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범여권 ‘4+1 협의체’가 합의해 국회 본회의에 상정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법안이 오늘 표결 처리될 예정이다. 이 법안은 공수처의 중립성 및 독립성 보장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여당은 표결을 강행하려 하고 있다. 이 법안과 별개로 바른미래당 권은희 의원은 수정안을 28일 발의했다. 이 수정안은 ‘4+1’ 안의 독소조항으로 지적된 ‘고위공직자 우선 수사권’ ‘강제 이첩권’ 등을 삭제했다. 공수처 검사의 경력도 5년 이상에서 10년 이상으로 높이고 전문성 요건을 강화했다. ‘4+1’ 안은 검경이 고위공직자 범죄를 인지한 즉시 공수처에 통보해야 하고 공수처가 요청할 경우 무조건 이첩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수정안은 공수처가 검경에 사건의 이첩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되 이첩 요청이 강제성을 띠지 않도록 해 검경이 독자적으로 인지한 수사는 계속할 수도 있게 했다. 고위공직자 범죄에 대한 수사 총량은 늘어나고 상호 견제가 가능해 공수처 설립의 본래 취지에 더 가깝다. ‘4+1’ 안은 공수처장 추천위원회 7명을 법무부 장관, 법원행정처장,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추천에 국회 추천 4명을 더해 구성하지만 수정안은 7명 모두 국회 추천으로 구성해 대통령의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줄였다. 또 ‘4+1’ 안은 판검사, 경무관 이상 경찰관의 경우 공수처가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갖도록 한 반면 수정안은 공수처에 수사권, 검찰에 기소권을 부여하되 검찰이 불기소 처분할 경우 국민으로 구성된 ‘기소심의위원회’에서 불기소 처분의 적절성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4+1’ 안은 패스트트랙에 올라간 원안보다 더 여권에 의해 좌우되는 방식으로 개악됐다. ‘4+1 협의체’ 정당에 속하면서도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의원들까지 나올 정도다. 무기명 투표에 부치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예측도 나온다. 권 의원 수정안에는 몇몇 자유한국당 의원도 찬성하고 나섰다. 한국당을 포함하는 여야 합의의 여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무소불위의 검찰을 개혁해야 한다. 그러나 검찰개혁을 빙자해 공수처를 또 다른 무소불위의 검찰로 만드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된다. 공수처가 꼭 필요하다면 독소를 줄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
청두(成都)와 시안(西安)은 각각 중국 내륙에 위치한 쓰촨성과 산시성의 성도(省都)로 해안 쪽에 비해 낙후된 내륙 개발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다. 2017년 청두와 시안 사이에 고속철도 전 구간이 개통된 후 소요시간이 3시간대로 줄었다. 고우영의 만화 십팔사략(十八史略)에 시안∼청두 기차가 17시간 걸린다고 나온다. 그가 중국을 답사한 시기가 한중 수교 직후다. 약 14시간의 단축에 중국의 고속 발전이 함축돼 있다. ▷청두에서 한중일 정상회의가 24일 열린다. 3국 정상회의는 2008년 제도화된 이후 8번째다. 그동안 정상회의가 열린 곳을 보면 3국의 수도 이외에서는 일본 후쿠오카, 한국 제주에 이어 이번에 청두다. 청두는 시진핑 주석이 추진하는 육상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중심기지로 중국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도시다. 중국 각지와 동남아에서 실려온 짐을 모은 대륙 간 기차가 여기서 출발해 시안을 거쳐 12일 만에 유럽에 도착한다. 올해 1500편 정도가 운행했다고 하니 하루 4대꼴이다.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청두가 있는 지방은 촉(蜀)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시인 이백은 촉도난(蜀道難)이란 시에서 “촉 가는 길의 험난함, 하늘 오르기보다 힘들다”고 했다. 절벽으로 난 아슬아슬한 잔도(棧道)를 타고 조조의 추격을 피한 유비가 청두에 이르러 촉한(蜀漢)을 세웠으니 이것이 삼국지 위 오 촉 중 촉이다. 한국인이나 일본인은 청두에서 유비와 제갈량을 모신 사당 무후사(武侯祠)를 방문하길 좋아한다. ▷청두에서는 촉이 한화(漢化)되기 전 고대 촉의 유적을 꼭 볼 필요가 있다. 기괴한 모습의 청동 가면이나 동상은 고대 이집트나 잉카 유적을 연상시킨다. 동아시아에 이런 문화가 있었다니…, 청두는 황허문화권이 아니었던 것이다. 청두는 중국이 정보기술(IT) 산업을 집중 육성하는 도시다. 1980년대 싼싱두이(三星堆)에서 발견된 고대 촉 유적과 IT가 결합해 청두는 세계의 SF 작가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현장법사가 시안에 가기 전 수련했다는 대자사(大慈寺)란 절이 청두에 있다. 절 주변에는 온갖 럭셔리 브랜드가 모여 있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하촌(寺下村)이 형성돼 있다. 콴자이샹쯔(寬窄巷子)는 청나라 말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골목으로 외국인이나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먹고 마시길 즐긴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만들어 내는 의외의 조합이라고나 할까. 한일 정상도 따로 만난다. 정상적으로는 조정하기 힘든 이해관계를 돌파하는 상상력을 발휘해 봤으면 한다. ― 청두에서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일본 아사히신문은 일본인 눈에는 애국적이지 않아 보일 때가 간혹 있다. 지난달 한국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를 연기하자 사설에서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이라고 강조하며 이제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누가 봐도 보복인 것을 보복이라 말하지 않는 다른 일본 언론들을 보면 보복이라 말하는 것도 쉽지 않은 듯하다. 아사히신문의 그 사설은 한국 언론에 널리 보도됐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서 애국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한국에서는 오히려 애국주의를 강화하는 데에 이용된다는 점이다. 아사히신문은 같은 사설에서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도 경솔했다고 쓰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일본의 주요 언론도 우리 입장에 동조한다’가 되고 만다. 결국 잘못된 기대로 갈등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든다.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논증하는 데 앞장섰으나 2012년 대법원 소부(小部)의 징용 배상 판결에는 비판적인 서울대 국제법 교수가 있다. 지난해 같은 내용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내려진 후 그에게 연락을 취했다. 마침 그가 독일에 가 있어서 이메일로 의견을 듣고 싶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날 저녁 그가 서울대 홍보실을 통해 내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밤늦게 국제전화를 걸어와서는 자기 이름이 거론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유권적 결정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그 판결이 성역인 것은 아니다. 판결을 비판하기만 하면 토착왜구라는 말로 낙인찍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일본이 판결에 따른 배상을 거부하는데도 정부가 왜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에 나서지 못하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더 큰 문제는 판결 후 정부의 대응이었다. 사법부 판결이므로 존중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며 손을 놓았다. 그러나 정부는 한일 청구권협정의 당사자다. 일본에서 새로운 배상을 받아내지 못하면 이미 배상받은 정부에 책임이 있다. 그런데도 나 몰라라 하다가 한일 갈등이 전례 없이 커지고 나서야 뒤늦게 봉합에 나섰다. 국회의장이 대타로 나서 추진하는 ‘문희상 안(案)’이라는 것이 일본 기업 돈을 조금 섞어서 우리 기업과 국민이 배상하는 것이다. 이럴 거면 왜 쓸데없이 갈등을 키웠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언론은 대단히 애국적이다. 런민일보 자매지인 환추시보는 사드 배치를 지지하는 한국인들을 향해 김치만 먹어 멍청해졌느냐는 논평 등으로 종종 논란이 되는 신문이다. 중국 언론으로서는 한국의 사드 배치를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국의 대표 음식을 들어 그것만 먹다 멍청해졌느냐는 표현은 필요 이상으로 상대국 국민을 자극하는 것이다. 나는 14일 중국 청두에서 런민일보사가 주최하는 한중일+10개국 미디어포럼에 참석했다. 토론회 사회를 후시진 환추시보 총편집인이 맡았다. 그는 패기 넘치고 언변에 능했지만 파키스탄 등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지원을 받는 주변국들로부터 중국에 대한 감사를 끌어내는 한편 한일 언론의 홍콩 사태 보도 태도를 비판하는 등 분위기를 고약하게 이끌어갔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런민일보만 해도 행간을 읽어야 뜻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장황하고 조심스러운 표현을 쓰고 배급망도 우편만 이용한다. 환추시보는 런민일보와 달리 가판대에서 팔리고 그 수익으로 운영된다. 중국인의 애국심을 직접 자극하는 노골적인 표현을 쓰면 더 많이 팔린다고 한다. 요즘 수익을 많이 내서 런민일보사 재정에 크게 기여하는 까닭에 후시진이 런민일보사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라는 말을 런민일보사의 다른 관계자들로부터 들었다. 중국 언론이 상업망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애국심을 이용한다는 인상이다. 