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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검찰의 공통점이 있다면 사람들한테 묻는 게 ‘일’이라는 거다. 기자들은 그걸 취재라고 하고 검찰에선 취조라고 한다. 기자들은 상대방의 말을 사실로 믿고 쓰고 검찰은 사실인지 의심한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물론 기자도 보도에 앞서 복수의 취재원한테 사실 확인을 하도록 훈련받는다. 기자의 확인 요청에 거짓을 말하는 공직자는 (거의) 없다. 차라리 답변을 피하거나 모른다고 할지언정 거짓말하면 책임을 면치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공복(公僕·국가의 심부름꾼)의 도리이고, 알권리를 위해 복무하는 언론에 대한 자세이며, 우리가 사는 세상의 상식이자 원칙이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전후 일을 도왔던 한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윤 대통령은 남들이 과연 진실을 말하는지 의심한다는 느낌이라고. 평생을 검찰로 살았기에 대통령이 됐다고 단박에 의심증을 벗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남들이 꼭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대통령이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거짓을 말했다면 심각한 문제다. ● “순직사고 질책” 못 믿겠다 5월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채 상병 사건과 관련해 ‘대통령실 외압 의혹과 대통령이 국방부 수사 결과에 질책했다는 의혹’을 묻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윤 대통령은 수사 결과 아닌 ‘순직 사고’에 대해 질책을 했다고 답했다. “채 일병이 순직한 사고 소식을 듣고 저도 국방장관에게 ‘현장에 며칠 전에 다녀왔지만 어떤 생존자를 구조하는 상황이 아니라 돌아가신 분의 시신을 수습하는 그런 일인데, 왜 이렇게 무리하게 진행을 해서 이런 인명사고가 나게 하느냐. 앞으로 여름이 남아 있고 또 홍수나 태풍이나 이런 것들이 계속 올 수 있는데 앞으로 대민 작전을 하더라도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된다’ 이렇게 좀 질책성 당부를 한 바 있다.”좋게 말해 동문서답이다. 최근 속속 드러나고 있는 대통령-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통화 사실로 미뤄보면 당시 답변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현장에 며칠 전에 다녀왔지만’이라는 말을 앞세움으로써 2023년 7월 19일 채 상병의 순직일로부터 며칠 지나 질책했음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킨 의도가 엿보인다. ‘격노’ 질문이 나올 줄 알고 뭔가를 은폐하려 치밀하게 계산한 발언이라면, 검찰 앞에 섰던 이들과 닮은 꼴이다. ● 국민은 개돼지가 아니다 순직 그 자체 때문이라면 대통령 주재 국가안보실 회의가 열렸던 7월 31일 즉 대통령 ‘격노설’이 불거진 그날 대통령실-이종섭 통화 말고도 8월 2일, 그러니까 해병대 수사단이 그 사건을 경찰에 이첩한 날, 윤 대통령이 심지어 휴가 중에 개인 폰으로 해외 출장 가 있는 이종섭에게 세 번 씩 전화해 20여 일 전 순직 사고를 또 질책할 리 없다. 그 질책성 전화 사이, 이종섭이 국방장관에서 해임되는 게 아니라 박정훈 수사단장이 보직해임 된 것도 황당하다. 지금까지 대통령(실)과 통화한 적 없다던 이종섭도 어쩔 수 없었는지, 사단장을 빼라는 통화가 없었다는 취지지 통화를 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라고 말을 바꿨다. 대통령실 관계자도 “통화내용에 대해 억측을 하고 있다”면서 공수처와 경찰의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이 개돼지로 보이는 모양이다. 윤 대통령도 기자회견에서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면 수사 당국에서 수사 결과를 발표할 텐데 국민들께서 이거는 봐주기 의혹이 있다, 납득이 안 된다 하시면 그때는 제가 특검하자고 먼저 주장하겠다”고 말하긴 했다. 안타깝게도 신임 공수처장은 인사 청문회에서 확인했듯 흠 많고, 수사 경험은 전혀 없는 인물이다. 공수처가 기신기신 또는 심기일전 죽기살기로 수사해 “대통령(실)은 무관하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고 치자. 다수 국민이 흔쾌히 믿어줄 수 있을까. ● 비리보다 은폐에 더 분노한다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대체 왜 대통령은 국민 앞에 거짓을 말한 걸까. 왜 과히 중요하지도 않은 격노의 이유를 굳이 감춘 것일까. 이종섭이 대통령(실)과의 통화를 죽어라 은폐했던 이유는 정녕 무엇이었나. 윤 대통령의 ‘격노 은폐’가 못내 불길한 것은 불행한 우리 역사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보면,우리 국민은 권력비리 그 자체보다 은폐 조작 사실을 더 못 참았고, 더 격노했다.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해 1월 16일 동아일보가 특종 보도한 (책상을) ‘탕’ 치니 ‘억’ 하고 숨졌다던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억울한 죽음. 더 큰 국민적 분노는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고문치사 조작 폭로-19일 ‘박종철 군 사건은 조작됐다’는 동아일보 기사에서 터져 나왔다. 고문치사 가담자들이 3명 더 있음을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도 알고 있었으면서 사건을 축소 은폐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자 신군부 정권에 대한 총체적 공분이 폭발한 것이다. 넥타이 부대의 민주화 시위, 노태우의 6·29 항복 선언은 깊숙히 감춰져있던 용암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급기야 분출하면서 온 하늘을 삼켜버린, 즉 ‘은폐’에서 비롯된 숙명적 결말이었다. ● 은폐 비서관을 대통령실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국도 비선실세 은폐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때 대통령의 행적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돌이켜보면, 국민에게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의 청와대 방문 사실을 감추려다 그 숱한 루머가 난무했고, 그럼에도 속수무책이었고, 그래서 일파만파로 일이 커진 게 아닌가 싶다. 당시 ‘문고리 권력 3인방’ 중 일인으로 최근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실 심지어 국민공감(!)비서관에 등용된 정호성도 이렇게 말했다. “최순실은 저희한테는 대외적으로 없는 사람이다. 존재하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돕는…. 그런 사람이 밖으로 등장하면서 상황이 꼬인 것 같다”고. 2017년 1월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증인 진술에서 한 말이다.지금은 많이들 잊었지만, 최순실이 세월호 당일 청와대 관저를 방문한 사실이 드러난 것은 2018년 3월이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신지용)에 따르면 그날 최순실은 청와대 경호검색을 받지 않고 관저까지 들어가 주요 국정 논의 회의(!!)를 문고리 3인방(!!!)과 함께 한 뒤 대통령에게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방문을 했다는 건의했다는 것이다(이 사실을 박 전 대통령은 탄핵 심판에서도 한사코 숨겼다). 그래서 정말이지 납득이 안 되는 바다. 왜 윤 대통령은 하필 탄핵과 비선, 은폐를 연상시키는 정호성을 대통령실에 들인 것인가. ● 분하고 원통해 그냥 넘길 수 없다‘채 상병 특검법’의 공식 명칭이 ‘순직 해병 수사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이다. 채 상병의 불행한 죽음을 규명하는 일은 기실 이렇게까지 온 나라의 에너지를 잡아먹을 일은 아니었다. 대통령(실)의 수사 방해 및 은폐가 의심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작년 8월 13일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채 상병 사건 처리 과정에 대통령실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 “정황과 추측을 하고, 가짜뉴스를 만들어가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감히 입을 놀렸다. 앞에서 누누히 썼듯이 우리 국민은 권력자의 비리 그 자체 못지 않게 비리 은폐에 무섭게 분노한다. 더구나 대통령은 안 갔던 군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아들 가진 부모들은 분하고 원통해 도저히 남의 일로 넘길 수 없다. 군 입대를 앞둔 청춘 사이에선 대통령이 무시로 하는 격노가 부글부글 끓어 넘칠 판이다. 차라리 기자의 격노설 질문에 윤 대통령이 이렇게 답했다면 어땠을까. “2022년 개정한 ‘군사법원법’에 따라 군내 사망사건 수사 권한은 민간경찰로 넘어갔습니다. 해병대 수사단은 이번 사건에 대한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사실’에 관한 문제만 조사할 수 있을 뿐 과실에 대한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해병대 수사단이었던 박정훈 대령이 사망사건 관련자들과 혐의까지 특정한 이첩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법에 어긋난 월권이었습니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바로잡은 것을 수사 개입이라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차라리 상남자답게 말하시라임성근 전 사단장에 대해서도 윤 대통령은 진솔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채 상병의 죽음은 정말 비통하지만 사단장이 지휘 책임 아닌 과실치사의 책임까지 져야 한다고 보진 않는다고 말이다(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런 의견에 동의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이종섭과 통화한 사실과 내용을 진솔하게 밝혀준다면(그리고 앞으론 격노하는 버릇도 고치겠다고 덧붙인다면), 대통령 편에 서겠다는 국민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취임 이래 최저인 21% 국정지지율(갤럽)을 먹고도 어퍼컷만 날리는 대통령이 불안하고 불길해 하는 말이다. 불행한 대통령 역사의 반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김순덕 고문·칼럼니스트 dobal@donga.com}
특검, 공수처, 검찰의 철저한 수사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가 난무해도 대부분의 평범한 시민은 평생 검찰청 한 번 안 가보고 산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수수’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이 최재영 목사가 김 여사에게 선물한 책을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주웠다는 주민을 소환한다는 뉴스에 내 첫 느낌은 ‘에고, 겁나겠다’였다. 그런데 다행이다. 21일 조사받은 권성희 씨는 마침 변호사였다. “범죄의 증인이나 증거를 가진 국민은 수사에 협조할 의무가 있다”고 씩씩하게 말했다. 그가 신의 목소리를 듣고 제보했다는 것도 신기하고 신비롭다. 3일 ‘4402’라는 소리를 듣고 사사공의, 즉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의(公義)를 취하라는 의미로 해석했는데 때마침 이원석 검찰총장이 디올백 신속 수사 지시를 내렸다는 뉴스를 접하고 언론에 제보했다는 거다. 보통 사람도 이럴진대 윤 대통령은 사사로움 때문에 공의를 버리는 듯한 모습이다. “윤석열의 사전엔 내로남불은 없을 것”이라고 2021년 11월 5일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를 수락하며 연설하더니, 자신이 당했던 ‘총장 패스 인사’ 판박이로 김 여사 관련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지휘부를 싹 갈아버렸다. 문재인 전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도 인도 ‘단독 외교’로 논란인데 자그마한 파우치 하나가 뭐 그리 중하냐고 볼 수도 있다. 그 문제는 그 문제대로 수사든, 특검이든 규명할 일이다. 그러나 김 여사 문제는 이번 총선에서 국힘 참패에 큰 영향을 미친 데다 앞으로 우리 삶도 좌우할 수 있어 그냥 넘기기 어렵다. 2022년 대선 때 윤 대통령을 찍었으나 4·10총선에서 민주당 지지로 변심한 이들, 특히 수도권 유권자들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이슈가 디올백 문제였다(동아시아연구원 민주주의연구센터 소장 강원택 서울대 교수 최근 연구). 이종섭-황상무 논란, 물가 상승, 의사 파업은 그다음 문제였다. 물론 윤 대통령은 ‘아내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을 사과하긴 했다. 검찰 수사에 대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오해가 일어날 수 있어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고도 말했다. 그러고는 검찰 수사 지휘부를 측근으로 교체한 것은 대국민사과를 뒤엎은 것과 다름없다. 16일 153일 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뒤 공개 일정을 계속하는 김 여사의 표정은 내 남편, 검찰공화국 대통령이 다 정리했다는 팽팽한 자신감이었다. 비교하기 내키진 않지만 5공화국 때 나돌던 유행어가 ‘육사 위에 여사’였다. 신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를 빗대 나온 말이다. 요즘 야권에선 ‘검사 위에 여사’라고 조롱한다. 정부가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는 방법 중 하나가 선택적 법 집행인데 이래서야 검찰이 암만 법과 원칙대로 수사한대도 공정하다고 인식될 수 없다. 사회적 정의로서의 공정성 인식이 시민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남편 잘 만나 수사도, 처벌도 안 받는 나라라니 과거 대통령 탄핵 때 외치던 “이게 나라냐” 소리가 절로 나올 판이다. ‘검사 위 여사’의 나라가 겁나는 것은 이 모든 일이 윤 대통령 취임 전 공개된 김 여사 녹취록대로 진행되고 있어서다. 김 여사는 인터넷 매체와의 통화에서 비판적 매체를 거론하며 “내가 권력을 잡으면 거긴 무사하지 못할 거야. 권력이라는 게 우리가 안 시켜도 검찰이 알아서 입건해요. 그래서 무서운 거지” 말한 바 있다. ‘내’가 권력을 잡는다는 인식도 위험하지만 권력의 주구라는 검찰 권력에 대한 통찰은 더욱 섬뜩하다. 윤 대통령의 ‘관저 정치’가 깊어지고 국힘이 총선에 패배한 뒤, 비선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도 불길하기 짝이 없다. 박영선·양정철 기용설이 나오고 함성득-임혁백이 대통령의 ‘이재명 대통령 밀어주기 거래’ 같은 발언을 밝혔는데 대통령 부부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도 공교롭다. 이 때문에 용산 근처에선 VIP1, 2를 넘어 ‘VIP제로’ ‘대리 격노’ 소리가 공공연히 나오는 것이다. 야권에선 마침내 탄핵을 공식 거론했지만 ‘개딸들의 나라’는 지금보다 더 비민주적이고 끔찍할 것이 틀림없다. 아직 희망을 놓지 않고 싶은 이유다. 3년은 한참 길다. 그래서 “국민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저에 대한 지지와 성원이 언제든지 비판과 분노로 바뀔 수 있다는 겸손한 자세로 임하겠다”던 윤 대통령의 국힘 후보 시절 연설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지지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지도자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아쉬운 대로 제2부속실과 특별감찰관 설치라도 서두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참 까마득한 옛날같지만 꼭 4년 전, 그러니까 2020년 총선 직전 김종인 미래통합당(지금의 국민의힘이었다)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가장 정직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이라고. 조국이 잠깐 법무부 장관이 됐다 검찰에 ‘비리’가 털리면서 물러나고, 위성정당 열린민주당이 검찰 수뇌부를 ‘검찰 쿠데타세력’이라며 대차게 공격하는 와중이었다.그 김종인이 국힘 대선 후보가 된 윤석열에게 2021년 말 결별을 고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늘 얘기하지만 경선하기 전 사람과 후보로 확정된 사람, 대통령이 된 사람 사이에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9일 윤 대통령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내가 묻고 싶었던 질문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만남 전 ‘비선라인’이 있었는지, 이재명의 대선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은 대통령실에 안 쓰겠다고 제안한 게 사실이냐는 질문 말이다. ● 대통령실 개편 때 이재명 경쟁자 안 쓰겠다고? 물론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윤-이 회담은 ‘공식라인’을 통한 것”이라고 부인했다. 그런 기사가 7일 조간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고도 한참이 지나 오후에 나온 답이다. 참내. 이런 경우엔 차라리 “모른다” 라든가 “말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게 낫다. 전쟁 중 적군 사이에서도 협상은 해야 하는 법. 밀사가 오가는 게 나쁠 순 없다. 분명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거짓말하니 가뜩이나 높지도 않은 윤 대통령의 신뢰가 더 떨어지는 것이다(10일 발표된 갤럽 조사에서 윤 대통령 직무 긍정률은 24%.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 중 최저였다) . 