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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분께서 ‘화끈하게 풀어 달라’고 하셨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올해 들어 13번째로 울산에서 열린 민생토론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비수도권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대폭 해제 계획을 내놓은 뒤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획일적인 해제 기준을 바꿔 부산 울산 창원 대구 광주 대전 등 6개 대도시 등지의 그린벨트를 풀 방침이다. 총선을 47일 앞두고 지방 표심을 겨냥한 조치란 분석이 나온다. ▷정부의 국가첨단산업단지, 지방자치단체의 지역전략사업 추진을 위해 필요한 경우 보전가치가 높은 1·2등급 그린벨트까지 풀 수 있도록 하고, 지역별 그린벨트 총량 규제에서도 예외로 인정해 준다는 게 이번 방안의 핵심이다. 현재 전국 그린벨트 3793km² 중 64%가 비수도권에 있다. 전국적인 그린벨트 해제는 2001∼2003년 춘천 청주 전주 여수 제주 진주 통영 등 7개 중소도시 해제 이후 20여 년 만에 처음이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서울 광화문에서 반경 15km 선상의 도넛 모양의 땅이 처음 지정된 후 그린벨트는 전 국토의 5.4%까지 확대됐다. 산업화, 도시화가 진행되는 동안 무분별한 도시 확대 방지, 미래세대를 위한 자연보전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김영삼 정부 때까지 큰 틀이 유지되다가 김대중 정부 때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 활성화 명목으로 큰 폭의 해제가 처음 이뤄졌다. ▷이후 역대 정부들은 수도권 주택 문제가 심각해질 때마다 그린벨트에 손을 댔다. 노무현 정부는 국민임대주택, 이명박 정부는 보금자리주택, 박근혜 정부는 민간 기업형 임대주택을 지을 땅을 확보하기 위해 서울 등 수도권의 그린벨트를 풀었다. 2020년 아파트 값이 폭등해 골머리를 썩이던 문재인 정부도 서울 주변 그린벨트를 해제해 아파트를 더 지으려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포기했다. ▷이번 그린벨트 해제는 지방 산업기반 강화 목적으로 비수도권 대도시를 겨냥했다는 게 다른 점이다. 수도권 그린벨트 해제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수도권 해제를 함께 추진할 경우 지방 표심에 미치는 효과가 반감되거나 오히려 역풍이 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그린벨트 해제는 국회에서 법을 고치지 않고도 정부가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국토의 효율적 활용은 중장기적인 밑그림을 토대로 추진돼야 한다. 특히 기후변화 때문에 세계적으로 환경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도시의 허파’ 역할을 해온 녹지 규제 완화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총선을 코앞에 두고 대통령이 그린벨트 해제처럼 인화성 높은 개발 정책을 쏟아내는 건 관권을 이용한 선거 개입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용산 대통령실이 지난달 2일 윤석열 대통령의 새해 첫 대외 일정을 한국거래소 개장식 참석으로 잡은 데에는 다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다. 윤 대통령이 연초 증시 개장식에 참석한 건 2022년 대선후보 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와 함께 방문한 뒤 두 번째, 역대 현직 대통령 중에선 처음이었다. 그날 윤 대통령은 내년 시행될 예정이던 금융투자소득세의 폐지 방침을 밝히면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드라이브를 걸었다. 각종 악재를 돌파하고, 4·10총선에 대비하기 위한 카드로 개미투자자 표심 잡기를 선택한 셈이다. 작년 11월 공매도 금지, 12월 주식양도소득세 부과기준 조정에 이어 금투세 폐지까지 꺼내들었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한국 증시의 1월 성적은 주요 20개국(G20) 중 꼴등이었다. 그래서 곧이어 나온 게 일본 증시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다. 정부는 다음 주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낮은 기업들의 배당 확대 등 주주 환원을 독려하는 내용이 담긴 증시 부양책을 내놓을 계획이다. 총선 개입, 포퓰리즘 논란을 무릅쓰면서 정부 여당이 개미투자자 구애에 나선 이유는 분명하다. 재작년 말 기준 한국의 주식투자자 수는 4년 전 560만 명의 2.5배인 1424만 명. 4월 총선 유권자의 30%가 넘고 경기도 인구보다 많다. 총선의 승패를 가를 2030세대 비중이 그중 32.6%로 40대(22.9%), 50대(21.2%), 60대(12.4%)를 크게 웃돈다. 정부 여당 지지율이 최근 상승세로 돌아선 데에 정부의 증시부양책에 대한 기대감도 한몫했을 것이다. 정부의 증시 정책 공세에 제일 속 쓰릴 사람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다. 대선후보 시절 유튜브 경제채널에 출연해 30년 전 주식, 선물 투자 경험을 공개하고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성공해 본전을 찾고 돈을 꽤 많이 벌었다”고 했던 그다. 주가조작·시세조종 등 불공정 행위를 없애고 장기 투자자에 대한 혜택을 확대해 ‘코스피 5,000 시대’를 열겠다는 공약도 내놨다. 본인 명의로 증권사 계좌 한번 만들어본 적 없을 것 같은 윤 대통령보다 훨씬 증시 친화적인 태도였지만, 대선 패배 후 이렇다 할 증시 대책을 내놓거나 추진하지 못했다. 조만간 민주당도 관련 공약을 내놓을 전망이다. 문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책으로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방안 대부분이 민주당 정책기조와 아귀가 안 맞는다는 점이다. 기업 오너들이 낮은 주가를 선호하도록 만드는 최고 60%의 상속세율(경영권 프리미엄 포함)을 내리자는 주장이 만만찮은데 ‘부자감세 반대’가 당론이 돼버린 민주당으로선 용인하기 어렵다. 기업의 배당, 투자 여력을 높일 법인세율 인하도 같은 이유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자사주 소각 강화는 기업 경영권 방어수단 확충과 함께 진행하지 않으면 부작용이 큰데 당 안에서 ‘대기업 특혜’란 반발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소액주주를 위한 기업의 배당 확대 강제 방안을 검토할 수 있겠지만, 제 이익만 챙기려는 행동주의 펀드에 멍석을 깔아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증시 대책을 통해 정치권이 공략하려는 MZ세대는 한국의 이전 어떤 세대와도 경제를 보는 시각이 다르다. 4050세대와 달리 탈(脫)이념, 기업친화 성향을 띠는 이유 중 하나가 자산투자에 대한 관심과 경험이다. 주가에 도움이 된다면 부자 투자자의 세금을 깎아주는 것도 찬성한다. 한국보다 지정학 리스크가 훨씬 큰 대만 증시의 약진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이들에겐 ‘남북관계 개선이 주가를 높일 것’이란 식의 어설픈 주장도 먹혀들기 어렵다. 뒤늦게 나올 민주당식 밸류업 대책이 MZ 개미투자자들의 까다로운 눈높이를 맞출 수 있을지 궁금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경부선 신대동∼옥천 구간, 호남선 오정동∼가수원 구간 철도를 조속히 지하화하고 상부는 상업·주거·문화가 융합된 공간으로 바꿔 나가겠다.” 전국 각지를 돌며 민생토론회를 주재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이 그제 대전에서 한 약속이다. 경부·호남선 철도가 대전을 동서로 나눠 도시 발전을 저해한다며 ‘철도 지하화’ 논의에 다시 불을 붙였다.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에 맞먹는 대전∼세종∼청주 간 ‘CTX(충청권 광역철도)’ 조기 착수 계획도 꺼내 놨다. ▷정부 여당과 야당이 4·10총선을 겨냥해 ‘받고 더블로’식 경쟁을 벌이면서 철도 지하화는 가장 뜨거운 공약이 됐다. 정부는 지난달 25일 전국 주요 도시 철도 지상 구간 지하화 방침을 밝힌 데 이어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경기 수원에서 철도 지하화를 공약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곧바로 “경인선, 경부선 등 9개 철도 노선과 수도권 도시철도 5개 노선, 수도권 GTX 3개 노선 등 총 259km 구간을 모두 지하로 넣겠다”며 세게 맞불을 놨다. ▷국토교통부는 이미 추진 중인 수도권 GTX A, B, C노선을 21∼70km씩 연장하는 한편 D노선(김포·인천∼팔당·원주), E노선(인천∼덕소), F노선(대곡∼의정부∼덕소∼수원∼부천종합운동장)을 신설하는 계획도 공개했다. 전국의 지자체들과 협의해 대전과 같은 방식의 지방 광역급행철도도 추가로 놓겠다고 한다. 