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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부안군 변산반도에 있는 채석강 해식동굴은 자연이 빚은 천연 포토존이다. 퇴적암층이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한 절벽에 바닷물이 침식해 만든 동굴이다. 이곳이 유명한 건 독특하게 나타나는 실루엣 때문이다. 동굴 안쪽에서 역광으로 촬영하면 각도에 따라 동굴이 유니콘 모양, 한반도 모양으로 찍힌다. 특히 해가 질 무렵 수평선 주위가 주홍빛으로 물들 때 매혹적인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밀물 때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물때표를 잘 보고 찾아가야 한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2001년)에서 배우 이영애가 연기했던 은수가 살았던 아파트는 강원 동해시 묵호항 주변에 있는 삼본아파트다. 묵호항 주변은 항구를 따라 전통시장과 산비탈 논골담길, 도째비골스카이밸리, 추암해변과 무릉계곡 등 봄날의 햇살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여행지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관광객들이 꼭 가볼 만한 국내의 대표 관광지 100곳을 모아 발표한 ‘2023~2024 한국관광 100선’에 새롭게 포함되기도 했다. 특히 일출로 유명한 동해 해변마을인데도, 야경까지 아름다운 곳이다. ●동해 묵호에서 즐기는 도깨비 불빛 여행 강원 동해 묵호항 인근에 있는 도째비골. 어두운 밤에 비가 내리면 푸른빛들이 보여 ‘도깨비불’이라 여긴 사람들에게 도째비(도깨비의 방언)골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도깨비불에 홀린 듯 시시각각 변하는 화려한 조명 탓일까. 밤에 보는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는 현실세계를 벗어나 어디선가 외눈박이 도깨비가 방방이를 들고 나타날 듯한 환상의 세계다. 세방향으로 이어지는 다리로 구성된 스카이밸리는 밤에 보면 푸르스름한 동해바다 묵호항에 내려 앉은 우주선을 연상케 한다. 급경사지인 묵호항 도째비골은 재해위험지역이라 폐허로 방치되던 곳이었다. 동해시에서 이곳을 안전하게 정비하고 2021년 바다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해발 59m)와 도깨비놀이 시설을 만들었다. ‘하늘산책로(스카이워크)’, ‘스카이사이클(와이어를 따라 공중을 달리는 자전거)’, ‘자이언트슬라이드(대형미끄럼틀)’ 등으로 구성돼 있어 낮에는 스릴 넘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밤에는 화려한 조명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스카이밸리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도깨비 방망이’ 모양의 해상교량 해랑전망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해랑전망대는 유리바닥으로 돼 있는 길이 85m의 바다위에 만들어진 스카이워크다. 발 아래로 부서지는 파도 너울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다리 위로 해가지면 시시각각 변하는 조명이 더해지며 밤바다의 풍경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해랑전망대에서 인생사진을 찍다보면 시선이 머무는 곳이 있는데 바로 ‘한국의 산토리니’ 논골담마을이다. 묵호항 뒷편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은 논골담 마을은 1960~70년대 동해에서 명태와 오징어잡이가 호황을 이룰 때 형성됐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모여들자 주거 공간이 부족해 묵호항 맞은편 오학산의 비탈진 경사면에 작은 집이 빼곡히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생선을 말리기 위해 소나무로 만든 작은 덕장도 곳곳에 세워졌다. ‘논골’은 오징어를 지게에 얹어 언덕 위까지 나르다 흘린 물로 길이 질퍽거렸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명태의 고갈로 과거 동해의 호황은 사라졌지만, 이 마을 담벼락에는 ‘묵호’의 이야기들이 벽화로 알록달록 피어나 있다. 하얀 자태가 아름다운 묵호등대는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올라가 360도로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개방돼 있다. 등대 전망층에서는 멀리 백두대간의 두타산과 청옥산, 동해의 풍경까지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묵호등대 앞에는 1968년 작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촬영지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묵호등대는 역시 밤이면 형형색색의 LED 조명등이 켜지며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등대에서 바라보는 묵호항 밤바다 오징어잡이 어선들의 분주한 움직임과 불빛들이 장관을 연출한다. ●파도가 종소리처럼 들리는 추암 능파대 동해를 따라 이어진 기찻길을 달리다 만나는 추암역 앞 바닷가에는 일출 명소로 유명한 촛대바위가 있다. 과거 TV 방송시간 규제가 있던 시절 애국가 첫 소절과 함께 촛대바위의 일출 장면이 나오면서 유명세를 탄 곳이다. 그런데 추암은 일출 뿐 아니라 요즘은 야경 명소로도 뜨고 있다. 지난 2019년에 놓인 해상출렁다리(길이 72m)가 야경 명소로 떠올랐다. 출렁다리는 바다를 건너는 짜릿한 스릴을 맛보면서 낮에는 푸른 동해바다와 기암괴석을 감상하고, 해가지면 조명에 비친 밤바다의 운치를 즐길 수 있는 포토존이 되고 있다. 추암에는 해안을 따라 촛대바위를 비롯해 다양한 모양을 한 바위가 숲을 이룬 능파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주차장을 지나면 가장 먼저 해암정이라는 고풍스러운 정자가 눈에 띈다. 해암정은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삼척 심씨의 시조인 심동로가 벼슬을 물리고 내려와 처음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 중종 25년(1530)에 심언관에 의해 다시 지어진 것을 정조 때 보수한 것이다. 가운데 현판의 ‘해암정(海巖亭)’이란 글씨는 우암 송시열, 오른쪽 ‘석종함(石鐘檻)’이란 글씨는 송강 정철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석종은 해암정 뒤쪽을 울타리처럼 에워싼 바위들을 돌로 된 종으로 비유한 것이다. 바위에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 같다는 의미다. ●무릉계곡 별유천지 동해시 무릉계곡은 많은 기암괴석과 절경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1977년 국민관광지 제1호로 지정됐다.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보물 제1292호) 등의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올해 동해시에서 ‘도째비골 스카이밸리’와 함께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됐다. 무릉계곡은 두타산과 청옥산 아래 용추폭포에서 호암소까지 이르는 약 4km 길이의 계곡을 말한다. 매표소를 지나면 만나는 신선교에서 물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검은 선이 보인다. 이것을 용오름 길이라고 하는데 무릉계곡을 따라 용추폭포까지 길이가 6km에 이른다. 용오름 길은 용이 지나간 흔적이라는 것이다. 서역에서 온 세 명의 선인이 용을 타고 계곡을 오르던 중 각각 흑련과 청련, 금련을 가지고 내린 자리에 절이 생겼는데 그중 흑련을 가지고 내린 곳이 삼화사다. 신선교를 지나 조금만 걸으면 ‘금란정’이란 이름의 정자와 함께 무릉반석을 만난다. 무릉반석은 천명이 앉아도 너끈할 만큼 큰 하나의 거대한 바위로 그 넓이가 1500평에 이른다.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바위 곳곳에는 한자로 85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주로 삼척부사 등 관리들의 이름이며 금난계(친구끼리 친목을 위해서 모은 계) 같은 계원의 이름도 있다. 무릉반석을 유명하게 만든 암각서 12자도 발견할 수 있다. 꿈틀대듯 힘 있는 초서체로 쓰인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은 ‘신선이 노니는 이곳에 돌과 물이 어우러져 잉태한 대자연 앞에 나도 세속의 번뇌를 내려놓고 신선이 될까 하노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해시 삼화동 ‘무릉별유천지’는 125m 상공에서 나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스카이글라이더와 알파인코스터, 오프로드 루지, 롤러코스터형 집라인, 두르미전망대는 가족과 함께 즐기기 좋은 체험시설이다. 이 곳은 원래 2017년까지 쌍용시멘트회사가 석회석을 채굴하던 곳이었다. 40년간 속살이 파헤쳐진 산에는 거대한 웅덩이 두 개가 생겼고 절개지 곳곳은 채굴에 따른 상흔이 그대로 남았다. 회사는 더는 원석이 나지 않는 광산 부지를 동해시에 기부했다. 이후 깊게 파인 웅덩이는 호수로 꾸며져 청옥호와 금곡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주변에 라벤더 꽃밭과 힐링을 위한 휴식의 공간이 생겨났다. 과거 커다란 돌덩이를 부수던 쇄석장은 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내부에는 돌덩이를 부숴 가루로 만드는 과정과 시멘트를 만드는 과정, 과거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4층에는 전망대를 겸한 카페가 있다. 무릉별유천지 입장객은 무료로 운행하는 무릉별열차를 이용해 드넓은 부지를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동해=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2001년)에서 배우 이영애가 연기했던 은수가 살았던 아파트는 강원 동해시 묵호항 주변에 있는 삼본아파트다. 묵호항 주변은 항구를 따라 전통시장과 산비탈 논골담길, 도째비골스카이밸리, 추암해변과 무릉계곡 등 봄날의 햇살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여행지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관광객들이 꼭 가볼 만한 국내의 대표 관광지 100곳을 모아 발표한 ‘2023∼2024 한국 관광 100선’에 새롭게 포함되기도 했다. 특히 일출로 유명한 동해 해변마을인데도, 야경까지 아름다운 곳이다.》●동해 묵호에서 즐기는 도깨비 불빛 여행동해 묵호항 인근에 있는 도째비골. 어두운 밤에 비가 내리면 푸른빛들이 보여 ‘도깨비불’이라 여긴 사람들에게 도째비(도깨비의 방언)골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도깨비불에 홀린 듯 시시각각 변하는 화려한 조명 때문일까. 밤에 보는 ‘도째비골스카이밸리’는 현실 세계를 벗어나 어디선가 외눈박이 도깨비가 방망이를 들고 나타날 듯한 환상의 세계다. 세 방향으로 이어지는 다리로 구성된 스카이밸리는 밤에 보면 푸르스름한 동해 바다 묵호항에 내려앉은 우주선을 연상케 한다. 급경사지인 묵호항 도째비골은 재해위험지역이라 폐허로 방치된 곳이었다. 동해시에서 이곳을 안전하게 정비하고 2021년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해발 59m)와 도깨비놀이 시설을 만들었다. ‘하늘산책로’(스카이워크), ‘스카이사이클’(와이어를 따라 공중을 달리는 자전거), ‘자이언트슬라이드’(대형 미끄럼틀) 등으로 구성돼 있어 낮에는 스릴 넘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밤에는 화려한 조명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스카이밸리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도깨비방망이’ 모양의 해상 교량 해랑전망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해랑전망대는 바다 위에 유리바닥으로 만들어진 길이 85m의 스카이워크다. 발아래로 부서지는 파도 너울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다리 위로 해가 지면 시시각각 변하는 조명이 더해지며 밤바다의 풍경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해랑전망대에서 인생 사진을 찍다 보면 시선이 머무는 곳이 있는데 바로 ‘한국의 산토리니’ 논골담마을이다. 묵호항 뒤편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은 논골담마을은 1960, 70년대 동해에서 명태와 오징어잡이가 호황을 이룰 때 형성됐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모여들자 주거 공간이 부족해 묵호항 맞은편 오학산의 비탈진 경사면에 작은 집이 빼곡히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생선을 말리기 위해 소나무로 만든 작은 덕장도 곳곳에 세워졌다. ‘논골’은 오징어를 지게에 얹어 언덕 위까지 나르다 흘린 물로 길이 질퍽거렸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명태의 고갈로 과거 동해의 호황은 사라졌지만, 이 마을 담벼락에는 ‘묵호’의 이야기들이 벽화로 알록달록 피어나 있다. 하얀 자태가 아름다운 묵호등대는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올라가 360도로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개방돼 있다. 