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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선 과거 대선이나 총선 때마다 돈이 대량으로 살포되는 경우가 많았다. ‘눈먼 돈’이 그나마 줄어들기 시작한 건 2003년 대선 자금 수사 이후였다. 당시 검찰 수사에선 2002년 대선 직전 이회창 후보 측에서 ‘차떼기’ 등의 방식으로 823억 원의 불법 선거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은 ‘차떼기 당’이란 오명을 얻었고 국민들에게 사죄하며 당사를 팔고 천막당사로 옮겨야 했다. 민주당에서도 불법 대선자금 113억 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들이 구속되거나 재판에 넘겨졌다. 이후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정치자금법이 개정돼 기업이 법적으로 정당에 기부할 수 있는 길이 막혔고 후원금은 개인만 낼 수 있게 됐다. 한마디로 검찰이 이끈 정치개혁이었다. 당시 수사팀엔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원석 검찰총장 등이 있었다. 2012년에는 한나라당 고승덕 전 의원이 2008년 당시 전당대회에 출마했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으로부터 300만 원이 든 돈봉투를 받은 사실을 폭로해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돈봉투를 받은 사람은 고 전 의원뿐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객관적 증거가 부족했다. 돈을 받은 인사들이 스스로 자백할 리도 없는 만큼 어려운 수사였다. 검찰은 박 전 의장과 전당대회 캠프 상황실장으로 돈봉투 전달에 관여한 김효재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을 조사한 뒤 재판에 넘겼다. 두 사람 모두 현직에 있어 정권 외압도 적지 않았지만 수사를 관철시킨 것이다. 그 대신 박 전 의장이 고령인 데다 3부 요인이고, 의장직 사퇴 의사를 밝힌 점 등을 고려해 불구속 기소했다. 결국 박 전 의장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김 전 수석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확정받았다. 이듬해 여야는 정당법을 고쳐 전당대회 때 관광버스 비용이나 식사비를 중앙당에서 제공하게 했다. 정치적 현실에 맞게 법을 바꾼 것이다. 당시 여권은 ‘관행’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두 사람을 엄호했고 결국 모두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로부터 11년 만에 다시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이 불거졌다. 유사 사건이 재연된 것은 당시 제도 개선이 미진했거나 방향이 잘못됐다는 얘기다. 어쩌면 ‘솜방망이’ 처벌 때문일 수도 있다. 이번 사건도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2부(부장검사 김영철)가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의 녹음파일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수면 위로 드러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당사자들은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지만 녹음파일에 드러난 내용을 보면 이들의 억울함을 그대로 믿기는 쉽지 않다. 감시가 느슨해지면 위정자들은 경각심을 잃고 일탈하게 마련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온다. 이를 감시할 검찰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지금도 음지에선 진화된 방식으로 불법 자금이 흐르고 있을지 모른다. 자체 개혁을 못 하는 건 정치권이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이다. 여야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치개혁 방안 마련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곪은 상처는 완전히 도려내야 새살이 돋는다.황형준 사회부 차장 constant25@donga.com}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학창시절에 꼭 그런 친구가 있다. 노는 것도 잘 놀면서 공부도 잘한다. 경쟁자를 의식해 공부 안 한 척 안심시키고 몰래 공부하는 ‘No 재수’도 아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지 화장실에서 몰래 초코파이를 까먹는 ‘이등병’도 아니었을 것이다. 반장은 고3 때 1번 맡았지만 오락부장은 늘 맡았다. 누구나에게나 진심으로 대해 주기 때문에 여야를 떠나 적(敵)이 없다. 친화력이 있고 무엇보다 소탈하고 인간적이다. 최연소 공인회계사시험 합격을 포함해 행정고시, 사법시험 등 고시3관왕 스펙(spec)이 비인간적일 뿐….김관영 전북도지사(이하 김관영)는 늘 웃는 상이다. 실패를 겪어도 자신감이 있다. 아무리 수재여도 하나도 통과하기 어려운 고시를 3개나 패스한 경험이 그의 자산인 것이다. 2011년 펴낸 책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라는 제목도 자신감이 넘친다. 누구든 행복 바이러스로 즐겁게 해줄 자신이 있다는 거 아닌가.● 6남 중 5남…‘리어카에서 태어날 뻔했던 아이’“참말이지, 관영이 너는 리어카에서 나오는 줄 알았어야.” 1969년 전북 군산시 학당군(당시 지명은 옥구군 회현면 학당리)에서 6남 중 5남으로 태어난 김관영은 어머니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채소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산통을 느끼고 귀가하던 중 진통이 시작됐다. 버스 정류장 앞 가게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해 리어카에 실려 집에 온 뒤 무사히 자택에서 그를 출산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농사일을 했고 시장에서 소매로 채소 등을 팔았다.김관영도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거들었다. 오이 심고 농약 주고 가지 심고, 배추 다듬고, 마늘 심고 생강 심고… 일 년 내내 농사는 이어졌다. 아버지는 공부를 하기 싫으면 나랑 같이 농사짓자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농사는 너무 힘들고 이문이 별로 남지 않는 일이라 그 말이 무서웠다고 한다. 아들만 6명인 형제들은 용감했다. 싸움을 하건 농사일을 하건 단결 하나는 끝내줬다고 한다. 형들은 동생들이 공부할 수 있게 도와줬고 희생했다. 형제들 사이에서 정치와 사회를 배웠다. 김관영이 천재는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형들로부터 “야, 우리 집에 너같이 공부 못한 사람은 없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열심히 해서 240명 중 3등으로 졸업했다. 군산제일고에도 전교 18등 정도로 입학했지만 점점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대입 학력고사를 예상보다 잘 못 보았지만 아버지는 재수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큰형의 조언으로 이과에서 문과로 바꿔 성균관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1987년 대학교 1학년 때 열심히 데모에 참석하며 화염병을 던지는 등 ‘열혈청년’으로 지냈다. 6월 민주항쟁으로 6·29선언이 이어지자 큰형은 여름에 “시골 부모님 생각하고 네 자신도 생각하면서 공부를 좀 해라”라며 상업부기 학원 수강증을 끊어줬다. 2학기부터 성균관대 고시반에 들어가 회계사 시험을 준비했다. 그는 경제학 등을 공부하며 재미를 느꼈다. 다음 해 4월 치러진 1차 시험에서 객관식 문제가 굉장히 쉽게 나왔다. 1차 합격자 발표가 6월이고 8월 2차 시험 예정이었는데, 그는 그때까지도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1차 시험 준비를 다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덜컥 합격했고 11월 최종합격자 발표에서 230명 중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성대 고시반에서 2학년이 합격한 것도 처음인 데다, 학교를 일찍 들어간 김관영은 만 18세 최연소 합격자로 소개됐다. 그는 이 과정에서 “시험장에서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시험 준비할 때 나는 무조건 된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비인간적 스펙…김관영의 공부법“공부와 관련된 일반 원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력’을 높이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는 결국 집중력의 차이다.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첫째, ‘동기 부여’가 중요하다. 가난과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새로운 도전의 기회로 삼는다는 정신, ‘헝그리 정신’ 같은 것이다. 집중력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실천력을 기르는 것이다. 실천력은 ‘성공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중략) 내가 개발한 나만의 학습법은 ‘나만의 책’ 만들기이다. 요즘은 이런 식의 학습법을 ‘단권화’ 작업, ‘오답 노트’ 만들기라고 하면서 장려하는 것을 보면, 그 효과가 검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관영,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 중에서 재학 중에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김관영은 지도교수로부터 행정고시를 준비하라는 조언을 받고 다시 행정고시반에 들어갔다. 다시 한번 최연소 합격을 하겠다는 욕심이 있었지만 1차에서 2번 떨어졌다. 3년 9개월 동안 고시반에 있으면서 결국 1992년 10월 합격했다.대학이랑 대학원을 다닐 때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시 공부를 했다. 교사를 꿈꾸던 아내를 만나서 내조를 받았고 1995년 4월 회계장교로 입대하기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 원래 사법시험을 볼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에 배치되고 보니 법안을 만드는 과정이 재밌었다. 마침 군대에서 오후 5시 퇴근 후 저녁시간을 낼 수 있어 법 공부를 시작했다. ‘이렇게 할 바에야 제대로 하자’는 생각이 들어서 아예 고시를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 두 번의 낙방 끝에 군대 마치기 직전인 1998년 1차 시험에 합격했다. 재정경제부에 복직한 뒤 공부 시간 확보를 위해 정부과천청사 옆에 고시원을 얻어 ‘주경야독’을 했다. 형을 따라 성균관대에 입학한 김관영의 막냇동생이 함께 사법시험 공부를 하며 자료 등 도움을 줬다. 형제는 나란히 1999년 합격해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같은 대학을 나온 형제가 나란히 사법고시 2차에 합격했다. 주인공은 김관영(金寬永·31) 형완(炯完·26) 씨 형제. 특히 형 관영 씨는 88년 공인회계사자격증(CPA), 92년 행정고시 합격에 이어 ‘고시 3관왕’에 올랐다. 그는 현재 재경부 감사담당관실에 근무하고 있다. 전북 옥구군 회현면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김 씨 형제의 부모는 무엇보다 형제애를 강조했다. 이 때문에 이들 형제는 이번 합격이 너무나 기쁘다고 말했다. 이들 형제는 성균관대 동문으로 각각 경영학과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형제는 이 대학 사법고시 준비반인 ‘양현관’에서 함께 시험 준비를 했다. 동생은 낮에 자료를 정리해 퇴근 후 양현관을 찾은 형에게 줬고 형은 슬럼프에 빠진 동생을 격려했다. 이들 형제는 23일 면접만 남겨놓아 사실상 합격한 상태. 관영 씨는 재경부에서 계속 근무할 예정이며 형완 씨는 판사나 검사를 희망하고 있다.” ―1999년 11월 10일자 동아일보그 스스로 본인이 머리가 좋거나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고 여긴다. 중학교 시절 IQ 테스트 결과도 113이었다. 대신 그는 남들보다 강한 인내심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는 “내가 마땅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은 그러니까, 세 개의 합격증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기울였던 나의 ‘열심’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대학 별명은 ‘스트립’…‘가장 김앤장 같지 않은 변호사’로 불려공부도 공부지만 그는 놀기도 잘 놀고 무대 체질이었다. 노래를 잘했고 중학교 소풍 때 장기자랑으로 시골 약장사 촌극을 벌였다. 대학교 1학년 때 엠티 장기자랑에서 4학년 선배의 ‘픽업’으로 스트립쇼를 연출해서 별명이 ‘스트립’으로 불렸다고 했다. 대학원 신입생 환영회 때도 어김없이 장기자랑에 나서 노래를 불렀고 심봉사 연기를 해 박수를 받았다. 중앙공무원교육원 시절엔 자치회 기획부장을 맡아 오락부장 역할을 했고 인기가 많았다.사법연수원에 있는 동안 김앤장법률사무소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당초 공무원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된다는 생각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시 그는 나중에 뜻 있는 사람들을 모아 나라에서 할 수 없는 사업에 자원을 분배하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같은 자선사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회계사 자격증과 재경부 재직 경험 및 인맥 등은 변호사로서 큰 장점이었다. 인재들이 모인 김앤장에서도 김관영은 잘나갔다. 소탈함과 솔직함, 성실성은 그의 품성이었고 김앤장의 제1원칙인 ‘고객중심주의’에도 잘 부합했다. 그러면서도 겸손한 호감형이었다. ‘가장 김앤장 같지 않은 변호사’라는 별명도 붙었다. 그의 좌우명은 ‘지경을 넓히는 삶’, 즉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이다. 기독교인인 그는 ‘야베스의 기도’라는 기도문을 좋아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표현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정치인이 돼 지금보다 더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김앤장에서 근무한 지 10년 만이었다.● 차세대 리더로 주목…제3당 원내대표 지내고향인 군산에서 출마한 김관영은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전북 군산에서 당선됐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당 기준으로 청년(45세)이었다. 그는 ‘고시 3관왕’이라는 ‘간판’으로 인해 주목을 받았고 당 비상대책위원과 수석대변인, 대표 비서실장 등 요직을 차지했다. 주목받는 초선 의원이자 차세대 리더로 불렸다. 물론 실력이 드러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19대 국회 전반기엔 국토교통위원으로 활동하다 후반기엔 기재부 출신의 장점을 살려 기획재정위원으로 활동했다. 2014년 12월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이 추진하던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 표결을 앞두고 반대토론에 나섰다. 중소기업의 가업상속공제 적용 요건을 낮춰 경제 활성화를 꾀하겠다는 게 당시 여당 입장이었다.하지만 김관영은 “대한민국에 전통 있는 명문 가족기업을 육성해서 지속적으로 고용과 성장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정부의 취지에 100% 동의한다”면서도 “그 방법이 기업을 하는 부자들에게 그냥 수백억 원의 세금을 면제해주는 방식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여야가 합의한 사안임에도 김관영의 반대토론 이후 여당 내 기권표가 늘면서 결국 부결됐다.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이 민주당에 있던 시절 그를 따라 국민의당으로 옮겼다. 그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박지원 원내대표 체제에서 원내수석부대표를 맡은 김관영은 20대 국회에서 여야 협상 창구를 맡으며 제3당의 존재감을 보여줬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이 시작되자 탄핵소추위원을 맡았다.당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한 뒤 유승민 의원이 창당한 바른정당과 합당하면서 바른미래당 소속이 됐다. 김관영은 재선 의원으로선 드물게 바른미래당에서 원내대표에 당선됐다. 2019년 4월 선거제 개편과 공수처 설치법 등의 패스트트랙 지정 논란에 중심에 서기도 했다.바른미래당이 내분으로 당이 깨지면서 2020년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결국 낙선했다. 그 뒤 싱크탱크인 한국공공정책전략연구소(KIPPS·킵스)를 설립해 김성식 채이배 전 의원 등과 함께 여야를 뛰어넘는 공동의 정책 어젠다를 만들었다.2022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에 복당했고 같은 해 6월 지방선거에서 전북도지사에 당선됐다.● MB의 청계천처럼 새만금은 김관영의 브랜드… 친기업 성향 비판도 그는 워커홀릭이다. 김앤장법률사무소에 있으면서 하루 14시간씩 일했고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도 8년 동안 지역구인 전북 군산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 매일 오전 6시에 경기 성남시 분당구 자택에서 출근을 했다고 한다. 도지사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일 자체가 재밌고 일을 즐길 줄 아는 것이다. 본인이 즐거우니 그를 만나는 사람도 즐거울 수밖에 없다.몇 달 전 김관영에게 행정(도지사)과 정치(국회의원) 중 어떤 게 더 재밌냐고 물어봤다.“일단 행정이 더 재밌지, 지금은 도지사인데… 왜냐하면 여기는 이제 내가 얘기를 하면 집행이 되잖아 그 변화가 즉각 있잖아. 그리고 일주일 후에 보고를 하잖아. 내가 강조하는 게 ‘한 번 지시, 세 번 점검’이야. 내가 보고받을 때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보고를 받은 뒤부터 내가 세 번 점검하는 것. 하겠다라는 계획에 대한 보고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받을 수 있어. 그러나 점검이 더 중요해.” ―취재 메모 중 김관영에게 새만금 개발사업은 정치의 시작이자 끝이다. 새만금 개발의 성패에 따라 그의 미래도 달렸다. 2013년 새만금청이 설립될 때부터 지역구 의원으로 도레이첨단소재 등 해외 기업 유치에 나섰다. 2013년 이후 9년 동안 새만금 투자 유치 규모가 1조5000억 원에 불과했지만 김관영은 7월 취임 이후 6월 말까지 60개 기업과 투자협약을 체결해 7조10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발로 뛰고 해외 기업인들을 직접 만나 투자를 설득한 결과다.그는 야당 재선 의원 당시 새만금에 카지노복합리조트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 새만금 내국인 카지노 허용 법안을 내기도 했지만 야당과 시민단체 등의 반대가 거세 좌절된 상태다.이런 점 때문에 일각에선 그를 향해 엘리트 출신, 김앤장 출신답게 지나치게 친기업적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관영이 추구하는 건 무엇보다 실용이다. 그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강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정치적 스승으로 삼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미 이미 정치와 행정이 이끄는 사회가 아니다. 나는 경제인이 이끈다고 봐요. 공직자들의 월급이 어디서 나오냐. 다 세금 걷어야 나온다. 법인세 부가가치세 소득세 등 3개가 국세의 80%인데 이 3개는 철저하게 기업 활동과 관련해서 나온 것이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가 고도화됐기 때문에 결국 기업인들이 대한민국을 이끌어 간다. 그러면 정치인의 롤은 뭐냐. 우리 기업인들이 국제적 글로벌 경쟁에서 뒤지지 않도록, 그 사람들이 너무나 뒤처지지 않도록 빨리빨리 제도 개선을 해서 뒷받침하는 것이 나는 정치와 행정의 역할이라고 본다. 특히 한국은 수출 경제이고 글로벌 경제에서 살아남아야 되기 때문에 글로벌 경제에 뒤지지 않도록 제도를 정치와 행정이 뒷받침해주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취재 메모 중● 여당과 협치의 협치 행보로 주목… 전북 국가예산 9조 원 시대 열여김관영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정치인은 김한길 위원장이다. 김 위원장이 민주당 대표였던 시절 그를 수석대변인과 비서실장 등으로 중용했다. 김관영은 그를 보며 정치를 배웠다. 김 위원장 측이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여러 차례 함께 윤석열 대통령을 돕자는 제안을 했지만 그는 “국민의힘으로 갈 경우 군산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가능성이 높고 나중에 퇴임하고 나서 지역에 있는 친구들하고 편하게 소주 한잔, 막걸리 한잔 마시기가 어려운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김한길계로 불렸지만 그다음 당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도 그를 아꼈고 마지막까지 국민의당으로의 탈당을 만류했다. 안철수 의원도 그를 좋아해서 ‘초선 원내대표’로 내세우자는 말까지 한 적이 있다. 도지사가 되고 나서도 윤석열 정부, 국민의힘과 협치를 통해 보조를 맞추고 있다. 국민의힘 전북도당 사무처장 출신인 박성태 씨를 3급 정책협력관 직위에 임명했고, 김 지사는 도·정협의회를 전북도-민주당이 아닌 전북도-국민의힘-민주당으로 바꿨다. 여야 협치 결과 김관영은 사상 처음으로 전북도 예산 9조 원 시대를 따내는 성과도 냈다.지난해 12월엔 윤 대통령과 시도지사협의회 임원들하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2023년 8월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개최와 관련해 60억 원 특별교부세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더니 윤석열 대통령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예산을 한 푼도 깎지 말고 다 도와줘라”라고 했다고 한다. 김관영이 잼버리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자 윤 대통령이 “내가 옛날에 보이스카웃을 했다”며 관심을 갖고 호응을 해줬다는 것이다. 예산 지원은 물론 잼버리 조직위원장에도 행안부 장관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포함시켰다고 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듯이 김관영이 윤 대통령의 신뢰를 받고 환심을 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같은 일이 전해지자 다른 시도지사가 “왜 전북만 챙겨주냐. 우리도 챙겨달라”고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김관영의 정치에는 재미와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그 스스로 ‘치어리더’를 자청하는 이유다.“우리 삶에서 원래 힘들고 지루했던 일을 그 자체로 재미있고 즐거운 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정치 지도자라면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유능한 ‘치어리더’를 자청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중략) 하지만 결국 ‘진심은 통한다’는 것이 나의 인간관계 지론이다. ” ―김관영,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 중에서2014년 민주당 수석대변인이던 김관영 전북도지사를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뒤 “오늘은 저를 어떻게 즐겁게 해주실 거냐”고 묻곤 했었습니다. 정치는 성적순이 아닙니다. 하지만 공부할 때 체득한 성실함과 열정으로 정치를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김 지사의 최대 장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김관영의 ‘즐거운 정치’가 국민들을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길 기대해봅니다. 54세, ‘도백’으로 성장한 그는 이제 차세대 주자로 꼽힙니다. 주변에서 2027년 대선 도전을 권유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새만금 개발이 그의 정치적 브랜드로 자리 잡을지, 당내 주자들의 역학관계에 따라 결정될 것 같습니다. 다만 낮은 인지도와 당내 세력 부재 등도 그가 넘어야 할 벽입니다. 여지껏 서울시장을 제외하곤 광역단체장 중에 대권을 잡은 인물은 없습니다. 중앙 무대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지방정치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다음 법정모독 [25화]는 7월 13일 공개될 예정입니다. 여권의 유력 정치인에 대해 쓸 예정입니다. 참고로 [25화]를 마지막으로 법정모독 연재를 마칩니다.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강의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 뒤늦게 재능을 찾은 것 같았다. 국민들도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공부의 신’이라고 해서 꼭 남을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둘 다 갖췄다.전국 수석과 대장동 1타 강사로 국민적 인지도를 얻었던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하 원희룡)의 이야기다. 1982년 대학입시에서 전국 수석과 서울대 법대 수석 입학, 1992년 34회 사법시험 수석 합격이라는 진귀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원희룡은 장관 취임 이후인 지난해 7월 ‘원희룡 TV’에서 유튜브를 다시 시작했다. 그는 정치적 발언은 하지 않는 단서로 국무총리로부터 겸직 허가까지 받았다고 했다. 세계 최초라고 한다. 그는 당시 “여러 장관 중에 대표 주자로 유튜버 겸직 장관으로서 여러분 앞에 섰다”며 “어떤 분들은 또 장관이 매정하게 ‘야 장관이 일이나 똑바로 하지 무슨 유튜버야?’ 그런 분들은 아시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늘, 참, 열심이다. 정책 홍보와 국민 소통 등을 이유로 시작한 유튜브의 이 영상은 현재 기준 조회 수 1만7000회에 그쳤다. 다시 시작한 원희룡 TV 구독자 수도 17만8000명에서 약 1년 동안 19만4000명으로 1만6000명밖에 안 늘었다(그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다”고 아쉬워했다).원희룡은 올해로 정치에 입문한 지 23년이다. ‘소장파’로 이름을 날린 그도 이제 어느덧 환갑을 앞두고 있다. 더 이상 ‘차세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을 지냈고, 당 사무총장과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고 제주도지사에 두 번 당선됐다. 하지만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가 되지 못했고, 2007년과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선거 경선에 출마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꽃이 너무 빨리 핀 것일까. 좀처럼 뜨질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주류이면서도 당내에선 비주류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보수 여당에서 개혁적인 목소리를 내왔고, 제주도 출신으로 영남이 기반인 당에서 활동했다. 정치를 오래했지만 최근 국민들에게 각인된 건 대장동 1타 강사였다. 하지만 일각에선 지금이라도 그냥 1타 강사로 전업해 교육업계로 진출하는 게 어떠냐는 조롱도 들린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마라톤 유세’를 폈던 안철수 의원에게 ‘마라토너로 전업하라’는 비난처럼…물론 원희룡도 마라톤에 심취해 2005년에 ‘나는 서브쓰리를 꿈꾼다’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발간하기도 했다.그가 정치를 하는 이유는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다. 정치적 부침은 있었지만 그의 정치엔 진정성이 느껴진다.“우리 사회에 고통이 있는 한, 누군가는 이 고통을 나누고 덜어내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일을 저의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중략) 긍정의 정치의 근본 뿌리에는 우리 사회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끌어안는 ‘사랑의 철학’, ‘사랑의 정치’가 있습니다.” -원희룡, ‘사랑의 정치’-● 연수원 동기 “제주도에서 ‘원희룡 아냐’ 물으면 다 알아”그는 1964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시장에서 고무신, 농약 등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늘 가난과 함께했다. 중학교 3학년까지는 전깃불도 없었다. 빚 독촉에 시달리는 부모님을 보면서 함께 떨었던 적도 있었다. 부모님이 마지막에 하다 망한 게 책 장사였다고 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 가정의학대백과 사전부터 동화책, 만화책, 심지어 농사에 관한 책까지 다 읽었다. 제주제일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두환 정부 시절 들어간 대학 캠퍼스에선 군사독재에 대한 투쟁이 한창이었다. 그도 바로 사법시험을 보지 않고 학생운동을 함께 했다. 독재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경찰서에 끌려갔고 철제 의자로 숱하게 맞았다고 한다. 실제 동아일보에 처음 등장하는 원희룡은 가리봉동 5거리 시위와 관련해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서울대생의 모습이다. 구로공단에 있는 야학에서 연합을 해서 공동으로 유인물을 뿌리며 가두시위를 벌인 것. “서울남부경찰서는 지난 25일의 九老구 加里峰동5거리 시위와 관련、元喜龍 군(20·공법학과 3년) 등 서울대생 4명을 소환、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동아일보 1984년 6월 4일 자 <경찰 시위 주동 大學生 일제 소환> 기사 중-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경인 지역 공장에 위장 취업해 2년 가까이 지하 노동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동구 공산권이 몰락하고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제6공화국이 들어서자 고민이 깊어졌다. 석 달 동안 무전여행을 떠나고 여러 사람을 많이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전투적인 사회주의나 민족주의 이념이 아닌 자유주의를 통해 헌법 내에서 우리의 이상을 충분히 담아내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투쟁적·조직적으로 진지전을 벌이는, 집단주의 이념에서 자유로워져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는 사법시험 준비에 나섰고 1992년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했다. 수석 합격 기록이 많던 그는 연수생 사이에서도 유명했다고 한다. 24기 연수원 동기의 전언이다.“연수생들 사이에 리더 같은 존재였다. 연수원 때 우리가 다 모여서 무슨 민사 판결문이 어쨌다, 형사 판결문이 어쨌다, 시험 얘기만 할 때 희룡이 형은 ‘지금 세계정세가 어떻고 아시아가 어떻고’ 이런 굉장히 들을 만한 얘기를 많이 하셨다. 그때도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등 미래학에 관한 책도 많이 봤다. 그때부터 ‘정말 이 사람은 똑똑하다 그러고 정치할 것 같다’ 그런 평이 많았다. 그때 이제 연수생들이 놀란 게 제주도를 놀러 가서 택시를 타서 ‘혹시 원희룡 아시냐?’ 그러면 다 알 정도로 제주도에서 수재(秀才)로 유명했다.” -취재 메모 중- 최상위권 성적으로 사법연수원을 마친 그는 검사를 지원했다. 판사보다는 현장을 다니며, 백지인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검사직에 더 끌렸기 때문이다.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 2년, 여주지청 1년, 부산지검 6개월 등 3년 6개월간 검사 생활을 했다. 