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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영하가 신작 장편 ‘작별 인사’(밀리의 서재)를 내놨다. 2013년 ‘살인자의 기억법’을 펴낸 뒤 7년 만이다. 그동안 방송인으로서 ‘숨은’ 진가를 드러냈던 그는 문단 귀환 작품으로 공상과학소설(SF)을 택했다. 20일 서울 중구 한 호텔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그가 한 말을 빌리면 “지금까지 써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도전, 모험”이다. 소설의 배경은 가까운 미래, 통일 한국의 도시 평양이다. 주인공인 ‘소년’ 철이는 자신이 인간인지, 인간을 닮은 로봇 휴머노이드인지 정체성을 고민하는 실존적 위기에 처한다. 이후 펼쳐지는 모험에서 철이는 인간, 클론(복제인간), 단순한 로봇에서부터 인간처럼 먹고 소화하고 배변하는 ‘똥싸개’ 휴머노이드까지 만난다. 고교 시절 영어반 동아리 선생님을 통해 아이작 아시모프의 SF 걸작 ‘파운데이션’을 읽게 됐다는 김영하는 이번 작품에 로봇이 등장하는 SF의 중심 주제들을 거의 망라했다. ‘로봇 3원칙’의 변주, 휴머노이드의 정체성, 클론의 생명윤리, 기억과 인식만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인간, 인간과 로봇의 대결…. 원고지 400장 분량의 경(輕)장편이 다루기에 이런 심오한 이슈들은 약간 버거워 보인다. 완결된 소설이라기보다 향후의 SF 대서사시를 준비하는 한 편의 시놉시스 같은 느낌이 드는 까닭이다. 작가는 “SF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근미래 한 소년의 성장담(成長談)으로 읽어 달라”면서 “독자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한 비유로 이 소설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든 외국인이든 사회에서 타자화되는 이들을 인간으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를 상징한다는 얘기다. ‘작별 인사’는 전자책 구독 서비스 플랫폼인 밀리의 서재에 월 1만5900원의 구독료를 내면 전자책과 종이책으로 볼 수 있다. 몇몇 동네서점에서도 구할 수 있다.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에는 3개월 후에 다른 출판사에서 공급한다. 작가는 “책은 형태가 고정돼 있지 않다.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며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사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고 말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내용이야 이미 갖고 있는 몇 권과 똑같지만 손에 잡히는 느낌이 좋아 자꾸 기분이 좋아져서 틈나면 손에 들고 팔랑팔랑 넘겨보게 된다.” (수필집 ‘장수 고양이의 비밀’ 중에서)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미국의 서점에서 멋진 디자인의 ‘위대한 개츠비’ 양장본을 구한 뒤 털어놓은 고백이다. 최근 몇 년째 출판사와 서점에 부는 리커버 바람의 배경을 하루키의 이 말로 대부분 설명할 수 있다. 이미 출간된 책의 표지를 바꿔서 다시 내는 리커버는 ‘손에 잡히는 느낌이 좋다’를 오감(五感)으로 추구한다. 안지미 알마 대표의 말을 빌리자면 “책을 경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존의 책이 내용의 간접경험에 치중했다면 리커버는 질감, 촉감, 부피감, 향, 종이와 폰트 사이의 여백까지 책의 물성(物性)에 대한 직접경험에 집중한다. 굳이 종이책을 택하는 충성도 높은 독자의 소유욕을 자극한다. 대상은 주로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고전같이 독자가 익히 알고 있는 책이다. 책 내용정보를 더 제공할 필요가 없기에 디자인이 강조된다. 그만큼 디자이너의 부담은 크지만 상대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리커버는 보통 이슈와 시즌에 맞춰 발간한다. 책 출간 100년, 저자 탄생 100주년, 세계문학전집 통권 100권, 봄꽃 특집, 바캉스 에디션 등 다양하다.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이 출판사에 특정 책의 리커버를 제안해 해당 서점에서만 팔기도 한다. 통상 한정판으로 2000부를 찍는다. 자연스럽게 책 판매의 돌파구 역할도 한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큼 예쁘고 감각적인 리커버는 평소 책에 신경을 쓰지 않던 독자들을 창출하는 기능을 한다. 스테디셀러를 많이 보유하고, 출중한 디자인팀이 있는 큰 출판사에 유리해 출판 산업의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1610년대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인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의 부두는 런던에서 온 배들로 가득했다. 이들이 싣고 갈 것은 길이 120cm, 지름 76cm의 담뱃잎 두루마리들. 당시 런던에만 타바코 하우스가 7000개를 넘을 정도로 담배는 대히트 상품이었다. 담뱃잎 두루마리를 최대한 많이 싣기 위해 대부분 흙더미와 자갈돌인 바닥짐은 배 밖으로 내던져졌다. 영국의 흙과 버지니아 담배를 맞바꾼 셈이다. 단지 흙뿐이었을까. 아니, 흙 속의 지렁이가 있었다. 마지막 빙하기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사라졌던 지렁이는 식민개척자들과 함께 북아메리카 생태계 변화의 분수령이었다. 역으로 담배는 구대륙(유럽) 경제와 사회를 뒤흔든 상품이 됐다. 저널리스트인 저자의 ‘1493 콜럼버스가 문을 연 호모제노센 세상’은 ‘콜럼버스적 대전환’이 빚어낸 세계화의 역사다. 1492년 12월 25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발을 디딘 이후 구대륙과 신대륙 간에 미생물 씨앗 가축 그리고 노예(인간)가 서로 옮겨지며 이뤄낸 ‘새로운 세상’의 발생사를 저자는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살펴본다. 새로운 세상의 특징은 균질화, 동질화를 뜻하는 호모제노센(Homogenocene)이라는 말로 압축된다. 이질적이던 구대륙과 신대륙의 생태계가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유럽인들이 알게 모르게 가져간 세균 동물 식물이 만들어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메리카에 유럽의 식생을 이식한 셈이다. 하지만 호모제노센의 세상은 쌍방향이다. 신대륙에서 구대륙으로 건너간 감자와 고구마가 각각 아일랜드와 중국 명나라를 어떻게 변모시켰는지, 아마존강 유역에서 자라던 히비어 브라질리엔시스(고무나무)가 영국으로 밀수돼 140년 뒤 라오스와 중국 국경 인근을 어떻게 황폐화시키는지 책은 꼼꼼하게 설명한다. 