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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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zsh75@donga.com

취재분야

2024-10-23~2024-11-22
칼럼44%
남북한 관계30%
경제일반20%
문화 일반3%
사회일반3%
  • “생명 나눔 400회 이상, 당신이 헌혈 챔피언”

    대한적십자사가 ‘세계 헌혈자의 날’인 14일을 맞아 헌혈의 중요성을 알리고 헌혈에 참가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해 여러 가지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헌혈유공자의 집’ 명패 수여 사업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행사는 보건복지부와 대한적십자사가 다회(多回) 헌혈자를 내세우기 위해 올해 처음 시작한 사업이다. 헌혈유공자의 집 명패를 받으려면 400회 이상 헌혈을 해야 한다. 매달 2차례씩 헌혈해도 17년이나 걸린다. 대한적십자사는 그동안 다회 헌혈자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그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누적 헌혈 횟수에 따라 30회 은장, 50회 금장, 100회 명예장, 200회 명예대장, 300회 최고명예대장을 수여해 왔는데, 올해부터 최고 우대 기준을 400회 이상으로 늘린 것이다. 지난해까지 헌혈을 400회 이상 한 헌혈자는 314명. 지난달부터 전국 각지 헌혈센터에선 해당 지역 400회 이상 헌혈자에게 헌혈유공자의 집 명패를 수여했다. 대표적으로 지난달 22일 서울 헌혈의집 강남역센터에서는 김철수 대한적십자사 회장이 이재인 씨에게 직접 명패를 전달했다. 대한적십자사는 지난해 7월 14일부터 약 한 달간 119개 명패 디자인을 공모해 1만 명이 참가한 온라인 투표를 실시한 끝에 ‘나눔의 무한 가치’를 담은 명패 디자인을 최종 선정했다. 대한적십자사는 14일 각종 기념행사를 진행하는 것과 동시에 이번 주말을 맞아 2박 3일 일정으로 서울 광화문광장 놀이마당에서 다채로운 공연과 대국민 참여 프로그램을 펼친다. 대한적십자사는 헌혈유공자 명패 수여와 국민 참여 프로그램 등을 통해 우리 사회에 생명나눔 헌혈 문화를 널리 전파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 사람들을 예우함으로써 헌혈자가 존경받는 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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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푸틴을 감동시켰다는 김정은의 활약

    북한에서 살다보면 자기들의 군사력이 세계 최강이라는 그럴듯한 괴소문들을 많이 듣게 된다. 1980, 90년대 내가 직접 들었던 소문들은 대충 이런 것들이다. “전선 부대 탄약고에는 최고사령관의 명령이 하달돼야 뜯을 수 있는 밀봉된 탄약 상자가 있다. 한번은 최전방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명령이 하달돼 뜯어보니 총알이 있었다. 그걸 자동보총에 장전하고 쏘니 산 하나가 날아가 적이 찍소리 못 하고 잘못을 빌었다.” “미제가 진짜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항공모함을 끌고 온 적이 있다. 이때 우리가 점잖게 ‘너희들 배 밑창을 보라’고 했다. 살펴보니 핵탄두를 멘 결사대들이 벌써 항공모함에 붙어 있었다. 미제는 공포에 질려 물러갔다.” 이런 소문들이 어떻게 생산돼 퍼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북한이 은퇴한 고위 간부들 중에 몇 명을 선발해 허름한 옷을 입혀 기차역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의도적으로 퍼뜨린다는 얘기도 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너무나 황당한 궤변들이었지만, 외부 세상과 철저히 단절된 북한에서는 이런 소문을 사실이라 믿는 사람들이 많다. 소문과 별개로 북한에선 각종 강연이 끊임없이 진행되는데, 그중에서 최고 강연은 중앙당 선전선동부 강연과 소속 강사들이 진행하는 것이다. 이걸 중앙당 강연이라고 하는데,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중요한 기관에만 찾아가 한다. 북한에서 엄선된 달변가들인 강사들은 사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버무린 강연으로 청중을 쥐었다 놨다 한다.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던 시절 중앙당 강연을 많이 들었다. 고난의 행군 시절 중앙당 강사들이 특별히 장마당을 찾아가 “장군님이 요즘 이렇게 힘들게 하시는데…”를 연발하며 신파극을 펴니 뼈가 앙상한 청중이 몰려들어 배가 남산만 한 김정일의 건강을 걱정하며 대성통곡했다. 실은 이런 강연이 새빨간 거짓말인 것을 제일 잘 아는 사람들이 바로 중앙당 강사다. 하지만 거짓말의 달인들인 이들도 위에 사례를 든 총알이나 항공모함 같은 궤변은 차마 공식적으로 말할 수 없으니 은밀한 소문으로 만들어 유통시켰을 것이다. 거짓말은 점점 더 큰 거짓말을 부른다. 거짓된 강연을 들으며 자랐을 요즘 중앙당 강사들은 과거보다 한술 더 뜬다. 소문으로 퍼뜨릴 것도 당당하게 공식 강연에서 사실처럼 말한다. 올 초 중앙당 선전선동부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공화국 대외정책에서 이룩한 성과’라는 제목의 강연이 대표적이다. 학습까지 시킨다는 강연의 주요 줄거리는 이렇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 지난해 7·27 전승절 경축행사에 와서 원수님(김정은)께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절실히 부족한 군수물자와 병력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원수님은 쇼이구에게 ‘원조를 청하겠으면 쩨쩨하게 놀지 말고 덩치 큰 땅덩어리에 어울리게 청하라’고 하면서 그가 요구한 군수물자 수량보다 훨씬 더 많이 주겠다고 했다. 러시아가 군 병력 3000명을 지원해 달라고 했는데 원수님은 특수부대 3만 명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이런 지원 덕분에 우크라이나에서 고전하던 러시아는 획기적인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러시아의 한 개 전선군 병력이 동원돼 몇 달 동안 점령하지 못했던 어느 전략적 요충지를 우리가 파견한 단 몇백 명의 공화국 전투원들이 이틀 만에 점령했다. 다른 나라들이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제국주의자들의 눈치를 보고만 있을 때 우리 공화국만이 러시아에 많은 군사적 원조를 주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에 깊은 감동을 받아 원수님께 러시아를 방문해줄 것을 무려 여섯 번이나 간청했다. 푸틴은 원수님께 자기가 타고 다니는 최고급 승용차와 함께 쿠릴열도의 섬 4개를 공화국의 해군기지로 제공하면서 원동지역의 안전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다.” 하도 황당한 내용이라, 뒤늦게 이런 강연이 진행됨을 인지한 평양 주재 러시아대사관이 김정은에게 항의하면서 당장 중지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강연이 북한에선 먹힌다는 것이다. 워낙 극단적인 폐쇄 정책에다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이니 ‘청년교양배격법’이니 하는 악법으로 외부 정보를 접하면 극형에 처하니 북한 주민들은 위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마음껏 거짓말을 해도 되는 환경이니 노동당 선전선동부는 점점 괴물로 진화하는 것 같다. 그 선전선동부를 책임진 것이 바로 김여정이다. 그에게 이런 창작 재능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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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툰-웹소설 저작권 등록 수수료 41.5% ↓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가 7일 개정된 저작권법 시행규칙을 시행했다. 개정 시행규칙은 창작자가 저작권을 등록할 때 발생하는 경제적 부담을 덜고, 업무상 창작에 참여한 자들의 창작 의욕 고취를 목적으로 한다. 저작권 등록 7만 건 시대를 맞아 개선된 시행규칙은 기초생활수급자에게만 부여하던 저작권 등록 수수료 면제를 장애인 및 국가유공자 등에게도 확대했다. 그동안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에 따라 생계급여 또는 의료급여 수급자에 한해 저작권 등록 수수료를 면제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차상위계층인 교육급여나 주거급여 수급자뿐만 아니라 장애인복지법에 따른 장애인,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른 국가유공자, 5·18민주유공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에 따른 5·18민주유공자도 저작권을 등록할 때 수수료를 면제받는다. 이로써 수수료 면제 대상자는 기존보다 약 580만 명 늘어나게 된다. 또 웹툰, 웹소설같이 내용을 일부분씩 순차적으로 공표하는 저작물(순차저작물)의 경우 두 번째 등록 신청부터 수수료를 경감하도록 관련 규정을 개정했다. 2022년 웹소설 분야 산업 현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웹소설 산업 규모는 1조390억 원이다. 2023 웹툰 사업체 실태조사에 따르면 웹툰 산업 규모는 1조8290억 원에 이른다. 이처럼 두 콘텐츠 산업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한국저작권위원회는 현장 의견 등을 수렴해 더 쉽게 웹소설과 웹툰 저작권을 보호할 수 있도록 저작권 등록 수수료 할인 규정을 신설했다. 과거에는 매회 저작권을 등록할 때마다 발생하는 비용이 부담스러워 마지막 회가 완결될 때까지 저작권 등록을 미루는 창작자들이 많았다. 이젠 이 같은 부담 없이 연재를 끝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연재물을 올릴 때마다 저작권을 등록할 수 있게 돼 저작권 침해 피해에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웹소설과 웹툰 같은 순차 저작물은 최초 저작권 등록 후 두 번째 추가 등록부터 수수료를 2만∼3만 원에서 1만 원으로 내리도록 했다. 예를 들어 50회로 완결되는 웹툰에 대한 저작권 등록을 온라인으로 회마다 개별 등록할 때 그동안은 수수료를 118만 원 납부해야 했으나 앞으로는 69만 원만 납부하면 된다. 창작자가 부담하는 수수료 비중이 41.5% 절감될 전망이다. 새 시행규칙은 또 저작권 등록을 할 때 업무상 저작물 작성에 참여한 사람을 기재하도록 수정했다. 업무상 저작물은 법인이나 단체 등에 소속된 사람이 법인 등의 기획 아래 업무상 작성한 저작물로서 외부에 공표될 경우 그 저작권은 업무상 창작자가 아니라 법인 등에 귀속된다. 이 때문에 업무상 저작물을 직접 만든 사람은 창작 참여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해 자신의 경력 관리에 활용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규칙이 바뀌면서 실제 창작자의 창작 사실을 저작권 등록 때 기재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저작권위원회 정재곤 분쟁조정본부장은 “저작권 등록은 분쟁 발생 시 저작자로 추정되고 법정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어 권리 구제에 용이하며, 저작재산권 이중양도의 경우 상대방에 대해 대항력을 갖게 하는 등 거래 안전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면서 “저작권 등록 수수료 면제 대상을 늘리고 할인제를 신설하는 등의 개선은 저작권 등록 활성화를 유도해 창작자 권익 강화와 콘텐츠 산업 육성에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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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정착지원과는 어디에 있습니까?

    # 통일부에서 가장 위치가 좋은 건물은 서울 종로구 삼청동 와룡근린공원에 위치한 남북관계관리단 사무실이다. 지난해 9월까지 50년 동안 남북회담본부로 이용됐다. 이 건물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 모르게 개인 별장을 짓던 중 발각되자 “북한 손님들이 올 때 회의할 장소가 필요하다”고 둘러대면서 생겼다. 울창한 숲과 만발한 꽃들 사이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건물은 지금도 호화 별장 느낌이 물씬 난다.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발아래 펼쳐진 서울시내를 바라보면 ‘백만 불짜리 뷰’가 이런 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남북관계관리단의 주 업무는 남북회담 준비다. 2020년부터 단 한 건의 남북 간 회담도 없었는데, 앞으로 전망은 더 암울하다. 올해 초 김정은은 “미국의 식민지 졸개에 불과한 괴이한 족속들과 통일 문제를 논한다는 것이 우리의 국격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통일, 겨레, 민족이란 단어조차 삭제하고 대남기관들을 모두 없앴다. 남북회담의 상대가 사라진 것이다. # 탈북민 정착 업무를 담당하는 통일부 인권인도실 정착지원과는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8층 옥외비상계단 옆에 있다. 과거 비상계단에 흡연실이 있어 가장 안 좋은 위치로 인식됐다. 인사에서도 정착지원과는 ‘유배지’ ‘변방’으로 치부됐다. 통일정책실이나 교류협력국을 거치면 승진이 빠르지만, 정착지원과는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말도 나돌았다. 그래서인지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2년도 안 됐는데, 정착지원과장은 4번이나 바뀌었다. 과장이 자주 바뀌면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그렇다고 일이 적거나 업무 비중이 작은 것도 아니다. 통일부 사업비 중 북한이탈주민 정착 지원 예산이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정착지원과 소속 공무원 10여 명이 통일부 사업비의 절반을 소화해야만 하는 것이다. 넘쳐나는 서류들로 통일부에서 탈북민을 가장 만날 시간이 없는 사람이 정착지원과 공무원들이다. #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1월 국무회의에서 “북한이탈주민은 우리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이다. 정부는 탈북민들이 우리 사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이탈주민의 날’을 제정하라”고 주문했다. 공교롭게도 김건희 여사가 탈북민들을 거짓말쟁이라고 지속적으로 공격해온 사람을 만나 “남북문제에 직접 나서겠다”고 말하며 명품백을 받는 동영상이 공개된 지 한 달 반이 지난 시점이다. 남북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자 탈북민을 대표 상품으로 내세운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지만, 윤 대통령이 탈북민의 성공적 정착을 진심으로 바란다고 믿는다. 대통령의 주문에 따라 급히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일인 7월 14일이 ‘북한이탈주민의 날’로 최종 결정됐다. 대통령의 관심 사항이니 제1회 행사는 전국에서 성대하게 열릴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지방자치단체와 기관 등이 탈북민을 위한 사업 성과를 보고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 앞으로 ‘북한이탈주민과 함께하는 ○○’이라는 이름의 행사들이 끊임없이 진행될 것이고, 탈북민들은 여기저기 행사에 제발 참가해 달라는 읍소에 가까운 요청을 수없이 받게 될 것이다. # 지금까지 탈북민 정착 지원 정책의 주요 목표는 ‘사회 통합’이었다. 자연스럽게 사회에 녹아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정착이라고 간주한 것이다. 북에서 온 사람임을 자꾸 부각시키고, 큰 특혜를 받는 것처럼 보여진다면 통합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탈북민들을 만나 보면 정부의 탈북민 지원 정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탈북민은 우리 사회가 나서서 정착을 도와주어야 하는 계층으로 인식됐다. 그런데 막상 정착 지원의 사령탑이라고 할 수 있는 정착지원과는 통일부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지 않은 구석에 있어 찾기도 힘들다. 통일부 인력의 2.5%에 불과한 인력이 부처 예산의 50%를 사용하느라 문서 더미에 파묻혀서 정작 탈북민 구경도 못 하고 있으니 탈북민보다 먼저 도움이 필요한 곳은 정착지원과가 아닐까 싶다. 정착지원과가 정착지원국으로 승격돼 인력도 늘어나고, 통일부 건물에서 제일 좋은 자리로 옮겨지고, 정착지원국을 거쳐야만 좋은 보직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길 때 대통령의 진심이 와닿을 것 같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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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꽃제비’가 탈북민 지원 전담 국회 보좌관이 되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북한 북부 함경북도 무산군에는 아시아 최대의 자철광 노천광산으로 알려진 ‘무산광산’이 있다. 신분세습이 유지되는 북한에선 광산 마을에서 태어나는 순간 남자 아이들의 운명은 90%쯤 비슷하게 흘러간다. 중학교를 졸업해 군에 입대해 청춘을 바치고, 다시 광산에 돌아와 광부가 되는 것. 여자 아이들은 자라서 누구랑 결혼하는 가에 따라 신분이 좀 더 다양하게 분화된다. 광부는 북한에서 노동계급이라는 사회성분에 속하지만,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이 광부로 일생을 마칠 일은 거의 없다.1981년 무산광산에서 태어난 남자 아이 중 적어도 세 명은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의 굴레를 벗어버렸다. 이들은 서울에 와서 모두 훌륭하게 뿌리를 내렸다. 4월 30일 현재 기준으로 한 명은 통일부 6급 공무원이 됐다.▶ 통일부 6급 공무원이 된 탈북청년…“고향 가는 날을 위해 삽니다”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40129/123283920/1) 다른 한 명은 국회에서 4급 의원 보좌관이, 나머지 한 명은 공공기관 차장이 됐다.이들 셋에겐 공통점이 있다. 10살쯤부터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배고픔 속에 자랐고, 13살 때부터는 숱한 사람들이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을 경험하며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그리고 10대 시절 두만강을 넘나들며 가족을 먹여 살리다가 한국으로 왔다.그 중 한 명인 박영철은 16세부터 시작해 4년 동안 두만강을 50번 이상 넘나들었다. 북한에서 잡힌 일을 빼고도, 중국에서만 4번 체포돼 강제송환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국경을 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반동의 손자로 태어나다박영철은 태어날 때부터 ‘처단자’의 손자로 출신성분이 결정돼 있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평양에서 잘 나가는 전기기술자였다. 1970년대 외할아버지는 어느 비밀 터널 전기시설 공사에 차출됐다. 공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비밀을 유지하겠다는 손도장을 찍었다.그런데 공사가 끝나고 얼마 뒤 외할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지인들에게 자신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를 말했다. 이것이 보위부 귀에 들어가 외할아버지는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리고 1주일 뒤 집 앞에 도착한 트럭을 타고 온 가족이 무산으로 추방됐다. 외할아버지 소식은 더는 알 수 없었다. 비밀 처형됐거나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무산에 끌려온 박 씨의 어머니는 광산 노동자로 일하던 고아 출신의 남성을 만나 결혼했고, 1982년 첫째로 박 씨가 태어났다. 8년 뒤엔 남동생도 생겼다.무산광산에서는 1992년경부터 배급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고난의 행군이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북부지역은 1990년대 초부터 이미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배를 곯는 일이 일상화됐다. 그나마 겨우 버텼지만 1994년 이후부터는 배급마저 끊겼다.박 씨는 13살 때부터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산에 올라가 나물을 뜯거나 장작용 나무를 만들어 팔았다. 인근에 사는 어머니 친척들을 찾아 도움을 청해 입에 풀칠하는 일도 적잖았다. 평양에서 죽은 김일성을 위한 화려한 궁전이 건설되고 있을 때 광산 마을에선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은 출석부에 올려진 인원의 20%도 되지 않았다.● 인신매매에 걸려 사라진 어머니1997년 1월 말 갑자기 어머니가 사라졌다. 수소문해보니 중국에 갔다 온 동네 젊은 청년이 “중국에 가면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어머니를 꼬드겨 데려갔다고 했다. 북한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그즈음부터 북-중 국경일대에선 인신매매가 시작됐고, 박 씨 모친은 첫 희생자가 됐다. 중국만 가면 일자리가 풍족해 큰 돈을 벌어 올 수 있을 것이란 달콤한 유혹에 속아 두만강을 건넜던 수많은 여성들이 중국 깊은 내륙 한족 동네로 강제로 끌려갔다.16세에 불과했던 박 씨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중국에 가서 어머니를 찾아와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의 동네에서 두만강은 수십 리 길이지만, 그는 걸어서 두만강까지 갔다. 당시만 해도 어린 아이들에 대해선 국경경비대가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았다.1997년 1월 28일 저녁, 그의 첫 도강이 시작됐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 산에 올랐던 그는 깜짝 놀랐다. 그곳에 숱한 탈북민들이 있었던 것. 그중에는 방금 건너온 이도 있고, 새벽에 다시 북으로 몰래 건너가기 위해 기다리는 이도 있었다.사람들은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어른들 틈에서 박 씨는 산에서 내려와 10리쯤 걸어가면 마을이 나타나며, 그 마을 어느 집에 가면 인심 좋은 노인이 산다는 정보를 얻었다. 들은 대로 찾아가니 할머니가 그를 맞았다. 그는 “하루 밤에도 10여 명씩 찾아 온다”고 푸념하더니 꽁꽁 얼은 배 하나를 내주었다. 이어 “좀 더 가면 큰 부락이 나오니 거기에서 도와달라고 하는 게 좋다”고 귀띔했다.다시 큰 부락을 찾아가 아무 집이나 문을 두드렸다. “우리 엄마가 며칠 전 이곳으로 넘어왔다는데, 엄마를 찾아주세요”라고 부탁했다. 문을 연 집주인은 “너 중국이 얼마나 큰지 아냐, 그 시간이면 벌써 흑룡강에 가있겠구만. 엄마는 못 찾으니 포기해라”라며 혀를 찼다. 박 씨를 안쓰럽게 여긴 집주인은 약간의 식량까지 내주었다. 박 씨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었다.“중국에선 이렇게 무작정 문을 두드려도 식량을 주는구나….”받은 식량을 숨겨놓고, 다시 다른 집을 두드리니 어느새 20~30㎏이 모아졌다. 엄마를 찾는 것보다 북으로 돌아가 굶고 있을 아버지와 동생에게 식량을 주는 일이 더 급해졌다. 소년의 어깨가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메고 그는 다시 두만강을 넘었다. 그런데 그만 국경경비대에 체포됐다.