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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보살상을 감싼 화려한 목걸이와 팔찌, 보살상을 받치는 귀꽃(석탑 등의 추녀마루 끝에 새기는 꽃 모양 장식) 문양 대좌(臺座)까지…. 1000년이 넘도록 흙에 파묻혀 있던 9세기 통일신라 불교조각의 걸작 ‘강원 양양 선림원지(禪林院址) 출토 금동보살입상’(사진)이 보존 처리를 마치고 11일 서울 종로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처음 자태를 드러냈다. 2015년 10월 선림원지에서 엎어진 채 출토된 이 금동보살입상은 불상의 높이가 38.7cm이고, 대좌(14cm)와 불상 주변을 감싼 광배(光背)까지 더하면 크기가 60cm에 이른다. 2020년 ‘미술사학연구’에 관련 논문을 발표한 임영애 동국대 문화재학과 교수는 “통일신라시대 금동보살입상은 30cm가 넘는 것이 손에 꼽을 만큼 드물고, 그중에서도 이 불상이 가장 크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보살상의 온몸을 감싸는 장신구가 전부 따로 제작돼 ‘신라 금속공예의 걸작’이란 평가가 나온다. 보살상의 머리에 씌운 보관과 목걸이, 팔찌, 전신에 두른 영락(瓔珞·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 등이 따로 만들어져 불상에 옷을 입히듯 장식됐다. 왼손에 든 정병(淨甁·깨끗한 물을 담는 병)도 마찬가지다. 임 교수는 “주물로 한꺼번에 보살상과 장신구를 제작하지 않고 하나하나 섬세하게 제작해 장착한 경우를 이전에는 보지 못했다”며 “보살상의 눈썹과 눈, 콧방울, 콧수염 등을 먹으로 그려 섬세함을 더했다”고 강조했다. 학계에서는 불상의 가치가 국보로 지정되기에 충분하다는 의견이 많다. 선림원지는 9세기 창건된 선종사찰 억성사(億聖寺)가 있던 곳이다. 이 유물은 9세기 후반 제작됐다가 10세기 초 산사태로 사찰과 함께 땅속에 매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불상이 신라 왕경(王京)에서 만들어져 억성사에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불상은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다음 달 25일까지 열리는 ‘명작: 흙 속에서 찾은 불교문화’ 특별전에 전시된다. 불상의 보존처리를 맡았던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재보존과학센터의 이재성 학예연구사는 “흙 사이로 희끗희끗 금빛과 장신구들이 보였다. ‘정말 아름답다’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며 유물을 처음 본 순간을 회고했다. 전시는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6세기 한반도 남부에 세력을 형성했던 가야의 고분군이 9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것으로 전망된다. 문화재청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심사를 맡은 자문기구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가 가야고분군에 대해 ‘등재 권고’ 판정을 했다”고 11일 밝혔다. 9월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최종 등재 여부를 결정하지만 사실상 등재가 확실시된다. 등재 권고 대상에 오른 가야고분군은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 △경남 김해 대성동고분군 △경남 함안 말이산고분군 △경남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경남 고성 송학동고분군 △경남 합천 옥전고분군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으로 모두 7곳이다. 가야는 낙동강 일대 등에서 1세기경부터 562년까지 존속했던 금관가야 등 6개 나라의 총칭이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에 비해 문헌 기록은 적지만, 곳곳의 고분군과 출토 유물 등을 통해 가야의 역사와 당대 문화상이 드러났다. 가야고분군 출토 유물은 피장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위세품(威勢品)이 대등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 때문에 가야가 수평적 관계를 구축한 연맹체제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6세기 한반도 남부에 세력을 형성했던 가야의 고분군이 9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것으로 전망된다. 문화재청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심사를 맡은 자문기구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가 가야고분군에 대해 ‘등재 권고’ 판정을 했다”고 11일 밝혔다. 9월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최종 등재 여부를 결정하지만 사실상 등재가 확실시된다. 등재 권고 대상에 오른 가야고분군은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 △경남 김해 대성동고분군 △경남 함안 말이산고분군 △경남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경남 고성 송학동고분군 △경남 합천 옥전고분군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으로 모두 7곳이다. 가야는 낙동강 일대 등에서 1세기경부터 562년까지 존속했던 금관가야 등 6개 나라의 총칭이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에 비해 문헌 기록은 적지만, 곳곳의 고분군과 출토 유물 등을 통해 가야의 역사와 당대 문화상이 드러났다. 가야고분군 출토 유물은 피장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위세품(威勢品)이 대등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 때문에 가야가 수평적 관계를 구축한 연맹체제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코모스도 가야고분군이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증거”란 점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가치가 있다고 봤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코모스는 가야고분군이 주변국과 공존하며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체계를 유지해온 점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핵심 증거란 점에서 세계유산 등재 기준을 충족한다고 평가했다. 