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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왕’ 조용필 씨(73·사진)가 26일 새 미니 앨범 ‘로드 투 트웬티-프렐류드 투(Road to 20-Prelude2)’를 발표했다. 조 씨의 소속사 YPC에 따르면 이번 앨범에는 신곡 ‘필링 오브 유(Feeling Of You)’와 ‘라’를 비롯해 지난해 발표한 ‘찰나’와 ‘세렝게티처럼’ 등 4곡이 수록됐다. 수록곡 모두 작사가 김이나 씨가 노랫말을 썼다. 앨범 이름은 조 씨가 올해 말 발매를 예고한 정규 20집으로 가는 두 번째 여정이라는 뜻을 담았다. 그의 정규 앨범 발표는 2013년 ‘헬로(Hello)’ 이후 10년 만이다. 조 씨는 다음 달 13일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2023 조용필&위대한 탄생’ 공연을 연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일제강점기인 1923년 전차선로가 설치되며 땅속에 묻혔던 광화문 월대(月臺·궁궐 주요 건물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터보다 높게 쌓은 단)의 전모가 100년 만에 확인됐다. 경복궁의 얼굴 격인 광화문이 월대 복원으로 제 모습을 찾을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재청은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가 지난해 9월부터 서울 종로구 광화문 일대 1620㎡를 발굴한 결과 임금이 다니던 너비 7m의 어도(御道)를 포함해 남북 방향 48.7m, 동서 방향 29.7m에 이르는 월대의 정확한 규모가 밝혀졌다고 25일 밝혔다. 1865∼1868년 경복궁 중건을 기록한 ‘경복궁 영건일기(營建日記)’ 등을 통해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월대의 실제 모습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문화재청은 “비교적 원형이 보존된 월대 동쪽의 모습을 확인해 월대 복원을 위한 실물자료를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임금 다니던 어도 좌우로 신료의 길 분리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후 27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정문인 광화문의 격을 높이기 위해 월대를 쌓았다. 1866년 3월 3일 경복궁 영건일기에는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다’고 나온다. 덕수궁과 창덕궁 정문에도 월대가 조성됐지만 좌우를 난간으로 두른 건 광화문 월대뿐이다. 학계에서는 경복궁 안팎을 잇는 광화문 월대에서 외국 사신 맞이 등 각종 왕실 행사가 열렸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월대 좌우 가장자리에 길이 120∼270cm, 너비 30∼50cm, 두께 20∼40cm 장대석을 2단으로 쌓아 올려 만든 기단의 모습이 거의 완전하게 드러났다. 월대의 높이는 약 70cm였다. 월대 내부는 흙으로 채웠다. 월대 남쪽 가장자리에서는 3단의 계단석도 파악됐다. 어도가 시작되는 중앙 부분 계단에서는 동쪽에 소맷돌(계단 좌우 양단을 장식하거나 마감하는 부재)이 발견돼 임금이 다니는 가운데 길목과 신료들이 드나들던 동·서쪽 길목이 분리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전차선로로 덮인 월대 서쪽과 어도 주변은 일부 훼손된 채 발굴됐다.● 일제강점기 선로 설치, 월대 깔아뭉개 월대의 모습은 시간에 따라 4단계로 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 후기 광화문 월대를 촬영한 사진 자료를 보면 1890년대까지는 월대 남쪽 계단부는 중앙 어도와 좌우 신료의 길이 모두 계단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1900년대 중반 어도 계단이 흙으로 덮여 경사로로 바뀌었다. 1910년대 중반에는 동·서쪽 계단도 경사로로 변경됐고, 전차선로가 설치된 1923년 월대 좌우 난간석이 제거되고 월대가 모두 흙으로 덮였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월대 위를 ‘Y’자 모양으로 지났던 전차선로의 원형도 파악됐다. 선로는 1966년까지 사용되다가 세종로 지하도를 조성할 때 콘크리트로 덮였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이번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올 10월까지 광화문 월대의 원형을 복원할 계획이다. 원형이 훼손된 뒤 경기 구리시 동구릉 등에 일부 이전됐던 월대 난간석과 하엽석(荷葉石·난간석 아래 조각된 받침석)을 재사용할 방침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광화문 월대 복원은 일제에 의해 훼손됐던 경복궁의 역사를 완전히 바로잡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월대를 덮었던 전차선로 유적은 일부가 경기 의왕시 철도박물관으로 옮겨져 보존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김치는 중국의 파오차이(泡菜)와 재료와 절임 방식 등이 역사적으로 다른 한국의 독자적 음식이라는 분석이 동북아역사재단이 발간하는 ‘동북아역사 리포트’에 게재됐다. 박채린 세계김치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재단에 기고한 글 ‘음식도 발효를, 생각도 발효를’에 따르면 채소를 장기간 보관하기 위해 소금에 절여 두는 ‘채소 절임’ 방식은 인류 보편적 식문화였는데, 1∼3세기경 발효 문화가 형성되면서 한국과 중국은 각자의 노선을 걸었다. 중국 최초의 농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채소를 절일 때 식초와 술 등을 썼다. 이 시기 한국에서는 주로 콩을 소금에 발효시킨 두장(豆醬)으로 채소를 절였다. 박 연구원은 “중국이 한국의 삼국시대에 채소 절임 기술을 전파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했다. 특히 박 연구원은 조선시대 들어 젓갈과 고추, 마늘, 생강, 파, 갓, 미나리 등 향신 채소를 버무려 김칫소로 사용하면서 김치가 더욱 독특해졌다고 강조했다. 파오차이는 식초 등에 채소를 절이는 ‘채소절임 단계’에 머무른 반면 김치는 동물성 발효식품인 젓갈로 감칠맛을 더하는 ‘가미 발효절임’ 단계까지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는 식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됐다. 중국은 절임채소를 다시 볶거나 요리 재료로 활용하기 때문에 절임 단계에서 풍미를 더하지 않는 반면에 김치를 반찬으로 먹는 한국에선 그 자체로 완성된 맛을 내기 위해 젓갈 등으로 풍미를 더했다는 해석이다. 박 연구원은 “조리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완결된 맛을 지닌 김치는 한국 상차림에 최적화된 음식”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2020년 중국 쓰촨 지역의 파오차이가 국제표준화기구(ISO)의 인증을 받고, 중국 관영 ‘환추시보’가 왜곡된 기사를 실으며 ‘김치 종주국’ 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005년 4월 25일 오전 9시 19분 4초. 일본 효고(兵庫)현 아마가사키시에서 벌어진 ‘후쿠치야마(福知山)선 탈선 사고’로 아내와 여동생을 잃고, 딸이 중상을 입은 아사노 야사카즈 씨의 시간은 이날 멈췄다. 2007년 6월 발표된 사고조사보고서는 23세 열차 운전사의 주의 소홀을 사고 원인으로 지목했다. 운전사가 열차 지연을 만회하기 위해 무리하게 과속하다 벌어진 사고라는 분석이었다. 고작 12줄의 글로 사고 원인을 기록한 이 보고서에는 사고의 구조적인 원인이 담기지 않았다. 