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재선 포기 압박이 더 강해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어떤 결심을 할까. 8월 중순 민주당 전당대회까지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1개월 남짓이다.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①출마 강행. 부통령 후보에는 카멀라 해리스 현 부통령을 관행대로 지명한다. ②출마를 강행하되 부통령 후보로 제3의 인물을 지명. 재선 대통령을 지낸 버락 오바마가 유력 후보다. ③불출마 선언. 민주당은 초고속 경선을 통해 대체 후보를 선출해야 한다.“선출 아니라 승계 땐 3번 중임 가능” 바이든은 선택지 ①을 움켜쥐고 있다. 그는 30세 이후 상원의원(36년), 부통령(8년), 대통령(곧 4년)을 지냈다. 하늘에서만 머물던 그는 TV토론 참패 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바람에 출마 집착이 더 커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11월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질 확률이 더 커진 것으로 조사되고, 승리한다 해도 만 86세까지 대통령직 수행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패배한다면 노욕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으며 민주당에 죄짓는 일이기도 하다. 승리하더라도 정상 통치가 어렵다면 대통령직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②의 경우라면 현직 부통령을 내치는 평지풍파를 감수해야 한다. 미국 블로그를 중심으로 퍼져 가는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통령 발탁 카드라면 돌파 가능하다. 여기에 “트럼프 집권을 막아낸 뒤 나는 취임 100일 되는 날 사임하겠다”고 바이든이 자기 희생을 약속한다면 설득력이 커질 수 있다. 내년 4월 말까지만 집권한다면 인지 능력 저하 우려도 어느 정도 씻게 된다. ‘부통령 오바마’가 대통령직을 승계해 3번째 4년 임기 대통령에 오르는 시나리오다. 미국 수정헌법 22조는 2번까지만 대통령에 투표로 선출(elected)될 수 있다고 못 박고 있다. 오바마의 3번째 임기는 얼핏 불가능해 보이지만, 실은 가능할 수 있다. 오바마는 2008년, 2012년 2차례 선출됐지만, 대통령 사퇴에 따른 부통령 승계(succeed)라면 선출된 것이 아니니 명시적 위헌이 아니다. 이재명의 헌법 84조 논란처럼 일종의 입법 미비다. 공화당은 꼼수 아니냐고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반민주, 부도덕의 대명사가 된 트럼프를 막아야 한다는 대의를 위해 다퉈볼 수 있다. 선택 ③도 순탄할 수 없다. 새 후보를 뽑는다는 건 대혼란을 의미한다. 경선 룰 갈등은 분열을 부르고, 표 응집력을 떨어뜨린다. 갑작스러운 경선으로 국정 준비가 덜 된 후보가 뽑히더라도 트럼프를 꺾을 수 있을까. 바이든은 개인의 명예, 민주당의 승리, 민주주의의 앞날을 놓고 번민할 것이다. 바이든이 선택할 확률은 ①40% ②20% ③40%라고 생각한다. 노쇠함이 한 번이라도 더 노출된다면 출마를 강행하는 ①의 가능성은 크게 떨어질 것이다. 트럼프를 꺾을 가능성만 본다면 시나리오 ②가 80%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①과 ③ 방식으로 약진하는 트럼프를 이길 확률은 20%를 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어떻게든 바이든과 민주당이 고사 가능성이 큰 오바마를 설득해 내는 것이 관건이다.권력은 외롭다… 그래서 오판한다 바이든은 전국 선거에서 9전 9승 기록을 갖고 있다. 그래서 ①을 통해 10번째 승리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②는 본인도 승리하고, 미국의 향후 4년을 경험 많은 오바마가 이끌도록 할 수 있다. 미국이건 한국이건 권력의 속성상 “사퇴하시라”는 입바른 ③번 조언 받기는 참 어렵다. ②방식이 바이든과 민주당이 윈윈하는 모델이지만, “대통령님 말고는 트럼프를 이길 사람이 없다”며 ①을 속삭이는 백악관 참모가 아직까지는 다수일 것 같다. 질 확률이 큰 ①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40%나 되고, 이길 확률이 큰 ②의 가능성을 20%로 낮게 보는 이유다. 이처럼 권력은 외롭다. 그래서 권력은 종종 오판한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독점 인터뷰하는 행운을 얻었던 라디오 채널 2곳의 진행자 2명이 “시키는 대로 질문했다”는 이유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동부 필라델피아의 앤드리아 로풀샌더스 앵커와 중서부 밀워키의 얼 잉그램 앵커가 그들인데, 로풀샌더스는 방송이 나간 뒤 이틀 만인 6일 해고됐다. 두 라디오는 청취자 대부분이 흑인인 곳이다. 노쇠한 바이든이 첫 대선 TV토론을 망친 뒤 압도적 지지층인 흑인 표심을 붙들어 두려고 기획한 인터뷰였다. ▷잉그램 앵커의 첫 질문은 “위스콘신주에서 대통령이 이룩한 성취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81세 대통령이 국정 수행 능력을 의심받던 그 순간에 자기 홍보의 시간을 안겨준 것이다. 이 질문은 바이든 캠프에서 사전에 제공한 질문이었다. 이 앵커는 5개 질문을 제시받고 그 가운데 4개를 골랐다고 인정했다. 로풀샌더스 앵커는 질문 8개를 캠프로부터 받았고, 그중 4개를 실제로 질문했다. ▷저널리즘의 기본을 깬 행위를 간파한 것은 CNN 앵커였다. CNN은 6일 바이든과 전화 인터뷰를 한 진행자 둘을 연결해 3자 간 화상 대담을 진행했다. 그 자리에서 “둘의 질문이 이상하리만치 비슷하더라. TV 토론 평가, 당신들 주(州)에서 이른 성취, 바이든 안 찍겠다는 유권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혹시 바이든 쪽에서 준 것이냐”고 물었다. 로풀샌더스 앵커는 순순히 인정했다. 대선 4개월을 앞두고 라디오 저널리즘의 독립성을 뒤흔드는 말이었다. 라디오 채널 대표는 주말인 토요일에 앵커를 해고한 뒤 “우리는 바이든의 보호 도구(mouth-piece)가 아니다”라는 성명을 냈다. ▷라디오 인터뷰 때 바이든은 “뭐든 물어라(fire away)”라고 힘주어 말했다. 뭐든 답할 수 있다는 자신감 같았지만, 그는 상당수 질문을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바이든은 TV토론이 부진했던 이유에 대해 녹음기 틀듯 동일한 답을 내놓았다. “나쁜 밤(a bad night)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라고 가르쳤다”고 말했는데, 백악관이 추가로 기획한 지상파 ABC방송과 한 인터뷰에서도 같은 답을 내놓았다. ▷해고된 앵커는 CNN 생방송 인터뷰 중에 “우리 라디오가 (바이든에게) 선택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바이든 측 질문 가운데 내가 몇 가지를 승인한 것”이라고 말할 땐 표정과 말투에서 문제의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해고되지 않은 잉그램 앵커의 라디오 채널에선 아직 반응이 없다. 하지만 전화 인터뷰 녹음 영상에 달린 댓글에는 지역의 소규모 라디오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대선 공론장에서 기본이 흔들리는 것을 우려하는 의견이 여럿 달렸다. 바이든 캠프는 처음엔 “전례가 없는 일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비판이 커지자 떠밀리듯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물러섰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 TV토론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지자 여론조사 회사들이 바빠졌다. 바이든 외에 누가 트럼프의 맞상대가 될 수 있는지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인데,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62)의 부인 미셸(60)이 단연 주목 대상이다. 로이터-입소스 조사에서 현직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 등 어떤 정치인도 트럼프에 못 미쳤지만, 미셸은 50%-39%로 오차 범위 밖에서 앞서는 걸로 나타났다. “두 번까지만 선출될 수 있다”는 수정헌법 22조에 따라 남편 오바마는 출마가 불가능하다. 미셸을 향해 민주당 지도부의 눈이 반짝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오바마라는 지명도를 고려하더라도 예상 밖 수치였다. 미셸은 “선거에 관심 없다”고 말해왔는데, 그냥 하는 말은 아니다. 그의 X(옛 트위터)를 보면 8년을 백악관에서 함께 보냈던 당시 부통령 바이든 이야기가 없다시피 하다. ‘무당파도 투표하자’는 시민운동 응원 글 정도가 눈에 띈다. 바이든의 모금 파티에 남편은 자주 참석하지만, 미셸은 가지 않았다. 