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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0일 오후 4시경 황해도 서흥군 능리시장. 인근 마을 주민 200여 명이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앞서 9일 전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촉발된 3·1만세운동이 황해도까지 번진 것이다. 만세 시위는 기독교 전도사 김성항이 민족대표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평양에서 받아 오면서 계획됐다. 시위 전날인 3월 9일 이를 눈치챈 헌병대가 오후 6시경 김성항을 비롯한 주동자들을 검거했다. 하지만 다음 날 서당 교사 김두성 등이 송화리에서 주민들을 모아 계획대로 만세운동을 강행했다. 근처 소사리 주민들도 합류한 상황에서 장터를 찾은 이들까지 현장에서 가세했다. 이날 미리 대기한 일제 헌병과 경찰이 무기를 휘두르며 시위를 진압했다. 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주민들도 검거됐다. 주동자로 검거된 14명은 1, 2심 법원을 거쳐 6개월에서 2년의 징역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들은 이에 불복해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결국 기각됐다. 동아일보가 3·1만세운동 105주년을 맞아 1919년 6월 19일 일제 고등법원이 작성한 판결문에서 확인한 당시 상황이다. 판결문에서는 지식인이 아닌 평범한 민초들도 민족의식에 입각해 주체적으로 시위에 나선 사실이 확인된다. 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검거된 농민 민응식(당시 24세)은 “파리평화회의에서 다룬 민족자결주의를 신문 보도로 봤다. 독립선언서를 통해 조선 독립이 바야흐로 달성된다는 신념이 굳어져 조선인으로서 좌시할 수 없었다”며 상고 취지를 밝혔다. 능리 장터에서 시위 중 체포된 농민 김두성(당시 20세)은 “반만년의 조선 역사가 10여 년의 세월 일장기 아래 묻혀 있었는데 평화의 춘풍이 삼천리에 이르니 2000만 중 한 명으로서 어찌 감동하지 않았겠는가”라며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은 인도와 정의에서 우러나온 것인데 어째서 법으로 처벌하려고 하는가”라고 말했다. 서당 교사 전종철(당시 21세)은 “전국 각지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는 사실을 듣고 조선인으로서 당연히 외쳐야 한다는 생각에서 했다”며 “이는 사람으로서 본분을 지킨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아무런 죄책이 없다”고 강조했다. 남녀 차별이 강했던 당시에 여성들이 시위를 주도한 사례도 발견된다. 1919년 4월 15일 전남도장관이 조선총독부에 보낸 ‘도장관 보고’ 문건에는 “4월 8일 오후 2시 목포부 죽동에서 기독교 신자인 부인 4명이 구한국기를 높이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조선인을 선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목포에선 청년과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4월 8일 오전 10시 영흥·정명학교 재학생 및 기독교인 150여 명이 남교동 시내로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다 일제에 강제 해산됐다. 그러자 당일 오후 2시경 죽동 부근에서 기독교인 부인 4명이 또다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앞장선 것. 이날 하루만 일제가 검거한 목포 시민이 80여 명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에 멈추지 않고 이튿날에도 애국지사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 시위를 이어 나갔다. 독립기념관은 ‘황해도 능리시장 만세운동’ 판결문에서 피고 14명 중 아직 포상받지 못한 7명을 밝혀내 2021∼2022년 정부 포상을 이끌어냈다. 김은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자료발굴TF팀장은 “서울에 사는 지식인이 아닌 일반 민중들도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충분히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시위에 참가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3·1만세운동은 민중들이 부화뇌동한 우발적인 시위가 아니었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3·1절을 맞아 일제강점기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을 호소한 문건들이 독립기념관에서 전시된다. 독립기념관(관장 한시준)은 밝은누리관에서 제105주년 삼일절을 맞아 특별자료를 공개한다고 28일 밝혔다. 이번에 공개되는 자료는 3·1 독립선언을 전후로 열린 제2차 뉴욕 소약국동맹회의와 파리평화회의 등과 관련된 문건 12점이다. 한국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각종 외교활동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독립기념관은 “전시품은 학계에는 소개됐지만 국내에선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자료들”이라고 말했다. 1918년 12월 작성된 ‘뉴욕 소약국동맹회의 전단지’는 식민 지배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한국 독립 문제를 파리평화회의 안건으로 제출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파리평화회의 자료 중 ‘비망록’과 ‘청원서’도 일제 식민 지배의 부당함을 알리고, 독립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됐다. 파리평화회의에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은 두 문건의 내용을 요약해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서 김규식은 “일본의 대륙 침략이 궁극적으로는 태평양을 지배하려는 데 있다”며 태평양전쟁을 경고했다. 이 밖에 한국친우회의 ‘설립 공포문 및 설립목적 4개항’ 자료는 미국 사회에 한국의 실정을 알리고, 독립을 위한 지원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남자는 힘이 세고 여성은 그렇지 않다는 힘의 논리만으로 여경을 비하하는 논리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박미옥 전 경정) “프로파일링을 할 때는 오히려 여성의 섬세함이 더 큰 강점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이진숙 인천경찰청 경위) 각각 대한민국 1호 강력계 형사, 1호 여성 프로파일러인 이들에게 최근 불거진 ‘여경 무용론’에 대해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앞서 2021년 11월 ‘인천 층간소음 흉기난동 사건’ 당시 여성 경찰관이 초동 대응 없이 현장을 이탈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여성이 소수인 경찰 조직에서 승승장구하며 여경 역사를 새로 쓴 이들을 26일 만났다. 