지역환경계획연구소 대표였던 아사노 씨의 싸움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그날 운전사가 무리하게 과속하면서까지 열차를 몰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추적에 나선 것이다. 사고 당시 고베신문 기자였던 저자가 사고 이후 10년 동안 서일본여객철도주식회사(JR서일본)에 맞서 사고 원인을 파헤친 아사노 씨의 분투를 기록했다. 과속은 구조적 문제였다. 적자 노선을 떠안은 JR서일본은 배차 간격을 촘촘하게 편성하고 출퇴근 시간대 속도를 올렸다. 시간표에 따르면 사고 열차는 직전 열차가 떠나고 나서 1분 30초 뒤 출발하게 돼 있었지만, 문이 닫히기 직전 뛰어드는 승객까지 감안하면 출발 시간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JR서일본은 1분 이상 늦으면 ‘반성 사고’로 분류하고 운전사에게 매일 리포트를 쓰게 하거나, 직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등 징벌성 일근교육을 시켰다. 애초에 정시 운행이 불가능한 시간표를 짜놓고 운전사에게 책임을 떠넘긴 조직문화가 과속을 야기했다는 게 아사노 씨가 분석한 사고 원인이었다. 아사노 씨가 걸어온 10년의 궤적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안전관리를 체계화하는 규정이 마련됐고, 지연 운행에 대해 내리는 징벌 제도가 없어졌다. 열차가 정해진 속도를 넘어섰을 때 자동적으로 감속시키는 신형 자동 열차 제어 장치도 설치됐다. “사고를 사회화하는 것이 유가족의 책무”라는 자신의 말을 지킨 것. 2018년 일본에서 출간된 이 책은 이듬해 고단샤(講談社) 논픽션상을 받았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한반도 선사 문화의 정점으로 불리는 울산 ‘반구천 일원의 암각화’와 조선 한양을 지키던 ‘한양의 수도성곽’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한발 더 다가섰다. 문화재청은 “13일 문화재위원회 회의에서 반구천 일원의 암각화와 한양의 수도성곽을 세계유산 ‘등재신청 후보’로 선정했다”고 14일 밝혔다.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서를 제출하기 전 ‘잠정목록→우선등재목록→등재신청 후보→등재신청 대상’ 등 4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이번 결정은 최종 신청 대상에 오르기 직전 단계에 해당한다. 반구천 일원의 암각화는 국보 ‘울주 천전리 각석’과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포함한 유적이다. 그중 반구대 암각화는 높이 2.5m, 너비 9m에 이르는 암면에 고래 57점을 포함해 호랑이, 사슴 등 문양 355점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한양의 수도성곽은 한양도성·북한산성·탕춘대성을 포함하는 유적으로, 문화재위원회는 이 유적을 등재신청 후보로 선정하면서 ‘예비 평가’를 받을 것을 권고했다. 예비 평가란 등재 신청을 준비하는 단계부터 자문기구와 당사국이 논의하며 등재 가능성을 높이는 제도다. 문화재청은 올 9월 한양의 수도성곽과 관련한 예비평가 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할 계획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주변 온도가 40도가 넘는 후덥지근한 가마 앞이 임규헌 씨(31)의 어릴 적 놀이터였다. 임 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 임인호 국가무형문화재 금속활자장 보유자(59)를 따라 충북 괴산에 있는 작업실에서 온종일을 보냈다. 지난해 8월 국가무형문화재 전승교육사로 인정받은 임 씨는 전승교육사 총 248명 중 가장 젊다. 열여섯 살 때부터 전수생으로 아버지를 따르던 그가 본격적으로 금속활자의 세계에 들어선 건 스무 살 무렵. 1200도가 넘는 쇳물을 다루고, 조각칼로 나무판과 밀랍에 일일이 글자를 새기는 위험천만한 일을 하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임 씨는 “이러다가는 금속활자를 만드는 전통이 끊어질 거란 생각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13일 전화로 만난 임 씨는 “아버지 밑에서 이수자로 지낸 5년 동안 돈은 한 푼도 벌지 못했다”며 “첫 월급을 받아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는 또래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과연 옳은 길을 가는지 고민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돈보다 명예가 더 중요하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겼다”고 했다. 임 씨는 2011년부터 5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직지)’의 활자 3만여 자를 복원하면서 “장인으로서의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됐다”고 했다. 상·하권을 합해 78장, 총 3만여 자에 달하는 직지의 금속활자를 손수 제작하는 동안 부자는 하루에 3시간만 자고 주말도 없이 밤낮으로 작업실에서 살았다고 했다. 직지 상권은 국내에 있는 목판본을, 하권은 금속활자본 영인본을 보고 활자를 각각 만들었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소유한 금속활자본 하권은 12일(현지 시간) 현지 전시를 통해 50년 만에 공개됐다. 임 씨는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저는 어떻게든 작업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아버지 몰래 도망치기도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복원을 마치고 하반신 마비 증세가 올 정도로 온종일 앉아서 활자를 만드는 데만 몰두했다”고 회고했다. 2015년 마침내 3만여 자를 모두 복원하던 날, 아버지는 말없이 작업실에 놓인 활자들을 바라봤다고 한다. “아버지는 제게 ‘일에 미치라’고 말씀하셨어요. 여기서 ‘미’는 한자로 아름다울 ‘미(美)’라고,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런 일이라고 하셨죠. 그제야 그 뜻을 깨달았어요. 우리가 역사를 지켜내는 아름다운 일을 하고 있다는 걸요.” 임 씨의 목표는 최초의 한글 금속활자 인쇄본인 국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의 활자를 복원해내는 것. 지난해 1년간 이 책의 첫 장에 나오는 금속활자를 복원했다. 그는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을 비춘다’는 책의 제목에 매료됐다”며 “아버지처럼 수년, 수십 년이 걸리더라도 꼭 복원해 내겠다”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조선 말기 프랑스로 건너간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직지)을 국내에서도 볼 길이 열릴까. 12일(현지 시간)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전시를 통해 50년 만에 직지를 일반에 공개한 프랑스국립도서관의 로랑스 앙젤 관장은 11일 직지의 한국 전시 가능성에 대해 “현재로서는 말씀드릴 게 없다”며 확답을 피했다. 다만 직지를 고해상도로 디지털화해 대중과 공유해 왔다고 덧붙였다. 직지는 프랑스가 병인양요 때 약탈했다가 2011년 영구대여 형식으로 사실상 한국에 반환한 ‘외규장각 의궤’와 달리 약탈 문화재가 아니다. 고문헌 수집가로 조선 말기 주한 대리공사를 지낸 프랑스인 콜랭 드 플랑시(1853∼1922)가 구매해 가져간 유물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1970년 채택된 유네스코 협약은 전쟁과 식민 지배 등을 통해 약탈되거나 도난된 문화재를 원소장처에 돌려주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직지는 여기 해당하지 않는다.