그를 취조하던 소대장은 사정이 딱해보였는지 “다시 잡히는 날엔 가만 두지 않겠다”는 엄포와 함께 편지를 적어 배낭에 넣어주며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 집에 도착해 열어본 편지에는 “모두가 어렵지만 조국을 절대 배신하면 안 된다. 아버지가 아들을 잘 교육해주면 좋겠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하지만 박 씨는 얼마 뒤 당시 강을 넘으려 했고, 소대장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소대장은 그를 사정없이 때린 뒤 영하 수십 도의 겨울 날씨에 발가벗겨 꽁꽁 얼어 쓰러질 때까지 밖에 세워뒀다. ● 중국군을 찾아간 꽃제비그런 고초를 겪으면서 구한 식량을 배낭에 담아 메고 집에 돌아가니 쓰러져 누워있던 아버지와 동생이 깜짝 놀랐다. 엄마가 사라진 걱정도 잊은 채 이들은 모처럼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가져온 식량의 절반은 다른 집에 진 식량 빚을 갚는데 쓰고, 나머지는 세 식구가 아껴 먹었지만 보름도 안돼 없어졌다. 당시 아버지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팔았는데 그걸로 두 아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박 씨는 다시 두만강을 건너 식량을 구해올 결심을 했다. 그때부터 그는 거의 보름에 한 번씩 식량 구걸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당시는 탈북민들이 중국으로 밀물처럼 몰리던 때였다. 늘어나는 식량구걸에 중국 국경마을의 민심은 싸늘해졌다.1997년 봄에 접어들면서 중국 사람들은 탈북민이라면 치를 떨기 시작했다. 국경을 넘은 일부 탈북민들이 현지인들의 창고를 털어 식량을 훔쳐가거나 개를 잡아가거나 소를 끌고 갔기 때문이다. 탈북민이 강도짓을 했다는 말까지 퍼지면서 민심은 갈수록 흉흉해졌다. 중국 국경경비도 강화되기 시작했다. 어린 박 씨의 구걸도 통하지 않았다.이듬해 겨울에는 마을을 열심히 돌았지만 먹을 것을 하나도 구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배고파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눈앞에 중국군 국경경비대인 ‘변방대’ 건물이 보였다. 그는 무작정 찾아가 밥을 달라고 애원했다. 당황한 군인들 사이에서 한 조선족 장교가 나오더니 어이없는 표정으로 “여기가 어딘 줄 아느냐. 내가 뭐하는 사람인줄 아느냐”라고 타박한 뒤 밥을 줬다. 이어 중국돈 20위안과 매점에서 사온 즉석 라면과 과자를 내주며 “다시 잡히면 이번엔 세관으로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놨다.하지만 라면과 과자 몇 봉지만 가지고 돌아갈 순 없었다. 그는 다시 여러 마을들을 돌아다녔고, 마침내 식량 한 배낭을 채웠다. 북한 배낭엔 약 25㎏이 들어간다. 그걸 메고 산에 숨었다가 새벽 1시쯤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었다. 그런데 강을 건너면서 물에 빠져 발이 젖어버렸다. 그곳에서 집까지는 25리가 넘었다.산을 타고 가는데 점점 발에 감각이 사라졌다. 발이 얼면 높낮이 감각도 무뎌져 계속 넘어지게 된다. 가까스로 집 근처 아는 이의 집에 기어가다시피 도착했다. 언발을 녹이려 양말을 벗으려 했지만 피부에 달라붙어 벗겨지지 않았다. 찬물에 발을 담근 채 30분 넘게 있으니 그제야 양말이 녹으면서 피부와 떨어졌다. 두 발은 보라색으로 변했다.그때 그는 두 달 넘게 동상 치료를 받아야 했다. 발톱이 모두 빠지고 살이 썩어 들어갔다. 북에선 동상을 입어 살이 썩으면 잘라내는 것밖에 치료법이 없었다. 혈기왕성한 10대였던 박 씨는 다행히도 절단하는 일은 피했다. 박 씨는 이를 기적이라 생각한다. 다만 후유증이 남았다. 그는 지금도 한 여름이라도 선풍기 바람이 발에 닿으면 통증을 느낀다. 덕분에 양말을 벗지 못하고 산다.● 동생을 업고 두만강을 건너3개월쯤 지나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자 박 씨는 또다시 두만강을 찾았다. 집에 있으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강을 넘어가 식량을 빌어와야만 아버지와 동생을 살릴 수 있었다.강을 넘나드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의 활동반경도 넓어졌다. 연길까지 가서 교회도 찾았다. 이 과정에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도 만났다. 같은 동네에서 자라 북한에 있었으면 동창생이 됐을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다보니 중국에서 만나서야 서로가 동창인줄 알았다.한 번은 같은 동네 세 친구가 큰마음을 먹고 하얼빈까지 가기로 했다. 그런데 기차를 타려다 단속에 걸리고 말았다. 셋은 함께 북송됐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교화소 대신 유랑하며 걸식하는 꽃제비 청소년들을 모아놓는 집결소에 끌려갔다. 사실상 이곳은 청소년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선 병에 걸려도 치료를 해주지 않았다.세 친구 중 장염에 걸린 한 친구는 방치된 채 죽고 말았다. 그곳에서 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박 씨는 탈출 기회만 노렸고, 결국 석 달 만에 성공했다. 같이 잡혀 끌려갔다 탈출했고, 한국에도 함께 온 친구는 지금 서울의 모 공공기관에서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박 씨는 중국에서 네 번이나 체포됐고, 북송됐다. 그때마다 나이가 어리다는 점이 고려돼 선처를 받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소년으로 취급받을 수만은 없었다. 1999년 집에 군사동원부(병무청) 사람들이 찾아왔다. 군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도망쳤다.이후 중국에 있는 한국 식당 앞에서 꽃도 팔고, 돈을 구걸하고, 한국 교회를 찾아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한국 선교사들과 낯을 익혔고, 한국에 가면 잘 살 수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동생을 두고 갈 수가 없어 망설였다. 그러다 만 20살이 되던 2001년 언제까지 이런 삶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그래 5월 그는 도와주겠다는 선교사의 약속에 아버지와 동생을 동반한 한국행을 결심하고, 다시 북한으로 넘어갔다. 집에 도착하니 1주일을 굶어 퉁퉁 부은 아버지와 동생이 그를 맞았다. 동생은 이미 영양실조에 걸려있었다. 한국으로 가자는 얘기에 아버지는 죽어도 가지 않겠다며 남동생을 데려가는 것도 거절했다. 며칠을 설득한 끝에 결국 동생만 동행하기로 했다. 두 달 뒤인 7월 그는 12살 동생을 업고 두만강을 건넜다. 그리고 다시 두 달 뒤인 9월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오는 루트를 찾았다. 박 씨는 이 루트를 이용한 초창기 탈북민이다.몇 년 뒤 그의 아버지가 산에서 홀로 굶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좀 더 열심히 설득하지 못했던 일이 그에겐 두고두고 아쉬움과 죄책감으로 남아 있다. ● 한국에서 22년의 정착2002년 2월 박 씨는 경기도 안산의 한 공동체 생활시설에 정착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에, 동생은 초등학교 3학년에 각각 편입됐다.어린 친구들과 학교를 다니는 일도 쉽지 않고, 오랫동안 공부를 하지 못해 공부가 머리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2년 동안 열심히 노력해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고, 중앙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만나본 사람들이 주로 사회복지사들이었기 때문이다.그는 하루라도 빨리 졸업해 동생을 먹여 살리려는 생각에 휴학 없이 노력했고, 4년 만인 2008년 대학을 졸업했다. 살아본 동네가 안산이라 그는 대학 졸업 후 다시 안산에서 임대아파트를 얻었다. 대학 졸업 당시 그의 통장에는 불과 30만 원밖에 없었다.몇 달 동안 일자리를 찾느라 맘고생을 했지만, 결국 시흥 신협에 인턴으로 입사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일자리였지만, 그에게는 잘 맞지 않았다. 제2금융권이라 실적을 중시했는데 한국 사회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에게 예금 실적 목표 달성은 불가능한 임무였다.1년 반 정도 지난 2009년 6월 우양재단이 운영하는 탈북민 사업 담당자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는 11년을 근무했다. 맡은 일은 탈북민과 관련된 남북한 프로그램 운영이었다. 처음에는 주임으로 입사했다가 남북청년통합프로그램, 통일축구대회, 통일인재양성 아카데미 운영 등을 담당했고, 경력이 쌓이면서 과장으로 승진도 했다. 일은 보람이 있었다. 통일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나도 통일 관련 일을 오랫동안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012년엔 남쪽 출신 여성과 결혼해 두 딸도 얻었다. 재롱을 부리며 성장하는 두 딸만 보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가 업고 왔던 남동생도 서강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지금은 사무직 회사원으로 잘 지내고 있다.● 트라우마 딛고 4급 보좌관으로2020년 5월 그는 국회의원 5급 보좌관으로 임명됐다. 평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지만, 당시 탈북민 출신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지성호 의원이 그의 전문성을 인정해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국회에서 일반적인 업무 외에 탈북민 권익센터를 운영하고, 효율적인 탈북민 지원 체제를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국회에 가보니 탈북민을 통일 역군으로 키워야 한다는 말은 정말 많은데, 정작 실행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제가 갔을 때 탈북민정착지원법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다문화가정 지원법과 유사해 보였어요. 탈북민의 현안에 맞춰 정착지원법도 개선되어야 합니다. 또 탈북민은 통일이라는 큰 관점에서 투자 개념으로 꾸준하고 일관성 있게 지원해야 합니다.”박 씨는 4년 동안 열심히 일한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3월 4급 보좌관으로 임명됐다. 지 의원의 임기 종료와 함께 그도 국회를 떠날 수 있었지만, 22대 총선에서 당선된 탈북민 출신의 박충권 씨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그는 박충권 의원 사무실에서 이전처럼 4급 보좌관으로 국회 업무와 함께 탈북민 관련 정책을 담당한다.지금까지 입법부에서 활동하는 탈북민은 국회의원에 조명이 집중됐다. 하지만 박 씨처럼 국회 보좌관으로 전문적인 경력을 쌓는 이도 있다. 그가 겪은 북한 경험이 의원이 된 탈북민보다 못한 것도 아니다.“아직도 저를 괴롭히는 트라우마가 있어요. 10대 시절 두만강을 수없이 넘나들면서 겨울에는 동사한 사람, 여름에는 익사한 시신들을 많이 보았어요. 시신이 퉁퉁 불어나 옷도 다 찢어진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걸 볼 때마다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되겠지’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는데,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런 불쌍한 탈북민들을 위해 입법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일을 한 보좌관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이 제 바람입니다.”그는 중국에서 빌어먹던 꽃제비였던 자신을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만들어준 대한민국이 정말 고맙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선 자신이 롤모델이 돼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앞으로는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한 탈북민들을 적극 발굴하려 합니다. 언론에는 탈북민이 늘 어렵게 사는 것으로 보도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여러 분야에서 조용히 살면서 누가 봐도 성공한 훌륭한 탈북민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해 통일을 위한 준비된 역군으로 살도록 적극 도울 생각입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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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 앞세워 ‘미래 먹거리’ 수산업 스마트화 추진 박차

    해양수산부(장관 강도형)는 올해에도 수산업을 미래 성장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다양한 지원 정책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고 16일 밝혔다. 스마트화와 어업 분야 혁신을 통해 수산업을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육성하고, 수산식품 수출 확대 및 어촌 활성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수산업 스마트화를 위해서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정보통신기술(ICT) 같은 첨단 과학기술을 어선(魚船)어업, 양식업 및 수산식품 등 전 분야에 접목해 추진한다. 어선어업 분야에서는 AI를 활용해 효율적이고 안전한 어선을 설계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어업인 및 조선소 부담은 낮추면서 동시에 어선 전반의 변화를 꾀할 계획이다. 양식업은 2019년부터 스마트 양식 클러스터 조성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첨단 해수순환여과시스템(RAS)을 기반으로 하는 스마트 양식은 최적의 양식 환경을 구축해 생물을 안정적으로 기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생산단가를 절감해 가격 경쟁력을 높이고 환경 보호에도 도움이 된다. 현재 부산 강원 전남 같은 전국 주요 거점에 스마트 양식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있다. 부산은 올 3월 준공됐고 강원 클러스터도 올해 말 준공을 앞두고 있다. 어업 분야 규제도 과감히 혁신하고 있다. 5t 미만 어선에 적용되는 어선 기관 비개방 정밀 검사 대상을 지난해 말 10t 미만 연안어선 전체로 확대했다. 규제 1500여 건을 2027년 이후 절반 가까이 폐지하고 모든 어선에 어획량(TAC)을 전면 적용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수산자원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국제 어업관리 방식에 부합하는 관리·감독(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하고 ‘한국형 어획증명제도’를 도입해 국내외 불법 수산물 유입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수산식품산업 육성 및 수출 지원도 적극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수산식품 가공과 수출, 연구개발(R&D) 등이 집약된 수산식품수출단지를 전남 목포와 부산 서구에 만들고 있다. 신선도가 생명인 수산식품 수출을 늘리기 위해 해외 유통망 확보에 대한 지원도 강화하고 있다. 이를 위해 수산식품 물류 인프라 구축을 위한 국내외 공동물류센터 확보 및 해외 콜드체인 구축 등을 추진하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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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무법국가와 법치국가

    무법국가의 표본으로 삼기엔 북한만 한 곳도 없다. 과거 탈북했다가 북송됐던 개인적 경험을 떠올려 봐도 그렇다. 당시 난 교화소에 끌려갈지,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갈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조사관들은 “너는 김일성대 졸업생이라 훨씬 크게 처벌받을 것”이라고 했다. 아마 한국에서 “넌 서울대 졸업생이라 더 큰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면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고 할 게 뻔하다. 사회주의 국가라는 중국에서도 베이징대를 나왔기 때문에 같은 죄가 더 중하게 처벌된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북한에선 경력에 따라 처벌이 달라진다는 말이 너무 당연하게 들린다. 주변 수감자들을 봐도 어떤 처벌을 받을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 번의 재판으로 선고를 받고 즉시 끌려가기 때문에 경험을 얘기해줄 사람도 없었다. 법이 있다고는 하나 아는 사람은 없었다. 형사소송법은 법조인들이나 보는 줄 알았다. 법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책으로 팔지도 않았고, 도서관에서 빌릴 수도 없었다. 설사 법을 알아도 재판정에서 따질 사람도 없을 것이다. 판검사의 기분을 나쁘게 하면 훨씬 더 중한 처벌을 받기 십상이다. 북한에선 김씨 일가의 말이 곧 법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당시 탈북했다 북송된 사람들만 봐도 김정일이 “관대히 봐주라”고 하면 우르르 풀려났고, 반대면 우르르 교화소로 끌려갔다. 김정일이 “사회 기강이 해이해졌으니 총소리를 울리라”고 하면 크지 않은 죄로도 공개 총살됐다. 유훈통치란 개념은 설명조차 어렵다. ‘김일성저작선집’만 봐도 성경만큼 두꺼운 책이 100권을 넘는다. 김정일, 김정은의 말을 적은 책까지 모아놓으면 수십 트럭은 족히 된다. 여기선 이 말을 하고, 저기선 저 말을 했지만 상관없다. 처벌할 땐 필요한 구절만 인용해 “수령님의 말씀을 거역했다”고 죄를 만들면 된다. 그렇다고 유훈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얼마 전 김정은이 통일이란 단어를 삭제하라며 각종 기념물을 폭파해도 김정은이 유훈을 위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법국가에선 법관이 그다지 권세 있는 직업이 아니다. 북한에선 기업들 털어 뇌물을 먹고 살 수 있는 검사 정도만 좀 위세가 있지만, 그들도 당 간부 앞에선 머리를 숙여야 한다. 소신 판결이 불가능한 곳에서 판사는 허수아비일 뿐이고, 변호사는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북한에서 살다 한국에 오니 무슨 법이 그리 많은지 놀랄 때가 많다. 수령의 기분에 따라 고무줄 잣대로 처벌받는 일이 불가능하다. 그만큼 법치국가가 훨씬 더 좋은 사회인 것은 분명하다. 법이 힘이 있으니 법조인의 위세도 좋다. 판검사, 변호사가 되는 게 인생의 성공 잣대다. 그런데 한국에 왔던 20여 년 전과 비교해 보면 점점 더 법이 득세한다. 뭔 일만 터지면 법을 만들겠다고 떠들고, 정치적 문제도 법원 판결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다가 판사가 총리가 되더니, 검사가 대통령까지 됐다. 며칠 전까진 양당 수뇌도 법조인 출신이었다. 이런 ‘법조인 득세 시대’가 일시적인 것 같지는 않다. 법이 많아질수록 법조인의 힘이 빠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법안들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많은 법들은 국회에서 만들어지고, 지방 의회에서도 법들을 만들어낸다. 주목할 것은 21대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을 장악한 뒤로 법안이 너무 많이 쏟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29일 기준 21대 국회가 발의한 법안이 무려 2만6637건이라고 한다. 참고로 20년 전인 16대 국회에선 1615건, 그 다음의 17대 국회에선 5728건의 법안이 발의됐다. 국회의원들의 전문성은 점점 떨어지는 것 같은데 오히려 법은 그에 비례해 늘어나니 문제다. 게다가 법안을 많이 만들면 우수 의원이라고 표창까지 한다. 반세기 전의 낡은 법들도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속도로 새 법들이 나오다간 법의 무게에 깔려 질식할 판이다. 민주당은 현 정권을 ‘검사 독재정권’이라고 규탄하지만, 법을 이리 많이 쏟아내면서 검사의 힘을 빼겠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22대 국회가 새로 구성됐다. 법부터 만들겠다고 벼르던 사람들도 대거 당선됐으니 이번 국회는 초반부터 법이 쏟아질 것이다. 이제부턴 법을 만들었다고 상을 주지 말고, 과거 법을 다듬고 정리하고 줄이는 의원에게 상을 주면 어떨까. 같은 민족인데 한쪽은 법이 없어 죽고, 한쪽은 법에 깔려 죽는 것을 보고 싶진 않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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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아동행복지원사업, 위기아동 627가정 지원

    복지 사각지대 위기가정을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한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 월드비전(회장 조명환)과 한국사회보장정보원의 ‘e아동행복지원사업’이 성과를 보이고 있다. 월드비전과 한국사회보장정보원이 지난해 6월 맺은 업무 협약에 따라 시행 중인 이 사업은 e아동행복지원시스템을 활용해 위기아동을 빨리 발굴하고 생계 의료 주거 교육을 비롯한 맞춤형 복지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e아동행복지원시스템은 한국사회보장정보원의 44종 사회보장 빅데이터를 활용해 복지 서비스가 필요할 것으로 예측되는 가정을 전담 공무원이 방문하고 아동과 보호자의 복지 욕구 및 양육 환경을 확인한 후 적절한 복지 서비스를 지원한다. 전기, 수도, 가스 공급 중단 및 체납 정보 28종과 영유아 검진 미실시, 장기 결석, 양육수당 및 보육료 미신청 등 위기아동 정보 16종을 종합해 전국 위기 아동 및 가정을 파악할 수 있다. 월드비전과 한국사회보장정보원은 전국 364개 기관에서 신청한 위기아동 627가정을 생계 의료 주거 교육 영역에서 지원했다. 또 아동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필요한 문화 체험 활동, 가족 화목을 위한 활동, 진로 탐색 활동까지 지원하고 있다. 올해는 가구당 지원금을 50만 원에서 100만 원까지 늘렸다. 지난달부터 받은 1차 신청을 심사해 112가구에 지원금을 전달했다. 다음 달부터 주민등록상 거주지 읍면동 행정복지센터(주민센터)를 통해 2차 신청을 할 수 있다. 월드비전 위기아동지원팀 박아람 차장은 “특히 민간 기관과 보건복지부 산하기관, 그리고 각 지역 주민센터까지, 민간과 공공이 협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월드비전과 한국사회보장정보원이 실시한 2023년 e아동행복지원사업 우수 사례 공모전에서는 경기 의정부 송산2동 주민센터 보건복지팀 이상은 주무관이 우수상을 받았다. 이 주무관은 지난해 6월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는 아버지, 지적장애 어머니, 7세 남아 가정을 꾸준히 방문 상담하고 이 사업의 지원금뿐 아니라 민간 재단 및 지역 복지관과 연결해 생계비를 지원했다. 또 월드비전 중앙위기아동지원사업을 통해 지원금 1000만 원을 전했다. 한국사회보장정보원 이성호 대리는 “위기 발생 후 사후약방문처럼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 예측을 통해 위기아동을 발견하고 월드비전 같은 위기아동 지원사업 전문기관과 연계해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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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김주애는 여왕이 될 수 있을까?