다음 주 청두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이 열린다. 한중 한일 중일 정상회담도 열린다. 중일 관계가 급격히 호전된 반면 한중 관계는 답습을 거듭하고 한일 관계는 최악이다. 나라를 부하게 하는 것도 이웃 국가이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도 이웃 국가다. 중국 고대 관자의 말이다. 이웃이니까 교류가 많지만 또 이웃이니까 다툰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교류할 필요도 없고 다툴 이유도 없다. 애국적이어야 하지만 애국주의의 폐쇄회로에 갇혀 이웃과의 관계를 망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중국 청두에서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민주화 이후 수사기관은 선거 후보자나 그 주변인에게 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선거 전에는 수사를 하지 않고 선거 뒤로 미루는 관행을 쌓아 왔다. 지난해 6·13지방선거를 3개월도 채 남겨두지 않았을 때 울산지방경찰청이 김기현 당시 울산시장이 근무하는 시청을 압수수색한 것은 뜻밖이었다. 당시 황운하 울산경찰청장이 받은 제보의 근원지는 백원우 당시 대통령민정비서관으로 드러났다. 백원우는 반부패비서관실을 통해 경찰청에 넘기는 방식으로 제보를 세탁했다. 그러나 거기서 꼬리가 잡혔다. 백원우는 “많은 제보를 넘기기 때문에 김 전 시장 관련 제보가 특별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으나 박형철 반부패비서관에 따르면 백원우가 단건(單件)으로 넘긴 유일한 제보가 김 전 시장 관련 제보였다. 게다가 제보는 공문으로 넘기게 돼 있는데 그 제보만 공문 형식을 취하지 않고 넘겼다. 지난해 김 전 시장 내사 단계에서 백원우 특감반원 2명이 울산을 방문했다. 그중 검찰로 복귀한 수사관이 유력한 증인이었는데 그가 검찰에 출두하기 직전 자살을 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상황이다. 황운하는 수사가 무혐의로 끝났는데도 좌천되기는커녕 오히려 영전했다. 백원우와 황운하 사이에 물밑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이 부분은 의혹일 뿐이다. 하지만 물 위로 드러난 몇몇 사실만으로도 정치공작이라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백원우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간부 출신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향해 ‘사죄해’라고 고함치며 과격한 성정을 표출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 부처별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를 설치하는 기획안을 짠 장본인이다. 이후 각 부처에서 과거 정권의 정책 결정권자만이 아니라 실무자까지 경쟁적으로 문책하는 광란이 벌어졌다.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감찰 무마와 뒤처리도 조국 당시 민정수석이 아니라 백원우 주도로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백원우는 17,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 20대 총선에서 연거푸 떨어지긴 했지만 재선 의원 출신이 차관급 수석비서관 밑에 비서관으로 들어갈 때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이 유재수 감찰을 무마한 정도로 끝이겠느냐는 의문이 든다. 울산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선거 개입 의혹까지 불거지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텔레그램의 유재수 단체대화방에서는 김경수 경남도지사, 윤건영 국정기획상황실장 등 친문(親文) 실세들이 등장한다. 잡담만 나눈 게 아니라 국장급 인사까지 논의한 것으로 나온다. 지금까지 드러난 퍼즐들을 맞춰 보면 백원우는 배후에서 움직이는 숨은 국정 운영 커넥션이 공식 조직과 연결되는 주요 접점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경수는 드루킹 조직에 의한 댓글 여론 조작을 사주한 혐의로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2심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한 번 하고 마는 정치공작은 없다. 정치공작은 한번 맛보면 그 유혹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공작을 정치로 알고 살아온 운동권 정치인 집단은 더 그렇다. 적폐청산 역사전쟁 정치공작, 셋은 긴밀히 연결돼 있다. 적폐청산은 이명박 박근혜 두 보수 정권을 역사에서 지워야 할 정권으로 만들어 보수 정당의 존재 기반을 흔들려는 시도다. 역사전쟁은 대안의 틀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이승만과 박정희가 정착시켜 한국을 성공으로 이끈 자유민주주의와 산업화의 틀을 깔아뭉개고 보는 것이다. 이런 사고를 하는 집단은 정치공작의 유혹에서 벗어나려 하기는커녕 정치공작을 시도해서라도 권력을 잡는 것이 정당하다는 도착(倒錯)에 빠지기 쉽다. 김경수 조국에 이어 이번에는 백원우 차례다. 경찰이 놓친 김경수는 허익범이라는 내유외강(內柔外剛)의 정의로운 특별검사에 의해 법정에 회부됐다. 조국의 경우는 그의 위선적 행태가 널려 있어서 언론이 앞다투어 폭로하고 깨어 있는 국민이 몸으로 사퇴를 얻어냈다. 백원우의 정치공작은 청와대 권력의 한가운데서 일어났다. 결정적 증언을 해줄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검찰 외에는 이 장벽을 뚫고 나갈 주체는 없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명운과 정권의 명운이 동시에 걸려 있다. 윤석열의 실력과 용기는 여기서 판가름 날 것이다. 윤석열이 마지막을 맞든가, 정권이 일찍 레임덕에 들어가든가 할 것으로 본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과거의 제도 법규 관행을 문제 삼기보다 그 제도 법규 관행에서 일한 사람을 문제 삼으니 안 걸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결과 정권에서 일할 수 있는 적재(適材)의 씨를 말리는 인재 풀의 왜소화가 일어납니다. 인재가 없는 게 아닙니다. 대기업에 가면 인재가 차고 넘칩니다. 삼성 하나가 갖고 있는 인재가 대한민국 정부 전체가 갖고 있는 인재보다 많습니다. 정권이 스스로 인재 풀을 줄이고 있을 뿐이죠. ‘현재가 과거와 싸우면 미래가 없어진다’는 잠언이 지금만큼 잘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 겁니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82세 나이에도 정정할뿐더러 논리가 총총해 ‘원로 학자’라는 수식어를 붙이려다 만다. 우국(憂國)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절이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에서 빚어지는 정치의 위기와 이를 극복할 지혜에 대해 물었다.》 ―보수의 위기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어느 나라든 보수의 특징은 위기를 되풀이해서 맞는다는 데 있다. 보수의 원류로 300년 된 영국 보수당도 되풀이해서 위기를 맞았다. 19세기에는 자유당 글래드스턴에게 20여 년간 정권을 뺏겨 물러나 있다가 디즈레일리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와 재집권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처칠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만나 대세를 회복했다. 되풀이해서 위기를 맞으면서도 나아가는 것이 보수다.” ―보수가 위기를 되풀이해서 맞는 이유는…. “보수는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므로 싸워봐야 소용없다. 과거와 싸우면 현재가 죽고 미래가 사라진다. 이것이 영국 보수당의 시관(time-perspective), 즉 시간에 대한 신념이다. 그래서 미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미래는 불확정적이다. 그렇다 보니 누구나 다 지지하는 목표를 갖기 어렵고 조직은 이완되기 쉽다.” 그는 보수의 또 다른 특징으로 정직과 성실을 강조했다. “미국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정직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여겨 ‘정직이 최고의 정책(Honesty is the best policy)’이라고 말했다. 성실이란 무슨 일이든 온 마음을 기울여 하는 것이다. 중용의 25장이 내세우는 가치가 불성무물(不誠無物)이다.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수는 ‘무(無)정직’하고 ‘무(無)성실’한 포퓰리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도 어려움을 초래하는 원인 중 하나다.” “과거와 싸우면 미래 사라진다”―본래 진보가 미래지향적이지 않은가. “진정한 진보도 보수처럼 미래지향적이다. 다만 우리나라 진보는 자기들끼리 말로만 진보이지 실은 과거지향적이다. 그래서 수구 좌파라 부르는 것이 맞다. 과거지향의 대표적인 것이 적폐청산이다. 과거를 지향하면 미래를 지향할 때에 비해 공격할 목표가 확실하고 결속력이 강해진다. 이런 진보와 대결해야 하는 것이 보수의 어려움이다.” ―적폐청산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적폐란 과거에 쌓인 폐단이다. 잘못된 제도 법규 관행이다. 그것을 바꾸는 게 뭐가 잘못이겠나. 그러나 실제로는 그 제도 법규 관행에서 일했던 사람을 몰아내는 데 주력한다. 이것을 사회학에서 목적전치(目的顚置)라고 부른다. 목적과 수단이 뒤집혀 자리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잘못된 제도 법규 관행의 개혁이 원래 목적인데 그 목적이 되는 제도 법규 관행은 그대로 둔 채 그 목적을 수단으로 해서 거기서 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을 몰아내는 것이다.” ―개혁은 어떠해야 하는가.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개혁도 점진적일 수밖에 없다. 점진적 개혁은 서서히 가되 확실히 가는 것이다. 한국인은 이런 개혁관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개혁은 밑뿌리부터 바꾸는 것이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는 경험주의자다. 