또 세계화는 경제적 이득이라는 편익과 생태적, 사회적 혼돈이라는 비용을 동시에 치른다. 감자는 1840년대 대기근으로 아일랜드인들을 무참히 굶겨 죽였지만 17세기 아시아보다 훨씬 낙후됐던 많은 유럽인의 삶의 질을 높였다. 말라리아는 아메리카 원주민 80%를 사라지게 했지만 미국 독립과 노예해방을 앞당겼을 확률이 매우 높다. 책은 400년 전 세계화가 태동할 무렵부터 당시 사회가 맞닥뜨린 첨예한 이슈들은 오늘날과 판박이처럼 닮아 있다고 말한다. 살충제의 발명에 ‘맞서’ 바이러스가 염기서열 하나를 변형시켜 스스로 진화해 인류를 위협했던 것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공포에 시달리는 지금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저자는 조지프 스티글리츠처럼 세계화의 불평등을 소리 높여 외치거나 환경운동가처럼 맹목적으로 생태 보호를 외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계화의 시작이 중국과의 교역이라는 부(富)를 좇던 유럽인의 집착에 가까운 욕심에서 시작됐다는 점을 빼놓지 않는다. 농업 생태학 등 전문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흥미로운 인물들을 앞세워 쉽고 재미있게 풀어가는 저자의 능력은 부러울 정도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재즈를 즐겨 듣지는 않지만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를 빼놓고는 20세기 재즈 역사를 논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러나 괴팍하고 예민했던 마일스 데이비스가 슈퍼보스인 줄은 몰랐다. 슈퍼보스(superboss)는 리더십 전문가이자 미국 다트머스대 턱 경영대학원 교수인 저자가 10년간 다양한 업계의 리더들을 연구해 발견한 공통된 패턴을 지칭하는 말이다. 파이낸셜타임스가 ‘세계 경영학계의 오스카상’이라고 부른 ‘싱커스 50(Thinkers 50)’ 순위에 지난해까지 4회 연속 이름을 올린 그는 슈퍼보스를 이렇게 정의한다. ‘리더가 조직원을 이끌고 위대한 성취를 이뤄내는 사람이라면 슈퍼보스는 거기에 더해 조직원들이 스스로 위대한 리더가 되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찬란한 성과가 자신을 끝으로 소멸되지 않고 세대를 이어 사회에 퍼지도록 인재를 키워내는 리더라는 얘기다. 따라서 슈퍼보스는 조직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인재를 포착해 가르쳐 발전시킨 뒤 배출하면서 거대한 왕조를 형성한다. 슈퍼보스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먼저 최고 지향형의 목표는 승리뿐이다. 부하 직원을 극한까지 몰아붙인다. 때로 이기적이고 무정하며 불쾌하다. 영어 원문에는 ‘영광스러운 개자식(Glorious Bastards)’ 유형으로 돼 있다. 그러나 목표 달성을 위해 최고의 인재를 모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행한다. 굴지의 소프트웨어 업체 오라클 창업자 래리 엘리슨이 대표적이다. 양육형은 직원의 성공에 깊은 관심을 쏟으며 이들을 지도하고 가르치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행동파 리더다. 1980년대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서 슈퍼볼 3회 우승을 거둔 빌 월시 감독이 선두주자다. 그의 휘하에서 NFL 32개 팀 가운데 감독이 26명이나 나왔다. 올해 슈퍼볼 우승팀인 캔자스시티 치프스의 앤디 리드 감독도 그중 한 명이다. 마지막으로 전통파괴형이다. 이들은 자신의 일과 열망, 비전에만 몰두한다. 창의적인 예술가에게 많은 유형이다. 의식적으로 인재를 모으지 않지만 인재들이 그들 주위로 알아서 몰린다. 그 속에서 발굴된 인재들이 성공해 스타가 되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한다. 다른 스타의 출연에 개의치 않는 자신감으로 충만하다. 존 콜트레인, 캐넌볼 애덜리, 빌 에번스, 허비 행콕, 웨인 쇼터, 칙 코리아 같은 준령들을 빚어낸 마일스 데이비스가 슈퍼보스인 것은 당연하다. 저자는 2016년 2월에 펴낸 이 책에서 한 사람을 ‘기술이나 재능에서 자신과 견줄 만한 사람은 누구든 용납하지 못하며 … 자신이 받을 관심을 가로챌 듯한 사람과 같이 일한다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오만불손형 보스라고 혹평한다. 하지만 9개월 뒤 그 사람,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 됐다. ‘최선이 아니라 차선, 최악이 아니라 차악’이라는 선거의 격언 앞에서 슈퍼보스는 발 디딜 곳이 없었던 것일까. 총선을 앞둔 한국 정치가 더 걱정된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저작권 3년 양도’ 수상 조건 논란으로 일부 작가가 수상을 거부한 이상문학상 사태에 대해 문학사상사가 4일 공식 사과하고 문제가 된 조항을 삭제하는 등 개선책을 발표했다.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자 발표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상문학상을 주관하는 문학사상사는 이날 회사 페이스북에 임지현 대표이사 이름으로 공식 입장을 올리고 “제44회 이상문학상 진행 과정에서 일어난 문제와 그와 관련해 벌어진 모든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깊은 책임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어 임 대표는 “김금희 최은영 이기호 윤이형 작가를 비롯해 이번 사태로 상처 입으신 모든 문인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께 큰 실망을 드린 점 역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문학사상사는 논란이 된 우수상 수상 조건은 모두 없애기로 했다. 대상 수상작의 ‘저작권 3년 양도’ 조항은 ‘출판권 1년 설정’으로 바꾸고 ‘(3년간) 작가 개인 작품집에 표제작으로 실을 수 없다’는 내용도 상을 받은 뒤 1년 후부터 해제하는 것으로 바꾼다. 문학사상사 측은 정정한 수상 조건을 소급 적용하겠다고 밝히며 “(그동안) 규정을 지켜주신 수상자분들께는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고 했다. 당초 지난달 6일 이상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려 했지만 우수상 수상자인 김금희 최은영 이기호 작가가 수상을 거부하면서 무기 연기됐다. 이어 지난해 대상 수상자인 윤이영 작가가 이 같은 조건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절필을 선언하고 동료 작가 수십 명이 ‘문학사상사 업무와 청탁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파문이 커졌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저작권 3년 양도’ 조건 논란으로 올해 수상자 발표가 연기된 이상문학상 사태가 문단 전반으로 퍼질 조짐이다. 