전국 아파트값이 12주 연속 하락세인데도 ‘철도 호재’를 맞은 관련 지역의 집값은 꿈틀대기 시작했다. ▷워낙 전례 없는 규모다 보니 정말 실행이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밝힌 철도 등 교통대책에는 134조 원이 든다. 이명박 정부의 22조 원짜리 ‘4대강 사업’을 6번 벌이는 규모다. 정부는 그중 절반이 넘는 75조2000억 원을 민간에서 충당할 계획이다. 철도 지하화 비용 50조∼80조 원도 여야는 상부에 만들어질 땅의 특례 개발을 허용해 민간에서 대부분 조달하겠다고 한다. 수십 년 걸릴 공사에 막대한 자금을 묻어둘 민간 자본을 찾기 어려울 것이란 전문가들의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 ▷철도 지하화의 대표적 성공 사례는 프랑스 파리의 ‘리브고슈 프로젝트’다. 센강을 따라 길게 이어진 노후 철도시설 상부에 인공용지를 조성하고 그 위에 고급 주상복합시설을 지었다. 그런데 1991년 계획을 세우기 시작해 폭 100m, 길이 3km 용지를 만들고 그 위를 개발하는 데 30년 넘게 걸렸고 10년은 더 지나야 완성될 예정이다. 돈도 돈이지만, 수백 km 철도를 지하에 놓겠다는 여야의 공약이 모두 실현되는 걸 보려면 현 세대는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진행되는 철도 공사를 평생 참아내야 할 모양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광주의 한 카페 주인은 2021년 6월 “진짜 서민의 삶을 1도 모르는 패션좌파들이 ‘시급 만 원도 못 줄 것 같으면 장사 접으라’는 소리를 거침없이 한다”며 울분을 토했다. 문재인 정부 임기 초 2년 만에 최저임금이 30% 가까이 오른 뒤 아르바이트생 월급보다 집에 가져가는 수입이 적은 자영업자 사장님들이 속출하던 때였다. 그럼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삶이라도 나아졌어야 했다. 한국의 저소득층은 홀로 벌어서는 생계유지가 어려워 가족 구성원 중 여럿이 일하는 경우가 많다. 당시 최저임금 인상으로 실업자가 급증하면서 아빠, 엄마가 함께 돈 벌던 가정에서 한쪽이 일자리를 잃는 일이 많아졌다. 최저임금이 올라도 총수입은 감소해 삶은 오히려 팍팍해졌다는 뜻이다. 계속 일하는 쪽도 편치 않았다. 주 5일, 15시간 이상 일할 때 주는 주휴수당이 부담스러운 자영업자가 많아지면서 ‘주 15시간 미만 알바’가 파트타임 일자리 표준이 됐다. 한 곳에서 오래 일하던 이들은 2곳 이상 일터를 옮겨 다니거나, 배달 일을 병행하는 ‘N잡러’가 됐다. 몇 해 전부터 자주 발생한 저소득층 일가족, 자영업자들의 비극적 선택에 ‘소득주도성장’의 핵심이던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한다. 광주 카페 주인이 분통을 터뜨린 그해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졌다. 사망 사고 등 중대재해가 터졌을 때 안전 관리 의무를 소홀히 한 사업주, 안전 관리 책임자에게 1년 이상 형사 처벌, 10억 원 이하 벌금을 부과하는 법이다. 형벌 하한선을 ‘1년 이상’으로 둔 건 ‘감옥 가기 싫으면 안전 조치를 철저히 하라’는 취지다. 문제는 법이 너무 모호해 어떤 예방 조치를 얼마나 해야 사고가 터져도 처벌을 피할 수 있는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재작년 1월 50인 이상 사업장에 도입된 이 법이 지난달 27일부터 근로자 수 5∼49인의 83만7000여 개 사업장에 확대 적용됐다. 영세 사업자의 준비 부족을 이유로 적용을 2년 늦추자는 정부와 국민의힘의 요구를 민주당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거부해서다. 산재 사고 80%가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한다는 이유로 유예 없는 강행을 요구한 노동계를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중소기업인들이 국회로 몰려가 재고를 요청하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알바생 포함 5명 이상 직원을 쓰는 모든 자영업자·중소기업이 대상이란 소식에 음식점, 빵집, 카페 사장들은 당황해한다. 이에 대해 노동계와 민주당은 ‘동네 빵집’에서 중대재해가 나봐야 얼마나 되겠냐며 정부 여당의 ‘공포 마케팅’이라고 일축한다. 고용이 위축될 거란 경제계 우려도 과장됐다고 한다. 지난 정부가 최저임금을 급히 올릴 때와 판박이 같은 반응이다. 중대재해법을 피하려고 종업원 5, 6명 중 한두 명을 해고할 사업주가 있겠냐는 생각은 ‘최저임금 좀 올린다고 고용이 줄겠냐’는 물음만큼 순진한 발상이다. 내가 직원 4명을 둔 자영업자일 때 일이 벅차다고 직원을 추가로 뽑아 중대재해법 리스크를 질 건지 자문해 보면 답이 나온다. 예상할 수 없고, 어떻게 대비할지 알 수 없는 사고가 터져 형사 처벌을 받고, 삶과 일터가 무너질 수 있다는 건 확률이 낮더라도 사업주들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험이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다 비슷비슷한데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지난 정부의 소주성은 최저생계 선상에 있는 한국 저소득층 가정에 중대한 불행의 원인을 추가했다. 그런 정책을 밀어붙였던 이들 중 진지하게 반성한 이들은 거의 없다. 그리고 다시 중대재해법 확대라는 새로운 비극의 씨앗을 심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역대 정부 청와대, 대통령실에 있었던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선거를 앞두고 정부, 여당이 쓸 수 있는 카드는 너무나 많다”는 거다. 22대 총선을 석 달 앞두고 윤석열 정부는 이런 말을 확인시켜 주려는 듯 연일 대형 정책 카드를 봇물처럼 쏟아내고 있다. 윤 대통령은 2일 한국거래소 개장식에서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를 추진하겠다”면서 1400만 주식투자자를 겨냥해 깜짝 카드를 꺼냈다. 며칠 뒤엔 은퇴 노인 등 건강보험 지역가입자의 보험료를 깎아주기 위해 자동차에 물리는 추가 보험료를 없애고, 집에 물리는 보험료도 경감해 주는 대책을 발표했다. 부가가치세를 적게 내는 간이과세 영세사업자의 범위를 연 매출 8000만 원에서 1억 원 정도로 확대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라고 한다. 큰 선거를 앞두고 ‘민생 대책’이란 이름으로 정부가 선심성 정책을 내놓는 데에 우리 국민은 이미 익숙하다. 4년 전 문재인 정부는 4·15총선을 불과 며칠 앞두고 피해가 가시화하지도 않은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며 초유의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결정했다. 4인 가족 기준 100만 원씩 나눠준 돈으로 “오랜만에 한우를 사먹었다”는 이들이 속출했다. ‘고무신 선거’의 재현이란 비판이 나왔지만 여당의 압도적 대승에 끼친 효과는 확실했다. 문 정부의 재난지원금과 윤 정부 민생 대책 시리즈는 현금을 직접 쏘느냐, 세금 등의 부담을 줄여주느냐 차이가 있다. 경제논리로 따지자면 나랏빚을 늘리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현금 살포보다 재정을 보수적으로 운영하면서 세금을 깎아주는 게 낫다. 그렇다고 급조한 정책에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다. 대선 공약에 없던 금투세 폐지, 간이과세 대상자 확대는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세정(稅政)의 기본 원칙을 흔들어 장기적으로 나라 살림에 악영향을 미친다. 지역가입자 건보료 인하는 향후 전체 가입자의 보험료 인상 압력을 높일 것이다. 30%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을 빼고는 해당 부처 장관들조차 논리적 설명이 어려워 말이 꼬이는 정책을 안면몰수하고 추진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역대 최악의 비호감 선거’로 불렸던 지난 대선의 후유증이 이번 총선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사이 대통령이 착실히 호감도를 높여 지지율 50%를 넘겨 놨다면 지금처럼 부작용이 예상되는 벼락치기 정책을 내놓을 필요가 있겠나. 최소 몇 %의 지지율을 끌어내리는 ‘김건희 리스크’도 정부 정책의 부담이 됐다고 봐야 한다. 4년 전 상황도 비슷했다. 문 정부가 임기 초 무리하게 올린 최저임금 때문에 자영업자들의 고통이 커지고, 일자리는 급감했다. 선거 전년도부터 집값, 전셋값이 폭등한 데다 코로나19 초기 대응 실패로 정권의 비호감도가 극에 달했다. 결국 재난지원금이 풀렸고, 임기 중 400조 원 넘게 늘어난 나랏빚과 인플레이션이란 부작용이 남았다. 지난 대선의 다른 주역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기본소득을 비롯한 과감한 돈 풀기 약속으로 높은 비호감도를 극복해 왔다. 부산 흉기 피습 이후 서울로 이송되는 석연찮은 과정 때문에 부산 지역 호감도가 떨어졌다는데, 이를 넘어서기 위해 또 어떤 카드를 꺼내들까 궁금하다. 큰 개혁을 이룬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존 F 케네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정당, 이념을 떠나 높은 개인적 호감도가 강점이었다. 