미국의 부부 동반 문화를 감안하면 바이든 선거에 관심을 끊었다는 뜻이다. ▷44세에 영부인이 된 미셸은 백악관 8년 동안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퇴임 시점 호감도 조사 때 남편보다 높은 60%대 후반을 기록했다. 시카고대 병원 부원장 출신으로 청소년 비만 퇴치 운동에 앞장섰고, 변호사 경험을 살려 흑인 여성 아동 인권 신장을 위해 일했다. 절제된 언어로 하는 연설 실력도 인정받았다. 첫 자서전(비커밍·Becoming)은 31개 언어로 번역됐고, 1000만 부 넘게 팔렸다.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바이든 사퇴와 본인 결심이 꼭 필요하다. 그런 뒤에도 50개 주에서 약식이나마 경선에서 이겨야 한다. 경제, 복지, 범죄, 국방은 물론이고 중국, 러시아, 이스라엘과 중동, 한반도 등 대외정책까지 꿰고 있어야 한다. 11월 5일 대선 때까지 4개월. 가난한 흑인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역경을 이겨냈지만, 지금 삶의 안락함을 떨쳐낼 수 있을까. 그가 쓴 책의 선인세는 800억 원대였다. ▷만약 미셸이 출마한다면 그건 ‘트럼프만은 안 된다’는 민주당의 요구를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모범적 안주인으로 누린 인기는 내려놓아야 한다. 비판이 집중적으로 쏟아질 것이고, 경험 부족에 따른 실수도 잇따를 수 있다. 여론조사 숫자만 믿고 덤빌 수 없는 이유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직까지는 출마 강행의 의지가 여전하다. 그렇다면 미셸과 바이든 둘 모두 같은 질문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내가 나서면 혹은 내가 양보하면 과연 민주당은 트럼프 재선을 막을 수 있을까. 누구도 답을 모를 그 질문 때문에 민주당 핵심부는 당분간 머리를 싸매고 있게 됐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집권당이 선거에 패배했다면 나빠진 경제, 불통 이미지에 빠진 대통령을 패인으로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두 기준에서 비교적 성과를 낸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일요일 치러진 프랑스 총선에서 크게 졌다. 그가 이끄는 중도 연합 앙상블은 제3당으로 밀릴 전망이다. 7일 시행되는 2차 결선 투표가 1차 때와 비슷하다면 극우파가 1당, 좌파 연합이 2당이 된다. 프랑스 언론은 대통령의 엘리트 이미지를 민심이반 요인으로 꼽았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마크롱의 오만하다는 이미지가 치명적이라고 표현했다. 대통령은 임기 초 시민들을 엘리제궁으로 초청했는데, 실직한 청년 정원사와 나눈 대화가 카메라에 잡혔다. 마크롱은 “다른 일을 찾아보라. 가령 식당 웨이터 같은…”이라고 했다. 현실적인 조언일 수 있겠지만, 정원사로서 일했던 경험은 아무래도 좋다는 인상을 남겼다. 프랑스 대중은 상처 받았다. ▷지지율은 30%에 묶여 있지만, 업적이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전임 대통령들이 엄두를 못 낸 구조개혁에 매달렸다. 엘리트의 길을 걸어온 그로선 ‘나는 할 수 있다. 나 아니면 누가 할까’ 싶었을 것 같다. 그는 해고를 쉽게 하는 친기업적 노동개혁을 했고, 연금개혁을 시도해 구멍난 연금재정을 메워야 하는 납세자의 부담을 줄였다. 정책 수혜자는 쉽게 잊지만, 손해를 입었다고 믿는 유권자는 표로 응징하곤 한다. 이런 표심을 마크롱도 피해 가지 못했다. ▷그가 야당의 반대를 넘어선 것은 절충과 타협 대신 프랑스 특유의 헌법 조항을 활용한 결과였다. 대통령이 49조3항을 발동하면 법안은 국회 표결 없이 발효된다. 의회주의를 거스른다는 비판 때문에 역대 프랑스 대통령은 이 조항을 대체로 1년에 1번 정도만 쓰는 절제력을 보였다. 마크롱은 2022년 재선 후만 따져도 20번 넘게 썼다. 여소야대 속 야당은 일방주의적이란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경제 지표는 좋아졌지만 지지를 되살리지는 못했다. 취임 때 9%였던 실업률이 7% 선으로 떨어지면서 4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6%대 물가상승률도 2%대로 안정됐다. 46세 젊은 대통령답게 메모 한 장 없이 몇 시간씩 시민들의 질문을 받았고, 부유세를 폐지할 때는 전국을 돌며 끝장 토론을 11번이나 벌였다. 이런 마크롱의 ‘진심’은 “소통 쇼” 비판에 가려졌다. ▷1992년 미국 대선 때 클린턴 후보가 들고 나온 슬로건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란 말이야(Stupid, it’s economy)”였다. 그 후로 먹고사는 민생이 선거의 제1 요건으로 여겨졌지만 이번 프랑스 총선에선 먹히지 않았다. 비교적 좋아진 경제나, 대국민토론을 통한 설득 노력은 평가받을 만하다. 하지만 마크롱에겐 엘리트주의 이미지가 악몽처럼 돌아왔다. 흠집 나기는 쉬워도 되돌리기는 지난한 법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100년 동안 미국 대통령 후보들은 경제 정책과 대외 전략과 함께 개인적 인품, 인생 역정을 기준으로 유권자의 선택을 받았다. 하지만 올 11월 대선을 앞두고 어제 CNN 본사에서 열린 첫 TV토론을 본 시청자들은 건강과 스태미나라는 새 기준을 떠올렸을 것이다.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전직 대통령으로는 132년 만에 재선에 도전하는 가운데 81세(바이든)와 78세(트럼프)의 초고령 경쟁이 본격 시작됐다. ▷TV토론을 누가 더 잘했느냐는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는 완승했다. 67% 대 33%. 승부는 두 후보의 목소리에서 갈렸다. 청소년 시절 말 더듬는 습관을 노력으로 극복했던 바이든은 유난히 더듬었고, 발음도 번번이 샜다. 잔뜩 쉬고 힘 없는 목소리에선 미국 대통령다운 단호함과 명료함이 안 보였다. 민주당이 토론 도중에 “감기 탓”이라고 해명을 내놓을 정도였다. 트럼프는 “방금 전 그 말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바이든 본인은 알까”라고 꼬집었는데, 바이든의 민주당 지지층도 반박하기 어려웠다. ▷악수도 없이 시작한 토론답게 두 후보는 후벼 파는 말을 앞세웠다. 바이든은 트럼프가 성인물 여배우와 불륜을 저지르고 회삿돈을 꺼내 입막음용으로 준 사실을 상기시켰다. “당신은 아내가 임신한 그때 포르노 배우와 잤다”며 공화당 주류의 가족 중시 정서를 건드렸다. 또 “당신이 미군 전사자를 가리켜 썼던 호구(sucker)와 패배자(loser)는 바로 트럼프”라고 몰아세웠다. 대표적 신사 정치인인 바이든답지 못한 이런 강공은 곧 빛을 잃었다. 평소와 달리 비속어나 조롱성 발언을 절제한 트럼프의 변신이 더 눈길을 끌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멕시코 불법이민 등 정책 이슈가 나왔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도 바이든에겐 뼈아팠다. 트럼프는 늘 그렇듯 과장하고 왜곡해가며 “내 재임 시절 미국 경제가 최고였다”고 자랑했다. 이런 식의 왜곡은 미 언론이 수년간 팩트체크로 반박한 것이었지만, 바이든은 현장에서 반박할 능력이 없는 듯했다. 자신을 중국으로부터 돈을 받는 “만주(滿洲)의 대통령 후보”라고 부르는데도 별 대응을 못 했다. 하나하나가 바이든의 순발력과 집중력 부족을 부각시켰다. ▷미국 대선 TV토론은 1960년 처음 도입됐다. 당시 닉슨-케네디 중 승자는 젊은 상원의원 케네디 후보였다. “카메라 덕을 가장 크게 본 후보는 케네디”라는 말이 60년 넘게 힘을 얻고 있지만, 트럼프가 그 주인공이 될 듯하다. 바이든의 고민은 이제부터다. 삼삼오오 모여서 수군거리던 고령 문제가 공론의 장에 올려졌다. 같은 편인 민주당 지지층이 더 아우성이다. 통상적이라면 바이든이 부통령 후보를 지명하는 축제의 장이 될 8월 전당대회까지 민주당과 백악관은 큰 혼돈과 마주하게 됐다. 2차 TV토론은 9월 10일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북한의 오물풍선 공세에 골머리를 앓던 우리 당국이 선택한 대응법은 저강도 심리전에 가깝다. 통일부와 군 당국은 그제 오전 오물풍선이 또 날아올 정황을 파악한 뒤 풍선 속 오물의 실체를 일부 공개했다. 인분이 든 퇴비, 칼로 난도질한 청바지, 다 쓴 건전지, 체제 선전물 조각 등이었다. 북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제 밤 5번째로 풍선 350여 개를 날려 보냈다. 하지만 1개월 동안 날아든 2000개 안팎의 풍선에는 공작을 주도한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예상치 못한 북한의 속살이 여럿 담겨 있었다. ▷통일부에 따르면 오물에선 사람의 DNA도 나왔다. 인체에 있던 회충 편충 등 기생충이 토양에 섞인 것으로 당국은 추정했다. 퇴비에 인분을 썼거나, 화장실 부족으로 일어난 일일 것이다. 7년 전 판문점에서 북 병사가 귀순했을 때도 기생충이 뉴스가 됐었다. 총상을 수술한 이국종 아주대 의대 교수가 수십 cm 길이의 기생충 수십 마리를 제거한 적이 있다. 상대적으로 영양 상태가 좋았을 최전방 병사에게서 벌어진 일이다. 풍선에는 찢어진 걸 몇 겹이고 기운 장갑, 구멍 난 곳을 여러 번 덧댄 양말, 옷감을 겹쳐 조악하게 만든 마스크도 있었다. ▷북 당국이 정보 노출을 막으려고 신경 쓴 흔적이 없지는 않았다. 