최근 ‘내 안의 악마를 꺼내지 마세요’(행성B)를 펴낸 이 경위는 심리학 석사, 교육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2005년 경찰청 범죄분석요원 특채 1기로 선발됐다. 연쇄살인범 이춘재와 전남편을 살해한 고유정 사건 등 500여 건의 프로파일링을 맡았다. 지난해 베스트셀러 ‘형사 박미옥’(이야기장수)을 출간한 박 전 경정은 1987년 순경으로 시작해 1991년 강력계 형사가 된 뒤 신창원 탈옥 사건, 서울 숭례문 방화 사건 등을 담당했다. 첫 여성 강력반장 및 강력계장 타이틀을 갖고 있는 박 전 경정은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며 정년을 7년 앞둔 2021년 서귀포경찰서 형사과장으로 명예퇴직했다. 현재는 제주도에서 작가 생활을 하고 있다. ‘형사 박미옥’엔 2011년 박 전 경정이 강남경찰서의 첫 여성 강력계장이 됐을 때 한 기자가 “여성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는 ‘립스틱 정책’이냐”고 비꼰 에피소드가 나온다. 당시 박 전 경정은 “제가 수사 경력과 실력이 허접하다면 깊이 반성하겠다. 하지만 강력계장으로서 경험이나 실력을 인정받았다면 당신은 여성 비하 발언을 한 것”이라고 받아쳤다. 그는 “어떤 조직이든 남녀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지식과 지혜가 보태져야 한다”고 했다. 이 경위는 “프로파일링 시 범죄자들이 ‘여성 경찰이라 조금 더 편안하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내 안의 악마를 꺼내지 마세요’에 나오는 지난해 3월 ‘현대시장 방화 사건’의 경우가 그렇다. 술에 취해 인천 동구 현대시장에 불을 지른 범인은 이미 방화로 4차례나 실형을 받은 적이 있는 병적인 인물이었다. 이 경위는 “범인이 내게 ‘범행 전 선생님과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두 베테랑 경찰이 보는 범죄자들의 속성은 어떨까. 이 경위는 “범죄자들은 보통 외부 요인이 부정적 상황을 만들었다고 지레짐작하는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책에 언급된 지난해 2월 ‘편의점 살인 사건’은 범죄자들의 전형적인 ‘남 탓’ 성향을 보여준다. 전자발찌를 찬 30대 남성이 인천의 편의점 창고에서 흉기로 업주를 살해한 뒤 도주한 사건이다. 체포된 범인은 이 경위와의 면담에서 “원래 강도만 하려고 했는데 피해자의 반항이 너무 심해 ‘사고’로 이어졌다”고 진술했다. 박 전 경정은 2015년 10월 ‘강서구 일가족 사망 사건’을 예로 들며 “자신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건 범죄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가장이 부인과 고등학생 딸을 죽이고 자살한 사건이다. 박 전 경정은 “당시 범인은 ‘부인의 부채로 인한 생활고를 버틸 수 없었다’는 유서를 남겼지만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가장으로서 심리적 압박이 부른 잔혹 범죄였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3.1절을 맞아 일제강점기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을 호소한 문건들이 독립기념관에서 전시된다. 독립기념관(관장 한시준)은 밝은누리관에서 제105주년 삼일절을 맞아 특별자료를 공개한다고 28일 밝혔다.이번에 공개되는 자료는 3.1 독립선언을 전후로 열린 제2차 뉴욕 소약국동맹회의와 파리평화회의 등과 관련된 문건 12점이다. 한국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각종 외교활동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독립기념관은 “전시품은 학계에는 소개됐지만 국내에선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자료들”이라고 말했다.1918년 12월 작성된 ‘뉴욕 소약국동맹회의 전단지’는 식민지배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한국 독립문제를 파리평화회의 안건으로 제출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파리평화회의 자료 중 ‘비망록’과 ‘청원서’도 일제 식민지배의 부당함을 알리고, 독립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됐다. 파리평화회의에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은 두 문건의 내용을 요약해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서 김규식은 “일본의 대륙 침략이 궁극적으로는 태평양을 지배하려는데 있다”며 태평양전쟁을 경고했다.이밖에 한국친우회의 ‘설립 공포문 및 설립목적 4개항’ 자료는 미국 사회에 한국의 실정을 알리고, 독립을 위한 지원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일본인이 소장하던 안중근 의사(1879∼1910)의 미공개 유묵(遺墨·생전에 남긴 글씨)이 경매를 통해 국내로 들어온다. 서울옥션은 27일 서울 강남구 ‘분더샵 청담’에서 열린 미술품 경매에서 안 의사의 유묵 ‘인심조석변 산색고금동(人心朝夕變 山色古今同·사진)’이 추정가 6억∼12억 원보다 높은 13억 원에 낙찰됐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19억5000만 원에 낙찰된 안 의사의 ‘용호지웅세 기작인묘지태(龍虎之雄勢 豈作蚓猫之態)’ 유묵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가격이다. 일본인이 소장하던 해당 유묵을 독립운동가 후손인 고(故) 곽노권 회장이 창업한 한미반도체가 구매해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유묵의 문구는 “사람의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변하지만 산의 색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뜻이다. 나라를 위한 자신의 충절은 변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해석된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사형을 선고받은 뒤 순국하기 전까지 감옥에서 많은 글씨를 썼다. 일본인 관리와 간수(교도관)들이 앞다퉈 안 의사에게 글씨를 요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안 의사가 생전에 유묵을 200여 점 썼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현재까지 국내외에서 확인된 것은 60여 점이다. 이 중 보물로 지정된 작품은 31점이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서울 송파구 방이동 공사 현장에서 백제시대 우물이 발견됐다. 한성백제시대(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 우물로는 세 번째 발견으로, 당시 왕성인 풍납·몽촌토성과 가까워 주변 생활 유구의 양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26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발굴 조사 기관인 중부고고학연구소가 방이동 52 일대에서 목조 우물 1기를 발견했다. 