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은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아 직지의 국내 첫 전시를 추진했으나 끝내 무산됐다. 당시 프랑스국립도서관은 직지 대여 조건으로 한국이 해외 소재 한국 문화재를 들여가 전시할 때 압류나 몰수를 금하는 ‘한시적 압류 면제법’(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는 한국 절도범들이 일본 관음사에서 훔쳐온 금동불의 소유권을 충남 서산 부석사에 넘기라는 1심 판결이 2017년 나온 여파로 해외 주요 박물관들이 한국 문화재의 대여를 기피하던 상황이었다. 법무부는 이 법안이 사법부의 압류 면제 결정 권한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국회에 심사 보류를 요청했고, 결국 법안은 폐기됐다. 이규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외 소재 문화재가 약 23만 점에 달하는 우리 상황을 고려하면 ‘한시적 압류 면제법’ 제정으로 얻을 실익이 훨씬 크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법안의 존재만으로 국외 소재 한국 문화재를 대여 전시할 수 있는 협상력이 커질 수 있는 만큼 이전 법안의 한계를 보완해 새로 입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이 법안이 제정되면 약탈·도난 문화재를 점유국 소유로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불법 반출 문화재나 소유권 분쟁 중인 문화재는 압류 면제에서 제외하면 된다는 반론도 있다. 직지의 한국 전시를 위해서는 양국 기관의 교류가 우선이라는 의견이 많다. 김지현 건국대 세계문화유산대학원 겸임교수는 “법 제정도 필요하지만 직지 대여 전시 논의가 진전되기 위해서는 양국 기관의 우호적 교류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문화재청은 11일 프랑스국립도서관과 업무협약을 체결해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 한국 문화유산에 대한 학술조사와 연구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등 한국 문화유산 2000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적의 동태를 명나라 병부시랑 송응창과 상의해 신속히 군사를 진격시킬 계책을 만들라. 경은 장수들을 지휘하여 관병과 의병을 별도로 정돈해 두었다가 적들이 아직 상륙하지 않았다면 수군을 데리고 건너온 적선을 쳐부수고, 적들이 이미 상륙하였다면 정예병을 거느리고 협력하여 요격하라.”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1593년 4월 18일, 선조가 영의정이자 도체찰사(都體察使·조선시대 전시 최고 군직)였던 서애 류성룡(1542∼1607)에게 내린 유지(有旨) 내용이다. 두 달 전 전라도 관찰사 권율(1537∼1599)이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물리쳤지만 주변에서 그를 돕겠다고 나선 장수들은 없었다. 아군이 전장에서 도망치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르는데, 왜적의 세력은 더욱 불어나던 풍전등화 같은 상황. 선조는 류성룡에게 관병과 의병을 동원해 왜선을 선제공격하라는 명령을 이같이 내렸다.● “임란 당시 조정의 대응책 상세히 나와”1592∼1607년 선조가 류성룡에게 내린 유지 76건과 유서(諭書·왕이 군사권을 가진 관원에게 내린 명령서) 1건 등 총 77건을 엮은 보물 ‘유성룡 종가 문적―유지’ 2책이 처음으로 국역됐다. 문화재청과 성균관대 유학대학(학장 김동민)은 2018년부터 ‘중요기록유산 국역 사업’을 통해 보물로 지정된 고문헌 30종(총 1075책 186만9374자)을 국역했다. 이 사업을 통해 종가가 소장해 일반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이 사료가 우리말로 옮겨진 것. 류성룡에게 내려진 유지에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조정의 대응책이 상세하게 담겨 임진왜란 역사 연구의 공백을 채울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급증한 왜선에 대한 대응책이 담긴 1593년 4월 18일자 유지에는 이전까지의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조정의 대응 사례가 담겼다. 하루 전인 1593년 4월 17일 실록에는 “왜적이 금년 봄에 병력을 증파하는 일에 대해 누군들 염려하지 않겠는가. 비변사(備邊司)에 일러 조처를 강구하게 하라”고만 기록돼 있다. 류성룡이 남긴 ‘징비록’과 ‘서애집’에도 자세한 얘기는 안 나온다. 이 밖에도 유지에는 군량 보급 대책, 명나라에 대한 원병 요청, 포로 송환 논의와 관련해 실록 등에는 요약돼 나와 있는 대책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난중일기’를 완역한 노승석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은 “이 사료를 통해 임란 당시 조정의 전술과 이에 따른 성패를 다시 분석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무능한 왕으로 여겨졌던 선조에 대한 평면적인 평가를 뒤집는 입체적인 인물사를 구성해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조실록을 포함한 중앙 관찬 사료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선조의 감정도 유지 속에 드러난다. 1593년 3월 25일 선조가 류성룡에게 보낸 유지에는 “명나라 장수가 왜적과 강화를 이미 결정했다고 하니 울음을 참을 수가 없다”고 기록됐다. 당시 선조실록에는 ‘명나라 사신 심유경(?∼1597)이 왜장과 강화를 맺어 4월 8일까지 군사를 물리겠다고 했다’고만 적혀 있다. 그러나 유지에는 명군의 협조를 이끌어내려던 전략이 실패한 뒤 선조의 울분이 생생하게 담긴 것이다.● 우금치 전투 묘사한 문중 전적도 번역1894년 동학농민군이 조선과 일본 연합군에 항거했던 우금치 전투가 담긴 ‘함양박씨 정랑공파 문중 전적―나암수록(羅巖隨錄)’도 이번 사업을 통해 처음 완역됐다. 유학자 박주대(1836∼1912)가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를 총 4책으로 기록한 이 사료에는 당시 조선 관군으로부터 전해 들은 전시 상황이 묘사돼 있다. 1894년 11월 3일자에는 “적병(동학농민군)이 고개를 넘으려 하면 일제히 총을 40, 50차례 발사하니 (적병의) 시체가 쌓여 산에 가득했다”고 나온다. 공정권 성균관대 유학대학 책임연구원은 “동학농민봉기를 바라본 유학자의 시선 등 당대 격변기 사회상이 담겼다”고 말했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청나라 학자의 편지글을 필사한 보물 ‘김정희 종가 유물―척독초본(尺牘鈔本)’과 현종의 셋째 딸 명안공주(1667∼1687)가 왕실과 주고받은 편지 등이 포함된 보물 ‘명안공주 관련 유물’도 국역됐다. 정제규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전문위원은 “당대 사회상을 진솔하게 담고 있는 기록물에 대한 후속 연구의 토대가 마련됐다는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국역된 사료 30종의 원문과 국역본을 내년에 국가문화유산포털 홈페이지에 공개할 예정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왜적의 세력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고 하는데, 매우 걱정스럽다. 현재 군사들 중에는 지금 주둔한 곳에서 뽑아 보낼 군사가 따로 없으니, 다만 전진할 것을 권하는 하나의 방책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니 경은 관병과 의병을 규합해 방어하도록 조치하라.”