평소 쌓아둔 ‘호감 점수’가 있었기에 정치·경제·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국민에게 인내를 요구할 수 있었다. 당장 입에 단 곶감을 물려주는 대신 개혁의 고통을 분담해 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호감 정치인’을 우리 국민은 언제쯤 보게 될까.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이론’은 1970년 일본의 로봇 공학자가 내놓은 개념이다. 로봇, 인공지능(AI) 등의 존재가 인간과 비슷해질수록 사람들의 호감도는 상승하는데, 닮은 정도가 특정 수위에 도달하는 순간 불쾌한 감정으로 급변해 골짜기에 추락하듯 호감 수준이 뚝 떨어진다는 거다. 언캐니란 말은 뭔지 정확히 꼬집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괴이쩍고 불편한 느낌을 뜻한다. 이달 초 윤석열 대통령이 부산 국제시장에서 대기업 오너들을 병풍처럼 세우고 찍은 떡볶이 먹방 사진에서 많은 이들이 이런 느낌을 받았다. 선거철에 정치인이 전통시장을 찾아 떡볶이, 오뎅(어묵) 먹방을 찍는 건 흔한 일이다. 대기업 오너라고 글로벌 푸드가 된 떡볶이를 싫어할 리도 없다. 가난한 집 딸과 사랑에 빠진 재벌 2세가 “떡볶이 처음 먹어 본다”며 감탄하는 표정을 짓는 건 드라마에나 나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장면은 뭔가 대단히 불편했다. 많은 이들이 나름대로 불편한 이유를 댔다. 엄혹한 대내외 경제 상황에 맞춰 신년 경영계획 세우기도 바쁜 글로벌 기업 총수들을 정치 행사에 동원한 데 대한 비판이 다수다. 엑스포 유치전에 그토록 대기업을 끌고 다녀놓고, 실패를 수습하는 자리에까지 동원한 건 너무하다는 거다. 부하 직원들은 싫어하는 억지 회식 자리를 만들고, “고생했는데 풀어줘야지”라며 노래방에 끌고 가 혼자 노래 부르는 직장 상사를 보는 것 같다는 이들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2015년 1월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의 기자회견 장면이 떠올랐다. 취임 2년이 다 됐을 때지만 기자의 즉석 질의를 허용한 회견으로는 겨우 두 번째였다. ‘장관들과 대면보고를 늘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 대통령은 뒷줄에 앉은 국무위원들을 돌아보며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박 대통령식의 썰렁한 농담이었을 텐데, 잠깐의 정적이 지난 후 장관들이 멋쩍게 따라 웃었다. 소통 부족에 대한 우려가 커지던 때였다. 앞서 “밤낮으로 대통령 전화를 받지만, 먼저 대통령에게 전화하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란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앞으로는 열심히 만나겠다”는 한마디로 국민의 염려를 덜어줄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냐”고 물었고, 지켜본 많은 국민은 ‘바꿀 생각이 없구나’라고 직감으로 느꼈다. 박 대통령은 기억도 못 할 이 짧은 장면이 이듬해 탄핵 사태의 작은 조짐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난달 말 엑스포 유치전에서 큰 표 차로 패배한 직후 윤 대통령은 “모든 것은 저의 부족”이라며 국정 변화를 예고했다. 그 마음이 진심이었다면 최소한의 인원만으로 부산을 찾아 시민들의 마음을 다독였어야 했다. 하지만 대신 그는 부자연스러운 먹방 사진을 찍었다. 1년 이상 함께 고생하며 지구를 400바퀴 넘게 돈 대기업 총수들에게 ‘쫑파티’라도 해주고 싶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을 본 많은 국민은 ‘달라지는 게 아닌 모양이다’라고 느꼈다. 현실이 갑갑하고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때 국민들은 국가의 리더인 대통령의 말과 행동에서 변화의 단초를 찾길 원한다. 이런 때 나오는 기대와 전혀 다른 발언, 몸짓 하나하나는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 메우기 힘든 깊은 간극을 만들 수 있다.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35번 강조한 ‘자유’와 거리가 먼 비시장적 물가관리 정책과 날로 강화되는 금융관치, 연일 미래세대를 걱정하는 대통령 발언과 달리 무책임하게 국회에 내던져진 연금개혁 때문에 그런 골짜기는 더 깊어지고 있다. 대통령 자신부터 심각성을 깨닫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면 넘어서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국회는 국민 부담을 줄이는 데 치중해야지, 부담을 증가시키는 일을 하는 건 아니라는 취지다.” 1948년 제헌헌법의 기초를 잡은 유진오 박사는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 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는 헌법 제57조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 차례 헌법이 개정됐지만 이 조항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선 5년마다 대선에 승리해 집권한 정부가 예산 편성권과 집행권을 갖는다. 새 정부가 공약한 정책을 구현하기 위해 예산을 배정하고 사용할 일종의 ‘공격권’을 부여하는 셈이다. 이에 대해 국회는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정부 예산안을 심의하고, 의결할 권리가 있다. 선거에서 진 야당은 정부가 과도한 예산을 편성해 세금을 축내는 걸 감시하고, 막아내야 하는 수비수로서의 책임을 맡게 된다. 올해 예산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이런 점에서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정권을 잃은 민주당이 168개 거대 의석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정책’을 관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야당이 장악한 국회 상임위원회들은 ‘윤석열’ 이름표가 붙은 정책이라면 여지없이 심한 칼질을 하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서 방향이 정반대로 바뀐 정책에서 그런 일이 두드러진다. 민주당은 지난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서 탈피해 원전 생태계 복원을 추진하고 있는 현 정부의 원전 관련 예산 1814억 원을 뭉텅이로 삭감했다. 그 대신 지난 정부가 강조했던 신재생에너지 예산을 그 이상 증액했다. 나라 전체로 봤을 때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해 정부가 전액 삭감한 지역화폐 예산도 야당은 7000억 원 이상 살려내려고 한다. 탈원전, 지역화폐는 각각 문재인, 이재명 브랜드의 대표 정책들이다. 작년 3월 대선에서 민주당의 패배로 국민들로부터 한 차례 평가를 받았는데, 그 불씨를 다시 살려내겠다는 거다. 이명박 정부 때 ‘4대 강’ 예산, 문재인 정부의 ‘세금 알바’ 예산 등 이전 정부에서도 야당이 정부의 주요 정책 예산을 깎으려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올해 국회의 예산 전쟁이 예전과 다른 건 정부 예산에 대한 삭감은 중점 정책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과감하고, 야당인 민주당이 무게를 실은 정책에 대한 증액 규모는 대단히 크다는 점이다. 야당의 공격적 태도가 밀실담합 비판을 받는 국회 소(小)소위원회에서 정부 여당과 마주 앉아 주고받기 딜을 할 때 협상의 우위를 잡으려는 전략이란 분석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극한 대치가 계속된다면 정부는 주요 정책을 추진할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는데, 민주당은 이 대표가 요구한 예산 6조 원을 대부분 얻어내는 전례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이른바 ‘윤재명(윤석열+이재명) 예산’이 출현할 가능성이다. 국민에게 걷은 세금으로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는 건 국가 통치 기능의 핵심이다. 내각책임제 국가에선 예산안 통과가 정권에 대한 신임과 직결돼 예산안이 부결될 경우 내각이 사퇴하고, 의회가 해산되는 일까지 벌어진다. 집권세력이 정책 추진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정부와 정당의 명운을 걸어야 할 정도의 중요한 일이란 의미다. 정부와 여당은 5년간 국정에 대해 대선으로 평가받는다. 민주당은 지금 예산과 관련해 야당(opposition party) 본연의 수비수 역할을 넘어 여당(ruling party) 수준의 통치행위를 하고 있다. 이렇게 공수가 뒤섞인 혼전이 계속된다면 국민은 나중에 국정 운영의 책임을 어디에 물어야 할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강한 힘에는 그만큼의 책임도 따라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오픈AI는 인공지능(AI)이 삶의 모든 측면을 개선할 것이란 믿음에서 설립됐지만 동시에 심각한 위험도 존재합니다. 