하지만 1998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국가적 위기에 스스로의 역할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사표를 냈고 변호사로 활동하다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권유를 받고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소장파 개혁운동 이끌어… ‘한나라당의 유시민’ 평가도“대한민국 안보와 경제 성장을 이끌어온 게 보수였다. 보수가 변해야 한국이 압도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진국의 우파나 보수들이 갖고 있는 그 품격과 실력에 대해서 상당히 부러웠다. 그래서 한국도 그렇게 가야 되지 않았나 이렇게 봤고… 386운동권의 상당히 부패하고 자기 합리화적인 오만한 그런 구석들도 많이 봤기 때문에 그들과 동화되기 싫은 측면도 있었다. 그게 20년 뒤에 조국 사태로 피크를 쳤다.” -취재 메모 중- 원희룡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서울 양천갑에 출마해 국회에 입성했다. 그의 나이 만 36세였다. 그는 당내에서 남경필 정병국 의원 등과 함께 움직이며 소장 개혁파의 대표 선수가 됐다. 그는 이회창 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한 뒤 2003년 “당내 60세 이상은 물러가라”고 주장하기도 했고 2004년 최병렬 당시 대표 퇴진 카드를 꺼내 드는 등 쇄신에 목소리를 냈다. 2004년 7월부터 2006년까지 최고위원을 지내며 쓴소리를 이어갔다. 국가정보원의 X파일 처리와 감세안, 대북 지원 방안 등 여야가 대치하는 주요 현안마다 당론과 다른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혀 왔고 ‘한나라당의 유시민’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2006년 1월엔 당의 사학법 장외 투쟁과 관련해 당시 대표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향해 “박 대표의 이념적 편견은 병(病)”이라며 비판했다가 당내 반발이 커지자 공개 사과하기도 했다.“저는 그동안 당내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소장 개혁파’로 당내에서 쓴소리를 많이 하니까 한나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고 오히려 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참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원희룡, ‘사랑의 정치’-당 안팎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여당에선 “좌파”라고, 야당에선 “변절자”라는 등 양쪽으로 비판을 받았다. 학생운동권 출신이 보수 정당에 몸을 담는다는 것부터 각오는 했고 내부에서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역할로 ‘포지셔닝’을 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힘들었다. 소신대로 하고 불이익은 감당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변화하지 않으려는 집단의 관성은 공고했다. 그가 여당 내 비주류로 주목받지 못하게 된 이유다. 소장파로서 주어진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원희룡은 2007년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 박근혜 홍준표 당시 후보와 경선했지만 낙마했다. 2010년 서울시장 경선에서 오세훈 당시 시장에게 밀렸고 2011년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선언과 함께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지만 홍준표 현 대구시장에 밀려 당 대표의 꿈은 좌절됐다. 주변에서 수재라고 대우만 받던 그도 줄줄이 쓴맛을 맛본 것이다.● ‘잃어버린 10년’ 이후 다시 중앙무대로2012년 총선에 불출마한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등에서 방문연구원을 지내고 휴지기를 가진 뒤 2014년 제주도지사로 출마해 당선됐다. 2017년 대선에 불출마했고 2018년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도지사로 7년간 근무하며 원희룡은 차근차근 행정 경험 등을 쌓았다. 2017년 유권자시민행동이 수여하는 ‘대한민국 유권자 대상’을 3년 연속 수상했다. 제주 신항만 건설과 영리병원 등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는 중앙무대에선 조금씩 잊혀져 갔고 소외됐다.반전은 2021년 대선 경선에 출마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원희룡은 그해 10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성남시장 시절 벌어진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이 불거지자 유튜브를 통해 관련 의혹에 대해 ‘대국민 강의’를 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누리꾼들로부터 ‘대장동 1타 강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윤석열 대통령도 당시 “원 후보의 ‘대장동 게이트 1타 강사’ 동영상을 봤다. 아주 잘 설명하셨다”며 “솔직히 말하면 원 후보의 그런 능력이 부럽기까지 했다”고 공개적으로 칭찬하기도 했다. 2021년 11월 경선 결과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선출되고 원희룡은 4위에 그쳤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그를 선거대책본부 정책본부장으로 임명해 정책을 총괄하도록 했다. 대선 뒤에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기획위원장을 신설해 원희룡에게 위원장을 맡긴 뒤 5년의 핵심 국정 과제를 조율하도록 했다.윤 대통령의 신임을 받은 원희룡은 지난해 4월 윤석열 정부 초대 국토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서울대 법대 3년 선후배 사이지만 학창 시절에는 전혀 친분이 없었다고 한다. 이제 그는 부동산정책, 지역 균형 발전, 화물연대 파업 등 각종 현안의 주무 장관으로서 현장을 누비고 있다.● 학보사 기자였던 한동훈이 ‘연수생 원희룡’ 인터뷰… 기이한 인연 한동안 ‘차세대’로 불렸던 원희룡은 이제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같은 후배들에게 ‘차세대’란 바통을 물려줄 때가 됐다. 서울대 법대 10년 후배인 한 장관과 그의 인연도 기이하다. 원희룡은 대학에서부터 전국 수석 등으로 유명했던 만큼 그가 사법연수원을 다닐 시절 한 장관이 그를 찾아온 적이 있다고 한다. 서울대 법대의 학보사인 ‘법대신문’ 기자로서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온 것. 향후 그를 만난 한 장관이 약 30년 전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며 이를 언급했다고 한다. 원희룡은 한 장관에 대해 “아주 명석하고 상황에 대한 감각도 뛰어나고 저랑도 옛날에 인연이 있는 선후배 관계”라고 평가했다. 원희룡은 이미 윤석열 정부와 운명공동체다. 그의 미래는 윤석열 정부의 성공 여부와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다. 그를 두고 국무총리 발탁이나 내년 총선 출마 및 향후 당 대표 도전 등 여러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에 대한 원희룡의 답변이다. “아직 국토부에서 해야 될 임무가 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개인의 어떤 미래의 진로를 따로 생각하기보다는 윤석열 정부를 어떻게 뒷받침하고 거기서 우리 대통령께서 가장 좋은 구상을 펼쳐 가실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국민들에게 단체전 평가 점수를 잘 받을 거냐, 여기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야 되는 거고요. 그런 점에서는 한동훈 장관이나 저나 마음이 똑같다. 만약에 총선을 앞두고 윤 대통령이나 당에서 ‘당으로 돌아가라’ ‘총선을 뛰어라’라고 하신다면 나는 가기 싫어요라고 하기는 어렵겠죠.”원희룡 장관은 자칭 ‘완소남’입니다. ‘완전 소중한 남자’가 아니라 ‘완전 연소를 꿈꾸는 남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사랑의 정치’에서 “되돌려주는 삶, 이것이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잡거나 속도를 조절함에 있어 가장 지혜로운 철학”이라며 “되돌려주는 삶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자신이 한국으로부터 많이 받은 인생을 산 만큼 자신을 불살라 한국에 바치겠다는 뜻이지요.그는 윤 대통령의 장점에 대해 “결단을 내렸을 때 그 결단을 믿고 밀고 나가는 어떤 결기와 강단, 뚝심이 있다”며 “또 사람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고 사람 관계 속에서의 인간적인 결속력을 굉장히 중시하는 리더십이다. 그러니까 이제 ‘석열이 형’으로 불리고 보스 기질이 있고 친화력이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석열이 형’으로 부른 적은 아직 없다고 하네요.정치인으로서 그의 한계는 낮은 인지도와 세력의 부재입니다. 그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부족한 점을 알고 또 거기에 진정성과 전력을 다하면, 뿌린 만큼 열매를 거둘 것”이라며 “함께할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 그 사람들하고 모든 걸 나눠야 되는데, 원희룡이 안 나눠줄 것 같고 자기 혼자 깨끗할 것 같은 이런 느낌 때문에 안 되는 거라면 그건 제가 문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내가 안 변했기 때문에 국민들의 인식이 안 변하는 문제일 테니까 제가 변화하면 저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도 변화할 것”이라며 “길이 열릴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20년 전 “당내 60세 이상은 물러가라”고 외쳤던 나이도 이제 내년입니다. 완소남은 과연 뜰 수 있을까요? 그의 진정성이 받아들여질지 그의 미래와 변화가 궁금해집니다.다음 법정모독 [24화]는 야당의 광역단체장으로 넘어갑니다. 자칭 ‘즐거운 희망 전도사’입니다.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2008년 5월 필자는 수습기자를 마친 뒤 사회부에 배치돼 경찰을 출입하는 사건팀 기자가 됐다. 정식 기자가 됐다는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비슷한 시기 시작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현장을 몇 달 동안 취재해야 했다. 시위대는 취임한 지 몇 달 안 된 당시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독재 타도’, ‘명박 퇴진’ 등의 구호를 외쳤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을 부정하고 독재라고 낙인찍는 ‘이른바 진보’ 진영을 보면서 쓴웃음이 나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진짜 독재정권이었다면 이들이 ‘독재’라고 마음대로 외칠 수도 없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일부는 폭력 시위로 변질돼 갔다. 사전적 의미에 맞지도 않지만 대안이 없어 그대로 쓰고 있는 표현이 진보 대 보수다. 역사는 15년이 지나 반복되고 있다. 이른바 진보 진영에선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와 관련해 비슷한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광우병 괴담처럼 오염수 괴담과 가짜뉴스도 나오기 시작했다. 야당은 먹거리에 예민한 민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나섰고, 일부 단체는 거리에서 ‘윤석열 대통령 퇴진’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독재’라는 주장에 박수를 치는 국민은 거의 없다. 대부분이 과장된 구호로 여길 뿐이다. 이를 두고 민도가 높아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 지난주 행정안전부는 6·10민주항쟁 기념식에 불참했다. 기념식을 주관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대통령 퇴진 주장 단체를 후원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업회는 “해당 단체가 협의 없이 정치적 내용을 포함했다. 후원금은 집행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행안부는 요지부동이었다. 6·10민주항쟁이 2007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뒤 줄곧 행안부가 주최하고 사업회가 주관하던 기념식의 전통이 깨졌다. 주최자인 행안부와 여당 지도부가 불참하면서 행사는 싱겁게 끝났다. 지난해 한덕수 국무총리가 기념사를 하고 이준석 당시 여당 대표가 참석했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행안부의 불참은 과거 정부에서 시민단체에 준 보조금 상당수가 부정 집행됐다며 목소리를 높였던 윤 대통령 및 대통령실의 생각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문제는 행안부의 행사 주관이 관행이 아니라 법 규정 사항이란 것이다. 대통령령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행안부는 ‘6월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행사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물론 안 지켰을 경우 벌칙 조항은 없다. 하지만 법령에 규정된 업무를 하지 않은 것은 엄연한 직무유기다. 행사 불참을 행안부 혼자 결정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유관 단체의 사소한 실수로 주최자가 행사에 빠진 건 자기부정이다. 일부 보도를 문제 삼아 기자를 공군 1호기에 못 타게 한 것처럼 ‘길들이기’로 비칠 수밖에 없다. “옹졸하다”는 야당의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른바 진보’와 ‘뒤끝 정부’는 현행 헌법을 탄생시킨 1987년 6·10민주항쟁의 의미와 정신을 진정 존중하고 계승하는 걸까. 그랬다면 괴담을 앞세운 시위도, 민주항쟁 기념식 불참 해프닝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황형준 사회부 차장 constant25@donga.com}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앞으로다. 통합의 정치로 가야 한다. 답은 연정밖에 없다. 한 10년, 아니 단 5년만이라도 정치적 휴전을 하고 여야가 힘을 합쳐야 한다. 그런 기치하에 협력과 통합의 정치로 가지 않으면 G7 도약은 힘들다. 여야가 연정을 해야 한다. 일시적 협치 실험이라도 좋다. 안에서 화합하고 바깥 경쟁에서 이기려면 그 길밖에 없다.” -취재 메모 중-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이하 양정철)이 2~3년 전부터 줄곧 강조하는 이야기다. 그의 이 같은 통합론과 연정론을 처음 들었을 때 의외였다. 솔직히 그가 가진 이미지는 강성 이미지였고 논쟁적인 이슈의 선봉에 서서 ‘홍위병’으로 불렸으니까. 그 역시 50대에 들어 30, 40대 때와 생각이 조금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그 스스로 일본과 뉴질랜드, 미국 등 세계를 돌아보며 시야가 바뀐 측면이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나도 골수 운동권이었는데 청와대 5년 있으면서 국가 전체를 보는 쪽으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있었고 또 하나가 지난 3년간 유랑을 다니면서 모든 사고와 시각이 바뀌었어. 지금 내 관심은 다음 대통령이 우리 당이냐, 저 당이냐, 누가 되냐 관심이 없다. 이젠 대통령 당선이 중요한 게 아니라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서라도 어떻게 ‘성공하는 대통령’이 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취재 메모 중-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했던 운동권 출신이라 과거엔 피아 편 가르기를 하고 기득권에 분노하는 마이너적이면서 인권 감수성이 높은 가슴이 뜨거웠던 청년이었는지 모른다. 어찌 보면 그는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의 곁에서 줄곧 ‘악역’을 도맡아 왔다. 그 탓에 호불호가 엇갈리고 ‘논쟁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세상의 오해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미움받을 용기’를 지닌 것이다. “자네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일세.” -기시미 이치로, ‘미움받을 용기’ 중- 결국 그는 문재인 전 대통령을 도와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일등공신이 됐다. 하지만 잊혀질 권리와 공성불거(功成不居·공을 세웠으면 그 자리에 머물지 말라) 원칙, 내 자유도 소중하다며 문재인 정부 내내 공직을 맡지 않았다. ● 등단 꿈꾸던 문학소년에서 운동권 핵심으로 양정철은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구로구에 위치한 우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글이 좋고 책이 좋았던 문학소년은 고교 시절에도 문예서클에서 활동했다.“내가 초등학교 때 직장에서 밀려난 선친은 어렵게 가족 부양하느라 이사를 자주 했다. 자연히 전학이 잦았다. 친구 사귈 기회가 적었고 외로움을 책으로 달랬다. 나중엔 친구보다 책이 좋았고 또래들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글 쓰는 게 좋았다.” -양정철, ‘세상을 바꾸는 언어’ 중에서 - 가난은 그의 시선을 사회로 향하게 만들었다. 특히 서클 지도교사였던 동화작가 김진경 선생님으로부터 사상교육을 받았다. 이에 고교생 양정철도 운동권 대학생들이 보는 이른바 ‘불온(?) 서적’들을 그 시절 이미 섭렵했고 사회에 눈을 떴다. (후에 김 선생님은 이를 이유로 해직됐지만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교육문화비서관이 됐고 그와 함께 비서관으로 일하는 기이한 인연을 맺게 됐다.) 등단 작가를 꿈꿨던 그는 국문과에 진학하려 했다. 하지만 형편이 어려웠던 가족의 반대로 한국외대 법대에 진학했다. 그는 전공에 관심이 없었고 학보사에 들어가 기자로 활동하는 데 몰입했다. 3학년 때 편집장을 지냈고 동시에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전대기련) 회장도 맡았다. 그는 점점 운동권 핵심에 속하게 됐다. 1986년 전대기련에서 발행한 기관지가 문제가 돼 지명 수배를 받게 됐고 아예 한국외대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조국통일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학내 시위를 주도했다. 이와 함께 전국단위 대학 투쟁조직인 ‘학생투쟁연합’ 서울지역 부의장을 맡아 1987년 6월 민주항쟁에서 대학가의 반정부 민주화운동 연합시위를 주도했다. 1년 넘게 장기 도피 중에 검거돼 그는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과 특수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실형을 살았지만 1988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대규모 사면·복권을 단행하면서 수형 4개월 만에 석방됐다. 글을 쓰며 밥벌이를 하고 싶었다. 언론사 기자를 해볼 생각도 있었지만 전과도 있는 데다 언론민주화 운동에 대한 믿음이 있어 전국언론노조연맹에서 언론노보 기자로 일을 시작했다. 중앙 일간지에서 이직 제안도 받았지만 ‘언론노조를 지켜야 된다’는 사명감에 6년간 일했다. 그러다 결혼을 하면서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실적 이유였다. 나산, 한보, 신원그룹과 스카이라이프 등 4곳을 거쳐 차장에서 임원으로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마음은 헛헛했다. “젊은 나이에 ‘운동’하다가 갑자기 기업-기업주 대변하는 일은 마음고생이 컸다. 언론계에 있는 선배들에게 부끄럽기도 했다.” -양정철, ‘세상을 바꾸는 언어’ 중에서- 결국 2002년 노무현 후보 대선캠프에 합류했고 인수위를 거쳐 5년 내내 노 전 대통령을 모셨다.● 30대 최연소 청와대 비서관으로 정치 무대 등장언론인에서 대기업 임직원으로, 청와대 비서관으로 변신한 양정철은 정치 무대의 전면에 섰다. 39세로 최연소 비서관으로 고속 승진했다. 국내언론비서관과 홍보기획비서관을 맡아 정부의 신문방송 정책을 총괄했다. 쉬운 자리는 아니었다. 그는 혈기가 왕성했고 언론계에선 언론노보 기자 출신인 그를 쉽사리 인정해주지도 않았다.노 전 대통령은 언론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었다. “기자실에 몇몇 기자들이 죽치고 앉아 보도 자료를 가공하고 담합한다”며 추진한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은 그 정점이었다. 언론에 민감했던 노 전 대통령이었던 탓에 양정철에겐 악역이 맡겨졌다. 홍보기획비서관 시절 동아일보 등 언론의 신행정수도 이전 관련 보도에 대해 “저주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막말을 했다. 2005년 8월에는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을 거부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박 대표의 반응은 책임감, 결단, 역사의식, 깊은 성찰, 일관성 등 5가지가 없는 5무(無)”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해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2007년엔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수립해 기자실 통폐합을 실행해 전 언론으로부터 ‘언론 탄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사실 그는 선진화 방안에 대해 신중한 입장이었다고 한다. 이를 추진하려면 임기 초에 추진했어야 하고 언론계 내부의 공감과 설득 없이는 실효성도 없을 것이라는 취지로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얘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뜻을 굽히지 않자 주무 비서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면에 나섰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전언이다.● 盧 지키지 못한 회한에… 文 앞세운 정권 교체에 주력노무현 정부 말기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쓸쓸한 퇴장이었다. 양정철도 참모로서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 아닌가 싶은 죄책감이 들었고 퇴임 후 봉하마을로 내려간 노 전 대통령이 외로워 보였을 것이다.퇴임 후 어느 날 노 전 대통령이 양정철을 불렀다. 정치에 나서보겠다고 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뜻밖에도 이를 말리셨다.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민주주의적 진보를 이루려면 국민들 생각과 의식을 바꾸고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정치를 하지 말고 좋은 책을 내자고 제안하셨다.양정철은 두말없이 짐을 싸서 봉하마을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후 검찰 수사를 받던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5월 23일 부엉이바위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노무현을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분이 모진 결심을 놓고 번뇌하던 오랜 시간, 그의 고독을 가늠조차 못 했다는 죄책감에 양정철은 괴로웠다. 그 죄책감을 이겨내고 노 전 대통령을 재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권교체였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 -2002년 11월 노무현 당시 대선 후보가 부산에서 문 전 대통령을 소개하며- 노 전 대통령이 이같이 평가했던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 문재인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든다는 게 그의 과업이 됐다.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문 전 대통령을 설득했고 2011년 ‘문재인의 운명’ 출간을 도왔다. 2012년 4월 총선에서 문 전 대통령은 부산 사상에 출마해 당선됐지만 양정철은 서울 중랑을에 출사표를 던졌다가 경선에서 박홍근 의원에게 밀려 탈락했다. 문 전 대통령은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됐지만 그해 12월 치러진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문재인 정부의 일등공신이었지만 대선 뒤 홀연히 떠나 대선 이후 문 전 대통령을 비롯한 친문(친문재인) 진영은 대선 패배 책임론에 시달렸다. 양정철도 그 대상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호철 전 민정수석비서관과 전해철 의원 등과 함께 ‘3철’로 불리면서 ‘비선’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문 전 대통령이 2015년 2·8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됐지만 야당은 내홍을 겪으며 혼란이 빚어졌다. 김한길 안철수 전 공동대표 등 비문 진영에선 ‘친노(친노무현) 패권주의’로 몰아세웠고 끊임없이 당을 흔들어댔다는 게 친문 진영의 시각이었다. 그해 4·29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하면서 대표 책임론은 더욱 심해졌다. 당시 한 최고위원이 전했던 이야기다.“재·보선 참패 이후 어느 날 비공개 최고위원회에서 ‘양정철이 도대체 어떤 ××냐.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데 뒤에서 다 결정한다고 하냐. 차라리 비서실장이든 부실장이든 공식적인 직위를 주든지 해라’라고 호통을 쳤다. 그랬더니 문 대표는 얼굴이 벌게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 -취재 메모 중- 거듭된 쇄신 요구에 양정철도 2015년 12월 이호철 전 민정수석, 윤건영 민형배 김영배 현 의원 등과 함께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거듭된 희생 요구이자 문 전 대통령이 평소 강조해온 육참골단(肉斬骨斷·자신의 살을 베어 내주고, 상대의 뼈를 끊는다는 뜻)이었다. 2016년 결국 안철수 의원이 국민의당을 창당하면서 문 전 대통령은 당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민주당은 김종인 전 대표를 내세워 총선을 치렀다. 그해 6월 문 전 대통령이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났을 때 양정철은 탁현민 전 대통령의전비서관과 함께 동행했다. 문 전 대표의 대선 예비캠프 성격인 ‘광흥창팀’을 주도하며 대선 준비는 물론이고 정권 교체 이후 밑그림도 그렸다. 2020년 4월 그가 했던 이야기다. “정치 경력이 짧았던 문 대통령에게 핵심 측근이랄 수 있는 사람은 나랑 이호철 전 수석 등 단 네 명이었고 그 네 명이 목숨 걸고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했다. 심지어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임기 첫날부터 일정도 미리 준비해 둘 정도로 다양한 준비를 했다.” -취재 메모 중-양정철은 대선 승리 직후인 2017년 5월 “저의 퇴장을 끝으로, ‘패권’이니 ‘친문’ ‘친노’ 프레임이니 ‘삼철’이니 하는 낡은 언어도 거둬 주시기 바란다”며 “멀리서 그분을 응원하는 여러 시민 중 한 사람으로 그저 조용히 지낼 것”이라며 “잊혀질 권리를 허락해달라”고 밝혔다. 그 뒤 뉴질랜드로 출국해 일본, 미국 등 유랑에 나섰다.● 당 외곽에서 ‘장막 뒤 조언자’ 역할 이어가 그는 7개월 뒤 ‘세상을 바꾸는 언어’ 책을 내면서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그를 중용한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진 마음의 빚은 정권교체로 일부 갚게 된 것이다.“그분이 서거 며칠 전 내게 건넨 마지막 말은 ‘양비는 먹고살 방도는 있는가?’였다. 죽음을 결심한 분이 일체 내색하지 않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참모들 걱정을 한 것이다. 이 책은 ‘깨어 있는 시민으로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려 발버둥치고 있다’는, 그분을 향한 나의 안부 인사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이 부디 그곳에서 편하셨으면 좋겠다.” -양정철, ‘세상을 바꾸는 언어’ 중에서-주진우 전 기자는 이 책 추천사에서 “양정철은 자기를 낮춘다. 주위를 비춘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안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짠하다. 그리고 찡하다”고 썼다.그러다 2019년 5월 이해찬 당시 대표의 강력한 부탁을 받고 민주연구원장으로 전격 복귀했다. 그는 “민주연구원이 총선 승리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는 첫 일성을 냈고, 백원우 전 의원과 함께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공천에서 물갈이 의지를 드러냈다. 인재 영입을 맡았고 위성정당 논란이 일자 총선 승리를 위해 비례연합정당 참여가 불가피하다며 연합정당 참여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민주당은 2020년 21대 총선에서 180석 압승을 거뒀다. 물론 그 이후 열린우리당의 악몽처럼 입법 독주 등을 거듭하다가 2년 뒤 정권을 다시 빼앗기게 됐지만 당시로선 전례없는 성과를 낸 것이었다. 총선 직후 그는 관용과 통합을 외치며 연구원장직을 던지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 등으로도 거론됐지만 그는 결국 약속대로 공직을 맡지 않았다. 2021년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객원 선임연구원을 지내는 등 자유인으로 살았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민주당과 청와대 인사들과 접촉하며 조언과 쓴소리를 했다. 2021년 6월 6일 필자가 했던 인터뷰다. ▶양정철 “與 절박함 없어…정권 재창출 비관적 요소 더 많아”대선을 앞두고 있던 2021년 11월에는 당내 초선 의원 특강에서 이같이 조언했다.“스타일리스트형 정치인은 제발 안 되셨으면 하는 간곡한 부탁을 드린다. 하찮은 패션 따위로, 튀는 표현이나 말장난, 돌출 행동 등으로, 그저 뜰 수만 있다면 SNS 통해 뭐든 하려는 분들을 많이 본다. 여야의 그런 모습이 정치를 희화화시키고 냉소와 조롱을 유발한다. 각자가 정치적 정책적 신념은 확고히 가져 주시되 행동에서는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원칙을 지켜 주셨으면 좋겠다. (중략) 저는 ‘스러짐의 미학’을 아는 사람이 좋은 정치인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즉, 국민과 공공을 위한 헌신과 희생 후 어느 때 스스로 소멸되어 가는 것이 아름다운지 정확히 아는 것이 좋은 정치라 생각한다.” -취재 메모 중-● 소문의 남자… “엇갈리는 평가는 자업자득” 지적도야권 일각에선 그가 결과적으로 윤석열 정부의 공신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양정철은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 영입을 위해 처음 만나면서 윤 대통령과 적지 않은 친분을 쌓았다. 서울중앙지검장 발탁이나 검찰총장 임명,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당시 여권에 윤 대통령을 감싸는 등 엄호에 나섰던 것으로 전해졌다. 문재인 정부의 킹 메이커였지만 그도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할 것이라고 예상하진 못했던 것이다. 소문이 무성하고 논쟁적인 인물, 양정철에 대한 한 정치권 인사의 평가다. “양정철은 실제로 킹 메이커 역할을 하고 대통령을 만든 사람이다. 그만큼 실제 기획력도 인정한다. 다만 그 과정이 투명한 게 아니라 대부분 음모적이어서 항상 장막 뒤에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음흉한 이미지가 생긴 거다. 그리고 본인이 또 그걸 즐긴 것 아니냐? 뒤에서 자기가 조종하고 자기의 힘을 은근히 과시하고 다닌 거다. 그러니까 엇갈리는 평가는 자업자득이지 뭐….”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이면 어느 자리라도 맡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은 사실상 무보수 명예직인 싱크탱크 수장만 맡았고 끝까지 원칙을 지켰습니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여러 차례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자리는 한사코 고사하고 은둔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공개석상이나 언론에 등장하지 않을 계획이라는 게 양 전 원장 지인들의 전언입니다. 