지난해 대상을 받은 윤이형 작가(44·사진)가 ‘절필’을 선언한 데 이어 동료 작가 수십 명이 이 상을 주관하는 문학사상사의 문예지 원고 청탁을 거부하기로 했다. 지난달 30일 일부 언론에 절필 사실이 보도된 윤 작가는 31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원고지 29장 분량의 글을 올려 “부당함과 불공정함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돼 제가 받은 이상문학상을 돌려드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며 “이런 환경에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 일할 수 없다. 작가를 그만둔다”며 절필을 재확인했다. 윤 작가는 지난해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라는 작품으로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어 “문학사상사는 이상문학상을 자의적으로 운영한 것, 우수상 수상자들의 저작권을 불공정한 방식으로 빼앗은 것 등을 작가들과 독자들에게 사과하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윤 작가에게 공감하는 작가들은 SNS를 통해 문학사상사가 펴내는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 보이콧을 선언하며 문학사상사의 사과와 상 운영방식 개선을 촉구했다. 출판계에 따르면 소설가 권여선 구병모 김이설 박상영 안보윤 정세랑 조해진 함정임 황정은, 시인 권창섭 오은 등 40여 명은 1, 2일 SNS에 ‘#문학사상사_업무―거부’라는 해시태그를 올렸다. 이들 중 일부는 과거 이상문학상 수상자다. 2008년 ‘사랑을 믿다’로 대상을 받은 권여선 작가는 SNS에 “윤 작가의 글을 읽고 반성한다. 관행이란 말 앞에 모든 절차를 안이하게 수용한 제가 부끄럽다”고 적었다. 지난해 우수상 수상자인 조해진 작가도 “정식으로 사과하고 해결 방안을 마련하기 전까지 문학사상의 업무와 청탁에 응하지 않겠다”고 했다. 앞서 이달 초 이상문학상 우수상에 선정된 김금희 최은영 이기호 작가는 ‘수상작의 저작권을 3년간 출판사에 양도하며, 수상작을 개인의 작품집 표제작으로 쓸 수 없다’는 조건에 반발하며 수상을 거부했다. 문학사상사는 수상작 발표를 무기 연기한 상태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남의 잘못을 대신 사죄하는 일은 자신의 잘못을 깨우쳐 사과하는 것보다 쉽다. 그 남이 입 한 번 벙긋하지 않고 옴짝달싹 못 하는 죽은 자라면 더 용이하다.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내각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징용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에 분개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진심으로 사죄하는 것을 보라”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독일 정치인들은 혹시 ‘이 모든 악행을 저지른 히틀러라는 미치광이를 대신해 사죄합니다’라며 추모비에 헌화하고 무릎을 꿇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불경스러운’ 의구심의 근거를 영국 역사학자인 A J P 테일러가 1961년에 쓴 이 책에서 찾는다면 엄청난 비약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의 전쟁’이었다는 당대의 해석을 논박한 이 작품을 읽으면 비약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저자는 주장한다.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계획했고, 오로지 히틀러의 의지가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 이 설명은 뉘우칠 줄 모르는 몇몇 나치주의자를 제외한 나머지 독일인을 만족시켰다. 책임을 전체 독일인에게서 히틀러에게 돌리는 것은 좀 더 간편한 조작이었다. … (그러나) 독일 국민들의 지지와 협조가 없었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공명판(共鳴板)이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사범대를 졸업한 뒤 신문기자 생활을 20년 넘게 하고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노신사가 소설을 쓰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장성원 작가(81)는 최근 출간한 소설집 ‘영원한 약속’(문예바다·사진)에서 김유정과 이효석을 언급하며 그 일단을 밝혔다. “두 분이 모두 자신들이 태어나서 자라서 살아가고 가본 곳을 작품의 무대로 하고, 보고 듣고 겪은 것을 줄거리로 엮고, 두 분의 생각과 사상을 테마로 해 작품을 창작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명언을 체감한 나에게 탐욕이 발동했다.” 늦깎이 작가의 ‘탐욕’은 자유민주주의의 열린사회를 강조한 ‘빗점골 산행’, 외환위기의 고통을 이야기한 ‘백련과 시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충격적으로 다룬 표제작 ‘영원한 약속’ 등 단편소설 6편으로 표출됐다. 모두 작가가 기자로서, 정치인으로서 살면서 보고 들은 소재에 시대 상황을 버무리고 그의 역사의식과 사회비평을 가미한 것들이다. 그의 소설가 데뷔를 추천한 작가 정소성은 “작품 하나하나에 쏟는 (작가의) 정성과 성실성은 높이 사고 싶다”고 밝혔다. 1만2000원.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시장을 끌고 가는 메가트렌드 콘텐츠가 사라진다”(김인호 바다출판사 대표), “흐름이 없는 게 흐름이다”(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 새로운 10년을 맞는 2020년의 출판(문학)계를 규정할 굵직한 트렌드를 출판인들은 호명하기 꺼려했다. 미래를 확신하기 어려워서라기보다 독자의 관심과 기호와 취향이 다양하고 좁아지고 깊어지고 있어서다. 천변만화하는 독자의 마음을 감지하고 그에 맞는 콘텐츠로 따라가는 일이 관건이다. 각개약진, 백가쟁명이다. 그럼에도 입을 모으는 키워드는 ‘나(我)’다. 나의 취향 성장 생존 성찰 경험이 올해 출판계의 화두다.○ ‘나’에 초점, 다양성의 폭발 2018년 출판된 책의 종수(種數)는 전년보다 약 1만 종 늘었다. 독자의 선택 폭이 넓어졌고 그만큼 독자가 공감하는 영역이 세분화됐다. 짧고 무궁무진한 내용을 대량생산하는 유튜브처럼 ‘다양성의 폭발’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 배경에 ‘나’가 있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독자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잘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고 말했다. 