정부의 규제와 개입이 중요합니다.” 올해 5월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가 한 발언이다. 생성형 AI 혁명의 주인공인 그는 이렇게 틈만 나면 AI의 위험성, 규제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랬던 올트먼이 지난주 오픈AI에서 쫓겨났는데, 그 원인이 과도하게 수익성만 좇았기 때문이라니 외부인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를 이해하려면 오픈AI의 특이한 지배구조를 알아야 한다. 오픈AI는 2015년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을 안전하게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비영리단체로 출발했다. 지분이 없는 6인 이사회가 모든 결정권을 갖는다. 챗GPT 개발이 외부 입김에 좌우되지 않도록 자본과 경영을 완전히 분리한 것이다. 초기 투자자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나중에 130억 달러를 투자한 마이크로소프트(MS)는 이익은 배분받아도 경영에는 간여할 수 없다. ▷올트먼의 퇴출은 그와 함께 회사를 공동 창업한 수석과학자 일리야 수츠키버가 주도했다. ‘AI의 대부’ ‘딥 러닝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힌턴 토론토대 교수의 수제자로, AI의 급속한 개발이 인류에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힌턴 교수 역시 올해 5월 “악의적인 이들이 나쁜 일을 위해 AI를 쓰는 것을 막기 어렵다”고 경고하면서 10여 년간 협력해온 구글과 인연을 끊었다. 퇴출을 주도한 이들의 눈엔 올트먼이 겉으로만 규제를 강조할 뿐 실제로는 AI의 위험을 경시하고 사업만 확장하려는 인물로 비친 모양이다. ▷이번 일을 보면서 1987년 애플 창업자 고(故) 스티브 잡스가 자신이 영입한 존 스컬리 CEO 주도로 회사에서 퇴출된 사건을 떠올린 이들이 많다. 잡스의 퇴출 사유는 수익성이 떨어지는 고성능 PC 개발에 과도한 자원을 투입해 회사 수익성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1년 만에 기업 가치를 111조 원으로 키우고도 예고 없이 해임 통보를 받은 올트먼과 많이 다르다. ▷그렇지만 38세 올트먼은 이미 AI 업계의 거인이 됐다. MS 측은 그가 MS에 합류해 새로운 AI 연구팀을 이끌 것이라고 밝혔다. 올트먼의 이적으로 종결되긴 했지만 이번 ‘오픈AI 내전’은 인류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다. AI가 핵폭탄에 버금가는 위협요인이 될 것이란 세력과, AI를 활용해 미래의 주도권을 쥐려는 이들이 정면충돌한 ‘AI 윤리전쟁’이기 때문이다. 선두그룹 따라가기에 급급한 AI 후발국으로선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기조차 어려워 더 불안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올해 세금이 예상보다 59조 원 넘게 덜 걷힐 한국과 반대로 세금이 잘 걷혀 행복한 고민을 하는 나라가 영국 서쪽 섬나라 아일랜드다. 아일랜드의 올해 재정 흑자는 100억 유로(약 14조 원)로 경제 규모가 한국의 30% 정도인 나라로선 큰 액수다. 내년엔 흑자가 162억 유로로 증가하는 등 2026년까지 650억 유로 흑자가 날 전망이다. 코로나19로 주요국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한 2020년에 아일랜드는 3.4% 플러스 성장했다. 재작년과 작년 성장률도 13.7%, 12.2%로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아일랜드는 ‘박리다매 법인세 전략’으로 성공한 나라다. 24%였던 법인세 최고세율을 2003년에 12.5%까지 낮췄다. 유로존 평균인 21.3%보다 9%포인트 낮고, 24%인 한국의 절반 수준이다. 게다가 연구개발(R&D) 비용 4분의 1을 감면해주는 등 각종 세제 혜택으로 기업들이 실제 내는 법인세율은 6%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이런 메리트를 좇아 세계 20대 다국적 제약사 중 19곳이 아일랜드에 R&D센터, 생산시설을 두고 있다. 구글 애플 인텔 메타 등 정보기술(IT) 기업 유럽본부도 아일랜드에 있다. 앙숙인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한 뒤에는 런던의 금융회사들이 영어가 통하는 더블린으로 몰려들고 있다. 세율은 낮아도 법인세수가 늘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심각한 주거, 교통 문제로 돈 쓸 곳은 많지만 아일랜드 정부는 흑자를 털어 쓰는 대신 저축을 선택했다. 재정 흑자 일부를 매년 떼어내 연금 고갈에 대비한 ‘미래기금’, 기후변화 등에 대응할 ‘인프라·기후기금’ 등 2개 국부펀드에 1000억 유로를 쌓는 게 목표다. 이런 결정에는 2000년대 중반 ‘1차 법인세 호황’ 때 재정을 낭비하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만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았던 때의 트라우마가 작용했다. 게다가 내년부터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이 법인세 인하 경쟁을 피하기 위해 합의한 ‘15% 글로벌 최저 법인세율’에 맞춰 아일랜드도 세율을 높여야 한다. 그간 누려온 낮은 법인세율 프리미엄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 이후에 대비해 정부가 저축에 나선 것이다. 대다수 국민이 관심 없이 넘겼을 뿐 지난 몇 년 새 한국에도 법인세 특수가 있었다. 2017년까지 50조 원대였던 법인세수는 2018, 2019년 연속으로 70조 원을 넘었다. 코로나19가 터진 2020년 일시적으로 55조5000억 원으로 뚝 떨어졌지만, 재작년에는 70조4000억 원으로 회복됐고 작년엔 103조6000억 원이란 사상 최대 규모의 법인세가 걷혔다. 그 2년간 법인세수가 정부의 예상을 뛰어넘은 건 코로나19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정부는 경제 전반에 팬데믹 충격이 올 것으로 봤지만 실제 피해는 자영업 등 대면경제에 국한됐다. 전 세계인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고, 각국 정부가 지원금까지 풀면서 전자제품 등 내구재 소비는 급증했다. 반도체를 위시한 한국 수출기업은 호황을 맞았고 세금도 그만큼 더 냈다. 코로나19 종료 후 수출과 법인세수가 동시에 급속히 감소한 데에는 팬데믹 특수의 거품이 꺼진 영향이 크다. 현명한 정부라면 이런 특수 상황에서 세금이 더 걷힐 때 그 뒤 찾아올 세수 감소를 대비해야 한다. 아일랜드 정부가 지금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청와대 관계자가 ‘곳간에 재정을 쌓아두면 썩는다’는 어이없는 발언을 할 정도로 더 걷힌 세금을 쓸 곳에만 골몰했던 문재인 정부에선 기대할 수 없던 일이다. 올해 급감한 세수를 놓고 더불어민주당은 달랑 1%포인트 깎아준 법인세율, 부자감세 때문이라며 ‘국가 부도 위기’ 운운하고 있다. 염치없는 일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자 10명 중 9명은 재작년 기준으로 1개 이상의 연금을 받았다. 하지만 국민연금, 기초연금과 사적연금을 통틀어도 1인당 연금소득은 월 60만 원에 불과했다. 올해 1인 가구의 최저생계비는 124만6700원, 2인 가구는 207만700원. 부부가 동시에 연금을 받아도 어디서라도 소득을 보충하지 않으면 최저생활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은퇴한 부부가 여유롭게 여행을 다니거나, 취미생활을 즐기는 ‘인생 2막’은 중년층의 로망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좀처럼 실현하기 힘든 꿈이다. 평생 번 돈 대부분을 자녀교육 등에 써버린 바람에 은퇴 후 삶을 즐길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이들이 많다. 한국 노인의 빈곤율은 2021년 37.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다. 그러다 보니 배우자가 있는 60세 이상 가구 10쌍 중 3쌍은 남편과 아내가 맞벌이로 일한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게 연금 등을 통한 노후 준비다. ▷통계청이 어제 내놓은 ‘포괄적 연금통계’에 따르면 한국 노인의 1인당 연금소득은 올해 처음 60만 원에 턱걸이했다. 매년 4만 원 안팎씩 늘어나는 추세다. 연금 수급자 비율은 남성이 여성보다 높고, 수급액도 남성이 78만1000원으로 44만7000원인 여성보다 많다. 남성이 직장생활을 더 많이, 오래한 영향이다. 그 결과 한국 여성은 남성보다 평균 6년을 더 살지만 여성 1인 가구의 빈곤율은 65.1%로 남성의 2배가 넘는다. ▷더 큰 문제는 은퇴 후 연금소득 격차까지 크다는 점이다. 최상위 5%의 수급액은 월 200만 원 이상인데, 최하위 21%는 25만 원 미만이다. 집을 가진 노인의 한 달 수령액은 76만2000원으로 47만2000원을 받는 무주택자보다 훨씬 많다. 무주택자의 노후 주거비 부담이 더 큰데 연금소득은 적은 것이다. 집이 있다고 다 편안한 것도 아니다. 