등대 전망층에서는 멀리 백두대간의 두타산과 청옥산, 동해의 풍경까지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묵호등대 앞에는 1968년 작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촬영지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묵호등대는 역시 밤이면 형형색색의 발광다이오드(LED) 조명등이 켜지며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등대에서 바라보는 묵호항 밤바다 오징어잡이 어선들의 분주한 움직임과 불빛들이 장관을 연출한다. ●파도가 종소리처럼 들리는 추암 능파대동해를 따라 이어진 기찻길을 달리다 만나는 추암역 앞 바닷가에는 일출 명소로 유명한 촛대바위가 있다. 과거 TV 방송시간 규제가 있던 시절 애국가 첫 소절과 함께 촛대바위의 일출 장면이 나오면서 유명해진 곳이다. 그런데 추암은 일출뿐 아니라 요즘은 야경 명소로도 뜨고 있다. 2019년에 놓인 해상출렁다리(길이 72m)가 야경 명소로 떠올랐다. 출렁다리는 바다를 건너는 짜릿한 스릴을 맛보면서 낮에는 푸른 동해 바다와 기암괴석을 감상하고, 해가 지면 조명에 비친 밤바다의 운치를 즐길 수 있는 포토존이 되고 있다. 추암에서는 해안을 따라 촛대바위를 비롯해 다양한 모양을 한 바위가 숲을 이룬 능파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주차장을 지나면 가장 먼저 해암정이라는 고풍스러운 정자가 눈에 띈다. 해암정은 고려 공민왕 10년(1361년)에 삼척 심씨의 시조인 심동로가 벼슬을 사양하고 내려와 처음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 심언관에 의해 다시 지어진 것을 정조 때 보수한 것이다. 가운데 현판의 ‘해암정(海巖亭)’이란 글씨는 우암 송시열, 오른쪽 ‘석종함(石鐘檻)’이란 글씨는 송강 정철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석종은 해암정 뒤쪽을 울타리처럼 에워싼 바위들을 돌로 된 종으로 비유한 것이다. 바위에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 같다는 의미다. ●무릉계곡 별유천지동해시 무릉계곡은 많은 기암괴석과 절경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1977년 국민관광지 제1호로 지정됐다.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보물 제1292호) 등의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올해 동해시에서 ‘도째비골스카이밸리’와 함께 한국 관광 100선’에 선정됐다. 무릉계곡은 두타산과 청옥산 아래 용추폭포에서 호암소까지 이르는 약 4km 길이의 계곡을 말한다. 매표소를 지나면 만나는 신선교에서 물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검은 선이 보인다. 이것을 용오름 길이라고 하는데 무릉계곡을 따라 용추폭포까지 길이가 6km에 이른다. 용오름 길은 용이 지나간 흔적이라는 것이다. 서역에서 온 세 명의 선인이 용을 타고 계곡을 오르던 중 각각 흑련과 청련, 금련을 가지고 내린 자리에 절이 생겼는데 그중 흑련을 가지고 내린 곳이 삼화사다. 신선교를 지나 조금만 걸으면 ‘금란정’이란 이름의 정자와 함께 무릉반석을 만난다. 무릉반석은 1000명이 앉아도 너끈할 만큼 큰, 하나의 거대한 바위로 그 넓이가 5000㎡(약 1500평)에 이른다.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바위 곳곳에는 한자로 85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주로 삼척부사 등 관리들의 이름이며 금란계(친구끼리 친목을 위해서 모은 계) 같은 계원의 이름도 있다. 무릉반석을 유명하게 만든 암각서 12자도 발견할 수 있다. 꿈틀대듯 힘 있는 초서체로 쓰인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은 ‘신선이 노니는 이곳에 돌과 물이 어우러져 잉태한 대자연 앞에 나도 세속의 번뇌를 내려놓고 신선이 될까 하노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해시 삼화동 ‘무릉별유천지’는 125m 상공에서 나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스카이글라이더와 알파인코스터, 오프로드 루지, 롤러코스터형 집라인, 두르미전망대 등 가족과 함께 즐기기 좋은 체험시설이다. 이곳은 원래 2017년까지 쌍용시멘트가 석회석을 채굴하던 곳이다. 40년간 속살이 파헤쳐진 산에는 거대한 웅덩이 두 개가 생겼고 절개지 곳곳은 채굴에 따른 상흔이 그대로 남았다. 회사는 더는 원석이 나지 않는 광산 부지를 동해시에 기부했다. 이후 깊게 파인 웅덩이는 호수로 꾸며져 청옥호와 금곡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주변에 라벤더 꽃밭과 힐링을 위한 휴식의 공간이 생겨났다. 과거 커다란 돌덩이를 부수던 쇄석장은 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내부에는 돌덩이를 부숴 가루로 만드는 과정과 시멘트를 만드는 과정, 과거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4층에는 전망대를 겸한 카페가 있다. 무릉별유천지 입장객은 무료로 운행하는 무릉별열차를 이용해 드넓은 부지를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글·사진 동해=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가는 고무 대야에는 아들이 호롱불을 켜고 밥상에 앉아서 공부를 한다. 등불을 환하게 켠 오징어 배와 명태, 그리고 자식은 어머니가 힘든 삶에도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던 버팀목이었다. 아버지는 양동이를 지게에 지고 앞으로 걸어가고, 키 작은 소녀는 연탄을 들고 따라간다. 강원 동해 묵호항 논골담길에는 1960, 70년대 산비탈에 살던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벽화가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작은 민속촌으로 재현된 김만덕 객주조선시대 상단 비즈니스 -제주음식 체험 사라봉 언덕에서 바라보는 환상적 낙조백년 넘은 등대에서 커피와 전시도 즐겨 김만덕 위패 모신 사당에 직함 밝힌 묘비구휼 의인의 삶 멀티미디어로 소개 제주도의 관문인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언덕은 북쪽으로는 푸른 바다, 남쪽으로는 웅장한 한라산을 볼 수 있고, 발 아래로 제주 시내의 모습이 보이는 숨은 명소다. 특히 사라봉 북쪽 끝에 있는 산지등대에서 바라보는 붉은 노을은 절경이다. 바다에는 제주항의 불빛이 반짝이고, 수시로 육지로 오가는 비행기가 떠오르는 모습도 낭만적이다. 건입동은 제주의 거상(巨商) 김만덕(1739~1812)의 스토리가 담긴 곳이기도 하다. 조선 최초의 여성 CEO이자, 대재난에서 백성을 살린 의인(義人), 여성에게 금지된 꿈을 실현한 여행가였던 ‘김만덕의 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조선 최초의 여성CEO, 김만덕의 객주제주 북부의 건입포는 예로부터 제주와 육지를 잇는 관문이었다. 건입포 주민들은 봄이면 전북 군산-연평도-해주-신의주까지 진출한 뒤 음력 10월이면 쌀과 각종 상품을 싣고 귀향했다. 만덕의 아버지도 건입포의 상인이었다. 그러나 만덕이 12살 때 아버지는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었고, 이듬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친척집에 살던 만덕은 어린 나이에 기녀(妓女) 교육을 받고 기생이 되었다. 스무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제주 목사를 찾아가 양인으로 환속시켜줄 것을 요청했고, 객주를 차렸다. 조선시대 객주는 다른 지역에서 온 상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면서 물건을 맡아주고, 팔아주고, 흥정을 붙여주는 일을 하던 집이다. 김만덕의 물산객주(物産客主)는 위탁매매는 물론이고 숙박, 금융, 도매, 창고, 운반 등 전방위적인 비즈니스를 했다. 제주 북부 올레길 18코스가 시작되는 건입동에는 산지천 산책로가 있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산지천은 건입동을 관통한 뒤 제주항으로 빠져나간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0년대에 산지천을 복개하여 주택과 상가 건물이 들어섰지만, 1990년대 중반에 산지천을 복원해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려는 사업이 진행 중이다. 산지천을 걷다보면 복원된 ‘김만덕 객주’를 만난다. 작은 민속촌처럼 초가지붕을 이은 8채의 제주 전통가옥이다. 당시 객주와 상단의 모습이 재현돼 있는 이 곳은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 한쪽 켠에는 실제 음식을 판매하는 주막도 운영되고 있다. 제주 전통 음식인 몸국, 고사리육개장 등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만덕의 사업성공 비결은 육지와 섬에서 나는 물건의 시세 차익이었다. 그는 제주에서만 생산되는 제주마, 말총, 양태, 진주, 우황, 미역 등 특산물을 육지에 판매했고, 대신 척박한 제주로귀한 쌀과 소금을 들여왔다. ‘신용본위(信用本位)’를 내건 만덕은 적극적으로 선상(船商)을 유치하고, 관가에 물품도 공급하며 제주 최고의 거상이 되었다고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김만덕이 조선시대 전국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정조 18년(1794년)의 일. 제주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갭인년 숭년(갑인년 흉년)’으로 불리는 참혹한 재난의 해였다. 가뭄과 태풍이 반복된 그 해에 거리엔 굶어죽은 시체로 가득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제주 산지로에 있는 ‘김만덕 기념관’에 가면 각종 기록과 멀티미디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린 ‘만덕 할망’의 행적을 생생히 볼 수 있다.당시 제주 목사 심낙수는 “동풍이 강하게 불어와 기와가 날아가고 돌이 굴러가 나부끼는 것이 마치 나뭇잎 날리는 것 같다”며 구휼미 2만 섬을 요청하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이에 정조 임금은 제주도로 급하게 구휼미를 보내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구휼미를 실은 배마저도 난파돼 재난은 더욱 심해졌다. “정조 19년(1795년) 윤2월 진휼곡 5000석을 실은 배 12척 중 5척이 바다를 건너오다가 난파됐다. 이즈음 제주 백성 3분의 1이 굶어 죽었다.”(정조실록) 이를 본 만덕은 평생 모은 재산을 털어내 구휼에 나섰다. 당시 만덕이 육지에서 사들여 관가에 실어나른 쌀은 제주도민 전체가 열흘간 목숨을 연장할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수천명의 제주민들이 굶주림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정조는 김만덕을 높이 치하하고, 신하들에게 그녀의 삶을 널리 알리는 전기를 집필하라는 명을 내렸다. 사회경제 개혁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정조는 자신의 개혁 의지를 밝히는 롤모델로 만덕을 내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에 좌의정 채제공을 비롯해 수많은 공경대신이 ‘만덕전’을 지었다. 추사 김정희는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로운 빛이 세상에 가득차다)’라는 글씨로 김만덕의 의로움을 찬양했다. 김만덕은 조선왕조실록이나 당대의 많은 문집에서 ‘협사(俠士)’ ‘열협(烈俠)’ ‘의열사(義烈士)’라고 불렸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의로운 일을 해낸 영웅에게 던지는 찬사다. 극심한 가뭄에서 수천명의 목숨을 살렸으니 ‘구휼 의인’으로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여행가 김만덕이 올랐던 사라봉과 산지등대제주올레길 18코스의 일부인 ‘김만덕의 길’은 사라봉과 산지등대로 이어진다. 사라봉(해발 148m)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사봉낙조(沙峰落照)’라고 한다. 성산일출봉에서 바라보는 해돋이인 ‘성산일출(城山日出)’과 함께 제주의 열두가지 아름다운 풍광을 일컫는 ‘영주(瀛洲·제주의 옛 이름) 십이경’ 중 하나에 든다. 사라봉에 오르면 제주항에서 제주공항까지, 제주도심에서 한라산 자락까지 탁 트인 전망이 두 눈 가득 들어온다. 특히 사라봉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산지등대는 밤이 깊어가면 칠흑같은 바다를 수놓는 수백척 고기잡이배들의 불빛 향연을 볼 수 있는 손꼽히는 야경명소이기도 하다. 1916년 이후로 제주 바다를 지켜온 산지등대는 15초에 한번 씩 반짝이며 48km 밖 바다까지 불빛을 비춘다. 수년전 무인등대가 된 후로 등대원이 머무르던 숙소는 카페와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만덕은 사라봉 언덕에서 평생 여행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정조는 제주 목사에게 “사람들의 목숨을 살린 만덕에게 원하는 바를 들어주라”고 어명을 내렸다. 당시 58세였던 만덕은 “바다를 건너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다”는 소원을 밝혔다. 이 소원은 당시로서는 세상이 뒤집힐 일이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부녀자가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면 곤장 100대에 처한다”고 규정한 데다, 제주도의 평민은 섬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출륙 금지령’이 200년이나 지속됐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김만덕이 임금에게 “금강산을 보고 싶소”라고 말한 것은 출륙금지령에 묶여 있던 제주도 여인들의 원망과 포부를 대변한 용감무쌍한 선언이었다. 