가야 고분군의 등재 여부는 9월 10~25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리는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등재되면 한국은 총 16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저는 가난하여 공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잘것없는 등불 하나를 올려 부처님의 크신 덕을 기립니다.” 가난한 인도 여인 난타는 온종일 구걸해 얻은 한 푼을 등불 하나 밝히는 데 썼다. 그의 등불 주변에는 왕과 귀족들이 밝힌 호화로운 등불이 가득했지만 거센 바람이 불었을 때 오직 난타의 등불만 살아 어둠을 밝혔다. 이를 바라보던 부처는 “큰마음을 지닌 여인이 정성으로 켠 등불이기에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불경 ‘현우경(賢愚經)’ 속 이야기로 연등(燃燈) 의례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신라인들도 등잔에 불을 밝히며 어두운 마음과 세상을 밝히길 바랐을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11일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인 ‘황룡사지 회랑 외곽 공간에 대한 최신 조사 성과’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최근까지 경북 경주시 황룡사터 서회랑(西回廊) 서편지구를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름 약 10cm 크기 작은 토제등잔 1712점이 출토됐다. 황룡사 내 유일한 연지(蓮池)가 있었던 곳으로부터 약 30m 떨어진 데에서 가로 240cm, 세로 220cm, 깊이 90cm 규모 구덩이가 발견됐는데, 이곳에서 등잔이 쏟아져 나온 것. 경주 분황사(130여 점), 안압지(150여 점) 등에서도 등잔이 출토됐지만 이처럼 많이 나온 적은 없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등잔들은 한꺼번에 묻힌 것으로 나타났다. 최문정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정확한 용도가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수량을 보면 대규모 행사나 의례가 황룡사에서 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매립은 연지를 중심으로 이뤄진 의례의 마무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등잔에 불을 밝히는 것은 물론이고 한꺼번에 묻는 행위까지 의례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혹시 황룡사에서 행해진 연등회에 쓰였던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 연등 의례는 불국토를 꿈꿨던 신라의 왕실 사찰 황룡사에서 시작됐다는 게 통설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경문왕이 866년 정월 황룡사에 행차해 연등 행사를 구경했다’고 기록돼 있다. 임영애 동국대 문화재학과 교수는 “수량으로 미뤄 대규모 연등회에 쓰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고승 100명이 100일간 설법하는 ‘백고좌(百高座)’ 행사에 쓰였을 거라는 추정도 나온다. 613년에 황룡사에서 백고좌가 처음 시작됐고, 이때 원광법사가 설법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등잔이 고승들이 가부좌한 자리를 밝혔을 수 있다는 것이다. 등잔이 어떻게 쓰였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출토된 유물을 토대로 황룡사터 서회랑 서편지구가 의례를 행하고 지원하는 기능을 담당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2020년 서편지구 건물지 1호 주변에서는 중요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로 추정되는 6cm 크기 ‘금동봉황장식자물쇠’ 1점이 나왔다. 2021년 서편지구 건물지 79호 주변 또 다른 구덩이에서 등잔 100여 점이 출토된 바 있다. 553년 창건된 황룡사는 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돼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저는 가난하여 공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잘 것 없는 등불 하나를 올려 부처님의 크신 덕을 기립니다.” 가난한 인도 여인 난타는 온종일 구걸해 얻은 한 푼을 등불 하나 밝히는 데 썼다. 그의 등불 주변에는 왕과 귀족들이 밝힌 호화로운 등불이 가득했지만 거센 바람이 불었을 때 오직 난타의 등불만 살아 어둠을 밝혔다. 주위에서 난타의 등을 끄려 할수록 불은 더 밝게 타올랐다. 이를 바라보던 부처는 “가난하지만 큰 마음을 지닌 여인이 정성으로 켠 등불이기에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불경 ‘현우경(賢愚經)’ 속 이야기로 연등(燃燈) 의례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한국에서 연등 의례는 불국토를 꿈꿨던 신라의 왕실사찰 황룡사에서 시작됐다는 게 정설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11일 발표 예정인 ‘황룡사지 회랑 외곽 공간에 대한 최신 조사 성과’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최근까지 경북 경주 황룡사의 서회랑(西回廊) 서편지구를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등잔 1712점이 무더기로 출토된 것으로 나타났다. 황룡사 내 유일한 연지(蓮池)가 있었던 곳으로부터 약 30m 떨어진 곳에서 가로 240㎝, 세로 220㎝, 깊이 90㎝ 규모 구덩이가 나왔는데, 이 속에서 역대 최대 수량의 등잔이 쏟아져 나온 것. 경주 분황사(130여 점), 안압지(150여 점) 등에서도 등잔이 나왔지만 1000점이 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화려하지 않은 지름 약 10㎝ 크기 토제등잔에 신라인들은 어떤 염원을 담아 불을 밝혔을까. 타오르는 등불을 바라보며 어두운 마음과 세상을 밝히길 기원했을까. 최문정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정확한 용도가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수량 면에서 대규모 행사나 의례가 황룡사에서 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등잔들은 특정 시기 한꺼번에 매장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연지를 중심으로 이뤄진 의례의 마무리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했다. 등잔에 불을 밝히는 것은 물론 한꺼번에 매장하는 행위까지 의례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문헌을 통해 이 등잔들이 황룡사에서 행해진 ‘연등회’나 ‘백고좌(百高座)’에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 경문왕이 866년 정월 황룡사에 행차해 연등 행사를 구경하고 백관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기록돼 있다. 100개의 사자좌(獅子座, 부처를 모시는 자리)를 마련해 법사 100명이 100일 간 설법하는 백고좌 역시 613년 원광법사가 황룡사에서 설법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이후에도 황룡사에서 10번의 백고좌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사료를 통해 전해진다. 