이곳은 몽촌토성에서 0.6km, 풍납토성에서는 1.6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백제 왕성 인근에 당시 사람들이 거주하며 우물을 만든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4, 5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은 목판을 서로 끼워 井자 형태로 층층이 쌓아 올린 구조다. 서울에서 백제시대 우물이 확인된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앞서 풍납토성 경당지구와 송파구 대진·동산 연립주택 부지에서 한성백제시대 우물이 1기씩 발견됐다. 우물 바닥에선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토기들이 출토됐다. 일부 토기는 주둥이 일부가 깨져 있거나 윗부분에 끈을 묶은 흔적들이 확인됐는데 발굴팀은 제의용 토기로 보고 있다. 고대 우물은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졌는데 동물 뼈나 토기 등 제사 흔적이 종종 발견된다. 강세호 중부고고학연구소 책임조사원은 “한성백제시대 왕성 외곽에 거주하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자료를 확보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풍납토성 발굴에 참여했던 신희권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이외 일반인들이 살던 마을과 도로, 우물 등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적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과 중부고고학연구소는 보존 처리를 위해 우물의 각 부재를 최근 해체했다. 나무 부재와 토기는 보존 처리를 거쳐 한성백제박물관으로 이관될 예정이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서울 송파구 방이동 공사현장에서 백제시대 우물이 발견됐다. 한성백제시대(기원전 18년~475년) 우물로는 세 번째 발견으로, 당시 왕성인 풍납·몽촌토성과 가까워 주변 생활 유구의 양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26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발굴 조사기관인 중부고고학연구소가 방이동 52번지 일대에서 목조 우물 1기를 발견했다. 이곳은 몽촌토성에서 0.6㎞, 풍납토성에서는 1.6㎞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백제왕성 인근에 당시 사람들이 거주하며 우물을 만든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약 4, 5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은 목판을 서로 끼워 井자 형태로 층층이 쌓아올린 구조다.서울에서 백제시대 우물이 확인된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앞서 풍납토성 경당지구와 송파구 대진·동산 연립주택 부지에서 한성백제시대 우물이 1기씩 발견됐다.우물 바닥에선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토기들이 출토됐다. 일부 토기는 주둥이 일부가 깨져 있거나, 윗부분에 끈을 묶은 흔적들이 확인됐는데 발굴팀은 제의용 토기로 보고 있다. 고대 우물은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졌는데 동물뼈나 토기 등 제사 흔적이 종종 발견된다.강세호 중부고고학연구소 책임조사원은 “한성백제시대 왕성 외곽에 거주하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자료를 확보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풍납토성 발굴에 참여했던 신희권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이외 일반인들이 살던 마을과 도로, 우물 등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적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고 말했다.문화재청과 중부고고학연구소는 보존처리를 위해 우물의 각 부재를 최근 해체했다. 나무 부재와 토기는 보존처리를 거쳐 한성백제박물관으로 이관될 예정이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취급허가 없이 살 수 있는 소비재 중 가장 복잡하고 다층적인 ‘화학 프로필’을 갖고 있다.” 안전한 옷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웹사이트 ‘에코 컬트(Echo Cult)’의 편집장인 저자는 패션 제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가공, 직조, 염색 등 제작 전 과정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복잡한 화학물질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 기분 좋게 뜯은 새 옷에서 나는 독한 약품 냄새에 얼굴을 찡그린 경험이 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저자는 연구자, 패션 전문가, 승무원, 의류 공장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이 책을 썼다. 옷에 포함된 화학물질의 유독성은 상상 이상이다. 음식, 주거 등 온갖 분야에서 웰빙 바람이 불어도 ‘안전한 옷’에는 여전히 무관심한 편이다. 법에 따라 엄격히 칼로리와 영양성분을 표기해야 하는 음식과 달리 옷의 성분은 규제가 없어 제조사나 유통사조차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옷 한 벌에 많게는 50종 이상의 화학물질이 사용되는데, 이 중에는 호르몬을 교란하고 암과 불임을 유발할 수 있는 독성물질도 있다. 미국 알래스카항공 승무원들이 옷에 묻은 화학물질이 유해하다며 2012년 집단소송을 제기한 사례도 있다. 밀폐된 환경에서 유니폼을 상시 착용하는 승무원들이 화학물질로 인해 호흡 곤란과 발진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항공사는 “개인이 민감한 탓”이라고 반박했고, 법원도 “유해성에 대한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항공사 손을 들어줬다. “옷을 먹는 건 아니잖아요.” 집요하게 취재하는 저자에게 어떤 패션회사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미국 듀크대 연구팀이 어린 자녀가 있는 가구 124곳의 집 먼지를 분석한 결과, 모든 집에서 합성섬유 염색에 쓰이는 ‘아조 분산염료’가 검출됐다. 옷에 묻은 염료가 떨어져 나간 뒤 공기 중에 떠다니다 호흡기를 통해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옷의 화학물질 말고도 근무 환경, 스트레스 등 현대인의 질병 원인은 다양하다. 이에 따라 의류의 화학물질과 건강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증명하기 위한 저자의 실험정신도 돋보인다. 인도 티루푸르 공장을 직접 방문해 옷 제작 과정을 조사하고, 구매한 제품을 친환경 인증 기관 ‘오코텍스’에 맡겨 실험했다. 