밀레니얼 세대를 주축으로 한 20, 30, 40대 독자는 자신(나)의 문화적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이야기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이들은 보편과 범용이 아니라 실용적이고 구체적으로 ‘나’와 직접 연결되는 것을 원하며 그런 답이 제대로 큐레이션 된 책을 원한다.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키며 생존과 성장에 도움 되는 책을 바란다. 이 흐름은 에세이와 교양서(실용서)로 나타난다. 주연선 은행나무 대표는 “최근 강세를 보인 에세이 흐름이 이어져 더 다양하고 많은 에세이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대적으로 세대적으로 위로와 공감이라는 코드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얘기다. 분량과 문장은 짧아진다. 사람에 대한 관심도 달라진다. 김형보 어크로스 대표는 “기존 에세이가 권위자나 성공담 위주였다면 이제는 삶을 대하는 다양한 방식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경험이 중요해진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내가 이런 경험을 했다’는 전문직, 독특한 체험을 한 사람들의 통찰력 담긴 경험이 특히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내가 아는 지식이 진짜 지식일까’라는 궁금증에 대한 답을 요약, 정리해주는 교양서 유행은 지속된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처럼 파편화된 독자의 니즈를 간단한 지식 전달로 채워주는 방식은 실효성이 높다. 50대 이상에게 철학책이 정통 대중교양서였다면 지금은 독자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풀어주고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독자들이 ‘펭수’와 ‘빨간 머리 앤’ 등에서 자신의 욕망을 투사할 대상을 찾았다면 그런 캐릭터 출판은 올해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김학원 대표는 “저자를 따라 책을 읽는 시대는 지났다. 책 속 인물을 시대의 캐릭터로, 나의 캐릭터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나’에게서 벗어나는 흐름은 없을까.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는 “너무 자기애(愛)적인 책은 개인에게는 만족스러울 수 있지만 사회 총합으로 보면 어떨지 모르겠다”고 했다. 장은수 대표는 “일상에 대한 성찰적 지혜를 추구하는 독자는 토마 피케티, 빌 게이츠, 버락 오바마같이 가치를 잃지 않는 저자의 책을 읽고 싶어 한다”고 전망했다.○ 중견 작가의 복귀 혹은 부활 문학은 젊은 여성 작가의 시대가 공고해지리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이상술 문학동네 국내문학1팀 팀장은 “여성소설은 유행이 아니라 확고한 것이 됐다”고 했고, 이근혜 문학과지성 주간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표현했다. 페미니즘, 불평등, 젠더, 소수자같이 그동안 조명받지 못하던 이슈들이 고민과 공감의 대상이 됐고 이에 밀착한 여성 작가들에게 각광이 이어진다는 것. 황혜숙 창비 출판1본부장은 “그 세대가 공감하는 감성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저자에게 열광한다”고 말했다. ‘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 작가가 새 작품집을 내놓는 등 여성 작가들 작품은 이어진다. 황석영 한강 김연수 김중혁 등 중견급 이상 작가들이 내놓을 신작에 대한 기대도 크다. 백다흠 악스트 편집장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선 굵은 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초엽 작가 등의 SF소설에 대한 기대도 높았다. 한계에 부딪힌 듯한 현대사회의 ‘밖’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주고 대안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철학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자문에 응해주신 분(가나다순)김인호 바다출판사 대표,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 김형보 어크로스 대표,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백다흠 악스트 편집장, 서효인 민음사 편집부 차장, 이근혜 문학과지성 주간, 이상술 문학동네 국내문학1팀 팀장,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주연선 은행나무 대표, 황혜숙 창비 출판1본부장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정치인은 대권을 꿈꾼다. 물론 국회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재선이 급하다. 하지만 그것은 상임위원장, 원내대표, 광역단체장, 당 대표 등으로 이어지며 국가 지도자급 반열에 올라서기 위한 긴 사다리의 첫째 칸일 뿐이다. 그러나 경북 경주에서만 5선을 한 김일윤 전 의원은 자서전 ‘에밀레종은 울고 있다’(동아일보사·사진)에서 자칫 ‘지역 정치인’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는 우려에도 개의치 않아 보인다. 오히려 경주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온통 드러낸다. 팔순이 넘은 지금도 경주 에너지 융·복합 타운 유치를 주장하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공약을 지키라고 촉구할 정도다. 경주 내남면 박달마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마흔이 채 되기 전에 고등학교와 대학을 세운 그의 흥미로운 삶이 책 전반부에서 간결하게 펼쳐진다. 자신이 다니던 경주고교 학습지 판매권을 따내고, 대학에 다니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서는 영어학원 강사로 일한다. 모두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만나 담판을 짓는 건곤일척의 승부 끝에 이룬 성과다. 1만5000원.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백인 양부모 가정에서 자란 한국인 입양아 남매, 그러나 피는 섞이지 않은 누나와 동생이 있다. 서른두 살의 누나 헬렌은 양부모와 소식을 끊은 지 5년이 넘었다. 어느 날 스물아홉 살 동생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양아버지의 숙부로부터 듣는다. 