임영애 동국대 문화재학과·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는 “백고좌 때 법사들이 가부좌한 자리를 밝히는 데 쓰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수량에 미뤄 백고좌보다는 대규모 연등회에 쓰였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황룡사 서회랑 서편지구에서 출토된 유물 등을 토대로 이 공간이 의례를 행하고 지원하는 기능을 담당했을 것이란 추측을 내놨다. 앞서 2020년 서편지구 건물지 1호 주변에서는 사찰 내 의례에 사용하는 중요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로 추정되는 6㎝ 크기 ‘금동봉황장식자물쇠’ 1점이 나왔다. 2021년 서편지구 건물지 79호 주변에서도 등잔 100여 점이 출토된 바 있다. 553년 창건된 황룡사는 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돼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문화재청이 한국 문화유산 방문 코스 10가지를 선보여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을 9일부터 시작했다. 10가지 코스는 △경주와 안동을 중심으로 한 ‘천년 정신의 길’ △백제 옛 수도 공주 등을 둘러보는 ‘백제고도의 길’ △고창판소리박물관 등 옛 가락을 좇아가는 ‘소릿길’ △제주 문화유산을 탐방하는 ‘설화와 자연의 길’ △경복궁 등 왕실문화를 체험하는 ‘왕가의 길’ △경주 옥산서원 등을 돌며 성리학의 역사를 알아보는 ‘서원의 길’ △양산 통도사 등 사찰을 여행하는 ‘산사의 길’ △강릉 오죽헌 등 동해의 관동팔경을 둘러보는 ‘관동 풍류의 길’ △철원 고석정을 비롯해 선사시대 자연문화를 살피는 ‘선사 지질의 길’ △김해 수로왕릉 등 가야고분군을 둘러보는 ‘가야 문명의 길’ 등이다. ‘관동 풍류의 길’에서는 바다열차를 통해 즐기는 ‘바다열차 관동풍류’와 강릉 선교장을 야간 탐방하는 ‘선교장 달빛 방문’ 등 여행 프로그램이 이달과 10월 중 열린다. 해당 프로그램은 무료로 진행되며 사전에 예약해야 한다. ‘네이버 예약’을 통해 예약 받을 계획이다. 올해부터는 ‘문화유산 방문자 여권’이 현장마다 배포돼 방문객들이 도장을 찍으며 세계를 여행하듯 국내 문화유산을 탐방할 수 있도록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여태까지 책을 10여 권 썼는데, 전부 전문가를 위한 학술 책이었어요. 내 생의 마지막 책은 관장이 아닌 유물을 사랑하는 할머니로서 아이들을 위해 쓰고 싶었어요.” 국내 최초의 여성 학예연구사, 최초의 여성 학예연구관, 최초의 여성 국립경주박물관장…. 1957년부터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하며 잇달아 ‘최초’ 기록을 썼던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89)은 6일 전화 인터뷰 내내 ‘마지막’이라는 말을 자주 꺼냈다.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단국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 전 관장은 최근 펴낸 ‘박물관에서 속닥속닥’(진인진·사진)에 대해 “내 생의 마지막이자 은퇴 이후 30년을 정리한 책”이라고 했다. 2012년 출간한 ‘한국 고대의 금속공예’(서울대학교출판부) 이후 11년 만에 펴낸 이 책에는 그가 1986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일하기 시작하며 마주한 유물에 얽힌 추억이 담겼다. 책은 유물 이야기를 전하다가도 자꾸 샛길로 샌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사리장엄구’를 소개하다가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경주박물관에서 이 유물을 처음 본 순간을 들려주는 식이다. 이 전 관장은 “일부러 그렇게 썼다”며 “돌이켜 보니 내가 경주와 경주박물관을 사랑했던 건 그곳에서의 추억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수학여행 당시 전시장에는 분황사 모전석탑 사리장엄구에서 나온 가위, 동전, 집게, 은합 등이 함께 전시돼 있었다. 그의 눈에 띈 유물은 그중 가장 작고 가느다란 ‘금·은제바늘’이었다고 한다. 훗날 학예연구사로 이 유물을 재조사한 인연을 덧붙이며 그는 “오랜 시간 녹슬지 않고 완형을 유지한 이 유물은 당대 신라의 바늘 제작 기법이 얼마나 완벽했는지를 대변한다”고 예찬했다. 이 전 관장은 신라 유물 가운데 토우(土偶·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상)를 “성덕대왕신종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했다. 이 전 관장은 “발굴 조사를 나가면 나 혼자 여자라 방을 차지한다고, 힘을 쓰지 못한다고 늘 현장 작업에서 소외되곤 했다”며 “‘그냥 학교 선생님을 할걸’ 하고 후회하던 때 나름대로 박물관에서 살길을 찾았다. 그 길이 바로 유물 창고 관리였고, 그때 창고에서 만난 유물이 신라의 토우였다”고 회고했다. 이 전 관장은 2000년 ‘신라의 토우’(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6년 ‘토우’(대원사) 등 자신의 토우 연구 성과를 담은 저서를 냈다. 2020년 초 이번 책 출간을 준비하면서도 틈틈이 토우와 관련된 신간 초고를 집필해 왔지만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지난해 7월 낙상 사고로 거동이 어려워진 탓이다. 이 때문에 ‘박물관에서 속닥속닥’을 펴내는 데에도 3년이 넘게 걸렸다. 이 전 관장은 “몸이 아파 더는 책을 못 쓰겠다 싶을 때마다 경주박물관 직원과 제자들이 나를 찾아와 도판을 내밀며 글을 계속 쓸 수 있게 도왔다. 아직도 나를 관장이라고 불러주는 후배들 덕분에 마지막 힘을 쥐어짜 냈다”고 했다. 이 전 관장은 “내 책을 읽고 더 많은 이들이 박물관을 찾아준다면 그걸로 내 할 일은 다 한 것 같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청와대 개방 1주년(5월 10일)을 맞아 청와대 본관, 춘추관, 관저에서 역대 대통령의 일상을 주제로 한 전시가 잇달아 열린다. 또 3주간 청와대 야간 관람 인원을 기존 하루 100명에서 2000명으로 대폭 늘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청와대 개방 1주년을 맞아 10대 연중 기획 프로그램을 선보인다고 8일 밝혔다. 다음 달 초 대통령 집무실이던 본관에서 ‘우리 대통령들의 이야기, 여기 대통령들이 있었다’ 전시회가 열린다. 역대 대통령들의 숨결이 담긴 소품 등을 소개하며 청와대를 거쳐간 지도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조명한다. 기자회견장으로 쓰였던 춘추관에서는 역대 대통령들이 사용했던 식기와 가구를 선보이는 전시가 10월부터 열린다. 청와대 야외에서는 공연이 펼쳐진다. 