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1593년 3월 15일, 선조가 영의정이자 도체찰사(都體察使·조선시대 의정·議政이 맡은 전시 최고 군직)였던 서애 류성룡(1542~1607)에게 내린 유지(有旨·임금의 분부를 전하는 문서)에 적힌 내용이다. 불과 한 달 전, 전라도 관찰사였던 권율(1537~1599)이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물리쳤지만 주변에서 그를 돕겠다고 나선 장수들은 없었다. 아군은 전장에서 도망치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르는데, 왜적의 세력은 더 불어나던 풍전등화 같은 상황. 선조는 도체찰사 류성룡에게 “의병을 규합하라”는 명을 내렸다. 임진왜란 직후인 1592년 7월 14일부터 1607년까지 선조가 류성룡에게 내린 유지 총 76건과 유서(諭書·국왕이 군사권을 가진 관원에게 내린 명령서) 1건을 엮은 보물 ‘유성룡 종가 문적-유지’ 2책이 처음으로 국역됐다. 문화재청과 성균관대 유학대학(학장 김동민)이 2018년부터 ‘중요기록유산 국역 사업’을 실시해 보물로 지정된 고문헌30종(총 1075책 186만9374자)를 국역하면서 종가가 대대로 소장해 접근하기 어려웠던 이 사료가 처음 우리말로 옮겨진 것이다. 공정권 성균관대 유학대학 책임연구원은 “임란 발발 직후 3개월 이후부터 일자별로 전시 상황이 정리된 유일무이한 사료”라며 “급변하는 변란 상황은 물론 적에 대한 조정의 군사전략 등이 생생하게 담겼다”고 설명했다. 유지에는 1592년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에 있을 때 류성룡에게 ‘군량을 보급하고 선박을 마련하라’고 내린 지시를 시작으로 △군량 보급 대책 △명나라 구원병 요청 △포로 송환 논의 등이 기록돼 있다. 특히 이 유지에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조정의 대응책이 상세하게 담겨 있어 임란사의 공백을 채웠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례로 1593년 4월 18일 유지에는 “부산과 동래 사이에 많은 수의 왜선이 정박해 있어 분명 군사를 증가시킬 형세라고 하니 매우 걱정스럽다. 적의 동태를 명나라의 병부시랑(兵部侍郞) 송응창과 상의해 신속히 군사를 진격시킬 계책으로 삼으라. 경은 장수들을 지휘하여 관병과 의병을 별도로 정돈해 두었다가 적들이 아직 상륙하지 않았다면 수군을 데리고 건너 온 적선을 쳐부수고, 적들이 이미 상륙하였다면 정예병을 거느리고 협력하여 요격하라”는 기록이 나와 있다. 이는 이전까지 사료에선 파악되지 않은 조정의 대응이다. 하루 전인 1593년 4월 17일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왜적이 금년 봄에 병력을 증파하는 일에 대해 누구인들 염려하지 않겠는가. 비변사(備邊司·조선시대 군사회의기구)에 일러 조처를 강구하게 하라”고만 기록돼 있다. 이후 어떤 대책이 마련됐는지는 류성룡이 1592~1598년 집필한 임진왜란 전란사 ‘징비록(懲毖錄)’과 그가 남긴 문집 ‘서애집’에도 설명되지 않았다. 공 책임연구원은 “그동안 급증하는 왜선에 대해 조정이 정확히 어떤 대응책을 내놨는지 알 수 없었던 역사의 공백을 이 사료가 채워준 것”이라고 강조했다.‘선조실록’을 포함한 중앙 관찬 사료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선조의 감정도 유지 속에 드러난다. 1593년 3월 25일 선조가 류성룡에게 보낸 유지에는 “명나라 장수가 왜적과 강화를 이미 결정했다고 하니 울음을 참을 수가 없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선조실록에는 ‘명나라 사신 심유경(?~1597)이 왜장과 강화를 맺어 4월 8일까지 군사를 물리겠다고 했다’고만 적혀 있다. 류성룡에게 보낸 유지 속에는 명나라군의 협조를 이끌어내려던 전략이 실패하자 선조가 울분을 토로하는 대목이 생생하게 담긴 것이다. 정제규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문화재 전문위원은 “이번 사업으로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어 전문가들도 접근하기 어려웠던 유지와 일지 등 중요기록문화재 30종이 국역됐다”며 “당대 사회상을 가장 진솔하게 담고 있는 기록물에 대한 후속 연구의 토대가 마련됐다는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기록유산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사료 원문과 국역본을 국가문화유산포털 홈페이지에 무료로 공개할 예정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일본의 고속철 신칸센 전동차 설계를 맡았던 공학자 나카쓰 에이지(仲津榮治)는 1990년 난관을 맞닥뜨렸다. 시범 운행을 하던 신칸센은 터널 밖으로 나올 때마다 굉음을 냈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골몰하던 그는 우연히 오사카에서 열린 야생조류학회에 참석했다가 ‘무음 비행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물총새로부터 답을 찾았다. 납작하고 긴 물총새의 부리를 본떠 15m 길이의 신칸센 앞머리를 새롭게 설계한 것. 결과는 놀라웠다. 시속 298km로 달리면서도 진공청소기가 내는 소음보다 더 조용하게 터널을 빠져나온 것이다. 영국 BBC 다큐멘터리 제작자이자 생물학자인 저자가 동물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생체모방(Biomimicry)’ 기술 30가지를 정리했다. 생체모방이란 생물의 생태나 신체 구조로부터 영감을 받아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대왕쥐가오리의 주둥이는 해양 생태계를 지킬 기술을 개발하는 데 영감을 줬다. 이 가오리는 먹이를 먹기 위해 직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입을 벌려 바닷물을 빨아들이는데, 이후 플랑크톤만 입안에 남고 나머지 바닷물은 아가미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간다. 입 내부에 있는 아가미 판으로 플랑크톤만 남기고, 나머지는 판 뒤쪽으로 튕겨내는 식이다. 네덜란드 헤이그응용과학대 연구팀은 대왕쥐가오리의 아가미 구조를 본떠 해양 환경오염의 주범인 미세 플라스틱을 여과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 아가미처럼 생긴 그물로 물속을 떠도는 플라스틱 오염 물질만 빨아들여 거르는 기술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화가이자 공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대표적인 자연 예찬론자였다. 그는 박쥐 날개를 모방해 ‘날아다니는 기계’라는 제목의 스케치를 남겼는데, 훗날 이 스케치는 최초의 동력 비행기를 만든 라이트 형제에게 영감을 줬다. 생전 다빈치는 “자연은 최고의 스승”이라는 말을 남겼다. 혹등고래, 문어, 낙타 등 인간이 풀지 못한 문제를 미리 풀어낸 ‘자연의 해결사’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천마도(天馬圖)가 나오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장니(障泥·말 안장의 부속구) 두 장이 겹쳐진 채로 출토됐는데, 아래 장을 들춰 보니 선명한 색이 일품이었어요.” 1973년 8월 22일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담당관실에 소속해 있던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80)은 경북 경주시 황남동 155호분 발굴조사 현장에서 국보 ‘천마총(天馬塚) 장니 천마도’가 발굴되던 당시를 어제 일처럼 회고했다. 