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한국외국어대 독일어학과를 나와 서독 뮌스터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재정학 분야의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지도교수는 소련 경제 전문가였고 그의 권고로 중국 경제에 대해 써보려고 준비하다가 뜻하지 않게 바꾼 주제가 ‘개발도상국가에 있어서의 분배와 재분배’다. 철학이나 신학이면 몰라도 1960년대에 경제학을 공부한다면 미국으로 가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 같다. 그는 유학에서 돌아와 서강대에서 가르쳤다. 교수 시절인 1980년에 그가 낸 유일한 학술적 저서인 ‘재정학’을 읽어보면 유학까지 가서 공부해 쓸 내용인가 싶을 정도로 평이하다. 가인(街人) 김병로의 손자로 태어났으나 뛰어난 학재(學才)는 보이지 않으니 당시 집안에서 기획 유학을 보내 교수로 만든 케이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는 최근 낸 회고록에서 처삼촌이 되는 박정희 시절 비서실장 김정렴 씨를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지만 국내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지도 않아 선배도 없고 경제학도 생소한 곳에서 배운 그를 청와대의 처삼촌이 아니면 누가 찾아줬을까. 그는 유신 시절 정부 프로젝트에 여러 차례 초청받아 참여하고, 전두환 집권 과정에서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재무분과위원으로 활동한 끝에 두 차례나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 돼 1987년 민주화를 맞는다. 그는 유학을 떠나기 전 24세의 나이에 정치인 가인의 비서를 맡으면서 정치에 일찍 눈을 뜰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전두환 시절 민정당 전국구 의원 2차례, 노태우 시절 경제수석을 거쳐 다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을 지내면서 경제 분야의 정치기획가로서 경험을 쌓게 됐다. 공부보다는 정치가 적성에 맞은 듯하다. 군사정권 시절의 여당 정치인인 데다 1994년 민자당 전국구 의원 당시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사라지는가 했던 그가 존재감을 지니고 다시 불려나온 것은 정계가 2011년 무상급식을 시발로 퍼주기 경쟁에 돌입한 이후다. 그는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는 박근혜 쪽으로, 2016년 총선에서는 문재인 쪽으로 불려 다녔다. 1987년 헌법에 그가 넣었다는 경제민주화의 개념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 서양에서 경제민주주의라고 하면 노동자자주관리나 노사공동결정을 의미한다. 그런 건 아니란다. 알쏭달쏭한 경제민주화 덕분에 그가 이쪽저쪽 불려 다녔지만 실제 한 일은 박근혜 쪽에서는 노인들에게 월 20만 원을 지급하는 공약을 만들고, 나중에 문재인 쪽으로 가서는 한술 더 떠 노인들에게 월 30만 원을 지급하는 공약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개발이 중요한 노태우 시대에 경제수석을 지낸 사람인데도 성장에는 관심이 없었다. 재정학자가 대체로 성장에는 문외한이다. 그래도 제대로 된 재정학자라면 최소한 세입과 세출의 균형에는 관심을 가진다. 그는 세입에도 별 관심이 없었고 돈을 쓰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그가 다시 보수 정당 쪽으로 불려왔다. 그의 전략은 늘 그렇듯이 상대편보다 더 많이 지르는 것이다. 4·15총선을 앞두고 긴급재난지원금의 지급 범위를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조차 70%로 정한 것을 100%로 바꿔버린 것이 그다. 그러나 통합당은 표를 얻지 못하고 그 제안을 잽싸게 낚아챈 민주당이 공을 독차지했다. 김종인식 처방에 내성이 생겨 그 약효가 다해 가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퍼주기 경쟁은 더 무책임한 쪽이 승리하는 게임이다. 보수정당은 이 게임에서 질 수밖에 없다. 그는 앞으로 청년 기본소득을 도입할 뜻을 밝혔다. 보수정당이 얼마를 주든 민주당은 그 이상을 줄 준비가 돼 있다. 기본소득 등 온갖 공상적 아이디어가 민주당 쪽에 판친다. 보수정당이 그중 하나를 받으면 민주당은 죄의식마저 털고 더 얹어서 갈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20년 집권 혹은 100년 집권의 묘책이라고 할 것도 없는 묘책이다. 보수정당은 ‘누가 더 많이 퍼주나’의 게임을 ‘누가 더 많은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나’의 게임으로 바꿀 때만 승리의 기회가 온다. 그러나 평생 나랏돈 버는 궁리는 없이 나랏돈 쓰는 궁리만 해온 80대 노인은 자기편이 이길 수 있는 게임에는 관심이 없고 상대편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을 하겠다고 덤비고 있다. 보수정당마저 상대편보다 더 많이 퍼줘 선거에서 이기려다 망한 나라들이 더 이상 남 일 같지 않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독일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책 ‘토템과 터부’에는 터부(taboo)의 뜻을 설명하는 친절한 부분이 나온다. 터부는 두 가지 상반된 방향의 뜻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신성한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섬뜩하고 불결한 것을 의미한다. 터부는 본래 태평양 폴리네시아인의 말이다. 폴리네시아어에서 터부의 반대말은 평범한 것을 뜻하는 노아(noa)라고 한다. 터부는 신성한 쪽으로든, 섬뜩하고 불결한 쪽으로든 특별한 것이다. 터부가 가진 두 가지 상반된 방향의 뜻은 실은 내적으로는 긴밀히 연결돼 있다. 죽음이나 정조의 상실은 섬뜩하고 불결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존재가 우리나 우리의 가족을 대신해서 섬뜩해지고 더럽혀졌다면 그 존재는 신성하다. 우리가 그 존재의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나 우리의 가족이 죽거나 정조를 상실했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우리 시대의 터부다. 터부는 금지와 연결돼 있다. 그래서 금기(禁忌)라고 한다. 행동으로든 말로든 터부를 함부로 다루는 것은 금지된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루는 어려움은 여기서 비롯된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학문적인 실증정신으로만 혹은 엄격한 법률 개념으로만 다루려는 시도가 반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이 문제가 일종의 제의(祭儀)적 차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윤미향 사태는 금기의 뒷면에서 금기를 다루는 자들의 충격적인 일상을 보여준다. 위안부 피해자를 돕기 위한 정부의 보조금, 기업의 후원금, 시민들의 기부금이 쏟아지지만 금기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금기의 그늘에서 감시 체제가 느슨해지고 배임과 횡령의 유혹이 작동하기 쉬운 환경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윤미향이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에게 한 협박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는 “약 30년 전 이용수 할머니가 모기 소리만 한 목소리로 떨면서 ‘저는 피해자가 아니고요. 제 친구가요…’라고 하던 그때의 상황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라는 글을 최근 페이스북에 올렸다. 위안부 피해자가 있고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고 위안부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자신이야말로 누가 위안부 피해자이고 누가 위안부 피해자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이용수 할머니에게 상기시킨 것이다. 윤미향의 협박은 한 할머니에 대한 협박 이상이다. 누가 위안부 피해자이고 누가 위안부 피해자가 아닌지 그 경계선이 확정돼 있는 것은 아니라는 암시를 던진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 가진 일관성에 간혹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누구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그 후신인 정의기억연대가 그 문제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들의 오래전 기억이 정확할 수도 없지만 꼬치꼬치 캐묻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면이 있다. 그런 점을 이용해 그들은 할머니들 위에 군림하는 힘을 갖게 됐을 수 있다. 이용수 할머니 이전에 심미자 할머니가 있었다. 심 할머니는 16년 전 정대협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정대협이 정해 ‘기억의 터’ 조형물에 새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247명의 명단에 들지 못했다. 심 할머니는 가해자인 일본의 최고재판소로부터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임을 인정받은 피해자인데도 그랬다. 신이 있어서 신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전이 있어서 신이 있다는 말이 있다. 정대협과 정의연은 말하자면 신전을 운영하는 사제들이었다. 이용수 할머니의 윤미향 비판은 정의연이 더 이상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불편해졌다는 뜻이다. 할머니들을 이용해 먹지만 말고 실질적 도움을 달라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기부금이 자신들을 돕기보다 교육과 홍보에 더 많이 쓰이는 것도 불만이지만 기부받은 돈으로 맨날 교육하고 홍보한다고 하는데 정말 빼돌리지 않고 교육이나 홍보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금기의 자리에 앉혀 놓고 이용하는 것을 그만둬야 한다. 할머니들을 일상의 자리로 내려오게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고 생존하신 분들도 연세가 많다. 살아서 금기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할머니들이 죽기 전에 일본으로부터 보상을 받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심리다. 