이달 중 대정원에서는 ‘개방 1주년 기념 특별음악회’가 열리고 13, 14일 헬기장에서는 국립무용단이 ‘태평무’ 등을 선보이는 ‘전통의 품격’ 공연이 열린다. 공연은 9월에도 이어진다. 녹지원에서는 다음 달부터 ‘대통령의 나무들’이라는 주제로 경내 수목 자원 탐방 프로그램을 매일 2회씩 진행한다. 청와대 야간 관람 프로그램 ‘청와대 밤의 산책’은 일일 최대 관람객 수를 2000명으로 크게 늘려 다음 달과 9월 중 총 3주간 운영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5, 6세기 신라의 군사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시 기념물 ‘대구 팔거산성’(사진)이 8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 예고됐다.팔거산성은 해발 287m 높이 대구 함지산 정상부에 축조돼 대구 분지와 금호강 유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리적 특성을 지녔다. 특히 영남 지역과 서울을 잇는 당대 주요 교통로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어 신라왕경의 방어체계를 담당한 군사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산성 서쪽 아래 5, 6세기경 만들어진 ‘대구 구암동 고분군’이 있는 것으로 보아 팔거산성 역시 이 고분을 쌓은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2019~2021년 시굴조사 도중 팔거산성 내 목조 집수지(集水地·물이나 빗물을 저장하는 시설물)에서 출토된 목간(木簡) 16점의 간지(干支) 등을 분석한 결과 팔거산성은 5세기 후반 축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팔거산성은 신라 지방사 연구의 핵심 유적”이라고 설명했다. 30일 간의 예고 기간을 거쳐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최종 지정 여부가 결정된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내가 여태 쓴 책이 10여 권 정도 되는데, 전부 전문가들을 위한 학술 책이었어요. 나는 그동안 누구를 위해 글을 쓴 건가…. 내 생의 마지막 책은 관장이나 큐레이터가 아닌 유물을 사랑하는 할머니로서 아이들을 위해 쓰고 싶었어요. 나의 지식이 아니라 경주박물관에 얽힌 나의 추억을 담아서요.” 최초의 여성 학예연구사, 최초의 여성 학예연구관, 최초의 여성 국립경주박물관장. 1957년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국립박물관에서 일하며 늘 ‘최초’의 기록을 썼던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89)은 6일 전화인터뷰 내내 ‘마지막’이라는 말을 자주 꺼냈다. 이 전 관장은 최근 펴낸 신간 ‘박물관에서 속닥속닥’(진인진)에 대해 “내 생의 마지막이자 은퇴 이후 30년을 정리한 책”이라고 했다. 2012년 출간한 ‘한국 고대의 금속공예’(서울대학교출판부) 이후 11년 만에 펴낸 이 책에는 그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관장을 지낸 국립경주박물관 속 유물에 얽힌 추억들이 빼곡히 담겼다.이 전 관장은 “일부러 유물 이야기를 전하며 샛길로 많이 샜다. 구순을 앞둔 지금 돌이켜 보니 내가 경주와 경주박물관을 사랑했던 건 지식이나 학문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느끼고 겪었던 추억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경주 분황사모전석탑 사리장엄구’를 소개하며 그가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경주박물관에서 이 유물을 처음 본 순간을 들려주는 식이다. 당시 전시장에는 경주 분황사모전석탑 사리장엄구에서 나온 가위, 동전, 집게, 은합 등이 함께 전시돼 있었는데, 그의 눈에 띈 유물은 그 중 가장 작은 ‘금·은제바늘’이었다고 한다. 훗날 국립경주박물관장 소속으로 이 금·은제바늘을 재조사한 인연을 덧붙이며 “10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도록 완형을 유지한 이 유물은 당대 신라의 바늘 제작기법이 얼마나 완벽했는지를 대변한다”고 예찬했다. 이 전 관장이 “성덕대왕신종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고백한 신라의 유물은 토우(土偶·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상)다. 토우는 한때 박물관을 떠나고 싶었던 그를 사로잡은 유물이다. 이 전 관장은 “발굴조사를 나가면 나 혼자 여자라 방을 차지한다고, 여자라서 힘을 쓰지 못한다고 늘 현장 작업에서 소외되곤 했다”며 “‘그냥 고등학교 선생님을 할 걸’ 후회하던 때 내 나름대로 박물관에서 살 길을 찾았다. 그 길이 바로 유물 창고 관리였고, 그때 창고에서 만난 게 신라의 토우였다”고 회고했다. 이 전 관장은 2000년 ‘신라의 토우’(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6년 ‘토우’(대원사) 등 자신의 토우 연구 성과를 담은 저서를 퇴직 후 출간하기도 했다. “토우는 조그맣잖아요. 내가 다루기 쉬웠죠. 토우가 담긴 유물 상자 하나만 내게 주면 하루 종일 들여다보며 연구했어요.” 2020년 초 무렵 이 책을 집필하면서 틈틈이 토우와 관련한 신간 초고를 집필해왔지만 아쉽게도 빛을 볼 수 없게 됐다. 이 전 관장이 지난해 7월 낙상으로 더 이상 거동을 할 수 없어 요양병원에 머물게 되면서다. 이 때문에 ‘박물관에서 속닥속닥’을 펴내는 데에도 3, 4년이 걸렸다. 이 전 관장은 “몸이 아파서 더는 못 쓰겠다 싶을 때마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속 직원들이 나를 찾아와 자료와 도판을 내밀며 계속 글을 쓸 수 있게 도왔다”며 “박물관을 떠난 지 30년 가까이 됐는데도 나를 관장이라고 불러주는 후배들의 말 덕분에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낸 것 같다”고 했다. “다시 태어나도 박물관에서 일하고 싶다”는 이 전 관장은 끝으로 자신의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박물관에 가 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내 책을 읽고 더 많은 이들이 박물관을 찾아준다면 그걸로 내 할 일은 다 한 것 같아요.”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조기는 지역을 먹여 살리는 산업 그 자체였어요. 1950년대 인구 약 1000명인 연평도에 조기 파시(波市·풍어기에 열리는 생선시장)가 열리면 선원만 2만여 명이 들어왔습니다. 연평도어업조합의 일일출납고가 한국은행보다 더 많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죠.” 한때 인천 연평도는 ‘조기의 섬’이었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50)가 2017년 연평도에 1년 동안 살며 연구하던 당시 연평도에서 나고 자란 95세 노인은 회고했다. “그 시절 연평도는 서울이 부럽지 않았다. 파시가 열리면 골목골목이 명동보다 붐볐다”고. 