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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공디자인을 혁신하고자 하는 인사들의 모임 ‘공공디자인포럼’이 18일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창립심포지엄을 연다.이날 심포지엄은 ‘한국의 공공디자인,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가 사회를 맡고 박진배 뉴욕 패션공과대(FIT)교수가 ‘시골의 맛: 지방의 경쟁력과 문화’에 대해, 서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가 ‘도시 디자인에 드러난 업역간 장벽과 몰이해’에 대해 발표한다.공공디자인포럼은 학자·소설가·예술인 등 10명(박진배·백영옥·이연숙·이행·전상인·정영록·조병수·조용헌·황주홍·황지우)이 모여 만들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1980년대를 풍미한 소설 ‘F학점의 천재들’을 아시는지? 50대 이상인 분들은 제목이라도 들어봤다는 반응이 대부분. 하지만 이 책의 필자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1951년생 이주희 씨가 살아온 이력에는 결이 다른 두 캐릭터가 공존한다. 20대엔 소설 ‘F학점의 천재들’을 써 선풍을 일으킨 베스트셀러 작가였지만 30대부터 65세까지는 지방자치를 전공한 학자로서 진지한 학문 세계에서 살았다. 이 기간 독서와 글쓰기는 취미생활에 가까웠다.70대를 넘긴 지금, 그는 돌고돌아 작가의 길로 회귀하는 듯하다. 올 초 언더그라운드 작가생활을 청산하고 문예지를 통해 제도권 문단에 들어섰다. 최근에 ‘아수라난장판(도서출판 천우)’이라는 사회 풍자 콩트소설집도 펴냈다. 70대가 된 ‘F학점 천재’의 근황을 들어봤다.‘웃픈’ 시니어 기자 체험담그를 만난 계기는 얼마 전 그가 메일로 보내온 재미있는 콩트 때문이었다. 00구 문화원이 모집하는 ‘시니어기자’에 응모해 석 달 간 겪은 일들을 적었는데, 관에서 ‘시니어’를 내세워 벌이는 사업의 ‘우습지만 슬픈’ 현실이 재치 넘치게 표현돼 있었다.주인공은 67세. 코로나 사태로 답답하던 차에 ‘시니어 기자’ 모집 공고를 보게 된다. 구비서류는 1)지원서 2)이력서 3)경력증명서 4)자기소개서 5)문화예술 관련 기획 콘텐츠 1편(기사 또는 영상) 6)에세이 1편(A4 2장 내외). 꼬박 3일을 뛰어다니며 서류를 모아 제출, 1차 심사에 합격했다. 면접관 5명이 동원된 면접 심사도 통과해 무려 7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3명에 뽑혔다. 기자 위촉식에서 위촉장과 기자증, 명함을 전달받았다. 다만 사무실에 출근하는 것도 아니요, 보수는 월급 대신 원고료를 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행여나 취재지시가 왔을까, 매일같이 메일함을 열어보는 생활 3개월. 드디어 ‘00천 벚꽃 축제를 취재하라’는 지시가 왔다. 축제기간 6일 중 4일을 현장에서 취재해 원고지 5장 남짓 기사를 써서 사무국에 보냈다. 구정 홍보지에 기사가 실린 뒤, 계좌번호를 불러달라는 구청 직원의 연락에 그의 마음은 폭발했다. 원고료는 건당 2만 원, 1000자 이상이면 1만 원 얹어 3만원이라고 했다. 분명 돈 때문에 지원한 건 아니지만, 석 달에 3만 원 원고료라니…. 받지 않는 게 스스로를 대접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메일로 사직서를 보냈다. ‘이 사직서가 이 땅에서 열심히 사는 노인들의 자존심을 지키는 순교자의 저항으로 기록되기를 바랄 뿐’이라며.한국 노인, 봉사자는 있어도 근로자는 없더라―개인적으로 허울좋은 직함 뒤에 숨겨진 전시행정과 관료주의, 당하는 입장에서만 느껴지는 착취의 구조를 적나라하게 표현하신 글을 보고 속이 다 시원하더군요.“그 글로 2021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논픽션부문)을 탔어요. 제 체험담이고요. 무척 설레면서 시작했다가 딱 석달만에 그만뒀습니다. 서울시 25개구가 시니어 기자를 3명씩 뽑았다면 75명인데, 노인 일자리 75개를 창출했다고 통계를 낼 거라 생각하니 더이상 들러리 서고 싶지 않더군요.”―콩트 중에 ‘공화국 노인들은 봉사자는 있어도 근로자로 존재할 수 없다’는 표현이 뼈를 때린다는 느낌이었습니다.“‘시니어’를 내세웠으면 노인을 위한 정책이 돼야 되는데 자기들 실적주의에 치우쳐 있어요. ‘몇 명 취직시켰다’는 것만 강조되죠. 노인을 이용하고 홀대하는 거예요. 뽑는 과정만 보면 엄청난 자리인 것 같잖아요. 면접심사에서는 ‘자치구의 문화예술을 발전시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근엄하게 물어보더군요. 그런 건 문화원장 후보에게 물어봐야죠.” ―사실 시니어들이 겪는 부조리한 경험들은 개개인의 황당하고 억울한 체험으로 끝나고 사회에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합니다.“불평하는 것 자체가 구차하게 생각되는 경우가 많지요. 예컨대 제가 68세때 일인데, 서울시가 운영하는 기관에서 유튜브 제작을 배우려 지원했더니 응시용 3분 동영상을 내라고 하더군요.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 그 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죠. 저도 3분짜리동영상을 만들어 갖고 갔는데 결국 ‘65세 미만만 뽑는다’며 탈락시켰습니다. 웃기는 게 제 당락을 결정하기 위해 하루종일 면접을 봤어요. 그러고는 나이를 이유로 떨어뜨렸죠. 연령제한이 있다면 처음부터 오지 말라고 해야죠.” ―요즘 이른바 ‘신중년’을 고령자(65세)가 되기 직전까지 연령으로 설정해서 그런 것 같아요. “70대는 이제 부르는 데가 없어요. 노인복지관에 가서 밥 먹는 것만 가능하죠. 저는 가끔 자전거 타고 집 근처 노인종합복지관 가서 저보다 나이많은 노인들과 점심 먹고 그곳 프로그램들을 기웃거립니다. 제가 지금도 ‘향부숙’이라는 사설 교육기관에서 공무원들에게 노인복지정책을 강의하고 있거든요. 강의 소재로 많은 참고가 됩니다.”20대에 용돈벌이로 썼던 소설이 엄청난 히트현실세계에서 그는 공무원을 가르치는 교수이면서 본인도 공무원이었다. 하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는 1980년대 초반을 풍미한 소설가였다. 1980년 3월 출간한 ‘F학점의 천재들’ 1편 ‘멋없는 배우들’은 근 1년간 베스트셀러로 기록됐다. 2년 뒤 2편 ‘자기전성시대’를 펴냈다. 당시 ‘F학점의 천재들’ 열풍이 불어 배우 원미경이 주연을 맡은 동명 영화가 개봉됐고 드라마센터에서 동명 연극이 46일간 공연됐다. 관객이 무대와 통로까지 들어찰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고. 몇년 뒤에는 라디오 드라마와 만화도 만들어졌다. 그는 “만화는 원작권을 불법으로 도용했더라”고 씁쓸해했다. ―어떤 책입니까? “1970년대에 유행한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이 미국 법대생들 얘긴데, 제 건 한국 법대생들 얘기예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한 캠퍼스소설이죠. 시작은 주간지 연재였는데 당시 제목은 ‘F학점의 행진곡’이었어요. 제가 고시공부를 하다가 포기하고 군 입대까지 3개월 정도 시간이 남았었어요. 용돈이 너무 궁해 글이라도 팔아보려 쓴 건데, 주간경향에서 받아줬어요. 두어달 연재하다가 입대했는데 군대에서도 계속 썼어요.”―군대 가서도 연재를 했다구요?“보통은 어려운 일인데, 당시는 신문사가 힘이 센 시절이었어요. 훈련소장에게 협조를 요청해 그게 통했던 것 같아요. 논산훈련소에서 매주 원고를 써서 봉투에 넣어 연무대 터미널에 갖다주면 고속버스에 실어서 동대문 터미널에서 경향신문 기자가 받아가서 실은 거죠. 10개월쯤 연재했습니다. 제대 후에 그걸 다시 써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거죠.” ―그게 ‘F학점의 천재들’로 이름을 바꾸고 베스트셀러가 된 거군요.“제 기억에 1편이 48쇄, 2편은 5쇄 찍을 정도로 많이 팔렸어요. 저작권도 명확하지 않던 시대니 정말로 몇부 팔렸는지는 사실 잘 모르죠. 20만부라는 설도 있고 40만부라는 설도 있어요. 1편은 근 1년간 신문 베스트셀러 코너에 올라가 있었어요. 1편 낼 때는 제가 무명인이라 원고료만 받았고 출판사만 돈을 많이 벌었지요. 2편은 책값의 10%를 인세로 받았습니다.”2017년 66세가 된 그는 1,2편의 연장선에서 3편 ‘굿모닝 소울메이트’를 내면서 연작 시리즈를 마무리했다.어머니의 못다한 꿈, 아들의 부채감 소설이 인기를 끈 것과는 별개로 그는 직장에서 일했다. 1980년부터 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 사무국장으로 5년, 지방행정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5년을 일한 뒤 1990년부터 지방행정연수원(현 행정안전부 지장자치인재개발원)에서 전임교수로 20년을 근무했다. 제 9대 한국지방자치학회장과 한국 매니페스토 공동대표도 역임했다. ―소설과는 확연하게 분위기가 다른 인생을 사셨는데요.“밥벌이를 해야 했지요. 처자와 부모님을 부양해야 했거든요. 글 써서는 밥벌이가 안될 거라고 생각했고 큰 미련도 없었어요. 그 흔한 신춘문예에 도전한 적도 없어요.”전남 구례의 농가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부를 잘해 부모님의 기대를 받았다. 중학교 2학년때 서울법대생 삼촌이 사는 친척집으로 혼자 유학 보내졌을 정도. 1년 뒤에는 온 가족이 상경했다. 부모님은 낯선 서울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4남매를 키웠다. “부모님은 무조건 자식이 출세해서 권력자가 되길 바라셨죠. 그런데 저는 서울대 법대를 못 가고 한양대 법대를 장학금 받고 갔어요. 대학에서 데모와 학생회활동, 고시공부를 병행하다보니 고시에 실패했지요.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입학해서도 고시공부를 계속했지만 합격하지 못했어요. 크게 기대했던 부모님께 굉장히 미안했지요.”어머니의 못다한 꿈은 95세가 된 지금도 여전해서, 간혹 그를 ‘서울대 법대 나온 아들’로 착각하신다고 한다.평생 ‘부캐’였던 글쓰기, 인생 3막에서 다시 만나이런 그는 퇴직 뒤 미뤄뒀던 장기 배낭여행을 다니고 다시 글을 쓰고 있다. 퇴직 직후 2년간 중국어를 배운 뒤 30일 이상 장기여행으로만 세 차례 중국 각지를 탐험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도 33일에 걸쳐 완주했다. 산티아고 여행기를 ‘월간 자치발전’에 연재중이고 블로그와 유튜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노년에 좀 자유로운 입장이 되어 창작 활동을 재개한 거군요.“유튜브나 블로그나 제가 가진 지식과 정보를 다른 분들과 공유하고 싶은 겁니다. 저로서는 일종의 사회봉사인 셈이죠.”유튜브 채널 ’F학점 천재 TV‘는 5월 30일 현재 구독자 1940명, 동영상 152개가 올려져 있다.―유튜브 채널명이 ‘F학점 천재들’이네요. “제가 미미한 존재이다보니 평생 어딜 가도 ‘F학점의 천재들’이 절 따라다녔어요. 다들 책은 안 읽었어도 제목은 들어봤으니까. 요즘 그런 거 있잖아요. ‘부캐(副캐)’라고, ‘또 하나의 자신’이죠. 이쪽 세상도 살고 저쪽 세상도 살고. 작가 일이 제게는 그런 것인 듯해요.”―오랜만에 책(아수라난장판)도 내셨네요.“우리나라 정치사회를 풍자한 33개의 콩트집이예요. 요즘 사람들이 긴 글을 안 읽잖아요. 도서출판계가 다 죽게 생겼어요. 콩트 한 편은 한 10분이면 되니 좀 읽어보지 않을까요?”‘노노(老老)케어’의 엄혹한 현실바야흐로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시대. 73세인 그는 95세 동갑인 부모님을 돌보며 100세 시대를 절감한다.“부모님 모두 치매를 앓고 계세요. 특히 어머니는 30년 전 대장암 수술 후유증에 더해 지난해 고관절 골절이 왔어요. 두분 간병을 위해 재택 간병인이나 요양원 종합병원 등등을 전전했죠. 지금은 아버지는 댁에서 혼자 지내시고 어머니는 근교 요양원에 계세요.”어머니에겐 4형제가 각자 월 1회씩 돌아가며 방문한다. 아버지는 서울에 사는 3형제가 이틀에 한 번씩 교대로 가서 식사준비를 해놓고 오지만 불안하기 짝이 없다고. “저도 73세 노인인데, 노인이 노인을 모시려니 꽤나 힘들어요. 하지만 제 어머니도 73세때 시어머니(할머니)가 98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50년간 모셨지요. 정말 100세 시대예요.”―앞으로 계획은….“작가 직함은 별 의미 없어요. 앞으로 책은 산티아고 여행기 한 권, 노인이 삶에 관련된 소설 한권 쓰고 그만둘 거예요. 다만 제 정신이 말짱할 때까지는 지방자치법 조문별 판례해석을 계속할 겁니다. 유튜브건 글쓰기건 제가 가진 것을 사회와 공유하며 치열하게 살고 싶습니다. 백수(白手)로 백수(白壽)하고 싶지는 않아요.”서영아 기자 sya@donga.com}
1884년 여름, 표류 중이던 구명정에서 식인 사건이 일어났다. 구명정에는 선장과 1등 항해사, 갑판원, 잡역부로 일하던 17세 소년 리처드 파커까지 4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통조림 두 개를 챙겨 왔을 뿐, 식수조차 없었다. 표류 19일째, 선원들은 파커를 죽여 그의 피와 살로 연명했다. 24일 만에 구조돼 재판에 넘겨진 이들은 파커가 바닷물을 마셔 매우 아팠고 부양가족이 없는 고아였으며 그를 희생시키지 않았다면 4명 모두 죽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중 2명이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지만 6개월 만에 석방됐다. 마이클 샌델의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에 등장하는 실화다. 우리 사회의 화두인 연금문제 처리 방식과 많은 점에서 닮았다. 무엇보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해도 된다는 결정을 다수인 어른들이 내려버리는 ‘제론토크라시’ 논리가 엿보인다. 노인 인구가 늘면 1인 1표의 민주주의 사회는 그들의 뜻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노인이 청년을 잡아먹는다? 1988년 출범한 우리 연금제도는 당초 예상치 못한 장수화와 출산율 저하로 파탄을 예고하고 있다. 이 문제를 책임지고 고쳐야 할 어른들은 피해 당사자가 될 청소년들은 배제한 채 의견을 모았고, ‘조금 더 내고 많이 더 받는 안’을 채택해 버렸다. 이후로도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시간을 끌수록 미래세대의 부담은 늘어난다. 혹 ‘그래도 된다’는 미필적 고의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한국보다 먼저 고령화가 진행된 일본은 2004년 공적연금을 단일화하고 긴 시간에 걸쳐 야금야금 ‘더 내고 덜 받는’ 방향으로 연금 개혁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연금 납입 기간을 40년에서 5년 더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그럼에도 연금의 세대 간 형평성 논란에 ‘혐로(嫌老) 현상’이 지적되고, 약육강식 대신 ‘노육강식(老肉强食)’, 공해를 빗댄 ‘노해(老害)’ 등의 신조어가 유행할 정도로 여론은 험악하다. 참고로 2004년 일본의 고령화율은 19%로 올해 말 20%에 도달할 것으로 보이는 지금의 한국과 유사하다(출산율은 일본 1.3명, 한국 0.7명).연금 대신 세대별 공제회 도입 주장도 2010년 일본의 젊은 경제학자 모타니 고스케는 저서 ‘디플레의 정체’(한국어판 ‘일본 디플레이션의 진실’)에서 경제와 인구의 관계를 조명해 주목받았다. 개인적으로 흥미 깊었던 점은 그가 기존 연금제도는 존속이 어렵다며 대안으로 연령별 공제회를 제안한 것이다. 지금까지 낸 연금 적립금은 이자를 더해 각자에게 돌려주고, 이 돈으로 동년배끼리 공제회를 만들어 여기서 연금도 받고 상부상조하자는 게 핵심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금은 줄겠지만 사망자가 늘면서 수급자도 줄어들게 된다. 배경에는 일본의 고령세대가 청년세대보다 지금도, 앞으로도 부자라는 점이 깔려 있다. 이 제안은 고령세대가 청년들이 내는 돈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제시하는 ‘신연금 분리안’과 닮은 대목이 있다. 다만 KDI 안은 ‘구연금’ 가입자에게 부족한 연금액을 세금으로 보충해 주려 한다. 한국의 많은 청년들이 국민연금에 대해 “차라리 안 내고 안 받고 싶다”며 피해의식을 보인다고 한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 청년일수록 “그동안 낸 연금을 돌려받을 유일한 길은 해외 이민”이라며 ‘우리를 뜯어먹으려는 노인들로부터 통쾌하게 도망치는 법’을 연구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연 20만∼30만 명씩 태어난 세대가 100만 명 안팎으로 태어난 세대의 노후를 책임질 방법은 없다. 낸 돈이 적은데 많이 받는 마술 같은 셈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대 간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
1948년생 김 현 씨는 현직 ‘직업상담사’다. 어딘가에 메인 몸이 아니니 ‘프리랜서’라는 설명을 붙여야겠다. 자유롭고 퇴직 걱정 없는 대신 늘 일거리가 있는 건 아니란 얘기다. 그는 어떻게 현역 생활을 유지하고 있을까. 8일 서울 종로구 다가치포럼 사회적협동조합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다가치포럼은 시니어들의 재능기부를 위한 비영리단체로 그는 이사를 맡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일자리창출 민간단체인 ‘사회공헌잡정보연구소’의 대표이기도 하다.● 봉사활동 속에서 아이디어 찾기그의 루틴은 요일별로 다르다. 월요일에는 임원 정기모임이 있는 다가치포럼 사무실에 나간다. 요즘 주제는 자립준비 중인 청년들을 도울 방안찾기에 쏠려 있다.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는 성수고등학교 도서관에 가서 4시간 동안 사서로 봉사한다. 격주 토요일 오후에는 한강 시설점검봉사단 활동을 나간다.이런 일상은 세상과 소통하고 직업이란 주제에 대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통로가 된다. 동료들과 만나 움직이고 대화하면서 직업과 관련된 테마를 찾고 각종 공모전에 낼 아이디어를 구상한다. 교육기관에 강의계획안도 수시로 제안하고 있다.“지난해 말 고려대에서 퇴직 예정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했어요. 올해도 상반기와 하반기 두 번에 걸쳐 16시간짜리 강의가 예정돼 있고요. 수도직업전문학교 강의 요청에 대비해 24시간 대기 중이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현역이라는 표현이 틀린 건 아니죠.”● 퇴직 후 ‘직업=인생’에 꽂히다공고를 졸업한 뒤 방송국 기술직으로 일하다 군에 입대했고 베트남전에 1년 간 파병된 탓에 고엽제 후유증을 얻었다. 32세에 결혼과 동시에 고려대 행정직으로 취직해 만 24년 일한 뒤 2004년 명예퇴직했다.“쉴 생각뿐이었어요. 당시엔 ‘인생2모작’ 같은 개념도 없었지요. 하지만 조금 쉬다보니 역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주차단속원, 시설관리인 등 단순노무직으로 몇 년을 일했어요. 그러다가 딸의 해외취업 관련해 찾아간 직업소개소에서 직업상담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딸의 진로를 함께 고민하며 적성과 직업에 대해 연구했고, 발상의 전환이 인생의 선택지를 넓혀준다는 것을 체감했다.“당시 딸은 임용고시를 준비 중이었는데 미국에서 수학과학교사 28만 명이 부족하다는 뉴스를 보게 됐어요. 딸은 임용고시 대신 미국행을 택했지요. 영어실력을 늘리기 위해 2년간 국제협력단(KOICA) 봉사도 다녀왔어요. 딸은 결국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수학교사로 일하다가 9년 전 귀국해 경북 문경의 국제학교 교사로 있어요.”그가 직업에 천착하는 배경에는 평생 여러 직업을 헤맨 경험도 있는 듯하다.“저희가 클 때는 적성 같은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던 시절이었죠. 제가 찾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청년이건 퇴직자건 자신의 적성과 직업을 살리는 방법에 대해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60대는 보물, 70대는 폐물… 그래도 현역으로 남을래요”2009년 61세에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따고 서울 대림역 인근에 직업소개소를 열었다. 2010년에는 직업훈련교사 자격을 취득했고 마침 새로 생긴 고용노동부 ‘취업지원관’ 1호로 등록됐다. 한편으로는 직업 관련 강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여기저기 제안했는데, 전국에서 강의 요청이 물밀듯 들어왔다.“하루 세 곳씩 뛴 시절도 있어요. 새벽에 충남 교육청 가서 오전 내내 강의하고 오후엔 인천 부평, 끝나면 서울의 종로여성인력개발센터로 가는 식이죠.”지난 14년간 그는 직업상담사로서 평생교육원이나 직업전문학교, 대학 등에서 총 5200시간을 강의했다. 이와 별도로 서울시50+지원센터, 사학연금공단, 공무원연금공단, 노사발전재단 등 기관 강의도 300시간에 이른다. 그의 수업을 한번이라도 들은 ‘제자’가 1000여 명, 이중 수백 명이 직업교육기관의 컨설턴트나 상담원으로 일하고 20여 명은 강의를 다닌다.하지만 그에게 들어오는 강의요청은 점차 줄어들었다.“70세가 넘으면서 확 줄더군요. 제가 ‘60대 초반까지는 보물(寶物)이고 65세부터는 고물(古物), 70세 넘으면 폐물(廢物)이더라’고 말하는 이유죠. 고물은 고쳐서라도 쓸 수 있지만 70세 이상은 일을 시킬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지난해부터는 수도직업전문학교 강좌도 끊겼어요. 학교 측이 강좌를 여는 손익분기점이 5명인데 모이지 않는 거죠.”―왜 그렇게 됐을까요?“몇가지 이유가 있어요. 우선 (직업정보사) 소득이 생각보다 적다, 둘째 너무 많이 배출됐다, 셋째 인터넷 등에 무료 강의가 있다…. 설상가상으로 직업전문학교 수강료는 자비 부담 비중이 늘었거든요.”―직업상담사는 이미 레드오션이라고 봐야 할까요.“생계를 걸기는 좀 어렵죠. 다만 자격증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운전면허 딴 사람이 어디서 어떤 차를 모느냐가 각자 다르듯이 말이죠. 이를테면 저는 이 나이에도 여전히 일하고 있잖아요. 체력이 받쳐주는 한, 적어도 80까지는 뛰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녁마다 헬스장에 가서 2시간씩 근력운동합니다.”● 굽히지 않는 도전정신그는 끊임없는 암중모색을 이어간다. 2018년 대통령직속 일자리 위원회가 주최한 대한민국 일자리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신중년의 맞춤형 일자리 직업훈련교사로 재취업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는 한국기술교육대에서 채택돼 2019년 이래 매년 신중년 직업훈련교사 600여 명을 배출하고 있다.―신중년 맞춤형 일자리란….“직장에서 퇴직 예정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이분들의 진로대책이 너무 없다는 걸 발견했어요. 그들이 가진 수십년간의 노하우와 경력이 퇴직과 동시에 무용지물이 되는 건 본인은 물론 사회에도 큰 손실입니다. 그런데 자기 경력을 살려 자격증을 받고 직업전문학교나 평생교육원에서 가르칠 수 있는 길이 있어요.”그가 강력히 추천하는 퇴직자들의 일자리는 직업훈련교사다.“중장년이 퇴직 후 가질 수 있는 가장 멋진 직업 중 하나예요. 어느 직종의 7년 이상 경력자가 한기대 직업능력개발교육원에서 200시간 정도 교육 받으면 자격증이 나와요. 전부 무료예요. 은행 지점장이니 회사원, 교사 출신인 제 제자들이 지금 프리랜서나 평가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그 분들이 절 만나면 평생 점심을 사지요. 하하.”고용노동부는 국민평생직업능력 개발법(구 근로자직업능력개발법)에 따라 직종별 직업능력개발훈련교사를 두도록 돼 있다. 이중 ‘신중년 교직훈련과정’은 고숙련 기술자의 노하우 확산을 목적으로 만 40∼70세의 7년 이상 경력자가 대상이다.“이런 게 있다는 걸 잘 모르는 분이 많아요. 퇴직 예정자들 대상으로 강의하다가 이 얘기를 하면 갑자기 질문이 쏟아지고 분위기가 활기를 띠죠.”자격증을 받으면 직업훈련 포탈인 HRD-Net에 경력을 올려 국가직무능력(NCS) 확인 강사로 등록해둬야 한다. “첫째, 직업훈련교사 자격증을 따고 둘째, NCS등록을 했다면 완벽합니다. 자신의 콘텐츠로 40시간 이상의 강의계획을 만들어 평생교육원이나 직업학교에 제안하세요. 한국에는 평생교육기관이 7000개 있고 이중 4000개가 직업전문학교에요. 국비지원되는 ‘내일배움강좌’도 많죠. 강의안이 채택되면 교사일을 시작할 수 있고 반응이 좋으면 계속할 수 있어요.”● 4시간에 1만 3000원… ‘노인 일자리’의 현실그가 매주 나가는 도서관 사서 자원봉사는 서울시 교육청, 한강 시설점검봉사단은 서울시 소속인데, 4시간 일하면 교통비 조로 1만 3000원을 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달이면 10여 회니 합치면 13만 원 가량 될 것이다.―이런 돈을 받고도 일하는 게 좋으신가요?“시간을 유익하게 활용하니 좋고 일 자체도 의미가 있죠. 인생 후반전도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원봉사를 한 1년 하고 나면 이것저것 느끼는데, 수기 공모전이 많거든요. 그럼 거기 또 도전을 하는 거예요.”―기관 쪽에서는 ‘노인 일자리 창출’ 업적이 되겠죠.“당연하죠. 예산이 나가는데. 경쟁이 치열해요. 고령자들도 각종 세금에 건강보험료, 아파트 관리비 등으로 월 100만 원은 훌쩍 나가요. 이렇게 10만 원이라도 벌어 보태고 싶은 거죠.”―자원봉사라 해도 인건비도 안 되는 액수를 주는 이유는 당초에 필요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고령자들의 처지를 악용하는 걸까요. 서울시 50플러스 지원센터 일자리들도 어떻게 해도 월 30만 원을 넘지 않게 세팅해 놨더라고요.“50플러스센터는 본래 교육하는 곳이지 일자리 만들어주는 곳은 아니예요. 제가 초기 멤버거든요. 처음 교육받았을 때 수강생 90%가 기업 임원 출신들이었고 그 분들이 퇴직후 원하는 자리는 다 강의였어요. 그런데 자리는 그만큼 없으니 경쟁이 치열해지는 거죠.”―고령자 일자리 대부분은 돈을 쓰는(주기 위한) 일자리인 것같습니다. 고령자들의 경륜과 경험, 커리어 등을 살리면서 생산성도 도모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쉽지는 않지요. 하지만 틈새 시장을 찾다보면…”● 고령자가 공모전에 끝없이 도전하는 이유언제부턴가 그는 각종 공모전에 참가해 크고작은 상을 타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고령자라 해도 나이 차별 받지 않고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공모전은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어요. 