일본의 보상 문제에 정의연이 대리인 주제에 주인 행세 하며 더 이상 끼어들어선 안 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조선 태종 이방원에게는 형제 살해의 어두운 구석이 있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인 그는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을 죽이고 친형을 즉위시켰다가 물러나게 한 뒤 왕이 됐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태종을 대놓고 비판하지는 못했지만 중국 당(唐)나라 태종 이세민이 친형제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인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을 들어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차가운 군주가 치세에 능한 면이 있다. 이방원 이세민 둘 다 새 왕조 창립자의 아들로 형제 살해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태종과 세종은 음양(陰陽)의 한 묶음이다. 태종이 흘린 피 위에서 비로소 세종이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우광재-좌희정’ 중 오른팔이었던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자는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은 태종 같다.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새롭게 과제를 만드는 태종이었다면 세종의 시대가 올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을 현대판 태종이라고 한다면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박근혜 이명박 두 직전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차가운 면도 함께 연상된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이 이 당선자 발언 후 “지난 3년이 파란만장해서 태종처럼 비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태종이라는 형상에만 문 대통령을 가둬둘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어쨌든 지난 3년간 태종의 모습이었다면 남은 2년은 세종의 모습으로 보이도록 보좌하겠다”고 말했다. 또 “차기 대통령이 세종과 같은 일을 할 것이라 본다”면서 문 대통령 임기 후반부와 차기 대통령의 시기를 세종의 시대로 연결했다. 태종의 부정적 측면을 의식해서 말하다 보니 ‘문재인=태종’의 비유보다 한술 더 떠 ‘문재인=세종’의 비유를 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4·15총선 압승 이후 여권에서 문비어천가가 터져 나오고 있다. 친노(親盧)인 이 당선자도 문비어천가 합창에 합류한다고 했지만 친문(親文)에는 미치지 못한 듯하다. 친문은 문 대통령을 비유한다면 세종에 비유해야지, 태종에 비유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다. ▷유홍준 씨가 2004년 문화재청장 당시 노 대통령을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으로 안내하면서 “규장각을 만든 정조는 개혁 정치를 추진했고 수원 화성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점에서 대통령과 닮은 점이 많다”는 말을 건넸다고 해서 빈축을 샀다. 현직 대통령을 왕조 시대 명군에 비유하는 것만큼 낯간지러운 일도 없다. 그런 비유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역사에 대해 아는 체하고 싶다면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출산하다 숨진 딸을 대신해 외손자를 애지중지 키운 할머니가 있었다. 사위가 재혼하자 할머니는 외손자는 자신이 키우겠으니 두고 가라고 매달리다시피 당부했다. 그러나 사위는 아들을 데려가 버리고는 아들이 할머니를 만나지도 못하게 했다. 사위로서는 아들이 새엄마와 애착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시점에 할머니를 만나고 친엄마의 죽음을 깨닫게 되는 게 아들에게 좋을 게 없다고 여겼다. 할머니는 법원에 면접교섭권을 청구했고 지난해 법원은 외손자가 할머니를 만나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중시해 이를 인정했다. ▷민법에서 면접교섭권은 양육권을 차지하지 못하는 측에 주어지는 최소한의 배려와 같은 것이다. 예전 민법은 ‘자녀를 직접 양육하지 않은 부나 모는 자녀와 면접교섭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다. 면접교섭권을 친권(親權)의 영역으로 봐서 부모에게만 인정했다. 그러나 2016년 12월 조항 하나가 신설돼 추가됐다. 부모 중 자녀를 직접 양육하지 않은 쪽의 조부모는 자기 자식이 사망하였거나 질병, 외국 거주, 그 밖의 불가피한 사정으로 자녀를 면접교섭할 수 없는 경우 가정법원에 손자녀와의 면접교섭을 청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조부모의 면접교섭권이 뒤늦게 인정됐지만 부모의 면접교섭권과는 차이가 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는 면접교섭권을 원칙적으로 허용하되 극히 예외적으로만 불허한다. 반면 조부모는 손자녀와 면접교섭할 수 있게 해달라고 법원에 청구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부모의 이혼은 부모 일방의 사망, 질병, 해외 거주와는 달리 법이 예시한 사유에 들어 있지 않아 부모의 이혼 시 조부모 면접교섭권의 인정은 전적으로 판사의 재량에 달렸다고 하겠다. ▷미국에서는 부모가 이혼하거나 부모 중 한 명이 사망했을 때만이 아니라 부모가 결혼 상태에 있을 때에도 조부모의 면접교섭권을 인정하는 주(州)가 대부분이다. 부모가 생존해 잘 살고 있어도 조부모와 손주가 부모의 방해로 만나지 못한다면 조부모는 면접교섭권을 청구할 수 있도록 권리를 폭넓게 인정한다. ▷요즘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를 키우는 집이 늘어남에 따라 조부모의 면접교섭권을 둘러싼 분쟁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줄어들었다가 다시 3대가 육아에 협력하는 가족으로 변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자식은 안 봐도 견딜 수 있지만 손주 안 보고는 살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손주 사랑이 끔찍한 조부모들이 많다. 더구나 아이가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만나길 원한다면 그 만남의 허용 여부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에 따라 판단할 일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최근 4·15총선 결과를 분석하는 한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어느 분의 질문이 날카로웠다. 세미나 발표자들은 정치학자들이었는데 그는 “정치학자들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위성비례정당이 만들어질 줄 몰랐는가”라고 물었다. 경고는 있었다. 지난해 8월 한국정당학회 토론회에서 영남대 정준표 교수가 알바니아 사례를 거론하면서 위성비례정당 등장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보다 앞서 2018년 11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선거제도 개혁 관련 공청회’에서 경북대 강우진 교수가 비슷한 경고를 보냈다. 다만 대학총장까지 지낸 그 질문자조차도 정치학계가 미리 경고하지 못했다고 느낄 정도로 경고의 목소리는 미약했다. 정치적 의제를 공론화할 적합한 자리에 있는 사람은 신문에 칼럼을 쓰는 정치학자들일 터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위성비례정당을 경고하지 못했다. 어떤 이는 이미 물 건너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계속 거론하며 지역주의에 의존하는 폐쇄적 양당 구조에서 벗어나는 길이 될 것이라는 찬사로 일관했다. 어떤 이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비판했지만 많은 비판 내용 중에 단 하나 위성비례정당에 대한 경고만 없었다. 어떤 이는 아예 이 주제를 무시했다. 위성비례정당의 등장은 굳이 알바니아 사례를 알아야 경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당의 생리를 안다면 전문가든 아니든 웬만하면 다 생각할 수 있다. 필명을 날리는 정치학자들이 새 제도의 허점을 지적하기는커녕 문제가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다니 한마디로 학문의 실패다. 총선에서 봤듯이 정치의 실패로 이어진 학문의 실패다. 한 정치학자는 총선 직후에 쓴 칼럼에서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난 3년간 보수정파에 대한 지지율은 20% 전후에 머물러 있었지만 있지도 않은 숨은 보수를 만들어내며 촛불 집회 이후의 변화된 현실을 부정했던 결과가 오늘날 이런 선거 결과로 이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자답지 못한 안이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대목이다. 총선 직전의 리얼미터와 한국갤럽의 정당지지도 조사에서 미래통합당의 지지율은 각각 29.5%와 23%였다. 총선 직후의 조사에서는 각각 27.7%와 22%였다. 실제 투표에서 통합당은 41.4%를 득표했다. 여론조사 회사 측은 정당지지도 조사는 전 유권자를 모집단으로 하고, 득표율은 투표한 유권자만 모집단으로 하기 때문에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통합당은 41.4%를 득표했지만 투표율은 66.2%에 그치므로 곱하면 얼추 27%의 지지도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더불어민주당은 49.9%를 득표했으므로 33%의 지지도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총선 전후 그 지지도는 50% 안팎에 이르는 것으로 나온다. 문제는 민주당의 지지도는 실제 득표와 비슷한데 통합당만 15∼20%포인트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여론조사 회사들은 지금도 정당지지도 조사를 계속 발표한다. 가짜 뉴스는 가짜 뉴스로 끝나지만 가짜 여론조사는 그것을 인용한 수많은 가짜 분석을 생산한다. 여론조사 결과는 정치 분석의 중요한 기초 자료다. 정치학자라면 가짜 여론조사를 인용해 가짜 분석이나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일본의 정치 여론조사는 어떻게 무려 40∼60%의 높은 응답률을 끌어내는지 알아내서 고작 5∼10% 수준인 한국 정치 여론조사의 낮은 응답률을 제고하는 데 기여할 생각부터 해야 한다. 4·15총선은 코로나19라는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변수로 인해 문재인 정권 3년에 대한 중간평가가 되지 못했다. 