연평도민 사이에서 전승되는 민요 ‘연평도 니나니타령’에는 “연평도에 물이 마르면 말랐지 내 주머니 돈이 마르랴”란 노랫말이 나온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던 파시의 소음과 바다 깊은 곳에서 들려오던 조기 떼 우는 소리는 1968년 5월 26일 연평도 파시가 멈춘 후 사라져 버린 옛 소리가 됐다. 해수 온도 변화로 더 이상 조기가 연평도 바다까지 북상하지 않는 탓이다. 6일 전화로 만난 김 연구사는 “이 생선과 함께 생계를 지탱했던 어민의 삶도 사라졌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8월 15일까지 열리는 ‘조명치(조기 명태 멸치) 해양문화특별전’을 기획한 김 연구사는 “사료가 아닌 살아 있는 문화로서의 조명치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강원 황태 덕장과 부산공동어시장, 인천 연평도 등을 오가며 실제 ‘조명치’의 실물과 어시장의 소리를 짭조름한 생선 비린내와 함께 전시장 안에 들여왔다. 전시장에는 그가 연평도에 살며 어민들에게 받아 입었던 ‘갑바’(어민들이 작업할 때 입는 비옷)도 걸려 있다. 약 6년 가까이 경남 남해, 제주, 울산 등 전국 곳곳의 해양문화를 탐사하며 뭍보다 바다와 가까이 지낸 그를 박물관에서는 ‘용왕님’이란 별명으로 부른다. 김 연구사는 “조명치는 음식일 뿐만 아니라 의례와 신앙, 경제를 지탱해주는 문화”라고 강조했다. 종묘에서 치르는 행사 절차를 풀어쓴 ‘종묘친제규제도설(宗廟親祭規制圖說) 병풍’에는 종묘대제에 조기젓과 명태포가 쓰였다고 기록돼 있다. 그는 “조선시대 한반도 어획량 1, 2위를 차지했던 명태와 조기는 어디서나 손쉽게 구해 제사상에 올릴 수 있었던 생선”이라며 “특히 명태는 한 번 건조하면 수십 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특성 때문에 바짝 말려 ‘액막이 북어’로도 쓰였다”고 했다. 북어는 가난한 백성들도 값싸게 구할 수 있어 ‘민(民)의 생선’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조선이 ‘명태의 나라’였다는 말도 이젠 옛말이 됐다. 2008년 이후 국내 명태 어획량은 ‘0’이다. 그 대신 지난해 국내에 수입된 수산물 121만7869t 가운데 냉동 명태(동태)가 33만6287t(27.6%)으로 1위다. 밥상에 오르는 동태의 98%는 러시아산이다. 김 연구사는 “바다 위 선원들의 땀이 밴 ‘명태잡이 소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 바다에서 들리지 않는다”며 “전시를 통해 사라져가는 우리의 소리와 냄새를 남기고 싶다”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99년 러시아 남성의 기대수명은 직전 해보다 4년 단축돼 58세까지 떨어졌다. 유엔 보고서는 그 원인으로 “빈곤율과 실업률, 재정 불안전성 증가”를 꼽았다. 러시아는 1998년 모라토리엄(지불 유예)을 선언했다. 러시아로부터 독립하려던 체첸공화국은 1999년 모스크바 일대 아파트에 폭탄 테러를 가했다. 바로 그때 연방보안국(FSB) 국장 출신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이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다. 모스크바 아파트 테러 전 2%에 그쳤던 그의 지지율은 그해 11월 40%를 넘어섰다. 이 기간 러시아 언론은 “체첸으로 밀고 들어가라”고 명령하는 푸틴의 모습을 자주 실었다. 2000년, 21세기 시작과 동시에 푸틴은 러시아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외무 담당 수석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푸틴의 등장 이후 중국과 튀르키예(터키), 영국, 미국 등을 장악한 스트롱맨의 시대를 분석했다. 저자가 정의한 ‘스트롱맨’은 보수주의자이면서 민족주의자로, 소수자를 배척하고 국익만을 노골적으로 앞세우는 국가 지도자를 뜻한다. 책에는 스트롱맨 통치의 특징은 물론 앞으로의 전망을 담았다. 저자는 스트롱맨 시대가 세계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건 2012년 시진핑이 중국 국가주석으로 집권한 뒤부터라고 봤다. 이전에도 러시아와 튀르키예에서 스트롱맨 통치가 싹텄지만 이들은 초강대국이 아니었다. 세계 경제와 안보 패권을 놓고 미국과 다투는 중국의 지도자로 시진핑이 급부상하면서 미국도 이에 맞설 더 강력한 스트롱맨을 원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이 때문에 저자는 “트럼프가 2016년 백악관에 입성한 사건은 이미 확립된 세계적 추세의 일부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꼽은 스트롱맨의 공통점 중 하나는 ‘사법부 장악’이다. 이들에게 법은 반대파를 탄압하는 정치적 무기다. 푸틴은 2021년 반대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를 투옥했다. 시진핑은 집권 직후 반부패 운동을 벌인 운동가 100만여 명을 감옥에 가뒀다. 2016년 미국 대선에 나왔던 트럼프가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을 겨냥해 외친 구호는 “그녀를 가둬라”였다. 스트롱맨의 통치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삼권분립을 위협한다는 분석이다. 과연 스트롱맨의 시대는 끝날까. 저자의 답은 솔직하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 “독재자들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겠다”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포부도 실현되기 어렵다고 내다봤다. 미국의 경제력이 최고 수준이었던 과거와 달리 2019년 세계 최대 무역국은 중국이다. 2021년 바이든 정부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점령할 걸 알면서도 미군을 철수시켰다. 자유민주주의의 보루를 자처했던 냉전 시기처럼 미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는 환경이란 얘기다. 저자는 서구 정치평론가로서 스스로에 대한 자성도 담았다. 저자는 2014년 독재자 나렌드라 모디가 인도 총리에 올랐을 때 쓴 칼럼에서 “모디는 인도가 감수할 가치가 있는 위험”이라고 낙관했다고 한다. 수년 뒤 이 책을 펴낸 저자는 “서구 평론가들은 냉전 승리에서 비롯된 자유주의가 가진 힘에 대해 과신했다”며 자신의 오판을 인정했다. 원제는 ‘The Age of the Strongman(스트롱맨의 시대).’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어린이날을 맞아 박물관에서 각종 무료 행사와 공연이 열린다.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은 5일 낮 12시부터 4시간 동안 박물관 1층 강당 등에서 어린이날 큰잔치 ‘박물관에서 놀자’를 연다. ‘인형극단 친구들’이 선보이는 막대인형극 ‘햇님달님’을 시작으로, 비눗방울 마술 ‘버블 매직쇼’ 공연도 펼쳐진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도 이날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추억의 골목놀이’와 가족 음악극 등 여러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박물관 내 3층 다목적홀에서는 오후 2시부터 1시간 동안 한국 설화 ‘목도령과 대홍수’를 모티브로 한 가족 음악극이 펼쳐진다. 