얼마 전 사석에서 공직은 아니더라도 교수로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주거나 다른 적합한 일은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양비는 먹고살 방도는 있는가?’라는 노 전 대통령의 말처럼 생계는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거 대기업 다니며 모은 돈 등으로 생활하면 족하다고 했습니다.“배 째드리지요.” 그가 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말에 대해서도 다시 확인해봤습니다. 2006년 8월 유진룡 당시 문화관광부 차관이 인사 청탁을 들어주지 않자 대통령홍보기획비서관이었던 그가 청와대 행정관을 통해 이 같은 말을 했다고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기사를 찾아보니 양 전 원장은 줄곧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해왔지만 그의 해명은 저조차도 알지 못한 채 그의 강성 이미지만 덧씌우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당시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는 노무현 정부 청와대 출신 인사들에 따르면 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양정철이 그런 말을 했다더라고 누가 들었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가 전부인 ‘카더라’였다”며 “당시 소송을 해서라도 진위를 가렸어야 했는데 당시 민정수석실 만류로 적극 대응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억울해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그가 2018년 펴낸 ‘세상을 바꾸는 언어’ 책에는 평등, 공존, 배려 등의 개념으로 우리 의식을 좌우하는 언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말과 글의 힘을 아는 그이기에 오해는 오해였나 보다 생각이 듭니다. 필요에 따라 거친 언어를 쓰며 악역을 맡았지만 알고 보면 부드럽고 문재(文才)가 뛰어난 사람입니다. 장막 뒤에서라도 통합과 협치를 위한 정치권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해주길 바랍니다.다음 법정모독 [23화]는 여당의 ‘일타강사’ 장관님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이하 김한길)은 여의도에서 ‘전략기획통’으로 불린 대표적인 ‘브레인’이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 기획을 맡았고 DJ정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 노무현 전 대통령 인수위 기획특보,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의원 시절 전략기획위원장, 총선기획단장 등 그의 이력엔 유독 ‘기획(企劃)’이 많다. 2000년과 2004년 두 번이나 총선기획단장을 맡은 것은 거의 전례가 없다. 선거 ‘판’을 짜고 ‘킹메이커’ 역할을 잘하는, 여의도식 표현으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2016년 20년 가까이 몸담았던 민주당을 떠난 뒤 국민의당을 거쳐 윤석열 대통령을 도와 현재 장관급 국민통합위원장을 지내고 있다. 애연가였던 그는 2018년 폐암으로 사경을 헤맸지만 신약을 통해 기적적으로 완치됐고, 다시 정치의 중심에 뛰어들었다. 야당 지지자들은 그가 탈당했을 때마다 그를 향해 간혹 ‘창당 전문가’라거나 ‘정당 브레이커(breaker)’라는 등의 비난을 해왔다. 민주당에 있을 때부터 중도 노선으로 ‘우클릭’한다는 공격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실천해온 정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면서 희망을 탐색하는 직업’이요, DJ의 금언인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조화시키는 중도실용의 정치였을 것이다. DJ가 영입했지만 그는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과 같은 DJ맨도 아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를 아꼈지만 친노(친노무현)계와 특히 각을 세우며 ‘계파 패권주의’를 외친, 어쩌면 정치권의 외로운 이방인이었다. ● 金에게 ‘제갈공명’급으로 평가한 김중권 전 비서실장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김한길은 1996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DJ에 의해 영입돼 새정치국민회의 비례대표 후보로 당선되며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총선 선대위 대변인을 거쳐 총재특보, 1997년 대선에서 TV 토론회 등을 맡아 DJ의 승리를 이끌었고 대통령직인수위원이자 당선자 공보팀장, 대변인 등으로 활약했다. 1999년 3월 대통령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면서 비례대표 의원직을 사퇴했다. 정책기획수석으로서 각종 정책 조율과 행사 기획, 국정홍보 등을 맡았다. 소설가이자 방송인 경험을 활용해 DJ의 메시지 및 홍보전략 등을 맡았던 것이다. 2000년 총선을 앞둔 1999년 11월 총선 출마자들이 청와대를 나가자 DJ는 “실장도 나가고, 정무수석도 그만두는데 김한길 수석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김 수석은 여기 남아 계속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며 김한길의 총선 출마를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DJ가 마음을 바꾸면서 그에게 “총선기획단장을 맡아라”는 임무를 주며 2000년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후보로 총선에 내보냈고 그는 다시 국회로 돌아왔다. 당 총재를 겸하던 DJ가 그에게 비례대표 의원직을 두 번이나 준 것이다. DJ는 그해 9월엔 박지원 당시 장관의 후임으로 그를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지명해 김한길은 1년간 내각 경험을 쌓았다. 2001년 10월 비례대표 의원직을 버리고 서울 구로을 재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DJ 정부의 김중권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함께 호흡을 맞췄던 김한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역사가들은 중국 역사상 뛰어난 참모의 전형으로 제갈공명을 거론하면서 그를 ‘식치(識治)의 양재(良才)’라고 평했다.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을 지근 거리에서 보좌하면서 그의 진면목을 직접 체험한 사람의 입장에서 평하자면, 김 수석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식치의 양재’라는 평가가 결코 과분하지 않은 사람이다.” - ‘김한길의 희망정치’ 추천사에서 -김한길은 DJ에 대해 자주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버지 같은 분”이라며 “내가 평가하기에 너무나 큰 거인”이라고 했다. ● “김한길 아니었으면 내 당선도 없었다”고 했던 盧 김한길은 향후 비노(비노무현)계의 좌장, 수장으로 불렸지만 친노, 친문(친문재인)의 계파주의를 경계했을 뿐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사감’은 없었다. 2002년 9월 대선 지지율이 하락했던 노 전 대통령은 김한길을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다. 선대위 미디어특별본부장을 맡기면서 사실상 전권을 줬다고 한다. 그는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협상에선 노 후보 측 협상단 대표로 나서 정 후보 측과 단일화 협상을 타결하기도 했다. 대선 직후에는 당선자 기획특보를 맡았다.노 전 대통령은 그를 아꼈다는 일화도 많다. 대선 승리 뒤 소장파 의원들과 부부동반으로 63빌딩에서 자체 축하연을 하고 있는데 바로 옆방에 노 전 대통령이 다른 사람들과 식사 중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잠깐 그 자리에 들러 김한길 부부를 앞으로 나오라고 한 뒤 “김한길 본부장 아니었으면 내 당선도 어려웠을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의원들의 입장에선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후 김한길은 다른 의원들로부터 은근한 견제를 받았다고 한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이 추진되자 그도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에 합류했고 2004년 17대 총선 서울 구로을 지역구에서 당선됐다. 3선 의원으로서 당시 국회 건설교통위원장을 지냈고 2006년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88 대 49의 역대급 표 차이로 당선됐다. 하지만 2006년 6월 치러진 4회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16개 광역단체 중 전북 1곳에서만 이기고 당시 한나라당이 광역자치단체 12곳을 차지하는 등 참패하고 2007년 대선 패배 위기감이 돌자 당내 신당 논의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당시 원내대표였던 김한길은 국회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 “열린우리당의 창당은 우리 정치사에 크게 기록될 만한 의미 있는 정치실험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치실험을 마감하고 지켜가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서 또 한 번 ‘다시 시작하는 아침’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그는 탈당하기 전날 청와대에 가서 노 전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당시 박상천 대표의 ‘꼬마 민주당’과 힘을 합쳐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극복을 외친 내가 어떻게 지역당과 합치냐”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열린우리당을 나오기 전날 만난 노 전 대통령은 내 옆에서 가슴을 치면서 ‘우리가 이렇게 헤어지더라도 내가 김 대표에게 진 마음의 빚은 여기에 담아두고 잊지 않겠습니다’고 말씀하시더라. 그 때문인지 노 전 대통령이 탈당한 다른 의원들에 대해선 실명을 거론하며 비난했지만 나에 대해서는 끝까지 욕을 안 했다. 그 마음의 빚이라는 게 이런 건가 나중에 생각했다.” - 취재 메모 중 - 결국 김한길은 열린우리당을 탈당해 2007년 통합신당모임을 이끌며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고 열린우리당 창당 당시 분당됐던 민주당과 통합 등 합종연횡 과정을 거쳐 11월 대통합민주신당으로의 통합을 완성시키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2007년 12월 대선은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의 참패로 끝났다. 김한길은 “대선 참패 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지적이 매우 아프다. 나를 버려 우리가 사는 데 도움이 된다면 나부터 기득권을 버려야겠기에 18대 총선 불출마를 결심했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서울에서 구로을을 포함한 4곳만 민주당 승리가 예상됐는데 당선될 수 있는 사람이 책임을 져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 4선 의원으로 복귀하자마자 전당대회 출마4년간 야인으로 지냈지만 공백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4년 뒤 김한길은 선거를 한 달여 앞두고 서울 광진갑에 전략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한명숙 당시 대표의 출마 권유를 여러 차례 사양했지만 공천 마감일이 끝난 뒤에도 출마 요구가 거듭되자 이를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대선을 8개월 앞둔 시기였다. 김한길은 총선 직후 당선자 신분이 된 2012년 4월부터 존재감을 보였다. 그는 “총선 패배의 중요한 원인이 계파 공천”이라며 쓴소리를 시작했고 당시 ‘이해찬 당 대표-박지원 원내대표’로 지도부를 꾸리자는 이른바 ‘이-박 담합’ 논란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장 주변 의원들의 독려를 받아 6·9 전당대회에 당 대표 후보로 나섰다. 이해찬 전 대표가 24.3%(6만7658표)를 얻어 김한길(23.8%·6만6187표)을 0.5%포인트(1471표) 차로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충남과 부산을 제외한 지역 대의원 투표에서 김한길이 앞서 있었지만 모바일 투표에서 결과가 뒤집어졌다. 모바일 선거인단 불법 모집 의혹이 불거졌지만 그는 승복을 선언했다. 몇 년 뒤 그가 했던 이야기다. “2012년 당 대표 경선에서는 모바일 투표에서 뒤집히면서 내가 지고 이해찬이 당선되지 않았나. 나를 따르던 의원들은 전부 다 불복 선언하라고 난리를 쳤다. 그런데 그때가 대선 6개월 남았을 때다. 내가 불복하면 당이 엉망이 되고 대선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어질 거 같았다. 그래서 이해찬 대표에게 다음 날 ‘결과를 수용하겠다. 대신 이번 지방 경선에서 나타난 당원들 표심을 잊지 말아 달라’고 했고 이 대표도 ‘알겠다’고 했다.” - 취재 메모 중 -이후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전 대통령과 안철수 후보 측이 단일화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안 후보 측이 당 혁신을 요구해 11월 이해찬 당시 대표가 사퇴했다. 대선에서도 패배하면서 이듬해 치러진 5·4 전당대회에서 김한길이 당 대표로 선출됐다. ● 야당 대표 시절, 정권교체 위해 안철수 신당과 통합 결단제1야당 대표가 된 김한길은 그해 8월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의혹 등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 등을 요구하며 45일간 서울광장 천막당사에서 노숙 농성을 벌이며 박근혜 정부와 각을 세웠다. 국회를 식물 상태로 마비시켰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야당의 존재감을 보여줬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었다. 다음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그의 일화다. “처음 만난 게 ‘박근혜 수필가’였다. 내가 MBC 토크쇼 진행할 때였는데 여러 차례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클로징 멘트에서 ‘우리는 동갑인데 같은 세월을 살았지만 서로가 너무 다른 세월을 살았다. 박근혜 씨가 어머니를 대신해 청와대에서 안주인 노릇을 하는 동안 나는 긴급조치로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면회 다니면서 세월을 까먹은 사람이다. 이렇게 다른 우리가 한 시간 동안이나 사이좋게 얘기한 것은 아마 좋은 일일 겁니다’ 뭐 이런 멘트였는데 이거를 빼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나가긴 나갔더라. (중략) 대통령이 돼서도 회동하면 편하게 얘기했다. 박 대통령도 격식을 안 따지더라. 항상 준비 많이 해서 수첩에 빼곡히 써온다. 중간에 내가 말을 끊고 하면 다시 볼펜으로 짚어가면서 써온 것을 읽더라. 내가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시절에 박 대통령이 여당 대표였다. 생일날 꽃을 사 들고 찾아갔더니 기자들이 많이 와 있는데 기자들에게 그가 ‘우리가 동갑인데 난 머리에 물감을 안 들였다’고 내 백발을 가리키며 얘기해 한바탕 웃었다. 재밌는 구석이 있다.” - 취재 메모 중 -김한길은 2014년 3월 창당을 추진하던 안철수 의원 측과 합당을 선언해 새정치민주연합을 출범시켰다. 중도층을 흡수하고 야권 통합을 이뤄내야 정권교체와 대선 승리가 가능하다는 평소 소신을 발휘한 것이다. 북한인권법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고, 북한의 무력도발을 비판하는 등 튼튼한 안보를 강조하며 중도 노선을 강화했다. 그 탓에 당내 친문 진영 등 전통적인 지지층으로부터 ‘우클릭’을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비판을 감수하며 “진영 논리와 막말과 이전투구로 국민을 불안하고 걱정하게 만들었던 정치와 결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합당한 뒤 안철수 의원과 함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를 맡았던 그는 7·30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다음 날 즉각 당 대표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비대위 체제를 이어가던 당은 2015년 2·8 전당대회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대표로 선출되며 친문-비문 진영 간 갈등이 극심해졌다. 이 무렵부터 김한길도 제3지대 신당 창당과 ‘창조적 파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2015년 1월 그가 했던 이야기다.“우리 정치가 전반적으로 양당 중심 체제에서 적대적 공생 관계에 안주하고 있다는 지적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지적을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모색이 있어야 된다. 중요한 문제예요. 지금은 이념과 지역과 세대 간의 일종의 분열을 기반으로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거든요. 과감하게 그 기득권을 벗어버린다는 각오가 있어야 우리 정치에 새로운 장이 열리지 않겠는가. 적대적 공생이 아닌 경쟁적 상생 관계가 되어야 국민으로부터 박수를 받고 국민이 정치에 희망을 가지지 않겠나.” - 취재 메모 중 -이후 김한길은 친문 진영의 패권정치에 절망하다가 안철수 의원과 함께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야권의 압도적 승리를 위해 민주당과 수도권에서의 야권연대를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책임 정치 차원에서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국민의당은 38석을 얻어 약진했다. 연대를 거부한 안 의원이 옳았다는 시각도 있지만 만약 김한길의 주장대로 야권연대가 성사됐다면 (국민의당이) 더 큰 성과를 거뒀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섣부른 불출마 김한길… DJ 후광 못 챙긴 김홍걸…결과적으로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치러진 2017년 5·9대선에서 문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정치권의 제갈공명으로 불렸던 그의 판단도 결과적으론 어긋난 셈이다. ● 2013년 국정원 댓글 수사팀장이던 尹과 묘한 인연… 킹메이커 된 金국민의당의 대선 주자였던 안철수 의원은 대선에서 패배했고 바른미래당과 합당하며 결국 사라졌다. 안 의원이 다시 국민의당을 창당했지만 그마저도 2022년 국민의힘과 통합됐다.이 무렵 김한길은 정치무대에 거의 나서지 않으며 휴지기를 가졌다. 폐암 선고를 받은 뒤 방사선 치료 등을 받고 2018년 12월 3주가량 의식을 잃을 정도로 사경을 헤맸다. 다행히 신약이 몸에 잘 맞아 사실상 완치됐다. 자연스럽게 정계를 은퇴한 것으로 보였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유력 야권 대선주자로 급부상하면서 그를 찾아왔고 그는 결과적으로 킹메이커로 다시 성공한다. 어찌 보면 윤 대통령이 지금 자리에 있는 것도 김한길과 무관치 않다. 당시 김한길은 의원총회에서 2013년 국정원 댓글 수사팀장이었던 윤 대통령에 대해 “윤석열 검사와 같이 정의로운 검사를 야당 국회의원들이 보호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에 야당 법사위원들이 윤 대통령을 국감 증인으로 신청했다. 이어 법사위에 나온 윤 대통령은 외압을 폭로하며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면서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날 김한길도 법사위 회의실을 찾아 구석에서 ‘검사 윤석열’을 멀리서 처음 봤다고 한다. 김한길은 윤 대통령에 대한 마음의 빚도 있었다. 장외투쟁을 하던 김한길이 박 전 대통령과 영수회담에서 윤석열 검사 등 댓글수사팀의 신분 보호를 요구했는데 이듬해 1월 인사에서 좌천됐기 때문이다. 자신의 요구가 오히려 윤 대통령을 좌천되게 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김한길은 2014년 7·30 재보선 당시 대구고검으로 좌천됐던 윤 대통령에게 출마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2019년 5월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윤 대통령이 했던 이야기다. “김한길 전 민주당 대표가 2014년에 누구 통해서 재보선 나오라고 하길래 ‘정치 안 합니다’고 했어. 2016년에도 민주당, 국민의당에서도 전화가 오더라고. 근데 내 적성도 아니고 국정원 사건 재판 진행 중인데 정치판 간다는 게 말이 안 돼서 기분 안 나쁘게 거절했어. 재판 진행 중인데 성향이 야당 쪽이라 기소한 거 아니냐는 말 나올 수 있으니까 당에 부담될 거라고 말했어.” - 취재 메모 중 - 이후 종종 만남을 이어오던 두 사람은 검찰총장직에서 사퇴한 윤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대선 출마를 결심하면서 정치적 멘토와 멘티 관계로 발전했고 김한길은 또 한 번 킹메이커로 불렸다. ● 尹과 자주 독대하며 현안 논의“행정부와 입법부 관계라고 볼 때 이 여당과 청와대 역시 견제와 균형이 원칙인 것이죠. 우리 정치가 크게 잘못된 거 하나가 청와대가 여의도를 우습게 여긴다는 거죠. 청와대와 여당과의 관계는 굉장히 어려운 관계거든요. 청와대가 여의도, 국회를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요. 특히 여당과의 관계가 여당이 청와대의 졸이 아니잖아요. 문제가 크지요. (중략) 왜 정치의 중심이 국회여야 하냐. 어쨌든 국회의원들은 민심에 민감하니까 이렇게 막무가내 할 수 없거든요.” - 취재 메모 중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1월 김한길이 필자에게 했던 이야기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윤석열 정부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김한길은 윤 대통령과 자주 독대하며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과 쓴소리도 적지 않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을 돕기로 한 그였지만 모든 게 계획된 대로 흘러간 것 같지는 않다. 김한길과 가까웠던 한 야당 인사는 김한길로부터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이 아닌 제3지대로 갈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적대적 공생관계인 양당제를 깨고 제3당을 꿈꿨던 것이다.다음은 김한길의 말이다. 그를 향한 세상의 삐딱한 시선에 대한 항변이자 이상주의자의 면모가 드러난다. “지난 대선 마지막 토론회에서 윤석열 이재명 안철수 등 모든 후보들이 정치발전의 첫 단계로 한국이 다당제가 돼야 된다는 데 동의했다. 다당제는 결국 양당이 아닌 제3당이 있어야 된다. 정당 설립은 범죄도 아니고 헌법에 있는 기본권이다. 그런데 창당하려고 하면 여기저기서 벌떼같이 달려들어 공격을 받고 창당하려고 하면 역적이 된다. 내가 비록 실패는 했지만 3당을 만들려고 했던 노력들이 적어도 비난받을 대상은 아니지 않을까. 내가 대선 끝나고 본 문구 중 마음에 와닿는 문구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세상도 수많은 이상주의자의 좌절을 통해서 이룩된 것이다’는 말이다.”정치권에선 김한길 위원장의 향후 역할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통령비서실장, 국무총리 등 현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위해 역할을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입니다.김 위원장은 윤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습니다. 솔직하고 뚝심 있고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보기보다 훨씬 더 괜찮은 정치인이라는 것입니다. 정치 경험이 적은 윤 대통령의 부족한 점을 그가 잘 채워주고 그가 말했던 ‘인간화의 시대’를 여는 데 기여하기를 기대합니다. 다음 [22화]는 다시 야당 정치인으로 넘어갈 예정입니다. 지난 정부의 ‘킹메이커’로 불린, 호불호와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야인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내가 생각하는 정치는 이런 거야. 우리사회 구성원들 저마다의 꿈과 자유의 한부분씩을 저당 잡아 생긴 큰 힘으로 뭔가를 해내서,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에게 저당 잡았던 것보다 더 큰 꿈과 자유를 되돌려주는 일이야.“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이하 김한길)이 1981년에 쓴 단편소설 ‘세네카의 죽음’에는 남자 주인공이 이같이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작가로서 이름을 날리던 김한길이 정치에 뛰어들게 된 이유가 담겨 있다. 김한길은 학창 시절 모범생도 아니었고 기성 정치인의 시각에서도 ‘이단아’였다. ‘모든 시험문제에는 모범답안만 있을 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하고, ‘농담이나 하면서 실속 없이 살자’고 생각했던 한량이고 ‘아무것도 각오하지 않고 딱 일 년만 살아보고 싶다’던 청년이었다. 삶을 사랑하고 이별할 줄 알며, 아파할 줄 알고, 성장통을 겪으며 청춘을 보냈다. 그는 한때 젊은이의 우상이었고 여성 팬이 많았다. 본인 스스로 어느 여성잡지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YS)을 제치고 ‘인기남 1순위’였다고 전한 적이 있다. 실제 그는 당대 최고 여배우였던 탤런트 최명길 씨와 1995년 결혼해 한길이 명길이 ‘길길이’ 부부가 됐다. 작가로서 이름을 날렸고, 방송인으로도 활동하다 정치권에 진출했다. 민주당에서 4선 의원과 민주당 대표를, 김대중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과 대통령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지냈다. 중도개혁 성향으로 탈당과 중도정당 창당을 반복했던 그는 윤석열 대통령의 멘토 역할을 하며 장관급인 국민통합위원장을 맡고 있다.● 정치인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난 金… 영원한 이방인 김한길은 김철 전 사회민주당 위원장의 3남 중 2남으로 195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도쿄에서 유학 중 그가 태어난 것이었고 일곱 살 때까지 일본에서 컸다. 그 시절부터 그는 이방인이었다.“우리는 물론 간혹 다투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나를 어김없이 ‘조센징’이라고 놀렸다. 일본 사람들의 어느 명절날, 때때옷을 입은 아이들이 나를 끈으로 묶어 앉혀놓고 자기들이 지어낸 노래를 불렀다. 조오세엔징…조오세엔징…그러면서 한 녀석씩 내게 다가와서 나를 쥐어박았다. 조센징에게는 그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그 얼마 뒤부터 나는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아직 우리 말을 잘하지 못했지만 조센징들의 나라에서 초등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다. 나는 다시 시작해보려고 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있었으므로 나는 아주 착한 아이인 체하였다. 새로 사귄 친구들이 나를 ‘쪽발이’라고 놀려대기 전까지는. (중략) 나는 나를 조센징이라고 놀려대던, 지금은 사십 대가 돼 있을 어린 날의 옛 친구들을 진작부터 용서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내가 그 옛 친구들을 용서하지 않고 품고 있으면 내가 더 망가지기 때문이었다. 잊자 한들 잊혀질 일은 결코 아니었다.”- 1995년 8월 16일 자 동아일보 칼럼 ‘김한길의 세상읽기 <일본의 옛 친구에게>’ 중에 -한국의 대표적인 사회민주주의 계열 정치인이었던 아버지는 가정에 소홀했다. 외국을 오갔고 1971년엔 사회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고, 박정희 정부에서 탄압을 받았다. 1975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진보정당 이력으로 인해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은 적도 있었고 대학생일 때 쓴 글이 문제가 돼서 기관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적도 있었다. 아버지가 그를 시대의 반항아로 만들었던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누군가를 미워했던 양으로 친다면, 가장 많이 미워한 사람이 바로 내 아버지가 아닐까 싶다. 늘 민주화와 통일과 민족과 못사는 사람들의 삶을 말하면서 정작 당신이 거느린 식솔들에게는 한없이 무력했던 분. 세상에서는 옹고집, 반골로 불리면서도 정작 당신 둘째 아들의 반항에는 속수무책이었던 분. 통일이고 민주화고 개뿔이고 간에 아버지 제발 우리한테도 좀 신경을 써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내가 대들면 말없이 한숨만 내쉬시던 분…” - 1994년 7월 5일 자 동아일보 ‘내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 기고문 - 20대의 김한길은 “무슨 꿈 같은 것도, 희망 같은 것도, 야망도 욕심도 없었다. 그런 알량한 낱말들은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여간 그랬다”고 썼다. 합격한 대학을 때려치우고 구두닦이를 하기도 했다. 건국대 국문과에 입학했다가 제대한 뒤 정치외교학과로 전과해 졸업한 뒤 서울 중앙여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78년 김한길이 군에 입대하고 나서 처음 넉 달 동안에 쓴 ‘병정일기’는 월간 ‘문학사상’에 실려 화제가 됐지만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는 이 글이 완간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한길이 미국행을 택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독재정권하의 고국은 우울했고 미래는 보이지 않아 불안하게 했다. “내가 쓴 어떤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가 모 기관의 지하실에 끌려가서 야단을 맞고 나온 뒤로는, 주위 사람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내게 권했다. 일단은 해외에 나가서 관망해보는 게 좋을 거라고.” - 김한길 수필집 ‘눈뜨면 없어라’ 중 - ● 미국 건너간 뒤 주유소, 햄버거 가게 등에서 일하다 5년 만에 언론사 지사장1981년 6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도착한 그는 목수 보조, 주유소 계산원, 햄버거 가게 요리사보조 등으로 일하기도 했다. 흑인들이 많이 살아 ‘흑석동’으로 불린, 홍등가에 있는 주유소에서 방탄유리 안쪽에서 카운터를 맡았다. 밥벌이를 하면서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지만 노동과 생활의 무게는 그를 짓눌렀다. 수면 부족과 지나친 흡연으로 인한 두통에 시달렸다. “나는 주유소 주인인 최 씨를 미워한다. 최 씨는 매일 아침 교대 시간보다 삼사십 분씩 늦게 오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미워한다. 그러면서 단 한 번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그를 나는 진짜로 미워한다. 나를 삼사십 분씩 덤으로 더 부려 먹는 것이 자신의 순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최 씨의 그 낯간지러운 꾀를 미워한다. 또 최 씨는 내게 단 한 번도 보수를 제날짜에 준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를 더 미워한다. 며칠을 참다가 내가 마지못해 말을 꺼내면 그제야 잔뜩 목에 힘을 주며 돈을 던져주는 최 씨를 나는 속으로 미워한다. 일한 만큼의 정당한 보수를 받는 나를 괜스레 초라해지게 만드는 최 씨를 나는 무지무지 미워한다. - 김한길 수필집 ‘눈뜨면 없어라’ 중 -“완전히 미국 사람이 되지는 말라는 너희들의 충고는 엉터리다. 생각해보렴. 내가 어디 여탕에 뛰어든다고 갑자기 여자가 되겠니, 이 바보들아. 우리는 어떤 ‘인종’이나 한 ‘세대’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키워가야 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길만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숱한 의문과 혼돈을 조금씩이나마 풀어줄 수 있을 거야.” - 김한길 수필집 ‘눈뜨면 없어라’ 중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 -이듬해 3월 이후 그는 미주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지사에 기자로 취직했고 중앙일보 미주지사장까지 지냈다. 