정부도 문제의식이 있으니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아이디어를 모집하는 거거든요. 어떤 공모전이 있는지 수시로 검색하고 제안서를 만들어 제출한 뒤 합격을 기다리는 게 즐겁습니다. 입상하지 못하면 다시 도전하는 재미가 있죠. 그러다보면 인지능력도 좋아집니다. 시니어들끼리 동아리를 만들어 함께 응모하기도 합니다. 저는 일자리 아이디어에 관한 한 계속 도전할 생각입니다.”● 자립준비 청년들의 멘토 역할도 준비그가 매주 참여하는 다가치포럼에서는 소속 시니어 600여 명을 자립준비 청년들의 멘토로 매칭해주기 위한 작업을 추진 중이다. 여기서도 그는 직업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시설에서 나와 자립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정착금 등 지원금이 나가는데, 문제는 돈만 주지 사전 사후관리가 없어요. 돈을 주기 전에 진로와 직업에 대해 먼저 교육을 시켜줘야 해요. 금융교육도 시켜주면 금상첨화죠. 예컨대 남들이 안 가는 직업에서 성공해 1인자가 되는 것도 가치있다는 걸 가르쳐줘야 해요. 요즘 매스컴에 소개되는 여성 도배공이나 용접 배우는 의사가 좋은 예죠.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남들이 좋다는 게 꼭 좋은 직업은 아니라는 걸 알려줘야죠. 인공지능(AI) 시대에는 사무직 화이트칼라가 제일 위험하고 몸 쓰는 블루칼라가 귀해진다는 얘기도 있잖아요.”궁극에는 자립준비 청년들 내에서 직업상담 교사를 양성해 자신들끼리 상담과 정보교환이 이뤄지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한다.그의 생활담을 들어보면 큰 능력이나 요행수, 배경이 없는 보통사람이 열심히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 돌아보게 된다. 그는 치열하게 나의 일거리를 찾아 도전하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매순간 열심히 살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노년, 이 정도면 풍족하지 않은가.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내 삶의 마감을 내가 정하겠다’는 생각은 섭리를 거스르는 오만일까, 혹은 인간 존엄성을 지키는 기본권일까. 지난해 12월 조력 존엄사 허용을 기대하며 헌법소원에 나선 이명식 씨는 5년간 매일 찾아오는 통증에 고통받고 있다. 통증은 마약성 약물로도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고통을 1∼2%나마 줄이려면 심각한 부작용을 각오하고 약물을 포기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 판결을 기다리는 게 요즘 그의 유일한 버팀목이다. 이런 그가 일본에서 들려온 뉴스에 분개해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2019년 루게릭병을 앓는 여성(당시 51세)을 안락사시킨 의사 오쿠보(46)에게 징역 18년 형이 내려졌다는 소식이다. 그는 ‘세상에 무책임한 사람이 많다’며 분개했다. 딸을 잃은 83세 아버지가 “형이 무겁거나 가벼워도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 제2, 제3의 딸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한 발언에 대해서도 “고통에 힘들어하는 딸에게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마냥 살아있기를 바라느냐”고 성토했다. 또 “환자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죽게 해달라고 돈을 주고 부탁해야 하는 상황에 국가는 뭘 해줬느냐”며 “책임을 못 지면 대책을 세워줘야 한다”고 주장했다.한국인 63%가 조력존엄사 찬성일본 영화 ‘플랜 75’는 정부에 의해 안락사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세상을 그렸는데 많은 이의 우려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배경에는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청년이 받는다”는 각박한 인식이 깔렸다. 이런 제도가 광범위하게 시행된다면 어떤 고령자가 사회적 압박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3월 10일자로 이명식 씨를 다룬 기사가 나간 뒤 리서치앤리서치 노규형 대표가 ‘연명의료결정법 및 조력존엄사법’에 관한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보내왔다. 기사를 보고 일부러 기획했다는 조사는 1000명을 대상으로 성별 연령별 지역별 종교별로 표본을 맞췄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연명의료결정법에 대해 응답자의 65.3%가 찬성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쓴 사람은 12.7%에 불과했으나 62%가 앞으로 쓸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조력존엄사법에 대해서는 62.7%가 찬성, 12.1%가 반대했다. 주목할 점은 응답자의 연령대가 높을수록 찬성률이 높았다는 것이다. 종교 여부는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내 삶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 존엄사 혹은 안락사 관련 논의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격세지감을 느낀다. ‘나는 안락사로 죽고 싶다’고 공표했던 일본 작가 하시다 스가코를 인터뷰했던 2018년 초만 해도 ‘이상한 기자’로 보일까 위축되는 마음이 있었다. 그로부터 불과 5, 6년 한국 사회에서도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존엄사에 찬성하는 여론이 다수를 차지하게 됐다. 고령자가 늘면서 일상과는 멀리 떨어져 있던 죽음을 부쩍 가깝게 체험할 수 있게 된 탓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의 자기 결정권을 허용하는 국가 대부분이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 선진국이고 아시아권은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생과 사에 대한 관점, 개인의 권리에 대한 시각이 동서양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집단주의가 강한 문화권일수록 조력존엄사의 길을 열어놓는다면 쏠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하는 듯하다. 이 대목에서 던져보는 질문. 한국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중 어느 쪽이 강한 사회일까. 조력안락사가 허용된다면 절제된 사용이 가능할까. 최근 보건복지부는 연명의료 중단 시기를 말기 환자에서 암이나 중증 진단을 받은 단계로 앞당기는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고령자 문제를 다뤄 온 입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건 한국 사회가 무척 빨리 변하고, 쏠림도 심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시대 흐름은 ‘개인 존중’의 방향으로 진보해갈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진지한 사회적 논의와 준비가 필요한 이유다.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
2월 초 ‘현대미술의 성지’라 불리는 일본 나오시마(直島)에 다녀왔다. 환경파괴로 버려진 섬을 30여 년에 걸쳐 세계적 관광지로 바꾼 나오시마 스토리는 식자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얘기. 가족여행이었던지라 기사로 쓴다는 건 애초에 고려하지 않았었다.그런데 고향인 충북 보은에 컬처센터를 짓겠다는 김상문 인광그룹 회장을 인터뷰하다보니 나오시마가 자꾸 떠올랐다. 김 회장은 인구감소로 시들어가는 고향에 사재를 들여 컬처센터를 짓고 문화의 힘으로 생기를 불어넣고 싶어했다. 나오시마야말로 한 기업가의 소신있는 투자로 섬의 미래를 바꾼 케이스가 아니던가.쿠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이 맞아주는 선착장나오시마는 일본 중남부 가가와 현에 속한 인구 3300여 명의 작은 섬이다. 여의도와 비슷한 면적(8㎢)으로 자전거를 빌려 이동하는 관광객이 많다. 그 흔한 편의점도 세븐일레븐 딱 한 개뿐. 이 섬에 연간 50만 명이 찾아온단다. 관광객은 물론 지역재생을 공부하려는 건축가, 미술가, 활동가 등 면면은 다양하다. 2010년부터 3년마다 열리는 세토우치국제예술제의 해에는 연인원 100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나오시마와 주변 섬에 몰려온다.나오시마에 도착하면 선착장의 랜드마크가 된 쿠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이 반겨준다. 한적한 자연과 아기자기한 마을이 어우러진 풍경 속에 어딜 가나 외국인들을 마주친다. 고령화율은 33.9%(2020년)로 노인들이 많다. 주택 한쪽을 개조해 직접 구운 쿠키를 파는 집, 살림집에 테이블을 놓은 식당이나 카페 등 애초에 있던 것들을 활용한 작은 가게들이 적지 않았다.예술과 인간사랑에 진심인 기업가의 뚝심나오시마를 비롯한 세토나이카이(内海)의 섬들은 한국의 다도해처럼 일찌감치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용도폐기된 제련소와 폐기물들이 방치된 상태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런 섬에서 1990년대부터 예술 프로젝트가 시작됐다.주도자는 후쿠타케 소이치로(福武總一郎) 베네세 홀딩스 명예고문(79·이하 소이치로 회장). 1992년 그는 오카야마의 출판교육 기업 ‘후쿠타케 서점’의 오너로서 나오시마에 갤러리와 호텔을 겸한 ‘베네세하우스 뮤지엄’을 세웠다. 기업 메세나의 일환이었는데 이후 이곳은 나오시마 예술섬의 출발점이자 중심축이 된다.호텔방에는 TV가 없고 대신 투숙객들만을 위한 갤러리가 있다. 투숙객들은 나오시마의 자연과 바다, 미술작품을 감상하며 몸과 마음을 정화할 수 있었다. 베네세하우스는 요즘이야 반년치 예약으로 꽉꽉 차 있지만 초기에는 파리만 날리는 시기가 꽤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뚝심있게 다음 계획들을 밀어부쳐 1994년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 등 섬 곳곳에 현대미술을 심어나갔다.1995년에는 아예 회사 이름을 베네세(Benesse)’로 바꾸고 증시에 상장했다. 베네세는 라틴어로 ‘잘(Bene) 산다(esse)’는 뚯. 그는 “나오시마 개발의 목적은 ‘베네세(잘 사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라며 “함께 ‘잘 사는’ 사람이 있어야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지론을 편다.2004년에는 세계 최초의 지하미술관인 지추(地中) 미술관이 세워졌다. 자연훼손을 막기 위해 건물을 지하로 배치하고 자연채광을 최대한 살려 설계됐다. 2010년엔 이우환 미술관이 들어섰다. 이 모든 작업은 그와 의기투합한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가 맡았다.나오시마 개발의 테마는 ‘자연과 건축, 예술의 공존’. 소이치로 회장은 이를 통해 외지인들을 끌어들이고, 이들과의 교류 속에서 지역 주민들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고 싶어했다. 실제로 지추 미술관이 건립된 2004년 경부터 나오시마를 찾는 관광객은 연간 10만 명을 넘어서기 시작했다.‘2020년 관광백서’(일본 관광청)에 따르면, 가가와현은 ‘광역자치단체별 외국인 관광객 총증가율(2012-2019년)’이 16배로 전국 평균의 약 4배를 기록했다. 나오시마의 예술 활동이 방문객 유치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밝혀졌다.레지스탕스 마음으로 섬에 투자와세다대 기계공학과를 나온 그는 왜 나오시마에 예술을 심을 생각을 했을까.그는 당초 나오시마에 투자를 시작한 원동력은 ‘분노’였다고 말한다. “오카야마에서 지척이라 청소년국제캠핑장을 만들기 위해 자주 오갔는데, 이 아름다운 곳에 국가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고 방치돼 있다는 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는 것.당시 나오시마와 인근 이누지마(犬島)는 제련소가 내뿜는 유독가스 탓에 온통 잿빛이었고 인근 데시마(豊島)는 유독성 폐기물 불법 투기장이 돼 있었다. 자신은 ‘레지스탕스’처럼 “국가를 상대로 현대미술을 무기로 삼아 싸웠다”는 설명이다.나오시마의 기적은 주변 섬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재단은 2008년 이누지마에 ‘제련소미술관’을 지어 경제성장에 올인해 자존심을 잃은 일본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았다. 2010년 데시마에 들어선 흰색 물방울 모양의 콘크리트 미술관은 ‘산업폐기물의 섬’이란 오명을 벗어난 데시마의 정화와 부활을 상징했다.같은 해에 나오시마를 비롯한 주변 7개 섬(제 2회부터 12개섬)에서 제1회 세토우치 국제예술제(트리엔날레)를 열었다. 소이치로 회장은 매회 ‘종합프로듀서’를 맡아 기획과 재정을 책임지고 있다. 행사는 주민들이 작가들의 작업 과정을 도와주고 작품에 대해 관람객에게 설명하는 도슨트 역할을 하는 등 지역민과 소통하는 축제로 정평이 나 있다. 2010년 1회 때 93만 명, 2013년 2회 때 107만 명이 다녀갔다. 가가와현이 추산하는 경제효과는 제 1회때 111억 엔. 22019년에는 180억 엔, 코로나 사태로 원활치 않았던 2022년에도 103억 엔에 달했다. ‘잘 산다’는 것은섬 프로젝트의 진짜 주인공은 주민들이다. 소이치로 회장은 1986년 부친 데쓰히코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40세까지의 도쿄생활을 급히 마무리하고 오카야마에 돌아와 회사를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유지였던 나오시마 청소년캠핑장 건립을 위해 여러차례 섬을 방문하면서 섬에 매료됐고, 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그곳에 사는 사람들, 특히 노인의 얼굴에 미소를 찾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나오시마 프로젝트’ 착수에 앞서 섬마을 사람들을 위해 중학교와 마을회관, 선박터미널 등을 지었다. 주민설명회만 2000번 이상 열었다고 한다. “예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예술작품을 매개로 외지인들과 소통하며 생기를 얻어가는 섬 주민들을 보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았다.”(소이치로 회장)주민 참여를 통한 활력 찾기는 1998년부터 시작한 ‘이에(家·집) 프로젝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버려진 민가나 절, 신사, 치과, 소금창고 등을 사들여 그들이 살았던 시간과 기억을 담은 작품으로 재창조했다. 집 한 채가 한 작가의 갤러리가 됐다. 인구감소가 멈춘 섬200년 된 고(古)민가를 개조해 거대한 수조를 넣고 250개의 디지털 숫자를 띄운 ‘가도야(角屋)’가 그 1호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색색의 디지털 숫자 LED가 각자의 속도로 1에서 9까지 반짝이는 걸 볼 수 있다. 숫자 LED는 주민 250명에게 관리를 맡겨 각자 속도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7군데에 산재해있는 이 프로젝트를 모두 둘러보기 위해 지도를 들고 나오시마의 작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각자 길을 찾아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외국인들을 마주친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듯이 즐거움에 눈빛이 반짝인다. 어딜 가건 길 안내를 자청하는 할아버지,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할머니, 예쁘게 정돈된 마당이 보이도록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가정집들을 만나게 된다.현장 가이드도 모두 지역 고령자들. 70~80대는 돼 보이는 직원들은 빠릿빠릿하거나 일본인 특유의 친절한 맛은 별로 없지만 충분히 자기 역할을 해내고 있다. 오히려 무심하게 일을 즐기는 모습이라 서로가 편안하다.나오시마에는 숙박시설이 많지 않으므로 방문객들은 대개 아침일찍 배를 타고 들어가 마지막 배로 빠져나온다. 관광객들이 섬에서 1000엔 씩만 소비해도 50만 명이면 연간 5억엔. 나오시마가 조금은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다른 지자체와 달리 나오시마는 인구감소가 거의 멈춰 있다. 인근 쇼도시마(小豆島)는 매년 약 300명이 이주해오고 오기지마(男木島)는 도민 130여 명 중 50여 명이 외지에서 온 이주자다. 이 섬에는 이주민들 덕에 초증학교와 보육소가 다시 문을 열었다. “경제는 문화에 종속돼야 한다”그는 부친으로부터 자본금 6억엔, 매출 593억 엔 규모의 ‘후쿠타케 서점’을 물려받아 연결매출 4000억 엔 규모의 상장기업 베네세로 키워냈다.기업철학은 ‘경제는 문화의 종복이어야 한다’는 것. 기업이 경제활동으로 얻은 부를 경제가 아닌 문화에 투자해 좋은 커뮤니티를 만드는 데 쓰는 것이 인간이 ‘잘 사는’ 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기업은 사주의 이익만이 아니라 사원과 그 가족, 고객, 거래처,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 전체에 대한 공헌(공익)을 중시하는 자본주의로 가야 한다는 것. 그는 이를 ‘공익 자본주의’라 부른다.2004년 개인재산을 기부해 ‘나오시마 후쿠타케 미술관재단’을 만들었다. 나오시마의 개발과예술제 등에 그와 가족은 2억 5000만 달러(약 3500억, 2022년포브스)가 넘는 비용을 내놓았다. 2012년에는 기존 재단들을 통합해 ‘공익재단법인 후쿠타케 재단’으로 하고 베네세 홀딩스 주식 5%와 현금, 보유 작품, 자산 등을 추가로 기부했다. 주식기부는 이후로도 이어져 현재 재단이 보유한 베네세 주식 지분은 8%(약 1억3600만 달러 상당, 2022년 포브스)가 넘는다. 이 주식에서 나오는 배당금이 매년 베네세에서 재단으로 흘러들어간다.한 언론이 인터뷰에서 그에게 “회장 가족과 베네세 그룹이 나오시마에 들인 돈이 1000억 엔(9000억 원) 정도 된다던데”라며 질문하자 소이치로 회장은 “그 정도까진 아닐 걸?”이라고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예술을 지원할 자금을 사수하라”관련 자료들을 찾고 공부하다보니 소이치로 회장의 근황이 더 재미있다. 그는 더 이상 일본에 살지 않는다. 2009년 부부가 뉴질랜드로 이주해 그곳에 정착했다. 자녀가 없어 조카 히데아키(47) 씨를 양자로 들여 후쿠타케 재단을 맡겼다.일본 언론은 1383억 엔(2022년 포브스)의 순자산을 지닌 그가 뉴질랜드로 옮겨간 이유로 ‘절세’를 꼽았다. 뉴질랜드는 상속세나 증여세가 없고 개인소득세 최고세율은 33%(일본 45%)다. 일본의 상속세는 50%. 재단의 예술지원활동은 베네세 주식에서 나오는 배당금으로 유지되는데, 자신이 사망하면 이전 배당금을 유지할 수 없다. 이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 뉴질랜드로 이주해 재단의 ‘지속가능한’ 구조를 완성시켰다는 것이다.여기 더해 최근 베네세는 아예 상장폐지의 길을 택했다. 1월부터 경영진 참여 주식공개매수를 통해 대부분의 주식을 매입하고 3월 4일부로 기업을 비공개로 전환한 것. 지난해 3월 일본 정부가 상장기업들에게 주주가치 확대를 강조하며 주가순자산비율(PBR) 1.0 이하 기업에 불이익을 주겠다는 방침을 내놓은 것과 관련이 있다. 앞으로 행동주의 펀드 등으로부터 ‘기업 이익과 상관없는 예술지원을 그만두라’는 압박이 들어올 가능성을 아예 잘라버리겠다는 것. 일본 언론은 이번 주식공개매수가 80세를 목전에 둔 ‘에술의 패트론’ 소이치로 회장의 최후의 과업이었다고 평가했다.후쿠타케 재단은 2025년 봄 나오시마에 새로운 미술관을 개관한다. 이번에도 안도 다다오가 건축설계를 맡았다. 그로서는 나오시마에서만 10번째 작업이다. 이 발표에 맞춰 소이치로 회장은 “새 미술관은 35년 이상에 걸친 지금까지의 활동의 집대성이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내놓았다. 2025년은 세토우치국제예술제도 열리는 해다. 이번에도 소이치로 회장은 축제의 종합프로듀서를 맡을까. 나오시마=서영아 기자 sya@donga.com}
회사를 떠난 후배가 책 한 권을 썼다며 보내왔다. ‘안 하는 거야 못 하는 거야(희망마루)’라는 제목의 중견기업 회장 일대기다. 중졸 흙수저 출신인 주인공이 책읽는 습관과 포기하지 않는 끈기로 자수성가하기까지의 과정과 인생철학이 담겨 있었다.무엇보다 그의 진심 어린 고향사랑에 마음이 끌렸다. 지방소멸이 화두가 되는 요즘, 외지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고향에 대해 갖는 관심과 사명감은 해당 지역에 큰 힘이 된다. 일본의 작은 섬 나오시마를 세계적인 ‘예술 관광지’로 바꾼 베넷세 그룹 오너가 대표적이다.30대에 고향을 떠나 성공한 뒤 70세가 넘어 평생의 성과를 고향과 나누려고 움직이는 사람. 지난달 25일 광화문에 자리한 인광그룹 서울사무실에서 김상문(72) 회장을 만났다. 꼿꼿한 자세에 겸손한 어조가 몸에 밴 노신사다.200억 컬처센터 지어 고향에 헌정그는 지난해 11월경 주소지를 서울 용산구에서 충북 보은군의 고향집으로 옮겼다. 부모님 산소 근처 작은 한옥을 고쳐 틈날 때마다 찾아가 쉬곤 하는 집이다. 주소를 옮긴 이유가 재미있다. 사업 일부를 정리하면서 부과된 세금 650억 원에 따라붙는 지방세 10%를 고향에 납부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국세는 국세청에 내지만 지방세는 주소지 관할 구청이나 군청에 내게 돼 있어요. 내야 할 지방세가 제몫(65억 원)에 딸의 것까지 더하면 67억 원쯤 됩니다. 돈이 없어 쩔쩔매는 보은군에 요긴할 것 같았습니다. 군의 1년 세수가 300억 남짓이니까요. 최근 최재형 군수를 만나 이 돈은 군민들의 삶의 질에 관련된 것에 써달라는 뜻도 전했어요.”이뿐 아니다. 보은에 땅매입비를 포함해 200여 억 원을 들여 컬처센터를 지어 헌정하기로 하고 지난달 1일 착공식을 마쳤다. 그의 호를 딴 ‘제산(霽山)컬처센터’는 공연장과 갤러리, 도서관과 카페 등이 결합된 복합문화공간이다. 내년 4월쯤 완공되면 인천에 있는 공익재단법인 ‘제산평생학습’ 본부도 여기로 옮겨올 계획. 2018년 설립한 이 재단은 앞으로 그의 활동의 중심이 될 터다.“고향분들은 물론, 외지 분들도 각종 행사에 참여할 정도로 수준높은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어요.”“30년 벌었으니 이제는 잘 써야죠”1991년 인천의 석산 골재재취업으로 시작한 사업은 인천(석산, 건축폐기물, 토양정화)과 당진(레미콘, 아스콘, 레저), 청주(석산, 레미콘), 포항(보강토 블록공장) 등으로 늘어났다. 정직원만 200여 명, 연 매출 1500억 원 규모로 성장했다. 이렇게 확장만 해오던 사업장 중 하나를 처음 정리한 것. 올해부터 그룹명을 IK에서 ‘인광’이라는 초기 사용했던 것으로 바꿨다.“제 시대는 끝나가고, 미래는 다른 분야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입니다. 보은에 컬처센터를 지을 비용을 마련하고 그동안 회사를 믿고 투자해준 주주들, 동고동락한 근속 가족들에게 성과금으로 나눠줄 자금도 필요했습니다. 직원들의 노후를 위해 만든 행복기금 재원도 확충해줘야 했고요.”이제 그의 사업계획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모아놓은 돈을 잘 쓰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다. “올해부터 회사 운영을 후계자들에게 맡겼습니다. 저는 자문이나 해주고 재단 일에 힘을 쏟으려 합니다. 큰 방향은 국민이 책 읽는 데 도움주는 것으로 정했습니다.”중졸, 흙수저가난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환갑을 앞두고 있었고 어머니도 마흔이 다 된 나이였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며 입에 풀칠을 했다. 중학교 수업료를 내지 못해 설움을 겪어야 했고 농고에 진학했지만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다. 스무살에 군대에서 그는 현실에 대해 각성하게 된다. 중졸 학력에 빈손으로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니 공무원시험 합격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보초를 서면서도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군대 내 책장 청소를 자원해 꽂혀 있던 책을 모두 읽었다.“펄벅의 대지, 한국문학선집 등 우량도서가 많았어요. 보초를 서며 책을 읽다가 들켜 두들겨 맞곤 했죠. 어느 날 중대장이 불러 이유를 물었는데 제 처지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쏟아냈어요. 그러자 중대장은 아침 6시부터 12시간씩 말뚝보초를 서라고 하더군요. 보초를 서면서 고교 과정을 독학으로 끝냈고 많은 책을 읽었어요.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뭔가에 손을 대면 끝장을 보는 성품 때문일까. 74년 말 제대한 그는 공무원이 아니라 과외선생이 됐다. 옆집 아주머니가 틈틈이 중3 올라가는 아들의 공부를 봐달라고 부탁한 게 계기였다. 반에서 중간 정도 하던 학생인데 수학이 약했다. 겨울방학동안 초등학교 3학년 산수부터 중2 수학까지 진도를 끝냈다. 이 학생이 3학년 첫 시험에서 학급 3등을 하자 온동네에 난리가 났다. 입소문이 돌면서 제자는 200명 단위로 불어났고 학원을 열게 됐다. 많은 돈을 벌다보니 ‘보은의 돈은 김상문이가 다 가져간다’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1980년 7월 전두환 정권의 과외금지조치로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었다.“당시 오자복 장군이 그 발표를 했어요. 한참 뒤에 제가 그분을 만나게 돼 그때 얘길 했어요. 그분이 ‘아이고 김 사장 내가 그거 안했으면 당신 지금도 시골에서 학원 운영하고 있었잖아’. 