헬렌은 동생의 자살 이유를 찾겠다며 ‘유년기 고향’으로 향한다. 하지만 동생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는지를 ‘조사’하면 할수록 과도하게 감정적이고 불안한 자신의 모습만 재확인할 뿐이다. 그가 기억하는 양부모 집에서의 삶은 묘하게 현실에서 뒤틀려 있다. 양부모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 친척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 이웃들이 그를 경계하는 모습에서 독자들은 헬렌의 기억과 사실 사이에 균열이 존재함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그가 기억하는 동생과의 사이에도?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해외로 입양된 작가가 쓴 소설을 읽으면 독해의 딜레마에 빠질 때가 적지 않다. 이야기의 심연에 입양이라는 ‘괴물’이 당연히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은 작가의 본의를 본의 아니게 왜곡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정체성이라는 변수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 양 읽을 수만도 없다. 1981년 한국에서 출생해 미국 중서부 지방의 가정으로 입양된 저자가 한국인 독자를 얼마나 의식하고 이 작품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실제 저자의 입양된 한국인 남동생도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읽기가 편하지만은 않다. 헬렌에 대한 감정이입을 저자가 의도적으로 방해한 듯도 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태생적’으로 상처받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주변과 소통하고 화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느끼게 된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북핵 문제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대변동을 부르는 독립변수가 아님은 기지의 사실이다. 냉전 이후 형성된 한미일 삼각안보체제를 뒤흔들고 있는 것은 중국의 부상(浮上)이다. 1년 넘게 지속되며 세계 경제를 우왕좌왕하게 만든 미중 무역전쟁도 위협인지, 포위인지, 기회인지 규정하기 어려운 중국의 존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손꼽히는 국제정치이론학자인 저자는 중국 변수의 등장으로 변화가 불가피한 한미일 삼각안보체제 속에서 한국이 취할 전략적 선택은 무엇인지 체제, 주체와 구조 문제, 삼각관계라는 분석틀을 활용해 그려냈다. 저자는 전략적 모색을 위해서는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평화’, ‘바꿀 수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바꿔 나가는 용기’, 그리고 ‘양자(이 둘)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 정부는 평화와 용기를 구별하는 지혜를 갖고 있을까.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이야기하기 위해 신산한 기억들을 다 지운 다음에야 고통 때문에 잊혀졌던 기억들을 불러낼 수 있다는 생각, 문학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잊어야 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을 분별하며 다시 성실히 걷겠습니다.” 수상 소감을 말하는 이민희 씨(중편소설)의 목이 살짝 메었다. 이 씨의 당선 소식을 위독했던 그의 부친은 캄캄한 새벽, 병원으로 가는 구급차 안에서 들었다. 16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은 당선자들이 드러낸 가족에 대한 애틋함으로 훈훈했다. 이 씨를 비롯해 서장원(단편소설) 김동균(시) 정인숙(시조) 심순(동화) 조지민(희곡) 이다은(시나리오) 홍성희(문학평론) 이현재 씨(시나리오)가 상패와 부상을 받았다. 홍성희 씨는 “원하는 게 뭔지 말할 줄 몰랐던 제게 엄마는 생각을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셨다”고 말했다. 이다은 씨는 “글 써서 먹고살 일이 순탄치만은 않을 텐데 여전히 잘 부탁해요, 엄마”라며 웃음을 자아냈다. 수상의 의미를 심순 씨는 “동아일보 신춘문예는 제가 상상력을 꺼낼 수 있는 또 다른 출구를 줬다”고 풀이했다. 정인숙 씨는 “말을 지어 글을 써서 집을 지어서는 다듬고 문질러 광을 내야 하는 글쟁이가 된 것 같은 순간”이라고 했다. 조지민 씨는 “말을 삼키는 게 버릇이 돼서 제 글 보여주는 것도 두려웠는데 당선 소식이 글을 써나갈 용기가 돼줬다”고 했다. 작가로서의 앞날을 맞는 태도는 단단했다. 서장원 씨는 “열심히 쓴 소설을 다시 보면 빛이 바랜 경우가 많았는데 앞으로 제 눈에 빛나는 글을 쓰겠다”고 말했다. 김동균 씨는 “신춘문예라는 문을 통과하는 자리에서 문을 허물고 더 넓은 문학의 영토를 함께 오래오래 걷고 싶은 마음”이라고 밝혔다. 이현재 씨는 “행여 환영받지 못하더라도 매 순간 진심으로 남아 있을 수 있기를 바라겠다”고 했다. 이들의 엄숙함이 안쓰러웠던 듯 소설가 구효서 씨는 격려사에서 “마치 우리 앞에 가시밭길만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런 것 없다. 정말 기쁘고 행복한 일만 있다. 마음껏 즐기라”고 응원했다. 작가가 되면 ‘취재여행 핑계 대기 좋다’ ‘옷을 허름하게 입어도 멋져 보인다’ 등을 열거한 구 씨는 “작가 여러분, 특권을 내려놓지 마십시오”라고 힘줘 말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심사위원인 소설가 오정희 씨, 문학평론가 조강석 연세대 교수, 시조시인 이근배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이우걸 씨, 아동문학평론가 원종찬 인하대 교수, 연출가 김철리 씨, 영화감독 이정향 씨, 문학평론가 강지희 씨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어스름 새벽, 인기척에 눈을 비비고 쳐다보면 아버지의 굽은 어깨와 하얀 러닝셔츠 바람 등이 보였다. 단칸방 30촉 백열전구 아래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끊임없이 쓰던 아버지. 공주 시내 서점 두 곳에서 사온 각종 문예잡지와 신간이 바닥서부터 벽을 만들었다. 1980년대, 나태주 시인(75)과 문학평론가인 딸 나민애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41)의 공간이었다. 껌딱지같이 초등학교 교사이자 시인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딸과 그 아버지가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시집을 놓고 만났다. 