병뚜껑에선 안쪽이 뜯겨 있었고, 플라스틱 병에선 라벨을 일일이 떼어낸 듯했다. 하지만 물자 부족을 드러낼 물건들을 전수 조사로 걸러내지는 못했다. 특히 오물의 DNA 분석까지 할 것으로는 북측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풍선 속에서 훼손된 김정은 찬양물이 나왔다는 점이다. ▷풍선에는 “김일성 대원수님의 교시”와 같은 선전물이 있었다. 쓰레기와 함께 담겼다는 것도 경을 칠 일이지만, “위대한 령도자(…)”에서 잘려 나간 것도 있었다. 북한에선 신성모독과 다를 바 없는 일로, 형법상 사형까지 가능하다. 2016년 평양 양각도 호텔에서 체제 선전물을 훼손한 혐의로 장기간 억류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를 떠올려 보라. 엄격한 처벌을 모를 리 없는 북쪽의 누군가가 ‘령도자’ 관련 인쇄물을 훼손했고, 그걸 남쪽으로 내려보내는 과정도 꼼꼼하게 걸러지지 않았다. ▷상상도 못 할 오물풍선 공작은 탈북자 단체가 북으로 날려보낸 대북전단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시작한 것은 맞다. 북한 매체들은 탈북자들을 “인간쓰레기”라고 비난해 왔으니 북한 나름대로는 형식 논리를 갖췄다고 여겼을 것이다. 오물풍선은 우리 불안감은 고조시켰지만, 북 무인기가 서울 상공을 헤집고 돌아다닐 때처럼 남남갈등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헛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지금의 긴장이 이렇게 끝날 리가 없다는 점에서 긴장해야 한다. 북은 남북이 더 이상 단일 민족이 아니라고 선언했고, 러시아와 동맹 수준으로 관계를 격상시켰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9분 능선을 넘어 끝난 일처럼 됐지만,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당헌(黨憲) 개정을 중단해야 한다. 중단할 수 있다는 유연함과 과단성을 국민 앞에 보여 줘야 한다. 친명의 충성심이 빚은 당헌 개정 작업을 두고 내부 깊숙한 곳에서 경고음이 울렸을 때 바로잡아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 저하의 상당 부분이 잘못을 스스로 교정할 능력이 부족했던 때문 아니던가. 이 대표는 이른바 개딸 정치를 해 온 40대 최고위원에게 당헌 개정의 실무책임을 맡겼다. 국회의장 후보 선출에 당원 의견 20% 반영, 연장 가능한 당 대표 임기, 기소될 때 당직 박탈 조항 폐지 등 3군데를 뜯어고치자는 의견이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 이 대표가 “이건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임기 문제로 국한해 보자. 이 대표는 30년 관행을 깨고 올 8월 연임에 도전할 것이 분명하다. 그가 2027년 3월 대선에 출마하려면 선거일 1년 전에는 대표직을 내려놓으라는 것이 지금의 당헌이다. 당 대표가 자신도 출마할 대통령 후보 경선을 쥐락펴락하는 비민주성을 줄이자고 여야가 공히 채택한 제도로, ‘당권·대권 분리’라고 부른다. 이 조항을 “상당한 사유가 있을 땐 사퇴 시한을 바꿀 수 있다”는 쪽으로 수정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2026년 6월 지방선거 때까지 몇 개월 임기 연장의 길을 터 준 조치로 여겨진다.“설탕만… 이 다 썩는다”는 최측근 경고 반론이 엄두가 안 나는 1인 체제 민주당이지만, 지난주 원조 친명인 7인회 소속 김영진 의원이 반대의 뜻을 밝혔다. 그는 “이 대표가 설탕만 먹고 있다면 이빨이 다 썩는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개인 설득을 하기엔 너무 나가 버려,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김 의원은 이 대표의 중앙대 후배이자, 대학 총학생회장 시절 전대협 활동을 했다. 당 주류로서 손색없는 인물이 나섰지만, 거기까지였다. 지난주 연석회의에 의원 등 206명이 참석했지만 반대 의견은 2명에 그쳤다고 한다. 지금대로라면 월요일 중앙위원회가 추인하면 절차는 끝난다. 하지만 이 대표의 대통령 꿈은 오히려 반발짝 멀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 옳지도 않고 이익도 생기는 게 없는 일이다. 전두환도 7년 대통령 단임제로 개헌하면서 임기 조항은 변경을 하더라도 ‘다음 대통령부터’ 적용된다고 했다. 그게 신군부도 알던 상식이고 염치다. 이런 수준의 정치가 중도층 확장에 도움이 되는 걸까. 둘째, 민주당은 “윤석열 독재”라는 비판을 반복하지만 반론을 용납하지 않는 민주당은 뭐가 다른 걸까. 김영진 의원 말처럼 민주당이란 큰 공기(公器)에 대한 역사적 책임의식 부족에서 비롯된 일 아닌가. 셋째, 이 대표를 희화화할 소지가 있다. 이 대표는 “임기 조항은 손 안 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여럿 나왔다. 그런데 조항 손질 작업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 말이 이 대표의 진심이 아닐 것으로 민주당 핵심부가 판단해서였을까. “손대지 말란다고 정말로 그런 줄 알았느냐”는 패러디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브레이크 제때 밟는 솜씨 입증해야 이 대표가 대통령 꿈을 이루려면 이 대표 본인은 물론 참모그룹을 포함하는 ‘팀 이재명’에 액셀과 브레이크가 잘 갖춰져 있어야 한다. 추진력이 액셀이라면, 경고음에 멈출 줄 아는 능력이 브레이크다. 완급 조절 능력을 보여 준다면 국민들은 훗날 이재명 정부가 이렇게 돌아가겠구나 하고 기대감을 키울 수 있겠다. 지지지지(知止止止)라는 옛 말씀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멈출 때를 알아, 멈출 곳에서 멈춰야 하는 것은 만사의 이치다. 집권을 꿈꾼다면 이 대표도, 팀 이재명도 멈춰야 한다. 그럴 수 있음을 유권자에게 입증해야 한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중국에는 6월 4일이 없다. 그제는 ‘5월 35일’이었다. 포털에서 6월 4일을 검색하면 “해당 결과를 찾을 수 없다”는 글이 뜬다. 중국 메신저에선 6월 4일이 포함돼 있으면 문자가 전달되지 않는다. 8964라는 숫자도 마찬가지다. 1989년 봄 중국에서 개방파 공산당 총서기가 숨진 뒤 시작된 민주화 및 반부패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덩샤오핑이 무자비하게 탱크로 진압한 날이 바로 6월 4일이다. 젊은이들은 그래서 5월 35일, 8의 제곱(64), 로마숫자 VIIV(64)로 검열을 피하고 있다. ▷35년 전에도 무자비했지만 1인당 소득이 1만3000달러에 이른 지금도 그날의 기억을 지우겠다는 당국의 뜻은 여전하다. 그제 네덜란드 기자가 중국 외교부 대변인에게 “사실상의 학살이었던 그 사건”을 평가해 달라고 하자 “항의 풍파(소동)는 이미 끝난 일”이란 답이 돌아왔다. 그런 뒤 외교부는 이 대목을 삭제한 속기록을 공개했다. 톈안먼(天安門) 망루 관광이 하루 중단됐고,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걸 막기 위해 온라인 게임 사용자가 프로필 사진이나 아이디를 변경하는 것이 금지됐다. 일요일에 발간된 홍콩 종교 전문 주간신문의 1면은 백지로 나왔다. ▷같은 6월 4일이지만 달에선 중국의 우주 굴기(崛起)가 빛을 발했다. 중국의 무인 달 탐사선 ‘창어(달의 여신) 6호’는 달 뒷면에 착륙한 지 이틀 만에 로봇 팔로 토양과 암석 2kg 정도를 채취한 뒤 지구 복귀에 나섰다. 달 뒷면 착륙도, 뒷면 암석 채취도 인류 최초다. 달은 자전주기와 지구를 도는 공전주기가 모두 28일이다. 그래서 지구를 향해 늘 같은 쪽 절반(앞면)만 보여 준다. 역사상 달 토양 채취는 미국이 5번, 옛 소비에트가 3번 성공했지만 모두 앞면의 일이었다. ▷달의 뒷면은 앞면보다 울퉁불퉁해 착륙이 더 어렵고, 지구와는 직선 무선 통신이 불가능하다. 중국은 오작교라는 이름을 붙인 통신 중계위성을 미리 띄워 뒷면-오작교-베이징 3자 통신에 성공했다. 달 뒷면은 헬륨 3가 더 많아 광물 자원화 가능성이 더 크고, 소행성 충돌도 잦아 달 생성과 진화의 비밀을 풀 열쇠를 지녔다고 한다.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내려서서 성조기를 내건 뒤 미국이 달을 잊은 듯한 사이 중국은 오성홍기를 달 뒷면에 펼쳤다. ▷6월 4일의 두 얼굴은 중국에 대해 묻게 만든다. 억압과 창의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 걸까. 달 뒷면 탐사는 과학 역량은 물론이고 가 보지 않은 길을 가겠다는 도전정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국가적 투자는 물론 과학자의 자유로운 사고와 연구 투명성이 불가결한 요소다. 베이징 권부가 개개인의 기억마저 장악하려는 6월 4일의 비극과 상충된다. 중국은 자유와 통제의 기로에 선 걸까. 아니면 국가 과학이 억압과 공생하는 두 얼굴이 상당 기간 유지되는 것인가.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박근혜 청와대의 ‘문고리 3인방’ 중 하나로 국정농단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정호성 전 대통령부속비서관을 대통령실에 기용하기로 했다. 