하는데 할 말이 없더군요. 하하.”그 뒤 고향을 떠나 일간지 어린이신문 판매에 뛰어들기도 했지만 ‘40세가 되면 내 사업을 하겠다’고 일찌감치 마음먹고 있었다.114번 찾아간 끝에 받아낸 승낙인광그룹 곳곳에는 사훈처럼 ‘114, 학습, find a better way’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특히 ‘114 정신’은 그룹에서 전설처럼 회자된다. 1990년 사업 아이템을 찾던 그는 신도시 건설열기에 골재가 부족하다는 뉴스를 보고 골재 채취업에 관심을 가졌다. 석산을 찾아다니다 인천에서 좋은 산을 발견해 주인을 수소문하니 부천의 모 중견기업 회장이었다. 해당 기업의 관리이사를 찾아가 “산을 빌려주면 채석사업장으로 개발해 돈을 벌어 임대료를 갚겠다”고 간청했다. 외상으로 산을 달라는 뜻이었다.“처음엔 미친놈 취급당하며 쫓겨났죠. 공짜로 남의 산을 달라니, 말이 되나요. 하하.”그는 포기를 몰랐다. 승낙을 얻기 위해 해당 이사의 사무실을 주 2회, 1년 2개월간 113번 찾아갔다. 문전박대도 한계가 있는 법. 이사는 점차 차도 한잔 내주며 얘기를 들어주게 됐다. 그렇게 114번째 찾아간 날, 이사는 김 씨를 회장실로 데리고 가 소개하며 ‘한번 시험삼아 맡겨나 보시자’고 권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두 달 만에 허가증 받아서 레미콘 공장들을 돌아다니니 선수금을 2억, 5억씩 마구 갖다 주는 거예요. 워낙 골재가 부족했거든요. 처음 임대계약액이 13억 2000만 원이었는데 며칠 만에 갖다 드렸어요.”―그때의 이사님을 돌아가실 때까지 돌보셨더군요. “제가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래 갑니다. 회사에 세무조사 나왔던 분이나 제가 투서 때문에 구치소 들어갔을 때 담당교도관이 모두 저희 회사 주주가 됐어요. 이번에 회사 정리하면서 그분들께 배당을 드렸는데 투자액보다 훨씬 높은 정산을 해드렸어요. 해마다 투자금의 10%를 배당해드렸고요.”“제대로 길 찾으려면 책을 읽으세요”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어갈 때마다 그는 책이 자신을 이끌어줬다고 믿는다.“사업하며 고생 많이 했어요. 새벽 6시면 무조건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매주 회의하고 고민하고 함께 으쌰으쌰 하면서 만든 회사예요. 하기야, 조금이라도 성공한 분들 들여다보면 다 고생했지요.”―고생만 하고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하는 분들도….“잘못 고생한 거죠.”―잘 고생하는 것과 잘못 고생하는 것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될까요.“책을 통해 길을 찾았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책을 많이 보면 예지력이랄까 인사이트 파워가 생깁니다. 예컨대 제가 책을 안 봤으면 지하채석을 생각이나 했겠어요.”그는 한국 최초로 지하채석을 시작한 주인공이다. 당시에는 석산에서 산 부분을 다 깎아내면 끝이라고들 여겼다. 석산은 땅 아래로도 이어져 있다. 왜 땅속 돌을 안 꺼낼까, 군청 가서 물어봐도 아무도 대답을 못 했다. 그저 ‘해본 적이 없으니 안된다’고 했다. 요즘은 당연해진 지하채굴 허가를 받기까지 온갖 규제를 풀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당초 돌을 파낸 자리는 양질의 토양으로 복원한다는 조건이 딸려 있었는데 여기서도 그의 왜? 정신이 발동했다. 책들을 찾아보면 나무가 자라는 데는 흙 1m면 충분했다. 몇 년간의 시행착오와 티격태격 끝에 지하 60m까지 석산을 파낸 뒤 깊은 곳은 건축폐기물처리과정에서 나오는 양질의 순환토사로 채우고 그 위에 흙을 덮는 방식으로 표준화된 모델이 만들어졌다. 그는 지금도 이런 채석 방식덕에 수많은 산림자원 훼손을 막았다고 자부한다.“과거 12만 명 북적이던 보은, 인구 5만은 돼야”수구초심(首丘初心)은 고향과 근본을 잊지 않는 마음. 그에게 늘 고향은 어머니 품과 같은 존재였다. 다만 고향과 관련해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은 일이 있다. 2018년 무소속으로 보은군수에 출마했다 고배를 마신 것. 당시 내건 공약은 ‘인구 5만 보은을 만들겠다’. 현재 인구는 3.3만이다.“진심으로 고향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보은 발전을 위한 방향이 제게는 보였거든요. 하지만 정치라는 세계는 그런 진심과는 거리가 멀더군요. 다시는 선출직 출마 같은 건 안 합니다.낙선한 뒤 나라 구석구석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다른 쪽에서 역할을 하라는 뜻이로구나. 그 첫 단추가 제산컬처센터입니다.”70세를 넘기는 2022년 전국 5대 둘레길 총 5035km를 완주했다. 이 여정에는 때로 직원들도 1박2일, 2박3일씩 돌아가며 참여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많은 개인적 성취를 이뤘다. 연간 200권씩 독서하고 짬짬이 써낸 책이 18권이다. 저우언라이, 마오쩌뚱 덩샤오핑의 평전 등 중국과 관련된 책이 많고 최근에는 링컨 평전을 냈다. 간혹 강연도 하는데, 몇년째 성균관대 최고경영자 과정의 피날레 강의를 맡고 있다. 한자능력검정시험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특급’을 따기 위해 일부러 지하철에 서서 공부하며 출퇴근하는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50대 후반이 되어서야 세간에서 말하는 ‘학력’을 채워넣기 시작했다. 한국방송통신대 중어중문과에 진학해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그게 미안해 졸업 때 학교에 발전기금 1000만 원을 기부했다. 같은 전공으로 성균관대에서 석사를 수료했고 현재는 동아시아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직원들 미래 생각한 노후행복기금그의 관심이 ‘확장’에서 ‘정리’로 넘어간 흔적은 2022년 직원들을 위해 만든 ‘노후행복기금’에서도 읽힌다. 국민연금과 퇴직연금만으로는 이들의 노후가 편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직원들에게 ‘60세까지 찾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은 뒤 증권사에 계좌를 만들어 급여를 제외한 모든 돈을 여기에 넣어주기 시작했다. 명절 떡값이나 성과급은 물론, 책을 산 영수증을 제출하면 그 돈도 넣어줬다. 지난해 회사 정리하면서 받은 돈도 연차에 따라 3000~9000만원 씩 넣어줬다. “1년 여 만에 전 직원이 5000만 원 이상 모았고, 1억 원 이상도 상당수 있는 걸로 압니다. 명절 보너스까지 묶여 버리니 처음엔 투덜대던 직원들도 돈이 쌓이는 걸 보며 너무 좋아합니다. 각자 2억 정도 모으면 금융공부를 시켜 ‘돈이 일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좋겠습니다.”재단에서는 그가 출연한 주식에서 나오는 배당금으로 매년 3~5억 원 정도를 벽지 학생들에게 책을 보내주는 데 사용한다. 그는 앞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해 자산 규모를 500억 원 정도로 키울 생각이다.“환경이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물고기잡는 법’을 가르치고 싶은 거죠. 좀더 긴 계획으로는, 걸으면서 느꼈던 단상을 모아서 80세쯤 되면 인생을 정리하는 시집을 한번 내볼까 생각 중이예요.”인생 정리? 무엇을 남길 것인가기업가들은기업을 일굴 때는 뒷일을 생각지 않지만 황혼을 바라볼 때쯤이면 머리가 아파온다. ‘기업 두 번 상속하면 국유화 확정’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큰 세금부담 탓이다. IK의 경우 부동산 과다보유 법인이라며 양도차액의 49.5%가 세금으로 매겨졌다. 하지만 김 회장은 이 세금에 ‘자랑스러운 의무’라며 국가에 환원한다는 의미를 부여했다.그래도 기업을 넘기며 아깝지 않았느냐는 거듭된 질문에 그는 가족 토론방에 자신이 남긴 글을 보여줬다.‘세금납부가 거의 끝났다. 76,574,194,649원. 765억7000만원의 세금을 내는가정이 얼마나 되겠느냐. 지난 세월 아버지의 인생결산이자 자랑스러운 의무다…(중략) …아버지는 큰 짐을 내려놓고 부모님께 감사하며 어제 단잠을 잤다.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아가거라. 아버지’1녀 2남 자녀들은 ‘그 큰 금액을 세금으로 내면서 많은 감정이 교차했지만, 아버지 말씀처럼 고생하시면서 만들어온 결과물을 사회에 환원하는 뜻깊은 세납이었기에 자랑스러웠다’, ‘처음엔 엄청난 금액에 놀라고 평생을 거쳐 일군 재산을 담담히 국가와 사회에 환원하시는 모습에 또 한번 놀랐다’라는 말로 화답했다.“열심히 제 갈 길 걷다보니 어느 새 멀리, 높이 와 있더라구요. 처음엔 돈을 벌려고 사업했지만 나중엔 사업이 좋아서 뛰어다녔는데 정신 차려보니 회사의 가치도 한참 커져 있더군요. 어찌 보면 제가 좀 바보스럽게 산 것 같아요.….”―후회하십니까.“보람을 느끼죠. 보람을 느끼려면 좀 바보스럽고 우직하게 살아야 해요. 너무 얕게 살면 남는 게 별로 없더라고요.”<길> 김상문조국산천 걸어간다좋은 길나쁜 길편한 길힘든 길인생이나 길이나 그게 그거다섞여 있는 것이 세상 이치다모두 그렇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연면적 5만 평을 종일 뛰어다니다보니 저절로 운동이 됩니다. 하루 2만보가 기본이예요.”경기도 의왕시에 자리한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 ‘타임빌라스’. 이정균(60) 씨는 이곳의 전기안전관리 책임자다. 200여 개 매장의 전등과 콘센트는 물론, 야외 가로등까지 그가 이끄는 팀의 소관이다. 쇼핑몰 규모가 크다 보니 온종일 매장들 사이를 안전모와 작업복 차림으로 누비고 다닌다. 지난해 9월 경 그가 2019년 폴리텍대 관련 기사 링크를 보내왔다. 기사에는 그가 ‘대형 은행 전산팀에서 30년간 일한 고액연봉자로, 한국폴리텍대에서 기술을 배우며 인생 2막을 꿈꾸는 사례’로 등장했다. 그 뒤 실제로 2020년 전기기사 자격증을 땄고 전기안전관리자로 변신해 인생 2막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퇴직 1년도 안 돼 이뤄낸 놀라운 변신. 그 비결이 궁금했다. 13일 그의 일터를 찾았다.준비없이 맞은 명예퇴직그는 대학에서 계산통계학을 전공한 뒤 1989년 한일은행 전산부에 입사해 금융전산 개발의 한 우물을 팠다. 그 동안 은행 간판은 ‘한일’에서 ‘한빛’, ‘우리’로 바뀌었다. 최종 소속은 우리은행에서 IT 부분이 분사된 우리에프아이에스(WFIS)였다.2019년 3월말, 55세로 명예퇴직할 때 그의 인생계획에는 오로지 ‘귀향’만 있었다. 고향에 내려가 홀로 계신 어머니와 살며 옛 친구들과 어울리고 흙냄새도 맡는 전원생활을 꿈꿨다. 퇴직 바로 다음날 고향인 전남 영암으로 내려갔지만 행복은 잠시, 두달도 안 돼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왔다.“어머니가 제 눈치를 보신다는 것. 제가 어머니 자유를 방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죠. 어머니는 시골생활을 하며 제가 망가질 것을 염려하셨고 절 내쫓다시피 올려보내셨지요.”퇴직을 전후해 많은 사람이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면서도 막막해한다. 귀향 계획이 틀어졌을 때부터 그에게도 막막함이 찾아왔다. 부동산 공부를 한다면서 중개업소를 기웃거렸고 아파트 가격동향 조사를 한다며 등산복 차림으로 경기도 일대를 돌아다니기도 했다.폴리텍과의 만남그 무렵 전철에서 성남 폴리텍대의 ‘신중년특화과정’ 모집공고를 보게 됐다. 만 40~65세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직업훈련을 통해 자격증 취득과 재취업을 지원해준다고 했다. 무작정 성남시청을 찾아갔다. 6월부터 3개월간 전기기술 교육을 받는 야간반에 들어갔는데, ‘신세계’가 열린 느낌이었다.“공부와 실습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새로운 인간관계도 즐거웠습니다. 25명이 함께 수강했는데 30대부터 60대까지, 해외영업사원, 치킨집 사장님, 시립교향악단원, 택배기사 등 전직이 다양했어요. 과거에 무슨 일을 했건, 새 직업을 얻는다는 목표를 향해 함께 달렸죠. 직장시절엔 몰랐던 인간적인 감정을 느낀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해 12월까지 △승강기 기능사 △소방안전관리자(1급) △전기기능사의 3가지 자격증을 땄다. 교육이 끝나고 동기들은 하나둘 새 직장을 찾아 떠났지만 그는 좀더 난이도가 높은 전기기사 자격증에 도전하기로 했다. 선배들 사이에서 ‘따놓으면 평생 먹고 산다’고 불리는 법정자격증이다. 1년에 4번 시험이 있는데 합격률은 8~30%대 정도다. 공부를 하면서 뒤늦게 자신에 대해 재발견하고 당연히 여겼던 것들에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예컨대 난생처음 이과를 전공하길 잘했다고 생각했고 무심코 따놓은 자격증이 30여 년 만에 효자노릇을 하기도 했다. “전기기사는 전공자가 아니면 따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그나마 저는 이과계여서 내용을 이해하기 쉬웠어요. 대학때(1986년) 따놓은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은 평생 쓸모가 없었는데 전기기사 응시자격을 갖추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넓은 세상에 나와보니 자격증이 자신을 증명해주는 수호신이더군요.”“코로나마저 내 공부를 도와줬다”이 무렵 첫 취직도 했다. 당시 개원을 준비하던 용인 세브란스 병원의 전기설비관리직. 시설관리 하청업체 소속으로 근무하는 조건이다. 처음 면접에서는 보기좋게 탈락했다.“나이는 많은데 경력이 전혀 없으니까요. 그런데 며칠 뒤 같은 구인광고가 또 뜨더군요. 성남 ‘고용복지 플러스센터’ 직원이 사정을 듣더니 회사 측에 전화를 해주셨어요. 그 덕에 시설관리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경력이 없다보니 남들이 기피하는 일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1년 반 동안 야간근무를 전담하며 경험을 쌓았다. 전기기사 시험을 준비하던 그에게는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 고마운 일자리였다. “아침에 퇴근해서 밥 먹고 4시간 정도 자고 나면 오후 1시예요. 그때부터 밤 9시까지 공부할 수 있었죠. 사람 만나기 어려운 코로나 시대라는 점도 공부에는 도움이 됐죠. 게다가 선임근무자가 전기기술사 공부를 하는 분이어서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2020년 12월 31일 마침내 전기기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듬해 8월엔 집과 가까운 현재의 직장으로 옮겼다. 자격증과 경력 덕에 취직은 쉬웠다. 15개월 정도 야간근무를 하다가 선임이 이직하면서 그가 주간 선임이 됐고 이달부터는 전기팀장까지 맡았다.그는 지금 자신의 일에 만족한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재미있게 일하고 있고, 주변 평가도 좋다고 느낀단다.정년이 따로 없으니 일만 제대로 한다면 퇴직 걱정도 없다. 연 4000만원대 급여가 넉넉하지는 않지만 크게 부족하지도 않다. 4대보험도 보장된다.“저처럼 이미 퇴직했고 자녀교육이 끝나 큰 돈 쓸 일 없는 경우 딱 좋은 직장이죠. 많이 움직이니 건강에도 좋아요. 예전 직장에서는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 하루걸러 직원들과 회식하고 소통하려 애썼어요. 부하직원들도 싫었을 텐데, 실은 저도 스트레스였죠. 하하.”‘중요한 일’ 자부심 강하지만 사회적 대우 아쉬워 시설관리직은 음지에서 일하지만 건물을 관리하고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화재를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만 그 중요성 만큼 대우받지는 못한다고 느낀다. “아무리 취업난이라고 해도 청년들이 이 직업은 기피하죠. 사회의 시선이나 대우가 좋지 않으니까요. 급여체계도 계약직처럼 돼 있어 호봉이 오르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제가 폴리텍대를 다니면서 행복해하고, 일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했어요. 하지만 시설관리 일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어요. 제가 아파트단지 전기팀장으로 자리를 옮기려 했는데 그것도 반대했습니다. 아파트 경비원이나 시설관리자들이 주민들에게 갑질 당하는 류의 뉴스들 때문에요. 월급은 더 받을 텐데, 못 옮기고 있어요.”그의 말에 따르면 시설관리는 자격증이 요구되다보니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하기도 어렵고 대형건물이 늘어나는 데 따라 일손이 부족해지면 보상 체계도 나아질 것이라고 한다. 쇼핑몰 내 카페에서 커피를 사는 사이 손님용 좌석에 앉았던 그는, “이곳에서 2021년부터 일했지만 손님석에 앉아보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사실 시설 안전관리는 무대 뒤 작업과 유사할 것이다. 커피 매장의 소음을 피해 그는 애완동물 동반자들의 식사용으로 설치된 무료 테이블로 안내했다. 전 직장에서 입은 마음의 상처코딩 열풍이 불고 ‘문송(문과 출신이라 죄송)하다’가 인사가 되는 시대다. 30여 년 간 전산직에서 일했고 프로그램 개발도 직접 해온 그가 전공 쪽에서 길을 찾지 않는 이유는 뭘까.“가장 큰 이유는 경력 단절이죠. 제가 부장만 10년을 했어요. 사원 대리 과장 시절에는 프로그래밍을 직접 했고 누구보다 잘 할 자신이 있었죠. 하지만 부부장, 부장이 되면서 실무에서 멀어지고 프로그래밍에 대한 감이 떨어졌어요. 개인적으로 전산업종을 아예 떠나겠다고 결심한 계기도 좀 있습니다.”전 직장 마지막 프로젝트인 은행 차세대시스템 구축 과정에서 완료시기가 약간 늦어졌는데 그 책임을 혼자 떠맡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씁쓸한 경험을 했다.“예산 3000억 원, 준비기간 3년이 넘는 큰 프로젝트였어요. 부장급인 저 혼자 막판에 프로젝트에서 배제됐어요. 더 큰 책임이 있는 분들은 끝까지 남아 프로젝트 성공에 대한 축하를 받았지만, 저는 뒷방으로 물러났죠. 제게는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다시는 프로그램을 하고 싶지도, 그쪽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게 된 거죠.”직장생활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는 의외로 많다. 조직에서는 위로 올라갈수록 ‘책임’의 무게도 커지지만 뭔가 삐끗했을 때의 희생양은 권력과 책임의 오묘한 밀당 속에 정해지게 마련이다.“두드려라, 그러면…”인생 2막을 잘 살아내는 분들 중에는 높은 자존감의 소유자가 많다. 남들의 이목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다. 자존감이 높으니 어쩌다 남의 도움을 받게 되면 오히려 선의로 받아들이고 적극 임한다. 이런 열린 자세와 적극적 노력이 새로운 기회를 열어준다.이 씨가 퇴직 후 빠른 시간에 새 생활의 리듬을 찾기까지, 그는 열린 마음으로 폴리텍 수강을 시작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배웠다. 취직 면접에서 탈락하자 고용복지 센터 직원의 도움을 얻기도 했고 직장 선임자의 도움을 공부에 십분 활용했다.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야간근무 전담이 됐지만 오히려 자격증 공부의 기회로 삼았다.“별 기대가 없었는데 정부나 지자체가 의외로 많은 도움을 주더군요. 결국 본인이 얼마나 열린 자세로 적극적으로 임하느냐에 달린 것 같아요. 막막해하는 퇴직자들에게도, 취업 때문에 힘든 청년들에게도 이런 길도 있다고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최근 문과출신으로 30대에 무직이던 친구 조카가 제 조언에 따라 자격증을 따고 취직했어요. 친구가 고맙다며 커피를 사는데, 보람이 느껴지더군요.”이 씨가 수료한 한국폴리텍 ‘신중년특화과정’은 2018년 개설돼 매년 60% 안팎의 취업률을 기록 중이다. 지난해 상반기 통계를 보면 취업률은 62.8%였다. 훈련생은 50대가 40.5%로 가장 많고 60대 35.8%, 40대가 23.7%다. 다만 취업률은 40대(73.9%), 50대(64.7%), 60대(55.8%) 순으로 아무래도 젊을수록 높다. 지난해 기준 전국 35개 캠퍼스에서 2500명을 교육했다. 교육비와 실습재료비 등이 전액 무료이고 일정액의 훈련수당과 교통비를 지급한다.의왕=서영아 기자 sya@donga.com}
한국에서 죽음의 자기결정권은 어디까지 인정될까. 현재로서는 2016년 제정돼 2018년부터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임종 단계에 연명치료를 받지 않는 것’까지다. 본인이 사전에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 놓거나 본인의 의식이 없다면 가족이 합의해 결정할 수 있다. 주로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현대의학의 힘을 빈 연명과정을 피할 수 있다. 단, 통증관리와 영양공급은 계속된다.임종과정을 인위적으로 ‘늘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극적 안락사’라고도 불린다. 만약 임종 단계는 아닌 불치병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 회복될 가망 없이 통증이 이어진다면?죽음의 자기결정권 보장해달라제주도에 사는 전직 공무원 이명식(63) 씨가 이런 경우다. 그는 원인을 알 수 없고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척수염’ 진단을 받고 5년째 하반신 마비와 극심한 환상통에 시달리고 있다.이런 그가 지난해 12월 조력 존엄사를 입법하지 않은 현 상태는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청구의 내용은 1)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에 조력 존엄사를 허용하는 구체적 입법을 마련하지 않은 잘못에 대한 청구 2) 자살관여죄를 규정한 헌법 조항의 위헌여부에 대한 청구의 2가지. 존엄사를 원하는 당사자와 가족의 기본권이 침해되고 있는데도 국가가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행복추구권 자기결정권 자기운명결정권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이다.이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1월 16일 ‘심판회부’를 결정함으로써 조력 존엄사에 대한 헌법소원재판이 시작됐다. 심판회부는 정식으로 심판하겠다는 뜻인데, 2017년과 2018년에는 유사한 헌법소원 심판청구가 모두 각하됐었다.<현행 연명의료 중단과 의사 조력 존엄사 개념 비교>연명의료 중단의사조력 존엄사관련법연명의료결정법으로 허용법적 근거 없어 불허조건사망 임박, 회복 불능극심한 고통, 회복 불능이행수단인공호흡기, 심폐소생술 등 연명의료 중단사망을 유도하는 약물 처방대상의식불명 환자 포함의식불명 환자 미포함환상통 시달리는 척수염 환자이명식 씨는 제주도에서 딸(36)과 함께 산다. 5년 전 명예퇴직 뒤 제주도에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그런데 피부과에서 알레르기 치료를 위한 주사를 맞고는 고열과 두통에 시달렸다. 며칠 뒤 대학병원 응급실에 갈 때쯤에는 ‘뇌 속을 면도날로 베어내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 뒤 40여 일 간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처참했다. 가슴 아래가 마비됐고 척수염이란 진단이 어렵사리 내려졌다. 척수염은 척수 주변 신경섬유가 손상돼 신경통증, 마비, 감각 이상을 유발한다. 그의 경우 바이러스가 척수에 침투해 염증을 일으켰고 신경을 교란시키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병원 10여 군데를 돌았지만 원인도 모르고 치료에도 진척은 없었다.“차라리 말기암 환자였다면…”지난달 26일 전화 인터뷰에 응한 이명식 씨는 대상을 알 수 없는 피해의식과 분노를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히는 건 견딜 수 없는 통증. 수시로 찾아오는 통증은 마약성 약물로도 제어가 되지 않는다.“다리는 마비가 됐는데 고장난 신경이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통증을 만들어냅니다. 통증이 심하면 마구 화가 나요. 그런데 화낼 곳이 없고 화를 내는 내 모습도 추접해보이고….”그의 표현에 따르면 다리를 프레스기로 압박하거나 꼬아서 꼬집는 듯한 느낌이 수시로 엄습해온다. 다리 아래는 차갑고 저려 난로불을 쬐고 있는데 머리쪽은 열이 몰려 땀을 뻘뻘 흘린다. 마약성 진통제 패치를 붙이고 지내며 오후에야 두어시간 정신을 차리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통증을 호소하면 병원에 입원하라고들 해요. 원내에서는 더 강한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때뿐, 어느 병원이건 3개월 지나면 퇴원하라고 합니다. 차라리 말기암 환자였다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했어요. 치료라도 할 수 있고, 치료가 안 되면 끝이라도 있으니. 끝없는 통증에 짓눌려 매일을 견뎌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디그니타스 등 해외 조력 단체 4군데에 등록그의 딸이 수발을 도맡고 있다. 배변활동이 불가능한 아버지를 위해 매일 항문에 손을 집어넣어 변을 꺼내야 한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의 블로그에 남겨진 기록을 훑어보니 보통 사람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 가득했다. 감각이 없으니 저온화상을 입어 발뒤꿈치와 새끼발가락을 잘라내거나 소변줄에서 일어난 감염 탓에 급성신우신염을 앓거나 욕창으로 고통받는 등 여기저기 몸은 부서져간다. 한시도 딸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만큼 딸에게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더욱 그를 괴롭힌다. 수차례 극단적 생각을 했지만 가족에게 흉한 모습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스위스에 ‘디그니타스’ 등 존엄사를 도와주는 단체가 있다는 걸 알고 한동안 희망을 품었지만, 결국 포기했다. 혼자 거동을 못하니 누군가 스위스까지 데려가줘야 하는데 형법상 자살방조죄가 된다.