이달부터 주택연금에 가입할 수 있는 집값이 공시가 9억 원에서 12억 원으로 높아지자 집을 담보로 노후생활 자금을 마련하려는 이들이 평소보다 40%가량 급증했다. ▷국민연금만 보면 평균 월 수급액이 38만5000원으로 여전히 ‘용돈연금’ 수준이다. 가입 기간이 짧은 노인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이러니 정부가 제공하는 월 30만 원짜리 쓰레기 줍기, 산불 감시 ‘세금 알바’에 노인들이 몰리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60세 이상 고용률은 지난달 47%로 역대 최고를 찍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일터를 못 떠나는 빈곤층 노인들을 더 두텁게 지원할 수 있도록 연금제도를 서둘러 손봐야 하는 이유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한국의 소비자가 지난해 중고차 구매에 쓴 돈이 38조 원이다. 새 차를 사는 데 쓴 59조 원보다 적다. 하지만 거래량으로 따지면 중고차가 238만 대로 신차의 1.4배나 됐다. 그래도 중고차 시장 규모가 신차의 2배가 훌쩍 넘는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작은 규모다. 중고차 시장에 나갔다가 바가지를 쓰거나, 두고두고 고장으로 속 썩을까 봐 겁내는 소비자가 많아서다. ▷현대자동차가 어제 국내 완성차업체 중 처음으로 ‘인증 중고차’ 시장에 진출했다. 자동차 제조업체가 자사 중고차를 사들여 진단·정비를 한 후 판매하는 차를 인증 중고차라고 한다. 수입차 업체 20여 곳은 이미 국내에서 인증 중고차 사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중소 중고차 업체들의 반발에 막혀 역차별을 받아 왔다. 작년에 정부가 중고차판매업을 ‘생계형 적합 업종’에 포함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현대차는 24일부터 현대차와 제네시스 브랜드의 인증 중고차를 판매한다. 두 브랜드는 작년 국내 중고차 거래의 38%를 차지했다.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차는 연식과 주행거리가 짧은 무사고 차량으로 판매 차량을 제한했다. 정밀 진단, 품질 개선, 검사, 인증 과정을 거쳐 품질을 높인 중고차다. 상품 검색, 비교부터 견적, 계약, 결제, 배송 모두 온라인에서 가능하다. 기아, 르노코리아, KG모빌리티의 인증 중고차 시장 진출도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신뢰성이 낮았던 한국 중고차 시장은 급속히 재편될 전망이다. ▷판매자는 차의 문제점을 속속들이 알지만, 구매자는 결함을 알아채기 힘든 게 중고차 시장의 구조적 문제다. 한국에선 여기에 더해 주행거리 조작 차량, 침수 차량 등을 속여서 파는 사기성 거래가 자주 발생해 왔다. ‘중고차 사면서 뒤통수 안 맞는 법’과 같은 콘텐츠가 높은 조회수를 올리는 이유다. 그 해법으로 나온 게 제조사가 직접 참여해 품질을 보증하는 인증 중고차 제도다. 현대차는 중고차를 팔면서 1년간 2만 km 무상보증을 제공할 예정이다. ▷중고차 비즈니스는 금리에 민감한 일종의 ‘금융 산업’이다. 미국에선 코로나19 발생 초기 정부가 가계 지원금을 풀고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를 낮춘 데다, 대중교통 이용을 꺼리는 분위기까지 겹쳐 중고차 시장이 폭발적인 호황을 맞았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기준금리가 높아지고, 할부금융 대출금리가 10%를 크게 넘어서자 판매량이 줄고 가격도 급락해 심한 침체를 겪고 있다. 과도한 빚에 짓눌려 있는 한국의 가계, 청년들로선 중고차에 대한 신뢰도만큼 얼마나 합리적인 가격과 조건에 살 수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달 내놓은 노인빈곤 보고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노인들의 가난에도 세대 차이가 있다’는 거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이 선진국 중 1위란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국의 노인을 모두 비슷한 빈곤층으로 보는 건 착각이란 의미다. 소득에 따라 전 국민을 한 줄로 세웠을 때 정중앙에 놓인 사람의 소득을 ‘중위소득’이라고 한다. 중위소득의 50% 이하를 버는 사람은 빈곤층으로 분류된다. 65세 이상 노인층의 2021년 한국의 빈곤율은 37.7%다. 10% 안팎인 유럽 선진국들은 물론이고, 20%를 조금 넘는 미국, 일본에 비해서도 압도적으로 높다. 하지만 출생 시점에 따라 빈곤율의 차이가 현격하다는 게 보고서의 시사점이다. 현재 나이로 80대 중후반인 1930년대 후반기 출생자의 빈곤율은 56.3%다. 80대 초반인 1940년대 전반기 출생자는 51.3%, 높은 70대인 1940년대 후반기 출생자 역시 44.5%로 심각한 수준이다. 그런데 70대 초반, 1950년대 전반기 출생자로 넘어가면 그 비율이 27.8%로 뚝 떨어진다. 높은 60대인 1950년대 후반기 출생자는 18.7%로 더 내려간다. 더욱이 한국의 고령층은 자산의 70∼80%를 집으로 갖고 있다. 다른 선진국 노인들보다 부동산 자산 비중이 많이 높다. 공시가 12억 원, 시가 17억 원 미만 집을 보유한 노인들이 모두 집을 담보로 주택연금에 가입해 연금을 받는 등 자산 수준을 고려하면 연령대별 빈곤율은 5∼14%포인트씩 뚝 떨어진다. 1950년대 후반기 출생 노인들의 빈곤율은 13.2%까지 내려간다.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과 정확히 같은 수준이다.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 가운데 60대 초반과, 그 아래 50대의 이른바 ‘신(新)중년’이 노인이 되는 시점엔 빈곤율이 더 낮아질 것이다. 역사상 가장 혜택받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신중년층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더 많이 교육받았고, 경제성장률이 10%를 넘나들던 1980년대 대기업 일자리가 쏟아질 때 어렵지 않게 취업했다. 눈치 빠른 이들은 집값이 폭락한 1997년 외환위기 즈음해 내 집까지 장만해 자산 증식의 고속도로에 올라탔다. 이렇게 다 같이 힘든 노인이 아닌데도 우리 정부는 소득하위 70% 노인에게 월 32만 원의 기초연금을 제공하고 있다. 진짜 빈곤층 노인에겐 절대 없어선 안 되는 생계비다. 하지만 경제적 여유가 있는 노인들에겐 그저 생기면 좋은 용돈일 수 있다. 기초연금 확대 공약으로 정권을 잡은 박근혜 정부가 지급 대상을 크게 늘리고, 10만 원이던 월 지급액도 20만 원으로 증액했다. 문재인 정부 때 월 30만 원을 넘겼고, 40만 원 인상은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다. 일하는 동안 본인이 상당 부분을 부담한 뒤 노후에 받는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은 전혀 다르다. 순전히 그 해 걷는 세금에서 나눠줘야 한다. 현 제도를 유지한다면 내년에 대상이 700만 명에 육박하고, 2030년엔 한 해 40조 원의 예산이 필요해진다. 노인들 대신 앞으로 수십 년간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청년 세대가 그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한다. 70, 80대 빈곤층 노인을 위한 기초연금은 필요하다. 32만 원이 아니라 생계에 실질적 보탬이 되는 수준까지 높여야 한다. 하지만 취업난과 과중한 대출이자 부담에 허덕이고, 심지어 전세사기까지 제일 많이 당한 MZ세대가 내야 할 세금으로 부유한 노인까지 매달 용돈을 주는 사회는 계속 유지될 수 없다. 입만 열면 청년의 미래를 생각한다는 여야 정치인들의 얘기가 빈말이 아니라면 눈앞에 닥친 이 숙제에 해답을 내놔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이달 17일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성공적으로 평가한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의 논문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띄웠다. 문 정부에서 소주성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문재인·민주당 정부 동안 고용률과 청년 고용률 사상 최고, 비정규직 비율과 임금 격차 감소…” 등 자화자찬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지난 정부 청와대, 국토교통부가 부동산·소득 통계를 조작했다는 이틀 전 감사원 발표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지난 정부 고용률이 높았던 건 사실이다. 예산을 퍼부어 노인, 청년을 위한 ‘세금 알바’를 매년 수십만 개씩 만들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급등으로 음식점, 편의점 직원 1명 일자리가 주 15시간 미만 알바 여러 개로 쪼개진 것도 높은 고용률의 원인이 됐다. 정규직 증가는 ‘노-노(勞-勞) 갈등’까지 야기하면서 공공기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무리하게 전환한 영향이 크다. 이미 드러난 부작용들로 볼 때 자랑거리라고만 하기 힘든 일들이다. 경제를 조금만 알아도 ‘이게 반론이 되나’라고 느낄 주장을 문 전 대통령은 왜 자기방어의 수단으로 내놨을까. 우선 대응할 논리나 근거가 정말 궁색했을 가능성이 있다. 