정조는 만덕의 소원을 듣고 금강산 유람 뿐 아니라 한양 궁궐 구경까지 흔쾌히 허락했다. 일반 평민이 뭍으로 나오는 게 불법이기 때문에 정조는 만덕에게 ‘의녀 반수(醫女班首)’라는 벼슬도 내렸다. 만덕은 난생 처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정조의 명으로 전례없는 배려를 받고 이동한 만덕은 가는 고을마다 환대를 받으며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도 금강산 여행은 평생의 꿈이었다. 조선시대 금강산 여행은 오늘날의 해외여행과 비슷한 준비와 시간,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학자 박제가는 김만덕에 대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세상을 떠나는 동안 ‘멋쟁이’로 살다간 사람으로 귀하다 할 만한 사람”이라고 썼다. 만덕은 여행을 마치고 제주로 돌아온 후에도 전과 다름없이 장사를 계속하면서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고, 굶주린 사람에게 쌀을 주는 등 자선사업에 힘을 쏟았다.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온 제주도민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만덕 할망’이었다. 김만덕의 위패를 모신 모충사에는 그의 무덤도 있다. 비문에는 ‘행수내의녀 김만덕지묘(行首內醫女 金萬德之墓)’라고 적혀 있다. 조선시대 여성의 경우 묘비에 누구의 부인, 누구의 딸, 며느리로 표현함으로써 남성의 이름과 자호, 직함을 앞세우고 뒤에 숨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김만덕의 묘비에는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과 직함, 삶의 행적이 묘비에 적혀 있어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제주도의 관문인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언덕은 북쪽으로는 푸른 바다, 남쪽으로는 웅장한 한라산을 볼 수 있고, 발아래로 제주 시내의 모습이 보이는 숨은 명소다. 특히 사라봉 북쪽 끝에 있는 산지등대에서 바라보는 붉은 노을은 절경이다. 바다에는 제주항의 불빛이 반짝이고, 수시로 육지로 오가는 비행기가 떠오르는 모습도 낭만적이다. 건입동은 제주의 거상(巨商) 김만덕(1739∼1812)의 스토리가 담긴 곳이기도 하다. 조선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CEO)이자, 대재난에서 백성을 살린 의인(義人), 여성에게 금지된 꿈을 실현한 여행가였던 ‘김만덕의 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조선 최초의 여성 CEO, 김만덕의 객주제주 북부의 건입포는 예로부터 제주와 육지를 잇는 관문이었다. 건입포 주민들은 봄이면 전북 군산∼연평도∼해주∼신의주까지 진출한 뒤 음력 10월이면 쌀과 각종 상품을 싣고 귀향했다. 만덕의 아버지도 건입포의 상인이었다. 그러나 만덕이 12세 때 아버지는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었고, 이듬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친척 집에 살던 만덕은 어린 나이에 기녀(妓女) 교육을 받고 기생이 되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제주 목사를 찾아가 양인으로 환속시켜 줄 것을 요청했고, 객주를 차렸다. 조선시대 객주는 다른 지역에서 온 상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면서 물건을 맡아 주고, 팔아 주고, 흥정을 붙여 주는 일을 하던 집이다. 김만덕의 물산객주(物産客主)는 위탁매매는 물론이고 숙박, 금융, 도매, 창고, 운반 등 전방위적인 비즈니스를 했다. 제주 북부 올레길 18코스가 시작되는 건입동에는 산지천 산책로가 있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산지천은 건입동을 관통한 뒤 제주항으로 빠져나간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0년대에 산지천을 복개하여 주택과 상가 건물이 들어섰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산지천을 복원해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려는 사업이 진행 중이다. 산지천을 걷다 보면 복원된 ‘김만덕 객주’를 만난다. 작은 민속촌처럼 초가지붕을 이은 8채의 제주 전통가옥이다. 당시 객주와 상단의 모습이 재현돼 있는 이곳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한쪽에는 실제 음식을 판매하는 주막도 운영되고 있다. 제주 전통 음식인 몸국, 고사리육개장 등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만덕의 사업 성공 비결은 육지와 섬에서 나는 물건의 시세 차익이었다. 그는 제주에서만 생산되는 제주마, 말총, 양태, 진주, 우황, 미역 등 특산물을 육지에 판매했고, 대신 척박한 제주로 귀한 쌀과 소금을 들여왔다. ‘신용본위(信用本位)’를 내건 만덕은 적극적으로 선상(船商)을 유치하고, 관가에 물품도 공급하며 제주 최고의 거상이 되었다고 한다.●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김만덕이 조선시대 전국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정조 18년(1794년)의 일이다. 제주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갭인년 숭년(갑인년 흉년)’으로 불리는 참혹한 재난의 해였다. 가뭄과 태풍이 반복된 그해에 거리엔 굶어 죽은 시체로 가득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제주 산지로에 있는 ‘김만덕 기념관’에 가면 각종 기록과 멀티미디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린 ‘만덕 할망’의 행적을 생생히 볼 수 있다. 당시 제주 목사 심낙수는 “동풍이 강하게 불어와 기와가 날아가고 돌이 굴러가 나부끼는 것이 마치 나뭇잎 날리는 것 같다”며 구휼미 2만 섬을 요청하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이에 정조 임금은 제주도로 급하게 구휼미를 보내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구휼미를 실은 배마저도 난파돼 재난은 더욱 심해졌다. “정조 19년(1795년) 윤 2월 진휼곡 5000석을 실은 배 12척 중 5척이 바다를 건너오다가 난파됐다. 이즈음 제주 백성 3분의 1이 굶어 죽었다.”(정조실록) 이를 본 만덕은 평생 모은 재산을 털어내 구휼에 나섰다. 당시 만덕이 육지에서 사들여 관가에 실어나른 쌀은 제주도민 전체가 열흘간 목숨을 연장할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수천 명의 제주민이 굶주림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정조는 김만덕을 높이 치하하고, 신하들에게 그녀의 삶을 널리 알리는 전기를 집필하라는 명을 내렸다. 사회경제 개혁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정조는 자신의 개혁 의지를 밝히는 롤모델로 만덕을 내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에 좌의정 채제공을 비롯해 수많은 공경대신이 ‘만덕전’을 지었다. 추사 김정희는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로운 빛이 세상에 가득 차다)’라는 글씨로 김만덕의 의로움을 찬양했다. 김만덕은 조선왕조실록이나 당대의 많은 문집에서 ‘협사(俠士)’ ‘열협(烈俠)’ ‘의열사(義烈士)’라고 불렸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의로운 일을 해낸 영웅에게 던지는 찬사다. 극심한 가뭄에서 수천 명의 목숨을 살렸으니 ‘구휼 의인’으로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여행가 김만덕이 올랐던 사라봉과 산지등대제주 올레길 18코스의 일부인 ‘김만덕의 길’은 사라봉과 산지등대로 이어진다. 사라봉(해발 148m)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사봉낙조(沙峰落照)’라고 한다. 성산일출봉에서 바라보는 해돋이인 ‘성산일출(城山日出)’과 함께 제주의 열두 가지 아름다운 풍광을 일컫는 ‘영주(瀛洲·제주의 옛 이름) 십이경’ 중 하나에 든다. 사라봉에 오르면 제주항에서 제주공항까지, 제주 도심에서 한라산 자락까지 탁 트인 전망이 두 눈 가득 들어온다. 특히 사라봉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산지등대는 밤이 깊어가면 칠흑 같은 바다를 수놓는 수백 척 고기잡이배들의 불빛 향연을 볼 수 있는 손꼽히는 야경 명소이기도 하다. 1916년 이후로 제주 바다를 지켜온 산지등대는 15초에 한 번씩 반짝이며 48km 밖 바다까지 불빛을 비춘다. 수년 전 무인등대가 된 후로 등대원이 머무르던 숙소는 카페와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만덕은 사라봉 언덕에서 평생 여행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정조는 제주 목사에게 “사람들의 목숨을 살린 만덕에게 원하는 바를 들어주라”고 어명을 내렸다. 당시 58세였던 만덕은 “바다를 건너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다”는 소원을 밝혔다. 이 소원은 당시로서는 세상이 뒤집힐 일이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부녀자가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면 곤장 100대에 처한다”고 규정한 데다 제주도의 평민은 섬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출륙 금지령’이 200년이나 지속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김만덕이 임금에게 “금강산을 보고 싶소”라고 말한 것은 출륙 금지령에 묶여 있던 제주도 여인들의 원망과 포부를 대변한 용감무쌍한 선언이었다. 정조는 만덕의 소원을 듣고 금강산 유람뿐 아니라 한양 궁궐 구경까지 흔쾌히 허락했다. 일반 평민이 뭍으로 나오는 게 불법이기 때문에 정조는 만덕에게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벼슬도 내렸다. 만덕은 난생처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정조의 명으로 전례 없는 배려를 받고 이동한 만덕은 가는 고을마다 환대를 받으며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도 금강산 여행은 평생의 꿈이었다. 조선시대 금강산 여행은 오늘날의 해외여행과 비슷한 준비와 시간,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학자 박제가는 김만덕에 대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세상을 떠나는 동안 ‘멋쟁이’로 살다 간 사람으로 귀하다 할 만한 사람”이라고 썼다. 만덕은 여행을 마치고 제주로 돌아온 후에도 전과 다름없이 장사를 계속하면서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고, 굶주린 사람에게 쌀을 주는 등 자선사업에 힘을 쏟았다.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온 제주도민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만덕 할망’이었다. 김만덕의 위패를 모신 모충사에는 그의 무덤도 있다. 비문에는 ‘행수내의녀 김만덕지묘(行首內醫女 金萬德之墓)’라고 적혀 있다. 조선시대 여성의 경우 묘비에 누구의 부인, 누구의 딸, 며느리로 표현함으로써 남성의 이름과 자호, 직함을 앞세우고 뒤에 숨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김만덕의 묘비에는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과 직함, 삶의 행적이 적혀 있어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제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경남 통영시에는 미륵도로 연결하는 통영대교가 있다.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운 다리다. 1998년 완공된 통영대교(591m)의 중앙 아치 부분에 달려 있는 등불이 최고의 야경을 자아낸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붉게 물드는 통영운하 위로 초록빛, 보랏빛, 붉은빛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통영대교가 어우러진 낭만적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다리 밑으로 배라도 한 척 지나가면 더욱 아름다운 물결무늬가 생겨난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길상(吉祥)이란 좋은 일이 있을 조짐이다. 길(吉)은 선(善)한 것, 상(祥)은 아름답고 기쁜 일의 징조다. 좋은 기운을 줄 것으로 믿는 대상들을 생활 속에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삶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이다.’ 서울 경복궁 내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다음달 2일까지 열리는 ‘길상 특별전’에는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행운과 복을 비는 상징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 중 입구에서 가장 처음으로 만나는 것은 집이나 가게 출입문 위에 걸어두었던 ‘북어 실타래 장식물’이다. “실타래는 긴 실과 같이 오래 살기(장수·長壽)를 의미하고, 말린 명태인 북어는 액을 막아주는 의미로 제사나 고사에서 제물로 사용된다.” (북어 실타래 장식물 안내문) 북어 실타래 장식물이 MZ세대 사이에서 행운을 기원하는 예쁜 아트상품으로 부활했다. 