    김주애 우상화가 점점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15일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에 3차례에 걸쳐 ‘향도의 위대한 분들께서’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북한에서 ‘향도자’는 지도자를 의미한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 3명에게만 허락된 수식어이다. 이를 주애에게 썼다는 것은 김정은이 11세 딸을 차기 지도자로 확실히 밀고 있다는 증거다. 2022년 11월 아버지 손을 잡고 나타난 주애의 첫 호칭은 ‘사랑하는 자제분’이었다. 이후 ‘존귀하신’ ‘존경하는’ ‘조선의 샛별여장군’ 등으로 점점 높여졌고, 1년 반도 안 돼 급기야 향도자 반열에 올려졌다. 김정은 대신 주애를 부각시킨 사진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김정은은 정말 그를 차기 여왕으로 키울 생각일까. 여러 의견이 엇갈리겠지만, 누가 되든 나중에 ‘그런가 보다’라고 받아들여도 별문제는 없다. 분명한 점은 김정은이 딸을 9세 어린 나이부터 노출시킨 것은 건강에 자신감이 없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정상적인 오너라면 40세도 되기 전에 9세 자식에게 후계 세습을 시작하고, 자신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일은 하지 않는다. 김정은이 “언제든 죽을 수 있겠다”고 느꼈다면 “내가 죽은 뒤 가문은 어떻게 될 것인가”가 가장 큰 걱정일 것이다. 후계자 없이 김정은이 급사하면 혼란이 벌어지고, 김 씨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미리 후계자를 내세우고 권위를 높여 만일을 대비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가부장적인 북한에서 5대까지 내려가면 성씨가 바뀔 위험을 감수하고 여왕을 내세울 수 있을까.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도 없던 일이다. 김정은은 원하면 언제든 아들을 얻을 수 있다. 이미 지금도 여럿 있다. 어쩌면 그 아들들이 너무 어려 클 때까지 주애를 ‘비상용’ 후계자로 삼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주애가 후계자가 절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김정은의 생각에 따라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다만 몇 가지 사전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김정은이 딸을 너무 사랑한다면 후계자로 삼을 수 있다. 김정은은 권력을 위협하는 형 김정남을 세계의 면전에서 잔혹하게 독살했다. 이모부 장성택도 비참하게 끌려가는 장면을 연출하며 처형했다. 그것은 김정은의 뜻일 수도 있고, 김경희 등 패밀리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혈육을 죽인 김정은의 마음이 편했을 리는 없다. 만약 나중에 아들로 후계자가 바뀐다면, 더구나 아들의 어머니가 이설주가 아니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통성을 가진 본처의 자식들부터 제거하려 들 것이다. 김정은부터 맏형을 죽여 형제의 피를 손에 묻혔다. 역사 속 무수한 왕조에서 이런 일은 흔했다. 김정은이 딸을 너무 사랑한다면 이런 위험을 감수하게 하진 않을 것이다. 다른 후계자로 교체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손으로 딸을 죽이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주애에게 권력을 넘기거나, 가장 아끼는 자식임을 과시함으로써 함부로 주애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둘째 이유도 김정은의 체험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2010년 10월 새파랗게 젊은 25세의 김정은이 처음 나타나자 북한 주민들은 깜짝 놀랐다. 김정은의 경력이나 능력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들 “어린애가 알면 뭘 알겠냐”고 수군거렸다. 김정은도 여러 차례 참을 수 없는 수모를 경험했을지 모른다. 집권 초기 자기를 무시했다고 죽인 사람도 많다. 그것이 한에 맺혀 “내 후계자는 불쑥 튀어나오게 하지 않고,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통치자임을 인식시키겠다”고 다짐했을 수 있다. 셋째 이유는 해외 물을 먹은 김정은이 5대 세습은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다. 인공지능을 앞세운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20∼30년 뒤를 내다볼 수 있는 전문가도 없다. 나이를 감안하면 주애는 최소 반세기 이상의 기간 동안 통치할 수 있다. 지금의 북한처럼 사회주의를 사칭한 기형적인 왕조는 그리 오래갈 수는 없다. 이미 북한 주민의 마음은 김씨 왕조를 떠났다. 다만 극단적 공포통치로 현재 상황을 유지할 뿐이다. 경제적 비전도 밝지 않다. 김정은은 주애에게 자신이 죽을 때까지만 통치하고 이후엔 북한을 정상국가로 되돌리는 부드러운 인계자 역할을 기대하고 있진 않을까. 물론 이는 희망적인 시나리오일 뿐이다. 김정은이 누굴 후계자로 지명하든 지금 당장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나중에 일어날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봐도 충분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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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한줌의 패거리가 만든 지옥

    북한은 한줌도 못 되는 패거리가 똘똘 뭉쳐 나라를 나락으로 끌고 간 역사적 사례다. 한때의 투쟁 경력을 훈장으로 내건 인간들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사례도 북한에서 찾을 수 있다. 김일성이 소련 88여단 대대장일 때 거느렸던 한인 부하는 60여 명이었다. 김일성은 광복 후 소련의 비호와 빨치산 출신들에 의지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때부터 북한은 80년 넘게 물갈이가 되지 않았다. 빨치산 패거리들의 특징은 첫째로 형편없이 무식했다는 것이다. 김일성보다 투쟁 경력이 더 긴 사람들도 있었지만, 김일성이 대장 노릇을 한 것은 그나마 글을 알았다는 이유가 컸다. 빨치산 출신 가운데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자는 손꼽을 정도였고, 대다수가 글을 읽지 못했다. 6·25전쟁 때 빨치산 출신 북한군 장성 다수는 지도도 볼 줄 몰랐다. 1960년대 초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 빨치산 출신들이 권력을 장악했지만 장관급 자리에 오른 자들이 글을 몰라 김일성고급당학교에서 ‘가나다라’부터 공부해야만 했다. 하지만 머리가 굳어 끝내 배우지 못한 자도 많았다. 그들을 가르친 교장은 일제 때 공부했다는 이유로 나중에 양강도 오지로 추방됐다. 머리가 텅 빈 인간들이 권력을 잡았으니 북한은 절대 잘 살 수가 없었다. 여기에 “수령님 하는 일은 무조건 좋다”고 환호를 지르는 무식한 머슴과 노동자 출신들을 승진시켜 나라의 핵심으로 삼았다. 무식한 패거리들이 온 나라를 무지한 땅으로 만든 것이다. 빨치산 패거리들의 두 번째 특징은 강한 권력욕과 무자비한 정적 숙청이었다. 한때 사지를 함께 넘었던 이들은 위기 때마다 똘똘 뭉쳐 때로는 암살로, 때로는 회의장에 총을 들고 들어가 협박도 하면서 반대파를 차례로 제거했다. 그나마 공부를 했던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국내파 등은 무식하고 용감한 빨치산파를 당하지 못했다. 빨치산 패거리는 전국에 정치범수용소를 만들고 정적은 물론이고 불평하는 사람과 유식한 사람들까지 모두 가둬 버렸다. 빨치산 패거리들의 세 번째 특징은 성적으로 문란했다는 것이다. 여성은 그들에게 보상과 전리품에 불과했다. 김일성부터 예외는 아니었다. 광복 후 김일성과 함께 일을 하다가 나중에 소련으로 망명한 수십 명의 전 북한 고위 관료들이 이에 대해 자세한 증언들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북한군 작전국장을 지낸 유성철 전 중장의 수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김일성의 여성 편력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만주와 소련을 떠돌며 엄격한 규율 속에서 생활하다 북한에 돌아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된 김일성은 그동안 억제해 온 욕구를 분출하듯 여자관계가 문란했다. 김일성은 한 인민군 고급군관의 부인을 농락하고 그 군관을 소련으로 유학 보낸 일도 있으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할 때는 오찬복이란 타자수에게 키스를 하려다 뺨을 맞은 적도 있었다. 김일성은 그의 엽색 행각이 부하들 사이에서도 불만을 사게 되자 1호, 2호 등 일련번호가 붙은 비밀저택을 곳곳에 마련하고 아리따운 처녀들을 불러들여 은밀히 즐기기도 했다.” 유 전 중장의 수기에는 이런 얘기도 나온다. 김일성의 공식 부인 김성애도 안전부 부부장 김성국의 타자수였다는 것이다. 우연히 김성애를 본 김일성이 다음 날 자기 방에 타자수가 필요하다고 연락했다. 다른 수기들에도 비슷한 증언이 많은데, 금강산으로 놀러가면서 차 뒷좌석에서 여비서와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짓을 벌였다는 내용도 있다. 윗물이 이러니 아랫물이 맑을 리가 없는 법. 최측근인 최현은 강계에서 목재상의 딸을 겁탈하려다 거절당하자 “우리가 싸울 때 편히 살던 반동”이라며 목재상을 쏴 죽였다. 그가 38여단장 시절 간호사를 건드려 낳은 사생아가 최룡해이다. 최현은 처벌받을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두목부터 범죄자인데, 누가 누구를 처벌할 수 있단 말인가. 빨치산 패거리들은 1970년대 김정일이 별장을 잔뜩 지어 20대 미녀들을 비서와 간호사 명목으로 상납하자 그의 후계자 세습을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빨치산 패거리의 네 번째 특징은 조국과 민족 따윈 안중에 없었다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권력과 향락을 실컷 누리고도 모자라 대대손손 대물림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2021년 마지막 빨치산 1세가 사망했다. 김주애는 빨치산 패거리의 4세이다. 현재 북한은 빨치산 2∼4세의 세상이다. 이들은 대를 이어 ‘조국과 인민’을 입에 달고 산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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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김정은의 포탄상자 수탈사건

    지난해 10월 중순 북한 각 기관, 기업소의 노동당 책임자와 행정 책임자들이 밤 10시에 시군 당위원회에 긴급 호출됐다. 이들에게 하달된 것은 최고사령관 명의의 긴급 명령이었다. 내용은 학생과 연로보장(은퇴) 노인을 제외한 모든 성인 남성에게 24시간 안에 포탄 상자 2개씩을 만들어 바치라는 것이었다. 당위원회에선 포탄 상자 견본품까지 보여주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작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상자의 규격은 가로 30cm, 세로 120cm, 높이 30cm로, 직경 120mm 이상의 포탄 2발과 장약을 넣을 수 있는 크기다. 또 포탄 상자는 무조건 폭 15cm, 두께 1.5cm의 이깔(잎갈)나무 판자로 제작해야 한다는 조건도 붙었다. 명령이 하달된 순간부터 전국에서 이깔나무 판자가 순식간에 동나기 시작했다. 목재 가공 공장과 가공업자들이 발 빠르게 시장에서 이깔나무 판자와 목재를 사들였다. 그리고 밤새 포탄 상자를 제작했다. 뒤늦게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 시장에 나갔을 때에는 이미 해당 규격의 포탄 상자 2개가 중국 돈 500위안(약 70달러)에 팔리고 있었다. 직접 만들기도 어려웠다. 아침에 해당 규격의 판자는 m당 2.8달러에 팔렸고, 이걸 사서 목공에게 부탁해도 자재값만 28달러에 가공비 5달러가 붙어 33달러나 들었다. 시장에서 포탄 상자 2개를 사는 것과 비교하면 차액은 고작 4달러 정도에 불과했다. 명령은 독재적이고, 하달 방식은 사회주의적인데, 집행한 사람들은 완벽하게 시장경제의 논리로 움직였다. 허나 아무리 최고사령관의 명령이라고 해도 없는 이깔나무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법이다. 남성들은 명령을 수행한 자와 수행하지 못한 자로 나뉘었다. 당연히 후자는 두고두고 사상 검증을 받아야 한다. 북한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이렇게 모은 포탄 상자가 전국적으로 약 200만 개라고 한다. 명령이 하달된 시점은 북한이 본격적으로 러시아에 포탄 지원을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 70달러면 북한 일반 4인 가정이 최소 두 달은 먹고살 수 있는 돈이다. 북한 인민의 고혈을 짜낸 수제 포탄 상자는 지금쯤 어느 우크라이나 벌판의 진창 속에서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포탄 상자 수탈 사건은 북한의 위선과 허세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김정은은 지난달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지방 인민들에게 기초식품과 식료품·소비품을 비롯한 초보적인 생활필수품조차 원만히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 당과 정부에 있어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심각한 정치적 문제”라며 반성하는 척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인민들의 생활을 개선하지 못했다며 울먹인 적도 여러 차례다. 민심이 악화되면 인민들에 대한 수탈을 하지 말라며 몇몇 간부를 본보기로 호되게 처벌하는 척하기도 했다. 정작 본인은 인민이 두 달을 먹고살 수 있는 돈을 24시간 만에 꿀꺽하고 입을 싹 씻었다. 포탄 상자도 생산할 능력이 없어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전국 남성들이 톱과 망치를 들고 뛰어다녀야 하는 게 현실이지만 김정은은 정찰위성을 쏘고 핵잠수함을 만들겠다고 허세를 부리고 있다. 새해 들어서도 연일 신형 미사일을 만들었다고 자랑하며 시험발사 사진을 공개했고, 군수공장에 찾아가 수많은 미사일과 발사 차량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뿌렸다. 지금 북한의 군수산업은 김정은이 허세를 부릴 수 있는 몇몇 샘플용 무기 제작과 러시아에 보낼 탄약 제작에 모든 걸 쏟고 있다. 최근 김정은이 전쟁을 운운하며 연일 대남 강경 발언을 내뱉고 있지만, 정작 헐벗은 북한 군인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민가를 약탈하고 있다. 연료 부족에 기갑부대와 함정들은 대책 없이 녹이 슬고 있고, 공군 비행기는 추락이 무서워 훈련도 못 하고 있다. 일각에선 김정은이 정말 전쟁을 벌이려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지만, 쓸데없는 기우이다. 제대로 전쟁 준비를 하기도 전에 북한 인민들부터 죽어갈 것이다. 탄약 상자는 물론 비상식량을 만들어 내라, 장갑을 내라, 군화를 내라, 디젤유를 내라 등과 같은 지시가 수십 번 넘게 떨어질 것이다. 심지어 총포를 닦을 천까지 내라고 할 것이다. 이건 개인적 상상이 아니라, 실제 북한에서 이미 다 일어났던 일이다. 이런 군대를 갖고 김정은은 “남조선 영토 평정”을 운운하고 있다. 말라갈수록 허세는 거꾸로 커지기만 하는 게 참 안쓰럽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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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부 6급 공무원이 된 탈북청년…“고향 가는 날을 위해 삽니다”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2004년 8월 백두산으로 자유여행을 떠났던 탈북청년 강원철에게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한국 국적을 따면 중국 여행을 하겠다는 생각은, 그가 중국에 숨어 지낼 때부터 가졌던 오랜 꿈이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여권을 만들었고, 대학 입학을 기념해 중국에서 함께 지냈던 탈북 친구와 함께 떠났다.인천공항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국민의 자부심을 느껴보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중국 연변에 도착하자마자 일부러 공안을 찾아 길을 물어보기도 했다. 3년 전엔 공안 복장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줄행랑을 치느라 바빴지만, 한국 여권을 보여주니 경례까지 받았다. 삶이 하늘땅 차이로 바뀌었음을 체감하니 너무나 신이 났다.다른 한국 관광객들과 함께 도문의 두만강에서 배를 타고 북한을 구경할 때였다. 건너편에서 삐쩍 마르고 헐벗은 북한 국경경비대 군인들이 강가에서 관광객들을 쳐다보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부산에서 왔다는 한 부부가 강 씨와 친구를 보더니 “너희들은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정말 다행으로 생각해야 돼. 저렇게 젊은 청년들이 너무 고생하고 있잖아”라고 말을 건넸다. 부부는 이들이 탈북 청년인줄 모르고 있었다.그 말을 듣는 순간 강 씨는 북한 군인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그래, 내가 북에 계속 살았다면 지금 저렇게 보내고 있었을건데….”백두산으로 가는 길에 버스는 그의 고향 무산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멈춰 섰다. 떠날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고향땅을 건너다보며 강 씨는 아직 거기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을 떠올렸다.“나는 운이 좋아 한국에 와서 대학도 다니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먹고, 외국 여행까지 다니는데, 아직 저기 살고 있는 똑똑했던 친구들은 저 땅에서 태어났다는 죄 하나로 얼마나 고생을 할까. 통일이 돼 고향에 돌아갔을 때 친구들이 ‘우리가 힘들게 살 때 너는 무엇을 했냐’고 물으면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그의 고향에서 백두산은 차로 3시간 거리였지만, 북한에 살 때 가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백두산을 서울에 살게 됐을 때에야 비로소 가볼 수 있었다. 백두산에서도 그는 친구들 얼굴 하나하나 떠올리며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통일이 돼도 그들에게 떳떳한 대답을 하고 싶었다.서울로 돌아온 그는 그때부터 북한 인권문제에 천착했다. 지금 그는 통일부 6급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삶의 궤적은 20년 전에 세운 목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채 직진 중이다.● 태어나는 순간 결정된 운명북한에서 강 씨의 운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가 1982년 두만강 옆 함북 무산에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무산광산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자라면서 학교에 갈 때마다 그는 아버지 때문에 창피했다. 북한 학교에선 학생들에게 아버지가 당원인지, 비당원인지를 적어오라고 한다. 부모의 노동당 가입 여부에 따라 아이들 속에서도 계급이 나뉘었는데, 부모 모두 당원이 아닌 강 씨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강원도 평강 출신인 강 씨의 아버지는 북한군에서 10년 넘게 복무를 했지만, 당원이 되지 못했다. 제대 후엔 어렵고 힘든 무산광산 노동자로 발령이 나 연고도 없는 함북 오지로 오게 됐다. 강 씨가 13살 때인 1995년 아버지가 병사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출신성분이 얼마나 나쁜지 알 수 없지만, 어머니의 출신성분을 보면 아버지도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강 씨의 외할머니는 강원도 통천의 지주집 딸로 이화여전을 졸업한 인텔리였다. 외할머니는 종종 “현대 정주영 회장이 우리 동네에서 살았어. 참 못살았는데”라고 회상하곤 했다.그런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강 씨가 대학에 갈 가능성의 거의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해 가장 힘들다고 알려진 공병국 같은 곳에서 10년 동안 건설장을 전전하다가, 제대해 무산광산 노동자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주어진 운명이었다.그의 고향은 무산읍에서 통근열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무산광산 노동자들을 위한 집단부락 성격의 마을이었다. 모두들 가난했다. 탈북할 때 두만강에서 처음으로 헤엄을 쳤다.그가 살던 4층 아파트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에서 가장 먼저 텅텅 빈 아파트로 꼽힌다. 먹고 살기 힘들다보니 자고 나면 사람들이 중국으로 도망쳐 사라졌다.그나마 강 씨의 집은 동네에선 비교적 굶지 않고 사는 축에 속했다. 함경북도는 1990년대 초반부터 배급을 잘 주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강 씨의 어머니는 일찍부터 장사에 뛰어들었다. 무산에서 중국 물품을 받아다 황해도 같은 앞쪽 지역에 나가 쌀을 바꾸어왔다. 그 덕분에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을 때 강 씨의 집은 풀죽이나마 먹고 살 수 있었다.당시 강 씨의 학년은 40~50명 규모의 학급 5개로 구성이 됐는데, 고난의 행군 막바지에는 학년에서 학교에 나온 학생을 다 모아야 3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강 씨는 학교 때 공부를 잘해 간부를 도맡았는데, 학교에 가면 선생이 늘 나오지 않은 학생들을 찾으려 보냈다.친구들 집에 가면 얼굴이 퉁퉁 부은 부모들이 맞아주었다. 그나마 그런 집은 부모가 굶어죽은 집보단 낫다고 할 수 있었다.● 어머니 장사 밑천 마련하려 탈북1998년 강 씨는 졸업반이 됐다. 반 년만 있으면 군에 나가야 했다. 그때 어머니의 장사도 잘 되지 않아 집안이 힘들었다. 군에 나가 10년 있는 동안 어머니와 5살 아래의 여동생이 굶어죽지는 않을지 너무나 걱정이 됐다.강 씨는 다른 친구들처럼 중국에 건너가 돈을 벌어 어머니의 장사 밑천을 마련해 주기로 결심했다. 이미 학교는 문을 닫을 지경이었고, 학교에 나가지 않는 것이 정상일 때였다.“입대하기까지 반년 남았으니 그동안 중국에서 일하면 인민폐 100위안은 벌어오겠지.” 16살 소년이 집을 떠난 동기는 단순했다.당시만 해도 무산에는 국경경비가 그다지 삼엄하지 않았고, 특히 아이들은 단속이 심하지 않았다. 통근열차를 타고 무산으로 간 그는 두만강 상류를 따라 걸어갔다. 군인들이 어디 가냐고 물으면 나무 하러 간다고 둘러댔다.어둑어둑해졌을 때 그는 무작정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당시는 5월이라 두만강이 깊지 않았다. 강을 건너자마자 그는 두만강에서 초막을 치고 있는 조선족 남성들을 만나게 됐다.이들은 겉으론 고기잡이를 한다고 했지만, 실은 북한과 밀수도 하고, 여성들이 건너오면 팔아먹기도 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다. 이들은 키가 작은 16살 소년이 쓸모가 있어보였는지 함께 움막에서 살자고 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강 씨는 이들의 제안을 수락해 3개월 동안 함께 지내며 농사를 거들어주었다.이 기간 강 씨는 북에서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알게 돼 충격을 받았다. 조선족들은 대놓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욕했다. 그런데 강 씨가 듣기엔 그 말이 틀린 것이 없었다. 북에 있을 때 강 씨는 고난의 행군이 날씨가 좋지 않아 흉작이 들었기 때문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을 하나 건넜을 뿐인데 중국은 1년 농사해 3년을 먹고 살았고 이밥에 고기가 빠지지 않았다.조선족들은 자주 그를 마을로 데려가 한국 TV와 드라마를 보여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 씨는 군에 가는 목적이 헐벗고 굶주린 남조선 동포들을 해방하기 위해서라고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TV 속 남조선은 너무나 풍요로웠다. 함께 있는 조선족 청년들도 한국을 침이 마르게 극찬하며 한국에 갈 꿈만 꾸고 있었다.“내가 군에 가야 할 이유가 없어졌네.”강 씨는 중국으로 건너온 지 3개월 만에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장사 밑천을 마련하려는 생각은 버릴 수가 없었다. 조선족 청년들은 돈을 주진 않았다. 강 씨는 시내에 가서 돈을 벌어 집에 보내주려고 결심했다. 조선족 청년들에게 차비를 빌린 그는 연길로 향했다.● 북송 비행기에서 느낀 행복키 작은 16세 소년이 중국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교회들을 다니며 하루하루 연명했다. 당시 연변의 교회들엔 그와 비슷한 신세의 탈북민이 많이 드나들었다. 이 과정에 그는 자기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탈북 소년들을 알게 됐다. 어쩌다 보니 30대 탈북청년 한 명과 10대 또래 청소년 3명이 한 팀이 돼 서로 의지하며 살게 됐다.30대 형이 늘 이들에게 “남조선에 가면 배고프지 않고 잘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목표는 한국에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가는지는 몰랐다. 