이 씨가 한국존엄사협회 최다혜 회장에게 디그니타스에 대한 문의전화를 하면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료변론을 자처한 변호사단체 ‘착한법만드는사람들’과 연결됐고 그는 헌법소원에 나서기로 했다. 헌법소원에는 그의 딸도 청구인으로 이름을 올렸다.조력 존엄사 인정하는 국가 갈수록 늘어의사의 도움으로 존엄한 죽음을 얻는 조력 존엄사 혹은 안락사를 합법화하는 국가는 갈수록 늘고 있다.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캐나다, 뉴질랜드, 미국과 호주의 일부 주(州)들에서 조력사망을 허용하고 있다. 지난해 프랑스의 유명배우 알랭 들롱(89)이 조력사망으로 생을 마감하겠다고 밝혔고 최근에는 네덜란드의 전 총리 부부가 93세를 일기로 함께 존엄사를 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2002년 세계 처음으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네덜란드에선 △환자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치료의 가망이 없고 △죽고 싶다는 의지를 명확히 밝히는 등 6가지 기준이 충족될 경우 안락사를 시행하고 있다. 이렇게 안락사를 택한 사람이 2022년 8720명에 이른다.일본의 저널리스트 미야시타 요이치의 저서 ‘안락사를 이루기까지(쇼가쿠칸)’에는 네덜란드인 시프 피텔스마 씨(2013년 11월 79세로 사망)의 그날이 소개돼 있다. 피텔스마 씨는 자녀와 손자 26명이 모인 거실에서 일일이 포옹과 키스를 나눈 뒤 아내가 불러주는 추억의 노래를 들으며 의사가 건네준 컵에 든 약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제 잠이 오네’라며 앉아있던 소파에 모로 누웠다. 그는 사망 13년 전 심근경색, 4년 전 피부암을 이겨냈지만 10개월 전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자 안락사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의 어머니가 오랜 기간 알츠하이머를 앓았는데 같은 길을 걷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굳었다. 이를 계기로 네덜란드에서는 치매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해당되느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헌재 심판, 이번에는 다를까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는 “조력 존엄사의 전세계적 확산은 21세기 들어 일어난 현상”이라며 “워낙 확산세가 빨라 한국에서도 오래지 않아 현실이 될 것같다”고 말했다.이명식 씨의 소송대리인으로 공개변론을 맡은 김현 착한법만드는 사람들 대표(법무법인 세창 변호사)도 “이번 헌법심판은 과거와는 다를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2009년 존엄사 허용 여부를 다룬 이른바 ‘김할머니 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이미 ‘존엄사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임을 인정한 바 있다. 다만 ‘이는 법학 의학만이 아니고 종교 윤리 철학까지 연결되는 중대한 문제이므로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존엄사 관련한 현행 법 외의 입법의무는 없다’고 결정했다.김대표는 “그로부터 15년이 흐르면서 조력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성숙 단계에 도달했다”면서 “관련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80% 이상이 찬성하고 있다”고 강조했다.앞서 2022년 국회에서 안규백 의원의 발의로 조력 존엄사법이 발의됐으나 진척이 없었다.최다혜 존엄사협회 회장은 “죽음을 앞둔 환자가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헌법 가치를 수호하는 일”이라고 말한다.하지만 선진국가들과 달리 노년의 의료와 돌봄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은 한국에서 조력 존엄사가 시행된다면 ‘너무 쉬운 탈출구’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본인의 의지보다 사회의 압력, 가족의 바람 등에 떠밀려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것. 치료받고 돌봄받지 못해 고육책으로 존엄사를 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야말로 비극이다. 최 회장은 “그래서 사회보장제도나 의료서비스 확대와 조력존엄사 합법화가 병행돼야 한다”고 말한다.“죽을 권리 인정받은 순간, 살아갈 의지 생겨나”이 씨는 요즘 조력 존엄사가 가능하도록 세상을 바꾸는데 힘을 보탠다는 일념으로 힘든 나날을 버티고 있다. 그에게 존엄사가 인정된다면 즉각 실행에 옮길 계획인지 물었다.“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내 생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고 싶다는 거죠. 선택지를 하나 더 갖게 되면 그때 가봐야죠. 통증만 사라진다면….”이는 일본에서 안락사 문제를 제기했던 작가 하시다 스가코 씨(2021년 작고)가 생전 인터뷰에서 말한 심경과도 같다. “선택의 권리가 내게 있음을 확인하는 것 자체가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긍정이자 마지막까지 더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북돋는 일”이라는 것. 스위스 디그니타스는 등록 조건이 무척 까다롭지만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회원이 된 뒤 안락사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3%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고로 장애를 입은 데다 잠시도 그치지 않는 통증을 얻은 한 젊은이는 가까스로 안락사 허가를 받아낸 뒤 오히려 자신의 상황을 긍정하고 장애인 올림픽 출전 준비를 시작했다.선택권을 얻더라도 선택의 자유는 여전히 각자에게 있다. 굳이 낯선 스위스 땅까지 찾아가지 않더라도, 때가 되면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가족의 축복과 인사를 받으며 아름답게 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믿음이 오히려 살아갈 힘을 줄 수도 있다.위의 책 ‘안락사를 이루기까지’에 등장한 사례. 말기암 환자였던 네덜란드인 윌 피서 씨(2012년 65세로 사망)는 세상을 뜨기로 정한 날 자택에서 가든파티를 열었다. 왁자지껄하게 파티가 무르익던 무렵, 그는 친지와 친구들에게 이런 인사를 남기고 의사와 가족이 기다리는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럼 여러분, 저는 지금부터 침대로 가서 죽겠습니다. 끝까지 파티를 즐겨주세요. 감사합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은퇴후 세계 여행 떠난 아부지.’ 이런 특이한 제목의 유튜브 사이트를 지인이 보내왔을 때 잠시 망설였다. 지면에 유튜버를 다룰 경우 ‘홍보해준다’는 오해를 살 수 있어서다. 하지만 전직 공무원 최수길 씨(64)의 ‘수길따라(sugilway) TV’는 조금 달라 보였다. 상업성과 거리가 있었고 퇴직후 삶을 고민하는 시니어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듯했다. 무엇보다 그가 내세우는 ‘가슴 떨릴 때 떠나라, 다리 떨리면 못 간다’는 캐치프레이즈가 강렬했다.2월초 방글라데시를 여행 중이던 그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2021년 6월 튀르키예 여행 때부터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지내고 있다. 16일 그가 사는 춘천으로 향했다.어쩌다 유튜버“퇴직하면 바로 떠나려 했는데, 코로나19 상황하고 겹쳐 움직일 수 없었죠. 튀르키예가 가장 먼저 관광객에 대한 방역을 완화했어요. 여행하며 찍은 동영상을 가족에게 보냈는데 딸이 재미있다며 유튜브에 올리자고 하더군요.”그가 40일간 찍어온 영상들은 ‘60대 아빠의 나홀로 터키여행’이란 제목으로 약 40편이 올라갔다.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몇년간 100명도 안되던 구독자가 하루 700~800명씩 늘었고, 15편 정도 올렸을 때 1만명을 돌파했다. -반응이 좋은 이유는 뭐라고 보세요?“코로나19 때문에 다들 해외에 못 나가니까 대리 만족이 됐던 것 같아요. 또 댓글을 보면 ‘자신이 여행하는 느낌’이란 표현이 많아요. 제가 해외에서도 주로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그분들과의 소소한 대화나 일상을 그대로 전하다 보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같아요.”당시 튀르키예는 일상에서 마스크도 쓰지 않았다. 튀르키예편 마지막회에는 이런 환경에서 40일간 생활하다 귀국한 그가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한국의 엄격한 방역 시스템에 당혹해하는 모습도 기록돼 있다. 이후 ‘은퇴 후 따듯한 태국에서 겨울나기’를 거쳐 스페인과 포르투갈, 베트남, 몽골에 다녀왔다. 필리핀에서는 어학연수를 겸해 석 달 간 체류했고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 키르키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코카서스 3국(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을 각기 묶어서 가기도 했다. 그렇게 이번의 방글라데시까지 17개국을 돌았다.여행은 에피소드와 해프닝의 연속으로, 그가 겪는 좌충우돌이 가감없이 등장한다. 이방인에게 친절한 현지인들의 모습도 빠지지 않았다. 언어가 부족한 부분은 웃는 얼굴과 바디 랭귀지로 메웠고 때로는 아마추어 성악가를 뛰어넘는 노래실력으로 현지인들과 교감을 이어갔다. 수길따라TV는 구독자 13.4만 명, 누적 조회수 2037만회를 기록 중이다(15일 현재). 구독자의 85%가 45~65세 층이다.가난, 그리고 야학 선생님과의 인연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난 그는 강원도 교육청에서 40년을 근무하고 2020년 퇴직했다. 최종직함은 도 교육청 행정국장. 직전에는 원주 교육문화관 관장을 지냈다. 지방직 공무원으로서는 최고위직인 3급 부이사관까지 올랐다.그런데 그의 학력이 눈에 띄었다. 중고 모두 검정고시다. “무척 가난했어요. 혼자 월남했던 아버지는 1907생이셨고 저희가 자랄 무렵에는 이미 연로해 일을 못하셨어요. 남에서 만나 결혼한 어머니는 6.25때 부상으로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셨죠. 저희 4남매의 정규학력은 국민학교 졸업으로 끝났어요.”신문팔이나 ‘아이스케키’ 장사 등으로 가계를 도우며 야학에서 공부했다. “7사단 군인교회에서 저녁에 중학교 과정을 가르쳐줬어요. 공부만이 아니라 인생 멘토로 형님처럼 도와줬어요. 부대에서 짬밥을 담아와 나눠주기도 하고 치약 비누 등을 주기도 했죠.” 이런 군인 중 고려대 법대생으로 군복무 중이던 차석용 전 LG생활건강 부회장(현 휴젤 대표)과의 인연이 재미있다. 차 대표는 그를 눈여겨보고 계속 관심을 보이며 격려해줬다. “춘천의 한 명문고에 장학생으로 합격해 학비는 해결됐는데 기숙사비를 낼 수가 없었어요. 한동안 비슷한 처지 친구 자취집에서 살며 학교에 다녔는데 끼니를 때울 수가 없었죠. 어느날 기숙사 식당에서 몰래 밥을 먹으려다 들켜 엄청나게 맞고 퇴학처분 당했어요. 죄명은 ‘무단도식(盜食)’이었네요.”삼청교육대 갈 뻔했던 말단 공무원1977년, 인권도 복지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 살아온 이야기는 당시 시대상황까지 겹쳐 고난의 연속이다. 한동안 제주도에 가서 일본 밀항을 꿈꾸기도 했다.“그 무렵 이미 제대해 서울로 간 차석용 선생님이 ‘서울로 와서 우리 집에서 지내며 공부하라’고 권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고집이 좀 있어요.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하고는 올라와서 고졸검정고시를 치르고 입주과외를 했어요. 드디어 좀 살 만해졌는데 전두환 정부가 과외 금지 조치를 내놨죠.”그해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1980년 9월 지방공무원으로 임용됐지만 부정투표에 항의했다가 이듬해 5월 의원면직 당했다. “삼청교육대 갈지, 입 다물고 사표쓸지 선택하라고 하더군요. 집에 돌아가 삼청교육대 가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결사반대하셨어요. 당시 집근처에 교육장이 있었는데 교육이라는 미명하게 잔혹한 폭력이 행해지는 걸 아신 거죠.”그렇게 잘린 뒤 불과 석달 뒤인 8월, 이번에는 교육행정 공무원 시험에 다시 합격했다. “1~2년 일하고 돈을 모아 대학에 가려 했는데, 결혼하고 아이들 생기고 부모님 부양하고 하느라 그냥 눌러앉게 됐네요.”그는 50세에 한양사이버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야학선생님과의 인연도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에 미국으로 유학간 차 씨는 10여 년 뒤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귀국해서 가장 먼저 생각난 게 그였다며. 2년전 그의 딸 결혼식에는 화환과 축의금을 보내왔다. ‘관광’ 아닌 ‘여행’을 하시라―자유여행을 가는 이유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관광을 가요. 관광이란 말 그대로 ‘보는’ 거잖아요. 가이드 안내로 다니며 보는, ‘왔노라 봤노라 찍었노라’죠. 여행은 그 나라의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그 나라 사람들을 만나 얘기 나누고 그 나라 음식을 직접 먹어보는 체험과 교류를 하는 거죠. 여기 더해 가난한 사람 만나면 쌀 한자루라도 채워주고 떠나는 나눔이 있다면 더 좋겠죠.”―퇴직자들은 관광보다는 여행을 하시라는 거군요.“이제는 그럴만한 시간 여유가 충분히 있으니까요. 지난번 미얀마 영상에 제가 주민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장면이 있는데, 왜 돈을 나눠주냐고 뭐라 하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현장을 보지 못하셔서 그래요. 그 나라는 지금 절대빈곤이라 한 끼 먹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현장을 보면 저보다 더 그런 마음이 생기실 거예요.”미얀마에서 한 끼를 해결할 때 1000짯(약 600원) 정도가 필요하다. 그가 나눠준 돈이 1000짯 지폐였다. 그것 외에 달리 그분들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고.“가난은 창피한 것이 아니예요. 숨길 일도 아니죠. 다만 어린 시절 가난이 꿈을 빼앗는다면 그건 문제예요. 지금 미얀마는 많은 이들이 끼니를 걱정하는 상황인데, 이걸 외부로 알리는 일도 수월치 않더군요. 영상을 찍는데도 엄청난 통제를 느꼈어요.”―어려운 곳들을 다니다 보니 좀 위험한 상황도 있던데요. “선진국이라는 유럽도 소매치기가 득실거리고 지저분해요. 여행은 그 나라에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소매치기 만나거나 바가지 쓰는 건 당연한 거예요. 여행은 그걸 감수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감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조지아에서는 위험한 택시를 타기도 했다. 이때는 카메라가 그의 수호장비가 된다. “돈 더 달라면 바가지 써주면 돼요. 싸우는 것보다 낫죠. ‘필요한 거 뭔데, 알았어. 더 줄게’하면서 ‘나 유튜브 하니까 사진 좀 찍자’며 그들의 사진을 찍고는 ‘이거 실시간으로 한국으로 전송된다’고 말해요. 그럼 얘네들도 웃어요. ‘이거 더 털다가 다치겠구나’고 생각하는 거죠. 자기들 얼굴이 다 나갔다고 하니까. 그렇게 지혜롭게 넘겨야죠.”소매치기 바가지 정도는 감내해야 진짜 여행 -시니어들에게 자유여행 팁을 주신다면.“갈 곳 정할 때 날씨를 잘 살펴보세요. 나이가 있는 분들은 날씨 때문에 굉장히 힘들 수 있어요. 극기 훈련하러 가는 거 아니니까요. 그 나라에 대해 사전에 공부도 하셔야죠. 일단 역사부터, 그리고 지리 교통 음식 문화 이런 식으로 해나가요. 저는 주로 인터넷으로 해요. 항공권은 한 달 전까지는 구입해야 저렴하게 살 수 있어요.”중앙아시아 3국 여행방법을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많아 아예 동선과 경비, 준비물, 호텔 등을 정리한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그의 경우 27일간 경비 총 350만 원 정도가 들었다. “비용문제를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지에 대해 영상을 올린 것도 있어요. 저는 20년 전부터 연금저축을 들고 달러 예금을 했어요. 외국가서 쓰려면 달러가 있어야 하니까요. IMF외환위기 때 1달러 2000원 근방까지 갔을 때 저는 해외여행에 나섰어요. 저로서는 1000원도 안 되게 샀던 달러니까 그 돈을 쓸 수 있었죠. 2000원에 환전해야 한다면 어떻게 나가겠어요?”―그때 원화로 바꿨다가 나중에 떨어졌을 때 다시 사면…. “그건 달러를 투자 수단으로 하는 경우고 저는 해외여행에 필요한 만큼 모은 거니까 목적에 맞게 잘 쓴 거죠. 퇴직 후 여러 나라를 다니다 보니 이제 저금이 바닥났는데 다행히 구글에서 돈을 주네요.”―구글이 수익금을 달러로 주죠. 실버버튼(구독자 10만) 이상되면 수입이 꽤 될 텐데….“여행비용 걱정이 없어진 정도예요. 현지 가서 굶는 사람들에게 쌀이나 밀가루를 사줄 여유도 가질 수 있죠. 저는 채널을 돈버는 수단으로 삼지는 않으려 해요. 예컨대 사적인 광고를 하면 굉장히 많이 돈을 벌 수 있지만 일절 응하지 않고 있어요. 여행경비만으로 충분하고 제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는 게 중요하니까요. 제가 가능하면 강연를 하러 다니는 것도 비슷한 이유예요. 강연은 돈도 안되고 힘들고 시간도 많이 빼앗기지만 제 여행, 은퇴 후 삶에 대해서 다른 분들과 나누고 싶은 거죠.” 지난해 9월 대구 인재개발원을 시작으로 경북인재개발원 제주평생교육원 등에서 ‘여행으로 시작하는 행복한 은퇴생활’을 주제로 강연했다. 정년퇴직을 앞둔 공무원들이나 중견 실무자들이 대상이다. “‘국뽕’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방글라데시에서 귀국한 날 ‘바퀴벌레 모기 없는 편안한 방에서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고 하셨는데 고생하고 돌아오면 이제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세요.“여행이 좋은 건 돌아갈 집과 나라가 있다는 거예요. 돌아갈 나라가 없다면 난민이죠. 전 집으로 돌아갈 때 굉장히 기분 좋아요. 나를 반겨주는 가정이 있고 내가 돌아갈 국가가 있으니까. 그걸 되새기기 위해 자꾸 떠나는 건지도 몰라요.”―모자에 태극기 마크도 붙이고, 혹시 ‘국뽕’같은 거 있으신가요.“음… 당연히 있어요. 제가 처음에 1980년대에도 여행을 갔잖아요. 그때만 해도 한국 모르는 사람 많았죠. 지금은 오히려 ‘서울’이라 하면 ‘와’ 탄성을 질러요. 요즘 K문화라 하잖아요. 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도 많고 한국인이라면 더 도와주려고 하니 여행하기도 쉬워요. 국뽕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죠. 대신 예전에는 좀 실수를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국인으로서 제대로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요. 자부심을 갖는 만큼 책임을 져야 하는 거죠.”그는 자신이 유튜브를 하는 보람으로 어느 젊은 분의 댓글을 소개했다. “그 분은 평소 미래에 대한 꿈이 없었대요. 미래가 불투명하기도 하고 나이 드는 것도 싫었는데 제 유튜브를 보고서 꿈이 생겼다는 거예요. 자기는 60세 이후의 인생은 모든 게 끝인 줄 알았는데 저를 보면서 ‘아 내가 왜 젊어서 열심히 일해야 하는지, 인생을 길게 계획해야 하는지 알겠더라’고, 어떤 기대와 희망이 생겼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이럴 때 아, 내가 유튜브를 하기를 잘했구나 하고 생각하죠.”―그래서 후배들을 위해서도 시니어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니까요.“퇴직자들도 그래요. 사회에서 ‘은퇴(隱退)’라고 하잖아요. 물러나서 숨는다. 근데 직업에서 은퇴하는 거지 인생에서 은퇴하는 건 아니거든요. 제가 보기엔 내려놓기는 커녕 새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그분들이 제 영상을 보면서 ‘나도 꿈을 꾸게 됐다’ ‘희망을 갖게 됐다’ ‘당신이 하는 거 보니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이렇게 반응해주시길 바래요.”60대,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그는 정식으로 성악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각종 대회에서 수상하는 등 빼어난 성악실력을 보인다. 두 자녀도 모두 성악을 전공해 기회있을 때마다 세명이 함께 노래하곤 한다. 현재 아들 은총(38) 씨는 보디빌더로 유튜브 ‘총총TV(구독자 12.1만)’를 운영한다. 딸 은혜(33) 씨는 춘천시립합창단원으로 일하는데 최씨의 유튜브 동영상 편집자이기도 하다. 제목이나 자막에 ‘아부지’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앞으로 계획은? “여행은 원래 70세까지 할 생각이었어요. 인생설계도 거기 맞춰서, 연금저축을 딱 70세까지 받도록 설계했어요. 그런데 요즘 같아서는 한 75세까지는 다니겠다 싶어요. 그 이후에는 국내를 다녀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또 제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강의에 치중해야 겠다는 생각도 합니다.”―어느 날 갑자기 이젠 떠나기 싫어질 가능성은 없을까요.“제가 여행을 떠나는 건 호기심과 설렘 덕이예요. 저는 아직도 이 나라 저 나라 지도를 들여다볼 때 너무 기분이 좋고, 밤에 비행기를 타고 불빛 반짝이는 낯선 도시에 내려갈 때 가슴이 두근거려요. 이 도시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이 사람들은 어떤 취미를 가졌고 무슨 음식을 먹고 살까. 그런 기대감이 끝이 없어요. 그 설렘 호기심이 있을 때까지는 계속 가겠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은퇴 직후는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가슴이 떨릴 때 떠나세요”춘천=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지난달 중순 오찬을 청해온 원혜영(73) 웰다잉운동본부 공동대표는 “올해가 초고령사회의 원년이 될 것같다”는 말부터 꺼냈다. 전체 인구에서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20%를 넘어서면 초고령사회다. 당초 2026년으로 점쳐지던 한국의 초고령사회 진입 시점은 몇 년 전부터 2025년으로 당겨지더니 이제는 올해 후반이 될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출산율이 떨어진 만큼 고령화가 더 빨라지는 것이다. 그는 이런 시대를 제대로 된 준비없이 맞는 현실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했다. 지난달 26일 정식 인터뷰를 청했다. 100세카페로서는 3년만에 다시 하는 인터뷰다.1000만 노인시대 원년그는 2020년 70세를 기점으로 총 7선(국회의원 5선, 부천시장 2선) 경력을 내려놓고 정계은퇴한 뒤 ‘웰다잉 전도사’로 변신했다. 그간 연명의료의향서 작성하기, 장례문화 개선, 유언장 쓰기, 장기기증, 유산기부 등의 운동을 펼쳐왔다. 국회의원 시절인 2016년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는 연명의료결정법을 통과시켰고 2019년에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보장하는 법적 기반 조성을 위한 웰다잉기본법을 대표발의했다. 이 과정에서 은퇴하면 이쪽 일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지난 3년 간 성과는 어떠셨는지요.“조금씩 천천히 진행되고 있어요. 사전연명의료 의향서 서명자는 지난해 10월 200만 명을 넘겨서 어느 정도 정착단계라고 보고, 올해부터는 ‘유언장 써보기’에 힘을 기울이려 합니다. ‘유언장 쓰기’가 아니고 ‘써보기’예요. 완성된 유언장이 아니라 처음 써보는 유언장으로 시작하자는 거죠. 연명의료의향서가 내 생명에 대해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이라면 유언장은 재산에 대한 결정권을 찾는 게 됩니다.”연명의료결정법(속칭 존엄사법)은 그 무렵 일본에서 관련 취재를 하다보니 자신들이 훨씬 오래 전부터 논의만 하고 있던 것을 한국이 앞서서 도입했다고 감탄하는 평가를 들은 일이 있다. 그 주인공이 원대표인 셈이다. 그는 1월 초 웰다잉문화운동이 펴낸 ‘유언장 개론’이란 책을 내밀었다. 상속 전문인 이양원 변호사가 집필했다.“이게 교과서 역할을 하기를 바랍니다. 올초부터 전문변호사들이 유언 무료상담을 해주는 온라인서비스센터도 개설했어요. 미국인은 성인의 56%가 유언장을 쓰는데 한국은 1%도 되지 않아요. 최근 들어서는 상속분쟁도 급증하고 있죠.”이혼소송보다 더 많아진 상속분쟁상속분쟁은 엄청난 부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일까.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최근 10년 사이 상속재판은 늘고 이혼재판은 줄어드는 추세다(표 참조). 상속재판에서 83%는 소송물 가액이 1억 원 이하다. 돈보다 감정싸움이 더 크다는 얘기다. 재판과정에서는 부모의 편애, 성장과정에서의 불평등, 독박간병의 억울함 등 평소 묻어둔 한이 다 쏟아져나온다. 결국 가족은 다시는 안 보는 사이가 되고 만다.이혼과 재혼, 독신 등 날로 복잡해지는 가족의 형태도 본인이 교통정리 해놓지 않으면 갈등요소가 된다. 여기 더해 미리 유산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일부를 사회에 기부하는 것도 보람있는 일. 평소 관심 있었던 분야에 10%건 1%건 기부한다면 자신의 삶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최근 뉴스만 봐도 상속분쟁에 빠진 LG는 유언장이 아예 없고 순복음교회의 경우 유언장의 실효성이 다퉈졌죠. 