이 공연은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사전 신청하면 되고, 현장 접수를 통해서도 관람할 수 있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은 18, 19세기 ‘동자상’을 비롯해 상설전시실 곳곳에 있는 어린이 관련 전시품 20건 25점을 소개하는 ‘어린이를 찾아라’ 프로그램을 8월 20일까지 선보인다.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어린이 유물 지도’를 내려받아 아이들이 보물을 찾듯 어린이 유물을 찾는 식이다. 모든 행사와 전시는 무료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9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온 천마총 ‘천마도(天馬圖)’는 1500여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당장이라도 구름을 타고 하늘을 노닐 듯 찬연한 모습이었다. “변색이 적은 건 무덤 속의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됐기 때문일 거예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학예연구사가 4일 귀띔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올해 천마총 발굴 50주년을 맞아 특별전 ‘천마, 다시 만나다’를 이날 개막했다. 이번 전시에는 국보 ‘경주 천마총 장니·障泥 천마도’(2점) 등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장니·말을 탄 사람의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 유물 5점과 천마총 출토 금관 등 유물 총 26점을 선보인다. 천마총 천마도가 수장고 밖으로 나와 전시되는 건 2014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특별전을 연 이후 9년 만이다. 천마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신성한 동물로 신라 건국설화에서 시조의 탄생을 예견하는 동물로 분석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천마총 천마도뿐 아니라 지금까지 출토된 모든 ‘천마 말다래’를 선보인다. 천마총에서 함께 발견된 금동판을 오려 만든 1점, 일제강점기 각각 금령총과 금관총에서 출토된 2점이다. 정효은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2013년 천마총 금동판 말다래의 문양을 복원하면서 비로소 과거 금관총과 금령총 출토 말다래에 그려진 것 역시 천마라는 게 파악됐다”며 “천마가 신라 사람들의 마음에 널리 자리 잡은 신성한 동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천마총 천마도 2점의 경우 6월 11일까지 1점이, 이튿날부터 전시가 끝나는 7월 16일까지 또다른 1점이 전시된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유물이 온도와 습도 변화에 극히 민감한 탓에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전시장 온도는 21∼23도, 습도는 50∼60%로 수장고와 똑같이 유지하고 있으며 장치를 통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했다. 전시장에서는 빛에 의한 훼손을 막기 위해 사진 촬영 시 플래시를 터뜨리는 것이 엄격히 금지된다. 이번 전시의 1부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다’에서는 구본창 사진작가의 렌즈를 통해 새롭게 조명한 천마총 출토 황금 유물 사진 11점도 선보인다. 구 작가는 금색지를 배경에 놓고 금관과 금모(金帽) 등 유물을 놓았다. 올해 2월 촬영 당시 그는 박물관 측에 “지금까지 황금 유물 사진은 검은 배경에 찍는 게 일반적이었다. 나는 그 틀을 깨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금색지에 놓인 황금 유물은 배경보다 더 선명하게 빛나는 듯했다. 구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 황금 유물에서 인간의 욕망이, 시대의 삶이, 사후세계에 대한 열망이 읽혔다.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충분히 증거하고 싶었다”고 했다. 전시 2부 ‘황금으로 꾸민 주인공을 만나다’에서는 금관과 금제장식 등 19점의 실물을 볼 수 있다. 1973년 8월 22일 두 겹으로 겹쳐져 있던 천마도를 손수 발굴했던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73)은 이날 전시장을 찾아 “곧 으스러질 것 같은 유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하늘을 나는 백마가 보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전시 마지막은 천마총 발굴조사단을 이끌었던 고 김정기 초대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의 말로 장식됐다. “말다래에 그려진 하늘을 날 듯한 천마, 그 천마는 우리를 버리고 하늘로 날아가지 않았다. 오늘도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채 더 큰 비상을 꿈꾸고 있다”. 무료.경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어린애 잡지를 누가 거들떠보기나 할 듯 싶으냐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될 터이니 하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안 될 일일수록 우리가 하지 않으면 누가 손대는 사람이 있겠소. 낭패하더라도 낭패하는 그날까지 억지로라도 시작해야지요.” 1923년 3월 20일 어린이들을 위한 한글 잡지 ‘어린이’를 창간한 소파 방정환(1899∼1931)은 1928년 햇수로 창간 6년을 기념하는 제7권 제3호에 이런 글을 남겼다. 모두가 실패할 거라고 했던 이 잡지는 창간 후 폐간되는 1935년까지 122호가, 광복 후인 1948년 5월 복간돼 총 137호가 발행됐다. 한때 독자 수가 10만 명에 달했다.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은 ‘어린이’ 창간 100주년을 기념해 ‘어린이’ 잡지 150여 점을 비롯해 관련 자료 총 325점을 선보이는 특별전 ‘어린이 나라’를 4일부터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창간호를 포함해 방정환이 1923년 동화 ‘백설공주’를 번안해 소개한 ‘어린이’ 제1권 제5∼7호, 어린이가 쓴 문예작품을 실은 부록 ‘어린이신문 제1호’ 등 실물이 처음 공개된다. 전시 제목은 “죄 없고 허물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하늘나라! 그것은 우리 어린이의 나라”라고 쓴 창간사에서 따왔다. ‘어린이’는 어린이에게 세계를 보여주는 창이었다. ‘어린이’는 1925년 2월부터 매달 일본, 미국, 영국 등 세계 각지의 사진 화보를 실었다. 전시에서는 해외 풍경 사진뿐 아니라 당대 지식인들이 우리말로 옮긴 세계 명작 아동문학 ‘석냥팔이(성냥팔이) 소녀’ ‘ 현철이와 옥주(헨젤과 그레텔)’ 등이 실린 호를 선보인다. 