 지운 채 집에 가는 바람에 부모님한테 들켜서…. 이래저래 포기해버렸어요.”-아쉽지 않았습니까.“그때 방황을 많이 했어요. 오랫동안 품었던 꿈인데,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끝났으니까. 고깃집 알바도 얼마 안 가서 관뒀어요. 내년이면 고3이라 뭔가 제 길을 찾아야 하는데,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렇다고 공부를 하기엔 성적이 바닥이었고. 친구들은 대학이란 목표를 향해 가는데, 저만 홀로 멈춰선 기분이었어요. 그래서인지 괜히 집안 형편 나쁜 것에 대한 원망만 쌓여갔고요.”-어떤 원망이었나요.“알바 때도 그랬거든요. 주말에 친구들과 있다가도 저만 6시까지 가야 하니까, 기분이 그렇죠. 집이 좀 살았으면 연기학원도 편하게 다녔을 텐데 싶고. 공부도 변명이지만, 초6 때 수학학원 몇 달 다닌 게 전부거든요. 괜히 나도 남들처럼 학원 보내줬으면 공부했을 거란 부아도 치밀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했죠. 누구 탓할 시간에 제가 잘해야 하는 건데.”-누구나 그럴 수 있죠.“솔직히 저한테 가난은 어릴 때부터 익숙한 환경이었어요. 집도 방 2개짜리 임대아파트여서 제 방을 따로 가져본 적도 없고요. 항상 기초생활수급자였지만, 친구들도 내색하지 않고 잘 대해줬고요. (친구들이 어떻게 아나요) 당연히 알죠. 학교에서 방송을 해요. 고선민 어디어디로 오라고. 그럼 학습지 같은 걸 무료로 줘요. 그걸 이만큼 받아오면 애들 눈엔 이상한 거죠. 자기들은 돈 내고 사는 참고서를 왜 쟤는 학교에서 공짜로 주나. 금방 소문나죠.”-대놓고 방송을 한단 말입니까.“아마 애들이 눈치챌 수 있단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지 못하셨던 거 같아요. 그걸로 서운하진 않았어요.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이 다 잘 해주셨거든요. 친구처럼 대해주시고, 공부 못 한다고 구박도 안 하셨고. 전 일찌감치 대학 포기해서 수능도 안 봤는데. 공부 말고도 다른 길이 있다면서 항상 응원해주셨어요.”-그 다른 길은 뭐였나요.“돈 버는 거죠. 대학 간 친구들은 빨라야 4년 뒤에 취업하잖아요. 걔들한테 뒤처지지 않으려면, 전 그 시간에 최대한 많이 벌어둬야죠. 돈 모아서 그때쯤부터는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할 자금을 마련하겠단 계획이었죠. 특히 졸업 전후로 그런 생각이 컸어요. 실은…, 졸업식 때 부모님이 안 오셨어요. 당시에 사이도 안 좋으셨고, 일하시느라 바쁘셔서. 그땐 차라리 안 오는 게 낫다고도 생각했는데, 다른 애들처럼 같이 졸업식 사진 한 장 못 찍은 건 나중에 좀 아쉽더라고요.”-왜 사이가 나쁘셨는지 물어봐도 되나요.“돈 때문이죠. 그때그때 상황은 달랐어도, 결국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어요. 없는 살림에 애 둘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스트레스가 많으셨을 거예요. 형도 그런 상황을 힘들어했고. 전 그땐 될 대로 되라 식이었어요. 빨리 독립해서 내 살길이나 찾자 싶었죠. 제가 봐도 착한 아들은 아니었어요.”-지금은 괜찮으신가요.“네, 지금은 싸우지 않으세요. 계기가 있는데, 저 군대 있을 때 어머니가 한번 쓰러지셨어요. 휴가 나와 보니까 어머니 머리 스타일이 이상해서 여쭤봤더니 대충 얼버무리셨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당시엔 심각해서 검사받으시느라…. 다행히 큰 병은 아니었지만 부모님도 느끼신 바가 컸나 봐요. 이후론 싸울 상황을 피하세요. 이젠 형도 대학 졸업해 사회복지사가 됐고, 저도 제 앞가림 하니깐. 졸업한 뒤엔 거의 항상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고 투잡을 뛰었거든요.”