어머니가 셋째아들에게 유산을 몰아줬는데 유언장 작성 당시 법적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는 게 장남과 차남의 주장이었어요. 판결은 유언 당시 법적인 효력을 인정하는 쪽으로 났더군요. 두 경우 모두 제대로 된 유언장을 준비했더라면 갈등을 훨씬 줄였을 텐데, 그걸 못한 거죠.”친구의 황망한 죽음, 유족의 비통…“유언장 썼더라면”유언장 쓰기의 근본적 의미는 더욱 깊이가 있다.“유언장을 쓰는 건 사랑하는 가족과 벗들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는 일이예요. 지난해 제 친구가 복통으로 입원한 지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어요. 빈소에서 부인이 ‘말 한마디 못하고 보냈다’고 애통해하는데 이 친구가 유언장을 썼다면 어땠을까 싶더군요. 유언장에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표현돼 있었다면 부인에게 얼마나 위로가 됐을까….”―내가 세상에 무엇을 남길까를 생각하다보면 오늘을 의미있게 살기 위해 자세를 다잡게 될 것같습니다.“내 마지막 모습을 내가 결정해둔다는 의미도 있지요. 가령 수의 대신 평상복을 입겠다거나 작은 장례식을 하고 싶다면 미리 결정해둬야 해요. 자식들 입장에서는 체면도 따져야 하고 효도 의식도 있으니 차마 그런 결정을 할 수 없거든요.”―연명의료를 거부하거나 장기기증 서약을 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쳤을 때 가족이 반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그러니 가족에게 자신의 뜻을 시간을 들여 알려두는 게 중요하죠. 마음의 준비가 되게끔 말이죠. 그게 좋은 마무리지요.”“난 복받은 인생…돈에 무관심했던 건 후회”―본인의 유언장은 쓰셨나요.“몇년 전부터 썼습니다. 다만 저는 재산이 워낙 없어요. 살고 있는 집, 국민연금, 약간의 저금이 전부라, 집을 두 아들에게 나눠주는 정도지요. 사람들은 제가 풀무원 창업자니까 뭔가 있을 거라고 오해하는데 정치 입문할 때 공동창업자에게 다 넘기고 상표권만 갖고 있다가 그것도 나중에 장학재단으로 넘겨받았어요.” 이렇게 설립된 부천교육문화재단은 1996년 설립된 뒤 28년째 수천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은퇴하고 보니 돈에 너무 무관심했던 게 좀 후회됩니다. 국민연금에 약간의 저축을 더해 월 200만 원 전후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만약의 사태는 염두에 없었어요. 예컨대 저나 아내가 중병이 걸려 종일 간병이 필요하다면? 내가 노후 돈 문제에 너무 신경을 안 썼구나 반성이 들더군요.”그는 1951년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지금도 산다. 그린벨트로 묶인 덕에 우물과 연못, 수백 평 마당을 가진 호사를 누리지만, 집을 팔 수가 없다. 고시지가로는 서울 변두리의 전세값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정계은퇴 뒤 실업자 겸 자원봉사자가 되신 건가요.“70세까지 일했으니 복받은 인생이죠. 친구들이 60세 전후해서 모두 퇴직했는데 그동안 이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면서도 얼마나 외롭고 심심하고 답답했을지 미처 몰랐어요. 제가 은퇴하고 보니 아차하는 거죠. 같이 놀아주고 밥도 먹고 여행도 다니고 해야 했는데 그걸 생각 못했네…라고. 사람은 다 자기가 겪어봐야 아는 거예요.”여권 중진 시절, 청와대에서 담당 찾다 포기“1000만 노인 시대인데, 그 분들이 활기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다는 느낌이예요. 1000만 노인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신인류’라고도 하죠. 은퇴 뒤에도 30년을 더 살아내야 하는 이 분들이 보람있게, 품위있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중요한데, 최고 정책결정기구에서 일하는 분들이 그런 개념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이를 위해 발의했던 웰다잉 기본법은 21대 국회에서도 통과되기 어려워보인다.그는 문재인 정부 때 시민사회수석 사회정책수석 정책실장 등 담당자(가 될 만한 후보들)를 찾아다녔다고 한다.“이 새로운 현상이 워낙 중요하고 빨리 진행되고 있으니 관심을 갖고 어디서 어떻게 다룰 것인지부터 논의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니다가 포기했어요. 다들 ‘내 담당이 아닌 것같다’고 하더군요. 당시 여권 중진이던 제가 그런 상황이었으니 오죽했겠어요. 위에서 관심 없다면 공무원들은 절대 움직이지 않아요.”―정부로서는 아무래도 재정부담을 의식하지 않을까요.“고령자 관련해서는 기초연금부터 의료비 지원, 간병지원에 일자리지원까지 천문학적 돈이 필요한 일이 많지요. 유일하게 재정이 들지 않는 분야가 웰다잉이예요. 오히려 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지요. 고령자들이 연명의료를 하지 않으면 의료비가 줄고 작은 장례식은 가계에 보탬이 되죠. 고령자들이 기부를 많이 하면 사회의 취약한 곳에 유산이 돌아가니 도움이 되고요. 지금의 고령자 세대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오랜 빈곤의 대물림에서 벗어나 자신이 땀흘려 모은 깨끗한 돈을 후대에 물려주는 세대라고 봐요.”1000만 노인 품격 지키고 사회적 낭비 갈등 줄여야―좀더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있을까요.“이제라도 관심을 가지고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틀을 마련해야 합니다. 가장 가까워보이는 게 저출산고령화위원회인데, 저출산과 고령화는 내용상 떼어내야 합니다. 어떻게 인구를 늘릴 것이냐와 현재 존재하는 1000만 노인을 어떻게 건강하고 책임있고 당당한 시민으로 살도록 도와줄 거냐는 차원이 다른 얘기죠. 법으로서는 일단 ‘웰다잉기본법’이 통과되고 시스템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 행정은 보건복지부가 주무가 돼 좀더 통합적인 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취재를 하다보면 고령자문제를 다루려는 노력들이 여기저기 있긴 한데 전체를 아우르는 머리 부분이 없고 단편적인 대응만 있더군요.“법이 만들어진 것만 따로따로 이뤄지는 현실이죠. 일례로 장례문화를 개선한다며 보건복지부가 만든 장례문화진흥원도 있고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만들어진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안에 사전연명의료 관리기관이 있어요. 두 기관은 유사한 일을 하지만 따로 놀아요. 장례에 대한 것, 연명의료, 장기기증, 유언장 쓰기, 후견제도 이런 것들을 통합적으로 하면 시너지도 생기고 낭비도 막을 수 있을 텐데 말이죠.”―다시 유언장으로 돌아와서, 언제 쓰는 걸 권합니까.“정해진 때는 없지만 정년퇴직할 때 혹은 65세 법적인 고령자가 됐을 때를 계기로 하는 건 어떨지요.”친척 친지들과 만나고 시간 여유도 갖는 명절이 다가온다. 잠시 몸과 마음의 짬을 내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나는 세상과 가족에게 무엇을 남길지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유언의 방식 5가지―‘유언장개론’에서유언은 법에 의한 방식으로해야 효력을 갖는다. 우리 상속법에는 유언의 방식으로 5가지를 정해놓았다.1)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 : 유언자가 그 전문과 연월일, 주소, 성명을 자서하고 날인해야 한다(작성이 쉽고 비밀유지에 용이하나 위조나 분실, 상속인들이 그 존재를 모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2) 녹음에 의한 유언 : 유언자가 유언의 취지, 성명과 연월일을 구술하고 증인이 유언의 정확함과 자신의 성명을 구술해야 한다(필기가 어려울 경우 적합. 위 변조 우려)3) 공정증서에 의한 유언유언자가 증인 2명이 참여한 공증인의 면전에서 유언의 취지를 말하고 공증인이 이를 필기낭독하여 유언자와 증인이 그 정확함을 승인한 뒤 각자 서명 또는 기명날인(가장 안전하고 정확하지만 비용이 든다. 1억 원에 15만 원 정도)4) 비밀증서에 의한 유언유언자가 필자의 성명을 적은 증서를 엄봉날인하고 이를 2명 이상의 증인에게 제출해 자신의 유언서임을 표시한 뒤 그 봉서 표면에 제출연월일을 기재하고 유언자와 증인이 각자 서명 또는 기명날인. 표면에 기재된 날로부터 5일 내에 공증인 또는 법원서기에게 제출해 봉인 확정일자인을 받는다(절차 복잡하고 유언의 존재가 노출된다)5)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질병 기타 급박한 사유로 인해 위 4가지 방식을 따를 수 없을 경우 유언자가 2명 이상 증인 중 1명에게 유언 취지를 구술하고 이를 들은 자가 필기낭독하여 유언자의 증인이 그 정확함을 승인한 뒤 각자 서명 또는 기명날인, 7일내 검인신청(실효성 많지 않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4일 마포평생학습관 1층에 자리한 시민 전시관 마포갤러리. 올해 칠순을 맞은 이승룡 씨와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는 외손녀 김리원(12)양의 새봄맞이 조손(祖孫) 전시회 ‘행복을 그리다’의 현장이다.할아버지는 평소 그려온 민화 10여 점을, 김리원 양은 아크릴화, 색연필화 등 10여 점을 내걸었다. 전시회장에는 주인공들 외에도 이 씨의 부인과 큰딸 작은 딸에 동생들까지, 출근한 사람 빼고 온 가족이 모였다.“양념으로 할머니의 그림 한 점과 손자 리호(3)가 그린 ‘아기상어’도 걸었어요. 말 그대로 이 집안 조손 전원이 출동한 전시회죠. 하하.”(이승룡)손녀딸이 6학년에 올라간다거나 3살 손자가 그린 낙서인지 추상화인지 모를 그림. 각박해진 우리 사회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작고 소소한 의미들이 이곳에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 값지고 소중하다. 이제 속칭 ‘7학년’이 됐다는 이승룡 씨는 이런 작은 것에 열과 성을 바치며 행복해한다. 사실 이런 작은 의미들이 쌓이고 모여서 역사가 되고 세계사가 되는 것 아닌가.한때 잘 나갔지만그는 30년간 광고회사 LG애드에서 일하다 2009년 55세로 퇴직했다. 2010년부터 모하(慕何) 이헌조 전 LG전자 회장(1932~2015)이 사재 80억 원을 출연해 만든 재단 ‘실시학사’의 상임이사 및 사무국장을 맡아 13년간 일하다가 지난해 봄 여기서도 퇴직했다. 30년간 광고회사 물을 먹었다고 하지만 정작 광고 만드는 일에 관여한 것은 중반기 3년 정도. 나머지는 전략과 조직관리 전문가로 일했다. 2003년 병마로 쓰러졌을 때 직함은 경영전략본부장 상무였다. “입사 4년 차에 기획관리과장, 8년 차에 부장이 됐습니다. 11년 차였던 1990년 회사는 기획관리실이라는 조직을 새로 만들고 당시 없던 ‘실장’이라는 직책을 주더군요. 밑에 3개 팀이 있었어요.” 1990년대는 LG애드의 매출이 해마다 1000억 원 단위로 늘어나던 시절이었다.3개월 시한부 선고2003년 전환점이 찾아왔다. 배가 아파 동네병원부터 찾았던 것이 순식간에 유명 종합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는 사태가 됐다. 그런데 의사가 수술을 포기하고 환부를 다시 닫아버렸다.종양 근처를 동맥과 정맥이 지나가고 염증까지 있어 손을 댈 수가 없다고 했다. 그의 부인은 “3개월 내에 만약의 사태가 일어날 수 있으니 대비하라”는 말을 들었다. 아직 49세. 치료법을 묻는 이 씨에게 당시 담당 의사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글리벡’ 복용을 말했다. 글리벡은 당시 백혈병 치료제로 나온 신약이었다. 이 씨가 “그럼 글리벡이 나오기 전에는 어떻게 치료했느냐”고 물으니 그 의사는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절망에 빠져 병원에 누워있는 그에게 당시 LG전자 고문이었던 이헌조 회장이 전화를 해왔다. “우리 회사 사장과 모하 회장이 어느 결혼식장에서 만났는데 회장님이 제 소식을 듣고 전화를 주신 거죠. 우연인 듯싶지만 전 이런 건 숙명이라고 믿어요. 회장님은 본인이 암 수술을 받은 일본의 의료진을 소개해줬습니다.”일본으로 건너간 이 씨 부부는 이 회장의 주치의와 그 제자 2명에게 다시 진단을 받았고 그중 40대였던 야스노 박사가 “확률은 반반이지만 열어봐야 안다”며 수술하겠다고 나섰다. 다행히 재수술은 성공했다. 그 뒤 국내 종합병원에서 20년 가까이 추적관찰을 해왔는데 지난달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는 판정이 떨어졌다.다행인 일은 또 있었다. 일본에서 두 달간 입원해 있다가 귀국한 그에게 회사는 ‘일선에서 일하기 어려울 테니 상근감사직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당시 회사는 다국적 광고그룹 WPP에 매각된 상태였는데, 사직을 생각하던 그에게는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었다.모하 이헌조 전 회장과의 인연모하 이헌조 전 회장은 그가 1979년 LG애드의 전신인 희성산업(LG애드는 1984년 희성산업에서 독립했다)에 입사했을 때 사장이었다. 2010년 그 모하회장이 LG애드를 퇴직한 이 씨에게 연락해왔다.“재단을 설립하려는데 설립과 운영을 좀 맡아서 해다오. 처우를 아주 잘해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걸어 다닐 때까지 길게 일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시더군요.”모하 회장은 한국의 사상적 뿌리를 실학에서 찾는 실시학사를 재단으로 설립해 사재를 투여할 생각이었다. “그날 밤 회장님께 이메일로 세 가지를 말씀드렸어요. 첫째 제가 능력은 안 되지만 회장님 뜻을 받들어 성심껏 열심히 하겠다. 둘째 혹시라도 저를 불러주는 더 좋은 처우의 자리가 나오면 그때는 놓아주십사. 셋째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인으로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회장님 답은 ‘100% 수용한다’는 것이었죠.”이 씨가 재단에서 일한 지 2년 정도 된 무렵, 지방 어느 상장회사의 감사 자리를 제안받고 고민 끝에 허락을 구하자 모하 회장은 ‘사람이 돈만 갖고 사나?’라고 물었다. 재단에서의 인생이 결코 허술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도 했다.“사람에게는 명분과 긍지가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거죠. 제 생명을 살려주신 분의 말씀을 차마 거역할 수 없어 재단에 남았습니다.” 그는 목공에도 재미를 붙였다. 작품을 만들며 관련된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연재한 것이 10년간 180점쯤 쌓이자 책 ‘이야기가 있는 목공(2020)’으로 묶어냈다. 기록과 보존에 마음을 담아그는 기록과 보존에 열심이다. 이렇게 만든 레거시를 적절한 임자에게 의탁해 더 큰 쓰임새를 기대한다.2015년 선친 이효석 씨(1929~2000)가 남긴 문건과 훈장, 증명서, 기록물 등 148점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손녀 리원 양 이름으로 기증했다. 선친은 독일주재 대사관 수석노무관,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역임했다. 기증에 앞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아버지의 인생 기록’ 일부를 공개했는데 반응이 뜨거웠다고. 자료 중에는 꼼꼼하게 정리된 1950년대 결혼축의록, 1970년대 장례부의록 등도 있어 당대 민속사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란 평가를 받았다.“기록을 보존하는 건 집안 내력인 것 같아요. 집 안에 있던 고전 책이나 옛날 문서 같은 것은 안동의 국학진흥원에 손녀딸 이름으로 기증했습니다. 제가 회사생활 30년 동안 받은 급여 명세표, 명함 40여 장, 사령장 등은 LG그룹 역사관에 기증했어요.”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학생 시절 일어난 동아일보 백지광고사태도 그에겐 기록과 보존의 대상이었다. 당시 3개월간의 백지광고를 모두 모아 제본해서 소장하고 있었다.“신문 방송학도로서 이런 역사적인 기록을 내가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제본한 걸 이사 다니면서도 늘 침대 밑에 보관하곤 했어요. 2000년 당시 동아일보가 신문박물관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기증했지요. 나중에 들으니 그게 보관된 게 대한민국에 3질인가 밖에 없었대요.”―일부 기증을 손녀 이름으로 하신 이유가 있을까요.“어차피 리원이도 후손이니까 나름 의미 있는 일이잖아요. 당시에는 손녀밖에 없었고요.” 큰딸이 낳은 리원이 12살, 둘째 딸이 낳은 손자 리호는 이제 3살이 됐다.시니어들의 가슴 속 앙금60대 이상쯤 된 분들을 만나보면 뭔가 하나씩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 같은 게 있다. 그의 경우는 13년간 일해온 실시학사가 그랬다. 당초 한국 실학 연구의 태두라 불리는 성균관대 이우성 교수가 만든 공부 모임에 이헌조 전 회장이 80억 원을 출연해 재단으로 만들었다. 이 씨는 2010년부터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2015년 이 회장 사후에는 그 이사직을 이어받아 상임이사를 겸했다. 그런데 2020년 11월 새 이사장이 난데없이 ‘사무국장 정년을 60세로 하자’는 규정을 이사회에서 통과시켰다. 당시 이승룡 사무국장은 66세. “나가라, 못 나간다”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지난해 3월 퇴직했다. 현재 8명의 재단이사진 가운데 과반을 특정 인맥이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모하 회장이 세상을 떠나며 재단에 남겼던 대리인이 타인들에 의해 쫓겨난 셈. “다른 미련보다 모하 회장의 유지를 받들지 못하게 될까 봐, 그게 무척이나 괴롭습니다.”“할아버지, 지금 유언하는 거예요?”―손주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글쎄요. 너무 많아서. 우리보다 좋은 환경에서 꿈을 맘껏 펼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죠. 뭐 특별히 공부를 잘하거나 좋은 대학에 가거나 그런 거 말고요.”특별히 뭔가를 말하지 않아도 자손들은 어른을 보고 배운다. 할아버지가 지속적으로 책을 만드는 것을 본 당시 3학년 리원 양이 ‘나도 책 한 권 내고 싶다’고 하자 이 씨가 돕겠다고 나섰다. 리원이가 48명의 신의 모습을 그리고 이 씨가 각 신에 얽힌 이야기를 써넣은 ‘리원이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2021년 탄생했다.“그때는 무척 기뻤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그림들이 너무 어릴 때 그린 거라서 좀 이상해요. 약간 제 흑역사가 된 것 같아요.^^”(김리원)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이던 리원이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할아버지 지금 유언하는 거예요?”이 씨가 가족 모임에서 자신의 집을 훗날 어떻게 활용할지 딸들에게 당부하던 중이었다.“그래. 유언 맞아. 언젠가 할아버지가 없어도 엄마랑 이모랑 이 집을 잘 활용해서 사이좋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할아버지 마음을 말하는 거야라고 말해줬지요.”책, 세상에 쓰레기를 더하지 않기이 씨는 2001년 선친의 1주기를 맞아 추모문집을 엮은 것을 시작으로 15권의 책을 펴냈다. 이중 6권은 비매품이고 나머지는 POD(Publish On Demand) 방식으로 간행했다. 본인이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쓰고 그림을 넣어 PDF파일로 출판사 홈페이지에 등록하면 출판사 측이 고객의 주문을 받아 출판해주는 서비스다.“자꾸 책을 내는 행위가 제게야 의미가 있겠지만 세상에는 별로 공헌하는 바도 없고 낭비일 수 있어요. 그래도 별 부담이 없는 건 주문만큼만 책을 제작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껏 책을 내지만 ‘공해는 되지 않는다’고 자위하는 거죠.”POD방식은 작가 본인을 포함해 누구나 정가로 주문해야 하고 책값의 20%가 작가에게 인세로 돌아온다. 작가는 자기 책을 80% 가격에 사는 셈이다.―많이 팔렸나요.“간혹 팔리기도 하는지 몇 달에 한 번씩 몇천 원 또는 2, 3만 원 이렇게 인세가 들어옵니다. 하하.”“사는 동안 재미있게 살자”이제 말 그대로 연금생활자. 부인과 합쳐 200만 원 정도 된다. 실시학사 사무국장 할 때는 적지만 고정급여가 있었지만 지난해 3월 이후 받은 실업급여도 이달 끝난다.“저도 딸들도 일찍 결혼했어요. 부부 둘만 살면 되니까 큰 돈이 필요하지 않아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데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이 연령대 대부분이 “생각보다 돈 쓸 일이 많지 않다”고 하시더군요. 다만 자식들이 집에 돌아와서 손 벌리기 시작하면 골치 아프다고요.“자식들이 사고 치면 문제지만 우린 그런 것 없으니까요. 저는 죽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목숨 건져 다시 온 뒤 제 인생관이 ‘사는 동안 재미있게 살자’가 됐어요. 집사람도 크게 사치하지 않고 명품 가방 이런 거에 관심도 없어요. 둘이 어디 여행가고 맛있는 것 먹고, 아무튼 지금 현재를 재밌게 잘 사는 게 목표예요.”옆에서 부인이 “본래 명품을 싫어했던 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런데 좋은 물건 같은 건 남편이 죽다가 살아 돌아오니 아무 의미 없어지더라구요. 그저 조금이라도 이 시간들이 이어져 주길 바랄 뿐입니다.”(부인 박양화 씨)“이 나이가 되면 세상에 고맙지 않은 게 없습니다. 저는 인연, 숙명 같은 걸 믿는 사람입니다. 모하 회장 덕분에 다시 살아 돌아온 것,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도 모두 숙명이 아닐까. 죽고사는 것도 본인의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때까지는 세월이 익어갈수록 잘 늙어가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야지요.”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100세 카페는 2021년 1월 인터넷판으로 시작해 격주 토요판 신문과 일요일 인터넷판으로 독자들과 만나왔다. 저출산이 심각한 가운데 고령자가 급증하는 ‘정해진 미래’ 앞에서 국가와 사회, 개인의 준비는 미흡해보였다. 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돈 △건강 △행복의 3가지를 꼽고 젊어서부터 미리미리 준비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연재 만 3년이 돼 가는 지금도 이 취지는 변함이 없다. 올해에는 특히 인터뷰 성격의 ‘이런 인생2막’을 많이 썼다. 한바탕 현역시절을 거친 시니어들의 다양한 2막을 통해 독자들도 아이디어를 얻고 힘을 내시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저물어가는 한해, 100세 카페를 빛낸 주인공들을 돌아본다.“노년에도 일을 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외국어고 교장 퇴직 후 개인택시 운전사로 일하는 정정호 씨(67)를 소개하며 가장 걱정했던 것은 ‘연금 받는 분이 굳이 돈을 번다’는 부정적 반응이었다. 정 씨도 같은 이유로 한 차례 만남을 사양했다가 한 달 뒤에야 인터뷰에 응했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예상대로였다. 여기 더해 생계를 위해 힘들게 일하는 다른 택시 운전사들이 느낄 위화감을 우려하거나 노년 운전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내용들이 많았다. 정작 본인은 “충분히 예상했고 나 자신이 떳떳하니 전혀 문제없다”며 담담했다. 말 그대로 남의 눈보다 내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자세다.신문기사가 나간 토요일부터 그의 휴대전화는 불이 났다고 한다. 인천의 교원 커뮤니티부터 학생들, 학부모들까지, 심지어 어릴 적 고향 철원시까지 들썩였다고 한다. 그를 통해 ‘과거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분명 그의 블로그에는 교사로서의 정체성이 거의 없었는데, 기사에 사용할 옛날 사진들을 찾아 보여주는 장면에서 억눌러왔던 추억과 그리움이 생생히 전달돼왔다. 그의 기사에 뜨겁게 반응하는 분들도 오랜 교직생활에서 맺어진 인연들이 많았다.정 씨는 교육자답게 기자에게도 많은 격려를 전해줬다. 인터넷판 기사가 나간 일요일 한산하던 그의 블로그에 하루 방문자가 2000명이 넘었다며 사진을 찍어 보내주고 자신에게 몰려오는 주변 반응과 격려들을 공유해줘 기사 쓰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소박하고 하찮은 일이라도 좋다100세 카페에는 노년에 새로운 일거리에 푹 빠져 있는 분이 적잖게 등장했다. 대개 현역 시절보다 소박한 일거리다.3년째 강원 춘천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박의서 전 안양대 교수(72)는 지역의 텃세를 살짝살짝 느끼면서도 시 소속 문화관광해설사 일에 열심이다. 월 100만 원 안짝으로 버는 정도지만 이 일이 없었다면 삶의 질이 달라졌을 거라고 말한다. 해설을 더 잘하기 위해 공부를 계속하고 개인적으로 책을 쓸 준비도 하고 있다.은행 임원으로 퇴직한 뒤에도 개방형 공직에서 일하던 박삼령 씨(76)는 65세에 암이 발병한 이후 삶을 백팔십도 바꿔 산림치유지도사가 됐다. 경쟁이 치열해져 일할 기회가 줄고 있지만 하루 일을 얻기 위해 자비를 들여 지방에 답사를 다닐 정도로 진심이다.10년 이상 부모님 간병을 하다가 아예 직접 요양원을 설립한 임수경 씨(62)는 본래 정보기술(IT) 전문가였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문을 연 요양원은 이제 궤도에 올라 설립 과정에서 진 막대한 빚을 조금씩 갚아나갈 수 있게 됐다. 부모님 편안하게 모실 수 있어 한시름 덜었고 고령자의 대열로 접어든 본인과 가족, 친구들을 위한 ‘갈 곳’을 장만했다는 점에서 흡족해한다. 그는 “부모님 세대는 우리가 부담하지만 우리 세대는 자녀에게 기댈 수 없다”며 ‘현타’를 안겨주기도 했다. 