주인공은 정연중 디자인스튜디오 ‘버금’ 대표. 그는 우리 고유의 정신과 멋이 담긴 문화재를 아트상품으로 개발하는 디자인 전문가다. “명태는 말라 비틀어져 북어가 되어도 눈이 굉장히 맑아요. 그래서 명태에 ‘밝을 명(明)’자가 들어가는 지도 모릅니다. 명태에 흰색 명주실을 감아놓은 형태 자체만으로도 정말 아름다운 디자인이라고 느꼈습니다.” 홍익대 광고디자인학과를 졸업한 정 대표는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의 금제유물, 국립고궁박물관의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프랑스가 반환한 ‘조선왕조의궤’ 등을 모티브로 한 예술상품을 만들어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특히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제작한 길이 5m의 족자 상품은 500세트가 순식간에 완판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가 지난해 리움미술관 재개관 특별전, 공예트렌드페어에서 선보였던 새로운 아트상품은 바로 길상(吉祥)의 의미를 담은 ‘명주실 북어’다. 집이나 사무실을 이사할 때, 차를 새로 샀을 때 복을 빌고, 액운을 막는 의미로 걸어두던 민속이다. 그는 명주실을 감은 북어를 직접 디지털로 조각해 3D프린터로 만들어 레드, 블루, 골드, 그린, 화이트 등 다채로운 색깔의 상품으로 만들고, 자석을 붙여 아파트 문이나 냉장고에 붙일 수 있도록 했다. ‘Good Luck Fish(굿럭피쉬/명태)’라고 이름 붙인 이 아트상품은 지난 가을 리움미술관 아트숍과 공예트렌드페어에서 3000여 개가 팔렸고, 올초 카카오메이커스에서 5000개가 팔리는 등 돌풍을 일으켰다. ―우리 문화재를 소재로 한 아트상품을 개발하게 된 계기는. “중학교 수학여행 때 경주에 갔었어요. 불국사와 첨성대에 큰 감명을 받아 기념품을 사려고 했는데, 너무 조잡한 품질에 실망했습니다. 내 좋은 추억을 오히려 망칠 것 같더군요. 그런데 디자이너가 되고 나서 그 당시 기억이 났습니다. 국내외 사람들에게 우리만의 스토리텔링과 철학, 예술성을 기념할 수 있도록 퀄리티 있는 굿즈(Goods)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문화재 아트상품은. “프랑스가 반환한 ‘조선왕조의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기념 굿즈였습니다. 영조의 행차를 그린 도감을 아트상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영조의 행차도는 사람들이 실제 행차한 기록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이 그림은 행차를 하기 전에 행렬 계획을 짠 설명도입니다. 왕과 왕비는 어디에 있고, 신하들은 몇 번째로 오고, 누가 말을 타고, 걸어서 가는지를 정해주는 그림이지요. 원래 책에 한 쪽씩 붙어 있는 그림을 스캔해서 전체 행렬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5m 크기의 족자로 만들었습니다. 총 500세트를 디자인해서 각 15만원에 팔았습니다. 왕실에서 쓰던 상아(象牙) 장식을 달아서 족자를 꾸미는 등 높은 퀄리티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행렬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료라 소장 욕구가 폭발했는지 금세 매진되더군요.” ―명태를 굿즈로 만들게 된 계기는. “일본에 가면 손을 흔들고 있는 고양이 인형 하나씩 꼭 사오고, 뉴욕에 가면 ‘I♥NY’ 로고가 적힌 기념품을 사오잖아요. 우리나라도 한국을 상징하는 인상적인 기념품을 꼭 개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어릴 적에 보면 구멍가게마다 문 위에 걸려 있던 북어가 생각났어요. 저는 이 북어가 굉장히 디자인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명태가 눈을 똑바로 뜨고 있어서 잡귀들이 무서워서 도망칠 것 같더라고요. 저는 북어에 명주실을 감아놓은 형태 자체만으로도 정말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정 대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명태를 말려도 눈이 살아 있다는 이유로 고사를 지낼 때 쓰고, 악귀를 물리치고, 행운을 불러오는 상징으로 집 안에 걸어놓기도 한다”며 “한국인들에게 굉장히 친숙한 생선이기 때문에 살릴 가치가 있는 우리 문화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명태는 한국인들에게 너무너무 중요한 생선이었습니다. 신선한 명태는 생태탕을 끓여먹고, 얼리면 동태탕으로 끓여먹어요. 명태를 반건조한 게 코다리이고, 명태의 새끼는 맥주집에서 안주로 최고인 노가리죠. 명태를 겨울 산속 눈바람에 얼렸다가 말렸다가 해서 만드는 게 황태예요. 명태알로는 명란젓을 만들고, 명태 창자로는 창란젓을 담궈요. 하나도 버리는 게 없어요. 명태는 동해안에서 그물만 던지면 어마어마하게 잡혔던 생선입니다.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던 서민적인 음식이었죠. 이렇게 친숙한 생선이라 집이나 사무실 이사를 하거나 차를 바꿨을 때 고사를 지내고, 명주실을 묶어서 문 위에 걸어놓거나, 트렁크 안에 넣어두었죠.” ―명태를 어떤 식으로 디자인을 했나. “처음엔 명태 사진을 을지로에서 목조각하시는 분에게 가져가서 깎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무로 깎은 명태를 이용해 금형으로 제작해봤지요. 진짜 명주실을 감아보려고 했는데, 금속에 명주실을 감으니 미끄러워 다 풀려버렸습니다. 금형으로 제작한 명태가 귀엽고 예쁘긴 한데 제가 조각한 것이 아니라 그만두었죠. 그래서 제가 직접 3D프린터로 제작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는 학원에서 3개월간 3D프린트 프로그램을 배워서 직접 디지털로 명태를 조각했다. 명태 위에 명주실이 감긴 형태를 그대로 3D 디지털로 조각해냈다. 명태와 명주실을 같은 재료로 하되 색상을 다양하게 해서 출품했더니 젊은 사람들까지 열광했다. 골드, 그린, 화이트, 블루 등 각자 좋아하는 색깔로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구입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가 디자인한 명태 아트상품은 문화체육관광부와 관광공사가 주최하는 한국관광기념품 공모전에 출품을 해서 동상을 수상했다. 리움미술관이 코로나 이후 재개관을 하면서 한국적인 느낌이 나는 아트상품으로 그의 ‘굿럭피쉬/명태’를 팔았는데 3000개가 순식간에 팔렸다고 한다. 이 아트상품은 지난해 가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공예트렌드페어에서도 선보였다. 명태는 3D프린터로 만든 모양이지만 자석이 달려 있어서 아파트의 철제 출입문에 잘 붙게 만들어졌다. “공예트렌드페어에 온 관람객이 첫날 10개를 사갔는데, 다음날 또 와서 색깔별로 10개를 사가는 거예요. 어디에 선물하실 거냐고 물었더니 아들, 손자, 며느리, 친척, 친구들 줄 거라며 누구 대문은 빨간색이어서 이 색깔이 어울리겠다고 하더라구요. 명태를 선물한다기보다는 ‘복 받으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명태와 명주실을 선물하기에는 좀 꺼림칙하지만, 예쁜 액세서리용 아트상품이 재미와 의미가 담긴 선물로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MZ세대까지 명주실 명태 아트상품에 호응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패턴 구매자 분석을 해보면 20대도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일상 속 샤머니즘 같은 것이 어떻게 하면 아트상품으로 나올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약간 무거울 수 있는 메시지를 유니크하고 재미있게 풀었기 때문에 젊은 세대들도 좋아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게 웃긴 점은 기능이 없는 물건이라는 점이죠. 마우스나 펜, 컵처럼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이잖아요. 복을 기원해주고, 액을 막아주는 상징일 뿐입니다. 댓글에 보면 ‘한국에 이런 문화가 있었대’하고 엄마에게 물어보니 엄마가 설명해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우리 문화가 끊어지지 않고 대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혹시 물고기 모양의 민속 선물에 대한 거부감은 없나. “사실 물고기에 대한 상징은 모든 종교에 다 들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물고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상징이었습니다. 불교에서도 물고기는 밤에도 눈 뜨고 잔다고 해서 수행자의 상징입니다. 또한 눈을 뜬 물고기는 재물을 지켜준다고 해서 우리나라 자물쇠에는 거의 100% 물고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창덕궁 후원에는 연못의 돌에도 물고기가 조각돼 있고, 이어지는 누각에는 용이 새겨져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잉어가 오랜 수행을 하면 용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적인 문화를 아트 디자인 상품으로 만들면서 보람은. “예전에 제가 알고 지내던 스님을 찾아 절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스님이 댓돌에 고무신을 벗어놓고 들어가셨길래 나오실 때 편하시라고 신발 방향을 밖으로 돌려놓고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스님에게 혼이 났습니다. 손님이 벗어놓은 신발을 돌려놓는 것은 일본에서 온 문화지 우리 문화가 아니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그걸 합리적인 예절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찾아온 손님이 오랫동안 여유있게 이야기도 하고, 천천히 가시라는 의미에서 신발을 돌려놓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나갈 때 신발 신기에 조금 어렵겠지만, 손님이 편안한 마음으로 머무르게 배려하는 문화라는 설명이 너무 좋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소엔 관심없다가도, 한국의 문화에 담긴 내면의 철학을 알고 나면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에 한국적 문화 아트상품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은. “다음으로 개발하고 있는 것이 ‘효자손’입니다. 효자손은 등에 손이 안 닿는 곳을 긁어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없을 때 긁어주는 도구잖아요. 그냥 ‘등 긁게’라고 하면 될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효자손’이라는 이름을 붙였거든요. 저는 효자손이라는 말이 너무 좋습니다. 지극히 한국적인 맥락에서 나온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효자손은 낙엽을 긁는 도구나, 밭을 가는 쟁기같은 농기구처럼 생겼습니다. 그걸로 등을 긁으면 진짜 시원합니다.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효자손’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한국적인 문화상품이 되는 것이죠. 댓돌에 신발을 거꾸로 돌려놓지 않는 것처럼, 한국적인 개념과 스토리텔링이 모티브가 되는 아트 디자인 상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경남 통영의 가로수는 동백이다. 통영의 길가에는 동백꽃과 매화가 한창이다. 가장 아름다운 동백은 1606년(선조 39년)에 지어진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충렬사에서 만난다. 고즈넉한 사당 앞마당의 수령 400년 가까운 동백나무에는 나뭇가지 아래에도 붉은 동백꽃이 뚝뚝 떨어져 피어 있다. 시인 백석은 충렬사 돌계단에서 통영의 한 소녀를 그리며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강원도 속초에서 미시령 고개를 넘어갈 때 당당하게 서 있는 울산바위는 외설악의 상징이다. 공룡의 등줄기를 닮은 거대한 설악의 봉우리들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는 가운데 산줄기에서 불끈 솟아 있는 울산바위는 장쾌하기 그지없다. 북부 이탈리아 알프스 돌로미티 지역의 웅장한 바위산맥이 부럽지 않은 한국의 명소다. 요즘 MZ세대들이 열광하는 울산바위 찍기 좋은 핫플레이스 4곳을 찾아 강원도로 떠났다. ● 거대한 파도가 나를 덮치는 신선대 강원 인제군에서 속초시를 잇는 미시령터널을 빠져나가면 오른편으로 울산바위(해발 873m)가 웅장하게 서 있다.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 있는 울산바위는 둘레만 4km에 이르고, 6개의 기암괴석 봉우리로 이뤄진 돌산이다. 넷플릭스 예능 ‘피지컬: 100’에서 볼 수 있는 울퉁불퉁한 근육질 몸매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우람한 봉우리 위에 작은 바위들이 화려하게 수놓여 있어서 왕관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장쾌한 남성미뿐 아니라 바위 틈에서 자라는 소나무까지 어우러져서 예술적 감동까지 느끼게 하는 자연의 위대한 작품이다. 울산바위를 감상하는 첫 번째 방법은 울산바위를 직접 올라가보는 것이다. 