-주로 어떤 일이었습니까.“졸업 전후 땐 노래방과 편의점 알바를 오래 했고요. 그때가 ‘편돌이’ 생활 시작이네요. 친구랑 순대 공장도 갔었는데, 거긴 이틀 만에 관뒀어요. 일도 일이지만 냄새를 도저히 못 버티겠더라고요. 형이 했던 PC방 알바도 물려받아 1년 정도 했고. 제가 2017년 7월 11일에 입대했는데, 제 생일 다음날이라 훈련소에서 케이크 줬던 게 기억나네요. 그때까진 쉬는 날도 없이 일했어요. 한 달에 한 번 쉴까 말까 했죠. 한 달에 120만 원에서 200만 원 정도 벌었는데, 매달 평균적으로 100만 원가량은 저축했어요.”-진짜 아껴 써야 했겠네요.“한 달을 10만 원으로 버틴 적도 많아요. 점심은 거의 굶다시피 했어요. 편의점 때는 보통 기한 지나 폐기하는 음식으로 때우고. 친구들이랑 어쩌다 술 한 잔 하는 것 말고는 쓴 데가 없어요. 군대에서도 월급 받은 거 고스란히 다 모았거든요. 제대할 때 1700만 원인가 모았어요. 당시 치아교정을 해야 해서 600만 원 정도 쓰고, 제 수중에 1100만 원쯤 남아있었습니다.”-왜 그렇게 악착 같이 모았나요.“말씀 드렸듯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였죠. 군대 때도 일반 소총수였는데 자원해서 취사병으로 갔어요. 요리를 배워두면 어떻게든 쓸모가 있겠구나 싶었거든요. 진짜 감자조림 하나 할 줄 모르는데, 선임들한테 혼나가며 노트에 깨알같이 요리법 써가며 배웠어요. 덕분에 지금은 웬만한 건 다 할 줄 알죠. 배워두길 잘한 게, 요즘 제가 꿈꾸는 일에 도움이 될 거 같아요.”-하고 싶은 일이란 게….“그때만 해도 명확치는 않았어요. 인터넷 개인방송 해보겠다고 장비를 500만 원 어치 마련해서 몇 달 하다가 반값에 팔아버린 적도 있고. 구체적이진 않아도, 장사를 해보고 싶기도 했고요. 좀 되는대로 부딪혀보던 시절이었어요. 주위에선 진득하게 하는 게 없다고 뭐라 하는데. 그 말도 맞지만, 전 이런 게 다 제 ‘경험치’가 된다고 믿었어요. 연기도 인터넷방송도, 도전해봐야 내 길이 아닌 줄 아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편의점을 차린 건 다른 얘기죠. 형이랑 저의 전 재산이 들어갔으니까. 그전까진 모의 전투였다면, 이젠 진짜 전쟁에 뛰어든 거죠. 어떻게든 이기고 살아남아야 하는.”(다음주 토요일 하편에서 이어집니다.)김천=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강경젓갈축제는 단순한 지역 먹거리 행사가 아닙니다. 200년 넘는 전통을 바탕으로 논산 음식문화의 우수성과 상품성을 널리 알리는 소통의 한마당이죠. 특히 올해는 남녀노소 모두 좋아할 문화·체험행사도 많아 ‘전국구 페스티벌’로 사랑받으리라 확신합니다.” 19일부터 나흘간 충남 논산시 강경읍에서 열리는 ‘2023 강경젓갈축제’는 타 지역민들에겐 생소할 수도 있다. 하나 강경은 전국에 젓갈 유통의 60%를 공급하는 최대 산지다. 젓갈축제 역시 올해로 27년째를 맞을 만큼 역사가 깊다. 특히 백성현 논산시장(63)이 지난해 취임한 뒤 상월고구마축제와 합쳐진 젓갈축제는 올해 ‘대변신’이라 부를 만큼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눈길을 끈다. 4일 시청 집무실에서 만난 백 시장은 “최근 여러 가시적 성과를 거둔 ‘다이내믹(Dynamic) 논산’의 진면모를 느껴 볼 기회”라며 “우리 시민과 관광객 모두가 만족할 축제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올해 3월 열린 ‘논산딸기축제’에 5일 동안 35만여 명이 다녀가셨어요. 팬데믹으로 4년 만에 열렸는데 이런 인기를 모은 건 ‘메타버스 이벤트’ ‘헬기 체험’ 등 최신 트렌드를 반영하면서도 논산만의 특색을 잘 살렸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강경젓갈축제 역시 유아부터 어르신까지 누구나 만족할 프로그램들을 잔뜩 마련했습니다.” 