나 시인이 세상 모든 딸들에게 안부를 묻는 시 106편을 묶은 ‘너의 햇볕에 마음을 말린다’(홍성사)이다. “(딸이 어렸을 때는) 제게 딸은 나민애로 한정됐는데 오래 쓰다 보니 ‘많은 딸’로 변해요. 하나의 특정한 풀꽃, 제비꽃에서 모든 제비꽃으로, 특수한 무엇도 갖고 있지만 무한한 보편도 갖게 되는 것. 제가 졸렬하고 모자란 시인이지만 이건 제 강점이지요.” 시집에는 나 교수뿐만 아니라 혼자 한글을 배워 한국시를 읽어온 25세 알제리 여성 샤히라 등 여러 딸(여성)이 나온다. 샤히라는 몇 년 전 나 시인이 알제리에서 강연할 때 한글로 쓴 시 ‘풀꽃’을 적고, 말린 풀꽃을 붙인 공책을 들고 강연장까지 찾아왔다. 나 교수는 아버지 시의 보편성을 ‘공감의 확산성’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저를 예뻐하니까 세상의 모든 여덟 살, 열 살, 스무 살의 ‘나민애 닮은 애’가 다 예쁜 거예요. 공감이 확산된다는 거죠.” 보편을 추구하는 노시인은 겸손하다. “제 시는 굉장히 허술해요. 그래서 독자가 완성합니다. 무엇으로요? (공감의) 울음으로요. 시 ‘풀꽃’에도 독자들이 ‘아, 나도 그렇다’라고 한 줄을 더 넣어요. 그것이 보편입니다.” 그러나 평론가인 딸이 볼 때 그 허술함은 “시인의 자아비판이 아니라 본인 시의 장점”이다. 어린 시절 나 시인은 집 밖에서 꾸깃꾸깃한 종이쪼가리에 시를 써와서는 어린 딸에게 읽어줬다. “들어봐, 이 단어가 낫겠니?” 그러면서 시를 고쳤다. 나 교수는 ‘아, 저렇게 시를 쓰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아버지처럼 글을 쓰는 선생님이 되겠지 생각하던 나 교수에게 ‘당연히 국문과에 가야 한다’고 한 사람은 아버지다. 다만 시인이 되는 것은 말렸다. “문학세계는 냉정하고 치사해요. 얘가 나보다 시를 더 잘 쓰면 내가 불행할 수 있어요. 얘가 못 쓰면 얘가 불행한 거고요. 나는 얘가 불행해지는 건 원하지 않아요.” 어머니는 월급날이면 책과 술 외상값 갚고 남은 돈으로 쌀과 연탄을 비축하는 가난이 싫었을 테다. 나 교수는 “시인은 뭔가 상처가 많고 아파서 수액(樹液)처럼 나오는 것이어서 이해는 하고 싶지만 경험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버지는 참나무처럼 수액이 많이 나오는 분이에요. 저는 수액을 맛보고 ‘참 달다’고 얘기하는 풍뎅이 정도?”라고 했다. 나 시인은 딸이 1주일에 한 번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시가 깃든 삶’ 코너로 딸의 상태를 확인한다. “딸의 글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 생략된 마음이 있어요. 마음을 떨어뜨리고 가는 거죠. 그 글을 읽고 얘 상태를 딱 알아요.” 그러고는 ‘밥 잘 먹고. 힘내’ 문자메시지를 툭 보낸다. 나 교수는 시 ‘너 가다가’를 가장 와 닿은 시로 꼽았다. 아버지의 오랜 투병 등으로 마음에 병이 든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실린 시였다. ‘너 가다가/힘들거든 뒤를 보거라/조그만 내가/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딸이 빛나기 위해 한없이 작아질 수 있다는 시였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한반도에서 처량한 처지에 놓인 일본 여성과 한국 남성이 사랑에 빠진다면. 여성은 일본군 장교의 부인이고 남성은 독립운동가의 고교생 아들이라면. 국적 나이 신분 관계…, 거의 모든 조건이 당시 사회적, 시대적 통념과 궤를 달리하는 두 연인의 러브스토리를 미수(米壽)의 작가가 풀어냈다. 소설 ‘아름다운 인연’(장충식 지음·윤진·1만8000원·사진)은 자칫 신파 같은 소재가 전부일 뻔한 이야기를 현실감 있는 당대 배경 묘사에 잘 버무려냈다. 귀국 전까지 처참한 수용소에서 사는 일본인들의 생활, 평안북도를 비롯한 이북 지역에서 월남하는 이들의 고초, 해방정국 좌우 대립의 혼란 속에 몰락해가는 독립운동가 가문, 서북청년단과 남로당 간의 테러 공방, 일본으로의 밀항 과정이 실감 나게 전개된다. 평안도 말 대사가 일품이다. 단국대 총장과 남북 체육회담 수석대표,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내고 현재 단국대 이사장인 저자는 소설적 완성도보다는 날것의 메시지, ‘용서’를 전하는 데 좀 더 주력한다. 뛰어난 각색과 원숙한 감독을 만난다면 꽤 괜찮은 영화나 시리즈 드라마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서두에서 “모든 인간은 본성상 알기를 원한다”고 했다. 앎에 대한 욕구가 본성이라면 이 책을 쓴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는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왜 유럽에서 근대과학이 탄생했는지를 10년 넘게 파헤친 그는 2005년(국내 출간 기준) ‘과학의 탄생: 자력과 중력의 발견, 그 위대한 힘의 역사’를 펴냈다. 물체를 밀어내고 끌어당기는 보이지 않는 힘의 발견이 과학을 만들어냈음을 풀어냈다. 2010년에는 16세기가 유럽의 르네상스와 17세기 과학혁명이라는 두 창조적인 시대의 골짜기는 아니었다는 ‘16세기 문화혁명’을 내놨다. 직인 상인 뱃사람 군인 등이 폐쇄적이던 현장 지식을 라틴어가 아닌 지역의 말(속어)로 기록하고 인쇄 출판해 지식세계의 지각변동을 일으켜 과학혁명을 예비했다는 도발적인 해석이었다. 마지막 3부인 이번 책은 16세기 유럽인의 세계관이 바뀌는 계기를 제공한 천문학과 지리학의 혁명적 전환을 담았다. 지구 중심의 세계상(천동설)에서 태양 중심의 세계상(지동설)으로 바뀌는 것만이 아니다. 고대 ‘달 아래 세계’였던 지구를 ‘달 위의 세계’인 행성 대열에 포함시키면서 두 세계가 서로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오래된 전제를 허물어뜨리는 과정이다. 3부의 첫째 권인 이 책에서는 15세기 후반 독일의 천문학자 게오르크 포이어바흐(1423∼1461)와 그의 제자 요하네스 레기오몬타누스(1436∼1476)의 저작과 행적을 추적한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받아들여 개혁하고 극복하는 길을 닦았다. 중세 후반 아라비아 학자들이 재발견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수학적 천문학은 천동설이 바탕이지만 관측과 계산을 기반으로 천체의 운동을 예측했다. 관찰이나 측정과는 상관없이 말과 논증의 엄밀함으로 옳고 그름이 판단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우주론과 달랐다. 저자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실용과 현장을 소환해 논지를 꿰뚫는다. 포이어바흐 등은 수학에 정통하면서 스스로 관측 장치를 제작, 개량, 실행한 기능자였다. 포이어바흐는 “저희는 오로지 실천을 통해 한층 더 현명해진다”고 했다. 당시 대학의 학자들도 수학을 이용해 천체운동을 예측했지만 ‘노동의 장을 서재에서 작업장으로 옮기는 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역산(曆算)과 점성술 같은 일상생활 전반의 실용적 쓰임새를 위해 예측과 관측 결과가 일치하는지 질문하며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술과 이론이 올바른지 검증했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처럼 고대인의 지식에 함몰되지 않고 ‘거인의 어깨’ 위에서 그것을 뛰어넘을 길을 모색했다. 