미국에 온 지 5년 만에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미주한국일보 기자로 일하면서부터 억척으로 일했고 남에게 지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했다. 충성스럽게 일하고 뛰며, 기사며 칼럼을 써제꼈다. 1987년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강원용 목사가 조직위원회 문화예술행사추진위원장을 맡으면서 업무를 도와달라고 해 한국으로 돌아와 위원회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듬해 강 목사가 방송위원장을 맡으면서 방송위 기획국장으로 일했다.그러면서도 틈틈이 글을 썼고 글쟁이로 이름을 날렸다. 1981년에 소설 ‘바람과 박제’가 문학사상에서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고 ‘병영일기’, ‘미국일기’ 등 에세이와 ‘여자의 남자’,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등 소설을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1992년 3권짜리 장편소설 ‘여자의 남자’는 400만 부가 넘게 팔렸고 1993년 MBC에서 같은 이름의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방송국에서 구성 작가로 일하고 있는 남자 주인공과 대통령의 외동딸인 여자 주인공의 러브스토리로 드라마에선 정보석 김혜수 씨가 주연을 맡았다. 김한길은 1988년 발표된 가수 조영남의 ‘화개장터’를 작사했다. 2015년 1월 그가 직접 했던 이야기다.“내가 화개장터가 있다는 걸 조그마한 기사를 보고, 영호남 사람이 어울리는…그래서 작사하자고 했는데 조영남 씨가 건전가요라 팔리지도 않는다며 반대했다. 그런데 조 씨가 레코드 만드는 데 노래가 몇 개 없어서 화개장터도 넣은 거야. 그게 조 씨 노래 중 톱10에 들어간 유일한 노래가 된 거야. 그게 26년 전인데 저작권법이 없었다고 조 씨가 얘기하더라고. 어쨌든 그때 미국에서 오래 있다 보니까 영호남 문제가 오래갈 거 같은데 강연하고 책 쓴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래서 가요 만들자고 한 것이다…국민들 마음속에 영호남이 화합해서 같이 살면 좋겠다…그런 마음을 담아서 우리나라 전체가 하나의 화개장터가 됐으면 좋겠다고 작사를 했다.” - 취재 메모 중 -● 작가·방송인 등으로 전국적 인기 누린 金소설 외에도 위트와 풍자, 촌철살인 등이 담긴 칼럼을 썼고 라디오와 TV 방송에서 토크쇼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배우자 최명길 씨를 만났다. 두 번째 결혼이었다. MBC 라디오의 진행자로 평소 알고 지내던 두 사람은 1994년 MBC 방송대상 라디오 부문 수상자로 나란히 선정돼 각종 행사에 참석하면서 자주 만난 것이 서로에 대한 호감을 사랑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대뜸 1995년 1월 그가 “나에게 시집오면 어떻겠느냐”고 전화로 청혼을 했고 최 씨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그 무렵부터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였지만 마지막에 화해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나는 이 땅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좇아 미국으로 도망갔는데 아우의 편지가 나를 못살게 굴었다.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말이야.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질 않아. 위인전을 읽을 때처럼 거리감이 느껴지는 거야. 너무나 성실하게 자기 갈 길을 가는 한 거인을, 결코 좌절할 줄 모르는 한 영웅을 아버지에게서 보는 거야.’ 문민정부가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우셨다. 나는 이제 아버지를 미워했던 마음의 열 배쯤 내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 1994년 7월 5일 자 동아일보 ‘내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 기고문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여야 양쪽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한국 사회의 지역주의와 지역 갈등이 제일 큰 걸림돌이라고 봤던 그는 문화적으로 차별당하는 쪽에 힘을 보태는 게 맞다는 생각에 야당을 택했다.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비례대표 의원으로서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가 자주 언급했던 단어 중 하나는 희망이었다. 그가 정치를 하게 된 이유는 여기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정치는) 차라리 산문 쪽에 가깝다. 우리들 자신과, 우리가 모여 사는 사회의 크고 작은 실체와 끊임없이 맞닥뜨리는 일이 정치의 시작이니까 그렇다. 우리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은 거울 속의 풍경은 종종 황량하고 을씨년스럽다. ‘동물의 왕국’에서처럼 야비하고 잔인하고 냉혹하다. 그 속에서나마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면서 희망을 탐색하는 직업이 정치가 아닐까 싶다.” - 저서 ‘김한길의 희망일기’ -어느 날 9살 된 아들이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 장터엔 / 아랫마을 하동 사람 윗마을 구례 사람 /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그래서 저도 따라 부르다가 “아빠가 잘 아는 할아버지가 그 노래를 작사했단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조영남 씨의 ‘화개장터’를 어린이가 아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그 무렵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의 이야기를 한 번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국민통합위원장 자리를 맡았을 때 참 적합한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방인 경험이 많았고 지역주의와 계파주의의 문제를 직시했고 늘 통합과 갈등 해소,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그의 대척점에 있던 정치인들은 ‘정당 브레이커’라거나 갈등을 만드는 인물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인간화시대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시대적 가치이자 시대정신입니다. 소위 우리가 겪은 산업화 민주화 시대 다음에 어떤 시대를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가. 산업화 시대가 최소한의 물질을 추구하고 민주화 시대가 민주적 제도를 갖춰가는 시기였다면 이제 물질과 제도가 사람을 위해서 쓰이는 시대가 되어야 된다는 것. 그런 의식은 상당 기간 숙성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국민이 그런 인식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희망을 살려 나가는 게 우리 정치를 살려 나가는 것입니다.”그의 글에선 휴머니즘이 묻어납니다. 단문을 구사하며 위트와 유머가 담겼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글도 좋아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번 20화에서 책에 나오는 그의 아픈 개인사는 일부러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김 위원장이 계속 작품 활동을 했다면? ‘정치인 김한길’로 살았을 때보다 우리 사회에 더 많은 메시지를 던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음 에선 그의 정치활동을 중심으로 다뤄보겠습니다.황형준기자 constant25@donga.com}
2016년 12월 9일 국회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자 헌법재판소는 국가적 혼란을 조기에 해소하기 위해 재판에 속도를 냈다. 헌재는 매주 1, 2차례 재판을 열었고 총 3회의 변론준비기일과 17회의 변론기일 등 20차례 재판을 거쳐 이듬해 3월 10일 파면 결정을 내렸다. 탄핵심판의 재판장이었던 박한철 전 소장은 임기가 2017년 1월 31일 끝나 재판을 마무리하진 못했지만 매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는 퇴임식에서 “헌법질서에 극단적 대립을 초래하는 제도적·구조적 문제가 있다면 지혜를 모아 빠른 시일 내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희망한다”고 개헌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박 전 소장의 뒤를 이어 헌재소장 권한대행을 맡은 이정미 전 재판관은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역사적 선고문을 낭독했다. 선고 당일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느라 미처 떼어내지 못한 뒷머리 ‘헤어롤’ 2개가 카메라에 포착돼 화제가 됐다. 법조계에선 이때만큼 헌재가 국민적 지지와 박수를 받고 역할과 위상이 높았던 때는 찾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헌법의 최종 수호자인 헌재가 탄핵심판을 마무리함으로써 국가적 혼란을 마무리하고 새 대통령 선출 절차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높았던 헌재의 위상은 6년 만에 급격히 추락했다. 특히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했던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에 대한 헌재의 권한쟁의심판 결과를 두고선 ‘사법의 정치화’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지적이 법조계에서 나온다. 헌재는 올 3월 국민의힘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청구한 권한쟁의심판을 모두 각하 또는 기각했다. 눈길을 끈 건 헌재 판단이 4 대 4로 극명하게 갈렸다는 점이다. 진보 성향 재판관과 중도보수 성향 재판관의 의견이 거의 모든 쟁점에서 대립하면서 키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명한 이미선 재판관이 쥐게 됐다. 이 재판관의 결정에 따라 헌재는 입법과정이 국민의힘 의원들의 표결권을 침해했다면서도 무효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선고 직후 여당에선 “헌재가 아니라 정치재판소 같다”는 날 선 반응이 나왔다. 박한철 전 소장은 지난해 9월 발간한 저서 ‘헌법의 자리’에서 “‘정치의 사법화’는 다시 사법을 특정 세력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거나 그의 숨겨진 정치 행위로 전락시키는 ‘사법의 정치화’로 나타나기도 한다”며 “그 결과 사법에 대한 국민 신뢰가 저하되고, 헌법시스템의 약화와 훼손, 국가 공동체의 위기라는 악순환이 발생할 가능성이 더 커지고 있다”고 썼다. 지금 헌재를 두고 지적되는 사법의 정치화는 문재인 정부에서 심화됐다. 우리법연구회 창립 멤버인 유남석 소장 등 이념적 지향성이 같은 재판관을 대거 충원했기 때문이다. 재판관이 인사권자의 입맛에 맞는 결정을 내렸다는 평가가 나오면 결과적으로 국민 신뢰를 갉아먹게 된다. 그 책임도 인사권자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올 11월부터 유 소장의 후임을 포함한 재판관 3명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하는 윤석열 대통령이 잊지 말아야 할 점이다. 황형준 사회부 차장 constant25@donga.com}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나는 훌륭한 헌법재판이란 직선과 곡선, 그리고 색채가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음악과 같다고 생각한다. 좀 더 풀어서 말하면 국가와 사회의 지속성을 의미하는 직선, 공동체의 발전에 필요한 창의성을 뜻하는 곡선, 그리고 의견과 가치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색채가 어우러져 고된 현실에 부대끼는 국민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희망을 주는 선율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박한철 전 헌법재판소 소장(70)은 지난해 9월 발간한 저서 ‘헌법의 자리’에서 헌법재판의 의미와 가치를 이같이 표현했다. 박 전 소장은 역대 유일한 검찰 출신 헌재 소장이었다.2016년 12월 9일 국회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자 헌재는 국민적 혼란을 조기에 해소하기 위해 재판에 속도를 냈다. 헌재는 이듬해 3월 10일 파면 결정을 내릴 때까지 매주 1, 2차례 재판을 열었고 총 3회의 변론준비기일과 17회의 변론기일 등 무려 20차례 재판을 열었다. 그 수장이 박 전 소장이었다. 박 전 소장은 임기가 2017년 1월 31일 끝나면서 재판을 마무리 짓지 못했지만 언론으로부터 매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는 퇴임식에서는 “우리 헌법 질서에 극단적 대립을 초래하는 제도적 구조적 문제가 있다면 지혜를 모아 빠른 시일 내에 개선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고 개헌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때만큼 헌재가 국민적인 지지와 박수를 받고 그 역할과 위상이 높았던 때를 찾기 어렵다. 헌법의 최종 수호자인 헌재가 나서서 탄핵 심판을 마무리함으로써 국가적 혼란을 수습하고 대선을 통해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절차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6년 만에 높아졌던 헌재의 위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금도 현 유남석 헌재 소장이 누군지는 몰라도 박 전 소장을 기억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특수·기획 거친 ‘독일 병정’ 검사1953년 부산에서 태어난 박 전 소장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인천으로 올라와 중·고교를 졸업한 뒤 1975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 13기로 수료한 뒤 1983년부터 검사로 재직했다.그는 검사 시절 특수통이자 기획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평검사 시절 요직인 법무부와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 청와대 파견 등을 거쳤다. 막스 플랑크 국제형사법연구소 객원연구원 등으로 독일에서 유학을 했고 헌재 파견, 인천지검 특수부장, 대검 기획과장,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 삼성 비자금 특별수사·감찰본부장, 대검찰청 공안부장, 대구지검장, 서울동부지검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검사였다. 검사장 시절 조회 때 한시와 영시를 인용하기도 하고 후배 검사들에게 시집을 선물하는 등 시와 고전을 즐겨 읽었다. 동양과 서양 역사는 물론 문학과 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낭만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별명이 ‘독일 병정’이었다. 워낙 엄하고 철두철미한 업무 스타일 때문이었다. 박 전 소장 밑에서 일했던 검사 출신 A 변호사의 이야기다.“굉장히 꼼꼼하시고 일을 무지하게 열심히 하시는 분이니까 검사들이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재도 워낙 꼼꼼하게 하다 보니 차장 시절에 그 밑에 있던 부장들이 아무도 결재를 안 올리려고 했다. 결재를 할 때 기록에다가 본인이 수정한 부분을 접어놓는데 수십 개가 접혀 있어서 놀라고 그걸 밤늦게까지 부랴부랴 수정한 기억이 있다.” - 취재 메모 중 -그는 이원석 검찰총장의 초청으로 올해 2월 서울 서초구 대검 청사에서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후배 검사들에게 공익 실현 기관으로서의 검찰은 정치적 중립이 필수적이며 균형감각 등을 통해 헌법 가치를 실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정치적 중립 의무는 헌법 가치를 실현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검찰 구성원, 총장으로부터 정문을 지키는 청원경찰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성원들이 한마음으로 지혜를 짜내야 한다. 끊임없이 교감하면서 답을 찾아가야 한다. 검찰이 담당하는 모든 사건은 크고 작은 걸 떠나서 전부 방정식으로 풀어야 한다. 특히 복잡한 사건은 8,9차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데 고차방정식에 있어서는 국민 설득 문제가 가장 앞에 나온다. 국민이라는 건 언론이 가장 많은 부분을 대변하고 있고, 언론을 설득하는 문제,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그걸 풀어나가는 게 검찰의 중요한 숙제다.” - 2월 대검찰청 강연 중 - 수사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지지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결국 검찰이 치명상을 입게 된다는 의미다. 이런 이유로 그는 언론 대응을 중시했다고 한다. 공보 역할을 맡을 때는 수사 상황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어 선문답을 즐겼다.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로 있던 2005년 6월엔 기자단과의 티타임 도중에 “호연(浩然)한 기개 맑고 드높으며 선재(仙才) 뛰어나 속인은 알아보기 어렵네”라며 갑자기 한시를 읊기도 했다. 당시 불거진 ‘행담도 개발비리 의혹’을 둘러싸고 기자들이 “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이 맡게 되느냐”고 집요하게 묻자 중국 고사를 꺼낸 것이다. 당시 그는 이처럼 대답하기 난처하거나 보안이 필요한 질문에는 역사, 문화에 관련된 다양한 지식을 설명하며 피해 갔다고 한다. 기자들도 원칙을 지키는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2005년 4월 초순이었던 것 같은데 봄이었다. ‘춘래불사춘’, 봄은 왔는데 봄이 온 거 같지가 않구나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앞으로 엄청난 권력형 비리로 부각이 돼 있고 그게 궁금해하는 사항이니까 수사하는 데 여러분들의 협조를 간곡히 부탁한다. 의혹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는 기사를 쓰지 말고 검찰 수사와 속도를 맞춰서 보도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중략) 언론과는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신뢰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는 의미에서 말씀드렸다. ” - 2월 대검찰청 강연 중 - 그는 △오전 10시와 오후 2시 브리핑 △기자들이 취재해 오는 사항에 대한 확인 △기자들의 전화는 무조건 받을 것 등 기자단과의 약속을 몇 달간 지켰고 그 결과 언론과의 신뢰관계가 형성됐다고 한다. ● 고검장 승진 고배… ‘전화위복’으로 헌재 재판관 지명그런 그도 대검찰청 공안부장 시절인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집회를 잘 통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검장에 승진하지 못하고 서울동부지검장으로 옷을 벗었다. 이후 김앤장법률사무소에서 일하던 중 반전이 찾아왔다. 헌재 파견 근무를 하던 시절 눈에 띄었던 덕분인지 법무부 차관을 지낸 검사 출신 김희옥 재판관 후임으로 2011년 2월 지명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었다. 이어 재판관을 하면서도 당시 이강국 헌재 소장으로부터 “소장을 맡아도 될 것 같다”는 말을 종종 들을 정도로 그 자질을 인정받았다. 결국 2013년 헌재 소장으로 지명돼 헌법재판의 수장을 맡게 됐다. 또 다른 검찰 출신 B 변호사의 말이다.“대구지검장 시절에 대구 갓바위를 한 몇 달을 매일 올라가셨어. 불심이 깊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나라에 대한 걱정이 많으셔서… 나라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셨는데 결국 그 기도가 헌재 소장까지 만들어 주신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 취재 메모 중 -그가 소장이던 시절 헌재는 역사에 남을 만한 결정을 많이 내렸다. 2014년 통합진보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 사건에서 정당 해산 인용 결정을 내렸다. 정당 해산 심판에 대한 최초의 헌재 결정이었다. 당시 헌재는 “통진당이 추구하는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는 조선노동당이 제시하는 정치 노선을 절대적인 선으로 받아들이고 그 정당의 특정한 계급 노선과 결부된 인민민주주의 독재 방식과 수령론에 기초한 1인 독재를 통치의 본질로 추구한다는 점에서 민주적 기본질서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고 밝혔다. 또 2015년에는 간통죄에 대해 “간통 행위를 국가가 형벌로 다스리는 것이 적정한지에 대해 더 이상 국민의 인식이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게 됐다”며 “혼인과 가정의 유지는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지와 애정에 맡겨야지 타율적으로 강제할 수 없다”고 간통죄 조항을 위헌으로 판단했다. 박 전 소장은 헌재 재판관 임명 제도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2013년 인사청문회부터 “9명의 재판관 중 대통령과 국회가 각각 3명씩 지명하는 것은 국민적 대표성이 있으나 대법원장이 3명을 지명하는 것은 국민적 대표성이 없다”며 “대통령과 국회의 합동 행위로 재판관 임명이 이어진다면 (이 문제가)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소신 발언을 했다. 2016년 3월 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회에선 “솔직히 자존심이 상한다”며 “(선출되지 않고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원장은 국민의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 상태다. 헌재가 이중으로 민주적 정당성이 희석돼 과연 권위를 가질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판사 출신 헌재 소장이었다면 하기 어려운 소신 발언이었다. 박 전 소장과 함께 일했던 한 전직 헌재 재판관은 “검사 출신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았고 바르고 훌륭한 분이었다”고 말했다.2017년 1월 말 은퇴한 뒤에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초빙교수와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초빙교수 등을 지냈고 지금은 동국대 법대 석좌교수로 지내며 인권법 강의를 학부생에게 가르치고 있다.● “사법의 정치화로 국민 신뢰 저하되고 헌법시스템 훼손” 박 전 소장은 지난해 9월 발간한 저서 ‘헌법의 자리’에서 헌법재판의 사회 통합 기능도 강조했다. 그는 “헌재는 보다 적극적인 헌법해석을 통해 우리 헌법이 구체적인 갈등 해결의 수단이자 목표로 작동하도록, 단계적 가치판단에 있어 헌법을 준거의 틀로 활용해야 한다”며 “동시에 정치와 권력기관에는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 지속적으로 제시해 밝은 미래를 향한 사회 통합의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에 대한 문제의식도 담았다. 그는 “‘정치의 사법화’는 다시 사법을 특정 세력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거나 그의 숨겨진 정치 행위로 전락시키는 ‘사법의 정치화’로 나타나기도 한다”며 “그 결과 사법에 대한 국민 신뢰가 저하되고, 헌법 시스템의 약화와 훼손, 국가 공동체의 위기라는 악순환이 발생할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라고 썼다. 특히 “정치의 과도한 사법화는 사법기관에 대한 소위 코드 인사와 맞물릴 경우 헌법재판이나 사법이 헌법과 법치주의의 실현을 넘어 재판관 개인 또는 그가 대표하는 정치적, 사회적 세력의 특정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거나 추종하고자 하는 숨겨진 정치 행위로 전락할 위험성이나, 명백한 정치적 판단은 아니라 하더라도 헌법정신과 정치적 의도를 적당히 절충·조정하는 타협적 판결에 이르게 할 가능성을 갖는다”라고 코드 인사를 에둘러 비판하기도 했다. 지금 헌재와 관련된 사법의 정치화는 문재인 정부에서 이념적 지향성이 같은 재판관을 일방적으로 임명한 것과 무관치 않다.특히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했던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에 대한 헌재의 권한쟁의심판 결과를 두고 ‘사법의 정치화’라는 지적이 다시 나오고 있다. 헌재는 국민의힘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청구한 권한쟁의심판을 올해 3월 각하 또는 기각했는데 헌재 판단은 4 대 4로 극명하게 갈렸다. ‘우리법연구회’의 창립 멤버인 유 소장을 포함한 진보 성향 재판관과 중도보수 성향 재판관의 판단이 엇갈리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이미선 재판관이 결정권을 쥐게 됐다. 그의 결정에 따라 헌재는 입법 과정이 국민의힘 의원들의 표결권을 침해했다면서도 무효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렇다 보니 여당에선 “헌재가 아니라 정치재판소 같다”는 날선 반응을 보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11월 퇴임하는 유 소장의 후임을 포함해 임기 중 재판관 3명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할 예정이고 이번 정부에서 헌재 구성원이 모두 교체된다. 헌재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선 사법의 정치화에 대한 박 전 소장의 지적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 부인과 사별한 뒤 절에서 기거… ‘아우라’ 있는 법조계 원로독실한 불교 신자인 그는 2009년 서울 서초구 아파트를 불교재단에 기부한 뒤 당시 전세보증금 2억2000만 원에 월세 100만 원을 내고 그 아파트에 그대로 살았다. 여기에는 불자였던 부인의 뜻이 반영됐다고 한다. 자녀가 없는 그는 2019년 부인과 사별한 뒤 서울 종로구의 한 절에서 기거하며 주말에만 서초구 아파트에서 지낸다고 한다. 공수래공수거다. 검사 출신 A 변호사는 “간혹 대구지검장 시절 멤버들과 골프를 치시는데 그때 보니 가방이나 골프화, 골프채 등이 정말 오래됐다”며 “하나 사드리고 싶은 마음에 골프 가방을 하나 사드렸는데 여전히 안 쓰신다. 요즘 나오는 게 아무래도 화려해서 비교적 점잖은 걸 사드렸는데 또 안 쓰시더라”고 전했다. 또 다른 후배 검사는 “내가 검찰 선배 중에 유일하게 ‘아우라’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박 전 소장이다. 통상 장관이나 총장을 한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얼굴이 달라진다”며 “하지만 박 전 소장은 그 아우라가 과거나 현재나 여전하다. 그분은 한결같고 사리사욕이 없는 분이라서 늘 존경하게 되고,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그는 ‘어느 곳이든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는 뜻의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을 좌우명처럼 주변에 자주 한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 때 임재선사가 한 말씀이다. 그는 검사 시절은 검사로서, 헌재 재판관과 소장 시절에는 법관으로서의 역할을, 지금은 교수로서 충실히 후학을 양성하며 만족해한다고 한다. 말 그대로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법정모독 시리즈의 근간에는 정치와 법조의 영역이 구분되지 않고 수렴하고 있다는 현상이 담겨 있습니다. 최초로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탄생했고, 국회의원 등 정치인의 주류 집단은 법조인입니다. 로스쿨 도입 이후 법조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정치와 법조의 화학적 결합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문제는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요한 정치적 결정을 사법의 영역으로 미루는 일도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사법이 정치화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박 전 소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를 법정모독 [19화]의 주인공으로 쓰게 된 이유입니다.글을 쓰기 전에 그를 직접 만나서절에 가보고 싶었지만 책이 나온 뒤 한 번 인터뷰한 것을 빼곤 모두 언론과의 접촉을 피했다며 완곡히 거절하셨습니다. 본인을 내세우는 것도 세상에 근황을 전하는 것도 꺼리시는 것 같았습니다. 대부분 법조인들이 현직에서 떠난 뒤 개업해 전관예우를 받아 부를 축적하는 상황과 달리 변호사로 개업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속세와 거리를 두며 검소하게 한결같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후배 법조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이유겠지요.다음 [20화]는 여권의 정치인을 다룰 예정입니다. 수식어가 많습니다. 언론인, 소설가, 야권 출신 중도 성향의 중량감 있는 정치인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내가 아는 명리학자가 있는데 앞으로 7년간 운이 제일 좋다고 하더라. 원래 정치인이 고난을 겪는 사주여야지 대성한다. 나는 감방도 한번 갔다 왔고(웃음). 1942년생의 시대가 온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김정일 전 북한 노동당 총비서… 42년생 중에 국내에서 제일 유명한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은 죽었고 그다음 나다. 청와대에 잘 출입하고 있어라ㅎ” - 취재 메모 중 - 2021년 4월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필자를 포함한 기자들과 사석에서 만난 박지원 당시 국가정보원장(이하 박지원)은 이렇게 말했다. 4선 의원과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국정원장 등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자리는 다 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 끊임없이 권좌를 지향하는 게 그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노욕(老慾)에 끝이 없다”는 비난과 함께 “그래도 그만큼 열정적인 경험과 지혜가 많은 원로가 없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감탄할 정도로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과 놀라운 정치적 순발력’ 때문에 호불호를 떠나 ‘대단한 정치인’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그의 왕성한 활동엔 권력욕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건강한지 모른다. 그에겐 ‘질투는 나의 힘’이 아니라 ‘권력욕은 나의 힘’인 셈이다. 최근 그는 매주 10~12회의 방송 출연을 하며 현안에 대해 언급하고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한다. 그러면서도 올 2~4월에 전국 16개 광역자치단체를 방문해 30여 회 초청 강연을 했다. 그만큼 그의 정치평론을 듣고 싶어하고 그를 찾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호감을 갖는 ‘안티’도 많다. 누리꾼은 그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한다’는 의미로 ‘박쥐원’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하고, 노욕을 부린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는 방송이나 강연에서 “제가/ 그/ 유~명한/ 박지원입니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이름부터 원래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과 같아 한국에서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다 아는 이름이다. 