민주당 쪽 비선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는 그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자신과 함성득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이 윤-이 사이에서 “일종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고 확인해줬다. 임혁백이 누군가. 비록 내가 신문 칼럼에서 ‘이재명의 망나니’라고 쓰긴 했어도(4‧10 총선에서 그는 민주당 공천관리위원장이었다) ‘명예’교수가 정치인처럼 ‘정치적 거짓말’을 할리 없다. 윤 대통령이 함성득-임혁백을 통해 전한 메시지는 국힘 지지층이나 보수라면 뒷목 잡고 쓰러치기 충분했다. 거칠게 해석하면, 국힘의 1호 당원이라며 2년간 당 대표 2명, 비상대책위원장 3명을 갈아치웠던 윤 대통령이 대통령실을 이재명의 대선 경쟁자가 안 될만한 ‘얼빵’으로 채워선 다음 정권을 민주당에 상납할 의향을 밝혔다는 얘기다. 우하하하. 대통령감은 대통령실에만 있다는 윤 대통령의 발상도 웃기지만 이재명은 무슨 이런 대통령이 다 있나 속으로 비웃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경쟁자는 많을수록 좋다”는 모범답안을 전해달라고 했다는 거다. 아주 여유만만하게. ● 기자회견에서 ‘비선라인’ 왜 물을 기회 없었나 그래서 기자들이 ‘사전 담합’을 해서라도 윤 대통령에게 비선 확인 질문을 했어야 한다는 거다. 윤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그런 말은 한 적도 없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는데 그런 말이 어떤 말인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국민을 고문한 셈이다(국힘 지지층은 궁금해 미치겠고, 민주당 지지층은 고소해 죽겠도록). 함성득은 윤 대통령의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시절 ‘사우나 동문’인데다 대통령 부부와 가까운 사이로 유명하다. 특히 7일 한국일보 단독기사로 실린 함성득의 ‘설명’은 반드시 대통령의 확인이 필요하다. 함성득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나는 어차피 단임 대통령으로 끝나지 않느냐”며 “소모적 정쟁이 아니라 생산적 정치로 가면 이 대표의 대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는 거다. 생산적 정치 중요한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생산적 정치가 나라와 국민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이재명의 대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윤 대통령이 말했다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재명이 윤 대통령을 도와주면 윤 대통령도 이재명의 대통령 당선을 돕겠다는 ‘거래’의 의미로 읽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윤 대통령이 “이 대표를 둘러싼 각종 수사는 내 정부가 아니라 문재인 정부 시절 시작된 것”이며 “ 내 가족도 다 수사를 받았고 다 끝난 문제로 다시 불려 왔다”고 강조했다고 함성득은 설명했다고 한다. 위의 생산적 정치와 연결해 또 한 번 거칠게 해석하면, 머리끝이 쭈뼛 설 판이다. 몇 달째 두문불출하는 김건희 여사를 위하여 윤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사법 리스크를 피차 퉁치고 정권을 주고받자는 간교한 딜로 읽혀서다. 가장 불쾌한 건 무슨 대의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 봐도 김 여사의 도이치 수사 문제를 감싸주기 위한 눈물겨운 윤 대통령의 순애보로 읽힌다는 점이다. 한국일보 기사가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사실 확인 기회가 필요했던 것인데 대통령은, 대변인은 그걸 놓쳐버렸다. ● 총선은 윤석열식 내로남불에 대한 심판기자가 물어도 과연 대통령이 정직하게 답할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윤 대통령이 솔직담백하게 말해주는 성격인지도 잘 모르겠다. 대통령의 9일 답변도 사실과 다른 것이 적지 않았다. 김 여사의 ‘도이치니 하는 사건’(대통령 표현)을 놓고 윤 대통령은 “지난 정부 한 2년 반 정도, 사실상 저를 타깃으로 검찰에서 특수부까지 동원해 정말 치열하게 수사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실은 서면조사만 달랑 한번 받았을 뿐이다(지금까지 대통령은 늘 “탈탈 털렸다”고 말했기에 난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어버이날 가석방된 대통령의 장모만 해도 그렇다. “내 장모가 누구한테 10원 한 장 피해 준 적 없다”로 유명해진 바로 그 분이다. 대통령은 2021년 6월 출마 선언을 하며 “그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표현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었다(마치 “바이든이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표현을 한 적이 없다”는 말과 흡사하지 않은가). 검찰총장 출신 정치 신인 윤석열은 그때 “제 친인척이든 어떠한 지위와 위치에 있는 분들이건 간에 수사와 재판, 법 적용에 있어선 예외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멋지게 말했었다.그렇다면 김 여사도 마찬가지여야 옳다.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총선 패배 이유로 민생과 소통에서의 부족을 꼽았지만 난 아니라고 본다. 윤석열식 내로남불에 대한 심판이었다. 말로는 공정과 상식을 외치며 ‘내 식구’ 아닌 모두를 범인 취급하고, 정직하지 못하게 ‘내 식구는 예외’라고 주장하는 대통령에 대한 대파 일격이었던 것이다.● 이젠 대통령이 뭔 말을 해도 믿기 어렵다4년 전 정직하고 나라에 충성했던 윤석열은 지금 안 보인다. 국방부 수사 질책 의혹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채 상병 순직 사고를 질책했다는 대통령의 답변도 정직해 보이지 않는다. 나라에 충성하기 보다 오로지 김 여사에게 충성하는 대통령만 보일 뿐이다. 윤석열 국힘 대선후보 시절 김종인은 곡절 끝에 그의 곁을 떠나며 “정직하지 않으면 성공도 못한다”고 일갈했다. 인간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 옛날 공자는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이라고 했다. 경제도, 국방도 중요하지만 신뢰가 없는 나라는 존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앞으로 윤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든 믿기 어려울 것 같아 나는 그게 제일 두렵다.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역사에 답이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중국의 마오쩌둥이 17번이나 완독했다는 역사서 ‘자치통감’까지 안 읽어도, 과거 대통령 행적만 돌아봐도 윤석열 대통령은 위기 극복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는 김대중(DJ),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겉모습만, 그것도 변칙적으로 따라가는 듯하다. 2000년 집권 3년 차 총선에서 여소야대를 맞은 DJ처럼 윤 대통령은 영수회담을 가졌으되 DJ와 달리 경청은커녕 야당 대표보다 더 많은 말을 했다. 2016년 박 전 대통령처럼 윤 대통령이 내부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참패 소회를 밝히고 친윤(친윤석열) 비서실장을 앉힌 것도 위험하다. 여당에서 원로의 관리형 비상대책위원장을 모신 것도 모자라 친윤 원내대표 설이 끈질기게 나오는 것도 기시감을 일으킨다. “나를 내시라고 불러도 좋다”던 ‘도로친박당’ 대표는 ‘당정청 한 몸’을 위해 단식까지 불사했지만 결국 불행한 파국을 맞고 말았다. 또 다른 모델은 있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이다. 윤석열 정부의 인사와 정책이 MB 때와 꽤 겹친다는 점은 이미 알려졌지만 그 밖에도 공통점이 적지 않다. 첫째, 강부자(강남 땅부자) 인사와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으로 출발해 부자 정권 낙인이 찍힌 점이다. 대통령 부인의 친인척 관련 사건이 끊이지 않은 것도 공교롭다. 둘째, ‘불통 대통령’도 닮은꼴이다. MB 역시 “나는 정치 안 한다”며 뺄셈 인사와 공천으로 선거연합을 해체해 오만과 불통 소리를 들었다. MB의 “내가 해봐서 아는데…”와 윤 대통령이 영수회담에서 말했다는 “내가 수사해봐서 아는데…”도 맥락이 같다. 무엇보다 취임 첫해부터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는 게 슬픈 공통점이다. MB는 MBC ‘PD수첩-광우병’이 촉발시킨 촛불시위가 터지면서 취임 석 달 만에 국정 지지율 21%로 추락했다(갤럽). 윤 대통령이 취임 100일도 안 돼 지지율 28%까지 주저앉았을 때는 부정평가 이유 1위가 인사, 2위가 ‘경제·민생을 살피지 않는다’였다. 비우호적 방송 환경과 좌파 이권 네트워크의 선전선동 역시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MB는 넉 달 만에 30%대 지지율을 회복했다. 2010년엔 49%까지 올랐고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으며 무사히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비결은 친서민 중도실용 정책 전환과 탕평 인사였다. 말로만 “첫째도 민생, 둘째도 민생” 해가며 학예회 같은 민생토론회나 열어선 소용없다. 원금만 4억 이상 있어야 혜택 볼 수 있는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를 내놓으며 부자 감세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그러면서 내 식구만 싸고돌아 ‘공정과 상식’을 코미디로 만드니 양남(영남-강남) 정권으로 몰락한 것이다. MB에게는 “여론조사 결과 대선 지지자의 상당수가 이탈했다”며 국정 기조 전환을 건의한 참모진이 있었다. 그 결과 중도 실용과 ‘따뜻한 자유주의’를 선언한 2009년 8·15 경축사가 나왔고 진보 진영의 제안을 채택한 서민금융제도, 든든학자금, 보금자리주택 등 친서민 정책이 이어져 문재인 전 대통령의 3년 차보다 높은 40%대 후반 지지율을 구가할 수 있었던 거다. 국정 기조 전환과 더불어 중요한 것이 인사를 통한 가시적 변화다. 윤 대통령은 능력만 본다고 강조했지만 그 말을 믿는 국민은 검찰과 대통령 동창 그리고 대통령 부인의 측근 빼면, 없다. 2010년 최초의 전남 출신 총리 김황식을 내정할 때 MB는 이재오 특임장관을 야당에 보내 ‘동의’를 받아오게 했다. 친박(친박근혜)이라는 당내 야당과 공존한 것도 넓게 보면 협치다. 윤 대통령이 지지율에 목매달아야 할 이유는 국정 동력을 높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3년은 너무 길다’며 윤 대통령을 끌어내리려는 세력이 기세등등하기 때문이다. 벌써 야권 일각에선 대통령 임기 단축을 위한 개헌론을 쏟아내고 있다. 거대야당에 신뢰할 만한 대통령감이 있으면 또 몰라도 윤 대통령을 뽑았던 다수 국민은 불안하고 답답하다. 글로벌 불평등이 격해지며 민주적 자본주의가 위기인 상황이다.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고물가 저성장으로 살림이 팍팍해진 현실에서 “과도한 재정 중독을 해소하는 과정에 살피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윤 대통령의 설교는 1도 와닿지 않는다. 태도와 소통 방식뿐 아니라 MB 같은 가시적 변화가 절박하고 시급하다.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은 여당 원내대표 시절인 2016년 말 대통령 탄핵 사태 직전 “(대통령 하야) 전례가 생긴다면 제왕적 대통령제의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다음 대통령들은 거의 대부분 하야하게 될 것”이라고 불길한 말을 남겼다. 시간이 많지 않다.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아직 혼이 덜 난 모양이다. 친윤 원내대표를 세우겠다는 집권세력말이다. 대통령 때문에 총선 참패하고도 답정이(李)라니! 흥분해 이런 소리를 하면, 윤석열 대통령은 이미 나라를 구했다고 도사처럼 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나라 걱정하는 평범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주로 우파에서 나오는 소리다. ‘이재명 대통령’의 탄생을 막은 것만으로도 할 일은 다 했다는 거다. 만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통령이면 어떤 대한민국으로 바뀔지는, 그림이 그려진다. 기본소득이 온 국민을 받쳐줘 일 안해도, 노력 안 해도(학생은 공부 안 해도^^) 먹고사는 데 지장없는 안심국가가 될 것이다(라고 믿고 싶다). 중국에도, 대만에도 ‘셰셰(謝謝·고맙습니다)’하는 기막힌 외교로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나라가 될지 모른다. 물론 정반대가 될 공산도 크다. 2년 전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후보를 찍은 48.56% 민의 중 상당수는 이런 걱정근심의 반영이었다.● ‘공정과 상식’은 국정원칙이었다윤 대통령은 임기를 마칠 때 어떤 대한민국일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공정과 상식의 나라? 이미 깨졌다. 대통령실 홈페이지를 보니 심지어 ‘공정과 상식’은 국정운영의 원칙이었다. ‘이념이 아니라 국민의 상식에 기반해 국정을 운영하고, 우리 국민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 법치의 원칙을 고수’한다고 친절히 설명한다. 헹. 김건희 여사 문제만 봐도 공정과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연금·노동·교육 개혁?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윤 대통령도 “이번 정부 말기나 다음 정부 초기에는 앞으로 수십 년간 지속할 수 있는 연금개혁의 ‘완성판’이 나오도록” 하겠다고 2022년 말 제1차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밝혔다. 차질 없이 진행된대도 임기 중엔 개시도 못한다는 소리다. 같은 날 윤 대통령은 노동유연성 개혁도 강조했다.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국제시장에서 3류, 4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당시 발표된 로드맵에 따르면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는 이미 작년 하반기 이뤄졌어야 했다. 이런 식이면 3년 후 우리는 3류, 4류로 전락한 나라에서 살 판이다. ● 국정비전이 ‘다시 대한민국!’이라고? 그럼 교육개혁이라도 성공하면 우리 아이들은 좋아질까. 2025년 우리나라는 국가교육과정에서 세계 최초로 AI 디지털교과서를 도입한 나라가 된다(는 계획이 나왔다). 하지만 수능과 대입제도가 그대로면, 사교육에 목매는 현실도 그대로일 게 뻔하다. 그밖에 또 윤 대통령이 무슨 일을 도모해 어떤 나라로 이끌어갈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하도 답답해 대통령실 홈페이지를 다시 들여다봤다. ‘국정비전’이라는 문패를 클릭하니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가 뜨는 것이었다. 윤석열 정부의 비전이 그거였다니! 취임사에서 강조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한다는 뜻인 듯하다. 취임사 맨 끝에서도 ‘자유, 인권, 공정, 연대의 가치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라고 재차 강조했었다. 말은 좋되… 공허하다. 윤 대통령이 자유를 수십번 강조한 것은 알겠는데, 지금 적잖은 정치평론가와 기자들이 방송에 나와 “이런 말하면 고소당할까 봐…” 우려한다.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는 나라에서 대통령이 자유를 외치는 건 코미디다. 윤 대통령-검찰 연대가 확고한 것은 알겠는데, 총선에서 야당 찍은 이들은 “대통령 주변은 당당하냐” 코웃음 친다. ‘인권과 공정과 연대의 가치가 기반인 나라’는 조롱거리가 된 거다. ● 참모가 써준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그래서 대통령의 ‘비전’이 절실한 것이다. 앞으로 3년 꾹 참고 윤 대통령을 지지하면 어떤 나라가 될 것인지 그림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SK의 전신인 선경그룹은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 인수 후 장기 경영 목표를 정보통신사업 진출로 정하고 ‘2000년대 세계 일류의 정보통신기업’을 새 비전으로 제시했었다. KT를 인수하기 한참 전부터 이런 비전이 있었기에 오늘의 SKT도 가능했을 터다.하다못해 노태우 대통령(1988년 2월~1993년 2월 재임) 시절엔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라는 비전이 있었다(비전대로 됐느냐고 따지지 마시길. 다만 ‘권위주의 종식이라는 그림만은 분명히 그려지지 않는지?) 그 불후의 구호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열겠다”는 실은 유능한 참모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언론인 출신으로 국회의원과 김영삼 대통령 때 노동부 장관을 지낸 남재희는 회고록 ‘시대의 조정자’에서 이렇게 썼다. 노태우 대선 후보의 연설문을 전담했던 김학준 전 서울대 교수(회고록 속 표현. 당시엔 민정당 의원이었다)가 하루는 대선에서 매우 중요한 연설문이라며 민정당 정책위의장이던 자기 방을 찾아왔더란다. 읽어보니 밋밋하고 신문사에서 쓰는 말로 ‘야마’(山·강조점)가 없었다.생각 끝에 “위대한 평민의 시대를 열겠다”는 구절을 넣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김학준은 ‘평민’을 ‘보통 사람’으로 바꾸면 어떠냐고 했다.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라는 비전은 그렇게 탄생했다. ● 윤 대통령은 왜 참모들 도움을 받지 않나‘물태우’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노태우가 무탈하게 대통령 임기를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철저하게 참모들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남재희는 평가한다. 