경험해 보니까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듯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극한의 위기에서 변화가 온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에 대한 우려가 많다.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연목구어(緣木求魚)란 표현을 쓰고 싶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같은 경제정책도 그렇고 탈(脫)원전 같은 기술의 문제도 그렇고 사회 통합도 그렇다. 맹자 양혜왕(梁惠王) 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개인이 연목구어를 하면 저만 손해 보고 말지만 나라가 연목구어를 하면 후필재앙(後必災殃), 후일에 반드시 재앙을 맞게 돼 있다.”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보는가. “궁즉변(窮則變) 또는 궁즉통(窮則通)이란 말이 있다. 국민은 대개 참고 기다리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무섭게 반응한다. 노무현 정권이 끝날 때 즈음 이명박 대통령이 약 500만 표차로 이겼다. 역대 그렇게 큰 표차가 없었다. 10월 3일 광화문 집회도 이러다 죽겠다 싶어 뛰어나온 것이다. 견딜 수 없게 되는 시점이 오고 궁즉변 궁즉통이 일어날 것이다.” ―보수 통합은 가능할까. “위기의 극한까지 가서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내년 총선 직전에 가서 ‘총선에서 지면 연목구어식 정책이 연장돼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달라질 것이다. 내년 4월이 총선이니까 내년 2월 정도에는 변화가 있지 않을까. 정치에선 모든 것이 한때다. 더불어민주당이 득세하고 문재인 정부의 연목구어식 정책이 횡행하는 것도 한때다. 차일시피일시(此一時彼一時),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너무 초조해하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많은 국민이 이미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젊은이들이 보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이 보수를 좋아하면 그게 이상한 거다. 젊은이들은 경험적이지 않고 이상적이니까 진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현 상태대로의 좌파 정당을 지지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실은 진보적이지 않으니까.” ―2030세대가 더 많이 국회에 진출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 20대가 굉장했다. 그때 스무 살은 서른 살이 되면 세상이 끝장나는 줄 알고 서른 살은 마흔 살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그만큼 세대가 짧았다. 지금은 100세 시대다. 20대는 시대의 주인의식을 갖기 어려울 정도로 어린 나이가 되고 말았다. 2030세대의 국회 진출보다 중요한 것은 2030세대를 위한 정책 마련이다.” ―국회에서 정책 대결이 보이지 않는다. “2030세대 정책만 해도 2030세대와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현 정부의 것이 뭐가 틀렸다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번 한국당이 민부론(民富論)이란 걸 내놓았는데 아는 사람이 없다. 보수정당이 싸우는 방법은 정책 대결밖에 없다.” ―한일 관계, 한미 관계 등 주요한 국제 관계도 어려워지고 있다. “약속은 준수돼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것이 17세기 이래 국제 관례다. 국가 간 약속이 국내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하더라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다. 세계로 나가야 먹고사는 나라가 그 원칙을 지키지 못해 외교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 ―우리나라가 취할 외교 전략은…. “구한말, 약 130년 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이 주장한 바와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에 주재하던 중국 외교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1880년 김홍집이 일본에 수신사로 갔다가 가져왔다. 몇 쪽 되지도 않는다. 결일연미(結日連美)가 조선의 살길임을 강조한 내용에 위정척사파가 들고일어나고 조선은 쇠망의 길로 들어섰다. 오늘날도 우리 곁에 중국이 민주화하지 않고 패권국가로 남아 있는 한 결일연미 할 수밖에 없다.” 송 교수는 결일연미의 정신을 확대해 해외지향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정희 때도 구한말의 선택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1960년대 초 서울대 교수들을 포함해 거의 모든 경제학자들이 수입 대체 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을 때 박 대통령이 수출입국을 외치고 나왔다. 그때 경제학자들이 ‘군바리들이 판타지 속에 살고 있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1965년까지 1억 달러 수출 목표를 한 해 앞당겨 달성함으로써 경제학자들의 탁상머리 주장을 우습게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바깥으로 향해야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데 현 정부 들어 해외지향성이 위축되는 느낌이 든다.” “결국 다 노심초사 속 평화”―문재인 정부는 평화만은 지켰다고 자부한다. “휴전 이후에 지금과 같은 평화는 늘 지속돼 왔다. 다만 그 평화가 ‘깨지지 않을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가운데의 평화일 뿐이다. 지금의 평화라고 특별한 게 있나. 특별한 게 있다면 오히려 핵을 가진 북한 앞에서 더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북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체제 안전이다. 체제 안전을 위해 핵을 개발했는데 핵을 포기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핵 속의 평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전술핵이든 전략핵이든 핵 공유든 핵을 핵으로 막는 것만이 우리에게 가능한 평화다.” 근황을 물었더니 다음 달 2일 유학자 류성룡을 연구하는 서애학회를 발족할 준비에 바쁘다고 한다. 퇴계 율곡 등 유학자의 호를 내건 학회는 대개 사학자들이 주도하지만 서애학회는 사회학자이면서 ‘위대한 만남 서애 류성룡’이란 책을 쓴 송 교수가 주도한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보기 드문 구국의 리더십을 보여준 서애 정신을 연구하는 학회다. 송 교수는 징비록에 담긴 ‘서애 정신’을 강조하면서 말을 맺었다. “징비(懲毖)의 주체는 나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징(懲)은 내 책임을 깨닫고 뉘우쳐 나를 철저히 징계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 또 다른 실패나 파탄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고 준비해서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 비(毖)다. 비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 과거지향이다. 임진왜란은 새 정권이 들어서면 전 정권 사람들을 어김없이 감옥에 보내는 처절한 당파싸움에 매몰돼 미래를 망각함으로써 초래된 비극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인류가 말을 사용한 지는 수십만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살인을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대화의 기법을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일상에 등장한 지 겨우 반세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터넷에서의 대화 기법을 발전시키는 것은 인류에 주어진 새로운 숙제다. ▷온라인이 오프라인과 다른 점은 익명이 디폴트(기본) 상태라는 것이다. 오프라인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익명 속에 숨어있다 보면 악의적인 말을 하기가 더 쉬워진다. 인터넷 시대에서도 특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등장하면서 악플은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SNS 중 하나인 트위터가 악플에 대처할 수 있는 ‘댓글 숨기기(hide reply)’ 기능을 추가해 22일부터 적용했다. ▷개인이 악플에 대처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스스로 댓글을 보지 않는 것이다. 쉽다고 써놓고 보니 어폐가 있다. 사실 댓글을 보고 싶은 호기심을 이기기가 쉽지 않다. 시청자 반응에 민감한 연예인들은 악의적인 댓글에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서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또 댓글을 보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국내 카카오(포털 다음 포함)의 경우 연예인 설리의 자살 이후 연예 뉴스 기사에는 댓글을 차단했다. 댓글은 인터넷에서 체류시간과 접속 횟수를 늘려주는 주요 수단이기 때문에 기업들이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손해를 감수한 카카오의 조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네이버와 비교되면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트위터의 ‘댓글 숨기기’는 댓글 전체를 차단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트윗을 날린 사람이 자신의 트윗에 달린 댓글을 본 뒤 그 댓글이 보기 싫으면 스스로의 결정으로 댓글을 숨기는 기능이다. 댓글을 보는 것 자체를 막거나 댓글을 본 뒤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그래도 악의적이거나 귀찮은 댓글을 다른 사람들까지 보게 되는 상황은 막을 수 있다. 