이들은 막연하게 중국 항구에 가서 한국으로 가는 배에 몰래 타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런 생각을 공유하다보니 이들의 행선지도 중국의 항구도시를 향하게 됐다. 처음 대련에 가서 항구에 정박한 수많은 배들을 보며 “저걸 어떻게 탈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다시 이들은 상해로 향했다. 상해는 훨씬 더 큰 도시니 거기에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해를 넘겨 1999년 6월 상해에 도착한 이들은 도움을 요청하러 한인교회를 찾아 들어갔다. 당시에는 탈북민들이 상해까지 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교회에 들어간 직후 공안이 들이닥쳐 이들을 체포했다. 교회에 들어가기 전에 말을 나눈 조교(북한 국적을 가진 조선족)가 이들을 신고했던 것이다.김일성대를 졸업했다는 공안이 들어와 이들을 심문했다. 처음에는 조선족이라고 우겨도 봤지만 그때마다 가혹한 매질이 가해졌다. 강 씨가 조사실에 들어갔을 때 여러 명의 공안이 달라붙어 그를 거꾸로 세우고 발로 마구 때렸다.이들에게서 탈북민이란 자백을 받은 공안은 다음날 4명을 차에 태웠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는데 점심시간이 되자 큰 식당 앞에서 차가 멈췄다. 그리곤 이들에게 호화로운 점심을 먹였다. 강 씨는 태어나 그렇게 좋은 식당을 처음 봤다. 큰 원형 테이블에 음식을 가득 올려놓고 실컷 먹었다.점심을 먹은 뒤 공안이 다시 이들을 차에 태우고 가면서 “이제 너희들은 비행기를 타고 단동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비행기를 탄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던 강 씨는 속으로 “범죄자를 비행기를 타게 한다는 것이 말이냐 되냐”고 생각했지만, 차는 실제로 어느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 태우기 전엔 수갑도 풀어줬다.강 씨는 잠깐이나마 북송의 공포에서 벗어나 너무 행복했다.“나는 비행기를 타봤으니 성공한 인생이구나. 이젠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비행기에선 기내식까지 주었다. 비행기에서 주는 빵이 너무 비싸 보여 아끼느라 품속에 몰래 감추었다.2시간 지나 비행기는 단둥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중국 변방대 군인들은 상해 공안들과 달리 이들을 거칠게 대했다. 강 씨는 숨겼던 빵을 빼앗길 때 들었던 아까웠던 마음을 오래오래 기억했다. “그냥 먹을 걸….”● 자고나면 사람이 죽었다단둥에서 일주일 정도 수감생활을 마치고 이들은 신의주로 송환됐다. 다행히 신의주 보위부는 어른들에게 관심이 있었지 17살 청소년은 혹독하게 취조하지 않았다. 그때는 고난의 행군 직후라 강 씨처럼 중국에서 구걸하다 잡혀온 아이들이 수없이 많았던 것이다.이들 4명은 중국에 갇혀 있을 때 한국으로 가려던 것, 교회에 갔던 것은 죽어도 말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그걸 말하면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보위부 조사가 끝나 신의주 집결소로 이동했다. 이곳은 신의주에서 1차 심문을 끝낸 탈북민들이 살던 지역으로 호송되기 전 머물며 하루 12시간 이상씩 강제노동을 하는 곳이다. 그가 갔을 때 300~400명이 수감돼 있었다. 강 씨는 집결소로 가기 전 일이 힘들 것보단 빈대가 더 걱정이 됐다. 그만큼 신의주 집결소는 빈대가 많기로 소문이 났는데, 강 씨는 빈대에 약한 체질을 갖고 있었다.불행 중 다행으로 강 씨는 이 곳에 하루만 머물렀다. 마침 다음날에 함경북도 호송원들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강 씨는 수십 명과 함께 수갑을 차고 열차에 올랐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함북 청진의 농포집결소였다. 이곳에서 강제노동을 하며 도 내 각 군에서 호송원들이 오길 대기하는 것이다.그의 고향 무산은 청진과 기차로 불과 3시간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무산에서 호송원이 오지 않았다. 안전원들이 호송이란 귀찮은 출장이 싫어 서로 미루다보니 집결소에 온 많은 탈북민들은 기약없이 기다려야 했다.기다리는 동안엔 혹독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강 씨도 벽돌을 찍고, 시멘트를 만들고, 풀을 뜯는 따위의 일에 내몰렸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더러는 복도에 앉아 자야 했다. 먹을 것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키기 때문에 이곳에선 반 년 이상 버티기 어렵다. 강 씨가 있던 5개월 기간에도 농포집결소에서 13명이 영양실조로 죽었다. 강 씨 옆에서 자던 사람이 아침에 시체로 발견돼 끌려 나간 일도 있었다.시신들은 집결소 마당에 거적으로 덮어 방치해 둔다. 식사 시간이면 안전원이 나와 시체들을 가리키며 “조국을 배신한 놈들은 이렇게 죽어도 싸다”고 일장 훈시를 했다.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하면 수감자 중 몇 명을 불러내 손달구지에 시신을 싣게 한 뒤 뒷산에 올라가 대충 묻어버린다. 집결소에선 이걸 ‘직파’한다고 말했다. 시신을 깊이 묻지 않아 큰 비가 오면 산 여기저기에서 유골들이 노출돼 뒹군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어머니도 몰라본 아들의 모습기다리던 무산 호송원은 11월 말이 돼서야 나타났다. 이 때쯤 강 씨도 영양실조에 걸려 더는 운신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한 달만 더 있었더라면 강 씨도 뒷산에 직파될 뻔했다.무산으로 가는 탈북민들과 함께 열차에 탔을 때 강 씨는 도망갈 기운도 없었다. 다행히 집결소에서 알게 된 무산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북송된 지 얼마 안 돼 기력이 남아있었다. 그는 귓속말로 “내가 가다가 틈을 타서 도망칠 것이니 집주소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리곤 정말 밤중에 열차에서 뛰어내려 강 씨의 집을 찾아갔다.다음날 강 씨 일행은 무산역에 내렸다. 이들은 다시 무산군 집결소로 이동했다. 그런데 도중에 갑자기 어머니가 나타나 아들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나중에 어머니는 이렇게 회상했다.“네 친구한테서 네가 잡혀 온다는 연락을 받고 길에 나갔어. 그런데 사람 몰골이 아닌, 여름옷 차림의 새까만 맨발의 무리가 나타나 머리를 숙이고 지나갔어. 내 아들이 저기 있는데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겠는 거야. 일행이 지나가고, 다시 뒤돌아서 한 명 한 명 뜯어보았지.”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강 씨는 뼈만 남아 있었다. 게다가 여름에 체포됐을 때 입었던 옷을 6개월 내내 입고 온갖 험한 일에 내몰렸기 때문에, 옷을 입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어머니는 온 집안 재산을 다 털어 안전부에 뇌물을 주었다. 강 씨는 성인도 아니었던 터라 뇌물이 쉽게 먹혔다. 집결소에 끌려간 다음날 그는 바로 병보석을 핑계로 집에 왔다.이후 3~4개월 동안 몸이 부었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잠을 잘 때엔 집결소의 악몽이 떠올라 가위에 눌렸다. 보위부에선 수시로 찾아와 그가 집에 있는지 감시하고 갔다.● 몽골을 거쳐 한국에 입국2000년 봄이 왔다. 무산에 USA라는 글씨가 붙은 옥수수 마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북한 당국은 강연을 통해 “우리 장군님의 배짱에 미국 대통령이 납작 엎드려 빌었고, 미국을 살려주는 대가로 식량을 바치고 있다”고 선전했다.북한에선 그 말을 믿는 사람이 꽤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1년 넘게 지낸 강 씨는 이것이 모두 거짓말임을 잘 알고 있었다. 몸이 회복되자 그는 다시 중국으로 갈 생각을 했다. 이미 외부세계를 경험한 그는 북한에서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그는 어머니에게 “중국에서 일하며 벌었던 돈이 3000위안 있는데 그걸 찾으러 가야겠다”고 말하곤 집을 나섰다. 중국에서 살면서 아는 사람들도 생겼기 때문에 이번에 넘어가면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다시 예전처럼 두만강을 넘은 그는 연길에 가서 한국 목사를 찾았다.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이미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국 목사를 만나 그의 보호를 받으며 은신처에 머물게 됐는데, 성경공부를 하면서 1년 정도 지냈다. 물론 완벽하게 안전했던 것은 아니어서 한 번은 중국 공안에 함께 공부하던 일행과 함께 체포되기도 했다. 이들은 대련 변방대 청사 6층에 수감됐는데, 밤에 남자들은 배수관을 타고 도망쳤다. 여성들도 다음날 돈을 주고 풀려났지만, 북에서 각각 과학자와 의사였던 한 노부부는 끝내 풀려나지 못해 북송됐다. 이들이 북한에 가서 얼마 안돼 사망했음이 나중에 탈북한 뒤 한국에서 한의사가 된 부부의 딸을 통해 알려졌다.변방대에서 도망치는데 성공한 그는 교회가 운영하는 인근의 다른 숙소로 찾아갔다. 그런데 강 씨 숙소 사람들이 모두 잡혔다는 소식은 이곳에도 이미 전해졌다. 가뜩이나 긴장한 채 살던 이들은 강 씨가 문을 두드리자 창문에 밧줄을 드리우고 도망쳤다. 동네 사람들이 이걸 보고 신고하는 바람에 이들은 또 공안에 체포될 뻔했다. 한 친구는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손바닥에 화상을 입었는데, 그 상처는 몇 년 지나도 낫지 않았다.이렇게 숨을 조이며 살던 와중에 다른 곳에 있던 한국 선교사가 “지금 한국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연락을 해왔다. 이들은 주저 없이 길을 나섰다.2001년 2월 그는 6~7명의 탈북민과 함께 몽골로 향했다. 이때가 탈북민들이 한국으로 오는 루트가 개척되던 초기여서 중국과 몽골 국경 경비도 삼엄하지 않았다. 철조망 5개를 넘어 몽골 땅에 들어갔지만, 군인들은 보이지 않아 한참을 헤맨 끝에 열차역이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역무원에게 “울란바토르로 가고 싶다”고 하자 그제야 신고를 받은 군인들이 나타났다. 울란바토르에서 보름 정도 머무르다 드디어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두 번째 기내식은 빡빡 다 먹어치웠다. 2001년 3월 강 씨는 그렇게 한국에 도착했고 조사기관과 하나원을 거쳐 9월 사회에 나왔다.탈북민들은 서로 만나면 “하나원 몇 기냐”고 묻는다. 언제 왔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원이 생긴지도 올해로 25년. 매달 한 기수씩 배출되니 이제는 하나원 기수가 300기를 육박하는데, 강 씨는 하나원 13기이다. 이 정도면 빨리 온 것으로 따졌을 때 ‘레전드’급에 들어간다.● 인권에 눈을 뜬 청년강 씨가 처음 한국 사회에 나왔을 때 나이는 만 19세였다. 미성년자로 구분돼 임대주택도 받지 못하고 비슷한 또래의 탈북 청소년 2명과 함께 서울에서 천주교가 운영하는 한 직업학교 기숙사로 보내졌다. 이곳은 소년원 출신도 여럿 있는 등 학생들이 대개 거칠었다. 이들과 탈북 학생들은 자주 싸웠다. 한동안 싸우다가 나중에 싸우면서 정이 들어 친해졌다.아이들은 서로 “우리야 말로 진정한 남북통일을 했다”고 자부했다. 직업학교에서 1년 반 정도 머물며 강 씨는 선반기술을 배웠다. 돈을 벌어 가족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독한 마음으로 공부해 선반 2급 자격증 등을 따냈다.2003년 3월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있는 한 금형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은 쉽지 않았다. 가장 힘든 것이 차별이었다. 그가 일하는 회사엔 동남아 노동자들이 많았는데, 공장 사람들은 강 씨도 외국인과 똑같이 취급했다. 당당한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던 강 씨는 적잖게 상처를 입었다.그는 대학에서 공부를 해야 몸값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해 6개월 만에 공장을 그만두었다.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번 돈을 악착같이 모아 북한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한국에 데리고 온 것이다. 공장을 그만 둔 강 씨는 열심히 대학준비에 매진해 이듬해 한양대 경영학과에 했다.대학생활을 막 시작하려던 때에 시민단체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연락이 왔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유엔인권위원회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을 통과시키려 하는데, 여기에 참가해 북한 인권을 증언해달라는 것이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은 그가 한국에 올 때 비용을 지불해 준 인연이 있었다. 스위스에 로비를 하러 떠나는 대표단 10명 중 강 씨 혼자만 탈북민이었다. 이미 가족도 한국에 와 꺼리길 것이 없었던 그는 선뜻 응했다. 그는 스위스에서 세계 각국 대표단을 상대로 자신이 북한 집결소에서 겪었던 참혹한 실상을 증언했다.그때만 해도 그는 인권이란 개념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세계인권선언문을 읽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지옥 같은 삶을 강요당하며 살았는지 깨달았다. 더구나 북한이 유엔인권이사회에 가입돼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가 겪은 북한은 인권선언문의 조항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는 곳이었다.몇 달 뒤 떠난 중국 배낭여행은 인권에 눈을 뜬 그에게 목표를 만들어준 계기가 됐다. 파란 여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짐승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감한 그는 중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북한 인권 활동에 뛰어들었다.그는 대학에서 북한인권동아리를 만들었고, 다른 대학의 북한 인권 모임과 연계해 각종 캠페인과 세미나를 열었다. 나중엔 북한인권탈북청년연합을 만들어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다보니 대학 졸업도 늦어 2010년에야 졸업증을 받았다.● 이상과 현실 사이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2010년부터 2013년까지 3년 동안 민간단체인 북한민주화네트워크로 옮겨가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잡지 발간 일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북한 인권단체들은 열악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월급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강 씨는 고향을 바라보며 친구들을 향해 다졌던 맹세에 충실하려 애썼다. 2013년엔 고려대 북한학 석사 과정에 입학해 2017년 석사학위도 받았다.북한 인권을 알리는 활동도 계속 이어나갔다. 2014년 8월 15일 탈북청년 40명이 가수 이승철과 함께 독도에서 ‘홀로아리랑’과 ‘그날에’를 합창했던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는 당시 이 행사를 기획한 탈북청년연합 ‘위드유’의 사무국장이었다.하지만 사명감 하나로 버티기엔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2015년 1월 그는 돈도 벌지 못하는 자신을 묵묵히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던 탈북민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곧 아이도 생겼다.이제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취직을 생각했고, 2015년 하나은행 입사시험에 응시해 당당히 합격했다.연수와 고려대 지점 생활을 거치며 서서히 은행원의 삶에 익숙해갈 무렵 그는 통일부에서 탈북민을 대상으로 공무원 모집을 한다는 공고문을 보게 됐다. 가슴이 다시 뛰었다. 통일부에 가면 자신이 원하는 일을 월급을 받으며 할 수 있는 것이다.통일부는 박근혜 정부 시절 탈북민에게도 일부 채용의 문을 열었는데, 2016년 12월 그가 지원했을 때가 두 번째 공고였다. 탈북민 중에서 석사 이상 학력의 7급 공무원 1명과 9급 공무원 2명을 모집했다. 많은 탈북민이 지원해 경쟁이 나름 치열했는데, 시험을 통해 최종적으로 강 씨가 선발됐다.● 통일부에서 만들어가는 미래2017년 초부터 그는 통일부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기엔 적지 않은 35살이었지만, 강 씨는 첫 출근이 너무나 흥분되고 설렜다.“광화문 정부청사로 출근할 때 너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북한에 있었다면 평양도 가보지 못했을 제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통일 정책을 다루는 공무원이 돼 일하게 됐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고향에 가도 친구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뭔가가 생긴 것 같은 자부심이 생겼습니다.”자부심과 달리 신입 공무원 생활은 쉽지 않았다. 서무, 예산, 사업 등 모든 일들이 처음 해보는 것이라 낯설고 익숙하진 않았다. 부서도 자주 바뀌었다. 통일교육원에서도 일했고, 2021년엔 경의선 출입사무소에서도 일했다. 한산한 사무소를 지키며 그는 통일이 자신의 생각처럼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2022년 그는 6급 주무관으로 승진했다. 탈북민 중에서 공무원이 된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별정직이 아닌 공채 출신으론 6급이 현재 제일 높다. 지난해엔 통일부 장관상을 받는 등 부처 내에서도 인정받고 있다.현재 강 씨는 통일교육원에서 공무원 대상 통일교육 담당 주무관으로 일하고 있다. 안내, 교육자료 작성 지원, 강사 일정 조율 등이 그의 일과다. 2019년부터 공무원 대상 통일교육이 법정의무교육이 됐다.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은 장점도 많다. 가정에 돌아와서도 딸 둘의 재롱을 보며 행복감을 느낀다.그럼에도 활동가형인 그에겐 할 수 있는 일들이 한정된 공무원 생활이 완전히 맞는다고 할 수는 없다. 인터뷰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기자가 직접 통일부에 정식 요청을 넣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자부심으로 버티고 있다.“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도 통일돼 고향에 돌아가는 날만 꿈꾸고 삽니다. 오늘 열심히 배워 통일된 뒤 북한에 행정조직을 만들 때 저의 경험을 살려 이바지하려 합니다. 저는 출근할 때마다 굶어죽지 않았을지도 모를 고향의 친구들을 떠올립니다. 그것이 제가 하루하루를 사는 원동력입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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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의 황당한 현실 인식 ‘20×10 정책’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새해 벽두부터 대외적으로 ‘동족·통일’ 개념을 지우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한 김정은이 내부적으로는 ‘지방 발전 20×10 정책’으로 인민생활을 개선하겠다고 공언했다. 구체적으로 “매해 20개 군에 앞으로 10여 년간 현대적인 지방공업공장을 건설해 10년 안에 전국의 모든 시군과 전국 인민들의 물질문화 생활수준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북한에선 이를 ‘20승10 정책’이라고 읽는데, 노동신문은 “80년을 가까이 하는 우리 당의 역사, 75년을 경과한 공화국의 장성 발전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거대한 변혁, 거창한 혁명”이라고 치켜세웠다. 김정은은 23일부터 이틀간 평북 묘향산에서 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간부들을 강하게 질타하면서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 담당자들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김정은의 발언을 보면 현실 인식이 너무 황당해 회의장 간부들이 ‘자다가 잠꼬대를 하는 것 아닐까’라고 속으로 의심했을 것 같다. 보도를 접한 주민들도 기가 막혀 당황하지 않을까 싶다. 김정은은 “반드시 하겠다”고 결의했지만, 그게 실현 불가능한 목표라는 것은 김정은만 빼고 모두가 안다. 그러나 하지 않으면 “책임을 묻겠다”면서 “목을 내놓으라”고 하니 무서워서 말을 못 할 뿐이다. 김정은의 발언을 조목조목 반박하려면 책 하나도 모자랄 판이지만, 그의 연설을 듣고 북한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를 가장 원초적 반박이라도 대신 해주고 싶다. 김정은은 말했다. “지방 인민들에게 기초식품과 식료품, 소비품을 비롯해 초보적인 생활필수품조차 원만히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당과 정부에 있어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심각한 정치적 문제다.” 북한 사람들은 묻고 싶을 것이다. “그 심각한 정치적 문제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고는 있을까. 된장, 간장, 칫솔, 치약 등을 공급하지 못한 것이 아무리 짧게 잡아도 30년이 훌쩍 넘었는데, 긴 세월을 모르는 척하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문제라니. 자다가 깬 것인가? 그나마 드디어 이밥에 고깃국, 기와집 타령을 하지 않으니 다행스러운 건가?” 공장 200개를 짓는다고 주민 생활이 얼마나 좋아질지는 알 수 없다. 정작 주민들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다. 그들은 워낙 반세기 넘게 시달려서 이럴 때마다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공장 건설 인력은 군인들을 동원한다 해도, 건설비는 누가 대지?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생산설비, 자재, 원료는 어떻게 마련한단 말인가. 돈도 안 주고 책임을 묻겠다면 또 우리 주머니를 악착같이 털겠다는 말이구나.” 공장을 지어도 문제다. 이미 있던 공장들도 전기, 생산설비, 원료, 경쟁력 등 각종 문제 때문에 망가진 지 오래인데, 새로 또 짓는다고 이런 문제가 해결될 리도 만무하다. 그들의 궁금증 몇 개는 이미 김정은이 대답을 주었다. 건설자재, 설비, 원료 기지를 해당 지방 당 간부들이 책임지고 해결하라는 것이다. 심지어 국책사업으로 해결해야 할 전기, 철도 문제까지 간부들에게 책임을 전가했으니, 그들도 기막힐 것이다. “차라리 정찰위성, 미사일에 빠져 있을 때가 그립겠군. 어차피 앞으로도 돈이 생기면 무기 만드는 데 탕진할 거면서, 자기가 못 한 일을 최강의 대북 제재 와중에 우리보고 해결하라니.” 실제로 김정은이 직접 나서서 국책사업으로 추진하다가 망친 사례는 부지기수다. 폐허로 방치된 원산갈마관광지구, 껍데기만 완공된 평양종합병원, 파리만 날리는 마식령스키장, 준공식을 성대히 열고도 5년째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는 순천인비료공장…. 돈을 다 틀어쥐고도 실패만 거듭한 지도자가 권한 없는 부하들에겐 실패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니 간부들도 눈앞이 캄캄할 것이다. “전기와 사료가 없다”고 말했다가 조건타발을 한다며 처형된 자라공장 지배인 신세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다. 나중에 몇몇 공장이 돌아가도 생산 지속 가능성과 품질은 또 다른 문제다. 그때 가서 모든 생필품을 중국산에 의존해왔던 주민에게 조악한 품질의 북한산을 쓰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할지도 궁금하다. 시장경제만 도입해도 간단히 해결될 문제라는 것을 누구나 아는데, 김정은은 앞으로도 사회주의 채찍을 10년 더 휘두르겠다고 선언했다. 간부나 백성이나 머릿속에 공통으로 떠오를 말은 이것밖에 없다. “희망 없네. 망했군.”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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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실내 연평균 초미세먼지 세계 5위