유능한 참모들의 집합적 합의에 따라 정치를 한 결과였다는 거다(회고록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김학준 공보수석이 청와대를 떠나는 퇴임식 때도 김학준 자신이 써준 말씀자료를 그대로 읽더라고 했다^^ 하지만 김학준 전 동아일보 회장은 노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 했다. ‘대통령 퇴임식’ 말씀자료를 그대로 읽었다는 게 팩트다.).‘물’과는 거의 상극일 듯한 윤 대통령은 연설문도 직접 쓴다고 알려져 있다. 검찰 공소장을 많이 쓴 경험에다 자신이 제일 잘 쓴다는 자신감 때문일 터다. 취임사도 윤 대통령이 다듬고 수정해 거의 새롭게 쓴 원고였다(그래선지 기억에 남는 명구절은 없다). 국민을 가르치는 것 같은 51분간의 의대 관련 대국민담화, ‘그러나’와 ‘하지만’이 15번이나 들어간 총선 참패 국무회의 모두발언 역시 윤 대통령이 손을 댔다는 후문이다.올초 KBS 신년대담에서 윤 대통령은 “참모들이 써준 예상 질문과 답변을 보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기까지 했다. 그게 바로 재앙이었음을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혈세 내는 입장에선 가슴이 미어질 판이다. 손해가 곱절이서다(제 할 일 못하는 국정메시지비서관한테 왜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줘야하느냐고요!). ● 사람을 부리는 것이 임금의 능력신하는, 요즘 말로 관료는, 자기 일 잘하면 최고다. 하지만 임금은 달라야 한다. 모든 일을 다 잘 할 수도 없지만 자신이 더 잘 한다고(그리고 잘 안다고) 신하가 할 일까지 떠맡아 하는 임금은 임금답지 않다. ‘신하는 스스로 어떤 일을 자임하는 것을 능력으로 삼고 임금은 사람을 부리는 것으로써 능력을 삼는다’. 중국의 인재학 고전 ‘인물지(人物志)’에 나오는 귀절이다. 유능한 참모를 찾아 앉히고 제대로 부려먹는 것이 대통령의 능력이라는 의미다. 비서실장 하나 바꾸는데도 그리 뜸을 들이더니 어쨌든 새 사람이 들어왔다. 정상적 대통령실이라면 5월 10일 대통령 취임 2주년을 기해 기자회견을 마련해야 마땅하다. ‘김치찌개 간담회’로 퉁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윤 대통령이 “김치찌개” 소리 할 때마다 슬프다. 기자가 김치찌개에 환장한 줄 아시는지). 정진석 신임 대통령비서실장이 과연 유능한지, 윤 대통령이 사람 볼 줄 알게 됐는지, 기자회견에서 재차 확인될 것이다.● 자칫 ‘박절한 정부’로 기억될 수도 있다대통령 모두 발언만은 제발 참모가 써준 대로 읽기 바란다. 그 속에 국민을 어떤 나라로 이끌겠다는 비전을 다시 담아 분명히 전달해주었으면 한다. 취임사에 쓴 ‘글로벌 리더 국가’나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나라’? 1도 다가오지 않는다(총선 참패한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존경받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시길…). 설 명절 때 대국민 메시지로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노래를 부른 것이 국정운영 비전인 ‘따뜻한 정부’를 부각시키려고 그랬다는 건데 아…그게 비전인지는 동아일보 기사보고 처음 알았다. 정말 안타깝지만 이 정부가 따뜻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한남동과 대통령 주변이 아니라면).‘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는 윤 대통령만의 비전이랄 수 없다. 차라리 “공정과 상식으로 돌아가겠다”며 지난 2년의 과오에 고개 숙인다면, 국민과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럴 자신 없으면 이제라도 국민이 기억할 만한, 그리하여 희망을 갖고 따라갈 만한 비전을 새롭게, 제대로 제시해주기 바란다. 또 타이밍을 놓치면 윤석열 정부는 ‘박절한 정부’로 기억될 수도 있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역사에 답이 있다. 먼 과거까지 갈 것도 없다. 총선에서 패배한 김대중(DJ),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만 비교해도 답은 금방 나온다. 대통령 중간평가인 4·10총선에서 ‘정권 심판론’으로 대파, 아니 대패한 윤석열 대통령이 당장 어째야 하는지.집권 3년차 2000년 4·13 총선에서 여소야대를 맞은 DJ는 대국민 특별담화를 냈다. “총선 민의는 여야가 협력해 나라의 정치를 안정시키라는 지엄한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소회를 밝히며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에게 여야영수회담을 제의했다. 패배 나흘 만에 TV로 생중계된 담화였다. ‘총재회담’ 대신 입때껏 안 써왔던 ‘영수회담’이라는 용어를 쓴 것도 시선을 끌었다. ● DJ 대국민 담화-朴, 청와대 모두발언 집권 4년차인 2016년 4·13총선에서 1석차로 패한 ‘박근혜 청와대’는 달랐다. 청와대 대변인 명의로 “20대 국회가 민생을 챙기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새로운 국회가 되기를 바란다. 국민들의 이러한 요구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는 달랑 두 줄짜리 논평을 내놨을 뿐이다.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그 흔한 크리셰조차 없었다. 대통령 육성은 총선 닷새 뒤에야 들을 수 있었다.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다. 늘 그랬듯 단호한 표정으로 그는 “국민의 민의를 겸허히 받들어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민생에 두겠다”고 했다. ‘국회 심판론’을 외쳤던 대통령 자신을 변호하듯 “20대 국회가 민생과 경제에 매진하는, 일하는 국회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정부도 새롭게 출범하는 국회와 긴밀하게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즉 국회가 변해야 한다고 일침까지 놨다. 당연히 영수회담 제의 같은 건 없었다. 6분 간의 모두 발언 중 총선 관련 발언도 꼴랑 45초였다. 여당에서조차 답답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대통령이 의례적인 사과라도 당연히 표명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물론 비박(비박근혜)계 의원들이 주로 하는 소리였지만. ● 국무회의 모두발언 택한 ‘윤석열 모델’ 윤석열 정부는 ‘박근혜 모델’로 가는 듯하다. 물론 현재까지 얘기다. 총선 패배 다음날 이관섭 대통령비서실장이 기자들 앞에 나타나 “이번 총선 결과에 대한 대통령의 말씀을 제가 대신 전해드리도록 하겠다”더니 “총선에서 나타난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 국정을 쇄신하고 경제와 민생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44자(공백 포함하면 56자)를 읽었다. 박 전 대통령 때는 그래도 두 줄이었는데 이번엔 김밥처럼 고작 한줄이다. 윤 대통령은 16일 오전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고 했다. 2016년처럼 비서들 앞이 아니라 국무위원들 앞이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기자회견도 아니고, 국무위원들 듣는 형식을 왜 굳이 국민이 알아서, 새겨들어야 하는지 부아가 난다. 총선 압승 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거듭 촉구했던 대통령과의 만남도 대통령실에선 아직 결정을 못한 눈치다. 패배 6일만에 하는 육성고백이면(이미 박근혜 때보다 하루 늦었다) 윤 대통령은 제대로 해주었으면 한다. 국민들 대신해 질문해줄 기자들이 없어 궁금증은 다 풀 수 없겠지만 제발 여당 내에서조차 답답하다는 소리는 안 나오게, 담아야 할 내용은 다 담아서 읽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윤 대통령이 아니라 나라 걱정하는 국민을 위해서다. ●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이라도 해야 한다대국민 담화 일주일 뒤 열린 여야영수회담에서 DJ와 이회창은 ‘국민대통합의 정치’를 약속하는 공동발표문을 내놨다. 물론 다 지켜졌다고 하긴 어렵다. DJ는 한달 뒤 새총리에 자민련 총재 이한동을 임명하고 총선 과정에서 폐기되다 시피했던 DJP 연대도 복원했다(이회창은 DJ의 ‘인위적 정개 개편’ 에 분노보다 환멸을 느꼈다고 자서전에 썼다). 이렇게 여소야대를 극복한 놀라운 정치력으로 DJ는 종국엔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던 것이다. 반성 할 줄 몰랐던 박 전 대통령이 그 뒤 어떤 길로 갔는지, 멀지 않은 역사가 말해준다(정말이지 그 끔찍한 단어를 쓰고 싶진 않다). DJ 반의 반 만큼의 정치력도 없어 보이는 윤 대통령이 ‘민생’만 강조해 현 사태를 극복할 수 있을지 걱정들이 많다. 시중엔 윤 대통령이 과연 변할 것인가, 안 변할 것인가를 놓고 말들이 분분하다. 국무회의 모두 발언을 택한 것 보면, 그 오만해 보이는 스타일이 변할 것 같지가 않다. “지도자가 통치스타일을 바꾸지못하는 것은 타고난 성향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정한 노선을 추구함으로써 항상 성공해 온 경우에는 그것을 포기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마키아벨리가 한 말이다. ‘윤통 스타일’ 때문에 정권은 총선에서 심판받았다. 포기해야 할 이유는 이제 충분하지 않은가. 국무회의 모두발언 속에 “5월 10일 취임 2주년을 기해 반드시 기자회견을 마련하겠다”는 말이 들어간다면, 또 한번의 희망은 가질 수 있을 것 같다.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제목에 꽂힌 독자들은 말할지 모른다. 아니, 우린 대통령을 바꾸고 싶은 것이라고. 그럴 방도가 없어 촛불 혹은 짱돌을 들 듯 분노 투표, 시위 투표, 응징 투표를 한 것이라고. 누가 뭐래도 이번 총선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심판이었다. 내각제 같으면 총리를 쫓아내고 정권을 갈아 치우는 야당 승리다. 국민의힘이야 참패가 슬프다고 해도 여전히, 엄연히 집권당이다. 지금까지와 별로 달라질 것도 없다.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당 대표 쫓아내라면 쫓아내고, 내부 총질 없이 대통령의 ‘체리 따봉’에 감읍하면 그만이다. 물론 야권은 하늘을 쓰고 도리질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오만한 대통령을 국민이 용납하지 않듯 오만한 야권도 결국은 심판받는다. 2000년 4·13총선이 그랬다. 소수파 정권이었던 김대중(DJ) 대통령은 신년 초 ‘대통령당’인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며 “정치가 국정의 발목을 잡는 사태는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고 거대 야당의 횡포를 비판했다. 그러나 집권 3년 차에 치러진 16대 총선에서 집권당은 고작 115석이었다. 한나라당(현 국힘)은 DJ 정권 심판론으로 133석을 차지해 제1당을 지켰지만 ‘제왕적 총재’ 이회창은 3년 후 대선에서 패하고 말았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최고의 꿈은 정권 재창출”이라고 DJ는 회고록에 썼다. 윤 대통령에게도 3년의 시간이 있다. 대통령만 빼고 다 바꾼다면, 총선 패배를 딛고 그래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킨 대통령으로 정권 재창출에 기여할 기회는 살아있다. 패배 나흘 뒤 DJ는 담화문을 통해 야당 총재와의 영수회담을 제의했고 실제로 만나 상생 정치도 약속했다. 윤 대통령이 그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암만 담화문을 내고 지금껏 안 만났던 야당 대표와 회담을 한대도 윤 대통령 스스로 달라지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국민 신뢰만 잃을 수 있다. 작년 10월 서울 강서구청장 보선이 끝나고도 그랬다. “저와 내각이 반성하겠다” “국민은 무조건 옳다”고 말했다지만 바뀐 건 없다. 윤 대통령으로부터 개각 인사 천거를 요청받은 한 인사는 자신이 건넨 괜찮은 명단이 참모진의 평판조회를 거치면서 괜찮지 않게 돼버리더라고 한탄을 했다. 결국 비서실 찔끔 개편과 총선용 개각에 그쳐 마침내 이 지경까지 온 것이다. 구청장 하나 바꾸는 ‘쪼만한 선거’일 뿐 정권 중간평가는 아니라고, 대통령에게 ‘내 귀에 캔디’ 같은 소리나 했던 그들이 간신이다. 대통령이 국힘 대표들을 갈아 치울 때 “그건 아니다” 한마디 못 하고 북 치고 장구 친 그들이 간신이다. 학예회 같은 민생토론회나 연출했던 참모진과 내각은 물론이고 ‘입틀막’에 이어 ‘파틀막’ 사태까지 번지게 만든 경호처에도 간신이 수두룩하다. 이들 무능한 간신들은 곧 분출할 대통령실-내각 개편 요구에 대해서도 몇 달 전 단행한 걸 또 할 필요 있느냐며 제 한 몸 보존에 급급할 것이다. 당이 문제이지 대통령은 잘못 없다며 심기 경호에만 골몰하는 간신이 들끓지 않고서야 2년 전 ‘공정과 상식’을 들고나와 “무도한 문재인 정권 교체”를 외쳤던 대통령 후보 윤석열은 어디 갔는지 납득이 안 되는 것이다. 그때의 윤석열은 지금, 없다. 지긋지긋한 내로남불 박살낼 줄 알았는데 부인과 동창, 검찰 특수통 등 내 식구에게는 박절하지 못하면서 내 식구 아니면 잠재적 피의자로 아는 검찰주의자 윤석열만 보일 뿐이다. 조국혁신당이라는 유아적 당명을 짓고 대표직에 오른 조국이 돌풍을 일으킨 것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면 당신들은 떳떳한가’ 싶은 배신감 때문이었다. 이대로 3년을 갈 순 없다. 대통령을 갈아 치울 수 없으니 대통령 빼고 다 바꾸라는 것이다. 윤 대통령 스스로 인정했듯 정무감각이 꽝이니 정치 경험 많은 비서실장을 들이라는 것이다.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라며 부인만 감쌀 게 아니라 진짜 게이트 생기기 전에 제2부속실을 설치하라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 뒤에도 정치적 책임을 묻지 않았던 충암고 후배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제라도 경질하라는 것이다.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고 뚜벅뚜벅 가겠다고 오기즉생(傲氣則生)할 때가 아니다. 국민 앞에 고개 숙이고 사즉생(死則生)하는 모습을 안 보이면 나라가 망할 것 같아 불안하고 불길한 것이다. 살아생전 김수환 추기경은 2000년 월간지 신년호에서 DJ에게 남은 임기 3년간 당적을 떠나 온 국민이 바라는 정치를 펴줄 것을 건의한 바 있다고 했다. 우리 곁에 큰 어른이 있다면 분명 같은 조언을 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이 변화를 가시적으로 드러내 국민을 내 편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악착같은 야권 공격에 ‘불행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도 있다.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젊은이들이 하는 말이란다. ‘이총망(이번 총선은 망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1일 대국민 담화에 ‘애국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은 가슴을 친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긴 침묵 끝에 대통령이 앞에 나섰으면, ‘의대 2000명 증원’ 문제로 지치고 불안한 국민 심신을 풀어줘야 했다. 윤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다. “계속되는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으로…국민들의 불편을 조속히해소해드리지 못해 대통령으로서 송구한 마음”이라면서도 정부가 옳고 의사들이 틀렸다고 ‘나는 불통 대통령’ 같은 표정으로 51분간 원고만 읽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존재하는 기자들 질문받기는커녕 출입까지 막았다. 검찰총장도 이런 식으로 수사결과 발표를 하진 않는다. 그날 나는 총선 유세현장을 가보려고 국민의힘 서울 한 지역구 후보의 동선을 먼저 물어보고 있었다. 오전만 해도 곧 알려주겠다던 출입기자 말이 오후가 되자 달라졌다. ‘이총망’…대통령 때문에 이번 총선은 망했다는 분위기라며 오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 2년 전에도 자칭 ‘애국보수’ 애태우더니2년 전 대선을 코앞에 두었을 때도 윤석열 당시 국힘 후보는 어지간히 지지자들 애를 태웠다. 잠깐 잊고 있었지만 윤 대통령은 혼자 힘으로 대통령 된 게 아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이 대선 2주 전인 2022년 2월 22일 깨졌는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의 지지율 차이가 달랑 1%포인트였다(윤 37%, 이 38%로 지고 있었다·갤럽 조사). 하도 답답해 2월 26일 ‘도발’에다 ‘윤석열은 안철수를 보쌈이라도 해오라’고 썼을 정도다. 지금은 이렇게 써야하나 싶다. “윤 대통령은 전공의들을 보쌈이라도 해오시라.” 원래 지지율도 안 챙기고, 공감 능력이 좀 떨어지는 대통령이라고는 한다(대통령 탈당을 주장했다 철회한 서울 마포을 함운경 국힘 후보는 대선 후보 시절 자신의 가게를 찾아왔던 대통령에 대해 “사실관계를 설명하려고 하는 성향이 강하다. 그러니까 국민들이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별로 신경을 안 쓰시더라”고 했다). 선거와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인식이다. 2021년 9월 이재명의 대장동 의혹이 터지면서 다시 뒤집힌 지지율은 김건희 여사의 허위이력이 불거졌는데도 한사코 사과도 안 하고, 국힘 내 갈등까지 폭발하면서 2022년 1월 초 26%(윤)-36%(이)까지 뒤졌다(죄송해요. 욕설 아니에요). 이걸 다시 뒤집은 것이 이재명 부인 김혜경의 과잉의전 논란이다. 공식선거운동 개시일 2월 17일 41%까지 올라갔던 지지율은 일주일 만에 또 뒤집혔다. 누가 누가 더 싫은가, 더 부도덕한가를 가리는 듯한 역대급 비호감 대선. 여론조사 공표 마지막 날인 3월 2일 지지율은 39%(윤)-38%(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12%였다. ● 대선 때도 1주일 전 후보 단일화마침내 다음날 아침. 안철수가 ‘조건 없는 윤석열 지지’를 발표하고 후보를 사퇴했다. 대선 꼭 일주일 전이다. 전날 밤 마지막 TV토론회 뒤 윤석열과 머리를 맞대고 두 시간 반 동안 서로의 정치철학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했다는 거다. 그 장소가 이번 총선 전에 ‘책임을 지고’ 불출마를 선언했던 찐윤 장제원 의원의 매형 집이었다. 그리하여 결과는 48.56%(윤)-47.83%(이). 0.73%포인트. 역대 최소 격차였다.눈치 빠른 독자들은 2년 전 얘기를 꺼내는 이유를 알아챘을 것이다. 