게다가 그 역시 언론과 SNS에 끊임없이 매일 등장하니 삼척동자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17화]에 이어 노무현 정부 이후 그의 행적으로 돌아가 보자. ● 대북송금 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3년 살아박지원이 검찰에 구속돼 징역 3년의 유죄 판결을 받는 계기가 된 ‘대북송금 의혹’은 2002년 9월 국정감사장에서 처음 불거졌다.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서 현대상선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산업은행에서 4900억 원, 당시 환율로 4억 달러를 긴급 대출받아 현대아산을 통해 북한에 넘겨줬다고 주장하면서다. 이듬해 1월 말 감사원은 ‘4000억 원 중 1760억 원은 현대 계열사 운영자금으로 사용됐고, 나머지 2240억 원은 북한에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의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파문이 커지자 DJ도 퇴임을 앞둔 이듬해 2월 사실관계를 인정하며 “어떻게 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민족이 서로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국민이 안심하고 살면서 통일에의 희망을 일궈나갈 수 있도록 할 것인가 하는 충정에서 행해진 것”이라며 “저는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결국 송두환 특별검사팀은 6월 김대중 정부와 현대그룹이 2000년 4월 8일 북한과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최종 합의하면서 정부와 현대가 각각 1억 달러, 4억 달러를 북한에 지급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을 파악해 이에 관여한 박지원을 직권남용 및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그는 수감 중 녹내장 등 건강이 악화돼 구속집행정지와 형집행정지를 반복하다 석방됐고 2007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의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됐다.● 당 대표 1번, 비대위원장 3번, 원내대표 3번 기록재기는 순탄하지 않았다. 박지원은 DJ의 ‘정치적 고향’이자 자신이 고등학교를 나온 전남 목포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려 했지만 공천심사위원회의 ‘금고 이상 형 확정자 배제’ 원칙에 따라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무소속으로 출마해 목포시민의 평가를 받겠다”며 탈당한 뒤 DJ의 부인 이희호 여사의 지원 유세와 동교동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당선됐다. 이후 재선 의원으로는 이례적으로 2010년 5월 민주당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그는 이를 시작으로 2012년 민주당 원내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내는 등 의원 시절 동안 민주당에서만 원내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을 2번씩, 2016년 안철수 의원이 창당한 국민의당에서 원내대표와 비대위원장, 당 대표까지 지내는 정치사의 신기록을 세웠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선 정보력과 전문성을 중심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2009년 7월 당시 검찰총장 후보자였던 천성관 씨와 스폰서 박모 씨의 해외 골프 여행, 천 씨 부인의 면세점 쇼핑 명세 등을 폭로하며 후보자 사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를 포함해 원내대표로 청문회를 지휘하면서 7명의 청문 대상자를 낙마시켜 ‘청문회 낙마 7관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여의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도 거의 매주 지역구인 전남 목포를 방문할 정도로 지역에도 공을 들였다. 금요일 귀향해 지역구 업무를 보고 월요일 새벽 서울로 돌아오는 것을 뜻하는 ‘금귀월래(金歸月來)’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그 결과 18~20대 총선까지 목포에서 내리 3선에 성공했다.하지만 좋은 평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12년 ‘이해찬 대표-박지원 원내대표’로 친노(친노무현) 세력과 호남 세력이 결탁했다는 ‘이박 담합’ 논란도 불러왔고 구정치의 상징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잦은 SNS와 방송에서 가끔 근거 없는 의혹 제기나 말실수를 해서 구설수에 오른 적도 적지 않다. 2014년 1월 당시 같은 당 중진 의원의 비판이다. “SNS에 글 올리기 좋아하는 X들은 먼저 생각을 안 하고 말이랑 행동이 앞서서 문제야. 너무 경망스러워.” - 취재 메모 중 -박 전 원장은 DJ 정신을 기리고 국민들에게 계속 알리는 걸 사명으로 생각하지만 일각에선 지나치게 DJ를 팔아 자기 정치를 하려 한다는 비난도 제기된다. ● 2015년 2·8 전당대회 낙마 이후 탈당-신당 합류까지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2015년 2·8전당대회에선 2012년 대선에서 낙마한 뒤 당 대표 후보로 나선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고배를 마셨다. 당초 노무현 정부 시절 대북송금 특검법을 통과시키고 특별사면이 미뤄지는 등의 과정에서 친노·친문 세력과는 멀어진 그였다. 다음은 그가 2014년 12월 한 이야기다. “2년 전 문재인 낙선 직후 만났다. DJ의 길을 갈 거냐 이회창의 길을 갈 거냐 선택해야 한다며 설명해줬다. DJ는 낙선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갔다. 하지만 지지자들은 DJ가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언젠가 DJ가 돌아오고 대통령을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DJ는 결국 돌아와 대통령 후보가 됐지만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 보수우파인 김종필 전 총재(JP)를 영입해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느냐. 이회창의 길을 봐라. 대통령 선거에 실패하고 정계를 떠났다. 그러나 바로 복귀해서 손에 피를 묻히더라. 자기에게 대통령 후보를 양보한 조순 총재를 쳐내고, 야당에서 여당으로 넘어온 이기택을 쳐내고 박근혜 당시 대표가 오겠다는 걸 쳐내버렸다. 피를 묻혀서 대통령 후보는 됐지만 대통령은 안 되더라. 그랬더니 그가 굉장히 좋은 얘기라고 참고하겠다더니…” - 취재 메모 중 - 대선 후보로서 정책 준비에 골몰해야지 당 대표로서 각종 논란에 휘말리면 안 되는 만큼 당 대표로 나서는 게 적합하지 않다는 취지였지만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당대회에서 낙마한 뒤에도 문 전 대통령과 각을 세우던 그는 2015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현 민주당)에서 ‘친노패권주의’가 논란이 되며 안철수 의원이 국민의당 창당을 추진하자 2016년 1월 탈당했다. 같은 해 3월 국민의당에 합류했고 4·13총선에서 국민의당이 38석을 얻는 기염을 토하며 박지원도 20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당선 직후 그가 사석에서 했던 말이다.“안 대표가 미래를 보는 안목이 있다. 탁월하다. 그런 정치 지도자가 얼마나 있냐. 깜짝 놀랐다. IT 강국, 신지식을 얘기했던 김대중 대통령에 이은 안목이다. 나도 통합론자였지만 결국 김한길 천정배 박지원이 틀리고 안철수가 맞았던 거 아니냐. 깔끔하게 인정하고 따라가야지.” - 취재 메모 중 -4월 총선 전에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야권연대와 후보 단일화 논의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안 의원이 이에 동조하지 않은 덕분에 국민의당이 ‘녹색 돌풍’을 일으켰다는 뜻이었다. 이후 그는 국민의당 원내대표로 추대됐고 안 의원을 DJ급으로 모시며 킹메이커 역할에 전념한다.● 안철수 대통령 만들기 총대 멨지만… ‘문모닝’ 별명만 남아그가 당 초선 의원들에게 한 ‘십계명’ 강의는 지금 봐도 정치인들이나 예비 정치인들이 배울 점이 있다. 필자가 썼던 기사다. ▶초선의 선생님 된 박지원 ‘깨알 강의’박지원은 제3당의 원내대표로서 법안 처리 등의 캐스팅보트를 쥔 3당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국회의 중심에 섰고 안 의원이 국민의당 총선 리베이트 사건으로 대표직에서 물러나자 비대위원장을 맡았다. 그해 8월 당시 국민의당 6선 의원이었던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은 사석에서 이렇게 평가했다.“박지원 대표가 잘하고 계신다. 어떤 분은 몇백 년 만에 한 번 나올 분이라고 하던데…삼국지에 나오는 영웅들을 다 합친 것 같다.” - 취재 메모 중 -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처리 국면에서도 그는 “탄핵 열차는 출발했다” “개가 짖어도 ‘탄핵 열차’는 달린다” “법꾸라지 김기춘” 등 어록을 내놓으며 정국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정치 9단’인 그도 결국 틀렸다. 문 전 대통령 비판으로 하루를 시작해 ‘문모닝’이라는 별명도 얻었지만 점차 안 의원에게 실망했고 2017년 5월 대선은 문 전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국민의 선택은 안철수 후보는 물론 박지원과 국민의당이 아니었던 것이다. ● ‘winter is coming’ 2017년 대선 이후 찾아온 암흑기… 국정원장 지명 반전2017년 5월 대선 이후는 시련의 계절이었다. 2017년 10월 안 의원이 당시 탄핵 사태를 계기로 갈라져 나온 보수 정당인 유승민 전 의원의 바른정당과 합당을 추진하면서다. 결국 안 의원을 비롯한 통합파와 박지원을 포함한 호남 의원이 결별하면서 이들은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으로 분당됐다. 단독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 위한 의석수(20석)가 모자랐던 민주평화당은 정의당과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했지만 여야 관계에서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대선과 그 이후 호남에서 문 전 대통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문 전 대통령이 DJ의 햇볕정책을 계승한 남북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자 박지원의 문 전 대통령에 대한 입장도 비판에서 지지로 선회하게 됐다. 2018년 2월 민평당이 창당된 이후 박지원의 입지도 쪼그라들었다. 민평당이 원내정당이긴 했지만 의정활동에서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고, 당 대표였던 정동영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한 주류와 비주류의 반목이 심해졌다. 결국 박지원을 포함한 광주·전남 의원 9명은 탈당해 2020년 1월 대안신당을 창당하고 이후 민생당으로 통합됐지만 2020년 4월 21대 총선에서 원내 진출에 실패했다. 그도 전남 목포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원이 의원에게 패배하면서 2008년 이후 12년 만에 자유인이 됐다. 물론 그는 각종 방송에 출연 요청을 받으며 ‘과로사 직전의 백수’였다. 여의도 주변에선 총선에서 민주당이 180석을 얻으며 압도적 지지를 받은 만큼 문 전 대통령이 박지원 등을 중용해 통합 인사를 하고 협치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실제 문 전 대통령은 같은 해 6월 박지원을 국정원장에 내정하는 깜짝 인사를 발표했다. 그는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국정원 개혁에 힘을 쓰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국회 인사청문회 서면 답변서에서 문모닝 행보에 대해 ‘후회나 반성을 하느냐’는 질의에 박 후보자는 “치열한 선거 유세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었음을 양해해달라”고 답했다.그해 12월 사석에서 박지원이 한 이야기다.“내가 호가 단재(旦齋)야. 유명한 한학자 선생님이 지어주셨어. 주역을 만든 주공(周公)을 중국 사람들이 존경해서 ‘단(旦)’자를 이름에 잘 안 쓰는데 나에게 그 단자를 지어줘. 주공이 문왕에 이어서 무왕도 엄청 잘 모셔서 중국을 이끌었다. 당시 다 주공이 무왕을 치고 왕이 될 거라 했는데 오히려 무왕을 극진히 모셨다.” - 취재 메모 중 -당시 이에 대해 DJ에 이어 문 전 대통령, 두 왕을 모시는 것을 예견한 것이냐고 묻자 그는 “그런 것일 수도 있지”라고 답했다.● “정치는 생물… 다음은 나(next is me)”문 전 대통령이 박지원을 국정원장에 지명한 것은 그만큼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가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지원이 임명된 이후에도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이듬해 초부터 코로나19 위기가 찾아왔고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북관계는 더욱 경색됐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남북정상회담이 재개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지만 미국 대선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박지원은 국정원 내부에서 여성 간부를 중용했다. 2020년 8월 사상 최초로 여성 차장이 임용됐고 여성 최초 선임 국장도 배출됐다. 정치개입 금지와 대공 수사권 이관을 골자로 하는 국정원법 개정안을 임기 중에 통과시켰고 국정원의 사이버보안 기능과 마약 등 해외 연계 범죄 대응 능력도 강화했다. 구설수도 여전했다. 그는 원장으로 재직하며 2021년 6월 창설 60주년을 계기로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원훈을 바꾸고 원훈석을 교체했다. 그런데 원훈석에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손글씨를 본뜬 ‘신영복체’가 쓰였다는 점이 논란이 됐다. 신 교수는 과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0년간 복역한 전력 등이 있어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를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직접 써온 그가 원장 취임 뒤에도 미국을 방문해 자신의 동선을 노출해 논란이 됐다. 재직 당시 벌어진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사건 다음 날 국정원 직원들에게 관련 첩보와 보고서를 삭제하게 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지만 그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2022년 5월 대선 이후 국정원장 임기를 마친 뒤에는 다시 방송 등에 출연하며 정치 현안에 대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 그해 12월 결국 복당해 약 7년 만에 민주당으로 돌아와 이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가 자주 하는 말처럼 ‘정치는 생물’이다. 박지원이 앞으로 어떤 경로를 거쳐 여의도 정치 현장에 복귀할지 아무도 모른다.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거나 2024년 총선에서 지역구였던 전남 목포나 고향인 전남 해남·완도·진도에 출마할 가능성도 있고 총선에서 불출마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최종 목표는 ‘엉클 조’라는 친근한 별명이 있는, 동갑내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일 것이다. ‘다음은 나야(next is me)’라고 영어로 말하는 그를 보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는 맥아더 장군의 말이 생각난다. 물론 그의 ‘안티’들은 “제발 TV 방송 등 시야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라고 할 테니 그냥 채널을 돌리는 게 사라지길 기다리기보다는 현명할 것이다. 박지원 전 원장은 술자리에서 건배를 할 때 현직 대통령을 붙여 ‘○○○ 대통령을 위하여’를 많이 외칩니다. 박근혜 문재인 전 대통령부터 ‘윤석열 대통령을 위하여’는 물론 국민의당 시절엔 안철수를 위하여까지 들어봤습니다. 그의 정치엔 기본적으로 나라 걱정과 충성심이 깔려 있습니다. 물론 DJ 서거 이후엔 그의 충성심도 누구를 향했는지 오락가락하긴 했지요.한 독자분께서 박 전 원장의 정치관(觀)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그는 과거에 “정치는 곱하기의 예술, 종합 예술이다. 정치가 제 역할만 해도 경제 사회 문화는 잘 돌아가고 정치가 0이면 나머지가 아무리 잘해도 0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정치는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으로 오지 않는다. 타 당이 잘못하면 결국 정치권 전반으로 문제다”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인식이 그를 정치인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17화]의 댓글에 많은 누리꾼이 ‘산소 같은 남자’를 O₂가 아닌 tomb(무덤)으로 해석해주셨더군요. 정말 대단한, 대한민국의 저력입니다. 한국 정치에 산소인지 연탄가스인지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몫입니다. 앞서 서두에 썼던 명리학자가 2021년에 7년간 박 전 원장의 운이 좋다고 했으니 다음 대선까진 운이 좋을까요? 그분이 ‘건진법사’급인지는 다음 대선까지 지켜볼 일입니다. 다음 [19화]의 주인공을 누구로 할지는 미정입니다. 애초에 염두에 뒀던 법조계 원로가 등장하길 원하지 않고 있어 설득 중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방송에선 얘기를 못 하는데… 내가 돈을 많이 줘보기도 하고 받기도 해봤는데 돈 센다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안 나와~(웃음)” - 취재 메모 중 - 올 3월 사석에서 만난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하 박지원)은 지난해 12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의 체포동의안 통과를 요청하기 위한 국회 본회의 발언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당시 한 장관은 “구체적인 청탁을 주고받은 뒤 돈을 받으면서 ‘저번에 주셨는데 뭘 또 주냐’ ‘저번에 그거 제가 잘 쓰고 있는데’라고 말하는 노 의원의 목소리, 돈 봉투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까지도 그대로 녹음돼 있다”고 했는데 이를 반박한 것이다. 박지원 이야기를 이 발언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경험과 연륜, 정치 현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분석력, 타고난 유머와 재치, 솔직하지만 노회한 정치인이라는 평가 등의 이미지가 그대로 묻어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산증인’이다. 박지원은 현재까지 4선 의원과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국정원장 등을 지냈다. (아직도 그의 이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전남 진도 출신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불리는 그는 81세의 고령임에도 여전히 건재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최고수 중 하나로 꼽힌다. 자고로 일찍부터 그를 중용한 DJ는 그를 이같이 평가했다. 1996년 박 전 원장이 발간한 저서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발간 축사에서다.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 놀라운 정치적 순발력.’ 박지원 대변인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정치인의 최고 덕목은 신언서판(身言書判)이다. 생김새와 언변과 문필력, 판단력이 모두 잘 어우러지면 어느 분야에서든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법인데, 박 대변인이 그런 정치인이다…소신과 원칙에도 강한 박 대변인이다. 그러면서도 유연함과 해맑은 미소를 늘 잃지 않는다. 누가 박 대변인을 ‘산소 같은 남자’라고 해서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중 - ‘산소 같은 남자’란 1990년대 히트를 친 배우 이영애 씨가 나오는 아모레퍼시픽의 ‘산소 같은 여자’ TV 광고에서 따온 표현으로 보인다. ● 중학생 때부터 박지원의 꿈은 ‘야당 총무’ ‘진도 섬놈’ 박지원은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 박종식 선생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바다가 친구이자 놀이터였고 육지를 동경하는 섬 소년으로 자랐다. 늑막염을 앓아 건강이 좋지 않았다.밀양 박씨 집안 어른 중에 국회의원이 있었고 가까이서 본 그는 정치의 꿈을 키웠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부터 장래 희망은 국회의원이었고 중학교 때부턴 ‘야당 총무’(현 야당 원내대표)였다고 한다.“고등학교 때 우리 반 친구 중 한 놈이 나처럼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한 번은 그 친구가 내게 한 가지 내기를 제안했다. 누가 현직 국회의원의 이름을 더 많이 써내는지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그 친구는 100명 정도를 썼고, 나는 150명 정도를 써내 이긴 기억이 있다.” -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중 - 박 전 원장은 머리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공부보다는 놀기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목포 문태고를 다니다 대입에서 떨어져 광주에서 재수를 했지만 당시엔 부인 이선자 씨를 만나면서 연애에 빠졌다. 단국대 경영대에 입학한 뒤로는 이전과 달리 아주 열심히 공부했다. 졸업 후 군대를 다녀온 뒤 어려운 취업문을 뚫고 ‘LG그룹’ 계열사였던 당시 반도상사(현 LX인터내셔널)에 취직했다. 그는 맡은 바 임무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처리했고 성실성을 인정받아 미국지사로 발령받았다고 한다. 미국지사에서 근무하던 중 그는 사업을 시작했다. 친형이 미국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형님이 회사 생활에 재미를 못 느끼고 있던 그에게 사업을 권유하며 사업자금을 대준 것이다. 뉴욕에 사무실을 내고 처음 가죽 수입을 시작했지만 돈만 날렸다. 대신 실패를 딛고 가발 수입을 시작했다. 새벽에 집을 나와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 소변을 종이컵으로 받아둘 정도로 악착같이 일했다. 유행에 민감한 패션산업이었기에 유명 패션쇼나 헤어쇼, 그리고 뷰티숍을 두루 살펴보며 트렌드를 파악했다. 수요를 정확히 파악한 덕분에 사업에 성공해 날로 번창했다. 뉴욕 맨해튼에 건물 몇 채를 가질 정도였다고 한다.그러자 다른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의 오랜 꿈인 국회의원이었다. 미국에서 그냥 돈만 벌어 한국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당시 교민들은 미국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고 한인회 일을 거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일종의 정치 연습으로 뉴욕 한인회 활동을 열심히 했고 회장 후보로 추천을 받게 됐다. 15대 뉴욕 한인회장에 출마했지만 낙마했고 2년 뒤 역대 최연소 회장이 됐다. 그 뒤 교민사회에서 뉴욕 한인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1981년 8월 미주 한인 총연합회에서 98개 한인회장의 만장일치로 총연합회 회장에 당선됐다.● 전두환 동생 전경환과 DJ 사이… 뒤바뀐 박지원의 ‘운명’ 총연합회장을 맡던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씨와 가깝게 지냈다. 전 전 대통령의 미국 방문 환영위원장을 맡았고 그 일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쓰던 수많은 양심적인 인사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한다. 전 씨는 그의 정계 입문을 도와주려고 애썼고 여당인 민정당의 전국구 의원 입성을 도와주려 했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이 해외 동포에겐 전국구를 줄 수 없다는 지시를 내리면서 무산됐다. 미안했던 전 씨는 엄청난 이권이 있는 사업을 제의했지만 바로 거절했다. 그가 그때 민정당 의원이 됐거나 사업을 챙겼더라면 아마 지금의 박지원은 없었을 것이다.“어쨌든 잘못된 행동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얼마 뒤 김대중 선생을 만나면서 심각한 인간적 고뇌에 빠지기도 했다.” -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중 - 박지원의 운명이 바뀐 건 뉴욕에서 ‘독립신문’을 발행하던 김경재 전 의원의 소개로 망명 중이던 DJ를 만나면서부터다. 1983년 5월이었다. “절대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게 돼 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반드시 우리나라에도 민주화가 온다”는 등 DJ의 말에 감명을 받은 박지원은 무릎을 꿇고 “선생님, 제가 잘못 살아왔습니다”라고 참회했다. 첫 만남 이후 그는 김대중 사단의 말석에 자리 잡게 됐고 DJ가 하던 인권문제연구소 일을 돕고 국내에서 동교동계 인사들에게 DJ의 메시지를 전하는 ‘밀사’역 등을 맡았다.이는 ‘일급비밀’이었다. DJ의 최측근인 권노갑 고문조차 그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1987년 평화민주당 창당 과정에서 박지원은 고향인 전남 진도위원장을 맡았다. 권 고문도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굴러온 돌”로 여기고 이를 반대했다. 미국에서 맺어진 DJ와 박지원의 관계를 모르던 권 전 의원의 입장에서 보면 옳은 진언이었다. 이후 권 고문이 처음 미국을 방문할 당시 미국에 있던 박지원을 만났다. 권 고문은 “이번에 미국 오기 전에 동교동에 들렀더니 사모님과 총재께서 미국 가면 꼭 박 회장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소. 그러면서 그간 박 회장과의 관계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셨소”라며 손을 꽉 잡고 “전에 정말 미안했다”며 몇 번이나 사과를 했다고 한다. “오십이 넘어야 관운이 풀린다”는 이야기를 사주가들에게 들었던 박지원은 실제 3수 끝에 전국구 의원이 됐다. 대입에서 재수한 것을 합쳐 “내 인생은 오수(五修)”라는 게 그의 말이다. 1984년엔 야당인 신민당에서 전국구(현 비례대표) 의원직을 제의받았으나 당선권 순번을 받기 어려울 것 같아 거절했다. 선거 결과는 당선권이었다. 첫 번째 실패였다. 미국에서 들어온 뒤 진도위원장과 총재 언론특보 등을 맡았지만 1988년엔 지역구가 통합되면서 출마가 좌절됐다. 전국구로 출마하기로 했지만 마지막에 DJ가 다른 인물에게 자신에게 주겠다던 전국구 순번을 줘 기회가 없었다. 다시 4년 뒤에 전국구 국회의원 후보 21번으로 간신히 당선됐다. 그의 나이 만으로 50세였다. 1987년과 1992년 대선에서 DJ의 지근거리에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특히 1992년에 그는 수석부대변인을 맡아 4월부터 12월까지 매일 오전 6시 10분이면 동교동에 도착해서 DJ와 함께 하루종일 선거운동을 했다. 기자들과 ‘떡’이 되도록 폭음을 한 이틀을 빼곤 하루도 그 시간에 도착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대선을 열심히 뛰었지만 결과는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승리로 끝났고 DJ는 다음 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DJ 대통령을 만들려던 박지원에겐 눈앞이 깜깜한 순간이었다. ● 몸으로 때운 ‘독설’ 명대변인…“부활한 예수님, ‘기자들 왔냐’고 물을 것” “나는 본변인이 아닌 대변인이니 좀 봐주시오. 큰 정치 하는 분들이 그깟 대변인의 말에 신경을 써야 되겠느냐.”‘대변인 박지원’은 간혹 자신이 논평에서 비판한 당사자가 직접 전화를 해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항의하면 이같이 달랬다고 한다. 일부 논평에 인신공격성이나 조롱이 들어가는 등 센 논평을 낸 적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수준 이하”라거나 “보좌관이 쓴 것을 읽기만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대변인 명의 논평은 그가 직접 썼다고 한다. 그는 1992년 대선에선 YS가 재산을 공개했을 때 “머리부터 공개하라”며 공격했고 TV 토론을 거부하자 “연설 때 사용하는 원고를 가져와도 된다”고 비꼬았다. 항간에서 DJ에 비해 YS가 덜 총명하다는 지적을 겨냥한 것이었다. 또 1994년 당시 박찬종 신정치개혁당 대표가 DJ의 정계복귀론에 대해 비판하자 “연탄가스는 틈만 있으면 비집고 나와 인체에 해만 주고 있는데 박 대표도 틈만 있으면 비집고 나와 야당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5년 11월엔 당시 민자당이 당명 개칭을 추진하자 “호적 이름을 바꿨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호박에 줄 친다고 수박이 되지는 않는다. 민자당은 이름을 바꾸어도 대통령이 되기 위해 야합했던 김 대통령과 민자당 그 이름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국민은 기억할 것이다”고 했다.그러면서 그는 “대변인 성명이 개떡 같더라도 기사는 찰떡같이 써 주시오”라고 기자들한테 너스레를 떨었다고 한다. 당의 언론 정책이 맘에 들지 않을 때는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면, 가장 먼저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기자들 왔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부활한 사실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질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그 시절부터 박지원을 오래 지켜본 한 인사의 말이다. “DJ가 여러 장점을 가진 지도자지만 기준이 높아 모시기 어려운 지도자다. 성실함과 집중력을 요구하고 듣기 좋은 얘기만 하는 사람은 곁에 안 둔다. 그 기준에 부합하는 게 박지원이고 내가 본 사람 중에 그만큼 순발력이 있고 성실하고 집중력이 있는 사람이 없다. 그 시절 낮밤으로 기자들과 폭탄주를 마시면서도 매일 아침 일찍 DJ가 있던 일산과 청와대로 출근했다.” - 취재 메모 중 -1996년 박지원은 부천 소사에 출마하며 재선에 도전했다. 상대는 신한국당 후보였던 김문수 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저서도 1996년 총선을 앞두고 발간됐는데 이를 두고 ‘넥타이’ 공방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노동운동가 출신에서 여당 신한국당의 후보로 변신한 김 위원장이 먼저 ‘아직도 나는 넥타이가 어색하다’라는 책을 냈는데 이후 박지원이 이 같은 제목의 책을 내자 김 위원장 측에서 ‘저격용’이라고 반발한 것이다. 박지원은 전에도 “넥타이를 제법 잘 맨다는 보도가 있었다”고 반박했지만 김 위원장은 박지원을 저작권법 위반으로 고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고배를 마셨다. 당시 그를 향해 좌익이라고 공격하는 등 색깔논쟁, 용공몰이를 한 탓도 컸다. ●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대(代)통령’이라는 말까지 회자낙선한 뒤에도 박지원은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DJ의 특보 등을 맡았다. DJ는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와 DJP연합을 성사시키며 결국 대선에 성공한다. 박지원은 당선자 대변인,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 문화관광부 장관 등을 거치며 DJ를 대리해 대북특사를 다녀와 6·15 남북정상회담 성공에 기여했다.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오르며 명실상부한 DJ의 ‘2인자’로 자리잡았다. 