    한국이 연평균 초미세먼지 수치가 가장 높은 나라 순위에서 5위를 기록했다. 글로벌 기술기업 다이슨이 전 세계 39개국, 44개 도시를 대상으로 진행한 ‘세계 공기 질’ 연구에 따르면 한국은 인도, 중국, 튀르키예, 아랍에미리트(UAE) 다음으로 초미세먼지 수치가 높았다. 이번 연구는 2022∼2023년 약 1년 동안 조사 대상국 가정에 분포된 약 250만 대 이상의 다이슨 공기청정기가 수집한 5000억 개 이상의 데이터에 의해 이뤄졌다. 연구 대상 전 국가에서 연평균 실내 초미세먼지 수치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연간 지침(m³당 5μg) 수준을 초과했으며, 특히 인도는 11배, 중국은 6배, 튀르키예와 UAE는 4배, 한국 루마니아 멕시코 이탈리아는 3배를 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연평균 초미세먼지 수치가 가장 높은 도시 5곳은 델리(인도), 베이징(중국), 상하이(중국), 선전(중국), 부산(한국)으로 모두 아시아에 속했다. 도시별 순위에서 서울은 이스탄불(튀르키예), 두바이(UAE)에 이은 8위에 올랐다. 이번 연구 결과 전체 조사 대상국 중 대부분의 국가가 1년의 절반 이상은 실외보다 실내 초미세먼지(PM2.5) 수치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2022년 기준 6개월 동안 월평균 실내 초미세먼지 수치가 실외 수치를 초과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7개국에서 2월이 실외 대비 실내 초미세먼지 수치가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한국의 경우 실내 연평균 초미세먼지 수치는 m³당 18.17μg으로, 실외 수치(17.24μg) 대비 5%가량 더 나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연구에 활용된 다이슨 공기청정기 데이터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공기 오염이 가장 심한 계절은 겨울로 나타났다. 겨울철 날씨가 추워질수록 사람들이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고, 창문을 닫은 채 연소 작용을 하는 난방 시스템을 가동하기 때문이다. 폐쇄된 공간에서 연소 작용이 지속적으로 이뤄질 경우 공기 오염을 유발하는 물질이 실외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축적되면서 실내 공기 질이 악화된다. 한국은 공기 오염 수치가 가장 높은 달이 1월로, 가장 낮은 8월 대비 2.6배 이상 높았다. 맷 제닝스 다이슨 환경제어부문 엔지니어링 디렉터는 “이번 조사를 통해 다이슨 공기청정기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와 기술적 아이디어를 얻게 됐다”며 “다이슨 공기청정기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은 MyDyson™ 앱에서 실시간 및 월간 보고서로 공기 질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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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짐 로저스 회장의 수행비서가 된 탈북여성[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2018년 11월, 세계 3대 투자자로 꼽히는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회장이 정유나 씨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유나, 너를 보좌관으로 영입하고 싶다.”앞서 로저스 회장은 정 씨에게 몇 차례 메일을 보냈다. 정 씨는 장난 메일인줄 알고 무시하다가 마지막 메일에 “만약 회장님이 맞다면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다.“세계적인 대학을 나온 수재들도 많고, 영어를 잘 하는 한국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필 저를 보좌관으로 영입하려 합니까?”정 씨의 질문에 로저스 회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I saw your dazzling brain through your eyes.(네 눈을 통해 너의 눈부신 두뇌를 봤다)”그리곤 설명을 이어나갔다.“나 같은 투자자들은 사람을 볼 줄 아는 능력이 있다. 나는 고맙게도 그 능력을 30대 초반에 가진 것 같다. 너는 매우 열정적이고, 북한 출신임에도 영어도 아주 잘한다. 나는 아주 잠깐이지만, 너의 역량을 봤다. 내가 왜 너를 굳이 영입하려는지 지금은 이해를 하지 못하겠지만, 나랑 같이 일을 하면 알게 될 것이다.”전화가 오기 얼마 전 로저스 회장은 채널A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와 화상 인터뷰를 했는데, 이때 정 씨가 영어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정유나와 짐 로저스 회장과의 첫 만남 영상 =>며칠 뒤 정 씨는 로저스 회장의 초대를 받아 부산으로 내려갔다. “북한에 전 재산을 투자하고 싶다”는 발언으로 화제를 모은 로저스 회장은 당시 3년 임기로 대북투자기업인 ‘아난티’의 사외이사로 이름을 올렸다.부산에 내려간 정 씨는 어리둥절했다.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7~8명의 남성이 그를 영접하더니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으리으리한 호텔 복도를 지나 커다란 문을 열었다. 로저스 회장이 그를 맞아주었다.그날 정 씨는 로저스 회장의 수행비서로 임명돼 이후 함께 세계를 누볐다. 로저스 회장이 만나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거물들이었다. 기억에 남는 일로 정 씨는 2019년 부산에서 열린 한-아세안 정상회담 만찬 때를 꼽았다. 당시 로저스 회장의 소개로 그는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고문,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 앞에서 북한의 실상을 이야기했는데, 모든 정상들이 그의 말을 경청하며 박수를 보냈다.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2년 2월 짐 로저스 회장과 만날 때 이들의 대화를 통역한 사람도 정 씨였다. ● 북한 오지에서의 어린 시절세계적인 거물 투자자의 개인비서실장(Personal executive secretary)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 씨는 1988년 북한에서도 가장 오지로 꼽히는 자강도 전천군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북한 최정예 특수부대인 스키부대 대대 참모장이었다. 스키부대는 특성상 비밀 유출 방지와 특수훈련을 위해 산간오지에 주둔한다.정 씨의 어린 시절 추억은 온통 산과 관련된 것이다. 군부대 주둔지엔 동갑내기도 없어 두세 살 나이 많은 오빠들과 울창한 산에서 오미자, 다래, 두릅을 따고 계곡과 폭포수에서 수영을 하고 가재를 잡고, 허리까지 내린 눈을 헤치고 학교에 가던 삶이 일상이었다.어린 유나가 꽁지머리를 촐랑이며 걸어가면 군인들이 ‘새끼 참모장’이라고 놀렸다.정 씨는 어렸을 때부터 끼가 많았다. 공부도 학급에서 제일 잘했고, 노래나 시낭송 대회가 열리면 늘 1등을 독차지했다. 담임선생이 그에게 늘 “유나는 커서 인민배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그가 인민학교에 다니던 때는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러나 특수부대에는 공급이 좋았던 터라 유나는 배고픔을 몰랐다.어느 날 “계란 후라이를 왜 안주냐”고 투정을 부리는 유나를 아버지가 부르더니 “부대 바깥 아이들은 하루 한 끼도 못 먹는데, 밥이라도 굶지 않고 먹는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고 혼을 냈다.아버지의 말이 거짓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유나도 현실을 깨달았다. 군부대 마을 아이들은 인근 농촌마을 애들과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그의 반에서도 세 명이나 굶어죽었다. 능쟁이 독에 올라 눈사람처럼 퉁퉁 부었다가 죽은 같은 반 남학생을 그는 아직도 기억한다.어느 날엔 어머니와 아버지가 밤에 조용히 나누는 대화도 엿들었다.“여보, 이러다가 우리도 배급이 끊기는 것 아닙니까. 그럼 나도 산에 가서 길짱구(질경이)를 캐야 하는데 명색이 참모장 아내이고 직맹위원장이니 달밤에 몰래 나갈 수밖에 없네요.”다행히 어머니가 풀을 뜯으러 나가는 일은 없었다.공부를 잘했던 정 씨는 인민학교를 졸업한 뒤 자강도 소재지에 있는 수재학교인 강계1고등 중학교에 입학했다. ‘자강도는 장군님의 제2의 고향’ ‘강계정신’ 등의 빨간 간판이 곳곳에 걸려있는 풍경이 낯설기는 했지만, 도시 생활은 나름 나쁘진 않았다.그러나 이곳에서 오래 있진 못했다. 1997년 여단 참모장(대좌) 직책으로 백두산에 동계훈련을 나갔던 아버지가 스키에 손가락들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해 1년 넘게 병상에 누워 있었다. 부대에선 부친에게 여단 고문으로 남아달라고 요청했지만, 부친은 고향인 함북 회령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1999년 정 씨는 아버지와 함께 회령으로 이사를 왔다.● 국경도시에서 받은 충격 국경도시인 회령은 그가 자라며 알던 세상과 너무 달랐다. 꽃제비도 많았고, 동창들은 당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도 전혀 없는 것 같았다.과수원에서 과일을 훔치는 동창들에게 그가 “아니, 장군님께서는 쪽잠에 줴기밥(주먹밥)을 드시며 현지 지도를 나가시는데, 우리가 여기서 도둑질이나 하면 되냐”고 하자 아이들이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더니 “너 멍충이 아니야? 선전부에서 나온 것 같구나. 배가 불러야 장군님 지키지 않겠어”라고 대답했다. 자강도에서 ‘우리는 장군님이 기억하는 사람들’이란 집단 최면 속에서 살던 그는 충격을 받았다.정 씨는 전학 오자마자 스타가 됐다. 독특한 자강도 억양 때문이기도 했지만, 수학과 영어도 학교에서 항상 1등을 차지했다.정 씨에겐 두 살 위 오빠가 있었는데 그 역시 학교에서 늘 1등을 도맡았다. 오빠는 북한 최고의 수재들에게 수여하는 ‘7.15최우등상’을 받았다. 이 상을 받으면 무조건 김책공대 등 중앙대학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오빠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김정일 친위부대인 974부대에 입대했다. 이유는 오빠가 173㎝로 학교에선 큰 키에 속했고, 출신 성분도 좋았기 때문이다. 북한은 각 지역마다 중앙당 5과 선발 대상을 할당하는데, 5과 지도원들은 당에서 내리 먹인 할당 인원을 채우기 위해 중학교를 돌면서 인원을 선발해 관리한다. 오빠가 졸업한 뒤 부모들이 김책공대에 보내려하자 5과 지도원이 “회령에서 7명을 뽑아 이미 당에 명단을 보냈는데, 이를 거부하면 정치적으로 걸린다”고 협박했다. 나중에 들으니 수재 오빠가 친위대라는 974군부대에 입대해 한 일은 외진 산골에 있는 김정일의 별장을 수리하는 일이었다.정 씨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김정숙교원대학 교원학부 음악과에 입학했다. 이곳은 인민학교 음악교사를 양성하는 곳이었다.아버지는 그가 대학에 입학하자 “날라리 같은 애들과 어울리지 말고 남조선 드라마 같은 것은 절대로 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야말로 밖에 나가 누구보다 많이 남조선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술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신사동 그 사람’을 흥얼거렸다. 조금 더 취하면 “지금이 어느 때인데 종신 대통령이냐. 김정일 저 ××가 나라를 다 망친다”고 욕을 퍼부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입을 막으며 “우리가 당신 때문에 관리소에 갈 거다”고 푸념했다. 사실 아버지는 군에 있을 때부터 집에 들어와 TV를 보다가도 쩍하면 “군대도 안 가본 게 최고지도자라니. 우리가 나라를 지키는 군대이지, 김정일을 지키는 군대냐”고 욕을 퍼부었다. 그런 아버지가 딸에게 남조선 드라마를 보지 말라고 하니 그 당부가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한국 드라마에서 받은 충격대학에 입학한 정 씨는 가야금을 전공하는 친구를 사귀게 됐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남조선 드라마에 푹 빠져 있었다. 그때부터 정 씨는 난생 처음 접하는 한국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 아버지가 늘 말하던 “벽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이 무엇인지 알았다.‘가을동화’를 시작으로 ‘황태자의 첫 사랑’ ‘목욕탕집 남자들’ ‘순풍산부인과’ ‘이브의 모든 것’ 등 숱한 한국 드라마가 회령에서 돌고 있었다. ‘이브의 모든 것’을 보면서 그는 이렇게 느꼈다.“장동건이 채림에게 고백했다가 차이는 장면이 있어요. 그 뒤 그는 집에 가서 파란 수첩을 꺼내들고 미국으로 날아가요. 그걸 보면서 아니 나라의 허락도 받지 않고, 국가 공무도 아니면서 개인 사정으로 비행기를 탄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생각했죠. 인천공항에 각종 비행기가 엄청 많았는데 처음 보는 것들이었죠. 북한 애들은 비행기를 그리라면 다 똑같이 그려요. 비행기라곤 영화에서 본 6.25때 미그15 전투기가 유일했거든요. 그리고 남조선은 미국의 식민지라고 배웠는데, 미국을 마음대로 가고, 미국인들과도 너무 잘 지내는 겁니다. 저는 남조선 사람들은 미국 사람들을 보면 일제 악질 순사를 만난 것처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머리 숙여야 하는 줄 알았어요.”드라마는 거짓일 수 있다고도 생각했지만, 회령에는 드라마 외의 영상도 많이 돌았다.“총리에게 계란과 밀가루를 뿌리는 영상도 봤는데, 북한 같으면 가족까지 다 잡혀갈 건데 저런 일을 한다는 것도 놀라웠고, 돌도 아닌 먹을 것을 마구 던진다는 것도 놀랐어요. 연예인 시상식도 봤는데 너무나 자연스러웠어요. TV를 향해 ‘엄마 보고 있어’라고 하는가 하면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는 말도 나왔어요. 회령에선 미신을 믿었다는 이유로 종종 사람을 공개처형했는데, 저긴 저렇게 신을 자유롭게 믿어도 되는구나 싶어 놀라웠죠.”드라마를 접한 뒤 정 씨는 더는 북한에서 살 생각이 없어졌다. 대학에서 배워주는 혁명역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꿈속에서도 원빈이나 송승헌이 나올 때쯤 그는 탈북을 결심했다. 그때가 2006년 1월이었다.● 한국을 향해 떠나다정 씨는 수소문을 통해 강을 넘겨줄 사람을 찾다가 한 국경경비대 중대장을 소개받았다.“얼마 주면 중국에 보내줄 거냐”고 묻자 중대장은 100달러라고 했다. 당시 경비대에 도강비로 주는 돈은 10달러 정도가 일반적이었지만, 정 씨는 그런 사정을 몰랐다.그는 집에 와서 집 천정에 숨겨둔 아버지의 비자금을 훔쳤다. 외화를 돌돌 말아둔 덩어리가 3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꺼냈더니 1200달러였다. 그 돈이면 당시 회령에서 집 서너 채를 살 수 있었다.중대장에게 100달러를 주니, 그는 직접 정 씨를 데리고 자신이 병사 시절 근무했던 먼 지역으로 데리고 가서 두만강을 건넜다. 그날이 2006년 3월 2일이었다.강을 건너는 데는 대략 3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산을 타니 낙엽이 워낙 많이 쌓여 소리가 요란했다. 이때 등 뒤에서 총소리가 7번 터졌다. 당시는 국경을 건너는 사람을 사살하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하달됐다고 한다. 다행히 추격은 없었다.중대장이 자기가 친하게 지낸다는 중국의 한 촌장 집에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그리곤 “이 아가씨한테 1000달러가 있으니 절대 인신매매범에게 넘기지 말고 한국행 브로커에게 바로 인계하라”고 당부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날 중대장이 다시 강을 건너왔다.“유나야. 너를 보내고 가다가 아무리 생각해보니,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남조선에 꼭 가야 되겠냐. 내가 집이 평양이고 집도 잘 사는데, 나랑 결혼해 평양에 가서 사는 것이 어떻겠냐.”중대장의 고백에도 정 씨의 뜻은 단호했다. 설득시키지 못한 중대장은 돌아가면서 “동남아까지 무사히 도착하면 꼭 촌장의 집에 전화해 달라”고 당부했다. 촌장에게 500달러를 주니 다음날 멋진 승용차가 나타나 그를 태우고 떠났다.옌지, 베이징, 쿤밍 등을 거치면서 정 씨는 신이 났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구멍이 난 청바지를 입으니 드디어 내가 원하던 세계가 가까이 오는가 싶은 생각도 들었고, 노래방에 가서 마음 놓고 남조선 노래를 부르니 희열도 솟구쳤다.베이징에서 한국으로 가는 다른 탈북민들과 합세해 일행은 11명으로 늘어났다. 태국에 도착해 경찰에게 단속되기도 했지만, 이때 유나의 영어가 통했다. “100달러 줄 테니 우리를 풀어 달라”고 하자 경찰이 돈을 받고 사라졌다. 일행을 이끌고 한국 식당으로 찾아간 것도 유나였다. 문 밖에서 보니 식당 여주인의 머리 스타일이 한국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같았다.그 식당 주인 내외의 도움으로 일행은 방콕으로 와 한인교회에서 도움을 받았다.● 조사기관에서 만난 아버지방콕에서 3개월 동안 성경공부를 하며 머물던 그는 마침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드라마에서 보던 비행기를 타보니 너무 떨려 신발을 벗고 타려 했고, 한국 땅이 아래에 보일 땐 눈물이 절로 났다.인천공항은 드라마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멋이 있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대리석을 처음 보는 그는 미끄러질까봐 얼음판을 걷듯이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뒤의 미래로 간 것 같았다.조사기관에 들어갔을 때 그의 수중에는 200달러가 남아 있었다. 조사관들은 북에서 탈북해 곧바로 어린 소녀의 품에서 큰 돈이 나오자 아버지가 뭐하냐며 꼬치꼬치 캐물었다.8월 초 조사도 끝나고 자유로운 상태가 되자 마당에 나가 운동도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마당에서 공놀이를 하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유나야”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올려다 보니 4층 창문에서 머리가 길고, 수염이 덥수룩한 아버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니, 회령에 있어야 하는 아버지가 왜 여기 있지?”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도망간 딸을 잡겠다고 중국에 넘어왔다가 공안에 체포됐다. 하지만 북한 최정예 특수부대 지휘관이었던 아버지는 달리는 차에서 공안을 제압하고 탈출했다. 이후 딸이 한국으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37일 동안 산을 타고 3000리를 행군해 대련까지 온 뒤 위조여권을 구해 한국으로 오는 배를 타고 건너왔다. 정 씨가 방콕에 머무는 3개월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정 씨는 아버지가 크게 화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을 보고 “너 살아 있었구나. 건강히 지내다가 사회에 나가서 보자”고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정 씨는 하나원을 거쳐 2006년 11월 사회로 나왔다. 아버지는 조사 기간이 길었다. 비밀을 많이 알고 있다 보니 하나원을 거치지 않고 한미일의 합동 조사만 6개월을 받은 끝에 이듬해 3월 사회로 나왔다. 정 씨는 아버지와 함께 경기도 분당에 임대주택을 받고 살게 됐다.정 씨는 아버지와 함께 열심히 돈을 모아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간 어머니를 2년 뒤에 구출해 한국에 데리고 왔다. 정 씨가 탈북한 뒤 974군부대에 복무했던 오빠는 오지로 쫓겨났다. 어머니를 데려온 이듬해 오빠도 한국에 데려왔다.처음 오빠와 통화했을 때 군에서 세뇌된 오빠는 “내 앞길을 막은 유나를 총으로 쏴죽이겠다”고 펄펄 뛰었다. 하지만 부녀가 돈을 보내지 않자 6개월 뒤 중국으로 탈북해 “나도 데려가달라”고 연락해왔다. 이후 오빠는 연세대와 해외 유학을 거쳐 현재 유명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미용사로 시작한 정착 정 씨의 한국 정착은 쉽지 않았다. 남조선에만 가면 자유롭게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며칠도 되지 않아 끝났다. 어머니를 데려오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첫 직업은 커피숍 알바였는데, ‘카라멜 마키아토’ ‘블랙티 레모네이드’와 같은 생소한 단어에 쩔쩔 매며 실수를 연발하다가 일주일 만에 쫓겨났다.두 번째로 찾은 직업은 편의점 알바였는데, 저녁 8시에 나가 새벽 타임을 근무했다. 아침에 들어와 4시간 정도 자고 미용학원을 열심히 다녀 8개월 만에 미용사 자격증을 받았다.하지만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어도 회답이 없었다. 그는 직접 동네 미용실을 찾아나섰다.“원장님, 저는 북에서 왔는데요. 시키면 뭐든 다 할 테니 제발 취직 좀 시켜주십시오.”하지만 20세도 안된 그를 선뜻 받는 곳은 없었다. 그러다가 ‘아니온미용실’ 김태연 원장을 만났다. 정 씨를 안쓰럽게 여긴 김 원장은 그를 키워주기로 했다.처음 몇 달은 너무 힘들었다. 샴푸독이 올라 손에서 피가 줄줄 났다. 어머니를 데려오기 위해 버스비조차 아끼다보니 7~8개 정거장 거리를 걸어 다녔다. 퇴근길에 너무 힘들어 벤치에 앉아 혼자 슬피 운적도 많았다.나중에 한 예술대학 문화예술전공 학부에 입학하기도 했지만, 일과 병행하기 힘들어 2학년 때 자퇴했다. 그는 외국에 나가기를 꿈꿨다.그래서 인근 지구촌교회에 나가 4년 넘게 외국인들과 하루에 2시간씩 공부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영어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 나중에 해외 유학을 간 오빠를 따라가 반 년 동안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도 했다.● 정유나의 꿈 10년 동안 미용실에서 일하며 이제는 한국에서 잘 살 수 있는 자신감이 붙었을 때 인생을 바꾼 일이 벌어졌다.이만갑 제작진이 수소문 끝에 그에게 출연해달라고 요청을 해온 것이다. 2017년 이만갑에 처음 나간 그는 고정 출연자가 되게 됐다. 얼굴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에서 강연 요청도 많이 들어왔다. 고민 끝에 그는 미용실 일을 그만두고 방송인으로 살기로 했다.2018년 짐 로저스 회장과 화상 인터뷰를 한 것은 그의 인생을 바꾼 또 다른 계기였다.코로나가 퍼지기 전까지 1년 남짓 기간 그는 전 세계를 누비며 수행비서 겸 북한을 알리는 홍보대사로 활동했다.코로나 이후 로저스 회장은 그에게 “난 이제 해외에 거의 다니지 않고 필요하면 부를 것이니 너는 한국에서 이제부터 하고 싶은 일들을 해보라”고 말했다.이때부터 그의 끼가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강연, 공연, TV, 라디오 출연으로 스케줄이 빈틈없이 가득 찼다. 1월 초에도 부산에서 삼성생명, KB 손해보험 FC들을 대상으로 꿈과 동기 부여에 관한 강연을 3일 연속 한 뒤 곧바로 미국 공연길에 오른다. 공연은 그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다. 바이올린과 손풍금을 멋들어지게 연주하고, 노래까지 잘 부르는 그는 탈북예술인 공연단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하지만 그의 꿈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는다.“어쩌다 보니 제가 세계 유명 정치인, 경제인, 금융인들을 많이 만나보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 자신감과 꿈이 커졌어요. 앞으로 제 꿈은 한반도를 위해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탈북 여성 정치인도, 외교관도 없잖아요. 저는 로저스 회장님과 동행하면서 어떻게 외국 투자자들과 정상들이 투자를 하게 만드는지도 배우게 됐습니다. 통일되면 저는 한반도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해외 투자를 적극 유치하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남북이 통일되면, 그때에야 말로 통일부가 할 일이 많아질 것인데, 통일부 장관을 탈북민이 못할 이유가 없죠.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지금까지 삶을 통해 꿈을 꾸는 사람에게 길이 보이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길이 열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 정유나가 어디까지 가는지를 지켜봐주시고 응원해주십시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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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도발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징검다리’ ‘돈줄’ ‘동네북’. 기분 나쁘지만 북한에 한국의 용도는 위의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징검다리는 미국에 접근하기 위해 한국을 이용한다는 의미다. 대표적 사례가 2018년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집권한 뒤 관계 회복 가능성을 엿본 북한은 한국을 징검다리로 이용하려 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된 뒤 북한에 가장 중요한 전략적 생존 과제는 미국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로 수십 년을 살아오다가 한 축이 부러지자, 이번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양다리를 타려 한 것이다. 북한은 소련 붕괴 직후부터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줄기차게 문을 두드렸다. 1차 북핵 위기도 미국의 시선을 끌기 위한 시도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2000년 말 북한은 그토록 원하던 북-미 수교라는 목표에 거의 근접했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과 9·11테러로 미국의 관심을 중동에 빼앗겼다. 중동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 후 첫 외교적 업적을 쌓을 곳으로 북한을 주목하자 김정은은 대담하게 문을 열고 나왔다. 2018년 급작스러운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와 4월 판문점 회담 모두 미국에 보내는 러브콜이었다. 북한은 미국과의 수교 없이는 대북 제재를 풀 수 없고 경제난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정상 국가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미국에서 대통령이 인권 탄압으로 악명 높은 북한 세습 독재자와 손을 잡는다는 것은 재선을 포기하는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북한의 시도는 체제의 획기적인 변화 없이 이뤄지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북-미 수교나 대북제재 해제, 국제사회 진출 등 북한에 절실한 것들은 모두 미국이 쥐고 있다. 