차단에 비하면 부드러운 댓글 관리법이다. ▷국내에서 2007년부터 적용된 인터넷 실명제가 악플의 차단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인터넷 실명제도 범죄적인 악플이 아닌 일상적인 악플을 거르는 데는 한계를 드러냈다. 무엇보다 해외에 기반을 둔 SNS는 실명제가 적용되지 않아 국내에만 적용되는 실명제가 큰 의미가 없다는 비판이 있다. 인터넷에서 실명제가 과연 바람직한지도 논란이 있다. 그러나 SNS의 목적이 소통인 한 SNS만 발전시킬 게 아니라 SNS에서의 원활한 소통에 필요한 대안의 에티켓을 발전시키기 위해 전 세계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조국 사퇴를 이끌어낸 10월 3일 대규모 광화문 집회는 보수 측의 단결과 동시에 보수 측의 분열을 보여줬다. 그날 광화문 집회는 주도권이 자유한국당에 있는지, 보수기독교인집회에 있는지, 우리공화당이나 태극기 부대에 있는지, 아니면 여기에도 저기에도 동질감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분노에 차서 뛰쳐나온 사람들에게 있는지 헷갈릴 정도로 뿔뿔이였다. 보수 정당은 20대 총선 공천 파동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거치면서 봉합하기 어려운 분열을 겪고 있다. 탄핵이 옳았음을 인정하라는 소리도, 탄핵이 틀렸음을 인정하라는 소리도 분열만 부추길 뿐이다. 언젠가는 탄핵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시점이 오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분열을 분열로 인정하는 게 탄핵의 강에 빠지지 않고 그 강을 건너는 방법이다. 보수 측에 부족한 것이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였다. 조국 임명 강행 사태에서 야당의 비판도 언론의 비판도 통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을 때 광화문 집회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줬다. 아스팔트 보수들이 주말마다 광화문에서 열어온 집회가 10월 3일 대규모 집회의 불씨가 된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유승민계는 좋게 보면 블루칩이고 나쁘게 보면 계륵이다. 그러나 블루칩이 아니라 계륵으로 보더라도 유승민계 없이는 광화문 집회가 만들어낸 운동의 동력을 제도적 표심으로 바꾸기 어렵다는 전망에는 차이가 없다. 유 의원은 자기 지역구만이 아니라 전국 어느 지역에서 출마해도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 밖의 유승민계 의원들도 비슷하다. 그럼에도 유승민계는 ‘버리자면 계륵이지만 취하자면 보배’가 되는 확장성을 갖고 있다. 광화문 집회에 와 봤다면 조국 사퇴 여론과 한국당의 지지도가 왜 그렇게 큰 차이가 나냐는 어리석은 질문은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당이 받고 있는 지지도가 본래 그 정도다. 지금은 거버넌스(governance), 즉 지배구조를 바꾸어 빅텐트를 치는 것이 중요하다. 빅텐트라 함은 한국당을 일종의 플랫폼(platform)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같은 플랫폼 정당은 아닐지라도 친박(親朴)이든 비박(非朴)이든 중도파든, 돌아온 비박이든 나가 있는 비박이든 나간 친박이든, 그 위에서 공정하게 경쟁해서 국민의 평가를 받는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헌집 헐고 새집 짓는 것도 마다해서는 안 된다. 빅텐트를 치는 의미의 쇄신을 하려면 가능한 한 빨리 공천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국민경선이든 뭐든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공천의 룰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공정한 공천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정리할 대상이 있다. 과거 새누리당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지역의 의원들이다. 그런 의원들이 능력이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 중에는 당선이 보장된다는 이유로 비례대표 못지않은 전문성을 갖춘 이들이 공천된 경우가 의외로 많다. 다만 그들이 받은 기회가 민주주의 원칙에 비춰 공정하지 않았기에 보수가 분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선수(選數)에 상관없이 물러나는 것이 부당함을 바로잡는 차원에서도 필요하다. 3선 이상 중진 의원 퇴진론은 화끈한 쇄신안 같지만 논리적이지 않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정치적 성향이 고정되지 않은 지역에서 정치적 바람이 이리저리 요동칠 때도 지역구를 지켜낸 중진 의원들이야말로 정당의 주축이다. 그런 의원들더러 물러나라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맞지 않을뿐더러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존재하는 정당의 목적에도 어긋나는 자해적인 조치다. 보수 측은 연대(連帶)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연대에 약하다. 조국 사퇴 광화문 집회는 분열된 보수의 연대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다른 쪽과의 큰 차이를 봐야 자기 쪽의 큰 같음(大同)이 보이고 작은 차이(小異)가 사라진다. 탄핵을 둘러싸고 사분오열된 집단이 국민을 핫바지 취급한 조국 장관 임명 강행 앞에서 한목소리를 냈다. 보수 측으로서는 구동존이(求同存異)의 희귀한 경험이다. 이 경험을 소중히 기억해야 빅텐트를 칠 수 있다. 보수 측이 통합돼 견제력을 가져야 진보 정권의 폭주가 제어되고 나라도 균형을 잡을 수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최근 미국 언론의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대권 구도가 조 바이든 전 부통령 1강(强) 구도에서 바이든,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매사추세츠) 2강 구도로 바뀌는 모습을 보였다. 바이든은 우크라이나 스캔들의 영향을 받아 지지도가 하락하는 추세인 반면 워런은 40대 신성(新星) 베토 오로크 전 하원의원이 경주를 포기하면서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 ▷워런은 2012년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기 전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진보 상법 교수 중 한 명으로 통했다. 대선 공약으로 거대 첨단 기업 분할, 최저임금 2배 인상, 부유세 신설 등 강력한 규제책을 내걸었다. 2016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경선에 나섰다 힐러리 클린턴에게 지고 이번에 다시 경선에 나서는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못지않다. 빌 게이츠는 부유세 부과에 찬성하는 기업가이지만 워런의 부유세는 과도하다고 여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보다 못해 “일부 후보들이 국민 여론과 동떨어진 얘기를 하고 있다”며 “많은 민주당원은 이치에 맞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고 충고했다. ▷공화당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선에 도전해 실패한 대통령은 민주당의 지미 카터와 공화당의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 등 2명뿐인데 경제적 이유도 컸다. 트럼프는 성격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경제 실적을 자랑한다. 하지만 5일 켄터키주 주지사 선거와 16일 루이지애나주 주지사 선거에서 트럼프가 강력한 지지를 보낸 공화당 후보가 진 것은 트럼프에게는 불길한 조짐이다. 켄터키주와 루이지애나주는 모두 전통적인 공화당 강세 지역이다. ▷미국 대선은 내년 11월 3일 치러진다. 각 당은 내년 2월 3일 아이오와주를 시작으로 해서 주별로 코커스나 프라이머리를 통해 전당대회 대의원을 뽑는 순차적인 경선을 치른다. 14개주에서 동시에 코커스나 프라이머리가 실시되는 내년 3월 3일의 ‘슈퍼 화요일’을 지나면 대개 유력 후보의 윤곽이 드러난다. 후보는 8, 9월 각 당 전당대회를 통해 지명된다. ▷트럼프가 탄핵 추진에 영향을 받고 민주당 대선 주자들도 승산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나오자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이 민주당 경선에 출마할 채비를 하고 있다. 2016년 대선에서도 정치적 경력이 없던 트럼프에 대한 반감이 나타나자 블룸버그는 당시 무소속으로 출마를 고려하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블룸버그가 나와 경쟁력을 높인다면 트럼프도 재선에 도전했다가 떨어지는 현직 대통령이 되지 않기 위해 힘겨운 경쟁을 해야 할 판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찾아보니 2014년 ‘8년 만의 수능 한파’란 기사가 있다. 2014년으로부터 8년 전인 2006년에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에 한파가 몰아쳤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2001년 영하로 떨어졌고, 그 전에는 1997년과 1998년 2년 연속 영하로 떨어졌다. 2014년 후로는 2017년에 이어 올해 다시 영하로 떨어졌다. 서울 지역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진 것을 기준으로 하면 1994년 수능이 시작된 이후 올해까지 7번 수능 한파가 찾아온 셈이다. ▷평년 기온과의 차이가 3도 이상 낮은 것을 기준으로 해도 큰 차이는 없다. 이 경우 2010년을 추가해 8번 수능 한파가 찾아왔다고 할 수 있다. 확률적으로 26분의 8, 즉 약 30%다. 실은 평년기온보다 5도 이상 높은 유난히 따뜻한 수능일도 몇 차례나 있었고 예년과 기온이 비슷한 수능일은 더 많았다. 그러나 그런 건 기억에 별로 남지 않는다. 기억이란 수학적이 되지 못해서 소풍날은 비온 것만 오래 기억에 남고 수능일은 한파가 몰아친 것만 오래 기억에 남는다. ▷머피의 법칙이란 말이 있다. 나에게만 재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법칙이다. 슈퍼마켓에 줄을 서면 꼭 다른 줄이 먼저 줄어든다. 