여기에는 DJ의 기존 가신그룹인 ‘동교동계’가 2선으로 물러나면서 그가 빈자리를 메우게 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동교동계는 1997년 대선 직전에 선출직을 제외한 임명직은 맡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고 2000년 12월 좌장인 권 고문은 정동영 당시 최고위원으로부터 2선 후퇴를 요구받고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DJ의 심복이지만 동교동계와는 약간 이질적인 그가 전면에 나서게 됐고 권력이 쏠리게 된 것이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다’는 이야기도 많았고 시기와 질투, 미움도 많이 받았다. 김창혁 전 동아일보 기자와 권 전 고문이 쓴 권노갑 회고록 ‘순명’에는 박지원에 대해 이 같은 비화가 나온다. 18대 총선을 앞둔 2008년 초, 전남 무안으로 향하는 권노갑의 승용차 안. DJ의 차남인 김홍업 의원의 선거를 돕기 위해 내려가는 길이었다. 권노갑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DJ였다. “무안 가는 김에 목포도 좀 다녀오소.” 김홍업 지원 유세를 마친 다음 목포에 가서 박지원도 좀 도와주고 오라는 말이었다. “무안은 가겠지만 목포는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 권노갑 회고록 ‘순명’ 중 -DJ의 ‘외유 권유’를 물리치자 박지원이 DJ의 뜻을 직접 전한 것, 2002년 4월 ‘진승현 게이트’에 권 전 고문이 연루됐다는 보도가 나오자 권 전 고문은 박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이 같은 내용을 “알고 있었냐”고 물었는데 알고 있었지만 이를 전달하지 않은 것 등 일련의 과정에서 권 전 고문도 적지 않은 서운함을 품었던 것이다.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내면서는 ‘대신할 대’자가 붙은 ‘대(代)통령’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항상 처신에 유의하고 몸조심을 했지만 미움을 받았다. 언론사 인사에 개입하거나 언론사 세무조사를 그가 기획했다는 의구심과 논총을 받으면서 그의 전문 분야이자 동반자였던 언론들도 일부 등을 돌렸다. ‘태양에 가까우면 타죽을 수 있다’는 말처럼 권력에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박지원도 DJ 정부가 끝난 뒤 갖은 고초와 수난을 겪게 된다. 이 또한 그의 운명이었다. 기자 초년병 때인 2009년경 어딘가 술자리에서 들었던,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었습니다. 박지원 전 원장이 문화관광부 장관 시절, 여배우 C 씨와 염문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근 박 전 원장에게 물었더니 “전혀 사실무근이다. C 씨는 본 적도 없다”며 웃었습니다. 근거가 없는 ‘찌라시’인지 유사한 사건이 와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박 전 원장이 현재까지 낸 책은 딱 두 권입니다. 2018년 10월 부인 고 이선자 여사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뜬 뒤 추모집으로 발간한 ‘고마워’가 가장 최신입니다. 책까지 낼 정도로 ‘사랑꾼’인 그에게 과거 저런 소문이 있었다는 게 신기해서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나머지 한 권은 1996년에 발간된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였습니다. 2019년 무렵 의원실에 부탁해서 복사본으로 구해 읽었던 책입니다. 이번 편의 상당 부분은 그 책에 의존했습니다. 저 역시 기자로서 그 시절을 직접 겪지 못했고, 27년 전 씌어진 데다 절판된 지 오래여서 독자분들도 새롭게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 전 원장에게 1996년 이후 자서전을 쓰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DJ와 관계된 얘기를 안 쓸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매일 TV와 라디오, 유튜브 등에 매일 4번 안팎 출연해 일각에선 “DJ 장사를 그만 좀 해라”라는 말도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DJ에 누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자제하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권력의 핵심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자리지만 원래 미움을 많이 받는 자리입니다. 동전의 양면입니다. ‘대(代)통령’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던 그도 영욕의 세월을 겪었습니다. 다음 [18화]에선 그의 노무현 정부 시절 이후를 다루겠습니다. 그가 산소 같은 남자인지 연탄가스(일산화탄소) 같은 남자인지는 후속을 보고 판단하시길 바랍니다.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몇 년 전 A 검사는 검찰 내에서 이른바 부서 말석(末席)이 맡는 ‘밥총무’였다. 매달 10만∼30만 원씩 직급에 맞는 돈을 걷은 뒤 매주 정해진 날 부원들의 식당 예약부터 돈 관리까지 하는 게 밥총무의 일이다. “초임검사는 아침에 밥총무 일밖에 안 한다. 가족 없이 지방에 온 검사들은 평소 혼자 밥먹으러 다니니까 점심을 먹을 때 맛있는 걸 먹고 싶어한다. 그런데 선배들마다 메뉴와 식당에 대한 요구사항이 다 다르다. ‘어제 술먹었으니 해장국집 가자’ ‘바쁘니 가까운 데서 먹자’ 등 아침마다 쪽지가 수십 개씩 온다. 이를 조율하다 보면 오전 시간이 다 간다.” 문제는 밥총무를 향한 ‘직장 내 갑질’을 동반했다는 점이다. ‘밥총무를 잘해야 기획도 잘한다’는 말은 갑질을 숨기기 위한 포장이었을 뿐이다. 말하는 사람보다는 지위가 높지만 듣는 사람보다 낮은 경우에 쓰는 ‘압존법’ 때문에 A 검사는 선배 B 검사로부터 수없이 많은 언어폭력을 당했다. “쪽지 때문에 매일 혼났다. 압존법이 틀렸다고 첫날 불려가 눈물이 쏙 빠지게 세 시간 동안 혼났다. 두 번째는 메신저의 글씨색이 분홍색이라고 또 혼났다. 세 번째는 ‘○○○ 선배 △△△ 선배’라고 써야 되는데 ‘○○○ △△△ 선배’라고 썼다고 ‘○○○가 네 친구냐’라고 혼났다. 기상천외한 이유로 계속 괴롭혀 머리가 다 빠졌다.” 압존법은 군대에서조차 2016년 폐지됐다. A 검사가 “이렇게까지 해야 되냐”고 했더니 B 검사는 “선배의 (수사)기록은 두껍고 너의 기록은 얇지 않느냐. 그 대신 너는 밥총무라는 임무가 있다”고 했다. “계속 시키면 회사를 나가겠다”는 말에는 “그 정신으로 나가서 뭐라도 될 거 같냐. 집에 가서 애나 보라”는 말이 돌아왔다. A, B검사가 모두 여성이어서 젠더 이슈로 번지진 않았다. 이는 2018년 1월 취재파일에 적어둔 내용이다. 2017년 9월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밥총무를 폐지하라는 지시를 내린 이후에도 계속된 것이다. 아직도 밥총무는 상당수 남아 있다고 한다. 이후 A 검사는 출산을 한 뒤 복직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날이면 육아 때문에 오후 7시면 퇴근을 한다. 일이 많으면 출근을 일찍 하거나 밤에 다시 청사로 나온다. 아이가 아프거나 일이 생겼을 때 조퇴를 하거나 연차를 쓰겠다는 A 검사에게 부장검사는 못마땅하다는 듯 “부모님은 뭐하시길래 아이를 돌봐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내 새끼를 내가 키워야지, 왜 어른들이 봐주셔야 되냐”고 반박했다고 한다. 시댁과 친정 어른들은 거주지가 멀고 지병을 앓고 있어 아이를 맡길 수 없다. 최근 만난 A 검사는 업무에 보람과 재미를 느끼지만 승진은 포기했고 진로를 고민 중이라고 했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아닌 건 아니다’라고 하고, 육아휴직을 쓰고, ‘칼퇴근’을 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A 검사의 사례가 특수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악습과 폐단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곰팡이처럼 계속 피어난다. 인권수호기관을 자처하는 검찰은 ‘우리 안의 파시즘’을, 그리고 내부에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속 ‘연진이’가 없는지 늘 경계해야 한다.황형준 사회부 차장 constant25@donga.com}
금태섭 전 국회의원(이하 금태섭)에게는 3인의 유명한 스승이 있었다. 한 명은 학문적 가르침을 받은 스승이요, 나머지 두 명은 정치적 스승이렷다. 그중 누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과 같은 위대한 스승인지, 아니면 반면교사해야 할 대상인지, 정치인 금태섭의 행보를 보고 독자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잘못된 만남’이다. 금태섭 주변에선 “어떻게 10년 동안 안 되는 길만 골라 가나 싶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금태섭은 ‘개구리 왕자’처럼 눈이 크지만 사람 보는 안목은 장식품 수준이요,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급이다. 정의의 여신은 형상이 조금씩 다르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은 눈을 뜨고 저울과 법전을 든 형상인데 공교롭게 금태섭이 저서 ‘디케의 눈’ 책 표지에 인용한 사진은 눈을 가리고 칼과 저울을 든 형상이다. ● 정치권 입문 계기 된 안철수와의 결별첫 출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금태섭은 2007년 검찰을 나온 뒤 5년 만에 2012년 안철수 캠프에 합류했다. 안철수 의원(현 국민의힘)이 대선 출마 선언을 하기 전 ‘시골 의사’ 박경철 씨로부터 제안을 받았고 2012년 봄에서야 비공식 캠프인 ‘여의도 오피스텔’에 합류한 것이다. 금태섭은 안철수 캠프에 합류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2012년 대선을 앞둔 우리 앞에 선택의 길은 그렇게 평면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문재인, 박원순, 안철수 등을 놓고 장점과 단점을 비교해가며 한 명을 고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때 나도 많은 사람들이 원했던 것처럼 어떻게든 정권을 교체해서 판을 갈아보자는 생각이었는데, 그런 계기를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안철수 원장뿐이었다. (중략) 나는 그 노력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려고 한 것이지 여러 정치인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2015년 8월 발간한 ‘이기는 야당을 갖고 싶다’ 중 -한마디로 얘기하면 정치는 시작해야겠고 딱히 안 의원을 ‘주군’으로 삼을 만큼 끌리진 않았지만 마침 제안이 들어왔으니 합류했다고 다소 솔직히 밝힌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금태섭이 안 의원과 사실상 결별한 뒤 쓰여졌다.)그 뒤 그는 안 의원에 대한 언론과 야당 등의 검증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네거티브’ 대응을 맡았다. 박근혜 캠프의 정준길 변호사가 금태섭에게 전화를 걸어 이른바 ‘안철수 대선 불출마 종용’ 논란이 일었고 이 일로 어쨌든 유명해졌다.그해 11월 23일 당시 민주당과 단일화 협상을 진행하던 중 안 의원이 결국 후보 사퇴를 결심하면서 진심캠프도 해산됐다. 안 의원은 18대 대선 당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떠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꺾으면서 당시 여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금태섭은 2013년 초 안 의원을 만나러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찾아갔다. 이와 관련된 두 시간 동안 금태섭이 진흙 길을 걷고 있는 데도 안 의원이 몰랐다는 에피소드는 법정모독 [8화]에서 다룬 적이 있다.이 내용이 언론에 주목을 받자 2015년 8월 안 의원 측 인사는 이같이 말했다. “금 변호사가 당시 미국에 온 게 결국 4월 재·보선 때 노원병에서 자신이 나가려고 한 것인데, 거기에 대한 설명은 쏙 뺐다.” - 취재 메모 중 - 당시 금태섭은 2013년 4월 24일 치러지는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에서 대선에서 패배한 지 몇 달 안 된 안 의원이 출마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대신 자신이 출마할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 의원은 귀국해 보궐선거에 직접 출마했고 금태섭은 노원병 선거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안 의원은 무소속으로 당선이 됐다.그 뒤 안 의원은 신당 창당 방침을 밝혔고 금태섭도 신당 창당기구의 대변인을 맡으며 활동했다. 그러던 중 그해 3월 2일 안 의원이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전격 합당을 발표하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이 탄생했다. 비밀리에 추진되던 합당 계획이 발표되고서야 알게 된 금태섭은 2012년 후보 사퇴에 이어 또 한 번 적지 않은 배신감을 느꼈다.합당 뒤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 대변인으로 활동하던 금태섭은 7·30 재·보선에서 서울 동작을 출마를 선언했지만 출마는 좌절됐다. 당시 김한길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는 그를 수원병에 전략공천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동작을에 나가겠다고 한 사람이 다른 지역으로 출마할 수 없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대변인직에서 물러났고 안 의원과 결별했다. 그 뒤 안 의원이 새정치민주당을 탈당해 2016년 국민의당을 창당할 때도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금태섭은 민주당에 그대로 남았다. 그해 1월 말 금태섭이 했던 이야기다. “지지난주에 안철수 의원을 만났다. 자기가 2015년에 왜 탈당했는지 말한 다음에 ‘금 변호사는 심지가 곧은 사람이고 오래 생각해서 한번 결정하면 안 바꾸는 사람이니까 내가 얘기해도 소용없겠지만 우리 당에 왔으면 좋겠다. 공천받고 출마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내가 ‘진심으로 잘하시길 바라지만, 이번에는 당에 있는 게 맞겠다’고 했고 안 의원은 ‘언제든 생각 바뀌면 이야기해라’고 했다.” - 취재 메모 중 -● 20대 국회 입성…촉망받는 초선으로 ‘신들린 발연기’까지 소화결국 금태섭은 민주당 후보로 서울 강서갑에 출마해 20대 국회의원이 됐다. ‘김종인 비대위’ 체제에서 대변인에 발탁됐고, 추미애 대표 시절엔 전략기획위원장을 맡는 등 초선 의원으로 당 요직을 맡았다.대선 직전엔 문재인 캠프의 정책홍보 사이트인 ‘문재인 1번가’를 홍보하기 위해 배우 정우성 장쯔이가 등장했던 ‘2% 부족할 때’ 음료의 과거 광고를 패러디해 추미애 당시 대표와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나무위키에는 ‘신들린 발연기’였다고 표현돼 있다.)원내에선 법조인의 전문성을 살려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주목을 받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촉망받는 초선 중 한 명이었다. 초선으로선 이례적으로 2019년 백봉신사상 대상을 받았다. ● ‘지도교수’ 조국 전 장관 정면 비판… ‘조금박해’로 불려금태섭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각각 서울대 법대 86학번과 82학번이다. 네 학번 차이지만 조 전 장관이 학교를 일찍 들어갔기 때문에 나이는 두 살 차이다. 금태섭은 학교 다닐 때는 조 전 장관을 몰랐지만 대검찰청 연구관으로 근무하면서 그를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검사 시절 금태섭은 1년간 미국 연수를 통해 석사 학위를 땄지만 논문을 안 쓴 상태였다. 교수들이 논문 없는 석사를 탐탁지 않게 여겨서 박사 과정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안면이 있는 조 전 장관에게 부탁했고 그가 금태섭을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친하게 지냈다. 결국 금태섭은 논문을 쓸 여유가 없었고 박사 학위는 받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금태섭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조 전 장관에게 서울시장 출마를 권유한 적도 있다. “나는 조국 교수가 그때부터 정치를 시작하더라도 18대 대선에서 야권의 후보로 나가 한나라당의 박근혜 후보를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야권에 유리하게 조성된 서울시장 선거에 나간다면 승산이 충분하다고 봤다. 그러면 야권은 설사 대권에서 패배하더라도 젊고 유력한 정치인을 서울시장으로 보유하게 되는데 여기엔 작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지지자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줄 수 있었다.” - ‘이기는 야당을 갖고 싶다’ 중에서 -그러나 조 전 장관은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없었고 대신 박원순 변호사를 돕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뒤 조 전 장관은 초대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됐다. 이어 2019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이 박상기 전 장관의 후임으로 조 전 장관을 지명했고 자녀 입시비리 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거세졌다.여기서 ‘그 일’이 벌어졌다. 법사위 소속이었던 금태섭은 조 전 장관이 기자간담회에서 ‘금수저는 진보를 지향하면 안 되냐’고 반박한 점을 언급하며 “사람이 이걸 묻는데 저걸 답변하면 화가 난다. 언행불일치 동문서답식 답변으로 상처를 깊게 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할 생각이 없냐”고 조 전 장관을 몰아세웠다. 이어 “진보적 삶을 살아왔다는 이유로 비판받는 게 아니다. 언행불일치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런 이유로 친문(친문재인) 진영의 미움을 샀다. 그 뒤 조 전 장관과의 관계도 사실상 끝났다. 또 금태섭은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검찰개혁 법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수사와 기소의 분리를 주장했고 검찰의 직접 수사는 줄이는 방향의 검경 수사권 조정에 회의적이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결국 2019년 12월 공수처법 수정안을 민주당이 밀어붙이며 본회의에서 표결할 때 기권표를 던졌다. 금태섭은 쓴소리를 하던 당내 ‘비주류’ 조응천 박용진 김해영 당시 의원과 함께 ‘조금박해’로 몰리며 한 묶음으로 ‘빨간 점퍼’라는 비판을 받았다. 겉은 민주당 소속이지만 속은 국민의힘이라는 비아냥이었다.결국 그는 21대 총선 경선에서 탈락했다. 그 과정도 결과도 물밑에서 이뤄졌지만 그는 경선 결과 발표날 필자에게 “다 제가 부족해서 그렇다. 면목이 없다”고 패배를 인정했다. 심지어 그해 5월 말 당 윤리심판원은 공수처법 표결에서 기권을 했다는 이유로 금태섭에 대해 ‘경고 처분’을 내렸다. 다음은 당시 민주당 징계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한 필자의 칼럼이다.결국 금태섭은 같은 해 10월 “민주당은 예전의 유연함과 겸손함, 소통의 문화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며 “마지막 항의의 뜻으로 충정과 진심을 담아 탈당계를 낸다”고 밝혔다.‘내로남불’을 비판하며 소신 있고 합리적인 정치인으로 금태섭이 국민들에게 각인되는 장면이었다. 메시지에 울림이 있었다. 하지만 파장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당내 세력이 없는 혈혈단신 비주류 초선 의원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이듬해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며 인위적으로 체급을 올렸지만 평가는 냉정했다. 안철수 의원과의 ‘제3지대 후보’ 단일화에서 패배했고 안 의원도 오세훈 후보와 단일화를 했다. 금태섭으로선 서울시장 출마로 인지도를 올렸을지 모르지만 별로 얻은 게 없는 선거였다. ● 금태섭의 ‘멘토’ 김종인의 빛과 그늘그 뒤 금태섭은 정치평론가로서 언론 기고와 방송 출연, 방송진행자 등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이달 18일 국회에서 연 ‘다른 미래를 위한 성찰과 모색’ 모임 토론회 발제문을 통해 양극화, 편 가르기식 정치, 양당제의 문제 등을 한국 정치의 문제점으로 꼽았다. 그는 “새롭게 출현할 세력은 기존 한국 정치의 문제들을 일소하는 합리성과 객관성을 갖추어야 하고 자기편에게 유리한 의제가 아닌 우리 사회에 진짜 중요한 문제를 찾아서 제기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며 “단순히 기존 정당들의 행태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반사체’가 되는 데서 존재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비전을 제시하는 ‘발광체’가 되어야 한다. 양 진영으로 나누어져 있는 현재의 정치 지형을 3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세력을 갈아치우겠다는 의지와 힘이 있어야 새로운 세력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선 “올해 9월 추석 전에 제3지대 깃발을 들어 올리겠다”고 했다.금태섭이 신당 창당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년 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도 청년들이 주축이 된 신당을 만들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이번 토론회에선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좌장을 맡았고 신당 창당에 대해 “금 전 의원이 용기를 갖고 그런 시도를 하니까 도우려 한다”고 했다. 여야를 두루 경험하고 ‘킹 메이커’이자 영향력 있는 ‘스피커’ 원로인 김 전 위원장은 금태섭에겐 든든한 후원자다. 하지만 청년 신당 방침을 밝히는 자리에 노회한 정치인이 등장해 배후에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게 오히려 ‘마이너스’라는 지적도 있다.금태섭은 2016년 당시 민주당 비대위 대표였던 김 전 위원장으로부터 공천장을 받은 인연이 있다.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특별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조국 사태와 공수처법 반대 등 과정에서 금태섭이 소신 발언을 할 때마다 김 전 위원장으로부터 격려를 받았고 공천에 탈락했을 때 가장 먼저 전화를 건 것도 김 전 위원장이었다고 한다.금태섭도 김 전 위원장에 대해 “양당을 다 경험했고 또 오래 정치를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무슨 개인적인 욕심이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러는데 적어도 제가 겪어본 바로는 사심이 없는 분”이라며 “당신이 무엇을 하시겠다는 게 아니라 나보고 이런저런 걸 해보라고 조언하는 관계”라고 했다.김 전 위원장은 ‘경제민주화’ 조항을 헌법에 반영시켰고 박근혜 문재인 정부 탄생에 기여한 원로다. 하지만 대선에 직접 ‘플레이어’로 나섰다가 일주일 만에 철수한 적도 있다. 2017년에 민주당을 탈당하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가 주목을 받지 못하자 출마를 접고 안철수 의원을 지지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와도 가까운 그는 금태섭과 이준석 같은 인물을 통해 한국 정치의 변화를 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금태섭은 정치인 10여 년 동안 좌충우돌 ‘잘못된 만남’을 이어왔다. 그리고 결별을 거듭했다. 이제 그가 주도하는 제3지대 신당 창당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 전 위원장이 참스승으로 그의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을까. ‘청출어람’이라는 말처럼 금태섭이 3인의 스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그 성공 여부에 따라 정치인 금태섭의 미래도 달렸다. 금태섭 전 의원에겐 팬덤이 아직 없습니다. 정치 10년이면 팬클럽이라도 생길 만한데 없습니다. 임팩트가 약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는 “조직이 안 되어서 그러지 길에서 보는 사람들은 다 나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과 밉지 않은 왕자병입니다.신당 창당 방침을 두고도 그 주변에서조차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 “대선 주자도 아닌데 함께 출마할 인물도, 조직도, 아직까진 콘텐츠도 뭔지 모르겠다”는 등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중심이 되는 ‘금태섭 신당’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 양당으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하에 논의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낡은 잣대’로 바라보지 말라고 합니다. 그는 “과거 개인을 중심으로 한 창당은 모두 실패했다. 세력화보다는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답을 찾기 위해 논의하고 또 공부도 하고 전문가들 얘기도 듣고 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더 이상 묻기가 어려워 혼자 그의 미래를 상상해 봅니다. 그래도 그의 ‘근자감’과 충만한 ‘똘끼’라면 좀더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봅니다.다음 [17화]는 2주 뒤인 5월 11일까지 차분히 써볼 예정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야권의 ‘셀럽’이어서 삼척동자라도 알만한 분입니다. 그래서 다들 잘 아는 것처럼 친숙하지만 진면목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변에선 피아를 떠나 다들 “대단한 사람”이라고 감탄하는 인물입니다.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더불어민주당의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사건에서 자금을 마련해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는 강래구 한국감사협회장이 21일 구속을 면했다. 12일 강제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이 사건의 ‘키맨’인 강 회장 구속영장을 청구하며 수사에 속도를 냈지만 신병 확보가 좌절되면서 제동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중앙지법 윤재남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21일 오후 11시 반경 강 회장에 대해 “현재까지 제출된 자료만으로는 피의자 등에 대한 압수수색 이후에 피의자가 직접 증거인멸을 시도하였다거나 다른 관련자들에게 증거인멸 및 허위사실 진술 등을 하도록 회유하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윤 부장판사는 또 “현재까지 확보한 주요 증거와 향후 수집이 예상되는 증거들에 대해 피의자가 수사에 영향을 줄 정도로 증거를 인멸하였다거나 장차 증거를 인멸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며 “도망의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앞서 검찰은 강 회장이 2021년 3∼5월 9400만 원이 담긴 돈봉투를 배포한 혐의(정당법 위반)와 함께 사업가 박모 씨로부터 2020년 9월 수자원공사 납품 청탁 명목으로 300만 원을 받은 혐의(뇌물수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강 회장은 9400만 원의 돈봉투 중 8000만 원을 마련하고 나머지 1400만 원에 대해서도 자금 조성을 지시, 권유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날 구속영장실질심사에서 강 회장 측은 “국회의원들에게 돈봉투가 전달됐다는 건 전혀 아니다”거나 일부 혐의에 대하선 “기억이 안 난다”고 부인했다. 그러면서도 그간 수사에 잘 협조를 해왔다며 증거인멸 우려 등이 없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맞서 검찰은 감시 사각지대에 있는 전당대회에서 금품이 살포됐고 이 과정에 관여한 혐의를 받는 윤관석 민주당 의원 등 송영길 캠프 인사들이 당내 요직을 차지하는 등 매관매직 정황이 뚜렷한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또 강 회장이 공범 등을 접촉해 회유한 정황이 다수 확인된 점 등을 들어 구속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은 영장 기각 사유 분석과 보강 수사를 거친 뒤 영장 재청구 여부를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장은지 기자 jej@donga.com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먹고 노는 대학생’이라는 말이 있던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 시절, 대학에서 학사경고(학고)를 받은 형제자매가 8촌 일가친척 내에 꼭 한 명씩은 있었다. 그는 대학에서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학고는 면한 모범생(?)이었다.사춘기가 늦게 온 것인지 10, 20대가 아닌 30, 40대에 들어 반항이 시작됐다. 한 번 받기도 힘든 ‘별’을 각각 두 개나 달았다. 한 번은 검찰총장에게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한 번은 소속된 정당 대표에게서 당론을 위배했다는 이유로 ‘경고’ 징계를 받은 것이다. 이 두 가지 징계를 잇달아 받은 대한민국 국민은 처음일 것이다. 학고까지 받았다면 ‘트리플 크라운’으로 기네스북감일 텐데 아쉬울 뿐이다. 집에도 놀러 갈 정도로 친했던 4개 학번 선배이자 박사학위 지도교수였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겐 “언행 불일치”라며 정면 비판을 했다. 항간에는 박사학위만 줬다면 그렇게 척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 정도면 핍박받는 선구자인지 악동인지 헷갈린다. 그래도 소신이나 개똥철학 없인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임스 딘의 ‘이유 없는 반항’과 달리 이유 있는 반항이었다.12년간 검사 생활을 했지만 검찰 출신 티가 나지 않는다. 변호사나 정치인 이미지가 더 강하다. 일도양단으로 유무죄를 가리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보기 때문이다.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해 손등에 찍었던 ‘무지개 도장’의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도 모른다.신언서판(身言書判)이 뛰어난 ‘서울깍쟁이’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이다. 백미는 해맑은 미소다. 눈가의 주름이 무색할 만큼 소년처럼 순수하게 웃는 게 트레이드마크다. 금태섭 전 국회의원(이하 금태섭)의 이야기다.● 어릴 적 꿈은 ‘탐정’…평검사 시절 특수-기획 분야에서 두각1967년생인 금태섭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판사 출신의 금병훈 변호사였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금 변호사는 박정희 정부의 유신시대에 판사를 하며 긴급조치 위반 사건으로 기소된 대학생들에게 무죄를 선고하거나 시국사범들에게 가벼운 형량을 내리면서 미움을 사 법원의 재임용 절차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었다. 1973년 비슷한 이유로 수십 명의 판사들이 재임용에서 탈락한 이른바 ‘사법파동’ 때다. (여담이지만 이때 국민의힘 유승민 의원의 아버지 유수호 전 의원도 판사를 하다가 같은 이유로 법복을 벗었다고 한다. )금 변호사는 제11대 총선에서 경기 용인-이천-여주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그 뒤 다시 출마하지 않았다고 한다. 금태섭이 법조인과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물론 정의에 대한 원칙이 있는 것도 가풍을 이어받은 덕분이라는 게 주변인들의 분석이다. 변호사 아버지를 둔 덕에 금태섭은 유복하게 자랐다. 1986년 여의도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에도 그는 똑똑하고 매너 좋은 모범생이었다. 유머감각이 있었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추리소설을 좋아했던 그의 어렸을 적 꿈은 탐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대학생이 되던 때만 해도 1987년 민주화 되기 전이어서 검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다. 그래서 1992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에도 아버지를 따라 판사가 되려고 했다. 