퇴직이라는 ‘현실’, 미리 준비해야퇴직은 잘 준비하고 맞이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이후 삶에 천양지차가 난다.정년퇴직을 향해 치밀하게 준비한 케이스로는 유통업체 부장급으로 정년퇴직한 다음 날 지식산업센터 관리소장으로 새출발한 최경묵 씨(62)가 있다. 전 직장에서는 만년 차장(퇴직 전 마지막 1년간만 부장이었다)으로 30년 가까이 일하며 자격증을 땄고 그것을 활용해 재직 중에도 경력을 쌓았다. 회사 입장에서는 그가 건물 안전관리자를 겸해주니 한 사람분 고용을 줄일 수 있었다. 그의 경우 직장에서 서러움을 겪었던지라 더 일찌감치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고 준비할 수 있었다.반대로 적당히 따뜻하게 지낸 사람일수록 비바람 치는 광야에 던져졌을 때 충격이 크다.신세계그룹에서 임원을 지냈지만 4년 전 만 50세에 퇴직해야 했던 정경아 전 상무(54)는 그 충격을 삭여 책을 두 권이나 썼다. 퇴직 2년 만인 2021년 낸 첫 책 ‘독한 언니의 직장생활백서’에서 그는 퇴직은 내색 않고 직장생활만을 다뤘는데, 그가 받은 충격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퇴직 4년 차가 된 올해에야 자신의 퇴직을 정면으로 마주한 두 번째 책 ‘어느 대기업 임원의 퇴직일기’를 내놓았다. 그는 요즘 동아일보에 칼럼을 연재하는 한편 유튜브와 강연 등을 통해 새로운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인의 주된 직장에서의 비자발적 퇴직연령은 평균 49.5세. 어찌보면 정년퇴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받은 케이스다. 두 사람 사이 어디쯤에 해당하는 직장인이라면 회사를 떠날 날이 가까워질수록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새겨둬야 할 듯하다.힘의 원천은 가족 시니어들에게도 가족은 힘의 원천이 된다.초등학교 중퇴 학력을 극복하고 60세부터 경남 거제의 한의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이숙희 씨(64)에게 100세 카페 인터뷰는 세상에 자신을 커밍아웃하는 일이었다. 기사가 나간 뒤 모두의 이해와 인정을 받게 돼 여한이 없다며 기뻐했다. 11월 KBS 라디오방송에 출연하기 위해 부군과 함께 서울 나들이를 하기도 했다. 늘 아내를 믿고 지원해주는 남편, 엄마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방향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딸까지, 가족은 이숙희 씨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빽’이다.경기 평택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조동근 씨(63)도 먹고사는 문제에 쫓겨 중학교 중퇴로 끝날 뻔했던 경우다. 신혼 초기 중학교와 고교 검정시험에 합격하고 방송통신대에 입학했지만 20대 부인에게 닥친 병마에 다시 한번 위기가 몰려왔다. 기사에서 빼먹은 에피소드 하나. 부인이 비장암으로 암병동에 장기입원했던 당시, 병원 측은 병세를 체크하기 위해 환자의 피를 엄청나게 뽑아가곤 했다. 환자식만으로는 회복이 어려울 것을 걱정한 그는 병동 계단참에서 휴대용 가스버너로 보양식을 만들어 아내에게 먹였다. 병원 측에서 제지하자 “난 저 사람 반드시 살려내야 한다”며 저항해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 2, 3일 뒤 그가 다시 요리를 시작하자 병원 측도 모른 척해버렸다고. 1980년대니까 가능했던 얘기지만 그는 이런 집념으로 가정과 부인을 지켜냈다.30여 년 간 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애썼던 재미작가 김석휘(74) 씨는 기사를 읽은 주변사람 덕에 미국 이민 초기 동고동락했다가 40년간 연락이 두절됐던 친구와 연결될 수 있었다. 다만 친구분이 알코올과 심장질환 탓에 인지 장애가 상당히 진행돼 소통은 어려웠다고. 그는 “나이들면서 후회되고 마음 아픈 기억들만 늘어난다”고 토로했다.공부하는 노년이 아름답다이순국 전 신호그룹 회장(81)은 출판사에서 신간 ‘다시 시작하는 인생수업’을 보내온 것이 계기가 돼 인터뷰를 청했다. 한때는 재계서열 25위를 넘볼 정도로 사업을 키웠지만 외환위기로 모든 것을 잃은 뒤 68세부터 건강을 부여잡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삼아 신체 개조를 단행하고 74세에 체육학 석사, 76세에 체육학 박사, 81세에는 의학박사(예방의학) 학위를 받으며 “뭔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신간에서 그는 홀로 죽음을 향해 노를 저어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표지에 그려놓고 있다. 지금도 매일 2시간씩 근력운동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서’라고 한다.13년 째 방송통신대 학생 신분을 이어가는 김광성 씨(71)도 뒤늦게 알게 된 공부의 재미를 놓지 못하는 경우. 7년 전 재취업해 서울시내 감정평가법인의 상임고문, 그 자회사인 부동산중개법인의 대표를 맡아 현역 생활을 한다. “방송대에서 젊은이들과 만나며 감각을 유지했기에 취업도 가능했다”며 학교에 공을 돌리는 그는, “이 나이에 공부는 지식이 아닌 지혜를 얻는 과정”이라고 말한다.대구의 환경미화원 정연홍 할머니(71)는 장난처럼 ‘책을 쓰겠다’는 말을 꺼냈다가 지난해 11월 첫 책 ‘나의 감사는 늙지 않아’를 내면서 꿈을 이뤘다. 갑자기 듣게 된 ‘작가’ 호칭이 쑥스럽지만 행복하다고. 글을 잘 쓰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고 중요한 대목을 베껴 써보기도 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뭔가를 쓰고 있다.이웃과 함께, 동세대와 함께정영록 전 서울대 교수(65)는 8월 말 학교를 정년퇴직했다. 5년 전부터 전남 구례로 거처를 옮기고 뜻 맞는 사람들과 귀촌타운을 만든다는 생각을 가다듬고 있다. 기성세대의 귀촌으로 지방소멸을 막고 질 높은 노후를 살아갈 터전을 만들자는 것. 3월에 인터뷰 기사가 나간 뒤 정부나 지자체, 개인들의 연락이 많았다. 정부에서 주관하는 지역활력타운 선정 심사에도 참여했는데, 이곳저곳 후보지를 돌면서 ‘쓴소리’를 쏟아냈다고 한다.올 초 100세 카페를 장식한 김종훈(50) ‘우리동네좋은사람들’ 대표는 올해도 서울 강남구에서 ‘우리 동네와 함께 나이들기’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지역 어르신들의 주택에 낙상을 방지하기 위한 설비를 마련해주는 일에서부터 ‘살던 곳에서 나이들기(aging in place)’가 가능한 지역사회 만들기를 모색하고 있다. 나아가 이런 활동을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으로 18일 공유오피스에 책상 한개 놓고 작은 사회적기업 ‘쉘위파트너스’를 출범시켰다.지난해 말 100세 카페에서 은퇴자들이 ‘갈 곳’에 대해 ‘공공에서 시설을 제공하고 민간이 운영주체가 되는 방식‘을 제안했던 백만기 위례인생학교 교장은 11월 ‘경기인생캠퍼스’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당시 기사를 본 경기도에서 그를 찾아갔고 경기도청 구청사에 장소를 만들고 운영을 그에게 위임하기로 했다는 것. 그로서는 분당, 위례에 이은 세 번째 인생학교다. 현재 25개 시범강좌가 운영중인데, 경기도는 앞으로 31개 시군에 인생학교를 보급할 예정이라고 한다. 백 씨의 평생 목표인 ‘전국에 인생학교 100개 만들기’가 현실감을 갖기 시작했다.‘느리게 나이들기’ 연구하는 젊은 의사지난해 4월 여러차례 취재했던 정희원(39)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 처음 만난 날 기자가 “당신은 반드시 스타가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예언한 인물이다. 젊지만 해박했고 유창한데 겸손하고 문제의식도 좋았다. “아하하..그런 건 바라지도 않고요, 책이나 좀 팔렸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하던 그의 표정이 개구장이 같았다.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그는 그 뒤로 책을 2권 더 냈고 신문에 정기칼럼을 쓰는가하면 각종 강연에 불려다니고 TV나 유튜브에도 자주 얼굴을 내민다. 취미인 호른을 열심히 연습해 ‘동아음악콩쿠르에 출전할 거’라 했는데 지난해 정말 ‘출전했고,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올해 두번째 신간인 ‘느리게 나이드는 습관(한빛라이프)’을 최근 보내왔다. 댓글에서 읽히는 ‘살기 힘들다’는 아우성기자는 100세 카페 기사에 달리는 댓글들을 열심히 읽는 편이다. 우리 시대 시니어의 초상이 그려지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좋은 기운도 얻을 수 있어서다. 때로는 실망스러울 때도 있다. 열심히 사는 노년을 소개하면 종종 ‘이제 됐으니 그만 쉬며 인생을 즐기시라’는 조언이 달리는데, 이는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라고 본다. 30, 40대가 보람을 얻고 활력을 느끼고 싶다면 70, 80대 어르신도 보람과 활력이 필요하다.타인의 노력이나 행복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가 읽히거나 과도한 피해의식이 전해져오기도하는데, 그만큼 ‘내 삶이 힘들다’는 마음의 표현으로 보였다. 특히 안정적으로 연금을 받는 직종에 대한 질시가 심한데, 아직 부실한 한국의 연금제도 탓도 있어 보인다. 국민연금이 도입된 1988년 이래 꾸준히 연금을 납부해온 세대가 본격적으로 수급자가 된다면 맞벌이라면 3~400만이 넘는 가정도 드물지 않게 된다. 반면 저출산으로 인한 생산인구 감소로 연금의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실제로 노후를 살아본 분들의 공통된 증언은 나이가 들수록 생활비는 많이 들지 않는다는 것. 이때는 생계문제보다 남는 시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서 보람과 의미를 찾을 것인가가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런 인생 2막’에 등장하는 분들을 어떻게 찾아내느냐고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 가장 많은 경우는 이메일을 통한 자천타천이다. 출판사에서 100세카페에 어울릴 것같은 신간을 보내주기도 한다(내돈내산인 경우가 더 많다). 재미있는 것은 한 기사가 나가면 유사한 분들의 소개가 몰려온다는 점. 예컨대 전직 교사가 주인공으로 나가면 교직에서 은퇴하신 분들의 메일이 갑자기 많아지고, 은퇴 후 전원살이하는 분 얘기가 나가면 전원에 정착한 분들이 전국에서 연락해오는 식이다. 이런 경우 아무래도 비슷한 사례를 연달아 다루기 어렵다보니 뒤로 돌려지게 된다. 이 밖에도 언급하지 못한 더 많은 분들을 인생2막이라는 주제로 만났다. 이들은 노년에도 사회와 사람, 세상과의 소통은 중요하다고 입 모아 말한다.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앞으로도 열심히 찾아 소개하고자 한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선생님, 안전하고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깔끔한 양복 정장에 나비넥타이, 왼쪽 가슴에는 명찰을 단 중년 기사님이 미소와 함께 이런 멘트를 날린다. 이 택시를 타면 5살 꼬마도 ‘선생님’이 된다. ‘제임스네네(JamesYes!Yes!) 택시’. 1956년생 정정호 씨가 인천에서 몰고 다니는 개인택시의 애칭이다. 2018년까지 그는 인천에서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미추홀외국어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졸 학력으로 영등포의 한 공장에서 일하는 배고픈 소년이었고, 이 소년은 27세에 7살 아래 막냇동생과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범대에 진학해 영어 교사가 됐다.그는 100세 카페 애독자다. 기사에 자신의 체험을 예로 들며 ‘퇴직 후에도 일을 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는 댓글을 성심껏 달아주곤 했다. 기자는 그 댓글에 들어 있는 나비넥타이, 인천, 개인택시 등을 단서로 무작위 검색을 통해 그의 블로그를 찾아냈다. 30일 그를 만나러 인천 남동구의 한 카페로 갔다.학생들과 친구처럼 지낸 교장 선생님정정호 씨와 인천과의 인연은 1987년 31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제물포고등학교로 발령받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인천에서 31년간 교직에 머물며 영어 교사, 장학사, 교감, 교장을 거쳤다. 정년퇴직 직전 3년 반 동안 교장으로 봉직한 미추홀외고는 2010년 인천 유일의 공립 외국어고로 개교했다. 당시 그가 인천시교육청에서 장학사로 일하며 설립을 이끌었고 2015년 2대 교장으로 취임했다.교장 시절 그는 전교생 587명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한다.“매일 교장실에서 사진첩 들고 애들 이름 외우곤 했지요. 왜 그랬냐고요? 제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학생들에게 절 부를 때는 ‘교장선생님’이라 하지 말고 ‘제임스’라고 부르라고 했지요.”재미있는 것은 교장이 학생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다녔다는 점. 그가 보여주는 옛날 사진을 보니 의외로 잘 어울렸다. “학생들이 무척 좋아했죠. 친구같이 지냈거든요. 정말 재미있었어요.”택시 운전을 시작한 얼마 뒤 쓴 그의 블로그에는 ‘송도에서 택시 내부를 소독하고 있는데 뒤에서 “제임스, 멋져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추홀 외고 졸업생 000이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우연히 만난 제자가 친구처럼 부담 없이 큰 소리로 부를 수 있는 그런 교장이었다는 얘기다.―제임스라는 이름은?“영어교사 하면서 제가 지었어요. 007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아시죠? 그처럼 교사도 만능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미추홀외고 학생들은 언제부턴가 학교 앞에 있는 커다란 호수를 ‘정정호’라 불렀다. 구글에서 학교 이름을 검색하면 이 호수에 대해 ‘정식 명칭은 해오름호수지만 재학생들은 전임 교장의 성함을 따서 정정호라고 부른다’는 구절이 나온다(더 위키).본인은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2018년 8월 그의 퇴임일에 그의 의지와는 달리 점심시간에는 학생들이, 밤에는 학부모들이 깜짝 파티를 열어줬다는 대목에서 그의 인기도는 짐작할 수 있다. 퇴임 뒤에는 인천영어마을 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2년간 일했다.10대 후반엔 소년공 생활, 4년 늦게 고등학교 입학교사가 되기까지, 그는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1·4후퇴 때 신의주에서 맨몸으로 월남한 정 씨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 실향민들 사이에 ‘곧 통일이 된다’는 소문이 돌자 급히 서울 생활을 정리해 북한과 가까운 강원도 철원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기다리던 통일은 오지 않았고 슬하에 1녀 5남이 태어났다. 6남매 중 장남이던 정정호 소년은 빤한 형편에 차마 고등학교에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연년생 동생과 함께 상경해 영등포의 한 공장에 취직했다. “저는 조립, 동생은 공작기계 선반을 했어요. 동생은 아직도 그 기술을 살려 일하고 있는데 다들 부러워하지요. 만일 펜대를 잡고 있었다면 66세인 지금 갈 데가 없겠죠. 그 1년 아래 동생도 역시 공장에 들어갔고 지금도 일합니다. 대형 펌프의 권위자예요.”그는 3년 만에 공장일을 접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동기들보다 4년 늦었는데 재학 중 군복무를 한 탓에 졸업은 7년 늦어졌다.“고교 3학년 10월에 군대 들어가서 3년 뒤 7월에 제대했어요. 저보다 7살 어린 막냇동생과 함께 졸업했지요. 같은 철원고를 다니다 보니 참 동네 창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얼마 되지 않는 소년공들의 월급이나마 가계에는 크게 도움이 됐다. 귀향을 포기하고 빚을 얻어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아들들이 적금을 타면 그 돈을 가져가 빚을 갚았다.“그렇게 돈 번 덕에 제가 고등학교에 간 거죠. 저는 가계에는 크게 도움을 못 줬습니다. 둘째 셋째 동생들이 계속 일하면서 큰 기여를 해줬지요.”두 동생은 그가 대학교에 들어가자 방송통신고에 지원해 졸업했다. 그 아래 동생들은 집안 살림이 나아진 덕에 제때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정말 고생들 많이 했지요. 꼰대 같은 얘기가 되지만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한 데는 이런 세대들이 역경에 맞서 뭔가를 이뤄낸 덕도 크다고 봅니다.”퇴직한 해에 택시운전자격증 취득 택시운전 자격증은 교직에서 퇴임한 2018년에 땄다. 2021년부터 개인택시면허 양수요건이 대폭 완화돼 쉽게 면허를 얻게 됐다.―교장 선생님은 사회적 체면을 중시할 자리인데, 어떻게 택시기사를 생각하셨나요.“저는 사람은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라 하죠. 평소에도 ‘교장 옷을 벗으면 내가 교장이라는 생각은 잊어버리자’고 다짐했었습니다. 퇴직 후에는 남에게 서비스해주는 일을 하고 싶어서 호텔 웨이터도 생각했어요. 당시 지원서까지 보냈지만 답이 안 왔죠. 지금 보면 잘 됐어요. 택시운전이 더 자유롭고 좋아요.”―가족의 반응은 어땠나요.“집사람이 전적으로 찬성했어요. 자기도 면허증 있으면 택시 하고 싶대요.”택시 운전을 준비하며 블로그도 시작했다. 블로그 첫 글이 2021년 2월 올린 ‘제임스 제4의 인생’이다. 그대로 옮기자면 ●제1의 인생 영등포 철공장 유성공업 소년공 노동자 ●제2의 인생 미추홀 외고 교장을 마지막으로 한 교직 ●제3의 인생 인천영어마을 원장 ●제4의 인생 제임스네!네!택시 운전사 이렇게 딱 4줄이 올라와 있다. ―본격적인 글은 그해 7월부터 작성하셨는데 손님들 얘기를 간략하게 쓰셨더군요.“다니다 보니 특이한 분을 많이 만나게 되는 거예요. 이건 기록을 해야겠다, 인생 공부를 할 수 있겠구나 싶었지요.”‘과거를 내려놓는다’는 생각을 실천하고 있었던 걸까. 2년 이상 기록된 블로그에는 교장 시절 얘기는 거의 없었다. 직접 만나 인터뷰하며 옛날 사진들을 보여줄 때에야 그가 당시를 얼마나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노년에 택시 운전은 하늘이 주신 직업평소 시니어 개인택시 기사들의 일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정 씨가 마침 ‘택시 기사 해서 좋은 점 10가지’를 블로그에 기록해 놓았다. ● 1. 다양한 분을 만날 수 있다 ● 2. 운전대는 바로 내가 잡고 있다● 3. 자가용을 끌고 나가면 돈이 나가지만, 택시는 가지고 나가면 돈이 들어온다● 4. 치매 예방에 최고다● 5. 삼식이를 면할 수 있다(집안의 평화)● 6. 맛집을 찾아 다니며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7. 승객을 통해 나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8. 노동의 신성함을 느끼게 해 준다● 9. 휴일의 맛을 만끽할 수 있다● 10. 삶의 시계는 멈추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보너스 : 망할 일이 없다.―‘망할 걱정이 없다’는 말이 와닿습니다.“퇴직자가 창업하면 대부분 실패한다던데, 개인택시는 나중에 양도하면 살 때와 거의 비슷한 가격을 받거든요. 월세니 시설비, 직원 인건비도 필요 없죠. 망할 수가 없어요.”10가지를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터. 그는 ‘세상 구경을 하며 배울 수 있다’는 점을 가장 강조했다. “택시의 작은 창을 통해 넓은 세상을 보는 거죠. 게다가 돈 받으면서 세상 구경 다니잖아요.”―100세 카페에 퇴직 후에도 열심히 사는 분들의 얘기가 자주 나가는데, ‘뭘 굳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려 하느냐’는 댓글들이 종종 달립니다. 겪어본 분들은 일이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그 당혹감을 많이 얘기하시던데…. “교장 모임 같은 곳에 가면 ‘그 나이 먹어서도 일하느냐’고 물어요. 저는 ‘수요일 일요일엔 쉰다’고 답하죠. 정주영 씨가 ‘임자 해봤어’라고 했다지만, 두려움은 바로 ‘해보지 않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결혼식장에서 만난 어느 명예퇴직 교사도 ‘어떻게 그걸 시작했느냐, 나는 발 들여놓기가 두렵다’고 하시더군요. 처음 하는 일들은 다 두렵죠. 하지만 그런 길을 가보는 것도 해볼 만한 일 아닌가요.”그는 자신의 택시 이름에 들어간 ‘네!네!’의 뜻을 열심히 설명했다. “고객의 모든 것에 긍정한다는 뜻이에요. 택시가 a에서 b로의 물리적 이동만이 아니라 심리적 공감의 장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요즘 사회가 참 살기 힘들죠. 승객이 무엇을 얘기하건 가치 판단을 하지 말고 무조건 공감을 하자. 그래서 ‘네네’입니다. 누가 무슨 얘기를 하든 ‘네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며 긍정해드려요.”“택시운전은 청년들의 선망 직종은 아니죠” ―공무원 연금 받으면서 또 돈 버느냐는 질타도 나올 듯합니다. “제 경우 월 매출 200만 원이 목표예요. 비용 제하면 100만 원 남기는 정도죠. 아침 9시 반에 출근해 5시간 반만 일하고 주 2일은 쉽니다. 제 동생도 딸도 ‘젊은이들 일자리 뺏지 말고 조금만 하라고’ 해요. 다만 우리 사회가 은근히 분업화되고 있는데 택시기사는 청년들이 선망하는 일자리는 아니에요. 고령자들한테는 굉장히 좋은 일자리지만요. 그러니 젊은이 일자리 빼앗는다는 말은 하기 어렵게 돼 있어요.” 실제로 개인택시업계는 고령화됐고 법인택시는 기사 부족으로 가동률이 떨어져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비슷한 이력을 가진 분들이 계시다고요.“2021년 양수조건이 완화되고 나서 인천에서 교장 출신으로는 제가 1호예요. 그 뒤 교장선생님 두 분과 명예퇴직한 교사 한 분이 택시를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택시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택시를 몰고 다니면 재미난 일들이 많다. 특히 그의 시선은 어려운 처지의 고령자들에게 자주 향한다.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편리함의 상징인 택시 앱 탓에 노인들이 힘들어졌다는 것. “젊은이들은 집 앞에서 택시를 부르는데 노인들은 도로까지 나가 택시를 잡으려 애태우시죠. 그나마 빈 택시는 모두 ‘예약’이 걸려 있고요. 전 그런 어르신이 보이면 콜을 끄고 유턴을 해서라도 앞에 세워 드립니다. 무척 좋아하시죠.”94세 할머니가 선풍기 파는 곳으로 가자고 해 상점에 내려드렸다가 결국 할머니 집 앞 거리에서 선풍기 조립까지 해드리고, 남동구청까지 가자며 택시를 탄 남루한 할아버지를 목적지에 내려드리며 택시비를 받는 대신 돌아갈 때도 택시로 가시라고 2만 원을 쥐여 드린 얘기 등 운전을 하지 않았다면 체험하지 못했을 에피소드가 많다.물건 두고 내린 손님을 쫓아 추격전도 벌이고 손님들과의 대화를 통해 배우기도 한다. 노부모님이 전 재산을 일찍 아들에게 주고 나서 오갈 데 없게 된 사연을 들으며 “재산은 미리 주면 안 되는 거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직접 택시 호출 앱을 사용하는 92세 할머니를 만나기도 했다. 인터넷뱅킹도 한다는 그 할머니가 ‘조금만 배우면 이렇게 편리한데 친구들이 그걸 못한다’라고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며 ‘변화하는 세상, 주도는 못 할지라도 따라는 가야겠다’고 다짐한다. 꽃 피듯 살아온 인생, 꽃 지듯 살다 간 인생…―택시 일은 언제까지 할 생각이세요?“몇 살이라고 못 박기는 어렵지만 인지능력이나 운동감각이 떨어졌다고 느껴지면 바로 그만둬야죠. 저는 젊고 깔끔하게 보이려고 눈썹 그리고 비비크림 바르고 염색도 하고 다녀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인지능력은 당연히 떨어집니다. 본인은 모르더라도 객관적으로 인지능력이 떨어지면 그만둬야죠. 저만 타고 다니는 거라면 괜찮지만 소중한 생명이 타고 계신데….”―택시를 그만두신 다음은요?“집사람하고 언젠가는 ‘제임스네!네!카페’를 열자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안에 작은 심리 상담소도 두자고. 집사람이 심리상담사 자격증이 있거든요. 많은 시니어들이 속 얘기를 털어놓을 데가 없잖아요. 그런 자리를 좀 만들어보자. 오시는 분들에게 차 대접하고 그분들의 인생사도 들어주고…. 그런 생각을 해보고 있죠.” 30대 중후반에 들어선 두 자녀가 혼인한 지 몇 년 됐는데도 손주 소식이 없어 서운하지만, 그 기대또한 내려놓았다고. 그는 가수 MC 스나이퍼의 ‘인생’이란 노래를 말했다.“중간에 여가수가 피처링하는 대사가 나와요. ‘꽃피듯 살아온 인생/ 꽃 지듯 살다 간 인생/ 돌아보니 아름다웠던 인생/ 이젠 미련이 없네.’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택시 하면서 차창 밖에 보이는 인생들….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들 많이 보잖아요. 저런 평범한 사람들 덕분에 우리나라가 잘 돌아가는구나. 나의 들어 몸 아프신 분들, 그건 또 저의 미래잖아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공부를 많이 합니다. 이게 택시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거지요.”인천=서영아 기자 sya@donga.com}