이번 축제 일정을 살펴보면, 지방에서 열린다고 믿기 힘든 알찬 대형 프로그램이 가득하다. 축제에 맞춰 ‘KBS 전국노래자랑’ 현장녹화가 진행되며, 박범신 김홍신 작가의 북콘서트도 개최된다. 캠핑카와 열기구(강경 하늘 전망대) 체험, 핑크퐁 어린이공연 등은 벌써부터 청년층과 어린이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젓갈 음식 레시피 100가지를 선보이는 ‘젓갈미식 100선’, 1000원에 만나는 ‘젓갈고구마비빔밥’ 등 군침 도는 체험행사도 가득하다. 강경젓갈축제가 이렇게 대폭 업그레이드된 건 장기적으로 축제의 지속적인 발전이 논산시민의 살림살이에 큰 보탬이 될 것이란 백 시장의 시정철학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올해 캐치프레이즈인 ‘강경젓갈이 상월고구마와 춤을 추다!’도 그가 직접 내놓았다. 백 시장은 “시장이 CEO(최고경영자)의 마인드로 지역 상품을 개발하고 소개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며 “발상의 전환을 통해 기존 행정과 차별화된 미래 고부가가치 산업을 일궈 나가겠다”고 했다. 실제로 백 시장의 시정 1년 동안 논산의 변화는 눈부시다. 육군훈련소로 유명한 논산의 이미지에 맞게 국방미래기술연구센터를 유치해 ‘국방·군수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난달엔 태국 방콕시와 협약을 맺고 내년 2월 현지에서 ‘해외 농식품 박람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백 시장은 “올해 딸기축제에서 2027년 ‘딸기엑스포’ 개최를 천명했다”며 “논산의 자랑스러운 농산물을 매개로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농업문화관광 콘텐츠를 만들겠다”고 전했다. “이런 ‘담대한 도전’이 논산은 물론 충남 지역의 상생과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 논산은 행정과 기업, 교육, 시민, 군인이란 5가지 분야의 혁신 발전을 추구하는 ‘4+1 행정’을 추진합니다. 시민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하는 행정이 기업과 교육 발전 등을 유기적으로 이끌어내자는 취지입니다. 지금 논산은 다시 찾는 고향, 부흥의 도시가 되리란 희망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성과의 현장을 강경젓갈축제에서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논산=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만화를 통해 세상을 보려 합니다. 1965년 비틀즈 싱글 곡 ‘데이트리퍼(Day tripper)’는 “당일치기 여행자”를 일컫습니다. 만화를 본다는 건 잠깐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니까요. 브라질 그래픽노블 ‘데이트리퍼’도 영감을 줬습니다. 이 만화엔 삶을 담는 소설가를 평생 꿈꾸지만, 실상은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 담당 기자가 나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우리네 인생과 무척 닮지 않았나요.누구에게나 명절 하면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친척모임이나 해외여행처럼 거창할 필요도 없다. TV에서 틀어주는 한가위 특선영화, 성묘 가는 흙길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 집안에 진동하던 부침개 기름내, 혹은 귀향을 접은 채 퇴근길 홀로 맞이한 성긴 보름달이라도….좋건 싫건, 과거의 편린으로 새겨져 버린 흔적들. 