천문 관측의 양은 방대해졌고 질은 정밀해졌다. 레기오몬타누스 사후 그를 돕던 베른하르트 발터는 1475년부터 죽기 직전까지 약 30년간 천체 관측을 빼놓지 않았다. 이 ‘새로운 천문학자들’이 중부 유럽의 자유교역 지역으로 상인과 기계기술자, 인쇄업자가 밀집한 뉘른베르크를 주무대로 활동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고대 문헌을 정확하게 복원하는 인문주의 방법, 수학을 중시하는 상인의 에토스, 장치를 이용해 관측하는 직인의 기량을 통합해 천문학의 새로운 양식을 제시했다. 그렇게 코페르니쿠스 브라헤 갈릴레오 케플러로 이어지는 길을 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을 수학적으로 소개한 초반 약 50쪽은 일반 독자가 소화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수식(數式)의 계곡을 지나면 Ⅱ, Ⅲ권이 기다려질 것이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단군 이래 소설가가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시대 아닌가.” 최근 만난 40대 중반의 작가가 말했다. 소설을 1만 부 이상 팔기 어려운 때에 뜬금없는 소리 같다. 하지만 이 작가가 칭한 ‘소설가’가 모바일 플랫폼에 기반한 웹소설 작가를 포함한다면 얘기는 다르다. 이미 한 해 수입이 10억 원을 넘는 작가가 10명 넘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18년 국내 웹소설 시장 규모는 약 4300억 원. 2013년 약 100억 원에서 5년 만에 40배 이상 성장했다. 7일 카카오페이지의 ‘밀차’, 네이버웹소설의 ‘강하다’ ‘달콤J’ 작가를 e메일로 인터뷰했다. 3인 모두 필명을 쓰는 30대 여성으로 최근 전업 작가가 됐다. 주요 장르는 로맨스. 수 만에서 수십 만의 누적 유료 독자를 갖고 있다. 이들에게 웹소설 작가란 무엇인지 물었다. ―필명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강하다(강)=달콤하고 부드러운 로맨스라는 장르와 다소 세게 느껴질 수 있는 필명의 언밸런스함이 마음에 듭니다. 달콤J(달)=회사 생활을 하며 글을 쓸 때 웹소설을 보는 동료가 혹시라도 알아보지 않을까 하는 민망함에 썼어요. 달달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오글거리는 포부도 있었고요. 밀차(밀)=손수레를 가리키는 밀차인데요, 첫 연재 시작할 때 쓰던 닉네임이에요. ―웹소설을 쓰게 된 계기라면…. 달=어린 시절부터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지인의 소개로 사이트를 알게 됐어요.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퇴근하면 집에서 글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강=이야기 짓는 걸 좋아해서 도전을 많이 했어요.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이 내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웹소설을 알게 됐고요. 밀=카카오페이지에서 웹소설을 접하고 무작정 연재를 시작했어요. ―하이틴로맨스나 할리퀸로맨스, 귀여니를 아시나요. 밀=(2000년대 초반 인터넷 소설 붐을 이끈) 귀여니 작가님의 후세대 작가라고 생각해요. 로맨스 소설에 비해 웹소설은 호흡이 더 빠르고 트렌드에 민감하죠. 강=하이틴로맨스를 보고 자랐어요. 사랑에 대한 이상향을 보여준다는 목적은 같지요. 로맨스물이 한 번에 풍성하게 차려놓는 일품요리라면 웹소설은 장시간 천천히 즐기는 코스요리예요. 달=로맨스물이 특정 장르를 기반으로 특정 연령과 성별을 겨냥했다면 웹소설은 연령과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선택해 볼 수 있지요. ―소재나 아이템은 어떻게 구하나요. 강=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캐릭터를 잡아서 그에 맞는 소재나 아이템을 부여합니다. 달=신문 기사나 인터넷 뉴스 등에서 사회적 이슈나 흥미로웠던 이야기를 통해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밀=로맨틱 코미디부터 공포 스릴러까지 여러 장르를 다양하게 보면서 열심히 줍고 있어요. ―작업은 언제 하나요. 밀=늦은 저녁부터 자기 전까지, 아침부터 마감 전까지. 여유가 있으면 스마트폰 앱으로 조각글을 쓴 다음에 다듬어 완성해요. 강=여가활동과 취미에 많은 시간을 내는데 이동할 때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 노트북을 휴대해서 틈틈이 작업하죠. 달=직장생활처럼 점심시간, 쉬는 시간을 정해놓고 일해요. 스스로 조절하지 않으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더라고요. ―웹소설은 ‘싼 소설’이라는 인식이 있잖아요. 밀=싸게 볼 수 있으니 접근성이 높아 많은 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요. 웹소설의 기능 자체를 폄하하지는 않았으면 해요. 강=웹소설은 지금도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죠. 시작에 비하면 많은 발전이 있었어요. 달=장르소설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져서 인식이나 인지도도 점점 더 대중화할 거라고 봐요. ―웹소설의 존재 이유는 뭘까요. 강=지하철을 기다리는 시간, 출근길의 지루함, 친구를 기다리는 몇 분간을 충족시켜 줄 수 있어야죠. 밀=현실의 근심에서 잠시 벗어나 즐길 수 있는 휴식을 선사하는 것. 제 목표이기도 해요. 달=드라마 영화 웹툰 같은 2차 콘텐츠 시장 확대에 역할이 있을 거라고 봐요. ―본격문학과 비교되나요. 밀=본격문학과 웹소설이 같은 위상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봐요. 다큐멘터리와 예능의 위상을 서로 비교하지 않듯이 말이죠. 달·강=종이책 시장과는 달리 작가에게나 독자에게나 진입장벽이 낮아요. 작가도, 독자도 될 수 있다는 장점이 확연히 다르죠. ―목표가 있다면요. 달=50대 아내가 암 수술을 받았다는 남편분에게서 e메일을 받았어요. 제 소설을 아내에게 읽어주면서 가족이 많은 힘을 얻으셨다고요. 한 사람이라도 공감하고 가슴이 따뜻해질 수 있는 글을 쓰자고 다짐했어요. 강=15년을 버티면서 매년 새 작품을 내는 것. 잘하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게 문제거든요. 밀=올해를 무사히 완결하고 새 작품을 내고 싶어요. ―웹소설 쓰는 팁을 주신다면…. 강=연습작을 반드시 완결해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완결하는 경험이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밀=시작보다 이어 나가기가 어렵고 완결은 더욱 어렵죠. 