근 10년 전인 2014년 4월, 김학서(67) 씨는 32년간 다니던 한국무역협회에서 정년퇴직했다. 만 58세. 한 달 정도는 참 좋았다. 소파에서 딩굴며 세상을 다 가진 듯 속이 편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몸이 근질근질하고 좀이 쑤시면서 깨닫게 됐다. ‘퇴직 후에 뭐라도 배워 새롭게 일을 시작해야 하는구나….’‘OECD 보건통계(2023)’에 따르면 0세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3.6세, 65세가 된 사람의 기대수명은 86.6세에 이른다. 반면 법정 퇴직연령은 60세, 민간기업의 비자발적 퇴직연령은 49.5세로, 퇴직 후 20~30년이 숙제처럼 남게 된다. “평생 어느때보다 재미있게 살고 있다”는 김 씨는 지난 10년간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13일 그가 운영하는 시니어 독서모임에 가봤다.시니어들, ‘내 이야기’ 하면서 치유되고 자존감 높여서울 강동구에 자리한 서울시민대학 동남권캠퍼스의 한 교실. 시니어 남녀 10명이 둥근 테이블 앞에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책 질문지로 토론하는 독서모임. 자신들은 ‘수다떨기 인생학교’라고도 부른다.수다의 화두는 김학서 씨가 신작 수필집에서 뽑아온 9가지 질문. 예컨대 △싫은 사람 △밥벌이 △전원생활 △멍 때리기 △새로움과 마주할 용기 등이 이 날의 질문, 즉 화두다. 질문별로 참가자들은 돌아가며 이야기를 쏟아냈다. 화두가 다양하다보니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기억이나 경험들이 마구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고.김 씨는 2년 전 우연히 책 질문지 만드는 법을 배워 질문지 독서 모임 기획가로 활동하고 있다. 여러 책에서 발췌한 문장과 함께 던지는 질문이 사람들이 자연스레 얘기를 꺼내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내 사연이 소중하면 당신의 사연도 소중하다“퇴직 후 동병상련의 시니어를 많이 만나면서 알게됐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누군가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럴 기회가 별로 없다는 것, 그리고 이들이 자기 서사를 이야기하며 그 자체로 위로받고 치유된다는 것을요. 나이 든 세대는 하소연할 곳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 자체로 마음 치료가 되는 것같아요.”구성원은 글쓰기나 독서에 관심이 많은 시니어들. 현재는 55세부터 78세까지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나면 뭔가 후련해지고 즐거워지는 것을 체험해본 사람들이다. 한 멤버는“10년 간 혼자 지내던 생활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러 나오는 과정 자체가 용기가 필요했다”면서 “이제는 매주 이 시간을 기다리게 됐다”고 말한다. 구성원은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 정책이라 조금씩 들고 나며 8~10명 규모로 2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다. ―혼자서만 길게 얘기한다던가, 물 흐리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요. “자연스럽게 필터링이 되더라구요. 토론 때는 2분이상 발언금지, 다른 사람 얘기에 대한 논쟁 금지. 이런 원칙이 있어요. 지나칠 경우 제지를 하기도 하지요.”각자의 소소한 사연은 자신에게는 소중하지만 타인에게는 관심을 끌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자리에서는 일종의 사회계약이 작동하는 느낌이었다. 타인의 얘기를 소중하게 들어주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얘기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퇴직후 5~6년은 경험과 지식 살려 사회활동김학서 씨가 평생 몸담았던 무역협회는 중소무역업체의 수출입업무를 도와주는 기관. 그는 중국실장, 상하이지부장 등을 역임한 중국전문가다. 퇴직 후 우선은 이력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 찾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를 위해 창업컨설턴트 등 전문가 과정을 이수하기도 했다.이듬해부터 2년간 광운대에서 겸임교수로 ‘중국 경제’를 강의했다. 2016년부터는 한국무역협회 수출전문위원으로 위촉돼 강원지역 중소기업의 수출 활동을 도왔고, 중소벤처기업 진흥공단, 대중소농어업 협력재단, 서울시 창업포럼 등에서 자문과 평가 업무에 참여했다.“퇴직 후 5년 정도는 각종 기관과 단체에서 올리는 모집공고에 적극적으로 신청했습니다. 현직에서 익힌 경험과 지식, 노하우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는 사명감이 컸지요.”―여러 일을 겸직하면 수입도 어느 정도 확보되나요?“턱도 없죠. 교수는 한 과목 강사료가 전부이고 각종 위원의 경우 한달에 한번 회의 참석하고 교통비 받는 정도입니다. 퇴직 후에 돈 생각하면 즐겁게 일할 수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인생을 즐긴다는 쪽으로 접근해야죠.”―경제적으로 지장은 없나요.“크게 문제 없어요. 평생 월급쟁이였으니 집 한 채에 국민연금, 개인연금 정도 있는데, 베이비붐 세대가 다 비슷할 거예요. 간혹 뉴스에 나오는 노후 부부 최저생활비(월 200~300만원)정도면 무리없이 살 수 있다고 봐요.”100세 시대 무색한 시니어 일자리 사정그에 따르면 이런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은 딱 65세까지다. 65세가 넘으면 아무리 경험이나 지식이 많아도 사회 활동을 중단하라는 공식적인 압력을 피부로 느낀다.“국제노동기구(ILO) 통계가 만 64세까지를 생산활동인구에 넣기 때문일까요. 대부분의 일에서 아예 지원자격이 없어지더군요. 100세 시대가 무색하죠.”사실 60세를 넘기면서 슬슬 사회에서 배제되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거리나 슈퍼마켓에서 흔히 마주치는 동년배들이 일터에서는 보이지 않았다.“언젠가부터 회의가 있어 가보면 항상 제가 최고령자더군요. 외롭다는 생각을 넘어, 이걸 계속 나와야 하는지 고민이 되더라구요.”―지자체 등에서 운영하는 ‘노인일자리’는 있을 텐데요.“명목은 ‘일자리’지만 월 30만 원 짜리 돈 뿌리기예요. 그분들이 평생 쌓아온 경험이나 지식과는 무관한, 복지의 대상이 되는 거죠. 문제는 이걸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는 거예요.”그러고보니 그가 가리킨 벽에 붙어 있는 서울시민대학의 ‘중장년 진로탐색 워크샵’ 포스터는 모집대상을 ‘40~64세 중장년 누구나’로 한정하고 있었다. “65세 이상은 모든 울타리에서 벗어나 있어요.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는 거겠죠. 결국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던지 세력화해서 여론과 정치인들을 움직여야 고쳐질 겁니다. 전 그런 일을 시작하기엔 늦었지요.”동년배들의 동병상련그래도 한 20~30년은 더 뭔가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 스스로 길을 찾자. 그가 찾은 일은 두가지. 첫째는 수필가 등단이다.“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게 100세 시대를 즐기는 길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문화센터에 등록하고 열심히 배워 지난해 1월 수필작가로 등단했습니다. 습작으로 쓴 글을 모아 ‘삶의 온도는 따뜻한가요’라는 수필집도 냈지요.”이에 앞서 2020년에 퇴직 후 6년간의 생각을 정리한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마이북하우스)’을, 이듬해에는 전자책 ‘중장년, 새 꿈을 펼치자(낙서당)’를 냈다. 그가 찾은 두 번째 일이 이날 보여준 질문지 독서모임이다.“글쓰다 보면 혼자서는 재미있게 지낼 수 있어요. 그런데 동년배들이 눈에 밟히는 거예요. 우리 모임에 나오는 어르신이 78세인데 출석률이 제일 높아요. 말씀 들어보면 ‘이 나이 되니 불러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모임 와서 얘기도 하고 또 연배가 아래인 사람들 얘기를 듣고 하면서 너무 즐겁다고 하세요.”―시니어층 중에서도 특히 70대 남성들이 가장 갈 곳이 없다고 하더라구요. 경로당은 너무 이르고. “그러니까요. 앞으로도 많은 시니어와 질문지 모임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조만간 이분들 이름이 공동으로 들어간 결과물을 만들 생각입니다. 종이책이나 전자책, 동영상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는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나만의 무기를 기르세요―베이비붐 세대의 퇴직과 고령자층 진입이 순차적으로 이뤄지고 있죠. 이 분들, 살 길을 찾아 각자도생하거나 세상에서 한 발 빼고 조용히 방관자로 살거나 대충 두갈래인 것 같습니다.“제가 보기에 극소수 퇴직자들이 뭔가를 하려고 하고, 대부분은 그냥 인생을 놓고 살아요.” ―왜 그럴까요.“무언가에 새롭게 도전한다는 생각을 쉽게 못하는 탓 같아요. 저는 그런 분들에게 ‘생산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늘 얘기해요. 소비자 입장에서 노래를 듣기만 할 게 아니라 노래건 뭐건 재미있으면 그걸 직접 하라는 거죠. 누구든지 뭔가를 한 2~3년 꾸준하게 붙들고 가면 밥벌이도 된다고 보거든요. 그러면 반응들이 ‘그 동안에는 뭘 먹고 사느냐’고 해요. 하지만 뭘 하든 간에 그 3년은 지나가요. 아무 것도 안하고 살면 그냥 지나가는 거고 뭔가를 하면 성과물이 조금씩은 쌓이는 거죠.”―좀 더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가라는 말씀인가요.“살면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잘 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지 못하면 남들이 차려주는 밥상이나 바라게 됩니다. ‘나 좋은 밥상 줘, 그럼 내가 먹을게’ 이런 생각이거든요. 모두가 다 그런 태도라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요. 스스로가 밥상 차릴 생각을 해야지요.”나를 위해, 타인 위해 밥상 차리는 자세그는 요즘 세상의 변화를 오픈카톡방에서 배운다고 했다. “요즘 오픈카톡방 보면 작은 것은 100명 단위, 큰 것은 1200명 정도 가입돼 있는 것도 있어요. 저는 누구건 1000명 정도만 내 고객을 갖고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고 봐요. 그걸 가지고 사업을 한다면 모두 1인 기업이 되는 거죠. 사업도 옛날에는 조직에 의존해서 했다면 지금은 개인들이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것을 확실하게 갖고서 뭔가 챙기는 사람이 승자예요. 즐기면서 잘하는 사람이 가장 강할 수밖에 없고요. 앞으로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해야 해요.”―무슨 말씀인지. “퇴직하고 보니 더더욱 확실하게 알겠어요. 좋건 싫건 의무에 따라 일하는 월급쟁이는 하다 보면 끝내 그냥 월급쟁이죠. 이들은 별 고민도 안 해요. 그에 비해 1인기업들은 그게 자기 것이니까 고민을 하더라고요. 눈덩이로 비유하자면 처음에는 잘 안 뭉쳐지는데 자신의 고민이라든가 생각을 거기다 자꾸 쏟아붓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눈덩이가 확 커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경제적인 부분도 자동으로 따라올 수 있을 거예요. 스타트업이나 유튜브 채널이나 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요.”용기를 내는 것도 습관“저는 지금도 무언가를 배우려고 애씁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을 공부하고 있어요. 두어달 전, 동영상 만들기 강의를 들으러 부천까지 갔어요. 8만 원 내고 8시간 수업을 듣는데 머리만 아팠죠. 하지만 어찌어찌 동영상을 만들 수 있게 됐어요. 용기를 내는 것도 습관이에요. 습관은 그 다음부터는 반복되기 때문에 쉽게 굴러가죠.”그는 질문지 만들는 일이 너무 재미있고 그것을 동료들과 나누는 일에서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요즘 ‘평생 중 가장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뭐라도 좋으니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시작해보세요. 공을 들여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든 뒤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더욱 좋지요. 100세 인생 후반부 30~40년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 조금이라도 잘하는 것, 관심있는 것 중에 하나씩 붙들고 가면 뭔가를 이룰 수 있어요. 요즘은 인공지능이 발달해서 조금만 도움을 받으면 전문가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도 어렵지 않아요.”―다 좋은데 수필도 독서모임도 돈되는 일은 전혀 아니네요.“지금은 그렇지요. 이것저것 용기를 내어 시도해보고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는 것,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이런 게 제겐 더 소중합니다. 또 누가 압니까. 하다보면 제게도 어떤 기회가 올지. 하하…”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캠프 데이비드 이후 한미일 관계-한일 안보협력 과제와 전망’ 주제로한일의원연맹(회장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은 오는 2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한일 전문가 초청 세미나를 연다고 22일 밝혔다. 행사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주최한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미중 전략경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등 주변 안보 환경 변화 속에서 한일 양국 정부의 인식과 대응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양국 정부가 채택한 국가안보전략 문서 등에 대한 평가도 진행한다. 또 지난 8월 미국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나온 공동성명의 의미와 실천 방안을 논의하면서 정책적 제언을 내놓을 것으로 기대된다.한국 측에서는 이상현 세종연구소 소장과 김숙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 이병철 경남대 교수가, 일본 측에서는 지지와 야스아키 방위성 방위연구소 주임연구관과 도쿠치 히데시 평화안전보장연구소 이사장, 사하시 료 도쿄대 교수가 발제와 토론을 맡았다. 한일의원연맹에서는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과 김한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패널로 참여한다.한일의원연맹은 지난 6월 ‘김대중-오부치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25주년 기념심포지엄’을 일본 와세다대학 일미연구소와 공동으로 개최한 바 있다. 한일의원연맹은 “앞으로도 양국 전문가들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국회 차원에서 안정적이고 바람직한 한일관계 발전방향을 찾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경부선 평택역에서 걸어서 4분, ‘착한남성컷’ 간판이 눈에 띈다. 지난해부터 조동근(63) 씨가 혼자 운영하는 이발소다. 메뉴는 크게 컷과 염색 두가지. 컷 7000원, 염색도 1만 원의 파격적 가격을 자랑한다. 대신 머리는 본인이 감아야 한다. 말 그대로 주머니 가벼운 사람들이 편하게 찾는 실용적 이발소다.그는 안정된 직장으로 소문난 한국전력을 50세에 그만두고 반찬전문점 사장을 거쳐 이발소 사장님이 됐다. 그의 사연을 들으러 3일 경기도 평택시의 이발소를 찾았다.20대 후반, 아내가 암 선고를 받았다 50세까지 그의 본업은 한국전력 직원이었다. 19세에 한전직업훈련소를 거쳐 기능직으로 입사했다. 소위 ‘전기원’이라 불리던, 철탑에 오르고 전봇대를 타며 고장을 고치는 그 일을 했다. 32세 때 회사 내 계열 전환 시험에 도전해 기술직 직원이 됐다. 연봉 높고 안정적인 직장으로 유명한 한전이지만 그는 미래가 불안했다. 일찌감치 결혼해 아들딸 낳고 잘 살던 아내가 그의 나이 29세에 비장암 선고를 받았다. 비장은 잘못 건드리면 출혈이 멈추지 않아 사망한다는 장기. 수술이 안 돼 항암치료에 희망을 걸었다.“병명을 알기까지, 입원해서 두 달이 걸렸어요. 만 한 살, 네 살 된 아들딸을 친척 집에 맡기고 회사도 일시 휴직하고 아내 간병에 매달렸죠. 치료비에 가진 것 전부 쏟아붓고 일산의 외양간 같은 곳을 얻어 살았어요. 퇴원 후에는 집 앞 밭 200평을 얻어 온갖 작물을 길러 자연식을 아내에게 해 먹였지요.”그의 나이 37세, 부인이 완치판정을 받았을 때 그는 거의 무일푼이 돼 있었다.“‘이런 상태에서 아내의 병이 재발한다면, 그때는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더라구요. 제가 아내를 간병하는 와중에도 1년을 공부해 기술직에 도전한 것도 혹여 아내가 죽고 저마저 일하다가 사고로 죽으면 아이들이 고아가 될 수 있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반찬전문점으로 ‘대박’돈을 벌기 위해 부업에 나섰다. 낮에는 한전에서 근무하고 밤이면 식당에서 일하며 보신탕집 오리로스구이 가든식당 김치공장 등 닥치는 대로 손댔지만 모두 실패했다. 식당은 그의 사정을 이해하는 직장 동료들의 회식 장소로 애용되곤 했다.1997년 무렵, 5일장에 가서 김치를 팔던 그에게 어느 아주머니가 물었다. “다른 반찬은 없어요?” 섬광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반찬을 만들어 팔면 어떨까? 외식 장사도 사람들의 생활방식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걸 독서를 통해 알고 있었다. 외환위기( IMF)사태가 오면서 모든 사람이 일을 하는 시대가 왔다. 수요가 적지 않을 것 같았다.상가 한구석에서 시작한 반찬가게는 시대 흐름과 맞아떨어져 ‘대박’을 쳤다. ‘명가 찬방’이란 간판을 달고 상가 전면으로 진출했고 매장은 세 군데로 늘었다.성업의 배경에는 끊임없는 연구가 있었다. 그에게는 독서를 통해 얻은 새로운 반찬 레시피 아이디어가 가득했다. 예컨대 식재료를 포장해서 집에서 끓이기만 하면 되게 한 청국장, 부대찌개 등의 반응이 뜨거웠다. 요즘으로 치면 밀키트다.“제조업에 종사하는 오너는 그 제조과정을 다 알고 있어야 해요. 제가 직접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배웠어요. 명절 때 부침개 같은 건 정말 어마어마하게 팔렸어요. 3일간 매출이 3000만 원을 넘겼죠. 제가 직접 녹두 갈고 아주머니 10명이 종일 부치고….”50세, 본업보다 부업 수입이 더 많아지자 그는 한전을 7년여 당겨 명예퇴직했다.시대가 변해도 ‘진화’할 직업을 찾아 이 반찬가게를 그는 2015년까지 모두 접었다. 시대가 빠르게 변했고 반찬가게도 시류를 탔다. 1인 가구가 늘고 1인당 소득 3만 달러 시대가 되니 반찬을 사다 먹는 사람이 줄었다. 올라가는 인건비, 대기업들의 시장진출도 설 자리를 좁게 만들었다.그는 노후 자신의 진로를 놓고 연구를 거듭했다. 다행히도 아내의 건강은 괜찮았고 아들딸 모두 가정을 이뤘다. 평생 먹고 살 것은 어느 정도 마련돼 있지만 스스로가 놀 수 없는 체질임을 알고 있었다. 세상과의 소통도 이어가야 했다. 바야흐로 세상은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AI)이 지배하는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그래서 찾은 게 이발인가요?“이발, 설비, 중장비운전 등 몇가지를 놓고 검토했어요. 미래 직업을 △없어질 직업 △대체될 직업 △진화할 직업으로 분류해봤지요. 사람마다 두상이 다르고 모발 질도 다른데, 이 일은 기계가 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고령시대에 싸고 간편하게 이발할 곳을 찾는 수요도 늘어날 수밖에 없지요. 이용학원에 등록하고 6개월간은 마침 학원 위층에 있던 고시원에서 지내며 공부에 매진했습니다.”이발사는 어떻게 진화할 수 있을까. 그는 고령자가 더 늘어나면 출장 이발 수요도 증가할 거라고 보고 있다. 지금은 이발사가 가정을 방문해 이발해주는 것은 법으로 금지돼 있다. “퇴폐이발소에서 연상되는, 그런 우려 때문이겠죠. 그런데 직접 이발소에 오기 어려운 고령자들이 더 늘어나면 그에 맞게 법도 정비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나이가 많은 이발사들도 부담 없이 프리랜서처럼 일하는 시대가 열릴 수 있지요.”나이 60에 이발사 자격증 따고 평택에 자리 잡아어디에서 개업할 것인가. 자택이 있는 일산 일대를 검토했지만 신도시는 젊은이가 많다. 나이 든 이발사에게 젊은 손님이 오지 않으리라는 게 자명했다. 인구 밀도와 연령대 등을 따져 서울에서 멀지 않고 교통이 편리한 경기도 평택과 안성 구시가지를 노렸다. 고령자도 유동인구도 많아 틈새시장이 있다고 봤다. 그가 2019년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안성에 ‘착한남성컷’ 1호점을 연 이유다.“저는 어떤 머리라도 5~7분이면 다 깎습니다. 불필요한 동작을 모두 배제합니다. 패턴이 다 비슷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평택에는 시니어층도 많지만 군부대도 많아 휴가 나온 군인들이 적잖게 찾아왔다. 이발소에는 음식점 메뉴처럼 머리모양 샘플 사진이 있고 고객은 그중 번호를 고르면 된다.“평택에는 외국인 근로자도 많아요. 그분들이 머리 깎으러 와서 원하는 스타일을 설명하는 건 쉽지 않죠. 그림을 보며 번호를 고르게 하니 서로 편했어요.”나아가 이 분야에서 일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멘토 역할을 자처했다.“한사람 몫의 이용사가 되려면 1)자격증을 따고 2)실습 750여 시간을 거쳐 3)창업 혹은 취업하는 세 단계를 거쳐야 해요. 자격증은 학원에서, 창업 취업은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실습을 감당해줄 곳이 마땅치 않죠. 그걸 제가 돕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봉사활동과 기능연마 두 마리 토끼 잡아그는 주말이면 ‘원데이 클래스’를 열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매주 화요일이면 함께 이발 봉사를 나가 실습 기회를 만들어준다. 카카오톡에 ‘착한남성컷 학습방’을 만들어 수시로 일정과 정보를 공유하고 참고할 만한 지식을 전달해준다. 이 카톡방에는 현재 40명이 들어와 있다.“인근 요양원이나 정신병원 등에 아침 9시부터 7~8명이 가서 100여 명 정도 이발해드립니다. 봉사는 그 자체로도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이발 기술이 숙련되는 좋은 기회예요. 이분들은 조금 밉게 깎아도 상관 않으시잖아요. 특히 고령 남성들은 대개 빡빡 밀어달라고 하세요. 그러면 제자들에게 이발 기계로 밀기 전에 상고머리 커트하는 연습을 해보라고 하지요. 연습용 가발 한 개에 7~8만 원인데, 절호의 기회죠.”유튜브에 이 발기술 자료 영상을 80여 개 올렸는데, 이발을 공부하다가 이 영상을 발견하고 찾아오는 제자들이 간혹 있다. 그의 신조는 ‘최고보다 최초가 돼라’는 것. ‘크몽’이라는 전문가 등록 전자책 포털 사이트에 ‘이발의 정석’ 교재를 등록하고는 “남성헤어컷 분야 교재로는 최초”라며 자랑한다.현재 ‘착한남성컷’은 전국에 5곳이 있다. 1호점이 자리가 잡히자 제자에게 넘기고 2호점을 평택 서정리에 열었다. 그 뒤 2호점도 다른 제자에게 넘기고 지난해 평택역에 둥지를 튼 게 지금의 3호점이다. 서울 봉천동과 광주광역시에도 50대, 60대 제자들이 ‘착한남성컷’을 열었다.“1호점은 58세 전직 미용사가 맡았는데 센스가 좋아 성업 중이에요. 2호점은 60세 여성인데 거기도 잘 되지요. 3호점은 아직 완전히 자리 잡지는 못했지만 훗날 여길 근거지로 하려고 합니다.”“사는데 대학은 그리 필요하지 않더라구요”베이비붐 세대의 특징 중 하나가 극도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 또 그렇게 바닥에서 시작했어도 좌충우돌 부딪히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큰 도약을 해낸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조 씨 또한 본인 표현에 따르면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는’ 가난한 집안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연탄 한 장 한 장 사다가 때우며 생활하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월사금 낼 돈이 없어 중퇴하고 인쇄소에 취직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공장을 전전하다 18세가 되자 ‘이렇게 살면 미래가 없겠구나’는 ‘현타’가 찾아왔고, 야학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한전 직업훈련소에 들어갔다.1985년 첫 아이가 태어날 때 그는 검정고시 학원에 있었다. 그해 고입 검정에, 이듬해 대입 검정에 합격해 1987년 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2년 뒤 아내의 병으로 휴학하면서 그의 학업은 끝났다.-왜 나중에라도 학업을 마치지 않으셨나요.“사는데 대학이 그리 필요하지 않더라구요. 10년간 책을 2000권쯤 읽었어요. 특히 자기계발서에 빠져들었지요. 책 내용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늘 메모하고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봅니다. 나름 시대를 조금은 읽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사실 학벌과는 상관없이 그는 지금도 열심히 공부한다. 음식 장사를 하던 시절에는 외식업 관련 책을 섭렵하고 어떻게 하면 성공할지 고민한 흔적들을 수첩에 빽빽이 남겼다. 반찬가게를 할 때도, 지금의 이발 일을 할 때도 늘 메모하고 읽고를 반복한다. 다만 요즘은 수첩이 아니라 스마트폰에 저장한다고. “한국 청년 걱정되지만…앗! 내색은 안 합니다”마음 같아서는 청년들의 앞길도 열어주고 싶은데 청년세대에는 아직 그의 진심이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전철에서 젊은 아이들 보면 안타까워 죽겠어요. 그 귀한 시간을 시시한 게임이나 하며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막상 표정을 보면 세상에서 자기 역할을 찾지 못해 주눅 들어 있고요.”화요일 봉사 모임에도 가끔 청년 이용사 지망생이 오는데 소통이 쉽지 않다. “봉사 다녀오면 후기를 쓰라고 해도 안 써요. 하나라도 배우려는 자세가 잘 안 보여 답답합니다. 그래도 내색하면 ‘꼰대’가 되니까 참아야죠.”-혹시 나이 든 멘토와 소통이 어색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저는요, 평생 세상에 들이댔어요. 제가 세상에 들이댄 것처럼 많은 젊은이들이 저에게, 세상에게 들이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60세부터 아내는 가끔 만나는 게 반갑고 좋아요”이 세상 많은 가장이 그러하듯 평생 그를 움직인 동력도 가족이었다. 아내가 투병하던 당시에는 어딜 가도 손을 붙잡고 다녔다. 암으로 인해 혈소판이 줄어 어딘가에 부딪히기만 해도 출혈이 멎지 않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주 1~2회 정도 일산에 올라가 만나는 정도로 쿨하게 지낸다. 자녀들은 다 출가했고 아들과 함께 사는 부인은 교회활동에 열심이라고. 조씨는 주로 평택에 얻은 오피스텔에서 생활한다. 그는 “60세 넘으면 부부는 가끔 만나는 게 제일 반갑고 좋다”며 웃는다. “평생 일해 가족을 지켰습니다. 이제 제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거죠. 이 일은 제가 세상과 만나는 창문 같은 겁니다. 인생 바꾸고 싶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이 일을 하길 정말 잘했죠. 아니었으면 세상에 조금이나마 도움 되고 싶은 이 마음을 전할 방법을 어디서 찾았을지 모르겠어요.”평택=서영아 기자 sya@donga.com}