무엇보다 ‘어린이’는 어린이에게 우리말로 자신의 생각을 쓰게 했다. 이 잡지는 폐간될 때까지 어린이 독자들의 창작 작품을 받아 실었다. 전시에서는 아동문학가 이원수(1911∼1981)가 15세 때 ‘어린이’ 제4권 제4호에 발표한 동요 가사 ‘고향의 봄’과 그의 부인인 가수 최순애(1914∼1998)가 ‘어린이’ 3권 11호에 발표한 동요 가사 ‘오빠생각’도 소개된다. 처음 공개되는 부록 ‘어린이세상’ 제28호(1929년)에는 어린이 독자들을 향해 “생각하는 그대로 쓰라”는 당부가 담겼다. 김민지 한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어린이’를 통해 국내 창작 아동문학이 싹텄을 뿐 아니라 어린이 공동체가 형성됐다”며 “일제강점기 어린이들은 이 잡지를 통해 이야기를 터놓으며 고립되지 않고 서로의 생각을 나눴다”고 했다. 8월 20일까지.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왕실 문화를 보여주는 ‘조선왕조 어보(御寶)·어책(御冊)·교명(敎命)’이 보물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은 종묘 신실에 봉안돼 온 어보 318점, 어책 290첩, 교명 29축 등 총 637점을 3일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어보는 국왕이나 왕세자, 왕세제, 왕세손과 배우자가 지위에 임명되는 책봉 때나 상왕(上王) 등에게 존호(尊號·덕을 기리는 뜻으로 올리는 칭호)를 올릴 때 제작된 의례용 인장이다. 어책은 어보와 함께 내려지는 책으로 의례의 배경과 의미가 기록돼 있다. 신분과 재질에 따라 어보는 금보, 옥보, 은인으로, 어책은 옥책, 죽책, 금책으로 나뉘었다. 교명은 왕비와 왕세자, 왕세자빈 등을 책봉할 때 내리는 문서로, 주로 지위에 책임을 다할 것을 일깨우는 내용이 담겼다. 지정 예고된 유물 중 신정왕후 조씨가 1819년 효명세자빈으로 책봉될 때 제작된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약탈당했다가 2017년 프랑스 파리 고미술 시장에 나온 것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매입해 국내로 들여온 것이다. 이 밖에도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정몽주(1337∼1392) 등 1136명의 필적을 엮은 서첩 ‘근묵(槿墨)’과 1565년 제작된 불화 ‘아미타여래구존도’, 1657년 만들어진 ‘순천 동화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도 보물로 지정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충청북도(도지사 김영환)와 충북문화재단(대표이사 김갑수)이 1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충북갤러리’를 개관한다. 개관 기념전으로 10일부터 28일까지 ‘충북 예술의 서막-그 영원한 울림’을 선보인다. 충북문화재단은 3일 “충북갤러리는 충북미술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충북 예술인들에게 안정적인 전시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며 “앞으로 이 공간을 통해 충북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개관전시에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독자적인 예술의 정체성을 확립한 충북의 작고 예술인 8명(안승각, 박석호, 임직순, 정창섭, 이기원, 윤형근, 안영일, 하동철)의 작품 50여점을 선보인다. 충북미술교육의 선구자로 충북화단의 주춧돌을 놓은 안승각, 독자적인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구상 양식을 구축한 박석호, 색채화가 임직순, 기하학적 추상 작가 이기원, 선과 색을 빛으로 환원한 하동철, 단색화로 한국적 모더니즘의 미학을 이룩한 정창섭, 윤형근과 미국에서 ‘물’ 시리즈로 한국의 고유한 정신성을 그려낸 안영일 작가 등이다. 재단은 “이들은 충북미술이 태동하며 초석을 다지는 여명기부터 한국 근현대미술의 이행 단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거장들”이라고 설명했다. 11일 오후 3시에는 조은정 미술사학자와 함께하는 세미나가 열린다. 이 세미나에서는 근·현대를 살아간 충북 지역 예술인들을 재조명할 예정이다. 재단 관계자는 “전시와 세미나를 통해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충북 예술인들의 업적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경남 양산 통도사, 경남 합천 해인사 등 국가지정문화재를 보유한 대한불교조계종 산하 사찰 65곳의 문화재 관람료가 4일부터 무료로 전환된다. 문화재청과 대한불교조계종은 ‘불교문화유산의 온전한 보존 및 활용을 위한 업무협약’을 1일 체결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국보와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의 소유자나 관리자가 관람료를 감면하는 경우 정부가 그 비용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문화재보호법 개정안’이 4일부터 시행되는 데 따른 조치다. 사찰은 관람료를 면제하는 대신 국비를 지원받는다. 올해 관람료 감면 지원을 위해 책정된 사업비는 419억 원으로 법주사, 불국사, 석굴암, 화엄사, 백양사, 송광사, 선운사, 범어사, 수덕사, 월정사, 백담사 등에 무료입장할 수 있다. 이번 조치로 문화재 관람료 징수를 둘러싸고 빚어졌던 갈등이 일단락될 것으로 보인다. 사찰 측은 2007년 국립공원 관람료가 폐지된 뒤에도 문화재 관리와 보존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관람료를 거둬왔다. 하지만 단순히 사찰 구역을 지나는 등산객도 관람료를 내야 하느냐는 반발이 일었다. 다만 시도지정문화재를 보유한 조계종 산하 △인천 강화 보문사 △충남 부여 고란사 △경남 남해 보리암 △전북 무주 백련사 △경북 영주 희방사 등 5곳은 국고 지원 대상에서 제외돼 이전처럼 관람료를 내야 입장할 수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리와 중국의 관계는 필요할 때는 경쟁적이고, 가능할 때는 협력적이며, 불가피할 때는 적대적일 것입니다.” 2021년 3월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취임 후 공식석상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대(對)중국 정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국 하버드대 중국사 교수 등 중국학 전문가들은 블링컨 장관의 말 속에 등장한 단어 ‘경쟁’에 주목한다. 당시부터 5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이 미국과 어느 정도 맞먹는다는 평가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가 바뀌었다. 안보와 경제, 군사개발 등을 둘러싼 미중 문제에 대한 세계적 석학 54명의 글을 엮은 이 책에서 필자들은 “미중 양국은 (이미) 경쟁 관계”라고 전제한다. 