총선이 코앞인 지금, 엄정한 ‘정치중립’을 해야 마땅한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의정갈등을 일으켰다 전격 해결에 나선 것이라곤 보지 않는다. 그러나 총선과 상관없이, 풀 것은 풀어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의 생명, 젊은 의사들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마침내 윤 대통령이 의대 증원 정책에 반발해 현장을 떠난 전공의들과 만날 모양이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비상대책위원회 조윤정 홍보위원장이 2일 브리핑에서 “박단 (전공의협의회장) 대표에게 부탁한다”며 “만약 윤 대통령이 박 대표를 초대한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만나보라”고 말한 다음, 대통령실에서 신속하게 “대통령이 전공의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 제발 입을 닫고 귀를 여시라만나거든, 윤 대통령은 제발 좀 듣기 바란다. 전공의 대표를 만나 또 혼자 계속 자기주장을 되풀이하면, 꽝이다. ‘역시 대통령은 꼰대 중에 상꼰대…’ 젊은 의사들은 실망해 차갑게 마음을 닫을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안 만나는 것만 못하다. 전의교협 조윤정이 대통령과 전공의들의 만남을 간곡히 당부하는 말에 문제 해결의 단초가 담겨 있다. 그는 “대통령의 열정과 정성만 인정해도 대화는 시작할 수 있다”며 전공의들을 향해 “대통령의 열정을 이해하도록 잠시나마 노력해 달라”고 했다. 대통령을 향해서는 “우선 이 젊은이들의 가슴에 맺힌 억울함과 울음을 헤아려 달라”며 “대통령께서 먼저 (전공의들에게) 팔을 내밀고 대표 한 명이라도 딱 5분만 안아 달라”고 했다. “의료 현장에서 밤낮으로 뛰어다니고 자정 무렵이 돼서야 그날의 한 끼를 해결해야만 했던, 새벽 컨퍼런스 시간에 수면 부족으로 떨어지는 고개를 가눠야 했던 젊은 의사 선생님들이 바로 지금까지 필수 의료를 지탱해왔던 분들”이라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조윤정은 브리핑 도중 목이 메면서 “법과 원칙 위에 있는 것이 상식과 사랑이라고 배웠다. 아버지가 아들을 껴안듯 윤 대통령의 열정 가득한 따뜻한 가슴을 내어달라”고 했다. 이보다 감동적인 말을 찾을 수 없어 그대로 옮기는 거다. 그렇게 대통령이 공감력을 키우고, 그리하여 대통령이 달라질 수 있다는 모습만 보여준대도…다수 국민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사족 1. 대통령과 전공의 간의 ‘조건 없는’ 만남을 요청했던 조윤정은 3일 “전공의에 대한 면허정지 처분 철회와 대통령 사과가 우선”이라고 밝히고 홍보위원장직을 사퇴했다. 하루새 얼마나 힘들었을지…이해한다. 그럼에도 만남은 이루어지길.사족 2. 대선 일주일 전, 윤 대통령은 지금 잊었겠지만 절체절명의 시기에 후보직을 양보했고, 그 뒤 대통령실로부터 말 못할 수모도 겪었던 던 의사 출신 안철수 국힘 의원이 2일 대안을 제시했다. 의료계와 전문가, 시민단체, 국제기구로 구성된 협의체를 조속히 꾸리되 시간이 부족하면 의대 정원 확대 문제는 내년으로 넘기자고.김순덕 칼럼니스트 dobal@donga.com}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란 옛말이 있다. 임진왜란 때 전시행정을 총괄하는 도체찰사 류성룡이 지방에 보낼 공문을 하달했는데 다음 날 고칠 부분이 생겼다. 난감한 순간, 공문이 아직 안 내려갔음을 알게 됐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괘씸해 문책하자 부하는 “공문이 달라질 수 있어 사흘 있다 보내려 했다” 하더란다. 류성룡의 ‘징비록’에 나오는 얘기다. 급하게 추진하고, 또 금방 잊고 잘못을 반복하기. 우리 성정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의대 정원 2000명 확대를 밀어붙이는 대통령이나 ‘진보정권 몰락’을 몰고 온 조국을 잊고 조국혁신당에 환호하는 국민이나 오십보백보다. 너나없이 조급하고 건망증도 심하지만 그래도 반성할 줄 아는 리더십도 있어 우리가 이만큼 왔다. 총선을 2주 앞둔 지금은 어디를 봐도 답답하다. ‘정부 견제론’이 커지는데 야당은 더 믿을 수 없어 불안하다. 범죄(혐의)자로 그득한 정당들이 복수혈전에 골몰해 과연 나라와 국민을 위할지 의문이다. 대안은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여당 속 야당’ 역할을 선언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에서 정무수석을 지낸 이철희는 “청와대에서 제일 두려운 것은 여당”이라고 했다. 대통령실은 ‘오버’할 가능성이 많은데 야당 반대는 당연하게 여기지만 여당이 “NO” 하면 다시 고려하게 된다는 것이다. 국힘도 과거엔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하는 여당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당과 정례회동을 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도 정동기 전 민정수석의 감사원장 사퇴 등 당의 건의를 수용한 전례가 적지 않다. 국힘은 ‘내부 총질’을 못 견뎠고 윤석열 대통령은 상명하복의 검사 체질을 버리지 못했다. 대통령과 여당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할 정무수석은 당 대표 후보로 나선 의원에게 감히 “아무 말 안 하면 아무 일 안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비서실장은 한동훈에게 물러나라는 대통령 말을 전하기까지 했다. ‘윤심이 당심’이고 ‘당심이 민심’이라는 간신들 언행에 민심이 돌아선 것이다. 이젠 민심이 당심이고, 당 중심으로 대통령의 국정운영 성공을 돕겠다고 한동훈이 나서야 한다. 이유는 첫째, 정부 견제론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을 믿을 수 없어서다. 한동훈이 27일 동아일보에 밝혔듯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은 공공선을 추구하는 당이라 하기 어렵다. 이에 비하면 적어도 방탄 걱정 없는 한동훈이 여당 속 야당 역할을 자임하면, 차라리 믿고 정부 견제를 맡길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브라질도 7대 경제 강국이었다가 사법독재와 검찰독재 때문에 갑자기 추락했다”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 주장은 야당 대표의 자질을 의심케 한다. 브라질에 빗대 윤석열 정부의 검찰독재를 비판하려는 건 이해한다. 그러나 이재명이 2년 전 대선 후보 시절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에 관해 했던 말을 또 했다는 것은 2년간 어떤 발전도, 배움도 없었다는 의미다. 그 나라 두 전직 대통령이 재임 중 남미 최대 건설사 오데브레시로부터 정치자금 33억9000만 달러(약 3조9000억 원)를 받아 국내외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뿌린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미 연방법원은 해외부패방지법 위반으로 오데브레시에 35억 달러 벌금을 선고했다. 무엇보다 대장동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재명이 할 소리는 아니다. 혈세가 제 돈인 양 퍼준다고 외치는 식견은 더 불길하다. 2016년 탄핵당한 지우마 호세프는 첫 임기 때 재정회계법을 위반하며 예산을 헤프게 써 재선 1년 후인 2015년 국가부채 등급을 정크본드 수준으로 떨어뜨린 전력이 있다. 검찰독재 때문에 그 나라가 돌연 추락한 게 아니란 말이다. 한동훈이 여당 속 야당을 자임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고려공사삼일’이라는 우리 성정 때문이다. 당장은 조국혁신당의 돌풍이 불고 있지만 조국은 나라의 ‘도덕적 안전망’을 무너뜨린 인사였다. 지지자들이 “같은 잣대를 윤석열 정부에 들이댄다면 과연 떳떳한가” 묻는 건 안다. 그러나 총선 뒤면 손가락 자를 유권자가 적지 않을 터다. 한동훈이 여당 속 야당으로서 그 질문을 정부에 하고, 또 답변도 받아낼 수 있어야 한다. 한동훈은 ‘의대 정원 사태’ 중재에 나섬으로써 과연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지 보여줄 시험대에 섰다. 윤 대통령은 전두환의 4·13호헌 선언처럼 ‘의대 정원 2000명 고수’를 밝힌 바 있다. 류성룡에게는 선조의 마음을 눅이면서 경청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한동훈이 제2의 6·29선언에 성공할 수 있을지, 그리하여 정부 견제론을 흡수하고 총선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과연 제왕적 총재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결코 박용진을 용납하지 않았다. 과거 성범죄자 변호 이력이 불거져 사퇴한 서울 강북을 조수진 후보 자리에 22일 친명(친이재명) 한민수 대변인을 전략공천했다. 조수진과 경합을 벌였던 현역 박용진 의원은 고려되지도 못했다. 당 최고위와 당무위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이재명 대표가 내린 결정이다. ‘제왕적 대통령’도 국민 눈이 무서워 감히 못할 담대한 결정을 일개 정당 대표가 해낸 셈이다. 김영삼-김대중-김종필 3김 시대 퇴장과 함께 제왕적 당 총재의 시대도 종말을 고한 줄 알았다. 아니었다. 비록 야당 총재라 해도 공천권과 정치자금을 틀어쥐고 국회의원들을 수족처럼 부리던 전근대적 가산주의(家産主義·patrimonialism)는 21세기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정치자금보다 막강한 개딸 팬덤을 무기로 공천 룰을 바꾸고, 당내 민주주의를 부정한 채 당 대표가 전권을 틀어쥐는 정당의 사당화(私黨化)는 SNS시대에도 가능하다. 이 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은 임혁백이 2014년에 쓴 저서 ‘비동시성의 동시성’ 민주당 판이다. ● 이재명의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그럼 윤석열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인가. 윤 대통령의 ‘20년 지기’ 주기환 전 국민의힘 광주시당 위원장이 21일 대통령 민생특별보좌관에 임명됐다. 여당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24번에 배정되자 삐져선 사퇴했는데, 하루 만에 대통령이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대파로 후려치듯 없는 자리까지 만들어 옆에 세운 거다. 그 전날 더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친윤(친윤석열) 핵심 이철규 의원이 한동훈에게 “이재명의 민주당과 뭐갸 다르냐”고 공개 저격을 한 것이다. 윤 대통령과 친분 깊은 주기환을 비례대표 당선권 안에 배치해 달라고 요구한 사실이 있다고 대놓고 밝히면서 이건 주기환이 당에 공헌했기 때문이지 사천이 아니라고 했다.참 도긴개긴이다.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은커녕 제왕적 총재에 한참 못 미친다고 눈물을 찍어내야 할 것인가. 주기환은 “단순히 술 한 잔 하는 정도가 아니라 속내를 다 털어놓는 관계”라고 밝혔는데 그렇다면 두 분이 계속 폭탄주를 마시면서 속내를 털어놓으시기 바란다. 개인적 속내 털기에 그치지 않고 하필 총선을 코앞에 둔 이 때 대통령이 찐윤을 공직에 임명하니 ‘정권 심판론’이 솟구치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 ‘배우자 부실장’ 직책까지 친명이든, 친윤이든 그들의 ‘브로맨스’에 시비 걸 생각은 없다. 아무리 피보다 진한 사이라 해도 ‘관리를 공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사유물로 여기는 것’이 가산주의다(‘비동시성의 동시성’ 641쪽). 심지어 주기환의 아들도 대선캠프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이어 대통령비서실 부속실에서 6급으로 일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공직 임명권이 있어 대통령실에 자리를 만들어줬고, 이재명은 개딸 팬덤과 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빽’이 있어 공천을 준 것이 차이일 뿐이다. 만약 이재명이 대통령이라면 어떤 자리를 만들어줄지 상상초월이다. 윤 대통령 부인도 제2부속실을 안 두고 있는데(그래서 서둘러 설치하라는 판인데) 대통령 후보 시절 ‘배우자실 실장’에 ‘배우자실 부실장’까지 설치했던 이재명 아니던가(그 부실장이 이번에 사천 논란을 딛고 경선 승리한 권향엽 후보다). 아니, 대통령 후보 배우자에 대한 의전이 그 정도면, 김혜경 씨가 대통령 부인 됐으면 어쩔 뻔 했느냐고? 정치학자 임혁백은 “21세기 한국 정치를 선진화하기 위해선 전근대적인 유교적 가산주의 전통을 청산해야 한다”고 저서에서 강조했다. 만일 그가 민주당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지 않았다면 2024년 총선으로 인해 한국 정치는 한층 후진화 됐다고 목청을 높였을지 모를 일이다. 임혁백은 이번 공천으로 가산주의의 특징인 이재명의 보스주의, 보스 중심의 인치주의를 굳혀준 것은 물론 한국 민주주의 후퇴에도 기여한 꼴이 되고 말았다. ● 이념에 따라 민주 후퇴 인식도 달라진다 그럼에도 정권 심판론은 갈수록 커지는 양상이다. 최근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V-Dem)가 발표한 ‘민주주의 보고서 2024’에선 한국을 자유민주주의에서 독재화로의 전환이 진행되는 국가 중 한 곳으로 꼽았다. ‘검찰 독재 심판’에 힘을 실어주는 보고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 이 연구소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선 ‘결함 있는 민주주의’라고 본 수리남, ‘하이브리드 정권’이라고 본 부탄을 자유민주주의라고 분류했다는 사실이다(두 나라를 폄훼할 뜻은 전혀 없다^^). 수리남이 민주주의 순위 45위인데 한국이 47위라고?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걸 이해하게 해주는 또 다른 연구를 발견했다. 2023년 초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민주주의 후퇴 인식 조사’를 분석한 조선대 지병근 교수의 ‘민주주의 후퇴 인식의 이념적 편향성’ 논문이다. 응답자들 절대 다수가 윤석열 정부 시기에 한국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되 응답자의 이념이 보수적일수록 윤석열 정부보다 문재인 정부 시기에 민주주의가 가장 많이 후퇴했다고 인식하며, 진보적일수록 이와 정반대로 인식할 가능성이 증가했다는 거다.● 다시 대통령이 드러나고 말았다대선 0.73% 차이가 말해주듯 우리나라는 이념적으로 거의 양분된 나라다. 간신히 정권 교체에 성공했는데 의회권력은 제왕적 야당 총재가 꽉 잡고 있다. 그래서 보수 성향, 아니 윤석열 정부가 곱진 않지만 문 정권 뺨치는 ‘이재명의 민주당’에 계속 의회권력을 줘선 안 된다고 믿는 유권자들은 요즘 애가 탄다. 독불장군 식으로 밀어붙이는 윤 대통령을 덜 보이게 하려고 국힘은 73년생 한동훈을 내세웠다. 강감찬 아꼈다 임진왜란 때 쓸 수 없다며, 급하게 출발했지만 산뜻하게 이재명을 압도하는가 싶었는데, 기어이 대통령은 코끼리만한 덩치를 드러내고 말았다. 이번 주 갤럽 조사에서 ‘정부 견제 위해 야당 후보 당선’ 응답이 51%다. 전 주보다 늘었다. 심지어 중도층에서도 여당(26%)보다 야당(58%), 무당층도 여당(19%)보다 야당(43%) 승리를 원한다. 왠지 아는가. 총선은 대통령 지지율이 좌우한다.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률이 꼴랑 34%여서다. 전주보다 올라도 시원치 않은데 2%포인트가 떨어졌다. 윤 대통령은 긍정평가 이유 첫 번째가 의대정원 확대(27%)이고 두 번째가 결단력/추진력/뚝심(10%)인데 뭔 소리냐며 격노할 지 모른다. ‘의사들 악마화’에 더욱 매진할까 겁난다. 방향은 옳을수 있어도 2000명씩 5년간 무조건 정원 확대를 밀어붙이는 건 국민을 불안케 한다. 대통령은 아프거나 (만에 하나 일어나선 안 될) 사고가 나도 최고의사가 달라붙겠지만 보통사람은 다르다. 혹시나 병원 갈일 생길까 걱정이 태산이다.● 이재명에게 정부 견제 맡길 수 있나더 늦기 전에 한동훈은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말 뒤집기를 밥먹듯 하는 이재명의 민주당에 정부 견제를 맡길 수 없다며, 국정운영에 책임 있는 집권여당으로서 ‘균형과 견제’ 역할을 다하겠다고 분명히 밝혀야 할 때다. 선거 유세만 할 게 아니다. 의대정원 확대 발표 이후의 의료개혁 문제에 대해 국민을 안심시킬 수 있는 정책도 내놓아야 한다.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하는 대통령실에도 똑바로 하라고 말하기 바란다. 국힘 승리를 위해서라면, 국정기조 전환이나 대통령 탈당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정권 심판론이 바람을 타는 것은, 여전히 윤 대통령은 국민 앞에 오만한데 대통령 앞에서 유일하게 ‘깡다구’를 보인 한동훈이 총선 뒤 국힘에서 남아나지 못할 것 같아서다. 권력이란, 남자의 질투란 무서운 법이다. ‘총선 후 유학설’에 대해 그는 22일 “저는 뭘 배울 것이 아니라 무조건 봉사하는 일만 남았다”고 했지만 국힘을 지키겠다는 말까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발 윤 대통령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달라고, 비례대표 정당으로 범죄(혐의)자 그득한 조국혁신당을 찍겠다는 응답이 무려 15%나 나오는 것이다. ● 한동훈이 나라를 이끌 비전을 말하라 윤 대통령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관섭 대통령비서실장은 1월 19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윤 대통령은, 공천은 당이 알아서 하는 것이고 대통령실은 공천에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라고 말했지만, 아니었다(대통령실 아닌 이철규가 공천에 개입했다). 한동훈이 ‘지르면’ 대통령은 지는 척 받아주고 갈등을 봉합하는 모습을 연출했으나 그 담엔 그대로다. 한동훈이 어렵게 입을 뗀 대통령 부인의 명품백 사건 이후 제2부속실도, 특별감찰관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종섭 호주 대사가 조기 귀국했다고 ‘대통령실 수사 외압 사건’ 의혹이 사라질리 만무하다. 이재명의 ‘망나니’ 노릇을 하는 바람에 학자로서의 명예가 많이 훼손됐지만 임혁백은 저서에서 강조했었다. “한국 정당의 제도화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정당의 목소리가 정책 결정 과정의 꼭대기에 있는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제도적 통로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대통령도 자신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집권 여당과 상의해야 한다”고. 그래야 집권여당의 권위와 권력도 올라가고, 대통령도 여당과 통합적으로 움직여 성공적 국정운영을 할 수 있다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과도한 당정분리로 열린우리당은 선거에서 연패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찰떡같은 당정 원팀으로 총선에선 대승했으나 정권을 잃었다. 제왕적 당 대표와 대통령, 어느 쪽이 더 민주주의를, 나라를 말아먹는지는 각자의 이념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 있다. 다만 책임 있는 여당 대표로서, 그리고 낡아빠진 가산주의를 뿌리뽑고 정치의 세대교체를 해낼 수 있는 73년생 정치인으로서 한동훈은 비전을 밝혀야 한다. 총선에 이길 경우 나라를 어떻게 이끌 것인지,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해주었으면 한다. 대통령한테 실망한 유권자가 이재명 아닌, 조국 아닌, 한동훈에게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dobal@donga.com}