분홍 인조가죽 미니스커트, 네온 오렌지색 반투명 하이힐 등의 각종 검사 결과가 책에 담겼다. 책을 읽는 내내 1962년 발표된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이 떠올랐다.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이 생태계에 일으키는 문제를 보여준 이 책은 출간 당시 감상주의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제는 고전이 됐다. ‘죽음을 입는다’는 다소 과장된 제목 역시 언젠가는 당연한 상식이 될지도 모른다. ‘모조품과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를 피하라’ 등 소비자가 독성물질이 묻은 옷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 팁도 유용하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출산 후 몸이 허하고 야위었을 때 멥쌀 반 되와 양념을 넣어 버무린 다음 닭 속에 넣고 삶는다. 이어 배를 갈라 백합과 밥을 취하고….” 1460년(세조 6년) 의관 전순의가 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치료 처방서 ‘식료찬요(食療纂要)’에 나오는 문구다. 닭의 배를 갈라 여러 재료를 넣고 끓여 먹는 오늘날의 ‘삼계탕’(사진)과 비슷하다. 정희정 한국미술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이 처방은 재료, 조리, 먹는 방식 등에서 오늘날의 삼계탕과 유사성이 높아 삼계탕의 시초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삼계탕을 20세기 전후의 근대 음식으로 본 통설을 깨는 견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한국 식문화의 연원을 추적한 신간 ‘한국음식문화사’를 최근 발간했다. 중국이 김치를 자국 음식인 ‘파오차이(泡菜·중국식 채소 절임)’로 주장하는 등 ‘문화 공정’ 논란이 일어난 가운데 우리 음식의 역사성을 고증한 것이다. 책은 여러 저자가 밥, 김치, 삼계탕, 나물, 고기, 장(醬), 인삼 등 7가지 주제로 한국 음식의 역사와 발달 과정을 다뤘다. 이 중에는 다채로운 나물 문화도 소개됐다. 한국인이 섭취하는 식물 종류는 약 1000가지에 이르는데 이 중 국어대사전에 ‘나물’ 자가 붙은 낱말은 300종이나 된다. 특히 깨끗한 물로 생채소를 씻을 수 있는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고기에 쌈을 싸먹는 ‘쌈 문화’가 발달했다. 원나라 시인 양윤부는 ‘난경잡영(灤京雜詠)’ 시에서 ‘고려인은 생채에 밥을 싸서 먹는다’고 썼다. 정혜경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는 “한국 전통 식문화는 채식 위주의 환경 보존적 식생활”이라고 말했다. 책은 김치가 파오차이와는 명백히 다른 음식이라고 강조한다. 둘 다 절인 채소를 발효시키지만 식초와 술 지게미 등을 사용하는 파오차이와 달리 김치는 동물성 발효식품인 젓갈을 사용한다. 박채린 세계김치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김치는 다양한 재료의 풍부한 양념을 통해 오늘날의 형태로 진화한 한국만의 독특한 음식”이라며 “중국 채소 절임이 2000∼3000년 동안 종류와 조리 방식이 크게 변하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라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문화재청은 조선 영조(재위 1724∼1776) 때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고려시대 청동북 ‘천수원명 청동북(薦壽院銘 金鼓)’ 등 6건을 보물로 지정한다고 21일 밝혔다.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소장한 여지도서는 각 군현에서 작성한 읍지(邑誌·한 고을의 연혁, 지리, 풍속을 기록한 책)를 모아 55권의 책으로 만든 지리지다. 경기·전라도를 제외한 6개 도의 지도와 영·진 지도 12매, 군현 지도 296매 등이 포함돼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이전 지리지와 달리 읍지 앞에 지도가 첨부됐고, 호구(戶口)와 도로 등 사회경제 항목이 추가돼 학술적 가치가 높다. 온양민속박물관이 소장한 고려 청동북은 1162년(의종 16년)에 제작됐다. 측면에 제작 시기와 무게, 사찰 이름, 주관 승려가 적힌 글씨가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였던 고하(古下) 송진우 선생(1890∼1945)을 조명하는 학술회의가 19일 열렸다. 고하송진우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김창식)는 1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고하 송진우의 민족운동: 3·1운동에서 건국운동까지’ 학술회의를 열었다. 고하는 일제강점기 중앙학교장과 동아일보 사장을 지냈고, 광복 후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활동했다. 김형석 대한민국역사와미래재단 이사장은 고하의 3·1운동 관련 업적을 발표했다. 중앙학교를 중심으로 3·1운동을 기획하고 민족문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박명림 연세대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는 ‘자유와 통합, 민주와 공화: 21세기를 위한 송진우의 사상과 실천’을 주제로 고하의 사상을 조명했다. 박 교수는 “공산주의는 반대했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수용해 민주적 방법으로 자유와 평등의 길을 제시한 선생의 민주공화국 구상을 제대로 살려내야 한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조선시대 매장 시 시신의 머리카락을 담는 붉은 주머니 두발낭(頭髮囊)이 매화 무늬로 장식돼 있다.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는 매화는 예부터 군자의 강인한 지조와 더불어 아름다운 여인을 상징했다. 두발낭은 경기도박물관이 지난해 12월부터 진행 중인 ‘배리어 프리’(장애인이나 고령자가 물리·제도적 장벽 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 특별전 ‘구름 물결 꽃 바람’의 전시품 중 하나다. 전시에선 과거 조상들이 사용한 전통 무늬가 새겨진 소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특이한 것은 각 전시품들 앞에 놓인 촉각 모형이다. 전시품을 본떠 3차원(3D)으로 만든 모형으로, 시각장애인들이 만져 볼 수 있게 했다. 나비 무늬로 장식한 보자기, 당초 무늬로 전시된 나전칠기함을 재현한 촉각 모형도 있다. 신선들의 잔치를 그린 조선 후기 ‘요지연도 8폭 병풍’은 실제 크기의 모조품 안에 3D 무늬를 붙여놨다. 또 풀, 복숭아, 꽃의 세 가지 향을 맡을 수 있는 공간도 있다.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공간을 두고, 점자 해설판과 수어 해설 영상도 갖췄다. 정윤회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그동안 장애인을 위한 문화예술 교육은 있었지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전시는 처음 기획했다”며 “전시는 눈으로 봐야 한다는 명제에서 벗어나 오감으로 즐길 수 있게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박물관에 배리어 프리 공간이 늘고 있다. 