그가 맡을 자리는 시민사회수석 아래 3비서관이다. 정 전 비서관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는 복심 중의 복심이었다. 검찰이 압수한 그의 휴대전화에는 비선(秘線) 최순실과 나눈 대면 대화와 전화 통화가 여럿 녹음돼 있었다. 최순실이 그에게 “받아 적으라”며 지시하는 듯한 육성이 공개되면서 대통령직은 무게를 잃었고, 탄핵으로 이어졌다. ▷윤 대통령은 2016년 특검 파견검사 시절 그를 수사했고, 구속기소했다. 1년 6개월 만기 출소한 이후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에게 우호적이었다. 취임 첫해 사면·복권시켰고, 이젠 비서관으로 기용하기에 이르렀다. 정 전 비서관이 지난해 국가정보원 산하 기관에 자문위원으로 비공개 위촉됐는데, 용산의 힘이 작용했다는 게 정설이다. “수사와 재판으로 소원해졌던 박 전 대통령이 추천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친박계의 설명이다. ▷윤 대통령은 청와대 문서를 최순실에게 유출한 혐의로 자신이 구속한 인사를 발탁해 쓰기로 마음먹었다. 국정 농단의 문제점을 국민들이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논란이 될 게 뻔한 이런 인사를 왜 단행하려는지는 정확지 않다. 정 전 비서관의 대통령실 근무는 부적절하다. 정부문서 유출이란 범죄 말고도 그는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를 알면서도 바로잡지 못했다. 법원이 그의 판결문에 “농단의 방조자가 됐다”고 쓸 정도였다. 그가 맡을 시민사회 3비서관 자리는 민심을 파악해 대통령에게 정확히 보고해야 하는 자리다. 부적절한 인사를 기용한다면 총선 패배 후 “민심에 더 귀 기울이겠다”던 대통령 말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 ▷‘농단 문고리’ 인사의 발탁은 4월 총선 참패 후 뭔가 어긋나는 듯한 대통령실 인사의 극적인 사례가 될 듯하다.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국정의 중핵인 용산 대통령실이 낙천·낙선자로 채워지고 있다. 교체된 비서실장, 정무수석, 시민사회수석이 그렇다. 정무수석실 아래 비서관 3명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의 공직기강비서관은 총선 출마를 위해 인사비서관을 그만둔 지 4개월 만에 다시 회전문이 되어 돌아왔다. 탕평이니 삼고초려니 하는 말은 역사책에만 있는 일이 돼 버렸다. ▷민주당은 “탄핵에 대비하는 거냐”는 조롱성 비판을 내놓았다. 형사처벌 대상이 된 총선 후보가 유독 많았던 조국혁신당조차 “(용산은) 부끄러운 줄 알라”고 반응했다. 그런데도 집권당에선 아무런 대응이 없다. 누구도 “발표 전이니 인사 결심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말을 못 하고 있다. 용산은 민심에서 동떨어져 가고, 여당은 민심의 전달자 역할을 못 하고 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이 그제 정책실장, 수석비서관들과 가진 첫 회의에서 “대통령실의 정치는 대통령이 하는 것이지 비서들이 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실 또는 대통령실 관계자라는 이름으로 부정확한 얘기가 산발적으로 (언론에)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런 경고는 용산발 국정 난맥을 끊어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듯하다. ▷‘말의 기강’을 세우겠다는 첫 지휘 메시지는 공식라인을 건너뛰는 일 없이 업무계통을 정확히 밟으라는 지시이기도 하다. 지난주 불거졌던 ‘박영선 국무총리-양정철 비서실장 유력 검토’ 보도가 남긴 파장을 염두에 둔 것이다. 보도된 대로 ‘문제 발언’의 당사자로 지목된 용산 참모는 인사, 정무, 대언론 접촉이 본 업무가 아닌데도 나섰다. 또 휘발성이 강한 더불어민주당 측 인사의 핵심 요직 발탁 아이디어를 비서실장, 정무수석 등 최고위 참모들조차 알지 못하는 가운데 언론에 흘렸다. ▷민주당 인사의 총리 발탁이 상상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협치 의지를 밝히고, 국회 제1당이 된 민주당에 의견을 구하기도 전에 공개되면서 일의 순서가 뒤엉켰다. 최고 권부의 일 처리가 느슨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총선을 거치며 얇아진 대통령 지지층의 반발과 실망을 다독이는 사전정지 작업은 할 틈도 없었다. 대통령의 업무가 이렇게 다층적 고려 없이 추진되어도 되나.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대변인은 첫 보도 3시간 뒤 “논의한 바 없다”고 공식 부인했다. 그러나 그런 뒤에도 “아이디어 차원에서 논의한 적은 맞다”는 발언이 이어졌다. 단순 실수를 넘어 ‘말의 실패’였다. 영입 대상으로 삼았던 박영선, 양정철 두 인사는 대통령 부부와 이런저런 사적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와중에 김건희 여사와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용산 참모가 발언 당사자였다는 점에서 대통령실 계통 파괴의 심각성이 더 부각됐다. 지난 2년간 검찰 출신, 측근 그룹 출신 등 참모 그룹은 ‘누가 윤심에 더 가까운가’를 두고 경쟁이 존재했다고 한다. 과거 정부 때도 있었던 일이라지만, 비서들의 정치가 구설로 이어진 경우는 드물다. ▷“(비서실은) 말하는 곳이 아니라 일하는 곳”이라고 질책한 정 실장은 용산을 어떻게 이끌어 갈까. 그동안 직보(直報)의 형식으로, 다양한 의견 청취라는 이름으로 걸러지지 않은 의견과 정보가 용산 최상층부에 전달된다는 후문이 많았다. 그러던 중 어설픈 언론 플레이로 대통령실의 권위와 기강을 흔든 일이 생겼다. 이런 비공식 정보의 흐름을 교통정리 해내는 것 또한 정 실장이 다짐한 ‘말의 기강’을 잡는 일이다. 그 당사자를 솎아내지 않은 채 용산의 난맥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용산 비서들의 정치 행위를 근절하겠다는 정 실장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1980년 5월 광주의 한 모텔에 몇몇 외국인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모텔 창문 밖으로 멀리 저항에 나선 광주시민들이 보였고, 신군부 진압부대도 대오를 갖추고 있었다. 그때 모텔에서 6m쯤 떨어진 옆 건물 옥상에 총을 든 군인이 나타나더니 기자들에게 손짓하며 떠날 것을 요구했다. 잠시 후 모텔방 유리창이 깨지며 총알이 날아들었다. 한 기자가 카메라를 꺼내 들고 창밖 촬영을 시도했다. 총알이 더 날아들자 기자들은 바닥을 기어서 빠져나왔다. UPI통신 기자가 1989년 미국 LA타임스에 쓴 5·18민주화운동 취재기에 담긴 내용이다. ▷어떻게든 촬영하려고 카메라를 꺼내 든 이는 AP통신 도쿄지국 테리 앤더슨 기자(당시 33세)였다. ‘뉴스 현장’을 찾아 한국으로 건너온 그로선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내밀었을 것이다. 80년 광주에선 희생자 수를 두고 논란이 컸다. 신군부는 초기에 3명이라고 발표했고, 시민들은 261명이라고 주장했다. 앤더슨 기자는 거리 취재 때 시신을 직접 셌다. “그렇게 많은 시신은 처음 봤다”며 하루에 179구까지 확인했다고 기억했다. 왜 굳이 세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기자는 원래 그렇게 일한다”라고 답했을 것이다. ▷앤더슨 기자가 지난 주말 미 뉴욕주 자택에서 76세를 일기로 숨졌다. 그가 세상에 더 알려진 것은 광주 취재 5년 뒤 AP통신 중동지국장으로 일하던 때 내전 중이던 레바논에서 헤즈볼라에게 납치된 일 때문이다. 그곳 수도 베이루트에서 동료와 테니스를 친 어느 날 괴한 3명에게 끌려갔다. 이들은 영어로 “걱정 마라. 이건 정치적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로부터 2454일, 6년 8개월 동안 그는 인질이 됐다. ▷훗날 쓴 ‘사자굴’이란 회고록에 자세한 기록이 담겨 있다. 대부분을 눈이 가려진 채 지냈고, 수갑과 족쇄가 채워졌다. 몇 시간씩 기도하며 버텼다고 썼다. 당시 약혼녀는 임신 6개월이었고, 그때 태어난 딸은 여섯 살이 되어서야 사진으로만 보던 아빠를 만났다. 그는 귀국 후 헤즈볼라의 배후인 이란 정부를 상대로 1억 달러(약 1400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액수가 밝혀지지 않은 큰 배상금을 받아냈다. 그 돈으로 해병대원으로 참전했던 베트남을 위해 학교 50개를 지었다. ▷언론을 떠난 그의 삶은 대학 강의와 자선사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레바논 근무 시절 “분쟁지역 취재는 내 삶에 가장 매혹적인 일”이라고 했던 대로 ‘현장을 지킨 기자’로 기억될 것이다. 민주화 시위를 기록하기 위해 광주를 찾았고, 남들은 피하는 중동의 분쟁지역을 지켰다. 그의 모습이 담긴 영상에는 왼쪽 가슴팍 주머니에 꽂힌 검은 볼펜과 빨간펜이 눈에 띈다. 세련된 정장 차림은 아니었지만 현장 기자라면 누구나 그랬을 모습 그대로였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한국이 초청받지 못하면서 국내 정치로 불똥이 튀었다. 