실은 재수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느낄 뿐이다. 슈퍼마켓 계산대가 5개 있다고 치면 내 줄이 가장 먼저 줄어들 확률은 5분의 1에 불과한 반면 다른 줄이 먼저 줄어들 확률은 5분의 4다. 수능일에 꼭 한파가 몰아친다고 느끼는 데도 비슷한 착각이 있다. ▷우리나라는 수능이 11월에 치러진다. 11월은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환절기로 날씨의 변화가 큰 시기다. 일본판 수능인 대학입시센터 시험은 1월에 치러진다. 1월은 한겨울이라 추운 게 당연하고 오히려 따뜻하면 뉴스가 되는 시기다. 중국판 수능인 가오카오(高考)는 6월 치러진다. 2002년까지는 7월에 치러졌다. 6, 7월은 베이징을 기준으로 하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다. 같은 환절기라도 시험 보는 사람은 갑자기 더워지는 것보다는 갑자기 추워지는 것에 더 예민할 수밖에 없다. ▷일본만 해도 대학입시센터 시험을 이틀에 걸쳐 치른다. 중국의 가오카오는 사흘 동안 본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는 2주간에 걸쳐 6일간 치른다. 미국의 SAT는 1년에 7차례 볼 수 있다. 우리만 유독 하루에 수능을 끝내버리다 보니 인생에서 수능일 하루의 컨디션이 무척 중요해지고, 날씨에까지도 수험생이나 학부모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상이 수능 한파란 말 속에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 같은 불안은 세르비아의 전 대통령 밀로셰비치 때문일 것이다. 인종 학살을 한 그를 옹호했다나. 페터 한트케가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관객모독으로. 연극을 좋아하지는 않아도 멋모르고 ‘고도를 기다리며’ ‘관객모독’ 같은 연극을 보게 될 수 있으니 조심할 것. 안 보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정경심의 PC 반출은 증거인멸이 아니라 증거보전이다. 유시민의 궤변, 노벨궤변상감이다. 공지영은 관객모독에서 배운 바가 있나 보다. 억지도 대놓고 부리면 문학이 된다. 때로 혁명적 당파성까지 인정받을 수 있다. 그래도 그들은 궤변 늘어놓는 대가로 국민 세금은 받지 않는다. 세금으로 월급 받으면서 궤변을 늘어놓는 청와대도 있다. 자고 일어나면 미사일 발사다. 그것도 신형. 이스칸데르. 초대형 방사포. 북한이 올해 12차례 미사일을 쐈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우리도 북한 못지않게 미사일 발사 시험한다고 했다. 미사일을 몰래 쏠 수도 있나. 나라에서 그렇다고 하니 믿어 보자. 우리 미사일 능력이 북한보다 우수하다고도 했다. 그것까지 믿어 보자. 근데 궁금한 건 그게 아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면 어떻게 막을 건데? 필요한 답은 않고 딴소리를 하고 있다. 의미 없는 말들. 내년 예산안을 짜려면 세수 전망이 있어야 한다.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있어야 내년 전망치가 나오고 그에 맞춰 세수 전망이 나온다. 세수 전망이 나와야 필요한 국채 규모가 나오고 예산안을 짤 수 있다. 이호승 경제수석은 그 수치를 기억하지도 찾지도 못했다. 워낙 현실과 동떨어져 알 가치가 없는 수치를 왜 자꾸 묻느냐는 듯 쏘아보던 눈길. 최소한 숫자로는 앞뒤를 맞춘다는 계산적 합리성마저 사라졌다. 의미 없는 수치들. 조국 사태를 둘러싸고 광화문 집회니 서초동 집회니 나라가 찬탁 반탁 시절로 돌아간 듯할 때도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 분열이 아니라고 했다. 신묘한 능력으로 하나로 모아지는 국민의 뜻을 읽어냈으니 검찰 개혁이다. 분열을 통합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쪽에는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없는 검찰 개혁을 양쪽에 다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헌법보다 높은 문법이다. 대통령이 설혹 헌법을 위반하더라도 문법을 위반할 수는 없다. 지록위마(指鹿爲馬)의 문장들. 억지를 강요하는 문장들. 독재의 문장들. 국정 혼란이 논리적인 언술이나 계산마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한트케의 연극 관객모독은 의미 없는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러분이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은 여기서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본 적이 없는 것은 여기서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들어본 적이 있는 것을 들려주는 것도 아니고 본 적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대사는 이어진다. “여러분은 늘 보았던 것을 여기서 전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늘 들었던 것을 여기서 전혀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연극 보고 싶은가? 그래서 관객모독이다. 그래도 최소한 문법적으로는 말이 되기 때문에 돌아버릴 지경은 아니다. 관객모독이 의미 없는 말들로만 채워졌다면 노벨상을 받을 정도로 유명해지지는 못했다. 모독에도 클라이맥스가 있다. 욕설이다. 돈 내고 연극 보러 와서 막판에 끝이 없을 듯 이어지는 욕설을 들어야 한다. “허풍쟁이들아, 맹목적인 애국자(쇼비니스트)들아, 혐오스러운 상판대기들아, 비굴한 작자들아, 소심한 작자들아, 가치 없는 작자들아….” 청와대판 관객모독의 클라이맥스는 강기정 정무수석이 맡았다. 의미 없는 말들이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갈등이 최고로 고조되는 지점에서 고함이 터졌다. 반발을 불러일으킨 말은 ‘우기다’가 차지했다. 정 실장이 “북한 미사일은 우리에게 위협이 안 된다”며 근거도 대지 못한 채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자 ‘우기지 말라’는 항의가 쏟아졌고 정 실장 뒤편에 있던 강 수석이 벌떡 일어나 ‘우기다가 뭐냐’며 소리를 질렀다. 어떤 정권에서도 보지 못한 특이한 장면이기에 클라이맥스로서는 인상적이었다. ‘촛불혁명’의 역사화로 그려놓아도 될 듯하다. 뭉크의 비명처럼 강기정의 고함이란 제목으로. ‘그로테스크하게’라는 지문을 달아서. TV로 지켜보는 사람이 야단맞는 기분이 들 정도로 실감났다. 역시 깡패 역은 강기정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은 동서독 분단 당시 바로 앞에 베를린 장벽이 설치돼 있어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었던 곳이다.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 문이 바라보이는 옛 서독 지역에서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을 향해 “장벽을 허무시오”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미국 NBC 방송 앵커였던 톰 브로코는 1989년 11월 9일 장벽이 열리던 날 현장을 생중계한 유일한 미국 언론인이다. 그는 그날 밤 운 좋게 베를린에 출장 와 있었다. 브로코는 장벽 붕괴를 현장 중계하면서 고르바초프가 모스크바에서 탱크를 보낼지 모른다는 걱정을 반복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탱크를 보내지 않았다. ▷9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10주년 때 베를린은 장벽 인근의 국회의사당과 아들론 호텔 등 유서 깊은 건물들의 재건을 막 끝냈다. 20주년 때 베를린은 무인(無人) 완충지대였던 포츠담 광장 등에 초현대식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면서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로 변했고 라이프치히 등 다른 옛 동독 도시로도 개발의 기운이 퍼져갔다. 30주년에는 옛 동독에서도 동쪽에 위치한 드레스덴마저 복원을 끝내 제2차 세계대전 폭격 전의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드레스덴은 첨단 산업시설까지 들어서 독일의 동유럽 진출의 전진기지로 이용되고 있다. ▷독일이 통일 후유증을 극복하고 유럽연합(EU)의 선두 국가로 올라선 것은 2000년대 중반 무렵이다. 그때부터 물동량이 크게 늘었다. 독일을 자동차로 달려 보면 독일 전역의 고속도로에서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걸 목격할 수 있다. 옛 서독 구간만이 아니라 함부르크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옛 동독 구간 등도 마찬가지다. 동독 출신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장벽 붕괴 30주년을 앞두고 “1990년 통일 당시 서독 지역의 43%에 불과했던 동독 지역 경제가 현재 75%까지 올라왔다”고 평가했다. 대단한 성공이지만 여전히 갈 길이 남았다. ▷독일을 취재하다 보면 옛 동독 사람들도 간혹 만나게 되는데 대부분은 여느 유럽 사람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개방적이지만 여전히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람도 있다. 독일인끼리는 잘 내색하지 않지만 그 차이를 더 예민하게 느낀다고 한다. 단순히 다른 지역에 사는 데서 오는 차이를 넘어 다른 체제를 산 데서 오는 차이일 것이다. 그 차이가 의외로 깊어 장벽 붕괴 이후에 태어난 세대가 주인공이 될 때에야 완전히 극복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9·11테러 주범 오사마 빈라덴이 사살된 지 8년 만에 이슬람국가(IS) 수장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가 제거됐다. 2011년 빈라덴 사살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똑같이 작전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다만 오바마는 백악관 상황실 정중앙 자리를 작전 지휘자인 육군 준장에게 양보한 채 점퍼 차림으로 구석 자리를 지킨 반면 트럼프는 정장 차림으로 정중앙에 황제처럼 앉아 있었다. 오바마는 빈라덴의 죽음이 확인되자 일요일 밤 12시 가까운 시간임에도 곧바로 이를 발표했으나 트럼프는 26일(현지 시간) 토요일 오후 9시경 중대 사건 발생이라며 궁금증만 자아내는 트윗을 날린 뒤 밤새 뜸을 들이다 일요일 아침에야 바그다디의 사망을 발표했다. ▷바그다디 제거 작전은 빈라덴 사살 작전의 속편을 보는 듯했다. 첨단기술과 정보력을 동원해 은신처를 찾아내고 특수부대가 무장헬기를 타고 적지를 날아 기습했다. 