그동안 박물관은 유물 훼손 우려 때문에 시각 체험 위주의 전시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시각장애인들은 전시품의 질감이나 색깔, 부피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 취약계층의 문화 향유 기회를 넓혀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배리어 프리 전시가 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해 9월부터 공감각 교육공간 ‘오감’을 운영 중이다. 국보 반가사유상 2점이 비치된 ‘사유의 방’을 시각장애인도 체험할 수 있도록 원래 크기와 재질대로 재현한 반가사유상과 미니어처 등 불상 모형 30점을 배치했다. 미니어처부터 실제 크기의 불상 모형까지 단계별로 반가사유상의 촉감을 느낄 수 있다. 비장애인들도 시각 차단 안경을 쓰고 1시간 반 동안 같은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다. 장은정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과장은 “시각장애인만을 위한 별도 공간이 아니라 모두가 어우러져 공존할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올 9월 상설전시실 3층 조각공예관에 범종 체험 공간을 조성할 예정이다. 청각장애인도 범종을 느낄 수 있도록 소리를 시각 요소로 변환하는 방안을 기획하고 있다. 국보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실물도 함께 전시한다. 국립공주박물관은 이달부터 선사시대 간석기와 뗀석기, 백제 토기, 조선 분청사기 등을 촉각전시품으로 제작해 전시하고 있다. 석기는 실제 전시품과 유사하게 돌로 만들었으며, 분청사기 모형은 단면을 만질 수 있도록 절반을 자른 형태로 전시한다. 또 촉각 전시품을 제작하는 영상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해설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통역이 함께 제공된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화장실? 그 어떤 작은 주제에도 지적 우주의 한 부분이 정말 담겨 있나 봅니다.” 저자가 두 세기에 걸친 미국 공중화장실의 역사를 연구하겠다고 하자 인터뷰 대상이던 어느 연구원이 건넨 말이다. 그러나 화장실은 결코 작은 주제가 아니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 사회적 불평등을 연구하는 저자는 성별 또는 계층에 따른 공중화장실의 사용 행태를 통해 한 사회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환영해 왔는지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단순한 일상 공간 이상의 의미를 화장실이 갖고 있다는 것. 저자는 공중화장실 관련 문서 7238건과 192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화장실 담론’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화장실은 계급과 젠더의 불평등을 강화한 정치적 공간이었다. 미국 최초의 공중화장실은 19세기 후반 자선 사업가들이 도시 빈민들을 위해 지었다. 그러나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결국 대다수 화장실이 호텔과 기차역, 백화점 등 중산층 이상의 공간에 들어서게 됐다. 화장실에서마저 부유한 도시 거주자들이 노동계급과 유리된 것이다. 20세기 초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고용주들은 성별로 분리된 화장실을 만들어 달라는 여성들의 거센 요구에 직면했다. 결국 1887년 미국 매사추세츠주가 공중화장실 성별 분리를 의무화하는 주법을 처음 통과시켰고, 이어 1889년 뉴욕주도 비슷한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1978년 여성 전용 화장실이 없다는 이유로 여성을 고용하지 않으려는 고용주들이 고발을 당할 정도로 화장실을 둘러싼 성차별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저자는 성별 분리 화장실에는 여성의 몸을 성적 약탈의 대상으로 보는 논리가 저변에 깔려 있다고 지적한다. 20세기 후반 트랜스젠더 운동과 더불어 성별 구분 없이 쓸 수 있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성중립 화장실)’ 설치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는 성소수자나 장애인, 성별이 다른 활동보조인 등이 사용할 수 있도록 성별 구분 표지판을 없앤 화장실이다. 그러나 여성이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등으로 인해 성중립 화장실 설치는 반대에 부닥쳤다. 저자는 성중립 화장실도 지역의 빈부 격차와 무관치 않음을 보여준다. 개조나 설치에 드는 비용을 무시할 수 없어서다. 저자는 그럼에도 미국의 공중화장실은 꾸준히 진보했다고 말한다. 1990년 미국 장애인법 시행을 계기로 성중립 화장실 설치 주장이 힘을 얻게 됐다. 성중립 화장실 설치론자들은 ‘가족용 화장실’이라는 이름을 붙여 포용적인 공간을 만들거나, “우리 조직이 더 돋보이기 위해 이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변을 설득했다. 그 결과 학부생들에게 성중립 기숙사 및 화장실을 제공한다고 보고한 대학의 수가 2009∼2016년 7년간 4배 이상 급증했다. 한국과 미국의 상황을 비교하면 한층 흥미롭게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화장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미국뿐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2022년 3월 성공회대에 이어 12월 KAIST에 성중립 화장실이 생긴 직후 찬반 논란이 벌어졌고, 관련 지방자치단체에 폐쇄 요청 민원이 잇따랐다. 하루에 몇 번이고 용무를 보기 위해 드나드는 일상의 공간조차 젠더와 계급의 불평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 최고경영자(CEO)가 8개월 만에 한국을 찾아 “새 시즌으로 돌아오는 드라마 ‘오징어게임’ 시즌2 세트장에 가게 돼 굉장히 기대된다”고 말했다. 서랜도스 CEO는 16일 서울 종로구 센트로폴리스에서 열린 ‘넷플릭스 서울 사랑방’ 행사에서 기자들을 만나 “한국에 돌아와 매우 기쁘다”며 “한국에서 스토리텔링, 콘텐츠에 대해 보여주는 관심이 커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징어게임 시즌2 세트장을 방문할 계획을 언급하며 “황동혁 감독이 이번엔 어떤 세계관과 게임을 보여줄지 굉장히 흥분된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기대하는 넷플릭스 한국 콘텐츠로 오징어게임 시즌2와 예능 ‘피지컬:100’ 시즌2, 드라마 ‘스위트홈’ 시즌3 등을 꼽았다. 또 지난해 인상 깊게 본 작품으로 영화 ‘길복순’과 드라마 ‘더글로리’를 언급했다. 지난해 6월 이후 약 8개월 만에 한국을 찾은 서랜도스 CEO는 이날 넷플릭스의 자회사인 스캔라인 VFX 산하 ‘아이라인 스튜디오’를 방문해 임직원들을 만날 예정이다. 