민주당을 필요 이상으로 의기양양하게 하는 것도, 통합당을 필요 이상으로 의기소침하게 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주당이 총선 압승을 문재인 정권에 대한 긍정 평가로 여겨 유턴하지 않고 직진하면 중국발 입국 금지를 주저하다 초기 방역에 실패한 것처럼 경제와 안보의 파탄을 피할 수 없다. 통합당이 총선 참패를 정권 견제에 대한 부정 평가로만 여겨 전 국민 긴급재난지원금 반대와 찬성을 오간 ‘샤워실의 바보’ 같은 짓을 계속하면 정권의 폭주를 막을 수 없다. 민주당의 오버슈팅도 통합당의 오버슈팅도 바람직하지 않다. 아니 정치학자들의 오버슈팅이야말로 바람직하지 않다. 정확한 자료에 의해 민심의 분량을 정확히 계산해주는 것이 향후 또 다른 정치의 실패를 막기 위한 정치학자들의 과제일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회의의 의장을 가리키던 프레지던트(president)란 말을 통치 체제의 용어로 처음 쓴 것은 미국이다. 19세기 일본에서 미국의 프레지던트를 번역하면서 대통령이라고 했다. 당시 한자권에서는 통령(統領)이란 말이 쓰이고 있었다. 왕을 갖고 있는 일본의 눈으로 볼 때 그래도 ‘미국의 왕’인데 통령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대(大)자를 달았다. 대통령이 가지는 국가긴급권 등을 고려하면 그 느낌이 아주 부정확하지는 않은 듯하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4가지 긴급권을 갖고 있다. 긴급명령권, 계엄선포권, 긴급 재정경제처분권, 긴급 재정경제명령권이다. 앞의 두 개는 안보적인 위기, 뒤의 두 개는 재정·경제적 위기와 관련된 것이다. 긴급 재정경제명령권은 민주화 이후로는 1993년 8월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때 유일하게 발동됐다. 박정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1972년 ‘경제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8·3 경제조치)이 있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23일 임시국회가 끝나는 다음 달 15일까지도 긴급재난지원금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긴급 재정경제명령권 발동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앞서 4·15총선 과정 중 당시 미래통합당 황교안 대표와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이 정부의 70% 지원에 대해 100% 지원 역공을 펼치면서 긴급권 발동을 요구했다. 그러나 총선 이후 김재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 겸 통합당 정책위의장이 100% 지원에 반대하면서 총선 전 입장을 수정하는 듯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다만 어제 통합당의 비상대책위원장직 제안을 수락한 김종인 씨는 긴급권 발동 요구를 이어갔다. ▷긴급 재정경제명령권을 발동하려면 우선 내우외환·천재지변이나 중대한 재정·경제적 위기가 있고, 다음으로 국회 소집을 기다릴 여유가 없어야 한다. 코로나19로 빚어진 사태가 중대한 재정·경제적 위기라 하더라도 현 상황이 국회 소집을 기다릴 여유조차 없는 때인지는 의문이다. 조건도 맞추지 못한 긴급권 발동이 빚어질까 우려된다. ▷대통령의 긴급권은 국회의 사전 동의를 얻을 필요는 없지만 국회의 사후 승인은 얻어야 한다. 20대 국회 임기가 다음 달 29일로 끝난다. 그다음 날부터 21대 국회가 시작된다. 민주당은 총선에서 위성비례정당과 함께 180석을 얻어 국회선진화법에도 불구하고 국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됐다. 국회 사후 승인도 쉽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새 국회를 긴급권의 사후 승인으로 시작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 가능한 한 긴급권 발동 없이 여야 합의로 해결하는 게 좋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반성도 불필요하게 자학하는 것이 되면 생산적인 반성이 아니다. 이번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의 득표율이 20%나 30%에 그쳤다면 주류 정당으로서는 생명이 끝난 것이니 해체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지역구 의석수에서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득표율은 41.4%에 이르렀다. 비례정당 투표에서도 더불어민주당 계열 두 비례정당의 득표를 합산한 것과 5%포인트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물론 41.4%의 득표는 아깝게 지기에 딱 좋은 수치다. 그래서 지역구에서 대패했다. 그러나 아깝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지는 게 뻔한데도 ‘정신 승리’만 외친 것은 아니다. 총선 전 전망은 코로나19 위기가 문재인 정부의 온갖 실정을 뒤덮으면서 잘하면 통합당이 민주당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정도였다. 다만 한선교의 어처구니없는 비례대표 공천부터 왜 했는지 알 수 없는 세월호 막말과 그 대처까지 최악의 선거 관리가 이어지면서 접전 지역이 대부분 민주당 쪽으로 넘어간 것이 대패의 원인일 것이다. 숨은 보수표가 없었다는 것도 자학적인 분석이다. 이번 총선은 리얼미터와 한국갤럽이 매주 실시하는 정당 지지도 조사가 실제와 얼마나 불일치하는지 보여주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했다. 여론조사에서 지난 3년간 통합당의 지지도는 20% 전후에 머물렀지만 이번 투표에서 40%를 넘겼다. 숨은 보수표가 있었지만 이기지 못한 것일 뿐 여론조사에 반영되지 않은 숨은 보수표는 상당히 컸다. 한 번 하고 마는 선거라면 20%로 지든 30%로 지든 40%로 지든 마찬가지다. 졌다는 사실을 통렬히 비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선거는 한 번 하고 마는 게 아니다. 5 대 4로 진 경기를 5 대 1로 진 것처럼 자학해서는 다음 경기에서 이기기 위한 실효적 분석을 하지 못한다. 불필요한 정도로 자학해서 오버슈팅(overshooting)하면 또 지게 된다. 통합당은 황교안과 김종인의 어울리지 않는 결합으로 총선을 치렀다. 서로 욕할 것 없다. 김종인을 불러들인 황교안이나 황교안이 부른다고 온 김종인이나 똑같다. 황교안은 사퇴의 변으로 ‘화학적 결합이 되지 않았다’는 말을 남겼다. 황교안이 유승민과도 화학적 결합을 못 했는데, 김종인과 화학적 결합을 할 리가 없다. 한배를 탔던 이상 황교안 유승민 김종인 모두 누가 더 책임이 있냐고 따지는 것이야말로 품위 없는 짓이다. 한쪽에서는 통합당이 꼰대당 체질을 벗지 못해 졌다고 비판하고, 한쪽에서는 통합당이 정체성을 훼손하다가 졌다고 비판한다. 진실은 꼰대당 체질을 벗으려 노력했으나 어설픈 중도 흉내로 끝났다는 데 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김종인의 중도 성향이 탐난다 할지라도 일단은 김무성·유승민계와의 화합적 결합이 중요하고, 그런 결합이 이뤄진 상황에서 더 큰 확장을 모색해야 한다. 보수정당의 약점이 계파정치를 할 만한 도량이 없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서 친이계가 친박계를 박해하는 바람에 친박계가 탈당해 친박연대를 만들었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친박계가 김무성·유승민계를 박해하는 바람에 김무성·유승민계가 탈당했다가 김무성계가 먼저 돌아오고 유승민계가 총선을 앞두고서야 뒤늦게 돌아왔다. 이 정도 경험이 쌓이며 불행을 겪었으면 서로 공존하는 정치를 모색할 때도 됐다. 이번 총선에서는 충청 지역의 정진석과 김태흠의 저력이 돋보였다. 인천의 윤상현은 또다시 예상을 뛰어넘었다. 대구에서 김부겸을 이긴 주호영, 부산에서 김영춘을 이긴 서병수도 높이 평가해야 한다. 험지에 차출돼 아깝게 패배한 사람 중에서 오세훈 같은 이는 당선자와 마찬가지로 대우해야 한다. 유승민 홍준표는 출마나 당락 여부와 관련 없이 늘 보수정당의 인재다. 5060세대가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주장도 3040세대 정치인이 해야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들이 중심이 돼 계파와 세대를 뛰어넘는 정치를 해 보인다면 통합당의 미래가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황교안이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나간 것은 패배 뒷면의 수확이다. 선거 결과가 어정쩡해서 남아 있었다면 정말 골치 아플 뻔했다. 아직도 남긴 했지만 비호감 의원들이 대거 공천과 선거에서 탈락한 것도 생각해 보면 나쁠 게 없다. 통합당이 살아나려면 빨리 대선의 깃발을 들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겸손하게 찾아보면 그런 인물이 없지도 않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유럽발 입국자에 대한 전수조사가 처음 시행된 지난달 22일에만 19명의 확진자가 쏟아졌다. 이후 매일 입국자 중에서 적지 않은 확진자가 나왔고 날에 따라서는 신규 확진자의 절반을 차지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할 때 중국발 입국자를 전수조사했다면 어땠을지 가늠할 수 있다. 최소한 수백 명의 중국발 감염자가 들어와 휘젓고 다녔다는 말이 된다. 당시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고 중국발 한국인을 자가 격리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안 듣더니 유럽과 미국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하자 모든 입국자에 대한 자가 격리 조치에 들어갔다. 선진국도 가지 못한 미답(未踏)의 길을 걷는다는 주제 넘는 발상을 하다가 비로소 이제야 다른 나라 비슷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창문 열어 놓고 모기 잡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모기 없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중국인보다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 더 큰 감염원”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발생한 바이러스가 중국인만 감염시키고 중국에 있는 한국인은 감염시키지 않을 리가 없다. 중국인 입국자를 차단하라고 하면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 입국자에 대해서도 자가 격리 등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라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장관이 말꼬리나 잡으면서 책임 회피만 하더니 나중에는 자국민을 입국 금지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라는데 엉뚱하게 자국민 입국 금지 타령을 하니 듣는 쪽은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코로나 지옥을 겪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도 더 일찍 더 철저하게 중국 쪽 입국 관리를 하지 못한 걸 후회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월 31일 중국발 입국을 제한하며 선제적 조치를 취했다고 떠벌렸지만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미 늦은 대응이었던 데다 입국 제한 후에도 미국 시민 등 4만 명이 중국에서 들어와 철저하지 못했다”. 