얼마 전 디즈니+ 드라마 ‘무빙’을 보다, 뜬금없이 세기말 추석이 스쳐 지나갔다. 장주원(류승룡)이 모텔에서 꺼내든 무협소설 ‘영웅문’ 탓이었다. 귀뚜라미 울음이 뿌옇게 번지던 까만 밤, 시골집 아랫목에서 구룡포처럼 그 “멜로소설”을 읽고 또 읽던 기억. 항룡십팔장 초식을 다 외울 지경에 우연히 들른 만화방. 시금털털한 무료함 끝에 만난 만화가 ‘아기와 나’였다.일본 현지 기준으로 1991~97년 연재했던 이 순두부 같은 만화는 국내에서도 팬 층이 은근히 두터웠다. 애니메이션도 여러 차례 방영했고, 원작은 21세기 초 ‘애장판(愛藏版)’ ‘완전판’ 등으로 꾸며져 다시 나왔다. 불과 2년 전엔 ‘오리지널’이란 이름을 달고 또 한 번 출간됐는데, “추억의 한국식 이름으로 다시 복원”했단다. 작가가 고심해 지은 등장인물 이름을, ‘한국식’이란 미명 아래 함부로 바꿔놓고선 이제 와 오리지널이라 일컫다니. 허나 어쩌랴. 우린 그 잔혹의 시대에 길들여져 살았다. 강백호를 사쿠라기 하나미치라고 불러서야 어찌 영광의 순간을 불러올 수 있겠나. ‘아기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이 만화 주인공은 이미 진이와 신이인 것을. 타쿠야와 미노루라고 아무리 되뇌어본들 입에 감길 리 없다.실은, 그 시절 ‘아기와 나’ 1권을 집어들기까진 무척이나 쭈뼛거렸다. “재밌다”는 추천이 없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순정만화였던 탓이다. 절벽을 날아오르는 무협에 빠져 살던 ‘머슴아’로선 금남의 영역에 발 딛을 손톱만 한 용기가 없었다. ‘아기와 나’ 표지 그림체만 봐도 그렇지 않나. “넌 이미 죽어있다”(북두신권)던 쾌남의 기상을 기대하기 어려웠다.줄거리도 상대적으로 밋밋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불의의 사고로 엄마를 여윈 진. 슬픔을 감당하기도 어려운 나이에 열 살 아래 동생 신이까지 돌봐야 한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아빠 윤석원(에노키 하루미)이 있긴 하지만, 순수하고 성실한 진의 깊은 속앓이까진 알아줄 리 없고. 그런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을 담은 작품이니, 배경도 웬만하면 동네 어귀를 크게 벗어나질 않는다.게다가 30년 가까이 지나 다시 만난 ‘아기와 나’는 누군가에겐 아사코(피천득의 ‘인연’)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이젠 스마트폰으로 카카오페이지에서 언제든 볼 수 있는 만화는 ‘현재의 시선’에선 은근히 불편한 대목들이 눈에 띈다. 어느 댓글이 지적했듯, 진의 처지는 요즘 기준으론 “아동학대”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무래 좋게 봐줘도, 열두 살 꼬마가 혼자서 두 살짜리 동생을 부양해야 한다니. 심지어 가사까지 떠맡은 채로. 주변에서조차 이를 당연시 여기는 세상은 전혀 정당해 보이질 않는다. 게다가 진이 아빠를 비롯해 여러 성인들이 아이들에게 쉽게 손찌검하거나 막말하는 장면들도 상당히 부담스럽다. 어른들이 아이를 대하던 그 시절의 방식은, 그때도 옳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그 어떤 액션영화보다 폭력적이기까지 하다.허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은 안다. 발목에도 채 오지 않아보이던 그 파고가, 깊숙한 감성을 건드리면 얼마나 큰 파장과 여운을 만들어내는지를. 진이가 겪어내는 일상은 광활한 우주 행성을 부숴대던 초사이언의 모험보다 더 긴박하고 거세다. 진이 가족만이 아니다. 진이 친구인 철이네나 장수 가족을 봐도 그렇다. 어느 식구에게나 ‘결여’는 존재하며, 또 그런 삶들이 모여 빚어낸 진실을 이처럼 오롯이 들려주는 만화는 그리 흔치 않다. 별것 아닌 것들이 켜켜이 쌓여 별것이 되는 우리네 인생의 소용돌이처럼.