결국 박용진은 공천 받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 중 꽤 합리적 인물로 꼽히면서 대선 경선, 당 대표 경선에서 이재명 대표와 맞섰던 그가 4월 총선에 출마도 못 하게 됐다. 이재명은 2022년 8월 당 대표 경선연설회에서 “우리 박용진 후보도 공천 걱정하지 않는 당을 만들겠다”며 공정하고 합리적인 당 운영을 다짐했다. 어쩌면 지금 이재명은 흐흐 웃고 있을지 모른다. 박용진도 공천 걱정 않는 당을 만들겠다고 말했다고 진짜 만들 줄 알았느냐고. 일찌감치 단수공천 받은 친명 정청래 최고위원은 지난달 “시대마다 시대정신이 있다”며 “이재명이 민주당의 시대정신”이라고 했다. “이재명 깃발로 총단결해 시대적 소명인 윤석열 정권을 심판하고 총선에서 승리하자”는 주장이다. 당내 우상화 작업쯤은 모르고 싶다. 하지만 내 혈세까지 당 국고보조금으로 들어가니 모른 척할 수 없다. 민주당이 이재명의 사당(私黨)일 수도 없고 개딸들만의 정당이어서도 안 되는 이유다. 정권심판을 시대적 소명으로 잡는 건 그들 자유지만 이재명을 시대정신으로 내세우는 건 심각하다. 비명횡사 뒤 탈당한 홍영표 의원 말을 굳이 옮기자면 “이재명 대표가 시대정신이면 민주당도, 대한민국도 망하는 길”이어서다. ‘하면 된다’ 정신을 불러일으킨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유신 독재라는 역사적 과오는 용납할 수 없지만 박정희의 ‘하면 된다’는 온 국민의 자신감과 자립심을 자극해 가난을 떨쳐내고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끈 당대의 시대정신이었다. 이재명이 상징하는 시대정신으로 민주당은 무엇을 들 것인가. 홍영표는 ‘말 바꾸기’를 첫손에 꼽았다. ‘존경하는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말했다가 “존경한다고 했더니 진짜인 줄 알더라”며 뒤집는 정도는 애교였다. 불체포특권 포기, 위성정당 포기 같은 공약 뒤집기도 이번 공천 사태에 비하면 약과다. 나 같으면 ‘설마’를 이재명의 시대정신으로 꼽고 싶다. 22대 총선 민주당 공천은 한마디로 ‘설마가 사람 잡은 공천’이었다. 국어사전에 ‘그럴 리는 없겠지만’이란 뜻으로 부정적인 추측을 강조한다고 나오는 부사가 이토록 빈번히 쓰인 공천도 없을 거다. 설마 ‘시스템 공천’을 도입했다면서 골대 옮기듯 공천 룰을 고치고, 선출직공직자평가위원장에 이재명 지지 모임 대표 출신 송기도 전북대 명예교수를 임명해 물갈이 현역 의원 55명 중 70%에 육박하는 비명(비이재명)을 잘라낼 줄은 몰랐다. 의원 평가에서 하위 10%로 찍혀 30% 감점받는 걸 알게 된 박용진도 지난달 “예상을 이만큼은 했죠, 설마하니 이러랴. 그런데 결과는…” 했을 정도다. 이재명의 시대정신 설마가 겁나는 것은 보통 ‘그럴 리는 없겠지만’ 하고 추측하는 일이 그의 주변에선 태연히 벌어지기 때문이다. 별명이 만독불침(萬毒不侵·만 가지 독에 면역이 있다)이라는 이재명은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일반인의 상식과 상상을 뛰어넘는, 그래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도 ‘이재명은 합니다’. 심지어 이재명은 작년 10월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재판에서 재판장에게 피고인석에 나란히 앉은 측근 정진상 전 민주당 정무조정실장을 “한번 안아보게 해 달라”고 청해 끌어안더니, 이번에 공천 룰까지 바꿔 ‘대장동 변호사들’을 줄줄이 지역구에 공천하기까지 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생각할수록 섬뜩하다. 국민이 이재명의 시대정신을 따르면, 말 바꾸기와 거짓말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설마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도 태연하게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공천받기 위해 “차은우보다 이재명이 더 미남”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할 수 있듯, 아부는 보통이 될 것이다. 어제 했던 사랑의 약속이나 상법상의 계약을 깨는 것도 우습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만에 하나, 사기죄나 패륜 등으로 붙잡혀 가더라도 무도한 정권에 의한 박해라고 우기면 그만이다. 좀 더 용감하면 ‘비법률적 판단’을 받겠다며 민주당이나 조국혁신당에 입당해 공천 신청을 할 수도 있다. 어떤 범죄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전 국민 멘털이 강해지고 도덕성 수준이 떨어지면서 가히 국민성 개조가 벌어질 판이다. 전 국민의 이재명화, 끔찍하지 않은가. 설마 이런 이재명이 대통령 되랴 싶겠지만 만독불침 이재명은 또 모른다. 지금은 당내 비명만 자른 당 대표이나 대통령이 될 경우 알 수 없다. 반대세력은 비명도 못 지르게 잘라버리는 이재명의 시대정신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신당을 차린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윤석열 정권 ‘조기종식’이란 말을 달고 산다. 총선 목표가 검찰정권 조기종식이라며 대통령 탄핵이란 단어까지 입에 올린다. “좀 더 나아가면 내란 선동”이라는 박민식 전 국가보훈부 장관 말을 굳이 전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지난 대선 패배 뒤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이해찬이 했던 말은 전하고 싶다. “5년은 금방 간다.”2심 유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 판결만 남은 조국에겐 단임제 대통령의 남은 임기 3년 반도 너무 길 것이다. 안다. 하지만 오늘은 총선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이미 정해진 대통령 임기 5년도 어떤 이에게는 죽도록 길 수 있다는 사례로 드는 것 뿐이다. 그래서 만약, 눈 떠보니 조국(祖國)은 식민지가 됐고 언제 독립할지 기약없는 100여 년 전이었으면 어땠을지 묻고 싶은 거다.“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단재 신채호는 1923년 ‘조선혁명선언’에서 2000만 민중에게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 것을 촉구했었다.● 단재 신채호, 교육·문화독립운동을 ‘적’으로 규정 교과서에선 단재를 독립운동가·역사가로 배웠지만 기실 그는 교육적, 문화적, 외교적으로 독립을 추구한 이들을 무조리 ‘적’으로 규정했던 혁명가였다(죽창가를 부르던 조국과 흡사한 점이 없지않다). 그러나 따져보자. 단재 자신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했지만 2000만 백성 전부가 단재처럼 나라를 떠날 순 없다. 더구나 그땐 지금의 조국처럼 3년 반만 기다리면 정권이 바뀌도록 정해진 상황도 아니었다. 언제 독립될지, 그런 날이 올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단재는 “경제약탈의 제도 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존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이 있으랴” 조선혁명선언에서 개탄했다. “검열·압수, 모든 압박 중에 몇몇 신문 ·잡지를 가지고 ‘문화운동’의 목탁으로 스스로 떠들어 대며, 강도의 비위에 거스르지 아니할 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 발전의 과정으로 본다 하면, 그 문화 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 주장했다. 그래놓고 이듬해인 1924년 동아일보 1월 1일자 전면에 ‘조선고래(古來)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이라는 글을 실었으니 신문 없었으면 어쨌을까 싶다(1936년 그의 옥중 순국 기사 역시 동아일보에 게재됐다). 외교독립운동에 대해서도 단재는 “탄원서나 열국공관(列國公館)에 던지며…(중략) 국가 존망·민족사활의 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며 폄훼했다. ‘의열단 선언’이라고도 하는 이 글을 쓴 시기엔 무장투쟁만이 피 끓게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100년 전 조선 땅에서, 그 후로도 한참동안 조선총독부 아래 자식들 공부시키며 먹고 살아야 할 사람들이 모조리 총칼 들고 나서긴 힘든 일이다. ● 교육과 문화독립운동 평가한 3·1절 기념사 그럼에도 일제 강점기 이 땅에서 펼쳐온 ‘다양한 운동’은 제 몫의 평가를 받지 못해온 게 사실이다. 우리를 지배해온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 상당부분이 의열단 선언 같은 혁명적 사고에서 비롯된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3·1절 기념사는 지금껏 가려져 왔던 국내에서의 교육·문화독립운동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3.1운동을 기점으로 국내외에서 여러 형태의 독립운동이 펼쳐졌습니다.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무장독립운동을 벌인 투사들이 계셨습니다. 국제정치의 흐름을 꿰뚫어 보며, 세계 각국에서 외교독립운동에 나선 선각자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역량을 갖추도록, 교육과 문화독립운동에 나선 실천가들도 계셨습니다.”짐작하시겠지만, 여기서 ‘교육과 문화독립운동에 나선 실천가들’은 인촌 김성수 선생 등을 염두에 둔 것이다(대통령실의 한 수석도 그렇게 확인했다). 윤 대통령은 “우리의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모든 선구적 노력의 결과였다”며 “이 모든 독립운동의 가치가 합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기념사에서 강조했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그래서 이 기회에 의외로 잘 안 알려진, 동아일보 사람들한테는 참 자랑스러운 3·1운동과 인촌, 대한민국 근대화와 인촌에 대해 전하고 싶다. ● 상층 지주가 근대화에 기여한 유일한 한국근대 이전의 사회는 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진 계급사회였다. 만일 눈 떠보니 당신의 부친이 상층계급 지주라면, 축하한다. 그들이 사회적 책임을 기꺼이 지는 나라라면, 국민도 해피할 것이다. 그러나 동양에서 그런 나라는 거의 없었다. 역사학자 이승렬은 오늘날 한중일 삼국 차이가 상층 지주세력에서 성장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존재 여부에서 비롯됐다고 본다(2021년 벽돌책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 일본 지주들은 청일-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강력한 관료제와 군에 휘둘려 군국주의에 포획됐고, 패전 뒤에도 자유주의로 정착하지 못해 지금도 자민당 거의 일당 체제다. 중국 지주 역시 농업관료제에 기생하다 1911년 신해혁명에서 좌절하고 국공내전서도 패했다. 하층 농민에 기반한 공산당은 전체주의 일당독재에서 현재 거의 시진핑 황제체제다. 반면 한국은 진취적 지주 엘리트가 자유주의 세력을 형성해 근대화를 이끌고, 의회주의를 주도한 나라다. 조선의 기득권 세력이던 서울경기, 충청과 황해도 지주 다수는 일본에 협력했지만(이회영 일가 등 소수는 망명해 독립운동) 변방인 호남 지주세력은 달랐다. 농업관료제(의 수탈)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 개항 후 기업형 농업과 미곡무역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의 젊은 부르주아지 2세들은 일본 유학으로 세상 변화를 깨우쳤고, 나라와 미래를 고민했다. ● 중앙학교 숙직실은 3·1운동의 산실축적된 부와 지식을 그들은 자신만의 부귀영화에 쓰지 않았다. 교육과 문화 그리고 경영에 헌신하며 온건한 민족주의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 중심인물이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하고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1891~1955)였다. 서울 계동의 중앙학교 숙직실은 젊은 인촌의 살림집이자 고하 송진우(1890~1945), 기당 현상윤(1893~1950) 등 동경유학생 출신 중앙학교 교사들이 학교와 민족의 장래, 세계정세를 통론하는 민족 수재들의 사랑방이었다. 3·1운동의 산실도 이 작은 기와집이다. 화제의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은 3·1운동을 이끈 배경에 이승만 박사가 있다고 보는데 동아일보사가 1985년 발행한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에도 그런 대목이 나온다.‘1918년 12월의 어느 날 워싱턴에서 재미동포들과 구국운동을 하고 있던 우남 이승만이 밀사를 보내왔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파리)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 주기 바란다.”’● 기미독립선언 33인에 인촌이 빠진 이유하지만 이승만 자신의 진술에 의하면 이승만이 직접 국내에서 만세운동을 기획하거나 지시한 사실은 없다고 박명수 서울신학대 명예교수는 2023년 논문에서 밝혔다(‘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미친 미주 독립운동의 영향’). 다만 당시 이승만의 명성이 매우 높아서 사람들은 독립운동의 배후에 이승만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했다. “계동 김성수의 사랑방에는 1880년대와 1890년대 태어난 고학력 엘리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사회 경제 언론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일어났던 국내의 온건한 민족운동에 관여했다”고 이승렬은 저서에 썼다. 인촌과 고하, 기당이 일본유학시절 만든 동경유학생회에서 2·8독립선언서를 들고 찾아온 곳도 바로 계동 사랑방이었다. 3·1운동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대표들을 한데 모으는 데는 중앙학교에 뭉친 이들 진취적 부르주아지 2세대가 가교 역할을 했다. 이들은 위계를 따지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며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독립의 목표로 공존공영과 평화를 주장했다. 이 새로운 ‘정치적 인간’들이 한국 시민계급의 초석을 놓으면서 자유주의 세력을 확장하여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정으로 나아갔다는 것이 이승렬의 분석이다. 그럼에도 ‘기미독립선언 33인’에 인촌의 이름이 빠진 이유가 있다. 고하의 우격다짐같은 권유로 인해서다.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정말 일조일석, 단판 승부로 얻어지는 건 아닐거야. 밤새도록 혼자 생각해봤는데 이 운동은 영구적인 투쟁이 돼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네…(중략) 성수가 투옥되면? 우리 중앙학교 역시 당장 폐교야!…(중략) 자금은 대줘도 그 자취는 남기지 말고 비밀회의 같은 외부회의에는 나가지 말고!”(‘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공선사후(公先私後)와 친명횡재는 상극인촌은 중앙학교와 보성전문(현 고려대학교)의 교육을 통해 근대 시민을 길러냈다. 1919년 경성방직 설립은 경제의 근대화,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은 사상의 근대화와 관련이 있다고 이승렬은 썼다(그래서 그의 책 제목이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이다). 우리 헌법 1조 1항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박사 역시 인촌이 인수한 보성전문학교 교수였다.민주주의는 알겠는데 공화주의는 추상적이고 어렵다. 모두의 이익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공적 이익과 공동체의 안녕을 중시한다는 개념. 우리 사무실엔 ‘공선사후(公先私後)’라는 인촌 정신을 쓴 액자가 걸려 있다. 공사가 부딪힐 땐 무조건 공을 최우선으로 중시하고, 사적인 일은 나중으로 돌리는 것(하다못해 밤중에 취재와 집안일이 겹칠 때도 취재가 먼저였다). 나는 이것이 공화주의를 실천하는 가장 쉽고도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인촌은 1946년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를 맡기도 했는데 안타깝게도 최근 횡행활보하는 민주당 ‘친명횡재-비명횡사’ 공천은 공선사후와 완전상극이다.‘전북 고창과 전남 담양은 개항 이후 미곡시장이 확대되면서 상업적 농업을 통해 자유롭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조선왕조의 주변부여서 새로운 문명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시대 변화에 민감했으며 차라리 근대화와 학습을 통해 국가적 위기를 돌파하려는 열기도 충만했다. 특히 김성수는 지역 인물과 재력을 연결하는 독특한 역할을 했고, 그 이면에는 열린 자세로 뒷받침했던 부모 세대의 노력과 재력이 있었다.’ 이승렬은 저서에 적었다. 호남은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들을 키운 땅이었다. 그랬던 호남이 100년 후 광주엔 복합 쇼핑몰 하나 없는 ‘민주당 식민지’ 처럼 되고 말았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dobal@donga.com}