그러던 중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가 1년 먼저 검사가 된 걸 보고 검찰을 지망했고 아버지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사법연수원 24기를 수료한 뒤 1995년 검사로 임관했다. 서울지검 동부지청(현 서울동부지검)과 창원지검 통영지청, 울산지검, 인천지검을 거치는 동안 특수부 수사를 많이 했다. 초임 검사 때부터 국가대표 볼링 선수들의 마약 사건과 가락시장 멸치 도매인 가격 담합 사건 등 수사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2002년 대검찰청 중수부로 5개월간 파견을 나갔다. 특정 사건 수사를 뭉갰던 신승남 전 검찰총장에 대한 직권남용 의혹 수사팀의 막내로 근무했다. 금태섭을 제외하곤 신 전 총장과 함께 근무했던 인연이 있어서 쉬운 수사는 아니었지만 결국 그를 기소했다. 문재인 정부 이후 잦아진 직권남용 수사 이전에 직권남용 혐의로 유죄 판결을 확정받은 사례는 거의 없지만 유죄를 이끈 성공한 수사였다. 수사 능력뿐만 아니라 평소 논리적이고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는 평가를 받은 그는 2003년 1월부터 3년간 대검 기획조정부 검찰연구관으로 발탁됐다. 대검 중수부와 기조부를 합쳐 총 3년 반가량 대검 연구관으로 근무하며 ‘특수통’과 ‘기획통’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특히 그가 남긴 족적은 검찰 CI다. 5개의 대나무 모양에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저울 형상과 칼이 대나무 5개의 위쪽 라인과 가운데 대나무 칼 모양으로 형상화돼 있다. 물론 그가 디자인한 것은 아니지만 실무자로서 업체를 골라 몇 개의 시안을 받은 뒤 총장에게 보고하는 등 CI를 관철시켰다. 또 검찰 재직 중 미국 코넬대 로스쿨에서 석사학위를 딴 그는 영어가 유창해 국제검사협회 서울총회 개최 준비를 맡아 무사히 임무를 마쳤다. ● 피의자 위해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을 연재하려다 좌절조직 내에서 승승장구했던 그가 유명세를 탄 건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 검사 시절인 2006년 9월 한겨레신문에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 연재를 시작하면서다. 연재를 위해 그는 신문에 기고하기 위한 제안서를 직접 작성했다고 한다. “약자인 피의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행동 지침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는 변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이다. (중략)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행동하면 상처를 입는다. 가만히 있으면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다. 더구나 수사기관에는 피의자에게 유리한 사실까지 찾아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어떤 검사도 무고한 피의자를 기소했다가 무죄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지는 것만은 피하라. 상황을 파악한 이후에도 수사에 대응할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다.” - 한겨레신문의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 중 -제목은 ‘섹시’하고 파격적이지만 지금 관점으로 보면 현직 검사라도 못 할 이야기는 아니다. 수사를 피해 가는 묘수를 밝히는 것도, 수사 기법을 공개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서 벗어나야 검찰이 살 것이라는 취지에서 시작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장은 컸다. 금태섭은 검찰 지휘부로부터 질책을 받았고 당초 10회 분량으로 시작한 연재는 1회로 끝났다. 그는 다음 달 “검찰의 수사 현실을 왜곡하고, 검찰의 공익적 의무에 부합하지 않는 사견을 임의로 기고해 국민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은 직무상 의무 위반과 품위 손상에 해당된다”며 총장 경고를 받았다.당시 검찰 내부에서는 “뜨고 싶어서 사고 친 것” “혼자 잘난 척한다”는 등의 비판도 나왔다. 수사를 하는 평검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도 낳았다고 한다. “검찰에서 계속 열심히 하고 싶어 했다기보다는 정치적 욕심이 있는 것 같았다. 본인이 검찰에 계속 있는 것보다는 정치적으로 성장하려고 하는구나 이렇게 읽혀졌다. 공보지침을 위반하면서까지 하는 건 정치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봤다. 성급하게 가야 되는 상황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금태섭은) 되게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기조부 연구관을 맡을 정도로 글도 잘 쓰고 장래가 촉망되는 검사였는데… 본인은 시간이 없다고 느꼈는지 빨리 정계로 가려고 했던 것 같다.” - 당시 대검 과장급으로 근무했던 A 변호사와의 통화 -반면 검사 금태섭을 잘 아는 또 다른 전관 변호사는 상반된 평가를 내놓았다. “나는 그가 대개 순수하다고 봤다. 형사사법 절차에 관심이 많았고 실력이 있고 자기 기준과 소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그 글을 쓴 이유는 시민의 권리를 검사가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게 검찰 이미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그걸 약간 재밌게 쓰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글이 나왔을 때 참 좋은 글이고 검찰 이미지도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착각이었다. 대로한 선배들도 있었다. 그만큼 당시 선배들이 너무 편협했다. 나는 금태섭이 이를 발판 삼아 그때부터 정치하려고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잘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그 이후에 정치인이 된 건 결과론적인 것이다. ” - 당시 대검 연구관으로 평검사였던 B 변호사와의 통화 -금태섭의 설명은 또 다르다.“나는 검사가 규정을 어기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엔 관행적으로야 그랬는지 모르지만 (언론 기고에) 상부의 승인을 받으라는 규정은 없었다. 그래서 공식 징계가 아닌 총장 구두 경고를 받았다. 나 때문에 공보지침이 생겼다. (중략)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로 검사들이 욕을 많이 먹었다. 그때 검사들의 항변이 ‘밤새워 일하는데 국민들이 몰라준다’였다. 나는 밤새워 일한다고 국민들의 신뢰가 생기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글을 썼다. 나는 여러 경력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헌신적으로 한 것이지만 혼자 변화를 하려고 하면 결국 실패한다는 걸 깨달았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에 등장하는 인물마다 저마다 다른 얘기를 하듯 각자 다른 이야기다. 금태섭은 2008년 발간한 저서 ‘디케의 눈’에서 라쇼몽과 친구들의 에피소드를 언급하며 “제삼자로서는 서로 다른 말을 들을 수 있을 뿐 과연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런 경우에, 과연 객관적인 진실이라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했다. ‘검사 금태섭’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 11년 만에 ‘제3지대’ 조연에서 주연으로조직에서 징계를 받은 경험에서 ‘혼자 변화를 꾀하려 하면 실패한다’는 교훈을 얻은 그는 그 무렵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만약 정치를 하게 되더라도 당장 할 생각은 없었다. ‘수사 제대로 받는 법’ 기고로 워낙 큰 파문을 일으킨 데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금태섭이 정치하려고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치권에 기웃거리면 ‘싸구려’로 보일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4, 5년 이상은 정치권은 쳐다도 안 보려했다. 이듬해인 2007년 1월 그는 인사를 앞두고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며 사표를 냈다. 변호사로 변신한 그는 방송과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 등으로 활동하며 얼굴과 이름을 알렸다. 실제 그의 뜻대로 5년 지난 뒤인 2012년 봄에서야 그는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현 국민의힘 의원)이 ‘안철수 현상’의 주인공으로 급부상하면서 캠프 상황실장 제안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무소속으로 시작한 정치인 금태섭은 안 의원과 함께 신당 창당을 준비하다 더불어민주당과 합당했다. 국민의당이 생길 때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강서갑에서 2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1대 총선 경선에서 떨어진 뒤 탈당해 다시 무소속으로 돌아왔다. 2021년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다가 2022년 대선에선 윤석열 캠프에 합류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엔 입당하지 않고 ‘제3지대’에 머물렀다. 이달 18일 그는 “새로운 세력이 출현해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조금씩 나아지게 할 수 있는 정치를 펴야 된다고 생각한다”며 신당 창당 가능성을 열어뒀다. 11년 만에 조연에서 주역으로 성장한 그의 반항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어느덧 그도 56세다. 안철수 의원이 결국 포기한 제3당 실험을 다시 시도하는 게 얄궂은 운명처럼 보인다. 금태섭이 든 깃발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2014년 당시 ‘안철수의 입’ 역할을 하던 금태섭 전 의원을 처음 만났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안 의원의 측근’으로 표현된 기사에 대해 “내가 왜 누구의 측근이냐”며 그렇게 쓰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사석에선 솔직했습니다. 안 의원과 함께 정치를 시작했지만 안 의원에게는 물론 기자들에게도 본인의 생각과 감정을 다소 가감 없이 털어놓았습니다. 2, 3년 정도 지난 뒤 서로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느낄 때쯤 술자리에서 “앞으로 형님으로 불러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왜 황 기자 형이냐”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말문이 막혔습니다. 호형호제를 거절당한 건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까칠하다기보단 깍쟁이, 차도남 같았습니다. 윗선의 눈치를 보지 않는 언행과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를 가진 인물입니다. ‘검찰 전성시대’라지만 검찰 출신이라는 걸 내세우지 않습니다. 유머 코드가 ‘왕자병’이지만 아무리 자랑질을 해도 밉지는 않습니다.에는 정치인 금태섭과 그의 미래에 대해 좀더 다뤄보겠습니다. 법정모독이 회를 거듭해갈수록 ‘짠맛’이 없고 ‘단맛’만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필자로선 고민이 깊습니다. 그런데 권력이 없는 ‘미래 권력 호소인(?)’들에겐 회초리가 별로 소용은 없습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것보다는 낫지 않냐라고 항변해 봅니다. 황형준기자 constant25@donga.com}
수능 만점 출신의 의대생이 자기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현장에선 동생이 죽은 형의 가슴을 세게 때리는 장면을 부모가 목격했다. 유일한 목격자지만 자폐를 겪고 있는 동생은 ‘죽는다’는 말만 반복할 뿐 사건에 대해 제대로 진술하지 못해 살인범으로 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기 캐릭터 ‘펭수’ 아이템을 장착할 정도로 ‘덕후’인 동생의 마음을 열기 위해 변호사는 ‘펭수 마이크’를 잡고 열창한다. 또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기 위해 의대생 방을 찾아 자살을 암시한 일기를 발견한다. 그렇게 동생은 누명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자폐를 앓고 있는 천재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3회’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영우 같은 변호사가 드라마에만 있는 건 아니다. 재심 전문으로 유명한 박준영 변호사는 1999년 삼례 나라슈퍼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3∼6년 동안 옥살이를 한 ‘삼례 3인조’와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들을 대리해 재심을 진행한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변호사들은 누구나 법과 지식이 부족한 의뢰인을 법정에서 대리하는 기본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승소를 위해 의뢰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현장을 조사하고 관련자를 만나고 법정 증언을 요청하는 것도 변호사의 중요한 업무다. 이런 변호사들의 자존심과 명예를 실추시킨 인물이 항소심 ‘노쇼’로 논란이 된 권경애 변호사다. 권 변호사가 맡은 사건은 2015년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고 박주원 양(당시 16세) 사건이다. 박 양의 어머니는 2016년 8월 권 변호사를 선임해 서울시교육청과 가해 학생 등 30여 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지난해 2월 1심은 피고 30여 명 중 1명에게만 “5억 원을 지급하라”며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박 양의 어머니는 항소했지만 권 변호사가 항소심 재판에 3회 출석하지 않아 지난해 11월 항소가 취하됐고 1심 결과도 패소로 변경됐다. 재심 청구는 요건에 해당하지 않아 어렵고 권 변호사에 대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는 가능하다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유족 측은 13일 권 변호사 등을 상대로 2억 원을 배상하라는 취지의 소송을 냈다. 민사소송은 법원에서 변론기일 통지서를 보내고 이메일 또는 문자메시지로도 날짜를 알려준다. 권 변호사는 9000만 원 배상의 각서를 썼을 뿐 어떤 이유로 변론기일에 불출석했는지, 왜 유족에게 5개월 동안 항소심 결과를 알리지 않았는지 등에 대해 충분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권 변호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이었지만 조국 사태를 계기로 민변을 탈퇴하며 이른바 ‘조국 흑서’를 집필해 주목받았다. 하지만 본업과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직업인은 사이비일 뿐이다. 권 변호사가 6년여 동안 이 사건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도 의문이다. “드라마에 나온 우영우 같은 변호사가 있냐”는 박 양 어머니의 호소를 법조계는 무겁게 되새겨야 한다. 그들의 업무가 한 사람의 인생을 천국으로 만들 수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황형준 사회부 차장 constant25@donga.com}
‘재승박덕(才勝薄德)’기성 정치권을 몰아세우며 ‘따박따박’ 할 말을 하는 것이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의 장점이자 매력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 단점이 되기도 한다. 이 전 대표와 같은 정당에 몸담았던 한 유력 정치인은 그에 대해 한마디로 재주는 많지만 인덕이 없다는 의미로 이 같은 평가를 내놓았다고 한다.● 과도하게 자아가 강한 ‘재승박덕’ 스타일이 전 대표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정치권 인사들은 “한마디로 아주 잔머리 굴리는 데 도가 튼 ‘도사’인 데다 하나도 손해는 안 보려 하니 덕이 없다” “정치인들은 기본적으로 자기애가 강하지만 이 전 대표는 에고(ego)가 강해도 너무 강하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내공은 없고 입만 살아 있다” “언론과 SNS에 자기 이름이 나오는지 매일 검색하는 데 중독된 ‘관종’” 등의 혹평도 있다.흔히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말이 있다. 17대 국회에 대거 진출한 당시 열린우리당 386운동권 출신 초선 의원들의 행태 이후부터 생겨난 말이다. 하지만 26세에 정치를 시작하고 보수를 표방한 이 전 대표도 기성 정치인들로부터 같은 평가를 받는다. 싸가지 없음이 진보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기원전 1700년 무렵 수메르 점토판에 “요즘 젊은 놈들은 버릇이 없다”고 써 있듯이 그저 세대 차이에 따른 갈등일 수 있다.이 전 대표도 도발적인 발언을 하다 보니 구설수에 자주 휘말렸다. 국정농단 사태가 논란이 됐던 2016년 11월엔 당시 이정현 대표 사퇴를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였다. 또 안철수계 국민의당과 유승민계 바른정당이 합당해 만든 바른미래당에선 2019년 4월 재·보궐선거 성적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손학규 당시 바른미래당 대표의 사퇴를 촉구했다. 이 전 대표가 비공개 회식 자리에서 안철수 의원을 향해 ‘병×’라는 비속어를 써서 논란이 된 일도 있다. 이 전 대표는 “사석에서 한 말이고 이것이 문제 될 발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사과하지 않았다. 안 의원 측의 문제 제기로 바른미래당 윤리위원회는 이 전 대표에 대한 징계 결정을 내렸다. 결국 이 사건으로 계파 간 갈등이 폭발하면서 바른정당계 의원들은 탈당한 뒤 새로운보수당을 창당했다. 이후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다시 국민의힘으로 통합됐다.2021년 국민의힘 당 대표로 선출된 뒤에도 친윤 측과 갈등이 깊어졌다. 친윤 측에선 이 전 대표를 의도적으로 소외하거나 그를 깎아내리는 익명 인터뷰를 하는 등 견제구를 날리며 불화를 일으켰다. 이 전 대표도 ‘윤핵관’이라는 단어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며 여러 차례 충돌했다. 특히 이 전 대표는 자신이 연루된 성 접대 의혹을 수사하는 경찰의 배후에 윤핵관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도 폈다. 국민의힘 대표와 대선 후보 양측이 대선 앞에서 힘을 모아 일치단결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 이전투구를 벌이며 몇 차례 싸웠다 화해하는 꼴불견의 장면을 만들었다는 비판도 나온다.성 접대 의혹에도 휘말렸다. 2013년 7월 11일과 같은 해 8월 15일에 대전 유성구 소재의 모 호텔에서 김성진 당시 아이카이스트 대표이사의 주선으로 성매매 여성에게 두 차례 성 접대를 받았다는 것이다. 가로세로연구소가 2021년 말 의혹을 제기하면서 경찰 수사로 이어졌다. 지난해 7월 당 윤리위원회가 그에 대해 당원권 6개월 정지 결정을 내리자 그는 불복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홍준표 대구시장은 ”바른미래당 시절 대선배이신 손학규 대표를 밀어내기 위해 그 얼마나 모진 말들을 쏟아냈느냐”며 “좀 더 성숙해져서 돌아와라”라며 업보이자 자업자득이라는 점을 꼬집기도 했다. 같은 해 9월 경찰은 2013년의 성 접대를 포함한 수수 행위에 대한 알선수재 혐의는 공소시효가 지나 ‘공소권 없음’으로 무혐의로 불송치 결정을 했다. 대신 이 전 대표가 의혹을 제기한 가세연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지만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다. 이에 가세연 측은 다시 이 전 대표를 무고 혐의로 고소했고 경찰이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넘기면서 현재 서울중앙지검에서 수사가 진행 중이다. ● 2024년 총선에선 무소속 출마도 불사이 전 대표는 추가 징계까지 받으면서 총 1년 6개월 당원권이 정지됐다. 그 뒤 한동안 지역을 돌아다니며 잠수를 탔다. 2024년 총선 직전인 1월에서야 당원권이 회복된다.지난달 치러진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천아용인’(천하람 허은아 김용태 이기인 후보의 약칭)을 지원했지만 당선자를 만들지 못했다. 무고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가 끝날 때까지 당분간 이 전 대표의 휴지기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대신 지난달 10일 ‘이준석의 거부할 수 없는 미래’를 출간하면서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기지개를 펴며 지지세를 다시 모으는 분위기다.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이 30%까지 추락하는 등 벌써부터 김기현 대표를 간판으로 총선을 치를 수는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당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이 전 대표 측근은 “일단 당을 개혁하는 데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했다.‘0선’ 꼬리표가 붙어 있는 이 전 대표에게 내년 총선 출마는 상수다. 그가 2016년부터 2018년 재·보선, 2020년 총선까지 3번 출마해 낙마했던 서울 노원병 지역구 출마가 기본이다. 비례대표 의원은 안 한다는 생각을 과거에도 여러 번 밝혔다.하지만 다른 험지 출마를 요구받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만약 친윤 지도부가 이 전 대표에게 공천을 주지 않더라도 그는 무소속 출마도 강행할 분위기다. 지난달 8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 “(친윤 진영이) 괴롭혀서 만약 출마 못 하게 하면 홍준표 시장은 징계받으면서도 대선도 나갔다”고 말한 바 있다.● ‘할배’ 김종인의 마지막 대선 프로젝트는 이준석과 ○○○?그는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을 꼽는다. 그는 2011년 한나라당 비대위원 시절 당시 금기처럼 여겨졌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해 CBS 라디오에 출연해 “국민들이 아직 해소가 안 됐다고 생각한다”는 취지로 날을 세웠다. 그러자 그 뒤 김 전 위원장이 “용기 있네”라며 밥도 사주고 했다고 한다. 그 후 이 전 대표는 김 전 위원장을 10년 넘게 멘토로 삼았다. 지난달 이 전 대표가 사석에서 한 이야기다. “ 추천사를 받기 위해 김 전 위원장을 찾아갔다. 할배(그는 김 전 위원장을 사석에서 ‘할배’라고 부른다)가 말하길 ‘이 대표, 이제 이렇게 된 이상 대선 준비해. 내가 도와줄게. 살아 있으면….’ 진짜 이제 할배가 (킹 메이커에) 한을 품었구나 싶었다.” - 취재 메모 중 -마지막 “살아 있으면…”이라는 말이 이 전 대표에게 여운을 남겼다고 한다. 1940년생인 김 전 위원장은 올해 83세고 1985년생 이 전 대표는 38세다. 나이를 화투 게임의 일종인 ‘섰다’로 따지면 둘 다 최고 패인 ‘38광땡’이다. 4년 뒤에도 운이 계속 따를 것인가.또 그가 “그럼 대선 준비를 위해 누구를 만날까요”라고 했더니 김 전 위원장은 “○○○을 만나보라”고 했다고 한다.이 전 대표 MBTI는 ‘모험을 즐기는 사업가’형인 ESTP다. 이 유형은 ‘내기를 좋아한다’ ‘삶을 즐기며 산다’ ‘스릴을 좋아한다’는 등 평가가 있다. 이 전 대표 측은 “모험을 즐길 줄 안다. 전당대회에서 1등을 달리고 있는데도 ‘부자 몸조심’을 안 하고 대단히 공격적으로 베팅을 하더라”고 말했다. 그 역시 승부사적 기질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오세훈 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추진한 것도 누군가는 정치적 야심이 컸기 때문에 다음 행보를 노리고 나섰다고 하지만, 시의회를 다수를 차지한 당에 빼앗긴 상태에서 시정을 마음대로 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승부수를 던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것이 경솔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정치를 하면서 그런 큰 것을 대범하게 걸 줄 아는 승부사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한다.” - 저서 중 -하지만 오 시장은 주민투표로 10년 가까이 정치적 암흑기를 거쳤고 도박이 그렇듯이 베팅을 잘못했다간 집안이 거덜날 수도 있다. 다행히 미혼인 그에게 아직 부양가족은 없다.● 오바마에게서 배워야 할 포용과 관용이 전 대표는 한국의 오바마를 꿈꾼다. 47세 나이로 ‘흑인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통합과 개혁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이 전 대표가 그를 벤치마킹하기 위해선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서 배워야 할 덕목이 있어 보인다. 이 전 대표가 2021년 3월 국민의힘 대구 합동연설회에서 했던 말이다.“2004년 제가 공부하고 있던 보스턴에서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 출마한 존 케리 대선 후보의 선출을 위해 모인 사람 중 바람잡이 연설자로 흑인 상원 의원이 나섰습니다. (중략) 그는 ‘이라크전에 찬성하는 사람도 애국자요, 이라크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도 애국자다. 백인의 미국, 흑인의 미국, 라틴계의 미국, 아시아계의 미국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오직 미합중국이 있을 뿐이다.’ 이 말에 미국은 전율했습니다. (중략) 오바마가 외친 통합의 시발점은 바로 관대함입니다. 그리고 통합의 마지막 완성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중략) 여러분은 다른 생각과 공존할 자신감이 있으십니까. 내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고 그 사람도 애국자라는 것을 입 밖으로 내어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국가 이전에 당 내부에서부터 ‘다른 생각과 공존할 자신감’ ‘통합’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는 자세 등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철부지’네 뭐네 비하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그는 사상 첫 30대 여당 대표 신화를 만든 유례없는 인물이다. 그의 미래가 곧 청년정치의 미래라고 하면 과언일까? 지난 가 나가자 하버드대 경제학과 복수전공에 대한 이준석 전 대표의 허위학력 의혹을 제기하는 독자들이 여전히 많았습니다. 이에 대해 이 전 대표는 “이미 무혐의로 끝난 사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확하게는 하버드대에선 ‘joint concentration’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한국식으로 복수전공에 가까워 보입니다. 다만 학위를 각각 부여하는 게 아닌 통합전공에 가까워서 이 차이 때문에 오해가 빚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성 접대 의혹에 대한 질문은 왜 하지 않았느냐고 저를 채근하는 댓글도 있었습니다. 물론 했습니다. 최태원 SK 회장이 자신의 사업을 도와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김성진 아이카이스트 전 대표가 최 회장의 사면을 자신에게 건의하기 위해 접대를 했다는 내용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했습니다. 또 자신이 갔던 유흥업소에 전직 장관과 유력 인사 등도 갔었는데 그러면 다 접대를 받은 것이냐고 경찰 조사에서 되물었다고 말했습니다. 어쨌거나 ‘팩트’는 신의 영역이고 이제 검경 수사는 무고 건만 남아 사법적 판단은 마무리 단계입니다. 정치적 판단과 평가는 국민들이 할 것입니다. 공교롭게 20일 공개될 <법정모독 15화>의 다음 주인공은 앞서 김종인 전 위원장이 이 전 대표에게 만나보라고 했다는 인물입니다. 그의 조언에도 아직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가 봐도 결이 다르고, 스타일 차이가 있는 분들입니다. 다음 주인공은 법정모독에는 처음 등장하는 ‘무소속’ 정치인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대표님, 그 ○○랑 일해 본 적 있습니까?”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해 A 씨를 당협위원장을 시킨 뒤 총선에 출마시키는 게 어떠냐고 묻자 윤석열 대통령은 이같이 답했다고 한다. 이 전 대표는 “왜요. A 씨만큼 스펙 좋고 멀쩡한 사람 없다고 했더니 윤 대통령은 ‘뭐~ 그 이 새끼는 일도 못 하고…’”라고 윤 대통령의 성대모사를 했다. 윤 대통령이 A 씨를 자주 데리고 다녀서 아끼는 줄 알고 의사를 떠본 것이라고 했다. 이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특징 중의 하나가 주변 사람들 욕을 굉장히 많이 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써본 사람만 믿고 쓰다 보니 주변에 검찰 출신과 ‘윤핵관’만 남아 있다는 취지로 들렸다. 머리가 명석하고 언어 감각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성대모사를 잘한다. 이 전 대표의 성대모사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끊임없이 정확한 단어를 구사하며 쉼 없이 이야기를 했다. 지난달 2일 이 전 대표와의 첫 만남에서 느낀 인상은 “IQ가 높다”였다.●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0선 중진’ 이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이 전 대표는 이문열 작가의 책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들고 약속된 시간보다 10여 분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서점에 책을 사러 갔다가 시간이 좀 걸렸다고 했다. 다음 날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여는 데 회견문을 위해 다시 한 번 읽어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회견문은 머릿속에 어느 정도 정리돼 있기 때문에 술자리가 끝난 뒤 집에 가서 쓸 거라고 했다. ‘일그러진 영웅’이 누구냐고 묻자 말을 아꼈다. 그는 다음 날인 지난달 3일 기자회견에서 “1987년 이문열 작가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통해 그려냈던 시골 학급의 모습은 최근 국민의힘의 모습과 닿아 있다”며 “분명히 잘못한 것은 엄석대인데 아이들은 한병태가 ‘내부 총질’을 했다며 찍어서 괴롭힌다”고 했다. 이어 “국민의힘에서 엄석대는 누구일까요? 엄석대 측 핵심 관계자는 어떤 사람들일까요?”라며 “한 가지 명확한 것은 담임 선생님은 바로 국민이라는 것이다. 당원 여러분의 투표로 이 소설의 결말을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당대회에서 이른바 친윤계 후보를 지원하는 윤 대통령과 ‘윤핵관’을 비판하며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한 이준석계 ‘천아용인’(천하람 허은아 김용태 이기인 후보의 약칭) 후보 지지를 호소한 것이다.‘친윤(친윤석열)’계가 지원했던 김기현 대표에 대해 이 전 대표는 그날 이렇게 말했다. “김기현 대표가 마치 윤 대통령과 신뢰가 깊어서 당 대표 후보로 낙점된 걸로 아는데, 전혀 아니다. 약점이 많기 때문이다. 약점이 많아 용산(대통령실) 뜻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낙점된 것이다.” ―취재 메모 중―● 하버드 졸업생, 정치에 뛰어들다그는 서울과학고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한 뒤 하버드대 컴퓨터과학과와 경제학을 전공한 ‘엄친아’였다. 하버드는 지우개 유명 메이커로나 봤던 이름이었다. 내가 만난 하버드대생은 40여 년 생애 처음이었다. 2011년 12월 당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그를 발탁하면서 만 26세의 나이에 당시 여당 지도부를 경험했다. 여의도 정치권의 나이로 따지면 그야말로 아이돌이었다. 그는 하버드대 재학 시절 방학 때면 귀국해 무료로 과외 봉사를 했고 졸업 후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해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봉사단체를 만들었다. 교육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벤처기업 클라세스튜디오도 세웠다.