1961년생 최경묵 씨는 2021년 12월 31일 정년퇴직하고 이듬해 1월 3일 새 직장에 출근했다. 연면적 5만 평 규모 빌딩의 관리소장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금요일까지 전 직장에서 근무하고, 신정을 낀 주말 쉬고 월요일부터 출근했어요.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최 씨)단순히 운으로만 돌리기엔 설명이 부족하다. 50대 초반부터 그가 노심초사하며 쌓아온 준비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에게 막막하게 느껴지는 퇴직 후 삶. 그는 어떻게 막간도 없이 인생2막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까. 그건 또 어떤 느낌일까.그를 만나러 17일 서울 송파구 문정현대지식산업센터 관리사무소를 찾았다.●무조건 생존하라, ‘가늘고 길게’지하 2층에 자리한 관리사무소 소장실. 그는 이곳에서 아침저녁으로 회의를 하고 소속 직원 50여 명의 중간보고를 받는다. 평일 상주인구 1만1000명이 넘는 건물의 냉난방과 급탕, 소방 안전관리가 그의 책임하에 돌아간다.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인의 비자발적 퇴직 평균연령은 49.5세. 법정 정년인 60세를 채우는 것은 천운이라고들 한다. 반면 한국인이 일을 손에서 놓는 시기는 72세까지 늦춰진다. 충분하지 않은 노후준비 탓이다. ―퇴직과 동시에 재취업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요.“틈틈이 따놓은 자격증 덕분이죠. 재직 중에 자격증을 활용해 경력까지 쌓아 놓았어요.”그가 가진 자격증은 안전, 소방, 위험물 관련의 3가지. 용의주도하게 퇴직을 준비한 배경에는 남들보다 일찌감치 ‘철이 든’ 과거사가 있다.●이직 5년 만에 부도가 나버린 회사행정학을 전공한 그는 대형 건설사 인사팀에서 6년 반 정도 일한 뒤 당시 백화점 사업에 진출하는 한신공영으로 소속을 옮겼다. 하지만 회사는 그가 이직한 5년 뒤인 1997년 부도가 났고 우여곡절 끝에 중견 유통기업에 흡수돼 버렸다.“고용승계 조건으로 회사가 정리됐으니 우선은 버틸 수 있었지만, 동료의 절반 이상은 회사를 나갔습니다. 회사는 수시로 구조조정을 했고 눈치를 줬습니다. 피합병회사의 직원으로서 갑자기 한직으로 발령이 나거나 진급이 안 되거나, 여러모로 한계가 느껴졌죠.”그의 직급은 1992년 이직할 때 과장이었는데, 정년 1년 전까지 ‘차장’에 머물렀다. 어제까지 그의 업무지시를 받던 부하 직원이 상사로 오는 일은 다반사. 40대 후반쯤 되니 ‘나이가 많다’는 눈치가 더해졌다.“그런 모멸감을 이겨내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호기롭게 나간 사람들이 예외 없이 후회하는 모습을 봤거든요. 이구동성으로 ‘힘들어도 참고 다니라’고 하더군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정년퇴직하는 게 최고의 노후 대책’이라고 충고하는 분도 있었죠.”최 씨는 전형적인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1955년~1963년생). 자존심 세우고 목소리 크지만 컴퓨터 앞에서는 ‘독수리타법’이나 구사하는 ‘꼰대’ 동년배들과 선을 긋고 ‘가늘고 길게’ 생존하는 길을 택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발령에 묵묵히 따랐고 지방 발령을 받자 더 열심히 일했다. 새벽에 컴퓨터학원에 다니며 파워포인트 포토샵 동영상 제작을 배워 20대 청년보다 빠른 정보화 능력을 탑재했다. 회사에서도 중요한 보고서 작성 때마다 그를 찾게 됐다. 승진은 못 했어도 밥값은 하며 살았다고 자부한다.●만년 차장의 설움, “자격증이 날 지켜줄 것”전 직장에서의 마지막 직책은 경영지원부장. 주로 건물과 용역관리 일을 하면서 관련 자격증이 있다는 데 눈을 떴다.―회사 일하면서 자격증 도전, 할 만한가요.“본격 공부는 3년 정도 했는데, 회사일 정상적으로 하면서 시험공부 하는 건 정말 힘듭니다. 기술 자격증은 대체로 공대 출신에 유리하고 문과 출신에게는 용어부터 생소해요. 책만 보면 졸리고, 봐도 봐도 잊어버리고…. ”3차까지 있는 시험에서 수차례 실패했지만 반복하다 보니 조금씩 실력이 쌓였다.“근무시간에는 회사 일을 열심히 하되 밤시간과 주말 등 자기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에는 퇴근 후 바로 도서관에 가서 평균 2시간 정도는 공부했고, 시험 임박해서는 밤 12시에 집에 와서 씻고 한두 시간 더 하곤 했습니다. 이런 때는 하루 서너 시간 자고 공부했던 거 같아요.”●자격증+경력 있으면 좋은 기회 늘어다만 자격증이 좋은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즉시 현장에 투입되려면 경력이 있어야 합니다. 제 경우 산업안전기사 자격증을 딴 뒤 퇴직할 때까지 3년 정도 면허를 걸고 경력을 쌓았어요.”―무슨 말씀인가요.“구청이나 소방서, 산업안전공단 등 공식 기관에 자격증 면허 신고를 하고 실제 활동을 해야 경력이 됩니다. 사전에 회사에 문의를 했어요. ‘자격증을 따면 면허를 걸 테니까 해도 되겠느냐’고. 인사 담당자는 ‘자격증만 따시라, 그 뒤에 얘기하자’고. 아마 수당도 나올 거라고 하더군요.”그는 자격증을 딴 뒤 회사를 통해 구청에 ‘총괄재난관리자’로 신고하고 3년간 일했다.―다른 퇴직 예정자도 따라 할 수 있는 걸까요.“자격증을 딴 뒤 회사와 잘 협의해 공식 기관에 회사의 ‘총괄재난관리자’로 신고할 수 있으면 근무 기간이 경력으로 인정되죠. 그러면 퇴직과 동시에 취업으로 연결될 수 있어요. 꼭 그 길이 아니더라도 전기 안전 소방 등의 ‘기사’ 자격증을 가지면 취직이 수월해져요. 예컨대 소방 관련 자격증을 따면 아파트 같은 데서 근무할 수 있습니다. 기사로 근무하다가 경험이 쌓이고 능력이 되면 관리소장에 도전해 볼 수도 있죠.”●“퇴직하면 모두 똑같아지더라”물론 누구에게나 미래는 알 수 없고 불안하다. 그 또한 다르지 않았다.“퇴직 1년 남기고는 ‘뭐 하고 사나’ 걱정의 연속이었지요. 자격증을 준비는 했지만 이게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어디서건 청소부라도 하겠다고 작심하고 있었지요.”그런데 퇴직 6개월 전부터 인터넷으로 직장을 알아보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보냈더니 한 곳에서 ‘당장 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퇴직일로 정해진 12월 31일까지 마무리는 해주고 나가는 게 도리인 것 같다고 그쪽 회사에 사정했어요. 그런데 그쪽은 당장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못 갔어요. 그 뒤 연결된 지금 직장은 기다려줄 수 있다고 해서 이곳으로 결정했지요.” 관리소장으로서 연봉은 5000만 원 수준. 4대보험, 주 5일 근무가 보장된다.“이 정도 큰 빌딩을 관리하다 보니 나름 책임감도 크고 자부심도 느낍니다. 여기서 일하는 게 행복합니다. 보통 퇴직자들이 제2의 직장을 잡아도 2년 이상 다니기 힘들고 경력을 살리기도 힘들죠. 저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아내가 그러더군요. 요즘은 퇴근할 때 표정이 편안해서 너무 좋다고요.”●“나는 ‘최부장’ 아닌 ‘최씨 아저씨’”―퇴직하는 분들에게 조언을 한다면….“과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정년퇴직하고 밖에 나오면 다 똑같아져요. 직책이 어땠건, 학력이 높건 낮건, 재취업을 하면 급여는 대개 200만 원대 초반이에요. 지금 여기서 일하는 기사님들 중에도 서울대 출신, 은행 지점장 출신, 공무원 출신이 있어요. 50대 초반쯤 구조조정 당해서 산전수전 겪고 자격증 딴 케이스가 많아요. 제가 볼 때 ‘깨인’ 분들이죠. 이렇게 깨인 분이라야 자신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일할 수 있어요.”―어차피 퇴직하면 누구나 힘이 빠지지 않습니까.“전화 통화 목소리나 태도에서 보면 옛날을 내려놓지 못한 분들이 많아요. 높은 지위였을수록 그렇겠지요. 퇴직하면 모두 똑같다는 것,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본인만 괴롭죠.”이런 그는 옛 직원들이 그를 ‘최 부장님’이라 부르면 “그냥 ‘최씨 아저씨’라 부르라”고 한다고. 반대로 진급이 빨라 한때 상사가 됐던 친구가 퇴직 후에도 상사 마인드로 자신을 대하는 걸 느낀 순간, 그 친구를 손절해버렸다고 한다.●남은 꿈은 기술사 도전 그에게는 아직 꿈이 남아 있다.“기술사 공부를 하고 있는데 여러 번 떨어졌습니다. 소방설비기술사 같은 자격증은 최하 연봉 8000만 원 이상이고 건강만 받쳐준다면 80세까지는 일할 수 있어요. 문제는 시험이 어렵다는 거죠. 제대로 준비하려면 전업으로 한 2년 공부해야 할 것 같아요. 다른 한편으로는 더 늦기 전에 좀 놀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다리 성할 때 집사람과 여행도 좀 다니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도전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기술사는 응시 자격 자체가 까다롭다. 기사 자격증을 딴 뒤에도 다시 오랜 경력을 쌓아야 한다. 그는 한국산업인력공단에 가서 면접과 심사를 거쳐 응시 자격을 인정받았다. 전 직장에 자격증을 걸었던 3년은 물론, 그곳에서 20여년간 건물 시설 관리 업무를 한 이력이 도움이 됐다. -혹시 ‘일 중독’이란 생각은 안 드시는지요.“그냥 그렇게 됐어요. 지난 추석 때 6일 연휴가 있었잖아요. 제 평생 가장 길게 쉰 것 같아요. 전 직장에서는 여름휴가 일주일 받아도 2, 3일 쉬고 회사에 나갔어요. 시설관리라는 일 자체가 마음 놓고 쉬기 어려운 데다가 위에서도 은근히 눈치를 주곤 했지요.” ● “이 나이 되면 공부보다 운동이 중요”―언제까지 일할 생각이세요.“지금 직장은 제가 그만둘 때까지 다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65세까지 바라보고 있고, 그 후에는 상황을 봐야죠. 다만 모든 건 건강을 전제로 합니다. 이 나이에는 공부보다 체력 지키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사람을 많이 고용하다 보니 딱 보면 알아요. 그분의 건강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행동이나 말, 걸음걸이가 어눌해지면 일하기 어렵죠. 이건 제게도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요즘 운동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있어요.”40, 50대 때 열중했던 마라톤 대신 요즘은 근력운동과 걷기를 열심히 한다.“얼마 전 동창 모임이 있어 고향에 갔는데 열두어 명 중 현역은 저 혼자였어요. 친구들이 ‘도대체 뇌 구조가 어떻게 됐길래 지금까지 일을 하느냐’며 놀리더군요. 친구들이 저를 칭찬해주고 부러워하는 걸 보니까 내가 잘하고 있구나 싶고, 친구들에게 밥이라도 한 번 더 사게 되니 ‘이게 행복이구나’ 싶기도 합니다.”1막에서 마음껏 꽃피우지 못한 아쉬움은 다 풀린 걸까. 부단한 준비로 화려한 2막을 시작하며 웃는 그를 보며 보통 사람의 성공담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한일축제한마당 2023 in Seoul’이 22일 ‘우리가 그리는 미래’를 주제로 서울 강남구 코엑스 D홀에서 개최된다고 19일 한일축제한마당 실행위원회(위원장 손경식)가 밝혔다. 한일축제한마당은 2005년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한 ‘한일우정의 해’ 주요 사업으로 시작돼 매년 빠짐없이 개최되며 양국 최대 규모의 민간 교류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제 19회를 맞는 올해 축제에서는 특히 한국과 일본의 전통탈춤 특별공연(한국 봉산 탈춤, 일본 이와사키 오니켄바이)이 펼쳐질 예정이다. 지난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한국과 일본의 전통탈춤 무용극(한국 탈춤, 일본 후류오도리)이 동시에 등재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았다. 이 행사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에 관한 협약 20주년 기념사업으로 인정됐다.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진행되는 행사의 오프닝 무대는 서울시 소년소녀합창단과 서울일본인학교의 합동공연으로 양국의 대표적인 동요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함께 부르는 것으로 시작된다.이어 조선통신사를 주제로 한 일본극단 시즈오카현사의 공연, 한일 힙합 공연, K-POP과 J-POP 공연 등이 축제장을 뜨겁게 달굴 예정이다. ‘한일 전통의상 체험 부스’에서는 한복과 기모노 등을 직접 입어 보고 포토존에서 추억을 남길 수 있다. ‘한일 전통 놀이 체험 부스’와 일본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일본 차 문화 체험’, ‘일본 꽃꽂이 체험’도 마련됐다. 한일 만화 특별전 부스에서는 40주년을 맞이한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 ‘마크로스’ 시리즈의 전시 코너가 마련됐고, 오리지널 크리에이터 중 한 명인 가와모리 쇼지 감독을 초대해 사인회를 진행한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15년 전 어느 금요일 밤. 어머니(당시 72세)가 좀 이상했다. 뇌졸중 전조증상이었지만 가족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날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12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뇌자기공명영상(MRI)을 찍었다. 뇌경색으로 이미 왼쪽 뇌가 하얗게 변했다고 했다. 기나긴 간병생활의 시작이었다.4년 뒤에는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아내가 투병생활을 시작한 뒤 마음 둘 곳 몰라하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같은 병원에 입원하면서 차라리 편안해보였다. 그 뒤 대학병원과 요양병원, 재활병원을 옮겨다니는 부모님 간병이 이어졌다. 월 700만~800만 원 씩 들어가는 비용은 네 형제가 분담했지만 버거운 일이었다.임수경 보아스골든케어 대표(62)의 고민도 깊어갔다.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들이 편하게 지내고 보호자에게도 힘을 줄 공간은 없는 걸까. 어디에도 없다면 내가 한번 만들어볼까. 마침 그가 8월에 낸 책 ‘우리 부모님은 요양원에 사십니다’(삼인)가 손에 들어왔다. 5일 그의 일터이자 ‘집’인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의 요양원을 찾았다.잘 나가던 IT전문가, 요양원장이 되다그는 잘 나가던 IT전문가였다. LG CNS 상무, KT 전무, 국세청 첫 여성 국장, 한전KDN 첫 여성 사장, 광주과학기술원(GIST) 이사장 등 공·사기업을 오가며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이런 그가 인생 마지막 ‘사명’을 노인요양으로 정했다.-요양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은 알겠는데 직접 요양원을 짓는 건 차원이 다른 도전이네요.“아픈 부모님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요양원을 찾다가 이렇게 됐네요. 형제들 모두 바쁘게 생활하면서 부모님을 온전히 모시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작동했어요.”형부가 마침 갖고 있던 현재의 부지를 내어줬다.여기에 어떤 요양원을 지을지 구상하던 2014년 그가 한전KDN 사장으로 발탁돼 전남 나주로 내려가게 되면서 프로젝트는 지연됐다. 2018년 임기를 마친 그는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부모님을 직접 모시기로 했다. 재활의료기기를 갖춘 집을 마련하고 간병 도우미도 구했다. 7년 만에 한 방에 누운 부모님은 깜짝 놀랄 정도로 즐거워했다. 늘 무표정에 가까웠던 어머니의 활짝 웃는 얼굴이 사진에 남아 있다.“더 이상 해드릴 게 없습니다. 퇴원하세요”노인성 질환의 특징은 분명 아프고 불편한데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결해줄 수 없다는 점이다. ‘더 이상 해줄 게 없다’니, 보호자 입장에서는 이보다 막막한 말이 없다. 그렇게 병원에서 내쳐진 노인이 갈 곳은 집이나 요양병원, 요양원 재활병원 중 하나다.“이런 현실에 대해 최소한의 안내도 없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도 통탄스러운 게, 어머니가 처음 뇌경색으로 입원했다가 퇴원할 때의 정보부족이예요. 그때 의사가 ‘재활병원으로 가라’는 한마디만 해줬어도 어머니가 와상상태까지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뒤늦게 간병인의 귀띔으로 재활병원에 들어간 어머니는 재활치료 덕에 다리에 조금 힘이 생겼다. 요양원을 짓기 위해 설계만 14번 바꿨다. 10여 년간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아쉬웠던 점을 깨알같이 반영했다. 그에 따르면 원칙은 ‘노인의 삶이 삶인 채로 존재할 수 있는 집과 같은 곳’.“단순 치료 외에 노인의 건강과 정서 상태에 따라 운동·인지·정서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아버지가 운동 삼아 병실 밖에 나가려 하면 간병인이 막아섭니다. 혹시 넘어져 골절상을 입을까봐. 꼼짝 말고 침대에 누워있으라는 겁니다. 노인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가 대개 이래요. 늙고 병들었어도 여전히 오늘을 사는 사람이란 걸 간과하죠. 노인에게도 요양 돌봄 재활치료뿐 아니라 친구 여가 웃음 놀이 쉼이 모두 필요해요.” 부모님 모시고 요양원서 생활그렇게 2020년 4월 문을 연 요양원은 연면적 3000평에 침상 250개로 민간에서는 국내 최대 규모다. 4층짜리 2개동이 요양원이고 부속동에는 노인요양연구소와 채플을 넣었다. 개인생활과 공동생활의 균형을 갖추도록 ‘유니트 케어 시스템’을 도입했다. 유니트(이곳에선 ‘마을’이라고 부른다)마다 거실을 중심으로 주방이 있고 개인 침실이 배치된다. 한개 층마다 두개의 유니트 사이에 간호스테이션과 목욕실 등이 있다.어르신들은 거실에서 이웃과 함께 식사하고 색칠놀이나 노래교실 등 프로그램을 공유한다. 반찬은 공동조리실에서 만들어오지만 밥은 거실마다 따로 짓는다. 밥짓는 내음으로 입맛을 돋우고 내 집같은 느낌을 살렸다.공간이 널찍널찍하고 어디나 햇빛이 들어오도록 설계돼 밝다. 옥상정원과 텃밭 등 면회 온 가족들과 함께 즐릴 수 있다. ‘종사자들이 즐거워야 어르신도 즐겁다’며 마련한 편백나무 휴게실도 임대표의 자랑거리다. 현재 237개 침상이 가동중인데 2인실을 혼자 쓰며 추가비용을 내는 입소자들이 있어 빈자리는 없다. 간호사 요양보호사 등 정규직 종사자 160여 명이 이들을 돌본다. 임 대표는 개원 이래 부모님 옆방에서 생활한다.건축비와 초기비용이 고스란히 대출로 남아 있는데, 침상이 꽉 차면서 이자를 낼 수 있게 돼 안도하는 중이라고.어르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합치면 100평 규모인 두 군데 물리치료실에는 코끼리자전거와 전동자전거, 기립기, 적외선 치료기 등 노인에게 필요한 기기들을 채웠다. 그가 물리치료를 강조하는 이유는 부모님에게서 효과를 봤기 때문. 노인들이 근력을 키워 조금이라도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삶의 질과 직결된다. 자신의 힘으로 화장실에 가는 것만으로도 자존감은 크게 회복된다.딜레마도 있다. 근력을 조금 키운 어르신들이 자신감이 붙어 혼자 움직이려다 넘어지는 사고가 적지 않다는 것. 고관절 골절을 입은 입소자가 수술까지 해 겨우 나았는데 방심한 사이 혼자 움직이다가 주저앉는 바람에 다시 수술한 경우가 있었다. “얼마나 애써서 회복된 건데, 보호자께도 죄송하지만 저희가 더 속이 상했어요. 그런데 이 어머니는 조금 회복되니 또 움직이려 하세요. ‘어머니 근력 운동하시면 또 움직이려 하실 텐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여쭈면 보호자도 답을 못하세요. 저는 어르신이 자력으로 움직이기 원한다면 그래도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휠체어는 정말 못 일어나게 되면 그때 타시면 되죠.”큰 요양원에서는 사고 위험을 피하기 위해 걸을 수 있는 어르신도 모두 휠체어에 태워버리는 경우가 많다. 안전과 걷는 능력, 어느 쪽이 중한지 섣불리 답할 수 없는 사안이긴 하다.‘집 대신 요양원’도 충분한 선택지-요양원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적지 않은데….“입소하는 어르신도 보호자도 마음의 짐이 크죠. 어르신들은 요양원 가는 걸 창피하게 여기고 보호자들도 부모봉양 제대로 못한다는 자책감을 가지세요. 하지만 어르신들이 조금만 마음을 열면 공동생활이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저는 ‘보호자들도 살아야 되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많이 하죠. 제가 2년 정도 집에서 부모님을 모셨는데, 제 생활이 없었어요. 간병 도우미 2명 데리고 했는데 비용도 많이 들고요. 문제는 부모님께 ‘집에 있다’는 것 말고는 별로 해드릴 게 없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1년쯤 되니 ‘심심하다, 지루하다’ 자꾸 말씀하시더니 갑자기 치매가 오셨어요.”-여기서는 어떻게 지내시나요?“아버지는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산책도 많이 하고 남들 사는 모습도 보고…나름 사회생활이 가능하니 무척 좋아하세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곁에 계신 것만으로도 좋아하시고요. 틈만 나면 두 분이 손 붙잡고 계세요.”-가장 힘든 일은?“어르신들은 상태가 나빠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들어올 때 괜찮았는데 왜 이렇게 되셨느냐’며 항의하는 보호자들이 계세요. 효심이 큰 분일수록, 내가 모셨어야 한다는 자책감이 강한 분일수록 더 그러세요.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 일에 에너지 소모가 많습니다.”따지고 보면 모두가 이미 ‘돌봄이 매우 필요하다’는 장기요양등급을 받은 어르신들이다. 시간이 흐르면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 인생 섭리가 그러한 것 아닌가. -좋았던 일은?“이제 보내드려야 하나, 생각했던 분이 회복되시면 힘이 나지요. 4월 병원에서 담석제거 수술을 받고 한달간 입원했던 99세 어르신이 복귀하겠다고 하시길래 보호자께 ‘요양병원쪽으로 알아보시는 게 좋겠다’고 권했어요. 저희는 병원이 아니니 임종을 놓칠 수도 있고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여기가 내 집’이라고 고집하신다는 거예요. 결국 제 방 옆방에 모시고 들여다봤는데 처음엔 음식을 잘 못드시더니 5개월 지난 지금은 스스로 휠체어 운전하고 다니세요.”여생을 어디에서 보낼까여생을 어디에서 보낼까에 정답은 없다. 세계적으로 ‘살던 곳에서 나이들기(aging in place)’가 붐이지만 각자 처한 여건도, 상태도 다르다. 부모 입장에서는 돌봄은 필요하지만 자식들 삶을 망가뜨리면 안된다. 자식 입장에서는 돌봄뿐 아니라 부모님 삶의 질도 생각해야 한다.“어, 우리 아버지 춤춘다. 옆에 우리 어머니…”(임 대표)방을 비운 임 원장의 부모님을 찾아 노래교실이 한창인 거실로 가봤다. 트로트에 맞춰 율동지도가 진행되는 현장을 보자마자 임대표는 아버지가 율동을 따라하시는 것을 반겼다. 거동이 부자유스러운 어르신들의 춤이란 게 강사의 지도에 맞춰 손을 움직이는 정도지만 몸이 리듬을 타고 있는 건 분명했다.“매일 아침 일어나면 13개 마을을 돌며 인사드리고 ‘박수치기’ 같은 것을 함께 합니다. 어르신들과의 소통이 즐겁습니다. 지금이 너무 좋아요. 이곳을 만든 덕분에 저는 노후에 할 일을 얻었고 부모님은 안정되고 편히 지낼 곳을 얻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제 가족이 생의 마지막에 돌아와서 살 곳도 얻었지요.”사실 그가 요양원을 세운 데는 본인 세대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크게 작동했다. “부모님 세대는 우리가 돌보면 되는데, 우리 세대는 그런 걸 기대할 수 없죠. 흔히 효도를 하는 마지막 세대, 효도를 못 받는 첫 세대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갈 곳을 스스로 만들어야겠구나…이곳을 세운 뒤 제 형제나 친구들 모두 ‘더 나이들고 아프면 갈 곳이 있어 든든하다’고 말하고 있어요.”포부는 노인 돌봄 복지 모델을 만드는 것. 요양원에서 다양한 사례를 모아 노인요양 서비스, 프로그램, 노인요양정책 등을 개발하는 데 힘을 실을 생각이다. “어르신들은 살아온 삶에 대한 칭찬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공감하고 위로받는 분들이 많아져 어르신과 보호자들, 편치 않은 분들이 조금은 편해졌으면 좋겠습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