‘문재인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노무현 정부는 실패한 정부라는 것이다.’ 임혁백 더불어민주당 공직선거후보자추천관리위원장이 고려대 교수 시절인 2012년 11월 동아일보 ‘동아광장’에 쓴 칼럼 중 한 대목이다. 2007년 대선 당시 정동영 여당 후보의 패배는 민주당 대참패일 뿐 아니라 노무현 통치에 대한 총체적인 국민적 부정이었다고 임혁백은 썼다. 그럼에도 2012년 대선 과정에서 문재인 후보는 노 정부 유산 계승을 선거구호로 내세웠고 캠프는 ‘노빠’로 가득하니 선택은 국민 몫이라는 매서운 내용이었다. 그랬던 임혁백이 28일 서울 종로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위 곽상언 변호사를 단수 공천했다. 작년 12월 출마 선언하며 “저는 노무현의 사위로 알려진 사람으로 노무현 정치를 계승하는 것이 숙명”이라고 했던 곽상언을 공천한 거다. 노파심에 미리 밝히자면, 나는 정치학자 임혁백을 존경해 마지않는다. 민주당 대변인이 말했듯 임혁백은 ‘민주주의의 세계적 석학’이라는 것도 잘 안다. 과거 사형 집행 때 죄인의 목을 베던 ‘망나니’란 용어가 좀 무엄해도 임혁백은 ‘비동시성의 동시성; 한국 근대정치의 다중적 시간’이라는 저서를 쓴 만큼, 투명하고 공정하고 또 지엄하게 칼을 휘두르는 공천 관리자 역할을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다. 임혁백의 언동이 막돼서 망나니라는 게 아니고 글과 행동이 달라지는 게 석학답지 않다. 그는 달랑 칼럼 한 편만으로 노 정권을 비판한 게 아니다. 2006년 ‘좋은정책포럼’을 발족해 “한국 진보세력이 정체적 위기, 수권능력 위기, 평화관리 위기의 삼중 위기에 빠졌다”고 진단하는 등 노 정권 실정을 기회 있을 때마다 비판했다. 그래 놓고 자신이 비판한 노 정권을 계승하겠다는 노무현 사위를 ‘선거구 세습’시켜 공천한 것은 전근대적 처사다. 굳이 저서에 맞춰 본다면, 근대성을 완결하고 탈근대로 진입해야 할 시기에 공화주의적 가치관과 사회적 신뢰를 깨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이상한 공천은 곽상언만이 아니다. 임혁백의 학자적 양심과 공관위원장의 양식을 무너뜨리는 공천이 한두 곳이 아니다. 곽상언은 이재명의 경쟁자가 아니어서 괜찮을지 몰라도 임혁백은 자기 말까지 뒤집으며 당 대표 이재명을 닮아가고 있다. 심지어 학계에선 석학 임혁백이 달라졌다며 우려가 번지는 상황이다.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임혁백은 “실질적 심사는 내가 한다. 계파에 관계없이 시스템에 의해 공정하게 심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정치학자 임혁백이었다. 그러나 “당 통합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증오와 폭력 발언 등을 공천 기준에 반영한다”더니 임혁백은 돌연 이재명이 했던 증오와 폭력 발언, 음주운전을 공천 기준에서 빼버렸다. ‘윤석열 검찰정권’ 탄생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책임지라고 이재명을 위해서 총대까지 멨다. 총선 뒤 당권 경쟁에서 이재명의 경쟁자가 될 법한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은 절대 공천 못 준다는 얘기다. 2012년 우리 신문에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줘라’ 칼럼을 썼는데 지금은 민주당 밀실공천을 뻔히 알고 사과까지 하면서도 속수무책인 모습이다.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임혁백은 ‘이기는 공천’을 강조했지만 이제는 완전 ‘지는 공천’을 한다. 공정하지도 투명하지도 않다. 왜 진보적 민주주의 석학이 뒤늦게 이토록 말도 안 되는 공관위원장을 고수하는 것일까. 자신의 ‘방탄’만이 중요한 이재명은 석학 방패막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친명으로 똘똘 뭉칠 수만 있다면, 총선 패배도 상관없다. 대선에서 이기면 그 많은 사법 리스크쯤 ‘셀프 사면’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을 터다. 임혁백은 2022년 한 인터뷰에서 한국 정당의 가장 큰 문제가 ‘사인(私人) 정당화’라고 했다. 박용진 의원에게 하위 10%를 알리면서 “나도 (이유를 모르고) 통보만 한다” 할 만큼 임혁백은 이재명 사당(私黨)에서 허수아비다. 공화주의의 핵심은 공익, 공적 덕성의 지배다. 이재명에게는 그게 없다. 아니라고? 임혁백이 이재명에게 총선 불출마를 요구해 보시라. 그럼 알 것이다. 만에 하나, 그럴 리 없겠지만 지난 대선 때 이재명의 지지 그룹에 몸담았던 임혁백이 총리라도 시켜준다는 약속을 받고 ‘망나니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제라도 그 불명예스러운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 바란다. 설령 이재명이 다음 정부 대통령이 된대도 그는 “총리 시켜준다 했다고 정말 시켜줄 줄 알았느냐”고 할 사람이다. “박근혜를 존경한다고 했다고 정말 존경하는 줄 알더라”라고 말했던 걸 잊었는가.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설 연휴 온 식구가 ‘건국전쟁’을 봤다. 극장이 만원이어서 뿔뿔이 떨어져 앉아야 했다. 덕분에 각자 눈치보지 않고 영화에 빠져들 수 있었다. 기자인 나는 습관처럼 메모를 했고 젊은 내 딸은 눈물 훔치는 옆 사람을 구경했다고 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자 관객들이 일어나 나오면서 박수를 쳤다. 이쯤 되면 기립박수다. 다큐멘터리와 일반 영화의 차이는 팩트냐 아니냐다. 기사는 사실을 쓰고 소설은 아니다(칼럼은 의견을 쓴다^^). 이승만 칼럼을 쓸 때마다 달리는 댓글이 주로 ‘이승만은 6·25전쟁이 터지자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간 나쁜 대통령’이라는 것이었다. 수많은 피난민을 한강에 빠져 죽게 만들고는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켜주십시오” 국민 속이는 방송까지 했다는 건데 김덕영 감독은 그게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그래서 고맙다. 이제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을 한껏 존경해도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켰지만 과오도어렵게 세운 대한민국을 지켜낸 뒤, 사사오입 개헌에 이어 4·19에 이르는 과정까지 이승만을 존경하기는 그러나 쉽지 않다. 한 인간을 단편적으로 평가해선 안 될 일이지만, 또 지금껏 이승만을 지나치게 박절하게 대한 점은 반성하고 시정해야하지만, 그럼에도 무조건 우상화하는 것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1950년대 주한 미국인들 사이의 공통된 화제는 80세의 이승만이, 특히 경제문제에 있어서, 얼마나 요상하고 멍청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었다…미국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무상원조를 받아내어…헤아릴 수 없는 부정부패 사건들이 줄지어 일어났다.’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가 불편하고 악의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김영명 한림대 명예교수 역시 이승만 정권의 기본구조를 ‘일인체제 또는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규정했다(2006년 ‘한국의 정치변동’). 아무도 자유민주주의를 경험해본 적 없는 나라에서 이승만은 대통령 자신이 ‘정파를 초월한’ 위치에 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했다. 팔순 고령의 대통령 옆에는 파파의 건강만 챙기는 영부인이 장막을 쳤다. 그 사이를 아첨꾼과 거짓 정보 전달꾼만 파고들었다는 사실은 섬뜩하다. 우리 안에 사라지지 않는 ‘한국적 민주주의’ 원조를 보는 듯해서다. “장기집권은 했지만 독재는 아니”라는 다큐멘터리 속 나레이션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이승만이 통찰한 러시아의 침략본능그럼에도 지금 이승만을 다시 보는 이유는 그가 러시아, 그리고 공산전체주의의 본질을 누구보다 앞서 꿰뚫어본 위대한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윈스턴 처칠이 ‘철의 장막’을 말한 것이 1946년이었다. 이승만은 1904년 29세 나이에 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서 러시아 전제정치의 본질을 알렸다. 꼭 120년 전이다. 러일전쟁이 터진 1904년 2월부터 넉 달 간 쓴 이 책에서 그는 ‘옛날부터 아라사 사람들의 정치적 목표는 오로지 남의 땅 빼앗는 것’이고 ‘전제정치로 강국이 된 나라’라고 갈파했다. 영국 스웨덴 심지어 일본도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근대국민국가의 시대였다. 러시아는 제 국민을 노예로 아는 전제군주국임을 자부하면서 고종에게 따라하라고 권했다는 걸 젊은 이승만이 알고 있다는 게 되레 놀랍다. ‘전제(專制)나 압제(壓制)나 위에서 하시기에 달려 있는데 어찌 백성이 감히 상관하겠는가…아라사는 전제정치로써 천하의 강국이 되어 만국이 다 두려워하는 바이니 우리를 단단히 의지하면 일본이 감히 어찌할 수 없을 테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노라고 하였다’(현재 아라사-소련-러시아를 따라가는 나라가 북조선 김씨 왕조 아닌가! ).이승만은 전제정치의 원류로 대(大) 피득(표트르 대제·재위 1682~1725)도 소개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역사적 멘토로 삼는 인물이다. 그가 남긴 14조목의 비밀유서엔 약소국가를 뺏어오는 비법이 담겨 있다. 강한 나라와 먼저 힘을 합해 작은 나라를 나누어 없애고 그 후에는 틈을 타서 그 나라를 마저 쳐 없애며, 자유하는 나라에는 혼인이나 결연을 통해 먼저 내정을 간섭하여 권리를 주장하라는 거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2차 세계대전 뒤 어떻게 동유럽을 유린했는지, 한반도 북쪽에 얼마나 서둘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웠는지 돌아보라. 푸틴이 일으킨 2차 대전 이후 유럽 최대의 전쟁 우크라이나 침공사태도 마찬가지다. 뼛속 깊이 박힌 아라사의 영토 야심, 전제정치 DNA는 소련공산당이 무너졌음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거다. ● “공산주의 따르는 정치는 반드시 실패”1917년 소련공산당 정부가 들어서자 이승만의 반러감정은 반공사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원래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역해가며 국민을 지배하려는 사상체계’로 간주했고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는 정치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장담했다(홍용표 2007년 논문 ‘현실주의 시각에서 본 이승만의 반공노선’). 임정 국무총리 이동휘가 소련과 연대할 것을 주장할 때도 이승만은 “소련과의 협력은 조국을 공산주의 국가의 노예로 만들자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논리로 반대했다. 이승만이 1941년 일본의 미국 침략 야욕을 폭로한 ‘Japan Inside Out’에서 소련 공산주의를 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일본 군국주의와 나란히 전체주의로 분류한 것은 중요하고도 의미 있다. 그때만 해도 세계는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었고 소련은 자기네 실상을 감추고 있던 시기여서다. 이승만은 ‘민주주의 대(對) 전체주의’ 장에서 ‘소련, 일본, 나치스, 파시스트 세력들은 자기들 정부와 같은 새 정부를 설립하기 위해 미국 정부를 전복시키겠다는 의도를 선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썼다. 그리고 ‘한국의 운명은 세계의 자유민들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다’며 미국의 맹성을 촉구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강조했던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을 연상시킨다. 이승만은 그만큼 세상을 앞서간 인물이었다.● 푸틴까지 이어지는 표트르대제-스탈린 유산답답하게도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소련을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다. 연합국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문제는 러시아”라며 가슴을 쳤지만 루스벨트는 마지막 순간까지 스탈린이 합리적인 인간이라고 믿고 모든 것을 주면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박지향 2023년 저서 ‘윈스턴 처칠, 운명과 함께 걷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300통 이상의 메시지를 분석한 ‘MY Dear Mr. Stalin‘이라는 책도 있을 정도다. 징그럽지 않은가. 또 미국 대통령이 될까 겁나는 트럼프가 과거 북한 김정은에게 보냈던 러브레터처럼. 목적을 위해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산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봤기에 이승만은 미국이 요구한 좌우합작 정부 수립을 단호히 거부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사람이면 다 똑같은 줄 알고 미국은 동유럽에, 중국과 우리에게 좌우합작을 한사코 권했던 것이었다. 미국과 소련 원하는대로 좌우합작에 나섰다가는, 폴란드처럼 망명정부는 배제되고 민주 지도자들은 추방되거나 처형되고 결국 친소 괴뢰정권이 들어설 게 뻔했다. 백범 김구는 몰랐고 이승만은 꿰뚫어 봤던 점이 바로 이것이 아니던가. 소련 공산주의가 망하고도 공산전체주의 속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알렉세이 나발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이 17일 교도소에서 복역 중 급사했다. 47세. 푸틴 독재에 용맹하게, 또 유머러스하게 항거해온 나발니는 러시아 자유의 상징이었다. 푸틴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용병기업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작년 8월 돌연 비행기 사고를 당한데 이어 나발니까지 목숨을 뺏긴 거다. 1940년 지구 반대편 멕시코까지 자객을 보내 정적 레온 트로츠키를 살해했던 스탈린처럼, 푸틴이 멘토로 모시는 대피득처럼, 푸틴도 전제정-공산전체주의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형국이다. 어쩌면 푸틴 이후 또 다른 지배자까지도. ●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다행히도 우리는 ‘한국적 민주주의’ 망령에서 벗어났다. 우리끼리는 “이게 나라냐” 또 “이건 나라냐” 불만을 터뜨려도, 야당이 ‘검찰독재’라고 목청을 높여도, 대한민국은 세계인구의 7.8%만 경험하는 ‘완전한 민주주의’ 속에 사는 나라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산하기관 EIU가 15일 발표한 ‘2023년 민주주의 지수’ 보고서에 나온다. 167개국을 완전한 민주주의(8점 이상), 결함이 있는 민주주의(6점 이상), 혼합 체제(4점 이상), 권위주의 체제(4점 이하)로 분류했는데 한국은 22등이지만 아시아에선 5개국 밖에 없는 완전민주다(뉴질랜드, 대만, 호주, 일본, 다음이 우리^^). 민주주의 맹주국이어야 할 미국도 완전치 못하다(결함민주). 한때 우리처럼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었으나 탁월한 지배세력 덕에 우리보다 훨씬 잘살고 있는 싱가포르도 결함민주다(그게 더 나을까?). 세계 인구의 3분의 1정도만 러시아를 비난하거나 서방에 동조하는 국가에 살고 있지, 나머지는 중립 아니면 심지어 러시아를 지지하는 나라에 산다. 옛날부터 만만한 나라는 침략하고, 비판자는 죽이고, 권력자는 부패한 무서운 나라인데도. 남의 나라 한탄할 때가 아니다. 북한은 권위주의 체제라는 말도 아깝고 안타깝다. 165등. 꼴찌에서 세 번째다. 우리에게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전체주의 독재국가 북조선처럼 됐을 공산이 무섭게 크다(‘눈 떠보니 북한’이라고 상상해보셔요. 얼마나 끔찍한지). 그것만으로도 위대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추앙할 이유는 충분하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dobal@donga.com}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 임종석은 억울하겠다. 더불어민주당 임혁백 공천관리위원장이 공천 부적격자로 ‘윤석열 검찰정권 탄생에 원인을 제공한 분들’을 지목했다. 당장 윤석열 검찰총장 임명과 부동산정책 실패에 책임 있는 문 정권 사람들을 뜻한다는 해석이 나오면서 임종석이 공천을 못 받게 생겼다. 부동산정책 실패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지적엔 동의한다. 하지만 윤 총장 임명을 윤 정권 탄생의 원인처럼 지목하는 건 억지스럽다. 지금의 윤 대통령은 2019년 7월 총장 임명 당시 문 대통령한테 ‘우리 총장님’ 소리까지 들으며 ‘살권수’(살아 있는 권력 수사)를 독려받았던 사람이다. 오히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윤 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이라 해야 옳다. 2021년 알앤써치의 문 정권 국정 평가조사에서도 가장 큰 실정으로 꼽힌 것이 부동산정책(41.8%), 두 번째가 조국 장관 임명(10.2%)이었다. 2019년 8월 대통령이 조국을 장관으로 지명하지 않았다면, 검찰총장이 정권에 ‘도전’하고 야당 대선 주자로 뜨는 일은 없었을 공산이 크다. 어쩌면 자칭 사회주의자 조국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해 현재 대통령으로 앉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국 사태’가 한국사회에 끼친 여파는 정권을 뒤집을 만큼 크고도 깊다. 첫째는 이른바 진보의 몰락을 몰고 왔다는 점이다. 강남 좌파를 자처했던 조국은 도덕성을 코에 걸었던 진보의 위선을 부끄럼 없이 노출했다.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률도 법무부 장관 임명-사퇴를 거치면서 취임 후 처음 30%대로 내려갔다. 2019년 ‘서울대인 조국 사퇴 촉구’ 집회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김근태 의원은 “조국 사태가 정권교체의 시발점”이라고 했다. “나는 진보”라는 응답도 탄핵 국면인 2017년 1월 37% 최대치에서 내려오기 시작해 윤 총장이 사퇴한 2021년 4월 26%로 “나는 보수”와 동률을 기록했다. 2023년 현재 우리 국민의 주관적 정치 성향은 보수가 30%, 진보가 26%다. 86운동권그룹의 위선적 도덕주의를 선명하게 보여준 이도, 그리하여 86 청산 요구를 불러온 이도 조국으로 봐야 한다. 