다음날 충청도 오징어게임 시즌2 세트장을 방문해 황동혁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과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역사왜곡 막장 전개. 이게 대하사극이냐?’ 지난달 26일 서울 영등포구 KBS 본사 앞. 디씨인사이드 갤러리 회원들이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을 성토하는 문구의 전광판을 실은 트럭을 보내 시위를 벌였다. 지난해 11월부터 방영 중인 이 드라마는 고려와 거란이 벌인 2, 3차 여요전쟁(1010년 및 1018∼1019년)을 다루고 있다. 일일 최고 시청률이 10%를 넘는 등 인기를 끌고 있지만, 17∼20회에 걸쳐 고려 조정의 내부 갈등을 다루는 과정에서 역사왜곡 논란이 불거졌다. 원작 소설을 쓴 길승수 작가도 “드라마가 원작에 충실하지 않아 역사를 왜곡했다”며 제작진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전문가들은 “일반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정사(正史)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며 “작가나 제작진이 시대 흐름을 정확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고려거란전쟁’의 세 가지 주요 논란에 대해 역사학자들의 의견을 들어봤다. 역사학자들은 극중 지방제도 개편을 놓고 현종(김동준 분)과 호족이 대립하는 장면이 지나치게 과장됐다고 지적한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호족의 힘을 빼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5도 양계와 4도호부, 8목을 설치한 지방제도 개편이 골격을 갖춘 건 3차 여요전쟁(귀주대첩) 당시인 1018년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선 이를 2차 전쟁 직후로 앞당겨 갈등을 과장했다는 것. 허인욱 한남대 사학과 교수는 “나라의 온 힘을 모아도 힘든 상황에서 현종이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는 설정은 과했다”고 말했다. 고려사 등에 따르면 호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과거시험과 노비안검법(본래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의 신분을 회복시키는 법)을 도입한 건 광종(재위 949∼975년)대다. 길 작가는 자신의 블로그에 “드라마에선 마치 광종 시대의 일을 현종 때 벌어진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고 비판했다. 극중 왕후 간 갈등은 조선시대 사건을 단순 대입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드라마에서 현종의 첫 번째 왕후인 원정왕후(이시아 분)는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딸 원성왕후를 견제하는 악역으로 나온다. 문제는 원정왕후가 병석에 있는 현종을 대신해 정전(正殿)에 들어가 김은부와 그의 딸 원성왕후를 직접 추궁하는 장면. 수렴청정도 아닌데 왕이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는 정전에 왕후가 출입하는 행위 자체가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설정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고려사 전공 교수는 “왕이 거란에 쫓겨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는 마당에 왕후들이 궁중 암투를 벌일 겨를이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현종의 지방제 도입 장면도 조선시대를 떠올리게 한다고 지적한다.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는 “고려시대에도 군현제가 있었지만 모든 군현에 관리가 파견된 건 조선시대 들어와서다”라며 “극중 현종의 지방제 개혁 장면은 조선시대 정도전의 행적에 가깝다”고 말했다. 극중 현종이 강감찬(최수종 분)과 갈등을 벌인 후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타고 질주하다 낙마하는 장면을 놓고 시청자들 사이에서 ‘현종 비하’ 지적이 나왔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고려전기 문신 최충(984∼1068)은 현종을 “가히 중흥을 이룬 군주”라며 높게 평가했다. 이진한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현종의 낙마는 고려사 자료에 전혀 없는 사실”이라며 “이성계가 공양왕 말년에 낙마한 기록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작가나 제작진이 사극 제작에 앞서 사료를 깊이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일본의 경우 소설가 아베 류타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을 다룬 대하소설을 쓰기 위해 학계 최신 이론과 답사자료를 엮은 중간 보고서를 최근 책으로 발간했다. 기경량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 “창작자들이 역사 고증을 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아쉽다”며 “퓨전 사극뿐 아니라 고증에 신중을 기울이는 정통사극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상투를 튼 두 사람이 씨름판에서 숨 가쁜 대결을 하고 있다. 씨름꾼들을 둘러싼 관람객들이 모두 경기에 집중하는 가운데, 두 사람만 딴 곳을 쳐다보고 있다. 한 사람은 관람객을 살피는 엿장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엿장수를 바라보는 어린아이다. 엿을 팔아야 하는 엿장수가 관람객을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꿀처럼 단 엿에만 한눈을 파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의외의 웃음을 자아낸다. 이는 조선 후기 화가 단원 김홍도(1745∼?)의 대표작 단원풍속화첩 중 ‘씨름’의 장면이다. 단원풍속화첩은 김홍도의 풍속화 25점을 모아놓은 화첩으로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돼 있다. 최근 신간 ‘김홍도 새로움’(사진)을 펴낸 정병모 한국민화학교장(전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은 “김홍도 풍속화에는 단순한 풍속의 묘사를 넘은 유머와 풍자가 드러난다”며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 하나 허튼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림의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했다. 신간은 스토리텔러로서의 김홍도의 창의성과 휴머니즘에 집중한다. 단원풍속화첩의 또 다른 그림 ‘길쌈’의 경우 베를 짜는 여인만 보면 평범한 풍속화처럼 보이지만, 등 뒤에 손자를 업고 서 있는 시어머니의 표정에 집중하면 한 편의 ‘휴먼 드라마’를 읽을 수 있다. 