유럽의 감염원이 된 이탈리아도 1월 31일 중국인 관광객 2명이 확진자로 드러나자 즉각 중국발 직항노선의 운항을 중단시켰으나 다른 국가를 경유한 항공편과 인근 국가에서 육로와 해로로 들어오는 중국인 관광객을 막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처음에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 지도자들만큼도 신중하지 못했다. 중국 쪽 창문을 열어놓고 영화 ‘기생충’ 제작진과 파안대소(破顔大笑) 파티를 여는 여유를 부리면서 방역도 외교도, 방역도 경제도 잡겠다고 하다가 된통 당했다. 다행히 현명한 국민들이 열심히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을 씻고 종교의 자유 등 기본권 침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시행한 데다 의사 약사 등 현업의 전문인들이 드라이브스루 검사와 약국 마스크 판매 같은 획기적 아이디어를 내 성공적 방역으로의 대반전을 이뤄냈다. 대대적이고 신속하고 투명한 검사는 정부가 주도한 것이지만 의도가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정부가 초기 방역 실패의 책임을 신천지에 뒤집어씌우려고 마녀사냥하듯 방역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측면이 있다. 그마저도 정부의 의지만으로 된 것은 아니다. 민간 기업들이 메르스 사태 이후 조성된 새로운 기반 위에서 개발해 공급한 신속검사키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정적으로 의료 공백 사태를 막아 치사율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은 역대 정부가 가꿔온 효율적인 건강보험 제도 덕분이다. 한국의 성공적 방역 이후 문 대통령과 외국 정상이 통화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국민과 나라를 대표해 통화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말 잘한 게 있는 정부는 공을 국민에게 돌린다. 대개 숟가락만 얹은 정부가 국민의 공을 가로채려 하고, 적폐몰이를 일삼는 정부가 과거 정부의 공까지 제 것으로 만든다. 경제학 족보에도 없는 소득주도성장을 내세우며 매년 슈퍼 적자예산을 편성해 국가를 빚더미에 앉히고도 성장률을 사실상 1%대로 떨어뜨렸다. 이벤트뿐인 비핵화 협상 뒤에서 북한 김정은은 핵무기 개발과 단거리미사일 시험을 계속해 한반도를 더 위험에 빠뜨렸다. 조국 씨의 장관 임명 강행으로 국민을 우롱하더니 임명을 철회한 후에도 ‘마음의 빚’ 운운하며 다시 우롱하고 있다. 공수처법 관철을 위해 해괴한 선거법을 통과시켜 아이들 앞에 설명하기도 창피한 선거를 치르게 한다. 경제도 안보도 정치도 제대로 못하면서 방역만 잘하는 그런 정부는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코로나19 감염 첫 의사 사망자가 된 허영구 원장(60)은 경북 경산에서 ‘허영구 내과의원’을 수십 년째 해왔다.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으나 경북대 의대를 나와 경산에 정착했다. 지방의 여느 내과병원처럼 할아버지 할머니로 붐비는 병원이었다고 한다. 집과 병원만 오가던 조용한 의사의 삶을 코로나19가 흔들어 놓았다. 경산은 대구와 청도 사이에 있다. 영남대 대구대 등이 몰려 있어 대학생이 많고 취업난 등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을 신천지가 파고드는 곳이었다. ▷안경숙 경산시 보건소장은 “보건소가 코로나19 환자를 담당하느라 일반 환자 진료를 못 하는 상황에서 대신 진료를 부탁하면 잘 받아주셨고, 공무원이 자가 격리자의 증세를 적어서 가면 귀찮은 일인데도 기꺼이 대리 처방을 해주셔서 고마웠던 분”이라고 기억했다. 박종완 경산시의사회장은 “코로나19 감염이 확산될 때 선별진료소에서 검체 검사를 하겠다는 뜻을 내비쳤고 다른 젊은 의사들이 먼저 선별진료소에 투입돼 자신의 순서가 오기를 기다렸다”고 회고했다. ▷허 원장의 부인에 따르면 그는 2월 26, 27일경 코로나19 환자를 진료하면서 환자의 상태를 열심히 듣다가 감염이 된 것 같다고 한다. 평소 환자의 증상과 관련된 것이라면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 부인의 전언이다. 그는 지난달 18일 근육통으로 경북대병원 응급실을 찾았다가 다음 날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이후 상태가 급속히 악화됐고 지난달 23일 인공호흡기를 달았으나 3일 사망했다. ▷코로나19와의 싸움의 최일선에는 의료진이 있다. 코로나 전담 병원이나 대형병원의 응급실만 최전선인 것이 아니다. 감염자들은 대개 처음 가벼운 증상이 나타날 때 1차 진료기관부터 찾아간다. 1차 진료기관이야말로 코로나19의 기습을 당하기 쉬운 위험천만한 최전선이었던 것이다. 허 원장은 그곳에서 코로나19의 확산을 막다 유명을 달리했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 앞에서 삶의 불합리성을 봤다. 전염병의 위험은 무작위다. 누가 감염될지, 감염된 누가 죽을지 모른다. 작품 ‘페스트’ 속의 의사 리외는 불합리한 전염병과 싸우는 유일한 길은 품위(decency)를 잃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 품위가 뭐냐고 묻자 리외는 “내 일을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환자가 감기 증세만 보여도 슬금슬금 피할 판에 허 원장은 더 열심히 듣고 도움을 주려 했다. 3일 기준 확진자 중 의료인이 241명이나 된다. 고인을 포함해 전염병의 무작위한 위험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기 일을 해온 모든 의료진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여론조사 회사는 자신이 한 조사를 믿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2018년 6·13지방선거에서 광역의회 비례대표 정당별 득표는 자유한국당이 27.76%였다. 그러나 선거 직전인 11, 12일의 리얼미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의 광역의회 비례대표 정당지지율은 한국당의 경우 18.7%로 개표 결과와 무려 9%포인트의 차이가 났다. 리얼미터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갤럽은 광역의회 비례대표 정당지지율을 조사한 것은 아니지만 정당지지도 조사를 매주 했다. 지방선거 1주일 전의 정당지지도 조사에서 한국당 지지도는 11%였다. 이 수치와 한국당의 광역의회 비례대표 득표 27.76%는 무려 16.76%포인트 차이가 난다. 정당지지도와 광역의회 비례대표 정당지지율은 다른 것이지만 이 정도 격차가 나면 정당지지도 조사는 의미 없다. 지상파 방송 3사가 칸타퍼블릭 코리아리서치센터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광역단체장 여론조사를 보면 실제 투표 결과와의 차이가 더 크다. 여론조사는 당시 지방선거를 1주일여 앞둔 6월 2일부터 5일까지 실시됐다. 서울에서는 박원순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49.3%, 김문수 한국당 후보가 13.6%, 안철수 바른미래당 후보가 10.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김 후보가 약 10%포인트 오른 23.34%, 안 후보가 약 9%포인트 오른 19.55%를 얻었다. 박 후보는 3.5%포인트 오르는 데 그쳤다. 지방에서는 차이가 더 컸다. 대구에서 권영진 한국당 후보는 25.4%포인트를, 부산에서 서병수 한국당 후보는 16.8%포인트를 더 얻었다. 대부분의 한국당 후보가 여론조사보다 훨씬 큰 지지를 받았다. 의미가 없는 여론조사의 수준을 넘어 의미를 왜곡하는 여론조사였다고 할 수 있다. 2018년 6·13지방선거 전에는 2017년 대선이 있었다. 대선이 끝난 이후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의 용역으로 2016년 4월 12일부터 2017년 5월 3일까지 심의위에 등록된 801개 대선 여론조사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가 나왔다. 그에 따르면 전화면접에 비해 ARS 방식에서 문재인 후보 지지율이 예외 없이 더 높게 나왔다. 또 무선 ARS 방식만 사용한 경우가 유무선 혼용 ARS 방식보다 문 후보 지지율이 대체로 더 높게 나왔다. 지난달 21일 리얼미터가 서울 종로구에 출마한 이낙연 민주당 후보와 황교안 미래통합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이 후보가 50.3%, 황 후보가 39.2%의 지지율을 얻었다. 이 조사의 다른 설문에서 응답자의 무려 70.2%가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대선 당시 득표율은 41.08%, 종로구에서는 41.15%를 얻었다. 종로구의 투표율이 77%였기 때문에 여론조사에서 문 후보 지지자들은 32% 정도가 포함되는 것이 적절하다. 무려 2배가 넘었다. 리얼미터가 의도적으로 이런 편향을 방치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이 후보가 황 후보보다 높게 나온다. 다만 여론조사의 실태에 비춰 보면 샘플링(sampling)의 체계적 왜곡으로 실제보다 더 높게 나오는 것일 수 있다.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진 집단이 응답을 선호하고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집단이 응답을 선호하지 않을 경우 한쪽으로 치우친 샘플이 나오기 쉽다.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이런 경향이 현저히 강화됐다. 여론조사의 정확성이 전 세계적으로 떨어졌지만 우리나라처럼 심각한 경우도 드물다. 여론조사 회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현재의 조사비용이나 조사기법으로는 대표성 있는 샘플을 얻기가 어렵게 되자 아예 자포자기 상태에 이른 것이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누구나 뻔히 알 수 있는 설문 조항의 편향이나 샘플링의 편향조차도 방치하면서 투매하듯 결과를 던져버리는 것일 수 있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4월 창원 성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선거 1주일 전 여론조사로는 여영국 정의당 후보가 강기윤 한국당 후보를 24.1%포인트 차로 앞서는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 결과는 강 후보가 거의 따라잡았다. 최악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실제 득표율과 여론조사 결과 사이에 큰 차이가 난다면 있어서 없는 것만 못한 여론조사를 어찌할지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유럽을 여행할 때 유럽이 하나로 느껴지는 순간은 유로화를 사용할 때와 유럽 내에서 국경을 통과할 때다. 