그 대신 한국에는 대북 경제 지원을 할 능력 정도는 있다. 2002년부터 시작해 2009년까지 북한은 매년 식량 40만 t, 비료 10만 t 등 각종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북한은 ‘밥값’은 하려고 노력했다. 지원 기간 인명 피해를 초래하는 어떠한 도발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위의 두 용도로 사용하기 어렵거나, 내부에 더 중요한 일이 생기면 북한은 한국을 가차 없이 동네북으로 사용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직전 3년이 그랬다.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정일은 죽음이 다가옴을 직감했다. 그는 사망 전까지 3년 남짓을 오로지 후계 구도를 완성시키는 데 몰두했다. 대문을 열고 비밀스러운 집안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법. 이명박 정부가 대북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지만 김정일은 한국의 용도를 다른 곳에서 찾았다. 2010년의 천안함 공격과 연평도 포사격은 내외부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사람들은 북소리가 요란한 곳을 쳐다보기 마련이다. 2010년의 도발은 김정은이 업적을 쌓기 위해 한 짓이라는 분석들도 있지만 북한 시스템에서 김정일의 지시 없이 후계자가 단독으로 그런 일을 저지를 수는 없다. 이런 도발의 결과 북한은 스스로 내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세습에 필요한 시간을 벌고, 김정은을 강력한 지도자로 미화시켰다. 북한 사람들이 전쟁이 터질까봐 걱정하는 사이 김정일은 아들에게 당과 군, 비밀경찰과 금고 등을 차례로 물려주었고, 세습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숙청했다. 올해 북한은 다시금 한국을 동네북으로 활용하려 한다. 김정은은 새해 벽두부터 한국을 주적, 적대적 교전 국가로 규정하고 가용한 무력을 총동원해 초토화하겠다며 위협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의도는 뻔하다. 6년째 이어지는 사상 최강의 대북제재, 3년간의 코로나 셀프 봉쇄로 경제가 파탄 난 상황에서 김정은은 김주애로의 후계 구도를 완성시키려 하고 있다. 민생이 도탄에 빠졌는데 열한 살짜리 어린 딸을 위한 4대 세습에만 집착하고 있느냐란 원성을 누르기 위해 김정은에게 필요한 것은 비상계엄령과 시선을 돌리기 위한 북소리다. 전쟁 위기를 고조시켜야 ‘준전시 상태’ ‘전시 상태’로 내부 통제 수위를 높일 수 있다. 그러면 김정은은 주애를 위한 시간도 벌고, 주민들의 시선도 돌리며, 4대 세습에 반대하는 ‘눈빛이 불량한 자’들을 전시 상태에 준하는 즉결처분으로 제거할 수 있다. 새해 벽두부터 김정은은 그 방향으로 판을 깔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북한이 울릴 포성에 대비해야 할 순간도 다가오고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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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뷰티 전문가로 변신한 북한 여성 돌격대원[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2000년 10월 평양과 남포 사이 42㎞ 구간에 왕복 10차선의 청년영웅도로가 건설됐다. 북한은 이 도로를 ‘위대한 장군님 시대의 청춘 서사시’라고 찬양했다. 북한은 약 2년 동안 10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동원돼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인력만으로 완공한 고속도로’라며 격찬했다.도로가 완성된 지 한 달 뒤 김정일은 현장을 둘러보고 “청년영웅도로는 우리 당의 청년 중시 사상이 낳은 위대한 창조물이다”라는 장문의 담화를 발표했다. 일부만 언급하면 이렇다.“청년들이 이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강성대국 건설의 대통로라고 하였다는데 그럴 만합니다. 이렇게 넓고 시원한 고속도로는 세계적으로도 드물 것입니다. 청년영웅도로는 우리 당의 청년 중시 사상이 낳은 위대한 창조물입니다. 당의 청년 중시 사상은 청년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 당은 언제나 청년들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청년들을 믿고 내세워 어려운 과업들을 수행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당은 고속도로공사 전 기간 여기에 깊은 관심을 쏟았으며 청년 건설자들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았습니다.”지금은 다니는 차도 거의 없고, 관리도 안 돼 여기저기 패인 이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노예노동을 강요 당했던 청년 중에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나서 자란 16세 김연희(가명)도 있었다.● 2000년 청년영웅도로김 씨는 2000년 3월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동료 2명과 함께 이 도로 공사장에 차출됐다.그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열차를 타고 10여일 만에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가 소속된 중대는 100명 정원 중 33명만 남아 있었다. 자고 나면 도주자가 속출했다. 남아있는 사람들도 눈이 휑하게 들어간 채로 넋이 나간 표정들이었다.냉기가 그대로 들어오는 흙벽돌로 쌓은 임시 숙소에서 잠이 들자마자 기상소리가 울렸다. 그날부터 그는 새벽 5시30분에 일을 시작해 저녁 6시까지 흙 마대를 날랐다. 이틀에 한 번씩은 야간작업이라며 1시까지 일했다.100㎏짜리 마대에 흙을 담은 뒤 두 명이 번쩍 들어 김 씨의 어깨에 얹어주면 수십m 떨어진 도로까지 가서 퍼부어야 했다. 흙이 쌓이면 큰 망치를 들고 땅을 내리쳐 다졌다.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시키면서도 하루 식사 정량은 400g에 불과했다. 집에서 옥수수를 볶아 넣어간 주머니는 한 알, 한 알 세면서 먹었어도 금방 바닥이 났다.겨울에는 추워서 고생했고, 여름엔 모기에 뜯기며 더워서 고생했다. 샤워실도 없었다. 며칠에 한 번씩 어둑어둑해지면 인근 저수지에 사람들을 인솔해 간 뒤 씻으라고 했다. 이쪽엔 여성들이, 건너편엔 남자들이 단체로 들어가 씻고 나왔다. 김 씨는 너무 굶주리면 부끄러움 따위는 없어진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호수에 들어간 누구나 머리 속에 먹을 생각만 가득할 뿐 이성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공사장엔 사고도 잦았다. 그의 작업장에서도 한꺼번에 7명이 차에 치여 죽은 대형 사고도 발생했다. 실제 북한은 나중에 도로 건설과정에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났음을 직간접으로 인정하기도 했다.그래도 무서워 도망갈 생각도 못했다. 허약해져 겨우 걸을 수 있는 상태에서 도망을 쳐봐야 얼마 안 돼 잡힐 것이다. 지휘관들이 사람들 앞에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때렸다. 매 맞는 도주자들의 비명이 도로 공사장 어디에서나 매일 터져 나왔지만, 그럼에도 살려면 도망쳐야 했다. 얼마쯤 지나니 그와 함께 차출돼 온 공장 동료 2명도 보이지 않았다. 도주에 성공한 것이다.그는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며 한탄했다. “난 왜 태어났을까?”다행히 그는 2개월 뒤 중대 식당 식모로 발령이 났다. 식모들도 다 달아나니 밥을 지을 여성이 부족했던 것이다.밥을 짓는 일이다보니 배고픔에선 일단 벗어났다. 금방 원망하던 마음이 달라졌다.“집에서 배곯는 것보다 여기서 일하는 게 차라리 낫구나.”● 1990년대 고향김 씨는 태어나서 배고픈 기억밖에 없었다. 그는 13살 때부터 고향에서 빵 장사를 시작했다. 빵을 만드는 집에서 외상으로 받아와 팔면 얼마쯤 남았다. 그것으로 자기 배를 채우기도 버거웠지만 학교를 다니며 굶주리는 것보단 나았다.그가 태어난 고향은 두만강 국경도시인 함북 회령 시내에서 걸어서 3시간쯤 떨어진 농촌마을이었다. 탈북민들에게 악명 높은 ‘전거리교화소’가 걸어서 3시간쯤 거리에 있었다.김 씨가 1984년에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광산 광부였다. 김 씨가 인민학교 4학년 때인 1995년 고난의 행군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가정의 생계는 어머니가 책임졌다. 산에 올라가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지만, 절반은 도둑을 맞고 절반만 겨우 건져오면 다행이었다. 집도 세 번이나 도둑을 맞아 건질 것이 없었다.그는 학교에 가면 12개 과목을 공책 한 권에 받아 적었다. 책 살 돈도 없었다. 그렇게라도 학교에 나오면 다행이었다. 학교에 오는 학생들은 갈수록 줄어들었다.“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어요. 한 번은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아버지가 쥐가 들어온 줄 알고 어둠 속에 파리채를 들고 나가 휘둘렀는데, 등잔을 켜고 보니 앞집에 살던 6살짜리 아이가 들어와 밥을 훔쳐 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영양실조가 심하니까 울지도 못하는 겁니다. 감자밥이라도 먹여서 보냈는데 이틀 뒤에 죽었어요.”김 씨의 집도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고향이 중국이어서 연변에 친척들이 살았다는 것이다.가난한 집안 형편을 견디다 못해 아버지는 1995년 몰래 중국에 건너가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서 왔다. 그러나 그걸로 밀린 빚을 갚고 나니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1997년 아버지가 다시 중국에 들어가려 할 때 13살 김 씨는 무조건 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가겠다고 졸랐다. 중국에 가면 며칠이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딸이 안쓰러웠는지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두만강을 몰래 넘었다. 중국에 가서 닷 새 동안 머물며 난생 처음 행복하게 살았다. 연변에 사는 친척들은 가난했다. 김 씨 부녀가 나올 때 170위안을 모아 주었는데, 그걸 갖고 오다 그만 국경경비대에 체포됐다. 다행히 김 씨의 기지로 20위안만 빼앗기고 150위안은 숨길 수 있었다. 안전부에선 그래도 아이를 데리고 조국으로 돌아왔다며 큰 처벌을 하지 않았다. 150위안으로 빚을 갚고 나니 딱 한 끼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시간은 흘러 그는 2000년 중학교를 졸업해 시멘트공장 노동자로 발령이 났다. 공장에 가자마자 고속도로 건설현장에 끌려가 6개월 동안 고생을 했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다.● 2005년 두만강김 씨는 공장에서 21세 때인 2005년까지 일하다가 다시 중국으로 몰래 건너갔다. 그가 중국에 간 동기는 어머니에게 치아를 해줄 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너무나 고생을 한 어머니는 이가 하나둘 빠지다가 이때쯤 남은 이가 없게 됐다. 음식을 씹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다 못해 그는 추운 겨울 두만강을 넘었다.12월 말이 돼도 두만강은 가운데가 얼지 않았다. 몰래 강을 넘던 그는 중간쯤에서 물에 풍덩 빠졌다. 겨우 빠져나왔는데 옷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관절을 굽힐 수가 없으니 펭귄처럼 엉큼엉큼 움직여 겨우 중국에 갔다.그렇게 찾아갔지만 중국 친척들에게선 도움을 거의 받을 수가 없었다. 며칠 뒤 다시 나오다가 또 강에 빠졌다. 기어서 북한 기슭에 도착했지만 지쳐서 얼음판 위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침 순찰을 돌던 경비대가 그를 발견하고 업고 갔다. 북한에서 발견됐기에 큰 처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얻은 소득은 없었다.집에서 얼마쯤 있다가 다시 중국으로 넘어갔다. 이번엔 중국에서 취직해 직접 돈을 벌려고 생각했다. 집에는 장사를 간다고 말하고 떠났다. 중국에서 일자리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그때는 연변에서 탈북민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고 있었고, 더구나 2008년 베이징 올림픽까지 앞둔 터라 경계도 삼엄했다.그렇게 중국에서 제대로 된 직업도 못 구하고 친척집을 전전하는 가운데 세월이 하염없이 흘렀다. 친척의 친구 언니 집에 가서 아이를 봐주며 몇 달을 보내고 있을 때, 그 언니가 “그러지 말고 남친이라도 사귀라”며 한 남자를 소개해주었다.그 남자는 자기 사무실에 와서 밥을 해주면 돈을 주겠다고 했다. 남자 사무실에는 컴퓨터 여러 대가 있었고 직원 여러 명이 상주했다. 드디어 컴퓨터 업종에 종사하는 남자를 만나 중국에서 자리를 잡나 싶어 기뻐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에 공안이 들이닥쳤다.그는 뒷문으로 도망쳐 체포되진 않았지만, 남친을 포함해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다 잡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친의 직업은 보이스피싱범이었다. 그는 그때 처음 보이스피싱이라는 사기 수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김 씨는 중국에 있을 때 한국에 가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돈을 벌어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치아를 해주겠다는 생각뿐이었다.하지만 공안의 추적을 받는 막다른 골목에 빠지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친구 언니가 소개한 한국의 탈북민 모임 사이트에 접속해 여기저기 도움 요청을 보냈다. 그렇게 연락한지 사흘 만에 브로커를 만나게 됐다. 브로커의 지시에 따라 다른 탈북민 16명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던 때가 2009년 5월이었다. ● 2009년 평택인천공항에 내릴 때 그는 많이 무서웠다. 인솔자가 너무 무섭게 통제하다보니 “내가 납치당해 가는 것 아닌가”라는 두려움도 있었고, 공항에 내려서 기자회견을 할까봐 걱정도 됐다. 그때까지 그는 한국에 가면 무조건 기자들이 달라붙어 물어보는 줄 알았다. 그러면 고향에 있는 가족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 우려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합동조사는 비교적 쉽게 끝났다. 그는 고향에서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와 있는 줄 몰랐다. 아는 사람이 많으면 조사는 비교적 빠르게 진행된다.2009년은 탈북민들이 가장 많이 한국에 입국한 해이다. 베이징 올림픽 때문에 이동이 차단됐던 탈북민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그해에만 3000명 가까이 입국했다. 그가 하나원에 갔을 때 같은 기에 여성만 무려 245명이나 됐다. 하나원에선 매달 4만 원씩 용돈을 주었는데, 그는 사회에 나가면 돈이 없을 것을 우려해 먹고 싶은 것도 먹지 않고 악착같이 모았다.그해 9월 그는 하나원을 나와 평택에 정착했다. 먼지가 뽀얀 임대주택을 청소하고 있을 때 브로커가 맨 먼저 찾아왔다. 그래도 그 브로커는 착한 사람이었다.초기 정착금으로 300만 원이 나왔는데, 중국에서 맺은 브로커 비용 계약이 300만 원이었다. 브로커는 “내가 다 가져가면 먹고 살기 어려울 것”이라며 280만 원만 받아갔다.20만 원으로 그의 첫 한국 정착이 시작됐다. 돈이 없어 초기 3개월은 먼저 한국에 온 친구가 준 옷을 입고 지냈다. 나흘 만에 그는 벼룩시장을 뒤져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휴대전화 부품에 땜을 하는 작업이었는데, 그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금방 적응했다. 그런데 그 일자리에서도 텃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신입이 너무 빨리 컨베이어에 섰다”며 매일같이 온갖 구박을 하는 한 중년 여성 때문에 6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나왔다.컴퓨터 학원을 다니며 엑셀 자격증을 따고 한 회사 경리로 입사했는데 이곳에서도 3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용어도 잘 모르는 그에게 산더미 같은 일감을 들이밀며 무작정 혼을 내는 부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웃 직장 경리가 매일 같이 산책로에 나와 우는 그에게 “이곳에서 버틴 사람이 없다”고 슬그머니 귀띔을 해주었다. 결국 그 일도 3개월 뒤 그만두었다.일을 그만둘 때마다 앞길이 막막했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힘들 때마다 그의 머리 속에선 13살 때 빵을 팔려 다니던 일, 16살 때 흙 마대를 메고 달리던 시절이 떠올랐다. ● 2024년 예천어느덧 14년이 흘렀다. 김 씨는 안동에 있는 경북도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예천군의 한 거리 도심에 피부 관리실을 운영하고 있다. 정성스럽게 서비스를 한다고 소문이 나 고객들도 많아졌다.그는 이제 뷰티 전문가로서 한국 사회에 당당히 자리 잡았다. 거저 얻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2011년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오누이를 낳아 키우던 전업주부 시절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집에서 마냥 놀고만 있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평생을 할 수 있는 직업을 수소문하다가 피부 미용을 선택했고, 이왕 시작하려면 제대로 배우고 시작하겠다는 결심으로 2017년부터 4년제 대학 과정을 마쳤다. 졸업 직후 피부관리실을 연 뒤에도 2년제 석사과정까지 내처 마쳤다. 석사과정을 마칠 때는 매주 3일을 왕복 3시간씩 차를 몰아 수업을 듣고 왔다.“피부미용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5년 동안은 하루도 휴식한 날이 없었던 것 같아요. 매일 9시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일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살아 피부 관리실을 열면서 받았던 대출도 이미 다 갚았습니다. 요즘은 주변에서 하도 말려서 일요일엔 가끔 쉬긴 합니다.”서비스직에 종사하는 탈북민들은 보통 자신의 신분을 숨긴다. “북에서 온 사람이 잘하면 얼마나 잘 하겠냐”는 편견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일을 시작한 뒤로 자신의 고향을 숨긴 적이 없다. “처음엔 저도 무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더 잘해주려 노력하니 어느 순간부터 고객들도 인정하고, 다른 고객을 소개해 데려오기도 합니다. 한국은 노력한 것만큼 이룰 수 있는 사회라서 만족합니다.”그는 요즘 사이버대를 또 다니고 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다.“사회가 고령화되면서 고령 인구가 늘고 있고, 노년에도 자기 관리의 중요성을 느끼는 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노인 피부 미용을 전문으로 하려는데, 그러자면 사회복지도 꼭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그가 노인 피부 미용을 전문으로 하려는 것은 단순히 시장이 확대돼서만은 아니다.“북에 사시던 부모님들이 다 돌아갔습니다. 돈을 벌어 어머니에게 치아를 해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려 탈북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제 마음 속에 평생의 한으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 하지 못한 효도를 이제 부모님 또래의 어르신들에게 하고 싶습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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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에 뿌리 내린 북한 새댁…‘복희네농장’ 김복희 대표의 소원[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 태풍을 맞는 곳이다. 제주 사람들에게 이곳에서도 가장 바람이 센 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주저없이 남서쪽 송악산과 산방산 아래에 위치한 대정과 안덕면을 꼽는다.몇 년에 한 번 큰 태풍이 오면 숱한 나무들이 꺾여 쓰러지는 이곳 산방산 아래에 한 탈북 여성이 꿈을 꾸고 살고 있다. 어떤 바람에도 끄떡없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안덕면에서 감귤농장인 ‘복희네농장’을 운영하는 김복희 씨는 1978년 남포에서 태어나 2018년 한국에 정착했다. 제주도 토박이인 남편을 만나 2020년 제주로 옮겨와 현재 4000평 규모의 감귤농장을 운영하고 있다.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저는 잠잘 때도 늘 꿈을 꿉니다. 머리 속에 앞으로 해야 할 일만 가득한 것 같아요. 친구도 안 만나고 놀려 다닐 시간도 없습니다. 돈을 벌면 모두 식물과 장비를 사는데 씁니다.”제주 정착 3년 만에 김 씨는 이미 감귤 재배를 위한 일반 기술을 모두 습득했고 조경수 사업도 성공시켰다. 주변에서 모두 “귤 농사나 잘 짓지 뭘 엉뚱한 일을 벌이냐”고 할 때 그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고, 지금은 조경수 판매로만 일반 농가의 소득이 나온다. “뭘 몰라서 그런다”고 하던 주변의 시선은 이제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냐. 머리가 참 좋다”라는 감탄으로 변했다.“저는 5개년 계획이 있어요. 복희네종합테마농장을 만들 겁니다. 산방산에 놀려오면 꼭 들리게 되는 곳으로 만들려고 해요. 지금의 귤 농장은 누구나 무료로 와서 돌아볼 수 있고, 실비로 과일을 따는 관광체험농장으로 만들 겁니다. 그리고 이 주변에 누구나 와서 사진을 남기고 싶은 예쁜 야자수 숲을 만들고요, 동물농장도 만들 겁니다. 그러면 아담한 돌담을 두른 민박집도 있어야겠죠. 그 집은 새들이 지저귀고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한 정원으로 둘러싸게 될 겁니다. 이곳을 머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곳으로 만들려고 합니다.”아름다운 정원과 과수원은 제주에 와서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어린 시절 머리 속 어딘가에 저장된 아득히 먼 추억이기도 하다.● 평범했던 학창시절김 씨가 태어난 고향은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 옆에 복숭아꽃, 살구꽃, 사과꽃이 만발한 마을이었다.부지런한 어머니와 중국에 있는 아버지 친척들의 도움 덕분에 형제가 여럿이었어도 배고픔을 몰랐다. 학창시절 김 씨는 놀기를 좋아하고 공부엔 큰 관심이 없었던 학생이었다. 1994년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아버지는 군에 입대하라고 권했다. 군에 나가 노동당에 입당해야 출신성분의 굴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그의 부친은 중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연변대학까지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1960년대 북한으로 넘어와 정착했다. 그러나 출신성분 때문에 노동당원이 될 수가 없었다.아버지는 자신의 굴레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김 씨의 두 오빠는 졸업과 동시에 주저 없이 군에 나갔고, 언니도 총을 메는 보위대에 입대했다.김 씨는 군에 나가 청춘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군대에 가지 않으면 사회에 진출해야 했다.북한 당국이 김 씨에게 임명한 직장은 한 연합기업소의 선반공이었다. 막상 가서 일하고 보니 그곳도 진저리나게 싫은 일터였다. 뜨겁게 가열된 쇳밥이 얼굴에 튀어 오르고,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선반에 말려들어가 신체가 잘리는 사고가 수시로 발생했다.그가 사회에 나갔던 1994년을 기점으로 북한은 고난의 행군으로 접어들었다. 여기저기서 배급을 못 받았다는 아우성이 터지더니 급기야 1995년엔 김 씨의 직장에도 배급이 끊겼다.직장에선 어린 노동자들을 선발해 서해 바다에 조개잡이를 내보냈다. 특히 어린 여성 직원들이 대거 발탁됐는데, 김 씨도 17세에 조개잡이 조에 차출돼 나갔다. 바다에 나가 조개를 잡으면 먹을 것은 주기 때문에 가정의 식량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지옥의 조개잡이조개잡이는 큰 배에 50~60명을 태우고 나가 진행했다. 바다로 한동안 달려 어디인가 정박하면 썰물 때 물이 빠져 배가 갯벌 위에 올라앉게 된다.그러면 배에 탔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 갯벌을 열심히 파고 대합이나 백합과 같은 조개를 양동이에 주워 담는다. 밀물이 들어오면 다시 배에 올라간다. 이 생활이 3개월이나 반복됐다. 조개를 판 돈은 모두 당국에서 걷어갔다. 석 달을 작업했지만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예 생활이었다.“그때는 정말 지옥이었어요. 여름에 나갔는데 석 달 동안 배에서 내리지 못했습니다. 목욕을 하지도 못하고 소금에 쩐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살아야 했습니다. 