속초의 설악산 소공원에서 시작해 신흥사, 흔들바위를 지나 울산바위 정상 전망대까지 오를 수 있다. 흔들바위부터 울산바위까지는 철제 계단으로 편도 1㎞ 거리임에도 1시간 정도 걸리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울산바위 동봉 정상에서 보면 대청, 중청봉과 천불동계곡, 화채능선이 펼쳐져 선경이 따로 없다. 울산바위를 오르면 주변 설악과 동해의 풍경을 볼 수 있지만, 막상 울산바위 전체를 조망하긴 힘들다. 울산바위를 감상하기보다는 체험하는 것에 가까운 코스다. 프랑스 파리 에펠탑을 제대로 보려면 에펠탑에 오르기보다는, 맞은편 언덕인 트로카데로 광장이나 몽파트나스 타워 전망대로 가야 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요즘 MZ세대들이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인생샷을 찍으려 오르는 봉우리는 따로 있다. 바로 금강산 화암사에서 올라가는 신선대(성인대)다. 지난 주말 속초에 살고 있는 지인과 함께 ‘금강산 화암사 숲길’을 찾았다. 그는 “화암사에서 올라갈 수 있는 신선대는 해발 645m로 설악산에서는 낮은 봉우리에 속하지만 울산바위 조망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고 귀띔해주었다. 화암사 입구 찻집 앞에서 등산화에 아이젠을 신는다. 이곳에서 신선대(1.2km)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1시간이면 충분하지만, 눈이 녹지 않은 산길은 등산 장비를 제대로 갖춰야 한다. 숲길을 오르다 보니 중간 즈음에 ‘수암(穗巖)’이라는 바위를 만난다. 바위 모양이 벼 낟가리를 쌓아놓은 모습이라 ‘쌀바위’라고 불리는 바위다. 바위를 두드리면 쌀을 보시한다는 쌀바위 덕분에 이 절의 이름이 ‘화암사(禾巖寺)’가 됐다고 한다. 이후 한참을 오르다 보니 신선대(성인대)에 도착한다. 헬기장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전망이 탁 트이는 널찍한 암반이 나타난다. 낙타바위가 있는 이곳이 울산바위를 조망하는 최고의 포인트다. 설악산 달마봉부터 미시령 옛길, 신선봉, 동해바다와 속초 시내까지 360도의 전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신선대 낙타바위에서 마주 본 겨울의 울산바위는 산이 아니라 파도였다. 미시령에서 올려다봤던 울산바위는 육중한 병풍이나 성채 같았는데, 높은 곳에서 마주 보는 울산바위는 기운생동(氣韻生動), 살아 움직이는 파도였다. 설악에서 금강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물결 위로 갑자기 불쑥 솟아오른 거대한 파도. 영화 ‘인터스텔라’나 ‘퍼펙트 스톰’에서 봤던 파도이자, 언젠가 태풍이 지나가는 포항 앞바다에서 직접 마주쳤던 하늘에서 덮쳐내리는 파도였다. MZ세대들이 인생샷 명소로 꼽는 곳이니만큼 보기만 해도 아찔한 바위 앞에서 과감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에서 만난 등산객 황현주 씨는 “드라마틱한 바위산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 신선대는 탁 트인 전망과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어서 자주 오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보는 울산바위는 철마다 다르고, 날씨와 바람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르다”며 “아무리 피곤해도 한걸음에 달려오면 피로가 풀리고 기운과 힘, 에너지를 얻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 호수에서, 카페에서 감상하는 울산바위 울산바위 오른쪽 미시령 고개 너머에 솟은 봉우리는 신선봉이다. 금강산 1만2000봉의 남쪽 제1봉인 산이다. 신선봉에 살고 있는 성인이 양간지풍(襄杆之風)을 일으킨다고 전해진다. ‘속초 바람’ ‘미시령 바람’이라고 불리는 양간지풍은 봄철 동해안의 산불을 일으키는 바람으로 유명하다. 울산바위의 틈새 구멍에서 양간지풍이 불 때마다 바위가 큰 소리로 울어 ‘울산’ 바위로 불렸다는 전설이 있다. 울산바위 이름에 대해서는 다른 유명한 스토리도 있다. 조물주가 전국의 유명한 바위를 모아 금강산을 만들 때 울산바위도 금강산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울산을 떠나 설악산을 지날 즈음 1만2000봉이 모두 채워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눌러앉았다. 그런데 설악산 유람을 나섰던 울산의 원님이 찾아와 “울산바위는 울산 고을의 소유이니, 신흥사에서 울산바위를 차지한 대가로 세금을 내라”고 했다. 주지스님이 돈이 없어 걱정하자 동자승이 나섰다. “세금을 낼 돈이 없으니, 바위를 울산으로 옮겨 가세요.” 한 방 맞은 울산의 원님은 “바위를 재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가겠다”고 맞섰다. 동자승은 속초의 영랑호와 청초호 사이에 자라는 풀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에 둘러놓은 다음 불을 놓아 재로 꼰 새끼를 만들었다고 한다. 동자승의 지혜로 양민을 수탈하는 관리의 횡포를 막을 수 있었다는 슬픈 전설이다. 이 때문에 울산바위 아래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의 동네 이름이 ‘묶을 속(束)’ ‘풀 초(草)’자의 ‘속초’가 됐다고 전해진다. 속초의 아름다운 석호(潟湖)인 영랑호는 울산바위를 감상할 수 있는 세 번째 포인트다. 영랑호의 맑은 물 위로 비친 울산바위와 설악의 능선은 알프스의 풍경을 연상케 한다. 최근엔 영랑호 호수 위로 ‘뜬다리’(부교)가 놓여 울산바위를 바라볼 수 있는 사진촬영 포인트가 되고 있다. 울산바위를 즐기는 네 번째 방법은 미시령 터널 부근에 있는 고성 소노펠리체 델피노 10층에 있는 카페 ‘더 엠브로시아’다. 울산바위 설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전면의 대형 유리창 앞 자리를 맡기 위해 오전 8시 카페 문을 열면 오픈런이 벌어진다.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울산바위 6개의 봉우리 모양으로 조각된 디저트 ‘울산바위 오렌지 판나코타’. 크림, 설탕, 우유를 젤라틴과 섞어 시원하게 먹는 이탈리아 후식인 판나코타와 함께 곁들이는 ‘솔방울 라떼’는 설악의 분위기를 물씬 느끼게 해준다. ●가볼 만한 곳 속초 청초호에 있는 칠성조선소는 동해안의 고기잡이배를 만들던 소형 선박 조선소였다. 요즘처럼 섬유강화플라스틱(FRP)으로 배의 모양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목수가 직접 손으로 나무를 깎고, 휘고, 다듬어서 배를 제조하는 공장이었다. 1952년 원산조선소로 시작해 2017년까지도 배를 만들고 수리를 했던 곳이다. 입구에는 조선소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고, 배를 진수시키는 레일이 놓여 있는 야외 작업장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조선소로 쓰이던 천장 높은 컨테이너 작업장은 복층 카페 건물이 됐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속초항과 청초호의 풍경은 색다른 맛이다. 커피에 곁들이는 소금버터빵이 인기 메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MZ세대 사로잡은 울산바위 강원 속초에서 미시령 고개를 넘어갈 때 당당하게 서 있는 울산바위는 외설악의 상징이다. 공룡의 등줄기를 닮은 거대한 설악의 봉우리들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는 가운데 산줄기에서 불끈 솟아 있는 울산바위는 장쾌하기 그지없다. 북부 이탈리아 알프스 돌로미티 지역의 웅장한 바위산맥이 부럽지 않은 한국의 명소다. 요즘 MZ세대들이 열광하는 울산바위 사진을 찍기 좋은 핫플레이스 4곳을 찾아 강원도로 떠났다. ● 거대한 파도가 나를 덮치는 신선대 강원 인제군에서 속초시를 잇는 미시령터널을 빠져나가면 오른편으로 울산바위(해발 873m)가 웅장하게 서 있다. 강원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 있는 울산바위는 둘레가 4km에 이르고, 6개의 기암괴석 봉우리로 이뤄진 돌산이다. 넷플릭스 예능 ‘피지컬: 100’에서 볼 수 있는 울퉁불퉁한 근육질 몸매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우람한 봉우리 위에 작은 바위들이 화려하게 수놓여 있어서 왕관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장쾌한 남성미뿐 아니라 바위 틈에서 자라는 소나무 등이 어우러져서 예술적 감동까지 느끼게 하는 자연의 위대한 작품이다. 울산바위를 감상하는 첫 번째 방법은 울산바위를 직접 올라가 보는 것이다. 속초의 설악산 소공원에서 시작해 신흥사, 흔들바위를 지나 울산바위 정상 전망대까지 오를 수 있다. 흔들바위부터 울산바위까지는 철제 계단으로 편도 1km 거리임에도 1시간 정도 걸리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울산바위 동봉 정상에서 보면 대청, 중청봉과 천불동계곡, 화채능선이 펼쳐져 선경이 따로 없다. 울산바위를 오르면 주변 설악과 동해의 풍경을 볼 수 있지만, 막상 울산바위 전체를 조망하긴 힘들다. 울산바위를 감상하기보다는 체험하는 것에 가까운 코스다. 프랑스 파리 에펠탑을 제대로 보려면 에펠탑에 오르기보다는 맞은편 언덕인 트로카데로 광장이나 몽파르나스 타워 전망대로 가야 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요즘 MZ세대들이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인생샷을 찍으려 오르는 봉우리는 따로 있다. 바로 금강산 화암사에서 올라가는 신선대(성인대)다. 지난 주말 속초에 살고 있는 지인과 함께 ‘금강산 화암사 숲길’을 찾았다. 그는 “화암사에서 올라갈 수 있는 신선대는 해발 645m로 설악산에서는 낮은 봉우리에 속하지만 울산바위 조망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고 귀띔해 주었다. 화암사 입구 찻집 앞에서 등산화에 아이젠을 신는다. 이곳에서 신선대(1.2km)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1시간이면 충분하지만, 눈이 녹지 않은 산길은 등산 장비를 제대로 갖춰야 한다. 숲길을 오르다 보니 중간 즈음에 ‘수암(穗巖)’이라는 바위를 만난다. 바위 모양이 벼 낟가리를 쌓아놓은 모습이라 ‘쌀바위’라고 불리는 바위다. 바위를 두드리면 쌀을 보시한다는 쌀바위 덕분에 이 절의 이름이 ‘화암사(禾巖寺)’가 됐다고 한다. 이후 한참을 오르다 보니 신선대(성인대)에 도착한다. 헬기장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전망이 탁 트이는 널찍한 암반이 나타난다. 낙타바위가 있는 이곳이 울산바위를 조망하는 최고의 포인트다. 설악산 달마봉부터 미시령 옛길, 신선봉, 동해바다와 속초 시내까지 360도의 전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신선대 낙타바위에서 마주 본 겨울의 울산바위는 산이 아니라 파도였다. 미시령에서 올려다봤던 울산바위는 육중한 병풍이나 성채 같았는데, 높은 곳에서 마주 보는 울산바위는 기운생동(氣韻生動), 살아 움직이는 파도였다. 설악에서 금강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물결 위로 갑자기 불쑥 솟아오른 거대한 파도. 영화 ‘인터스텔라’나 ‘퍼펙트 스톰’에서 봤던 파도이자, 언젠가 태풍이 지나가는 경북 포항 앞바다에서 직접 마주쳤던 하늘에서 덮쳐내리는 파도였다. MZ세대들이 인생샷 명소로 꼽는 곳이니만큼 보기만 해도 아찔한 바위 앞에서 과감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에서 만난 등산객 황현주 씨는 “드라마틱한 바위산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 신선대는 탁 트인 전망과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어서 자주 오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보는 울산바위는 철마다 다르고, 날씨와 바람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르다”며 “아무리 피곤해도 한걸음에 달려오면 피로가 풀리고 기운과 힘, 에너지를 얻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 호수에서, 카페에서 감상하는 울산바위 울산바위 오른쪽 미시령 고개 너머에 솟은 봉우리는 신선봉이다. 금강산 1만2000봉의 남쪽 제1봉인 산이다. 신선봉에 살고 있는 성인이 양간지풍(襄杆之風)을 일으킨다고 전해진다. ‘속초 바람’ ‘미시령 바람’이라고 불리는 양간지풍은 봄철 동해안의 산불을 일으키는 바람으로 유명하다. 울산바위의 틈새 구멍에서 양간지풍이 불 때마다 바위가 큰 소리로 울어 ‘울산’ 바위로 불렸다는 전설이 있다. 울산바위 이름에 대해서는 다른 유명한 스토리도 있다. 조물주가 전국의 유명한 바위를 모아 금강산을 만들 때 울산바위도 금강산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울산을 떠나 설악산을 지날 즈음 1만2000봉이 모두 채워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눌러앉았다. 그런데 설악산 유람을 나섰던 울산의 원님이 찾아와 “울산바위는 울산 고을의 소유이니, 신흥사에서 울산바위를 차지한 대가로 세금을 내라”고 했다. 주지스님이 돈이 없어 걱정하자 동자승이 나섰다. “세금을 낼 돈이 없으니, 바위를 울산으로 옮겨 가세요.” 한 방 맞은 울산의 원님은 “바위를 재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가겠다”고 맞섰다. 동자승은 속초의 영랑호와 청초호 사이에 자라는 풀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에 둘러놓은 다음 불을 놓아 재로 꼰 새끼를 만들었다고 한다. 동자승의 지혜로 양민을 수탈하는 관리의 횡포를 막을 수 있었다는 슬픈 전설이다. 이 때문에 울산바위 아래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의 동네 이름이 ‘묶을 속(束)’ ‘풀 초(草)’자의 ‘속초’가 됐다고 전해진다. 