천마총 발굴 50주년을 맞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6일 경북 경주시 힐튼호텔에서 주최한 특별좌담회 ‘천마총, 그날의 이야기’에 발굴에 참여했던 지 전 관장과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75),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76), 남시진 계림문화재연구원장(71), 소성옥 씨(71)가 50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발굴 당시 나무껍질로 만든 유물이 부서질까 봐 지 전 관장을 포함한 발굴조사원 6명이 달라붙어 커다란 한지를 대고 상자 위에 옮겼다고 한다. 상자 안에는 솜과 소독된 한지를 겹겹으로 깔았고,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물을 적신 탈지면을 둘렀다. 지 전 관장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천마도는 뒤틀림이나 변색이 없다”며 “우리가 정성으로 최선을 다한 덕인 것 같아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천마총 발굴은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 국가가 주도한 첫 번째 기획 발굴이다. 1973년 4월 6일 첫 발굴을 시작해 국보 ‘천마총 금관’ 등을 포함한 유물 1만1526점이 쏟아져 나왔다. 고분은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말 탄 사람의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가 출토되면서 ‘천마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천마총 발굴은 발굴일지를 세분화해 기록한 ‘한국 과학 발굴의 시초’로 여겨진다. 당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담당관실 소속으로 발굴 조사에 참여한 고 박지명 씨가 발굴 현장을 실측해 도면을 남겼다. 남 원장은 수년 전 작고한 박 씨를 떠올리며 “우리나라 발굴 현장에서 도면을 온전하게 작성한 건 천마총이 처음”이라며 “우리가 이런 기록을 남긴 데엔 박 씨의 공이 컸다”고 했다. 유물 보관 상자에 점토를 깔고, 출토되기 전 모습 그대로 핀셋으로 옮긴 것도 천마총 발굴 현장에서 처음 시도했다. 천마총 발굴조사단 부단장이었던 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이날 영상을 통해 “5∼6시간이 걸리더라도 핀셋으로 하나씩, 발견된 모습 그대로 유물 상자에 옮겨 담았다”고 회고했다. 이날 좌담회 사회를 맡은 최 교수는 “우리가 늙는 동안 천마총 발굴은 한국 현대사의 일부가 됐고, 고고학과 보존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경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네이버의 웹툰 플랫폼 ‘네이버웹툰’과 ‘네이버시리즈’가 작가 등 제작자로부터 콘텐츠 유통 수수료를 많게는 50%까지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수료가 지나치게 많아 창작자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국여성노조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가 지난해 6월 작성한 ‘플랫폼 계약 현황 및 수수료 문제점’ 보고서에 따르면 네이버는 작가의 작품 매출에서 구글스토어 등 ‘인앱 결제’로 인한 마켓 수수료를 제외한 금액을 기준으로 월 3000만 원 이하인 경우 수수료를 30%, 3000만∼1억 원인 경우 40%, 1억 원을 넘으면 50%를 가져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네이버웹툰 관계자는 수수료율에 관한 본보의 질의에 “당사자 간 계약 내용은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작품 매출이 100원이라고 가정할 때 구글이 30원을 가져가고 네이버가 나머지 70원 중 35원(50%)을 가져가면 작가의 손에는 35원만 남는 셈이다. 범유경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 변호사는 네이버의 수수료율에 대해 “10∼30%대 수수료를 가져가는 게임 플랫폼과 비교해도 과도하다”고 지적했다. 네이버는 작가와 직접 계약하지 않고 콘텐츠 제작사(CP)를 통해 작품을 유통하는 경우에도 약 40%의 수수료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경우 CP에 소속된 작가가 받는 몫은 더 줄어든다. 한 CP 관계자는 “인앱 결제 수수료를 제외한 나머지에서 네이버 수수료 40%를 떼면 CP의 몫은 총매출액의 절반도 안 된다. 이를 CP가 글 작가와 연출 작가, 그림 작가 등 최소 3명이 넘는 작가에게 나누다 보니 작가의 몫은 적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범 변호사는 “이 경우 창작자가 가져가는 수익은 총매출액의 10%도 되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수수료가 네이버보다 저렴한 웹툰 플랫폼이 있지만 대안은 못 된다. 웹툰계 관계자는 “네이버의 국내 웹툰시장 점유율이 압도적으로 높아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토로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21년 웹툰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한 트래픽 분석 결과 네이버웹툰과 네이버시리즈가 전체의 42%로 1위를 차지했다. CP 관계자는 “네이버의 수수료가 과도해도 ‘을’ 입장에서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CP 소속 작가들이 네이버의 정산 내역을 투명하게 알지 못하는 구조도 개선 과제로 꼽힌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지난해 10월 기존 CP만 확인할 수 있었던 결제 정산 내역을 창작자에게도 모두 공개하는 ‘파트너 포털’을 마련했다. 반면 네이버웹툰 등은 여전히 직접 계약한 작가와 CP에게만 정산 시스템을 개방하고 있다. 네이버웹툰 관계자는 “구체적인 수수료율이나 계약 조건에 대해선 확인해줄 수 없다”며 “계약 구조와 관련해 작가 친화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지민구 기자 warum@donga.com}
“돈은 필요 없습니다. 이 작품들을 물려주신 시아버지의 이름으로, 시아버지의 고향과 가장 가까운 박물관에 기증해 주세요.” 조선 후기 최대 서화 컬렉션 ‘석농화원(石農畵苑)’에 수록됐다고 기록만 전해지던 ‘묵매도(墨梅圖)’ 등 조선 후기 귀중 회화 4건이 미국에서 돌아왔다. 이 작품들을 소장해온 고 허민수 씨(1897∼1972)의 미국인 며느리 게일 허 여사(84)가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한 것. 한국은행 초대 부총재를 지낸 허 씨는 전남 진도 출신으로, 조선 말기 남종화의 대가 소치(小痴) 허련(1808∼1893)의 후손이다. 국립광주박물관에 따르면 기증 작품은 ‘송도 대련(松圖 對聯)’과 ‘천강산수도(淺絳山水圖)병풍’ 등 허련의 작품 2건과 ‘묵매도’, ‘동파입극도(東坡笠屐圖)’를 비롯한 총 4건이다. 기증 작품 중 조선 후기 문인 김진규(1658∼1716)가 그린 묵매도는 매화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수묵으로 담백하게 그려낸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 후기 서화 수장가 김광국(1727∼1797)이 단원 김홍도(1745∼?)의 작품 등 일생 동안 모은 그림을 9권으로 엮은 화첩 석농화원에 포함됐던 것이다. 석농화원은 현재는 파첩(破帖)돼 낱장으로 흩어져 있다. 2013년 고서 경매를 통해 확인된 ‘석농화원 필사본 권1’에는 화첩에 수록된 그림 267점의 제목과 화평 등이 남아 있는데, 이 가운데 실체가 확인된 작품은 묵매도를 포함해 58점뿐이다. 석농화원 필사본에는 김광국이 묵매도에 대해 ‘귀한 그림이니 소중히 아끼라’고 쓴 화평이 기록돼 있다. 