유로화를 사용하다가 유로존 국가가 아닌 스위스만 가도 스위스프랑으로 환전해야 하는 불편이 크다. 솅겐조약국 사이에서는 통상 여권 검사도 세관 신고도 하지 않는다. 영국은 ‘브렉시트’ 전부터도 솅겐조약에 가입하지 않아 유럽 대륙에서 영국으로 건너갈 때는 출입국 절차를 따로 밟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끼어 있는 룩셈부르크에는 솅겐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1985년 솅겐조약이 체결됐다. 이미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는 베네룩스 조약으로 국경 통제를 철폐한 상태였다.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베네룩스 국가를 대표한 룩셈부르크가 모여 5개국의 국경 통제를 철폐하기로 한 것이 솅겐조약이다. 1999년 암스테르담 조약에 의해 영국과 아일랜드를 제외한 유럽연합(EU) 국가는 솅겐조약 가입이 의무화됐다. 현재 26개 유럽 국가가 가입해 있으며 약 4억 명이 적용을 받고 있다. ▷유럽은 솅겐조약 때문에 이탈리아인이 다른 국가로 가거나 다른 국가 주민이 이탈리아로 가는 것을 통제하기 어렵다. 그것이 이탈리아에서 급속히 퍼진 코로나19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주된 이유다. 이제 유럽 전역에 코로나19 방역 비상이 걸리면서 하나의 유럽이 국경선을 따라 거울에 금 가듯 쩍쩍 갈라지고 있다. 아예 국경을 폐쇄한 나라도 있고 물자 이동은 그대로 두되 인접 국가로 출퇴근하는 근로자들의 통행만을 허용해 인적 이동을 최소화한 나라도 있다. ▷솅겐조약의 위기는 유럽 각국이 정치적으로는 독립국이면서 독자적인 국경 통제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발생한 유럽만의 특이한 문제다. 과거 유로존 채무 위기도 비슷하다. 그리스 등 경쟁력이 떨어지는 국가들이 유로존 국가가 되면서 흥청망청 돈을 빌려 쓰다가 채무에 허덕이게 됐으나 자국의 화폐를 유로화로 바꾸는 순간 환율 통제권을 상실했기 때문에 자국 화폐 가치를 떨어뜨려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이 막혀버려 채무 위기가 발생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전국 봉쇄 조치로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자 국민들이 발코니에 나와 연주하는 ‘발코니 콘서트’라는 새 풍속이 생겼다. 인생을 즐기는 낙천적인 국민다운 반응이지만 그들이 주로 합창하는 국가(國歌)는 “죽을 준비가 돼 있다. 함께 뭉치자”는 등 그 내용이 자못 비장하다. 하나의 유럽을 지향하지만 위기는 국가 단위로 먼저 느낀다. 이번 위기는 임시적인 것이겠지만 유사한 위기에 대비해 솅겐조약을 유연화할 새로운 숙제가 유럽에 주어졌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방역은 지금 와서 보니 과학이라기보다는 정책적 결단인 듯하다. 대한의사협회도 대한감염학회도 중국인 입국 금지가 방역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정책 결정자에게 권고할 뿐이다. 그 권고를 받아들이느냐 마냐는 정책 결정자에게 달렸다. 한국에서 확진자가 급증하기 시작할 때 모리셔스가 한국인 신혼부부들을 예고도 없이 허름한 숙소에 격리시키고 돌려보냈다. 처음에는 괘씸한 나라라고 여겼으나 이어지는 각국의 유사한 조치를 보면서 인도양의 작은 섬나라도 알고 있는 방역의 기본을 우리만 몰랐던 것은 아닐까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약 110개국이 한국의 입국을 금지하거나 제한했다. 가장 뼈아픈 것은 중국이 친 뒤통수다. 우리 외교부가 항의하자 중국 관영 환추시보는 “외교보다 중요한 것은 방역”이라고 응수했다. 일본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방일(訪日) 연기를 확정하자 즉각 중국인 입국을 제한했다. 그동안 중국인 입국은 막지 않으면서 한국인 입국만 막는 것은 일관성이 없어 하지 않았던 한국인 입국도 함께 제한했다. 방역은 매정한 것이다. 우리만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방역 능력이 없는 국가들이 한국인 입국 금지라는 투박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말한 다음 날 호주가 한국인 입국을 금지했다. ‘2019 세계 보건안보지수’에서 호주는 한국보다 5계단 높은 세계 4위다. 세계 1위는 미국이다. 미국이 방역 능력이 다른 나라보다 모자라 중국인 입국을 금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외교는 세련돼야 하지만 방역은 투박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방역은 국방과 비슷하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고 골든타임을 놓치면 국민이 생명을 잃는다. 실제 그랬다. 한국은 평균 수준의 방역을 했을 경우에 비해 현재까지 최소한 수십 명은 잃지 않을 수도 있었던 목숨을 잃었다. 일본이 뒤늦게나마 중국인 입국을 강력히 제한하자 중국은 별 말 없이 양해했다. 그것은 중국보다 바이러스에 덜 오염된 일본이 가진 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이 오염이 심해져 이런 권리도 갖고 있지 못하다. 확진자의 절대 수로 보면 중국보다 훨씬 더 낫지만 인구 비례로 보면 중국만도 못하다. 우리로서는 덜 오염된 일본의 조치에 맞대응하려면 그 전에 더 오염된 중국의 조치에 먼저 맞대응을 했어야 한다. 그러지 않았다. 방역은 외교처럼 하고 외교는 방역처럼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그제 “한국이 방역의 세계 모범이 될 수 있다”며 뭐가 그리 급한지 미리 앞서서 자화자찬했다. 나중에 방역이 잘 끝났어도 방역을 책임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은 낯 뜨거운 일인데, 확진자가 신천지 관련을 빼도 세계 3, 4위권인 나라가 방역의 세계 모범 운운하니 중국의 시진핑 영웅 만들기 시도를 남 일처럼 볼 것도 아니다. 드라이브 스루 검사는 인천의료원 의사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약국을 통한 마스크 판매는 경북 문경의 한 약사의 청원에서 시작됐다. 코로나19 신속 검사키트를 개발한 것은 민간기업들이다. 한국판 ‘칼레의 시민들’은 정부가 엎지른 물을 최대한 잘 수습하고 있다. 정부만 궁지에 처한 이웃 나라를 돕는 것과 자국민을 위해 꼭 필요한 방역을 하는 것을 구별해 결정적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평균 이상이었을 것이다. 박 장관은 감염원의 정확한 목록도 내놓지 않은 채 “감염의 가장 큰 원인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라고 했다. 그가 언젠가는 감염원의 정확한 목록을 내놓기 바란다. 신천지 감염원도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꼭 밝혀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의 판단처럼 설혹 감염의 가장 큰 원인이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방역 책임자는 중국인 입국 금지와 함께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을 격리하는 더 일관성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을 반성했어야 한다. 중국인이든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든 중국발 모기(바이러스)가 원인이라는 것은 과학자에게 물어볼 것도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창문을 아무리 틀어막아도 비집고 들어오는 모기가 있어 팬데믹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으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창문을 최대한 막는 것이 사람이 할 바를 다하는 방역의 진인사(盡人事)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일본은 섬나라다. 한국은 반도 국가이지만 북한으로 인해 대륙과 차단돼 섬나라나 다름없다. 항공만 막으면 대부분의 외국인 입국을 차단할 수 있다. 이탈리아는 다르다. 유럽연합(EU) 국가는 국경 이동을 자유롭게 한 솅겐 조약 때문에 엄격한 출입국 통제가 힘들다. 이탈리아는 코로나19 사태 초기에 우한에서 온 중국인 부부 관광객이 확진자로 밝혀지자 중국발 직항기의 자국 착륙을 금지했지만 잠재적인 감염원이 인근 유럽 국가를 통해 들어오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이탈리아 밀라노는 세계 의류·섬유 산업의 중심지다. 패션 브랜드 회사의 하청을 맡은 업체 중에서 중국인 업자가 인건비가 싼 중국인 근로자를 고용해 운영하는 곳이 적지 않다. 이탈리아는 유로존 채무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국 자본의 도움을 받으면서 중국인의 진출을 많이 수용했다. 서유럽 국가 중에서 중국 일대일로(一帶一路) 계획에도 가장 적극적인데 13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중국까지 여행한 마르코 폴로가 두 나라 협력의 상징이다. ▷이탈리아 최초의 코로나19 확진자는 밀라노에서 남동쪽으로 70km 떨어진 코도뇨에 사는 38세 남성이다. 이 남성은 중국을 다녀온 적이 없다. 그에게 바이러스를 전달한 0번 환자로 현지 중국인이 의심을 받았지만 현지 중국인 중에서 확진자는 나오지 않았다. 0번 환자는 국적은 알 수 없지만 인근 유럽 국가에서 이탈리아로 넘어왔다가 돌아간 감염자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 다음으로 확진자가 많은 나라는 한국이었으나 어제부터는 이탈리아가 한국을 추월하기도 했다. 이탈리아가 바이러스의 온상이 된 것은 알 수 없는 0번 환자가 휘젓고 다녔는데도 상당 기간 발견하지 못해 방역의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 주된 원인이다. 중국이 지리적으로 멀어 코로나19에 대한 경각심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고 뺨키스 등 라틴 특유의 친밀감을 표시하는 인사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롬바르디아 등 15개 주에 중국 우한과 비슷한 ‘봉쇄’ 조치가 내려졌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에 코로나19를 확산시킨 감염원의 상당수가 이탈리아를 다녀온 사람으로 드러나고 있다. 유럽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확진자가 크게 늘면서 팬데믹으로 가는 양상이다. 유럽 국가들은 의료기술도 높고 국가의료보험제도도 잘 갖추고 있지만 그 효율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한국과 일본은 의료기술도 높고 국가의료보험제도도 잘 갖추고 있고 그 효율성도 높다. 