평등과 공정, 정의와 개혁을 말하면서 자기 딸은 외고에서 고려대 이과계열로,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으로 보낸 내로남불의 끝판왕이 조국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의 진보적 가치와 아이의 행복이 충돌할 때 결국 아이를 위해 양보하게 되더라”고 발뺌한 적도 있다. 2011년 칼럼에서 이를 지적하자 그는 “내 속의 ‘위선’과 ‘언행불일치’를 고치려고 노력할 것이나 동아의 공격에 위축될 생각은 없다”고 트위터로 나의 ‘저급철학’을 비난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위선과 언행불일치는 날로 심해졌음이 ‘윤석열 검찰’을 통해 드러났다. 허위 인턴십 확인서와 위조 봉사표창장 등 자녀 입시비리로 그는 최근 2심에서 징역 2년의 유죄를 선고받았다. 가짜 증명서까지 만들어 딸에게 지위를 물려주는 ‘세습 자본주의’의 추악한 죄악을 자행하고도 2016년 ‘재(再)봉건화의 시대, 정의를 말한다’란 강연에서 “내 부모가 누구인가에 따라 내 노력의 결과가 결판 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근원적 문제”라고 강조했던 강심장이 놀랍다. 둘째, 조국은 대입제도까지 바꿔 놨다. 돈으로도 만들 수 없는 그들만의 스펙 쌓기가 ‘엄빠(엄마 아빠) 찬스 계급’에선 가능하다는 사실을 노출하면서 ‘대입 공정성 강화 방안’이 졸속으로 발표돼서다. 정시는 확대되고 학생부 등 비교과 활동, 자기소개서가 폐지되자 2018년까지 20조 원 아래였던 사교육비도 급증했다. 2019년 21조 원에서 2022년 무려 26조 원이 됐다. 살림은 더욱 팍팍해졌고 수능까지 어렵게 나오면서 국민 심성까지 파괴되는 형국이다. 셋째, 조국 여파로 이념갈등도 극심해졌다.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와 한국리서치의 ‘2019 한국인의 공공갈등 의식조사’에서 88.4%가 ‘보수와 진보 간 갈등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지역·세대·빈부·노사갈등을 제치고 이념갈등이 가장 심각한 문제로 등극하면서 진영에 따라 인간관계도, 사실관계도 달라지는 상식 파괴, 가치관의 전도 현상이 극심해졌다. 좌파 정치인은 물론 지식인까지 조국의 범죄 아닌 검찰 수사를 공격하며 ‘검찰 쿠데타’라고 주장한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처럼 재판 중이어도, 조국처럼 유죄 선고를 받고도 태연히 출마하고, 신당 창당에 나서 대법원 판결 때까지 국민 위에 군림하려 든다. 죄를 짓고도 “모른다” “떳떳하다”며 오리발 내미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조국이 끼친 영향 때문에 우리는 이미 ‘조국의 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매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의혹 사건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인식이다. 대통령은 7일 녹화 방송된 KBS 특별대담에서 “제가 보기에는 좀 그거를 매정하게 좀 끊지 못한 것이 좀 어떤 문제라면 문제고 좀 아쉽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말했다. ‘좀’이 아니라 많이 아쉽다. 대담 다음날 동아일보 사설 제목이기도 하지만(윤 대통령 신년 녹화대담, 내용도 형식도 ‘많이 아쉽다’) 무릇 뭇사람들이 잔뜩 기대를 걸고 있는 일을 벌일 때는 ‘떡 하나 더’가 아니라 과할 만큼, 그러니까 기대를 뛰어넘는 담대함을 보여줘야 성과가 나는 법이다. 조선제일의 사랑꾼으로 소문난 이가 프로포즈를 하면서 선물을 내민다면 상대방의 기댓값에 0을 하나 더 붙여줘야 감동 이벤트가 된다. 짠돌이 선물이면 안 하는 것만 못하다. 하물며 두어 달간 나라를 들었다 놨다 했던 이른바 ‘김건희 리스크’에 대한 대통령의 최초 언급 아닌가. 밤 10시부터 TV대담을 보며 이제나 저제나 목 빼고 기다린 국민을 생각한다면, 대통령은 듣는 이의 마음을 좀더 배려했어야 옳았다. ● “박절하기 어렵다”세 번이나 언급 그럼에도 “대통령이나 대통령 부인이 어느 누구한테도 이렇게 박절하게 대하기는 참 어렵다”는 전제부터 깔고 윤 대통령은 시작했다. 박절(迫切)하게. 국어사전에 따르면 ‘인정이 없고 쌀쌀하게’라는 요즘 듣기 쉽지 않은 단어를 세 번이나 언급한 것도 특이하다. 1시간 34분 진행된 대담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기다린지 무려 53분이 지난 다음이었다. “제 아내가 중학교 때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셔가지고 아버지와의 동향이고 뭐 친분을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앵커 “방문을 접근했던”) “네 그래서 제가 볼 때는 거기에다가 또 저도 마찬가지고 대통령이나 대통령 부인이 어느 누구한테도 이렇게 박절하게 대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마 그 관저에 있지 않고 이렇게 사저에 있으면서 또 지하 사무실도 있고 하다 보니까 자꾸 오겠다고 하고 해서 제가 보기에는 좀 그거를 매정하게 좀 끊지 못한 것이 좀 어떤 문제라면 문제고 좀 아쉽지 않았나…” 앵커가 여당에선 정치공작의 희생자라고 하는데 동의하느냐고 묻자 윤 대통령은 “정치공작으로 봐야죠” 하면서도 “정치 공작이다라고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라고 했다. 그럼 정치공작에 당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대통령 부인의 처신의 중요하다는 말씀? “박절하게까지야 누구를 대해선 안 되겠지만 조금 더 분명하게 좀 단호할 때는 단호하게 선을 그을 때는 선을 그어가면서 처신을 해야 되겠다는 그런 것”이라니 박절하게 하겠다는 건지, 하지 않겠다는 건지 헷갈린다. 재발 방지를 위해 특별감찰관과 제2부속실 설치 계획을 묻는 질문에도 윤 대통령은 또 ‘박절’을 언급했다. “제2부속실이 있었더라도 제 아내가 내치지 못해 가지고 자꾸 오겠다고 하니까 사실상 통보하고 밀고 들어오는 건데 그거를 박절하게 막지 못한다면 제2부속실이 있어도 만날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 뇌물 거절한 공직자는 매정한가그래서 드는 생각이 이거다. 아, 윤 대통령과 부인은 박절하지 못한, 참 인정 많고 다정한 사람들이구나. 대통령은 “그 이슈 가지고서 부부싸움을 했느냐”는 질문에도 “전혀 안 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아, 김 여사는 복도 많은 사람이구나. 보통의 공직자 부부라면 김영란법(부정청탁및금품등수수의금지에관한법률) 위반 같은 문제가 터지면 부부싸움이 일어나는 게 정상이다. 설령 부부싸움을 안 했더라도 그 밤중에 TV를 지켜보는 국민을 생각한다면 대통령은 “국민이 걱정할(실은 매우 실망할) 일이 벌어져 아내에게 싫은 소리 좀 했다” 정도는 말해야 마땅하다. 혹여 나중에 법적 문제가 벌어질까 우려해 대통령이 ‘유감’ ‘사과’ 같은 단어를 입 밖에 내지 못할 순 있다. 그럼에도 나라를 뒤집어놓은 일을 벌여놓고도 대통령 부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건, 그들은 다정했는가 몰라도 국민에겐 참 매정한 소리다. 국민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공감능력 빵점의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조선제일의 사랑꾼 아닌 ‘조선제일의 퐁X남’ 소리까지 나오는 거다. 결국 김 여사는 사적 친분으로 만남을 요청한 친북 성향의 목사 최모 씨를 박절하게 거절하지 못했고, 그가 놓고 간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그 조그마한 백’을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게 문제일 뿐이다. 박절하게 말한다면, 사적 인연으로 밀고 들어오는 불투명한 방문자를 거절하거나 자그만한 파우치든 큰 명품백이든 뇌물 절대 안 받는 공직자와 그 부인만 매정한 사람인 셈이다.● 김 여사에게는 누구도 박절할 수 없다 대통령실 참모진이 마련한 예상 질문과 답변지를 참고했다면, 윤 대통령이 절대 이렇게는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메모 한 장 없이 대담에 임한 대통령은, 즉 누구의 조언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냈기에 더욱 걱정스럽다(앗, 김 여사 빼고). 심지어 윤 대통령은 “개고기식용금지법안 말고도 김 여사와 다른 사안에 대해서도 많이 논의하느냐”는 질문에 “그래도 비교적 아내하고 뭐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늦게 들어와 일찍부터 일하고 하다 보니 대화를 많이는 못 합니다마는”하면서도 굳이 아내와 국정을 많이 논의한다는 사실을 털어놓다니, 이 또한 제2부속실 설치 요구 여론에 신경쓰지 않는 매정한 답변이다.국민이 걱정하는 것은 김 여사가 정치공작에 걸려 친북 성향 목사가 놓고간 ‘자그마한 파우치’를 두고 있어서만이 아니다. 대통령 부인의 동선과 예산 등을 국회가 감시할 수 있는 제2부속실 설치는 ‘검토’만 하는 사이, 김 여사는 남북문제에 적극 나서겠다는 식으로 강한 국정 개입 의지를 보이는 것이 두렵고 우려스러운 거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도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낼 분위기인 걸 보면, 김 여사를 제어할 힘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윤 대통령은 어떤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어린이를 많이 아낀 따뜻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답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의 대통령 모습은 과히 따뜻하지 않다. 어린이들은 많이 아끼는지 모르겠으나 야당에는 물론 윤핵관이 아닌 여당 사람들, 참사 희생자들의 가족, 심지어 언론사 기자들에게도 매정하기 그지 없다. 신년회견 대신 미루고 미루다 마련된 이번 특별대담은 모처럼 대통령의 통 큰 모습을 보여줄 기회였다. 그걸 아쉽게도 윤 대통령은 박절하게 넘겨버렸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어제 신년 기자회견을 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셨다”며 모두 발언을 시작할 때는 여유가 넘쳤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한 이후 작년에도, 올해도 신년회견을 마다하는 상황이다. 기자들을 한사코 피하는 윤 대통령과 대비되면서 오히려 이재명이 대통령 같은 모습이었다. 질문도 보드랍고 공순했다. 작년 신년회견 때 11개 질문 중 6개나 됐던 ‘사법 리스크’ 관련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선거제에 대한 질문에 이재명이 “의견 수렴 중”이라며 넘어가도 “이 대표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공약했다 병립형으로 방향을 틀지 않았느냐”며 다시 캐묻는 일 따위도 없었다. 이렇게 쉬운 신년회견을 윤 대통령은 왜 한사코 기피하는지 안타깝다. 대통령 기자회견 같은 모습은 그러나 거기까지다. 이재명은 작년에 했던 정부 비판을 거의 반복했다. 작년 회견에선 “어려운 경제 상황에 안보 참사까지 더해지면서 ‘코리아 리스크’가 전면화되고 있다”며 폭력적 국정과 정적 죽이기 중단을 요구했는데 올해는 저출생과 민주주의를 추가해 대한민국이 4대 위기에 처했다고 지적했다. 윤석열 정부가 지난 2년간 정적 죽이기에만 올인해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진단이다.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다 박수를 치긴 어렵다. 그러나 이재명 죽이기에만 골몰해 저출생 위기까지 왔다는 소리는 삶은 소대가리가 앙천대소할 자기중심적 분석이다. 심지어 극단적 정치를 끝낼 수 있는 복안을 묻는 질문에 이재명은 “저에 대한 소위 암살 시도, 정치 테러가 개인에 의해서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대통령이) 권력을 상대를 죽이는 데 사용하게 되니까 국민들도 그에 맞춰서 좀 더 격렬하게 분열하고 갈등하고 적대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2일 이재명이 부산 가덕도에서 당한 불의의 습격이 윤 대통령 책임이라는 억측까지 불러일으키는 발언이다. 물론 그의 말대로 “현실을 바꾸는 첫 출발점은 통합의 책임을 가진 권력자가 통합의 책임을 다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개딸(개혁의 딸들)이라는 살벌한 이재명 팬클럽의 그악스러운 행태가 민주당과 나라를 갈등과 분열로 몰아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비명(비이재명)계 의원 지역구에 “총알 한 발이 있다면 처단할 것”이라는 협박 현수막까지 내걸었는데도 이재명은 방관했다. 이재명 자신의 얄팍하고 편협한 인식과 ‘사이다 발언’이 나라와 국민과 심지어 동맹까지 찢어놓을 지경임을 본인만 모르는 척한다. “대구·경북이 대리인들을 지배자로 여기면서 지배당한 측면이 있다” “하다 하다 안 되면 마지막으로 가는 게 택시(운전)” “한미일 연합훈련을 핑계로 자위대의 군홧발이 다시 한반도를 더럽힐 것”, 심지어 최근엔 “우리 북한의 김정일, 또 김일성 주석의 노력이 폄훼되지 않도록 애써야 할 것” 등등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이재명이었다. 어제 저출생 대책이라며 발표한 ‘출생기본소득’도 괜한 사회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크다. 지난해 경제 해법이라던 기본주거, 기본금융의 연장인데 한국국회학회 주최 2022년 학술회의에서 ‘20대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의 선거 전략과 실패요인’으로 대장동 비리 의혹 등 신뢰성 추락에 이어 두 번째로 꼽힌 패배 이유가 국민 정서에 안 맞는 기본소득제 공약이었다. 이번엔 대학 교육비까지 지원하겠다며 사립대 등록금을 국공립대 수준으로 낮추고 장기적으로는 대학교육 무상화를 추진하겠다니 차라리 민주당 당명이나 위성정당을 ‘기본민주당’으로 하라고 권하고 싶다. 경기도지사 법인카드로 소고기와 점심 샌드위치까지 알뜰하게 챙겨 먹었다는 공공귀족 일가가 국민 혈세는 마구 걷어 누구 맘대로 퍼주겠다는 건가. 당 대표 1년 반 동안의 성과를 묻는 질문에 이재명은 “제 자신이 평가하기는 적절치 않다”고 모처럼 맞는 말을 했다. 민주당이 ‘이재명 방탄’ 말고 또 뭘 했는지 암만 머리를 쥐어짜도 모르겠다. 이재명은 대통령을 겨냥해 ‘권력 사유화’를 비판했다. 그러나 민주당 공천관리위원회를 비롯한 요직에 자기 사람을 꽂아 넣고, 공천 심사 5개 항목에서도 ‘음주운전’은 쏙 빼놓아 자기만 살겠다는 식으로 ‘당 권력 사유화’를 하는 당 대표가 또 있을까 싶다. 그러고도 총선 결과가 말해줄 것이라며 151석 과반석을 기대하는 강심장이 놀랍다. 야당 대표 신년회견에 꽉 막힌 심장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윤 대통령이 진정 대통령다운 신년회견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약속 대련’ 이었으면 좋겠다. 태권도나 검도에서 양측이 사전에 약속한 방법으로 공격-방어해서 기술을 연마하는 것. 이관섭 대통령비서실장은 21일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나 사퇴하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뜻을 전했고, 한동훈은 “국민 보고 나선 길”이라며 거부해 한방씩 주고받았다. 신문없는 일요일 인터넷판이 발칵 뒤집혔다. 대통령비서실장이 백주대낮에 집권당 대표를 만나 “그만두라”는 대통령 말을 전했다고? 안 그래도 수직적 당정관계가 문제여서 은밀히, 쥐도 새도 모르게 작업해도 모자랄 판에 원내대표까지 같이 만났다고? 이 정도면 국민들(한동훈 표현에 따르면 ‘동료 시민’) 다 보고 듣고 아시라고 대놓고 저지른 거사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다음날인 22일 윤 대통령은 예정됐던 민생토론회에 30분 전 요란하게 불참을 통보했다. 감기 기운 때문이라지만 덕분에 한동훈은 선민후사(先民後私) 정치인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윤 대통령은…선처후민(先妻後民)으로 지질하게 찍힐 수도 있겠으나 미리 짠 약속 대련이면, 희생과 헌신의 대통령이다.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말만 안 했을 뿐. ● 6·29를 돋보이게 해준 ‘4·13 호헌’1987년 노태우의 6·29 선언이 혁명적으로 보였던 것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4·13 호헌’ 특별담화가 있어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당치 않은 비유라는 것, 안다. 하지만 하도 ‘한동훈의 6·29’를 고대하는 이들이 많아 되돌아보자는 거다. 당시 신민당의 온건 대표 이민우는 전두환이 띄운 내각제 개헌론에 솔깃해 있었다. 이에 김영삼 김대중 양김 씨가 분기탱천 탈당해 혼돈의 창당 정국이 이어졌다. 전두환이 4월 13일 “개헌 논의 유보, 현행 헌법으로 연내 대선 실시”를 발표하자 야권은 “장기집권 음모”라며 격렬히 반발했다.마침내 6월 16일 전두환은 ‘직선제 개헌 요구 완전수용’의 결심을 굳혔다고 회고록에 썼다. 그러자 그간 잠 못 이루며 고심했던 일이 한낱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며 마음이 한없이 평화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이런 전두환의 각본에 노태우는 “제가 직선제 수용을 포함한 민주화조치를 건의 드리면 각하께서는 크게 노해서 호통 치는 모습을 보여주면 더욱 효과가 있겠다”고 말했다(전두환은 즉답하지 않았다). ● 민생보다 김 여사가 그리 중한가6·29와 4·13을 굳이 쓰는 이유는 좀 구차하다. 윤 대통령도 그러지 않았을까 믿고 싶어 전두환 회고록을 들여다 본 거다(영화 ‘서울의 봄’이 떠올라 또 굳이 밝히자면, 정권을 어떻게 잡았는가와 집권 후 어떻게 성과를 올렸는가는 따로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대통령이 한동훈에게 온 국민 다 알게 “관두라”고 외치고, “국민 보고 나왔다”는 한동훈의 한 방을 먹는 약속대련을 펼침으로써, 말하자면 4·13 호헌 선언 같은 악역을 자처함으로써 한동훈에게 자신을 밟고 가는 모습을 만들어준 게 아닌가 믿고 싶은 거다. 그랬다면 마음도 한없이 평화로워졌을 듯하다. 그게 아니라면, 불길하다. 전두환은 그래도 헌법을 지키기 위해 호헌선언을 했던 것이었다. 윤 대통령은 무엇을 지키겠다고 있어선 안 될 당무 개입 의혹까지 일으킨단 말인가. 설마 부인 김건희 여사가 헌법보다 중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김 여사가 대통령에게 민생보다 중한 것은 분명하다. 22일 윤 대통령이 빼먹은 국정 행사가 하필 ‘국민과 함께 하는 민생 토론회’였다. 