최장열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묵매도가 발견됐다는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힘차게 뻗은 소나무를 그려낸 ‘송도 대련’과 8폭으로 된 ‘천강산수도병풍’은 허련 특유의 건필(健筆)과 호방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수작으로 꼽힌다. 송도 대련에는 허련의 호를 새긴 낙관과 함께 시가 적혀 있다. 허련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다. 천강산수도병풍 뒷면에는 허련의 뒤를 이어 남종화의 대를 이은 서화가 허백련(1891∼1977)이 쓴 표제가 남아 있다. 허백련은 이 작품을 소장해온 허 씨와 친척으로 평소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또 다른 기증 작품 ‘동파입극도’는 조선 말기 문인 화가 신명연(1808∼1886)의 그림으로, 중국 북송대 문인 동파 소식(1037∼1101)이 귀양 시절 삿갓과 나막신 차림으로 비를 피하는 모습을 그린 인물화다. 산수화나 화훼도로 유명한 신명연이 그린 희귀한 인물화란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있다는 평가다. 허 여사는 지난해 5월 미국 워싱턴 한국문화원을 통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 시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작품을 정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작품을 감정하러 허 여사 자택을 찾아간 김상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특임연구관이 “조선 회화사의 공백을 채워줄 미공개 작품들로 가치가 높다”며 매입 의사를 전하자 “돈은 필요 없다”며 선뜻 기증을 결정했다고 한다. 워싱턴 옛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에서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열린 기증서 전달식에 참석한 허 여사는 “소중한 작품들이 그 작품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국립광주박물관은 올해 9월 기증받은 작품들을 전시로 선보일 예정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돈은 필요 없습니다. 이 작품들을 물려주신 시아버지의 이름으로, 시아버지의 고향과 가장 가까운 박물관에 기증해주세요.” 조선 후기 최대 서화 컬렉션으로 손꼽히는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에 수록된 ‘묵매도(墨梅圖)’ 등 조선 후기 회화 4건이 미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작품들을 소장해온 고 허민수 씨(1897~1972)의 미국인 며느리 게일 허 여사(84)가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한 것. 한국은행 초대 부총재를 지낸 허 씨는 전남 진도 출생으로, 조선 후기 서화가 소치 허련(1808~1893)의 후손이다. 국립광주박물관은 “미국 버지니아주에 사는 허 여사가 시아버지 허 씨로부터 물려받은 조선 후기 회화 4건을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했다”고 4일 밝혔다. 기증 작품은 ‘송도 대련(對聯)’과 ‘천강산수도병풍(淺絳山水圖屛風)’ 등 허련의 작품 2건과 ‘묵매도’, ‘동파입극도(東坡笠屐圖)’ 등 총 4건이다. 올 2월 16일 미국에서 들여와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최장열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이번 기증은 그동안 석농화원에 수록됐다는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묵매도가 발견됐다는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크다”며 “이번 기증이 한국 회화사의 공백을 채워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석농화원은 조선 후기 서화 수장가 김광국(1727~1797)이 단원 김홍도(1745~?)의 작품 등 일생 동안 모은 그림을 9권으로 엮은 화첩으로, 현재는 파첩(破帖)돼 낱장으로 흩어져 있다. 특히 조선 후기 문인 김진규(1658~1716)가 그린 묵매도는 2013년 고서 경매를 통해 확인된 ‘석농화원 필사본 권1’에 제목과 화평이 나와 있어 기록으로만 전해져왔다. 이 필사본 목록에는 ‘석농화원에 총 267점의 그림이 수록돼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가운데 실체가 확인된 작품은 묵매도를 포함해 58점뿐이다. 묵매도는 매화 나뭇가지에 앉은 새의 모습을 수묵으로 담백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다른 기증 작품 ‘동파입극도’는 조선 후기 문인 화가 신명연(1808~1886)이 그린 그림으로, 중국 송나라 문인 동파 소식(1037~1101)이 귀양 시절 삿갓과 나막신 차림으로 비를 피하는 모습을 그린 인물화다. 산수화나 화훼도로 유명한 신명연이 그린 희귀한 인물화란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있다는 평가다. 이밖에도 힘차게 뻗은 소나무를 그려낸 ‘송도 대련’과 8폭으로 된 산수도 병풍 ‘천강산수도병풍’은 허련 특유의 건필과 호방한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수작으로 꼽힌다. 허 여사는 지난해 5월 워싱턴한국문화원을 통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 시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작품을 정리하고 싶다”는 의사를 처음 밝혔다. 이후 작품을 감정하러 허 여사 자택을 찾아간 김상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특임연구관이 “조선 회화사의 공백을 채워줄 미공개 작품들로 회화사적 가치가 높다”며 매입 의사를 전하자, 허 여사는 “돈은 필요 없다”며 선뜻 기증을 결정한 것이다.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소재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서 열린 기증서 전달식에 참석한 허 여사는 “시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작품들이 그 작품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국립광주박물관은 올 가을 이 작품들을 전시로 선보일 예정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봄을 맞아 ‘고종의 서재’로 쓰였던 서울 경복궁 집옥재(集玉齋)에 작은 도서관이 생기고, 덕수궁 석조전에서는 야간 탐방 행사가 열린다. 문화재청 경복궁관리소는 “5일부터 10월 30일까지 경복궁 건청궁 왼편 집옥재에 독서 공간을 만들어 개방한다”고 3일 밝혔다. ‘옥처럼 귀한 보물을 모은다’는 뜻의 집옥재는 고종이 서재 겸 집무실로 쓰며 외국 사신들을 접견했던 곳이다. 1881년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졌으나 1891년 고종이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긴 뒤 현재 자리로 옮겨졌다. 집옥재 내부에는 조선 왕실문화를 엿볼 수 있는 각종 왕실사료 영인본(影印本·원본을 복제한 인쇄물)과 역사서가 마련돼 있다. 휴궁일인 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무료로 개방된다. 대한제국 황궁인 덕수궁 석조전의 밤풍경을 탐방하는 ‘밤의 석조전’ 행사도 11일부터 다음 달 11일까지 예매자를 대상으로 열린다. 관람객들은 해설사와 석조전 내부를 둘러보고 2층 야외 테라스에 앉아 커피와 디저트를 즐긴 뒤 석조전 접견실에서 고종의 이야기를 담은 ‘고종―대한의 꿈’ 뮤지컬을 볼 수 있다. 