올해 G7 의장국인 이탈리아가 한국을 초청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해진 시점이 윤석열 대통령과 집권당의 총선 참패 직후여서 파장이 더 미묘하다. 이탈리아는 6월 중순 열리는 G7 회의 때 정식 회원국 7개국 외에 아르헨티나 브라질(이상 남미), 이집트 튀니지 케냐 알제리 남아프리카공화국(이상 아프리카), 그리고 인도(아시아) 등 8개국 등을 초청하기로 했다.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대중국 관계를 희생시켜가며 미일 등 서방국과 연대를 강화했음에도 이렇다니 참담하다”고 외교 실패라는 주장을 폈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립외교원장을 지낸 한 조국혁신당 국회의원 당선인은 “눈 떠 보니 후진국”이란 표현까지 썼다. 대통령실은 “이탈리아가 자국 내 이민자 문제와 연결된 아프리카·지중해 국가 위주로 정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정부는 애써 태연한 듯했지만 이탈리아 초청을 위한 물밑 노력은 치열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한-이탈리아 외교장관 회담에서 강력한 희망을 전달했다. 하지만 지난주 G7 외교장관 회의에 이미 조 장관은 초청받지 못했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관측이 늘었다. 정부가 G7 초청에 매달린 데는 이유가 있다. 윤 대통령은 한미일 3국 협력을 외교의 골간으로 삼는 것과 동시에 높아진 국제 위상에 걸맞게 처신한다는 ‘글로벌 중추국가 외교’ 노선을 채택했다. 이런 마당에 계속 초대받던 G7 회의에 초청받지 못한다면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한국이 G7 무대에 처음 초청된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을 초청한 2020년부터다. 우리 반도체의 전략적 중요성이 주목받던 때와 겹친다. 코로나 위기로 그해 회의는 취소됐지만, 이후로 영국의 문 대통령 초청(2021년), 독일의 미초청(2022년 한국의 정권 교체기), 일본의 윤 대통령 초청(2023년)으로 이어졌다. 2020년 이후 4번 중 3번을 초청받게 되자 국내에선 ‘준(準)회원국쯤은 된다’는 분위기도 생겼다. 하지만 G7 회원국의 속사정은 제각각이다. ▷미국이 G7을 주도하는 가운데 영국 캐나다 일본이 밀착 공조를 한다. 하지만 유럽대륙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는 국익 계산법이 다르다. 미국 영국 일본이 우리를 초청했고, 독일 이탈리아가 뺀 것이 우연만은 아니다. 미국과 함께 쿼드, 오커스, 칩4 동맹을 만들어 중국의 위상 약화를 노리는 나라들은 한국을 품으려 애쓰고 있다. 관행대로라면 내년 이후로 캐나다 프랑스 미국이 차례로 의장국이 된다. 나라마다 초청 기준은 다를 것이다. 그때마다 일희일비할 수는 없다. 초청받았다고 과잉 홍보할 필요도 없고, 공들였던 외교 노력이 실패했을 때 “별일 아니다”라며 축소할 일도 아니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뭘 어떻게 해야 여야 협치인가. 이명박(MB) 정부의 4대강 사업에서 반면교사를 찾을 수 있겠다. MB 정부는 2008년 소수당인 민주당의 반대를 딛고 한강 금강 등 4곳에서 사업을 동시에 추진했다. 속도전까지 벌여 MB 정부 임기 내 모두 완성했다.4대강 사업 MB-민주-朴 협의했더라면 뒷거래처럼 들릴지라도, 정치에서 협치는 주고받는 거래 요소가 있다. 4대강 사업에는 MB 1인의 직인(職印)이 강렬히 남아 있다. 민주당 텃밭인 전남이 원하던 영산강 등 한두 곳에서만 공사하고, 그 결과를 확인한 뒤 나머지 강으로 확대했더라면 어땠을까. 민주당 대표에게는 ‘MB 사업을 크게 축소시켰다’는 공적이 돌아갈 테니 협력했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또 친이-친박 갈등이 극심하던 그때 ‘여당 내 야당’인 박근혜 전 대표의 의중도 살폈어야 했다. 4대강 프로젝트의 결재란에 이명박, 민주당 대표, 박근혜 3인이 각각 도장(印)을 찍는 상상을 해 보자. 4대강은 MB 독식을 넘어서 협치 프로젝트로 거듭나고,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재명 대표는 총선 전부터 전체 국민에게 1인당 25만 원을 나눠 주자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의 기본시리즈 공약에 맞춰 14조 원대 추경예산 편성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인플레 고통을 줄이겠다면서도 인플레를 유발할 돈 풀기에 나서면서 논란이 크지만, 일단 논외로 해 보자. 대통령은 이에 대해 며칠 전 “무분별한 포퓰리즘은 나라를 망친다”며 거부의 뜻을 밝혔다. 과거 같았다면 이렇게 끝날 일이지만 지금은 달라야 한다. 대란(大亂)을 대치(大治)로 풀어야 할 만큼 용산은 사정이 급하다. 대통령이 수용한다고 가정해 보자. 대통령 결재서류 옆 칸에 이 대표의 도장 찍는 공간을 두는 셈이 된다. 대통령은 민생과 협치의 이름으로 자기가 며칠 전 꺼내 든 반대를 거둬들여야 한다. 민주당이 엇비슷한 크기의 반대급부를 내놓으려면 ‘대통령의 정책’을 국회에서 처리해야 한다. 외국인력 비자 완화 등 여러 건의 킬러규제 완화 법안을 이제라도 처리해 줘야 한다. 대통령과 이 대표가 다음 주 용산 대통령실에서 만나기로 합의했는데, 이런 주고받기 협치를 논의하기를 바란다. 양쪽 모두에 불편하고 낯선 일인 것은 맞다. 대통령은 권력의 생살을 떼주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이 대표도 지금이 지지율이 23%까지 떨어진 대통령을 몰아붙일 기회라고 여길 것이다. 양쪽 극렬지지층은 반발할 것이다. 하지만 타협이 없었더라면 사장됐을 프로젝트 2개는 실현되지 않나. 솔로몬의 재판처럼 위기에 빠진 국정을 걱정하는 진짜 어머니가 누구인지 살피는 기회도 있을 것이다. 협치와 절충은 여야 지도부의 정치력에 달렸다. 특히 여당인 국민의힘은 상상력을 발휘해 민주당이 동의할 교환 패키지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중요해졌다. 한쪽이 60 대 40으로 유리하다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40 대 60인 법안을 찾아 2, 3개 묶어낸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용산과 與, 손해보는 주고받기 추진해야 비슷한 타협이 없던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입법에 반대가 많았던 법안일수록 총대를 메고 거래를 성사시킨 여야 정치인 이름을 법안에 넣곤 한다. 의원들이 반대한 정치자금규제법(매케인-파인골드법), 기업 회계장부에 대한 책임 수위를 높여 재계가 반발한 법(사베인스-옥슬리법)이 그런 사례다. 우리도 대타협의 물꼬를 튼 정치인의 이름을 단 ○○○-○○○법이 나와야 할 때가 됐다. 박영선 총리 구상은 어설픈 소동이 됐지만 그 정도로 용산이 절박하다는 걸 확인하는 계기였다. 용산과 여당은 조금 손해 보는 듯한 거래를 민주당과 시도해야 한다. 국민을 위한 것이라면 작은 손해 보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고, 쓰러진 국정을 일으켜 세우는 기회도 된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22대 4·10총선은 여론조사로 시작해 출구조사로 끝났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론조사는 선거의 승패를 예측하기도 하지만 ‘응답하려는 의지’를 반영하면서 특정 정당 지지자들이 지금의 정치에 얼마나 만족하는지, 그래서 기꺼이 투표소에 가서 표를 던질 뜻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늠자 기능을 한다. 예컨대 여론조사 때 보수층 응답률이 떨어지면 절대 보수정당이 그 선거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실제 투표장에 가겠다는 의지가 부족하다는 뜻일 수 있어 그렇다. 정치 지도자는 지지층이 여론조사 전화에 기꺼이 응답하게 하고, 투표장에 가서 투표할 맛이 나도록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과 통한다. 총선 민심과 여론조사의 상관관계를 따져보기 위해 여론조사 전공학자 2명에게 답을 구했다. 12일 동아일보 광화문 사옥에서 있었던 대담은 김승련 논설위원이 진행했다.》―이번 총선 여론조사를 통해 여당의 참패를 예상할 수 있었는지.▽김영원 숙명여대 교수=총선 전에 더불어민주당이 꺼냈던 ‘200석 개헌선’까지 나오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 이유는 여론조사마다 ‘나는 보수’라는 응답자 비율이 평소보다 줄었기 때문이다. 보수 유권자가 숨었다는 뜻이다. 이런 숨은 보수가 선거 당일에 나타날지 말지가 변수였다. ▽이준웅 서울대 교수=사전투표율 비교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했다. 2년 전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될 때 사전투표율이 높았던 경북 포항 등지에서 이번 총선 때 그 숫자가 낮아졌다. 중앙선관위 250여 개 시군구 자료에 그게 들어있다. ―2월, 3월 여론조사를 보면 양대 정당의 승리 가능성이 요동쳤다.