정확히는 빈라덴은 사살되고 바그다디는 도망치다 입고 있던 자살폭탄 조끼를 터뜨려 목숨을 끊었다. 트럼프는 자신의 업적이 오바마보다 크다고 자랑하지만 역시 본편만 한 속편은 없다. 빈라덴 사살 발표 때 백악관 앞을 휩쓸었던 성조기의 물결도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다. ▷트럼프가 바그다디에 대해 개에 쫓겨 울며 도망치다 겁쟁이처럼 죽었다는 식의 발언을 반복하는 것은 바그다디의 자살이 지지자들에게 영웅시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선전전으로 보인다. 바그다디의 제거가 빈라덴의 사살처럼 대(對)테러전에서의 주요한 진전이긴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조직의 붕괴로 직접 이어지지는 않는다. 테러조직의 특성상 지도자는 유고시를 대비해 후계자를 선정해 놓기 마련이다. 바그다디는 미군 공습 때 입은 부상과 당뇨 고혈압 등 지병으로 일찌감치 일상적인 지휘에서는 손을 떼고 물러나 압둘라 카르다시를 후계자로 세워 조직을 운영케 했다고 한다. ▷오바마는 재선 출마를 앞두고 빈라덴을 사살하는 성과를 냈음에도 재선에 이용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자랑하고 다니지 않았다. 역시 재선 출마를 앞둔 트럼프에게는 그런 겸손이 보이지 않는다. 미군의 때 이른 시리아 철수계획이 바그다디 측의 보안태세에 빈틈을 초래했다면 바그다디 제거는 뒷걸음질치다 얻어걸린 행운일 수 있다. 빈라덴 사후 궤멸하듯 하던 알카에다가 IS로 살아나듯 바그다디 사후 IS가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트럼프가 자랑할 역량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그 역량을 발휘해서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으면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공수처장) 후보는 2명이 추천된다. 추천위원 7명 중 최소 6명의 찬성으로 추천된다. 추천위원 7명 중 2명이 야당 몫이므로 야당이 반대하면 추천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여권이 지지하는 후보 1명과 야권이 지지하는 후보 1명을 추천하는 타협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 경우 대통령이 누굴 지명할지는 물어보나 마나다. 기만적인 공수처장 임명 과정보다 더 큰 문제는 공수처 검사를 절반 이상 비(非)검사 출신으로 충원한다는 데 있다. 사실 공수처에 집착하지 않으면 검찰 개혁은 단순하다. 공수처 기능을 포괄하는 검찰의 수장을 공수처장 임명하듯 임명하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 데에 공수처를 만드는 진짜 목적이 있다. 공수처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류로 채우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인사 중 코드 인사가 아닌 게 없지만 법 관련 인사가 특히 그렇다. 대통령이 임명한 두 사법부 수장과 대통령 몫의 헌법재판관 2명이 모두 우리법연구회나 그 후신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다.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려 했던 안경환과 실제 임명한 조국은 참여연대에서 활동한 법학자다. 전 법제처장은 민변 출신이다. 법무부의 비(非)검찰화를 추진하면서 뽑은 실·국장급 간부 4명 중 3명이 민변 출신이다. 공수처가 민변류로 채워지지 않으리라 예측하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중요한 사실을 빠뜨릴 뻔했다. 대통령 자신이 전체 변호사의 5%도 안 되는 민변 출신이다.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도 9명의 구성원 중 위원장을 포함해 5명이 민변 출신이었다. 과거사위의 수사를 통해 민변 출신이 좌우하는 기구가 어떻게 수사할지에 대한 예고편을 볼 수 있었다. 김학의 사건에서는 추측에 불과한 내용을 확인된 사실인 양 언론에 공개했다가 피해자 검사들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했다. 장자연 사건에서는 책임질 말도 못 하는 윤지오 씨를 비행기표와 숙박비까지 제공하며 데려와 허무한 평지풍파만 일으켰다. 현 정권과 지지자들은 촛불시위를 우스울 정도로 진지하게 ‘촛불혁명’이라고 부른다. 사실은 정권교체, 그것도 임기 반 가까운 지금 와서 보면 무능한 정권으로의 교체였을 뿐인데 혁명이란 망상에 사로잡힌 자들은 윤석열 검찰의 조국 ‘신성(神聖)’ 가족에 대한 수사를 일종의 반(反)혁명 시도로 여겼다. 한 친여 신문은 군사쿠데타가 아니라 검찰쿠데타라고 칭했다. 그게 검찰쿠데타라면 공수처는 레닌이 반혁명 세력으로부터 혁명을 수호한다며 만든, 저 악명 높은 ‘체카(보위부)’다. 혁명 세력이 자신의 충견(忠犬) 역할을 해온 윤석열 검찰에 대해 한 상찬은 검찰이 박근혜나 이명박 전 대통령 수사하듯이 혁명의 노멘클라투라를 수사하자 분노로 돌변했다. 그들에게 ‘정무감각이 없거나’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는’ 검찰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촛불혁명 이전의 세계에서나 통하는 덕목이다. 이제 검찰은 혁명의 정무감각을 가져야 하고, 우면하지 않아도 좌고는 해야 한다. 그런 미래의 검찰이 바로 민변 변호사들이 주도할 공수처라는 것이다. 국민의 뜻이 검찰개혁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대통령의 말을 반복해서 듣고 있어야 하는 쪽은 미칠 지경이다. 조국 사태 때 국민은 “그래, 검찰개혁 해야 한다. 그러나 그걸 왜 꼭 위선적인 조국이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대통령은 설득력 있는 답을 하지 못했고 조국은 물러났다. 조국 없는 조국 사태에서 국민은 다시 묻고 있다. “그래, 검찰개혁 해야 한다. 그러나 왜 꼭 공수처여야 하지?” 문 대통령은 어제 국회 시정연설에서 “공수처 말고 무슨 대안이 있느냐”고 물었다. 대통령만 대안을 모르는 듯하다. 한 번 더 말하자면 대통령이 공수처장 임명 방식으로라도 검찰총장을 임명하면 된다. 그 다음은 대체로 조국 씨가 만든 검경 수사권 조정을 실행하면 된다. 그 경우 경찰 비대화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것까지 고려하면 개혁하지 못한다. 그 문제는 행정경찰과 사법경찰의 칸막이를 강화하고 전문수사청을 하나씩 분리하는 식으로 차차 해결할 일이다. 공수처는 전문수사청의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우려 없이 제 기능을 할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울대 경제학과에는 38명의 남성 교수가 있을 뿐 여성 교수는 없다. 지난해 정은이 미국 일리노이대 조교수의 채용이 확정됐지만 개인 사정으로 포기하면서 서울대 경제학과 사상 첫 여교수가 무산됐다. 서울대 경제학과가 유난한 경우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도 경제학에서 여교수의 낮은 비율은 논란이다. 2015년 하버드대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남성 경제학자가 정교수가 될 확률은 8%인 데 반해 여성 경제학자가 정교수가 될 확률은 2%에 불과하다. ▷애덤 스미스에서 근대 경제학이 태동했다. 리카도 맬서스 피구 세 마르크스 케인스까지 교과서에서 다루는 경제학자는 다 남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9년부터 시작된 노벨 경제학상의 지난해까지 수상자 81명을 봐도 폴 새뮤얼슨, 밀턴 프리드먼, 게리 베커, 로버트 루커스, 폴 크루그먼 등 80명이 남성이었다. 유일한 예외가 2009년 공동 수상자인 엘리너 오스트롬 당시 인디애나대 교수였다. 그리고 올해 에스테르 뒤플로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가 두 번째 여성 수상자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 ▷경제(economy)는 그리스어로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s)와 관리를 뜻하는 노미아(nomia)가 합쳐진 말이다. 그렇다면 살림하는 주부가 경제학을 가장 잘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여성이 경제학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19세기 말까지 여성은 기껏해야 상품의 소비를 관리하는 주체였지, 상품의 생산을 관리하는 주체가 아니었다. 여성이 취업하기 시작하고 참정권을 갖게 되면서 뒤늦게 여성에게 국가적 규모에서 경제를 생각해볼 여건이 주어졌다. ▷세계경제포럼(WEF)이 2015년 경제학의 세계를 변화시킨 13명의 여성을 꼽은 적이 있는데 이 중에는 ‘자본축적론’을 쓴 로자 룩셈부르크도 있고 포스트케인스주의의 선두주자인 조앤 로빈슨도 있다. 이들은 저명하지만 비주류라서 평가받지 못했다고 치자. 1960년대 프리드먼과 함께 ‘통화주의’를 연구했고 노벨상 공동수상자가 됐어도 충분한 애나 슈워츠라든가 1920년대 이미 시카고대 사회복지행정스쿨의 학장을 지낸 이디스 애벗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스트롬은 첫 여성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긴 하지만 수상 분야가 정치 제도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로 순수한 경제학 분야라고 보기 어렵다. 뒤플로는 MIT에서 자신의 박사학위를 지도한 스승이자 나중에 남편이 된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교수 등과 함께 수상했다. 순수한 경제학 분야에서 단독으로 수상하는 여성 경제학자도 조만간 나오리라 본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장삼이사(張三李四)라도 “조국 논란에 왜 갑자기 검찰 개혁?”이라는 의문을 품을 정도로 사리를 분별한다. 그들은 “검찰 개혁은 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왜 조국이 해야 하는 거지?”라고 묻고 있다. 누구라도 쉽게 알아들을 이 주장을 두고 대통령이 국민의 뜻이 검찰 개혁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딴소리를 하고 있으니 숨이 막힐 지경이다. 대통령은 동남아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조국 논란을 검찰 개혁 프레임으로 바꾸는 시동을 걸었다. 다음 날인 9월 28일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 앞에서 대규모 검찰 개혁 요구 집회가 열렸다. 자발적이란 주장은 한 동아일보 기자에게 잘못 보내진 더불어민주당 조직국의 동원 메시지에 의해서도 거짓임이 드러났다. 