무엇보다 ‘아기와 나’는 가족이란 대체 무엇일까를 다시금 자문하게 만든다. 신이가 버겁고 때론 싫으면서도 끝끝내 껴안는 진이의 심정은 그저 ‘혈연’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어쩌면 진이는 신이의 어리광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 게 아닐까. 엄마를 잃은 그토록 아픈 마음. 누구도 달래주지 못하던 그 심정을, 자신과 ‘똑같이’ 다신 엄마를 만나지 못하는 동생이란 존재에게서 위로받은 게 아닐지. 세상 어디를 찾아봐도 우리 엄마를 잃은 사람은 진이와 신이 뿐이니까.‘아기와 나’는 그리 특별한 마무리가 없다. 생사를 넘나들던 신이가 깨어나며 가족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살고 싶다면 명심하란 대사와 함께. “자신을 위해,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그리고 어느덧 중학생이 된 진이. 아빠, 신이와 여느 때처럼 집을 나서며 함께 인사를 건넨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들의 귓가를 맴도는 “잘 다녀와”란 환청은 어쩌면 착각이 아닐 게다. 우리 영혼 속에 엄마는, 아내는 여전히 살아있으니까. 마음이 지키고 서 있는 한, 가족은 영원히 가족이다. 언제 어디서라도, 다시 만나 뺨을 부빌 그 순간까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만화를 통해 세상을 보려 합니다. 1965년 비틀즈 싱글 곡 ‘데이트리퍼(Day tripper)’는 “당일치기 여행자”를 일컫습니다. 만화를 본다는 건 잠깐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니까요. 브라질 그래픽노블 ‘데이트리퍼’도 영감을 줬습니다. 이 만화엔 삶을 담는 소설가를 평생 꿈꾸지만, 실상은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 담당 기자가 나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우리네 인생과 무척 닮지 않았나요.“너 이상하지 않아. 조금 다르고 특별할 뿐이야.”(희수가 봉석에게)맞다. 분명 다르고 특별하다. 하늘을 날거나, 다치질 않는다. 누구보다 빠르고 힘이 세다. 그런데 왜, 그들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는 걸까. 어째서 정상이 아닌 이상으로 여겨지는 걸까. 그건 우리가 다름을 다름 자체로 받아들이질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능력을 지닌 초인들 자신조차도.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드라마 ‘무빙’이 최근 시즌1의 마지막 20회를 공개했다. 방영 내내 디즈니플러스 역대 시청 기록을 경신하더니, 일본 대만 미국 등 해외에서도 호평이 쏟아지며 순위가 급상승이다. 덩달아 2015년 연재했던 원작 만화도 카카오페이지·카카오웹툰에서 매출이 10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사실 ‘무빙’은 원작부터 매력이 넘쳐났지만 불안요소도 적지 않았다. 원작 만화가이자 극본을 쓴 강풀 말마따나, 그의 만화는 실사화(實寫化)돼서 시원하게 흥행한 적이 없다. 지금껏 한국형 초인물이 크게 재미를 보지 못했던 전례도 쉬운 문턱이 아니었다. 허나 결과론적이지만, 역시 좋은 콘텐츠는 결국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는 걸 다시금 일깨워준다.그간 강풀 만화가 영화나 드라마로 주춤거린 건, 원작의 에너지가 너무 강했던 측면도 있다. 작가의 최대 매력 중 하나인 ‘텁텁함’이 제대로 살아나질 않았다. 그의 만화는 우리 시대의 명암을 마치 종이책 질감처럼 까칠까칠하게 살려내는 힘을 지녔다. 