국민 대다수가 분노하는 부동산 통계 조작 의혹에 대해 일언반구 없는 걸 보면 그렇다.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임기 중 경제 현안과 관련해 문 전 대통령을 종종 다른 세상 사람처럼 느끼게 만들었던 ‘현실 이탈 발언’의 연장선이란 것이다. 듣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한 발언의 정점은 2018년 6월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란 거였다. 최저임금이 단박에 16.4%나 올라 편의점, 식당 주인들이 직원을 줄줄이 해고하던 시절이다. 대통령 발언을 뒷받침할 숫자 하나를 만들어 내느라 홍장표 당시 경제수석은 통계청 직원을 심야에 청와대로 불러들이고, 사적으로 아는 학자까지 동원해야 했다. “부동산 문제는 자신 있다고 장담하고 싶다”고 문 전 대통령이 말한 건 2019년 11월 ‘국민과의 대화’에서다. 5개월 전인 그해 6월 서울 집값은 벌써 상승세로 돌아섰다. 이때 “저희 라인 다 죽는다. 전주와 마찬가지로 마이너스 변동률로 해 줄 수 없겠나”라는 국토교통부 공무원의 간절한 요청에 한국부동산원은 서울 집값 상승률을 ‘―0.01%’로 고쳤다고 한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이 “부동산만큼은 할 말이 없게 됐다”며 정책 실패를 인정한 건 그보다 2년 뒤인 2021년 5월 취임 4주년 기자회견 때다. “이제 알았나”라며 혀를 차는 이들이 많았다. 이런 발언의 출발점은 취임 바로 다음 달인 2017년 6월 고리 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탈원전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1368명이 사망했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 원전 사고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항의를 받았다. 1368명은 지진, 쓰나미의 희생자 숫자였다. 외교 문제까지 일으킨 심각한 오류였지만, 그 연설과 관련해 누구도 중한 징계나 질책을 받았다는 얘기는 없었다. 임기 5년 내내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면 이유는 둘 중 하나다. 문제가 있다는 걸 몰랐거나, 알고도 모른 체했거나. 문 전 대통령 캐릭터를 아는 이들은 대부분 전자 쪽에 무게를 둔다. 이번에도 달라진 건 없어 보인다. 한 조직 안에서 성과를 부풀리거나, 사실과 다른 보고를 하고도 멀쩡한 직원이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라면, 그건 항상 고개를 끄덕여 주는 관리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팩트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닥칠 것이란 생각은 과한 기대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미 그때 했을 것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880년대 미국에서 전기가 처음 보급될 때 송전 방식으로 교류가 옳은가, 직류가 맞냐를 놓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직류파(派)’ 거두였고, 반대편 ‘교류파’엔 요즘 전기차 브랜드로 이름이 유명해진 천재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가 있었다. 테슬라를 고용해 에디슨을 패배시키고, 전기시장을 교류로 평정해 ‘커런트 워(current war·전류 전쟁)’의 승자가 된 기업이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창업한 전기회사 ‘웨스팅하우스’였다. ▷발전소, 가전, 방위사업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던 웨스팅하우스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원자력 발전 사업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개발 원조까지 받아 한국 정부가 1968년 처음 발주한 원전 입찰에서 웨스팅하우스는 제너럴일렉트릭(GE) 및 영국, 캐나다 기업과 경합했다. 이듬해 1월 웨스팅하우스의 가압경수로형 원전이 최종 낙점됐다. ▷이렇게 ‘고리 1호기’ 사업이 시작됐고, 1971년 첫 삽을 뜬 원전 건설은 7년이 걸렸다. 10·26사태 한 해 전인 1978년 원전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했다. 당시로선 한반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사업이었고, 한국은 세계 22번째 원전 보유국이 됐다. 한국 원자력 산업에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된 이유다. ▷좋은 인연에서 출발한 웨스팅하우스와 한국의 관계가 복잡해진 건 최근 일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이 폴란드 체코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수출을 시도하고 있는 한국형 원전(APR1400)을 작년 10월 웨스팅하우스 측이 문제 삼았다. 미국 원자력에너지법에 따라 수출 통제 대상인 웨스팅하우스의 원전 기술이 한국형 원전에 포함돼 있다며, 미국 정부의 허가 없이 한수원이 수출을 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소송을 낸 것이다. ▷워싱턴 연방지방법원은 그제 웨스팅하우스가 제기한 소송을 각하했다. 미 원자력에너지법이 수출 통제 권한을 법무부 장관에게 위임했을 뿐, 민간기업에 권리를 준 것은 아니라는 한수원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한수원은 한국형 원전을 수출할 때 웨스팅하우스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돼 독자 수출의 길이 열렸다. 다만 지식재산권 분쟁은 별도 사안이라 갈등이 모두 해소된 건 아니다. ▷이미 여러 번 주인이 바뀐 웨스팅하우스는 2005년에도 매물로 나왔다. 한국의 두산중공업 등이 관심을 보였지만 결국 일본 도시바가 인수했다. 지난해에는 세계 1위 우라늄 채굴 기업인 캐나다 카메코로 대주주가 바뀌었다. 한국도 언제까지 선진국 기업의 지식재산권 횡포에 시달리기만 할 순 없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답게 원천기술을 보유한 해외 기업 인수합병(M&A)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역대 최악의 ‘세수 흉년’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올해 정부 예상보다 덜 걷히는 세금은 50조∼6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수십조 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일이라도 없다면 나라 살림은 악화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면 주목받는 게 ‘체납 세수’다. 오랜 체납액은 털어내면서 작년 말까지 남아 있는 누적 세금 체납액은 102조5000억 원. 절반만 걷혀도 올해 세수 부족 대부분을 충당할 수 있는 규모다. ▷총액만 증가한 게 아니라 체납 규모가 큰 세금 대도(大盜)가 급증하고 있다. 양기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받은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10억 원 이상 체납자 수는 작년 말 1090명으로 1년 전의 740명보다 47.3% 늘었다. 1억 원 이상∼10억 원 미만도 2만3800명으로 46.9%, 5000만 원 이상∼1억 원 미만은 3만100여 명으로 31.6% 증가했다. 어쩌다 실수로 단 몇만 원 세금을 누락해도 큰일 날까 벌벌 떠는 일반 납세자에게 박탈감을 주는 간 큰 사람들이다. ▷체납세액 가운데 비중이 제일 큰 건 부가가치세다. 전체 체납액의 27%인 27조9000억 원이 부가가치세 체납액이고, 2위는 23조8500억 원인 소득세, 3위는 12조 원인 양도소득세다. 부가가치세는 음식점에서 밥값 낼 때도 10%씩 꼬박꼬박 붙는다. 사업자가 거래 상대에게 세금을 포함한 대금을 받고도 내지 않고 떼어먹은 세금이란 점에서 죄질이 나쁘다. ▷매년 12월 공개되는 고액·상습 체납자 명단에는 유명인이 포함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작년엔 수년 전 지상파 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화려한 집과 여러 대의 슈퍼카를 ‘플렉스’했던 래퍼 도끼, 배우 장근석의 어머니인 전혜경 트리제이컴퍼니 대표 등이 포함됐다. 