속초의 아름다운 석호(潟湖)인 영랑호는 울산바위를 감상할 수 있는 세 번째 포인트다. 영랑호의 맑은 물 위로 비친 울산바위와 설악의 능선은 알프스의 풍경을 연상케 한다. 최근엔 영랑호 호수 위로 ‘뜬다리’(부교)가 놓여 울산바위를 바라볼 수 있는 사진촬영 포인트가 되고 있다. 울산바위를 즐기는 네 번째 방법은 미시령터널 부근에 있는 고성 소노펠리체 델피노 10층에 있는 카페 ‘더 엠브로시아’다. 울산바위 설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전면의 대형 유리창 앞 자리를 맡기 위해 오전 8시 카페 문을 열면 오픈런이 벌어진다.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울산바위 6개의 봉우리 모양으로 조각된 디저트 ‘울산바위 오렌지 판나코타’. 크림, 설탕, 우유를 젤라틴과 섞어 시원하게 먹는 이탈리아 후식인 판나코타와 함께 곁들이는 ‘솔방울 라떼’는 설악의 분위기를 물씬 느끼게 해준다. ● 가볼 만한 곳 속초 청초호에 있는 칠성조선소는 동해안의 고기잡이배를 만들던 소형 선박 조선소였다. 요즘처럼 섬유강화플라스틱(FRP)으로 배의 모양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목수가 직접 손으로 나무를 깎고, 휘고, 다듬어서 배를 제조하는 공장이었다. 1952년 원산조선소로 시작해 2017년까지도 배를 만들고 수리를 했던 곳이다. 입구에는 조선소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고, 배를 진수시키는 레일이 놓여 있는 야외 작업장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조선소로 쓰이던 천장 높은 컨테이너 작업장은 복층 카페 건물이 됐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속초항과 청초호의 풍경은 색다른 맛이다. 커피에 곁들이는 소금버터빵이 인기 메뉴다.글·사진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명태는 말려서 북어가 돼도 눈이 굉장히 맑아요. 그래서 명태에 ‘밝을 명(明)’자가 들어가는지도 모릅니다. 명태에 흰색 명주실을 감아놓은 형태 자체만으로도 정말 아름다운 디자인이라고 느꼈습니다.” 어릴 적 가게 문 위에 걸려 있던 ‘흰색 명주실을 감은 명태’를 아트 상품으로 만든 정연중 디자인스튜디오 ‘버금’ 대표(사진). 그는 우리 고유의 정신과 멋이 담긴 문화재를 아트 상품으로 개발하는 디자인 전문가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금제 유물, 국립고궁박물관의 일월오봉도, 프랑스가 반환한 ‘조선왕조의궤’ 등을 모티브로 한 예술상품을 만들어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특히 정조의 화성행차 행렬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길이 5m의 족자 상품은 500세트가 순식간에 완판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가 지난해 리움미술관 재개관 특별전, 공예트렌드페어에서 선보였던 새로운 아트 상품은 바로 길상(吉祥)의 의미를 담은 ‘명주실 북어’다. 집이나 사무실을 이사할 때, 차를 새로 샀을 때 복을 빌고, 액운을 막는 의미로 걸어두던 민속이다. 그는 명주실을 감은 북어를 직접 디지털로 조각해 3차원(3D) 프린터로 만들어 레드, 블루, 골드, 그린, 화이트 등 다채로운 색깔의 상품으로 만들고, 자석을 붙여 아파트 문이나 냉장고에 붙일 수 있도록 했다. ‘굿럭피쉬/명태’라고 이름 붙인 이 아트상품은 지난가을 리움미술관 아트숍과 공예트렌드페어에서 3000여 개가 팔렸고, 올 초 카카오메이커스에서 5000개가 팔리는 등 돌풍을 일으켰다.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은 꼭 손을 흔드는 고양이 인형을 사옵니다. 한국을 상징하는 아트상품이 없을까 하다가 액을 막아주고, 복을 기원해주는 ‘명주실이 감긴 명태’를 생각하게 됐어요. 명태 자체를 선물하긴 어렵잖아요. 예쁜 물고기 모양의 아트상품으로 만드니 젊은층이 반응한 것 같아요. 집의 인테리어에 맞춰 선물용으로 다양한 색깔을 구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 대표는 “고교 수학여행 때 경주 불국사에서 큰 감명을 받았는데 기념품이 너무 조잡해 오히려 좋은 추억을 망쳤던 기억이 있다”며 “우리만의 스토리텔링과 철학, 예술성이 살아 있는 높은 퀄리티의 아트 상품을 개발해 한국관광에 대한 좋은 기억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선자령은 강원도를 영동과 영서로 나누는 대관령 북부에 있는 ‘바람의 언덕’이다. 동해에서 출발해 고개를 넘는 초속 6.7m 이상의 바람이 연중 내내 분다. 선자령은 해발 1157m로 높지만 옛 대관령휴게소(840m)에서 출발하면 완만해서 산책하듯 올라갈 수 있다. 정상에 서면 발왕산, 계방산, 오대산, 황병산이 파노라마로 펼쳐지고 동해 바다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눈 덮인 능선에 거대한 풍차 50여 기가 돌고 있는 모습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이탈리아 베네치아 카니발 기간 중 어린아이들이 가면을 쓰고 산마르코 광장을 걷고 있다. 12세기에 시작된 이 카니발은 이탈리아 최대 축제다. 매년 사순전 전날까지 10여 일 동안 열리는데, 올해는 2월 4일부터 21일까지 열린다. 카니발이 열리면 화려하게 치장한 보트들이 운하 위에서 퍼레이드를 벌이고, 화려한 가장행렬과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코로나로 수년간 마스크를 껴야 했던 시민들이 진짜 마스크(가면)를 쓰고 축제를 즐기는 것이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동아일보는 광화문 네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동아일보 편집국 회의가 열리는 14층 회의실 창문에서 바라보면 북악산 아래 청와대와 경복궁, 광화문이 한 눈에 보인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북악산과 인왕산, 그 뒤로 보이는 북한산까지 온통 새하얗게 변하고, 광화문 광장에도 하얀 눈발이 흩날린다. 2000년에 동아일보 신사옥이 준공된 이래 광화문 광장의 풍경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명소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곳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국가대표 축구팀 붉은악마 응원단들은 처음엔 동아일보 구사옥(현 일민미술관) 옥상에 있는 대형전광판이 마주 보이는 세종로 건너편 동화면세점 앞에서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축구 국가대표팀이 4강까지 진출하자 붉은 옷을 입은 응원단의 숫자는 점점 많아져 광화문부터 시청앞 광장까지 연일 가득 메웠던 것이다. 당시 이러한 장엄한 광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숨은 명소가 바로 동아일보 사옥이었다. 광화문부터 시청앞까지 가득메운 응원단들의 함성과 도약, 어깨를 걸고 추는 춤들이 지신밟기가 되어 광화문이 깨어났다. 그 때부터 광화문은 왕복 20차선의 차도가 아닌 ‘광화문 광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월드컵의 함성이 도로를 광장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월드컵이 끝난 후 히딩크 감독과 국가대표팀의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모습을 14층 회의실 창문 밖으로 내려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후 광화문 광장은 우리 사회의 가장 역동적인 정치적 공간이 됐다. 2009년 서거한 노무현 대통령의 노제가 지나갔고, 광우병, 세월호, 촛불집회, 태극기 집회 등이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완공된 구 동아일보 사옥(현 일민미술관)은 일제 총독부와 군사독재 시절 청와대를 마주보며 견제하기 위한 공간에 지어졌다. 실제로 구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들이 사용하던 남자 화장실은 총독부(청와대)를 마주보고 있는 방향으로 소변을 볼 수 있는 구조다. 창문 밖으로 총독부를 바라보는 상태에서 소변을 보는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전설이 내려져왔다. 요즘 동아일보 사옥에서 광화문과 청와대를 바라보는 풍경은 사뭇 달라졌다. 대통령 집무실이 용산으로 이전하고, 광화문 광장이 대폭 확장돼 공원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이제 권력의 공간이 아니라 시민들이 걸어다니는 문화와 산책의 한 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인왕산-북악산-청와대-경복궁-광화문-송현동으로 이어지는 도심의 산책 코스는 무궁무진한 역사와 문화가 숨쉬고 있는 답사길이자 최고의 핫 플레이스다. 광화문은 그 자체가 이질적 시간의 복합체다. 과거와 현재, 영광과 오욕, 지배와 피지배, 한국과 외국, 식민과 민족자주의 흔적이 공존하는 이 거리의 특징은 획일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광화문의 대로변은 파리의 샹젤리제를 연상시키는 말쑥한 근대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로 안쪽으로 열 발짝만 들어가도 실타래처럼 얽힌 골목들을 만날 수 있다. 골목마다 다른 이력과 단골을 가진 밥집, 술집, 가게…. 광화문의 골목은 이 공간의 자유와 개성을 담보해 왔다. 외국의 구도심에 가면 광장 주변에 수많은 역사 유적과 건물, 시장이 서 있는 곳이 많다. 서울의 경우 자동차에 내주었던 도심이 점차 광장으로 회복하고, 산책로로 연결되고 있다. 올해 말 광화문 광장 북쪽 월대까지 복원되면, 광화문과 경복궁이 얼마나 더 가까워질지 기대가 된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눈 덮인 겨울숲으로 가자.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송곳같은 칼바람에도 꼿꼿이 서서 버텨내는 겨울나무에는 눈꽃, 얼음꽃, 서리꽃이 피어난다. 상고대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하늘은 바다처럼 푸르다. 나뭇가지에 맺힌 얼음꽃은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크리스탈 보석이다. 강원도의 높은 산에서 ‘살아천년, 죽어천년’을 산다는 주목(朱木)과 하얀 눈밭에서 눈처럼 시린 은세계를 펼쳐내는 자작나무까지. 겨울산을 지키는 나무에게서 진정한 고독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자. 발왕산 천년주목숲길고산지대의 능선에는 다른 큰 나무를 볼 수 없다. 붉은색 줄기에 푸른 잎을 가진 주목만 드문드문 서 있을 뿐이다. 주목은 우리나라에서 태백산,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자생한다. 한민족의 끈기와 인내를 상징하는 주목은 오래 살고 죽어도 잘 썩지 않는다. 말그대로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사는 나무다. 주목은 왜 그렇게 높고 추운 산에서 더 잘 살아가는 것일까. 주목은 1년에 불과 몇cm 밖에 자라지 않아 성장이 느린 나무로 유명하다. 쑥쑥 자라는 나무와의 경쟁에서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그늘에서 햇볕을 받지 못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주목의 선택은 과감하게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따뜻한 햇볕이 있지만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에서 벗어나, 혹독한 환경에서 자발적 고립과 무한한 인내를 선택한 것이다. 주목은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대에서 강추위와 칼바람을 견뎌내며 천년을 살아간다. 푸른 하늘이 가까운 발왕산 정상이, 주목에게는 바로 블루오션이다. 강원 용평에 있는 발왕산(1458m)은 우리나라에서 12번째로 높은 산이다. 이곳엔 천년주목숲길이 있다. 50주년을 맞은 용평리조트가 새롭게 이름을 바꾼 발왕산 모나파크(Monapa가)가 지난해 만든 숲길이다. 발왕산 정상부에 잘 보전된 주목 군락지를 발견한 모나파크는 수년간 산림청, 평창군과 협의해 주목을 한 그루도 베어내지 않고 생태를 살린 무장애 데크길(3.2km)을 조성했다. 케이블카를 타면 15분 만에 용평스키장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발왕산 정상에 있는 드래곤캐슬에 도착한다. 모나파크 스카이워크에 서면 선자령, 안반데기, 황병산으로 이어지는 산세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밖으로 나오면 발왕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눈꽃, 얼음꽃 요정이 살고 있는 상고대가 핀 나무들을 지나면 천년주목숲길이 나타난다. 오랜 세월 욕심을 버리고 내면을 비워서 그럴까. 천년을 넘게 산 주목들은 속이 텅 비었다. 참선의 나무, 고뇌의 주목, 왕발나무 주목…. 혹독한 환경 속에서 생명의 싹을 띄워온 나무들에게는 스토리텔링이 담긴 이름이 붙어 있다. ‘고해의 주목’은 나무 안에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텅빈 공간이 있다. 나무에 감싸여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에서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컴컴한 나무 속 작은 구멍으로 한줄기 빛이 쏟아진다. 고해와 명상 끝에 얻을 수 있는 구원의 빛! 한 그루의 나무도 베지 않고 조성했다는 천년주목숲길은 걷다보면 데크길 위로 드리워진 나무들 때문에 허리를 숙이고 지나가야 한다. 누구나 자연 앞에 몸을 낮춰야 하는 ‘겸손의 나무’다. 오래된 주목의 텅빈 몸통에는 다른 나무의 생명이 싹트는 경우도 많다. 