게다가 강풀은 요즘엔 보기 드문, 캐릭터에 의존하기보다 이야기 자체의 힘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작가다. 하지만 스크린에선 이런 텁텁함은 뭉개지고 이야기의 흐름은 어정쩡해지곤 했다.‘무빙’은 달랐다. 일단 강풀의 텁텁함을 어떻게 살리느냐는 숙제를 말끔하게 풀어냈다. 해결책은 발상의 전환. 드라마는 그 무게에 얽매이지 않고 아예 시원스레 벗어던져 버렸다. 만화 ‘무빙’이 스산한 삶의 굴곡이 짙게 배인 작품이라면, 드라마 ‘무빙’은 이를 다리미로 싹 밀고 100% 깔끔한 오락영화로 완성시켰다. 극본까지 직접 맡은 작가가 자기 만화를 ‘초안’으로만 대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능력은 둘째 치고, 결의가 감탄스럽다.그렇게 선보인 한국형 초인물 ‘무빙’은 익숙했던 미제(美製) 슈퍼히어로와는 생경할 만치 동떨어진다. 생각해보라. 배트맨이든 아이언맨이든, 탁월한 능력을 지녔는데 입에 풀칠할 걱정을 하는 처지가 어디 있었나. 몇몇 가난한 초인도 없진 않지만, 대체로 신분을 숨기기 위한 선택일 뿐. 굳이 따지면 세상의 따돌림에 허덕였던 ‘엑스맨’이 그나마 닮았으나, 이 정도로 ‘현실 밀착형’ 초인들은 한국이니까 가능했지 싶다. 더구나 ‘무빙’은, 이런 설정들이 단지 상상에 그치지 않는단 메시지도 담뿍 담고 있다. 무빙 히어로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 사회가 빚어낸 살풍경을 시큼하게 드러낸다. ‘나와 다름’이 각자 다른 개성과 능력이 혼재하는 세상의 일부로 여겨지지 못하는 현실. 그건 ‘내 편’이 아니기에 차별과 경원의 대상으로 삼는 우리네 모습이다. 장희수(고윤정)가 악마 같던 일진들을 물리쳤는데도, 정의로 받아들이기는커녕 멀찍이 떨어져 머뭇거리는 반 아이들처럼. 어쩌면 우린 다름을 다름으로 받아들이는 법조차 배우지 못한 건지도.물론 드라마는 절대 인상 구기고 숨 참아가며 볼 작품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근사하게 깎고 멋지게 다듬은, 순도 높은 오락물이다. 눈 치켜뜨면 스리슬쩍 넘어가는 전개가 없진 않지만, 향연이라 불러도 좋을 캐릭터들의 매력이 잘 덮고 넘어간다. 특히 원작엔 없거나 작은 비중이던 등장인물을 생기 넘치게 살려내 엄청난 활기를 불어넣었다.원작 만화와 드라마는 많이 다르다. 추어탕(만화)과 돈까스(드라마)마냥. 한배에서 났지만 애기 때 갈라진 일란성쌍둥이 같다. 허나 그 눈 코 입이 어딜 가겠나. ‘무빙’은 만화도 드라마도 가족 이야기다. 이 한국형 초인들이 스산한 인생을 사는 건 솔직히 씨족사회의 핏줄에 너무 강력히 얽혀있던 탓 아니었나. 자식을 위해, 연인을 위해 스스로 능력을 봉쇄하고 또 터뜨려야 하는 서글픈 슈퍼히어로. 안타깝게도 그들을 보듬어주는 건, 자신이나 가족이 ‘다른 사람’일 경우뿐이었다.또 하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쓸모’다. 주로 민용준(문성근)의 입을 통해 반복되며 초인의 다름을 이용 가치로 판별하는 비정함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아이러니하게도, 매번 그 평가를 견뎌야 했던 초인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나 상대를 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 심지어 빌런들조차도. 언제나 잣대를 들이미는 건 스스로 ‘정상적’이라 여기는 세상이었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 잔혹한 시선은 정말 그들만 향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당신은 쓸모 있는 사람인가. 이미 등 뒤에서 채점은 시작됐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