완결까지 이어 나가는 게 중요해요. 달=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꾸준하고 성실하게 도전하시길 바랍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제44회 이상문학상 수상자 공식 발표가 전격 취소됐다. 이 상을 주관하는 문학사상사는 6일 낮 12시 예정됐던 대상 및 우수상 수상자 발표를 무기 연기한다고 이날 오전 밝혔다. 우수상 통보를 받은 작가 5명 중 3명이 출판사 측의 ‘수상작 저작권 3년 양도’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어 수상을 거부하겠다고 밝힌 것이 연기 사유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4일 소설 ‘경애의 마음’ 등을 쓴 김금희 작가(41)는 자신의 트위터에 “저작권을 3년간 양도한다는 계약서 내용을 확인하고는 수상집 게재를 못 하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쇼코의 미소’ 등을 쓴 최은영 작가(36)는 같은 이유로 3일 e메일을 문학사상사에 보내 상을 받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기호 작가(48)도 6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저작권 양도 이야기를 하기에 가볍게 거절했다”는 글을 올렸다. 문학사상사 관계자는 “저작권 3년 양도는 계약서상의 관례적인 언어일 뿐으로 수상집과 작가 단편집 출간 시기가 겹치지만 않으면 양해해왔다”며 “불합리하다고 작가들이 느끼는 점을 향후 개선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6일 예정됐던 제44회 이상문학상 수상자 공식 발표가 취소됐다. 이 상을 주관하는 문학사상사 측은 대상과 우수상 작품들 발표를 위한 기자간담회가 열리기 약 2시간 전인 이날 오전 언론에 ‘발표 연기’를 알렸다. 국내 대표적인 문학상인 이상문학상이 발표를 미룬 것은 40여 년 역사상 처음이다. 우수상 수상자로 통보받은 소설가 5명 가운데 김금희 최은영 이기호 작가가 상을 받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문학사상사가 발표를 연기한 것이다. 문학사상사는 1977년부터 매년 1월 초 대상 1편과 우수상 대여섯 편을 선정한 뒤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펴낸다. 그런데 우수상 수상자의 과반이 상을 받지 않겠다고 한 셈이다. 정상적으로 기자간담회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사달은 ‘수상작 저작권을 3년간 출판사에 양도하고, 작가가 개인 단편집을 낼 때 수상작을 표제작(책 제목이 되는 작품)으로 쓸 수 없다’는 취지의 계약 조항에서 났다. 최 작가는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3일 출판사 측이 이 같은 계약 내용을 알려왔기에 e메일로 ‘그럴 수는 없다’고 알렸다”고 밝혔다. 출판계에서는 ‘작가의 저작권 3년 양도’는 말이 되지 않는 조항이라는 지적이 많다. 문학사상사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작가를 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구시대적인 불평등 계약”이라고 꼬집었다. 지난해 우수상 수상 작가 일부가 이 조항에 의문을 제기했을 때 “조항에 구애받지 마시라”는 취지로 답했다는 문학사상사 측은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작권에 대한 작가와 사회의 인식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했다면 문제의 조항을 버젓이 계약에 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20∼30년 전 독자가 어떤 소설이 좋은지, 읽을 만한 작품은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을 때 이상문학상은 하나의 잣대가 돼줬다. 작품집은 매해 베스트셀러가 됐기에 작가로서도 독자를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됐다. 그래서 ‘저작권 3년 양도’를 수상 조건으로 받아들인 것이 관행처럼 굳어지기도 했을 터다. 출판사와 작가가 “우리 사이에 계약서는 무슨…” 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2010년대 초반 등단한 작가가 출판계약을 맺었을 때 계약서는 단 한 장이었다. 하지만 이 작가가 최근 서명한 계약서는 보통 10장 안팎이다. 종이책뿐만 아니라 e북, 오디오북, 웹 연재, 영화, 드라마 등 2차 저작권 내용이 가득하다. 이런 다양한 권리를 대리할 에이전시를 두는 작가도 늘어만 간다. 한 출판사 대표는 “젊은 작가들의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더 강화되면서 그만큼 출판사도 고민하는 지금이 과도기 같다”고 말했다. 이상문학상 ‘사태’는 그저 돈 문제만은 아니다. 작가의 권익 보호가 한 차원 더 진화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작은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 진화는 작가에 대한 존중이라는 기본에서 시작할 것이다. 민동용 문화부 차장 mindy@donga.com}
그런 허름한 동네다. ‘어두운 시간’이 밤뿐 아니라 낮에도 질주하는 거리. 아이들은 ‘총성 후 이어질/총알 박히는 소리가/우리에게 닿지 않기를’ 빌면서 땅바닥에 코를 박는다. 총과 갱과 마약이 가족처럼 이웃처럼 부대끼는 그곳에서 15세 주인공의 형이 총에 맞아 죽는다. 주인공은 형의 서랍을 비틀어 열고 총을 꺼내든다. 이곳의 룰은 ‘울지 말고, 밀고하지 말고, 복수하는 것’이다. 미국 영화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이나 TV 범죄드라마 ‘와이어’에 나올 법한 흑인 슬럼가의 흔한 이야기 같지만 거기서 궤도를 튼다. 소설의 공간은 주인공이 사는 게토 같은 아파트 7층에서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이 ‘거지 같은 철제 상자’ 속에서 난생 처음 총을 쥔 소년이 층을 내려가며 겪는 60초가 소설의 시간이다. 소년은 복수라는 룰을 지킬까. 얼빠진 고교생이나 반유대주의 백인이 총기를 난사해 무고한 생명을 앗아갈 때 미국 사회는 ‘총기 규제’ 찬반 논쟁이 되풀이된다. 하지만 엄마가 10대 아들에게 “제발 감옥에 가지 말라고/제발 죽지 말라고” 호소하는 흑인 동네의 총기 사건은 일상처럼 받아들인다. 소설은 그런 동네의 청소년 눈높이에 맞춘다. 암울한 배경과 총이 등장함에도 어린이를 위한 작품에 주는 ‘뉴베리 아너’ 상을 받은 까닭이다. 모두 306쪽의 소설은 300편 가까운 운문으로 이뤄져 있다. 엄밀히 말해 독립된 시는 아니지만 리듬감이 살아 있다. 번역자의 공이다. 유명 영화번역가이도 한 번역자는 “읽을수록 어딘가 영화적이었다”고 말했다. 읽을수록 ‘쇼미더머니’도 떠오른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