추운 밤에도 물이 빠졌다고 추운 갯벌에 내몰았어요. 한 배에서 남녀가 함께 생활하는데, 화장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병이 나도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어요.”김 씨가 북한을 떠올리면 가장 몸서리치게 기억되는 악몽이다. 김 씨는 멀미를 심하게 해 물이 들어오면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다.악몽 같은 조개잡이 동원을 마치고 돌아오니 공장에 출근하는 노동자들이 현저히 줄어들어 있었다. 배급을 받지 못하게 되니 모두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그즈음 집안 형편도 어려워졌다. 김 씨도 뭔가 집안에 도움이 될 것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장사를 하지는 못했다. 장마당은 밑천도 경험도 없는 17세 소녀가 뛰어들기 너무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김 씨는 조개를 잡아 팔면 식량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언니도 갓난아이를 부모에게 맡기고 동생과 함께 서해바다로 향했다.1995년 12월 두 자매는 장화도 없어 맨발로 살얼음이 낀 갯벌에 뛰어들었다. 배가 없으니 해변에서 조개를 캘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수확은 신통치 않았다. 주위를 돌아보면 굶주린 사람들이 너도나도 바다에 나와 조개를 잡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죽느냐 사느냐를 가르는 전쟁터였다.20일 남짓 바다에서 헤맸지만 벌어들인 밀가루는 2~3㎏ 밖에 안 됐다. 김 씨 자매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돈이 없어 추운 날에 차도 잡아타지 못하고 하루 종일 걸어와야 했던 일도 김 씨에겐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다.봄이 되자 김 씨는 인근 밭에서 시래기와 이삭줍기를 하면서 끼니를 유지해야 했다. 산을 개간해 농사를 지을 생각이 없진 않았지만, 종자를 살 돈도 없었다.이런 일을 겪으며 김 씨는 더는 북한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1996년 겨울 김 씨는 가족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북부 국경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동상을 입고 탈북김 씨는 중학교 졸업반 때 중국에 가본 일이 있었다. 고난의 행군 이전부터 아버지는 몇 년에 한 번씩 형제들이 살고 있는 중국으로 가서 도움을 받았다. 어떤 때는 합법적인 증명서를 떼고 가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두만강을 도강해 갔다. 김 씨의 고모가 사는 집과 사촌오빠가 사는 아파트는 두만강 건너편 북한 쪽에서 빤히 바라보였다. 1990년대 중반까진 두만강에 국경경비대가 거의 없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손쉽게 강을 건널 수 있었다.김 씨가 컸을 때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함북 온성으로 가 중국 고모네 집으로 몰래 넘어갔다. 아버지는 중국에 다녀올 때마다 그곳이 너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김 씨가 직접 가보니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식량과 고기, 간식, 과일이 풍부했고, 각종 채널을 통해 신기로운 세상을 접할 수 있었다. 중국을 한 번 다녀온 북한 사람들은 절대로 그 경험을 잊지 못한다.중학교 졸업 후 지옥 같은 삶을 2년이나 살다보니 김 씨는 중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떠날 때는 탈북을 결심하진 않았다. 중국에서 도움을 받고 오자는 마음이었다.집에 말을 하지 못하니 여비를 받을 순 없었다. 대신 그는 아버지가 중국에서 가져온 예쁜 옷들을 잔뜩 껴입고 떠났다. 가다가 옷을 팔면, 먹을 것은 살 수 있다고 타산한 것이다.그러나 이 계획이 오산이었음은 얼마 안 돼 알게 됐다. 남포에서 온성까지 무려 한 달이나 걸렸던 것이다. 기차는 며칠에 한 번씩 다녔고, 정전 때문에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기차 천정에까지 사람들이 새까맣게 매달렸다. 허허벌판에 기차가 서면 옷을 팔 곳도 없었다. 기차가 서면 주변 농촌 동네에서 이때라 생각하고 각종 음식을 만들어 달려 나와 승객들에게 비싸게 팔았다. 농촌 사람들에겐 옷은 사치품이었다. 김 씨는 눈물을 머금고 터무니없이 싼 값에 옷을 넘기고 먹을 것을 사먹었는데 며칠도 되지 않아 팔 옷도 떨어졌다.이때부터 그는 꽃제비가 됐다. 어린 소녀라고 불쌍하게 여겨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사람들도 적진 않았다. 발 디딜 틈도 없는 기차 안에서 여기저기 치이며 잠을 잤지만, 추위는 견딜 수가 없었다. 특히 발이 얼어들어가 동상을 입었다.그 한 달의 여정은 김 씨에게 또 하나의 악몽이었다. 마침내 함북 온성역에 내렸을 때 그는 걸을 수조차 없었다. 어느 농가의 나무 울바자 밑에서 어두울 때까지 기다렸는데 동상을 입은 다리는 더 얼어 감각이 없었다.그 다리를 끌고 그는 두만강으로 나갔다. 그리고 무작정 기어가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아버지와 강을 건널 때도 밤에 강에 나가 기어갔다. 그가 겨울에 떠난 이유도, 지금쯤 떠나면 얼어붙은 강을 기어가기 쉬울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두만강을 건너 고모가 사는 마을에 들어갔지만, 쉽게 찾을 것이라 생각했던 고모의 집은 나타나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집들이 늘어선 동네를 서너 시간 헤맨 끝에야 마침내 고모의 집을 찾았다. 갑자기 나타난 조카의 행색에 고모는 깜짝 놀랐다. 처음엔 움직일 수도 없어 대소변도 받아내야 할 상태였다. 그러나 가지를 다린 물에 다리를 씻으며 각종 약을 쓰고 나니 한 달이 되자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는 1997년 설날을 고모집에서 맞았다.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보낸 슬픈 설날이었다.● 중국에서의 삶김 씨가 회복되자 고모는 “조선에선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그런 곳에 너를 다시 내보낼 수가 없다”고 집에 돌아가는 것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북한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이 늘어나 중국 국경 통제도 강화됐기 때문에 그곳에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고모는 그를 하얼빈에 사는 친척집에 다시 보냈다. 그곳에서 김 씨는 친척집 아이를 봐주는 보모로 3년을 지냈다.하지만 아무리 친척이라도 남의 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는 22살 때인 2000년 친척들의 소개로 조선족 남성과 결혼했다. 남자 쪽에서 합법적인 호구(신분증명서)를 위조로 만들어줘 북송될 걱정도 덜었다. 그해 딸도 태어났다. 나가서 일을 해야 했기에 중국어도 열심히 배웠다. 주변 사람들이 다 한족이라 언어 실력도 쑥쑥 늘어 몇 년 지나서 어디에 취직을 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중국에서 2018년까지 무려 21년을 살았다.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일당직 노동을 하는 남편이 워낙 말이 없어 둘 사이 소통이 잘 되지 않아 너무 답답했다. 그렇지만 다시 돌아갈 곳도 없어 모든 불만을 억지로 참고 살아야 했다. 그는 점점 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그는 한 직장에 취직해 10년 동안 매니저로 살기도 했고, 식당을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1년에 많이 쉬어야 1주일을 넘긴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만 하고 살다보니 돈도 적잖게 벌었다. 물론 그래봐야 한족 동네의 평균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짐을 가장 많이 갖고 온 탈북자어느덧 딸이 17살이 돼 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됐다. 그런데 딸이 한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결정했다. 김 씨는 공부를 더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던 터라 더 공부하겠다고 하는 딸이 대견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중국에서 버는 돈으로는 딸의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김 씨는 결단을 내렸다.“내가 서울로 가서 돈을 벌어 딸의 뒷바라지를 하자. 딸 때문에 억지로 살았는데, 딸이 중국을 뜨면 이걸 기회로 희망이 없는 이 삶도 청산하자.”2017년 말 김 씨는 한국 영사관에 전화를 걸었다.“저는 사실 탈북자인데 한국에 가도 되나요? 한국에 가서 북한말을 하게 되면 간첩으로 잡힐지 몰라서요.”그는 그때까지 한국에 수만 명의 탈북자가 사는 것도 몰랐다.대사관에선 “당연히 한국에 가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대답했다. 딸이 서울에 들어온 지 1주일 뒤 김 씨도 비행기표를 끊고 하얼빈 공항을 떠나 인천공항에 내렸다. 중국 호구가 있기에 비행기를 타고 직접 오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으로 떠날 때 김 씨는 “저기는 물가가 비싸니 아무 것도 사지 말고 여기서 다 챙겨가자”고 생각했다.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그는 커다란 캐리어를 서너 개 갖고 내렸는데 마중 나온 요원들이 “이렇게 짐을 많이 갖고 온 탈북자는 처음 봤다”고 혀를 내둘렀다.김 씨를 태운 버스는 합동조사센터에 들어갔는데, 모든 물품은 물론 휴대전화도 압수된 채 독방에 들어갔다. 김 씨는 한국에 가면 조사를 받는다는 사실을 몰라 체포된 줄로만 알았다. 며칠 동안 김 씨는 “왜 이런 곳에 잡아넣지?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나겠구나. 바보처럼 내가 발등을 스스로 찍었구나”하는 생각에 끝없이 홀로 자책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이것이 통상적인 과정임을 알았다.하나원을 거쳐 김 씨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됐다. 행운도 따랐다. 이전까진 중국에서 10년 이상 산 탈북민에겐 집을 주지 않았는데, 그가 올 즈음엔 법이 바뀌어 임대주택을 주었다. 2018년 3월 김 씨는 인천에 집을 받고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제주도에 새 둥지를 틀다사회에 나오자마자 김 씨는 한 식당에 취직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일도 쉽지 않았지만, 한국어 소통도 어려웠다. 중국의 한족 동네에서 20년 넘게 살다보니 한국어도 많이 서툴렀다.중국에서 새벽 2시에 출근하며 식당까지 운영했기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한국 식당 서빙의 강도는 훨씬 더 높았다.돈을 아끼려고 겨울에 난방도 틀지 않고 살았지만 남는 돈이 없었다.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눈을 뜨자 지인이 동탄에 있는 골프장 식당이 더 좋다고 소개해주었다. 그 식당에서 그는 먹고 자면서 열심히 일했다. 쉬는 날엔 다른 알바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식당일을 계속하니 다리가 끊어질 정도로 아파오기 시작했다.“내가 한국에서 죽을 때까지 이렇게 허망하게 살다 죽는 건 아닐까”이렇게 회의하던 순간 지인이 “아직 나이도 젊은데 여기서 혼자 열심히 살기보단 서로 의지해 사는 것이 좋다”며 오래 전에 상처한 한 남성을 소개해주었다.둘은 몇 달 동안 전화를 하면서 서로를 알아갔다. 남자는 서울에서 30년 가까이 살면서 해외에서 회사를 운영했는데, 코로나로 여건이 악화돼 모든 것을 접고 부모가 사는 제주도로 내려가 귤 농사를 하며 새롭게 살려고 결심하던 차였다. 남자의 다정다감한 풍모에도 끌렸지만, 김 씨의 마음을 무엇보다 끌어당긴 것은 ‘과수원’이란 단어였다. 나무를 키우며 사는 삶은 김 씨의 오랜 소원이기도 했다.둘은 여생을 함께 하자고 언약을 하고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에 둥지를 틀었다.“남편이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게 하겠다고 했지만, 제주도에 오자마자 그게 이뤄질 수 없는 약속임을 알았습니다. 물론 남편은 절대 힘든 일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디 그렇게 되나요. 내려와서 과수원 정리를 하면서 돌을 옮기다가 허리 디스크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참 잘해주니 힘든 것들을 잘 넘깁니다.”남편은 귤 농장에 ‘복희네농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 씨는 드디어 뭔가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생겼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취미로 시작한 조경식물 사업4000평의 귤 밭을 가꾸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꽃과 열매솎기, 가지치기, 수확 등의 일정이 365일 동안 쳇바퀴처럼 돌아갔다.열심히 농사일을 하는 와중에도 예쁜 농원을 만들고 싶은 김 씨의 꿈은 지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꽃과 식물을 좋아한 그는 5일장에 가면 다른 가게에 가지 않고 식물을 파는 곳에만 가서 시간을 보냈다. 꽃나무들은 생각보다 비쌌다. 그가 식물 가게에서 웅크리고 앉으면 남편이 비싼 식물을 사서 키우는 것은 낭비라며 자꾸 잡아끌었다.그런 속에서도 그는 한라봉, 레드향, 천혜향, 황금향 등의 귤 묘목들과 레몬나무, 낑깡나무, 금목서, 은목서, 동백나무 등 수십 종류의 정원수 묘목을 사와 키우기 시작했다. 과일 밭에 사계절 꽃향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김 씨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주변에서 “시골에 왔으면 농사나 잘 하지 쓸데없는데 시간을 팔고 있다”는 소리도 들려왔다. 식물들이 너무 많아지자 김 씨는 작년 10월부터 남는 식물을 인터넷에 올려 팔았다. 그런데 너무 잘 팔렸다. 이유를 알아보니, 제주도에선 주택이나 숙박시설 등을 지어 허가를 받으려면 나무를 얼마 심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인근에서 건설공사들이 많이 벌어지는데, 조경수나 꽃나무를 판매하는 곳이 주변에 없었던 것이다.처음에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뜻밖에 취미로 시작한 식물 재배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김 씨는 이제는 조경수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귤을 판매한 돈보다 조경 식물을 판 수입이 더 많아지자, 이젠 남편도 아내를 적극 응원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이제는 “초보농부가 머리가 좋다”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돈을 버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식물을 가꾸고 키우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사는 제주도 여기저기서 이 손으로 키운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푸른 숲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구슬땀을 흘리며 키운 식물이 아름다운 정원도 만들고, 지구도 살리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제주도에 남길 삶의 흔적조경 식물 사업을 하면서도 본업인 귤 농사도 놓치지 않고 있다. 감귤 재배 방법도 열심히 배워 지난해엔 당도 16브릭스의 고품질 감귤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제주도에서 나는 평균 귤 당도보다 2브릭스나 높았는데, 이런 우수한 감귤을 생산하는 농장은 많지 않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김 씨는 올해 ‘장한 안덕면민상’ ‘서귀포시 시장상’을 잇따라 수상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다음 목표는 제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우수한 감귤을 생산하는 것이다.과원 주변에 아름다운 정원수들을 심고, 제주도 전통의 아담한 민박집을 갖춘 ‘복희네종합테마농장’을 만들려면 아직 할 일이 태산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에게 오아시스처럼 구원을 안겨주는 농장이 그가 그리는 꿈이다.“제가 자꾸 일을 만들어서 남편도 덩달아 고생이죠. 그런데 어쩔 수가 없어요. 내년에는 더 바빠질 거니까요.”김 씨는 친구도 만나지 않고, 놀려 다니지도 않으며 꿈을 실현하는데 모든 힘을 쏟고 있다. 남들이 버린 가구나 가전제품을 가져다 쓰고, 옷도 거의 사지 않는다. 그렇게 아낀 돈은 모두 장비와 식물을 사는데 쓴다.“예전에 삶의 목표가 없을 때는 ‘사람이 잘 먹고 즐기면서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꿈이 있습니다. 제가 살아온 삶의 족적을 제주도에 남기고 죽는 것이 목표입니다. 언젠가 통일도 되겠죠. 그때가 되면 북한 사람들도 제주도로 놀려올 겁니다. 그들이 산방산 아래의 아름다운 농장이 남포에서 온 김복희 씨가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평생을 바쳐 가꾼 것이라고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그 꿈을 위해 오늘도 그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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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혹을 맞은 ‘아버지 김정은’에게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올해 설날은 김정은에게 예년보다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일주일 뒤면 김정은은 만 40세 생일을 맞이한다. 공자는 마흔을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불혹(不惑)’의 나이라고 했지만, 그가 2500여 년의 세월을 지나 현대 사회에 온다면 분명 자기 말을 수정했을 것이다. 요즘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문명을 따라가느라 여든이 돼도 여전히 정신없이 사는 게 당연하다. 공자라고 예외일 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공자가 세상을 다니다가 북한에 이른다면 너무 익숙한 풍경들이 많아 분명 크게 반길 것 같다. 거기선 소가 밭을 갈고, 논에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 손으로 잡초를 뽑는다. 여인들이 얼음을 깨고 손빨래를 하며 물동이를 이고 다닌다. 밤엔 등잔 기름도 없어 관솔(소나무 옹이)불 아래서 옥수수밥을 허겁지겁 먹는다. 공자가 사회주의란 요상한 이름을 대하고 갸웃거릴 순 있어도, 거기엔 분명 ‘왕족’이 살고 있고 이에 반항하면 멸문지화를 당하는 시스템이 지구상에 유일하게 존재해 낯설지는 않을 것 같다. 이것이 김정은이 다스리는 북한의 현실이다. 김정은은 이미 인생의 절반을 살았고, 자식들도 두었다. 설날에 김정은은 아버지로서 딸 주애의 미래를 생각하길 바란다. 김정은에게도 인민을 잘살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조금이라도 있을 것이다. 가끔이긴 하지만 인민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하며 보인 눈물이 모두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 통치 12년 동안 인민들의 생활 형편은 더 어려워졌고, 스스로 문을 걸어 잠가 세계 최악의 고립 지역을 자청했다. 김정은은 지금까지 자신의 안녕과 인민의 행복이 존재하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동안 수많은 숙청으로 통치 기반을 공고히 했음에도, 여전히 ‘제로섬(Zero-Sum)’ 통치를 고집하고 있다. 내가 안전해지려면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더 많이 뺏어야 하고, 인민이 부유하고 행복해지면 내가 위태로워진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통치의 결과로 북한이 점점 파멸의 낭떠러지로 미끄러져 가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보인다. 마흔을 넘긴 김정은에게 이제 ‘윈윈’의 통치 방식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찾으면 방법은 분명히 있다. 한때 비슷한 길을 걸었던 이웃 나라들만 봐도 답을 찾을 수 있다. 중국을 보라. 거의 반세기 전에 개혁 개방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했지만 공산당은 여전히 굳건하다. 수천 년 동안 기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중국 인민은 지금 배고픔이 뭔지 모르고, 외국 여행도 마음대로 다니고 있다. 러시아를 보라. 경제 개방은 물론이고 다당제까지 허용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은 20년 넘게 권좌를 지키고 있고, 아마 죽을 때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할 것이다. 러시아 인민들의 삶도 북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하다. 쿠바를 보라. “원하면 언제든 쿠바를 떠나라”는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피델 카스트로는 반세기를 통치했고 동생에게 권좌를 물려주었다. 그 동생이 13년을 통치하다가 혈통이 아닌 사람에게 권력을 물려주었지만, 비극적인 결말은 맞지 않았다. 사회주의가 아니더라도 권력을 유지하면서 세습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달성한 싱가포르의 리콴유도 있다. 그 외에도 세계를 돌아보면 김정은이 참고할 나라는 참으로 많다. 김정은이 발상만 바꾸면 북한에 비해 압도적인 경제력을 가진 한국도 적극 도울 것이다. 한국은 위협이 아니다. 남쪽의 대다수 사람들은 가난한 북한을 먹여 살리는 책임을 떠안고 싶어 하지는 않지만 남북은 얼마든지 경제적으로 윈윈할 수 있다. 북한이 매년 10%의 경제성장만 이루면 인민은 ‘김정은 만세’를 부를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선전으로 이러한 북한의 급속한 번영은 오직 김정은만 이룰 수 있다고 세뇌시킬 수도 있다. 강력한 리더십이 없으면 나라가 분단돼 비극이 온다는 공포를 끊임없이 주입해 장기 집권에 성공한 중국과 러시아를 본받아도 된다. 그러나 경제가 끝없이 추락해 인민이 빈궁의 원인을 오로지 김정은 집권에서 찾게 된다면 강력한 철권통치도 더는 안 먹히는 날이 온다. 이미 북한은 임계점으로 가고 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버지의 미덕이 아니던가. 주애에게 비극의 말로를 물려줄지, 밝은 미래를 물려줄지는 오로지 김정은에게 달렸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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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공장 사장이 된 북한 여의사… “통일건배주를 만듭니다”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남조선은 월급을 잘 줍니까?”치료하던 환자의 딸이 자신에게 탈북을 권했을 때 김성희 씨가 했던 첫 질문이었다.환자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 석 달 뒤 한국에 도착한 뒤에도 김 씨는 한국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다.인천공항에서 조사기관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김 씨는 생각했다.“이제 고문을 어떻게 견뎌야 하지? 제대군인 출신에 노동당원이고 의사까지 한 나는 악질 빨갱이라고 고문을 더 받을 수밖에 없겠구나.”조사기간 내내 김 씨는 언제 고문장으로 끌려갈지 두려웠다. 밥을 먹을 때도 독약이 들어있진 않는지 걱정했다. 건강검진 받으러 간 날은 더욱 공포스러웠다. 주사약에 독약을 넣어 평생 고통 속에 살게 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조사기관을 퇴소해 하나원을 갈 때도 ‘여긴 새로운 형태의 감옥인가’라고 생각했다. 하나원을 나올 땐 강원도 강릉으로 거주지를 정했다. 전쟁이 나면 얼른 배를 타고 바다로 탈출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남조선에 도망가면 고문을 해 비밀을 뽑아낸 뒤 죽인다고 끝없이 주입했던 노동당의 세뇌는 그만큼 오래갔다.그랬던 김 씨가 지금은 “한국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내가 만든 술을 더 많이 마시고 취하게 만들까”를 고민하는 주류회사 사장으로 변신했다. 고난과 역경을 헤쳐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다.● 김천 출신의 아버지김 씨는 1974년 함경북도 두만강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출신성분이 좋은 집안은 아니었다.아버지의 고향은 경북 김천이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북간도로 가서 콩 농사를 짓겠다고 가족을 끌고 떠나는 바람에 중국에서 컸다. 그러다 20대 중반인 1960년대 초반 ‘조선 사람은 조선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결심해 친구 3명과 함께 북한으로 나왔다.