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등장과 민주당의 공천 파동 때 국민의힘 지지율이 크게 올랐을 때다. 어떻게 해석하나.▽김=갤럽과 NBS 등이 실시해 온 정기 여론조사의 흐름이 중요하다. 국민의힘, 민주당의 정당 지지율이 더 긴 흐름에서 크게 출렁인 적이 거의 없다. 큰 변수가 안 됐다는 뜻이다. ▽이=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1년 넘도록 30% 대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이 정도면 총선 승리가 쉽지 않다. 한동훈 등장 초기의 지지율 상승은 2012년을 연상시켰다. 한나라당이 임기 5년 차 이명박 대통령 대신 박근혜 비대위원장을 전면에 내세워 총선을 이겼던 그때 말이다. 그런 기대감이 생기면서 보수 지지층이 여론조사에 적극 응했다. 민심이 달라졌다기보다는 여론조사에 적극적인 분위기가 생긴 게 (당시의)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2월 이후에는 의대 정원 확대, 이종섭 주호주 대사 출국, 대파 논란 등 쟁점이 여럿 등장했다. 어떤 사안이 영향이 컸을까. ▽김=특정 사안들이 표심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정치적으로는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동의한다. 유권자마다 찬반 의견은 그때그때 있겠지만 영향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 여당에 악재가 등장하면 민주당 지지자들이 여론조사 응답에 더 나서 대통령 정책에 반대한다고 답하게 된다. 정치 지도자가 지지층에 투표할 이유를 제공하느냐가 선거 승리의 요체다. 민심을 살피는 정치라는 것도 바로 이 이야기 아닐까. ―선거 여론조사의 정확도를 어떻게 평가하나. ▽이=정권 심판 응답이 많이 나온 여론조사가 총선 담론을 지배한 것이 특징이다. 표심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론정치는 민주제도의 기능이기는 하지만 그 규모가 컸다는 점에서 놀랐다. 진보 성향 유권자의 응답률이 높아지면서 지역구에서는 민주당, 비례대표에선 조국혁신당 지지율이 과대 평가된 측면이 있다. ―여론조사는 잘 작동했나. ▽이=조사가 너무 많다는 점은 지적해야 한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는 전국 조사만 234회 진행됐다. 234개 가운데 전화면접 방식은 대부분 주류 언론이 의뢰한 것으로, 88개였다. 나머지는 인터넷 언론이 발주한 ARS 조사였다. 이 숫자는 지역구 조사 말고 전국 단위의 지지 정당 조사만 따진 것이다. 그런 만큼 유권자이자 뉴스 소비자는 조사 품질 기준에서 옥석 구별을 잘해야 한다. ―좋은 여론조사는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나. ▽이=높은 응답률이다. 몇 % 이상이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높을수록 잘된 조사로 볼 수 있다. 면접 조사원이 직접 질문하는 방식은 예산이 더 들지만, 끊으려는 유권자에게 ‘잠시만요’라며 붙잡기도 한다. 이렇게 응답률이 높아진다. 조사원은 평소 교육도 받아야 하니 ARS보다 비용이 더 든다. 5, 6배로 알고 있다. ―ARS 조사가 정확도가 떨어진다고 볼 수 있나. ▽이=컴퓨터가 전화 거는 ARS 방식은 응답률이 매우 낮아서 품질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다수 축적돼 있다. 결론이 나 있는 셈이다. ―품질이 낮다면 금지시킬 수는 있나. ▽이=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어서 금지는 곤란하다. 어찌 보면 자동화라는 게 혁신의 일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문과 방송이 ARS 조사는 가급적 보도하지 않았으면 한다. 인터넷 매체가 보도는 하겠지만, 뉴스 독자들은 그런 조사를 마주하면 사람이 하는 면접조사보다는 신뢰를 덜 하고 보면 좋겠다. ▽김=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정치조사에 ARS를 규제하기도 한다. 워낙 텔레마케팅 회사의 로보콜을 많이 써서 상품 홍보를 많이 하니까 아예 금지시킨 주도 있다. 그 바람에 선거 여론조사도 ARS 방식은 응답할 패널을 미리 정해놓고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여론조사에 어떤 마음으로 답하나. ▽이=전화가 걸려올 때 응답하려면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현재 응답률은 전화면접은 13∼14%, ARS는 3∼4%다. 접촉이 된 응답자 100명 중 13명 안팎과 3명 안팎이 응답한 결과물이다. 조사에 응하는 사람들은 지지 정당 공개에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작다. 또 기다렸다는 듯이 답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정치적 의견 표명 성향이 높은 것이다.(※한국과 미국은 응답률 표현 기준이 다르다. 3만 명에게 전화 걸어 1만 명이 전화를 받았고, 그 가운데 1000명이 답변을 끝까지 마친 경우를 가정해 보자. 이때 우리는 접촉률(33%)-응답률(10%)로 표시한다. 미국에선 최종 응답률은 두 숫자를 곱한 3.3%가 된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 최종 응답률을 ‘성취율’ 등으로 표현하자는 의견이 있다.) ―선거 때마다 나오는 이슈지만 선거 1주일 전에는 여론조사 결과를 공표할 수 없다. 변화가 필요하지 않나. ▽김=과거엔 선거 앞두고 엉터리 조사 결과를 퍼뜨릴 우려가 있었다. 지금은 조사 방법을 함께 공개하니까 장난치는 게 쉽지 않다. 공직선거법을 개정함으로써 선거 하루 전까지는 발표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그러나 국회 정치개혁특위가 수용하지 않고 있다. ―왜 그렇다고 보나. ▽이=흔히 말하는 ‘깜깜이 기간’은 선진국 중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정도만 남아있다. 하지만 국회가 변화를 선호하지 않는다. 하루 전날까지 발표하도록 해야 엉터리 여론조사를 하는 회사들이 냉정한 시장의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럴 때 여론조사 품질이 더 좋아져 유권자에게 도움이 된다. ▽김=현역 의원들은 자기 선거구 도전자가 신인일 경우 마지막에 따라붙을 걸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다. 1주일간 공표를 차단하면, 신인의 도전장을 받는 현역 의원이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여론조사 기관의 정치적 편향성에 따른 여론 왜곡 문제는 없나. ▽김=특정 업체가 너무 많이 틀렸다는 점은 꼭 지적해야겠다. 이 업체는 언론사 의뢰 없이도 자기 예산으로 여론조사를 가장 많이 수행한 곳이기도 하다. 3월 25일 이후 이 업체가 실시한 비호남권 조사 27개를 전부 살폈는데, 실제 선거 결과와 비교할 때 단 1곳도 예외 없이 민주당 후보가 과다 추정됐다. 7곳은 당락이 뒤바뀌었는데, 모두 민주당 당선으로 잘못 추정됐다. ▽이=이런 게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지지 정당을 바꾸지는 않더라도 실제 투표할지 말지 행동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국가정보원 예산은 일부 공개되기도 하지만 전모는 베일에 가려 있다. 국정원 예산은 세 덩어리로 구성된다. 첫째, 지난해 8526억 원이 책정된 공식 예산으로, ‘안보비’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영수증 증빙이 생략되는 특수활동비로 전액 구성됐다가 전직 원장 3명이 재판받는 홍역을 치른 뒤 바뀌었다. 둘째, 기획재정부가 편성한 예비비에서 가져다 쓰는 ‘국가안전보장 활동경비’다. 셋째, 국방부·경찰청 등의 몫으로 책정된 특수활동비를 함께 쓰는 것이 있다.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블랙 예산”으로 부르듯, 합법적으로 숨겨놓은 예산이다. ▷주목받는 것은 안보 활동경비다. 예비비는 태풍 피해가 생기거나, 새만금 잼버리 행사 차질에 따른 긴급대응처럼 1년 전 미리 짜놓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 꺼내 쓰는 돈이다. 말 그대로 비상금이다. 하지만 국정원은 상시 예산처럼 쓰는 듯하다. 추정액 기준 2020년 6000억 원, 2021년 6300억 원이다. 예산 규모도 정식 예산(안보비)의 80%를 넘나드는 수준이다. ▷예비비 집행은 국무회의 의결이 필요하다. 국정원은 지난해 4차례 국무회의를 통해 예비비를 가져갔다. 12월에는 ‘글로벌 원자재 공급망 긴급 확보’ 명목이었다. 하지만 어떤 활동이었는지는 2급 기밀이어서 파악하기 어렵다. 지난해 국정원 예비비가 7800억 원이었고, 역대 최대 규모라는 보도가 지난주 나왔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2020년 이후로는 매년 6000억 원대로 올라섰다는 추정이 틀리지는 않는 듯하다. ▷정부 예산은 국회 예결위 심사를 받는다. 국정원은 기밀성을 감안해 중진급 정치인이 포진한 정보위가 그 역할을 맡는다. 