성인 세 명이 안아야 감쌀 수 있는 둘레 4.5m의 ‘어머니왕주목’의 몸통 한 가운데에는 마가목의 가지가 삐쭉하게 뻗어나와 있다. 마치 나무가 출산하고 있는 장면처럼 보인다. 어머니왕주목은 작은 마가목을 품에 안고 키운다. 인근에는 든든한 어깨로 발왕산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아버지왕주목’도 있다. 지혜를 상징하는 왕수리부엉이가 이 나무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니 더욱 신령스럽게 보인다. 발왕산 천년주목숲길은 발왕수(發王水) 가든에서 마무리된다. 발왕산의 순백의 눈이 스며든 맑은 석간수가 매일 410톤이나 쏟아지는 곳이다. 천연미네랄을 함유한 발왕수는 톡 쏘는 맛이나 쇠맛 없이 깔끔하고 시원한 물맛을 자랑한다. 모나파크에서는 발왕산 정기가 담긴 이 물로 발왕산 막걸리와 김치를 만든다. 발왕산에는 또다른 명품 겨울숲이 있다. 발왕산 애니포레에 있는 독일 가문비나무 숲이다. 애니포레는 울릉도에서 산나물이나 고로쇠물을 채취할 때 쓰는 작고 느린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간다. 이 곳은 1960년대 화전민들이 이주한 터에 심은 독일가문비나무가 국내 최대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쭉쭉 뻗은 독일가문비나무 숲에서는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온다. 발왕산의 기(氣)를 느끼며 걷다보면 호흡이 맑아지고 머리도 상쾌해진다. 날이 풀리면 독일가문비나무 숲 속에서는 요가 클래스도 열린다. 이 곳에는 알파카 농장도 있다. 남미가 원산지인 알파카는 푸들이나 비숑같은 반려견처럼 몽글몽글한 털이 있어 귀여움 그자체다. 속삭이는 자작나무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숲에 들어서면 마치 광활한 시베리아 설원에 온 듯한 이국적 풍경에 가슴이 설렌다.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었던 ‘닥터 지바고’ 영화에서 나오던 라라의 테마 음악이 들릴 듯하다. 연인인 라라가 자작나무 숲 사이로 썰매를 타고 떠나가던 모습을 바라보던 지바고의 눈빛도 떠오른다. 북유럽과 시베리아, 우리나라 함경도, 일본 홋카이도 등 추운 지방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는 뽀얀 수피가 아름다운 수종이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인제국유림관리소가 산불 확산을 막기 위해 1974~95년까지 41만 평에 69만 그루를 심어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자작나무숲에 가려면 주차장에서 내려 약 3,5km 임도를 걸어야 한다. 눈이 와 있는 요즘에는 등산화와 아이젠이 필수다. 입구에서 1시간 쯤 걸으니 자작나무 숲이 나타났다. 눈부신 수피가 뿜어내는 은(銀)세계. 하얀 눈밭에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자작나무 군락의 첫 느낌은 포근함이었다. 숨어들기 좋은 숲이다. 자작나무의 수피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무늬들이 있다. 산모양, 호미모양, 달팽이 모양…. 처음엔 상처처럼 보였는데 나무의 입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불자 자작나무 숲에 있는 수백그루의 나무들이 입을 벌려 나지막히 속삭였다. 자작나무 숲에서 따뜻함과 포근함을 느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자작나무는 영하 20~30도의 혹한을 그리 두꺼워 보이지 않는 새하얀 나무 껍질 하나로 버틴다. 자작나무의 껍질을 손으로 만져보니 의외로 부드러웠다. 하얀 가루가 묻어날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자작나무는 보온을 위해 종이처럼 얇은 껍질을 겹겹이 입고 있다. 겨울 등산을 할 때 두꺼운 옷 한 벌보다는 얇은 옷 여러벌을 겹쳐 입는 것이 좋다는 법을 자작나무도 아는 것 같다. 자작나무는 얇은 껍질 사이에 풍부한 기름성분까지 넣어 나무의 근원인 부름켜(형성층)가 얼지 않도록 한다. 두께 0.1~0.2mm 남짓한 흰 껍질은 매끄럽고 잘 벗겨지므로 종이를 대신하여 불경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쓰였다. 경주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를 비롯해 서조도(瑞鳥圖) 등은 자작나무 종류의 껍질에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일까. 인제 자작나무 숲에는 방문객들이 자작나무 껍질에 낙서를 하거나, 껍질을 벗겨 훼손된 나무가 있었고, 이를 금지하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자작나무란 이름은 작위를 받은 귀족같은 풍모에 붙여진 이름인 줄 알았는데, 탈 때 ‘자자작자작’하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자작나무 껍질은 기름기가 많아 불을 붙이면 잘 붙고 오래가서 부엌 한 구석에 불쏘시개로 놓여 있던 나무였다. 결혼식 등 경사스러운 날에 불을 켜는 ‘화촉을 밝힌다’는 표현 또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초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그리고 감로(甘露) 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시인 백석(1912~1995)이 1938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하얀 자작나무가 있는 풍경을 담은 시 ‘백화(白樺)’를 썼다. ‘온통 자작나무다’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는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에 가보면 알 수 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눈 덮인 겨울숲으로 가자.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송곳 같은 칼바람에도 꼿꼿이 서서 버텨내는 겨울나무에는 눈꽃, 얼음꽃, 서리꽃이 피어난다. 나뭇가지에 서리가 잔뜩 붙어 눈꽃을 이룬 상고대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하늘은 바다처럼 푸르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린 얼음꽃은 크리스털 보석처럼 햇빛에 반짝반짝 빛난다. 강원도의 높은 산에서 ‘살아천년, 죽어천년’을 산다는 주목(朱木)과 하얀 눈처럼 시린 은(銀)세계를 펼쳐내는 자작나무까지. 겨울산을 지키는 나무에게서 절대 고독의 아름다움을 생각해 보았다.》 ●발왕산 천년주목숲길고산지대의 능선에는 커다란 나무를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붉은색 줄기에 푸른 잎을 가진 주목만 드문드문 서 있을 뿐이다. 주목은 우리나라에서 태백산,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자생한다. 한민족의 끈기와 인내를 상징하는 주목은 오래 살고 죽어도 잘 썩지 않는다. 말그대로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사는 나무다. 주목은 왜 그렇게 높고 추운 산에서 더 잘 살아가는 것일까. 주목은 1년에 불과 몇 cm밖에 자라지 않아 성장이 느린 나무로 유명하다. 쑥쑥 자라는 나무와의 경쟁에서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그늘에서 햇볕을 받지 못하면 죽을 운명이기에, 주목의 선택은 과감하게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따뜻하지만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에서 벗어나, 혹독한 환경에서 자발적 고립과 무한한 인내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주목은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대에서 강추위와 칼바람을 견뎌내며 천년을 살아간다.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에 있는 발왕산(1458m)은 우리나라에서 12번째로 높은 산이다. 이곳엔 ‘천년주목숲길’이 있다. 50주년을 맞은 용평리조트가 새롭게 이름을 바꾼 발왕산 모나파크(Monapark)가 지난해 조성한 숲길이다. 이곳에서 잘 보전된 주목 군락지를 발견한 모나파크는 수년간 산림청, 평창군과 협의해 주목을 한 그루도 베어내지 않고 생태를 살린 무장애 덱길(3.2km)을 만들었다. 케이블카를 타면 15분 만에 용평스키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발왕산 정상의 드래곤캐슬에 도착한다. 모나파크 스카이워크에 서면 선자령, 안반데기, 황병산으로 이어지는 주변 산세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밖으로 나와 눈꽃, 얼음꽃 요정이 살고 있는 상 고대가 핀 나무들을 지나면 천년주목숲길이 나타난다. 오랜 세월 욕심을 버리고 내면을 비워서 그럴까. 천년을 넘게 산 주목들은 속이 텅 비었다. 참선의 나무, 고뇌의 주목, 왕발나무…. 혹독한 환경 속에서 생명의 싹을 틔워온 나무들에게는 스토리텔링이 담긴 이름이 붙어 있다. ‘고해(告解)의 주목’은 나무 안에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텅빈 공간이 있다. 나무에 감싸여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에서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컴컴한 나무 속 작은 구멍으로 한줄기 빛이 쏟아진다. 한 그루의 나무도 베지 않고 조성했다는 천년주목숲길은 걷다 보면 덱길 위로 드리워진 나무들 때문에 허리를 숙이고 지나가야 한다. 누구나 자연 앞에 몸을 낮춰야 하는 ‘겸손의 나무’다. 오래된 주목의 텅빈 몸통에는 다른 나무의 생명이 싹트는 경우도 많다. 성인 세 명이 안아야 감쌀 수 있는 둘레 4.5m의 ‘어머니왕주목’의 몸통 한가운데에는 마가목의 가지가 삐쭉하게 뻗어나와 있다. 마치 나무가 출산하고 있는 장면처럼 보인다. 어머니왕주목은 작은 마가목을 품에 안고 키운다. 인근에는 든든한 어깨로 발왕산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아버지왕주목’도 있다. 지혜를 상징하는 왕수리부엉이가 이 나무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니 더욱 신령스럽게 느껴진다. 발왕산 천년주목숲길은 발왕수(發王水) 가든에서 마무리된다. 발왕산 순백의 눈이 스며든 맑은 석간수가 매일 410t이나 쏟아지는 곳이다. 천연미네랄을 함유한 발왕수는 톡 쏘는 맛이나 쇠맛 없이 깔끔하고 시원한 물맛을 자랑한다. 모나파크에서는 발왕산 정기가 담긴 이 물로 발왕산 막걸리와 김치를 만든다. 발왕산에는 또다른 명품 겨울숲이 있다. 발왕산 애니포레에 있는 독일 가문비나무숲이다. 이곳은 1960년대 화전민들이 이주한 터에 심은 독일가문비나무가 국내 최대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쭉쭉 뻗은 독일 가문비나무숲에서는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온다. 발왕산의 기(氣)를 느끼며 걷다 보면 호흡이 맑아지고 머리도 상쾌해진다. 숲속엔 알파카 농장도 있다. 남미가 원산지인 알파카는 몽글몽글한 털이 있어 귀여움 그 자체다.●속삭이는 자작나무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숲에 들어서면 마치 광활한 시베리아 설원에 온 듯한 이국적 풍경에 가슴이 설렌다. 195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었던 ‘닥터 지바고’ 영화에서 나오던 라라의 테마 음악이 귓가에 맴도는 숲이다. 자작나무는 북유럽과 시베리아, 우리나라 함경도, 일본 홋카이도 등 추운 지방에서 자생한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인제국유림관리소가 산불 확산을 막기 위해 1974∼1995년 41만 평에 69만 그루를 심어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자작나무숲에 가려면 주차장에서 내려 약 3.5km 임도를 걸어야 한다. 눈이 와 있는 요즘에는 등산화와 아이젠이 필수다. 입구에서 1시간쯤 걸으니 자작나무숲이 나타났다. 눈부신 수피가 뿜어내는 은세계. 하얀 눈밭에 서 있는 키 큰 자작나무 군락의 첫인상은 포근함이었다. 숨어들기 좋은 숲이랄까. 자작나무의 수피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무늬들이 있다. 산 모양, 호미 모양, 달팽이 모양…. 처음엔 상처처럼 보였는데 나무의 입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불자 자작나무숲에 있는 수백 그루의 나무들이 입을 벌려 나지막이 속삭였다. 자작나무숲에서 포근함을 느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자작나무의 껍데기를 손으로 만져 보니 의외로 부드러웠다. 자작나무는 영하 20∼30도의 혹한을 견디기 위해 종이처럼 얇은 껍질을 겹겹이 입고 있다. 겨울 등산을 할 때 두꺼운 옷 한 벌보다는 얇은 옷 여러 벌 겹쳐 입기가 좋다는 걸 자작나무도 아는 것 같다. 두께 0.1∼0.2mm 남짓한 흰 껍질은 매끄럽고 잘 벗겨지므로 종이를 대신하여 불경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쓰였다. 경주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는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일까. 인제 자작나무숲에는 방문객들이 자작나무 껍데기에 낙서를 하거나, 껍데기를 벗겨 훼손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자작나무는 탈 때 ‘자작자작’ 하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작나무 껍데기는 기름기가 많아 불을 붙이면 잘 붙고 오래가서 부엌 한구석에 불쏘시개용으로 비치돼 있던 나무다. ‘화촉을 밝힌다’는 표현 또한 자작나무 껍데기로 만든 초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시인 백석(1912∼1996)이 1938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하얀 자작나무가 있는 풍경을 담은 시 ‘백화(白樺)’를 썼다. ‘온통 자작나무다’라는 표현이 무슨 말인지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에 가면 알 수 있다.