그는 2011년 12월 한나라당 비대위가 출범하기 사흘 전 비대위원 제안을 받았다. 약 5년 전 봉사단체를 찾아온 적이 있는 박 전 대통령과 한 번 만난 게 전부였다. 당시 비대위에는 ‘경제민주화’의 상징인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전 의원) 등이 참여했고, 비대위는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정권 실세 및 전직 당 대표 용퇴론 목소리가 나오는 등 쇄신이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이 전 대표는 개성을 발휘하며 청년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성 추문과 논문 표절 의혹을 받은 19대 총선 당선인에 대해 출당을 요구하는 등 입바른 소리를 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디도스(DDoS·분산서비스 거부) 공격 사건에 대한 ‘디도스 검찰수사 국민검증위’ 위원장을 맡아 주목을 받았다. 2014년 4월 발간한 저서 에 따르면 19대 총선 공천 과정에선 당시 민주당에서 김근태 전 대표의 부인인 인재근 여사의 도봉갑 출마가 유력하다는 소문을 듣고 무공천을 제안했다. “김근태 전 복지부 장관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민정당 독재 정권하에서 가해진 고문에 대해 당 차원에서 진정성을 가지고 유감을 표명하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부끄럽다. 이번에 새누리당은 조금 더 과감한 공천을 통해 진정성을 보여야 했다.” ― 중―또 여성의 정치참여를 활성화하기 위해 비례대표 중 여성을 5 대 5가 아닌 8 대 2로 공천하자는 주장도 폈다. 40대가 되기 전에 미국에선 흔한 사립 과학고등학교를 세워 이사장을 하는 것이 꿈이라고 썼다. 자신이 받았던 평범하지 않았던 ‘교육의 기회’의 문을 넓혀 가정 등 환경 때문에 기회를 받지 못한 학생들에게 되돌려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정치인으로 변신하면서 지금 그 꿈은 실현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9년 전 책 내용과 이 전 대표의 현재 모습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근본은 같다. 3개월 임시직 비대위원으로 인상을 남긴 이 전 대표는 방송패널 등으로 활동했고 2014년 6월 ‘새누리당을 바꾸는 혁신위원장’을 맡은 뒤 줄곧 정치인으로 살았다.● 능숙한 메시지 전달 능력과 톡톡 튀는 선거전략으로 급부상이 전 대표는 메시지 전달과 의사소통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 입문 초기부터 이미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에 자기 목소리를 내며 논쟁에 뛰어들었다. 2019년 바른미래당 최고위원 때 카카오 카풀 서비스 도입에 택시업계가 반발해 갈등이 빚어지자 갈등의 해법을 찾겠다며 택시 기사 자격증을 따고 법인 택시를 몰기도 했다. 이 전 대표와 가까운 인사는 “일단 대단히 명석하고 선거에 대한 이해도 높다. 오세훈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2021년 전당대회, 2022년 대선 등을 보면 선거에서 공략해야 할 타깃 지점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합리적 보수를 표방하고 있다. 그간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으로 양분된 진보-보수 진영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만큼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진영의 구분이 재편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릴 적 싱가포르와 미국에서 대학 생활을 하면서 다소 서구화된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는 “책임정치를 구현시키기 위해 기득권 정치를 타파해야 한다. 우리의 경우 (국회의원 임기) 4년은 너무 길다. 2년으로 단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통일에 대해선 “통일의 방법이 체제 우위를 통한 흡수통일 외에 어떤 방법이 있을까 싶다. 통일 교육도 필요 없다. 통일 교육은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받아야 한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2021년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선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 캠프 미디어본부장을 맡았다. 2030세대 청년들을 자신의 SNS에서 희망자를 모집해 후보 유세차에서 직접 발언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희망자들은 번갈아 가면서 보통 3~5분가량 발언을 했고 한 번에 40~50명씩 와서 정책 제안을 했다. 그 결과 재보선의 20대 지지율이 75%에 달했다고 한다. 특히 당 대표로 선출된 2021년 국민의힘 전당대회 합동연설회에서 그의 장점이 국민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는 지역마다 맞춤형 메시지를 내며 당원들의 마음을 샀다. 그는 그해 5월 30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호남 합동연설회에서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 속에서 (5·18은) 가장 상징적이고 처절했던 시민들의 저항”이라며 “저는 80년 광주에 대한 개인적인, 시대적인 죄책감을 뒤로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자유롭게 체득한 첫 세대”라고 강조했다. 이어 “전당대회를 앞두고 호남 당원이 우리 당원의 0.8%밖에 되지 않는다는 데이터가 공개됐다. 노력해야 한다”며 “(호남 당원은) 그동안 왜 배척받았나. 당내 큰 선거를 앞두고 일부 강경 보수층이 목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두려워하며 그들이 주장하는 음모론과 지역 비하와 차별을 여과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적극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며칠 뒤 대구 합동연설회에선 “박 전 대통령이 저를 영입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라면서도 “저는 제 손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박 전 대통령이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을 배척하지 못해 국정 농단에 이르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을 비판하고, 통치불능의 사태에 빠졌기 때문에 탄핵은 정당했다고 생각한다”고 소신 발언을 했다. 한국 정당사상 최초 30대 당 대표라는 기록을 남긴 이 전 대표는 전당대회에서 당선된 뒤 2022년 지방선거에서 공천 자격시험을 도입했고 토론배틀로 당 대변인과 상근부대변인을 2명씩 선출하는 등 신선한 아이디어를 정치권에 접목했다. 이 전 대표는 또 전략가이기도 하다. 2030세대, 특히 2030 남성층과 국민의힘의 전통적 지지층인 60대 이상 노년층을 묶어 더불어민주당의 주요 지지기반인 40, 50대 중장년층을 포위해 지지세를 압도하겠다는 ‘세대포위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는 2021년 서울시장 선거와 전당대회에서 성공한 전략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미 ‘내각 30% 여성할당제’ 폐지, 군가산점제 부활 등을 주장하며 안티 페미니스트로 자리잡으며 ‘이대남(20대 남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 같은 세대포위론은 윤 대통령이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선출된 뒤 반문재인 세력을 결집해 정권교체를 이뤄내겠다는 윤석열 캠프의 선거전략과 충돌했다. 이 전 대표와 친윤 간 갈등의 출발점이었다.매력적이지만 치명적이어서 멀리하고 싶은 ‘옴파탈’ 같다. 적이 많은 ‘트러블 메이커’라는 평가도 받는다.그가 닮고 싶어하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보다는 아직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모습에 가까운지도 모른다.법정모독 14화에선 이준석 전 대표의 향후 정치적 행보와 정치인으로서 아쉬운 점에 대해 좀 더 다뤄볼 예정입니다. 이 전 대표는 늘 논란의 중심에 서 왔습니다. 논리정연하고 토론배틀에선 잘 지지 않기 때문에 싸움을 걸면 되로 받아치는 ‘쌈닭’입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이 전 대표가 반대편에서 토론배틀을 한다면 상당히 명장면이 될 것 같습니다. 그간 소통을 게을리 한 측면이 있습니다. 댓글을 남기시거나 e메일을 주시면 이 전 대표에 대해 궁금한 점 등을 다음 화에 다뤄보겠습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지난달 7일 오후 7시경. 퇴근을 앞둔 대검찰청 기획조정부와 형사정책담당관실 등 형사법제 관련 부서가 발칵 뒤집혔다. 오후 4시 38분경에 온라인에 뜬 기사 때문이었다.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영장을 법원이 발부하기 전에 피의자와 검사 등을 심문할 수 있도록 한 형사소송규칙 개정안을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입법예고했다는 내용이었다. 검찰로선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수사의 밀행성이 보장되기 어렵다는 등 부작용이 우려되는 상황. 문제는 두 시간 넘게 온라인에 올라온 이 기사를 대검 간부와 실무진 누구도 체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1만 검찰’의 수장이 이 기사를 가장 먼저 본 것. 그 주인공인 이원석 검찰총장은 옛날 상사들처럼 불같이 화를 내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후배들에게 경어체와 존댓말을 사용하고 거의 말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아랫사람들로선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질책하는 꾸짖음이 더 무섭게 느껴진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내용을 아무도 모르고… 기사도 체크 안 할 수가 있습니까.”유관부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날 밤늦게까지 형사소송규칙 개정안이 미칠 영향과 대응 방안에 대한 보고서 등을 썼다는 슬픈 이야기. 이후 대검 각 과에선 언론 모니터링 담당자를 지정해 일종의 ‘당번’을 서게 하는 내부 제도 개선(?)이 이뤄졌다.● 전형적인 ‘똑부’… “혼자만 행복” 내부 불만도 지난해 5월 윤석열 대통령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지명한 다음 날 제주지검장이었던 이 총장을 대검 차장검사로 임명했다. 대선이 끝난 뒤 더불어민주당이 일명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을 밀어붙이면서 내부 반발이 거세진 상황에서 김오수 당시 총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시기였다. 그때부터 대검 간부들이 일이 너무 많아져 다음 인사만 기다린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의 스타일상 뭔가 생각나면 잊기 전에 그때그때 연락해 지시를 내리다 보니 간부들이 늦은 밤이나 주말에도 지시를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랫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상사는 ‘똑게(똑똑하고 게으른)’형이다. 이 총장의 단점도 ‘똑부(똑똑하고 부지런한)’형 상사의 단점과 유사하다. 본인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지시할 게 많고 후배 검사들이 못 미더워 보일 수밖에 없다. 잔소리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 이 총장은 취임 이후 사적인 자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몸가짐을 조심한다. 그 대신 점심엔 각계각층의 명사들을 대검으로 초청해 강연회를 열거나 오찬을 함께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검찰에 대한 시각 등을 경청하기 위해서다. 최근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 소장과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등을 초청해 강의를 들었고, 이달 15일엔 김훈 소설가를 초청해 비공개 오찬을 함께 했다. 외부 인사 초청 뒤엔 검찰 내부망에 사진과 함께 총장 동정이 올라온다. 최근 만난 한 검찰 간부는 “동정 사진에서 총장님의 웃는 모습을 보며 직원들이 ‘총장님 혼자 행복한 것 같다’는 말을 우스개로 하곤 한다”고 전했다. 총장의 바쁜 일정 때문에 일부 직원들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뼈 있는 말이다. 또 직원들이 몰라도 될 일정까지 굳이 공유된다는 지적도 있다. 다른 총장 때는 없었던 일이다.총장이 모든 기사를 다 볼 정도로 꼼꼼하게 읽고 언론에 민감해 직원들이 전임 총장 때에 비해 일이 많아졌다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매일 30분씩 직원들과 ‘칭찬 소통’… ‘부드러운 카리스마’그럼에도 대검 내부에선 이 총장에 대한 ‘용비어천가’가 대부분이다. 한 대검 간부의 말이다. “총장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전형적인 똑부형 상사라 같이 일하기가 너무 힘들지만 배울 게 많다. 솔선수범하는 데다 맞는 방향으로 맞는 말만 하니 따르지 않을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 이 총장이 업무 지시와 채찍질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는 매일 30분 정도 할애해 일선 검찰청에 전화를 하거나 단체 메시지방을 열어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를 보낸다. 검사뿐만 아니라 수사관, 실무관 등 모든 직원에게 해당된다. 우수 직원으로 뽑힌 직원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고, 건강이 좋지 않거나 조사 등 힘든 일을 겪은 구성원에게는 따뜻한 말을 건넨다. 총장과 직접 소통할 기회가 없는 평검사나 수사관들이 처음에 연락을 받고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다고 한다. 실제 그는 굉장히 자상하고 상냥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대학생을 거쳐 검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그를 만난 사람들은 깍듯하게 예의를 갖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아랫사람에게도 존댓말을 쓰고 조곤조곤하며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한다. 다정다감한 ‘부드러운 카리스마’다. 특히 공권력을 사용하고 단죄하는 검찰인 만큼 늘 겸손과 경청, 소통 등을 강조한다. 그가 총장으로 취임하며 강조했던 말이다. “일하는 데 있어 최소한 법(法)에 맞게, 다음으로 세상의 이치(理致), 상식에 맞게, 마지막으로 사람 사는 인정(人情)까지도 헤아리는 겸허한 검찰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지난해 9월 16일 대검찰청에서 열린 제45대 총장 취임식에서 ● 민주화 항쟁·법복 보고 자란 ‘아인슈타인’ 1969년 광주에서 태어난 이 총장은 동네 수재였다. 광주 지산동에 위치한 동산초를 다니는 동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초교 동창인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유정 전 의원은 “우리 어머니 기억에 IQ는 이 총장이 전교 1등이었고 내가 2등이었다고 하더라”며 “학생 때 피부가 하얗고 귀여운 외모여서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반장도 도맡아 하며 총명했다”고 전했다. (외모 얘기가 나온 김에… 그는 자신의 적은 머리숱을 ‘셀프 디스’하며 유머 소재로 삼는다. 이 총장은 대학생 때 ‘개구리 왕눈이’ ‘미키마우스’ 등 귀여운 별명을 갖고 있었다. 요즘 누리꾼들 사이에선 ‘미니언즈’라는 별칭도 붙었다고 한다.) 동산초는 광주지법과 광주지검 등이 있는 법조타운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검사와 판사의 법복을 보고 자란 게 그가 공직자 중에서 법조인을 선택하게 된 배경 중 하나라는 게 지인들 전언이다. 동산초, 동성중을 졸업한 뒤 광주 동신고를 다니던 그는 고2 때 상경해 서울 중동고를 다녔다. ‘전라도 촌놈’이 서울 강남의 명문고에 들어온 것인데, 그는 전학하자마자 반에서 1등을 해 놀라움을 샀다고 한다. 당시 별명은 ‘아인슈타인’.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Einstein)의 이름이 하나의 돌(one stone)이라는 뜻이어서 ‘원석’과 같다는 것이다.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모르는 서울 친구들에게 피 흘리던 대학생을 숨겨준 일화 등에 대해 이야기해줄 정도로 정치적으로 조숙했다. 여느 호남 출신처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존경했다. 학생 시절부터 그는 이미 논어, 맹자, 장자, 한비자 등을 읽었다. 중국 역사와 한학(漢學)과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정확한 표현을 찾기 위해 국어사전, 유사어사전 등을 늘 꼼꼼히 읽었고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썼다고 한다. 마르크스와 칸트 등 독일 철학과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독일어를 잘했고 이런 영향으로 그는 평검사 시절 연수 기회가 주어지자 독일에서 연수를 했다. 그가 대학교 1학년이 된 1987년은 6월 민주항쟁이 있던 해였다. 중동고와 서울대 정치학과 87학번 동기로 단짝이었던 김동규 씨의 이야기다. “(원석이가) 대학 다닐 땐 운동권은 아니지만 PD(민중민주) 그룹 선후배들과 교류가 많았다. 1987년 때도 명동에서 열심히 돌도 던지고(웃음) 학내에서 집회가 있으면 꼬박꼬박 참석해서 토론하고 그랬다. 기본적으로 그 친구는 민주화에 관심이 많았고 나보다는 훨씬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2학년까지는 거의 매일 정치 상황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남북통일, 국가와 정치의 존재 이유 등 정치·사회 분야에 대해 밥 먹으며 소주잔 기울이며 아침부터 밤까지 토론을 했다. 그러다 2학년을 마쳐가는 1988년 12월 원석이가 ‘이제 민주주의가 틀이 잡혀가는 것 같다. 나도 직업을 찾아봐야겠다. 사법시험 봐서 법조인이 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경북 상주에 있는 절에 같이 들어가지 않을래?’라고 했고 그래서 상주에 있는 절에 가서 두 달을 같이 지내며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 총장은 시험에 빨리 붙은 것도, 그렇다고 늦은 것도 아니었다. 중간에 군 복무를 하며 일명 ‘방위’로 상병 제대했고 군 복무 후 고시 공부에 집중해 1995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27기로 입소한 이 총장은 1996년 입소 후 학번은 5개, 나이는 네 살 어린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6반 A조에서 2년간 동고동락했다. 소년 급제한 한 장관이 17~20명이 있는 A조에서 막내였다고 한다. 두 사람을 가르쳤던 한 연수원 교수는 “그 시절부터 둘 다 총명하고 눈에 띄었다. 단 1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지도교수였던 조대현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이 총장에게 판사 임관을 권유했지만 그는 검사가 됐다. 다음은 이 총장과 한 장관에 대해 다룬 필자의 최근 칼럼.[광화문에서/황형준]‘족집게’ 이원석과 ‘독종’ 한동훈● “왼손은 거들 뿐… 거들면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1998년 임관한 그는 서울지검 동부지청(현 서울동부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해 부산지검, 서울중앙지검, 수원지검, 법무부 등에서 근무했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에서 2005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을 맡으면서다. 한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이 사건 공소유지를 맡았는데도 혼자서 꼼꼼하게 추가 수사를 착착 진행해놨더라. 윗분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삼성 비자금 특별수사팀, 대검 연구관, 대검 수사지휘과장,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1부장 등 요직을 거쳤다. 특수1부장 시절에는 2016년 법조 비리 의혹으로 번진 정운호 게이트를 수사했다. 당시 홍만표 전 검사장 등 전관 변호사들이 수사선상에 오르자 검찰 고위층에선 ‘가장 공정하게 수사할 수 있는 이원석에게 맡겨라’라고 했다고 한다. 2016년 10월 법조 비리 의혹 수사를 마친 뒤 한 달가량 현안 사건이 없을 무렵이었다. 당시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형사7부에서 하고 있었다. 여론이 좋지 않았다. “왜 특수부에서 수사를 하지 않느냐”고. 불안한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다고 하지 않든가. 결국 이영렬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 그를 불러 수사를 나눠 맡겼다. 그가 후배 검사들을 불러 놓고 했다는 말이다. “과거 조선시대 등 옛날이면 이런 수사를 잘못하면 목을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한직으로 밀려나도 검사를 계속할 수 있지 않느냐. 우리는 거들기만 하면 된다. 슬램덩크에서 나오는 말이지만 우리는 농구에서 왼손이다. 거들기만 하면 된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진실의 힘이 무섭기 때문이다.” - 취재 메모 중 - 결국 이 총장은 2017년 3월 박 전 대통령을 직접 조사한 뒤 구속했다. 이후 그는 여주지청장과 대검 해외불법재산환수 합동조사단장을 지낸 뒤 윤 대통령이 총장 시절 기획조정부장으로 윤 대통령과 호흡을 맞췄다. 윤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와 각을 세운 뒤에는 수원고검 차장검사와 제주지검장 등 검사장 자리 중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곳으로 좌천됐다. 하지만 정권 교체 뒤 대검 차장검사를 거쳐 전임 총장보다 7기수 아래 총장으로 발탁됐다.● 비(非)법학 전공 첫 총장… 목계지덕의 고수민주화 이후 21대 이종남 검찰총장부터 45대 이 총장에 이르기까지 그는 유일한 비법대 출신 총장이라는 특징도 있다. 25명 중 서울대 법학과 출신이 18명, 고려대 법학과 출신이 6명, 그리고 유일하게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인 이 총장이 있다. 민주화 이전엔 서울대 법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 법학과, 고려대 법대의 전신인 보성전문 법학과, 일본 대학 등의 출신이 많았다.이 총장은 정치학 전공자라는 이유로 검사가 되고 나선 선배 검사들에게 “나중에 정치를 하려고 하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이수성 전 총리는 이 총장과 경기도 ‘광주 이씨’로 같은 종친 할어버지뻘 되는 분이라고 한다. 이 전 총리가 대선 후보로 거론되던 2007년경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마당에서 우연히 이 전 총리 부부를 만나 인사를 하고 덕담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 전 총리가 “자네는 정치학 전공인데 왜 정치를 하지 않고 검사를 하고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 총장은 이 전 총리에게 웃으며 “총리님은 법학 전공하셨는데 지금 정치를 하시지 않느냐”고 했다. 이 총장의 재치 있는 답변에 이 전 총리 부부는 활짝 웃었다고 한다. 이 총장은 전형적인 선비 스타일로 독서와 산책, 등산 등이 취미다. 매일 다독(多讀)한 뒤 걸으며 다상량(多商量)하는 스타일이다. 단벌 신사에 외모에는 관심이 없고 검소한 생활을 신념으로 여긴다. 실제 총장 청문회를 준비하면서 이 총장 집에 가본 직원들이 다들 엄청 놀랐다고 한다. 집에 책이 많고 불필요해 보이는 물건이 하나도 없는 정갈함 그 자체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선비 집이 이랬을 것 같다. 미니멀리즘을 실현한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장미같이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엄친아’ 이미지의 한동훈 장관과는 대조적으로 이 총장은 은은한 향기를 내는 난초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당초 실세 한 장관에게 휘둘려 조직 장악이 어려울 것이라거나 “총장의 공간이 없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엔 ‘검수완박’ 등 위기에 몰렸던 검찰 조직이 이 총장을 중심으로 안정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검찰 간부는 “이 총장은 장자에 나오는 ‘목계지덕(木鷄之德)’처럼 나무로 만든 닭처럼 작은 일에 흔들림이 없고 교만함, 조급함 없이 완전히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능력이 뛰어나다”며 “목계지덕의 최고수 같다”고 평가했다.이 총장 스타일상 검찰총장까지 한 사람이 ‘초선’ 의원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다만 한 장관이 내년 총선에서 출마를 위해 법무부 장관에서 사퇴하거나 혹은 그 이후에라도 이 총장이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되거나 감사원장 등 다른 공직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그가 검찰총장 임기를 어떻게 마무리하느냐가 그 길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이원석 총장이 2017년 8월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에서 여주지청장으로 발령이 난 뒤 어느 날, 당시 법조팀장이었던 선배와 함께 여주로 가서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여주에 있는 한 식당에서 만찬을 한 뒤 그는 서울로 돌아가는 우리를 버스터미널에 차로 데려다줬습니다. 여기까지는 통상적인 배웅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돌아가는 버스터미널에 들어와 버스에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 극진한 예의를 차렸습니다. 차창 안에서 바라봤던 그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1도’도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겸손하고 신중하고 중용의 미덕을 갖춘 그는 검찰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에서도 신망이 두터운 사람입니다. 청문회에서도 야당이 결점을 찾기 어려워 보좌관들이 “실화냐”고 했다는 후문입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 등 야권을 향한 계속된 검찰 수사로 야당 탄압 아니냐는 시각이 적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검찰의 공정성과 중립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그나마 이 총장이 있기에 ‘아니겠지…. 나오는 대로 수사하는 것이겠지’라며 이런 의구심을 덜 했던 형국입니다. 결과적으론 임기 1년 반 남은 이 총장이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입니다. 검찰이 20일 국민의힘 하영제 의원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정부 출범 1년 만에 야권만 수사한다는 비판을 다소 덜 수 있게 됐습니다. 그가 자주 인용하는 한비자의 문구 ‘법불아귀(法不阿貴·법은 신분이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는다) 승불요곡(繩不撓曲·먹줄은 굽은 것을 따라 휘지 않는다)’처럼 흔들리지 않는 검찰이 되길 바랍니다. 앞서 예고 없이 법정모독 <11화―번외편>을 쓰면서 ‘공정선거 지킴이’였던 윤석열 대통령의 어색한(?) 전당대회 개입 논란에 대해 썼습니다. <13화>는 ‘0선 중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여권 인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톡톡 튀는 스타일이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떠오르는 정치인입니다.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검사 윤석열’을 키운 것은 팔 할이 선거개입 의혹 수사였다. 2013년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팀장을 맡았다가 상부 외압을 폭로하며 ‘국민 검사’가 됐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 개입해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을 위반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이 사건으로 징역 4년에 처해졌다. 당초 선거법 위반 사건은 공소시효가 6개월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2014년 2월 ‘공무원이 직무와 관련됐거나 지위를 이용해 범행을 저지른 경우’에는 공소시효가 10년이 되도록 선거법이 개정됐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선 ‘윤석열법’이란 말이 나왔다. 윤 대통령은 서울중앙지검장 시절인 2018년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관련된 총선개입 의혹 수사를 진두지휘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대 총선을 앞두고 현기환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등과 공모해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친박(친박근혜) 인사들을 대거 당선시키려고 여론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선거 및 경선 전략을 수립해 이를 당 공천관리위원회에 반영한 혐의로 기소됐다. 전직 대통령에게 선거법 위반 혐의가 적용된 첫 사례였다. 1심 재판부는 2018년 7월 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하며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을 남용한 것으로 헌법의 근본가치인 대의제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정당의 자율성을 무력화시키는 행위”라고 질타했고 2심에서 그대로 형이 확정됐다. 그러던 윤 대통령이 최근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노골적으로 ‘친윤’ 후보를 지원 사격했다는 말이 나온다. 대통령실이 나경원 전 의원의 출마를 주저앉힌 것이나, 윤 대통령 자신이 안철수 의원이 사용한 ‘윤-안 연대’에 대해 “실체 없는 표현으로 이득 보려는 사람은 국정 운영의 방해꾼이자 적으로 인식될 것”이라고 언급한 것 등을 두고 나오는 평가다. 대통령실이 전당대회에 개입했다면 국회에 자기 편을 입성시켜 국정을 원만히 이끌겠다는, 이른바 ‘당정 일체’를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이는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공천에 개입한 동기와 같다. 차이가 있다면 윤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처럼 공천에 대놓고 개입하지 않기 위해 이심전심이 되는 당 대표 후보를 만들려 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전대 개입 논란에 대해 대통령실은 “선거 개입이라면 공직선거법에 따른 것이어야 하는데, 지금 전대는 당 행사이지 선관위가 주관하는 선거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 말대로 선거법은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의 경선 및 본선거에만 적용된다. 전당대회와 관련해 공무원이 선거에 관여할 수 없다는 조항은 정당법에도 없다. 하지만 대통령실 해명은 선관위가 주관하지 않는 초등학교 반장, 회장 선거 등 다른 선거에선 중립적이어야 할 공직자가 개입해도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누구나 아는 것처럼 민주주의 선거에선 공정이 생명이고, 공직자에게는 선거 중립이 기대된다. ‘공정선거 지킴이’였던 윤 대통령이 법망을 피해 당내 선거에 개입한 것처럼 비치는 건 무척 아이러니하다. 이번 전대가 정당의 자율성과 후보자 간 공정한 경쟁을 보장했는지를 판단하는 건 결국 국민들의 몫이다.황형준 사회부 차장 constant2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