기껏해야 몇만 명에 불과한 집회 참석자를 정권의 선전기관들이 100만 명이니 하며 부풀리자 “우릴 무슨 핫바지로 아느냐”며 화가 난 국민들이 10월 3일 광화문으로 몰려나왔다. 그것으로 대통령의 홍위병식 동원 정치는 실패로 끝났다. 광화문 집회에 맞서기 위해 10월 5일 서초동 집회가 조직됐으나 역부족을 드러냈다. 여론에서도 지고 대중 동원에서도 진 것이다. 난 9월 28일 서초동 집회 때는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보느라 우연히 그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참석자 수가 턱없이 과장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10월 3일 광화문 집회와 10월 5일 서초동 집회는 직접 가서 봤다. 10월 5일 서초동 집회는 9월 28일 서초동 집회보다 훨씬 커지긴 했으나 광화문 집회에 미치지 못했다. “당신이 세 봤냐”고 물어볼지 모르겠다. 그러나 세 보지 않아도 집회에 가서 그 사이를 누비고 다녀보면 안다. 광화문 집회 때는 광화문역에 지하철이 서지 못해 서대문역에서 내려 10분을 걸어갔다. 종각역 시청역에서도 걸어오고 있었다. 서초동 집회 때는 서초역에서 내려 올라갈 수 있었다. 광화문 집회에는 면적이 훨씬 넓은데도 참석자 상당수가 서 있었고 서초동 집회에는 참석자 대부분이 앉아 있었다. 화장실은 광화문 집회가 훨씬 불편했다. 광화문역 화장실에는 수십 m씩 뱀줄을 섰으나 서초역 인근에 마련된 임시화장실은 거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양이 아니라 질로 보면 일사불란한 서초동 집회가 일견 앞서는 듯했다. 서초역 사거리에서 사방으로 스크린이 설치되고, 동일한 화면에 따라 참석자들은 일제히 ‘조국 수호’ ‘검찰 개혁’을 외쳤다. 광화문 집회는 주최하는 쪽도 참가하는 쪽도 시위에 익숙하지 않았다. 함께 부를 노래조차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자유한국당 주최 집회 따로, 기독교인 중심 집회 따로, 우리공화당 집회 따로, 예비역 군인 중심의 원조 태극기 집회 따로였다. 그 어느 쪽에도 마음 붙일 곳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조국이란 사람 때문에 한날한시에 한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 분출된 에너지는 훨씬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서초동 집회에서는 검찰의 독립성 같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공준마저 무너지고 있었다. 사회자가 “대통령 말도 듣지 않는 검찰을 이대로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하자 참석자들은 “옳소”라고 외치며 팻말을 흔들었다. 대통령으로부터 검찰의 독립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지만 현 대통령은 예외였다. 마오쩌둥이 하는 건 다 옳다는 홍위병의 범시론(凡是論)처럼 ‘이니’가 하는 것은 뭐든 옳은 것이다. 서초동 일대를 꽉 채운 대대적 조국 수호는 당성(黨性)만 좋으면 잘못까지도 눈감아주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회의 전조처럼 보였다. 유시민과 공지영 등의 ‘닥치고 조국 옹호’는 당파(黨派)를 넘어선 보편적 판단이 옳은 게 아니라, 자신들은 진리를 담지하고 있고 따라서 자신들은 당파적일 때 더 옳다는 위험한 ‘진리의 정치’를 드러냈다. 그것이 진중권 같은 이들에게 윤리적 패닉 상태를 초래했다. 대통령은 두 집회를 두고 대의 정치가 민의를 반영하지 못할 때 국민이 직접 의사 표시를 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민의를 반영할 주체가 누구보다 대통령 자신인데 국회 탓만 하고 있다. 대통령에게 조국 파면을 요구하는 광화문 집회는 민의도 아니란 말인가. 국회 탓이라면 왜 여의도가 아니라 서초동에서 모여 검찰 개혁을 외치는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아니 경험하고 싶지 않은 대통령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2006년 경기 군포 안양 지역에서 컴퓨터 부품회사 영업사원 김윤철이 여성 3명을 연속해서 강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퇴근하다 젊은 여성 취객을 발견하고 자기 차에 태웠다가 범죄를 저질렀다. 한 달이 안 돼 취하지도 않은 젊은 여성을 퇴근길에 태워준다고 유인해서, 그러곤 또다시 한 달이 안 돼 이번엔 젊은 여성을 강제로 태워 범죄를 저질렀다. 그는 범죄 연구자들과의 대화에서 처음에는 어찌하다 사람을 죽이게 됐는데 두 번째부터는 복종시키는 재미랄까 그런 것이 자꾸 떠올라서 저질렀다고 했다. 또 처음에는 사람이 너무 쉽게 죽는 데 놀랐으나 두 번째는 죽이려고 하니 이러면 죽는구나 알게 됐고, 세 번째는 죽이는 방법을 알고 달려들어 죽였다고 했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일어난 경기 화성 연쇄 살인 사건에서 첫 피해자인 71세 할머니에게는 성폭행 흔적이 없었으나 두 번째부터는 모두 있었다. 두 번째는 맞선 보고 돌아온 20대 여성, 세 번째는 갓 결혼한 20대 신부였다. 네 번째는 비 오는 날 20대 여성이었는데 이때부터는 신체에 가한 난행이 발견됐다. 다섯 번째는 10대 여고생, 여섯 번째는 봄밤 남편 마중 나간 29세 주부였다. 일곱 번째는 50대 여성이었는데 몸 안에서 복숭아 9조각이 발견됐고 여덟 번째 13세 여중생의 몸 안에서도 볼펜 숟가락 포크 등이 발견됐다. 범죄를 반복하면서 단순 살인에서 강간 살인으로, 다시 변태성 강간 살인으로 잔인화하는 모습이 보인다. ▷1994년 처제 강간 살인으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이춘재가 DNA 분석 결과 화성 연쇄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데 이어 범행 일체를 자백하고 다른 미제 살인 사건 5건과 강간 사건 30여 건도 자백했다. 사실이라면 살인 피해자는 15명에 이른다. 하지만 자백에도 불구하고 그가 체포 전에 지은 모든 범죄의 공소시효는 지나버렸다. 자백은 진실을 밝히는 것 외에 형벌을 가중시키는 효과는 없다. 설혹 공소시효가 남아 있어 법원이 무기징역보다 높은 사형을 선고한다 해도 정부가 사형을 집행하지 않으니 결과는 마찬가지다.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살인자의 마성(魔性)을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그는 군에서 제대한 직후 저지른 한두 차례의 강간 살인이 발각되지 않고 지나가자 그에 탐닉해 체포될 때까지 자력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초등학생 때 동네 누나와의 첫 성관계가 왜곡된 성 집착을 키웠다고 한다. 그가 출옥을 꿈꾸며 1급 모범수로 생활해 특사 심사 대상에 올랐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뿐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양이 동양을 앞서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 산업혁명 이후부터다. 청나라 강희-옹정-건륭 시대의 중국만 해도 세계 최강국이었다고 한다. 다만 서양과 실제 군사적으로 맞붙어 싸워보기 전이어서 그런 말이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19세기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시작되고 중국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21세기에 와서야 중국은 비로소 다시 세계 최강에 올라설 꿈을 꾸고 있으니 그것을 중국몽(中國夢)이라 부른다. ▷1969년 건국 20주년의 중국만 해도 마오쩌둥 시대의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혼란으로 희뿌연 먼지 속에 있었다. 1979년 건국 30주년의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노선으로 돌아선 지 겨우 한 해가 지났다. 1989년 동유럽 공산정권의 붕괴 속에 맞이한 건국 40주년에 중국은 톈안먼(天安門) 학살로 개혁개방이 민주화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1999년 건국 50주년의 중국은 개혁개방이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화려해졌다. 2009년 건국 60주년의 중국은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세계 경제의 구원자로 우뚝 섰다. ▷중국 건국 70주년을 앞두고는 미중 간에 격렬한 무역전쟁이 불거졌다. 세계 경제 규모 1, 2위 국가의 격차가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경제전쟁의 뒤에서는 군비증강 경쟁이 이뤄지고 있다. 마오쩌둥이 꿈꾸던 ‘동풍이 서풍을 제압하는’ 날이 올 것인가. 기존 강국과 신흥 강국이 힘으로 충돌하는 ‘투키디데스 함정’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강력할 때 한국은 힘들었다. 동서고금에 강한 큰 나라 옆에서 괴롭지 않은 작은 나라는 없지만 중국 외에 의지할 다른 대국이 없던 중화권에서는 더 그랬다. 한나라 전성기 때 중국은 고조선에 4군을 설치했다. 당나라 때 중국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지배하려다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자 비로소 물러났다. 반면 문화적 수준은 높았으나 군사적으로 약한 송나라가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시달릴 때 중국과 한국은 평화롭게 지냈다. ▷장쩌민 이래 중국 지도자의 임기는 10년이다. 시진핑 주석은 2022년까지 집권한다. 그러나 직전 지도자가 차차기 지도자를 지정하는 관행이 깨지면서 시 주석의 후계자가 명확하지 않다. 집단지도체제를 사실상 무산시킨 시 주석이 2022년 후에도 계속 집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중국 건국일인 10월 1일이 국군의 날과 겹쳐서가 아니라 민주적이 되지 않고 경제적 군사적으로만 커지는 중국의 건국 70주년을 별생각 없이 축하하는 건 곤란하지 않나 싶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군사정권 시절 민주 대 반(反)민주의 정치 구도가 1987년 민주화 이후 재편되는 과정에서 김영삼의 3당 합당이 일어났다. 그러나 3당 합당을 반민주 세력과의 야합(野合)이라고 비판하며 꼬마 민주당에 잔류했던 노무현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이 나타났으니 그것을 김영삼 중심의 PK우파와 구별해 PK좌파라고 불러보자. PK좌파는 김대중을 지지한 호남세력과 결합해 노무현 문재인 두 정권을 만들어냈다. 