한마디 할 기세로 못마땅한 얼굴을 한 시어머니는 해맑은 표정의 손자와 대조돼 강한 인상을 남긴다. 화가인 김홍도에게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풀어내는 ‘연출자’로서의 능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신간의 책 표지로 사용된 ‘염불서승’ 역시 평범하지 않다. 연화대에 앉은 스님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척추뼈의 일종인 청량골(淸凉骨)을 바짝 세우면 드러나는 두 줄기의 긴장된 목선을 잡아냈다. 긴장된 목덜미와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이 어우러져 우주적인 숭고함이 느껴진다. 보일락 말락 한 작은 점으로 그린 오른쪽 눈썹 끝은 고뇌하는 스님의 앞모습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신간에선 왕의 어진부터 촌부의 얼굴까지 두루 그린 김홍도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풍부히 맛볼 수 있다. 정 교장은 “김홍도는 무엇을 그려도 색다르게 표현한 화가로 사람들의 희로애락에 주목했다”며 “기존 유교의 도덕적 측면에 주목한 그림과 달리 늘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회화 세계를 열어간 위인”이라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얼마 전 내 작품이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에 올랐는데 출판사 판매량 시스템에는 그게 반영이 안 돼 있었다.” 10권 이상 책을 펴낸 중견 작가 A 씨는 “한참 지나서야 시스템의 숫자가 바뀌는 걸 보고 출판사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2021년 출판계의 불투명한 인세 정산을 놓고 논란이 불거졌지만, 3년이 지난 지금도 현실은 그대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인쇄량이 아닌 판매량만 알 수 있는 데다 이마저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인된 공공기관이 아닌 출판사나 서점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통계라는 점도 한계다. A 씨는 “인세 논란이 불거진 뒤 대형 출판사들과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가 관련 시스템을 내놓았지만 여전히 믿기 힘들다”고 털어놨다. 2021년 공상과학(SF) 출판사 아작은 장강명 등 작가들의 인세를 누락한 사실이 밝혀져 사과했다. 임홍택 작가는 출판사 웨일북으로부터 전달받은 ‘90년생이 온다’의 종이책 판매부수를 검토하다 발행부수보다 10만 부가 적다는 사실을 발견해 뒤늦게 인세 1억5000만 원을 받아냈다. 논란이 커지자 출협과 문화체육관광부가 각각 도서판매정보공유시스템과 출판유통통합전산망을 만들어 저자가 판매량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대형 출판사인 문학동네와 창비도 인세 정보를 저자들과 공유하는 시스템을 내놓았다. 하지만 작가들은 여전히 “바뀐 게 없다”는 반응이다. 책마다 고유 번호가 없어 출판사가 판매부수를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는 것. 한 작가는 “담당 편집자조차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 모를 정도로 출판사 내부에서도 판매량을 쉬쉬한다”며 “하물며 작가가 정확한 판매량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판매량 집계가 실시간으로 이뤄지지 않는 것도 문제다. 인쇄부수가 아닌 판매부수를 기준으로 인세를 정산하는데, 반품된 물량을 반영하다 보니 인쇄 후 길게는 수개월이 지나서야 판매량을 알 수 있다는 것. 다른 작가는 “출판사가 인세를 뒤늦게 지급한 걸 나중에 알았지만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인세를 언급하는 작가를 속물로 보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작가들 스스로 시스템 개선에 나서고 있다. 임홍택 작가는 지난해 11월 출판사 ‘도서출판11%’를 세웠다. 이곳은 출판계 관행과 달리 판매부수가 아닌 발행부수를 기준으로 인세를 지급한다. 임 작가는 “책이 반품되면 출판사가 책임지고 비용으로 처리하고 저자에게 부담을 전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작가들이 책을 온라인 출판 플랫폼에 독점 공급하기도 한다. 한국추리작가협회 소속 작가들은 2022년부터 오디오북 플랫폼 ‘윌라’에만 작품을 올려 수익을 얻고 있다. 김재희 한국추리작가협회 부회장은 “‘윌라’ 종합 순위에 오르면 수익이 수천만 원에 달해 굳이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출판계도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처럼 공신력 있는 공공기관이 판매 데이터를 일괄적으로 집계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현재 출협 도서판매정보공유시스템에는 1290개, 문체부 출판전산망에는 2791개 출판사가 각각 참여하고 있다. 이는 문체부에 등록된 전체 출판사(8만2588개)의 각각 1.6%, 3.4%에 불과하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출협이나 개별 출판사들이 운영하는 인세 시스템은 작가들이 신뢰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며 “정부 주도의 통합전산망 가입 출판사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숲에서 어미를 따라오는 가냘픈 새끼 사슴 두 마리를 보고 ‘상처투성이 모성’에 대한 책을 떠올렸습니다.” 소설 ‘흐르는 강물처럼’(다산책방)의 미국인 저자 셸리 리드(사진)는 집필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신간은 미국 콜로라도 이주민 5세대로 웨스턴콜로라도대 교수로 30여 년간 재직한 그의 데뷔작이다. 1970년대 콜로라도 아이올라 수몰 지역을 배경으로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냈다. 12년간 집필해 한국 등 34개국에서 출간된 신간은 곧 영화로도 제작된다. 책에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17세 소녀 ‘빅토리아 내시’가 등장한다. 복숭아 과수원집에서 무뚝뚝한 아버지와 폭력적인 남동생, 괴팍한 이모부 틈에서 묵묵히 살아가던 빅토리아의 인생은 이방인 윌슨 문과 사랑에 빠지면서 바뀐다. 마을에서 배척당하던 윌슨이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빅토리아는 윌슨과의 사이에서 임신한 아이를 지키고자 산꼭대기로 도망친다. 그리고 무사히 아이를 낳는다. 리드는 “빅토리아 캐릭터에는 지역 목장과 산악 공동체에서 알고 지낸 많은 겸손한 여성의 자질이 묻어 있다”며 “타인의 기대에 순응하며 살던 빅토리아가 윌슨을 만난 순간부터 한 꺼풀씩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강을 댐으로 막으면서 마을은 저수지가 될 위기에 처한다. 이에 빅토리아는 집안에 수 대째 내려온 복숭아나무를 옮겨 심고자 과학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등 최선을 다한다. 