윤 대통령이 “첫째도 경제(민생), 둘째도 경제(민생), 셋째도 경제(민생)”이라며 해외순방도 민생에 역점을 뒀다고 강조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코로나도 아닌 감기 기운에 민생토론회를 빼먹었다고?? ● 이순자 여사는 청와대 생활 점검했다김 여사는 2022년 6월 서울 연희동으로 이순자 여사를 방문해 90분간 머문 적이 있다. 짧지 않은 시간,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 여사도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편치만은 않은 영부인 역할을 했다. 단군 이래 최대 어음사기라던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터진 것이 1982년, 전두환 집권 2년차였다. 장영자는 이순자의 작은아버지의 처제다. 그는 “사실상 나도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한 여자의 대담한 사기행각의 피해자”라고 회고록에 썼지만 사건이 종결되고 나서도 고슴도치처럼 온 몸에 비난을 받아야 했다. ‘큰 손’으로 온갖 부도덕한 사치와 이권에 개입하는 여자. 탐욕으로 가득 찬 권력형 부정부패의 온상…. 그래서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따로 헤어져 있었으면 좋겠다”고 남편에게 말했다고 회고록에 썼을 정도다(2017년 ‘당신은 외롭지 않다’). 그 아픔을 겪으면서 이 여사는 청와대 생활을 점검했다. 우선 주변에 정직한 충고를 부탁했더니 한참들 망설이다 ‘사치스럽고 나서기를 즐겨하는 권력 지향형의 여자’로 보인다고 말해주더라는 거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봐도 거부감이 생길만큼 TV에 자주 등장했다. 컬러TV 초기여서 한복에 금박을 박아 입었는데 너무 화려해 보이기도 했다. 조용히 공보수석을 만나 부탁했다. “행사 참석 횟수를 줄이고, 부득이 참석하면 TV화면에 내 모습이 나오지 않도록 신경써달라”고. ● 국민 이간질 대통령실도 문제다현 대통령실엔 민정(民情)이 없다. 그렇다면 참모진 하나하나가 민정이 돼도 모자랄 판에 충심만 가득해 비극이다. 대통령실은 “대통령 부부에게 접수되는 선물은 대통령 개인이 수취하는 게 아니라 관련 규정에 따라 국가에 귀속돼 관리, 보관된다”며 김 여사의 순결무구함을 방어하긴 했다. 헹. 대통령 관저의 반려견 토리가 웃는다. 그럼 윤 대통령은 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선물한 선글라스를 국가에 귀속해 관리, 보관하지 않고 자신이 쓰고 다니는지 묻고 싶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대통령 부부와 국민을 이간질하는 참모가 바로 세작 같다. 진심 대통령과 나라를 생각하는 비서실장이면, 대통령이 “그만 두라”고 전하라고 할 때 “그건 아닙니다” 해야 하는 것 아닌가.윤 대통령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민생도, 법치도, 우리나라도 아니다. 오직 하나, 영부인뿐임을 온 세상이 알아버렸다. 참 대통령답지 않다. 우리가 기대했던 윤 대통령답지도 않다. 몰래카메라 불법촬영은 그것대로, 법대로 처벌하면 된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한다면,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나. 우리는 다만 , 뻑하면 ‘격노’만 하는 대통령이 국민에게는 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전임 정권에선 살아있는 권력 앞에 굽히지 않던 사람이었다. 왜 용산-한남동 구중궁궐에 들어간 다음엔 국민을 이기려고만 드는가.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명된 지 사흘 뒤면 한 달이다. ‘여의도 문법’에 맞춰 삼고초려 하는 연출을 안 했던 건 산뜻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개딸 전체주의, 운동권 특권세력 폭주를 막겠다”며 가는 데마다 8도 사나이의 친화력을 보인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삼칠일이면 단군신화 속 곰이 쑥과 마늘만 먹으며 금기를 지키다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의미 있는 삼칠일이 지났는데도 한동훈은 정부여당에 실망한 민심을 돌리진 못하는 형국이다. 한 달 전보다 국힘 지지율(36%)도 높이지 못했고 4월 총선 정부 견제론(35%)도 못 줄였다(갤럽 조사). 물론 정치개혁안을 연달아 내놓긴 했다. 하지만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나 정치적 상상력은 보이지 않는다. 귀책 시 재보궐 무공천 방침은 개혁안이 아니라 사과를 하며 밝혔어야 마땅했다. 불체포특권 포기, 금고형 이상 의원의 재판 중 세비 반납, 의원 정수 감축안도 인요한 혁신위원회에서 권고안으로 이미 발표한 내용이다. 그만큼 한동훈이 절박하지 않다는 얘기다. 5년 전 민주당의 싱크탱크 민주연구원에선 ‘총선 승리 3대 법칙’이 혁신공천, 미래비전, 그리고 절박함이라는 정책 브리핑을 내놨다. 공천 잘하고, 단순한 진영 심판론이 아닌 미래 공약을 내놔야 한다는 건 당연하다. 그보다 ‘이기기 위해선 못 할 게 없다’는 절박함이 있어야만 승리한다는 것을 알고 모두가 공유했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문재인 정권은 2020년 4·15총선 전 소득 하위 70% 코로나 재난지원금 지급을 발표하고도 선거 이틀 전엔 여당 원내대표가 “(서울 광진을) 고민정 후보를 당선시켜 주면 100% 국민 모두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드리겠다”며 노골적인 현금 살포 작전까지 외쳤던 거다. ‘윤석열 아바타’ 소리까지 듣는, 심지어 민주당에서 ‘한나땡’(한동훈이 나오면 ‘땡큐’) 하는 한동훈을 국힘이 비대위원장으로 영입한 것은 그의 개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통령의 ‘버럭’이 무서워 아무도 못 하는 ‘고양이 방울 달기’를 한동훈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을 터다. 국힘의 아킬레스건은 대통령과의 수직적 관계다. 특히 총선 공천에서 용산 입김을 막고 ‘영부인 리스크’ 해결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적잖은 이가 기대했다.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 평가가 33%, 부정 평가가 59%인 1월 둘째 주 갤럽 조사에서 부정 평가 이유 두 번째가 ‘(김건희) 특검 거부권 행사’였다. 윤 대통령이 밤낮으로 외쳐도 나아지지 않는 ‘경제·민생·물가’ 다음일 만큼 심각하다. 총선 결과는 대통령 지지율에 따라 달라진다. 한동훈은 “9회말 2아웃 2스트라이크면 원하는 공이 들어오지 않아도 후회 없이 휘둘러야 한다”며 타석에 들어섰다. 그런데 후회 없이 휘두르기는커녕 벌써부터 ‘대통령 사인’에 도리도리하는 모습이다. 작년만 해도 “법 앞에 예외는 없어야 한다. 국민 보기에도 그래야 한다”며 총선 후 특검론을 피력했던 그다. 해가 바뀌자 ‘김건희 특검’을 ‘도이치 특검’으로 바꿔 말하며 특검 반대를 밝힌 한동훈은, 시시하다. 윤 대통령의 ‘공정과 상식’은 무너졌다. 이젠 한동훈의 국힘이 무슨 공약을 내놔도 믿기 힘들 만큼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국힘이 총선에서 패해도 한동훈은 손해 볼 일 없을지 모른다. 훌훌 털고 변호사 개업을 해도 전관예우로 수억 원대 연봉을 챙길 수 있다. 해외 유학을 떠났다 2027년 대선 전 해맑은 얼굴로 돌아와도 대선 주자로 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수 국민은 다르다. 국회가 비토크라시(vetocracy·반대만 하는 정치)에 휘둘려 윤석열 정부의 남은 3년을 허비하면, 한동훈이 참신하게 외쳤던 ‘동료 시민’의 귀한 3년도 맥없이 낭비된다. 한동훈은 용산 아닌 국힘과 국민을 똑바로 보기 바란다. 그리고 사즉생의 자세로 말했으면 한다. ‘쌍특검법’(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대장동 50억 클럽 의혹 특검)을 국회 재표결 할 경우, 국힘은 당당하게 표결에 임하겠다고 말이다. 취임 한 달 기자회견 자리에서 조사 시점을 총선 이후로 연기하자는 조건을 걸고 밝혀도 좋다. 2020년 10월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관련 수사지휘권을 배제당한 검찰총장의 지휘권을 풀어주도록 이노공 장관 직무대행에게 촉구하는 방법도 있다. 한동훈이 예뻐서도, 대통령 부인이 미워서도 아니다. 지난 대선 때 독립운동 하는 심정으로 윤석열을 찍었던 다수 국민을 대신해 하는 말이다. 그리해 준다면 한동훈은 한사코 기자회견을 피하는 윤 대통령과 대비되면서 국힘은 물론 종국에는 윤 대통령과 나라를 수렁에서 구한 정치인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상대를 죽여 없애야 하는 전쟁 같은 정치를 이제는 종식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0일 서울대병원을 나서면서 내놓은 첫 메시지다. 동의한다(그리고 쾌유를 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만 보면 마치 이재명이 적대적 정치인, 즉 정적(政敵)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것처럼 읽힌다.물론 이재명은 “이번 사건이 증오의 정치, 대결의 정치를 끝내고 서로 존중하고 상생하는 정치를 복원하는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부산경찰청 수사 발표에 따르면 이재명을 습격한 살인미수 혐의자 김모 씨는 정치인이 아니라 민간인이다. 범행을 교사한 배후세력은 현재까지 없다고 경찰은 발표했다. 12일 민주당은 경찰 수사가 축소됐다며 ‘배후’를 철저히 밝혀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재명은 “사건을 계기로 우리 모두가 되돌아보고 저 역시도 다시 한번 성찰하겠다”고 했으나 성찰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증오의 정치, 대결의 정치에 매달리는 건 정치인들이지 다수 국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쁜 독자를 위해 이어질 내용을 세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① 정치적 양극화는 거대양당 문제다.② 강성지지층만 보는 정치는 해법 아니다. ③ 무당파를 움직이는 건 결국 대통령이다.● ‘정치적 양극화’는 정치인 문제증오의 정치에 대해 우려와 경각심을 갖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냉정히, 객관적으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상대를 죽여 없애야 하는 전쟁 같은 정치, 즉 ‘정치 양극화’를 정치학에선 이념 양극화와 정서 양극화로 나눠 분석한다. 이 분류가 중요한 이유는 처방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념 양극화란 단순히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게 아니다. 중도가 줄어들면서 보수집단은 더 보수적으로, 진보집단은 더 진보적으로 쏠리는 걸 뜻한다. 진영 내 딴 목소리가 사라지고 충성심을 보여야 살아남는 거대 양당 정치엘리트들이 여기 속한다. 소금을 더 퍼부어 더 짠 소금물로 만들려는 지금의 민주당이다. 오죽하면 ‘원칙과 상식’ 이란 모임을 만든 의원들이 뛰쳐 나왔겠나.하지만 그건 정치인들 얘기고 국민 차원에선 다르다. 유권자의 이념 양극화가 성립되려면, 중도파와 무당파가 줄면서 양당 지지도가 높아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는 연구 결과는 너무나 많다. 한국행정연구원이 2023년 펴낸 700쪽 넘는 경제·인문사회 연구회 협동연구총서 역시 “유권자들의 이념성향 분포에서 좌우 양극단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21세기 이후 치러진 다섯 차례의 대통령선거 분석에서도 이념적 양극화가 심화됐다고는 볼 수 없다는 연구 결과다(건국대 김성연 교수 2023년 논문 ‘한국 유권자들의 이념적 양극화와 당파적 정렬’). ● 중도-무당파 유권자가 더 많다이는 갤럽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작년 12월 조사한 작년 말 유권자 정치성향을 보면 중도파(중도적+성향 유보)가 무려 42%다. 스스로 보수적(32%), 진보적(26%)이라고 밝힌 수치를 훨씬 넘는다. 박근혜 탄핵 정국이었던 2017년 1월 중도가 36%(보수 27%, 진보 37%)로 유독 적었을 뿐, 2016~2022년 중도파는 45% 안팎이다. 이들은 무당파와 좀 다르다. 무당파는 지지정당이 없다는 건데 갤럽 조사 결과 2023년 28%가 무당파다. 2022년(22%)보다 늘었고 특히 18~29세 무당파는 37%→48%다. 중도파는 이들 무당파+소극적 지지자 또는 반대자들로, 정책이나 사람 또는 상황에 따라 당을 바꿔 투표하곤 한다. 의원들이 매사 싸우는 것을 꼴 보기 싫어하는 보통사람들이 대개 여기 속한다. 앞서 ‘정치 양극화’는 이념 양극화와 정서적 양극화로 구분한다고 했다. 즉 이념 양극화는 정치인들 사이에서나 요란할 뿐 유권자들은 중도파가 더 많다는 게 중요하다.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을 더 싫어하는 정서적 양극화는 유권자 사이에서도 진행 중이다. 지난 2022년 대선이 바로 좋아하지 않는 후보를 떨어뜨리려는 ‘비호감 대선’이었다. ● 무당파를 움직이는 대통령 지지율이념적 양극화와 정서적 양극화를 굳이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해결책도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일 유권자가 이념 양극화 경향을 보인다면, 정치는 상대진영 유권자를 설득하는 전략을 짜야 한다고 하상응 서강대 교수는 2022년 논문에서 지적했다. 지금껏 양당이 증오의 정치, 극단의 정치로 달려간 것도 잘못된 분석 탓이었다. 양당 극단적 선수들은 유권자들도 자기네처럼 이념적, 정치적으로 양극화 했다고 믿고 상대진영을 죽일 듯 공격에 골몰했다. 이런 정치가 일부 극단적 유권자에게 영향을 미칠 순 있다. 야권 원로 인사인 유인태는 이재명 피습에 대해 “워낙 우리 정치가 서로 상대를 악마화 하면서 증오만 키워온 업보가 아닌가”하고 말했을 정도다. 지금처럼 유권자들이 이념 양극화 없는 정서적 양극화를 보이고 있을 때는 해법도 달라야 한다. 여야는 극단적 정치를 멈추고, 정부는 더 많은 중도파와 무당파를 보고 정책을 펴야 했다. 아무도 대변해주지 않는, 그래서 부글거리는 ‘조용한 다수’의 요구를 반영해 대통령 지지도를 높여야 정국이 매끄럽게 돌아갈 수 있다. 왜 또 대통령 지지도가 나오냐고? 무당파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대통령 지지율이어서다. ● 무당파, 제3지대냐 여당 지지냐흔히 선거는 구도싸움이라고 한다. 거대양당의 소금물에서 빠져나온 두 전직 당 대표를 비롯해 양향자, 금태섭, 또 ‘상식과 원칙’ 팀 등이 제3지대 합종연횡을 모색하는 모양이다. 이들이 ‘적(敵)만 아니면 다 우리편’으로 한데 모여 기호 3번을 엮어낼지는 아직 모른다. 이 당, 저 당, 싸움당 싫은 중도파 및 무당파가 제3당을 주시할 것이라는 기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총선 결과를 좌우하는 건 결국 대통령이다. 자꾸 논문을 들이대서 미안하지만 대통령 지지율이 상승하면 야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은 떨어진다(문우진 아주대 교수 2022년 논문). 더 눈에 띄는 것은 무당파의 움직임이다. 이한수 아주대 교수는 2023년 논문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증가하면 여당 대비 야당 비율과, 여당 대비 무당파 비율은 유의미하게 감소한다고 했다(‘대한민국 유권자들의 정당 지지 변화에 대한 거시적 탐구’). 대통령에 대한 긍적적 평가를 한 야당 지지자들과 무당파가 여당에 대해 긍정적인 신호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는 2017년 이한수의 연구 결과와 부합한다.● 어게인 2016년? 어게인 실용주의?2016년 제3당의 등장을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여당인 지금의 국힘, 즉 새누리당은 ‘진박(진짜 박근혜) 대 비박’ 공천으로 대통령당 변신을 꾀해 국민의 실망을 샀다. 운동권 물을 빼는 듯했던 민주당은 비례대표 공천 파동을 겪으면서 ‘도로 친노(친문)당’으로 부활했다. 반면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창당공신들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양당 공천 싸움에 실망한 부동층이 몰려 원내 교섭단체 구성에 일단 성공했다(오래가진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잊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록은 남아있다. 2021년 12월 12일(공교롭게도 12·12다) 국힘 외연 확장 기구로 만든 새시대준비위원회 현판식에서 당시 대통령후보 윤석열은 “국민의힘도 실사구시, 실용주의 정당으로 확 바뀌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선거대책위원회에서 담기가 아직 쉽지 않은 중도와 합리적 진보를 (새시대준비위가) 다 포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때는 그가 대통령 되면 정말 국민통합을 이뤄낼 수 있을 줄 알았다.용산에 들어가니 달랐을지 모른다. 지나치게 왼쪽으로 치우친 정관계 이념적 양극화를 중간으로 옮기다보니 바른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긴 측면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개선책으로 행정연구원의 벽돌만한 최종보고서 ‘정치양극화 시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방안’은 대통령 1인에 집중된 권력구조, 적대적 공생관계가 특징인 양당제를 바꾸는 개헌과 선거제 개혁 등을 제안했으나…지금은 늦었다. ● 대통령은 과연 무당파를 돌릴 수 있을까정치 양극화는 정치 엘리트만의 현상이라 해도 민주주의를 퇴행시키기에 심각하다. 민주당 소금기가 묽어질 기미는 단언컨대, 없다. 국힘도 공천관리위원회 구성을 보면 대통령당으로 달려갈 조짐이 보인다. 이 틈을 뚫고 중도·개혁신당의 제3지대가 꿈틀대는 상황이다. 갤럽 최근 조사 결과 4월 총선에서 ‘정부 지원론’이 35%인 반면 ‘정부 견제론’은 51%였다. 보수 유권자 65%가 여당 승리, 진보 유권자 83%가 야당 승리를 기대한 건 당연하다. 그러나 중도층에서 여당 승리(27%)보다 야당 승리(56%) 기대가 많다는 건 정부여당이 가슴을 칠 일이다. 무당층도 마찬가지다. 절반이 신당을 포함한 야당 승리를 원했고 여당 승리를 원한다는 응답은 고작 15%다. 석 달 남은 총선, 윤 대통령의 지지율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 한동훈 국힘 비상대책위원장의 개인기만으론 불가능하다. 대통령은 과연 중도·무당파를 돌려세울 수 있을 것인가.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