하루 총 3회, 회당 16명까지 입장 가능하다. 예매는 4일 오후 2시부터 티켓링크에서 선착순으로 할 수 있다. 1인 2장까지 예매 가능하다. 2만6000원.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일제강점기 신동아에 실려 조선총독부에 맞선 저항정신을 담아냈던 소설 ‘제방공사(堤防工事)’가 일본어로 처음 번역돼 소개됐다. 전남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가 일본 시 전문 잡지 ‘시와 사상’ 4월호에 독립유공자 이창신(1914∼1948·사진)의 소설 ‘제방공사’를 일본어로 번역해 소개했다”며 “이 소설이 일본어로 번역된 건 처음”이라고 2일 밝혔다. 제방공사는 이창신이 이석성(李石城)이라는 필명으로 1934년 ‘신동아’ 10∼12월호에 게재한 소설이다. 소설은 조선에서 가져가는 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전남 나주 영산강 일대에 제방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일제의 탄압을 견디다 못한 조선인 노동자들이 봉기하는 과정을 그렸다. 나주에서 태어난 이창신은 1931년 총독부 주도로 벌어진 영산강 제방공사 현장에서 일본인 공사 감독들이 자행하는 인권유린 실태를 목격하고 이 소설을 집필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창신은 앞서 1929년과 이듬해 광주학생운동 관련 시위를 벌이다 체포, 구금된 바 있다. 소설은 일제의 검열 탓에 200자 원고지 75장 분량을 끝으로 연재가 중단되면서 미완으로 남았다. 조선총독부는 소설 속 주인공 동수가 일제의 폭압에 맞서 봉기하기로 결심하는 1, 2회분 일부를 복자(伏字·글자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듦) 처리했다. 봉기가 본격 전개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동아 12월호 연재분(3회분)은 제목이 실린 첫 페이지를 복자 처리하고 나머지는 전면 삭제했다. 소설을 번역한 김 교수는 “주인공 동수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공사 현장에 나섰다가 조선인을 향한 일제의 폭압을 직시하고 저항하기로 결심한다”며 “비록 소설은 미완으로 남았지만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담은 이 작품을 일본에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소설에는 1930년대 조선인 노동자들의 속어와 은어 등이 풍부하게 담겨 당대의 해학과 언어문화도 엿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번역을 통해 ‘제방공사’를 읽은 일본 문학평론가 사와다 아키코(澤田章子) 씨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 작품과의 공통점에 눈길이 간다”고 밝혔다고 기념관은 전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지동설은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처음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당대를 지배하던 천동설을 뒤집으며 과학혁명의 출발점으로 여겨진 과학사의 대전환은 사실 9세기 이슬람 천문학자들로부터 출발했다. 11세기 이집트 천문학자 이븐 알하이삼과 13세기 페르시아 천문학자 나시르 알딘 알투시는 지구가 행성 궤도의 중심에 있지 않고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을지 모른다고 추론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학자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연구서에 적힌 수학 기법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문헌에서 나왔다. 인식의 전환을 상징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은 지극히 서구 유럽 중심적인 표현인 셈이다. 영국 워릭대에서 과학기술사를 연구한 저자가 서구 중심의 과학사에서 잊혀진 중동과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과학사를 기록했다. “과학혁명이 서구의 창조적 산물”이라는 인식을 부수고 진정한 기원을 파헤쳤다. 과학혁명은 서구 유럽에서 어느 날 갑자기 태동한 게 아니라 전 세계가 오랜 시간 문화적으로 교류하며 함께 축적해온 더 넓은 차원의 역사라는 것이다. 르네상스 과학혁명은 유럽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당대 오스만제국은 유럽과 과학 문물을 활발히 교류했을 뿐 아니라 들여온 문물을 자체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16세기 말 오스만제국 궁정의 최고 천문학자 타키 알딘이 이스탄불 천문대에서 관측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세밀화에는 14세기 말 유럽에서 발명된 기계식 시계가 그려져 있다. 어린 시절 로마에 머물며 르네상스 과학 문화를 접한 타키 알딘은 기계식 시계로 항성이나 행성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데 걸리는 시간을 정확히 측정했다. 저자는 “기계식 시계를 처음 발명한 건 유럽이지만 이 시계를 천문대에 최초로 설치한 건 오스만제국”이라고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과학혁명이 서구의 산물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20세기 냉전을 거치면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 대립이 국제 정치를 지배하면서 영국과 미국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근대과학의 발원지를 유럽으로 규정했다는 것. 이 과정에서 유럽과 미국을 제외한 소련과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대륙의 과학사는 누락됐다. 저자는 반쪽짜리 과학사를 완전하게 복원하려는 이유에 대해 “오늘날 과학계의 축이 바뀌고 있다”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더 잘 반영하는 새로운 과학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늘날 아랍에미리트(UAE)의 화성 탐사선 프로젝트를 이끄는 교육·첨단과학기술장관은 36세 여성 과학자 사라 알 아미리다. 21세기 과학의 중심이 서구 백인 남성에 있지 않듯 과거에도 그랬다는 얘기다. 책에는 서구 중심의 과학사가 놓쳤던 과학혁명의 주역들이 빼곡히 담겨 있다. 이들의 면면은 국적뿐 아니라 성별, 인종, 종교 등 여러 면에서 다채롭다. 원제(‘Horizons’)는 근현대 과학사의 지평을 넓힌다는 뜻을 담았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을 표시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서 군사시설까지의 거리 등 조선의 지리 정보를 빼곡히 담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목판본’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문화재청이 30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한 총 23첩의 이 지도는 모두 펼친 뒤 이어 붙이면 세로 6.7m, 가로 4m 크기가 된다. 조선의 지리학자 김정호(1804∼?)가 1864년 제작한 대동여지도 목판본에 동여도(東輿圖)에 기재된 주기(註記·지도 여백에 영토의 역사와 지도 제작법, 사용법 등을 적어놓은 정보)와 교통로 등 지리 정보를 추가로 필사한 조선전도다. 문화재청은 “대동여지도 위에 동여도의 내용까지 필사된 판본이 발견된 건 처음”이라고 밝혔다. 