리드는 “빅토리아를 포함한 캐릭터들은 모두 성실하고 결단력이 있다. 하나같이 슬픔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지난해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1300만 명을 돌파했어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이 책을 매개로 서로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길 바랍니다.” 신간 ‘반려 변론’의 저자 이장원 변호사(39·사진)는 지난달 26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간은 국내외에서 실제 발생한 반려동물 관련 판결을 쉽게 풀어낸 책이다. 이 변호사는 “반려동물 문제에 대해 사람들의 인식 차가 큰 데 반해 객관적인 자료가 부족하다고 느껴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약 3년간 책을 집필했다”고 말했다. 반려동물도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을까. 책은 2007년 사망한 미국 부동산 재벌 리오나 헴슬리의 상속 사례를 들어 궁금증을 풀어준다. 헴슬리는 신탁 형식으로 반려견 ‘트러블’ 몫의 유산 1200만 달러(약 160억 원)를 남겼다. 그러나 돈을 한 푼도 상속받지 못한 손자 등이 “헴슬리가 온전한 정신 상태가 아닐 때 유언장을 작성했다”며 소송을 걸었다. 결국 유산은 200만 달러(약 27억 원)로 감액됐다. 이 변호사는 “미국 주 대부분에선 반려동물 신탁이 법제화돼 있다”며 “한국에서도 환경에 맞는 펫 신탁 상품이 더 많이 개발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려동물의 법적 지위는 ‘물건’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국 법원은 최근 반려동물의 특수성을 고려한 판례를 내놓고 있다. 2016년 4월 미니어처 핀셔 한 마리가 트럭에 치여 사망했을 때, 법원이 가해자에게 개 분양가 45만 원보다 많은 수술비 500만 원 이상을 피해자에게 지급하도록 한 것이 한 예다. 이 변호사는 “판례를 보면 수십만 원에 불과했던 반려동물 관련 위자료도 수백만 원 상당까지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책은 이혼하면 반려동물이 누구의 소유가 될지, 의료사고를 입었을 때 얼마나 배상받을 수 있을지 등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실용적인 정보를 포함한다. 집주인 몰래 반려동물을 키우는 세입자와 길고양이를 돌보는 ‘캣맘’ 등 반려인과 비반려인 사이의 논쟁적인 이슈도 다룬다. 이 변호사는 “기존 동물 서적은 일반인 입장에서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보일 정도로 동물의 권리만 옹호하는 책이 많았다”며 “이번 데뷔작에 이어 좀 더 현실적인 방식으로 동물을 이야기하는 책을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5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인장 가게 거인당. 조각칼을 움켜쥔 유태흥 씨(83)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돋보기를 쓴 유 씨는 자그마한 대추목 도장을 감싼 조각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집중했다. 회전 베어링으로 조각대를 돌려가며 도장 이곳저곳을 신중히 팠다. 5분 정도 지나자 조각칼에 의해 파인 부분이 선명해지며 글자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유 씨는 “3시간 꼬박 작업해야 수제 도장 하나를 완성할 수 있다”며 “고유 서체와 새기는 방식이 적용돼 세상에 딱 하나만 있는 인장”이라고 말했다. 유 씨는 2008년 대한민국 인장공예 명장으로 인정받은 ‘인장 기술자’다.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 등 유명인들의 고급 인장이 유 씨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 대다수 인장 업체가 컴퓨터 조각기를 사용하고 있지만 유 씨는 직접 글씨를 쓰고 새겨 도장을 만든다. 수조각 도장은 컴퓨터로 설정된 서체와 달리 기술자만의 독특한 손글씨가 도장에 새겨진다. 위변조도 어렵고 예술성을 갖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무부터 물소 뿔, 터키석, 상아까지 재료가 다양한데 비싼 수제 도장은 1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최근 거인당 등 서울의 오래된 인장 가게를 소개하는 조사 보고서 ‘서울의 인장포’를 발간했다. 박물관은 2020년부터 낙원떡집, 서울 대장간, 이용원 등 시민생활사를 잘 보여주는 기록물을 발간해 왔다. ‘서울의 인장포’는 네 번째 시리즈다. 보고서에는 일제강점기부터 본격화된 인장 문화의 변천사 등이 담겼다. 1950년대부터 서울에서 활동한 박인당, 거인당, 옥새당, 여원전인방, 인예랑 등 명장에 대한 기록도 포함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과거 인장은 ‘돈이 되는 기술’이었다. 6·25전쟁으로 생긴 피란민 수용소에서 배급을 받으려면 반드시 인장이 필요했고, 학교에서도 입학과 졸업을 하려면 반드시 서류에 인장을 찍어야 했다. 가령 유 씨가 1960년 서울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인장부에 취업했을 때 초봉은 1만2000환으로, 공무원 월급인 4000환보다 세 배 많았다. 유 씨는 치과용 전동 드릴을 활용한 인장 조각기를 고안하고, 진열 샘플용 조각품을 대량으로 제작해 하청 인장포들에 판매했다. ‘인장업의 산업화’를 이끈 것이다. 그러나 인장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최근 행정안전부는 1914년 도입된 인감증명제도를 110년 만에 대폭 축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인감증명제도는 도장을 행정청에 미리 신고하고 증명서를 발급받아 본인임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정부는 2025년까지 인감증명을 요구하는 사무 2608건 중 인감 필요성이 낮은 사무 82%(2145건)를 정비할 계획이다. 신분 확인만으로 가능한 사무는 간편인증, 전자서명으로 대체하게 한다는 방침이다. 유 씨는 “도장 수요가 줄더라도 명장이 만드는 ‘진짜’는 남아있을 것”이라며 “서운하더라도 도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계속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유 씨의 가게를 이용하는 손님들은 주로 50, 60대 연령층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나 손주에게 선물하는 용도로 도장을 맞춘다. 부동산 계약 등 중요한 금전 거래에 쓰이는 인장을 제 몸처럼 아끼라고 값나가는 수제 도장을 선물하는 것이다. 과거엔 예물 도장을 맞추는 손님들도 있어 카탈로그를 만들기도 했다. 최보영 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인장 문화는 독특한 생활사를 잘 보여주는 데다 전통 예술의 한 부분으로서 계승할 필요가 충분하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