글·사진 평창·인제=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이탈리아 북부의 비첸차에는 최대 관객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올림피코 극장이 있다. 유럽에 현존하는 실내 극장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공연장이다. 1580년 이탈리아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설계로 시작돼 5년 뒤 제자인 스카모치가 완성했다. 개막작이었던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렉스’를 공연하기 위해 테베의 거리를 3차 원근법으로 재현한 아름다운 무대 장치가 그대로 남아 있다. 대리석으로 보이는 무대는 나무와 회반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프리미엄 매트리스 브랜드 씰리침대(대표 윤종효)가 차별화된 수면 경험을 위한 스프링 시스템 ‘포스처피딕’을 새로운 브랜딩 캠페인으로 본격 알리기에 나섰다.포스처피딕(Posturepedic)은 자세(Posture)와 정형외과(Orthopedic)를 의미하는 단어의 합성어. 씰리가 1950년 세계 최초로 정형외과 전문의들과 함께 개발한 이후 진일보하고 있는 독자적인 매트리스 스프링 시스템이다. 최상의 수면 경험을 위한 기술의 집약체로 수면 시 신체 흔들림을 최소화하고 안정적인 지지력을 통한 최적의 편안함을 제공한다.이미 씰리침대는 세계 최대 매트리스 시장으로 꼽히는 북미 지역에서 다년간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한 프리미엄 매트리스 브랜드로 입지를 공고히 해왔다. 올해는 건강 측면에서 수면에 대한 소비자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매트리스의 본질이자 수면 건강과 직결된 스프링 기술력에 대한 우위성을 알리는 데 집중한다. 최근 공개된 TV 광고에도 포스처피딕의 장점이 잘 드러났다. 포스처피딕 기술력이 집약된 매트리스에서 취하는 편안한 수면이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 간접적으로 표현됐다. 특히 포스처피딕 기술이 적용된 스프링과 매트리스 가장자리 처짐을 방지하는 씰리의 또 다른 독자 기술 ‘유니케이스’ 등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며 기술력의 차이가 양질의 수면 경험을 만들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최고의 품질을 위한 지속적인 연구개발로 포스처피딕은 갈수록 진보하고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제품으로는 씰리의 대표 프리미엄 매트리스 제품인 ‘엑스퀴짓Ⅱ’와 럭셔리 하이엔드 컬렉션 ‘헤인즈’ 등이 있다. ‘엑스퀴짓Ⅱ’에는 포스처피딕 기술력의 정점인 티타늄 합금 소재의 ‘ReST Support Coil’이 적용됐다. 가볍지만 강한 내구성과 3단계에 걸친 섬세한 서포트 시스템을 통한 구간별 지지력 강화로 안락한 수면 경험을 돕는다. ‘헤인즈’ 역시 ReST Support Coil이 적용됐으며, 세계 최고 수준의 씰리침대 장인의 최소 11단계 공정에 걸친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져 씰리의 헤리티지를 느낄 수 있다.씰리는 소비자 이벤트와 구매 고객 대상 사은품 증정 프로모션도 마련했다. 2월 28일까지 씰리침대 전국 백화점 및 아웃렛, 공식 대리점에서 구매 고객 대상 으로 금액에 따라 다양한 사은품을 증정할 예정이다.씰리침대 관계자는 “편안한 수면 경험이 삶의 질과 직결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건강한 수면을 위한 연구를 이어온 씰리침대는 올해 인체공학적으로 디자인된 포스처피딕 스프링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데 집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계묘년(癸卯年) 설연휴를 앞두고 토끼의 하얀털처럼 보송보송한 눈이 덮인 설산(雪山)을 찾았다. 조선후기 실학자 홍만선은 ‘산림경제’에서 “토끼는 1천년을 사는데 500년이 되면 털이 희게 변한다고 한다”라며 흰토끼를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상징으로 보았다. 용궁에 잡혀가도, 호랑이에게 먹힐 위기에도 지혜로 탈출해내는 토끼는 지혜와 성장, 부부애와 화목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남녀노소 모두 다 친근하게 여기는 토끼의 미덕을 생각하며 겨울산에 올라보자. ●월악산의 달토끼, 옥토끼서울에는 밤새도록 비가 내렸던 지난 주말. 충북 제천에 있는 월악산(月岳山)에 올랐다. 소백산을 지나 속리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월악산의 험준한 산세에서 겨울 산행의 백미인 눈꽃과 상고대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동창교입구에서 산행을 시작한지 20여 분 만에 비는 눈으로 바뀌었다. 나뭇가지마다 보송보송한 솜털같은 눈이 쌓이고, 기암절벽에 뿌리내린 소나무의 솔잎에도 얼음이 얼어붙었다. 낮게 깔린 구름이 부연 안개처럼 골짜기를 가득메우니 한폭의 수묵화같은 절경이 펼쳐진다. 아이젠을 신고 스틱으로 균형잡으며 조심조심 정상으로 올라간다. 산 아랫부분에서는 눈꽃이 피었는데, 송계삼거리를 지나 높이 올라갈 수록 찬바람이 불면서 서리가 얼어붙은 상고대가 피어난다.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여. 드디어 월악산 정상인 영봉(靈峰·1097m)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의 산 중에 주봉의 이름이 영봉인 것은 백두산과 월악산이 유일하다고 한다. 백두산은 민족의 성산(聖山) 또는 영산(靈山)으로 불리는 산이고, 월악산도 신라시대부터 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져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동창교 입구에 있는 월악산신제의 유래 간판에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 당시 월악산으로 사람들이 피난해 몽골군이 쫓아왔는데, 갑자기 날씨가 사나워져서 몽골군이 월악산의 산신령이 노했다고 여기고 추격을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적혀 있다. 월악산이란 이름의 유래는 영봉 위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신라시대 월형산(月兄山)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월악산 달맞이 산행도 일품이다. 월악산 영봉에 걸리는 커다랗고 둥근 달은 자연스럽게 옥토끼(달에 산다는 토끼)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조선시대 한시, 민화, 구비문학에 이르기까지 옛사람들은 달에 토끼가 살고 있으며, 토끼를 달의 정령으로 여겼다. 예로부터 토끼는 선한 품성과 평화로움 때문에 이상향에 사는 동물로 생각했다. 달은 사람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세상이었기에 달에 사는 토끼 전설이 시작됐다고 보기도 한다. 토끼는 달에서 절구로 떡방아를 찧고 있다고 흔히 말하지만, 원래는 약초를 찧어 신선들을 위한 장생불사 약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달토끼의 전설은 만병통치의 약 ‘토끼의 간’으로 이어져 ‘별주부전’ ‘수궁가’에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도 있다. 영봉은 달이 걸리는 멋진 암벽이지만, 낮에 오르면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조망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충주호의 비경과 속리산, 대야산, 조령산, 주흘산의 산세가 한눈에 펼쳐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영봉에 올랐으나 짙은 안개 구름에 싸여 충주호를 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 다음날 영봉에 오른 지인이 맑게 개인 월악산 사진을 보내주었다. 상고대가 피어 있는 순백색의 산세와 충주호의 넘실거리는 푸른 물이 어우러져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날씨가 좋은 날, 충주호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보덕암에서 하봉, 중봉, 영봉을 넘어가는 코스로 월악산을 다시 한번 찾으리라. 서울의 명산인 도봉산 망월사(望月寺)에도 달과 토끼에 대한 전설이 내려온다. 대웅전 동쪽에 토끼 모양의 바위가 있고, 남쪽에는 달 모양의 월봉(月峰)이 있어 마치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망월사란 이름이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원래는 신라시대 수도인 경주 월성(月城)을 바라보며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 달토끼의 전설은 우리의 산하의 곳곳에 남아 있는 정겹고 평화로운 이미지임에 틀림없다. ●북한산 의상능선 ‘쌍토끼 바위’ 국토지리정보원에 따르면 전국에 토끼 관련 지명은 158개다. ‘토끼골’ ‘토끼섬’ ‘토산’ ‘토끼봉’ ‘묘봉’ 같은 이름이다. 그러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토끼모양은 흔치 않은데, 새해 산행 도중 서울 북한산 의상능선에서 영락없이 토끼를 닮은 바위를 만났다. 북한산성 입구에서 의상봉 방향 능선의 가파른 암릉을 네발로 기다시피 하며 올라간지 1시간여. 갑자기 시야가 탁하고 트이는 절벽 위에 용의 뿔을 단 개구리 얼굴같은 바위가 나타났다. 뒤로 돌아가니 쫑긋 선 두개의 귀를 가진 토끼 두 마리가 입맞춤을 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살짝 감은 둥그런 눈과 찢어진 입술, 토실토실한 엉덩이까지 영락없는 토끼다. 전통적으로 토끼를 그릴 때는 한 마리만 그리지 않고 두 마리를 그린다. 달에서 계수나무 아래에서 방아를 찧는 쌍토끼를 비롯해 민화 ‘화조영모도’에서도 모란꽃 아래 두 마리의 토끼를 그려 넣는다. 부부애와 화목함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의상봉 능선에서 쌍토끼 바위에 손을 대고 새해 소원을 빌어본다. 우리 부부에게도 사랑이 넘쳐나고, 가족도 늘 건강하고 화목하기를. 의상봉 쌍토끼 바위의 넉넉한 엉덩이는 긴 뒷다리를 감추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토끼는 뒷다리는 앞다리 보다 2~3배나 길다. 덕분에 토끼는 오르막과 평지에서 최대 시속 80km까지 껑충껑충 뛸 수 있다. 대신 내려갈 때는 속도를 내지 못해 사냥꾼들이 토끼몰이할 때는 아랫방향으로 몰아간다. 토끼의 높이 오르는 습성 탓에 토끼는 승진과 출세, 성장의 상징이기도 하다. 토끼님, 새해에는 KOSPI 주가도 토끼처럼 오를 때는 팍팍 오르고, 내려갈 때는 조금씩 내려가게 해주시길.경계심이 많은 토끼는 지혜로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영리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판다’는 ‘교토삼굴’(狡토三窟)은 조선시대에는 지조가 없는 선비를 비아냥대는 말로도 쓰였다. 그러나 21세기에는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경구처럼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해 다양한 대안을 마련해놓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판소리 ‘수궁가’에서 토끼는 자라의 속임수에 용왕에 끌려가 간을 빼앗길 위기에 몰린 힘없는 서민들의 상징이다. 권력자(용왕)와 그 하수인(자라)의 농간에 멍하고 있다보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앗길지도 모른다. 토끼는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나보다 뜨거운 돌덩이가 더 맛있다’고 속이고, 용궁에서는 ‘간을 빼놓고 왔다’고 꾀를 내고 도망가는 ‘탈토지세(脫兎之勢·우리를 민첩하게 빠져나가는 토끼의 기세)’의 정수를 보여준다. 새해에는 모두들 토끼처럼 샘솟는 지혜로 위기를 헤쳐나가고 퀀텀점프로 높이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월악산 산행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는데 친구가 퀴즈를 냈다. “토끼가 동물의 제왕이 됐다고 한다. 어떻게 됐을까?” 글쎄. 작고 귀여운 초식동물 토끼가 어떻게 제왕이 됐을까? 답은 ‘깡과 총으로’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무서운 토끼다. ●토끼해 설연휴 가볼만한 곳=서울 경복궁 내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토끼해 특별전 ‘새해, 토끼왔네’가 열린다. 토끼 생태에 얽힌 다양한 민속이야기를 볼 수 있다.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고 있는 ‘빛초롱 축제’에서는 빨간 복주머니를 든 대형토끼가 야경사진 명소로 인기다. 서울 월드컵공원과 목포 유달산, 대구 앞산 전망대에 설치된 달토끼 인형도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용인 에버랜드에서는 초대형 토끼 인형 ‘래빅’과 함께하는 설날 이벤트가 열린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