아버지는 북한에서 운전 관련 대학을 졸업하고, 김일성의 지시로 ‘농촌기계화운동’이 벌어질 때 농촌으로 자원해 진출했다. 그곳에서 토박이 여성을 만나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남조선 출생에 중국에서 성장한 아버지는 더는 출세하지 못했다. 북한에선 이런 사람들을 ‘동요계층’으로 구분하고 간부로 쓰지 않았다. 사실 아버지는 ‘동요’라는 단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뚜렷한 소신의 소유자였다. 누군가 “고향이 남쪽으로 돼 있으면 절대 출세할 수 없으니 고향을 중국으로 바꾸라”고 권고했지만, “내가 태어난 고향을 어찌 바꾸겠냐”며 경북 김천 출생임을 당당하게 여겼다. 아무리 높은 간부 앞에서도 부당한 것을 참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살면서 자기보다 훨씬 못한 간부들의 지시를 받으며 인생이 꼬여가고, 자식들까지 자신 때문에 출세길이 막히자 점점 성격이 괴벽해지고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다.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김 씨는 자라면서 아버지보다는 두 오빠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며 컸다. 아래 남동생까지 합쳐 6명이나 되는 식구의 생계는 어머니 몫이었다. 함북은 1980년대 말부터 배급을 제대로 주지 않은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산을 개간해 밭을 만든 뒤 거기서 농사를 지었다. 콩과 옥수수를 재배해 두부와 술, 엿을 만들어 팔았다. 두부를 만든 찌꺼기는 돼지를 먹여 키웠다. 버리는 것이 없었다.김 씨는 어렸을 때부터 밭에 가서 돼지에게 먹일 세투리(씀바귀)를 뜯어 오는 일을 맡았다. 체육을 좋아해 학교에선 태권도와 농구 특기생(선수)으로 뛰었다. ● “오빠, 나 대신 공부해”김 씨는 1991년 군에 입대했다. 원래는 전문학교 추천을 받았지만, 가정형편을 생각하니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김 씨의 두 오빠는 출신성분을 바꾸려면 노동당에 입당을 해야 한다며 모두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에 갔다. 김 씨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그 해에 공교롭게 군에 갔던 맏오빠가 제대해 도 소재지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두 명의 대학 뒷바라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을 뻔히 아는 김 씨는 군 입대를 택했다.군에 입대해 가던 중 도 소재지에 열차가 한동안 멎었다. 이때 맏오빠가 기차역으로 찾아왔다. 그가 열차에서 내렸을 때 오빠는 아무 말도 못했다. 둘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백만 마디의 말이 눈물을 타고 땅에 흘러내렸다.열차가 떠날 때 오빠는 열차를 따라 한참을 달려오다가 자갈에 걸려 넘어졌다. 훗날 집에 와보니 오빠의 손바닥엔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그때 생긴 것이었다. 사랑하는 여동생이 오빠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고 험한 고생이 기다리는 군에 가서 청춘을 바치려 결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빠는 밤마다 눈물을 흘려야 했을 것이다.열차에서 오빠가 넘어지는 모습을 봐야 했던 기억은 김 씨의 일생에서 가장 마음 아픈 순간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그 순간만 떠오르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다행인 점은 김 씨가 학교 때 체육 선수였던 점을 인정받아 군단 체육단에서 군 복무를 했다는 점이다. 그는 군단 태권도 선수 겸 농구 선수로 활약했다.그가 군 복무를 했던 1991년부터 1999년 사이는 고난의 행군 기간이었다. 군단에서 영양실조 환자와 아사자가 무리로 발생할 때였다. 그러나 체육단은 허약에 걸리지 않을 정도에 불과하긴 했지만, 그나마 밥은 주었다.군단 대항 경기는 1년에 몇 차례씩 열렸다. 김 씨가 속한 농구팀은 군 복무하던 8년 동안 4번 정도 우승을 했다. 최상위급의 농구팀이었던 것이다.원래 여성은 군에서 5~6년만 복무하면 됐다. 하지만 1997년 김정일은 군 병력이 모자란다며 남성은 기존 10년에서 13년으로 군 복무 기간을 늘였다. 여성도 8년으로 늘었다.김 씨는 17세에 입대해 만 25세를 꽉 채우고서야 제대증을 받았다. 군단 체육단에서의 활약이 인정돼 제대할 때 그는 3년제 의학전문학교 추천서를 받았고 내친 김에 입학까지 성공했다.● 술을 만드는 처녀의사8년이나 공부를 하지 않던 김 씨가 전문학교 학업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출신성분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의전을 졸업하면 준의사 자격을 받았다. 북한에선 준의사를 준의라고 하지만, 환자들은 의사 선생님이라고도 한다.준의는 의사와 간호사 중간쯤에 위치한, 이를테면 보조 의사라고 볼 수 있는 직제다. 집집마다 찾아가 진료를 하는 왕진 의료 시스템을 표방하는 북한에선 의사들이 힘들어 모든 담당구역을 커버할 수가 없다. 그리 심하지 않은 병은 준의가 맡는다. 준의도 왕진을 다니고, 처방을 내줄 수 있다.2002년 김 씨는 고향으로 가 병원 준의로 일했다. 그동안 두 오빠 모두 대학을 졸업해 자리를 잡았다. 대학 및 전문학교 입학률이 15~20%에 그치는 북한 실정에서 3남매가 모두 대학, 전문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병원에 가보니 약이 없었다. 의사가 하는 일은 진찰을 하고 처방을 떼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환자가 장마당에 가서 처방대로 중국제 약을 사고, 다시 병원에 오면 의사가 주사를 놔주었다.병원에 입원실이 있긴 하지만, 입원하려면 환자가 먹을 것을 모두 집에서 가져와야 했다. 겨울엔 입원실 난로의 땔감도 보장해야 했다. 병원은 침상을 빌려주고, 관찰하고, 환자가 가져온 약을 주사하는 일만 했다.의사라고 해도 배급도, 월급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출근하지 않으면 처벌하니 어쩔 수 없이 출근은 해야 했다.점점 의사들은 돈 많은 집 가정 의사처럼 변했다. 지금은 돈을 낼 수 있는 집에서 의사를 부르면 찾아가 진단을 내린 뒤, 의사가 직접 장마당에서 약을 구해 매일 찾아다니며 치료를 한다. 이 과정에 용하다는 소문이 나면 저마다 해당 의사를 찾게 된다. 그러면 의사 몸값도 높아져 잘 살 수가 있게 된다.반면 의사를 부를 수 없는 가난한 집은 기존처럼 병원을 찾아 처방을 받는다. 병원에서 자리를 지키는 의사는 능력이 없어서 불려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2023년 현재의 북한 의료 제도의 실태다.김 씨가 준의로 일했던 2008년까지는 의료 제도가 위처럼 변해가는 과도기적 단계였다. 아무리 열심히 치료해봐야 보상도 없으니 의사들은 왕진을 나가기 싫어했다. 점점 김 씨에게 왕진 부담이 전가되기 시작했다. 낮에는 의사로 왕진을 다니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야 했다. 김 씨는 명색이 의사였지만, 퇴근 뒤에 마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돼지를 먹일 뜨물을 걷어오는 것이 일과였다. 늦은 밤엔 단속을 피해 어머니와 함께 술을 빚었다.● 고향에서 받은 충격들의전을 졸업하고 고향에 온 그는 여러 번 충격을 받았다.첫 번째 충격은 11년 만에 고향에 오니 가까운 친구들이 거의 다 사라진 것이다. 물어보니 중국에 시집갔다고 했다.두 번째 충격은 위생검열을 가다가 길에서 본 여인들이었다. 북한 당국은 수십 명의 여성들에게 수갑을 채워 거리를 행진하게 했다. 중국에 갔다 오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였다. 노예처럼 끌려 다니는 여인들을 보며 그는 같은 여성으로서 참을 수 없는 수치와 분노 한편으로는 공포도 느꼈다.세 번째는 왕진을 갔다가 본 북송 여인이었다. 방에 들어갔을 때 그는 산 미라가 누워있는 줄 알았다. 북송돼 전거리 수용소에서 1년을 복역하다가 죽기 직전 병보석으로 풀려났는데, 해골에 눈만 붙어있는 줄 알았다. 매일 가서 수액을 놔주었는데 한 달 뒤 또 한번 놀랐다. 미라가 여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옥수수죽에 된장국만 먹었는데도 놀랍게 달라졌다. 치료를 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는 충격의 연속이었다.북한 보위부에서 고문받던 일, 전거리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차마 인간의 짓이라고 할 수 없는 학대들…. 특히 임신한 여성들은 배를 걷어차 어떻게 하든 유산하게 만든다는 말에 치를 떨었다. 전거리에 가면 1년을 버티기 어렵다고 한다.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치료를 끝내고 얼마쯤 있다가 그 여인은 다시 중국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김 씨는 2005년 31세에 결혼했다. 북한 여인들은 20대 중반에 결혼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늦은 나이였다. 남편은 제대군인이었고, 대학을 나왔는데 직업은 약초 관리사였다. 매일 병원을 찾아와 고백하는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이듬해 딸도 태어났다.그러나 신혼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8년 3월 산에 갔던 남편은 도벌꾼들이 벤 나무에 깔렸다. 한국 같으면 목숨까지 잃지 않았겠지만, 산에서 업어 내려오고 달구지에 태워 병원에 오느라 시간을 너무 지체하는 바람에 숨을 거두었다.졸지에 청상과부가 된 김 씨는 두 살이 된 딸을 안고 울었다. 더는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린 딸을 위해 결행한 탈북아무런 삶의 의욕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던 때 왕진을 다니던 집의 딸이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선생님 함께 남조선에 가요”라고 제안했다. 딸의 여동생이 이미 한국에 가 있는데 어머니와 자기도 데려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우리 어머니가 아픈데 의사 선생님이랑 가면 치료도 해줄 수 있으니 좋잖아요. 여기에 무슨 미련이 더 있어요. 함께 가요.”김 씨는 그들과 함께 떠나기로 결심했다. 김 씨는 의사 생활을 하면서 한국 드라마 같은 것은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남조선이 어떤 곳인지 알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남들이 다 그렇게 가려고 애쓰는 곳이니 당연히 북한보다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내 운명은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린 딸은 나처럼 살지 않겠지.”2008년 11월 김 씨는 두만강을 넘었다. 서울에 있는 환자의 딸이 브로커를 포섭하는 등 모든 준비를 했다.두만강을 넘을 때 만감이 교차했다. “고향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던 아버지처럼 나도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야겠구나. 과연 살아서 다시 고향에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떠오를 땐 울컥 했지만 딸의 얼굴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너는 나처럼 살면 안돼.”11월의 두만강 물은 몹시 차가웠고, 깊은 곳은 가슴까지 왔다. 두 살 남짓 딸을 목마 태우고 비틀거리며 강을 건널 때 아이가 울까봐 제일 걱정이 됐다. 건너는 지점의 경비대 초소는 돈으로 매수했지만, 아이가 울면 인근 초소에서 군인들이 달려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 딸도 위급한 순간임을 감지했는지 찬물에 잠겨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김 씨는 지금 생각해도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강을 건너니 서울 딸이 보낸 브로커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이때부터 동남아 모 국가까진 불과 20일 만에 빠르게 이동했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중국 대륙을 횡단하면서 김 씨는 “내가 지금까지 우물 안에 갇혀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중국은 정전되는 일도 없었고 어딜 가나 먹을 것이 풍부했다. 옷 사러 시장에 나가니 보지 못한 온갖 상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악어강’을 넘어 간 동남아 국가에서 3개월을 기다린 끝에 김 씨는 2009년 3월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 와선 고문을 받을 걱정으로 잠을 설쳤다.그런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사기관에 들어갔을 때 “당연히 딸과 나는 따로 가두고 심문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딸도 함께 지내게 했다.“남조선은 고마운 일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을 보고 미소를 지어주는 조사관들의 웃음이 거짓이 아닌 진심이었음을 그는 한국 사회에 나와서야 알았다.강릉에서 만난 첫 신변보호 담당관은 여형사였는데, 사심없이 너무나 친절하게 잘 대해주었다. 여형사 덕분에 한국 사회에 대해 많이 알게 되고, 마음도 열게 됐다.● 충북 음성에 자리잡다강릉에선 3개월밖에 살지 못했다. 딸이 문제였다. 식당 보조로 첫 직업을 얻었는데 어린이집은 일찍 문을 닫았다. 아이를 데려와 식당 구석에 앉히고 일을 하면서 늘 마음이 내려가지 않았다.이때 충북 음성에 사는 동생이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북한 한 동네에서 컸던 3살 어린 동생이었는데, 그가 고향에 왔을 때는 중국에 가서 없었다. 김 씨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과정에 한 일행과 합세했는데, 거기서 동생을 만났다. 몇 년 동안 동생은 중국에서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살다가 뒤늦게 한국으로 떠난 것이다.음성의 한 산업단지에서 일하는 동생은 “우리 둘이 같이 살면 아이를 번갈아가며 볼 수 있으니 좋지 않냐”고 했고, 그 말에 김 씨는 선뜻 짐을 싸고 음성에 왔다. 공장에서 일하니 퇴근 시간이 있어 아이를 돌보긴 좋았다.동생에겐 중국에 남겨둔 아들이 있었는데, 김 씨의 딸과 동갑이었다. 둘은 돈을 벌어 제일 먼저 아들을 데려왔다. 15평짜리 집에서 두 가족의 동거가 시작됐다. 나중에 김 씨가 집을 받아 분가하려 하니 이미 남매처럼 살던 아이들이 서로 떨어지지 않겠다고 울며 난리였다.그래서 조금 더 큰 18평 아파트로 이사가 방 하나씩 쓰면서 공동주택처럼 살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13년 동안 이렇게 살고 있다. 아이들은 커서 고등학교 2학년이 됐다. 동생 아들은 서울의 한 대안학교에 입학했는데 얼마 전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한다. 딸이 이 소식을 듣자 이렇게 말했다.“진짜 축하해. 여친한테서 머리털 뽑히지 않으려면 정말 잘해야 해.”김 씨가 창업한 뒤 동생도 함께 옮겨왔다. 지금도 둘은 같은 회사에서 함께 회사를 키워가고 있다.● “내가 술을 만들어 팔자”음성에 와서 김 씨는 자동차부품회사에서 일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창업을 하겠다는 결심을 버리지 않았다. 주말마다 창업교육을 받으러 가서 많은 직업을 알아봤지만 음성이란 지역에서 토착민들과 경쟁해선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생각한 것이 술 공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태어나서 본 것이 술독이었고, 탈북하기 전까지 했던 것이 술을 만드는 일이었다. 탈북민들 중에 술을 만들어 성공한 사람이 있는지 조사해보니 없었다.“그래, 그럼 내가 술을 한번 만들어보자.”하지만 결심에서 실행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에선 술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보기 위해 술 공장에 취직하려 했지만 여직원을 받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다.김 씨는 집에 술독을 들여놓고 북에서 만들던 방식으로 계속 시험 제조를 해봤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술 빚는 방법은 김 씨의 집에서 3대째 내려오는 방식이었다.김 씨의 외가는 나름 지역에서 오래 산 토착민이었다. 다른 북한 가정은 공장에서 만든 술로 제사를 했지만, 김 씨 외가는 제사술은 꼭 집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전통을 고수했다. 그 집에서 자란 어머니가 제사술을 만드는 방법을 전수받았다. 엄마가 만든 술은 술맛이 좋기로 유명해 만들기만 하면 동네에서 부리나케 팔렸다. 그 방법을 김 씨가 배운 것이다. 술 공장으로 목표를 세운 김 씨는 차곡차곡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2016년 사이버대에 입학해 경영학을 전공했다. 술 공장을 만드려니 자격증들도 많이 필요했다. 한국에서 술을 만들려면 술 종류마다 자격증이 다 달랐다. 알코올이 나오게 발효하면 탁주, 탁주에서 앙금을 가라앉힌 맑은 술은 약주, 찌꺼기를 짜서 증류하면 증류주, 약주와 증류주를 섞으면 기타 주류에 속했는데 각각의 면허가 다 달랐다.열심히 노력해 술 전문가를 찾긴 했지만 면허를 따려면 400만 원씩 달라고 했다. 4개를 따는데 1600만 원이 들었는데, 창업자금을 억척스럽게 모으던 김 씨에겐 여간 큰 돈이 아니었다.이럴 바엔 내가 진짜로 공부해 자격증을 따겠다고 생각해 서울의 가양주연구소에 등록해 공부를 시작했다. 부품공장에서 퇴근해 두 시간 넘게 운전해 서울에 가서 7시 반부터 10시까지 수업을 듣고 집에 돌아오면 12시가 넘었다. 그리고 아침 6시 반에 다시 출근길에 나섰다. 이런 생활이 매주 2회씩 반복됐다.그는 끝내 술 제조 면허 4개를 따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2019년 마침내 건물을 임대해 술 공장을 만들었다. 한국에 온지 10년 만에 목표를 이룬 것이다. 동네의 종친회 회장이 북에서 와서 딸을 키우며 힘들게 사는 그를 눈여겨봤다가 자신의 건물을 싸게 빌려주었다.건물을 술 공장으로 바꾸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전문 시공업체를 부르려니 너무 비쌌다. 그래서 직접 에폭시 시공을 배워 바닥부터 깔았다. 어린 딸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함께 엄마를 도왔다. 바닥을 칠하고 천정을 수리하고, 증류기와 발효조 등 설비를 사서 들여오는 등 갖은 노력 끝에 2019년 4월 마침내 첫 재료를 발효조에 채웠다. 이것을 6개월 동안 숙성시켜 10월에 마침내 첫 제품을 출시했다.● 코로나 위기를 이겨낸 힘첫 술을 뽑던 그날 밤 김 씨는 정말 많이 울었다.“북에서 엄마가 술을 뽑아 우리 자식들을 키웠는데, 이젠 내가 남쪽에서 딸을 키우려고 술을 만드네요.”집에서 술을 뽑을 때마다 처음으로 마셔보며 술맛을 평가했던 아버지 생각도 났다.김 씨는 처음으로 생산된 술에 ‘태좌주’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실 북에서 술을 만들 때는 브랜드라는 것을 몰랐다. 그냥 제사술이라고 불렀는데, 한국에서 그렇게 팔 순 없는 일이었다.김 씨는 제사 때마다 하던 외할아버지 말씀을 떠올렸다. 외할아버지는 일가 남자들이 모여 앉으면 늘 “남자는 술을 마실 때 올방자(책상다리)를 크게 틀고 앉아 마셔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에 착안해 김 씨는 태좌주란 브랜드를 술에 붙였다.술을 만들었으니 이젠 판매처를 찾아야 했다. 김 씨는 각 지역 축제장을 타켓으로 정했다. 술을 싣고 가 어르신들에게 맛보시라고 권하며 “제가 북에서 왔는데 술을 만들어봤습니다. 한번 드셔보십시오”라고 열심히 권했다. 원래 술을 잘 못 마시는 체질이지만, 술 공장 사장이 술도 못 마시냐는 소리를 여러 번 듣고 나서 혼자 술도 많이 마시며 단련했다.“탈북자가 만들었으면 독이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하고, “어디서 이따위 술을 마시라고 하냐”며 면전에서 술을 뱉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맛을 봐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머리를 숙여야 했다.그러나 모두가 그를 박대하진 않았다. 따뜻하게 맞아준 사람이 훨씬 많아 힘이 났다. 전화를 해서 자기 동네 매장에 가져다 팔게 해주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그렇게 2019년 석 달 동안 행사장 등을 돌면서 10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너무 기뻤다. 첫 해에 “100만 원만 벌어도 내가 이기는 거지”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 팔린 것이다. 자신감이 솟구쳤다.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호락호락하게 성공을 선물하지 않았다. 2020년 본격적으로 술을 만들어보려 했는데 그만 코로나가 터진 것이다.노인들이 많이 사는 음성은 거리에서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축제도 다 취소됐고, 슈퍼에 입점해도 슈퍼를 찾는 사람들이 없었다.임대료와 전기세, 수도세 등 고정비는 계속 나가는데 어떻게 팔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공장 문을 닫을 수도 없었다. 술은 6개월 또는 1년간의 숙성기간을 거치는데,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 술을 계속 빚어 발효조에 채워야 했다.이 기간 그는 무작정 알바를 뛰었다. 한 번에 새벽 배송과 사무보조, 학교 급식 배송 등 다섯 가지 알바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는 하루 1시간도 자지 못하고 일했다.고마운 도움도 많이 받았다. 남북하나재단에서 그의 술을 받아 명절 선물로 돌렸고, 고성통일전망대에서 판매해주겠다고 승인했다. 충북은 텃세가 심한 동네로 알려졌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를 대견하게 여겨 일부러 술을 사서 주변에 선물했다.가장 힘든 시절을 그는 주변의 도움으로 이겨냈다.매출은 조금씩 성장했다. 2021년 매출 3900만 원을 기록했고, 2022년엔 6000만 원, 2023년엔 9000만 원을 기록했다. 많이 남지는 않지만, 성장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태좌주로 시작한 브랜드도 농태기, 삼팔주, 과하주 등으로 확대됐고 ‘하나도가’ 홈페이지를 만들어 온라인 판매도 하고 있다. 김 씨는 내년에는 한국에 없는 77도짜리 술도 출품해 시장을 개척하려 한다. 하나도가의 목표는 40대 이상이 집에서 마실 수 있는 묵직한 각종 전통주를 만드는 것이다.● “통일건배주는 우리 술이 최고입니다”김 씨는 지역사회에서 받은 도움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령자가 많은 동네엔 농사 때마다 일손이 부족했다. 그래서 2019년 무작정 딸을 데리고 농사 봉사를 나서기 시작했다. 딸에게 너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봉사가 제겐 생소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북에서 의사로 일했던 6년이 저에겐 봉사였어요. 돌봐줄 사람이 없이 중병으로 앓는 환자를 업고 강으로 나가 목욕을 시켜주기도 했습니다.”그렇게 시작한 봉사는 이후 ‘소금봉사회’라는 탈북민 봉사단으로 성장했다. 현재 봉사단원은 20명인데, 이중 18명이 탈북민이다.“한국에 정착하는 초기 ‘너희는 우리 세금으로 정착금을 받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받은 세금을 지역 사회에 돌려준다는 의미로 봉사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동네 어르신들 농사일을 돕다가 사람들이 합세하면서 정기화했어요. 우린 ‘주말 하루는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께 바치는 날이다’고 생각하고 봉사해요.”소금봉사회의 스케줄은 나름 정교하다. 매월 첫 번째 토요일은 노인복지센터에서 마사지 봉사를 하고 마지막 주 월요일은 인근 이천에서 치킨집을 하는 탈북민의 기부로 ‘학교밖 청소년센터’에 가서 치킨 봉사를 하는 식이다. 농번기엔 매주 토요일에 농사일을 도우러 나간다. 이들의 노력으로 음성에선 탈북민에 대한 시선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 김 씨는 300명이 소속된 대한적십자봉사회 음성지구 협의회 사무부장도 맡아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삶을 인정받아 김 씨는 2023년 남북한 사회통합사례 발표대회에서 대상인 국회의장상을 받았다.김 씨는 술 공장으로 성공하면 탈북한 한부모 가족을 돕는데 힘을 쏟을 계획이다.“제가 한국에 와서 아무런 연고 없이 혼자 애를 키우니 너무 힘들었어요. 이제 저는 애를 다 키웠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 애를 키우며 힘들게 사는 탈북 여성이 너무 많아요. 제가 겪어봤으니 형편이 되는 한 이런 탈북 여성들을 물심양면으로 키우고 싶습니다.”술 제조업체 대표로서의 그의 꿈은 무엇일까.“우선은 인정받는 술을 만드는 거죠. 한국이 아닌 세계에서 칭찬하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요. 술이 맛있어 알아봤더니 북에서 온 탈북 여성이 만들었다 이렇게 알려지길 원해요. 그리고 제일 큰 소원은 통일이 되면 우리 하나도가에서 만든 술이 통일건배주가 되는 겁니다. 우리 술은 재료는 남쪽의 것이지만, 제조방법은 북쪽의 것입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훌륭한 통일건배주가 어디에 있겠습니까.”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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