첫 집권 이후 사실상 폐족(廢族)이 됐다가 안철수를 이용해 재기한 뒤 그를 버리고 운 좋게 박근혜 탄핵 사태를 만나 재집권했으나 다시 특유의 고집불통을 드러내며 국정을 혼란으로 몰고 가고 있다. 조국 사태는 PK좌파의 고집불통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새로운 가늠대다. 공론(公論)을 무시한 폭주란 면에서 조선 광해군 때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부추기다 정계에서 완벽하게 몰락한 경상우도(임금이 볼 때 낙동강 오른쪽의 경상도) 중심의 대북(大北) 세력은 PK좌파의 먼 선조 격이 될 만하다. 당시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대북세력의 영수인 정인홍은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깎아내린 회퇴변척(晦退辨斥)을 제기해 파란을 일으켰다. 남명이 퇴계와 동갑이고 훌륭한 유학자이긴 하나 남명 있고 퇴계 있는 게 아니라 퇴계 있고 남명 있다는 게 그때나 지금이나 공론이다. 남명의 또 다른 수제자인 정구마저 회퇴변척을 비판했으니 정인홍이 당시 공론에 얼마나 반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인홍은 그나마 양식이 있었다. 그는 폐모살제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폐모살제를 밀어붙인 것은 그의 후계자인 이이첨이었다. 이이첨은 심복을 언관에 포진시키고 과거시험을 장악해 인척을 발탁하는 방식으로 당시 공론의 형성 과정 자체를 왜곡했다. 인조반정(反正)은 그런 왜곡을 더는 참지 못한 반(反)대북 세력의 광범위한 연대에 의해 발생한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만 해도 고집은 셌지만 토론을 해서 결론에 이르려는 열린 자세를 가졌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뜻에 반했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병도 했다. 문 대통령에게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발전적으로 바꾸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거의 없다. 꼼수로 늘어난 일자리, 사실상 줄어든 소득 등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하며 최초 생각을 고집한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정부 주도의 실패박람회를 지나가다 보게 됐다. 좌석은 텅 비고 부스는 휑했다. 실패박람회는 역발상이긴 하나 실패하는 실패박람회를 보는 기분은 착잡하다. 이 정권이 실패한 정책만 모아서 성공하겠다고 덤비다가 실패하는 꼴이다. 안 해본 일을 벌일 때는 자신이 틀리지는 않았나 삼가 조심하는 자세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오히려 공영방송을 장악하고 공론의 형성 과정을 왜곡하면서 외교 안보 경제를 총체적 혼란으로 몰고 가고 있으니 영락없는 이이첨 시대다. 문 대통령은 취임 초 경상우도가 가장 큰 수혜자인 가야사 연구를 강조하더니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포섭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운 부마항쟁을 헌법 전문에 따로 넣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통영 출신 친북음악가 윤이상의 베를린 묘소 헌화는 논란이 일 것이 뻔하자 충분한 사전 예고 없이 해치워 버렸다. 일국(一國)의 대통령이 아니라 붕당(朋黨)의 지도자 같았다. 안경환 한인섭 조국은 서울대 법대의 PK좌파들이다. 안경환과 한인섭이 조국을 교수로 만드는 데 일조했고, 조국은 민정수석이 되자 안경환을 법무장관으로 모시려 했고, 한인섭을 법무·검찰개혁위원장과 형사정책연구원장으로 만들었다. 안경환은 장관 검증 과정에서 위조 혼인신고가 드러나 탈락했고, 한인섭은 조국 아들과 친구에게 인턴증명서를 부정 발급해준 혐의를 받고 있다. 되돌아보면 실력도 도덕성도 부족하고 끈만 있는 자들이 사법개혁을 말아먹으려 했다. 남명은 평생 교유하는 사람이 적었다. 정인홍도 잘 화합하지 못했다. 남명은 절(絶)과 의(義)를 강조한 유학자다. 정인홍 등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그것이 대북세력의 정치적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박문궁리(博文窮理)하지 않고 절과 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사나워지고 결국 몰락을 자초했다. 그 정신이 DNA를 복제한 것처럼 닮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헌터 바이든은 2014년 우크라이나 에너지 기업인 부리스마의 임원이 됐다. 그는 내년 미국 대선의 유력한 민주당 후보 예상자인 조 바이든의 아들이다. 이듬해 빅토르 쇼킨이 우크라이나의 새 검찰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한 해 전부터 시작된 친러시아 정부 시절 유력자들의 부패 혐의 수사를 이어받았는데 부리스마 소유주에 대한 수사도 그중 하나였다. 여기에 헌터가 연루됐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우려를 표시했다. 당시 부통령이던 바이든은 쇼킨 총장이 물러나지 않으면 10억 달러 대출 보증을 철회하겠다는 압력을 넣었다. 쇼킨은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인지 부패수사를 제대로 못 한 탓인지 의회 탄핵으로 물러났다. 후임자인 유리 루첸코는 올 5월 바이든 아들이 연루된 혐의는 없다고 밝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 무렵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개인 변호인인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은 새로 취임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부리스마 수사를 계속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결국 트럼프가 직접 젤렌스키에게 전화를 걸기까지 했다. 미국 언론은 내부 고발자의 제보로 이런 사실을 보도할 수 있었다. 트럼프는 계속되는 언론 보도에 젤렌스키에게 전화한 사실을 22일 시인하면서 “미국 국민이 우크라이나에서 부패에 연루된 바이든과 그 아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에 전화로 압박할 당시 미국 의회가 승인한 2억5000만 달러어치의 군사 지원이 백악관에 의해 보류돼 있었다. 앞서의 ‘러시아 스캔들’이 지난 미국 대선에서 러시아가 트럼프 당선을 위해 적극 개입한 혐의라면 ‘우크라이나 스캔들’은 러시아의 크림반도 무단 점령 이후 친서방적이 된 우크라이나 정부가 내년 미국 대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사에서 손을 떼려 하자 그 수사를 계속하라고 압력을 넣은 것이다. 바이든도 오바마 행정부 당시 우크라이나에 수사 중단 압력을 넣은 모양새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이든 아들이 부패에 연루됐다고 해도 대선을 앞두고 남의 나라 대통령에게까지 수사 압력을 넣는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다워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가 왜 이렇게까지 돼 버렸는지 안타깝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는 바이든을 포함한 민주당 후보 예상자 3명에게 모두 10%포인트 이상으로 뒤지고 있다. 겉으로는 재선 승리를 장담하고 있지만 내심 초조하지 않을 수 없다. 내년 재선 승리를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트럼프에게 북핵 협상을 맡기고 있는 우리에게도 남 일 같지 않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오는 핀란드발 뉴스가 있다. 최고 교통범칙금 기록을 경신했다는 뉴스다. 대개는 보도될 당시 경찰이 처음 부과한 액수보다는 나중에 확정된 액수가 줄어든다. 현재까지는 2000년 속도위반으로 한 인터넷 재벌이 8만 유로의 범칙금을 낸 것이 최고 기록이다. 8만 유로를 원화 가치로 환산하면 1억 원이 넘는다. 핀란드는 세금을 누진적으로 매기듯이 벌금이나 범칙금도 누진적으로 매길 수 있다고 여긴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도 재산비례벌금제를 갖고 있다. 재산비례벌금제는 세금 등을 뺀 순수입을 한 달 30일로 나눈 일수(日收)를 하루 벌금 액수로 정하기 때문에 일수벌금제(day-fine)라고도 한다. 가령 순수입이 한 달 6000유로인 사람은 하루 200유로, 순수입이 한 달 600유로인 사람은 하루 20유로가 일수벌금이다. 법원은 범죄만 보고 며칠 치 벌금이라고 선고한다. 그러나 같은 5일 치라도 검찰이 받아내는 벌금은 각각 1000유로와 100유로로 차이가 난다. ▷수입에 관계없이 정해지는 벌금은 같은 액수라도 빈부의 차이에 따라 느껴지는 징벌의 강도가 다르다. 게다가 형법이 함부로 바꾸지 못하는 기본법인 까닭에 벌금 액수는 시대의 돈 가치를 따라잡지 못해 일부 가난한 사람을 빼고는 부담이 크지 않아 액수 자체로는 형벌의 의미를 상실한 경우가 적지 않다. ▷다만 경제범죄에서는 벌금 액수가 범죄 수익에 비례해 커진다. 그러나 2014년 대주그룹 허재호 전 회장이 벌금 254억 원을 내지 않고 버티며 일당 5억 원짜리 황제 노역을 해 비난을 샀다. 이후 노역 기간을 함부로 줄이지 못하게 법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3년 이상 노역장 유치는 금지돼 있기 때문에 여전히 일당 수억 원의 황제 노역이 발생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법무부가 어제 재산비례벌금제를 제안했다. 참신한 제안인 것처럼 내놓았으나 실은 해묵은 논란거리다. 2004년 노무현 정부 시절 사법개혁추진위원회에서 채택을 심도 깊게 논의했으나 무산됐다. 개인 소득이 정확히 얼마인지 파악하기 어려워 투명하게 소득이 잡히는 봉급생활자만 벌금을 많이 내는 제도가 될 수 있고, 재산 전체가 아니라 소득만 가지고 따지는 것이 공정하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당정이 정말 현행 벌금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다면 개인의 자산과 소득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부터 갖춰야 할 것이다. 재산 상황은 수시로 바뀌고 죄를 범할 때마다 새로 재산 상황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갑작스러운 제안이 진정성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