국정원이 3개월마다 고강도 검증을 받는다지만, 예산·결산 심사가 얼마나 정밀한지는 의문이다. 정보위는 인사청문회 등을 빼면 개회 직후 비공개로 전환된다. 언론 취재도 어렵고, 속기록도 확인할 수 없다. 다른 부처의 예산은 예결위의 소인수 회의체인 ‘소소(小小)위’ 대화까지 개방하지만, 정보예산은 비공개다. ▷미 국가안보국 출신 에드워드 스노든이 자국의 불법 행위를 2013년 폭로하면서 예산까지 공개한 적이 있다. 그가 공개한 178쪽 자료에 따르면 CIA가 연 16조 원을 썼다. CIA로선 러시아와 중국이 봤을 이런 노출은 큰 타격이었다. 이 자료를 입수한 워싱턴포스트는 이례적으로 정부와 보도 범위를 상의했다. 보안과 독자 알권리 사이에서 경계선을 찾는 노력이었다. 우리 국정원은 역대 원훈(院訓)처럼 음지에서, 소리 없는 헌신을 해 왔다. 그런 자부심에 걸맞은 예산 투명성 확보의 때가 왔다. 비밀 활동 예산은 100% 보안이 기본이다. 그렇지 않은 활동 예산이라면 국회 정보위가 역할을 더 키우는 쪽으로 변화를 생각해야 한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우리 해경과 해군이 지난 토요일 여수 앞바다를 지나던 3000t급 화물선을 나포했다. 이 배는 중국 산둥반도에서 출항해 북한 서쪽 남포항에 열흘쯤 머문 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던 중이었다. 선박에는 러시아 수출용으로 보이는 북한산 무연탄이 가득 실린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북한의 석탄 수출은 대북 제재 대상이다. 이 배는 아프리카 토고 국적선이었지만 지금은 무국적이다. 비슷한 국적세탁 사례로 볼 때 북한 통제하의 선박으로 정부는 의심하고 있다. ▷이번 나포는 미국 요청에 따른 것으로, 우리 정부가 대북 제재 위반 의심 선박을 나포한 것은 처음이다. 유엔 안보리 결의 2397호는 제재 위반이 의심되면 문제의 선박을 영해(領海)에서는 나포·검색·억류할 수 있다. 이 배는 북한 남포항 입출항을 전후로 국제적 의무인 자동식별장치를 껐다고 한다. 북한 흔적 지우기다. 우리 당국이 정선 명령을 내렸지만 불응했다. 중국인 선장은 “석탄을 실은 곳은 북한이 아닌 중국”이라고 부인했으나 정찰위성에 따르면 남포에 머물 때 석탄이 채워졌다고 한다. ▷이번 나포는 구멍 뚫린 대북 제재망을 방치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북한은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를 반복하면서 안보리 제재를 받았다. 하지만 2017년 이후로는 러시아와 중국의 반대로 추가 제재가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그 사이 벤츠 등 사치품이 평양으로 흘러들어갔다. 지난주엔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을 감시하는 유엔 전문가 8인 패널을 아예 없애버렸다. 적절히 통제만 한다면 핵 가진 북한이 미국을 괴롭히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일 것이다. ▷북한에 선박은 생존 통로다. 중-러 국경에서 육상 운송도 가능하지만, 경제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일정량 이상 수입이 금지된 석유 제품을 배에서 배로 옮기는 선상 환적을 자행하고, 미사일처럼 돈 되는 수출품도 배로 실어 나른다. 2002년 서산호 사건은 미국이 해상 차단의 근거 마련에 주력하게 된 계기가 됐다. 북한은 스커드미사일 15기를 예멘에 수출했는데, 미국 요청으로 스페인 해군이 공해(公海)에서 나포했다. 하지만 안보리 제재와 같은 근거가 없었던 때여서 미사일을 예멘에 넘겨야 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 대응의 속도와 강도다. 유엔에서 중-러가 북한 감시 패널을 없애버린 것은 지난주 목요일이었다. 우리가 선박을 나포한 것은 이틀 뒤인 토요일이었다. 미국은 과거에도 비슷한 위성 추적을 했지만 이번처럼 한국에 나포 요청을 한 적은 없었다. 북한은 포탄과 미사일을 제공하며 전쟁 중인 러시아를 돕고 있다. 미국으로선 북한의 돈줄 차단도 중요하지만, 러시아 견제도 감안했을 것이다. 한반도 안보 질서는 우리 뜻과 관계없이 가변성이 더 커졌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월 29일자에 4개 면으로 구성된 특별 섹션을 발행했다. 그 섹션을 통상 인쇄되는 신문 섹션들을 바깥에서 감싸도록 했다. 이렇게 탄생한 1면이건만 가장 중요한 머리기사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로 취재 출장을 갔다가 간첩 혐의로 체포된 자사 기자 에반 게르시코비치(32)의 구금 1년째 되는 날이었다. 백지(白紙) 편집은 러시아에 대한 항의였고, 용기 있는 저널리즘에 대한 다짐이었다. ▷기자 생활 8년째인 게르시코비치의 부모는 옛 소련의 경제난을 피해 1970년대 미국에 정착했다. 그런 그가 냉전 종식 후 러시아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된 첫 미국인 기자가 된 점이 기막히다. 그는 프랑스 통신사 AFP를 거쳐 4년 전 WSJ에 합류했다. 간첩 행위로 몰린 지난해 봄 출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입된 용병기업 와그너 그룹 취재를 위해서였다. 푸틴의 요리사였다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의문의 항공기 사고로 숨진 프리고진이 설립한 그 회사다. ▷특별 섹션 1면은 3분의 2가 백지였는데, 위쪽에 제목은 달려 있었다. “빼앗긴 1년: 그의 취재기사가 여기 실렸어야 했다.” 그런 뒤 4개 면에 걸쳐 그가 1년 동안 놓쳐야 했던 친구 결혼식과 축구 경기 시청을 비롯한 일상의 소중함 등을 기사로 담았다. 그는 지난달 모스크바 콘서트장 테러를 자행한 범인들과 같은 구치소에서 독방에 감금돼 있다. 외부 접촉 없이 비공개 재판 절차를 밟는 동안 러시아가 공개한 짤막한 법정 동영상으로 그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뿐이다. ▷러시아는 강력한 언론 통제 국가다.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뉴스매체가 외국과 인적-경제적 인연을 맺었다면 모든 기사 첫머리에 “외국 기관(Foreign Agent)이 관여했다”는 딱지를 붙여야 할 정도다. 정부 매체의 발표만 믿으라는 뜻이다. 푸틴의 정적 나발니의 의문사처럼 ‘권력의 반대편’이란 말은 독살 납치 구금의 위험을 뜻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지구촌 삶의 방식을 바꾼 러-우크라니아 전쟁과 그 이면을 알려야 한다는 믿음은 꺾이지 않고 있다. WSJ와 취재 기자는 이런 위험 감수를 언론의 길이라 믿었다. ▷언론 탄압은 러시아 외에도 중국 이란 미얀마 등 권위주의적 독재국가에서 자행되고 있다. 국경없는 기자회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가택연금 혹은 투옥된 언론인이 520명이 넘는다고 한다. 중국에만 100명 넘는 기자가 체포 또는 구금됐고, 팔레스타인 전쟁을 시작한 이스라엘에서도 기자 35명이 억류 중이라는 것이다. 저널리즘엔 남다른 용기가 필요하다. WSJ 특별섹션 1면의 커다란 빈칸은 강렬한 메시지다. 신문은 독립적으로 취재한 진실을 담을 것이고, 외부의 힘이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할지라도 누군가가 그 일을 지속할 것이란 점이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4월 총선이 다가올수록 정치가 도(道)보다는 기(技)의 영역으로 옮겨간 것을 절감한다. 그래서 얼굴 두껍든(厚), 뱃속 시커멓든(黑) 둘 중 하나는 해야 정치에서 성취한다는 100년 전 중국인의 역사 연구는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후흑(厚黑)이 승부를 가르는 정치는 고대 중국에선 몰라도 21세기 한국 정치에선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유권자들은 정치 IQ가 후흑과 만날 때 지지를 더 보내는 게 현실이다. 서울 강북을 공천 소동 후 민주당 전체에 흐르는 침묵을 보자. 이재명 대표의 전횡을 비판하던 원로들도, 비명횡사당한 친문들도 약속한 듯 입을 닫았다. 친문 배제 때 비판 성명서까지 냈던 김부겸 전 총리는 “이제 더는 말 않겠다”고 돌아섰다. 정적에게 먹잇감을 주지 않겠다는 본능에 가깝다. 집단적 IQ가 작동한 것이고, 후흑에 비유하자면 후(厚)의 발현이다. 민주당이 한미 동맹론자인 위성락 전 북핵 6자회담 대표와 반미를 내세운 통진당의 후예 3명을 동시에 비례대표로 공천한 것은 명백한 가치 충돌이다. 그럼에도 워싱턴에서 말이 먹히는 위 전 대표에게 2번을 부여한 것은 신의 한 수다. 싱하이밍 중국대사 앞 해프닝, 반미운동가 대거 공천, 중국-대만 셰셰(謝謝) 발언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이 대표가 미국 주도 국제질서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그조차 동맹파 외교관을 중용했다. 정치 IQ를 인정하든 흑(黑)의 작용으로 보든, 그건 유권자 몫이다. 대장동 쌍방울 등 숱한 사건에서 드러난 후흑의 징후와는 다른 정치 감각이다. 친윤 핵심 이철규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은 어떤가. “한동훈 사천(私薦)”이란 비판은 김부겸의 침묵과 비교된다. 