동여도는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 저본(底本)으로 삼았던 조선전도로, 1만8000여 개에 달하는 지명과 조선시대 교통로, 군사시설 등이 빼곡히 담겼다. 동여도의 제작자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대동여지도에 묘사된 산맥과 형태가 유사해 역시 김정호가 만들었을 것이란 설이 지배적이다. 김기혁 부산대 명예교수(지리학과)는 “환수된 지도는 몸통은 대동여지도 목판본, 머리는 동여도라고 할 수 있다”며 “목판으로 새겨지면서 주기와 지명이 생략된 기존 대동여지도 목판본의 한계를 채워준 더욱 완전한 형태의 조선전도”라고 설명했다. 일례로 이 지도에는 1712년 백두산에 세워진 백두산정계비와 인근에 세워진 방어시설 혜산진 간의 거리가 필사돼 있는데, 이는 대동여지도 목판본에는 없고 동여도에 나와 있는 정보다. 김 교수는 “유사시 국경 지역에서 방어시설까지 가는 거리를 측정해 지도에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울릉도 일대가 묘사된 제14첩에는 대동여지도 목판본에는 없지만 동여도에는 기재돼 있는 ‘울릉도행 배의 출발지’ 정보가 적혀 있다. 지도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필사본으로 제작돼 대량 생산되지 않았던 동여도를 접했을 정도라면 고위 지식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 교수는 “19세기 중반 대동여지도 목판본이 조선 사회에 보급되면서 해당 지도 위에 지리정보를 추가한 주문 제작 체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두 지도의 결합은 한반도 강역을 하나의 지도로 완성하려는 당대 지식인들의 의지를 보여준다”고 했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지난해 7월 해당 지도를 소장한 일본인이 매도 의사를 밝히면서 유물의 존재를 파악했다. 지난해 12월 두 차례 자문회의를 거쳐 지난달 매입해 이달 17일 국내로 환수했다. 대동여지도 판본은 환수본을 포함해 현재까지 국내외에 38건이 전해지며, 이 중 3건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3개 파편 상태로 출토된 ‘충남 부여 부소산사지 출토 치미’ 복원에는 3차원(3D) 모델링 기술이 사용됐다. 이 치미(전통 건축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물)는 1978년 국립부여박물관이 한 차례 파편을 접합한 뒤 석고로 결손 부분을 복원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곳곳의 석고가 떨어져 나가 심하게 파손된 상태였다. 지난해 1월 복원을 맡은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는 석고를 제거한 뒤 파편을 3D 모델링 기법으로 스캔하고 유물의 원래 모습을 가상으로 만들었다. 치미는 옆에서 봤을 때 좌우 대칭이기에 결손 부위도 유추해 완성된 모습을 구현할 수 있었다. 이어 결손 부위를 채울 조각을 3D 프린팅으로 만들어 붙였다. 디지털 기술이 없었다면 8개월 이상 걸렸을 작업은 2개월 만에 끝났고, 지난해 5∼10월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의 치미’ 전시에 선보일 수 있었다. 당시 복원을 맡았던 황현성 국립나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사실상 접합 과정에만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이라며 “3D 모델링으로 복원의 정확도도 높아졌다”고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디지털 기술로 유물을 복원하는 ‘디지털보존과학센터’를 짓는다. 서울 용산구 박물관 뒤편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올해 5월 착공한다. 박물관이 소장한 유물 43만여 점 가운데 긴급 보존이 필요한 7만4000여 점을 디지털 기법으로 복원하는 첫발을 떼는 것. 센터는 2025년 완공 예정이다. 유혜선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장은 “수백 개 파편으로 쪼개져 수작업으로는 복원이 쉽지 않았던 ‘익산 미륵사지 출토 치미’를 비롯해 많은 유물을 3D 모델링 기법으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오늘 법정에서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열두 살 소녀와 헤어지고 오시길 바랍니다.” 2021년 11월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51)는 성폭력 사건 고등법원 판결 선고를 앞둔 피해자 A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A 씨는 12세 때 사촌에게 강간 피해를 입었지만 10년 넘게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말하면 너희 부모님이 죽을 것”이라는 가해자의 말이 두려워서였다. A 씨는 성인이 된 뒤 어렵사리 김 변호사를 찾아왔다. 지난한 수사와 재판을 앞둔 그에게 김 변호사는 “오늘의 당신이 아니라 그날의 소녀가 법정에서 목소리를 내주면 된다”고 다독였다. 3년 넘게 이어진 법정 싸움 끝에 유죄 판결이 내려지던 날, A 씨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덜 힘들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을 비롯해 20년 넘게 여성·아동·청소년 등 성범죄 피해자를 대리해온 김 변호사가 에세이 ‘완벽한 피해자’(천년의상상)를 최근 펴냈다. 서울 서초구 변호사 사무실에서 27일 만난 그는 “세상이 요구하는 ‘피해자다움’을 완전하게 갖춘 피해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책 제목을 이같이 정했다”며 “성범죄 피해자를 향한 지독한 편견에 균열을 내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친부에게 수년 동안 성폭행을 당했던 B 씨 등 피해자들을 대리하면서 편견 섞인 질문들을 맞닥뜨렸다. ‘진짜 성폭행을 당했다면 왜 그때 신고하지 않았는지, 성폭행 피해를 입고도 왜 가해자에게 보고 싶다는 문자를 보냈는지, 이런 피해를 입고도 어떻게 멀쩡하게 대학과 직장을 다니고 있는지….’ B 씨의 친부는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피해자가 자신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아버지에게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피해자의 관점에서 들여다봐야 한다”며 “어린 시절부터 친부의 가정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는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피해자에 대한 정신 감정 결과 ‘학대순응증후군’이란 진단이 나왔다. 법원은 친부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며 이렇게 판시했다. “피해자는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이뤄진 폭언과 폭력, 성폭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심리적인 항거 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다.” “이런 판결문을 받아 들 때 피해자 대리인으로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피해자가 자기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어린 피해자와 헤어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니까요.”(김 변호사)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