개인 체납자 1, 2위는 각각 1739억 원, 708억 원의 종합소득세를 체납한 ‘불법 토토’ 운영자들이었다. ▷작년에 국세청이 고소득 사업자 615명을 대상으로 벌인 세무조사를 통해 추가 징수한 세금은 총 2329억 원이다. 2018년 4185억 원, 2019년 3807억 원, 2020년 2595억 원, 2021년 2670억 원으로 줄어드는 추세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세무조사 횟수와 강도를 낮춘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불법 체납액 환수의 고삐가 느슨해져선 곤란하다. ▷‘정직하게 세금을 내지 않는 데 대한 사회적 지탄·처벌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나’를 묻는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설문에 성인 남녀 응답자의 75.5%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얌체 체납자들이 떼어먹은 세금은 고스란히 성실한 납세자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세금 도둑에 대한 사회적 제재와 압박의 강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위 중국 1798개, 2위 독일 668개, 3위 미국 479개. 한국무역협회가 국가별로 세계 수출시장 1위에 올라있는 품목들을 분석해 지난해 발표한 결과다. 5204개 품목 중 35%를 차지한 중국이 1등이었다. 한국은 77개로 10위다. 개혁개방 후 수십 년간 명실상부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던 중국이 미중 경제패권 전쟁, 내부의 부동산시장 문제 등으로 성장의 벽에 부딪혔다. 주요 2개국(G2)의 고래 싸움에 끼인 글로벌 기업들은 ‘중국을 대신할 아시아’를 찾고 있다. ▷알타시아(Altasia)는 ‘대안’ ‘대체’란 뜻의 얼터너티브(alternative)와 아시아를 합성한 조어다. 올해 3월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미중의 지정학적 균열 후 글로벌 제조업체들이 중국을 대신해 생산기지로 삼을 만한 아시아 14개국을 선정해 이렇게 이름 붙였다. 경제 수준이 높은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인구 대국인 인도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아세안(ASEAN) 회원국인 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라오스 브루나이가 포함됐다. ▷14개국에 흩어져 있는 기술 및 자본력, 값싼 노동력, 풍부한 자원이 합종연횡으로 시너지를 내면 중국을 대신할 생산기지로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분석이다. 재작년 10월부터 작년 9월까지 알타시아 14개국의 대미 수출 규모는 6340억 달러(약 847조 원)다. 같은 기간 중국의 대미 수출 6140억 달러를 웃돈다. 이 중 다수는 아세안,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참여하고 있어 역내 무역질서도 잡혀 있다. 미국의 애플 등은 이미 중국에 몰렸던 생산기지를 알타시아 국가로 나누는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을 빠르게 추진 중이다. ▷중국을 제치고 올해 인구수 세계 1위에 오른 인도, 4위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알타시아의 15∼64세 생산가능인구는 14억 명. 9억5000만 명인 중국을 뛰어넘는다. 인도,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의 제조업 인건비는 중국의 절반에서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10년간 갑절로 오른 중국의 임금이 부담스러운 기업들엔 매력적이다. 다만 노동력의 질이 고르지 않다는 게 약점이다. ▷미국, 유럽연합(EU)이 대체 생산기지를 찾는 과정에서 나온 알타시아 개념은 다분히 서구 중심적이다. 그렇다 해도 알타시아 내의 긴밀한 협력은 희토류를 앞세운 중국의 자원 압박, 자국에 생산시설을 세우라는 미국의 요구에 한국이 대항할 지렛대가 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내년에도 중국발 경제 위험이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본다. 30여 년간 중국이란 하나의 바구니에 담아뒀던 계란을 알타시아로 나눠 옮길 시간 여유가 많지 않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지난달 말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와 관련해 발언의 강도를 확 높였다. “도대체 과학이라고 하는 건 (없고) ‘1 더하기 1을 100’이라고 하는 이런 세력들하고 우리가 싸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위험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원자력 전문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설명을 부정하는 더불어민주당 등을 겨냥한 것이다. 주목할 부분은 100이란 숫자다. 뚜렷한 과학적 근거나 실효적 대응책 없이 “제2의 태평양 전쟁” 운운하는 야당의 태도는 ‘1+1=2’라는 자명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에는 ‘1+1을 3 또는 1+1을 4라는 세력’, 좀 많이 간다 해도 ‘1+1을 10이라는 세력’ 정도로도 족하다. 사전에 준비했든, 즉흥적으로 떠올렸든 대통령 내면의 ‘분노 게이지’는 100보다 낮은 숫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1+1=100’과 싸우겠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중간지대에 있는 이들에게 미칠 심리, 정서적 효과다. 대통령의 표적은 ‘오염수 괴담’을 확산하는 세력일 터다. 하지만 머리로는 ‘1+1=2’를 받아들여도 그저 ‘찜찜하다’는 이유로 추이를 지켜보던 이들도 적지 않다. ‘희석한 오염수를 가져오면 마시겠다’는 과학자, 일부러 횟집에 더 자주 가는 사람과 달리 ‘안전한 건 알아도 그걸 왜 마시냐’, ‘그래도 회는 좀…’이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다. 후쿠시마 바닷물의 방사능 검사 데이터가 축적될수록 국민의 인식은 ‘1+1=2’에 점차 수렴하고, 괴담도 수그러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통령이 ‘1+1=100이란 사람들’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 판단을 유보하던 이들이 합리적, 이성적인 쪽으로 돌아서는 속도가 늦어질 가능성이 있다. 자기가 틀린 걸 알고, 고치려고 마음먹었다가도 옆에서 “넌 그게 틀렸어”라고 지적하면 반대로 엇나가는 게 사람의 심성이다. 윤 대통령의 공격적 숫자 표현과 관련해 현 정부 핵심 정책과제인 노동개혁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다. 올해 초 고용노동부가 일이 많을 때 집중적으로 더 일하고, 놀 때 몰아서 쉬는 주 52시간제 개혁 방안을 내놨을 때다. 경직된 근무시간 체제는 개혁 필요성이 큰데도, 야당과 노동계는 이론적으로나 가능한 ‘주 69시간 근무’ 프레임을 앞세워 반발했다. 그때 윤 대통령이 대선 주자 시절에 했던 발언이 소환됐다.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구글, 테슬라 같은 빅테크도 초기엔 야근을 밥 먹듯 하며 성장했다는 걸 강조한 것일 게다. 하지만 왜 하필 ‘120시간’인지 알 수 없는 이 말이 개혁의 걸림돌이 됐다. 대통령실은 결국 “연장근로를 하더라도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란 메시지를 내놔야 했다. 앞으로도 숫자 하나에 개혁 성패가 좌우될 일들이 예정돼 있다. 정부 국민연금 자문기구인 재정계산위원회가 내놓은 연금개혁 방안에는 9%인 보험료율을 12∼18%로 인상하는 방안, 수령개시 연령을 66∼68세로 높이는 방안 등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여야 정치권이 부딪칠 최대 관건은 소득 대체율을 40%로 놔둘 것이냐, 50%로 올릴 것이냐가 될 전망이다. 대통령은 미래세대의 부담은 덜고, 연금제도 수명은 늘리는 쪽으로 국민을 설득할 의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성을 뜻하는 ‘로고스’, 감성적 측면인 ‘파토스’, 화자의 성품과 신뢰성의 반영인 ‘에토스’를 설득의 3요소로 꼽았다. 지금 윤 대통령은 이성적 측면인 로고스를 너무 강조하느라 국민의 파토스를 놓치고 있다. 이런 패착이 반복되면 개혁은 어려워진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A Diamond is Forever)”라는 카피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광고 문구 중 하나다. 다국적 보석기업 드비어스는 1947년 내놓은 이 광고로 ‘결혼반지=다이아몬드’란 인식을 심는 데 성공했다. 이 회사는 생산량을 줄여서라도 가격을 유지하는 고가 전략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드비어스가 고집을 꺾고 다이아몬드값을 낮추고 있다. ▷드비어스는 상품 가치가 높은 ‘셀렉트 등급’ 다이아몬드 원석 값을 최근 1년 새 40% 내렸다. 작년 7월 캐럿당 1400달러였던 원석이 올해 7월 850달러로 떨어졌다. 연구실에서 만드는 보석인 ‘랩 그론 다이아몬드(Lab Grown Diamond·LGD)’ 공급이 늘어난 게 주요 원인이다. LGD의 생산원가는 천연 다이아몬드의 3분의 1 수준이다. ▷LGD는 흑연에 고압·고열을 가하는 등의 방법으로 2∼4주 만에 만들어진다. 성분이 자연산과 동일해 전문가가 아니면 감별조차 어렵다. 예전엔 ‘인조 다이아몬드’라 불리며 가짜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가성비가 높아 청년층 사이에서 인기다. 