세계 안보 패권을 놓고 미중은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따르면 중국의 첩보활동 사례 적발 건수는 10년 전에 비해 1300% 증가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2020년 대선 기간 한 중국 조직이 조 바이든 후보 측 관계자들의 e메일 계정을 해킹하려 했다고 밝혔다. 미국의 동맹국을 향한 중국의 경제 압박도 심해지고 있다. 한국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를 배치하기로 결정하자 중국이 사실상 자국민의 한국 여행을 금하고 중국 내 한국 기업의 문을 닫게 만든 사례가 대표적이다. 중국은 미국 중심의 안보 체제에 균열을 내고 있다. 경제 측면에서의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2020년 기준 미중 양국 간 상품 및 재화 무역액은 약 6600억 달러(약 884조 원). 미국과 중국은 경제적으로 상호 의존적인 관계다. 이 때문에 라이언 해스 미국 브루킹연구소 외교정책학 부장은 적대적인 미중 무역 전쟁이 오히려 미국을 위협할 거라고 지적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무역 전쟁으로 미국 내 일자리 24만5000개가 사라졌고, 2020년 중국의 대미 직접투자액은 2017년 대비 10%로 줄었다. 중국은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경제성장을 이끌어왔으며, 최근 대미 무역 비중을 줄이는 추세다. 미국의 대중 무역 제재가 잘 통하지 않는 배경이다. 앞으로 주변국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미중 갈등이 어느 한쪽의 손쉬운 승리로 끝나진 않을 거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앨러스테어 존스턴 하버드대 교수는 “상호 간 위협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흑백 논리가 아니다. 미중의 이해관계를 서로 구분할 수 없는 복잡성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것”이라고 했다. 유럽이 선택한 방식은 ‘줄타기 외교’다. 유럽연합(EU)은 “중국의 경제적 관행들에 대해 미국과 먼저 협의해 달라”는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요청을 무시하고 2020년 중국과 포괄적 투자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면서도 EU는 2021년 중국이 위구르 소수민족을 탄압하던 시기 위구르 자치구를 책임지고 있던 중국 관료 4명에게 제재를 가했다. 래너 미터 영국 옥스퍼드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는 추천사에서 “우리는 지금 중국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하며 이를 통해 보다 분명하고 현실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했다. 원제 ‘미중 관계에 대한 비판적 통찰력(Critical Insights Into US-China Relations)’.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리는 영·정조 때를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영조와 정조는 제왕으로서의 권력을 강화했을 뿐 조선을 새롭게 바꾸진 못했습니다. 이들과 함께 정치 개혁을 꿈꿨던 이들의 눈에 비친 조선은 여전히 낡고 병든 나라 아니었을까요.” 조선 정조 때 실권자 홍국영(1748~1781)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의리주인’(북레시피)을 지난달 17일 출간한 강희찬 작가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간 싱크탱크 국가경영전략연구원(NSI) 기획조정실장이자 국제정치학 박사인 강 작가는 “조선의 흥망은 이미 18세기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며 “조선은 어째서 개혁에 실패했는지, 이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사상이 꿈틀거렸고 어떤 꿈이 결국 좌절됐는지 이 소설 속에 담아내고 싶었다”고 했다. 강 작가는 기존 ‘세도정치가’로 그려져 왔던 홍국영을 ‘개혁가’로 새롭게 재해석했다. 홍국영은 당대 유력했던 풍산 홍씨 가문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를 지냈지만 그의 아버지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홍국영과 관련된 사료를 찾던 그는 “홍국영 집안이 도성 밖에 있었다”는 기록에서 이 소설이 시작됐다고 했다. ‘어쩌면 홍국영의 고향은 도성이 아닌 무수히 많은 상인과 물품들이 오가는 시장이 아니었을까. 구습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장통에서 홍국영은 어떤 조선을 목격했을까.’ 그는 “도성 밖 출생이라는 홍국영의 태생이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했을 것이라는 상상에서 출발한 소설”이라며 “누구나 자유롭게 돈을 벌 수 있는 시장에서 성별과 신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고, 시장에서 자라난 홍국영은 더 자유로운 조선을 꿈꿨을 것이라고 상상했다”고 했다. 그렇게 강 작가가 빚어낸 소설 속 홍국영은 서학과 시장 논리에 밝은 개혁적 인물로 그려진다. 벼슬에 오르지 못한 아버지를 대신해 홍국영의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하며 생계를 이끌었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조선의 낡은 관습들이 조금씩 깨지고 있는 현실을 목격한 소설 속 홍국영이 동궁(정조)에게 “사람들의 생각이 변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생각은 낡았고 새로운 생각이 필요합니다”라고 직언하는 대목은 그가 꿈꿨던 새로운 조선을 보여준다.‘의리주인’은 홍국영의 도움으로 동궁이 왕위를 물려받는 데서 끝나지만, 강 작가는 “그 이후의 이야기가 더 남아 있다”고 했다. 역사가 말해주듯,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이며 권력의 중심에 다가서다가 1780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던 계획이 발각돼 축출당한 뒤 33세에 병사했다. 강 작가는 “‘의리주인’ 후속편에서는 근본적인 태생이 달랐던 정조와 홍국영의 사상 대립을 다룰 것”이라며 “소설 속에서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홍국영의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지만, 나는 이것이 홍국영 개인의 실패가 아닌 조선의 실패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강 작가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조선 개혁에 뛰어든 홍국영의 꿈과 욕망을 후속 작품에 담아내고 싶다”고 덧붙였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