미국은 의료기술은 높지만 국가의료보험제도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 지역의 방역 결과가 마지막에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대구에서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지정된 두 병원은 대구의료원과 대구동산병원이다. 대구의료원은 공공병원이지만 대구동산병원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돈 한 푼 지원받지 않는 민간병원이다. 대구동산병원은 대구 사정이 급박해지자 코로나19 전담병원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기존 입원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이송하거나 퇴원시켜 병원을 비워야 하는 데다 소속 의료진을 코로나19와의 싸움에 내모는 어려운 결정이었다. ▷동산병원은 지난해 4월 대구 달서구 계명대 성서캠퍼스에 계명대 동산병원을 새로 지어 이전하고 대구 중구의 기존 동산병원은 대구동산병원이라고 해서 200개 병상만 유지하고 있다. 과거 동산병원은 1000개 병상까지 운영한 적이 있다. 전국 각지에서 힘을 보태려는 의료진이 모여들었다. 대형병원들이 빠듯한 진료 일정을 쪼개 일부 의료진을 빼내 보냈다. 개인 병원 문까지 걸어 잠그고 대구로 향하는 개업의도 적지 않았다. 지난 주말에는 의사 출신인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부부도 합류해 힘을 보탰다. ▷최근 네이버의 한 카페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몇 년 전 첫아이가 하늘나라로 가기 전 동산병원 어린이중환자실을 수없이 드나들었습니다. 서울 유명 병원에서 안 좋은 일을 수없이 겪고 동산병원으로 갔습니다. 동산병원에선 가만히 누워만 있는 우리 아이를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이 얼마나 예뻐해주고 기도해주던지…. 아이가 나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럼에도 그곳에서 우리 아이가 너무 사랑을 받았기에 제게 동산병원은 은인과 같아요.” ▷의사가 단지 돈 잘 버는 직업이 아니라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고 있는 곳이 동산병원이다. 동산병원의 역사는 구한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선교사들이 대구에 와서 대구제일교회를 세우고 의료기관으로 대구 제중원(濟衆院)을, 교육기관으로 계명학원을 설립했다. 대구 제중원이 오늘날 동산병원이다. 120년의 역사를 갖고 있기에 단지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병원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는 병원인 듯하다. ▷‘충북 진천 시민’이라고만 적은 익명의 기부자는 동산병원을 지정해 예쁘게 포장한 샌드위치 수십 개를 보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대구의 한 샌드위치 가게가 주문을 받아 만들어 보낸 뒤 인터넷에 사진을 올려서 알려졌다. 큰 기부금이 아니더라도 곳곳에서 섬세한 배려가 담긴 정성들이 대구를 응원하고 있다. 대구 시민들이 홀로 싸운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 그들도 좀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한국 천주교 모든 교구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사를 일시 중단했다. 한국은 신부가 들어오기 전부터 천주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난 나라다. 하지만 미사는 신부 없이는 드릴 수 없어 최초의 미사는 중국 베이징교구의 주문모 신부가 파견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1795년 4월 5일 부활절에 서울 가회동에 있는 신자의 집에서 최초의 미사가 몰래 거행됐다. 그 이후 조선 왕조의 박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사가 중단된 적은 있지만 한국의 모든 곳에서 자발적으로 미사가 중단된 것은 처음이다. ▷개신교회의 예배 중단과 천주교회의 미사 중단은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가 있다. 개신교 예배는 설교가 중심이고 천주교 미사는 성찬(聖餐)이 중심이다. 천주교에서는 우리가 흔히 먹고 마시는 빵과 포도주라 할지라도 신부가 축성(祝聖)하면 그것이 예수의 몸과 피가 된다. 이런 성체(聖體)와 성혈(聖血)을 먹고 마시는 의식이 미사의 중심이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걸 상징으로 보는 경향이 점차 강해지고 예배의 중심도 설교로 옮겨갔다. ▷많은 개신교회들이 오프라인 예배를 온라인 예배로 대체하고 있다. 설교가 중심인 예배는 온전하지는 않을지라도 온라인 예배로도 어느 정도는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미사는 신부가 축성한 빵과 포도주를 일일이 신자들에게 배달하지 않는 한 온라인으로는 불가능하다. 천주교회는 그 대신 대송(代誦)을 권하고 있다. 대송은 신자가 미사 참석 등 정해진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대신해 하는 묵주기도 성경읽기 등을 말한다. 대송은 신행(信行)일 뿐이다. ▷예배와 미사의 중단은 교회의 정체성 유지에 어려움을 초래할 뿐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힘든 상황을 가져올 수 있다. 온라인으로 헌금하는 제도를 정착시킨 선진적인 교회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이 입구에 헌금함을 마련해 놓거나 예배나 미사 시간에 헌금주머니를 돌린다. 몇 주씩 예배와 미사를 중단하면 재정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자발적으로 예배와 미사를 중단하고 있다. ▷성경에 ‘모이기에 힘쓰라’고 나와 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모이면 모일수록 교회도 피해를 입고 교회 밖도 피해를 보는 난감한 상황이다. 박해를 피해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숨어서 미사를 드릴 때도 없던 어려움이다. 교회 절기로는 26일부터 사순절(四旬節)이다. 교회가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는 마음으로 국민이 처한 어려움을 나누고 그 극복에 동참하는 노력이 결실을 거둬 40일 이후에는 기쁨의 부활절을 맞을 수 있기를 바란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역병이 돌 때는 조선시대 임금들도 함부로 웃지 않았다는데 우한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던 날 청와대에서는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영화 ‘기생충’ 팀과 짜파구리를 끓여 먹으며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우한 코로나가 돌기 시작하자 김정숙 여사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라졌다는 말이 들렸다. 다들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타면 주변에서 말려도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나타나 예상했던 이상을 보여줬다. 고작 짜파구리 만드는 데 이연복이라는 유명 셰프를 대동하고 재래시장에 들러 장까지 봤다. 경제만 거지꼴이 아니고 나라가 거지꼴이다. 우한 코로나 확진자가 중국 다음으로 많다. 크루즈선 확진자 약 700명을 포함한 일본보다 많다. 크루즈선 확진자를 빼면 크루즈선 확진자 수 이상 차이 나는 압도적인 2위다. 한국이 또 하나의 우한(another Wuhan) 취급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은 주민 시위에 관광 온 한국인들을 자기들 돈으로 전세기를 마련해 돌려보냈고, 모리셔스에서는 신혼여행을 간 부부들이 느닷없이 격리돼 허름한 숙소에 갇혔다. 중국 산둥성은 한국인 입국자를 강제 격리했다. 미국 등은 한국 여행경보를 최고로 올렸다. 한 가지도 제대로 못 하면서 두세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화를 불렀다. 기생충 파티는 미뤄도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관심이 식기 전에 하고 싶어 안달이 났던 모양이다. 우한 코로나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자 그새를 참지 못하고 ‘종식’을 거론하며 “이제 경제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결국 방역도 경제도 망치게 했다. 방역은 첫째도 감염원 차단이고, 마지막도 감염원 차단이다. 미국은 이 단순한 원칙에 따라 중국인 입국을 금지했고 크루즈선 확진자를 뺀 자국민 확진자를 30명대에 잡아두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지 않아 2, 3위 확진국이 됐다. 일본이야 도쿄 여름올림픽을 앞두고 있어 중국의 협조를 구한다는 국민적 대의(大義)가 있다. 한국으로서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찾아주면 좋지만 왜 조만간 꼭 와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미국은 중국인 입국을 차단하면서도 빌 게이츠 같은 민간 기업인이 중국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우리는 위정자들이 궁지에 처한 중국을 돕는 것과 방역을 위해 중국인 입국을 차단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 결과 우한 꼴이 나고 결국 중국에 마스크 보내는 도움조차 어려워졌다. 신천지 대구교회의 감염 실태가 드러나고 있으나 역학 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신천지 교주 형의 장례식이 청도대남병원에서 치러진 사실을 고리로 양쪽을 관련짓는가 싶더니 흐지부지다. 질병관리본부는 감염자가 많아 검사와 치료에 주력하겠다고 한다. 추적해서 찾아봐야 감염원이 중국인이나 중국인으로부터의 2, 3차 감염자로 나온다면 정부만 곤란해지는 상황이다. 신천지에서 더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중국으로부터의 입국 절차를 강화한 후에도 입국자가 10만 명을 넘었다. 60∼70%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잠재적 감염원으로는 천문학적일 정도로 많은 숫자다. 정부는 중국 입국자 중 20%가량이 한국인이고 이런 한국인이 오히려 더 ‘밝혀지지 않은 감염원’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한국인은 추적이 가능하다. 중국인은 추적이 어렵다. 방역을 아예 포기하면 모르되 방역을 한다면 이제라도 중국인 입국을 막아야 한다. 문 대통령은 뒤늦게 전문가 간담회라는 걸 열었다. 중국인 입국 금지 불가를 인정받기 위한 자리였다. 중국인 입국 금지를 수차례 건의한 대한의사협회는 간담회에 초청받지 못했다. 정부 눈치를 보는 전문가들은 우한 코로나가 너무 많이 퍼져버려서 중국인 입국을 막아도 소용없다고 주장했다. 