비례 후순위를 받고 사퇴한 주기환 후보를 용산 대통령실은 사흘 만에 대통령 특보로 임명했다. 둘 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여권 핵심부가 당의 간판인 한동훈 위원장을 겨냥한 일인데,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게다가 검찰 수사관 출신인 주 특보는 인수위, 광주시장 후보, 총선 비례 후보, 대통령 특보까지 2년 사이 4번의 공직 기회를 부여받았다. “또 검찰, 또 아는 사람”이란 야당 비판에 앞서 대통령 지지자들이 뒷목을 잡을 지경이다. 비상근 무보수라지만 특보 인선을 총선 뒤로 늦추지 않은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종섭 주호주 대사 때처럼 섬세한 과정 관리가 안 됐다는 의미다. 후도 흑도 안 느껴지는 결정이 용산에서 나올 때가 있다. 요즘 조국 전 장관에게선 강한 후의 기운이 있다. 그는 유재수 금융위 국장의 비리를 눈감아준 혐의로 2심까지 유죄 판단을 받았다. 청와대 핵심의 청탁을 받고 공직 감찰을 무마시킨 건 권력형 범죄다. 그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입시 문제는 있을지언정 권력형 비리는 없다”고 답한다. 하도 자신 있게 말하는 바람에 ‘유재수 건도 무죄로 바뀌었나’ 착각할 정도다. 그러나 어쩌랴. 조국혁신당에 표가 몰리는 건 이유가 있다. 대통령 주변과 검사들은 왜 느슨하게 수사받느냐는 질문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다. 이와 별개로 조국 본인과 황운하 의원처럼 하급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후보는 후보직에서 사퇴하기를 권한다. 그게 염치에 맞고, 그럴 때라야 조국은 후의 굴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다. 높은 정치 IQ와 후흑의 만남이 좋은 정치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 없이 선거 승리는 쉽지 않다. 2세기 전 프랑스 학자는 “모든 국가는 국민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고 했다. 요즘 유권자들의 정치 IQ는 정치인 못지않다. 여든 야든 높아진 유권자 수준에 걸맞게 정치 IQ를 더 높여야 한다. 이걸 못하고선 승리도 뭐도 없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스웨덴이 210년 중립국 원칙을 벗어던지고 집단안보체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정식 가입한다. 지난해 4월 튀르키예에 이어 그제 헝가리 의회가 최종 동의함으로써 스웨덴은 32번째 회원국이 되기 위한 행정절차만 남겨놓고 있다. 나토 회원국이 되려면 모든 회원국 동의가 필요하다. 2년 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때 “나토의 동진(東進)이 러시아 안보를 위협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는데, 그 침략 전쟁이 중립국까지 나토의 품을 찾게 만들었다. ▷국가 안보에는 세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강대국과 한편이 되거나(한미동맹), 강대국의 반대편에서 힘을 합치거나(소련에 맞선 나토), “누구도 편들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중립국이 되는 길이다. 현재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이 영세중립국이다. 스웨덴과 핀란드는 러시아 침공에 놀란 2년 전 나토 가입을 선언하기 전까지는 스위스처럼 중립국으로 평가받았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중립국이 된 스웨덴은 2차대전 때 나치 독일의 침공을 모면하는 등 210년간 전쟁이 없었다. 냉전 붕괴 후에는 육군의 90%를 감축할 정도로 외침 걱정 없이 살았지만, 옛이야기가 됐다. ▷압박을 느낀 러시아 국방부는 모스크바 군관구와 레닌그라드 군관구를 14년 만에 부활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러시아 해군에 핵심적인 발트해(海)를 나토 8개국이 완벽하게 둘러싸게 됐다. “발트해가 나토해(海)가 됐다”는 평가도 그럴듯하다. 중국도 불만을 감추지 않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나토 정상회의에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를 초청했다. 나토를 전체주의에 맞서는 지구적 자유진영 안보체제로 확대하려는 것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구상이다. ▷스웨덴 가입 과정은 실리 챙기기 외교의 교과서에 가깝다. 헝가리는 친러-친중 총리가 21개월 동안 가입 동의를 미루며 스웨덴의 애를 태웠다. 44조 원 규모의 유럽연합(EU) 지원금, 러시아의 에너지, 중국의 자본 투자를 모두 챙기려는 속내다. 끝에서 두 번째로 동의해 준 튀르키예도 자국이 원하는 유럽연합 가입을 돕겠다는 약속을 받을 때까지 스웨덴을 괴롭혔다. 미국에서 F-16 전투기 40대 추가 수출 승인을 덤으로 챙겼다. ▷스웨덴 핀란드가 선택한 중립국 지위 포기는 한쪽 편에 서서 뭉쳐야 안심할 수 있는 집단안보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미국 도움 없이 스스로를 지켜야 할 수도 있다”는 유럽의 공포감이 배어 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2%도 많다던 나토 회원국들의 국방비는 ‘2%가 최소치’로 바뀌었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군사 개입에 비판적이던 프랑스가 “우크라이나 파병도 가능하다”고 나설까. 국가 위상과 국익에 걸맞은 군사적 기여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 어쩌면 지구 반대편 우리에게도 머잖아 닥칠 일일 수도 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부 폐지를 전제로 ‘여성가족부의 마지막 장관’을 자처하던 김현숙 장관이 어제 이임식을 치렀다. 지난해 8월 새만금 잼버리 파행으로 사의를 표명한 지 5개월 만이다. 후임 김행 후보자가 하차하는 바람에 장관직 수행 기간은 21개월로 늘어났다. 후임자 지명 없이 차관 대행 체제로 갈 전망이다. 여성가족부는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1호 공약으로 폐지를 공언했던 조직이다. ▷폐지 추진일까, 존속일까. 대통령의 생각은 파악되지 않는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1호 공약을 110대 국정 과제에서 제외시켰다. 공약 후퇴 논란이 생기자 대통령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이냐”고 반문했고, 행정안전부는 몇 개월 뒤 폐지안까지 내놓았다. 요즘 용산 대통령실 기류는 애매하다. 공약으로는 살아있지만, 실행 여부는 총선 후 정국에 달렸다는 말도 들린다. 차관 대행 체제는 적어도 총선 전에는 해소될 것 같지 않다. 이를 놓고 인사청문회 부담으로 총선 이후로 장관 임명을 미룬 것일 뿐이란 해석도 나온다. 어느 경우건 1호 공약인데도, 똑 부러지게 설명하지 않는 것은 어색하다. ▷김 장관의 조용한 사퇴는 국정 얼버무리기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새만금 잼버리는 어느 정부의 누가, 무엇을, 왜 잘못했는지 명확히 가려야 한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국무총리실이 나서서 김현숙 장관, 박보균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잼버리 공동 조직위원장은 물론 집행위원장이던 김관영 전북지사를 상대로 정밀조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종합 조사는 없었다. 대신 감사원 감사가 9월 시작됐고, 아직 감사가 진행 중이라고 하며, 언제 결과가 나올지 감감무소식이다. 4월 총선 이후 ‘아무도 잼버리를 기억 못 할 때’를 골라 슬쩍 공개될 개연성이 없지 않다. ▷정부가 미적거렸다면 국회라도 갈피를 잡았어야 했다. 정기국회가 시작된 9월에 여가부와 문체부 장관이 ‘때맞춰’ 교체됐다. 잼버리 책임을 지닌 장관에게 직접 물을 방법이 사라졌다. 그러다 김행 후보자의 중도 사퇴가 빚어졌고 11월이 되어서야 김현숙 장관 상대로 본격 질문 기회가 왔다. 민주당 의원들은 소리만 높였지 새롭게 밝혀낸 게 없었다. 김 장관도 “이미 사과한 대로다. 사의를 표명했다”는 식으로 넘겼다. ▷여가부는 어떤 운명을 맞을까. 폐지 추진 가능성이 남았다지만 총선 이후라고 법 개정이 순조로울지는 미지수다. 누가 총선 승자일지 모른다. 국민의힘이 이기더라도 지금처럼 민주당이 반대하면 1년쯤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미제(未濟) 상태에서 김 장관은 숭실대 교수직으로 돌아간다. 하필 3월 개강이 코앞인 시점이다. 국무위원이자, 논쟁적 부처 수장인 그의 면직 결정인데, 1학기 강의 일정에 영향받은 건 아니길 바랄 뿐이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