명품업체인 루이뷔통 모에에네시(LVMH)가 LGD 벤처기업에 투자했고, 드비어스도 직접 제조에 뛰어들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소환된 ‘블러드 다이아몬드’ 논란도 LGD 확산의 원인이다. 원래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시에라리온 등 아프리카 분쟁 지역에서 민간인을 착취해 생산하는 다이아몬드에 붙던 이름이다. 지금은 다이아몬드 광석 매장량 세계 1위로 매년 5조 원어치의 원석을 수출하는 러시아가 논쟁의 중심이다. 주요 7개국(G7)은 푸틴의 전쟁 자금줄로 쓰이는 러시아 다이아몬드 수출을 차단할 방법을 찾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올해 6월 미국을 방문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부부에게 7.5캐럿짜리 LGD를 선물했다. “인도 연구실에서 태양열·풍력 에너지를 사용해 친환경적으로 만든 것”이란 설명을 덧붙였다. 인도는 해외에서 사들인 원석으로 세계에서 팔리는 다이아몬드의 90%를 가공해 파는 나라다. 러시아산 원석 수입이 끊기면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는다. 이 때문에 논란을 피할 수 있는 LGD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LGD를 개발한 업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공급 확대로 등급이 낮은 1캐럿대 다이아몬드 가격은 100만 원 밑으로 떨어졌다. 합리적, 윤리적 소비를 원하는 청년들의 취향과 잘 맞는다. 작년 글로벌 다이아몬드 주얼리 시장에서 LGD 비중은 처음으로 10%를 넘어섰다. 결혼반지가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는 게 의미 없는 시대가 오고 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국민 실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세금 제도를 한국처럼 매년 갈아엎는 나라도 드물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작년만 해도 법인세율, 소득세 구간, 종합부동산세 제도를 뜯어고쳤다. 세제의 큰 틀에 손대지 않고 ‘핀셋 감세’를 하겠다는 정부의 내년도 세법 개정안이 오히려 이례적인 경우다. 2년 연속으로 거대 야당과 세금 문제 때문에 격돌하긴 부담이 크고, 올해 세수 결손이 40조 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돼 감세 등을 밀어붙이기 어렵게 된 게 이유다. 대형 세제 개편 이슈가 빠지다 보니 올해는 신혼부부 결혼자금에 대한 증여세 비과세 한도 확대가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지금도 10년간 5000만 원까지 자녀에게 물려줄 때 증여세를 내지 않는데, 결혼하는 자녀에겐 그 한도를 더 늘려 주자는 거다. 혼인신고를 전후해 2년씩 총 4년 안에 부모나 조부모가 재산을 자녀, 손자녀에게 물려주면 기존 5000만 원에 1억 원을 더한 1억5000만 원까지 세금을 면제해준다. 신랑신부가 양가에서 세금 없이 3억 원까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이런 증여세제 개편이 청년층의 결혼, 출산을 장려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적극 찬성하고 있다. 평균 결혼 비용이 3억3000만 원, 이 중 2억8000만 원이 주거 마련에 쓰인다는 점을 감안했다고 한다. 내년 4월 총선에서 청년층의 표를 늘리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 반면 ‘부의 대물림’에 이념적 거부감이 강한 더불어민주당은 반발했다. 이재명 대표의 첫 반응이 “또 초부자 감세냐”다. 1억5000만 원씩 결혼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되느냐는 거다. 받을 게 없는 청년에겐 상실감만 줄 것이란 비판도 이어졌다. 다만 세게 반대하다가 오히려 청년층 표가 깎일까 봐 걱정하는 모습도 엿보인다. 이념이나 형평성 문제를 빼고 본다면 비과세 한도 확대는 긍정적 측면이 적지 않다. 올해 상반기 서울의 평균 전셋값은 5억 원 정도다. 직업이 있어도 신혼부부가 부모 지원 없이 저축과 대출만으로 집을 구하기 어렵다. 세무사와 상담하고, ‘가짜 차용증’을 쓰면서 자녀들을 지원하는 부모가 수두룩하다. 세정 당국도 눈에 띌 만한 액수가 아니면 잘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사실상 방치했던 탈세 관행을 양성화, 현실화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안에는 세제 현실화를 뛰어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바로 ‘세대 간 부의 재분배’를 어느 수준까지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사회적 합의의 문제다. 현재 한국 베이비 부머들의 나이는 60∼68세. 고도 성장기, 집값 폭등기를 거치며 역사상 가장 많은 자산을 축적한 부모 세대다. 부동산, 금융자산을 합해 한국 가계 순자산의 46%를 60세 이상이 갖고 있다. 이에 비해 연봉 많이 주는 일자리는 찾기 어렵고, 비싼 주거비를 감당하기 버거운 자녀 세대들 사이에선 돈을 얼마나 절약하며 살 수 있는지 서로 경쟁하는 ‘거지 배틀’이 벌어진다. 고령층은 돈이 있어도 쓰지 않고, 청년들은 쓰고 싶어도 쓸 돈이 없다. 일본의 선례가 보여주듯, 이 문제로 인한 소비 위축이 경제의 발목을 잡는 날이 머지않았다. 그런 점에서 정부 여당이 증여세 비과세 한도 확대를 비혼(非婚), 저출산의 해결책처럼 내건 것은 핀트가 어긋났다. “재산 물려줄 테니 빨리 결혼하라”는 부모의 독촉에 배우자를 서둘러 찾는 청년은 쌍팔년도 드라마에나 나온다.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친구들한테 ‘비혼 축의금’을 거두는 게 요즘 청년들이다.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부모 세대의 부를 자녀 세대에게 나눠주는 길을 넓게 열어주고, 이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게 더 중요한 일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아니)꼬우면 니들도 이직하든가. 어차피 한두 달만 지나면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진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에 국민의 분노가 들끓던 2021년 3월. 직장인 익명사이트 블라인드에 ‘내부에서는 신경도 안 씀’이란 제목의 글이 불난 데 기름을 끼얹었다. LH 측은 현직 아닌 전직 직원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수사를 요청했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2년 5개월이 지난 지금 LH가 존폐 위기를 맞았다. 주차장 건설 중 붕괴사고가 났던 인천 검단 아파트처럼 LH 발주 아파트 가운데 무량판(기둥으로만 천장을 받치는 방식) 구조 아파트가 91곳, 이 중 15곳의 주차장이 부실시공됐다는 지난달 말 발표가 시작이었다. 열흘 뒤인 이달 9일에는 갑자기 무량판 구조 단지 10곳, 철근이 덜 쓰인 5곳이 추가로 확인됐다. ▷집계에 빠졌다가 추가된 과정이 황당하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경기 화성시의 LH 단지 감리현장 점검에 나섰는데, 무량판 방식이 아닌 줄 알았던 이 단지 주차장도 같은 방식으로 확인된 거다. “현황조차 취합되지 않는 LH가 존립근거가 있느냐”는 질책 후 찾아낸 게 부실 공사 5곳이다. “철근 빠진 정도가 경미하다”며 실무자들이 보고에서 뺐다고 한다. ▷이한준 LH 사장은 이 사실을 공개하면서 전체 임원 7명의 사직서를 받았고, 자신의 거취도 임명권자 뜻에 따르겠다고 했다. 이와 함께 자력으로 조직 내부 혁신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경찰, 공정거래위원회, 감사원에 조사를 요청했다. 1962년 설립된 대한주택공사, 1979년 세워진 한국토지공사가 2009년 통합돼 만들어진 LH 역사상 최대 위기다. ▷LH가 지금까지 국내에 지은 공공주택은 임대 167만 채, 분양 129만 채 등 총 296만 채다. 전국 주택 수 2200만 채 중 13.5%다. 국민 20명 중 1명꼴인 250만 명이 LH 공공임대 주택에 살고, 분양 아파트를 합하면 거주자 수는 더 늘어난다. 올해 3월 LH가 내놓은 새로운 비전이 ‘고품질 주택 80만 채 공급’이었다. 저가 임대주택 이미지를 탈피하는 게 목표였는데, 이번 사태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공염불이 됐다. ▷지난번 땅 투기 부정부패 사건은 관련자 처벌과 임직원 부동산 보유내역 의무공개 등의 조치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번엔 입주자 안전을 위협하는 안전사고다. 불안에 떠는 주민이 남아 있는 한 기억에서 적당히 지워질 가능성은 없다. LH 퇴직자가 일하는 설계, 감리 회사와의 부정한 커넥션도 문제로 꼽힌다. 다닐 때나, 퇴직한 뒤에나 ‘신의 직장’ 소리를 듣는 LH는 이제 조직 해체 수준의 대수술이 불가피해졌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