왜 그렇게 많이 퍼져버렸는지,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추경은 해야 한다. 하지만 추경을 요구하는 자세가 고약하다. 중국 다음 가는 최악의 방역 실패에 사과 한마디가 없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당 최고회의에서 우한 코로나 사태 악화에 대해 송구하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대통령 대신 할 수 있는 말도 아니고 회의석상에 앉아서 무성의하게 할 수 있는 말도 아니다. 추경에 필요한 돈은 국민 주머니에서 나온다. 문 대통령이 정중히 사죄하고 추경을 당부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질병은 과학의 대상이다. 과학적으로 진단하고 과학적으로 치료할 대상이다. 그러나 인류는 흔히 질병을 종교나 문학의 용어로 표현해 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질병을 신의 진노로 여겼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 때 유럽의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여겼다. 20세기의 암에 비견될 수 있는 19세기 결핵은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사랑의 질병으로 미화되기도 했다. 문학 속 비련의 주인공은 종종 결핵환자로 등장했던 것이다. 19세기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역병이 있었으니 콜레라다. 콜레라는 1800년 이전까지는 인도 벵골 지방의 풍토병에 불과했으나 인도를 식민지배한 영국이 중국 광둥에 그 병원균을 실어왔고 결국 조선에까지 전파됐다. 1821년 조선에 처음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죽은 사람이 도성에서만 20만 명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고 시골은 그 수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한다. 조선 왕조는 사악한 기운 때문에 콜레라가 발생한다고 여겨 콜레라가 발병하면 죄수를 석방하는 등의 방법으로 하늘의 노여움을 풀려고 했다. 천주교와 동학 같은 종교가 민중 사이에 파고드는 데는 그 앞에서 인간이 완전한 무력감을 느낀 콜레라에 대한 공포도 큰 역할을 했다. 콜레라의 원인이 세균으로 밝혀진 것은 1880년대다. 이때부터 인류를 괴롭힌 병원균이 하나씩 과학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구한말 지석영이 일본에서 배운 종두법으로 천연두를 치료하기 시작한 것도 1880년대다. 그럼에도 질병을 은유적으로 다루는 오랜 습관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1980년대 에이즈가 확산되자 서구의 보수주의자들은 ‘성의 쾌락을 도착적으로 추구하다 신의 진노를 산 것’으로 여겼다. 에이즈가 동성애를 통해 많이 확산됐기 때문에 그런 은유가 가능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에이즈 치료의 길을 연 것은 도덕적 방종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과학적 진단에 의한 에이즈 치료제의 개발이다. 에이즈가 소멸하는 질병이 되고 있는 지금 그들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돌아선 것은 1978년이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의 굴기(굴起)는 중국발 전염병의 굴기이기도 하다. 사스는 2002년 대유행을 했고 지금 우한 폐렴이 그 이상의 대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스는 닭을 사육하는 더러운 환경에서 인간에게 전파된 것으로 여겨진다. 우한 폐렴은 가축이 아닌 야생동물을 함부로 먹는 식습관에서 비롯됐다는 추정이 있다. 우한 폐렴 사태를 두고 프랑스의 어느 신문은 ‘Alerte jaune(황색 경보)’이라고 칭했다. 서양에서 황화(黃禍)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죄와 벌’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전 세계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번지는 어떤 무시무시한 역병의 희생물이 될 운명에 놓이는 꿈을 꾼다. 도스토옙스키가 염두에 둔 것은 콜레라였다. 에이즈 때는 아프리카 기원을 문제 삼으며 흑화(黑禍)론이 일었다. 황화론이나 흑화론은 서양인의 나쁜 버릇 같은 것이다. 서양인의 눈에는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이 모두 비슷하게 보인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묘한 입장에 빠져 있다. 그들은 중국인들처럼 바이러스 숙주 취급을 당하는 데 기분 나빠하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또 중국인들을 바이러스 숙주 취급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중국인이 세계 시민이 될 만한 위생관념을 갖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조차도 19세기에 시궁창이 만연한 도시 환경이 콜레라의 온상이 됐다. 나라가 발전하면서 위생관념도 발전한다. 어느 나라나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근대화한다. 콜레라를 세계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영국 자신이다. 중국발 전염병도 중국이 세계의 물가를 낮춰준 긍정적 앞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부정적 뒷면이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을 통해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시진핑은 중국을 마오의 1인 독재 시대로 되돌리려 한다. 우한 폐렴은 그 과정에서 공안통치의 강화로 확산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봉쇄된 도시에서 사투를 벌이는 중국 인민의 치열한 노력에 인류애적 차원의 성원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질병은 질병일 뿐이다. 중국인을 도와서 하루라도 빨리 전염병을 극복하는 것이 모두가 황화의 잘못된 은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윤석열 검찰총장의 지시로 이뤄진 최강욱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 기소에 대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감찰 운운하면서 정권이 최강욱 기소를 막는 데 총력을 기울인 모양새가 됐다. 조국 아들에게 허위 인턴활동확인서나 써준 ‘천하의 잡범’(진중권 표현) 최강욱이 대단한 인물이라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새로 짜인 추 장관-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 라인이 윤 총장을 중간에 두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려고 실전처럼 막아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권이 진짜 걱정하고 있는 것은 유재수 비리 의혹과 울산시장 선거공작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을 거쳐 임종석 전 비서실장과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는 상황이다. 윤건영 전 국정기획상황실장, 김경수 경남지사, 송철호 울산시장도 걸려 있다. 시험 가동의 결과는 100% 만족스러운 게 아니어서 감찰 운운하는 협박이 나왔겠지만 윤 총장 쪽도 이 지검장이 최강욱 기소안 결재를 깔아뭉개는 사보타주를 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최강욱을 기소했을 정도니 앞으로 수사가 첩첩산중이다. 백원우의 이름이 검찰 수사에서 자주 거론되자 임종석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잽싸게 사라졌다. 그러다 군사정권 시절에도 보지 못한 파렴치한 검찰 물갈이 인사가 끝날 때쯤 다시 더불어민주당에 얼굴을 드러냈다. 손발이 잘린 윤 총장이 수사를 더 지휘해 봐야 자신에게까지는 칼날이 미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 듯하다. 임종석의 웃음에서 바야흐로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하지 못하는 계급이 태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강욱은 기소된 직후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겼다. 향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출범하면 자신을 기소한 윤 총장을 공수처가 수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에 불리한 사이비 연동형 비례대표제까지 해주면서 군소정당을 끌어들여 공수처법을 통과시킨 이 정권의 사람들이 공수처를 어떻게 활용하고 싶어 하는지 그 내심을 보여주는 말이다. 공수처는 고위공직자에 대해 누구를 수사하고, 누구를 수사하지 말지를 결정할 뿐 아니라 고위공직자 중 검사와 판사에 대해서는 수사할 권한을 넘어 기소할 권한까지 갖고 있다. 공수처가 그 존재를 각인시키는 길은 우선적으로 검·판사를 수사해 기소까지 하는 것이다. 정권의 뜻을 거스른 수사를 한 검사들이 공수처의 제1호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 최강욱의 말은 검찰 물갈이로도 모자라 검사들을 향해 조심하라는 협박장을 보낸 것이나 다름없다. 공수처의 제2호 수사 대상은 판사들이 될 수 있다. 김경수 항소심 재판부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2차례나 선고를 연기했다.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유재수 감찰 무마 혐의가 죄질이 나쁨에도 부인 정경심 씨가 구속돼 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기각했는데 정경심 재판부는 정 씨의 보석 석방을 고려하고 있다. 판사들도 굳이 정권에 밉보이면서까지 정의를 관철하려 하지 않는다. 김경수 재판이야 허익범 특검이 상대하고 있지만 조국 정경심 최강욱 재판에서 물갈이된 검찰이 공소 유지나 제대로 할지 의문이다. 조국과 그 가족의 비리가 터져 나올 때 그들을 신성(神性) 가족처럼 취급하는 지지자들의 해괴한 정신 상태를 경험한 바 있다. 그런 정신 상태로부터 귀태 같은 공수처가 태어났다. 고위공직자 수사를 독점하게 된 공수처는 정권의 반대자들은 가혹하게 다루면서 다른 한편으로 당성(黨性)만 좋으면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노멘클라투라를 만드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검경수사권 조정은 경찰권의 충분한 분산이 이뤄지면 대체로 법치의 모범국가들을 따라가는 개혁이다. 김학의 불기소 같은 일은 이번 조정으로 방지할 수 있고 오히려 경찰판 김학의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반면 공수처는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다. 남들이 다 하는 제도에서나 잘할 생각을 해야 한다. 형사사법제도같이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에서는 더욱 그렇다. 모자란 것들이 꼭 검증되지 않은 새것으로 하면 잘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공수처는 보수 정권이 장악해도 진보 정권이 장악해도 악이다. 그것이 악인 것은 처음 장악하는 쪽이 20년, 혹은 그 이상 집권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수처를 막지 못하면 올해는 후대에 2020년 체제라고 불릴 사악한 체제가 출범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자유한국당은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완패했다. 더불어민주당이 법안을 국회선진화법이 정한 절차대로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걸 물리적으로 막은 것부터가 잘못됐다. 패스트트랙 법안을 본회의에서 처리할 때도 이를 물리적으로 막겠다고 지금 여당이 과거 야당일 때 했던 추태를 재연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다. 민주주의의 숫자는 5분의 3이 아니고 2분의 1이다. 국회선진화법은 5분의 3의 합의를 표결의 원칙으로 하는 세계에서 드문 법이다. 5분의 3쪽만 보면 더 많은 다수의 합의를 요구하는 좋은 법인 것처럼 보이지만 5분의 2쪽을 보면 2분의 1도 안 되는 소수가 2분의 1 이상 다수의 의사 관철을 막는 나쁜 법이다. 다만 국회선진화법은 패스트트랙이란 절차가 있어서 최종적으로는 2분의 1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위헌 시비를 벗어났다. 패스트트랙은 그 말의 일상적 의미와는 달리 신속처리와는 거리가 멀다. 어느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건 길게는 1년까지 그 법안을 심사숙고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심사숙고는커녕 양대 정당이 싸우기만 하다가 막판에 여당이 군소정당과 야합해 표 대결로 끝냈다. 날치기 공세가 반복되고 날치기를 막는다는 명분의 몸싸움도 반복됐다. 국회선진화법이 국회를 식물국회로 만든다는 점은 입증이 끝난 것이지만 이번에는 패스트트랙이 가동되면 국회는 다시 동물국회로 돌아간다는 점도 입증됐다. 국회선진화법의 5분의 3은 세계에서 드물게 가중(加重) 다수제를 채택한 미국 상원의 3분의 2를 어설프게 흉내 낸 것이다. 미국 상원에서조차 3분의 2의 합의를 요구하는 경우는 예외적인데 대통령 탄핵 의결 때와 합법적 의사진행방해(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킬 때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2분의 1의 합의로 회기를 종결시키는 꼼수를 써서 필리버스터조차 있으나 마나 한 제도로 만들었다. 정작 5분의 3의 합의가 꼭 필요할 때는 5분의 3을 회피하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인 것이다.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된 것은 2012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의 대선 주자였을 때다.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연합이 야당이었을 때 던진 합의정치의 미끼를 덥석 문 것은 새누리당 대표인 황우여와 쇄신파들이었고 이를 침묵으로 승인한 것은 박근혜였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내놓은 경제활성화 법안 등은 모두 국회선진화법의 5분의 3 규정에 묶여 번번이 통과되지 못했다. 남 탓 할 수 없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이었다. 그때 왜 박근혜 정권은 여당이 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물국회 타령만 하면서 패스트트랙을 가동할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패스트트랙이 어떻게 작동할지 그려보지 못했을 수도 있고, 패스트트랙에 올릴 경우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참지 못할 정도로 조바심을 냈다고 볼 수도 있다. 개혁은 지식과 끈기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인데 둘 다 부족했다. 민주당이 정의당 등 범여권의 군소정당들에 유리한 선거법 개정을 해주는 대가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법안 등의 통과를 보장받았다. 민주당이 공수처법에 매달린 것은 형사사법 체계의 근간을 흔들어서라도 후환을 막으려는 것이다. 언젠가는 더러운 야합의 결과를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야합일지라도 표결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아니 물리적으로 막아지지 않는다. 그런 뻔한 계산도 하지 못하고 어리석게 한국당을 이끌었던 지도부는 아마추어였던 것이다. 패스트트랙에서 한국당과 범여권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범여권에서는 또 최루탄을 터뜨리고 해머로 문을 부수는 의원들까지 나왔을지 모른다. 한국당이 그 정도까지 한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흉내를 냈다. 정치의 품격은 의회주의를 존중하고 일관성을 지키는 데서 나온다. 앞으로 한국당이 다수의 표를 모아 패스트트랙으로 법안을 통과시킬 때 물리적으로 막는 반대편을 향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운동권 의원들의 행패를 흉내 내지 않는다고 해서 웰빙 체질인 것이 아니다. 한 번은 국회선진화법이 내세운 5분의 3이라는 합의정치의 환상에 속고 또 한 번은 패스트트랙을 통해 관철되는 2분의 1의 냉엄한 현실에 당하고도 절치부심(切齒腐心)하지 못하면 그것이 웰빙 체질이다. 요란한 분노보다 조용한 분노가 더 무섭다는 걸 선거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전세 사는 사람들은 일할 의욕이 나지 않는다. 집값 잡는다고 한 조치가 이제는 전셋값을 끌어올리고 있다. 집값은 못 잡아도 좋으니 제발 전셋값이라도 잡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다. 죽어나는 건 집 없는 사람이고 자영업자이고 아르바이트생이고 중소기업이고 신생 혁신기업이다. 살판 난 것은 서울 등 수도권 요지에 집을 가진 사람들이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주52시간 노동제의 혜택을 고스란히 받는 대기업과 공공기업에 다니는 근로자들이다. 혁신은 없다. 다른 나라는 다 근미래(近未來)의 전기차로 가는데 우리만 올지 말지 알 수 없는 원미래(遠未來)의 수소차로 가고 있다. 정부가 바이오산업의 육성을 외친 올해 바이오산업의 주가는 오히려 추락했다. 공산당이 만사를 통제하는 중국마저 화끈한 규제개혁을 하는데 우리만 기득권 조합이나 노조에 발목 잡혀 지지부진이다. 적폐청산 과정에서 정책 결정에 대한 시비로 감옥에 가거나 좌천한 선임자를 본 공무원들은 재량을 발휘할 생각을 않는다. 일본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시비이고 중국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굴욕적 처신이다. 중국은 사드 보복에 무릎 꿇고 미세먼지조차 자기 탓하는 걸 보면서 한국은 무시해 버려도 되는 나라로 판단한 듯하다. 그러니 ‘홍콩과 신장위구르 사태는 중국 내정 문제’라는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중국 관영 언론이 써대는 것 아니겠는가. 중국 외교부가 고쳐줄지 지켜보겠다.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센카쿠열도 갈등을 극복하고 급속히 호전되고 있다. 일본 쪽에서는 일본인이 한국보다 중국을 더 좋아한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중국도 일본도 동북아시아를 한중일 삼국지(三國志)가 아니라 중일 양국지(兩國志)로 이끌고 싶어 한다. 하수(下手)에게는 한일 관계와 한중 관계의 소국(小局)만 보이고 중일 관계의 대국(大局)은 보이지 않나 보다. 새로운 규칙은 그 규칙을 만든 자에게 먼저 적용돼서는 안 된다는 오랜 법언(法諺)이 있다. 적폐청산이라며 사화(士禍) 수준의 수사를 하면서 피의자를 공개소환하고 피의사실을 밥 먹듯이 유포하고 수갑까지 채워 수치를 주던 정권이 조국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해 새로운 검찰사무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을 피의자 조국과 그 가족에게 제일 먼저 적용했다. 그러고도 파렴치하게 공정을 외치고 있다. 이런 정부에 무슨 공정한 검찰 개혁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공수처에서는 조국, 유재수, 송철호, 그 윗선에 대한 수사가 가능할 것인가. 공수처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그런 수사가 가능하지 않다는 데는 별 의견 차이가 없다. 지지하는 자들은 그런 수사를 왜 하냐고 뻔뻔하게 물을 것이고 지지하지 않는 자들은 그런 수사 하지 말라고 만든 게 공수처가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 이유야 뭐라고 보든 그런 수사는 하지 않는 게 바로 공수처다. 그래서 정권의 보위부인 것이다. 건국 100주년이 제야 속으로 사라졌다. 가야사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고 법률가가 되지 않았으면 역사가가 됐을 것이라는 아마추어 역사가는 일제 식민지배의 한가운데인 1919년을 건국이라고 불렀다. 잃은 것을 잃었다 하고 얻은 것을 얻었다고 하는 사회는 걱정할 게 없다. 나라를 잃은 것을 나라를 얻었다고 하니 그 역사의식이 송두리째 걱정스러울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김정은의 말만 믿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김정은이 비핵화의 진의가 있다고 전달한 것이 베트남 하노이 북-미 회담을 좌초시킨 근본적 원인이다. 시대의 중요한 문제는 말이 아니라 피와 철에 의해 결정됨에도 일방적으로 군사훈련을 중단하고 경계태세를 허물었다. 어리석은 송양공(宋襄公)이 따로 없다. 그 어리석음의 대가는 전멸이다. 경제성장률은 1%대로 추락시키고 부동산 값 하나 잡지 못하는 무능한 정권이 제 분수도 모르고 나라를 정초하겠다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 땀과 피와 철로 세운 것이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다. 세우기는 어려워도 부수는 건 한순간이다. 힘이 없으면 옳은 것도 관철하지 못한다. 정치는 옳은 것을 관철하는 힘이다. 좀 더 겸손하게 말하자면 옳지 못한 것을 막는 힘이다. 광장에서는 옳지 못한 것을 막아냈으나 국회에서는 막아내지 못했다. 올해는 총선이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